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니스토리 13강 문명의 진화 인류는 움켜쥘 수 있는 손, 두발로의 직립보행, 커다란 뇌 등의 특징을 가진다. 이런 특징들은 인간 선조들이 보여준 자연 환경에 대한 빠른 적응의 결과이다. 이러한 특징들에 더하여, 우 리의 얼굴모양은 영장류의 얼굴 모양과는 상당히 다르다. 길게 튀어나온 주둥이를 영장류들은 가지고 있으나, 인류의 얼굴은 편평하며, 입은 들어가고 아래 턱의 끝 부분만이 살짝 돌출되 어 있다. 현대 인류에서 아래 턱의 끝부분은 치열을 넘어서 밖으로 살짝 돌출한다. 자세히 보 면, 아래 턱이 얼굴보다 앞으로 돌출된 것이 아니라, 치아들이 뒤쪽으로 이동하면서 생긴 결 과이다. 이런 변화가 어떤 환경적인 적응의 결과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사실, 치열의 후방 이 동으로 인해 우리에게 이득이 발생하는지 여부도 불분명하다. 오히려 현생 인류에겐 지금 다 소 불편함이 발생한다. 어금니 쪽에서 치아들 간의 공간이 부족해지며, 서로 너무 빽빽하게 들어차서, “사랑니”라고 부르는 맨 뒤의 치아들이 다소 혼란스럽게 배열된다. 현재 사랑니의 갯수는 축소되고 있는 중이거나 이미 상당히 없어져가는 과정이라고 생각된다. 미래의 인류 후손들에게는 사랑니의 문제가 아마 발생하지는 않을 지도 모른다. 자연 환경에 대한 적응의 또 다른 결과에는 코의 돌출 현상도 있다. 현대 인류에서 코의 역할 은 상당히 중요하다. 사냥처럼 장기간에 걸친 격렬한 활동 중에는 많은 양의 공기가 호흡을 통해 들어오고 나가야 한다. 이때 코 속의 공간은 찬 공기가 몸에 흡입되기 전에 조절되는 공 간이다. 이러한 완충적인 공간으로 인하여 호흡 시에 보온과 보습의 효율이 증가된다. 동시에, 외부 공기가 코 중심부 지역의 좁은 통로를 지나 몸 속으로 흡입되기 직전에 코 안의 점막은 공기를 정화하고, 따뜻하고 축축하게 해주며, 숨을 내쉴 때는 열과 수분을 다시 회수하는 역 할을 한다. 그런데, 코의 이런 기능들이 제대로 발휘되려면 코의 구조가 커져야 한다. 이를 위 해, 두개골을 변형시키거나 아니면 코를 몸 바깥 쪽으로 튀어나오도록 확대시켜야 한다. 외부 로 돌출된 현생 인류의 코는 이렇게 하여 탄생하였다. 추운 유럽의 북방 계통은 특별히 더 돌 출된 코를 가지고 있다. 반면에 열대 지방의 인류는 덜 돌출된 코를 가진다. https://en.wikipedia.org/wiki/Nose#/media/File:3D_Medical_Animation_Nose_Top_sec tion.jpg 코 뿐만 아니라 인간의 체형 또한 자연환경에 대한 적응의 결과로 나타났다. 추운 기후대에 사는 사람들은 에스키모처럼 몸집이 작고 단단하며 몸이 주로 옆으로 퍼지듯이 발달하지만, 반대로 따뜻한 기후에 적응한 사람들은 열을 발산하여 시원하게 만들기 위해, 일부 아프리카 사람들처럼, 몸이 주로 아래위로 길게 늘어나듯 발달한다. 키 뿐만 아니라 몸무게도 자연환경 에 대한 적응의 결과이다. 추운 북부 유럽 사람들은 체구가 크고 몸무게도 많이 나가지만 더 운 지역의 피그미 족은 매우 작다. 사람들의 피부색 변화도 자연 환경에 대한 적응의 결과다. 피부색은 멜라닌 세포의 분포와 그 세포로부터 방출된 색소의 양에 의해 결정된다. 열대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많은 양의 태양 자외선에 노출되는데, 자외선의 흡수를 막기 위해 멜라닌을 많이 방출하여 피부색이 어두워 진다. 추운 기후 지역에서는 반대로 자외선의 흡수량을 늘리기 위해 피부 멜라닌을 감소시켜 밝은 피부색이 된다. 피부 멜라닌의 양은 계절적으로도 변한다. 겨울에 감소할 뿐 아니라, 구 름이 많이 끼거나 숲이 빽빽한 지역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감소한다. 이렇듯 피부색은 환경에 빠르게 적응하고 비교적 가변적이다. 현대 인류는 영장류들과 비교할 때 몸에 털도 현저하게 적다. 아마도 호모 에렉투스나 또는 호모 에르가스타 시절에 거의 다 없어졌다고 생각된다. 더 이상 열매를 수집하지 않고 호모 에렉투스는 사냥을 위해 긴 다리로 먼 거리를 걸어 다녔다. 이때, 열의 발산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털의 축소를 통하여 냉각 능력을 향상시켰다. 겨울 옷을 벗어 던지듯 보온성 털을 버리 고 피부를 시원한 공기 중으로 노출시켜 좀 더 효율적이며 직접적으로 열을 방출하였다. 땀샘 도 증가하여, 이때부터 인간은 땀을 많이 흘릴 수 있게 되었다. https://sites.google.com/site/5earlyhominids/home/homo-erectus [호모 에렉투스] 언어를 통한 말하기는 인간 능력에 있어 매우 중요하고 획기적인 적응의 결과이다. 그러나 인 류가 말하기 능력을 가지게 됨으로서 얻게 된 최초의 이득이 과연 무엇이었는지는 쉽게 파악 되지 않고 있다. 