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loaded by 배서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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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침략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러·일 전쟁과 일제의 침략
덩치 큰 러시아 인과 왜소한 일본인이 한판 붙으려 하고 있다. 링 위에는
동아시아의 지도가 그려져 있다. 러시아 인은 만주와 한국의 북쪽을 밟고
있고, 일본인은 오른발을 한국의 남쪽에 내딛고 있다. 링 밖에는 거만한 자세의 영
국인과 미국인 등이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 관람할 자격조차 얻지 못한 채 경기
장 밖에서 구경하고 있는 중국인의 모습이 안쓰럽게 보인다.
한국 지배와 동아시아의 주도권 장악을 둘러싸고 벌인 이 격투기(러·일 전쟁)
의 승자는 예상과는 달리 일본이었다.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등에 업은 일본은 한
국을 식민지로 삼을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일제가 러·일 전쟁 이후 한국을
강점해 간 과정을 살펴보자.
일본, 미국과 영국의 지원을 등에 업고 러시아와 맞서다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삼국 간섭으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이 위축
되었다. 이에 친러 정책을 주도했던 민비를 살해하는 만행을 저질렀으나 아관 파천
✽의화단 운동
청 말기에 일어난 농민 운동이
다. 청 왕조를 지지하고 서양
세력을 몰아내자는 구호를 내
세우며 반크리스트교, 반제국
주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으로 상황은 더욱 불리해졌다. 반면, 한반도에서 세력을 확대한 러시아는 ✽의화단
운동을 진압한다는 구실로 청에 파견한 군대 일부를 만주에 계속 주둔시켰다.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영국과 일본은 동맹을 체결하였다(1902, 제1차 영·
일 동맹). 미국도 러시아의 독주를 막기 위해 일본을 지지하였다. 한국을 둘러싼
러·일 간의 갈등이 고조되는 가운데, 일본은 한국을 분할하여 차지하자는 러시
아의 제안을 거절하고 러·일 전쟁을 일으켰다(1904. 2.).
일본, 전쟁을 일으키고 한국을 침략하다
러·일 양국 간의 전운이 감돌자 정부는 우리 영토가 전쟁터
한·일 의정서(제4조)
제3국의 침해 또는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 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
대일본 제국 정부는 곧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
며, 대한 제국 정부는 대일본 제국 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충분히 편의를 제공할 것.
대일본 제국 정부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
해 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사용할 수 있다.
위 조항의 핵심 내용을 지적해 보자.
206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로 변하는 것을 막고자 국외 중립을 선언하였다. 하지만 러·일
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이를 무시하고 서울을 점령한 후, 일본이
한국 내에서 군사 기지를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하는 한·
일 의정서를 강제로 체결하였다(1904. 2.).
그 후 전세가 유리해지자 일본은 한국의 재정·외교 고문을
추천한다는 협약(1904. 8.)을 강요하고 메가타와 미국인 스티븐
스를 고문으로 파견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한국의 내정과 외교
에 본격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미국, 영국, 러시아가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하다
일본은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격파하고 러·일 전
쟁의 승기를 잡았지만, 전쟁 비용이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 러시아도 국민의 봉기로 혼란에 빠져들고 있
었다. 이에 양국은 한국에서 일본의 정치·군사·경
제 등에 관한 특수 권익을 인정하는 내용의 포츠머스
강화 조약을 체결하였다(1905. 9.).
이에 앞서 일본은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한국에 대
한 지배를 승인받았다. 미국과 가쓰라·태프트 비밀
포츠머스 강화 조약 체결 모습 한국을 두고 협상하는데 정작 한국 대표의 모
습은 없다.
협약(1905. 7.)을 맺어 미국의 필리핀 지배를 인정하고, 일본의 한국 지배를 인정
받았다. 영국과도 제2차 영·일 동맹(1905. 8.)을 맺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독점
적 지배권을 인정받았다.
을사늑약을 강요하다
미국, 영국, 러시아로부터 한국에 대한 독점 지배를 인정받은
일본은 군대로 궁성을 포위하고, 고종과 대신들을 위협해 한국을
보호국화하는 조약 체결을 강요하였다. 일부 대신이 강력히 반대
했으나 일본은 이완용 등 을사오적을 앞세워 조약 성립을 일방적
으로 공포하였다(1905. 11.).
공식 명칭도 붙이지 못한 채 강제로 체결된 을사늑약으로 대한
제국의 외교권은 강탈당하였다. 그 후 통감부가 설치되었고,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통감으로 부임해 내정과 외교를 장악하였다.
한·일 협약도(韓日脅約圖, 신한민보) 제목의‘협(脅)’
자
는 위협한다는 뜻이다. 을사늑약이 일제의 위협(威脅)에 의해
강제로 체결되었음을 풍자하고 있다.
을사늑약과 민중의 울분
매국노 이근택의 아들은 한규설의 사위였는데, 그 딸이 시집갈 때 하녀 한 명을 데리고
갔다. 이근택이 대궐에서 돌아오며 숨이 차서 땀을 흘리며 부인을 대하였다. 그는 을사늑약
을 맺은 일을 말하며“내 다행히 죽음을 면하였다.”
라고 하였다. 이때 하녀가 부엌에 있다가
그 소리를 듣고 부엌칼을 집어들고 뛰어나오면서 소리쳐 말하기를“이근택아! 네 놈이 대신
이 되어 입은 나라의 은혜가 어떤 것인데, 나라가 위태함에 죽지 않고 다행히 목숨을 건졌다
고 하느냐. 너는 참으로 개돼지만도 못하구나. 내 비록 천인이기로서니 어찌 개돼지의 종이
되고 싶겠는가? 내 힘이 약해서 너를 만 토막으로 참하지 못하는 것이 한스럽다.”
