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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 슝스리(熊十力)를 중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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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 _ 제4집│07~60│전주대학교 한국고전학연구소
https://doi.org/10.37524/HUCO.2020.08.4.7
ISSN 2636-1604; eISSN 2714-0296
│기획논문│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슝스리(熊十力)를 중심으로
‘Revolutionary Confucianism’ in the 20th century of Chinese history
–Focusing of the Philosophy of Xiong Shili
저우잔안(周展安)
Zhou, Zhan‐An
상하이대학교(上海大學校) 중어중문학과 교수
│목차│
1. 서론
2. 혁명 유학의 경전 근거
3. 혁명 유학의 외왕학(外王學)
4. 혁명 유학의 내성학(內聖學)
5. 결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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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문 초록┃
본 논문은 20세기 중국 역사 속에서 독특한 유학인 ‘혁명 유학’을 해
석하고자 한다. 선택한 연구 대상은 20세기 중국의 저명한 사상가인 슝
스리(熊十力, 1885~1968)의 여러 저작으로, 특히 그의 ‘말년의 정론’인
『건곤연(乾坤衍)』을 주요 해석 대상으로 삼았다. 본 논문은 슝스리의 ‘혁
명 유학’에서 특히 ‘사회주의’와 ‘유학’을 어떻게 접합시키고 양자의 사상
궤적을 서로 촉발시키는지 그 윤곽을 그려 보고자 한다. 슝스리는 전통
유학에 대한 변별을 통하여 유학을 ‘대도지학(大道之學)’과 ‘소강지학(小
康之學)’으로 구분하였다. ‘대도지학’을 대표하는 중국 고전 경서에 대해
새로운 원리적인 해석을 통해 ‘유가(儒家)’와 ‘사회주의’를 접합시키는 계
기를 마련하였고 ‘혁명 유학’의 ‘외왕학(外王學)’과 ‘내성학(內聖學)’을 발
전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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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_제4집
슝스리의 전통 유학에 대한 급진적 해석, 특히 ‘대도지학’의 철학적
기초인 ‘체용불이(體用不二)’에 대한 해석은 기존의 ‘사회주의’ 구상에 대
해 새로운 요소를 제공할 수 있게 했고, ‘유물론(唯物論)’에 대해 보충과
수정을 가하게 했다. 총체적으로 보면, 슝스리는 그의 급진적인 비판 작
업을 통해 ‘사회주의’의 유가적 형태에 대해 극한적인 사고 실험을 한 것
이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사회주의’와 ‘유가’의 관계를 재인식하는 데에
유력한 참조점을 제공할 것이다.
주제어
슝스리(熊十力), 사회주의, 유가(儒家), 대도지학(大道之學), 체용불이(體用
不二)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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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20세기 중국 역사의 주기적인 변동 속에서 유가(儒家)의 보수성은 항
상 말하지 않아도 아는 것으로 여겨졌다. 이런 생각이 만들어진 원인은
우선 유가 자체가 위안스카이(袁世凱)의 복벽(復辟)과 장쉰(張勳)의 복
벽 및 이와 동시에 30년대 점점 심각해진 복고적인 경전읽기운동 등 일
련의 정치와 문화의 실천 속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던 것에서 온 것이
며, 그 자체의 보수성과 다른 역사 시기에 군벌과 정객들이 그것을 왜
곡하고 이용하며 추진했던 객관적 현실에서 온 것이다. 또 다른 측면에
서 보면, 신문화운동부터 1970년대까지 ‘법가를 평가하고 유가를 비판
[評法批儒]’하는 운동 등에서 이루어진 사상과 관념 논쟁 속에서 유가
는 총체적인 분석을 하지 않은 채 보수적이고 낙후된 학술과 사상으로
여겨졌다. 오늘날 전통문화 부흥이라는 흐름 속에서 유가는 그동안 비
판당했던 운명을 점점 벗어나게 되었다. 그러나 유가 부흥을 지지하는
자들도 유가가 20세기 급진사상에 비해 보수적이라는 것에 만족하며
‘유가를 긍정하는 것’과 ‘혁명을 성찰하는 것’을 항상 하나로 연관시켰
다. 다시 말하면, 유가에 대한 비판이든 유가에 대한 지지이든 유가는
일반적으로 20세기 급진사상의 흐름 또는 혁명과 서로 대립하는 위치
에 놓였다.
유가 자체가 능동적이든 피동적이든 20세기 정치 실천 속에서 맡
았던 역할은 ‘보수적인 유가’라는 인식을 직접 만들었고, 그것은 관념
적 측면에서 총체적으로 인식된 역사 상황이었으며 또한 이런 인식을
더욱 강화시켰다. 신문화운동이 게시한 “공자학파의 거점을 타도하자
[打倒孔家店]”라는 구호는 ‘보수적인 유가’라는 인식을 더욱 광범위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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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_제4집
게 확산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나 보수는 유학의 유일한 얼굴도 아니
고 변혁 및 혁명과의 대립도 아니며 모든 유학자들이 선택한 것도 아니
다. 우리가 신문화운동 전으로 돌아가 즉 만청(晩淸)시기 사상과 정치
적 흐름 속에서 살펴보면, 다른 사상 학파가 아닌 유가가 오히려 만청시
기 급진적 변혁의 흐름을 열었다고 하는 것이 맞다. 우선 언급해야 하
는 것은 청대 금문경학(今文經學)의 부흥이다. 금문경학의 부흥은 만
청시기 사상 변혁의 중요한 핵심이었다. 금문경학자인 유봉록(劉逢祿,
1776~1829)으로부터 시작하여 유흠(劉歆)의 경서 위조 문제에 초점이
모아졌으니, 이른바 “유흠처럼 앞선 성현을 비방하는 경우는 경술(經
術)을 겉으로만 보기 좋게 꾸며 간사함을 숭상하는 것이니 ‘어찌 애달
프지 않겠는가!’”1 이에 경학 내부에 분열이 일어났다. 전통시대 정치에
서 통치의 근간인 고문경학(古文經學)이 의심을 받게 된 것이다. 유봉
록을 스승으로 모신 공자진(龔自珍)은 금문경학의 문제의식을 발전시켰
는데, ‘삼세설(三世說)’에서의 ‘말세[衰世]’(일종의 쇠락과 혼란의 시대)를
사용하여 동시대에 대응하여 해석할 것을 명확하게 했고, 심각한 위기
의식에 기초해 “자아를 변혁해야 한다[自改革]”는 주장2을 제시하였다.
마찬가지로 유봉록을 스승으로 모신 위원(魏源)은 만청시기 중요한 경
세파(經世派) 사상가가 되었다. 캉유웨이(康有爲)는 유봉록을 계승하여
1 유봉록(劉逢祿), 『좌씨춘추고증(左氏春秋考證)』, 고힐강(顧頡剛) 교열, 박(樸)출판사,
1936, 56쪽. 전현동(錢玄同)은 “경서의 위조 문제에 대한 문제 제기는 유선생 책의 제1
부이다.” 같은 책 「후기」 6쪽 참조. 장서당(張西堂)은 유봉록을 “유흠(劉歆)의 경서위조
를 고증하여 교정한 선구자”라고 생각했다. 같은 책 「서문」 28쪽 참조.
2 저우잔안(周展安),「마르크스주의가 중국에서 확립하게 된 논리와 특질 ‐중국 근대사
의 내재적 경향이라는 시각에서‐」,『마오쩌둥 덩샤오핑 이론연구』,2015, 제3기.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11
유흠의 위조경서에 대한 고증 작업을 했고,3 금문경학이 포함하고 있는
변혁의식을 더욱 급진적으로 변화시켰다. 그의 『신학위경고(新學僞經
考)』와 『공자개제고(孔子改制考)』 등의 저서는 한나라 이후의 중국 역사
에 대해 강렬한 비판적 태도를 가졌고, ‘민주’, ‘공화’ 등의 개념을 언급하
며 사상의 측면에서 ‘무술변법’의 제반 조건을 마련했다.4 이와 같은 금
문경학자 외에 고문경학자도 강렬한 변혁의식을 가진 인물이 적지 않
았다. 만청시기 유학의 주류로서 고문경학은 여전히 예더후이(葉德輝),
왕셴첸(王先謙), 원티(文悌), 왕런쥔(王仁俊) 등 ‘삼강오륜, 군주, 황위(皇
威), 조정(朝廷)’5을 지킴으로써 올바름을 지키려는 보수적인 유학자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장타이옌(章太炎), 류스페이(劉師培) 같은 인물
은 캉유웨이, 량치차오(梁啓超)보다도 더 급진적인 사상가였다. 장타이
옌이 고문경학의 측면에서 추론 연역한 ‘신사(信史)’6사상은 역사 내부
로부터 동시대 위기의 출로를 되돌아 찾아가자는 것이다. 그 하나가 사
람들에게 호소하여 자국의 ‘언어 문자, 법령 제도, 인물의 역사’ 7를 소
중히 여기는 마음을 통해 애국을 주요 기조로 한 민족주의 사상을 일
3 “또 위원의 『시고미(詩古微)』, 유봉록의 『좌씨춘추고증(左氏春秋考證)』에서 반복하여
고증하고 교정하여 유흠이 경서를 위조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캉유웨이, 『신학위경고
(新學僞經考)』, 『캉유웨이전집』 제1권, 중국 인민대학출판사, 2007, 417쪽.
4 유봉록과 비교하면, 캉유웨이는 중국 역사를 더 명확하고 총체적으로 파악하였고 강
렬한 비판을 가했다. 그는 “2천 년의 오랜 세월을 겪으며 수만 명의 사대부가 모여 학
문을 하고 20여 왕조는 봉건 예법과 제도로 통치했고 가짜 경전을 황제가 제정한 법으
로 신봉했다”고 말했다. 캉유웨이, 앞의 책, 355쪽.
5 쑤위(蘇輿) 편, 『익교총편(翼教叢編)』, 상하이서점출판사, 2002, 서문.
6 [역주] 일종의 믿을 만한 역사를 만드는 것에 역점을 둔 사상.
7 장타이옌(章太炎), 「연설록(演說錄)」, 『민보(民報)』 제6호, 중화서국 영인판본, 793쪽.
12
공존의 인간학_제4집
으키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중국 역사를 다양하게 연구하자는 것인
데, 예를 들면 오대 왕조의 법률에 대해 연구하여 중국 역사 자체가 가
지고 있는 “생명을 중시하고, 힘들고 어려운 처지에 놓인 사람을 연민하
고, 관리와 백성이 평등하고, 부자를 통제”8하는 전통시대의 평등사상
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자는 것이다. 그는 심지어 “중국의 모든 법령제도
는 항상 사회주의에 가깝고 가장 좋지 않은 것도 여전히 사회주의에 가
깝다”9라고 생각했다. 마찬가지로 류스페이는 『양서(攘書)』를 통해 자신
의 민족혁명의 입장을 표명하였고, 또 『중국민약정의(中國民約精義)』를
통해 정치와 사회혁명의 입장을 드러냈다. 만청시기 사상가들의 중국
역사와 유가 전통 내부에 대한 비판적인 분석과 새로운 해석은 신문화
운동과 유기적으로 연결된 전사(前史)를 이루었다. 만약 우리가 신문화
운동을 만청시기 사상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인식한다면, “공자학파의 거
점을 타도하자”는 등의 구호가 유가 전체에 대한 부정이라고까지 볼 수
는 없다. 사실상 신문화운동 시기에 공자와 ‘공자학파의 거점[孔家店]’은
여전히 명확하게 구분되었다.
신문화운동 이후 중국 현대사에서 유학은 시종 정치가들에게 이용
당하거나 지배당하는 운명을 벗어나지 못했다. 하지만 만청사상의 명맥
을 이어나간 학술계와 사상계는 변혁과 혁명이라는 측면에서 유학과 경
학 그리고 공자를 급진적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류런항(劉仁航)은 1926
년에 쓴 『동방대동학안(東方大同學案)』과 1928년에 쓴 『천하태평서(天
8 장타이옌, 『오조법률색은(五朝法律索隱)』, 『태염문록초편(太炎文錄初編)』, 상하이인민
출판사, 2014, 73쪽, “重生命、 恤無告、 平吏民、 抑富人”
9 장타이옌, 「연설록(演說錄)」, 『민보(民報)』 제6호, 중화서국 영인판본, 795쪽, “中國一切
典章制度,總是近於社會主義,就是極不好的事,也還近於社會主義。”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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下太平書)』에서 공자, 노자, 양주(楊朱), 묵자, 예수, 부처를 하나로 융합
하여 이들 사상 유파 모두가 풍부한 ‘대동’사상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
했고, 심지어 마르크스 사상을 이용하여 해석하기도 했다. 주첸즈(朱謙
之)가 1927년 출판한 『대동공산주의(大同共產主義)』는 유학에서 찾아
낸 ‘대동’ 학설을 ‘대동 공산주의’로 확대해 놓은 것이고, 그것으로 국민
혁명의 이론적 기초를 삼았다. 그 급진성은 같은 시기 다이지타오(戴季
陶)의 국민혁명과 중국 전통사상의 관계에 대한 해석과는 완전히 상반
되는 것이다. 역사학자 뤼쓰몐(呂思勉)은 1934년에 완성한 『중국사회변
천사(中國社會變遷史)』와 1935년에 완성한 『대동석의(大同釋義)』와 『중
국정치사상사십강(中國政治思想史十講)』에서 유물론적이고 사회사적 관
점에서 유학의 혁명성 및 유학과 대동사상의 관계를 충분히 서술했다.
앞의 학자들과 비교했을 때, 뤼쓰몐의 사상은 특히 일종의 행동성을 가
지고 있었다. 그는 이 사회를 구하려면 사람을 개혁하여 새롭게 하는
데 그쳐서는 안 되고, 대동의 뜻을 따라 “사회를 개혁하려고 노력해야
한다”10고 강조했다.
