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loaded by ahwkd12

14강 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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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대일로와 21세기의 대운하
서론
마지막으로 강의 내용을 전체적으로 정리. 전체적인 주제는 현대 중국에서 나타나고 있는 일
대일로 현상을 어떻게 볼 것인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러한 중국의 변화와의 관련성 속에서
대운하를 어떻게 다시 한 번 조망하고 21세기의 대운하와 그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에 대
한 교수님의 견해를 알려주겠음.
먼저, 강의를 시작하기 전 대운하를 연구하는 과정 중 모은 몇 가지 자료 소개
-학부에서 졸업논문을 쓰고 처음으로 대운하에 관심을 가졌던 1997년에 얻은 자료. 당시 지
도교수가 준 자료 가운데 운하 도시에 대한 책이 있음. 거기에 중국 명청시기운하전도라고 하
는 자료집이 있음. 그때 모아놨던 자료를 복사해서 쭉 연결을 하면 북경에서부터 아래로 쭉
이어짐. 운하를 따라 남쪽으로 연결이 되어 산동성을 지나서.. 회안에 있는 여러 갑문들을 지
나고, 결국 회안을 지났던 것이 양자강도 지나고 해서 마지막까지 쭉 가면 양자강 루트를 지
나설 때까지... 사실 이 지도는 항주노선까지는 나오지 않고 주로 양자강과 만나는 지역까지
해서 마무리가 됨. 이 지도를 보면.. 운하 루트라고 하는 것이 참 긴데, 과거에 이게 어떻게
운영됐을까 하는게 처음 관심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던 자료.
-이것과 함께 또 보여주고 싶은 자료가 청대경항운하전도. 청나라 시기의 경항 운하, 수도 북
경과 항주를 연결하는 운하전도. 쭉 펼쳐보면 남쪽에 있는 항주에서부터 시작 되어 북경까지
가는 것. 그림을 쭉 펴면 710m 정도 됨. 청대의 항주~북경 운하 노선.
-대운하에 대해 중국에서 만들어진 dvd 자료. 중국 대운하. -운하를 따라 살고 있는 사람들
에 대한 드라마. families on canal –중국 cctv에서 운하와 중국의 주요 수로인 양자강, 장
강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있음. 장강, 양자강에 대해 다시 말한다는 것... 운하에 대해서 말한
다라고 하는 다큐멘터리고 있음. 30년 전에 나온 거..
-중국의 운하에 대한 관심은 바다에 대한 관심을 일부 상쇄시킴. 중국에서 바다로 진출해서
교역하고 싶은 욕망 등이 운하를 통해 상당 부분 해소된 것. 동시에, 바다에 대한 길을 조금
막으면서 치안을 유지하며 국가를 유지함. 이랬던 과거의 중국이 21세기에 어떤 방식으로 이
어질 것인가에 대한 책이 있음. 아시아 지중해-16~21세기 아시아 해양도시와 네트워크라는
책. 16세기라고 되어있지만 13세기부터 관심을 갖고 지푸루라고 하는 학자가 장기간에 걸쳐
중국 혹은 동아시아에 해상 네트워크들이 어떻게 재편되는가를 논술하고 있음. 중국에서 21세
기에 어떤 도시가 해양 도시로 성장할 것이고 중국의 발전에 있어 해양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방식으로 재편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 홍콩을 중심으로 한 광저우와 상해를 중심으로 한
지역 두 가지가 중요. 상해와 광저우, 이 두 가지 가운데 어느 것이 새로운 아시아의 지중해
라고 할 정도로 해양시대가 열릴 때 중국의 주요한 거점도시가 될 것인가에 대한 문제의식을
담은 책.
1. 시진핑의 일대일로 정책
대운하 시대의 중국은 해양에 대해 나름 합리적 선택을 했다고 이야기를 했는데, 각자 갖고
있던 과거의 중국의 역사 혹은 대운하의 나름의 중요성과.. 이번 강의를 통해 새롭게 인식한
부분이 있을 것 같음. 어떻게 느끼고 있는지 말해봐
-중국이라고 하는 거대한 제국이 어떻게 한 통치자에 의해 제대로 컨트롤 되었는지,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남과 북, 동과 서의 네트워킹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이슈였는지를 잘 보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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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키워드였다고 생각하게 됨. 그러면서 한 편으로 현대의 중국이 하나의 국가로서 중국의 정
체성을 국가 차원에서 매우 강조하는데 아마 그런 것들이 과거 이런 역사들에서 축적된 노하
우, 즉 하나의 제국으로 통치되어야만 제대로 안정된 국가가 유지되고 그 안에 문제들이 잘
통제된다 라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현 중국 정부가 그런 정책들을 내세우는 것 같음.
-맞아. 운하는 남과 북을 연결했지만 사실 중국은 과거에 진시왕의 동서와의 연결이 항상 중
요했고, 그러나 남과 북도 통합해야만.. 일단 너무 넓은 영토잖아. 동-서, 남-북을 하나로 연
결하는 데에 있어 수많은 시행착오가 반복되면서 노하우가 생긴거지. 물론 각 지역 사람들은
꼭 하나의 통일된 중국이 되어야 할까에 대해서는 그 필요성을 못 느낄 수도. 그러나 현대적
은 관점에서 교육을 받았던 많은 중국인들에게는 하나의 중국에 대한 열망은 강력한 힘으로
발휘할 수도 있겠지.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일 듯. 남북... 우리가 통일을 지향하고 어떻게
남과 북이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이것을 우리가 역사적인 경험에서 지혜를 받아오고 현대적 관
점에서 해석할 필요가 있는데, 거기에 이런 중국에 있어서 적어도 대운하를 통해 남과 북을
하나로 일치했던 이것은 앞으로 한국의 미래에 시사점이 될 수 있을 듯.