라고 하며
다시 한규설의 집으로 도망쳐 왔다.
- 황현,“매천야록”-
*한규설은 을사늑약 체결 당시 참정대신으로, 늑약에 결사 반대하다가 일본 헌병에게 끌려 나갔다.
4. 일제의 침략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207
고종 황제가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다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은 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열강의 지
원을 얻기 위한 외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특히 미국에 지원을 호소
했지만, 이미 일본의 한국 지배를 승인한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도
움도 받을 수 없었다. 1907년 네덜란드의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
평화 회의에도 이상설, 이준, 이위종을 특사로 파견했으나, 일본과
헤이그 특사(왼쪽부터 이준, 이상설, 이위종)
영국 등의 방해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오히려 일본은 이를 빌
미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켰다.
그 후 일제는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을 강요하여 통감의 내정 간섭 권한을 크
게 강화시키고,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한국의 행정권을 장악하는 차관 정치를 실
시하였다. 또한, 군대를 해산시켰고 사법권과 경찰권도 차례로 빼앗았다. 이어 일진
회를 사주해 친일 여론을 조성하는 등 강제‘병합’
의 수순을 밟아 갔다.
한국, 일제에 강점당하다
일제는 격렬하게 전개된 우리 민족의 반일 항쟁을 무력으로 철
저히 진압하였다. 그리고 일본 군대가 서울 곳곳에 배치된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 총리대신 이완용과 통감 데라우치 사이에 이른바
‘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1910. 8.). 이 조약의 서문에는 두 나라
의 행복과 동양 평화를 위해 일본이 한국을‘병합’
한다고 쓰여 있
었지만, 사실은 무력을 앞세워 이루어진‘병탄’
일 뿐이었다.
경복궁 근정전 앞에 내걸린 일장기
일제의 한국 강점은 우리 민족이 근대 국가를 수립할 기회를 빼
앗아 갔고, 한국인의 정당한 주권 행사를 가로막았다.
침략성을 숨기고 한국의 멸망을 표현한 용어,‘병합’
‘병탄’
이라는 용어는 침략적이어서 사용할 수 없었다. 여러 가지로 고심한
결과 나는 지금까지 사용된 적이 없는‘병합’
이라는 문자를 새롭게 고안해 냈
다. 이것이라면 다른 영토를 제국 영토의 일부로 삼는다고 하는 의미가‘합병’
보다 강하다.
- 일본 외무성 정무 국장 구라치 데쓰키치 -
일제는 한국을 강점하면서 침략성을 숨길 수 있는 용어를 찾는 데에도 힘썼다.‘병탄’
은
사실에 부합하지만 침략성이 너무 드러나고,‘합방’
은 양국이 대등한 관계에서 한 나라가 되
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에 차마 사용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일본은 고심 끝에
당시 일반적으로 쓰이던‘합병’
이란 글자를 바꾸어‘병합’
이라는 용어를 고안해 내었다.
일제의 한국 강점 풍자화 죽은 이토 히로
부미가 세계 지도에서 한국을 떼어 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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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일제의 한국 국권 강탈 과정과 불법성
1 외교권을 박탈한 을사늑약(1905. 11.)
제2조 일본 정부는 한국과 타국 간에 현존하는 조약의 실행을 완전히 하는 책임
을 맡고, 한국 정부는 금후에 일본 정부의 중재를 거치지 아니하고 국제
적 성질을 가진 어떠한 조약이나 약속을 맺지 않을 것을 서로 약속한다.
제3조 일본 정부는 그 대표자로 하여금 한국 황제 폐하의 밑에 1명의 통감을 두
되, 통감은 오로지 외교에 관한 사항을 관리하기 위해 경성에 주재하고
친히 한국 황제 폐하를 알현할 권리를 가진다.
을사늑약 문서의 끝부분ㅤ을사늑약은 서명자인
한국 외부대신의 전권 위임장, 황제의 비준서가 없
2 행정권을 장악한 한·일 신협약(정미 7조약, 1907. 7.)
었기 때문에 국제법상으로도 무효이다. 또 일제는
제1조 한국 정부는 시정 개선에 관하여 통감의 지도를 받는다.
외부대신의 날인을 받는 데 급급한 나머지 공식 명
제2조 한국 정부의 법령 제정 및 중요한 행정상의 처분은 미리 통감의 승인을 거
칭마저 써 놓지 못했다.
친다.
제4조 한국 고등 관리의 임면은 통감의 동의로써 이를 행한다.
제5조 한국 정부는 통감이 추천하는 일본인을 한국 관리에 임명한다.
3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1910. 8.)
제1조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하고도 영구히 일
본 황제 폐하에게 양여한다.
제2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앞 조에 기재된 양여한다는 것을 수락하고, 또 완전
히 한국을 일본 제국에 병합하는 것을 승낙한다.
제3조 일본국 황제 폐하는 한국 황제 폐하, 태황제 폐하, 황태자 전하와 그들의
한국 병합 조서 오른쪽에는 일왕의 서명과 어새
황후, 황비 및 후손으로 하여금 각각 그 지위에 따라서 상당한 존칭, 위엄
가 찍혀 있는데, 왼쪽 한국 황제의 비준서에는 대한국
과 명예를 향유하게 하고, 또 이것을 유지하는 데 충분한 세비를 공급할
새가 아닌 행정 결재에만 사용되는‘칙명지보(勅命之
것을 약속한다.