일반적으로 언어의 사용이 사냥에 유리하다고 생각되기 쉽지만 과연 사냥에 유리하였을까는 다소 불분명하다. 물론, 사냥을 하는 동안 사회적 협동과 분업을 위해 언어는 유용하게 사용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냥의 규모가 커질 수록, 사냥꾼들은 쉽게 소리가 들리 는 범위를 벗어나 퍼져 있게 되므로 언어는 사실상 활용되지 못한다. 게다가 실제의 사냥에는 침묵이 더 중요할 수도 있다. 사자와 늑대는 동료들끼리 소리를 내지 않고 협동하면서 더 효 율적으로 사냥한다. 따라서 언어는 사냥을 하는 동안보다는 오히려 사냥 후 긴장을 누그러뜨 리기 위해 활용되었을 수도 있다. 말하기를 통하여, 성공과 실패의이야기는 다음 세대에게 전 달되어 같은 실수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고, 과거의 성공사례들을 공유할 수 있도록 해주었을 것이다. 언어의 사용이 유발했던 최초의 이득이 무엇이었던 간에, 현대 인류는 복잡한 여러 언어들을 가지고 있다. 말하기 능력은 우리가 현재 생존할 수 있도록 해준 가장 중요한 적응 능력 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문자는 언어보다도 인류를 더 인류답게 만들어 주었다. 문자는 언어를 기록하는 시각적인 기 호들이다. 문자를 통해, 인류는 음성을 기록하여 메시지를 전달하고 미래를 위한 정보를 저장 할 수 있게 되었다. 문자는 기원전 3천년 경부터 사용되기 시작했다. 기록 체계로서의 문자는 인류에게 역사 시대를 열어 주었다. 고대 이집트에서 탄생한 상형문자와 고대 중국에서 태어 난 갑골문자가 가장 대표적인 초기의 문자들이다. 이집트 상형문자는 기원전 3,000년대 초반 에 발생하였고 중국 갑골 문자는 기원전 1,200년경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Egyptian_hieroglyphs#/media/File:Hieroglyphs_from_the _tomb_of_Seti_I.jpg [이집트 상형 문자] 이집트 상형문자는 기원전 12세기경에 지중해에서 교역을 하던 페니키아인들의 문자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 페니키아인들은 이집트에서 상형문자를 배워 자신들의 표음문자인 페니키아 문자를 만들었다. 페니키아 문자는 그리스인들에게 영향을 주어 그리스 알파벳 문자를 탄생시 켰다. 다시 그리스 문자가 향후 라틴문자와 키릴 문자의 조상이 되어 각각 서유럽과 동유럽에 서 활용되었고, 이후 중동으로 건너가 각각 유대인과 아랍인에게 전해지면서 히브리 문자와 아랍 문자가 탄생하였다. 페니키아 문자는 중앙아시아에서는 몽골 문자와 만주 문자의 조상이 되었고, 이후 인도 각 지역의 여러 문자가 되었으며, 더 나아가 티베트문자, 태국문자에까지도 영향을 주어 동남아시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https://en.wikipedia.org/wiki/Phoenician_alphabet#/media/File:Phoenician_alphabet.s vg [페니키아 문자] 고대 중국의 갑골 문자는 거북이 등이나 동물의 뼈에 새겨졌던 문자이다. 갑골문자는 기원전 11세기 주나라에서 금문이라는 문자를 거쳐 결국 중국 한자의 기원이 되었다. 현재 사용되는 한자는 기원 후 약 5세기경 남북조 시대에 완성되었다고 알려진다. 이렇게 완성된 한자는 한 국과 일본 같은 동아시아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렇게 이집트의 상형문자와 중국의 갑골문자 는 세계의 여러 곳 문자의 시조이다. https://en.wikipedia.org/wiki/Oracle_bone_script#/media/File:Shang_dynasty_inscrib ed_tortoise_plastron.jpg [갑골문자] 문자가 인류의 문화적 발명품이라면 좀 더 물리적인 인류의 발명품도 있다. 동그란 물체를 굴 려 마찰을 줄이고 이동을 쉽게 만드는 바퀴가 그런 물리적 발명품들 중의 하나이다. 바퀴는 기원전 4천년전인 청동기시대부터 물레와 같은 장치에 활용되기 시작하다가, 의식이나 행사용 으로 쓰였고 곧이어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실제로, 기원전 3,000여년 경 현재의 이라 크 지역인 메소포타미아에서 쓰였던 나무바퀴가 발견되었고, 유사한 시기에 인도와 중국 그리 고 유럽에서도 바퀴는 사용 중 이었다. 바퀴는 처음에는 통나무 전체를 잘라서 그대로 쓰다 가, 그 후에 통나무 일부를 원반 모양으로 잘라내고 다듬어 사용되었고, 나중에는, 통나무 내 부를 파내어 무게를 줄이기 시작한 끝에, 바퀴 살을 붙여 전체 무게를 획기적으로 줄였다. 