멍원통(蒙文通)은 1930년대 발표한 『특별히 다른 정치학설[非常異義
之政治學說]』, 『특별히 다른 정치 학설의 어려움을 해결하다』 등의 장문
과 1944년 출판한 『유학오륜(儒學五論)』 등의 저작에서, 한나라 금문경
10 뤼쓰몐(呂思勉), 「대동역의(大同釋義)」,『중국문화사상사구종(中國文化思想史九種)』,
상하이고적출판사, 631쪽. 뤼쓰몐은 관념적 해석 외에 중국 사회의 구체적 상황에 대
해서도 심도 있게 관찰하였고, 특히 중국 혁명의 역사적 조건을 중시했다. 그는 중국
혁명이 농민을 중시하고 노동자에 편중되지 않아야 하고, 소련과 다르게 중국은 농민
인구가 주체인 국가라고 생각했다. “중국의 민중 8,90%는 농업에 종사하고, 신식 공
업은 대도시에만 있을 뿐이다. 혁명을 하지 않으면 자본주의가 이루어지기를 앉아서
기다리는 게 이후의 계획인가?” 같은 책, 6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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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_제4집
학자가 ‘정전제(井田制)’, ‘벽옹(辟雍)’, ‘순수(巡守)’, ‘명당(明堂)’ 등 고대
제도에 대한 해석을 통해 전해 내려온 ‘평등’, ‘혁명’, ‘제도개혁’ 사상을
해설하였다.11 요컨대, 유학은 그 자체 내부에 다양한 차이가 있고 특히
풍부한 혁명성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이 점은 중국 현대사상사에
서 많이 논의되고 서술되어 왔으며,12 중국 현대사상사에서 ‘혁명 유학’
의 맥락이 존재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논의와 서술이 신문화
운동 이후에 나타났다 하더라도 꼭 신문화운동의 산물이라고 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만청시기 사상혁명의 흐름을 이어받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뤼쓰몐의 사상은 캉유웨이에게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고,13 멍
11 멍원통(蒙文通), 『유가정치사상의 발전(儒家政治思想之發展)』, 『멍원통전집(蒙文通全
集)』 1권, 파촉출판사(巴蜀書社), 2015, 56~80쪽. 멍원통의 유가의 혁명성에 대한 해석
에 비교적 일찍 관심을 둔 것은 류샤오펑(劉小楓)의 『유가 혁명정신의 원류고찰(儒家
革命精神源流考)』, 상하이 산롄서점, 2000이다.
12 위에서 서술한 인물 외에, 현대사상사에서 서로 다른 방향과 정도에 따라 유학과 혁
명의 관계에 관심을 가졌던 학자들도 많았다. 예를 들어 천환장(陳煥章), 량수밍(梁
漱溟), 다이지타오(戴季陶), 첸무(錢穆), 후스(胡適) 등은 유학의 급진성과 유학과 사
회주의의 관련성에 대해 논술한 적이 있다. 논제의 제한으로 일일이 거론하지는 않
겠다. 오늘날 역사 조건에서, 연속성의 시야 속에서 유학을 포함한 전통문명과 혁명
의 관계에 관심을 가지고 체계적으로 분석한 것은 장즈창(張志強)의 『송대 주희와 육
구연ㆍ공자와 불교ㆍ현대사상(朱陸ㆍ孔佛ㆍ現代思想)』, 중국사회과학출판사, 2012를 참
조할 만하고, 특히 서론, 제4장, 제5장, 제7장이 볼만하다. 구체적인 인물 연구에서
는, 딩윈(丁耘), 「대륙신유가와 유가사회주의 ‐량수밍을 중심으로‐」, 『문화종횡(文化縱
橫)』, 2010, 제2기; 탕원밍(唐文明), 「천환장의 유교사회주의(陳煥章論儒教社會主義)」,
『중국유학(中國儒學)』, 2017, 제12집이 참조할 만하다. 전통 유학과 현대 혁명의 관계
에 대한 일본 학자들의 연구는 많이 축적되어 있고 깊이도 있어 중시할 만하다. 필자
가 보기에 다카다 준(高田淳), 니시코 조(西順藏), 곤도쿠니 야스(近藤邦康), 코바키
유우키(小島祐馬), 미조구치 유조(溝口雄三) 등의 연구가 체계적이다.
13 뤼쓰몐(呂思勉), 「남을 자기와 비교하다(自況)」, 『뤼쓰몐논학총고(呂思勉論學叢稿)』, 상
하이고적출판사, 2006, 745~746쪽.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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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통은 그의 스승인 랴오핑(廖平)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켰다.14 만청사
상 맥락과의 계승관계는 전통 유학 자체의 활력과 잠재적 가능성을 드
러냈다.
20세기 중국 사상사에서 이상의 맥락을 이어 나가면서 전통 유학 자
체의 잠재적 혁명성에 대해 계속 발굴하고 탐구하여 최종적으로 유가
의 혁명성을 가장 급진적인 상태로 올려놓은 인물이 바로 슝스리(熊十
力, 1885~1968)일 것이다. 초기에는 불학(佛學) 연구 중에서도 ‘유식학
(唯識學)’ 연구에 매진했다. 이는 1945년에 발표한 『독경시요(讀經示要)』
부터 1951년의 『논육경(論六經)』, 1954년의 『원유(原儒)』를 거쳐 마지막
으로 공개 출판한 저작인 1961년의 『건곤연(乾坤衍)』에까지 이른다. 슝
스리는 유가사상 중에서도 특히 유가사상의 발원지인 ‘육경’에 대해 비
교적 총체적으로 해석하였고,15 유학을 ‘대도지학(大道之學)’과 ‘소강지
학(小康之學)’의 두 가지 맥락으로 구분하였다. 더 나아가 ‘대도지학’에
대한 분석을 통해 ‘외왕학(外王學)’과 ‘내성학(內聖學)’이라는 서로 다른
시각으로 ‘대도지학’과 ‘사회주의’ 사이의 긴밀한 관계를 설명하며, “경전
문구를 상세히 살펴보니 분명히 사회주의”16라는 결론을 냈다. 총체적
으로 봤을 때 슝스리의 사상은 점점 더 급진적인 경향으로 기울어졌음
을 알 수 있다. 본 논문에서 집중적으로 연구하는 『건곤연』은 이런 급
14 멍원통(蒙文通), 「정연료사와 한대 금고문학(井研廖師與漢代今古文學)」, 『멍원통전집』
제1권, 파촉출판사, 2015, 298~299쪽.
15 이런 전문 서적들 외에 『한비자평론(韓非子評論)』, 『친구와 장강릉(張江陵)을 이야기
하다(與友人談張江陵)』에서 ‘신론’의 체계적인 「명심편(明心篇)」까지 모두 유가의 육경
의 내용을 일부 언급하고 있다.
16 슝스리(熊十力), 『건곤연(乾坤衍)』, 중화서국, 1994, 384쪽, “詳玩經文,明明是社會主
義”. 이하 본 논문에서 『건곤연』의 인용은 중화서국 판본을 사용한다.
16
공존의 인간학_제4집
진적인 사상의 귀결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 자신이 말한 것처럼 “이 책
은 병중에 쓴 것이지만 마음은 편안했고 정신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이
는 내가 말년에 세운 정론이 되었다.”17
본 논문은 『건곤연』을 주요 연구 대상으로 하여 ‘혁명 유학의 경전
근거’, ‘혁명 유학의 외왕학’, ‘혁명 유학의 내성학’이라는 측면에서 슝스
리가 어떻게 ‘사회주의’와 ‘유학’을 접합시키고, 양자의 사상 궤적을 서
로 어떻게 촉발했는지를 규명하고자 한다. 슝스리는 전통 유학에 대한
변별 작업을 통해 ‘대도지학’과 ‘소강지학’으로 구분하였고, ‘대도지학’을
대표하는 『역경(易經)』, 『춘추경(春秋經)』, 『주관경(周官經)』, 『예운경(禮
運經)』에 대한 급진적 해석을 통해 ‘사회주의’를 ‘유가’와 접합시키는 계
기를 만들어냈으며, ‘혁명 유학’의 ‘외양학’과 ‘내성학’을 발전시켰다. 전
통 유학에 대한 급진적 해석은 특히 ‘대도지학’의 철학적 기초 즉 ‘체용
불이(體用不二, 체와 용은 둘이 아니다)’에 대한 해석으로, 슝스리는 기
존의 ‘사회주의’ 구상에 대해 새로운 요소를 제공할 수 있게 되었고, ‘유
물론’에 대해서도 수정과 보충을 할 수 있게 했다. 총체적으로 보면, 슝
스리는 전통 유학에 대한 변별 작업을 통해 ‘사회주의’의 유가적 형태에
대해 극한적인 사고 실험을 한 것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도 슝스리가 실
험한 사고의 의미를 평가해야 할 것이다.
17 『건곤연』, 587쪽, “本書寫於危病之中,而心地坦然,神思弗亂。 此爲餘之衰年定論。”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17
2. 혁명 유학의 경전 근거
유학자들은 유학을 논할 때 항상 육경을 근거로 해야 한다. 그러나
슝스리가 보기에 세대를 걸쳐 내려온 소위 말하는 육경은 실제로는 ‘위
조된 경서[僞經]’18이다. 여기서 ‘위조’라는 것은 공자가 지은 진짜 경서
의 상대적인 말이다. 따라서 ‘위조된 경서’를 비판하고 진짜 경서를 탐
구하는 것은 슝스리가 스스로 유학 체계를 구성하는 첫걸음이 되었다.
그전의 『독경시요』와 『원유』 등의 저서에서 슝스리는 이미 육경의 진위
여부에 대해 변별 작업을 했었다. 그러나 『건곤연』에서 육경과 육경을
둘러싼 주석과 주석을 해석한 서적(注疏)을 검토하는 태도는 더욱 엄격
했다.
일반적인 고고학자와는 다르게 슝스리가 유가 경전에 대한 진위를
식별하는 방법은 주로 성운, 문자, 훈고를 연구하는 소학의 방법론이 아
니라 강렬한 주관적 색채를 가지고 있는 논지로부터 출발한다. 이 논지
가 바로 ‘대도지학’과 ‘소강지학’의 대립이다.19 이른바 ‘대도지학’은 ‘천하
위공(天下爲公)’ 즉 ‘천하는 만인의 것’이라는 사상체계이며, ‘소강지학’은
이에 상응하여 ‘천하위가(天下爲家)’ 즉 ‘천하는 한 개인의 것’이라는 사
18 [역주] 위경(僞經)은 금문학자(今文學者)가 고문경서(古文經書)를 일컫는 말이다.
19 ‘대동(大同)’과 ‘소강(小康)’의 대립이라는 이 논술이 주관적 색채를 가진 판단이라고
한 까닭은 ‘대동과 소강에 대한 논술’이 공자의 사상인지 아니면 유가의 사상인지 역
사상 많은 논쟁이 있었고 더욱이 중국 현대사상사에서 반복되어 온 토론이었기 때
문이다. ‘대동’ 학설은 하나뿐이 아니라 도가, 묵가, 불교, 초기 유가, 후기 유가 등등
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근대 이래 대동 학설이 공자의 학설이라는 것은 명확하고, 캉유
웨이가 ‘대동사상은 공자의 귀착점’이라고 하는 것을 제일로 꼽는다. 캉유웨이, 「논어
주」, 『캉유웨이전집』 제6권, 중국 인민대학출판사, 2007, 415쪽.
18
공존의 인간학_제4집
상체계이다. 개괄하여 말하자면, 슝스리가 보기에 진짜 경전은 대체로
‘천하위공’의 사상 경향을 드러내는 경전으로 이런 진짜 경전을 기초로
한 유학이 바로 ‘혁명 유학’인 것이다. 그래서 ‘천하위가’의 사상 경향을
드러내는 경전은 ‘위조된 경전’인 것이다.
이를 기준으로 슝스리는 우선 공자 이전의 성군을 구분했는데, 즉
‘대도지학’을 신봉한 요(堯) 임금, 순(舜) 임금과 ‘소강지학’을 신봉한 하
나라의 우(禹) 임금과 상나라의 탕(湯) 임금을 구분했다. 왜냐하면, 요
순은 “천하를 사사로이 한 가문의 소유로 여기지 않았다. 그들이 천하
를 다스림은 사방의 문을 열어 사방 백성들의 눈을 밝게 하고 사방의
소리를 들으며 천하의 백성들을 이끌었던 것이니, (천하를 다스림은) 백
성들로 하여금 모두 스스로 자신의 이목을 총명하게 사용하여 천하의
일을 함께 알게 하는 것만 함이 없다.”20 우 임금 이후 이른바 3대 성왕
들은 모두 “제왕이 천하를 개인의 소유로 여기고 후손에게 이어 주는”
제도를 취해 “천하를 어지럽히는 수괴가 되었다”는 것이다.21 그래서 ‘봉
건적인 예법과 도덕’의 창시자일 뿐이다. 따라서 슝스리는 공자가 “요순
을 본받자”라고 하는 것은 되지만, 공자가 “주나라 문왕과 무왕을 본받
자”라고 한 것은 ‘소강지학’을 지지하는 후대 유학자가 조작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소강지학’을 신봉하는 삼대 성왕은 사실 역사상 폭군과 근본
적인 차이가 없다. “은나라 주왕이나 주나라 문왕의 경우 똑같이 통치
계층이다. 여기(주왕과 문왕)는 우뚝 솟아 있고 저기(백성들)는 엎드려
20 『건곤연』, 371~372쪽, “不以天下爲其一家私有,其治天下也,辟四門、 明四目,達四聽,領
導天下庶民者,莫要於使庶民皆得自用其耳目之聰明,共知天下事”
21 『건곤연』, 371쪽, “並爲亂天下之罪魁”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19
있어, 다만 천하 대다수 백성들을 고통스럽게 할 뿐이다.”22
‘대도지학’과 ‘소강지학’은 슝스리가 공자를 분석하는 기준이기도 했
다. 슝스리가 보기에 젊은 시절 공자도 ‘봉건적인 예법과 도덕’를 신봉했
는데 만년에 이르러서야 ‘대도지학’으로 방향을 바꿨다.23 이런 전향의
계기는 공자가 열국들을 두루 돌아다니며 실천한 경험과 주역을 공부
한 경험에서 나온 것이다. “여러 나라를 두루 돌아다니면서 높은 계급
의 악독함을 목격하고, 아래 백성들이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는 것을 실
감했다. 이 때문에 혁명을 부르짖지 않을 수 없었고, 육경을 짓지 않을
수 없었다.”24 게다가 “오십에 역경(易經)을 공부하고 또 고대 천재들의
중요한 전장(典章)을 얻고서 깊고 넓게 계발되었다. 이에 평생의 실질적
인 관측이 축적되고 뭇 이치가 하나로 모이는 것을 살핌으로써 활연히
대도를 통철하게 깨달아 육경을 지은 것이다.”25
그러나 공자의 제자들은 ‘대도지학’의 정신을 관통하는 공자의 만
년 사상을 널리 알리지 않았다. “공자의 대도지학을 이어받은 이는 『사
기ㆍ중니제자열전(史記ㆍ仲尼弟子列傳)』을 근거로 하면 두 사람뿐이다.”
