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loaded by 오바라

비밀도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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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 도감
1화. 가라사대
“여...여보세요~!"
“야이~ ! 지금이 몇 신줄 알아?
너 ! 이번에도 시간 늦으면 일감 끊긴다고 했어? 안했어?”
“아! 맞다~ 깜박했다! 근데 상준아! 진짜 미안한데 네가 믿어줄지 모르겠는데 지금 오퍼레이션 중
이거든~ 지금 작전 좌표로 들어가야 해서 이만 끊을게~"
“야야! 끊으면 너 뒈질 줄 알어!
오늘도 제 시간 안에 못 들어가면 너땜에 나도 일 끊긴단 말야
새끼야!”
“알았다고, 알았다고!... 너 지금 늘 가던 그 VR방이지?
나 대신 접속할 사람 구해서 5초만에 보
낼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슈트 착용해라!"
“이 새끼가~ 너 돌아이냐? 책임을 회피하려고 수작을 부리네! 당장 어떻게 사람을 구해? 너 지금
거기 어디야! 내가 일 때려치고 너부터 작살내고 만다!”
...3...4...5초.
“저... 혹시 레이드 뛸 사람 구하시는 거 맞습니까?"
“네...에... 그런데요?..."
“와 다행이다 바로 찾아왔네..."
“예에? 호...혹시 브로커 누구한테 연락 받으셨는지?..."
“브로커인지는 모르겠는데 아이디 졸라맨 사용하시는 분이 지금 가면 시급을 더블로 쳐준다고 해
서요...바로 저쪽 자리에서 하고 있다가... 긴급쪽지가 뜨길래 보자마자 곧바로 왔습니다...”
“네엥? 더 더블이라고요?"
깊은 밤.
<좌표발견. 단독으로 들어간다. 승인바람>
[승인. 건투를 빈다]
나는 소울 해킹 용의자의 아이피 우회 주소를 마침내 찾아냈다. 작전개시 한달만이다.
<정찰드론으로 계속 주시 바람>
폭력적인 하드고어 야동을 VR로 제공하고 고액의 돈을 받아 챙기는 일당을 어렵게 추적했다. 네
트워크 기술로는 한계가 있어서 혹시나하고 가상 사이코메트리 기법을 이용했는데 이것이 먹힐
줄이야!
광원이라곤 달빛 뿐인 상황.
숲 속의 별장...
이...
아니라 여기저기 거미줄이 쳐져 있고 아주 허름해 보이는 창고였다.
문을 슬며시 열었다. 삐걱 소리는 정말 실감났다. 그런데 뜻밖에 내부는 화려한 갤러리처럼 꾸며
놓았다.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은 딱 하나. 원초적이고 강렬한 붉은 색이 단번에 나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대략 가로 세로 길이가 200센티미터는 돼보였다. 강렬한 색깔과 크기에 압도되고 말았다.
‘작품 제목: 붉은 숲’
보자마자 직관적으로 로스코의 작품이 떠올랐다.
뚜렷하게 정물이 표현된 것은 아닌데 뭔가에 홀린 듯 보는 순간 그려져 있는 2차원적인 면과 질
감들이 3차원으로 살아 움직이는 듯한 묘한 기분이 들었다.
제목대로 붉은 색의 숲을 표현한 그림이었다. 흔히 풍경화 그릴 때 표현하는 모양의 나무나 숲은
아니었다.
'붉은 계열의 색이 이렇게 다양하다니...'
자세히 보니 숲 가운데에 짙은 검붉은색으로 오솔길처럼 표현된 선이 있었다. 좌측 아래에서 우
측 위 방향으로 약간 구불거리는 모양으로 원근감 있게 그린 선이었다.
그런데 선이 끝나는 소실점 지점에서 숲에서 갑자기 자그마한 그림자 같은 게 슬며시 나왔다. 붉
은 색을 계속 보고 있어서 내눈이 순간 착시현상을 일으켰나 싶었다. 눈을 비비고 조금 다가가서
들여다 보았다. 착시가 아니었다. 그것은 정말로 움직이고 있었다. 조금씩 앞으로 걸어 나오고 있
는 그림자는 사람의 형체를 띄고 있었다. 점점 빠르게 앞쪽으로 걸어 나오고 있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숨이 멎는 듯 했다.
VR용병으로서 격렬한 전투를 천 번 넘게 경험해 본 자타공인 베테랑 용병이지만 이런 오싹한 상
황은 난생 처음이었다.
일단 뒤로 물러난 다음 거리를 두고 방어태세를 갖추는 게 안전하겠다 싶어서 옆쪽으로 몸을 돌
리려 하는데 몸이 전혀 움직이질 않았다.
목도 허리도 아예 돌아가지가 않았다.
심지어 입도 손도 발도 전혀 안움직였다.
오직 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눈동자뿐이었다.
<정체를 밝혀! 새끼야!> 반사적으로 이 말이 머릿속에서 튀어나왔다.
입이 아닌 메세지창으로!
어느새 원근상으로 가장 가까운 거리지점까지 다가왔다.
그림은 평면인데 이렇게 표현하는 게 어불성설이긴 하지만 느낌상으로는 딱 맞는 표현이었다. 점
점 다가오면서 캔버스 전체를 거의 검은색으로 뒤덮어 버렸다.
<네가 해킹한 놈이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얼굴은 이목구비가 없었고 그냥 검은색만 있었다.
반타블랙처럼 빛을 완전히 흡수한 짙은 검은색의 그림자놈은 내 가슴팍쪽으로 움켜진 손을 내밀
었다. 근데 들이민 손을 가만히 보니 손톱은 흰빛인데 이상하게 손끝 바깥쪽에 있지 않고 지문이
있는 쪽에 있었다. 눈알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순간 너무나 무서웠다. 기절초풍하기 직전이었다.
바로 그때 그림자놈은 움켜진 손을 펼쳤다.
대인용 이엠피 폭탄이었다.
두드러진 변조된 음성으로 짧게 한마디 내뱉었다.
{이게 사는 길이야!}
<안돼! 안돼! 안돼!>
머릿속에서는 폭풍처럼 고함을 질렀다. 지름과 동시에 폭탄이 터졌다.
그렇게 끝났다.
동시에 비음과 저음이
고 나는 생각했다.
<아아악! ···으···으응? 뭐야? 씨발~꿈이었어?
휴...진짜 죽는 줄 알았잖아...뭐 이렇게 실감나게 죽는 꿈을 다 꾸냐...>
[4015!]
일어났으면 빨리 착용해라!
<뭐? 누, 누구냐 넌?>
[저세계의 메신저다]
<뭐? 그게 뭔데 갑자기 명령을 하고 지랄이야 지랄을!>
[무엄하다! 상제의 명령을 따르는 것이 이곳의 율법이거늘]
<그러니까요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살고 있는 제가 왜 그래야 하는데요?!>
[네가 살고 있다고 했느냐! 너는 지금 혼과 육신이 허공에 흩어지기 직전에 상제의 뜻으로 재장전
상태로 돌입했다. 앞으로 저세계 시간으로 7일 동안 산화의 시험을 수행해야 한다]
<에엥~! 지금 뭐 뭐라고 했습니까? 내 육신이 어찌 됐다구요?>
[너의 혼과 육신이 흩어지기 직전에 상제께서 너를 가엾게 여기셨다. 그리하여 신경총을 통해 저
세계로 들어가 7일 동안 산화의 시험을 받을 수 있도록 특별히 명을 내리셨노라]
<아니 제가 죽었단 말입니까 이렇게 의식이 또렷한데요?>
[너는 작전도중 자폭테러로 현장에서 사망하였다]
<네에? 주···죽었다구요? 안돼요 안돼 저는 죽으면 안돼요 아직 어머니에게 한마디 말도 전하지
못했습니다>
[안타깝지만 이미 많은 용병들이 작전 중에 테러리스트의 자폭 혹은 참수로 생을 마감했다]
<안돼요 안돼··· 차라리 죽은 줄도 모르게 내버려두지 그러셨어요··· 뭔 시험인가 테스트도 받지 않
고 어머니에 대한 생각도 떠오르지 않게 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이것은 상제의 뜻이다]
메신저는 둘둘 만 족자를 내밀었다.
족자에는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었다.
[조력자들의 기부를 받으려면 괴물 도감을 완성해야 한다.
괴물은 괴물로 처단해야 한다.
괴물들이 온 세상을 어지럽히고 있다.
조력자들이 기부를 받게 되면 반드시 괴물 도감을 완성하고 산화
를 이뤄야한다. 산화는 그들의 고귀한 기부에 대한 가장 명예로운 보은이다]
<뭐라구요? 괴물 도감요? 아니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자꾸 괴물 운운하십니까? 그리고 아까부터
산화, 산화 그러시는데 그게 뭡니까>
[개죽음이 아닌 무엇을 이루고 장렬하게 죽는 것을 의미한다]
<그럼 산화를 하면 그 다음은요?>
[저세계에서 산화는 곧 다른 세계에서의 부활을 의미한다. 부활 이후에는 네가 그 어디에 있든 조
력자들의 기부를 받을 수 있다]
아래는 조력자의 등급이고 금액은 1회 상한선이다.
브압: 10만 코인
골디: 5만 코인
실뱅: 1만 코인
브롱: 5천 코인
개미: 1천 코인
조력자는 팬일 수도 있고 일반 사용자일 수도 있다. 주로 게이머의 팬이 많다.
브압이 되려면 누적 200만 코인 이상의 기부가 있어야 한다.
골디는 100만 코인, 실뱅은 50만 코인, 브롱은 10만 코인 이상의 기부가 있어야 한다.
개미는 1천 코인 이상 기부가 있으면 해당 등급을 받는다.
그러면 이렇게 기부하면 뭐가 좋으냐! 일단 세금을 공제 혜택을 준다.
각각의 등급자가 되면 풀VR 게임+무비에 참여가 가능해진다.
이렇게 되면 관객 수준이 아닌 자신이 직접 스토리 메이커가 된다. 말하자면 자신이 스토리 진행
에 개입하여 자신만의 엔딩을 만들 수가 있는 것이다.
기부자들은 이 카타르시스와 희열과 감동에 매료되어 거액의 기부도 결코 아까워하지 않는 것이
다. 그리고 동시에 그 콘텐츠에 1순위 투자자가 된다.
반면 게이머는 자신에게 주어진 기부액 총액이 자신의 인기도가 되며 이후에 멀티 콘텐츠로 제작
할 경우에 조력자와 마찬가지로 그 콘텐츠에 1순위 투자자가 된다.
단, 현실 세계의 육신으로 즉시 부활하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었을 때 가장 많이 접속했던 가상
세계에서 즐겨 사용했던 너의 아바타로 부활하는 것이다.
<아...네...바로 현실 세계로 가면 좋은데... 그래도 부모님도 친구도 동료도 지인들도 모두 접속을
하니까 얘기는 나눌 수 있겠네요?>
[당연하다 물론 그들을 이해시키는 것은 너의 몫이다]
<저기저기! 그러면 언제쯤 완전히 부활하는 건가요?>
[그건 내 영역이 아니다.
이시각 이후부터는 괴물 도감이 너를 적극적으로 도와줄 것이다. 건투
를 빈다!]
<아니... 잠깐만요! 그쪽 하고 싶은 말만 하고 아니라 하는게 어디 있습니까?>
메신저는 사라지고 갑자기 앞이 깜깜해졌다. 몸이 다시 움직였다. 앞이 전혀 보이지 않는 가운데
손을 더듬어서 앞으로 조금씩 걸어 나갔다. 몇 걸음 가지 않아 서서히 빛이 들어왔다. 다시 그곳
이었다. 작전 중이었던 바로 그곳.
큰 그림도 똑같이 걸려 있었다.
앞에 섰다. 어차피 주위에 달라진 것은 없는 것 같았다. 그림을
쳐다 보았다.
<설마 이번엔 몸이 마비되진 않겠지!>
처음과 똑같이 검은 그림자가 소실점 부근에서 갑자기 나타나더니 천천히 앞으로 다가왔다. 한
번 맞다뜨린 상황인데도 여전히 온 몸에 소름이 돋고 등은 오싹해지고 심장은 쿵쾅거렸다.
<이 새끼 오늘 완전히 조져 버리겠어>
뭔가를 움킨 손을 앞으로 쭉 뻗었다. 가슴팍까지 다가와서는 움켜진 손을 펼쳤다.
아까 한 번 당한 기억대로라면 이놈은 대인용 이엠피폭탄을 들고 있을 것이다.
펼치면 또 터져서 죽는다. 펼치기 전에 지금 당장 무슨 수를 써야 한다.
그때 갑자기 눈앞에 스위치를 막 켰을 때 형광등처럼 지직거리는 메시지창이 하나 나타났다.
[조력신 RK991님께서 '강길'을 후원하시려고 합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강길요? 어떤 괴물인지 간단히 설명 부탁합니다>
[강길은 불기운이 강한 괴물입니다. 폭탄을 삼키면 뱃속에 끓고 있는 용암이 곧바로 녹여버립니다]
<와~ 완전 대박인데요! 콜!>
말이 떨어지자마자 강길이란 놈이 구름과 함께 획하고 나타나더니 눈깜짝할 새도 없이 그림자놈
과 폭탄을 함께 덥석 물더니 순식간에 삼켜 버렸다. 그러고는 금세 붉은 그림속으로 사라져 버렸
다.
-김효린-
내가 활쏘기에 처음 꽂히게 된 건 각궁과 컴파운드 보우 때문이었다.
길이가 짧은 화살인 애깃살을 반으로 쪼갠 죽통에 넣은 다음 나무와 뿔의 합성궁인 각궁에 걸어
서 쏘면 먼거리도 총알처럼 날아가 타겟을 맞힌다. 영화 최종병기활에서 주인공 남이가 그렇게
청나라 군을 하나씩 제거하는 장면을 넋을 잃고 봤었다. 그리고 우연히 본 람보2에서 컴파운드
보우로 폭탄화살을 걸어 헬기를 격추하는 그 장면이 시선을 단번에 사로 잡았다. 한동안 그 두
종류의 활과 화살이 자꾸 떠오르며 영화처럼 멋지게 따라하고 싶은 욕구가 솟구쳤다.
양궁 국가대표 꿈나무에 선발되고 훈련 도중에 중지에 통증이 심해서 한동안 훈련을 쉰 적이 있
었다. 그때 심심함을 달래기 위해 VR게임을 시작하면서 궁사캐릭터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피융~!! 애깃살이 타겟을 향해 아주 빠르게 날아갔다.
나는 매구의 목덜미를 정통으로 맞혔다. 매구는 눈동자가 뒤로 넘어가더니 공중에서 그대로 둔탁
하게 바닥으로 떨어져 죽었다. 만에 하나 소생의 확률을 없애기 위해 폭탄촉을 사용했다. 폭탄이
터지면서 대가리는 완전히 분해되었다.
나는 VR용병이다.
특기는 활이다. 어떤 RPG나 RTS 게임이든 궁사 캐릭터를 최우선으로 선택하
고 키웠다.
나의 절친 동료가 작전 도중 자폭테러로 흔적도 없이 사라진 후에 충격으로 한동안 일을 내려놓
았다. 그러다가 입에 풀칠을 해야 했기에 최애무기 활과 화살을 다시 잡을 수밖에 없었다.
<잠깐만! 지금 이 상황... 기시감인데....>
[매구의 목이 아니라 심장을 노려야 했다.]
<뭐야? 넌?>
2화. 괴물 공화국의 탄생
[나는 하세계의 ‘신오’이다 주로 중세계와 하세계 간의 계시나 메시지를 관리한다]
붉은 색 까마귀가 나타나서는 ‘하세계, 중세계’ 그러면서 이상한 말을 한다.
<그건 모르겠고요... 지금 뭐하는 겁니까?>
[여긴 가세계의 일부인 하세계이다. 매구는 심장을 터뜨려야 완전히 사라진다. 대가리만 터뜨리면
시간이 지났을 때 다시 그것이 돋아난다. 재생의 원천이 심장에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아니 난 VR용병으로 자원해서 힘들게 일하고 있는데 왜 갑자기 나타나서 구라를 치냐구요?>
[말을 함부로 하지 말라! 구라라니! 상제의 노여움을 건드리면 너에게 좋을 것이 없다. 가세계에서
말을 조심하라]
<아니 그러니까 왜 갑자기 나타나셨나구요?>
[그냥 말로 해서는 안되겠구나! 그럼 이것을 보아라!]
내 눈앞에 어떤 영상이 돌아가고 있었다. CCTV영상인 것 같았다.
편의점 안에 누군가 있다.
<어? 나잖아?>
영상에 카운터가 보이고 뒤에는 창문너머로 어두운 골목길이 보였다.
스냅백 야구모자에 후드를 덮어 쓴 괴한이 식칼을 들고 달려들었다.
다짜고짜 젊은 알바생을 수차례 칼로 찌르고는 POS기를 열어서 돈을 빼앗아 달아났다.
[너는 이날 급한 일이 생긴 다른 알바생을 대신해서 야간타임 근무를 하다가 참변을 당했다]
<네에? 그럴리가요? 그럴리가요!!>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가 저렇게 죽었단 말인가!
내 기억에는 오로지 VR 용병으로 일한것 밖에 생각이 나질 않는데
내
너무나 기가 막혀 한동안 아무말도 하지 못했다.
<그럼 내가 활쏘기를 좋아했던 건 뭔데요?>
[그건 네가 VR게임 ‘아처 오브 레전드’의 궁사 캐릭터를 좋아했기 때문이다]
<...진짜인가 보네...>
나는 너무나 실망한 나머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너는 곧 하세계에서 첫번째 시련을 맞이해야 한다. 만일 시련을 통과하면 중세계로 올라갈 기회
를 잡을 수 있다]
<네? 부활요? 방금 부활이라고 했습니까 중세계로 올라가면 그 다음은요? >
[그 다음은 내 영역이 아니다]
[불가사리가 쇠를 토하게 하라]
이 말을 끝으로 신오라는 붉은 까마귀는 갑자기 사라졌다.
갑자기 사라진 뒤에 내 눈 앞은 깜깜해졌다가 천천히 다시 밝아졌다.
똑같은 시멘트 벽돌로 만들어진 블럭 주택들이 길다랗게 늘어서 있었다.
그 중에 한 채는 완전히 부서지고 무너져서 시멘트 블럭 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 내부에는 경찰
과 감식반이 있었고 그리고 폴리스 라인 밖에는 기자 여러 명이 에워싸고 있었다.
나는 기자에게 물었다.
<여기가 뭐하는 곳입니까 혹시 가스 폭발 사고라도 일어났나요?>
“아뇨 무슨 돌풍 같은 것이 갑자기 생겨나더니 집을 다 박살내 버렸습니다"
아까 까마귀가 분명히 시련을 통과해야 한다고 했으니 여기서부터 뭔가 실마리를 찾아야 할 것이
다.
“뭔가 시컨먼게 보였는데 그게 먼지인지 바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기자의 질문에 한 목격자가 답변을 하고 있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가령 그게 바람하고 다른 모양으로 움직였다든지 말이죠.."
“시커먼 먼지 덩어리 같았는데 아 맞다 그 덩어리 안에서 뭐가 번쩍번쩍 했었던 것 같아요 확실
친 않지만..."
기자는 수첩을 들고는 정신없이 받아 적었다. 나는 기자를 살짝 옆으로 밀치고 앞으로 들어갔다.
<저 근데 혹시 그 먼지 덩어리에 다른 물체는 없었나요?>
“아니 이봐요! 내가 질문하는 중인데 왜 말을 가로채고 그러세요?"
인상을 쓰고 나를 보고 나무라는 이 기자는 얼핏 정우성을 닮았다. 깊은 눈매에 시선이 꽂히고
말았다.
“아니, 여보세요! 안들리세요? 지금 그쪽에게 말하고 있잖아요! 목격자 질문을 하려면 뒤에서 순
서를 기다리시라구요! 사람이 교양도 양심도 없어...”
아주 낭랑한 톤으로 CF 나레이션하는 성우같은 목소리였다. 여기서 이러면 안되는데 몇 초 동안
살짝 정신줄을 놓아버렸다.
“죄송합니다!”
나는 뒤에서 질문이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그런데 주위를 빙 둘러보는데 뭔가 이상한게 보였다.
쇳조각이나 철로 된 물건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일반적으로 붕괴된 건축물이나 주택이라면 당
연히 보여야 할 것들인데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시멘트나 나무 이외에는 집안에서 사용하는 생
활도구나 용품뿐이었다.
‘아까 까마귀가 말한 불가사리가 쓸고 간 게 틀림없어'
혹시나 다른 골목에서 같은 짓을 하고 있는지 살펴보기 위해 근처에서 가장 높은 빌딩으로 올라
갔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한강 쪽을 바라보았다. 해가 저물어 가는 시간대가 가까워
져서 서서히 노을이 드리워지고 있었다. 그런데 저 멀리 우뚝 서있는 고층 빌딩 사이로 이상한
비행물체들이 보였다. 어찌나 빠른지 금방 육안으로 알 수 있을 만큼 가까이 왔다.