이 후에 바퀴의 외부에 쇠를 감아 수명을 대폭 향상시켰으며, 현대에 이르러서는 쇠 대신 고무를 붙여 탄력을 더 높였다. 그러나, 바퀴는 도로 밖의 험한 상황에서는 빠지거나 부서지기 쉽다. 또 진창에 빠지거나 장 애물에 걸려 쉽게 망가지기도 한다. 이리하여 바퀴는 상시적인 유지보수가 필요할 뿐만 아니 라 효율적으로 작동하기 위해서는 도로와 같은 사회 기반 시설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도로를 만들 수 없는 지역에서는 오히려 바퀴보다는 도보나 말 또는 낙타가 주요한 운송수단으로서 아직도 활용된다. 신대륙의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바퀴를 발명하지 못했으며 유럽인들이 몰려 오기 전까지 그 존재 조차도 알지 못했다. 현대에 이르러 이제 바퀴는 너무나도 보편적이며 당연하기에, 바퀴는 전쟁, 정치, 경제, 산업, 기술의 모든 영역에서 큰 영향을 발휘하고 있다. 장거리 이동과 대규모 물자 수송에서 바퀴가 없는 사회는 이젠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결국 바퀴는 인간의 문화를 문명과 문명 사이에 옮기며, 노동 효율을 비약적으로 상승시켜서, 기술 과 지식이 빠르게 퍼져나가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인류의 가장 위대한 발명들은 언어와 같은 정신적 발명품이나 바퀴와 같은 물리적 발 명품이 아니라, 자연과 우주를 바라보는 세계관과 그 세계관 속에서 작동하는 여러 개념들일 것이다. 이러한 세계관은 우리를 둘러싼 자연을 인간이 이해해 가려는 노력과 적응의 결과이 다. 그런 세계관을 우리는 근대에 이르러 과학이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고대의 서양 과학은 이집트문명과 메소포타미아의 문명에서 주로 기원하였다. 현재 이라크의 티그리스와 유프라테 스강 유역에 위치했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은 기원전 3,000년경 수메르의 도시국가시대로부터 시작하였다. 기원전 18세기에는 함무라비에 의해 바빌로니아 왕국으로 확립된 후, 기원전 6세 기 페르시아제국으로 이어지며 세계최고 문명 중의 하나로 성장한다. 또한, 나일강 유역의 이 집트 문명도 수학 특히, 기하학적 사고의 기원지로서 일찍이 측량술과 건축술을 개발하여 피 라미드와 같은 거대 건축물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기자Giza 지역의 대규모 피라미드는 지금도 세계의 불가사의로 널리 인정된다. http://en.wikipedia.org/wiki/Great_Pyramid_of_Giza[기자의 피라미드] 기자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6세기경에 20년간의 건설을 통해 완성된 140여 미터 높이의 건축 구조물이다. 이 피라미드는 정사각형바닥에 전체무게 590만톤이나 되는 석회암과 화강암 벽돌 230만개를 쌓아 올렸다. 이중 가장 큰 화강암벽돌의 무게는 무려 80톤이나 되며, 800km밖에 서 나일강의 홍수를 이용하여 뗏목으로 이동시켜졌다. 이런 벽돌들을 절단하기 위해, 암석의 빈틈 사이에 나무를 끼우고 물을 부어 나무를 서서히 팽창시켜 절단하였다고 추측한다. 피라 미드의 건설자들은 천체의 주기운동도 조사하여, 농업활동, 종교의식, 국가권력 및 사회계급유 지 등을 위한 여러 신화의 근거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이들의 이런 신화적 세계관은 인간의 모습을 한 신들이 자연현상을 지배한다는 굳건한 믿음이었다. 그러나, 물질간의 상호작용으로 자연현상을 설명하려는 새로운 세계관인 자연철학이 곧 이 신화적 세계관을 대체한다. 자연철 학은 다양한 도시국가들을 기반으로 하는 그리스의 혼란스러운 사회 내에서 정치적 통일을 추 구하려던 필요성에 의해 나타났다. 자연철학은 혼란을 극복할 수 있는 단일하고 보편적인 유 형의 지식으로서 인정받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자연철학의 시조는 이오니아 학파로서, 기원전 6세기에서 5세기 사이에 그리스 동부와 터기 서부지역 사이에 위치한 에게해(Aegean sea)를 중심으로 나타났다. [그리스와 터키 사이의 바다인 에게 해] [터키 서부의 이오니아지역] 이오니아 학파 사람들 중의 한 명으로, 기원전 6세기경, 탈레스가, 만물의 유일한 근원은 물이 라고 생각하였다. 또 다른 이오니아 학파의 인물로는, 숫자를 종교적으로 신비화했던 피타고 라스Pythagoras가 있었는데 그는 이오니아지역의 사모스섬 출신으로서, 이탈리아 남부지역에 정착하여 교주로서 활동하였다. 반면에 만물의 근원이 하나가 아니라 여러 개의 물질이라고 주장한 엠페도클레스Empedocles 는 기원전 5세기 경에 만물의 근원이 물, 불, 흙, 공기 등의 4원소라고 생각하였다. 