즉, 자유(子遊)와 자하(子夏)뿐이고, 자공(子貢), 염구(冉求), 원헌(原憲)
22 『건곤연』, 374쪽, “若殷紂、 周文同是統治階層,此起彼仆,徒苦天下大多數庶民爾”
23 근대 이래 공자 사상을 전기와 후기로 구분하는데, 이런 견해는 랴오핑(廖平)에서 시
작되었다. 랴오핑은 “주의 봉건제도는 젊은 시절 공자의 학설이고, 변화 발전한 것은
말년 공자의 뜻이다.”라고 생각했다. 랴오핑, 『금고학고(今古學考)』, 『랴오핑선집(廖平
選集)』, 리야오셴(李耀先)주편, 파촉출판사, 1998, 69쪽. 랴오핑은 나중에 또 이런 견
해를 바꿨는데 슝스리는 이런 구분을 지속했다.
24 『건곤연』, 351쪽. “周遊列國,目擊上層殘毒、 下民困於水深火熱之實感。 於是不得不呼號
革命,於是不得不作六經”
25 『건곤연』, 331쪽, “五十學易,又得古代天才之大典,啟發甚宏,於是積平生之實測,觀眾
理之彙通,豁然洞徹乎大道,而有六經之作矣。”
20
공존의 인간학_제4집
이 “세 명의 사상은 모두 소강사회의 전형이었다.”26 공자 이후 유가사상
은 더욱 분열되었다. 한비자를 계승한 공자 이후 ‘8개로 분열된 유가’라
는 견해와 『유행편(儒行篇)』의 ‘15개 유가’를 근거로 한 구분을 통해 슝
스리는 15개의 유가 중에서 ‘우사지유(憂思之儒, 우려하는 마음을 지닌
유가)’만이 대도사상을 계승했다고 생각했다. “‘우사지유’는 바르게 해
석된 적이 없었다. 나는 그것을 ‘혁명 유학’이라고 명명했다. 나라가 존
망의 위기에 처했음을 제대로 인식하고, 그 뜻을 모색하지만 변하지 않
음을 스스로 설명할 수 있으며, 백성의 아픔을 여전히 잊지 않고, 이것
이 공감과 강인한 기백을 확대하니 혁명 지사가 아니라면 있을 수 없
다. 이 글의 작자는 육국(六國)시대 사람이다. 15개의 유가 중에서 혁명
의 유가는 대도학파뿐이다.”27 나머지 14개의 유가는 전부 ‘소유(小儒)의
길’을 신봉했다. 육국시대의 유생들 대다수는 이미 공자의 대도사상을
멀리했지만, 황제 제도는 아직 확립되지 않았고 정치적 압력도 비교적
적었다. “소유들은 여전히 쇠락한 세상에서 돈독함을 구하고 마땅함을
행할 수 있었다.”28 진한(秦漢)시대가 오자 대도사상은 더욱 사라졌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의 재앙으로 유생들은 두려움을 갖게 되어 계속해
서 대도를 멀리했다. 한나라가 흥기하고서 황제의 전제정치 국면이 안
정되자, 군주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교리가 까마득한 하늘에 뭇 별들처
26 『건곤연』, 354쪽, “三子之思想,皆小康社會典型也。”
27 『건곤연』, 348쪽, “憂思之儒,從來無正解。 餘正其名曰革命之儒。 審其身曆危亡之境,能
自伸其志謀而不變,猶不忘百姓之病,此其廣大同情與堅鋼之毅力,非革命志士不能有。此
篇之作者,當是六國時人。 十五儒中,惟革命之儒是大道學派。”
28 『건곤연』, 345쪽, “小儒猶能於衰世求敦行誼”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21
럼 찬란하게 드러나 사람들이 모두 이를 추앙하였다.”29
슝스리는 많은 지면을 사용하여 한나라 시대의 학술사상 판도를 분
석하였다. 그는 이 판도를 세 개의 유파로 나눴다. 첫째는 사마담(司馬
談)과 사마천(司馬遷) 부자 일파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역사학파이다.
둘째는 공양수(公羊壽), 호무생(胡毋生), 동중서(董仲舒) 일파로 일반적
으로 말하는 금문경학파이다. 셋째는 유향(劉向), 유흠(劉歆) 부자 일파
로 일반적으로 말하는 고문경학파이다. 슝스리가 보기에, 이 세 파는
봉건 예법과 도덕의 옹호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육국의 유생과 비교할
때 한나라 유생은 특히 뒤의 두 파에 해당한다. 대도지학을 벗어났을
뿐 아니라 공자가 저술한 ‘육경’ 원본에 대해서도 대대적으로 왜곡하여
위조하였다. 예를 들면 공양수와 호무생의 『공양전(公羊傳)』은 바로 공
자의 『춘추(春秋)』에 대한 완전한 반박문이며 공자를 빙자하여 위조한
것이다. 육국 유생들의 고쳐쓰기와 전국시대의 사회 불안, 진나라의 분
서갱유와 한나라 유생들의 위조 및 한나라 통치자의 경서 원본의 훼손
을 거치면서 공자의 ‘육경’도 여기저기 흩어져서 진상을 파악하기 어렵
게 되었다. 슝스리의 추론에 근거하면, 공자의 ‘육경’은 최종적으로 이런
모습으로 드러났다. 『시경(詩經)』은 원래 『시(詩)』 삼백 편과 『시전(詩傳)』
이 있었으나, 현재 『시전』은 모두 없어지고 시 삼백 편만 남았다. 『서경
(書經)』은 원래 한 무제에 의해 훼손되었고, 후대에 전해진 『서경』은 봉
건 예법과 도덕을 옹호하는 것으로 모두 위조된 경서이다. 후세에 전해
진 『예경(禮經)』은 한나라 유생들이 육국 이래 소강파 유생들이 한 말
29 『건곤연』, 344쪽, “呂政焚坑之禍,儒生畏懼,相率遠離大道。 漢興,皇帝專制之局已穩
定,忠君教條如眾星之燦著乎太空,人皆仰之矣。”
22
공존의 인간학_제4집
들은 수집하여 기록한 것이다. 그중의 「예운편(禮運篇)」은 공자의 『예운
경(禮運經)』을 첨삭한 결과이다. 슝스리는 예전부터 위서로 의심된 『주
관(周官)』을 공자가 지은 것으로 보고 『주관경(周官經)』으로 존중하였
다. 『악경(樂經)』은 육국 동란 시기에 소실되었다. 『역경(易經)』도 왜곡
되었는데 건곤(乾坤) 두 괘만 유일하게 원문 그대로 비교적 유지되었
다. 건괘의 「단사(彖辭)」와 곤괘의 「단사」만이 공자의 원문 전부가 보존
되었다.
『춘추경(春秋經)』에 대해 말하자면, 『춘추공양전(春秋公羊傳)』은 공
양수와 호무생이 위조한 것으로, 『춘추경』의 대의를 추구하려면 하휴
(何休)의 ‘삼세설(三世說)’과 동중서가 사마천이 말한 “천자라도 깎아내
리고, 제후라도 퇴출하고, 대부라도 토벌한다.[貶天子, 退諸侯, 討大夫]”
라는 것에 대한 흩어진 언설을 종합해야지만 진상을 모색할 수 있을 뿐
이다. 총체적으로 봤을 때, “한나라에서 전해 온 오경(악경(樂經)은 소
실)은 거의 모두 소강사상이다. 이에 소강파가 고쳐 쓴 위조된 오경은
사실 공자가 쓴 진본 오경이 아니다.”30 이외에 『효경(孝經)』도 육국시
대 소강파 유생들이 위조한 것이다. 왜냐하면, 공자가 말한 효도는 “항
상 사람 본성에서 나온 진심으로 절대로 정치적 의도를 말하지 않았다.
『효경』은 통치계급을 옹호하기 위해 효도를 정치적으로 끌어들였다.”31
말하자면, ‘대도지학’이 ‘혁명 유학’의 경전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은 대체
로 『역경』의 건곤 두 괘의 「단사」와 수정된 『예운경』과 『주관경』, 하휴의
30 『건곤연』, 318쪽, “漢人傳來之五經(樂經散失),幾乎完全是小康思想。 此乃小康派所改竄
之僞五經,實非孔子五經之真本也。”
31 『건곤연』, 320쪽, “總是在斯人本性真情出指示,絕不涉及政治作用。 『孝經』將孝道引入政
治作用,以維護統治階層。”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23
‘삼세설’과 『사기』에 은폐된 『춘추』의 대의에 관한 논설뿐이다.
청대 고증학에 근거한 성과는 말할 필요 없고, 위에서 서술한 슝스
리의 ‘육경’의 진위에 대한 판별도 필연적으로 광범위한 논란을 불러일
으킬 것이다.32 슝스리가 저술한 책을 종합적으로 보면, 그는 육경에 관
한 청대 고증학의 성과를 잘 모르는 것도 아니며 고증의 기본적 기능을
중시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상대적으로 강렬한 태도를 지닌 『건곤연』
을 보면 문자, 판본, 훈고학 등에 근거하여 자구의 의미를 고찰한 부분
도 곳곳에 상당히 많다. 그러나 총체적으로 보면, 슝스리는 고증학자가
아닌 철학자의 태도로 ‘육경’을 파악했다. 그의 혁명 유학의 경전 근거
를 탐구하는 방법에 대해서는 다음 다섯 가지 측면에서 알 수 있다. 첫
째, 슝스리는 『논어(論語)』의 진실성을 비교적 중시했고 『논어』를 통해
‘육경’의 진위를 고증했다. 예를 들어, 『논어ㆍ양화(論語ㆍ陽貨)』에서 공자
가 공산불요(公山弗擾)의 부름에 응하여 가서 반란자를 도우려 했던 사
례를 통해, 공자가 말년에 통치계급에 의지하여 도를 행하려 했던 생각
을 바꿨음을 증명했다.33 둘째, 슝스리는 경전 문구 자체의 문장상에서
의 모순된 지점을 중시했다. 예를 들어 『예기ㆍ예운(禮記ㆍ禮運)』에서 “큰
도가 행해지던 때와 (하은주) 삼대의 현인들의 때는 내(공자)가 미칠 수
없지만 이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大道之行也,與三代之英,丘未之逮
32 학파의 관점에서 보면, 이는 고문학파에도 속하지 않고 금문학파에도 속하지 않
는다.
33 슝스리, 『육경은 말년 공자의 정론이다(六經是孔子晚年定論)』, 『원유(原儒)』, 중국 인민
대학출판사, 2006, 313쪽. 멍원통도 『논어ㆍ양화(論語ㆍ陽貨) 중의 이 이야기를 인용하
여 공자의 혁명사상을 증명하였다. 멍원통, 『공자사상에서 진보적 측면에 대한 연구
(孔子思想中進步面的探討)』, 『멍원통전집(蒙文通全集)』 제1권, 파촉출판사, 2015, 20쪽
참조.
24
공존의 인간학_제4집
也,而有志焉]”에서 ‘삼대의 현인들의 때’는 ‘제왕이 천하를 개인의 소유
로 여기고 후손에게 이어 주는’ 제도를 신봉하는 것으로 이는 ‘대도지
행’과 확연히 모순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슝스리는 ‘여삼대지영(與三代
之英)’은 후대 유생들이 첨가한 것이라고 단정했다. 셋째, 슝스리가 ‘육
경’을 판별하고 분석할 때 가장 중시한 것은 『역경』이었고 『역경』이 육경
의 최고봉이며 그중에서 건곤 두 괘의 「단사」라고 생각했다. 그의 해석
에 의하면, 그중 가장 중요한 것은 ‘대도지학’의 사상이다. 이는 슝스리
로 하여금 『역경』 사상을 기준으로 나머지 경전을 판단하게 했고, ‘봉건
예법과 도덕’을 드러내는 말들은 후대 유생들이 위조한 것으로 보았다.
넷째, 슝스리는 나머지 경전에서 ‘봉건 예법과 도덕’을 옹호하는 것과 확
연히 다른 내용을 읽어냈다. 예를 들면, 동중서가 사마천이 말한 “천자
라도 깎아내리고, 제후라도 퇴출하고, 대부라도 토벌한다”에 대한 언설
과 하휴의 『공양전해고(公羊傳解詁)』에 숨어 있는 혁명성, 『시경』에 기록
된 백성의 고통과 분노와 원망이 담긴 시 등이다. 이런 내용은 슝스리
의 ‘대도지학’에 대한 신념을 더욱 강화했다. 다섯째, 이는 슝스리가 신
해혁명 이후 혁명에 종사한 경력과 진나라 이후 중국 역사의 암흑을 통
감하며 학문의 길에 들어선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가장 중요한 것
이기도 하다. 그는 자서전에서 “나는 만청시기 혁명이 실패한 것에 상처
를 받았고, 또 스스로 공을 세울 재목이 아니란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중국 철학 사상을 연구하기로 결심하고 과거의 인물들에 대해 분명히
밝혀 중국이 어째서 정체되어 앞으로 나가지 못하는지를 명확하게 알
고자 했다. 그래서 고학(古學)을 연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세심히 하
면서 감히 소홀히 하지 않았다.”34 그가 육경을 고증한 것은 지적인 흥
미에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깊고 무거운 역사의식을 가지고 해 나간 것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25
이다. 그는 ‘봉건 예법과 도덕’을 통탄했는데 왜냐하면 바로 ‘봉건 예법
과 도덕’이 사상적 측면에서 중단된 적이 없던 황제 제도를 지지했고,
상하(上下), 비천(卑賤), 존비(尊卑)라는 차별적 구조를 지지했기 때문이
다.34황제 제도가 끝난 후에도 “그 전해 내려온 사리사욕과 정의감의 결
핍, 독창성이 결핍된 사고력, 고루함, 비열함, 안일함, 의기소침 등은 일
체의 악습이 되었고, 지금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그 뿌리가 쉽게 제거되
지 못하는 듯하다.”35 슝스리의 저서에는 사상의 의미와 뜻을 다른 방
향으로 전환한 문장들을 항상 행간에 집어넣었다. 이는 아마도 문장의
요지를 헷갈리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슝스리가 일종의 지식 이상의 ‘역
사‐생명의식’에 기초하여 학문을 했다는 것을 작지만 구체적으로 드러
낸 것이다. 이는 우리가 독단적이고 나아가 주관적 추측의 고증 작업을
대하는 전제가 되어야 할 것이다. 불교에서 부처는 세상에 나온 목적이
있다고 했다. 슝스리도 세상에 나온 목적을 위해 저술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실제로 그의 자각에서 비롯되었다.
