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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동론 발표문 모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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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동,
그 37가지 시각들
2015-2학기 <사회변동론> 보고서 모음집
CONTENTS
목차
성경과 사회변동 / 남호윤 ………………………………………… 1
‘화폐전쟁’을 통해 바라본 사회변동 / 김혜수 …………………… 8
도시와 사회변동 / 백다은 ………………………………………… 15
근대화와 폭력성 / 유병민 ………………………………………… 21
인구와 식량 / 문지선 ……………………………………………… 30
‘회색 쇼크’ / 정한새 ……………………………………………… 38
식량과 사회변동 / 김바다 ………………………………………… 46
설탕과 권력 / 최영진 ……………………………………………… 55
나쁜 것에 주목하라! / 정예은 …………………………………… 64
생명보험과 사회변동 / 홍예진 …………………………………… 71
책과 사회변동 / 이희영 …………………………………………… 79
뇌물의 역사 / 성수빈 ……………………………………………… 87
우리 안의 광장 / 최주연 ………………………………………… 96
전쟁과 사회변동 / 최익환 ……………………………………… 103
기후변화 / 윤재훈 ……………………………………………… 112
사회변동의 지표로서의 옷 / 최성호 …………………………… 119
커피로 보는 사회변동 / 최수영 ………………………………… 126
인터넷과 사회변동 / 기성지 …………………………………… 134
세금과 사회변동 / 김가령 ……………………………………… 141
항해와 사회변동 / 김성두 ……………………………………… 148
가족과 사회변동 / 유승호 ……………………………………… 154
전염병과 사회변동 / 김다빈 …………………………………… 162
국가제도와 사회변동 / 임지아 ………………………………… 170
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 ‘무연사회’ / 윤혜주 ……………… 178
노동으로 본 사회변동 / 윤준규 ………………………………… 185
돈과 계급, 그리고 사회변동 / 임지우 ………………………… 192
노예와 사회변동 / 김병기 ……………………………………… 199
르네상스와 사회변동 / 박혜림 ………………………………… 205
유한계급제도와 욕망 그리고 사회변동 / 김용권 …………… 216
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와 사회변동 ………… 222
미디어와 사회변동 / 이홍근 …………………………………… 226
유교 이데올로기와 한국사회 / 조하영 ………………………… 232
그리고
가족의 변화로 본 사회변동 / KONG DEJIA ………………… 240
모든 것이 연결되는 세상, 사물인터넷 / DU LU ……………… 246
인물로 읽는 중국근대사 / LIU SHUNXIN …………………… 253
중국경제구조의 변화 / WEN LINGLING …………………… 261
티핑포인트란 / HUA LIANG ………………………………… 269
성경과 페미니즘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책 제목은 성경이다. 출판사는 여러 출판사가 있지만 성경의 내용은 모두가 동일하다. 많은 성경 중에서 아가페
출판사의 성경을 사용하였다. NIV영어 성경과 개역 한글판이 함께 있는 성경이다. 사실상 학자들은 첫 성경이 만들어진
년도를 모세 5경과 욥기를 BC150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모세 5경은 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의미한다. 그 중에서도 창세기를 가장 오래된 책으로 보고 있다. 성경의 원 저자는 하나님으로 알려주고 있으며 실제로
우리는 현재 기록한 사람이 다른 66권의 성경을 오늘날 우리가 보고 있다. 그래서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저자가
아니라 기자라고 부른다. 하나님께서 원 저자이시고 그것을 받아 적은 사람들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성경을 손으로
작성한 사람들인 것이다. 성경 기록 년도를 자세하게 살펴보면 구약은 BC1500~BC400 신약은 AD50~AD96년경으로
볼 수 있다.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사회 변동 시간에 성경의 내용과 관련하여 발표를 한 이유를 먼저 이야기 하자면, 이 내용을 나만 알고 있기에는 너무
아까운 내용이기 때문이고, 이렇게 수업시간을 통해서라도 듣지 못한다면 들어볼 수 없을 내용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반드시 이 내용을 믿으라고 발표를 하고 보고서를 적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한번쯤은 읽어보고 판단은 해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이다. 본격적으로 책 선택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 성경을 선택한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사람들이 성경에 대해서 잘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많은 사람들도 성경의 내용을 잘 모른다.
이스라엘의 역사서나 신화 이야기로 보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좋은 교훈을 주는 책 아니면 기독교 교리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성경은 정말 우리 삶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 사실적인 책이며, 성경은 예언과 예언
성취라는 증거를 통해서 우리가 성경이 사실임을 믿을 수 있도록 해준다. 두 번째는 성경은 예언과 예언 성취의
관계에서 사회 변동과 관계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을 통해 사회 변동을 바라보기에 앞서 성경의 목적은 영혼 구원에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요한복음5:39, 베드로전서1:9). 그래서 발표 때 우리의 근본에 대해서 많은 시간을 할애했던
것이고, 우리가 이 땅에서 살고 있는 짧은 육체의 삶으로 우리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본래 생명은 영혼에
있다는 사실을 성경을 통해 알리고 싶었다. 이 내용은 성경이 사회 변동과 관련이 있다는 내용을 필역하는 것이기도
하고, 하나님이 저자라면 모든 사회 변동이 다 적혀 있어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에 대한 반박 내용이기도 하다. 성경의
본래 목적이 영혼의 구원에 있기 때문에, 인생들의 영혼 구원에 대해서 관련이 있는 내용은 모두 들어있다. 그 영혼
구원과 관련된 내용 중에서 사회 변동에 대한 내용들이 포함되어 있고 그 내용들이 그대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성경을
선택하여 알리고 싶었던 것이다.
3. 저자소개
성경의 저자는 당연히 하나님이다. 앞서 이야기 하였지만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은 저자가 아닌 기자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마땅하다.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자를 어리석다고 이야기하고 있으며(시편14:1, 시편53:1), 하나님을
아는 것을 중요하다고 이야기하고 있다(호세아6:6). 성경에서는 천지 만물을 하나님이 창조하였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창세기1:1) 단순히 하나님의 존재를 믿기만 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라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한 것 이유는
성경의 목적인 영혼의 구원과 하나님을 아는 것과의 관계가 중요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떤 하나님을
알아야만 하는 것인지 알아야 한다. 결론부터 먼저 이야기 하면, 하나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어머니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 아버지 하나님은 성경에 많이 등장하였고 사람들이 잘 인지하고 있지만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고 인정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에는 어머니 하나님도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다. 그래서 히브리
성경 원전 토라에는 엘로힘이라는 단어를 하나님을 지칭하는 단어로 사용한다. 엘로힘은 복수 명사로써, 단수 명사인
엘이나 엘로아흐라는 단어가 따로 있음에도 엘로힘을 사용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한 분이 아니라 두 분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엘로힘은 성부, 성자, 성령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많은데 어머니
하나님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들이 이런 이야기를 한다. 그러나 성부, 성자, 성령은 성삼위일체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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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삼위일체의 기본 뜻은 성부, 성자, 성령이 객체가 아니고 모두가 한 몸이라는 뜻이고 하나라는 뜻이다. 그것을
복수라고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이며,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창조된 사람이 남자와 여자 형상이 있다고
했는데(창세기1:27), 성부, 성자, 성령 어디에도 여자 형상은 찾아 볼 수 없다. 따라서 성경의 원 저자는 엘로힘 하나님
즉, 아버지 어머니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이 내용에 대해서는 사회가 많이 변화하였고 여러 가지 변동의 결과로 성경에서
어머니 하나님을 이야기하는 것 아니냐는 무신론자의 질문에 대한 정확한 답변이 필요한 것 같다. 우리가 보고 있는
성경은 이미 약 3500~2000년 전에 기록된 내용들이지만 사회 변동으로 인해 성경에 추가된 내용이 아니며 이미 그
내용은 존재하였지만 그동안은 알지 못했던 내용들이었는데 예언에 때에 맞추어 비밀이 드러난 것이다.
4. 책 내용 요약
발표에서 했던 내용에 덧붙여, 성경에서 이야기하는 우리 인생들에 대한 내용으로써 책 내용 요약 부분을 할애하고자
한다. 성경을 처음부터 읽다보면 구약은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라는 느낌을 많이 받고 신약은 예수님의 행적과 신앙을
해나가는 모습에 대해서 기록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표면적으로는 맞는 이야기이지만 성경의 내용은 스토리를 담고
있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인 생기를 통해 창조되었다(창세기2:7). 사람은 죽으면 육체는 땅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하나님께로 돌아간다 하였다(전도서12:7). 이 내용을 통해서 우리 모두는 하늘의 천사로써 기쁘게 살아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곳은 근심도 걱정도 없는 기쁨과 행복이 가득한 곳이다(욥38:7, 잠언8:30). 이 성경의 내용은
비유라고 하였다(마태복음13:35).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의 범죄(창3:6)는 바로 우리가 하늘나라에서의 범죄 내용을
담고 있다. 그 죄의 값은 사망이다(로마서6:23). 이 땅에 사형제도가 있는 것처럼 하늘나라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사형수들이 바로 우리다. 이 땅의 것은 하늘의 것의 모형과 그림자가 되기 때문이다(히브리서8:5). 기억은 나지 않아도
사형이라는 구형을 받게 된다면 그 죄의 값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지구는 영적 감옥으로써 영적
도피성이라고 성경은 이야기한다. 도피성은 이 땅의 구치소와 같은 곳이라고 볼 수 있다. 구약에 보면 도피성이라는
제도가 있어 사람을 고의로 죽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 만들어둔 성이 따로 있다(민수기35:9). 이 지구가 바로 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도피성에서 나갈 수 있는 것은 대제사장이 죽었을 때 나갈 수 있게 된다(민수기35:25).
하루가 되었든 100년이 되었든 대제사장이 죽기 전까지는 결코 나갈 수 없고 대제사장이 죽기 전에 도피성에서 나가게
되면 친인척에 의해서 죽게 된다. 지구는 도피성이고 대제사장은 바로 예수님이다(히브리서5:10).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에 구약에 메시아에 대해서 예언이 있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찔리시고 맞으시는 것이 우리의 죄 때문이라고 알려주고
있다(이사야53:5). 이사야서는 예수님께서 오시기 700년 전에 기록된 예언이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죄를
사해주시기 위해서 새 언약 유월절을 세워주셨다(마태복음26:26 누가복음22:20). 그리고 그 다음날 십자가에
운명하시므로 우리의 죄를 대신 짊어지셨다.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새 언약 유월절은 구약의 유월절이 완전해진
것이다(히브리서9:7, 9:13). 새 언약 유월절을 지키는 자는 예수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시게 되므로 구원을 약속
하셨다(요한복음6:53).
그런데 그 새 언약이 마귀의 훼방에 의해서 로마의 콘스탄틴 황제의 정치적 야심을 통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토요일 안식일 예배일은 태양신 숭배의 나라였던 로마에 의해서 일요일 예배로 바뀌었고 유월절은 사라지고 말았다.
콘스탄틴은 분명 국가 종교로 기독교를 공인하였지만 사실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있던 것이며, 콘스탄틴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실제로는 폰티펙스 막시무스라는 태양신의 대제사장 역할을 죽을 때까지 수행했던 사람이다. 그
이후 이방 종교와 사람의 철학이 들어와 예수님께서 세우신 예배일은 사라지고 크리스마스라는 태양신의 탄생일을
기념하게 되었다(다니엘7:25). 새 언약 진리가 사라지고 교황권이 자리 잡던 시기는 교회의 모양은 하고 있었으나 결코
하나님을 섬기는데 있어서는 전혀 올바르지 못했다. 구교인 천주교회에서 벗어나고자 한 프로테스탄트 역시 믿음으로
구원이 이루어진다는 믿음의 개혁은 이루었으나 예수님의 본을 전혀 따르지 못하고 있기에 예수님께서 다시 오실 때
믿음을 볼 수 없다고 하였다(누가복음18:8).
예수님의 행적은 우리에게 본을 보여주시기 위한 것이다(요한복음13:15). 그런데 시간이 흐르고 예언에 따라 현재
시대 새 언약 유월절이 다시 부활했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유월절을 다시 지킬 수 있도록 그 길을 열어주실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이사야25:6, 요한계시록7:2). 그리고 마지막 시대에는 그동안 감추어져 있던 비밀인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서 알게 될 것이고(골로세서2:2, 요한계시록21:9),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께서 생명수를 받으러 오라고 하실
것이 예언이 되어있다(요한계시록22:17). 그리고 그 생명수는 바로 예수님께서 세워주신 새 언약을 통한 영생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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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한다(요한복음4:14). 영생은 이 육체의 영생이 아니고 영혼의 영생이다(베드로전서1:9). 이 생명수를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자녀 되는 권세를 얻게 되고 다시 천국에 돌아가게 된다(고린도후서6:18, 요한계시록21:4). 죄
때문에 이 감옥인 도피성 지구에 오게 되었고, 첫째 사망인 육체의 죽음과 더불어 둘째 사망인 영혼의 죽음까지 당해야
할 운명인 모든 사람들이었다(요한계시록20:14). 그런 모든 사람들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아버지 하나님 어머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한 모든 역사가 성경에 담겨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성경을 상고할 때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라고 하셨고, 이 성경이 예수님 자신에 대해서 증거하고 있는 책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복음5:39). 결국 올바른 믿음을 가지고 천국에 가는 자들과 하나님을 올바로 알아보지 못하여 예정된
대로 둘째 사망을 당하게 될 사람들이 있게 될 것이다(요한계시록14:12). 천국에 가게 되는 사람들은 단순히 믿는다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고 행하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마태복음7:21, 누가복음12:47). 이
내용이 전체적인 성경의 목적과 내용이라고 보면 될 것이다. 누군가는 성경을 다 읽고 이야기 해야지 조금씩 뽑아서
보면 안 된다고 이야기 하지만 성경은 본래 짝된 말씀이 있기 때문에 연결된 말씀으로 해석이 이루어지는
것이다(이사야34:16). 그리고 짝된 말씀으로 여기서도 조금 저기서도 조금씩 이야기하는 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라고
알려주고 있다(이사야28:13). 그렇다고 해서 다른 부분들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다. 필요한 부분으로 말하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일 뿐이다. 성경의 모든 내용은 다 의미가 있고 또한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진다(마태복음 5:18,
마태복음24:35).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결론부터 이야기하자면 이 세상의 모든 사회 변동은 가장 근본적으로 성경의 예언이 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볼
수 있다(마태복음5:18, 마태복음24:35). 물론 미시적인 관점에서 보았을 때 사회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 성경을
봐야하는 것은 아니다. 성경의 목적은 영혼의 구원에 있기 때문에(요한복음5:39, 베드로전서1:9) 사회변동을 보기
위해서 보는 책이 아니다. 다만, 시대를 분별하기 위한 중요한 사회 변동에 대해서는 성경의 기록이 있는 것이다. 또한
그 기록을 예언의 말씀으로 성경에 기록해놓음으로써 우리가 성경을 믿을 수 있고 하나님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도록
해두신 것이다(베드로후서1:19, 데살로니가전서5:20). 그래야 믿음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결국 성경이 이야기하는
사회변동으로써의 관점은 성경의 예언과 예언 성취의 관계로써 사회변동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증험이 없으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알려주고 있다(신명기18:22). 사실 사람들은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우리가 사회변동을 이야기하고 그 관점을 찾는다고 하지만 미래를 정확하게 예언할 수는 없다. 그저 과거와 현재의
정보를 통해서 미래를 예측을 할 뿐인 것이다. 우리는 하루에도 무슨 일이 날지 알 수 없다(잠언27:1). 발표를 할 때
교수님은 우리가 예언이 있고 예언대로 살면 무슨 재미가 있느냐고 말씀하셨지만 사회 변동을 이해하고 예측하려고 하는
것 역시 미래의 불확실성을 줄이고 내가 무엇인가 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그런 예측을 하고 공부를 하는 것인데,
성경의 예언은 왜 재미가 없다고 하신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 성경의 말씀을 따르고 성경의 예언을 믿는다고 해서
지금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가 선택을 못하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우리는 살면서 보험을 든다. 보험을 드는 이유는
예기지 못한 일이 나에게 일어났을 때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서 보험을 드는 것이다. 그런데 100년도 채 못사는 이 땅의
삶에도 그렇게 투자를 하는데 확실한 예언이 있는 성경의 말씀에 대해서 부정적으로만 생각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
하지만 성경을 혼자서 억지로 읽고 풀어서는 이해할 수 없도록 되어있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서는 스스로의 능력을 통해
알려고 하는 것 자체가 잘못 된 것이므로 겸손하게 알아볼 필요가 있다(베드로후서3:16, 요한계시록5:3).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성경의 예언들은 무수히 많지만, 성경의 예언들 중에서 페르시아의 키루스 왕에 대한 내용과 유대인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자 한다. 그리고 발표의 내용인 페미니즘에 대해서 이야기 할 것이다. 성경의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당연히 예언과 예언 성취의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 옳다고 판단했다.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생활을 한
적이 있었다. 이 포로 생활 역시도 예언이 되어있던 내용이었는데(예레미야25:11), 예언에 따라 이스라엘 민족은 바벨론
왕을 섬기게 되었다. 70년 동안 바벨론에서 포로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페르시아의 왕 키루스(성경의 명칭은 고레스,
영어NIV성경에는 Cyrus)가 바벨론을 정복하게 된다. 당연히 키루스는 바벨론의 정복이 자신의 능력과 지략에 의해서
이루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바벨론을 정복한 뒤 전리품을 챙기던 도중 이사야서를 발견하게 된다. 이사야서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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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루스 대왕이 바벨론을 정복하기 170년 전에 기록된 성경으로 키루스에 대한 예언이 있다(이사야45:1). 키루스의
이름부터 시작해서 바벨론을 정복하게 될 과정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다 풀어주고 성전을 건축할 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키루스 대왕은 그 예언을 보고 모든 것을 이끄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포로들의 신이었던 여호와 하나님을
참 신이라고 찬송하게 된다(에스라1:1). 그리고 성경의 예언에 따라 이스라엘 백성들을 값없이 풀어주고 성전을 건축할
비용을 지원하게 된다. 학자들은 이 성경의 내용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했다. 페르시아의 왕이었던 키루스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역대 페르시아의 왕들은 잔인했고 포로들은 값진 재산이었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은 조작된 것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나 현재 대영박물관에 전시가 되어있는 키루스 대왕의 업적이 담긴 실린더가 발견되었고, 실제로 그
실린더에는 키루스 왕이 이스라엘 백성들을 풀어주고 하나님의 성전을 건축하게 했다는 내용이 담겨있었다. 이로 인해
성경의 예언이 사실임이 만 천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또한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와 역사를 보게 될 때 유대인들을 보게
된다면 정말 하나님께서 존재하시고 역사를 이끄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성경의 예언을 보게 되면 유대인들은 나라를 3번 잃게 되고 3번 회복하게 된다는 사실을 이해해 볼 수 있다. 모든
내용은 예언과 성취로 이루어져있는데 현재 이스라엘이 세워져 있는 곳이 성경에서는 가나안이라는 땅으로써 이미
하나님이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주시기로 약속한 땅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세 차례 나라를 잃고 회복한다고 하였는데
첫 번째는 모세 당시 430년 동안 이집트에서 노예생활을 했던 것이고, 두 번째는 바벨론에서 70년간 포로생활을 했던
것이고, 마지막은 예루살렘이 멸망당한 후 세계 각지로 흩어졌다가 다시 이스라엘이 회복될 것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가
지금 2015년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 예언이 사후 검정이 아니냐고 이야기 하면서 성경을 믿을 수 없다고 이야기 하지만
예언은 예언이 일어난 이후에야 알 수 있는 것이며, 이스라엘이 독립 될 당시 1948년에는 이 예언은 문자로써만
존재했지만 실제로 그 내용이 일어났다는 것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종교를 사회적 산물로써 바라보게 된다면
국가가 멸망하고 다른 문화와 섞이다보면 종교는 자연스럽게 사라지거나 다른 종교를 받아들이게 되는 현상이
일어나지만 유대인들만큼은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었다.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절대적으로 믿을 수 있던 것은 하나님께서
구약 4000년 동안 생생하게 움직이셨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의 안에는 하나님의 존재가 각인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스라엘이 2번 종살이 하다가 2번 회복 될 것에 대한 예언이 그대로 이루어졌었기에 성경의 예언 역시 믿을 수 있었다.
이와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 멸망에 대해서 예언하셨다(누가복음21:20). 예루살렘이 군대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면 멸망이 가깝다고 하셨는데 실제 역사를 살펴보면 AD68년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에 의해서 예루살렘 성이
포위되지만, 로마의 네로 황제가 자살을 하여 베스파시아누스 장군은 군대를 돌려 로마로 돌아간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서워서 돌아간 줄 알았지만 실제로 2년 뒤인 AD70년 베스파시아누스 황제의 아들 티투스 장군이 다시
예루살렘을 포위하게 되고 그 결과 이스라엘은 멸망하고 110만 명이 죽고 9만 8천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참혹한 결과를
맞게 된다. 그 이유는 예수님을 죽일 때 그들이 했던 말에 대한 죄 값이다(마태복음27:25). 어쨌든 예루살렘은 멸망했고
모든
사람들은
흩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분명히
성경은
가나안
땅은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한
땅이었고(창세기12:7), 예수님께서도 예루살렘은 이방인의 때가 차면 다시 회복될 것이라고 예언하셨다(누가복음21:24).
물론 유대인들은 신약의 내용은 보지 않는다. 하지만 구약과 신약은 연결되어있으므로 하나의 내용을 이야기하고 있다.
성경의 예언에 따라 결국 1948년에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인 가나안 지금의 팔레스타인 지역에 나라를
회복하게 되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포로 생활, 압제, 핍박, 학살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저버리지 않았다. 독일
나치 시대 때 유대인 피난처에 있던 글귀라고 한다. '나는 태양을 믿는다. 지금 비추지 않아도, 나는 사랑을 믿는다. 지금
표현하지 않아도, 나는 하나님을 믿는다. 지금 응답하지 않으셔도'. 이러한 글귀를 통해서 유대인들은 약 1900년간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그 성경의 예언적인 내용은 이스라엘이 지금까지
정착하기 위해서 전쟁을 치룰 때 가장 유명한 전쟁인 6일 전쟁에서 산 증인들을 많이 만들었다. 1967년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은 군사적 열세를 극복하고 승리를 거두었는데 그 숫자는 유대인 병사 1만 대 아랍 연합군 12만과의
싸움이었다. 선공은 이집트 이란 시리아 연합군에서 하였고 소련제 무기를 이스라엘보다 3배를 더 많이 보유하고 있었다.
탱크는 9천대 가량 보유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사람의 생각으로 가늠할 수 없는 기적과 같은 연승을
거두며 6일 만에 승리를 거두었다. 심지어 승리 후에 이스라엘 영토를 넓히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스라엘이 지금
팔레스타인 지역에 자리를 잡고 많은 국제적인 문제가 있다고 하지만 왜 그들이 그 땅을 굳이 차지하려고 하는지 왜
이스라엘은 1900년 동안 떠돌이 생활을 하고 나서도 아랍 국가 세력들을 이길 수 있었는지 성경에 예언은 정확하게
알려주고 있다. 이밖에도 많은 예언들이 성경에 존재하고 그 예언들은 때가 되면 이루어지도록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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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표 때 이야기 했었던 페미니즘도 역시 마찬가지다. 성경의 관점을 보더라도 그렇고 실제 역사를 보더라도 과거는
철저한
남성위주의
사회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성경의
예언에는
여성의
지위
향상과
관련된
예언이
있고(예레미야31:22), 또한 마지막 시대에 어머니 하나님께서 등장하신다는 예언이 있다(요한계시록21:9). 발표
당시에도 이야기 했었지만 여성의 인권이 낮았던 시대에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했다면 사람들이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고 믿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성경의 내용을 살펴보면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하다고
하였다. 어머니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은 굉장히 중요한 내용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여성의 인권이 상승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성경의 관점으로 해석한다면 앞으로의 세상은 역시 성경의 예언대로 이루어질 것이다. 많은 사람이 어머니 하나님께로
나아올 것이 예언되어 있으며(이사야60:4),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라고 예언이 되어있다. 또한 하나님의
뜻대로 행하는 겸손한 자들은 구원을 받을 것이라는 예언 역시 있다(스바냐2:3, 요한계시록14:12). 성경에 남은 예언이
얼마 없지만 이 보고서에는 남은 예언에 대해서 쓰는 것은 삼가도록 할 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과거를 통찰하는 사회학적 상상력을 통해 현재를 분석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 사회변동론 수업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예측을 하려고 하는 이유는 어떻게 해서든지 남보다 좀 더 잘 살기 위해서다. 또한, 자신이 살면서
하고자 하는 일을 판단하고 더 잘살아 보려고 예측을 하는 것 같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성경의 내용을 이야기하는 것은
사회학적 상상력과 그 연구들과 사람들의 통찰력을 무시하기 위함이 아니다. 성경의 내용은 사회학적 상상력과
통찰력으로 결코 알 수 없는 내용이지만, 성경의 예언은 사회변동의 근본적인 내용으로써 너무나 핵심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성경을 선택한 것이다. 성경의 예언이 정말 확실한 예언이라고 한다면, 사회학적 상상력과 큰 관련이 있는 것
같지 않아도 우리는 그것에 대해 알아보고 판단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나는 성경의 예언에 대해서 공부한 후, 성경의
예언이 확실하고 모두 다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서 진지하게 생각해볼 내용이 있다. 성경의 예언을
듣고 그 예언에 발을 맞추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무시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 결과는 과연 어떨까? 사람은 결코
시간을 멈출 수 없고, 이 사회에서 어떠한 계급이나 위치에 있든지 돈이 많든지 적든지 결국 죽음이라는 운명은 피할 수
없다. 그렇다면 성경의 예언에 발을 맞추고 있는 사람은 시간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었다고 볼 수 있으며, 반대로 예언을
멸시하는 사람은 시간을 적으로 돌리는 행위라고 판단할 수 있다. 성경의 예언은 때가 되면 다 이루어지도록 되어있기
때문이다. 또 한 가지 이야기하자면, 우리는 완전한 존재가 아니다. 우리의 눈은 한정된 것만 볼 수 있으며, 우리의 귀도
한정된 범위의 소리만 들을 수 있다. 우리가 느낄 수 있는 것 역시도 한계가 분명하다. 한계가 있는 몸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세상을 분석하다 보면, 때로는 자신이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망각하고 자신이 모든 것을 다 보고 알고
있다고 착각을 하는 것 같다. 따라서 불완전한 존재인 우리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틀에 박힌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자면, 우리가 우주 공간을 망원경을 통해 육안으로 본다면 검은 세상으로 보이지만, 우주 공간을 전파 망원경이라든지,
적외선 망원경 등을 통해 보게 되면 검은 공간이 아니라 우주 공간이 규칙적이고 촘촘하게 연결이 되어있다는 사실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물론, 각자 생각하는 것이 다르겠지만 새로운 것에 대해서 들어보고
판단해보고 알아보는 것과 아예 무시하고 듣지 않는 것과는 다른 것이다. 성경의 가르침은 나에게 이러한 깨달음을
주었고, 성경의 가르침대로 행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안정과 행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성경을 대체할 수 있는 자료는 없다고 판단한다. 발표 자료는 저작권 문제로 첨부하지 않는다.
10. 종합결론
성경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허구적인 내용을 적어놓은 것이 아닐 뿐더러 단순히 이스라엘의 역사를
알려주려고 적은 책도 아니다. 성경이 사실이고 정말 중요한 내용이라는 것을 예언과 예언 성취를 통해서 살펴볼 수가
있다. 예언은 당연히 그 시대에 살고 있는 사람으로써는 알 수가 없는 내용인 것이다. 수업시간 발표 때에는 성경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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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언이 사후 검정이라서 믿을 수 없다는 비판을 받았었는데 그 질문에 대한 답은 예언은 당연히 사후검정을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예언이 실제 일어나지도 않았는데 그 예언은 사실인지 알 수 없다. 예언에 따라서 일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이유는 성경에 있는 예언이 그 사건만을 말하고 있는 예언이기 때문에 알 수 있는 것이다. 고레스에 대한
예언이나 예수님에 대한 예언 그리고 예루살렘 멸망에 관한 예언 등 그 밖에도 많은 예언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이루어졌기에 성경을 사실로 믿을 수가 있는 것이다. 추가적으로 외경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서 보고서에 설명을 하자면
외경을 지금 사용하지 않는 이유는 가장 큰 이유가 예수님께서 외경은 사용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는
그리스도를 믿고 그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그리스도이신 예수님께서 외경을 사용하시지
않으셨다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기독교인으로써 올바른 행위일 것이다. 신앙적인 측면이 아니라 내용의 측면으로
살펴보면 외경은 그 내용이 정경의 내용과 상충되며, 윤리적이지 못한 내용과 비도덕적인 내용이 많이 있기 때문에
사용하지 않는 것이다. 이런 외경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는 천주교에 대해서 심각하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외경을
제외한 성경은 정경이라고 부른다. 내용의 짝과 짝이 맞고 같은 흐름으로 진행되며 예수님께서 사용하신 것이다. 이러한
관점으로 사회 변동을 바라보면 페미니즘 역시도 성경의 예언의 흐름 속에 일어난 현상인 것이다. 우리가 과거의 예언을
아는 것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을 통해서 성경이 사실임을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아무런 증거도 없이 성경을 믿을 수는
없는 것이다. 앞으로의 예언을 알려주고자 한다면 당연히 과거의 예언이 이루어진 것으로 증명을 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경이 알려주는 미래에 있을 예언을 알게 하기 위해서 과거의 모든 일들을 예언대로 이루어지도록 한 것이다.
성경의 내용이 비과학적이고 비논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면 큰 오산이다. 성경만큼 과학적이고 논리적인 책도
없을뿐더러 우리가 사는 사회나 제도 등의 이치와도 너무나 닮았고 일치한다는 것이 우리가 성경을 알아봐야만 하는
이유라고 하겠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주소
남호윤, 사회학과, 2010104354, 이번 발표와 보고서의 내용에 맞게 나의 소개를 하면, 나는 어렸을 때부터 영적인
세계에 관심이 많았다. 6살 때 처음으로 교회를 갔지만 그때는 아무것도 모르고 먹을 것을 준다는 이유 때문에 갔었다.
그리고 몇 년 지난 후 초등학생이 되어 3학년 때 교회를 갔었는데, 기독교에 대해서 굉장히 실망을 한 기억이 있다.
하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물었는데 그곳에서 제대로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기독교에 대해서 불신을 가지게 되었던
것이다. 당시, 한국 기독교 총 연합회에 속한 교단들은 아담과 하와의 죄 때문에 내가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내가 잘못한 것이 없는데 왜 내가 하나님을 믿어야 하냐고 이야기하고 그 이후 교회에 대한 불신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다. 또한, 개신교 목사들은 예수님을 믿기만 하면 구원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하면서 똑같이 예수님을 믿는
천주교는 잘못되었으니 가면 안 된다고 이야기하는 것 때문에도 가지 않았다. 사실 그들이 하는 행동이나 규례를 지키는
것을 보면 둘의 차이를 그 당시에는 더욱 느끼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더 이상 천주교와 개신교 둘에 관심이 사라졌고,
기독교 종류에 대해서는 일절 알아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중학교 3학년 정도 되었을 때는 이 세계의 진리를
찾겠다는 일념이 생기게 되었다. 그렇게 느끼게 되었던 이유는 이 땅의 삶이 허무하고 답답하다고 느꼈고, 또한 죽음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때부터 여러 가지 종교를 알아보고, 사주, 팔자, 손금, 이름 점 등을 공부하였다.
그 때 생각하게 된 내 나름의 두 가지 가설이 있었다. 이 세계의 진리가 '우주와 지구와 모든 만물이 우연히 생긴
것이다'라면 나 역시도 우연의 산물일 것이며, 그렇다고 한다면 이 땅에 삶에 충실하게 살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한
편으로는 만약에 우연히 생긴 것이 아니라고 한다면 반드시 누군가의 계획에 의해서 만들어 진 것이기 때문에 법칙과
진리가 있을 것이고 그 진리를 찾거나 깨닫는 것이 중요하고 진리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중학교 시절과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뒤 경희대학교 사회학과에 들어왔다. 처음 대학교 1학년 때는 여러 가지를 공부하고 알아보다가 이름 점과
사주, 팔자에 대한 것이 잘 들어맞는다고 생각하여 그것을 진리라고 생각했지만 부족함이 있었다. 그것들은 이 땅에서 살
때에는 어느 정도 영향력은 있지만, 영적인 세계를 설명하지 못했다. 경희대학교 사회학과는 내 의지로 들어온 것은
아니지만 배워보니 사회학이라는 학문이 상당히 매력이 있었고 재미가 있었다. 그리고 내 미래를 상당히 윤택하게 해줄
학문이 사회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 때는 사회학에 관심이 있었고, 오히려 확신이 없었던 내가 지금까지 쌓아오고
진리를 알고자 했던 과거의 내용을 바탕으로 이 세계에는 진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사회학을 공부해서 이 땅에 충실하게
잘 살자는 생각이 강했다. 그래서 놀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 내 나름의 도전 같은 것도 많이 해보는 계기가 되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의 끝에 느끼게 되는 허무함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어떠한 계기로 어머니 하나님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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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을 듣게 되었는데 기독교 자체에 불신을 가지고 있었던 나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관심이 없었고 부인하였다. 그런데
과거에 내가 알아보고 노력했던 모든 내용이 생각나서 모든 것을 물어보고 정말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성경에 대해서
알아보고 배워보았을 때 놀라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어머니 하나님을 믿고 있는 교회는 기존 내가 알고 있던
기독교의 모습과 다른 모습이었다. 모든 내용을 성경으로만 가르치고 성경의 내용과 합치되는 모습을 보면서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현재까지 살아오고 있다.
메일 주소는 yhn575@naver.com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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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전쟁’을 통해 바라본 사회변동
1. 화폐전쟁(Currency Wars), 랜덤하우스, 2007, 쑹홍빈, 차혜정 역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화폐[money,貨幣]
교환경제사회에서 상품의 교환·유통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일반적 교환수단 내지 일반적 유통수단.1)
구리동전에서 지폐로, 플라스틱 신용카드에서 전자결제방식까지 화폐는 계속 변화해왔다. ‘교환수단’으로 요약되는
화폐의 정의와 같이 돈의 가치를 나타나내는 형태는 다양하게 변화해왔지만 화폐는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해오고 있다. 그만큼 우리의 삶에 깊숙하게 침투해있는 화폐의 흐름을 주도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치열한 암투가
있어왔다. 19세기부터 시작된 주도권다툼은 21세기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이러한 암투는 비단 화폐를 장악하고자
하는데서 그치지 않고, 사회에 직․간접적 영향을 미쳤다. 저자는 한국의 국가부도사태(IMF)와 같은 국가적 위기가 발생한
원인 역시 국제적 금융 주도권 다툼에서 발생한 피해라고 주장한다. 나는 화폐흐름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암투가 전쟁과
정치적 격변과 같은 사회의 큰 전환점을 만들어 냈으며, 다가올 미래에도 계속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것을 중점으로
사회변동을 파악해보고자 하였다.
3. 저자소개
2008년
세계
금융위기를
정확히
예측해
화제가
된
책
'화폐전쟁(貨幣戰爭)'의
저자
쑹훙빙(宋鴻兵·41)은 2007년 발간된 이 책에서 글로벌 금융위기의 원인과 결과를 설명하고,
1800년대 이후 반복돼온 경제위기의 배후에 거대한 유대계 금융자본이 있다는 '음모론'을 제기,
국제 금융계에서 관심의 인물로 떠올랐다.
중국 쓰촨(四川)이 고향인 쑹훙빙은 둥베이(東北)대학에서 전자공학을 전공했으며, 1994년
미국으로
건너가
아메리칸
대학교(American
University)에서
정보기술(information
technology) 공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2002~2007년 이번 글로벌 금융위기의
'방아쇠'로 꼽히는 모기지 업체 페니메이(Fannie Mae)와 프레디맥(Freddie Mac)에서 일하며 미국 금융계의
내면(內面)을 깊이 있게 관찰했다고 스스로 말한다. 그는 이곳에서 시니어 컨설턴트로 근무하며 파생상품 리스크 분석과
자동심사시스템 개발 등을 주로 담당했다.
그는 이때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2007년 6월 '화폐전쟁'이란 책을 중국에서 펴내 중국에서 160만부, 한국에서
10만부가
팔렸다.
이
책에서
그는
지난
200년간
반복적으로
일어난
경제위기의
배후에
유대계
금융자본인
로스차일드(Rothschild)가로 대표되는 글로벌 금융재벌이 있다고 주장한다. 달러 발행권을 실질적으로 통제하는 이들이
주기적으로 경제위기를 조장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오는 3월 유럽의 금융세력을 분석한
1) 두산백과
8
'화폐전쟁—유로화편'을 중국에서 출간할 예정이다.
쑹훙빙은 2008년 금융위기에도 배후가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은 금융위기를 예측할 수 없다고 하는데, 예측
가능하고 얼마든지 설계가 가능하다고 봅니다. 다만 설계도가 워낙 복잡해 쉽게 드러나지 않을 뿐입니다. 개인적으로
이번 금융위기 배후에는 역외 헤지펀드나 이를 통제하는 사람이 있을 것으로 추측합니다.” 그는 자신의 이 같은 주장을
뒷받침할 근거들을 공개된 자료에서 찾는다고 했다. "책이나 신문, 정부문서 등 흩어진 정보들을 모아 퍼즐을 맞추면, 그
실체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4. 책 내용 요약
국제금융재벌의 모태인 로스차일드 가문의 다섯 아들들은 각각 독일, 오스트리아, 영국, 이탈리아, 프랑스에 로스차일드
은행의 지점을 연다. 국제 금융재벌의 모태 로스차일드 가문이 세계 최초의 국제 은행그룹을 만든 것이다. 뿐만 아니라
비상한 전략과 통찰력을 지닌 로스차일드 형제에게 한 국가를 손아귀에 넣는 것은 식은 죽 먹기였다. 그 신화의 역사는
꽤 오래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815년 유럽에서는 대륙의 운명을 결정할 워털루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워털루전투는 웰링턴 장군이 이끄는
영국군과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국가의 운명을 걸고 벌이는 한 판 승부이자, 수많은 투자자가 거액을 놓고 벌이는
도박의 대상이기도 했다. 영국이 패할 경우 영국의 국채 가격은 나락으로 떨어지고, 승리한다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을 터였기 때문이다. 런던 증권거래소에는 팽팽한 긴장감이 돌았고, 모두가 초조하게 워털루전투의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전쟁이 시작되기 훨씬 전부터 로스차일드 가는 전략정보를 수집할 정보망을 구축해놓았다. 이 정보망은 효율과
속도 및 정확성에서 웬만한 정부조직보다 훨씬 뛰어났다.
저녁이 되어 나폴레옹의 패색이 짙어지자, 네이선은 급히 편지 봉투를 받아 제목만 대충 훑어보고 나서 즉시 런던의
주식거래소로 달려갔다. 네이선이 들어서자 사람들은 하나같이 숨을 죽였다. 이윽고 네이선이 주변에 있던 거래원들에게
의미심장한 눈빛을 보내자 거래원들은 조용히 영국의 국채를 팔아 치우기 시작했고, 홀 안은 술렁거렸다. 수십만
달러어치의 영국 국채가 맹렬한 기세로 시장에 쏟아져 나왔다. 국채 가격은 눈 깜짝할 새 바닥으로 떨어졌고, 이에
자극을 받은 사람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국채를 팔아댔다. 몇 시간에 걸친 투매 광풍이 휩쓸고 난 후 영국 국채는
액면가의 5퍼센트도 안 되는 휴지 조각으로 변해 있었다. 네이선은 이 모든 과정을 시종일관 태연하게 지켜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의 눈빛이 한 번 더 번뜩이자 거래요원들이 이번에는 영국 국채를 닥치는 대로 사들이기 시작했다. 하루가
지난 후에야 웰링턴 장군의 특사가 런던에 당도해서 나폴레옹의 패배소식을 알렸다. 그 하루 동안 네이선은 20배나 되는
차익을 챙겼고, 이 금액은 나폴레옹과 웰링턴이 전쟁으로 얻은 재산을 합친 금액보다 훨씬 많았다.
워털루전투로 네이선은 영국 정부 최고의 채권자로 등극했으며, 그때부터 공채발행을 주도하고 잉글랜드 은행(Bank
of England)의 실권을 장악했다. 영국 국채는 정부가 세금을 징수할 수 있는 근거였기 때문에, 이제 영국인들이 정부에
내는 세금은 고스란히 로스차일드 은행으로 흘러 들어갔다. 이 같은 징수 행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영국 정부는 국채를
발행해서 재정 지출에 필요한 자금을 충당하고 있었는데, 영국 정부의 국채권한이 없어졌기 때문에 민간은행에서 돈을
빌려 쓸 수밖에 없게 되었다. 게다가 8%의 이자를 내야했고, 원금과 이자는 모두 금화로 계산했다. 네이선이 영국 국채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는 것은 곧 국채 가격이나 영국 전체의 통화 공급량을 마음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의미다. 야심가
네이선이 오만한 대영제국을 보기 좋게 정복한 것이다.
훗날 네이선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어떤 꼭두각시가 권력을 획득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영국의 통화를 지배하는
자가 대영제국을 지배하는 것이고, 나는 영국의 통화를 지배한다.” 화폐운용의 시스템을 꿰뚫은 로스차일드 가문은
19세기 중반에 이르러 영국,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등 유럽의 주요 국가의 화폐발행권리를 손에 넣게
된다. 신성한 군주의 권리가 ‘신성한 금권’으로 대체된 것이다. 이 때, 그들의 시야에 들어온 것은 대서양 저쪽에서
떠오르는 아메리카 대륙이었다.
독립전쟁 후 미국은 심각한 경제난과 채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 가문의 자금지원을 받은
알렉산더 해밀턴이라는 사람이 미국에 민영 중앙은행을 세워서 화폐 발행 직무를 이행할 것을 의회에 강력하게 제안했다.
로스차일드 은행에서 화폐발행권을 가져갔던 영국의 상황처럼 미국도 민간은행에서 화폐발행을 주도하자는 내용이었다.
당연히 찬반이 극으로 치달았고, 치열한 정치적 싸움 끝에 미 연방준비은행은 마침내 현실이 되었다. 연방준비은행의
주요 내용은 이러하다. 중앙은행은 개인이 소유하며, 정부의 화폐와 세금 징수는 반드시 중앙은행 시스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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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리해야한다는 것 외에도 중앙은행이 미국 정부에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받는다는 내용이 골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중앙은행은 현 세계패권국가인 미국을 지금도 쥐락펴락하고 있다. 연방준비은행으로 인해 미국의 불행한 미래는 현실이
되었다. 오늘날 미국 연방준비은행은 국가화폐 유통량의 97%를 발행하고 있으며, 미국 국민은 은행에 44조 달러, 우리
돈 5경에 달하는 천문학적 금액의 채무를 진 상태이다. 화폐의 본질을 생각했을 때, 자국의 화폐를 정부가 발행하지
못하고 민간은행에서 그 기능을 대신하면서 정부는 끝없는 채무의 굴레 속으로 들어가는 이 상황은 극히 비정상적이다.
훗날 앤드루 잭슨대통령과 링컨, 케네디를 비롯한 수많은 대통령들이 이 굴레를 끊어내고자 했지만, 본질에 접근하는
radical한 이들의 결말은 모두 비극적이었다.
나라 전체를 흔들만한 위력의 은행을 등에 지고, 국제 금융재벌은 본격적으로 활개를 치기 시작한다. 국제 금융재벌의
도구인 은행은 10%의 부분지금준비금을 제외하고 대출을 통해 신용통화를 만들어내고, 반복되는 대출로 발생하는
이자는 통화를 팽창시키게 된다. 여기에 화폐 유통량까지 늘어나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인플레이션이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이런 인플레이션을 통해 사람들의 재산을 부풀리고, 통화긴축상황을 만들어 재산을 빼앗아가는 일명 ‘양털
깎기’는 국제 금융재벌들이 주기적으로 써먹는 수법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1929년의 대공황이었다. 물가가
폭락하고, 생산이 축소되어, 경제활동의 마비상태를 야기시켰으며 기업도산이 속출하면서 실업자가 늘어나, 33년에는 그
수가 전 근로자의 약 30 %에 해당하는 1,500만 명 이상에 달했다. 하지만 이 대공황은 가장 파급력이 컸던 양털 깎기
일뿐, 크고 작은 인플레이션과 디플레이션을 이용한 양털 깎기는 현재 진행형이다.
국제 금융재벌이 좋아하는 또 다른 수법은 바로 전쟁이다. 각종 주요 시설들이 파괴되면 복구비용이 필요하게 될 뿐만
아니라, 전쟁 당사자들은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싸움에서 이기려고 한다.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에는 이긴 쪽 정부든
진 쪽 정부든 은행 채무라는 함정에 빠져들고 만다. 이것이 바로 국제 금융재벌들에게 전쟁이 큰 호재인 이유다.
또한 거대 금융기관은 먼저 신용대출을 확대함으로써 경제적 거품을 조장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투기에 집중하게
만든다. 그런 다음 통화량을 갑자기 줄여 경제 불황과 재산 가치의 폭락을 유도하는데 우량 자산의 가격이 정상가의
10의 1, 심지어 100분의 1까지 폭락하기를 기다렸다가 갑자기 나서서 말도 안 되는 싼 가격에 사들이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국제 금융재벌들끼리 통하는 용어로 '양털 깎기(fleecing of the flock)'라고 칭한다. 사유 중앙은행이 설립된
이후 양털 깎기는 규모 면에서 사상 최고에 달했는데 이 책의 주장대로라면 1997년에 아시아의 '네 마리 작은 용'을
상대로 일어났던 것을 ‘양털 깎기’라고 말할 수 있다. 이처럼 화폐를 점령한 국제 금융자본들은 약 200년 동안 세계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화폐전쟁은 경제영역에서 벌어지는 각축전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경제가 정치와 사회도 움직인다. 놀랍게도 그
뒤에는 국제 금융재벌이 버티고 있다. 이들은 그림자 정부라고 일컬어질 정도로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오늘날 세계패권국가라 할 수 있는 미국의 중앙은행 ‘연방준비은행(Federal Reserve Bank)’도 국가 소유가
아닌 이들의 소유로, 기축통화인 달러를 거머쥐고 세계를 움직인다.
시중에 유통되는 모든 달러는 일종의 차용증서이며 모든 차용증은 날마다 이자가 붙는다. 게다가 그 이자는 복리로
눈덩이처럼 불어난다. 그 천문학적 이자 수입은 과연 누구에게로 돌아갈까? 이자 수입은 다름 아닌 달러를 만들어내는
은행의 몫이다. 달러의 이자는 원래 화폐의 총량을 제외한 부분이며 현재의 화폐 유통량 외에 새로운 채무 달러의
발행이 뒤따른다. 바꿔 말해 사람들이 돈을 더 자주 빌릴수록 더 많은 돈을 빌리게 되는 것이다. 채무와 화폐는 연동되어
있으므로 채무는 늘어날 수밖에 없다.
이 같은 악순환은 무거운 이자 부담으로 말미암아 경제 발전을 가로막고, 결국에는 모든 체제가 붕괴할 때까지
계속된다. 채무의 화폐야말로 현대 경제에 도사린 심각한 잠재적 불안이다. “인시(寅時)에 묘시(卯時)의 식량을
먹는다.”라는 중국 속담처럼 사람들은 미래의 돈을 빌려 현재의 수요를 충족하기 때문이다. 빚을 내어 당장의 상황을
모면하는 것은 비단 일반 시민들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국가와 빚 역시 떼려야 땔 없는 관계다.
전쟁을 하려면 돈이 필요하고, 규모가 큰 전쟁일수록 더 많은 돈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하다. 문제는 누가 누구의 돈을
쓰는가 하는 것이다. 화폐 발행 권한이 없는 유럽과 미국 정부는 은행가에게 돈을 빌릴 수밖에 없다. 전쟁은 물자의 소모
속도를 가속화한다. 또한 전쟁 당사국은 무슨 짓을 해서라도 버텨내야 한다. 전쟁으로 모든 대가를 치른 정부는 조건을
따질 틈도 없이 은행재벌에 융자를 신청한다. 그래서 전쟁은 은행재벌이 가장 좋아하는 호재다. 그들은 전쟁을 책동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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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추기며, 전쟁에 자금을 지원한다. 국제 금융재벌들의 호화로운 건물은 무수한 주검과 폐허 위에 지어진 것이다. 세계를
황폐화시켰던 과거의 전쟁뿐만 아니라 미래에 일어날 전쟁 또한 국제 금융재벌의 손아귀에서 자유롭다고 할 수는 없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BS 다큐프라임, EBS Docuprime, 자본주의, 1부, 돈은 빚이다
www.youtube.com/playlist?list=PLf_vppNPJQYuMOAQ3eBN4xchC_AvwrAgn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1850년에 런던은 의심할 여지없이 세계 금융 체제의 태양이었으며, 1950년에는 뉴욕이 세계 재산의 중심이 되었다.
2050년에는 과연 누가 국제 금융 맹주의 보좌를 차지할 것인가?
인류의 역사적 경험에서 볼 때 부상하는 나라는 언제나 더 왕성한 생산력으로 거대한 부를 창조한다. 이들 지역은
무역 거래에서 환율 차이로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순도가 높은 화폐의 내재적 동력을 유지한다. 이를테면 19세기에
견고했던 황금 파운드와 20세기 전 세계를 주름잡던 금은 달러가 그러했다. 그런데 세계의 부는 언제나 그 가치를
보호해주는 곳으로 흘러가게 되어 있다. 견고하고 안정적인 화폐는 사회의 분업과 시장 자원의 합리적 분포를 강력하게
촉진해서 더 효율적인 경제구조를 형성하고 더 많은 부를 창조했다.
화폐가 튼튼한지 아닌지로 그 나라의 흥망성쇠의 흐름을 알 수 있다. 1914년 잉글랜드 은행이 파운드화의 황금
교환금지를 선포했을 때 대영제국의 위풍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닉슨이 1971년 일방적으로 황금 창구를 폐쇄했을
때 미합중국의 번영은 이미 정점을 지나 쇠퇴로 돌아서는 전환점에 도달했다. 영국의 국력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성
속에서 빠르게 쇠퇴했으며, 미국은 다행히도 큰 전쟁을 치르지 않았기에 한동안 번영을 구가할 수 있었다. 그러나 겉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대저택 안에는 이미 거액의 부채가 남아있다.
미국의 성장과정은 국제 세력의 개입과 음모로 점철되었다. 특히 국제 금융세력은 미국에 대해 가공할 만한 침투력과
영향력을 발휘했다. 남북전쟁 전후 100년동안 미국 정부와 국제 금융재벌은 미국 민영 중앙은행 시스템이라는 금융의
고지를 선점하고자 투쟁을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일곱 명의 미국 대통령이 피살되었고, 다수의 의원이 사망했다.
국제 금융재벌이 큰돈을 벌 수 있는 수단의 하나로 경제 불황의 조작이 있다. 그들은 먼저 신용대출을 확대함으로써
경제적 거품을 조장하고, 사람들로 하여금 투기에 집중하게 한다. 그런 다음 통화량을 갑자기 줄여 경제 불황과 재산
가치의 폭락을 유도한다. 그리고 우량 자산의 가격이 정상가의 10분의 1, 심지어 100분의 1까지 폭락하기를 기다렸다
갑자기 나서서 말도 안되는 싼 가격에 사들이는 것이다. 이를 가리켜 국제 금융재벌들끼리 통하는 전문 용어로
‘양털깎기(fleecing of the flock)’라고 한다. 사유 중앙은행이 설립된 이후 양털 깎기는 규모 면에서 사상 최고에
달했다. 가장 최근의 양털깎기는 1997년에 아시아의 ‘네 마리 작은 용’을 상대로 일어났다.
케인스는 황금을 ‘야만적 유산’이라고 표현했다. 케인스가 황금을 죄악시한 동기는 무엇일까? 국제 금융재벌들은
황금이 결코 보통 귀금속이 아니라는 사실을 똑똑히 알고 있다. 본질적으로 황금은 유일하고, 고도로 민감하며,
역사적으로 계승되는 ‘정치 금속’이다. 황금 문제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으면 세계적으로 금융위기가 일어난다. 정상적인
사회 상황에서 금본위제도를 폐지하면 틀림없이 심각한 사회불안이 일어나고, 심지어 폭력적인 혁명을 일으키기도 한다.
은행가들이 심각한 위기와 불경기를 필요로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위기와 경기 쇠퇴의 위협 아래 국민은 가장
쉽게 타협하고 단결력이 쉽게 무너지며, 여론도 쉽게 오도할 수 있다. 사회의 주의력은 쉽게 분산되고, 은행가의
권모술수도 가장 쉽게 실현될 수 있다. 따라서 역사적으로도 위기와 금융의 쇠퇴는 은행가들에게 정부와 국민을 상대하는
가장 효과적인 무기로 되풀이되어 사용되고 있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화폐전쟁(貨幣戰爭)'의 저자 쑹훙빙(宋鴻兵·41)이 그리는 달러의 미래는 암울하다."치열한 화폐전쟁에서 기축통화로서
달러의 몰락은 필연적입니다. …지금처럼 한 국가의 화폐가 기축통화로 쓰이는 시대는 종언을 고할 수밖에 없다"며
"(지역통화 시대를 거친 후)결국엔 금본위제(金本位制)처럼 금이나 은을 기반으로 국제사회가 공동으로 관리하는 '월드
머니(world money)'가 기축통화로 자리잡을 것"이라고 말했다.2)
2) 조선일보 경제 [Weekly BIZ] 달러를 공격한 남자 (2009.0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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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정 상품의 공급을 독점하는 자가 높은 이윤을 창출한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상식이다. 화폐는 누구에게나 필요한
일종의 상품이다. 한 나라의 화폐 발행을 독점할 수 있다면 무한정으로 높은 이윤을 내는 수단을 갖게 된다. 이것이 곧
수백 년 동안 국제 금융재벌들이 한 나라의 화폐발행권을 독점하고자 온갖 계략과 수단을 동원했던 이유다. 그들이
원하는 최종적 목표는 전 세계 화폐 발행권의 독점이다.
세계의 화폐 발행권이라는 금융 전략의 고지를 선점하기 위해 국제 금융재벌들은 1970년대부터 달러에 대한 믿음을
굳히고, 개발도상국의 경제를 망치며, 잠재적 경쟁자를 무너뜨리자는 취지의 화폐전쟁을 일으켰다. 그들의 최종적 전략
목표는 세계경제를 ‘통제하면서 해체’해 런던과 월가가 축이 되어 통제하는 ‘세계정부’와 ‘세계화폐’ 및 ‘세계 세금’체제를
완성하기 위한 기초를 착실하게 다지는 것이다.
국제 금융재벌이 화폐의 공급을 손아귀에 쥔 이러한 체제에서는 모든 주권국의 화폐 정책과 경제 내정의 결정권이
박탈되게 마련이며, 모든 주권국가 및 국민의 경제 자유와 정치 자유도 통제를 당하게 된다. 현대인의 목에는 목걸이가
아닌 채무의 올가미가 씌워진다. 모든 현대의 ‘노예들’로 하여금 더 많은 효율을 올리도록 하기 위해 방만한 경영 관리는
반드시
고효율을
자랑하는
과학적
단계로
전환해야
한다.
무현금사회,
전자화폐,
국제적으로
통일된
무선주파수(RFID)신분증, 인체 내에 칩을 삽입하는 신분증 기술 등이 장차 현대인을 ‘노예’로 전락시키는 표시가 될
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교수님이 수업시간에 말씀하신 것처럼 ‘본질을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의 차이’는 앎과 무지의 차이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그 차이를 아는 것이 행동의 차이로 이어지고 결국 삶의 차이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사실 우리가 화폐를
통해 소유하고 싶은 것은 보이지 않는 ‘돈의 가치’다. 화폐는 돈의 가치를 물질로 구체화하여 보여주는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치를 물질로 구체화시키는 형태로 발전해 온 화폐는 다시 눈에 보이지 않는 형태로 변화하고 있다.
결국 미래의 화폐전쟁은 더욱 치밀해지고 암묵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우리는 그 속에서 화폐전쟁의 피해자가 되지
말아야 한다.
역사적으로 그래왔듯이, 화폐전쟁의 주체는 일반 시민들이 아니다. 하지만 일반 시민들은 화폐전쟁으로 인한 변화와
피해를 고스란히 받는다. 이게 바로 우리가 화폐전쟁에 대해 알아야하는 이유이다. 거품경제로 재산을 불린 뒤 통화량
줄이기를 통해 재산 가치를 폭락시키는 양털 깎기로 인한 재산상의 피해뿐만 아니라 전쟁과 같이 생명에 대한 직접적
피해까지 모두 우리의 삶과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일하지 않고도 더 많은 것을 가지기 원하는 사람들의 심리는 우리나라와 같은 부동산투기 성행이나 활발한 주식매매를
초래한다. 사람들은 자신의 재산 가치가 떨어지는 것을 매우 싫어한다. 자기 자신은 아무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그저
자신이 소유하고 있는 부동산이나 주식의 가격이 오르기를 기대한다. 하지만 사람들은 국제 금융재벌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울고 웃는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부의 분배 메커니즘을 해부하다”
(쑹훙빙 저, 홍순도 역, 2014, 알에이치코리아)
이번에 그가 다다른 곳은 ‘탐욕’. 금융권력에 대한 탐욕이 거세질수록 되레 부를 빼앗길
수밖에 없는 구조를 설득한다. 근거는 2012∼2013년 글로벌경제에 대한 연구를 집대성하는
과정에서 찾아냈다. 막상 들여다보니 2008년 당시보다 자산거품의 크기가 훨씬 비대해진
상태였다. 문제는 누구도 심각성을 감지하지 못하는 상황. 뒤따르는 슈퍼 글로벌 금융위기는
불 보듯 뻔하다고 했다.
키워드 격으로 중심에 ‘부의 분배’를 뒀다. 사실상 인류의 모든 활동이 ‘부의 창조’와 ‘부의
분배’라는 틀 안에서 이뤄지지 않았느냐는 접근이다. 탐욕은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거론된다.
전제는 ‘창조’의 생산성 향상이지만 결국 화근은 ‘분배’의 공평성과 합리성이 어긋날 때
생긴다는 거다. 한마디로 인간의 탐욕이 부의 분배를 왜곡시켜 세계경제를 망친다는 논리다.
이런 틀에서 쑹훙빙은 2013년 4월 이후 타깃인 미국경제의 미시적 흐름을 세세히 걸러내는 데 몰입했다. 우선 미국
12
상위 10% 부자의 국민소득 점유율이 50%를 돌파했다는 진단으로 초석을 깔았다.
혁명이나 전쟁이 아닌 제도적 힘으론 도저히 변화가 불가능한 상태. 그 고착된 부의 분열이
중산층의 소비력을 근본적으로 약화시켰다는 것이다. 6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복의 기미조차
없는, 수렁에 빠진 세계경제의 원인이 거기에 있다는 일갈이다.
3)
2008년부터 본격화된 금융위기의 '진정한' 원인은 과연 무엇일까? 이런 의문을 가진
경제부기자, 이상훈은 『탐욕의 제국, 미국 경제의 진실』에서 미국 경제를 파국으로 내몬
진짜 원인을 추출하고, 파국을 수습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저자는 미국이 무늬만 개혁일 뿐
진정한 개혁을 외면하고 있다고 주장하며, 이 때문에 필연적으로 또 다른 위기가 싹트고
있다고 경고한다.
본문은 월가의 보수체계, 금권정치, 회전문 인사, 그리고 카지노 자본주의 같은 시스템이
월가를 도박판으로 변질시킨 과정과 정치권이 그런 월가를 제어하기는커녕 부추기고
방조하게 만든 근본 구조를 살펴본다. 이렇듯 드러난 위기 이면에 자리 잡은 미국의 모습을
제대로 들여다봄으로써 향후 달라질 세계의 모습을 유추해보고자 하였다.
“미국이 숨기고 싶은 개혁의 허상”
(이상훈, 2009, 케이앤제이)
4)
10. 종합결론
오르내리는 그래프와 주가는 ‘보이지 않는 손’인 시장이 만들어낸 자연스러운 결과인 줄로만 알고 지내왔다. 하지만
‘화폐전쟁’의 관점에 따르면 이 때 보이지 않는 손은 시장이 아닌 국제 금융재벌이 가진 권력이다. 처음 책을 선택할
때는 경제라는 한 영역에서 이루어지는 암묵적 전쟁에 대해서만 다루는 책이라고 생각했지만 읽고 나니 생각이 달라졌다.
경제는 우리의 삶 속에 뿌리 깊게 관여하고 있다. 일상의 의식주를 해결하는 것부터, 과거의 채무와 현재의 소비
그리고 미래에 대한 대비 등 삶의 전반은 경제와 떼려야 땔 수 없다. 하지만 책에서는 그러한 경제적 통제권을 개인이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일각에서는 국제 금융재벌의 존재를 두고 음모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나는 국제
금융재벌의 실존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왜? 사람의 욕심이 끝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글로벌한 스케일의 경제
주도권을 잡고자 하는 시도가 있었을 가능성은 농후하다.
사회변동의 측면에서 그들의 존재가 중요한 이유는 경제가 움직이면 사회의 각 분야 역시 함께 움직이기 때문이다.
국제 금융재벌의 술수는 국가로 하여금 채무를 지게 하기 위해 전쟁을 촉발하기도 하고, 사람들의 자산 가치를
떨어뜨리기 위해 조작을 가함으로써 사회에 큰 불안을 야기하기도 한다.
수업시간에 다루어졌던 사회변동의 여러 원인들과 종합해서 생각해봤을 때 전 세계는 어느 때보다 변화의 속도가
빠르지만 사람들은 점점 늙어가고 있다. 어찌 보면 모순되는 사회인 것이다. 변화를 맞이해야 하는 사람들의 평균 연령은
점점 높아져감에도 불구하고 변화의 속도는 점점 빨라지기 때문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사람들은 큰 불안감을 느끼고,
안정을 추구한다. 수많은 금융상품이 여기에서 출발한다. 사람들은 노동을 통해 힘들게 모은 자신의 재산을, 변화무쌍한
사회 속에서 잘 지켜주고 불려주기를 원한다. 춤을 추듯 일렁이는 주가에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는 속사정이 바로
이것이다.
사회변동을 설명하기 위해 ‘화폐전쟁’을 공부하면서, 그래프를 해석하는 경제 교과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관점의 경제를
통해 세상을 읽는 방법을 배웠다. 사실 평소에 경제 분야에 큰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앞으로도 내가 하고자 하는 일과 큰
상관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속단이었던 것 같다. 사회변동론 수업시간에 배웠듯이
세상은 경제, 정치, 사회 모든 분야가 밀접하게 연결되어 굴러간다. 비록 학교에서 배우는 지식은 살아가면서 배워야하는
수많은 지식 중 매우 일부에 불과하지만, 이번 학기를 보내면서 앞으로 새로이 등장하는 분야들을 어떻게 알고
습득해야하는가에 대한 방법을 배울 수 있었다. 화폐전쟁을 통해 터득하게 된 새로운 시각이 앞으로의 내 삶 속에서
기회의 씨앗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3) 중앙일보 "자산거품에 속지마라 '슈퍼 금융위기' 다가온다" (2014.08.21.) 참고
4)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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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김혜수
사회학과 (2012110397)
마지막 정규학기에서야 진정한 사회적 ‘통찰력’이 무엇인지,
어떻게 내 삶에 연관지어야하는지 알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4학년.
suu102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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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사회변동
1.
- 책 제목 : 도시의 승리(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고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
- 출판사 : 해냄 출판사
- 출판년도 : 2011년
- 저자 : 에드워드 글레이저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농업혁명으로 인해 정착 생활이 시작되면서 가족 단위를 넘어선 사회의 개념이 형성되었다. 사회는 인간의 공동생활을
위한 구성체이다. 이러한 사회는 세월이 흐름에 따라 다양한 모습으로 진화를 거듭하였다. 나는 그 중에서도
농업혁명에서 산업혁명으로 넘어오기 전에 있었던 도시의 탄생, ‘도시혁명’을 설명하고자 한다. 농업, 산업혁명이 사회를
바꾼 주요한 큰 사건이었다면, 우리가 거주하고 있는 이 도시의 탄생에도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도시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사람들은 모여 살았다. 하지만 단순히 모여 산 곳을 도시라고 칭하지는 않는다. 도시는 사람들이
많이 모여 사는 곳이면서도 일정한 지역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이 되는 곳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현대 고고학자 칠드가 주장한 도시 혁명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처음 사람이 토지에 정착하여 도구를 이용한 농경을
시작한 것을 농업혁명이라 부르고, 그 농업혁명의 결과로 잉여생산물이 발생하게 된다. 이때 네 사람이 다섯 사람분의
식량을 생산하게 되면 한명은 농사를 지을 필요가 없게 되고, 농경에서 해방되게 된다. 그러면 농경에서 해방된 한
사람은 학자나 예술가, 기술자 등 비농업적 전문가가 된다. 이러한 사람들의 수가 늘면서 그들은 필연적으로 활동여건이
좋은 중심촌락에 모이게 되고, 더 나아가 계급과 국가가 생기며 도시도 형성되는 것이다. 이것을 도시혁명이라고 부른다.
이렇듯 도시가 형성되면서 다양한 직종이 만들어지게 되고, 사람들의 생활은 점점 더 복잡해지고 다양하게 되는 것이다.
나는 도시의 형성과, 발전으로 인해 사람들의 삶의 양상이 변화하는 과정을 사회변동 중 하나로 보았다.
그렇다면 도시와 관련 된 수많은 책들 중에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된 이유는 ‘도시’에 대한 새로운 관점으로 바라보기
때문이다. 도시의 승리의 부제는 다음과 같다. 도시는 어떻게 인간을 더 풍요롭게 더 행복하게 만들었나? 무분별한
도시의 발전은 수많은 언론과 책 등의 지탄의 대상이었다. 수많은 사람들, 심지어 그렇게 도시를 비난하는 사람들조차
도시에 삶의 기반을 두고 있으면서도 교외, 시골에 대한 예찬론을 멈추지 않는다. 하지만 이 책은 도시의 부정적인
이미지에 과감하게 도전장을 내민 책이다. “진정한 도시의 힘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 “도시화는 번영과 행복의
열쇠다.”, “아스팔트보다 더 친환경적인 것이 있을까?” 목차 제목만 보아도 알 수 있듯이 도시생활이 인류에 가져다준
긍정적인 효과에 주목한다. 도시의 긍정적인 부분을 부각하여 인류가 도시에 거주해야만 더욱 많은 기회와 창조성을
가지게 됨을 역설하고 있다.
3. 저자소개
에드워드 글레이저는 미국 하버드 대학 경제학과 교수로 경제, 사회, 문화, 역사를
다루는 학자로 전 세계의 도시정책 및 계획가들에게 주목을 받고 있다. 1967년
뉴욕의 맨해튼 이스트사이드에서 태어나 40년 가까이 도시에 살면서 자연스럽게
'도시경제학'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고 한다. 저자는 는 교육, 기술, 아이디어, 인재,
기업가 정신과 같은 인적 자본을 모여들게 하는 도시의 힘이야말로 한 국가의 번영은
물론, 인간의 행복에 중대한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펼치며 잘못된 도시 정책에
대한 비판과 대안을 제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도시인의 삶과 관련된 다양한 주제를
연구하며 《뉴욕타임스》 블로그 이코노믹스에도 활발히 글을 쓰고 있다. 그동안 『연방
주택 정책을 다시 생각하며』, 『도시, 집합, 공간 균형』등의 저서를 비롯한 다수의 논문을 발표했다.
4. 책 내용 요약
도시가 부를 증대시키지만 도시가 사람들을 초라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도 한다. 그러나 도시화가 더 많이 진행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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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도가 훨씬 높다. 도시는 소규모 기업과 숙련된 시민들이 많을수록 성공한다. 산업시대의 도시
모형은 이제 끝났다. 쇠퇴하는 도시의 대표적인 특징은 경제규모에 비해서 주택과 인프라가 과도하게 많다는 것이다.
건물 중심으로 도시를 개편하려는 행동은 어리석은 행동은 도시는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교훈을 우리에게 도시는
구조물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교훈을 상기시켜준다. 사람이 많아져서 시설을 늘리는 것은 옳지만 건물을 통해 사람을
늘리려고 하면 안 된다. 궁극적으로 도시의 정부가 해야 할 일 은 비용감당이 힘든 건물이나 도로망 구축이 아니라
도시민을 돌보기 위한 자금 지원이다.
인접성은 아이디어와 상품 교환을 용이하게 해주지만 박테리아나 소매치기의 전파 역시 훨씬 더 쉽게 만들어준다.
범죄와 질병에 맞선 도시의 승리는 도시가 생산성과 즐거움이 풍부한 장소로서 번성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사람들이 점점 부유해지면서 점점 더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도시를 선택하게 되었고, 그 결과로 소비도시(도시의
경제구조에서 서비스 산업 비중이 큰 도시)가 생겨났다. 도시는 우리가 같은 관심을 가진 친구들을
찾을 수 있게
해준다.
도시에서 교외로 나가는 역방향 통근의 유행은 성공한 소비도시의 가장 눈에 띄는 특징일지도 모른다. 운송기술은
항상 도시의 형식을 결정해왔다. 속도와 공간은 자동차 위주의 생활이 갖는 두 가지 대표적 이점이다. 이는 스프롤
현상(도시의 급격한 발전과 땅값 상승으로 인해서 도시 주변이 무질서하게 확대되는 현상)을 일으키고, 결론적으로
환경문제를 일으킨다. 나무와 풀에 둘러 싸여 살면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도시에 사는 사람보다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인간의 협력을 통해서 나오는 힘은 문명의 발전을 가져온 가장 중요한 진실이자 도시가 존재하는
주된 이유이다. 특히 우리는 도시를 도시에 있는 건물로만 보려는 경향에서 벗어나고, 진정한 도시는 콘크리트가 아니라
인간의 체취로 이루어져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그린벨트나 도시 중앙 광장들이 도시와 시골을 통합하는 주된 방법이 되지는 못했다. 더 빠르면서 저렴한 교통수단이
출현하면서 자연과 벗하며 살면서 도시에서 일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또한, 자동차는 사람들을 교외로 이주하게
만들었고, 이로 인한 탄소배출이 기존 도시에 모여 사는 것보다 더 많아졌다. 거주지 인구밀도와 도시 중심과의 거리가
휘발유 사용량과 강력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거의 모든 메트로폴리탄 지역에서 도시 거주자들은 교외 지역
거주자들에 비해 연료를 훨씬 적게 소비한다. 도시인들이 전기를 덜 사용하기 때문에 도시는 교외 지역보다 더 푸르다.
간단하게 말해서 우리가 토지개발 정책을 수정함으로써 탄소 배출량을 줄이고 싶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복잡하고
도시적인 환경에서 살아야 할 것이다. 영국의 사례를 살펴보면 찰스 왕세자는 시골과 전통을 중시하면서 예전의
생활방식과 전통 가옥으로의 복귀를 희망한다. 반면 리빙스턴의 환경보호주의는 도시적이면서 극단적이다. 어느 쪽이 더
옳을까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다.
서양 세계는 더 똑똑한 환경보호주의 형식을 포용해야 한다. 우연히 생길 수 있는 여러 환경 정책의 부작용을 철저히
따져보면서 실제로 득보다 실이 되는 정책들이 무엇인지를 알아봐야 한다. 또한 인센티브를 도입해야 한다. 도시의
밀집성은 도시가 발전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요인에 해당되기도 한다. 가령 근대사회가 시작될 때 도시에 산업이
집중하게 되면서 발전하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산업의 발전 그 자체 못지않게 사람들의 집중에서 찾을 수 있다. 도시의
밀집성을 평가할 수 있는 관점은 다양하다. 단 어떠한 측면에서도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이 가지는 의미는 크며 이는 곧
도시의 힘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도시에는 부유한 사람들부터 가난한 사람들까지 모두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 ‘도시’하면 떠오르는 높은 빌딩에 바쁘게
움직이는 사람들의 이미지 속에 가려진 이면이 있기도 한다. 과연 어떤 힘이 가난한 사람들을 도시로 끌어오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그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서 도시로 향한다. 도시의 높은 인구밀도는 거래를 용이하게 해주며, 시장을 만들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시장은 노동시장이다. 이곳에서 사람들은 금융 자본을 가진 사람들에게
자신이 가진 인적 자본을 빌려준다. 그러나 도시가 단순히 노동자와 자본가에게 상호 교류의 장만 마련해 주는 것은
아니다. 도시는 종종 수천 종에 달하는 광범위한 일자리를 제공한다. 대도시는 고용주들로 짜여 있는 분산 포트폴리오인
셈이다. 도시에는 한 고용주가 파산할 경우 그를 대체할 또 다른 고용주가 존재한다. 수많은 고용주들 속에 그들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사람이 필요한 것이다. 이 장에서 중요한 점은 도시에는 많은 사람들이 혼재하며 살아가고 있으며, 그 속에
일자리는 찾으려고 한다면 수많은 일자리가 생산되어 진다는 것이다.
저자는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로 인접성과 친밀성, 혼잡성, 생산성을 든다. 도시의 외형만을 본 것이 아니라 내면의
문제점도 같이 본다. 도시의 승리 이면에는 개개인의 삶이 스며있으며 급격한 인구 집중으로 인해 무질서하게 확대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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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프롤현상이 부산물로 나타난다. 이러한 부작용을 극복하고 이런 교훈들을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우리의 도시는
궁극적인 승리에 도달할 것임을 주장한다. 3장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의 사례를 들어 가난한 도시 이주민들이 도시가
만들어 놓은 일자리와 상호거래가 가능한 시장, 그리고 금융 자본의 생태계 내에서 새로운 기회와 희망을 주고 있다는
것을 설명한다. 결론적으로 도시의 가난이 시골의 가난보다 더 낫기 때문에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든다는 것이다. 적어도
도시는 이들에게 신분상승이 가능한 공정한 곳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적지 않은 모순과 딜레마를 안고 있는
오늘날 도시가 최종적인 승리를 위하여 그동안 제기된 문제점들은 치유될 수 있는가? 도시에서 배출된 쓰레기, 과도한
개발로 인한 자연훼손, 수자원의 확보 및 처리의 문제, 도시 빈민, 범죄 및 그로 인한 안전의 문제, 질병 등의 문제점이
도시의 과제로 남는다. 해결책으로 제시하는 것이 도시 지도자들의 정책이다. 각종 편의 시설 및 사회적 인프라를
구축하면 도시가 필요한 인재들이 집중될 것이다. 그 중 특히 중요한 것이 교육이다. 질적으로 평등한 공교육 시스템은
위에서 제기된 다양한 문제들을 장기적으로 해결하는데 근원이 된다. 이렇게 축적된 다양한 문화와 구성원의 질적 향상은
도시를 활기차게 하고 시민들에게는 즐거움과 자부심을 선물한다.
도시는 존재 자체가 하나의 역사다. 세기를 관통하며 건립된 위대한 건축물들의 집합이 바로 산 역사의 증거다.
이쯤해서 우리는 저번스의 역설에 따른 딜레마를 갖는다. 보존할 것인가 아니면 개발할 것인가. 과거의 지나친 집착으로
인한 개발 규제는 도시의 새로운 역사를 가로막는 것이다. 비록 도시가 무분별하게 확산되고 스프롤 현상이 심화되는
부작용을 수반하기도 하지만 현재의 대도시들은 이 스프롤 현상의 결과이기도 하다. 혁명적인 이동수단의 발달은 도시의
외곽을 확대하는 주요 요인 중 하나이다. 도시의 사람들은 다양한 이유로 도시 근교로 이주한다. 삶이 비용이 적게 들기
때문이다. 도시의 중심에서의 이탈에 따른 문제는 자동차와 아파트와 같은 대량 주택 등이 해결해 주고 있다. 이렇듯
자동차는 도시 근교의 이주민들에게 비용 측면뿐만 아니라 환경측면에서도 삶의 질이 향상이 가능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저자는 도시의 삶이 더 친환경적이라고 주장한다. 자연을 사랑한다면 자연에서 멀리 떨어져 살아야 한다는 언급은 저자의
또 하나의 역설이다. 마지막으로 도시의 성공적으로 지속적인 발전을 하기 위해서는 맹목적인 모방을 자제하며 각 도시의
특색을 살리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자는 모든 도시의 성공 요인으로 다음 몇 가지의 충고를 전한다. 첫째는
공평한 장을 제공하라는 것이다. 경쟁에 대한 공정한 기회는 도시민을 꿈꾸게 할 수 있다. 둘째, 세계화와 접목이다. 전
세계의 다양한 사람들의 유입은 도시의 문화를 풍족하게 하고 그런 도시는 역동적인 도시의 근간을 이룬다. 셋째는
양질의 사회적 교육 시스템 구축이다. 학교교육뿐만 아니라 평생 교육의 프로그램도 포함된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고대 그리스의 도시에서부터 현대의 도시에 이르기까지 인류의 역사와 함께한 도시들에 대한 저자의 평가는
긍정적이며, 낙천적이다. 바로 승리를 예언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의 집중을 통한 도시화는 정보의 집중을 낳았고,
정보의 집중은 혁신의 역할을 했다. 고대 아테나는 인류 문명의 근원이 되는 철학을 이탈리아의 피렌체는 르네상스를
근대 영국의 도시들은 우리에게 산업 혁명을 가져다주었다. 인도의 뭄바이와 방갈로르는 IT혁명의 진원지였으며,
대한민국 서울은 산업과 정보와 문화가 어우러진 디지털 사회를 구현한다. 도시가 승리했다는 그의 주장에 대한
방증이며, 이 책이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이다. ‘도시’가 인간의 생활을 풍요롭게 만들었고, 도시의 형성 그
자체는 ‘승리’라는 것이다. 도시가 부를 증대시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지만, 우리는 도시가 사람들을 초라하게 만든다는
이야기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도시화가 더 많이 진행된 국가에 사는 사람들의 행복도가 훨씬 높다는 통계를 마주하게
된다.
엄청나게 넓은 이 지구상에서 우리는 도시를 선택한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대도시에 더 가까운 곳에 밀집해서
살고 있다. 지금까지 도시는 승리했다. 그러나 도시는 승리할지 모르지만, 도시민들은 지나칠 정도로 자주 실패를 맛보는
것 같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에게 20세기 후반은 도시의 훌륭함이 아니라 도시의 누추함을 배운 시기였다. 도시의
전형인 뉴욕을 예로 들어 서술하는데, 뉴욕은 운송기술의 변화로 인해 부흥하다가 세계화가 되면서 쇠퇴하다가 다시
생산기술의 아이디어를 통한 생산성의 발전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이처럼 도시는 장거리를 연결하는 비용이 떨어져도
인접성의 가치는 더욱 커진다는 현대 대도시의 역설을 갖고 있다. 세계화 시대에도 도시의 중요성은 감소하지 않는다.
비싼 인건비와 생활비를 감당하면서도 기업들이 도시에 머무는 것은 그것을 상쇄할하는 생산성의 이점을 만들어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도시는 시장과 문화를 연결해주는 관문으로서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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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도시가 생겨난 후, 사실상 모든 중세 도시는 시장 주변에서 성장했다고 볼 수 있다. 시장들은 대부분 공통적으로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곳에 위치하였으며, 성이나 대수도원의 외곽, 교통수단이 제공되는 강이나 항구 또는 교통이 몰려서
사람이 많이 오고가는 여울 주변이었다고 한다. 오늘날의 도시발달은 산업혁명 후의 기계문명에 힘입은 공업제품의
대량생산 ,대량거래, 대량수송으로 성장하기 시작하였다. 공업의 발달은 고용기회를 증대시켰고, 고용증대는 많은
사람들이 도시로 모일 수 있도록 하는 촉진제가 되었다. 따라서 자급적인 경제에서 상품경제로 발달됨에 따라 유통의
기능이 증대되었고, 편리한 교통상의 요지가 공장의 입지나 상거래의 중심지로 선택되어 생산, 유통에 필요한 시설이
갖추어지게 되었다. 다음으로 시민을 위한 생활물자의 공급과 문화, 기타 시설이 정비되면서 비로소 시가지가 형성되게
되는 것이다.
지금부터는 도시의 발달로 인한 교외의 성장, 그리고 대중교통 수단의 발전에 대해 이 책의 관점으로 서술하고자 한다.
어느 정도 도시가 발달하고 산업도시사회가 되자 상류층 핵심인사들은 모두 빌라 지역으로 이주했다. 19세기 말이
되었을 때에는 어느 정도 사회적 지위가 있는 사람 중에서 도심에 사는 사람이 아무도 없게 된다. 이러한 교외의 성장은
대중교통 수단의 발전에 힘입은 바가 컸다. 처음 등장한 것은 승합마차였는데 19820년대부터 수가 증가해 런던 전역에
확산되었고, 그 다음으로 지역 철 도, 말이 끄는 전차 그리고 마지막으로 전동 전차까지 등장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교통수단의 운임이 너무 비싸서 노동자 계급은 그것을 이용할 수가 없었지만, 대도시를 떠나고자 하는 많은 수의
중간계급이 나타나면서 도시는 광범위한 단일 계급의 지역으로 발전한다. 부유한 이들이 교외에 거주하는 것은
도시생활의 거부를 의미하지도 않는다. 그것은 도시에서의 삶과 전원에서의 삶의 장점들을 조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의 관점으로 따르자면 교외, 외곽으로 나가려는 시도는 좋지 않다는 것이다. 물론 중세와 현대는
차이가 있는 것을 감수해야겠지만, 도시가 어느 정도의 발전을 끝내고 나면 도시에 거주하던 부유계층들이 교외로
빠진다는 것에는 공통점이 있다. 중세시대부터 부유한 이들의 ‘다름’을 추구하는 일환으로 거주지를 구별 짓는 데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이 책의 관점으로 해석하는 오늘날의 세상을 이야기하기 전에 앞서 오늘날의 도시의 성장 흐름을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현재를 알아야 미래를 알 수 있는 법이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량적인 인구이동의 결과로서 가장
주목되는 현장 중 하나가 빠른 도시의 성장이다. 선진사회에서는 인구이동에 의한 도시화가 공업화와 발맞추어 함께
진행되었다. 하지만 20세기 중반부터 급격해진 후진사회에 있어서는 도시화는 공업화를 수반하지 않거나 공업화의
정도를 훨씬 넘는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 농촌으로부터 도시로의 인구의 이동은 후진국의 경우 거의 예외 없이
도시의 발전보다는 농촌의 피폐나, 생활고에 의해 촉진되었다. 결과적으로 도시뿐만 아니라 국가의 발전에도 역기능으로
작용된다. 이를 ‘과잉도시화’라고 말하는데, 공업화에 앞서 진행되는 빠른 도시화를 가리키는 말로서 사용된다.
과잉도시화에 앞서 도시화의 정의에 대하여 먼저 설명하고 넘어가고자 한다.
* 도시로의 인구 집중 현상 ‘도시화’
인구가 도시 지역으로 집중되는 과정으로, 도시적 생활양식으로의 변화를
말한다. 인구가 지역 사회의 경제적 이익으로 인하여 일정 지역에 집중되는
상태에 도달되어, 그 지역이 확대되고 인구 밀도가 높아진다. 따라서 국가 전체
인구 중 도시 지역에 집중되는 인구의 비율이 증가되는 과정을 의미한다. 도시화
초기 단계인 농업 사회는 도시화율이 낮은 반면 가속화 단계에서는 도시화,
공업화되면서 상업적, 공업적 기능이나 인구가 도시로 몰려 도시화가 급진전된다.
이어 종착 단계에서는 도시가 너무 비대해져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인구나
기능이 분산되고, 도시의 공간 개발이 균형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도시화의
단계는 S자형의 도시화 곡선으로 나타난다.
* 도시 사이의 불균형을 초래하는 ‘과잉도시화’
후진국의 과잉도시화는 단순히 도시화와 공업화의 불균형뿐 아니라, 도시들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 성장과 발전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최근 후진국의 도시화
[그림1] 도시화 곡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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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도는 엄청나게 빠르고, 또한 선진국의 초거대도시들보다 훨씬 큰 초거대도시들이 많은 후진국에서 형성되고 있다.
과잉도시화는 도시로의 과다한 인구집중이 도시문제의 원인이라는 생각에 기인한다. 하지만 반대로 오늘날 후진국의
도시문제나 인구이동을 지역적인 맥락에서 파악하는 것은 바람직한 태도라고 할 수 없다는 의견이 있다. 실제로
후진국에서는 도시로의 인구집중이 도시의 문제는 가중시키지만, 그 사회 전체의 문제를 경감시키는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균형적인 사회발전이나 지역발전이 없는 상태에서 농촌사람들의 도시로의 이동의 기회를 제한하는 것은 현재
사회적으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회를 더 박탈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즉, 이러한 경우 과잉도시화의 관념은
사회적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는 계급적 관념이 전제된다고 할 수 있다.
* 도시의 이질성 증대
도시에는 인구가 집중하게 되면서 모든 면에서 이질성이 증대한다. 사람들의 출신배경, 생활양식, 가치와 규범,
생활정도 등 모든 부문에서 이질성이 커진다. 워스(Louis Wirth)는 이러한 이질성의 증대를 도시화의 한 필수적인
구성요인으로 보고 있다. 도시의 인구집중과 이에 따른 그 구성인구의 이질성의 증대는 도시생활에 있어 분화와 획일화를
동시에 진행시킨다. 도시에의 인구집중은 우선 거주지역의 분화를 야기한다. 상층거주지역과 하층거주지역, 아파트 지역과
상가·공장가·거주지 분화, 일과 거주의 분화가 그것이다. 이러한 분화는 인간관계에 있어 분절적인 관계를 초래하는
경향이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같이 일하고 활동을 하면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 대해 포괄적으로 알게 되고, 따라서
인격이 개입하는 관계가 된다. 그러나 활동 하나하나에 따라 상대하는 사람이 다르고 단지 부분적인 문제에서만 다른
사람과 접촉을 하게 되면 그들의 관계는 자연히 분절적이 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한편 사람들의 수가 많아지고 서로 잘 모르게 되면 농촌사회에서 보는바 전통적 비공식적 통제는 불가능해지고, 또
다른 사람에 대한 평가도 종합적으로 할 수 없게 된다. 따라서 사회적인 통제는 주로 법에 의한 통제인 획일화된 공식적
통제로 바뀌게 된다. 사람에 대한 평가도 성격이나 인격, 능력 등 그 사람의 하나 하나의 특성에 대한 고려도 없이
하나의 표준화된 방법에 의해 이루어지게 된다. 현대도시에서 이 표준화의 기능을 하는 것은 화폐이다. 다시 말해
도시에서 사람들은 ‘돈’ 하나만을 가지고 다른 사람을 평가하는 경향이 커진다. 이러한 획일화는 다른 한편으로는
도시사회의 공통문화를 발생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앞으로의 세상은?
이러한 관점에서의 앞으로의 세상은 과잉도시화를 넘어선 다른 어떤 패러다임이 있을 것이다. 점점 더 도시에
사람들이 유입될 수도 혹은 교외로 빠져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대한민국에서만 보아도 서울과 그 근교에 인구가
집중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집중됨이 좋다고는 하지만 과도하게 비싼 집값이나 교통정체 등의 야기되는 문제점들이
있기 때문에 정책상 인구를 분산시키기 위해 세종시를 만들기도, 공기업을 지방으로 옮기기도 한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성장이 다 되어있는 국가들은 계속해서 교외로 빠져나가도록 하는 시도가 있을 것 같다. 이미 수도 주위의 도시들은
포화상태가 되었기 때문이다. 수도 주위를 중심으로 한 원형 반경은 점점 더 넓어지지 않을까 싶다. 하지만 이와는
반대로 개발도상국일 경우 더욱더 수도로 모일 듯싶다. 일자리를 얻기 위해, 또 지식들이 모여져 있는 공간에서 발전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국가가 성장하고자 한다면 도시로 사람들을 끌어 모아야 할 것이다. 앞서 이야기 했듯이 후진국의
과잉도시화는 단순히 도시화와 공업화의 불균형뿐 아니라, 도시들 사이의 심각한 불균형 성장과 발전을 일으키기 때문에
균형적인 발전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도시로의 이동은 경제적인 기회 이외에도 사회적 지위의 기회의 장이 되기도 한다. 우리나라 사회와 같은 경우에는
사람들이 도시로 모이는 이유 중 하나가 사회·경제적 지위의 상승을 할 수 있는 기회의 땅이라고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 중에서도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자기 자신보다는 자녀의 복지와 그들에게 주어진 교육기회의 증대인 것이다. 농촌에서
도시로 옮긴 이동자가 도시로의 정착 후 자신의 경제적인 지위가 떨어지리라는 것은 알지만, 자식의 교육을 위해 도시로
가는 것이다. 물론 자식에 대한 투자는 경제적으로 다음 세대에 대한 전망으로 다시 자기에게 되돌아오는 것으로 볼
수도 있다. 도시에의 청소년 인구의 집중은 새로운 청년문화의 발생과 함께 세대 간의 규범적인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경제적으로는 대량 실업의 위험과 청소년 범죄의 가능성을 증대시킨다. 한편 농촌에서는 도시로 나간 젊은
노동력을 어떻게 대체시킬 수 있는가 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된다. 결과적으로 노인들도 일할 수 있는 나이까지 일을 해야
하고, 전통적인 권위도 잃게 된다. 반대로 도시에서는 노인들이 젊은이에 밀려 전보다 일찍 일에서 물러나야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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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으로도 점점 젊은 사람에게 의존하지 않으면 안 된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 존 리더의 『도시, 인류 최후의 고향』 : 인류가 점점 기술과 문명을 발달해오면서 도시라는 정주공간을 형성하고
미래 어떤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하는지에 대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 마크 기로워드의 『도시와 인간』 : 도시가 사람들을 끌어들였던 기능으로부터 시작해 그 기능들을 위해 생겨난
공간에 대한 책이다.
- 조엘 코트킨의 『도시의 역사』 : 미래의 도시에 대하여 알고자 한다면 도시의 역사를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세
도시서부터의 도시의 역사를 알려주는 책이다.
10. 종합결론
저자의 주장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도시는 사람들이 모임으로써 만들어지며, 많이 모일수록 더 좋은 기능을 할
것이다.’이다. 즉 진정한 도시의 힘은 ‘사람’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이다. 더욱도 사람들이 한데 모여살고, 상호작용이
활발히 이루어지는 곳에서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로워 질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생각이다. 2011년 전 세계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살고 있다고 한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도시에 거주하고 있는 국가들에서 국민의 30%는 자신이 매우
행복하다고 말하며, 17%만에 매우 또는 전혀 행복하지 않다고 대답한다. 인구의 절반 이상이 시골에 거주하는
나라들에서는 국민의 25%는 매우 행복하다고 말하는 반면 22%는 불행하다고 말한다. 어느 나라나 상관없이 생활의
만족도는 도시에 살고 있는 인구 비중이 높을수록 함께 높아진다.
도시를 삶의 터로 살아가는 시민들에게 행복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도시 외곽으로 도시를 무차별적으로 확산하고
교외를 개발 할 것이 아니라 오히려 도시 내부의 역량을 강화하는 것을 해법으로 제시한다. 나무와 풀에 둘러싸여
살면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도시에서 살면서 자연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비해서 훨씬 더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도시에 많이 모일수록 좋다는 것이다. 도시의 밀집성은 도시가 발전하게 된
가장 근본적인 요인에 해당되기도 한다. 가령 근대사회가 시작될 때 도시에 산업이 집중하게 되면서 발전하게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산업의 발전 그 자체 못지않게 사람들의 집중에서 찾을 수 있다. 도시의 밀집성을 평가할 수 있는 관점은
다양하다. 단 어떠한 측면에서도 사람들 간의 상호작용이 가지는 의미는 크며 이는 곧 도시의 힘이자 장점이기도 하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주소
이름
백다은
학과
사회학과
학번
2014104410
안녕하세요. 사회학과 2학년 백다은입니
간략한 자기소개
다. 사회변동론 수업시간에 많은 선배,
동기 분들의 다양한 주제와 생각을 들을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email 주소
daeun30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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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화와 폭력성
-한국의 근대화와 일제식민통치의 경험 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목차
Ⅰ.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역자)
Ⅱ.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Ⅲ. 저자소개
Ⅳ. 책 내용 요약
Ⅴ.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Ⅵ.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Ⅶ.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Ⅷ.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는가?
Ⅸ.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Ⅹ. 종합결론
Ⅺ. 이름, 학과, 학번 ,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Ⅰ.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역자)
본 연구를 위해 필자는 아래와 같은 자료들을 참조했다.
• 배링턴 무어,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까치, 1991
• 김동노, 「근대로의 길 식민으로의 길」, 『근대와 식민의 서곡』, 창비, 2009
• 김동노, 「식민지시대의 근대적 수탈과 수탈을 통한 근대화」, 『IMF 시대에 다시 보는 자본주의적 근대』, 1998
• 미야지마 히로시, 「내가 보는 조선후기상과 토지조사사업」, 『토론광장』, 2002
Ⅱ.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필자가 해당 자료들을 선택한 이유는 근대화와 식민지 사이의 연관성, 다시 말해 식민의 경험이 근대화로 진입하는
하나의 통로로 작용했는가에 대한 실증적인 검증을 하기 위함이다.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근대화는 아주 중요한 기점이자, 연구의 대상이다. 어떤 요인이 근대화를 촉발했는가, 각 국가의
근대화의 양상들은 어떤 차이점을 가지고 있고 어떤 요인으로부터 그런 차이점이 발현된 것인가, 근대화의 결과들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시각에서 어떻게 성찰해야 하는가 등등. 우리는 근대화와 관련한 수많은 질문들과 직면해왔고,
지금도 직면하고 있다.
그 중 식민지 관련문제는 단연 가장 논쟁적인 주제 중 하나 일 것이다. 사실상 많은 선진 근대 국가, 후기 산업화
국가들이 자국의 근대화를 유지, 발전시키기 위해 취했던 방법이 타국을 식민지로 희생시키는 제국주의였음은 자명한
역사적 사실이다. 하지만 동시에 식민국으로 전락하는 것이, 그것이 매우 안타까운 일이며 비판받아야 하는 것은
분명하지만, 근대화로 진입하는 하나의 통로로써 작용한 측면이 있다는 담론 역시 존재한다. 이런 주장은 자칫 잘못하면
반인륜적이며 역사적으로도 앞으로도 용인되어서는 안 되는 제국주의 미화의 논리로 쓰일 가능성이 있기에 많은 경우
논의 자체에 대해 소극적이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다양한 역사적 사료들은 식민 경험을 통한 근대화
담론의 타당성을 상당부분 지지해준다. 그렇기에 우리는 여기서 잠시 멈춰 서서, 이 담론이 역사적으로 얼마나 신빙성
있는 가설인가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그렇지만 한국 사회에서는 상기된 논의를 진행하기가 여러 모로 굉장히 힘들다. 식민통치기 일제로부터 받았던 고통과
아픔이 민족적 감수성에 기반한 서사 구조를 통해 사회 전반에서 한국인의 정서 깊숙히 공유되고 있는 까닭이다. 한국
사회의 구성원들은 식민지 역사를 아픔과 치욕의 역사로서 기억하기에, 식민 통치를 통해 한국이 근대화로 진입할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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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는 주장은, 그것의 논리적 타당성이나 근거로 쓰인 사료들의 신빙성과는 별개로, 금기시 되는 측면이 강하게
드러난다.
본 연구는 위와 같은 경향을 비판하는 문제의식에서부터 출발한다. 식민 경험과 근대화 양자가 어떤 관계인지를
검증하는 것은 근대화를 탐구함에 있어서, 더불어 한국사에 있어서 아주 중요한 질문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는 사회적 분위기는 역사 검증에 있어서 크나큰 공백을 남겨버린다. 그리고 그 공간은
비생산적인 대립구도와 도덕적 논쟁들로 채워지게 되는 양상을 보인다. 필자는 적어도 역사학, 즉 학문의 영역에
있어서는, 역사적 사실을 과도하게 도덕과 윤리의 영역으로 위임하고 있는 이런 상황을 문제시해야함을 강력하게
주장하는 바이다.
필자는 본 연구에서 앞서 언급한 문제적 태도를 지양함과 동시에 실질적으로 제국주의 국가로부터 식민통치를 받은
역사적 경험과 근대화로의 진입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한국의 일제강점기 관련 자료와 기록들을 통해
검증해보고자 한다.
Ⅲ. 저자 소개
• 베링턴무어 (Barrington Moore) 사회학자
1913년 5월 12일, 미국에서 태어나서 2005년 10월 16일에 사망한 미국의 사회학자이다. 1948 미국 하버드대학교
러시아연구센터, 미국 법무성, 미국 전략문제연구소에서 근무했으며, 오랜 연구로 출판한 역사 사회학 관련 저서인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학적 기원”으로 일약 스타가 되었다. 주요 연구 분약 역시 이와 관련된 역사의 흐름과 변동을
일으킨 사회적 요인들이었다.
• 김동노
현재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학부 역시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출신이며 석사 역시 마찬가지다. 1990년대부터
함께하는 시민행동 정책위원회 위원장으로 활동했다. 주요 연구 분야는 역사사회학으로, 한국 전쟁, 일제강점기, 민족과
국가의 형성, 사회변동과 사회적 배제, 일본 제국주의 등등이 주 연구 분야다.
• 미야지마 히로시
1948년 10월 2일 일본에서 출생했으며, 현재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교수이다. 일본에서 역시 교수직을 가지고
있는데 도쿄대학 명예교수, 도쿄대학 동양문화연구소 교수, 도쿄도립대학교 인문학부 조교수를 역임하고 있다. 맡고 있는
자리를 보면 알 수 있듯, 주요 연구 분야는 동아시아 국가들의 역사, 문화, 사회와 관련된 것들이다.
Ⅳ. 책 내용 요약
연구를 진행함에 있어서 여러 자료들을 참조했기 때문에, 그 중 핵심적인 단행본들을 중심으로 내용을 요약하겠다.
더불어 필자가 하나의 단행본 전반의 내용에 대해 다룬 것이 아니라 여러 단행본들 중 필자의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한
내용들을 선택적으로 읽고 인용했기 때문에, 각 단행본의 내용 모두를 처음부터 끝까지 요약하는 것은 불필요해 보인다.
따라서 연구에서 인용한 부분의 내용들을 중심으로 요약하고, 어떤 맥락에서 이를 인용한 것인지에 관해 제시하는
방식으로 책 내용을 요약하도록 하겠다.
베링턴무어의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이라는 책은 근대화에 대한 일반이론에 대해 다루고 있다. 저자는
책에서 근대화로 가는 길이 다음과 같은 3가지임을 주장한다. 부르주아혁명, 파시즘, 공산주의
혁명이 그것이다. 나아가 저자는 이 중 부르주아 혁명을 통해 근대화룬 이룬 국가들, 미국,
프랑스, 영국, 은 민주주의 정치체를 수립한 반면, 파시즘을 통한 국가들, 독일 일본, 이나
공산주의 혁명을 거친 국가들, 러시아, 중국, 은 독재체제를 수립했음을 지적하며 이런 차이가
어떤 사회적 요인으로부터 비롯된 것인지를 찾아내고자 한다. 그의 저서에 따르면 그 원인은
근대 이행기에 근대화가 어떤 행위자에 의해 주도되었는가 하는 것이다. 베링턴무어는 근대
이행기에 행위자를 크게 삼자로 분류한다. 전통적 지배세력(귀족이나 왕), 부르주아(경제력을
기반으로 하는 신흥 상인세력), 농민(관습법 등으로 경작권을 보장 받던, 전통적 농민)이 바로
그것이다. 이 중 부르주아의 세력이 주도권을 잡고 근대화를 주도한 경우가 부르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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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이며 이들은 민주주의 체제를 수립하게 된다. 전통적 지배세력이 주도권을 잡은 경우는 파시즘이며, 이들은
독재체제를 수립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신흥 세력이었던 부르주아와 전통적 지배 세력 둘 모두가 근대화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는 경우 전통사회의 농민 계층이 대중혁명을 일으키는데, 이 경우가 공산주의 혁명이며 이 역시 독재체제가 수립되는
것으로 귀결된다.
• 김동노, 「근대로의 길 식민으로의 길」, 『근대와 식민의 서곡』,
창비, 2009 /
김동노, 「식민지시대의 근대적 수탈과 수탈을 통한 근대화」, 『IMF 시대에 다시 보는
자본주의적 근대』, 1998
두 책에서 필자가 중점적으로 집중한 내용은 식민국가와 제국주의 국가, 식민과 근대의
모순적이지만 상호보완적이고 긴밀한 결합에 대한 것이다. 이 책의 저자는 근대와 식민에
대한 도식적이고 경직된 인식에 대해서 비판한다. 우리는 흔히 근대는 서구 국가들에
의해서 선행되었고, 식민은 그에 대한 반작용, 희생양으로 발생한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 책에 의하면 이것만으로 근대와 식민의 관계를 단정하는 것은 다분히 협소한 시각에
지나지 않는다. 만약 이 같은 단정적 시각을 견지한다면, 일제강점기의 조선에 대한 설명은
당시 조선을 식민국가로 인지하는 것에 그칠 것이다. 하지만 김동노는 이런 단편적 시각을
지향할 것을 촉구하며, 당신 조선이 근대국가와 식민국가라는 이질적-다층적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음을 주장한다.
• 미야지마 히로시, 「내가 보는 조선후기상과 토지조사사업」, 『토론광장』, 2002
이 책은 기본적으로 미야지마 히로시가 보는 조선후기의 토지제도와 이후 일제가
행한 토지조사사업에 대한 것과 그 역사적 의의에 대해서 서술한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일제에 의한 조선 토지조사사업이 근대적 토지제도의 정착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사실과 동시에 그렇지만 이런 식민 정책은 일제의 순수한 호의로 실행된
것이 아니라 효과적인 식민정책의 실행이라는 목적을 위한 전략이었다는 사실 역시
확실히 하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그런 주장이 한국 한계 내에서 식민지 미화론이라고
비난받는 것에 의아해하며 이런 태도가 한국 전반에 퍼져 있음을 지적한다.
Ⅴ.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연구에 인용된 자료가 하나의 단행본이 아니므로, 각 자료들을 중 인용된 부분을 중심적으로 제시하며, 이를 통해
필자가 최종적으로 도출하게 된 사회변동의 핵심관점에 대해 단계적으로 제사하겠다.
(1) 근대화를 향하는 상반된 통로, 제국주의와 식민지
근대화로 이르는 경로에 대한 3가지 길을 제시한 베링턴무어의 이론을 통해 필자는 다음과 같은 가능성을 발견했다.
제국주의가 식민지를 희생시킴으로써 근대화를 이루는 방식임과 동시에, 제국주의의 수단으로 이용되었던 식민국 역시
서구 국가들로부터 지배당한 기간을 통해 근대화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주장이 일면 모순되어 보이지만 무어의 이론을
조금 더 확장시켜 보면 결코 허무맹랑한 상상만은 아니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를 위해 배링턴 무어의 저서를 인용한다.
“연구의 첫 시작에서부터 그는 “산업화 이전의 세계로부터 근대세계로 전환하는 데에는 3가지 중요한 역사적인
통로가” 있다고 전제하고 있다. 그는 3가지 통로를 살펴보자. 그에 따르면, 첫째, 자본주의적인 민주주의 체제로
나아갔던 부즈주아 혁명인데 그것은 독자적인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던 사회 집단의 발전적 결과로서 나타났으며
이러한 혁명은 민주주의적 정치 결과를 가져오는 데 장애가 되어온 것들을 파괴시켰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업을 달성함에
있어서 농촌 지역의 사회 계급은 부르주아지와 공동 전선을 구축했거나 아니면 변화에 저항했으나 그 결과는 무력했다고
설명한다. 바로 이러한 유형에 속하는 경우로서 그는 영국 프랑스 미국을 들고 있다.“
5)
5) 배링턴 무어,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까치, 1991, pp.1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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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체제를 정착시킨 부르주아 혁명에 관해서다.
“이보다 좀 더 늦게 시작된 것이지만, 근대화의 두 번째 통로는 자본주의적이었으나 반동적인 것이다. 이들 사회에서
근대 사회로의 발전을 위해 요구되었던 정치적 경제적인 변동은 그 사회의 지배적 위치에 있었던 토지 소유 귀족들에
의해서 행해졌다는 것이다. 비록 도시의 부르주아지는 정치적으로는 미약한 위치에 놓여 있었지만, 산업 발전은 대단히
급속하게 전개되었다. 이러한 변동 과정에서 나타난 정치 체제는 귀족 출신의 개혁가들에 의해서 점유되었던 유사 의회에
의해서 그 성격을 보여주었으며 이어서 불안정한 민주주의 정치체제를 보여주다가 마침내 파시스트 정치 체제로
결과되고 말았다. 바로 이러한 성격을 보여주었던 국가로서는 독일과 일본을 들 수 있다. 세 번째 통로로는 농업
중심적인 국가 관려에 의하여 상업과 산업적인 충격을 효과적으로 억제했던 경우이다. 이 통로에서는 국내의 산업
부르주아지 약화시킬 수 있었으며 여전히 절대 다수의 국민을 전통적인 농민적 상태로 존재하게 하였다. 근대 세계로의
압력은 마침내 이들 농민 계급을 체제 도전적인 세력으로 대두시켰으며 그 사회를 공산주의 체제로 변모시키는 결과를
가져오고 말았다. 이 세 번째 통로에 해당하는 나라가 바로 러시아와 중국이다.”
6)
그리고 독제체제를 발생시킨 나머지 두 통로에 관해서다. 이처럼 베링턴무어는 3가지 통로를 확실히 명시하고 있다.
하지만 엄격히 말한다면 그는 하나의 통로를 더 제시했다. 물론 그 통로에 대해서는 무어 스스로 자신의 분석틀이
설명하지 못함을 시인하며 설명하기를 포기하지만 말이다. 다시 베링턴 무어를 인용한다.
“한편 인도의 경우를 통하여 또 다른 제 4의 통로가 가능한지를 검토하고 있다. 인도는 위에서 지적한 3가지 통로 중
그 어느 것에도 해당되지 않기 때문이다. 인도에는 서구 민주주의의 실현에 요청되는 몇 가지 역사적 전제 조건이
존재하고 있지만, 근대 사회로의 발전에 대한 자체적인 노력은 여전히 미약한 상태에 있다. 결국 인도의 경우는 위에서
설정한 일반론적인 범주에는 해당되지 않는 또 다른 이론적 가설의 설정이 필요한 것 같다.”
7)
사실 베링턴무어가 본인이 만든 일반이론으로 인도와 같은 나라를 설명하는데 어려움을 겪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의 이론은 다분히 서구 중심적으로, 책의 앞부분에서 언급되었듯 근대화의 과정에서 단일 국가 외부의 외생변수를
배제한 체 내생변수를 중심으로 연구를 진행했기 때문이다. 식민 통치, 달리 말해 타국에 의한 지배라는 다분히 외생적인
변수가 강력하게 작용한 국가들의 근대화를 베링턴 무어의 이론으로 설명하기 힘든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그가 제시하는 일반 이론이 포괄하는 범위는 사실상 주로 제국주의 국가들이다. 부르주아 혁명과 파시즘을 통해
근대로 진입하는 국가들이 제국주의 국가와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이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식민국가들은 근대화의 수단이자 희생양으로 인식될 수 있다. 하지만 역사 적 흐름 속에서, 역설적이게도 식민지로
전락했었던 국가들이 식민통치기를 거치면, 해당국가의 근대화가 부분적으로 나마 진행된 증거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무어의 이론은 서구 국가들의 근대화를 중심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이처럼 식민 통치기를 겪으면서 근대화로 진입한
비서구권국가들의 사례를 적절히 해명해내지 못한다. 결론적으로 무어가 스스로 설명을 포기한 식민통치를 통한
근대화까지를 포함한다면 근대화로 통하는 통로는 4가지가 된다.
여기서 주목해야 하는 것은 이 4가지 통로가 매우 이질적인 요소들을 동시에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부르주아
혁명과 파시즘을 통한 근대화는 사실상 제국주의를 통한 근대화인데, 동시에 제국주의로부터 피해를 받은 역사적 경험,
즉 식민지의 경험도 근대화로 가는 하나의 통로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매우 모순적이어 보인다. 작용과 반작용의 관계에
있는 두 가지 움직임이 종래에는 같은 정착지로 도착한다는 주장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위와 같은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간접적이게 나마 무어의 책에서도 이런 모순적인
상황들을 시사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제시할 다른 책들에서도 궤를 같이하는 증거들이 존재한다. 오히려 제국주의와
식민은 모두 전근대에서 근대의 문으로 들어가는 통로로 작동 했다는 사실을 적극적으로 수용해야 함을 역설하는
주장들도 있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다른 참고문헌들을 통해 자세히 논하겠다.
(2) 식민국가와 근대국가의 공존
제국주의 국가에게 지배당하는 식민국가로의 전락이 근대화로의 통로가 될 수 있음을 시사하는 앞선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본다면, 20세기 식민국의 같은 시간 같은 공간에서는 이질적인 두 개 요소가 공존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해, 제국주의의 지배하에 있던 비서구권 국가들은 스스로 식민국가와 근대국가라는 이질적-다층적 정체성을
6) 배링턴 무어,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까치, 1991, p.20.
7) 배링턴 무어, 『독재와 민주주의의 사회적 기원』, 까치, 1991, p.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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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시에 지니고 있던 것이다.
식민국가와 근대국가가 중첩된 이질적-다층적 국가 정체성이 존재했었다는 것은 역사적 기록과 증거물에 대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고증을 통해서 뿐만이 아니라, 여러 학자들의 주장에서 역시 발견된다.
문제는 한국 사회의 경우 유독 이런 이질적-다층적 정체성의 존재 가능성에 대해 매우 부정적으로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한국의 과거 식민기에 대해 근대와 식민이 중첩되어있었다는 주장을 하는 것 자체를 금기시하며, 이를 제국주의
미화라고 비난하고 도덕적 차원의 공격을 퍼붓기도 한다. 미야지마 히로시의 글을 인용한다.
“이번에는 가족들을 데리고 왔는데, 오자마자 내 책에 대해 한국 학계로부터 많은 비판을 받았다. 비판의 주된 내용은
토지조사사업을 근대화를 위한 사업으로 평가한 내 입장에 대한 것이었다. 이런 비판은 나에게는 그야말로 뜻밖의
비판이었다.
(중략)
내가 주장한 것은 토지조사사업이 한국의 토지제조를 근대화시켰지만 그것은 일제의 혜택이 아니라 조선시대에 이미
수조권적 토지지배가 해체과정에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일제가 그러한 정책을 실시한 것은
어디까지나 더 효과적인 식민지지배를 위한 것이었지 선의에 의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고 생각했는데, 일제미화론이라는
비판을 받게 된 것이다.“
8)
인용문에서 알 수 있듯, 미야지마 히로시의 한국 사회의 이런 공격적 태도에 대한 유감을 표하며 다른 한편으로
일제에 의한 토지조사사업이 진행되던 당시의 조선 사회가 근대화와 식민화가 겹쳐져 있는 지점에 있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우리는 그의 글에서 해방전후의 역사 인식에 대한 한국 사회의 공격적이고 경직된 태토에 주목할 수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히로시 역시 식민 조선이 대외적으로 식민국가 였으나 내부적으로는, 거기에 좋음과 나쁨 같은
어떠한 가치판단도 배제한 채 객관적 사실 자체로, 근대화가 진행된 여러 가지 증거가 확인된다는 점에서 근대
국가였음을 간접적으로 나타내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한다.
김동노는 본인의 저서에서 미야지마 히로시가 유감을 표한 한국 사회의 공격적 태도에 대해 날카롭게 지적하고 있다.
더불어 식민 조선의 정체성을 식민 혹은 근대라는 일차원적인 틀에 끼워 맞추는 것에 대해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김동노의 글을 인용한다.
“논쟁이 심화되고 확산될수록 논쟁의 긍정성은 점차 줄어들고 상대방에 대한 반론이 극단화되는 부정적 측면도
나타나게 되었다. 논쟁의 양측을 “식민근대화론”과 “수탈론”으로 개념화했을 때, 식민지시대의 근대화를 주장하는 입장에
대해
반대편에서는
이를
“식민지근대화론”을
넘어서
식민지미화론
내지는
심지어
신식민사관으로
간주했고,
식민지근대화론에서는 식민지시대 우리 민족의 극심한 경제적 피해를 주장하는 관점을 ‘원시적수탈론“으로 비난했다.
이들은 자신의 입장에 대한 상대방의 이름짓기를 거부할 뿐만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들의 주장을 문맥에서 분리하여 다른
의미로 왜곡한다고 비난한다. 결국 식민지시대의 성격규정을 둘러싼 학문적 영역의 근대성 논의가 이 시기를 보는 관점의
도덕성 문제, 즉 도덕적 선과 악의 대립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9)
김동노는 해방 전후사의 역사 인식에 관해 위와 같은 문제점을 지적함과 동시에, 미야지마 히로시의 글에서
간접적으로 드러나 있었던, 당시 조선의 이질적-다층적 정체성이 실재했음을 주장한다. 김동노의 글을 인용한다.
“조선의 위기를 극복하려는 노력들이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면서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하게 되었고
조선인들은 오랜 질곡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나 조선의 식민지 전락이 곧 실패의 역사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비록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지만 그 과정에서 조선은 근대화의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이전과는 다른
사회로 끊임없이 바뀌어갔다. 따라서 이 시기의 역사를 단순히 조선의 식민화에만 초점을 맞추어 실패의 역사로
규정한다면, 역사의 복잡한 과정을 지나치게 단순화하는 오류를 범하게 될 것이다. 오히려 이 시기는 근대로 가는 길과
식민으로 가는 길이 중첩되는 때였으며, 이 두과정은 분절적이거나 배타적인 것이 아니라 하나로 뒤엉켜 있는 모습을
띠었다.”
10)
이처럼 당시 조선 사회는 식민국이었으면서 동시에 근대국가로 가는 길에 있었다. 이 둘은 서로 복잡하게 얽혀있으며,
이 둘을 구체적인 역사적인 상황에 있어서 분리하거나 구분하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것이다. 오히려 양자를 분리해서
8) 미야지마 히로시, 「내가 보는 조선후기상과 토지조사사업」, 『토론광장』, 2002, pp.201~202.
9) 김동노, 「식민지시대의 근대적 수탈과 수탈을 통한 근대화」, 『IMF 시대에 다시 보는 자본주의적 근대』, 1998 ,pp.112~113.
10) 김동노, 「근대로의 길 식민으로의 길」, 『근대와 식민의 서곡』, 창비, 2009, p.1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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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하는 순간 다분히 비생산적인 논의가 나타난다. 다시 김동노의 글을 인용한다.
“조사사업을 보는 기존의 두 입장에는 해결되지 않은 의문이 남아 있다. 우선, 수탈론에서는 조사사업을 통해 전국토의
40~50%가 수탈되었고 지세 개정이나 다른 조세정책을 통해 식민지기간 조선 재정에서 일본(인)으로 조세의 81%나
유출되었다고 한다. 이런 엄청난 규모의 수탈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가능했는지도 의문이지만,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조선민중은 대부분이 피해자였고 식민지시대에 경제적 이익을 본 사람은 거의 없다는 함의를
갖게 된다. 그렇다면
1920년대 이후 이런 직접적이고 노골적인 수탈 속에서 어떻게 식민통치가 커다란 저항 없이 진행될 수 있었는가에 대해
수탈론은 답을 제시해야 한다. 반면에 근대화론은 일제가 영구병합이라는 목적을 위해 경제적 이익을 양보했기 때문에
조사사업이 비수탈적이고 근대적일 수 있음을 주장하는데, 왜 일제가 경제적 이익의 양보를 감수하면서까지
영구병합이라는 목적 하에 조선의 식민지화를 추진했는지 답을 줄 수 있어야 한다.
수탈을 주장하는 쪽에서는 수탈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식민체제의 지속을 설명하기 힘들고, 근대화론에서는 경제적
이익의 양보를 통해 근대성의 확립을 주장하면서 왜 그런 양보가 일어나고 근대적 제도가 도입되었는가에 대해 답하지
못한다. 그렇다면 두 입장은 대립적이기는 하지만 상대방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관한 단서를 제공해주는 상호보완의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즉, 식민체제가 지속된 이유를 근대성의 확립을 통한 경제적 이익의 제한된 양보로 설명하고,
근대적 제도의 형성은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높은 차원의 구조적 왜곡을 위한 것으로 풀이할 수도 있다.“
11)
이처럼 근대화론과 수탈론은 서로가 서로를 설명해 줄 수 있는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다. 당시 조선의 상황은 양자
중 하나의 이론만으로 설명하기에는 복합적이며 다면적인 것이다. 그렇기에 각각의 이론은 일제강점기의 조선에 대해
설명할 수 있는 각자의 영역을 가지고 있으나, 동시에 그렇지 못한 영역 역시 존재하는 것이다. 그 시기의 역사적 분석에
있어서 두 이론 중 하나를 채택하여 나머지 한 쪽을 배제한 채 그로써 당시 상황 전체를 설명하려고 한다면, 상기된
인용문에서 제사한 것과 같은 개별 이론의 한계점에 부딪히게 된다. 수탈론은 스스로가 주장하는 일제에 의한 엄청난
규모의 수탈에도 불구하고 당시 식민체제가 어떻게 유지되었는지에 관해 답하기 어려우며, 반대로 일제가 영구병합이라는
목적을 위해 경제적 이익을 양보했음을 주장하는 근대화론은 왜 그들이 경제적 이익의 양보를 감수하면서까지 이를
강행했는지에 대해 답하기 어렵다.
하지만, 위의 인용문에서도 언급했듯, 이런 한계는 두 이론을 분리된 이론이 아닌 상호보완적인 하나의 이론으로
상정함으로써 극복이 가능하다. 수탈론은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은 근대화론이 설명 가능하고, 근대화론이 설명하지
못하는 영역은 수탈론으로 설명가능하기 때문이다. 양자를 모두 긍정함으로 보다 통합적이고 다층적인 분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때문에, 수탈론과 근대화론을 통합가능하고 공존 가능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이론들로 보는 것이 아니라,
상호배타적이고 대립적인 이론으로 취급하는 것은 이런 가능성을 철저히 배제한다. 이는 결국 대립이 불필요한 두 이론을
대립적 구도에 끼워 넣음으로, 입체적인 역사인식의 가능성을 배제한 체, 불필요한 논쟁만을 양산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결론적으로 위와 같은 수탈론과 근대화론의 상호보완성은 식민국가와 근대 국가라는 이질적인 요소가 당시 조선사회
내부에 동시에 배태되어 있었음을 반증한다. 상호 이질적인 두 이론의 결합으로 식민지 조선의 상황을 보다 적절히
설명할 수 있는 까닭이다.
(3) 근대화와 폭력성은 불가분의 관계이자 상호독립적이다.
지금 까지 근대국가와 식민국가의 그리고 제국주의와 식민의 긴밀한 연결성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우리는
근대화는 언제나 폭력성을 동반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자세히 논해보자.
작용-반작용의 발생적인 관계에서 입각해서 보자면
제국주의국가와 식민국가는 서로 철저하게 상반되고 대립적임에도
불구하고, 양자 모두 근대화로 향하는 통로로 작용가능하다는 점에서 공통분모를 갖는다. 제국주의가 서구 국가들의
효과적이고 확실한 근대화 전략이었음은 역사적으로 이견이 없을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제국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이런 체제의 작용으로 발생하는 반작용으로써의 식민국가의 발생, 폭력의 발현 때문이다. 모든 제국주의가
태생적으로부터 폭력성을 내재하고 있음은 자명하다.
그런데 이 지점에서 우리는 곤혹스럽게 만드는 사실은 서구국가의 근대화 전략의 밑거름으로 희생되었던 식민국가들
역시 식민 통치기를 겪음으로 근대화로 진입하게 되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해주는 수많은 역사적 사료들이다. 하지만
11) 김동노, 「식민지시대의 근대적 수탈과 수탈을 통한 근대화」, 『IMF 시대에 다시 보는 자본주의적 근대』, 1998 ,pp.116~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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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곤혹스러움 속에서, 상기된 서구국가들의 근대화 전략과 식민국들의 근대화 과정에서 모종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폭력성의 발현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법하다. 근대화 과정은
항상 폭력성을 동반하는가? 해당 명제를 확인하기 위해서 본 연구에서 제시해 왔던 근대화의 통로들을 하나씩 되짚어 볼
필요가 있다.
근대화의 통로로써 제국주의 국가는 “폭력의 가해”를 내재하며, 식민 국가는 “폭력의 피해”를 내재한다. 혹자는 폭력의
가해와 피해를 같은 선상에서의 “폭력”이라고 볼 수 있느냐고 반문할지 모르지만, 이는 그저 국가주의 혹은 민족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주장일 뿐이다. 국가와 민족이라는 다분히 주관적이고, 작위적인 구분의 틀의 지워버린다면, 폭력의
가해와 피해는 그저 인류 사회 내부에서의 폭력의 발현으로 동일한 현상이다. 이를 바탕으로 제국주의와 식민국가 모두를
근대화의 통로로 본다면, 근대화는 언제나 폭력이라는 반작용을 동반하는 사회적 변동임을 알 수 있다.
베링턴무어의 저서에서, 물론 이 연구에서 주된 분석의 대상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공산주의 혁명을 통해 근대화를
이룬 국가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혁명이라는 급진적인 방법을 근대화 전략으로 택했는데, 혁명은 항시 폭력성이
전제된다. 그런 점에서 내부적 혁명을 통한 근대 국가들 역시 폭력성이 동반된 근대로의 진입을 경험했다고 볼 수 있다.
결론적으로 외부로 발산하는 형식의 근대화인 제국주의, 그리고 외부로 부터의 유입을 통한 근대화인 식민지, 내부적인
폭발을 통한 근대화인 공산주의 혁명 3 가지 경로 모두 어떤 형식으로든 폭력을 동반한다.
이 같은 명제를 받아들임에 있어서 우리는 다음의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근대화와 폭력성은 언제나 서로를
동반함과 동시에 상호 독립적이다. 긴밀한 연관성을 가짐과 동시에 간섭불가능 하다는 말이다. 근대화를 근거로 폭력의
사실을 부정하거나 미화하는 제국주의미화론 근대화와 폭력성의 상호독립성을 간과한 대표적인 사례이다. 우리는 이런
주장이 논리적으로, 윤리적으로 많은 허점을 가지고 있음을 이미 인지하고 경계하는 반면, 반대의 경우 즉 폭력성이
근대화에 간섭하는 경우에 대한 경계심은 상대적으로 매우 낮은 편이다. 폭력을 근거로 근대화의 사실을 부정하려는
주장이 이에 해당한다. 주로 민족주의적 감수성에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 주장들이 그러한데, 이들은 식민 통치기 동안의
자신의 민족이 당했던 수모와 탄압을 근거로 당시 근대화가 진행되었다는 사실을 부정하려 한다. 우리는 이 역시
지양해야한다. 근대와 폭력 양자가 서로에게 간섭하기 시작한다면 그 때부터 매우 비생산적인 논의가 발생한다. 박정희가
근대적 경제발전을 했다 해서 독재를 하지 않은 것도 아니고, 독재를 했다고 하여 근대적 경제발전 하지 않은 것도 아니
듯이 말이다. 근대와 폭력은 상호 독립적이다. 이 둘을 섞어서 인식하는 우를 범해서는 안될 것이다.
Ⅵ.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근대화가 항상 폭력성을 동반하는 것은 모든 사회변동의 과정에서 나타는 기존의 체제와 새로운 체제 사이의 마찰과
같은 것이다. 사회변동이라는 것은 기존의 사회 구조, 체제에서 새로운 형태의 사회, 체제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결코 단발적으로 일어나지 않는다. 변동은 것은 어느 날 갑자기 한 번에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진행되는 것이 아닌가. 이것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기존의 체제와 이와는 상이한 모습의 새로운 사회
체제가 마찰을 일으키며, 종래에는 새로운 시스템이 기존의 것을 밀어내거나 흡수 융화시켜 버림으로 사회는 변동하게
된다. 이 지점에서 발생하는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의 충돌과 마찰로 발생하는 일련의 지각변동들은 해당 사회
구성원에게는 폭력적인 힘으로 다가온다. 이전의 것은 변화의 힘에 의해 파괴되고 재구성된다. 이 때 사회 구조 속에
위치하고 있는 개인들은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사회적 지위가 역동적으로 바뀌어 기존의 자신의 위치에서 사회의
최하층으로 곤두박질치기도 하고, 사회 규범의 형성이 변화의 속도를 따라가지 못해 무규범 상태 속에서 방황하거나, 그
결과 자살 같은 극단적인 선택들이 나오기도 한다. 우리가 살펴본 근대화에서도 이런 마찰과 그에 따른 폭력의 발현을
살펴 볼 수 있었다. 결국 모든 사회변동은 기존 구조와의 마찰이므로 항시 폭력을 동반하는 것이다. 이는 비단
근대화에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며 인류 역사 전체에 대한 통찰이다. 이를 바탕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역사는
지속적인 폭력의 발현이다. 역사란 역동적으로 변화해온 인류사회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이다.
Ⅶ. 이 관점으로 앞으로의 세상은?
사회는 지금도 가시적으로 그리고 비가시적으로 조금씩 변화해 가고 있으며, 앞으로도 계속될 것임이 분명하다. 그런
점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사회 속에 언제나 변동의 가능성은 내재하고 있으며, 그 자체로 변동의 과정인 미래의 사회에서
역시 이런 폭력은 항상 존재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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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의 사회 모습이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일지에 대한 정밀한 예측만큼이나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할
폭력이라는 요소에 대한 인식 역시 중요할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미래 사회를 살아갈 우리에게 중요한 점은 첫째로
어떻게 미래 사회의 변동에서도 나타날 폭력성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이냐 하는 인식의 문제, 둘째는 이에 어떻게 대응할
것이냐
하는
현실적
대응의
문제일
것이다.
필자가
앞서
언급한
근대-폭력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우리는
사회변동-폭력(마찰)의 관계 역시 상호 보완적임과 동시에 상호 독립적임을 인지해야 할 것이다. 나아가 사회가
변화하는 모든 지점에서는 그에 따른 반작용으로의 마찰로써 발생하는 폭력이 존재함을 언제나 인지하여, 개인적
차원에서는 이를 사전에 회피하려고 해야 하며 공동체적 차원에서는 최소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Ⅷ.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는가?
앞선 문항에서도 반복적으로 언급했듯, 모든 사회 변동은 폭력성을 내재한 다는 명제는 인류의 역사를 꿰뚫는 통찰일
것이다. 과거의 사회변동도 그랬고 현재도 그러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건 너무나 확실한 사실이 아닐 수
없다.
과거 영국의 인클로저 운동은 전근대 사회에서 관습법을 보장되던 수많은 농민들의
경작권을 지주의 자본주의적-배타적 소유권으로 편입시키는 과정이었다. 농민들은 조상
대대로 내려오던 생산수단을 상실했고 그들의 삶은 파괴되었다. 더불어 그 이후 그들은
생산수단으로부터 소외된 채 임금노동자로 전락했고 삶은 피폐해졌다. 산업혁명 초기
영국의 임금노동자가 여러 가지 부당한 대우와 살인적인 노동 조건을 감수해야 했다는
건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이다. 현재 기계와 정보통신 기술을 통한 산업 구조의
자동화와 정보화라는 사회 변동 역시 폭력성을 내재한다. 그 동안 제조업 분야에서
일하던 수많은 노동자들은 자동화의 동력인 기계에 의해 생계를 잃었다. 이는 비단
비숙련 노동을 필요로 하는 단순 반복식의 제조업 분야에만 한정되는 이야기가 아니다.
점진적으로는 반복적인 단순 노동 뿐만 아니라 보다 숙련된 노동을 필요로 하는
직종으로 까지 확장될 것이라는 전망이 일반적이다. 그렇게 지금 이 순간에도 기계에
의해, 정보 시스템에 의해 대체 가능해진 직종들이 늘어남에 따라 사람들은 직장을 잃고
있으며, 그 범위는 점차 확장될 것이다. 이는 일종의 폭력이다. 농민과 노동자의 퇴출, 생산 수단과 생계의 박탈은
개인들의 삶에 있어서 다분히 폭력적이지 않은가. 사회 변동이 동반하는 폭력성은 이렇듯 과거 영국의 농지에서도 현대
노동시장의 영역에서도 발생하고 있다.
이 같은 역사적 흐름과 인류 사회의 보편적인 변화양상의 연장선상에서 앞으로의 사회에서도 사회가 변동됨에 따라
폭력성이 발현될 것이다. 동시에 폭력의 이면에 근대화가 있었듯이, 미래의 사회변동 속 폭력의 이면에도 진보와 발전이
위치하리라고 생각된다. 결국 우리는 변동이 일어나는 지점을 미리 예측하여 개인적으로는 폭력성을 최대한 회피함과
동시에 사회적으로는 이를 최소화하려고 노력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앞으로의 역사를 대비하는 통찰이자 올바른
태도이다.
Ⅸ.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 이영훈, 「조선후기사회경제사」, 경제사학회, 『경제사학』, 1989
• 허수열, 『개발없는 개발』, 은행나무, 2011
• 이영훈, 『대한민국 이야기』, 기파랑, 2007
• 강유원, 『고전 인문 강의』, 라티오, 2010
• 존 로크, 『통치론』, 까치글방, 2007
• 제러미 리프킨, 『노동의 종말』, 민음사, 2005
• https://www.youtube.com/watch?v=-HbPsbOwxiM
- 친일비판자는 좌익인가에 관한 토론 영상
• https://prezi.com/dgcihwl6xmcc/presentation/
- 발표 관련 시각자료 (Prez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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Ⅹ. 종합결론
역사가 변화의 연속이라면 모든 역사는 폭력성의 발현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통해 비관해서도 안 되며,
부당함을
합리화해서도 안 된다. 그저 이러한 역사의 본질적 형태 그 자체를 냉정하게 인지하며, 그 속에서 자신을 올바르고
합리적인 위치에 자리하게 하기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고 투쟁해야 할 것이다.
Ⅺ. 이름 / 학과 / 학번 / 간략한 자기소개 / email 주소
유병민 / 사회학과 / 2012104411 /
현재 사회학과 4학년에 재학 중인 12학번 유병민입니다. 앞으로 법률 관련 직종을 통해 시민단체나 공익단체에서
활동하려고, 진로 계획 중에 있습니다.
/ patrickyoo041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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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와 식량; 사회변동 요인으로서 인구와 식량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백억 인구 먹여 살리기- 인구 성장과 식량 증산 (원제 Feeding the Ten Billion)
고려대학교 출판부 | 2008년 | 로이드 에반스 (지은이) | 성락춘 (옮긴이)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왜 이 책을 선택하였는가를 설명하는 것은 왜‘인구와 식량’이라는 주제를 삼았는지를 이해시키는 것에서 출발할 수
있다. 우선 사회적인 변동을 만드는 주체는 인간이다. 인류의 역사는 물리적 공간을 점유하여 끊임없는 변동을 만들어온
인구의 역사라고 말할 수 있다. 인구를 사회변동을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인구는 생물학적 분류개념인 인간과
다른 개념으로 사회학적 의미로서의 인간 집단을 의미한다. 인구는 그 자체를 통계적으로 분석할 수도 있고 그의 사회적
역할이나 기능, 행태를 중심으로 한 사회학적 의미를 가질 수도 있다. 더불어 공간과 더불어 연결하여 다룰 수 있다.
인구는 특정 공간에서 사회 형성하고 생존활동을 영위하는 구체적인 인구 집단이다. 따라서 어떤 지역의 인구현상은 그
사회의 자연적,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제 조건을 반영하는 특정 시대의 사회적 소산이라 말할 수 있다. 인구는 사회
자체를 이루는 인간이라는 집단을 보기에 가장 원초적이고 주체적 요소이다.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인구가 갖는 의미는 다양하게 해석될 수 있다. 다양하게 해석되는 과정에서도 인구는
여전히‘주체’이다. 우리는 인구를 특정 부문의 계량적 자료로 활용하여 분석에 활용할 수 있다. 사회변동의 요인으로
인구라는 주제만을 놓고 해석하기에는 이와 관련된 주거, 교통, 질병, 위생, 식문화, 복지 등이 너무나 광범위한 영역에
걸쳐 사회변동에 영향을 주고받았다. 이 범위를 줄이기 위해 인구 성장의 역사적 요인인 문화혁명, 농업혁명, 산업혁명에
주목하였다.
문화혁명기는 인간이 출현한 구석기부터 신석기 시대 농경시대
직전까지를 말한다. 이시기는 수렵과 채집 생활로 인간 스스로
생산
활동이
증가했다.
없었고
따라서
농업혁명기는
생활이
현대
중근동
11000-6000년경
불안정해
사회
변동을
비옥한
최초
인구가
설명하기엔
초승달
작물재배와
느린
지역에서
야생동물
속도로
어렵다.
BC
가축화에서
시작한다. 이는 인간의 생산 활동의 시작과 안정된 정착생활을
시작을 의미한다. 이를 통해 식량의 자급자족 뿐만 아니라 여러
기술혁신이
이뤄지고
취락,
관개술도
발달해
잉여생산이
가능해졌다. 기원후 1년에는 지표상 인구가 2.5-3억 1500년경엔
5억으로 증가했다. 인간이 획기적 문명사회, 산업사회로 접어든
것은 산업혁명 때문이다. 이전에 상호 역학적 관계에서 높은
출생률과 사망률을 보이던 유럽 인구 동태는 사망률의 급격한 저하를 보였다. 고도로 발달한 농업기술, 기계공업,
운송수단, 보건위생시설 등은 출생률과 사망률의 심한 격차을 만들어냈다. 왼쪽의 그림은 디비의 인구성장의 역사적 과정
그래프이다.
y축은 인구, x축은 기원전후를 아우르는 시기를 보여준다. 3번의 큰 인구의 변화를 보이는데, surge1은
기술, 의복, 불의 발달에 의한 것이고 surge2는 농업과 관개시설의 발명, surge3는 산업혁명에 의한 것이다. 이 중
농업혁명을 통해 일궈진 인구의 큰 변동을 보고자 하는데, 가장 단적으로 변동의 요인으로 설명할 수 있기도 하고 우리
인간이 생활하는데 가장 중요하다고 여겨지며 개인의 일상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고 행복감을 주는 ‘식’에 대해 다루고
싶기 때문이다.
3. 저자소개
저자 로이드 에반스(Lloyd T. Evans)
로이드 에반스(Lloyd Evans, 1927-2015)는 개화(flowering)의 생리학에 초점을 맞춘 식물생리학자이다. 옥스퍼드
30
대학교에서 로드스(Rhodes) 학자로 박사학위를 받은 뒤 식물산업의 CSIRO 분야의 조사과학자가 되기 전, 미국
캘리포니아 기술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했다. 그는 CERES12)의 설립의 책임을 가진 생물학자였고 식물생산조절실로
알려진 환경조사시설을 관리했다. 그는 이 곳에서 1971년에서 1978년 까지 장으로 일했다. 오스트레일리아 학술원에서
1971년부터 일하면서 1978년에서 1982년 까지 원장으로 재직했다. 주로 식물생리학 분야에서 수많은 논문과 연구의
저자로, 표준교과서처럼 된 수많은 책을 썼다.
역자 성락춘
고려대학교 농학과와 미국 미주리 대학 졸업하였다. 농촌진흥청 농업연구사를 거쳐 고려대학교 생명과학대학 교수를
지내고 있다. 농촌진흥청 녹색혁명 연구상과 한국작물학회 연구상을 수상했으며, 지은 책으로는 《공예작물학》과 《인간과
식량》 등이 있다.
4. 책 내용 요약
본 책은 인구 증가의 양상과 그 역사를 기준으로 내용을 이어간다. 의미 있는 인구 숫자를 기준으로 인구
500만명에서 인구 60억명이 될 때 까지의 식량과 인구 간의 관계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기원전 8천년 이전부터
지금까지 인구가 증가하는데 식량이 어떤 역할을 해왔는지 흐름을 읽을 수 있는 책이다. 로버트 맬서스는 인구는
억제되지 않을 때 기하학적 비율로 증가한다. 생산수단은 오로지 산술적 비율로 증가할 뿐이다. 맬서스는 이것이
생존수단의 어려움으로부터 어떤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인구 억제를 함축한다고 말한다.
세계인구가 지속적으로 팽창해오고 1845년 아일랜드 감자 대기근은 맬서스 망령을 보게 만들었다. 이는 사건 자체와
맬서스 이론과 더불어 세계 식량공급 능력을 인구 성장에 맞춰 늘릴 수 있는 것에 관심을 갖게 만들었다. 1960년 이후
여러 선진국들에서 주식작물의 수량성 향상과 잉여 농업 생산력의 축적은 세계 식량공급문제가 근본적인 해결을
가져왔다는 결론을 내리게 만들었다. 주식으로 하는 화곡류의 세계 가격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것처럼 농업과학은
지나치게 성공한 정도까지 보인다.
인구 5백만 명에 도달할 기원전 8천년까지 에선 초기 인간들의 인구증가에 대해 설명한다. 최초의 영장류는 약 6천만
년 전에 나타났는데, 이들의 불을 사용한 요리는 고기섭취를 현저하게 증가시킬 수 있었다. 불이 요리 뿐 아니라
사냥활동을 하고 초목을 다루는 것에 용이하게 사용되었다. 그리고 이 수렵채집자들은 식물과 생활주기와 동물 습성에
대한 방대한 지식을 가졌다. 이들은 농업을 할 수 있을 정도로 동식물의 생활주기를 이해했지만 생활양식의 다양성을
선호하여 인구압에 의해 어쩔 수 없을 때만 농업적 생활양식을 적용했다. 인구 5천만에 향해가는 기원전 8천-2천 년
전엔 신석기혁명을 통해 인류가 농업에 의존하기 시작했다. 본 책은 농업으로 이끈 힘으로 농업으로의 전환은 이것이
쉬운 환경이라고 꼽았다. 그리고 기후변화를 통해 계절특성이 커지고 일년생 벼과 식물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사람들이 정착해서 사는 생활양식에 열망을 가졌기 때문이며, 마크코헨이 제기한 인구압 또한 이를 설명한다.
인구 5억에 접어드는 기원전 2천-서기 1500년에는 서기 원년 인구를 2억 5천만 정도로 추정한다. 세계 인구가
5억에 도달하는 과정에서 주기적인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볼 수 있었다. 이는 농업이 가뭄, 전염병, 전쟁에 당면해
확고한 안정된 식량공급을 보장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10배의 인구증가를 가능하게한 식량생산은 경지면적이 확장되고
4천년 전부터 보습쟁기의 도입에 힘입은 것이다. 농업은 고원지대까지 확대되고 계단식 농업이 도입되었다. 이 때
근동에서 유럽으로 농업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인구 10억에 접어드는 서기 1500년-1825년에는 지속적인 인구의
가파른 성장세가 시작됐다. 유럽에서 상업적 농업이 시작되어 3포식 윤작을 시작해 휴한지에 작물을 재배했다. 두배 가된
세계 인구에 대처할 수 있는 농산물 증가분의 많은 부분이 겨작지 면적의 확대에서 기인한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작물과
짧아진 재배주기 및 수량의 증가 또한 많은 역할을 했다. 이 당시 영국에서는 수량증가와 더불어 공장노동의 생산성도
배로 향상되는데, 이는 1700년과 1850년 사이의 농지 관리 개량이 광범위하게 적용됐기 때문이다. 보다 많은 노동력이
산업발전을 위해 자유로워졌고 농업개량, 산업발달, 인구성장 및 식량 수요의 증가 사이에 상승적 상호작용이
12) 세리즈(Ceres)는 기후변화나 물 부족 등의 전 지구적 환경변화에 대응해 환경파괴 없는 지속 가능성 문제를 다루기 위해 미국의
투자기금, 환경단체, 민간그룹들이 결성한 비영리 연합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세리즈 [Ceres] (네이버 기관단체사전 : 종합, 굿
모닝미디어)
31
지속되었다.
인구 20억에 접어드는 서기 1825년-1927년에는 아시아와 유럽의 인구 증가세가 여전히 두드러졌다. 이 기간에
서유럽 국가들에서는 1인당 식량공급이 하루 2천 칼로리 이하에서 3천 칼로리 이상으로 증가했다. 20세기에 인구의
배가는 농업을 위해 삼림과 목초지를 개간한 토지 면적의 배가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다. 이 시기에 세계 인구가
40% 증가하는 동안 경지 면적은 75% 증가했는데, 북아메리카와 러시아에서 이뤄진 대규모 개간 때문이다. 과학이
농업과 접목되면서 어떻게 연구를 뒷받침하고, 연구를 통해 발견한 것을 확장하고 이를 적용할 농업 전문가를 어떻게
교육시킬 것인가 하는 문제들이 긴급한 현안으로 대두되었다. 새로운 작물의 도입이 더 많고 빠른 효율을 가져왔다. 이
정도의 인구에 달했을 즈음 공공자금을 기반으로한 연구와 농업 교육의 필요성은 영양학, 병리학, 식물도입, 식물개량의
분야의 성과가 막 나온 때임에도 불구하고 널리 수용되었다. 그만 큼 전통 농업의 생산성한계를 깨뜨리는 지적, 물적
투입이 이시기의 핵심이었고 이것이 인구 증가를 뒷받침했다.
인구 30억에 접어드는 서기 1927년-1960년에는 세계 인구가 20억이 되는데 1세기가 걸린 반면에 또 10억이
증가하는 기간에는 1/3 밖에 걸리지 않았다. 이 33년 동안 농업계의 중대한 변화의 기틀이 마련되었고 주요 혁신이
일어났다. 이에 불구하고 인구 50% 증가에 대한 식량공급 증가의 가장 중요한 원동력은 여전히 경작을 위한 개간지
면적을 늘리는 전통적 방식의 식량공급 증가였다. 이 시시의 농업은 다른 네 가지 주요 변화로 특징지어진다. 첫 번째는
1927년 당시엔 미미했던 농장 외부로부터의 투자에 대한 의존도가 증가했다. 그 이후로 기계화의 결과로 연료와 전기가
농장운영의 에너지원이 되어 사람과 말을 대체했다. 두 번째로는 농업투자의 산업적 유용이 증가했다. 이전의 농업은
산업적 대안이 없는 자연적 생산절차와 자본주의와의 대립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농민의 독창적 발명의 산물인 기계화는
농약, 비료의 공급의 경우처럼 산업이 인계받았다. 세 번째로 작물을 위한 값싼 질소비료의 발전으로 농민들이 더욱
특화된 농작물 생산시스템을 위해 과거 농업적 이상을 대표했던 작물/축산 혼합 시스템을 버리게 됐다. 네 번째로
기계화와 농업 투자의 산업화는 작물 수량 증가에 따라 경지 확장에 제한을 둘 수 있는 선진국과 인구 통계학적으로
과도기에 있고 식량 수요를 충족시키기 위해 지속적인 개간이 필요할 정도로 인구 증가가 급속한 저개발 구가 사이의
격차를 더 크게 했다. 많은 분야의 연구가 농업의 발전에 기u한다. 그러나 인구 증가 초기 단계처럼 기근은 아직도
사라지지 않았다.
인구 40억에 접어드는 서기 1960년-1975년을 보면 세계 인구가 20억에서 30억이 되는 데에 33년이 걸렸다면
40억이 되는 것엔 15년이 걸렸다. 이 시기 세계 인구는 해마다 2.1%라는 최대의 인구 증가율을 보였다. 40억 인구가
대다수 거주하던 69%의 아시아 국가가 속한 개발도상국은 급속한 인구 증가와 지지부진한 식량생산 증가 사이의 대조에
주목했다. 개발도상국과의 협력을 위해 국제적 농업 연구센터들은 포괄적인 체계 지원을 위해 국제농업연구자문그룹을
설립했다. 이 기구의 설립을 주도한 사람들은 밀과 벼의 왜성품종이 몇 해 동안 성공한 것에 고무되었다. 혹자는 이
왜성품종이 끼칠 영향을 녹색혁명이라 불렀다. 이 녹색혁명은 개발도상국의 1인당 식량 공급지수가 올라가게 할 수 있게
했고 실제 밀과 벼의 가격이 계속 떨어졌다. 하지만 이 왜성 화곡류의 성공이 부분적으로 콩과 작물의 재배를 잠식하여
단백질 결함을 악화시킬 우려를 가져왔다. 세계 인구가 40억에 도달하면서 왜성 화곡류의 재배는 선진국으로도 널리
퍼졌다. 수확지수가 높아지면서 수량성이 커졌다. 노동의 집약화로 선진국 30%의 사람들은 과잉 생산, 과식 및
보조금으로 애를 먹은 반면, 개발도상국 사람들의 70%는 적자, 부채, 영양결핍에 직면했다.
세계 인구가 50억이 되는 서기 1975년-1986년 시기엔 식량공급에 대해선 이전보다 덜 걱정하기 시작했다.
개발도상국에서 11년동안 26%의 인구 증가를 보였음에도 불구하고 1인당 식량 공급에 있어 14%의 일괄된 증가치를
보였다. 주요 화곡류의 세계 평균 수량은 11년 동안 꾸준히 늘었고 이는 개발도상국에서 비료사용의 두드러진 증가와
결합한 왜속 화곡류의 지속적인 영향을 반영했다. 이 시기에 선진국의 인구는 8.9%만이 증가하여 식량생산이 이
증가세를 지탱하는 것에 문제가 없었다. 이 상황에서 이곳의 농업 연구는 공적 재정의 지원이 위축됐다. 1972-1973년
유가 파동으로 농업에 집중적 에너지 분석이 필요함을 느꼈다. 이는 우리가 자급자족하는 농민으로 얼마나 멀어졌는지와
현대 농업이 어느 정도로 화석 연료 에너지에 기댔는지 깨달을 수 있게 하였다. 그럼에도 불고하고 적절한 제초제의
사용을 시작한 때에 최소 경운을 통해 더 가파른 경사지에서 안전하게 재배할 수 있게 되었다. 결과적으로 잠재적인
경지가 늘어났고 빠르게 작물을 전환함으로써 작물 작부의 강도를 높일 수 있었다.
인구 60억이 되는 서기 1986년-1999년에는 세계 인구가 40억에서 50억으로 늘어날 때 함께 나타난 세계전체 식량
지수의 지속적 증가가 이때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아시아와 남아메리카에서 약간 개선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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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의 관개 면적의 연간 증가율은 1970년대 2.5% 이상에서 1980년대 말 0.4%로 떨어졌다. 개발 은행들이 관개
대출, 원조를 대량 삭감한 것에 의한 것이다. 이 주요 원인은 아마도 세계 화곡류 가격의 하락과 관개 개발의 헥타르당
비용의 상승이 맞물린 것 때문일 것이다. 인구가 60억에 육박하면서 많은 나라에서 농업 연구에 대한 공공자금
실제가치의 감소 및 농업연구센터의 수의 감소가 나타났다. 이 과정에서 농업 연구에서는 지적 재산소유권의 진전에 대한
대가를 보증할 수 있는 분야에서 더 커진 상업 연구의 역할이 커진 경향을 보인다. 이는 지난 식량생산의 증가에서 주요
작물 수량의 더 많은 증가를 보였던 흐름에서 벗어나는 연구 방향이라 볼 수 있다. 세계 인구가 60억이 지나치는
시점에서 여전히 기근은 존재하고 앞으로 100억 인구의 시대가 될 때 이를 먹여살릴 방법이 모호해졌다.
5. 이 책에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은 지난 1만년 동안 ‘세계의 인구 성장과 농업의 진화 사이의 상관관계’를 탐구한다. 이를 통해 농업이 현재
당면한 도전을 이해하고 미래의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카를로 치폴라(carlo cipolla)는“산업혁명 이전까지 인간은
지속적으로 주로 식물과 동물을 통해 에너지를 만들어왔다고 말하는 것이 타당하나. 식물은 식량과 연료를 위해, 그리고
동물은 식량과 기계적 에너지를 위해 이용해 온 것이다.”즉, 식량을 통해 인간은 지속적인 에너지를 얻어왔다고 말한다.
인구 증가를 막은 것은 자연환경과 자원에 대란 종속이다. 이는 수렵과 채집 사회에서 두드러졌다. 왜냐면 안정적인
식량의 수급에 한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강우량과 생산의 관계를 보면 이는 단위면적당 식물성 생산량은 강우량에 의해
제한받는다. 이는 가용한 식량의 양이 주거자의 수를 제한한다. 즉, 인구증가 억제요소가 자연환경과 자원 종속이라
설명할 수 있다.즉, 강우량이 많다는 것은 식물 생산성이 좋고 이는 식량 생산에 연관됩니다. 이에 근거하여 인구의
양상이 영향을 받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식량은 인간 생존의 역사에서 중요한 키워드이며 인구가 분포하고 증감하는
변동에 영향을 미쳤다.
인구에 대해 말한 학자는 맬서스, 마르크스, 밀이 있다. 밀은 ‘이상적 상태’를 역설하며 사회구성원 모두가 안정된
상태를 위해 인구가 안정되어야 하며 이는 인간의 이성적 속성과 연결된다. 마르크스는 맬서스를 비판하면서 상대적
과잉인구론을 말했다. 시공간 초월한 인구법칙은 없고 인구문제는 오로지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에 비롯된다. 이
해결책은 급진적 사회개혁이다. 맬서스는 인구론을 통해 인구와 식량 간의 관계에 대해 깊게 생각했다. 그는 자신의
논점의 핵심을 이렇게 밝힌다.
