2024학년도 1학기 동북아시아문화교류의역사(이동윤, 2024.03.15.) 2주차 강의 – 초기 국가의 교류 1. 고조선의 건국과 발전 ● 고조선의 건국 - 청동기 문화의 발달로 만주 요령 지방과 한반도 서북 지역에 많은 집단이 발생. - 여러 집단을 ‘단군’이 통합하여 고조선이 건국(B.C.2333 : 삼국유사에 따른 것). → 환인의 아들 환웅이 무리를 이끌고 인간의 여러 가지 일을 다스림. - 청동기 문화를 바탕으로 철기 문화를 받아들이면서 발전. - 비파형 동검, 미송리식 토기, 고인돌 등을 결합한 문화. - 기원전 4세기 철기 문화를 통해 요하 일대(요동 일대)에서 초기 국가로 성장해 나감. - 요동 반도 남단의 강상 무덤과 같은 유적을 남기면서 중국 세력과 대결. - 단군왕검 이후 발전 과정에 대한 기록이 無. - 기원전 2천년 경 청동기 문화가 만주 지역에서 발전한 것은 사실. - 기원전 8~7세기에는 요동·요서 지역에서 성장하고, 기원전 4~3세기에는 연나라와의 싸움에 밀려 중심 이동. ● 고조선의 변천 - 기원전 194년 위만조선이 성립됨. → 중국이 진과 전한으로 이어지는 혼란기에, 연왕 노관의 망명을 계기로 위만이 고조선 준왕을 축출. - 토착 세력과 연합하여 반한 정책을 강화. - 한 무제는 조선이 흉노와 결탁할 것을 두려워하여, 조선을 압박하는 전략을 강구함. - 조선에 속해 있던 예군 남려가 우거왕을 뒤로한 채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한나라에 투항. - 섭하 사건을 계기로, 이를 명분 삼아 한나라가 조선을 공격. ● 기자 동래설 - 기원전 3세기 중국 전국시대의 혼란으로 망명한 자들이 한반도로 밀려옴. - 그 가운데 이른바 기자동래설이 나타났는데, 은나라에서 온 ‘기자’라는 인물이 고조선 영역으로 온 것. - 실제로 은나라에서 기자가 온 것이라기보다는, 후손들이 파상적으로 이동해 온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 - 현재 학계에서는 ‘기자조선’을 역사적 사실로서 부정하는 입장이 많음. - 오랜 기간 한국 역사 속에서 기자를 숭배하는 경향이 지속되었기 때문에, 그 의의는 중시될 필요가 있음. - 1 - 2024학년도 1학기 동북아시아문화교류의역사(이동윤, 2024.03.15.) 2. 고조선의 의미와 관련 문헌들 - 고조선이란 표현 속에는 단군조선, 기자조선, 위만조선이 모두 포괄. - 1392년 건국된 조선왕조와 구분하고자 하는 의미가 담겨져 있다. ● 고조선의 역사적 사실을 전해주는 문헌사료 한국 : 고려 말에 편찬된 『삼국유사』와 『제왕운기』, 조선 초에 편찬된 『세종실록지리지』 및 『응제시주』 등. 중국 : 『관자』, 『전국책』, 『산해경』 등과 한(漢)나라 이후 편찬된 『사기』, 『한서』, 『위략』 등. ※ 고조선의 강역 문제(중심지) ① 성립부터 멸망 때까지 지금의 요령지역에 있었다는 설 ② 대동강 유역인 평양에 있었다는 설 ③ 두 견해를 절충하여 처음에는 요령지역에 있었다가 나중에는 평양으로 옮겨갔다는 이동설 3. 단군신화 속의 대외관계 ● 단군신화는 직접적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기 때문에 고조선의 대외관계를 살피기에 적절치 못한 사료. → 중국에서 이동해 온 세력과의 전쟁 역시, 단군조선의 지배자가 주관한 360여 가지의 일(A-①)에 포함. → 단군신화에서는 도둑질한 자를 노비로 삼았다는 언급(A-②)이 주목되는데, 기록 그대로는 형벌노예. - 노예는 본래 전쟁포로(피정복 지역의 주민을 노예로 삼거나 전쟁포로를 노예로 만듦). - 고조선사회에는 ‘형벌노예’도 있었지만 ‘포로노예’의 존재도 충분히 상정. 4. 