-처음에 대운하가 왜 중요할까 생각했는데 대운하가 공간적으로 남-북, 동-서를 잇기만 할 뿐
이 아니라 통시적으로 수~청까지, 특히 명청대를 아주 잘 설명할 수 있는 매개가 된다는 것을
알게 됨. 운하 주변 사람들과 운하를 관리하고자 하는 통치자들, 운하를 둘러싸고 놀랐던 마
르코 폴로, 운하를 이용했던 다양한 외국인들의 감상 등 모든 것을 설명해낼 수 있는 매개가
되는 중요한 키워드라는 것을 깨달음. 그리고 현대 중국에서 운하가 어떤 역할을 할지 기대.
-사실 운하라고 하는 키워드가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겠지만, 어차피 한 가지로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으니까 가장 효과적으로 많은 부분을 포괄할 수 있는 소재를 생각하는 것은 필
요. 그런 의미에서 대운하는 중국의 전체를 설명할 수는 없어도 물길, 특히 수나라 때부터 만
들어진 대운하라고 했을 때 그것을 광의의 대운하라고 했고 또 하나의 북경으로 가는 길을 대
운하로 일원화 시켰던 것을 협의의 대운하 시대라고 할 때는 1415년부터 봤음. 그게 적어도
1784년에 끝나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19세기에 약하게나마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던 것을 언
급함. 그렇다면 대운하가 20세기 후반, 즉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선 이후에 운하는 어
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또 그리고 그것이 21세기를 살아가고 21세기를 조망하며 생각해야
되는 사람들에게.. 일단 중국인에게 어떤 의미를 갔는가, 또 한국인에게는 대운하를 통해 봤던
역사가 어떤 시사점을 줄 수 있는가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음.
그런 관점에서 시진핑 주석 정부에서 2013년부터 본격적으로 들고나온 정책이 일대일로. 영어
로는 one belt, one road. 이것이 일대, 즉 육상 실크로드 일로, 해상실크로드 혹은 해상 실
버로드겠지. 그 육상의 길(실크로드)과 해상의 길(해상의 실버로드)을 하나로 통합해야 하는
큰 계획이란말야. 이에 대해 어떤 느낌이 들었는지 궁금.
-야심찬 계획. 다만 실크로드와 해상의 실버로드를 강조할 때 자주 채용하는 역사적 사건이나
인물들을 영웅화시켜 과거의 영광을 보여주며 정책의 정당성을 확보하려는 거 움직임이 보이
는 듯. 어떻게 보면 역사를 정치화하는.. 위험할 수도 있지만 정책적으로 유용한 프로파간다일
수도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 특히 주목되는 점은 남중국해, 특히 해상과 관련해서는 과거와
달리 바다를 유용한 자원으로 보기 시작하는 새로운 현대적 시각이 결부되면서 중국의 정책들
은 상당히 복잡하면서도 매우 내면에 담긴 함의가 능축되어 있을 거라고 생각. 이런 것들을
주변국들이 어떻게 반응하고 대처해 갈지 정치적으로 재밌을 듯. 그것들을 잘 소화하고 파악
할 수 있는 시야를 갖기 위해 중국의 역사를 잘 파악하는 것이 중요할 듯.
-그래. 아주 통찰력있는 지적인 것 같아. 과거에 어떻게 살았을까가 역사 공부의 첫 시작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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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 역사적으로 보면 실제로 정치에 이용당하거나 정치에 일정하게 기여했던 점이 상당히 많
았던 것도 사실. 역사의 정치와, 정치의 역사화.. 이런 것들을 볼 때 중국의 일대일로를 어떻
게 해석하는 가는 참 흥미로움. 한국의 입장에서는 일대일로에 대해 비교적 자유롭게 이야기
할 수 있지만 만약 한국의 문제라면..? 한국인 지도자가 이런 정책을 펼친다면 어떻게 반응?
쉽지 않음.
2. 중국의 해양 패권과 역사의 패러독스
그리고 남중국해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사실 바다에 대해 우리가 계속 언급했는데.. 남중
국해가 정말 뜨거운 감자와 같은 지역이지. 일촉즉발의.. 전쟁이 날 것 같은.. 중국에서도 항
공 모함을 파견하려고 하고 미국의 항공모함은 이미 와있고.. 여기서 한 가지 재밌는 책이 있
는데 티모시 브루크 교수의 책. 거기서 언급하는, 1600년 즈음 만들어졌다고 하는.. 중국 사
람이 그렸다고 추정되는 해상 지도가 있는데 그게 영국의 도서관에서 발견됨. 그 교수가 책으
로 내면서 1600년 즈음에 중국인들이 바다에 대해서 관심 있는 사람이 많았다.. 단, 국가권력
과 상관없이. 그런데 그 바다에 대해서 실제로 국가 권력은 관심을 별로 갖지 않거나 사람들
이 밖으로 나가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그 역사적 전통을 생각해본다면 현재 중국이 21세기
에 다소 갑자기 바다에 대한 점유권, 통치권을 주장한다는 것이 의아하게 생각될 수도 있을
것 같아. 일대일로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긍정적인 측면에서 생각해봄. 길이라는 것을 뚫고 관리하겠다는 것.. 길을 만든다는 것은 일
방이 아니라 상대방과 소통하고 무역하기 위한 수단.. 이건 상대방과 자신의 번영을 함께 이
룰 수 있는 수단이라고 생각. 가령, 장건이 일대를 만들었을 때 중국의 비단과 서역의 물품이
함께 교류되었지 중국의 비단이 일방적으로 수출되거나 서역의 물품이 일방적으로 들어오지
않았음. 그렇듯이 항상 양방의 번영을 함께 구가할 수 있게 되는 것. 그리고 정화의 원정.. 일
로의 경우에도 중국이 위상을 세계에 떨쳤을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의 작은 국가들도 중국이라
는 존재를 알고 도자기도 알고.. 다양한 문물 교류가 일어나서 쌍방의 발전과 인식의 확장이
촉발되는 부분이 있음. 그렇다면 중국의 패권은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한다면.. 나이브할지
도 모르지만 잘 할 수 있는 국가가 한다면 크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 오히려 지정학적 특성
을 이용해서 소말리아의 해적들처럼 완전히 폭력적인 수단으로 말도 안 되게 하는 것이 아니
라 세계 각국의 합의 속에서 합리적으로 운영을 한다면 이것이 크게 문제가 되는지는 나중 문
제라고 생각. 그러니까, 문제가 될지 안 될지 모르지만, 기본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는 쪽으로
충분히 발전 가능한 문제라고 생각.