“인구는 억제되지 않을 때 기하학적 비율로 증가한다. 생존수단은 오로지 산술적 비율로 증가할 뿐이다. 수에
대해약간의 식견만 갖추어도 뒤의 것에 비해 아의 것이 지닌 어마어마한 힘을 알 수 있다. 식량을 인간의 삶에 필수적인
것으로 만들어 놓은 저 자연의 법칙에 따르면, 동등하지 못한 이 두 힘의 결과는 평형을 유지하여야만 한다. 이는
생존수단의 어려움으로부터 어떤 강력하고 지속적으로 작동하는 인구 억제를 함축한다. 이러한 어려움은 필시 어느
곳인가를 덮칠 것이며, 많은 인류는 이에 대해 심각하게 느껴야만 한다.“
이때 맬서스가 말하는 생존수단은 식량이라 볼 수 있다. 맬서스는 식량공급을 설명변량으로, 인구를 종속변량으로 보고
있음을 명확히 볼 수 있다. 즉, 인구가증가하는 속도를 식량증산의 속도가 따라잡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에 반한
의견으로 에스테르 뵈세룹은 인구성장은 독립변량으로 간주되며 이것은 다시 농업발전을 규정하는 주요인으로 된다.
맬서스는 강력하고 확실한 어떤 억제요소에 방해받지 않는다면 인구 성장은 언제나 생존수단을 억압할 것이라는
것이라 말한다. 다음 도식과 같은 양상으로 이어진다.
궁극적 억제
|
직접적 억제
|
적극적 억제
기근, 질병, 전쟁
예방적 억제
만혼, 금욕, 부정한
성생활
궁극적 억제는 인구와 식료의 증가율 차이에서 오는 식량부족이며 적극적 억제는 기근 질병 전쟁 가혹한 노동 등
사망률을 높이는 곤궁, 예방적 억제는 출생률을 저하시키는 혼외 성생활, 낙태, 만혼, 금욕 등 인간의 도덕적 억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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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부족으로 전멸할 인간이 생존가능하는 것은 식량과 인구 사이에 균형유지. 이를 가능하게 하는 것은 기하 급수적인
인구증가를 방해하는 제거작용의 존재이며 원천은 위의 억제요소와 같다. 맬서스의 인구론은 출발점으로 삼은 생존을
위한 식료의 필요성, 인구증식의 지속성, 식료와 인구 사이의 격차 성을 증명하는 작업이었고 인구와 식량의 관계가
축이다. 여타 다른 요소나 현상을 보았을 때 적용할 수 있거나 비판점이 있는 이론이지만 주로 인구 증가와 식량의
관계에 주목하여 보았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이 그래프는 인구 성장 그래프를 보여준다. 각 그래프 a, b, c는 동일한 데이터에
서로 다른 스케일을 적용한 것이다. 산술 스케일은 대수학의 정수 계산을 중심으로
한 것이고 대수는 수 대신 문자를 써서 문제 해결을 쉽게 방정식처럼 만든 것이다.
(A)는 두 가지 축 모두 산술적 스케일, (B)는 인구축은 대수적 스케일 시간축은
산술적 스케일
이를 통해 인구성장이 느리고 뷸규칙한 서력 기원 초기의 변화에
대해 더 자세한 그림을 얻을 수 있다. (C)는 양쪽 모두 대수 스케일이다. 에드워드
디비가 제안한 형태이다. 이는 이 시점에 500만을 향해 나아가는 양상을 보여주고
농업의 도약과 연결되어 2억5천만에 도달하는 양상을 보인다.15세기 까지 인구는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19세기에 그러하였다.
신석기시대 인구이행을 보면 수렵 채집인들이 농부로 전환되는 점진적 이행은
농업의 확산으로 인구는 지속적으로 몇 배의 규모로 증가하였다. (a)는 A는
인구집단이 성공 B는 균형 C는 실패를 의미한다. 총 인구증가율은 A는 증가, B는
무변동, C는 감소를 의미한다. (b)는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 시대의 이행으로
생존조건의 안정성이 증가하여 곡선이 성공쪽으로 이동했고 인구증가율이 과거보다
높아졌다. 농업시스템이 영양상태를 개선하여 사람들의 생존력이 높아져 인구증가가
가속화되었다.
이는
불안정에서
보호하여
곤궁기가
적어졌다.
구석기시대에서
신석기시대로의 인구 이행은 영양상태개선 - 생존력 증가 - 안정성 부여 인구증가 가속화의 수순을 밟았다. 이 과정에서 인구를 인구는 인간들은 수렵채집인에서 농부로 직업활동의 형태를
전환해갔다.
근동지역에서 유럽으로 농업이 얼마나 오랜 기간 걸쳐 느리게 확산되었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쟁기나 청동제 및 철제 기술 등이 농업보다 먼저 확산됐기
때문이다. 5천 년 전 이동시 불규칙한 지리적 장벽에도 불구하고 보리나 밀의
흔적은 다음과 같다. 근동에서 영국까지 느슨하게 확산된 일련의 동심원의 현태를
보인다. 이 속도가 사람들이 새로운 기술이나 생각에 적응하는 과정에 반영하기엔
너무 느리다고 보았는데, 이는 이민전파의 예로 볼 수 있다. 왜냐면, 유럽에
발견되는 주요 인간 유전모형은 근동지역으로부터 나온 유전자 빈도와 맞다. 인구
성장과 이민의 인구통계학적 모형은 관찰된 속도와 양립할 수 있는 농업의 확산에
관한 정도를 설명해준다.
인류 역사에선 유럽발 거대한 이민이 있었다. 공간의 가용성이 산업혁명 이전
유럽의
인구증가를
창출해내는데
중요해졌다.
18세기
말에
800만
명
이상이
유럽을
떠나
남북아메리카로
나뉘어정착하였다. 유럽 인구 체제에서 이민은 상당한 영향을 미쳤고 총 경제 성장의 관점에서는 유익했다. 이는
인구압력을 낮추는 기능을 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이 이민의 원인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는 유럽 경제 체제가 흡수할 수 없는 과잉인구, 아메리카의
가용토지와 자본, 교통수단의 발달로 꼽힌다. 그러나 배후의 존재 이유는 농촌인구의 증가, 유럽과 외부지역에서의
토지가용성, 농업생산성 등의 현상에 있다. 인구확대는 식량수요를 증가했으나 생산성은 낮았다. 유럽이주민들이 정착한
새 지역의 낮은 생산비용과 하락하는 해상운송비용은 농작물의 가격하락을 유발했다. 농촌에 투입된 자번과 기계화의
진전이 결합하며 노동생산성을 향상했다. 소유가 낮은 소농과 증가된 노동생산성은 잉여노동을 증가시켜 이들이 이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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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이는 점진적으로 일어난 것이기에 이러한 설명이
나올 수 있었고 이는 꾸준히 증가했다. 농촌인구의 변동현상도 영향을
주고받았는데, 농촌지역에서는 산아제한이 도시지역에 비해 사당한 시간적
격차를 두고 확산되어 인구변천기간에 자연증가율을 높게 유지한다. 당대의
비농업활동의 증가현상은 농업을 위한 도구 기계 비료 등을 위해 생산된
공업체제말고도 도시 서비스 활동의 성장이 농촌노동력에 새로운 일자리를
제공함. 실제 이 과정이 일찍 진행된 지역에서는 이민율이 낮게 나타나거나
잠깐 동안 이민이 발생했다. 제조업 인구 농업 종사인구 상황변화 지수
보여주는 그래프를 보시면 해당시기에 급격히 제조업 종사인구가 증가함을 볼 수 있다.
필연적으로 전쟁 후엔 인류는 엄청난 재생산을 한다. 주로 전쟁 후에 소위 베이비붐이 일어나는데, 세계 대전 이후 전
세계적인 인구의 폭발은 식량의 수급을 자연스럽게 필요로 하게 되었다. 이 당시
미국은 경제적 대호황을 이뤄 수많은 잉여생산물이 남았다. 이러한 미국의
잉여농산물은 미국 농업이 경험한 농업 공황의 소산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만성적인 농업의 불황상태를 3번에 걸쳐 겪어왔다. 19세기 말 농업공황, 1차
대전 후에서 2차대전 말 까지의 농업공황, 2차대전후 지금까지의 만성적 장기적
불황이다. 한국은 1948년 전 후 농업 공황이 개시되고 이는 진행되어 왔다. 이와
같은 공황의 진행과정에 있어서 인위적인 정치적인 원조를 받았는데, 미국의
잉여농산물이 그것이다. 농업공황을 해결하기 위해 미국의 농업정책은 가격지지,
생산제한, 대외원조에 의한 농산물의 수출 촉진책을 청구하여 농업공황대책의
주요한 내용을 이뤘다.13) 이처럼 미국의 잉여생산물을 이용한 무상원조는 한국의
공산화를 막고 남고 필요 없는 생산물을 이용하여 정치적 이득을 얻는데
이용되었다.
즉,
인류의
역사에서
식량은
인구의
증가에
따라
끊임없이
소비되어왔고 이를 이용한 정치적인 영향이 지속적으로 있어왔다. 이러한 식량은
인구와 더불어 인류 역사의 변동에 함께 해왔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맬서스의 예측대로 인구와 식량의 양상이 펼쳐지지 않았다. 인구는 억제되지 않을 때 기하학적 비율로 증가하며
생존수단은 오로지 산술적 비율로 증가한다고 그가 말했다. 그러나 UN이 내놓은 세계인구증가 예상치는 2050년에
94억에 달할 것으로 예측했고 다른 기관에서는 2040년 까지 100억 명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이 과정에서 2050년
까지 선진국의 총 인구 수는 감소하고 개발도상국 가운데 인도, 중국, 파키스탄 등이 증가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개발도상국의 인구 폭발은 지난 역사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큰 폭으로 증대하여 식량 공급의 증가 필요성과 맞물려
여러 문제점을 시사할 것이다.
이는 40-50년 이내에 100억 인구가 소비할 생산능력을 개발해야하는데, 인구가 집중적으로 늘 아시아와 아프리카가
그 대상이다. 이를 위해선 100억 인구를 위한 충분한 식량을 생산할 능력을 개발하는 것과, 식량이 과잉생산 되는
시점에서 기아 문제가 여전히 일어나는 현실을 개선하는 것이다. 앞으로 작물에 의한 전세계 식량공급증가에 필요한
요소들이 있는데, 이 요소들을 실현함이 중요하다. 재배할 토지 면적의 확대, 작물당·면적당 수량의 증가, 연간 면적당
작물 수의 증가, 저수확 작물을 다수확 작물로 대체, 수확 후 손실의 경감, 동물사료 이용의 감축이 될 것이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앞으로의 폭발적인 인구 증가와 맞물린 식량상황은 두 가지로 나눠 생각해볼 수 있다. 선진국과
개도국(특히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의 사이한 상황이다. 선진국의 경우 대부분 인구의 노령화 추세를 보여 저출산,
고령화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는 사회적으로 출생을 억제하는 측면을 보이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기존의 농촌 중심의
사회에서는 사람이 곧 농촌 인력이 되기에 더 많은 자녀는 더 나은 경제적 자원을 가진 것으로 해석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선진국에서는 농업의 비중이 줄어들고 일반적으로 행해지는 농업은 기계화되거나 상품성이 높은 작물을 재배하는
13) 미 잉여 농산물 원조의 경제적 귀결, 박현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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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태로 흘러가기에 이러한 상황을 보이기 어렵다. 즉, 맬서스가 말한 대로 인구가 자유롭게 올라가지 못하고 사회적으로
구성된 수명연장과 양육부담으로 인한 저출산이 인구 성장의 정체를 일으킨다.
선진국이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이된 것은 꾸준한 개발과 생산 등을 통해 경제적 부를 이룬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는 앞으로 수십 년간 개발도상국에서도 지속적인 개발에 대한 의지를 기반으로 개발을 하고, 경제적 풍요를 위해
노력하면서 선진국과 비슷하진 않겠지만 유사한 성질의 사회구조를 갖게 될 것이다. 따라서 궁극적으로 인구는 정점을
찍은 후 감소하는 양상을 보일 것이다. 하지만 정점을 찍기 전에도 지속적으로 인구는 증가하면서 식량은 이의 소비를
충족할 필요가 요구된다. 현재에도 식량이 과도하게 생산된다는 이야기가 많이 나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아문제로
생명권에 위협을 받는 국가들이 존재하고 있다. 따라서 연구개발의 내용을 일방적으로 개발도상국에서 재배를 하여
소비하는 형태를 보이기보단 함께 성장하고 지속가능한 성장을 목표로 한다면 개발도상국에서는 전 세계적인 식량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더 나은 삶의 질을 추구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방적인 원조를 기대하기에는 세계 국가 간의 권력관계를
무시하기 어렵다. 모든 것은 정치적이고 이윤에 기대하여 일어나는 것이기에, 앞으로 인구와 식량의 영향이 가장 클
개발도상국에 대해 상호 이윤을 가져다주는 경제 체제가 구축될 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요즘 한국 미디어, 문화 등에서 가장 인기 있는 키워드를 말하면 맛집, 쿡방, 먹방, 셰프 등 음식에 관련된 것들이다.
이를 생각하면 앞으로의 사회트렌드와 현재의 흐름을 읽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키워드는‘사람’자체가 될 것이며 그리고
근본적으로 그 인간이 필요로하고 관심을 갖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우리가 앞으로 살아가는 방향과 연결될
수 있는데, 인구가 줄어드는 선진국과 인구가 지속적으로 늘어날 개발도상국의 양상을 생각하면 앞으로의 사회변동을
통찰하는 것에는 두 가지의 시각이 존재할 수 있다. 첫째는 고령화되고 인구가 줄어드는 선진국에서의 식량상황에서
개발될 방향이다. 그리고 둘째는 인구가 늘어나면서 식량의 소비가 계속 증가할 개도국에서의 식량개발을 위해 내가 어떤
방식으로 이에 참여할 수 있는 가이다.
각각의 국가들이 직면한 인구변화의 양상이 다름에 주목함이 중요하다. 앞서 본 글의 초반에서 말했듯, 사회를
변동해나가는 주체는 인간이며 이에 영향을 받을 객체 또한 인간이다. 인간의 증감과 이들의 분포가 어떤 식으로
변화하는지를 예측함을 통해 어느 곳이 블루오션인지 우리는 직접 생각해볼 수 있다. 우리가 앞으로의 사회를 예측하고
변동의 흐름을 읽는 방식에서 국가적으로 변화하는 인구증감의 추이가 상이함을 기본으로 깔아야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예측을 기반으로 식량생산을 연구하는 것에서도 이 연구 결과를 개발하고 현실화할 기술과 방식이 중요해질 것이다.
스마트폰이 대중화되고 사물인터넷14)의 시대까지 예측하는 시대에서 우리는 변동을 일으킨 요인 자체를 이해하고
발견하는 것을 넘어서 이를 활용할 실용적인 발상이 중요하다. 우리가 그동안 음식을 해먹고 사먹으면서 즐겨온 역사는
길다. 하지만 이것이 사회적 트렌드로서 역할을 하는 것은 아프리카TV, Facebook, Youtube 등 1인 미디어를 만들 수
있는 플랫폼이다. 이 플랫폼을 보다 본질적으로 이해하고 직접 플랫폼을 만들 수 있는 코딩 등을 연구함을 통해 인구와
식량의 연구를 보다 실용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인간과 식량 - 개정판 | 고려대학교출판부 | 2013 | 성락춘, 이철
*새 인구론 : 인구의 공간적·사회적 접근 | 푸른길 | 2006 | 조혜종
*인과지도로 본 한국의 성장의 한계: 인구, 경제, 자원, 환경, 식량 위기요인을 중심으로 | 「한국 시스템다이내믹스
연구」 제10권 제3호 | 2009 | 문태훈, 김병석
*식량안보와 한국: 과제와 전망 | 제주평화연구원 | 2012 | 유호근
*세계 속 화제-유엔,기근·가뭄 심한 아프리카에 식량 지원 https://youtu.be/QDzAq2MZax0
*[C채널뉴스] '2013 세계의 식량 불안정 상황', "북한 주민 1/3이 영양부족"
https://youtu.be/ktDJKen9ZXc
14) 사람과 물건만이 아니라 각종 사물이 서로 통신하고 정보를 공유하게 하여 인간-사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개념을 지칭한다. 모든
것이 연결되는 세상; 사물인터넷 | 매일경제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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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SBS.식량의 날 특집] 식량전쟁1부.식량이 사라진다
https://youtu.be/_zKNWXOzwFk
*Food Production and Population Growth - Part 1, 2
| https://youtu.be/AAqWUxCjisE
| https://youtu.be/kAnds1tPx2A
*Population growth and food supply-- bottom up or top down? | Tom Wilson | TEDxTucsonSalon
https://youtu.be/f9uJ_cBXEKQ
10. 종합결론
사회를 이루고 이를 변화시키는 요소들은 모두 연결되어있다. 인간사회를 변동해오고 이에 영향을 받아온 인류는
식량이라는 생명존속을 위한 요소를 끊임없이 개발해왔다.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해 현재는 60억이라는 인구가 지구
안에서 살고 있으며 앞으로는 100억이 살 것으로 예측되고 있다. 이러한 인구가 소비할 식량은 끊임없는 개량과 개간,
연구 등을 통해 생산성을 높여 이들이 먹을 것을 제공해왔다. 하지만 식량생산은 엄청나게 증가하여 과잉생산과
과잉섭취라는 문제가 대두되는 반면, 여전히 굶주리는 사람들도 많이 존재한다. 이를 통해 전세계적이고 지배적인
인구증가와 식량생산 효율의 증대가 있었지만 각 국가마다, 지역마다 이 현상의 양상은 다르게 나타난다. 그리고 이
지역마다의 변동의 패러다임의 예측 또한 다르다. 따라서 우리는 사회변동을 이해할 때 거시적으로 흘러가는 사회의
흐름을 읽는 것도 필요하지만 미시적으로 사회가 어떻게 거시적 흐름 속에서 변화해 가는지를 알아야한다. 전세계 식량
생산 위성으로 관리하면서 재분배를 위한 정책을 자본의 논리로 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인구와 식량의 측면으로 보았을 때 한국은 인구가 노령화되고 경제적 여유를 갖고 있기에 선진국의 인구와
식량의 양상을 보인다. 인구의 증가에 맞춘 식량생산방식의 변화는 우리 인간이 사회를 살아가고 변동시켜온 양상과
비슷하다고 생각한다. 끊임없는 개량과 새로운 개간, 관개시설의 확충 등은 인간이 새로운 사회에 적응하기위한 노력을
보여주는 모습이다. 지금까지 식량이 계량화되어왔듯이 이러한 계량은 앞으로도 일어날 것이다. 인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계량은 단순한 작물계량을 떠나서 사회적 계량으로 기능할 것이다. 앞으로 한국에서
농업의 비중이 줄어들고 이 수요를 줄어듦에 따라 타국과의 교역 양상도 변화할 것이고 한국 내의 농업 작물의 종류도
달라질 것이다. 개발도상국이 주로 농업의 생산기능의 역할을 함에 따라 선진국들의 농업 자립생산력은 줄어들 것이다.
따라서 식량이 외부 국가에 의해 권력이 될 것이다. 이는 선진국과 개발도상국이 상호 개발에 협력하는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이메일 주소
문지선 | 사회학과 | 2012학번 | 학교 다닐 시간이 1년 남았습니다. 지금은 학교의 노예로 살고 있습니다. 졸업 후엔
노예가 되지 않고 주체가 되는 삶을 살 수 있게 기도해주세요. | moakmoon1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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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색 쇼크
1. 책 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 책 제목 : 회색 쇼크
- 출판사 : 반비
- 출판년도 : 2011년
- 저자 : Ted C. Fishman - 역자 : 안세민
이 책은 개인과 가정, 기업과 사회 곳곳에 고령화가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것인지를 보여준다. 일본, 미국, 스페인
등 전 세계 고령화의 현장에서 여러 사람들의 인터뷰와 저자가 본 지역 사회를 통해 고령화가 어떻게 인간 삶에 직접
적으로 개입되고 있는지 조명하면서, 고령화가 일으키는 변화와 갈등에 주목한다. 이를 통해 고령화와 관련된 다양한
갈등의 맥락을 살핌으로서 고령화란 단순히 개인 보험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개인적, 가족적 차원에서부
터 시민사회와 지역사회, 시장, 국가에 이르기까지 전사회적인 조정을 통해서 접근해야하는 문제임을 깨닫게 한다.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사회 변동론 수업을 들으며 어떠한 요인이 사회 변동에 큰 영향을 미쳤는지 많은 고민을 해 보았다. 처음엔 내가
지금 하고 싶은 것, 즐기고 싶은 것, 발표를 준비하면서 재밌을 것 같은 주제들 위주로 생각을 했는데, 그 때 생각했
던 요인들이 음식, 외모, 스포츠, 그리고 사랑과 같은 것들이었다. 이러한 주제들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뿐
만 아니라 경험해보고 싶어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요인들이 사회변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
쳤는지에 대해서 고민하며 막연함을 느끼고 있을 때, 반대로 ‘모든 사람들이 겪기 싫어하는 것은 무엇일까?‘라는 의문
을 가지게 되었다. 그 해답으로 생각해낸 것이 바로 죽는 것, 늙는 것, 사람들에게서 소외되는 것이었다. 앞서 말한
요인들은 모든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는 요소가 아닐 수도 있고, 관심이 있다고 하더라도 경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
랑을 해보고 싶다고 마음먹어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우리는 원하든 원하지 않던
간에 늙는다. 나이를 점점 먹어감에 따라 나타나는 신체적인 기능의 저하가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공통적으로 나타나
고, 이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여겨진다. 이러한 자연스러움 속에서 ’늙음‘은 개인적인 차원에서의 생활의 변화를 가
져오고, 뿐만 아니라 사회적 차원에서도 변화를 가져왔다. 그 중 이슈가 되는 대표적인 사회적 차원의 변화로 ’고령화
‘를 생각하게 되었고 ’고령화, 쇼크인가 축복인가‘라는 부제를 가진 ’회색 쇼크‘라는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 책은 고
령화로 인해 변화하는 여러 나라의 사회를 저자가 직접 현장에서 겪어보고, 겪은 그대로의 현상을 기록해 놓았다는 점
에서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책 표지에 적힌 연애 관계, 가족 관계, 직장과 일, 주거환경, 국가와 세계의 역할
등의 변화를 갖가지 이론들과 지식을 통하여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변화의 양상을 보여주고 독자에게 판단을 맡긴
다는 점에서 중립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측면이 고령화에 대해 다룬 수많은 책 중에서 특히 이 책을 선
택한 이유이다.
3. 저자소개
- 저자 : 테드 C. 피시먼
저자 테드 C. 피시먼(Ted. C. Fishman)은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1992년까지 트레이딩 업체를 직접 경영했
다. 기자이자 자유기고가로서, 《뉴욕 타임스》, 《머니》, 《하퍼스》, 《워스》, 《에스콰이어》, 《USA 투데이》, 《시카고》, 《비
즈니스 2.0》 등에 특집 기사와 칼럼을 써왔다. 지은 책으로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China★Inc. 차이나 주식회사」가
있으며, 현재 시카고에서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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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자 : 안세민
역자 안세민은 고려대학교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받았으며, 미국 캔자스 주립대학에서 경제
학 박사 과정을 수학했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에너지관리공단, 현대자동차 등을 거쳐 현재 번역가로 활동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자본주의 사용설명서」, 「중국이 세계를 지배하면」, 「왜 트렌드의 절반은 빗나가는가?」, 「혼돈을 넘어
위대한 기업으로」,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등이 있다.
4. 책 내용 요약
세계는 점점 회색이 되어 간다. 그냥 나이를 먹는 것이 아니라 ‘늙는다’는 것이다. 늙는다는 것은 부정적으로 바라
보면 가족이라는 울타리가 텅 비고, 은퇴, 죽음, 몸과 마음의 쇠락, 사회적 지위의 하락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개인의
경험이 더 커지고, 여태껏 짊어지고 있던 책임들에게서 해방되어 개인시간이 확장된다는 긍정적인 측면도 존재한다.
여기서 ‘고령화’란 개인의 평균수명이 연장되는 개인 고령화(Individual aging)와 개인 고령화를 사회적 차원에서 총
체적으로 생각하는 인구 고령화(Population aging)를 모두 포함한다. 고령화 사회는 개인이 고령화하고 이에 따라
한 사회의 인구가 고령화하는 사회를 말한다. 이러한 고령화는 개인적인 측면에서 소원의 성취나 축복이 될 수 있고,
사회적 차원에서 인류사회 발전의 위대한 성취라고 할 수 있지만, 개인적·사회적 측면에서 모두 부정적인 내용 역시
가지고 있다.
이러한 고령화는 ‘장수’ 기술의 발달이 가져온 변화이다. 저자는 장수 기술이 발전할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요인으
로 문해율의 상승이라고 설명하는데, 문자를 사용하는 사회는 공중보건을 증진시키는 보편적인 습관을 배울 수 있게
하고, 그것은 개인위생과 직접적으로 연관되기 때문이다. 또한 저자는 장수의 가장 중요한 요건으로 20세기에 태어날
것과 부유한 선진국에서 태어날 것을 주장한다. 런던대학교 유아보건연구소의 앨런 존스는 유전자가 후성유전적 변화
를 거치면서 신체를 만드는 시기인 출생 전과 유아기의 단계를 ‘기회의 창(window of opportunity)’이라고 말한다.
그는 이 시기에 이루어지는 유전자와 환경 간의 미묘한 상호작용이 개인의 일생을 좌우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의학
의 개입을 통하여 태아의 수명과 건강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우리가 어머니 뱃속에서
부터 죽기 시작한다는 과거의 관점은 반대로 자궁에서부터 장수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의학 기술은 발달된 도시에서 이용할 수 있고, 경제적인 지불 능력을 갖춘 사람들만이 이용할 수 있다는 점에
서, 우리는 우리가 태어나고 자라는 장소, 시기, 방법에 따라 건강과 장수의 혜택을 여전히 불평등하게 제공받는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고령화는 단기간에 이루어졌다. 문명이 발달하여 공중위생이 개선되기 전, 그리고 현대 의학이 전염병을 정
복하기 전에는 건강한 사람이 갑자기 죽는 경우가 허다했다. 수명이 짧다는 것은 그만큼 죽음의 과정도 짧다는 것을
의미했고, 과거 죽음의 가장 흔한 원인은 전염병, 전쟁, 그리고 출산이었다. 이처럼 어린 나이나 젊을 때 죽는 사람들
이 많았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노인은 드물었다. 17세기에 25세 영국 사람이 80세까지 살 가능성은 6%이고, 85세
노인을 볼 가능성은 유니콘을 볼 가능성과 같았다고 한다. 하지만 불과 3~4세기만에, 우리는 주위에서 유니콘을 어렵
지 않게 볼 수 있다. 과거 생명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었던 홍역, 볼거리, 폐렴, 천식 등은 현대 사회에서는 통과의례
수준에 불과하다. 이처럼 도시화를 통한 공중보건 인프라의 확충은 인간의 평균수명 증가를 초래하였고, 이러한 기술
을 통해 이루어진 유아 사망률의 하락 역시 평균수명 증가의 대부분을 설명한다. 하지만 이러한 수명의 증가는 더욱
오랜 삶을 살게 된 우리들에게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죽음의 공포를 관리하며, 죽음을
떠올리지 않으면서 살아가려 한다. 때문에 노인들을 자신과 다른 존재로 보게 만들고, 이러한 시각은 곧 연령차별주의
로 이어져 노인에 대한 사회적, 개인적 냉대가 사회에 만연하게 한다. 이와 같은 맥락에서 노인인구는 점점 더 늘어나
고 있으며, 이러한 변화가 앞으로 몇 십 년 동안 개인적으로 혹은 사회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미칠지 예상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저자는 이렇게 고령화가 진행되는, 또는 이미 진행된 현대 사회에서 고령화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는 몇몇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 미국 플로리다, 스페인, 일본, 중국에서 다르게 나타나는 고령화의 양상은 우리로 하여금 고령화에
어떻게 대비해야 할 것인지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인구구조의 변화가 생활의 거의 모든 면에 영
39
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먼저, 저자는 플로리다주의 새러소타를 활동적 노화(Active aging)의 현장이라고 부른다. 따
뜻한 날씨와 멕시코 만의 해안선에 존재하는 240여종의 새들과 같은 탁월한 자연환경은 사람들을 이곳으로 유인하는
요인이다. 은퇴 후 노년을 자연경관과 더불어 여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장소임에 틀림없지만, 주요 도시와 많이 떨어
져있기 때문에 곤경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돈이 있는 사람들만 거주할 수 있었다. 때문에 경제적으로 여유가 있고,
자신을 재창조하려는 의지가 강한 사람들이 이 도시에 머물게 되었다. 때문에 새러소타는 ‘활력 넘치는 노인사회’가
될 수 있었고 노인들 사이에 자원봉사가 유행하는 것과 같은 일종의 집단적 소비 현상이 나타난다. 여기서 집단적 소
비는 노인집단보다 더 큰 집단이 시간과 돈을 가지고 하는 선택과 행동의 방식을 노인들이 재정립
한다는 뜻이다.
새러소타에서 나타나는 다른 특이점은 세계에서 가장 늙은 사회이지만 노인병 전문의가 별로 없다는 것이다. 노인병에
대한 연방정부의 메디케어 보장액이 얼마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노인들 스스로 자신을 더욱 매력있는 노인으로 만
들기 위해 치과나 성형외과에 더 많이 가기 때문이다. 또한 새러소타는 미국지역 대도시 중 가장 적은 임금을 받는
도시 중 하나이다. 고용주인 노인들 입장에서 고용자들에게 적은 임금을 지불할수록 경제적으로 더 오래 버틸 수 있
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동자들은 가난하게 되고 건강관리 서비스가 충분하지 못하다고 느끼는 부자들과, 건강관리 서
비스를 전혀 받을 수 없는 가난한 사람들 간에 긴장이 형성된다. 모순적으로 어린이들을 위한 자선사업은 활발히 이
루어지는데, 어린이에 대한 관심과 지출에 대해 노인들은 미래에 대한 투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지불능
력이 있고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노인들이 이끄는 사회는 그들의 선호와 취향에 맞게 개편되었다.
둘째로 작가는 스페인의 고령화 사회를 이야기한다. 스페인은 지중해식 식단과 사교적 식사의 위력을 바탕으로 고
령화의 앞장서는 국가 중 하나이다. 스페인에서 주의 깊게 봐야할 점은 수많은 이민자들과 노인인구, 그리고 젊은 노
동계층 사이에 간극이 형성되어 있다는 점이다. 역사적으로 스페인은 많은 사람들을 외국으로 이주시킨 나라였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스페인 사람들은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 농업, 제조업 부문이나 가정에서 저임금 노동자로 일했다.
1950~70년대 스페인에는 젊은 인력이 넘쳐났기 때문에 외국 고용주들이 스페인의 가난한 농촌을 찾아와 사람들을
데려가기도 했으며, 스페인 정부 역시 그들이 본국으로 돈을 송금해줄 것이라는 생각에 젊은 인력의 해외 수출에 적
극적이었다. 한편, 스페인 경제는 스페인으로 들어오는 관광객과 은퇴자들에 의해 크게 좌우되었다. 때문에 1960년대
부터 스페인은 외국의 연금생활자들을 적극적으로 유치하였고, 따사로운 햇살을 관광객과 은퇴자를 유혹하는 수단으로
활용하면서 경제개발에 필요한 외화를 획득하였다. 이러한 서비스산업은 호황이었고 때문에 과거 스페인 사람들이 외
국으로 이주한 것과 같은 이유로 1990년대 초부터 스페인으로 많은 이민자들이 몰려오게 되었다. 이민자들은 스페인
에서 생산성과 임금이 낮은 부문과 농촌 등에서 일했고, 따라서 임금이 높은 양질의 일자리는 상대적으로 나이 많은
스페인 국민들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2008~2010년 스페인 사회의 실업률이 20%로 높아지면서, 도시로 떠났던
스페인 젊은이들이 다시 농촌으로 귀화하기 시작했다. 결과적으로 본국 가족을 부양해야 할 이민자들은 다시 실업상태
에 놓이게 되었고, 가족 규모의 축소로 인한 고령화 현상은 젊은이들에게 노인인구 부양의 부담을 짊어지게 했다. 이
처럼 스페인 사회에서는 고령화 국가의 이민 정책의 양면성을 보여준다. 좋은 시절에는 새로운 이민자들을 찾지만, 상
황이 나빠지면 그들의 일자리를 다시 뺏듯이 이민자들로부터 필요한 것만 골라서 취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고령화가
도시화로 인한 가족규모의 축소로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할 때, 도시화가 진행된 나라일수록 경제적인 능력이 있다
고 볼 수 있기 때문에, 고령화 사회로 후진국에서의 저임금 노동자들의 이민이 이루어지는 것이 불가피한 상황이다.
셋째로 65세 이상 인구가 21.5%, 70세 이상 인구가 10%인 일본은 세계에서 가장 고령인구가 많은 나라 중 하나
이다. 2050년이 되면 전체 인구 85,000,000명 중 40%가 65세 이상 노인들이 될 것이라고 전망되는 일본은 고령
화의 추세를 가장 선두에서 이끄는 나라로, 인구가 감소하면서 나타나는 결과를 전 세계에 보여주기 때문에 세계적으
로 관심을 끌고 있다. 일본에서의 노인인구의 증가 역시 일본 사회의 변화로 이어지는데, 대표적으로 노인들의 거리인
스가모지조를 들 수 있다. 나이들고 병약한 사람들이 병을 치료할 수 있다는 희망을 찾아 몰려든 이 곳 스가모에는
1.6km도 채 안 되는 거리에 노인 고객만을 위한 상점이 200개 이상 있다. 또한 세대를 거듭하며 노인을 모시는 일
본의 관습은 노인들을 돌보는 일을 하는 ‘돌보미’ 집단을 형성하여 가정으로 파견하는 거대한 회사가 설립되도록 했
다. 하지만 주목해야 할 점은 일본 노인들의 빈곤율이 OECD국가 중 가장 높은 편에 속한다는 것이다. 가장 취약한
계층은 자영업자와 연금제도가 취약한 기업에서 일했던 사람들이다.
마지막으로 중국의 고령화는 다른 국가와 비교할 때 그 접근 방식이 조금 다르다. 다른 나라들은 도시화로 인해 많
은 사람들이 도시로 이동하면서 가족 규모가 축소되고, 부양해야 하는 아이들의 비중이 줄어 노동 생산성과 취업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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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상으로 경제적으로 부유한 사회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고령화 현상이 나타났다. 하지만 중국의 경우 정부
가 직접적으로 나서서 인구변화를 촉진하는 전략을 사용한다. 국가의 모든 목표는 경제개발이며, 이미 중국의 경제기
적을 이끌었던 도시들은 젊은이들을 새로 고용하여 70,000,000명에 달하는 기존의 중년 노동자들이 주변부로 밀려났
다. 다시 말해 점점 더 늘어나는 노인의 수에 따라 그들을 부양하는 비용이 경제성장을 더디게 만들기 전에, 더 큰
번영을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노인의 입지는 더욱 좁아지고, 위태롭다. 중국은 특히 출산율과 사망률
이 높은 사회에서 낮은 사회로의 변화가 다른 국가에 비해 더 빠르게 진행되었고, 또한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이처럼
고령화하는 인구의 안정된 삶을 대가로 하는 이런 성장을 어디까지 밀어붙일지 결정해야한다.
고령화는 이미 다가왔고 피할 수 있는 것이 아닌 자연스러운 것이다. 고령화로 인한 인구구조의 변화가 생활의 거
의 모든 면에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변화는 다른 여러 복합적인 요소(문화, 경제, 국가, 종교 등)에 따라 다르게 나
타난다. 때문에 앞으로 사회가 어떤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이 책
의 결론이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바로 ‘인구 구조’의 변화이다. 인구 구조는 전체인구의 성별, 연령별,
지역별 등의 분포 상황을 살펴 본 것으로, ‘인구 규모’가 인구의 양적인 측면을 말하는데 반하여 인구 구조는 인구의
질적인 측면을 나타낸다. 이러한 인구 구조는 사회 속에서 구성원들의 행동양식을 설명해줄 수 있고, 뿐만 아니라 그
사회가 어떻게 나아가야 하는지를 예측하게 해준다는 면에서 중요하다. 이 책에서는 특히 현재 세계적으로 겪고 있는
‘고령화’라는 인구 구조의 변화를 중심으로 앞으로 변화하게 될 사회를 조망한다. 기술이 발전하고 생활이 편리해짐에
따라 개인의 수명이 늘어나게 되었는데, 이는 단지 개인적 차원에서의 생활 패턴의 변화뿐만 아니라 사회적인 측면에
서의 변화를 초래하였다. 책에서 보여주는 새러소타, 스페인, 일본, 중국의 사례와 더불어 우리나라 역시 고령화로 인
해 일상생활에서부터 법·제도적 측면에까지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개인적인 생활 패턴의 변화가 한 개인만의 변화
가 아닌 공동의 혹은 다수의 변화로 이어지면서 사회가 변화하게 되는 것이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오랜 기간 생존한다는 것은 반대로 개인이 일찍 사망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개인이 오래 산다는 것 자체는
생물학적인 현상이지만 사망의 사회적 수준은 여러 가지 사회적 조건에 의해 결정된다. 특히 사망은 주어진 사회의
경제수준, 영양상태 등과 밀접한 관련을 보이고, 또한 사회경제적 집단 사이에서도 의미 있는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권태환·김두섭, 2002). 다시 말해 선진사회와 후진사회를 비교 하였을 때, 선진사회의 구성원이 더 오래
생존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사망수준의 변화는 인구구조를 변화시키고 그 결과 새로운 사회현상을 야기한다.
앞서 말한 고령화 역시 사회의 사망률과 출생률이 저하됨으로써 나타나는 인구현상이다. 대부분의 고령화를 겪고
있는 사회의 대부분은 출생률 저하에 앞서 사망률의 저하를 보였다. 이러한 사망률 저하의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7세기 중반 이후로 추정되고, 19세기 중엽부터 서구에서 사망률의 현저한 저하가 시작되었다. 서구 사회에서
19세기 중엽부터 20세기 중엽에 이르기까지 1세기에 걸친 사망률의 저하는 사람들의 평균 수명을 약 40세에서 70
세로 30년 연장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책 내용에서 다루었듯 산업혁명 이후의 의학·과학 기술의 발달과 생
산 확대 및 이에 의한 전체인구의 생활수준 향상과 더불어 천연두 예방 실시 등 공중보건 시스템 도입의 시작으로 설
명 가능하다. 그러나 사람들의 수명 연장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사건은 1945년 이후 ‘항생물질의 대량공급’이었다. 서
구사회에서는 1945~1955년의 10년 사이에 이미 낮은 수준의 사망률이 다시 떨어져, 약 10년의 평균수명 연장을
경험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시각에서 전 세계적으로 인간의 수명 연장과 생활환경, 나아가 사회체제의 혁신에 가장 공
헌한 단일 항목으로 항생물질의 발견과 대량공급을 손꼽을 수 있다. 한편 동부 및 남부 유럽의 사회들은 서구사회에
비해 늦게 사망률의 저하를 경험하였다. 19세기 말을 전후하여 사망률의 저하가 일어났으며, 이들 사회의 사망률 저
하 속도는 서구 사회의 속도에 비해 훨씬 빨랐다. 기타 대부분의 라틴 아메리카, 아프리카와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서
는 제 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전까지 별로 주목할 만한 사망률의 변천을 경험하지 못하였고, 1950년이 지나서야 높
은 사망률로부터 벗어나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항생물질의 대량생산과 보급이 이루어진 시기와 같은 시기이다. 한국의
경우 19세기 말부터 새로운 보건 및 의약제도가 도입되었고, 1930년경부터 사망률의 지속적인 저하가 이루어졌다.
현재 세계 각국의 사망수준은 그 나라의 경제적 수준과 거의 일치한다. 그러나 모든 사회에서 경제발전이나 산업화가
41
반드시 사망률의 저하에 선행하는 것은 아니다. 오늘날 개발도상국이나 후진사회에서는 경제발전이 시작되기 전에 사
망률의 저하기 나타나는 것이 보편적인 현상이다. 이는 경제 발전과는 관계없이, 서구의 발전된 의약 및 보건제도가
이들 사회에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현대사회에서 우리가 통계자료를 보고 우리의 수명을 약 80세 정도로 예측하듯, 과거의 사람들은
동시대 사람들의
수명을 통하여 자신의 수명을 어느 정도 예측했을 것이라고 추측할 수 있다. 자료에 따르면 고대 로마국의 평균 수명
은 25세, 18세기 후반 프랑스 혁명 시대의 평균 수명은 34세였다고 한다(EBS, 인간에 대한 오해 : 인간의 늙음,
2007).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 의해 만들어진 그 시대의 인구구조는, 개인의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과거 죽음
의 가장 흔한 원인은 전쟁과 전염병, 그리고 출생이었다. 평균 수명이 짧고, 언제 전염병에 걸려 죽게 될지 모르는 상
황에서 개인들은 미래, 노후를 준비하는 것 보다는 현재를 살아가는 데에 더욱 초점을 맞추었을 것이다. 과거 되도록
이른 시기에 일찍 결혼을 하여 많은 수의 아이를 낳았던 사람들은, 그들의 입장에서 죽음이 갑자기 들이닥칠 수 있기
때문에, 그리고 아이를 많이 낳아도 살아남는 아이는 몇 안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반면
수명연장으로 인한 결과로 나타나는 인구의 증가는 농업사회에 있어, 그 시점의 기술수준으로서는 흡수할 수 없는 ‘잉
여인구’를 만들어 낸다. 이 잉여인구는 결국 농업 또는 자급자족의 생계활동에서 벗어나 다른 활동에 종사하게 만들었
고, 이들의 활동에 따라 기술과 혁신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들 활동의 근거지로서 도시가 발전하였고 이것은 다시 가
족규모의 축소와 고령화로 이어졌다. 이처럼 인간의 수명은 그들의 행위에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였고, 인구 구조
의 변화로 이어지는 인간 수명의 변화는 인간의 생활양식의 변화를 초래하였다고 할 수 있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표 1> OECD 국가의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 추계
국가
2000
2010
2020
2030
2040
2050
호주
캐나다
체코
덴마크
핀란드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일본
한국
스페인
영국
미국
12.4
12.6
16.8
14.8
14.9
16.1
16.4
18.3
17.4
7.2
16.8
15.8
12.4
14.3
14.1
15.4
16.8
17.3
16.7
20.4
20.5
23.1
11.3
17.4
16.5
13.0
18.3
18.2
20.1
20.9
22.8
20.3
22.7
23.3
29.2
15.6
20.0
19.0
16.1
22.2
23.1
22.7
24.1
26.2
23.4
27.8
27.3
31.8
24.3
25.1
21.9
19.3
24.5
25.0
26.5
26.2
27.0
25.6
31.1
32.2
36.5
32.5
31.6
23.7
20.0
25.7
26.3
31.2
25.4
27.6
26.2
31.5
33.6
39.6
38.2
35.7
24.1
20.2
출처 : OECD(2010), OECD factbook.
<표2>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에 따른 사회 구분
총인구 중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
사회의 명칭
4% 미만
청년기사회(young society)
4% 이상 ~ 7% 미만
장년기사회(matured society)
7% 이상 ~ 14% 미만
고령화사회(aging society)
14% 이상 ~ 21% 미만
고령사회(aged society)
21% 이상
초고령사회(super-aged society)
42
<표1>에서, 다가오는 2050년까지 대부분의 나라에서 65세 이상 노인인구의 비율이 늘어나는 것을 알 수 있다. <표2>
에서, 65세 이상 노인인구 비율이 21%이상일 경우 그 사회는 초고령사회로 분류되는데, 머지않아 대부분의 OECD가입
국들이 초고령사회에 진입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다가올 세상은 지금보다 더욱 회색빛이 될 것이다. 물론 세상에는 아
직 고령화사회와는 거리가 먼 곳도 있다. 고령화사회를 측정하는 기준이 노인 인구의 비율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출산
을 많이 하는 나라들은 고령화사회에 해당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인인구는 증가할 것이다. 오늘
날 경제발전과는 상관없이, 서구의 발전된 의약 및 보건제도의 도입이 선진국 뿐만 아니라 개발도상국이나 후진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인구 구조의 변화가 사회가 발전하고 변화하는 과정에서 비슷하게 변화해 왔다는 것 역시
세계적인 노인 인구의 증가를 막을 수 없다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자본주의 체제가 지배적인 현대 사회의 분위기와, 그리
고 나날이 발전하는 의학·과학 기술은 이러한 국가들을 앞선 나라들과 같은 절차로 이끌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림 1> 한국의 연령계층별 인구 구성비
(출처 : 통계청 「장래인구추계」, 2010 )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앞서 언급했듯이 노인들의 숫자는 점점 더 늘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노인인구의 증가로 인해 초점이 노인에게
맞추어진 변화 역시 늘어날 것이다. 왜냐면 노인 인구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나에게 크게 두 가지의 통찰력을
주었다. 첫째는 인간의 평균 수명이 65세를 넘게 된 시기가 30년도 채 안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현대 사회의
고령화 현상이 낯선 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사회도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우리의 수명은 고령화에 대해 충분히 고려할
시간도 없이 빠르게 늘어갔다. 따라서 우리는 늘어난 수명만큼 더 늘어난 인생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다. 늘어난 인생
은 미래에 대해 준비할 수 있는 시간을 조금 더 준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축복일 것이다. 더욱이 사회적으로 고령화로
인한 변화의 모습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 책에서 다룬 몇 가지 사례들처럼 노인들의 필요를 먼저 파악하여 변화하
면 괜찮은 정책 또는 사업이 될 것이다.
둘째는 우리는 돈이 많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새러소타와 일본에서 보여주듯, 편안하고 안정적인 노년 생활은 돈 있
는 사람들만이 누릴 수 있다. 젊었을 때도 마찬가지겠지만, 상대적으로 노인은 젊은 시절에 비해 경제적인 수입을 얻
기 어려운 뿐더러 신체적·정신적으로 쇠약해져 할 수 있는 일이 제약될 것이다. 때문에 노년기의 빈부격차는 가난한
사람들에게 상대적으로 더욱 큰 빈곤을 안겨줄 것이고, 그들에게 수명 연장은 불행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러한 상황에
서 고령화로 인한 사회 변화를 예측하고 그 길목에서서 돈을 번다면 우리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기회일 것이다.
43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 책 제목 : 인구의 이해
- 출판사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 출판년도 : 2002년 3월
- 저자 : 권태환, 김두섭
이 책은 ‘인구’ 와 관련된 주요 개념들을 설명하고, 과거부터 지금까지 인구의 변화가 세계적으로 어떻게 이루어져
왔는지를 알려주는 인구학 입문서이다. 사회변동의 주요 원인을 인구구조의 변화라고 생각하는 만큼, 이 책은 인구구
조가 어떻게 변화하고 그 구성요소에는 어떤 것들이 있는지 쉽게 설명해준다는 점에서 도움이 될 것이다.
또한 함께 볼만 한 자료로 EBS 특집다큐멘터리 <인간의 늙음>을 추천한다. 이 영상에서는 개인의 세포나 단백질 수
준에서 노화의 생리적인 측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의학, 비교동물학, 진화생물학, 인류학 등을 통찰하여
인간의 노화를 탐구한다.
10. 종합 결론
역사적으로 인류가 오래 살게 된 것은 불과 200년도 채 되지 않았다. 사회의 발전 또는 변화는 인간 수명을 증가
하게 하였고, 이는 인구 구조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러한 인구 구조의 변화는 다시금 개인의 생활양식을 변화시키고,
결과적으로 다시 사회가 변화하게 만들었다. 지금, 우리 사회는 회색으로 변화하는 중이다. 그것은 분명해 보인다.
이러한 변화는 각 사회가 어떠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지에 따라 다르게 나타나며, 변화에 대비하는 과정에서도 차이
가 나타난다.
이러한 상황에서 우리는 우리의 사회학적인 상상력을 노인 인구에 사용할 필요가 있다. 인간의 수명은 그들의 인생
계획에 영향을 미치고 그것은 다시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지금은 인간의 수명이 많이 늘어 노인 인구가 증가하
고 있기 때문이다. 늙는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현상이다. 그리고 음식을 섭취해야 하는 것도 피할 수 없는 현상이
다. 옷을 입어야 하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때문에 상점에서는 음식을 팔고 옷을 판매한다. 하지만 단순히 한 종류의
음식과 옷을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에는 수없이 많은 종류의 음식과 옷이 만들어지고, 판매되고 있다. 그 이유
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음식을 먹고 옷을 입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 사회가 가진 특성을 많이
반영하고 있으며, 개인의 취향과 선호 혹은 경제적인 환경 등에 따라 선택된다. 늙음에 대하여도 마찬가지이다. 과거
노인들의 숫자가 상대적으로 적어 노인들을 위한 서비스가 많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이제는 충분한 수요가 확보되어
있기 때문에 음식과 옷처럼 그들의 취향과 환경을 고려한 서비스가 등장해야 할 것이다. 돌보미 서비스와 같이 이미
존재하고 있는 노인들을 위한 서비스가 있지만, 아직은 세상에 등장하지 않은 것들을 생각해 내려고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음식과 옷은 구석기 시대부터 필요했지만, 고령화로 인한 서비스에 대한 필요는 시작된지 얼마 되지 않았
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수명연장이 개인에게 있어서 좋은 것만은 아니다. 앞으로 50년 후를 생각해 볼 때, 지금 내가 해야 하
는 것은 크게 두 가지라고 생각해 볼 수 있다. 젊음에 감사하고 젊을 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누리고, 노후
에 안락하게 지낼 수 있도록 돈을 많이 벌어놓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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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정한새, 사회학과, 2010104379
욕심은 많지만 게으르고, 나이는 많지만 어려보이는 얼굴을 가진 인상 좋은 대학생입니다.
전 언젠가 제 이름을 따서 회사 이름을 원버드라고 짓겠어요. 아, 물론 치킨집은 아닙니다.
nice1bird.j@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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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과 사회변동
1. 책 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책 제목
식량의 세계사
출판사
웅진지식하우스
출판연도
2012년
저자
톰 스탠디지 (Tom Standage)
역자
박중서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모두가 그렇듯이, 나는 맛있는 음식을 좋아한다. 하지만 즐거운 '먹는' 일에서 몇 가지 죄책감을 느끼는 요소들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공장식 축산과 기아였다. 어느 날 접하게 된 『동물을 먹는 것에 대하여』라는 책에서 A4 한 장
크기도 안 되는 우리에서 생명체로서 필요한 최소한의 것들을 존중받지 못한 채 자라나는 닭들과, 60cm 폭의 좁은
스톨(Stall)에서 살아가는 돼지의 삶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TV를 보았을 때 등장한 기아후원
광고는 머리를 쾅 때리는 느낌을 주었다.
누구나 한 번쯤 겪어봤을 이러한 경험을 곱씹어보면서, 식량이 인간 삶과 사회적 환경에 밀접하게 영향을 주고받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공장식 축산 문제는 생명보다 이윤을 우선시하는 사회적 풍조와 관련이 깊다. 기아문제 역시
불평등한 전 지구적 식량 배분 문제와 정치적·사회적 다툼이 복잡하게 얽혀있다. 또 주제를 구체화하기 위해 식량과
관련된 다양한 책과 기사를 접하면서, 식량과 폭력이 꽤 밀접한 연관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사회변동에 따라
식량은 인간다운 삶을 뒤흔들 수 있는 폭력이나 무기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식량이 인간의 삶을 가능케 하는
필수요소이기 때문에, 인간의 존엄성과 다른 어떤 것보다도 큰 연관성을 맺고 있다는 점도 알게 되었다.
따라서 식량이 인간 역사에 어떤 구체적인 영향을 주었는지, 그것이 어떤 모습의 사회변동으로 나타났는지 알고
싶었다. 식량에 대해서 가장 개괄적인 흐름을 제시하면서도 생각할 거리가 풍부한 『식량의 세계사』를 바탕으로
<사회변동론> 수업을 듣는 학우 분들과 사회변동의 아이디어를 공유하고자 이 책을 선택하였다.
3. 저자 소개
톰 스탠디지(Tom Standage)는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공학과 컴퓨터공학을 전공한 이후, 1988년 세계적 명성을 지닌
영국의 경제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입사하여 과학 관련 기사를 쓰기 시작했다. 그리고 현재는 이코노미스트의
부편집장으로 자신의 전문분야인 '혁신, 인터넷, 미디어, 문화, 식품 및 음료, 과학, 기술'에 대한 기사를 작성하고 있다.
또한 세계의 정치, 경제, 사회적 현상을 이론과 경험을 겸비한 전 세계 유명 집필진들이 모여 심도 있게 분석한
『이코노미스트 세계경제대전망』에 흥미로운 기사를 기고한다. 이코노미스트 외에도 와이어드, 가디언과 뉴욕타임스 등
다양한 매체에 기사를 투고한다.
이러한 저널리즘적 글쓰기를 바탕으로 세계사의 극적인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주는 역사 교양서를 집필하고 있으며
대표작으로는 뉴욕타임스가 지정한 베스트셀러 『역사 한 잔 하실까요?』와 포춘지가 선정한 가장 지혜로운 책이자
다큐멘터리로도 제작된 바 있는 『19세기 인터넷 텔레그래프 이야기』가 있다. 최근 한국에서도 『소셜 미디어
2000년』15)이 번역되는 등 작가·기자·지식인을 넘나드는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다.
4. 책 내용 요약
세계사를 돌아보았을 때, 인간은 '식량'을 기반으로 많은 것들을 이루고 변화시켜왔다. 저자는 식량이 역사에 끼친
영향력을 '보이지 않는 포크'로 비유한다. 당시 사람들은 대부분 그 영향력을 알아차리지 못하였지만, 이 포크는 역사의
중요한 순간에서 인류를 쿡 찔러 그 운명을 바꾸어 놓았다. 식량은 사회조직, 제국주의, 산업혁명, 전쟁과 폭력과 경제적
15) TED강연 “Lessons from ancient social media”, https://youtu.be/ixsridS3qV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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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 등 다양한 사회변동을 일으키는 촉매작용을 했다. 그 자세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식량은 모든 문명의 바탕이 되었다. 초기 농민들은 야생식물 가운데 바람직한 형질을 선택하고 번식시키는
과정을 통해 식량을 '발명'하였다. 농업은 보편적인 인간 삶의 모습으로 등장하였고, 인간은 정착생활을 시작하며
현대세계를 향해 나아가게 되었다. 둘째, 식량은 사회조직의 도구로서 훗날 복잡하고 계층화된 사회를 구축하였다. 수렵
채집민에서 최초의 문명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고대사회의 정치·경제·종교 구조는 식량의 생산과 분배체계에 근거한다.
잉여 식량과 물품 흐름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한 ‘거물’은 권력의 기반을 다졌다. 농업생산 잉여분의 공동저장과
관개시설의 정비는 점차 정치적 집중화로 이어졌으며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는 국교로 발전했다. 이처럼 통화제도가
발달하기 오래전 고대사회에서 식량은 곧 ‘부’였고, 식량의 지배는 곧 ‘권력’이었다.
<향신료 무역망> (Gary Paul Nabhan, 『A Spicy Odyssey』)
셋째, 식량은 세계 각지의 문명을 하나로 ‘연결’하는 역할을 했다. 향신료로 대표되는
식량 무역 경로는 국제적 통신망이었다.16) 이는 단순히 식품의 교환뿐만 아니라 다양한
문화·종교·건축·과학 등이 전파되어 서로의 문화를 비옥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초기 지리학자들에 의해 최초의 세계지도가 제작되기도 했다. 향신료에 대한 유럽인들의
열광은 자신만의 독자적인 무역 경로를 찾고자 하는 노력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로
유럽에서 아메리카, 그리고 아시아를 잇는 대항해시대가 개막되었으며 식민지를 건설하고
착취하는 제국주의의 원형이 나타났다. 그 예로 향신료가 풍부하게 생산되었던 몰루카
제도(Molucca Is.)에서는 원주민의 의견은 전혀 고려되지 않은 채, 제국 간의 소유권
논쟁이 빈번하게 나타났다. 결국 강대국으로 부상한 네덜란드는 이곳에 동인도회사를
건립하고 에스파냐와 포르투갈을 쫓아내고 향신료 공급을 독점하였다. 이 과정에서 수많은
주민이 학살되었으며, 그들의 삶의 터전이 훼손되었다. 옆에 제시한 삽화와 같이, 유럽의
부흥은 아메리카와 아프리카의 착취를 바탕으로 이루어졌다.
<윌리엄 블레이크>, 『아프리카와 아메리
카가 지탱하고 있는 유럽』 (1796)
넷째, 식량은 산업혁명을 통한 급격한 경제발전이라는 거대한 변화를 이끌었다. 산업혁명은 증기기관만큼이나 설탕과
감자에도 의존했다. 17~18세기에 발전한 설탕 플랜테이션은 노예제에 대한 의존을 바탕으로 근대적 공장의 원형을
빚어냈다. 플랜테이션은 이들 노예를 근대적 노동력으로 착취하였고, 이러한 공정에서는 기계적인 분업이 나타났다. 이는
산업혁명보다 앞서 개발되어 적용되었다. 식민지에서 대량생산된 설탕은 공장 노동자의 식탁 위로 옮겨졌다. 또한,
감자는 같은 면적에서 자라는 곡물보다 더 많은 열량을 제공해주는 주요 작물이 되었다. 이렇게 설탕과 감자는
산업노동자들의 저렴한 먹을거리가 되었고 이는 영국의 산업화 과정을 지탱한 연료로써 작용하였다.
다섯째, 인류 역상의 대부분 기간에 식량은 전쟁의 연료였다. 미국의 독립전쟁, 남북전쟁과 나폴레옹의 러시아 원정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대규모 군대에 식량을 공급하는 능력은 전쟁의 승패를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였다. 20세기 들어
전쟁이 기계화됨에 따라 식량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냉전에 이념적 무기로 작용하였다. 그 예로, 우크라이나의 대기근은
한 공산주의 정권이 그 국민을 상대로 식량을 무기로 벌인 이념 전쟁이었으며, 폭력이었다.
16) "EBS 다큐프라임 : 아시아의 허브 말레이시아 2부 해양왕국의 부활" http://tvcast.naver.com/v/289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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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발도상국의 밀 수확량의 변화(1961~2012)>
(출처: http://faostat.fao.org/faostat-gateway/go/to/download/Q/QC/E.)
마지막으로, 1960년대부터 개발도상국에서 추진된 대량소출 종자의 개발 및 도입, 수리 관개시설의 대대적인 확충,
화학비료와 농약의 도입을 일컫는 '녹색혁명'은 인구폭발을 낳았을 뿐만 아니라 중국과 인도 등 아시아 경제의 역사적인
소생을 불러왔다.17) 하지만 오늘날 이는 여러 가지 환경적·사회적 논란을 야기하기도 했다. 녹색혁명으로 인해 물 부족
등 대규모 환경 피해가 나타났으며, 전통적인 농사 풍습이 파괴되었고, 다국적 곡물 기업의 값비싼 종자와 화학약품에
농민을 예속시켰다고 주장한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식량은 인간 생존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이다. 즉, 인간다운 삶과 식량은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먹는가'는 우리의 모습, 더 나아가 사회의 모습을 결정짓는 중요한 지표이다. 식량은 사회변동의 구체적인 모습에
영향을 미치며, 동시에 사회변동은 인간의 식생활과 깊은 관련을 맺고 있기도 하다. 따라서 식량과 사회변동은 상호
영향관계에 있다. 이는 문화, 경제, 정치와 환경 등 사회 각 분야에서 확인할 수 있다.
먼저, 미시적인 수준에서의 문화와 풍속이다. 식량을 가공해 만든 음식18)과 여기서 비롯된 식생활과 음식문화는
사회적 변화와 긴밀한 영향을 받는다. 그 예로, 일본 돈가스의 탄생을 들 수 있다. 메이지 유신이 일어나기 전, 일본은
정책적으로 육식을 금하던 나라였다. 하지만 적극적인 개국정책을 장려하게 되면서 '근대화'라는 목표를 달성하고자 했던
일본은 한 가지 문제점을 발견하게 된다. 바로 서구인과의 체형 차이이다. 따라서 정부는 육식을 강력하게 장려하였고,
이에 따라 서양식 음식 ‘커틀릿’을 일본에 맞게 변형해 탄생한 것이 ‘돈가스’라는 것이다.19) 이외에도 근대화 시기
서양의 음식문화가 아시아에 전파되고 변형되는 과정들을 통해 서구중심주의적 문화에 대해서 알아볼 수 있다.
또한 식량은 경제와 정치와도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식품의 가격은 그 사회의 경제 수준을 알 수 있는 지표이다.
그
중
'빅맥지수'는
전
세계에
점포를
둔
맥도날드의
‘빅맥’
가격을
통해
각
국가의
물가수준을
비교하는
구매력평가지수로써 사용되고 있다. 식량 가격의 불안은 정치적인 혼란과 불안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의 모잠비크는 정부가 빵 가격을 30% 올리면서 폭동이 촉발되기도 했으며, 2006년 멕시코에서 발생한
‘토르티야 폭동’은 옥수수 가격의 급등이 주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20)
17) “녹색혁명”, https://youtu.be/9SsvZGg5uvU
18) ‘식량’과 ‘음식’의 개념은 때에 따라 혼동되어 사용된다. 혼동을 막기 위해, 식량은 음식을 포함하는 폭넓은 개념으로, 음식은 식량을
가공하여 만든 먹고 마시는 모든 것으로 정의했다.
19) 오카다 데쓰, 『돈가스의 탄생』, 뿌리와이파이, 2006.
20) 이완주, 『라이스 워(RICE WAR)』, 북스캔,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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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 식량은 환경문제의 원인이 되기도 한다. 녹색혁명으로 적극적으로 장려된 화학비료는 수질오염과
부영양화의 문제를 야기했으며21) 농지확대는 살충제의 사용 확대로 야생동물 서식지와 생물학적 종의 절멸 위험을
증대시켰다. 또한, 선진국에서는 먹을거리의 풍요로 음식물류 폐기물 발생량이 대폭 증가하였다. 이처럼 사회변동의
여파가 식량에 영향을 미침에 따라, 새로운 환경문제가 등장하며 이는 다시 사회변동으로 이어짐을 알 수 있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책 『식량의 세계사』 내용 자체가 식량으로 인해 나타난 인류적
사회변동을 역사적 흐름에 따라 설명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이
장에서는 인류의 역사에서 나타난 사회변동 사건 하나를 선정하여
식량이 이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적고자 한다. 본 책에서는
농사가 처음 시작되었을 시기부터 개괄적으로 식량이 사회변동에
미친 영향을 다루었기에, 그 내용이 구체적이지 않으며 고대와
중세에 대한 내용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근대와
현대에
변화하게
된
음식체계와
이로
인한
사회변동의 영향에 대해 해석하고자 한다.
음식
사회학자
앨런
비어즈워스는
기존
전통적
음식체계를
농사를 지어 개별 가구 혹은 지역 사회가 교환을 통해 소비하는
것으로 정의한다. 즉, 농사를 지어 산출된 식량을 개별 가구나
지역사회의 범위 안에서 교환을 통해 소비하는 것이다. 이때 식량의
생산은 전적으로 자연적·지리적 조건에 의존하며, 농사를 위해
관개시설을 관리하는 등 노동력을 조직하는 모습이 나타난다.
근대적 음식체계는 이와 같은 기존 전통적 음식체계의 모습을
<근대적 음식 체계> - 앨런 비어즈워스, 『메뉴의 사회학』
완전히 뒤엎는다. 그 변화를 세 가지로 나누어 생각해보았다. 첫째,
생산의 기업화이다. 전통적으로 식량이 자연적인 조건을 배경으로 인간의 노동력이 더하여 이루어졌다면, 근대적인 음식
체계에서는 자연조건과 인간의 노동력에 크게 의존하지 않고도 식량 생산이 가능해졌다. 온실이나 비닐하우스는 자연적
기후를 대체하여 작물을 기르기에 적합한 기후를 인공적으로 제공한다. 인간의 노동력은 농기계가 대신하여 더 빠르고
효율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흐름은 품종개량, 화학비료의 개발 등 과학 기술적 발전을 바탕으로 더욱 가속화되었다.
둘째, 유통의 산업화이다. 근대적 음식 체계는 식료품을 중점으로 하는 대규모 소매 사업의 발전을 가져왔다. 오늘날
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대규모 슈퍼마켓이 그 예이다. 슈퍼마켓은 단순히 식료품을 구매할 수 있는 가게를 의미하지
않는다. 슈퍼마켓은 전통적 음식 체제의 생산·가공·유통·소비 전 과정을 바꾸어 놓았다. 식료품은 예쁘게 포장되어
전시되었으며, 소비자를 유인하기 위한 마케팅 기술은 점차 발전했다. 슈퍼마켓은 생산자와 소비자를 매개하면서
현대인의 생활과 경제 체제의 중심에 자리 잡았다.
셋째, 식품의 상품화이다. 전통적 음식 체계가 ‘집밥’으로 대표된다면, 음식 체계가 근대화됨에 따라 ‘외식’이 점차
보편적인 일상이 되었다. 음식은 상품으로 전시되고 판매된다. 이에 따라 식품 소비와 판매에도 ‘효율성’과 ‘합리성’이
요구되었고, 조지 리처가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음식은 표준화되고 계산 가능하며 통제
가능한 상품이 되었다. 이러한 음식 소비문화는 음식뿐만 아니라 주거, 교육, 경제, 등 다양한 사회 분야에 적용되었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는 앞으로의 세상은?
최근 식량을 중심으로 가장 활발하게 전개되는 담론은, 세계가 '식량 위기'에 빠졌다는 것이다. 그 원인으로 제시되는
것 중 하나는 '기후변화'이다. 지구온난화, 폭우, 홍수와 가뭄과 같은 미래 기후 조건이 예측불가능하게 변화함에 따라
식량 가격의 변동성도 크게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그 예로, IPCC가 2007년도에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기온이 2도만
올라가도 벼농사는 큰 손해를 입어 두 자릿수의 감소량을 보일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이에 따라 아시아의 쌀 생산량은
21) 윤순진, 『우리 눈으로 보는 환경사회학』, 창비,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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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에 급감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여러 대륙 중 가장 심각한 피해를 입을 것이라고 예상되는 지역은 아프리카이다.
다른 대륙에 비해 큰 사회변동에 적응할 기회가 부족하며, 대응 능력도 취약하기
때문이다. 특히 아프리카 사하라 이남 지역은 가장 큰 위험에 처해있다고 한다.
IPCC는 2100년 남아프리카의 수확량은 95% 감소할 것이라는 다소 충격적인
전망을 발표한 바가 있다. 이러한 기후변화로 인한 식량 위기는 현재 진행 중인
심각한 문제이지만, 세계는 이에 충분히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
식량 생산에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는 '물'이다. 하지만 녹색혁명으로 발명된
종자들은 엄청난 양의 지하수를 필요로 했고, 이는 전 지구적인 물 부족 현상을
야기했다. 물 비축량의 80%는 물을 헤프게 쓰는 관개농업 경작지에서 사라진다.
인구수가 점점 증가하게 됨에 따라 물 비축량은 턱없이 부족해져 가는 것이
현실이다. 따라서 앞으로 수십 년 후 물은 전 세계에서 가장 희소한 자원 중 하나가
될 예정이다. 부족한 물 자원을 둘러싼 국가 내의 갈등 또는 국가 간의 갈등이
야기될 수도 있다. 이미 유프라테스 강과 티그리스 강을 중심으로 터키와 주변 국가
간의 잦은 갈등이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기후변화로 인한 2020~2080년의 세계 수확량
변화> - 출처: IPCC 2007
초국적 곡물·종자 기업들이 생산한 고성능 작물이 전 세계의 농작지에 퍼져감에
따라 지역 고유의 토종 식물들은 점차 감소하는 추세이다. 즉, 고성능 작물로 인해
다양한 종과 품종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세계 식량 공급에 크게 기여하는 곡물은 벼와 밀 두
작물뿐이며, 하나의 작물 안에서도 다양한 품종들이 사라지고 있다. 식량의 다양성은 예측할 수 없는 미래의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안정성과 관련 있다. 일례로, 1845년부터 1850년까지 일어난 아일랜드의 감자 기근은 식량자원의
다양성 감소로 인해 더 심화되었다. 이처럼 미래 식량 확보의 안정성은 감소하고 있다.
또한 육식에 대한 선호는 점차 증가하지만 이러한 수요를 모두 감당할 수 있는 곡물의 양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도
하나의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식량농업기구에 의하면, 2050년 인류의 육류 소비량은 465백만 톤에 달할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소고기 1kg을 생산하는 데 필요한 곡물의 양은 7kg에 달한다. 최근 많은 나라들이 채소·곡물의
수요가 증가하기 시작하는 식생활 변화의 1단계에서, 전체적인 섭취 열량이 안정화되고 축산물의 소비가 증가하는
식생활 변화 2단계로 이행해나가는 양상을 보인다. 하지만 세계의 식량 생산량이 육식에 대한 선호를 충족시킬 수 있을
정도로 빠르게 증가할 수 있는지는 많은 전문가들이 의구심을 품고 있다. 식량 생산에 한계점이 다가옴에 따라, 세계의
식탁은 크게 변화할 가능성이 크다.
최근 유가가 불안정하게 변동함에 따라, 바이오 연료에 대한 갈망이 커지고 있다. 바이오 연료는 식료품 시장에서의
많은 원료를 가공하여 만들어진다. 앞서 언급한 '토르티야 시위' 역시 바이오 연료를 향한 미국의 수요로 인해 멕시코
옥수수 시장이 거의 텅 빈 상태가 된 것을 배경으로 나타났다.
전문가들은 2030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5,800만 헥타르의 경작지가
연료 작물의 재배에 이용되리라 예측한다.22) 또한 식량농업기구 역시
식품 가격상승의 절반가량이 바이오 연료 붐으로 일어났다고 추정한다.
이처럼 바이오 연료의 부상은 식량 위기를 심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안정적으로 인류에게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식량을 공급할
수 있다는 생각은 허상이 되었다. 식량주권과 식량안보의 문제는 누구도
피해갈 수 없고 모두에게 당면한 정치적 아젠다로서 자리 잡았으며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도 더욱 심화될 예정이다. 정치적인 주권을
행사하는 데 가장 기본요소인 식량 주권을 지키는 일은 점차 어려워질
것이다. 북아프리카와 서아시아는 외부에서 식량을 지원받는 등 식량의
의존도가 매 해를 거듭할수록 증가하고 있다.23) 그 이유로는 인구의
<2002년 국내 총생산에 따른 육류 소비량> - 장폴 사르베, 『세계
식량 위기』
22) 빌프리트 봄머트, 『식량은 왜! 사라지는가』, 알마, 2011.
23) 장폴 샤르베, 『세계 식량 위기』, 현실문화,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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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발적인 증가와 자국 내의 식량 보급의 어려움 등이 꼽힌다.
하지만 충분한 양의 식량 공급이 어느 정도 보장된 선진국의 경우에도 식량의 질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없다. 유전자
조작 식품(GMO)은 세계의 식량 부족에 대한 해답이라고 여겨지는 시각이 존재하지만, 그 안전성은 여전히 논쟁중이다.
미국에서 팔리는 식품의 3분의 2가 유전자 변형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고 한다. 이에 따라 선진국에 사는 소비자들은
시장에서 판매되는 식량의 위생 수준과 안전성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경향이 있다. 이처럼 먹을거리는 점차 ‘위험’의
영역으로 들어서고 있다. 2004년 쓰레기 만두 파동과 미국산 소고기 논란은 국민들의 먹을거리에 대한 불안을 반영한다.
질 좋은 식품에 대한 갈망은 점차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전 세계적으로 진행 중인 식량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 제시되는 것이 ‘로컬푸드’(Local Food)이다. 먹을거리
자급률은 점차 하락하는 추세이지만 정작 사람들은 농업문제에 관심이 없으며 오히려 농업은 하찮게 여겨진다. 이러한
모순적 상황에서 로컬푸드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로컬푸드는 생산자 소비자 간의 거리를 줄임으로써 국제적
운송에서 발생하는 이산화탄소의 양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또한 지역의 소농생산을 장려함으로써 기존
녹색혁명이 부농과 소농의 불평등 격차를 심화시킨 점을 완화할 수 있다. 소비자에게도 보다 신선하고 건강하고 안심할
수 있는 식재료를 구매할 수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이에 따라 로컬푸드 운동은 앞으로도 많은 이들에게 생활화될
것이고 더욱 확장되어 나타날 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사실 이 주제에 대해 알아보기 전에는 식량이 사회변동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는지 조금 의심스러웠다. 모름지기
사회변동은 정치적·사회적 구조 등과 같은 좀 더 거시적인 차원에서 이뤄지는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주제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아갈수록, 사회변동을 일어낼 수 있는 요소는 딱히 특정한 제한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다만
인간의 삶과 더욱 밀접하게 연관된 것일수록 사회변동 가능성과 여파가 조금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한 발표를 준비하기 이전에는 사회변동의 요소나 핵심이라는 것이 어느 정도 사후적인 해석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우연히 무엇에 의해 어떤 사회변동의 결과가 나타났고, 따라서 그것은 사회변동을 일으키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고 해석하게 되는 건 아닐지 의구심을 품었다. 이처럼 사회변동의 핵심에 대한 논의는 사후적으로
이뤄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후적인 특성으로 인해 그것이 사회변동에 미친 영향과 결과를 과소평가하는 것은
올바른 자세가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즉, 사회변동을 나타나게 된 과정과 영향, 그리고 결과를 통해 우리는 미래의
사회변동을 '예측'할 수 있고 미리 '대응'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사회변동을 알아보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는 것을
몸소 알 수 있었다.
이러한 깨달음은 일상에서 느껴지는 여러 변화에 민감하게 접근하고 해석하려는 태도로 이어졌다. 지나가다 마주친
치킨 광고를 보고 시대별로 각광받는 음식을 통해 사회변동을 해석할 수 있을지 생각해보기도 했다. 또한 식료품을 사러
마트와 슈퍼마켓을 갈 때, 식량 유통구조의 변화는 사회적으로 어떤 영향을 끼쳤을지 고민하기도 했다. 이는 어쩌면 아주
사소한 변화일지 모른다. 하지만 하루가 다르게 변화해나가는 복잡한 현대사회에서 변화의 흐름을 캐치하고 사회적
배경을 파헤치는 일은 매우 가치가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먼저 식량의 문화적 관점에서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다음과 같다. 최근 사회학에서도 '음식'과 '식생활', '음식문화'가
주요 연구대상이 됨에 따라, 이에 대한 개괄적인 이론과 연구결과를 제시한 책이 있다.
저자
책 제목
출판사
출간연도
주영하
음식인문학
휴머니스트
2011
밥 애슬리 외
음식의 문화학
한울아카데미
2014
데버러 럽턴
음식과 먹기의 사회학
한울아카데미
2015
앨런 비어즈워스 외
메뉴의 사회학
한울아카데미
2010
또한 특정 음식들을 역사적으로 추적하여 그 음식이 어떤 사회적 배경을 바탕으로 나타났는지, 또는 사회변동에 어떤
51
구체적인 영향을 끼쳤는지 제시하는 책이 있다. 음식인문학자 주영하, 식문화 연구자 오카다 데쓰, 정은정, 래리 주커먼과
시드니 민츠는 음식의 유래뿐만 아니라 그것의 유행을 가능케 했던 정치·경제·사회·문화적 함의를 파헤친다. 우에하라
요시히로의 책은 일본 부락민이었던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미국의 흑인, 불가리아의 집시와 네팔의 불가촉민 등
최하층민의 음식을 찾아 나선 ‘소울 푸드’(Soul Food) 견문록이다.
저자
책 제목
출판사
출간연도
주영하
맛있는 세계사
휴머니스트
2011
주영하
식탁 위의 세계사
휴머니스트
2013
주영하
차폰 잠폰 짬뽕
사계절
2009
오카다 데쓰
돈가스의 탄생
뿌리와이파이
2006
오카다 데쓰
국수와 빵의 문화사
뿌리와이파이
2006
우에하라 요시히로
차별받은 식탁
어크로스
2012
정은정
대한민국 치킨전
따비
2014
래리 주커먼
감자이야기
지호
2000
시드니 민츠
설탕과 권력
지호
1998
또한 정치적·경제적·국제적 관점을 중심으로 식량문제를 다룬 책은 다음과 같다. 캐슬린 게이, 빌프리트 봄버트와 짐폴
사르베의 책은 보다 포괄적인 관점에서 다양한 식량문제를 다뤘다. 페트릭 웨스트호프와 김화년, 제니퍼 클랩, 로버트
엘브리턴과 폴 로비츠는 세계 식량경제와 식량 소비시스템의 경제학적 현실을 파헤친다. 월든 벨로와 KBS 스폐셜
제작팀은 식량을 세계화와 신자유주의, 그리고 초국적 곡물 기업에 초점을 맞추어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나머지의
책들은 이러한 식량문제의 대안으로 제시되는 로컬푸드, 슬로푸드와 도시농업 등의 세계적 현황과 적용 예시를 알 수
있다.
저자
캐슬린 게이
빌프리트 봄버트
짐폴 사르베
페트릭 웨스트호프
김화년
제니퍼 클랩
로버트 앨브리턴
폴 로버츠
월든 벨로
KBS 스폐셜 제작팀
김종덕
카를로 페트리니
제니퍼 코크럴킹
책 제목
왜 식량이 문제일까?
식량은 왜! 사라지는가
세계 식량 위기
식량의 경제학
식량쇼크
식량의 제국
푸드쇼크
식량의 종말
그 많던 쌀과 옥수수는
어디로 갔는가
종자, 세계를 지배하다
먹을거리 위기와 로컬푸드
슬로푸드, 맛있는 혁명
푸드 앤 더 시티
모두
출판사
반니
알마
현실문화
지식의날개
씨앤아이북스
이상북스
시드페이퍼
민음사
출간연도
2013
2011
2012
2011
2012
2013
2012
2010
더숲
2010
시대의창
이후
이후
삼천리
2014
2009
2008
2014
식량과 관련한 영상자료로는 다음이 있다. ‘한국 음식을 말하다’와 ‘요리인류’는 음식의 문화사와 사회적 변화를
바탕으로 한 연대기를 그렸다. ‘바다의 제국 2부’는 설탕을 중심으로 세계의 부가 어떻게 축적될 수 있었으며, 설탕이
이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보여준다. ‘생명의 선택’은 음식과 환경의 관계를 바탕으로 어떤 음식을 먹을 것인지에 대한
선택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종자독점, 세계를 지배하다’와 ‘바다의 경고, 해조류 종자 전쟁’은 최근 초국적 곡물
기업으로 위협받는 식량주권을 다룬다. 그 외의 ‘다섯 개의 열쇠’, ‘2012년 종자 이야기’, ‘오래된 미래, 토종’은 종자의
중요성과 대안을 모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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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사
프로그램명
방영연도
다큐프라임 - 한국 음식을 말하다
EBS
KBS
KBS1
SBS
EBS
EBS
EBS
1부 오래된 것과의 만남 : http://tvcast.naver.com/v/233051
2부 밥상위의 근대 : http://tvcast.naver.com/v/233686
3부 과식의 시대에서 미식의 시대로 http://tvcast.naver.com/v/233723
요리인류
http://tvcast.naver.com/foododyssey/playlists
바다의 제국 - 2부 부의 빅뱅
http://tvcast.naver.com/oceanempire
SBS스폐셜 - 생명의 선택
1부 당신이 먹는 게 삼대를 간다 : https://youtu.be/RkDPK3s5bjI
2부 다음 천년을 위한 약속 : https://youtu.be/iWeedxwkiiI
3부 페어푸드, 도시에 실현되다 : https://youtu.be/YvEo5QDKHZc
다큐프라임 - 다섯 개의 열쇠 3부 종자
http://tvcast.naver.com/v/131329
하나뿐인 지구 - 2012년 종자 이야기
http://www.ebs.co.kr/tv/show?prodId=439&lectId=3102539
하나뿐인 지구 - 오래된 미래, 토종
http://www.ebs.co.kr/tv/show?prodId=439&lectId=3086867
2012
2015
2015
2009
2013
2012
2011
KBS
KBS스폐셜 - 바다의 경고, 해조류 종자 전쟁
2011
KBS
KBS스폐셜 - 종자독점, 세계를 지배하다
2011
10. 종합결론
식량은 인간의 필수 요소 의·식·주 중의 하나로서, 인류의 오랜 시간 동안 사회변동과 깊은 연결성을 가지며
발전해왔다. 식량은 사회변동을 ‘이끄는’ 주요 원인이면서도 사회변동에 영향을 ‘받는’ 대상이기도 하다. 또한 국제와
현지, 자연과 문화, 생태와 경제 등 사회를 이루는 주요 부분의 이슈와 문제점이 교차하는 점에 바로 ‘식량’이 존재한다.
역사적으로 식량은 문명의 기원으로 작용하였다. 세계 주요 문명의 기원을 추적하면 농사로 대표되는 식량 생산이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식량은 복잡하고 계층화된 사회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즉, 식량은 사회조직의
도구였다. 향신료 무역은 세계 각지의 문명을 연결해주었으며 대항해시대의 개막 배경이 되었다. 감자와 설탕은 인류
사회변동의 큰 전환점인 산업혁명에 큰 영향을 준 작물이었다. 또한 인류의 전쟁 역사를 되돌아보았을 때 식량의 공급은
승패를 결정짓는 주요한 요소였다. 과학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식량은 이념적 무기로서 악용되기도 했다. 근대에 이르러
식량은 또 다른 전환점을 맞게 되었는데, 바로 녹색혁명이다. 녹색혁명은 아시아지역의 굶주림을 해소하고 경제를
발전시켰다. 하지만 동시에 치명적인 생태학적 한계와 또 다른 불평등을 낳았는데, 이는 현대사회에도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근대와 현대에 이르러 음식 체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나타나게 되었다. 자연적 조건과 인간의 노동력에 의해 생산되고
소비되었던 전통적 음식 체계는 근대적 음식 체계로 대체되었다. 먼저 식량 생산이 기업화되었다. 모든 것이 통제 가능한
식물 공장이 나타났으며, 과학기술이 기존 농사의 조건을 대신했다. 또한 유통이 산업화 되었다. 대형 슈퍼마켓으로
대표되는 음식 체계의 근대화는 기존의 상품 유통구조와 거래방식 등의 양상을 모조리 바꾸어놓았다. 식품은 상품이
되었으며, ‘효율성’과 ‘편의성’으로 대표되는 음식 소비문화는 음식 외의 산업, 유통, 거주 등 모든 분야에 적용되고 있다.
최근, 인류의 미래에 예상되는 사회변동으로 식량 위기 담론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지구온난화와 가뭄 등
기후변화와 전 세계적인 물 부족으로 현재와 같은 식량 공급이 불가능하게 될 것이라는 예측이다. 또한 초국적 종자
기업이 전 세계 농업을 집어삼키고 있다. 이에 따라 종자 다양성이 감소할 것이고, 이는 식량 공급의 안정성을 빠르게
감소시킬 것이라고 한다. 그 외에 유가의 변동성이 심화되면서 바이오 연료가 급부상하게 되었고, 많은 나라에서 육류
소비가 빠른 속도로 증가하게 되었다. 하지만 세계의 식량 생산량이 바이오 연료와 육류 소비를 감당할 수 있는지는
불분명하다.
53
이에 따라 전 세계는 식량주권과 식량안보의 위험에 처해있다.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안정적인 식량 보급은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상된다. 선진국의 경우, 식량난의 위험은 상대적으로 적은 반면, 질 좋은 먹을거리를 찾는 것이 점차
어려워지고 있다. 안전성이 입증되지 않은 GMO 식품과 농약을 사용하여 생산한 먹을거리 등 식품 안전성은 점차
중요한 현대사회의 이슈로 떠올랐다. 이에 대한 대안으로서 로컬푸드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생산자와 소비자의
거리를 좁혀 생태적으로 지속 가능한 먹을거리를 생산하고 지역 소농의 경제적 불평등을 줄일 수 있다는 점이 주요
장점으로 꼽힌다. 이러한 흐름은 앞으로 더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이름
김바다
학과
사회학과
학번
2014104400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맛있는 음식과 사회변동에 관심이 많은 사회학과 2학년입니다.
ruby361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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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탕과 권력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설탕과 권력, 시드니 민츠, 지호, 1998년, 시드니 민츠, (김문호 옮김)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사회변동의 요인은 다양하게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의 작은 요인이라도 당시의 시대적 환경과
맞물리면서 사회의 큰 흐름을 변화시키기 때문이다. 특히, 수업시간에도 많이 언급된 것처럼
필수품이 아닌 기호품이 사회 변동을 일으킨 예시가 많다. 커피, 차, 담배 등이 그러하다. 항해술과
무역이 발달하면서 많은 기호품이 세계상품으로 거래되었다. 이에 따라 국가 간 교류가 활발해지면서
사회변동은 범국가적 차원에서도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국가 간, 계층 간의 불균등한 자본축적은
세계를 변화시킨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원동력이 되었다.
사회변동을 이끈 많은 세계상품 중에서도 인간에게 가장 오랫동안 가장 많은 영향을 준, 설탕에
주목하였다. 설탕 역시 다른 기호품처럼 사치품의 명분으로 거래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기호품과 달리, 개인적 영역에서 설탕이 필수품으로 변화하였고 막대한 수요가 창출되었다.
오늘날에도 우리가 모르는 새에 수많은 음식에 설탕이 사용되고 있으며, 여전히 수많은 사탕수수가 재배되고 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설탕은 몸에 해로운 음식으로 다시 둔갑하였다. 언론에서는 설탕이 현대인의 질병을 유발한다는
지식을 생산하였고, 설탕이 건강에 해롭다는 하나의 사회담론이 형성되었다. 일각에서는 이러한 지식을 수용하여 설탕을
다른 단맛으로 대체하려는 웰빙의 움직임이 있다. 설탕에게 부여된 담론은 우리 사회를 또 어떻게 변화시킬까?
이 책은 설탕의 생산과 소비의 관점에서 설탕이 사회에 미친 영향과 이로 인한 사회변동의 모습을 설명한다. 또한
기호품이었던 설탕이 필수품으로 변화하게 된 과정을 파악하여, 역사적으로 설탕이 개인적 영역에서 소비된 방식을
살펴본다. 저자가 인류학자이기에 책의 뒷부분은 인류학적 관점이 많이 추가되어 있지만, 책에 전반적으로 깔린
문제제기를 통해 설탕이 사회변동을 이끈 이유에 대해 고찰해볼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설탕뿐만 아니라 사회변동
자체에 있어서 중요한 ‘insight’가 무엇인지 나름의 관점을 제시해볼 수 있었다.
3. 저자 소개
시드니 민츠(Sidney Mintz, 1922~)는 카리브 해와 음식 인류학 연구로 잘 알려진 인류학자이다. 예일대학에서 20년
간 강의하였으며, 현재 존스홉킨스 대학의 인류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그는 1951년 콜롬비아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고, 일찍이 푸에르토리코의 사탕수수 노동자 사이의 현장 연구를 주로 진행하였다. 이때의 경험은 그의 학문과 모든
저작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후에 아이티와 자메이카에 대한 민족지적 연구를 확대하여, 노예제도와 세계자본주의, 문화적
잡종성, 카리브 해 소작농, 식료품의 정치경제학에 대해 역사적이고 민족지적인 연구를 생산하였다. 『설탕과 권력』은
문화인류학과 식품연구에 영향력 있는 책 중 하나이다. 이외의 저서로는
『음식의 맛, 자유의 맛』, 『사탕수수밭의
일꾼들』, 『카리브 해 지역의 변모』등이 있다.
시드니민츠의 개인사이트: http://sidneymintz.net/history.php
시드니민츠에 대한 위키백과사전: https://en.wikipedia.org/wiki/Sidney_Mintz
4. 책 내용 요약
설탕은 기본적으로 사탕수수로부터 가공된 자당이다. 사탕수수를 수확하여 분쇄, 압착, 농축하면 시럽형태의 ‘당밀’이
되고, 이를 결정화시키면 설탕이 된다. 사탕무도 설탕의 재료가 될 수 있지만, 현재 전 세계 설탕의 2/3가 사탕수수로
생산되는 만큼 사탕수수는 설탕의 중요한 주재료이다. 사탕수수는 적당한 열기와 습기, 규칙적 수분 공급이라는 조건이
충족되면 9-18개월 만에 설탕 생산에 적합할 정도로 성숙한다. 또한 아버지수수로부터 아들수수가 자라나기 때문에
12개월마다 수확이 가능하며 다 자란 사탕수수는 사람 키를 훨씬 넘어 4.5m에 달한다. 사탕수수는 수확시기가 지나면
수액이 줄거나, 수액 속 자당 함량이 감소하기 때문에 제 시기에 수확하는 것이 중요하다. 게다가 일단 수확하고 나면
55
사탕수수가 쉽게 변질되기 때문에 빠른 시간 내에 설탕으로 가공해야한다.
이러한 사탕수수의 본질적인 특징 때문에 사탕수수 산업에서는 시간과 노동력이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수확 후 바로
설탕을 제조해야 하므로, 사탕수수 밭 옆에서 설탕제조 공장을 운영했다. 노예들은 낮에 농장에서 사탕수수를 베고, 밤에
공장에서 설탕 즙을 만들었다. 또한 사탕수수 재배부터 설탕 제조까지는 수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제조과정에서
맷돌형식의 사탕수수 압착기를 작동시키려면 성인 2-3명의 노동력이 필요했다고 한다. 시간과 노동력의 효율을 위해
공장은 분업체계로 운영되었으며 엄격하게 통제되었다. 심지어 노예가 고된 노동에 잠시 조느라 압착기로 팔이 달려
들어가도 관리자는 공장을 멈추는 대신 노예의 팔을 잘랐다. 이렇게 제조된 설탕은 현지에서 소비되지 않는다. 설탕을
대량으로 생산해 상품화하여 다른 지역에서 막대한 이윤을 창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따라서 사탕수수 농장은 자본주의
생산방식을 따른 최초의 근대적 공장이라고 볼 수 있다.
사탕수수는 고대 뉴기니에서 처음 재배되었다고 추측된다. 기원전 400-350년경에는 인도에서 사탕수수 수액을
결정화하여 고체로 만든, 유사 설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다. 즉, 인류 역사상 사탕수수와 설탕 가공방법을 발명한
지역이 페르시아와 인도라고 볼 수 있다. 7세기 무렵 아랍인들이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이슬람교를 전파하면서,
코란과 함께 자신들의 생산물인 설탕과 설탕 생산 기술을 가지고 다녔다. 8세기, 스페인이 멸망한 후 아랍인들이 지중해
지역의 일부를 석권하였고, 이들은 다양한 문화를 전달·융합하는 과정에서 지중해 사탕수수 경작을 시도하였다. 11세기
말에 이르면 기독교 유럽인들이 설탕의 생산에 직접 관여하기 시작했다. 십자군 전쟁은 결과적으로 실패하였으나, 수차례
원정 동안 유럽은 이슬람과의 교역 루트를 열었다. 유럽은 당시 수준 높은 이슬람 문화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설탕 제조
기술도 받아들이게 된다. 유럽 십자군은 정복지에서 지배자로서 설탕생산을 감독했다고도 전해진다.
13세기, 설탕은 유럽에 의약품이자 사치품으로 보급되었다. 설탕의 순백색은 미학적으로 가치 있게 여겨졌고,
희소성으로 인해 가격이 높게 책정되었다. 14세기에는 상류층에서 설탕을 향신료, 양념, 감미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15세기 말에 대서양 제도의 설탕산업 발달로 설탕 생산이 점차 안정화되자, 유럽에서는 설탕에 대한
지식과 욕구가 더욱 커졌다. 상류층과 더불어 중산층의 수요도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로 인해 설탕산업이 많은 이익을
남기자, 유럽 자본가들은 더 많은 사탕수수를 생산하려는 욕망을 키워갔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사탕수수를 재배할
새로운
경작지를
위해
식민지를
건설하고
신대륙을
개척하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설탕산업은
지중해->대서양제도->중남미브라질->카리브 해->자메이카로 계속해서 그 중심이 이동하였다. 영국은 바베이도스 면적의
20배에 달하는 자메이카에 식민지를 건설하고 설탕 플랜테이션을 운영하였다.
식민지와 신대륙을 통해 경작지는 확보했지만, 그 땅에서 일할
수많은 노동력을 유럽이 충당할 수는 없었다. 유럽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인구가 대폭 감소했으며 식민지 원주민을 동원하는
것에도 한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때마침 16세기부터 국제시장으로
부상한
벨기에의
안트베르펜에서
노예와
설탕이
거래되기
시작한다. 당시 노예는 인간이 아니라 총 3자루, 면직물 1.8m,
럼주 3통의 가격으로 거래되는 하나의 상품에 불과했다. 유럽의
자본가들은
식민지의
사탕수수
플랜테이션에
노예들을
대거
투입시켰다. 노예무역이 활성화되면서 ‘종(Zong)’호 사건과 같이
비인간적인 노예무역이 횡행하기도 하였다. 또한 식민지 거주인
구성은 대다수의 아프리카 흑인노예와 극소수의 백인감독관으로
변화하였다.
이
틈에서
노예들은
아프리카
문화를
계승하여
부두교, 쿠바스타일 음악 등 새로운 집단문화를 형성하기도 했다. 백인들도 현지와 결합된 새로운 문화인 콜로니얼
스타일의 주거·의복 양식을 만들어냈다.
17세기 말부터 유럽-아프리카-아메리카 세 대륙을 잇는 삼각무역이 시작되었다. 유럽 상인들은 먼저 총과 면직물
등을 싣고 아프리카로 가서 노예사냥이나 노예무역을 통해 노예로 교환한다. 이 노예들을 아메리카 대륙의 카리브 해로
데려가 설탕과 교환한다. 마지막으로 설탕을 다시 유럽에서 판매한다. 이런 방식으로 최대 300%의 수익을 올릴 수
있었던 삼각무역은 유럽에 막대한 이익을 남겼다. 큰 이윤을 남긴 사람부터 월급 받는 사람까지 다양한 사람들이 설탕을
56
통해 돈을 버는 ‘설탕경제’가 형성되었다.
특히 영국의 리버풀은 17세기 후반부터 150년간 340만 명의
노예를 실어 나르며 세계에서 3번째로 큰 대규모 노예무역 항구로
성장했다. 리버풀은 맨체스터와 같은 인근 공업도시의 생산품을 삼각
무역에 연결하였고, 이를 통해 얻은 이익을 공장에 재투자하였다. 당시
리버풀에서는 상류층뿐만 아니라 중산층도 돈을 벌기 위해 노예무역에
투자하기 시작했다. 삼각무역으로 총과 럼주의 수요가 증가하면서
무기상, 럼 제조업자가 이익을 보았고, 물품 운송이 중요해지면서
조선업과 중공업이 성장하였다. 당시에는 배가 5척에 1척 꼴로 조난을
당했기에 보험이 발전하였다. 현재에도 유명한 로이즈 은행은 노예선의
보험사 역할을 했다. 또한 바클리스 은행처럼 삼각무역에 은행이
투자하면서 이익을 보기도 했다. 이러한 설탕경제가 영국 전역으로 퍼지면서 영국 사회에 많은 자본이 축적되었다. 이
자본은 현대 사회변동의 큰 흐름인 19세기 산업혁명의 발판으로 작용하게 된다.
이제까지 설탕을 생산의 관점에서 살펴보았다면, 소비의 측면에서 다시 설탕을 바라볼 수 있다. 아랍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유럽에 처음 설탕이 들어올 때는 의약품으로 인식되었다. 순백색의 설탕은 미학적으로 가치 있게 여겨졌고,
희소하기 때문에 가격이 매우 높았다. 따라서 상류층에서 귀한 향신료로 사용되었다. 14세기에는 음식의 맛을
더해주거나 감춰주는 양념이나 감미료로도 사용되었다. 15세기 대서양 제도 설탕산업의 발달로 설탕 생산이 증가하면서
가격이 잠시 하락하고, 설탕에 대한 중산층의 수요도 증가하였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설탕은 값비싼 수입품으로,
호사품으로써 소비되었다.
설탕에 대한 과시적 소비는 16세기 들어 가장 잘 나타난다. 상류층 사이에서는 설탕을 반죽하여 건축물, 동물의
모양으로 장식조각품을 만든 이른바 ‘솜씨음식’이 유행하였다. 상류층은 단순히 설탕의 소비뿐만 아니라 솜씨음식을 통해
권력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솜씨음식이 화려할수록 강력한 권력을 상징하였기에, 왕가에서는 솜씨음식의 크기를
제한하기도 하였다. 상류층은 연회 때 솜씨음식을 전시했고, 마지막에 망치로 깨서 나누어 먹는 행위를 통해 부와 명예를
과시하였다. 18세기에 들어 설탕은 차와 커피의 감미료이자 디저트 재료로서 보다 일상적이고 실용적 성격을 보인다.
특히 찰스2세 왕비인 캐서린이 차에 설탕을 넣어 마신이후로, 달콤한 차를 마시는 것은 궁중의식이 되어 귀족에게로
전파되었다. 당시 집에서 차를 마시는 것은 그만큼 가정의 품위를 드러내는 징표였다.
설탕은 19세기 산업혁명 시기에 들어서야 보편화되었다. 자유무역 운동의 성공으로 설탕가격이 급락하면서 설탕을
이용한 잼과 마멀레이드 통조림이 생산되었다. 도시로 몰린 공장 노동자들은 가난하고 생활환경이 열악했기에 좋은
식사가
어려웠고,
저렴하고
간단하지만
칼로리가
높은
식사가
필요했다.
이에
따라
빵과
잼,
설탕을
넣은
오트밀죽(포리지)과 홍차를 중심으로 하는 ‘영국식 아침식사’가 형성되었다. ‘영국의 티타임’ 역시 노동자들이 휴식시간에
칼로리와 카페인을 얻기 위해 생긴 문화이다. 그동안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던 설탕은, 홍차·커피와 상생하고 산업혁명을
겪으면서, 노동자의 식사로 자리 잡으며 필수품이 된 것이다.
한편, 설탕은 동일한 계층에서도 젠더정체성을 생산한다. 19세기 말의 기록에 따르면, 노동계급의 가정 내에서도
고기와 베이컨의 소비가 부분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이 고기는 주로 아버지의 저녁식사에 소비된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주 1회 정도로 고기를 먹었고, 빵과 잼 등 설탕을 통해 주된 칼로리를 섭취하였다. 가장 질 높은 노동력인
아버지가 가계를 책임지기 때문에 여성과 아이들은 영양의 불균형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산업혁명 이후 현대사회에서 요리와 식사의 개념은 축소되었고 식품을 구매하는 것이 일반적인 행위가 되었다.
공장에서는 설탕을 첨가한 많은 가공식품들을 생산한다. 이에 따라 가정보다 산업에서의 설탕 소비가 증가하였다.
심지어는 단맛이 나지 않는 가공식품에도 설탕이 첨가되어,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새에 설탕을 섭취하게 된다. 우리가 더
간편하고 ‘자유로운’ 식사를 추구하지만, 역설적으로 ‘자유로운’ 선택에 제약을 받게 되는 것이다. 더불어 현대사회에서
생산과 소비의 분리로 인해 우리는 이러한 경향에 저항하기보다 소비에만 집중하는 수동적인 소비자가 되어간다. 앞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더욱 방대한 설탕의 소비자가 되어갈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역사적으로 설탕은 사치품에서 필수품으로 변화하였다. 이는 인간이 본성적으로 단맛을 선호한다거나, 단순히
상위계층에 대한 모방심리를 가지기 때문이 아니다. 생산이 소비를 결정하고 소비가 생산을 결정하는 과정은 정치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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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군사적 상황과 결부되어있으며 크고 작은 사회변동을 유발하였다. 또한 설탕으로 인한 사회변동이 역으로 설탕의
위치와 상징을 재조정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우리는 세계가 변화하는 방식을 보다 광범위하고 포괄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때, 세계를 사회적으로 효과적인 방식으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3.저자소개’에서 언급했듯이, 저자는 푸에르토리코의 사탕수수 노동자 사이의 현장연구를 진행한 경험이 있다. 당시
그가 관심 있게 본 것은 푸에르토리코의 사탕수수 생산이 대부분 다른 지역의 사람들을 위해 이루어진다는 점이었다.
학자로서 그는 설탕의 수요가 증가한 이유, 그 방대한 수요가 지속된 이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였다. 이에 따라 저자는
역사적 흐름 속에서 설탕의 생산과 소비를 파악하였다.
설탕을 통해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욕망과 구별짓기이다. 사탕수수는 8세기 아랍인들에 의해 지중해에서
처음 경작되었다. 설탕이 왕가와 귀족의 사치품으로 인기를 얻자, 15세기부터는 유럽인이 설탕 생산에 관여하기
시작하였고, 마데이라제도, 카나리아제도 등의 대서양제도에서 설탕이 생산된다. 설탕 생산이 증가하여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상류층이 아닌 중산층의 수요도 증가하기 시작한다. 설탕의 상품적 가치를 알아본 유럽인들은 설탕을 통해
부를 쌓으려는 욕망을 키웠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이 자본가들과 결탁하여 본격적으로 식민지와 신대륙을 개척하였다.
제국주의 시대에 식민지의 소유는 국가 권력을 의미했기 때문이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더욱 많은 식민지를 갖기 위해 경쟁하였고, 새로운 식민지와 신대륙이 개척될 때마다
설탕산업의 중심은 계속해서 이동하였다. 16세기 콜롬버스는 사탕수수 농장을 경영하던 그의 장인을 통해 설탕의
수익성을 익히 알고 있었고, 서반구를 향해 떠난 두 번째 항해 때 사탕수수 모종을 가져가 신대륙에 전했다. 사탕수수가
중남미에 정착하자, 그동안 지중해와 대서양 제도 위주로 이루어 졌던 설탕산업은 당시 포르투갈령이었던 브라질
중심으로 이동되었다. 삼각무역이 시작된 17세기에는 영국령 바베이도스 섬, 프랑스령 마르티니크 섬 등 카리브 해가
설탕산업의 중심이었다. 17세기 후반 영국은 스페인으로부터 빼앗은 자메이카에서 설탕 생산을 시작하였고, 설탕산업의
중심은 자메이카로 옮겨간다.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은 더욱 많은 식민지에서 더욱 많은 설탕을 생산하기 위해 경쟁하였고,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였다. 물론 이 과정에서 수많은 흑인 노예가 착취당하였다. 제국은 임금을 지불할 필요 없이 마음대로 부릴 수
있었던 노예 노동력을 설탕산업에 투입시켜 막대한 자본을 축적하였다. 노동력을 제공한 사람이 대가를 얻지 못하는
대신에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에게 모든 이익이 돌아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수익 불평등은 유럽사회 전체의 자본을
축적할 수 있게 하였다. 유럽 사회에 축적된 자본을 바탕으로 일어난 19세기 산업혁명은 전 세계로 뻗어나갔고,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사회의 기틀을 구축하였다.
한편, 설탕의 소비를 부추긴 것은 설탕에 내재된 ‘구별 짓기’의 속성이다. 칸트는 모든 인간이 순수이성을 갖기 때문에
감각적 판단을 보편성으로 승화시킬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사람들이 나이와 신분을 떠나 보편적인 미적 쾌락을 느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반면에, 부르디외는 칸트를 비판하며 미학적 판단의 기준이 사회적으로 구성된다고 주장했다.
부르디외는 미학적 취향이 현실세계의 성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기 때문에 계급이 취향을 구별하기도 하며, 취향이
계급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따라서 고급취향/대중취향과 같은 이분법적 구도는 현대사회에서
피지배자에 대한 지배자의 권력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측면에서 문화와 취향의 구별 짓기는 계급을 재생산한다.
유럽에 처음 설탕이 들어왔을 때, 설탕은 사치품으로 소비되었다. 의약품, 향신료, 양념, 감미료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되었으나 비싼 가격으로 인해 상류층에서만 소비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경우 설탕은 상류층과 다른 계층을
구분하는 고급취향이 된다. 생산이 조금 안정화되자, 중산층 역시 설탕을 구매하려한다. 이러한 행위는 중산층이
상류층의 취향을 모방하여 계급 상승에 대한 기대를 나타내는 태도라고 해석할 수 있다.
설탕을 통한 구별 짓기는 단순한 설탕 소비뿐만 아니라 설탕을 활용하는 방식에서도 드러난다. 중산층에서도 설탕의
구매가 이루어지자, 상류층에서는 설탕으로 조각장식품을 만드는 솜씨음식이 유행했다. 솜씨음식은 별도의 기술이
필요했으며, 더욱 정교하고 화려할수록 권력을 드러냈다. 왕은 귀족들이 솜씨음식을 통해 권력을 과시하는 것을 경계하여
작거나 단순한 솜씨음식을 만들도록 제한하기도 했다. 또한 18세기에 찰스2세 왕비인 캐서린이 설탕을 차의 감미료로
사용하자, 귀족이 궁중의식으로 수용하고 모방하였다. 이처럼 설탕은 소비와 활용방식에 따라 계급을 구별 짓는 중요한
음식으로 자리 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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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세기 산업혁명 이후 급락한 설탕가격은 더 이상 사치품으로서의 가치를 잃어버린다. 오히려 노동자계층의 주된
칼로리 공급원으로 사용되면서 필수품으로 변모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동일한 계층 내에서 또 다른 구별
짓기에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다. 노동자 가정에서 아버지는 고기를 통해 양질의 칼로리를 섭취했던 반면, 아내와
아이들은 설탕을 통해 불량하지만 높은 칼로리를 섭취할 수 있었다. 이는 한 가구 내에서도 양분화 된 취향을 통해
권위를 드러내고 젠더 정체성을 형성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요약하자면, 욕망과 구별 짓기는 설탕으로 사회 변동을 유발할 수 있었던 중요한 요인이었다. 제국주의 국가의 권력과
부에 대한 욕망은 설탕 생산을 위한 식민지와 신대륙 개척을 자극하였다. 이 과정에서 많은 흑인노예들이 착취당하였고
세계적 하위계층으로 전락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유럽에서는 설탕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여 막대한 이익을
창출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산업혁명까지 이뤄낼 수 있었다. 설탕 소비에 대한 계층의 구별 짓기는 설탕 생산을
뒷받침하는 수요를 보장해주었다. 중산층은 설탕을 소비하고 활용하는 상류층의 문화를 끊임없이 모방하였다. 설탕이
계층을 구별 짓는 사치품으로서의 기능을 잃어버리자, 동일한 계층 안에서 또 다른 권력을 형성하기 위해 이용되었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욕망과 구별 짓기는 인류의 역사에서 되풀이 되어 온 현상이다. 이 두 가지에서 공통점을 찾는다면 계급화로 연결해
볼 수 있다. 인간의 사회에서 계급은 항상 존재해왔다. 계급을 나누는 기준이나 계급에 따른 자원의 배분이
다양하더라도, 항상 계급을 구별 지었다. 맑스에 따르면, 고대에는 지배자-노예 관계, 중세에는 영주-농노 관계,
자본주의 시대에는 유산계급(자본가, 부르주아)-무산계급(노동자)로 계급이 양분화 되어왔다. 피지배계층은 계급투쟁을
통해 봉기하였으나 기존의 지배 계급이 무너져도 또 다른 지배관계가 형성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다는 현대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여전히 계층이 존재하고 있다. 다만 단순히 양분화 된 계급이
아니라 더욱 다양화된 계층으로서 경쟁할 뿐이다. 이렇게 다양한 계층 간에는 상반되는 욕망이 존재한다. 상위계층은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욕망을, 하위계층은 상위계층으로 진입하려는 욕망을 가진다. 이들은 다양한 장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각자의 욕망을 드러내며 서로 대립한다. 상위계층은 직접적인 혹은 간접적인 방법으로 하위계층에 대한 권력을
행사하고 통제하려한다.
그 방법 중 하나가 앞서 말한 ‘구별 짓기’의 방식이다. 상위계층은 경제적 격차나 정치권력을 강조하여 하위계층에
대한 우월함을 드러내기도 하지만, 문화적 측면에서 보다 일상생활에 침투하는 방식을 사용하기도 한다. 구별 짓기의
가장 큰 특징은, 미시적 수준에서도 계층의 재생산을 유발한다는 것이다. 개인의 취향이 개인의 사회경제적 계층을
반영한다. 상위계층은 그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문화와 취향을 통해 스스로를 하위계층과 구별 지음으로써 계층을
드러낸다. 부르디외는 특히 ‘교육’이 그들의 취향에 격차를 제공한다고 보았다. 교육 수준에 따라 상위계층의 문화에 대한
개인의 해석과 접근성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화 된 사회는 많은 효용과 이익을 창출하며 발전해 왔다. 수업시간에도 언급되었지만 이른바
20:80법칙이라는 ‘파레토법칙’이 있다. 파레토 법칙24)은 파레토가 조사를 통해 경험적으로 얻은 결과로, 상위 20%
사람들이 전체 부의 80%를 가지고 있다는 소득 분포에 관한 통계적 법칙이다. 전체성과의 대부분(80%)이 몇 가지
소수의 요소(20%)에 의존한다는 의미로 사용되기도 한다. 소수의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 역시 설탕산업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여 산업혁명이라는 전 세계 인류의 큰 진보를 이루어냈다. 현재에도 몇몇 선진국의 발전이 이 세계를 주도하고
있으며, 개발도상국은 선진국으로의 도약을 꿈꾸고 있다.
따라서 인류의 역사는 계급의 역사이다. 개인은 자신의 계급에 따라 각자 이익에 부합하는 욕망을 지니게 되었고 이
욕망은 발전의 계기가 된다. 계급화 된 사회에서 상위계층은 하위계층과의 ‘구별 짓기’를 통해 자신들의 권위와 우월성을
강조하며 계급을 고착화시키려 한다. 하위계층은 계층 상승에 대한 욕망으로 상위계층의 문화와 취향을 모방하려 한다.
이에 따라 다양한 이익구조가 형성되고, 많은 일자리가 창출된다. 하위계층의 모방이 시작되면 상위계층은 더욱
세분화되거나 새로운 문화와 취향을 도입하여 계속 구별 짓는다. 이러한 과정의 반복은 사회를 부유하게 만들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 어쩌면, 계급은 이 사회를 분열시키지만 동시에 발전시키는 ‘필요악’인 것이다.
24) [네이버 지식백과] 파레토법칙 [Pareto’s Law] (한경 경제용어사전, 한국경제신문/한경닷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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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현재까지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미래에도 필요악으로써 계층이 재생산될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먼저,
선진국과 개발도상국 간에는 국가적 불평등이 존재하며, 이를 국가적인 계층이라고 인식할 수 있다. 설탕을 통해 자본을
축적한 유럽은 현재에도 여전히 선진국의 위치를 고수하고 있다. 반면에, 당시 사탕수수 식민지였던 도미니카 공화국,
아이티, 바베이도스와 같은 나라들은 낮은 GDP와 GNP를 기록하고 있다. 설탕산업을 주도했던 국가와 식민국가 간의
격차는 여전히 좁혀지지 않는 추세이다.
또한 계층의 기준이 점차 다양화·세분화되고 있다. 한 사회 내에서도 단순히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자본가-노동자로 계급이 양분화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소득과 더불어 사회적 지위, 문화적 취향 등을 통해 상대적으로
계층이 형성될 수 있다. 또한 동일한 계층에서도 세분화되어 다른 계층이 생산될 수 있다. 예를 들어 노동자 가정에서
칼로리를 고기로 섭취하느냐, 설탕으로 섭취하느냐에 따라 젠더 정체성이 형성되었고 여성은 남성으로부터 타자화되었다.
따라서 계층이 여전히 존재하는 앞으로의 세상에서 취향의 구별 짓기 역시 계속될 것이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 설탕의
위치를 살펴보자. 사치품에서 필수품으로의 변화를 거친 설탕은 21세기 들어 배척당하기 시작했다. 초기에 의약품으로
전해졌던 설탕이 이제는 건강에 해로운 음식으로 간주되었기 때문이다. 의학계는 당뇨, 비만 등 설탕의 과다 섭취로 인한
합병증과 부작용을 밝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가 왜 설탕의 부정적 기능에 주목하게 된 것인지에 대한
의문을 제기해보는 것이다. 의학계에서 설탕에 건강 문제를 제기한 것은 19세기부터이다. 나는 21세기 들어 특히 설탕을
배제하는 현상이 웰빙(well-being) 풍조의 구별 짓기가 일부 작용한 결과라고 보았다.
원래 사치품이었던 설탕은 산업혁명 이후 노동자의 식사에 높은 칼로리 보급원으로 이용되며 필수품으로 자리 잡았다.
더 이상 설탕은 상위계층만이 향유하는 문화로 인식될 수 없었다. 오히려 공장에서 대량생산되는 가공식품에 설탕이 각종
양념, 감미료로 다량 사용되기 시작했다. 현대사회에 들어서 식사의 개념이 사회적 의미를 잃고 끼니와 영양 보충의 의미
위주로 축소되었다. 자본주의 아래 생산 효율을 극대화한 가공식품은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식사를 위해 직접 요리하지 않고 가공식품을 소비하는 것은 일상적이고 당연한 일이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가공식품을 구매하면서도 이 제품에 설탕이 얼마나 들어갔는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연상하지 못한다. 생산과 소비가 유리된 현대사회에서, 생산보다 소비의 행위, 즉 눈에 보이는 결과인 음식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결국 가공식품 구매자는 ‘설탕’을 구매하려는 의지와 상관없이 ‘설탕이 첨가된 가공식품’을
구매함으로써 설탕의 방대한 소비자가 되어버린다. 이때 주목할 점은, 설탕이 첨가된 가공식품의 주된 구매자가 바로
하위계층이라는 것이다. 노동자가 높은 칼로리로 끼니를 때우기 위해 설탕을 주식으로 섭취했던 것과 같은 논리로,
하위계층은 저렴하게 끼니를 해결하기 위해 그들에게 이미 한정되어 주어진 선택지인 가공식품을 먹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편, 21세기에 유행하기 시작한 웰빙 풍조는 상류층이 가공식품을 더욱 배제하도록 만든 이유라고 생각한다.
웰빙25)은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통해 행복하고 아름다운 삶을 추구하는 삶의 유형이나 문화를 통틀어 일컫는
개념이다. 그러나 개념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생활수준이 낮고, 하루살이가 급급한 이들에게 웰빙을 추구하는 일은
쉽지 않다. 육체적·정신적 건강의 조화를 위해서는 어느 정도 사회경제적 기반이 필요하다. 따라서 웰빙을 추구하는 것
자체가 하위계층과 구별되는 상위계층의 ‘구별 짓기’가 되는 것이다. 이 웰빙 시대에 건강에 해로운 음식인 설탕을
선호하는 것은 자신이 곧 하위계층임을 드러내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처럼 계급과 구별짓기가 계속되는 한, 다양한 계층의 재생산과 사치품의 거래는 필수불가결하다. 비정상적으로
고가인 명품백이 인기를 끌고 있는 것은 그것에 실질적 가치 이상의 가격이 매겨졌기 때문이다. 다이아몬드가 부의
상징이 된 것 역시 그것이 부를 드러내는 것 말고는 아무 효용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앞으로의 세상에서도
소유만으로 부를 과시할 수 있는 명품과 보석은 여전히 높은 가격에 거래될 것이다. 그에 따른 이익구조와 일자리가
계속해서 창출되기 때문이다. 유럽사회에 갑자기 등장한 설탕이 사치품으로 시작해 사회변동을 이끈 것과 같이, 새로운
사치품을 생산하여 욕망과 구별짓기를 자극한다면, 우리는 산업혁명과 근대화보다 더욱 발전된 사회를 미래로 맞이할지도
모른다.
25) [네이버 지식백과] 웰빙 [well-being]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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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인간은 본능적으로 생존에 대한 욕구가 있다. 생존하기 위하여 직립보행을 시작하였고, 도구를 사용하였다. 더 나아가
단순한 생존뿐만 아니라 더욱 탁월한 삶을 살기 위해 끊임없이 사고하고 성장했다. 또한 다양한 측면의 생존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하기 위해 끊임없이 세상에 적응하고 사회를 변화·발전 시켰다. 이에 따라 시간이 흐를수록 사회는 더욱
다양한 방향으로, 더욱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끊임없이 변화하는 사회에 한 단계 앞서 미래를 내다보고 적절한 대응을
하는 것이 중요해졌다.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서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진행된 역사와 사회변동을 이해해야한다. 세계의
역사가 변화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지, 어떤 흐름으로 변화해왔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사회의 한
가지 측면이 아니라 다양한 측면과 연결지어 여러 가능성을 생각하면서도 하나의 큰 insight가 무엇인지를 깨닫는
것이다.
나는 이 책을 통해 사회변동의 한 가지 코드가 ‘욕망’과 ‘구별 짓기’라고 보고, ‘계급화 된 사회’와 연결지어 보았다.
이 세상에 계급이 없는 사회는 없다. 과거뿐만 아니라 현재에도 계급은 다양한 기준으로 다양한 방식으로 나타나고 있다.
좋은 계급을 유지하거나 더 나은 계급이 되고 싶은 ‘욕망’은 계속해서 계층을 ‘구별 짓고’있으며 이러한 계급화
과정이야말로 사회를 변화시키고 발전시키는 원동력이다. 앞서가는 소수의 상위계층이 이 사회를 이끌어 갈 때,
하위계층의 수준까지 높일 수 있는 전체 사회의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때로는 노예의 착취와 같이 하위계층의
희생이 발전에 요구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모두가 평등한 사회보다 계급이 분명한 사회가 더욱 발전할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관점(point of view)이 비윤리적이고 부도덕한 상위계층의 악행을 모두 옹호하자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명시할 필요가 있다. 단지 과거와 현재의 역사가 계급화 된 사회에서 상위계층에 의해 변화·발전해왔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는 전망을 제시하는 것이다. 물론 상위계층의 무제한적인 욕망으로 인해 다수의 희생이 뒤따르거나, 사회의
부정부패가 악화될 수 있다. 그러나 인간이 짐승이라는 사실을 알기에 짐승이 아닌 인간일 수 있는 것처럼, 우리가 그
욕망의 근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정확히 알 수 있으면, 그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다.
즉, 우리 사회에 필요악으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계급의 존재를 인정함으로부터 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다.
사회변동이 불평등한 계급 격차로부터 발생한 것을 인지하고 사회변동의 주체가 상위계층임 정확히 파악해야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사회를 변동시키는 사람이 될 것인가, 사회 변동에 편승하는 사람이 될 것인가? 사회 변동의 주체를
알고 직접 주체의 자리에 서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할 때 우리는 현대사회를 더욱 능동적으로 살아갈 수 있다. 그리고
비로소 사회 변동의 주체가 된 우리는 병폐한 사회 시스템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 시스템을 개선할 수 있는
권력을 지니게 된다.
따라서 누가 어떤 담론을 부여하는지를 아는 것은 가장 중요하다. 이제까지 상위계층은 자신들을 구별 짓기 위해
설탕에 특정 담론을 부여해왔다. 의약품이자 귀한 사치품이었던 설탕은 상위계층을 하위계층과 구별 짓는 취향이었으나,
그 가치를 잃고 필수품이 되자 오히려 설탕과 가공식품의 소비는 하위계층을 구별 짓는 취향으로 작용한다. 설탕이 정말
몸에 해로운지, 어느 정도까지 섭취하는 게 좋은지에 대한 논의와 별개로 상위계층을 모방하여 설탕을 배척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미디어에서는 설탕을 대체할 수 있는 올리고당, 과일의 단맛을 이용하는 조리법이 소개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사회 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하여 그 안에 숨겨진 의도가 무엇인지를 발견할 줄 아는 주체가 되어야 한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KBS 대기획, “바다의 제국”2부, ‘부의 빅뱅’, 2015년 1월 30일 방송
설탕이 부의 빅뱅을 일으키며 세계로 뻗어나갈 수 있었던 이유에 대해 다양하게 접근한다. 삼각무역과 노예무역을
중심으로 착취당하는 노예 노동력에 주목한다.
-가와기타 미노루, 『설탕의 세계사』, 2003, 장미화 옮김, 좋은책만들기
『설탕과 권력』과 비슷한 관점이지만 보다 최근 출간되어 더욱 쉽게 읽을 수 있으며, 세계에서 설탕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다. 서구 열강에 개방적인 태도로 빨리 근대화를 이룩한 일본에서 설탕을 취급한 방식에 대해서도 언급되어있어
우리나라와 비교하며 읽어볼 수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유럽을 살찌운 대서양 무역
무역이 설탕의 확산에 기여한 바를 사진과 함께 간단히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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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582710&cid=47323&categoryId=47323
-[네이버 캐스트] 블랙&화이트 : 서양의 설탕이야기
소비의 측면에서 설탕의 역사에 대해 서술되어있다. 흑인 노예와 연대하여 문제의식을 제기했던 일부 중산층
페미니스트 여성에 대한 언급이 흥미롭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34&contents_id=26590
10. 종합결론
현대사회는 이전보다 더 빠른 속도로 다양하게 변화하고 있다. 변화하는 사회에 발맞춰 적응하고 다가올 미래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미래를 내다볼 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과거와 현재까지 진행되어 온 역사적 사회 변동의 사례를
다양한 측면에서 통합적으로 고찰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사회를 변동시키는 요소에 대한 하나의 통찰력을 배워 미래
사회에 적절히 대응하는 것이다.
설탕은 우리 사회의 다양한 사회변동을 일으킨 요인 중 하나이다. 이를 생산과 소비의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사탕수수를 가공하여 얻은 자당인 설탕은 아랍에서 처음 발견되었다. 8세기 무렵, 유럽은 수준 높은 이슬람 문화를
도입하면서 설탕을 의약품과 사치품으로 들여왔다. 상류층 사이에서 유행하기 시작한 설탕은 양념, 조미료, 감미료
등으로 사용되었다. 설탕의 상품적 가치를 알아 본 유럽 자본가들은 부와 권력에 대한 ‘욕망’으로 설탕 생산을 늘리기에
주력했다. 유럽은 제국주의 식민지를 건설하고 신대륙을 개척하여 사탕수수 경작지를 확보하였고, 삼각무역과 노예무역을
통해 막대한 노예 노동력을 착취하여 설탕 산업을 발전시켰다. 이때 축적한 자본은 19세기 산업혁명과 근대화의 발판이
되었다.
한편, 사치품으로 상류층의 ‘구별 짓기’에 이용된 설탕은 하위계층의 모방심리를 자극하여 생산 증가에 따른 수요를
보장했다. 이에 따라 상위계층은 설탕조각품인 솜씨음식을 만들어 권력을 과시하는가 하면, 차와 커피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차 문화를 고급문화로써 향유하는 등 설탕을 더욱 다양한 방식으로 구별 짓기에 이용한다. 하지만 19세기
산업혁명 이후 설탕의 가격이 하락하자, 높은 칼로리 공급원이라는 실용적인 측면에서 하위계층의 소비가 증대되었다.
이후 노동자의 식사로 자리 잡으며 설탕은 필수품으로 변모하였다. 반면에, 21세기 들어 나타난 웰빙 풍조는 다시금
설탕을 ‘구별 짓기’에 활용하고 있다. 이제 설탕은 건강에 해로운 음식으로써, 상위계층이 아닌 하위계층의 취향으로
구별지어진다.
이처럼 설탕에 반영된 ‘욕망’과 ‘구별 짓기’는 계급화 된 사회를 변화·발전시키도록 기여하였다. 상위계층은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하위계층은 상위계층으로 진입하려는 욕망을 가진다. 계층 간 상반되는 갈등 속에서
계층 간의 불평등과 격차는 더욱 심화되지만 이는 결과적으로 사회를 변화·발전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한 쪽의 희생은
다른 한 쪽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기반이 되며, 소수의 상위계층이 발전하면 하위계층의 수준까지 상승되어 사회
전체의 성장을 이루기 때문이다. 따라서 계급은 미래에도 세분화되고 다양한 형태로 존재해야할 ‘필요악’이다.
계급화 된 사회에서 중요한 것은, 상위계층에 의해 사회가 변동하게 되는 흐름을 이해하여 우리가 그 사회변동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계급화 된 사회의 불평등은 불가피하다. 그러나 이 불평등으로부터 사회 발전이 나온다면, 어느
정도 그 필요성을 인정할 필요가 있다. 사회를 발전시키되 진정 불평등을 개선하고 싶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사회
시스템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 변동의 주체가 되는 일이다. 사회변동의 주체가 될 때 우리는 부패한 시스템에
종속되지 않고 더 나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사회 제도가 부여한 나의 위치에 머물면서 하루하루 생존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은 제도에 순응하는 것일 뿐이다. 형성된 사회 담론에 민감하게 반응하여 제도의 구조를 정확히 파악하고, 계층
상승에 대한 능동적 태도를 지닐 때, 우리는 사회 변동의 주체가 되어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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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주소
최영진, 사회학과 2012104424, cyj9888@naver.com
저는 노예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4학년 학생으로 제 최근 관심사는 ‘취업’뿐입니다. 그러나 이번 과제를
수행하면서, 현대사회에서 사회변동의 주체가 되려는 의식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같은 취업을
하더라도 위에서 주는 월급에 만족하며 하루하루를 살아갈 것인지, 혹은 기업의 중심이 되겠다는 남다른 포부를 가지고
일할 것인지 자신의 태도에 따라 취업의 의미가 상당히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아직은 ‘취업’ 그 자체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만, 취업에 성공하더라도 취업했다는 사실에 만족하고 그 자리에 안주하지는 않아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직장을 다니더라도 더 나은 제 모습을 위해 노력할 것이며 누군가의 명령에 따라 살기보다는 제 삶의 주인으로서
능동적인 삶의 태도를 갖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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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쁜 것에 주목하라!
1.
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
문학동네
2012년
피터 노왁
이은진
2. 책을 선택한 이유
많은 사람들이 ‘포르노’는 선정적이고 유해하고 무익한 것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고지식한 유교사상이 뿌리잡고 있던 우리나라의 첫 번째 그림책은 춘화26)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춘화가 조선의 묘사실력을 한층 높여준 데 기여했을지도 모른다.
어느 교양 수업에서 자기소개를 하는 시간이 있었다. 한 경영학과 학우가 자기를
소개하며 ‘야동 평점 사이트’를 운영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는 “저는 교회
다닙니다. 이상한 사람 아니에요.”라는 말을 덧붙여 웃음을 자아냈다. ‘누군가 한
번쯤 생각해봤을 법 하지만 어딘가 껄끄러워 시도하지는 못했을 일을 해낸 것이
정말 대단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을 할 수도 있지만 사실 ’야동‘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순간부터 어딘가 껄끄러워지는 것이 분명하다. 무언가 이상하지 않은가?
영화를 보고 영화에 평점을 주고 그에 대한 평을 남기는 것은 아무렇지 않으면서
야동을 보고 평점을 주고 평을 남기는 것은 왜 예민하게 반응하며 이상한
사람이라는 오해를 먼저 받아야 할까? 내가 ’성생활‘이라는 주제를 선정한 것은
이런 생각으로부터 출발한다. 사실 종족번식이 목적인 동물이라면 다들 가지고 있는
성욕이고, 인간에게 있어서도 가장 원초적인 본능이라 할 수 있는 성욕은 당연하게
여겨질만 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성(性)‘이라는 단어가 들어가면 사람들이 당황하는 건 인간이 살아오는 역사 가운데
무언가 영향을 받아서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인간이 ’성생활‘에 예민한 태도를 보이는 것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계속 이것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회변동론 발표 주제를 ’성생활‘이라고
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자료를 찾던 중 이 책을 발견하게 되었다. 우리가 너무나도 당연하게 쓰이는 기술들이
포르노 회사에서 가장 먼저 사용하고 발전시켜왔다는 것을 알게 되면 많은 학우들의 반응이 어떨지 궁금했다. 나는
굉장히 놀랐기 때문이다. 또한 여기에는 포르노뿐만 아니라 전쟁, 패스트푸드와 같이 우리를 두려움에 빠지게 하거나
우리의 건강을 위협하는 나쁜 것들이 우리의 삶에 영향을 미친 것에 대해 설명한다.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 그리고
이들이 빚어낸 현대 과학기술의 역사. 현대 과학기술은 인간의 삶을 완전히 바꿔놓았으며, 현대 인간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었으나 이것이 나쁜 것을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는 생각은 아무도 하지 못한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이야기가 재밌어 보이지 않는가? 책도 사례 바탕으로 쓰여서 읽는데도 어렵지 않았고 내용 자체가 흥미로워서 함께
알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3. 저자소개
피터 노왁은 CBS, 내셔널포스트, 뉴질랜드 헤럴드 등의 기자를 거쳐, 현재는 더 글로브, 메일,
토론토 스타, 캐나다 비즈니스 등에서 프리랜서 칼럼니스트와 블로거로 활약하고 있다. 그는
테크놀로지에 관한 전문적인 글을 써, 2009년 캐나다 첨단 기술협회가 수여하는 보도상을
받았고, 2006년 뉴질랜드 통신사용자협회에서 선정한 ‘올해의 전문 기자’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그는 대중문화적인 관점으로 복잡한 이슈와 문제를 일상과 연결하여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는데 탁월한 전문가로 손꼽힌다. 정기적으로 최신 테크놀로지에 관한 CBS라디오 방송에
출연, 2011년 베를린에서 인터내셔널 E-러닝을 주제로 하는 컨퍼런스의 기조연설을 했다.
26) 남녀의 직접적인 성 풍속 장면을 소재로 한 풍속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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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크놀로지와 저널리즘에 관한 전문지식과 폭넓은 경험, 거기에 문화를 초월한 유머와 시각까지 더해 가장 인기 있는
스피커 중 한 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4. 책 내용 요약
이 책의 내용을 한 줄로 요약하자면 이렇다. “음탕하고, 사람을 살상하고, 건강을 해치는 ‘나쁜 것들’이 현대 문명을
발전시켜 왔다.” 책의 표지에 나와 있는 이 문장은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하고 싶은 주장을 전부 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저자는 이러한 생각들을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설명하고 있다.
우선, 인터넷의 발전을 살펴보자. 인터넷은 미국의 국방부가 통신시스템을 구축하면서 시작된 하나의 거대한 국가
프로젝트였다. 인터넷은 사실 엄청난 비용이 들어 기업의 측면에서 보면 비효율과 낭비가 가득한 네트워크였다. 그래서
기업보다는 이것이 필요한 군에서 실시한 것이다. 미국정부는 군에 막대한 군사비를 지출하여 비효율적이지만 분명
필요한 대규모 통신망을 구축하며 인터넷의 발전을 촉진시켰다. 사실 군에 투자한다는 것은 인류를 절멸시킬 무기를
만든다는 것과 다름없다. 하지만 그러한 기술들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물건들이 되었다. 그 대표적인 예를 들어보자.
우선 전자레인지다. 전자레인지는 21세기 초, 전 세계 3억 5000만 명 이상이 사용하고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상품이다. 이러한 전자레인지는 군대에서 쓰이던 레이더를 다른
용도로 사용한 것이었다. 이 레이더는 원자폭탄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정확히 안내해주는
하나의 살상무기였다. 또한 우리가 너무나도 쉽게 사용하는 랩. 플라스틱 용기들도 다
전쟁을 위해 만들어진 기술이었으며, 프라이팬을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생각나는 테팔이라는
회사도 전쟁에서 전선을 감싸는 용도로 쓰였던 테프론27)이라는 물질을 이용해서 성공한
회사이며, 방수와 방풍기능에 뛰어나 요즘 많은 옷들에 적용되고 있는 고어텍스 기술도
전시에 만들어진 테프론을 이용한 것이다. 따분한 요리하는 일에서 사람들을 해방시킨
전자레인지, 고생해서 번 돈을 써도 좋을 만큼 새로운 제품을 계속해서 내놓는 플라스틱과 같은 소비재들은 새로운
생활방식을 창조했다. 이렇듯 전시에 살인 기술을 완벽하게 만들어준 발명품에서 파급된 대량
소비라는 무기가 가정과 일상생활을 완전히 바꿔버렸다고 할 수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지금까지의 기술발전 역사를 되짚어 보면 우선 군대의 비효율적일 정도의 투자가 이뤄진다.
로봇도 마찬가지다. 미국은 군용 로봇에 엄청난 투자를 했고 이는 거대한 하나의 시스템을
구축했다. 이제 이걸 민간부문에서 상업용으로 전환하면서 소비재로 발전하게 된다. 그런데 이
로봇산업을 재빠르게 소비재 산업으로 이끈 첨단 산업은 바로 포르노였다. 그것이 바로
섹스로봇이다.
섹스로봇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포르노 산업은 기술 개발에 돈을 쓰지만 포르노 기술 혁신을 위해 과학자를 고용하고
연구실을 만들진 않는다. 대신에 포르노 산업은 얼리 어답터로서 영향력을 행사한다. 포르노 산업에서 흘러나온 돈이
종종 기술을 개발하는 회사들의 파산을 막아주고, 일반 대중도 이용할 수 있도록 기술을 혁신하는 것을 돕는다. 포르노
회사들은 극도로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에 항상 최신 기술을 유지하고 가능한 한 빨리 제품들을 고객들에게 전달하려
한다. 그리고 대개 회사 규모가 작고 융통성 있기 때문에 새로운 기술에 빨리 적응할 수도
있다.
그렇게
포르노를
통해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게
된
기술들은
무엇일까?
폴라로이드 카메라와 캠코더는 누드촬영과 포르노물 촬영을 위해 많은 사람들이 사용하며
발전하였다. 또한 잡지를 웹사이트로 옮긴 것도 포르노 잡지인 ‘플레이보이지’가 거의
최초였다. 이는 웹진의 저작권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디지털 워터마크28) 삽입 기술의
개발로 이어졌다. 또한 핍쇼29) 부스에서 영감을 얻어 언제나 보고 싶을 때 가능한 한 빨리
포르노를 볼 수 있도록 하는 취지에서 시작한 동영상 사이트는 인터넷에서 비디오로 돈을
버는 기술과 사업방식까지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인터넷에서 동영상을 볼
27) 테프론은 불소와 탄소의 강력한 화학적 결합으로 인해 매우 안정된 화합물을 형성함으로써 거의 완벽한 화학적 비활성 및 내열성,
비점착성, 우수한 절연 안정성, 낮은 마찰계수 등의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28) 어떤 파일에 관한 저작권 정보를 식별할 수 있도록 디지털 이미지나 오디오 및 비디오 파일에 삽입한 비트패턴
29) 독립된 부스(booth)에 들어가 유리창 너머에서 공연되는 여성의 스트립쇼를 보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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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쓰는 고화질 스트리밍의 기술도 포르노 웹사이트에서 동영상을 더 좋은 화질로 올리기
위해 개발하게 된 기술이다. 웹사이트에 올린 포르노물을 유료로 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개발한 신용카드 자동 결제 방식과 전자화폐의 개발은 지금의 모바일 결제 방식 개발에도
도움을 주었다. 지금은 거의 모든 웹사이트에서 제공하는 쌍방향 화상회의 방식도 사실은
스트립쇼를 생방송으로 인터넷에 올려주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하면 믿을 수 있겠는가?
이뿐만 아니다. 웹사이트를 개발하면서 더 돈을 벌기 위해 광고 제휴 시스템을 개척했다.
이는
우리가
구글을
사용하다보면
자주
검색하는
상품이
광고화면에 뜨는 것과 같은 문맥 기반 광고 시스템(GDN)의
토대가 된다. 이뿐만 아니다. 섹스토이사업은 4D영화의 전신이라
할 수 있고 촉감이 살아있는 섹스토이를 개발한 기술을 의수와 의족에 접목시켜 촉감이 있는
의수족을 만드는 작업도 진행 중이다. 이처럼 우리가 꺼려하고 숨기는 포르노 산업은 사실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기술들의 전신이 된다. 또한 구글, 애플, 아마존, 이베이, 야후 등 거대
인터넷 기업의 수익을 모두 합친 것보다 많은 돈을 굴리는 시장을 가지고 있으며 전 세계
기업체들이 다음에 무슨 기술을 내놓을지 촉각을 곤두세우고 지켜보는 엄청난 산업이다.
식욕도 마찬가지다. 원재료 그대로 먹는 것보다 영양가도 떨어지고 여러 가지 첨가물들이
들어가지만 오래 보관이 되고 더 편리하고 더 맛있게 먹을 수 있다는 이유로 냉동 및 가공기술이 생겨났다. 이렇게
생겨난 제품들이 우리가 쉽게 접할 수 있는 스팸, 감자튀김, 분유와 같은 것들이다. 그런데 이러한 것들이 전쟁과 연관이
된다. 나폴레옹은 “군인은 위장으로 전진한다.”는 말로 유명할 정도로 행군하는 동안 군인들을 잘 먹이려고 애썼다.
그러나 18세기 식품 보관 및 저장 기술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매우 힘든 일이었다. 그래서 그는 상금을 내걸고 식품
저장 기술 개발을 촉진시켰고, 아페르라는 사람이 1810년 고기나 채소 같은 음식을 보관할 수 있는 공정을 발견했다.
이것이 통조림의 시초다. 스팸은 이 기술과 비슷한 기법으로 만들어졌다. 스팸을 만든 사람은 제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병참 장교였던 제이 호멜이다. 그는 전쟁이 끝난 후 정육업을 했고 사람들이 잘 먹지 않는 살을 가지고 더
맛있게 만들기 위해 첨가물을 넣어 실험하고 거기에 고기 색깔이 까맣게 변하지 않도록 아질산나트륨을 첨가하자 몇
년간 찬장에 두어도 상하지 않는 다용도 고기 통조림인 스팸이 탄생했다. 스팸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과 영국에 군용
식량으로 배급되면서 엄청나게 팔렸다. 사실 스팸은 절대로 건강에 좋은 음식이 아니었다. 하지만 오래가고 쉽게 먹을 수
있어야 하는 군용 식품으로 시작한 기술은 건강을 신경써줄 만큼 친절하지 않았다. 감자튀김도 마찬가지였다. 미국 최대
감자 운송업체의 사장인 존 리처드 심플롯은 감자칩을 처음으로 만들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미군에 팔았다. 그는 이로
인해 상상하지 못할 부를 얻었다. 그는 더 새로운 사업을 위해 감자튀김을 냉동하는 법을 찾아냈다. 그냥 기름에
튀기기만 하면 맛있는 생감자 튀김의 맛이 나는 냉동 감자튀김이 만들어졌지만 이를 찾는 사람은 없었다. 그래서
심플롯은 그 당시 빠르게 성장 중이던 맥도날드를 찾아갔고 생감자를 쓰며 한계를 느꼈던 맥도날드는 냉동 감자튀김으로
갈아타기 시작했다. 그리고 다른 패스트푸드 체인점도 맥도날드의 뒤를 따랐다. 심플롯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는데
심플롯이 부자가 된 데에는 전시 유대관계를 활용해 군사 전문가들을 고용하는 데 노력을 기울인 덕이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이 말은 군사 전문가들이 그만큼 지식이 많고 전문성이 있다는 말이 될 것이다. 이렇듯 우리가 지금도 너무나도
자주 접하는 스팸, 주스, 패스트푸드점의 감자튀김 등 많은 가공식품들의 시작은 전시식량이거나, 더 편하게 맛있는 것을
먹으며 살고 싶은 욕망이었다. 건강하게 살고자 하는 욕망이 아니었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은 기술이 사회변동에 큰 역할을 했다고 생각하고, 그 기술의 발전에는 부끄러운 욕망의 삼위일체, 즉 섹스와
전쟁과 패스트푸드가 있다고 말한다. 전쟁과 섹스, 그리고 음식. 이 세 가지가 의미하는 것은 아주 오래된 인간의
욕구다. 인간은 육탄전이든 정치 공방이든 스포츠든 싸우고 경쟁하면서 주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집착한다.
또 살기 위해 먹을 것을 얻기 위해 싸우며, 섹스를 위해 음식과 선물을 이용한다. 지금 우리가 언제 어디서든 TV와
인터넷을 통해 만나는 각종 스캔들도 다 다이어트, 성매매, 비만, 테러 등 이 세 가지와 연관되어 있지 않은가. 이
책에서는 이와 같은 인간의 욕망을 잘 이용하고 그것을 산업적으로 활성화시킨 사례들을 통해 사회가 어떻게
변화해나가는지를 보여 준다. 즉 세상을 어렵게 만드는,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는 혹은 별로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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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구와 그를 반영한 사업들이 세상에 엄청난 기회와 변화를 제공한다는 것이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이라 할 수 있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성욕과 전쟁욕구는 가장 원초적이면서도 가장 강력한 인간의 본능이다. 이 두 가지 본능은 인간의 기본욕구인 동시에
중요한 행동을 이끌어내는 동기이기도 하다. 인류는 수세기 동안 이 두 가지 힘을 부인하거나 외면하거나 치료하거나
억누르려고 애를 써왔지만 아직까지 뾰족한 대안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이런 욕구를 만족시키는 사업이 돈을 많이
벌게 해주었다. 그러나 경쟁에서 밀리지 않고 계속 괜찮은 수익을 내려면 더 좋은 기술이 뒤를 받쳐줘야만 한다. 우리는
그래서 이런 욕구를 만족시키는 사업을 위해 기술을 계속 연구하는 것이다. 물론 우리를 충동질하는 강한 욕망은 하나
더 있다. 바로 음식에 대한 욕구다. 식욕은 다른 욕구를 능가하는 인간의 본능 중 본능이다. 음식이 없으면 생존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역사를 통틀어 우리 인간이 손에 쥔 모든 자원을 가져다 식량을 확보하는데 써온 것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식량은 언제나 권력과 관계가 있었고, 그 때문에 늘 갈등을 낳았다. 역사적으로 가장 많은
식량을 가진 사람이 가장 많은 권력을 누렸고 많은 식량을 생산하는 최상의 방법은 기술을 이용하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역사상 가장 많은 권력을 누린 사람은 많은 기술을 가져 많은 식량을 소유한 사람이다. 이는 현대사회에서만 적용되는
법칙이 아니다. 어떤 사회에서든 부유한 사람은 부족함 없이 잘 먹고 잘 마시는 사람이다.
전쟁, 섹스, 음식에 대한 인간의 본능은 기술뿐 아니라 인간의 진화에도 영향을 미쳐왔다. 최근에 발견된 440만 년
전의 인류의 해골은 이제껏 발견한 것 중 가장 오래된 해골이다. 이 해골은 네 발로 걷던 인간을 두 발로 걷게 만든 세
가지 요소가 전쟁과 섹스, 음식이라는 증거를 보여준다. 오하이오 주에 있는 켄트 주립대학교 연구진은 원시인 남성들이
여성의 관심을 끌기 위해 싸움을 하며 기량을 겨뤘다고 말한다. 그런데 경쟁자들과 힘을 겨뤄 마침내 짝을 얻은
유인원은 항상 가장 강하고 사나웠다. 그러면 힘 싸움에서 진 남성들은 여성을 포기했는가? 그건 아니었다. 그들은 힘이
아닌 다른 전략으로 여성에게 접근했다. 바로 선물이다. 인류가 태동하던 시기에 이들에게 의미 있는 선물은 오직 하나,
음식뿐이었다. 연구진은 힘이 약한 남성이 여성에게 음식을 가져다주려면 일단 손이 자유로워야 했기 때문에 두 발로
걷는 법을 배웠다고 추정한다. 인류의 가장 큰 진화라고 여겨지는 직립보행이 전쟁, 섹스, 음식이라는 인간의 욕망에서
나왔다는 것은 한편으로는 신기하지만 한편으로는 당연하다.
인간은 언제나 욕망을 따라 움직여왔다. 지금도 사람들은 여전히 식량을 얻고 섹스를 위해 싸우고, 섹스를 하려고
음식과 선물을 이용한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서로 교차하는 이 세 가지 고유 본능에 집착하게 되었다. 언제
어디서든 신문을 펴거나 TV만 켜도 이 증거를 확인할 수 있다. 지금 한창 방송과 신문 지면을 장식했던 IS의 테러에
대한 국가들에 대응과 난민들의 문제, 그리고 여러 지역에서 벌어지는 국지적인 전쟁 소식, 전염병처럼 퍼지는 비만,
그와 상대되는 다이어트 열풍, 유명인들의 성생활, 성 스캔들로 구속되는 정치인들의 이야기를 쉼 없이 실어 나른다.
전쟁과 음식, 섹스는 어디에나 있다. 우리가 이것들을 원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는 전쟁과 음식, 섹스
이 세 가지와 떨어뜨려 생각할 수 없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전쟁과 포르노, 패스트푸드가 모든 기술의 발전을 이끌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산업들도 각자 제몫을 성실하게
해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마이크로소프트와 애플 같은 컴퓨터 및 소프트웨어 거물들은 윈도우 운영체제부터
아이팟까지 아주 많은 기술혁신을 이뤄냈다. 자동차 제조업체들도 동력조향장치부터 충돌 탐지기까지 꾸준히 더 나은
제품을 선사했고 무인자동차라는 꽤 근사한 로봇도 만들었다. 앞으로 몇 년 안에는 이보다 더 대단한 제품이 나올
것이다. 제약 회사들도 그동안 혈압부터 발기부전까지 모든 질환을 치료하는 약을 개발함으로써 많은 기적을 이뤄냈다.
미래에 우리는 더 효과 빠른 백신을 손에 쥘 것이다. 그런가 하면 통신회사들은 인터넷부터 휴대전화까지 무수히 많은
방법으로 우리를 서로 연결해주었다. 인터넷에 바로 연결해주는 휴대용 칩을 우리 머릿속에 넣을 날도 멀지 않았을 것
같다. 이런 산업들은 군과 포르노, 패스트푸드 산업에 전혀 뒤지지 않는다. 그들도 신제품을 만드는 기술혁신과 그로
인한 이윤 증대에 크게 의존한다. 그러나 이들은 대부분 사업가나 독창성, 고상한 욕구를 통해 영감을 얻는 일명 깨끗한
산업이다. 우리는 앞에서 살펴본 부끄러운 삼위일체를 대하듯 이들 산업을 내려다보지 않는다. 우러러보고 대단하다고
말하며 찬양한다. 하지만 사실상 이들 중 진짜 깨끗한 산업은 하나도 없다. 사실상 모든 산업은 직접적으로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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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접적으로든 전쟁과 섹스, 패스트푸드의 부끄러운 삼위일체가 이룬 기술혁신 덕분에 이득을 보았다. 결국 우리는
부끄러운 삼위일체가 모두 사라진 세상을 만들어내지 못할 것이다. 전쟁과 섹스, 패스트푸드 기술이 앞으로도 우리가
사는 세상을 이런저런 모습으로 빚어나갈 것이다. 우리는 그에 따르게 될 것이다.
20세기 이 세 산업을 주도한 것은 미국이었지만, 세계화에 의해 점점 이 세 산업은 세계로 나아갈 것이다. 패스트푸드
기술은 이미 세계로 뻗어나갔으니까 말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포르노에 대한 수요도 세계적인 수준이지만,
플레이보이처럼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는 기업은 소수다. 포르노 산업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소규모 회사가 많은 탓이다.
그러나 인터넷에서 불법복제가 성행하고 이로 인해 포르노 산업이 쇠퇴하면서 모든 이들이 합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고
이제 곧 작은 회사들은 좀 더 경쟁력 있는 큰 회사들과 합병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면 점점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는
대기업들이 생겨날 것이다. 전쟁은 어떨까? 국방은 개별 국가의 영역이기 때문에 세계화가 이뤄질 수 없는 유일한
시장이라 여겨질지 모른다. 그러나 여러 나라들은 국사 산업을 공유하는 집단방위체제를 구축해왔으며 특히 오늘날에는
서구 대 동구의 대결이 아니라 국가 대 테러리스트의 대결로 시장이 재편되었다. 그래서 앞으로 조금 이상한 조합을
상상해보자면 중국과 미국의 두 나라가 힘을 합쳐 테러리스트에 대항하고 군사기술을 공유하는 일이 나타날지도 모른다.
사실 지금도 화웨이(Huawei)30)와 같은 중국 회사들이 미국 통신망을 구축하고 있다. 통신망은 국가 안보에 아주
치명적이라는 이유로 DARPA31)가 직접 연구를 진행했던 사회기반시설이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실제로 중국은 기술 발전을 주도하는 세력이 될 것이다. 2008년, 중국은 처음으로 군사비
지출에서 세계 2위를 기록했다. 이는 중국이 전쟁을 준비하기 위함이 아니다. 그동안 뒤처져 있던 부분을 만회하려는
것뿐이다. 중국의 무기고는 대부분 1950년대 소련제 무기로 이뤄져있었기에 이를 현대화하기 위해 투자하는 것이다.
그리고 포르노를 금지하는 중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포르노 시장이기도 하다. 중국 정부는 포르노를 근절하기 위한
강력한 조치를 취하고 있으나 포르노에 대한 중국인의 수요가 다른 나라 사람들에 비해 떨어지지는 않는다. 포르노
매출이 가장 높은 3개국이 중국, 한국, 일본이라 하니 말할 것도 없다. 그러니 중국에 포르노가 침투하는 것은 막을 수도
피할 수도 없다. 그리고 지금 중국은 식품 가공기술에 눈부신 발전을 이루고 있다. 이미 미국이 1950년대에 경험했던
일을 뒤쫓아 가고 있는 것이다. 예상대로 패스트푸드는 단연 인기다. 중국은 지난 20년간 식품 산업이 두 자리 수로
성장했다. 10억 명이 넘는 사람들을 먹여야 하니 이런 성장세가 쉽게 꺾이지는 않을 것이다. 그리고 이런 성장 속에서
중국 과학자들은 새로운 식품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미국 과학자들만큼이나 많은 노력을 기울일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50년 뒤에는 우리 모두 미국드라마 <스타 트렉>32)에서처럼 복제기로 만든 인공 식품을 먹을지도 모른다.