寶)’어새가 찍혀 있고, 순종의 친필 서명도 빠져 있
다. 따라서 이 조약은 그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➊ [자료 1, 3]을 참고로 일제가 강요한 을사늑약과 병합 조약의 성격과 그 불법성을 이야기해 보자.
➋ [자료 2]를 참고하여 일제가 내정 간섭을 강화하기 위해 썼던 정책을 정리해 보자.
➌ [자료 1, 2]와 본문을 토대로 (가)`~`(라)에 들어갈 각 조약의 핵심 내용을 적어 보자.
4. 일제의 침략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209
간도와 독도
제`1`조 울릉도를 울도로 개칭하여 강원도에 부속하고 도감을 군수로 개
정하여 관제 중에 편입하고 군등(郡等)은 5등으로 할 것.
제`2`조 군청 위치는 태하동으로 정하고 구역은 울릉 전도(全島)와 죽도
(竹島), 석도(石島, 독도)를 관할할 것.
- 대한 제국‘칙령 제`41호’
(1900) -
10월 25일은 독도의 날이다. 1900년 10월 25일 대한 제국이 독도가
우리의 영토라는‘칙령 제41호’
를 제정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틀
뒤 이 칙령을 국가 공식 기관지인“관보”
에 실음으로써 대외적으로 독도가
대한 제국 칙령 제41호와 그것이 실린 관보
우리 영토임을 확실히 밝혔다. 이처럼 대한 제국은 외세의 침탈에 맞서 영토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 대표적 사례인 간도와 독도에 대해 알
아보자.
대한 제국, 간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다
간도는 두만강과 쑹화 강 사이에 있는 땅으로 조선과 청은 모호한
경계를 확정하기 위해 백두산정계비를 세웠다(1712). 그런데 19세기
후반 간도로 이주하는 사람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간도 귀속을 둘러싼
분쟁이 일어났다.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으로’
라는 백두산정계비문의 내용에
서 문제가 된 점은 동쪽의 경계로 삼는다고 새겨져 있는 토문강의 위
치였다. 이에 대해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이라고 주장했지만, 정부는
백두산정계비 부근
토문강이 쑹화 강의 상류이므로 간도가 틀림없는 우리 영토라고 주장
하였다.
이렇듯 백두산정계비문의 해석을 둘러싸고 양쪽이 팽팽하게 맞서
간도 귀속 문제는 확실한 결론을 맺지 못하였다. 그러나 대한 제국 정
부는 간도에 이미 수십만 명의 한민족이 거주하는 것을 감안하여, 간
도 관리사 이범윤을 파견하고 간도를 함경도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하
였다(1903).
이후 을사늑약으로 일제가 대한 제국의 외교권을 강탈하면서, 간도
귀속 문제는 청·일 간의 외교 문제로 넘어가 버렸다. 일제는“한·청
양국의 국경은 두만강을 경계로 삼고, 일본 정부는 간도를 청의 영토
로 인정한다.”
라는 내용의 간도 협약을 맺었다(1909). 일제는 그 대가
이범윤(1863~1940)의 허묘(국립현충원) 이범윤
은 간도 관리사로 임명되어 간도 거주 조선인에게 큰
힘이 되었고, 이후 무장 투쟁에도 앞장섰다.
210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로 만주의 철도 부설권과 탄광 채굴권 등을 얻었다. 그 결과 현재까지
간도는 중국의 영토로 남아 있다.
독도를 수호하려고 노력했으나 일본에 강탈당하다
독도는 울릉도와 함께 삼국 시대 이래로 명백한 우리 영토였지만, 개항 이후
일본 어민들이 불법 침입하는 일이 늘어났다. 이에 정부는 일본 측에 항의하고
종전과 달리 육지 주민을 울릉도에 이주시키고 관리를 파견하는 등 적극적인 개
척 정책을 펼쳤다. 한편, 일본에서도 최고 통치 기관인 태정관이 독도와 울릉도
가 자국의 영토가 아님을 명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1877).
대한 제국은 울릉도를 군으로 승격시켜 독도도 관할하게 하면서 우리의 영토
임을 분명히 밝히는 대한 제국‘칙령 제41호’
를 공표하였다(1900). 그러나 일본
은 러·일 전쟁 중에 독도를 불법적으로 자국의 영토에 편입시켰다(1905). 이는
국제법상 명백한 불법 영토 침탈 행위인 동시에 일제에 의한 한국 영토 강점의
조선 전도ㅤ1876년 일본 육군참모
국에서 발행한 지도이다. 울릉도와 독
도를 지도 오른쪽 외곽선 근처에 따로
서막이었다.
표시하여 일본이 두 섬을 조선 영토로
간주했음을 알 수 있다.
일제의 독도 강점과 대한 제국의 대응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올린 보고서와 답변
•울도 군수 심흥택의 보고서는 다음과 같습니다.“본군 소속 독도가 바깥 바다
100여 리 밖에 있는데, 본월(3월) 초 4일 배 한 척이 군내 도동포에 정박하여 일
본 관인 일행이 관사에 와서‘독도가 지금 일본 영토가 되었으므로 시찰차 왔다.’
라고 말하온 바 ⋯⋯ 이에 보고하오니 살펴 헤아리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 강원도 관찰사 서리 춘천 군수 이명래(1906. 4. 29.) -
•보고는 잘 받아 보았다. 독도의 일본 영토설은 전혀 사실 무근이니, 그 섬의 형
편과 일인이 어떻게 행동하는지를 다시 조사해서 보고하라.