-아주 새로운 시각이고 미래지향적 시각인 듯. 하나의 정책이 있을 때 나에게만 유리한 게 아
니라 상대방에게도 일정한 이익이 배분될 수 있다면 그 정책은 일방적이라고만 볼 수 없겠지.
그리고 비록 그 정책에서 사용하는 소재가 역사적 소재에서 가져왔다고 하더라도 역사에서 이
랬으니까 현재에도 이래야 한다 강요할 수는 없는거지. 그걸 지금 만들면 또 100년, 200년
뒤에는 역사가 될 테니까. 이제 그런 관점에서 길을 통해 상대방과 소통하려는 과거의 선례들
을 21세기적 관점에서 중국에서 하려고 하는 것은 나름의 가치가 있다. 이것이 오히려 잘 성
사 된다면 중국을 중심으로 한, 중국이 한 축으로 되어있는 유라시아의 하나의 유통망, 일체
성 이런 것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 같아. 소말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그것도 참 흥미
로운 주제야. 아프리카에 소말리아의 해적들이 많이 나타나고 그것을 어떻게 잘 방어할까.. 특
히 외국에서 온 배들이 자국의 선박을 어떻게 보호할까.. 현재 치안 유지가 안 되는 상황에서.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장보고함인가? 아마 그런 배가 가서 우리나라 배를 도왔고 중국도 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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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게 큰 배들을 보내서 중국 배를 도우니까 그때 세계 언론이 아 정화의 함대 이후에 이렇
게 많은 중국의 배들이 아프리카에 간다고 해서 대서특필된 적이 있거든. 역사적으로도 흥미
롭지만 21세기의 국제 정치를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이슈인 듯. 이것을 우리끼리만 이야기 하
지 말고 세계각지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무엇보다 중국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는가
들어볼 필요가 있는 듯. 마침 대운하에 대해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는 장해용 감독의 관점과
중국의 학자인 상건화 교수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보고 미국의 피터퍼듀 교수의 미국인의 관점
에서.. 혹은 청사를 전공한 관점에서 들어보고 마지막으로는 홍콩의 푹윙킨 교수님의 시각을
차례대로 들어보자.
<일대일로>에 대한 중국인의 평가, 대운하와 관련성은?
-장해용 감독
Q. 오늘 날 우리와 관심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는데, 지금 현재 중국을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
인 시진핑 주석의 주장 중 하나가 일대일로임. 이것은 강의 초반에도 말했듯이 육상·해상 실
크로드의 합작인데 이런 국가적 정책이 상당히 역사적 고려에서 나온 것이고 그 안에는 명나
라 청나라의 대운하의 관점이 있음. 이 부분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일대일로와 대운하가 어
떤 관련이 있습니까?
A. 사실상 일대일로는 굉장히 큰 명제라고 봅니다. 우리는 이것이 육상의 실크로드와 해상의
실크로드 경제 지역이라고 보죠. 나아가 이러한 국가의 전략이 제시된 이후 사실상 모두가 이
정책을 소화해 내거나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이 어떻게 일대일로 정책과
관련될 수 있는지를 고민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일대일로와 대운하의 관계성에서 가장 중요하게 언급될 수 있는 부분은 대운하가 바로 이러한
일대일로의 연결고리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러한 중요성 때문에 대운하
가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된 것이죠. 그래서 우리는 운하의 연결고리로써의 기능, 영어로
link라고 하는 기능을 이해해야 하는 것이죠. 대운하는 많은 것을 연결하고 있습니다. 대운하
는 일대일로를 연결하고 있고, 원대에는 몽골의 초원제국과 상업으로 번성한 남쪽의 해양제국
을 연결하죠. 이러한 대운하가 오늘날에는 다시 한 번 우리의 일대일로를 연결하고 이른바 세
계의 운명공동체를 연결하는 것이죠.
