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loaded by Taeho Ha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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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일공동세미나 보고
제4회 한일공동세미나 보고
2019년 서울시립대 대회 이후 코비드-19 펜데믹으로 중단되었던 한일공동세미나가 2023년 8월 19, 20일(일) 이
틀 동안 일본 동경학예대학에서 개최되었다. 19일 진행된 세미나의 주제는 ‘대도시권의 변용’이고, 양국에서 두
명씩 모두 4개의 논문이 발표되었다. 이튿날 20일 진행된 답사를 포함한 세미나 일정과 발표문은 아래와 같다.
그림 1. 세미나 후 기념 촬영(동경학예대학)
1. 학술세미나 : 8월 19일 토요일 13:00~17:00
▣ 개회 인사 13:00-13:10 나카니시 료타로(中西僚太郎, 일본 역사지리학회 회장)
▣ 세션1 13:10-14:50
∘ 사회 야마모토 타카쯔구(山元 貴継, 류큐(琉球)대학)
∘ 발표1 13:10-14:00
- 발표자 : 마고메 쇼(馬籠 翔, 교토부립대학)
- 발표 제목 : 사가미만 연안의 해수욕장 형성-근현대기 오오이소를 중심으로
∘ 발표2 14:00-14:50
- 발표자 : 차선혜(화성시연구원 화성학연구센터)
- 발표 제목 : 동탄 신도시의 공간 이질성과 ‘새로운 마을’ 만들기
▣ 휴식 14:50-15:10
▣ 세션2 15:10-16:50
∘ 사회:시부야 시즈아키(渋谷 静明, 츄부(中部)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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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지리 제35권 제3호(2023)
∘ 발표3 15:10-16:00
- 발표자 : 시게나가 슌(重永 舜, 교토대학)
- 발표 제목 : 근현대 도쿄(東京)의 노점상과 식목시장
∘ 발표4 16:00-16:50
- 발표자 : 전종한(경인교육대학교)
- 발표 제목 : 도시 뒷골목의 장소 기억 - 서울 종로 피맛골의 사례
▣ 폐회 인사 16:50-17:00 김덕현(전 문화역사지리학회 회장)
2. 학술답사 : 8월 20일 일요일 9:00-15:00
답사는 한국의 방문객에게 도쿄 대도시권, 특히 교외 지역의 자연적·사회적 조건을 재확인해 주는 것을 목표로,
세미나 일본측 간사 야모모토 타카쯔구(山元 貴継, 류큐대학) 교수가 인솔하였다. 고쿠분지의 절벽을 그대로 이용
하여 조성한 도노가야 정원은 한국의 전통 정원에서 볼 수 없는 입지가 흥미로웠다. 무사시고쿠분지에서 무사시
노 대지의 개발에 관련된 혼다가의 저택, 노가와 계곡의 개답(開畓)과 주택단지로의 전환, 그에 따른 구릉지 상의
부촌 형성과 평지의 서민촌의 분화 등, 대도회 교외 지역에서의 토지이용의 변용을 확인할 수 있었다. 타마가와
상수도는 에도시대에 상업 지구를 조성하기 위해서 대규모 건설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변용 과정을 거친
방공 녹지는 근대과 전후 일본의 단면을 잘 보여주었다. 전쟁 중 공습 피해와 이를 대비한 도시계획은 일본의 대도
시를 이해하는 중요한 키워드가 된다는 것을 인지하기에 충분하였다. 에도 도쿄공원 입장 후, 관람은 개별적으로
진행하기로 하고 입구에서 답사 일정을 마쳤다. 이로써 제4회 한일공동세미나의 공식 행사가 종료되었고, 참가자
들의 인사와 함께 내년 한국 대회를 기약하였다. 답사 프로그램은 아래와 같다.