이러한 다 원적 기원설을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 데모크리투스는, 더 이상 나뉘거나 파괴되지 않으면서, 진공 속을 무한히 운동해 나가는 원자가 물질의 기본적인 최소단위라고 믿었다. 그런데, 기원전 5세기 펠레폰네소스 전쟁에서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승리하며 그리스 도시국가 들을 통일한다. 그러나 그리스 북부에 있던 마케도니아 왕국이 그리스를 다시 재통일한 후, 알렉산더가 이집트, 페르시아를 거쳐 인도에 이르는 군사 원정에 들어간다. 그러나 그의 갑작 스런 죽음 이후 제국은 곧 분열되었고, 그 중 하나인 톨레미 왕국이 아프리카 동북부 알렉산 드리아를 중심으로 번성하였다. 이곳에서 이집트 문화와 그리스 문화를 접목한 고대문화의 꽃 인 헬레니즘문화가 탄생하였다. 알렉산드리아에 있던 왕립연구기관인 무세이온Museion에는 동물원, 식물원, 천문대, 실험실, 해부실 등과 함께 수백만권의 장서를 확보한 궁정도서관이 있었다. 이런 도서관을 중심으로 많은 자연철학자들이 활동하였다. [직접 그린 그림임] 예를 들어, 알렉산드리아의 에라토스테네스는 하지날 정오 시에네에서 태양이 머리 위의 천정 점에 위치하여 모든 물체의 그림자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하지날 정오에 알렉산드리아에서는 태양이 천정점으로부터 남쪽으로 7도 아래에 머문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에라토스테네스는 지구는 둥글며 시에네와 알렉산드리아간의 위도차이가 바로 7도라 고 확신한다. [위 그림참조] 동시에 그는 두 도시간 거리가 약 800km이므로, 지구둘레는 약 4만km라고 추산하게 된다. 이렇듯 지구가 둥글다는 주장은 이미 기원전 2-3세기 경에 확립 되었다. 에라토스테네스 이외에도 알렉산드리아에는 태양중심설을 주장한 아리스타코스 Aristarchos와 타원, 포물선, 쌍곡선을 연구했던 아폴로니우스Appollonios, 그리고 지렛대, 부력, 투석기를 개발했던 아르키메데스Archimedes도 있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도, 당시의 우주론을 집대성하여 지구중심설을 완성했던 천문학자 톨레미Ptolemy도 기원 후 2세기경에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었다. 톨레미의 지구중심설은 16세기 중반 폴란드의 수학자 코페르니 쿠스가 태양중심설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는 책으로 출간할 때까지 거의 유일한 우주론 으로서 활용되었다. 이렇게, 자연철학은 그리스의 민주적 정치제도를 기반으로 하는 자유로운 토론과 비판 문화 속에서 성장하여 급기야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의 헬레니즘문화에서 그 정점을 이루었다. 반 면에 고대 최고의 기술자들은 동시대의 로마인들이었다. 특히, 시멘트를 발명하여 원형경기장, 다리, 하수도, 상수도시설 같은 각종 건축물을 로마인들은 건설하였다. 그러나 이런 건축물들 이 보여주는 위용에도 불구하고 로마에는 자연철학적 전통이 전연 없었다. 급기야, 알렉산드 리아와 로마가 5세기에 모두 몰락 후, 자연철학의 전통이 단절되면서 유럽에는 1,000년에 걸 쳐 소위 중세의 암흑기가 도래한다. 그 당시 자연철학은 유럽이 아니라 이슬람 문화권에 의해 계승된다. 유럽은, 특히 알프스 이북의 유럽은, 로마의 몰락 이래로 중세 동안 거의 신석기 시대수준의 경제 문화 지식의 낙후지역이었다. 중세유럽의 지식문화는 교회를 중심으로 비전문적인 학자 에 의해 겨우 명맥만 유지되던 수준이었다. 이곳에서, 돈을 낼 수 있는 학생들이 필요한 교육 을 할 수 있는 교수자들을 계약하여 직접 고용하거나, 또는 돈이 필요한 교수자들이 돈을 낼 만한 학생들을 직접 모우기도 하였다. 이런 세속적 금전거래 형식으로 12세기에 유럽에 대학 이 처음으로 나타난다. 이리하여 프랑스 파리대학, 이탈리아의 볼로냐대학, 영국의 옥스포드대 학 등이 설립된다. 대학의 신입생들은 논리학, 대수, 기하학, 천문학, 음악 등의 기초교양지식 을 배웠고, 이 과정 이후에 다시 선별된 학생들은 신학, 의학, 법학 등을 더 배웠다. 대학은 800년의 역사를 가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사회기관이다. 유럽에는 큰 강이 없다. 경작지는 질척한 진흙의 논이 아닌 건조한 밭의 형태이다. 이렇게 척 박한 농지를 처음에는 소가 끄는 무거운 쟁기를 사용하여 깊게 쟁기질해야 했다. 이후 소보다 속도와 지구력이 더 뛰어난 말을 이용하여 경작지를 개간하기 시작하였다. 