3. 혁명 유학의 외왕학(外王學)
장자가 가장 먼저 언급한 ‘내성외왕(內聖外王)’이라는 말은 역대 거의
34 『건곤연』, 320쪽, “餘傷清季革命失敗,又自度非事功之材,誓研究中國哲學思想,欲明了
過去群俗,認清中國何由停滯不前。 故餘研古學,用心深細,不敢苟且。”
35 『건곤연』, 376쪽, “其所遺傳之自私自利、 缺乏正義感、 缺乏獨辟獨創的識力、 固陋、 卑
狹、 偷惰、 萎靡乃至一切惡習,延及於今,恐猶未易除其根也。”
26
공존의 인간학_제4집
모든 유학자들의 공통된 이상이었고 슝스리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
나 무엇이 ‘내성’이고 무엇이 ‘외왕’인지는 의견이 분분했다. ‘대도지학’과
‘소강지학’을 구분했던 슝스리는 ‘대도지학’에 입각한, 즉 혁명 유학의 입
장에서 ‘내성’과 ‘외왕’을 해석한 것은 분명했다. 그는 ‘외왕’을 이렇게 서
술했다. “외왕에서 왕(王)이란 향한다[往]는 뜻이다. 공자는 대도를 표명
하며 천하를 공(公)으로 삼아 만물의 이치를 깨달아 여러 가지 일을 하
는 근본을 세우고, 천하를 가(家)로 삼아 인류 생활의 안정을 도모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대도에 의해 작용을 하고 세상을 헤아리며 만물을
서로 보좌하고 인간의 도리를 깊게 하니 최고라고 할 만하다.”36 다시
말하면, 왕이 인격화된 것이 아니며 어떤 개인을 왕으로 삼는 것도 아
니고 일종의 총체적인 정치 상태인 ‘왕도(王道)’를 말하는 것으로, 다시
말하면 ‘대도(大道)’이다.
슝스리는 이처럼 풍부하고 깊고 심오한 ‘외왕(外王)’사상은 주로 『춘
추경』 에서 드러났다고 보았다. “『역경』은 광대하고 내성외왕을 모두 갖
추고 있지만 내성을 근본으로 삼았고 오경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다.
『춘추』는 『역경』을 계승하여 쓴 것으로 만물을 이루는 것은 왕도라고
했다. 내성학을 근본으로 삼았지만 왕도도 상세하게 나와 있다. 『예경』,
『악경』, 『시경』, 『서경』은 모두 『춘추』의 날개이다.”37 그러나 위 1장에서
36 『건곤연』, 314쪽, “外王者,王猶往也。孔子倡明大道,以天下爲公,立開物成務之本,以天
下一家,謀人類生活之安。 此皆依於大道而起作用,乃至裁成天地,輔相萬物,人道之隆,
可謂極矣。”
37 『건곤연』, 315쪽, “『易經』廣大,雖內外皆備,而內聖爲宗,五經同出於斯。『春秋』繼『易』
而作,成萬物者王道,雖以聖學立本,而王道特詳。 『禮』『樂』『詩』『書』四經,皆『春秋』之羽
翼也。”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27
말했듯이 후세에 전해진 『춘추』는 봉건 예법과 도덕을 널리 알린 위조
된 경전이다.
대도를 밝힌 『춘추』 의 뜻은 하휴의 『공양전해고』에서 ‘삼세설’에 관
한 서술과 흩어진 동중서의 언론들 속에서만 겨우 찾을 수 있다.38 따
라서 혁명 유학의 외왕학을 파악하려면 우선 하휴의 ‘삼세설’을 해석해
야 한다. ‘삼세설’은 만청시기 금문경학자인 캉유웨이, 피시루이(皮錫瑞)
등이 좋게 평가한 주제이지만 슝스리는 만청시기 금문경학자의 ‘삼세설’
과 하휴의 ‘삼세설’은 근본적으로 다르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만청시기
금문경학자의 ‘삼세설’은 공양전을 추종하는 유학자들이 위조한 『공양
전』과 동중서의 『춘추번로(春秋繁露)』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이다. “『공
양전』과 『춘추번로』에서 말하는 ‘삼세’란 오로지 왕과 신하 간의 은혜
와 도리만을 저술한 것으로 하휴가 서술한 ‘삼세’와는 확연히 다르고 서
로 유사한 점이 전혀 없다.”39 이른바 “오로지 왕과 신하 간의 은혜와 도
리만을 저술한 것”은 『원유』40에서 더 자세하게 해석하고 있다. “정감[情]
으로 말한 것은 ‘본 시대[見世]’에서 대부가 죽으면 비록 죄가 있을지라
도 역시 그 죽은 날짜를 기록하여 차마 생략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
써 임금은 자신이 신하를 대하는 두터운 은혜가 두렵다는 것을 그럴듯
하게 꾸미고, 신하 된 자는 임금의 은혜를 품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38 슝스리는 금문경학을 직접 계승했다고 할 수 없지만 금문경학의 영향을 약간은 받
았기에 금문경학의 개조파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점에 관해서는 필자의 다른 저서인
『경학과 20세기 중국 혁명』(출간 예정)을 참고할 수 있다.
39 『건곤연』, 316쪽, “『公羊傳』與『繁露』說‘三世’,專就君臣恩義立言,明明與何休所述‘三世’截
然不可相通,判然無有相近。”
40 [역주] 본 논문의 『원유(原儒)』 번역은 웅십력 지음, 임헌규ㆍ윤원현ㆍ김학목ㆍ류희성 옮
김, 『원유 ‐유학의 본원을 탐구함‐』 상ㆍ하, 세창출판사, 2020의 번역을 참조했다.
28
공존의 인간학_제4집
의리[義]로 말한 것은 ‘들은 시대[聞世]’에서 대부가 죽으면 죄가 없는 자
는 그 죽은 날짜를 기록하고, 죄가 있는 자는 그 죽은 날짜를 생략하
여 기록하지 않았으니, 그것으로써 신하가 임금을 섬김에 마땅히 죄가
없도록 경계한 것이다. ‘전해 들은 시대[傳聞之世]’에서 대부가 죽으면 죄
가 있든지 없든지 모두 그 죽은 날짜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시대가 멀
고 은혜가 미미해서 생략한 것이다.”41
다시 말하면, 한(漢)대 『공양전』 속의 삼세설은 단지 왕과 신하 간의
정감과 굳건한 의리 관계에 착안한 것으로 거기에서 정치사회에 대한
더 큰 관심은 없다. “그러므로 삼세(三世)에 각기 그 표현을 달리했지만,
그 큰 요지는 임금과 신하가 정감과 의리로 서로 결합할 것을 타일러
훈계하는 데 있었으며, 그 주된 의도는 신하의 도리를 더욱 중시하는
데 있었다. 임금과 신하가 정감과 의리로 서로 믿으면 전제군주제가 그
것에 의지하여 공고해지니, 공양수와 호무생 사제가 한나라를 위해 법
도를 제정한 것은 충성스러웠다고 할 수 있다.”42
다행히 예외적으로 하휴는 『공양전』에 대해 ‘풀어서 해석’을 했는데
『공양전』의 소강파 사상을 옹호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공자의 진의를 보
존하여 후대인이 그 속에서 공자의 ‘대도지학’을 살필 수 있게 했다. 이
점은 하휴가 『공양전』을 넘어서 단지 ‘보고, 듣고, 전해 들은 것’ 및 동
41 『원유(原儒)』, 123쪽, “以情言者,於所見世,大夫卒,雖有罪亦錄其卒之日,不忍略之,所以
爲君文飾其待臣子之恩厚,爲人臣者不可不懷君恩也。 以義言者,於所聞世,大夫卒,無罪
者錄其卒之日,有罪者則略其卒日而不錄,所以戒人臣事君當求無罪也。 於所傳聞之世,大
夫卒,有罪、 無罪皆不錄其卒日,世遠恩淺則略之。”
42 『원유(原儒)』, 123쪽, “故三世各異其辭,而其大要在勸戒君臣以情義相結合,其屬意臣道
尤深也。 君臣情義交孚,爲帝制所賴以鞏固,公羊壽、 胡毋師弟爲漢制法可謂忠矣。”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29
중서의 ‘삼등(三等)’의 시각에서43 ‘삼세설’의 견해를 파악한 것에서 가
장 집중적으로 드러났다. ‘거란세(據亂世)’는 ‘본 시대[所見世]’로 대응하
고, ‘승평세(升平世)’는 ‘들은 시대[所聞世]’로 대응하고, ‘태평세(太平世)’
는 ‘전해 들은 시대[所傳聞世]’로 대응한 일련의 구조는 본래 군신정의
(君臣情義)로 굳건한 ‘삼세설’을 혁명 의식이 충만한 정치 구상으로 발전
시켰다. 슝스리의 해석에서 하휴의 ‘거란세’는 “만국의 민중들이 오랫동
안 당한 압박과 침체 속에서 떨쳐 일어나 혁명을 통해 통치계급을 소멸
하고 난세를 다스려 올바른 세상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며, ‘승평세’
는 “혁명 초기 혼란한 제도를 개혁하고 새로운 사회 건설을 이끄는” 시
기를 의미하며, ‘태평세’는 “국가 간 민족 간의 모든 경계가 사라지고 세
상이 한 가족이 되고 사람은 모두 주체가 되어 모두 평등하고 서로 돕
고 피차간의 구분이 없는” 상태를 의미한다.44 이뿐만이 아니라 공자의
43 동중서는 가치의 차이라는 의미를 내포한 ‘삼등’으로 『공양전』의 ‘삼세설’을 파악하지
만 군신관계를 벗어난 시각으로 해석하고 있지는 않다. 그래서 그는 “굽히고 펴는 뜻
과 자세하고 간략한 문장이 모두 상응한다. 우리는 그 가까운 것은 가깝게 대하고,
먼 것은 멀게 대하며, 친한 것은 친하게 대하고, 소원한 것은 성글게 대한다. 또 그 귀
한 것은 귀하게 대하고, 천한 것은 천하게 대하며, 무거운 것은 무겁게 대하고, 가벼
운 것은 가볍게 대함을 안다. 두터운 것은 두텁게 대하고 얇은 것은 얇게 대하며, 선
한 것은 선하게 대하고, 악한 것은 악하게 대함을 안다. 양은 양으로 대하며, 음은 음
으로 대하고, 흰 것에는 흰 것으로 대하고 검은 것에는 검은 것으로 대함을 안다.(屈
伸之志,詳略之文,皆應之,吾以其近近而遠遠、 親親而疏疏也,亦知其貴貴而賤賤、 重重
而輕輕也,有知其厚厚而薄薄、 善善而惡惡也,有知其陽陽而陰陰、 白白而黑黑也。)” 그의
춘추대의에 대한 이해는 여전히 “안과 밖을 구분하고, 현명함과 어리석음을 차별하
며, 존귀함과 비천함을 구별하는(別內外、 差賢不肖、 而等尊卑)” 수준에 머물고 있다.
자세한 것은 동중서, 「춘추번로 ‐초장왕제일‐」, 『춘추번로』, 중화서국, 1975, 13쪽.
44 『건곤연』, 316쪽, “升平世”意味著“革命初成,亂制已革,更須領導新建設”的時期,“太平
世”則意味著“國界種界一切化除,天下一家,人各自主,而皆平等互助,無彼此分別”的
狀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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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_제4집
진의를 이어받은 하휴의 ‘삼세설’은 캉유웨이가 해석한 “아직 시대가 오
지 않아 다스림을 넘어서기 어렵다”45와 같은 것이 아니라 중단되지 않
는 ‘혁명’의 논리로 ‘삼세’를 관통하고 있다. 즉, 거란세가 승평세로 진입
하고 승평세가 태평세로 진입하는데, 이 과정에서 결코 중단된 적이 없
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제하(諸夏)가 과감하게 개조하여 이미 승평
세에 진입하면, 결단코 머뭇거림이 없어야 태평의 치세가 우리에게 다가
와서 몸소 보게 된다는 것이다.”46라는 것이다. 차라리 “삼세는 본래 한
가지 일[一事]이다. 한 가지 일이란, 혼란한 시대를 제거하여 올바른 사
회로 되돌리는 것이다.”47 슝스리는 글로는 진화론을 긍정했지만, 그의
진화론은 만청시기 유행했던 주장과 비교했을 때 이미 매우 급진화되었
다. 그는 진화의 주도권을 완전히 자신의 손으로 장악하기를 원했고 ‘시
대를 기다리는 것’을 반대하고 ‘시대를 만들기[造時]’를 주장했다.48 “‘시
대를 만든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의 병폐 및 쇠퇴하는 추세로 나가는
것을 경계하여 있는 힘을 다해 그것을 제거하고, 오직 민중들이 함께
좋아하고 함께 싫어하는 것에 따라 아주 공평하고 지극히 바른 도리를
실행함으로써, 한번 변동하여 광명스럽게 되고 형통하며 오래도록 위대
45 캉유웨이(康有爲), 『맹자미(孟子微)』,『캉유웨이전집(康有爲全集)』 제5권, 중국 인민대
학출판사, 2007, 421쪽, “時有未可,治難躐級”
46 『원유』,서문, 127쪽, “諸夏勇於改造,既進升平,決無停滯,天平之治,當及吾身而親見之
矣。”
47 『원유』,서문, 127쪽, “三世本爲一事。 一事者,撥亂世反之正也。”
48 슝스리의 ‘때를 만들자’는 것은 아마도 평소 존경하던 왕부지(王夫之)의 ‘운명을 만들
자’(造命)는 것에서 온 것 같다. ‘운명을 만들자’에 관해서는 왕부지의 『독통감론(讀通
鑒論)』, 중화서국, 1975, 742쪽 참조.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31
한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다.”49 그는 노자와 장자와 같은 도가사상가
들이 고대 성왕에 대한 비판에 대해 특히 긍정적인 태도를 지녔지만, 도
가의 소극적 사상 즉 노자의 세 가지 보물 중 하나인 “감히 천하를 위해
앞서지 않는다[不敢爲天下先]”는 것에 대해서는 여러 번 비판했다.