개발도상국 중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가장 크고 분명한 예는 중국뿐이지만, 다른 나라들도 현대화 작업을
진행하면서 신기술을 개발하고 있다. 이런 신기술은 단순히 우리가 소유하는 물건만 바꾸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이
우리에게 영향을 끼치는 방법, 세상을 바라보는 우리의 시선, 우리가 관계를 맺는 방법까지도 바꿔놓을 것이다. 기술은
실용적인 새로운 장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을 향상시키는 것에 관한 이야기다. 기술은 우리의 필요와
욕구를 채움으로써 암흑시대에서 우리를 끌어냈다. 우리는 기술과 함께 점점 발전하고 있다. 이들이 우리에게 가져다 줄
신기술도 마찬가지다. 결과적으로 섹스와 폭탄과 햄버거는 계속해서 우리가 속한 세상과 우리의 삶을 이런저런 모습으로
빚어나갈 것이다. 그리고 새로운 문명은 ‘더 나쁜 것’을 찾았을 때 탄생할지도 모른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책을 읽으며 작가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패리스 힐튼의 섹스 비디오가
야간영상촬영기술로 촬영된 것을 보고 걸프전33)의 전쟁영상이 떠올리고 그 생각을
바탕으로 섹스와 전쟁의 연관성을 밝혀내는 작가의 창의력은 대단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과학 기술을 다루는 글을 쓰는 사람이라 그랬을까? 나쁜 것들이 현대 과학기술을
발전시켰다는 저자의 주장이 신선하지 않은가? 그저 과학기술이라고 하면 전구를 만든
30) 중국에서 가장 큰 네트워크 및 통신 장비 공급업체.
31) 미국방위고등연구계획국[Defenc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 美國防衛高等硏究計劃局]:군사 기술을 주로 연구하는 미
국 국방부 소속 기관
32) 엔터프라이즈호의 승무원들이 우주를 탐사하면서 외계 문명을 접하고, 그 과정 중에 벌어지는 모험과 스릴을 담은 작품
33) 이라크의 쿠웨이트 침탈(侵奪)이 계기가 되어, 1991년 1월 17일∼2월 28일, 미국·영국·프랑스 등 34개 다국적군이 이라크를 상대
로 이라크·쿠웨이트를 무대로 전개된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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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디슨, 산업혁명의 시작인 방직기로부터 시작하여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노트북, 그리고 내가 즐겨보는 유투브,
SNS라는 이름의 사람들 간의 연결망과 같은 웹사이트들, 매일 한시도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핸드폰이 생각난다. 그리고
이러한 것들은 대단한 사람들이 대단한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낸 대단한 것들이라는 생각이 든다. 천박하게 여기는
포르노로부터, 잔인하게 여기는 전쟁에서, 맛있는 쓰레기라고도 부르며 더럽다고 여기는 패스트푸드에서 왔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책을 읽다보니 재미있게 풀어진 저자의 말에 완전히 설득되었고, 완전히 믿게 되었다. 우리가 사회를
보는 눈은 신선해야 한다. 남들이 생각할 수 있는 대로 생각하면 진실을 알지 못한다. 남들이 보지 않는 측면에서
바라보면 거짓과 오해에 휩싸인 것이 아닌 진짜 모습이 보인다. 아니다. 사실 보이는 그대로 봐도 된다. 대신 보기 싫은
부분에서 내 눈을 가리지 않고 정확히 현실을 마주해야 한다. 그러면 보인다. 무엇이 진짜인지. 아마 인간은 보고 싶은
것만 보기 때문에 보지 못할 것이다. 사실 모든 산업은 나쁜 것이 가득한데, 그걸 알지 못한다. 돈이 되게 하려면 착한
마음으로 하면 안 된다. 많은 현실을 봤을 때, 진짜 착하게 장사하는 집은 매번 적자에 시달린다. 어느 한 곳에서라도
사람을 속여야 이익을 얻을 수 있다. 즉, 아무래도 앞으로의 세상은 더 나쁜 것을 찾아야 성공하는 사회가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1) http://kiss7.tistory.com/m/post/407 플레이보이誌-신기술은 사람 죽이기/성산업에 가장 먼저 적용된다. 과학
신기술이 적용되는 데에 일종의 공식 같은 과정이 전쟁과 성산업이라고 주장하며, 포르노 잡지인 플레이보이지가 어떻게
신기술에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설명하는 글.
2)
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인생학교:섹스
쌤앤파커스
2013
알랭 드 보통
정미나
인생에 있어 섹스가 무엇인지에 대해 집필한 책이다. 이 책은 연애, 사랑, 결혼, 불륜은 물론이고, 탐욕, 헌신, 성공,
타락의 모든 것의 교집합이자 세상 모든 문학, 영화, 노래가사의 바탕에는 섹스가 있다고 말하며 ‘섹스’라는 것에 대해
철학적으로 고찰한다. 내가 이 책을 추천하고 싶은 것은 성욕이라는 주제를 다른 시선으로 바라볼 수 있는 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책에 나오는 한 구절을 소개하고 싶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성욕 때문에 생기는 이러한 고통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일까? 어쩌면 성욕이 없으면 예술과 음악을 이해하는 능력이 떨어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고통에 대해 훨씬 더 둔감해졌을 테고, 스스로를 비웃는 일에 서툴렀을 것이며, 그래서 인간에 대해 훨씬 더 잔인해졌을
것이다.”
3)
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현대과학철학논쟁
아르케
2002
저자
칼 포퍼, 토머스 새뮤얼 쿤, 임레
라카토슈
역자
조승옥
위에서 설명했던 책 섹스, 폭탄, 햄버거에서 하고 싶은 것은 한편으로 흠없고 중립적인 과학의 실상을 발가벗게 만드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부끄러운 삼위일체가 과학기술의 발전을 추동해왔던 점을 지적하며 과학이 가치중립적이며 그것을
사용하는 것이 인간이기에 과학 기술의 근거 없는 환상은 떨쳐버려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책 '현대과학철학 논쟁'은
20세기에 이루어졌던 과학의 실상을 밝히는 시도이다. 이에 서구의 과학기술에 대한 환상을 무너뜨리는 책이라고 할 수
있다.
4)
제목
휴먼 3.0 : 미래 사회를 지배할 새로운
인류의 탄생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새로운현재
2015
피터 노왁
김유미
‘섹스, 폭탄 그리고 햄버거’의 저자인 피터 노왁의 다른 책이다. 보통 우리는 미래에 로봇이 발전한다면 로봇이 인간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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뛰어넘는 일이 벌어지고 이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하지만 저자 피터 노왁은 컴퓨터의 인공지능 발전이 인간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말한다. 물론 컴퓨터의 인공지능은 인간의 집단지능을 뛰어넘는 시대가 온다. 하지만
이는 컴퓨터 인간을 지배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현자와 같은 비서와 항상 함께 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작가는 이 시대에 우리가 어떤 일을 하게 될지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다. "컴퓨터 인간의
지혜를 뛰어넘으면 그것이 우주의 본질로 확장되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믿는다. 마지막 시대에는 모든 물질과 에너지에
인간과 기계의 혼합지능이 스며들면서 우주가 '깨어날' 것이다. 인간은 신에 대한 질문과 우주에 대한 답변으로 돌아갈
것이다. 우리가 하게 될 유일한 일은 새로운 우주를 설계하고 제작하는 일일 것이다." 기술이라는 것을 통해 인간의
본질을 바라보는 저자의 시선은 먼저 쓴 책과 비슷한 관점이라 할 수 있다.
10. 종합결론
아침에 일어나서 일회용 즉석 밥은 전자레인지에 데우고 3분이면 조리가 끝나는 즉석 국을 끓여서 먹는다. 시간에
쫓겨 점심 대신 물만 부으면 되는 컵라면을 먹기도 한다. 바쁘고 빠르게 살아가는 학생들, 또는 직장인들이라면 한 번쯤
아니면 매일 겪는 일상이다. 우리는 이런 삶들을 일명 ‘패스트푸드 인생’이라고 말하며 이러한 인생을 사는 우리들을
바라보며 한숨을 내쉰다. 그런데 저자의 논의에 따르면, 이런 인생은 첨단 기술이라는 인류 문명의 유산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다. 즉, 우리가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 패스트푸드 인생이야말로 ‘문명’이라는 것이다. 먹고사는 문제를
오늘날처럼 편리하게 만들어준 숱한 기술들이 사실은 인류를 파괴하려는 노력에서 나왔다는 아이러니는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건강에 좋지 않은 스팸 같은 제품이 오랫동안 팔린 이유는 무엇일까? 전투식량으로 개발되었기에 영양가
따위를 따질 수가 없었다는 것이 큰 원인 가운데 하나다. 즉, 전쟁이라는 비인간적인 상황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전쟁에서 중요한 것은 생존이었고, 따라서 건강에 좋은 것보다 값싸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을 찾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기술의 발전은 이처럼 비인간적인 기원을 가졌다고 할 수 있다. 감춰진 기술의
역사들을 알아가면서 우리는 현대의 삶을 구성하는 다양한 사물과 기술들이 어떻게 탄생한 것인지를 생생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식품뿐만 아니라 카메라와 인터넷까지, 저자가 선정한 섹스, 폭탄, 햄버거라는 키워드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역사들을 꿰뚫어 보여준다. 무심코 지나가는 우리의 일상 속에서 20세이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다는 것도 알아갈 수
있다. 현대에 살고 있는 우리의 삶에는 근대가 만들어내었다는 것을 알면서 역사를 더욱더 자세하고 정확히 알아야 함을
알게 된다. 그리고 기술이 나쁜 것에서 시작했지만 우리의 삶에 이롭게 사용되고 있으며 또 현대에는 그렇게 발전된
기술에 대해 비판하면서 새로운 깨끗한 기술을 찾아가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책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기술은 가치중립적이다. 문제는 우리가 기술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기술이라는 것은 인간에 의해
사용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사용하느냐에 따라 우리는 그것을 나쁜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좋은 것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전쟁에서는 한 지역을 폭파시키는데 사용되는 레이더기술이 바쁜 일상 속에서 조금이라도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전자레인지로 사용되는 것은 분명 다른 목적이지 않은가. 우리는 지금 이 자리에서 우리가 살아온 삶을
되돌아보면서 어떤 목적에 의해서 우리의 삶을 발전 시켰는지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11.
정예은,
사회학과,
2014104430,
스물한
살의
끝을
마무리하고
있는
사회학과
정예은입니다.
yeeun5026@naver.com
70
생명보험과 사회변동
1. 책 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죽음의 문화와 생명보험』, 신아, 2006, Viviana.A.Zelizer, 원용찬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이 책은 생명보험이라는 특정 사회제도의 출현 및 발전에 얽힌 역사적 맥락을 설명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생명보험이
사회문화적, 의식적 반발을 딛고 보편적인 사회보장제도의 한 축으로 자리잡기까지의 과정을 소개한다. 그 중심에는
인간의 생명에 관한 전근대의 신학적 전통이 자본가들에 의해 깨어지는 과정이 있다. 이 책에서는 생명보험이 근대화의
핵심을 지나는 상징적인 제도로서 출현하였으며, 이후에도 근대적인 모습의 사회를 형성하는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특히 자본주의의 발달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근대적 생명보험 제도의 탄생 과정을 엿보며 한 사회의
근대화의 발자취를 따라가기 위해 이 책을 선택하였다.
3. 저자소개
비비아나 젤라이저는 미국 프린스턴대학교 사회학과 교수로 재직중이며, 생명보험과 화폐를 통한 사회사적 의미 작업을
꾸준히 수행하고 있다. 이와 관련된 저서로는 <돈으로 따질 수 없는 어린이에 가격 매기기Pricing the Priceless
Child(1985)>, <화폐의 사회적 의미The Social Meaning Of Money(1994)>가 있다.
4. 책 내용 요약
이 책에서는 사회변동을 유발한 하나의 혁신으로서 생명보험을 바라본다.
<서론, 1장, 2장>
첫째, 생명보험은 경제행동의 비경제적인 측면에서 생명보험이 사회적으로 정당성을 얻기까지 벌어졌던 문화적,
이념적인 요소들의 충돌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근대 보험의 과도기적인 모습을 보면 톤틴연금이나 도박보험이
횡행했었다는 기록이 있다. 그것은 생명이 보험에 걸리면서 경제영역의 한 부분이 되는 과정에서 잠시나마 사행성을
보이기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둘째, 생명과 죽음이라는 것에 가격이 매겨지고 마침내 시장에 편입하면서 구조적인 딜레마가 생겼다. 이 두 가지
이유로 인해, 생명보험은 하나의 혁신이다.
근대 이후 새로 태어난 사람들의 기대여명은 이전보다 월등히 증가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특히 여성의 여명이
남성보다 높게 나타남과 동시에, 남편 사후에 여성 및 자녀들이 겪을 경제적인 문제가 심화되었다는 것이다. 집안 경제의
전부를 책임지던 남편의 죽음은 가계경제에 크나큰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이는 여성들이 남편의 생명보험을 들도록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그러나 잠재적 보험 가입자인 서민들은 보험에 대해 무관심했고, 또 그만큼 무지했기에, 보험
증서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다.
<3장 ­ 영국과 프랑스 비교>
당시 사람들에게 자신의 생명을 직접 담보로 하여 돈을 내라고 말하는 것에는 크나큰 의식적 저항이 있었다. 생명의
보장을 지역사회가 아닌 시장에 맡겨버린다는 것에 대한 도덕적 문제를 느꼈던 것이다. 특히 생명보험에 가입하는 것은
근면과 절약 없이 안정적인 미래를 바란다는 인식도 당시의 청교도 윤리에 어긋나는 일이었다. 따라서, 화재나
해상보험과 달리 생명보험에 확산 및 발달에 있어서 브로커의 능력과 역할이 매우 중요한 변수로 작용한다. 당시
브로커들은 생명보험을 맹렬히 거부하는 대중들의 반응에 상당히 당혹스러워 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브로커와 대중들의
대립은 재산을 통해서라도 생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과 목숨을 물질로 환원할 수 없다는 두 가지 관점의 대립이기도
했다.
이렇듯 시작부터 수많은 반발과 문화적 거부가 있었던 생명보험이 어떻게 근대의 중요한 금융제도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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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경우, 생명보험은 국가의 안정적인 지원을 받으면서 빠른 시작을 보였다. 1706년 영국 최초의 생명보험회사
아미카블 소사이어티가 설립된다. 이후 20년이 채 되지 않은 1721년, 영국 의회는 “생명보험은 유익하고 유용한
것”이라고 강조하며 정부 차원에서 보험사를 적극 지지한다. 그러부터 약 100년 뒤 1852년 의회는 “보험가입자는
사회에서 최고이며 또 가장 존경받을 만한 계층”이라고 다시 한번 더 언급한다. 그러나 영국에서 생명보험이 일반적인
보험이 된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프랑스의 경우도 크게 다르지 않다. 프랑스는 보험계리에 필요한 정교한 확률론을 가지고 있었고 사망표도 정확하게
작성할 줄 알았으며, 보험료 또한 비싸지 않았다. 전반적인 기업의 재무상태도 나쁘지 않았고, 가계경제도 안정적인
편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생명보험 사업이 자리잡기까지 그렇게 오랜 시간이 걸렸는지에 대해 생각 해 본다면, 두 나라 모두
관습적이고 이념적인 저항에 직면했기 때문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에서는 “어떤 사람의 사망에 따른 장래 일을 계약서로 꾸미는 일은, 그런 계약 당사자의 한쪽에게 사망을 성취하고
싶은 욕구를 자극할 수 있다는 관념이다”라고 말하면서 생명보험이 당시 맞닥뜨렸던 이념적 딜레마를 설명한다. 특히
당시 횡행했던 도박·투기성 보험의 경우, 죽음의 불안과 생존권 보장과는 약간 다른 종류의 문제를 야기한다. 상대방의
죽음과 나의 이윤이 직결되어 있는 구조 속에서, 다른 재난보험들과 생명보험은 근본적인 차이를 보였다. 생명보험이
초기에 투기라는 오해를 받은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이것은 근대적인 생명보험만의 문제였다.
<4장 ­ 생명보험과 죽음>
여태까지 죽음에 대한 문화적 가치가 생명보험의 발전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정확히는 어떻게 생명보험 발전을
가로막았는지) 살펴보았는데, 이제는 생명보험이라는 제도가 확립되고 나서 당시의 지배적인 가치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지에 대해 알아보려 한다.
생명보험에 대한 반감은 인간생명을 금전적으로 평가하는 것에 대해 거부하던 문화적 풍토에서 기인한 것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생명보험은 화폐와 죽음을 결합하는 매개자의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화폐는 죽음과 보험을 연결 해 주는
징검다리 역할을 했다. 가족구성원들에게 죽음을 처리하는 것은 하나의 의례였다. 그런데 이 일을 고도로 구조화된
제도에 일임할 수 있게 된 것은 생명보험의 출현 이후였다. 그러나 죽음을 시장에 내보낸다는 것 자체가 인간 생명의
존엄성과 관련된 기존의 도덕관에 위배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결국 죽음을 객관화 하는 것에 성공했고, 생명보험은
죽음과 관련된 일상을 합리적reasonal인 측면에서 관리하는 역할을 위임받게 된다.
이렇듯 화폐와 죽음의 이중적인 관계(현실적 화폐와 상징적 죽음)는 생명보험의 발전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생명보험은 현금을 생명으로 대치하기 때문에 생명모독이라고도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사망시 화폐를 상징적으로 잘
사용하여 난감한 상황을 잘 해결해 주는 적당한 장치가 되어주었던 것이다.
<5장 ­ 생명, 우연, 그리고 운명>
생명보험은 인간이 사회 속에서 리스크를 대하는 태도를 변화시켰다.
전근대 사회의 사람들은 리스크에 대한 불안을 종교와 운명론에 귀의하여 해소했다. 혹은 자본주의 태동 이후
기업가들은 자본을 축적하며 자신들의 미래의 리스크를 해소하고자 했다.
따라서 경제적 위기를 협동과 자조를 통해
처리하는 효율적이고 또 세속적인 리스크 부담제도로서의 생명보험이 태동하게 된 것이다.
<6장 ­ 생명의 보험 마케팅 : 도덕적 설득과 영리기업>
생명보험은 마케팅 전략과 만나 기존의 협동·자조의 의미를 잃어가기 시작했다. 보험의 유형이 상호부조에 가깝던
시기에는 신뢰와 자발적·공동체적 연대를 기반으로 호혜적인 부조가 이루어졌다. 반면 상호부조가 시장에 뛰어들게
되면서 부조는 철저히 합리성에 기반한 경제적 교환으로 탈바꿈한다. 연대는 기꺼이 자발적으로 결성하는 것이 아닌
판매자-구매자 관계의 계약이 되었고, 원조는 화폐를 기반으로 유료로 이루어진다. 이 뚜렷한 변화는 증여관계 체제가
새로운 경제로 이행되었음을 나타낸다. 생명보험을 이끌어나가는 도구적 원동력이 도덕에서 비즈니스로 이행된 것이다.
생명보험 및 이를 통해 나타난 변화의 문제는 더 이상 도덕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비즈니스 모델로 간주하고
풀어나가야 한다. 여기서 “보험은 인간적인 서비스를 화폐 서비스로 대체하고, 사회의 근간을 이뤄야만 하는 측은지심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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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해한다.”라는 비판이 일기도 했다.
보험이 상호부조에서 시장으로 이행한 것은 중요한 사회적 연대를 파괴했다는 평가도 있다.
사회적, 도덕적으로
저평가되며, 진정한 형제애에 반하는 것으로 여겨지기까지 했다. 미국의 경우 1870년대 이후 생명보험 사업이
폭발적으로 성공하게 된다. 초기의 생명보험은 분명 도덕주의에 의한 것이었으나, 시장의 논리에 의해 돌아가게 개편된
생명보험은 도리어 도덕주의의 몰락을 가져왔다. 생명보험 회사들이 이윤 추구에의 의욕을 숨기지 않게 되면서, 생명보험
사업은 상승세를 타게 된다. 이윽고 생명보험 회사는 중요한 금융기관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여전히 생명보험 사업은
도덕과 이윤-문화와 화폐-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양면성ambivalance을 가지고 있다. 이 양면성은 시장과 도덕의
엇갈린 요구에 의한 산업 내부의 긴장감으로 표출되기도 한다.
<결론>
생명보험은 인간의 생명의 가치와 그를 잃는 것에 대한 대가를 화폐로 측정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따라서 생명보험은
죽음을 받아들이는 의례의 일부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생명보험 사업은 이타적 목표와 상업적 목표를 번갈아가며
추구하였고, 지금까지도 판매자와 소비자는 이 두 가지 목표 사이에서 왔다갔다하는 역동을 보여준다.
특히 생명보험은 근대 이후 가족 기능의 변화에 대한 설명을 제공하기도 했다. 과부가 고아를 돌보는 일은, 종전에는
국가의 책무였지만 이제는 유급전문가가 이 책임을 위임받게 되었다. (이와 유사한 일이 19세기 초 망자의 육체를
관리하는 일에서도 나타났다. 장의사업이 발달하면서, 가족들의 기능 중 하나였던 망자의 육체를 정돈하는 일은 전문
장의업자에게 돌아갔다.)
죽음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한 기존의 신학적 접근방식은 자본주의의 태동 이후 시장의 논리에 밀려버렸다. 그러나
죽음을 대하는 신학적 전통이 사람들의 의식의 근저에서 완전히 철수한 것은 아니었다. 자본 자체만으로 생명이 대체되는
것은 도덕적으로 바람직한 일이 아니었기에, 자본가들은 생명보험 상품에 신학적 의미를 덧씌워서 팔았던 것이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은 미국의 생명보험 발달사를 다룬 책이기에, 청교도 윤리에 근거하여 전근대적인 생명보험을 설명한다. 처음부터
기독교가 죽음 및 장례, 부조를 담당했던 것은 아니었다. 하인리히 브라운의 『생명보험 발달사』를 보면, 3세기 전에
로마에서는 기독교의 영향이 전혀 없는데다 어느정도 화폐경제에 기반한 콜레기아라는 부조 시스템이 존재했다. 이후
화폐경제 쇠퇴와 기독교 확산의 영향으로 인해 중세 말까지는 죽음에 대한 종교적 처방이 가능했던 것이다. 이 책의
관점은 중세 이후의 짙은 종교의 그늘을 다시 벗겨내며 부조가 어떻게 근대적 경제 체제 아래로 복속될 수 있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특히 이 책에서 눈여겨보아야 할 관점이 있다면, 생명보험이 이타심에 근거한 상호부조에서 합리성에 근거한
금융경제의 일부로 전환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이다. 대개의 경우 사회변동을 이끌어내는 것은 명분보다는 실리이다.
인간은 이성적 존재로서 언제나 이익을 극대화하는 방법을 찾아냈는데, 이렇게 실리를 추구하는 습속은 산업혁명 이후
자본주의의 태동과 만나면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사회의 서두를 이끌었다. 대부분 농노였고 일부는 상공업에 종사하던
중세와 달리 근대 이후 자본가로서, 혹은 노동자로서 자신의 이윤을 최대한 추구하기 위해서는 화폐경제를 유연하게
수용하고, 그것을 적절히 운용하는 방법을 익힐 필요가 있었다. 중세 이후 부활한 화폐경제는 노동의 결과로 창출된
생산물로 대표되는 물질적인 것 뿐만 아니라 정신가치들까지도 등가물로 설정하게 되는데, 이 책에서는 그것이 생명이
되면서 생명보험이 시작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인간의 생명이 화폐의 등가물이 된 것은 혁신이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문화적·이념적 충돌이 있었던 것은 자명하다.
근대는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는 시기이나, 여기서는 화폐경제의 변화 및 그로 인해 촉발된 사회제도로서의 보험을
설명하기에, 특히 경제관 및 윤리관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근대를 조명한다. 당시의 자본가들의 행보는 종교적 배경과
완전히 분리해서는 설명이 불가능했다. 그렇기에 자본 축적을 정당화하는 종교적인 설명이 뒤따라야만 했다. 마르크스의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따르면, 칼뱅주의자들이 근면하게 부를 축적하는 것이 정당화될 수 있었던
것은 생전의 재산 축적이 사후 자신의 영혼이 구원받을 수 있다는 징표가 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정교하게 마련된
종교적 설명을 바탕으로, 공공연한 사익과 실리 추구에 따른 문화적 반발을 어느정도 제어할 수 있었다. 화폐경제를
전제로 한 자본축적이 정당화되면서 생명보험 발달의 초석이었던 영국 해상보험의 발달을 가능하게 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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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생명과 관련된 사회제도는 아주 오래 전 고대 로마의 콜레기아에서 그 원형을 찾아볼 수 있다. 콜레기아란 본래
종교조직으로, 조합원들끼리 미리 갹출한 기금으로부터 주로 상조에 해당하는 지원을 하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
통칭 ‘원시보험’은 로마제국의 멸망과 함께 사라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부조의 기능을 대신할 크리스트교의 출현과
고대교환경제의 붕괴로 인한 것이라고 설명된다. 따라서 중세로 넘어가게 되면 상조회와 빈민구제 역할의 대부분을
교회가 일임하게 된다. 이후 장원이 해체하고 도시가 발달하여 상공업자들이 도시로 몰려들면서 이 구조가 깨어지고
우리가 흔히 길드라고 알고 있는 협동조합이 출현하였다. 길드 내에서는 조합원들끼리의 공동저축을 통한 상호부조가
이루어졌다.
고대의 콜레기아와 중세의 길드는 같은 신분, 혹은 같은 직종끼리의 상인들로 이루어져 있었다는 특징이 두드러진다.
즉 동업조합 내의 구성원들끼리 굉장히 동질적이었다는 것이다. 현대의 보험제도권은 다양하게 형성되어 있으며 여기에
속한 개인들은 전혀 동질적이지 않다는 점을 생각할 때, 집단 내 이질성은 현대와 고대·중세 보험제도의 가장 큰
차이점이라고도 할 수 있다.
구성원 간에 서로 이질적인 보험제도의 출현은 보험에 있어서 중세와 근대를 가르는 분기점이 됨과 동시에, 근대
일반이 가진 시대적 특성을 반영한다. 근대 이전과 이후의 보험제도가 가진 두드러지는 차이점들은 다음과 같다.
전근대 ­ 상호부조, 증여
근대 ­ 시장, 경제적 형태의 교환
신분에 의한 호혜적 교환
신분과 관련 없는 계약에 의한 교환
신뢰·공동체적 연대
판매자 ­ 구매자 관계
자발적 원조
유료 원조
출처 : V.Zelizer, 『죽음의 문화와 생명보험』, 2006
이렇듯 근대 이후 보험제도의 획기적 변화는 보험이 시장에 편입되면서 이루어졌다.
생명보험이 시장제도권 하로 귀속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13세기 해상보험의 변화를 살펴보아야 한다. 해상보험은
생명보험이 하나의 금융사업으로 발달할 수 있는 바탕이 되었기 때문이다. 해상보험은 고대로부터 해상무역의 역사와
함께했다. 13세기 전까지 해상보험은 금융가들이 교역에 필요한 물자를 대부분 지원하고, 항해 후에 원금과 함께
상인들이 얻은 이윤의 약 30%를 이자로 회수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고대 그리스로부터 유래한 이 방식을
‘모험대차’라 불렀는데, 사실상 보험보다는 일반 금융활동에 더 가까운 형태이다. 이것이 본격적으로 근대적 해상보험으로
자리잡은 계기는 1236년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내린 ‘이자금지령’ 이후이다. 금융가들은 상인들의 수익의 일부를
이자로 상환받을 수 없게 되자, 더 이상 교역 전 단계에서 투자를 하지 않게 되었다. 상인들 또한 자비로 항해 준비를
끝마쳐야 했기 때문에 교역을 통해 얻은 이익을 금융가들과 함께 나누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따라서 상인과 금융가의
거래는 기존의 투자를 통해 이익을 극대화하는 적극적인 방식에서 교역시에 배가 사고를 당하는 등 손해가 있을 때
보상해주는 소극적인 방식으로 대폭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자금지령을 피하기 위해 상인들과 금융가들은 다른 방안을
모색하게 된다. 즉, 교역을 떠나기 전에 상인들은 금융가들에게 일정 금액의 수수료를 지불한다. 이후 사고가 났을 경우
금융가들은 그 사고를 금전으로 보상해 준다. 이를 ‘변형된 모험대차’라 부른다. 상인들 입장에서는 이자금지령 이후
금융가들의 투자가 줄었음에도 불구하고 손해를 보상받을 수 있는 안전망이 확보된 것이고, 금융가의 입장에서는
고리대를 통해 이윤을 추구할 길이 막혔음에도 여전히 상인들이 납부하는 수수료로 안정적인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후에 설립된 해상보험회사들 역시 상인들을 보호해주기 위해서라기보다는 금융가들이 상인들로부터 이윤을
취하기 위해 출현하였다. 이것이 근대적 보험의 출발선이 되었다.
또한 보험은 중상주의에 근거한 해상무역의 증가 및 자본주의 발달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해상보험업자들이 보험을
판매하기 시작한 것은 그것이 막대한 이윤을 창출할 수 있는 창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왜냐하면 당시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던 해상무역은 국익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필연적으로 위험을 수반한 것이었고, 이를 보장받는 일은
항해의 성패를 좌우했기 때문이다. 사고가 나면서 이윤창출은 실패하는 거나 마찬가지지만, 상인들에게는 그것이 손해로
이어지지 않도록 최대한 두터운 안전장치를 확보하는 일이 필요했다. 따라서 상인들의 필요와 보험업자들의 계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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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아떨어지는 지점에서 보험업이 발생할 수 있었다.
난립하던 해상보험업자들을 하나로 묶었던 것은 1687년 Tower Street에서 개업한 로이드 커피하우스(Lloyd’s
Coffeehouse)였다. 이 곳은 개인보험업자들이 보험을 모집했고, 해안으로부터 사고·재해 및 각종 소식이 가장 빨리
당도하는 곳이었다. 빠른 정보력과 보험 판매의 전통을 바탕으로 로이드 커피하우스에서는 보험업이 활발하게
이루어졌고, 그 범위는 비단 해상보험뿐만이 아니라 다른 여러 가지 보험까지 다양했다. 보험에 가입하고자 하는 개인이
카페에 보험을 들고자 하는 품목과 금액을 적은 쪽지인 slit을 가지고 앉아 있으면 보험업자들이 그것을 읽어본 후
보험계약을 체결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보험업자 중에서는 당시 성행하던 도박보험업자들도 섞여 있었다. 도박보험은
누군가의 보험 증서를 경매 형식으로 팔고 그 사람의 보험 연한이 다 되었을 때 보험 증서를 사 들인 사람이 그 돈을
대신 가지게 되는 일종의 투기였다. 이들을 포함하여 순전히 도박을 목적으로 카페에 발을 들이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기존의
보험업자들은
1769년
제
2의
로이드
커피하우스를
열고
회원제로
운영하게
된다.
이는
자신들과
도박보험업자들을 가르는 일종의 구별짓기였고, 로이드에 모인 보험업자들은 브랜드의 이미지를 높임과 동시에 자신들의
정체성을 확보하여 본격적으로 체계적인 보험 마케팅을 시작하게 된다. 로이드 커피하우스는 뿔뿔이 흩어져 있던 개인
보험업자들을 뭉치게 했고, 이들이 설립한 법인이 현재의 로이드 보험(Lloyd’s of London)의 전신이 되었다.
로이드 보험은 이후 해상보험 뿐만 아니라 다양한 보험까지도 포섭하게 되었고, 생명보험도 예외는 아니었다. 보험은
소비자들이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하는 욕구를 충족시켰던 것이다. 보험이 인류의 역사에 미친 첫 번째
영향은 이렇듯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하고자 하는 욕구를 시장의 논리를 통해 합리적으로 풀어가는 방법을 제시한 것이다.
두 번째로, 근대를 기점으로 생명 관련 사회제도 양상 변화한 것은 생명과 돈의 관계에 대한 시각이 변화했기
때문이다. 로이드 보험 이후 화재보험 등 매우 다양한 상품들을 보험에 들 수 있게 되었지만, 생명을 보험에 들게 되는
일은 적지 않은 반대에 부딪쳤다. 왜냐하면 생명 그 자체가 가지고 있는 존엄함을 감히 몇 푼의 금전에 걸 수 없다는
도덕적 신념 때문이었다. 생명보험이 성립하기 위해서는 생명이 반드시 일정 금액의 화폐와 등가적인 관계를 맺어야
한다. 설령 그것이 한 사람의 목숨값의 무게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생명을 담보로 돈을 내거나 받는다는
인식은 그 자체만으로 부정적인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다. 생명을 보험 상품화하기 위해서는 생명과 화폐의 관계를 잘
맺어야 했는데, 이는 당시의 기독교적 종교관을 생각했을 때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한 것은 근대 이후 가족의 기능 변화였다. 가족의 결속력이 높았던 전근대 사회에서는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이 죽는다는 것이 곧 생계의 중요한 타격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았다. 특히 가장의 죽음은 과부와 남겨진
아이들의 일상에 매우 치명적이었다. 중세에는 남편을 잃은 부인과 자식들은 약간의 토지만 가지고 있다면 자급자족하며
그럭저럭 생활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업화·도시화로 인해 사회가 복잡해지고 생산양식이 크게 변하면서, 더 이상 한 줌
토지로는 생활을 유지하기가 힘들어졌다. 따라서 남편 혹은 다른 가족 구성원의 죽음에 대비하여 사고 발생 시 환급받을
수 있는 생명보험에 가입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를 통해 죽음을 합리적으로 관리 해 주는 전문가들에게 죽음의 처리
과정을 위임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합리성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 사회와 그 맥을 같이 하는 것이었다. 마찬가지로
합리성의 측면에서 죽음과 화폐의 결합은 순조롭게 이루어졌다. 화폐는 누군가의 죽음 이후에 발생하는 상당히 난감한
상황을 순조롭게 해결 해 주는 상징적이고 적절한 장치가 되어 주었다. 다만 그러한 결합에 대한 문화적·종교적 반발에
대비하여 보험 모집인들은 보험 상품에 신성한 의미를 덧씌워서 팔았다. 실제로 당시 남편의 사망보험을 들었던 부인이
액수가 더 큰 보험을 들걸 후회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심지어 이 부부는 기독교인으로, 아내는 남편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신성한 당신의 목숨값이 이렇게 싸서야 되겠냐고 말하기도 한다.
보험제도의 획기적인 변화는 근대화를 분수령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현대 보험은 금융상품화 되었다. 현대의 생명보험
회사는 기본적으로 금융기관이다. 보험은 피보험자에게 사고가 닥쳤을 경우 현금을 지급해야 하기 때문에 일정수준의
현금을 항상 가지고 있어야 한다. 나머지 돈으로는 금융활동을 하고 현금을 불려 나간다. 현대의 생명보험사들은 이윤을
추구하고 수혜자를 고객으로 생각한다는 점에서 원형의 보험제도들과는 완전히 다른 새로운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고령화는 세계적인 추세가 된 지 오래되었다. 이미 일본은 초고령사회에 진입하였고, 우리나라도 향후 40년 내에
일본을 뛰어넘는 초고령사회가 될 것이라는 예측이 있다. 새롭게 출생하는 신생아들의 기대여명은 80세가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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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출산률은 갈수록 감소하고 있다. 저출산이 지속되는 가운데 개인의 수명만 증가한다면 사회의 생산가능인구의
감소로 인해 노인 한 사람을 부양하는 젊은이의 인구는 감소한다. 2010년에 10명이었던 노인 1인 부양 인구가
2050년이 되면 1명이 될 것이라는 전망이 있다. 이러한 추세를 따른다면 세대를 막론하고 점점 더 살기 힘들어질 것이
분명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신의 생명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빠르고 합리적인 방법은 자본을 축적하는 것이다. 다만 자본을
축적하기에 현대인들은 너무 오래 살고, 너무 짧게 일한다. 앞으로는 퇴직 후에도 또다른 직업을 가져야 생계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살게 될텐데, 짧은 시간동안 벌어들인 한정된 자본을 이용해서 긴 삶을 살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게다가 오래 살아남는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이미 사회는 양적으로 많은 발전을 이룩한 상태이기 때문에 삶의 질을
높이는 사업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식량문제를 해결하고 의학기술이 발달하면서 수명을 연장하는 데 성공한 인류는 이제
길어진 삶을 무엇으로 채울지에 대해 고민 해 보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생산가능연령동안 동안 자신들의 미래를 대비하기 위한 각종 보험상품을 물색하게 될 것이다. 위험은
더 이상 생명을 위협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앞으로 이어질 긴 인생을 무미건조하게 내버려두고 방치하는 것 또한
위험의 일종이다. 주기적으로 인간의 본능적 욕구인 감정을 나누는 일 또한 보험의 일부가 될 수 있다. 생명을 넘어선
감정과 미래의 소중한 시간들까지도 자본을 통해 획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특히 보험은 미래가치에 대한 소비자들의 기대심리와 결합할 때 시너지효과를 낼 수 있다. ‘트레일러리즘’이란
시청자들에게 본편이나 본방에 대한 기대감을 높이기 위해 예고편을 특별제작하여 노출하는 것을 말한다. 트레일러는
곧이어 출시될 본편에 대한 기대를 자극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본편이 나오지 않았지만 매우 만족스러운 기분을 느낄 수
있다. 같은 원리로 한정판 제품을 높은 가격을 책정하여 먼저 출시했을 때 불티나게 팔리는 것을 볼 수 있다. 가령
라디오헤드는 <In Rainbows> 앨범의 한정판은 정식 발매되기 전에 40%나 높은 가격을 매겨 발매했음에도 불구하고
매우 성공적인 세일즈 성적을 거두었다. 이처럼 상품을 기다리는 시간동안 미래가치를 통해 얻을 행복감을 미리 느끼며
즐거움을 누리고 싶어하는 소비자들을 공략하는 것은 향후 막대한 이윤을 창출할 기회가 될 것이다. 기대수명이 늘어난
시대에 단순히 매력적인 상품만으로는 소비자들에게 어필할 수 없다. 미래가치에 대한 심리적 기제와 보험의 원리를
결합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다. 근대화 이후 사회를 이루는 양적인 토대는 팽창하듯 성장하여, 이제는 그
위에서 삶의 질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 트레일러리즘의 심리학적 기제 위에 보험의 원리를 적용하여,
보험 판매인들은 소비자들에게 금전적인 메리트 이외에 미래에 대한 즐거움과 만족감이라는 가치를 함께 판매하게 될
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이 책을 통해 근대화의 한 결을 생명보험이라는 예시를 통해 이해할 수 있었다. 생명보험이 하나의 제도로 확립되는
과정에서 어떤 실리적인 목적이 바탕이 되어 사회문화적인 의식적 차원의 변화를 선도했는지, 그리고 그게 그 당시
지배적인 정신가치였던 종교관과 어떻게 충돌하고, 어떻게 타협하였으며, 결국 그 종교마저도 자본주의의 발달을 어떻게
도왔는지에 대한 큰 그림을 그려볼 수 있었다. 자본가들이 종교와 타협하기 위해 종교에게 내어주었던 것과, 타협 이후의
일들을 생명보험을 통해서 풀어내면서, 당시의 사회상을 보험을 통해서 반영 해 보려는 시도를 읽어냈다. 그를 통해
역사를 해석 해 보고, 이런 통시적 흐름을 통해 알 수 있는 사회변동의 핵심이 무엇인지 짚어보았다. 마지막으로 현재의
사회 추세를 볼 때, 앞으로의 변동은 무얼 중심으로 이루어질 것인지까지 예측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처음에 이 작업을 하면서 막막하다고 느꼈는데, 이는 내가 기존에 가지고 있던 틀을 아주 오랜 시간동안 깨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틀이란 오랫동안 스스로에게 세뇌시켜 왔던 하나의 과제였다. 사회가 개인을 최대한으로 보장 해 주어야
한다, 복지는 중요하다, 무조건적인 보편적 복지는 지양해야 하지만 보편적 복지의 목표를 가지고 나아가야 한다, 인간은
보장되어야 한다, 누군가 우릴 보장해야 한다, 누가 날 챙겨줘야 한다. 라고 생각하던 것은 “왜 누군가 나를 보장해
주어야 하는가?” 라는 또 하나의 질문을 통해 깨졌다. 여기에 대한 답이라면 그간 선언적으로 굉장히 많이 보고
들어왔었다. 인간은 존재 자체로 존엄하기 때문이다. 이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고, 우리가 공존하기 위해서는 이를
반드시 지향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살아남기 위해 고군분투 해 왔고, 생존과 번식이 늘 최상의 목표였다. 그 과정
속에서 사회가 변동한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그 누구도 누군가를 순수히 이타적으로 대해야 할 의무는 없다. 이는
인간은 항상 자신의 생존에 최대한 유리한 방향으로 행동하고 사고 해 왔다는 것을 반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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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가 변동하는 것은 인간의 이기심 때문이다. 인간은 양면적 존재라서 이타성과 이기심 모두 가지고 있다. 하지만
결정적으로 사회변동을 야기하는 것은 이타성보다는 이기심이었다. 이건 연역적 설명이라기보다는 귀납적 설명이다.
근대적 보험의 출현 과정에서처럼 결정적인 변화의 순간에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한 행동을 하던 중이었다.
그 결과 인류 역사에 있어 전례 없는 폭발적인 양적 성장을 이룩할 수 있었다. 최종적으로 사회가 추구해야 하는 방향은
질적으로 향상된 사회이고, 이는 이타성에 기반한 공존과 협력을 통해 이룩할 수 있다. 그러나 질적인 발전은 양적인
토대 위에 세워질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회변동 및 발전에 있어서 생산의 확장은 필수불가결하다.
따라서 사회변동을 일으키는 것은 사실상 명분이 아니라 실리이다. 사회변동의 주체들은 늘 사익을 추구하기 위한
당대 최고의 합리적인 선택을 감행했다. 이 책에 나타난 합리적인 선택이란 보험을 판매하는 자본가들이 생명보험에 대한
당시의 문화적이고 종교적인 반발에 대응하여 택한 전략이다. 죽음에 대한 보장이 필요했던 당시의 사회적 요구를
반영하되, 죽음과 화폐를 동등한 교환관계로 인식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 그 사이의 틈새를 공략했던 것이다. 가령
보험판매인은 보험에 가입하여 자신이 죽은 뒤에 남겨진 사람들이 경제적 고통을 받지 않도록 조력하는 일을
신성시하면서 사람들을 끌어모으는 전략을 취했다. 이 방법은 생명이 가진 본연의 신성성을 해치지 않음과 동시에,
보험을 드는 것이 경제적이고 합리적인 선택이라고 인식하도록 유도하는 방책이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사회변동의 동력은 사익과 실리를 추구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 자본가들이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 택했던 전략은 중세 이후의 짙은 종교의 그늘을 다시 벗겨내며, 상호부조가 어떻게 근대적 경제 체제 아래로
복속될 수 있었는지를 잘 설명해 준다. 가령 인류는 수백만 년 전부터 늘 생명의 위협에 시달리며 노동을 해 왔고,
위험에 대비하는 사회적인 방법으로서의 상호부조를 발달시켜왔다. 그런데 상호부조의 형태 및 기능이 획기적인 변화를
겪은 것은 근대 이후였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근대적 보험 제도는 폭발적으로 성장해서 자본주의 사회의 하나의
기반으로 자리잡았다. 근대보험과 전근대 상호부조와의 근본적인 차이는 보험시스템의 목적에 있다. 전근대 상호부조는
이타적이고 호혜적인 목적에서 시작했다. 그러나 근대보험은 자본가들의 이윤 창출을 위해 시작된 체계적이고 합리적인
제도였다. 노동의 목적이 중세와 달리 신이 아니라 자신의 이윤 창출로 선회하면서 근대사회의 결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했다.
또한 보험은 사회계층을 구별짓는 기능을 했다. 보험에 들기 위해서는 기본적인 경제력이 바탕이 되어야 한다. 현대의
보험은 더 이상 부조가 아니기 때문이다. 결국 결정적인 순간에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들은 경제력이 바탕이 되는
사람이다. 미국 의료보험과도 같이, 보험이 민간에 맡겨진 이상 보험은 모두에게 열려 있는 제도가 아니다. 보험료 환급
기준도 갈수록 까다로워진다. 위급한 상황에서 보험료를 환급받으려 할 때 환급이 불가능한 조항들로 인해 돈을 돌려받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겉으로 보기에는 보험이 우리가 살아가며 마주칠 수 있는 각종 위급상황에서의 유일한 해결사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보험회사 측은 고객을 자본을 창출해 낼 금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기능적으로 이들의 태도는 근대화의 추진력으로 작동하였다. 14세기에는 중상주의에 근거하여 활발히 장려되던
해상무역을 뒷받침하던 이들은 해상보험업자들이었다. 근대화를 이끌어 낸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에 답을 내리고자
한다면, 이 책의 관점에서는 개인의 의식마저도 바꾸어 놓은 합리적 경제학이라고 말할 수 있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1) 네이버캐스트 ­ 시간의 심리학 : 현재보다 미래에 중독된 사람들
미래가치의 운용을 위한 전략을 심리학적 관점에서 재밌게 풀어보는 글이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99&contents_id=55010
2) 네이버캐스트 - ‘보험의 발달’ 시리즈
총 5편으로 구성되어, 대중들에게 다소 생소한 보험사를 이해하기 쉽게 설명했다.
http://navercast.naver.com/contents.nhn?rid=134&contents_id=32681&series_id=1045
3) 『생명보험사』 Heinrich Braun
보험사 일반에 대해 보다 자세히 알아보고 싶다면 일독을 추천한다.
4) 지식채널e ­ 인간의 늙음 그 진실에 대하여
수명연장에 성공한 인간과 그 이후의 삶 설계에 대한 질문을 던진다.
2005년 12월 30일 EBS에서 방영했던 다큐멘터리 “인간의 늙음”의 서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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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www.ebs.co.kr/tv/show?courseId=BP0PAPB0000000009&stepId=01BP0PAPB0000000009&lectId=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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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종합결론
보험제도의 목적이 이타적 호혜에서 시장에 근거한 이윤 추구로 변화한 것은 생명과 화폐의 관계를 바라보는 관점이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생명에 대한 존엄은 인류 역사상 단 한번도 평가절하된 적이 없다. 전 인류의 최초이자 최종
목적은 생명 보전과 번성이기 때문이었다. 다만, 중세에 들어 생명의 존엄성은 신의 이름을 빌어야만 성립하는 불완전한
개념이었다. 신의 가호를 받는 생은 당연히 신성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르네상스 이후 헬레니즘적 시각으로 자신들의
모습을 비추어보게 된 인류는, 생명이 신에게 맡겨졌기 때문에 존엄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존엄하다는 불가침의
명제를 깨닫게 된다. 자신의 생명을 보전하는 것은 신이 아니라 자신들 스스로의 능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인류는 현
세태로서 가장 안정적인 생명유지의 수단이 자본축적이라는 것을 합리적 판단을 통해 알아냈다.
자본과 화폐를 바라보는 시각 및 화폐와 생명의 관계를 바라보는 시각이 변화한 것은 일종의 혁신이었다. 근대에
접어들며 자본 축적을 기존의 종교관을 통해서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프로테스탄티즘이 자본주의 발달의
근간이 되었다는 주장이 있을 만큼 자본 축적은 탐욕의 상징이라거나 죄악시되는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여기에 생명을
결부시킨다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생명과 화폐를 연결지으며, 생명을 화폐의 가치로 저울질 하는 일을 용납하려는
사람은 드물었다. 생명에 얼마의 가치를 달아야 할지에 대해서는 아무도 답을 할 수 없거니와, 임의의 가치를 매겨
누군가 죽었을 때 그만큼의 대가를 지불한다고 하더라도 그 가치의 합당함을 누가 보장할지에 대한 문제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보험 판매인들이 생명의 존엄성과 화폐가치 모두를 취할 수 있는 사회적 배경이 있었다. 가족의 기능
변화라는 틈을 파고들며 보험제도는 구성원의 죽음을 합리적으로 처리하고 그 이후의 생활까지도 보장 해 주는 기제로
작동하였다. 보험에 생명이 맡겨질 수 있었던 것은 미래에 닥칠 위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을 해결 해 줌과 동시에,
이렇게 생명과 화폐의 관계에 대한 시각이 변화했기 때문이었다. 보험산업이 은행과 견줄 만큼 급속도로 성장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이 변화는 필연적이었다. 왜냐하면 인간은 삶에의 본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로이트가 말한 삶의 본능인 Eros는
죽음의 본능인 Thanotos보다 강력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은 인간이 위험을 회피할 방법을 모색하며 역사를 이어왔다는
사실로 증명이 된다. 특히 죽음에 대한 불안은 가장 근원적인 것으로, 이를 제도적·사회적으로 해소하고자 하는 노력은
어느 시대에나 있어왔다. 특히 근대사회의 태동기의 경우, 경제적 위기는 죽음과 직결되었다. 따라서 경제적 위기를
해소하는 것은 곧 죽음에의 공포를 해결하는 것과 같은 의미로 통용되었다. 현대 사회에는 생명을 위협하는 요소가
너무나 많아졌다. 또한 우리가 해결해야 할 새로운 문제는 길어진 삶 속에서 생산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한 열쇠로 생명보험의 연장선상에 있는 보장제도들이 제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삶을 이어가는 것에 대한 문제는
오랫동안 인류의 고민거리였고, 이제는 늘어난 수명과 함께 그 결을 어떻게 채워나갈지에 대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인류의 새로운 과제가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할 열쇠는 삶에의 욕구를 누가 더 빨리, 정확히 찔러내는지에 달려 있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주소
홍예진, 사회학과, 2012104428, hongyj93@naver.com
사회학 전공이고, 인간발달과 생애에 관심이 많습니다. 사자가 되고 싶은 낙타입니다. 해야만 하는 것이 아닌 하고
싶은 것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하고 싶은 것을 해야만 하는 데에 지나치게 많은 이유를 부과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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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과 사회변동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책 제목 : 책의 문화사
출판사 : 생각비행
출판년도 : 2015년 2월 16일
저자, 역자 : 데틀레프 블룸 지음, 정일주 옮김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책하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가? 두껍고 무거운 전공 책 혹은 도서관에 비치된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책들 일수도
있다. 또는 만화책일수도 있고 테블릿 PC에 저장된 전자책일 수도 있다.
‘책’하면
단순히 책의 외형을 떠나서는 어떠한가?
우리는 보통 지식의 습득 나아가 문명인이라면 당연히 읽어야 하는 일종의 미덕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매년
대 통령들이 휴가 때 읽은 책들은 몇 주 뒤 대형 서점의 베스트셀러에 올라가 있을 것이고 간 혹 유행하는 책을 읽지
않으면 일상적인 대화가 통하지 않을 때도 있다. 대학생들은 과제를 할 때 몇 권의 책을 쌓아놓고 열심히 밑줄을 치고
사람들은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어디서든 책을 읽는다. 책은 이렇게 우리의 일상에 밀접하고 깊숙하게 들어와 있다.
그렇다면 이 지점에서 우리는 책의 사회적 기능, 역할, 그것이 유발하는 구체적 실천, 즉 삶의 양식을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책이란 형태가 발명된 순간부터 지금까지 책의 일관된 기능은 지식의 기록이다. 그 지식의 형태가 어떠하던
간에 좋은 책이란 좋은 정보를 가지고 있음을, 즉 유용한 지식의 기록을 전제로 한다. 그렇다면 그 책은 혹은 지식은
순수한가? 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 우린 어려서부터 비판적 읽기를 요구받는다. 이는 저자와의 대화라고 일컬어지는
독해 과정이다. 저자의 주장이 항상 옳은 것 즉 진리를 담보하지 않는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이 과정은 개인적 차원의
독해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이라 배워왔다. 그러나 여기서 나아가 책과 지식의 사회적, 역사적, 구조적 차원을
탐구해볼 필요가 있다. 사회적, 역사적, 구조적 차원을 탐구한다는 것은 책이라는 매체와 그 속의 지식이 사회, 역사적
시기와 맥락에 따라 특정한 지식구조를 형성하며 이 지식구조와 사회, 집단 간의 역동적 상호작용을 담보하는 것을
전제한다.
가령,
오늘날 논란이 되고 있는 역사교과서의 국정화는 우리 사회에서 어떠한 의미를 가지는가? 또한 대형
출판사에서 비싼 광고료를 내면서 홍보하는 책들,
베스트셀러,
스테디셀러 등은 우리 대중의 지식구조와 어떤 연관 을
가지며 그로인해 우린 어떤 행위를 할 수 있는가? 성경이라는 책은 우리 사회에서 어떤 의미를 가지는가? 이러한
사유가 해석학, 사회학적으로 행해질 때 비로소 책이라는 물체가 단순히 개인적 차원을 넘어선 사유가 가능해질 것이다.
3. 저자소개
데틀레프 블룸 : 저자 데틀레프 블룸은 1954년 베를린에서 태어났다.
중퇴하고
서점과
출판사에서
서적상,
출판사
대표
독일서적상출판인협회의 대표이사로 재직하고 있다.
및
발행자로
대학에서 신 학과 종교교육학을 전공하다
일했다.
1992년부터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주로 고양이와 도서문화와 관련된 전문서적 및 소설을 집필해
현재까지 20권 가량의 책을 출판했다. 대표작으로《 고양이 대백과사전》(2007),《 고양이 파울—페이스북에 쓴 일
기》(2011)가 있다. 최근에 《책의
여명기: 도서문화의 미래에 관하여》(2014)와《 배에 탄 고양이》(2013)를 썼다.
4. 책 내용 요약
<네 번의 매체혁명과 당시의 지식구조>
1-1.
유럽 도서문화의 기원을 논할 때 호메로스(Homeros)라는 이름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는 기원전 약
8세기 전 인물로 고대 최초의 작가로 알려져 있으며 [오디세이]의 저자이기도 하다.
그가 작품을 집필할 무렵 입으로만
전해지던 문학이 시문학의 형태로 문자로 기록된다. 이는 파피루스 두루마리를 사용하기 때문에 가능했는데 이것이 바로
첫 번째 매체혁명이다.
이러한 기록 양식의 변화가 왜 혁명적이었는지는 소크라테스의 말을 빌어 알 수 있다. 그는
“이런 발명품은 기억하는 데 소홀하게 만들어 배우는 자를 오히려 쉽게 망각으로 이끕니다.
기억하려 하지 않고,
외부에 있는 낯선 기호를 매개 로만 기억하기 때문이지요.”라고
왜냐하면 그들은 즉각
말하며 글쓰기라는 혁명이 읽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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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를 게으르고 무지하게 만들 염려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즉 최초의 책의 발명으로 인해 인간의 기억 체계가 몸의
기억에서 문자 기억으로 상당부분 이동한 것이다.
이는 지식구조의 새로운 지평을 여는 것이었다. 인간은 망각에서 어느 정도 자유를 획득할 수 있었고 동시에 지식에
대한 갈망은 커졌다.
일일이 기억할 필요 없이 옮겨 적은 것을 모아두면 기록 자체가 곧 지식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러한 발명은 지식이라는 것의 저작권에 대한 관념을 최초로 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비록
저작권이 법적으로 인정되기 까지는 수많은 시간이 걸렸지만 최소한 윤리적인 의미로서 저작권이 탄생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었다.
그리고 문자에 대한 욕구 또한 증가했다.
기존에는 글자 를 굳이 몰라도 적정 지식을 획득할 수
있었으나 책의 발명과 함께 문맹과 비문맹 간의 지 식 계급화 현상이 시작되었다. 이제 지식은 언어자본과 떼어 놓을 수
없는 것이 되었다.
이와 더불어 도서관이라는 것이 기원전 5세기 사모스 섬과 아테네에 처음 생겼다. 최초의 기업형 도서 거래,
도서 수집이 이뤄진 것이다.
이동한 것이다.
공적
지식다양성의 중심이 몇몇 현 인(wise man)에서 여러 종류의 책이 있는 도서관으로 점차
이는 서적의 무역과 함께 발전했으며 도서는 중요한 상품으로 발전했다.
당시 도서관 장서량에 관한
진술 은 2세기 아우루스 겔리우스(Aulus Gelius)의 기록이 가장 신뢰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70 만개의 두루마리, 즉
오늘날 기준으로 12만권의 책이 그리스의 도서관에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도서관들은 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1세가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삼아 세례를 받은 뒤 이교도 숭배와 신전에 대한 칙령을 공표했는데 이 시기 상당수의 도서관이
문을 닫게 되었다.
이를 통해 우리는 종교적 지식과 일상적 지식의 분리가 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지식의 소유자가 국가라는, 왕이라는 명확한 형태를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두루마리, 기록의 시작
1-2. 두 번째 매체혁명은 코덱스의 발명에서 기인한다.
과거 파피루스 두루마리의 길이는 6~10m 사이였고 그 무게
또한 무거웠다. 게다가 매번 풀었다 접었다 하는 과정이 번거로웠으며 그 제조원이 이집트 특산의 카야츠리그사과의
식물이었기 때문에 수급이 부족했다. 이에 양피지라는 새로운 서사용 소재가 개발되었는데 이는 짐승의 가죽을 가공해서
만 들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그 수급이 안정적이었다. 양피지에서 발전한 코덱스는 1세기경 제작되었으며 그 모양이
현대의 책과 유사했다. 즉 낱장을 나뭇가지 대에 엮은 형태였는데 이것이 바로 매체혁명이었던 샘이다. 그 이유는 낱장
형태의 책 덕분에 문단, 글의 내용에 대한 분류가 용이해졌기 때문이며 이러한 의미에서 코덱스는 두루마리에 쭉 쓰인
글들과는 달리 체계적 기록을 가능하게 했다. 이것은 즉 지식이 체계적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현 하버드 대학 도서관
관장인 로버트 단튼은 코덱스의 발명을 “최초로 지식이 체계화된 것이며 인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성과”라고
주장하기도 하였다. 오늘날 우리는 지식을 체계적으로 분류하는데 익숙하다. 글쓰기 방법 또한 서론, 결론, 본론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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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식으로 지식을 전달하며 읽을 때 또한 각 장의 의미가 명확히 구분되어 있는 책을 선호한다. 결국 코덱스의 발명은
단순히 책의 모형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우리의 지식 구조가 좀 더 복잡한 형태의 지식을 담을 수 있게 질적으로
발전된 것이다. 또한 코덱스의 발명으로 인해 두루마리를 쭉 풀고 다시 말아낼 필요 없이 책을 펴고 덮기만 하면 되었던
것도 가히 혁명적이다. 왜냐하면 지식의 시공간적 접근 가능성을 늘려놨기 때문이다. 이동 중에 책을 읽는다는 것은 생각
보다 엄청난 일이었을지 모른다. 소형책자에서 인터넷의 발달 그리고 스마트폰까지 우린 끊임없이 지식에 더 쉽게
접근하는 방법을 찾기 때문이다.
코덱스의 발전으로 인해 기존에 사용하던 두루마리가 아예 쓰이지 않았던 것은 물론 아니다. 이 두 종류의 기록
매체는 600년 가까이 같이 사용되었다. 그럼에도 코덱스가 중요한 발명인 이후 중 하나는 기독교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기독교가 공인되기 전에는 사회적으로 고위층과 지식인들 위줄 두루마리를 사용하였고 교회는 이들과 거리를 두기를 원
했다.
당시 상위층의 책을 사치품으로 이용하는 행태는 항상 비판의 대상이 되어왔다. 세네카는 “무지한 자는 책을
지식의 보조수간이 아니라 식사시간을 위한 진열품으로 간주한다. 두루마리 책장과 책 제목에서 근본적인 즐거움을 찾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면,
자네들은 어떠한가?” 라고 비판하였다. 때문에 당시 사회 풍조에 비판적이었던 교회는 코덱스
이용에 적극적이었고 4세기 말 기독교가 국가종교로 공인되면서 코덱스가 보편적으로 사용되었다. 오늘날 성경책은
코덱스로 쓰였거나 코덱스에 다시 옮겨 쓴 것을 기원으로 한다.
두루마리를 쓰는 집단과 코덱스를 쓰는 집단이 다르다는 점부터 시작해서 결국 교회가 코덱스라는 기록 매체를
장악했다는 점을 우리는 의미심장하게 바라볼 필요가 있다. 어떠한 지식의 매체는 사용하는 집단이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또 매체 경쟁에서 승리한 뒤 그것을 장악한 집단이 있다면 이후 사회는 어떠한 지식
구조를 가 질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이 뒤따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후 서술할 중세시대의 시작과 몰락의
과정에서도 관통하는 주제다. 책과 지식의 역사를 사회학적으로 탐구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로마는 분열을 거듭한 끝에 멸망했고 중세시대가 열렸다. 당시의 책은 기존 역사에 서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통치 기제 중 하나였으며 이때부터 ‘지식과 지식접근 대한 통치’의
개념이 발달했다. 로마의 공공도서관은 대부분 문을
닫았고 책은 교회의 감독 하에 수도원 바깥에선 거의 찾아볼 수 없는 것이 되었다.
뭄멘다이는 “책의
운명적 사건이
우리에게 와서 도대체 어떻게 그 당시의 주옥같은 책들이 종말을 맞이했는지 꼬치꼬치 캐묻는 고객이 없을 정도로
관심을 받지 못한 채 이루어졌다.”라고 주장했다.
당시 기독교 문화 에서는 수도원이라는 독특한 형태의 종교적 생활
공동체가 있었다. 수도원은 엄격한 종교적 규율로 운영되었는데 이곳은 최대의 필사본 생산지이며 더불어 지식이
생산되고 폐기되는 장의 역할을 했다.
의무였다.
당시 성서를 필사하는 것은 규율로 정해져 있는 것으로써 신이 내린 신성한
12세기 클러니 수도원의 9대 원장이었던 페트루스 베네라빌리스는 “입이 아닌 손으로 드리는 기도”라고
필사를 정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교회는 기존 사회의 ‘세속적이고 불경한‘ 모든 책들을 폐기하는 장소로 수도원을
활용하였다. 수도원장은 과거의 텍스트를 없앨 수 있는 권한을 위임받았는데 이는 인류 역사상 최대의 분서갱유가 너무나
자연스럽게, 신의 이름으로 행해졌음을 의미한다.
지식은 이제 종교적인 것과 아닌 것, 신성한 것과 불경한 것 이라는 이분법적 형태 로 규정되었다.
책이라는 매체가 가진 강력한 사회 변동 동력을 알아차렸다.
기독교는 일찍이
기독교 입장에서 자신들의 이데올로기의 안정된 정착을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겉으로 드러나는 세금 등의 행정적 조치가 아니었다. 가장 먼저 그들은 지식을, 그리고 당시 지
식을 담을 수 있었던 유일한 매체인 책을 그들의 손아귀에 넣어야 했던 것이다.
당시 성서는 대부분 라틴어로 쓰였다.
이는 대중의 지식구조 확장을 막기 위한 의도적 기획이었다. 대중은 라틴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상 그들의 신에게 접근할
수 없었으며 이는 신의 말씀은 종교적 권위를 가진 자들을 매개해서만 들을 수 있는 것이라는 규율과 적절하게
결합했다. 종교가 곧 지식인 시대, 삶이 곧 종교인 시대, 언어자본을 획득해야만 접근할 수 있는 종교, 언어자본을
획득한 자를 통해서만 접근할 수 있는 종교. 이 같은 특징은 당시 대중들의 지식구조가 얼마나 획일적이었는지, 그리고
지식구조 자체가 얼마나 식민화되어 있는지 짐작 하게 해준다.
1-3. 그러던 와중 인류 역사상 가장 큰 혁명,
자녀!”라고
종교혁명이 발발한다. 장 프랑소아 기몽은 “종교개혁, 구텐베르크의
하였다. 이는 종교개혁이 당시 매체와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짐작하게 해준다. 이는 책을 통한
유물론적 지식사회학의 작업이 단순히 인간의 주체성을 말살하는 구조기능주의적 작업이 아니라는 것을 시사한다. 책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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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론을 담 고 나르는 그릇이자 그 그릇을 깨고 대항하게 해주는 목적인 동시에 수단으로 기능했다. 세 번째 매체혁명인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 기술 발명을 서술하기 전에 당시 역변하고 있던 중 세 사회에 대해서 간단하게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첫
번째로
이탈리아에
11세기에
대학이
이르러
생겼고
처음으로
이후
프랑스,
잉글랜드, 비엔나 등 유럽 여러 도시에 대학이
생겼다. 당시 교회는 수도원 내 학교를 통해
고등교육을
독점하고
있었다.
학생들은
종교인의 입을 통해서가 아니라 책을 통해,
토론을 통 해 지식을 습득했다. 지식의 이와
같은 습득 방식 변화는 중세 시대 굳어 있던
지식구조를 용해시키는 데 일조했다. 그리고
늘어난 대학 덕분에 책의 수요는 급증했다. 두
번째로
비슷한
이슬람문화권을
시기에
거쳐
서양에도
기술이
수입되었다.
양피지와
종이는
스무
저렴했지만
배나
중국에서
종이
비교했을
제조
때
견고했으며
대량생산에 용이했다. 당시 새로 운 문물에
관심이 많았던 상류층을 중심으로 종이 사용이
중세, 지식통치의 시작
확산되었으며 이는 후에 구텐베르크의 혁명에
큰 밑거름이 된다.
구텐베르크는 1434년 인쇄술 연구를 시작하고 1448년 마침내 금속활자를 기반으로 한 인쇄소를 세웠다. 그리고
1450년 그는 그 유명한 구텐베르크 성서를 인쇄한다. 그의 인쇄술은 단순히 목판에서 금속으로, 재질의 변화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금속활자 개발을 위해 활자의 배열, 행간의 조절, 용지의 두께, 잉크의 농도 등 인쇄술 전반을
발전시켰다. 구텐베르크 이전 필사본은 책 1권을 필사하는 데 2달 정도의 시간이 소요됐다. 그러나 구텐베르크의
인쇄술이 보급되기 시작한 1450년부터 1500년까지 유럽에서는 2000만권(지 난 2300년간 필사된 책의 양보다
많다.)의 인쇄본이 간행되었다. 1470년 구텐베르크 인쇄술을 사용하는 인쇄소는 17곳에 불과했으나 1년만에 121곳으로
그 수가 수직상승하였다.
구텐베르크 인쇄술은 부르주아 계급의 성장에서 비롯된 상업활동, 무역활동(실제 구텐베르크가 금속활자 인쇄술을
고안한 가장 큰 이유도 그것을 이용한 상업적 이득이었다.)과 맞물려 대량 인쇄를 가능하게 했고 이는 중세시대 초,
중기동안 말 그대로 암흑기를 보내고 있던 책의 운명에 날개를 달아줬다. 대량인쇄로 인해 책의 가격은 하락했고 더
많은 사람들이 책을 볼 기회가 생겼다. 더불어 독서문화가 극소수의 상류층과 종교집단에서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널리
퍼지는 계기가 생겼다. 그리고 이때 처음으로 저자의 이름을 책에 적는 형식이 탄생했다. 교회는 처음에는 교리의
효과적인 확산을 기대하여 인쇄술을 반겼으나 지식인들의 시대 비판적 내용이 점차 책을 통해서 확산되자 사태의
심각성을 받아들이고 1479년 인쇄 시 검열을 지시하였다. 이 또한 우리에게 앞서 논한 바와 같이 많은 점을 시사한다.
새로운 매체혁명으로 인해 사람들은 역사상 최초로 민주화되고 공론화된 매체를 갖게 되었다. 기존의 토론 방식은
소규모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서 언어라는 단일 매체를 가지고서만 행해졌다. 그러나 근대적의미의 책이라는
대중매체의 탄생은 사람들의 토론 방식 자체를 크게 바꾸었다. 책은 더 이상 지배집단의 지배논리를 그저 확산시키는
이념적 도구에 머물고 있지 않았다. 사람들은 책을 통해 집합적 논리를 구축하였고 책을 통해 비판하고 옹호함으로써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게 쉽게 접근하고 공감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매체의 민주화와 공론화는 자연스럽게
지식의 민주화와 공론화로 이어졌다. 이제 ‘무엇이 정녕 옳은 것인가?’와 같은 논의는 궁궐 담을 넘어 도시 곳곳으로
퍼져나갔다. 그리고 이에 불을 짚힌 사건이 1517년 한 성직자의 생각과 맞닿는다.
마틴 루터는 1517년 그 유명한 [95개 논조]를 비텐베르크에 있는 슐로스 교회 정문 출입구에 붙였다. 이것이
종교개혁의 시작이다. 면죄부 판매의 중단 등 교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요구한 그의 사상은 새로운 인쇄술을 기반으로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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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통해 급속도로 확장된다.
1522년 루터는 독일어로 된 신양성서를 출간한다. 이 책은 당시 돼지 한 마리 가격과 비슷하였지만 날개 돋친 듯
팔려 16세기 최고의 베스트셀러가 된다. 성서를 독일어로 쓴다는 것, 그리고 그 책을 대중의 영역에 보급했다는 것은
가히 혁명적이라고 할 수 있다. 전술하 였듯이 당시 교회는 라틴어라는 학술적 언어자본, 그 언어자본으로 쓰여진
성서라는 문화자본을 전적으로 소유하며
지식
전반에
대한
강력한
통제를
하였다. 그리고 루터의 독일어 성 경은
교회가 독점하던 언어자본, 문화자본의
힘
자체를
약화시켰다.
라틴어는
독일어가 쓰 이지 않았기 때문에 가치
있었고 책 역시 보급이 어려웠기 때문에
가치 있었으나 이제 두 자본의 절대적인
지위는 상당 부분 훼손되었다. 루터는
“인쇄술은 신이 내린 최고이자 최선 의
선물이다. 왜냐하면 신은 이런 수단을
통해
진정한
알리고자
전달하고자
주장하였다.
종교를
하시며
하시기
이
세계
모든
끝까지
언어로
때문이다.”라고
대목에서
우린
당시
인쇄술 이 루터의 사상 보급과 종교
인쇄혁명과 종교혁명
개혁과 얼마나 큰 연관이 있었는지를
유추할 수 있다.
전술하였듯 책의 가격이 하락했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일반적 의미의 대중들에게 보급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었다.
그러나 인쇄술와 종교개혁의 바람은 이마저도 상당 부분 해소시키는데, 그것은 바로 속보책자의 발행이었다. 그것은 최대
10쪽으로 값싼 종이에 인쇄한 매체였다. 속보책자는 학술적으로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들, 즉 대다수의 국민들을 위 해
고안된 인쇄 매체이며 오늘날 주간지, 신문 등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다. 1524년 나온 종교개혁적인 속보책자의 앞
구절은 대다수 이러한 구절로 시작되었다. “친애하는 독자들께. 책을 읽지 못한다면 이 글을 읽어줄 젊은 남자를
찾으십시오.” 왜냐하면 책은 두껍고 그 내용이 길어 읽는 시간이 오래 걸리는 반면 1, 2쪽의 짧은 글로 이루어진
속보책자는 부 담 없이 다른 사람에게 읽어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 속보책자는 여관, 술집, 일터 등에서 큰
소리로 낭독되는 식으로 읽혔다. 결국 일반 대중, 대다수의 농민들은 속보책자를 통해 자신들이 부당한 대우를 당하고
있음을 또는 자신들이 느끼는 부당함이 옳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고 그들은 루터를 통해 종교적, 사상적으로 무장했다.
(결국 후에 보수파인 루터와 이들은 서로 다른 이념을 가지고 등지게 된다.)그들은 농민단을 결성해 1525년 독일
에서는 최초의 민중에 의한 인권 요구 <12개조>가 등장한다. 동시에 농민전쟁이 발발하였다. 프랑스 혁명 전까지 가장
큰 규모의 민중 혁명이었으며 10만 명 이상이 사망하였다. 결과적으로 종교개혁은 30년 전쟁 발발의 원인이 되었고
1648년 베스트팔렌 조약을 끝으로 막을 내렸다. 그리고 교회의 황금기 역시 함께 막을 내리게 된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부터 종교개혁까지, 3차 매체 혁명은 그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서로만 존재하던 책에 종교에 반하는 내용이 적히고 이것이 대중적으로 소비됨으로 인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계몽주의적 지식구조를 가진 인간이 탄생하게 된다. 책은 비로소 지식을 그 주된 기능으로 갖게 되었다. 책의
현대적 기능이 당시에 최초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지식이란 기존의 지식구조에 균열을 내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혁명은 죽음을 불사한 각오를 대규모의 군중이 가졌을 때 할 수 있는데 이 대규모 군중의 결집에
직접적으로 쓰인 수단이 바로 책과 그 속에 있는 지식이었다. 즉 지식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지식의 전파와
그 지식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사회적 행위로 인해 의미를 터득한다. 이러한 점에서 책이라는 매체와 사람들의 의식은
상호발전을 하며 양자가 서로룰 필요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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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 네 번째 혁명은 인쇄물에서 디지털 도서로의 이행이다. 이 부분은 기술적인 측면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기로 하고
지식이 인터넷이라는 통신 혁명을 통해 어떠한 구조를 터득했는가를 중심으로 논의를 전개시킬 것이다. 저자는 디지털
도서로 매체를 한정시키고 있으나 나는 그 범위를 더 넓히고자 한다. 내가 어제 블로그에 쓴 글이 다른 사람에게는
하나의 소책자가 될 수도 있고, 페이스북에 공유된 한 신문사의 기사 역시 일종의 책의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네
번째 매체 혁명에서 중요한 것은 세 번째 매체 혁명과는 달리 실려 있는 콘텐츠가 아니라 그것의 전파라고 할 수 있다.
첫 번째, 위와 같은 매체 혁명은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이 지식의 상대성을 직접적으로 경험하게 하였다. 우리는 같은
사안에 대한 다양한 관점과 주장을 손쉽게 접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대중의 지식구조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지식의
상대성은 곧 지식의 불완전성으로 이어졌다. 바야흐로 해석학적 인간이 매체 혁명을 통해서 보편적으로 출현하게 된
것이다. 지식은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해석되어야 하는 것이 되었다. 우리는 이러한 경향을 쏟아지는 정보 속에서
직간접적 경험으로 터득한 것이다. 단순히 어떠한 당위, 미덕의 차원 이 아니다. 세상에 책은 넘치고 논리와 지식 또한
그러하다. 두 번째, 저작권의 개념이 모호해지고 있으며 지식이 몇몇의 ‘대가’에서 ‘대중’으로 이동하고 있다. 산업화,
근대화에 따른 교육제도의 급격한 변화로 인해 책은 19세기가 들어 그 전성기를 맞았고 저자가 곧 그 지식의
소유자라는 ‘저작권’의 개념이 최초로 생겨났다. (우리나라는 1957년 최초로 저작권 법령이 생겼다.) 그러나 매체의
발달과 함께 책과 지식의 종류가 다원화됨에 따라서 어떠한 지식이 딱히 누군가의 소유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 자주
발생한다. 그 이유는 지식에 있어서 전문가와 비전문가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있기 때문이며 그 과정에서 새로운 매체
혁명이 그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어떠한 이론, 지식을 학자의 이름과 함께 배운다. 즉 우리의
지식구조는 전문가들에 의해 조합된 성격이 강하다. 실제로 논문의 인용 횟수를 보더라도 그것은 멱함수를 그린다. 소수
의 지식 생산의 중심과 그것을 조합하는 2차적 생산자가 나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점에서 대중은 3차 혹은
4차적 지식 생산자의 위치를 차지하였다. 그러나 네 번째 매체 혁명으로 대중은 지식 생산의 주체로 성장하고 있다.
이는 세 번째 매체 혁명과 더불어 지식 구조의 민주화, 공론화가 가속도화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지식을 지식으로
인정하는 권력’이 세 번째 매체혁명 까지는 극소수의 학자 혹은 체제가 있었다면 지금은 그 상황이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이다. 이는 대중에게 ‘해석권력’을 부여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위와 같은 두 가지 차원의 분석을 일반화하기에는 아직 이르다. 조선시대가 일찍이 발달된 금속활자 기술을
가졌으나 서양처럼 혁명적인 전사회적 변화가 없었던 이유는 국가의 출판 사업 독점, 상업 활동에 대한 경시, 문맹률 등
다양한 사회적 요소가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식은 단순히 책이라는 매체 하나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다양한 조건과 맥락이 우리의 지식구조와 맞닿는 지점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튈 때, 그때 우리의
지식구조는 진정한 혁명을 이끌 원동력을 가진다. 종교개혁이 그러했으며 농민전쟁, 프랑스 혁명이 그러하였듯이.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주된 분석틀은 흡사 지식사회학의 작업과 유사하다. 지식사회학은 지식의 사회구성적 성격을 탐구하는
학문으로서 나아가 ‘어떠한 것을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우리에게 질문한다. 만하임(Mannheim)은 지식의 구성이
순수하게 주체의 이성에 기초하기 보다는 존재의 맥락에 의존하여 이뤄진다고 주장하였다. 즉 그는 이전에 지식의
패러다임을 인식론에서 존재론으로 전환시켰다. 지식은 우리가 어떠한 능력(이성)으로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지식이
만들어질 당시의 사회, 문화, 역사적 맥락과 읽는 지금의 사회, 문화, 역사적 맥락에 따라 다르게 구성된다는 것이다.
가령,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태양계가 9개의 행성으로 구성되었으나 지금은 명왕성이 빠지고 8개의 행성만이
태양계로 정의된다. 이것을 언제, 누가, 왜, 그렇게 규정했는지 그 메커니즘을 파악하는 것이 하나의 숙제라고 할 수
있다. 가다머(Gadamer)는 만하임의 논의를 발전시켜 해석이란 필연적으로 선입견을 가질 수밖에 없으며 지식은
상대적으로 끊임없이 재해석, 재구성된다는 것, 즉 해석학적 순환 의 가치를 역설했다. 그러나 내가 볼 때 가다머의
이러한 작업 역시 아직 인식론적 차원에 상당히 많이 기대고 있다. 왜냐하면 해석학적 순환 역시 일종의 연구자의 당위
차원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지식의 사회구성적 성격은 결국 푸코가 비담론적이라 명명한 요소들, 즉 제도, 규정,
기술, 분류 유형 등 일정 정도의 푸코식 계보학적 사고가 뒷받침 될 때 당위의 차원에서 사회학적 분석의 차원으로
발전할 수 있다.
1)이러한 점을 미루어 볼 때 ‘책’이란 지식사회학에서 중요한 방법론적 단초를 제공한다. 앞서 서술한 책의 사회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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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격은 그것의 해석학적 분석 가능성을 내포하는 동시에 유물론적 분석의 가능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즉 책은 여타
다른 법, 제도 등과 달리 지식 자체를 그 주된 목적과 기능으로 한다는 점에서 지식사회학의 주제에 관통한다. 그리고
동시에 책은 글과 종이의 결합이라는 구체적인 형태를 가지며 그것의 생산, 폐기 등 측정 가능한 역사를 가진다는
점에서 비담론적 요소의 성격을 가진다. 그렇기 때문에 난 책이라는 주제를 통해 (서양)역사의 지식구조, 지식을
습득하는 방법 또 그것과 연관된 여러 사회구조를 일면 살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위 4번 내용 참조.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조선시대가 일찍이 발달된 금속활자 기술을 가졌으나 서양처럼 혁명적인 전사회적 변화가 없었던 이유는 국가의 출판
사업 독점, 상업 활동에 대한 경시, 문맹률 등 다양한 사회적 요소가 뒷받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처럼 지식은 단순히
책이라는 매체 하나에 의해서 좌지우지 되는 것이 아니다. 사회의 다양한 조건과 맥락이 우리의 지식구조와 맞닿는
지점에서 강렬한 스파크가 튈 때, 그때 우리의 지식구조는 진정한 혁명을 이끌 원동력을 가진다. 종교개혁이 그러했으며
농민전쟁, 프랑스 혁명이 그러하였듯이. 그렇기 때문에 섣불리 단정할 수 없지만 난 여전히 매체의 힘은 강력할 것이며
이제 영상매체가 활자매체의 자리를 위협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어떠한 사실을 영상으로 목격하는 데 익숙해져
있으며 영상=사실 이라는 도식을 뿌리깊게 머리에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우린 흔히 고려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금속활자 기술을 개발했다고 들어왔다.
그리고 실제로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가 1445년경 발명된 것에 비해 고려는
12-13세기 이미 금속 활자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오랜
기간 조선시대 책의 역사를 연구해온 강명관에 따르면 단순히 위와 같은 사실을
민족적 감정과 결부시켜 ‘우리가 더 뛰어나다.’식의 생각에 사로잡히면 안된다.
그 이유는 단순히 기술의 발명 시기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기술로 인해
얼마만큼의 사회적인 변동, 사회적 발전이 있었는지가 더욱 중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구텐베르크의 금속활자와 고려, 조선의 금속활자는 재질이 금속이라는
공통점 외에 독서인구의 증가, 지식의 해방, 지식의 값싼 공급 등의 사회적
측면에서 어떠한 영역도 겹치지 않는다. 부록에서는 왜 한반도에서 책이라는
직지심체요철
것이 서양만큼의 파급력을 가지지 못했는지 간략하게 적어보려고 한다.
조선시대 책의 출판은 전적으로 국가의 주도 하에 이루어졌다. 고려시대에는 사찰 이 출판의 기능을 담당하지만
조선시대로 들어와 국가 기간인 주자소, 교서관과 지방행정 기관이 출판을 담당하게 된다. 국가가 인쇄와 출판을
담당하는 사례는 오직 조선에서만 찾아볼 수 있는 독특한 현상이다. 중국은 송나라때 이미 민간 출판사, 서점이
존재하였고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 이후에 그러하였다.
조선시대 정부는 출판 대상 선정부터 그것의 출 판, 책의
유통까지 전 영역에 걸쳐서 그 영향력을 강제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서 책의 민간으로의 유통은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조선시대 금속 활자는 희귀한 물건이었고 국가만이 소유할 수 있는 것이었다. 구텐베르크의 금속 활자가 상업적
가치를 가진다는 것을 일찍이 알아본 부르주아들에게 유통되었다면 조선은 그러한 경향이 전혀 없었다. 가장 큰 이유로는
우선 조선이 서양과 다르게 한자라는 표의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종대 인쇄물인 [자치통감]을 인쇄하는
데에는 20만자의 활자가 필요했다. 그렇기 때문에 활자 비용을 민간의 차원에서 부담하기에는 무리일 가능성이 크다.
한글 활자가 쓰이긴 쓰였으나 한글 자체의 보급이 조선 후기부터 시작되었다는 점에서는 한글 활자 역시 대중적으로
쓰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민간으로 보급되지 않는 활자 때문에 조선은 서양의 역사와 정반대의 경향을 가진다.
구텐베르크의 활자가 지식의 해방으로 비롯된 사회 변혁을 일으켰다면 조선에서는 국가의 이데올로기 통치 기구로서
활자가 사용된 것이다. 이는 중세시대 서양의 모습과 상당히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
책의 활발한 생산이 이루어지지 않다보니 책의 가격 또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비쌌다. 중종실록에 따르면
[대학]이나 [중용] 같은 책을 구입하기 위해서는 상면표 3~4포 정도가 필요하다고 적혀있다. 오늘날의 가치로 환원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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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 300만원 정도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장시 종이 값 또한 굉장히 비쌌는데 기록에 따르면 비단 3~4필에 전지만한
종이 1장을 구매할 수 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조선에서 활자, 책의 문화가 만들어지지 못한 이유는 조선 정부의 지식
독점적 정책이 가장 큰 이유다. 또한 ‘사농공상’이라는 말과 같이 조선시대 상업, 즉 장사는 가장 가치가 낮은 류의
노동에 속했다. 서양에서 청교도 윤리가 발달하여 부르주아가 성장, 시민권 등의 권리를 획득한 것과 달리 조선은 그러한
사상적인 기반이 있지 않았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봤을 때 책은 사상의 해방의 기능도 하지만 사상의 억압 기능도
하는 양날의 검과 같다고 할 수 있다. 결국 책의 역사를 통해 모든 사회를 분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책이라는
소재를 통해 ‘지식 구조’의 형성, 작동 등을 분석하는 것은 유의미한 작업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1. 책의 문화사 _ 데틀레프 블룸, 2015, 생각비행
2. 조선시대 책과 지식의 역사 _ 강명관, 2014, 천년의 상상
3. 말과 사물 _ 미셸 푸코, 2012, 믿음사
4. 가다머의 해석학과 지식사회학 _ 송재룡, 2003
5. 책의 역사 _ 브뤼노 블라셀, 1999, 시공사
10. 종합 결론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발명부터 종교개혁까지, 3차 매체 혁명은 그 거대한 역사적 흐름의 중심에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성서로만 존재하던 책에 종교에 반하는 내용이 적히고 이것이 대중적으로 소비됨으로 인해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계몽주의적 지식구조를 가진 인간이 탄생하게 된다. 책은 비로소 지식을 그 주된 기능으로 갖게 되었다. 책의
현대적 기능이 당시에 최초로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지식이란 기존의 지식구조에 균열을 내는 점에서
혁명적이다. 혁명은 죽음을 불사한 각오를 대규모의 군중이 가졌을 때 할 수 있는데 이 대규모 군중의 결집에
직접적으로 쓰인 수단이 바로 책과 그 속에 있는 지식이었다. 즉 지식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기 보다는 지식의 전파와
그 지식을 기반으로 한 인간의 사회적 행위로 인해 의미를 터득한다. 이러한 점에서 책이라는 매체와 사람들의 의식은
상호발전을 하며 양자가 서로를 필요로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이름 : 이희영
학과 : 사회학
학번 : 2011104321
자기소개 : 11학번 이희영입니다. 다양한 지적 도구를 만나볼 수 있는 즐거운 시간이었습니 다.
email adress : distract021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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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물의 역사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책제목: 『뇌물의 역사』
-출판사: 이야기가있는집
-출판년도: 2015년
-저자: 임용한·김인호·노혜경 공저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사실 처음부터 이 책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첫 수업시간 이후, 교수님께서 던지셨던 질문인, ‘무엇이 우리
인간의 삶, 사회변동에 가장 영향을 주었는가?’,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처음에는 ‘문자 체계’에
대해서 하려고 했었다. 그러던 와중에 우연히 이메일을 확인하면서 『뇌물의 역사』라는 책의 저자의 강연을 듣게 되었고,
강의를 들으면서, 순간 ‘이거다!’ 싶은 생각이 들었다. 강의를 듣고 나서 바로 책을 정독했고, 읽으면서 뇌물이 인류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내용이 마음에 와 닿아, 처음에 생각한 ‘문자 체계’ 대신에 ‘뇌물’을 발표 및 보고서
주제로 정하게 되었다.
물론 ‘문자 체계’도 발표 및 보고서 주제로 삼기에 부족함이 없는 소재다. 하지만 ‘뇌물’ 또한 ‘문자 체계’ 못지않게
주제로 삼기에는 부족함이 없다고 할 수 있다. ‘뇌물’은 얼핏 사소한 것처럼 보이면서도, 위험하고도 강력한 존재였다.
인류의 역사에서, 뇌물 때문에 수많은 나라의 운명이 바뀌기도 했으며, 한 국가나 사회가 몰락의 길을 걷기도 했다.
이처럼 때로는 사소하게 보이는 것이 인류의 역사를 바꿀 수도 있다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뇌물이다.
이외에도, ‘어떤 국가와 사회가 성장하고 번영하는가?’가 아닌 ‘어떤 국가와 사회가 몰락하고 멸망하는가?’에 초점을
맞춰서 사회변동을 관찰하기에도 적절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뇌물’이라는 소재를 선택하게 되었다.
3. 저자소개
-임용한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경희대학교
대학원에서
한국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학교를 비롯해 광운대학교, 충북대학교, 공군사관학교 등에 출강했다. 동아 비즈니스 리뷰(DBR)에 ‘전쟁과
경영’이란 칼럼을 연재하고 있으며, SERICEO에서 <전쟁으로 배우는 경영학>을 강연하였다. 현재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로 역사 속 인물의 역동성을 발견해내고 다양한 사건의 맥락을 짚어냄으로써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감을 줄
만한 삶의 진실과 교훈을 도출해내는 작업을 하고 있다. 저서로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경제육전과 육전체제의 성립』(공저), 『조선국왕이야기 1, 2』, 『한성 판윤에서 서울시장까지』, 『박제가 욕망을
거세한 조선을 비웃다』, 『전쟁과 역사 1, 2, 3』(삼국편, 고려전기편, 고려후기편), 『세상의 모든 전략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세상의 모든 혁신은 전쟁에서 탄생했다』 등이 있다.
-김인호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문학, 한국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히로시마대학교 객원 연구원을
지냈으며, 현재 광운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고려시대 지식인들의 국가개혁론과 조선 초기 법전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으며, 고려시대 사람들의 삶과 심성에 대한 연구에 몰두하고 있다. KBS KOREA <시간여행 역사
속으로>의 프로그램에 출연, 진행을 하기도 하였다. 현재 역사 중심 어린이 월간지 <생각쟁이>에 한국사 관련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저서로는 『미래를 여는 한국의 역사 2』, 『조선의 9급 관원들』이 있다.
-노혜경
연세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를,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한국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UCLA
Postdoctoral Scholar, 덕성여자대학교에서 연구교수로 활동 중이다. SERICEO에서 <조선 르네상스 리더십>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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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연하고, 동아 비즈니스 리뷰에도 동일 주제로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조선후기의 민중들의 실제적인 모습과 세밀한
역사를 전달하기 위해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저서로는 『조선후기 수령 행정의 실제-황윤석의 이재난고를 중심으로』,
『승총명록으로 보는 조선후기 향촌 지식인의 생활사』, 『다산, 조선의 새 길을 열다』(공저), 『영조어제해제 6』, 『인도
신이 인간이 되어 사는 나라』(공저) 등이 있다.
4. 책 내용 요약
중국 하나라를 멸망시키고, 은나라를 세운 탕왕은 이전의 하나라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겠노라고 호언장담을 했다.
하지만 탕왕이 즉위한 이래 7년 동안 계속 흉년이 들자, 탕왕은 6가지 잘못을 적어 벽이 걸어 놓고 반성했다. 그
반성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치가 절제되지 않고 문란하지 않은가?
둘째,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경제가 어렵지 않은가?
셋째, 궁전이 화려하고 사치스럽지 않은가?
넷째, 여자의 청탁이 성하고 정치가 불공정하게 운영되지 않는가?
다섯째, 뇌물이 성행하지 않는가?
여섯째, 참소로 어진 사람이 배척당하고 있지 않은가?
여기서 뇌물과 관련된 항은 하나뿐이지만, 사실 세세하게 파고들어가다 보면 나머지 다섯 개 항들도 뇌물과 무관하지
않다. 뇌물이 성행하면 정치는 권력 남용과 음모로 얼룩지고, 권력자는 백성의 삶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이익을 챙기는데
혈안이 된다. 미인계와 청탁이 성하여 인재가 밀려나고, 화려한 궁전은 비리의 좋은 공급원이다. 탕왕의 6가지
반성에서도 알 수 있듯이, 뇌물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된 역사이다. 인류의 역사가 시작됨과 동시에 뇌물의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뇌물의 기나긴 역사는 뇌물이 발생하는 원인에서 기인한다. 바로 인간의 욕망이다. 보다
빠르고 쉽게 원하는 바를 쟁취하고 싶은 욕망, 혹은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뇌물이 발생한다.
욕망과 뇌물은 인간 사회 어느 곳에서나 생긴다. 그러나 욕망이 가장 먼저 몰려드는 곳, 현저하게 충격적인 결과를
만들어내는 곳에 권력이 있다. 사회의 분화, 직업과 권력의 생성, 국가의 탄생과 함께 뇌물의 역사도 기나긴 여정을
시작한다.
시공간을 초월하여 뇌물의 본질은 변하지 않았지만, 뇌물로 인하여 발생한 결과물은 시대마다, 사회마다 다르게
나타났다. 유럽과 조선, 사회도 문화도 서로 다른 두 지역이었지만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뇌물이
성행했다는 점이다. 17세기 유럽, 당시 군주들은 절대왕정이 요구하는 권력을 얻기 위해 돈이 필요했다. 그래서 돈을
벌기 위해, 군주들은 특허권, 독점권, 전매권, 수수료, 작위, 무역회사 설립권 등 자신이 줄 수 있는 모든 권한을
현금화시킨다. 이 때, 매관매직 또한 군주들의 돈벌이의 일환으로 성행하기 시작했다. 과거 프랑스 루이 11세의 경우,
귀족에게 연금·월급을 주기 위해 관직 매매를 확대하고, 이 과정에서 고등법원제를 창설하고, 고등재판소를 계속
증설하여 고등재판소의 관직을 행정관리, 법관, 새로운 부르주아와 돈 있는 사람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이 과정에서
법복귀족이 탄생하였으며, 법복귀족은 기존의 정통귀족을 견제했다. 그 결과, 루이 11세는 충성스런 관리와 수입을
동시에 얻었다. 다른 유럽 군주들도 루이 11세 못지않게 매관매직을 자행했다. 심지어 관직을 받는 것을 거부할 경우,
독일에서는 변경 요새로 추방되었고, 프랑스에서는 바스티유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16세기 조선, 당시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인하여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공명첩을 대량으로 발행했다. 전쟁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적과 싸우기 위해서는 병력과 물자보급이 원활하게 이루어져야 하는데, 당시 조선에서는 당장 징집할
병사도, 군대에 지급할 군량미도 모두 부족했다. 병력과 물자의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조정은 대책을 강구하게 되는데,
그 대책이란 게 바로 공명첩이었다. 공명첩(空名帖), ‘이름이 비어있는 임명장’, 즉,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고, 군량미를
제공해주면, 즉석에서 관직을 주는 방법이었다. 사실 공명첩 중에 제일 최고로 여긴 것은 과거 급제를 증명해주는
공명홍패였다. 공명홍패는 이름이 비어있는 과거합격증으로, 일반 공명첩보다 더 인기였다. 공명첩은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 모두 허울뿐인 관직이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동네에서나 양반 취급을 받았다. 하지만 공명홍패는 관직에
진출하는 시험인 과거에 급제했다는 것을 증명해주었기에 어디에서나 양반 취급을 받을 수 있었다. 이 때문에,
공명홍패는 반드시 왜군의 목을 베어 오는 사람에게만 주었다. 이외에도 왜군 한 명을 죽이면 무과 1차 시험 합격, 두
명을 죽이면 2차 시험에 응시할 자격을 부여했으며, 왜군을 가장 많이 죽인 사람은 장원급제로 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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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조선 모두 매관매직이 성행했지만, 매관매직이 성행하게 된 맥락은 서로 달랐다. 유럽의 경우, 귀족 세력의
분열과 관료제의 부재로 인하여 매관매직이 성행하게 됐다. 당시 유럽의 군주들은 귀족들의 견제를 받고 있었지만,
귀족들은 국가 정치에 관심이 없었고, 자기들의 이권을 유지하는 데 관심이 있었다. 게다가 귀족 내에서도 토지를
기반으로 하는 정통귀족과 돈으로 산 관직을 기반으로 하는 법복귀족이 대립하고 있었다. 국왕을 견제하는 귀족 세력이
분열함으로써, 왕들은 비교적 자유롭게 관직을 사고팔 수 있었다. 관료제의 부재도 큰 몫을 했다. 당시 지방관을
파견하는 것은 많은 시간과 비용을 요구했다. 지방관을 파견하기 전에 그 지역에 있던 귀족의 권위를 인정해주고,
지역민을 관리로 등용하고, 영주들과 귀족들을 안심시키는 등 온갖 수고가 들었다. 그렇다고 지역민의 관리로서의 능력을
평가하자니, 평가할 방법이 없었다. 결국, 왕들은 번거로운 수고를 들이지 않기 위해, 관직을 입찰에 내걸고 영지와 도시
내부에 있는 중소 귀족이나 성장하는 부르주아들에게 돈을 받고 팔았다.
반면에 조선의 경우, 부족한 국가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매관매직이 이루어졌다. 사실, 조선은 매관매직이 발생하기
힘든 환경이었다. 관료제가 없었던 유럽의 사정과는 달리, 당시 조선에서는 이미 지방관이 파견되었을 정도로 유럽의
절대주의 국가들보다 훨씬 높은 수준의 관료제가 있었다. 실제 권력이 따라오는 관직들은 이미 관료제에 흡수되었기
때문에, 팔 수 있는 관직은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팔 수 있는 관직은 공명첩과 같은 명예직뿐이었다. 게다가 조선
초기에는 전쟁과 같은 국가적 위기 상황이 없었기 때문에 공명첩을 발행해야 될 이유는 더더욱 없었다. 하지만
임진왜란이 일어나면서 조정은 병력과 물자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공명첩을 대량으로 발행한다. 물론, 공명첩의 남발로
인한 사회적 폐해를 경고하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무시되었으며, 임진왜란이 끝날 때 즈음엔 이미 수만 장 이상이
발급되었다. 이후에도 국가재정이 부족하면, 조정은 어김없이 공명첩을 발행했다. 성을 재건하거나, 무기를 제조하거나,
빈민을 구제할 때가 오면 공명첩을 발행해 비용을 마련했다.
유럽에서는 군주들의 매관매직을 통해 당시 부르주아들이 대거 지방 행정관이나 법원의 관직을 차지하며 성장할 수
있게 되었고, 지방 행정관이나 법원이 된 부르주아들은 법복귀족이 되어 기존의 정통귀족과 대립을 하게 된다. 이처럼,
매관매직은 때로는 새로운 세력의 진입로가 되어, 사회구조를 변화시키는데 일조하였다. 조선에서도 매관매직은
사회구조를 변화시켰지만, 유럽과 다른 결과를 불러왔다. 전쟁을 치르고 있던 조선 조정은 부족한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우거나, 군량미와 같이 물자를 제공하면, 공명첩을 주기로 결정한다. 전쟁이 끝난 뒤에도 조정은
재정이 부족할 경우, 공명첩을 팔아 재정을 충당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발생한다.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공명첩을
남발하면, 양반층이 급속하게 증가한다. 양반층이 급속하게 증가하면서 군역을 부담하는 대상인 평민의 수는 감소하게
되고 이는 군역세와 같은 세수의 감소로 직결된다. 그렇게 되면 다시 국가 재정이 악화되고, 이에 조정은 더 많은
공명첩을 발행하게 된다. 이렇게 공명첩이 남발하게 되면, 공명첩에 대한 구매 욕구는 하락하고 공명첩의 단가 또한
하락하게 된다. 결국 조정은 재정을 충당하기 위해 예전보다 더 많은 공명첩을 발행해야 하는 악순환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렇게 조선의 공명첩은 신분질서를 파괴하고, 관료들에게 손쉬운 수익 수단을 던져줌으로써 관료 세계를 거대한 부패의
늪으로 빠트렸다.
역사적으로 뇌물을 다스리고, 뇌물과 싸우려고 노력한 국가나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되었지만, 그렇지 못한 국가와
사회는 대부분 몰락과 멸망의 길을 걸었다. 이렇듯 뇌물은 한 나라의 흥망성쇠를 결정할 정도의 위력을 지녔다. 뇌물이
가지고 있는 파괴력과 전염성이 다른 범죄들에 비해 강했기 때문이다. 뇌물은 기본적으로 상층부, 하층부를 가리지 않고
침입을 한다. 상층부에는 권력형 비리의 모습으로, 하층부에는 급행료, 불법적인 수수료, 약간의 사례 등과 같이 소소한
형태로 침입한다. 뇌물이 상·하층부를 가리지 않고 일상화되면, ‘뇌물은 범죄이며 도덕적으로 지탄받아 마땅하지만,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이 존재하는 필요악이다.’와 같은 생각을 하거나, 정치인의 뇌물수수를 비난하지만 자신에게
뒷돈이 들어오면 기꺼이 받는 것과 같이 뇌물에 대한 과도한 이중적 가치관이 발생하게 된다. 그 결과, 막대한 사회적
비용이 발생하게 되고, 국가와 사회는 생기와 동력을 상실하게 된다.
뇌물의 역사가 길 듯이, 뇌물을 다스리고 뇌물과 싸우려고 노력한 역사 또한 길었다. 어느 시대에나 국가에나 뇌물에
대한 처벌 규정은 있었다. 법적으로 처벌하고, 인센티브를 이용하고, 뇌물에 대한 시민의식을 제고하는 등 뇌물에 대한
처방은 다양했으며,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했다. 뇌물과 싸우고, 끊임없이 다스려 발전의 길을 걸은 대표적인 경우로
홍콩과 싱가포르를 들 수 있다. 2014년, 국제투명성기구에서 발표한 부패인식지수에 의하면, 홍콩과 싱가포르는 세계
183개 국가에서 각각 세계 17위와 7위, 아시아에서는 각각 3위와 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1960, 70년대, 홍콩과
싱가포르는 모두 부패의 온상이었다. 당시 홍콩 총독인 트렌치는 1969년 의회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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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의 부패는 오랜 관행이다. 어느 사회처럼 여기에도 존재한다. 부패의 정도는 추측만 무성할 뿐이다. 하지만
도처에 존재한다는 사실은 감내할 수 없는 일이며 가능한 한 모든 것을 없애야 한다.”
싱가포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 리콴유는 ‘부패방지는 선택이 아니라 국가생존의 문제다.’라고
말하면서 뇌물과 부패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기초하여, 기존의 부패방지법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홍콩과 싱가포르는 각각 염정공서, 부패행위조사국이라는 경찰이나 행정 기구와 독립적이면서, 부패 수사에 있어서
초법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부패방지기구를 설립한다. 더불어, 부패를 예방하기 위해, 시민의식을 제고하는데 많은
투자를 한다. 홍콩의 경우, 유치원에서 대학교까지 부패 문제와 신고의식 교육을 하고, 부패의 토양을 없애기 위해
행정절차상 불필요한 부분을 과감하게 잘라냈으며, 공무원이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싱가포르 또한
기존의 부패방지법을 재정비하고, 공직자의 급여를 높은 수준으로 인상시켜, 뇌물의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했다.
뇌물을 통제하려고 시도한 역사적 사례들을 돌이켜보면, 개중에는 성공적인 시도도 있었지만, 그에 못지않게 한계를
보이고 실패한 시도도 있었다. 뇌물과 부패를 통제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그러한 시도가 사회 발전은 물론이고 자신의
이익과 직결된다는 인식과 그것을 뒷받침하는 경제 발전이다. 결국, 가장 근본적인 방법은 지역과 신분을 가릴 것 없이
뇌물과 부패가 전체 국민에게 큰 피해를 입힌다는 사실을 체득하고 깨닫는 사회구조를 이루는 것이다. 이런 인식에
기초하지 않은 방법으로는 언제나 그랬듯이 반짝 효과로 그치고 말 것이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 키워드는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다. 인간의 필요와 욕망은 인간의 삶을
동물의 삶과 다르게 만들고 인류의 삶과 문명을 발생시킨 근원적 축이다. 뇌물도 이런 인간의 필요와 욕망과 궤를
같이한다.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뇌물도 있을 수 있었다. 뇌물은 인간의 필요와 욕망의 어두운 단면이다.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인류는 국가와 사회를 형성하고 성장할 수 있었지만, 한편으로는 필요와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국가와 사회를 몰락의 길로 이끌었다. 이 둘은 동전의 양면과 같아, 서로 분리해서 이해할 수 없다.
뇌물은 보다 빠르고 쉽게 원하는 바를 쟁취하고 싶은 욕망, 혹은 자신의 능력 이상의 것을 추구하고자 하는 욕망에 의해
발생한다. 양반 또는 귀족이 되고 인정받고자 하는 욕망, 다른 사람들이 쉽게 가지지 못한 부와 명예를 빨리 얻고자 하는
욕망, 이러한 욕망들이 뇌물을 성행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다른 한편으로, 책은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대하는 자세가 사회변동에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인간의 행위의 기저에
있는 필요나 욕망을 이해하지 않고, 오히려 부정하고 억압하려는 시도들은 대부분 한계에 직면하거나 실패했다. 뇌물도
마찬가지인데, 뇌물 관련 사건이 발생하면 뇌물이 발생하거나 발생할 수밖에 없는 제도나 사회구조를 개선하기보다는,
뇌물을 주고받은 개개인만 비난하고 처벌하는 경우가 더 많았다. 예를 들어, 정치인 뇌물수수 사건이 발생하면, TV,
신문을 비롯한 대중매체는 얼마나 많은 양의 뇌물을 주고받았는지, 누구에게 받았는지, 처벌을 얼마나 받을 지에
주목하지, 왜 그 정치인이 돈을 주고받았는지, 현행 법·제도에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지에 대해서는 세세하게 다루지
않는다. 이는 과거에도 마찬가지였다. 관리가 뇌물을 받으면, 주로 관리의 처벌여부에 대해서만 의논하고, 왜 관리가
뇌물을 받았는지, 원인이 있다면 이를 제도를 통해 어떻게 개선할 지에 대해서는 거의 논의되지 않았다.
뇌물이 인간의 필요와 욕망으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과 사회적 환경을 연관시켜 생각해보면 해결책은 충분히 나온다.
가령,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뇌물을 받는 거라면, 공무원의 임금을 대폭 인상시켜주는 방법이 있다. 실제로 중국 명나라
관리들은 봉급이 너무 적아서, 조선 관리들은 생필품을 구할 수 있는 시장이 부족해서 뇌물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공무원의 처우를 개선해 뇌물을 큰 폭으로 줄인 사례로 중국 청나라의 양렴은을 들 수 있다. 전조 명나라와 마찬가지로
청나라 관리들도 봉급이 너무 적어서, 온갖 부가세와 수수료, 선물 강요와 억지 기증 등의 뇌물로 생계를 유지해야
했었다. 이를 직감한 옹정제는 ‘양렴은’이라는 특별수당을 만들었다. 양렴은(養廉銀), ‘염치를 기르는 돈’이라는 의미를
지닌 이 특별수당은 봉급 외의 관리의 행실에 따라 지급하는 수당 내지는 보상금이었다. 옹정제는 그 동안 관리들이
걷은 부가세를 정식 세금으로 인정하고 모두 국고로 환수하는 대신, 일반 봉급의 30배~100배 수준으로, 양렴은이라는
이름으로 다시 관리들에게 하사했다.
인간의 필요와 욕망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기 자신에게 동물과는 다른 삶을 살게 만든 원동력이다.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인류는 수천, 수만 년의 시간을 거치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발전할 수 있었지만, 동시에 그러한
필요와 욕망으로 인하여 스스로의 삶을 옥죄거나 파멸의 길로 몰아넣기도 했다. 뇌물은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가져다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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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성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준다. 뇌물은 나라를 팔아먹고, 왕조의 운명을 바꾸며, 잘못된 정책으로 전 국민에게 고통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대하는 자세다. 뇌물을 죄악시하고, 형벌과 감시
체계를 강화한다고, 뇌물은 없어지지는 않는다. 뇌물은 인간의 본성의 부정적인 모습이 현시된 사례다.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직시하고, 이에 기초하여 제도와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할 때, 비로소 국가와 사회는 유지되고 발전한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인류의 역사는 필요와 욕망의 역사라고 할 수 있다. 인간은 필요와 욕망을 가졌기 때문에, 동물과 다른 삶을 누릴 수
있었으며, 자기 자신들의 삶과 문명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살아남고자하는 욕망이 있었기 때문에 인류는 총, 칼과 같은
무기를 만들 수 있었고, 쟁기, 낫과 같은 농기구를 만들어 농사를 짓고 농경사회를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자신들의
신체와 권리를 지킬 필요가 있었기 때문에, 인류는 모여서 사회를 이루고, 더 나아가 국가를 형성하였다. 그 바탕에서
법률, 경찰, 군대 등과 같이 자신들의 신체와 권리를 지킬 수 있는 수단들을 만들었다. 하지만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인류의 역사를 마냥 발전적이고 긍정적한 방향으로 이끌 지는 않았다. 때로는 인류의 역사를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방향을
이끌 기도 했다. 이 책에서 주제로 다룬 뇌물은 더 빨리, 더 많이, 더 쉽게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하는 인간의 어긋난
욕망에서 비롯된 결과물로, 인류의 역사를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방향으로 이끌었다.
인류 역사의 수많은 순간들마다,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대하는 자세는 역사의 분수령 역할을 했다. 특히,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무시하고, 오히려 부정하고 억압하려는 시도들은 스스로 한계를 보여주거나 실패하는 경우가 많았다.
대표적인 경우가 바로 미국의 금주법이다. 미국에서 술을 마시는 것을 법으로 금지하고자 한 시도는 식민지 시절부터
오랫동안 이어져 왔다. 그 결과, 그 동안 주마다 자체적으로 시행한 금주법을 1920년부터 연방 차원에서 시행되었다.
하지만 금주법은 술을 마시고 싶은 인간의 욕망을 막지는 못했다. 술을 마시지 않게 하는 대신 몰래 술을 마시게
만들었다. 가난한 사람들은 밀조 진을 마셨고, 부자들은 개인 클럽처럼 꾸며놓고 암호명을 가진 사람만 입장시키는
‘무허가 술집’을 만들었다. 이렇게 금주법은 1934년 폐지될 때까지, 미국 사회를 밀주와 밀거래로 뇌물투성이로 만들고,
마피아와 같은 갱단의 급성장을 가져오고, 공직 사회를 부패시켰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과거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듯이, 앞으로도 인간의 역사는 인간의 필요와 욕망에 크게 좌지우지될 것이다.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아는 세력이 세상을 주도하게 될 것이다. 뇌물의 역사에 대해서 살펴봤듯이,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부정하고 근절하는 것보다는 그러한 욕망을 인정하고 조절하는 것이 국가와 사회의 생존에 도움이 된다.
또한 인간의 필요와 욕망 문제를 떠나서, 뇌물 그 자체만 보면, 부정부패를 해결하는 것은 앞으로 국가와 사회의 유지와
발전에 결정적 부분이 될 것이며, 부정부패를 해결하지 못한 국가와 사회는 살아남지 못할 것이다. 최근 들어서 이러한
추세는 강화되고 있는데, 이미 국제적·국가적 부패 극복을 목표로 하는 비정부기구인 국제투명성기구가 설립되어
활동하고 있으며, 매년 부패인식지수(CPI)를 산출하여 발표하는 등 반부패의 움직임이 일고 있다. 부패인식지수 순위를
보면, 부패인식지수 순위가 높은 국가군에 대부분 경제성장률이 높은 선진국들이 포진되어 있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014년 부패인식지수>
경제성장률이 높기 때문에 청렴한 것이 아니라, 청렴하기 때문에 경제성장률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부패인식지수가 하락하면 경제성장률도 같이 하락한다는 연구 결과도 존재한다. 이외에도 국내에서도 부패인식점수가
상승하면 1인당 GNP가 최대 25% 또는 1인당 국민소득 4,713달러가 상승한다는 연구 결과가 나와 있다. 앞으로
한국도 원하던 원하지 않던 뇌물을 비롯하여 부정부패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국가 청렴도가 곧
경제성장으로 직결되기 때문이다. 미래 노동력의 투입이 제한적이고 대부분의 자원을 수입해야 하는 한국의 입장에서는
더 많이 일하지 않아도, 더 많이 공해를 일으키지 않고, 경제를 성장시킬 수 있는 이런 매력적인 방법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부정부패를 해결하는 게 그렇게 간단한 문제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부정부패를 해결함으로써
유발되는 경제적 가치와 노동력·자원을 투입하는 기존의 방식으로 산출되는 경제적 가치를 비교하면 당연히 전자의
가치가 우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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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책을 읽으면서, 때로는 사소하게
보이는 것들이 인류의 역사를 바꾸는
기폭제로 작용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사실 뇌물이라는 것은
개개인의 입장에서는 얼핏 보면, 별
거 아닌 문제로 여겨질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정치인이나
기업가와 같은 권력이 있는 사람들이
주고받는 수천, 수억 원의 뇌물이
문제가
된다고
주고받은
사회의
생각하지만, 개인이
푼돈의
생존에
뇌물이
국가와
영향을
준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개개인이
주고받은 뇌물이 역사의 이정표가 된
사례는
멸망시킨
토벌로
관군에게
항복하고,
무수히
많다.
이자성은
인하여
명나라의
위기에
거액의
포위망을
안티오크
뇌물을
바침으로써,
안티오크
성을
바치고
빠져나갔다.
수비대장에게
십자군은
함락하고,
예루살렘을
반군
몰리지만,
뇌물을
보에몽이
기점으로
명나라를
이를
함락하고
예루살렘 공국을 세웠다. 로마 시민은
이민족에게 금 1000파운드와 미녀를
바침으로써 로마를 지켜낼 수 있었다.
모두 하나같이 역사의 결정적 순간들이었다. 역사에 만약은 없지만, 관군이 이자성에게 뇌물을 받지 않고 바로
처형했다면, 안티오크 수비대장이 뇌물을 받지 않고 그대로 성을 지켰다면, 이민족이 로마 시민이 제공한 1000의 금과
미녀를 포기했다면,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뇌물의 역사에 대해서 공부하면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이해가 뇌물과 같이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얽히고설킨 문제를
해결하는데 매우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누구나 뇌물이 악이고 부패이며, 다른 어떤 범죄보다 위험성과 전염성이
강하다는 것은 알고 있다. 하지만 뇌물에 대한 처방들은 대부분 인간의 본성에 대한 몰이해에 기초하여 만들어졌다.
그중에서 단순히 처벌 수위를 높이는 선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단순히 형량을 무겁게 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뿐더러 오히려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한다. 여기서 형벌의 궁극적 한계가 드러난다. 1424년, 조선시대 세종은 뇌물을
받은 사람과 준 사람 양자를 모두 처벌하는 새로운 뇌물금지법을 제정한다. 세종의 뇌물금지법은 당시 상품 경제가
발달하지 못한 조선의 실정에도 맞지 않았지만, 더 큰 문제는 그로 인하여 또 다른 범죄가 발생한다는 것이다. 1432년,
고성 수령 최치가 창고 물건을 횡령하고 죄를 창고지기에게 뒤집어씌운 사건이 발생했다. 조사 결과, 최치가 중앙
관료들에게 여러 가지 상납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문제는 상납한 물건이었는데, 상납한 물건이 문어나 대구와 같은
먹을거리였다. 당시 관료 사회 기준으로는 사소한 것이었지만, 세종의 뇌물금지법은 이 또한 뇌물로 규정했다. 하지만
작은 사건으로 조정의 주요 관료가 모두 곤경에 처할 수 있었기 때문에, 결국 흐지부지됐다.
작은 죄를 엄벌에 처하면 사람들은 단합하고 더 큰 집단 범죄를 유발한다. 사람들은 자신이 억울하게 당한다고
생각했을 때 가장 잘 단합한다. 억울하다는 명분처럼 자신의 행위를 정당화할 수 있는 무기도 없기 때문이다. 만약에
최치를 문어 2마리, 대구 2마리를 상납한 죄로 처벌했었다면, 조정의 모든 관료들이 뇌물죄로 뒤집어쓰고 혼란에 빠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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것이다. 관료들은 이제 누가 문어 1마리, 대구 1마리를 더 받았고, 덜 받았는지에 대해서 이전투구를 하게 될 것이고, 그
과정에서 하급 관료나, 관료들 사이에서 뇌물을 주고받는 걸 도와준 하수인이 희생양이 될 것이다. 설령, 그 하수인이
뇌물에 대해서 아무 것도 몰랐다 해도, 그런 사실은 관료들에게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관료들에게 필요한 것은 그들의
죄를 뒤집어쓸 희생양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관리들의 공익을 위해 한 인간이 생매장을 당한다. 뇌물이 사소한 양이고
스스로 불합리하다고 생각할수록 편향된 정의감은 확고해진다. 단순히 형량을 무겁게 하는 것은 뇌물을 막지 못할뿐더러,
오히려 또 다른 범죄를 양산한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저자들의 이력을 통해 대략 짐작하겠지만, 이 책은 한국사, 그중에서 조선사를 중심으로 뇌물의 역사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서양사의 비중이 낮은 것도 아니지만, 여기서는 책의 서술을 보충해주는 책과 자료를 위주로
소개하고자 한다.
-『선물의 역사』, 서해문집, 2004년, 나탈리 제먼 데이비스 저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16세기 프랑스의 선물 문화다. 왜 갑자기 선물의 역사에 대해서
언급하는지 의아해할 수 있는데, 사실 뇌물이란 선물이라는 범주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선물이라는
주제는 마르셀 모스를 비롯하여 많은 인류학자와 역사가들의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저자도 이 많은
인류학자와 역사들 중 한 사람이다. 다만, 시장 경제의 발달과 함께 선물 경제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기존의 연구들과는 달리, 저자는 시장 경제의 출현 이후에도 선물 경제는
여전히 필요했고, 시장 경제와 상호 보완적 관계였다고 본다. 저자는 선물을 호혜성과 친목, 그리고
신분을 창출하는 좋은 선물과, 반대로 분쟁과 불신과 반감을 야기하는 나쁜 선물로 구분했으며,
그중에서 뇌물은 나쁜 선물에 포함되었다. 저자는 뇌물과 같은 나쁜 선물이 왕의 의무와 신민의 요구에 관한 정치사상을
배태시킨 것으로 간주하며, 나아가 왕의 선물을 둘러싼 분쟁, 이를테면 왕이 관직 선물을 베풀 때, 신민의 공적을
인정해야 할 의무가 있는지, 아니면 자신의 의지대로 원하는 신민에게 베풀고 원한다면 이를 매매할 수 있는 자유롭고
최고 권위를 지닌 증여자인지에 관한 분쟁이 구제도 전체를 나타내는 시대의 표지 중 하나라고 해석한다. 더불어서
저자는 16세기까지만 해도 프랑스에서 뇌물이 부정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고 분석한다. 뇌물을 의미하는
‘pot-de-vin’은 작은 빵 한 조각을 의미하는데, 이 단어가 불법적인 의미를 가진 것은 불과 19세기부터였다고 한다.
오늘날,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뇌물이라는 개념은 근대의 산물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부패전쟁』, 프리스마, 2011년, 부경복 저
『선물의 역사』가 서양에서의 뇌물의 역사를 보완하기 위해 넣은 책이라면, 이 책은 『뇌물의
역사』가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을 심화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기업 부패방지 전문 변호사로서의
경험이 묻어나 있는 책으로, 저자는 부패문제가 단순히 윤리의 문제를 넘어서 국제경쟁력의 문제가
되었다고 본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국제적 기업들이 각종 국제적
반부패협약에 서명하고 부패방지기구들의 평가를 받고 있는데, 여기에는 반부패라는 비교우위를 통해
아시아의 위협적인 경쟁자들을 제고하고자 하는 의중이 담겨 있다. 부패를 탁자 밑에서 이루어지는
보호무역이라고 한다면, 자유무역주의는 시장경제의 탁자 위를 치우는 것이라면 반부패는 탁자 밑을
치워버리는 것이다. 즉, 보조금이나 관세뿐만 아니라 정부 관료를 포함한 여러 의사결정권자들의
보호도 없애겠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그 동안 부패 문제에 대해서 관용적이고 미온적인 태도를 취해왔지만, 2011년
국제표준화기구(ISO)는 사회적 책임에 대한 국제표준 ISO 26000을 발효했다. 이 국제표준은 기업의 부패 문제를
지적하고 이에 대한 방지 시스템을 요구하고 있으며, 부패 감시, 내부고발자 보호, 공정경쟁을 주요 내용에 포함시키고
있다. 국제 거래에서도 ISO 26000 요건의 충족을 거래 조건으로 제시하면서 부패 문제가 새로운 무역 장벽으로 작용할
것이라는 우려가 현실이 되고 있다. 저자는 부패를 윤리의 문제가 아닌 비용의 문제로 보아야하며, 부패 제거를 통한
경영전략을 세울 것을 촉구한다.
-『조선은 뇌물천하였다』, 팬덤북스, 2012년, 정구선 저
이 책은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을 토대로 하여, 조선시대에 뇌물을 주고받은 사람에 대해 분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조선시대의 뇌물 세태를 묘사했다. 『뇌물의 역사』에서는 조정 주요 관료들이 뇌물을 주고받은 사건 위주로 서술하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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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형조 판서, 관찰사, 명문가의 자손 등과 같이 사회의 지배계층 뿐만 아니라 후궁, 유모,
노비 등과 같이 사회의 피지배계층이 뇌물을 주고받은 사례도 언급하고 있다. 뇌물을 받은 임금의
유모, 주인이 뇌물을 주고받는 것을 보고 뇌물을 주고 양인이 되고자 했던 노비, 뇌물을 받고
시험지를 빼돌린 성균관의 노비 등 다양한 사례들이 소개되어 있다. 책을 읽다보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람들이 뇌물을 주고받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뇌물의 역사』처럼 뚜렷한 주제 의식은
없지만 조선시대의 뇌물 세태를 가장 잘 묘사하고 있다.
10. 종합결론
그리스의 경제위기가 한창일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리스 경제위기의 원인을 그리스인들의 나태함과 과도한 복지로
몰아갔다. 하지만 그리스인들은 여타 유럽인들보다 더 많은 일을 했으며, 복지 역시, 세계금융위기 직전인 2007년 GDP
대비 복지지출 비중이 21%에 불과해, 일반적인 복지국가 수준은커녕 OECD 회원국 평균에도 미치지 못했다. 사실
문제는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그리스 사회의 부패였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그리스 경제위기를 대표하는 단어로
‘파켈라키(Fakelaki)’를 들었다. 그리스어로 ‘작은 봉투’를 뜻하는 이 말은 세무서나 각종 인·허가 담당 공무원에게 주는
뇌물을 뜻한다. 그리스에서는 탈세하기 위해서, 또는 돈을 빌리거나 교수 임용 청탁 등 모든 부탁이나 청탁을 할 때
무조건 돈 봉투를 건네주는 것이 아예 관행으로 굳어져 있을 만큼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다.
그리스 경제위기와 같은 사례를 통해서 알 수 있듯이, 뇌물은 그 위험성과 전염성으로 한 국가를 몰락으로 이끌어가는
무서운 존재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국가와 사회는 끊임없이 뇌물을 다스리고 뇌물과 싸웠다. 형벌을 신설하고
강화하는 사후적 조치부터 공직 사회를 감시하고, 임금 인상과 같이 인센티브를 부여하고, 부패 예방을 위한 시민 인식의
제고와 같은 예방적 조치까지 다양한 해결책이 모색되어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이기적이면서도 공리주의적인
본성, 그리고 그로 인해 나타나는 형벌의 한계로 인하여, 뇌물은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뇌물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범죄이다. 인류가 존재하고, 인간의 필요와 욕망이 계속 존재하는 한 뇌물은 끊임없이 인간을 유혹하고,
국가와 사회는 흥망성쇠를 반복할 것이다.
『뇌물의 역사』의 저자는 이런 뇌물의 속성을 암세포에 비유한다. 암세포는 우리 몸이 정상일 때에도 항상적으로
생산되는 세포다. 암세포를 근본적으로 차단하는 방법은 죽음뿐이다. 암은 인간이 살아있는 동안 몸에서 생산해내는
죽음의 씨앗이다. 그러므로 암은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다스리는 것이다. 뇌물도 마찬가지다. 뇌물은 그 시작부터가
인간의 본성으로부터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인류가 멸망하지 않으면 뇌물도 없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뇌물에 대한 가장
좋은 대처법은 뇌물을 근절하는 것이 아니라 뇌물을 다스리고 끊임없이 싸우는 것이다. 뇌물의 기저에 있는 인간의
본성을 이해하고, 인간의 필요와 욕망을 인정하고, 이에 기초하여 제도와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할 때, 국가와 사회는
보다 건강해진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이름은 성수빈(成洙斌), 2011년에 경희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여 현재 3학년으로 재학 중이다. 영어선생님,
수학선생님, 수학교수, 시민단체활동가 등 다양한 꿈과 진로의 변화를 거치고, 현재는 사회학연구원을 진로로 삼고 있다.
사실 처음부터 사회학과에 들어오겠다는 생각은 없었다. 초등학생 때는 영어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고, 중·고등학생
때는 수학선생님, 수학교수 등이 꿈이었지만 이 직업들 중에 사회학과 연관되어 있는 직업은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꿈을
본격적으로 바꾸게 된 결정적 계기가 두 가지가 있었는데 하나는 2008년 5월에 있었던 미국산 쇠고기 수입 반대
촛불집회였고, 다른 하나는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이란 책이었다. 당시 촛불집회를 보면서,
‘집회에 참여하지 못하는 자기 자신을 대신해 집회에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보답을 해야 한다.’는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내가 사회학과에 가게 된 이유가 되었으며, 베버의 책은 사회현상, 그리고 그 현상을
분석하는 것에 대한 호기심을 키워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의 단순한 치기였지만, 그로 인해 2011년
경희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하게 되었고, 사회학에 대해서 공부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2013년 8월에 입대를 하고
2015년 5월에 제대를 하게 된다. 군대에서의 경험 또는 트라우마는 인간의 본성에 대해 가졌던 기존의 가치관(예:
인간은 기본적으로 선하다)을 재정립하는 토대가 되었다.
이메일: caprisung@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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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참고문헌 및 영상
임용한·김인호·노혜경 공저, 2015, 『뇌물의 역사』, 이야기가있는집
에두아르트 푹스, 이기웅·박종만 공역, 2001, 『풍속의 역사: 풍속과 사회1』, 까치
[대담한 경제] 그리스 디폴트...‘뇌물봉투’가 부른 경제 재앙
http://media.daum.net/economic/others/newsview?newsid=20150630090915884
신년 경제대기획 부국의 조건 3편 신국부론, KBS 파노라마(26분 38초부터)
https://www.youtube.com/watch?v=2jlNzIOm_9c
[지식채널e] 대한민국 점수 5.5
http://www.ebs.co.kr/tv/show?courseId=BP0PAPB0000000009&stepId=01BP0PAPB0000000009&lectId=3
057673
[지식채널e] 살기 좋은 나라 2부 게으른 국민
http://www.ebs.co.kr/tv/show?courseId=BP0PAPB0000000009&stepId=01BP0PAPB0000000009&lectId=1
0380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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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안의 광장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제목: 『광장(Square of Europe, Square for Europe)』
출판사: 생각의 나무
출판년도: 2009년
저자: 프랑코 만쿠조 외 지음, 장택수 외 옮김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본인은 지난여름 한 달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다. 여행을 하면서 수많은
관광지와 명소들을 찾아다니고 조사했는데, 어느 나라를 가든, 어느 도시를 가든 광장은
광장(프랑코 만쿠조 외 저)
항상 가봐야 할 곳으로 손 꼽혔다. 이렇게 수많은 광장들을 다니다 보니, ‘도대체 광장은
왜 이렇게 많을까?’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광장의 보편성이 본인으로 하여금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광장이 보편적으로 웬만한 도시에는 다 위치하고 있는 데에는 어떤 이유가 있을지, 보편적인
만큼 사회에 영향력을 끼치지는 않을지에 대한 의문이 사회변동의 요인으로 광장을 선택하게 만들었다.
광장에는 항상 많은 사람들이 머무르고, 지나가는데, 이는 광장에서 다양하고 많은 사회적 교류가 발생함을 의미한다.
이처럼, 광장은 문명, 사회적 교류, 공동체 생활, 법제적 다원주의의 상징으로 우리 사회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광장은 관광지의 이미지가 조금 더 강하긴 하지만, 조금 더 깊이 있게 들여다보면
광장은 사회적으로 큰 의의를 갖고 있는 공간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물론이고, 역사 속에서 사회를 바꿀만한
일들은 주로 광장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즉, 사회변동은 광장에서 이루어졌고, 이루어지고 있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광장은 단순히 사회변동이 이루어진 공간을 넘어 사회변동을 일으킬 공간을 제공하고 시민들과
상호작용을 하는 공간이다. 사회변동의 요인으로 광장을 소개하기 위해 자료를 찾던 중 선배의 도움을 받아 이 책을
접했다. 이 책은 주로 유럽의 광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총 2개의 부로 나눠있는 이 책은 1부‘유럽 광장의 정체성과
유용성’에서는 유럽 광장의 성격과 역할에 대한 전반적인 설명을 다루고 있고, 2부 ‘도시와 광장’에서는 유럽의 주요
광장들을 하나하나 꼽아 자세히 설명해주고 있다. 1부에서는 광장의 역할을 다양하게 규정하고 설명하고 있는데, 그
6개의 역할은 다음과 같다 : 장터(market), 문화(culture), 예술(arts), 의식(celebration), 군중집회(involvement),
사람들(people intero). 본인은 이 부분이 바로 광장이 사회변동에 어떻게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보는 데에 큰 도움이
되리라 생각해 이 책을 선정하게 되었다. 광장이 사회에 어떤 역할을 했는지를 알아야 광장이 어떤 사회변동을
일으켰는지를 알 수 있기 때문이다.
3. 저자소개
이 책은 프로젝트로 이뤄진 연구를 담고 있다. 이는 유럽연합의 ‘문화 2,000년’프로그램에 따라 공동 수행된 연구로
단지 ‘유럽의 광장’이 아닌 ‘유럽을 위한 광장’을 제안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많은 사람들이 연구에 참여했기 때문에
한명의 저자가 아닌 여러 연구 팀들을 소개할 것이다.
§
베네치아 IUAV대학교 도시학부
- 프랑코 만쿠조(Franco Mancuso): 과학담당국장
- 티지아나 아우데 루피에라(Tiziana Aude Lupieri), 알렉산드로 트리콜리(Alessandro Tricoli): 연구조정담당
- 베네치아 IUAV대학교는 베네치아 건축대학이라는 이름으로 1926년에 설립되었으며 2001년에는 교육 및 연구
프로그램을 확장하여 건축학부에 도시 및 지역개발학부, 미술 및 디자인 학부가 추가되었다. 산업디자인, 건축시공, 계획,
건축설계, 건축사, 도시계획 등 각 학부에서 연구 활동을 펼치고 있으며 지역기관이나 공공 ․ 민간기관과 협력하여 도시
및 지역을 개발하는데 앞장서고 있다.
§
아리스토텔레스대학교 건축대학
96
- 마리아 아나니아두 찌모푸루(Maria Ananiadou-Tzimopoulou): 과학행정담당
- 1957년에 설립된 그리스 테살로니카의 아리스토텔레스대학교 건축대학은 건축공학 학사 5년 과정, 건축 및
도시설계, 도시 및 지역계획, 조경학, 기술, 건축학, 보존, 시각예술 분야에 박사과정과 박사 후 과정을 제공한다.
건축대학은 국내외 활동 덕분에 인정을 많이 받고 있다.
4. 책 내용 요약
(1) 광장의 의미
광장에 대해 다루기 전에 앞서, 광장의 의미를 살피는 것은 중요하다. 의미를 찾는 첫 단계로 광장의 사전적 정의는
무엇일까? 광장은 사전에 ‘많은 사람이 모일 수 있게 거리에 만들어 놓은 넓은 빈터’로 정의되어 있다. 또한, 광장은
비유적으로 여러 사람이 뜻을 같이하여 만나거나 모일 수 있는 자리를 비유적으로 의미하고, 많은 사람들이 휴식하거나
집회를 가지는 등 공공의 목적으로 사용하기 위해 만든 장소를 의미한다. 이 책에서 초점을 맞추고 있는 지역인
서양에서 광장은 그리스 아고라(Agora)를 시작으로 로마의 포럼(Forum), 중세도시의 플레이스(Place)로 계승되어
왔으며, 지금도 도시 공간의 핵심에 위치한다. 광장은 종교, 정치, 사법, 상업, 사교 등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시민들의
사회생활의 중심지 역할을 하며, 광장을 중심으로 도시가 발전하는 경우가 많았다. 광장은 반드시 매력적이고 접근하기
쉬우며, 잘 관리되어야 하고, 청결한 장소이어야 한다. 또 채광과 초명이 충분히 확보되어야하고 활력 있는 장소이면서
디자인이 잘 되어 있어야 한다. 고대도시의 광장같이 공공공간은 명백히 거주자들이 모이고 그 스스로 정체성을 갖는
중심공간이었다. 즉, 광장은 개인의 사회화와 대면을 위한 장소이자, 상징이 층층이 쌓이고 기억이 집합되며, 기능이
중첩되고 활동이 교차되는 공간이다.
도시사회학의 개념을 빌리자면, 광장은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하며 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결정하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공간으로 사회적 에너지를 이끌어낸다. 광장에서는 일상의 상호작용과 소통이 이루어지며, 무형의 공간이지만
대중이 함께 호흡하는 특별한 장소를 의미한다. 또한, 광장은 빈 공간이 사람들의 가치로 채워진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행위가 벌어지는 무대가 되며, 광장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함으로서 참여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확고해지기도 한다. 또한,
ㅌ 의식의 과정에서 사회적 유대가 강화되는 기회가 마련되기도 한다.
광장에 대한 다양한 의미들 중에서 이 책은 광장을 ‘유럽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 규정하며 시민
사회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장소라고 주장한다. 광장은 대중에 의해 정의되는 거의 유일한 물리적 공간으로 그곳에서는
통행, 회합, 교환, 상호인식, 권력의 과시, 반란 등 다양한 사건이 발생한다. 광장에서는 공개처형이 이루어졌고 문화와
종교의 고상한 사건들도 이곳에서 일어났다. 또한, 광장은 사회적으로 화합하는 열린 공간이기도 하다. 모든 광장은
각자의 역사와 개성이 있다. 모든 광장은 각자의 역사와 개성이 있다. 광장은 물리적이든 정신적이든 구체적 요구를
충족시키고 시간이 지나면서 스스로 다른 방향으로 변형되기 위해 창조되었다. 결과적으로, 광장은 도시의 중심부에
위치하면서 조화로운 세계, 그 도시 역사를 보듬는 문화적 ․ 물질적 공간이었으며 정치행사와 종교의식이 펼쳐지는
장소라고 정리할 수 있다.
(2) 광장의 역할
이 책에서는 광장의 역할을 6가지(장터, 문화, 예술, 의식, 군중집회, 사람들)로 나눠 설명하고 있는데, 본인은 이를
정리해 광장의 역할을 지성, 문화, 집회의 공간 세 가지로 나눠 설명할 것이고, 다음의 논의가 그에 관한 것이다.
① 지성의 공간으로서의 광장
오래 전부터 광장은 지성의 공간으로서 기능했다.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나누는 토론을
진행함으로서 집단 지성을 발휘하며 새로운 철학과 과학을 발전시키곤 했다. 광장이 지성의 공간을 마련해줬다는 주장은
하버마스의 공론장 이론과 연관 지을 수 있다. ‘공론장(Public sphere)’은 광장처럼 토론이 형성되는 공간으로 공적인
의견을 주고받으면서 여론을 형성하는 공간을 의미한다. 하버마스는 그의 저서 『공론장의 구조변동』에서 ‘공론장’을 근대
서구 사회에서 발생한 공개된 토론장으로 정의하였고, 이곳에서 공적인 의견들이 주로 형성된다고 주장했다. 이곳에서는
동등한 참여자들이 자유롭게 서로 비판적인 논의들을 주고받을 수 있었다. 하버마스는 이 이론을 통해 공정한 의사소통의
조건 속에서 사회구성원간의 상호존중과 연대적 책임을 정당화하는 도덕적 규범이 어떻게 도출되는 지를 알아내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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했고,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관심사들이 공적인 논쟁을 통해 모두의 관심사로 전환되는 방식과 실천적인 정당화를 통해
합의를 이끌어내는 과정에 주목했다. 이처럼, 시민들은
공론장에서
이뤄진
토론을
통해
사회통합의
연대를
형성했고, 이를 통해 급진적인 민주주의를 형성했다는 것이
이 이론의 함의라고 할 수 있다.
광장이 지성의 공간으로서 역할했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로는
그리스의
아고라(Agora)가
있다.
아고라라는 단어는‘만나다’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것으로,
시민들이 여러 가지 공적, 사적 일에 관해 의견을 교환하러
가는 도시의 공용 공간(common space)을 의미한다.
이러한
연설이나
대중
전용
투표
공간에서
같은
일어나는
민주주의의
만남들로
이상이
자유
실질적으로
달성됐고, 민주주의와 철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문명의
아고라(Agora) [출처: Google 이미지]
꽃을 피우는 계기를 마련했고, 아고라에서 이뤄졌던 토론은
시민자치의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현대인들은 이 광장은 ‘민주주의의 산실’이라 칭한다. 즉, 아고라는 토론의
장을 제공함으로서 공적인 의사소통과 직접 민주주의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민주주의의 본적이라 불리는 그리스
아고라는 단순히 공간의 의미를 갖는 것을 뛰어넘어 소통과 토론의 공간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상호이해와 화합이 생명을
얻었다.
② 문화의 공간으로서의 광장
광장의 두 번째 역할은 바로 문화의 장을 마련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도 광장에서는 많은 축제와 의식이 진행되고
있으며, 이는 광장이 사람들이 문화를 생산 ․ 소비하는 공간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카니발이나 행진과 같은 세계의
다양한 축제에서 광장이 문화의 공간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스페인 광장에서 이루어지는 투우는 광장에서 이뤄지는 대표적인 축제(carnival)이다. 축제를 위해 광장에 모인
사람들은 함께 소통하고 화합하며 자신들의 문화와 가치관을 공유한다. 문화의 공유를 위해 모인 사람들에게 광장은
소통의 장을 제공하게 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함께 소통하며 자신들의 문화를 전파하며 새로운 문화를 전파한다. 이처럼
광장은 사람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고 볼 수 있다.
③ 집회의 공간으로서의 광장
“좋은 광장은 충돌과 화해가 교차하는 곳이다.”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광장은 충돌의 장이며, 집회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사람들은 광장에서 정치적 주체로 활동하면서 자신들의 정치적 소신을 드러낸다. 즉, 광장은 개인이 정치적
주체로 활동할 수 있게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이는 행위자-연결망 이론의 흐름과 연결된다. 이처럼 사람들의
가치로 채워진 광장은 사회적 행위가 벌어지는 무대이며, 이에 참여하면서 사람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지위를 다진다.
역사적으로 광장은 군중을 응집하는 일종의 사회적 용광로로 기능해왔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광장은 파리 바스티유
광장처럼 군중의 분노가 폭발하는 현장이 되기도 했고 때론 로마의
베네치아 광장처럼 새로운 정치이념에 도취한 군중이 집단 최면에
빠지는 장소가 되기도 했다. 이처럼 사회구성원 전체의 의도를
표출하는 광장의 과거 모습은 이익집단 간 갈등 표출 현장으로
쓰이는 오늘날과는 다소 차이가 있는데, 이는 광장 자체의 의미가
변질된 것이 아니라 사회계층분화의 복합적 요소와 집단이기주의의
팽배에 따른 현상으로 볼 수 있다.
집회의 공간으로 쓰이는 광장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체코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광장은 성
바츨라프의 이름을 따서 만들었지만, 그 후에도 바츨라프 하벨 전
바츨라프 광장(프라하, 체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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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의 공이 고스란히 담겨있다. 바츨라프 광장의 역사를 살펴보자면, 이 광장은 처음에는 시장으로 알려졌다가 그
뒤로 격변의 체코 근현대사에서 주요한 무대가 된 곳이다. 체코 근현대사의 굵직한 사건들인 체코슬로바키아 공화국 건국
선포, 자유 항쟁 ‘프라하의 봄’과 소련의 무력진압, 이에 저항한 대학생들의 분신, 무혈혁명으로 자유를 되찾은
‘벨벳혁명’이 모두 이 광장에서 일어났기 때문이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이 제시하는 관점은 광장이라는 인공물과 사회변동이 서로 영향을 끼치며 변화하고 발전해왔다는 것이다. 이
관점은 행위자-연결망 이론(Actor-Network theory, ANT)과 일맥상통한다. 이 이론은 프랑스의 철학자 브루노
라투어(Bruno Latour)가 주장한 것으로 사물이나 사람의 존재가 구성되는 과정이 환경과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주변
사람들, 사물, 인공물 등의 영향을 받는다는 내용이다. 이는 기존의 사회학 이론들이 개인의 정체성 구성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로 타인이라는 인간 행위자만 제시했던 것과는 다르게 사물이나 인공물을 그 범주에 포함시켰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 그는 이 이론에서 주관-객관(subject-object)으로 이뤄진 이분법적 도식을 지적하며 모든 대상들을
여러 행위자(actor)들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이질적인 연결망(heterogenous network)으로 보길 제안한다. 이 때, 그는
인간 행위자와 비인간 행위자 모두 동등한 행위능력(agency)을 가진 존재로 보며 이 둘을 대칭적으로 다룰 것을
주장한다.
이 이론에 따르면 개인의 정체성이 구성되는 데에 광장이라는 인공물이 영향을 끼치고, 광장의 성격과 역할에 따라
개인의 성격과 역할 또한 다양한 양상을 띠며 생성 또는 변화된다는 것이다. 이처럼, 이 행위자-연결망 이론이 광장이
사회변동에 영향을 끼쳤다는 이 책과 본인의 주장을 뒷받침해준다. 예를 들어, 광장이 집회의 공간으로 기능하게 도면 그
사회의 개인은 집회의 공간으로서의 광장이 없는 사회의 개인들에 비해 정치적 주체로 기능할 가능성이 높아지며, 이러한
특성을 가진 개인은 사회의 변동을 이끌어 낼 수 있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인류의 역사를 해석하기 위해 광장의 역사를 먼저 살펴볼
것이며, 앞서 책의 내용과 달리 한국 광장의 역사에 대한 논의가
이어질 것이다. 우리나라 광장의 역사는 서구 사회에 비해 짧은
역사를
갖고
있다.
이는
왕권
중심의
사회가
오랫동안
지속되면서 광장이 따로 존재하지 않고, 궁문 앞마당이 광장을
대신했기 때문이다. 그 곳에서는 주로 왕권을 높이기 위한
놀이나
권력과시를
위한
싸움이
벌어졌기
때문에,
광장의
지배권은 상류층이 독점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에
근현대사회로
진입한
뒤,
시청
앞
광장에서
3.1
운동
만민공동회가 개최되면서 우리나라 광장 문화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때까지도 광장의 지배권은 시민이 아닌 권력층이 갖고
서울시청 2002 월드컵 응원 현장 [출처: Google 이미지]
있었다. 이처럼 광장에 대한 접근성과 지배권이 상위 계층에게만 한정되어있던 시대에는 광장의 성격은 기득권층의
성격과 유사했다. 이러한 성격의 광장은 사회 구성원들이 새로운 성격의 주체로 발전하는 것을 막았고, 기득권층이
지배하는 사회를 존속시켰다.
우리나라 광장의 주도권은 2002 월드컵 응원을 기점으로 본격적인 변화를 겪었다. 시민들이 모두 한자리에 모여
응원하고 기뻐하면서 광장에 대한 담론이 시민들이 향유하는 문화를 중심으로 진행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이후로 줄곧
우리나라 광장은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하고 있다. 세월호 집회나 민중총궐기가 광장에서 진행됨으로서 집회의 공간으로
기능하기도 하고, 노동자의 날을 맞아 다 같이 모여 기념행사를 하는 등 화합의 공간으로 쓰이기도 한다. 또한, 가수
싸이의 무료 콘서트가 시청에서 열리거나 한글날 행사를 광화문 광장에서 진행하는 등 문화 ․ 예술의 공간으로서도
확실히 기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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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사회가 인공물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관점을 이 책의 논의와 연관 지으면, 광장이라는 인공물이 사회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고,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는다는 관점을 추출할 수 있다. 이 관점으로 앞으로의 세상을 해석해본다면,
긍정과 부정 양방향으로의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긍정적 해석을 먼저 해본다면 광장에 대한 사회적인 관심이 증가하고
있으며, 이 추세는 점점 강화될 것이라는 것이다. 미디어와 SNS 사용의 확대로 인해 대중들 간의 소통이 증가하면서,
사람들은 실제로 만나 우리문화 알리기 운동이나 유의미한 실천을 하는 것에 대한 관심이 증대했다. 관심이 증대됨에
따라 그러한 실천도 함께 했고, 그 무대는 주로 도시의 광장이 되었다. 이처럼 사람들은 광장에 모였고,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각각의 개인들이 마음껏 자신의 의견을 공유하면서 집단 지성의 힘을 크게 발휘하는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또한 스마트폰의 보급에 따른 인터넷의 확산은 광장의 범위를 확대시켰다. 물리적으로 존재하는 광장에서 확장해
인터넷 광장이 두드러지게 활성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자신들의 의견을 좀 더 자연스럽게 드러내고,
이에 대해 서로 토론하며 과거에 아고라가 그랬듯이 서로의 생각을 교환하며 확장시킨 것이다.
뒤이어 이 관점 하에 부정적인 방향으로 세상을 해석해본다면, 현재 광장은 많은 문제점을 지니고 있다. 사회 내에서
다양한 기능을 하며 사람들과 상호작용해야 하는 광장은 점점 일상적인 공간과 멀어지고 있다. 도시사회학의 관점에서
보면 이러한 현상의 원인은 우리가 자연스레 광장으로 발걸음이 향할 이유가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는 주로 우리나라의
경우에 국한되는 현상이기는 하지만, 카페나 음식점 혹은 쇼핑몰 같은 상업시설이 광장 주변에 위치해있지 않기 때문에
시민들이 자주 찾지 않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일상적인 공간이 되는 데에 실패한 광장은 목적이 있어야만 방문하는
장소가 되면서 ‘광장= 시위’라는 잘못된 선입견이 생기게 된다. 이러한 악순환이 반복되면서 시민들을 문화의 주체,
정치의 주체, 지성의 주체로 활동할 수 있게 돕는 광장은 점점 사람들의 곁에서 멀어질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문제는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 이는 광장의
필수요소들을 채우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광장의 필수요소는 랜드
마크가 될 만한 건물, 주변이 건물로 둘러싸인 구조, 형태를 갖추고
있는
공간,
주변의
상업시설
이렇게
네
가지이다.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광장인 시청 광장과 광화문 광장을 살펴보면, 이러한
필수요소들 중 몇 가지가 충족되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공통적으로
부족한 부분인 상업시설만 보완한다면, 사람들과 광장의 상호작용이
일상적으로 이뤄지는 인간을 위한 공간인 광장으로 발전할 수 있을
것이다.
광장 시위 현장[출처: Google 이미지]
또 다른 부정적인 해석으로는 역설적이게도 긍정적 기능으로
꼽았던 인터넷 광장의 등장으로부터 비롯된다. 이는 바로 소위 디지털 마오이즘(Digital maoism)으로 인터넷
집단주의를 의미하며, 인터넷 상에서 급속히 확산되는 감성적 집단주의의 위험성을 극단적인 집단주의운동에 빗대어
나타낸 용어다. 인터넷광장이 확산되면서 점점 더 다양한 목소리가 사회 내에 존재하게 됨과 동시에 몇몇 극단적인
의견이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전체주의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최근 우리 사회에서도 일베와 같은 극단주의적
성향을 가진 사람들의 의견이 점점 확산되는 문제가 발생되고 있고, SNS에서 사실이 확인되지 않은 정보들이 마치
사실인 것처럼 퍼지는 문제가 자주 생기고 있다는 점에서 디지털 마오이즘이 우리 사회에서도 발생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이 책은 나에게 일상적인 요소에서 사회학적인 함의를 찾는 통찰력을 길러 주었다. 지금까지는 주로 사회에서
발생하는 큼지막한 사건들이나 사람들의 행동에서 사회학적인 의미를 찾는 것에 익숙했다. 즉, 본인에게 사회학적 함의를
갖는 대상의 범위는 인간의 행위에만 국한되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사회변동의 원인을 찾는 과정에서 인간의
행위보다 더 근본적인 요인을 찾게 되었고, 그 요인으로 ‘광장’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본인은 사회학적
함의를 갖는 대상의 범위를 건축물과 같은 인공물로까지 확대하게 되었다.
또한, 이번 기회를 통해 사회 현상에 있어서 일방적인 인과관계가 아닌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 상호관계가 존재한다는
통찰력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책을 통해 “광장”이라는 하나의 요소로 사회의 흐름을 읽고 해석하는 복합적인 분석은
100
익숙한 원인분석에서 더 나아가 원인과 결과를 다양하게 설정하고 해석할 수 있게 해주었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
프랑코 만쿠조 외 지음, 장택수 외 옮김.『광장(Square of Europe, Square for Europe)』. 도서출판 생각의 나무.
2009
§
박승규. 『광장, 카니발과 미학적 정치 공간(Agora: A Carnival and Aesthetic-Political Space』. 2010
§
(영상) <EBS 지식채널 e - 민주주의의 산실(아고라 광장)(Cradle of Democracy (Agora))>.
https://www.youtube.com/watch?v=vYuqUb4-d80
§
최유나. 『도시광장의 시각적 인지 특성에 관한 연구 : 선호성 및 복잡성을 중심으로』.2012
10. 종합 결론
이 책의 내용과 앞의 논의를 종합적으로 관통하는 핵심은 다음과 같다. 개인의 정체성이 구성되는 데에 광장이라는
인공물이 영향을 끼치고, 광장의 성격과 역할에 따라 개인의 성격과 역할 또한 다양한 양상을 띠며 사회가 변화한다는
것이다(행위자-연결망 이론, Actor-Network theory, ANT). 즉, 광장은 인공물이지만 인간 행위에 직 ․ 간접적으로 큰
영향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광장은 ‘유럽의 정체성을 구성하는 가장 근본적인 요소’로 시민 사회의 정체성을 부여하는
장소라는 의미를 갖는다. 광장은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해 공동체에 대한 인식을 결정함으로서 사회적 에너지를
이끌어내는 공간이다. 그 곳에서는 일상의 상호작용과 소통이 이루어지며, 무형의 공간이지만 대중들은 그곳에서 함께
호흡한다. 또한, 광장은 빈 공간이 사람들의 가치로 채워진 것이기 때문에, 사회적 행위가 벌어지는 무대가 되며,
광장이라는 공간에서 함께 함으로서 참여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확고해지기도 한다. 또한, 이 의식의 과정에서 사회적
유대가 강화되는 기회가 마련되기도 한다.
광장은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는 데 가장 주요한 역할은 바로 지성의 공간, 문화의 공간 그리고, 집회의 공간으로
기능한다는 것이다. 첫 번째, 지성의 공간인 광장은 사람들에게 토론의 장을 제공해줬다. 사람들은 광장이라는 토론장에
모여 자신의 생각과 철학을 나누었고, 집단 지성을 발휘하며 새로운 철학과 과학을 발전시켰다. 광장이 사람들에게
지성을 발전시키고 지식을 나눌 공간을 제공했다는 대표적인 예로는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Agora)를 들 수 있다. 두
번째, 문화의 공간으로서의 광장은 그 곳에서 사람들이 문화를 생산하고 소비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주로 광장에서
진행하는 축제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광장에 모여 함께 소통하고 화합하며 자신들의 문화와 가치관을
공유한다. 이처럼 광장은 사람들이 문화를 향유하는 공간을 제공함으로써 문화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다. 광장의 마지막
역할은 바로 집회의 공간이다. “좋은 광장은 충돌과 화해가 교차하는 곳이다.” 이 문장이 시사하듯, 사람들은 광장에서
정치적 주체로 활동한다. 즉, 광장은 개인이 정치적 주체로 활동할 수 있게끔 공간을 마련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광장의
역할은 체코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도 확인해 볼 수 있고, 우리나라의 광장에서도 모두 확인할 수 있다.
