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한국의 형성 7주차: 1930~40년대, 일본제국의식민지조선ʻ동원하기’ 2024년 4월 15일 01. 문제의식 v1910년대의 일반적 정치/사회 구조 식민정책 식민정책 총독부, 총독, 관료, 경찰, 군대 집단 집단 사건, 단체 개인 개인 사회생활상, 인물 01. 문제의식 v1920년대 일반적 정치/사회 구조 식민정책 일 집단 사건, 단체 집단 개인 조 선 식민정책 총독부, 총독, 관료, 경찰, 군대 본 개인 사회생활상, 인물 01. 문제의식 v1930~1940년대 일반적 정치/사회 구조 식민정책 식민정책 총독부, 총독, 관료, 경찰, 군대 일 집단 사건, 단체 집단 개인 조 선 본 개인 사회생활상, 인물 01. 문제의식 v일제강점기를 살아간 청년 세대 1910년대 1920년대 ü 1880~1890년생 ü 1900~1910년생 ü 조선에 대한 기억 ü 대한제국에 대한 기억 ü 일본에 대한 저항 ü 3.1운동에 대한 기억 1930~1940년대 ü 1910~1920년생 ü 일제강점기 출생 ü 자본주의화 진행 ü 전쟁의 확산 01. 문제의식 1910~1945년 갈등과 배제 CONFLICT&EXCLUSION 01. 문제의식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통치에서 발생한 갈등은 무엇이며, 배제된 것은 무엇일까? 국가의 일방적이며 강압적인 동원은 사회와 개인의 관계를 단절한다. 01. 문제의식 우리의 일상에는 피하기 어렵고, 동원되어야 하는 시간들이 있다. 1930~40년대 일제 식민정책의 동원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02. 수업개요 1. 1930~40년대 일본제국의 조선 식민정책 ü1930년대 전반의 전시 동원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ü 중일전쟁 이후 전시 동원은 어떻게 더 심화되었을까? 2.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ü 독립군과 의열 활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ü 1930년대 민족 간의 갈등이 격화된 까닭은 무엇일까? ü 조선민족의 정체성과 관련한 사건은 무엇이 있었을까? 02. 수업개요 3.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ü 전시체제에도 유행은 있었고, 소비는 계속되었다? ü 무언가에 ʻ미친’ 사람들, ʻ이상한’ 종교, ʻ새로운’ 사상은 왜 유행했을까? ü 1930~40년대에 보급된 매체와 문화예술은 무엇이었을까? 03. 기초 지식: 세계대공황 ü 1929년 미국 뉴욕 증시의 대폭락으로 시작 ü 전세계의 경제 불황과 실업 발생 ü 미국의 채권 회수, 보호주의 정책 ü 독일의 나치당 집권 배경 ü 일본의 침략 전쟁과 천황제 중심 체제 강화 배경 03. 기초 지식: 1930~40년대 일본의 침략 전쟁 1931년 1937년 ü 만주사변 ü 만주국 성립 ü 중일전쟁 ü 전시체제기 본격화 1941년 ü 태평양전쟁 ü 전쟁 확대 03. 기초 지식: 만주사변 ü 기간: 1931년 ü 만철노선을 폭파시키고 그 책임을 중국군에 돌림 ü 일본 내각에서 확전을 반대, 관동군의 진격 ü 일본 육군의 성과에 이어 일본 해군도 상해 침공 ü 1932년 만주국을 세워 청 황제 푸이를 황제로 임명 ü 국제기구에서 철수를 권고하자 국제연맹 탈퇴 ü 군부 중심의 천황제 파시즘 체제의 확립 03. 기초 지식: 중일전쟁 ü 기간: 1937년 ü 노구교 사건으로 중국 공격 본격화 ü 북경과 천진에 대한 공세로 점령 ü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의 국공합작 ü 상해와 난징에 대한 공격, 치열한 저항 ü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난징의 민간인 학살 ü 중국 진출의 어려움, 소련과의 전투에서도 패배 03. 기초 지식: 태평양전쟁 ü 기간: 1941년 ü 중국의 포위 목적, 서양 세력과의 갈등 ü 1940년 독일 히틀러의 승기로 동맹 체결 ü “대동아전쟁”이라 부르며 전쟁 시작 ü 일본의 진주만 습격, 미군의 패배 ü 1942년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군의 반격 ü 1944년 미군의 사이판과 필리핀 탈환 ü 1945년 8월 14일 천황의 “무조건 항복”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전시체제(戰時體制) 모든 사회 기구와 조직을 전쟁 수행에 맞도록 편성한 체제 ü 6대 조선총독 우가키(재임 1927, 1931~1936) ü 내선융화, 농공병진 정책 ü 7대 조선총독 미나미(재임 1936~1942) ü 내선일체, 황국신민화 정책 만주사변 중일전쟁 태평양전쟁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내선융화 일본과 조선이 사상적으로 하나가 되자! ü 6대 조선총독 우가키의 정책 구호 ü 1929년 세계대공황으로 인한 사회 경제의 혼란과 식민 지배의 불만 증대 ü 조선인을 일본인과 사상적으로 융화하여 같은 사상과 사고를 갖도록 하는 목표 ü 만주 진출을 위한 조선 동원: 일선만(⽇鮮滿) 블록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내선융화 ü 우가키 총독의 정책 방향 - 조선에서 일본자본의 지배력을 확대 - 조선에서 중화학 공업과 근대 공업 토대 마련 - 조선인을 만주로 이주시킬 것 - 조선인의 반중 감정을 자극할 것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내선융화 “만주사변을 동기로 한 국제연맹의 탈퇴와 그 후 열강의 태도에 대한 일본의 결의를 조선인에게 인식되어, 정신작흥, 경제갱생운동을 철저히 한 결과 일 한병합조선의 정신에 기초한 일본의 조선통치의 방침에 대한 편견이 현격히 제거되었다. 