그림 2. 절벽(단구애)을 이용한 도노가야 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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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일공동세미나 보고
∘ 장소 : 도쿄(東京)도 고가네이(小金井)시~고쿠분지(國分寺)시
∘ 주제 : 도쿄 대도시권 교외의 지형적 조건과 신전(新田) 개발
∘ 일정 : JR중앙(中央)선 고쿠분지(國分寺)역 9시 집합-도노가야 정원-누쿠이(貫井)신사-JR무사시고가
네이(武藏小金井)역(점심)-다마가와(玉川) 상수도-고가네이(小金井)공원 - 에도(江戶)도쿄(東京)
다테모노(건축물)원 15시 해산
∘ 인솔 : 야마모토 타카쯔구(山元 貴継, 류큐대학)
3. 세미나 발표문
▣ 발표 1
사가미(相模)만 연안의 해수욕장 형성 - 근·현대기의 오이소(大磯)를 중심으로 마고메 쇼(馬籠 翔, 교토부립대학)
머리말
최근, 종래의 도시 연구가 “비도시적”인 영역으로 간주하여 등한시한 공간-해변, 산, 사막 등과 같은 “후배지”
-의 중요성이 인식되고 있고, 이러한 공간의 인식론적 재고가 요청되고 있다. 예를 들면, 지리학에서는 주로 지금
까지 ①도시 형태 ②발달 과정 ③도시 계획 ④지속성 ⑤경제 재편 등의 관점으로 해변 리조트의 형성·변용에 관심
을 갖고 있었지만, 거기에서는 해변 공간이 사회·경제적인 기능에 근거해 분절화되는 것과 동시에, 근대기 이후
생긴 도시화나 교외화의 필연적인 귀결로서, 즉 도시에 종속하는 공간으로서 기술되어 왔다. 게다가 그렇게 기술
된 공간은 사람들의 경험이나 감각이 탈 신체화될 때 비로소 인식이 가능해지는 추상적 공간이었다.
본 보고서는 일본 최초로 해수욕장이 설치된 가나가와현(神奈川縣) 오이소마치(大磯町)를 사례로 한다. 이상
의 관점으로부터, 본 보고는 종래의 “단순한 용기”로서의 해수욕장이 아니라 “살아가는 공간”으로 해수욕장을
새롭게 포착한다. 그리고 거기서 펼쳐지는 사람들의 일상생활이나 경험, 혹은 신체적인 실천의 레벨로부터 해수
욕장에 있어서의 “공간의 정치”까지를 논한다.
1. 해수욕장으로서의 오이소(大磯)의 “발견”과 “해수 찻집”의 탄생
1885년 초대 육군 군의총감이었던 마츠모토 준(松本 順)의 진언(進言)으로 일본 최초의 해수욕장이 가나가와
현 타와유루기(淘綾)군 오이소마치에 개설되었다(오이소 해수욕장). 마츠모토는 에도막부 말기 이후의 인맥을
이용하여 오이소 해수욕장의 홍보활동을 도쿄에서 활발하게 실시한다. 그 결과 정치가나 화족(華族) 등 이른바
“귀현신사(貴顕紳士)”들이 메이지기 이후 잇따라 오이소에 별장을 마련해 갔다.
오이소 해수욕장에는 “해수 찻집”(이하 찻집)이라 불리는 간소한 휴게소가 설치되었다. 찻집에서는 짐의 일시
보관이나 보리차의 제공 외에, 수영에 익숙한 현지의 어부 “지이야(할아버지)”(그림 3)를 복수로 고용, 해수욕객의
감시·보호나 수영의 지도를 담당시켰다. 해수욕장과 찻집의 운영은 기본적으로 여관조합에 위임되고 있었지만
별장 증가에 따라 여관은 점차 감소해 갔다.