위의 논의를 우리나라 광장에 적용한다면, 우리나라의 광장의 역사는 짧으며 그 마저도 오랜 시간 지배권이
상류층에게 있었다. 근현대사에 진입한 뒤로도 그 추세는 지속되다가, 2002년 월드컵 응원을 기점으로 광장의 주도권이
시민들에게 넘어갔다. 그 뒤로, 시민들이 중심이 되는 다양한 집회와 문화행사가 광장에서 일어나면서 우리나라 광장은
다양한 역할들을 수행하고 있다.
사회가 인공물과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관점으로 앞으로의 세상을 해석해본다면, 긍정과 부정 양방향으로의 해석이
모두 가능하다. 긍정적인 부분은 미디어와 SNS의 영향을 받아 사람들이 도시의 광장을 무대로 자신들의 생각과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또한 스마트폰의 보급에 따른 인터넷의 사용이 증가함에 따라 인터넷 광장의 영향력과 범위가
확대되었다. 반면, 부정적인 면도 무시할 수 없다. 광장이 점점 일상적인 공간과 멀어지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결국, 광장은 목적이 있어야만 방문하는 장소가 됨으로서 ‘광장= 시위’라는 잘못된 선입견이 생기게 되며, 이는
곧 시민들이 문화의 주체, 정치의 주체, 지성의 주체로서 활동할 수 있게 돕는 광장의 의미가 옅어지는 것을 의미한다.
두 번째 부정적인 해석은 바로 디지털 마오이즘(Digital maoism)의 문제이다. 인터넷광장의 확산과 동시에 다양한
목소리들이 사회에 출현하게 되고, 이는 몇몇 극단적인 의견이 진리인 것처럼 받아들여지는 전체주의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것이 요지이다.
위의 논의를 종합하면, 광장은 단순한 건축물이나 인공물로서의 의미보다 더 포괄적인 의미를 가지며, 다양한 역할을
101
수행하는데, 이는 사회를 살아가는 인간 행위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친다. 광장이 어떤 역할을 하느냐에 따라 행위자가
어떤 성격을 띠게 되는지가 결정되는 것이다. 이처럼, 광장은 사회가 변동이 일어나는 주 무대였고, 사회 변동을
일으키는 계기를 마련해주기도 했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이름: 최주연
학과: 사회학과
학번: 2014104438
자기소개: 안녕하세요. 여행, 생각, 말하기를 좋아하는 22살 최주연입니다!
e-mail 주소: juyoun676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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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사회변동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전쟁과 문명, 플래닛미디어, 2015년, 허남성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이 책은 전쟁을 사회현상으로 이해하기 위해 정치, 사회, 문화, 경제의 변동을 제시하는
접근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을 통한 결과가 사회의 변동을 나타난
사례를 제시하기보다는, 전쟁을 만들어낸 요인이 무엇인지 알아보는 것에 조금 더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전쟁으로 인해 발생한 다양한 사회변동을 알아보려는 나의
시도에서는 조금 방향이 벗어난 측면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이 책에 제시된 ‘군사사’라는 개념이
가진
‘성찰적
태도’
때문이었다.
문자가
등장하고
나서야
인류는
전쟁의
역사를
체계적으로 기록할 수 있었으며, 언어의 발달에 따라 인류의 사고체계는 발전을
거듭해왔다. 그러한 과정에서 군사분야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당시의 인류도 전쟁에서 패배한 이유를 성찰하고, 다음
전쟁에선 어떻게 해야 효율적인 승리가 가능한지에 대해 성찰했을 것이다. 그리고 전쟁의 승패와 인적·물적피해 등
군사적 변화가 수반하는 사회적 변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사실 이 책은 군사사(軍事史, Military History)를 다룬 책이다. 우리가 보통 말하는 전쟁사(戰爭史, War History)는
군사사에 비해 협의의 단어로서 전역사(戰役史, Campaign History)와 전투사(戰鬪史, Battle History)를 포함하는
개념이다. 이에 반해 군사사는 전쟁 뿐만 아니라 군사문제(Military Affair)와 관련된 전반적인 분야를 포괄하는 역사를
다루는 학문체계이다.
책의
시작은
그리스와
페르시아의
전쟁을
다룬
헤르도토스(Herdotos,
BC
480?~420?)의
저서
『역사
Historiae』이다. 이 책에는 전쟁 자체뿐만 아니라 다양한 사회적 측면을 찾을 수 있다. 그렇기에 전쟁의 배경과 성격,
그리고 전쟁의 결과를 좀 더 자세히 알 수 있었다. 물론 이어지는 투키디데스(Thucydides, BC 460?~395?)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에도 정체(政體, Political System), 경제, 외교, 사상
등이 전쟁의 기원이나 경과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 지, 공정하고 과학적으로 서술되어있다. 또한 카이사르,
폴리비우스, 플루타르코스 등이 남긴 기록들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모두 군사사가 가진 ‘성찰성’이라는 소중한
역사적 전통을 잘 보여주었다.
그리고 이러한 고전들은 과거의 전쟁 역시 인류문명과 사회를 변화하게 한 주된 요인이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특히
앞서 언급한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의 주된 내용인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고대
그리스의 정치, 외교, 역사 그리고 문화에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고대 그리스의 ‘주도국가’였던
아테네는 스파르타의 지배기에 접어들며 민주주의가 쇠퇴하고 몰락의 길을 겪는다. 이후 그리스에는 마케도니아의
지배까지 이어지며 ‘지배받는 역사’가 19세기까지 이어지게 된다.
그렇게 전쟁은 ‘종합적인 사회현상’으로서 그 주체인 군인뿐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 땅의 민초(民草)들과 그들의 삶에
직접적이고도 깊숙하게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민초들은 그들의 삶의 대부분을 잃거나, 혹은 대부분이 변화한 현실에
적응한다. 전쟁을 통해 지배받고 복속된 민초들이 노예의 삶에 적응했듯이, 또 징병에 끌려간 젊은 청년들과 슬퍼하던
그들의 처자식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그래서 이 책은 CHAPTER 1에서 CHAPTER 4까지 전쟁과 문명이 이뤄내는 상호작용에서부터 문명과 전쟁의 정의와
전쟁과 과학기술의 상관관계에 대해 논한다. 이후 이어지는 내용들은 사회변동과 크게 관련이 없는 내용이기에 보고서와
발표에서는 제외하였다.
3. 저자소개
이 책의 저자는 ‘허남성’으로 육군사관학교(26기)와 서울대학교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학교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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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학 석사 및 전쟁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육군사관학교 교수와 대통령 비서실 국제안보
담당관, 대통령 경호실장 보좌관을 지냈으며, 국방대 교수부장과 안보문제연구소장을 역임했다.
국무총리실, 국방부, 통일부, 육군 본부 등 여러 기관의 자문위원과 KBS 객원해설위원 등으로
활동했다.
국방대학교
한국위기관리연구소장으로
군사전략학부
재직하고
교수를
있다.
역임했으며,
현재
<세계전쟁사>(공저),
국방대학교
<전쟁과
명예교수와
문명>,
<위기의
한국안보>(공저) 등을 비롯한 여러 저서와 역서가 있으며, 안보, 군사, 전쟁사 분야에 관한 60여
편의 논문이 있다.
4. 책 내용 요약
CHAPTER 1 ­ 전쟁과 문명의 짝짓기
전쟁과 문명은 마치 ‘샴쌍둥이’처럼 떼어서 생각하기 어려운, 또 같이 붙어 다니는 존재이다. 이러한 전쟁은 인간이
수행하는 폭력적 행위로서 인간의 ‘양면성’과 닮아있다. 인간은 그 누구를 막론하고 그 안에 악마와 천사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 전쟁도 마찬가지로 살육과 파괴의 악신(惡神)인 동시에, 갈등과 반목의 해결사이자 새로운 창조와 건설의
제공자, 그리고 문명 교류의 매개자이다. 그래서 전쟁은 그것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한 단계 더 높은 문명의
계단으로 오르게 해준 동인(動因)으로 작용해왔다.
인간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기술을 사용한다. 과학기술은 물론 초고도의 전략과 지식 등 문명의
이기(利器)들을 모두 끌어들인다. 또한 이기기 위해서는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또 현실화되지 않은 개념이라도 과감하게
끊임없이 실험하고 적용하려는 시도를 아끼지 않는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문명으로 다시 환류(還流)되어 문명의 발달을 촉진시켜왔다. 본디 고대의 청동기와 철기는 본디
싸움의 용도로 쓰여 왔다. 그러나 이것이 생활의 영역인 수렵과 채집에 사용되고 나서부터는 획기적인 문명의 발달을
빚어내었다. 현대에 와서도 전기·전자 및 정보통신 분야의 최첨단 기술이나 소재공학 지식들도 군수용 기술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서양 토목공학의 바탕은 도로·다리·진지 구축 등 로마군의 전쟁기술이었으며, 예방의학·외과술 등 의학분야의
발전과 도약도 전쟁으로 인해 크게 발전했다. 그런가 하면 문학·음악·미술·연극·영화 등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도 전쟁이
빚어낸 인간 행위의 극적인 주제들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수준에 근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전쟁은 문명 교류와 교배의 매개자로서 인류 문명 발달에 촉진제로서 역할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전쟁,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훈족·돌궐족·게르만족·바이킹의 민족이동과 원정들, 그리고 십자군 전쟁과 징기스칸의 정복
전쟁, 오스만 투르크의 제국 확장 전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전쟁들이 문명 교류의 매개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전쟁은 살육과 파괴의 상징인 만큼 ‘문명의 파괴자’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파괴조차도 새로운 창조와
건설의 계기가 된다는 점은 ‘전쟁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독일(프로이센)의 군인이자 군사이론가인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은 문명이 가진 그
자체의 속성이 전쟁을 초래하는 측면을 바라보았다. 그는 ‘군사적 천재’가 문명화된 국가의 국민들에게서만 발견될 수
있으며, 이는 군사적 천재의 덕목인 ‘지성’이 문명에 의해 배태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따라서 “문명화된
국민들은 그렇지 않은 국민들에 비해서 더 호전적인 경향이 있다”고 까지 주장했다. 그의 말을 정리하면 문명에 의해
국민의 지적 수준이 낮아지며, ‘지성’이라는 덕목을 군사적으로 이용하는 사람이 쉽게 ‘군사적 천재’가 된다는 말이다.
문명이 곧 ‘전쟁광’을 만들어내는 셈이다.
반면 문명이 전쟁의 빈도를 완화시킨다는 논리도 가능하다. 계몽주의자들의 전쟁관(戰爭觀)에 의하면 “인간의 이성이
발전하여 문명사회가 도래하면 전쟁은 결국 시대착오적인 존재가 된다”고 한다. 물론 계몽주의자들이 가진 이상주의적
주장인 측면이 없지 않지만, 문명이 발달하고 이성과 지혜가 발전하면 갈등을 폭력으로 해결하려는 빈도가 낮아지고,
그만큼 협상과 타협으로 갈등을 조정하려는 추세가 높아지게 마련이다.
CHAPTER 2 ­ 문명이란 무엇인가?
전쟁과 문명을 논하기 전에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할 작업은 개념을 규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문명이
무엇인지를 정의하는 일은 엄청나게 방대하고 복합하며 미묘한 질문이다. 그래서 “문명이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의 답은
인류의 온갖 삶의 모습과 발전과 그를 위한 시행착오, 그리고 이를 다룬 모든 역사를 다루어야 한다. 또한 그 결과물에
104
대한 탐구, 그리고 그 원인과 전망에 대한 모든 것을 담아야 할 것이다. 일단 이 책에서는 문명의 정의에 대한 사전적
의미를 제시하고, 문명에 대한 나름대로의 분석과 독특한 해석을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몇몇 학자들의 견해를 고찰하며
저자의 생각을 곁들인다.
문명에 대한 사전적 의미, 혹은 정의들은 다음과 같다. 민중서관의 『국어대사전』은 문명을 “사람의 지혜가 깨서 자연을
정복하여 물질적으로 생활이 편리하여지고 또는 정신적으로도 발달하여 세상이 열리어 진보한 상태 …(중략)…대체로
문화는 종교·학문·학술·도덕 등 정신적인 움직임인 데 대하여 문명은 보다 더 실용적인 식산·공예·기술 등 물질적인
방면의 움직임이라 하여 편의상 전자를 ‘정신문명’, 후자를 ‘물질문명’이라 함.”이라고 정의하고 있다.
이렇게 문명과 문화는 구분되어지는데, 문화가 정신적인 측면을 강조한 반면에, 문명은 물질적인 측면에 집중해
설명하는 개념이다. 그러나 더욱 포괄적인 차원에서 보자면 문명은 물질문명과 더불어 정신문명까지도 포함하는 개념으로
이해해야하며, 이 책에서는 보다 포괄적인 차원에서의 문명의 개념을 사용한다.
한편 웹스터(Webster)사전의 정의를 살펴보면 문명을 나타내는 명사 ‘civilization’은 형용사 ‘civil’과 동사
‘civilize’와 직접적으로 연계되어있다. civil은 ①시민의, ②문명의, ③정중한, 예의바른, ④민간의 등을 나타내는데,
본래의 ‘시민’의 뜻을 가진 라틴어 ‘civis’와 ‘도시’의 뜻을 가진 ‘civitas’로부터 유래되었다. 이는 곧 도시안의 시민은
공동체의 규범에 따라 타인과의 관계에서 정중하고 예의바른 태도를 견지해야 하는데, 이것이 곧 ‘문명스러운’ 행위라는
것이다. civilize는 구체적으로 예의바른 시민이 되는 과정, 또는 그 행위를 나타낸다. 즉, ①사람이 사회제도나
정치조직의 정립을 통해 야만 상태를 벗어나는 것, ②시민사회의 규범이나 표준을 가르치는 것, ③사람을 기술적으로
진보되고 이성적으로 질서 잡힌 단계로 발전시키는 것 등의 의미를 띈다. 곧 civilize라는 말은 “야만으로부터 교육을
통해 높은 수준으로 정제됨, 즉 ‘교화(敎化)’ 또는 ‘문명화(文明化)’를 뜻한다. 그리고 곧 civilization은 ”야만스러움이나
비이성적 행위가 일절 없고, 물리적·문화적·정신적·인적 자원의 적정한 활용이 이루어지며, 개인들이 사회의 틀 속에서
완벽하게 순응되는 등 인간문화의 이상적 특성이 정립된 상태“, 또는 ”예술·과학·정치적 기술·인성 및 정신 등이
단계적으로 발전되는 과정“을 나타낸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의 개념들은 다양한 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해석된다. 먼저, 학술분야의 세계적인 베스트셀러로
기록된 『철학이야기 The story of Philosophy』의 저자인 윌 듀런트(Will Durant)는 그의 마지막 저서 『역사속의
영웅들 Heroes of History』에서 문명의 기원과 정의에 대해 매우 흥미로운 설명을 하고 있다. 그는 인류의 역사는
‘생존을 위한 경쟁’의 한 단편(斷片)이며, 인간은 기본적으로 싸우는 동물이라고 서술한다. 즉, 인간은 자신의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음식을 얻기 위해, 혹은 여자를 얻기 위해 싸움을 한다는 것이다. 이런 그의 견해는 전쟁의 시원(始原)이
식량과 여자 쟁탈을 위한 약탈전의 형태에서 비롯되었다는 통설과 닿아있다. 사실 인류가 농업을 시작한 이후의 역사보다
수렵을 통해 생존을 도모해온 역사가 길기에, 그는 인간에게 ‘사냥꾼 본능’이 내재되어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남자는
농경에 처음 성공한 여자에 의해 마지막을 길들여진 동물이며, 이로인해 시작된 정착생활이 바로 문명의 시작이라고
설명한다. 그가 내린 문명의 정의는 “공동체의 구성원이 된다는 의미”이다. 이는 인류가 정착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면서
사냥꾼 본능을 법과 도덕으로 억제하며 공존을 위한 자질과 미덕을 갖추도록 교화되는 과정이 곧 문명의 길이라는
설명이다.
두 번째로, 러시아의 아동문학가이자 과학소설가인 미하일 일리인(Mikhail Iliin)은 1936년부터 연작시리즈 『인간은
어떻게 거인이 되었나』를 집필했다. 그의 방대한 저작은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인류의 문명이 어떻게 생겨나서
발전해왔는지를 역사적으로 추적한 일종의 문명사적 작품이다. 일리인이 이 책에서 일컫는 ‘거인’은 단순히 몸집이 큰
인간이 아니라, 만물의 영장으로서 이 세상을 지배하는 우월적 존재로 표현한 용어이다. 인간이 성숙하고 계몽된 상태가
됨으로써, 이 세상을 지배하는 존재로 성장했음을 보여준다. 여기서 성숙하고 계몽된 존재는 바로 ‘문명인’이다. 그리고
그가 말하는 문명은 ‘상대성의 발견’, 즉 ‘타자(他者)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이는 곧 타자를
인정하지 않고서는 문명세계의 질서가 수립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다른 사람으로부터의
배움’이다. 인간의 문명은 타자의 다른 것을 발견하고 인정할 때에만 발전할 수 있었다. 사회학에서 문화를 ‘모든 학습된
것의 축적’이라고 정의하는 것은, 바로 문명의 습득과 발전 과정에 있어서 이 ‘상대성의 발견’과 일맥상통한다.
세 번째로, 세계적인 문명비평가이자 역사가인 아놀드 토인비(Arnold J. Toynbee)는 본인의 대작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를 통해 방대하고 심오한 인류문명사의 내용과 그 속에 흐르고 있는 역사철학의 실체를 드러내었다.
그러나 그의 이러한 광활한 저작을 모두 설명하긴 힘들다. 그렇기에 이 책은 그의 역사서술 속에서 ‘문명’이 어떻게
105
이해되고 있는지를 살펴본다. 토인비의 저술은 인류역사에 존재한 문명을 26개로 보고, 이 문명들의 흥망성쇠를
비교사적(比較史的)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리고 이들을 ‘발생-성장-쇠퇴-해체’로 이어지는 네 단계로 일반화하고, 그러한
각각의 단계적 유형에 작용한 역사적 원리와 법칙성을 도출하고자 했다. 그가 도출해낸 문명의 성쇠과정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었다. 그것은 ‘도전(Callenge)과 응전(Response)’이었다. 즉, 자연이나 다른 문명, 다른 인간 집단, 혹은
내부적 도전에 어떻게 대응하고 해결책을 찾아내는가의 여부가 한 문명의 발생, 성장, 쇠퇴, 해체를 좌우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원시사회에서 문명사회로의 질적 변화를 이끌어낸 제1대 문명들은 모두 ‘자연적 도전’에 대한 ‘응전의
소산’이라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살기 힘든 자연환경’이라는 도전을 극복하고 이겨낼 때 문명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
도전이 지나치게 힘들어서도 아니되며 안이해서도 안된다는 것이 그가 주장한 ‘황금의 중용 Golden Mean’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은 ‘바보학’이라고 알려진 독특한 학문을 연구하는 마티이스 반 복셀(Matthijs van Boxel)의
견해를 소개한다. 그는 저서인 『어리석음에 대한 백과사전 The Encyclopedia of Stupidity』에서 유머와 해학을 통해
인간을 사유하도록 만드는 독특한 접근을 시도한다. 이 책에서 반 복셀은 두 가지 중요한 주제를 제시하고 있다. 하나는
“어리석음이 인류 문명의 원동력이자 그 근원”이라는 주장이고, 다른 하나는 “인간이 고안한 문명과 제도는 어리석음의
역설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암시이다. 우선 그는 인간이 어리석은 존재임을 인정하지만, 기본적으로 이
어리석음이 가진 가치를 찬양한다. “어리석음은 인류의 위대한 덕목”이라고 말하는 그는, 인류문명은 인간의 어리석음이
빚어낸 결과물일 따름이고 따라서 어리석음이야말로 인류 문명의 원동력이자 근원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그는
인류문명의 불완전성을 지적하는 데, 이것 또한 인간의 어리석음에서 기초한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이와 같이 반 복셀은
인간이 쌓아 올린 문명의 탑은 ‘어리석음의 시행착오’로 빚어진 결과물이지만, 바로 그러하기 때문에 인류 문명은
숙명적으로 어리석음 덩어리이고, 완전성으로부터는 거리가 멀다고 말한다.
CHAPTER 3 ­ 전쟁이란 무엇인가?
인류의 역사는 곧 전쟁의 역사였다. 역사 전반에 걸쳐 전쟁은 평화보다도 훨씬 더 일반적인 현상이었으며, 문명 탄생
이전부터 인류가 끊임없이 겪어온 뼈아픈 경험의 일부였다. 그렇게 늘 전쟁은 인간 삶의 한 부분처럼 늘 곁에 있었다.
그리고 인간문명의 발전에 따라 조직화되고 대규모로 발전해왔다. 그 종착점엔 대량파괴와 대량살상이 있었다. 지금
인류는 핵무기와 같은 ‘대량살상무기 WMD’가 등장한 이래 전쟁은 전 인류의 공멸을 야기할 수 있는 악마적 존재가
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전쟁이 무엇이고, 왜 생기며, 어떻게 준비하고 대비해야하며, 어떻게 싸우고 마무리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해야 한다. 그리고 전쟁은 모두의 삶과 깊숙이 연관되어있기에, 더 이상 군인들만이 이런 생각을 해야하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이 장에서 전쟁의 정의와 더불어 전쟁의 본질을 말해준다
우선 웹스터 사전과 옥스퍼드 사전은 전쟁의 의미에 대해 사뭇 다르게 서술하고 있다. 웹스터 사전은 전쟁을 “국가들
사이에 벌어지는 명시적으로 선언된 적대적 무장투쟁 상태, 또는 그러한 투쟁의 기간”이라고 정의한다. 이 정의에 따르면
전쟁은 공개적인 선전포고로 시작되어야 하고, 국가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전쟁은 명시적
선전포고 없이 시작된 수많은 사례를 가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옥스퍼드 사전의 광의의 정의가 더욱 의미있다.
사전에서는 전쟁을 “살아 있는 실체들 사이에서 벌어지는 모든 적극적 적대 혹은 투쟁”, 그리고 “적대적인 힘 또는
원칙들 사이의 갈등”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물론 이 해석은 지나치게 포괄적이고 광범위하다. 그러나 웹스터 사전이
간과한 게릴라전, 테러전, 내전 등의 범위를 포괄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편 전쟁을 실질적인 무력충돌의 상태로 볼 것인지, 아니면 형식적·법적 또는 조건의 틀로 볼 것인지 하는 점에
따라서도 정의의 해석에 차이가 날 수 있다. 전자의 경우, 전쟁현상은 실질적이고도 대규모적인 무력충돌과 투쟁이
현존하는가의 여부, 즉 그 상태에 따라서 규정되며, 이 점에 있어서 외교, 무력위협 혹은 간섭, 선전, 경제적 압력 또는
봉쇄와 구별된다. 후자의 경우 전쟁은 법적·형식적 해석상 선전포고로 시작되어 어느 일방에 의한 정복 혹은 쌍방 간
협상에 의해 전쟁이 공식적으로 종결될 때까지 지속되는 ‘조건적 틀’속에 있는 현상이다. 물론 학자들에 따라 전쟁의
의미는 협의에서 광의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펼쳐져 있다. 루소(Jean-Jacques Rousseau)는 전쟁이 ‘국가 대 국가의
관계’라고 못박았다. 반면 키케로(Cicero)는 더 광범위하게 ‘힘의 대결’로 규정했다.
이쯤에서 헤라클레이토스(Heracleitos)가 내린 전쟁의 정의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그는 전쟁을 ‘만물의 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이 말의 숨은 뜻은 전쟁이 모든 악과 비극의 씨앗임과 동시에 인간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는 역동성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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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태임을 강조한 것이다. 손자도 “전쟁은 국가에게 있어서 운명을 건 문제이다. 백성들이 죽고 사는 경지이며, 생존 또는
멸망하는 기로이다. 반드시 깊이깊이 고찰해야만 될 사안이다”라는 말을 통해 전쟁이 국가와 그 국민의 사활을 건
투쟁임을 분명히 했다. 시대와 사는 곳은 달랐지만 클라우제비츠도 상당히 유사한 관점을 공유했다. 그도 전쟁을 “자신의
의지를 상대방에게 강요하여 관철시키는 폭력적인 행위”로 보았다.
그렇게 전쟁은 대부분의 사상가들에 의해 그것이 가진 목적성과 광범위성이 드러나게 되었다. 저자는 “어떠한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가 또는 사회집단에 의해 수행되는, 의도적이고 집단적이고 광범위하게 벌어지는 조직화된
무력투쟁이며, 인간소회의 가장 종합적인 사회현상의 하나이다.”라는 정의로 3장을 마무리한다.
CHAPTER 4 ­ 군사과학·기술의 진보와 전쟁 양상의 변천
인간은 끊임없이 전쟁을 해왔다. 전쟁은 인간의 삶의 한 부분처럼 늘 곁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점점 더
치열해지고 조직화되고 발전해왔다. 이 발전은 인간의 지식과 지혜, 특히 과학기술의 발달과 더불어 진행되어왔다.
그러나 이러한 진화와 혁명의 종착점은 전반적으로 대량파괴와 대량살상의 방향으로 귀결되어왔다. 인간은 전쟁을 보다
나은 삶을 쟁취하기 위한 수단으로 보았지만, 과학중심주의는 마침내 인간을 핵무기와 같은 ‘문명의 덫’에 가두었다.
그렇다면 인간이 추구해야 할 군사과학·기술의 본질은 무엇이어야 하나? 그것은 인간의 요소로서 과학의 한계를
인식하는 것이다. 과학만 발전시키면 모든 것이 이루어 질 것이라고 생각하는 ‘과학기술만능주의’에서 물러나, 인간을
위해 과학은 무엇을 할 수 있고 없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아야 한다. 물론 인간사회에서 전쟁이 어쩔
수 없는 사회현상이고, 그렇기에 전쟁에 과학기술이 동원되어 무기와 장비를 만드는 데에 사용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한계를 인식하고, 인간의 요소로서 전쟁을 바라보려는 이러한 시도는 저명한 전쟁역사가인 존
키건(John Keegan)에 의해 시도되기 시작했다. 그는 전쟁을 ‘문화적 행위 Cultural activity’라고 보았다. 여기서
문화는 우열의 차이가 없다. 어느 민족의 문화는 높은 문화이고, 어느 나라의 문화는 열등하다는 등급의 매김이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의미도 없다는 말이다. 단지 서로 다르다는 차이점만 존재할 뿐이다. 반면 문명에는 높고 낮음과 앞서고
뒤쳐짐이 있다. 전쟁은 분명 ‘우열의 싸움’이다. ‘우세’를 점하면 승리하며, 인원수나 화력과 같은 수치의 싸움이기도
하다. 하지만 역사속에는 분명 소수가 다수에 이긴 경우도 적지 않다. 여기서 소수는 ‘인원수의 적음’을 뜻한다. 어릿수가
작다고 해서 우세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 (영화 300 중 中 https://www.youtube.com/watch?v=x6m3dInumTg)
열세를 극복하기 위해 소수가 할 수 있는 일은 머릿수의 적음을 보충하고도 남을 만큼 무기와 장비의 양과 질을
향상시키는 것과 더불어, 꾀를 내어 결정적인 전략을 짜는 것이다. 후자를 가장 대표적으로 보여준 인물은
나폴레옹(Napoleon Bonaparte)인데, 그는 전체 병력 수에서 열세일 때에도 자기가 결전을 벌이고자 한 장소와
시간에는 병력이 절대다수가 되도록 만들었다. 그 비결은 절약과 집중이었다. 어느 곳에선가 병력을 절약하는 곳이
있어야 결전 장소에서 다수가 되도록 집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교묘한 기만과 분당 120보의 행군과 같은
빠른 기동으로 적을 묶어둠과 동시에, 결전장소로 병력을 끌어모았다. 이러한 꾀 이외에도 많은 군사지도자들은 훈련과
조직력 향상, 게릴라전과 같은 후방기습 등에도 능했다. 그리고 이는 분명 ‘문화적 행위’로서의 전쟁이었다.
그러나 문명으로서의 전쟁은 문화로서의 전쟁에 비해 그 영향력이 매우 적다. 문명으로서의 전쟁은 군사과학·기술의
발달과 연관을 가진다. 그리고 그 연관은 ‘시간 지체’라는 현상으로 인해 문화적 행위의 그것에 비해 약화된다. 어떤
새로운 싸움 도구가 등장했다 해서 그것이 곧바로 전장에서 영향력을 발휘하진 않는다. 그것이 상황과 교리, 전술에
완벽히 동화되어야만 전장에서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시간 지체’ 현상의 본질이다. 결국 전쟁은
‘쇳덩어리’가 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부리는 ‘사람’이 하는 것이다.34)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은 인류 역사에서 이어져온 다양한 사회변동이 ‘전쟁’에서 기인하며, 또 다양한 사회변동이 ‘전쟁’을 야기한다고
이야기한다. 한마디로 ‘전쟁과 사회변동의 상호작용’을 말한다. 이 책의 <CHAPTER 1>에서 저자의 생각이 드러난다. 이
책은 전쟁을 ‘종합적인 사회현상’으로 이해하기 위해 정치, 사회, 문화, 경제의 변동을 제시하는 접근방법을 택하고 있다.
그리고 저자는 이러한 접근방식을 정당화하기 위해 책의 머리에 군사사에 대한 다양한 고전(古典)들을 소개한다. 특히
34) 존 키건의 논의에서 문화와 문명의 의미는 서로 대립되는 개념이다. 저자와 이 책에서 사용하는 문명의 의미와는 약간 다르다는 점
을 참고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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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키디데스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History of the Peloponnesian War』에는 정체(政體, Political System), 경제,
외교, 사상 등이 전쟁의 기원이나 경과와 어떤 연관을 가지고 있는 지, 공정하고 과학적으로 서술되어있다. 저자는
이러한 역사적인 고전들을 제시하면서 전쟁이 사회 전반에 미치는 영향은 물론, 인류의 생활양식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말한다.
이를 통해 저자는 본인이 제시하는 “전쟁은 종합적인 사회현상이다”라는 결론을 정당화한다. 그리고 전쟁을 문화적
행위로 바라본 존 키건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전쟁이 가진 사회적 영향력을 강조하고자 한다. 단순히 전쟁을
과학기술 발전과 연관시키지 않고, 사람의 영역이자 문화의 영역인 사회현상과 깊은 연관이 있음을 말하고자 한다.
사회현상은 그 자체로도 크나큰 의미를 가진다. 이미 그 자체만으로도 경제, 문화, 도덕, 예술, 종교 등, 각 분야의
사회생활에 의거하여 일어나는 또 하나의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더 중요한 점은 이것이 사회를 크게 변화시킨 다는
점이다. 하나의 사회현상이 만들어내는 새로운 흐름과 파급효과는, 사회가 새로운 장으로 이행하게 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자 이벤트가 될 수 있다. 두 차례의 거친 인류의 세계대전이 파시즘에 대한 배격과 인간존엄성에 대한 중요성을
대두시켰듯이, 한국전쟁이 냉전의 새로운 시발점이 되고 지금의 한국사회와 세계정세에 큰 영향을 끼쳤듯이 말이다.
그래서 저자가 이야기하는 “전쟁은 종합적인 사회현상이다”라는 핵심적인 관점은 우리가 전쟁을 통해 얻은 것은
무엇이며, 전쟁이 인류의 삶을 어떻게 바꾸어놓았는지 생각해보게 해준다. (아! 물론 저자가 그 사례들을 말해주지는
않는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전쟁과 문명은 서로 상호작용을 이어오며 인류의 역사를 만들어왔다. 이러한 전쟁은
폭력적 행위로서 살육과 파괴의 악신(惡神)인 동시에, 갈등과 반목의 해결사이자 새로운
창조와 건설의 제공자, 그리고 문명 교류의 매개자이다. 그래서 전쟁은 그것의 폭력성에도
불구하고 인류를 한 단계 더 높은 문명의 계단으로 오르게 해준 동인(動因)으로
작용해왔다.
인간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당대 최고의 기술을 사용한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은
문명으로 다시 환류(還流)되어 문명의 발달을 촉진시켜왔다. 본디 고대의 청동기와 철기는
본디 싸움의 용도로 쓰여 왔다. 그러나 이것이 생활의 영역인 수렵과 채집에 사용되고
나서부터는 획기적인 문명의 발달을 빚어내었다. 현대에 와서도 전기·전자 및 정보통신
분야의 최첨단 기술이나 소재공학 지식들도 군수용 기술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서양
토목공학의 바탕은 도로·다리·진지 구축 등 로마군의 전쟁기술이었으며, 예방의학·외과술
Bonaparte franchissant le
Grand-Saint-Bernard painted by
Jacques-Louis David, 1801
등 의학분야의 발전과 도약도 전쟁으로 인해 크게 발전했다. 그런가 하면 문학·음악·미술·연극·영화 등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도 전쟁이 빚어낸 인간 행위의 극적인 주제들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수준에 근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또한 전쟁은 문명 교류와 교배의 매개자로서 인류 문명 발달에 촉진제로서 역할했다. 알렉산드로스의 정복전쟁,
카이사르의 갈리아 원정, 훈족·돌궐족·게르만족·바이킹의 민족이동과 원정들, 그리고 십자군 전쟁과 징기스칸의 정복
전쟁, 오스만투르크의 제국 확장 전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수 많은 전쟁들이 문명 교류의 매개 역할을 했다.
그럼에도 전쟁은 살육과 파괴의 상징인 만큼 ‘문명의 파괴자’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이러한 파괴조차도 새로운 창조와
건설의 계기가 된다는 점은 ‘전쟁의 아이러니‘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전쟁은 ‘종합적인 사회현상’으로서 그 주체인 군인뿐만 아니라 전쟁이 일어난 땅의 민초(民草)들과 그들의 삶에
직접적이고도 깊숙하게 영향을 끼친다. 그리고 민초들은 그들의 삶의 대부분을 잃거나, 혹은 대부분이 변화한 현실에
적응한다. 전쟁을 통해 지배받고 복속된 민초들이 노예의 삶에 적응했듯이, 또 징병에 끌려간 젊은 청년들과 슬퍼하던
그들의 처자식들이 그랬듯이 말이다. 물론 전쟁은 인류를 한 단계 더 높은 문명의 계단으로 오르게 해준 동인(動因)임이
분명하지만, 전쟁이 가진 파괴성은 민초들의 미시적 현실파괴에서부터 인류공멸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전쟁은 ‘종합적인 사회현상’으로서 인류 역사에 끊임없이 존재해왔다. 또한 수많은 인명을 죽였고, 동시에 문명
재창조의 매개체 역할을 수행해왔다. 인류역사를 한 단계 더 높은 경지에 이르게 한 동인이 바로 전쟁인 것이다.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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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에서도 전쟁은 필연적인 일이라는 것이 자명해진다.
나는 이러한 역사적 사실과 핵심적 관점을 ‘역사적 유추법 Historical Analogy’을 통해 바라보고자 한다. 역사적
유추법은 지금까지의 미래예측에서 가장 널리 사용되어온 방법 중 하나로서, 역사적 사실을 통해 일반화된 유형 또는
법칙을 찾아내고 이것을 토대로 미래를 예측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과거에 나타났던 현상이나 거기에 작용했던
힘들이 유사하게 나타날 것이라는 가정 아래, 오늘날의 사례와 공통성이 있는 역사상 사례를 골라, 미래에 그와 비슷한
사례가 일어날 수 있는 조건들을 제시하거나 예측하는 기법이다.
여기서 나는 토인비가 주장한 법칙을 빌려오고자 한다. 토인비의 저술은 인류역사에 존재한 문명을 26개로 보고, 이
문명들의 흥망성쇠를 비교사적(比較史的)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리고 이들을 ‘발생-성장-쇠퇴-해체’로 이어지는 네 단계로
일반화하고, 그러한 각각의 단계적 유형에 작용한 역사적 원리와 법칙성을 도출하고자 했다. 그가 도출해낸 문명의
성쇠과정에는 한 가지 법칙이 있었다. 그것은 ‘도전(Callenge)과 응전(Response)’이었다.
토인비의 주장을 ‘역사적 유추’로서 바라보면, 미래의 세상에서도 도전과 응전이 지속될 것이며 또한 문명은
발생-성장-쇠퇴-해체로 이어지는 과정을 모두 겪게 될 것이다. 지금 벌어지는 이슬람극단주의 세력과 서구 문명사회의
대충돌 또한 분명 이러한 과정의 일환로서 바라보아야 한다. 지난 11월 프랑스 파리 테러로 대표되는 이슬람 극단주의
세력의 비문명적인 행태로 인해, 서구 문명과 문화의 중심가치인 관용(Tolerance)은 무너지고, ‘무슬림 사냥’이 시작될
조짐마저 감지된다. 비록 서구문명이 이 엄청난 도전을 어떻게 받아낼지, 또 응전에 성공할지 실패할지는 아직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서구 문명사회가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종교적 극단주의에게 심각한 도전을 받고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러한 도전은 전세계를 향해 무차별적으로 지속될 것이다. 결국 이러한 도전이 사회 전 영역으로
확산되면 ‘종합적 사회현상’인 전쟁이 일어날 것이고, 그 전쟁은 분명 인류가 개발한 군사과학기술의 엄청난
수준만큼이나 파괴적이고 잔인한 싸움이 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인류는 전쟁을 지양하려 하며, 그 발생을 억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전쟁이 없었던 시기는 없었다. 지금 이 시각에도 지구 어딘가
에서는 전쟁이 끊임없이 이어지고 사회를 뒤집어 놓는다. 그렇게 우리는 전쟁이 전쟁인지도 모르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는 전쟁이 전쟁인지 아는 사람들도 줄어들 것이다. 분명히.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나는 이 책을 통해 전쟁의 역사와 그와 관련해 변화해온 인류사회와 문명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그리고
전쟁과 문명, 그리고 인류사회가 만들어온 상호작용에 대해서도 고찰해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해 전쟁이 인류문명 발전의
중요한 동인(動因)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를 통해 꿰뚫어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인간의 끝없는
욕망’이었다.
인간이 전쟁을 수행하는 이유는 최근 들어서 훨씬 더 복잡해지고 있으며, 물론 바로 이 ‘욕망’으로 설명하기 힘든
전쟁도 있다. 그러나 인간이 내뿜는 욕망의 범위는 석유 등의 천연자원, 영토와 바다의 영유권과 같은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것에서부터 정의나 종교적 신념과 같은 가치적이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에까지 광범위하다. 인간은 과거부터
식량과 여자를 더 많이 차지하기 위해 부족간의 전쟁을 서슴치 않았으며, 전쟁에서 노획한 물품은 ‘전리품’으로, 얻은
사람은 ‘노예’로 만들었다. 그리고 승리한 자들은 그들의 욕망을 모두 충족시켜오며 살았다.
그리고 본인들의 신념과 종교를 남들에게 전파하여, 본인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높이는 ‘정치적 욕망’을 충족하기 위한
전쟁도 다수 일어났다. 그러나 실상을 살펴보면 이러한 전쟁들은 모두 ‘가면 전쟁’이나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신념과
종교와 같은 ‘가치’를 위해 싸우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의 모두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욕망을 포장한 가면에 지나지
않았다. 중세 유럽을 전쟁터로 내몰았던 십자군 전쟁 역시 예루살렘이 가지는 ‘성지(聖地)’의 가치보다는, 중동을
정복하여 각종 무역과 사치품을 차지하려는 ‘욕망의 발현’이었다.
21세기에 들어 벌어진 ‘테러와의 전쟁’은 그 배경과 명분에 무고한 미국과 서방세계 시민들의 희생이 있었지만,
음모론자들에 의해 ‘석유를 노린 전쟁’이라는 비난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한 부시
가문은 애초에 석유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백만장자 가문이었으며, 그들이 소유한 석유회사들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
진출해 석유시추를 진행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 부시 시절부터 다져놓았던 현지 정권과의 관계도 점점 나빠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부시는 전쟁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는 것이 음모론자들의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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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음모론이지만 이러한 음모론이 나오게 된 것도 분명 ‘인간의 욕망’에 대한 성찰에서 비롯된 것이 아닐까. 부시가
가진 욕망을 간파한 누군가는 음모론을 만들어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러한 음모론을 만들어내고 재생산하며,
스스로의 욕망을 애써 감추려는 것이 아닐까? 전쟁이라는 욕망의 덩어리를 비난하기 전에, 본인 스스로가 가진 욕망을
인정하는 것이 먼저 아닐까? 자신이 짐승이란 것을 아는 인간은 더 이상 짐승과 같은 행동을 하지 않고, 짐승인 것을
모르는 인간이 짐승같은 행동을 하듯이 말이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사실 발표를 준비하면서 이 책의 내용으로만 발표하기엔 부족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나는 두 가지 책을 더 봐야했다.
첫 번째 책인 『Made In War-전쟁이 만든 신세계』(플래닛미디어)는 부트가 과거 500년 전쟁사에서 성공적으로
군사혁명을 이룬 국가와 전쟁의 사례 등을 탐색해 4년간의 방대한 연구 끝에 내놓은 저서다. 이 책에서 부트는 역사상
'혁명'적인 강대국의 출현의 밑바탕에는 도화선 역할을 한 기술혁명이 있었다고 말한다. 화약혁명, 1.2차 산업혁명,
정보혁명 등 폭발적으로 나타난 기술혁명의 소용돌이에서 성공적으로 군사혁명을 이룬 국가들이 결국 포스트 혁명시대의
중심에 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저자는 에필로그에서 "이 책의 주요 주제는 미래에 다가올 전쟁의 큰 변화에서
소외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라며 "미국이 초강대국의 자리를 계속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과거 여러 차례 기술혁명을
거치면서 보았듯이 다시 새로운 강대국이 그 자리를 차지할 것인지는 미국이 이 과제를 얼마나 잘 수행하느냐에
달려있다"고 말한다. 좁게는 군사혁명을 논하고 있지만 넓게는 '과거 승리에 안주한 자'와 '미래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꾼 자'의 엇갈린 희비를 통해 시시각각 변하는 현대사회에서 강자가 되는 법에 대해 생각하게 했다.
두 번째 책인 도현신의 『전쟁이 발명한 과학기술의 역사』(시대의 창)는 이 책과 상당히 비슷한 관점을 보유하고 있다.
특히 전쟁에 사용된 과학기술이 인류문명으로 환원되는 사례를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특히 나는 이 책에서 ‘정로환’에
대한 부분을 매우 재미있게 읽었다. 어렸을 적, 배앓이를 할 때 할머니가 늘 챙겨주시던 약이 바로 정로환이었기
때문이다. 그 이름 안에 ‘러시아를 정벌하는 약’이라는 의미가 들어있을 줄은 몰랐다. 다양한 기술혁명들이 전쟁과 어떤
상호작용을 주고받았는지에 대해서도 이 책을 통해 알아볼 수 있었고, 발표할 수 있었다. 또한 인터넷과 라디오가 어떻게
군사적 목적으로 이용되었고, 이 기술들이 어떻게 인류사회로 환원되었는가에 대한 상세한 서술이 많은 도움이 되었다.
10. 종합결론
우리에게 군주론으로 유명한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전쟁만큼 무서운 전염병은 없다. 전쟁은 사람의 인격을, 가족을,
종교를, 국가를 파괴한다.”라는 말로 전쟁을 표현했다. 나는 이 말보다 전쟁을 더 잘 표현하는 말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쟁은 말그대로 ‘종합적인 사회현상’으로서 사회 모든 부분에서 영향을 받으며, 동시에 모든 부분에 막대한 영향을
끼친다. 그만큼 전쟁은 엄청난 임팩트를 가지는 사회현상인 것이다. 그런 전쟁과 문명이 가지는 상관관계를 알아보는
것으로 결론을 짓고자 한다.
먼저 전쟁은 파괴적이고 폭력적인 대충돌이다. 전쟁은 모든 것을
파괴하고,
폭력을
정당화
한다.
20세기
이후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으로 셀 수 없는 인명이 세상을 떠났으며, 인류문명의 소중한
자산들은 파괴되거나 파괴될 위기를 겪었다. 또한 인류는 생화학무기,
생체실험, 핵무기 등 인격적이지 못한 무자비함을 보여주며 인간
본성에 대한 성찰을 요구받았다. 20세기 중반부터, 새천년이 오기
불과 10여년 전까지 이어진 ‘냉전 Cold War’는 소비에트연방과
미합중국의 체제경쟁을 가속화했으며, 핵무기와 대륙간탄도미사일 등
가공할만한 무기체계가 등장하며 인류공멸의 위험성을 내포하기도
1940년부터 2010년까지의 전쟁사망자수를 나타낸 그래프,
HSRP&오슬로평화연구소
했다. 물론 냉전이 끝난 지금 이 순간에도, 전세계 곳곳에선 파괴적인 충돌이 일어나고 있다.
그러나 전쟁은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전쟁을 위해 개발했던, 혹은 전쟁을 통해 교류하였던 문명의 산물들은 우리가
향유하는 지금의 문명을 만들어 놓기도 하였다. 본디 고대의 청동기와 철기는 본디 싸움의 용도로 쓰여 왔다. 그러나
이것이 생활의 영역인 수렵과 채집에 사용되고 나서부터는 획기적인 문명의 발달을 빚어내었다. 현대에 와서도 전기·전자
및 정보통신 분야의 최첨단 기술이나 소재공학 지식들도 군수용 기술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서양 토목공학의 바탕은
110
도로·다리·진지 구축 등 로마군의 전쟁기술이었으며, 예방의학·외과술 등 의학분야의 발전과 도약도 전쟁으로 인해 크게
발전했다. 그런가 하면 문학·음악·미술·연극·영화 등 예술의 거의 모든 분야도 전쟁이 빚어낸 인간 행위의 극적인
주제들이 없었다면 오늘날과 같은 고도의 수준에 근접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폭력적이고 파괴적인 전쟁이
오히려 서로 교류하고 발전할 수 있도록 하는 아이러니하고 역설적인 역사가 지속되어 왔다. 전쟁이라는 일이 없었다면
우리가 지금 포기해야할 문명이 많다는 말이기도 하다. 물론 전쟁은 피해야 하는 것이고,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이다.
그러나 인류의 태동과 더불어 시작된 전쟁은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으며, 아마 인류가 사라져야만 비로소 사라질
행위가 될 것이. 전쟁의 비극은 아프고 참담하지만, 전쟁이 인류역사와 문명을 바꾸어 놓은 동인 중에 하나임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일 것이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최익환, 사회학과, 2012104426
2012학년도 수시 네오르네상스 전형으로 경희대학교 사회학과에 입학한 이후 학과 학생회 집행부 활동을 하며
새터기획단과 홍보부장을 역임하는 등 학과를 위해 봉사했습니다. 이후 2013년 11월 14일에 군에 입대하여 2015년
8월 13일까지 인천지방경찰청 의무경찰로 현역 복무를 마치고 육군 병장으로 전역하였습니다. 전역 이후 학교로 돌아와
2015-2학기 <<사회변동론>> 등 전공과목을 수강하며 학업에 매진하고 있습니다. 이번 수업의 보고서 편집을 동기인
김다빈, 최성호 학우와 함께 맡고 있습니다.
평범한 기자가 되어 입에 풀칠하며 살고자 했으나, 교수님의 ‘노예근성’에 대한 말씀을 듣고 나중엔 기자들을 부려서
돈을 버는 언론사를 하나 만들어볼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노예가 되봐야 노예들을 효과적으로 굴릴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졸업 이후 언론사에 취업할 목표는 그대로입니다. 긴 보고서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ikhwan0323@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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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후변화
1. 책 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세상을 바꾼 기후’. 다른 출판사. 2013. 김덕진
‘지구온난화를 둘러싼 대논쟁’. 동녘사이언스. 2012. 스펜서 위어트. (김준수) - 지구온난화 부분은 이 책을
참고하였음.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사회변동에는 여러 가지 요인이 있다. 자연적 요인, 생물학적 요인, 사회적, 문화적 요인 등이 있을 수 있다. 많은
학생들이 사회적, 문화적 요인을 주제로 선택하였다. 하지만 나는 자연적 요인, 그 중 기후에 대해 탐구해보고 싶었다.
2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 번째는, 사회학과의 학생으로서 평소 잘 접하지 못하는 자연이라는 분야에 대한 탐구를 하고 싶었다. 한국에서는
문과/이과의 분리가 뚜렷하기 때문에 사회학과와 같은 인문, 사회 계열의 학생들은 자연과학 분야를 접할 일이 없다.
하지만 더 이상 시대는 문과와 이과의 분리를 요구하지 않는다. 현재 다양한 학문들 간에 교류가 나타나고 있다.
대학에서 수학이나 생물학, 동물학 등을 전공했던 사람들이 인문, 사회과학의 연구에서 뛰어난 성과를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제 나를 포함한 사회학과 학생들도 더 이상 자연 분야에 대한 학습을 게을리 할 수 없는 시대가
온 것이다. 사회학과 전공 수업 중 ‘환경사회학’ 역시 이러한 시대적 흐름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한다.
두 번째 이유는 자연과 사회는 상호작용한다는 믿음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문화적, 사회적인 요인만이 사회변동을
일으키는 유일한 요인인 것일까? 물론 문화적, 사회적 요인 역시 사회변동에서 뺄 수 없는 중요한 부분인 것은
확실하다. 하지만 기후와 같은 자연적 요인 및 인구와 같은 생물학적 요인 역시 사회변동에서 뺄 수 없는 부분이다. 사실
과거의 자연적 요인은 인간의 의지가 개입된 부분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 문명은 기후와 같은
자연적 요인에 끊임없이 영향을 받았다. 기후 변화에 잘 적응한 국가는 번영을 유지하지만 적응하지 못한 국가는 쇠락을
맡게 되었다. 이렇듯 자연과 사회는 상호작용하는 것이기 때문에 사회 변동에 영향을 미치는 자연적 요인에 대해서
탐구를 해보고자 하였다. 그래서 책을 찾던 중 ‘세상을 바꾼 기후’라는 책을 발견하게 되었고, 환경부로부터
우수환경도서에 선정된 경험이 있다는 것을 보고 신뢰할만한 책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3. 저자소개
‘세상을 바꾼 기후’의 저자 김덕진은 전남대학교 사범대학 국사교육과를 졸업하고, 전남대 대학원 사학과에서
석사학위와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다. 현재 광주교육대학교의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조선시대 경제사를 전공하여 그와
관련된 다양한 책들을 집필하였고 최근에는 기후 변화가 우리 역사에 어떤 변화를 주었는지에 몰두하여 ‘대기근, 조선을
뒤덮다’라는 책을 펴내었다. ‘세상을 바꾼 기후’ 역시 그러한 노력의 한 고리이며 앞으로도 계속해서 이 연구에 몰두할
예정이라고 한다.
4. 책 내용 요약
기후란 어느 지역에서 장기간에 걸쳐 나타나는 날씨(기상)의 평균 상태를
말한다. 기후는 일정하지 않고 지역에 따라 덥거나 추울 수 있고, 건조하거나
습할 수 있다. 다음과 같은 표를 보면 기후가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긴 단위에서 보든, 짧은 단위에서 보든 기후는 끊임없이 변화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기후변화가 격동적으로 일어나는 시기에 적응의 문제는 더욱 크게
다가온다. 기후변화를 이겨내고 적응에 성공한 국가는 살아남고 적응하지 못한
국가는 사라지게 되었다. 이 책은 이러한 기후 변화의 관점에서 역사를
살펴본다.
112
먼저
인간
문명은
빙하기가
끝나고
후빙기가
도래하면서
시작된다. 그 전까지는 너무 추운 날씨 탓에 인류는 동굴 밖을
나오지 못했다. 하지만 날씨가 따뜻해지고 강수량이 증가하면서
인류는 밖으로 나와서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기후
조건은 인류가 농사를 가능하게끔 만들어 주었다.
후빙기의
시대는
대홍수의
시대였다.
홍수하면
일반적으로
부정적인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당시의 홍수는 강을 범람하게
만들어 비옥한 흙이 하류 저지대에 쌓이게 만듦으로써 토지를
비옥하게 만들어주는 역할을 하였다. 홍수가 축복이었던 것이다.
덕분에 4대 문명 지역의 땅은 비옥해졌고 땅이 비옥하다는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그곳으로 몰려와 4대 문명 지역은 큰 발전을 하게
된다.
하지만 기후는 변한다. 4대 문명 지역의 기후도 그랬다. 축복이었던 대홍수의 시대가 끝나고 날씨가 추워지고
강수량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기후변화에 적응을 잘 하면 국가가 생존할 수 있었지만 아직까지 인류 문명은
그렇게 뛰어난 적응력을 가지지 못한 상황이었다. 추워진 날씨 탓에, 4대 문명 지역의 곡물 수확량은 감소하였고 굶주린
사람들은 불만을 터뜨리기 시작했다. 그나마 강을 가진 4대 문명 지역은 나은 상황이었다. 주변 국가의 상황은 훨씬 더
심각하였다. 굶주림이 계속되자 주변 이민족들이 4대 문명 지역으로 침략을 시도하였고 이것이 내부적인 불만과
합쳐져서 4대 문명 국가는 쇠퇴의 길을 겪게 된다.
4대 문명 국가의 시대가 막을 내리고 유럽 대륙에는 미케네 문명을 비롯해서 스파르타, 아테네 문명이 등장한다. 이들
문명은 유럽 문화의 근원을 이루며 발전하지만 역시 기후가 혹독해지던 시기를 버티지 못하고 멸망한다. 그나마 오랜
기간을 버틸 수 있는 힘을 가진 문명이 등장한 것은 바로 로마시대였다.
기원전 2세기에서 기원 후 2세기까지 지중해 지역에 온난한 기후가 찾아온다. 온난한 기후 덕분에 그리스 지역과
북아프리카 지역에서는 농사가 풍년을 이루었고 로마는 이들 지역으로부터 활발하게 곡물 수입을 하며 성장한다.
따뜻해진 날씨 덕분에 작물 재배 한계선이 상승한다. 예전에는 숲과 목초지였던 이탈리아 반도 북쪽에서도 난대성
작물인 포도와 올리브가 재배되기 시작한다. 포도와 올리브는 술과 기름으로 가공될 수 있었기 때문에 큰 경제적 가치를
지닌 작물이었다. 이 작물들의 재배가 활발하게 되면서 대지주들은 많은 돈을 벌기도 하였다.
온난했던 지중해 지역의 날씨와 달리 기원전 29년부터 기원후 219년까지 중국은 한랭 건조기후를 겪고 있었다. 당시
훈족은 극심한 가뭄을 겪고 있었고 굶주림을 견디지 못한 훈족은 먹을 것을 찾아 서쪽으로 이동하게 된다.
위의
그림은
훈족의
이동을
나타낸
표이다.
훈족의
이동은
게르만족의
이동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이러한
연쇄작용의
결과로
로마는
흔들리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새뮤얼
헌팅턴이라는 학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아시아 유목민들이 살던
중앙아시아의 목초지가 말라
버린 것이 야만인 부족들을
서쪽의 유럽으로 이동시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가져왔다.”
기원후 2세기 이후 온난했던 기후가 끝이나고 지중해 지역의 기후는 다시 나빠진다. 추운 날씨와 기근이 계속 된
것이다. 535년~536년에는 동로마 제국에서 화산 폭발이 일어나고 대기 중에 발생한 화산재 때문에 날씨는 더욱
113
혹독해진다. 541년 유스티니아누스 역병까지 발생하면서 동로마 제국은 큰 위기를 겪는다.
이러한 위기는 중세온난기가 찾아오고서야 멈춘다. 1000년부터 1400년까지는 중세 온난기가 찾아오는데 이전
온난기보다도 훨씬 따뜻해진 날씨 때문에 유럽, 아시아 대륙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한다. 경작지가 확대되어 농업
생산량이 증가하고 풍족해진 생활 덕분에 평민과 농노 납세자가 증가한다. 이러한 영향으로 교회의 영향력 역시
증가하였는데 사람들이 풍족한 식량을 신의 축복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1400년 이후 소빙기가 찾아온다. 다시 추워진 날씨가 찾아온 것이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기근이 찾아왔다. 농업
생산량이 감소하여서 생활이 궁핍해지기 시작했다. 기근과 함께 찾아온 흑사병은 당시 유럽 인구의 1/3을 사망시킨다.
생활이 피폐해지자 교회의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날씨가 추워지면서 작물 재배 한계선이 다시 내려가기 시작했다. 폴란드, 독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북쪽 지역의
포도농장이 큰 타격을 입기 시작했다. 포도 생산량이 감소는 포도주 소비세의 감소로 이어졌다. 국가 재정의 큰 부분을
담당하고 있던 포도주 소비세가 감소하자 국가의 재정에 큰 타격이 이어진다. 포도 생산량이 줄어들자 포도주를 대신할
맥주가 사람들의 식탁에 오르기 시작했다.
소빙기에는 사람들의 의식주도 변화하였다. 먼저 중세시대와 달리 의복에서 변화가 찾아온다.
왼쪽
그림은
중 세 시 대 의
의복을
나타낸
것이고,
오른쪽
그림은
소빙기
시대의
의복을
나타낸
것이다.
중 세 시 대 의
의복은
얇고,
짧고, 옷의 색이
밝고
화려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소빙기
시대의 옷은 두껍고 색이 어둡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날씨가 혹독하게 변화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이 옷을 입는 방식 역시
이와 함께 변화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소빙기 시대에는 연이은 흉작 때문에 고구마와 감자 같은 구황 작물의 섭취가 심해졌다. 또한 서양에서는
벽난로가, 조선에서는 온돌이 대중화되던 시기가 바로 이 소빙기 시대였다.
현대에는 지구온난화의 영향으로 기후가 따뜻해지고 있는 추세이다. 이에 관련해서는 계속해서 논쟁이 이어져오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논쟁에 대해서는 후에 서술하겠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의 핵심 관점은 기후변화이다. 기후 변화가 사회변동을 일으킬 수 있는 원인에는 몇 가지가
있다. 그 중 기후 변화로 인한 식량 생산의 감소가 가장 결정적인 요인이다. 온난하고 습윤한 기후는 농업 생산량을
증가시켜 삶을 풍요롭게 만들지만 혹독한 기후는 기근과 연결되어 사람들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기후가 혹독할 때 사람들은 거리에 내몰리고 굶어 죽어간다. 먹을 것을 찾아 다른 곳으로 떠나는 사람도 있었는데,
게르만족의 이동을 불러일으켰던 훈족의 이동이 이러한 예에 해당한다. 당시 훈족이 거주하던 아시아 일대의 지역에는
한랭건조한 기후가 계속되고 유럽 대륙 쪽은 온난습윤한 기후가 계속되었다. 기근에 시달리던 훈족은 먹을 것을 찾아
따뜻한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이러한 이동은 연쇄적으로 게르만족의 이동을 발생시켰다. 훈족의 예시 외에도 아일랜드
사람들이 미국으로 이주한 것이나 조선인이 간도로 이주한 것 역시 혹독한 기후를 피해 먹을 것을 찾아 나선 예에
해당한다.
기후 변화로 경제 위기가 닥치고 민심이 흉흉해지면 사람들은 사회개혁을 요구하게 된다. 기후가 온난할 때는 식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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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량이 많아지기 때문에 국가 전체가 풍요로워진다. 농업 생산량이 많아지면서 농민이나 농노의 세금 납부도 많아지기
때문에 국가 역시 부유해진다. 그리고 사람들은 이것이 신의 은혜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종교에 대한 믿음 역시
굳건해지며 사회는 안정을 유지한다.
하지만 기후조건이 나빠져서 기근이 돌면 이러한 상황은 반대로 변한다. 이른바 ‘정치적 스트레스’가 높아진다고 할 수
있는데, 역사적으로 기후조건이 나쁜 시기에 반란이 일어나고, 개혁이 단행되고, 혁명이 발생하고, 왕조가 교체되는
모습이 자주 발견되었다. 대표적인 시민 혁명으로 꼽히는 프랑스 대혁명의 배경에 바로 기후 악화로 야기된 식량 부족이
있었다. 반면에 성난 민심을 밖으로 돌리고 부족한 식량을 충당하기 위해 침략 전쟁을 일으킨 경우도 있었는데, 여진족이
조선을 침략한 병자호란 때가 그 경우였다.
기후 변화는 사상과 예술 및 생활 문화, 종교 생활에도 영향을 미쳤다. 마지막 빙하기 때 구석기인들이 남긴 동굴
벽화는 후빙기 때에는 더 이상 그려지지 않았다. 소빙기(온난했던 중세가 끝나고 날씨가 다시 추워진 시기) 때에는
보온을 강화하는 주택과 의복이 널리 보급되었다. 사람들이 입는 옷은 상당히 두꺼워졌다. 서양에서 벽난로, 조선에서
온돌이 대중화 되던 시기도 날씨가 추워진 소빙기 시기였다. 추워진 날씨에 맞춰서 적응하기 위해 새로운 생활양식이
등장한 것이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4번에서 구체적인 해석을 하였기에 6번에서는 요점만 얘기하도록 하겠다.)
흉작이 들어도 인간이 버틸 수 있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초반에서였다. 그전까지의 인류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생존을 위한 식량이었다. 그리고 그 식량의 생산량을 결정하는 것이 바로 기후였다. 기후는 계속해서 변하기에
인류문명은 그 변화에 적응을 할 수밖에 없었다. 잘 적응하면 생존하는 것이었고 적응하지 못하면 멸망하는 것이었다.
과거의 기후는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에 인간은 단지 좋은 기후를 바랄 수밖에 없었다. 날씨가
좋지 않아 가뭄이 오면 기우제를 지내면서 비를 뿌려달라고 제사를 지내는 것이 인간이 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물론 현대에도 이러한 모습이 남아있다. 여전히 우리는 기후를 완벽히 통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류
문명이 성장하면서 기후에 대한 적응력이 커진 것이 사실이나, 여전히 인간은 기후변화의 영향을 받으며 살아간다.
사진을 보면 현대에도 과거와 같이 비가 내려주길 기원하면서 기우제를 지내는 모습을 뉴스 등에서 볼 수 있다.
인공강우 등의 기술의 개발이 논의되고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여전히 기후는 인간이 완벽히 통제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근대를 기준으로 달라진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이 기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점이다. 근대 이후
증가된 온실가스 배출 때문에 지구온난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되면서 이러한 가능성이 고개를 들었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이제 인간은 기후로부터 영향을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다. 이제 인간은 기후 변화에 영향을 미칠 수도
있는 것이다.
하지만 위와 같은 주장은 현재 논쟁 중에 있다. 가능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확신할 수는 없는 단계이다. 아직까지
지구온난화 논쟁은 계속되고 있고 다양한 주장이 대립하고 있다. 과학자들처럼 대중들 역시 지구온난화에 대해 다양한
115
생각을 가지고 있는 상황이다. 다음과 같은 표는 지구온난화에 대한 미국인들의 생각을 보여준다.
아직 논쟁이 완전히 종결되었다고 말할 수 없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각 입장들의 주장을 소개한 영상을 첨부하려고
한다. MBC의 ‘서프라이즈’라는 프로그램에 소개 된 영상 내용이다.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AHq98hXKpaE)
영상을 보면 알 수 있듯이, 현재까지 지구온난화 논쟁은
활발하게 진행 중이다. 하지만 21세기가 넘어 오면서 지구온난화
논쟁은 보다 다른 형태로 변화되었다. 더 이상 지구온난화가
진실이냐
무엇이냐의
거짓이냐의
문제로
문제가
논쟁이
아닌
변화한
지구온난화의
것이다.
계속되는
원인이
기후
관측으로 인해 지구의 온도가 따뜻해지고 있다는 사실에는 거의
모든 과학자들의 합의가 이루어졌다. 1940년에서 1960년까지
지구의 기후가 잠시 하강했을 때가 있지만 1960년 이후 지구의
온도가 급속도로 증가하면서 지구의 온도가 상승하고 있다는
사실에는 거의 모든 과학자가 동의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 지구온난화의 원인이 무엇이냐의 논쟁은
계속되고
있다.
그것이
인간이
배출하는
온실가스
때문이라는 주장과 태양의 흑점과 같은 자연적 주기
때문이라는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이다. 지구온난화의
원인으로
온실가스를
주장하는
대표적인
집단은
세계기상기구(WMO)와 유엔환경계획(UNEP)가 1988년
공동으로 설립한 IPCC라는 유엔 산하 국제 협의체이다.
이러한 협의체의 주장에 의하면 지구온난화를 발생시키는
주범은 인간이다. 자연적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지만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은 인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반대 의견도 제시되고 있는 상황이다. 반대 의견에 의하면 태양의 흑점 에너지 방출시기와 지구의 기온 상승
시기는 같은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주장에 의하면 지구온난화는 온실가스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적 요인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결코 인간에 의해 발생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논쟁이 일어난다는 자체가 기후에 대한 인간의 영향력이 과거보다는 증가하였음을 시사해준다. 기후
상승이 인간에 의한 것이 맞든 아니든, 인류는 지구온난화를 견뎌내야만 하는 위기에 처했다. 이러한 위기에 얼마나 잘
적응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해진 것이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지구온난화 논쟁에서 살펴보았듯이, 원인이 무엇이든 간에 앞으로 기후는 상승할 것으로 예측된다. 그리고 상승하는
기후 때문에 농업에서 큰 변화가 일어날 것으로 보인다. 날씨가 따뜻해졌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도 아열대 작물이
재배되고 있다는 소식의 뉴스를 심심찮게 볼 수 있다. 다른 나라도 마찬가지이다.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예전에는 농사가
불가능했던 지역에서도 농사가 가능해지고 있다는 부분은 식량확보라는 관점에서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다.
(링크 : https://www.youtube.com/watch?v=ak7H_VcYOjU)
지구온난화는 식량 문제와 함께 에너지 문제와도 관련된다. 그것은 바로 지구온난화 문제 때문에 다양한 에너지 규제
정책이 시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탄소배출권이나 배기가스 허용 제한 등의 다양한 정부 정책이 시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지구온난화 문제가 이제 정책적인 문제에까지 확대된 것이다. 기후 변화의 문제가 정치적으로 복잡한 관계를 띠기
시작하면서 이러한 정책과 관련된 다양한 음모론들이 제기되고 있는 상황이다. 정책이 계속되는 한 이러한 문제는
계속해서 복잡하게 남아있을 것으로 보인다. 정부의 에너지 규제 정책은 앞으로도 계속 될 것으로 보이는데, 지구온난화
논쟁에서 온실가스가 하나의 원인으로 지목 된 상황이기에 이와 관련된 국제 여론을 대비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116
기업들은 이제 ‘친환경’이라는 이미지를 적극 이용하기 시작했다. 지구온난화 논쟁이 확대되면서 기업들은 자신들은
남들과 달리 환경친화적인 기업이라는 사실을 어필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어필이 대중에게 성공을 거두게 된 것이다.
위의 사진들을 보면 기업들이 적극적으로 ‘녹색’, ‘환경’의 이미지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을 알 수 있다.
반면에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사용했다가 그것이 거짓임이 밝혀지고 타격을 입은 사례도 있다. 2015년 폭스바겐
배출가스 조작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그간 깨끗하고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강조했던 폭스바겐에 배출가스 조작 사건이
터져서 폭스바겐은 기업 이미지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러한 모습을 봤을 때 대중들이 현재 ‘친환경’이라는
이미지에 민감하다는 것을 알 수 있으며 기업들은 이를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을 다양하게 탐색해야 할 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사회변동론 수업에서 한 발표자가 다음과 같은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사회변동에는 인간의 가치나 욕구가 반드시
개입되어야만 합니다.” 사실 사회변동론 발표에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선택한 주제를 보면 이러한 말이 이해가 가긴 한다.
하지만 기후변화라는 주제로 발표를 한 나의 입장에서는 이러한 주장에 100% 동의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기후변화는
인간의 가치가 개입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기후 말고도 질병, 인구 등의 요인 역시 인간의 가치나 욕구가
개입되었다고 보기는 힘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후는 얼핏 보면 사회 변동의 요인이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과거에 인간 문명은 기후에 많은 영향을 받으며
살아왔다. 기후 변화에 적응하면 국가가 생존하는 것이었지만 그렇지 못하면 그대로 멸망하는 것이었다. 기후가 좋지
못하여 기근이 들면 국가 전체가 굶어 죽는 것이었기 때문에 국가마다 기후에 대한 관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물론 현대에 들어서 기후문제는 인간의 가치가 개입된 복잡한 문제가 된 것이 사실이다. 이제 기후문제는 더 이상
과거와 달리 자연적인 문제가 아닌 복잡한 정치적, 정책적인 문제가 되었다. 기후문제로 인한 정책에 따라서 기업계,
산업계는 큰 영향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을 잘 이용하여 이득을 보는 집단이 있을 수도 있고 반대로
피해를 입는 집단이 있을 수 있다.
기업들은 더 이상 환경의 문제를 무시할 수 없게 되었다. 기업가라면 가능한 적극적으로 자신의 기업이 환경을
생각하는 기업이라는 사실을 홍보해야만 한다. 왜냐하면 대중들이 ‘친환경’이라는 이미지를 일단 긍정적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특히 식품을 파는 기업들에게
이러한 이미지는 더 중요할 것으로 생각된다. 식품업계 중에서 친환경적인
이미지를 가장 잘 구축할 수 있는 기업은 소비자로부터 가장 많은 선택을 받게 될 것이고 이것을 통해 큰 이득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최근 들어 지구의 날씨가 따뜻해지고 있고 농작물 재배지가 북상하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이를 적극적으로
이용한 농업이 등장하면 큰 이윤을 볼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위 그림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예전에는 남쪽에서만 재배되던 작물이 이제는 북쪽에서도 재배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
117
수 있다. 작물 중에서도 높은 경제적 가치를 가진 작물이
있을 수 있다. 이를 먼저 대량으로 재배하여 판매한다면 큰
수익을 가질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한국에서 재배되지
않았던 동남아시아 등지의 경제적 가치가 높은 작물을
한국에서 재배하여 판매한다면 큰 이윤을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인류학자가 브라이언 페이건의 ‘기후는 역사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라는 책이 내가 선택한 책과 비슷한 주제를
다루고 있다.
지구온난화 논쟁에 대해서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스펜서 위어트의 ‘지구온난화를 둘러싼 대논쟁’이라는 책을
참고하면 좋을 것 같다. 또한 지구온난화의 문제에 대해서는 다양한 영상 자료가 존재하기 때문에, YouTube에
지구온난화 논쟁이라고 검색한다면 내가 소개한 영상 외에도 다양한 영상을 볼 수 있을 것이다.
10. 종합결론
과거의 기후는 인간의 생존을 위한 식량 생산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이었다. 기후가 좋을 때는 식량 생산량이
많아져 풍족한 삶이 이어졌고 기후가 나빠지면 사람들은 굶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기근이 든 지역의 민족들은
먹을 것을 찾아서 끊임없이 이동하였고 이러한 이동이 한 문명의 몰락을 가져오는 일이 역사적으로 관찰되었다. 기후
변화는 곧 사회 변혁의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기후가 좋아서 식량이 풍족할 때와 달리 기후가 나빠져 기근이 들면
곳곳에서 사회 변혁의 목소리가 등장했다. 기후가 좋을 때는 종교도 많은 지지를 받지만 기후가 나쁠 때는 기존의
종교에 대한 지지가 떨어지는 모습도 나타났다. 사람들의 의식주 역시 기후변화에 맞춰서 변화하는 모습이 나타났다.
현재의 기후변화 추세를 보면 지구가 따듯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와 관련된 기후변화 문제는 굉장히
복잡한 정치적, 정책적 문제가 되었다. 현재까지도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논쟁은 계속되고 있고 다양한 주장들이 대립하고
있다. 정부는 다양한 에너지 규제 정책이 내놓고 있는 상황이다. 이와 더불어 ‘친환경’이라는 이미지가 가지는 힘이
강력해졌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이미지를 잘 활용할 수 있는 기업은 많은 소비자의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라고
예측된다. 또한 날씨가 따뜻해지면서 재배 가능한 작물이 다양해지고 있는 추세이기 때문에 경제적 가치가 높은 다양한
작물들을 재배할 수 있는 기회가 열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이름 : 윤재훈
학과 : 사회학과
학번 : 2014104419
자기소개 : 안녕하세요. 사회학과 14학번 윤재훈입니다. 부산에서 출생해서 고등학생 때까지 부산에서 생활하였고
현재는 서울로 올라와 학교 근처에서 자취중입니다. 부전공으로 아동학을 공부하고 있습니다. 사회학과 더불어 심리학,
아동학, 교육학에 관심이 많아 관련된 전공수업을 수강하고 있는 학생입니다.
email 주소 : wogns928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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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동의 지표로서의 옷
목차
1. 책 소개
2. 이 책들을 선택한 이유
3. 저자소개
4. 책 내용 요약
5. 이 책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사회변동의 핵심관점
6. 책들에서 제시된 핵심관점으로 해석한 역사
7. 책들에서 제시된 핵심관점으로 예측한 앞으로의 세상
8. 이 책들이 나에게 준 통찰력
9. 이 관점이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들
10. 종합결론
11. 간략한 나의 소개
1. 책 소개
이번 발표 및 보고서를 작성하는데 사용된 책은 「현대사회와 패션」, 「의복과 현대사회」, 「패션의 문화와 사회사」로 총
세 권이다. 「현대사회와 패션」은 이인자 외 9명이 공저했으며 2002년 초판이 나온 이후 2009년 개정판이 나왔으며
건국대학교출판부에서 출판하였다. 「의복과 현대사회」는 신혜원 외 4명이 공저했으며 2003년 초판이 나혼 이후 2009년
개정판이 나왔으며 신정출판사에서 출판되었다. 마지막으로 「패션의 문화와 사회사」의 저자는 다이애너 크레인이며
서미석 씨가 번역하였다. 이 책은 2004년에 한길사에서 출판되었다.
2. 이 책들을 선택한 이유
의복으로 사회변동을 바라보는 데는 여러 가지 측면이 있을 수 있다. 의복으로 인해 사회변동이 촉발된 측면이 있을
수 있고 의복이 사회변동의 지표로서의 역할을 하는데 초점을 맞출 수도 있다. 처음에는 사회변동의 촉발요인으로서
의복을 조사해 보았지만 이러한 시각에서 쓰여진 책이 없었고 촉발요인인 방직기술의 발달 등은 넓게 보면 산업혁명에
포함되기 때문에 사회변동을 나타내는 지표로서의 의복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다. 그래서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패션을
해석한 「패션의 문화와 사회사」를 선택하게 됐고 그 이전에 옷의 역사와 옷에 대한 개념을 알아보기 위해 「의복과
현대사회」, 「현대사회와 패션」이라는 의상학 기본서적을 선택했다.
3. 저자소개
먼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패션을 해석한 「패션의 문화와 사회사」의 저자인 다이애너 크레인은 1953년 케임브리지
래드클리프 대학을 졸업한 뒤 1964년 뉴욕 컬럼비아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펜실베니아 대학 사회학과
교수로 있으며 문화사회학, 예술과 대중문화, 문화정책 그리고 세계화에 대해 연구해오고 있다. 뉴욕 아방가르드의 양식
변천을 예술사회학적으로 접근한 『아방가르드의 변형: 뉴욕 미술계, 1940~1985』를 비롯해 예술과 대중문화를
사회학적으로 분석한 저서를 다수 집필했다. 「현대사회와 패션」의 저자인 이인자 교수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가정학과를
졸업, 미국 FIDM 및 Glendale College 수학, 이학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한국복식학회 및 한국의류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건국대학교 디자인문화대학 학장 및 대학원장을 역임했으며 현재는 건국대학교 예술문화대학 명예교수 및
서경대학교 석좌교수로 재직 중이다. 「의복과 현대사회」의 저자 신혜원 교수는 서울대학교 의류학과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취득했으며
뉴욕
FIT에서
수학하였고
선경
인더스트리
섬유연구소에서 연구를 진행했으며 현재는 동국대학교 사범대학 가정교육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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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책 내용 요약
「의복과 현대사회」, 「현대사회와 패션」은 의상학 기본 서적으로 의복의 착용 동기부터 패션의 전파과정, 의복의 역사,
의복의 소재, 의복과 디자인, 의복과 패션산업, 의복의 관리 등 의복과 관련된 사회과학적인 내용 외에도 의상학에 대한
내용이 주를 이루고 있다. 이 중에서도 이번 보고서에는 의복의 기원과 전파에 관한 내용이 인용되었다.
먼저 의복의 착용 동기를 살펴보면 그 동기에는 총 세 가지가 있다.
이는
역사적인
자료의
해석과
유물로
추측한
것인데,
첫째
정숙설이다. 정숙설은 인간이 수치스러움을 느끼기 시작하면서 의복을
착용하게 되었다는 성경 창세기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으로 신체
노출에 대한 부끄러움에 의해 의복을 착용하게 되었다는 이론이다. 두
번째로 장식설이다. 장식설은 인간의 장식에 대한 욕구로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고통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체에 무늬를 새기거나
각종 장식물을 삽입하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는데, 이 같은 목적으로
매슬로우의 욕구 5단계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것이 장식설이다. 마지막으로 보호설이다.
보호설은 다시 두 가지로 나뉘는데 극한 기후나 외적 위험으로부터 신체를 보호하려 옷을 입기 시작했다는 신체보호설과
의복 착용을 통해 얻는 심리적 안정으로 인해 옷을 입게 됐다는 심리적보호설이 있다. 심리적보호설에 관해 더
살펴보자면 이 심리적 보호에는 신분 상징을 통한 심리적 안정의 의미가 크다. 의복은 착용자의 지위에 대한 상징적
표현과 더불어 정체성을 나타내 주는 하나의 도구로 사용된다. 이러한 심리는 매슬로우의 5단계 욕구를 살펴보면 더 잘
이해할 수 있는데, 생존을 위한 기본적 기능이 충족되면 그 다음으로 복식을 통한 신분 상징의 욕구를 표출하게 된다.
이는 원시시대 때부터 찾아볼 수 있는데, 그 시대의 족장들은 동물의 뼈, 이빨, 가죽 등으로 자신의 신분을 과시했다.
이렇게 입게 된 옷은 비싸고 귀했기 때문에 산업혁명 이전까지는 상류층 계급에 의해 향유되었고 산업혁명 이후
방직기술의 발달로 대중화 되었으며 이러한 옷의 흐름은 ‘패션’이라는 단어로 표현되며 옷은 사회 전반적으로
향유되었다. 이러한 패션의 전파는 소개기, 상승기, 절정기, 하락기, 폐용기의 다섯 단계로 구분된다. 소개기에는 새로운
의상이 특정 소비자 즉 패션리더에 의해 수용되며 패션이 시작된다. 이러한 패션리더는 고급 취향을 가진 특권층,
부유층, 사회명사, 인기 연예인, 안목 높은 일반 소비자 등이 있다. 이렇게 시작된 패션은 상승기에서 보다 많은 패션
리더들에 의해 수용된다. 이에 따라 사회 전체에 착용자수가 많아지며
사회적 가시도가 높아진다. 절정기에는 특정 스타일에 대한 수용
정도가 최고 수준에 달하며 이제 착용할 만한 소비자는 거의 착용한
단계로 매일 쉽게 볼 수 있는 스타일이 된다. 이렇게 절정기를 지나고
나면 하락기에 접어드는데, 특정 스타일의 포화로 패션은 하락하게
된다. 이때 초기 소개기에 패션을 수용했던 소비자들은 싫증을 내거나
사회적으로
패션의 확산단계
차별화가
어려워
사용을
기피하게
된다.
마지막으로
폐용기에는 하락기 이후 더 이상 특정 스타일을 입지 않는 단계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 대해서도 학자들마다 해석이 달랐는데 이는 패션 전파이론으로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하향전파이론이다. 이 이론은 사회철학자인 짐멜(Simmel, 1904)에 의해 구체화되었는데 패션은 상류계층에서 최초로
수용된 후 그것이 최하의 사회계층으로 하향 전파될 때까지 바로 인접한 낮은 계층에 의해 점진적으로 모방된다는
이론이다. 계급의 개념을 패션에 접목한 이 이론은 상류층이 계속 새로운 스타일을 받아들여 의복 착용에서 변화를
추구하지만 하류 계층이 그들의 스타일을 모방하여 경계선을 침범하면 바로 그 스타일을 버리고 차별되는 새로운
스타일을 채택한다고 설명한다. 베블렌(1909)도 패션의 전파를 하향전파이론으로 해석했다. 그는 패션을 여가계층이
부를 과시하는 방법으로 보았다. 두 번째로 수평전파이론이다. 수평전파설은 한 스타일이 사회계층별로 주어진 계층
내에서 수평적으로 이동하여 확산된다는 이론이다. 하향전파이론에서는 패션 리더를 상류계층에만 국한시켰으나
수평전파이론은 각 계층에 패션리더가 존재한다고 본다. 세 번째로 상향전파이론이다. 상향전파이론은 소수집단이나
청소년 하위문화집단이 채택한 스타일이 높은 사회계층으로 전파된다는 이론이다. 이는 히피패션, 힙합패션 등 일부
패션의 경우가 이에 해당된다. 네 번째로 집합선택이론이다. 집합선택이론은 사회학자인 블루머가 제안한 이론인데
120
패션은 사회 전반의 공통적 취향에 동조하는 집합적 선택에 의해
형성된다는 것이다. 즉, 소비자 취향이 동질화 되면서 유사한 취향을
가진
대중이
집합적으로
선택한
스타일이
패션으로
인정받는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대 사회의 패션전파이론다. 현대사회는 다양하고
복잡하기 때문에 패션 현상 또한 앞에서 소개한 다른 이론들 중 한
가지 이론만으로 설명하기 어렵다. 현대 사회의 패션 전파 현상은 두
가지
관점인
패션시스템
모델과
비패션시스템
모델로
설명이
가능하다(데이비스, 1992). 패션시스템 모델이란 기존 패션의 근원지를
파리, 밀라노, 뉴욕의 오트쿠튀르로 두는 하향전파론과 각 계층별로
히피패션
패션이
동시에
확산된다는
수평전파이론을
포함하며
비패션시스템
모델은 하위문화집단을 패션의 원천으로 보는 상향전파이론을 말한다. 현대 사회에는 이러한 경향성이 동시에 존재한다.
이렇게 「의복과 현대사회」, 「현대사회와 패션」을 통해서 의복의 착용 동기와 의복이 어떻게 이 사회에서 전파되는지를
알 수 있었다. 패션 전파이론에서도 보여지 듯 의복의 존재와 전파는 계층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다. 이렇게 패션은
계층과 뗄 수 없는데 이런 패션을 사회학적 관점에 맞춰 살펴본 책이 바로 「패션의 문화와 사회사」이다.
이 책은 계급과 패션을 통해 여러 시대에 걸친 여러 계층의 패션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 노동자계급의
의상과 사회계급의 경험, 비언어적 저항으로서의 여성의상 등 계급과 그에 따른 패션의 차이와 변화를 통해 사회를
바라보고 있다. 이 책에서도 계급에 따른 패션의 변화를 구체적인 의복의 형태나 착용방법 등 의상학적인 측면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패션을 사회적 변화를 나타내는 지표로서 역할을 한다고 본 관점은 사회학적인
측면에서 패션을 바라본 것이다. 책에서 의상은 가장 뚜렷한 소비형태의 하나로 사회적 정체성을 형성하는데 중대한
역할을 한다고 소개한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적 정체성으로 인해 의상은 사회적 신분과 성별의 가장 뚜렷한 지표로서
상징적인 경계를 유지하거나 허무는데 유용한 역할을 한다. 따라서 의상의 선택은 각기 다른 시대의 사람이 사회조직과
이미 결정된 신분경계 안에서 자신의 지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 알려주는 척도가 된다. 즉 의상선택의 차이는 사회
내에서 각기 다른 공동체와 신분이 실제로 어떻게 경험되는지를 보여주는 민감한 지표인 것이다.
19세기
이전에는
옷이
너무
비싸고
귀했기
때문에
상류층을
제외하고는 옷을 구입하고 소유하는 일조차 쉽지 않았다. 때문에 옷은
대체로 개인의 가장 귀중한 재산이었다. 대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후에야 자기 것이 된 옷을 입던 가난한 사람들로서는 새로운 옷은
꿈도 꾸기 힘들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옷을 한 벌만 가지고
있었는데 예를 들면, 1780년에 파리 부군에서 체포된 278명의 사람들
가운데 옷을 두 벌 이상 소유한 사람은 28명에 불과했다(Daniel
Roche 1994:87). 이러한 행태는 산업혁명을 기점으로 변화하게 된다.
산업혁명으로 방직기술이 발달하고 공장에서 옷이 나오기 시작했다.
때문에 옷은 더 저렴해지고 자연스럽게 상류층을 제외한 계급에서 옷에
대한 접근가능성이 높아졌다. 복식역사가들은 이러한 현상을 의상의
영국 산업혁명을 주도했던 면직물 공장
민주화라고 결론지었다. 즉 더 이상 옷 그 자체는 상류층만의 전유물은 아니었다. 전 계층에 걸쳐 옷에 대한 접근이 더욱
용이해진 산업혁명 이후에는 옷의 종류 즉 어떤 옷을 입느냐가 사회와 계층의 측면에서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다.
산업사회에서는 의상행위가 사회조직에서 사회계급과 성별뿐 아니라 대개 직업, 종교 출신지역 등 한 개인의 사회적 지위
및 위치를 나타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옷의 사회적 지위 및 위치를 나타내는 역할과 더불어 옷에 대한 접근이
쉬워지면서 상류층은 끊임없이 그들을 중·하류층과 자신들을 구별 지으려는 목적으로 패션을 형성했다. 산업혁명 이전과
비교했을 때 훨씬 많은 사람들이 옷에 쉽게 접근했지만 옷은 다양한 형태로 계층을 구별 짓는 수단이자 지표였다. 이는
부르디외(Pierre Bourdieu 1984)의 구별짓기로 알아 볼 수 있다. 이렇게 옷은 사회에서 계층을 구별하며 존재했고
상류층의 끊임없는 구별욕구로 변화하며 옷은 사회변동의 지표로서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행태는 현대사회에서도 유효하다. 이 책의 5장 ‘패션계와 글로벌 마켓’에서 이와 같은 내용을 살펴볼 수 있다.
산업혁명 이전에 계급패션으로 존재했던 옷들이 그 이후에는 소비자 패션으로 재편됐지만 프랑스의 유명 명품
121
브랜드들이 다시 패션계를 지배하며 이전과는 다른 형태로 옷은 계층을 나타냈다. 프랑스 상류층 고객을 위해
오트쿠튀르를 만들어내던 프랑스 디자이너들은 현재까지도 전세계의 스타일에 영향력을 행사 하고 있으며 이
디자이너들의 옷을 소비할 수 있는 상류층과 그렇지 못한 계층에 괴리가 생겨났다. 위에서 살펴봤듯 현대의 패션 전파는
상향전파 혹은 하향전파 중 하나로 온전히 설명되진 못하지만 전 세계의 메인 패션은 프랑스에서 시작해 상류층에서
하류층까지 모방을 통해 전파되며 이는 끊임없이 계층일 상징하는 지표로 역할을 한다.
5. 이 책들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사회변동의 핵심관점
사실 사용된 세 권의 책 자체에서는 뚜렷한 사회변동의 핵심 관점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 책들은 옷이
계층을 나타내는 역할을 하고 상류층의 구별짓기에 대한 욕망으로 변화하고 발전함을 보여준다. 결과적으로 세 권의 책을
통해 이해할 수 있는 사회변동의 핵심관점은 옷이 사회변동의 지표로서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옷 그자체가 사회변동의
촉매가 되는 측면도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옷이 처음 사람들에게 입혀진 시점부터 현재까지 옷이 갖고 있는 분명한
특성은 옷이 개인의 사회적 계층의 이해와 지위를 나타낸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이 입은 옷과 그 옷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됐는지를 알고, 위에서 살펴본 전파 단계 중 어느 위치에서 옷을 소비하는지 파악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 옷을 소비하는 사회의 구조를 파악할 수 있고 그 사회를 이끄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지 알 수 있는 것이다.
6. 책들에서 제시된 핵심관점으로 해석한 역사
모든
사회는
현대사회뿐만
여러
아니라
가지
요인에
과거의
모든
의해
계층화
사회에도
된다.
계층은
존재했다. 푹스(Eduard Fuchs)에 의하면 의복은 계층의
차별을 나타내는 중요한 도구로 패션을 권력과 재력의
상징으로 보고 있다. 의복은 과거 봉건사회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계층을 상징하는 하나의 도구로 이용되고 있다.
이를 뚜렷하게 나타내는 것이 복식의 규제이다. 동서양의
신라시대 골품제
역사를 통해 복식은 과거 봉건시대의 제도적 사회계층에
있어 지배 계급의 신분 상징 수단으로 이용되었다. ‘복식금제령(Sumptury Law)’을 통해 계층에 따라 복식의 색상,
소재 및 형태, 장식의 크기와 종류를 규제함으로써 복식을 계층 간의 규제를 통한 사회적 통제 수단으로 사용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신라시대의 골품에 따른 의복의 색과 직물 종류에 관한 규제가 있었다. 조선시대의 경우에는 사치와
낭비를 막는다는 명목 하에 계층에 따라 복색의 소재, 장신구 등을 규제했다
또한 회색과 금색은 평민들의 사용이 제한된 색상이었다. 서양의 경우에도 이러한
경향은 잘 나타난다. 중세 초 고딕 시대에는 뿔랭(Poulaine)이라는 코가 뾰족한
신발의 앞코의 길이가 계층에 따라 달랐다. 중세 로마서는 계급과 연령에 따른
복식 규제로 계급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색상을 제한하는 등 동서양을 막론하고
옷에 대한 규제가 존재했다.
이러한 규제는 옷이 계층을 구별하고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라는 사실에서
비롯된다. 왕족이나 귀족 등 상류층은 그들을 제외한 중ㆍ하류층이 자신들과
유사한 옷을 입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의복을 제외하고 자신들의 지위나 권력을
나타낼 수 있는 창구가 많지 않았기 때문에 상류층은 옷으로 중ㆍ하류층과
자신들을 구분되길 원했다. 산업혁명 이전의 시대에는 옷이 비싸고 귀했기 때문에
이 같은 현상이 더 뚜렷하게 상류층과 나머지를 구분했다.
산업혁명 이후 옷의 민주화가 완성됐을 때도 옷의 계층을 구별하는 기능은
사라지지 않았다. 모두가 저렴해진 옷을 향유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옷의 구별 기능은 어떠한 형식으로 존재했을까? 산업혁명과 프랑스혁명 이후
공식적으로 ‘계급’이 폐지된 이후에 국가나 정부 차원의 복식규제는 존재하지
오늘날 오트쿠튀르 패션쇼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옷은 계층을 구별 짓는 기능을 했는데 바로 프랑스의
122
오트쿠튀르라는 고급 양재사 모임이 그 역할을 했다. 오트쿠튀르란 원래 고급 양재 또는 고급 양재사를 의미했다.
1868년 이후 1년에 2회 창작 의상을 발표하는 고급 의상점들의 모임을 의미하게 됐다. 최근에는 세계적인 일류
디자이너들의 고급 주문 여성복을 의미하며 지방시, 샤넬, 디올, 장폴골티에르 등과 같은 명품 브랜드가 이 모임에 속해
패션쇼를 열고 있다. 오트쿠튀르를 통해 매년 선보이는 옷들은 매우 고가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추고
있는 일부 상류층에게만 향유될 수 있다. 자연스럽게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추고 있지 못한 계층에서는 이러한 옷들을
소비할 수 없고 그 결과 오트쿠튀르에 속한 명품 의류들은 사회경제적 계층을 구별 짓는 지표가 됐다. 과거 봉건시대
때처럼 왕족이나 귀족에 의한 복식금제의 형태는 아니지만 산업혁명 이후 이러한 명품 옷들은 계급이 아닌 자본이라는
또 다른 기준에 의해 나눠진 계층을 뚜렷하게 나타내는 지표가 되었다. 이렇게 오트쿠튀르를 통해 선보인 옷들은
상류층에 의해 수용되며 패션으로서 사회에 퍼지기 시작하고 중ㆍ하류층의 모방 욕구로 인해 끊임없이 스타일이
모방되고 상류층은 다시 그들과 구별되기 위해 기존 스타일을 버리고 새로운 스타일을 수용하면서 의복은 존재하고
변화해 간다.
7. 책들에서 제시된 핵심관점으로 예측한 앞으로의 세상
이러한 관점에서 미래의 옷을 바라보면 어떨까? 미래에도 사람들은 옷을 입을 것이고 옷은 여전히 사회적 계층과
지위를 나타내는 분명한 지표로서 역할을 할 것이다. 다만 그 형태에 있어서는 조금 변화가 있을 것 같다. 미래에도 명품
의류는 오늘날 그들이 존재해 온 방식대로 존재해 갈 것이다. 여전히 유능한 디자이너들이 프랑스에서 선보이는 옷들은
고가이며 전세계의 유행을 선도할 것이다. 이 고가의 옷들은 특정 계급에게만 소비되며 계층을 상징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러나 미래에 변화가 생긴다면 어떤 변화가 있을 수 있을까?
우리가 주목해 볼 수 있는 측면은 웨어러블디바이스의 등장이다. 현재까지도 옷은 단순히 섬유로 조직되어있으며
디자인적인 측면에서는 수없이 다양한 형태를 띠고 있지만 기능적인 측면에서는 피부보호ㆍ보온ㆍ방한 등의 기능만을
갖고 있다. 최첨단 섬유로 된 옷도 존재하지만 기능적인 측면에서 기존에 옷이 갖고 있던 기능의 물리적인 한계를
뛰어넘는 수준은 아니다. 하지만 최근에 옷에 다양한 기능이 추가되고 있다. 에어컨 기능을 갖춘 옷을 비롯해 컴퓨터가
내장된
옷이
외에
스마트디바이스들이
옷과
결합하고 있다. 이러한 옷을 스마트 웨어라고 한다.
스마트 웨어(Smart Wear)는 신기술을 결합해
전통적
섬유나
의복의
개념을
벗어난
새로운
개념의
미래형
의류를
칭한다.
스마트
웨어는
섬유(직물)나 의복 자체가 외부 자극을 감지하고
스스로
반응하는
‘소재의
기능성(hi-functional
materials properties)’ 과 의복 및 직물 자체가
갖지
못한
Properties)’을
‘기계적
결합한
새로운
기능(Digitalized
개념의
의류를
‘기계적 기능’이 추가된 코오롱스포츠의 스마트웨어
총칭한다.
섬유자체가 회로의 역할을 하는 특수 기능의 섬유로 만들어진 옷 속에 초소형 컴퓨터 칩이 내장된 스마트웨어는 각종
디지털 기기와 의류를 하나로 만든다. 이렇게 만들어진 옷은 그 자체로 착용한 사람과 함께하면서 인간의 기능적 한계를
뛰어넘게 해 줄 것이다. 예를 들어 컴퓨터가 내장된 옷은 착용자가 보고 듣는 모든 것을 저장ㆍ처리할 수 있게 되고
이는 인간의 망각이라는 기억력의 한계를 뛰어넘게 해준다. 이처럼 옷이 ‘기계적 기능’을 갖추게 되면 착용자의 업무
처리ㆍ수행 능력의 향상을 가져올 것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이러한 ‘기계적 기능’의 옷을 착용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업무 처리의 능력적 차이를 가져오고 이는 사회에서 다른 평가를 받게 하고 다른 계층에 존재하게 할 것이다. 옷
자체의 이러한 기능으로 계층의 분리가 야기될 수도 있지만 이러한 ‘기계적 기능’을 갖춘 옷들은 필연적으로 많은 기계적
장치와 고급의 기술을 포함하기 때문에 비싼 가격에 거래될 것이다. 물론 방직기술의 발전처럼 이러한 스마트 웨어
제작의 혁명이 있다면 스마트 웨어 자체에 모두가 더 쉽게 접근하게 될 수도 있지만 그러한 혁명이 있기 전까지는 비싼
가격에 거래될 것이다. 이러한 옷이 비싸게 거래된다면 자본을 갖은 일부 계층에 명품의류가 소비되듯 스마트 웨어도
일부 계층에서만 소비될 것이다. 또 상류층의 끊임없는 구별욕구로 명품 의류가 새로운 디자인으로 변화하듯 스마트
123
웨어도 새로운 기능 이 추가되면서 끊임없이 상류층을 모방하려는 중ㆍ하류층과 기술적 격차를 가져올 것이다. 결국
이러한 최첨단 스마트 웨어의 소비에 있어서도 사회경제적 계층에 따라 차이가 발생할 것이고 스마트 웨어는 사회
계층의 지표로 역할을 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논의는 먼 미래에 대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웨어러블디바이스와
스마트 웨어에 대한 개발이 활발한 만큼 언젠가는 이러한 세상이 올 것이다.
8. 이 책들이 나에게 준 통찰력
사회변동을 야기하는 데는 다양한 요인이 있다. 농업혁명이나 산업혁명 같은 기술적 발전이나 전쟁, 질병 등 다양한
요인에 의해 사회변동이 일어난다. 사회변동을 촉발시키는 요인을 살펴보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렇게 다양한 요인들로
변동해온 사회가 어떤 계층구조를 가지고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지 파악할 수 있는 능력도 중요하다. 사회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권력의 흐름이나 계층도 변화한다. 옷은 이러한 구조를 파악하는데 있어 좋은 지표이다. 옷은 그 존재의
이유부터 사회적 지위의 표현으로 인한 심리적 안정을 가져오는 목적에 의해 사람들에게 입혀지게 되었고 역사적으로
살펴봐도 옷은 개인의 사회적 위치를 나타내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때문에 상류층은 그들을 다른 사람들과 다른 특별한
사람들로 보이게 하기 위해 강제로 복식의 형태를 규제하기도 했고 값비싼 옷을 소비하면서 그들을 특별한 존재로
보이게 했다. 옷의 존재의 이유와 현재까지의 옷이 그랬듯 앞으로도 옷은 사회 계층을 나타내는 지표로서의 역할을 할
것이다. 그 사회가 어떤 요인에 의해 격변한 사회이든 상관없이 사람들이 입는 옷을 살피고 그 옷의 유행이 어디서부터
시작되며 누구에 의해 가장 먼저 수용되는지 이러한 매커니즘을 파악한다면 사회 변동과 그 사회의 구조까지도 파악할
수 있으며 한 사회에 작용하는 힘의 흐름까지도 이해할 수 있다. 과거에는 복식을 규제했던 상류층 오늘날엔 자본을
갖춘 유명 인사나 지도층이 그 역할을 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옷을 통한 사회변동과 구조에 대한 이해는 중요하다고
생각된다.
9. 이 관점이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들
샤넬의 오트쿠튀르쇼 https://www.youtube.com/watch?v=cjH6VC87xKo
‘기계적 기능’을 갖춘 스마트 웨어(블랙야크 야크온 H) http://blog.naver.com/gyoil/220547770963
명품의류를 모방하려는 욕구로 인해 빚어진 ‘H&M X 발망 콜라보레이션’ 노숙현상
http://www.ekn.kr/news/article.html?no=186565
10. 종합결론
옷을 입기 시작한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신체보호를 위해 입기도 했고 신체 노출에 대한 부끄러움에 의해
입기도 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유효한 옷을 입기 시작한 이유는 신분상징을 통한 심리적 안정이다. 우리는 단순히
비바람으로부터 몸을 보호하기 위해 옷을 입지 않는다. 자연스럽게 옷은 지위를 상징하는 하나의 지표가 되었다. 아울러
옷은 일정한 전파의 단계를 거쳐 사회에 전파된다. 패션 전파 초기에는 패션 혁신자라 불리는 사회경제적 지위를 갖춘
집단이 새로운 패션을 수용한다. 이렇게 수용된 패션은 인접한 계층의 모방을 통해 하향전파된다. 물론 히피패션과
힙합패션 같은 경우에는 패션이 아래계층에서부터 위로 상향전파 되는 경우도 있다. 오늘날 패션의 전파를 한 가지
전파이론으로 설명할 수는 없으나 우리가 흔히 말하는 주류 패션은 보통 하향전파 된다. 새로운 스타일의 옷을 시도하는
패션혁신자, 과거에는 왕족과 귀족이 됐으며 오늘날엔 사회경제적지위를 갖춘 유명 인사나 재벌들은 자연스럽게 자신들의
고유한 스타일을 유지하길 원했다. 전근대시대에는 이러한 욕구가 복식 금제령으로 나타났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상류층은 평민들의 복식을 규제했다. 반면 자신들은 화려하고 값비싼 옷을 입으면서 재력이나 권력을 과시했다. 산업혁명
이후
방직기술의
발달로
옷의
민주화가
이뤄졌다.
모두가
쉽게
옷에
접근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옷은
사회경제적지위를 갖춘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을 구분하는 기능을 했다. 전근대시대와 같은 복식의 금제령은
아니만 프랑스 오트쿠튀르에서 선보이는 명품의류들은 일반인들은 접근하기 어려운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으며 일부
사회경제적지위를 갖춘 이들에게만 이용되고 있다. 전세계의 유행을 선도하는 이 오트쿠튀르에 속한 명품 브랜드
의상들은 이 옷을 입은 사람들에게 재력이나 권력의 과시 수단이 되었다. 이러한 형태는 전근대 시대때 평민의 복식을
규제하고 화려한 의상으로 자신들의 권력이나 재력을 과시했던 귀족이나 왕족등 상류층의 행태와 비슷하다. 이렇게
프랑스에서 시작된 새로운 스타일의 옷은 사회경제적지위를 갖춘 사람들에 의해 향유되지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124
모방되며 비슷한 스타일을 상류층이 아닌 계층의 사람들도 향유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기존에 그 스타일을 수용했던
상류층은 기존 스타일을 버리고 새로운 스타일을 추구하는데 이렇게 옷은 변화하고 또 존재한다.
이러한 옷의 계층을 구별하는 지표로서의 역할은 비단 최근의 일만은 아니다. 과거 원시시대에서도 족장들은 각종
장신구와 사냥한 동물의 가죽 등으로 옷을 만들어 입으며 자신들의 권위를 과시했다. 인간이 옷을 입으며 살아온 모든
시대를 관통하며 옷은 개인의 사회경제적지위와 인식을 나타내는 지표로 역할을 했다. 미래에도 옷은 그러한 역할을 할
것이다. 물론 과거와 오늘날과는 다른 형태, 예를 들면 기계적기능을 갖춘 스마트 웨어 등으로 그 형태는 바뀔 수 있지만
옷은 계속해서 옷을 통해 재력과 권력을 과시하려는 상류층, 동시에 중ㆍ하류층들에 의한 모방으로 존재하고 변화해갈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옷은 사회 변동을 파악하고 사회 구조를 이해하는데 아주 좋은 도구가 된다. 유행이 어디서
시작되고 그 유행을 주도하는 이른바 힘을 갖은 사람들이 누구인지, 그들을 모방하려는 사람들은 누구인지, 사람들이
입은 옷을 보면서 그 사회의 구조와 변동을 파악할 수 있는 것이다. 항상 우리가 입고 있고 가까이 있어 쉽게 지나칠 수
있지만 이 옷은 사회와 개인을 나타내는 중요한 지표로서 역할을 한다. 때문에 사회학적 관점에서 사회 구조와 변동의
이해를 위해 옷이 대해 관심을 갖고 패션의 흐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1. 간략한 나의 소개
이름 : 최성호
학과 : 사회학과
학번 : 2012104423
간단한 자기소개 : 저는 사회학과 12학번 최성호입니다. 군 제대 후 2학년 2학기 재학 중에 있으며 평소 사회 현상과
그 변화 요인에 대한 관심이 많아 사회 변동론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습니다. 옷이라는 관점으로 사회 변동을 살펴보는
데 있어서 다른 주제들과는 다르게 사회변동을 촉발시킨 요인 보다는 사회 변동과 구조를 나타내는 지표로서의 옷을
통해 사회 변동을 파악해보고자 했습니다. 구성적인 측면에서 부족한 부분이 많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너그러운 마음으로
읽어주셨으면 좋겠습니다.
E-mail : neo61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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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로 보는 사회 변동
1. <책 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커피가 돌고 세계史가 돌고, 북북서, 2008, 우스이 류이치로 지음, 김수경 옮김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사회를 변화시키는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사회는 무엇에 의해 변화될까 많은 생각을 하였다. 그러다가 읽게 된 책이
있는데, 바로 사이토 다카시가 쓴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 가지 힘’ 이었다.
이 책에서는 세계사가 흘러온 흐름을 다섯 가지 관점으로 분석하였다. ‘욕망, 모더니즘, 제국주의, 몬스터(자본주의,
사회주의, 파시즘), 종교’ 가 바로 그 다섯 가지 관점이다. 이 다섯 가지 관점 중 흥미로웠던 부분은 욕망부분이었다.
세계사의 흐름을 욕망과 관련해서 볼 때 세계사는 물질과 그에 대한 동경이란 말로 정리되었다. 어떤 물질을 소유하고자
하는 사람들의 욕망에 의해 세계사의 흐름은 변화하였다. 이와 관련해서 주목할 만한 것은 이때의 물질이 항상 우리의
삶을 영위하는데 필수적인 것들은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사회는 삶을 이어가는데 꼭 필요한 의식주에 의해서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치품이나 기호품에 의해서 변화되기도 하였다. 수많은 노예들을 만들어낸
초콜릿, 설탕 그리고 유럽 국가들의 항로 개척과 다른 대륙을 향한 식민지화를 부추겼던 향신료 등이 이를 볼 수 있는
예시일 것이다. 커피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고 당장 우리 몸에 큰 변화가 생기고 건강에 이상이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커피는 기호품으로 오랜 시간동안 사랑받으며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커피를 생산하기 위한
노예들과 식민지를 만들어냈다.
사회를 변화시킨 여러 가지 요소 중, 커피라는 상품을 통해 사회 변동을 살펴보고자 했다. 그래서 선택한 책이
『커피가 돌고 세계史가 돌고』였다. 처음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사람의 욕망으로 인한 사회변동을 ‘커피’라는 상품을
통해 보고자해서였다. 하지만 이 책을 읽으며 욕망으로 인한 사회 변동 뿐 아니라, 커피라는 상품이 가진 특성으로 인해
변화된 사회의 여러 모습들도 볼 수 있었다.
이 책에서는 처음 이슬람에서 마시기 시작한 커피가 유럽 그리고 전 세계로 퍼지며 빚어낸 다양한 사회 변동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커피가 퍼지며 나타난 커피하우스와 여기서 일어난 정치·사회적 변혁, 제국주의 열강의 식민지 착취,
인종차별에의 개입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3. <저자 소개>
이 책의 저자인 우스이 류이치로는 1946년 일본 시즈오카 현에서 태어났다. 1972년 도쿄교육대학 독일문학과를
졸업하였고,
1974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수료하였다.
니가타대학
교양부
조교수를
지냈으며,
지금은
도쿄대학
교양학부(종합문화연구과 언어정보과학 전공) 교수로 재임 중이다.
저서로는 『네티 라드바니에서 안나 제거스로』, 『바하오펜론집성』, 『빵과 와인이 돌고 신화가 돌고』, 『말라버린 나무의
언어』, 『기억과 기록』 등이 있다.
4. <책 내용 요약>
①커피의 기원과 전파
커피의 발상지는 인류의 요람인 고대 아비시니아 땅, 즉 현재의 에티오피아라고 추정이 된다. 커피가 어떻게
발견되었는지 정확한 것은 전해지지 않아서 여러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그 중 하나가 목동 칼디의 전설이다.
어느 날, 칼디가 산양 무리를 새 목초지로 데리고 갔는데, 산양들이 흥분을 해서 밤늦게까지 잠들지 않았다. 당황한
칼디는 근처의 수도원을 찾아갔다. 수도원장 스키아들리가 조사를 해보니, 산양들이 어느 작은 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그 열매를 이런저런 방법으로 먹어보다가 한 번은 끓여서 마셔보았다. 그러자 그날 밤에 잠이
오지 않았다. 그때 문득 그의 머릿속에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수도원에서는 밤에 예배를 볼 때마다 앉아서 꾸벅꾸벅
조는 수도사들이 있었다. 수도원장은 그 열매 끓인 음료를 그들에게 마시게 했다. 효과는 금세 나타났다. 그 후로
수도원에서는 저녁예배 때마다 그 검은 음료를 마시게 되었다.
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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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이야기가 바로 칼디의 전설이다. 전설이기 때문에 조금씩 변형되어 전해져 내려오긴 했지만, 그래도 커피의
기원이라고 전해지는 이야기들은 모두 한 가지의 공통점을 갖는다. 바로 이슬람 수도사들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특이한
점은 이 수도사들이 단순히 위대한 수도사들이 아니라 ‘수피’라는 특정 교파의 수도사들이라는 점이다. 커피라는 음료가
만들어지고 전파되는 과정에는 이 수피들이 크게 기여하였다고 볼 수 있다. 수피들은 절대적으로 현세를 거부하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이들이 추구하는 정신 중에는 독특한 것들이 많았다. 배고픔과 목마름을 극복하는 금욕주의, 마른 몸,
잠들지 않는 것 등이 그 대표적인 예이다. 이런 수피의 정신은 커피의 특성과 잘 부합하였다. 씹는 음식을 먹을 때 신을
찬양하는 시구를 70회 반복해야하는 수피들에게 식사는 아무 의미가 없었기에 이들은 식사를 하는 대신 식욕을 없애주는
커피를 마셨고, 이렇게 다른 음식 대신 커피를 마심으로 마른 몸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커피에 있는 카페인의
각성효과로 늦은 밤까지 이어지는 예배를 깨어있는 정신으로 버틸 수 있었다. 이렇게 커피는 수피즘의 정신과 깊이
합치하였고, 이들에게 커피를 마시는 것은 일종의 종교적 의식처럼 여겨졌다. 이렇게 수피들이 종교적 의식처럼 마셨던
커피는 점차 이슬람 전역으로 퍼져나갔다. 처음에는 부유한 사람들이 집에 커피방을 만들어 놓고 커피를 마시기
시작하였는데, 시간이 흘러 전용 커피방을 만들 형편이 안 되는 사람들을 위해 커피하우스가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등장한 커피하우스는 이전과는 다른 성격의 공적장소로 공론의 장의 역할을 하였다. 커피하우스들은 사람들을 소비를
부추기기 위해 엄청난 재력을 이용해 호사스럽게 지어졌는데 이는 유럽 상인들의 관심을 끌기에도 충분하였다. 유럽
각국의 상인들과 여행자들은 호사스러운 커피하우스와 이 알코올이 들어있지 않은 뜨거운 음료에 호기심을 갖게 되었고
훗날 이들의 호기심은 커피가 유럽으로까지 전파되게 하였으며, 이로 인해 비로소 커피문명이 전개되어졌다.
②근대 시민사회의 제도를 마련한 커피하우스
위에서 잠깐 언급한 것과 같이 이슬람 전역에 커피가 보급됨과 함께 필연적으로 나타난 것이 바로 커피하우스였다.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술을 마시는 것은 해서는 안 될 행위로 여겨졌다. 예배가 끝나면 선술집에 모여 정치적 화제나
여러 가지 소문에 대해 이야기장을 벌이는 그리스도교와 달리 이슬람교도들은 선술집에 드나드는 것 자체가
금기시되었기 때문에 이런 점에서 결핍을 느끼고 있었다. 이슬람 문화권에서 커피하우스가 폭발적으로 보급이 된 것은
이런 결핍에 기반을 둔 필연적인 현상이었다. 커피하우스에서는 기존의 선술집에서 그랬던 것처럼 사람들이 모여서 여러
가지 정치, 사회적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선술집과는 달리 술은 존재하지 않았다. 커피하우스는 이슬람교도들에게도
허용이 되는 사교의 장이 된 것이다.
커피하우스는 공적이지도 사적이지도 않은 독특한 공동 영역을 제공해주었다. 이곳에선 다양한 정보와 대화가
오고갔다. 통치자들은 커피하우스의 이러한 점 때문에 커피하우스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기도 하였다. 다양한 이야기들이
오고가다보니 사회·정치적 이슈는 자주 등장하는 주제였고, 통치자들을 향한 비판 여론이 자주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한
예로 메카의 젊은 통치자였던 카이르 배그는 자신을 조롱하는 풍자시들의 근원지가 커피하우스임을 알게 된 후
커피하우스들을 강제 폐업시키기도 하였다.
이슬람세계의 커피하우스는 호화스러운 모습을 띄고 있었다. 이러한 모습들은 이슬람을 방문한 유럽 여행객과 상인들의
호기심을 자극했고, 상인들은 이 까만 음료를 자신들의 나라로 들고 갔다. 처음 유럽인들은 이 낯선 음료를 잘
받아들이지 못했지만 시간이 흐르며 커피에 푹 빠지게 된다. 1700년대 무렵 런던에는 문을 연 커피하우스가 2천개를
넘어서기도 하였다. 이슬람세계에서 공론의 장으로서 역할을 하던 커피하우스는 유럽에서도 공적영역으로 입지를 다졌다.
유럽에서 커피하우스는 ‘1페니 대학’이라고도 불렸는데 이는 커피 한 잔 값인 1페니만 내면 그곳에서 오가는 내로라하는
엘리트들의 대화를 경청할 수 있다는 이유에서 붙은 별명이었다. 유럽에서의 커피하우스는 다목적 공간으로 활용되며
근대 시민사회의 제도들을 다져나갔다. 그 중 커피하우스 몇 곳을 자세히 살펴보고자한다.
①로이드 커피하우스
로이드 커피하우스의 주요 고객층은 뱃사람과 무역 상인들이었다. 이 당시 해상무역은 위험을 동반했기 때문에 보험이
필요했고, 이곳을 이용하는 뱃사람들과 무역 상인들에게 보험가입을 권유하기 위해 보험업자들이 수시로 드나들었다.
이에 로이드는 보험 가입을 희망하는 ‘선박 리스트’를 작성해 두었고 이는 훗날 로이드가 세계 최대의 보험회사가 될 수
있도록 하였다.
35) 우스이 류이치로, 『커피가 돌고 세계史가 돌고』, 북북서, 2008, 1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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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마일즈 커피하우스
이곳에는 ‘로타클럽’이라는 사설 국회가 존재했다. 매일 밤 마일즈 커피하우스에서는 회합이 열렸다. 타원형 테이블은
사설의회의 회의장이었고, 테이블에는 투표상자가 준비되어 있어서 투표를 통해 중요한 사항들이 결정되었다. 이 모습은
커피하우스가 공론의 장이 된 대표적 모습이다.
③정치적 커피하우스들 - 세인트제임스 커피하우스, 스미르나 커피하우스, 오진다 커피하우스, 코코아 트리 커피하우스
“커피하우스는 모반과 데마고기(선동정치가가 정치적인 의도로 유포하는 선동적 허위선전)의 온상이 되어가고 있다.
대중에게 끼치는 불쾌도는 그 어떤 정부도 태평스레 방관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36)
커피하우스에서는 정부를 향한 비판의 여론들이 오고갔기 때문에 정부에게는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커피하우스가
여론형성의 중심지로 크게 성장하였기 때문에 정부는 커피하우스의 정치적 영향력을 제거하기 위해 위와 같은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하고 커피하우스를 폐쇄시키려고도 하였다. 커피하우스는 정부를 비판하는 자유로운 토론의 장이었다.
(훗날 프랑스 혁명 때, 파리의 아지테이션 카페는 반정부적 전단, 캐리커쳐등을 만들어내는 곳으로 역할을 한다.)
커피가 보급되기 전 유럽에서 주로 마시던 음료는 알코올 음료였다. 17세기 유럽의 가정에서는 평균적으로 1인당
하루 평균 3리터 정도의 맥주소비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커피의 역사는 알코올과의 경쟁의 역사라고도 하는데, 알코올에
취해있던 유럽에 커피가 보급되며 유럽사회가 지적 각성을 하게 되었다. 커피, 그리고 커피하우스와 함께 유럽인들은
근대 시민사회에 맞는 ‘판단하고 비판하는 대중’ 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관련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WcAtts48VeQ
③커피와 식민지
커피가 알코올을 대신하는 음료가 되면서 유럽인들의 지적 각성이 가능했다. 이들은 커피를 마시며 ‘자유, 평등, 박애’
의 이념을 이야기 하였다. 하지만 유럽 사회는 여기에만 그치지 않고 시민사회의 돌연변이 파시즘을 만들었으며,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커피가 유럽 전역으로 전파되면서 커피수요는 날로 늘었지만, 재배 환경이 제한적인 탓에 커피가 공급되는 곳은 예멘
한 곳에 불과했다. 당시 커피는 상인들에게 막대한 부를 보장해주는 상품과 다름없었는데, 이런 두 상황의 결합으로
유럽인들은 자신들이 정복한 식민지에 커피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독일은 이를 전형적으로
보여주는 나라였다. 독일은 1883년 앙고라 항에 최초의 아프리카 식민지를 얻어냈다. 당시 독일 정부는 식민지 정책에
조심스러웠지만, 아프리카 식민지 획득에는 적극적인 원조를 아끼지 않았다. 독일은 동아프리카에 606개의 식민지,
면적으로는 전체 10만 6,292헥타르에 달하는 넓은 플랜테이션을 갖고 있었다. 문제가 된 것은 노동력이었다. 이 넓은
플랜테이션 중 실제 노동자가 일하는 곳은 전체의 20%밖에 되지 않았다. 노동의 양적측면 보다 더 문제가 된 것은 질적
측면에서였다. 독일은 커피플랜테이션에 임금노동을 도입하였다. 하지만 흑인들은 노동과 임금을 교환하는 이 교환관계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노동시간을 계약하고도 노동시간 중에 노동을 하지 않고 하고 싶은대로 자유롭게 행동하기도 하였다.
이에 골머리를 앓던 이들이 도입 한 것은 바로 채찍이었다. 임금노동의 개념을 이해하려 하지 않던 흑인들을 쉽고
빠르게 통제하기 위해 유럽인들은 채찍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근대 시민사회의 복잡한 사회 속에서 의사소통 기술을
기르는 것은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유럽인들은 긴 역사의 과정을 통해 이 기술을 체득했다. 하지만 그것을 체득하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것은 잊어버리고 말았다. 이들은 흑인들에게 이런 의사소통을 이해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을
주지 않았다. 유럽인들은 그들이 이룬 역사적 성과를 당연한 것으로 여겼고, 흑인들은 이 당연한 역사를 이루지 못한
본성적으로 노동을 위해 창조된, 타고난 노예로 간주하였다. 흑인들의 자유와 평등, 형제애에 대한 관념은 철저히 무시한
채 자신들의 자유, 평등, 박애의 개념만을 내세운 것이다. 커피는 흔히 ‘니그로의 땀’ 이라고 불려졌다. 가혹한 학대의
환경 속에서 흑인들은 커피를 생산해냈고, 이들의 노동으로 유럽인들은 풍요로운 삶을 영위했다.
식민지는 일종의 인종도가니였다. 그곳에는 다양한 인종의 사람이 뒤섞였는데, 유럽인들은 이 속에서 자신들을 지배
인종으로 규정하였고, 다른 인종들을 열악 인종으로 분류하였다.
36) 우스이 류이치로, 『커피가 돌고 세계史가 돌고』, 북북서, 2008, 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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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주의와 관료주의가 합쳐지며 파시즘적 전체주의가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그리고 이렇게 인종을
분류하던 방식이 유태인에게 적용되었을 때, 이는 국가 관료 기관에 의한 합리적 대량 살육으로 전개되었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 핵심 관점은 무엇인가?
커피와 함께 세계사의 변화 흐름을 보면서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 핵심 관점으로 생각했던 것에는 두 가지가 있다.
첫 번째,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사회 변동을 일으켰다.
두 번째, 개개인이 모여 대중이 되었을 때, 사회의 변동이 일어났다.
바로 이 두 가지이다.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사회 변동을 일으켰다.>
역사를 살펴 볼 때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했던 인간의 욕망은 사회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커피를 통해서 보더라도
커피를 향한 사람들의 욕망은 식민지 쟁탈, 플랜테이션 농업, 노예무역의 활성화, 파시즘 등 많은 변화들을 수반했다.
커피가 점차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고, 이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지며 커피는 부의 획득을 보장해 주는 상품이 되었다.
그리고 수많은 상인들은 커피 거래에 뛰어들었다. 커피 수요의 증가는 이에 맞는 공급의 증가를 요구했고, 서구 열강은
커피 생산을 위해 아프리카 식민지 쟁탈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아프리카를 식민지 삼은 후에는 플랜테이션 농업 구조를
형성하였고, 원주민과 아프리카인들의 노예화와 학대가 조장되기도 하였다. 이 과정 속에 사람들은 지배 인종과 열악
인종을 구분을 시도했고. 특정 인종을 지배하는 것을 정당화하였다. 이렇게 나타난 인종주의는 관료주의와 결합하여
파시즘을 낳았다.
<그림1. 서인도제도의 플랜테이션에서 커피 생산을 위해 혹사당하는 노예들>
커피를 향한 욕망은 이렇게 많은 사회적 변화들을 가져왔다. 하지만 이는 비단 커피만의 이야기는 아니다. 사람들로
하여금 소유하고자하는 욕망을 불러 일으켰던 것들은 커피가 그러했던 것처럼 크든 작든 사회 변동을 일으켰다.
아이러니한 것은 인간의 소유 욕망을 자극함으로써 사회 변동을 일으켰던 것들은 인간 생활에 필수적인 것들이 아닌
경우가 많았다는 점이다. 커피가 그러하듯,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기호품, 사치품들은 자주 우리 사회를
변화시켜왔다.
<개개인이 모여 대중이 되었을 때, 사회 변동이 일어났다.>
사람들이 모여 대중이 되고, 이 대중이 여론을 형성할 때에 사회 변동이 일어났다. 커피가 널리 사랑받으며
커피하우스가 점점 더 많이 생겨날 때, 통치자들이 커피하우스를 못마땅해 했던 이유도 바로 이러한 점 때문이었다.
129
이전까지 이렇다 할 공적 영역이 없었던 이슬람과 유럽 사회에서
커피하우스는 공적 영역으로의 역할을 훌륭히 수행하였다. 사람들은
커피라는 음료를 두고 한 장소에 모여 서로 대화를 나누었다.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필연적으로 그들을 둘러싼 사회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즉 이곳에서 나누어지는 대화는 개인과 개인
사이의 긴밀한 사적 영역의 수준에만 머무른 것이 아니었다. 이곳의
대화는 정치·사회적 영역에까지 확장된 것이었다. 커피하우스 특유의
편안한 분위기로 인해 커피하우스에서는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논의도
자유롭게 오고갔다. 이런 논의들이 오고갔던 커피하우스는 사람들로
하여금 사회의 부조리함을 깨우치게 하였고, 통치자를 향한 비판
여론을
형성하게도
하였다.
그리고
때로는
실천적인
행동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는데, 프랑스 혁명이 그 예시이다. 어느 역사가는
‘프랑스 혁명은 카페 드 포아에서 이루어졌다.’ 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카페 드 포아’는 프랑스 혁명을 지향하는 부르주아들과 그들을
지지하던 사람들의 아지트였다. 이곳에서는 절대왕권과 봉건귀족으로
대표되는 구체제에 대한 비판이 오고갔으며, 현실적인 대안들을
찾고자 노력했다. 커피하우스에서 이루어졌던 많은 논의들은 유럽
사회가 근대시민사회로 나아가는데 필요한 여러 제도들을 다질 수
<그림2. 플랜테이션을 홍보하기 위한 선전포스터로,
있게 하였다.
플랜테이션이 원주민 경제에 도움이 된다고 홍보하였다.>
사람들이 모여 대화를 나누고 정보를 공유할 때 지성이 깨어났다.
이렇게 깨어난 지성은 여론을 형성하였고, 이로 인해 정치·사회적
변혁들이 나타났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첫 번째, 무언가를 얻고자 하는 인간의 욕망은 사회 변동을 일으켰다.
두 번째, 사람들이 모여 대중이 되었을 때, 사회의 변동이 일어났다.
앞서 말한 이 두 가지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하고자 한다.
먼저 첫 번째 관점과 관련해서이다. 인류 역사상 사람들은 항상
무언가를 얻기 위해 노력해왔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상품이든, 아니면
보이지 않는 것이든 말이다. 사람들의 이러한 소유의 욕망은 위에서
설명한 것과 같이 사회의 변동을 일으켰다. 그리고 만약 그것이 상품인
경우 이는 필수품이 아닌 기호품이나 사치품인 경우가 많았다. 사람들은
삶에 꼭 필요한 것이 아닌 것들을 얻기 위해 다른 나라를 식민지
삼았고, 전쟁을 불사했으며, 다른 인종을 노예로 삼고 지배하였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기호품과 사치품에 열광하였을까?>
미국의 사회학자인 베블런은 베블런 효과를 가격이 높을수록 소비를
<그림3. 17세기 영국 커피하우스를 묘사한 목판화>
자극하는 효과라고 정의하였다. 이 효과에는 값비싼 상품으로 남들보다
돋보이고 싶고, 그것을 뽐내고 싶은 인간의 욕망이 반영되어 있다. 커피, 설탕, 후추, 차 등의 상품들이 서구에 처음
들어갔을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이 상품들은 다른 대륙에서 건너온 희귀한 물건으로 귀족들이나 부자들만 누릴 수 있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다. 상품이 가진 희귀성으로 인해 그 자체로 권위의 상징이 된 것이다. 때문에 이들이 향유한 것은
상품 그 자체만이 아니라 그것이 갖고 있는, 그것을
둘러싼 문화였다. 가령 커피를 생각해 볼 때 커피의 쓴맛은 단맛을
찾는 인간의 본성과는 반대되는 것이었다. 그럼에도 커피의 소비가 꾸준히 증가한 것은 그들이 즐겼던 것이 비단 커피의
맛뿐만 아니라 커피를 마심으로서 느낄 수 있는 여유로움과 삶의 풍요로움이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처럼 기호품과
130
사치품은 그것을 둘러싼 사회적 의미와 문화가 있다. 상류 계급의 사람들은 기호품과 사치품을 통해 그들만의 문화와
취향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상류 계급에 속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와 비슷한 것을 쫓거나 그 상품들의 희귀성이 감소해
더 이상 상류층의 전유물이 아닐 때, 즉 그 상품이 상류계층과 하류계층의 구별 짓기 역할을 충분히 해내지 못할 때에
비로소 향유한다. 때문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상품들은 끊임없이 바뀌었다. 이와 관련하여 볼 때 인류 역사의 한 부분을
구성하는 기호품과 사치품의 역사는 상류 계급에 의한 하층 계급과의 끊임없는 구별 짓기의 과정일 것이다.
두 번째로 대중에 관해서이다. 개개인이 모여 대중이 되었을 때 이들은 소수 권력층, 특권층에 대항할 수 있는 힘을
가졌다. 이와 마찬가지로 개개인의 의견이 하나의 의견으로 모아져 다수의 의견이 되었을 때, 이것은 사회를 변화시키는
힘이 되었다. 프랑스혁명의 경우를 커피하우스와 관련하여 살펴볼 때, 18세기 프랑스에서 프랑스 혁명이 가능했던
이유는 이 시기 커피하우스에서 계몽주의의 담론을 철학의 세계에 가두지 않고 단순하여도 가장 현실적인 내용으로
재조정하고 대중과 소통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커피하우스에서 이런 작업들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계몽주의 철학은 높은
수준의 담론에만 머물러 있었을 것이다. 계몽주의 철학에 의한 구체제에 대한 논리적 비판이 대중과 소통하며 다수의
지지를 얻게 되고, 시민적 여론이 되며 사회의 변화를 시도하는데 필요한 충분한 힘을 얻게 된 것이다. 유럽인들은
커피하우스에서 근대시민으로 의사소통하는 방식을 체득해나갔다. 그리고 이 때 수많은 시민근대사회 제도의 기반이
마련되었으며, 체득한 의사소통 방식을 통해 크고 작은 사회적 진보를 이루게 되었다.
개개인이 모인 대중은 큰 힘을 갖는다. 그리고 이 대중이 지성에 눈을 뜨고 스스로 판단하고 비판하는 힘을 가질 때
사회는 변화해왔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커피가 널리 사랑받으며 많은 커피하우스가 생겨났고, 또 커피하우스가 대중에게 사랑받았기에 커피 역시 오랫동안
사랑 받을 수 있었다. 커피하우스가 사랑 받을 수 있었던 것은 공적 영역이 거의 부재했던 시기에 커피하우스가 공론의
장을 열어주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현대 사회에서는 공론의 장으로서의 커피하우스를 대체할 만한 것이 얼마든지 있다.
한 예로 커피하우스처럼 눈에 보이는 실체는 아니더라도 인터넷이 그 역할을 대신하고 있기도 하다. 때문에 더 이상
카페에 공론의 장으로서의 역할은 기대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과거의 사람들이 공적인 공간의 필요로 인해 커피하우스에 흘러들어간 것처럼 현대사회에서 카페도 공론의
장으로서의 역할은 아니더라도 사람들이 느끼는 공간의 필요성을 채워주는 역할을 할 것이다. 온갖 네트워크 연결망과
사물인터넷의 발달로 굳이 만나지 않아도 다른 사람과의 통신이 가능한 현대 사회에서 과거에 비해 타인과 교류하는
것은 더 잦아지고 쉬워졌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면대면 방식의 만남을 필요로 한다. 네트워크만으로 이루어지는 교류는
사람들로 하여금 더 외로움을 느끼게하기 때문이다. 이때에 카페는 과거처럼 사교의 장으로서 역할을 수행한다. 여전히
카페는 다른 사람과 친밀한 대화를 나누고, 교류하는 곳으로서의 공간을 제공해 준다.
또한 최근 카페에서 쉽게 찾아 볼 수 있는 모습은 공부 또는 일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다. 카페에서 스터디를 하는
사람들을 일컫는 ‘카페 스터디 족’, 사무실 대신 노트북으로 카페에서 업무를 보는 ‘코피스 족’ 등 이런 현상을 보여주는
신조어들도 생겨났다. 이들이 조용한 독서실이나 사무실을 두고 카페에서 공부, 작업을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현대사회에서 사람들은 점점 더 많은 양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처리해야할 일의 양이 점점 증가하며 그에 따른
압박도 증가한다. 쫓기듯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늘고 있는 것이다. 이 때 카페는 독서실처럼 다른 사람과 완전히
구별되고 고립된 공간이 아니면서도 독서실과 사무실이 그런 것처럼 특별히 다른 사람의 방해를 받지 않는 독특한
공간을 제공해준다. 때문에 숨 막히는 사무실과 독서실에서 나와, 처리해야하는 일의 압박으로부터 조금이나마 벗어나기
위해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의 카페를 찾는 것이다. 처음 이들은 오랜 시간 자리를 차지하기 때문에 불청객처럼
여겨졌지만, 공부와 일의 목적으로 카페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지면서, 이제는 카페에서 이들을 겨냥한 판매
전략을 내놓기도 하고 있다.
공론의 장을 형성하였던 과거의 커피하우스와 비교하여 카페는 그 성격이 많이 달라졌지만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위의 사례들에서 본 것처럼 카페는 특유의 편안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라는 틀 안에서 사람들이 가진
다양한 목적으로의 공간의 필요를 채워주는 형태로 변화할 것이다.
131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커피’ 라는 한 가지 상품으로 세계사의 흐름을 바라보며, 상품이 소비되는 이유는 비단 그 상품의 필요성 때문만은
아니라는 점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커피 그 자체의 쓴맛은 사람들이 원하는 것보다는 기피하는 성질의 것이었다.
때문에 사람들로 하여금 커피를 소비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커피에 사회적인 의미가 부여되어야 했다. 이에 상인들은
자신들의 거래상품인 커피가 성공적으로 자리매김 할 수 있도록 고도의 홍보 전략을 사용하였다. 이들은 커피에 지성을
깨우는 음료, 각성제라는 이미지를 부여하였고, 이를 통해 사람들의 소비 욕구를 자극하였다. 낯선 대륙에서 온 이국적인
음료였던 커피는 이렇게 부여된 이미지와 함께 초기에는 상류 계층의 전유물로, 시간이 흘러서는 전 계층에 사랑받는
음료가 되었다. 사람들의 무언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에는 그것의 필요성뿐만 아니라 그것이 지닌 문화와 사회적
의미에 대한 열망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에티오피아에서 발견된 커피가 이슬람을 거쳐 유럽, 그리고 전 세계에 거쳐 사랑받을 수 있었던 것은 사람들이 함께
모여 커피를 마시는 커피하우스라는 공간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인간은 사교적 동물이다. 동료와 함께 있기를 원하고,
대화하고 소통하기를 원한다. 커피가 보급되기 전 사람들의 주된 모임 장소는 술집이었는데, 커피의 보급은 취하지 않은
맨 정신의 상태로 타인과 만날 장소를 제공해주었고, 지적 대화를 가능하게 하였다. 실제로 유럽에서 커피가 전 계층이
마실 수 있는 정도로 널리 보급되었을 때, 커피하우스에서 제공되는 커피는 큰 물통에 커피를 가득 끓여놓고 커피가
떨어지면 다시 뜨거운 물을 부어서 만들던 것으로 그 질과 맛이 굉장히 낮은 수준의 것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커피하우스에는 항상 사람이 넘쳤는데 그이유는 커피하우스에 가면 다른 사람들과 만날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점점 개인화되어가는 현대사회이지만 그럼에도 사람들은 다른 사람과의 최소한의 연결을 필요로 한다. 사교적 동물인
인간은 타인과 완전히 단절된 생활은 원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단편적이고 일시적인 인간관계가 늘어가는 현대
사회에서도 타인과 교류하는 장소는 반드시 요구될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이 커피하우스처럼 눈에 보이는 영역에서든,
눈에 보이지 않는 영역에서든.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①커피, 설탕, 차의 세계사, 필맥, 2013, 이윤섭 지음
-『커피가 돌고 세계史가 돌고』가 커피라는 단일 상품을 통해 세계사의 흐름을 보았다면 이 책은 커피와 더불어 설탕,
차도 함께 보고 있다. 이 세 상품은 과거 그리고 현재에까지 교역규모가 엄청나기에 이 세 가지 상품의 유래, 전파과정,
문화적 의미를 살피며 산업혁명, 근대 세계체제의 성립 등을 설명한다.
②매혹과 잔혹의 커피사, 을유문화사, 2013, 마크 펜더그라스트 지음, 정미나 옮김
-『커피가 돌고 세계史가 돌고』가 좀 더 큼직한 범위에서 커피와 세계사의 흐름을 보았다면이 책은 그보다 좀 더
자세하게 그 관계를 살펴 볼 수 있다. 커피로 인한 사회변동의 다양한 사례들을 볼 수 있는 책이다.
10. 종합결론
커피는 현재까지 오랫동안 사랑받고 있는 음료이다. 처음 커피는 이슬람의 수피교도들이 종교적 의식을 위해 마셨던
음료였다. 그 후 이슬람 세계 전역으로 퍼졌을 때는 커피하우스가 선술집을 대신하는 공적 영역이 되었다. 처음 유럽
사회에 들어갔을 때, 커피는 상류층의 전유물이었고, 커피가 더 다양한 계층이 마실 수 있는 음료가 되었을 때에는
커피하우스에서 근대 시민사회의 제도들이 마련되기도 하였으며, 프랑스혁명 같은 사회 변혁의 기반이 되기도 하였다.
커피는 막대한 부를 보장해주는 상품이었기 때문에 많은 상인들이 커피 거래에 뛰어들었고, 유럽 열강의 커피 거래에
대한 이해관계는 열강들끼리 서로 갈등하고, 전쟁도 하게 만들었다. 계속해서 증가하는 커피 수요에 비해 공급되는 곳이
현저하게 부족하던 상황은 서구 열강이 식민지를 개척하는데 열을 올리게 하였다. 그 후 플랜테이션을 운영하기 위해
인종을 구분하고, 인간이 인간을 학대하는 야만적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으며, 이렇게 점점 확고하게 자리를 잡아가던
인종 구분은 관료주의와 결합하며 파시즘을 낳았다.
커피는 다양한 모습으로 다양한 의미를 지니며 사회를 변화시켜왔다. 때로는 지성의 각성이라는 측면에서 계몽주의
사상의 출현과 구체제의 타파라는 긍정적 진보를 가능하게도 하였지만, 파시즘과 인종구분, 식민지라는 부정적인 변동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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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를 통해 볼 때 우리가 어떤 상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단순히 그 상품의 필요성때문만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어떤
상품을 소비한다는 것은 그것이 지닌 문화와 사회적 의미를 소비하는 것과도 같았다.
커피하우스는 많은 논의들이 오고갔던 작은 사회였다. 이곳에서 근대시민사회의 제도들이 탄생했고, 이곳에서의
논의들은 사회변혁의 틀을 마련하였다. 독립적으로 존재하던 개개인이 한곳에 모여 의견을 나누고 여론을 형성하였을 때,
이는 사회를 변화시키는 충분한 힘을 가졌다. 또한 커피하우스는 사교의 장이었다. 인간은 사교적 동물이다. 다른 사람과
교류하고 함께하기 원한다. 커피하우스는 이러한 인간의 본성을 충족시켜주었고, 커피가 오랫동안 사랑받을 수 있도록
해주었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최수영, 사회학과, 2013104403, chlsy6298@naver.com
*참고문헌
커피가 돌고 세계史가 돌고, 북북서, 2008, 우스이 류이치로 지음, 김수경 옮김
커피, 설탕, 차의 세계사, 필맥, 2013, 이윤섭 지음
매혹과 잔혹의 커피사, 을유문화사, 2013, 마크 펜더그라스트 지음, 정미나 옮김
설탕, 커피 그리고 폭력, 심산, 2003, 케네스 포메란츠, 스티븐 토픽 지음, 박광식 옮김
커피의 역사, 자연과 생태, 2013, 하인리히 에두아르트 야콥 지음, 남덕현 옮김
세계사를 움직이는 다섯가지 힘, 뜨인돌, 2009, 사이토 다카시 지음, 홍성민 옮김
133
인터넷과 사회변동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1)「제 3의 물결」, 『홍신문화사』, 2006.05.30, 엘빈 토플러 저, 원창엽 역.
(2)「퓨처 파일」, 『청림출판』, 2009.01.10, 리처드 왓슨 저, 김원호 역.
(3)「사이버 공간의 사회」,『한양대학교 출판부』, 2003.02.10., 윤영민 저.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1) 제 3의 물결
엘빈 토플러의 제 3의 물결이라는 책은 인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3가지 사건을 소개하는 책이다. 인류의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준 3가지 사건 중 정보혁명에 주목하여 인터넷이 사회변동에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이 책을 선정하였다.
(2) 퓨처 파일
리처드 왓슨의 저서인 퓨처 파일은 미래 사회에서 인간이 어떠한 사회 환경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갈지, 미래는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하여 논의하는 책이다. 미래사회에서 인터넷이라는 키워드가 어떠한 역할을 할지 살펴보기 위해서
이 책을 선정하였다.
(3) 사이버 공간의 사회
윤영민의 저서인 사이버 공간의 사회는 사이버 공간 내에서 개인정보와 프라이버시, IT 교육과 E-학습 등 사이버 공간
내의 모습과, 단점을 보여주는 책이다. 인터넷을 통한 사회변동을 이해하고자 할 때, 인터넷을 통해 만들어진 사이버
공간 내에서 우리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고, 사이버 공간 내에는 어떠한 문제점이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서 이
책을 선정하였다.
3. 저자소개
(1) 제 3의 물결 ­ 엘빈 토플러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저명한 미래학자이자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다. 디지털혁명, 정보통신혁명,
사회혁명, 기업혁명, 기술적 특이성 등에 관한 저작으로 유명하다. 컨설팅회사 액센츄어는 토플러를 일컬어 “빌 게이츠와
피터 드러커에 이어 가장 영향력 있는 비즈니스 지도자 3위”로 칭송했고, 〈파이낸셜타임스〉는 그를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미래학자”로 꼽은 바 있다. 그런가 하면 〈인민일보〉는 “현대 중국을 만드는 데 기여한 50인의 외국인”으로 그를
선정했다.
토플러는 뉴욕대학교를 졸업했으며 과학, 문학, 법학 등 여러 학문 분야에 걸쳐 다섯 개의 명예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대학 졸업 후 5년간 용접공으로 노동 현장을 경험하다, 저널리스트로 변신해 미국 의회와 백악관 출입 기자로 활동했다.
이후 경제전문지 〈포춘〉에서 칼럼니스트를 지내며 노동과 문화 관련 글을 썼으며 코넬대학교에서 객원교수를 역임하기도
했다. 무명의 저널리스트인 토플러를 세계적 지식인의 반열로 올려놓은 것은 세 권의 책이다.
『미래 쇼크』로 그는 현대 사회에 대한 날카로운 통찰력을 인정받았으며 미래학자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다졌다.
『제3물결』에서는 인류가 제1의 물결인 농업혁명, 제2의 물결인 산업혁명을 거쳐 제3의 물결인 정보화혁명으로 가고
있다고 예견, 세계적 명성을 얻었다. 그리고 『권력이동』 에서는 앞으로의 세계는 지식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들에 의해
지배될 것이라는 주장을 펼쳤다.
이후 15년 만에 내놓은 『부의 미래』에서는 미래의 부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누가 그 부를 지배할 것인가, 그것은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를 다뤄 큰 반향을 일으켰다. 그 외의 저서로는 최근 전 세계를 휩쓴 경제위기의 원인과 해법을
진단하는 『불황을 넘어서』, 새로운 전쟁 형식의 출현과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 반전쟁을 이야기하는 『전쟁 반전쟁』 등이
있다.
(2) 퓨처파일 ­ 리처드 왓슨
리처드 왓슨(Richard Watson)은 앨빈 토플러, 다니엘 핑크와 함께 생존해 있는 ‘세계 3대 미래학자’로 꼽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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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래학의 거장이다. 미래 전략 컨설팅 기관인 퓨처 익스플로레이션 네트워크(Future Exploration Network)의 수석
미래학자이자, 시나리오 플래닝 전문 컨설팅 회사인 스트래티지 인사이트(Strategy Insight)의 창업자이기도 하다. IBM,
코카콜라, 맥도날드, 도요타, 유니레버 등 주요 글로벌 기업과 정부기관의 미래 트렌드를 컨설팅하고 있다. 트렌드 분석과
시나리오 플래닝 분야의 최고 권위자로, 전세계 개인과 조직을 대상으로 전략적 식견을 갖고 남보다 앞서 사고하는
방법에 대해 조언해왔다.
특히 미래에 예상되는 시장 트렌드를 토대로 장기 전략을 수립하고 개인과 기업의 이노베이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전문으로 한다. 그가 여러 기업들과 함께 시나리오 플래닝, 리서치, 혁신 프로젝트 등을 수행하며 거둔 성과는 저명한
잡지와 매체에 널리 인용되면서 미래학자로서 그의 위상을 높이고 있다. 전작 『퓨처 파일(Future Files)』에서는
2050년까지의 미래 역사를 정치, 경제, 사회 등 다방면에서 재미있게 짚어주며 미래 상상력에 불을 지펴주는데 이어,
신작 『퓨처 마인드(Future Minds)』에서는 모든 것이 급변하고 정보가 넘쳐나는 디지털 시대에 우리의 사고방식의
변화와 그것이 갖는 의미 및 대처방법을 통찰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3) 사이버 공간의 사회 - 윤영민
윤영민은 1994년 5월 University of California, Berkeley 대학원 사회학과를 졸업하였고, 2013년 8월부터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언론정보대학장을
맡고
있는
한양대학교
정교수이다.
한양대학교
ERICA캠퍼스
언론정보대학장과 함께 국가오픈데이터포럼 공동의장, 소셜네트워크 미래포럼 의장, 한국데이터사이언스학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대표적인 저서로는 사이버 공간의 사회와 함께, Dialogue: 소셜미디어와 집단지성, 온라인 국민참여의
확대, 사이버공간의 정치: 시민권력과 공동체의 부활 등이 있다.
4. 책 내용 요약
(1) 제 3의 물결
이 책은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을 역사적으로 분석·기술하면서 과거 문명을 기반으로, 그와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제3의 문명'이라는 새로운 세계를 흥미롭게 소개한다. 무엇보다 이 책은 변화의 방향이 아니라 그 과정에 초점을
맞추어, 변화에 대한 적응의 어려움에 주목했으며, 동시에 어떤 사태가 일어났을 때 그 변화에 재빨리 적응하지 않으면
얼마나 큰 손실이 따르는지를 강조한다. 또한 '제3의 물결' 문명은 통찰력과 약간의 행운이 주어진다면, 지금까지의 어떤
문명보다도 건전하고 바람직하며 인간에게 보다 알맞은 민주적인 문명이라고 말한다.
(2) 퓨처파일
이 책은 2050년까지의 미래 역사를 다방면에서 흥미롭게 짚어주며 스스로 미래를 디자인해나갈 수 있도록 무한한
상상력을 키워준다. 사회와 문화, 과학과 기술, 미디어와 엔터테인먼트, 자동차와 교통, 은행과 금융, 음식과 음료, 쇼핑,
건강과 웰빙, 여행과 업무 출장, 비즈니스, 정부와 정치 등 11개 주제에서 미래를 예측한다. 저자는 책에서 '사람 사이의
소통이 사라진다, 사람들은 목욕을 더 오래 할 것이다, 로봇이 필수가 될 것이다, 인공지능 자동차가 등장한다, 가상
화폐가 유통될 것이다, 편안히 앉아서 손가락으로 쇼핑하게 된다' 등을 이야기한다. 본문에서 다루는 내용 가운데 일부는
이미 일어난 일에 관한 것이다. 이들에 관해서는 앞으로 어떤 식으로 전개되고 그로 인해 미래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
변해갈 것인지를 논한다. 곳곳에 가상 편지를 곁들여 재미를 더했다. 미래의 누군가가 친구에게 일상의 이야기를
전달하는 편지는 본문의 내용을 보다 생생히 이해하게 한다.
(3) 사이버 공간의 사회
이 책은 사이버공간에 대해 그간 저자가 세미나나 저널에 발표한 글들을 손질하여 한데 묶은 논문모음집이다. 저자는
이 책에서 사이버공간 내의 개인정보와 프라이버시. 사이버공간 내의 성희롱. IT 교육과 E-학습, 사이버 선거운동,
전자정부 등의 다양한 주제를 다룬다. 사이버 공간 내에서 어떠한 사회활동이 일어나며, 사이버 공간에서 나타나는
부작용이 무엇인지에 대하여 설명하고, 이미 우리의 생활 깊숙한 곳까지 침투한 사이버공간에 대하여 고찰한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나는 하나의 책을 통해서 사회변동을 바라보고자 한 것이 아니다. 사회변동을 바라보는 하나의 핵심 키워드를 선정한
이후 다양한 책에서 필요한 부분의 내용만을 뽑아서 사회변동을 이해하고자 하였다. 따라서 각각의 책이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으로 무엇을 말하는지 파악하는 대신에, 스스로 생각한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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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명하고자 한다. 몇 권의 책을 읽고, 논문을 찾아보고, 인터넷 자료 등을 찾아본 결과 내가 생각한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바로 기술의 발전이다. 인류의 역사를 통틀어 보았을 때 기술의 발전은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변동을
야기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인터넷이라는 기술의 발전이 다른 기술보다 사회변동에 있어서 핵심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기술의 발전 중에서도 인터넷이라는 기술에 초점을 맞추어 사회변동을 바라보고자 하였다.
인터넷이라는 기술에 초점을 맞춘 이유는 다음과 같다. 인터넷 기술의 등장 이후 사회는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인
다양한 측면에 있어서 급격히 변화하였다. 인터넷의 기술의 발전을 통해 발생한 가장 눈에 띄는 정치적 측면의 변동은
바로 정치 참여의 장이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인터넷의 등장 이후 사람들은 익명성에 근거하여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보다 자유롭게 표출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표출하는데 있어서
어려움이 있었다. 신문, 방송을 통해 정치적인 이슈를 접하긴 하였으나, 그에 대한 자신의 견해를 표출한만한 장이
마땅치 않았다. 하지만 인터넷이 등장한 이후 다음 아고라 광장처럼 정치적 의견을 나누고 토론할 수 있는 인터넷
광장이 등장하였다. 또한 SNS가 개발된 이후 사람들은 정치적인 이슈를 이전보다 빠르게 접할 수 있게 되었고, SNS에
자신의 정치적 의견을 개제하고, 다른 사람과 실시간으로 의견을 나누는 것 또한 가능해졌다. 또한 다양한 커뮤니티를
형성하여 자신과 정치적 의견이 비슷한 사람과 물리적 거리의 한계 없이 교류하는 것 또한 가능해졌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은 경제적 변동 또한 야기하였다. 인터넷의 탄생 이후 지식과 정보가 중요해짐에 따라 공장에서 배,
자동차 등을 생산하던 제조업 중심의 산업이 지식과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서비스업 중심의 산업으로 변화하였다. 그에
따라 핵심 산업은 인터넷을 이용한 컴퓨터, 스마트폰 등의 전자제품으로 변화하였고 세계 기업순위 또한 제조업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에서 인터넷 서비스업을 기반으로 하는 기업 위주로 재편되었다. 또한 인터넷 뱅킹이 가능해짐으로써
사람들은 직접 은행에 가지 않고도 집에서 컴퓨터를 이용해서 은행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스마트폰이
등장하면서 핸드폰에 간단한 은행관련 어플리케이션만 설치한다면 핸드폰으로도 은행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5년 1분기 국내 인터넷뱅킹 서비스 이용현황에 따르면 인터넷 뱅킹 이용자수는 1억 861만
명으로 전 분기 말 대비 5.3%증가하였고, 모바일뱅킹 등록 고객 또한 6408만 명에 육박한다. 이처럼 인터넷의 등장은
산업시스템의 기반을 바꾸어 세계 기업순위를 바꾸었고, 인터넷 뱅킹의 등장을 통해 편리하고 신속하게 은행 업무를
처리할 수 있게 하는 등의 경제적 변동을 야기하였다.