조선인의 진정한 행복은 실로 일본인이 되는 것에 있으며, 장래 공존공영하는 것으로써만 달성될 수 있다.” - 우가키 총독의 일기 ☞ 정신작흥: 내선융화, 사상범 통제 ☞ 경제갱생: 농촌진흥운동, 산업개발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농촌개발 ü 1920년대 산미증식계획으로 식민지 경제 구조 - 조선은 식량 생산, 일본은 공업 개발 ü 1934년 산미증식계획의 폐지 - 1920년대 소작쟁의의 다수 발생 - 대공황의 여파로 인한 농가의 해체 ü 농가의 자급자족을 강조하면서 농촌진흥운동 - 소작료 인하를 통한 농촌경제 부흥 - 만주 진출을 위한 농업 생산 증대 ü 각지에 농촌진흥위원회를 만들어 농민지도 - 개별 농가경제 장악과 농민 지도를 위한 조직화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농촌개발 ü 모범부락 - 일제의 시책과 요청에 부응하는 촌락을 선발 - 농사개량을 통한 생산력 증대 - 농촌사회를 체제순응적으로 개편 ü 모범부락의 선발 - 기존 촌락 중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둔 곳 선발 - 처음부터 일정한 부락을 모범부락으로 지원 ü 모범부락에 시설과 지도를 집중 투입하여 성과를 얻은 뒤 이를 인근 촌락에 과시 ü 촌락 간의 경쟁심을 유발시켜 관의 정책 홍보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산업개발 ü 한반도 북부의 수력발전과 결부된 화학공업 개발 ü 흥남에 대규모 조선질소비료 공장 설립 - 일본의 자본 투자 - 일본의 대규모 노동 이민: 중간관리자 ü 조선의 빈민을 공업화에 동원 ü 대공황 이후 금의 확보를 위한 광업 개발 유도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만주붐과 만주 이민정책 ü 1932년 만주국 설립 이후 조선농민의 이주 권장 ü 농촌실업 문제 해결과 만주국의 유지 ü 만주를 기회의 땅으로 여긴 다수의 조선인 이주 ü 총독부의 조직적인 이주 정책 실시 - 1932~1942년까지 약 100만 명의 조선인 이주 - 만주 철도 개발로 인한 함경도의 부동산 열풍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ʻ건전한 국민’ 되기 ü 심전(⼼⽥)개발 운동 - “일반 민중이 건전한 신앙심을 배양하여 심전을 윤택하게 한다.” - 조선인의 일본 국민으로서의 정신 수양 강조 ü 개인의 바른 인생관과 국가관, 사회관 → 완전한 인간 되기, 국민의 자격 갖추기 → 문화의 향상, 국 력의 강화에 기여하기 ü 총독의 명으로 각 도에 전달되어 관공서, 학교, 신 사 등에서 사상교육 실시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조선사』편찬 ü 경성제대를 중심으로 일본인 학자들의 조선사 연구조직 체계화 ü 총독부의 지원 아래 개항기부터 당대에 이르는 조선의 역사, 사회, 경제 전반에 대한 연구 ü 민족성론, 정체성론, 반도사관 ü 조선사회를 정체된 사회로, 일제하의 조선을 발전한 사회로 대비함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내선일체 조선인과 일본인은 운명공동체이다! ü 7대 조선총독 미나미의 정책 구호 ü 1937년 중일전쟁 이후 황국신민화 정책의 본격화 ü 조선인의 사상과 민족성을 지배하여, 전쟁 수행을 위한 동원 목적 ü 조선의 대륙병참기지 정책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대륙병참기지 ü 미나미 총독의 훈시 “제국의 대륙전진병참기지로서 조선의 사명을 명확하게 파악하는 것입니다. (중략) 내지로부터 해상수송이 차단될 경우 조선의 능력만 가지고 이를 보충할 수 있는 정도까지, 조선의 산업분야를 다각화하고 특히 군수공업의 육성에 역점 을 둘 것입니다.” ☞ 전쟁수행을 위한 조선의 공업화 추진 ☞ 단독으로 병참기지 기능 수행을 가능하도록 조선 산업의 다각화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사상통제: 궁성요배와 황국신민서사 ü 일본천황이 있는 쪽을 향해 허리를 꺽어 큰절 을 하는 ʻ궁성요배’ ü 공식 행사의 필수 식순 ü ʻ황국신민의 서사’라는 서약 구호를 만들어 암송하도록 함 ü 학교, 단체, 직장, 모임에서 반드시 함께 복 창하도록 함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사상통제: 신사참배의 의무화 ü 1936년 신사 제도 개정에 대한 칙령 발표 ü 황민화를 위해 1읍면에 1신사를 목표로 전국에 신사 건립 ü 신사참배는 종교와 무관한 ʻ국민의례’임을 강조 ü 1932년 로마교황청은 ʻ애국’의 표현임을 인정, 개신교 측도 일부가 이를 수용하여 신사참배 실시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사상통제: 사상범의 감시 ü 1936년 조선사상범보호 관찰법 “다시 죄를 범할 위험을 방지하기 위해 그 사상과 행동을 관찰하여 그를 보호함에 있다.” ü 1941년 조선사상범예방 구금령 “다시 동일한 죄를 범할 우려가 현저할 때 예방구금소에 이들을 수용하여 개선한다.” ☞ 불온사상에 대한 통제, 이들에 대한 전향을 유도 ☞ 사상범에 대한 사회격리와 규율을 통한 교화, 단련을 