시진핑 주석이 자주 언급한 운명공동체란 오늘날 이 세계가 과거와 달리 상호간의 연결성이
더욱 많아졌고 특히 경제적인 부분에서 당신 안에 내가, 또는 내 안에 당신이 있다고 할 정도
로 서로 단절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예컨대 요즘처럼 중국이나 각지에서 한
국 삼성의 핸드폰이 기내 반입이 금지되면 한국의 기업과 경제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이죠. 그렇다면 오늘날 이러한 경제사회에서 대운하가 일대일로에 제공한 가장 큰 부분은
바로 사유체계와 관리 방식의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대운하를 연구함에 있어
서 우리는 대운하를 과거 고대의 유물로만 혹은 중국인의 위대한 업적으로 한정해서 생각해서
는 안 됩니다. 이것은 세계적인 것이죠. 앞서 말했듯 대운하는 원래부터 국제적인 성격을 갖
고 있었어요. 그리고 이것이 과연 무엇을 연결하는지에 주목한다면 대운하는 중국과 세계의
관계를 연결하는 연결고리입니다. 과거에는 초원제국과 채양제국을 연결했죠. 기존의 일본 학
자인 야마모토 박사가 책에서 대운하에 대한 진정한 의미와 개념을 설명했죠. 그는 원대에 대
운하가 완성됨으로써 진정한 의미로써 세계적인 대제국이 출현한다고 언급했고 이를 중화제국
의 출현으로 보는 것이죠. 이러한 시각은 민족적 시각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운하의 가치를
평가함에 있어 자동적으로 구현된 것이죠. 왜냐면 운하의 기능이 원대에 많은 변화를 갖게 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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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서 대운하는 더 이상 단순히 국내적인 운하로의 기능으로만 볼 수 없고 오히려 말레이 해협
과 같이 큰 두 개의 경제체제를 연결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오늘날 일대일로를 생각
할 때 우리는 과연 이 일대일로가 무엇을 연결하고자 하는 것인지에 대해 생각할 필요가 있다
고 생각하고, 이 정책의 방향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상건화 교수
A. 제가 생각하기에 일대일로라는 정책의 방향은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이 정
책의 출발점 내지 이를 달성했을 경우의 결과가 참여한 모두가 다 같이 이익을 얻는 국면을
설정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함께 이익을 얻어 가는 과정에서 중국은 당연히 자국의 이익을
도모하면서도 동시에 함께 협력하는 다른 국가들의 이익을 도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두가
함께 문화, 경제, 정치 등 여러 방면의 교류를 증진시켜 이익을 도모할 수 있는 구상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피터퍼듀 교수
A. 일대일로는 굉장히 야심찬 계획. 중국정부가 중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의 광대한 영역에 걸
쳐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는 기간 사업이지요. 그리고 제 생각에 이 정책은 단순히 경제발전을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 외교적 영향력을 넓히고자 하는 것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중국 정부가
이 양방향 정책을 동시에 이루어내고자 한다는 것입니다. 땅을 가로지르는 철로를 부설하고
바다에는 파이프라인을 부설하고자 하고 있지요. 중국은 이런 일을 전에도 했습니다. 송나라
때 중국은 동남아시아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하고 지배하려고 했습니다. 선박을 많이 건조하여
큰 규모의 해양 정책을 펼쳤지요. 그리고 정화의 원정은 이러한 정책의 전성기였습니다. 그리
고 이러한 정책은 정부의 우려 때문에 중지되었죠. 그러나 동남아시아에서의 사무역은 계속되
었습니다. 그리고 청은 중앙아시아에 더욱 관심을 보였습니다. 그리고 신장의 몽골을 정복하
여 그곳에 군대와 행정기관을 배치함으로써 중국의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중앙아시아에 대
해서는 보다 직접적인 영향력을, 남방에 대해서는 다소 제한된 영향력을 행사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정부는 둘 모두를 동시에 하려고 한다는 점이 놀랍습니다. 큰 자금을 투자하면서
말이죠. 그러나 아무도 이 정책이 실제로 이익을 가져다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중국 안팎의 중국인 투자자들 역시 이 정책이 이윤을 발생시킬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
니다. 그러므로 이 정책은 이윤과는 다은 무언가에 대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따라서 중국
정부가 매우 부유하다고 할지라도 실제로 이 투자를 감당할 수 있을지 의문을 품어야 합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 대한 투자에 있어서는 이미 중국 내부 투자에서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는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 누군가는 과잉 제국확장은 아닐까 의심을 품어야
합니다. 중국정부는 너무 많은 것을 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지금까지 실제로는 투자를 크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정책에 대해 많이 말하고 방송하고 홍보합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투자는 적어요. 저는 중국정부가 실제로 이 계획을 실행하고 있는지, 나아가 중국 정부가 원
하는 영향력을 획득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입니다.
-푹윙킹 교수
A. 저의 이해로는 중국의 무역 체제 내지 조공 체제는 그다지 강제적이거나 효과적이지는 않
습니다. 역사학계에서 중국의 조공체제는 그저 명분상의 제도였던 것으로 이해되며 실제로 작
동하는 것은 아니었다고 봅니다. 만약 특정 국가가 조공체제에 기꺼이 참여하고자 한다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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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는 중국 왕조에게 조공을 바치도록 허락받습니다. 그리고 매년 중국 왕조에게 조공을 바
칩니다. 그러나 만약에 이 국가가 조공을 바치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요? 중국 왕조가 그들
에게 조공체제를 강력하게 강요하는 사례는 극히 드뭅니다. 그러므로 이 체제는 매우 오래 지
속됐지만 사실상 그렇게 강력하지도, 강요되는 것도 아니라서 역설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제 생각에 명과 청이 어떻게 조공체제를 그렇게 오래 유지하였는가에 대한 대답은 이
들이 조공체제를 엄격하게 또는 강력하게 운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
로 조공체제는 매우 느슨한 명분이었습니다. 현대 중국 정부의 일대일로 정책에 대해서 저는
이것이 조공체제를 참조한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조공무역과도 비슷하지 않다고 생
각합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오해입니다. 현재까지 제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중국의 일
대일로 정책은 무역의 글로벌화를 통한 중국 경제의 발전과 이웃 국가들의 잠재적 발전을 목
표로 합니다. 그러므로 이것에 대한 역사적 교훈을 얻고자 하는 시도는 현재의 현상에 들어맞
는 역사적 사례를 과도하고 끌어오려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자, 이제 우리가 네 분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비슷한 점도 있었고, 역시 사람마다, 나라마다,
연구자의 관점마다 다르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것 같아. 일대일로 정책은 이제 등장해서
성공할까, 역사 속 해프닝으로 남을까는 앞으로 지켜봐야 할 듯.