이때, 소의 짧은 목에 거는 멍에yoke 대신에 말의 어깨에 거는 가슴걸이horse collar를 중국에서 도입하여 견 인력은 더 향상되었다. 말의 편자horseshoe도 큰 도움을 주었다. [멍에]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0316093 [가슴걸이] http://en.wikipedia.org/wiki/Horse_collar [편자] http://en.wikipedia.org/wiki/Horseshoe 이에 따라 농업은 점차 북 유럽으로 확산되어, 공동소유 및 공동경작과 공동 가축사육을 통한 마을단위의 경제가 형성되어갔다. 이때 중국에서처럼 큰 강이 존재하지 않아서, 대규모 수로 와 같은 관개기반시설을 건설 관리할 필요는 애초부터 없었으며 따라서 중앙정부 수준의 관리 는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중세 유럽에서는 지방분권 체제가 발달하여 경제의 기본 단위 는 마을이었고, 영주와 기사로 이루어진 봉건제가 중세 유럽의 사회를 대표하였다. 영주는 기 사들을 계약을 통해 고용하고, 기사는 다시 영주에게 충성하며 치안과 사법을 책임지고 그 대 가로 일부 토지를 직접 관리하며 세금 및 소작료를 거두었다. 이 와중에, 과거 5세기경 중국에서 이미 발명되어 중세 유럽에 전파된 등자stirrup가 말에서 타고 내리는 과정을 쉽게 하였다. 등자는 말에 탄 사람의 체중을 균형 있게 분산시켜 말에서 떨어지지 않고 안정적인 기마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기마돌격전이 가능하게 된 기사 와 말은 현대의 탱크처럼 중세 유럽의 전쟁터에서 가장 강력한 무기가 된다. [등자] http://mode74.tistory.com/332 이때, 애초부터 인구가 적었던 중세유럽은, 중국에서처럼 많은 인력을 중앙에서 동원할 수도 없었기 때문에, 일찍부터 기계에 대한 관심이 높았다. 인간의 근력에 의하지 않은 기계들은, 과학적 지식 없이 고안되어, 이미 여러 혁신을 이루어 내었다. 예를 들어, 하천의 흐름에서 수 차는 제분기에 동력을 주었으며, 바람을 이용한 풍차는 바닷물을 퍼내어 경작지를 늘려주었 다. 이리하여 유럽인들은, 자연을 이용할 대상으로 보는 공격적인 세계관을 가지기 시작했다. 이런 공격적인 태도는 다시 군사기술에 대한 관심과 혁신으로도 이루어진다. 중세 유럽인들이 이룩한 군사기술적 혁신의 사례로는 거대 화포가 있다. 9세기에 발명된 화약 은 중국에서 주로 불꽃놀이와 같은 축제용으로 활용되었다. 그러나 화약이 유럽에 전파된 후, 최초의 대포를 14세기 초에 만들었다. 이로서 화약기술의 원조인 아시아인들을 대포기술에서 곧 능가하게 되었으며 이 기술은 거꾸로 중동과 아시아로 빠르게 확산되었다. 성벽을 무너뜨 릴 수 있던 화포기술은 기사를 무용하게 만들고, 화포 군대의 유지비용을 영주는 감당할 수 없었기에 중앙정부와 왕의 역할은 점점 더 커져갔다. 소총은 1550년대에 도입되어 일렬로 늘어선 소총수들에 의한 일제 장전사격이 전술로 개발됐 다. 기마병을 완전히 대체한 이런 소총수와 포병부대는 1600년부터 전장의 주역이 되어 이후 2백년 동안 수십만 명의 보병부대가 나라마다 확대되어 나타났다. 또한 대포 공격으로부터의 방어를 위해 중세의 성들은 별 모양의 요새로 개조되었고, 이때 막대한 비용이 필요해서 중앙 집권적 민족 국가들만이 이 비용을 낼 수 있었다. [1593년 만들어진 별모양의 네델란드 요새] http://blog.donga.com/lake1379/archives/7752 육상군사전략의 변화와 함께 대포는 해상군사전략도 크게 바꾸었다. 이전에는 충돌 후 적의 배에 옮겨 탄 후 공격하는 것이 주된 해전 전술이었다. 그러나, 1588년 영국해군이 스페인 무 적함대를 격파할 무렵에는, 일렬로 전열을 맞춘 배들이 측면 대포를 일제히 발포하여 적을 공 격하는 포격전 전술로 변화한다. 또한 많은 인력이 노를 저어 움직이던 갤리galley선에서 바 람을 이용하여 비교적 적은 인원이 탑승하는 대형범선galleon이 등장하여 항해에서 바람을 타 는 기술이 중요하게 되었다. 또 선장이 되려면, 나침반과 북극성의 고도로부터 위도를 확인할 수 있는 항해의 기술을 익혀야 했다. [노를 저어 움직이던 갤리선] http://en.wikipedia.org/wiki/Galley [영국의 대형범선] http://www.mutualart.com/Artwork/British-Galleon-at-Sea/DA0E9C5FBA6749D4 결국, 15세기 이후, 유럽에서 화포무기와 별 모양의 요새를 만들고 관리하는 것이 중앙집권적 문명화의 효과를 불러왔다. 수 천년 전부터 이집트나 중국에서 농업용 관개수로 망의 건설이 중앙집권화를 통한 문명화의 효과를 준 것처럼, 이때가 되어서야 유럽은 단일 문명권역으로서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한다. 