“뭐지 저 놈들은? 독수리야 까마귀야 뭐야?”
[옹이라고 합니다. 저놈들에게 물리면 즉시 몸이 말라서 죽습니다]
<뭐라구요? 지금 나더러 어쩌라구요?>
옹이라는 놈은 사람의 얼굴 비슷한데 눈이 네 개이고 귀는 아주 크고 다리가 세 개이며 몸체가
아주 컸다.
어릴 적 동물원에서 본 타조랑 크기가 비슷했다.
그런데 내가 지금 갖고 있는 것은 각궁과 화살 두개가 전부였다.
<지금 나보고 어쩌라고!>
[하세계의 불가사리를 잡으려면 저 옹의 눈과 귀를 가져야 합니다]
<아니 그럼 저 놈의 머리를 따란 소리잖아요!>
-주운발-
나는 16살에 게임신동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모바일통신 대기업 제이케이텔레콤 소속으로 스카우
트되었다. 그 안에서도 최고 유망주로 육성되고 전폭적인 지원을 받았다. 정식으로 스쿼드멤버가
되면서 합숙을 했기 때문에 집보다는 스쿼드 팀원들과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본격적으로 프로
시즌이 개막하면 가족들은 거의 만나지 못한다.
“엄마..형님은요?..."
“음 그냥 그래... 아직은 별다른 연락은 없어...근데 있잖아...저번에 얘기한 거 말이다... 그거 한번
해보면 안되겠니···”
“엄마, 그건 안된다고 했잖아요... 그거 잘못하다가는 정신이 못 견뎌서 돌아버릴지도 몰라요! 두
번 다시 그 얘기 꺼내지 마세요”
엄마가 어느 용하다는 무속인을 만나고 와서는 자꾸 고집을 피우신다.
형님은 잘나가는 VR용병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작전 도중 실종되었다. 해저에서 아군의 잠수함이
조난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구조전문 잠수함에 탑승하여 생존자를 구하러 갔다가 괴물체에게 공격
받고 있다는 급전을 마지막으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잠수함이 통째로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계속
해저를 탐사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었다. 수중 탐사의 횟수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고 가족들은 희
망도 줄어만 갔다.
오늘은 실시간 전략 게임 부동의 1위 '엑스데우스’ 팀전의 시즌 마지막 경기가 있는 날이다.
"아~ 저 새끼들 점수가 앞서가니까 너무 얍삽하게 플레이하는데! 앞마당에서 계속 방어만 하니깐
들어가질 못하겠다 아! 진짜 짜증나네! 시간내에 메리디언을 파괴하지 못하면 종합점수에서 뒤집
어지겠는걸!"
4명씩 한 팀인데 이미 두 명은 아웃되었다. 상혁이와 내가 남아서 상대편인 아이언 스쿼드 4명과
싸우고 있다.
“상혁아 너무 감정이입하지 말고··· 내 에너지가 조금씩 충전되고 있으니까 풀차징되면 그 때 슈퍼
플레어로 한꺼번에 날려 버리자 그때까지 네가 쟤네들 좀 끌어내봐! 넌 할 수 있어!”
[더 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뭐 뭐냐!>
갑자기 VR화면에 글자가 떠서 순간 놀랐다. 동시에 글자 그대로 목소리가 어디선가 들렸다. 내
귀에 아주 또렷하게 들렸다.
<아니 혹시 집행부에서 혼선 잡음 섞인 거 아닙니까?>
나는 헤드셋에 오작동으로 집행부 라인과 혼선이 발생한 줄 알았다. 그래서 혼자서 마이크에 대
고 그렇게 말을 한 것이다.
[여기는 집행부가 아닙니다. 가세계에서 보내는 메세지니 잘 들으셔야 합니다]
<집행부! 집행부! 안들려요 지금 이상한 말이 들리지 않습니까?>
챔피언 결정전이고 뭐고... 프로리그 본경기 플레이 도중에 이런 경우는 처음 겪기 때문에 솔직히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주운복씨 일은 안타깝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앞으로 당신의 역할이 더 중요합니다]
<잠깐만요! 잠깐만요! 그쪽이 어느 정보부 소속인지는 모르겠는데 이렇게 감청하시면 권익위원회
와 언론사에 제보할 겁니다. 그리고 더이상 형에 대해 한번만 더 어쩌고저쩌고 씨부리면 가만히
두지 않을 겁니다>
[가만히 두지 않으면 희망의 한가닥 마저 사라지고 가족들과는 영원히 이별하게 됩니다]
<지금 도대체 무슨 말씀하시는 거죠? 내가 죽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이제야 상황을 제대로 인지하는군요 이 영상을 보시죠]
누군가 컨버터블을 타고 강원도 방향 국도를 가는 영상이었다. 잠시 화면이 넘어가더니
호수에 빠진 그 차를 기중기로 들어올리고 있었다.
<아니 저건 내 컨버터블인데?>
[성인이 된 기념으로 구입한 비엠더블류 엠포 컨버터블입니다. 구입하고 2주 뒤 사고 수습장면입
니다]
<그럼 내 내가 저기에 차가 빠져 죽었단 말이에요? 아냐! 아냐! 거짓말이죠! 거짓말이야 거짓말!>
나는 핏줄이 터져라 고함을 질렀다.
[안타깝지만 빨리 받아들이는게 다음을 위해서 현명한 결정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요?>
[하세계로 가서 환혼석을 찾아야 합니다]
<아니 하세계는 뭐고 환혼석은 또 뭔데요?
중간 설명도 없이 계속 이럴 겁니까?>
[하세계는 너무 방대한 설명이 필요하니... 땅 밑에 있는 세계라고만 알아 두시고...
환혼석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을 드리지요...]
<근데요... 그전에 본인 소개부터 하시죠 아직 말 안했거든요 기본적인 상호 통성명은 하고 대면
을 해야지 안그렇습니까?>
[저는 죽은 사람을 태워서 가세계로 데리고 가는 주작이라고 합니다]
<헉! 그럼 다 당신이 저승사자요?>
[아니요 저승사자는 소속과 임무가 좀 다릅니다 자세한 건 천천히 알아가시죠...]
<환혼석이 뭔데요?>
[사람을 살릴 수 있는 돌입니다. 시신 위에 올려 놓기만 하면 잠시 후에 죽은 자가 소생하는 신비
한 돌입니다. 하세계에 있는 어느 누군가가 그것을 팔러 다닌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무서운 놈들
을 만날 수도 있으니 준비를 잘 하시고 부디 잘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주작은 곧바로 사라졌다.
나는 그냥 멍하니 서 있었다. 아까 게임을 했던 장소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텅빈 공간에 혼자 남
아 있었다. 조금 지났을까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렸다. 산들바람도 느껴졌다. 눈 앞이 밝
아졌다.
“와! 여기가 도대체 어디야?”
“어디긴 어디야!
뜨거운 물 반 차가운 물 반이 흐르는 흰머리산 한서수잖아!"
뒤에서 낯선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렸다.
“넌 뭐냐?"
"이곳에서는 나를 '허'라고 불러"
허라고 불리는 녀석은 교예단의 곡예사처럼 허리를 완전히 뒤집어 꺾어 발이 머리를 넘어 얼굴
앞을 덮고 있었다. 손톱은 얼마나 길렀던지 구불구불한 모양새로 있고 피부는 새까맣고 붉은 흙
을 갈아서 문신을 여기저기에 새겨 놓았다. 딱 보면 괴상하게 생겼다.
"근데 너 말이야 하세계로 가는 길 아냐?" 솔직히 너무 겁이 나서 나도 모르게 오줌을 살짝 지렸
다. 하지만 최대한 내색을 하지 않고 아까 주작이 말한 하세계에 대해서만 생각했다.
“알지! 근데 내가 몸이 너무 불편해서 네가 좀 도와주면 알려 줄게~"
쉽게 알려 줄 놈은 아니라고 예상했지만 조금 난감했다.
“내가 어떻게 도와주면 되지?"
“저기 언덕 위에 붉은 색 나무 보이냐? 거기에 버섯이 자라는 데 그걸 따면 돼!"
“직접 가지 그랬어...”
“근데 나무 주위에 뱀이 있어서 못갔어"
겁은 났지만 더 지체해서는 안 될 것 같아 두려움을 무릅쓰고 올라갔다.
올라가서 보니 뱀이 아니라 몸일 길쭉하게 생긴 벌레가 있었다.
아무래도 버섯에 중독이 되거나 해서 착각했을 것이다.
[장족충입니다. 잘못 건드리면 독침에 찔립니다. 도감에 넣어 두면 진기한 보물을 찾는데 도움을
줄 것입니다]
갑자기 메시지 창이 떴다.
<누 누구세요?>
3. 괴물 도감 초판본
[저세계 메신저입니다. 도감의 표지를 열면 봉인의 큐브가 있습니다 그것을 놈에게 던지면 저절로
펼쳐지고 블랙홀처럼 강력하게 빨아들여 봉인합니다. 가능한 몸뚱아리에 정확하게 맞히세요]
생전 처음 보는 도감이 눈 앞에 나타났다. 말한대로 표지를 열어보니 그 큐브가 있었다.
주저없이 던졌다. 표적을 항상 맞히던 습관이 있어 한방에 놈의 가운데를 맞혔다. 나뭇잎을 갉아
먹고 있던 놈은 영문도 모르고 순식간에 그대로 빨려 들어갔다.
‘오케이!’
“자 버섯!"
“오호~ 이렇게 쉽게 가져오다니 대단하구나!"
“버섯은 왜 따오라고 한거냐?"
“이건 미치광이 버섯이야 잘못 먹으면 한동안 미쳐 버려서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그런데 난 내성이 있어서 괜찮고 대신에 몸이 쫘악 펴지는 효과를 얻어"
“오호 신기하네~ 암튼 이제 길을 알려줘"
녀석이 대답은 바로 하지 않고 버섯을 먼저 먹었다. 곧바로 몸이 원래대로 쭉 펴졌다.
“이렇게 몸이 펴져야 물고기를 잡을 수 있거든"
버섯을 따 다랄고 한 이유가 이거였다.
"여기서 한서수를 따라 저 나무배를 타고 쭉 가다보면 절벽에 다다르고 곧바로 아래로 떨어지는
폭포수가 나오거든 거기 폭포수 뒤에 숨겨진 동굴이 하나 있어... 거기가 하세계로 가는 입구야!"
"그...그래 고맙다... 다... 다음에 만나지 말자...."
"폭포수에 떨어지기 전에 물가로 배를 잘 붙여야 한다... 폭포수에 빠지면 금혈어들이 달려들거
야..."
"그것들이 혹시 물어뜯는 놈이냐?"
"물어뜯기면 소생하기는 불가능해 살점이고 뼛조각이고 남아나질 않거든"
"헉! 무섭네 무서워~"
"그리고 동굴 앞에는 머리가 셋 달린 하세계 문지기병사가 있을 거야 일단 그놈을 따돌리던지 싸
워서 때려 눕히든지 해야만 하세계로 들어갈 수가 있어..."
"와~ 진짜 장난이 아니네! 난 죽은 줄도 모르고 여기까지 왔단 말이야! 산 넘어 산이고 누구의
말을 믿어야 할지도 모르겠고... 진짜 난감하다 난감해!"
"그러냐? 얼마 전에도 여기를 와서는 너처럼 하세계 입구를 물어보더라구..."
"그래 누구지?... 어떻게 생겼는지 좀 알려줄 수 있냐?"
-윤도훈-
기상청에서 올해는 유난히 겨울이 일찍 올 것 같다고 한다.
나는 폭이 넓은 계단을 올라가서 바로크 건축 양식을 모방한 현관 입구가 있는 도서관 앞에 섰다.
출입문 양쪽에는 괴물 출몰 경계 경보판이 설치되어 있다.
<오늘 괴물 출현 경보는 ‘위험'입니다>
서너 달 전쯤 '매우 위험’이었던 적이 있었다. 이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두려움에 떨며 외출을 하
지 못했다.
그렇지만 미처 경보를 체크하지 못한 시민들이 한강에서 노닐다가 거북이 등껍질같은 비늘을 두
른 강괴물에게 잡아 먹히는 일이 발생했다.
다행히 내가 해치 금배지를 달고 있어서 물리칠 수
있었다. 그가 현장에 없었다면 희생자는 훨씬 더 늘어났을 것이다.
나는 괴물 연구가다. 이곳은 현관을 들어가기 전까지는 작은 도서관이지만 현관을 들어서면 내부
는 천장이 아주 높은 거대한 괴물 관리국의 공간으로 변한다.
천장은 끝이 보이지 않는 무한 영역처럼 보일 만큼 광대했다. 봉황, 난조, 민들이 상공 높이 날아
다니고 있었다.
입구에 들어서자 괴물 연구소의 안경미 연구원이 반갑게 맞아 주었다.
“아! 도훈 쌤 안녕하세요~"
“네 경미쌤 요즘 힘드시죠?"
“아무래도 어딘가 게이트가 열린 것 같아요 이렇게 자주 출몰하는 경우가 없었는데...”
“일단 최근에 가세계에서 넘어온 소식통을 보면 특이한 세가지 케이스가 있어요 그들이 공통된
것은 VR 관련 일에 종사한다는 거예요"
“게이머 이런 쪽요?"
“맞아요... 어떻게 알았어요?”
안경미 연구원은 내가 괴물 도감에 빠져만 있는지 알고 있는 게 분명하다. 요즘 시대에 VR 게임
에 빠지는 게 정상이지 어디 괴물이라는 말이 가당키나 한가!
현재 괴물 관리국의 최고 의장은 프레지던트 최희선이다.
괴물 관리국은 가세계와 통하는 게이트가 있다. 지금은 평화의 시대를 맞고 있지만 아주 오래 전
에는 서로 원수가 되어 대전쟁을 일으켰다. 30년이 넘도록 전쟁을 치렀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각
자의 세계가 너무나 큰 손해와 피해를 입었다. 더이상 계속 했다가는 두 국가가 멸망하고 말 것
이라는 위기감이 휴전을 불러왔다.
“오늘 대책회의가 있으니 같이 참관해 봅시다"
관리국 차원에서 시민들의 안전을 보호하기 위해 긴급히 대책회의를 열었다.
“가세계 차사는 이번 일이 크라이언들의 남하가 시작되었다는 것과 연관이 있다고 언급하고 있는
데 그 말을 백퍼센트 믿을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냉혈족인 그들이 수백 년간
동면에서 깨어났다는 징후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긴급 대책회의는 국회의 대표 발언처럼 관리국 소속 부서 책임자들이 각자의 의견을 피력하는 자
리이다.
“냉혈족들의 지도자이며 힘의 원천인 킹크라이요는 능력이 상상을 초월한다고 들었습니다" 대항
무기 개발부의 배용준 부장이 발언했다.
“무기 개발도 중요하지만 하루 바삐 그들에게 대항할 수 있는 뱃지 몬스터의 임상실험에 돌입해
야 합니다" 뱃지 몬스터의 신태호 박사가 목에 힘을 주며 말했다.
“냉혈족의 특성을 좀 더 조사해야 합니다. 그들에게도 약점이 분명히 존재할 것입니다. 그리고 갑
자기 나타나는 괴물들도 골치 아픈 일입니다. 특히 도시에서 사람으로 둔갑했다가 어느날 괴물로
환원해서 사람을 죽이거나 혼절하게 만드는 일은 더이상 막아야 합니다" 최희선 의장이 명분을
보탰다.
“그렇소 그것은 재난입니다 재난! 정부도 관리국도 협업해야 합니다."
최병우 부의장이 계속 듣고 있다가 뼈 있는 한마디를 던졌다.
이때 코드 레드가 발령되었다. 경보음이 시끄럽게 울렸다.
고등학교 교실에 괴물 등장! 괴물 등장!
대책회의를 경청하던 나는 급히 그곳으로 이동했다.
섹터 난이도
Lv. 6
몹 개체능력지수 Lv. 5
(Level단계 1~12까지)
괴물 교사와 학생간에 전투 발생. 29명 부상입고 기절. 1명 사망.
VR 옵티칼 화면에 메세지가 떴다.
v.o. [특징: 탄환 닷지능력, 전후좌우 촉수다발의 기습공격에 주의바람]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공간.
“여기가 교실이야? 공장이야?
창문에 쇠창살은 왜 박아 놨어?”
“그래야 도망가질 못하지...뭐냐?... 너도 반물질때문에 탈출한 놈이냐?”
노란색 촉수 괴물이 시비조로 먼저 입을 열었다.
“너는 이 녀석들과는 아우라 질감이 완전히 다른 것 같은데..."
순식간에 촉수가 얼굴 아주 가까이에 뻗쳐와서는 여러 가닥으로 다시 나뉘어졌다. 그것들은 어루
만질 듯이 스멀거리며 움직였다.
“응?"
“아니면 크리퍼의 오더를 받고 온거냐?
무슨 말인지 못알아 듣겠어?”
피범벅이 된 다른 촉수들은 꿈틀거리며 사망한 학생의 팔을 뜯으려 한다.
“아니~ 나는 내가 사는 옥탑방으로 돌아가고 싶어서 왔는데···”
“어엉? 그러면 길을 잘못 택한 것 같은데... 허나!
들어오는 건 니 맘이지만 나가는 건 맘대로 안
돼~ 야앗!”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날카로운 송곳으로 변한 촉수가 나의 얼굴을 노렸다.
평소에 파크루와 스트리트 스턴트로 단련된 나의 머슬 메모리는 그 순간에 작동했다. 촉수를 깻
잎 한 장 차이로 피했다. 근데 무게중심이 한쪽으로 쏠리면서 넘어지고 말았다.
[적합한 무기 검색 중] 넘어져 허덕거리는 그 순간에 옵티컬 화면에는 괴물의 데이터창이 떴다.
[2개의 검색결과가 나왔습니다. 다연장 머신건과
5고 금강저에서 고르시오]
<이것들은... 구경도 못해 본 건데...>
[감응계수 머신건
75%
금강저 79%]
생각을 즉시 읽고 데이터창이 반응했다.
이곳에선 브레인 스캔이 되므로 분석데이터와 인벤토리가 즉시 팝업으로 뜬다.
“비슷비슷한데... 에라 모르겠다!” 나는 5고 금강저를 선택했다.
[아이템 다운로드를 완료했습니다]
순식간에 이 모든 일들이 일어났다. 괴물은 2개의 촉수로는 몸을 지탱하고 나머지 6개의 촉수를
가동해서 송곳공격을 퍼부었다.
경험이 일천한 헌터라면 벌써 수십개의 관통상을 입고 파워가 금방 다 깎였을 것이다.
나는 다 피했는데 딱 한방을 피하지 못했다.
봉술처럼 금강저의 그립을 최적으로 만지작거리는 빈틈을 노려 두 개의 송곳촉수가 동시에 날라
왔다.
하나는 심장 쪽 또 하나는 목으로 날아들었다. 적어도 하나는 맞을 수 밖에 없는 상황.
목을 뒤로 젖히면서 상체를 최대한 틀었다. 목을 노린 촉수는 완전히 피했지만 다른 하나는 심장
을 노린 촉수는 흉부측면에서 등뒤 견갑골까지 뚫리는 관통상을 입고 말았다.
“이런~ 좀 유연하구만! 한번에 죽일 수 있었는데 말야! 그 정도 민첩성이면 질러 출신들과 맞짱
떠도 되겠어... 일단 여기서 죽고 다시 태어난다면 말야... ‘
<아으~~ 장난 아니네... 통증은 홀빡 내가 다 감당해야 되네! 아으~~>
[금강저 전력이 100% 충전되었습니다]
“엥! 사용법은? 어떻게 쓰냐고오!! 빨리빨리!!"
[발사하는 순간 자동조준 됩니다]
노란색 촉수 괴물은 퉁퉁 뛰어다니며 다시 공격을 준비했다.
“깜냥도 안되는 것들이 상금에 눈이 멀어 나를 죽이려고 했어... 나라에서 포기한 불량스런 것들을
내가 얘네들 갱생시키는데 얼마나 사랑과 정성을 들였는데 말야... 그런 나를 배신해?”
“뭔 소리야! 그렇다고 애꿎은 애들을 공격하면 안되지! 이제 순순히 죄값을 받아라”
금강저를 양손으로 잡았다
[절연 슈트로 교체 바람]
[절연 슈트로 교체 바람]
인벤토리가 떴다. 절연 슈트를 장착하고 곧바로 금강저 출력버튼을 꾹 눌렀다.
이미 노란색 촉수 괴물은 공격에 대비해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공간을 이리저리 돌
아다녔다.
“네 죄값이야! 순순히 받고 이제 무지개강을 건너 가라!"
금강저에서 엄청난 세기의 번개가 여러 갈래로 괴물을 향해 뻗어 나갔다.