3. 해양 세계와 대륙 세계의 충돌을 역사적으로 보는 눈
이제 그러면 우리가 대운하의 시대라는 제목과 대운하를 통해 본 중국의 정치 경제.. 사실은
역사 문화까지 다 봤어요. 이것에 대해 한 마디로 대운하는 중국인에게 뭐다! 이렇게 정리를
해주면 좋을 듯.
-직감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중국에게 대운하는 넘치면 애물단지가 되는 운하....? 강의를 들으
면서 느낀 게 결국 운하를 만드는 여러 가지 비용들, 그리고 한 번 만들어지면 쉽게 버릴 수
없었던 중국인들의 난점들을 많이 느낌. 그래서 결국 이미 들어간 매몰 비용이 많기 때문에
운하를 유지하면서, 이게 황하가 범람해서 문제가 생겼을 때도 그것을 해운으로 바로 돌리지
못하고 더 큰 비용을 들여 계속 수리하고 유지하고 했던.. 다만 치수가 잘 되면.. 운용만 잘
돼서 넘치지만 않으면 참 좋은데, 넘치면 애물단지가 되는 그런 물이었다는 느낌.
아주 흥미롭네. 그 아슬아슬한 단계를 유지하는 게 힘 들었을 듯!
-시 중국야.. 이것이 바로 중국이다. 라고 생각. 논어의 시 구야라는 말에서 생각해냄. 논어
수리편에 공자가 말하기를 너희가 제자들에게 나 공자가 너희들에게 숨기는 게 있다고 생각하
느냐? 아니다, 너희들이 본 그대로가 내 본 모습이다.라고 했음. 이 대운하도 마찬가지로 대운
하가 숨길 수 없을뿐더러 엄청나게 큰 규모도 그렇고 매우 중요하고 그 자체로도 중국이라는
느낌.. 역시 중국이니까 가능하고, 이것이야말로 중국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대운하
라고 생각함.
아주 재밌네. 대운하가 가진 의미를 아주 극대화해서 표현해준 것 같아. 사실 대운하는 이번
강의 초반에도 언급했지만 과거의 역사적 유물로 그치지 않고 현대 중국에서는 새롭게 세계의
문화유산으로 등재시킴으로써 관광 자원으로 잘 활용하고 있거든. 사실 여기서 그래서 2014년
에 중국에서 대운하라고 하는 1,800KM에 달하는 물길을 세계 문화 유산에 등재시켰다고 하
는 점.. 그래서 여전히 현재도 중국에 가면 운하에 따라 도시에는 운하가 새롭게 바뀌고 있는
모습들을 우리가 지난 시간에 보았듯 잘 만들어 놓았거든.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이후
항주에서 만나게 되는 인터뷰를 통해 언급할 수 있을 것 같고.. 이번 학기동안 1415년부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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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년, 조금 길게 보면 수나라 때부터 21세기까지 함께 이렇게 강의에 참여해줘 고맙.
오늘날 항주 시민에게 대운하의 의미는?
-서방 연구원
대운하 항주에 와서 귀한 분을 만나게 되어 잠시 이야기를 듣겠음. 이 분은 대운하 항주에 있
는 공신하 바로 앞에 대운하 박물관이 있고 대운하 박물관 바로 앞에서 일하는 분. 이 쪽에
있는 절강 불염 문화 예술 공사라고 하는 것인데요, 예쁜 도자기를 만드는 회사에서 전시를
하며 중국 차 문화를 알려주고 있는 서방이라는 분.
Q. 2014년에 세계문화유산에 등재 되었다고 들음. 아마 대다수 한국인들은 모를 것 같은데
몇 년도에 왜 중국에서 세계 문화유산으로 대운하가 등재되었는지 설명해주세요
A. 운 좋게 2010년 이곳 대운하 주위에 자리 잡았는데, 저희 회사의 주임이셨던 황 선생님께
서 해주셨던 말 가운데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 한 마디가 있어요. 바로 ‘서호는 항주의 딸이고
운하는 우리 국가의 아들이다.’ 또 하나 행운이라고 생각되는 것은 우리가 운하를 돕는 일종
의 사업을 계획하고 운하 관련 활동을 함께 누렸던 것입니다. 이 활동은 2010/6/8에 있었던
일인데 그날 너무 기뻐서 아직도 기억남. 원래 계획했던 사업은 20여명의 예술가를 모시고 운
하 강변에서 운하와 관련된 예술작품을 창작하는 것이었음. 그러나 그날 당시 저녁에 회사와
정부와 함께 대운하광장에서 야외 파티를 주관하는 가운데 대략 저녁 7시 30분 쯤 소식을 얻
음. 대운하가 드디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는 것을 듣게 됨. 그때 함께 한 모든 사람이
너무 기뻐했음.
Q. 여기 와서 운하라는 잡지를 발견함. 운하 남단이라고 해서 운하의 가장 남단인 항주의 잡
지인 듯. 사진을 잠시 보면 운하에 대해 상당히 흥미로운 사진들이 있는데, 이곳에서 일하면
서 많은 대운하를 보러 오는 관광객들을 만났을 텐데 그들을 만났을 때 항주에 있는 운하가
어떤 의미가 있는지?
A. 대운하가 등재된 이후 여기에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영광스러웠음. 우리는 스스로를 이 일
의 주역으로 생각함. 왜냐면 대운하가 등재된 이후 세계 각국의 여행객들이 운하를 방문했고
우리는 이러한 다양한 여행객들을 상대로 대운하의 문화를 이해할 수 있게 도왔기 때문입니
다. 운하의 역사와 전설 등을 알리고자 했는데 이 과정에서 우리는 먼저 스스로가 대운하에
관련된 역사에 대한 이해를 넓히고 배워야 했습니다. 이 과정을 잘 완수하여 운하에 대해 소
개하는 일을 맡게 된 것을 행운이라고 생각.