법제화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사상통제: 전향 ü 자신의 정신적 신념이나 사상적 경향을 바꾸어 일제의 천황제에 승복한다는 의미 - 공산주의자: 마르크스 혁명사상의 단념, 제국주의 체제 인정 - 민족주의자: 민족의 독립 포기, 일제의 내선일체에 대한 인정 ü 지방별로 고등계 주임과 주재소 경찰관으로 하여금 전향대상자를 시찰, 전향 설득 ü 전향대상자들에게 직업 소개 및 알선 등 생활대책 마련 ü 전향자들의 모임을 구성해 전향을 유도, 천황과 조선총독부 보조금 지급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사상통제: 수양동우회 사건과 이광수의 전향 ü 안창호의 흥사단의 국내 조직으로 조선에 ʻ수양동우회’가 설립 ü 실력양성론에 기초하여 조선 신문화 건설의 기초를 준비하는 데 목표 ü 부르주아 사회운동으로, 농촌계몽과 문자보급 등을 실시 ü 안창호의 독립운동과 연계시켜 수사 ü 1937년 수양동우회 회원들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 구형 ü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구속된 안창호가 사망하자 풀려난 이들 가운데 다수 전향 ü 이광수는 조선문인협회장이 되어 문학계를 중심으로 한 친일에 앞장섬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사상통제: 박문사 “메이지 천황을 신체로 모신 조선신궁과 메이지 천황의 신임이 두터웠던 이토 히로부미 공을 보존하는 박문사를 대비시켜 남산을 중심으로 건립한 것은 우연이 아니다.” - 경성일보, 1932.10.24 ü 이토 히로부미를 모시는 사당을 장충단에 건립 ü 1939년 중일전쟁에서 사망한 일본군인에 대한 위령제 ü 데라우치, 이완용, 송병준, 김옥균 등 조선 합병 공로자 합동위령제 ü 일본 전통 불교건축과 조선풍을 혼재, 재료를 일본산과 조선산 혼합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사상통제: 박문사 ü 이토 히로부미 사망 30주년을 맞아 행사 개최 ü 안중근의 아들이 박문사에서 참배하고 사죄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속죄하고, 전력으로 국 가에 보답하는 정성을 다하고 싶다.” ü 이토 히로부미 아들과 안중근 아들의 화해 모습 연출 “극적대면, 마치 형제와 같았다. 오월의 30년(적개 심이) 영원히 풀렸다.”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사상통제: 국민정신총동원 ü 총독부를 정점으로 행정조직, 민간조직을 동원하여 ʻ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조직 “동양 평화를 확보하여 대정신을 세계에 널리 알림은 제국의 국시이다. 우리는 이에 일치 단결하여 국민정신을 총동원하여 내선일체 능력을 발휘해 국책 수행에 협력한다.” ü 황국정신을 함양하고, 전시 경제정책에 협력 등 - 매일 아침 궁성요배, 황국신민서사 외우기 - 정오에 전사자들에 대한 추모와 감사 묵도 - 매월 1일 신사참배, 8일에는 일장기 게양 - 첫 번째, 세 번째 일요일에는 근로봉사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농촌 통제 ü 지방행정의 하부인 면에 대한 통제에서 부락에 대한 통제로 확대 ü 부락 연맹, 애국반의 구성 - 애국반: 10호 내외로 인접한 이웃끼리 결성, 일상 생활에 대한 감시와 동원 ü 근로보국운동: 공공노동을 무임금으로 동원 “근로를 통해 조선인이 국시에 참여할 수 있으며, 황국신민된 신념을 각인시킬 수 있다.” ü 수입 발생시 일부를 애국 저축, 국방헌금, 국채 구입, 황군위문비로 납부 ü 농촌의 노동력 동원, 자원 수탈을 체계화하고 농촌 전체에 대한 감시체계를 만들어 사상통제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교육령 개정 ü 1938년 제3차 교육령 개정 ü 전시체제의 본격화에 따른 군국주의 교육 중심 ü 보통교육에서 조선인과 일본인의 차별을 없애고, 내 선일체 구현을 목표로 설정 - 1941년 일본과 조선에서 국민학교 제도 실시 ü 학교에서 궁성요배 및 신사 참배, 교육칙어 및 황국 신민서사 암송, 군사훈련, 일장기 게양식, 시국 강화, 황국신민체조, 일본어 사용의 일상화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창씨개명 ü 1940년부터 조선인 본관과 성을 쓰지 못하게 하고, 일본식 씨를 신고하도록 함 ü 일본식 씨를 새로 만들고(창씨), 이름을 바꾸는 것(개명) ü 6개월 간 신고기간을 두고, 신고가 없는 경우 호주의 성으로 씨를 만듦 ü 학교입학, 취업 제한, 경제활동 방해 등 여러 요인으로 조선인 호수의 80% 신고 ü 유명 인사들을 동원해 창씨개명에 대한 대대적인 홍보와 강연회 개최 ü 강제임을 감추기 위해 일부 친일 인사는 조선식 성과 이름을 허용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창씨개명의 독려 “내가 창씨를 한 것은 조선민족의 장래를 고려한 끝에 이 리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굳은 신념에 도달한 까닭이다. 나는 천황의 신민이다. 내 자손도 천황의 신민으로 살 것 이다. 이광수라는 씨명으로도 천황의 신민이 못 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향산광랑이 조금 더 천황의 신민답다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중략) 성명 세 글자를 고치는 것도 그 노력 중에 하나라면 아낄 것이 무엇인가. 