총알은 요리조리 피할 수 있어도 여러갈래로 때리는 번개는 아무리 빨리 피해 다녀도 불가항력일
수 밖에 없다. 괴물의 마하20도 번개의 속도를 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찰나의 순간에 수백 번 이상의 번개를 정통으로 맞고 힘없이 바닥으로 철퍼덕 쓰러졌다. 몸체에
서는 연기가 피어 올랐다. 촉수가 모두 잘리거나 탔고 몸통은 서서히 녹아내렸다. 노란색 촉수 괴
물은 비참한 형체로 눈을 감은채 꼼짝도 하지 않았다.
[관리국으로 신속히 복귀 바람, 신속히 복귀 바람]
-최희선-
나는 화를 참으며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에게 헌터 자격을 상실했다고 분명히 일러 준 걸로 아는데... 윤도훈!”
안경미 연구원은 윤도훈의 긴급 호출을 전해 듣고 무슨 일인가 걱정스러워 상벌위원회 회의장의
참관석 맨 뒤에서 이 상황을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안경미와 윤도훈 사이에 썸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었다. 지금은 사실 그게 문제가 아니다.
윤도훈은 약간 겁에 질린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네... 의장님. 하지만 저는 학교에서 발생한 긴급상황이라 저도 모르게 그만...”
“자네는 더 이상 헌터가 아니야."
“네? 의장님... 하지만... 괴물이 지금 너무나..."
“괴물들이 점점 자주 출몰하고 있다는 건 우리도 잘 알고 있네! 조금 전에도 그것과 관련해서 대
책회의를 열었고...”
“한강에서도 예보를 듣지 못한 시민들이 크게 다칠 뻔했습니다. 부디 제가 밖에서라도 활동할 수
있게..."
“윤도훈! 빨리 나가! 그리고 지하에 금배지를 반납하고 가! 지금 안 나가면 경호원을 불러서 강제
로 끌어낼 수밖에 없어!”
윤도훈은 몹시 모욕감을 느꼈다.
경호원을 부르기 전에 스스로 일어났다.
안경미는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그녀는 재빨리 회의장을 떠났다.
이 상황을 위원석에서 함께 지켜보던 최병우 부의장만이 윤도훈을 측은하게 바라보는 듯했다.
-윤도훈-
내 옆에는 반납부서를 안내하기 위해 배가 불룩한 장자마리가
뒤뚱거리며 서 있다.
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 20층 깊이까지 내려갔다.
문이 열리자 갑갑하고 통풍이 되지 않고 창이 없는 지하실 공간이 나온다.
위에선 메이저들이 일하고 이곳 아래층은 마이너나 루저들이 일하는 곳이다.
장자마리는 뒤뚱거리며 서류가 잔뜩 쌓여 있는 책상 숲을 지나쳐 갔다.
맨 구석 방까지 따라갔다. 그 방에는 '금배지 반납처'라고 쓰인 표지판이 걸려 있었다.
나는 표지판을 보고는 가슴에 있던 불꽃이 차갑게 꺼져 버린 듯한 절망감이 들었다.
4화. 질러
-질러-
질러의 본부.
질러는 일단 저세계의 경계지역 바로 바깥에 있는 것이다.
그들은 자아가 아직 있고 스스로 사
고를 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보통의 생명체와는 다르다. 좀비도 아니고 외계인도 아니고 죽은 것
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뚜렷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특이한 존재임에 틀림없다.
주로 사람이나 괴물 납치해서 돌연변이 실험체로 사용한다.
일단 현실과 저세계 사이에 게이트가 열린 후에는 활발하게 뭔가를 준비하고 있다.
“혼탁한 세상을 정화하기 위해 전사를 보내면 왜 세상은 전사를 악당으로 둔갑시키고 그곳은 점
점 더 시궁창이 되고 마는가”
딥쓰로트가 책을 펼쳐 한문장을 읽더니 도로 덮어둔다. 그리고 코로나 시가를 입에 물었다.
“모!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자신의 과오를 결코 시인하지 않고 더 큰 죄악으로 덮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닥터 모가 한 모금 마신 허브티 찻잔을 내려 놓으며 자신의 생각을 피력한다.
“닥터, 1차 에볼루션이 성공적으로 끝난 전사들 먼저 브리핑을 해보시오"
“네! 지금 바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괴물 도감>
1.오더
지하 깊숙한 곳에서 특화되어 있으나 1차 에볼루션을 거쳐 업그레이드 되었다.
시각보다는 촉각,
후각, 청각이 굉장히 발달되어 있다. 진동과 냄새, 소리로 상대를 구분한다. 열사풍, 지진을 일으킬
수 있다. 아주 빠르게 구르기 공격을 할 수 있다. 구르는 이동을 하다 벽에 부딪히면 그대로 잠시
뒤집어저 버둥거린다. 이때 반격을 가할 타이밍이다.
스스로 뒤집어지게 하는 것이 최선의 공략
법이다. 무중력술을 먼저 쓰고 몸을 땅에 박고 빙글빙글 돌면서 사방에 돌파편을 날리면서 치명
상을 입힌다.
땅을 여러 번 내려찍는 공격은 전방에 충격파까지 생기니 옆으로 구르거나 회피를
해야 한다.
*최고 스킬
무중력술
제자리에서 높이 뛰어 올랐다가 착지하면 근처의 적을 모두 공중으로 띄우며 멈추게 한다. 오더
는 무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으므로 적은 무방비 상태가 된다.
공간지배 마나가 꽉 찼을 때 사용가능하다.
마나가 소모되면 무중력이 사라진다.
2.인드라
흑륜과 비슷한 에테르형 괴물이다. 순간이동을 하면서 벼락과 얼음기둥을 뿌린다. 설빙 지역에서
최고의 능력을 발휘한다.
굉장히 까다로운 괴물이다. 얼음기둥은 날아오는 것을 잘 보고 피한
다 쳐도 벼락을 연속적으로 지져대면 아무리 초능력자라고 해도 다 맞아야 한다. 공략 방법은 절
연내성이 있는 슈트를 입거나 절연체 엘릭서를 마시고 반격을 해야 한다. 슈트는 시간 제한이 없
지만 브압의 후원이 없으면 구할 수 없다. 엘릭서는 실뱅 이상에서 후원을 받을 수 있다.
그리고 반격시 가장 효과적인 무기는 절연체로 만든 채찍을 들고 역소용돌이를 일으켜 빨아들여
소실시켜야 한다.
*최고 스킬
벼락트
초속 10만 킬로미터의 번개를 여러 갈래로 방출. 아무리 S급 이상 초능력자라도 절연 방어구 없
이 연타로 몇 번 맞으면 순식간에 녹거나 타서 죽는다.
3.다크 셉터
과거에 군주로서 악행을 심하게 저지르다 반란으로 처형당한 고스트. 순간이동으로 위기를 빠져
나가거나 멀리 있다가 상대와 거리를 순간적으로 줄여 공격한다. 씨클과 셉터 두 가지 무기를 양
손에 각각 들고 상대의 속성에 따라 혼합해 사용한다. 씨클을 연속으로 휘두르니 회피할 때 조심
해야 한다. 일시 정지 폭탄을 이용하여 순간이동을 무력화 시킬 수 있다. 다만 골디나 브압의 후
원을 받아야 구할 수 있다. 상당히 저돌적인 성향인데다 부하들을 함께 데리고 공격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일시 정지 폭탄은 아주 유용하다. 레벨이 높은 상대가 등장하면 1차 에볼루션 발동
이 작동해서 강화 셉터로 진화한다. 셉터를 따르는 부하들이 골치 아프지만 군주 셉터를 죽이면
모두 함께 사라진다.
왕의 상징인 셉터를 파괴하면 일단 순간이동 능력이 사라지고 전투력이 절반이하로 떨어지면서
패닉에 빠진다. 이때
근접해서 검으로 마구 공격하면 된다. 평상시에는 그림 속 그림자 망령으로
숨어 있다. 괴물 도감에 있는 불의 괴물 강길은 그림 속 다크 셉터의 천적이다.
*최고 스킬*
순간 이동
마법의 액체를 셉터 끝에 장착해서 이용한다. 순간이동 엘릭서가 필요하다.
영향반경 해당 맵 전체 어디든 순간이동이 가능하다. 자신의 부하들에게도 이 액체를 뿌리면 이
들도 따로 순간이동을 할 수 있다.
4.카이클론
팔이 길어 활을 잘 쏜다. 시위를 당기는 장력이 일반인보다 4~5배 이상 강하기 때문에 몸이 두꺼
운 트롤이 맞아도 뚫릴 정도이다. 가장 큰 문제가 되는것은 공격에 경직을 전혀 먹지 않는다는
점인데, 한 대 맞자 마자 바로 반격하기 때문에 연타는 거의 먹히지 않으며 단타로 치고 구르기
등으로 도망치려 해도 반격 범위와 판정이 엄청커서 이조차도 수월하지 않다. 그나마 공격하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회피 자체는 어렵지 않으므로 회피 후 속공이나 강공을 넣어준 후 뒤쪽으
로 굴러 도망가면 반격당할 확률이 적어진다. 덩치가 커서 때리기도 쉽고 느린속도 때문에 따라
오질 못한다.
뒤에서 공격할 경우 제대로 반응을 하지 못하는 괴물이다. 이를 잘 활용해야 이길 수 있다.
*최고 스킬*
마법의 깃털 화살
마법이 깃든 깃털이 꽂혀 있는 화살을 쏘으면 장애물을 피해 옆으로 휘며 목표물을 맞힌다. 그리
고 더 강력한 스킬은 자동 유도 추적이 되는 화살이기 때문에 상대가 한두 번 피해도 결국 맞게
된다.
활의 업그레이드 필수.
"총수님, 여기까지가 서울로 침투할 최정예 전사들입니다."
"저번처럼 속도만 엄청 빠르다고 자만하다가 번개 맞고 뒈지는 실수는 두 번 다시 일어나서는 안
되오!"
"그래서 이번엔 맞번개 작전이 가능한 인드라를 보낼 것입니다."
"잘 했소이다! 닥터 모! " 딥쓰로트는 시가를 크리스탈 재떨이에 비벼 끄면서 약간의 미소를 지었
다.
"과찬이십니다~ 총수님께서 디데이를 정해주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출격이 가능합니다."
"좋소이다~ 일단 괴물 관리국 헌터들의 동태를 파악하고 작전 개시일을 잡겠소!
소문대로 크라이요들이 깨어난다면 언제든지 침범해 올 것이니 최대한 빨리 저세계에서 우리 영
역을 넓히고 철벽을 쌓아야 하오"
-크라이언-
크라이언은 냉혈족을 말한다.
윤도훈은 연대기에서 크라이언에 관한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났다.
특별히 오늘은 VR방에 게임이 아닌 고서를 검색하기 위해 왔다. 방대한 자료를 검색하기 위해서
속도가 빠른 컴퓨팅이 가능한 이곳보다 나은 곳은 없다. 물론 괴물 관리국의 중앙서버에 접속하
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지만 지금은 무기한 정직 처분을 받은 상황이라 그럴 수가 없다.
고대문헌 스터디에서 함께 했던 조대영이 들어왔다.
브레인 타이핑으로 메세지창을 띄워 자료를 공유하고 있다.
<오프월드에 관한 연대기에 보면 얼음장벽인 글래셔의 유래와 함께 크라이언에 대한 내용이 약
간 언급되어 있어.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그렇게 많지가 않네~내가 아직 발견하지 못한 게 분
명히 훨씬 더 많을 텐데...>
{이것보다 더 오래된 파일들은 손상이 심해서 보기가 힘들어. 영웅의 시대에 엘리트 족속이었던
퍼스트무버족들이 우리에게 뭔가 영상을 남기긴 했는데 그 영상파일을 아직 제대로 복구한 전문
가가 없다는 거야... 현장에 가면 바위에 새긴 이상한 문자도 있고... 오늘 우리가 영웅의 시대와
여명의 시대와 관련된 모든 자료를 찾아보자고!}
윤도훈이 갑자기 궁금한 게 떠올랐다.
<그럼 킹크라이요는? 킹크라이요가 크라이언의 지도자인데... 그가 모든 무리들을 정신감응으로
조종할 수가 있대~>
{그러니까 킹크라이요의 약점을 알면 이길 수 있겠네}
<그만이 아이스브레이커를 만들 수가 있대...영웅의 시대 연대기에서 발견했어...반면에 영웅시대
때 숲의 수호신들이 아이스브레이커에 대적하기 위해 불새의 검을 만들어 줬다고 적혀 있어...>
{그런데 도훈아 크라이언들이 기후가 추워질때 남하했는지 그놈들이 내려오면 추워지는 것인지
분명하게 나와 있질 않네...}
<그래 그게 좀 애매해...눈보라를 몰고 온 건지 눈보라가 칠 때 온 건지는 확실치 않지만...암튼,
그놈들은 춥고 어두울 때 더 활발히 움직이는 건 분명해...>
{맞아 일단 햇빛엔 약한 게 맞는 것 같아... 햇빛에 노출되면 녹아서 사라져 버린다고 나와 있긴
해.... 그래서 햇빛을 피해 숨어 있다가 주로 밤에 나타나 이동한다네. 아~ 그러고보니 이들이 이
동할 때 폭설과 블리자드가 갑자기 발생해서 두터운 설원이 만들어진다고 기록돼 있어! 그들이
지나갈 경로에 있는 넓은 지역에 걸쳐 공기를 냉습하게 변질시켜 차갑고 두꺼운 눈구름으로
햇
빛을 차단하고 폭설을 내리게 한다...}
<어허이...주연들처럼 미리 카펫트를 깔고 등장하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윤도훈은 고서에서 크라이언들의 특성과 약점을 찾으려다 허탈함과 씁쓸함만 맛봤다.
<그런데 그거 아냐? 숲의 수호신들도 죽은 것을 소생시키는 능력이 있지만 킹크라이요도 사람이
든 동물이든 죽거나 심하게 다치면 소생시킬 수 있대...>
{맞아 맞아... 그들은 뼈가 드러난 말이나 흰 곰을 타고 다녔다...라고 나와 있어...}
<이놈들 때문에 멸종된 짐승도 많을 걸...>
{크라이언들과 싸우다 죽은 사람이나 짐승은 반드시 불에 태워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죽은 것들
은 킹크라이요의 노예로 다시 태어나게 될 거래...}
<그건 다 알고 있었어... 그런데 문제는 우리가 그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가이지... 그래서 자료를
찾으려고 하는 거고...>
{크라이언의 갑옷과 투구는 대부분 보통 무기로는 부셔버릴 수가 없는데 전설로만 전해지는 불새
의 검 말고 지금 우리가 실제로 만들 수 있는 무기는 뭐 없을까?}
자료를 검색하는 조대영의 손이 더 빨라졌다.
<찾았다! 여명의 시대 연대기에 보면 화닌이라는 영웅이 있었는데 그의 스토리에 명검이 나온대...
좀 더 찾아보자>
{그거 혹시 프로메 공주가 살았던 그 시대 말하는 거 아냐? 여명의 시대말야}
<맞아 그 시대가 맞아>
-화닌-
까마귀가 울부짖는 어두운 길을 걷다보니 화닌은 등을 따라 으스스한 전율이 타고 오르는 것이
또렷하게 느껴졌다. ‘난 프라니아 최강의 무사이자 군인이야’
화닌 스스로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다시 상기시켰다.
‘나는 지금 용감해야 해’
그러나 공기는 살을 에는 듯 아주 차가웠고 일행들은 내색하진 않지만 두려움으로 가득 차 있었
다. 어느새 러프울프들이 주위를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긴장을 늦추지 말아야 할 대상이 하나 더
생겼다. 목덜미의 털이 죄다 꼿꼿하게 섰다. 검고 굶주려 있는 러프울프들이 산비탈에서 내려와
적절한 거리를 유지하며 화닌의 빈틈을 기다리고 있는 분명하다. 달빛이 유일한 위안이라면 위안
이다. 늘씬하게 쭉 자란 눈덮인 전나무들의 그림자가 반대편으로 뻗었다. 얼핏 보면 키 큰 도깨비
처럼 착각할 수도 있는 모양새였다. 눈이 녹다가 얼어붙은 전나무들은 거기에 달린 얼음의 무게
로 흉하게 뒤틀어지거나 부러지거나 휘어져 있었다. 달빛조차 없다면 영락없는 키 큰 몬스터의
마을로 둔갑할 것 같았다. 가문비나무는 뿌리에서 꼭대기까지 언 눈에 파묻혀, 흰 천을 둘러 쓴
전형적인 유령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프로메 공주가 끌려 간 곳이 이 부근에 있다.”
화닌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일행들에게 목적지에
다와가고 있음을 알렸다. 동시에 일행 중 한 명인 보안관이 칼집에서 불장검을 스르르 뽑아 들었
다.
“어느 쪽요?" 적막을 가르는 목소리.
젊은 수색 대원이 너무 긴장한 나머지 목소리 톤조절에 실패하고 말았다.
‘아뿔싸!’
“쉿!”
또다시 강산이 고요해졌다.
“분명히 가까이에 있어...딱 찍어서 정확히 알려줄 수는 없지만 이 근처 어딘가에 있어..."
까마귀가 다시 괴성을 질렀다. “동가...” 보통 사람보다 키가 한배 반이상 큰 동가도 그 소리에 겁
을 먹은 듯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겁을 먹으면 목을 움츠리고 양손을 겨드랑이에 쑤셔
넣는 습관이 있다. 얼음꽃이 그의 갈색 턱수염 터럭에 하얗게 붙어 있고, 그의 콧수염은 얼어버린
콧물 덩어리로 변해버려, 달빛에 영롱하게 빛났다.
“러프울프들도 아까부터 계속해서 우리 가까이 따라오고 있어” 화닌은 일행들에게 경고했다.
“그들은 우리를 줄곧 따라오고 있었어. 나는 그들이 바람을 등지고 있을 때마다 그들의 냄새를 맡
을 수 있어.”수색대원도 화닌과 마찬가지로 아까부터 러프울프를 상당히 경계하고 있었다.
“러프울프들은 사실 이곳 골치거리들 중에서 가장 서열이 낮은 것들이지...”이 구역의 보안관이 굳
게 다물었던 입을 마침내 열었다.
“보안관 말이 맞아! 어서 서둘러 올라가야 한다구! 여기는 크리퍼가 엄청나게 출몰하기로 널리 알
려진 그곳이야" 화닌이 핵심을 바로 짚었다.
5. 흰머리산
"추운 곳에 사는 프로즌 크리퍼들은 약간의 온기가 있어도 금방 알아채거든...그들이 먹잇감을 구
하러 몰려오기 전에 저 흰머리산 부근의 계곡에 숨겨진 동굴을 찾아서 들어가야 해"
"우리들의 온기가 그들을 끌어들이고 있어...”수색대원들이 서쪽하늘에 등대처럼 떠 있는 보름달을
바라보았다. 달빛으로 인해 횃불을 들이댄 것처럼 밝게 보이는 서쪽 산꼭대기의 우뚝 솟은 바위
들이 멀리서 보면 하늘에서 내려온 다섯 신들의 모습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산을 '오선산' 또는 '오봉산'으로 불렀다.
잠시 쉬고 가죠 이러다가 추위에 피로에 배고픔에 모두 뒤져 버리겠어요···
출발할 땐 거뭇하게 보였던 보안관의 콧수염이 얼음꽃 때문에 어느새 흰수염으로 변했다. 화닌의
제안에 모두 큰 바위 바로 앞에 모여 앉았다. 보안관은 능숙한 솜씨로 나무를 구해와서 모닥불을
피웠다. “나 좀 도와주시게들~”
몇십 분 전에 크리퍼들과 한판 게릴라전을 벌이던 도중 크리퍼들이 동시에 터지면서 튕겨 나간
단도에 목이 찔려 죽은 순록 한마리를 밧줄로 꽁꽁 묶어서 끌고 왔었다. 보안관은 바위 뒤쪽 눈
밭에 순록을 옮기고 감았던 밧줄을 풀고 심장부위에 손을 얹었다.
무릎을 꿇고 푸른 뿔 순록의 목을 딸 때 뭐라고 중얼거리며 신의 가호를 빌었다. 입대한지 얼마
되지 않은 대원은 순록의 선명한 색의 피가 흘러나올 때 어린애처럼 눈물을 흘렸다. 그는 좀전에
프리즌 크리퍼에게 닿을 뻔 했던 대원이었다. 아마도 보안관이 그 찰나에 비브라늄 단검을 던지
지 않았다면 그 젊은 대원은 먼저 세상을 떠났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마도 죽음의 문턱까지 갔
다온 듯한 두려움과 살았음이 교차하면서 뭔가 속에서 묵직한 감정이 치솟아 올라왔을 것이다.