4. 21세기의 대운하와 그 미래
이제 총 14번에 걸친 대운하 시대에 대해 일단 강의를 마무리 하며 이번엔 어떤 이유로 1415
년부터 1784년까지 약 360~70년에 달하는 이 시기를 바라보는 중요한 키워드로 대운하라고
하는 것을 강조할 수 있었는가에 대해 마지막 정리. 이미 여러 번 이야기를 했지만
1415~1874년을 대운하가 이야기할 수 있는 굉장히 중요한 소재임이 분명하지만 이것이 중국
의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님. 그러나 이 시대의 중국이라고 하는.. 북경에서부터 남쪽
에 있는 항주까지를 연결하는 장장 1,800km에 달하는 대운하는 사실 전체 중국으로 보면 물
론 짧은 인공수로는 아니지만 전체를 담당하기에는 일부 한계가 있어 보임. 그런데 여기서 중
요한 것은 북경의 북단이 당시 황제의 거점이었던 북경이라고 하는 점이고 이 남쪽이 항주,
즉 양자강 하류.. 중국에서는 경제와 문화의 중심지였던 강남과 정치의 중심지의 북경을 연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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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있다는 사실. 즉, 경제 중심지와 정치 중심지를 하나로 연결하고 있는 대운하는 이른바
남과 북을 하나로 통합하는 중요한 물길인 것.
여기에 한 가지 더 중요한 루트가 장강, 양자강임. 또 하나의 강은 황하. 이른바 중원을 대표
하는 황하 문명을 이루는 북변, 중원의 이 흐름과 양자강을 통하는 남과 북의 흐름들을 이 양
자가 연결이 되는데.. 이 남과 북이 바로 연결되는 운하를 통해 황하 문명과 양자강 문명, 중
원의 흐름과 양자강의 흐름이 연결된다라고 하는 것임. 뿐만 아님. 항주에서 끝나는 듯한 대
운하는 사실상 아래에 있는 영파에 이르기까지 더 연결되어 있음. 이 영파는 일본과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접점. 일본에 있는 사절들이 중국으로 들어올 때 항상 거치는 곳이 영파
였고, 우리에게는 최부가 제주도에서 표착해서 표류하여 도착한 곳도 역시 영파 인근이었음.
따라서 이 영파라는 곳은 일본을 대표로 하는 해양 세력이 중국 내지로 들어오는 곳과 관련이
되어 있기 때문에 여기서 대운하로 바로 직접 연결이 되구요, 뿐만 아니라 중국에서 계속적으
로 항구가 열렸던 아래쪽 마카오, 마카오에서 베이징까지 연결되는데 있어서 이 감강루트, 주
강과 감강을 연결해서 양자강으로 오고 다시 양자강에서 북경으로 가는 이 전체 루트에 있어
서도 대운하는 대단히 중요한 부분을 차지함. 따라서 대운하는 단순히 북경과 항주만을 연결
하는 것이 아니라, 양자강과 황하를 연결해서 중국의 내지, 서북지방의 육상루트인 이른바 육
상실크로드와도 연결이 되어 있고 이쪽 연안에 있는 상해를 통해서는 항주로 이렇게 와서 연
결이 되고 영파를 통해서는 운하를 통해서 연결이 되고 마카오나 이쪽 왕조를 통해서는 감강
을 통해 연결이 되는 등 해양 세력과도 밀접하게 점과 선으로 연결이 되어 있는 핵심 루트가
되는 것임. 이런 대운하가 가장 힘을 발휘했던 이 시기를 대운하의 시대라고 일컫고 이 대운
하라고 하는 내륙의 유통로가 아주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면서 내부적인 장거리 유통망을 남북
으로 연결해주는 이 흐름이 내부에서 있는 원래부터 강했던 중국의 장거리 교역의 욕망을 상
당히 내부적으로 소화해줄 수 있었음.
따라서 이러한 내부적 유통망이 잘 되고 있었기 때문에, 바깥으로 즉 적어도 연안 지방을 따
라서 하려고 하는 해양, 혹은 바다 건너에 있는 외부 세력인 일본 혹은 포르투갈 등의 서양
세력과 직접적인 교류를 통해 남과 북을 연결하려고 하는 욕구들은 실제로 내부의 대운하를
통해 상당부분 그 필요성이 약해질 수밖에 없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이 시기를 우리가 이른바
대운하의 시대라고 하는 동시에 대운하의 시대를 통해 바다의 진출이라고 하는, 해양 밖으로
의 교역의 욕망들이 상당히 제어되고 있었다고 하는 것으로 이해가 될 수 있겠습니다.