혁명은 슝스리가 『춘추경』을 해석하는 핵심어라고 할 수 있다. 혁명
은 ‘거란세’ 시기의 가장 중요한 수단이며 ‘승평세’와 ‘태평세’ 단계에서
구제도와 구사상을 제거하는 데 사용하는 선택지이기도 하다. 『사기』에
실린 공자의 말인 “내가 탁상공론(卓上空論)을 남기려 하는 것은 행사
(行事)의 깊고 절실함을 드러내어 분명하게 밝히는 것만 못하다.[我欲托
之空言,不如見之於行事之深切著明也]”에서의 ‘행사’는 슝스리가 보기에
‘혁명’의 의미이다. 혁명은 탁상공론이 아니라 당시 천자와 제후, 사대부
등이 모여 이룬 차별제도에 대한 날카로운 공격을 의미한 것이다. 소위
말하는 “천자라도 깎아내리고, 제후라도 퇴출하고, 대부라도 토벌한다”
는 것이다. 천자를 깎아내리는 것은 천자의 지위를 박탈하여 먼 곳으로
쫓아내는 것이다. 제후를 퇴출하는 것은 제후의 지위를 박탈하여 서민
으로 강등시키는 것이다. 사대부를 토벌하는 것은 군사를 일으켜 제거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춘추시대에는 사대부들이 실제 집권자였기 때
문이다. 아울러 천자와 제후 그리고 사대부에 대한 혁명 행동은 “폭군
을 제거하고 다른 왕을 세우는 것”50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통치계급을
소탕하고 평정하여 통치를 없애는 것이다. “제왕의 정치체제, 이데올로
49 『원유』, 서문, 128쪽, “造時者,懲過去與現時之弊,與其頹勢之所趨,而極力撥去之,惟順
群情之公欲公惡,行大正至公之道,以創開以變動、 光明、 亨通、 久大之新時代。”
50 『건곤연』, 360쪽, “革去暴君而別易一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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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_제4집
기, 사회제도, 사회풍속 등의 일체를 전복시켜 개조해야 한다.”51 이로써
민중이 주체가 되는 사회 조건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슝스리가 『춘추경』으로 ‘외왕학사상’을 해석한 핵심은 바로 『춘추경』
의 혁명사상에 착안한 것이다. 더 나아가 말하자면, 『춘추경』의 혁명
을 핵심으로 했을 뿐 아니라 육경 전체도 “완전히 혁명사상이므로, 고
대 제왕 제도와 봉건 예법 및 도덕과 하나로 뒤섞일 수 없다”52는 것이
다. 『역경』의 정괘(鼎卦)와 혁괘(革卦)는 말할 필요도 없다. 슝스리는 한
무제가 공자의 구택에서 나온 『서경』을 훼손했다고 보았는데, 왜냐하면
『서경』 속에 군주 통치에 저항하는 혁명 담론이 실려 있었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시전』은 비록 소실되었지만, 공자가 말한 ‘시는 흥기시킬 수
있다[詩可以興]’는 것은 민중들로 하여금 혁명저항사상을 흥기시킨다는
것이고, ‘살필 수 있다[可以觀]’는 것은 민중들로 하여금 세상사의 관심
을 촉발시킬 수 있다는 것이며, ‘모일 수 있다[可以群]’는 것은 서민의 연
합을 촉구하는 것이고, ‘원망할 수 있다[可以怨]’는 것은 왕과 제후, 사대
부를 증오하여 그들을 없애려고 하는 것이다. 요컨대 『시경』도 혁명사
상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53
만약에 혁명을 폭력으로써 폭력에 대응한다는 측면에서, 통치의 측
면을 철저히 소멸하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미 ‘사회주의혁명’의 내용을
담고 있다. 즉 혁명의 측면에서 해석한 『춘추경』과 ‘육경’은 이미 ‘사회주
의’와 관련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쨌든 구체적인 측면에서 아직 부족
51 『건곤연』, 342쪽, “舉股帝王之政本、 教條、 群制、 群俗,一切推翻而改造之”
52 『건곤연』, 391쪽, “完全是革命思想,無可與古帝王小康禮教混雜一團”
53 『건곤연』, 375쪽.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33
하고 여전히 ‘사회주의’에 이르는 과정에 있기에 깊이 있다고 할 수는 없
다. 더 나아가 슝스리의 『예경』의 「예운경」과 「주관경」에 대한 해석은 혁
명 유학과 사회주의 제도의 친연성을 더욱 명확하게 드러냈다. 슝스리
의 말을 빌려 말하자면, 그것은 ‘분명한 사회주의이다.’
‘난세를 다스려 정상 사회를 회복’한 혁명 실천을 거친 후, 즉 ‘승평
세’의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위에서 말한 것처럼 ‘승평세’는 혁명 이후
방치되었던 모든 일이 다시 시행되기를 기다리고 있던 상태였다. 「예운
경」과 「주관경」은 바로 이 단계에 적합하여 이용해 쓴 것이다. 개괄하
여 말하자면, “「주관경」은 혁명의 초보적 성공으로 민중을 이끌어 민중
의 힘과 의지를 결합하고 일체의 새로운 정치를 건설하여 전 세계 인류
가 함께 살기 위한 제도를 만들기 위해 기초를 준비하는 것이다. 「예운
경」은 구사회의 봉건사상을 타파하고 고대 제왕시대의 여러 가지 불평
등한 제도의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다.”54 「주관경」의 주요 목적은 생산
발전에 있으며 비정치적이다. 다만 세계에 아직도 국가가 존재하므로
잠시 국가의 형식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새로운 국가의 중점
역시 통치에 있지 않다. 그것은 안으로 민주정치 체제를 실행하고 주권
을 전 인민에게 부여하는 것으로, 실제로는 ‘육경(六卿)’이 연합하여 이
끄는 것이다. 새로운 통치의 주요 직무는 정치적 통치가 아니라 사회사
상을 개조하고 강력하게 생산 발전을 이루는 것이다. “국가를 부강하게
하고, 만민을 양성하고, 만물을 성장시키기 위해서”55이다. 특히 주의할
54 『건곤연』, 321쪽, “『周官經』是革命初步成功,領導庶民,結合眾志眾力,建樹一切新政, 爲
創行全世界人類共同生活制度預備基礎。 『禮運經』是破除舊社會宗法思想,解脫古帝王種
種大不平的教條之束縛。”
55 『건곤연』, 382쪽, “以富邦國,以養萬民,以生百物”
34
공존의 인간학_제4집
만한 것은, 슝스리가 구체적인 계획에서 “사회의 모든 조직과 정치의 모
든 행위 및 생산의 모든 계획은 다 ‘연합’과 ‘균일’이라는 두 가지 원칙
에 의거한다.”56고 강조했으며 아울러 생산 발전과 사상의 혁신을 포기
하지 않을 것을 강조했다. 왜냐하면, 봉건 예법 및 도덕은 오랫동안 사
회에 잠재되어 있으며 그 뿌리도 깊고 견고하여 민중은 그 유혹을 보편
적으로 받아들이며 자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사상의 방해를 청산하지
않으면 「주관경」에서의 새로운 사회 건설과 새로운 생산 발전도 성공할
수 없다.
‘승평세’를 지난 후에는 ‘태평세’로 진입한다. 위에서 서술한 연속되
고 급진적인 혁명 논리로 말하자면, ‘승평세’의 건설 과정 속에 이미 ‘태
평세’의 요구와 기대가 들어가 있다. 이른바 ‘태평세’는 국가의 소멸, 정
부의 소멸을 의미하지만 어떤 조직도 없는 상태는 아니며 “전 세계 인
류의 공동생활 제도를 건립하는 것”이다. 이런 제도의 특징은 “전 지구
를 대략 큰 문화권역으로 구획하고 과거 국가와 정부 체제 또는 형식을
절대로 채택하지 않는 것이다. 각 큰 문화권역을 다시 아주 작은 문화
권역으로 나누고, 이 작은 각 문화권역은 각각 공동생활의 단위가 되는
것이다. 각 단위 안의 사람들은 서로 사랑하고 서로 협력하며 모두가
각자의 자유와 자주를 방해하지 않아야 하며 그 사이에서 이끄는 자는
없다. 이것이 바로 『역경』에서 말하는 “용의 무리에는 우두머리가 없다”
는 것이다.57
56 『건곤연』, 381쪽, 社会一切组织、政治一切作为、生产一切计划,都依据于‘联’和‘均’两原
则。”
57 『건곤연』, 382쪽, “將全地球劃分爲若幹大文化區,絕不可采用過去國家和政府的體制或
形式。 每一個大文化區內,再劃分若幹極小的文化區。 每一個極小的文化區,即是一個共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35
근대 이후, 유가의 대동사상을 통해 미래의 이상사회를 구상했던 사
상가가 드물지는 않았다. 몇몇을 거론하자면, 캉유웨이는 미래의 대동
세상을 ‘도교와 불학을 통해 이루어진’ 아름다운 상태로 구상했지만 이
런 구상은 세상에 나오지 못했고 결국에는 ‘복벽을 꿈꿨다’ 류런항(劉
仁航)은 ‘여성 우월주의’를 신봉하여 미래 사회를 ‘여성화된 사회’와 ‘세
계 여성 정부’를 수립하는 것으로 구상했다.58 주첸즈는 대동사회를 국
민혁명과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완성 형태로 보았다.59 이와 비교해 보
면, 슝스리는 확실히 ‘외왕학’을 전제로 한 ‘대도지세(大道之世)’로 ‘사회
주의’적 구상에 더욱 근접했다. 특히 그의 혁명에 대한 논술은 20세기
중국 혁명의 특색으로 매우 유명하다. 그러나 이는 해외 몇몇 학자들
이 말하는 것처럼 시대의 추세에 따라 신중국 이데올로기에 억지로 갖
다 붙인 것이 아니다. 일찍이 1945년에 출판한 『독경시요』에서 슝스리
는 ‘균등’을 핵심으로 하여 「주관경」과 기타 경전을 인식했고, 혁명의 긍
정과 하휴의 ‘삼세설’에 대한 서술도 이때 형성한 것이며 선진시대 농가
와 공자사상에 대해서는 “공산주의가 분명하다.”60라고 분명하게 지적했
다. 이외에 ‘삼세설’에서 슝스리는 ‘승평세’를 더 중시했다. 이 단계의 생
산, 과학기술, 문화를 중시했으며 20세기에 제국주의가 세계적으로 정
同生活的單位。 每一個單位裏的人,互相親愛,互相合作,亦各各都不妨礙其自由自主,沒
有領導於其間者,此即『易』之所謂‘群龍無首’”。
58 류런항(劉仁航),『천하태평서(天下泰平書)』, 태동서국(泰東書局), 1928, “세계여성정부”
에 관해서는 제10권에서 상세하게 볼 수 있다.
59 주첸즈는 쑨원 말년의 사상을 더욱 중시했는데 쑨원은 말년에 이미 “대동주의적 삼
민주의론”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주첸즈, 「대동의 길에 이르다」, 『주첸즈문집(朱謙之
文集)』 제1권, 푸젠교육출판사, 2002, 647쪽.
60 슝스리, 『독경시요(讀經示要)』, 중국인민대학출판사, 2006, 174쪽, “顯然共產主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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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_제4집
치, 문화, 경제 분야에서 행한 침략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었고 이 모
든 것들이 그의 ‘사회주의’에 더 많은 사회‐역사적 내용을 부여했다. 그
도 그의 ‘사회주의’가 캉유웨이 등의 ‘대동사회’와 다르다는 것을 확신했
다. “「예운경」에서의 사회사상의 개조, 「주관경」에서의 생산 발전의 영도
(領導), 『춘추경』에서의 통치의 소멸부터 세상을 구성하고 만물의 흥성
함을 서로 보좌하는 태평세에 이르기까지 한 걸음씩 견실하게 나가는
것이지 공상적인 사회주의가 아니다.”61
더 나아가 언급해야 할 것은 슝스리는 유가 경전을 ‘사회주의’와 결합
할 때 일방적으로 사회주의를 목적과 종착점으로 지향하지 않았고 유
가 경전을 사회주의의 목적에 억지로 맞추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유가
경전은 일방적으로 ‘사회주의’를 인증하는 위치에 있는 것이 아니다. ‘대
도지학’에 부합하는 육경의 담론들은 한 측면에서는 ‘사회주의’를 이끌
었고, 다른 측면에서는 ‘사회주의’가 더 고차원 상태로 나아가도록 이끌
어 뛰어넘도록 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주관경」을 서술할 때 “생산 발
전과 사상의 혁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과 ‘문화권역’을 구획하는 측면에
서 인류 미래가 ‘함께 하는 생활제도’를 사고할 때 내포한 의미를 강조
한 것이다.62
슝스리가 1951년 마오쩌둥에게 보낸 장문의 편지인 『논육경』에서 일
61 『건곤연』, 391쪽, “從『禮運』之改造社會思想、 『周官』之領導生產建設,方信『春秋經』自
消滅統治,以達到太平世裁成天地、 輔相萬物之盛,步步皆腳踏實地,不是空想的社會
主義也。”
62 「주관경」에 관한 의미는 슝스리의 『독경시요(讀經示要)』, 『논육경』, 『원유』 등에 모두
논술되어 있지만 각자 치중하는 지점이 있다.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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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이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중국화해야 마땅하다.”63라고 명확하게 요구
하였다. 그러나 여기에서 말하는 ‘중국화’는 육경과 마르크스레닌주의
의 내용을 서로 바꿔서 그 뜻을 명확히 밝히는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
레닌주의의 기초 위에서 육경으로 국민과 국가의 정신을 더 높은 수준
으로 진작시키자는 것이다. 왜냐하면 “중국인의 인격과 건국 정신은 결
국 공자의 육경에 있기” 때문이다.64 공자의 육경은 ‘해박하고 높은 수
준의 철학사상’이라는 측면에서 ‘깊고 높은 수준의 이치’를 핵심으로 삼
아 불교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다. 건국 이후 ‘쌍백운동(雙百運動)’ 과정
에서 슝스리는 짧은 글로 사회주의를 언급했었다. “옛 학문으로 해명하
든 새로운 학설을 만들어내든 사회주의 제도의 결점에 대해 논쟁할 수
있고 그 부족한 점은 보충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근본을 배반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 구절만 읽으면 슝스리가 ‘사회주의 제도’로 각종
사상 학술에 대해 최종 판단을 내렸다고 오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
나 이어서 말하는 것을 보면, “내가 사회주의 제도를 배반해서는 안 된
다고 한 말은 그 함의가 넓어서 제도라는 말로는 그 의미를 담기에 협
소하여 자세하게 말할 수는 없다. 청말 민초 시기에 우리는 군벌에 투
항하지 않고 지조를 지켰으며, 고난을 견디는 것을 고상함으로 여기고,
마음을 오롯이 하여[盡心] 본성을 알고[知性] 하늘을 아는[知天] 학문
을 귀착점으로 삼았다. 이는 대략 한두 개 예를 든 것이며 상세히 말할
수 없다. 사실 진정한 유학 정신은 반드시 군벌을 제거해야 비로소 지
63 『논육경』, 『슝스리전집(熊十力全集)』 제5권, 후베이교육출판사, 2001, 772쪽, “馬列主義
畢竟宜中國化”
64 같은 책, 771쪽, “中國人之作人與立國精神畢竟在孔子六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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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_제4집
조를 드러내는 것이며, 단지 군벌에 투항하지 않은 것이라면 소극적인
태도일 뿐이다. 이른바 고난을 견디는 것을 이루려면 반드시 민중의 힘
과 지혜를 모아야 사물을 열어 주고 일을 성취할 수 있다. 단지 자신만
달게 고통을 감수한다면 비록 원헌(原憲)처럼 고상하더라도 어찌 자신
을 이루고 사물을 이룰 수 있겠는가?”65 이로써 슝스리에게 ‘사회주의’
는 ‘유학 정신’의 ‘소극’적인 측면에만 대응하고, ‘사회주의’의 진일보한 발
전은 ‘진정한 유학 정신’인 ‘대도지학’의 인도에 따라 ‘마음을 오롯이 하
여 본성을 알고 하늘을 아는’ 경지를 추구해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
다. 이는 2년 후에 마오쩌둥이 쓴 『칠률이수ㆍ송온신(七律二首ㆍ送瘟神)』
중에서 “6억의 중국 인민들이 모두 요순처럼 될 수 있을 것이라네[六億
神州盡舜堯]”라는 시구와 함께 전 인민의 시 쓰기 운동, 철학을 배우자
는 운동과 역사서를 쓰자는 운동 등의 역사 실천으로 연결되었다. 이
는 중국판 사회주의는 바로 슝스리의 기대 속에서 전개되었으며 일종의
‘대도 유학 사회주의’라고 말할 수 있다. 이런 사회주의는 ‘대도 유학’과
‘사회주의’가 평면적으로 서로 결합한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를 기초로
하여 ‘사회주의’에서 ‘대도 유학’으로 도약하는 것이며, ‘대도 유학’인 ‘혁
명 유학’의 내재적 인도로 이루어진 ‘사회주의’이다.