하지만 순록의 입장에도 크리퍼가 터지면서 튕긴 단검에 맞아 뜻하지 않게 죽긴했지만 아주 굶주
린 프리즌크리퍼에게 당했다면 죽어서도 영면에 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크리퍼에게 심장을 뜯
겼으면 화염에 타지 않는 이상 좀비처럼 이 동토를 정처없이 떠돌아다녔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
러니 차라리 보안관의 기도를 받으며 이렇게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 나으리라.
보안관은 다리 한쪽을 잘라서 모닥불 위에 걸었다. 어느새 훈연까지 잘 먹은 고기가 구워졌다. 그
대원은 처음에는 건넨 고기조각을 빤히 쳐다보기만 하더니 다른 대원이 집어 가려하자 그제서야
정신없이 먹어 치웠다. 그리고 또 한 덩어리를 더 먹었다. 일행 모두는 순록 구이로 넉넉하게 배
를 채우고 난 후 다시 흰머리산과 신전산 사이에 있는 계곡으로 다시 출발했다.
화닌은 아까 소울 위빙으로 포섭한 알비노 러프울프를 짐썰매에 묶어 끌도록 했다. 덕분에 대원
들이 힘을 비축할 수 있었다. 일행들은 화닌의 특별한 능력을 눈치채지 못했기에 화닌을 조금 특
별한 동물교감사 정도로 생각했다.
화닌은 그런 능력으로 좀전에 순록 바비큐를 세 번 먹었다. 두 번은 사람으로 한 번은 러프울프
의 몸에 들어가서.
살아있을 땐 뿔에서 푸른 빛이 발하는 푸른 뿔 순록은 다른 순록보다 두배 가까이 크기 때문에
살이 포동하진 않았지만 닷새 동안이나 일행을 굶지 않게 해주었다.
“이제 동굴과 거리가100미터 밖에 남지 않았어!”
<그래도 모르니까 러프울프를 먼저 보내야겠다.>
화닌은 러프울프를 어루만지면서 정신감응을 시도했다. 동물의 뇌영역 중에 판단과 운동 명령을
관장하는 영역을 통제해서 의도한 대로 따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러프울프는 하얀 눈이 펼쳐져 있는 오르막길을 조금 빠른 걸음으로 올라갔다.
동굴 바로 아래에
서 멈췄다. 러프울프는 동굴에서 새어나오는 공기를 킁킁거리더니, 이빨을 드러내며 으르렁거렸다.
지켜보던 일행들의 털이 바짝 곤두섰다. 겁 많은 몇몇 대원들은 몇 보씩 뒤걸음쳤다. 체구가 큰
동가도 마찬가지로 겁을 먹고 제자리 걸음질을 하고 있었다.
“동가 잠시만 멈춰봐!” 화닌이 말했다.
“동가...동가...”
동가도 두려움에 안절부절못했다.
“잠시만 기다려봐! 눈 밟는 소리 때문에 저 동굴안에서 나오는 소리가 전혀 안들려~”
“뭔가가 있어...”
러프울프가 냄새를 맡고 또다시 으르렁대자 화닌은 입구 바로 안에 뭔가가 있음을 직감했다.
“동굴 입구 가까이에 뭔가가 있다~! 다들 조심해!”
“동가, 안돼! 물러나!”
보안관은 여전히 굳건하게 올라가고 있었고, 동가도 계속해서 집요하게 가길 원했다. “동가, 동가,
동가...” 그는 거세게 고집을 피워 수색대장인 화닌을 설득하려고 했다. 스스로 자립해가는 과정이
라 여기고 마지못해 허락한다. 언덕쪽 동굴로 올라가는 눈밭은 발이 푹푹 빠졌다. 한걸음 옮기는
게 여간 어려운게 아니었다. 동가의 호흡은 아주 가빠졌다.
동굴 안에서 뿌연 연무가 피어나왔다. 동굴 안과 밖의 온도차 때문이었다.
눈 속에 거의 허리까지 빠졌다. 동굴 입구 쪽으로 가까이 다가갈수록 더 가팔랐다. 동가는 팔을
뻗어 바위와 가문비 나뭇가지를 잡고 한걸음 한걸음 힘겹게 올라갔다. “동가~ 동가~”
한 걸음씩 한 걸음씩 조심조심 디딘 끝에 보안관과 동가는 동굴 입구에 도착했다.
보안관이 동굴 안으로 먼저 발을 들여 놓은 순간 동가가 무거운 몸 때문에 밟은 눈들이 조금씩
아래로 쓸려 내려가면서 경사면의 눈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동가도 중심을 잃고 미끄러졌다. 반사
적으로 큰 손을 뻗어 나무의 몸통줄기를 겨우 붙잡았다. 무너진 눈사태는 언덕의 경사면을 따라
무게와 속도가 더 가중되면서 내려가다가 아래에서 기다리고 있던 일행이 있는 곳으로 쏟아졌다.
“동가! 동가!”
동가가 여러 번 피하라고 외쳤다. 아래쪽 일행들은 그 순간을 지켜보고 있었기에 눈사태에 파묻
히는 것을 가까스로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부터가 문제였다. 설산 등반이나 이런 동굴
탐사 경험이 많다던 보안관이지만 혼자만 동굴 안으로 들어간 것은 아무래도 위험스러웠다. 나이
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몸관리를 잘한 것으로 보이는 보안관이지만 혹시라도 크리퍼나 자스트
같은 놈들이 여러 마리 있다면 혼자서 쳐내는 것은 힘들것이다. 제아무리 불장검이 있더라도 말
이다. 화닌은 걱정이 가득한 표정으로 동굴 입구 쪽을 응시했다.
알비노 러프울프는 계속 으르렁대고 있었다.
화닌은 아래쪽에서 동굴 입구가
잘 보이는 각도의 위치까지 뒤로 몇 발짝을 움직였다. 그러고는
미리 준비한듯 활을 꺼내 들었다.
갑자기 동가가 비명을 질렀다. 그는 겨우 다시 몸을 일으켜
올라가려던 참이었는데 그만 스텝이
꼬이는 바람에 경사면에서 자빠진 것이다.
화닌은 큰 골리앗족 소년이 격렬하게 굴러 내려오자 산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부딪치면 그대로
온몸에 골절이 발생할 것이 뻔했다. 급히 피하고자 두 걸음을 떼는데 뭔가에 걸려 몸이 앞으로
붕 떴다. 겨우 동가와의 대충돌은 피했다. 다만 몸이 떴다가 옆 나무에 몸통에 머리를 살짝 찧었
다. 이마에 긁힌 상처가 났지만 대형참사는 피했다. 동가는 넘어지고 구르면서 얼굴도 다치고 입
에서 피도 흘렀다. 허우적거리며 굴러다니다가 큰 바위에 부딪치고 나서야 겨우 멈춰섰다.
‘뭔가가 내 다리에 걸렸어...’ 화닌은 좀전에 굴러오는 동가를 피하면서 무엇에 걸려 앞으로 붕 떴
다가 고꾸라졌다. 발목에 걸린 것은 나무 뿌리일 거라 생각했다.
뭔가 싶어서 손으로 더듬어 보니 굵은 뿌리가 손에 닿았다. 그대로 잡아당겼다. 뿌리라고 생각했
는데 그건 팔이었다. 얼어붙었지만 살점은 별로 없고 뼈가 많이 드러나 있었다. 크라이언의 팔이
었다.
화닌은 팔을 보자마자 소리쳤다. “동가 동가! 나를 저 위로 던져 줘!”
“도~옹~~가아~~~!” 화닌의 말을 듣고 곧바로 일어난 동가는 굵은 팔뚝으로 힘껏 동굴 입구까지
던졌다. 정확하게 안쪽으로 떨어졌다.
“보안관! 보안관! 여기 얼음괴물이 있소! 빨리 나오시오 빨리요!”
안쪽은 어두워서 보안관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우우우우우우우~
저 안쪽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 귀에 제법 거슬리는 소리였다.
갑자기 어둠속에서 시커멓고 둥그런 것이 굴러 나왔다. 화닌의 발에 닿을 때까진 반신반의했다.
보안관의 머리였다.
우우우우우우우~
“모두 도망가~! 얼음괴물이 있다! 어서 도망가!”
화닌이 아래를 보며 소리치고 있는 사이 여러 마리의 크라이언들이 특유의 모양새로 뚜벅뚜벅 걸
어 나오고 있었다.
화닌은 뒤를 돌아다봤다. 크라이언들이 그를 보자 멈춰서서 입을 쩍 벌리며 턱과 고개를 좌우로
한 번씩 움직였다. 몸을 푸는 예비동작을 하고는 한 놈이 먼저 화닌에게 달려들었다. 화닌이 놀라
뒤로 물러서면서 발이 푹 빠지면서 아래 굴러 내려갔다.
“동가~~” 동가가 화닌을 부르며 굴러 내려오는 것을 막아냈다.
동굴 안에 있던 수많은 크라이언들은 다이빙 하듯이 아래로 뛰어내렸다.
“모두 도망가~ 저놈들에게 닿으면 그 부위가 꽁꽁 얼어버린다구!”
수색대와 동가는 그들이 왔던 길로 내달렸다.
몸집이 크고 무거워 좀 느린 동가는 잠깐 멈칫하더니 바위를 둘러보고는 번쩍 들었다. “동가~~~
동가!” 역시나 어깨 힘 하나는 천하제일인 듯 그가 던진 바위는 뒤에서 쫓아오는 크라이언들에게
그대로 떨어져 몇 놈들을 깔아뭉갰다.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지 신체 하반신만 깔린 놈들은 쫓아오겠다고 계속 버둥거렸다.
그런데 더 큰일이 벌어졌다. 밤새 눈 속에서 잠자듯 활동을 멈추고 있었던 크라이언들이 여기저
기에서 일어났다.
화닌은 더 빨리 눈밭을 달렸다. 눈이 너무 많이 쌓인 탓에 다리가 푹푹 빠지고 걸려서 좀처럼 거
리가 벌어지지 않았다. 크라이언의 숫자는 급속도로 늘어났다. 여기저기서 기지개를 켜듯 팔을 쌓
인 눈 위로 치켜올리며 깨어났다. 수색대 일행들은 너무나 많은 숫자에 질겁했다. 냉동고기처럼
비참하게 얼어 죽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화닌은 달리다가 잠깐 멈추고 바위 위로 올라섰다. 크라이언 중에 키가 크고 머리에 돌기가 있는
한 놈을 찍어서 소울 위빙을 시도했다.
하지만 이놈들은 영혼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서 그런지 전혀 스며들지 않았다.
“이런! 제기랄!”
소울 위빙이 한 번 실패하면 정신적인 충격과 후유증이 꽤 오래 간다.
“모두 흩어져서 전나무 숲으로 들어가! 모두 살아남아서 경비대 임시막사가 있는 곳으로 가라!”
전나무가 아주 빽빽하게 형성된 숲이어서 곰이나 늑대들이 쫓아올 때 따돌리기에 아주 유리한 곳
이었다.
‘좀더 멀리, 어서 조금 더 멀리 도망가라! 그러면 살 수 있어’
화닌은 얼떨결에 어둠의 숲까지 들어와 버렸다. 심해처럼 빛이 전혀 없는 곳이었다.
완전히 어두워지자 들고 있던 프라니움의 검에서 푸른 야광빛이 새어나왔다. 칼집에서 곧바로 꺼
내 들었다. 이 불빛 덕분에 바로 앞 1미터 거리 내에는 겨우겨우 보였다.
하지만 방향감각을 잃어버려 들어온 길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누군가에 의해 온통 주술이 씌
워진 공간 같았다.
다행히 더 이상 크라이언들은 따라오지 않았다.
“동가! 대원들! 어디에 있니? 동가~! 대원들~!
아무리 외쳐도 소리가 멀리 퍼져 나가질 않았다.
“동가~! 수색대~!”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었다. 화닌은 잠시 멈추더니 코를 킁킁거렸다.
‘어디서 무슨 냄새가 나는데 뭐지...어?
고기가 타는 냄새가 아냐?’
냄새가 흘러나오는 방향으로 조심스럽게 천천히 이동했다. 점점 숲속 안으로 들어가는 것 같아
두려왔다.
등은 이미 땀으로 흠뻑 젖었다.
프로메 공주를 찾으러 간 수색팀 일행은 예상하지 못한 크라이언들에게 쫓기다가 이곳 비틀린 삼
림으로 도망쳐 들어왔다. 이 곳은 소리가 나지 않는 숲이다. 들은 바에 의하면 글래셔와 가까운
삼림 중에 미혹의 숲(Lost Woods)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사람이 와서 소리를 질렀을 때 미혹의 나
무들이 그 소리를 흡수해서 외부로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고 한다. 이 부근에서 실종된 사람들
은 거의 다 이 안에 들어갔다가 나오지 못한 경우이다. 나가는 유일한 방법은 숲의 정령을 만나
는 것이었다.
이곳에 들어오면 시각보다는 청각과 후각이 더 예민해질 수밖에 없었다.
타는 냄새를 따라 계속 걸었다. 거리를 가늠할 수 없는 저멀리서 아주 작은 불빛이 잔상처럼 흔
들거렸다.
“불빛이다! 불빛이야!"
한편 동가는 냉혈족들과 몸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크라이언의 손이 닿아도 골리앗족들은 살갗이
아주 두껍고 딱딱해서 얼어붙지 않았다. 동가가 입은 방한복도 한몫했다. 방한복은 따끈 양모와
따끈 목화를 원료로 제작되어서 순간 내열성이 이주 뛰어나다. 크라이언의 눈알을 할퀴고 얼굴
살점을뜯고 대가리를 잡아 뽑았다.
“도옹가!”
동가는 가슴을 치며 포효를 질렀다. 그때 상체만 남은 크라이언이 오른쪽 무릎을 물어뜯었다. 무
릎 살점이 일부 떨어져 나갔다. 동가는 그놈의 대가리를 큰 두손으로
비틀어 뽑아서는 두손으로
눌러 찌그러뜨렸다. 그러도 분이 안풀렸는지 무릎을 뜯은 놈의 팔 두개를 하나씩 뽑아서는 다른
크라이언 두 놈의 주둥이를 벌려 하나씩 박아 넣었다.
6화. 미혹의 숲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잠시 평온을 되찾은 동가는 드디어 칼집에서 화닌에게 받은 프라니움 강철단
검을 꺼내 들었다..
동가에게는 단검이지만 보통사람에게는 장검이었다.
한바탕 싹 쓸어버렸지
만 주위에는 계속 캭캭거리며 크라이언들이 몰려들고 있었다. 동가는 강철검을 마구 휘둘렀다.
평소엔 마굿간 청소나 말과 당나귀를 돌보는 일을 주로 했었지만 이렇게 밖에서 맹활약을 하는
건 난생 처음이었다. 이제는 7피트가 훌쩍 넘는 진격의 거인으로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동가는 전
술을 바꿨다. 전략가의 면모까지 갖춰가는 진격의 거인!
크라이언 무리 중에 조금 뒤에서 그를 지켜보는 다른 놈을 주시했다. 중간보스로 보이는 놈! 그놈
을 노렸다. 잔챙이들을 손으로 다 뿌리치거나 쳐내버리고 그놈을 향해 고함을 치며 달렸다.
“도오오옹~가아~!”
그는 프라니움 검을 번쩍 들어올린 다음 사선 모양으로 중간보스를 내려쳤다. 아이스브레이커로
막아도 소용이 없었다. 그대로 몸이 반으로 댕강 잘려버렸다. 그러자 그와 함께 주변의 무리들이
한꺼번에 얼음가루로 잘게 부서져 버렸다. 눈에 다져진 바닥위로 얼음알갱이들이 쏟아졌다. 그들
의 브레이커도 갑옷도 프라니움 검에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골리앗족의 후손이 이순간 만큼은
영웅레벨로 등극하였다.
잠시나마 어깨에 힘을 주고 멀리 희머리산의 정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일 뿐...엄청
많은 무리들이 저 앞에서 몰려오고 있었다.
동가의 파워가 그리 많이 남지 않은 상황.개중에 엄
청 빠른 크라이언 한놈이 동가 뒤에 몰래 나타나 그의 목을 향해 얼음칼을 찌르려고
쓔우우우웅!
괴물의 대가리 옆에 화살 하나가 정확히 꽂혔다.
캭!
했다.
수색대원이 쏜 것이었다. 꽂히자마자 놈의 대가리가 똑 떨어졌다. 몸뚱아리도 힘을 잃고 따라 떨
어졌다. 동가는 그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포효를 질렀다. “도옹가! 도옹~가!”
도와준 수색대원에게 달려가 끌어 안더니 번쩍 들어 무등을 태우며 고마움을 표시하였다.
선임 대원 조제프와 함께 있던 다른 수색대원들도 함께 반가워했다. 동가에게 다가가서 두 팔을
번쩍 들고 만세를 불렀다. 동가는 다시 한 번 적을 이겼다는 기쁨의 표시로 가슴을 치며
“도옹
가아”를 외쳤다.고함을 질렀다.
한편, 동굴 쪽으로 돌아간 또다른 선임 수색대원 러팔로와 수색대원들은 언덕 아래에서 큰 가문
비나무를 등지고 서서 다가오는 크라이언들을 모두 쳐냈다. 프로메 공주를 찾우려면 반드시 동굴
을 지나가야 했다. 조제프와 일행은 동가와 함께 러팔로 일행이 있는 동굴쪽으로 이동했다. 동가
는 콧노래를 불렀다.
“동가~동가~“
깜깜한 숲 속에 불빛이 보이자 발걸음 재촉했다.
가는 동안 환영이 잠깐 아른거렸다. 멀리서 보이는 불빛이 마치 눈위에서 춤을 추는 붉은 깃발
같았다.
미혹의 숲에서는 아무때나 환영의 마법에 걸려든다. 숲 전체가 마법에 걸려 있기 때문이다.
환영이 아른거리고 환청이 들리는 건 흔한 일이었다.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보니 누군가 무엇을 불에 태우고 있었다. 근처에서 노랫소리가 들렸다.
그것은 어린 아이의 목소리로 들렸다가 아는 동생의 목소리로 들렸다가 자꾸 변했다.
그다음으로는 어른이 된 여자의 목소리였다. 가늘면서 조금 높은 음의 목소리를 냈다. 누구도 들
어본적이 없는 이상한 멜로디 같았고 화닌의 무의식 아래에 가라앉아 있던 슬픔까지 건드리는 듯
한 그런 노래를 부르고 있었다. 화닌은 그녀를 더 잘 보기위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녀는 여인이 아니라 소녀였다. 생각보다 체구가 작았다. 커다란 나뭇잎으로 만든 외투를 걸치고
몹을 태우고 있었다. 나무껍질처럼 얼룩덜룩한 그녀의 얼굴이 보였다.
그녀의 눈은 기묘했다. 조금 더 크고 홍채는 노란색에 동공은 녹색이었다. 고양이처럼 세로로 갈
라졌다. 어두운 숲에 적응하기 위한 진화의 결과였을 것이다.
그녀의 머리카락은 갈색, 주황색, 금색, 붉은색이 섞여 있었고 가느다란 가지와 잎사귀가 짜여 있
었다.
“누...누구요?” 화닌이 당황하며 물었다.
이 숲의 원래 주인들이었다.
“넌 뭐냐! 우리는 숲을 지키는 수호신 또는...원생이..."
“워...원숭이? 원숭이라고?”
“원숭이가 아니야! 원생이지...”
이들의 진짜 이름은 처음부터 스스로 노래를 부르는 존재들이었다.
“너희들의 고대의 언어가 만들어지기 훨씬 전부터 우리는 스스로 노래를 불러왔어...1만 8천년 동
안...”
화닌은 말했다, “당신들은 지금 우리말을 쓰고 있네요...”
“맞춰 주는 거야! 넌 이름이 뭐냐?"
“화닌이라고 합니다만..."
그 아이가 웃었다. “인간들은...어린애들이야...상종을 하면 안돼!”
“이름이 있니?” 화닌이 물었다.
“아직은 필요하지 않아... 사라지지 않았으니까...”
그녀들은 다 태우고 남은 것들은 대충 나무줄기 망태기에 쓸어 담았다.
“우리가 갈길은 따로 있어...너도 갈거냐?.”
화닌은 돌아온 길을 가리키며. “수색대원을 찾으러...”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녀들은 엄숙하게 말했다...“그들은 오지 못해...그놈들에게 곧 전부 당했을
거야...그놈들은 너무 많아...”
“뭐라고? 다 죽었을 거라고? 난 못 믿겠어! 동가와 수색대원들은 집으로 다시 돌아가야해! 나를
숲밖으로 나가게 해줘!”
원생이가 흙으로 뭔가를 만들면서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킨다.
“그것보다 먼저 해야할 게 있어... 저쪽에서 기다리셔”
“얘 말이 맞아 그가 너를 기다리고 있어”
“누군데...?"