전체적으로 것을 다시 한 번 보면 결국 현재 수도가 여전히 북경이죠, 북경과 대운하라고 하
는 것은 앞으로 바다, 해양 세계에 대한 관점과 또 대륙 세계에 대한 관점을 함께 가지고 볼
수 있는 루트이기도 함. 운하 자체가 놓여있는 남북의 방향 자체가 연안, 바다의 내지를 따라
남북을 가고 있기 때문에 이 길이라고 하는 것을 온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내륙의 유통망,
대륙의 관점뿐 아니라 당시 바로 해안을 통해 연결되고 있는 해양의 관점이 역시 필요하다는
것이죠. 이것이 아주 절묘하게 현재 중국 정부가 주장하고 있는 일대일로 정책과 연결되는 지
점이기도 합니다. 사실 일대는 육상 실크로드를 말하고 일로는 해양의 루트를 말하는데, 이
해양 루트와 육상 루트가 연결되는 터미널 같은 영역이 바로 베이징이고 그 베이징의 육상과
해상을 연결하는 과정에서 이해해야 하는 루트가 바로 대운하 루트이기도 한 것임. 이 운하가
바로 1784년에 끝난 줄 알았는데, 중국에서는 2014년에 대운하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를
했죠. 그러다보니 중국의 항주에서부터 경항 대운하, 수도인 북경과 항주를 연결하는 이 경항
대운하가 세계문화유산이 됐고 그것이 바로 중국의 남북을 연결하는 이 루트 자체가 하나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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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한 문화유적으로 현재 다시 되살아났고 이 루트는 중국이 만리장성이라고 하는 북방의 유
목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만든 루트와 함께 사실상 중국을 거의 t자로 연결하는 굉장히 중요한
루트가 되고 있음. 역사적으로 중요할 뿐 아니라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면서 관광자원으
로 되살아나는 형국이고, 또 한 가지 더 말하면 대운하는 현재 물이 풍부한 남쪽과 부족한 북
쪽을 연결하면서 남쪽의 물을 북쪽으로 조달하는 이른바 남수북조의 중요한 세 가지 루트 중
한 가지 루트가 되기도 함. 결국 대운하는 과거의 역사 속에 한 형상이기도 했지만 지금도 관
광자원 뿐 아니라 실제로 남과 북을 연결하는..... 다양한 물류가 지나다니고 물을 직접적으로
운송해서 북병 지역의 물 문제를 해결하는 데 중요한 기능을 함. 이런 맥락에서 대운하 시대
를 좀 더 장기적 관점에서 봤고, 이것은 앞으로 우리 한국의 관점으로 볼 때는 해양과 바다의
관점을 한 번에 바라보면서 우리가 반도국가가 가지고 있는 특성을 가지고 이런 양쪽의 관점
을 다 가지고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의 역사, 세계사의 역사를 조망 하는 데 기여할 수 있음
5. 현대 대운하의 남단 항주와 대운하
항주 시내의 옛 거리. 이름은 청하방 혹은 하방가. 이곳이 주로 발전한 시대는 남송 시대. 항
주라고 하는 도시 자체가 남송 시대에 기존에 수도였던 개봉에서 항주, 남쪽으로 왔죠. 그래
서 항주가 수도였던 남송 시대에 발전하게 됐고 이 거리 역시 그때부터 발전하기 시작해 이후
명대를 걸쳐, 특별히 청대에 아주 번영했던 곳. 그것을 보여주는 곳이 마지막 휘주 상인이라
고 불리는 청말에 호서람의 약방이 있는 곳. 호서람이 전당업이라든가 약방이라든가 무기를
판다든가 여러 가지로 돈을 벌었는데, 이곳에 호서람의 고거, 옛날 집도 바로 앞 거리에 있고
거리의 한 쪽에 호서람이 운영한 약방이 있음. 가보겠음.
여기가 바로 호서람이 운영한 약방. 호경여당국약호라고 되어 있음. 안쪽을 보면 호서람이 약
국 경영을 하던 사무실이라든가 약 파는 장소, 약을 조재하는 시설 등이 있고.. 여튼 이곳에서
마지막 휘주상인이라고 볼 수 있겠고, 그 후로도 휘주 상인이 완전히 단종된 것은 아니지만
명대에서 청대에 특별히 대운하를 중심으로 활동하고 번선했던 휘주 상인 가운데 가장 마지막
까지 힘을 발휘했던 호서람의 마지막 발자취가 항주에서 대강 끝나는 것을 알 수가 있음. 물
론 호서람은 항주를 근거지로 활동을 하며 주요한 전장이라든가 약국, 혹은 여러 시설들을 상
해나 강남 등지에다가 여러 지점에 두고 장사를 하다가 결국 태평천국의 난을 지나면서 생존
하는 데는.. 마지막 경영에는 최종적으로 실패를 했다고 볼 수 있음. 대표적 반관 반상.. 한편
으로는 상인이면서 한편으로는 관료였던 휘주상인 호서람의 마지막 모습을 여기서 확인.
여기는 남송어가라고 해서 남송 시대에 황제의 어가라고 되어 있는 거리. 대정항이라는 여러
골목들이 있고, 아까 처음에 보기도 했던 하방가가 이쪽에 있고 가다보면 휘짜호우도 있고 건
가서방도 있음. 여기에 이런 것들을 둘러보면서 무엇이 있는지 돌아보겠음. 네 이곳은 송대
거리에서 발견할 수 있는 휘자로라는 곳. 휘는 안휘성의 휘로 안휘성에서도 휘주부의 휘. 휘
주하면 휘주 상인이 생각나는데 휘주 상인이 활동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휘자로라고 하는 것은
상표죠. 그래서 여기 나오지만 주로 휘주가 문방사보로 유명했던 곳이고, 특별히 송대의 문방
사보의 발전으로 유명했던 곳입니다. 그래서 휘주에서 만들어진 각종 문예 용품들을 이곳에서
특별히 가구라든가, 건축 공예 예술품들을 현대까지도 계승해서 판매하고 있는 곳입니다.