65 슝스리, 「‘백가쟁명(百家爭鳴)’을 말하다」, 『철학연구(哲學研究)』, 1956, 제3기, “其實真
正儒學精神,須消滅軍閥,才見節操,若只不降軍閥,則消極而已。 至所謂吃苦者,必合群
力群策,以開物成務,若只自甘吃苦,雖如原憲之高,何可成己成物乎?”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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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혁명 유학의 내성학(內聖學)
이상의 내용에서, 우리는 이미 과거의 관습대로 제왕 혹은 유학자 같
은 이가 공을 세우고 업적을 쌓는 측면에서 ‘외왕’를 이해하는 것과 다
르다는 것을 보았다. 슝스리의 ‘외왕’은 총체적인 정치 상태로 방향을 전
환했는데, 여기에서 말하는 ‘외왕’은 개개인에 대한 요구도 아니고, 성군
에 대한 기대도 아니다. 그것은 바로 ‘왕이 없는’ 자치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건곤연』에서 슝스리의 ‘내성(內聖)’에 대한 논술 역
시 송명 유학자들에게 보편적인 ‘심성’론 혹은 량치차오처럼 개인적이
고 내재적인 도덕 수양(修己)66의 측면에서 입론을 세우는 방식과는 달
랐다. 그는 ‘내성’을 동태적인 사회집단의 맥락 속에 두었고, ‘내성’에 사
회성과 역사성을 부여했다. 즉, ‘내성’은 기존의 ‘양지(良知)’67를 안으로
탐구하거나 갈고닦는 것이 아니라 밖을 향해 광범위한 사회활동 속에
서 점진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다. 이렇게 기존의 ‘내성’이 해석한 개인화
와 도덕화의 차원을 뛰어넘어, ‘사회주의’와 서로 표리를 이루는 혁명 유
학에게 사회적 기초를 부여하고, 이상사회를 구성하는 모델로서 개인성
에 의존하는 성현군자의 의미를 근본적으로 전환하였다. 이뿐만 아니
라 슝스리는 이런 사회성을 가진 ‘내성학’을 한 걸음 더 나아가 철학으
로 격상하여 유학화한 ‘사회주의’에 깊고 두터운 철학적 기초를 부여했
다. 이 점은 오늘날 사회주의에 대한 논의에서 더욱 의미 있는 영감을
66 량치차오는 “도덕 수양의 노력을 끝까지 다하는 것이 바로 내성이다”라고 말했다. 량
치차오, 『유가철학(儒家哲學), 상하이인민출판사, 2009, 34쪽.
67 [역주] 이는 명대 사상가인 왕양명(王陽明)이 자주 사용한 개념인 ‘양심(良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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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_제4집
주고 있다.
슝스리에게 있어 도덕 범주를 사회화하는 것은 본래부터 가지고 있
던 생각도 아니었다. 1958년에 쓴 『명심편(明心篇)』에서 그는 ‘양지’에 대
해 여전히 보편적이고 정태적인 측면에서 파악했고 ‘혁명’을 ‘양지’가 확
대되어 만들어진 산물로 보았다. “사유제의 사회에서 인간은 나쁜 것
을 좇기 쉽지만, 그때의 인간 역시 선과 악을 구분하는 양심을 가지고
있고 이는 부인할 수 없다. 후에 혁명을 하여 사유제를 폐지하고 민중
이 모두 선악을 분명히 구분하는 양심을 가진 후에야 서로가 공평하고
진심으로 서로 결합하여 혁명을 일으킬 수 있다.”68 그러나 ‘말년의 정
론’으로서의 『건곤연』에 이르러 ‘선과 악을 구분하는 양심’이라는 도덕
을 동태적인 역사적 맥락 가운데 두고 인식하였다. “구사회의 개인은 각
자가 고립된 상태에 빠져 있었고 그 시대의 민중은 아직 형성되지 않았
다. 자기만이 옳다고 여기는 것을 덕으로 삼아 덕을 말하고, 자명한 것
만을 지혜로 삼아 지혜를 말했다.” 그러나 공동생활 제도를 건립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 새로운 시대에서 이른바 자기만이 옳다는 것은 이기
적인 것이다. “이미 심하게 덕망을 잃어 새 사회를 좀먹고 있다.”
더 구체적으로 분석하면, 슝스리는 도덕도 사적 도덕[私德]과 공적
도덕[公德]으로 나눈다. 만청시기 량치차오는 『신민설(新民說)』에서 일찍
이 ‘신민’의 각도에서 공적 도덕을 추앙하며 찬양했고 사적 도덕을 비판
했다. 그러나 슝스리는 사적 도덕뿐 아니라 공적 도덕도 보편적이고 영
68 『명심편(明心篇)』, 중화서국, 1994, 284쪽, “在私有制的社會中,人固易趨於惡,然其時之
人究有知善知惡的良知在,此無可否認也。 後來革命而廢除私有制,正由群眾皆有善惡分
明的良知,才能彼此以公誠相結合而奮起革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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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적인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적 도덕에 대해 말하자면, 구사회
(舊社會)에서 숭상하던 사적 도덕을 오늘날 새로운 사회에서 행한다면
종종 덕망을 잃은 과실이 될 것이다. 공적 도덕에 대해 말하자면, 구사
회에서 탄복하던 공적 도덕 역시 대체로 도덕이 아니다. 옛날의 이른바
어질고 의로운 사람은 나라가 망국의 위기에 처했을 때 적국에 몸담지
않고 멀리 떠나 침략한 조정에 들어가지 않으므로 민족의 기개를 지켰
다. 사람들은 적에 대항하는 그 공적 도덕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고 이
어서 그것을 존경하고 흠모했다. 그러나 적에 대항하는 기개로 목숨을
바치는 것을 아까워하지 않는 것도 민중을 이끌고 혁명을 하는 것에는
그리 도움이 되지 않는 것 같다. 오늘날 소극적 저항은 실로 온몸으로
해를 피하려는 것으로 그것이 미치는 영향은 민중을 위선에 빠지게 하
고 활기를 잃게 하여 결국에는 비굴하고 순응하게 하는 것이다. 그 죄
가 가장 심하며 그것을 어찌 공적 도덕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69
도덕은 각기 다른 역사 시기에 왜 이렇게 확연히 상반된 평가를 받
게 되었을까? 왜냐하면 도덕이란 내향적이고 개인적이고 자기 수양을
통해 길러야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닐 뿐 아니라 개인의 심성 내부에 국
한된 것만도 아니기 때문이다. 지혜가 반드시 “사물에 작용하여 곧 물
(物)로부터 물을 인식하여야 비로소 지식을 구성한다”는 것처럼, 도덕
69 『건곤연』, 409쪽, “以私德言,舊社會所崇尚之私德,若在今後新社會行之,往往是失德之
尤。 以公德言,舊社會所敬服之公德,亦多是不德。 如古之所謂仁人義士,當國家危亡之
際,潔身遠遁,不仕於侵略之廷,保存民族氣節,世人莫不承認其爲抗敵之公德,而相率敬
慕之。然抗敵之道,要在領導群眾革命,事如不濟,以身殉之,亦所不惜。 今乃消極抵抗,實
爲全身避害之計,此其影響所及,將使族類習於僞善、 委靡,終當卑屈而作順民,其失德最
甚,何可許以公德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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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사물’에서 작용해야 하고, ‘사물’과 교류하고 접촉하는 동태적인 관
계망 속에서 비로소 형성될 수 있다. 왜냐하면 “공자는 현실 세계를 초
월하여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자기(自己)를 승인하지 않았고, 또 지혜
가 안에서 수렴되어 격물(格物)할 때 반드시 작용한다고 주장하지 않았
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덕이야말로 바로 인생의 도덕이요, 인생이 날마
다 새로워지는 것을 따라 발전하는 것이다.”70 슝스리는 도덕을 파악하
는 방법에서 공자와 다른 ‘고대철학’이 확연히 다르다는 것을 지적했다.
“고대철학은 어느 유파이든 지혜의 작용이 모두 안으로 향하여 자신을
인식하는 것이지만 밖을 향하여 사물을 추구하지 않았다. 공자는 자
기 인식에 대해 다른 제자백가와 달랐다. 그 지혜의 작용이 안으로 자
기 인식을 심오하게 하는 데 편중하지 않고 사물의 이치를 밝히고자 했
다.”71 도덕은 항상 ‘인간 삶[人生]의 도덕’이며, ‘격물’ 즉, ‘사물과 현상’
과 서로 관계를 갖는 인생 과정에서 드러나는 것이다. 이는 결국 도덕
의 주체인 ‘인간’으로 귀결하는 것이다. ‘인간’ 또한 자신에게만 갇혀 있
는 것이 아니고 ‘격물’ 즉 ‘사물과 현상’과 관계를 맺고 교류하고 서로의
움직임인 동태적 과정에서 존재하는 것이다. 정도상 서로 다른 차이
가 있겠지만 논리상 ‘격물을 지속하는 것’의 함의는 왕양명의 ‘사 물과
현상 속에서 갈고 닦는 것’ 72에 근접하거나 하이데거의 말을 빌리면
70 『건곤연』, 414쪽, “孔子不承認有超脫現實世界而獨存的自己,又不主張以智慧收斂於內,
而必用之於格物,於是道德才是人生的道德,隨人生之日新而發展。”
71 『건곤연』, 413~414쪽, “古哲不論何家,要皆以智慧的作用是向裏認識自己,不可向外
逐物。 孔子對於自己的認識與諸家都不同,其於智慧作用,不偏主向裏冥識自己,卻要
格物。”
72 왕양명(王陽明), 『왕문성공전서(王文成公全書)』, 중화서국, 2015, 114쪽. ‘사물[事]’은 양
명학을 이해하는 핵심이며, 양명학의 ‘치량지(致良知)’ 외 ‘천지만물은 하나[天地萬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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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내 존재’ 73라고 말할 수 있다. 인간의 완벽한 형태는 ‘인간‐사물’이
어야 하며, 인간은 ‘사물’과 ‘세계’를 벗어나 고립된 존재가 아니다. 아울
러 ‘사물의 이치를 파헤치는 것’과 ‘사물과 현상 속에서 갈고닦는 것’의
동태성 역시 ‘인간‐사물’ 또는 ‘인간‐세계’가 정태적인 것이 아니라 끝없
이 계속 찾아가는 과정 가운데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도덕의 사회성
과 역사성의 의미는 바로 여기에 있다.
도덕을 ‘내성학’의 사회성과 현실성의 차원에서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기 위해 슝스리는 공자의 사유를 노자 및 불교의 사유와 비교했다. 그
가 보기에 노자든 불교든 모두 현실 세계를 소홀히 여기고 현실에 대해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를 몰랐다. 노자는 ‘무로 돌아감[返無]’을 말했고,
석가는 ‘적멸로 돌아감[歸寂]’을 말했다. 적멸로 돌아간다는 것은 만물
을 모두 허깨비[幻化]로 보고 생겨나지도 사라지지도 않는 곳으로 들어
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무로 돌아간다는 것은, 천지는 어질지 않아 만
물을 짚으로 만든 개로 여기고, 성인은 어질지 않아 천지를 짚으로 만
든 개로 여기기에, (노자를 신봉하던) 후대인들은 자기 힘으로 다할 수
一體]’라는 논조와 관련 있다. 왕양명이 섭문울(聶文蔚)의 ‘반드시 사물이 있다[必有
事焉]’에 관한 편지에 회답한 것도 참조했다. 같은 책, 102~103쪽.