유럽이 군대의 유지를 위해 징병제를 도입한 것은 마치 이집트 피 라미드의 건설이나 중국 만리장성의 건설과 같은 노역에 해당한다. 그러나 큰 하천이 없어서 중국처럼 대규모 건설사업을 통한 단일제국의 완성을 유럽은 끝내 이루어내지 못했다. 다양한 인종과 언어의 민족국가들이 서로 경쟁하며 어느 하나도 전체를 지배할만한 충분한 힘을 얻지 는 못하는 혼란스러운 상호 견제가 계속되며 유럽은 여러 군사적 분쟁을 서로 일으킨다. 또한, 15세기에는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나, 인문적 경험적 실용적 경향 의 문화활동이 발생했다. 예술가, 상인, 장인들의 사회 정치 문화적 지위는 향상되었고 미술에 서는 사실적 원근법과 다채로운 빛과 그림자의 효과를 묘사하는 색채기법 등이 출현하였다. 이탈리아의 화가, 발명가, 기술자, 해부학자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도 이때 활동하였다. 원 근법과 색채기법으로부터 르네상스 시대에는 빛과 그림자의 근원인 태양에 대한 특별한 생각 이 신비적인 태양중심주의로 나타났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는 서서히 해상무역의 주도권을 상실하고 있었고 그 빈자리 는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차지하였다. 이 나라들은 유럽의 서부에 고립된 지리적 환경으로 인 하여 직접적인 육로를 통한 동방무역에 가장 불리했다. 이리하여 이들은 해상교역을 통한 직 접적인 동방으로의 해상무역을 시도했다. 먼저 포르투갈이 남하하여 1400년대 초에 아프리카 서해안에 도달하고 1486년 아프리카 남단에까지 이른다. 이후 아프리카 최남단인 희망봉을 돌 아 1498년에는 인도 서해에까지 도달한다. 곧이어 말레이지아 반도에 들어와 싱가폴에 거점을 확립하고 1500년대에 이르면 마카오와 중국 남부 광둥에까지 포루투갈은 도달한다. 스페인은 포르투갈이 갔던 길을 따라가기 보다는 서쪽으로 곧장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에 이 르는 길을 모색했다. 스페인 여왕 이사벨라의 지원으로 이탈리아인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는 1492년 아시아로 가서 금을 찾겠다며 서인도 항로 개척에 나선다. 이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의 지원 하에 포르투갈인 마젤란Ferdinand Magellan은 1519년 8월 10일 5척의 배에 300여명을 이끌고 남아메리카 동부 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1521년 4월에 필리핀 에까지 이르러 사망하지만, 나머지 인원들은 인도와 아프리카를 거쳐 다시 1522년에 3년간의 여행 끝에 유럽으로 귀환하였다. 이를 마젤란의 세계 일주라고 부른다. 이 시대부터 스페인으로는 대량의 금과 은이 신대륙으로부터 유입되어 화폐의 제조에 쓰였으 며 이에 따라 물가는 폭등하고 소규모 농지소유자나 농부, 노동자 등은 몰락했다. 반대로, 상 업과 수공업이 확대되면서 상인과 수공업자들이 큰 세력으로 성장한다. 세계무역중심지는 동 방교역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던 근동이나 지중해를 벗어나 대서양과 인도양으로 바뀐다. 이 에 따라 유럽경제의 중심지도 지중해에 위치한 르네상스의 나라 이탈리아에서 대서양 국가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이동한다. 이런 국제적 교역은 자본주의의 시대를 열고 유럽국가들의 제국주의화를 가속화시킨다. 그런데, 르네상스 시대에 빛의 근원인 태양에 대한 특별한 생각이 신비적인 태양중심주의로 나타났었다. 이 태양중심주의는 코페르니쿠스 혁명의 문화적 배경으로서 작동한다. 폴란드의 수학자이자 천문학자였던 코페르니쿠스Corpernicus가 지동설을 『천구의 회전에 관하여』라 는 책을 통해 발표한다. 1543년의 이 사건을 인류역사상 가장 큰 단일 사건인 과학혁명이라 고도 부른다. 16세기의 이 사건 이후부터, 자연에 대한 실험적 태도와 같은 근대과학의 방법 론이 태어났으며, 인류 인식의 지평은 지구를 벗어나기 시작했다. [코페르니쿠스] http://en.wikipedia.org/wiki/Nicolaus_Copernicus 17세기부터는 과학단체가 나타난다. 1660년에 영국의 왕립협회와 1666년 프랑스의 왕립과학 아카데미가 창립되었다. 과학단체의 등장은 과학자들이 이제는 개인을 넘어 자신들의 공동 이 익을 위한 조직화와 집단화의 길을 걷고 있음을 말한다. 과학단체를 통해 과학자들은 서로의 지식을 조직적으로 상호교환 및 비판하면서 과학을 사회적으로 제도화하고 기관화 Institutionalization하는 길로 접어든다. 