“선지자”
그 말과 함께 그녀들은 만들던 것을 내려놓고 가리킨 방향으로 총총총 걸어갔다. 화닌은 그녀를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뭐하니?”원생이 중 한명이 뒤를 돌아보며 화닌에게 물었다.
“혹시 일행이 혹시 이곳에 찾아오면 표시를 해놓으려구요...”
화닌은 손수건을 찢어서 바닥에 일정 간격으로 놓아두었다.
나무덩굴이 작은 숲을 이룬 곳에 도착하였다. 큰 나무가 가운데 있었지만 덩굴이 그 주위를 높게
둘러싸고 있어서 곧바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이쪽으로 와”
원생이들이 일제히 화닌에게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곳은 덩굴로 된 터널 입구였다. 화닌이 들어가기엔 입구가 너무 낮았다.
화닌은 할 수 있는한 최대한 몸을 구부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머리 윗부분은 덩굴에 긁혔다. 너무나 좁아서 기어서 가더라도 이리저리 부딪
쳐서 찔리고 긁히기 일쑤였다. 이상한 벌레와 거미가 기어다니기도 했다. 아무리 용맹한 전사라지
만 화닌은 미혹의 숲에 들어와서 용기를 잃어버린 것 같았다. 터널을 기어가면서 겁에 잔뜩 질려
서 오줌을 지릴 뻔했다.
원생이 그녀들은 불빛을 내는 단검을 들고 앞으로 나아갔다. 그녀들 뒤로 큰나뭇잎으로 만든 망
토가 부스럭 거리는 소리를 내며 앞으로 가고 있었다. 그러나 통로는 너무나 좁고 여러갈래로 나
뉘어지고 많이 휘어져서 화닌은 뒤쳐져서 그녀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오직 덩굴 사이로 새어나
오는 단검의 빛만이 보일 뿐이었다.
“좀 천천히 가요!”
“늦으면 뱀이 쫓아온다 빨리 와!”
화닌은 엄청나게 큰 하얀 뱀들이 주위에 있는 흙에서 스르르 움직이며 들어오고 나가는 것을 보
았다. 그러자 그의 심장의 공포로 쿵쾅거렸다.
“얘들은 도대체 뭐야? 물리면 죽어?”
“그 애들은 고통을 심어주는 숲의 정령들이야”
“숲을 함부로 대했다면 그만큼 고통을 주지!”
화닌은 그말을 듣자마자 몸이 얼어붙었다.
“지금은 바쁘니까 그냥 내가 도와줄게”
그녀가 단검을 땅에 내리꽂자 뱀들은 어디론가 사라졌다.
“빨리와~ 다왔어!”
화닌은 좀전에 뱀들이 바로 머리와 이마가 긁혔던 바로 흰색 덩굴이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덩굴이었구나...암튼 여긴 온통 마법이 걸려있어...”
“너 혹시 이 숲에 오기전에 이상한 나무를 보지 않았니?
“숲에 오기 전에 동굴을 하나 발견했는데 그 앞에 잎이 아주 많이 달린 나무가 한그루 있었어...”
덩굴 터널의 직경이 커져서 한결 들어가기가 수월해졌다.
화닌은 서둘러 그녀들을 따라서 땅속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네가 본 것이 선지자의 나무야... 이 땅이 생길 무렵부터 계속 있었던 나무야”
그녀들은 다른 갈림길을 지났고 또 다른 갈림길을 지나갔다. 화닌의 숨이 턱밑까지 차올라 거의
쓰러질 지경이 됐을 때 마침내 아주 큰 공간이 나타났다.
그곳은 더 굵고 긴 뿌리가 위에서 내려와 있었고, 큰 기둥 같이 얽힌 덩굴나무 몸통이 있고 지나
온 길의 덩굴과는 달리 가시가 박힌 덩굴이 무섭게 휘감겨 있었다. 그녀들 중에 가장 어려 보이
는 아이가 화닌에게 큰 덩굴 줄기 기둥의 한가운데를 가리켰다.
화닌은 그녀가 가리키는 쪽만 보고 발을 내딛다가 뭔가 채이는 것을 느꼈다.
원생이들 중 한 명이 막대기에 손바닥을 문질러 만든 횃불을 화닌에게 건네주었다.
“뼈잖아?”
막대기는 팔 뼈였다. 화닌은 살짝 놀라며 주위를 둘러 보았다. 바닥은 새와 동물들의 뼈로 마구
어질러져 있었다. 다른 뼈들도 있었다. 거대한 용의 뼈 아니면 거인족의 뼈. 사람의 것으로 보이
는 뼈도 아주 많이 쌓여 있었다. 화닌은 해골을 살펴보았다. 각각 모양이 다르고 기괴한 형상이었
다.
“해골은 그만 보고 이제 저쪽을 봐! 저 안에 누가 있는 게 안보이냐? 저분이 바로 선지자야!”
나이가 몇 살 더 들어 보이는 원생이가 화닌에게 말을 걸었다.
화닌은 다시 덩굴 기둥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녀들이 말한 선지자가 보였다. 화닌이 입을 뗐다.
“당신은 누구십니까? 저를 도와주실 수 있나요?”
“자네를 기다리고 있었네...”
“저는 프로메 공주를 찾기 위해 왔습니다. 밖에서는 대원들이 위기에 처해 있구요~ 도와주십시요
~”
"그들은 다음에도 자네와 함께 할 걸세~"
"아까 숲의 원숭... 아니아니 숲의 원생이들은 힘들 거라고 했는데요..."
“너에게는 많은 것들이 짊어져 있구나!”
“그게 무슨 말입니까? 그들이 죽나요?”
"그들은 너의 짐을 덜어줄 조력자들이다"
“너는 프로메 공주를 구하기 위해 머지않아 다른 차원의 공간으로 가게 될 것이다”
“네? 다른 차원의 공간이라구요?”
달은 기울다가 차고... 칼날처럼 날카로운 초승달이었다가 방패처럼 둥근 보름달이었다가...하고 태
양은 어떤 때는 희미하고 창백하다가 어떤 때는 용암보다 더 붉게 뜨겁게 타오른다. 때론 맹렬하
게 떠올랐다가 때론 쿨하게 저편으로 넘어간다.
천가지의 나뭇잎들이 바람의 노래를 전한다. 어두운 구름이 하늘을 가득 채우더니 폭풍으로 바뀌
었다. 번개가 번쩍이고 천둥이 울려댔으며, 검은 손과 밝고 푸른 눈의 크리퍼들이 산비탈의 틈새
에서 어슬렁거렸지만, 들어올 수는 없었다.
언덕 아래에 선지자의 나무 아래 커다란 동굴 안.
화닌은 궁극적으로 킹크라이요를 대적할 수 있는 능력을 이곳에서 배양해야 한다.
노인에서 어린이로 변한 선지자는 그물같은 덩이줄기인 리좀의 틈에 앉아, 검은 보라매가 그의
팔에서 돌아다니는 동안 엑스데우스로 차원체인징이 있었다. “너는 이곳에서는 예전의 명성을 되
찾을 수 없어” 화닌의 꿈에 나타났던 다리가 세 개인 삼족오가 나타나 구관조처럼 같은 말을 읊
조렸다. “하지만, 너는 엑스데우스에서는 영웅이 될 수 있어” 이번엔 삼족오가 허밍으로 노래를 불
렀다.
‘숲의 수호자’ 또는 ‘원생이’로 불리는 그녀들은 인간은 말할 수 없는 그들만의 언어로 ‘땅과 숲을
달래고 돌보는 노래 요정’이 그들이 스스로를 부르는 이름이었다.
그들의 눈에는 비범함이 담겨
있었다. 그들은 선지자의 지시에 따라 삼족오를 날려 보내는 역할도 가끔이지만 해왔다. 선지자가
지목한 수신자를 각성시키기 위해 명령을 내리면 숲의 수호자들은 삼족오에게 그녀들의 언어로
만든 메세지를 수신자에게 전달할 것이다.
화닌이 바로 그런 수신자 중의 한 명이었다.
어느덧 달은 살이 가득 올라 있었다. 별들은 까만 하늘을 가로질러 지구의 세차운동에 맞춰 빙글
빙글 돌았다. 비가 내리고 얼어붙어, 나뭇가지들이 얼음의 무게에 꺾였다. 화닌은 숲의 수호자들
의 이름을 지어냈다. 뿌리캐처, 나뭇잎표창, 열매총알, 가지런한칼, 폭탄제조자, 벼락막대기, 흙폭풍.
그들의 진짜 이름은 인간의 언어로는 너무 길다고 뿌리캐처가 말했다. 오직 그녀만의 언어로 말
할 수 있었기에 인간이 지어준 새로운 이름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화닌은 알 수 없었다.
글래셔의 냉기가 뼛속까지 얼려 버릴 것 같은 추위가 지나간 뒤, 동굴은 다행스럽게도 따뜻해졌
고, 바위 밖으로 냉기가 흘러나올 때면 숲의 수호자들은 불을 밝혀 냉기를 다시 몰아냈다.
“혹시 다른 인간들도 여기에 온 적이 있냐?”
7화. 숲의 수호신
나뭇잎표창에게 물었다.
“어떤 자들은 아직도 각성을 못하고 있어..."
“예전처럼 많이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메세지를 금방 잊어버리는 습성이 있는 것 같아~" 폭탄제
조자가 진흙을 개면서 말을 이어 받고 있다.
“인간들도 선지자 나무들처럼 오래 기억을 할 수 있으면 좋지 않을까?”
“글쎄 그럼 고통스러운 기억은 어떻게 하냐?" 화닌이 고개를 가로젓는다.
“그게 뭐냐 우리는 고통이 뭔지 몰라...”
열매총알의 목소리는 너무나 감미롭고 부드러웠다.
“기억이 없다면 메세지는 어떻게 보관했다가 보내냐?"
“우리는 짧은 기억과 긴 기억만 있고 좋은 기억 나쁜 기억은 없어...
우리가 노래하는 하는 이유는 기억의 시간을 조절해 주기 때문이야 세상만물은 예외없이 기억 능
력이 있거든..."
“암 그렇지 기억이 인간만의 능력이거나 더 나은 능력이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지!"
“설사 나쁜 기억이 있더라도 우리의 노래가 들리면 시도때도 없이 부르는 노래소리를 들으면 기
억이 사라지거나 바뀌게 돼"
“와~ 대단한 능력이긴한대... 기억이 바뀌면 당사자는 혼란스럽지 않을까?
자기 과거가 통째로 뒤바뀐다면 현재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되는 거야 아우~~~ 너무 어렵고 복
잡해"
“그러니까 그럴 땐 우리 숲으로 와! 항상 좋은 기억만 갖게 될거야!"
“아니면... 마음에 드는 선지자의 나무를 하나 선택해서 줄기에 가만히 손을 대고 눈을 감아봐~
어떤 사건이 발생한 과거로 돌아가서 그 고통의 원인이 생기지 않도록 재조정할 수도 있어!” 뿌
리캐처가 또 다른 방법을 알려 주었다.
“그런데...선지자는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살고 있는 거냐?”
“그는 살 수 있는 시간을 넘어 살수도 있고, 떠나고 싶을 땐 그가 지정한 후계자에게 능력을 전해
주고 언제든지 떠나기도 해~”
“엥? 그걸 자기 마음대로 한다고? 그럼 자기 마음 내킬 때 돌아오기도 하냐?"
“아직 그런 건 본 적이 없는데..."
“처음이다 네가 말끝을 흐리는 거 말야!" 화닌은 살짝 웃음을 지어보였다.
“선지자는 결코 만만한 자리가 아니란 것만 알아두렴"
“그...그래...알아둘게..."
“지금 저 어르신이 집중해서 하는 일이 뭔지는 알아... 우리를 위해, 인간들의 대지를 위해, 너를
위해”
“그게 무슨 말이냐? 우리를 위해 인간들을 위해 그리고 나를 위해... 라고?"
“이제 그의 기운이 아주 조금밖에 안 남아있어... 천개의 소울로 봐야할 것들이 너무 많은데... 기
력은 점점 없어지고 있으니..."
벼락막대기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언젠가는 너도 알게 될거야”
“내가 뭘 알게 되는거야?” 화닌이 밝게 빛나는 횃불을 들고 동굴 안에 있는 작은 방으로 자리를
옮겼다. 가지런한칼이 방에 잘 수 있도록 침대를 마련해주었다.
“근데 아까 말한 선지자 나무가 무엇을 기억하니?”
“그거야 공간에서 일어난 모든 일이지”
“전부다 기억한다는 거네..."
“땅과 물, 흙과 돌, 참나무와 느릅나부와 버드나무, 그들은 우리 모두가 있기 전부터 이곳에 있어
왔고, 우리가 죽은 뒤에도 남아 있을 거야 나무는 전부다 기억해! 공간에 퍼지는 향기까지도...”
“난 프로메 공주가 어디로 갔는지 그걸 알고 싶어... 어디로 갔는지 흔적을 알아낼 수 있겠네..."
“어쩌면 너도 선지자가 될 수 있을거야” 가지런한칼이 말했다.
“글쎄... 난 전사가 되고 싶은데! 대대로 우리 집안은 글래셔 안쪽 영역을 지키는 것을 명예로 여
기는 가문이었거든!"
“화닌! 보통 인간의 생명은 유한해... 유한한 혼이 유한한 몸 속에 깃들어 있는 동안 자연의 원천
을 마시고, 나뭇잎들의 속삭임을 듣고서 신들처럼 나무들이 보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을 물려
받아야만해 이 또한 아무나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야...극소수에게만 주어진 신의 선물이야!"
“내가 선지자가 되어야만 프로메 공주를 찾을 수 있구나! 이제 알겠어!"
화닌이 악몽을 꾸고 벌떡 일어났다.
“그놈이 나를 노려봤어... 킹 그놈이..."
선지자 앞으로 갔다.
“꿈을 꾸었구나~"
“네, 무슨 징조일까요?"
“아주 중요한 시간이야~"
“무슨 말씀이신지..."
“프로메 공주를 찾는 것이 물론 중요하긴 하지만 세상 안과 세상 밖의 변화를 주시해야 해!”
“더 모르겠어요..."
“네가 꿈에서 본 킹은 인간세상을 장악하기위해 글래셔를 무너뜨리려고 하지만 지금 차원의 리멘
에서는 차원이 다른 공간과 우리가 있는 공간 사이의 장벽이 이미 무너졌어...절대 도감을 기억해
라~절대 도감을~"
말이 끝나자 선지자 주위에 안개가 생기더니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디로 가신거지?"
“차원의 리멘으로 가신거야" 뿌리캐처가 알려주었다.
“왜 가신 걸까?"
“그건 나도 몰라”
벼락막대기가 다가왔다. "내가 활과 화살을 만들어 줄 테니까 필요할 때 써!"
“얘가 우리 말고 외부인에게 무엇을 만들어 준다고 말한 건 처음이야~"
“사실 선지자 어르신이 그러라고 하셨어..."
“상황이 아주 급박해진 것 같아" 나뭇잎표창이 끼어들었다.
“무기를 더 많이 만들어 놔야겠어!"
매일매일 전날보다 날이 짧아졌다.
밤은 점점 길어졌다.
크라이언 떼들이 글래셔로 더 가까이 내려오고 있다는 증거였다.
언덕 아래 동굴 안에는 햇빛도 달빛도 닿지 않았다.
동굴 밖의 흐름을 알려면 날아다니는 잠시
동안 새에게 빙의를 해야 한다.
동굴 밖의 시간은 계속 변하고 있었다.
낮은 밤이 되고 밤은 낮이 되고 낮은 밤이 되고 밤은 낮이 되고...
“이제 배울 시간이 되었어”
뿌리캐처가 소울트리에 손을 대면 특정 장소의 특정 시간대를 되감아 볼 수 있다고 알려주었다.
“무엇을 배우는데?”
“이제 다음 단계로 넘어갈 때야. 네가 소울 위빙을 자유자재로 할 수 있을 정도의 수준에 도달해
야 비로소 선지가가 될 수 있어... 만약 네가 선지가 된다면 그 냉혈족들의 지도자인 킹크라이요
와 대적해도 전혀 두렵지 않게 될거야!"
“그런데 그 우두머리의 레벨이 어느 정도냐에 따라 결과는 달라지겠지...” 흙폭풍이 중요한 것을
짚어 주었다.
“물론이야 선지자에도 레벨이 있어... 이곳 어르신은 흰색의 선지자야... 자 이제 선지가 된다는 것
이 어떤 의미인지 알려줄게"
뿌리캐처는 열매총알과 함께 바깥에 태양이 떠올랐는지 확인하러 나갔다.
“일단 따라와"
태양이 밝게 비치고 있었다.
“이것을 먹어야 해” 열매총알이 말했다. 그녀가 화닌에게 나무로 된 숟가락을 쥐어주었다. 소년은
머뭇거리며 그릇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냐?”
“소울트리의 씨앗을 갈아서 만든 가루야” 그것을 본 화닌은 살짝 찡그린다.
아주 새빨간색이어서 살짝 긴장이 되었다.
“이걸 먹으면 선지자가 되는 거니?"
“아니 선지자가 되려면 모든 것을 바꿔야 해... 몸과 마음 전부를 말야"
“그럼 이건?”
“이건 소울트리와 네가 서로 소통할 수 있게 해 줄거야!"
화닌은 한꺼번에 입안에 털어넣었다. 도토리 가루처럼 약간 쓰고 떫은 맛이 났지만 그런대로 먹
을만 했다.
“더 먹어야 해"
화닌은 인상을 찌푸리며 또 털어넣었다. 이번엔 시나몬 맛이 살짝 났다. 중간 맛과 끝 맛은 알지
못하는 맛이 났다. 뒷맛이 약간 역겨웠다.
“또 먹어야 해 이제 마지막이야"
화닌은 인상이 완전히 구겨졌다. 이번엔 라즈베리와 블루베리 분말을 섞어 놓은 듯 아주 달콤하
고 향기로웠다.
“아니 근데 같은 씨앗 가루 아냐? 근데 왜 맛과 향이 다 달라?"
“나무의 감정이 각각 다를 때 수확한 씨앗이어서 그래..."
“와~ 희한한 나무네... 난생처음이야 이런 나무는~ 진짜! "
뿌리캐처가 화닌의 손을 살짝 잡았다.
“어? 왜애?"
“나무에 손을 대봐!"
“대면 어떻게 되는데?"
“아까 말한 거 기억나니? 소울 트리에 손을 대면 네가 찾고 싶은 특정 장소와 특정 시간대를 되
감아 볼 수 있어~"
“아하! 그럼 내가 아는 곳만 가능하겠네?"
“당연하지!"
“어? 벌써 어두어졌어... 밖으로 나온지 얼마 안됐잖아?”
“보이는 건 어젯밤이야! 저기 저쪽을 봐~ 몹들이 어슬렁거리고 있는 거 보이지? 쟤들은 어두워지
면 밖으로 돌아다녀!"
화닌이 흠칫 놀라서 손을 뗐다.
“자~겁내지 말고 천천히~ 다시 눈을 감아봐 소울트리가 기억 되감는 걸 도와줄 거야!
“아~ 살짝 떨리네”
뿌리캐처가 부드럽게 말을 건넨다. “이번엔 좀 더 멀리 가보자! 소울트리를 만지는 순간 세상의
모든 나무와 연결돼~ 네가 가고 싶은 곳에서 멈추면 돼! 나무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거든”
“이건 도대체 무슨 마법인거야? 이런 걸 오락거리로 만들면 좋겠구나야~"
“잡생각 그만하고! 손을 대면 나무줄기에서 뿌리가 보일거야 말타고 풍경을 바라보듯이 그렇게
보이는 것을 그냥 계속 따라가면 돼!” 열매총알이 아주 자세하게 설명을 덧붙인다.
화닌의 손을 대자마자 나무 줄기 뿌리 노선을 따라가는 마법의 관람열차가 출발했다.
“뿌리속으로 들어가는거야. 땅 위로 그들을 따라가서 언덕 위의 나무로 가. 그리고 내게 뭐가 보
이는지 말해줘” “ 화닌의 소울이 나무를 따라갔다. 속으로’ 그가 생각했다.
‘나무가 되는거야’
잠시동안 검은 흙도 보고 두더지가 파놓은 작은 구멍도 보고 계속 가다보니 작은 개울을 지나서
물이 제법 모인 강가를 달리고 있었다.
‘이미 과거로 넘어갔어'
어느새 화닌의 소울은 어릴적에 살았던 집으로 가 있었다. 아빠가 마당에서 5살배기화닌과 검투
사 놀이를 하고 있다.
“화닌아 이제 손목 힘이 좀 세졌구나 이제 목검을 제법 잘 다루는구나! 허허!
넌 커서 어떤 사람
이 되고 싶니?"
‘어? 다시 과거로 돌아가는데?'
“이제 뭐가 보이니? 거기 누가 있냐?” 뿌리캐처가 화닌의 소울이 보는 것을 소울트리를 통해 함
께 보고 있다.