73 하이데거, 쑨저우싱(孫周興) 번역, 『이정표』, 상무인서관(商務印書館), 2000, 412쪽. 여
기에서 목적은 ‘격물을 지속한다[持續格物]’의 함의를 더 나아가 설명하는 데 있으며,
슝스리와 왕양명 또는 하이데거를 같이 거론하는 것은 아무 의미가 없으며 이런 견
강부회는 학술적으로 아무 의미도 없다. 왕양명과 현상학에 관해서는 특히 후설 학
설이 서로 해석할 수 있는 정도이다. 이소 컨, 니량캉(倪梁康) 번역, 『인생의 첫 번째
일 ‐왕양명 및 그 후학의 ‘치양지’를 논함‐』, 상무인서관, 2014. 3장 참조. 어떤 학자는
후설과 서로 비교하며 양명학과 하이데거의 학설에 서로 해석할 수 있는 공간을 더
많이 두었다. 왕칭제(王慶節), 『현상학의 현상, 하이데거와 왕양명의 치량지(致良知)』,
『광시대학학보(廣西大學學報)』, 2015, 제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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있는 것이 없게 되었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피해 자신의 안위만 돌보
는 사람으로 변해 갔다.”74 이와 반대로 공자는 현실 세계를 높은 차원
에서 긍정하고, 현실 세계 내부의 존재를 긍정하고, 인간만이 현실 세
계와의 교류 속에서 진정한 존재의 의미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긍정했
다. “오직 공자만이 주도면밀하게 현실 세계를 바로 보았고, 현실에서 벗
어나 진정한 자기를 찾지 않았고, 사물의 이치를 벗어나 내재적 증거를
전하지 않았고, 지혜를 끝까지 발휘하고, 덕으로 서로를 도왔다.”75 ‘현
실’ 밖의 자신은 없으며 ‘현실’ 밖의 도덕도 없다.
벤자민 슈워츠는 ‘문화대혁명’을 해석할 때, ‘덕성통치(德性統治)’라
는 개념을 제시하며 마오쩌둥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한 이해를 해
석하였다. 그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실질은 “도덕과 자격을 갖춘 ‘사
회적 직무를 맡은 자’”를 가리킨다고 생각했다. 이런 도덕에는 사회를
위해 헌신하고, 고생을 참고 견디며 검소한 생활을 하고, 원대한 목표
와 나쁜 것들을 증오하는 것 등을 포함한다. 그는 “내가 마오쩌둥 사상
자체로 돌아갔을 때 사회윤리가 절대 우위를 차지하는 것에 놀람을 금
치 못했다.”76라고 말했다. 슈워츠는 더 나아가 이런 ‘덕성통치’의 기원
을 프랑스 사상가 루소와 중국 전통 사상가 맹자까지 거슬러 올라갔
74 『건곤연』, 410쪽, “老氏返無,佛氏歸寂。 歸寂,故觀萬有皆幻化,而欲投入不生不滅之鄉。
返無,則一任天地不仁,以萬物爲芻狗,聖人不仁,以天地爲芻狗。 而人生無有自力可盡,
其流至於窺幾以遠害。”
75 『건곤연』, 412쪽, “夫惟孔子,正視現實世界,不離現實而別尋真的自己,不離格物而傳務
內證,慧極於裁成,德備於輔相,至矣盡矣。”
76 벤자민 슈워츠, 「덕성통치(德性統治) ‐‘문화대혁명’ 중의 지도자와 당의 거시적 통
찰‐」, 『중국의 공산주의와 마오쩌둥의 굴기(中國的共產主義與毛澤東的崛起)』, 천웨이
(陳瑋) 번역, 중국 인민대학출판사, 2006, 20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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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게다가 맹자로 대표하는 중국 전통 유가사상이 루소와 자코뱅파보
다 더 중요한 역할을 발휘했다고 생각했다. 유가의 특징을 ‘덕성’으로 귀
납한 이런 견해는 더 나아가 덕성화(德性化)한 유가를 중국 공산혁명의
사상적 기원이라고 여겨 최근 몇 년 사이에 매우 성행하였다. 중국의
공산혁명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한 머우종산(牟宗三)을 포함한 홍콩, 타
이완의 신유가 학파도 유가를 파악하는 이런 방식에 사실상 동조하고
있었다.77 그러나 이상의 분석은, 유가 내부에서 적어도 슝스리에게는
유가가 ‘덕성’의 범주로 축소될 수 없으며 이른바 ‘내성’ 역시 도덕적으
로 뛰어난 것이 아니라 현실 내부에서의 교류와 실천정신과 지속적인
행동능력임을 보여 주고 있다. ‘내성’은 ‘외왕’에 우선하는 것이 아니라
차라리 ‘외왕’의 전개 과정 속에서 함께 걸어가며 실현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78 여기서 우리는 슝스리가 ‘내성학’과 ‘외왕학’이 일치하는 이
유를 어떻게 서술했는지 이미 알 수 있다. 현실에 대한 중시, 인간은 ‘인
간‐사물’이라는 현실 내부에 항상 존재한다는 것에 대한 이해, 인간의
실천정신과 행동력에 대한 중시는 『춘추경』이 제시하는 ‘거란세’ 단계의
보편적인 민중이 주체인 혁명을 내재적으로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이
것이 ‘내성학’의 전부는 아니다. 더 나아가 ‘내성학’을 소급하고 혁명 유
77 비교적 체계적인 논술은 머우종산(牟宗三)이 마오쩌둥의 「모순론」과 「실천론」을 비평
한 문장인 「공산주의자의 ‘모순론’을 반박하다」 및 「공산주의자의 ‘실천론’을 반박하다」
를 참고할 것. 머우종산, 『도덕의 이상주의』, 타이완학생서국(台灣學生書局), 1992.
78 머우종산의 ‘양지감함(良知坎陷, 양심은 천하를 구제하고 중생을 제도한다는 의미)’설
은 분명히 그 스승의 사고의 맥락은 매우 다르고 심지어 상반된 것이다. ‘양지감함(良
知坎陷)’은 ‘도덕 이성’이 ‘이성의 진리를 보고 이해하기’를 요구하는데, 즉 ‘내성’은 ‘이성
의 구조’를 통해 드러나지만 ‘외왕’을 벗어나야 하는 것이다. 구체적인 것은 머우종산,
『정도와 치도(政道與治道)』, 타이완학생서국, 1991, 59쪽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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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의 ‘내성학’과 ‘외왕학’의 근원을 찾으려면 더 기초적인 철학적 차원에
도달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슝스리가 오랫동안 사고하며 품고 있었던
‘체용불이(體用不二)’의 철학이다. 그가 말한 것처럼 ‘체용불이는 내성학
의 근원이다.’ 79
이른바 ‘체용불이’란 “유행(流行)에 대해서는 그 근원을 통철하게 깨
닫고, 만유(萬有)에 대해서는 그 체(體)를 인식함을 말한다. 출렁이며 움
직이는 뭇 거품에 비유하자면, 거품 그 자체는 바로 바다의 물임이 분
명하다. 이 때문에 바로 만유는 진실한 체[實體]이고 유행은 참된 근원
[眞元]이니, 한마디로 총괄하여 말하면 ‘체와 용은 둘이 아니다.’”80 ‘체용
불이’의 철학은 본래 『역경』에서 나왔으며, 그 가운데 특히 건곤(乾坤)
두 괘로 말미암는다. 슝스리는 일찍이 『역경』으로부터 ‘체용불이’를 깨
달은 내력을 스스로 서술했다. “나는 청나라 광서(光緒) 28년에 혁명에
처음 참가하면서 일찍이 공자에 분개했다. 신해(辛亥)혁명 이후 나는 불
학을 연구했지만 불학에도 만족하지 못했다. 내가 철학을 공부하며 스
스로 깨우친 것은 체와 용(用)은 둘이 아니다[體用不二]라는 것이다. 갑
자기 『주역(周易)』을 접하고서 성현이 고대에 『역경』을 썼다는 것을 알
았지만 예전에는 그 뜻을 이해하지 못했다.”81 구체적으로 말해서, 슝스
리가 보기에 건곤은 서로 다른 괘이지만 대립적인 관계가 아니며, 건괘
79 『건곤연』, 444쪽, “體用不二是內聖學之淵奧。”
80 『건곤연』, 404쪽, “於流行而洞徹其無,於萬有而認識其體。 譬之於翻騰活躍的眾漚,而明
了其本身即是大海水也,是故即萬有即實體,即流行即真元。 一言以蔽之,曰‘體用不二’。”
81 『건곤연』, 432쪽, “餘在清光緒二十八年始參加革命,嘗忿詈孔子。 辛亥而後,餘研究佛學,
又不滿於佛。 餘在哲學上之體會,自有所獲,即體用不二義。 忽觸及『周易』,乃知先聖早在
古代發明之於『易經』,餘往時未得其解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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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에 곤(坤)의 형상이 있고 곤괘에 건(乾)의 형상이 있으므로 건과 곤
은 서로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포함’한다는 것 역시 ‘체’와 ‘용’의 기본 관계이다. 좀 엄격하게
말하자면, ‘서로를 포함’한다는 것도 적절하지 않다. 왜냐하면 ‘서로를
포함’한다는 것이 ‘체’와 ‘용’이 원래 두 가지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
문이다. 슝스리가 보기에 ‘체용불이’는 바로 “작용을 긍정하며 작용 이
외에 실체를 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실체가 이미 변해서 작용이
되었기 때문이다. 현상을 긍정하며 현상 이외에 근원을 탐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니, 근원이 이미 변해서 현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만물을
긍정하며 신이 만물을 주재한다는 믿음을 질책하고 거부하며, 만물을
올바르게 보면 헛된 생각에 빠지지 않는다.”82 다시 말하면, ‘체’와 ‘용’은
본래 하나이며, ‘체’가 ‘용’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용’ 또한 ‘체’를 벗어나지
않는다. 여태까지 본체론 철학은 ‘본체’에 대한 우위를 타파하기 위해
두 가지의 합일성을 강조했지만, 슝스리는 그 방법과 반대로 ‘용’의 의미
를 더 강조했다.
“학자들이 실체(實體)가 현상(現象)과 떨어져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진정으로 이해한다면, 당연히 현상이 실체임을 인정해야
한다. 현상이 실체임을 인정하는 것은 현상을 주인[主]으로 여기는 것
이다. 실체는 근원적으로 현상 자체이다. 이 때문에 현상은 진실로 공
허한 것이 아니다. 이와 반대로 편향된 실체 측면에서 진실(真實)을 말
82 『건곤연』, 444쪽, “肯定功用,而不許於功用以外求實體,實體已變成功用故。 肯定現象,
而不許於現 象以外尋根源,根源已變成現象故。 肯定萬有,而斥絕神道,正視萬有而不涉
空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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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편향된 현상 측면에서 변이(變異)를 말한다면, 체와 용이 두 가
지 경계로 나뉘는 큰 잘못이 있을 뿐만이 아니다. 게다가 실체를 주인
[主]으로 여겨 용을 다스려 체로 돌아간다, 상(相)을 다스려 성(性)으로
돌아간다, 속(俗)을 다스려 참[真]으로 돌아간다는 불가의 거대한 미혹
이 또한 있게 된다.”83 따라서 슝스리는 차라리 “체를 다스려 용으로 돌
아가고, 성을 다스려 상으로 돌아가고, 진(眞)을 다스려 속으로 돌아
간다[攝體歸用, 攝性歸相, 攝真歸俗]”는 것을 ‘체용불이’를 파악하는 최
종 방식으로 삼았다. 슝스리 자신의 사상에 대해 말하자면, 이는 『신유
식론(新唯識論)』의 ‘체용 관계’에 대한 개조이다. 일찍이 “(사상이) 완결
될 무렵에는 참을 돌이켜 세속을 향했다[終則回眞向俗]”는 구절로 자기
사상의 변천을 묘사했다.84 우리는 슝스리에게서도 유사한 사상 전환
의 궤적이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다. ‘체용불이’ 사상은 원래 『역경』에서
나온 것으로, 슝스리의 해석 중에서 이는 공자가 과거 ‘천(天)’을 실체
로 한 것에서 더 나아가 ‘천’을 인격화한 미신사상을 발전시켜 나온 것
을 대상으로 한 것이다. “성인이 『주역』을 지은 것은 고대 제왕이 이용
한 천제(天帝)를 반대하고 체용불이라는 논제를 만들어 밝히기 위함이
83 『건곤연』, 482쪽, “學者真正了解實體不是離開現象而獨在,當然要肯定現象真實。肯定現
象真實,即是以現象爲主。 實體元是現象的自體,所以現象真實不虛。 反之,如偏向實體
上說真實,偏向現象上說變異,則不獨有體用剖作二界之大過。 而且以實體爲主,更有佛
家攝用歸體、 攝相歸性、 攝俗歸真之巨迷。”
84 장타이옌사상의 진속(真俗, 불교 용어로 속세를 떠남과 속세로 나옴) 문제에 관해서
는 저우잔안(周展安), 「단체결속의 명분, 사회주의와 다섯가지가 없는 제도 ‐장타이
옌의 진화론사상 및 그에 상응하는 정치구상에 대한 시론‐」,『마카오이공대학학보』,
2015, 제3기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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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85 실체성을 가진 ‘천제’에 대한 신앙은 사유 유형으로 보면 ‘용’을 벗
어난 ‘체’에 대한 신앙이며, ‘체’가 ‘용’ 바깥에 ‘용’을 통섭한 결과보다 높이
있다고 단정하는 것이다. 슝스리가 보기에 이런 사유 유형 역시 후세에
유물론과 유심론 두 가지 방향으로 나타났는데, 유물론의 ‘사물’을 ‘마
음’의 원형으로 보는 견해와 장자와 헤겔 등의 ‘세계정신’ 또는 ‘절대정신’
을 ‘사물’의 원형으로 보는 견해는 모두 ‘체용’ 즉 ‘우주 발전의 총체’적 표
현을 가르는 것이다. “나는 청말에 서양의 유심론과 유물론에 대해 들은
적이 있는데 매우 놀라며 이상하게 생각했다. 유심론자들은 실체는 정
신성에만 있다고 생각했고, 유물론자는 실체는 물질성에만 있다고 생각
했다. 이 두 가지 이론이 서로 다르지만 모두 실체를 단순하게 여기는데
다르지만 같음이 없지 않다.”86 ‘유가’와 ‘사회주의’를 연결하는 맥락 속에
서 슝스리는 유물론에 대한 반박에 특히 힘을 쏟았다. 그는 저서에서 세
가지 이유를 들어 설명했다. 첫째, 유물론에 의하면 세계의 근원은 물질
이다. 그러나 “물질은 비물질적인 것을 만들어내어 인과율을 무너뜨릴
것이다.”87 둘째, “마음과 생명의 근본은 두 가지가 아니다.”88 이른바 물
질 속에 내포하는 마음의 의지력은 단순하게 딱딱하게 있는 ‘물질’이 아
니다. 셋째, “실체는 만물을 초월해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만물에
85 『건곤연』, 443쪽, “聖人作『周易』,反對古帝王所利用之天帝,而創明體用不二之論。”
86 『건곤연』, 447쪽, “餘在清季,乍聞西洋唯心、唯物諸論,便起驚異。 唯心論者認爲實體只是
精神性,唯物論者認爲實體只是物質性。 兩宗持論雖互異,要皆以實體爲單純性,則異而
不無其同也。”
87 『건곤연』, 473쪽, “物質產生非物質的東西,將毀壞因果律”
88 『건곤연』, 475쪽, “心靈與生命根本不是兩物”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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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재하는 근원이다.”89 ‘하나의 본성’이 ‘사물[物]’의 본성인지 혹은 ‘마음
[心]’의 본성인지 막론하고, 바로 우주 만물과 떨어진 채로 하나의 굳어
있는 ‘하나의 본성[一性]’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슝스리는 유물론과
유심론 자체에 대한 해석에 다시 분석할 공간을 허용했다.90 그러나 그
의 논리적 틀에 대해 말하자면, 그가 정의한 ‘일원(一元)’론의 유물론과
유심론에 대한 반박은 확실히 ‘체용불이’라는 철학의 힘을 보여 주었다.