춘추시대 제나라와의 관계 ● 중국의 진나라 이전 문헌 중 ‘조선’, 즉 고조선을 언급하고 있는 최초의 사료는 『관자』. → ‘발’과 ‘조선’의 특산물인 문피(무늬 있는 가죽, 대체로 호랑이가죽으로 봄) 언급(B-①) → 특산물에 대하여 적절한 가격을 치러 준다면 조공해 올 것이라는 관중의 의견(B-②) ● 기원전 7세기 무렵에 중국을 대표하는 제나라가 고조선과 교역을 재개하여 정치적 우호관계를 모색. - 고조선은 이 무렵 제나라가 교역을 통하여 포섭해야 할 대상 중 하나. - 고조선과 제나라 사이의 교역과 왕래는 해로를 통해서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음. - 고조선의 영역이었던 요동반도와 제나라의 중심지였던 산동반도는 묘도열도. - 2 - 2024학년도 1학기 동북아시아문화교류의역사(이동윤, 2024.03.15.) 5. 전국시대 연나라와의 관계 ● 전국시대(戰國時代)가 되자 이른바 ‘전국칠웅’은 각각 왕호를 칭함. 이 무렵에 기자의 후예라 하는 조선후도 왕호를 칭하고 연나라를 공격하여 몰락한 주나라 왕실을 받들고자 하였다고 한다(사료 C-①). - 고조선은 기원전 4세기 후반 무렵에 연나라와 대립. → 먼저 연나라를 공격(C-①) / 연나라 사람들이 “교만하고 포학하다”고 할 정도(C-②) ※ 중심지 이동설 : 고조선의 중심지가 요동에서 지금의 평양으로 이동해 간 계기를 진개의 동정(東征)으로 봄. 6. 진나라와의 관계 ● 전국칠웅 중 하나였던 진(秦)나라가 나머지 여섯 나라를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 이제 고조선은 진나라와 경계 를 접하게 되었으므로 그와의 관계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 진나라는 중국을 통일한 뒤 곧바로 요동에까지 이르러 고조선을 위협(사료 D-①). → 진나라가 고조선을 멸망시켰다고 함(사료 D-②); 실제로 멸망당하지는 않았으므로 이 기록은 과장. → 진·한 교체기의 혼란한 정세를 관망하였다가(사료 D-③) 마침내 그 동안 잃어버렸던 땅을 회복. 7. 초기 한나라와의 관계 ● 기원전 209년 ‘진승·오광의 난’ ⇒ 기원전 207년 진 멸망 ⇒ 기원전 202년 한이 중국을 재차 통일. → 흉노의 맹공으로 한나라는 동방에서 침공해오는 고조선(사료 E-②) / 소극적 전략으로 대응(사료 E-①) → 고후 섭정기에 안정을 찾음(사료 E-④) / 진한교체기에 빼앗겼던 지역을 수복(사료 E-①, 사료 E-②) → 위만이 고조선으로 망명, 진번, 조선, 중국으로부터 온 유민들을 규합하여 고조선의 정권을 탈취(사료 E-③) → 위만은 진번, 임둔 등을 복속하며 주변세력의 통제를 강화(사료 E-④) ● 패수의 위치 한반도 내 - 대동강설·청천강설·압록강설 등 한반도 외 - 요서의 난하설·대릉하설/ 요동의 어니하설·혼하설 등 - 위만은 요동고새→패수→진고공지→왕검성의 과정을 거쳐 고조선으로 망명. 왕검성은 지금의 평양. - 패수는 요동고새보다 더 동쪽에서, 진고공지보다는 더 서쪽에서 찾아야 함; 진고공지의 범위가 문제. ※ 중심지 이동설에서 진나라와 고조선의 경계 : 청천강 혹은 압록강으로 보는 두 견해. - 기원전 2세기를 전후한 고조선 강역 : - 서쪽으로 요동지역의 일부를 영유, 남쪽으로는 대동강을 경계로 진국과 마주한 것으로 추정. - 3 - 2024학년도 1학기 동북아시아문화교류의역사(이동윤, 2024.03.15.) 8. 한나라와의 전쟁 - 한 무제(재위 기원전 142~기원전 87) 집권 이후, 한나라의 고조선에 대한 외교정책은 강경하게 변화. → 고조선(우거왕 시절)은 주변 소국들에 대한 압박을 지속(사료 F-①). - 주변국이 한나라와 직접 통교하는 것을 차단, ‘중개무역’을 행함으로써 막대한 경제적 부를 축적. - 한나라는 고조선의 세력 확장에 불만 ⇒ 흉노로부터의 위협 존재 ⇒ 섣불리 고조선을 넘볼 수 없는 형편. - 한나라는 흉노와 남월(南越)에 대한 원정을 마무리한 뒤에 고조선에 대한 무력 침공을 시도. ● 양국의 무력 충돌 - 우거왕을 