- 참정대신 박제순의 지령(1906. 5. 20.) -
독도는 바다사자의 일종인 강치의 천국이었다. 이에 일본인 어부 나카이 요자부로는 독도의
강치잡이를 독점하려고 계획하였다. 그는 독도를 한국 영토로 알고 한국 정부에 강치잡이 허가
서를 제출해 달라고 일본 정부에 의뢰하였다. 당시 일본인은 독도가 한국 영토라는 태정관 지령
(1877)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 정부는 나카이의 허가서 제출을 빌미로 삼아 독
도를 무주지로 간주하고 강제로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그다음 해 시마네 현 관민은 독도를 거쳐 울릉도에 도착한 뒤, 울도 군수 심흥택에게 독도를
일본 영토로 편입한 사실을 알려 주었다. 이에 깜짝 놀란 심흥택은 그 사실을 중앙 정부에 보고
하였다. 당시 참정대신 박제순은 을사늑약에 서명한 5적 중의 한 명이었음에도, 독도의 일본 영
태정관 지령문(위쪽)과 기죽도약도
(아래쪽) “울릉도와 독도가 일본과 관
토설이 전혀 사실 무근이므로 일본인의 행동을 조사·보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는 우리 관
계없다.”
라는 일본 최고 관청인 태정관
민이‘칙령 제41호’
에 근거하여 독도를 명백한 우리 영토로 인식하면서 잘 관리하고 있었다는
의 지령문과 이에 포함된 지도이다. 지
증거이다.
도에는 두 섬의 위치와 크기가 확실하
게 그려져 있다.
4. 일제의 침략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211
항일 의병 전쟁
“당신들은 언제 전투를 했습니까?”
,“오늘 아침에 저 아랫마을에서 전투가 있었습니다.”
,“일본을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
까?”
,“이기기 힘들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어차피 싸우다 죽게 되겠지요. 그러나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가 되어 사느
니 자유민으로 싸우다 죽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 매켄지,“한국의 독립운동”
-
사진 속 어린 소년이 총을 들고 항일 의병 투쟁에
나서게 된 까닭은 무엇일까? 총을 든 어린 소년
의병의 모습에서 외세의 총칼 앞에서도 꺾이지 않은 우리
민족의 독립 정신을 확인할 수 있다. 의병들은 일본의 노
예로 사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는 비장한 각오로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항전하였다. 항일 의병 전쟁의 전
후기 의병의 모습
개 과정을 살펴보고 그 의의가 무엇인지 생각해 보자.
위정척사 운동을 계승한 전기 의병
의병의 시기 구분
전기 의병(1894~1895), 중기
의병(1905~1906), 후기 의병
(1907~1910)은 일어난 해의 간
지를 따서 각각 을미의병, 을사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후부터 시작된 의병 투쟁은 명성 황후 살해 사건에 이어
정부가 단발령을 공포하자 전국 곳곳으로 확산되었다.
유인석, 이소응 등 위정척사 사상을 지닌 유생들은 단발령을 비롯한 개화 정책
의병, 정미의병 등으로 부르기도
을 비판하며 의병을 일으켰다. 이를 통해 유교 윤리를 수호하고 외세를 몰아내고
한다.
자 하였다. 농민과 동학 농민군의 잔여 세력도 의병에 적극 가담하였다. 그러나
아관 파천 이후 고종이 단발령을 취소하고 의병 해산 권고 조칙을 내리자 의병은
대부분 해산하였다.
그 후 동학 농민 운동이나 의병에 참여했던 백성은 활빈당 등의 무장 결사를 조
직하여 투쟁을 이어갔다. 활빈당은 1905년 무렵 지도부 대부분이 체포된 뒤에 잔
여 세력이 의병에 합류하였다.
평민 의병장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중기 의병
활빈당 강령(일부)
•시급히 방곡을 실시하여 백성을 구제할 것.
•시장에 외국 상인이 나오는 것을 엄금할 것.
러·일 전쟁 발발 이후 일제의 침략이 본격화되고 을사늑약으로
나라가 큰 위기를 맞게 되자, 수많은 의병이 일어나 항일 구국 투쟁
•사전을 혁파하고 토지를 균등하게 나눌 것.
을 전개하였다. 이때에는 유생뿐만 아니라 평민 출신 의병장이 크
•일정하게 곡가를 낮추게 하는 법을 만들어
게 활약했는데, 이를 중기 의병이라 한다.
백성을 구제할 것.
•외국에 철도 부설권을 허락하지 말 것.
-‘대한 사민 논설’
, 한성신보(1900) -
을사늑약이 강요되자 민종식은 의병을 모아 한때 충청남도의 홍
주성을 점령하여 기세를 올렸으나, 일본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고 말
았다. 최익현은 제자들과 봉기하여 정읍·순창 일대를 장악하였다.
그러나 관군이 출동하자 항전을 중지하고 체포되어 일본군에게 넘
겨졌고, 쓰시마 섬에 유배되어 순국하였다.
212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평민 의병장 신돌석은 경상도와 강원도 경계에 있는 일월산을 근거지로 의병
부대의 규모를 강화하고, 신출귀몰한 유격전을 펼쳐 일본군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그의 부대는 민중뿐만 아니라 양반으로부터도 커다란 호응을 받았다.