“개울에 내가 빠졌어!" 그때 기억의 잔상이 흔들거렸다.
“어? 이상한데? 왜 여기서 잔상에 노이즈가 끼는데? 이런 건 처음이야!"
화닌은 겁을 먹고 손을 뗐다.
“옆에서 우리도 도와주기 위해 네가 머문 곳의 잔상을 함께 보고 있었는데 마지막에 본 건 이상
하게 노이즈가 끼어서 제대로 볼 수가 없었어...혹시 뭘 봤니?”
“우리가 놓친 게 있으면 말 좀 해줘" 열매총알이 호기심어린 표정을 하며 묻는다.
숲의 수호신이자 원생이로 불리는 이들은 최근 몇 백년동안 이런 적이 없었다.
뿌리캐처와 열매총알은 이와 관련해서 서로 얘기를 나눴다.
“언니, 이런 경우는 처음 봐요..."
“300년 넘도록 이런 건 본 적이 없어! 우리 기억이 완벽하진 않겠지만... 그래도
이건 처음이야!"
“저... 목이 너무 말라요...물 좀 주세요~"
다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화닌은 갈증을 충분히 해소하고 한숨을 돌렸다.
“근데...아빠가 아직 살아 계셨어!”
“아니야 아니야” 뿌리캐처가 말했다.
“그는 이미 돌아가셨어...”
“그래 과거의 잔상일 뿐이야!
“너는 네가 보고싶어하는 것을 본거야. 네 마음이 어릴적 네 아버지와 네 집을 갈망했고, 그래서
그걸 네가 보게 된거지”
“그래 처음엔 그렇게 되기 십상이야~ 거의 다 그래~”
“선지자가 되려면 보고 싶은 것을 보는 걸 넘어서서 보이는 모든 것을 따라 갈 수 있어야 해 그
리고 그건 빛의 속도만큼이나 빨라야 해!”
“비 빛 빛의 속도라고?"
-윤도훈-
<여기에서 이야기가 끝나네... 아 다음이야기가 너무 궁금하다...>
나는 날이 새는지도 모르고 읽었다.
남준이와 찾아낸 여명의 시대 자료 중에서 발견한 화닌과 프로메 공주에 관한 다음 스토리가 너
무 궁금했다. 그런데 그중에서 화닌이 숲의 수호자들과 선지자의 나무가 나오는 부분을 읽다가
문득 시공간에 대해 왠지 모를 혼란스러움을 느꼈다.
'세리를 불러보자!'
<세리! 내가 모르는 다른 시공간이란 것이 존재하냐?>
메세지창에 VR 인공지능(A.I.) 세리의 답변이 즉시 올라왔다.
[당신이 쭉 살아온 여기에도 다양한 시공간이 있습니다.]
<엉? 여기에 다른 시공간이 있었다고?>
[공간의 변화에 따라 시간은 항상 상대적으로 미세하게 달라집니다]
<그건 이론에서만 가능한 거 아냐?>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의 몸도 하나의 공간이지요 따라서 사람이 있는 위치와 이동하는 속도에
따라서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데 미세한 차이가 발생합니다]
<표준 시계를 들고 직접 실험한다 해도 확연하게 시계마다 달라지는 건 아닐 텐데...>
[맞습니다. 지구에선 그렇죠...]
<그러면 증명할 수 없는 거나 마찬가지잖아!>
[예를 들어 볼게요~
실시간 전략 게임을 할 수 있는 VR세계에서는 현실보다 빠르게 시간이 흐릅니다. VR의 1초는 현
실 세계의 1분입니다.
그리고 다른 예를 들자면 윤도훈과 친구 김남준이 살고 있는 현실에서는 시계가 시간의 기준이고
인지하는 수단입니다.
고서 자료에서 찾은 화닌과 프로메 공주가 살고 있던 여명의 시대에서는 자연이 변해가는 흐름대
로 시간을 인지합니다]
<조금은 이해가 가는데... 너에게 질문을 던진 최초 의도로 다시 돌아가서...차원이 다른 시공간과
요즘 여기저기에 출몰하는 괴물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상관이 있습니다. 당장 보이지는 않지만 여기와 다른 차원의 시공간이 도훈님이 살고 있는 세계
에 많이 중첩되어 있습니다. 차원이 다른 시공간은 여기와 또 다른 리듬으로 시간이 흘러갑니다]
<다른 리듬이라고?>
[어떤 시공간에서는 도훈님의 기준에서 보면 시간이 반대로 흘러갈 수도 있다는 것이죠]
<엥? 정말? 그런 일이 실제로 있을까?>
[도훈님의 방금 그 의문은 여기에서만 적용되는 것입니다. 시공간은 광대합니다. 한가지로 통합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아~ 머리 아프다 괜히 물어봤어~>
[차원이 다른 시공간에 대한 고대 자료가 있었는데 누군가에 의해 원본과 복사본 파일이 전부 삭
제되었습니다. 자료는 사라지고 접속했던 로그 기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괴물 도감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괴물 도감이라고?>
8화. 프로메 아스테리온
-프로메 아스테리온-
나는 고대 유적지 폐허를 둘러보다가 우연히 땅이 꺼지면서 지하에 묻힌 연구소를 발견했다.
때마침 운이 좋게도 내가 찾던 괴물 도감에 대한 기록을 발견했다.
<괴물들의 약점과 특성을 알기 위해서는 관련 자료를 뒤지거나 퀘스트 중 알아내거나 해당 괴물
을 직접 잡아야 한다.
이후에 특성을 도감에 입력하면 괴물과 교전시에 도감의 조력을 받을 수 있다.>
다른 고대 문서가 있는지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냉혈족이 만에 하나 깨어나 프라니아로 남하를 시작한다면 그들과 대적할 군사력과 병력이 너무
나 초라한 상황이었다.
물, 불, 흙, 나무, 공기를 다루는 5명의 조력신들이 어느 날 내 꿈에 나타났다.
머지않아 대전쟁이 일어날 것이니 그전에 고대 왕국의 숨겨진 도감을 시급히 찾으라는 메세지를
전하고 사라졌다.
고대 왕국과 관련된 유적지는 모두 다 뒤졌으나 흔적이나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점점 시간만 흘
러갔다.
고대 왕국을 이룩한 종족이 먼 우주에서 왔거나 아니면 차원이 다른 곳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
할 수 있는 특이한 고대 문자와 문양들만 곳곳에 발견되었을 뿐이었다.
나는 점술가를 찾아가서 꿈에 대해 풀이를 해달라고 했다.
점술가는 조력신의 계시가 조국 프라니아의 멸망과 관련된 계시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고대의 은총을 받는다면 내가 멸망을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내 역할이 그만큼 중요해졌다는 압박감에 갈수록 신경은 날카로워졌고 편하게 잠을 잘 수가 없었
다.
크라이언들은 평범한 무기로는 절대로 죽일 수 없는 종족이다.
괴물은 괴물로 제압해야 하는 법. 그래서 고대 왕국이 남긴 괴물 도감이 꼭 필요한 것이다.
내가 짊어진 운명이라는 것은 대전쟁이 발발하기 전까지 고대 왕국 유적지에서 찾은 모든 흔적과
기록을 분석해서 도감이 어디에 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어...’
예년보다 추위가 더 빨리 다가오고 있었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이 조금씩 내 영혼을 잠식해 들어가는 것 같았다. 두려움과 강박으로 인해 무
리한 줄 알면서도 쉼없이 탐사일정을 감행했다. 우려했던 탈이 났다. 근접거리에서 보좌하던 경호
장교 한 명이 어느날 누적된 과로로 인해 쓰러진 것이다. 경호 공백이 발생하면 안되기에 임관한
지 얼마되지 않은 새내기 장교가 급히 새로 부임했다. 군사 학교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한 새내
기 장교는 우려와는 달리 경호를 빈틈없이 수행했다.
조금씩 탐사 일정을 조절하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유물을 탐사하던 중에 고대 왕국에서 빛나
는 전설의 보검으로 여겨졌던 구지검을 마침내 발견했다.
이번에도 우연히 지하 묘지에 내려갔다가 이상한 슬레이트를 발견해서 건드렸는데 전에 알지 못
했던 문이 열렸다. 그 안에 관이 있었고 열어보니 뼈와 구지검이 있었다.
전설에 의하면 구지검은 스스로 적합한 소유자를 선택하는데 검과의 감응도가 높으면 형태가 변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내가 검을 잡으려고 손을 대는 순간 검의 거부로 인해 충격파가 발생해 더이상 만질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이 포기하고 곁에 있던 경호 장교에게 잡아 보라고 했다. 당연히 튕길 것이라고 예상
했는데 반전이 일어났다. 장교가 검을 잡았는데 그 순간 구지검의 아홉개 검날이 길어졌다가 다
시 원상태로 돌아갔다. 생각지도 못한 경호 장교가 검의 선택을 받는 순간이었다.
프라니아 대륙에서도 명망있는 왕가인 아스테리온 가문의 딸로 태어났음에도 검의 선택을 받지
못한 자괴감이 드는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그 탓에 한동안 우울증에 사로잡혀 사람을 만나기가
꺼려졌다. 그 모습을 본 경호 장교는 내가 측은했는지 어느 날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공주 마마, 저는 경호국의 화닌이라고 합니다. 지난 번 구지검 일 때문에 상심이 크신 줄 압니다
만 검이나 창과 같은 다루기 위험한 무기들은 무사에게 맡겨 주십시요...머지않아 공주 마마께서
는 저희 무사들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위대한 고대 왕국의 은총을 받으실 것이옵니다."
“화닌이라고 했나요?...그렇게 멀쩡히 다른 말을 할 수 있으면서... 왜 항상 네! 네! 네!,
습니다! 이런 말만 했던 겁니까?"
마마! 알겠
나는 화닌에게 그동안 쌓여 있던 불만들을 토로했다.
그리고 이후 며칠동안 계속된 탐사에도 불구하고 성과가 없어 너무 우울해서 화닌에게 몇 번이나
혼자 있게 해달라고 부탁했다.
화닌은 내가 혹시나 나쁜 마음을 먹을까봐 노심초사하는 것 같았다. 항상 조금 떨어진 자리에 있
더라도 생체신호 탐지기까지 이용하면서 나를 살폈다.
그러던 어느 날 위험에 빠질 뻔한 일이 발생했다.
유물 탐사 중 식수가 부족해져 화닌이 계곡에 물을 구하러 간 사이에 혼자 있던 나에게 갑자기
크리퍼가 나타나 덮치려 했다. 다행스럽게도 재빨리 물을 구하고 돌아온 화닌이 화살로 그 크리
퍼를 일거에 제거해 버렸다.
나는 목숨을 구해준 화닌에게 거듭 고마워하며 이전에 감정을 참지 못하고 심한 말을 내뱉은 것
에 대해 사과했다.
탐사가 지지부진해지자 아바마마는 더이상 꿈에서 본 계시때문에 그런 부질없는 짓을 계속하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면서 탐사에서 손을 떼라고 명령하였다. 나는 분하고 창피했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서른여섯 번째 탐사를 끝으로 두번 다시는 고대 유적지와 괴물 도감에 대한 연구를 하지
않겠다고 공언하고 마지막 일정을 준비했다.
그러나 얼마 후 나에게 아주 슬픈 일이 일어났다. 어머니가 오랫동안 지병을 앓다가 마지막 탐사
를 며칠 앞두고 갑자기 숨을 거두셨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에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나에게 마
지막 말을 남기셨다.
“프로메...우리 프로메! 괜찮아! 잘하고 있어~ 너는 꼭 고대의 은총을 받을
거야...엄마가 하늘에서 작은별이 되어 너를 항상 지켜줄게...절대 슬퍼하지마...”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마지막 탐사에서 기필코 도감을 찾고야 말겠다는 다짐을 깊게 아로새겼다.
어머니의 묘소를 다녀온 다음날 새벽녁에 잠에서 깼는데 문득 뜨거운 불덩어리 같은 기운이 몸속
에서 꿈틀거리는 것을 느꼈다. 병이 난 것은 아닌데 이상하다 싶어 바깥 찬기운을 쐬었더니 열기
운이 사라졌다.
또다시 몸에 이상이 생기는 건 아닌가 걱정되어 잠시 탐사를 미루고 체력 단련과 정신 수양을 위
해 가까운 수련장에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던 어느날
내가 경호 장교와 동행하여 수련장에 가던 도중에 현기증을 일으키며 갑자기 기
절한 적이 있었다.
“마마 괜찮으십니까!... 마마! 괜찮으십니까!"
그때 나는 꿈을 이상한 꾸었다.
어두컴컴한 곳에서 빛으로 둘러싸인 여자를 보고 있었다.
직감
적으로 왠지 그 여자는 사람이 아닌 것 같았다. 사람인지 엘프인지는 알 수 없지만 퍼지는 빛으
로 둘러싸인 형상이 너무나 아름다웠다. 가만히 얼굴을 보고 있으니 뭐라고 말을 하느라 입술을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꿈 장면이 생생히 기억났다. 나에게 꿈을 해석할 수 있는 성스러운 능력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 꿈은 예지몽이었을까...아니면 한낱 의미없는 기억의 짜깁기였을까?
그 꿈을 꾼 그날 마침내 고대의 유적지에서 돌이나 철이 아닌 특이한 재질의 판을 찾았다. "마마,
전에 찾았던 슬레이트와 문양이 비슷합니다 그런데 푸른빛이 살짝 감도는데 보이십니까?" 진짜
그랬다. 전에 본 슬레이트와는 달리 살짝 푸른빛이 감돌았다.
손바닥보다 3배가량 큰 이 슬레이트에는 여러 괴물을 단순하게 그린 형상과 고대 왕족 특유의 문
양과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문양을 보고 나도 놀랐고 장교도 놀랐다.
“고대 왕국이 만들었다는 괴물 도감과 관련된 자료가 있는 것 같아요!"
"마마, 이 슬레이트의 문자와 문양을 모두 해석해 보면 도감이 있는 곳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요?"
"이제 들고 가서 곧바로 해독 작업을 해봅시다"
연구소에 들고 가서 슬레이트를 구지검 가까운 곳 탁자에 올려 놓았더니 갑자기 검과 슬레이트
양쪽에서 푸른 빛이 발하기 시작했다.
"오~ 이거였구나! 구지검이 슬레이트를 여는 열쇠였어..."
슬레이트에 구지검을 갖다대자 구지검이 아주 작아졌다. 깜짝 놀랐다.
슬레이트가 갑자기 밝게 커졌고 허공에 영사기처럼 확대한 지도를 비쳤다. 아직 모르는 고대어로
된 글귀가 있어 당장 해독할 수가 없었다. 지도에 있는 특정한 장소를 언급하는 것 같았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고대 던전의 위치가 아닐까?"
"저도 그렇게 생각되옵니다"
전설에 의하면 고대 왕족은 지하 던전을 만들어서 다른 보주와 함께 도감을 숨겨 두었다고 했다.
아무나 함부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갖가지 장치를 숨겨 두었다고 알려져 있었다.
며칠 후 좀 더 많은 수행원을 데리고 던전을 찾으러 가기로 했는데 갑자기 정체불명의 기습단이
내 처소를 기습 공격했다. 경호 장교와 대원들이 저항을 했지만 강력한 무기체계를 가진 그들에
게 속수무책으로 당하고 말았다. 화닌도 부상을 입고 쓰러졌다.
도감을 찾아야 조력을 받아 그들과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데 그때는 전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불가항력이었다. 나는 지금 장소를 알 수 없는 어느 성의 첨탑 꼭대기 다락에
갇혀 있다.
괴물 관리국.
윤도훈은 지하 20층 반납소에서 금배지를 반납하고 어깨가 처진 채로 1층으로 다시 올라왔다.
기다리고 있던 부의장이 규칙위반 관련해서 따로 조사할 것이 있다고 했다.
“감찰부에서 이미 웬만한 건 조사를 했을 테고...근데 자네 말야... 개인 출입국 관리 기록을 보니
까 얼마 전까지 곳곳에 여행을 참 많이 다녔더구만... 중국, 일본, 베트남, 라오스, 미얀마, 캄보디
아, 인도, 스리랑카, 몽골, 이란, 투르크메니스탄 등등... 그것도 아주 짧은 기간에 어떻게 이 많은
나라들을... 암튼 이곳에 왜 갔는가 ”
“여행 안내서를 출판하려고 그랬습니다” 윤도훈은 혹시 그가 눈치챌까 봐 조마조마했다.
“여행 안내서라... 아니 그럼 자네가 하는 일은 어쩌고? 하긴 정직 상태라 그걸 염려할 처지는 아
니겠구만...근데 말야...갑자기 여행 안내서를 쓰려는지가 궁금하구만..."
“그...그건 제가 이렇게 말썽을 일으키고 징계를 밥먹듯 하다가 언젠가는 짤리지도 모르기 때문
에..."
“자네 왜 그렇게 말을 더듬는가? 근데 말이야 자네 실력을 여기 괴물 관리국의 헌터들은 다 아는
데 굳이 단순히 여행 안내서 때문이라고 하니까 좀 의심스럽구만..."
“의심이라니요? 그럴리가요... 암튼 저는 앞으로 더 많은 나라들을 여행할 생각입니다..."
“일단 알겠네... 이만 돌아가보게나...정직 기간 동안은 제발 조용히 지내게"
돌아서서 급히 나가는 윤도훈의 뒷모습을 무심히 바라보는 부의장.
그의 손에 유난히 빛나는 푸른색 깃털이 하나 쥐어져 있었다.
VR방.
윤도훈은 갑자기 또 궁금한 것이 있어 VR슈트를 착용하고 세리를 불렀다.
<내가 모르는 다른 세계가 실제로 있을까요?>
[혹시 최근에 실제로 어떤 사건을 보신 게 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니고요... 지난 밤에 아주 이상한 꿈을 꿨는데요... 괴물 3마리가 갑자기 내 몸으로
들어오더라고요! 깜짝 놀라서 잠을 깼었거든요...너무 생생해서 말예요...>
[최근 한달 사이에 3명의 젊은이가 불의의 사건 또는 사고로 유명을 달리 했는데 경찰이 수사한
내용은 제가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만 그 사건 사고의 발생일로 추측되는 날짜 즈음에 VR 유저
3명의 데이터가 삭제된 일이 있습니다]
<우연히 맞아떨어졌는지는 확실치 않지만...새벽에 꾼 꿈이 그 사건 사고와 관련이 있는 것 같은
데... 어떻게 생각하나요?>
[도훈님이 생각하신대로입니다. 제가 갖고 있는 데이터에는 다른 세계 관련 내용이 한 개 존재합
니다]
<그래? 어떤 내용인데요?>
<<가세계는 현실 세계와 많이 다르다.
생과 사를 넘어서고 차원을 넘어서고 지금의 관념을 넘어
서야만 비로소 보이는 세계다. 분명히 어떤 곳에 존재하는 세계다.>>
[그런데 도훈님, 이건 연구 논문이 아니라 블로그에 누군가가 올린 소설 앞부분에 나오는 글귀입
니다]
<뭐라구? 소,소설이라구요?>
[네 그렇습니다. 근데, 이메일 주소가 나와 있습니다 올린 글 이외에 신상정보는 차단되어 있어서
정체를 알 수 없지만... 글을 올린 사람이 다른 차원에 훨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있을지 모르니
연락을 한번 해보는 것은 어떻습니까~]
<아까 만난 부의장이 이번 정직 기간 동안에는 제발 가만히 있으라고 했는데에.... 아~ 도저히 못
견딜 것 같아...>
9화.
진정석
여기는 정론신문사 본사 빌딩.
남자가 일행을 데리고 엘리베이터에서 내린다.
사장실.
“아버지 대박 특종 잡아왔습니다”
교안이 아버지의 책상에 직접 찍은 사진을 펼쳐 보인다.
“이게 뭐냐? 이런 거 볼 시간이 없어... 지금말이야, 우리가 밀고 있는 강준표 의원님 선거 운동
전략 회의를 해야 하니까 얼른 다시 들고 나가거라!"
“아버지! 사진만 들고 온 게 아니예요! 특종 거리를 직접 모시고 왔습니다~“
정석, 지원, 우희 그리고 이들을 보호하고 있는 보육시설의 원장 효숙이 들어온다.
정석은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숙인 채 서 있고 나머지 사람들은 사장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정재계와 오랫동안 친분을 갖고 갖가지 영향력을 행사해 온 정론신문의 사장 백구호는 여타 간부
들과 회의 중에 들이닥친 아들과 일행을 보고 인상을 마구 찌푸렸다.
“사전에 연락도 없이 이렇게 불쑥 사람들을 데리고 오면 안된다고 하지 않았느냐!"
“일단 아주 잠깐 얘기라도 들어보고 기사를 쓸지 말지 결정하세요~ 이 분들은 종교 단체에서 운
영하는 보육원 원장님과 소속된 아이들입니다. 이 친구는 나이가 조금 있구요" 교안은 정석을 가
리킨다.