회유하기 위해 한나라 사신 섭하(涉何)가 고조선을 다녀가던 와중에 일어난 일. - 섭하가 귀국길에 고조선의 비왕(裨王)인 장(長)을 살해하자, 고조선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섭하를 살해. - 기원전 109년 한 무제는 5만 명이 넘는 군대(육군 5만, 수군 7천)를 동원하여 수륙 양면으로 고조선을 공격. - 누선장군(樓船將軍) 양복(楊僕)은 수군을 거느리고 산동반도에서 발해를 건너 왕검성으로 공격. - 좌장군(左將軍) 순체(荀彘)는 요동지역의 군사들을 이끌고 침공. - 첫 전투에서 한나라군 패배 ⇒ 한나라군의 공세에 왕검성이 포위 ⇒ 고조선의 저항으로 1년 가까이 교착상태. - 양국은 강화를 모색 ⇒ 무제는 위산(衛山)을 파견, 상호불신으로 강화는 결렬. - 무제는 재차 제남태수(濟南太守) 공손수(公孫遂)를 파견 ⇒ 그러나 임무 미완수. ● 왕검성의 지배층 내부 동요 - 조선상(朝鮮相) 역계경(歷谿卿)이 자신의 무리 2천여 호를 이끌고 진국(辰國)으로 망명. - 고조선의 상(相) 노인(路人), 상 한음(韓陰), 니계상(尼谿相) 삼(參), 장군 왕(王) 등이 한나라 군에 항복. - 노인이 사람을 시켜 우거왕을 살해, 왕자 장항까지 한나라군에 투항. - 고조선의 대신(大臣) 성이(成已)는 끝까지 항전. - 좌장군 순체가 장항과 노인의 아들 최(最)로 하여금 성이를 죽이도록 함. - 왕검성이 함락되어 고조선은 멸망(기원전 108). ● 고조선과 한나라의 전쟁 결과 ‘한사군(漢四郡)’이 설치됨. - 한나라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그 해에 낙랑(樂浪)·진번(眞番)·임둔(臨屯)의 세 군(郡)을 둠. - 그 다음해(기원전 107)에 예(濊)의 땅에 현도군을 설치. - 4 - 2024학년도 1학기 동북아시아문화교류의역사(이동윤, 2024.03.15.) 9. 초기 국가의 성장과 교류 ● 부여(扶餘, 夫餘) 1) 부여의 건국과 발전 - 사기에서 처음 부여라는 이름이 등장, 기원전 2~1세기 무렵에 국가의 형태를 갖추었을 것으로 추정. - 만주 송화강 유역의 평야지대에서 성장, 지리적으로 중국과 고구려 사이에 위치, 국가 발전에 걸림돌. - 관구검이 고구려를 침략할 때 도왔고, 모용외의 침입에 왕이 사망. - 346년 수도가 함락되고 일부 왕족이 두만강 하류로 옮겨가 동부여를 세움. - 광개토왕 20년(410)에 정복되고, 문자왕 3년(494)에 고구려에 병합. 2) 부여의 사회와 문화 - 국왕 밑에 가축의 이름을 딴 마가·우가·저가·구가 등의 제가와 대사·대사자·사자의 관리를 둠. - 제가는 별도로 사출도를 다스림: 큰 것은 수천 家, 작은 것은 수백 家. - 국왕의 장례에는 옥갑(玉匣) 사용, 많을 때는 100여 명을 함께 순장. - 장마와 가뭄이 고르지 않으면 제가회의에 따라 왕에게 책임을 물어 퇴출되거나 죽일 수 있었음(왕권 미약). - 전쟁 시 제가들이 스스로 전쟁에 참여, 대가(大加) 아래에 호민(豪民)과 하호(下戶)가 있었음. - 하호는 주로 농업에 종사하면서 조세와 부역을 담당, 전쟁 시 제가의 통솔 하에 출전(직접 전투X, 군량 보급). - 영고(迎鼓)라는 제천행사 12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 발굽을 보고 길흉을 점침(우제점법;牛蹄占法). - 형사취수혼 제도, 후장과 순장 제도 존재, 살인죄, 절도죄, 간음죄를 처벌. ● 고구려(高句麗) 1) 고구려의 건국과 발전 - 압록강 중류의 동가강 유역의 졸본성이 근거지. - 삼국사기에는 기원전 37년에 부여에서 남하한 주몽의 건국 기록, 후한서에는 고구려와 구려를 구분. -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두었던 군현 중 기원전 107년에 세워진 현도군에 ‘고구려현’이 수현으로 존재. - 주몽 남하 당시 