전국적인 의병 전쟁으로 발전한 후기 의병
고종 황제가 강제로 퇴위당하고 군대가 해산되자, 의병의 항전은 더욱 거세졌
다. 서울 시위대를 비롯한 각지의 해산 군인들이 의병에 가담하여 전투력이 강화
되고, 국권 회복 투쟁도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때의 의병을 후기 의병이라
태백산 호랑이라 불리던 신돌석
고 한다. 후기 의병은 유생과 농민, 해산 군인뿐 아니라 노동자, 상인, 교사와 학
생 등 전 계층이 참여한 전국적인 항일 구국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의병 전쟁이 확산되자 의병 간에 연합 전선이 모색되었다. 이에 유생 의병
장들이 중심이 되어 13도 연합 의병 부대(13도 창의군)를 결성하였다. 경기
도 양주에 집결한 의병은 이인영을 총대장으로 추대하고 서울 진공 작전에
나섰으나, 우세한 화력의 일본군에게 가로막히고 말았다.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뒤에도 의병의 항일 전쟁은 계속되었다. 가장 활
발한 지역은 몰락 양반, 평민, 천민 출신 의병장이 활동한 호남 지방이었다.
호남 의병은 유격 전술을 펼치며 끊임없이 일제에 타격을 가하였다.
후기 의병장의 신분·직업별 분포
의병 투쟁이 일어난 계기
1 유인석 창의문
2 최익현 격문
우리 국모의 원수를 생각하며 이미 이를 갈았는데, 참혹한 일이
오호라. 작년 10월(1905. 11.)에 저들이 한 행위
더하여 우리 부모에게서 받은 머리털을 풀 베듯이 베어 버리니 이
는 만고에 일찍이 없던 일로서, 억압으로 한 조각의
무슨 변고란 말인가. ⋯⋯ 이에 감히 의병을 일으켜 마침내 이 뜻을
종이에 조인하여 5백 년 전해 오던 종묘사직이 드
세상에 포고하노니, 위로는 공경에서 아래로는 서민까지 어느 누가
디어 하룻밤 사이에 망했으니, 천지신명도 놀라고
애통하고 절박하지 않으리.
조종의 영혼도 슬퍼하였다. 우리 의병 군사의 올바
- 유인석,“의암집”
(1895) -
름을 믿고 적의 강대함을 두려워하지 말자. 이에 격
문을 돌리니 의연히 일어나라.
- 최익현,‘포고팔도사민’
(1906) -
3 해외 동포에게 보내는 격문
동포들이여! 우리는 함께 뭉쳐 조국을 위해 헌신하여 독립을 되
찾아야 한다. 우리는 야만 일본 제국의 잘못과 광란에 대해 전 세계
에 호소해야 한다. 간교하고 잔인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인류의
적이요, 진보의 적이다.
➊ 자료와 본문을 참고하여 전기·중기·후기 의병이 일
어난 주요 계기와 의의에 대해 각각 말해 보자.
- 대한 관동 창의대장 이인영(1907) -
4. 일제의 침략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213
일제, 수많은 의병과 양민을 학살하다
서울 진공 작전이 실패한 뒤에도 의병의 끈질긴 저항이 계속
되자, 일제는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만드는 데 가장 큰 걸림돌이
의병이라 판단하여 대대적인 공세에 나섰다.
1909년 9월부터 2개월 동안 진행된 호남 의병 토벌에서 의병
장 100여 명, 의병 4,000여 명이 체포되거나 학살당하였다. 이
를‘남한 대토벌 작전’
이라고 부른다. 이때 일본군은 의병의 근
거지가 될 만한 촌락과 가옥을 닥치는 대로 방화하고 살육하여
초토화시켰다. 이로 인해 국내에서 크게 위축된 의병은 국외로
‘남한 대토벌 작전’
으로 체포된 호남 지역 의병장들(1909)
이동하여 항전을 지속하였다.
‘의병은 우리 민족의 정수(精髓)이다’
전술을 알지 못하는 유생이나 무기도 없는 농민이 순국을 각오하고 맨손과 맨주먹으로
적과 싸워 뼈를 들판에 파묻을지언정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으니, 이것이야말로 오랜 역사적 전
통 가운데 배양된 민족정신의 발로였다.
- 박은식,“한국독립운동지혈사”-
을사늑약 이후 불붙은 의병 투쟁은 군대 해산을 계기
로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항일 의병 전쟁으로
발전해 나갔다. 비록 국권 회복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우리 민족의 강한 독립 정신과 애국심을 보여 주었다.
일제는 한국 강점을 위해 대규모의 군대를 동원한 식
민지 침략 전쟁을 벌였고, 의병은 이에 맞서 끈질기게
방어 전쟁을 전개하였다. 서울 진공 작전 당시 총대장
이인영은 각국의 외교 사절단을 향해 의병을 국제법상
의 교전 단체로 승인해 달라고 호소하였다. 이는 의병
투쟁이 일제의 침략에 대한 국가 단위의 정당한 전쟁임
을 주장한 것이다.
일부 양반 출신 의병장은 평민 의병장을 인정하지 않
는 등 봉건적 신분 의식을 극복하지 못한 한계를 지닌
경우도 있었다. 그렇지만 의병은 국제적 지원이 전혀 없
고 군사력의 열세가 뚜렷한 상황에서도 민족적 자유를
수호하기 위한 투쟁을 지속해 나갔다. 의병 전쟁은 일제
항일 의병 전쟁의 전개
의 강점을 지연시켰으며, 그 정신은 일제 강점기의 무장
독립 전쟁으로 계승되었다.