2. 해수욕장에서의 “공간의 정치”
해수욕장은 행정이나 전문가에 의한 통제의 대상이 되었다. 가나가와현은 미풍양속을 어지럽힌다는 이유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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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8년에 “해수욕장 단속규칙”(이하 “규칙”)을 제정했다. 또한 당시 다수 출판된 의학서는 해수욕과 해수욕장에
관한 주의와 유의사항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있었다. 이러한 자료로부터는 해수욕의 여명기에서 행정 조직이나
전문가가 해수욕장을 어떻게 통제하려고 했는지, 혹은 해수욕장은 어떠한 공간이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
지, 그 사고나 의도를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규칙”은 “부첨인(附添人)”을 제외하고 남자가 “부녀를 위하여 설치된 욕장”에 들어가는 것을 금지
하고 있다. 조령을 위반하면 금고형 또는 벌금형에 처해지는 것도 “규칙”에 명시되어 있다. 또한, 1894년에 출판된
나가오 오리조(長尾析三)의 “해수욕담”에서는, “해수욕”과 “수영운동”을 구별한 다음에 해수욕장은 어디까지나
의료 행위를 실시하기 위한 장소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렇지만, “규칙”에 의한 남녀의 혼영 금지는 거의 지켜지지 않았다. 가나가와현은 해수욕장의 설치자에게 울
타리를 설치하는 등 남녀의 혼욕을 엄금으로 하도록 요구하는 현령을 1904년에 다시 공포하고 있지만 그 후에도
혼영이 바뀌어진 모습은 없다(그림4). 또, “규칙”은 찻집을 영업하려면 미리 건축물의 도면 등을 관할 경찰서에
제출, 영업 허가를 받도록 정하고 있었지만 어부들은 찻집을 무허가로 영업하고 있었다. 게다가 대일본사립위생
그림 3. 메이지(明治) 중기 경의 “지이야(할아버지)”
大磯町 観光経済課(1980) 『磯のかおり』에서 전재
그림 4. 쇼와(昭和) 초기 경의 오이소 해수욕장(출처: 상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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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일공동세미나 보고
회(1895)는 오이소 등의 해수욕장에서는 해수욕객 뿐만이 아니라 행정이나 경찰의 단속도 철저하지 않은 것을 지
적하며 이것을 조속히 개선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즉, 오이소 해수욕장을 둘러싼 “공간의 정치”에 있어서는 행정·
전문가와 “이용자”인 사람들 사이에 어떤 종류의 “공범 관계”가 존재했다고 생각된다.
▣ 발표 2
동탄신도시의 공간적 이질성과 ‘새로운 마을’ 만들기
차선혜(화성시연구원)
2000년대 중반 농촌마을에서 계획도시로 거듭난 ‘동탄신도시’는 도시화의 속도나 규모면에서 괄목할 만한 사
례이다. 정부의 제2기 신도시 개발로 조성되었지만, 도시의 기능이나 성격도 여타 신도시와는 다른 ‘동탄신도시’
만의 특성을 나타낸다. 본 글에서는 ‘동탄신도시’의 개발과 공간 구성, 주민 정체성과 지역 공동체 운용 방식 등을
살펴 한국도시사에서 ‘동탄신도시’가 갖는 유의미성을 추출하고자 한다.
1. 동탄신도시의 탄생 - 농촌마을에서 첨단자족도시로
경기도 서남부에 위치한 화성시는 2001년 시급
도시로 승격한 도농복합도시이다. 2001년 시 승격
당시 도시 지역은 태안읍이 유일하였고, 나머지
지역은 농촌 또는 어촌으로 구성된 비도시적 성격
이 강했다. 그러나 2000년 이후 대대적인 ‘도시 개
발’로 화성시에는 이전에 없던 새로운 형태의 마
을, ‘신도시 마을’이 등장했다. 동탄신도시를 비롯
해 향남택지개발지구, 남양뉴타운이 대표적이며,
동탄신도시는 이러한 변화의 중심 지역이다. 2000
년 65.2%, 34.8%이던 농촌과 도시의 인구 비율은
2008년 각각 9.8%, 90.2%로 크게 변화했다. 인구
또한 2000년 19만 명에서 2023년 93만 명으로 증가
해 최근 10여 년 동안 한국의 도시 인구증가율 1위
를 기록하고 있다.