기쁘게 할 것이 아닌가. 나는 이러한 신념 으로 향산이라는 씨를 창설하였다.” - 이광수, 창씨와 나, 매일신보, 1940.2.20.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창씨개명의 거부 ü 자결에 의한 저항 ü 창씨개명 정책을 비판하다 투옥 ü 복성을 통해 성을 기억하기: O本, O原, O家 ü 일제를 조롱한 창씨 - 김병하 → 전농병하(덴노 헤이카, 천황폐하) - 엄이섭 → 엄이섭야(엄이섭이다) - 강원야원(에하라 노하라), 강원천대자(에하라 지요코) - 가나다(加那多)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군사동원: 지원병제에서 징병제로 ü 지원병제: 1938~1943년 시행 ü “조선인이 총구를 반대로 향할 수 있으니 징병제는 곤란하다.” ü 1944년에 징병제 실시를 발표 ※ 조선인은 왜 지원병으로 지원을 했을까? 1941년의 설문조사 결과 - 지원동기: 자발적 지원 35%, 관청의 종용 55%, 기타 10% - 심리상태: 열렬한 애국심 28%, 명예 23%, 개인의 동기 15%, 직업 11%, 기타 23%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국민총동원령 ü 1938년에 일제가 인력과 물자를 총동원하기 위해 제정한 법 ü 노동력, 물자, 시설, 출판에 대한 통제, 특히 징용과 물자 수탈이 심각 ü 국민징용령 - 만 16세~40세까지의 청장년 중 현재 총동원 업무에 종사하지 않는 자에게 작용 - 노무동원을 원하는 사업자가 모집 희망인원을 일본 본국에 신고 조선총독부에서 모집 지역을 할당받아 모집 면사무소 직원과 경찰관이 모집에 응하도록 강제력 행사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강제징용: 군함도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강제징용: 군함도 ü 강제징용 가운데 일본에 가장 많은 수 동원 ü 500~6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군함도에 강제 징용되어 석탄을 캐는 일에 동원 ü 지하 1,000m까지 내려가서 16시간씩 작업 ü 아파트 지상층에는 일본인이, 지하층에는 조선인 노동자가 거주 ü 식량사정이 좋지 않아 죽, 콩깻묵을 지급 ü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체벌, 임금 지불의 연체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강제징용: 군함도 세계유산 등재 ü 해방 이후에도 1960년대까지 광업도시로 기능했으나 폐광 이후 무인도가 됨 ü 2015년 ʻ메이지 산업혁명 유산’에 군함도를 포함시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ü 조선인, 중국인 강제징용 사실을 정보센터에 언급하고 피해자를 기리기로 했으나 세계문화유산 등재 이후 별다른 조치를 취하지 않음 ü 강제징용 피해자의 진술이 과장되고 모순된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강제징용 피해를 축소시키거나 부정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강제징용: 사할린 ü 약 6만 명의 조선인 강제 동원 ü 일본의 패전 이후 소련과 미군의 합의에 따 라 사할린에서 일본인은 철수 ü 조선인의 국적 상실을 주장하고 철수 대상 에서 제외시켜버림 ü 일부는 학살당하거나 도망가고, 4만 3천 여명의 조선인이 남겨짐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강제징용: 태평양 ü 태평양 전쟁기 격전지인 남양군도에 파견되어 강제노역에 처함 - 일본군 비행장 벙커 등 군사시설 구축 - 사탕수수 농장 - 총알받이 ü 연합군의 집중포격과 상륙작전, 일본의 옥쇄작 전 등으로 인해 가장 많은 피해를 당한 지역 ü 태평양 전쟁 이후 연합군은 조선인 징용자를 포로로 취급하고 조선 귀환을 협조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위안부 ü 여자들도 전쟁에 동원할 수 있는 ʻ여자정신근로령’ ü 조선과 일본 공장으로 배치된 근로노동자 ü 일본군의 군위안소에 배치된 위안부 ü 위안부의 경우 중국, 미얀마, 싱가포르, 인도네시 아 등 각지에 배치 ü 조선인 외에도 중국인, 대만인, 네덜란드인, 필리 핀인 등이 동원 ü 폭격으로 인한 희생, 패전 이후 이동 과정에서 사망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위안부 문제 “일종의 조작된 이야기다.” “위안부는 자발적으로 돈을 벌러 간 매춘부다.” “위안부는 고소득을 올렸다.” ü 1991년 김학순 할머니의 첫 증언 ü 계속되는 증언 제기와 증거 발굴에도 불구하고 이를 부정하는 일본 우익과 한국의 일부 집단 ü ʻ위안부’가 가지는 표현에 대한 문제 제기 ü 국제사회의 목소리와 다국적 피해자 연대 모임 진행 ü 2015년 한국과 일본 정부 간 위안부 문제 합의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위안부 문제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물자 공출 ü 쌀에 대해서는 부락 책임으로 공출제 시행, 사전 할당제를 실시 ü 하루 한끼 죽을 먹으라는 ʻ죽 먹기 운동’, 만주의 잡곡, 콩깻묵이 배급 ü 도시에서는 1941년부터 외식권을 발급해 식사를 하게 함 ü 금속 공출 “구리나 철을 남기는 것은 부끄러움을 남긴다.” “결전 아래 금속류 공출을 앞장서서 실행하자.” 04. 