214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민족의 이름으로 응징한 항일 의거 활동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에 대한 반대 투쟁이 다양하게 전개되었
다. 조약 파기를 주장하는 반대 상소가 잇따랐으며, 늑약의 부당성을
규탄하는 언론 활동도 활발하였다. 민영환, 조병세 등은 울분을 참지
못하고 자결하였다.
한편, 을사늑약에 적극 협조한 매국노와 일본 침략자를 직접 응징
한 의사들의 행동도 잇따랐다. 나철, 오기호 등은 을사오적을 처단하
기 위해‘자신회’
라는 5적 암살단을 조직하였다. 미국의 샌프란시스
코에서는 장인환과 전명운이 일제의 한국 침략이 정당하다고 선전하
자신회(自新會)
는 외교 고문 스티븐스를 저격하였다(1908).
연해주에서 의병을 이끌고 활약하던 안중근은 침략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처단하였다(1909). 그는 최후 진술에서‘대한의군의 참모 중장으로서
독립 전쟁의 일환으로 이토를 죽였기 때문에 형사범이 아니라 전쟁 포로로 대우
해 줄 것’
을 당당하게 주장하였다. 이재명은 매국노를 처단하는 것이 국권 수호의
지름길이라 여기고, 이완용을 칼로 찔러 을사오적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이처럼 목숨을 내건 의거 활동은 매국노들과 일제의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고,
독립 투쟁을 확산시키는 기폭제가 되었다. 나아가 우리의 주권 수호 의지와 한국
침략에 대한 일제의 부당성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이재명
동양과 세계의 진정한 평화를 외친 안중근의“동양 평화론”
일왕이 러·일 전쟁을 선전 포고하는 글에“동양 평화와 대한 독립을 공고히 한다.”
라고 하였다. ⋯⋯ 슬프다! 가장 가깝고 가장 친하며 어질고 약한 한국을 억압하여 조
약을 맺고 강점하였다. 지금 서양 세력이 동양으로 침략의 손길을 뻗어 오고 있는데,
이 재앙을 동양이 일치단결해서 막아 내는 것이 가장 중요함은 어린아이도 다 아는
일이다. 무슨 까닭으로 일본은 이러한 당연한 형세를 무시하고 같은 동양의 이웃
나라를 약탈하고 친구의 정을 끊어, 서양 세력이 애쓰지 않고 이득을 얻게
하려 한단 말인가.
-“동양 평화론”
(1910. 2.) 약지가 잘린 손바닥인
“동양 평화론”
은 안중근이 뤼순 감옥에서 사형을 앞두고 집필한 글이다. 안중근은 이 글에서 이토
안중근
히로부미를 처단한 이유를 밝히고, 진정한 동양 평화는 한ㆍ중ㆍ일 삼국이 독립 국가로 대등하게 상호 협력할 때 가능하다고 주장
하였다. 그런데 일본은 한국의 주권을 부정하고 침략하였기 때문에 동양 평화를 해치는 적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처럼“동양 평화론”
의 핵심은 한국을 침략한 일본의 잘못을 깨닫게 하는 데 있었다. 따라서 인종주의의 관점에서 서양 세력의
침략을 막아 내기 위해 무조건 동양이 하나로 합쳐야 한다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국가 간의 평등과 상호 협력으로 국제 평화를 이
룩하자는 그의 주장은 오늘날에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분쟁을 극복하는 보편적 원리로 높이 평가받고 있다.
4. 일제의 침략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215
애국 계몽 운동
천지가 있은 이래로 ⋯⋯ 경쟁이 없는 때가 없었으니, 승자는 주인이 되고 패자는 노예가 되었으
며, ⋯⋯ 승자는 존재하고 패자는 멸망했으니, 그 경쟁의 시대에 처하여 무릇 지각이 있고 움직일
수 있는 사람 중 다른 사람에게 승리할 것을 바라지 않는 사람이 있겠는가? 비록 보통으로 나누는
이야기와 간단한 노름일지라도 승리를 좋아하고 패배를 싫어하거늘, 하물며 국가의 존망이 달린
큰 문제에 있어서랴!
- 박은식,“서우”제1호(1906) -
윗글을 보면 자연 생태계와 마찬가지로 인간 사회에도 적자생존의 경쟁 논리가 적용된다고 생각
하고 있다. 즉 나라와 나라, 민족과 민족 사이에서도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
박은식
한 인식 위에서 을사늑약을 전후하여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무장 투쟁을 펼쳤던 의병과는 달리 실력 양성을 통해 국권을 수호하려는 애
국 계몽 운동이 활발히 일어났다. 애국 계몽 운동은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것이 지닌 역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개화 자강 운동을 계승하다
헌정 연구회 강령
개화파는 서양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문명개화(근대화)’
를
1. 제왕의 권위는 헌법에 정해진 바에 따
라 존중할 것.
2. 정부의 명령은 법률 규칙에 정해진
바에 따라 복종할 것.
이룩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갑신정변과 갑오개혁 등 개화 운동을 전개
했지만 민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였다. 여기에서 교훈을 얻은 독립 협회
는 먼저 민중을 계몽하고 국권·민권 운동을 전개해 근대 국가를 수립
3. 국민의 권리는 법률에 정해진 바에 따
라 자유로이 행사할 것.
하려 했으나, 수구 세력의 방해로 해산되었다.
그 후 일제의 침략이 거세지자 수많은 애국 단체가 만들어져 개화
자강 운동을 지속적으로 펼쳐 나갔다. 보국안민(輔國安民)을 뜻하는
보안회(1904)는 러·일 전쟁 중 일제가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해 오자 끝까지 반
대 운동을 전개하여 이를 철회시켰다.