동탄신도시는 2001년 개발지구로 지정될 당시
그림 5. 화성시와 동탄신도시의 위치
동탄면이었다. 1990년대 동탄면은 준농림지역으
로 지정되어 농경지와 소규모 공장이 혼재하는 농촌 경관을 형성하고 있었지만, 거의 9할에 달하는 지목이 임야
(42%)와 전답(46%)으로 구성된 농촌 지역이었고, 원주민 대부분은 농업에 종사하였다.
동탄신도시는 2001~2021년 1·2기에 걸쳐 33km2 면적에 인구 약 40만 명을 수용하는 것으로 계획되었다. 중·저
밀도 친환경 주거 단지를 조성한다는 개발 목표에 따라 1/4에 해당하는 면적을 녹지 공간으로 조성하고 인구밀도
도 134인/ha로 낮췄다, 또한 삼성반도체를 비롯한 인근의 첨단 산업단지를 아우르며 ‘전원 속의 첨단 복합도시’
구현하고자 했다. 이렇게 조성된 동탄신도시는 서울의 위성도시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수도권 남부의 주택시장
안정화와 ‘지역 성장 거점 도시’로서의 기능을 갖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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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탄신도시의 인구 구성과 도시 경관
화성시의 동쪽에 치우친 동탄면은 변두리 농촌 지역으로 2001년까지만 해도 인구 1만 명에 불과했다. 그러나
신도시 개발에 따른 공간 재편은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주거 생활을 마련하는 동시에 ‘동탄신
도시’만의 독자적인 영역과 지역성을 창출했다.
화성시 면적의 8%에 불과한 동탄신도시에는 2020년 현재 화성시 인구 89만 명의 41.3%에 달하는 37만 명이 살
고 있다. 동탄 주민의 평균 연령은 33.6세로 전국 최하위이며, 30~40대 부모와 자녀로 이루어진 핵가족의 비중이
높다. 원주민은 10~15%에 불과하고, 주민 대부분은 이주민들이다. 한적한 농촌 지역이던 동탄은 21세기 한국에
서 가장 젊은 도시, 그리고 이주민으로 구성된 대도시로 변모하였다.
동탄신도시 주변에 입지한 삼성반도체와 관련 산업체, 여타 경제 환경은 동탄신도시의 가족 형태와도 직결된
다. 2021년 한국의 1인 가구(33.4%)가 ‘정상가족’ 가구(29.3%)보다 높은 상황에서도 동탄신도시는 직장인 남편과
전업주부, 그리고 자녀로 이루어진 ‘정상가족’에 적합한 공간을 형성한다. 특히 대규모 삼성반도체 공장이 동탄대
로를 사이에 두고 아파트 블록과 마주하는 동탄의 도시 경관은 국내의 여느 신도시 경관과 다른 동탄만의 독특한
풍경이다.
3. 동탄 주민들의 정체성과 지역 커뮤니티
입주 시점과 가족 형태가 유사한 동탄 주민들은
공통의 관심사를 해결하면서 여느 지역공동체 못지
않은 결집력을 형성했다. 또한 이주민으로서의 감정
적 유대감과 실질적인 경험을 공유하면서 동탄신도
시 주민이라는 연대의식을 만들었다.
동탄신도시는 화성시에서도 ‘도시적 삶의 상징’
으로 여겨진다. 주민들은 거주 환경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삶의 만족도도 높은 편이다. 그런데 이러
한 동탄 주민들의 자부심이 동탄신도시를 화성시의
일부가 아닌 화성시와 구분 짓는 요인으로 작동하기
도 한다. 동탄 주민 대부분이 동탄의 브랜드 가치를
보고 이주해 왔기 때문에 ‘화성 시민’보다는 ‘동탄신
그림 6. 동탄맘들 모여라 초기 화면
도시 주민’이라는 생각이 더 강하다.