1930~40년대 일제의 조선 식민정책: 내선융화와 내선일체 전시체제의 호응 ü 중일전쟁 이후 동아일보, 조선일보 등의 언론사의 친일화 - 중일전쟁의 성전화, 조선인 전쟁 동원에 대한 지지 논설 - 일본어 상용 정책에 따라 1940년 자진 폐간 ü 기업인들의 친일화 - 박흥식 - 국방헌금과 비행기 헌납 ü 여성 지도자들의 친일화 - 군국의 어머니, 충성스런 2세를 길러야 한다는 모성애 논리 - 여학교를 운영하고 있던 지도층 여성들의 친일행위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v이봉창 ü 상해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소속 - 조선과 일본에서 조선인에 대한 차별 경험 - 상해임시정부로 가 김구의 명을 받음 ü 1932년 1월 도쿄에서 일본 천황의 행렬에 폭탄 투척 ü 첫 번째 탄은 거리가 짧았고, 두 번재 탄은 불발 ü 1932년 10월 사형선고를 받고 순국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v이봉창 선언문 “나는 적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 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 괴를 시해하기로 맹세하나이다.”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v이봉창 “제 나이가 31세입니다. 앞으로 다시 31년을 더 산다 해도 과거 반생에서 맛본 방랑 생활에 비한다면 늙은 생활에 무슨 취미가 있겠습니까? 그런 까닭에 이제는 영원한 쾌락을 얻기 위 해 우리 독립 사업에 헌신하고자 상해에 왔습니다.” 사진관으로 가서 기념사진을 찍을 때 내 얼굴에 처연한 기색이 있었던지 이봉창이 오히려 나를 위로한다. “저는 영원한 쾌락을 향유코자 이 길을 떠나는 터이니, 우리 두 사람이 기쁜 얼굴로 사진을 찍읍시다.”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v이봉창 “난 일본 왕을 미워하지 않소. 그러나 내 나라를 짓밟고 세상을 전쟁으로 몰아넣은 이 론 왕을 증오하오. 그를 세상에서 없애는 것이 내 나라를 되찾는 길이고, 세상을 구하 는 일이라고 확신하오.”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v윤봉길 ü 상해임시정부 한인애국단 소속 ü 1932년 1월 일본의 상해 침공 ü 1932년 4월 홍커우 공원에서 천황 생일 겸 전승 축하 기념식 개최 예정 ü 기자로 위장한 윤봉길은 일본군 수뇌부를 향해 물 통 폭탄을 던짐 ü 상하이 파견군 사령관 즉사, 함대사령관, 사단장 등 중상을 입음 ü 일본은 상해의 독립세력에 대한 탄압 ü 김구와 임시정부는 항저우로 피신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v윤봉길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v윤봉길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v윤봉길 때마침 7시를 치는 종소리가 들렸다. 윤군은 자기 시계를 꺼내 내 시계와 교환하고자 했다. “제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 선생님 말씀에 따라 6원을 주고 구입한 것인데, 선생님 시계는 불과 2원짜리입니다. 저는 이제 1시간 밖에 더 소용이 없습니다.” 나는 기념품으로 그의 시계를 받고, 내 시계를 그에게 주었다. 윤군은 자동차를 타면서 가지고 있던 돈을 꺼내 내 손에 쥐어주었다. 그러는 사이 자동차는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마지막 작별의 말을 건넸다.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 백범일지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한인애국단의 의열투쟁 v효창공원의 삼의사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만주 지역의 독립군 v양세봉의 조선혁명군 ü 1920~30년대 만주 일대에서 독립군 활동 ü 조선으로 들어가 경찰소와 면사무소 습격 ü 1920년 후반 민족유일당 조직으로 조선혁명당 개편 ü 1931년 만주사변 이후 중국군과 연합하여 일제 공격 ü 영릉가에서 일본군의 격파, 한중연합의 공고화 ü 밀정에 의해 암살당함, 묘를 숨겼으나 일제가 묘를 파 헤침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만주 지역의 독립군 v지청천의 한국독립군 “조국광복을 위해 싸웁시다. 싸우다 싸우다 힘이 부 족할 때에는 이 넓은 만주벌판을 베개 삼아 죽을 것 을 맹세합니다.” ü 대한제국 시기 육군무관학교 출신 ü 일본육군사학교 졸업 후 일본군 육군 소위 임관 ü 제1차 세계대전 때 탈영하여 만주로 이동, 신흥무 관학교 교관 ü 경신 참변 이후 자유시로 이동했다가 소련군에 체포 ü 1930년대 초 한국독립군 조직 ü 중국과 연합하여 쌍성보, 대전자령 등에서 대승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조선인과 화교의 갈등 v만보산 사건과 화교 문제 ü 1931년 만주 만보산 지역에서 조선 농민과 중국 인 농민의 유혈사태 ü <조선일보> 호외로 ʻ만보산에서 중국농민과 조선농 민이 충돌해서 많은 조선인이 피살됐다’고 보도됨 ü 조선 각지에서 중국인에 대한 습격이 진행됨 ü 평양에서 중국인 상점의 파괴, 127명의 사상자 발생 ü 1년 사이에 20% 가량의 