인터넷 기술이 발전하고, 스마트폰이 개발, 대중화 되면서 사회적으로도 많은 변화가 나타났다. 우선 다양한 커뮤니티
및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사람들은 인터넷 상에서 국적, 인종, 지역을 초월한 소통이 가능해졌다. 한국에서 제작한 싸이의
강남스타일 뮤직비디오가 유튜브를 통해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고, Facebook, Twitter등의 SNS를 통해 예전에 연락이
끊겼던 친구들을 다시 찾을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인터넷에서 실시간으로 다양한 정보를 생성하고,
공유하며, 소비할 수 있게 되었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은 문화적 측면에서의 사회변동 또한 초래하였다. 과거 사람들과 직접 만나 소통하고 상호작용하며
여가생활을 즐겼다면, 인터넷의 등장 이후 사람들이 여가시간을 활용하는데 있어서 컴퓨터 및 인터넷 게임이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증가하였다. 직접 만나 상호작용하기보다는 홀로 시간을 보내거나, 온라인상에서 상호작용하는 형태로
여가생활이 변화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 기술의 발전은 음악 산업의 변화 또한 야기하였다. 인터넷이 등장하기 전, 사람들은 CD 형태로
발매된 앨범을 구매하여 음악을 들었다. 하지만 인터넷 기술이 발전한 이후 디지털 앨범이라는 개념이 등장하였고,
직접적으로 CD 형태의 앨범을 구매하지 않고도, 인터넷 상에서 디지털 앨범을 구매하거나 다운로드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과거에 음악을 듣기 위해 CD player가 필요했다면, 지금은 핸드폰에 다운로드한 음악 파일을 옮기거나,
멜론과 같은 음악 재생 어플리케이션을 통해 간단하게 음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인터넷 기술의 발전은
전통적인 책의 개념 또한 변화시켰다. 과거 책은 종이에 인쇄된 것만을 의미했고, 책을 구하기 위해서는 직접 도서관에
가거나 서점에 가서 책을 구매해야만 했다. 이 때 책은 그 자체로 가치를 가지고 권력을 가지는 존재였다. 하지만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e-book이 생기면서 전통적인 책의 개념은 변화하였다. 책은 더 이상 종이에 인쇄된 형태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은 도서관이나, 서점에 가지 않고도 간단히 집에서 e-book을 구매하거나 전자 도서관에서 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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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여할 수 있게 되었다. 그에 따라 책 자체가 가지는 가치와 권력의 의미 또한 많이 약화되었다.
기술의 발전은 사회를 변동시키는 가장 중요한 요인이다. 따라서 사회변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술의 발전을 통해
변화된 사회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다양한 기술의 발전 중에서도 인터넷 기술의 발전은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짧은 시간 내에 다양한 측면에서의 사회변동을 야기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기술의 발전, 그 중에서도 인터넷
기술의 발전을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으로 생각하였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엘빈 토플러의 제 3의 물결은 기술 발전의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하는데 있어서 매우 적합한 저서이다.
미래학자인 엘빈 토플러는 자신의 저서인 제 3의 물결에서 인류의 역사를 크게 바꾼 세 가지 사건으로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을 소개한다. 농업혁명은 제 1의 물결이라고도 불리는 사건으로, 기원전 7,000년 전 인류가
수렵·채집 경제에서 곡류의 재배, 가축 사육에 성공하여 생산 경제의 농업 사회로 이행한 문명사의 획기적 사건을
의미한다. 농업혁명을 통해 수렵 및 채집 사회는 정착사회로 변화하였고, 잉여생산물의 생성과 그에 다른 계급의 발생 등
다양한 사회변동이 일어났다. 산업혁명은 18세기 중엽 영국에서 시작된 기술혁신과 이에 수반하여 일어난 사회·경제
구조의 변혁을 의미하는 사건으로 제 2의 물결이라고도 불린다. 산업혁명 이후 생산량이 급속하게 증가하였고, 농업
중심에서 제조업 중심으로 산업이 변화하였으며, 공장으로 사람들이 모이면서 도시가 형성되기도 하였다. 마지막 사건은
제 3의 물결이라고도 불리는 정보혁명이다. 기술 혁신으로 인한 인터넷의 등장 이후 제조업 중심의 산업은 지식과
정보가 중심이 되는 서비스 산업으로 변화하였다.
인류의 역사를 바꾼 세 가지 사건인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은 모두 기술의 발전을 통해서 촉발되었다. 농업
기술의 발달로 인해 곡류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고, 잉여생산물이 생겼으며, 그에 따라 사람들은 정착생활을 시작하였다.
정착 생활을 하게 되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모여살수 있게 되었으며, 이는 국가의 초석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증기기관 기술의 발전으로 시작된 산업혁명은 근대화를 초래하였다. 산업혁명을 통해 생산량이 급속하게 증가하였으며,
생산량의 급격한 증가는 공장으로 사람들을 모이게 만들었고, 이는 도시를 형성하는데 일조하여 근대화의 시발점이
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인터넷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발생한 정보혁명은 가장 짧은 시간동안 사회를 가장
급격하게 변화시켰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을 통해 사람들은 물리적 거리의 한계를 극복하였으며, 이는 결과적으로
경제적,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측면에 있어서 매우 급격한 사회변동을 초래하였다.
이처럼 인류의 역사는 기술발전을 통해 이루어진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인류의 역사를 크게 바꾼 세 가지
사건 모두 각 분야와 관련된 기술의 발전이 없었다면 절대로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약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이 없었다면, 오늘날처럼 우리가 살아갈 수 있었을까? 핸드폰은 고사하고, 펜 하나를 구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며,
나아가 아직까지 정착생활을 하지 않고 유목 생활을 하며 동물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는 중일지도 모를 것이다.
그 시기에 맞는, 그 분야에 맞는 적절한 기술 발전이 있었기 때문에 사회는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변화하였고, 인간들
또한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기술의 발전은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변동을 야기하였고, 그 중에서도 인터넷 기술의 발전은 짧은 시간 동안 급격하게
사회를 변동시켰다. 또한 앞으로의 기술은 거의 대부분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거나, 인터넷과 융합하는 형태로 발전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래사회에서 인터넷 기술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은 미래의 교육을 변화시킬 것이다. 살만 칸이 설립한 ‘칸 아카데미’는 실제로 현재 교육을
변화시키고 있다. 살만 칸은 MIT에서 수학, 전기공학, 컴퓨터과학 세 개의 학위를 받고 하버드 경영대학원에서 MBA를
취득한 후 실리콘벨리에서 엔지니어로, 보스턴에서 헤지펀드 분석가로 일한 엘리트다. 그가 수학으로 고생하던 12살
사촌동생을 직접 가르친 동영상이 유튜브에서 화제가 되었고, 칸은 이를 계기로 누구나 무료로 배울 수 있는
수업동영상을 제작해서 서비스하기 시작했다. 칸은 교육으로 세상에 변화를 일으키겠다는 포부로 2008년 칸 아카데미를
설립하였고, 구글, 빌게이츠 등으로 부터 후원을 받으며 더욱 유명해졌다. 현재 칸 아카데미의 교육콘텐츠들은 온라인을
넘어 15개의 공립학교, 독립적 교육기관의 정규수업과정에서 활발히 활용되고 있다.37) 칸 아카데미는 우리가 꿈꾸는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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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를 아우르는 무상교육을 현실로 만든 사례이다. 학교에 갈 수 없어도, 사교육을 받을 수 없어도 인터넷을 통해
동영상을 시청할 수 있으면 누구든 칸 아카데미를 이용해서 무료로 교육을 받을 수 있다. 이러한 칸 아카데미가 더욱
발전하면 하나의 촬영된 강의를 통해 전 세계 사람들이 공부를 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고, 지금과 같은 형태의 학교는
사라질 수도 있을 것이다. 칸 아카데미와 같은 교육이 실현되려면 반드시 인터넷이 필요하다. 인터넷을 통해 모든
사람들은 무료로 공부하는 것이 가능해질 것이고, 인터넷 기술은 이러한 꿈같은 미래사회의 교육을 가능하게 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작용할 것이다.
미래사회에서 인터넷은 교육적인 측면 뿐 아니라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변동에 있어서 큰 역할을 할 것이다.
미래학자인 리처드 왓슨은 자신의 저서인 ‘future file’에서 미래에는 인터넷 선거 및 투표가 가능해질 것이라고
예상한다. 여기서 말하는 투표는 총선과 대선처럼 직접 투표장에 가야만 하는 투표를 의미한다. 미래사회에는 현재
사용되고 있는 간단한 인기투표 형식의 인터넷 투표를 넘어서 정치적인 선거 및 투표 또한 인터넷상에서 가능할
것이라고 예상한다. 물론 선거의 4대원칙인 보통선거(일정한 연령의 모든 국민에게 투표권 부여), 평등선거(모든 유권자
1인 1표), 직접선거(모든 유권자 대리인을 거치지 않고 직접 투표), 비밀선거(유권자의 자유로운 의사표시 보장을 위한
비밀투표)가 지켜질 때 이러한 인터넷 투표는 가능할 것이다.
뿐만 아니라 자동차와 인공지능이 결합하여 무인자동차가 등장할 것이고, 운전자의 홍채나 신체적 반응을 읽어 사고를
예방할 수 있는 인공지능 자동차도 등장할 것이다. 실제 오늘날에도 이러한 기술은 개발되어있다. 구글의 무인자동차,
현대자동차의 무인자동차 등이 그 예이다. 이 두 기업 말고도 다양한 기업들이 무인자동차와 관련된 사업에 많은 투자를
하고 있으며, 앞으로 자동차 시장은 인공지능 자동차가 주가 되는 시대로 접어들 것이다.
또한 인터넷을 통해 생활 속 사물들을 유무선 네트워크로 연결해 정보를 공유하는 환경인 사물인터넷(IOT)또한
가능해질 것이다. 가전제품, 전자기기뿐만 아니라 헬스케어, 원격검침, 스마트홈, 스마트카 등 다양한 분야에서 사물을
네트워크로 연결해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미 미국 벤처기업 코벤티스가 개발한 심장박동 모니터링 기계,
구글의 구글 글라스, 나이키의 퓨얼 밴드 등도 이 기술을 기반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심장박동 모니터링 기계는
사물인터넷의 대표적인 예다. 부정맥을 앓고 있는 환자가 기계를 부착하고 작동시키면 심전도 검사 결과가 자동으로
기록돼 중앙관제센터로 보내지고, 중앙관제센터는 검사 결과를 전문가에게 전송해 임상보고서를 작성하고, 이 보고서를
통해 환자와 적합한 의료진과 연결된다. 이러한 사물인터넷(IOT)에 있어서 인터넷 기술은 이러한 과정을 가능하게
만드는 근본적인 요소이다.
이처럼 인터넷 기술은 그 기술 자체가 발전하거나 다른 기술과 융합하여 미래사회를 더욱 변화시킬 것이다. 또한
인터넷 기술 자체가 사회변동을 야기하지 않더라도 사회변동을 야기하는 다른 요소의 핵심적인 수단으로 기능할 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지금까지 기술의 발전, 그 중에서도 인터넷 기술의 발전이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이라고 설명하였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기술의 발전은 다양한 측면에서 사회변동을 야기하였고, 그중에서도 인터넷 기술의 발전은 단기간에 가장
괄목할만한 사회변동을 야기하였다. 하지만 항상 긍정적인 방향으로 사회가 변동한 것은 아니다.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회가 긍정적으로 변화한 부분도 있지만, 부정적으로 변화한 부분 또한 분명히 존재한다. 특히 인터넷 기술의 발전을
통해 사회에는 다양한 측면의 부정적 현상 또한 발생하였다. 사이버 폭력, 사이버 성폭력, 사이버 해킹을 통한 개인정보
유출 및 경제적 손실, 자신이 속한 집단의 견해만을 진리로 여기는 디지털 마오이즘38) 등이 그 예라고 할 수 있다.
인터넷 기술 발전으로 인한 이러한 다양한 부정적 현상은 기술의 발전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었다. 기술의 발전은 사회변동에 있어서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므로 매우 중요하다. 하지만 기술의
37) 칸 아카데미에 관심 있는 사람을 위해 칸 아카데미를 설명해주는 youtube 영상을 참고문헌에 기재하였다.
38) 인터넷 상에서 급속히 확산되는 감성적 집단주의의 위험성을 극단적 좌파나 우파, 중국의 마오이즘, 독일의 나치즘과 같은 집단주
의운동에 빗대어 나타낸 용어이다. [네이버 지식백과] 디지털마오이즘 [digital maoism] (시사상식사전, 박문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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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전이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맹목적인 기술의 발전은 지양하여야 한다. 뿐만 아니라
발전하는 기술에 맞추어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윤리적 수준 또한 향상되어야 한다.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을 생각하면서 다양한 책을 읽었고, 다양한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리고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으로 기술의 발전, 그 중에서도 인터넷 기술의 발전을 꼽았다. 하지만 단순히 인터넷 기술의 발전을
맹목적으로 찬양하는데 그치지 않고, 기술을 사용하는 사람들의 윤리적 수준이 기술 발전과 상응하여 발전하지 않는다면
사회는 앞으로 더욱 부정적으로 변화할 것이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통해 사회변동에 영향을 주는 핵심관점을 바라보는
통찰력을 가질 수 있었고, 그러한 사회변동의 핵심 요인이 긍정적으로 작용하기 위한 조건까지 생각해보는 통찰력까지
키울 수 있었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한국정보화진흥원이 출판한 「정보 윤리의 이해와 실천」이라는 책을 소개하고 싶다. 이 책은 인터넷 기술의 발전을
통해 지식 정보사회가 등장하였고, 그에 따라 인간의 사고, 사회 및 문화가 변화하였음을 잘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으로 인터넷 기술의 발전을 소개한 내 견해와도 매우 연관된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책은 인터넷 기술의 발전을 통한 사회의 변동만을 보여주는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정보 윤리라는
개념을 통해 인터넷을 통해 등장한 정보사회의 문제점과 그러한 환경에서 인간과 사회가 갖추어야할 덕목까지 다루고
있다.
이 책은 개인정보와 정보 윤리, 저작권과 정보 윤리, 인터넷 중독과 정보 윤리, 보안과 정보 윤리, 사이버 폭력과 정보
윤리, 불건전 정보 유통과 정보 윤리, 정보 윤리와 제도, 정보 리터러시와 정보 윤리, 신 정보 주체 등의 다양한 범주
안에서 인터넷 기술의 발전 이후 등장한 정보사회의 문제점과 대처방안에 대하여 소개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서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인 인터넷 기술 발전에 대하여 알 수 있고, 기술 발전으로 새롭게 등장한 사회의 문제점과
대처방안까지 생각해보는 통찰력을 기를 수 있으므로 이 책을 소개하고 싶다.
10. 종합결론
지금까지 기술의 발전, 그중에서도 인터넷 기술의 발전이 사회변동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보았다. 다양한
기술의 발전 중에서도 인터넷 기술의 발전은 지금까지의 사회변동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다. 뿐만 아니라 인터넷은
다가오는 미래사회에서 다양한 분야의 기술 개발 및 발전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사회변동 요인으로서
인터넷의 영향은 더욱 더 커질 것으로 예상된다. 오늘날 인터넷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을 것이다.
이미 인터넷은 우리 삶에 당연한 것으로 원래부터 존재했던 것처럼 녹아 들어와 있다. 하루라도 인터넷 사용이
불가능하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피해를 볼 것이고 기업, 학교, 병원 등의 업무가 마비 될 것이다.
미래 사회에는 인터넷에 대한 사람들의 의존도가 더욱 커질 것이다. 사람들이 이용하는 대부분의 기술이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기술이거나 인터넷 기술과 융합한 형태로 발전할 것이다. 인터넷 기술이 사회변동에 미치는 영향이
커질수록, 인터넷으로 인한 새로운 사회의 문제점들을 파악하는 통찰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인터넷 기술이
발전하면서 사회는 지금과는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것이고, 새로운 문제점 또한 많이 등장할 것이다. 예상치 못한
모습으로 사회가 변화하고, 그에 따른 문제점이 등장할수록 새로운 사회를 읽는, 새로운 사회의 문제점을 파악할 수 있는
통찰력이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사회변동론 수업을 통해 사회 변동을 유발하는 다양한 핵심적인 요소들을 생각해봄으로써 우리는 다가오는 미래
사회를 예측할 수 있는 통찰력을 기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미래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 예측할 수 있다면,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으로 인하여 등장하는 새로운 문제점들 또한 대비하고 나아가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사회변동을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본다면, 앞으로의 사회가 어떻게 변화할지에 대하여 다른 사람보다 빠르게, 다양한
관점으로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에 있어서 사회학적 통찰력은 매우 큰 역할을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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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주소.
- 이름 : 기 성지
- 학과 : 사회학과
- 학번 : 2012104386
- 자기소개
사회학과 2학년 2학기에 재학 중인 12학번 기성지입니다. 전역 후 지난학기에 복학하여 두 학기 연속으로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전역 후 다양한 전공과목을 배움으로써 사회학적인 시각으로 사회를 바라보는 훈련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학기에 배우는 사회변동론 또한 사회변동의 흐름을 자신만의 핵심관점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사회학적 통찰력을
키우는데 매우 도움이 되는 수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도 다양한 사회학 수업을 통해 사회를 바라보는 통찰력을
기르고 싶습니다.
- email :wwar93@naver.com
참고문헌
「제 3의 물결」, 엘빈 토플러 저, 원창엽 역, 『홍신문화사』, 2006.05.30.
「퓨처 파일」, 리처드 왓슨 저, 김원호 역, 『청림출판』, 2009.01.10.
「사이버 공간의 사회」, 윤영민 저, 『한양대학교 출판부』, 2003.02.10.
통계청
네이버 지식백과
칸 아카데미 소개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WNTV0Q7iYs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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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과 사회변동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사 속 세금이야기(인권 전쟁 그리고 세금), 문점식, 세경사, 2012년 (2007년 초판
발행)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자금’은 굉장히 영향력 있는 요소이다. 우리는 자금의 흐름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수많은 자금의 흐름들이 존재하지만, 그 중에서도
‘세금’이라는 흐름은 오래전부터 국가 차원에서 집행되어온 것이기 때문에 그 범위가
상대적으로 넓고 강제성 또한 뒷받침된다. 이러한 이유로, 세금은 인간사회에 상당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로크의 사회계약설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천부의 권리를 지니는데, 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충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계약을 맺어 국가를 구성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위임한다. 즉
개인은 국가에 세금이라는 명목의 돈과 권력을 부여하고, 국가는 그것으로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이렇게 세금에는 ‘공동의 목표를 위해 공동의 재원을 마련한다.’는 새로운 개념이 투영되었기 때문에,
그에 따른 새로운 사회적 변화들도 나타났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사회변동을 바라보는 핵심키워드로 ‘세금’이라는
키워드를 선택하게 되었다.
세금이 사회를 어떻게 변동시켰는지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세금이 처음 생겨난 시점에서부터의 역사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세금과 관련된 동서양의 역사 분석을 통해 세금제도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는 이 책이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세금을 인권을 신장시킨 역할을 한 요소로 바라보면서, 인권투쟁의 기록을 세금투쟁의
기록과 맥을 같이 한다고 바라보는 독특한 관점 때문에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3. 저자소개
저자
문점식은 한국조세연구포럼
학회장, 한영회계법인 국제조세담당 파트너, 기획재정부 국제조세 자문위원,
중부지방구세청 국세심사위원 등의 화려한 경력을 가지고 있는 세금 전문가이다. 현재에도 서울 지방 국세청 납세자
권익존중위원회 위원, 한국조세연구포럼 감사로 활동하면서 세금에 대한 연구를 활발히 해나가고 있다.
저자는 “사회에서 세금제도는 매우중요하다. 하지만 우리는 너무 가볍게 세금제도를 생각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아
안타깝다. 세법의 역사를 보면 알 수 있듯이 올바른 세금제도는 국가를 일으킬 수 있다. 또한 세금제도는 인권의 역사를
만들었다. 정부와 국민이 대등한 입장에서 공평한 세제를 완성하는 것이 세법전문가들의 책임과 의무라고 생각한다.”라고
말하며, 6년에 걸친 연구 끝에 펴낸 책 <역사 속 세금 이야기>를 ‘인생의 결산서’로 표현하기도 했다.
4. 책 내용 요약
세금이란 국가 또는 지방 공공 단체가 필요한 경비로 사용하기 위하여 국민이나 주민으로부터 강제로 거두어들이는
금전을 뜻한다. 가정 살림을 꾸리기 위해서는 매달 일정한 돈이 들어가듯, 나라도 살림을 하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게
된다. 우리가 매일 이용하는 도로, 거리의 가로등을 비롯하여 경찰, 소방관, 군대와 같이 국민들이 생활하는 데 필요한
것을 제공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세금을 걷어 필요한 돈을 마련한다.
세금은 국가가 성립하기 이전부터 존재했다고 볼 수 있다. 부족연맹 혹은 부족국가시대에도 외부로부터의 적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공동의 재원을 마련했다. 즉, 공동의 이익체를 운영하기 위해서 부족 구성원들로부터 일정량의 곡식을
거두었다. 이렇게 세금은 인류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신을 외부의 침입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공동체와 국가를
형성하고 그 비용을 분담하기 위해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세금은 소득재분배의 효과를 수반한다. 시장기능에 의한 소득분배는 필연적으로 불평등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이러한 소득의 불평등을 완화하기 위해서 정부가 정책적으로 개입하게 된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수단이 조세인데, 예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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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 조세의 경우 고소득층에는 중과세하고 저소득층에는 감세하는 누진적인 조세정책을 통해 소득재분배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
세금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세금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여겨졌던 사항은 “누가 이 세금을
부담할 것인가?” 그리고 “왜 부담하여야 하는가?”이었으며, 세금의 3가지 기본원리는 “능력에 맞게” 과세되어야 하고,
“부담은 동일하여야” 하며, “납세자가 받은 혜택에 비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인류는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며,
국가를 상대로 세금제도에 대하여 그 정당성 및 공평성을 다투어왔다. 자기 자신의 재산상 권리를 지키기 위하여
조세법률주의를 요구했고, 신체상의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하여 죄형법정주의를 주장하기도 했다.
역사상 강대국의 경우 필연적으로 약소국가를 침략하거나 다른 나라에 진출하여 식민지를 만들었는데 그 지역에서
새로운 세금제도를 제정하거나 다른 방법으로 세금을 거두었다. 즉 인류의 세금제도는 전쟁과 함께 발전하였고 전쟁을
통해 성숙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세금징수에 얽힌 사례가 많은데, 주로 좋은 사례보다도 나쁜 사례들이 많다.
나쁜 세금제도에 대하여 인류는 과감히 개혁을 시도하거나 투쟁하였고, 세금제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운용될 때는
혁명의 횃불을 높이 쳐들었다. 이를 통해, 세금은 나라를 세우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정부의 세금과세 뒷면에는
제사장과 왕, 왕과 국민, 특정집단에 속한 국민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국민들 간의 치열한 다툼과 투쟁 그리고
국가 간의 전쟁이 있었다. 인류는 세금에 대한 투쟁을 통해 인권의 역사를 싹트게 하고 꽃을 피웠다. 따라서 세법을 볼
때는 항상 과세권자의 입장에서 과세도구로 볼 것이 아니라, 국민 재산권을 보호하기 위한 마지막 장치가 세법이라는
것을 생각해야한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여러 관점들 중,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관점이 사회변동을 이해하는데 있어 핵심적이라고 할 수
있다.
① 세금이 국가의 흥망을 결정하는 주요한 열쇠로서 작용하였다는 점
② 역사상 전쟁은 항상 세금을 통해서만 가능하였다는 점
③ 세금이 혁명의 씨앗으로 역할하며, 자유와 독립 그리고 인권을 위한 투쟁을 이끌어 내었다는 점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① 번영하던 사회나 국가가 몰락하는 이유를 들자면 열 손가락이 모자랄 정도로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또
쇠퇴하던 사회가 다시 일어서는 이유도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그중에서도 세금이라는 경제적인 요인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로마라는 한 국가의 예를 통해서도 ‘세금이라는 요인을 통해 국가의 흥망이 결정될 수 있다는 사실’을 살펴볼 수 있다.
서양사에서 로마가 대제국을 이룩한 요인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를 다루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주목할 만한 사항은
세금제도로 여겨진다. 세 가지의 새로운 세금제도가 로마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을 주목해서 볼 수 있는데, 첫째는
점령지임에도 불구하고 시칠리아 섬에 낮은 세율을 적용하였다는 점이다. 로마의 번영은 지중해 해상을 장악하는 데 꼭
필요한 시칠리아 섬에 대한 영토 분쟁에서 시작되었는데, 로마가 이 영토 분쟁에서 승리한 후 점령하게 된 시칠리아
섬에 낮은 세율을 적용하였다. 그로인해 시칠리아 섬은 확실히 로마 편에 들어오게 되었고, 그 섬은 지중해를 지키는
곳으로 확실히 자리 잡게 되어 로마 번영의 기틀이 되었다. 둘째는 세금 징수제도에 시장경제원리를 따른 민영국세청
개념을 도입했다는 것이다. 이 개념은 오늘날 어느 나라도 감히 엄두를 내지 못하는 전혀 새로운 발상의 제도인데,
로마는 징세를 담당할 기관을 입찰에 부쳐서 정하는 이 제도를 통해 초기 징세비용을 낮추어서 효과적인 징세제도를
운영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는 교육·의료 분야에 대폭적인 세금 감면을 시행하였다는 것인데, 이 제도를 통해 로마의
교육환경을 개선하고 낮은 수수료를 부담하고도 국민들이 양질의 교육 ·의료서비스를 받을 수 있게 되었다.
반면, 로마를 대제국으로 세워준 이 세금제도에서 발생한 문제점은 로마를 패망시킨 요인으로도 작용했다. 로마는
수많은 전쟁을 거쳐 오면서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 충분한 군사력을 필요로 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 군사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당연히 충분한 세금을 거두어 드릴 수 있는 체제로의 변화가 수반되어야 했다. 일례로
농부들은 이웃에 사는 사람들의 세금에 까지 연대책임이 있어서, 어떤 농부가 도망쳐서 농지가 버려져 경작되지 않을
경우에는, 그 토지와 인접한 토지를 갖고 있는 농부가 버려진 토지에 대한 세금까지도 부담해야 했다. 그래서 점점 이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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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당할 자신이 없어진 농민들은 자신의 토지를 소유자에게 양도해버렸고, 소유자들은 뇌물과 로비를 포함한 여러
불법적인 수단을 동원하여 세금을 회피하곤 했다. 그 당시 이렇게 세금 회피가 만연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재정적인
자금부족이 나타날 수밖에 없었고, 로마제국에 필수적인 훌륭한 군대는 오래 유지되지 못했으며 당연히 이방인들도
적절히 막지 못할 수밖에 없었다.
② 인간의 탐욕으로 시작된 전쟁은 세금으로 시작하여 세금으로 끝났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동서양 어디에서나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전비조달을 위하여 과세를 강화하였고, 전쟁 중에는 애국심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세금을 내는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전쟁이야말로 근대적인 세금제도를 만든 영양소였는데, 역사상 세금제도는 전쟁을 통해서
성숙되었고 복잡해졌으며 정밀하게 만들어져 국민들의 숨소리를 죽여 갔다. 그로인해 본래의 목적이라 할 수 있는
‘국민들의 권익을 보장하기 위하여’ 세금제도가 제정되기는커녕, 국민들은 전쟁수행을 위하여 울며 겨자 먹기로 국가에
세금을 내는 도구가 되어버렸다.
인류는 새로운 전쟁을 위하여 세금제도를 바꿔갔는데, 그 중 대표적인 예로 백년전쟁을 들 수 있다. 영국은 백년전쟁
기간 중에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하여 인두세를 과세하였는데, 이 세금은 납세자의 지위에 따라서 과세하는 방식이었다.
이런 종류의 광범위한 세금이 이전에는 과세되지 않았기 때문에 ‘생전 듣지도 보지도 못한 세금’이라고 불렸다. 이
당시에는 재산보다도 직위가 생활수준에 더 직접적이 관련이 있었으므로, 이 세금을 과세하기 위해서 세금표가
공표되었다. 납세자의 신분에 따라서 세금이 다양하게 책정되었고, 기본적으로는 직급이 높을수록 세금을 더 많이 내는
방식으로 작성되었다. 그래서 각종 직업 종류별로 직급을 나누고, 높은 직급에 대하여는 세금을 높게 과세하였다. 하지만
실제로 거두어 드린 세금이 예상했던 것의 절반밖에 되지 않자, 1380년 의회가 다시 소집되어 필요한 자금을 다시
논의하였다. 이 돈은 프랑스에 주둔해 있었던 영국군에게 필요한 주둔비용이었다. 의회는 약 10만 파운드의 세금을
거두기로 목표를 설정하고, 모든 사람들에게 각 4펜스씩을 거두는 방안을 시행했다. 이에 덧붙여 부자들은 가난한 자들의
세금 납부를 도와야 한다는 조항을 함께 규정하였다.
프랑스는 막대한 전쟁비용의 누적으로 인해 더 이상 왕실 직영지 수익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자,
정규적인 조세체계를 확립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그래서 백년전쟁 이후인 1370년부터 1390년 사이에 이
세금제도를
체계화
하였는데,
가구당
세금을
부과하는
창문세를
신설하였고,
토지에
대한
세금인
따이유세를
부과하였으며, 간접세로는 보조세(술 종류에 대한 세금)를 만들어서 소금세와 함께 중요한 재정수입이 되게 하였다. 이들
대부분의 세금은 농민들에게만 과중하게 부과되었고 귀족, 성직자들은 광범위하게 면세혜택을 받았다. 그 때문에 왕은 이
세금제도를 정식으로 입안하기 위하여 삼부회를 자주 소집하였고, 삼부회 구성원의 대표였던 귀족, 성직자, 부르주아들은
새로운 세금 징수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귀족들은 세금 징수에 동의한 대가로, 세금 징수과정을 자신들의
입맛대로 통제할 수 있는 권한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와 같이 영국과 프랑스가 백년전쟁을 하는 동안 두 나라는 전쟁자금 조달을 위하여 여러 가지 세금제도를
마련하였다. 두 나라는 서로 상대방 국가의 세금제도를 모방하여 자기 나라의 세금제도를 바꿔갔고, 이는 전쟁을
이끌어가는 연료가 되었다.
③ 세금은 혁명의 씨앗으로 역할하며, 자유와 독립 그리고 인권을 위한 투쟁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즉, 세금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하여 왔다고 볼 수 있는데, 세금과 관련하여
중요하게 여겨졌던 사항은 “누가 이 세금을 부담할 것인가?” 그리고 “왜
부담하여야 하는가?”이었으며, 세금의 3가지 기본원리는 능력에 맞게
과세되어야
한고,
부담은
동일하여야
하며,
납세자가
받은
혜택에
비례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결국 인류의 역사는 이러한 질문들을
던지고 원리를 따져가며, 국가를 상대로 세금제도에 대한 그 정당성 및
공평성을 다투어 온 자취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이 세금제도가
자신의
재산상의
권리를
비롯하여
생명에
까지도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를 살펴보면 공평하지 못한 세금제도에 대해서
개혁을 시도하거나 투쟁한 사례들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세금제도가
참을 수 없이 운용될 때는 혁명의 횃불을 높이 쳐들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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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의 혁명 중에 세금과 가장 관련이 깊은 것은, 영국령 북아메리카 13개 주의 반란이다. 이는 미국의 독립으로
이어지게 되는데, 영국이 식민지에 부과했던 세금은 식민지인들이 뭉치게 하는 힘으로 작용했고 거센 혁명을 불러왔다.
영국은 13개 식민지가 경제적인 기반을 다져 나가자 자국의 이익을 중심으로 식민지 정책방향을 설정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식민지 생산품을 영국과 영국식민지에만 팔도록 했고, 그 밖의 지역에 판매하고자 할 경우에는 영국
상인을 통해서만 가능하도록 제한했다. 그 이후에도 영국은 7년 전쟁을 치르게 되면서 막대한 군비부담을 충당하고자,
식민지에서의 세금 수입을 늘리기 위한 여러 가지 세법을 제정하여 과세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국은 인지세법 제정하여
모든 공문서에 인지를 붙여서 인지세를 납부하도록 했다. 하지만 이 법에 대하여 미국 식민지인들의 항의는 매우 거셌다.
식민지인들은 뉴욕에서 메사추세츠 의회의 주도로 인지세법에 대한 회의를 열게 되었고, 이곳에서 “영국의회에 대표를
파견하지 않았으므로 영국의회가 식민지인들에게 세금을 과세 할 권한이 없다.”고 선언하였다. 또한 인지세법을
식민지인들의 권리와 자유를 침해하는 불법적인 것으로 규정하고, “대표자 없는 곳에 과세 없다.”라는 원칙을 주장하기
시작하였다.
식민지인들이
이렇게
영국정부의
과세에
격하게
반대하자 인지세법은 곧 폐기되었다. 하지만, 곧 타운센트법이라는
것을 새롭게 제정하여 식민지들이 수입하는 모든 수입품에 대하여
관세를
부과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지속되는
세금분쟁은
식민지인들이 불같이 일어나는 계기였고, 이를 통해 식민지의회들은
서로
연합하게
되었다.
이후
식민지
연합은
대륙회의를
열어
식민지에 대한 세금강경책 철회를 요구하였고, 영국을 제외한 다른
유럽의 국가에게 항구를 열고 군대를 조직하는 등의 조치를 통해
영국에 대항하면서 미국은 독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건국은 세금문제에 대한 영국과의 분쟁에서 승리한 식민지인들이
독립을 쟁취한 중요한 사건이었으며, 과세권의 정당성과 그 중요성 그리고 영국의 대헌장과 권리장전의 기본정신인 “대표
없는 곳에 과세 없다”라는 대원칙을 확인시켜 주었다. 세금문제 때문에 발생된 미국의 독립은 왕권의 시대를 민권의
시대로 바꾸어 놓은 커다란 사건이며, 이를 통해 올바른 과세문제는 국가의 정당성을 판단하는 매우 중요한 문제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미국의 독립 이후 확립된 민권의 힘은 프랑스대혁명의 계기가 되기도 했는데, 프랑스 시민들에게는 권력을 남용해
면세혜택을 누리며 부패한 성직자들 및 귀족들과 높은 세금을 부과하는 세무서가 가장 큰 증오의 대상이었다. 더군다나
공평한 조세제도에 대한 강한 열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성직자들 및 귀족들이 가졌던 특권에 대한 강한 불만이
있었다. 즉 불평등한 세금제도와 앞서 불어온 민권의 바람은 프랑스대혁명의 씨앗이 되어주었고, 이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하여 시민 인권의 역사가 새로이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 외에도 러시아혁명과 중국 공산혁명, 동학 농민 혁명
등과 같은 다양한 변화의 바람 속에서도 세금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이 역사적 사례들을 통해 인권의 발전은
인류의 세금투쟁의 성과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헌장과 권리청원, 명예혁명과 미국의 건국, 프랑스대혁명과
인권선언 등 역사상 중요한 인권투쟁의 기록은 결국 세금투쟁의 기록이었다. 결론적으로, 역사상 세금은 나라를 세우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며 인권을 신장시키는 촉매제로서의 역할도 했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역사 속에서 국가가 전쟁에 필요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세금이라는 명목으로 국민들에게서 자원을 동원했듯이, 지금도
국가는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이끌어 가기 위해 세금을 통제의 수단사용하고 있다. 그 예로는 싱글세와 담배세를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독신세·1인가구세로도 불리는 싱글세는 결혼을 하지 않고 혼자 사는 인구가 일정 나이 이상이
되면 걷는 세금이다. 한국의 굳어진 저출산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보건복지부, 여성가족부, 교육부 등 정부 관계부처가
종합대책을 마련 중인 가운데, 싱글세 부과 또한 언급되고 있는 추세이다. 지난해 합계출산율이 1.187명으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최하위에 머무른 한국의 저출산 문제가 개선되지 못한다면, 정부도 싱글세 부과를 진지하게
검토할 가능성이 더욱 커진다. 일반적으로 출산 장려를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제도적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에, 이를 위한
현실적인 세수확보라는 목적도 싱글세에 포함이 되어있는 셈이다. 하지만 저출산 문제를 극복한다는 국가의 목적 하에,
세금을 통해서 지극히 개인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던 결혼과 출산의 문제에 까지 국가의 통제와 압박을 받아야 할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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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른다는 사실은 세금정책이 국가가 원하는 방향대로 국민들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담배세 또한 같은 논리로 볼 수 있는데, 정부는 흡연율 감소로 인한 국민건강증진을 목적으로 2015년 1월부터 담뱃값을
인상한다고 발표했다. 물론 개인의 자율적 선택권이 존재하기에 결과가 반드시 국가의 정책대로 따라가지만은 않지만,
흡연이라는 각 개인들의 행동 또한 세금이라는 제도적 장치를 통해 제한받을 수 있으며 국가는 “국민건강증진”이라는
정책 방향에 맞춰 세금으로 국민들을 이끌어 갈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다. 앞으로도 정부는
자신들의 정책방향에 맞춰 세금제도를 개편해나갈 것이고, 그 세금제도를 통해 국민들을 “정책”과 “법”이라는 명목
하에서 통제해나가려고 할 것이다.
또한 공동의 자금인 세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좌우되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세금을 어떻게 “잘”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계속될 것이다. 통계청의 장래 인구 추계 결과에 따르면 국내 인구는 현재 추세대로라면
2019년을 기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한다. 특히 2025년까지 4900만 명 선을 유지하다가 급감하기 시작해 2040년에는
4630만 명, 2050년에는 4230만 명 선으로 줄어들 것으로 추계된다. 물론 이처럼 인구가 감소하는 것은 출생아 수는
줄어드는 데 반해 고령화에 따라 사망자 수가 급격히 늘어날 것으로 전망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인구 구조 변화는 한국
사회에 상당한 충격을 불러올 수밖에 없다. 인구 감소는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를 불러오며, 경제활동인구의 감소는 생산
경제 위축으로 이어진다. 하지만 저출산, 고령화, 인구 감소라는 변화의 흐름은 복지에 대한 지출을 필연적으로 크게
늘릴 수밖에 없다. 즉, 경제활동인구가 감소함에 따라 사회의 생산성은 떨어져서 경제는 위축되는데 반해 복지에 대한
지출은 더 커져서 결국 사회 전체의 부담이 커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특히 한국의 경우 고령화 속도가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다는 점이 복지에 대한 부담을 더욱 가중시킨다. 같은 부양 인구더라도 65세 이상 노인에게
들어가는 부양비용이 15세 미만 어린이에게 들어가는 비용보다 훨씬 많기 때문이다. 노령 인구가 급증하면 각종 의료
지출과 연금 지출 등과 관련한 재정 지출이 대폭 늘어난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에 따라 앞으로의 세금제도는 포퓰리즘에 활용될 가능성이 더욱 커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포퓰리즘이란 정책의 현실성이나 가치판단, 옳고 그름 등의 본래의 목적을 외면한 채 일반 대중의 인기에만 영합하여
목적을 달성하려는 정치행태를 말한다. 이와 같은 사회변화의 흐름 속에서 사람들의 복지에 대한 열망이 점점 높아짐에
따라, 정치인들은 국민들의 지지를 더 많이 받기 위해 무조건적인 복지를 약속하는 경우가 늘어날 것이라고 생각된다.
하지만 우리나라 세금사용의 현실은 그와 많이 비교된다. OECD자료에 따르면, 사실상 한국은 복지, 공공의료, 교육
등과 같이 국민들의 삶의 질을 끌어올리고 인적자본과 사회적 자본에 투자하는 데 지출하는 비용은 OECD 평균 수준에
비해 형편없이 낮은 반면, 주로 대기업에 혜택이 돌아가는 사업에는 예산을 과도하게 책정하는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이다. 납세자들의 공동 자금인 세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그 공동체의 미래가 크게 달라진다는 점에서 미루어 볼
때, 어떻게 하면 해당 사회의 특성에 맞게 세금을 “잘” 사용하는가에 대한 고민은 불가피할 것으로 보인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우선, 세금이라는 경제·행정적 성격을 지닌 개념에 대해 거시적으로 접근해보는 것 자체가 나에게 사회학적 통찰력을
심어주었다. ‘세금이 사회를 어떻게 변동시켰는가?’에 대한 핵심 관점을 읽어내기 위해 세금의 역사를 추적해보면서,
세금은 국가의 흥망을 결정하는 주요한 열쇠로서 작용하였다는 점, 역사상 전쟁은 항상 세금을 통해서만 가능하였다는
점, 세금이 혁명의 씨앗으로 역할하며 자유와 독립 그리고 인권을 위한 투쟁을 이끌어 내었다는 점들을 읽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핵심 관점들을 바탕으로, 더 나아가 앞으로의 세상은 어떤 식으로 흘러갈 것인가 대한 나만의
통찰 또한 시도해볼 수 있었다. 먼저, 역사 속에서 그래왔듯이 앞으로도 세금은 국가가 원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이끌어
가기 위한 통제의 수단으로 사용되어질 것이며, 그것이 얼마 전 화두가 되었던 ‘싱글세’와 ‘담배세’와도 연관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또한 지난 역사 속에서 공동의 자금인 세금을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 국가의 흥망이 좌우되었던 것처럼,
앞으로도 세금을 어떻게 “잘” 쓸 것인가에 대한 고민은 더욱 활발해 질 것이라는 점을 내다볼 수 있었다. 거기에
우리사회의 인구학적 변화 흐름인 저출산과 고령화 그리고 인구감소까지 엮어서 생각해보며, 세금이 포퓰리즘의 도구로
사용될 가능성을 지적하고, 복지비용 지출에 대한 고민이 더욱 필수적일 것이라는 점까지 통찰해 볼 수 있었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 『세금이야기』, 전태영, ㈜생각의나무,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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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문제를 역사적인 사례를 중심으로 살펴본 책이다. 서민들이 세금문제를 어떻게 느끼고 생각하고 행동했으며 그들의
형편과 처지가 어떠했는지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많은 재정적 실패와 성공의 사례들을 통해 앞으로 우리가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가야하는지를 제시해주고 있는 책이다.
▶ 『세금혁명: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최선의 돈』, 선대인, 더팩트, 2011
세금을 걷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제대로 쓰는 것”이 중요하다는 점에 대해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책이다.
세금이 올바로 쓰여 지지 못하고 있는 경제 현실을 고발하고, 앞으로 부딪힐 수 있는 문제들에 대한 해법을 제안한다.
▶ 「논문: 전쟁, 국가형성 및 정치발전: 영국 입헌주의와 프랑스 절대주의의 역사적 기원에 관한 연구」, 박상섭,
서울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 <국제문제연구> 20권 1호, 1996, pp.1-46
이 논문에서 제시된 ‘자원동원론’의 관점에서 세금을 살펴보면,
세금의 부과는 국가의 지배권력 행사에 대한 시민사회의 참여를
촉진하는 데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이는 1290년대부터 1세기 반
동안 이어진 영국과 프랑스의 전쟁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데, 이 오랜
전쟁은 양국 모두에 있어 국왕의 개인적 수입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막대한
자원이
소요되는
작업이었다.
그래서
양국에서는
모두
시민사회의 자원을 동원하는 작업을 시작하였는데, 이 작업을 통해
국가와
시민사회 간의
지속적인 상호작용의 과정이 시작되었다.
이러한 과정은 영국에서 보다 원활하게 진행되었는데, 그 이유는 이
과정을 원활케 하는 제도적 장치, 즉 대의제적 협의기구를 진작부터
발전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대의제적 협의기구를 통한 국가와 시민사회의 관계를 일방적인 관계가 아닌
상호작용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이 관계가 국가로의 자원이동으로만 그치지 않고 그 이동에 대한 대가로서 국가의
지배권력 행사에 대한 시민사회의 참여·지배 권력의 자의성 배제 등의 개혁 작업이 동시적으로 추진되었기 때문이다. 즉,
시민사회 측면에서의 대의제적 협의기구의 발전 유무가 자원동원의 원활성에 영향을 주기도하고, 자원동원이 시민사회의
참여를 촉진하기도 하는 순환 고리가 형성된 것으로 볼 수 있다.
▶ EBS 다큐프라임- 행복의 조건, 복지국가를 가다
http://www.ebs.co.kr/search?query=%EB%8B%A4%ED%81%90%ED%94%84%EB%9D%BC%EC%9E%84%ED%96%89%EB%B3%B5%EC%9D%98+%EC%A1%B0%EA%B1%B4%2C+%EB%B3%B5%EC%A7%80%EA%
B5%AD%EA%B0%80%EB%A5%BC+%EA%B0%80%EB%8B%A4&collection=again&sort=RANK&strOp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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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계약설에 따르면, 모든 인간은 천부의 권리를 지니는데 많은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사회에서는 개인이 스스로
자신의 자유와 권리를 충분히 지킬 수 없기 때문에 계약을 맺어 국가를 구성하고 자신들의 권리를 위임한다. 즉, 개인은
국가에 세금이라는 명목의 돈과 권력을 부여하고, 국가는 그것으로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지켜주어야 할 의무가 생기는
것이다. 여기에서 확장되어, 세금은 “복지”라는 개념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복지란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삶의 질에
대한 기준을 높이고, 국민 전체가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는 정책이다. 즉, 세금을 통해서 사회적
네트워크를 형성하여 안전망을 구축할 수 있으며, 이는 국민 모두가 함께 만들고 국민 모두의 참여로 유지된다는 것에
의의가 있다.
위에 제시된 영상에 나오는 너그러운 의료보험 또한 세금을 통해 이루어진 복지제도이다. 이 외에도 브라질의 ‘보우사
파밀리아’라는 사업은 2000년대 이후 세금을 가장 잘 쓴 복지사업으로 평가된다. ‘보우사 파밀리아’는 가족수당이라는
뜻으로, 브라질 정부가 야심차게 추진한 기아 제로 정책이다. 이 정책의 목표는 가난이 대물림되는 악순환 차단이며,
브라질 빈곤층에게 자녀들을 학교에 보내고 백신접종을 맞히는 조건으로 수당을 지급하는 내용을 포함한다. 정부 전체
재정 지출의 2.5%투입했고, 수혜 대상자는 4400만 명에 달했으며, 실제로도 브라질의 빈곤 퇴치에 크게 기여했다.
2001년 이후 불평등도를 완화하는데 20%가량 기여했으며, 7년 만에 1억 9000만 명의 국민 가운데 2000만 명이
빈곤선에서 벗어났고, 25% 정도 소득 증가 효과 또한 있었다. 이를 통해 세금을 제대로 사용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고양시킬 수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146
10. 종합결론
세금은 인류가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자신을 외부의 침입에서 보호하기 위하여 공동체와 국가를 형성하고 그 비용을
분담하기 위해 탄생한 개념이다. 세금은 인류의 역사와 함께 발전하여 왔다고 볼 수 있다. 인류는 국가를 상대로
세금제도에 대하여 그 정당성 및 공평성을 다투어왔는데, 나쁜 세금제도에 대하여 인류는 과감히 개혁을 시도하거나
투쟁하였고, 세금제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이 운용될 때는 혁명의 횃불을 높이 쳐들었다. 즉, 국가의 세금과세 뒷면에는
제사장과 왕, 왕과 국민, 특정집단에 속한 국민과 서로 다른 이해관계를 가진 국민들 간의 치열한 다툼과 투쟁 그리고
국가 간의 전쟁이 있었다. 인류는 세금에 대한 투쟁을 통해 인권의 역사를 싹트게 하고 꽃을 피웠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번영하던 사회나 국가가 몰락하거나 쇠퇴하던 사회가 다시 일어서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세금이라는 경제적인 요인은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세금제도를 어떻게 운영하느냐에 따라 한 국가의
흥망이 결정될 수 있을 만큼, 세금의 영향력이 막대함을 알 수 있다. 또한, 역사상 모든 전쟁은 세금으로 시작하여
세금으로 끝났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전쟁과 세금 사이에는 밀접한 연관성이 있다. 동서양 어디에서나 전쟁을 하기
전에 먼저 전비조달을 위하여 과세를 강화하였고, 전쟁 중에는 애국심이란 이름으로 포장하여 세금을 내는 국민들의
불만을 잠재웠다. 즉, 세금제도는 전쟁을 통해서 성숙되었고 복잡해졌으며 정밀하게 만들어졌다. 한편, 세금은 혁명의
씨앗으로도 그 역할을 하며, 자유와 독립 그리고 인권을 위한 투쟁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다양한 변화의 바람 속에서
세금은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는데, 이를 통해 인권의 발전은 인류의 세금투쟁의 성과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대헌장과 권리청원, 명예혁명과 미국의 건국, 프랑스대혁명과 인권선언 등 역사상 중요한 인권투쟁의 기록은 결국
세금투쟁의 기록이었다. 결론적으로, 역사상 세금은 나라를 세우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으며 인권을 신장시키는
촉매제로서의 역할도 했다.
사회학은 사회현상의 특성을 연구하는 학문으로서, 사회의 구조 및 변동에 대한 분석과 이러한 변동에 의해 발생하는
각종 사회문제에 대한 분석을 다룬다. 이제껏 살펴봤듯, 세금은 인류사회를 변화시키는 핵심적인 요인으로서 존재해왔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학은 앞으로의 우리사회에서는 세금이 어떤 방향으로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도 충분히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앞으로 세금이 “새로운 세상을 만드는 최선의 돈”이 될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11. 이름, 학과, 학번, email주소
김가령, 사회학과, 2014104396, rkfud6670@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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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해와 사회변동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책제목 : 대항해시대 ­ 해상팽창과 근대세계의 형성
출판사 :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출판년도 : 2008년
저자 : 주경철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이전에 문명에 관한 수업을 들은 적이 있었다. 한 학기동안의 수업에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내용은 영국의 역사학자 A.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에서 언급한 응전의 개념과 문명
융합을 통한 사회변동이었다. 문명의 태동시기의 응전은 자연세계와의 응전이었지만, 그 이후의
사회변동은 한 문명에 닥친 위기를 타개하기 위한 타 문명의 침입과 흡수의 방법으로 응전하는 것이었고, 그 문명과
문명 간의 마찰은 사회변동을 유발한다는 것이었다.
책 선택에 앞서 주제 선택에 수업을 들었던 경험이 영향을 미쳤고, 응전과 문명 간의 만남, 융합을 중심으로
사회변동에 대해 알아 볼 수 있는 주제가 무엇일까 고민했다. 사실 역사적으로 이런 사례가 무수히 많기 때문에 범위를
줄일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실크로드로 주제를 정해보려 했지만, 실크로드라는 것이 존재하는 특정한 길을 지칭하는
개념이 아니고 문명교류를 영향을 미친 모든 길의 개념을 지칭하는 것이기 때문에, 실크로드란 주제도 범위가 넓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에 범위를 줄이고자 문명교류의 범위를 바다라는 곳으로 한정하고자 했다. 시기적으로는 근대세계
형성이라는 거대한 사회변동을 유발하게 된 시기인 대항해시대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다.
대항해시대를 주제로 관련 책을 찾아보았으며, 마침 제목마저도 나의 주제를 잘 반영하는 이 책을 찾을 수 있었다.
3. 저자소개
주경철(朱京哲 1960. 10. 12. ~)
서울대학교 인문대 서양사학과 교수. 서울대학교 사회대 경제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서양사학과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였으며
프랑스
파리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Ecole des Hautes Etudes en Sciences Sociales)에서 역사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미국 하버드대학교 옌칭연구소 초빙 연구원을 역임했고, 서울대학교 서양사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저서로 『문화로 읽는 세계사』(2005), 『신데렐라 천년의 여행』(2005), 『네덜란드, 튤립의 땅
모든
자유가
당당한
나라』(2003),
『테이레시아스의
역사』(2002)가
있고
역서로는
찰스
킨들버거의 『경제강대국흥망사』(2004), 『제국의 몰락: 미국체제의 해체와 세계의 재편』(2003), 몬타나리의 『유럽의
음식문화』(2001), 마르크 페로의 『영화와 역사』(1999), 페르낭 브로델의 『물질문명과 자본주의』(1995~1997)가 있다.
4. 책 내용 요약
이 책은 총 3부 9장으로 구성되어있다. 1부는 근대 세계 구조의 형성을 주제로 하고 있으며, 2부는 폭력의 세계화,
3부는 세계화, 지역화된 문화를 주제로 다루고 있다.
먼저 제 1부 ‘근대 세계 구조의 형성’에서는 근대 세계의 전반적인 구조가 어떤 과정을 통해 짜여졌는가에 대해
전체적으로 조망한다.
제 1장에서는 근대 초까지의 세계의 무게중심이 아시아에 있었음을 설명하며, 아시아의 바다에서 일어난 중요한
변화를 설명했다. 중국이 해상 세계에서 후퇴하여 내륙 깊숙이 들어가 문을 잠그는 시점에서 유럽이 아시아의 바다로
들어와 중요한 거점들을 장악해 갔으며, 이 중국의 ‘해상후퇴’와 유럽의 ‘해상팽창’이 근대 세계의 구조를 이루는 데에
중요한 전환점이었다는 논의가 진행된다. 저자는 세계 인구 추이와 세계 GDP추이, 1인당 GDP 추이를 비교하며
148
18세기에 있었던 유럽과 미국의 거대한 생산성의 증가에 주목했고, 18세기에 발생한 유럽과 타 지역의 생산성 격차를
유발하는 요인이 이미 그 이전 시기인 15세기부터 씨앗이 준비되었을 것이라 말한다. 더불어 유럽중심주의라고 흔히
생각될 수 있는 유럽의 세계 패권장악을 바라보는 다양한 학자들의 시점을 제공함으로써 어느 특정지역을 중심으로
역사를 서술하지 않고, 좀 더 입체적 시각에서 해상팽창을 통해 근대세계가 형성될 수 있었는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다.
제 2장에서는 유럽의 팽창을 중점으로 다룬다. 유럽인들의 해상팽창과 그 결과로 이뤄지는 세계 각 지역의 문명들과
조우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일이었음을 강조한다. 책에 처음 제시되는 사례로는 포르투갈이 있다. 포르투갈은
대항해시대를 촉발하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는데, 여기에도 문명과의 접촉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지중해 권과
대서양 권에 경계에 있으며,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접점에 있었던 이 국가는 이슬람에 대한 투쟁과 대서양 교역에 있어서
선봉을 담당하는 역할을 했다. 아프리카를 통해 인도양에 들어선 포르투갈은 앞서 자신들의 향료무역을 방해하는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를 압박할 필요가 있었고, 적의 적인 페르시아와 연대하여 향료무역을 차단하는 등 기존에 유지되고 있던
무역 네트워크에서 선박과 결합한 군사력으로 자신들의 무역거점을 확보하여 판을 바꾸는 역할을 했다. 일본과 중국으로
대변되는 동아시아와의 무역 네트워크 확장에 있어서는 중국과 일본의 경우에서 서로 다른 양상을 띄는 등, 낯선 자와의
접촉과 교역에 있어서 아시아, 유럽과 중동의 서로 다른 국가들이 서로 이익이 되는 쪽으로 연대하고 교역을 거부하는
등 다양한 네트워크의 양상이 형성될 수 있었음을 강조한다. 네덜란드와 영국 동인도 회사의 성장 등 다른 문명과의
조우에서 발생한 다양한 사건들에 대해 설명하며 앞으로 이 부분에 대해 보다 자세히 서술할 것을 말한다.
제 2부 ‘폭력의 세계화’에서는 세계 문명권들이 상호 접촉하는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저자는
폭력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정리하고자 함을 밝힌다. 바다를 통한 유럽과 세계 각 지역의 상호 접촉은 폭력적인 방식으로
이뤄졌으며, 그렇기 때문에 대항해시대의 해상팽창을 통한 세계화의 과정은 폭력을 통한 것이었음을 말한다. 저자는
폭력을 통한 상호 관계의 고착화와 세계화를 이 시기의 핵심적인 특징으로 삼는다.
제 3장에서는 대항해시대 촉발의 주요 동력이었던 항해술, 선박과 선원에 대해 주로 다룬다. 항해술과 선박 제작
기술의 발달은 막연한 해상세계로의 도전을 가능케 하는 주요 동력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항해를 통한
수송은 자동차가 등장하기 이전 낙타나 가축을 이용한 지상에서의 수송보다 그 효율성이 매우 컸다. 저렴하고 짧은 시간
내에 사람과 상품을 다른 곳으로 수송할 수 있음에 바다는 세계 시장을 형성하고 문화, 정치적 교류를 증진시키는 데에
큰 역할을 한 것이다. 또한 당시 바다는 매우 위험한 세계였기 때문에 바다로 나가는 행위는 목숨을 걸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하는 것이었다. 때문에 목숨을 보존하기 위한 항해술과 튼튼한 선박의 제조기술은 그만큼 유럽의 해양팽창력을
강화시키는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이에 저자는 조선 기술과 해상 운송 기술의 발달만으로는 전 세계적 상호교류를
촉발하는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조선 기술과 해상 운송 기술이 선행되어야만 다른 문명과의 교역과 지배구조
형성이 가능함을 인정하나, 기술발전을 유도하고, 보유하고 있는 기술로써 성과를 낼 수 있는 내적 추동력이
필수적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선원은 주로 여관 등에서 구해졌지만, 나중에 선원의 모집이 힘들 때, 강제징모대와 같이
선원들을 강제로 징발하는 등의 수단을 통해 모집했다. 또한 거액의 임금을 준다고 약속한 뒤, 선원들로 하여금 빚을
지게 해 계약제 노예로 부려먹는 등 열악한 근무 환경과 사선을 넘나드는 길고 긴 항해에서 노동력을 착취당했다.
이렇듯 해상 운송업의 조직과 운영은 이미 자본주의적 공장의 선구적 형태로써 폭력적으로 조직되었다고 저자는 말한다.
제 4장에서는 본격적으로 폭력을 통해 이루어진 근대 세계를 집중적으로 조망하고자 한다. 문명 간의 충돌은
기본적으로 군사력의 충돌이 수반되는데, 이에 저자는 유럽이 전 세계를 상대로 해상의 패권을 가져갈 수 있었던 이유로
강력한 군사력을 지목한다. 군사력의 강약을 결정하는 요소로는 두 가지가 제시 된다. 하나는 기계, 기술과 같은
요소들이고, 다른 하나는 군대의 사기와 같은 문화, 조직력 등의 요소이다. 대개 군사력의 강약을 기계, 기술적
요소들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우가 많은데, 저자는 이에 반박한다. 왜냐하면 근대적 무기의 출현이 유럽에서가 아니라,
중국에서 발생한 것이었으며, 총포의 전파시기 초기에 인도, 중동, 아메리카 인디언, 일본 등도 총이라는 새로운 무기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성이 있었으므로, 기술력 그 자체는 크게 변별력이 없던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군사력의 강약은 문화, 조직력 등의 요소에서 변별력이 생기는데, 이에 저자는 유럽의 호전적인 성향이 유럽 군사혁명을
촉발하는 요인으로 작용했다고 본다. 유럽의 전쟁은 다른 지역의 전쟁과는 다른 양상을 띄는데, 그것은 바로 총력전의
개념이라고 한다. 승리하기 위해 모든 자원을 투자하는 유럽의 성향이 유럽은 공세적, 다른 세계는 수세적인 입장을
취하게 만들었고, 그로인해 미약하게나마 유럽으로 누적된 편익이 쌓여 결국 군사력의 차이가 벌어졌고 서구중심의
패권구조가 형성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유럽의 전쟁은 주로 유럽본토에서 발생하지 않고 유럽외의 지역에서 벌어졌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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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점에서 유럽의 평화는 세계의 전쟁과 함께 생각되어져야 할 것을 저자는 말한다.
제 5장에서는 귀금속과 화폐의 세계적 유통을 분석하였다. 세계가 긴밀하게 연결되고 그 과정에서 새로운 경제적,
정치적 구조가 짜여질 때, 이것을 원활하게 만들어준 윤활제 역할을 한 것이 귀금속과 화폐임을 설명한다. 세계적 화폐
유통구조의 형성은 단순히 상품과 서비스의 유통확대로 바라보는 것 보다, 더욱 큰 차원의 틀에서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함을 말한다. 화폐가 상품을 사고 팔기 위해 교환의 대가로써 가치를 갖고, 상품유통을 원활하게 하는 표면적인
기능으로 인해 중립적인 매개 수단인 것만은 아니며, 화폐의 유통은 세계 각 지역의 문호를 열게끔 하고, 세계의 주류
경제구조에 편입시키는 강제력으로 작용했음을 저자는 말한다.
제 6장에서는 근대 세계사에서 가장 극단적이고 가장 대규모로 폭력이 드러난 부분인 노예 무역을 중심으로 다룬다.
유럽 대륙이 신 대륙의 문명권을 억압하고 그 자리에 그들의 구상대로 새로운 사회를 만드는 과정에서 아메리카
인디언과 인디오들에 대한 대규모 학살이 일어났고, 아메리카에서의 부족한 노동력을 충족하고 유럽인들의 기호품들의
공급을 만족시키기 위해서 머나먼 아프리카 대륙에서 흑인 노예들을 끌어다가 강제 노역을 시켰다. 저자는 근대 세계
발전 이면에 숨겨진 어둡고, 비인간적인 구조적 측면에 대해 말하며, 근대 세계의 형성이 큰 억압과 희생 위에
구축되었다는 점을 역설한다.
제 3부 ‘세계화, 지역화된 문화’ 에서는 세계화와 지역화가 동시에 일어나는 근대 세계에서 사람들의 삶과 문화가
어떻게 변화했는가를 살펴본다.
제 7장은 세계화가 진행되면서 가속화된 생태 환경의 변화를 분석하였다. 세계화는 단순히 인간의 세계에만 한정된
일이 아니다. 이 장에서 저자는 생태 환경의 변화가 근대 해양 팽창의 결과 중에 가장 영향력이 큰 사건일지도 모른다고
말하며, 생태 환경 변화의 중요성을 역설한다. 사람들의 의도한 결과일수도 아닐 수도 있지만, 유럽지역의 병원균이
해상팽창을 통해 다른 지역으로 전해졌을 때의 발생한 참혹한 결과를 포함해, 외래종의 동식물로 인해 세계 각 지역의
생태계가 교란되는 것에 대해 말하며, 현재의 우리가 살아가는 생태 환경이 현재 상태로 만들어진 이유에는 15세기의
해상팽창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음을 말한다.
제 8장에서는 종교의 전파를 다룬다. 세계 각 지역의 상호 소통이나 지배라고 할 수 있는 것은 물질적인 차원으로만
한정지을 수 있는 일이 아니며, 인간의 심층적인 내면 요소들 역시 서로 교환되고 서로 영향을 미쳤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에 유럽을 가장 대표할 수 있는 종교인 기독교가 세계 각 지역으로 전파되면서 불러일으킨 정신적, 사회적 충격에
대해 다루며, 그 종교현상의 충격이 현재의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약하지 않고 매우 강력했음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유럽의 기독교전파는 흔히 국가기구가 앞장서고 무력을 동원한 일이었으며, 이로 인해 더욱 강렬해진
기독교의 충격은 세계 여러 지역의 사람들의 정신문화와 사회 구조변화에 끼친 심대한 영향에 대해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제 9장은 중요한 문화 현상으로 언어, 음식, 과학 기술 등 세 가지 분야를 추려서 살펴본다. 먼저 저자는
언어에 관해서 오늘날의 세계 언어의 판도가 형성된 이유로써 유럽 국가들의 해상팽창이 매우 중요했음에 주목한다.
문명의 접촉과정에서 다른 세계에 대한 지배구조를 형성하는데 단일 언어의 사용은 중요하였고, 또한 기독교와 같은
정신문화를 전파함에 있어서 언어를 습득하는 것은 중요하였다. 이에 전 세계 대부분의 언어는 소위 강대국이라 말할 수
있는 중국, 인도 및 서구권 국가들을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또한 음식물의 전파도 사회 변화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한다. 중요한 사례로는 중국의 인구 증가를 제시한다. 중국의 인구는 현재에도 세계 인구의 1/5을 차지하는데
신대륙에서 전파되어온 고구마, 감자 등의 작물이 중국의 인구 증가에 크게 기여했다고 저자는 말한다. 또한 설탕, 후추,
코코아 등의 맛이 유럽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설명하며, 음식물역시 사회 변동을 유발하는 요인이었음을 말한다. 또한
과학기술의 전파는 사회변동에 큰 영향에 주었지만, 근대 세계가 유럽의 뛰어난 과학기술을 중심으로 발전했다고
생각하는 것은 안 된다고 저자는 말한다. 무엇보다도 12세기에 유럽으로 전파된 나침반, 중앙타, 풍차와 14세기에 전파
된 화약과 인쇄술을 보았을 때, 유럽이 과학기술면에서 앞섰다고 보는 것은 어렵다. 다만 과학기술의 개발보다는 그것을
받아들이고 어디에 사용했는지가 중요했다고 저자는 말하면서 책을 마무리한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이 제시한 사회변동을 바라보는 첫번째 관점은 문물교류는 중요하다는 것이다. 문물교류를 통해
다양한 문화, 기술, 상품들이 교환되었고, 이를 생산한 문명보다 이를 수용하는 문명은 새로이 받아들인 문물에 큰
충격으로 받을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더 창의적인 응용이 가능하며, 문물을 수용한 문명에게 새로운 전기를 마련할 수
150
있도록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인쇄술, 화약과 총기 등의 뛰어난 기술이 중국에서 발명되었음에도 몇 세기의
역사동안 중국은 세계를 대상으로 유럽과 같은 지배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앞서 서술한대로 라고 생각된다.
다양한 문물이 세계 각지에 유통되지만 그 사용처가 어딘지에 따라서 성패가 갈리는 것이다. 인쇄술이 발달했음에도 글의
전파는 하층민들한테는 어려웠을 것이며 글이란 것이 지배계급의 전유물로써 여겨졌기에 사회 전반적으로 글을 통해
지식을 재생산할 수 있는 인프라가 제대로 구축될 수 없었을 것이다. 화약과 총기의 경우에도 총기를 개발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효용성을 극대화하기 위한 노력을 하려 했더라면 중국이 근대 세계의 패권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이 책이 제시하는 또 하나의 핵심관점은 인간은 본디 폭력적이라는 것이며, 폭력성은 욕망을 충족시키면서 사회변동을
유발한 중요한 요소라는 것이다. 먼저 대항해시대의 주요 동인이 인간의 생존에 는 별로 쓸모가 없는 후추를 얻기
위함이었다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과정이 사회변동을 일으켰다고 볼 수 있다. 후추의 자극적인 맛과
향신료로써의 기능은 유럽 귀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후추의 가격은 금의 가격과 비례할 정도로 상승했다. 후추는
본래 식료품으로써의 기능을 뛰어넘어 귀족계급의 사치품으로 사용되었다.
자신들의 영토에서 얻을 수 없는 진귀한 상품에 대한 갈망은 유럽인들로 하여금 바다 밖으로의 위험한 항해에
도전하게 하는 이유가 되었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가는 인도항로의 개척과 콜럼버스의
아메리카대륙 발견이 결과적으로 유럽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의 패권구조를 만들 수 있었다는 점에서 인간의 욕망은
의도했건, 의도하지 않았건 매우 중요한 사회변동요인으로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 인간은 폭력성을 표출해
욕망의 해소를 구조화하려 하는데,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로 대변되는 서구열강들이 폭력수단을
대동하여 바다에 나갔고, 바다를 통해 세계를 지배하려고 했다. 서구열강의 해상함대가 폭력성과 결합하는 것은
필연적이었다. 왜냐하면 태생적으로 낯선 것을 보면 모두가 꺼려하고, 두려워하듯이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외해에서 살다
온 인간집단과의 대면적인 접촉과 교류가 쉬웠을 리가 없다. 이에 상대방의 문호를 강제로 개방시키고, 자기집단의
의지와 욕구를 관철시키기 위해 상대방을 칼과 총 앞에서 굴복시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마지막으로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이 제시하는 핵심관점은 무역 역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중요한 수단이라는
것이다. 제 1장에서 서술했듯이 바다를 통한 문명교류는 육지를 통한 문명의 교류보다 더욱 먼 거리에 있는 문명끼리의
접촉을 가능케 했으며, 문물을 생산지에서 수요지로 옮기는 데 있어서 효율성이 훨씬 컸다. 먼 거리에 있는 문명의
교류는 더욱 강렬한 충격일 수밖에 없고, 이에 선박을 통한 수송은 효율성 까지 좋으니, 선박과 항해가 사회변동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클 수밖에 없다. 이에 바다의 패권과 무역을 할 수 있는 함대를 가지고 있는 집단은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기반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욕망은 돈이라는 수단을 통해 발현될 수 있는데, 세계적으로
중대한 사건들의 촉발이유가 돈과 관련된 이유가 많다. 그 만큼 돈 역시 인간의 사회변동에 있어서 주요한 요인인데,
여기서 무역을 핵심관점으로 삼은 이유는 무역은 돈을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이 돈을 원하기 때문에 세계의
돈을 좌지우지 할 수 있는 집단이 세계패권을 쥘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열강들이 세계 패권을 쥘 수 있게 된
이유는 그들이 바다에 대한 지배력을 행사하면서 각 지역을 잇는 무역으로써 막대한 부를 창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바다와 무역은 단순히 바다를 건널 수 있는 기술의 진보했다거나, 전 세계적 상품의 교류를 가능하게 했다는
한정적인 틀에서만 바라봐서는 안 된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먼저 문명교류의 관점에서 보자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되어서는 발전할 수 없다. 모든 문명은 그 문명자체의 힘만으로는
발전할 수가 없다. 물론 문명의 태동 그 자체는 자연적 시련에 대항하기 위한 응전의 과정이었을지라도, 문명의 발전
자체는 타 문명과의 교류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그것이 단순한 문물이 전파이던지, 전쟁과 약탈과 같은
폭력이었는지에 상관없이 문명의 교류는 타 문명에 대항할 수단을 강구하도록 하도록 하였으며, 또한 전파된 문물을
응용하여 더 나은 사회를 만들도록 노력하는 과정이었다. 쇄국정책으로 자유로운 문물교류를 거절함으로써 중대한 실패를
맛본 중국의 사례와 비교해 많고 다양한 접촉이 있었던 사회가 주도권을 잡고 더 발전할 수 있었음을 볼 수 있기에
인간사회의 발전사는 문명의 접촉과 궤를 같이 한다고 봐도 무방하다.
다음으로 폭력성의 관점에서 인류의 역사를 보자면, 인간의 역사자체가 폭력을 통해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고
욕망을 충족시키려는 역사였다. 고대에는 문명을 약탈하기 위한 야만인들의 약탈 전쟁이 부지기수였고, 인간에 대한
박애로써 태동한 기독교조차도 그 교리 아래에서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다. 또한 전쟁을 통해 패전국으로부터 수많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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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들이 끌려왔으며, 책에 언급되었듯 바다로의 항해를 가능하게 한 내적 추동력을 얻기 위해 납치와 고리대금을 통해
강제적으로 선원들의 모집하였다. 이렇듯 인간의 역사와 폭력성은 뗄 수 없는 관계이다. 하지만 이러한 폭력성을 통한
전쟁이나 노예제는 인간으로 하여금 사회 안정을 꾀해 차후의 사회로 발전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주기도 하였고,
괄목할만한 과학 기술들을 발전시키기도 하였다. 폭력성의 발현이 사회변동을 유발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무역의 관점에서 본다면, 인간은 자신의 결핍을 무역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다. 폭력성의 관점에서는 이를
약탈하려했겠지만, 인간은 서로 주고받는 물물교환부터 조개를 화폐로써 사용하고, 더 나아가 어떤 금속의 가치를
부여하는 식으로 거래의 양식을 간편화하였다. 그 결과로 서로 다른 집단 간의 거래를 촉진시키는 역할을 할 수 있었고,
다른 동물들과는 다르게 인간은 자신들의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효율적인 장치를 얻을 수 있었다. 인간은 외부에
있는 문물을 자신의 사회로 들여옴으로써 욕망을 창조하기도 하였다. 해외로부터 온 낯선 것은 대개는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매력적인 것이었으며, 그렇기 때문에 무역은 인간의 욕망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다시 창조된 욕망을
해소하는 장치로써 두 가지 역할을 하였고, 인류의 역사에서 사회변화를 유발하는 매우 중요한 요인 중 하나가 될 수
있었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먼저 문물 교류의 관점에서 보자면, 현대의 사회가 세계화 추세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물리적 세계에 대해
한정되었다고 생각한다. 이동수단의 발달로 세계 어디든 하루면 갈 수 있는 현대사회이다. 하지만 각 사회의 기저에 있는
문화적 측면에서의 교류는 더욱 더 활성화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거리가 가까워졌다고 해서 그들을 완전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다른 문명과의 접촉에 필요했던 노력이 줄어들고, 쉬워진 접촉만큼 더 많은 문물이 교류되었지만,
이에 모든 것을 안다고 착각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물리적 거리와 수 만년의 시간동안 각 사회는 독자적인 양상을
구축했고 서로 좁히기 힘든 간극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타 문명을 잘 안다는 착각은 사회발전에 영향을 줄 수 있는
힌트에 대한 접근을 차단할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앞으로의 세상은 문물교류에 적극적인 국가가 주도권을 쥘 수 있을
것이다. 다양한 문화에서 오는 양상이 어느 사회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폭력성, 무역을 묶어서 생각해보자면, 국가의 경제력은 곧 국가의 군사력이 된다. 현대의 사회가 이성과
인간성에 대해 그 어느 시기보다 많은 생각을 하지만, 국가 간의 무장력을 강화시키는 것만 보더라도, 인간은 언제나
전쟁을 대비하고 있다. 전쟁을 해선 안 된다고 외치면서도 전쟁을 대비하는 모순이 있는 것이다. 군사력은 앞서 말했듯
자신의 의지와 욕망을 상대에게 관철시키기 위해서 사용된다. 그 욕망에 중심에는 돈이 있으며, 돈의 흐름은 무역을
통한다. 무역은 경제력의 상승을 동반해 다시 군사력 팽창에 기여함으로써 욕망과 무역, 폭력성의 순환구조를 만들어
낸다. 때문에 앞으로의 사회 역시 이전의 사회가 그래왔듯이 바다의 패권을 쥐는 국가가 주도권을 쥘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도 대부분의 무역은 바다를 통해 이뤄지고 있고, 무역을 쥔 국가는 군사력을 강화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중국이 막대한 무역을 통해 G2의 자리까지 올랐지만, 더 앞선 군사력으로 미국이 남중국해를 압박해 중국을 제지하려는
이유도 바다의 패권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이 것 뿐만 아니라 해양력을 확장하기 위한 각국의 각축전은 다양한
곳에서 현재진행형이다. 북극의 빙하가 녹음으로써 생긴 북극항로에서 최대의 편익을 얻기 위한 국가들의 각축전이
있으며, 동아시아의 해양영토갈등 역시 두 말할 필요가 없다. 차기패권을 누가 가져갈 수 있는지를 보기 원한다면 바다에
주목해야 한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이 책을 통해 인간은 문명교류를 통해 사회를 발전시켰음을 알 수 있었다. 또 문명교류의 결과로써 생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폭력성이 현재의 사회구조를 만들어내는데 주요한 역할을 했으며, 무역을 통해 그것이 가속화될 수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를 종합적으로 보았을 때 나는 인간의 욕망을 지배할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주인이 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것이 기존부터 있었던 것이든 새로 창조된 것이든 간에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해선 인간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인간은 식욕, 성욕, 수면욕의
욕구를 가진다고 전해지지만, 이외에도 창조된 많은 욕구를 느낀다. 같은 기능과 디자인의 신발을 갖고 있음에도 색깔이
다르면 구매욕구를 느끼는 마니아들이 있는 것처럼, 인간의 욕구는 창조될 수 있다. 인간의 욕구는 사회적 맥락에 따라
달라지는 것으로 사회의 흐름을 잘 보아야 한다. 현재 인간이 어느 부분에 욕구를 느끼는지, 앞으로는 어떤 욕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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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끼게 될지, 더 나아가 어떤 욕구를 창조해야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이 필요한 것이다.
또한 인간은 본디 폭력적인 동물이라는 통찰을 얻었다. 인간은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폭력적일 수 있다. 폭력적 수단인
전쟁이나 노예제 등을 통해서 사회변동이 촉진된 부분이 많다. 현대에 와서는 인간성에 대한 논의가 많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발전한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큰 자만이라고 생각된다. 우리사회의 발전여부는 상대적인 것이기 때문에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현재사회의 상태도 원시적이라 느껴질 수 있다. 때문에 우리가 첨단을 살아가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낙관적이어선 안 된다는 것을 느꼈다. 이러한 통찰을 얻었다고 한 이유는 현재의 우리의 삶을 알아야 더욱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인데, 가장 중요한 것은 현재의 나 역시도 나를 노예로 만드려는 폭력적 구조 아래 놓여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이에 우리가 폭력적 역사 속에서 발전해왔고, 지금도 폭력성을 가졌다는 것을 인지해야만 적어도 의식적
측면에서 다음 사회변동으로의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것을 느꼈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A. 토인비 ‘역사의 연구’] : 문명의 발전과정을 시련과 응전의 과정으로 설명한 책.
[E. 울프 ‘유럽과 역사 없는 사람들’] : 서구중심주의적 역사기술을 부정하고, 지구사적 측면에서의 역사서술을
필요성을 강조한 책.
[주경철 ‘문명과 바다’] : 이번에 다룬 책인 ‘대항해시대 - 해상 팽창과 근대 세계의 형성’의 하위호환급의 책으로써
보다 적은 내용을 담고 있지만, 간편하게 읽기에는 보다 좋은책
[CCTV 다큐멘터리 대국굴기 1-4부], [EBS 다큐멘터리 ­ 강대국의 비밀 2, 4부], [KBS 다큐멘터리 ­ 바다의
제국 1-4부’] : 세계 역사의 흐름을 바다라는 키워드를 통해 알아본 다큐멘터리
10. 종합결론
나는 사회변동의 요인을 항해라는 키워드를 통해 알아보려고 했지만, 사실 항해를 통한 사회변동은 그 안에 더
세부적으로 나뉠 수 있는 변동유발요인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즉 항해는 다양한 사회변동요인의 매개체였던 것이다. 그
첫 째는 문명교류로써 각 사회는 문명교류를 통해서 사회변동요인을 수입하기도 하였으며, 다른 사회로부터의 유입된
색다른 욕망을 품음으로써 사회변동을 유발시킬 수 있었다. 두 번째는 폭력성으로써, 욕망이 해소되기 위해 폭력의
형태로 사회변동이 가능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세 번째는 욕망의 해소로 무역이라는 방법을 쓴 것인데, 이 방법이
앞선 폭력성과 결합함으로써 세계 패권의 무게가 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었다.
그로부터 나는 인간의 욕망을 쥘 수 있는 것이 세상의 주인이 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일임을 알 수 있었다. 기존의
욕망을 쥘 수 없다면 새로운 욕망을 창조해낼 수 있는 혜안이 가질 수 있는 역량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꼈다. 또 하나는
인간은 본디 폭력적이기 때문에 인간, 특히 기성세대를 쉽게 믿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결국 인간은
폭력성을 통해 현재의 사회구조를 형성했지만, 현재 인간은 인류역사상 자신들의 이성적으로 뛰어나다는 오만아래서 이
사회시스템이 폭력성의 기반에서 세워질 수 있었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현대 사회가 폭력성에 위에
세워진 사회구조를 직시해야 한다고 느꼈다. 왜냐하면 우리가 왜 우리가 되었는지를 알아야 다음 사회로의 논의가 가능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이름 : 김성두
학과 : 사회학과
학번 : 2012104393
간략한 자기소개 : 1993년 11월 6일 생으로 경기도 남양주에서 22년간 살아오다, 작년에 서울 관악구에서 생활하게
되었습니다. 2012년에 경희대 사회학과에 입학하였고, 2013년 4월에 군 입대 후 2015년도 1월에 병장만기
제대하였습니다. 현재 정경대 야구동아리 구리스에서 활동하고 있으며, 술도 좋아하고, 놀기도 좋아합니다. 교수님 수업을
듣고 노예가 되지 말아야 되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이 잘 안 잡히는 상태입니다. 그래도 노예보단
주인의 삶에 매력을 느끼며, 주인으로써의 삶을 살기위해 노력해보려 합니다.
email : rlatjden110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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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과 사회변동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 새물결 / 1999 /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 게른샤임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사회의 변동을 설명할 수 있는 요인들은 수없이 많을 것이다. 기술적 발전과 관련된 요인들 그리고 사회적 갈등,
통합의 실패, 적응의 필요성, 이념의 영향, 생산력과 생산과제의 모순 등과 관련된 요인들 말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사회
변동 속에서 우리는 어떠한 영향을 받고 있을까?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얻기 위해 나는 이 책은 선택하였다.
사랑, 결혼, 가족이라는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가장 일차적이고 친숙한 영역을 저자는 통찰력을
발휘하여 조목조목 살펴본다.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 1999년이라는 출판년도가 조금 신경이 쓰였다.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15년이 더 지난 지금, 이 책을 읽는 것이 과연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데 큰 임팩트를 줄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했던 구닥다리 사랑 이야기는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문장에 녹아 있는
저자의 통찰력과 위트는 현재를 살아가는, 그리고 미래의 독자들이 읽어도 전혀 구식으로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이 책은 읽는 이에 따라, 읽는 이의 경험과 성별, 연령, 지위에 따라 매우 다른 느낌으로 다가올 것이다. 또한 남편인
울리히 벡과 아내인 엘리자베트 벡 게른샤임의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진 이 책은 사랑에 대한 남성과 여성의 시각을 함께
볼 수 있다는 데서 큰 매력으로 다가온다. 사랑이 발명된 이후 수많은 연인들과 부부들이 그 속에서 기쁨뿐만 아니라
한숨쉬고 눈물지어 왔다.
여전히 사랑, 결혼, 가족은 대다수 사람들의 공통된 관심사이다. 다만 그것의 실현이 우리 사회에서는 매우 어려운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이 문제이다. 3포 세대라는 말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취업난, 불안정한 일자리, 천정부지로 치솟는
집값 등으로 연애, 결혼, 출산 세가지를 포기한 세대를 말한다. 현재 우리 사회가 당면한 과제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용어로 사용되었는데 이는 5포세대 즉 3포에 인간관계와 집을 추가로 포기한 세대를 거쳐 7포세대 꿈과 희망까지
포기한 세대까지 이어졌다.
요즘 TV 드라마를 보면 TV에서 아예 가족이 등장하지 않거나, 등장하는 경우에도 갈등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가족은 매우 다양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이에 어떤 사람들은 혀를 차면서 “가족이 붕괴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가족이 해체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형태로 변화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한 사회의 가족형태는 그 사회의 정치․경제․사회․문화 등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가족의 형태와 기능은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변화해 왔다. 그리고 그 가족을 만드는 결혼, 사랑 또한
변해왔다.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3. 저자소개
울리히 벡은 1944년 독일 포메른 주의 슈톨프에서 태어났다. 프라이부르크대학과 뮌헨대학교에서 법학, 사회학, 철학,
정치학 등을 수학하였다. 뮌헨대학교에서 사회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이후 뮌스터 대학과 밤베르크 대학 교수를 거쳐서
뮌헨 대학교 사회학 연구소 소장과 런던경제학교 교수를 역임하였다. 1986년 출간된 그의 저서 <위험사회>는 “제도
사회과학에 유성의 충돌과 같은 충격을 안겨준 책”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독일 바이에른 및 작센 자유주 미래위원회 위원을 역임하기도 한 그는 미래위원회 위원 활동을 통해 자신의 시민노동
모델을 발전시키기 시작하면서 정치적으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다. 2015년 1월 1일, 심근경색으로 70세의 나이에
사망하였다. 최근 저서로는 《자기만의 신 A GOD OF ONE’S OWN》, 《위기의 세계 WORLD AT RISK》, 《세계주의적
유럽 COSMOPOLITAN EUROPE》 등이 있다.
4. 책 내용 요약
울리히 벡 부부는 저서를 통해 여전히 가족이라는 개념의 핵심이 되는 부부를 중심으로 이들의 사랑, 결혼 그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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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대한 사회학적 성찰을 시도하고 있다. 벡의 ‘위험’ 개념은 현대 사회에서 ‘사랑’이 차지하고 있는 위상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는데 벡이 말하는 위험은 반드시 밖으로부터의 침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근대성의 등장으로 개인은 미리 정해진 신분적 운명이나 ‘전통’, 또는 자연적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워졌지만 이 자유는
또한 무한정의 불확실성, 타협, 선택지들 앞에 내던져질 자유이기도 했다. 전통 사회는 우리가 어떻게 행동할 것인지에
대해 엄격한 규칙과 규제들로 틀이 지워져 있었다. 그런 것들이 사라져감에 따라 삶에 주어졌던 제한은 약해지고, 선택의
여지가 늘어났으며, 선택의 가능성 또한 많아졌다. 많은 면에서 삶은 예전보다 덜 제한되고 훨씬 유연해졌다.
하지만 봉건으로부터의 해방은 개인에게 성찰성의 세계를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안전감의 토대인 확실성의 뿌리를
제거해 버리는 결과를 빚었다. 현대인은 집단 소속도, 전통도 떨쳐낸 개인인 ‘나’로서 이러한 불확실성의 세계를
항해하도록 요구받는다.
저자는 그러한 그 혹은 그녀에게 있어서 사랑은 그 자신을 정박시킬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 되었다고 말한다. 내
신분, 내 계급, 내 직장, 내 국적, 그 어느 것도 진정한 ’나‘를 보증해 주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날 때, 사랑은 나의
존재의 의미와 나의 진정한 자아를 확인시켜 줄 최후의 보루라는 것이다. 그 사랑에 실패할 때, 그 사랑이 나를 배신할
때, 그것은 나의 안전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다고 한다. 한마디로 ‘사랑’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은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불확실한 위험 사회에서 정말 사랑이 우리에게 안정과 안전을 가져다 줄 수 있을까?
수많은 선택지 앞에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선택의 기로에서 외로움과 두려움, 불안함을 느끼게 된다. 선택이란 곧 그에
따른 책임을 요구하기 때문다. 또한 선택의 순간 나 혼자라는 생각은 인간을 더욱 불안하게 한다. 따라서 현대인은
이러한 불안함과 외로움,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하며, 그럴수록 사랑에 대한 욕망은 더욱 커져 간다.
이렇게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새로운 신의 이름, 새로운 종교의 이름이 되어간다. 신이나 계급이 없더라도
최소한 그래도 ‘너’라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사랑에 대한 욕망이 커져가는 시대에서 결혼은 더
이상 자연스러운 일이 아니게 되었다. 이제는 더 이상 결혼했다는 사실 자체가 결혼의 유지를 보증해 주는 시대가 아닌
것이다.
성인 남녀는 마땅히 결혼해야 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며 아이를 낳았으면 엄마가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고
하는, ‘과거’의 결혼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결혼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고, 결혼을 했더라도 하나 하나의
단계들이 모두 의미를 부여받아야 하고 협상되어야 한다. ‘원래부터’ 그렇기 때문에 하는 것은 거의 없다. 이는 한편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한 개방성과 성찰성의 증대이겠지만 한편으로 끊임없이 위태롭고 변경되며, 어느 하나 확고한 것 없이
요동하는 몹시 피곤한 상황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현대의 사랑과 결혼의 변화는 어떠한 사회 변동 속에서 이루어졌는지 이제 조금 더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산업화 이전의 전통사회에서의 결혼은 두 사람간의 결합이라기보다는 두 가족, 혹은 두 씨족간의 결합이었다. 오늘날과
같은 의미에서 결혼 상대자를 선택하거나 사랑에 빠지거나 자신의 직관에 따르는 것은 거의 가능하지 않았다. 선택
범위는 지위와 재산, 인종과 종교 따위의 일정한 기준에 의해 미리부터 제한되어 있었고, 결혼은 가족, 친척, 지역
공동체의 네트워크에 의해 조정되었다. 사랑 때문에 결혼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결혼의 주목적은 경제 단위인 가족의
번영과, 일꾼이자 상속자인 아이를 생산하는데 있었다.
전통적 규칙에는 분명히 개인적 소망을 위한 여지가 없었으며, 그것이 가족의 소망과 다를 경우 가차없이 억압되었다.
집안의 반대속에서 사랑을 하게 된 로미오와 줄리엣은 결국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하게 된다.
하지만 그러한 규칙들이 결혼에 일정한 안정감과 지속성을 주었다는 것 역시 분명한 사실이다. 두 사람을 결합시키는
것은 가족과 지역 공동체지만 일단 결합이 성사된 다음에는 당사자들도 그것을 유지하는 일에 주력했다. 남녀가 관습과
규범을 배우고 동일한 기대치를 공유하고 가족 농장이나 상점에서 함께 일함으로써 서로 돕고, 함께 좌절과 위험, 가령
흉년이나 혹독한 겨울 등을 이겨내는 과정을 통해 서로 더욱 굳게 결속할 수 있었다.
또한
결혼과
부모되기가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하지만
이것이
옛날의
남녀가
요즘보다
더
자식을
애지중지했다는 뜻은 아니다. 전통 사회에서 아이는 경제적인 이유에서 긴요했는데, 그들은 집과 들에서 부모를
도왔으며, 나이든 부모를 돌보았고 재산을 대물림하였다. 이들에게 아이에게 일어나는 일이란 신의 손에 달린 것이었고
지나치게 감정적으로 얽혀들 여유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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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사회에서 현대의 산업사회로 변화하면서 결혼한 부부가 서로에게 취하는 태도가 달라지기 시작했다. 이전의
가족이 일을 공유하는 한 팀이었다면, 점차 감정을 공유하는 커플로 변하게 된 것이다. 가족 집단의 영향력은 상당히
줄어들고 한 평생 같이 사는 사람들의 권리는 강화되기 시작하였다. 수세기 동안 밖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던 쪽에서,
자기 마음대로 선택할 자유를 갖게 된 쪽으로 점차 그 변화가 생긴 것이다.
이처럼 ‘개인화’ 단계로 접어들게 되면서 새로이 정립된 개념으로 ‘일대기’라는 것이 있다. 개인의 일대기들은 개방적인
개인의 결정에 따라 계속 달라지며, 각 개인에게 일종의 과제로 제시되는 지극히 개인적인 사고의 틀이다.
현대 사회의 개인화는 남녀 각각에게 ‘일대기’를 부여했다. 따라서 자유로운 두 개인이 만났을 때, 서로 다른 방향을
추구하는 개인의 일대기들은 충돌하게 된다. 결국 두 일대기 사이에는 간극이 생기며 이것은 사랑하는 사람들이
능동적으로 노력해야만 메울 수 있는 것이 되었다.
설령 각자의 일대기를 조화시켜 결혼의 단계까지 갔다 하더라도 남녀를 갈라놓는 여러 가지 쟁점과 갈등은 끊임없이
발생했다.
이러한 갈등은 산업 사회의 사회적 토대라는 뿌리에서 형성된 것으로 파악해볼 수 있다. 외부 노동 시장에서 일하는
‘임금 노동자’는 가사 일과 육아 등을 살뜰히 챙겨주는 ‘가사 노동자’가 있어야만 온전히 존재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산업적인 측면 저변에는 이를 보필하는 봉건적인 측면이 존재했던 셈이다. 즉 산업사회에서의 가족도 전통사회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여성의 희생을 대가로 유지될 수 있었던 것다. 전통사회에서 산업사회를 거쳐 현대에 이르기까지
여성의 희생은 가족을 유지하는데 큰 부분으로 작용하였다.
그렇기에 여성의 일대기의 변화는 사랑과 결혼을 변화시킨 중요한 요인이다. 확대가족이 붕괴되고 대신 핵가족이
들어선 이후 점차 여성들이 맡아왔던 주된 임무인, 자녀 양육은 이제 그녀의 삶 전체에 있어서 작은 부분, 일시적인
기간만을 차지하는 일로 바뀌어 갔다.
지난 수십 년 동안 여성들을 얼마간이나마 전통적인 임무로부터 해방시키는 중요한 변화들이 있어 왔다. 무엇보다도
먼저 이제 기대 수명이 더 늘어났기 때문에 여성들의 일대기가 전과는 다른 모양을 갖게 되었다. ‘아이들 곁에
있어주기’는 일시적인 단계가 되었고, 전통적으로 여성 삶의 초점으로 간주되어 온 이러한 시기를 지난 후 평균
30~40년의 ‘빈 둥지’ 기간이 뒤따르게 되었다.
둘째 개인화 과정이 진행됨에 따라 핵가족은 가족의 독립성을 강조해 가족을 하나의 섬으로 만들며 주변의 가족들,
관계들, 이웃들 그리고 소수의 지인들과만 관계를 맺으려고 한다. 그 결과 주부는 무엇보다 고립된 노동자가 되었다.
다른 한편 자동화가 수많은 임무들을 인계받았다. 다양한 가전 제품, 기계 그리고 소비재들은 주부의 짐을 덜어주지만
동시에 주부가 하는 일의 의미를 빼앗아가 버렸다. 이제 주부의 일은 눈에 보이지도 않고 또 끝도 없이 이어지는 일련의
‘뒷마무리질’이 되어 버렸다. 요컨대 고립과 자동화는 가사 노동의 ‘탈숙련화’를 가져오고, 그 결과 많은 여성들이
성취감을 찾아 집 밖의 일을 찾아 나서게 되었다.
셋째로 모성은 여전히 전통적인 여성 역할과의 가장 강력한 연결고리지만, 여성들을 전통적 의무로부터 해방시키는데
있어 피임법과 합법적 낙태 허용이 지닌 중요성은 아무리 높게 평가해도 지나치지 않다. 이제 아이들과 모성은 더 이상
‘자연적 운명’이 아니다. 최소한 원칙상으로는 아이들은 원해서 낳는 것이고, 따라서 모성도 계획되는 것이다. 과거와
달리 아이를 원하는지 원하지 않는지, 원한다면 언제 얼마나 많은 아이들을 낳을지 함께 결정할 수 있게 되었다.
넷째 교육 기회의 평등화 역시 여성들의 취업 시장에 진입하려는 동기를 진작 시켜주었다.
이 모든 요인들, 즉 인구학적 해방, 보상받지 못하는 가사 노동, 피임, 직업훈련과 취업 기회들이 합쳐져 여성들은
적극적으로 현대의 봉건적 역할에서 느끼는 온갖 제약을 걷어내 왔다.
이처럼 낡은 질서의 붕괴와 함께 외부의 의무와 완전히 자유로운 어떤 개인적 행복이 발견된 것처럼 보였다. 이제는
더 이상 미리 정해진 기준에 따라 바깥에 있는 사람들이 남녀간의 결합을 정해주지 않게 되었다. 남성과 여성은 더 이상
가족에 복종할 필요가 없어졌고 예전보다 훨씬 자유롭게 결혼하고 싶은 상대를 스스로 결정하게 되었다.
아마 이런 상황이라면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일이 그 어느 때보다도 더 쉽고 더 만족스러울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사람들이 바로 이러한 상황으로부터 도망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사회는 대체로 사랑과 결혼을 분리하는 것이 방법이라고 말하는 것 같다. 사랑을 위한 결혼은 겨우 산업혁명이
시작되고 나서야 존재하기 시작하였으며, 따라서 산업혁명의 발명품이었다. 그러나 사회 현실과는 정반대로 사랑을 위한
결혼은 가장 바람직한 목표로 간주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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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은 안정성을 잃었지만 결혼이 부와 권력을 전하는 수단에서 단지 감정적 결합과 자기를 찾으려는 욕망에서만
자양분을 얻는 환상의 동화로 변한 결과 그것은 전혀 매력을 잃지 않았다. 사람들의 희망은 사랑에 있다. 사랑이라는 이
강력한 힘은 그 자체에 고유한 규칙에 따라 사람들의 기대, 불안, 행동, 패턴 속에 자신의 메시지를 새겨넣고, 사람들이
결혼하고 이혼하고 재혼하도록 이끌고 있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의 관심의 초점은 성적 행동의 생물학적 효과나 이것을 둘러싸고 성장해 온 대규모 사회적 제도들이 아니다. 이
책의 핵심 관점은 문화 속에 자리 잡고 있는 상징적 세계로서의 사랑이며, 이 세계가 빈곤, 출세주의, 기술적 위험, 환경
의식과 같은 다른 상징 세계와 어떤 관계를 맺고 있는가를 살펴보는데에 있다.
중세의 전사 사회나 계급 체제에서는 사랑이 일정한 역할을 했어도 주도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지만 우리가 보기에
요즘은 상황이 그 반대이며 미래에는 훨씬 더 그러할 것이다. 바꾸어 말해 사회가 번영함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계급적
고려나 기존의 권위에 그만큼 덜 구속이 되며, 사람들의 주의는 감정적 충족에 대한 열광적 추구에 집중된다.
사랑만이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믿음은 사회의 근대적 변화가 낳은 논리적인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약간
거칠게 표현하면 역사적으로 종교, 계급, 사랑이 차례로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 왔다. 물론 이것은 서열과 같은
순서를 갖고 있거나 진보같은 것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각각 나름대로의 범위를 가지면서 자체의 원리와
지평을 변화시켜 왔다는 의미로 이해되어야 한다.
삶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고 느끼는 개인들은 교회나 신의 보호나 계급을 찾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즉 자신과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으며 후원과 이해를 약속해 주는 사람을 찾는다. 물론 비동시적인 것들과
중복되는 영역들이 수없이 많지만 초점이 입장을 변화시켜 왔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저자는 역사적으로 종교, 계급, 사랑이 차례로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했다고 본다. 물론 그것이 서열과 같은 순서를
가지거나 진보같은 것을 시사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각각 나름대로의 범위를 가지면서 자체의 원리와 지평을
변화시켜 왔다는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굉장히 흥미로운 관점이다. 앞의 두가지, 즉 종교와 계급이 사회에
미친 막강한 영향은 누구나 인정할 것이다.
인류의 역사 속에서 종교는 정치, 경제, 사상, 예술, 과학 등 사회의 전 영역 속에서 기능해 왔다. 종교는 원시
시대에서 현대 사회에 이르기까지 역사의 발전과 함께 그 사회적·문화적 기능을 달리하면서 전개되어 왔는데
현상적으로만 보면, 문화와 사회의 거의 모든 영역에 관여했던 봉건 사회 이전에 비해서, 현대 사회에서 종교는 그 활동
범위가 좁아졌고, 종교 본래의 영역에 한정되어 온 경향이 있다.
계급 또한 사회 변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주제이다. 마르크스주의에 따르면 역사에서 특정 단계는 그 때의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의해 규정이 된다. 생산수단의 소유 여부에 따라 계급이 생기고 그에 따라 각자의 역할이 정해지는데 이 때,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 그리고 착취와 피착취의 관계가 생긴다. 따라서 서로 대립하는 계급의 존재가 사회의 구조를
만들어 나간다는 것이다. 노예제 사회에서는 주인과 노예의 관계로, 봉건제 사회에서는 영주와 농노의 관계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라는 관계로 대립하는 두 주요 계급에 의해 사회는 발전해 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저자가 말하는대로 ‘사랑’이 종교와 계급을 잇는, 역사를 관통할 수 있는 하나의 큰 흐름이 될 수
있을까? 여기서 말하는 사랑의 의미는 단순히 유년기 초기에 겪은 개인적인 반응과 체험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삶을 틀지우고 있는 사회 구조들, 즉 노동 조건과 생활 조건, 가족의 이상, 성 역할에 대한 고정 관념,
그리고 사람들의 개인적 욕구와 소망을 조직하고 방향을 잡아주는 가치들과 같은 사회 구조들을 포함하고 있다.
사랑은 유토피아이다. 그러나 위로부터 또는 문화적 전통이나 설교로부터 만들어지거나 설계되는 유토피아가 아니라
아래로부터, 성적 충동의 힘과 지속성으로부터 그리고 개인의 깊은 소망으로부터 자라나는 유토피아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사랑은 외적 의미와 전통에 방해받지 않는 종교이다. 옛날에 법을 부여하던 것들, 즉 교회, 국가, 계급, 전통적
도덕이 물러나게 되면서 사랑까지도 옛날의 표준적인 패턴과 확립된 규약들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되었고 그 결과 개인적
선호도와 가치로부터 규범을 만들어내는 일종의 실증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렇게 사랑을 고귀하고 신성한 것으로 여기게 된 것은 단지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도취되어 있기 때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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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약간 돈 것처럼 사랑의 광란으로 빠져드는 이유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또한 교육, 과학의 진보,
세계 시장, 기술적 위험처럼 전혀 다른 영역 또한 함께 탐구해 보아야 할 것이다. 외부 세계는 통계, 수치, 공식 등
추상물이 둘러싸고 있는데 이 모든 것은 우리가 얼마나 위험에 처해 있는지를 알려주지만 이것들 중에서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다. 따라서 사랑은 일종의 반란으로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막연하고 이해할 수 없는 존재에 저항할
수 있는 힘과 접촉하는 방식 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사랑은 의심에 대한 우리의 대안이다. 즉, 우리는 사랑 속에서 안정을 찾으려고 한다. 19세기에 사랑은 비합리적인 것,
부르주아 규범과 반대되는 것, 불확실하고 외래적인 것으로 상징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은 정반대이다. 옛날에는
사랑이 사회적 관습의 압력 때문에 무너지거나 불타올랐다면 지금 사람들은 사랑하는 관계가 적대적인 세계로부터 몸을
숨겨줄 수 있으리라고 믿고 있다.
우리 시대의 사랑은 탈전통적이고 비전통적이며, 이제 도덕적 또는 법률적 의무에 의해서는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게
된 성적 욕망으로부터 스스로의 규칙을 만들어 내고 있다. 자유로운 의사와 상호 동의가 사랑을 인도하는 별들인 이상
사랑은 제도화되거나 규약화될 수 없으며 또는 어떤 일반적 의미에서도 정당화 될 수 없다. 다른 식으로 표현하면, 더
이상 설교의 힘을 잃어버린 종교가 곧 사람들의 생각에 대한 모든 영향력을 잃은 반면, 성직자 없는 종교가 된 사랑은
성적 매력의 힘을 바탕으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것이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삶이 산산이 부서지고 있다고 느끼는 개인들은 교회나 신의 보호나 계급을 찾지 않는다. 그 대신 그들은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즉 자신과 같은 세계를 공유하고 있으며 후원과 이해를 약속해 주는 사람을 찾는다. 물론 비동시적인 것들과
중복되는 영역들이 수없이 많지만 초점이 입장을 변화시켜 왔다. 저자는 현재의 초점을 ‘사랑’에 맞추고 있다. 그렇다면
그 사랑이 미래에는 어떻게 변할 것이며 그것은 세상에 어떠한 영향을 줄 것인가?
오늘날까지도 사람들을 불안과 흥분에 빠뜨리고 있는 사랑의 유토피아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 것인가? 사랑을 둘러싼
견해의 대립은 더 이상 사생활 영역에 한정되지 않고, 점점 더 토크쇼와 인터넷 공론장, 중앙정부 부처, 정당, 의회,
정부로 확산되고 있다. 근거리 사랑을 넘어 이제는 장거리 사랑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 2010년 미국 역사상 최초로
결혼한 부부로 이루어진 가구가 전체 가구의 절반에도 이르지 못하였다. 1950년에는 74%에 이르렀던 이 비율이
2010년에 와서 48%에 불과했다. 뿐만 아니라 전통적 가족의 비중은 전체 가구의 1/5에 불과하였다. 1950년에는
43%를 차지하였는데 말이다.
전 세계적으로 가파른 출산 감소가 기록되면서 인구유지뿐만 아니라 정치 권력과 경제력, 문화적 정체성까지 위협
받았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혼인율이 감소하는 반면 이혼율은 급상승하고 있다. 이러한 경향을 여론에서는 사랑이
중단되고 활력 또한 상실했음을 보여주는 징후라고 평가하고 있다.
출산율 감소, 혼인율 감소, 장거리 사랑 비율 증가에 따라 정당들은 곧바로 그에 대응하는 여러 대책을 내놓고 있다.
앞서 말한 7포세대를 위해 한국 정부가 ‘집단 미팅’을 주선하겠다는 웃지 못할 대책을 내놓기도 하였다. 지난 10년간
120조원을 쏟아부었지만 지난해 한국의 출산율은 1.21명으로 여전히 세계 꼴찌 수준이었다. 이 통계를 보면서 “내가
우리 나라의 미래를 위해서 사랑을 하고 가족을 만들어 아이를 낳아야겠구나!”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젊은 부부들에게 출산은 득보다 실이 많다고 여겨지고 있다. 또한 결혼은 커녕 연애조차 포기하고
살아가는(그것이 자발적 포기이든, 비자발적 포기이든) 수많은 젊은이들이 있다. 이러한 사회의 변동 속에서 새로운
가족의 형태가 나타나고 있다. 가족의 모습은 사회 형태에 따라 적합한 방식으로 변화하는 것이고 이런 점에서 현재의
가족은 새로이 구성되는 과정에 놓여 있는 것이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고 가족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은 사회가 되어 가고 있다. 이러한 가족의 변화를
바라보는 관점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것을 가족의 해체로 보든 새로운 가족의 출현으로 보든
말이다. 그러나 변치 않는 한 가지가 있다. 가족의 모습이 어떠하든 가족간의 유대와 신뢰는 더 강화되고 정서적인
안정은 더 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미래에 ‘지속 가능한 사랑 윤리위원회’가 결성되고 각국에서 해당 기구를 설치할지도 모른다고 바라본다. 이
위원회는 역사적으로 여러 기구가 그랬던 것처럼 두 진영으로 갈릴 것이다. 한 진영의 논리는 장거리 사랑을 통해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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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결이 가능하다는 입장이고 다른 진영은 그 반대의 관점이다.
저자는 다른 저서에서 장거리 사랑과 세계 가족이라는 개념을 제시하는데, 이것은 국가, 종교, 문화, 인종 등의 경계를
넘는 사랑과 가족이다. 지배적인 규정에 따르면 함께 속하지 ‘않는’ 것이 거기에는 함께 속한다. 미리 주어진 전통이라는
구속력 대신 ‘적극적인’ 신뢰가 들어서고, ‘낯선 타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된다는, 관습적인
생각에 따르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장거리 사랑과 세계가족에 대한 시대 진단적 이론은 탈보편주의적이고 탈구성적으로 구성되었다. 맥락에 대한 고려
없이 사랑과 가족을 이해할 경우 잘못된 일반화의 오류로 빠질 수 있다. 결론적으로 말해 사랑과 세계가족의 지극히
다양한 형태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이해방식도 존재해야 할 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봉건으로부터의 해방은 개인에게 성찰성의 세계를 열어주었지만 동시에 안전감의 토대인 확실성의 뿌리를 제거해
버리는 결과를 빚었다. 현대인은 집단 소속도, 전통도 떨쳐낸 오롯한 ‘나’로서 이러한 불확실성의 세계를 항해하도록 요구
받는다. 그러한 그/그녀에게 사랑은 그 자신을 정박시킬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내 신분, 내 계급, 내 직장, 내 국적,
그 어느것도 진정한 ‘나’를 보증해 주지 못하는 것으로 판명날 때, 사랑은 나의 존재와 나의 존재의 의미와 나의 진정한
자아를 확인시켜 줄 최후의 보루이다. 그 사랑에 실패할 때, 그 사랑이 나를 배신할 때, 그것은 나의 안전을 뿌리부터
흔들어 놓는다.
어떤 이는 이에 대해 깊은 공감을 표할 것이고 어떤 이는 크게 공감하지 못할 것이다. 과연 다른 사람으로부터 진정한
‘나’를 보증 받을 수 있을까? 이에 대한 질문에 진정한 사랑(본인이 생각하기에)을 해본 사람들은 답을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 사람들에게 자신의 삶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느낌이 언제 가장 절실하게 다가왔는가 묻는다면 그들은 ‘정말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을 상처 입혔을 때’라고 말할 것이다. 가장 사랑했기 때문에, 가장 가까웠기 때문에, 가장 자신의
일부였기 때문에 말이다.
그렇게 상처 입었던 사람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새로운 사랑을 찾아 나선다. 그리고 이번에는 그 사랑이 ‘진정한
사랑’이 되기를 소망한다. 진정한 사랑을 찾는 과정도 독특한 통찰력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수십년을 서로
다른 배경을 가지고 살아왔던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를 떠올려보자. 남자는 여자를, 그리고 여자는 남자를 파악하기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을 총동원한다.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인지, 그리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느끼고, 생각하고, 추론한다. 하지만 이는 결코 쉽지 않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알기
어렵다’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상대방을 알아 가는 과정 속에서 연인들은 서로를 다르게 보고, 그래서 달라지고 다르게 되어 서로에게 새로운 현실을
열어준다. 각자의 역사/이야기를 드러내는 가운데 연인들은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미래를 새로운 모습으로 그려나간다.
사랑은 ‘두 사람을 위한 혁명’이다.
사랑은 자기 자신을 찾는 것이자 진실로 나와 네가 접촉해 몸을 나누고 생각을
나누며 뒤에 아무것도 감추지 않고 서로가 만나 고백하고 용서받으며 과거와 현재를 이해하고 확인하며 후원하려는
갈망이다.
또한 이는 가정에 대한 갈망이자 현대 생활이 낳는 의심과 불안에 대항할 수 있는 신뢰에 대한 갈구이기도 하다.
아무것도 확실하거나 안전하지 않다면, 심지어 오염된 세계에서 숨쉬는 것조차 위험하다면 사랑이 모든 것을 해결해줄 수
있으리라는 잘못된 꿈을 꾸게 되는 것이다.갑자기 이러한 꿈이 악몽으로 뒤바뀌더라도 우리는 다시 꿈을 꾸는데 주저하지
않는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장거리 사랑 / 새물결 / 1999 / 울리히 벡, 엘리자베트 벡 게른샤임
《사랑은 지독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혼란》의 속편으로 나온 《장거리 사랑》은 세계화, 지구화속에서 점점 더
혼란스러워 지고 있는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주변에서 쉽게 외국인과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볼 수 있고 국제
결혼 또한 점점 증가하고 있는 추세이다. 기러기 아빠의 이야기는 이제 그렇게 슬픈 이야기가 아니게 되었고 평범한 한
가정의 모습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장거리 사랑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사람에게 혹자는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수년간 매일 매일 반복되는 근거리 싸움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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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더 힘들겠어?” 과연 장거리 사랑과 단거리 사랑은 어떤 차이를 가지고 있을까? 저자는 국제 결혼 부부, 결혼 및
노동 이주, 대리모 출산, 그리고 스카이프를 통한 애정관계가지 수많은 종류의 장거리 관계를 고찰하고 있다. 과거의
‘정상 가족’이라 불리우던 가족들의 위기 속에서 ‘세계 가족’이라고 하는 새로운 가족이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세계 가족이란 국가, 종교, 문화, 인종 등의 경계를 넘어 함께 사는 가족이다. 지배적인 규정에 따르면 함께 속하지
‘않는’ 것이 거기에는 함께 속한다. 미리 주어진 전통이라는 구속력 대신 ‘적극적인’ 신뢰가 들어서고, ‘낯선 타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된다는, 관습적인 생각에 따르면 절대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일국가족에서 세계가족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문화에 대한 이해 또한 바뀐다. 세계가족의 ‘문화’라는 말 자체가
모순적이데 왜냐하면 ‘세계가족적 문화’는 하나의 전체로서 생각될 수 없기 때문이다. 세계가족은 사람들이 정치적 또는
행정적으로 나뉜 영토라는 틀에 따라 상대적으로 분리되어 있는 문화적 세계들 속에 살고 있다는 시각과는 정반대 되는
개념이다.
과연 세계가족은 보편적 개념으로 자리 잡을 수 있을까? 저자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우리가 보기에, 이질적이고
긴장이 내장된 세계가족에는 차이를 규제하는 어떠한 메타언어도 존재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가족에 대한 이해 자체가
문화적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세계가족이란 그러한 문화적 다양성을 포함하는 개념이다. 제1/제2/제3세계, 중심/주변,
서구 근대성/비서구 근대성이라는 구별을 모두 포괄한다. 이렇게 나뉜 세계들이 사람과 사생활 애정관계, 또 가족이라는
영역을 통해 전체적인 형상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세계가족이야말로 이러한 이분법의 붕괴를 경험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즉 세계가족은 그와 같은 이분법이 가장
내밀하고 사적인 핵심부로부터 붕괴하고 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또는 그러한 이분법이 새로 걸러져서 다시 연결되고
있음을 증명한다. 이런 의미에서 세계가족 자체가 이미 다언어적일 수밖에 없다. 세계가족은 구별하며 동시에 사랑하고
또 구별하며 동시에 살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한다.
오늘날 사랑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이해하려면 단순히 사랑해 대해 아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그와 함께 자아, 국경,
세계가 사랑과 어떻게 상호침투하고 겹치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 책은 사회사의 새로운 국면을 다루고 있는데, 거기서
사랑과 가족에 대한 통찰을 우리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10. 종합결론
지금 현재 우리는 사랑하고, 결혼하고, 가족을 만드는 것이 점점 어려워지는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이
세속화된 현대 사회에서 ‘사랑’은 새로운 신의 이름, 새로운 종교의 이름이 되어가고 있다. 신이나 계급이 없더라도
최소한 그래도 ‘너’라는 존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회가 번영함에 따라 사람들의 삶은 계급적 고려나 기존의 권위에 그만큼 덜 구속이 되며, 사람들의 주의는 감정적
충족에 대한 열광적 추구에 집중된다. 사랑만이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한다는 믿음은 사회의 근대적 변화가 낳은
논리적인 결과인 것처럼 보인다. 약간 거칠게 표현하면 역사적으로 종교, 계급, 사랑이 차례로 삶에 목적과 의미를
부여해 왔다고 볼 수 있다. 옛날에 법을 부여하던 것들, 즉 교회, 국가, 계급, 전통적 도덕이 물러나게 되면서 사랑까지도
옛날의 표준적인 패턴과 확립된 규약들을 벗어던질 수 있게 될 수 있던 것이다.
하지만 사랑의 결과가 곧 결혼과 출산으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다. 성인 남녀는 마땅히 결혼해야 하고 결혼하면 아이를
낳아야 하며 아이를 낳았으면 엄마가 집에서 아이를 돌본다고 하는, ‘과거’의 결혼은 빛을 잃어가고 있다. 우리는 결혼을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고, 결혼을 했더라도 하나 하나의 단계들이 모두 의미를 부여받아야 하고 협상되어야 한다.
‘원래부터’ 그렇기 때문에 하는 것은 거의 없다.
이는 한편으로 새로운 미래를 향한 개방성과 성찰성의 증대이겠지만 한편으로 끊임없이 위태롭고 변경되며, 어느 하나
확고한 것 없이 요동하는 몹시 피곤한 상황이기도 하다. 혼인율이 감소하는 반면 이혼율은 급상승하고 있으며, 이는
국가에 굉장히 큰 타격을 주고 있다. 전 세계적으로 가파른 출산 감소가 기록되면서 인구유지뿐만 아니라 정치 권력과
경제력, 문화적 정체성까지 위협 받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이 계속된다면 가까운 미래에는 ‘지속 가능한 사랑 윤리위원회’가 결성되고 각국에서 해당 기구를
설치할지도 모른다. 이것은 국가, 종교, 문화, 인종 등의 경계를 넘는 사랑과 가족을 위한 기구가 될 것이다. 이 기구가
모범 답안으로 내놓는 사랑과 가족에서는 과거의 그것과 달리, 함께 속하지 ‘않는’ 것이 거기에는 함께 속한다. 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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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어진 전통이라는 구속력 대신 ‘적극적인’ 신뢰가 들어서고, ‘낯선 타인’이 가장 사랑하는 사람이자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된다. 요지는, 사랑과 가족의 지극히 다양한 형태만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다양한 이해방식도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랑과 결혼, 그리고 가족의 변화를 바라보는 관점 중 어떤 것을 선택할 것인지는 각자의 몫이다. 그것을 해체로 보든
새로운 형태의 출현으로 보든 말이다. 그러나 변치 않는 한 가지가 있다. 그 모습이 어떠하든 그 관계에서 오는 유대와
신뢰 그리고 정서적인 안정은 더 깊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유승호, 사회학과, 2011104314, hsy5140@nate.com
복학을 한지 벌써 3학기 째이다. 점점 취업을 위한 자기소개서를 써야 할 시기가 가까워 지고 있는 중이다. 그런데
이 보고서에서는 나를 어떻게 소개하는 것이 좋을지 모르겠다. 교수님에게 나를 알리기 위해? 이 보고서를 공유할
학우들을 위해? 나는 어디에 살고, 가족은 누구이며, 성격은 어떻고, 성적은 어떠하고, 자격증은 뭐가 있고, 뭘 좋아하고,
뭘 하고 싶은지 시시콜콜 내 얘기가 궁금한 사람이 있을까? 혹시나 그런 사람이 있다면 방학 때 밥이나 한끼 먹으면서
이야기할 수 있으면 좋겠다! 아마 방학 때도 이것저것 준비하려고 회기에 남아 있을 테니 언제든 좋다. 나름 선후배들과
잘 지내고 있는걸 보면 밥 한번 먹기에 크게 불편한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연말에는 26일 이후 언제든 가능하니
연락 주길 바라며 이상 보고서를 마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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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염병과 사회변동
목차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3. 저자소개
4. 책 내용 요약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10. 종합결론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email 주소.
1.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우리는 모두 짐승이다』, 이음 ,2010, 로버트 H.욜켄, E.풀러 토리.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중동호흡기 증후군(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 메르스는 2015년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메르스는 중동의 낙타로부터 온 코로나 바이러스의 일종으로 국내 첫
확진자인 1번 환자가 업무 차 중동에서 체류 뒤, 카타르를 거쳐 5월4일 국내로 입국하며
시작되었다. 1번 환자를 시작으로, 총 186명이 확진판정을 받았고, 11월 25일 마지막 사망자가
나옴으로써 총 38명이 사망하였다. 그리고 메르스 감염자는 이제 ‘제로’로 판명되었으며,
세계보건기구의 전염병 종식 기준에 따라, 다음달 23일 메르스는 공식 종결선언을 맞게 된다.
메르스는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먼저 정치권에서는 메르스를 정부의 초기 대응 미숙과,
잇따른 고위 공무원들의 말실수, 과거 참여정부 시절의 사스 대처 능력과 비교하며 여당을 공격하는 정치 어젠다로 삼게
되었고, 박원순 서울시장의 경우 35번 환자의 행적을 공개기자회견을 통해 밝히며, 메르스 사태를 준전시상황이라는
말로
규정
지으며
정치적인
입지를
굳히려는
행보를
보였었다.
경제적으로는
메르스
사태가
한창이던
6월
소비자심리지수가 99로 떨어지면서 외식업, 문화산업 등 전반적인
외부소비가 급감하면서 수많은 자엽업자들이 위기를 맞았다. 올해
상반기 자영업자의 수는 작년 대비 10만 1천명이 감소했고, 그
중에서도 영세 자영업자들의 감소 비중이 높았다. 메르스가 서민의
삶에 큰 타격을 입힌 것이다. 사회적으로는 안전하지 못한 사회에
대한 불신이 생겨났고, 자성의 목소리가 이곳저곳에서 나타났다. 삼성
이재용 부회장은 삼성서울병원의 미흡한 메르스 대응에 이례적으로
직접 대국민사과를 하였고, 정부는 국가방역체계의 개편을 목표로
내걸었으며, 우리나라만의 독특한 간병·위문문화가 메르스 확산의
<그림1. 메르스 사태 당시 주요 포털 헤드라인>
원인으로 부각되면서 이를 개선하기 위한 노력도 나타났다.
메르스 사태의 총 인명 피해를 다시 상기해보자, 확진자가 186명에 총 사망자수가 38명이었다. 항생제가 개발되기
이전 과거에 비한다면 생각보다 엄청나게 많은 수의 피해자가 나온 것은 아니라고 보인다. 하지만, 메르스로 인해 우리
사회가 입은 피해, 우리 사회가 바꾸려고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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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존의 체계 등을 생각해보면 절대 적은 피해가 아니다.
만약에 이런 메르스가 전염병에 대한 아무런 지식과 대응책이
없던 몇 백년 전 과거에 우리나라에 창궐했다면? 지금보다 훨씬
광범위한 피해가 나타났을 것이고, 사회 전반적으로 훨씬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실제로 역사적으로 전염병은 전 세계적인
역사의 흐름을 뒤바꿔 놓을 만큼 큰 영향을 미친 요인이었다.
이처럼 우리의 역사 속에 거대한 흐름 속에는 늘 전염병이
함께였다. 또 지금 현재에도 전염병은 우리 사회의 변화에 큰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인이다. 전염병은 농업의 시작, 즉
사람들이 사회를 형성하기 시작한 시점부터 우리와 함께 해왔다.
또 전염병은 그리스 문명의 몰락, 중세 시대의 몰락, 대항해
시대의
신대륙
개척에
가장
중요
요인이었으며,
<그림2. 전염병이 영향을 미친 사건들>
나중에는
산업혁명 이후 도시위생의 발전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전염병을 사회변동의 핵심요인으로
선정하였고, 전염병을 통해 나의 통찰을 전개해보고자 하는 생각이다 . 이 책은 전염병의 역사를 통해 우리 사회가
역사적으로 어떤 변동을 겪었는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은 내가 설명해나가고자 하는 사회변동의 방향을
제시하는 길잡이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고, 이것이 내가 이 책을 선정한 이유이다.
3. 저자소개
저자 : E. 풀러 토리
저자 E. 풀러 토리(E. FULLER TORREY)는 의학 박사. 메릴랜드 베데스다 정신과 의사. 병원체가 정신분열증 및
조울증의 원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을 중점적으로 연구하고 있다. 《반역의 뿌리》를 비롯해 18권의 책을 저술했다.
저자 : 로버트 H. 욜켄
저자 로버트 H. 욜켄(ROBERT H. YOLKEN)은 의학 박사. 메릴랜드 볼티모어에서 감염성 질환 전문가이자 소아과
의사로 일하고 있다. 300권이 넘는 전문 서적을 집필했고 감염성 질환에 대한 연구로 수많은 상을 수상했다. 고양이 두
마리를 키우고 있다.
4. 책 내용 요약
오늘날의 전염병의 대부분은 ‘동물원성 전염병’이다. ‘동물원성 전염병’이란 병을 일으킨 감염체가 동물로부터 온
전염병을 의미한다. 쉽게 생각할 수 있는 예로는 모기가 병을 옮기는 ‘말라리아’를 들 수 있을 것이다. 2005년 영국의
에든버러 대학 연구진은 인체에서 전염병을 유발하는 것으로 알려진 1415개의 미생물 목록을 작성하였는데, 그중에
868개, 즉 61%가 동물에게서 사람으로 전파되는 미생물이었다. 대부분이 동물원성 전염병이라고 하는데, 61%면
적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이 1415개의 목록에는 최근 50년 안에 전파된 전염병들(에이즈, 신종플루 등)과
1만 년 전에 전파된 것(탄저병, 헤르페스 등)은 제외되었는데 이것들까지 모두 목록에 포함시킨다면 인체 감염, 즉
전염병의 3/4이상이 동물원성 미생물에 의한 것이 된다. 또한 나머지 1/4 역시 대부분은 우리의 선조 시대 때, 수렵을
하면서 그 시기의 동물에게서 전염된 전염병이 현재의 인류까지 내려온 ‘상속감염’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전염병의 대부분은 동물에게서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인류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의 시기부터 감염을 유발하는 미생물은 지구에 깊게 뿌리내려 있었다고 이 미생물들은 인류 이전의
동물들에게 감염을 일으켰으며 그 후 탄생한 인류가 생존을 위해서는 이미 미생물에 감염되어있는 동물들과의 접촉이
필연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역사 속에 기록된 전염병들과 앞으로 우리를 덮치게 될 전염병의 뿌리는 특정
동물로부터 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책은 이렇게 우리가 가지고 있는 질병, 그리고 우리가 앓게 될 질병은 동물로부터 온다는 것을 전제로,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은 다양한 전염병에 대해 소개하고 있다. 말라리아, 헤르페스, 흑사병, 천연두, 에볼라, 에이즈, 인플루엔자 등 셀
수도 없이 많은 동물원성 전염병들이 인류의 역사를 바꿔놓았고 지금 현재에도 위에서 언급한 메르스처럼 수많은
질병들이 우리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을 주지시킨다. 그러면서도 인류와 전염병은 언제까지나 늘 함께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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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반자이기 때문에 이를 슬기롭게 대처해나가기 위해서는 여러 가지 전략을 세워 잘 대처해야 함을 주지시키면서
마무리를 짓는다. 책에서 제시하는 많은 질병들이 있지만 나는 그 중에서도 아테네 역병과, 흑사병, 천연두, 콜레라가
인류 역사의 주요 전환을 이끌어 낸 질병이라고 생각한다. 6번 항목에서 책에서 소개 된 이 질병들을 통해 인류 역사의
변환과정을 바라보고 해석을 해보고자 한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 관점은 ‘파괴와 그를 통한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인류의 역사는
위에서도 계속 말했듯이 전염병의 역사와 그 궤를 함께 하고 있다. 전염병은 인간의 의지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하지만 전염병은 인류의 기존 사회를 파괴시키는 가장 큰 역할을 했고, 동시에 새로운 사회를 여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인류는 전염병에 의한 파괴를 막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행해왔고, 그 노력의 결과로 인해 세계는 더욱
발전해나갈 수 있었다. 이런 관점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 어떤 태도를 가지고 살아가야 할지에 대한 일종의
정박지를 제공해준다. 삶은 언제나 나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루에도 수많은 변수가 존재하고, 그 변수들을 모두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인류에게 전염병이 찾아온 것처럼 삶에 있어 큰 난관이 찾아올 수도 있다. 하지만 인류가
전염병을 통해 혁신을 이뤄내고 전염병을 대처하는 과정을 통해 발전을 이룬 것처럼 삶도 마찬가지로 난관을 통해
어려움을 이겨내는 법을 배움으로서 발전을 이뤄낼 수 있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4번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책에서 나온 여러 질병 중 아테네역병과 흑사병, 천연두, 콜레라 이 4가지의 인류역사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질병들을 통해 인류 역사를 해석하고자 한다.
(1)아테네역병
아테네 역병은 문헌으로 기록된 최초의 대규모 전염성 전염병이었다. 그리고 이
역병은 아테네, 즉 그리스 문명의 종말의 시발점이 되었다. 기원전 430년 경,
스파르타가 아테네에 침략하면서 펠로폰네소스 전쟁이 터지게 된다. 겁에 질린 촌락
사람들은 너도나도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아테네 성벽 안으로 몰려들게 되고, 성벽
안
많은
사람들이
만들어
내는
쓰레기와
분뇨
등으로
도시는
순식간에
쓰레기장으로 변하게 된다. 그리고 그 냄새를 맡고서 병원균을 사람에게 옮겨줄
곤충과 쥐가 모여들게 된다. 전염병이 활동하기 딱 좋은 환경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들은 사람들의 몸속으로 들어가 염증을 만들었고 피를 토하게 하거나 설사를
유발시킨다. 그래서 사람들은 열과 갈증 때문에 발가벗고 물을 찾아 거리를
뛰어다니게
되었고
그리곤
결국
거리에서,
신전에서,
심지어
우물
속에서
고통스럽게 숨을 거두게 된다. 똑같은 증상을 보이며 사람들은 점점 죽어 나간다.
아테네 역병은 아테네 인구의 1/3을 죽였고 병에 걸렸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은
손가락, 발가락, 시력 등을 잃게 된다. 이처럼 전염병은 이렇게 강력하게 역사에
등장하게 된다. 또한 전염병의 공격은 사람의 몸뿐만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까지
<그림3. 펠로폰네소스 전쟁과
병들게 했다.
아테네역병>문헌으로 기록된 최초의 전염성
전염병
아테네의 민주주의와 시민의식 몰락
아테네 역병이 사람들 사이에 퍼져 나가자, 민주주의와 시민의식을 자랑하던
아테네가 무법천지로 돌변하게 된 것이다. 사람들은 남의 것을 훔치고, 강도나 살인까지 서슴없이 저지르게 된다.
전염병이 인간의 생명뿐만 아니라 이성까지 빼앗았던 것이다. 사람들의 생활이 이러니 군대라고 재대로 돌아갈 리가
없었다. 아테네 역병이 돌기 전까지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아테네의 승리가 손에 잡힐 듯한 상황이었지만, 아테네역병이
아테네를 덮치면서 아테네의 국력과 전투력은 크게 저하되고 아테네의 훌륭한 군인이자 정치가인 페리클레스마저
역병으로 사망하게 된다. 페리클레스는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이끌어가던 인물이었는데, 전염병이 아테네의 황금시대를
닫은 셈이 된 것이다. 페리클레스의 죽음 이후 단기전으로 전쟁을 끝내려던 아테네는 이 펠로폰네소스 전쟁을 무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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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년이나 끌게 되었고, 결국 스파르타에 패배하게 된다. 이후 스파르타가 이끄는 그리스는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결국
전염병이 아테네 패배와 그리스 몰락의 결정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이처럼 고대에서 도시의 발달로 인해 나타난
전염병은 인간에게 파괴적인 영향력을 미치게 되었고 사람들은 전염병이라는 무서운 존재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고대의 전염병은 비교적 국지적인 영역에 해를 입히고는 사라지는데 이는 사람들의 교류범위가 매우 좁았고,
교통의 미비로 이동속도 또한 느렸기 때문이다.
=전염병에 대한 대책X, 비교적 국지적인 영역에서 WHY? 교류범위가 좁음!
(2)흑사병
흑사병이 창궐하기 시작한 것은 1304년대로 추정된다. 이 시기는 몽골이 유럽을
침략했을 때의 시기와 맞물리는데, 흑사병은 원래 아시아에서 시작된 전염병이었다.
그래서 몽골군이 유럽을 침략했을 때, 흑사병을 일으키는 병원균이 몽골군에게 붙어
있다가, 전쟁 중에 유럽인들에게로 옮겨 붙게 되면서 흑사병이 창궐하게 되었다.
당시 몽골군은 크림반도의 카파성을 함락시키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었는데
공격방법의 하나가 흑사병으로 죽은 시체를 성 안으로 던져 넣는 것이었다. 이런
방법을 쓴 것은 흑사병이 큰 전염성을 지녔다는 것을 몽골인들이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과정을 통해서 흑사병은 재빠르게 유럽인들에게 옮겨 가게
된다. 하지만 몽골군의 이런 전략에도 카파성은 함락 당하지 않았고. 결국 몽골군은
철수하게 되었다. 만약 이렇게 상황이 종결되었으면, 아테네 역병처럼 국지적인
지역에서만 흑사병이 창궐해서 우리가 알고 있는 것처럼 전 유럽에 피해를 입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항해의 발전, 무역의 발달로 인해 카파성안에는 이탈리아
제노바에서 온 상인들이 있었고 이 상인들이 전쟁이 끝난 후 배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과정에서 흑사병을 전 유럽에 퍼뜨리게 된다. 배가 정박했던 도시마다
<그림4. 흑사병과 봉건제도의 몰락> 유럽인구
절반의 목숨을 앗아간 전염병
흑사병이 창궐해서 사람들이 엄청나게 죽어나가기 시작했고 이런 전염병을 피해
항구도시를 떠나서 내륙으로 정착하는 사람들과 함께 흑사병도 내륙에 정착하며
활동범위를 넓히게 되었다. 결국 흑사병은 이런 과정을 통해 유럽전역을 휩쓸었고,
유럽 인구는 이 전염병으로 인해 절반가량이 사망하게 된다.
교회, 봉건제도의 몰락- 중세의 종말
흑사병이 창궐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신에게 기도했지만 당연하게도 교회는 흑사병을 해결해 주지 못한다. 경건한
사람도 죄인만큼 죽었고, 심지어 촉망 받던 성직자들도 흑사병에 걸려 죽게 되면서 교회의 권위는 크게 떨어지게 되었다.
교회가 이끌어 가던 중세의 끝이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흑사병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노동력이 귀해지면서
중세 봉건제도도 무너지게 된다. 교회와 봉건제의 몰락은 중세의 몰락을 가져왔고, 이에 가장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이
흑사병이었다. 아테네 역병 때와 마찬가지로 중세에 들어서도 사람들은 여전히 전염병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교회가 이끌어 가던 시대였던 만큼 전염병을 멈춰달라고 신에게 열심히 빌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비교적 국지적인 피해를
입힌 아테네 역병 시절에 비해 중세 시대 때는 전쟁과 교류의 영역이 넓어지면서 전염병이 미치는 범위는 확대되었고,
그 결과 흑사병은 유럽대륙은 물론이고 아시아와 북아프리카 대륙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이전 아테네 역병과
비교해서 전염병의 힘도 강해지고 전파범위도 넓어진 것이다. 유럽과 아시아, 북아프리카의 세 대륙은 흑사병을 거치면서
이후 서로의 다른 전염병들에도 어느 정도의 면역력을 갖게 되었다.
=전염병에 대한 대책X, 전쟁과 교통발달로 전염병의 범위 확장, 전염병의 교환
(3)천연두
절대왕정시대의 개막과 신항로 개척
흑사병으로 교회의 권위와 중세봉건제가 무너진 후 그 반사이익으로 왕가의 권위가 상승했고, 그 결과 서양은 우리가
잘 알듯이, 강력한 왕이 나라를 지배하는 절대왕정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이후 유럽 국가들은 돈이 되는 향신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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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에 참가 하고, 식민지를 개척하기 위해 신항로 개척에 열을 올리게 되고 그
과정에서 에스파냐의 지원을 받은 탐험가 콜럼버스가 1492년, 아메리카 대륙에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그리고 그 뒤 수많은 탐험가들이 아메리카 대륙 곳곳을
점령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필연적으로 탐험가들과 함께 유럽의 전염병도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게 되는데, 그 중 가장 강력한 전염병이 바로 천연두였다. 신대륙
발견 전에 유럽에서는 천연두가 한동안 유행했기 때문에, 유럽인들은 천연두에 어느
정도 면역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외부와 교류가 없던 아메리카 원주민에게
천연두는 그들이 한 번도 겪어보지 못했던 전염병이었고, 그들에게 천연두는 매우
치명적이었다.
신대륙 정복의 가장 큰 무기- 천연두
천연두를 가볍게 앓고 있던 유럽인 탐험가나 군인을 통해 병원균이 아메리카
원주민에게로 옮겨가자 원주민들은 셀 수 없이 죽어 나가게 된다. 천연두는 온
아메리카 대륙을 휩쓸었고, 그 결과 아메리카 원주민의 약 90%인 1억명 가량이
<그림5. 천연두의 신대륙 점령>
사망하였다. 이는 흑사병보다도 훨씬 많은 사망자를 낸 것이고, 천연두는 이렇게
역사에 한 획을 긋게 된다. 에스파냐가 점령한 아즈텍과 잉카, 포르투갈이 점령한 아마존, 프랑스와 영국이 차지한
북아메리카 가릴 것 없이 천연두의 습격은 원주민들에게 실로 파괴적이었다. 천연두 때문에 원주민이 다 죽은 뒤
신대륙에 도착한 한 영국인은 '신이 우리가 가질 수 있도록 땅을 청소해 주셨다'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만약 천연두가
없었다면, 유럽은 신대륙을 쉽게 점령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고, 역사가 어떻게 바뀌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미국이라는
나라가 없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이처럼 근대 전기의 전염병은 신대륙 발견과 천연두로 인해 그 규모가 전 지구적으로
넓어지게 되었고 그러면서 전 세계는 서로의 전염병을 공유하고 함께 전염병에 대한 면역력을 키우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인간은 전염병이 왜 일어나는 지에 대해 알지 못했고, 그래서 여전히 전염병에 대한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다.
=전염병에 대한 대책X, 전지구적인 전염병 확산, 사망자 수가 더욱 증가
(4)천연두
산업혁명의 도래- 위생문제의 심화
시간이 흘러 1800년대, 사람들은 산업혁명을 통해 공장을 짓고 석탄을
이용하기 시작한다. 사람들은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시로 모여들었고, 하루가
다르게 늘어가는 공장과 사람으로 인해 공장 폐수와 생활 쓰레기의 배출이
많아지면서
환경이
더러워졌다.
위의
그리스
역병처럼
인간들이
다시금
전염병에게 쾌적한 환경을 만들어 준 것이다. 위생이 형편없게 되면서 사람들은
다시 전염병에 시달리게 되었고, 콜레라는 그 중에서도 산업혁명 시대에 가장
치명적인 전염병이었다. 콜레라는 오염된 물을 통해 전파되는데, 사실 콜레라는
아주 옛날에 활발히 활동했던 인도의 풍토병이었는데 산업혁명 당시까지만 해도
거의
힘을
잃은
상태였다.
하지만
영국이
인도에
식민지를
건설하면서,
인도에서부터 유럽으로 콜레라가 넘어왔고 다시 힘을 얻게 되었다. 또, 거기에
더러워진
도시환경과
오염된
물은
그
힘을
보태주었다.
콜레라는
그렇게
인도에서부터 낯선 사람들의 몸속으로 침투했고 그 뒤, 식민지 정복전쟁과 무역
등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 나가게 된다. 그리고 콜레라가 도달한 지역마다 수천,
<그림6. 콜레라와 위생혁명>
수만명이 죽어나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콜레라를 일으키는 균은 깨끗한 물에서는
살 수 없는 균이다. 그 말인 즉 위생에만 신경을 쓴다면 확산을 막을 수 있는
전염병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산업화된 도시들은 위생에 신경쓸 형편이 되지못했고 영국의 경우, 거리에 쌓인 오물과
생활하수가 땅으로 스며들거나 강으로 흘러들고 사람들은 그런 강물과 더러운 우물물을 길어 올려 마시며 콜레라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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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염되었다. 게다가 그렇게 감염된 콜레라 환자의 배설물은 특별한 정화과정을 전혀 거치지 못한 채, 다시 상수원으로
퍼졌고 그렇게 콜레라 환자의 배설물이 퍼진 그 물을 다른 사람들이 마시게 되는 과정을 거치면서 콜레라는 빠르게
전파된다. 사람들은 여전히 전염병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했지만 바로 이때부터 사람들은 전염병을 극복하려고 뭔가를
시도해 보기 시작한다.
위생개혁과 전염병의 원인 발견
에드윈 채드윅의 도시를 청소해서 콜레라를 잡을 수 있다는 주장에 따라 영국에는 공공의료법이 만들어졌고
도시청소를 시작하게 된다. 또한 존 스노는 오염된 식수가 콜레라의 원임
임을 밝혀냈다. 이후 영국에서는 체계적인
상하수도 시설을 만들고, 도시를 청소하고, 식수를 철저하게 정화시키면서 콜레라를 제압하기 시작한다. 또한 유럽의
여러 국가들과 미국도 영국의 방법을 따르게 되었고 그 결과 1890년대에 콜레라가 다시 많은 나라를 덮쳤을 때 유럽과
미국은 콜레라의 영향을 거의 받지 않게 되었다. 이처럼 근대후기의 전염병은 여전히 강력한 힘으로 사람들을 죽음으로
내몰았지만, 속수무책으로 당하기만 하던 과거와는 달리. 전염병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달라졌고, 위생개혁운동과
콜레라 전파 경로 차단 등을 통한 전염병에 대한 연구는 진일보하여 현재로 부터 150여 년 전인 1865년 프랑스의
화학자인 루이 파스퇴르는 병을 일으키는 미생물을 세균이라 부르며 세균이 전염병을 일으키는 것을 증명해 내기에
이른다. 사람이 전염병의 실체를 드디어 밝혀내게 된 것이다. 이후 수십년간 연구자들은 전염병의 원인, 전파방식, 예방,
치료 등에 관한 주요 발견들을 해마다 쏟아내게 된다. 이렇게 전염병의 신비를 하나둘씩 풀어나가면서 현대의학은
눈부시게 발달하였고 시간이 흘러 1969년, 파스퇴르가 감염에 대한 개념을 발견한 지 약 100년 만에 미국
공중위생국장 윌리엄 스튜어트는 선언하게 된다. "전염병 전염병은 이제 대부분 끝이 보인다." 인간들은 백신과 항생제를
이용해서 천연두 ,결핵, 콜레라 같은 전염병들을 잘 막아냈고 이제 인류가 전염병을 정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한
것이다.
=전염병에 대한 대책O, 전염병에 대한 능동적인 대처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전염병 정복은 아직까지 먼 일
하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윌리엄 스튜어트의 선언 이후에도 전염병은 우리 사회를 파괴하고 변화시키는
주요요인이었다. 전염병은 인간이 기술을 따라가지 못할 지경에 이른 오늘날의 고도화된 지식사회에서도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다. 에이즈, 인플루엔자, 에볼라 등 현대에 들어서도 전 세계를 뒤흔들어 놓은 전염병들이 셀 수 없이 많다.
에이즈는 동성애자 혐오 담론의 주요 근거로 아직까지 사용되며, 콘돔의 사용 당위를 가장 잘 설명해줌으로써 피임과
위생에 대한 우리의 관념을 바꿔 놓았다. 인플루엔자는 1918년 전 세계적으로 5000만 명이상의 사망자를 만든 스페인
독감부터 2009년 우리나라 전국 학교의 휴교령을 내리게 만들고, 수능시험을 일주일 연기시키게 만든 신종플루 까지
계속 진화를 거듭하며 우리 사회에 공격을 입히고 있다. 또한 에볼라는 세계 경제의 침체를 가져와 2014년 세계
국내총생산을 0.5%, 세계 경제성장률 0.6%를 각각 감소시키는 결과를 만들었다.
이처럼 공중보건과 의약의 급격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전염병은 여전히 우리를 위협하는 중요한 요인이자 사회를
변동시킬 수 있는 큰 열쇠이다. 또한 전 세계적으로 우리 사회를 위협하는 전염병이 창궐하지 않는 비교적 평화로운
시기에도 전염병은 세계 곳곳에서 국지적으로 피해를 입히고 있다. 그리고 이런 국지적 전염병은 후진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다. 서론에서 제기한 메르스 사태만 보아도 비록 위생과 보건이 발달한 곳에서 전염병이 일어날 확률이 낮고,
피해를 줄일 수는 있지만 전염병은 언제 어디서든 우리를 습격할 수 있다. 게다가 현대사회에서는 교통의 발전으로 인해
과거보다 전염병의 확산이 훨씬 더 빨라질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위의 4가지 전염병만 보아도, 시대 순으로 교통이
발전되면서 전염병의 확산이 커지고, 피해가 더 심각해졌음을 알 수 있었다. 오늘날 인간의 편의를 위해 만들어진 그
시대와는 비교도 안 되게 빨라진 교통수단으로 인해 전염병이 확산된다면. 과연 우리는 전염병이 끝이 보인다는 윌리엄
스튜어트의 말에 동의할 수 있을까?
건국대학교 집단폐렴 감염 사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214&aid=0000554392(밑의
설명은
167
영상을 보았다는 가정 하에 진행이 됨)
이번 건국대학교 집단 폐렴 감염 사태는 메르스 여파가 사라지기도 전에 다시금 우리를 공포로 몰아넣었다. 하지만
영상에서 보았듯이 철저한 격리와 의학적 원인규명 작업을 통해 사태는 비교적 빠른 시간 안에 종결되었다. 비록 조금
전 말했던 것처럼 교통의 발전으로 인해 전염병의 확산 속도는 더욱 빨라지게 되었지만, 그와 더불어 의학의 발전으로
치료제가 개발되고 철저한 검역과 격리 등을 통해 사람들은 신종 전염병의 확산을 억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성과로 현대의 전염병은 과거의 흑사병이나 천연두처럼 세계역사를 바꾸어 놓을 만큼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지는
않는다. 비록 위에서 말한 에이즈, 신종플루, 에볼라 등의 전염병이 경제적, 사회적으로 미친 영향은 아직도 엄청난
것이지만, 과거 한 시대의 종말을 고했었던 전염병들에 비해서는 영향력이 떨어졌다고 볼 수 있고, 사망자 수 또한
과거의 전염병에 비해서 현저히 줄었다. 그러므로 현대사회에서 전염병은 아직도 사회를 변화시키고 인류를 위협하는 큰
요인이지만 그와 동시에 인류는 전염병에 대해서 과거에 비해 비교적 잘 대처하고 있다고 보여 진다. 앞으로의 세상도
지금과 같이 언제 나타날지 모르는 각종 전염병에 의해 뒤흔들려질 것이다. 하지만, 그에 맞춘 인류의 저항과 대처를
통해 그 충격의 간극을 줄여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예상된다.
전염병에 대한 대책O, 질병에 대한 능동적인 대처, 예전처럼 전염병에 대한 피해가 크지 않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책에서 제시하는 핵심은 결국 전염병이라는 난관을 인간이 극복하고, 전염병과 함께 최대한 다치지 않고 살아가는
법을 배워나간다는 것이다.
현대 사회는 지식정보 사회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언론에서 수업에서 혹은 글을 쓰면서 사용하는 일종의 관용어구처럼
상투적인 표현이 되었다. 맞다. 지식정보사회이다. 극소수의 천재들에 의해 우리의 삶은 윤택해지고 있고, 이들이 혁신에
우리는 발맞추어 따라가고 있다. 그래서 과거의 차티스트 운동, 러다이트 운동 등 다수의 사람들이 기존 체계를 바꾸어
사회의 변화를 이뤄낸 것과는 달리 현재의 사회변동은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고 있는 것 같다. 우리 사회도
마찬가지다. 광장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변화를 울부짖으며 투쟁을 하고 있으나, 이는 그들만의 투쟁으로 취급받고,
다수의 사람들은 소수의 정보 재단자들에 의해 일괄적인 정보를 공급받는다. 지식사회가 되면서 일반적인 사람들은
정보를 능동적으로 습득하고 지식의 민주화를 이뤘다기 보다는 그저 받아들이게 되는 지식의 총량만 많아졌을 뿐이라고
생각된다. 수많은 정보들을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생각해서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정보 그대로 수용하게
된다. 이와 같은 사회에서 과연 인류의 능동적 주도로 이끌어 내는 사회변화가 과연 클 것인가? 나는 새로운 세계를
창조함으로써 이뤄지는 변화보다는 기존의 존재하는 사회 관념들을 조금씩 비틀어주는 데이터를 바탕으로 한 통찰로
사회변화가 이루어 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식정보 사회와 전염병이 무슨 관계가 있는가? 전염병은 인간의 능력범위
밖에서 일어나는 일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사후대처로서 행한 일들이 인간의 발전을 이뤄냈다. 지식정보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물론 지식에 대한 정복을 통해 능동적으로 사회변화를 이뤄낼 수도 있겠지만, 이미 지식의 총량과 그 범주는
인간의 능력을 뛰어 넘었고, 앞으로는 더욱 그럴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지식들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를 하고
어떤 식으로 이용할 지에 더욱 방점이 찍힌다. 이런 식의 대응은 전염병이 일어난 후 인간의 사후대처와 그 맥락을 함께
한다.
예상 밖의 일들을 모두 제어하려고 하기 보다는 예상 밖의 일들에 대해 슬기롭게 대처하여 기회로 만들자는 생각이
내가 이 책을 통해 얻은 통찰력이라고 말할 수 있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재미있는 미생물과 감염병 이야기』, 천명선, 가나출판사, 2014.
-『상상하지 말라』, 송길영, 북스톤, 2015.
-「2015년 상반기 노동시장 평가와 하반기 고용전망」, 한국노동연구원, 2015.
-[일지]국내 메르스 사태…발생부터 마지막 환자 사망까지
http://www.newsis.com/ar_detail/view.html?ar_id=NISX20151029_0010380282&cID=10201&pID=10200
-건국대학교 집단폐렴 감염 사태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214&aid=00005543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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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즈니스 포스트, 「에볼라, 세계경제에 먹구름 드리우다」
http://www.businesspost.co.kr/news/articleView.html?idxno=5772
10. 종합결론
사회변동을 일으키는 요인에는 전염병 말고도 전쟁, 항해, 책 등 다양한 요인들이 있다. 하지만 다른 변동 요인과
전염병 간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전자는 인간의 의지가 수반된 요인들이었다는 것이고 후자는 인간의 의지가 전혀
담기지 않은 예기치 않은 사고들이었다는 것이다. 전쟁에는 더 넓은 영토를 획득하겠다는 의지, 항해에는 새로운 세상을
개척하겠다는 의지, 책에는 세상에서 채득한 지식을 후대에 전해주겠다는 의지가 포함되어 있었고 이런 의지들로 인해
사회변동이 일어났다. 반면에 전염병으로 인해 일어난 사회변동에는 인간의 의지가 포함되어 있지 않았고 그래서
전염병으로 인해 일어난 사회변동들은 대체로 파괴로부터의 혁신을 일으키는 변동들이었다. 전염병은 농경생활, 즉
‘사회’가 형성되면서부터 우리와 함께 존재해왔고 그리스문명의 종말, 중세시대의 몰락, 유럽의 신대륙 개척을 불러오는
등 인류사의 큰 영향을 미친 여러 사회변동들에 주원인으로 작용함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변동들은 한 체계의
파괴를 통해 일어난 일들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공중보건 개혁과 의약혁명 등의 창조의 변동을 이끌어 낸 원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다. 전염병은 의료 체계의 급속한 발전 이후에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 위협을 미치며 경제, 사회, 문화 등의
다양한 분야를 뒤흔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인류는 전염병에 대응하기 위한 기존 시스템의 변화를 이끌어내고 있다.
이처럼 전염병은 인간을 파괴하는 큰 요인이었지만, 동시에 새로운 세상을 창조시키는 동력원인 것이다. 전염병은 인류가
멸망하기 전까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인류가 존재하는 한 전염병의 위협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앞으로도 어떤
형태로든 인간은 전염병에 저항하기 위한 여러 변화들을 만들어낼 것이고 이런 순환의 과정을 통해 사회는 변화, 발전할
것이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김다빈, 사회학과 ,2012104388, david110456@naver.com
안녕하세요 12학번 김다빈입니다. 13년 초에 군대를 다녀와서 올해 1학기에 복학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 지방 국립대도 못 갈 성적이었으나, 고3때 정말 누구보다도 열심히 공부했고, 경희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그리고 그때 이후로 노력하면 안 되는 것은 없다는 신념을 지니고 살고 있습니다. 그래서 군 전역 후,
청운의 꿈을 품고 노력하면 못할 거 없다는 마음으로 복학을 했지만 2년 만에 돌아온 학교는 제 생각과는 너무
달랐습니다. 심화되는 취업난과 경제 불안으로 인해 청년층에서 각종 ‘패배의식’담론들이 속속들이 제 의식을 스멀스멀
지배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금만 눈을 들어서 세상을 달리 바라보면 눈앞에 펼쳐진 기회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리고 단순히 취업이 안 되는 세상에 살아서, 미래가 불안정한 세상 속에 살아서 나는 힘들고 지친다! 라고
불평불만하기에는 너무 아까운 시간들입니다. 더 열심히 공부하고, 더 열심히 실천력을 키워서 이 세상을 개척해나가고
싶습니다.