동탄신도시의 새로운 마을 만들기와 지역 네트워크 활동을 주도한 이들은 전업주부이다. 이들은 동탄신도시
의 가장 큰 ‘사회적 직업군’이기도 하다. 자녀 교육과 육아 등을 매개로 한 젊은 어머니들의 네트워크는 곧 지역
기반의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소통하는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 문화를 만들어냈다.
동탄신도시의 대표적인 온라인 커뮤니티는 ‘동탄맘들 모여라(이하 ‘동탄맘’)’라는 온라인 카페이다. 2006년 개
설된 ‘동탄맘’ 카페는 2023년 현재 회원 수가 30만 명을 넘는 대형 커뮤니티이다. 가입 회원이 반드시 동탄에 거주
할 필요는 없지만 카페 게시물 대부분은 동탄신도시의 생활과 관련한 내용들이다. 동탄맘 카페는 활동 범위와 영
향력이라는 측면에서 동탄신도시의 지역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부분 중 하나이다. 또한 지역이라는 물리적 공간
과 사람, 그리고 그들을 연결하는 매개체로서 온라인 공간의 기능을 잘 보여 주는 사례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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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일공동세미나 보고
▣ 발표 3
근·현대 도쿄(東京)에 있어서의 노점상과 식목 시장
시게나가 슌(교토(京都)대학·대학원)
1. 현대 도시와 노점
현대 일본의 대도시는 농촌으로부터의 인구 유입에 의해 급속히 확대되었다. 사사지(社寺地) 경내에서 정기적
으로 개최되는 엔니치(축제)시는 증가한 인구에 대한 일용품 공급 기능을 담당했다. 노점들은 “테키야”라고 불리
는 노점상인들에 의해 관리되어 불황 때에는 아마추어 노점상들이 참가하기도 했다. 지금까지의 도시 상업에 관
한 역사 연구는 상설 점포를 중심으로 한 것이 많아서, 일시적인 존재인 노점은 파악하기 어려워 충분히 검토되어
오지 않았다. 현재 필자는 도쿄와 교토를 대상으로 하여 노점 연구를 진행하고 있으며, 이번에는 노점 중에서도
식목시장(植木市場)으로 한정하면서 대도시권의 변용을 논한다.
2. 근대 도쿄의 노점상과 식목시장
많은 다이묘(大名) 저택과 사원 정원이 존재한 에도(江戶)에서는 원예 문화가 발달했다. 근세 후기에는 서민층
에도 원예문화가 널리 퍼져 꽃이나 분재 거래가 활발해졌다. 식목의 거래는 각 식목상의 정원 외에 식목시장에서
도 행해졌다. 식목시장은 식목상만의 모임뿐 아니라, 과자나 완구, 의복 등을 판매하는 다른 노점상에 섞여 식목상
이 출점하는 것도 있었다. 식목을 판매하는 노점상인은 “하보쿠”라고 불리는데, 메이지시대에는 대도쿄식목상조
합이라고 불리는 “테키야” 조직과는 다른 독립적인 조합을 조직했다.
1931년 도쿄시가 간행한 “노점에 관한 조사”는 당시 식목상 실태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사료이다. 이에 따르면,
식목상은 다른 노점상과 비교해 한 달의 출점 일수가 적고, 한 달에 한자리수만 출점하는 식목상도 많았다. 그것을
반영하여 평균 매출액은 전 업종 중 가장 낮았다.