독립 협회를 계승한 헌정 연구회(1905)는 의회 설립을 통한 입헌 정치 체제 수
립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왕실과 정부도 헌법과 법률에 따라 활동해야
하며, 국민은 법률이 보장하는 권리를 누릴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대한 자강회, 국권 수호를 외치다
을사늑약 이후 개화 지식인과 시민은 국권 수호를 위해서는 의병 투쟁보다 실
력 양성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였다. 헌정 연구회를 계승한 대한 자강회(1906)
는 교육과 산업 진흥 등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수호 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위
해 전국에 지회를 설치하고 월보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일제가 고종을 강제로 퇴
위시키자, 격렬한 반대 운동을 벌이다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산되었다.
대한 자강회의 후신으로 대한 협회가 조직되어 교육 보급, 산업 발전 등의 강
대한 자강회 월보
216
령을 내걸고 활동했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국권 수호라는 목표 의식은 약해졌다.
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신민회, 실력 양성과 더불어 무장 투쟁을 준비하다
일제의 식민지 침략이 심화되는 가운데 항일 비밀 결사가 활발하게 조직되었는
데, 대표적인 것이 신민회이다(1907). 신민회에는 안창호, 양기탁, 신채호 등 각
계각층의 애국지사가 참여하였다.
신민회는 취지문에‘오직 신정신을 불러 깨우쳐서 신단체를 조직한 후에 신국
가를 건설할 뿐이다.’
라고 밝혔다. 이는 신민회가 공화 정체의 근대 국가를 수립
하려 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를 위해 신민회는 실력 양성 운동을 활발히 전개하였
다. 대성 학교와 오산 학교 등을 세워 민족주의 교육을 실시했고, 자기 회사와 태
안창호ㅤ신민회의 설립과 활동
에 핵심 역할을 하였다.
극 서관 등을 설립하여 민족 산업의 육성에 노력하였다.
하지만 일제의 국권 침탈이 노골화되자, 장기적인 독립운동의 기반을 닦아 독립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나섰다. 이에 따라 이회영, 이상
✽105인 사건(1911)
룡 등은 남만주 유하현의 삼원보에 한인촌을 건설하고 독립 전쟁을 준비하였다. 이
안중근의 사촌 안명근이 독립
러한 활동은 애국 계몽 운동 세력이 의병 부대와 연대하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제는 이를 총독 암살 미수 사건
✽
신민회의 국내 조직은 일제가 날조한 105인 사건으로 해산되었지만, 이에 가
담했던 애국지사들은 이후에도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민족 운동을 전개하였다.
자금을 모금하다가 적발되자, 일
으로 날조하고 수백 명의 애국
지사를 검거하여 그중 105인을
구속하였다.
애국 계몽 운동
1 대한 자강회 취지문
2 신민회의 목적
무릇 우리나라의 독립은 오직 자강(自强)의 여하에 있을 따름이다. ⋯⋯
신민회의 목적은 한국의 부패한 사상과 습
자강의 방법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교육을 진작하고 산업을 일으키
관을 혁신할 국민을 유신(維新)케 하며, 쇠퇴
는 데 있다. 무릇 교육이 일어나지 못하면 국민의 지식이 열리지 않고, 산
한 발육과 산업을 개량하여 사업을 유신케
업이 일어나지 않으면 나라의 부가 늘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국
하며, 유신한 국민이 통일 연합하여 유신한
민의 지식을 열고 국력을 기르는 길은 무엇보다도 교육과 산업의 발달에
자유 문명국을 성립케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
있지 않겠는가? 교육과 산업의 발달이 곧 하나뿐인 자강의 방도임을 알
서, 그 깊은 뜻은 열국 보호하에 공화 정체의
수 있을 것이다. ⋯⋯
독립국으로 함에 목적이 있다고 함.
-“대한 자강회 월보”제1호(1906) -
-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일본헌병대기밀보고(1909) -
➊ [자료 1]을 참고하여 애국 계몽 운동이 추구하는
3 국외 독립운동 기지 건설
⋯⋯ 남만주로 집단 이주하려고 기도하고, 조선 본토에서 상당한 재력
민족 운동의 방향을 설명해 보자.
이 있는 사람들을 그곳에 이주시켜 토지를 사들이고 촌락을 세워 새 영토
➋ [자료 2]에 나타난 신민회의 목적을 지적해 보고,
로 삼고, 다수의 청년 동지를 모집·파견하여 한인 단체를 일으키며, 학교
기존의 애국 단체와 무엇이 다른지 말해 보자.
를 세워 민족 교육을 실시하고, 나아가 무관 학교를 설립하여 문무를 겸하
는 교육을 실시하면서, 기회를 엿보아 독립 전쟁을 일으켜 구한국의 국권
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
- 105인 사건 판결문(1911) -
➌ 신민회가 [자료 3]과 같은 활동을 전개한 이유는
무엇인가?
4. 일제의 침략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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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언론·출판을 통한 구국 운동
국권 수호를 위해서는 민중 계몽과 신교육의 보급이 시급하다고
인식한 애국지사들에 의해 기호 흥학회, 서북 학회 등 많은 학회가
설립되었다. 이들 학회는 학교를 세우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
과서를 보급했으며, 월보를 발행하여 민중을 계몽하였다. 그 결과
1910년경에는 전국에 2,000여 개나 되는 사립 학교가 들어섰다.