169
국가제도와 사회변동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Ⅰ.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책제목 :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
출판사 : 시공사
출판년도 : 2012.09.27.
저자 : 대런 애쓰모글루, 제임스 A. 로빈슨
역자 : 최완규
Ⅱ.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2015년 6월 30일, 국제통화기금(IMF)은 그리스가 만기인 15억 유로를 갚지 못했으며 이사회에 그리스의 체납
사실을 알렸다고 발표하였다. 신용평가회사들은 이번 그리스의 체납 사태를 사실상 디폴트(default)39)로 간주했고
그리스는 국제통화기금의 창설 이후 처음으로 채무를 갚지 않은 선진국이 되었다. 그리스 중앙 정부의 총 부채는
3200억 유로(약 400조원)으로 추산되며 이는 그리스 전체 GDP의 177%에 달한다. 그리스는 찬란한 문화유산과
아름다운 자연경관으로 관광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고 그리스 국민들의 한해 평균 근로시간은 유럽에서 유일하게
2000시간을 넘어 그리스 국민은 근면한 국가로 잘 알려져 있었기에 세계는 충격에 휩싸였다. 정치, 경제 전문가들은
이번 그리스 사태의 원인으로 정부의 방만한 복지 정책과 만연해있던 부정부패를 지적하고 있다. 과연 그리스 사회의
부정부패는 어떻게 그리스 사회에 작용하여 서구 유럽의 선진국으로서 이름 높던 그리스가 실패한 국가의 대표로
전락하게 만든 것일까. 성공한 국가와 실패한 국가의 차이는 무엇일까.
Ⅲ. 저자소개
‘국가는 왜 실패했는가’는 대런 애쓰모글루와 제임스 A.로빈슨의 공동 저서이다.
대런 애쓰모글루 현재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학교 경제학과 교수로 1967년 터키에서 태어나 런던 정경대 LSE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정치경제학, 개발경제학, 테크놀로지, 소득불균형, 노동경제학 등의 분야에서 연구했으며
2005년에는 연구의 성과를 인정받아 경제학적 사고와 지식에 크게 기여한 40세 미만의 경제학자에게 수여되는 상인 조
베이츠 클라크 메달을 수상하였다.
제임스 A. 로빈슨은 하버드대학교에서 정치학과 교수를 맡고 있으며 라틴아메리카와 아프리카에 관한 세계적 전문가로
보츠와나, 모리셔스, 시에라리온, 남아프리가 등지에서 활동한 바 있다.
Ⅳ. 책 내용 요약
저자는 세계의 빈부격차가 각 국가의 경제, 정치 제도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국가의 정치, 경제 제도는 어떤 성격을
띠고 있느냐에 따라 착취적 경제제도 또는 포용적 경제제도, 포용적 정치제도와 착취적 정치제도로 나뉘게 되며 이러한
국가별 제도의 차이는 그들이 겪어온 역사에 의해 결정된다. 포용적 정치제도는 포용적 경제제도와, 착취적 정치제도는
착취적 경제제도와 서로 순환하고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통해 확고하게 사회에 자리 잡게 된다. 또한 역사에 의해 특정한
방향으로 제도가 규정된 이후에는 그러한 경향이 계속 유지되고자 하는 관성을 보인다. 그러므로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의 차이는 제도적 관성과 그 관성을 유발하는 힘으로 인해 지속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적 경향성은 불변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전환점에 의해 변화하기도 하는 제도적 부동성을 지닌다.
1. 세계 빈부격차의 역사적 근원
저자는 사회변동이 그 어떤 다른 요인도 아닌 사회제도에서 기인한다고 주장하며 아메리카 대륙에 존재하는 두
39) 공·사채나 은행융자 등에 대한 이자 지불이나 원리금 상환이 불가능해진 상태. [두산 백과] 디폴트
170
노갈레스 시를 예로 들어 설명한다. 두 노갈레스 시 중 하나는 미국 애리조나
주에, 다른 하나는 멕시코 소노라 주에 속해있다. 두 도시로 분할되기 전
노갈레스 시는 멕시코의 영토였으나 1853년 개즈던 매입을 통해 미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러므로 두 시를 구성하는 시민들은 마치 남한과 북한처럼 인종,
지역, 기후 문화적으로 동일한 조건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애리조나
주의 노갈레스 시 평균소득은 1인당 3만 달러, 소노라 주의 노갈레스 시
평균소득은 1인당 1만 달러로 세 배 가량 차이가 난다. 과연 이러한 차이는
어디에서 기인하는 것일까.
대런 애쓰모글루는 이에 대해 두 도시가 서로 다른 국가에 소속되어 다른
제도의 혜택을 받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미국의 민주주의 사회에서는
국민들이 스스로 국민들이 정치인을 선출하기 때문에 미국의 정치인은 재선을
위해 공중 보건, 도로, 법질서 등 시민이 요구하는 기본적 서비스 제공해야 한다.
그러나 멕시코의 부패한 정부는 대부분 선거가 아닌 쿠데타에 의해 강제적으로
정권이 교체되기 때문에 미국과 같이 공공 서비스를 국민에게 제공해야 할
이유가 없다. 두 사회에는 전혀 다른 제도가 시행되고 있고 그로 인해 개인에게
부여되는 인센티브 또한 달라진다.
1500년 경 아메리카 대륙의 인구밀도
현재 두 국가의 제도적 차이는 15세기 무렵 유럽인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했을 무렵의 남아메리카와 북아메리카의
제도적 차이가 식민지화 과정을 좌우하면서부터 시작된다. 에스파냐 정복자가 도착했을 때 페루는 비교적 중앙집권화된
착취적 국가로 남아메리카에 상륙한 서구 열강은 손쉽게 체제를 장악함으로써 대규모 인구를 광산과 농장에 투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뒤늦게 후발주자로 식민지사업에 동참한 잉글랜드는 새로이 북아메리카를 개척하여 이익을 얻고자 하였다. 그러나
북아메리카의 경우 상대적으로 인구도 부족했고 중앙집권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존에 에스파냐에서 남아메리카를
착취하던 방식으로는 착취가 어려웠다. 이에 착취를 주도하던 잉글랜드의 버지니아 회사는 개척민들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이윤을 얻고자 하는데 이조차 실패하게 된다. 개척민들에게 착취를 감수하는 것 외에 인센티브를 얻을 수 있는 다른
대안이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개척민들은 버지니아 회사의 통제권 밖으로 도망쳐 인구밀도가 낮아 비어있던
농지들을 새로 개간하거나 원주민 사회에 편입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에 버지니아 회사는 개척민들이 도망가는 것을 막고
노동을 시키기 위해 그들에게 인센티브를 부여해주는 제도를 도입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인두권제도이다. 정착민 한
사람당 50에이커씩의 토지를 부여하는 이 제도는 정착민들이 그들의 목소리를 낼 수 있는 토대가 되었다. 이러한
정착민의 권익 보장은 후에 의회 설립으로 이어져 미국의 민주주의 설립에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러나 에스파냐에 의해 철저히 착취당하던 멕시코의 상황은 달랐다. 멕시코의 독립운동을 주도하던 이는 에스파냐
군사령관 출신의 ‘아우구스틴 데 이투르비데’로 그는 에스파냐의 착취적인 행태에서 벗어나고자 독립운동을 전개한 것이
아니었다. 에스파냐에서 시민의 권리가 확장되고 입헌군주제가 도입하려는 기미가 보이자 식민 통치 시절 발달한
경제제도를 유지하고 고스란히 자신이 갖기 위함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독립에 성공하자 바로 독재정권을
수립하였고 원주민을 착취하고 독점을 정당화하는 제도를 시행한다. 이러한
멕시코의 정치제도는 제도적 관성을 통해 현재까지도 지속되게 되었다.
2. 기존 이론 반박
기존에도 세계 사회의 빈부격차의 원인을 분석하고자 하는 이론 모델들이
존재해왔다. 저자는 그 중 대표적인 세 가지 이론인 지리적 위치 가설,
문화적 요인 가설, 무지 가설에 대해 역사적 근거를 들어 반박한다.
(1) 지리적 위치 가설
첫째로 지리적 위치 가설이다. <그림2>의 세계 기후 지도를 통해 아프리카,
중앙아메리카, 남아시아 등 상당수의 가난한 국가들이 열대 지역에, 잘 사는
국가들은 대개 온난한 지역에 위치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몽테스키외는
세계 기후 지도
붉은 계열 : 온대기후
베이지색 계열 : 사막기후
녹색 계열: 열대 기후
푸른 계열 : 한대 기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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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지리적 유사점에 기반하여 열대기후에 사는 사람들은 게으르고 호기심이 부족하기 때문에 절대 군주의 지배를
받기 쉽고, 일을 하지 않으려하고 혁신적이지 않기 때문에 가난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점은 서구중심의
인종차별적인 관점으로 비난의 여지가 높다. 그래서 현대의 지리적 위치 가설 신봉자들은 첫째, 열대 기후에서는
말라리아와 같은 열대성 질병이 유행하고 둘째, 열대 토양은 척박하고 열대성 폭우로 인해 토양이 급속도로 침식하는 등
열대 지역은 농업에 적합하지 않기 때문에 열대 기후가 농업생산성에 악영향을 끼쳤다고 설명하며 이론의 완성도를 보다
높였다.
그러나 이 또한 세 가지 근거로 반박할 수 있다. 첫째 열대성 질병의 유행은 정부의 공중 보건 증진 노력을 통해
충분히 극복 가능한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열대성 질병이 고통을 야기하고 영아 사망률을 높이는 원인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아프리카가 가난한 이유는 이러한 암담한 국가 현실 속에서도 빈곤과 질병을 박멸하는 데 필요한 공중
보건 정책을 취할 능력이나 의지가 없는 정부 때문이다. 19세기의 영국 또한 열악한 공중 보건으로 인해 콜레라 등
전염병에 시달렸으나 영국 정부는 상하수도 시설 건립 등 공중 보건을 개선하는 제도를 통해 전염병을 극복하고
효과적인 공중 보건 서비스의 투자를 늘려나갔다.
둘째로 농업 생산성의 차이는 농업에 적합하지 않은 열대 토양과 기후보다 노력을 해도 정부에게 착취당하는,
인티브를 기대할 수 없는 토지 소유구조와 정부 및 제도에 의해 발생한다.
마지막으로 현재 세계 불평등은 농업생산성의 차이보다 산업 기술 및 생산 기반의 불공정한 분배에 의해 심화되었기
때문에 현대사회의 불평등을 일차 산업의 생산성 차이로 설명하기 어렵다.
제레미 다이아몬드 또한 지리적 위치 가설을 주장하나 그는 기수가 아닌 지역별 서로 다른 동식물 자원의 보유가
국가의 성패에 영향을 미쳤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는 과거 풍요로웠던 아즈텍과 잉카문명이 위치한 멕시코와 페루가
현재 빈곤한 이유를 설명하지 못한다. 또한 소득 격차는 불공정한 현대 산업 기술의 분배에 의해 극대화되었기 때문에
이 가설 또한 앞에서 설명했듯 현대의 국가적 불평등이 정보기술 등 신기술의 도입으로 가속화되었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2) 문화적 요인 가설
문화적 요인 가설은 번영이 각 국가의 문화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한다. 문화적 요인 가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아프리카 등 가난한 나라에는 노동 윤리가 부족하기 때문에 산업이 발달하지 못하였고 이로 인해 현재 그들이
가난하다고 주장한다. 문화적 요인으로 세계 불평등을 설명하는 대표적인 학자로는 막스 베버를 들 수 있다. 그는 그의
저서인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통해 청교도 윤리가 자본주의 정신의 발달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이로 인해 유럽의 경제가 발전했다고 설명한다.
이에 대해 대런 애쓰모글루는 문화 또한 제도에 의한 것으로 독립적인 원인이 아니라고 보며 콩고왕국의 예를 든다.
콩고왕국은 쟁기 등 농업생산성 개량을 위한 어떠한 서양의 신기술도 받아들이지 않지만 총기 기술만큼은 급속도로
받아들인다. 이는 장기적인 생산성 향상을 위해 투자 하는 것보다는 노예를 잡아서 유럽에 수출하는 것이 집권층에 있어
훨씬 경제적으로 이득이었기 때문이다. 정부의 입장에서 새로운 농업기술을 받아들일 인센티브가 없었던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그들은 노예를 좀 더 편하게 잡기 위해 총기 기술은 빠르게 받아들였다. 이를 통해 아프리카의 문화가
신기술을 거부하고 그들의 문화를 고수하기 때문에 그들이 발전하지 못했다고 설명하기 보다는 그들에게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일 인센티브가 없는 제도가 선행되어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3) 무지가설
세 가지 가설 중 가장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이론인 무지가설은 시장실패에 대해 경제 전문가나 정책 입안자가
해결방법을 알지 못하고 잘못된 조언을 따랐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그들의 주장에 저자는 가나의 예를 들어
반박한다. 세계 최빈국 중 하나인 가나의 독재자였던 은크루마는 망고가 재배되지 않는 지역에 망고 통조림 공장을
세운다. 이 통조림 공장은 시장과도 거리가 멀어 통조림이 시장에서 판매되기 위해서는 수백 킬로미터를 이동해야했기
때문에 이는 매우 비효율적인 경제 정책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경제 정책 수립이 은크루마가 경제 정책에 대해 무지했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을 세웠다고 보기는
어렵다. 은크루마 주변에는 많은 경제, 행정 전문가들이 있었고 심지어 노벨상 수상자인 아서 루이스 또한 그에게
172
경제적인 조언을 아끼지 않았었다. 그러므로 은크루마가 무지해서 비효율적인 정책을 세웠다고 해석하기보다는 정치적
영향력이 큰 집단의 지지를 얻기 위해서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그의 입장에서는 정치적 영향력이 큰 지역에
공장과 같은 자원을 몰아주는 것이 정치적으로 옳은 선택이었기 때문이었다.
Ⅴ.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하는 데 경제제도가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만 그 나라가 어떤 경제제도를 갖게 되는지를
결정하는 것은 정치 제도라는 사실을 강조하며 저자는 정치 및 경제 제도의 상호작용이
한 나라의 빈부를 결정한다고 본다. 국가별로 다르게 나타나는 제도의 양상은 역사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한 번 결정된 제도의 방향은 바뀌기 어려운데 특정한 역사에 의해
사회 운영방식이 규정된 이후에는 제도적 경향이 계속 유지되고자 하는 관성을 보이기
때문이다. 부유한 국가와 가난한 국가의 차이는 제도적 관성과 그 관성을 유발하는 힘으로
인해 지속되며 이를 뒤집기 위해서는 거대한 역사적 전화점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국가가 성공하는 국가제도의 방향이란 어떤 것일까. 먼저 저자는 경제제도를
포용적 경제제도와 착취적 경제제도로 경제제도를 분류한다. 포용적 경제제도란 (1)
<그림3>2011년 소말리아
사유재산이 확고히 보장되고 (2) 법체제가 공평무사하게 시행되며 (3) 누구나 교환 및
세력 지도
계약이 가능한 공평한 경쟁 환경을 보장하는 공공서비스를 제공하는 경제제도를 말한다.
반면 착취적 경제제도는 한 계층의 소득과 부를 착취해 다른 계층의 배를 불리기 위해
고안된 제도라고 볼 수 있다. 앞에서 보았던 두 노갈레스 시의 사례에서 미국은 포용적
경제제도를 지니고 있고 멕시코는 착취적인 경제제도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두 시가 문화,
지리, 인종적으로 거의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생활수준의 차이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경제제도의 차이에 따라 동기를 부여하는 인센티브가 다르게 나타나기 때문이다.
각 국가가 다른 경제제도를 갖게 된 것은 사회구조를 결정하는 이들의 이해관계와
목적이 다르기 때문으로 이러한 관점에서 정치제도 또한 다르게 나타나게 된다. 정치제도
또한 경제제도와 마찬가지고 포용적 정치제도와 착취적 정취제도로 나뉘게 되는데 포용적
정치제도란 충분히 중앙집권화 되고 다원적인 정치제도40)를 말한다. 막스 베버는 국가란
<그림4>2013 소말리아
세력 지도
합법적인 폭력 사용을 독점한다고 규정한다. 국가가 독점, 즉 중앙집권화 되지 못하다면
공공서비스 제공, 경제활동 규제, 법질서 강제가 어렵게 되기 때문에 결국 중앙집권화에
실패하면 사회 혼란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한 국가가 포용적 정치제도의 요건 중 하나라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경우, 즉 충분히 중앙집권화 되지 못하거나 일원적인 독재형식의 정치제도를 갖춘 경우 착취적 정치제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중앙집권화에 실패하여 착취적 정치제도를 가지게 된 대표적인 예시로 소말리아를 들 수 있다. 소말리아는 과거
수많은 씨족들이 서로 경쟁하고 쟁탈하는 구도였다면 근래에는 크게 네 세력으로 통합된 측면을 보이기는 하나 세력이
비슷하기 때문에 어떤 세력이 월등하게 강하여 중앙집권적 국가를 수립할 정도는 되지 못한다.
위의 <그림3>와 <그림4>은 소말리아의 세력지도로 2년 사이에 세력이 급격하게 변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끊이지 않는 내전으로 고통 받는 소말리아 사회는 국민들에게 어떠한 공공 서비스도 제공하지 못하며 법질서가 제대로
확립되지 못했기 때문에 국민들에게 경제적 활동에 대한 인센티브를 부여해주지 못한다.
포용적 경제제도는 포용적 정치제도에서 힘을 얻으며 서로 지탱해준다. 포용적 정치제도는 다원주의적 정치권력을 고루
분배하고 법과 질서를 확립할 수 있도록 일정수준 이상의 중앙집권화를 달성하며 안정적인 사유재산권의 토대를
마련하여 포용적 시장 경제를 뿌리내리게 한다. 포용적 정치제도를 통해 포용적 경제제도가 마련되면 소득이 보다
공평하게 분배되고 힘을 얻는 사회계층이 더 넓어지면 정치영역에서도 공평한 경쟁의 장이 펼쳐진다. 그렇게 되면 권력
찬탈이 어려워질 뿐만 아니라 정치권력을 찬탈해 얻을 수 있는 소득이 낮아지기 때문에 착취적 정치제도 하에서
권력자가 얻을 수 있는 인센티브가 줄어들게 된다. 그러므로 쿠데타와 같은 방법으로 권력을 쟁탈하고 착취적 정치제도를
40) 한 개인이나 편협한 집단이 권력을 독점하지 않고 광범위한 연합이나 복수의 집단이 정치권력을 고루 나누어 갖는 형태
173
시행해야 할 이유를 잃게 된다. 이를 ‘선순환’이라고 칭한다.
같은 맥락에서 착취적 경제제도는 착취적 정치제도와 맞물려 상승효과를 낸다. 착취적 정치제도 하에서는 소수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기 때문에 자신들의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착취적 경제제도를 유지 및 개발하고 착취한 자원을 이용해
권력 기반을 다지고자 하는 인센티브가 커지게 된다. 이를 ‘악순환’이라고 한다.
착취적 경제, 정치 제도 하에서 국가는 가난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이는 결국 권력자가 착취할 수 있는 이익도
감소하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착취적 정치제도 하에서도 경제 성장에 유리한 포용적 경제제도를 도입한다면 국가
생산성이 증가하게 되어 전체 국민의 소득이 늘어나게 되고 결과적으로 권력자가 착취할 수 있는 이익도 더 커지게 되는
것이 아닐까? 왜 착취적 정부는 포용적 경제제도를 도입하려 하지 않는 것일까?
저자는 이러한 가정에 대해 착취적 제도 하의 성장은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첫째로 착취적 제도 하에서는
지속적 성장이 불가능하다. 지속적 성장은 혁신을 필요로 하고 혁신은 창조적 파괴를 수반한다. 창조적 파괴는
경제뿐만이 아니라 정치적으로도 기성 권력 집단의 기반을 흔들기 때문에 권력자는 자신의 정치권력 기반의 안정을 위해
창조적 파괴를 거부하게 된다.
둘째로 소수의 권력자가 이익을 독점하는 상황에서 경제가 성장하게 되면 권력 찬탈에 성공할 시의 경제적 인센티브가
커지게 되고 권력 투쟁이 발생할 확률이 높아져 정치 체제가 불안해진다.
그러나 중국의 경우 착취적 제도 하에서 일부 포용적 경제제도로의 개혁을 통해 권위주의적 성장을 거두었다. 저자는
중국의 개혁에 대해 진정한 포용적 경제제도로의 전환이 아니었다고 설명한다. 철강회사인 ‘장쑤톄번강철’의 회장인
다이궈팡은 비효율적 국영공장과 비교해 높은 시장 점유율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하여 2003년 사업 확장을
시도한다. 1년 뒤인 2004년, 그는 베이징 공산당에 의해 체포되고 5년 옥살이를 한 후 2009년 그는 가벼운 탈세
혐의를 명목으로 유죄 판결을 받게 된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죄는 국영기업과 경쟁을 벌이면서 공산당 수뇌부에 허락을
받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저자는 진정한 포용적 경제제도로 변화하지 않는 한 중국의 발달은 지속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며 중진국의 생활수준에 도달하면 발전을 멈출 것이라고 예측한다.
Ⅵ.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저자의 관점에서 역사를 바라볼 때 산업혁명이 다른 국가가 아닌 영국에서 발생한 것은
절대왕정체제 하에 착취적
제도가 유지되고 있던 다른 유럽 국가들과는 달리 영국에서는 창조적 파괴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포용적 제도가
싹트고 있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1215년 마그나카르타 서명과 1265년에는 왕실 견제 기능의 의회가 설립으로 영국 국왕의 권력은 위축되었다.
다원주의 정치제도의 기틀이 마련된 것이다. 이 때 의회의 일원으로 상업 및 농업으로 부를 축적한 젠트리가 포함되어
있어 포용적인 경제제도가 자리 잡을 수 있는 환경또한 마련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후 장미전쟁의 승리를 통해 왕위에
오른 튜더 왕조의 헨리 7세와 헨리 8세는 크롬웰을 통해 관료주의 정부 도입하였으며 수도원 해산을 해산하고 교회의
토지를 몰수함으로써 교회를 무력화시킴으로써 중앙집권정부를 강화하였다. 포용적 정치제도의 두 조건인 다원주의적이고
충분히 중앙집권화 된 정부에 한 발 다가선 것이다.
헨리 8세의 딸, 엘리자베스 1세의 재위 기간인 1589년, 윌리엄 리는 편물기계를 발명하고 잉글랜드, 프랑스에서
특허를 신청하나 모두 거부당한다.41) 이는 양말 생산의 기계화가 정치 불안으로 이어질 것을 우려한 정치적 행동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만약 백성이 일자리를 잃어 실업자가 증가한다면 정치 불안으로 이어지게 되고 왕실의 권력마저 위협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술 혁신은 인류 사회에 번영을 가져올 수 있으나 지속적인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새로운 기술과
업무방식이 필요함으로 특정계층의 경제적 특권과 정치권력을 파괴를 동반하게 된다. 양말 짜는 틀 역시 생산성 향상과
동시에 창조적 파괴를 불가피하게 수반하는 혁신적인 발명이었다. 비록 잉글랜드에 포용적 정치제도의 기틀은
마련되었으나 온전한 형태의 포용적 정치제도는 아니었고 착취적 경제제도의 잔존으로 인해 혁신이 거부당하고 만
것이다.
이후 엘리자베스 1세가 후사 없이 죽으면서 잉글랜드에서는 스튜어트 왕조가 시작되었고 왕실은 독점권을 부여할 수
있는 왕실의 권한을 기반으로 착취적 경제제도와 정치제도로 돌아선다. 당시 왕실에서 부여한 독점 품목은 무려 700여
41) 박찬영. 사양 산업의 구조 : 산업혁명기 영국 양말산업의 조업공간 구성과 편물공의 상태. 한국서양사학회, <서양사론> 123권0호
(2014), pp.135-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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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로 이 독점권 권한은 왕실의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러나 1623년 의회에서 독점법이 통과되면서 왕실에서는 더 이상
영국 내에 새로이 독점권을 부여하지 못하게 되었다.
뒤이어 즉위한 찰스 1세는 이에 반발하여 1628년 의회의 소집을 거부하였다. 그는 인민이 의무적으로 왕에게 돈을
빌려주어야 하는 강제 대금제도의 도입, 건함세의 무리한 확장 등 부당한 벌금과 수수료를 부과하였고 재판과정에
개입하여 사법부의 독립성을 위협하였다. 이러한 찰스 1세의 절대주의적 행태와 착취적 정책이 심해질수록 반발과
저항이 거세졌다. 결국 왕당파와 크롬웰이 이끌던 의회파 사이에 내전이 발발하였다. 왕당파는 내전에서 패배하였고
찰스1세는 처형당하게 된다.
그러나 의회파의 승리를 통해 포용적 제도로 변화한 것은 아니었다. 의회파의 수장인 크롬웰에 의한 독재정권이
시작된 것이다. 크롬웰의 독재정치는 영국 국민들의 반감을 샀고 크롬웰 사후 영국의 정치체제는 다시 왕정으로 복고하게
된다. 그러나 왕위에 오른 제임스 2세가 앞선 왕들과 같이 다시금 전제정치를 강화하고자 하자 의회는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명예혁명을 일으키게 된다.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의 승인을 통해 영국에서 의회의 힘이 커지게 되는데 의회는
사유재산권이 합리적으로 강화하였으며 금융시장을 개선하였다. 또한 이전의 독점법에서 제재하지 못했던, 해외무역에서
정부가 허용했던 독점을 와해시킴으로써 산업 확장을 가로막는 진입 장벽을 제거하였다. 이를 통해 아이디어를 개발할
기회와 인센티브를 제공하는 포용적인 경제제도의 필요성이 대두되었고 사회의 열망에 한층 더 민감한 개방적인
정치체제가 만들어졌다. 이렇게 역사적 격동을 거쳐 드디어 자리 잡게 된 포용적 제도는 산업혁명과 같은 창조적 파괴를
받아들일 수 있을 만한 사회를 만들어 주었고 영국은 비약적인 경제 성장을 이루게 된다.
반면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뒤 17세기 세계를 주도했던 오스만 제국은 기존 권력체제의 안정과 착취적 제도의
유지를 위해 인쇄를 금지하는 등 철저히 변화를 거부하는 모습을 보이고 결국 오스만 제국은 1922년 멸망하게 된다.42)
Ⅶ.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포용적 경제제도와 포용적 정치제도, 착취적 경제제도와 착취적 정치제도는 순환하며 서로를 지탱한다. 포용적 제도 간
선순환은 점점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 것이고 착취적 제도 간 악순환은 점점 국가를 파멸로 몰고 갈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거대한 역사적 전환점이 발생하여 국가제도의 성질이 변하지 않는 한 현대 지구 사회의 불평등은 점점
심화되어 국가 간 양극화는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2000년대에 들어 중국이 엄청난 속도와 팽창력으로 경제대국으로 부상하며 국제사회에서 위상이 높아지자 기존의
초강대국인 미국과 신흥강국인 중국, 두 나라가 글로벌 리더로서 부상하게 될 것이라며 G2론이 대두되고 있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에서 중국의 성장은 일부 포용적인 경제제도의 수용으로 인한 일시적인 것으로 지속 불가능한 경제성장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공산당 정권이 몰락하고 정치제도와 경제제도가 포용적 성격을 띠는 방향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미국에
의해 주도되는 국제 정세는 계속될 것으로 예상된다.
Ⅷ.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지금까지 사회제도가 포용적 또는 착취적 성격을 띠느냐에 따라 국가경제의 성패가 결정됨을 여러 역사적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그렇다면 그리스 사태는 이러한 제도적 관점에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을까.
먼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함락되면서 비잔티움은 멸망하게 되고 오스만 제국에 의한 지배가
시작되었다. 승승장구하던 오스만 제국은 18세기말에 접어들며 쇠락의 길에 접어들게 되고 그리스인들이 오스만 제국에
저항할 수 있는 국내외적 환경이 마련되게 된다. 결국 그리스는 1821년 3월 몰다비아와 모레아 지방에서 일어난
독립운동을 시발점으로 하여 10년이 지난 1830년 2월 런던 회의를 통해 독립할 수 있었다. 오스만 제국은 이례적으로
밀레트 제도를 통해 정치적으로 복속한 다양한 민족에게 종교, 문화적 자치성을 부여했다. 그리스 정교도들 또한 오스만
당국에게 조세의무의 이행을 조건으로 종교, 문화적 범주에 속하는 언어 사용, 종교, 교육, 관습법 등에서 자율성이
인정되었고 그리스인들의 정신적, 종교적 전통들은 보존될 수 있었다.43)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 400여년에 달하는
기나긴 투르크 지배는 그리스에 착취적 형태의 정치제도를 남기게 된다.
독립 이후 식민 지배에 대한 반발은 착취적 형태의 정부에 대한 반발로 이어지고 그리스정부는 포용적 정치,
42) 김대성. 독립운동과 오스만제국-서구의 대응.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지중해지역연구> 8권1호 (2006), pp.175-206
43) 김대성. 독립운동과 오스만제국-서구의 대응.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지중해지역연구> 8권1호 (2006), pp.175-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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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제도를 수용하게 되며 이를 기반으로 성장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착취적 제도가 가진 관성은 강력하여 온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국제투명성기구(TI)는 2010년 그리스가 불가리아, 루마니아에 이어 유럽연합(EU) 내 가장 부패한
국가라고 평가한 바 있을 정도로44) 그리스 사회에는 부정부패가 만연해있다. 이는 그리스 사회에서 자주 쓰이는 단어인
‘루스페티(Rousfeti)' ‘파켈라키(Fakelaki)’를 통해 잘 드러난다. ‘루스페티’란 정치적 특혜를 뜻하며 ‘파켈라키’란 작은
봉투라는 뜻으로 관공서나 병원 등에서 일을 처리하려면 건네야 하는 뇌물을 의미한다. 2012년 기준 공무원들이 받는
뇌물은 1인당 평균 1228유로(약 155만원)인 것으로 나타났으며 운전면허 취득에는 100~300유로(약 13만~38만원),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려면 100유로에서 최대 3만유로(약 3776만원)에 달하는 돈을 건네야 한다.45)
특이한 것은 착취적 형태의 정부에 대한 그리스 국민들의 반응이다. 착취적 국가에 의해 일방적으로 착취당하는
기존의 착취 국가 유형과 달리 그리스 국민들은 정부에 대해 불신하며 정부에 대한 반발로 납세를 거부한다. 그리스의
탈세자 비율은 40%로 절반에 가까우며 그리스의 탈세액은 연간 350억 달러(약 40조1천600억원) 규모에 달해 그리스
재정을 고갈시키는 주범으로 꼽힌다.46) 이는 그리스가 정치, 경제제도가 온전히 착취적인 형태가 아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일부 착취적인 제도의 잔재가 남아있기는 하나 기본적으로 그리스는 포용적인 정치, 경제제도를 가지고 있다. 한
번 포용적 제도의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착취적 제도로 돌아가기 쉽지 않다. 이는 그리스에 착취적 정치제도가 자리
잡는 것을 방해함과 동시에 또한 그리스 국민들이 착취적 제도를 내재화하는 것을 막았을 것이다.
결과적으로 약 400여 년에 달하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로 인한 착취적 제도의 잔재와 이로 인한 납세 거부 등 그리스
국민들의 반발이 현재 그리스사태를 유발했다고 해석할 수 있다.
Ⅸ.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2015년 12월, 프리이코노미스쿨에서 출판한 김승욱의 ‘제도의 힘(신제도주의 경제사 시각에서 본 국가의 흥망)’은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와 거의 유사한 관점에서 사회변동을 해석한다. ‘제도의 힘’에서는 경제제도에 집중하여 현대 서구
세계의 경제적 성공이 효율적인 시장경제제도의 창출과 운용에 있다고 보며 현재 가난한 국가들은 시장경제를
거부하거나 시장경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경제제도에 치중하여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경제제도와 정치제도와의 상호작용을 무시하고 있다는 단점이 있으나 저자가 한국 사람이기 때문에 아메리카와 유럽의
예를 주로 들어 설명하고 있는 ‘국가는 왜 실패하는가’와 달리 한국의 급격한 경제적 성공의 배경에 대해 일제
강점기부터 역사적으로 초점을 맞추어 제도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는 의의가 있다.
Ⅹ. 종합결론
국가의 성공과 실패는 그 국가의 경제, 정치 제도에 의해 결정된다. 국가의 제도는 포용적 정치 제도와 착취적
정치제도, 포용적 경제제도와 착취적 경제제도로 나뉘게 되는데 국가의 성공을 위해서는 포용적인 경제 제도뿐만 아니라
포용적인 정치제도가 병행되어야 한다. 포용적 제도 간 자연스러운 순환을 통해 창조적 파괴가 일어나고 구조와 체제가
변해야만 발전이 지속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착취적 정치제도 아래에서는 포용적 경제제도를 통한 성장이
불가능하다. 첫째로 창조적 파괴가 없이는 지속적 성장이 불가능하고 둘째로 권력 투쟁으로 인해 정치가 불안해지기
때문이다. 긴 역사를 통해 자리 잡은 국가 제도의 경향은 관성을 지니기 때문에 지속, 유지되나 고정되어 있어 영원히
불변하는 것은 아니다. 역사적 전환점이 있을 때 국가제도의 성격은 변화하기도 하는데 이를 제도적 부동이라고 한다.
저자는 세계적 불평등의 극복 방안으로 포용적 정치, 경제 제도를 발전시키는 방향으로 사용되는 조건부 해외 원조를
주장한다. 빈곤의 악순환에서 벗어나려면 포용적 정치, 경제 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기존의 해외원조로는 포용적
제도의 정착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거의 없기 때문에 국가 실패를 극복하는 데에 효과적이지 않다고 본다. 이는
착취적 형태의 정치제도 하에서는 더더욱 효과가 없다. 인도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해외원조조차 거부하는 것은 아니나
착취적 제도 하에서는 해외원조마저 정부에 약탈당하고 의도했던 곳에 제대로 전달될 리 없기 때문에 오히려 착취
정권에 원조를 해주는 꼴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조건부 해외원조를 통해 기존 지배층에 양보를
강요하는 것이 아닌 권력에서 밀려난 집단이나 지도자를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시키고 폭넓은 계층의 인민에 힘을
44) 국제투명성기구(TI). 그리스: 뇌물의 대가. 2012년
45) 헤럴드 경제. 운전면허 €300, 수술 €3만, 공무원 평균뇌물 €1200…그리스 ‘뒷돈(fakelaki)’ 경제. 2015-07-13
46) 오혁종. 그리스, 탈세와의 전면전 돌입. KOTRA, 200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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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어줄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Ⅺ.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주소.
임지아,
사회학과,
2013104395,
사회학과
3학년
임지아입니다:)
혹시
피피티
필요하시면
말씀해주세요!!,
mayjia@naver.com
참고 동영상
그리스 사태 뉴스 클립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POD&mid=tvh&oid=437&aid=0000083233
참고 문헌
포커스 : 그리스 사태의 현황과 향후 전개과정. 임준환 , 황인창 , 이혜은
보험연구원, <KIRI weekly (주간포커스)> 341권0호 (2015), pp.1-5
김대성. 독립운동과 오스만제국-서구의 대응. 부산외국어대학교 지중해지역원, <지중해지역연구> 8권1호 (2006),
pp.175-206
박찬영. 사양 산업의 구조 : 산업혁명기 영국 양말산업의 조업공간 구성과 편물공의 상태. 한국서양사학회, <서양사론>
123권0호 (2014), pp.135-169
오혁종. 그리스, 탈세와의 전면전 돌입. KOTRA, 2006년
국제투명성기구(TI). 그리스: 뇌물의 대가. 2012년
제민일보. 국가부도. 2015-07-07
헤럴드 경제. 운전면허 €300, 수술 €3만, 공무원 평균뇌물 €1200…그리스 ‘뒷돈(fakelaki)’ 경제. 201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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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살다 혼자 죽는 사회, 무연사회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책제목 : ‘무연사회’,
출판사 : 용오름
출판년도 : 2012.07.15
저자
: NHK 무연사회 프로젝트 팀
역자 : 김범수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나는 20년 동안 살아온 고향을 떠나오면서 서울 생활을 한지 3년째 되었다. 가족을 떠나 혼자 살면서 다른 사람과
함께 살아가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혼자 살아가면 어떠한 점을 느끼는지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신문에서 나와 같은 1인
가구가 점점 증가하고 있다는 것을 수치로 보고, 혼자 사는 사람끼리 같이 사는 셰어 하우스(share house)가 등장했고,
세탁기/에어컨 등 가전제품이 1인용으로 출시되는 등 사회 전반적인 면에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이러한 환경에서 왜 인간관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변했으며 혼자 사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 알아보기 위해 이 책을
선택했다.
3.
저자소개
NHK 는 일본 최대 공영방송사로서 6000 여 명에 이르는 직원을 이끌고 있다. NHK 는 현재 일본 전역에 54 개의
지역방송사와 지상파 TV 2 개 채널, 라디오 채널 3 개, 위성방송 3 개 채널을 보유한 거대 방송사다. NHK 는 보도기관
중에서 유일하게 '지정 공공기관'으로 정해져 효율적인 재난방송시스템을 구축하고 있다. NHK 는 유튜브에 독자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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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널을 개설하고, 주스트에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등 공공서비스 미디어를 구현하고 있다. NHK 는 글로벌 전략의 하나로
해외 지국을 확대하고 NHK 월드를 내세워 아시아 시장을 공략하면서 CNN, BBC 와 경쟁하고 있다.
저자 NHK 무연사회 프로젝트 팀은 일본 공영방송 NHK의 기자, PD, 카메라맨으로 구성됐다. 2010년 1월 초NHK의
저녁 메인 뉴스 프로그램인 <뉴스 워치 9>에서 3회에 걸쳐 시리즈로 ‘무연사회 일본’을 제작, 방송했다. 이어 아침 방송
시리즈 ‘인연을 만들자’, 주말 저녁 특집방송인NHK 스페셜 ‘무연사회:무연사 3만 2,000명의 충격’ ‘사라진 고령자
무연사회의 그늘’ 등 무연사회를 주제로 일련의 기획 프로그램을 4개월에 걸쳐 27편을 내보내 일본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4.
책 내용 요약
무연사회란 말은 2010년 1월 말경에 NHK 방송에서 방영한 <무연사회 : ‘무연사’ 3만 2천 명의 충격>이라는 스페셜
프로그램을 통해 알려졌다. 홀로 살다가 무연사에 이른 사람들을 다루며 현대 노인들의 고독한 삶을 강조한 방송이다.
이를 계기로 무연사회라는 단어가 눈 깜짝할 사이에 유행해 일본 사회에 정착했다고 한다. 무연사회란 인간관계가
희박해져 바로 옆집에 사는 사람의 죽음조차 쉽게 발견하지 못하는 사회를 의미한다. 이 프로그램이 초점을 둔 것은
이러한 가족 형태의 변화가 사회 양극화라는 경제적 문제들과 얽히면서 만들어내는 문제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프로그램을 본 일본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지켜보는 가족도 없이 죽음을 맞고 별다른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는 무연사 사례들을 지켜보면서 사람들은 죽음보다 더한 공포를 느꼈다고 한다. 이 책에 첫 사례로 등장하는
오모리 다다토시는 채무 연대 보증을 섰다가 그 빚을 떠안는 바람에 집이 남의 손에 넘어가고 결국 이혼까지 한 뒤
고향을 떠나 혼자 살아온 사람이다. 고향인 아키타를 떠나오면서 고향과 인연이 끊어졌고, 낯선 도쿄에서도 사람과의
인연을 만들지 못한 채 70세가 다 되도록 일자리를 전전하다가 혼자서 쓸쓸하게 죽음을 맞았다. 이 외에도 일밖에
모르다가 이혼을 당하고 혼자 사는 다카노, 아픈 어머니를 돌보며 간호사로 일하다가 결혼 적령기를 놓친 뒤 평생
독신으로 살아온 와카야마 등 무연사를 이미 했거나 무연사와 가까운 사람들의 이야기가 등장한다. 이러한 사람들의
증가로 사회 전반적으로 변화가 일어난다. 멀어지는 가족의 인연, 무연사의 현장에서는 새로운 비즈니스가 생겨나 있다.
먼저 ‘특수청소업’이라는 것이다. 지방 자치 단체의 의뢰로 가족을 대신해서 유품을 정리해주는 전문업자이다.
‘특수청소업’은 최근 수년 사이 생겨난 새로운 사업으로 지금은 30개 사 정도로 늘어나있다. 업체에는 연간 300여 건의
일감이 들어온다고 한다. 죽은 사람의 집에 가면 방마다 분담을 해서 유품 정리를 실시하는데 몇 주 동안이나 시신이
발견되지 않았던 경우는 악취가 심하고 방도 더러워져 있기 때문에 오존 가스를 방출하는 특수 장치를 가지고 간다고
한다. 정리를 하다가 생전에 ‘귀중품’이였을 것 같은 사진, 편지, 일기 등은 간직해 두어서 친족에게 넘기려고 하는데 이
조차 거부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다음은 NPO 비영리 시민단체의 등장이다. 무연사회 속 NPO는 가족 대신에 죽은 뒤의 일처리 등을 맡아 해준다.
NPO 직원은 신원보증 이외에 갑자기 부상을 당한다든지 병이 난다든지 했을 때 가족을 대신해 병원 입원 수속을
해준다. 또 죽은 뒤의 유품정리와 장례 준비, 납골까지 해주도록 생전에 계약을 하고 입회금을 받는다. 나고야 본부에
있는 NPO에는 생활에 어느 정도 여유가 있는 사람들도 혼자 사는데 불안을 느끼고 계약을 하러 찾아온다고 한다. 전직
교사, 자동차 대기업 전 사원, 전 공무원 등 각계각층을 망라한다. 현역 시절에는 수입이 있었고, 노후에도 상대적으로
많은 연금을 받고 있을 듯한 사람들이라도 이혼이나 사별을 겪어 지금은 혼자가 된 사람들, 의지할 친족이 있지만 짐이
되고 싶지 않다는 사람들이 오고 있다. NPO를 설립하고 매년 회원이 늘어나 현재 4,000명에 이른다고 한다.
무연사회의 도래로 ‘묘’의 형태도 크게 변화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공동묘’이다. 공동묘는 선조 대대로 써온 집안
묘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함께 매장되는 묘이다. 후쿠오카의 구릉지에 있는 커다란 묘에는 지금까지 납골된 사람이
140명에 가깝고, 생전에 이 묘에 묻히겠다고도 신청한 사람은 140명을 넘는다. 혈연이 없는 사람끼리 함께 묻히는
공동묘는 연금수급자 조합이라는 인연을 바탕으로 설립된 것 이외에도 절이나 지방 자치 단체가 관리하는 ‘영대 공양묘’,
‘합장묘’와 같이 지금 도시, 지방 가릴 것 없이 급속도로 늘어나고 있다. 또한 장례식 없이 화장터로 직행하는
장례풍습인 ‘직장’이 널리 퍼지고 있다. 이러한 경우 유족이 시체 인수를 거부해서 장례회사 직원 두 명만 참여한
‘직장’은 장례라기보다는 사체 처리에 가깝다. 사전에서 설명하는 임종의 정의를 보면, 죽어가는 부모를 지켜보는 행위
또는 의식이다. 과거에 부모의 임종을 지키지 못한 죄는 ‘불효 중의 불효’로 취급 받았고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떠나서
‘산 자’가 ‘떠나는 자’에게 베풀 수 있는 마지막 예의기도 했다. 이것과 비교했을 때 현대사회에서의 죽음은 매우 의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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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졌다고 할 수 있다. 또 혼자 사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 리얼 돌이라고 진짜 사람처럼 인형을 만들어 정말 인간과
함께 행동하는 것처럼 쇼핑을 하고, TV를 보고 심지어 성관계까지 하는 인형이 등장했다. 스스로 사후를 대비하는 임종
노트도 유행하고 있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인간 관계’이다. 다른 사람과의 인연이 없어지는 것은 살아 있는
채로 고독사 하는 것과 같다는 말이 있다. 누구의 관심도 끌지 못하고 자신도 아무런 역할을 하고 있지 않다면 살아
있는 거나 죽은 거나 마찬가지이다. 그래서 나는 사람과의 인연은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슬로우의 욕구단계이론에 따르면 인간은 소속감과 애정의 욕구, 즉 사회적 욕구를 가지고 있다. 어떤 단체에 소속되어
소속감을 느끼고 주위 사람들에게 사랑 받고 있음을 느끼고자 하며 이러한 욕구단계를 실천함으로써 종국적으로
자아실현욕구를 발현한다고 한다. 따라서 인간은 관계를 맺으면서 진정한 자아를 찾을 수 있고, 관계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인간은 원만한 소통을 위해 상호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것 뿐 아니라 더 나아가 그 안에서의
자신의 본질을 찾고 자신의 의미를 찾을 수 있기에 관계를 맺고 소통한다는 것은 자아를 찾는 것과 같다. 잘 다듬어진
관계는 삶을 이끌어 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 관계는 삶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 모습은 바뀌지만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이야기를 하고, 상대방과 의견을 나누며 소통하려 하는 것이 인간의 본능이다.
모두가 누군가와 연을 맺고 있다는 착각 속에서 살고 있다. 하지만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증가하고, 혼자 사는
노인의 인구가 급격하게 증가하고 있다는 뉴스를 보면 과연 우리가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고 살아가고 있는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 이 책 내용에 따르면 경찰이나 지방 자치 단체에서 신원을 확인할 방법도 없고, 지방 자치 단체의 예산
문제로 사망자의 특징 조차 신문에 단 몇 줄로 나와있는 것이 전부이다. 죽은 뒤 7일 후 발견. 죽은 뒤 보름 후 발견.
이런 일을 들으면 점점 사람과의 연결고리는 약해지는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그렇다면 인간관계는 왜 변화하기 시작했을까? 전통 사회에서는 대가족의 일원으로서 또는 마을의 공동 일원으로
관계를 맺으며 성장하고 그러한 관계 안에서 자연스럽게 인간관계와 소통에 대해 배울 수 있었으며, 또한 농경생활을
통해 마을 내에 품앗이나 두레 등을 통해 상호적인 인간관계를 이루며 사회집단을 형성해 나갔다. 품앗이는 일종의
노동의 교환형식으로 도움을 도움으로 갚아야 한다는 일종의 증답의례적 사고방식이 제도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두레는 원시적 유풍인 공동노동체 조직이며 농촌 사회의 상호 협력, 감찰을 목적으로 조직된 촌락 단위이다. 이렇게
매일매일 얼굴을 맞대고 정과 노동을 공유하며 생활했던 과거사회에는 사람 사이의 일체감이 높아 공동체 의식 또한
강했다. 과거사회의 인간관계란 일상의 삶이며, 살아가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인간관계를 습득할 수 있는 기회가
많았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핵가족화에 따라 고령자와의 동거가 많이 줄었다는 점, 독신의 증가, 아이를 가지려 하지 않는 라이프 스타일, 사회적
관계를 맺는 직장에서의 비정규직과 대량 해고의 증가, 또 그에 따른 빈곤 문제 등에 저출산, 고령화 문제와 1인 가구
확대가 더해져 무연사회와 고독사라는 새로운 문제가 나타났다.
다시 말해, 감정보다는 효율성과 효과성이 우선시 되고, 핵가족 또는 1인가구가 늘어난 현대사회에서는 사람과 사람
의 관계를 맺는 것은 물론이고 소통하는 것 또한 피상적이게 됐다. 현대사회는 개인주의적 성향이 높아지면서 서로
어우러져 관계를 맺는 것보다는 개인의 일상을 우선시하고 필요에 의한 만남을 목적으로 하는 전략적 호혜관계가 되어
버린 것이다. 또한 인터넷이 널리 보급되면서 실제적 만남보다는 인터넷을 통한 가상의 공간에서 익명의 사람과의 피상적
만남에 더 익숙해하고 만족하기도 한다. 트위터나 페이스북 등의 다양한 SNS가 보급되면서 새로운 소통의 유형이 생겨
났다. 과거에는 얼굴을 맞대고, 목소리를 듣고,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을 통해 의견을 교류하거나 자신의 생활반경 안에서
인맥을 쌓았다면 현대에서는 SNS를 통해 온라인상에서 불특정 다수와 인맥을 쌓으며 넓고 얇은 인간관계를 형성하게 된
다. 즉 온라인상에서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과 연결되지만 역설적이게도 아무하고도 직접적으로 알지 못하는 상황에 놓이
게 된다. 또한 남보다 더 나아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현대인들이 점차 심화되는 경쟁을 피하는 방법으로 타인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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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거리 두기를 선택하기도 한다. 지금까지 개인을 지탱해온 지역이나 공동체 기반, 또는 일정한 관심사를 공유하거나 특
정 사회 계층이 모인 동료집단은 결속력을 잃었고 개인은 각자 분리된 삶을 살아가기 시작했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일본 사회의 사례는 이와 같은 일은 고령 세대만이 아니라 모든 세대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실제
무연사회 방송은 아직 젊은 20~30대에게 큰 충격을 주었다. 방송 후 인터넷에서 ‘무연사 예비군’ ‘미래의 자신’이라는
젊은 세대의 글이 잇따랐다. ‘무연사회’를 남일이 아니다라고 받아들이는 젊은 세대. 인터넷에서 퍼지는 무연사에 대한
공포. 아직 ‘죽음’을 의식할리도 없는 20~30대가 ‘무연사회’에 대해 이러한 반응을 보여준 것은 왜일까?
해고 대상에 오른 비정규직 근로자들, 즉 안정된 직장이 없고 어려울 때 조금이라도 의지할 수 있는 가까운
인간관계를 맺지 못한 젊은 세대가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일거리를 찾지 못하면 PC방을 전전하게 될 것이고, 돈이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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떨어지면 노숙자가 되는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 점점 무연사회라는 현실에 압박을 받는 사람이 증가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고령화 시대에 홀로 살다가 홀로 죽어가는 무연사가 늘어나면서, 초기에는 노인문제로 떠올랐지만 개인적인 삶을
중시하는 도시 생활, 평생 싱글족의 부상, 샐러리맨 사회의 가족 해체 등과 맞물려 이제는 젊은 세대들이 각오하고
준비해야 할 현대인의 미래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초고령화 사회인 일본보다 출산율이 더 낮고 만혼, 미혼 추세가 급증하고 있는 한국이 처한 상황도 일본과 별로 다를
게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서울의 1인 가구는 최근 30년 동안 10배 이상 증가했다고 한다. 2010년 전체 가구에서
차지하는 비율이 23.9%쯤 됩니다. 1~2인가구의 70% 안팎이 60대 이상의 고령자들이며, 빈곤인구의 절반 이상이
1~2인 가구에 집중돼 있다. 부모를 부양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자식들은 36%에 불과하고 자식과 함께 살고 싶다는
부모도 29%에 그친다. 고독사는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2035년에는 약 2만 명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고 하는데,
우리나라는 경제협력개발기구 국가 중 노인빈곤률이 45.1%, 노인자살률이 10만 명당 81.8명으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며 ‘고독사 위험군’은 상당한 숫자일 것이다.
무연사회 스페셜 프로그램을 만든 일본 방송국의 프로그램 기획자가 이런 말을 남겼다고 한다. ‘연결되어 있지 않은
삶, 깔끔하고 산뜻해 보이기도 하지만 실제로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 고개를 가로젓곤 합니다.’ .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 왜 우리는 혼자가 되었나 _ 이정국, 임지선, 이경미 지음 _ ㈜레디셋고_2012 >
이 책에서는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독거노인의 얘기 뿐만 아니라 감정 노동자, 전문계 고졸 노동자, 학업 중도 포기자,
인턴사원, 직장인 임산부, 직장 왕따, 동성 커플, 자살자 유가족, 지하 거주자, 희귀 난치병 환자들 등 생존의 고통을
말하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한국 사람들이 매일 겪고 있는 가슴 저린 현실들이 담겨 있다. 이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과연 이 사회는 누구를 위한 곳인가’라는 질문을 던지게 된다. 개발 도상국 출신 유학생과
‘정규직’이 되고 싶다는 꿈 때문에 많은 불이익을 감수하는 젊은 인턴들의 이야기를 통해 강자에게는 약하지만
약자에게는 강한 우리 사회의 일면도 확인하게 된다. 또 학교에서뿐만 아니라 직장에서도 소리 없이 벌어지는 ‘왕따’의
실태도 접하게 되는데, 사회 곳곳에서 힘없는 사람에 대한 공격이 공공연히 벌어지고, 게다가 ‘정당화’되기까지 한다는
사실에 모골이 송연해질 것이다. 이 책에서 관통하는 핵심 내용은 ‘공동체’의 기능 상실과 개인들의 소외이다. 이 내용은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문제점으로 ‘나 하나 살기에도 벅차’라며 공동체의 문제에 무심했던 사회 구성원들은 질병, 파산
등 예상치 못했던 문제가 생기면 이에 대처하지 못하고 깊은 수렁에 빠진다. 제대로 된 사회 시스템이 부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드는 방법에 대해서 진지하게 모색해 봐야 하며, 파편화된 현대 한국
사회에서 새로운 형태의 ‘연대’는 어떻게 가능할지, 그 해답에 우리의 미래가 있는 것은 아닌지 생각해봐야 한다.
< 늙어가는 대한민국(저출산 고령화의 시한폭탄) _ 이현승, 김현진 지음_ 삼성경제연구소_2003 >
선진국을 중심으로 고령 인구가 급속히 증가하면서 ‘고령화’가 세계적인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UN은 1982년에 이미
고령화의 심각성을 제기하면서 ‘고령화에 관한 세계회의’를 개최한 바 있다. 그러나 고령화 문제가 전 세계적으로 주목을
받게 된 것은 1990년대에 들어서이다. 이후 경제협력개발기구, 세계은행, 국제결제은행 등이 잇달아 발표한 고령화
보고서는 현재의 상태가 계속될 경우 세계 주요 각국의 공적연금제도는 지탱될 수 없을 것이라고 지적하여 고령화
위기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21세기에 들어선 현재 대부분의 선진국에서는 출산율이 감소하고 평균 연령이 증가하면서
인구 감소와 고령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고령화 사회에 들어서면서 대한가족보건복지협회가 2001년에 실시한 전화
설문조사(대상 : 20세 이상 성인 남녀 1,091명)를 했는데, 결과에 따르면 인구 문제에 대해 관심이 없다는 응답이 무려
63%에 달했다. 최근 들어 미약하나마 정부 및 기업 차원에서는 고령화 사회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고령화 대책의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건강한 젊은 층을 재생산해내거나 현재의 인력 구조에서 생산성을 제고하는 등의 저출산 고령화
대책은 효과가 발생하기까지 장기간이 소요된다. 따라서 현상이 더욱 심각해질 때는 이미 늦다. 향후 인구의 규모와
인구의 구성, 특히 고령화가 정치/경제/사회/문화의 모든 측면에서 ‘늙은 대한민국’을 만든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정부와
기업 차원만이 아니라 개인들의 관심과 대응도 시급한 시점이다. 지금 바로 고령화 대책에 대해 정부, 기업, 개인이
지혜를 모으지 않는다면 21세기 한국은 고령화의 덫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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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쓰레기가 되는 삶들 _ 지그문트 바우만 >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이 2009년에 출판한 ‘쓰레기가 되는 삶들’은 국가가 국민들을 더 이상 돌보지 않고 위험에
대해서 스스로 알아서 하라고 내팽개쳐버리는 사회를 말한다. 이러한 사회속에서 불안감은 증폭되고 삶은 파편화된다.
세상에 믿을 것이 아무것도 없고 안정적인 것 또한 없으며 모든 것은 유동한다. 바우만은 ‘인간 쓰레기’에 대해 말하고
있다. 마치 서울시에서 단 이틀만 생활 쓰레기를 치우지 않으면 시내가 온통 쓰레기에서 풍기는 악취로 뒤덮여 사람
살기 불편해지는 것처럼 인간이 넘쳐나는데 이에 비유해 쓰레기처럼 불필요한 인간을 말하고 있다. 잉여인간들은
애초부터 취업 자체가 되지 않는다. 지금 대학교를 졸업하는 학생들의 30% 정도만 취업이 된다. 그
30%도
비정규직이 60%, 정규직이 40%의 비율로 나뉜다. 비정규직이든 정규직이든 인턴이든, 취업을 하는 30%를 뺀 70%는
바우만이 말하는 잉여인간에 가깝다. “잉여란 여분, 불필요함, 무용함을 의미한다. 유용성과 필수불가결함의 기준을
설정하는 필요와 유용성이 무엇이든 말이다. 다른 사람들은 당신을 필요로 하지 않으며, 당신 없이도 잘 할 수 있고,
당신이 없으면 더 잘 할 수 있다.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할 어떤 자명한 이유도 없고, 당신이 거기 있어야 한다고
주장할만한 어떤 뚜렷한 정당성도 없다. 잉여로 규정된다는 것은 버려져도 무방하기 때문에 버려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책 한 부분에 나오는 말이다. 우리는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인간이 되는 것을 두려워 한다. 이 스며드는 불안과
두려움 때문에 가속화되는 것이 인간과 인간 사이의 분리라고 생각한다. “우리 모두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 존재가
버림받고 배제되고 거부되고 배척되고 부인되고 버려지고 빼앗기는 것이며, 우리가 되고자 하는 바가 거절당하는 것인
듯하다. 우리는 난감하고 불행한 상태로 혼자 남겨지는 것을 두려워한다. 친구와 애정과 도움의 손길을 빼앗기는 것을
두려워한다. 우리가 가장 절실히 그리워하는 것이 바로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확실성이다. 우리는
보편적으로 편재하는 제외의 위협으로부터 면제되기를 원한다.”.
< 현대사회와 인간관계의 위기 _ 조성대 _ 한국인간관계학보 >
현대사회의 특징을 대표하는 정보화사회의 급속한 진전은 인간의 생활양식의 변화와 업무의 효율성과 능률성을
배가시키는 양적인 측면과 함께 새로운 커뮤니케이션 형태의 등장과 사이버스페이스의 형성으로 인한 인간의 사고와
인간성 자체의 질적인 측면의 변화를 초래하고 있다. 뉴미디어로 인한 매체적 특성은 단순히 기술이 지닌 효율성의
증대가
아니라
현대사회의
생활전반에
침투하여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변화를
야기시킨다.
이러한
정치/경제/사회/문화적 변화는 인간에 대한 이해, 인간관계, 공동체 형성, 인간의 능력과 태도와 행동양식 등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이다. 이 학보에서는 현대사회의 도전이라 할 수 있는 정보화 사회의 특징을 명확히
규정하고, 정보화로 인해 야기되는 변화양상을 살펴본 후, 우리나라의 정보화 실태에 대해 분석하였다. 정보화 실태
분석은 서울/경기 지역과 경남지역의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와 기존의 연구자료를 토대로 분석하였다. 이러한
분석결과를 토대로 현대사회의 일상적인 상황에서 전개되는 인간관계 변화이기를 제시하고 이에 대하 미래의 바람직한
인간관계방향을 정립하였다.
< 인간관계의 매커니즘에 관한 작업 연구 _ 권용철 _ 서울대학교 대학원 학위논문 >
불안정성, 불평등성, 지속불가능성의 신자유주의라는 자본주의의 모습으로 진화되어 가고 있는 근대의 특성은 개인과
사회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인간의 감수성도 바꾸어 놓았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 사람과 자연과의 관계, 그리고
기초적 생존의 조건에서조차 자유롭지 못하다. 삼중 사중으로 소외되고 있는 현실에서 무엇이 문제이고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가라는 본원적인 질문을 하게 된다. 이런 문제의식을 배경으로 하여 오늘날의 근대적 삶은 비인간적이기에 인간적
삶을 살수 있는 방법에 대한 모색으로 관계론에 주목하였다.
<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2449047&cid=51636&categoryId=51636 _지식채널e >
10.
종합결론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여섯 단계만 걸치면 연결된다는 이른바 ‘케빈 베이컨 게임’이 처음 등장했을 때의 충격을
기억한다. 소셜네트워크 서비스를 이용하면 매일 경험하게 된다. ‘어? 이 두 사람이 서로 알고 있었구나’하는 경우가
많이 생긴다. 과거와는 달리 글로벌 시대인 현재는 국적, 거리와 상관없이 무작위적인 관계가 만들어지고 있다. 이렇게
촘촘히 연결돼 있는 세상이지만 과연 타인과의 유대감이나 연대의식은 어느 정도인지 생각해보면 고개를 갸우뚱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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된다. 신문 기사를 통해 쓸쓸하게 죽어가는 ‘무연고 고독사’의 수가 점차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누구나 죽음을 두려워하지만 오늘날 우리가 느끼는 공포는 지금까지와는 성질이 조금 다르다. 오늘날 우리는 단순히
죽음이 두려운 것이 아니라 어떻게 죽게 될지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죽음 자체보단 죽는 방식이 공포의 대상이 된
것이다. 무엇보다 우리는 고독한 죽음을 두려워한다. 고독사한 사람은 죽은 뒤 며칠이 지나도 발견되지 못할 확률이
높고, 그러면 누군가 내 죽음을 알아차릴 때까지 며칠씩이나 버려진 것처럼 방치된다. 발견했을 때는 이미 부패가
진행되고 송장 썩는 냄새가 진동할지도 모른다. 과도한 가족중심주의도 문제지만, 가족 없이 모두가 파편화되어 살아가는
것 역시 인간다움을 지키기 쉽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주소
이름 : 윤혜주 / 학과 : 사회학과 / 학번 : 2013104385
간략한 자기소개 : 안녕하세요, 사회학과 13학번 윤혜주입니다.
Email 주소 : tkfkd164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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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으로 본 사회변동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책제목은 <피 땀 눈물>이다. 2005년에 바다출판사에서 출판하였으며 저자는 리처드 던킨이다.
2. 책의 선정 이유
한 학기동안 사회변동을 이끄는 요소로 노동을 선택하고 여러 자료를 조사했다. 노동을 다루는
다양한 주제의 책들이 있었지만, 대부분 어떠한 정치적 주장을 하거나, 현상에 대한 단순
설명으로 끝이 나는 경우가 많았다. 반면에 내가 원하는 자료는, 노동 그자체가 가진 본질과 그
본질이 인간의 욕망과 만났을 때 어떻게 사회를 움직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래서 꾸준히
자료탐색을 이어 나갔고 지금은 시중에서 절판된 <피 땀 눈물>이라는 책에 대해 알게 되었다.
<피 땀 눈물>은 어떠한 성급한 정치적 주장이나 노동의 한 부분에만 천착하지 않는다. 노동의
역사 전반을 소개하며, 인간과 노동이 어떻게 관계를 맺고 변화해왔는지 설명한다. 책에서
밝히고 있는 인간과 노동의 관계, 그리고 그 관계의 뻗어나가는 변화의 과정을 보면서, 막막했던
<피 땀 눈물>
노동이라는 거대한 실체가 사실은 그리 멀리 있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무언가를
얻기 위해, 혹은 피하기 위해 인류가 해왔던 노동이 사실은 인류사를 이끌어온 가장 가깝고도
강력했던 동력임을 알려준 이 책이야말로 사회변동을 소개하는 최적의 자료라는 판단했다.
3. 저자소개
<피 땀 눈물>의 저자 리처드 던킨은 영국의 저술가이자 칼럼니스트로, 주로 <파이낸셜 타임스>지에서
1994년부터 2008년까지 10년간 저술활동을 했다. 이후 종종 최근에도 경영이나 고용 등 노동에 관한
주제로 논평을 써내는 등 왕성한 집필활동을 이어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저작으로는 <피 땀 눈물>,
<퓨처 오브 워크> 등이 있으며, 가장 최근 저작인 <퓨처오브 워크>는 2011년 디지털 서적 중
경영부문에서 올해의 책으로 선정되어 수상한 바 있다.
4. 책 내용 요약
<피 땀 눈물>은 인류 역사 속 노동의 변천을 소개하는 책이다. 던킨은 책의 서두에서 다음과 같은 물음으로부터
논의를 시작한다.“기업이 인력을 구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하는가?”, “노동자들의 능률을 향상시키기 위해 어떤 조치를
취해지는가?”와 “노동자들이 조직화 되고 또 어떻게 직장에서 떠나가는가?”저자가 던진 이런 질문들은 곧 노동 전반에
대한 다음의 한 개의 궁극적인 물음으로 수렴하고 있다.“왜 우리는 노동을 하는가?”혹은“왜 우리는 일하지 않을 수
없는가?“ 이 근원적인 질문들에 우리는 다양한 대답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며, 아마 가장 많은 대답은“생계를 위해서”일
것이다. 저자 역시 이 대답에
동의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지점에서 독자로 하여금 조금 더 멀리 볼 필요가 있음을
지적하고 있다. 분명 인류는 먹고 사는 문제를 위해 일을 해왔다. 하지만 이 먹고 사는 생존의 욕구만이 노동의
동인이었다면 인류의 문명이 이렇게 까지 거대하고도 다양한 구조를 생성하지 못했을 거라고 지적한다. 또 노동이 이렇게
세분화 될 일도 없었을 것이다. 인류의 노동에서 분명 임금 노동이 차지하고 있는 부분은 주목할 만하다. 그러나 우리는
임금노동이외에도 경제적 이익 없이 이루어지는 다른 종류의 노동들을 알고 있다. 임금 노동이외에도 자원봉사활동을
한다든가 옷장을 꾸미고 정원을 예쁘게 가꾸는 등의 비경제 부문의 노동 역시 사람의 삶에서 빼놓을 수 없는 노동의 한
갈래이다. 단지 경제적 유인만으로 우리는 이러한 노동의 다양한 범주를 설명하는데 한계에 봉착하게 된다. 따라서
경제적 대가가 있든 없든 노동이라는 행위 자체를 제대로 마주 하기 위해선, 존재의 유지를 위한 생존의 욕구 외의
사람이 가진 또 다른 수많은 욕망들에 대해 인정해야 할 것이다. 결국 노동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류가 가진 생존의
욕구와 더불어 다양한 욕구, 가치, 희망을 이해해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노동의 원인이 되는 수많은 욕구와
가치가 어떻게 사회의 외적 조건과 섞이어 노동이라는 직접적인 행동이 나타나게 되었는지 설명하는 것은 꽤 어려운
일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직업과 다시 그 직업들 속에서 행해지는 모든 임금, 무임금 노동들에서 법칙성을
185
찾아내는 일은 무턱대고 들이대기엔 어렵고도 무모한 도전으로 보인다.
이러한 현대 노동이 지닌 복잡성을 극복하기 위해, 작가는 과거 속에서 해법을 찾으려고 했다. 아주 먼 과거,
초기인류가 행해왔던 수렵, 채집 등의 단순노동부터 시작하여 현대의 과학적 경영과 그 속에서 나타나는 노동의 형태를
조명하고 있다. 이러한 노동이라는 테마에 대한 역사적 추적은, 우리 곁에 밀착해 있는 탓에 우리가 발견할 수 없었던,
시간이 흘러도 바뀌지 않는 노동의 특성을 발견할 수 있는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피 땀 눈물>은 사회변동을 노동의 변천을 통해 보고자 하고 있다. 노동과 사회가 서로 영향을 주면서 세상을
바꿔왔다는 것이다. 노동은 어떠한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인간의 의지와 그에게 그러한 결과물을 허락하는 수단과 방법을
필요로 한다. 예를 들어 농사를 주 노동으로 삼은 사람은 생계를 안정적으로 유지하려는 욕망을 실현하기를 원한다.
때문에 이러한 욕망을 구체적인 수단, 예를 들어 농기구와 농사기법, 절기를 계산하여 날씨를 예측하고 이용하는 법,
물을 끌어오는 법 등을 활용하여 충족시킨다. 이렇게 사람의 노동은 노동 현장에서 자신을 둘러싼 외적 조건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노동이 일방적으로 외적 조건에 영향을 받기만 하는 것은 아니다. 동시에 사람의 노동과 노동
현장에서 그가 얻는 경험은 세상을 움직여 왔다. 예를 들어, 18c 중엽 영국의 수많은 노동자들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공업도시들로 모여들었다. 그들이 기존의 농촌환경에서 느낄 수 없었던 협소하고 비위생적이며, 쉴새없이 돌아가는
기계로 둘러싸인 공장에 처음 발을 디디게 되었다. 저렴한 임금을 대가로 일했던 노동자들이 하나씩 쌓아올린 자본이라는
결과물은 세계사를 바꾼 산업혁명으로 이어졌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의 전파로 유럽 국가들은 비서구권 국가들보다
강력한 자본과 군사력으로 시장을 개척해 나갔다. 이렇게 제국주의가 나타났고 결국 제국주의의 경쟁은 세계대전으로
끝을 맺었다. 분명 하나의 사회 변동에는 다른 수 많은 요소들이 작용하지만, 이 요소들을 등에 업고 사회를 변동시킨
작은 시작점은 역사의 무대 뒤에서 묵묵히 자신에게 주어진 노동을 수행했던 수많은 노동자들의 거친 손이었다. 이렇듯
노동은 노동환경을 구성하는 많은 물적조건과 상호작용하며, 사회를 변동시켜온 원동력이 된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현생인류가 지상에 나타난 뒤 농사를 짓기까지 인류의 노동은 주로 수렵과
채집이었다. 이 시기 노동은 주먹도끼, 긁개, 밀개 등의 뗀석기를 활용하여 이루어
졌다.47) 철저히 주변 자연환경에 의존한 이 시기 노동의 성격으로 인해, 인류는
이용할 수 있는 주변 동, 식물자원이 다 떨어지면 다른 곳으로 떠나는 유목생활을
해야 했다. 끊임없이 이동해야 했기에 아이를 많이 낳을 필요가 없었고, 불안전한
식량수급으로 인해 당시 인간의 조직은 소규모 씨족사회의 형태를 하고 있었다.
또, 수렵과 채집이라는 노동의 형태는 안정적인 식량의 확보를 보장하지 못했기
때문에, 식량 확보의 성공률을 높이기 위하여 당시의 노동은 집단적 협업이
라스코 동굴벽화
특징이었다. 이러한 협업의 형태는 구성원 공통의 노동력이 투입되었기에 그 결과물은 사냥에 실패한 구성원을 포함한
모두에게 돌아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한편, 수렵과 채집이라는 원시적인 생산방식을 기반으로 한 사회였지만, 초기
인류의 이러한 투박함 속에서도 기술적 다양성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기원전 1만 7천년 경에 그려진 프랑스 지역의
라스코 동굴 벽화에서는 3차원적 표현을 위한 스텐실 기법과 음영 등의 전문적 기술이 나타난다. 이렇게 머나먼
옛날에서부터 이미 인류는 노동에서 생존뿐만 아니라 또 다른 가치를 찾아내고 있었다.
한편 기원전 1만년 경, 빙하기가 끝나면서 거대한 기후의 변화가 온다. 기온이 상승하고 이에 인류가 이전까지
이용하던 주변 동,식물 자원이 크게 변하게 된다. 이로 인해 인류의 수렵, 채집이라는 노동을 통한 생산은 큰 한계를
맞이하게 된다. 이 불안정한 방법에만 의지하기에는 너무 많은 risk를 감당해야 했으므로, 인류는 또다른 생산방식을
병행하기 시작하는데, 그것이 바로 농업이다.48)
인류는 신석기 시대를 맞이하여 농업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시작과 동시에 오늘날과 같은 벼나 밀을 재배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이전에 채집의 대상으로 삼았던 과실류, 근경류, 화본과식물 등을 심으며 시행착오를 거쳐 점차 유리한
47) https://youtu.be/C2MRpA27epk
48) https://youtu.be/aarWkdS-dJ0?t=1278
186
작물을 선별해 나갔다. 이 과정에서 보다 효율적인 농업을 위해 뗀석기와는 다른 형태의 도구인 간석기를 제작하여
노동의 과정에 활용하였다.
농업이라는 새로운 형태의 노동은 당시 인류 사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농업을 시작한
인류는 작물을 꾸준히 가꿔야 했기에 한 곳에 정착하는 정주생활을 시작한다. 이에 더하여
농업을 병행함으로써 늘어난 식량자원은 인구를 증가시켰다. 이렇게 한 곳에 모여 살면서
인류는 원시적 씨족공동체에서 부락공동체 사회로 넘어가게 되었다. 또 각종 토기가
발전하여 식량 저장이 가능해졌는데, 이로 인해 잉여자원이 발생하면서 불평등이 나타나고
계급이 발생하게 된다. 계급적 분화는 계급 간 담당하는 노동의 종류를 분리시켰고 이는
빗살무늬 토기
기술과 노동의 분화로 이어지게 되는 이유가 되었다. 한편 농사라는 노동의 형태가 절대적
(식량저장)
생산량을 증가시키고, 인구를 늘려 문명의 탄생의 씨앗이 되었지만, 인류의 삶의 질이 높아졌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다는
의견도 많다. <총 균 쇠>에서 제레미 다이아몬드는 농업으로 인해 인류가 소수의 작물에 의존하게 되면서 영양학적
불균형이 나타나게 되었고, 한 지역에 밀집해 살게 되면서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또 이전에 비해
평균적인 노동시간이 증가하면서 노동에 종속되기 시작하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러한 농업이라는 형태의 노동을 기반으로 문명을 일궈낸 인류는 고대사회로 진입하게 된다. 고대사회의 노동은 주로
기초적인 협업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 원시공동체의 노동과 공통점이 있으나, 그 생산방법이 농업이란 점에서 큰
차이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협업에 의한 농업은 식량생산을 크게 증가시켰다. 이러한 풍부해진 생산량을 바탕으로 인구가
크게 증가하고 부락공동체는 국가라는 형태의 사회로 이행하게 된다. 고대 사회에서 노동은 이미 분리된 계급에 맞춰
함께 분화되었다. 계급에 따라, 귀족과 같은 계급은 정신노동을, 평민, 노예 등 피지배 계급은 육체노동을 담당하게
되었다. 특히 귀족을 비롯한 지배 계급은 육체노동으로부터 얻은 여유를 학문, 과학, 철학, 예술, 정치에 대한 집중으로
돌렸다. 이를 통해 법, 사상, 종교 등의 관념을 기반으로 한 체계는 더욱더 정밀해졌고 이를 바탕으로 사회는 점점 더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기초적인 상공업도 점점 발달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전이 기술의 발달로 이어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육체노동을 피지배 계급, 특히 노예들의 전유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다. 노동의 강압성 때문에 직접
육체노동을 수행하는 피지배 계급은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것이 없으므로 필요 이상으로 노동을 열심히 할 필요도,
기술을 발전시킬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고대 사회의 기술은, 로마나 그리스, 중국 등의 건축, 토목 등의 기술과
같은 일정 분야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후 크게 정체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렇게 식량의 생산이란 사회의
필수적인 요소를 노예에게 맡기면서 발생한 영향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일정수준의 확장 이후에는 기본적인 노동은
모두 노예에게 맡겨져 있었으니 사회의 정치와 문화를 이끌어가는 지배계급은 과소비와 향락에 몰두하기 시작했고,
실용적 기술 발전의 정체로 인해 생산력의 증가세가 점차 둔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로마의 경우 국방부분에 소홀히 하여,
게르만과 같은 이민족을 고용하는 용병제로 인해 몰락하는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중세사회에서의 노동에 대한 이야기에서 장원 경제49) 안의 농노의 노동은
빠뜨릴 수 없는 주제이다 . 농민들은 농노라 불리며 영주의 직영지와 자신이
따로 경작하는 보유지에서 노동을 했고, 그래서 무상 노동인 부역노동과 개인의
생계를 위한 경작지 노동이 있었다. 부역 노동의 경우 일주일에 2~3일, 많으면
4일까지 있었고, 여기서 나오는 생산물이 영주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장원 경제를
지탱하는 힘이 되었다. 중세의 농노는 약간의 재산을 가질 수 있었고 작은
토지나마 생산 수단을 가지고 있었기에 분명 노예의 신분은 아니었으나 거의
대부분의 잉여생산물을 영주에게 빼앗겼기 때문에 자율성은 거의 찾아보기
중세 장원경제
힘들었다.
한편, 중세시기의 노동이 이러한 장원에 예속된 노동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다양한 형태로 발전한 도시 안에서
수공업이 발달했다. 특히 도시의 상업과 수공업은 길드란 경제조직의 테두리에서 성장하게 되었다. 길드는 쉽게 말하면
상공업자들이 동종업자들과 함께 모여 만든 자율 규제적 성격을 지닌 조직이었다. 아직 도시를 둘러싼 상품경제와 화폐
경제가 크게 발달하지 않았고 시장에 유통되는 자본의 양 역시 많지 않아 상공업자들은 상호간의 경쟁을 피하고 모두가
49) https://youtu.be/NB-XHEa3aIY
187
함께 지키는 규칙을 만들고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려고 했다. 특히 후에 상업길드와 분리되었던
수공업길드에서는 장인과 도제라는 신분제도 안에서 나름의 비대칭적 권력이 나타나는 노동이
행해졌다. 도제는 장인의 밑에서 일을 하며 그의 전문기술을 계승받았고, 그의 인정 아래 한
사람의 장인으로 인정을 받는 절차를 밟았다. 노동의 역사에서 길드를 눈여겨보아야 하는 이유는
길드가 작업공정 뿐만 아니라 사업의 방식까지도 통제했기 때문이다. 길드의 장인들은 임금을
관리하고 제작,판매 등에서 나타나는 사기행위로 인해 도시의 상거래 질서가 훼손되지 않도록
사업방식을 표준화 시켰다. 전문 상인과 기술자는 자신들의 노동 분야를 점점 더 분화시켰고, 이
과정에서 도시는 단순히 사람이 많이 모인 곳이 아닌, 상공업, 정치, 문화의 중심지로 거듭나게
중세길드
검은머리 회당 건물
되었다.
이렇게 장원의 농촌과 도시라는 이원화된 공간이 공존하던 유럽의 봉건사회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농노는 영주에게 거의 대부분의 잉여 생산물을 바쳐야 했기에 따로 부를 축적할 여유가 되지 않았고, 이는
농노의 생산성을 저하시켰다. 또 도시의 발달로 장원을 몰래 이탈하는 농노의 수가 늘어나는 등 계속해서 생산성이
저하되자 이를 끌어올리려는 영주와 좀더 유리한 세금 지불조건을 추구하는 농민의 이해관계가 합치하여 부역노동은
점차 없어졌고 이를 화폐로 대신 납부하게 되었다. 이러한 화폐를 납부하는 방식은 농노가 영주의 지배권으로부터 점차
벗어나면서 동시에 스스로 자신의 노동을 통제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뜻한다. 물론 이것이 농노, 농민층이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독립하게 되었다는 말은 아니지만, 농민이 자신의 노동 성과를 결정할 수 있게 되었기에 그들은
자신의 계획 아래 생산과정을 조절하였고 스스로의 지위를 격상시키기 위해 노력하기 시작했다. 이런 흐름은 특히
서유럽에서 강했는데, 장원경제가 해체되고 화폐경제가 활성화되며 농민들이 자신들의 노동에서 얻은 잉여생산물을
교환할 수 있는 시장이 발달하게 되는 것으로 이어진다. 이는 농촌 경제 내에 자본을 중심으로 한 새로운 질서가
나타나고 있음을 의미하고 있다. 물론 이 새로운 질서 안에는 귀족, 영주 등으로 대표되는 봉건적 지배 계층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지만, 일부 영주가 화폐로 받은 지대를 모아 농업자본가화한 점, 그리고 영국의 요먼(yeoman)과 같이
자신의 노동을 기획하여 자본을 쌓았던 부농층, 마지막으로 이 대열에 끼지 못한 빈농층으로 계층이 분화되고 있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눈여겨 볼 만했던 부분은 똑같은 신분임에도, 스스로 노동의 주인이 되어 자본 생산의 기획에 성공한
소수의 농민들과 여러 요인으로 인해 이에 실패한 다수의 농민들이 각각 자본가와 농장노동자로 분리된다는 사실이다.
기존의 태생적 신분에 의한 분리가 아닌 생산 양식의 소유여부에 따라서, 겪게 되는 노동의 경험과 자산의 격차가
달라지고 있는 것이다. 생산수단을 쥔 자와 가지지 못한 자의 분리과정, 마르크스가
50)‘자본의
원시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에서 근대 자본주의가 나타날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이후 이러한 축적된 자본은 토지 매매가 활발해지면서, 토지란 자본을 많이 보유한
부농과 그렇지 못한 빈농의 차이를 급격하게 벌려놓는 역할을 했다. 특히 발달된
농업기술과 자본가의 토지 경영 효율성 추구는 이전까지의 노동관행, 협업에 기반한
‘공동경지 농업’을 폐기하는 데까지 이르게 된다. 기존의 공동경지 농업은 분할적인
소유지가 마구 혼재되어 있었고, 경지 강제와 같은 공동체 내 관행으로 인해
노동력이 효율적으로 투입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비합리성을 해결하려고 했던
지주들의 욕구는, 특히 영구에서 엔클로저 운동(Enclosure Movement)라는 현상을
불러오게 되었다. 효율적인 농업생산과 당시 상품가치가 높았던 양모의 생산을 위해,
인클로저운동
지주들은 당시공동 이용이 가능한 토지에 경계선을 그어 사유지로 만들며 개인적
경영을 시작한 것이다. 이로 인해 많은 소농들이 생계를 해결하기 위해 일자리가 있는 도시로 모여들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농업혁명 이후 가장 크게 세상을 바꿔 놨던 ‘산업혁명’으로 이어지게 된다.
산업혁명 이전의 도시에 위치한 길드 주도 공업은 한계를 맞이하고 있었다. 그 독점적인 성격으로 인해, 이윤을 두고
내부에서 분열이 있었으며 생산체제도 크게 바뀌고 있었다. 장인들이 만들어 놓은 다양한 규제로 인해 제한되어 버린
50) 원시적 축적[primitive accumulation]: 자본이 축적된 역사적인 과정. 마르크스(Marx)는 자본론에서 생산자로부터 생산수단의 분리
라는 과정이 자본주의 출현을 위한 중요한 요소를 형성했다고 말했다.
188
생산력은 외부의 수요를 충당하지 못하고 길드를 쇠퇴하게끔 하고
있었다. 이들로 인해 자유로운 영업을 할 수 없었던 도시 내의 중소
장인들과 직인들은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섰고, 도시의 근교와 농촌에
자리 잡게 되었다. 이들과 가내 수공업자들은 신항로 개척, 해외 무역,
농업자본의 축적 등으로 많은 자본을 가지고 있던 자본가들에게
고용되어 농촌공업을 시작한다. 특히 이 시기의 노동의 주목할 만한
점은 공장제 수공업, 메뉴팩처 방식이 도입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메뉴팩처는 노동과정을 세분화하여 각 노동자들이 각자 맡은 부분을
담당하는 분업을 기초로 한 협업의 형태를 보였다. 이를 통해 노동의
산업혁명 당시 공장의 모습
생산성은 크게 증가되었지만, 노동자들은 점차적으로 노동에 있어서
과정의 통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위의 인클로저 운동과 농촌 및 도시 근교의 공업 발달로 형성된, 저렴한 임금의 임금노동자 계층은 다양한 요소와
상호작용하였고 이러한 배경 속에서 최초의
51)산업혁명은
영국에서 일어 나게 되었다. 영국이 최초로 산업혁명을 시작
할 수 있었던 요인은 다음과 같다. : 싸고 풍부한 노동력, 방적기, 역직기 등의 개량된 기계들의 발달, 가축이나 사람보다
효율적인 동력을 제공하는 증기기관의 발명, 풍부한 철, 석탄 등의 지하 자원, 방대한 해외 식민지 시장과 축적된 자본이
그것이다. 산업혁명은 노동에도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소규모 인원이 모여 수행되었던 가내수공업은 빠르게 공장제
기계공업으로 대체되었다. 또 자본가와 임금노동자 간의 자본-노동력 교환 관계가 완전히 구축되었다. 또, 기존의 수공업
장인들이 크게 몰락하고, 임금이 싼 비숙련 노동자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마지막으로 일하는 방식 역시 기계 공정에
맞게 조정되어, 표준화되는 모습을 보였다.
산업혁명으로 인해 농업사회는 산업자본주의 사회로 이행했다. 자본은 폭발적으로 팽창했고 기술, 과학, 경제
분야에서의 찬란한 발전이 시작되었다. 또 변화한 노동의 방식은 사회에 영향을 끼쳤는데,
먼저 인구의 도시집중 현상을 더 가속화했다. 맨체스터나 리버풀 같은 공업도시들이 빠르게
성장했다. 하지만 전반적인 도시 인프라가 갖춰지는 속도보다 인구가 몰리는 속도가 더
빨라서, 보건, 범죄, 상하수도와 같은 시설 부족 문제 등이 일어났다. 한편
생산수단을 잃고
저임금에 일을 하게 된 노동자들과 공장, 토지 등 생산수단을 소유한 자본가들 사이의 갈등
문제가 붉어진 점 역시 주목할 부분이다. 이러한 갈등관계를 관찰했던 마르크스, 앵겔스 등의
사상가들의 사회주의 사상에 영향을 받아 노동자들은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로 칭하며
자본가와
러다이트운동
구분했고
계급의식이
나타나게
되었다.
노동현장에서의
비대칭적인 자본-임금 교환 체계에 문제의식을 갖게 된 노동자계급은
자주성과
지나치게
러다이트 운동52),
차티스트 운동 등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한 집단적 행동에 나섰다.
이렇게 산업혁명을 통해 구축한 산업자본주의 시스템은 오늘날 현대 자본주의 사회 형성에 밑바탕이 되었다. 산업혁명
이후 소규모 생산은 대량생산이라는 형태로 바뀌었다. 또, 자유경쟁은 곧 경쟁 속에 살아남은 경제 주체의 독점이라는
행태로 이어졌다. 쏟아지는 제품을 팔기 위해 19세기의 강대국들은 자원확보와 식민지 개척 경쟁에 열을 올렸고, 이는
제국주의를 탄생시켜 종국에는 세계대전으로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근대에서 현대로 이행하는 과정 중에도 노동과 관련한, 몇 가지 중요한 변화가 있었는데, 그 중 대표적인 변화는
포디즘53)이다. 헨리포드는 컨베이어 벨트 시스템을 도입하여 공장 내의 노동을
합리적으로 편성하여 연속적인 작업으로 구성해 내었다. 이런 흐름 작업의
도입은 생산성을 극대화하고 생산비용을 크게 절감시켰다. 이를 통해 독점적
대기업이 발전하게 되었고, 고임금을 기반으로 한 대량 소비, 거대한 국내
시장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일하는 노동자들의 전반적인 생활 수준이 크게
향상되었으며 이는 다시 소비라는 선순환으로 이어졌다. 하지만 독점대기업이
컨베이어 벨트
51) https://youtu.be/1mLLeQOT1Xs?t=69
52) https://www.youtube.com/watch?v=x0hquXrFI1U
53) https://youtu.be/lpTecAeYvGU?t=1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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갖는 시장에 대한 경쟁자 없는 지배력은 실질 임금의 상승을 가로막고, 소득 분배의 불평등을 심화시켰다는 지적을 받게
된다.
냉전시대를 거쳐 현대 사회로 오면서 노동은 그 어느 때보다 높은 다양성을 자랑하고 있다. 농업, 어업 등의 1차
산업부터 자연으로부터 얻은 재료를 가공하는 2차 산업, 앞의 1, 2차 산업을 기반으로 서비스를 생산하는 3차 산업에
정보혁명으로 나타난 많은 다양한 업종이 존재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하는 노동자들이 겪는 스펙트럼은 직업의
종류보다도 다양하다. 또 세계화로 자본과 노동의 이동을 가로막았던 국경의 벽을 허물어졌고, 수십 년 전에 시작된
정보화의 흐름은 스스로를 블루칼라 노동자들과 구분하던 화이트칼라 노동자의 자리를 하나 둘씩 감소시키고 있다.
여전히 자본가와 임금노동자라는 계층 차이는 있지만 1인기업의 탄생 등으로 인해 이 계급구분마저 점차 흔들리고 있는
추세이다.
원시공동체 사회부터 현대자본주의 사회까지 노동은 인류와 함께 변화해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노동은 단순히
인류가 해왔던 ‘살아남기 위해 해왔던 일’을 넘어서, 사회의 다양한 요소와 상호작용을 하며, 인류역사를 조용히 이끌어온
동력이었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노동이 사회를 변동시킨다는 관점에 입각해서 미래를 바라보면 앞으로의 노동이 어떤 사회적 요소들과 결합해 새로운
성격을 가지게 될지 이해해야 한다. 미래에 대해 다양한 논의들이 있지만 모두가 동의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정보기술의 발달이다. 정보기술은 현대에서도 인류의 많은 노동을 대체해 왔다. 직접 전달했어야 하는 정보를 거의
시간을 들이지 않고 신속하게 전달할 수 있게 해주었고,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몇 개의 프로그램을 통해 다룰 수 있게
해주었다. 우리 삶에 깊은 영향을 주고 있는 정보기술의 발달은 앞으로 우리가 어떻게 노동을 할 것이며, 그 노동의
과정에서 어떤 사회 속을 살아갈지를 결정하게 될 것이다.
이러한 정보기술의 발달은 우리 삶을 크게 편안하게 해주었지만, 동시에 중대한 물음을 던진다. “앞으로의
노동시장에서 컴퓨터와 경쟁해서 이길 수 있겠는가” 기계와 정보처리 기술의 발달은 우리 인간이 가진 물질적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나타났다. 따라서 단순히 빠르기와 정확성으로 기계와 승부하는 것은 승산이 없다. 점점 더 발달하는 기술
앞에 기존의 단순 노동을 비롯한 많은 종류의 노동을 맡기게 되겠지만, 컴퓨터가 따라할 수 없는 인간만이 발휘할 수
있는 능력 : 창의력, 직관성, 통찰력 등을 발휘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물리적 한계를 뛰어넘게 해줄 정보기술을 활용한 노동을 통해 앞으로의 세상은, 노동을 대신해서 자기 서사를
정의해줄 무언가를 찾게 될 것이다. 그리고 정보기술이 가져다 준 시간적 여유를 어떻게 사용할지를 고민하는 시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또, 생산성이 점점 높아질 것이기에 단순히 경제적 자본만을 위해 일하기보다는 그 노동에서 가치를 찾아
다른 사람들에게 이를 전달해 주기 위해 노력하는 세상을 향해 나아갈 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인류 역사와 사회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노동에 대한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다는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인류 역사상
사회가 크게 변동될 때에는 이전 사회로부터 자신의 욕망을 실현시키지 못했거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려는 사람들의
의도가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의 실현의 과정에는 그 개인들이 각계각층에서 해왔던
노동이 반드시 ‘수단’으로서 존재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동이라는 수단이 왜 나타났고, 그런 변화를 일으켰는지, 또
세상을 어떻게 움직였는지를 이해하는 것은 사회변동 그 자체와 사회변동이 일어나게 되는 이면의 배경을 이해하는데
강력한 무기라고 생각된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본 과제의 수행에서 <피 땀 눈물> 다음으로 많이 참고했던 한국 경제교육연구회에서 집필한
<사람의 역사, 경제의 역사>라는 책이 있다. 시그마프레스라는 출판사에서 발행한 책으로, 주된
내용은 인류의 역사를 경제의 변화로 추적하는 것이다. 이 책은 원시 사회의 경제생활부터 중세,
근대의 초기 자본주의 사회를 넘어, 현대경제까지 짚고 있다. 노동에 대해 직접 다루고 있는 책은
아니지만, 경제 양식의 변화가 인류의 역사에 어떻게 영향을 주었는지 설명해 주고 있다. 이러한
190
설명은 경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노동의 변화에 대해서 이해하는데 큰 도움을 주었다. 책의 구성은 시대를
원시, 고대, 봉건, 중세, 근대, 제국주의 시대, 현대 이렇게 총 7파트로 구성되어 있다. 각 장은 먼저 경제적 변화가
일어나는 당시의 사회적 분위기를 소개하고 이후 경제 내의 중요한 변화의 과정이나 경제 관련 사상 그리고 그로 인해
바뀐 사회상을 친절하고 명료하게 소개하고 있다.
과제를 하면서 참고했던 또 다른 책은 리처드 도킨스의 <한계비용제로사회>였다. 원래는
<노동의 종말>을 참고하려고 했으나 책이 출간된지 벌써 20년이 넘어가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빠르게 바뀐 트랜드와 미래의 노동을 공부하기 위해서는, 작년에 나온 <한계비용제로사회>를
선택했다. <한계비용제로사회>에서 리프킨은 에너지의 변화, 운송수단의 첨단화, 통신기술의
발달로, 상품을 하나 생산하는데 드는 생산비용인 한계비용이 제로에 수렴하는 사회가 올
것이라고 주장한다. 한계비용이 0에 가까워질수록, 자본주의 시장의 성격에 따라 생산자들 간의
무한 가격 경쟁이 시작되고 그로 인해 얻는 이익 역시 극히 적어지게 된다. 결국 경제적
이익이라는 자본주의 궁극의 목표는 유명무실해지게 된다. 도킨스는 앞으로의 사회에서 점점 더
많은 경제 활동이 경제적 이익 이외의 것들로 대체되어갈 것이라고 설명하며 한계비용제로 사회는
시장경제를 변두리로 밀어내고 공유경제를 중심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노동의 종말>과 같이 직접적으로
노동에 대해 논하고 있는 책은 아니지만 책에서 예측하고 있는 공유경제의 모습을 들여다보고 있는 동안 미래의 노동이
맞이할 변화를 상상할 수 있는 재밌는 틀을 제공해주고 있다.
10. 종합결론
인간의 역사는 곧, 노동의 역사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은 노동과 밀접한 관계를 맺어왔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라는 거창한 칭호를 가지고 있지만, 결국 동물의 범주 안에 위치하고 있다. 피와 살로 이루어진 물리적 존재란
한계 때문에 사람은 끊임없이 무언가를 소비하고 에너지를 얻어야 한다. 이러한 생존의 굴레에 놓여있는 인간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인간은 다른 동물과는 다르게 자신의 노동에 의미를 부여하고 정체성을 부여
받는다. 노동은 개인을 한 사람의 사회구성원으로서 다른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갈 수 있게 해주고, 이렇게
사회적으로 구성된 관계는 개인의 서사 구성에 있어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때문에 노동은 사람이 어떤 형태의 일이든
그것을 할 수 있는 한 언제나 사람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게 된다.
이러한 노동과 사람의 불가분의 관계를 이해하는 것은 사회변동을 설명하는 데 있어 중요한 하나의 관점이 된다. 사회
변동은 어떤 요인으로 인해 사회의 모습과 사람들의 삶의 양상이 변화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는
수많은 개인과 그 개인들이 맺는 관계로부터 구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본질을 갖고 있는 사회라는
구조가 변동할 때는, 반드시 수많은 사람들의 엇갈린 의도가 어떤 식으로든 개입되기 마련이다.
노동은 이러한 의도를
가장 선명하게 반영하고 있는‘수단’이자 형태이다. 따라서 노동이 어떻게 사회로부터 영향을 받고, 또 사회를 이끌어
가는지 세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특히 앞으로 과학기술의 발달과 인구구조의 변화 등으로 인해 격변하게 될 세상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노동에 대한 이해는 필수적인 관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사회학과 12학번 윤준규입니다. 사회학과에서 현재
2학년 2학기 재학 중입니다. 2년간 군대에 가있다가 복학한 첫
학기라서 전공수업에 대한 많은 부담감이 있었는데, 변동론 수업을 들으면서 사회학만이 줄 수 있는 즐거움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특히 다른 학우들이 매시간 준비해오는 다양한 주제의 발표를 들으면서 평소에 전혀 생각하지도 못했던
발상들이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노동에 대해 조사했었는데 주제가 워낙 거대한 것이라
고생을 많이 했지만, 아무 생각없이 바라보았던 노동이 사회를 유지시키고 어떻게 변동시켜왔는지 배운 것 같습니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얻었던 가장 큰 깨달음은 공부, 특히 사회학과 같은 공부는 훌륭한 선생님의 가르침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스스로 시간과 노력을 들여 탐구하려는 자세에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의 메일 주소는 jkyoon91@naver.com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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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과 계급 그리고 사회변동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1) 책 제목 : 돈과 인간의 역사
2) 출판사 : 이마고
3) 출판 년도 : 2004년
4) 저자 : 클라우스 뮐러
5) 역자 : 김대웅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 내가 생각한 사회변동의 원인은 ‘돈과 계급’이다.
나는 사회변동을 하나의 관점이나 키워드로 설명하려면 사회 변동들의 공통점을 찾아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공통점이 사회를 변동시킨 거대한 한 줄기의 힘일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대표적인 사회변동인 농업혁명, 산업혁명, 정보혁명의 공통점을 찾아보았다. 나는 그 공통점이 계급의 탄생이나
재질서화라고 생각했다. 농업혁명이 일어난 시기에 잉여 생산물이 생기기 시작했고, 잉여 생산물과 땅을 많이 가진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계급이 분화되기 시작했다. 산업혁명 시기에도 역시 자본가와 노동자 계급으로 계급이
분화되었으며, 정보혁명 시기에는 정보를 가진 사람과 가지지 못한 사람 사이의 ‘정보격차’가 그들을 분리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회변동들의 공통점인 ‘계급’이 사회변동에 미치는 영향을 주제로 수업시간에 발표를 진행했다. 영국의
부르주아 계급과 가톨릭 성직자 계급의 등장에 따라 일어난 사회 변동의 예시를 들면서 발표를 진행했는데, 발표를 준비
하는 동안 나의 관점은 약간 변했다. 부르주아의 예시에 등장하는 마그나 카르타와 대헌장의 내용은 부르주아 계급의
목적이 결국은 세금, 즉 돈을 적게 내고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는 것임을 알게 되고, 성직자 계급도 결국에는 수도원의
헌금 문제, 십일조를 걷는 문제, 면죄부를 파는 문제 등에서 교황권이 왕권과 싸우면서 돈과 재산, 이익을 지키려고
싸우는 것임을 알게 됐다.
그로 인해 나는 ‘그렇다면 결국 계급이라는 것도 인간의 돈에 대한 욕심 때문에 생기는 것 아닐까? 계급은 무리들끼리
자신들의 재산과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자연스럽게 형성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하게 됐다. 또한 사회변동에 가장
큰 영향을 주는 요인을 ‘돈과 계급’이라 보고 상류계급들이 무리를 만들면 그 외 무리는 자연스럽게 기타계급이 되며, 그
구조에 따라 사회가 크게 변한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돈이 사회변동에 미치는 영향을 소개한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3. 저자소개
정치경제학자인
클라우스
뮐러는
1944년
동독
작센주에서
출생하였으며,
1968년
동독
베를린경제대학교
금융경제학·국제경제학 석사를 거쳐 1973년 동 대학에서 「국민경제의 장기적이고 다양한 발전이 지니는 경제적 가치」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1972~1991년 카를 마르크스 공대(현 켐니츠 공대) 선임연구원을 역임하였고,
1991년부터
켐니츠
공대
경제학
교수로
재직중이다.
저서로는
<<재무관리론>>
<<미시경제학>>
등이
있다.
(네이버 인물사전)
4. 책 내용 요약
고대에서 현대까지 화폐의 변천사, 권력과 결탁한 검은 돈, 종교를 움직이는 돈의 힘, 돈을 향한 갖가지 사기사건 등
돈의 위력과 인간의 탐욕이 빚어낸 역사적 사건들을 다루고 있다.
화폐의 역사를 넘어 돈에 대한 인식 변화에 초점을
맞추고, 돈과 관련된 8가지 주제를 풍부한 일화와 사례를 통해 쉽게 풀어간다. 재벌 집단을 형성한 독일의 후고
스티네스, 돈을 빌리는 데 천부의 소질을 가졌던 카이사르, 교황의 재정 담당자였던 조반니 디 메디치등의 인물들과
그들이 만들어낸 사건들을 통해 돈의 이면에 숨겨진 인간의 탐욕과 돈에 얽힌 역사적 인물·사건들에 대해 비판한다.
또한 돈을 많이 가진 사람들, 부를 지키고 더 늘리려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더러운 수단의 방식'등을 통해 돈이 삶의
목적이 되어버린 듯한 우리의 '지금'이 행복한지에 대해 반문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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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서 저자는 인간의 탐욕과 부패를 비판한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행복을 빼앗아간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돈과 화폐가 인류의 역사를 이끌어왔다는 사실을 부정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모든 사건은 돈에서 비롯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
현대사회에서 돈이란 의․식․주생활과 문화생활 전반에 걸쳐 반드시 필요한 존재이다. 그러나 돈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부르기도 하고 자의이던 우연이던 간에 다른 사람에게 이 피해를 입힌다. 또한 돈이란 선과 악을 동시에 행하는
돈은 인류에게는 꼭 필요한 존재다. 엄연히 다른 노동의 질을 평가하는 기능, 상품 가치를 규정하는 기능, 계획성 있는
자금 분배를 가능하게 해주는 기능, 재생산 효율성을 높이는 기능 등 돈은 여전히 인간 감정이 해내지 못하는 부분에서
제 몫을 수행하고 있다. 이 책은 사회전반에 걸친 권력, 스포츠, 종교, 사기 등의 돈과 관련된 다양한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카이사르(시저)가 탁월한 정치력과 용맹함만으로 지도자가 됐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을 알고 보면 그렇지 않다. 로마
시대에도 돈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다. 카이사르는 뛰어난 웅변술로 정치자금을 끌어들이는 데 탁월한 재주가
있었다.
돈은 중세시대 최고 권력자인 교황과도 결탁했다. 교황 재정 담당자였던 조반니 디 메디치는 한 시절 유럽 역사를
뒤흔들었다. 메디치 가문은 교황을 갈아치울 만큼 권력을 행사했고, 그들 주머니에서 나온 돈은 다빈치 미켈란젤로 등
수많은 예술가를 후원하는 데 쓰였다. 메디치 가문이 의도했는지는 모르나 그들 돈이 르네상스의 원동력이 된 것이다.
돈은 더욱 정교한 방식으로 현대사에 끼어들고 있다. 굳이 이라크 전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전쟁이 때로는 누군가의
돈벌이를 위해 생겨난다는 사실쯤은 상식이 돼버린 세상이다.
저자는 "사람들은 조국을 위해 죽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기업가를 위해 죽는 것"이라고 꼬집고 있다. 제너럴
다이나믹스사는 작은 예에 불과하다. D. S. 루이스 사장에게는 미국 방위비가 금광이 되었다. 미국은 1982년에서
1992년까지 전략 로켓의 생산에만 1천2백50억 달러를 쏟아 부었다. 군수산업에는 수많은 기업들의 이해관계가 얽혀
있고, 이들이 부를 축적하기 위해서는 무기를 자꾸 만들어 사용하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몇 달 전 인터넷에서
이라크전도 이러한 상황을 직접적이나 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써놓은 어느 학생의 글을 본적이 있다.
지나치게 한쪽 면만 본다고 생각하기는 하지만 이런 부분이 오히려 학자다운 면모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거대 기업들이 등장하면서 돈의 위력은 점점 커졌다. 현대 기업들은 자기들이 가진 돈이 얼마인지도 모른다. 아니 모를
수밖에 없다. 예를 들어 폴크스바겐 자동차 회사가 자동차 공장만 소유하고 있다면 계산이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폴크스바겐은 세계 각지에 수많은 부동산과 동산을 소유하고 있다. 폴크스바겐은 브라질 북부 아마존 분지에 14만㏊에
달하는 농장을 가지고 있다. 이곳에는 소 2만7000마리가 있다. 이것을 쇠고기 장조림으로 가공한다면 도대체 얼마일까.
유럽과 북미에서 돈을 가장 잘 활용한 사람들은 유대인들이었다. 핍박 속에 살아왔던 그들은 믿을 수 있는 친구는
현금밖에 없다는 진리를 터득하고 있었고, 그것을 실천했다. 그들은 자본을 바탕으로 수많은 분야에서 이름을 날렸다.
미국인 중 유대인은 2%에 불과하지만 최상위 부자 40명 중 절반이 유대인이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중 65%, 의학상
수상자 중 23%, 물리학상 수상자 중 22% 가 유대인이다.
이러한 이야기를 통해 작가는 이 책에서 단순한 종이와 금속물이 돈으로 재탄생되면서 변화무쌍한 돈의 역사와 돈이
원인이 돼 일어난 사건들을 이야기함으로서 돈이라는 개념 자체에서 오는 에서 오는 힘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저자는 ‘돈은 역사발전의 산물이며 인간 스스로가 돈의 위력을 가질 수 있도록 했다’라고 하였다. 이 책의 모든
에피소드는 돈에 관련되어 있다. 이를 통해 과연 돈이 어떻게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는지 과연 돈이 곧 최선인지, 돈은
우리를 정말 행복하게 하는지에 대한 질문을 던지고 있으며 저자는 돈이 무엇인지 정의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 더 좋은
세계는 돈을 미워하고 경멸함으로써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돈의 순기능을 잘 이용함으로써 건설되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린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 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은 돈의 위력과 그에 대한 탐욕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들과 그에 관련된 인물들을 설명하면서 인류의 역사를
말하고 있다. 모든 사건은 돈에서 비롯되었다고까지 말하고 있다.
나는 이 책에서 강조하는 ‘돈’의 역할에 더해서 ‘돈과 계급’의 역할에 주목하고자 한다. 개인이나 가문 등의 욕망에 의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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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들도 사회 변동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자신들의 재산과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형성된 계급이 그 영향을 더욱 크게
만들고 더 큰 사회 변동을 가져온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예시를 들어서 이 관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예시 1) 영국의 부르주아계급.
※ 요약 : 세금 징수 문제로 의회(부르주아)와 왕이 대립하게 시작하였고, 세금을 중심으로 한 이 두 세력의 대립은
영국 역사를 관통한다.
13~14 세기의 영국에서는 전쟁이 끊이지 않았다. 왕은 전쟁 자금이 필요했고 당시 상공업 자영업 등으로 성장하고
있던 부르주아 계급이 부담하는 세금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부르주아는 왕에게 전쟁 자금을 주고 왕은 그들에게 여러
가지 권리를 주었다. 존왕이 전쟁의 목적으로 걷는 세금이 늘어나자 부르주아가 의회를 구성했다.
의회는 세금을 체계적으로 걷는 수단으로 사용되기도 했지만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려고 왕과 대립하는 구도를
형성하기도 했으며, “의회의 동의 없이 세금을 징수할 수 없다는 내용의 마그나 카르타(1215)의 승인을 받았다.
1204
1215
1265
1282
1314
1328
1337-1453
존왕, 노르만디 영토를 빼앗김
존왕, 마그냐 카르타에
(시민의 자유, 권리를 인정하는 칙언권,이것으로 왕권이 제한됨)
시몬 드 몽포르 의회소집 영국하원의 기초가 됨
에드워드 1세 웨일즈를 정복
바노크번의 전투에서 스코틀랜드가 잉글랜드격파
스코틀랜드 국왕 승인
백년전쟁
↑ 13-14 세기 영국의 전쟁 연표
하지만 이후에 제임스 1세 때 “국왕은 신에게만 책임이 있고 신하에게는 책임지지 않으며, 법의 지배를 받지 않는다.
국왕은 곧 법이다.”라는 의회를 무시하는 전제군주적인 발언으로 왕과 의회의 갈등이 격화됐다. 제임스 1세 이후 즉위한
찰스 1세는 스펜인과의 전쟁을 일으켜 의회에 세금을 요청했으나 의회는 이를 거절하고 대신 권리장전을 승인해주는
것을 조건으로 권리장전(의회의 승인 없이는 세금을 걷을 수 없다는 조항 포함) 승인을 요청했다. 찰스 1세는 이 요청을
승인하지만, 세금 징수 이후 이를 번복해버리면 의회를 해산시킨다.
이후에 스코틀랜드와 또 전쟁을 할 때 의회에
세금을 요청하지만 거절당하고, 결국 패배하고 맙니다. 이후에 의회파가 왕당파에 책임을 물으며 잉글랜드 내전 혹은
청교도 혁명을 벌이는데, 여기에서 의회파가 승리하게 된다. 부르주아 계급인 의회파가 승리하면서 결과적으로 왕인 찰스
1세가 처형당하고 공화정 등장, 의회민주주의의 기초 확립, 국민국가의 형성 등 사회는 크게 변화했다.
↑ 에드워드 왕이 재위기간 동안 징수한 세금 목록
마그나카르타와 권리장전의 핵심 내용은 세금이다. 왕과 의회의 싸움은 인간의 탐욕에서 출발한 왕당파와 의회파,
왕과 부르주아 계급의 싸움이었다. 그 과정에서 찰스 1세가 처형당하고 공화정이 등장하였으며, 의회민주주의의 기초
확립, 국민국가의 형성 등 많은 사회적 변화가 일어났다. 자신들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무리를 조직해서 전개한 싸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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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에도 엄청난 변화를 가져온 것을 볼 수 있다.
↑ 마그나 카르타
↑ 권리 장전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농업혁명 시기에 잉여생산물이 생겨나면서 많이 가진 자와 그렇지 못한 자로 사람들이 나뉘기 시작한 이래로 사람들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고 사회를 변화시켰다. 현재의 사람들은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으며, 앞으로도 ‘돈, 계급’은 인간
사회를 변화시킬 것이다. ‘돈, 계급’이 인류의 역사에 엄청난 영향을 미친 기독교와 함께 해온 예시를 들며 이 부분을
설명하려 한다.
예시 2) 로마 가톨릭 성직자 계급.
※ 요약 : 박해받던 로마 가톨릭 성직자 계급이 부를 축적하며 성장하고 왕권과 교황권이 수도원의 헌금 문제, 십일조
문제 등 이익 싸움을 하며 사회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기독교는 원래 로마에서 탄압받는 약한 조직이었다. 기독교의 유일신 사상과 다른 종교에 대한 배타성은 로마에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또한 조각상이나 제사물 등을 파는 사람들 등의 이해관계도 기독교에 과도한 세금을 부과하고,
잔인하게 탄압하게 만들었다. 그러던 와중 기원 후 4세기, 로마의 황제 콘스탄티누스는 312년 초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고 투린과 베로나에서 막센티우스군을 차례로 무찔렀다. 이후 벌어진 유명한 밀비우스 다리 전투로
결국 막센티우스 군은 콘스탄티누스에게 대패하고 막센티우스는 전사한다. 이 전투로 인해 제국 서방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유일한 강자이자 정제로서 군림하게 된다. 콘스탄티누스의 제국은 영토나 경제 등 다른 면에서는 통일되어있었으나
종교적인 부분에서는 하나로 묶여있지 않았다. 이에 황제는 자신의 제국을 기독교로 하나로 묶어 통합하기 위해 기독교를
이용하려하고, 성직자들에게 특권을 줬다. 기독교를 공인하여 국가종교로 삼으려한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발표했다.
밀라노 칙령
칙령의 내용
첫째, 다른 종교와 마찬가지로 로마
가톨릭교회도 공인되었다. 로마 제
국내의 모든 사람에게 신앙의 자유
를 허용해 주고 기독교인에게 교회
를 조직할 권리를 포함하는 법적인
권리를 보장해준다.
둘째, 기독교 탄압시대에 몰수한 교
회의 재산을 반환하고 이에 대해
국가가 충분한 보상을 주도록 했다.
황제는 밀라노 칙령을 통해 성직자 계급에게
각종 의무나 세금을 면제해주고 그동안 마음대로
몰수 할 수 있었던 교회의 재산을 반환할 것을
명하는 등 성직자 계급을 성장시키려 했다. 또한
재정과 조세, 법률의 특권을 주는 등 막대한 혜택을
주었다. 이로 인해 교회법이 제정되고, 종교재판이
시작되었다.
재산의
이전에는
소유가
불법단체로서
가능해지자
금지되었던
성직자들과
교회는
부패도 일삼지 않으며 여러 권리를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며 빠른 속도로 성장했다.
훗날 율리아누스 황제는 이렇게 성장한 교회와
성직자 계급을 탄압하려했으나, 이미 너무 성장한
교회를 방해할 수 없었고, 왕권과 교황권이 대립하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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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한 기독교는 훗날 1000년의 암흑시대라고 불리는 중세사회에 엄청난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하지만 검소한 생활을
주장하는 이런 기독교와 기독교 성직자들도 수도원 헌금, 십일조, 면죄부를 파는 문제로 왕권과 교황권 사이에 싸움을
벌이는 등 자신들의 돈과 재산을 지키려는 욕망을 보여준다. 중세 1000년과 인류 역사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준
기독교가 돈에 의해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증거는 메디치 가문의 예시를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예시 3) 교황을 배출한 메디치 가문.
메디치 가문은 남부 독일의 아우구스부르크 푸거가(die Fugger)에 앞서 유럽을 대상으로 고리대와 화폐거래업무를
영위한
대자본가이다.
이미
12세기경부터
거상으로서
주지되고
14세기의
아베라르도(Averardo)대에
외환업과
대부업으로 치부한 피렌체의 메디치가는, 시민에 대한 어느 정도의 자유부여, 조세의 대폭 인하, 거액의 자선금과
공공출비, 기업가 원조를 실천하는 한편, Bardi의 장녀와의 결혼을 통하여 구 부호와의 연계를 유지하면서 유럽 16개
도시에 은행을 설립하고 교황청 재정을 장악함으로써 거액 대부에 의하여 자가 경제력을 축적하고 시정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 후 에드워드 4세의 실각으로 말미암아 전 재산의 반액에 해당하는 거액 대부금의 회수불능, 그리고
밀라노, 리옹 등 각 출장소의 파산이 연속되어 1494년에는 몰락하였다.
메디치의 조상들은 향료상인이었다. 지오반니 메디치는 15세기 초 교황의 재정 담당자로 임명되었다. 덕분에 그는
금융업과 무역거래를 통해 막대한 자산을 축적할 수 있었다. 그의 아들 코시모는 자신의 자산을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는
데 사용하였다. 자신을 위협하는 가문들에게 높은 세금을 부과하고 정적들을 뇌물로 영입했다. 그는 반역자로 몰려
체포당했지만 재판소와 관청의 관리들을 매수해서 사형이 아닌 ‘10년 추방’형을 받고 불과 1년 만에 돌아왔다. 코시모는
1434년부터 피렌체 시를 통치하게 된다. 그 당시 그의 재력은 마키아벨리가 그에게 빚지지 않은 시민이 거의 없다고
말한 적이 있을 정도이다. 당시에 있었던 나폴리와 베네치아와의 전쟁에 필요했던 세금 징수나 사람들이 코시모에게 진
빚이 그의 권력을 탄탄하게 만들어주었다.
↑ 메디치 가문과 그 상징
메디치 가문은 가톨릭 교회에서도 재력을 통해 영향력을 끼쳐 16세기 유명한 두 명의 교황들(레오 10세, 클레멘스
7세)을 배출하였다. 메디치 가문의 교회에서의 영향력은 로마와 피렌체 두 곳을 손에 넣어 이탈리아의 지배자로
살아남게 하였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아직까지 살펴본 예시들에서, 부르주아는 돈과 의회의 권한, 성직자 계급은 교리, 교회법, 성직자의 권한 등을 무기로
자신의 이익과 지위를 지켜온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의 세상에서도 아직까지 그랬듯이 사람들은 욕망을 추구할
것이다. 따라서 많이 가진 자나 많이 가지려고 하는 자들 끼리 자연스레 무리가 형성되고 계급이 생겨날 수 있다.
그렇다면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어떤 계급이 생겨날까? 먼저 앞으로의 세상이 어떻게 변할지 생각해봐야 앞으로 생겨날
계급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앞으로의 세상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에 대한 논의는 다양하다. 그 중에 나는
‘탈산업사회’에 대한 논의에 집중해서 앞으로 형성될 계급에 대해서 생각해보고자 한다.
탈산업사회란 지난 200년간의 산업생산중심 근대사회가 전보통신기술혁명, 생산의 합리화를 겪으며 3차 산업 중심의
새로운 사회로 변한 모습을 말한다. 탈산업화에 대한 논의 중 포스트 포디즘에 대한 논의가 있는데, 이는 포디즘의
자본주의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제도적 양식이다. 포디즘은 대량 생산과 대량소비가 거시사회적으로 만나는 제도이다.
196
이 제도는 생산다변화의 한계, 노사합의의 어려움, 시장변화에 대한 비탄력성 등 때문에 비탄력적인 축적체계이다. 이런
비효율성 때문에 산업화의 이탈이 이뤄지고 사양산업이 빠져나간 이후 새로운 산업활동이 들어오게 된다. 새로운
산업활동은 주로 3차산업인 서비스업을 중심으로 하는 첨단산업이다. 여기서의 서비스업은 생산자 서비스업이라고
불리는, 생산을 돕는 서비스업이다. 새로운 혁신기술이 등장하고 생상방식의 고도화되며, 극소전자기술로 생산의 조직화와
관리가 신축적으로 변한 상황에서 상품의 투입 요소가 다원화되고, 생산공정이 복잡화되며, 다단계화 되었다. 생산을
돕는 서비스업이란 이런 과정에서 체계적인 생산방식과 합리화 과정을 돕는 산업이라고 할 수 있다. 가치의 창출과
실현이 복잡하면서 긴 투입-산출 과정을 통해 전개되는 순환체제에서 생산자본의 활동영역은 기업내에서의 기수합리화나
기업간 생산공정 및 유통망의 통합에 의해 축소되는 반면, 그 순환의 많은 영역은 서비스 관련 활동들로 채워지기
때문에 서비스업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이런 서비스업의 예시로는 개별화된 자본들의 경쟁을 조정하는 금융업이나
유통업 등이 있다. 이러한 서비스업들 중에서 금융업은 특히 궁극적으로 자본순환의 가속화를 담아내는 고도화된 축적의
한 양식이다.
서비스업 중심의 사회가 되어가지만 노동자의 고도의 기술이 요구되는 서비스업과 무기술, 원시적 육체노동 등이
요구되는 서비스업 두 종류의 서비스업으로 완전히 양극화된다. 계급끼리의 양극화가 더욱 심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산업화 사회에서 제품의 생산은 2-40대의 남성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제는 고급의 지식, 권위 자격을 소유한 남성이
중심이 되고 여성노동이 도시산업활동의 각 분야로 괄목할정도로 진출했다. 서비스상품의 생산과정이 분절되고
파편화되는 경향과 더불어 임시직, 하청직 등이 폭발적으로 생겨났다. 이런 상황에서 노동자의 집단적인 정체성이 현저히
약화된다. 집단적인 정체성 대신에 상품 소비 속의 이미지, 상징 감각 가치들로 개별적인 정체성을 쉽게 채우게 된다.
이러한 사회에서는 정치의 경향도 탈정치화, 담론화, 미시화된다. 이 이야기는 곧 집단적 정체성이 결여된 계급에 대해서
소비의 정치, 담론의 정치, 생활의 정치로 상위 계급이 하위 계급을 더욱 쉽게 통제할 수 있다는 이야기로 이해될 수도
있다.
탈산업사회는 기본적으로 기술의 발달, 정보 지식 중심 사회적 구성, 전개가 이뤄질 때 나타난다. 이에 따라 나는
앞으로 나타날 계급에 대하여 생각해보면서, 금융 등 고급 서비스업 중심의 탈산업 사회, 정보기술이 중시되는
미래사회에서는 정보를 무기로 하는, 정보를 소유하고 다룰 수 있는 계급이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나는 이 책을 읽고 발표 준비를 하면서 부르주아 계급, 성직자 계급, 메디치 가문의 예시 등 사회 변동에 영향을 미친
인물이나 계급을 보면서 그 모든 행위의 동인이 결국에는 자신들의 권리를 지키고 이익을 얻으려는 마음이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렇게 생각하게 되자, 아직까지 수업에서 다룬 여러 가지 주제들 중 화폐, 전쟁, 항해, 식생활, 그리고
이 계급 문제까지 결국에는 자신의 이익과 돈, 혹은 먹고사는 문제에 관한 문제이며 계급은 무리들끼리 자신들의 재산과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형성된 집단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앞으로도 인간의 욕망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며 따라서 새로운 이해관계를 중심으로 새로운 계급이 나타날 것이다.
나는 앞으로의 사회에 대한 여러 가지 논의 중 정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첨단 서비스 산업이 주요한 산업이 되는
탈산업사회에 대한 논의를 중심으로 앞으로의 사회에서는 정보기술이 중시되는 미래사회에서는 정보를 무기로 하는,
정보를 소유하고 다룰 수 있는 계급이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 논문
1)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앙과 종교정책(306-324년) [KCI등재]
이승희
한국서양고대역사문화학회, 서양고대사연구 38, 2014.8, 103-147 (45 pages)
2)메디치家의 미술후원과 정치적인 목적 [KCI등재]
이은기
서양미술사학회, 서양미술사학회논문집 6, 1994.12, 5-32 (28 pages)
3)박상섭, 「근대국가와 전쟁 : 근대국가의 군사적 기초, 1500~1900」(서울 : 나남,
1996) [KCI등재]
197
朴榮濬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군사 34, 1997.6, 275-281 (7 pages)
# 동영상 링크
로마 가톨릭 교회의 기원 http://www.youtube.com/watch?v=0Nf14n3IE90&sns=em
영국의 청교도 혁명 http://www.youtube.com/watch?v=x5b-VhEg0Vs&sns=em
영국 의회의 성립 ucc
http://www.youtube.com/watch?v=5tEzTt9cJ6U&sns=em
10. 종합결론
나는 아직까지 ‘돈, 계급’이 사회에 준 영향의 예시를 살펴봤다. 그 예시들 중 부르주아는 돈과 의회의 권한, 성직자
계급은 교리, 교회법, 성직자의 권한 등을 무기로 자신의 이익과 지위를 지켜온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앞으로의
세상에서도 아직까지 그랬듯이 사람들은 욕망을 추구할 것이다. 따라서 많이 가진 자나 많이 가지려고 하는 자들 끼리
자연스레 무리가 형성되고 계급이 생겨날 수 있다. 정보의 중요성이 커지고 첨단 서비스 산업이 주요한 산업이 되는
탈산업사회에서는 정보기술이 중시되는 미래사회에서는 정보를 무기로 하는, 정보를 소유하고 다룰 수 있는 계급이
나타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다. 따라서 우리도 코딩을 배우고 정보를 다루는 능력을 기르는 등 작은 일부터 앞으로의
사회에 적응을 하는 노력을 해나가야 할 것이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임지우, 사회학과, 2014104428, 수업시간에 계급을 주제로 발표를 진행한 학생입니다, limmisuu@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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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예와 사회변동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책 제 목 : 노예의 역사
책출판사 : 예지
출판년도 : 2015.03.13.
저
자 :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역
자 : 하정희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인터넷을 자주 접하는 나는 최근 인터넷에서 몇 가지 유행어를 자주 보게 되었다.
헬조선과 노예라는 단어이다. 지옥을 뜻하는 Hell과 조선을 합친 단어인 헬조선,
그리고 그런 조선에서 뼈 빠지게 일하는 노예. 이 단어들 모두 인터넷을 주로 이용하는
20~30대 청년들이 사용한다. 이들은 스스로 자신들이 살고 있는 나라를 지옥에
비유하며, 자신들을 노예라 칭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2014년 2월에 일어난 사건으로, 우리나라의 한 염전에서 감금,
혹사당했던 장애인이 구출되면서 큰 논란을 일으켰던 ‘신안군 염전 섬노예 사건’이 있었다. 이처럼 노예제도 혹은
노예라는 단어는 법적으로 노예제도가 폐지된 지 오래인 현재에서도 쉽게 접할 수 있었다. 실제로 호주의 인권단체인
워크프리재단(Work Free Foundation)이 2014년도에 발표한 세계 노예 지수(Global slavery index)에 따르면 전
세계에 3,580만 명이 노예처럼 살고 있다고 말한다.54) 즉 노예는 현재 아직도 존재하고 있으며, 이를 없애기란 매우
힘들 것으로 본다. 그렇기 때문에 노예 혹은 노예제도가 먼 과거부터 현재까지 이어져오면서 사회에 어떤 영향을 줬는지
알아보고, 앞으로의 세상에 어떻게 영향을 줄지 알아보고자 이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노예의 역사를 자세히 살펴보고
과거의 노예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아보고 이를 통해 사회 변동에 대한 관점을 찾고자 한다.
3. 저자소개
1949년 세네갈의 수도 다카르에서 태어났다. 1969년 파리 고등사범학교에서
자크 데리다, 루이 알튀세, 미셸 푸코와 함께 수학하였으며, 1972년에 철학교수
자격을 얻었다. 1982년 파리4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후, 로마의 빌라
메디치
대학의
프랑스연구소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프랑스
교육청과
외교부에서 문화 관련 업무를 수행하는 등 여러 나라에서 다양한 일을 했다.
1998년부터는 미국에서코네티컷 대학, 터프츠 대학을 거쳐 존홉킨스 대학교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20세기 프랑스 문학과 철학에 대해 가르쳤다. 2006년 프랑스로
돌아와 저술에 전념하던 중 이듬해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저서로는 『철학자들』, 『20세기 서양철학의 흐름』, 『인종차별의 역사』등이
있다.
4. 책 내용 요약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 (1949~2007)
○ 노예 계급의 등장
이 책에 따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이집트 문명 모두 특정한 장소와 시기에 사회의 생산력이 대단히 좋아져서
공동체가 생존하는 데 필요한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식량을 생산할 수 있게 되었다. 이와 같은 잉여생산물은 선택적인
소유를 가능하게 했으며, 결국엔 도구, 능력, 인력 등을 더 가진 자들이 더 많은 기회와 권한을 가지게 되었다. 이런
과정이 계속되면서, 물질적인 부가 권력으로 직결되고, 이는 점점 계급으로 변하여 많이 갖고 있는 자들이 재물을 가지지
못해 계급이 낮은 무리에게 노동을 강요할 수 있게 된다. 또한 이런 부를 더욱 향상시키기 위해 전쟁을 벌이고 패전한
54) http://news1.kr/articles/?1960819 new1 뉴스 <3600만명 세계인구 현대판 노예생활> 2014. 11.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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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리들을 자신들의 노동력으로 삼게 된다. 이때의 노예의 개념은 단순히 노동을 전담하는 낮은 계급의 무리로 정의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사회는 노예제도에 기반을 둔 사회는 아니었다.
○ 고대 그리스의 노예제
우리가 노예제하면 떠오르는 노예들이 사회의 대부분을 담당하는 사회, 즉 노예제도에 기반을 둔 사회는 고대
그리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때 노예들에게는 인격이라는 것이 철저하게 부정되었으며, 고대 그리스에서는 노예는
‘살아있는 도구’였다. 그리스의 노예들은 가사 노동, 농사, 가내공업, 공공분야(간수, 문지기. 시장의 화폐 검사원 등),
악사, 매춘 등 그리스 문명의 사회, 경제 등 여러 분야에서 없어서 안될 만큼 중요한 역할과 비중을 차지하였다. 특히
지배계급들의 권력과 삶의 양식을 뒷받침하는 경제적 잉여 대부분이 노예들이 창출하는 것이었다.
○ 로마의 노예제
고대 로마 사회는 노예제도에 기반을 둔 두 번째 사회로, 전설상 로마가 건국된 해인 기원전 753년부터 서로마의
마지막 황제 아우구스툴루스가 몰락한 476년까지 천 년 이상 노예제도를 유지했다. 로마의 공격적인 군사제국주의
정책의 결과로 전쟁 노예가 유입되어, 로마 내의 노예의 수는 꾸준히 증가했다. 전쟁뿐만 아니라 다양한 이유로 노예가
되기도 했는데, 로마에서는 자식을 노예로 팔 수 있었으며, 자식이 태어날 때, 독신 어머니가 키울 방도가 없거나,
키우고 싶지 않으면 자식을 유기할 권리가 있었다. 이렇게 버려진 아이는 구해준 사람의 노예가 되었다. 이런 노예들은
고대 그리스 사회 같이 대부분의 분야에서 혹독하게 노동을 하였으며, 검투사 노예와 같이 사람들의 엔터테인먼트를
책임지기도 했다. 다만 노예들은 전쟁에서 군함의 노를 젓는 일 정도만 했을 뿐, 군인이 될 수는 없었다. 노예들이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로마인들은 이들에게 무기나 훈련의 기회를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로마의
역사에서 노예들의 반란이 여러 번 있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스파르타쿠스가 일으킨 반란이 있다. 로마의
후기에는 경제적, 정치적 힘이 쇠퇴함에 따라, 전쟁 포로의 유입이 중단되어 로마는 심각한 노동력부족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문화적으로는 박애를 중시하는 스토아학파의 사상이 부각되면서 노예 해방에 영향을 주었다. 로마의
노예제도에 기반을 둔 생산양식은 로마제국이 붕괴할 때, 살아남지 못했으나 노예제도의 관습은 살아남았다.
○ 중세시대의 농노
옛날 대농지에서 고생했던 많은 노예 무리들은 농지와 함께 해체되었다. 이들은 대체로 남녀로 짝을 지어 더 작지만
더 자율적인 개척지에서 새로 자리를 잡게 된다. 이 같은 현상이 대대적으로 행해지자 주인은 노예들에게 개인시간을
허용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노예들은 세금과 부역(강제노동)을 감당해야 했다. 이런 식으로 이들은 어느 정도의
가정생활에 대한 권리를 인정받으면서도, 노예에 대한 법 규정은 변하지 않은 채 점점 ‘농노’가 되어갔다. 농노는 가정을
꾸릴 수 있는 권리가 있었는데, 이를 통해 자식을 낳으면 주인은 병자와 사망자를 대체할 젊은 노예를 사야 하는 재정
부담을 덜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농노의 사회적 위상은 그리 좋지 못했다. 우선 이들은 자유가 없었는데, 농노는
‘백성’에서 배제되었다. 농노는 직업군인이 될 수 없었고, 교회에 들어갈 때 정문을 이용할 수도 없었으며, 맹세를 할
수도 없었다. 또한 농노는 소속된 땅을 떠날 권리가 없었으며, 타인의 소유물이어서 소유자가 살 수도, 팔 수도, 물려줄
수도 있었다. 이들 모두가 로마법에 딸려있던 규칙의 잔재였다.
○ 유럽, 탐욕의 길을 열다
아랍인들을 통해 유럽에 설탕이 소개되었다. 그리고 즉시 설탕은 유럽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유럽인들은 십자군을
이용해서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사탕수수농장을 개발하였으나 이슬람교도에 의해 쫓겨났으며, 동시에 설탕의 수요가
계속 증가하면서 새로운 경작지를 찾는 것이 필수 과제가 되었다. 이에 따라 15세기 초부터 카나리아제도와
마데이라제도, 아조레스제도에서 설탕이 재배되었다. 하지만 이 제도의 인구는 매우 적었기 때문에, 대규모의
사탕수수재배를 위해서 노동자들을 들여와야 했다. 이렇게 해서 1420년대에 처음으로 마데이라제도에서 아프리카 출신
노예들만으로 사탕수수 농장이 개발되었다. 그리고 이후 사람들은 노예를 아프리카에서 직접 이송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육지가 아닌 해상을 통해 이루어진 새로운 형태의 흑인노예무역이 되었다.
200
○ 삼각무역
흑인노예무역에서 상당한 이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국가들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며 노예무역경쟁에 뛰어들기 시작했다. 이렇게
치열한
경쟁
속에서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
삼각무역이다. 삼각무역 체제의 대상 장소는 유럽,
아프리카,
아메리카였다.
삼각무역에
아주
능숙한
사람들은 영국 상인들이었지만, 다른 많은 나라들의
노예무역
상인들도
삼각무역을
노예상인들은
유럽에서
제조된
서해안으로
가져감으로써
행하였다.
제품을
자기들의
상업
이들
아프리카
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런 상품들은 팔리거나 아프리카 노예와
교환되었는데, 이런 노예들은 해당 지역의 아프리카
지배자들, 혹은 포로를 획득한 사람들, 혹은 이슬람 노예 상인들에 의하여 구매 대상으로 제공되었다. 삼각무역의 두
번째 변에서는 노예를 가득 실은 배가 대서양 가로질러 아메리카에 있는 유럽 식민지로 향하였다. 그런 다음에 아프리카
노예들은 플랜테이션 소유자들에게 팔려나갔고, 노예의 노동력에 의하여 생산된 농산품을 구입하는 데 노예 판매 대금이
사용되었다. 삼각무역의 세 번째 변에서는 이들 상품이 영국으로 되돌아왔는데, 이곳에서는 높은 이윤을 남기고 팔렸다.
이러한 삼각형 모양의 교역에서는 삼각의 세 변을 모두 담당할 수 있는 선박은 거의 없었다. 노예무역에는 아메리카에
식민지를 가진 모든 유럽 국가들(네덜란드와 덴마크를 포함하여)과 식민지를 가지지 않은 몇몇 국가들(특히 프러시아)
참여하였다. 프랑스의 삼각무역은 직물, 보석, 금속기구류를 서아프리카에 보내고는, 카리브해 지역에 있는 세인트
도밍고(하이티), 구아델루페, 마르티니케로 노예를 수송하였고, 최종적으로는 설탕과 커피를 프랑스로 보냈다. 프랑스는
나머지 유럽 대륙으로 설탕을 재수출함으로써 영국이 주도한 교역 제도를 확대하였다. 설탕은 카리브해의 노예 경제의
기반이 되었던 필수품이었다. 사탕수수는 유럽에서는 재배되지 않았다. 그리고 설탕은 아직 사탕무로부터는 추출되지
않았다. 아메리카에서 노예에 의하여 생산된 설탕은 단맛을 점점 좋아하게 된 유럽인들의 취향을 유지시켜주었다.
유럽인이 설탕에 탐닉함으로 인간성에는 심한 손상이 왔다. 1690-1790년 사이에는 유럽으로 운반되는 설탕 1톤 당 한
사람의 아프리카인들이 사망하였다. 카리브해산 설탕의 소비가 최고점에 달한 1801년에, 영국의 소비자 매 250명에게
설탕을 공급하기 위하여 노예 한 명이 사망할 정도였다.
○ 21세기의 노예제도
인류가 노예제도를 시행한지 5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노예는 사라지지 않고 존재한다, 저자는 가족제도와 종교를
제외한 그 어떤 제도도 이 같은 생명력을 가지지 못했다고 말한다. 21세기에 들어서 다양한 형태의 노예, 혹은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많이 있는데, 특히 제조 분야에서 옛날의 전통적 형태의 노예가 다시금 기세를 떨치고
있다.
자본주의체제에 전형적으로 나타나는 수익성 경쟁 때문에 현재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서는 노예제도와 유사한 형태의
경제적 착취가 확산되고 있다. 이는 아동노동착취와도 연결되는데, 유니세프에 따르면 2001년에 노예와 유사한 조건에서
노동을 강요당하는 5~15세 아동의 수는 2억 5천만 명이라 한다. 또한 성인도 매우 적은 돈을 받으며 공장에서
일하는데, 이 같은 ‘노동착취공장’이 점점 확산되고 있다. 주목할 점은 ‘노동착취공장’이 선진국에서도 증가하는 추세라는
것이다. 개발도상국으로부터 불법외국인이 지속적으로 유입되고 있기 때문에 이들은 계속 번창하고 있다. 이들은 노예와
같은 대우를 받지만 불법외국인이라 보호받을 수 있는 길이 전혀 없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노예의 역사’책은 제목 그대로 노예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다.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문명부터 현재 21세기까지,
노예제도는 계속 존재해왔으며, 노예들은 불합리한 대우를 받아왔다. 사람으로도 취급받지 못하며, 주인의 소유물정도로
인식되고 취급되었다. 주인이 죽으면 사후세계에서도 주인을 모시라고 노예를 같이 주인의 무덤에 묻는다던가, 노예를
201
가득 실은 배가 가라앉을 위기에 처하자, 노예를 산채로 바다에 던지고, 이들을 물건취급하며 보험 처리를 요구했던 종호
사건 등 노예의 삶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당연하게도 이런 노예들이 직접적으로 사회를 변동시키거나 혁명을
이끌고, 어떤 대단한 발견이나 발명을 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노예 혹은 노예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사회가 지금과
같이 발전하고 변동해왔다고 생각한다. 노예무역으로 자본의 축적을 했다던가, 사회의 변동을 이끌었던 집단이 그렇게 할
수 있도록 가사노동부터 사회의 전반적인 작업을 책임졌다든지 분명 노예들이 사회변동에 끼친 영향력은 간접적으로나마
존재한다. 즉 내가 이 책에서 찾은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노예는 매우 오래전부터 존재했으며, 이들이 있었기
때문에 혹은 이들을 이용한 덕분에 사회는 발전할 수 있었다. 또한 5천년이 넘는 역사동안 노예는 존속해왔고, 앞으로도
노예는 사라지지 않고 존재할 것이다. 현재 그리고 미래에도 노예나 노예와 다를 바 없는 사람들은 과거의 노예가
그랬듯이 사회변동에 어떻게든 영향을 줄 것이다. 그것이 설사 인권을 무시하는 행위더라도 말이다. 이것이 내가 ‘노예의
역사’라는 책에서 찾은 사회변동의 핵심관점이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과 노예
고대 그리스 사회, 특히 아테네의 민주정 발달은 페르시아 전쟁과 크게 관련이 있다. 아테네는 페르시아 전쟁을 통해
강력한 해군력을 키울 수 있었고, 에게 해의 해양대국으로 성장하였다. 아테네 해군의 성장은 그동안 자비로 무장할 수
없어 폴리스 방위에 배제되었던 하층 시민들까지 군사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들은 무장이 필요하지 않은 배의 노 젓는
노잡이 수병으로 함대에서 병사로써 활동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는 하층 시민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켰으며,
수적으로 우세한 하층 시민들이 정치화되자 아테네 내부의 귀족정의 잔재가 사라지고, 민회의 기능과 권한 강화 등
민주정이 더욱 발달하게 되었다.
동시에 페르시아 전쟁 이후, 아테네에서 노예제 보급은 더욱 가속화되었다. 페르시아의 위협이 사라지고 아테네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비그리스계 사람들이 다양한 방식으로 그리스 세계에 유입되었다. 특히 전쟁 이후 구매력이 증대한
아테네는 이런 상품 노예의 주요한 구매자였다. 기원전 5세기 후반 아테네에서 노예는 전 인구의 1/3에 달할 정도였다.
이들 노예는 그리스 사회의 거의 모든 생활영역에 배치되었다. 유명한 은 광산 라우레이온에는 수만 명의 노예가
투입되어 아테네의 경제에 큰 비중을 차지하기도 했다. 또한 아테네의 평균적인 가정의 가장이 민주적 시민으로 활동할
수 있으려면 보조적으로 노예 1~2명의 존재가 필수적이었다. 아테네의 시민들이 아고라에 모여 활동을 할 때55),
노예들이 이들을 대신하여 노동을 하기
때문에 시민들은 노동에 얽매이지 않고 민주적 활동을 마음껏 할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노예제는 아테네의 민주정에 불가결한 요인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그리스 아테네의 민주정이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시초로 여겨지는 만큼 노예제가 현재의 민주주의에 간접적으로 미약하게나마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중세 농업의 발전과 농노
중세 초기의 유럽은 자급자족 농지의 누더기 땅에서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영주의 성 하나와 성을 중심으로
형성된 작은 마을과 농경지가 전부였다. 외부에서 들어오는 상품도 거의 없었기 때문에, 돈이나 도로도 거의 필요치
않았다. 그러나 이런 자급자족적 생활방식은 생산량이 감소하거나 흉작이 나면 곧바로 기근으로 직결된다는 위험이
있었다. 이 때문에 농사를 담당하던 사람들 즉, 중세의 농노들은 이 같은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여러 노력들을 하게
된다. 장원의 농지는 돌려짓기(윤작)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휴작지, 춘경지, 추경지 세 개로 나누어 돌아가면서 땅을 쉬게
했는데, 이는 토지의 비옥함을 유지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북유럽과 서유럽의 농노들은 단단하게 얼어붙은 농지를
조각내어 갈아엎는데 소와 말을 이용했다.
이때, 경작을 수월하게 해준 농기구는 쟁기와 편자 그리고 목사리56)였다. 동물들의 목을 조르던 멍에 대신에 목사리를
달아주자 작업 능률이 다섯 배로 올랐다. 이와 같이, 중세의 농업 발전에는 농노들이 있었다.
또한 농업의 발전을 통해 많은 생산을 하게 되면서 더 많은 잉여생산물을 발생시켰다. 영주는 잉여분을 인근의
상인들과 거래하는 것이 수익성이 있다고 판단하여 거래를 시작하게 되며, 시정 거래가 형성되어진다. 농노가 시장
거래에 직접적인 역할을 한 것은 아니지만 농업 생산력 향상으로 인한 잉여생산물발생으로 인해 시장 거래의 형성에
55) https://www.youtube.com/watch?v=vYuqUb4-d80 에서 해당 영상 시청이 가능하다.
56) [명사] 개나 소 따위 짐승의 목에 두르는 굴레. 위로 두르는 굻은 줄과 밑으로 두르는 가는 줄로 되어 있다.
-네이버 국어사전
202
간접적으로 기여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삼각무역과 산업혁명
18세기 교역으로 인한 이익, 그리고 유럽의 번영 중 상당 부분은 노예제에 의한 것이었다. 그리고 노예제를 이용하여
가장 많은 이익을 남기는 방식은 삼각무역 체제였다. 그리고 이런 삼각무역 체제를 가장 잘 이용하고, 많은 이익을 얻은
나라는 영국이었다. 영국은 해상 무역을 통해 점점 소득이 늘어났으며, 이는 영국인들이 차, 커피 등을 많이 마시게
하였다. 이는 설탕의 수요도 같이 증가시켰고, 사탕수수의 재배가 불가능한 유럽은 서인도제도 등에서 재배하여
수입하였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런 사탕수수의 재배와 유럽으로의 공급이 처음부터 흑인노예를 전제로 시작하였다는
것이다. 유럽인들, 특히 영국은 흑인노예를 이용한 삼각무역과 대서양세계경제의 형성을 통해 큰 경제적 이익을 얻었다.
흑인노예는 서인도제도에 보내져, 사탕수수와 같은 열대작물을 재배하였고, 영국은 이런 작물을 처리하는 새로운
공업이 만들어졌다. 또한 거대한 플랜테이션 농장의 건설은 영국에게 새로운 시장의 건설과도 같았다. 영국은 삼각무역을
통해 막대한 자본의 축적을 이뤘으며 이는 영국의 산업혁명의 원천이 되었다. 인류의 역사에 많은 변화와 발전을 가져다
준 산업혁명도 이처럼 노예무역에 의한 자본에 그 토대를 두고 있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고대의 문명 때부터, 지금까지 5천년이 넘는 기간 동안 노예는 사라지지 않고 존재해왔다. 그런 노예가 미래에 갑자기
사라질 거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어떤 형식으로든지 노예는 미래에 존재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노예제도의
폐지, 인권에 대한 개념, 신분제의 폐지 등 노예와 노예제도는 존재해서는 안 되는 것이며 불법인 것이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대대적으로 노예제도를 시행하는 국가는 없다. 대신 가끔 미디어에는 노예와 같은 삶을 살며 노동력을 착취당한
사람들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경우, 얼마 전에 발생한 신안 염전 섬 노예 사건이 있다. 이처럼 21세기에 노예제도가
폐지되었음에도 노예는 계속해서 존재해왔다. 다만 앞으로의 세상에서는 이와 같은 노예도 계속 존재하겠지만, 그보단
새로운 형태의 노예가 있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그것은 바로 나를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을 노예로 만드는 것이다.
사회는 점점 사람들을 대중화시켜 단순하고 통제하기 쉽게 만든다. 한국에서의 학생들은 학교를 열심히 다니면서 좋은
대학교를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리고 대부분 그 좋은 대학교에서 좋은 직장으로 취직하기를 원하고 노력한다. 나
역시 이것을 중학교 어쩌면 고등학교 때부터 당연하게 받아들이고 열심히 공부를 했다. 그리고 결국 대학을 졸업하고
다른 누군가의 밑으로 들어가 일을 할 것이다. 한국의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 역시 그럴 것이다. 결국 우리는 사회에서
필요한 인력, 노동력을 공급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당연하게 되었으며, 우리는 우리가 그렇게 되기를
원하도록 대중화되었다. 앞으로의 세상은 이것이 더욱 강화되어 이런 ‘자발적 노예’가 더욱 많아질 것이라 예상한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이 책을 읽으면서, 노예는 고대부터 지금까지 계속 존재했으며, 앞으로도 계속 존재할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또한
노예라고 하는 것이 대농장에서 채찍을 맞아가면서 힘들게 노동하는 사람만 노예가 아니라, 어쩌면 나도 노예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좀 더 확장해본다면, 자신이 창업을 한 것이 아니고, 다른 사기업에 취직하거나, 남에게 월급을
받아가며 생활하는 사람은 전부 노예일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였다. 현재 대학생들은 좋은 직장에 취직을 하려고 소위
‘스펙’이라는 것을 쌓는다. 그리고 자기소개서나 이력서에 ‘토익 xxx점’,‘컴퓨터 활용능력 1급’,‘미국의 xxx학교 교환학생
1년’ 등을 적어 넣는다. 하지만 이는 마치 과거의 노예시장에서 노예상인들이 노예를 팔 때의 모습과 비슷해 보인다.
노예상인이 “이 노예는 글을 읽고 쓸 줄도 알고, 숫자도 셀 줄 압니다. 그리고 힘도 세서 쌀을 3가마씩 번쩍번쩍 잘
들고 일도 잘합니다.” 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어 보인다는 생각이 든다. 즉 나를 포함한 현재의 대학생들은 자기
자신을 노예시장에서 팔기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력을 공급하는 존재일
뿐인, 노예인 것이다. 이를 깨닫고 벗어나기 위한 노력을 한 사람이 앞으로의 사회를 변동시킬 것이다.
203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책 제 목 : 조선 노비들, 천하지만 특별한
출 판 사 : 역사의 아침
출판년도 : 2013.03.04.
저
자 : 김종성
위에 소개한 크리스티앙 들라캉파뉴의 ‘노예의 역사’는 고대 메소포타미아 때부터
21세기의 노예제도까지 넓은 시간적 배경을 바탕으로 노예의 역사에 대해 서술한다.
이는 외국에 대한 내용, 즉 대부분 서양사와 관련된 내용뿐으로, 한국의 노예에 대한
서술은 찾아볼 수가 없었다. 이에 한국의 노예에 대해 다룬 책을 찾다가 이 책을 찾게
되었다. 이 책은 조선시대의 노비의 기원, 몸값, 저항 등 다양한 주제를 실제 사료를
보여주며 재미있게 소개해주며 이 같은 움직임이 조선시대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설명한다. 이 책을 통해 조선시대의 노비에 대해 좀 더 알고, 이를 서양의 노예와 비교해보면 다양한 관점과 통찰력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책 제 목 : 당신은 노예, 미래한국
출 판 사 : 어드북스
출판년도 : 2012.09.11.
저
자 : 케니스 김
저자 케니스 김은 고려대학교 중퇴 후, 세계를 떠돌며 살면서 세계를 무대로 여러
사업을 하고 있다. 그는 “어디 사니?”, “어느 대학 나왔니?”, “부모님은 뭐
하시니?” 끊임없이 듣는 질문들과, 이런 종류의 질문 자체는 경멸하면서도 결국
우리
모습은
그
질문에
그럴싸한
대답을
하기
위해
밤낮없이
고생하며,
‘명문대학교’에 입학하고 ‘유학파’라는 이름을 달기 위하여 밤새워 공부하고 사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하는 것을 보고 세상의 시스템에 자신을 맞추지 말라 조언한다. 이를
벗어나지 못한다면 우리의 미래는 결국 노예라며 경고를 한다. 그는 우리 모두가
노예임을 깨닫고 이를 벗어나려고 노력해 성공한 삶을 살고 있다. 이 책에는 그것과
관련된 저자의 경험과 생각이 나타나 있어, 노예와 관련지어 사회변동을 이해하는데
있어 많은 생각할 거리를 제공해준다.
10. 종합결론
노예와 사회변동을 연관지어 공부하면서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1) 5천년이 넘는 역사동안 노예 혹은 노예제도는 간접적으로든지, 이용당하면서 사회변동에 영향을 주었다.
2) 그리고 앞으로의 세상에서도 노예는 사라지지 않고 계속 존재할 것이다.
3) 사전적 의미의 노예도 존재하지만, 아무 생각 없이 사회에서 시키는 대로 따르고 일하는 ‘자발적 노예’도 있다.
4) 이를 깨닫고 노예에서 벗어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 앞으로의 사회변동을 이끌 수 있을 것이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주소
이름 : 김병기
학과 : 사회학과
학번 : 2010104346
email주소 : sacred_moo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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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와 사회변동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1)책제목: 르네상스(Renaissance)
(2)출판사: 을유문화사
(3)출판년도: 2003년 4월 21일
(4)저자: 폴 존슨(Paul Johnson)
(5)역자: 한은경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사회변동론 수업 발표 주제를 한명씩 발표할 때, 내가 생각을 하고 있었던 몇몇 주제들이 이미 나왔고, 이미 언급된
사회변동에 영향을 준 변수 외에 다른 것이 무엇이 있을까 고민하던 와중에 ‘문화’라는 키워드가 떠올랐다.
