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오랑 세오녀 이야기 원문 第八阿逹羅王即位四年丁酉, 東海濵有延烏郎⋅細烏女夫婦而居. 一日延烏歸海採藻, 忽有一巖【一云一魚】, 負歸日本. 國人見之曰, 此非常人也, 乃立爲王【按日本帝記, 前 後無新羅人爲王者, 此乃邉邑小王, 而非真王也】. 細烏恠夫不來歸尋之, 見夫脫鞋, 亦 上其巖, 巖亦負歸如前. 其國人驚訝, 奏献於王, 夫婦相㑹, 立爲貴妃. 是時新羅日月無光. 日者奏云, 日月之精, 降在我國, 今去日本, 故致斯怪. 王遣使求 二人, 延烏曰, 我到此國, 天使然也, 仐何歸乎, 雖然, 朕之妃有所織細綃, 以此祭天可 矣, 仍賜其綃. 使人來奏, 依其言而祭之, 然後日月如舊. 藏其綃於御庫爲國寳, 名其庫 爲貴妃庫, 祭天所名迎日縣, 又都祈野. 『三國遺事』卷 1, 「紀異」2 延烏郞 細烏女 국문 제 8 대 아달라왕(阿達羅王)이 즉위한 지 4 년째인 정유(丁酉, 157 년)에 동해 바 닷가에 연오랑(延烏郎)⋅세오녀(細烏女) 부부가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연오가 바다 에 나아가 해초를 따고 있었는데, 갑자기 바위 하나【물고기 한 마리라고도 한다】 가 연오를 태우고 일본으로 가 버렸다. 일본 사람들이 그를 보고 “이는 예사로운 사람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그를 왕으로 옹립하였다【『일본제기(日本帝記)』를 살 펴보면 그 전후로 신라인으로 왕이 된 자는 없으니, 이는 다만 변경에 있는 마을 의 작은 왕이고 진짜 왕은 아니다】. 세오는 남편이 돌아오지 않는 것을 괴이하게 여겨 그를 찾다가 남편이 벗어 놓은 신발을 보고는 역시 그 바위에 올라갔는데, 바위가 또한 전과 같이 세오를 태워 일본으로 갔다. 그 나라 사람들은 놀라고 의 아하게 여겨 왕에게 나아가 아뢰니, 부부가 서로 만나게 되었고, 세오를 귀비(貴 妃)로 삼았다. 이때 신라에서는 해와 달이 광채를 잃었다. 일관(日官)이 “해와 달의 정기가 우 리나라에 내려왔었는데 지금은 일본으로 가 버렸기 때문에 이러한 괴변이 일어난 것이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이 일본에 사신을 보내 두 사람을 찾았더니 연오가 말하기를, “내가 이 나라에 온 것은 하늘이 그렇게 시킨 것이니, 이제 어찌 돌아 가겠소? 그렇지만 짐의 비(妃)가 짠 고운 비단이 있으니, 이것을 가지고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 될 것이오.”라고 하면서 그 비단을 주었다. 사신이 돌아와 아뢰어 그 말대로 제사를 지냈더니, 해와 달이 예전과 같이 되었다. 그 비단을 왕의 창고 에 보관하여 국보로 삼고 그 창고를 귀비고(貴妃庫)라고 불렀으며, 하늘에 제사를 지낸 곳을 영일현(迎日縣) 또는 도기야(都祈野)라고 이름 하였다. 『삼국유사』권 1, 「기이」2 연오랑 세오녀 해설 이 사료는 연오랑(延烏郎)⋅세오녀(細烏女) 부부의 설화로, 『삼국유사』권 1 에 실 려 있는데, 박인량(朴寅亮, ?~1096)이 지은 『수이전(殊異傳)』에 수록되어 있던 것 을 일연(一然, 1206~1289)이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 설화는 분량이 많지 않고 내용도 단조로운 편이지만, 고대 한일 관계에 대한 정보가 담겨 있을 뿐만 아니 라 신라에서 건너가 연오랑이 일본의 왕이 되었다는 흥미로운 이야기가 실려 있 어 일찍부터 주목을 받았다. 다만, 그 동안은 일식(日蝕)⋅월식(月蝕)에 관한 설화 라는 점이 각인되어 주로 국문학계에서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해 왔는데, 역사학계 에서도 주목할 만한 부분이 적지 않다. 우선 일연이 왜 설화적 색채가 짙은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수 록하였는지에 대해 알아보자. 연오가 일본에 건너가 왕이 되었다는 부분에 대해 “『일본제기(日本帝記)』를 살펴보면 그 앞뒤에 신라인으로 왕이 된 자는 없으니, 이는 다만 변경에 있는 마을의 작은 왕이고 진짜 왕은 아니다.”라고 주(註)를 단 것처럼 일연 역시 그대로 믿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연이 이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수록한 것은 그만한 사정이 있지 않았나 생각한다. 