항일 언론 활동도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독립신문의 뒤를 이어
발간된 다양한 신문들이 근대 의식과 애국심을 고취하면서 일제의
기호 흥학회 월보(왼쪽)와 서북
국권 침탈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일제 통감부는 신문지법과 보안
학회 월보(오른쪽)
법을 제정해 신문에 대한 사전 검열을 실시하고 많은 서적을 금서로 지정했으며,
집회·결사의 자유를 억압하였다. 이로 인해 교육·언론·출판 등을 통한 애국
계몽 운동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애국 계몽 운동, 민족 운동의 올바른 이념과 노선을 제시하다
애국 계몽 운동에 앞장선 진보적 지식인과 시민은 애국 단체를 조직하고, 언
론·학교·학회 등을 통해 국민의 애국심을 고취하고 근대 의식을 일깨웠다. 아
울러 그들은 산업을 육성하여 경제 자립을 이룩함으로써 나라를 지키려 하였다.
하지만 사회 진화론을 신봉하던 일부 지식인은 을사늑약 이후 강대국 일본에
의한 약소국 한국의 지배를 필연적 현실로 받아들여, 경제·문화적 실력 양성에
만 주력하고 의병 투쟁을 격렬히 비판하는 경향이 있었다.
이승훈ㅤ신민회의 식산흥업 운
이러한 한계는 장기적인 독립 전쟁을 준비하고 공화 정체의 독립된 민족 국가
동을 이끌었고, 민족 교육에도 앞
장섰다.
건설을 제시한 신민회 활동을 통해 극복되었다.
애국 계몽 운동의 의의와 한계
백성이 깨어나야 나라가 산다
의병 제군에게 경고한다
나라가 기울어 가는데 그저 앉아만 있을 수 없다. 이 아름다
⋯⋯ 의병 제군의 오늘 이러한 행동이 ⋯⋯ 실은 도리어
운 강산, 조상이 지켜온 강토를 원수인 일본인에게 내맡길 수
동포를 해치고 조국을 상하게 할 뿐이요, 털끝만치도 실효가
있겠는가? 총을 드는 사람, 칼을 드는 사람도 있어야 할 것이
없을지니, ⋯⋯ 국권을 되찾으려고 한다면 눈앞의 치욕을 참
다. 하지만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백성을 깨우치는 일이다.
고 국가의 원대한 계획을 도모하여 모두 병기를 버리고 각자
⋯⋯ 내가 오늘 이 학교를 세우는 것도 후손을 가르쳐 만분의
고향으로 돌아가, 농부는 농업을 열심히 하고 공장(工匠)은
일이라도 나라의 도움이 되기를 원하기 때문이다.
공업을 열심히 해야 한다.
- 이승훈, 오산 학교 개교식 식사(1907. 12.) -
자료를 토대로 애국 계몽 운동에서는 의병 투쟁보다 무엇을 더 중시했는지 지적해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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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국제 질서의 변동과 근대 국가 수립 운동
- 황성신문(1907. 9. 25.) -
글을 읽고 아래 빈칸에 자신의 의견을 등록해 보자.
의병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
제안
“민족의 정수, 의병 운동을 비판한 애국 계몽 운동가를
고발합니다.”
의병장 님이 올린 글입니다.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여 목숨을 걸고 항쟁했던 의병 운동을‘무모하다’
라며 비판한 애국 계
몽 운동가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사람입니까? 을사늑약 이후 적극적인 의병 투쟁이 없었다면 일
제의 한국 강점은 더 빨리 더 쉽게 이루어졌겠죠. 의병 운동의 흐름이 후일 무장 투쟁으로 계승
된 것도 중요한 의미가 있고요. 이런 의병 운동을 폄하하는 것은 매국노나 하는 일이겠죠.
누리꾼 댓글
실력 양성 의병 운동을 하시던 분들의 애국정신과 희생정신을 부인할 수는 없지만, 솔직히 계란으로 바위 치기
아니었습니까? 최신식 무기로 무장한 일본군에게 화승총 쏘고 저항해 봤자, 끝이 보이는 게임이고
무모한 일입니다.
이러한 무모한 희생을 담보로 하기보다는 우리의 부족한 점을 인정하고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더욱
현명한 선택이지 않을까요? 돌아가 실력을 기르라는 말의 의미를 잘 생각해 보는 것이 좋을 듯 ⋯⋯
의병장
참 한심하네요. 도대체 언제 실력을 기릅니까? 일본이 우리가 실력을 기르게 가만둘까요? 실력이 길
러지지 않으면 평~생 일본의 식민 지배를 받아도 상관없다는 말이냐고요. 비겁한 변명입니다. 모두
가 힘을 합쳐 목숨을 걸고 독립을 지켜 내겠다는 의지로‘실천’
만 한다면 당장 쟁취해 낼 수 있는 일
입니다.
로꾸꺼 전 두 운동 모두 국권 수호라는 공통의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왜
의병 운동과 애국 계몽 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서로의 활동을 격려하지 않고 비판을 했는지 안타
까워요. 지금 실력 양성 님과 의병장 님처럼 ⋯⋯ 목표가 같다면 서로 거국적으로 힘을 합쳐야
하는 것 아닌가요? 독립을 하려면 무력도 필요하고 사회·경제적인 실력도 필요하잖아요!
예스맨 음 ⋯⋯ 좀 뜬금없긴 하지만 전 그래서 신민회의 역사적 의미가 깊다고 생각합니다. ^^
또 우리나라가 발전을 하려면, 소모적인 대립을 멈추고 방법의 다양성을 존중하면서 공존하는 마
음가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논쟁에 찬물을 끼얹어서 죄송 ~
4. 일제의 침략과 국권 수호 운동의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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