문화라는 키워드는 여기저기서 많이 사용되고 나 또한 많이 사용하고 있는 단어이다. 하지만 막상 ‘문화’를 사회변동의
주제로 정하고 나니깐 ‘그런데 문화가 뭐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문화라는 단어의 정의를 찾아보니 ‘한 사회의
개인이나 인간 집단이 자연을 변화시켜온 물질적·정신적 과정의 산물’57)이었다. 정의를 보고 나니깐 문화가 내가
살아가고 있는 사회, 국가, 세계 전체를 뜻하는 것 같았다. 한마디로 문화는 모든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인 문화는 넓은 정의를 뜻하기 때문에 발표의 범위가 방대해질 수 있으므로 문화를 보다 더 좁은 의미의
정의로 찾아보았다. 주로 교양으로서의 문화, 진보로서 문화, 예술 및 정신적 산물로서 문화 그리고 상징체계,
생활양식으로서 문화로 문화를 좁은 의미로서 정의할 수 있는데 나는 ‘예술 및 정신적 산물로서 문화’인 좁은 의미로
문화의 정의를 내린 것을 선택하고 이와 관련하여 사회변동 발표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화-예술과 관련된 단어인 ‘르네상스’는 요즘에도 신문기사나 뉴스, 사람들의 말에서 종종 들을 수 있을 만큼 자주
사용되고 있는 단어이다. 과거의 문화적 부흥이 일어난 특정 시기의 시대를 나타내는 단어가 현재에도 계속해서 쓰이고,
그 단어가 직접적으로 과거의 그 시기를 가리키는 것이 아닌, 하나의 상징적인 의미로 쓰인다는 것은 르네상스시대
자체가 사회에 어떤 중요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르네상스와 관련된 책을 찾기 위해서 르네상스를 인터넷 검색창에 입력하여 검색하였을 때, 첫 페이지에 르네상스와
관련된 여러 책 제목들이 떴는데, 이 책만 유일하게 ‘르네상스’ 딱 네 글자만 띄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직접 책을 찾아서
보니 책 안의 구성도 르네상스가 미친 영향을 문학, 조각, 건축 등의 분야로 나누어서 보기 좋게 나누어 르네상스 시대를
잘 모르는 내가 읽어도 책을 읽고 많은 어려움 없이 정리할 수 있을 것 같아서 이 책을 선택하였다.
3. 저자소개
폴 존슨(Paul Johnson)
영국의 저명한 역자 저술가이자 대표적인 언론인 폴 존슨은 1928년 영국 맨체스터에서 태어났다. 스토니허스트
칼리지와 옥스퍼드 대학 맥달렌 칼리지에서 공부했다. 졸업 후 지브롤터에서 육군 대위로 복무하면서 프랑코 정권의
잔인함과 고통을 목격했다. 1950년대에 언론인으로서 명성을 얻었고, 「레알리테」의 부편집장과 「뉴 스테이츠먼」의
편집장을 역임했다.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소설 「닥터 노」를 비판하고, ‘비틀리즘Beatlism’이라는 종교 단체의
위협을 경고하기도 하는 등 우상 파괴자로서의 면모를 보였다. 1970년대 마거릿 대처의 정치적 조언자이자 연설문
작성자가 되었다. 보수적인 가톨릭교도로서, 해방 신학을 이단으로 여기고 성직자의 독신 생활을 옹호했으나 여성이 사제
제품을 받는 것에 대해서는 긍정적인 입장을 보였다. 2006년 미국 대통령이 주는 ‘자유의 메달’을 받았다. 「더
스펙테이터」, 「더 타임스」, 「데일리 텔레그라프」, 「뉴욕 타임스」, 「월스트리스 저널」, 「내셔널 리뷰」 등 권이 있는 신문과
잡지에 인문, 종교에 관한 글을 기고했으며, 역사 분야에서 40여 권이 넘는 활발한 저술 활동을 전개하였고, 그의
작품들은 전 세계에 번역, 소개되었다. 지은 책으로 『지식인의 두 얼굴』, 『기독교의 역사』, 『폴 존슨의 예수 평전』,
57)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2015-11-17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54876&cid=46634&categoryId=466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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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조자들』, 『위대하거나 사기꾼이거나』, 『모던 타임스』 등이 있다.
4. 책 내용 요약58)
(1)르네상스의 역사와 경제적 배경
‘르네상스’라는 용어는 1858년 프랑스 역사가 쥘 미슐레59)가 처음 주도적으로 사용했고, 2년 후에 야콥 부르크하르트
「이탈리아 르네상스 문명」이라는 저서를 발표하면서 완전히 굳혀졌다. 이 용어는 유럽이 ‘기독 국가’이던 중세 시대와
근대가 태동하던 시대간의 과도기를 표현하는 데 매우 편리했기 때문에 고착되었다.
르네상스의 자체의 기간을 정의하는 일은 매우 어려운 일이며, 로마 제국이 몰락한 5세기 이후 야만적인 몇 세기에
걸쳐 손실된 고대의 미덕과 기술, 지식. 문화를 재발견한다는 데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5세기에 서로마 제국이 몰락한 이후, 제국의 지위를 계승한 야만적이고 취약한 사회에서 장엄한 과거의 로마를
재발견하자는 열망이 더욱 강하게 곳곳에 드러났고, 고대의 미덕과 기술, 지식, 문화를 재발견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났다.
그리고 피렌체는 그 어느 도시보다 르네상스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르네상스를 형성하는 여러 요인들은 1300년 이전에 이미 존재하였지만, 이 운동이 추진력을 모아 자립성을
확보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소요되었지만 경제적 요인과 인간적 요인을 통하여 결실을 맺을 수 있었다.
르네상스는 세계 역사상 최초의 부가 점차 축적되어 성장ž확산되고, 중간 기술을 규범으로 삼는 사회가 부상하는 중에
언어가 인쇄되고 분배되는 방식의 놀라운 혁명이 이루어지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하지만 르네상스가 기술적인 사건이나
경제적인 사건은 아니다. 경제적ž기술적인 발전이 없었더라면 르네상스가 그 시대에 이루어진 형식을 취할 수 없었지만,
르네상스는 주로 인간의 사건이며, 여러 괄목할 만한 재능을 가진, 더욱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따라서 르네상스는 개인들의 작업이며 어떤 의미에서는 개인주의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2)문학과 학문의 르네상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어와 라틴어 텍스트를 복원하여 이해하고, 세련된 라틴어로 글을 쓰는 일이다. 동시에 자국
언어, 특히 이탈리아어를 완성, 정리하고 이용하는 일이기도 하다.
알리기에리 단테는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인물 중의 한 명으로 르네상스의 중심적인 패러독스를 구체화하였다. 그는
「신곡」을 전부 이탈리아어로 써 평범한 토스카나어로 가장 절묘한 시를 쓰고, 이것이 가장 중요한 의미의 문제를 다루는
데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보여준다. 단테 이전에 토스카나어는 이탈리아의 한 방언에 불과했고, 이탈리아 반도 전역에서
인정되는 문자 언어는 없었다. 그러나 단테 이후 토스카나 방식의 문자 언어는 기정사실화 되었고, 단테는 근대 언어에
결정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더욱이 그는 중세인인 동시에 교회에 매우 비판적이면서 사물의 본질을 날카롭게 통찰하고 재주가 남보다 못한 이들을
격려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근원인 등대와 같은 역할을 하면서 르네상스 자체를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단테
고대의
이후의
문학과
연구하고
학자들은
문법
등을
레오나르도
브루니에 의해 사용된 용어인
인문학에
대한
활발하게
하였다.
인문주의자들은
개편된
왼쪽부터 알리기에리보카치오, 초서, 라블레, 토머스모어, 루터, 몽테뉴, 셰익스피어, 단테
학문의
연구를
대학을
신학위주로
싫어하고
중심지들을
58) 책의 주된 내용이 르네상스 인물들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2), (3), (4), (5)에서는 각 분야의 대표적 이탈리아 인물들에
대해서 요약하였다.
59) 프랑스의 역사가로 국립 고문서보존소 역사부장, 파리대학 교수, 콜레주 드 프랑스 교수를 역임하였다. 역사에서 지리적 환경의 영
향을 중시하고 민중의 입장에서 반동적 세력에 저항하였다.
두산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96437&cid=40942&categoryId=343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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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아다니면서 아웃사이더의 영역에서 위치해왔으나, 궁정에 스며들었기 때문에 사회적인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인문주의학자들은 권력에 관심을 보였고, 그 이면에는 자신을 선전해 줄 사람을 구하고 싶다는 욕망이 있었다. 이러한
욕망을 뒷받침해준 이들이 메디치가인데, 메디치가의 권력은 궁극적으로 자본에 기반을 두었지만 문화적인 통솔력으로
표현되었다. 그들은 자신의 운명과 피렌체의 운명을 동일시하면서 새롭고 완벽하고 장엄한 것에 문화적인 열정을 보였다.
(3)르네상스 조각의 분석
르네상스는 인간의 실재를 표현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인간의 형상을 3차원적으로 환기시키는 조각은 이 목적에 가장
직접적으로 부합되었다.
르네상스의 조각은 니콜라 피사노에서 시작되었다. 피렌체와 다른 상업도시들은 자신의 부를 과시하기 좋아했고 이러한
것은 예술가들이 계약을 맺고 정교하고 화려한 작업을 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때 계약을 맺는 예술가들은 거의
드물었기 때문에 이들은 유명해지거나 명성을 의식하게 되면서 자신의 작품에 서명하기 시작하였다. 이 예술가-명사의
출현은 르네상스의 중요한 사실이다.
조각가 중 한 명인 도나텔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만큼 오랫동안 천재성을 소유하였고 피렌체에서 태어나
피렌체에서 죽은, 르네상스의 중심인물이다. 도나텔로는 겉치레나 상류사회에 관심이 없었고, 완벽주의자로써 예술적인
완전성을 지니고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은 몇 년을 투자하여서라도 완성하였다. 그는 어떤 재료를 가지고도 작업할
수 있었으며, 임의로 선택하여 특정한 용도에 맞게 자료들을 섞는 예술적 기법을 사용하였고, 이 기법은 500년 후에
프랑스에서 브리콜라주라 불리게 된다. 그는 독창성을 발휘하여 새로운 것을 해냈으며 인간 개개인을 서있는 모습으로
있게끔 조각상을 만든 것도 도나텔라이다.
도나텔로
도나텔로
베로키오
<다비드>
<다비드>
미켈란젤로
미켈란젤로
<다비드>
<피에타>
(4)르네상스 건축
중세 이탈리아는 거대한 건축의 폐허로서 로마 제국의 거대와 영광을 끊임없이 상기시켰고 점차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자 주요 도시들은 고대 로마의 모습을 복원하려고 시작한다.
브루넬레스키는 엄밀한 의미에서 건축가는 아니었지만 그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지붕을 로마 시대
이후의 최대의 돔 지붕인 판테온에서 영감을 얻어 돔의 지탱되는 무게를 가볍게 하기 위해 외벽과 내벽이라는 장치를
독자적으로 고안해 냈고 이는 과학적인 생각이었다. 그의 이러한 돔 지붕은 실제로도 오늘날의 성당이 거의 해낼 수
없는 방식이다.
그는 이 돔 지붕 경험을 통해 거장 건축가로 발전하였고, 이후에도 로마를 면밀하게 연구하고 고대 예술에서 여러
요소들을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르네상스인이지만, 완성품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고대 로마와는 전혀 무관한
새로운 형식이자 미를 추구하는 새로운 방식이었다.
브루넬레스키의 창조 이면에는 무한정 다양하게 창조물이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부분의 단순화를 통한 규칙적인
반복이 규범이 되었다. 가능한 조명 체계를 단일화하였고, 각 요소들이 서로 균형을 이루면서도 두드러진 특징을
나타내기보다는 전체를 통합하는 전반적인 양식이 돌출되었다.
더욱이 그는 고딕식 건축을 거부하고 고대의 것을 이용하면서 새로운 용어들을 만들어 냈다. 만곡 엔태블러처, 기둥
위의 아치, 기둥ž벽기둥ž소용돌이 장식의 부벽의 교체, 평평한 만곡ž평평한 삼각형의 교체, 소용돌이 꼴의 장식과 삼각
궁륭의 액센트 등은 이탈리아와 전 세계의 건축가들이 기꺼이 받아들인 새로운 용어의 일부이다.
브루넬레스키의 이러한 정신과 그의 작품들은 다른 건축가들에게도 영향을 주었고 그들은 고대 예술로부터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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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을 표현하고 거기에 자신들의 요소를 더하여 르네상스 건축을 발전시켰다.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
1420~1436, 브루넬레스키
붉은색 대형 돔은 역학상의 난점을
훌륭하게 해결한 걸작일 뿐만 아니라,
르네상스건축 중에서 빛나는 최초의
수확이기도 하였다. 또한 고대 로마의
판테온의 가구기술을 채용하여 돔을
설계했다.
산피에트로 (성 베드로) 성당
산타 마리아 노벨라 성당
캄피돌리오 성당
(5)르네상스 회화의 사도적인 계승
르네상스의 화가들은 단순히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뿐만 아니라 화가의 의도를 나타낼 수 있다고 여겨지는 모든 세부
사항들이 체계적으로 화폭에 옮겼다.
그들은 투시화법 기술을 이용하여 그림에서 자연스럽게 보이는 대로 공간을 구성하면서 결과적으로 좀 더 다양한
주제를 택할 수 있었다. 무엇보다 과거와는 다른 모험심과 창의력을 발휘하여 주제에 접근할 수 있게 되었다.
르네상스 회화의 가장 잘 알려진 인물로 꼽히는 이는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이다.
레오나르도는 매우 지성적이었고 사람보다는 사상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의 재능에 대해 사람들은 의심하지 않았을
정도로 대단한 인물이었다. 레오나르도는 눈에 보이는 세계의 모든 면에 관심이 있었다. 그는 자연의 다양성, 그중에서도
유별나게 인체에 관심이 많았지만, 동시에 다른 많은 영역에도 광범위하게 관심을 가지고 있어서 자신의 에너지를
분산시킬 수 밖에 없었다. 따라서 그는 한 주제에 집중하지 못하는 때가 많았다.
레오나르도는 라파엘로를 포함하여 직접적인 후계자나 동시대인에게 엄청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정확한 수학적
원근법이 실제적으로 보는 것만으로는 산출되지 않으며 그 교정이 필요하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외형선을 흐릿하게
표현하는 스푸마토 기법을 도입했으며, 15세기의 강한 외각선을 그리는 화가적 기법이 아닌 그림자 이용과 체계적인
강조법, 명암 대조법 등 16세기의 좀 더 완만한 화가적 기법을 이용했다,
레오나르도의 영향력은 진보적으로 누적되었으며, 상당한 위치의 예술가 중 그에게 영향을 받지 않은 이를 생각하기란
어려울 정도로 그는 르네상스를 지성적으로 압도했다.
미켈란젤로는 스스로 자신을 주로 조각가라고 생각했으며, 실제로도 그는 로마에 와서 거대한 프레스코 연작화 세
점60)을 그렸다.
60) 시스티나 천장화, 제단 끝 벽의 「최후의 심판」, 사도 바울로 예배당
208
그는 인간의 몸에 관심을 가장 기울인 자인 동시에 인간이 서 있는 땅에 완전하게 무관심하였다. 자신의 인물들이
놓일 위치에 관심을 보인 적이 전혀 없었던 것이다. 미켈란젤로는 모든 자연 현상에 매혹되어 사실주의와 꿈의 세계를
배경으로 삼았던 반면에 미켈란젤로는 풍경을 경멸하여 그리기를 거부했다. 이런 제한적인 의미에서 그는 르네상스
예술가의 정수를 보여준다. 즉, 과도하게 말하자면 예술은 인간에 대한 것일 뿐 그 어느 것도 아니다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의 이러한 태도는 그는 인간의 실제 몸을 보고 자연에 충실하게 인간의 형상을 그렸다는 점에서 사실주의자인 것과
인간의 형상을 최상의 원숙한 상태에서 그려내 거의 신격화에 이를 정도로 이상화하기를 원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마사치오
레오나르도 다 빈치
<삼위일체>
<암굴의 성모>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렘브란트
레오나르도 다 빈치
<묵상하는 철학자>
레오나르도 다 빈치
<최후의 만찬>
미켈란젤로
<아담의 창조>
<자화상>
<모나리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자화상>
미켈란젤로
<최후의 심판>
(6)르네상스의 확산과 쇠퇴
르네상스는 피렌체에서 천천히 확산되어 고딕양식을 고수하던 북부유럽에도 변화를 일으켰고, 1520년대 말
르네상스의 사상과 예술 형식은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서 재창조되거나 채택되었고 심지어는 신세계에까지 퍼져 갔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지배를 둘러싼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의 다툼이 실제로 이탈리아 땅에서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르네상스는 이에 영향을 받으면서 쇠퇴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반드시 예술가의 활동을 저지한 것은 아니지만 침입된
지역이 점점 늘어나면서 예술가들은 베네치아로 옮겨갔다. 그러나 베네치아도 외국의 침입의 반강제적인 공격은 피할 수
없었다. 이후에 프랑스와 독일, 네덜란드, 스페인과 심지어는 영국까지도 문화적인 자신감을 얻기 시작하면서 한 때
이탈리아가 휘둘렀던 예술의 절대적인 주도권은 사라졌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사상이 유럽 전역에 빠르게 확산되던
시기에 그 원천의 불기운은 오히려 시들어 가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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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적 요인도 르네상스에 영향을 주었다. 르네상스는 종교개혁의 근원에 영향을 주었고 종교개혁의 움직임이
일어나면서 반기독교적인 성향이 사회에 만연해지게 되었다. 따라서 교회는 교회가 인정하지 않는 성인의 기적 등은
교회나 그 외 종교 건물에 소장될 예술 작품에 묘사되어서는 안 된다고 규정하였으며 이는 르네상스의 몰락을
초래하였다. 또한 교회의 화려함과 부유함 등을 다시 주된 점으로 삼고 이를 적극적으로 표현하면서 르네상스의 시대는
지고 바로크 시대가 오게 된다.
르네상스는 바로크와 로코코에 스며들었다가 18세기 후반의 신고전주의 시대에 다시 부상했고, 아직도 현재에
존재하고 있다. 여러 면에서 당대의 이상은 부유하고 풍족한 좋은 시기에 만들어진 비길 데 없는 예술 작품이며,
영구적인 유물로서 문화유산의 일부가 되었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1)사회변동을 설명하는 이론들
사회변동을 설명하는데 다양한 이론이 있다.
이들 중 대표적인 것으로 인간이 주체가 되어 사회변동을 발생시키고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인간주의’와 정치구조나
경제구조라 할 수 있는 사회구조가 이끄는 대로 인간이 움직이고 이에 따라 사회가 변동하고 역사가 움직인다는
‘구조주의’를 들 수 있다.
인간주의는 인간을 사회변동의 주요인으로 보고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이고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는 관점으로 인간의 의지와 열정으로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주장이다. 이와 반대로 구조주의는 구조라는 인간을
둘러싼 비가시적이고 복잡한 제약요인이 역사를 결정해 왔다는 주장이다.
(2)폴 존슨의 ‘르네상스’를 통해 바라본 사회변동
유럽의 고대를 '인간 중심의 사회', 중세가 '신 중심의 사회'였다고 간략하게 평가한다면 르네상스는 고전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신의 권위에 짓눌려 있던 중세적 분위기를 벗어나 다시 인간의 본질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깊은
고찰이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갖는다. 따라서 르네상스부터 '근대적 정신이 시작'되었다고 평가한다.
르네상스 문화의 근본정신은 인문주의, 즉 휴머니즘(humanism)이다. 그리스·로마의 고전에서 '보다 인간답게 만드는
일'을 뜻하는 후마니오라(humaniora)에서 시작된 말로, 인간이 지니는 가치, 즉 인간의 창조성에서 만들어지는 모든
것들을 존중하는 사상이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어 독일, 프랑스, 영국을 포함한 유럽 전역의 정치·문화 형성에 큰 영향을 끼쳐 '서양
문화의 어머니'로 비유되기도 한다. 이 르네상스 운동은 유럽의 남부와 북부에 있어서 각기 뚜렷한 특징을 지니고
있는데, 전자는 문학·예술 등에 나타난 인문주의(humanism)의 특징을 지니는 데 반해, 후자는 로마 교황 권위에
도전하고 교회 조직과 정신의 근본적 개혁을 요구하는 종교개혁 운동으로 발달하게 되었다.
르네상스는 이처럼 신 중심의 중세사회를 인간 중심의 근대 사회로 바꾸었고 사회변동의 요소로 작용을 하였다.
책의 저자인 폴 존슨은 르네상스가 세계 역사상 최초의 부가 점차 축적되어 성장ž확산되고, 중간 기술을 규범으로
삼는 사회가 부상하는 중에 언어가 인쇄되고 분배되는 방식의 놀라운 혁명이 이루어지면서 가능하게 되었다고 하지만
르네상스가 기술적인 사건이나 경제적인 사건은 아니라고 말한다. 르네상스는 주로 인간의 사건이며, 여러 괄목할 만한
재능을 가진, 더욱이 천재적인 재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서 추진되었다고 말하는 것을 보면 그는 인간주의의 입장에서
사회변동을 바라보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르네상스의 예술가들이 고전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면서 고전과 인간에 대해 중요시하게 여기는 그들의 의식이
작품으로 연결되어 표현되었고, 이것이 사회에, 더 나아가 국가, 전 유럽을 변화시켰다.
즉, 그는 어떠한 의식과 가치를 지닌 개인 한명 한명이 작품의 창작이라는 행동을 통해 르네상스를 가능하게 했기
때문에 그는 의식과 가치를 지니고 행동을 실행한 ‘개인’으로 인해 사회변동이 이루어진다고 본다고 할 수 있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인간주의는 인간을 사회변동의 요인으로 보는 시각은 인간의 주체성을 강조하고 인간을 구조의 영향을 받지 않는
독립적 존재로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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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주의에 속하는 이론은 크게 3가지를 볼 수 있다.
(1)실존주의61)
실존주의는 자연 법칙 등의 과학성, 객관성을 부인하고 개인의 실존개념과 개인의 주관적 의식성을 중시했으며 인간을
자아 의식적이고 책임적인 존재로 보아 사물의 ‘존재’와 인간의 ‘실존’을 구별하였다. 또 인간은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해
어떠한 상황도 극복할 수 있는 초월성을 갖고 있다고 믿었다. 즉, 실존주의는 인간 중심의 인간과학으로서 주관적으로
주체의 중요성을 중시한 사상이라 할 수 있다.
(2)해석학62)
해석학 역시 인간의 의식성을 중심으로 한 인간중심의 인간과학으로서 텍스트의 숨겨진 의미를 발견하는 것을 그
주목적으로 한다. 주로 ‘이해’와 ‘해석’의 문제를 다루는 이 사조는 슐라이어마허에 의해 체계화되어 하이데거, 딜타이를
통해 가다머에 의해 대략 완성된다. 해석학은 인간을 중심으로 한 사조로서 텍스트 이면의 의미를 강조하여 역사성과
그것의 결정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해 의미를 부여한다.
(3)현상학63)
현상학은 과학주의, 실증주의의 물리적 객관주의에 반대해 ‘선험적 주관주의’를 강조한다. 즉, 현상학은 의식 그 자체를
다루며 그것을 둘러싼 물질적인 환경과 관계를 하지 않고 신념, 감정, 사상, 소망 등의 정신적 활동의 성격과 내용에
관심을 갖는다. 앞의 실존주의 및 해석학과 마찬가지로 역사적 주체로서의 인간에 대해 중요성을 부과한다.
따라서 인간주의의 관점에서는 인간을 주체적, 자율적 존재로서 자유의지를 가지고 상황에 대해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따라서 책임을 지는 도덕성, 주체성을 지니고 있는 존재로 바라보며, 상황적, 구조적 요소를 크게 중시하지 않고
인간적 요소를 중심으로 세계를 해석하려고 한다.
인간주의에서 역사를 해석한다면 역사는 각자의 개인이 자유의지나 능력을 가지고 행동하거나 선택한 결과로 인류와
사회가 변화해온 것이라 할 수 있다. 과거에서부터 개인들의 하고자 하는 선택과 행동에 합쳐져 그것이 하나의 커다란
사회흐름이 되어 현재까지 흘러온 것이다. 즉, 존재하는 독립적인 개인들이 상황이나 구조에 영향을 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선택한 결과의 연속적인 과정이 역사인 것이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인간주의는 인간이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에 앞으로의
세상에서도 사회변동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독립적인 개인’이다.
현재에도 독립적인 개인들인 우리는 행동을 하고
선택을 하며 미래로 나아간다. 그리고 이러한 행동과 선택들이 각기 작용하여 미래사회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므로 미래 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거나 발전을 위해서 개인들은 각자 옳은 선택을 하고 행동을 할 수 있도록,
그리고 보다 더 뛰어난 것을 이룰 수 있도록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시도하여 스스로의 선택과 행동들을 만들어가야 할 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1)인간주의의 한계
하지만 이 책의 인간주의만으로는 전체 역사를 설명하지 못하는 한계점을 지니고 있다.
역사적 예를 살펴볼 때 인간은 비대한 구조의 영향을 받아왔으며 그 구속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어떠한 사건, 역사적
61)두산백과, 실존주의[existentialism], 2015-11-2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19535&cid=40942&categoryId=31528
62)두산백과, 해석학[hermeneutics] 2015-11-22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2066&cid=40942&categoryId=31500
63)네이버블로그, 현상학의 특징과 지향점, 2015-11-22
http://blog.naver.com/czech_love/220507047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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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동을 설명할 때 그 사건을 둘러싼 구조를 분석하지 않으면 그 근원적인 원인을 밝혀낼 수 없으며 많은 오류의 여지를
남겨놓게 되는 것이다.
인간주의는 방법보다도 대상의 중요성을 강조하였기 때문에 설득력이나 종교적, 윤리적 타당성은 있지만 분석력이나
예측능력은 매우 부족하였다. 특히 산업사회로 접어들면서 점차로 복잡화된 자본주의 사회를 설명할 수 없었고
비인간적인 사회구조와 인간을 구속하는 국가 및 독재를 설명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또 다른 사회변동 이론인 구조주의가 생겨난 이유도 구조적 요인에 대한 인간적 능력의 한계, 표면적 갈등
이면의 구조적 모순의 존재, 실존주의적 사고의 한계 등 인간주의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2)사회변동을 고찰하는 것에 대한 중요성
역사나 사회변동을 보는 관점에 따라 해결책이나 행동방향이 결정되기 때문에 올바른 시각을 갖는 것이 미래를
대비하고 현 상황을 극복하는데 중요하다. 검은 안경을 쓰고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 검게 보이듯이, 현미경의 배율을
조정하면 대상이 달라 보이듯이 무엇을 통해 어떠한 방법으로 보느냐에 따라 세상의 모습은 달라진다. 사회변동을
바라보는 시각이 올바르지 못하면 당연히 문제의 본질에 접근하지 못하고 오류투성이로 얼룩진 시각이 되기 쉽다. 이에
따라 올바른 해결책이 나올 수 없고 사회와 역사에 대한 생각이 올바르게 정립되지 못하고 난해함을 느끼게 되며
혼란스러움만 가중시킬 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의 중요성은 크다.
(3)인간주의를 바탕으로 한 깨달음
현재 자본을 중심으로 한 시장사회는 인간보다는 자본, 즉 돈이 우선하며, 인간 또한 값이 매겨져 상품으로서
전락해버렸다.
나 또한 취직준비를 하면서 회사에 들어가 연봉 2,600만 원 이상의 인간이 되길 스스로 바랬다. 독립적, 주체적인
개인이 되어 결정하기보다는 종속적이고, 수동적인 인간이 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던 나에게 ‘인간주의’에 입각한
르네상스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존엄을 다시 한 번 새기는 계기가 되었다.
인간주의에서의 개인이 조직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가정했듯이, 또한 수업시간에 교수님이 내가 월급을 받는 사람이
아닌, 월급을 주는 사람이 되라고 하셨듯이, 이번 학기를 마치고 졸업을 한 후에 사회에 나가기 위한 준비를 하는
과정에서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미래에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또는 원하지 않는 결과를 피하기 위해서는 인간을 통제하고 제약하고
있는 구조를 살펴보아야 한다. 구조를 분석하고 원인을 밝혀냄으로써 그 문제의 본질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의 흐름 속에서 나는 자아존중과 보다 더 자신감을 가지기 위해서 내가 더 잘 할 수 있는 일에, 그리고
내가 지금 살아가고 있는 사회의 흐름과 연관시켜서 가능성이 있다고 확신하는 일에 그릇을 키우고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한 우리나라는 수능이라는 입시시험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어릴 때부터 과정보다는 시험에서 높은 점수를 얻는
결과를 가장 중요시하게 때문에 높은 점수를 위한 정답만을 암기하므로 자신에 대해서 생각해 볼 시간이 부족하다.
따라서 스스로 생각할 능력이 줄어들고 무궁한 성장 잠재력이 닫히기 때문에 이를 위해 교육 제도가 조금은 다른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들었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1)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
어린왕자는 실존주의를 바탕으로 쓰인 책이다. 실존주의란 자신이 실존하는 존재임을 깨닫고, 나의 주체성을 찾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실존하는 존재임을 깨달아서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하고 결단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다.
실존주의자들이 보는 주체적, 자율적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상황에 대해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따라서 책임을 지는 것을 도덕성, 주체성이라고 보았다.
어린왕자에서 여우가 만나서 사랑한다는 것은 길들여지는 것이며 책임을 지는 것이라고 말하는 것은 실존주의에서
강조하는 것과 일치한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실존주의가 중요시하는 것은 우연이지만 전인격적 만남인데, 상심에 빠진
어린왕자가 우연히 여우를 만나는 것도 전인격적 만남이며, 이를 통해 어린왕자는 삶의 의미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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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카뮈의 ‘이방인’64)
낯선 인물과 독창적인 형식으로 현대 프랑스 문단에 '이방인'처럼 나타난 소설. 젊은 무명 작가였던 알베르 카뮈에게
세계적 명성을 안겨준 이 작품은 현실에서 소외되어 이방인으로 살아가는 현대인이 죽음을 앞두고 비로소 마주하는
실존의 체험을 강렬하게 그린다. 카뮈는 '영웅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으면서 진실을 위해서는 죽음도 마다하지 않는'
뫼르소라는 인물을 통해 기존의 관습과 규칙에서 벗어난 새로운 인간상을 제시한다.
알제에서 선박 중개인 사무실 직원으로 일하는 뫼르소. 그는 교육을 받았지만 신분 상승 욕구나 야심이 없고 생활의
변화를 원하지 않는, 이상할 정도로 주위에 무관심한 청년이다. 그런 그는 우발적 살인을 저지른 후 세상에서 '이방인'이
되어 버리는데, 변호사와 재판관, 사제 등 그를 도우려는 누구도 뫼르소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그 또한 주위 세계를
받아들이지 못한다. 카뮈는 이처럼 자신을 둘러싼 것들에서 철저하게 소외된 뫼르소의 삶, 죽음에 이르러서야 신앙과
구원의 유혹을 떨치고 자기 자신과 세계를 똑바로 마주하게 되는 그의 모습을 통해 억압적인 관습과 부조리 속에
살아가는 고독한 현대인의 초상을 그린다.
(3)김성봉의 ‘인간주의 교육의 실천방향’65)
인간주의 교육은 인간에 대해 무엇보다 관심을 가지고 중요시하며 교육에 있어서 인간을 그 중심에 둔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잠재능력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고 전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따라서 그들은 지식교육뿐만 아니라
정의적인 면의 교육과 인격교육에 대해 강조를 하고 또한 학교가 보다 자신의 잠재력을 더 발휘하기 위해서 보다
자유로워야 한다. 이 책은 아직 체계화되지 않은 인간주의 사상을 정리하여 그 속에서 지향하는 핵심가치들을
뽑아내었으며 학교현장에서의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우리 교육이 지니고 있는 여러 가지 모순과 문제점들도 일부
지적하였다.
10. 종합결론
폴 존슨의 ‘르네상스’는 중세의 신 중심에서 벗어나 인간을 본질에 대해 고찰하게 된 근대의 시작이라 할 수 있는
문화 운동인 르네상스를 인간주의적 관점에서 설명하고 있다.
인간주의는 사회변동의 요인을 인간으로 보고 인간은 독립적인 존재이고 주변 환경의 영향을 받지 않고 주체적으로
행동한다는 관점으로 인간의 의지와 열정으로 역사를 이끌어 왔다는 주장으로, 실존주의, 현상학, 해석학이 인간주의에
속하지만,
인간주의만으로는
사회변동을
해석하기에는
한계가
있으므로
구조주의관점과
결합하여서
사회변동을
바라보아야 한다.
올바른 관점을 가지고 사회변동을 바라보는 것이 미래를 맞이하고 현 상황을 해쳐나가는 데에 도움이 되므로
앞으로는 현재 상품화된 인간을 바탕으로 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독립적인 개인들이 그들을 둘러싼 구조적 관계를
고려하여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사회 변화를 예측하고 대응하기 위한 것에 대해 생각하고, 능력을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개인이 역량을 펼치고 자신의 능력을 키워나갈 수 있도록 미리부터 그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교육체계의 문제점 개선이 필요하다.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 주소
(1)이름: 박혜림
(2)학과 행정학과
(3)학번: 2009104517
(4)email주소: hr3391@gmail.com
64) 네이버 책, 이방인, 2015-11-23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607389
65) 네이버 책, 인간주의 교육의 실천방안, 2015-11-23
http://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627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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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간략한 자기소개
안녕하세요. 사회학과 수업은 사회학원론과 사회심리학을 들은 이후에 처음 들어보는 터라 궁금한 반, 긴장감 반으로
수업에 들어왔었습니다. 사회변동에 영향을 준 요소를 주제로 한 학우들의 발표와 교수님의 강의를 들으면서 다양한
분야에 대해서 얕게나마 조금씩 알 수 있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사회에 대한 관심보다는 저의 개인적인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기에 급급하면서 살아왔지만 사회변동론 수업을 들으면서 사회를 변화시킬 그 무언가에 대해서
조금씩 생각해 볼 수 있었고 교수님의 말씀들을 들으면서 취업준비로 급급해있었던 와중에 제 앞날에 대해서 더 넓고
길게 생각할 수 있게 되어서 조금은 마음의 여유를 가질 수도 있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르네상스 관련해서 더 보고 싶으시면 아래 유투브 주소로 들어가세요.
보면서 듣는 거라서 이해가 더 잘 되실 거예요^^
https://www.youtube.com/watch?v=MI2cXqJa7j8
참고문헌
김승현 외著『현대의 사회과학』, 博英社, 1997
R. H. 라우어著, 정근식 엮음 사회변동의 이론과 전망, 한울, 1990
오현준,「후기의 교육」,『오현준 교육학』,박문각, 2011
오현준,「근대의 교육」,『오현준 교육학』,박문각, 2011
로버트 램,『서양 문화의 역사Ⅱ』, 사군자, 2000
시오노 나나미,『르네상스를 만든사람들』, 한길사, 2001
폴 존슨, 『르네상스』, 을유문화사, 2003
네이버 지식백과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066&docId=960125&mobile&categoryId=3066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069&docId=960368&mobile&categoryId=3069
http://terms.naver.com/entry.nhn?cid=3079&docId=957180&mobile&categoryId=3079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511853&cid=42126&categoryId=42126
네이버 카페
http://cafe.naver.com/platorica/84
네이버 지식인
http://kin.naver.com/qna/detail.nhn?d1id=11&dirId=111002&docId=148991142&qb=66W064Sk7IOB7IqkI
OuegA==&enc=utf8&section=kin&rank=5&search_sort=0&spq=1&pid=RRSgRU5Y7t8ssaYLOQKsssssssw-51
3193&sid=UUVRbnJvLBcAAFJ9PQ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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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한계급제도와 욕망 그리고 사회변동
1. 책 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제목: 유한계급론
출판사: 우물이 있는 집
출판년도: 2005년 2월 18일
저자: 소스타인 베블런 /역자: 김성균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현대 자본주의, 산업사회구조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소비를 갈망한다. 이러한 물질적 소비에 대한 인간의 욕망은 그
원천에 대한 고찰 없이 당연한 것 혹은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나는 이 책을 통해서 우리의 욕망역시
태생적인 것이 아닌 사회변동에 영향을 받아 형성되는 것이라는 것을 밝히고 싶었으며 기술발달과 유한계급제도의
상호작용이 인간의 생활양식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 지에 대해 알아보고자 이 책을 선택하였다.
3. 저자소개
1857년 미국의 위스콘신 매니터윅에서 태어난 베블런은 미국으로 이주한 노르웨이 명문가에서 태어났다. 그는 학교에
들어갈 때까지 영어를 구사하지 못했고, 평생동안 노르웨이 억양이 섞여 있었다. 미네소타주의 칼턴대학교에서 경제학과
철학을 공부하고 3년만에 졸업한 그는 스스로 훌륭한 학자이자 냉소적인 이기주의자라고 자처했다. 기존의 견해를
혹독하게 비판하는 그였지만 존스홉킨스대학교와 예일대학교에서 철학박사를 취득한 후에도 교수직을 구하지 못했다.
그는 아버지의 농장에서 7년 동안 독서에만 빠져 지냈다. 1888년 부유한 가문의 엘런 롤프와 결혼한 그는 본격적으로
일자리를 구하다가 1891년 코넬대학교 석사과정에 들어가게 되고, 그곳에서 로렌스 래플린 교수의 신임을 얻어 선임
연구원 자리를 얻는다. 하지만 39세가 되어서야 겨우 전임강사직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출판한 첫 저작 《유한계급론》으로 그는 일약 유명 인물이 되었다. 이 책을 출판할 당시 미국의 상황은
록펠러, 카네기 등의 탐욕스러운 부자들이 독점적인 수탈을 일삼고, 사치와 향락에 빠져 있던 시대였다. 그는 이 책에서
산업화된 제도가 사람들에게 근면, 효율, 협동을 요구하고 있지만, 실제로 산업계를 지배하는 사람들은 돈을 벌고 부를
과시하는 데에만 여념이 없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것이 과거에 약탈을 일삼았던 미개사회의 잔재라고 주장했다.
《유한계급론》은 출간되자마자 커다란 반향을 일으켰고 그를 학자로서의 한계를 뛰어넘어 사회피평가로서의 명성도
가져다주었다.
베블런은 《기업이론》(1904) 저서를 발표하면서 찰스 다윈의 진화론에 기초하여 경제를 이해하려는 입장으로
고수했다. 베블런은 시카고대학교에서 비로소 조교수직을 밭게 되었으나 혼외정사의 추문으로 학교를 떠나야만 했고,
옮겨간 스탠퍼드대학교에서도 사생활이 문제가 되어 부교수 자리에서 무러나야 했다. 1911년부터 근무한 미주리대학교
시절 베블런은 많은 저작을 내놓았다. 《제작본응과 산업기술의 실태》(1914)에서는 인간의 역량 가운데 많은 부분이
비효율적인 제도에 의해 소모된다고 했고, 《독일제국과 산업혁명》(1915)에서는 독일이 영국이나 프랑스와 같은
민주국가들에 비해 장점을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평화의 본질과 그 존속 기간에 대한 연구》(1917)로
국제적인 지지자를 얻기도 했다. 1918년에는 워싱턴 D.C.의 식량국에 일자리를 얻었지만, 경제문제에 대한 그의
접근방식이 정부관료들과 맞지 않아 5개월도 채우지 못하고 그만두었다. 그는 그해 가을부터 <다이얼>지의 기고자가
되어 ‘현대적 사고와 새 질서’에 대한 논문을 연재했다. 학계에서 베블런의 지위는 높았지만 그의 생활은 점점 더
비참해졌다. 2번째 부인은 정신착란에 시달리다 1920년에 세상을 떠났고, 그 자신도 신경이 극도로 쇠약해져 몇몇
친구의 도움으로 근근이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1926년 그는 강의활동을 그만두고 캘리포니아로 돌아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오두막에서 의붓딸과 함께 지내면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제자인 웨즐리 C. 미첼은 그를 ‘다른 세계에서 온
방문객’이라면서, “사회과학 분야에서는 어느 누구도 환경의 미묘한 속박으로부터 그처럼 정신이 자유로운 사람은
없었으며, 그만큼 탐구의 영역을 넓힌 사람 또한 볼 수 없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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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책 내용 요약
유한계급이란 무엇인가? 유한계급은 비생산적인 일을 하는 계급이라는 의미이다. 유한계급제도는 기술발달과 고래적인
태도의 종합으로 탄생된 관습이라고 볼 수 있다. 유한계급제도는 평화로운 생활습관이 호전적인 생활 습관으로 이행하는
과정에서 서서히 출현한다. 유한계급제도가 안정적인 형태로 출현하기 위해서는 공동체에 전쟁이나 대형동물 사냥 또는
두 가지 모두를 주로하는 약탈적 생활습관이 존재해야 한다. 다시 말해서 첫째, 초보적 유한계급을 구성하기 위해서는
남자들은 폭력이나 모략을 통해서 적이나 사냥감에게 위해를 가하는 일에 익숙해야 한다. 둘째, 공동체 구성원의 다수가
힘겨운 일상 노동에 시달리지 않아도 충분히 생계를 유지할 만큼 물자를 쉽게 확보할 수 있어야 한다. 이러한 조건
아래에서 가치있는 직업과 가치 없는 직업을 차별화 하는 일이 일어난다. 고대의 직업구분방식에 따르면 가치있는 직업은
공명을 획득할 수 있는 직업으로 가치 없는 직업은 공명의 요소라고는 아예 깃들 여지가 없는 필수적이고 일상적인
직업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는 고대의 인류들이 사냥을 명예로운 직업으로 그리고 일상적인 일들을 불명예한 일로
취급하여 주로 여성들에게 떠맡긴 사례를 보면 알 수 있다. 남성들은 공격적이고 호전적인 일을 명예로운 일로 규정하며
폭력을 통해 성취한 것을 도덕적으로 고귀한 것이라고 여긴다. 반면 사냥감을 손질하는 여자들은 비천한 일을 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이는 결과적으로 명예롭지 않은 일체의 생산활동에 참여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규범을 탄생시킨다.
귀족이 농사를 짓거나 상거래를 하지 않고 조선으로 따진다면 선비가 농사를 짓지 않고 남자가 부엌을 드나들지 않는
등의 규범을 탄생시킨 것이다. 이러한 고대의 사회적 규범은 현대의 산업사회와는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나 실상은 그
본질적인 차별과 구분은 남아 꾸준히 변화해 온 것이다.
유한계급제도의 생성에 기여했으며 동시에 발전하게 된 것은 소유권제도이다. 기술의 발달이 미개문화에서 야만문화의
이행으로 이끄는 동시에 이는 필연적으로 잉여생산물을 남긴다. 또한 야만문화에서의 정복과정을 통해 생겨난 전리품 즉,
상대 문명의 노예들을 처분할 때 이러한 소유권이라는 관념은 생길 수 밖에 없다. 이처럼 유한계급제도와 소유권제도의
발달은 밀접한 연관관계에 있다. 이는 고귀한 직업을 가질수록 더 많은 부를 가진다는 개념과 연관되었다. 기존의 부가
개인의 약탈이 성공했다는 점을 나타내 주었다면 이후에 이는 관습적으로 정착되어 약탈에 성공했다는 증거가 아닌
그것을 소유한 자가 그의 공동체에 속하는 다른 개인들보다 우월함을 과시하는 증거의 가치를 획득한다. 소유권제도와
유한계급제도는 이처럼 금력추구경쟁을 만들어 내게 된다.
유한계급제도 내에서 부와 용맹성은 차별적 비교를 통해 인간의 가치를 평가하는 도구이다. 이는 약탈문화에서
추구되던 가치인 용맹성과 비천한 직업에 대한 경멸은 일견 평화로워 보이는 초기 생산문화 단계에서는 나타날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는 ‘과시적 여가’라는 개념을 통해 등장한다. 발달한 생산문화 덕분에 유한계급들은
전례없이 생산에서 완전하게 손을 떼고서도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자신이 유한계급이라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하는 것이 과시적 여가인 것이다. 과시적 여가의 특징은 노동과는 거리가 멀고 시간을 비생산적으로
소비하는 것이다. 이는 자신이 금력이 충분하여 천박한 생산활동에 종사하지 않아도 되는 것을 나타내는 증거인 것이다.
그 예로서는 스포츠나 정치, 종교활동, 예법 등이 있다. 최초의 예법을 형성한 것은 상징과 몸짓이었고, 그것은 단지
상징화된 사실들과 속성들을 대변하는 지표의 유용성만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예법은 인간적인 교제에 이바지하던
상징적인 사실들과는 무관하게 변질되어 그 자체가 본질적인 유용성을 가지고 있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이와 같은 것이
과시적 소비의 성격을 획득한 이유는 훌륭한 예법을 갖추기 위해서는 많은 시간, 열성, 비용 등이 필요하다. 자신의
시간을 노동에 쏟는 이들은 이러한 예법을 배우기 힘들기 때문에 차별의 도구가 되었다.
과시적 소비의 경우는 약탈생활이 시작된 약탈문화의 초입단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직업의 분화, 과거에는
성별의 분화에 따른 업무 분화에서 남자들은 여성이 생산하는 것을 소비하고 또 비생산적으로 소비할수록 용맹함을
증명하는 가치로 보았다. 이는 여러 문화권에서 음식을 골라먹거나 귀한 장식품을 소비하는 것은 여성과 아이들에게
금기시 되었다는 점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이러한 문화에서 남성들이 술이나 마약을 소비하며 패악을 부리는 것은
오히려 그들이 그런 방탕을 즐길 수도 있는 우월한 신분에 있음을 간접적으로 증명하는
명예로운 표시가 되곤 했다.
이러한 관습은 생산문화에서도 여전히 유지된다. 하지만 생산문화에서는 중산계층에서 가부장은 전혀 과시적 소비를 하지
않는 특수한 현상을 목격할 수 있다. 이는 대리 여가와 대리 소비를 나타내는 것이다. 유한계급의 문화를 따라가야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그것이 불가능한 환경 속에서 가부장 자신은 노동을 통해 돈을 벌고 자녀와 부인은 그를 대리
소비하고 과시하는 역할을 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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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사회변동이란 정보화, 세계화, 다문화 등과 같은 모습과 같이 일정한 시간을 두고 물질적, 비물질적인 것이 원인이 돼
사회의 전반적인 사회적 관계, 생활양식, 의식 구조 등이 변화되는 현상을 말한다. 이 책에서 베블런은 사회변동을
기술의 발달에 따른 변화로 이해하나 그 사이에 기술의 발달과 인간의 문화 변천을 연결하는 연결고리로 유한계급의
존재를 제시한다.
베블런은 사회변동을 기술과 유한계급제도의 상호작용으로 이해한다. 사람들의 욕망은 선험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
유한계급제도의 형성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베블런은 기술발전으로 인한 재화의 발달이 인간의 생활양식을 직접
변화시키는 면뿐만 아니라 기술발전이 유한계급제도를 통해서 관습을 형성하고 이 관습이 인간의 생활양식에 변화를
일으켜 사회변동을 일으킨다고 말한다. 이를 개념적 준거틀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욕망
(유한계급제도)
기술발전
생활양식
종합하자면 기술발전이 생활양식을 변화시키는 측면도 있지만 유한계급제도와 상호작용하여 생활양식을 창조해 내는
것이다. 단, 유한계급제도의 역할은 기술발전을 통해 만들어진 문화나 물질문명 중에서 어느 것이 살아남는지 결정하는
필터로서 기능할 뿐이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베블런의 관점은 기본적으로 기술변동으로부터 사회변동을 도출해낸다. 따라서 사회의 핵심적 변동은 기술수준에
따라서 구분할 수 있다. 베블런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미개평화문화, 야만사회, 생산문화로 구분할 수 있다. 이는
기술의 수준에 따른 구별이다.
미개평화문명은 아직 전쟁을 위해 필요한 무기나 보급등을 위한 기술 즉, 잉여 생산물을 남길 수 있는 기술이
확보되지 않는 사회를 말한다. 이 상태에서는 전쟁이란 일어날 수 없으며 인간은 기본적이고 태생적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를 충족하기 위해서 노력하는 사회이다.
초기야만사회는 유한계급제도가 형성되기 시작한 사회이다. 이 사회에서는 전쟁포로와 잉여생산물의 관리와 처리 등을
위해 소유권제도가 형성된 시기이다. 소유물품은 전쟁에서의 용맹성을 나타내주는 징표가 되었다. 따라서 과시가 시작된
시기이다. 소유를 많이 하면 할수록 이는 그 사람의 가치를 상승시켜주는 증표가 된 것이다. 소유의 과시는 두가지
형태로 등장하였다. 하나는 과시적 소비이고 하나는 과시적 여가이다. 둘 모두 비생산적인 소비나 여가에 시간을
투자해서 내가 노동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생산문화는 인류가 서로 합의하에 전쟁을 자제하게 된 시기이면서 공업생산력이 극도로 발달한 시기를 말한다. 이
시기에는 그 동안은 주로 전쟁에서의 약탈적 행위를 통해서 가진 소유물이 그의 용맹성을 말해주었다. 용맹하면 소유물을
많이 가지게 되어 소유물이 그 용맹의 증표가 된다는 것이 기존의 사고였다면 이시기부터는 ‘소유물을 많이 가진다면
그는 용맹한 사람이다’는 역의 명제가 대두된다. 또한 산업화의 영향으로 사람들은 파편화 되었다. 이는 과시적 여가가
주가 되었던 기존의 사회에서 과시적 소비가 주가되는 사회로의 이행을 의미한다. 과시적 여가는 서로 많은 시간동안
장소와 시간을 공유해야 알 수 있는 반면 과시적 여가는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베블런의 해석으로 현대자본주의를
본다면 현대사회는 더욱 더 심화된 생산문화에 속한다. 따라서 현대에 과시적 소비가 더욱 기승을 부리는 이유라고 볼
수 있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이 관점에 따르면 앞으로의 세상은 사람들이 유한계급제도를 이해하고 그를 벗어나지 않는 이상 과시적 소비와 여가는
여전할 것이라고 보았다. 하지만 과시적 성향은 앞으로 약화될 수 있다고 보았는데 그 근거로 산업사회는 기존의 사회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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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도 다른 생산력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기존에 유한계급제도는 노동과 같은 생산적인 일을 천시하고
비생산적인 것들의 과시를 통해서 사람의 가치를 표현했다. 하지만 산업사회에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초적인
생활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노동이라는 가치에서 노동을 위한 노동이라는 그 자체의 가치로 가치체계가 변화하였다. 다른
한 가지 요인으로는 산업사회의 효율성 중시 특징 때문이다. 자본주의와 결합한 현대 산업사회에서는 효율성이 가장
우선시 된다. 이는 기존의 과시적 성격의 재화는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기업으로서는 배제되어야할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이런 시스템 속에서 살아가는 개인들에게 효율성을 추구하는 사상이 주입된다. 이는 과시적 소비를 약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논의를 통해 베블런은 현대 산업사회에서 왜 기존의 사회보다 낭비에 대한 혐오가 있는지에 대해서 설명한다.
앞으로의 미래사회에 지금보다 훨씬 시장중심의 자본주의가 이루어 진다면 좀 더 약화된 과시욕구가 존재할 것이라고 볼
수 있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베블런의 유한계급론은 과시적 소비와 과시적 여가가 얼마나 우리의 일상과 밀접해 있고 그에 따른 문화의 파생이
얼마나 광범위한 것인지를 말해주었다. 그 파생문화는 종교의례, 사생활(프라이버시), 유행 등이 있다. 이러한 파생문화는
너무나도 우리의 삶과 밀접해서 알아차리지 못했고 인간의 본능이라고 까지 생각하였으나 유한계급론을 통해 이는
만들어진 것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베블런은 과시적 여가와 소비가 종교의례에서 역시 적용된다고 주장한다. 종교는 대부분 겸약, 절제 등과 같은 덕목을
강조하나 유독 종교의례에서 만큼은 화려한 의례와 규범화된 예법을 강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러한 것은 인격신을
모시기 때문이다. 인격신은 인간이 추구해야할 이상적인 형태를 하고 있다. 이는 가장 이상적인 성향을 소비와 여가를
통해서 증명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그를 모시는 의례용품과 의식은 가장 존귀하고 존엄하게 다루어지고 행해져야
한다. 이것이 우리가 종교의례를 성대하게 치루는 이유이다.
사생활의 경우 이것 역시 만들어진 개념이라고 본다. 인간은 선천적으로 자신의 소유나 행동에 대해서 숨기는 것은
없었다. 하지만 과시적 소비가 등장하고 자신의 소유물 등으로 자신이 평가 당하는 시기가 오자 사람들은 자신의 집
등을 공개하는 것을 꺼려하게 되고 이것이 프라이버시(사생활)이라는 개념으로 포장되었다.
유행이 존재하고 바뀌는 이유는 사람들의 유한계급에 대한 선망과 유한계급의 비유한계급과의 차별화에 의한 것이라고
설명한다. 유한계급은 과시를 통해서 다른 이들과의 차별성을 획득한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은 이러한 과시를 통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 하고 이는 필연적으로 최상층 유한계급을 모방하는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유한계급은 이들과의 차별을 위해서 새로운 유행을 만들어 낸다. 이러한 순환에 따라서 유행은 변동하는 것이다.
여기까지가 내가 깨달은 이론적 통찰이다. 이러한 통찰을 현실적인 성공에 적용해 본다면 인간의 과시욕구를
자극해야만 상품이 성공할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어떠한 문화나 제품이 유행하는지를 알려면 상류층의
변화를 주시해야 할 것이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i) 짐멜의 모더니티 읽기(유행에 대한 짐멜의 설명과 베블런의 설명은 유사하나 그 내용에 있어서 조금 다르다.)
ii) 프레지 링크(링크가 작동하지 않으면 문서 밑의 메일로 문의해 주세요.)
http://prezi.com/d_8wwyjs2p9z/?utm_campaign=share&utm_medium=copy&rc=ex0share
iii)영화『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링크 21분 50초부터 25분까지(유한계급제도에서 비판하는 자원의 불필요한 사용이
어떻게 되고 있는지 알려준다.)
http://tvpot.daum.net/v/VQboB-UrEnA$
10. 종합결론
유한계급제도는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어떻게 유한계급제도가 작동하고 있고 이러한 제도가 어떻게 자원의
비효율적인 분배에 기여하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아래의 그림은 일반적인 재화의 소비곡선과 베블린 효과를 적용받는
소비재의 수요곡선을 나타내고 있다. 베블런 효과(veblen effect)란 가격이 올라갈수록 소비량도 늘어나는 효과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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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한다. 이러한 효과는 그 재화의 가격이 올라갈수록 사람들이 지불하는 가격이 올라가고 이는 필연적으로 더 많은
자원이 그곳에 투자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경제적으로 볼 때 자원의 가격에 따른 분배는 가능한 한 최대의 효율을
보장하지만 그것은 재화의 성격이 일반적인 재화일 경우에만 그렇다. 재화가 베블린 효과를 적용받을 경우에는 베블린이
말하는 ‘낭비’가 생겨난다. 즉, 개인의 진정한 행복과는 무관한 과시적 성격을 가진 비생산적인 재화에 사회적으로 자원이
분배되게 된다. 이는 시장의 효율적인 자원분배를 왜곡하는 기능을 하게 됨으로서 결과적으로 개인의 과시적 경쟁 때문에
진정한 자원의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아래의 그래프를 통해 본다면 일반적인 재화가 허영심을 자극하는 상태선을 통과하게 된다면 시장구조를 왜곡하는
결과를 도출해 냄을 알 수 있다.
유한계급제도는 소유권이 형성된 이래 우리에게 꾸준히 영향을 미쳐왔다. 고대의 가치가 우리에게 형식과 특성이
조금씩 바뀐체로 여전히 이어져 내려온 것이다. 이는 우리에게 과시적소비와 과시적 여가라는 형식으로 등장하였으며
산업발달에 따른 사회적 변화로 과시적 소비가 주가 되기도 하고 과시적 소비가 주가 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에 방해물로 작동하고 있는 형편이다.
하지만 우리는 개인의 욕망에 충실하고 남과 다른 구별을 통해서 얻는 것은 진정한 행복이 아닌가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해 볼 수 있다. 헤겔에 따르면 인간의 본성은 인정받고자 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그에 따라 남보다 낫다고
인정받기 위한 투쟁이 역사발전의 원동력이 된다. 헤겔이 말하는 ‘남보다 우월해지기 위한 욕망’이 인간 본성에 기인한
것이다라는 주장을 받아 들이면 우월욕망을 실현하게 해주는 이러한 시장의 기능은 오히려 인간의 욕구에 부합하는
것이다. 하지만 베블런의 가정은 이러한 욕망이 유한계급제도에 의해서 형성된 것이라는 가정아래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유한계급제도는 타파가 가능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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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주소
이름: 김용권
학과: 사회학과
학번: 2011104294
자기소개: 3학년 1학기로 재학 중 경제학과 정치학에 관심이 있음.
email주소: yongyong819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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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드워드 사이드의 <문화와 제국주의>와 사회변동에 대해.
1. 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문화와 제국주의, 창, 1995.06.01, 에드워드 사이드, 역자: 김성곤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사회변동의 원인과 결과와 같은 직접적인 변동요인 보다는, 그러한 변동으로 인해 지금까지 어렴풋이 존재하는
편견이나 문제점과 같은 사회적 후유증에 대해 더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말하는 문화
제국주의나 문화 식민주의, 그리고 자문화 우월주의, 국수주의와 같은 편견적인 척도는 시간이 지나도 해결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패권주의 국가들에 의해 서양문화의 우월함과 비서양문화의 열등함이 전세계적으로 전파되고 있다.
이러한 현상이 해결되기 위한 방안과 청사진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보고 싶었다.
3. 저자소개
에드워드 사이드(Edward W. Said.)는 1935년 팔레스타인 태생의 문학비평가이다. 나치독일의 박해를 피해 이집트
카이로에서 어린시절을 보냈으며,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던 부모님의 영향으로 인해 영어와 아랍어를 동시에 써
왔으며, 이름 또한 그 영향을 받았다. 이 시절부터 사이드는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품었으며, 이후의 그의
인생관에도 '어느쪽에도 속하지 못한, 동시에 어느쪽에도 속해있는' 제3의 시선이 큰 영향을 끼쳤다.
양과 동양, 지배와 피지배, 그리고 유럽과 아랍 등의 이분법적인 고찰은 비판받아왔지만, 제국주의 국가의 타국가
간섭에 대한 비판과 식민지 국가의 극단적 토속주의나 국수주의와 같은 사상에 대한 비판을 동시에 하여 한 쪽으로
치우친 의견을 지양하고 양 문화간의 경쟁이나 다툼의 덧없음을 주장하며 통합의 비전을 내놓았다.
4. 책 내용 요약
사이드는 주로 서구문화에 나타나는 문화적인 제국주의 혹은 절대주의를 강하게 비판하며, 문화의 탈식민지화를
추구한다. 크게 1장부터 4장의 구성으로, 과거의 지배와 피지배의 역사와 19세기 이후 소설과의 연관성을 찾고 서서히
당시의 사회변화로 인한 후유증이 남은 현재를 바라보며, 4장을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방향과 서구와 비서구의 화합
가능성을 제시하여 현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과제를 남겨주었다.
주된 시대적 문학 작품의 범위는 19세기-20세기 사이의 제국주의 문학과
저항문학이라고 할 수 있으며,
제국주의적인 사상에 대한 표면적인 비판을 소설 등에 담은 당시의 소설가들의 이면의 '제국주의를 옹호하거나
필요불가결하다고 보는' 관점을 잘 끄집어내어 비판하였다. 예를 들어, 죠셉 콘라드의 <노스트로모>, <암흑의 핵심>에서의
제국주의 비판과 옹호의 역설이나, 제인 오스틴의 <음울한 집>에서 나타나는 계급 제도를 바라보는 경외심이, 피지배
체제의 무질서한 혼란과 대비되는 점 등을 냉철하게 발견해내어 그들의 작품과 그들 스스로의 사상의 괴리감을 드러냈고,
동시에 그들이 얼마나 후대의 서구 문학가들의 작품관에 제국주의적인 사상을 알렸는지도 어렴풋이 느끼게 하였다.
그의 화살촉은 알제리나 케냐 등의 나라에서 일어나는 갈등으로 인한 민족주의, 토착주의으로도 향한다. 그러한 사상이
유일한 대안이 아니며, 좀더 관용적이고 대위법적인 세계에 나아가기 위한 대안이 충분히 있을 수 있다고 암시하고
있으며, 피식민지나 피지배국가 사람들의 분노의 감정은 분열과 다툼만을 부추길 뿐이라고 비판한다.
결과적으로 이 책을 통해 독자에게 말하고 싶은 바는 크게 두가지라고 할 수 있다. 첫째로, 우리가 얼마나 제국주의
문화와 사상이 당시대의 문학작품이나 예술작품 속에 함축되어 있는가를 알려주는 것(혹은 문화가 역사나 정치 등의
요소에 독립적이지 않다는 것)과 둘째로, 서구지역과 비서구지역의 문화적 화합의 중요성을 역설한 것이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사이드는 문화를 여러 정치적,이념적 명분들이 서로 뒤섞이는 극장이라고 해석했다. 여기서
발생하는 문제는 우리가 문화를 일상 세계와 경계선을 두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제국주의가 사회의 일부분이었다는 것을
감안하고, 이와 같은 이데올로기가 문화와 연결되어 지금까지 그 영향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이것은 큰
222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사이드는 제국으로 인해 모든 문화가 연결되어 있으며, 이는 절대적으로 순수하고 단일한 문화는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방증한다. 따라서 사이드는 필연적으로 '다문화주의'를 옹호하는데 이는 '혼란과 분열'이 아닌, '통합과 공존'을
가져온다고 주장한다. 지배 문화의 '유연하고 관대한 열린 태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사이드는 지배문화/피지배문화 어느 한 쪽에 치우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마땅히 문화에
문제점이 있다면 그것은 비판받아 마땅하며, 그것을 해결하기 위해선 유기적으로 연결된 문화간의 소통과 화해가
필요하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에드워드 사이드에 따르면, 최근에 와서 서구인들이 피지배 민족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서 언급하는 이유는 그
민족에게 도전받을 수 있다는 생각에서 기인한다. 이 저항이라는 것이 이미 선행되었거나 제국의 영향에 반하는 회복을
위한 노력이 저항의 비극적인 부분이다. 제3세계의 탈제국주의 작가들은 굴욕적인 과거의 상처를 가지고 있으며 이는 곧
탈식민지 미래를 향한 비전이나 재해석된 경험 등으로 나타난다. 이 저항의 힘은 통찰력에서 나오며 이는 제국주의화된
세계의 문학에서 계속해서 문제점으로 되돌아온다는 점이 중요하다.
피지배국가에 대한 해석을 우선적으로 한다면 필연적으로 그곳엔 '저항'의 키워드가 함축되어있다. 탈식민지화하는
문화적 저항에는 크게 세가지 주제가 있다. 1)공동 사회의 역사를 전체적으로 일관성 있게 보는 권리에 대한 주장, 2)
저항이 제국주의에 대한 단순한 반동이 결코 아니고 인간의 역사를 생성하는 대안이라는 생각, 3) 인간의 공동 사회와
해방에 대한 좀더 통합적인 견해를 향해서 분리주의적 민족주의로부터 멀어지는 것 이다. 언제 혹은 확실하게 이 투쟁이
해결될지는 아직 알 수가 없지만, 대중들의 관심과 노력에 의해 가능성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7.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마빈 해리스의 <작은 인간>을 보면, 인류가 다음 세기에 살아남기 위해서는 국가 자체를 초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다만 역사적 관점에서 보면, 정치 단위가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서는 전쟁에 전쟁을 거쳐야 한다. 그는 인류가
선천적으로 공격적이고 그래서 전쟁은 불가피하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야 하며, 우리는 우리가 아직 문화적 진화를
다스리지 못하고 있는 것을 인정하고 인간 조건과 역사의 반복적 과정을 객관적으로 연구함으로써 그것을 다스려 가야
한다고 말한다.
해리스는 결국 문화적 진화가 모순적이고 독특한 사건들에 의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연속적이고 규칙적인 변화의
과정으로 이루어진다고 말했다. 이렇듯 문화가 얼마나 다르고 떨어져 있다고 해도, 그 근본에는 인간의 보편적 욕구와
충동 그리고 '가느다란 윤리의 층위'(<문명의 충돌>, 김영사 출판, 새뮤얼 헌팅턴)와 같은 동질성이 존재한다.
1950년대에 노벨 평화상을 받았던 레스터 피어슨은 "인간은 다양한 문명들이 평화로운 교류 속에서 나란히
공존하면서 서로를 배우고 서로의 역사, 이상, 예술, 문화를 공부하여 서로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야 하는 시대로
나아가고 있다. 그 길을 택하지 않을 경우 이 인구 과잉의 비좁은 세계는 오해, 갈등, 충돌, 파국으로 치달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문화와 제국주의>에서 인류의 생존은 인간 사이의 관계 짓기를 통해 이루어진다고 한다. 다만
그러한 관계가 타자를 지배하거나 통치하는 것이 아닌, 위계 질서 속에 포함시키려는 것이 아닌, 자문화가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아닌 구체적인 공감과 이해와 화합을 통해 이뤄지는 미래를 바랐다.
다만 이렇게 많은 이론가나 비평가, 사상가들이 평화로운 해결책에 대한 당위성을 제시하여도 인류는 끝없이 서로
대치하고, 무력을 통한 타국가 개입을 서슴지 않고 이행한다. 영토 넓히기나 식민지 지배가 불가능한 시대가 되자, 과거
제국주의 국가들 대부분은 그 의미만 살짝 바꿔 경제, 정치, 문화, 군사 등으로 우위를 점하여 주변국에 간섭하는
패권주의 국가들이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강대국들과의 무역으로 인한 관세 철폐 등으로 인한 내수위축과 경기침체
등의 문제점이 생기자, 사회의 양극화는 더욱 심해져서 강대국은 점점 더 강대해지고 약소국은 점점 더 약해지게 되었다.
이에 반대하는 자들이 모여 '반세계화 운동'까지 진행되어 국제 기구나 국제 협정, 각종 다국적 기업들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반세계화 운동은 그 의도 자체는 나름대로 괜찮지만, 제3세계나 빈곤국가들의 지지를 얻지는
못한다. 이렇듯 현대의 세계는 비난과 질타 등을 통해 다툼을 일삼는 세계이다.
223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현 사회의 교섭이나 논쟁, 합의 등의 근간에는 각각의 국가의 문화적 정체성이 다르다는
인식이 기저에 자리잡고 있는 것 같다. 그것 자체만으로는 전혀 부정적이지 않은 순수한 원인일 것이다. 다만, 그러한
'다름'이 각자의 문화의 시각으로 해석되고, 질서화되고, 왜곡되어지는 것이 현재의 상황을 만들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편견과 왜곡을 잘 다스리지 못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앞으로의 세계도 변함없이 분쟁으로 점칠된 미래일 것이
분명하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사회는 항상 이상을 지향점으로 바라봐야 성장할 수 있다. 극단적인 예이지만, 전체의 99%와 다르다고 해서 나머지
1%를 내버릴 수는 없다. 소수가 어려움을 겪는다면 다수는 이를 도와야 비로소 사회가 본래의 작용을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사회 구성원들이 이익집단처럼 분열되어 서로를 헐뜯으며 배타성을 보이기 보다는, 공존과 보완이
이루어지는 조화로운 복합체가 되어야 한다.
부와 권력이 있다고 해서 그러한 위치에 있는 자들의 가치관이 그렇지 않은 자들의 가치관보다 우월하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크게 잘못된 태도이다. 베짱이의 존재가 개미들에게 부족한 인간의 존엄성이나 가치 등을 깨우치는
것처럼<동화:개미와 베짱이>, 문화의 가치라는 것은 어느 한쪽이 우월하거나 열등한 것이 아닌, 동등하고 수평적인
관계임과 동시에 상호보완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의 예를 들자면, 토착민들의 생활 터전의 폐허 위에 세워진 이민 사회로서의 미국의 정체성은 결코 단일하거나
통일된 것일 수 없다. 그것은 통일된 것이 아닌 복합체적인 정체성이며,그렇기에 '미국주의'와 '비미국주의'라는
이분법적인 사고방식은 굉장히 잘못된 견해이다. 이는 곧 개미들의 사회와도 연결된다. 개미들의 사회가 자신들의 이익을
앞세우는 집단을 대변한다면 그것은 더이상 피해받는 소수 집단이 아니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새뮤얼 헌팅턴의 <문명의 충돌>, 마빈 해리스의 <작은인간: 인류에 관한 102가지 수수께끼> 가 있다. 특히 새뮤얼
헌팅턴의 저서는 20세기 말의 세계 질서 재편의 핵심이 문명에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다만 당시 에드워드 사이드의
<무지의 충돌>이라는 논문이 나와, 새뮤얼 헌팅턴의 독단적인 이론 전개를 비판하였기 때문에 <문화와 제국주의>와
<문명의 충돌>이 탈식민지화를 위한 전개에 있어서의 차이를 보인다는 점을 고려하고 읽어야 한다. 그 충돌점만
제외한다면, 그 둘의 주장이 부합되는 부분이 많다.
10. 종합결론
본 저서를 통해 에드워드 사이드가 서론에서 하고픈 말의 요지는 '문화의 정체성은 단일하거나 통일된 것이 아니라
다른 문화간의 연결과 통합'이다. 콘라드의 소설인 '노스트로모'에서는 제국주의의 부권적 오만함을 그리고 있으며,
디킨스의 소설인 '위대한 유산'에서는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영국으로의 회기불가능성 등을 인물들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실은 이러한 작가들도 그 시대에는 다분히 계몽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겠지만, 여전히 현재의 관점으로서는 그 한계가
어렴풋이 보이게 된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또한 대학교육의 무비판적인 교육행태와 낡고 관습적인 관념들이 변화해야 한다고 보았으며, 특히
미국과 같은 이민 사회에서의 정체성이라는 개념이 단일할 수 없다고 보았다. 제국주의 국가와 제3국가의 문화에 둘 다
속한 에드워드는 자기자신을 '아웃사이더'라고 표현하여 그 경험을 통해 두 세계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메시지를 던진다.
이를 통해 독자에게 선택을 강요하지 않고, 조용하게 제안하며 주체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는 것이다.
제국주의라는 관념은 지리 즉 땅과 관련이 아주 깊다. 인류의 권력투쟁의 역사의 근본에는 영토와 소유의 개념이
자리잡고 있으며 이것은 역사라는 시간을 거쳐왔다. 그 시간 속에서 19세기의 제국주의의 색깔은 현대에 들어와서 많이
희석되었지만, 제국주의적 맥락과 일상에 형성된 분위기는 제국의 중심이든 제3세계이든 상관없이 곳곳에서 문화적
영향력을 형성하고 있다.
이를 통해 저자는 19세기의 제국주의 시대의 소설에 대한 이해가 당시의 역사와 떼어내어 이해하면 안된다고
강조한다. 과거를 모른채 현재를 이해하는 것과 과거를 이해하고 현재를 이해하는 것은 천지차이이기 때문이다.
224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주소
강병희, 사회학과, 2014104394, 문화와 제국주의 발표(12/9), rmfkznf@naver.com
발표자료 링크
ⅰ. 프레지
문화와 제국주의 https://prezi.com/nc-aq8h9-fls/
ⅱ. 빌 마허 ­ 서양 문화의 우월함 https://youtu.be/h7veFglGFdo
ⅲ. SNL, 루이스 C.K. 모놀로그 ‘인종차별과 아동성추행범’ https://youtu.be/ZhxKwNwGxU0
225
미디어와 사회변동
1.
첵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 (역자)
첵제목: 커뮤니케이션과 사회변동
출판사: Culturelook
출판년도: 2015년 7월 20일
저자: 강상현
2.
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성인이 되어서 첫번째로, 그리고 가장 크게 느낀 것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정치적 무력감을 꼽을 것이다. 4월
16일 세월호가 가라앉았고, 온 국민이 한마음으로 분노해줄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한 정의와 가치는 사회적
합의체가 아니었다. 수많은 정보들이 우리 곁에 맴돌았고, 국론은 통일되지 않아 잦은 논쟁이 있었다. 그러나 SNS상에서
목도된 토론은 내가 기대한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근거로 쓰인 정보들은 날조된 경우가 허다했고, 합의를 위한 토론이
아닌 그저 헐뜯기에 불과했다. 스무살의 내가 마주한 사회는 너무나 분열되어 있었다. 파편화된 사회에서 나의 정치적
목소리는 너무나 작았다.
고등학교때 우리는 컴퓨터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하는 정보미디어 사회에 살고 있으며, 이는 현대 민주주의에 큰
역할을 한다고 배웠다. 모든 이론과 현실에 괴리가 있듯이, 정보기술 발전과 민주주의 발전은 정비례 그래프를 그리지
않는 듯 했고, 그 이유가 궁금했다. 단순한 직관적 통찰을 넘어 사회학자들의 담론을 살펴보고 내 나름의 논리를 찾고
싶었다. 또한 인간 역사에서 미디어 기술이 어떤 변화들을 일으켰는지 역시 연구해보고 싶어 이 책을 골랐다.
3.
저자소개
저자 강상현은 연세대학교 언론홍보영상학부 교수로, 연세대학교 신문방송학과를 졸업하고 같은 대학원에서 석사 및
박사 학위를 받았다. 동아대학교 신문방송학과 교수, 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한국방송학회 회장, 디지털방송활성화위원회
실무위원장, 미디어발전국민위원회 공동위원장, 연세대학교 언론홍보대학원장과 커뮤니케이션대학원장 등을 역임했다.
책으로는 <정보 통신 혁명과 한국 사회: 뉴 미디어 패러독스>,<한국 사회의 디지털 미디어와 문화>, <모바일 미디어>
<공영방송의 이해>, <디지털 방송론>, <디지털시대, 미디어의 이해와 활용>, <시민이 열어가는 지식 정보 사회>, <지배
권력과 제도 언론> 등이 있다. 미디어 기술과 사회 변동, 디지털 방송론, 레토릭 등이 주요 연구 분야이다.
4.
책 내용 요약
미디어는 사회와 상호작용하며 발전해왔다. 미디어가 세상이나 세상 사람들에게 영향을 미치는 면도 있고, 세상이 혹은
세상 사람들이 미디어에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둘중 무엇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이야기는 많이 달라진다. 이
책은 미디어 발전사를 앞서 소개하고, 그 동안 제기되어온 미디어에 대한 시각 차이, 관점의 차이에 주목한다.
먼저 미디어 기술의 변화와 발전 과정을 보면, 그것은 분명 인간 커뮤니케이션의 진화 과정을 반영해 준다. 말만이
존재하던 초기의 인간들은 직접적인 면대면 상황에서 몸말과 입말을 통해 서로 소통함으로써 현장에서의 커뮤니케이션이
나름대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로 그 장소와 시간을 벗어나게 되면 서로 같은 의를 지속적으로 공유하는 것이 매우
어려워졌다. 그 뒤 의미를 고정시키는 그림이나 문양, 문자 등이 등장함으로써 기록을 통한 서로 간의 의미 공유와
보존이 상당히 수월해졌다. 나아가 인쇄술이 발명되고 널리 확산된 뒤로는 훨씬 많은 사람들이 동일한 텍스트를 이용하여
서로 같은 의미를 공유하게 되었다. 보다 근대에 들어와서는 과학 기술을 이용한 통신 기술의 발전으로 순식간에 먼
데까지 메시지를 보내고 또 쌍방 간에 실시간 소통하는 것도 가능하게 되었다. 위성 기술의 발전은 글로벌한 수준에서도
동시적인 메시지의 전파와 상호 소통을 가능하게 한 셈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디지털 모바일 기술의 비약적인 발전으로
문자와 소리, 명상 메시지의 저장과 보존은 물론, 다량 복제와 전송, 다자간 동시 소통도 가능한 시대를 열어놓고 있다.
이렇게 미디어 기술은 꾸준히 발전해 왔다.
226
그렇다면 사회는 발전적인가? 그렇지 않다. 그렇지만 사회는 늘 변하고 있다. 기존의 사회 변동 논의에서는 사회가
일정한 패턴을 반복한다고 보는 관점이 있는가 하면, 계속적으로 진보 발전해 간다고 보는 관점,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여러 하부체계가 나름의 역할과 기능을 함으로써 전체 체계를 유지해 나간다고 보는 관점, 그리고 사회 구성원들이나
지도자의 의지나 동기, 창의성 등에 따라 변화의 방향과 크기가 달라질 수 있다는 관점 등 여러 가지가 있어 왔다.
새로운 미디어 기술의 개발에 따라 사회 역시 보다 발전할 것이라는 견해들이 상당히 많은 것도 사실이다. 컴퓨터와
인터넷 등에 의해 정보사회나 네트워크사회, 유비쿼터스 사회가 도래할 것이라는 주류 정보사회론이 그 대표적인
입장이다. 그러나 미디어 기술과 사회 변화의 관계를 다루어 온 기존의 학술적 논의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본 결과,
매우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함을 알 수 있었다. 크게는 새로운 미디어 기술에 의해 새로운 사회가 도래한다는
관점(기술결정론)과 그렇지 않다고 보는 관점(사회구성론)으로 나누어진다. 미디어 기술에 의한 사회 변화를 강조하는
관점은 정보경제론, 정보사회론, 정보양식론으로, 그리고 반대로 사회의 지배 계층이나 기득권층의 어떤 의도나 목적에
의해 새로운 미디어 기술이 개발, 보급, 이용되고 있음을 강조하는 관점은 산업경제론, 자본주의 산업사회론,
지배양식론으로 하부 분류된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 변동을 이해하는 핵심 관점은 무엇인가
이 책에서는 어떠한 관점이 우리 사회의 디지털 미디 기술과 사회 변화를 설명하는 데 보다 적합한지를 따져 보고자
했으나, 각각의 관점은 현상의 일부를 설명하는 데에는 유용할지 모르지만, 하나의 관점이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다. 새로운 미디어 기술에 의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 것은 사실이다. 새로운 미디어 기술이 진공 상태에서 개발되고
보급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어떤 미디어이든 개발의 목적이나 동기가 있고, 그것을 사회적으로 수용하거나 보급하려는
이유나 목적 역시 있기 마련이다. 기술이 사회에 영향을 주기도 하고, 사회가 기술에 영향을 주기도 한다. 기술 결정론과
사회구성론적인 관점은 이렇게 공존하기 때문에, 미디어 기술과 사회 변화의 관계를 고려할 때 이들 양 관점은 물론 그
하부의 다양한 관점들을 함께 고려해야 한다. 다시 말해 미디어는 사회변동의 핵심이나, 특점 관점에 얽매이는 것이 아닌
다양한 시각을 가지고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보고서의 필자는 이러한 저자의 주장에 따라 한가지의 관점이 아닌
다양한 이론적 분석 틀을 가지고 사회 변동을 이해하고자 한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인간의 최초 매스 미디어는 ‘말’ 이다. 말은 이렇게 인간이 가진 가장 오래된 정보전달 체계이다. 그렇다면 구두
미디어는 어떻게 생겨났을까. 엥겔스는 ‘인간의 선조는 협의를 바탕으로 한 공동 노동이 개별 노동보다 효율적이어서
언어가 생겨났다’ 며 그 기원을 노동에서 찾았고, 루소는 ‘어려움에 처한 약자가 강자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해 생겨났다’
며 그 기원을 사회적 관계의 불평등에서 찾았다. 반면 일본의 마스오카 세이코는 인간이 직립 보행을 하고 발정기를
상실하면서 남녀가 성기를 가리게 되고 성 신호계가 은폐되면서 언어를 통해 구애를 하게 되었다고 설명한다. 이렇게
생겨난 언어는 살아있는 현장의 미디어로 현장성이 높고 생동감이 넘치나 그 순간의 의미를 보존하기 어렵다. 이러한
특징은 정보를 누군가의 기억에 의존하게 한다. 정보가 다음 세대로 온전히 전승되지 않기 때문에 오랜 시간 생존하여
체득한 기억이 많은 노인들이 정보의 우위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부족 내에서 문제가 생겼을 때 가장 연장자에게
물어보는 문화가 생긴다. 혈족 내에서 노인이 가지는 정치적 우위는 ‘조상 숭배’의 종교와 결합되어 그들의 위치를 더욱
공고히 하게 된다..
문자의 발명과 함께 정보 전달의 양상은 크게 바뀌었다. ‘추상화된 약속 코드’인 글자는 그 요소의 조합을 통해 훨씬
많은 의미를 생성하고 표현하며 전달할 수 있게 만들었다. 문자는 기억하는데 한계가 있던 구두 미디어와 달리 특정한
의미를 지속적으로 보존하고 상호 의미를 공유하는 데에 탁월한 기능을 갖고 있었다. 또한 단순히 개인의 생각과 느낌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데에 그치지 않고 객관적 사실이나 역사적 사건을 기록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문자는 그 사회의 보편적 미디어는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체득되는 말과 달리 글은 체계적으로 배워야 하기
때문에 특권적 미디로서 제한된 사람과 계층, 집단의 독점적 전유물이었다. 중세까지만 해도 유럽에서는 귀족 계급이나
성직자가 아니면 그리스어나 라틴어를 익힐 수 없었고, 성서 역시 교회가 독점하였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조선 말기까지
한자는 양반 계층이 독점하는 배타적인 미디어였다. 일반 상민들의 문자 습득은 제도적으로 배제되었고 문자
교육으로부터도 철저히 소외되었다. 문자가 등장하던 시기부터 문자를 통한 지식과 정보의 습득 및 교환은 힘과 권위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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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문자를 이용해 지배계급은 정보를 독점 및 세습하여 지배권력을 한 세대가 아닌 여러 세대동안 유지할 수 있었다.
정보를 독점한 지배층은 피지배층에게 제한된 정보만을 배푸는, 즉 가르치는 선생의 위치를 점유함으로서 그들의 정치적
정당성을 가지게 된다. 단순히 힘과 폭력에 의한 억압적 질서가 아니라 이렇게 정서적 우위를 지배계층이 가지게 되면
권력 구조를 유지하기는 더욱 쉽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러한 권위는 인쇄술의 발명과 함께 무너지게 된다. 과거에는 인쇄술 발달 이전에는 모든 책이 필사본이었다. 신문
역시 필사 신문이었기 때문에 양이 적고 비쌌으며, 힘있고 돈있는 사람들만이 독자였다. 인쇄술은 이런 동일 메시지
복제의 양적 제한성을 극복하게 만든 결정적인 기술이 되었다. 인쇄술의 발명과 발전은 지식과 권력 독점을 파괴하고
지식의 대중화, 문화의 대중화, 권력의 탈집중화를 가져왔다. 인쇄술이 급속히 보급되면서 서구 사회에는 종교 혁명과
함께 르네상스가 찾아왔다. 계몽의 수단으로 다량 생산된 인쇄물이 쓰이면서 서구 근대적 시민 사회가 열림과 동시에
시민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을 이끌어 냈다.
인쇄술이 발달하여 메시지를 다량 생산한다 하더라도 사람들간 정보 전달이나 소통에 아무런 문제가 없었을까? 아무리
많은 양의 메시지를 다량 복제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일정한 장소로 이동시키기 위해서는 물리적인 교통 수단을 쓸 수
밖에 없었기 때문에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러나 텔레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은 시간과 공간의 장애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였다.
텔레커뮤니케이션이란
멀리 떨어져 있는 두 사람이 그들 사이의 거리, 물리적 장애 등으로 초래되는 영향을 극복하기
위한 수단 · 장치를 이용하여 행하는 정보의 전달 프로세스를 이른다. 사무엘 모스의 유선 전신술은 그 기술 발달의
첫걸음이었다. 유선 전신술은 특정한 코드를 전류를 통해서 전송할 수 있게 만들었고, 이는 제국주의 국가의 식민지
확장에 큰 역할을 하게 된다. 제국주의 국가들은 본국과 파견대 간에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 교환을 필요로 했고, 그
수단이 유선 전신술이었다. 구한말 우리나라에 전신 기술이 들어온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1880년대
청나라와 일본, 러시아 등 주변 국가들이 한반도를 넘볼 때, 그들은 경쟁적으로 한반도에 전신 선로를 가설하였고 이를
그들의 영향력 확대를 위한 수단으로 삼으려 했다. 맨 먼저 청나라가 ‘의주전선합동’ 조약을 체결하여 인천-한성,
한성-의주를 잇는 서로전선을 가설하고 1888년 일본이 부산과 서울을 잇는 남로전선을 가설했다. 또한 러시아는 서울과
원산을 거쳐 블라디보스트크로 이어지는 북로전선을 가설하려고 했다. 이 유선전신들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에게 넘어갔고, 1905년 을사늑약에서 우리나라의 정보 주권과 한반도 주도권 역시 일본에게 넘어가게 된다..
모스의 유선 전신 기술 발명 이후 1895년 굴리엘모 마르코니에 의해 무선통신이 발명되면서, 유선망을 이용하지
않고서도 원격 통신을 가능하게 되었다. 이러한 무선 전신은 정보 소통의 신속성 보장과 함께 원격성을 한층 높여주었고
무선 전신을 조기 체택한 영국으로 하여금 ‘대영제국’의 영예를 안겨주었다.
뒤이어 라디오가 발명되면서 방송의 시대가 열렸다. 전신 기술과 전화와 같은 통신 기술이 한 장소와 다른 장소를
잇는 지점간 커뮤니케이션의 성격을 지니는 것과는 달리, 방송은 한 곳에서 메시지를 보내지만, 그러한 메시지를
수신하는 것은 불특정 다수라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렇게 일방향적이고, 다수를 상대로 하는 라디오는 대중에게
특정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기에 매우 용이했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컴퓨터와 인터넷의 등장은 미디어의 양식을 획기적으로 변화시켰다. 이는 점점 발전하여 미디어의 개인화를 이루어
냈다. 컴퓨터와 스마트폰을 통해 모든 사람이 엄청난 양의 정보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우리가 살고 있는
‘정보화 사회’를 열었다.
많은 학자들은 이러한 디지털 커뮤니케이션 기술의 발달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 스티븐 G 존스에 따르면
현대사회에서는 ‘사이버사회’라는 새로운 구성체가 나타날 것이라고 말했다. 컴퓨터가 널리 보급되고 이들 사이를
연결하는 네트워크가 확장됨에 따라, 그러한 네트워크로 연결된 사람들 간에는 정보와 데이터 교환은 물론 서로 간의
소통이 더욱 활발해지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서로 관심과 취향이 비슷한 사람들끼리는 일정한 그룹을 형성할 수 있게
되었고 이는 크고 작은 사이버 공동체를 만들어낸다. 사이버 공동체는 기존의 공동체와 같이 물리적 접촉을 이뤄내지는
않지만, 정신적 정서적 유대를 바탕으로 한 공동체 의식을 생성시킴으로써, 개인적 수준에서는 소속감을 주고, 대인적
수준에서는 공공 이익을 추구하며, 정치적 수준에서는 자유로운 의사 표현을 통해 합리적 합의에 도달할 수 있다고 한다.
228
이는 사이버자유주의로 이어져 사이버공간이 현실세계와 독립되어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는 자유롭고도
평등한 공간이며, 정치에 있어서 민주적 합의를 이뤄낼 수 있는 핵심이 된다.
이러한 낙관론을 비판하는 관점 역시 존재한다. 첫번째가 하버마스의 구조변동론이다. 공론권이란 간단히 말해서
‘여론이
형성되는
장’
이다.
공론권은
과거
봉건적
질서를
혁파하고,
새로운
근대
부루주아
시민
사회를
형성/발전시키는데 큰 기여를 했다. 살롱이나 커피숍, 찻집 등에서 사람들은 문학과 예술을 중심으로 생각을 나누었고,
점차 서로의 정치적 사상을 교류하고 논의하는 정치적 공론권으로 발전하였다. 이는 부르주아 혁명의 성공과 만나면서
정당, 의회, 언론기관으로 제도화되었고 권력에 대한 견제와 감시의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19세기 말부터 정당과, 의회,
언론은 새로운 권력기관이 되어 스스로의 권력을 과시하면서 다수 민중을 억압하는 ‘공론권의 재봉건화’가 되며
타락해버린다. 특히 하버마스는 시민 부르주아 공론권이 나중에 가서는 매스 미디어를 통한 각종 광고와 홍보 활동을
통해 스스로의 힘을 과시하는 ‘중세 과시 공론권’으로 회귀했다고 말한다. 그는 그 원인을 공론권의 ‘상업화’ 에서
찾는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공영방송이다. 전통적인 공영 방송은 본래 상업적인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공적 문제에 대해 보다
공정한 제공자, 그리고 시청률에 연연하지 않고 사회의 다양한 계층을 위한 프로그램 제공자의 역할이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1970년대 말 이후 tv수상기의 보급이 포화상태에 이르렀고, 광고 수입이 아닌 시청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은
위기를 맞게 되어 시장 논리를 따르게 되었다. 공롱권으로서의 방송의 역할이 약화되면서 공적 제공과는 무관한
프로그램의 오락화를 부채질하였고, 양질의 정보는 유료화되여 모든 사람에게 공적 정보를 제공한다는 공론권 이념이
퇴조되었다.
현대, 그리고 미래의 상황 역시 마찬가지라고 예측된다. SNS 역시 광고 노출도에 따른 수익 구조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상업화의 맹점에서 벗어날 수 없다. 또한 많은 페이지들이 불법 스포츠 토토, 성매매 알선단체 등에게 광고비를
받고, 이는 팔로워 수에 따라 결정되기 때문에 페이지 운영자들은 더욱 자극적이고 오락적인 정보만을 업로드한다.
이렇게 자극적이고 검증되지 않은 정보들은 앞서 말했던 자가 선동의 메커니즘과 합쳐져 그 스스로를 강화시킨다. 이러한
특징들이 우리로 하여금 sns에게 공론권의 역할을 기대할 수 없게 하는 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TV방송이나 언론이 공론권의 역할을 상실하면서, 그 권력을 SNS가 나누어 갖게 되었다. 그러나 SNS는 기존
언론들과 달리 검증되지 않고 자극적이다. 때문에 소위 말하는 ‘정보의 바다’ 인 SNS 안에서 정치담론의 형성 과정을
이해하고, 선별적인 정보 수집 능력을 갖추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다음은 지난 14일 광화문에서 있었던 민중총궐기에 대한 상반된 반응이다. 낙관론 학자들의 전망과 달리, 댓글들의
반응을 보면 같은 사건을 가지고 매우 상반된 반응을 보이고 있을 뿐만 아니라 토론이 아닌 감정적 대립만이 있는 듯
하다. 도대체 그 이유는 무엇일까.
필자는 이에 대한 이유를 ‘선동의 메커니즘 변화’ 라고 생각한다. 과거 선동의 메커니즘은, 예를 들어 나치와 일제와
229
같은 특정 주체가 불특정 다수의 객체에게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현대 SNS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선동은 주체와 객체가 나누어진 선동이 아닌, 끝없는 자기선동의 메커니즘을 따른다.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는 친구기반
서비스이기 때문에 이용자의 뉴스피드는 그 이용자가 친구를 맺거나, 팔로우를 하는 사람들/페이지로 채워진다. 이렇게
비슷한 정치적, 사회적 성향을 가지고 이데올로기를 공유하는 사람들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이용자의 SNS의 내용은
편향되게 된다. 그러나 이용자는 과거 학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SNS를 자유롭고 중립적 토론의 장이라고 인식하고,
편향된 여론(자기 뉴스피드의 여론을)을 합의된 여론이라고 잘못 받아들이게 된다. 이러한 메커니즘은 개인이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를 지속적으로 강화시키고, 합의된 여론 형성을 방해한다. 이처럼 친구기반의 SNS는 개인이 스스로에게
이데올로기를 주입하고 강화시키는 ‘자기 선동의 순환’을 따르게 되는 것이다.
9.
이 관점과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소셜 미디어와 사회변동> _ 설진아 _ 커뮤니케이션 북스
이 책은 소셜 미디어에 대한 개론서이다. 소셜 미디어는 ‘소리 없는 혁명’
이자 엄습하는 ‘바이러스’에 비유할 수 있다. 인터넷과 모바일의 물결을 타고
소셜
미디어는
도시와
오지,
부자와
빈자,
권력층과
힘없는
시민의
커뮤니케이션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동시에 소셜 미디어는 정치나 경제
영역에서 PR의 도구나 마케팅 도구로 적극 이용되기도 한다. 공공 영역에서도
소셜 미디어가 활용되고 있지만 막대한 자본을 바탕으로 매우 빠른 속도로
상업화되는 추세다. 소셜 미디어의 상업화는 디지털 관계 맺기가 상업적으로
이용되면서 경제적 가치를 창출하는 데 기인한다. 문제는 개인 정보가 노출될
위험성도 점차 커지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상업화에도 불구하고, 소셜
미디어는 사람들을
더욱
사회적으로 만단다. 소수의 지식층에서 다수의
시민들로 주체가 다변화되는 커뮤니케이션 권력 이동 현상이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본격적인 커뮤니케이션 패러다임 변화라고 할 수 있다.
<괴벨스의 입> _ 지식채널 e
http://www.ebs.co.kr/tv/show?courseId=BP0PAPB0000000
009&stepId=01BP0PAPB0000000009&lectId=3002198
나치가 어떻게 방송커뮤니케이션 기술인 라디오를 정치적 선전 및
선동에 이용했는지 알 수 있다.
10.
종합결론
인간 역사에서 기술 발전은 커다란 사회 변동을 이루어 냈다. 불의 발견과 농업 기술의 발달은 농업 혁명을 일으켰고,
증기기관의 발명은 산업혁명을 이루어 냈다. 미디어 기술의 발전 역시 획기적인 기술발달이며 인간 사회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기술의 발달은 사회 구조에 선행하는 것 만은 아니다. 인간은 어떤 기술을
발전시킬지에 대해 선택적으로 선별할 뿐만 아니라, 이미 발견한 과학 기술을 어떻게 이용할지에 있어서도 선택적이다.
이렇게 기술의 발전과 이용에 인간 의지가 크게 반영되기 때문에 기술 발전은 인간 사회에 선행되지만은 않으며,
기술환원주의는 오류를 발생시킨다.
기술이 인간 문명 진보의 상징이었던 산업화 시대는 끝났다. 기술의 발전 속도는 인간의 수용 범위를 넘은 듯 하다.
현대 사회에서 SNS가 예상했던 것과 전혀 다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다른 과학 기술 역시 예측할 수 없다. 기술을
계획적으로 통제하기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기술을 하나의 독립 개체로서 인정하고, 그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인간 생활에
유익하게 이용할지에 대한 방법론적 연구에 비중을 두어야 할 듯하다.
230
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email주소
이름: 이홍근 / 학과: 사회학과 / 학번: 2014104426
간략한 자기소개: 안녕하세요 언론인을 꿈꾸는 사회학과 14 이홍근입니다.
Email 주소: encoder0101@naver.com
231
유교 이데올로기와 한국사회
목차
0. 들어가며. 주제 선정 동기와 사회변동 핵심요소로서의 유교
1. 고려 사회의 해체와 신유학의 대두
2. 조선 전기: 새로운 사회 모델의 모색
3. 조선 후기: 양란 이후 소중화(小中華) 사상의 강화
4. 현대 사회에서 유교의 잔재와 가치
5. 나가며. 미래 시대의 이데올로기
0. 들어가며
우리가 사는 이 세계를 이끌어가고, 궁극적으로 지배하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이번 학기에 황승연 교수님의 수업을
들으면서 가장 많이 고민해본 질문이다. 솔직히 말하면 내가 단 한 번도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에 놀랐다. 내가 배운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끊임없이 재촉했다. 나는 나에게 주어진 여러 입장 중에
내가 선택한 나의 판단과 입장이 어떻게 “정의”라 불리는 것에 합치되는지, 사회적으로 옳은 것인지 검토하고, 또
정당화하기 바빴다. 그 와중에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내가 보는 선택지 바깥에 어떤 무궁무진한 세계가 있고, 혹은 내
스스로 새로운 선택지를 만들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세상은 끊임없이 성찰하고 수양하는 범인이
아니라, 창의적인 속세의 개척자들에 의해 변해가는 법이다.
그리고 진지하게 우리 세상을 이끌어가는 그것, 사회변동의 본질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았다. 사실 21세기를 살아가는
나에게 있어 과학과 기술의 발전을 빼놓고 사회변동을 이야기하는 것은 전혀 상식적이지 않다. 내가 태어났을 때 이미
전쟁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의 주제였고, 독재와 민주화도 교과서에서나 배우는 챕터였으며, 어렴풋한 경제위기에 대한
부모님의 말씀만이 “경제의 중요성”을 상기시켜주고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전쟁이나 민주화 역시 발전된 무기와
높아진 경제수준이 기반되지 않고는 불가능했음을 고려한다면, 유물론적 사관을 반박하는 것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나 나는 (누군가는 억지라고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과학과 기술을 발전시키고 보급하는
주체는 결국 인간이며, 개척자의 반짝이는 창의성이라는 점에 초점을 맞추고자 하였다. 구텐베르크가 위대한 이유는
금속활자를 발명했기 때문이 아니라, 이를 통해 출판물을 대중일반에 보급했기 때문이다. 특정한 순간에 특정한 사람이
어떻게 결정하고, 그 시대 사람들의 생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가는 그 사회를 바꾸기도 하고, 오랫동안 유지시키기도
한다. 특히 지배계급 혹은 다수의 이념과 사고방향은 사회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1905년 막스 베버가
<프로테스탄티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을 출판한 이후, 이데올로기가 사회변동에 미치는 영향은 오히려 진부한 것이
되고 말았지만, 오랜 역사와 문화를 거쳐 주입된 “이념”이라는 것은 얼마나 체계적으로 우리 사회를 유지, 변화시키는가.
그리하여 이데올로기라는 다소 추상적인 요소가 어떻게 사회를 변화시켜 왔는가에 대해 고민을 하다보니, 무엇보다 그
시작점을 잡기가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현대를 지배하는 과학적 사고관과 실증주의가 어떻게 세계의 “대세”가 되었는지,
인간 외부의 “객관적 대상”에 대한 믿음이 어떻게 우리 역사를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밝히고 싶은 욕망이 있었다. 그러나
곧 이성이나 감성과 같은 인간의 본질적인 기능이 “사회변동”의 요소라고 말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과 동시에 이것이
전혀 창의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고, (다행히) 이 주제를 접었다. 결국 나는 사회변동의 범위를 우리나라로
제한하여, 그나마 내가 현실적으로 경험하고 있고, 사회변동의 요소로서 주제화하기에 더 적합하다고 생각되는 주제로
바꾸기로 하였다. 그것은 바로 유교였다.
혹자는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라는 책에서, 현대 한국사회에서 유교의 잔재가 미치는 부정적 영향에 대해
적나라하게 지적하였다. 처음 이 책을 보았을 때 느꼈던 나의 개인적인 감정과는 별개로, 우리가 어떻게 유교적 이념을
선택적으로 기억하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이를 위해 유교가 우리 역사에 정착하고 지배적인 이념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지배계급의 정치적 상황이 아닌, 사회문화적이고 일상적 삶의 관점에서 알아보고자 한다. 고려 말에서 조선시대에 유교가
232
우리 삶에 미친 영향은 마르티나 도이힐러의 <한국의 유교화 과정>(CTK; 2013)66)을 중심으로, 근현대 사회의 유교적
이념의 영향은 여러 논문을 참고하였다.
1. 고려 사회의 해체와 신유학의 대두
기본적으로 고려는 불교국가였지만, 유교와 불교는 서로 다른 기능을 보완한다고 믿어지며 유교가 배척되지 않았다.
유교는 통치를 위한 기본 정강을 제시하는 반면, 불교는 백성의 영적 요구에 보답한다는 것이다.(CTK, 146)67) 물론
고려 중기에도 불교의 한계를 지각하고 유학의 장점을 설파한 초기 유학자가 있었는데, 10세기에 활동한 최승로는
유교와 불교를 비판적으로 비교한 최초의 유학자이다. 그는 불교 숭배는 저승에서의 보상을 지향하지만 유교 봉행은 현재
국가를 다스리는 근원이라고 지적했다. 또한 조만간 사라져버릴 것을 위해서 현재와 관련된 것을 버리는 것은 잘못이
아니냐고 물었다. 이후 신유학이 처음 도입된 13세기 후반에는 유교와 불교의 평화로운 공존을 말하는 학자들이
생겨났다. 신유학을 초기에 수용한 이제현은 불교의 ‘자비’를 유교의 ‘인’, ‘희사’를 ‘의’와 동의어로 해석하며, 유불 간의
유사성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공민왕의 통치 아래 불교의 폐단은 유학자들이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신돈의 일방적이고
강력한 불교개혁은 젊은 유학자들은 좌절하게 만들었고, 유교에 의한 더욱 급진적인 질서를 요구하도록 만들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옮겨갈 무렵 신유학자들은 불교 승려들의 불법(不法)적인 행위를 직접 목격하면서, 승려들에 대한
자신들의 비판 사례를 마련하는 데 필요한 방대한 자료를 찾았다. 성균관의 유생들은 승려들을 세속으로 돌려보내 군역에
종사하게 하고 불경을 불태우며 그들 소유지는 군대를 위해서 사용하고 소유 노비는 관청들에 나눠줘야 한다고 하였다.
또 불상은 녹여서 동전을 주조하는 데 사용하고 목판은 유교 서적을 출판하는 데 다시 사용하도록 하며 사원을 정부
창고나 역참 또는 향교로 개조하라고 주장하였다.
드디어 조선이 건국되고, 조선 사회에 새로운 안정과 질서를 부여하려는 열망은 실용적 이유뿐만 아니라 이상주의에
따른 동기도 있었다. 중국 고전에서 찾아낸 모델과 관례를 조선에 적용한다면 조선사회가 궁극적으로는 이상적인
유교사회로 변하리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조선 초기 정도전은 강력한 배불정책과 함께 조선이 중국의 고대 관습에
동화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당시 신유학자들이 구현하고자 한 유교 이데올로기는 일상에서 행위의 지표가 될 수 있는
실행가능한 계율로 축소되어야 했다. 신유학자들은 <예기>와 <의례>를 토대로 부계 혈연 개념과 조상 숭배, 배우자의
구분과 오복제도 등을 받아들이며 조선 초기 사회의 청사진을 그려나갔다. 특히 <주자가례>는 백성들을 불교의 전통에서
해방시키고 도덕적(유교적)인 삶을 지향하도록 의례편람을 제공하였는데, 이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조선사회에 깊이
영향을 주었다.
한편 사회변화는 필연적으로 경쟁과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새로운 지배계층(사대부)에 의한 유교적 사회로의 재편은
위에서부터 시작되는 변화였기 때문에 사람들의 일상과 전통적 풍속까지 단번에 바꾸기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많은 사람이 빠르게 진행되는 사회적 입법에 저항하였으며, 사대부가 제시하는 “모범적 틀”에 더디게
적응하였다. 때로는 왕실조차로 신유학의 지휘에 종종 순응하지 않았다. 결국 개혁과정은 새 왕조 사업의 선봉장으로
신유학을 선봉하는 소규모 엘리트 집단의 결정에 의존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점은 신유학자들도 우리나라 고유의 전통이
지속되는 것의 중요성을 충분히 고려했다는 점이다. 사회제도를 유교화에 크게 헌신한 세종대왕조차도 중국의 예(禮)를
도입하려고 지나치게 서두른 나머지 지역의 풍속을 해쳐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그는 “어찌 우리 과거 사람들(고대
중국인)이 행 한 것에 매일 수 있겠는가?”(<세종실록> 86:3)라고 하여 과거(고대 중국)와 현재(조선)는 다르며 시대
요구에 자신을 맞추는 일이 필요하다고 했다. 권근이나 하륜 같은 초기 신유학자들도 기본적으로는 정도전의 태도를
지지하였으나, 변계량은 조선의 국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중국 황제로부터 독립적이라는 것을 보여주어야 한다고
하였고, 양성지는 조선인이 오직 중국의 번영한 시대만 알고 한국의 역사를 무시하는 것을 개탄하였다.(CTK, 172)68)
66) 서론에 따르면, 본 연구는 두 가지 중요한 가설을 검증하는 데 목적이 있다. 첫째, 조선 후기(대략 17세기 후반) 한국의 사회상이
윤곽을 대략 파악할 수 있는 고려시대 한국의 사회상과는 뚜렷이 다르다. 둘째, 이러한 변동을 일으키고 연출한 원동력은 정치 또는
경제적 요소가 아니라-정치적 또는 경제적 영역에서는 지속성이 상당하다- 신유학이라는 가설이다.
67) 마르티나 도이힐러 저, 이훈상 역, 『한국의 유교화 과정』, 너머북스, 2013.
68) 마르티나 도이힐러, (2013)
233
2. 새로운 사회 모델의 모색과 사회적 혼란
(1) 효와 예: 제사와 부계 출계집단의 형성
조선에서
유교사회를
확립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첫걸음은
종법(宗法)을 사회기반으로 하여 부계 중심의 출계집단을 명확히
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한 실천적 의례는 제사였다. 제사는 단순히
장례나 조상에 대한 숭배를 넘어, 집안과 공적 영역 모두에서 의미
있는 체계를 규정하였다. 제사는 산사람과 죽은 사람을 하나의 부계
출계집단으로 묶어줄 뿐만 아니라, 의례를 수행하는 서열의 위치는
출계집단 안에서 개인의 권리와 의무를 결정하며, 정치의 장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지위를 보장한다.
조선 초기(태종 전후)에는 관리계급에서 조차도 지배적인 종교적 이념은 아직까지 불교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집안에 사당을 짓고 위패를 모시라는 법률이 잘 지켜지지 않았다. 이에 입법가들은 관리들의 협조를 구하기 위해 소비가
금지된 술을 봉사자(奉祀者; 조상의 제사를 받드는 사람)에게 팔도록 지시하기도 하였고, 봉사를 위해 이틀간 휴가를
주기도 하였다. 그럼에도 “효성스럽지 못한” 대다수의 관리가 이를 무시하여, 사당 건립 최종 기한은 삼십년 가까이
연장되었다.
그러나 세종 이후 급격한 유교화에 따라 상황이 역전되어 누가 제사를 지낼 것인가 하는 문제는 집안의 핵심문제로
대두되었다. 봉사자는 입후자(立後者; 후계자로 세워진 사람)와 일치하여야 했기 때문이다. 입후자에게는 호구의 호주,
직함, 재산권과 함께 한정된 제사의 의무가 부여되었다. 문제는, 고려 때부터 내려오던 관습은 남녀 구분 없이 평등한
형제 상속을 원칙으로 하는 반면, <주자가례>는 장자상속이라는 수직적 원칙을 규정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조선
초창기에는 장자 혼자 봉사를 하는 경우는 드물었고, 자손들과 심지어 사위까지도 돌아가면서 봉사(윤행)를 했다. 이는
경제적인 이유뿐만 아니라 모든 아들에게 동등한 의무를 부여하는 고려의 강력한 양변적 관행에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CTK, 232) 그러나 양행의 관습이 이루어졌던 것과 달리 법은 장자상속을 규정하고 있었으므로, 봉사자에게
봉사를 지낼만한 재산이 없거나, 혹은 장자가 없을 경우 문제가 되었다. 1475년(성종6년) 때 발생한 고위관리 김연지의
사례는 불확실한 종법에 따른 조선 전기의 문제 상황을 단적으로 보여준다.(CTK, 199)
김연지의 맏아들 김익수의 처 송씨는 시아버지 김연지가 관에 알리지 않은 채 후사를 바꾸었다고 예
조에 고소하였다. 김연지는 장자인 김익수가 조상 제사를 감당할 수 없다고 여겨 셋째 아들 김견수에게
제사를 모시게 하였다. 김연지는 아들, 사위들과 상의한 후 자신의 뜻을 담은 내용을 문권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고소에 대하여 예조는 그것이 종법을 문란하게 만드는 죄는 아니라고 하였다. 당국에서는 원
래 결정을 취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시아버지의 뜻을 어기고 여성의 도리를 어겼다고 송씨를 비난했
다. 그런데 송씨가 이에 불복하여 1489년(성종20년)에 다시 제소하였다. 예조에서는 이 사건을 재론하
고 싶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송씨가 왕명으로 자기 의견을 널리 개진할 수 있었다. 송씨는 1467년(세조
13년) 남편 김익수가 죽었을 때 자신의 아들 김덕흥이 어려서 김연지가 셋째 아들 김견수를 봉사자로
정하였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김견수는 이제 죽었고 김덕흥은 성인이 되었으므로 제사 계승권은 김덕흥
에게 와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잇따른 논쟁은 적장자를 압도적으로 지지하였음을 증명한
다. 지지자 3분의 2가 김덕흥을 올바른 종자로 인정하면서
김연지의 뜻은 분명히 종법을 무시한 불법이라고 드러내놓고
비난했다. 김연지의 뜻을 옹호하는 사람들조차도 종법에 문제
를 제기하는 이는 거의 없었으나 김연지의 의사를 취소하면
유사한 선례들이 논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우려하였다. 그러
나 종법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논의는 오직 한 가지 이유에서
꺾이고 말았다. 그것은 송씨가 시아버지를 관에 고소한 것이
불경스러운 일이라는 것이었다. 송씨의 처사는 김연지의 실수
보다 더 나쁜 것으로 판단되었으며, 성종이 김견수의 계승자
격을 확정한 것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성종실록>
52:4a-b, 233:14-16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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뿐만 아니라 출계집단 내에서 서자의 문제는 봉사자 선정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었다. 조선 초기에 서자(양인 출신의
첩에게서 태어난 아들)69)가 같은 형제의 아들보다 후사로서 선호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부친의 선대를 봉사하는
서자는 경제적 혜택도 조금 누릴 수 있었고 봉사자가 아니면 맡을 수 없는 관직에도 나아가는 등 국가로부터 어느 정도
인정도 받았다. 그렇지만 정식으로 결합하지 않은 남녀 사이의 자식에 대해서는 사회적인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차자(次子)가 형이 죽은 뒤 후사로 세운 형의 서자에게서 봉사 권리를 빼앗으려는 시도가 흔히 제기되었다. 또한
집안에서는 아들을 낳지 못한 적실이 경쟁자인 첩의 아들에게 남편 봉사를 맡기는 것에 분개했다.(CTK, 209) 그러나
법적인 시각에서 보면 평민 지위의 서자가 의례를 계승하는 것은 계속 받아들여졌다. 유학자 퇴계 이이 역시 적자가
없어 두 서자 가운데 맏아들을 봉사자로 삼았다.(CTK, 211)
(2) 여성의 지위
조선 초기 입법가들은 여성을 다루면서 유교사회에 적합한 지위를 부여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조선 전기까지 여성은 종족 집단 구성원의
권리를 전하는 핵심 인물이었다. 고려시기만 하더라도 같은 세대 구성원일 경우
여성은 친족집단에서 배제되지 않고 남성과 똑같은 권리와 책무를 행사했다.
형제와 자매들이 기본적으로 동등한 전통은 관직 계승이나 재산 상속과 중요한
인과관계가 있었다.
혼인식은 신부의 집에서 행해졌고, 남편들의 처가살이가 일반적인 거주형태였다. 고려시대에는 이러한 처가살이 혹은
신랑이 신부의 집을 방문하는 형식의 혼인생활이 일반적이었고, 이는 대부분 항구적이었다. 조선 전기까지 처가 거주제는
매우 자연스러웠고, 유학자 율곡 이이 또한 이를 당연시 생각하였다. 무엇보다 당시의 여성은 평등한 상속권을
부여받았기 때문에 처가에서 혼인을 하고 살림을 차리는 것은 경제적으로도 남성에게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다.
나아가 사위는 남성 후계자가 없을 경우 처가에서 아들의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이는 곧 남편이 잠재적 상속자라는
것을 의미했다. 자신 이름으로 된 재산과 친정 가족이 있는 이상 부인은 자기 스스로 판단하여 남편을 떠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재혼에도 사회적 낙인이 찍히지 않았다. 이러한 고려의 전통은 조선 초기 입법가들의 왕실의 모범적 행동을
통해 변화시키고자 했던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선 건국 이후 200년 이상 사라지지 않았다.70)
[관련영상: “여성의 재산 상속” https://youtu.be/wX8_kBqJLuQ]
조선시대 유교사회에서 여성의 위치는 본처인가, 첩이냐에 따라, 또한 맏며느리이냐, 아니냐에 따라 달라졌다. 특히
처와 첩을 분명하게 구별하는 1413년의 법은 조선의 의례생활에서 첩을 배제하는 결과를 가져왔다.(CTK, 212) 첩
혹은 후모라 불리는 둘째 부인은 남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첫 부인의 특권을 그대로 누렸으나, 죽은 후 사당에 위패가
모셔질 수는 없었다. 또한 조선 초기 관습에 따르면 아들 없이 죽은 장자의 부인은 남편이 봉사자였는지와 관계없이
총부(맏며느리)라고 불렀다. 총부에게는 두 가지 특권이 있었는데, 하나는 봉사자를 물려받는 것이고 하나는 죽은 남편의
후사를 지명하는 권리이다. 총부는 보통 사당이 붙어있는 대종가로 옮겨가서 봉사조로 특별히 따로 떼어놓은 토지와
노비를 소유하였기 때문에, 봉사를 계승하는 것은 과부에게 경제적으로 큰 도움이 되었다. 조선 전기에 통상적으로
며느리가 딸로 간주된 덕분에 총부는 이 같은 예외적인 지위를 얻을 수 있었다.
한편 봉사에서 총부는 남편 형제의 아들보다도 우위에 있었기 때문에, 때로는 총부가 후사를 지명하지 않고 우물쭈물
하여 아직 생존하여 제사를 안정적으로 존속하는 데 관심이 많은 시어머니와 갈등을 일으켰다. 일반적으로 총부는 남편의
서자를 후사로 삼는 것을 싫어하여 종종 남편의 유언을 무시하였다. 뿐만 아니라 총부로 인해 봉사자격의 형제계승이
가로막힌 시동생들은 종종 홀로 된 형수에게 불친절하였으며, 형수를 안정된 지위에서 축출하려고 노력했다.(CTK, 217)
이 모든 것이 남편을 잃은 여성이 총부의 지위에 집착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69) 천인 출신의 모친에게서 태어난 얼자는 결코 봉사자로서 논의되지 않았다.
70) 관련 내용 출처: <역사스페셜> (2002.09.28.) https://youtu.be/xdyhpiitx6A?list=PLqASjKBOO_rgsqkRlp1p_FmBfUlR6aTJ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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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소중화(小中華) 사상의 강화와 장자상속의 정착
(1) 양란 이후 정치적 변화: 소중화와 예학
17세기 중반, 명(明)·청(淸)의 교체와 양란은 조선의 사대부에겐 현실 문명과 유교 가치 실현의 안정성을 무너뜨리는
일이었다. 당시 조선은 유일한 유교 문명국을 자부하고, 자부심에 걸맞는 ‘유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매진하였다.
더군다나 존명배청의 아이디어는 동아시아 세계 속에서 조선의 존재의의와 자율성을 보장하는 정신적 보루로서 기능하는
한편, 현실에서는 청을 중심으로 한 세계 기준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18세기 후반에 이르면 기존의 강력한
성리학적 이념이 북학파와 실학 등의 여러 갈래로 분화하는 모습을 보이지만, 지배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는 못했다.
특히 17세기 후반, 조선 지식인들의 북벌을 통한 중화 회복 의지와 중화 문화 계승 의식은 ‘유일한 정통
유교국가’로서의 명분과 의례를 강조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17세기는 예학의 시대라고 불린다. 이 시기, 전례 없이 예학이 풍미하면서, <주자가례>를 기본으로 한 연구와 의례
지침서가 급증하였다.71) 16세기 후반부터 심화된 부계친 의식에 따라 의례를 바르게 집행하는 데 필요한 지식은
교육받은 엘리트의 핵심 관심사였기 때문이다. 본래 <예기>에서 “예는 평민에게 내려가지 않는다”는 격언에 따라 낮은
사회계층에서는 유교식 의례를 수행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여겨졌으나, 조선 후기로 접어들면서 상황은 변화하였다.
일정한 형식의 의례가 대중의 의례로 여과되어 내려갔고, 결국 평민도 조상을 기념하는 제사를 지내게 되었다.
(2) 양란 이후 사회문화적 변화: 장자상속제
양란 이후 사회·문화적으로 남성 중심의 가부장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이미 16세기 초 국가가 계승문제에 대해 최종
발언권을 가지고 계승법을 다시 만들려고 노력하였고, 그 이후 ‘종법에 대한 의식’과 종족의 윤곽은 더욱 강화된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였다. 결과적으로 장자의 지위도 함께 높아졌다. 이러한 발전은 서자와 여성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조선 초기에 서자의 지위를 보호하기 위해 입법자들은 여러 예서를 저술하며 노력하였지만 서자를 봉사에서 강제로
배재하려는 경향은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두드러졌다. 16세기 중반 이후 입후 자격은 점차 봉사 자체에 대한 자격으로
해석되었으며 출계집단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로 확대되면서 후사 없는 남성의 계통 자체에 그치지 않았다. 그 결과 서자
계승을 지지하던 이들은 서자가 있어도 아들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개탄했다.(CTK, 210) 유명한 예학자 이언적
마저도 적자를 대신할 후사로 서자 대신 사촌의 아들을 선택하였다. 적장자가 동생의 아들조차도 후사로 삼을 수 없는
경우에는 같은 세대에 속하는 사촌의 아들을 계후자로 삼았던 것이다. 실제로 16세기 중반 이후 서자는 계승 가능성이
있는 후보로 언급되지 않았고, 1746년에 편찬된 <속대전>에서는 서자에 대한 언급을 일절 하지 않았다.(CTK, 211)
서자 계승이 이토록 칼같이 금기화된 이유는 조상에 대한 본가의 특권이 지가로 옮겨가는 것을 뜻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서게 봉사 우선권을 주는 것은 귀천을 무시하거나 폐기하여 “사회이동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봉사자의 계승뿐만 아니라 조선 후기에는 상속제 또한 장자를 중심으로 세습되는 문화가 정착했다. 그 배경에는
임진왜란 이후 증가한 인구에 비해 토지 개간과 농업기술에 의한 농작물은 수요를 감당하기 힘들었고, 노비들은 도망치는
어려운 경제상황이 있었다. 이에 사대부는 현존하는 제례의식을 지속시키고자 토지 분산을 과감하게 줄이는 전략을
채택한다. 이전에는 제사를 맡은 상속자에게 법으로 보장된 봉사조가 거의 주어지지 않았던 것과 달리, 부계 자손들이
조상들에게 적절한 제례 행위를 하도록 지원하는 수단으로서 혹은 그 대가로서만 부가 세습되었다. 마침내 봉사를 위한
토지와 노비가 법률이 규정한 상속 재산의 5분의 1을 능가하기 시작했고, 종가와 사당을 포함한 조상의 자산은 더 이상
여러 아들에게 분산되지 않고 봉사자에게만 배타적으로 상속되었다. 이는 봉사자 개인이 아닌 출계집단 공동의
소유였으므로 봉사자는 단순히 자산을 관리할 뿐만 아니라 법적으로 파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3) 여성에게 일어난 변화
조선후기에는 제사와 상속이 모두 대를 잇는다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지면서, 여성의 입지가 크게 손상되었다. 무엇보다
처가살이가 시집살이로 바뀌고, 여성이 남편의 집안에 통합되면서 이전에 받은 상속이나 지참금 형태의 재산은 그녀가
출생한 가족과 영원히 분리되었다. 그리고 윤회제사가 사라지고 여성은 더 이상 남자형제와 함께 조상의 사당에서
71) 윤사순, 「성리학시대의 예사상」, 『한국사상대계』 IV, 성균관대학교 출반부, 1984. (pp.5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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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가며 제사를 지내지 못했으므로 합법적으로 재산을 받을 권리도 사라졌다. 이렇듯 여성은 의례 행위에서 중요성을
상실함에 따라 경제적 독립성도 잃었다. 결국 재산과 상속의 기제는 남성의 지배 영역으로 굳건히 자리 잡게
되었다.(CTK, 307) 이러한 경향은 1615년에 쓰인 권래의 유언장에서 솔직하고 분명히 드러난다.
나는 선대에서 세습 재산을 받았다. 토지와 노비들은 집안 식구들보다는 많지만 전처나
후처가 나은 딸도 매우 많다. 그러므로 이들 각각에게 똑같이 재산을 나누어주기에는 부
족하다. 만약 이들에게 재산을 똑같이 나누어준다면 직계 손자들이 궁핍을 면할 수 없어
조상 봉사를 계속할 수 있을지 매우 걱정스럽다. 아들과 딸이 부모에게서 똑같이 신체 외
양을 받았으니 사람으로서 감정은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내외의 원칙을 통해서 볼
때 그들은 차이가 크다. 그러므로 종손은 아무리 극빈해도 조상의 묘에 향을 사르는 일을
차마 중단해서는 안 된다. 이와 반대로 성이 다른 손자들은 학식이 있더라도 외가의 조상
들에 대하여 성의를 표하는 이는 거의 없을 것이다. … 재산을 분배할 때에 이르러 이 모
든 것을 생각하니 아들과 딸 사이에 차이를 둘 수밖에 없다.
(이수건 편, <경북지방고문서집성> pp.795)
유교적 관점에서 보면 하늘은 땅 위에 군림하듯, 남성은 여성보다 우위에 있었다. 조선 후기에는 그나마 유지하던
여성의 경제적 독립성과 자율성 빼앗으면서, 여성은 평생 ‘질투에 사로잡힌 존재’로만 간주되었다.(CTK, 303) 유교
이데올로기는 가정의 평화를 유지하는 궁극적인 책임을 천성적으로 아내보다 도덕적 우위에 있는 남편에게 돌렸다. 예를
들어 남편이 아내의 질투, 중병, 수다를 이유로 이혼하기를 요구한다면 이는 대부분 기각되었는데, 그런 것들은 여성의
천성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동시에 유교 이데올로기는 여성에게는 남편과 출계집단에 대한 헌신을 가장 큰 미덕으로
강조하였다. 따라서 조선 초기에만 해도 과부 중 놀라운 숫자가 두 번, 세 번 혼인하였던 보고가 남아있는 것과 달리,
‘정절을 지킨’ 과부에 대한 사회적 칭송과 압박은 재혼을 거의 불가능하도록 만들었다.
시집살이 또한 유교사회의 여성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남편의 집에 들어서자 마자 신부는 남편의 지위에 따라
권위와 명성이 정해지는 세계에서 자신의 자리를 찾고자 노력해야만 했다. 시어머니는 어린 신부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인데, 시댁에서 신부는 가장 낮은 위치에 있는 반면 시어머니는 여성의 사회적 특권과 권위 면에서 최고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세대 차이에서 비롯되는 갈등 속에서 서로 공유하는 한 남성의 관심과 신임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한편, 긴장과 갈등을 피해야 하는 이중적 상황에 놓이게 된다. 또한 아들의 혼인생활에서 부모의
간섭은 아주 일상적이었기 때문에 남편과 사이가 좋더라도 시부모가 며느리에게 불만이 많은 상황에서는 아들이 부인을
내쫓는 것이 효도행위였다.
이처럼 조선시대 유교를 기초로 한 사회 교리의 실천은 가정의 영역을 핵심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 중심에서 여성은
사회변화를 주도하지는 못했지만, 유교 사회로의 변혁은 남성보다 여성의 삶에 더 큰 영향을 끼쳤다고 생각된다.
4. 현대사회에서 유교의 잔재와 가치
일본강점기 시기, 우리나라 성리학은 학문적 전통이 끊겼고, 생활세계에 남아있던 유교적 이념 역시 근대화를 거치며
많이 약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쟁, 급격한 산업화와 민주화의 경험과 국제적 정치상황의 변화는 한국의 사회변동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에는 정치, 경제, 사회·문화 모든 면에서 자유주의와 자본주의만큼 지배적인 영향력을 가진
이데올로기는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교적 가치와
잔재가 공존하며 우리 사회를 구성하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대표적으로 가족주의적 가치로서의 효 사상과 고착화된 성역할을 중심으로
현대까지 남아있는 유교적 이념의 영향력을 살펴보고자 한다.
(1) 효 사상과 가족주의
유교의 핵심 사상이자 조선시대 국가차원에서 강조되었던 근본적인 가치인
‘효’(孝)는 여전히 우리사회에서 중요한 미덕으로 간주되고 있다. 더 이상
남아선호가 추앙받지 않으면서, 아들을 낳아 대를 잇거나 제사를 지내는 것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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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를 실천하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남아있지는 않다.(물론 많은 가족에게서 여전히 대를 잇고 제사를 지내는 풍속은
중요시 여겨지지만 그것이 효의 핵심은 안다.) 그러나 입신양명과 유사하게 출세를 하여 부모님의 은혜에 보답하는 것과
같이 매우 유교적인 효의 실천 관습은 아직까지도 유효하고, 또 한편으로는 물질적인 보답과 꾸준한 문안 역시 효의
실천방안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동시에 이 같은 가치를 업신여기거나 노인에 대해 폐륜적 행위 혹은 범죄를
일으킨 사람에게는 다른 사안에 비해 강력한 사회적, 도덕적 비난이 이루어진다.
이와 관련하여 최재석(1975)은 한국인의 가족생활에 대한 유교적 특징을 1) 가족내부의 엄격한 신분서열 존재, 2)
친자 중심의 가족구성, 3) 지배와 복종의 종속적 관계로 유지되는 친자관계, 4) 상하 수직적 관계로만 유지되는 가정의
화목, 5) 초시간적 집단인 집과 가족을 위한 개인의 독립, 자유 배척이라고 지적하였다.72) 이렇듯 수직적인 효의 가치와
가족중심주의는 현대사회에서도 사람들의 가치관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이는 전반적으로 전통적 효 사상에
기대어 개별적인 노후준비가 부실한 사례에서도 반영된다.
최근에는 노부모 부양의무에 대한 사회조사를 보면 그 의무가 가족(자녀)에게 있다는 의견은 2002년 64.8%에서
2014년 31.2%로 절반 이상 감소했고, 부모 스스로 해결해야한다는 입장은 16.4%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하지만
전통적 가치관을 몸에 익히고 살아오신 55세 이상 중·고령자의 경우 개별적이고 체계적인 노후준비는 자녀의 교육비와
결혼자금 등에 뒤로 밀려나고 말았다.73)
(2) 고착화된 성역할
우리나라는 급격한 경제성장 이후 국제개발지원금을 받던 개발도상국에서
세계
GDP
순위
11위인
현재의
모습으로
성장하였지만,
오직
성평등지수에서만큼은 100위권 밖을 돌며 OECD 꼴찌의 오명을 씻지
못하고 있다. 이미 산업화와 민주화가 높은 수준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유사한 경제상황을 가진 국가들의 평균에 비해 지나치게 낮은
여성의 지위는 조선 후기 여성의 사회적 활동에 대한 제재를 강화시켰던
유교 이데올로기의 잔재라고 볼 수 있다. 2013년을 기준으로 조사된 다음
자료는 한국여성이 남성과 같은 수준의 사회적, 경제적 활동을 하는 것이
아직까지도 매우 제한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통계치이다.74)
이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는
경제생활을
하는
여성
중에서도
고위직까지 남아 있는 비율이 매우 낮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2013)의
72) 최재석, 『한국가족연구』, 민중사, 1975.
73) 이진 기자, “노후대비 이것만은: 아직도 자녀교육 다걸기?”, <동아일보>, 2010.06.22.
http://news.donga.com/3/all/20100622/29279899/1
74) [인포그래픽] Visual Dive 제작,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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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에 따르면 현재 1745개의 기업에서 관리직 여성은 오직 7.9%였으며 여성 경영진의 비율은 1.9%에 그쳤고, 19대
국회의원의 여성 비율은 15.7%, 4급 이상의 고위 공무원 여성은 9.3%에 그쳤다. 이는 20대에 72%까지 올라가는
여성의 고용률이 30대에 접어들며 50%대로 떨어지는 경력단절 상황과 긴밀한 연관을 갖는다. 그만큼 결혼과 출산 이후
집에서 살림만 하는 여성이 늘어난다는 뜻이고, 적절한 육아휴직 제도가 정착되지 못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5. 나가며
지금까지 유교 이데올로기가 한국사회에 미친 영향에 대해 나름대로 몇 가지 대표적인 사회변화를 통해 알아보았다.
주제를 선정할 때부터 나는 사회변동에 있어서 인간의 지성과 이념이 미치는 영향력이 작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이
주제를 선택한 것이었다. 그리고 책과 논문을 읽고 공부할수록 실로 ‘유교’라는 이념과 합치되는 사회가 만들어지기까지
정말 많은 것들이 변하였고 또 변하도록 강요받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동시에, 이 작업을 통해
미래에는 어떤 것이 우리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 것인지 알아야 한다던 교수님의 말씀을 생각하면 그게 과연 무엇이라고
확답을 내놓지 못할 것 같다는 생각에 조바심도 난다. 성경과 기독교가 그러했듯, 유교는 현대사회에도 유의미한
사회변동의 촉매제가 될 수 있을까?
아마 유교로 인해 세상이 뒤집힐만한 변동, 예컨대 고려사회에서 조선사회로의 변화만큼의 혁명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작업과 고민을 통해 내가 얻은 것은 한 사회에 지배적인 이데올로기는 그 시대, 그 사회에 나름의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배경을 바탕으로 발전한다는 점과, 본래 목적으로 했던 가치의 숭상과 합리성이 지나치게 비대해질
경우, 그로 인한 사회의 부정적 변화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다. 대게 이미 지배적 위치에 있는 이데올로기 하에서
나타나는 부정적 변화들은 자꾸만 중요하지 않은 것으로 간주되며, 체계적으로 은폐된다. 그것이 가능한 이유는 물론,
그러한 부정적 영향을 받는 사람들이 대체로 권력이 없고, (그 사회에서는 합리적인 이유로) 차별받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나로서는 우리사회의 지배적인 이데올로기인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그 이상의 나은 사회(동시에 현실적인 사회)가
도래할지도 모른다고 상상할 수 없다. -어쩌면 그것은 내가 이미 이 사회에서 지배적인 위치에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만약 그런 사회가 온다면,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하에 합리적으로 차별받는 사람들은 누구일까? 우리가
지금 유교의 본래 사상인 인의예지와 효충 등의 미덕으로부터 배우지 못하고 유교가 남긴 부정적 잔재들만 보며
비판하는 것처럼, 미래의 사람들도 현 사회를 우리가 추구하는 자유, 민주주의, 합리성과 같은 긍정적 가치가 아닌, 그
추하고 부정적 측면으로 판단하게 될까?
글을 질문으로 마무리하는 것은 아직 사고의 연쇄가 끝나지 않은 것 같아 껄끄럽지만, 아직 내 수준은 이에 답하기
위한 토대가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미래 사회에 대한 통찰력이 하루아침에 얻어지는 것이 아닐테니, 노력이나 더
해보아야겠다.
철학과 2012101713 조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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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의 변화로 본 사회변동
1.책제목:《가족복지론》
출판사:나남출판
출판년도:2005년 8월 25일 발행
저자:김연옥.유채영.이인정.최해경
2. 선택원인
가족은 사회의 최소단위로서 사회의 변화를 직,간접적으로 반영할수 있습니다. 가족은 인간이 만든 제도 중 가장
오래됨 것으로 사회 변천에 따라 변화과정을 겪으면서도 꾸준히 지속된,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며 가장 오래된
제도입니다. 인류역사 초기부터 대부분의 개인은 가족이라는 집단에 소속되어 있으며 , 그 개인에게 가족의 중요성과
영향력은 이루 말할 수 없이 큽니다. 그리고 가족은 언제나 사회복지 전문직 활동에서 중요한 고려대상이었습니다. 최근
몇 년 사이에 가족은 개인적인 화제에서 벗어나 가족해체, 아동양육, 노인부양, 그리고 가족폭력 등 다양한 가족문제로
인한 사회 이슈로 되었습니다.《가족복지론》에서는 가족에 대해
섬세한 정리를 하고 부동한 사회가족에 대해 설명을
하였습니다. 가족과 현대 가족의 특성에 대해 더 깊이 이해하고 싶어서 《가족복지론》라는 책을 선택하게 되었습니다.
3.저자소개
김연옥
이화여자대학교 사회사업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미국 일리노이대학 사회복지학 박사
현재 서울시립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유채영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
동 대학원 사회복지학 석.박사
현재 충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이인정
서울대학교 사회복지학과 졸업
동 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미국 미시간대학 사회복지학 박사
현재 덕성여자대학교 사회복지학전공 교수
최해경
이화여자대학교 사회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사회복지학 석사
미국 미네소타주립대학 사회복지학 박사
현재 충남대학교 사회복지학과 교수
4.책 내용 요약
사회의 중추제도라고 할 수 있는 가족은 그 사회의 경제, 문화, 정치, 종교, 교육제도 등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으며,
사회변화에 개인과 가족이 적응하고, 또한 이들이 사회변화에 영향을 미치면서 다양한 형태로 변화되었습니다. 이
책에서는 현대 가족에 초점을 맞추어 이에 가장 밀접하게 영향을 미친 산업화 과정과 최근의 정보화 사회의 도래를
중심으로 가족변화를 살펴보았습니다.
가족의 전통적 정의에 따르면 가족이란 혼인, 혈연, 혹은 입양을 기반으로 형성되어 강한 정서적, 정신적 유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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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지며, 의식주를 공동으로 해결하는 공동체적 생활방식과 공통의 문화를 갖는 집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산업사회의 전형적 핵가족에 관해서는 적절하다고 볼 수 있으나 현대사회의 다양한 가족을 보편적으로 정의하는 데는
한계가 있습니다. 예컨대 동성애가족이나 부부중심의 생활에 역점을 두어 자녀를 갖지 않는 무자녀가족, 혹은 핵가족의
당연한 귀결로 나타나는 노인가족 등은 가족의 범주에 속하지 않는 것입니다.
무자녀가족, 한부모가족, 노인가족, 공동체가족, 비동거가족, 동성애가족 등 다양한 가족형태가 출현하는 오늘날에는
가족의 기능도 사회변화와 더불어 변화되었습니다. 산업사회에서 변화된 생산구조는 가족구조와 가족구성원들의 역할에
커다란 변화를 야기했으며, 그 결과 전통적 가족기능은 축소되거나 사회의 다른 부분으로 분산되었다는 이론이 기능주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습니다. 파슨스, 구드와 같은 구조기능주의 학자들은 가족을 사회의 유기적 통합과 유지를
위해 개인과 사회를 중재하는 단위로 파악하였습니다. 가족이 수행하는 기본적 기능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1)자녀의 출산
인간종족 유지를 위한 가족의 재생산 기능은 어느 시대와 사회를 막론하고 모든 가족의 핵심적 기능입니다. 사회는
사망하는 노인세대를 대치할 새로
태어나는 아동이 없으면 유지될 수 없습니다. 가족은 자녀출산의 기능을 통해
사회성원을 지속적으로 충원하고, 이를 통해 사회의 영속화에 기여합니다. 자녀출산율이 감소되는 것은 가족의 재생산
기능이 약화되는 것으로, 결과적으로 노년층 비율의 증가로 노인부양의 부담이 상승하는 사회적 부담이 발생되는 등
사회문제를 야기하게 됩니다.
2)양육과 보호
인간은 태어나서 스스로를 보호하고 독자적으로 생존할 수 있기까지 오랜 기간 가족의 도움에 의존하는존재이다.
가족은 태어나는 유아들의 생존에 절대적인 환경으로서 신체적,정서적으로 성장할수 있도록 음식, 애정, 보호 등을
지원합니다. 또한 가족 내의 노약자를 보호하는 기능을 수행하였습니다. 가족은 육체적,경제적,심리적으로 자신을 돌볼 수
없게 된 노인들을 부양하고 보호하였으며, 가족 내에 발생하는 병자를 돌보는 수발자의 기능을 수행하였습니다.
3)정서적 지원
가족이 정서적 만족과 친밀감 욕구의 충족공간으로 기능하는 것을 가족의 ‘정서적 안정화의 기능’, 혹은
‘긴장처리의
기능’이라고 합니다. 가족 밖의 사회는 이익추구를 목적으로 경쟁과 능률을 중시하며, 이 속에서 개인은 긴장과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있습니다. 반면에 가족은 이익관계를 초월한 애정과 친밀함에 기초하여 가족구성원들에게 사랑과
이헤, 정서적 수용과 지원을 제공하는 안식처입니다. 개인들은 사회에서 발생한 모든 긴장과 스트레스를 가족 속에서
해소하고 처리하며 정신적 안정을 얻게 됩니다. 가족의 정서적 지지 및 안식처의 기능은 다른 사회집단이나 이익사회에서
절대 찾아볼 수 없는, 가족 고유의 기능이라고 강조하였습니다. 사회변화와 더불어 전통적 가족기능의 많은 부분이 축소,
상실된 반면에 가정의 정서적 기능은 현대사회에 와서 더욱 강조되고 있습니다.
4)자녀의 사회화
인간이 사회성원으로 활동하기 위해서 사회화 과정은 필수적입니다. 사회화란 개인이 속한 사회의 문화, 가치, 규범,
언어 등을 초기 성장기에 학습하여 타인과 공유하며, 개인의 성격, 가치관, 사고방식, 행동양식, 습관 등을 형성해 나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회화를 통해 개인은 사회에서 적절하게 기능하며 적을할 수 있는 자질을 배양하게 됩니다. 사회화는
가족의 중요한 기능 중의 하나로서 가족구성원이 그 사회에 기능적으로 적응하며 살아가도록 교육 시킵니다. 산업화 이후
가족의 사회화 기능의 상당 부분이 사회의 다른 제도, 즉 학교나 교회 등으로 이전 되었지만 , 그래도 가족은 가장
기초적이고 중요한 사회화의 장으로 인식되고 있습니다.
5)성적 욕구 충족
대부분의 문명화 된 사회에서는 남녀의 무분별한 결합을 허용하지 않으며, 성행위 대상을 온전히 개인의 선택영역으로
두지 않습니다. 사회는 가족제도를 통해 결혼대상이나 결혼가능 상황을 특정화함으로써 성행위를 제한합니다. 즉, 개인은
가족제도를 통해서만 성적 욕구를 합법적으로 충족시킬수 있습니다. 가족을 중심으로 한 남녀의 성적 결속은 자녀출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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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육 및 사회화에 필요한 가정의 안정과 유지, 더 나아가 사회의 안정과 영속성을 보장하는 주요 기능입니다.
6)사회적 지위와 역할 부여
사회는 가족의 성원으로 합법적으로 태어나는 개인에게 사회적 지위를 부여합니다. 가족의 성은 물론 인종, 민족, 종교
및 사회계급 등이 가족을 통해 개인에게 전해집니다. 또한 결혼을 통해 가족이 성립되면 사회는 성인으로서 개인의 역할,
예를 들면 부부간의 성적 역할, 부모로서의 지위와 역할 등과 같은 사회적 역할들을 부여합니다.
7)경제적 기능
산업화 이전의 전통적 사회에서는 생산과 소비가 가족단위로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가족은 자급자족적 경제활동의
기본단위로서 가족의 기능 중 경제적 기능이 차지하는 비중이 대단히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의
경제구조에서는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고, 생산활동이 주로 가족 밖에서 이루어지게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고, 생산활동이
주로 가족 밖에서 이루어지게 됨에 따라 가족의 생산적기능은 노동력 제공의 의미로 축소되고, 소비기능의 비중이 점차
확대되었습니다. 생산능력이 있는 가족구성원의 수입을 경제력이 없는 다른 가족구성원이 함께 소비하면서 가족간의
경제적 협동이 현대 가족의 주요 경제기능이 되었습니다.
작가는 20세기 중반에서 부터 21세기 초반의 한국 가족의 평균수명, 출산율과 사망률 등을 연구하여 한국의 가족이
어떻게 변화고 있는지를 생생하게 설명하셨습니다.
지난 40여 년간 의학기술 발달과 함께 한국 경제성장이 가져온 생활수준의 향상은 유아사망률의 감소와 평균수명을
지속적으로 연장시켰습니다. 인구수의 평균수명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여 1971년 남자 59세, 여자 66세었던 평균수명이
2001년에는 각기 73세와 80세로 크게 늘어났습니다. 반면에 유아사망률과 출산율은 지속적 감소추세를 보이고
있습니다.
인구변동과 관련한 가장 커다란 변화는 출상율의 지속적 감소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인구학적 변동은 연령별
인구구조를 크게 변화 시켰습니다. 출산율이 감소하고 평균수명이 연장됨에 따라 전체 인구에서 아동인구가 차지하는
비율이 점차 줄어드는 반면에 노인인구의 비율은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습니다.
출산율의 감소, 이로 인한 가족구성원 수의 감소 등의 인구학적 변동은 그대로 가족생활주기의 변화를 나타났습니다.
자녀수의 감소로 인한 자녀양육기간과 출산기간의 축소는 여성들의 삶에 조용하지만 대단히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산율의 감소로 전체 결혼기간 중 자녀양육이 차지하는 비중이 41.82%로 감소되었습니다. 자녀의 출산과 양육에
소요되는 시간과 노력의 감소는 여성들의 생활변화를 불가피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여성의 사회참여 확대로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출산율과 유아사망률의 감소와 평균수명의 연장은 필연적으로 노인인구 수와 비율 상승을 가져왔습니다. 노인인구의
증가는 노인부양에 대한 사회적 부담을 증가시킬 뿐만 아니라, 서구사회와 달리 여전히 성인자녀가 부모를 부양에서
중심적 역할을 담당하는 한국의 경우, 노인인구의 증가는 가족차원에서 부양부담 또한 커지게 됨을 의미합니다. 가족들은
노인 가족구성원에 대한 경제적 지원뿐만 아니라, 신체적으로 퇴화과정에 있는 노인에 대한 신체적,심리적 수발까지
감당해야 하는데, 여성의 사회진출의 확대는 가족내에 노인 부양자의 부재를 의미하면서 노인부양의 문제가 사회적
문제로 부각되었습니다.
산업화
과정을
통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진전은
가족에
커다란
변화를
초래하였습니다.전통사회의
다수
가족구성원을 기반으로 한 자급자족의 경제활동이 산업사회에 이르러 생산과 소비가 분리되고,생산이 사회의 전문화된
경제기관으로 이양되는 변동과정에 가족이 일정한 양식으로 반응하는 과정에서 근대가족 또는 핵가족이 가장 보편적인
가족유형으로 자리 잡게 되었습니다.
오늘날에는 가족의 기능과 가족 관계, 가족구조의 변화.산업화 이전의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가족과 친족이 경제, 종교,
정치, 교육, 복지, 오락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산업화의 과정에서 사회의 다른 여러 제도들이 이들 기능들의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가족의 중요한 경제기능인 생산기능은 사회의 산업구조로 이관되었고,
교육기관과 사회복지프로그램들이 가족의 전통적 기능들을 대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녀의 출산과 양육, 사회화,
그리고 가족구성원의 정서적 욕구충족 기능만이 가족의 기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242
5.이 책에서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사회복지 발달과정은 산업화과정을 겪으면서 국가 혹은 사회가 전통사회에서의 가족기능을 대체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산업화는 가족구조를 변화시켰다기보다는 가족기능이나 가족가치관, 가족발달단계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특히, 산업사회 이전에는 가족에 수행되던 기능의 대부분이 사회의 다른 부분으로 이전되고, 가족기능은
자녀의 사회화나 가족에 대한 정서적 지원과 같은 일부 기능에 국한되었습니다. 시회변동은 가족의 기능과 가족 관계에
영향을 미쳤고 평등한 가족관계, 가족유대와 결속력의 약화, 가족구성원의 개인주의화 등 급격한 변화를 볼수 있습니다.
산업화 이전의 전통 농경사회에서는 가족과 친족이 경제, 종교, 정치, 교육, 복지, 오락 등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산업화의 과정에서 사회의 다른 여러 제도들이 이들 기능을 수행하였으나 산업화의 과정에서 사회의 다른 여러 제도들이
이들 기능들의 대부분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말할 것도 없이 가족의 중요한 경제기능인 생산기능은 사회의 산업구조로
이관되었고, 교육기관과 사회복지프로그램들이 가족의 전통적 기능들을 대행하게 되었습니다. 그 결과 자녀의 출산과
양육, 사회화, 그리고 가족구성원의 정서적 욕구충족 기능만이 가족의 기능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산업화에 따른 사회변화의 결과 가족관계에도 많은 변화가 초래되었는데, 남녀의 역할분리, 가부장으로서의 부의
위상과 권위의 변화, 아동개념의 변화 등으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노동과 가정생활이 분리된 영역이 아니라 끊임없이
겹쳐지던 전통사회에서는 노동과 정서적 역학, 자녀양육 등 광범위한 영역에서 남녀간의 공유가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점차 공적 생산영역은 남성의 공간으로, 사적 재생산영역은 여성의 공간으로 분리되었습니다.
산업화가 진행되어 후기산업화 단계를 거치고 오늘날의 정보화 사회로 발전하면서 가족은 산업화 직후와는 또 다른
모습으로 급격한 변화를 보이는데, 변화의 핵심은 평등한 가족관계, 가족유대와 걸속력의 약화, 가족구성원의
개인주의화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여성 경제활동의 급격한 증가로 인해 여성의 경제력 확보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경제적 의존을 기초로 짜여진 산업사회의 가족생활에 변화를 불러올 수밖에 없습니다.
6.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가족은 거주를 같이하고, 경제적인 협동 및 자녀의 생산으로 특징지어지는 하나의 사회 집단이다.”라는 정의에서 알수
있다 싶이
혈연을 가족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으로 볼수 있습니다. 거주를 같이 하는 집단이라는 점에서 혼인한 남녀가
함께 살면서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것이 일반적인 가족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이와 같은 거주 규정도 예외적인 사례가
많습니다. 가족원들이 일시적 또는 비교적 오랫동안 헤어져서 사는 경우도 많고, 또 주기적으로 헤어지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민노동자, 계절이동을 하는 유목민들이 그 예입니다.
다음 가족이 경제적 협동체라는 점에서 가족원들이 생산에 함께 참여하고 소비도 같이 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농업사회에서 가족원들이 모두 농사일을 하면서 경제적 협동체로서 그 기능을 잘 수행하였습니다. 남성은 생산활동에
참여하고 여성은 집을 지키고 아이를 보살펴 새로운 노동력을 창출 함으로써 혈연을 유대로 자기의 부의 축적을 다음
세대로 전승 함으로써 가족을 강대해지게 만듭니다. 그러나 현대 산업사회의 경우는 가족 구성원 전원이 동일한
생산활동에 다 같이 참여하기는 매우 어렵습니다. 가족은 자녀를 낳고 양육하는 집단입니다. 두 남녀가 혼인하여 자녀를
낳을 수 있는 합법성을 부여받고 또 기르는 의무와 책임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규정이 적용되지 않는 사회도
있습니다.
인류는 같은 성씨와 혈통을 가진 사람들이 생산집단형태로 거주하여 가족은 역사적 집단이며, 사회변동에 따라
대가족에서 소가족으로 분해하였고 가족원의 분업이 세밀하고 전문적으로 발전되며 생산을 하던 남성가족주의로 부터
개인주의적 가치관으로 변했다고 봅니다. 현재 부부단위의 가족으로부터 더 나아가 시설이나 개인으로의 분해를 강조하는
사람도 가족의 구조나 기능의 변화를 자연적 · 사회적 여러 조건의 변화에 적응하려고 하는 인간의 문화적 소산으로
인정하는 동시에, 특정 남녀의 지속적 결합과 그 자녀의 양육감호를 중심으로 하는 가족의 기본형태는 인류의 모든
역사를 통하여 보편적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합니다.
7.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1)부부관계 평등
정보화 사회의 촉진하에 여성의 지식수준이 부단히 높아짐에 따라 여성 경제활동의 증가로 여성의 지위가 부단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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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승합니다. 여성의 경제력 확보는 남성에 대한 여성의 경제적 의존을 기초로 짜여진 산업사회의 가족생활에 변화를
불러올 수 밖에 없습니다. 앞으로 대등해진 남녀간의 경제력은 부부관계의 평등성을 추구하게 되고, 여성의 경제활동
참여로 어쩔 수 없이 가사노동을 재조정하면서 남성의 가사노동 참여도가 늘어나게 되며, 더 나아가 남녀간 역할분담의
재편성이 발생하여 가사만을 전담하는 남편을 가리키는 주부라는 개념이 등장했습니다.
앞으로 부부간의 평등한 관계는 친족관계에도 영향을 미쳐 부계제의 친족관계중심에서 부모양계제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가족제도 또한 변화하여 가족법, 기초생활보장법, 의료보험법, 남녀고용평등법 등의 제정과 개정을 통해 가족의
기능과 역할, 그리고 이데올로기상의 변화를 반영하거나 초래하였습니다. 부계혈통 가족관계의 핵심 요소였던 호주제가
폐지되고 남자인 호주를 정점으로 구성되고 서열화 되는 기존의 가족관계가 완화되면서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관계로
변화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 되었고, 가족이라는 집단보다는 가족구성원 개개인에 대한 존엄성이 더 중요한 가치로
등장하게 된 것입니다.
2)부모권위 감소
전통사회에서 생산단위인 가족을 이끌었던 가부장으로서 아버지의 강력한 권위는 산업사회로 이전하면서 다소
약화되지만 여전히 공적영역에서의 경제활동 전담자로, 그리고 가족의 생계책임자로서 가족의 존경과 권위를 유지하게
됩니다. 그러나 공적 영역중심의 활동으로 인한 가정에서의 오랜 부재는 점차 가족 일에서 아버지의 영향력 약화를
초래하게 될 겁니다. 또한 산업화가 진전되어 고도기술집약산업과 정보화산업으로 발전하면서 지식순환이 급속히
빨라졌고, 그에 따라 부모의 지식과 경험이 자녀에게 더 이상 쓸모 없는 것이 되면서 부모의 권위는 축소될 것이고 더욱
자유롭고 평등한 관계를 이룰것입니다.
3)개인주의 강화
앞으로 개인주의적 경향이 강하고 탈권위적 가치관을 지닌 자녀세대는 부모와의 관계에서 복종적이기보다는
자율적이며 독립적인 평등한 관계를 원하게 되어 홀로 사는 사람이 많아지고 남녀비례의 실조로 결혼하고 아이를
부양하는데 부담이 큰 딩크족 등 아이를 가지지 않는 부모님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경제적 부담에 의해 새로운 양육관이
나타나고 1인가구가 증가 되며 고독사, 저출산, 고령화 문제가 더 심해질 것이고 노인에 대한 사회적 부양부담이 커짐에
따라 정부가 상응한 대책을 내여 인구와 노동력문제에 대해 신경을 써야 합니다. 가족간의 끈끈한 유대와 강한 결속
이라는 전통적 가족 관계는 사라지고 가족관계가 느슨해 질것입니다.