조선 거주 화교가 떠남 ü 일제 당국의 방관과 민족 간 대립의 격화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조선인과 소련인의 갈등 v연해주 조선인의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ü 소련의 연해주 조선인 숙청과 중앙아시아 강제 이주 ü 소련과 일본의 전쟁 위기가 고조되자 소련은 연해주 에 있는 조선인을 ʻ일본 스파이’, ʻ반소 반당 분자’라 는 명목으로 숙청 ü 연해주 방면에 거주하는 18만명의 한인을 중앙아시 아로 강제 이주시킴 - 1937년 한 해 동안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이주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조선인과 소련인의 갈등 v까레이스키(고려인) ü 중앙아시아 이주 이후에 한인 사회 유지 ü 집단농장을 운영하면서 생활 영위 ü 열악한 이주 환경, 소련 당국의 감시에도 정착 성공 ü 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에 적극 동조, 참여 ü 교육시설에서 소련어와 조선어 교육 ü 조선어로 된 신문과 잡지, 라디오, 영화관 운영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일장기 말소 사건 v손기정의 베를린 올림픽 우승 ü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에서 손기정 금메달을 땀 ü 올림픽의 꽃 마라톤에서 2시간 29분 19초로 세계신기록 ü 손기정은 일본 국기를 달고, 손기테이란 이름의 일본 대표로 출전해야 했음 ü 일본인 대표단의 손기정 견제와 훈련 배제, 차별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일장기 말소 사건 v일장기 말소 사건 ü 조선중앙일보, 동아일보가 1936년 신문에 베를린 올 림픽 우승자 손기정의 사진을 실으면서 일장기를 말 소한 사건 ü 조선인의 올림픽 금메달 소식임에도 일본이 자신 들의 우승으로 내세우는 것에 대한 분노 ü 조선중앙일보는 일제 당국에 의해 무기정간 ü 1937년 전시체제의 본격화에 앞서 조선인들의 민 족 정신과 일제가 부여한 국민이라는 정체성이 충 돌한 사건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일장기 말소 사건 v베를린 올림픽 뒷 이야기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일장기 말소 사건 v베를린 올림픽 뒷 이야기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한글 v브나로드 운동: 아는 것이 힘! 배워야 산다! ü 한글 보급 운동: 당시 2000만 인구 중 85% 문맹 ü 1929년 조선일보에서 제1회 귀향 남녀 학생 문자보급 반이라는 공고를 내서 귀향 학생들이 각 고장에서 문자 를 가르칠 것을 제안하여 장학금 지급 - 조선일보와 함께 동아일보도 참여 - 여름방학 동안 진행, 1등에서 5등까지 장학금 지급 - 한글원본을 가지고 한글 교육 - 한글원본은 조선어연구회의 한글맞춤법 통일안 보급 ü 1931년 제3회 문자보급 운동에 1,800명의 학생 이 참가, 한글원본은 30만 부가 배포됨 ü 1935년 총독부가 강제적으로 중단시킴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한글 v조선어학회와 한글 ü 주시경의 뜻을 이은 후학들이 조선어연구회 조직 ü<한글> 잡지의 창간, 가갸날(한글날) 선포 ü1931년 조선어연구회에서 조선어학회로 변화 ü한글 맞춤법 통일안,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 ü언론의 관심을 받아 대대적인 홍보 진행 05. 1930~40년대 주요 사건과 단체 : 한글 v조선어학회 사건 ü 조선어를 사용하는 여학생들 수사를 계기로 조선 어학회 인사들을 대거 구속 ü 1936년부터 준히바고 있던 <조선어사전> 편찬 완료 시점에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지도층 구속 ü 출판사에 넘긴 사전 원고가 압수 ü 해방 이후 서울역 창고에서 일제가 버린 원고를 발 견함으로써 <조선말 큰 사전> 출판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유행과 소비: 백화점의 시대 ü 1930년대 남대문과 종로에 백화점 설립 - 남대문: 미쓰코시, 조지아, 미나카이 백화점 - 종로: 화신 백화점 ü 미쓰코시 백화점 - 옥상에 식당을 열어 멜론, 아이스크림, 소다수 판매 - 옥상정원에서 조선은행과 시가지 감상, 네온사인 - 1층 화장품, 신발, 식료품, 2~3층에 의류, 4층에 식당 - 1955년 미쓰코시 백화점에 동화백화점 설립 - 1963년 신세계백화점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유행과 소비: 백화점의 시대 ü 조선의 자존심, 화신 백화점 - 조선인이 경영한 최초의 백화점 - 남대문에 있는 백화점과 달리 종로에 위치함 - ʻ민족주의’ 마케팅으로 조선인이 다수 이용 - 조선 최초로 에스컬레이터를 설치 - 1층에는 과자를 파는 자동판매기 설치 ü 6층에 가구 매장과 뉴스관을 설치 - 뉴스관: 250명 정원으로 관람료를 내고 뉴스 시청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유행과 소비: 백화점의 시대 “조선의 명물이 화신이라면 화신의 명물은 식당이라 고 하여도 무방하겠습니다. 화신 식당의 명물은 조선 요리입니다. 깨끗한 자리와 깨끗한 그릇으로 조선요 리를 제공하는 집은 경성 시내 화신 한 곳밖에 없습 니다.” 