3. 식목시장의 교외진출과 존속
메이지시대에는 고마고메(駒込)나 스가모(巢鴨) 등 구 시가지 북쪽 주변에 많은 식목상이 집주하고 있었다. 그
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이 일어나고, 식목상들은 도쿄 시가지에서 떨어진 사이타마(埼玉)현 오미야(大宮)나 안
교(安行) 등으로 이주해 갔다. 그러나, 그 후에도 식목시장은 도쿄 중심시가지에서 열렸는데, 1년마다 개최되는
넨이치(年市)와, 월 마다 개최되는 츠키이치(月市)가 중심이 되고 있었다. 1938년경에는 옛 에도의 시타마치(下
町)인 구 도쿄시역 동부를 중심으로 많은 월시가 개되었다(그림7). 또한 매일 열리는 식목시장도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도쿄에서는 암거래시장이 증가했다. 그러나 생활필수품이 아닌 식목은 암거래시장에서 거
래되는 것은 적고, 식목을 판매하는 엔니치도 감소해 갔다. 1966년경의 식목시장의 분포를 보면, 특히 구 도쿄시역
에 있어서의 월시 횟수가 크게 감소하고 있다(그림8). 이것은 교외 진출에 의해 중심시가지 인구가 상대적으로 감
소했고, 교통수단이 발달하면서 직접 식목상으로 가서 구입하는 것이 용이해진 것 등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
된다.
한편, 넨이치(年市)는 츠키이치(月市)만큼 감소하지 않고, 교외에서는 규모가 큰 넨이치도 볼 수 있다(단, 사료
에는 안 나타나지만 1938년 시점에서 벌써 개시되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보다 많은 식목상이 모이는 넨이치는,
츠키이치에 비하면 규모의 경제에 의한 메리트가 생기기 쉽고, 또 전통 행사로서의 가치도 일찍부터 알려져 있었
기 때문에, 비교적 유지되었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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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지리 제35권 제3호(2023)
이상와 같이 식목시장에 대한 도시화의 영향은, 츠키이치와 넨이치에서 다른 모습을 나타낸다. 대도시권의 변
용이 노점시장이라는 도시의 리듬을 어떻게 바꾸었는지를 보여주는 한 사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림 7. 근대 도쿄의 식목시장(1938년 경)
그림 8. 현대 도쿄의 식목시장(1966년 경)
▣ 발표 4
도시 뒷골목의 ‘장소 기억’ - 서울 종로 피맛골의 사례
전종한(경인교육대학교)
서울 종로의 ‘뒷골목 피맛골’은 조선전기 이래 오늘날까지 다양한 역사적, 사회적 의미가 중층적으로 채색되어
온 공간이다. 피맛골[避馬-골]이란 서울 종로와 평행을 이루면서 그 배후에 뻗어 있는‘이면 도로’, 즉 ‘종로의 뒷골
목’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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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회 한일공동세미나 보고
그림 9. 1780년대의 ‘윗피맛길’과 ‘아랫피맛길’
자료: 「都城圖」, 소장처-규장각
그림 10. 1910년대의 ‘윗피맛길’과 ‘아랫피맛길’
자료: 전종한, 2009, 지적원도에 의거 작성
피맛골은 원래 종로 남측과 북측에 모두 형성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북측 대부분과 남측의 일부 구간만 남아 있
다. 오늘날에는 ‘피맛길’과 ‘피맛골’ 두 용어가 혼용되는 경우도 있지만, 사실 이둘은 서로 의미가 다른 용어이다.
피맛길이란 피맛골의 중심축을 이루는 좁고 긴 도로를 일컫는 용어이고, 피맛골은 피맛길을 포함해 그 양쪽에 늘
어선 점포와 가옥을 총칭하는 말이다. 지리학적으로 규정한다면, 피맛골은 피맛길을 중심축으로 하여 발달한 일
종의 街村이며, 피맛길은 이 가촌을 형성케 한 중심 도로라고 정의할 수 있겠다.
피맛골의 기원은 조선 전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피맛골은 ‘避馬’라는 단어에서 유래한 지명이다. 피마의 의미와
관련해서는 ‘조선시대에 서민들이 말을 탄 高官을 피하다’라는 뜻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흔히 있다. 그러나 사실은
‘下官이 말을 타고 큰 길[종로]을 가다가 고관을 만났을 때 자신[하관]의 말을 돌려 그[고관]를 피하다’라는 뜻이다.