4)다양한 가족형태 공존 어려움
한국사회의 ‘가족’ 정의가 갖는 근본적인 속성, 즉 이성애 중심주의와 가족주의의 가치에 문제 제기하면 보편적인
가족정의가 혼인, 혈연, 입양으로 이루어진 결합 만으로 상정하여 ‘혼인여부, 가족상황, 성적지향’을 이유로 헌법에서
보장하는 평등권을 침해하는 차별행위로 ‘이성애적질서’와는 다른 성적지향을 통해 구성되는 가정을 배제할 것입니다.
국제적 다문화 가족이 증가될수 있겠지만 단일 민족국가인 한국에서 다문화의 형성은 아직도 오랜 시간을 거쳐야
형성될수 있고 핵가족을 주류 문화로 인증하는 것은 기타 다양한 가족형태의 자연스러운 공존에 큰 어려움을 가져 줄
것입니다.
8.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1)가족은 사회의 최소구성단위로서 의학기술 발달과 함께 경제성장이 가져온 생활수준의 향상은 유아사망률의 감소와
평균수명을 지속적으로 연장시켜 이러한 인구학적 변동은 연령별 인구구조를 크게 변화시킬수 있습니다.사소하고 보잘것
없어 보이지만 가족은 인구구조 변화에 큰 영향을 일으킬수 있습니다.
2)확대가족 감소부분이 일인가족 증가로 이어진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물론 개인주의의 확산과 같은
가치관의 변화로 설명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가족유형의 변화는 산업화 과정에서 발생한 이농현상과도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확대가족의 감소와 일인가족의 증가는 도시지역보다 농촌지역에서 더 현저한 것으로
밝혀집니다.산업화가 발달됨에 따라 시장자원의 부동한 분배는 새로운 노동력으로 하여 경제발전이 빠르고 자아실현을
만족할 수 있는 곳으로 산업노동력 이동을 하여 가족의 구성형태에 큰 영향을 줄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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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종합결론
가족구조 및 가족구성원간의 관계는 경제 뿐만 아니라 가족관념의 변화함에 따라
변화되고 산업화는 가족기능이나
가족가치관, 가족발달단계 등에 많은 영향을 미치게 되었습니다. 산업화와 정보화는 초고속 경제 성장을 가져왔으나
사회에 치열한 경쟁도 가져다 주었습니다. 특히 경제세계화 발전에 따라 국제화된 노동력 시장은 사람들로 하여금 더
심각한 경쟁속에 처해 취업이 힘들어지고 실업률이 높고 고학력 직장인들은 거의 여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사람간의
대인관계에서 진심을 느끼지 못하고 개인주의가 강해 가족관계가 느슨해지고 가족은 공통체의 특징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가족은 사회의 축도로서 가족의 발전과 변화는 시대의 변천과 사회발달을 의미합니다. 현대 산업 사회에서 가족의
기능이 크게 약화되고 가족에서 담당했던 기능들이 전문화된 다른 집단이나 단체로 분화되기 마련입니다.
10.이름: KONG DEJIA(공덕가)
소속학과:사회학과
학번:2015008459
안녕하십니까? 중국에서 온 공덕가라고 합니다. 연변대학 사회학과에서 2년 공부하고 경희대학교에서 1년의 공부를
하게 되었습니다.
11.재료 (영상)
가족의 의미 https://www.youtube.com/watch?v=skfMFBx6pIE
뉴스
https://www.youtube.com/watch?v=ckrmpyeDMq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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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이 연결되는 세상 사물인터넷
책제목 :모든 것이 연결되는 세상
사물인터넷
출판사 :매일경제신문사
출판년도 :2011
저자 : 김철홍
Ⅰ. 사물인터넷에 대한 배경지식과 사회적 맥락
많은 이들이 우리 주변의 모든 것들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초연결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 예측한다. 그 연결의
중심에는 사물인터넷이 있다. 사물인터넷을 중심으로 빅데이터와 클라우드 등이 국가, 기업의 성장의 열쇠로 떠오르고
있다. 미래창조과학부는 이에 대비하기 위하여 ‘초연결 디지털 혁명의 선도국가 실현’이라는 비전을 통해 사물인터넷
기본계획을 수립하였다.75) 현 정부는 이를 위해 SW․센서․부품․디바이스 등의 경쟁력 강화 및 창의적 서비스․제품 창출과
혁신을 주도할 중소․중견 전문기업을 육성하고자 한다. 그리고 기획 단계부터 보안을 내재화한 IoT 제품․서비스 개발로
안전하고 역동적인 발전 인프라를 조성하기 위한 전략을 내놓고, 이를 민·관 협력으로 추진하고자 하면서 사물인터넷에
대한 정책적 관심도 높아지고 있는 시점이다.
사물인터넷을 쉽게 정의하자면 네트워크를 통해 사물과 사물이 연결되고 이 연결을 통해 여러 기기들이 상호소통이
가능한 기술이다. 사람과 물건만이 아니라 각종 사물이 서로 통신하고 정보를 공유하게 하여 인간-사물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개념을
지칭한다.
이러한
상호소통을
위해서
필요한
기술은
블루투스나
RFID(Radio
Frequency
Identification)가 진화한 NFC(Near Field Communication) 등이 있다. 또한 사물인터넷 개념은 M2M(Machine to
Machine)과의 개념상 유사점들이 많아 서로 혼용되어 사용되기도 한다. 사물인터넷이 실현될 경우 네트워크에 연결된
인간과
사물은
엄청난
양의
정보를
주고받으며
IoT(Internet of Things)라고도 지칭한다.
대규모
이는 모든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게
것(things)이 인터넷에
된다.
따라서
사물인터넷을
연결되고 지식이 지배 하는
‘초연결사회’의 개막을 의미한다. 이러한 초연결사회의 구현이 가능한 이유는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네트워크를 통한
대규모 데이터 축적 및 데이터의 지식화 덕분이다.76)
Ⅱ. 본론
1. IoT 혁명의 시작
1) 2차 디지털 혁명의 시작, 사물인터넷
① 사물인터넷의 구조
그렇다면, 어떤 구조와 기술을 통해 사물인터넷의 구현이 가능해지는 것일까? 그에 대한 해답은 다음 세 가지에 있다.
센서, 빅데이터, 클라우드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로 ‘센서’는 우리 주변의 사물들에 부착되어 24시간 정보를 보낸다.
이 센서 네트워크를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수집하는 기능을 한다. 두 번째로 ‘빅데이터’는 센서가 보낸 정보가 모이는
곳이다. 이 빅데이터 자체는 단순한 정보로, 이를 분석하여 유의미한 인사이트를 추출하는 것을 ‘정보 분석’이라고 한다.
24시간 쏟아져 나오는 정보를 실시간으로 분석하여 이 정보에서 문제점이나 시사점을 추출해내는 과정이다. 이러한
인사이트를 어디서나 손쉽게 활용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세 번째, ‘클라우드’다. 사물인터넷 서비스에서 원하는 센서
자원과 서비스가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서 원하는 자원을 활용할 수 있는 것도 중요한 이슈다.77) 이를 위해 정보를
이용함을 용이하게 하는 클라우드의 기능은 더욱 중요하며 이는 적절한 식별 체계를 가지고 자원을 찾기 위한 기능을
갖춰야 한다. 사물인터넷에서 중요한 이슈중의 하나는 상호 호환성 문제인데, 따라서 클라우드 간 소통이 용이한 플랫폼
구축이 중요해지고 있다.
② IoT시대로의 패러다임의 전환
75) 미래창조과학부 및 관련부처, <초연결 디지털 혁명의 선도국가 실현을 위한 사물인터넷 기본계획>.
76) 김예진 외. 2013. 사물인터넷 산업 활성화를 위한 M2M과 IoT 범위획정 연구. <2013년도 한국인터넷정보학회 추계학술발표대회
논문집>. 제14권 2호.
77) 김호원. 2014. 사물인터넷 서비스에서의 보안 이슈, 정보과학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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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말한 기술적 기반을 통해 성장할 IoT시대는 인터넷이 가져온 디지털 혁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변화를 가져온다.
1차 디지털혁명은 첫 번째로 PC인터넷이 만들어냈고 두 번째로는 모바일 인터넷이 이뤘다. PC인터넷의 보급은 원하는
정보를 위해 오프라인에서 정보를 얻는 형태에서 인터넷을 통해 전 세계 모든 자료를 실시간으로 접할 수 있게
만들었다. 그리고 이메일, 메신저 등은 정보를 주고받는 형태를 바꿨고 수많은 포털, 전자상거래 업체들 (구글, 이베이,
아마존 등)은 쇼핑과 정보검색에 혁명을 가져왔다. 두 번째 혁명은 애플의 아이폰으로부터 시작된 스마트폰에 의한
혁명으로, 인터넷이 가져온 변화를 PC와 공간을 초월하여 사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IoT시대는 인터넷 발전단계에서
보면 세 번째 혁명으로 정보전자 기기를 벋어나 우리 모든 사물이 인터넷에 연결되는 시대이다. 이는 기존
인터넷·모바일 시대와는 개념이 다른 시대로 2차 디지털혁명이라할 수 있다. 모바일 시대에서 IoT시대는 패러다임의
전환이 일어났다. 기존의 연결주체가 인간 중심이었다면, 사물에까지 주체가 확대되었다. 기존에는 내가 필요할 때
무언가를 찾는 On-demand방식으로 필요한 정보를 끌어당기는 Pull방식이었다면 IoT시대에는 24시간 센서가 적절한
정보를 주는 Always-on방식으로 내가 필요한 정보를 적시에 넣어주는 Push방식으로 바뀌었다.
2) 티핑포인트에 놓인 사물인터넷
새로운 기술이 생활 속에 스며들어 삶, 기업, 사회를 바꾸기 위해서는 세 가지 조건이 충족돼야 한다. 첫 번째, 기술이
경제성을 가져야한다. 기술이 싸져야한다. 두 번째, 인프라가 잘 갖춰져야 한다. 세 번째, 혁신적인 무언가를 내놓는
이노베이터가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IoT는 위의 것을 잘 갖췄는가에 대해 짚어볼 필요가 있다. IoT구현의 핵심센서는
‘MEMS’라고 불리는 센서이다. 이 센서는 사물의 움직임, 가속도 파악하는 기능을 하는데, 최근 5년동안 MEMS의
가격은 80~90%하락했다. RFID(근거리 통신)센서 가격도 최근 18개월동안 40%가 하락했다. 네트워킹관련 장비인
Wi-Fi라우터, M2M통신모듈의 가격이 떨어졌다. 센서가격하락은 수요가 늘고 있다는 것으로, 주변 사물에 센서를
부착해 새로운 비즈니스를 할 만한 여건이 조성되고 있다. 그리고 컴퓨팅 능력도 갈수록 향상되고 있다. 2020년 쯤
프로세서 칩 내의 트랜지스터 수가 인간 세포 수를 넘을 것으로 본다. 인간 뇌에 버금가는 지능형로봇 등이 향후
가능해질 것이다. 또한 인프라스트럭처도 이미 준비되어있다. IoT시대가 되더라도 스마트폰이 당분간 허브 역할을 할
것이다. 2020년엔 스마트폰 보급률이 거의 100%될 것이라는 것인데, 누구나 센서를 통해 제공하는 정보를 받아볼 수
있게 된다. IoT의 주소체계인 IPv6이미 도입됐다. IoT 연결 최대치는 1~1.5조개인데, IPv6는 최대 16개에 달할 것으로
예상된다. 즉, 인터넷에 연결되는 모든 사물에 하나씩 부여할 주소체계가 이미 완비돼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IoT시대의 혁신가는 누가될까? 대다수 기업들이 IoT에 많은 준비를 하고 있다. 오라클, ARM, CES, MWC 등의 사례가
있지만 IoT시대에 가장 혁신적 기업은 구글이다. 구글은 무선 인터넷 온도조절기 회사를 32억달러에 사들였는데 이
기업을 통해 구글의 IoT서비스가 나올 것으로 본다. 하지만 IoT시대 혁신은 모든 사물이 연결되는 만큼
상당한 많은
기업들이 참여한 생태계를 통해 진행될 것이다.
기술 개발에는 네 단계가 있다. 기술을 개발하고 이를 기반으로 시장을 형성한다. 시장이 급성장하다가 기술이
성장하는 단계에서 버블은 꺼지고 시장이 성숙되며 승자가 해당 시장을 장악한다. 이 네 단계를 감안할 때 IoT는 시장과
기술이 만개할 직전인 티핑포인트(작은 변화가 하나만 일어나도 큰 변화를 일으키는 단계)에 있다. 티핑포인트에 있는
IoT시장을 선점하려는 글로벌기업으로 인해 더 빨리 사물인터넷 시대는 도래 할 것이다.
2. 사물인터넷을 활용한 글로벌 기업
IoT를 활용한 대표적인 다국적 기업으로 구글, 아마존, 삼성 등을 꼽을 수 있다.
1)구글
구글의 경우 모든 사물이 인터넷을 통해 연결되고, 온라인과 오프라인 세상의 경계를 허물어지는 초 연결사회를
준비하고 있다. 구글은 더 이상 이용자가 정보를 직접 검색해서 찾는 ‘Pull’의 방식이 아닌, 이용자의 욕구를 파악해 먼저
해당정보를 보내주는 ‘Push’의 방식으로 검색 방식을 바꾸려고 한다. 또한 구글은 2014년 초에 IoT기술을 활용해
온도조절기와 화재경보기를 만드는 회사인 네스트랩스(Nest Labs)를 인수하였다. 네스트랩스의 온도조절기는 움직임을
감지하는 센서와 무선인터넷을 내장하고 있어서 원격으로 실내온도를 설정하고, 때에 따라서는 스스로의 판단 하에
자동으로 온도를 설정할 수 있다. 구글은 이런 기술을 응용해 집의 허브가 되는 TV, 냉장고, 전등, 시계 등 집안의 모든
물건을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스마트 홈’을 구상하고 있다. 다음으로 구글에서 개발 중인 IoT기술은 ‘구글 카’이다. 구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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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스(Earth)와 맵스(Maps) 같은 지도 기술을 통해 전 세계 교통정보를 보유한 구글은 무인차 사막 횡단 대회 우승자인
세바스천 스런을 영입하여 본격적으로 무인차 개발에 나섰다. 2012년에는 구글카 1호를 처음으로 출시했으며 구글카는
2014년 누적거리 50만km를 무사고로 주행한 기록을 보유하게 되었다. 구글은 이렇게 무인차 기술에서 가장 앞서
있다고 평가 받고 있다.78) 마지막으로 안드로이드는 구글이 모바일 시대의 강자로 군림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2005년 구글은 안드로이드를 인수하여 오픈 OS정책을 실시하여 공짜로 사람들에게 제공하였다. 이는 앞서 개발한
애플의 폐쇄적인 iOS에 대한 대안으로 여겨져 스마트폰의 10대 가운데 7대가 안드로이드를 사용하게 되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다.
2)아마존
미국의 전자상거래를 기반으로 한 IT 기업인 아마존에서는 물품 배송과 물품 구매에 있어서 IoT기술을 도입하고 있다.
아마존은 2018년에 소형 무인 드론을 이용해 30분 내에 배달하는 서비스인 ‘프라임에어’를 실현시킬 것이라고
발표하였다. 프라임에어는 드론을 포함한 물류시스템의 모든 요소들이 IoT를 통해 연결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79)
이뿐만 아니라 아마존은 물품 구매에 있어서 고객이 살 것이라 예상 되는 물품들을 미리 근처의 물류창고에 배달하는
‘예상배송’ 기술의 특허권을 취득하였다. ‘예상배송’은 고객이 자신의 아이디로 로그인해 수행하는 모든 행위(주문, 반품,
관심 상품 보기, 주문에 앞서 고민하는 시간 등)를 저장하여 수집한 빅데이터를 분석하여 고객의 취향과 고객이 살
것이라
예상되는
것을
파악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아마존에서는
최근에
<워싱턴포스트>를
인수하였는데,
이는
미디어분석까지 동원해 고객을 분석할 것이라 전망되고 있다.
3)삼성전자
IoT기술을 도입한 다국적 기업 중 한국기업으로는 삼성전자를 말할 수 있다. 애플이 아이폰을 내놓을 당시만 해도
삼성은 휴대폰 개발에서 방향을 잃었었다. 휴대폰 업체 1위 업체인 노키아만 쫓아가다 아이폰이 출시되었고, 아이폰을
따라잡기 위해 출시한 스마트폰 ‘옴니아’시리즈 또한 실패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 속에서 삼성은 윈도우OS가 아닌
개방형 오픈 소스인 구글의 안드로이드 OS를 채택해 갤럭시S 시리즈를 출시하게 되고 7개월 만에 1000만대 판매
반열에 오르게 된다. 이후 갤럭시S시리즈를 끊임없이 개발하고, 갤럭시 노트를 시장에 내놓으면서 삼성전자는 애플을
제치고 스마트 폰 시장의 1위로 자리잡게 된다. 스마트 폰 개발뿐만 아니라 삼성전자는 웨어러블 기기들을 개발하고
있다. 갤럭시 기어는 안드로이드와 연동되는 스마트 시계로 전화, 문자메시지, 사진촬영 기능 등이 있다. 하지만 갤럭시
기어는 기능과 디자인부문에서 평이 좋지 않았고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지 못했다. 이런 실패의 경험을 바탕으로
삼성은 기어2, 기어네오, 기어핏 등의 웨어러블 기기들을 출시했으며 점차 시장에서 좋은 평을 받고 있다. 이렇듯 삼성은
끊임없이 웨어러블 기기 개발을 하고 있으며, 신종균 삼성전자IM부문 사장은 삼성전자가 웨어러블기기의 개척자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80)
3. 산업 틀의 변화
IoT기술을 받아들이고 개발한 기업들은 시장성을 확보하고 승자로 자리잡는 반면, 변화를 따라잡지 못한 회사들은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코닥의 경우 ‘Kodacked’라는 말이 실리콘밸리에서 ‘혁신을 외면하다 몰락한 기업’이라는
일반명사로 사용될 정도로, 기술을 따라가지 못해 몰락한 대표적인 기업이라 할 수 있다. 1990년대 까지만 해도 미국을
대표하는 25대기업으로 선정됐던 코닥은 2000년대 디지털 카메라개발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하고 결국 2012년
파산보호 신청을 하게 된다. 노키아 또한 대표적인 패자 기업이라 할 수 있다. 2008년 까지만 해도 휴대폰 업계 1위,
브랜드가치 세계 톱10안에 들었던 노키아는 아이폰 출시 이후 점차 판매량이 감소하게 된다. 이후에도 아이폰을 두고
‘틈새시장’에 불과하다고 말하면서 스마트 폰 개발을 주저하다가 결국 2013년에는 브랜드 가치가 500위권 밖으로
밀리게 되었다.
IoT기술은 이렇게 기업들의 흥망성쇠를 결정 지었을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산업의 틀을 변화시킬 것이라 예상된다.
IoT시대의 도래로 앞으로 ‘모든 산업의 서비스화(Everything as a Service)’가 이루어 질것이라 전문가들은 예측한다.
정보통신기술(ICT)산업의 경우 2012년 당시만 해도 통신과 IT기기 중심의 시장이었지만, 2020년에는 인터넷 서비스
78) 전황수, 2012, “무인자동차 기술 및 개발 동향”, 정보통신산업진흥원.
79) 오세일, 2015, “민간용 드론 활용 연구”, 한국방송공학회.
80) 심수민, 2014, “2014 웨어러블 디바이스 산업백서, KT경제경영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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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심으로 변할 것으로 예상된다. 또한 ICT산업에서는 샤오미, 레노버 같이, 중국 업체들의 기술력이 급성장 하면서
스마트 폰 기기들의 성능이 상향 표준화 되고 가격은 낮아지는 방향으로 흐름이 바뀔 것이라 전망된다.
자동차산업이 경우 혁신의 방향이 무인차 개발로 확산되고 있다. 무인차 개발은 기존 자동차 업체에 큰 위협이 될
것이라 예상되는데, 이는 무인차 기술의 핵심이 얼마나 주변상황을 잘 파악하고 이것에 신속, 정확하게 대응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이다. 즉, 기존 자동차 업체들의 주 개발 부문인 엔진기술보다 주변을 감지하는 센서와 통신 기술 개발에
더 초점을 두고 있어 ICT기업 쪽에서의 무인차 개발이 더 활발히 이루어질 것이라는 전망이다. 실제 구글은 무인차
개발에 가장 앞서 있다고 평가 받고 있으며, 전문가들은 도요타, 현대차 등이 머지않아 구글, 애플 등의 서비스 기업들과
경쟁하게 될 것이라고 예측하고 있다.81)
4. 한국에서의 사물인터넷 시장의 미래
1) 모멘텀 필요한 한국경제
전문가들은 대한민국 경제가 장기 저성장 국면에 빠진 가장 큰 이유로 디지털혁신역량의 하락을 꼽는다. 앞선
초고속인터넷과 이동통신기술로 세계디지털혁명을 선도했지만 스마트폰 이후 새로운 혁신의 모습이 미약하다는 것이다.
최근 중국 업체의 적극적 진출로 레노보, 화웨이, 샤오미 등이 스마트폰 업계에서 급성장을 이루고 있다. 중국이
추격하는 분야는 스마트폰에 국한돼있지 않다. 2002년 4.7년이던 한·중 제조업 기술격차는 2011년에 3.7년으로
줄었다. 그리고 한·중 국가전략기술격차는 2002년 3년에서 2012년 1.9년으로 좁혀졌다. 반면, EU, 미국, 일본과의
기술격차는 좁히기 어려운 실정이다.82)
‘넥스트 스마트폰’가 필요한 시점에서 무엇이 스마트폰 다음을 대체할 수 있는지는 IoT에 있다. 사물인터넷은 제조업의
혁신을 이끌고 새로운 벤처붐을 창출할 수 있는 동력이될 것이다. 정보통신산업(ICT)가 2007년에만 해도 자동차, 철강,
조선, 화학 등 주력 5대 산업과 균형있게 분포하며 40%정도를 차지했다. 반면 2013년에는 ICT는 62%, 자동차는
33%로 대부분을 차지하고 나머지 산업의 비중이 급속히 줄어들었다. ICT가 1차 모멘텀으로 PC, 반도체를 통해
외환위기 이후 경기를 개선시키고 2차 모멘텀으로 디스플레이를 통해 수출이 급증했다. 3차 모멘텀으로 스마트폰을
포함한 휴대폰으로 저성장에서 벗어나는 역할을 했다. 4번째 모멘텀은 사물인터넷으로 ICT와 함께 강한 제조업을
기반으로 높은 부가가치를 만들어낼 것으로 예상된다. 사물인터넷이 주력 5대 산업과 결합될 경우 2020년 얻게 되는
부가가치 총합이 30%이상으로 예상된다.
2) 중국의 IoT시장
2010년 중국의 사물 인터넷 시장 규모는 약 2,000억 위안에 달했으며, 2015년에는 7,500억 위안 규모에 육박하여,
컴퓨터, 인터넷, 모바일 통신 등의 단일 시장을 넘어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사물 인터넷의 응용 범위는 점차 확대되고
있으며 사물 인터넷의 핵심기술인 RFID 시장 규모 역시 성장세가 지속되고 있다. 중국의 RFID 시장 규모는 2008년
이미 50억 위안을 돌파하였으며, 2012년에는 200억 위안에 달할 것으로 전망된다.83)
(1) 가축 사육장에서는 가축에 방목한 양 한 마리당 한 개의 스티커를 부착한다. 이 스티커는 2차원적인 바코드나
QR코드의 형태를 보이는데, 이는 센서의 역할을 한다. 이 코드를 통해 가축의 정보를 수집하고 데이터화하여 저장한다.
해당 가축이 마트나 시장에 공급된 후 파는 고기에서 소비자들은 해당 제품을 스마트폰 등을 통해 주어진 QR코드를
읽으며 정보를 확인할 수 있다. 고기의 유통과정과 정보를 제공하면서 가축식품의 안전을 보증할 수 있고 중국에는
이러한 코드를 가진 동물이 10억 마리가 있다.
(2) 상하이 푸둥국제공항에 연결된 공항침입차단 센서는 공항에 접근하는 교통에 대한 정보를 수집한다. 이 수집된
데이터를 통해 공항에 무단으로 침입하는 대상에 대해 차단할 수 있다. 이러한 센서는 3만여 개를 포함하는 유도제를
갖고있고 지상과 펜스를 하나의 시스템을 통해 통제할 수 있다. 밀항이나 테러 등을 방지할 수 있고 대중교통 정보를
수집하여 전면적으로 상하이 최첨단 기술 단지 주변의 교통흐름을 조정할 수 있었다.
(3) 강서성에선 전력관리를 위해 사물인터넷을 사용했다. 강서성 전체 전력망에 2대를 설치하여 전 범위를 감시할 수
81) 이선미 외, 2012, “글로벌 자동차 사업자, 스마트카 경쟁 본격 시동”, KT경제경영연구소.
82) 산업연구원, 한국과학기술평가원
83) KIET 해외산업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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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었다. 이는 배전 변압기 장치에 대한 운행 유도 상태를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전기, 전력 품질 검사와 수요에 대한
관리를 실시간으로 감시하였다. 이를 통해 효율적 관리가 가능했고 1년 동안 1억 2000만㎾h 전기를 절약했다.
(4) 차이나 텔레콤의 M2M 플랫폼 구축사업은 2010년 말에 이미 완공되어, 우시(無錫)에서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차이나 텔레콤은 M2M 플랫폼을 토대로 이미 자체 사물 인터넷 사업 표준을 확립하였으며, 관련 장비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향후 M2M 플랫폼을 기반으로 진정한 사물 인터넷 운영업체로 부상할 것으로 전망된다.
3) 한국의 IoT시장의 미래와 현주소
한국에선 2009년 ‘사물지능통신 기반구축 기본계획’을 수립하여 사물인터넷 분야의 경쟁력 강화 및 서비스 촉진
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이 계획을 통해 사물인터넷을 위한 핵심 기술의 개발과 이 네트워크의 국내외 간의 표준화를
하고자 했고 연관된 법과 제도를 개선하고자 했다. 정부는 사물인터넷 관련 세계시장의 규모가 연평균 11.9% 정도,
국내 시장도 26.6% 정도의 높은 상승폭을 예상하고 있다.84) 또한 IoT를 통한 우리나라 주요 5대 산업과 결합될 경우
부가가치창출과 고용유발의 효과는 사물인터넷 투자비용 대비 사물인터넷 으로 인한 우리나라 대표 산업 전반의
생산유발효과와 부가가치 창출액, 고용유발 효과를 예측한 자료를 보면 사물인터넷 투자비용 대비 약 3,000억 원 이상의
총부가가치 효과와 1억 원당 0.7648명의 고용유발효과를 추정한다. 이 분야의 산업 파급효과는 매우 큰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IoT혁신지수는 중국을 포함한 35개국 중 하위권 인 20위로 평가되었다.85) 이는 ICT 강국이라는
것을 고려하면 미비한 수준이다. ICT 인프라에서 한국의 역량은 높으나, ICT 관련 신규 비즈니스 창출 및 이를 지원하는
정부 지원 측면에서 낮은 점수를 받았기 때문이다. 즉, 정부의 추진역량과 제도의 유연성의 부재로 인해 이러한 결과가
나왔다. 한국의 이런 정책적 한계가 잘 보인 사례가 바로‘무인 자동차’이다. 미래 세계 자동 차 시장은 무인 자동차가
주도하게 될 것이고 유럽과 미국 등에서는 connected car 관련 기술을 선도하고 있다. 반면 한국은 도로교통법 등
관련 법령 개정이 지연되면서 무인 자동차 관련 우리나라 기업의 경쟁력 확보가 어려워지고 있다. 정부가 사물 인터넷
관련 규제개정 필요성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고 이에 대한 지원이 더디다. 대부분의 제조업체와
ICT기업들이 IoT의
중요성에 대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어서 이를 극복하기 위한 환경 개선 노력이 시급한 실정이다.86)
IoT시대에 발맞추기 위해 정부는 기업의 사물인터넷에 대한 인식 변화를 주도하고 정책적 지원을 할 필요가 있다.
Ⅲ. 결론: 사물인터넷의 한계점과 그 대책
1. 사물인터넷의 한계점
세상의 거의 모든 사물이 인터넷으로 연결 되면서 사물인터넷은 사이버공격으로부터 취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공격의 피해도 걷잡을 수 없이 큰 규모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는 사물인터넷의 한계점을 크게 두 가지 차원에서
보고자 했다.
(1) 국가 및 사회적 차원의 위해요소
IoT기술로 인해 국가 중요 기간망들은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쉬운 설계를 만들었다. 그 체계는 서로 이어져있기에
이러한 시스템이 해킹당할 경우 그 피해의 규모는 상당할 것이다. 더욱이 국가 및 사회 차원의 안보를 위협하는 위험을
차단하기엔 사물인터넷의 개방성으로 인해 전반적인 위협대응이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국가 기간망 에 대한
고도의 해킹 확산이 이뤄지고 이에 대응해야할 보안업체의 경쟁력이 부족한 경우 이를 막아내기 어렵다. 그리고
사물인터넷을 이용해 IS와 같은 세력의 비대칭적 공격이 가속화될 수 있다. 해킹을 통해 일시적으로 사회 시스템 망을
마비시켜 자의적으로 이를 조종하여 사회적 불안과 인명 피해, 경제적 손해를 가져올 수 있다.
(2) 개인 차원의 위해요소
84) 장원규 외. 2013. “국내외 사물인터넷 정책 및 시장동향과 주요 서비스 사례.” <동향 과 전망: 방송·통신·전파>. 통권 제64호. 한국
방송통신전파진흥원.
85) 베인앤컴퍼니.
86) 커넥팅랩. 편석준 외. 2014. <클라우드와 빅데이터를 뛰어넘는 거대한 연결 사물인터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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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뿐만 아니라 건물 및 사회 전체에 널리 설치되어있는 센서들을 통해 개인의 생활패턴, 정보, 사생활 등의
개인정보를 해킹당할 여지가 있다. 이로 인해 24시간 개인은 감시될 수 있고 센서가 수집한 정보가 모인 빅데이터나
클라우드가 해킹될 경우 심각한 사생활 침해의 여지가 있다. 그리고 이것과 연결된 개인의 물품, 금융 정보 등이 유출
되어 심각한 경제적 혼란이 발생할 것이다. 정보에 보다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기업이나 정부에서 개인정보를 자의적으로
사용할 여지가 있으며 주로 이들이 구축할 사물인터넷망을 통해 정부와 기업에서 개인과 사회를 통제하는 수단으로
악용할 수 있다.
2. 사물인터넷 시대 보안문제에 대한 대책
(1) 보안 강화 대책 수립
보안문제의 경우 우선 초연결·융합보안 정책 및 제도가 미흡한 현실을 개선해야 한다. 여기서 융합보안이란
정보보안과 물리보안 간의 융합 또는 보안 기술이 비IT기술 및 산업과 융·복합되어 창출되는 보안 제품 및 서비스를
지칭한다. 미래 초연결·융합시대에는 모든 사람·사물·데이터가 자동 통신·연결된다는 점에서 기존 보안과 차별화되며,
이런 보안 생태계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기획 단계부터 보안요소를 고려한 전 방위 포괄적 보안 개념을 도출해야 한다.
또한 보안 요구의 글로벌화를 고려한 초연결 융합보안 정책 수립이 필요하다.
정책수립 외에도 보안 산업을 활성화시킴으로써 국가 및 사회 보안을 실현시킬 수 있다. 하지만 보안 기업이 발달한다
해도 보안기업 단독으로 대응하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이기에 기업, 정부, 대중간의 인식전환이 필요하다.
기업들은 보안기술에 대한 정보를 정부나 다른 기업과 협약을 체결해 공유하고 이와 동시에 보안서비스 정보를 대중과
공유하여 대중을 이해시켜야한다. 만약 대중의 보안서비스에 대한 이해가 바탕이 되지 않는다면 보안 업체에 대한 불신이
나타날 수 있고, 이것으로 인한 보안망의 취약성을 해커들이 노릴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와 더불어 초연결·융합보안 연구개발(R&D)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 사물인터넷·빅데이터·클라우드는 서로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어, 개별 분야의 보안보다는 초연결 전분 야의 종합적·체계적 보안 R&D 기획·개발이 요구된다.
(2) 개인정보보호 강화
현재 개인정보에 대한 개인의 통제력과 법·제도적 관리 및 처벌은 강력하지 않으며, 그나마 존재하는 권리마저도
제대로 행사하기 어려운 실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정보 관리 및 감시 제도의 개선과 처벌 강화 등을 통해 개인의 정보
활용 및 공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변화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위해 정부는 개인정보 보호에 관련된 제반 법률에
대한 지속적인 개선 등의 노력이 요구되고 필요시 공청회를 통해 이용자들의 의견을 적극 수렴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러한 공청회를 통해 법과 제도적 장치를 현실적으로 구현하며 안정적인 사회 정착을 기대할 수 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무분별한 정보이용을 관리하고 감시를 위한 강력한 중앙 기관의 설립을 고려해 볼 수 있다. 이러한
법·제도적 안전장치와 함께 정보이용과 수집에 관한 책임 및 권리를 명확하게 하면서 관련 부처의 기반을 견고히
한다면, 보안 위협에 대응할 효과적인 국 가 및 사회적 통합 시스템 형성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87)
추가:
차이나 텔레콤 (China Telecommunications)中国电信
소개
중국 국영통신업체로 베이징에 본사를 둔 중국 최대의 유선사업자이자 3위의 이동통신사업자이다.
2002년 차이나텔레콤은 북부 지역 10개 지점이 보유한 자산을 차이나넷콤(China Netcom)으로 이전했다. 이후
차이나텔레콤은 21개 지역만 운영하게 되었다. 두 업체는 중국 전역에서 자유롭게 경쟁하지만 차이나텔레콤은 중국
남부에서 압도적인 시장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차이나넷콤은 북부 지역에서 사업을 펼친다.
2002년 홍콩증권거래소와 뉴욕증권거래소에 상장되었지만 중국 정부가 지분의 대부분을 보유하고 있다.
차이나텔레콤은 상하이, 광저우, 선전, 난닝, 항저우, 청두, 다롄, 쿤밍, 우한, 충칭, 시안을 포함한 중국의 250개 주요
도시에 와이파이 무선인터넷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2008년부터 아시아와 유럽시장에서 서비스를 확대하고 있다.
87) 이상호·조윤영, 2015, “사물인터넷시대 국가 사이버안보 강화 방안 연구”, 정치·정보연구 제18권2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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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4월 기준으로 2억 1600만 명의 중국인들에게 유선전화와 휴대전화 서비스를 제공했다. 차이나텔레콤 인터넷
브로드밴드에 가입한 회원은 4000만 명에 육박한다. 중국 인터넷 사업 시장의 62%를 차지한다.
2008년 6월 중국유니콘통신회사가 진행하던 CDMA 사업과 자산을 1100억 인민폐에 인수하여 4300만 가입자에게
이동전화 서비스를 제공하기 시작했다.
2009년 1월 CDMA 2000 사업자가 되어 3세대 통신사업을 시작했다. 국가 소유의 독점 회사지만, 2010년부터
지역지점들에게 자율적 경영권을 부여했다.
차이나텔레콤의 무선 서비스인 샤오링통(小灵通, Personal access System)은 성능이 떨어지기로 유명하다.
차이나텔레콤은 3세대 무선통신기술인 CDMA 2000 분야에서 '티엔이(天翼)'라는 브랜드로 저가 마케팅을 펼치며
성능이 떨어지는 약점을 극복해 시장에서 좋은 반응을 얻었다.
사회학과
2013104370
DUL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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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로 읽는 중국근대사
책제목:<인물로 읽는중국근대사>,출판사:에버리치홀딩스,출판업도:2010.10.4,저자:신동준
21세기는 미구에 닥칠 통일시대에 대비키 위해서라도 한중일 3국의 공조체제가 절실히
요구되고 있다. 이는 오랫동안 중화질서의 주인공을 자처했던 중국과 150년 동안 새로운
패자로 군림케 된 일본을 비롯해 중간에 끼어 숱한 우여곡절을 겪어야 했던 한국 등
동아3국의 개화과정에 대한 객관적인 분석이 전제되어야만 한다. 중국조차 실패한 역사로
치부되던 양무운동 등을 새롭게 조명하는 상황에서 우리만 유독 서구의 역사전개과정을
토대로한잣대로자국의역사를폄훼하는우를더이상범해서는안된다.
영욕이 교차한 자국의 역사를 평가하면서 자고자만하는 것도 문제지만 자비자 학하는
것은 더 큰 문제이다. 이웃 중국의 비약적인 발전에 대한 평가도 같은 맥락에서 근할
필요가 있다. 과거와 현재를 잇는 ‘근대’에 대한 집중조명을 통해 ‘중체서용’의 정신을 되찾아낸 중국은 이제
자유민주주의와 인민민주주의의 차원을 뛰어넘는 독자적인 창조국가로의 비상을 꿈꾸고 있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세기사적인 격변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본서가 21세기 동북아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어나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에게
나름대로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는1840년 아편전쟁을 시발점으로 태평성대의 청나라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트린 내분과
외침 속에는 사상은 달라도 존망의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려 한 양무자강파와 변법자강파, 그리고 혁명파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책이다. 저자는 청대의 패멸에서 아시아 최초의 민주공화국이 된 중국을 만든 임칙서,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 강유위, 양계초, 손문과 원세개의 이야기를 통해서 급변하는 중국 근대사를 그려낸다.이 책은 최근 중국
역사학계에서 나온 역사에 대한 재조명 시각과 함께 기존의 평가를 비교하면서 아편전쟁에서부터 태평천국의 난,
양무운동, 청불전쟁, 청일전쟁, 무술변법, 의화단운동, 신정개혁, 중화민국의 건국, 군벌할거, 신문화운동과 5.4운동까지
중국 역사상 최고 격변기를 지낸 임칙서,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 강유위, 양계초, 손문과 원세개를 재평가하고
있다.지식은 많아서 선택했다.
학오신동준은 고전을 통해 세상을 보는 눈과 사람의 길을 찾는 고전연구가이자 역사문화 평론가다. 고전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탁월한 안목을 바탕으로 이를 현대화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으며, 그의 저서는 독자들에게 고전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경기고등학교 재학시절 태동고전연구소에서 한학의 대가인 청명 임창순 선생 밑에서
사서삼경과
『춘추좌전』,
『조선왕조실록』
등의
고전을
배웠다.
서울대학교
정치학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한
뒤
《조선일보》와 《한겨레》 등에서 10여 년 간 정치부 기자로 활약했다. 1994년에 다시 모교 박사과정에 들어가
동양정치사상을
전공했고,
비교연구』로
모교에서
이후
일본의
박사학위를
도쿄대학교
동양문화연구소
받았다. 현재
객원연구원을
21세기정경연구소
거쳐
『춘추전국시대
소장으로
있는
정치사상
그는
서울대학교·고려대학교·한국외국어대학교 등에서 학생들에게 동양 3국의 역사문화와 정치사상 등을 가르치고 있다. 또한
《월간조선》, 《주간동아》, 《주간경향》, 《이코노믹리뷰》 등 다양한 매체에 꾸준히 칼럼을 연재하고 있다. 2012년부터는
《조선일보》 주말판 경제섹션 <위클리비즈>의 인기 칼럼 ‘동양학 산책’을 연재 중이다. 저서로는 『채근담, 돈이 아닌
사람을 번다』,『삶의 한가운데서 초한지를 읽다』,『후흑학』, 『사마천의 부자경제학』, 『조조 사람혁명』, 『팍스 시니카』,
『열국지 교양강의』, 『조선국왕 vs 중국황제』, 『인물로 읽는 중국 현대사』, 『삼국지, 군웅과 치도를 논하다』, 『춘추전국의
영웅들』(전3권), 『CEO의 삼국지』,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연산군을 위한 변명』,『조선국왕 vs
중국황제』,『CEO의 삼국지』역서 및 편저로는 『자치통감 삼국지』(전2권), 『춘추좌전』(전3권), 『한 권으로 읽는 실록
초한지』,『G2 시대리더십으로 본 조선왕 성적표』 등이 있다.
시대적 배경의 시작은 청조말기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당시 시대적 상황은 격변하는 변화속에 끊임없이
부딪치게되는 위기에 처해있는 중국의 현실을 그대로 대변하는 듯 했고 과연 어떤 굵직한 사건이 발생하고 이 난세의
어려움을타개하고 극복해나가는데 선구자적 역할을 한 인물들이 속속 등장하게 되었는지를 하나씩 살펴보고 있다.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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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명의 대표적 인물은 임칙서,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 강유위, 양계초, 손문, 원세개이다. 한 때는 역사적 비판을
벗어던지지 못한 인물들에 대해 현대에 이르러 중국이 왜 새로운 해석과 조명을 비추며 중점에두고 있는 것인지 각각의
인물들이 살아갔던 시대적 상황과 배경을 이해하면서 그들의 업적과 평가에 대한 새로의 시선생각을 깨어볼 수 있기도
했다.
먼저
첫번째
인물인
임칙서는
바로
중국
근대에서
가장
커다란
사건이라고
꼽을
수
있는
아편전쟁을
계기로 부국강병의 방략을 제시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아편전쟁을 계기로 부국강병의 방략을 제시한 임칙서중국
근대사의 시발점인 1840년 아편전쟁이 일어나기 전, 아편의 늪에 빠진 중국을 구하기 위해 애쓴 사람이 임칙서다. 그는
아편 밀수의 중심지인 광동에서 강경 진압책을 써 무역 적자를 아편 밀매로 호전시킨 영국을 격노케 했다. 결국
아편전쟁이 발발해 청국이 패하고 임칙서는 파면 당했다. 그는 유배지인 신강으로 가면서 지리적으로 가까운 러시아의
위협을 간파하고 장차 청조의 최대 위험으로 러시아를 주목했다. 해양세력인 영국을 상대했던 그를 양무자강파 중에서도
해상방어를 중시하는 해방파가 아닌 육상방어를 중시한 새방파로 분류하는 이유다. 당시 청조는 홍콩 등지를 잃었으나
외침이 계속되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낙관적인 청조와는 달리 임칙서는 자신이 모은 구미 자료를 전부 친구인 위원에게
넘겼다. 이를 근거로 위원은《해국도지》를 썼다. 그를 통해 수많은 한족 관원이 청조의 전면에 부상하기 시작했으며
부국강병의 개혁 정신은 강유위 등 변법자강파로 이어졌다. 또한 서양의 기술을 배워 중국을 더욱 강하게 만들려는
중체서용의 정신으로 후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는 오늘날 반제국주의의 선구자라는 이미지가 강조되면서 중국
근대사의 효시로 불리고 있다. 청조에서는 한족 최초로 고관이 된 인물이면서 근대화 효시에앞장서며 노력한 난세에서
태어난 최고의 선각자로 일컫어지기도 한다. 서구 열강과의 끊임없는 대결과 외세침입에 대한 난국을 헤쳐나가기 위해서
나라를 구하고 양무운동의 시초가된그에 대한 오늘날의 재조명이 어찌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잘 알 수 있는 대목들이 잘
담겨져 있다.아편전쟁(1840-1842)청나라의 아편 단속을 빌미로 한 영국의 침략전쟁이다.사건의 배경과 발단19세기
청나라와 영국과 무역은 불공정한 무역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상인들의 무역으로 중국에서 들어온 홍차(Black Tea)는
영국 상류층을 시작으로 보급, 되었으나 영국산 제품들은 중국에 인기가 없자 영국상인들은 적자가 심해지자 아편을
밀매하기시작한것입니다 그들은 육체 노동으로 지친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아편장사를 했고, 아편은 19세기 중국의
히트상품이 되었다. 당연히 청나라는 흠차 대신 임칙서를 보내어 아편단속을 했고, 마약상들은 당시 자그마한 섬이었던
홍콩으로 철수해야 했다. 그러자, 영국은 무역항을 확대한다는 명분으로 청나라를 상대로 전쟁을일으켰다.이 전쟁이
제1차아편전쟁이다.전쟁의 결과홍콩 할양(1860년 99년간 조차하는 것으로 변경)
광둥 이외의 5개의 항구 개항이다.
그 다음 증국번, 바로 최초의 해군인 상군으로 난을 평정하고 임칙서와 더불어 부국강병을 외친 인물이다.특히 그이
인재등용의 처세술은 삼국지의 조조와 흡사한 면도 적지 않았다. 그 자신은 조조의 처세술에 근접하지도못했다고 밝히고
있으나 수많은 인재를 발굴하고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놀라운 역량을 발휘한 것은 분명 그가갖고 있는 강력한 리더십의
표본으로 삼아 볼 수 있는 것이었고 현재 중국이 21세기 동북아시대의 새로운 중화질서를구축하는데 있어 바람직한
국가경영 리더십의 표상으로 주목하고 있는 인물이 왜 증국번인지를 새삼 더 실감하게되는 만남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이이제이의 이홍장과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데 공을세운 좌종당 같은인물들이 모두 증국번이 발탁한 군계일학 같은
인물이라고 하니 그가 사람을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음을 한 번 더 확인해보기도했다.
그동안 증국번을 한민족의 반역자인 소위 ‘한간’으로 매도하는 견해가 대종을 이뤘다. 만주족 정부에 충성하며 중국
역사상 최고의 농민운동으로 평가받는 태평천국을 탄압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21세기에 들어와 초고속 경제 성장을
이끌어낸 중국은 새로운 중화 질서를 구축하는 과정에서 국가경영 리더십의 표상으로 그를 주목하고 있다. 그는 탁월한
경세지략과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능력을 지닌 인물이다. 태평천국의 난이 일어나자 청조는 한인 관원을 적극
활용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업적을 달성한 게 증국번이다. 그는 태평천국의 난을 농민혁명으로 보지 않고 비적
집단으로 매도했다. 일단의 승전과 주위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청조에 충성을 바쳤다. 그의 양무운동은 단지
사상에서 그친 것이 아닌, 청조의 승인을 받아 국가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되었으며, 그를 비롯한 양무자강파는 근대
교육기관을 설립하고 관독상판을 내세웠다. 관독상판은 정부의 감독 하에 회사 경영을 민간인에게 맡기는 반관반민의
기업 형태다. 오늘날의 중국이 채택한 기업 형태와 매우 유사하다.태평천국의 홍수전과는 또 다른 혹평을 받으며 역사적
비판을 온 몸으로 받은 인물이었지만난세를 타개하는 그의 탁월한 경세지략이 왜 현대의 정치 지도자에게 사상적 스승이
되는지를 우리는 정확히 그 의미를읽어낼 수 있어야 할 것으로 판단한다.태평천국 운동(1850~1864)청을 몰아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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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평천국을 세우자는 뜻니다.태평천국은 남녀 평등과 농민이 잘사는 나라를 만들고 만주족을 몰아내자!라는 주장으로
일으켰으나.서양의
군대와
청의
군대의
진압으로
실패합니다원인:
아편전쟁의
패배로
청조의위신손상내용:
청조타도크리스트교와 유교 사상을 융합한 이상 국가 건설, 남녀평등, 토지의 균등 분배 및 악습철폐 주장결과: 지도층의
분열, 한인의용군과 외국군의 활약으로 실패의의: 중국 근대 역사상 최초의 농민 운동이자 근대적 민족 운동였다.
한편 좌종당은 새방을 주장하고 신강 수복에 성공한 양무자강파의 인물인데, 바로 국토와 주권을 수호하기위해보여준
일련의 행보를 보자면 그가 얼마나 애국심을 자극하는지를 이해할수 있게 된다. 더불어 시종유화론을 펼친이홍장과는
대립되면서 무력을 바탕으로 한 실지 회복을 주장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물론 현대에서도 이홍장과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재조명을 받고 있는 또 하나의 중심인물임을 알 수 있게된다.태평천국의 도성인 천경이 무너지는 동치 3년(1864)
신강의 쿠차에서 시작된 무슬림의 반란은 100여 년에 걸친 청조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듬해에는 서쪽 변경의
코칸트한국에서 침공한 야쿱 벡이 일리를 제외한 신강의 전역을 정복해 이슬람 정권을 세웠다. 그러나 야쿱 벡의 정권은
2년 만에 좌종당이 지휘하는 청의 원정군에 의해 일거에 무너지고 말았다. 좌종당의 신강 수복과 이슬람 정권의 붕괴는
전한제국 이래 2000년 동안 서역을 판도에 편입시키고자 한 중국의 끈질긴 시도가 성공을 거뒀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미가 있다. 좌종당은 임칙서의 관점을 이어받아 해군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프랑스로부터 기술지원을 받아 복주에
조선소를 설립하는 등 해방파에 가까운 행보를 보였음에도 궁극적으로는 러시아 방어에 주력했다. 그는 생전에 새방파의
실천적 지도자가 되어 서북지역의 염군과 회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신강을 수복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그의
신강수복은 아편전쟁 이후 줄곧 열강의 압력에 굴복해 땅을 할양하며 미봉책으로 일관해오던 청조에게는 가뭄 끝의
단비와 같은 것이었다.
이홍장은 익숙한 인물일 것이다. 양무운동을 주도한 개화론자이면서 일본을 견제하기 위해조선을 속방으로 이용하였기
때문에 더 그렇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물론 잇다른 서구열강과 일본과의전쟁에 패배하면서 굴욕적인 조약 체결의
현장에 섰던 당사자 이기도 했다. 그리고 혹평으로 치부되어 한간이란불명예를 안고 말았던 그에 대한 재평가는 또 하나
우리가 주목해야할 부분들이었다. 실제 그가 죽는 순간까지얼마나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내기 위해 노심초사했는지, 그
노력의 빛이 다 보여지지 못했던 골수까지 병든나라의 현실은 안타까운 대목이기도 하다. 근원적인 당시 중국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 형국에서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다 결국 안타까운 운명을 맞이한 인물이었음을 좀 더 타당하게
평가할 수 있게가르켜주면서 말이다.동양의 비스마르크 이홍장은 시종 굴욕적인 매국조약의 원흉으로 지목된 까닭에 근
100여 년 동안 ‘한간’이라는 혹평을 받았다. 나아가 그는 청검한 삶으로 일관한 스승 증국번과 달리 생전에 뇌물수수 및
부정축재 의혹으로 숱한 비난을 샀다. 그러나 그는 죽는 순간까지 나라를 과분의 위기에서 구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다.
서구 열강의 끝없는 외침에 그는 대담하게도 청국이 비록 현재는 많은 손실이 있을지라도 문호를 열고 세계와 교역하면
언젠가는 부강을 이뤄 천하를 호령할 날이 올 것으로 내다봤다. 특히 그가 구사한 ‘이이제이以’의 책략은 당시 청국의
피폐한 상황에 비춰볼 때 높이 평가할 만하다. 현재 중국 학계에서는 이홍장을 애국자로 평가하고 있다. 예컨대 당시
그가 영국에 홍콩을 할양하면서 99년간이라는 단서를 단 것은 땅을 완전히 베어주지 않는 한 언젠가는 후손들이 되찾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
것이다.
멀리
내다보고
길게
호흡하는
사람만이
능히
생각해
낼
수
있는
셈법이다.양무운동(1870년대 시작)양무운동 또는 자강운동은 19세기 중반 이후 청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서양의 과학,
기술을 도입하여 스스로 강성해지자는 사회개혁 운동을 말한다. 청나라는 아편전쟁 등 일련의 군사적 패배와 열강의
잇따른 개입과 간섭을 겪고 나서 이러한 개혁운동이 가속화 되었다. 양무는 청나라와 서양 여러나라와의 관계, 교류 등을
일컫는 말이다.청 지식인들중 서양의 기술이우리보다좋다는것을 알고서양인 1명에게 기술을 전수받고 그 기술로청 일
전쟁을 하는데 패배를 하고 말자..양무운동의 한계를 느끼게 됩니다.그 한계는 양무운동은 서양의 기술만 받아들이지
서양의 사회성 및 평등은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배경: 아편전쟁, 태평천국 운동을 겪으면서 서양 무기의 우수성
인식목표: 서양 기술을 도입하여 부국강병의 개혁추구내용: 새로운 문물의 수입, 군비의 근대화와 군수공업 육성전통
사상과 제도는 유지한채 서양의 기술만을 도입하려함 청 일 전쟁의 패배로 실패였다.
그 다음 변법유신으로 나라를 구하고자 한 개화론자 강유위의 유신변법운동은 19세기 말 청국 지식인이 주도한
대표적인 근대화운동이다. 청일전쟁의 패배로 인한 양무운동의 실패와 더불어 서구의 기술만이 아니라 그들의 정신과
체제도 배워야 한다는 주장이 일면서 변법운동이 일어났다. 그는 저서《대동서》에서 자신의 이상을 구가했다. ‘대동大同’은
유가가
그리는
이상향으로
공동체적
합일合一의
삶을
영위하는
사회다.
그는
자신의
변법을
합리화하기
위해《공자개제고》에서 공자를 혁명가로 규정했다. 그가 만일 공자를 개혁가로 규정해 변법을 추진했다면 점진적인 개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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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호적인 입장을 끌어들여 이홍장을 설득하고 이내 서태후까지 개혁에 끌어들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현실적인
방안 대신 광서제를 끼고 혁명적인 방법으로 변법을 이뤄내고자 했다. 그는 모든 고통이 계급적 억압과 지구 곳곳에서
자행되는 차별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면서 ‘대동세계’의 이상향을 그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모든 집단적 구분을
폐지한 가운데 전 세계가 평등하게 통합하는 ‘세계통일정부’ 수준의 만민공동체를 이뤄야 대동세계의 구현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상적이기는 하나 당시의 제국주의 세계질서와 맞지 않아 실패하고 말았다.
탁월한 논리로 새 국가를 만들고자 한 당대의 논객, 양계초양무운동과 변법운동, 의화단운동, 신해혁명, 복벽, 5․4운동,
북벌 등을 잇달아 겪은 양계초는 혁명가이자 사상가, 문학가, 언론인 등으로 활약하면서 평생 중국의 변혁을 위해
헌신적으로 노력했다. 그는 스승인 강유위와 여러 면에서 대조적인 모습을 보였다. 강유위는 학자형으로 한 가지 일에
몰두하면 깊이 파고드는 스타일이었으나 양계초는 언론인답게 관심의 대상이 매우 넓었다. 양계초의 삶은 크게 과도와
다변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선변’은 기본적으로《주역》에서 역설하는 ‘자강불식’의 또 다른 표현이다. 상황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는 것은 불합리한 것은 과감히 파괴할 수 있어야 하고,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자강불식의
자세를 뜻한다. 상황이 변하고 있는데도 과거의 것을 묵수하는 것은 보수가 아닌 수구일 뿐이다. 실제로 그는 청조의
복벽을 찬성한 자신의 스승 강유위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그가 추구한 궁극적인 목표는 ‘빈국약병’으로 인해 열국의
침탈대상이 되어 있는 중국을 부국강병의 나라로 탈바꿈시키는 것이었다.탁월한 논리라던가 피폐한 청조에서 새로운
시대와국가를 만들고자 했던 신념은 높이 평가해야하지 않을까 생각한다.변법 자강운동(1898)변법자강운동은 캉유웨이가
추진한 정치 운동이였다.1989년의 ‘변법자강책’이다. 광서제는 당시 서태후의 손아귀에 휘둘리고 있었고, 이러한 상황을
타개하고 개혁 정치를 추구하기 위해 캉유웨이의 갖가지 정책을 지지하게 된다.캉유웨이의 변법자강책에는 과거 제도
개혁, 탐관오리 혁파, 각종 경제 개혁 등이 담겨 있었고, 무술변법을 통해 이중 일부를 실행에 옮기기도 한다. 그러나
그의 변법은 광서제의 권위에만 의존했으며, 결국 서태후 등 반개혁파에게 패배해 외국으로 망명을 가는 결과로 끝이
난다. 이로 인해 무술변법은 '100일 변법'이라고도 불린다.배경: 양무운동 실패, 청`일 전쟁의 패배, 좀 더 근본적인 개혁
필요내용: 부청멸양(청을 도와 서양을 친다)→반크리스트교 운동, 반제국주의 운동결과: 열강의 무력 진압, 외국군의
베이징
주둔,
막대한
배상금
지불다.의의:
외세배척
운동,
복고적
성격의
민족
운동였다.5·4운동(1911)1919년,5월4일 러시아 혁명과 조선의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베이징의 대학생을 중심으로
일어난 반제국주의·반봉건주의 혁명운동으로서, 중국의 근대화의 시발점. 당시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유럽 열강이
중국침략의 고삐를 늦추고 있을 때, 일본은 21개조 요구 등으로 중국에 대한 압력을 가중시키고 있었다. 대전이 끝나자
독일에 대한 전승국인 일본·영국·프랑스·이탈리아·미국 등은 파리에서 평화회의를 개최하고, 독일이 중국 산둥 성에
가지고 있던 권익을 일본에게 양보하라는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였다.이에 분격한 베이징의 학생은 5월 4일 데모를 벌여
반대의 기세를 올렸다. 학생들 사이에는 이미 21개 조항 요구반대운동의 경험이 있었고, 이 5·4운동은 애국운동에
그치지 않고, 봉건주의에 반대하고 과학과 민주주의를 제창하는 문화운동의 요소를 띤 광범한 민중운동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이징의
즉시탄압에나서서 여명을체포하였다.학생들은스트라이크로써대항하였는데 톈진·상하이·난징·우한에까지
군벌정부는
파급되어
민족
위기를 호소하고 국산품 장려, 일본 상품의 불매 등을 외쳤다. 6월 3일 군벌정부는 대규모 탄압을 감행하여 학생 약
1,000명을 체포하였다.6월 3일의 이 사건은 광범한 민중의 분노를 불러일으키는 결과가 되어, 6월 5일부터 상하이 기타
도시에서의 노동자의 파업, 상점의 폐쇄 등으로 나타났으며, 전국의 각계 단체의 연합인 통일전선조직이 성립되었다.
그러자 군벌정부도 파리평화회의의 조인을 거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운동은 이후 노동운동,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의
출발점이 되었다중국 근대사 열강과 맺은 각종 조약체결다.
이 밖에도 멸망흥한을 기치로 내건 공화주의자 손문, 바로 현대 중국의 출발점인 신해혁명의 주인공도 만나볼 수
있다.멸만흥한을 기치로 내건 공화주의자, 손문
현대 중국의 출발점인 신해혁명을 이뤄낸 손문은 원래 의사였으나 청일전쟁 전후로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빠지자
혁명가의 길을 걸었다. 민주공화국 체제인 타이완은 물론 인민공화국 체제인 중국에서도 청조를 무너뜨리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을 만든 그를 높이 평가하면서 국부로 칭송해왔다. 신해혁명은 안팎의 패망위기를 극복키 위해 새로운
국가체제를 수립해야 한다는 국민적 각성 위에서 성취된 까닭에 반제국주의 투쟁의 선구자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최근
신해혁명은 신사층이 자신의 보신을 위해 일으킨 정권 교체적 정변에 불과하다는 부정적 견해가 확산되고 있다. 열강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반대하는 명확한 강령을 제시하지 못하고, 민중을 광범하게 동원하지 못하며, 강력한 혁명정당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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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성치 못했기 때문이다. 변법을 이뤄 군주입헌제 국가를 만들면 적어도 러시아와 일본을 막을 수 있었는데 신해혁명으로
오히려 그것마저 무산되었다는 논거다. 그러나 신해혁명이 없었다면 그 이후 1919년 5.4운동을 비롯한 20세기 전반에
전개된 중국 및 아시아 민중의 반제투쟁은 일어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아시아 최초 공화국을 성사시키기도 했고 열강의 위협에 강한 위기의식을 느끼면서 혁명가의 길로 뛰어들었기에혁명의
대표적 인물로 더욱 평가받는 거 같다. 신해혁명(1911) 원인: 의화단 운동 실패 이후 청조와 서구 열강에 대한
반감쑨원의 혁명의 운동 추진: 중국 혁명 동맹회 결성, 삼민주의(민족, 민권, 민생)신해혁명(1911): 민간철도 국유화에
반대 → 우창에서 시작되어 전국으로 확대결과: 중화민국 정부 수립(1912) → 최초의 민주 공화정, 청조 멸망(1912)
그리고 마지막으로는조선 공사에서 초대 총통이 된 야심가원세개,원세개가 우리 앞에 등장한다. 8명의 인물중 가장
우리에게 기억되는 인물이 아닐까 생각하는데그를 간단히 평가하자면 시대의 야심가로 말할 수 있을거 같다. 일개
무부武夫가 중화제국의 황제 자리까지 올랐다가 세인들의 지탄 속에 죽음을 맞이한 비극에 해당한다. 그에 대한 기존의
평가에서 가장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부정적인 측면만을 부각시켜 당시의 상황을 파악하는 평면적인 접근에 있다. 당시
원세개가 ‘남북화의’를 통해 초대 대총통의 자리에 오른 것은 오직 그만이 막강한 무력을 보유했다는 점에서 볼 때
불가피했다. 게다가 말만 대총통이었을 뿐 권한이 그다지 많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의 전운이
감도는 당시의 상황에서 그가 대총통의 권한을 강화코자 한 것 역시 불가피한 면이 있다. 비록 세인들의 비난 속에
삶을 마치기는 했어도 예리한 상황판단과 능수능란한 처세술로 난세의 상황을 최대한 활용해 지존의 자리에 오른 그의
삶은 하나의 드라마다. 21세기 동북아시대를 맞아 그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전개되고 있는 것은 그의 행보를
타산지석으로 삼아 동북아질서의 기본 틀을 찾고자 하는 노력에서 비롯된 것이다. 임오군란을 통해서 출세의 가도를
달렸고 갑신정변을제압하는 공을 세우기고 했고 예리한 상황판단 능력과 능수능란한 처세술이 당시 난세의 상황을
최대한 잘 활용한인물이기도 했다. 중화제국을 열기도 했지만 황제의 꿈은 남가일몽으로 끝나버렸고 세인들의 지탄속에
비극적인죽음을 받아들여야 했던 원세개, 과연 오늘날에는 어떤 재평가를 내릴 수 있고 조명할 수 있을지 마지막까지그
주목하는 대목에서 놓칠 수 없는 인물임은 분명한 거 같다.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595페이지의 두툼한 책이었음에도 쉽게 읽혀내려갔다. 아마도 역사에 깊은 관심이 있어서
그랬거니와 이 책에 나오는 인물들, 임칙서, 증국번, 좌종당, 이홍장, 강유위, 양계초, 손문과 원세개라는 이름들을 평소
친숙하게 들어왔던 덕이다. 그럼에도 이해를 하기란 쉽지가 않았다. 역사에 대한 상식이 부족한 탓이리라. 조금 더
깊이있는 읽기가 필요했다. 이 책을 마스터할수 있다면 중국사에 대한 이해가 조금은 더 깊어지리라. 중국의 근대를
읽으며 동시대를 살아왔던 조선을 읽을수 있었다. 나라든 사람이든 약자는 강자에게 먹이가 될 뿐이란 사실을 다시 한번
깊게 느끼는 시간이었다.
청나라가 무너져가던 시기인 1840년대,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 중국의 태후 서태후, 일본의 황후 하루코의 일생을 통해
그 시대를 살펴볼수 있었던 [황후삼국지]에서 여인들의 일생을 통해 그 시절 나라의 운명 또한 점치고 있었다. 그동안
몇몇 인물들을 위주로 중국사를 이해해왔다면 이 책은 역사에 대해 선구자적 역활을 한 그래서 때론 역사의 비판을
받기도 했던 인물들을 위주로 새로운 해석을 내놓았다. 중국사에 연계된 그 당시 조선의 이야기도 함께 들을수 있어
좋았다. 서양의 외침에 대해 중국이나 조선이 어떻게 대응을 했는지 조선의 급진개화파, 온건개혁파, 위정척사파 중
온건개혁파의 시도가 가장 무난했다고 말한다.
21세기, 지금 중국은 세계 최강국이 되기위한 발돋움을 시작했다. 잠들어 있던 거인이 깨어나 세상을 향한 나래를
펴고자 한다. 거인의 한발짝은 소인의 열발짝보다 더 크기에 지금 전세계가 중국을 위기의 눈으로 응시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시기에 다시 보게된 중국의 역사, 중국의 근대인물들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내놓고 있었다. 지금 중국인의
생각의 근본이 어디에 있는지 알고자 하다면 이 책은 더할나위 없이 도움이 줄것이다. 난세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는
말이 있듯이 평범한 인물이 난세를 통해 세상에 두곽을 나타낼수 있었기에 하는 말일게다. 책에 소개된 위원의
[해국지도]라는 책에 궁금증이 생겨났다. 혹여 번역본이 나온것이 있나 도서관에서 찾아봐야겠다.
책속에 등장한 인물들 중 가장 조선과 가까웠던 사람 원세개, 중화제국의 처음이자 마지막 황제로 불리는 조선의
임오군란을 계기로 승승장구해 마침내 대총통에 이어 황제의 자리에 오른 그야말로 파란만장한 일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명문가에서 태어난 그는 벼슬에 인연이 없었는지 계속된 낙방거사였고, 돈으로 벼슬을 사려하지만 그마져도
실패하고 만다. 그런 그의 출세의 디딤돌이 되어준 조선의 임오군란을 계기로 무인의 자질을 잘 드러냈고 오장경의
신임을 얻어 출세의 가도를 달리게 된다. [인물로 읽는 중국 근대사] 원세개 편을 읽으며 그 당시 조선의 역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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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들도 함게 대할수 있다.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 커다란 사건들의 뒤에 중국이 존재해 있었던 것이다.
특히
중국이
이전보다
빠른
성장세를
바탕으로
국내의 파워게임에 도취해서 서로 싸우기보다는
더
강한 영향력을
세계에
발휘하고
있으니
현재
우리나라
좀더 큰 시선으로 세계를 바라보도록 위에 계신 어르신들께 간언을
드리고 싶은 마음이다.
엘리자베스 1세의 경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지도자의 요건 가운데 일반인을 뛰어넘는 독서량이 있지 않는가.
이전에도 이야기 했었지만 인류에게 가장 좋은 교과서는 그들의 조상이 걸어온 역사이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하지만 되돌이 반복보다는 레비스트로스가 말하는 나선형 반복이 긍정적인 방향성을 지닌 역사의
모습일 것이다.
이전에 벌어졌던 역사 속의 사건을 통하여 앞으로 비슷한 일이 일어난다면 나에게 더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또는
윈윈하는 방향으로 아니면 평화적인 방향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여 보자는 의미에서 이 책을 권한다.
저자는 우선 들어가는 글에서 중국의 근대에 대해 설명함으로써 본문에 등장할 인물들이 활약하는 시대에 대한
배경지식을 제공한다.
그리고나서 근대시대에 활약했던 8인의 거대한 인물들인 임칙서, 증국번, 좌종단, 이홍장, 강유위, 양계초, 손문,
그리고 원세개의 생애와 자신의 평가를 서술한다. 마지막으로 첨부된 청말민국의 연표는 지금까지 거론한 인물들과
관련된 중요 사건들을 위주로 수록되어있다.
들어가는 글을 읽은 후 한번 읽고 각 인물들의 이야기를 읽은 후 한번씩 더 읽는다면 당신은 어느새 중국 근대사의
달인이 되어 있을 것이다.
그 시대를 대표하는 인물들이 등장한다. 요즘 기업에도 인재의 중요성을 재차 강조하고 있다. 그렇게 뛰어난 사람이
지니고 있는 잠재력과 영향은 크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근대사 즉 중국의 1900년도 전후에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8명을 설명함으로써 역사적 상황과 인물들에 대한 묘사를 겸하고 있다. 평상시 역사에 대한 지식은 전무해서 책을
읽으면서 아편전쟁, 청일전쟁 등에 관한 역사적 대사건이 나올 때 이해하는데 있어서 크지 않은 어려움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근대사는 중국뿐 아니라 많은 나라에 있어서 현재를 살아가는데 있어서 기반을 마련하는 기회였을
것이다. 특히
아시아는
불교와
유교
사상들이
있어서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많은
어려움과
많은
사람들이
죽어갔다. 우리나라 근대사에 대한 지식이 거의 없지만 중학교, 고등학교 때의 기억을 떠올리면 크게 틀리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방식과 스타일은 다르지만 중국의 근대사에 있어서 나라를 위하여 어려운 일들과 개혁을 위하여 고생한 8명의
인물들을 통하여 중국의 근대사에 대하여 어느 정도는 알게 되지 않았나 생각을 한다. 책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것이지만
기초 지식이 있는 상태에서 읽는 것과 아닌 경우에 받아들이는데 있어서 많은 차이가 있음을 새참 느끼게 된다.
기억에 남는 것은 위인들의 공통점은 물론 다 공통된 것은 아니지만 사람을 알아 보고 인정하고 키울 수 있는 사람과
항상 배움을 추구한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서 다시 한 번 확인할 수 있었다.
한 번 읽음으로 인하여 얻지 못한 것이 많이 있다. 동아시아에 대한 근대사에 대한 기본 지식을 습득하고 다시 한 번
꼭 다시 읽을 것이다. 그럼 더욱 더 많은 지식이 흡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역사를 알아야 현재를 알 수 있고
미래를 준비할 수 있다고 한다. 이번 세기는 동아시아의 무대가 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그 중심에 있는 중국에
대하여 공부를 하고 대처하기 위해서는 역사에 대한 관심도 늦추어서는 안될 것이다.
지금 중국의 국가 주석 공산당 주석 최고 권력자는 시진핑이다.그 이전에는 강택민 (장쩌민), 호유방이 있엇고
나머지는 잘 모르겟다.
그 이전에는 유명한 등소평 (덩샤오핑) 이 잇었다. 그는 중국을 부강하게 만든 위대한 지도자엿다.
1989년 천안문 광장에 모인 학생등 민중 데모대를 탱크를 동원해 밀어 버린 과감한 지도자이기도 햇다. 당시 그의
주장은 민주화를 요구하는 학생등을 뒤에서 선동하는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고 나라의 정체 주체가 휘청거리느니 단호히
소수를 억압해서 국가 권력 정체를 지킨 후에 민주화를 따져 보자는 것이엇다. 일단 국가가 쓰러지고 혼돈에 쌓여 망하고
나면 외국의 침략이엇다는 변명도 필요 없다는 말이다. 백묘 흑묘 이론에서 말하듯이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는다면 상관 없다는 말이다. 중국의 경제가 발전하고 나라가 잘 살고 국민이 잘 살게 된다면 모든지 좋다는
말이다.
그 이전에는 모택동 (마오쩌뚱) 이 잇엇고 그는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로 아직도 천안문 광장에 그의 사진이 걸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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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다. 카리스마적인 지도자엿다. 1948년에 중화 인민 공화국을 창립한 그느 1959년에 대약진 운동을 펼쳤으나 실패한
후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2 인자들의 동태를 살피다가 그의 막강한 권력에 도전하는 2 인자 무리들 즉 등소평 류샤오치
등을 1969년부터 시작된 홍위병 문화 대혁명으로 숙청한다. 문화대혁명은 1979년 모택동의 사망과 함께 끝이 나고
그의 부인 장청등 4 인방을 물리친 등소평이 권력을 잡는다. 문화대혁명 때 모택동에 충성한 주은래 (쩌우런라이) 도 곧
실각되고 후계자였던 국방 장관 임표 (린바오) 도 실각되고 반란을 도모하다가 발각되 러시아로 도망 가던 비행기가
폭발 추락해서 죽는다. 6.25 전쟁때 중공군을 이끌고 나타난 펑더화이 장군도 잇다.
그렇다면 손문은 왜 중국의 국부로 존경받는가 ?
그가 1911년 신해혁명을 성공시켜 중국의 청 왕조를 무너뜨리고 입헌 공화제를 최초로 실행햇기 때문이다. 1912년
그는 새로운 나라 중화민국의 총통으로 취임햇다가 북경 군벌 원세개 (위안 스카이) 에게 총통직을 넘겨 준다. 남경을
향후 공확국의 수도로 한다는 조건하에서 원세개는 야심을 품고 스스로 황제의 지위에 올랏다가 곧 민중과 손문 그리고
다른 군벌들의 반발로 물러난 후 얼마 후에 죽는다.
손문은 무력으로 청조를 무너트리자는 혁명파의 우두머리엿고 멸청흥한 즉 만주족을 몰아 내고 한족의 중국을
만들자는 주장이엇다. 광동성 출신인 그는 당대 중국 대부호인 송씨 집안의 둘째딸 송경링과 결혼한다. 그보다 무려
27살이나 어린 처자였다. 송씨 집안의 첫째딸 송애링은 당시 중국의 다른 대부호의 아들 미국에서 유학하고 온 재벌
아들하고 결혼하고 셋째딸 송미링은 국민당 최고 권력자 그리고 대만 총통이 된 장개석과 결혼한다. 그렇다면 송씨
집안의 세 처자들은 다들 미모와 재능을 겸비햇던 것 같으다. 첫째딸 송애링이 중국인 최초의 미국 유학생이엇다니 맞는
말인건 같다.
1850년 열강의 침략부터 1911년 중국 청조가 멸망하기 전 까지의 근대를 이끈 안물들은 누가 있는가 ?
1850년경 영국이 중국과의 무역 적자를 해소하기 위해서 (당시 영국은 중국차를 마니 수입하고 면제품은 조금
수출해서 심각한 대중 적자에 시달리고 잇엇다) 인도에서 양귀비를 재배한 후 아편을 중국에 대량 수출하면서 또는
밀수를 하면서 중국과 마찰을 빚고 전쟁까지 간게 아편전쟁이다. 이때 단호하게 광동성에 내려가 (아편의 주 수입루트가
홍콩과 광주였다) 아편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강직하게 대처한 인물이 바로 임칙서다.
북경의 북양대신 북양군에 반해서 광동등 중국 남부에서 막강한 군벌을 지휘한 증국번도 청조에 충성을 다한이다.
광동과 광서를 통솔하는 양광총독 순무 (우리로 말하면 경남도지사 정도 ? 군대까지 통솔햇으니 제 3군 사령관 정도 ?
암튼 행정과 군사를 가진 지방의 군벌이었다), 양강총독, 직례총독 (북경을 포함한 북쪽 지역 담당인데 행정적으로는
국무총리 정도란다) 등을 두루 거치면서 험한 정치 풍토 속에서도 원칙과 기준을 잃지 않고 끝까지 청조에 충성한
무장이 증국번이다.
증국번의 제자로서 나중에 홀로 우뚝 선 좌종당은 더 대단한 무장이다. 그의 군벌 세력이 멸 만명에 달해 황실조차도
그를 두려워 햇지만 그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라는 부하들의 권유도 물리치고 끝까지 원칙대로 청조에 충성을 다한 전통
무장이엇다. 그 또한 만주족이 아닌 한족이엇음에도 말이다.
서양의 법과 제도를 도입해서 청조의 법과 제도를 고쳐 국가를 부강하게 만들자는 변법자강파의 영수 강유위 또한 한
인물이엇다. 변법자강파는 청조 황실을 유지하자는 입장이었으므로 혁명파는 아니엇다. 이들은 광서제를 도와 황제파로
불렷으나 당시 막강한 권력을 쥐고 잇던 서태후 (광서제의 이모) 황후파에게 밀려 탄핵을 받는다. 서태후는 끝까지
권력을 놓지 않고 휘둘러 청조 멸망의 일등 공신이 되엇다. 1908년 서태후와 광서제가 비슷한 시기에 죽고 3살짜리
부의가 황제에 올랏으며 이때를 선통 원년이라고 하는데 결국 부의는 1911년 청조가 멸망하고 중회민국이 들어서면서
하야햇다.
언론인 출신으로 정치인이 된 양계초도 한 인물이엇다. 손문의 혁명파에 대항하는 변법자강파의 영수 강유위의
제자였는데 나중에는 홀로 독립한다. 변법자강파나 혁명파나 모두 서태후에 대항햇다.
● 책 내용 요약
들어가는 글
그간
학계에서는
습득하려는 , 제2단계는
청국의
근대화운동을
청조를
그대로
두고
크게 3단계로
제도
및
나눠
문물을
설명해왔다. 제1단계는
개혁하려는 , 제3단계는
서양의
청조를
뒤엎고
과학기술을
공화제를
건설하려는이다.
259
제1장
증국번-최초의 해군인 상군으로 난을 평정하고 부국강병을 주창하다.
장개석이 12년간의
러시아
유학을
끝내고
귀국한
아들
장경국에게
일독을
권한
책이
바로 ‘맹자’와 ‘증문공가서’였다. 장개석은 증문공가서를 발췌해 자신이 교장으로 재직했던 황포군관학교의 교재로 쓰기도
했다. 92
증국번은
생전에 ‘일품재상’이라는
칭송을
받은
바
있다. 이는
밥상이
한
가지
고기반찬을
제외하고는
모두
채소반찬으로 꾸려진 데서 나온 것이었다. 그가 고기반찬을 하나 더 추가하는 것은 오직 손님이 왔을 때뿐이었다. 만년에
오른쪽 눈을 실명했음에도 주요 공문서는 자신이 직접 읽고 결재했다. 그가 생전에 자신의 집 이름을 八本堂으로 지은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8본은 독서를 통해 고전을 익히고, 조상들의 지혜를 배우고, 가족을 따뜻한 마음으로
대하고, 근심을 적게 가지고, 헛된 말을 하지 않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뇌물을 가까이 하지 않고, 행군시 민폐를 끼치지
않는 것을 말한다. 그는 평생 독서하며 청검한 삶을 사는 사대부의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몸소 실천한 특이한 존재였다.
169
제3장
좌종당-새방을 주장해 신강 수복에 성공한 양무자강파
제4장
이홍장-이이제이의 방략으로 양무운동을 주도한 개화론자
양강은
강소와
안휘, 강서라는
중국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을
지배했다. 직례는
도성이
있는
하북, 산동, 산서, 하남의 4개성을 관할했다. 동치 9년(1870)부터 직례총독과 양강총독은 각각 북양대신과 남양대신을
겸하면서 외교와 통상까지 관할하게 되어 더욱 막강해졌다. 청대 말기에 사실상의 재상은 직례총독이었다. 오랫동안 그
지위에 있던 이홍장은 사실상의 재상이고 국정의 최고 책임자였다. 260
장흥학사는 중국 최초로 지덕체로 상징되는 전인교육의 원칙을 세운 것으로 유명하다. 그의 수제자인 양계초가
장흥학사로 와 그의 문하생이 된 것은 광서16년(1890)이었다. 그가 쓴 장흥학기에 따르면, 장흥학사는 강학(이론강의 및
토론), 설경(경전해설), 독서(경전 읽기), 습례(예절교육), 일과(하루의 과제) 등 다섯 가지로 이루어졌다. 365
당시 손문의 곁에는 홍콩출신 진수분이 있었다. 정실은 마카오에 있었으나 그가 해외로 떠도는 바람에 사실상
별거였다. 진수분은 손문과 1896년 정식 결혼식을 올린 뒤 남편을 좇아 광주와 일본, 베트남 등지를 다니며 남편의
혁명사업을 곁에서 헌신적으로 보필했다. 그녀는 1912년초 스스로 물러나며 이같이 선언한 바 있다. “나는 출신이
한미하고 아는 바가 적어 스스로 물러나고자 한다. 손문이 나를 버린 것은 아니다. 그는 나에게 아주 잘 해주었고 나를
배신하지 않았다.” 468
유대치의 세례를 받은 김옥균과 박영효는 손문과 유사한 혁명파로 진행한 데 반해,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의 영향을
받은) 김윤식과 김홍집은 이홍장 및 좌종당과 유사한 양무자강파로 진행한 셈이다. 김옥균 등을 변법자강파로 분류하는
견해가 있으나 이들이 제시한 개혁안은 강유위와 양계초가 제시한 방안보다 훨씬 과격했다. 극우파인 미야자키 도텐 등이
손문과 김옥균을 동시에 지원한 것도 결코 우연으로 볼 수 없다. 589
이름:LIU SHUNXIN
학과:사회학과
학번:2013104382
간략한자기소개:안녕하세요!저는 중국 서안에서온 24살여자 유순심이고 현재 경희대학교 3학년학생이고 저는 한국에
온지 4년넘어고 5년안됐다.내년 졸업하고 중국에서 다시 돌아가고 일하것이다.
email:lsxdiudiu@sina.cn
260
중국경제구조의 변화
책소개
경제대국이었던 일본을 제치고 G2의 자리를 굳건히 한 나라, 세계 최대의 외환보유고를 가지고 있으며 세계 대형
M&A의 최대 큰손이 된 나라 중국. 『중국의 대전환, 한국의 대기회』는 오랫동안 중국에 대해 연구한 결과물을 집대성한
중국전문가 전병서 교수가 중국의 급성장 비결과 중국 경제의 현주소, 대중국 전략에 대한 실질적인 방안을 제시한다.
특히 저자는 향후 중국의 대전환 핵심 키워드로 ‘리커노믹스 2.0’, ‘중국의 인터넷경제’, ‘일대일로 프로젝트’에
주목하라고 조언한다.
저자소개
저자 : 전병서
저자 전병서는 여의도 금융가에서 애널리스트와 IB뱅커로 25년 일했다. 대우증권 상무와 한화증권 전무를 지냈다.
금융가에서
반도체와
IT애널리스트로
미국,
일본,
한국
IT산업을
연구했다.
애널리스트로
활동하던
시절에는
국내기관투자가는 물론 전 세계 펀드매니저들로부터 “베스트”라는 찬사를 들었고 “IT애널리스트 업계”에서는 살아 있는
전설로 명성을 날렸다. 2002년부터 자기부상열차처럼 달리는 중국이 두려워 중국 공부를 시작했고, 중국에서 직접
공부하고 일하면서 중국의 부상을 “매의 눈”으로 지켜봤다.
금융과 IT가 바꿀 중국, 그리고 미국을 추격하는 G2 중국의 전략과 한국의 대응에 관심이 많다. 중국 베이징의 칭화대
경영대학원(석사), 상하이 푸단대 경영대학원(석사/박사)에서 공부했다. 중국의 석박사 과정에서 주로 연구한 분야는
중국자본시장, 위안화 국제화, 중국성장산업이다. 중국 칭화대 경제관리학원 CEO과정, 푸단대 관리학원 CEO과정,
교통대 관리학원 CEO과정도 공부하면서 베이징과 상하이의 다양한 업종의 중국CEO들과 교류하면서 중국기업인들의
속내도 살펴보았다.
한국 IB에서 중국 리서치와 중국기업 한국상장업무를 최초로 담당하였고 중국 선박금융, 부동산투자업무를 담당했다.
중국에서는 상해한화투자자문과 상해 중국경제금융센터에서 일했고 중국 상해 차이나데스크 자문위원을 지냈다.
《금융대국 중국의 탄생》, 《5년 후 중국》, 《한국의 신국부론, 중국에 있다》, 《중국 금융산업지도》 등의 저서가 있다.
이유
중국경제의 고도성장에 따라 많은 산업분야에서 중국의 경쟁력 수준이 크게 증가 하고 있으면 중국산업의 발전에 따라
한국 주력산업과의 경쟁이 보다 심화되어지는 경쟁 구도 가 형성되 어가고 있습니다. 중국경제와 한국경제는 연결 많이
졌습니다.
중국은
1978년개혁·개방
정책을
실시한
이후,
수출과
고정자산투자
중심의
양적
성장전략을
추진함으로써
1978~2012년간 연평균 9.9%라는 높은 고성장을 달성한 바 있다. 이를 구간별로 나누어 보면, 1980~2001년간에는
민간소비 분야가 경제성장에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으로 나타났으며, 2006~2008년간에는 수출이, 2009~2011년간에는
고정자산투자가 기여를 하였다. 즉 중국의 WTO 가입 후(2001)에는 수출이, 2008년 말 촉발된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에는 대규모 경기부양책에 힘입은 고정자산투자가 성장을 주도한 것이다. 그래서 이번 보고서는 중국경제 정장구조에
대해 얘기하겠습니다.
요약:
중국은 신화가 없는 나라다. 기원전부터 중국인의 사상을 지배해온 동양의 셩경,<<논어>>에 답이있다. 공자는 지극히
현실적인 접근으로 도를 가르쳤다. 그래서 중국은 황당한 신들의 스토리에 열광하지 않는다.중국은 실용주의가 기본이다.
중국의 지도자들이 양복을잘 잘 안 입는 것도 그런 이유다. 중국이 2014년에 ,성장을 했고2015년 들어 분기에 70%의
성장을 했다. 8%를 하회하는 성장을 하면 물불 안 가리고 경기부양에 나섰던 가에도 부양책도 없고2015년3원에는
수출이14.6%나 감소했지만 수출 감소에도 특단의 수출지원이 없다.
중국은 과거30년간 연평균10%대의 고성장을 했고 그 결과 미국에 이은G2의 자리에 올랐지만 국민의 생활은 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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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아진 것이 없다. 이는 국가 자산의70%를 국가가 소유하고 있어 10% 성장의 과실 중 7%는 국가가 가져갔고
13억8000만 명의 민간은 3%성장의 과실로만 살았기 때문이다. 정부는 세계 최고의 부자지만 국민은 여전히 1인당
소득80위권에 머무는 가난한나라인 것이다.
중국의 WTO 가입으로 중국이 지난 20여년간 추진해 온 개혁·개방정책이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됨으로써
중국경제체제가 크게 변화될 것이다. 중국의 WTO 가입으로 중국내 제도와 정책이 국제적인 기준과 부합하도록
개정됨으로써 중국경제의 시장경제화가 확대되고 민간기업의 빠른 성장이 예상된다. 중국의 무역정책, 외국인투자 정책의
투명성이 제고될 것이다.
2014년 중국에서 금융기관의 자금 미스매치로 단기금리가 폭등하자 한국 증시는 버냉는
양적완화 중궁 발표 때보다 더 크게 주가가 폭락했다. 또비이 마이너스로 돌아서자 정작 중국은 무덤덤한데 한국에서는
중국발리스크에 대한 공포감이 커지고 있다.그 이유는 무엇일까?한국이 중국의 변화를 제대로 인식하지못하고 있시
때문이다. 지금까지 최근30년 동안 중국을 매년10%씩 성장시켰던 주인공은 바로 공대생,무관들이었다.공대생들이 30년
동안 G2를 만든 섯이다. 중죽의 최근2년간의 경제정정책은"리커노믹스"로 물리는 구조조정과 과잉설비 폐기를 통한
산업구조 개편에 중점이 맞추어졌다. 그결과3차 서비스산업의 비중이 2차 제조업의 비중을 넘어섰고3차산업의 확대가
고용유발계수를 대폭 올렸다. 후진타오 집권10년간 중국이 최저8% 성장에 목맨 것은 중국의 700만 명의 대학생을
고용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있다. 중국의 GDP1 1%달 고용유발계기수가 70만~80만이었기 떄문이다.그리고 중국 최초의
박사 총리인 리커창 총리 집권 이후2014년부터 중국은 경제목목표를 못
박았지만 리커창은 "7.5%좌우,7%좌우라는
표현을 통해 경제를 구간관리하고 있다.
한국은 "정미경중"이 답이다. 정치와 안보는 미국에 편승하고 경제는 중국과 협력해야 한국이 먹을 것이 생긴다.
중국과의 AIIB,미국과의 사드해법,한국은 양속에 꽃놀이 패를 줜 형국이었다.
그러나 한국은 내부적 입장을 정리하느라 의사결정이 약간 늦은 감이 있었다. 영국보다 먼저AIIB의 결정이
이루어졌으면 중국에 말려면 말라는 식이다. 중국과의 AIIB에서 한국이 얻을 것이 무엇일까?
한국은 돈만 대고줄지도 안 중지도 모르는 배당투자나 할 것인가?아니다. 남보다 먼저 중국에 AIIB를 대가로 요구할
만한 것은 무엇이 있을 까 3가지다. 첫째,건설공사 수주보장을 주장해야 한다 . 중국의 AIIB는 명분 쌓기이고 표심
얻기다. 돈은 문제가 안 된다.중국은 만약 돈이 문제되면 바로 증자한다. 1000억 달러에서 2000억 달러 증자도
문제없다. 중국과 여타 국가들 간에 AIIB의 지분율 싸움을 할 거리는 것이 서방의 시각이지만 큰 의미 없다. ㄴ최대
물주는 중국이다. 그리고 AIIB의 목적은 실크로드 건설공사다. 한국AIIB지분 율보는 실크로드 건설공사의 지분율을
요구해야 실익이 있고 한국 기업도 주가가 오른다.중국은 대놓고 AIIB에서이 돈 버는 것이 아니라고 떠벌린다. 중국은
요즘에 무역수지 흑자만 한 달에 600~700억 달러다. 중국은 연간3.2억 톤의 석유 가격10달러 하락에 240억 달러씩
비용이 줄어든다. 100달러에서 50달러대로 떨어진 석유 가격 하락분만 해도 1000억 달러는 가볍게 넘긴다. 둘째,중국
간의 해저고속철조를 건설하자고 해야 한다.인이천과 산등성 웨이하이를잇는 해저고속철도를 놓게 해야 한다. 실크로드는
중국의 시안에서 시작되고 바다로는 렌윈강에서 끈난다. 한국이 실크로드 수송망에 수혜 보려면 산동성과 한국의
인천이나 평택을 잇는 해저고속철도가 딱이다.현대 중국의 고속철도 기술은 이것도 가능하다. 이미 중국은
산등성
평라이
바닷길을
잇는
해저고속철도
건설을
벌표했다. 한국이
동북삼성으로
보내는
물류도
다렌과
인철_산둥
해저고속철도-산동 평리이-랴노닝다렌 해저고속철조를 이용하면 된다. 한국 건설사와 철도 그리고 관광업계의 수혜를
이끌어내고 대유럽 수송라인을 한국까지 연장하는 효과가 있다.셋째, 후강통,선강통 다음에 "한후통,한선통을 개통하자고
해야 한다. 중국 돈과 통하라.그것이 부자 되는 지름길이다.한국 증시와 상하이 선전 증시의 교차거래를 통해 중국
투자가도 유치하고 우리는 실크고드 수혜주에, 그리고 중국은 인터넷과 정부기술주에 투자해10배를 먹는 기회를 잡아야
한다.
지금 전 세계 신기술들이 중국에서 놀고 있고, 중국서 만들어 전 세계를 팔린다. 잘나가는 한국 제도업의 기술도 전
세게 정상의 기술과 만나면 빛이 바랜다. 중국 기술은 낙후되어 있지만 중국 시장에 들어온 세게 기술은 한국보다 수준
높은 것이 수두룩한다. 중국에서 돈 번다는 것은 이젠 중국기업과 경쟁이 아니라 전 세계 기업과 경쟁이다.한국의 적은
중국 기업이 아니라 중국에 들어온 서방 기업이다. 지금 중국은 전체 인구의90%가 이동통신망에 접속되어 있고45%가
인터넷에 접속되어 있다.중국은 자동차에 따른 물류현명,통신망 보급 면서 금융형이 일어나고 있다.중국 정부는 자금
유틍구조의 왜곡으로 고금리로 문제가 많은 그림자 금용을 바로잡고 부적절한 대출 관행에 빠진 은행을 길들이는데5%대
수익률의 인터넷 금용을 은행산업에 경각심어줄 대안으로 쓸작정이다. 리커창 총리는 2014년3원 전인대에서 인테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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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율을 율성하겠다는 선언을 했고 저우샤오추안 인민은행장은 인터넷 금융을 더 장려할것이라는 발표를 했다.중국 정부는
금용시장의 개혁을 5개의 순수 민영은행을 허가해주었고 2년 내예금금리 자유화를 선업했다. 5개 민영은행 중2개는
텐센트, 알리바바ㄸ 같은 중국의 인터넷 시업들이다. 이들 인터넷을 기업으로 한 민영은해들이 줄국의 은행산업을 어떻게
변화시킬지가 큰 관심이다.
중국인 관광객,요우커의 바람이 거세다. 서울의 명동,강남의 가로수길,제주도는 이제'중국 요유커 공화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우커들의 씀씀이도 대단하다.한국에 온 일본 관광객이 평균990달러를 쓰고 갔는데 중국 관광갠은
일분의 2.3배인2217달러를 쓰고 갔다. 중국의 요우커들이 지금 한광업계의 VIp다.요우커의 숫자도 대단하다. 2013년
한 해 중국 관광객43만 명이 한국을 다녀갔고2014년에는 613만 명을 돌파했다. 중국의2013년 해외관객 수는 9819만
명으로 18% 증가했고2014에도 19%증가한 1억1700만 명이 해외여행에 나섰다. 지금 한국은 떼로 몰려들어 오는
요우커들 때문에 당황스럽다. 잘 못사는 짝통과 모방의 나라. 한국의 영원한을 이라고 생각했던 중국인들이 갑이되어
나타났기 때문이다. 우리 마음속에 중국인은 아편전쟁 전인 1840년 까지는 잘 모셔야 할 '대인 '니었지만 6.25전쟁ㄱ
때에는 인해전술로 한국의 토일을 방해한'때놈들'이었고,1992년 한중수교 이후에는 하청생산하는 '중국인'노동자였다.
그러나 금용위기를 겪으면서 중국이 돌연 우리 앞에 '요우커님'으로 등장했고 이젠 여의도 금용가마저 좌지우지하는
큰손,'대인으로다시 돌아오고 있다.
최근30년간 미국 주도의 세계 경제 아래'글로벌라이제이션'이화두였다. 여기에 동참하지 않는 나라나 기업은 몰락의
길을 걸었고 여기에 발춘 나라와 기업은 대박은 대박을 냈다. 그런데 2008년 글로벌 금용위기 이후화두는
역-글로벌라이제이션,지역화',소위 차이나이션 이다. 아시아에서 성장과 부의 축적은 중국을 통하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가 왔다. 한국의 3대 주식부자의 재테크 비결도 크게 보면 중국 때문이다. 지금 아시아에서 거부 되는 길은중국을
어떻게 엎어치기 하는가에 달려 있다. 과거 30년간 한국 최고의 재벌은 '일본통 회 장님' 있는 그룹이었지만 미래30년
최고 재별은 '중국통 회장님'이 있는 그룹이 될 기능성이 높다. 부동산과 국제상품 가격의 하락 시기에 금리 인하는
자금의 증시유입을 블러오고 증시 상승을 가져온다. 중국 금용자산의 90%를 보유한 상업은행의 독점을 투자은행으로
전환시키고 기업의 직접금융시장에서 자금조달을 통한 금용비용 하락 효과를 보려먼 증시 상승이 필수다.외국인이직접
중국 본토 주식을 후강통 제도가 2014년 1원부터 시작되었다. 한국의 투자가도 중국 주식 매입으로 중국의 금리 인하에
따른 수혜를 볼 기회가 생겼다.
분석
중국 경제구조 전화에 대한 인식이 시급
한국에서 중국 경제에 대한 걱정이 많다. 그러나 사실 미국과 유럽이 거덜 난 판에 7%성정이면 나쁘지 않다.7%대
성장을 한 중국이 문제가 아니라 수출의1/3을 중국에 목매달고 한국 전체 무역흑자의 1.7배를 중국에 의존하고 있는
한국의 대중국 수출 의존도가 문제다. 한국의 제조업에 필요한 중간재 수출과 중국의 투자에 필요한 자본재의 공급이
한국의 주력 수출산업이다 보니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다. 2014년들어 중국경제의 둔화로 한국의 대중수출 불황이
심화되었다. 대증 중간재 수출은 마이너스로 돌아섰고 중국 수입시장에서 한국의 점유율은 계속 떨어지고 있다. 지금
중국은 세게 최대의 소비시장, 투자시장이고 전 세계에서 잘나가는 기업들의 경연장이다. 한국 기업들이 대중국 실적이
나빠지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시장의 속도보다 신규 참여자의 증가 속도가 더 빨라지면서 한국이 시장점유율 경쟁에서
밀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지금 중국은 세게 최대의 소비시장,투자시장이고 전 세계에서 잘나가는 기업들의
경연장이다. 한국 기업들이 실적이 나빠지는 것은 정확히 말하자면 시장의 성장 속도보다 신규 참여자의 증가속도가 더
빠라지면서 한국이 시 장점유율 경재에서 밀리면서 나타나는 현상이다.
한국에서 유럽 문제로 증시가 지지부진한 가운데 중국에서 잘나가는 화장품이나 제과업체 주가가 탄탄한 이유다. 예전
"차,화,정'처럼 중국의 중간재 수출 수혜로 소재주가 다시 상승하기에는 오래 시간 걸릴 것 같다. 더 길게 보면 앞으로는
중국에 생산공장이 있는 기업이 아닌,판매기지가 있는 기업들이 투자 유망기업이 될 가능성이 높다. 즉 과거에는
'중국생산.세계판매 '였다면 이제는 '한국 생산,중국 판매'또는 '중국 생산,중국 판매'가새 흐름이다. 소비대국 중국으로
하루빨리 인식 전환을 하고 소비대국 중국을 뜷을 전략을 모색해야 한다.
중국의 2012년 경제 정책
중국은 2011년 12월 12일 ~ 2011년 12월 14일 중앙경제업무회의(中央經濟工作會議)를 개최하였다. 매년 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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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최되는 중앙경제업무회의에서는 지난 2011년의 경제 성과를 점검하고 2012년도 경제정책 방행을 결정하였다. 이
회의는 경제 관련 최고회의로서 공산당 중앙정치국 상무위원 전원, 각 성(省)·자치구(自治區)·직할시(直轄市) 등의 당·정
책임자, 중앙당 및 국무원(國務院) 유관 부처 책임자, 주요 국영기업과 금융기관 및 군·경 유관 부처 책임자 등이 모두
참석하였다. 2011년 중앙경제업무회의 주요 의제로는 당면 경제여건 분석, 2012년도 경제정책 목표 설정, 거시조정,
내수확대, 3농: 강농(强農)·혜농(惠農)·부농정책, 물가 및 부동산 가격 안정, 구조조정 등을 선정하였다.
2012년 경제정책의 세부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은 9가지로 나눌수 있다.
첫째로는 안정 속의 발전 추구[穩中求進]이다.
경제정책 기조는 안정적인 거시경제정책을 통하여 성장과 물가안정을 동시에 달성함으로써 궁극적으로 국민들이
경제발전의 성과를 누릴 수 있도록 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를 통해 경제성장방식 전환을 지속하고, 개혁·개방을
가속화하여 민생개선을 달성하는 등 제12차 5개년 경제계획을 순조롭게 추진하고자 하였다.
둘째로는 중산층의 확대이다.
내수확대를 통해 민생개선과 서비스업 발전을 가속화함으로써 중산층 비중을 확대하는 데 노력하였다. 중산층의
소득수준이 현저히 제고되었으나 주택가격·의료비·교육비의 급등으로
가처분소득이 위축되어 소득 상위계층과 하위계층이 두꺼운 아령형 사회구조를 형성하였다. 이에 따라 조세개혁을
통하여 부유층의 담세를 확대하고, 중류 이하 소득계층에 대한 재정보조 정책을 시행하고, 재산권 개혁으로 농지거래
허용을 통한 농민의 재산소득을 창출하는 등으로 중산층이 두꺼운 올리브(olive)형 사회구조로 전환시키고자 하였다.
셋째로는 환율 안정이다.
환율결정 메커니즘(mechanism)을 개혁하여 위안화 환율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환율제도는 근본적인 변화는 없겠지만
환율안정을 위한 부분적인 개편은 불가피하며, 환율변동성을 축소하기 위해 금융기관이 환차익 목적으로 시장에 참여하는
것을 불허하였다.
넷째로는 감세이다.
적극적 재정정책의 일환으로 감세를 확대하고 민생부문에 투입되는 재정을 확대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중복과세
문제가 제기된 부가가치세 개혁을 통해 기업이윤과 종업원 소득을 제고하고, 개인소득세의 경우 중류 이하 소득계층의
조세부담이 줄어드는 방향으로 세제를 개혁하였다.
다섯째로는 대출의 합리적 증가이다.
통화정책은 경제상황에 맞추어 다양한 정책수단을 조화적으로 운용하여 적기에 조정하되 대출총량 증가는 합리적으로
유지하였다. 통화정책 조정으로 안정성장을 추구하고, 대출총량 관리로 대출구조를 개선하고 금융리스크(risk)를
완화시키고자 하였다.
여섯째로는 금리자유화이다.
예금금리 자유화를 통해 마이너스 실질금리를 해소하고 자금의 효율적 배분을 촉진하는 데 노력하였다. 금리자유화는
경제성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으나 금리가 시장수급에 따라 결정될 경우 저축이 증가하여 시중잉여자금이
투자재원으로 전환 가능하게 되는 것을 도모하였다.
일곱째로는 부동산세 개혁 추진이다.
부동산세 개혁 시범추진, 부동산 억지시책 지속 등으로 부동산 가격을 합리적으로 낮추고 자원세·환경보호세 개혁을
추진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아울러
보장성주책
건설·운영·관리
부문에
대한
투자
및
대출지원으로
저소득
도시근로자·신규취업자·농민공(農民工, 농민출신 도시 근로자)의 주거문제를 점진적으로 해결하고자 하였다.
여덟째로는 물가불안 재연 방지이다.
3농 정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농산품 공급능력을 확충하고, 곡물가격 통제에 대한 성장(省長)책임제 및 채소가격
통제에 대한 시장(市長)책임제를 실시하여 농산물가격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중국은 물가는 하락하는 추세이나 여전히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어 저소득계층이 물가고에 시달리고 있으며, 국제 원자재가격 상승, 미국의 통화팽창정책 실시
가능성 등으로 향후 물가를 낙관할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아홉째로는 소규모 기업 지원이다.
적극적인 취업정책과 다양한 일자리 창출을 위하여 조세부담이 크고 자금조달능력이 취약한 노동집약형 소규모 기업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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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해 세금감면 등을 추진하는 데 역점을 두었다. 연간 납세소득액이 6만 위안 이하인 소기업에 대해 소득액의 50%를
납세대상금액에서 공제하고 20% 세율을 적용하였다.
중국경제의 성장
1. 경제성장 현황과 산업구조의 고도화 중국 경제는 1990년대 이후 1차 산업의 비중이 크게 하락한 반면 2차 산업과
3차 산업의 비중이 상승하는 등 産業構造의 高度化가 급속도로 진행되어왔다. 제조업 부문의 활발한 성장에 힘입어
중국의 수출에서 공산품이 차지하는 비중은1990년의 74.4%에서 2000년은 89.8%로 크게 높아졌다. 특히 수출상품의
고부가가치화에도 성공하여 기계․전자제품의 수출이 1995~2000년 기간중 2.4배로 확대되면서 전체 수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제고되었다. 외자기업의 수출과 수입은 중국의 전체 수출․입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으며, 그 비중은 계속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중국은 대외무역에 있어 아직도 기계류, 부품과원재료 등 중간제품을 수입하여 완제품을 수출하는
전형적인 가공무역구조가 우세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이 과정에서 외자기업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중국의 輸出構造도 1990년대 중반 이후 전기․전자제품의 비중이 크게 상승하는 등 고도화가 급진전되었으며, 특히
IBM(컴퓨터), Nokia, Motorola, Ericsson(이상 휴대전화기)등 미국과 유럽의 다국적기업들이 중국에 대한 투자를
확대하면서 컴퓨터, 유무선통신기기 등의 수출비중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였다. 중국의 주요 업종별 경쟁력 추이를
살펴보면 의류, 신발류, 가전제품이 높은 경쟁력을 유지하고 있는 가운데 직물, 무선통신기기 등의 경쟁력이 강화되는
추세를 보였다. 이는 외자기업 전체 수출액의 1/4 중국 전체 첨단기술제품 수출액의 81%에달하는 규모이다. 미국과
일본에서 우리제품과 경합하는 중국산 제품에는 다국적기업의 생산제품이 상당 부분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미국시장과 일본시장에서 중국의 시장점유율 상승은 중국기업의 경쟁력 강화를의미하기도 하지만 중국에 진출한
다국적기업의 국제적 영업활동의 결과가 반영된것으로 보고 있다. - 7 - 외국인직접투자의 증가2)등에 힘입어
정보통신(IT)관련제품, 석유화학, 자동차 등의 경쟁력이 강화되었으며 금융․보험 등 통신, 유통산업의 발전도 촉진되고
있다.중국은
1978년에
改革․開放政策을
채택한
이후
2002년까지
24년간
年平均
9.3%의
성장률을
기록하여
세계경제(연평균 2.8%)보다 3배 이상의 높은 성장을 지속하고 있다. 1980~2001년중 불변가격 1인당 GDP가 5.3배
증가했으며 생산은 제조업이 6.9%, 농업 등 1차 산업이 3.5배로 각각 증가하였다. 이와 함께 도시소득이4.6배,
농촌소득이 4.0배, 1인당 소비가 4.9배로 각각 크게 증가하는 등 國民生活水準이 대폭 향상되었다. 量的 成長과 더불어
산업구조가 重工業과 高技術産業 위주로, 輸出構造는 1次 産業의 비중은 축소되고 2次(제조업, 건설업)및 3次 산업의
비중이 크게 擴大되었다.製造業 業種別로는 1985~2000년중 重工業(전기․전자제외)의 비중이 소폭 축소되었으나 여전히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가운데
輕工業과
電氣․
電子의
비중은
크게
확대되었다.
輸出은
工産品의
수출비중이
1985년까지도 50%에 불과하였으나 1990년이후 크게 확대되어 최근에는 90%에 근접하였다. 특히 輸出商品중 전기,
전자 등高技術製品의 비중이 크게 확대되어 2000년중 20%를 상회하였다.
중국 성장구조의 변화
먼저 2012년 중국은 일부 경착륙 우려에도 불구하고 7.8%의 양호한 경제성장을 기록했다. 2012년 1분기 성장률은
2011년 대비 1.2%포인트나 낮은 8.1%를 기록하였으며, 2분기 7.6%, 3분기 7.4%로 지속적인 하향세를 기록한 바
있다. 다만 4분기에 7.9%로 반등에 성공하여 전체적인 GDP 7.8%를 기록하게 되었지만, 이는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발했던 1998년(7.8%) 및 1999년(7.6%)과 유사한 낮은 수준이다. 2012년도 경제성장 결과치는 중국이 더 이상 두
자리 수 고성장 국가가 아니며, 중속(中速) 성장 시대에 진입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2012년 경제성장 중 소비기여도가 2년 연속 투자보다 소폭 높아져, 근본적인 성장방식 전환에 단초를 제공했다는
판단이다. 중국정부는 2008년 말 미국발 금융위기로 인해 수출이 큰 폭으로 줄어들자 GDP 성장 구조 중 소비비중을
제고하려는 노력을 4년째 지속하고 있다.
14.2%의 높은 경제성장을 기록한 2007년의 경우, 소비:투자:순수출 간 경제성장 기여도는 39.6:42.5:17.9 였으며,
투자와
수출에
성장을
의존하는
전형적인
성장방식을
보여주었다.
2012년
소비:투자:순수출간
GDP
기여도는
51.8:50.4:-2.2 로 소비 기여도가 투자대비 소폭 앞섰다. 2008년에 소비분야 기여도는 44.1%였으며, 2009년 49.8%,
2010년 43.1%, 2011년 55.5%로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반면, 투자분야 기여도는 2008년 46.9%, 2009년 87.6%,
2010년 52.9%, 2011년 48.8%로 하락세를 나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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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 물가 증가율은 2.6%로 안정세를 구현했다는 판단이다. 2009년 -0.7%로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던 CPI는
2010년에는 3.3%로 반등했고, 2011년에는 5.4%를 기록하여 인플레이션 우려를 불러왔다. 2012년 중국정부는 CPI
구성의 중요부분을 차지하는 식료품(육류, 식용유 등) 가격 억제에 정책중점을 두었으며, 그 효과가 시현되었다는
판단이다.
GDP 중 3차산업 내 서비스업 비중이 전년비 1.2%포인트 상승하여 일자리 창출에 기여했다. 2012년 GDP 중 전체
3차산업 비중은 44.6%로 이는 전년비(43.7%) 0.9%포인트 상승한 것이다. 2012년 한 해 새로 늘어난 일자리는
1266만 명 규모인데, 이중 대부분이 서비스업종에서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고정자산투자는 전년비 20.3% 늘어나 고수준을 지속했으나, 증가세 감소를 시현했다. 4조 위안 경기부양책이 나왔던
2009년 고정자산투자 증가율은 30%에 달했으나, 2011년 23.8%에 이어 2012년에도 증가세가 둔화되었다.
지역별로는 경제가 발달한 동부지역이 16.5%에 그친 반면, 중부지역 24.1%(중부굴기), 서부지역 23.1%(서부대개발),
동북지역 26.3%(동북진흥)로 지역발전 정책이 수행 중인 곳에 투자가 집중되었다. 2012년 특징 중 하나는 민간부문
고정자산투자 증가율이 24.8%로 전체 증가세를 앞섰다는 점이다. 전체 투자액 중 민간분야 비중은 59.8%로 매년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대외개방 패턴에도 변화 조짐
EU시장 수출 수요 감소에도 불구하고 안정적인 무역 증가세를 시현했다. 2012년 중국 수출은 전년비 7.9%
증가했고, 수입은 4.3% 성장하여, 2311억 달러의 무역흑자를 기록했다. 이는 전년도보다 흑자규모가 762억달러 늘어난
것이다. 전년대비 수입 증가세는 둔화되었고, 수출 증가세는 회복되었다. 대EU 수출은 전년비 6.2% 줄어들었으나, 대미
수출이 8.4%, 대아세안 수출이 20.1%, 대러시아 수출이 13.2% 늘어, 수출 다변화에 일정한 효과를 거둔 것으로
판단된다. 제품별로 보면, 첨단기술 제품의 수출 증가율이 9.6%, 수입 증가율은 9.5%로 일반 가전제품을 앞섰으며,
가공무역 수출 증가율은 3.3%로 일반무역(7.7%) 대비 증가세 둔화가 확연하다.
FDI(해외직접투자)는 감소세(-3.7%)를 시현했다. 업종별로 보면 제조업(-6.2%), 전력·천연가스 생산공급(-22.6%),
부동산 개발(-10.3%) 등은 전년비 감소세를 시현했으나, 정보전달·컴퓨터서비스·소프트웨어(24.4%), 도·소매(12.3%),
교통운수·창고(8.9%) 등은 증가세를 보여, FDI도 구조적인 변화를 보인 것으로 판단된다.
반면, 민간 연구팀(쓰촨성 시난재경대학)은 2010년 지니계수가 0.61이라는 결과를 발표한 바 있어, 관방 수치에
의혹을 보내고 있다. 이에 신정부는 소득배증 계획, 개인소득세의 면세점 향상 등 1차분배 구조를 개선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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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제(稅制)개편 및 사회보장 강화를 통한 소득재분배 개혁을 강화함으로써 빈부격차 완화 및 중산층 확대 정책을 추진할
예정이다.
중국정부가 향후 경제발전의 걸림돌로 꼽은 사항은 노동력 부족과 도농 간 격차이며, 향후에는 7~8%대의 중속
성장이 지속될 것임을 천명했다. 2012년에 중국 최초로 노동인구(15-60세) 345만 명이 감소했으며, 인구구조상
이러한 추세는 지속될 전망이다. 반면, 9억 명이 넘는 거대한 노동력이 여전히 존재하는 바, 급격한 성장세 둔화는
나타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이 중국정부 입장이다. 또한 이전에 두 자리 수 고성장 시대에 나타났던, 에너지 고소비형
위주 발전모델, 환경파괴를 수반한 성장 등이 이제는 더 이상 불가능함을 정부 정책결정자들이 천명하고 있다.
종합적으로 보면, 2012년 중국경제는 성장구조의 전환을 위한 단초를 제공했다는 판단이다. 이러한 결과를 바탕으로
향후 중국정부는 '민생우선' '도시화를 통한 소비증진' '소득격차 해소' 등 기존의 정책중점 분야를 견지할 것으로
전망된다.
2016년 세계경제의 키워드 중 하나는 바로 ‘중국경제성장 둔화’다. ‘최근 경제동향과 2016년 세계경제전망’을 주제로
첫번째 발표를 맡은 정성춘 KIEP 국제거시금융실장은 “중국을 중심으로 신흥국 경제성장세가 둔화되고 있다”고 말했다.
이러한 세계경제의 변화에 직격탄을 맞는 국가들은 바로 ‘신흥국’들이다. 그동안 신흥국들은 경제 규모를 확대하는
정책을 통해 가파른 경제성장을 이뤘다. 하지만 최근 중국경제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신흥국 경제에 적색등이 켜졌다.
이에 대해 정성춘 박사는 “신흥국의 경우 경제회복을 할 수 있는 여력이 부족하다”라며 “신흥국은 중국 경제 성장세가
둔화되면서, 고정자산투자, 부동산 투자가 큰 폭으로 감소됐다. 그나마 인프라 투자가 이뤄져 6.8p하락세를 기록했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선진국은 어떠할까. 정성춘 실장은 구조적인 경제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분석한다. 인구감소로
인해 수요가 낮아지면서 기업투자와 일자리 창출이 감소하는 등 경제 악순환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정성춘 실장은
“현재 미국경제는 플러스 성장률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런 경제성장세가 지속될 것이냐는 질문에
대해선 의문을 갖고 있다”며 “금리인상으로 소비가 위축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다. 유럽의 경우, 그리스 경제위기 이후
완만한 회복세를 보이고 있으나, 고용시장은 2008년 이후 제자리 걸음이다. 정 실장은 “유럽 고용시장 개선에 시간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아베노믹스’를 통해 재정확대정책을 펼쳤던 일본경제의 전망도 밝지 않다. 이에 대해 정성춘 실장은 “올해 일본경제는
0.4%의 미약한 성장을 보일 것으로 전망된다”며 “엔화약세, 소비세 인하 등의 효과가 사라지면서 다시 ‘마이너스 경제’
상황으로 돌아왔다”고 밝혔다. 최근 국제경제의 또다른 특징은 ‘세계교역량이 감소’하고 있다는 점이다. 세계 전체
교역량이 감소하면서 투자규모와 일자리 창출도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두 번째 발표를 맡은 이재우 IMF 아시아·태평양국 부과장은 “세계무역성장률이 상당히 미약한 실정”이라며 “현재로선
이 상황이 상당기간 지속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밝혔다.
특히 수출·교역의존도가 높은 아시아에선 세계교역량 감소가 악재로 다가오고 있다. 교역량 감소가 경제성장에도 큰
여파를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이재우 부과장은 “아시아 지역 경제성장률은 유럽, 미주 등 다른 지역보다 높은
수준을 보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며 “하지만 인도, 필리핀 등 극히 일부 아시아 국가를 제외한 다른 아시아 국가의
경우 경제성장률이 떨어지고 있다. 이런 하락세는 당분간 벗어날 수없을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의 지속적인 성장 및 개방은 아시아지역 산업 활동의 재조정을 촉진하고 있으며 지역내 경제통합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중국의 부상은 한국에 매우 가치 있는 기회를 창출하고 있는 한편, 상당한 위협 및 위험요인을 함께 제공하고
있어, 이에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과제를 제시하고 있다. 한국의 대중국 경제관계는양국간 교역 및 투자의 급격한
확대를 통해 양국간 상호 의존성 증가를 가져왔다. 현재까지 중국의 고성장이 한국 경제에는 커다란 혜택이 되었으나
교역 역동성의장기 지속성에 대한 불확실성 및 중국으로의 산업이전에 따른 제조업부문의 공동화우려가 대두되고 있으며,
한국과 중국의 기술경쟁력 면에서도 한․중 주요산업에서의기술경쟁력 격차는 분명히 존재하지만 이런 기술경쟁력 격차가
지속되어 한국의 우위구조가 오랫동안 지속될 가능성에 대해서는 확신할 수 없다는 점이다. 업종별로 차이는 있으나
2-7년 정도의 기술경쟁력 우위는 그동안 한․중 양국간의기술격차가 해소되어 오는 속도를 볼 때 아주 쉽게 추월될 수
있는 격차로 보인다.한국 주력산업에서 한국의 경쟁우위가 지속적으로 약화되어 가는 현실은 중국경제의 성장에 따른
한국의 기회요인이 점차 좁혀짐과 동시에 세계 주요수출시장에서한국의 입지가 지속적으로 위협받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향후 중국의 경제적 부상에 대응하여 우리는 지나친 중국경제 의존도의 증가는경계하면서 한․중 양국간에 보다 장기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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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점에서 적극적인 산업․경제 협력을 통해 대립이 아닌 상생(win-win)의 구도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 필요하다. 우리의
대응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행해 나가기 위하여 정부가 해야 할 역할은 첫째, R&D에 대한 국가차원의 과감한 투자로
기초기술과 원천기술의 수준을 높이는것이다. 둘째, 교육․인적자본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로 지식기반경제로의 이행을
가속화하여야 한다. 셋째, 국내 기업 환경을 지속적으로 개선하여 국내투자를 촉진하고 적극적으로 외국인직접투자를
유치하여 외국 선진기업의 첨단기술과 우리 기업의 생산기술, 마케팅 능력의 결합을 통하여 생산구조의 고도화와
수출능력을 배양할 수 있도록 한다. 특히 제조업에서는 소재 및 부품부문에 외국인투자를 유치하여 기술수준을 높이는
것이
필요하며,
제조업을
지원할
물류,
금융,
정보서비스업
등에서도
외국인투자유치가
매우
필요하다.
넷째,
중장기적으로는 일자리 창출을 위한 서비스분야 개발및 제조 생산성 증진을 이루어야 한다.
자기 소개
wen lingling
2012110468
사회학과 email:1003672522@qq.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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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핑포인트란
1.책제목, 출판사, 출판년도, 저자(역자)
책제목:티핑포인트란(Tipping Point)
저
자 : 말콤 글래드웰
역
자 : 임옥희
출 판 사: 21세기 북스
출판년도: 2004.09.14.
2.왜 이 책을 선택하였나?
현대사회를
'정보혁명',
컴퓨터
혁명'
또는
'커뮤니케이션
혁명'으로부터
파급된
정보사회라고
부른다.
티핑포인트란(Tipping Point) 균형을 유지하던 상태에서 균형을 깨고, 한순간에 전파되는 극적인 순간을 이른다. 저자는
유행은 질병과 같은 전염 현상이 있다고 말한다. 유행이 발생해가는 어느 지점에 극적으로 폭발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인터넷과 영향으로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책을 선택했다.
3.저자 소개
말콤 글래드웰(영어: Malcolm Gladwell, 1963년 9월 3일 ~)은 캐나다의 저널리스트이자 작가, 강연가이다.[1]
1996년부터 《더 뉴요커》에 정식 작가로 활동해 오고 있다. 5권의 저서 모두 현재 뉴욕 타임즈 베스트셀러 목록(The
New York Times Best Seller list)에 올랐다.
글래드웰의 책과 언론기사들은 사회과학 연구의 놀라운 의미들을 다루고 있어 사회학, 심리학 그리고 사회심리학
학문적 분야에서 널리 활용되고 있다. 그는 2011년 6월 30일 캐나다 훈장을 받았다. 《아웃라이어》라는 책에서 1만
시간의 법칙을 제시했다.
4.책 내용요약
티핑포인트란(Tipping Point) 균형을 유지하던 상태에서 균형을 깨고, 한순간에 전파되는 극적인 순간을 이른다.
저자는 유행은 질병과 같은 전염 현상이 있다고 말한다. 유행이 발생해가는 어느 지점에 극적으로 폭팔하는 순간이
있다는 것이다.
1775년 4월 18일 오후 보스턴의 마차 대여소에서 일하던 한 소년은 어느 영국 장교가 다른 장교에게 “내일은 난리도
아니겠군”이라고 말하는 것을 우연히 엿들었다. 소년은 이소식을 전하러 보스턴의 노스 엔드에 사는 은세공인 폴
리비어의 집으로 달려갔다. 리비어는 진지하게 소년의 말을 들었다. 그날 그가 이 소문을 들은 것은 처음이 아니었다.
상당히 많은 영국군 장교들이 일찌감치 보스턴의 한 카페에 모여 목소리를 낮추며 한 이야기들을 들었던 것이다.
보스턴 항구에 있는 두 척의 영국 군함 소머셋과 보이네 아래에 메어둔 배에서 영국 선원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날 아치 또 다른 선원 몇 명이 막바지 일을 수행하느라고 이리저리 종아다니는 것이 눈에 띄었다. 오후가
지나면서 리비어와 그의 친한 친구인 조지프 워렌은 영국이 중대 조치를 취할 작정이라는 오랜 소문이 사실임을 점점 더
확신하게 되었다. 존 핸콕과 새뮤얼 애덤스와 같은 신민지 지도자들을 체포한 다음 지역 민병대가 비축해 세뮤얼
애덤스와 같은 식민지 지도자들을 체포한 다음 지역 민병대가 비축해 두었던 총과 탄약을 몰수하기 위해 콩코드와
보스턴 남서쪽에 있는 렉싱턴이라는 마을로 진국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았다.
그 이후 일어난 사건은 역사적인 전설의 일부가 되어 오느날 모든 미국학생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가 되었다. 그날 밤
10시 우ㅓ렌과 리비어가 만났다. 그들은 영국군이 보스턴을 둘러싸고 있는 지역에 쳐들어올 것임을 경고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야 지역 민병대가 봉기하여 영국군과 대처할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이에 고무된 리비어는
보스턴 항구를 가로질러 찰스턴에 있는 부둣가로 갔다. 그는 한밤중에 말을 타고 렉싱턴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두 시간
동안 그는 13마일을 달렸다. 찰스턴, 메드퍼드, 케임브리지, 메노토미 등 그가 통과하는 모든 마을에 들러 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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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드리고는 이소문을 퍼뜨렸다. 그는 지역 식민지 지도자들에게 곧 영국군이 쳐들어올 테니 이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도
알려달라고 앴다. 교회의 종이 울리기 시작했다. 북소리도 울려퍼졌다.
풀 리비어에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또다시 그들 나름의 기수들을 폭발함으로써 이 소식은 바이러스처럼 번져나갔다.
비상경보는 전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이 소식은 1시경에 매사추세츠의 링컨으로, 3시경에는 서드베리, 5시경에는 보스턴
북쪽으로 50마일 떨어진 앤도버, 그리고 아침 9시경에는 저 멀리 애쉬비에서도 상당히 먼 북서쪽까지 전달되었다. 19일
아치내 영국군이 렉싱턴을 향해 행군을 시작했을 때 그 지역으로 진군하던 영국군이 너무나 놀랍게도 조직적이고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다. 그날 콩코드에서 영국군은 식민지 민병대와 마주쳐 완전히 패배했으며 이 교전으로 인해 미국 혁명으로
알려진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5. 이 책이 제시하는 사회변동을 이해하는 핵심관점은 무엇인가.
1) 티핑포인트를 완성시키는 3가지 규칙
티핑 포인트의 3가지 규칙, 즉 소수의 법칙, 고착성 요소, 상황의 힘은 전염을 이해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들이다.
이 법칙들은 어떻게 티핑포인트를 만들 수 있는가에 관한 지침으로, 여러 가지 당혹스러운 상황과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점염의 현상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준다.
소수의 법칙: 80 대 20의 원칙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대개 ‘작업’ 의 80%는 참여자 20%에 의 해 수행된다는
개념이다. 전염애서는 이러한 불균형이 더욱 극단적으로 나타난다. 극소수의 사람들이 대부분의 일을 저지르는 것이다.
고창성 요소: 고창성 요소는 전염되는 메시지를 기억하도록 만드는 특수한 방식이다. 정보를 제시하거나 구조화할 때,
작지만 고창성이 강한 변화만 주어도 엄청나게 다른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상황의 힘: 상황과 조건과 이런 것들이 작용하는 특수한 상황에 강한 영향을 받는 것이 전염이다. 상황에 따라
달라지는 인간의 행동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 인간 행동이 훨씬 더 암시에 걸리기 쉽다는 점을 말해준다.
세계는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우리의 직관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보에 접하는 방식은 투명하지도
직접적이지도 않다. 그 방식은 혼란스럽고 불투명하다.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인간의 의사소통이 그 나름의 대단히
특이하고도 반직관적인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2) 티핑포인트 관점으로 사회변동을 이해한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다.”(<총, 균, 쇠> )
발명은 한 사회가 아직 충족되지 못한 어떤 필요를 느낄 때, 즉 어떤 기술이 불만스럽거나 부족하다는 인식이
만연되어 있을 때 이루어진다. 하지만 어떤 발명가가 드디어 기존의 불만스러운 기술보다 더 좋은 해결책을 찾아낸다. 이
해결책은 사회의 가치관이나 각종 기술과 배치되지 않는다면 사회는 그것을 받아들인다. 발명은 어떤 사람인 사회가 아직
발명은 한 사회가 아직 충족되지 못한 어떤 필요를 느낄 때, 즉 어떤 기술이 불만스럽거나 부족하다는 인식이 만연되어
있다. 발명한 해결책이 필요하고 전파될 수 있다면 사회가 그것을 받아들인다.
애디슨은 축음기를 발명 할 때 10가지 용도를 생각했다. 그중에 죽어가는 사람의 마 유언을 기록해서 시각장애인에게
들려주는 이런 기능이 있었다. 하지만 나중에 음악계에서 사용해서 이 발명을 발전시켰다. 초반에 애디슨은 본인 발명이
음악에 사용되는 것은 원치 안았다.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
할
때
처음은
기압양수기를
만들려고
했다.
하지만
사회는
와트의
증기기관을
수력·풍력·축력·인력 등 농업사회의 기본적인 동력을 능가하는 것으로서 동력혁명을 가져왔으며, 산업혁명을 희망이라
부를 수 있게 한 기술적인 기초를 준비하기에 이르렀다. 또 면공업의 급속한 발전은 관련된 모든 산업의 발전을
촉진시키고 특히 기계생산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재 생산부문에서는 철공 업·석탄 업·기계공업의 발전이 현저하여 석탄과
철의 생산은 급속하게 중대하였다.
하지만 수요가 없다고 판단되면 선진적인 발명이라도 사회는 받아 드리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인체냉동보존은 미래의 의료 기술로 소생할 수 있는 것을 기대하고, 사람의 사체를 영하 196℃의
액체질소에서 냉동 보존하는 것을 말한다. 저온 보존된 사람이나 대형 짐승을 현재의 기술로는 소생시킬 수는 없다.
그러나 이 보존방식은 미래에 소생 기술이 만들어질 것이라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불치병으로 사망 선고를 받은
사람도 이 기술을 이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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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동상태로 보존된 사람은 냉동인간이라 부른다. 처음 냉동인간이 된 사람은 간암 선고 후 시한부 인생을 살던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베드포드이며, 1967년 체내의 혈액을 전부 제거한 후 동결보호제를 체내에 주입하고 액체질소를 채운
영하 196℃의 금속용기 안에서 동결되어 냉동 상태에 있다. 그 밖의 저명인사로는 야구 선수로 활동한 테드 윌리엄스가
있다.
1962년 미국의 물리학자 로버트 에틴거는 사람을 냉동시켜 보존하였다가 해동시키면 다시 살아난다는 주장을 펼쳐
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의학의 발달로 인간의 모든 질병에 대한 치료가 가능해 진다면, "죽음이란 제대로 냉동
보존되지 못해서 다시 태어날 수 없는 상태일 뿐이다"고 했다. 실제로 개구리나 금붕어의 경우에는 영하 200도 정도의
액체 질소 안에 넣어서 급속히 냉동시킨 후에 미지근한 물에 넣어 해동시키면 되살아난다. 그러나 아직까지 인간의
경우에 이러한 냉동 부활이 성공한 사례는 없다. 물의 특성 때문에 얼면서 부피가 늘어나는데, 이 때문에 세포막이
파열되어서 손상을 입게 되면 해동된 후에도 되살아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 사람처럼 복잡한 구조와 상대적으로 큰
크기를 가진 생명체의 경우에는 얼면서 다양한 장기와 모세혈관 등이 다칠 수 있기 때문에 냉동 후 부활이 쉽지 않다.
완전한 냉동은 아니지만, 체온을 낮추어 동면 상태를 유지한 후에 시간을 두고 치료하여 성공한 사례는 있다. 작년
미국에서 심장마비로 사망 진단을 받은 여성을 이틀 동안 체온을 낮추었다가 높이면서 다시 깨어나도록 시술한
저체온치료법으로 되살렸다. 당시 의사들은 냉동 담요와 냉동 주사로 환자의 체온을 33℃까지 낮추어 신체의 모든
기능을 정지시킨 후에 서서히 온도를 높이자, 정지했던 심장이 다시 뛰기 시작해서 소생한 것이다.
현재
존재하는
인체
냉동보존
서비스
기관
중에서
냉동
보존술에
대해
가장
많은
연구를
진행
중인
알코르생명연장재단에서는 대략 2040년경에 냉동인간 소생술이 실현될 것이라고 예견하고 있다. 그리고 현재 냉동
인간들이 100여 명 정도 존재하며, 냉동 인간이 되기를 희망하는 사람들도 천여 명에 이른다고 한다. 공식적인 최초의
냉동인간은 암에 걸렸던 미국의 심리학자 제임스 베드포드이다. 그는 73세였던 1967년 미래에 암 치료법이 나오기를
희망하며 냉동인간이 되기를 원했고, 현재까지 액체질소를 채운 금속 용기 안에 동결된 상태로 안치되어 있다.
냉동 인간이 부활하기 위해서는 냉동 기술도 발달해야 하지만, 해동된 후에 그들이 원하는 대로 불치의 병을 치료할
수 있는 의술도 같이 발전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의 냉동 인간들이 언제 부활할 수 있는 지는 아직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에틴거 박사는 냉동인간의 소생을 확신하고 자신의 1,000번째 생일에 초청할 친지들도 미리 정해
두었다고 하지만, 아직까지 인체 냉동보존술은 미완의 상태라고 할 수 있다. 현재까지의 과학기술로는 인체의 전부가
아니라, 일부만을 냉동시킨 후에 정상적인 상태로 해동해서, 복구하는 정도만 가능하다.
현재로서는 냉동인간 기술이 부족해서 사회가 받아들이지 않지만 나중에 기술이 반전되면 산업혁명처럼 거다란 변화를
일으킬 가능성이 있다.
미국 애리조나 주 알코어 생명재단에서의 전신 시술은 약 150,000.00 달러가 소요된다. 기본적인 시술 절차는 다음과
같다. 시신을 얼음 통에 넣고, 심폐소생장치를 사용해 호흡과 혈액순환 기능을 복구시킨다. 피를 뽑아내고 정맥주사를
놓아 세포의 부패를 지연시키고 환자를 애리조나주에 있는 알코르 본부에 이송한다. 시신의 가슴을 절개하고 늑골을
분리한다. 체액이 어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모든 체액을 빼 내고 특수액체를 넣어 내부 기관이 손상되지 않게 한다.
사체를 냉동보존실로 옮긴 다음 특수액체를 부동액으로 바꾼다. 며칠 뒤 시체는 영하 196℃로 급속 냉각되어 질소
탱크에 보존된다. 냉동인간은 불치병이나 미래를 위해 아니면 노화가 두려운 사람이 냉동인간이 된다. 만약에 냉동인간이
깨어나면 어떻게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문제다. 그들의 후손은 살아있다면 사회적문제가 생길 수 있다.
세계는 우리가 원하는 것처럼 우리의 직관과 일치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보에 접하는 방식은 투명하지도
직접적이지도 않다. 그 방식은 혼란스럽고 불투명하다. 우리는 무엇보다 우선적으로 인간의 의사소통이 그 나름의 대단히
특이하고도 반직관적인 규칙을 가지고 있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6. 이 관점으로 인류의 역사를 해석한다면?
산업혁명
1730년대에 폴과 와이어트가 발명한 방적기는 후에 아크라이트(R. Arkwright)의 수력방적기로 실용화되었고, 케이(J.
Kay)의
나는
북(flying
shuttle)의
발명은
방적부문에서의
기술혁신의
출발점이
되었다.
이것이
크럼프턴(S.
Crompton)에 의해 훗날 18세기 후반 뮬 방적기로 발전하게 된다. 또한 날염기술도 개량되면서 인도 제품 값의
반값으로 날염이 가능해졌고 결과적으로 영국의 면직물은 인도 면직물과 대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신기술과
271
기계의 발명은 노동력의 절감과 더불어 생산력의 향상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됨으로써 향후 면직물이 영국의 주력
산업으로 식민지 개척과 노예무역, 그리고 해외 시장의 확장 과정에서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될 수 있었다.
하지만 와트가 증기기관을 발명하는데 선구적인 역할을 할 것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제철공업 역시
신기술의 도입으로 16세기 후반 급속히 발전가도를 달리고 있었다. 용광로(blast furnace)가 도입되면서 종래의
분괴(bloomery)를 이용한 직접 제철방식에서 용광로를 이용한 간접제철방식으로 대체되었다.
산업혁명의 선행시기에 가장 중요한 공업 부문은 무엇보다 모직물 공업(TheFleece)이었다. 영국 모직물 공업은
14세기 에드워드 3세에 의한 국산 양모수출 금지와 국내 모직물생산 장려정책 이후 16,17세기 튜더-스튜어트 절대왕정
시대의 중상주의적 보호정책의 보호아래 ‘국민적 산업’으로 육성되었다. 모직물 공업은 19세기 면직물 공업에게 밀리기
전까지 농촌 가내공업을 중심으로 전 지역에 걸쳐 광범위하게 행해졌다. 이러한 모직물 공업의 확산은 오늘날
대공장제와도시로의 집중 현상과는 정반대 현상이었다. 왜냐하면 모직물 공업의 다양한 공정은 부녀자와 아동을 포함한
소규모 가족노동에 적합하였기 때문에 길드의 통제를 받지 않는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어 갔다. 특히 짧은 섬유의
섬세한 방모사로 짜여 진 무거운 넓은 폭 직물이었던 구직물(old draperies) 대신 1560년대에 네덜란드의 신교도들이
전쟁을 피해 이스트 앵글리아로 이주하면서 들여온 신직물은 보다 거칠고 가벼운 긴 섬유 소모사로 짜여 진
직물(stuff)로 가볍고 다채로우며 값이 저렴하여 대체적 수요가 컸다. 이렇게 구직물에서 신직물로의 제품구조의 변화는
기술적 혁신을 수반한 것은 아니었지만 섬유공업의 수요와 공급에 있어서 보다 압도적인 지위를 차지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특이할 만한 일은 계속된 채굴로 인해 깊어진 갱도에서 석탄을 지상으로 운반하기 위해서 사용된
마력 , 수력, 풍력 이외에 기계동력이 본격적으로 이용되면서 발생했다.
산업혁명과 인구의 관계에 있어서 산업혁명으로 말미암아 마침내 인류가 맬서스의 덫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는 것은
결과론적인 표현에 불과하지만, 산업혁명과 인구변화가 상호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단순히
양적인 문제만을 이야기한다면, 18세기 초 영국의 인구가 프랑스의 1/3 정도밖에 되지 않았는데 산업혁명이 왜
프랑스가 아닌 영국에서 발생했느냐에 대해서는 적절한 설명을 도출해 낼 수가 없다. 다음 표를 보면, 잉글랜드의 인구가
산업혁명 시기에 다른 주변 유럽 국가들에 비해서 훨씬 적은 것을 볼 수 있다. 그렇지만, 동시대 다른 나라와 인구
증가율을 비교해 보면 잉글랜드가 현격하게 높은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인구 증가율과 산업혁명의
상관성을 속단하기는 어렵다.
18세기 영국에서는 대체로 전쟁이나 전염병, 기근 등의 큰 재해를 겪지 않음으로써 인구의 자연증가율에 큰 영향을
미치는 일은 없었다. 1730~1755년 동안 농업생산량이 지속적으로 증가하였고, 이로 말미암아 곡가가 내려갔으며, 이와
아울러서 곡물 수확을 위한 더 많은 노동력이 필요했다 도시의 환경 . 및 위생 상태도 개선되면서 지난시절 흑사병과
같이 사망률에 큰 영향을 주는 일은 줄어들었다. 1750년대 영국은 곡물수출국이었으며, 금속 공업을 제외한 대부분의
공업원료는
국내에서
생산되는
농산물이었다.
1793년과
1813년
기간
동안
프랑스와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인플레이션으로 인한 물가 상승률이 높아지고 흉작도 찾아왔지만, 이전 시대와 같은 대규모 인구 감소는 없었다. 이는
18세기 전반에 걸쳐 영국의 경제적 ․
사회적 조직의 수준 ­ 교통의 개선, 은행제도의 개선, 상업의 활발, 감자와 같은
구황작물의 보급, 구빈법의 효율적 운영 등 - 이 보다 향상되었음을 의미한다.
이러한 인구 성장이 산업혁명의 큰
재원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영국 산업혁명의 전제조건으로 농업혁명을 꼽는다는 사실은 공업화 단계에서 농업 부문의 역할이 매우
중요했음을 의미한다. 딘 ․
콜의 추계에 의하면1700년의 영국 국민총생산의 구성비는 공업 및 상업의 30%에 대해서
농업은 43%였다고 한다. 18세기 중엽까지 영국은 곡물수출국이었으며, 농업 소득의 증대는 공업 제품의 구매력을
증진시킴으로써 공업 생산 향상에 영향을 미쳤으며, 이는 농업을 통한 초기 자본의 축적을 가능하게 하였다.
산업혁명의 선행 시대에 행해진 생산조직의 측면을 간략히 살펴보면, 크게 세 가지 형태를 가진다. 첫 번째는 길드에
소속되지 않은 독립된 소생산자들이 가족이나 도제 노동에 의거한 가내수공업적 형태로, 대체로 5~6명의 방사공을
필요로 하는 직기 1대 이상을 보유하였고, 쇠모, 방모, 직포작업 등을 수행하였다. 이들 중에 일부는 여러 대의 직기를
보유하고 소수의 노동자를 고용하기도 하였으나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조차 소제조업자 계급은 자신도 자본가라기보다는
함께 노동해야만 하는 노동자들과 별반 차이가 없는 처지였다. 이때 ‘제조업자’(munufacturer)는 공업경영자(captain
of industry)가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장인(artisan), 즉 자기의 손으로 일하는 사람이었다. 두 번째, 모직물공업의
중심지에서는 대체로 상인이 직접 생산을 관리하는 선대제(putting-out system) 가 발달하였는데, 이 경우에 있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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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산자인 가내공업자들은 독립적 생산자가 아니라 상인 자본이 지배하는 생산조직에 편입된 종속적 생산자 혹은
노동자라고 볼 수 있었다. 선대상인들은 가내공업자들에게 원료뿐만 아니라 생산수단인 도구까지 제공하였고 필요에
따라서는 대규모 시설을 갖추고 여러 대의 직기를 설치하여 운영하는 경우도 있었다. 물론 대부분의 경우는 여전히
이러한 직영작업장보다는 가내수공업적인 소규모 선대제 작업장을 운영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 번째의형태는 기계를
갖추지는 않았어도 다수의 수공업자들을 고용하여 전체적인 통제하에서 분업과 협업을 통한 작업장 운영방식을 택했던
매뉴팩처(manufacture) 방식이다. 그들 중 일부는 수백 대의 직기와 수천 명의 노동자를 고용하는 대규모 작업장도
운영하였던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형태는 ‘공장의 원형’(proto-factory)에 가까운 것이었다. 어쨌든 당시 대부분의
매뉴팩처들은 여전히 소규모 작업장의형태가 보편적이었고 그 대신 매뉴팩처의 방식들은 지역과 공업 분야를 넘어
광범위하게 확산되었다. 이렇게 생산조직의 측면에 있어서‘가내수공업-선대제-매뉴팩처’라는 발달의 과정 속에서 여기에
각종 기술혁신에 의한 기계의 보급과 상업자본의 산업자본으로의 전환과정을 통해서 기계와 동력자원, 이윤을 위한
고정자본의 투입으로 말미암아 향후 영국이 ‘세계의 공장’으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7. 이 관점으로 해석하면 앞으로의 세상은?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일어난 민중혁명은 페이스북이 만들어낸 최초의 혁명이었다. 튀니지의 독재자 엘 아비디네 벤
알리 대통령이 15일 사우디아라비아로 탈출하면서 23년 동안 계속돼온 튀니지의 독재정권이 막을 내렸다. 이 혁명의
원동력은 조직적인 검열망을 뚫고 세계 각국에서 밀려들어온 페이스북 포스트였다.
이번 튀니지 민중혁명의 클라이막스는 이보다 하루 전인 14일에 예고됐었다. 독재자 벤 알리 대통령은 이날을 기해
튀지니의 모든 인터넷 검열을 종료한다고 선언하고 구금돼있던 블로거들을 석방시켰다. 그 가운데는 튀니지의 인터넷
검열 실상을 폭로했던 슬림 아마모우씨가 석방돼 일약 국민적 영웅으로 떠올랐다. 슬림 아마모우씨는 약 9개월 전에
뉴미디어 전문 인터넷 매체인 'ReadWriteWeb'에 벤 알리가 조직해 운영하는 튀니지 인터넷 경찰의 실상을 폭로하는
글을 게재했다. 튀니지 인터넷 경찰은 튀니지 국민들이 페이스북이나 지메일에 접속하는 로그인정보와 비밀번호를 해킹해
검열을 하고 접속을 방해하는 조치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인터넷 경찰은 약 600명으로 구성돼 튀니지 각 지역에
흩어져 마치 인터넷 커뮤니티처럼 활동하고 있었다. 슬림 아마모우씨는 이 폭로를 계기로 구속 수감됐다. 튀니지의 소셜
네트워크 사용자들 사이에는 슬림 아마모우씨의 석방을 촉구하는 캠페인이 대대적으로 번져갔다. 불특정 다수의 수많은
사람들이 반정부 메시지를 페이스북에 실었다. 동시에 프랑스와 이집트의 운동가들로부터 지지 내용을 담은 수많은
블로그와 게시물들이 페이스북을 타고 쏟아져 들어왔다. 여기에는 페이스북의 자동번역 기능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집트처럼 외국어로 쓰인 블로그나 포스트 내용들도 자동으로 프랑스어로 번역돼 전달됨으로써 엄청난 양의 반정부
지지 문서를 튀니지 인터넷경찰들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들 블로그들은 마치 세계 각국에서 쏟아져 들어오는
DDoS 공격과 같은 것이었다.
다행히 튀니지는 아프리카 국가 가운데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나라인데다, 페이스북 보급률이 전체 인구 대비 16%에
달해 최고 수준에 있다. 바로 하루 전인 14일까지도 검열을 받고 있었지만 그래도 유튜브나 플리커가 아예 차단됐었기
때문에 페이스북이 외국과의 소통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결국 페이스북을 타고 들어온 엄청난 지지에 힘 입어 튀니지 국민들이 벤 알리의 독재정권에 끝까지 저항할 수
있었다. 마침내 벤 알리는 저항에 못 이겨 인터넷 검열을 풀고 슬림 아마모우씨를 포함한 블로거들을 석방한 바로
다음날, 국외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이번 튀니지 혁명은 페이스북을 포함한 소셜 네트워크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막대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지를 여실히 입증하고 있다. 특히 중국의 경우 트위터와 페이스북과 같은 소셜
네트워크를 철저히 차단하고 있으나 이번 튀니지 혁명을 보고 적지않은 충격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정보사회란 급속한 정보기술 혁신의 진척과 함께 정치, 경제, 문화 등 사회구조 전반에 걸쳐 정보와 지식의 가치가
높아지는 사회 현상을 지칭한다. 정보사회는 산업의 정보화와 아울러 궁극적으로 정보의 사회적 가치가 높아질 때 즉
정보화 과정에서 필요한 개개인의 인지, 태도, 가치관 및 행동의 변화와 새로운 정보환경의 변화가 얼마만큼 서로
상호조화를 이루느냐에 따라 이상적인 정보사회의 실현이 앞당겨질 수도 늦춰질 수도 있다.
인터넷은 기술 발전으로 인해 더 큰영향력을 가질 수 있다. 교통이나 인터넷 쇼핑 네트워크 등 기술중 새로운 기술이
나올 것이며 이런기술로 인해 더 세계화가 될 것이다. 사람들은 국가를 넘어서서 기업이나 공동처로 더 밀접한 관계를
갓고있을 가능성이 있다. 국제로서 정부가 대량으로 투자해서 경제를 발전시키는 형식이 더 이상 필요한가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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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이 날것이다.
8. 이 책은 나에게 어떤 통찰력을 주었나?
이책을 통해 사소한 것이 커다란 영향력을 줄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예를들어 광고의 메시지가 어떤 원리와
커뮤니케이션을 통해 소비자의 의식에 달라붙어 기억되고 구체적인 구매 행위로 이어지면서 티핑을 하는가라는 점을
과학적으로 분석하였음.
유행이 발생하는 것은 ‘변화를 일으키는 소수의 놀라운 능력’과 ‘변화를 유발하는 상황의 힘’이라고 말하고 있음.
사회적으로 큰 힘을 지니고 있는 특별한 사람들, 그런 소수를 찾아내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사회적인 전염의
과정을 형성할 수 있다.
거창하고 총체적인 노력이 아니라 미시적인 변화의 노력이 전체의 변화를 가져오는 폭발적인
힘으로 점화되는 과정 을 세부적으로 꼼꼼하게 짚어보면서 설득력 있게 제시한 점임. 누구나 기대하고 원하는 변화란
아주 소수의 사람에 의해 또 상황의 필요를 이해하고 상황을 고려한 작은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놀라운
통찰력으로 파악하여 다양한 사례로 제시하고 있음.
9. 이 관점에 연관된 다른 책이나 자료를 소개한다면?
<총,균,쇠> 저자 제레드 다이아몬드 1998.08
《총, 균, 쇠》(Guns, Germs, and Steel)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로스앤젤레스의 지리학 교수인 재러드 다이아몬드의
책이다. 저자는 '모든 이들의 최근 1만 3천 년간의 짧은 역사(A short history about everyone for the last
13,000 years)'라는 별도의 제목을 붙였다. 1998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유라시아 문명이 다른 문명을 정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유라시아 인종의 지적, 도덕적, 유전적 우월성 때문이 아니라, 지리적 차이에 있다는 결론을 저자 특유의
간결한 문체와 폭넓은 자료 분석으로 이끌어내고 있다.
<기술의 충격> 저자 케빈 켈레의 1994
케빈 켈레의 『Out of Control: The New Biology of Machines, Social Systems and the Economic World』
는 20여년 전 후배의 책을 빌려 읽다가 아예 사서 폭풍 흡입한 책이에요. 기술 변화와 사회경제 변화, 그리고 삶의
변화를 보는 참신한 시각에 혹했죠. ‘신의 법칙 9가지’가 흥미진진해요. 번역서가 없는 게 너무 아쉽습니다. 같은 저자의
『기술의 충격: 테크놀로지와 함께 진화하는 우리의 미래』가 번역되어 있다.
10. 종합결론
정보화 시대는 사람들이 어떤 느끼지 못한 수요나 인간의 발전하고 있는 방향을 알아야 한다. 티핑 포인트 이론은
우리가 세계를 생각하는 방식을 재구성할 수 있게한다. 인류 역사가 급변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계점을
넘어서면 언제든지 무너지고 혼란기를 거친후 다른 시스템으로 변화되어 왔다. 자본주의가 이제 티핑 포인트에 왔다는
주장이 나왔다고 파이낸셜 타임스가 16일 보도했다. 영국 워릭 대학의 리처드 램버드 총장은 "반 월가 시위는 시장
자본주의가 제기능을 하고 있는 지에 대한 대중의 불안이 표출된 것" 이라고 진단하고 시위대의 뉴욕 시 캠프 철수가
역효과를 불러 올 수도 있다고 우려했다.
파이낸셜 타임스 편집자와 영국 산업동맹(CBI) 사무총장을 역임한 램버트 총장은 시장 자본주의가 본래 다른 어느
대안보다 효율적이고 사회전체에 번영을 가져온다는 가설에 근거를 두고 있지만 지난 몇년 동안 이 가설들이 먹혀들지
않았다고 진단했다. 시장이론은 더 이상 적용되지 않았고 시장 기능 실패로 많은 대중이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경제적
과실이 부당하게 배분됐다. 특히 미국에서는 상위 1%가 이익의 거의 25%를 차지하는 심한 불균형이 매년 나타나고
있다. 이는 25년 전의 그것과 비교하면 2배나 증가한 것이다. 이런 와중에서 고교 졸업자를 중심으로 하는 중산층의
소득이 크게 감소했다는 설명이다. 수입 격차가 확대되는 가운데 경제성장은 둔화되고 실업률은 고공행진을 계속했다.
결국 일부 우파 정치가들도 최근 세계적으로 벌어지고 있는 자본주의 비판 시위에 동조하기에 이를 것은 놀랄만한 일이
아니다. 램버트 총장은 이같은 현실을 종합하면 자본주의가 모종의 티핑 포인트에 도달했다고 할 수 있다고 평가하고
이는 지난 30년 동안 시장을 지배해 온승자 독식주의를 종식시킬 수도 있다고 내다보았다. 그는 승자 독식주의를 그대로
두면 대중적으로 공격적인 규제 강화와 진보주의적인 세제 개편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설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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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이름, 학과, 학번, 간략한 자기소개, 이메일 주소.
이름: 화량
학과: 사회학과
학번: 2012110396
이메일 주소: hualiang1119@163.com
자기소개:
안녕하세요, 중국 강서성에서 온 화량이라고 하고 23살입니다. 2014년 3월에 경희대학교로 편입했습니다. 지금은 4학
년입니다. 저는 밝고 낙관적인 성격이고 영화를 보는 것과 음악을 듣는 것을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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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변동, 그 37가지 시각들
2015-2학기 <사회변동론> 보고서 모음집
교수 : 황승연 교수님
편집 : 김다빈 최익환 최성호
글 및 발표 : 남호윤, 김혜수, 백다은, 유병민, 문지선,
정한새, 김바다, 최영진, 정예은, 홍예진,
이희영, 성수빈, 최주연, 최익환, 윤재훈,
최성호, 최수영, 기성지, 김가령, 김성두,
유승호, 김다빈, 임지아, 윤혜주, 윤준규,
임지우, 김병기, 박혜림, 김용권, 강병희,
이홍근, 조하영, KONG DEJIA, DU LU,
LIU SHUNXIN, WEN LINGLING, HUA LIANG
2015년 12월 11일 편집
2015년 12월 14일 배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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