“돈이라도 후원을 받으려고 직접 데리고 온거냐?"
“돈은 필요 없답니다"
“그렇다면 그 얘기가 아무 쓰잘데기 없는 것이거나 나중에 언제든지 돈을 요구할 심상이구만 세
상에 공짜는 없어!"
보육원 원장이 불쑥 끼어든다.
“맞습니다. 사장님 저희는 돈보다는 더 가치있는 것을 원하기 때문에 이 자리에 왔습니다. 사장님
의 영향력이 워낙 크시잖아요... 종이와 인터넷에서 정론신문을 읽는 구독자들에게 사진에 나온
것처럼 이 위험을 알려야 합니다."
그녀는 차분하면서 점점 톤을 높이며 또렷한 발음으로 내용을 전했다.
“아버지 이 현장 사진을 보시고 말씀해도 늦지 않습니다. 집이 와르르 무너진 거며 지하철이 한쪽
이일그러진 거며...”
“그만하고 이제 손님들을 데리고 나가거라"
“아버지 아버지 이건 그냥 평범한 테러가 아니라구요... 사고 현장 사진을 꼼꼼하게 보세요! 제발!"
“정말 이럴래?"
사장은 고개를 숙이고 있는 정석을 노려보고 있다.
“오부장, 이 괴물들도 빨리 데리고 나가요"
정석이 괴물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눈 주위 근육이 격렬하게 떨렸다.
원장과 나머지 아이들은 침착하게 사장과 직원들을 계속 노려보았다. 무표정과 분노가 묘하게 혼
재되어 있다.
“여긴 개인 회사가 아니라 언론사 아닙니까?
여기가 무슨 선거 운동본부입니까 예? 너무하십니
다 아버지!"
사장은 다른 직원들에게 어서 이들을 데리고 나가라고 연달아 손짓을 했다.
효숙이 들고 온 전단지를 세게 움켜쥔다.
“사장님 한 번 더 재고해 주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저희 보육원에 언제든지 연락주십시요. 이만 돌
아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효숙은 차분한 어투로 한마디 하고는 아이들을 데리고 돌아서 나갔다.
사장실에는 싸늘한 정적이 잠시 감돌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던 정석이는 맨 뒤에 따라 나갔다.
“저 괴물들 두 번 다시 여기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확실히 하게 오부장!"
그말을 들은 지원이과 우희의 눈빛이 분노로 이글거렸다. 둘은 몇 걸음 뒤에 오는 정석쪽으로 몸
을 돌려 양쪽에서 손을 꼭 잡고 빠르게 데리고 나갔다.
정석은 또다시 괴물이라는 말을 듣자 눈과 입 주위 근육이 더 심하게 떨렸다.
윤도훈의 방.
윤도훈은 나가면 사고를 칠 것이 분명하기에 셀프 감금상태로 집에 있으면서 인터넷에서 신문 기
사를 꼼꼼하게 살피고 있다.
얼마전에 번화가 뒷길에 주택가에서 폭발사고 있었다. 바로 그곳의 현장 사진이 몇 컷 신문에 게
재되어 있었다.
주위에는 똑같은 시멘트 벽돌로 만들어진 블럭 주택들이 길다랗게 늘어서 있었
다.
그 중에 한 채는 완전히 부서지고 무너져서 시멘트 블럭 더미가 되어 있었다. 그 내부에는 경찰
과 감식반이 보였다. 그리고 폴리스 라인 밖에는 기자 여러 명이 에워싸고 있었다.
세리에게 물었다.
<세리, 이 기사 좀 봐요! 여기 혹시 가스 폭발 사고인가요? 기사에는 그냥 폭발 사고로만 나오고
원인은 조사중이라고 기재돼 있어요...>
[가스 폭발이 아닙니다 그을음이나 탄 흔적이 없어요 가스통도 보이지 않구요...폭발이 아니라 토
네이도처럼 강력한 돌풍이 이곳만 싹 쓸어버리고 간 것 같습니다]
<관련 기사를 다 뒤져 봤는데 한 신문에 특이한 목격담이 몇 줄 적혀 있어요...
'뭔가 시커먼게 보였는데 그게 먼지인지 바람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좀 더 자세히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가령 그게 바람하고 다른 모양으로 움직였다든지 말이죠.’
‘시커먼 먼지 덩어리 같았는데 아 맞다 그 덩어리 안에서 뭐가 번쩍번쩍 했었던 것 같아요...’>
[도훈님, 방금 그 기사를 캡쳐해서 소설을 쓴 사람에게 메일을 보냈고...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
다]
<아! 그래요? 잘했어요 잘했어!>
[지금 답장이 왔습니다. 보십시요...]
<<흑륜이라고 하는 괴물의 공격 방식과 매우 흡사합니다. 현존하는 개체가 전세계에 몇 개 밖에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흑륜이라고요?>
자정이 다 돼가는 밤.
정석은 시내 번화가를 늦게까지 돌아다니고 있었다. 양손으로 전단지를 가득 안고 있다.
며칠 째 계속 같은 전단지를 돌리고 있었다.
<<도시에서 계속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징후입니다. 세컨드
임팩트교와 함께 이 위기를 헤쳐 나갑시다... >>
저녁 무렵에 전단지를 나눠주려고 나왔으나 몇 장 밖에 주지를 못했다.
전단지 내용도 내용이지만 투블럭 컷 머리 스타일이 왠지 강한 인상을 주는데다가
특유의 눈매
때문에 번화가에 기분을 내러 온 행인들은 정석을 거의 외면하거나 무시하기 일쑤였다.
앞에 관광명소이기도 한 오래된 성당이 있다. 정석은 바로크 양식의 성당 건물에 매료된 듯 한참
을 바라보았다.
그때 괴물 관리국 부의장 최병우가 멀찌감치 떨어진 뒷쪽 빌딩 골목에서 정석을 주시하고 있었다.
정석은 주변을 두리번거리다가 최병우와 눈이 마주쳤다. 굳었던 표정이 조금 누그러지며 최병우
에게 걸어갔다. 둘은 이미 알고 있던 사이인 듯했다.
번화가에서 뒷쪽으로 두블럭 떨어진 이곳에는 지나가는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
아직도 기와나 슬레이트 지붕으로 된 1층 짜리 낡은 주택이 남아 있는 곳이었다.
정석은 계속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가로등도 없어 으스스하고 어슴푸레한 이 골목에 최병우
가 사람들의 눈을 피해 일부러 정석을 데리고 온 것이었다.
“화가 많이 나 있구나... 또 그 여자 때문이냐? 아니면 어디에서 누가, 네가 듣기 싫어하는 말을
막 하더냐?”
최병우가 진정석의 귀 가까이에서 조용히 말을 건넨다.
“아저씨도 제가 괴물이라고 생각하세요?"
“물론 아니지! 너는 아주 특별한 능력을 갖고 있는 유망한 청년이야...너를 괴물이라고 말하는 놈
들이 오히려 자신 밖에 모르는 이기적이고 악질적인 괴물들이지!"
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습관처럼 고개를 약간 숙인 채 한 번씩 눈을 치켜 뜨며 최병우
와 눈을 맞추고 있었다.
“이번 주에는 뭐 새로 발견한 건 없냐?"
“쟤 말인가요?”
“어어이~~~”
갑자기 위에서 회오리바람 소리같은 것이 나더니 갑자기 쿵하는 소리가 났다. 보도블록이 팝콘
튀듯이 모두 위로 떠올랐다.
정석, 병우도 무방비 상태에서 그대로 공중으로 떠 올랐다. 오더가 이 부근에 공간 일부를 일시적
으로 무중력 상태로 만든 것이었다. 무중력술은 오더의 주특기 중에 하나였다.
"어어? 이거 왜이래? 계속 공중에 뜨고 지랄이야!" 최병우가 버둥거리며 짜증을 냈다. 기습적으로
생경한 기술이 들어오면 즉각적으로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반면에 오더는 몸의 50퍼센트가
반중력 물질로 되어 있어 몸에 가하는 중력을 자유자재로 조절할 수 있다. 다만 반중력이 작동하
는 동안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되기 때문이 유효시간의 한계가 있다.
<< 퍼억 퍽! >>
몽둥이로 샌드백을 때리는 것 같은 소리가 났다.
오더가 주먹으로 정석과 병우의 가슴과 등을
마구 가격하면서 나느 소리였다. 둘이 무중력에 걸려 허공에서 허우거리고 있을 때 거침없이 공
격을 가했다. 하지만 유효시간이 다 끝나버렸다. 무중력이 풀리자 정석과 병우는 그대로 바닥으로
떨어졌다.
"아저씨, 괜찮아요?"
"너는 괜찮냐? 난 괜찮아..."
오더는 한숨 돌릴 틈도 없이 전광석화처럼 다시 달려와서는 병우의 턱을 가격해 뒤로 자빠뜨렸다.
어찌나 빠른지 지나간 자리엔 후폭풍처럼 주위에 널부러져 있던 보도블럭들이 종이 꽃처럼 사방
으로 날아갔다.
병우는 먼지를 털며 일어섰다.
"이 새끼가 진짜! 간만에 나를 자극하는 놈이 나타났구만...오늘
네 팔 다리를 뜯어서 잘근잘근
씹어 줄게!"
“씹든 삼키든 그건 니가 알아서 하고 우선 장소부터 다른 데로 옮기자구! 여기 더 있다간 뉴스에
나오겠어..."
정체불명의 모호 집단 질러에서 온 첫 번째 사도.
총수의 지시로 괴물 헌터들과의 전쟁을 잎두고 있었다. 하지만 헌터들의 숫자가 예상보다 증가하
여 그대로 대적하기에는 병력수가 열세였다. 그래서 용병으로 영입할 재야의 숨은 강호를 직접
찾으러 온 것이었다. 이렇게 선방을 날리며 난리를 치는 건 현장 오디션이나 다름없는 오더 특유
의 테스트 방식이었다.
"자 나를 따라와"
아주 빠른 속도로 도심을 벗어났다. 빈집이 많은 옛날 주택가의 변두리 공터에 도착했다.
병우도 무공술로 빠른 속도로 날아서 이동했다. 둘은 사실 '무버'라고 불리는 초능력자였다.
정석과
고수 그룹 상위 1%에 속하는 오더는 바닥에 시선을 고정했다. 두 손바닥이 위를 보게 하고 천천
히 들어 올렸다. 바닥에 꽂힌 시선은 점점 살기가 느껴졌다.
땅이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했다.
갑자기 땅이 기울기 시작했다.
땅이 기울어지는데도 사도를 비
롯해서 정석과 병우는 넘어지지 않았다. 바닥에 놓인 쓰레기 더미들이 회오리바람에 온사방으로
흩어지듯 날리더니 다 타면서 사라져 버렸다.
“엉? 땅과 하늘이 뒤집어지는 거 아녜요?”
“내 팔을 꽉 잡아! 근데 저 듣보잡이 도대체 지금 무슨 개수작이야!"
몸이 고정된 채 360도 회전하는 버블슈트처럼 땅이 빙빙 돌았다.
“아~~~ 씨~~~ㅂ~~~ㅏ"
블랙아웃처럼 잠시 캄캄해졌다가 다시 밝아졌다.
“아~ 속이 울렁거려요~ 괜찮아요?"
“네... 조금 그렇다...근데 저...저건 웬 뱀이냐?”
장사라는 아주 큰 뱀이다. 사도 오더가 항시 파트너처럼 데리고 다니는 사역마다.
“정석아 내 뒤에 있어라~ 저 뱀에 대항하는 놈을 소환해야겠다”
“파이톤~저 두놈을 물어뜯어!”
최병우는 상의 안쪽 주머니에서 작은 책을 꺼내서 펼쳤다.
“제건!”
소환된 제건은 힘있는 긴꼬리를 갖고 있는 외눈박이 괴물이었다.
“제건아 저놈의 또아리 틀기를 조심해!”
제건은 상대가 몸 길이를 자유자재로 늘이고 줄일 수 있는 장사여서 장기인 긴 꼬리공격을 하지
않았다. 조이는 힘으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장사는 대가리에 호저처럼 가시가 덮여 있어서 대가리 공격도 쉽지 않다.
제건의 푸른 눈이 붉게 변했다. 장사의 오른쪽으로 몇발 도움닫기를 한 후 껑충 위로 뛰었다. 반
대편으로는 긴꼬리를 휘둘러 몸통을 때렸다. 장사가 움찔했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붉은 눈에서
포톤블라스트를 발사했다. 장사의 주둥이를 맞혔다. 장사는 괴로워하며 긴 몸뚱아리를 이리저리
뒤틀었다.
"파이톤아 이제 됐다 이제 돌아가라"
"엥 저놈이 백기투항하려고 그러는 건가?" 파이톤이 사라진 것을 확인한 후 최병우는 제건이 도
감 속으로 다시 돌려보냈다. 제건의 형상이 점점 희미해지더니 스르르 사라졌다.
"이쯤에서 그만하자... 너희들의 능력을 충분히 봤으니 일단 내 제안서를 주겠다"
"이봐! 지금 장난치는거냐? 죽일 듯이 달려들어서 개패듯이 때려놓고선 지금 왜 딴소리를 지껄이
냐? 겁나서 그런거냐?"
"마음대로 생각해라! 내 의도는 변함이 없다. 질러에서 같이 일해볼 생각이 있으면 연락해라! 자
받아라!"
"아저씨 저놈 미친 것 아닐까요?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이상한 표식이 있는 둥근 칩을 던져 주었다. 일반적인 스포츠 대회 메달보다는 조금 작았다. 무게
는 흔히 발행하는 기념주화와 비슷했다. 한쪽에는 불사조 그림이 다른 한쪽에는 특이한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일단 넣어두고...자, 이제 돌아가야겠다. 정석아, 괴물 도감을 완성하는데 계속해서 도와주기
를 바란다"
10화. 김효린
둥! 둥! 두둥! 둥! 둥! 두둥!
전쟁을 알리는 북소리와 나팔소리가 계속 고막을 때린다.
수백 발의 신기전을 계곡 반대편에서 절벽 바로 가까이에 있는 성곽을 항해 발사했다.
아무리 좋은 활과 화살일지라도 닿는 거리가 아니었다. 신기전은 자체 추진장치가 있어 더 먼 거
리도 타격이 가능했다.
여기저기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성벽이 터질 때는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그리고 성 안쪽까지 날
아가서 터질 때는 주민들의 비명소리가 들렸다.
공포 그 자체였다. 안심하고 있었던 주민, 병사와 군주는 대혼란에 빠졌다.
대부분 신기전의 폭탄이 터질때 많이 죽고 그다음엔 벽이 허물어지면서 깔려서 죽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나는 지옥의 현장에서 탈출하기 위해 뒤를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내달렸다.
건물은 계속 허물어지고 있었고 아래엔 머리가 찍혀 터져버린 시체, 신기전이 몸가까이 터져 신
체가 팔이 떨어져가고 배가 터진 시체도 보였다.
나도 곧 저렇게 될 지 모른다는 공포감이 몰려왔다.
겨우 성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절벽의 반대쪽은 마을이 있었다. 이미 이곳도 불이 붙었거나 파괴된 곳이 너무 많았다.
붉게 타오르는 성곽의 뒤 하늘은 붉은 노을이 오로라처럼 드리워지고 있었다.
계속 들려오는 폭발음때문에 발을 옮길 수가 없었다. 창자가 뒤틀리는 통증까지 더해졌다.
불이 붙은 말, 돼지, 소들이 마구 날뛰었다. 마을의 거리에도 이미 많은 집들이 타고 있었고 불에
탄 시체도 곳곳에 흩어져 있었다.
불의 바다, 지금껏 한 번도 보지못한 광경이었다.
열기와 연기 때문에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숨이 막힐 것 같았다. 숨이... 숨이....
“마마! 마마!"
나는 첨탑에 갇힌 채 연기로 실신했고 그 사이에 유사환각상태에서 꿈을 꾼 것이었다.
“마마! 마마! 괜찮으십니까? 마마! 여기를 빠져 나가셔야 합니다!"
무의식상태에서도 익숙한 목소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화닌의 목소리이었다. 나는 안도했다. 그리고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일어나십시요!"
나는 땀에 흠뻑 젖은 것을 깨어난 직후 바로 느꼈다. 온몸이 땀으로 축축했다.
바람이 느껴졌다. 이렇게 바람이 시원했었나?
“일어나십시요!” 누가 아주 가까이서 나를 깨웠다.
“실장님, 빨리 일어나십시요 지금 데프콘 1이 발령되었습니다. 이곳도 위험합니다. 헬기가 도착했
습니다. 빨리 피하십시요”
<엉? 뭐야? 꿈 아니야? 그리고 이거 레알이야? 진짜? 좀전에 바람은 헬기의 프로펠라였어?>
나는 한쪽 눈만 실눈을 뜨고 진짜인지 꿈인지 살펴보았다. 눈 앞에는 AR-15 소총을 어깨에 메고
있는 건장한 아저씨가 좌우를 살피고 서있었다.
“대통령께서 긴급히 모셔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속히 이곳에서 나가셔야 합니다”
"뭐? 뭐라고? 당신들 지금 꿈인지 생시인지도 헷갈리는구만 무조건 탈출하라고 하면 어떻게 해
요?”
나는 벌떡 일어나서 사내가 낀 레이밴에 비친 얼굴을 보고 경악했다.
“넌 누구냐~?” 나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왔다.
레이밴에 비친 얼굴은 내 얼굴이 아니었다.
“넌 누구냐구?” 나도 모르게 썬글라스에 비친 얼굴을 향해 더 크게 소리쳤다.
“넷!
저는 수도방위부 73포격대 소속의 강인찬 중위입니다!”
갑자기 군인 아저씨가 살짝 반보 물러서며 소총을 멘 채 양손을 허벅지에 붙이고 관등 성명을 댄
다.
“어어? 아니 아니~ 아저씨 말구요··· 지금 나 말이요 지금 이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란 말이오~~”
“네? 무슨 말이십니까? 실장님...얼굴은 예전보다 더 좋으십니다!
지금 크라이언과 질러 연합군들
이 마식령 장벽을 파괴하고 남하하고 있습니다. 지금은 국가 비상사태로 1초가 급하니 빨리 빠져
나가셔야합니다. 이곳 북한산에서 한라산까지는 한번에 날아가지 못하므로 예천에서 항공기로 갈
아타셔야 합니다. 자~ 얼른 헬기에 탑승하십시요!”
“아저씨 근데 지금 왜 한라산까지 가야 하는 거예요?"
“저도 잘 모릅니다. 각하의 명령이십니다. 시간이 없습니다!
괴물 연합군들이 이미 평양을 통과하
고 있다고 합니다~”
“각하의 명령이라구요?
도대체 그 그럼 저는 누군데요?"
“네? 그걸 갑자기 지금 이 상황에...물으시니..."
“내가 누구냐구요?” 난 또 한 번 고함을 질렀다.
“넷! 대한민국 게임스포츠의 살아 있는 전설이며 게임단 K1을 이끌고 계시는 김효린 실장이십니
다”
“에에? 김효린이라구요?”
<엉? 프라니아 주변에는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나 가문을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었는데...>
“왜 그렇게 놀라십니까? 아무래도
최근에 너무 과로하신 탓인 것 같습니다...”
“아 네...그래요...근데 제가 왜 여기에 쓰러져 자고 있었던 거죠?"
“장거리 자체추진형 화살을 시험하던 도중에 예기치 못한 경미한 사고가 있었습니다. 그 충격으로
부상은 없었지만 이틀을 꼬박 일어나지 못하셨습니다."
“아 그 그랬군요... 충격때문이라... 기억이 잘 안나서요..."
“그러실겁니다. 너무나 막중한 임무를 받으시고 강행한 일이라서 체력도 많이 소진하셨습니다. 이
번에 무기실험이 성공해야 적들과 대등한 전투가 가능해집니다."
“그렇다면 제가 여기서 무슨 게임시연을 벌인 것도 아닐테고 왜 이곳에서 중요한 일을 맡고 있었
던 거죠?
“김 실장님은 게이머 이전에 우리나라 최고의 궁사였습니다. 올림픽 전라운드에서 올 10점을 쏜
것은 아무도 범접할 수 없는 넘사벽의 전설이 되었습니다."
그때 이중위의 무전기에 지지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는 델타 여기는 델타!
빨리 이륙하라!
지금 팬텀들이 벌써 철원을 통과하고 있다고 한다.
빨리 이륙하라!]
무전기 너머로 들리는 통신병의 말이 갑자기 지직거렸다. 뭔가에 쫓기면서 다급히 무전을 치는
듯했다.
강인찬 중위에게 긴급문자가 들어왔다.
[팬텀들의 화력이 매우 강함. 미사일이나 기관포가 아님. 발사한 광선에 맞은 물체나 사람은 순식
간에 사라져 버림. 주위에 민간인들을 빨리 대피시키기 바람]
“김 실장님 부디 살아남으셔야 합니다”
“네 아저 아니 강 중위님도 빨리 탑승하세요!”