일연이 『삼국유사』를 편찬한 것은 1281 년(충렬왕 7 년) 무렵으로 알려져 있다. 1274 년(원종 15 년)고려와 원나라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연합군을 편성하여 원 정에 나섰지만 태풍을 만나면서 뜻을 이루지 못하고 1 만 명 이상의 사상자를 낸 일이 있었다. 일연은 『삼국유사』 첫머리에 고조선조를 수록하여 우리 역사의 유구 성을 드러내면서 민족적인 자긍심을 고취시켰던 것처럼, 연오랑⋅세오녀 이야기를 수록하여 여⋅원 연합군의 일본 원정 실패의 아쉬움을 달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추정된다. 그러는 한편으로 결론적으로 연오가 일본에 건너가 왕이 됨으로써 『삼 국유사』 독자들로 하여금 긍지와 자부심을 느끼도록 의도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권 6 의 수인천황(垂仁天皇) 3 년 3 월조에는 신라 왕자였던 아메노히 보코[天日槍]가 일본으로 건너왔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수인천황 3 년은 곧 서기 93 년(신라 아달라왕 4 년)으로, 연오랑이 일본으로 건너간 157 년(신라 파사왕 14 년)과는 시기적으로 제법 차이가 있다. 그렇지만 양 기록의 연대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점과 더불어 전체적인 서사 구조 등에서 유사한 측면이 나타나므로 아 메노히보코와 연오랑을 동일한 인물로 봐야 한다는 견해도 제기되고 있다. 두 인 물이 과연 동일인인가의 여부는 여기서 논외로 하더라도 신라에서 살던 부부가 모두 일본으로 건너갔다는 연오랑⋅세오녀와 아메노히보코 등의 사례는 이미 이른 시기부터 신라에서 일본 열도로 건너가 정착한 경우가 드물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주목할 점은 연오랑⋅세오녀가 일본으로 건너간 이후에 벌이진 일들이다. 그들 이 일본으로 건너가자 해와 달의 정기 역시 그들을 따라 일본으로 가 버렸다고 한다. 고대의 농경 사회에서 태양은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요소로서, 원시 사회 이래 태양을 숭배하는 신앙이 존재하였던 것 역시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해와 달이 광채를 잃는 변고가 생기자 연오가 짠 비단으로 영 일현(迎日縣)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여성이 베를 짠다는 것은 농경민 들의 공동 작업이 전제되어 있는 동시에, 6 부(部)의 여자들이 8 월 15 일에 맞추어 왕실 주도로 길쌈 짜기를 하였다는 『삼국사기』권 1 의 유리이사금(儒理尼師今) 9 년 (32)조의 기사에서도 드러나듯 제의적 의미가 다소 가미되어 있다. 이 때문에 세 오녀가 짠 비단을 제물로 주었다는 것은 농경민이 첫 수확물을 추석 차례상에 올 리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지녔으리라고 추정된다. 영일현에서 지냈다는 하늘에 대한 제사는 결국 해와 달에 대한 제사, 즉 일월 제(日月祭)로 볼 수 있다. 나아가 일본으로 건너간 세오녀가 짠 비단을 가지고 제 사를 지내자 해와 달이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사실은 신라가 일본과 우호적 관계 로 나아갈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였음은 어렵지 않게 생각해 볼 수 있거니와, 일 본으로 건너간 연오랑과 세오녀로부터 신라 조정이 도움을 받았다는 점은 일본에 정착한 신라인 중 일부는 여전히 신라에 영향을 주고 있었음을 보여 준다. 이렇듯 연오랑⋅세오녀의 이야기는 비록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신라와 일본 사이 의 교류 관계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을 뿐 아니라, 해와 달에 대한 고대인의 생 각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자료라고 하겠다.*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