압록강 중류에 여러 정치집단(나부집단)이 있었음, 대표적으로 소노부 비류국(송양왕). - 주몽이 부여에서 오이·마리·협보와 함께 남하하여 오녀산성에 건국. - 비류국 항복, 유리왕 22년(3)에 국내성(집안)으로 천도, 대무신왕 대에는 낙랑을 정벌하며 성장. 2) 고구려의 사회와 문화 - 초기에는 5부족 중심, 주도권이 소노부에서 계루부 옮겨감(왕족은 계루부, 왕비족은 소노부로 흡수). - 왕 아래에 상가, 고추가, 대로, 패자 등이 있고, 그 아래에 사자, 조의 선인이 지배층으로 형성. - 법률로서 범죄자를 처벌, 도둑질에는 1책 12법으로 다스려 사유 재산을 보호. - 동맹(東盟)이라는 제천행사 10월, 나라 동쪽에 있는 수혈(국동대혈)에서 수신(隧神)에게 제사. - 혼인제도는 서옥제(壻留婦家婚). - 5 - 2024학년도 1학기 동북아시아문화교류의역사(이동윤, 2024.03.15.) ● 동예(東濊)와 옥저(沃沮) 1) 동예 - 강원도 북부 지방에서 성장, 대군장이 없고 각 지방마다 읍군과 삼로가 지방 하호를 지배. - 불내예국(不耐穢國)의 불내예후라는 우두머리를 중심으로 공조, 주부 등의 관리를 두었음. - 고구려에서 이탈하여 낙랑군에 붙었을 때, 불내예왕으로 봉해지기도 했지만 민간에서 거주(권력 미약). - 한군현의 정치적 지배와 토착적인 지배 질서 하의 이중적 정치 체제 유지. - 산천 중시, 읍락의 침범자에게 노비와 우마로 변상하게 하는 책화(責禍)가 존재. - 무천(舞天)이라는 제천행사 10월, 동성불혼(同姓不婚)의 전통. 2) 옥저 - 함경남도 남쪽 지방에서 성장, 지리적·정치적 여건으로 성장이 미약. - 낭림산맥에 가로막혀 서방의 선진문화를 수용 어려움, 한군현과 고구려의 정치적 압박(경제적 수탈)에 놓임. - 임둔·현도군에 소속되었다가(부조현이라는 이름, 이후 ‘옥저성’으로 변경) 1세기에 축출된 이후 고구려에 예속. - 해안 지역의 이점으로 생선과 소금 등 해산물과 농산물이 풍부. - 언어나 식문화, 의문화가 고구려와 비슷할 것으로 추정. - 대군장이 없었고 각 읍락마다 지배자 삼로가 다스림, 지배자들이 이후 현후(縣侯)으로 변경. - 민며느리제(豫婦制), 가족공동묘제, 세골장제(洗骨葬制) 존재. ● 삼한(三韓) 1) 삼한의 성립과 변화 - 남방의 한강, 금강, 섬진강 유역의 정치적 집단인 진국(辰國). - 기원전 3~2세기 후반 존재(한반도 중남부 지역, 남부 포괄, 삼한과 동일시 등 여러 설이 있음). - 한나라와 직접적인 통교를 희망, 위만조선에 가로막혔음. -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 망명한 사람들이 남하하면서 삼한으로 발전(북방 유민의 남하로 철기 문화 보급). ① 마한은 경기, 충청, 전라 등지의 54개 소국 구성, 목지국(진왕이 다스림)과 백제국이 대표적. ② 진한은 낙동강 유역의 12개 소국 구성, 사로국, 호로국 등이 중심. ③ 변한은 12개 소국으로 구성되어 낙동강 하류에 위치, 구야국, 안야국 등이 세력을 가짐. - 중앙 집권적인 국가가 아니라 신지·험측·번예·살해·읍차가 다스리는 소국으로 구성. - 목지국 진왕이 삼한을 통솔하였다고 하며, 통제가 약해지면서 마한이 백제, 진한이 신라, 변한이 가야로 발전. 2) 삼한의 사회와 문화 - 신지, 읍차 등 중앙 정치 지배자 외에 천군(天君)이 존재, 신성지역인 소도에서 종교, 농경 등 의례 주관. - 소도는 별읍(別邑)으로, 죄인이 도망쳐왔을 때 함부로 할 수 없었음(제정분리 사회). - 해마다 5월과 10월에 씨를 뿌리고 귀신에게 제사. - 철제 농기구의 본격적인 사용으로 농업 생산력이 늘어나는 시기. - 특히 변한 지역은 철 생산지로 유명, 한반도 내외로 수출. - 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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