화신 백화점 홍보 책자(1934) ü 다른 백화점과는 달리 조선 음식을 판매 ü 한복을 입은 조선인이 다수 이용 ü 조선런치: 밥과 김치, 나물, 전골, 구이 찜 ü 여름에는 도미찜과 백숙, 겨울에는 떡국과 만둣국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유행과 소비: 화신 백화점의 소유주 박흥식 ü 1937년 중일전쟁 이후 친일활동 본격화 - 동양척식주식회사, 국민총력조선연맹 등 친일단체의 핵심적인 역할 담당 - 거액의 국방헌금 기부 - 조선인의 전쟁협력과 학병지원을 독려 ü 해방 이후 반민특위의 1호 인사로 체포 ü 한국전쟁 이후로 기업 활동 재개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유행과 소비: 롬펜과 다방 ü 1920년대 말 대공황으로 인해 실업자의 증가 ü 보통학교 졸업생 중 75% 이상이 무직자 ü ʻ눈칫밥 롬펜’ 학력은 번듯한데 눈칫밥을 먹는 무 직자를 지칭하는 말 ü 명동과 종로를 중심으로 다방이 개점 ü 다방에서 시간을 죽이는 롬펜의 발생 “멜랑콜리를 어루만지는 가장 조그마한 안식소” 조선일보, 1934.2.9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유행과 소비: 롬펜과 다방 ü 문인과 예술가들도 다방에서 예술과 사교활동 ü 대표적인 다방 ʻ낙랑파라’ - 도쿄미술학교 출신의 주인이 개점 - 경성에서 화가, 음악가, 문인이 가장 많이 모임 - 이태준, 박태원, 이상 등이 자주 방문 - 문호의 밤, 연주회, 출판기념회 미술전시회 등 “다방의 오후 두시, 일을 가지지 못한 사람들이 그곳 등 의자에 앉아 차를 마시고, 담배를 태우고, 이야기를 하 고, 또 레코드를 들었다. 그들은 거의 다 젊은이들이었 고, 그리고 젊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에 피로한 것같이 느꼈다.” <구보씨의 일일>, 낙랑파라에 간 구보씨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유행과 소비: 시내버스의 운행 ü 1928년초 서울에서 20인싱 대형 버스 10여 대가 운행 시작 ü 1930년대 버스회사와 전차회사가 합병 - 노선에 따라 버스와 전차를 환승하는 시스템 ü ʻ버스걸’이라는 여자 차장 - 보통학교를 졸업한 16~20세의 여성 - 산술 시험과 면접, 체격과 말하기 능력이 중요 - 손님과의 실랑이, 남성들의 장난 “세상에 여자의 직업도 많아졌으나 버스 차장같이 고 달프고 속상하고 수입이 적은 노릇은 다시 없을 것입니 다. 제발 귀찮게 좀 굴지 마세요.”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무언가에 ʻ미친’ 사람들: 요요광 시대 “나의 요요여! 인생의 동무여! 늘었다 줄었다 할 그때마다 나의 심정은 어두웠다 밝았다 아아 요요 나의 연인이여!” 백철, 문화 현상으로 본 요요의 유행성(1933) ü 1930년대 외국에서 건너온 요요가 조선에 유행 ü 어린 학생부터 젊은 여성, 회사원까지 즐김 ü 요요의 유행은 자본주의의 몰락을 의미한다는 비판 ü 신체 단련을 내세운 총독부의 정책과는 달리 값싸고 가볍게 즐길 수 있는 유희이자 스포츠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무언가에 ʻ미친’ 사람들: 영어 배우기 열풍 “학교에서든지 사회에서든지 영어 아는 분은 존경을 받는 다. 영어는 입신과 성공의 제일 무기! 학력은 소학만 졸업 을 하여도 영어만 잘 알면 귀하는 꼭 승진!” 신동아, 1933.2 ü 중등학교에서는 1주일에 5~7시간 영어 교육 ü 전문학교, 대학교 입학시 영어 시험 ü 기업 취직이나 승진에서도 영어를 하면 인정 조선일보, 1937.9.26 ü 1939년 말 총독부는 학교교육에서 영어 제외 ü 영어 배격 운동, 영어 말살 운동 ü 태평양 전쟁기 영국, 미국과 대립, 스파이 활동 견제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무언가에 ʻ미친’ 사람들: 황금광 시대 “수삼 년 내로 금광열이 부쩍 늘기도 하였거니와 금광 때문에 졸부 된 사람도 많아졌다. 그래서 웬간한 양복 쟁이로 금광꾼 아닌 사람이 별로 없고 예전에는 미친놈 으로 알았으나 지금은 금광 아니한 사람을 미친놈으로 부르리 만치 되었다. - 삼천리, 1934.8 ü 조선총독부의 금 생산 증대 5개년 계획 ü 금광 개발을 통해 성공하려는 사람들의 골드러시 - 총독부의 허가를 받은 자본가, 지식인 등이 몰림 ü 간호사, 전화교환수로 전전하던 김정숙은 강원도 횡성 땅에서 금광을 만나 몇 백억 원대 부호가 됨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무언가에 ʻ미친’ 사람들: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ü 1930년대 경성의 급격한 성장으로 인한 도시 문제 ü 조선총독부의 ʻ도시 명랑화’ 정책 - 도시인의 생활, 교양, 위생을 위한 시설 정비 - 도시인의 생활과 문화의 향상을 방해하는 것을 퇴치 ü 청계천의 위생, 거주 문제가 가장 심각 “명랑 경성의 암”, “병균 원천”이라는 기사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무언가에 ʻ미친’ 사람들: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 ü 미나미 총독의 ʻ명랑 정치’ 1. 반도 청년 지도에 관해서 언행일치의 명량한 인격을 양성할 것 2. 동양 건설의 핵심은 내선일체의 완벽에 있음 3. 