더 나아가 뉴튼과 같은 권력적 과학자가 나타나 과학 단체를 동원하여 본격적으로 자신의 업적을 칭송하고 홍보하는 시대도 열린다. 그는 사과나무 에서 사과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자신이 중력의 법칙들을 깨닫게 되었다는 유명한 천재적 일 화로 자신을 포장하여, 조폐국장과 왕립협회 회장을 겸임하는 권력을 영국에서 소유할 수 있 었다. 뉴튼의 사과나무는 전세계에 보내져서 뉴튼을 영웅화하고 대영제국의 영광을 나타내는 상징물처럼 쓰였다. 이런 뉴튼의 이미지에 근거하여, 근대과학적 진보를 사회과학과 인문학으로 확장하려는 계몽 주의Enlightenment운동이 프랑스에서 시작하였다. 계몽주의는 중세를 미신, 무지, 독단, 편견 의 시대로 규정하고 뉴튼의 시대 이후는 근대과학의 시대로서 수학적, 합리적, 경험적, 실험적 시대로 발전했다고 선언한다. 특히 프랑스의 철학자 볼테르는 뉴튼 과학에 입각하여 사회내의 제도적 모순을 해결하자는 정치운동을 주장하였다. 이성을 강조하고 정치적 사회적 권위를 부 정한 볼테르의 영향으로 인하여, 자유주의적 입헌정치의 구현운동이 일어난다. 그러나 이런 계몽주의에 대한 사회문화적 반감도 동시에 일어나 수학적 기계론적 과학에 대한 거부감이 낭 만주의 사상으로 발전하였다. 낭만주의는 과학의 지나친 전문화와 권력화를 우려하며 인간의 감성적 측면에 대한 강조를 해 나간다. [볼테르] http://ko.wikipedia.org/wiki/%EB%B3%BC%ED%85%8C%EB%A5%B4 이 와중에 18세기 직전 위기가 발생한다. 영국에서 인구의 증가로 인한 땔감용 나무의 남벌과 해상국가에 필수적인 조선업이 대량의 목재를 사용 함으로서, 대규모 목재 부족 사태가 발생 했다. 목재의 부족은 석탄과 같은 난방용 자원의 중요성을 부각시켰다. 그러나 석탄채굴은 깊 은 갱도를 파는 과정에서 지하수가 발생한다. 이때 지하수를 뽑아내기 위해, 영국의 무명 철 물상 토마스 뉴커먼Thomas Newcomen은, 물을 끌어올리는 석탄채굴용 펌프 장치로서, 1712년 세계 최초의 증기기관을 발명했다. 그는 정규교육을 받지 못했기 때문에 당대의 과학 지식을 전혀 사용하지 못하였고 따라서 여러 실패 끝에 직관과 짜집기와 행운을 통하여 증기 기관을 우연히 발명하였다. 이렇게 증기기관은 목재부족 사태에 대한 적응의 결과로 탄생하였 다. [뉴커먼의 증기기관] http://en.wikipedia.org/wiki/Thomas_Newcomen 50여년 후, 1765년에 기술자 제임스 와트James Watt도 과학적 이론 없이 오직 경험적으로 뉴커먼의 증기기관을 개량한다. 1800년에는 리처드 트레비식Richard Trevithick이 증기기관 을 소형화시켰다. [트레비식의 1804년형 증기기관] http://en.wikipedia.org/wiki/Richard_Trevithick [스티븐슨의 1816년형 기관차] http://en.wikipedia.org/wiki/George_Stephenson 1814년에는 조지 스티븐슨George Stephenson이 소형 증기기관을 탑재한 최초의 증기기관차 를 발명하고 탄광에서 석탄을 운반하기 시작하였다. 이제, 증기기관을 중심으로, 18세기말 영 국에서는 산업혁명이 일어난다. 산업혁명 기간 동안 새로운 산업들이 발생하여, 제일 먼저, 철 도산업이 증기기관차와 철로, 그리고 교량을 갖추어 갔으며, 직물산업은 증기 동력으로 방직 기를 가동하고, 석탄산업은 증기기관 펌프로 석탄 채굴을 해나갔고, 그런 석탄을 가지고 철광 석을 가열하고 녹이는 제철산업도 함께 성장하였다. 그러나 산업혁명으로 발생한 기계화된 공장시스템은 새로운 문제들도 발생시켰다. 표준화되고 중앙집중적인 생산과 노동의 조직구조와 함께, 노동자들을 감시하는 감독관들의 엄격한 위계 구조를 탄생시킨 것이다. 공장시스템은 남성은 공장일, 여성은 집안일에 전담하는 가사 노동 의 분업도 가속시켰다. 동시에, 도시에서는 저소득 공장노동자들이 급증하면서 계급분쟁의 격 화에 따른 사회통제 및 감시기관도 등장하였다. 자본주의적 국제시장의 형성과 함께 세계 각 지로 유럽인들이 퍼지며 여러 곳에서 분쟁을 야기하기도 했다. 이런 유럽의 파괴적인 산업화 가 제국주의화하는 경향에 반발하여, 낭만주의 운동은 자연의 소박함을 강조하고 가족의 중요 성이나 순수한 인간의 마음 등에 관련된 주제로 눈을 돌리며 음악과 문학을 통한 인간성의 회 복을 추구했다. [1786년의 루이 16세] http://en.wikipedia.org/wiki/Louis_XVI_of_France 이 무렵, 미국독립전쟁을 지원한 결과, 왕실의 재정위기가 발생했던 프랑스에서는 급진적인 사회변혁이 발생한다. 루이 16세의 과도한 세금에 시달리던 시민계급이 국민의회를 결성하며 왕을 견제하기 시작했고 급기야 바스티유 감옥 습격과 함께 1789년 7월 14일에 민중봉기가 일어났다. 이것이 프랑스대혁명의 시작이다. 