유심론이든 유물론이든 표면상으로는 서로 다른 이 두 사유 형태는
결국 모두 형이상학이다. 슝스리에게 체용을 나누는 형이상학의 정치
적 대응물은 등급제이다. 특히 그것은 ‘천제(天帝)’를 실체화한 고대의
방식으로, 현실 정치에서 제시된 것은 바로 후대 유생들이 위조한 『예기
(禮記)』, 「상복(喪服)ㆍ사제편(四制篇)」에서 “하늘에는 태양이 두 개일 수
없고, 땅에는 왕이 둘일 수 없고, 나라에는 군주가 둘일 수 없고, 가정
에는 존장이 둘일 수 없으니, 한 사람이 다스리는 것이다.”라고 선창한
정치 유형이다. 이런 정치 유형 아래에서 널리 퍼진 것은 “한 사람이 모
든 나라와 모든 백성 위에 높이 올라서 그들을 노예화하는 것으로, 목
동이 양 떼를 모는 것과 같은” 정경이며, ‘체용불이’에 대응하는 정치 형
태와 상반된 것이다. ‘체용불이’의 철학은 원리상 신화적인 ‘천제’를 없애
버렸다. 이른바 “외왕학에서의 군주가 없다는 것은 내성학에서 신이 없
89 『건곤연』, 480쪽, “實體非超脫乎萬物而獨在,乃是萬物內在的根源”
90 슝스리의 유물론에 대한 이해는 포이어바흐의 ‘직관적 유물주의’에 비교적 가깝다. 마
르크스주의와 비교했을 때 슝스리는 ‘세계의 기원’을 둘러싼 사변에 더욱 기울어져 있
다. 마르크스주의는 특히, 마르크스 자신은 ‘세계의 기원’이 무엇인지에 대해 특별히
의미를 두지 않은 것 같다. 마르크스에게 이것은 ‘철학자’의 문제에 속하는 것으로, 마
르크스가 더욱 의미를 둔 것은 세계 ‘기원’ 이후의 인류 역사 특히 동시대 역사에 대
한 확실한 이해에 있다.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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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는 것에 기원을 둔 것이다.”91
형이상학의 ‘본체’에 대한 폐기는 정치에서 등급제에 대한 폐기에 대
응하는 것으로 평등의 상태를 지향한다. 체를 다스려 용으로 돌아가고,
“만물을 주인으로 여겨” “만물을 낮추는 것을 피한다”92는 생각은 ‘만
물’과 ‘현상’의 가장 큰 구성 요소인 ‘백성[小民]’의 지위를 더욱 두드러지
게 했다. 슝스리가 보기에, 이 역시 『역경』의 건괘에서 묘사한 “백성 중
에서 우두머리가 나타난다”라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서물(庶物)’이
란 만국의 민중을 말한다. 민중은 오랫동안 억압받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한다. 우두머리가 나타나 혁명을 하고, 힘을 합쳐 통치를
전복한다면, 세상은 공평해지고 민중이 서로 돕는 기반을 만들어낼 것
이다.”93 이 연합 혁명의 상황 속에서 원래 객체화된 ‘백성’들은 고개를
쳐들며 세상사에 대해 두 가지 자각을 하게 될 것이다. “첫째는 세상의
주인공으로 세상일에 대해 방관하지 않고 힘을 합쳐 나가야 한다는 자
각이다. 둘째는 세상의 한 사람으로 사람들과 서로 가까이 의지하여 전
체로 응결되어야 한다는 자각이다.”94 “우두머리는 백성에서 나온다[首
出庶物]”는 것은 민중이 공동으로 지도자가 되어 세상사의 다른 측면을
관리한다는 것이며, 등급제로 사람들을 높이고 낮추는 ‘왕’이 없다는 것
이기도 하다. 이것이 바로 “‘왕’은 향한다[王者、 往也]”가 함축하는 의미
91 『건곤연』, 407쪽, “外王學之無君,本於內聖學之無神。”
92 『건곤연』, 470쪽, “以萬物爲主”、 “避免降低萬物”
93 『건곤연』, 547쪽, “‘庶物’謂萬國民眾。 民眾久受壓迫,今乃萬眾同覺,首出而革命,合力推
翻統治,本天下爲公之道,開大眾互助之基。”
94 『건곤연』, 434쪽, “一、 自覺是天下之主人公,當戮力天下事。 不容袖手旁觀。 二、 自覺是
天下之一分子,當與天下人互相親比,凝成整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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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_제4집
이며, 『역경』에서 “용의 무리에는 우두머리가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의
미이다. ‘내성학’과 ‘외왕학’의 관계는 여기에 이르러야 완전한 통일의 상
태를 이루게 될 것이다.
5. 결론
슝스리는 ‘육경’을 분석하여 ‘대도지학’과 ‘소강지학’으로 구분하였고,
황제의 전제정치와 시종일관 같이한 ‘위조된 경전’으로부터 ‘대도’를 대표
하는 ‘혁명 유학’을 발굴하려고 노력했으며 ‘혁명 유학’의 창조자로서의
공자의 지위를 회복시켰다. 이런 노력은 문헌상으로는 『독경시요』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고, 사상적으로는 그가 『신유식론』과 난징학파의
이론으로 맞서는 것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으며, 감정적 태도로는 그
가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혁명당원들의 여러 가지 ‘패덕’을 저지르는 모
습을 목격한 것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더 먼 시야로 봤을 때, 이
는 진한 이후 중국 역사의 ‘암흑’ 같은 상황에 대한 분노와 불만에 기원
하는 것이다.95 이런 점은 『독경시요』에서는 다소 온화했지만, 『건곤연』
95 “진나라 이후 2천 년 동안 중국은 모든 부분에서 부패했다. 사람들은 중국이 정체되
어서 그렇다고 하지만 사실 정체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슝스리, 「벗과 장장링(張江
陵)을 논함」, 『슝스리전집』 제5권, 후베이교육출판사, 2001, 649쪽. 진나라 이후 중국
역사에 대한 격렬한 비판적 태도는 근대 이후의 맥락에서 보면, 송서(宋恕)까지 거슬
러 올라갈 수 있다. 그는 “주나라 이후 명나라 전까지 중국의 세계는 관심을 가질 수
가 없다.”라고 말했다. 송서, 후주셩(胡珠生) 편집, 「육자과재진담(六字課齋津談)」, 『송
서집(宋恕集)』, 중화서국, 1993, 50쪽.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53
에서는 급진적 태도가 남김없이 드러났다. 중국 역사라는 측면에서, 이
는 절대적으로 지나친 원망일지 모르겠지만 ‘육경’에 대한 고증의 측면
에서 말하자면 생각해 볼 여지도 있다. 그러나 우리가 『건곤연』을 역사
서가 아니라 철학서로 여기고, 신해혁명에 참가하여 실패한 경험이 그
에게 인간사의 중요한 의미를 느끼게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의
급진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슝스리는 공자의 ‘육경’을 ‘사회
주의’와 접합하여 중국 자체 내부에서 ‘사회주의’를 인식하는 통로를 제
공했으며, ‘육경’으로 ‘사회주의’를 인도하여 ‘사회주의’를 ‘깊고 수준 높은
정취’를 갖춘 경지로 이끌었다. 더 중요한 것은 슝스리가 ‘외왕학’의 철학
적 기초로서의 ‘내성학’을 체계적으로 서술하여 ‘내성학’에 풍부한 ‘역사
‐사회’적 의미를 부여하고 일반적인 도덕론의 한계를 돌파하여 새로운
진전을 이루었다는 것이다. 특히 그는 ‘체용불이’의 철학으로 “일원론”의
‘유물론’에 대해 비판적 분석을 하였고, 오늘날 우리가 ‘사회주의’의 철
학적 기초를 재인식하도록 했으며, ‘사회주의’를 둘러싼 더 많은 입체적
인 사고를 하도록 했다. 『건곤연』에서 슝스리는 전통적인 주체론 철학
에 대한 비판을 통해 자신의 ‘체용불이’의 철학을 전개했다. 특히 주목
할 만한 것은, 그는 철학이라는 것 자체에 국한시켜 과거의 주체론 철학
과 자신의 ‘체용불이’ 철학을 인식하지 않고 아울러 서로 다른 이 철학
을 기초로 한 정치구조를 지적했다는 점이다.
그의 ‘말년의 정론’인 『건곤연』은 풍부한 내용을 포함하고 있는데 그
것은 철학적이기도 하고 정치적이기도 하다. 본 논문의 주제가 한정되어
구체적인 내용을 다 언급할 수는 없다. 특히, 슝스리는 “건양(乾陽)이 곤
음(坤陰)을 다스리고, 곤음이 건양을 계승”하는 것을 “『주역』 변증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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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_제4집
최대 원칙으로 삼았다.”96 그런데 ‘곤괘=민중’이라는 구조에서 왜 또 곤
괘에 더 기초적인 지위를 부여한 것일까? ‘체용불이’는 ‘용’의 지위를 더
욱 두드러지게 하여 체를 다스려 용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강조했다. 이
는 ‘용’이 남용되어 돌아가지 않게 되는 것은 아닐까? ‘건곤’ 중에서 점점
더 ‘곤’으로 기울어지고, ‘체용’에서 점점 더 ‘용’으로 기울어지는 것이, 실
천의 측면에서 슝스리가 실제의 ‘사회주의 제도’에 대해 더 적극적인 인
식과 기대를 의미하고 있는 것인지는 이후의 연구로 남겨 두겠다.
총체적으로 말하자면, 유학 속의 혁명성을 탐구하고 20세기 중국 역
사에서의 ‘혁명 유학’의 맥락을 탐구하는 것은 단지 지식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뿐만 아니라 근대 이후 중국의 역사 과정에 대한 인식을 더욱
심화시키기 위한 것이다. 20세기 중국은 혁명의 세기였다. 그러나 이 혁
명은 과거의 역사와 절연하여 경계가 그어진 것이 아니라 중국 역사에
대한 새로운 서술과 평가에 따라 전개된 것이다. 혁명의 과정 또한 중
국 역사에서 억압된 수많은 것들이 다시 돌아오는 과정이다. 유학은 이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맡았다. ‘혁명 유학’에 대한 고찰은 전통 시기
중국 역사를 20세기 이후 중국 역사와 소통시키기 위한 것이며, 유학
이 새로운 역사 조건 속에서 활성화될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이고, 전
통 유학이 정치와 사상 측면에서의 한계를 성찰하는 것도 포함한다. 따
라서 오늘날의 역사 조건 아래에서 ‘문명과 혁명’을 새롭게 사고하는 것
에 대해 하나의 귀감이 될 것이다. 이는 오늘날 중국 사상계의 중요한
문제이다.
96 『건곤연』, 535쪽, “乾阳统坤阴、 坤阴承乾阳”为“『周易』辩证法的最大原则”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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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고일: 2020.07.10. 심사기간: 2020.07.17~07.30. 게재확정일: 2020.0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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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_제4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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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존의 인간학_제4집
│Abstract│
‘Revolutionary Confucianism’ in the 20th century of
Chinese history ‐Focusing of the Philosophy of
Xiong Shiliy
Zhou, Zhan‐An
This paper attempts to explain a unique Confucianism in
the 20th century of Chinese history, namely ‘revolutionary
Confucianism’. Xiong Shili (1885~1968), a famous Chinese
thinker in the 20th century, was chosen as the research object,
especially his ‘conclusion of declining years’ Qian Kun Yan as
the main interpretation object, as well as other works of Xiong
Shili. This paper attempts to outline Xiong Shili’s ‘revolutionary
Confucianism’, especially how to connect ‘socialism’ and
‘Confucianism’ and let them inspire each other. Xiong Shili
made a new theoretical interpretation of the ancient Chinese
Classics, which represented ‘the study of the great way (大道
之学)’, and obtained an opportunity to connect ‘Confucianism’
with ‘socialism’, and to develop the ‘the study of kingliness
without (外王学)’ and ‘the study of sageliness within (内圣
20세기 중국 역사 속의 ‘혁명 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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学)’ of ‘revolutionary Confucianism’ Learning. For the radical
interpretation of traditional Confucianism, especially for
the philosophical basis of ‘the study of the great way (大道
之学)’, that is, the explanation of ‘the unity of ontology and
phenomenon (体用不二)’, Xiong Shili can provide new elements
for the established concept of ‘socialism’ and supplement
and amend ‘materialism’. On the whole, Xiong Shili’s radical
judgment and teaching work has made a profound attempt to
think about the Confucian form of ‘socialism’. This provides
a powerful reference for us to understand the relationship
between ‘socialism’ and ‘Confucianism’ again today.
Key word
Xiong Shili, socialism, Confucianism, the study of the great way,
the unity of ontology and phenomen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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