내선일체의 기본은 충량한 황국신민 양성에 있음 ü 교육을 통한 청소년들을 체제 순응적 인간으로 양성 ü 조선의 지도급 인물에 대한 감시 ü 대중매체에 대한 검열과 통제 강화 ü 오락, 유희, 잡기 등에 대한 금지 ü 키스와 에로에 대한 검열과 금지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무언가에 ʻ미친’ 사람들: 서울에 댄스홀을 허락하라! ü 춤을 추고 사교하는 장소인 클럽이 ʻ딴스홀’로 들어옴 ü 1937년 레코드 회사 문예부장, 바와 다방의 마담, 여 급과 기생 등이 조선총독부에 딴스홀 허락을 요청함 “우리들은 이제 서울에 딴스홀을 허하여 주십사 연명으 로 각하에게 청합니다. (중략) 불량 댄스홀의 단속 이후에 도쿄의 신사숙녀가 모두 명랑하고 즐겁게 댄스홀에 출입 하고 있지 않습니까. (중략) 댄스를 하기 때문에 타락한다 하면 그 사람은 댄스를 아니해도 타락할 것입니다. (중략) 명랑하고 점잖은 사교 댄스홀이면 부부동반하여 유쾌하 게 놀고 올 것이 아닙니까.” - 삼천리, 1937.1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ʻ이상한’ 종교: 백백교 사건 “흉폭의 극, 참학의 끝, 백백교의 죄 독물에 죽은 교도 158명, 추정 피살자 남녀 400여명” - 조선일보, 1937.4.13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ʻ이상한’ 종교: 백백교 사건 ü 동학을 기반으로 1920~30년대 유행한 신종교 ü 1원을 내고 기도를 한 후 정화수 한 그릇을 떠놓고 세번 손을 흔들어 주문을 7번씩 세 차례 외움 - 남자: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 ü 종말의 시기에 백백교가 마련한 본소에서 생활 ü 교주의 흰 것으로 천하를 희게 하자! ü 교주에게 헌금을 바치고 딸들을 바치게 하고, 배교 자에게는 모두 살해 ü 교주의 아지트에서 314구의 유기된 시신 발견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ʻ새로운’ 사상: 과학운동 ü 1934년 과학데이 행사 개최 - 찰스 다윈의 기일에 과학의 날 행사를 개최 ü 과학적 방법이 계몽과 진보를 가져다줄 것이라는 믿음 ü 나라의 부강과 독립을 위한 과학 진흥을 주장 ü 기술자 김용관이 발명과들과 함께 과학잡지를 편집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ʻ새로운’ 사상: 우생학 ü 인종, 민족에 따른 우열이 존재한다는 과학적 믿음 ü 태평양 전쟁 기간 여러 민족을 다스리면서 우열을 구분 ü 한센병 환자들을 소록도에 격리, 인체실험 진행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매체: 라디오의 보급 ü 1927년부터 경성방송국에서 정규 라디오 방송 ü 한글 방송 시간이 확대되면서 라디오 보급 확대 ü 1937년 조선 전국에서 수신이 가능한 설비 구축 ü 전시체제기에는 라디오를 통해 조선인의 일상생활 을 규제하고 통제 ü 아침마다 궁성요배 방송, 황국신민서사 방송 ü 정오의 묵도를 위한 사이렌 방송, 감사 묵념 ü 태평양 전쟁 말기에 미국 방송을 수신한 이들은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듣는 도구로 활용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문화예술: 무용수 최승희 ü 숙명여자고등보통학교 졸어 후 일본의 무용가 문 하에서 연습 ü 서양춤과 조선의 전통춤을 접목한 영역을 개척 ü 1930년대 미국, 유럽, 남미 등으로 순회 공연 ü 1930년대의 대표적인 신여성, 패션 스타 ü 1940년대 일본군 위문공연, 국방헌금 등 친일행적 ü 해방 이후 월북하여 북한의 무용을 개척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문화예술: 영화 ʻ춘향전(1935)’의 인기 ü 배우가 대사를 하는 발성영화의 첫 시작 ü 외국에서 들여온 기술을 조선인 기술자들이 주도 ü 잡음이나 입모양과 어울리지 않는 어색함에도 불구 하고 발성영화라는 점에서 관심을 받음 ü 단성사에서 대히트를 기록하고, 지방에도 상영 ü 춘향 역의 문예봉은 당대의 스타 ü 최승희에게 춤을 배우고, 연극으로 데뷔 ü 전시체제기 <군용열차>, <지원병> 등에 출연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문화예술: 전시영화의 보급 ü 전쟁의 장기화로 인해 영화를 선전도구로 활용 -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조선 민중에게 주입하는 수단 ü 1940년 조선영화령: 신고제에서 허가제로 제한 ü 1942년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로 통합 ü 영화 제작과 배급, 상영 등이 모두 총독부의 지시 ü 군대와 관련한 영화가 다수 제작 - <지원병>: 지원병제의 선전 - <병정님>: 전선에 나가는 조선 청년들 ü 도시에서는 영화관에서 단체 관람 동원 ü 농촌에는 이동영사를 설치해 영화 관람 06. 1930~40년대를 살아간 사람들 v문화예술: 군국가요 ü 총독부 주관의 군국 가요 공모전 ü 가창 지도대를 통한 국민개창운동 ü 안익태 - 애국가 작곡가로 알려진 인물 - 1941년 나치 독일에서 관현악단 지휘 - 1942년 만주국 10주년 경축곡 완성, 지휘 - 유럽에서 일본축전곡 연주 07. 마무리 1930~40년대 일제는 전쟁의 승리를 위해 식민지 조선을 동원하였다. 이 과정은 국가의 일방적인 강요였으며, 이로 인해 사회와 개인의 관계는 단절되었고, 서로 간의 불신과 갈등이 심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