프랑스 혁명군은 루이 16세와 그의 왕비인 마리 앙뜨와네트를 단두대에서 처형하였고, 세금징수활동을 수행했던 왕당파였으며 근대화학의 아 버지로도 칭송되었던 라브와지에도 단두대에서 처형하였다. [불타는 바스티유] http://fr.wikipedia.org/wiki/Prise_de_la_Bastille [1778년의 마리 앙뜨와네트] http://en.wikipedia.org/wiki/Marie_Antoinette [혁명광장에서 처형당하는 루이 16세] http://en.wikipedia.org/wiki/Louis_XVI_of_France#/media/File:Execution_of_Louis_XVI.jpg [처형당하는 마리 앙뜨와네트] http://en.wikipedia.org/wiki/Marie_Antoinette 그러나 혁명세력의 내부 분열로 인한 독재 공포정치가 정국을 더 혼란하게 했으며, 뒤이어 쿠 테타를 통해 나폴레옹이 다시 1804년에 황제로 즉위하였다. 그는 트라팔가 해전에서 영국에 패배하고 다시 러시아 원정에서도 패배한 후, 엘바섬에 유배되었다가 기적적으로 복귀하였으 나 또 다시 워털루에서 다시 영국에 패배하며 몰락하였다. 이후 프랑스에서는 왕정이 복고 되 었고, 정치권력간의 극단적 투쟁은 악화되었으며 민중 봉기는 끊임없이 반복되었다. 아이러니 하게도 프랑스 민중의 삶은 대혁명 기간을 거치면서 오히려 더 피폐해져서 비참한 삶이 계속 되었다. 급기야 세계최초의 사회주의혁명이었던 파리코뮨마저 1871년에 실패로 돌아가며 무려 3만명 이상이 프랑스에서 처형되는 상황이 발생했다. 계몽주의가 중세의 미신을 타파하고 근대과학을 통하여 합리적 시대로 발전한다고 믿었던 프 랑스의 이상은 완전히 빛을 잃고 큰 방황을 계속했다. 프랑스 대혁명이 초래한 혼란의 역사는 근대과학의 합리성이 과연 인간들간의 갈등을 해결해 줄 수 있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불러 일으키기도 하였다. 인간이 발명한 모든 다른 도구들처럼 과학과 기술이라는 도구도 결 국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사용목적과 가치가 결정된다는 지극히 자명한 사 실이 다시금 우리를 일깨워주었다. 과학과 기술이라는 도구가 그 도구를 사용하는 사람들에 의해 그 사용목적과 가치가 결정된다 는 사실은 현대에까지도 이어진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폴 티베츠 대령이 조종한 에놀라 게이라고 명명된 B-29 폭격기가 히로시마 상공 9400미터에서 우라늄폭탄인 “Little Boy”를 투하하여 600미터 상공에서 폭발하였다. https://en.wikipedia.org/wiki/Enola_Gay#/media/File:Tibbets-wave.jpg [폴 티베츠와 에 놀라 게이] https://en.wikipedia.org/wiki/Little_Boy#/media/File:Little_boy.jpg [리틀 보이] https://en.wikipedia.org/wiki/Fat_Man#/media/File:Fat_man.jpg [펫맨] 에놀라 게이는 티베츠 대령의 어머니 이름이었고 이 폭격기의 최초 목표는 큐슈 동북부의 고 쿠라 였으나 날씨가 나빠 급히 투하 목표도시를 히로시마로 변경했었다. 구체적인 사망자의 수는, 일본 측 주장에 의하면, 폭발 직후 최소 6만 6천명이 현장에서 즉사하고 45년말까지 10만명으로 사망자가 증가했으며 5년후까지는 무려 2십만명 가까이 사망했다고 한다. 다시 3 일 후에는 플루토늄폭탄인 “Fat Man”이 나가사키에 투하되어 비슷한 숫자의 사망자가 발생 한다. 이제 현대 과학기술의 무기체계가 인류 전체의 현재와 미래에 직접적인 영향을 발휘하는 시대 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핵무기와 같은 대량 살상 무기체계의 등장은 인류가 자연환경에 적 응하기 위한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을 전부 수포로 돌릴 수도 있다. 다양한 인종과 언어의 국 가들이 서로 경쟁하는 이 혼란스러운 상호 견제의 국제질서는 이미 유럽의 역사에서 보듯이 끊임없는 여러 분쟁들의 원인을 제공할 것이다. 이런 심각한 상황 속에서, 우리는 이제 우리 를 둘러싼 자연환경에 대해서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들이 직접 만들어 놓은 인위적 환경에 대 해서도 인류의 생존을 위한 적응의 노력을 멈추지 않고 지속해야 한다. 우리가 이런 적응에 궁극적으로 성공할 수 있을지는 바로 오늘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손에 달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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