다시 말해 조선시대 하관의 업무 수행에 신속성을 도모할 수 있도록 ‘허용된’ 혹은 ‘의도적으로 마련된’ 이면 도로
로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
피맛길이 주로 하관의 통행로였던 까닭에 조선시대를 지나면서 이 일대는 하관들을 상대로 한, 저렴함과 신속
성을 갖춘 음식점과 여타 편의 시설들이 들어서게 된다. 이에 따라 이곳은 보부상과 상인들을 비롯한 일반 서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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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역사지리 제35권 제3호(2023)
의 주된 통행로 및 거주지로 발달하기 시작한다. 오늘날 피맛골을 대
표하는 해장국, 생선구이, 막걸리, 빈대떡 등등의 점포들은 과거의 경
관과 흔적이 입지 관성에 따라 존속된 결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조선시대 동안 피맛골은 자연스럽게 서민들의 공간으
로 성장해 가게 된다. 그리고 일제 강점기와 해방 이후를 거쳐 현재에
이르기까지, 피맛골에서는 이전의 장소성에 두께가 더해지고, 다른
한편에서 현대 자본주의 도시의 뒷골목으로서 이전과는 색다른 의미
와 기억들이 퇴적되어 왔다.
연구자는 피맛골의 장소성을 세 가지 층위에서 추출하여 병치할
수 있었는데, ‘서발턴의 공간 vs. 탈주의 공간’, ‘망각의 공간 vs. 회상과
생성의 공간’, ‘화석의 공간 vs. 삶의 공간’으로 각각 명명하고 서술하
였다. 연구자는 이들의 검토를 통해 ‘앞길’종로의 뒤안길이었던 이곳
에 퇴적된 중층적 장소 기억들과 피맛골을 둘러싼 이들 간 경합 관계
그림 11. 오늘날의 피맛골 경관
를 고찰하였다.
이 연구는 중심업무지구라는 단일 색깔로 채색된 종로 일대를 이
른바 ‘결을 거스르는 독해’를 통해 해체하고, 현대 자본주의 도시가 지닌 공간성의 또 다른 일면을 도시 뒷골목이라
는 창을 통해 재구성해보려는 시도의 일환이다. 현대 도시 재개발에서는 뒷골목이 간직한 두꺼운 장소성과 중층
적 장소 기억들이 면밀한 검토 없이 사라져가는 경우가 많다. 장소는 분명 많은 기억들을 담고 있다. 이중 어떤 것
이 조장되고 어떤 것이 완전히 잊히게 되는지의 문제는 일종의 정치적 문제임에 틀림없다. 모든 장소는 어떤 기억
을 소생시킬 것인지를 둘러싼 경합의 장소라는 뜻이다. 사람들마다 관심사와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에 사회적
주체에 따라 무엇을 보존하고 무엇을 배제할 것인지에 대한 입장이 서로 다르다.
이 연구에서 드러난 피맛골의 장소적 성격과 그 중층성은 현대 자본주의 도시 속에서도 다양하고 두꺼운 의미
의 장소들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나아가, 인간과 장소의 관계가 우리 삶의 본질을 구성하고 있음을 상기시
켜준다.
장소는 과거에 생명을 불어 넣어 현재에 존속하게 하는 힘을 갖고 있고 이를 통해 사회적 기억을 재생산하는
데에 공헌한다(Casey, 1987, 186-187). 모든 기억은 장소-지향적이며 적어도 장소-기반적인 성향이 있다. 무엇보다
장소 그 자체가 지닌 물질성과 그 위에 조성된 경관이 공적 기억을 각인해 담아두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장소는 도시 경관사를 연구함에 있어 핵심 주제로 설정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있다(Hayden, 1995,
18). 수 백 년에 걸친 사회적 기억을 가진 장소이자 현대 대도시의 뒷골목으로서 피맛골은 장소 기억이라는 개념적
토대 위에서 도시 뒷골목의 장소적 성격과 도시 경관사를 탐험할 수 있는 유의미한 사례가 될 것으로 판단한다.
이러한 연구는 오늘날 쟁점이 되고 있는, 피맛골 재개발을 둘러싼 논의와 정책 결정 과정에도 시사하는 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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