여기가 무림광장. 무림광장에 있는 다리 밑으로 경항 운하의 가장 남쪽인 항주의 최종 종착역
이라고 볼 수 있는데, 여기에 저쪽으로 래항주유운하라고 써있음. 항주에 와서 운하를 즐기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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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오 라는 말. 위로 올라가 보겠음. (올라온 후)앞이 광장이고 뒤가 다리. 다리를 따라 올라가
보겠음. 다리에 조형물이 운하의 모습을 그려놓은 것. 절동운하라고 써있는데 절강성의 동편
에 흐르는 운하의 거리고 약 127리에 달하는 운하의 모습을.. 운하와 주변에 있는 탑들이 그
려져 있음. 이 강이 전당강으로 아주 유명한 강. 항주를 관동하고, 전당강 옆에 있는 육화탑이
라는 유명한 탑이 있음. 우리가 절강성의 항주에 오면 반드시 봐야하는 장관 중 하나가 바로
전당강. 이 전당강은 대운하와 만나는 지점이기도 하지만 뭘로 또 유명하냐면 매년 8월 18일
전후에 조석간만의 차이에 따라 해와 거리가 가까워지는 즈음으로 해서 전당강 하류에서 해류
가 안쪽으로 엄청나게 밀려옴. 이것이 아주 큰 장관을 이루어 매년 많은 사람들이 보러옴. 근
데 이거 오토바이 타고 구경하다고 죽는 경우도 많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와서 보는 곳이
이 곳. 옥화탑, 전당강을 거쳐 가면 해신묘.. 바다에 대한 해신묘가 있음. 이런 것들을 쭉 그
려놓음. 이른바 항주에 있는.. 절강성에 있는 운하 구역이 전체가 다 담겨있음.
항주를 따라 오면 소주부가 나옴. 소주부 고소역에서 무석역까지의 거리에 역참이 하나 있고
길이는 90리입니다 라고 하는 표현이 되어 있음. 그다음 여기가 양자강. 양자강의 남쪽으로
진강부라고 하는.. 대운하와 양자강이 만나는 곳. 남쪽으로는 진강부, 북쪽으로는 양주부가 있
음. 다음으로 설명할 곳은 임청. 북경까지 얼마 안 남음. 산동성에 있는 임청. 여기보면 사리
탑이 있음. 여기도 운하가 오다가 이 사리탑을 보고 임청인 것을 알 수 있음. 그리고 임청은
명대의 가장 중요한 조운로의 항고이자 중요한 거점으로 유명함. 이런 것을 배경으로 명나라
말기에 우리에게 알려져있는 소설 중 하나인 금병매가 나옴. 금병매는 서문경이라고 하는 상
인이자 호걸같은 사람과 반금련이라고 하는 여성과의 사랑 이야기. 그 상업적 배경이 임청.
이제 북경까지 거의 다 왔는데, 여기서 또 볼 것이 천진부. 천진은 이쪽에 연결되어 있는 것
을 보듯이 바다로 연결이 되어 있음. 바닷길로 연결되어 있고 물길이 들어와서 천진으로 만
남. 운하는 이쪽으로 와서 여기서 다시 만나서 쭉 올라감. 따라서 천진의 발전은 대운하와 밀
접한 관련이 있고, 또 이 천진에는 천비 천후궁.. 마조를 신앙하는 천비궁도 있음. 여기서 조
금만 올라가면 북경. 여기 보면 대사천비묘차직고작이라고 해서 원대에 쓰인, 천비에 대한 신
앙을 찬양하는 시가 있고 올라왔던 배가 마지막에 장가만이라고 하는 곳에서 잠시 머물렀다가
통주라고 하는 곳에서 최종적으로 머무르고, 드디어 통주에서 자금성 안으로 들어오게 되는
것임. 통혜하를 통해 들어오겠죠. 자금성 안에 들어와서 원나라 때 만들어진 적수담에서 정박
을 하게 되면 장장 1,780km.. 거의 1,900km에 달하는 장대한 운하길을 보게 됨. 다시 북경
의 위치에서 이쪽을 보면 어마어마하게 크고 긴 길이 보이는데 이 길을 왕복으로 당시 대운하
를 왕래했던 많은 상인들, 관료들, 조운선을 이용했던 사행단 등.. 이들의 수고를 이해할 수
있음. 기본적으로 그냥 배를 타고 왕래하는 것이고, 모터나 전기 등의 기능이 없기 때문에 항
주에서 북경까지 한 4~5개월 정도가 걸리는 여정이고 왕복으로 하면 거의 1년이 걸리는 길.
여기는 갑문에서 보는 곳이고 저기 멀리 보이는 곳이 무림광장이고 저기 보면 천년고운하가
써있음. 천년 동안 이어진 고운하. 그리고 아래가 경항 대운하가 흐르는 곳인데, 바로 저기에
운하를 다니는 배를 볼 수 있음. 보면 위에 절강성에서 출발한 배에.. 절하고 평호화 01068이
라고 하는 넘버가 써있음. 위에 스티로폼 안에 여러 식물을 키우는 것을 볼 수 있음. 뒤에 보
면 배 뒤에 에어컨이 달려 있는 것을 알 수가 있음. 뒤가 늘 집이고 가운데가 짐, 앞에는 방
향을 알 수 있는 조타수 역할을 할 수 있는 곳이 있음. 저 두 배를 보면 알 수 있지만 앞 배
는 짐이 무겁고 뒤는 가벼움. 배가 얼마나 가라앉아 있는가를 통해 알 수 있음.
이제 도착한 곳은 건륭방 대주점. 건륭제가 항주까지 대운하를 타고 내려오죠. 건륭제가 총 6
번 배를 타고 항주를 방문. 이것은 할아버지였던 강희제를 본 따서 온 것인데, 건륭제가 강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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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와서 많은 유람 생활을 즐기고 했을 때 바로 여기에 건륭제가 정박을 해서 식사를 한 것으
로 생각을 하고 만들어 놓은 배가 있음. 이 안에 식당이 있고, 거기에 가서 건륭제가 먹었던
음식을 누려보겠음. 여기가 이제 건륭제가 왔다는 곳이지만 사실상 최근에 지음. 근데 흥미로
운 것은 시진핑 주석이 와서 이 자리에 앉아서 식사도 했고 한 장소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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