“아닙니다. 저는 이곳에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뭐라구요? 여긴 높은 지대라 발각되기 쉬워요~지금 타세요”
“아닙니다. 팬텀들이 날아오면 먼저 이곳 포격부대에서 먼저 격퇴를 해야합니다”
“그럼 나도 남아서 하던 일을 마저 마무리하고 탑승할게요!"
“안됩니다! 상부의 명령입니다. 지금 전쟁상황이니 어기면 즉형에 당해도 할말이 없습니다"
나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지금이 전쟁이라는 것이 실감나지 않았지만 지금 몇몇의 목숨도
중요하지만 수많은 국민들의 목숨이 달린 문제라는 것을 잊고 있었다.
나는 기억이 뚜렷하지 않지만...어떤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엄청난 책임감이 들었다.
“한라산에 가면 모든 장비가 설치되어 있습니다. 대한민국을 위해 최선을 다해 주십시요!
필~승!"
헬기에 탑승하자마자 나는 피로가 몰려 왔다. 기계소음도 아랑곳하지 않고 단잠에 빠져버렸다.
[여긴 현실과 저세계가 중첩되어 있네... 자네도 죽은 줄 몰랐지 않은가...]
<다 어디로 갔지? 꿈 속인 것 같은데...>
헬기를 탑승하기 전까지 어수선했던 기분은 사라지고 목소리에 집중했다.
[자네는 나라를 구하기 위해 큰 일을 하다가 여기에 왔구만...]
나는 낯선 목소리를 듣자마자 반사적으로 고개를 획 돌렸다.
<누...누구세요?>
[나를 저세계의 상제라고 불러주게나!]
<그러니까 누구시냐구요?>
[엥? 상제라니깐... 상제 모르냐? 저세계의 상제를 모른다 말이냐? 나를 모르는 존재가 없거늘...]
나는 상제라고 강조하는 말을 조금은 알아듣고 다시 물었다.
<네에? 그러면 아저씨 아니 쌤이 가세계라는 곳에서 대빵이라는 거죠? 근데 여기는 무슨 일로?...”
[음...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겠네... 크라이언이라는 냉혈족과 질러라는 괴상망측한 외계집단이 현실
과 가세계를 모두 장악하기 위해 연합세력을 구축하고 있다네...]
<잠깐만요... 아니 그러면 아까 강중위가 말한게 거짓말이 아니었네요?>
나는 너무 혼란스러웠다. 내가 있던 프라니아에서 나는 죽었고 여기는 그 전에 한번도 들어본 적
없는 곳이고... 왜 여기에 떨어졌는지도 모르겠고... 아 이거 복잡하고 난감했다. 사실 수면제 투여
한 후에 어떤 특별한 장치에 들어가 있는 것인지 진짜 꿈을 꾸고 있는 건지 도무지 분간하기 어
려웠다. 이 상태에서 무작정 이 어르신의 말을 믿을 수도 없다.
[자네가 좀 도와줘야겠네~ 괴물 관리국에도 괴물 도감을 완성하려는 자가 있고 질러들도 괴물 도
감을 만들고 있어... 자네가 화닌을 꼭 찾아서 둘이 힘을 합하여 괴물 도감을 완성해주게..”
<지금은 도와드리기가 힘듭니다...집으로 돌아가야 하거든요.>
[아직도 프라니아의 기억이 자네를 괴롭히고 있는 모양이구나...
프라니아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
다네... 화닌이 선지자가 되기 위해 애를 쓰고 있다네...]
<정말요? 화닌이 아직 살아 있나요?...다행이네요...걱정을 많이 했는데...아저...아니 쌤이 구체적으
로 저한테 뭘 원하시는 지는 모르지만 생각하신 것보다 제가 잘할 수 있는 게 없는데요...>
[허허허...지금 농담하는 건가? 자네는 프라니아 역사상 가장 강력한 능력을 갖고 있다네...]
그말에 나는 뒤통수부터 전율이 쫘악 올랐다.
어찌하란 말인가?.. 지금 나는 김효린으로 빙의한 것인데 뭘 어떻게 하란 말인지 아직 이해가 되
지 않는다. 이 아저씨의 기대치에 부응하는 도움을 줄 수가 없다는 거잖아 못해 못해! 나도 모르
게 절레절레 머리를 흔들었다.
[자네 혹시 두통이 있는가?]
<아, 아뇨 아뇨... 저 쌤...말씀드린 대로 제가 너무 피곤하고 그래서요... 오늘은 이쯤에서 마무리하
고 다음에 뵈었으면 하는데...>
[그런데...내가 온 건 자네의 결정을 받기 위해서 온 게 아닐세...모름지기 전장에 나가려면 활만 있
어서는 안되는 법...그래서 앞으로 닥칠지 모를 절체절명의 순간에 궁극의 필살기가 되어줄 아이
템을 주러 온 걸세...]
<예에? 뭐 뭐라구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도대체 무슨 말씀이신지...>
내가 되묻는 순간 상제 어른신은
미소를 띤 채 모습이 점점 희미해지고 있었다.
[자네와 김효린은 이미 그전에 선택을 했다네...내가 말한 그 일을 해야만 하는 그 이유를 찾아보
게나...]
상제 어르신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졌다. 그가 서 있던 자리 바닥에는 저장장치로 사용하는 작은
칩이 하나 놓여 있었다.
<그래~ 현실과 가세계가 합쳐진 상황이라면 그렇게 홀연히 사라지는 건 이상한 게 아니지...>
"실장님, 일어나세요...이제 예천비행장에 곧 착륙합니다."
<누가 나를 부르고 있다... 어엉? 다시 헬기구나>
깨우는 소리를 듣고 창밖을 내려다 보았다. 공군 비행장이었다.
안전하게 착륙한 후 장교들이 안내해준대로 잠시 대기실에 들어가서 소파에 머리를 기댔다.
나는 들고온 가방을 열었다. 안에는 이전에는 들어있지 않았던 손바닥 만한 작은 활이 들어 있었
다.
"엉? 아까 어르신이 말한 궁극의 아이템이 바로 이 활이란 말야?
에고고...이렇게 작은 걸로 뭘
하라는 거야?"
그때 갑자기 비행장에서 싸이렌이 울렸다.
-길미진-
[미진아!]
미진이는 땀에 흠뻑 젖은 채 놀라 비명 소리를 내며 깨어났다.
[미진아, 침착하게... 조용히...]
주위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렸다. 만년설로 뒤덮인 산과 때마침 근처에 걸려 있는 달이 낯익은
풍경화처럼 느껴진다. 조금 떨어진 곳엔 뭐가 있을지 궁금증을 자아내는 묘상한 숲이 보인다. 수
령이 수백 년이 된 나무들이 대부분인 보물같은 숲이다. 그리고 가지들과 잎들이 부딪치며 만들
어내는 웅장한 사운드를 듣고 있노라면 저절로 위대한 자연에 경이로움과 고마움을 느끼게 된다.
<글래셔가 무너졌어요...> (글래셔: 거대한 빙하 장벽)
[꿈이야 꿈... 걱정하지 말고 다시 자거라... 그리고 여기서는 조용히 해야 해...]
“꿈이라니요! 아저씨! 정신 차리세요! 또 술 드셨어요? 그리고 과로에는 휴식이 최고예요!
그냥
로그아웃하세요! !”
같은 처지의 중년 아저씨가 파밍이나 레이드에 집중하지 않고 게임 스토리에 빠져 자꾸 캐릭터
연기를 한다. 이런 분과 팀이 되면 제일 짜증이다.
“아저씨! 아저씨!
돈 많으세요? 여기서 제대로 못 벌면 결국 노역장으로 가야 하잖아요!”
우리들은 그동안 제한된 시간과 제한된 공간으로 인해 다양한 삶을 살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마침내 그런 한계를 뛰어넘는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다. 코인만 있으면 수천수만 가지 종류의 삶
을 살 수 있는 새로운 세상이 탄생했다.
11화. 가상 세계
-길미진-
인구 90퍼센트가 사용하는 가상세계 세콘도라.
이곳에서 가장 큰 게임머니 대부업체 '코인숍'이다. 이곳은 당장에 결제할 가상 코인이 없을 경우,
가상 코인을 먼저 빌려주고 채무자가 제때 갚지 못하면 강제노역을 시킨다. 힘은 들지만 만만하
게 할 수 있는 것이 톱 랭크 게임에 요청자의 아이디로 대신 로그인해서 파밍과 레이드를 부지런
히 뛰어 주는 것이다. 아이템마다 금액이 매겨져 있어서 모은 금액만큼 변제하는 것이다.
그리고 결코 만만하진 않지만 한번에 큰 돈을 버는 방법은 있다. 그것은 넷상에서 자생하여 학습
하고 진화한 악성 바이러스 프로그램을 제거하는 일이다. 가상 세계 세콘도라에서는 이런 악성
바이러스를 발견하면 현재 백신 기술로는 즉시 삭제를 할 수가 없어 윈도우의 휴지통처럼 '제로
섹터'라는 곳으로 먼저 강제전송을 한다. 그곳에서 수동방식으로 나같은 노역자가 '파쇄장'이라는
결투장에서 이것들을 박살내면 비교적 큰 돈을 벌 수 있다. 보상 단가는 만족할 만큼 아주 세다.
그러나 이곳에서 지면 파쇄기로 들어가야 한다. 파쇄되는 동안에 유저는 전기 쇼크와 비슷한 고
통을 견뎌야 한다. 가끔씩 후유증으로 뇌신경에 손상을 입거나 기억 영역이 손상될 수 있다. 만약
시일이 지나도 호전되지 않으면 정상적으로 살지 못할 수도 있다.
오늘은 그동안 아버지의 고가 아이템 구입으로 인한 과다 지출때문에 진 채무를 변제하기 위해
강제노역소에 왔다.
상환 기간을 계속 연장하다가 이제는 원금을 갚아 나가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다. 부당한
처사라고 소송으로 넘기면 여러가지 비용이 더 발생한다. 결국 채무자만 더 힘들어진다. 그래서
거치기간 마지막날에 자진해서 노역소에 입소를 결정했다.
오퍼레이션 첫 날.
시간당 급여가 가장 세다는 크러셔 던전에 당첨됐다. 대기자가 너무 많아서 올라올 때 마다 랜덤
추첨으로
참가자를 뽑는다. 리스크가 큰 대신 결투에서 이기면 고액을 챙길 수 있는 던전이다.
중상급 레벨이상이 안되면 아예 시도하지 않는 게 낫다. 여기서 지면 페널티로 전기쇼크를 받아
야 한다.
나는 오늘 두 탕을 뛸 예정이다. 먼저 이곳에서 레이드를 두 시간 뛰고 그 다음엔 정해진 시각에
크러셔 던전으로 들어갈 것이다.
레이드 장소는 폭포 주변.
이곳은 시작부터 밤이었다. 뭐가 나올지 알 수가 없다.
눈앞에 보이는 건 주로 가슴 높이의 장대풀. 한가지에 나뭇잎 색깔이 각각 다른 특이한 나무들.
큰 나무를 휘감고 있는 기생 덩굴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조금 멀리 폭포 소리가 들리고 길 옆 근처엔 개울물 소리가 들렸다.
어둡고 낯선 길을 가는 데다가 랜턴이나 플래시가 없어서 앞에 뭐가 나타날지 조마조마했다.
그나마 구름이 걷히면서 달빛이 비치는 덕분에 겨우겨우 앞을 분간할 수 있었다.
<이러다가 부시에 매복한 몹들이 막 뛰쳐나오면 속수무책으로 당하기 딱 좋겠다>
아빠가 부정맥으로 인해 심장에 무리가 많이 가서 쓰러지셨다. 병원에 입원하시는 바람에 기가
막힌 채무를 갚아 나가기 위해 어쩔 수 없는 노역코스를 밟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잔뜩 긴장한 채 가상의 스마트폰을 움켜쥐고 천천히 수풀을 헤쳐 나갔다.
“아저씨, 같이 가시죠 혼자 너무 앞서 가지 마시고요!”
아저씨는 아무 말이 없으셨다.
“아까 아저씨가 저 깨운 거 맞죠?"
“아니.. 그럴리가... 힘들어 죽겠구만... 너한테 말 걸 기운이 있으면 비싼 몹들 한마리라도 더 잡으
러 다니겠다"
“네엥? 어 이상하다 주위에 아저씨 말곤 없었는데... 누가 말을 걸었지?”
[나는 가세계의 상제이다.]
VR 헬멧 옵티컬 화면에 메세지 창이 뜨면서 글이 올라왔다.
<엉? 뭐라구요?>
[예전 기억이 제대로 나지 않나 보구나]
<네... 전혀 떠오르지 않는데요...>
[음... 최근 여러 게임 서버에 에러가 계속 발생했다. 플레이 도중에 멈추는 경우가 너무 빈번해지
고 있다. 복구 담당자가 고치러 올 때까지 여기서 기다리는 게 좋겠다]
“저기요! 아저씨! 방금 무슨 소리 나지 않았나요?”
내 귀에 뭔가 수풀을 빠르게 스치고 지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아니...폭포 소리하고 장대풀들이 서로 부대끼는 소리 말곤 못들었는데···”
“이상하네... 너무 으스스해서 헛게 들렸나봐요..."
<으~춥다!>
나는 도중에 너무 추워서 임시 움막을 만들기 위해 좀 길다란 나뭇가지를 구해 왔다. 한쪽 끝부
분을 위로 세운 다음 엇갈리게 걸쳐서 모으고 아래쪽 끝은 넓게 간격을 벌려서 세웠다. 그런 다
음 인벤토리에 있던 하나 있던 비닐랩을 칭칭 둘렀다. 안쪽에는 억새풀 같은 걸 뜯어서 깔았다.
“자 이 정도면 얼마동안은 추위를 막을 수 있을 테니까... 아저씨~ 안에서 좀 쉬세요... 저 잠깐만
뭐좀 구하러 갔다 올게요...멀리 가지는 않을 겁니다”
나는 막대기를 주워서 수풀을 양쪽으로 헤치며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이거 뒤덜미가 왜이리 춥지?"
손으로 목뒤덜미를 비볐다.
웅!
“엥? 이게 뭔소리야?” 나는 뒤를 돌아봤다. “아무것도 없잖아!"
웅!
“아~ 씨발! 같은 소리가 또 나네! 도대체 어디서 나는 소리야?"
갑자기 목덜미에 아주 차가운 것이 닿는 게 느껴졌다.
느껴지자마자 잽싸게 머리를 앞으로 숙였다. 그럼과 동시에 두세 걸음 앞으로 디딘 다음 아주 빠
른 속도로 몸을 돌렸다.
“아이씨 뭐야!~"
바로 뒤에는 푸른 빛을 내는 성에와 서릿발이 온몸에 갑옷 미늘처럼 붙어 있는 냉혈족 크라이언
이 냉기를 뿜으며 서 있었다.
목덜미에 댄 것은 크라이언의 아이스브레이커였다. 보통의 캐릭터면 날끝이 닿는 순간 머리가 급
속동결되어 목이 툭 떨어져 그대로 죽었을 것이다.
<엥? 나는 왜 얼어 붙지를 않지?>
[이미 불새 속성이 급발동되었습니다]
<불새 속성이라면 전설의 게이머들 극소수만이 갖고 있다던 바로 그 집혼석으로...>
[맞습니다. 집혼석이 인벤토리에 기본 장착돼 있었습니다]
크라이언의 아이스브레이커가 내 명치를 향해 곧장 들어왔다.
웅!
웅!
<아까 그 소리다!>
그 소리는 바로 내 몸에서 불새 속성이 발동할 때 나는 소리였다.
아이스브레이커가 기습적으로 들어오자 즉각 반응하며 또 소리가 났다.
나는 사실 타이밍이 늦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여느 때라면 이미 게임오버다.
불새 발동 덕분에 피하지 않아도 아이스브레이커는 몸에 닿는 즉시 다 녹아버렸다.
이어서 온몸에 덕지덕지 붙은 성에 외피가 녹기 시작했다. 크라이언은 놀란 표정을 하고 뒤돌아
도망치기 시작했다.
<에헤이~ 그냥 도망가면 섭하지!>
[인벤토리가 열렸습니다]
[적합한 무기 검색 중]
[3개의 검색결과가 나왔습니다]
[불화살, 화염방사기, 스크래머삭스 중에서 고르시오]
<와우! 이거 전부 다 처음 본다~ 완전 고급삘인데!>
[세 아이템 모두 적합도 90%입니다]
<스크래머삭스!>
[다운로드 컴플리트]
나는 스크래머삭스를 들자마자 놈보다 세 배는 빠른 속도로 이동했다. 5미터 뒤로 따라붙자 스크
래머삭스가 벌겋게 달아올랐다. 나는 동시에 크라이언 머리 위로 날아올랐다.
놈은 불곰에 쫓기듯 앞만 보고 내달리고 있었다. 시선은 계속 놈의 대가리를 향해 고정했다. 점프
해서 떨어지는 가속도에 그대로 힘을 실어 벌겋게 달아오른 스크래머삭스로 놈의 정수리를 찍어
내렸다.
[냉혈족 크라이언 하급 전사 사망]
[보상으로 1000코인을 지급합니다]
“햐~ 간만에 좀 세게 벌었네!"
우연인지 크라이언이 사라짐과 동시에 숲에는 어둠이 걷히고 서서히 여명이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크라인언을 무수한 물방울 상태로 흩어지게 한 후 나는 아저씨가 있는 움막으로 서둘러 돌아갔다.
세상 모르고 큰 대자로 자고 있었다.
“아저씨! 아저씨! 일어나요! 여기 자러 온 거 아니잖아요! 어서 일어나요 어서!"
“에엥? 내가 그새 잠이 들었나보네...넌 아직 안갔냐?..."
“안 가긴요? 벌써 센 놈 한마리 처리하고 왔는데요..."
“벌써 갔다왔다고? 아이구야 난 잠깐 존 것 같은디...허허..."
[다음 전철이 3분후에 도착합니다]
특정 장소에서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은 유저의 자유이다.
시시각각으로 달라지는 몹을 추적해서 알려주는 위치추적 프로그램을 구입해서 깔면 값이 좀 나
가는 몹만 골라서 잡을 수가 있다. 단, 이놈들이 출몰하는 제한시간내에 잡아야 한다. 머리를 잘
굴려야 하는 부분이다. 내가 활동할 수 있는 시간 안에 최대한 여러 마리를 잡으려면 선택과 집
중을 잘해야 하는 것이다.
<아저씨 다음 전철 탈 거예요? 말 거예요?
난 다음 장소로 넘어갈랍니다!>
배가 나올대로 튀어 나온 땅딸보 아저씨가 레이드 뛰어본답시고 온 것까지는 좋은데 슈트를 착용
하면 무슨 슈퍼맨이 되는 것도 아니고 어차피 평소 자신의 운동 능력만큼 발휘할 수 있는 건데
뭘 믿고 들어 온건지 모르겠다. 게임머니보다는 술값으로 날린 돈을 코인 벌어서 메우겠다고 이
러고 있는 건 아닌지...
“아저씨! 오기 전에 또 술 드셨죠? 해장하려면 로그아웃하고 대구탕이나 드시러 가세요 네?!”
“그래 알겠다! 다음 역까지만 같이 가자구!"
터덩 터덩 터덩 텅!
터덩 터덩 터덩 텅!
레일과 바퀴가 만들어 내는 특유의 소음을 들으며 둘 말고는 아무도 없는 전철에 몸을 실었다.
“아저씨는 어떤 게임을 많이 했어요? 저는 예전에는 아처 오브 레전드 했는데 요새는 엑스데우스
해요...”
“나는 ‘대물’에 빠져서 현질을 좀 많이 했어... 그러다가 급할 땐 코인숍에서 땡겨 썼는데 불경기로
사업이 망하는 바람에 이렇게 됐다..." (대물: 낚시 게임, 중장년층 매니아들이 제법 많음)
“그러셨구나... 저는 제가 하다가 빚을 진 게 아니고 아버지 대신 변제를 하려고 들어 왔거든요...”
“그래? 아버지가 바카라나 바다 이야기같은 도박 게임 하셨냐?"
“아뇨 그런 거 하신 게 아니라 아는 분이 고가의 게임 아이템 사면 금액의 20프로를 돌려 주고
하부 회원의 매출에서 또 얼만큼 돌려 준다는
사기에 넘어가서 그만 엄청나게 빚이 불어 났어
요...나중에 소개한 놈이 먹고 튀었다는 걸 알고 충격을 받아서 쓰러지셨어요...”
“네가 고생이 많구나... 그 사기꾼은 잡았냐?"
“아뇨...이미 다른 나라로 도망갔나 봐요... 인터폴에서 수배 중이라고 하더라구요... 잡기가 쉽지 않
대요...잡는다 해도 뺏긴 돈 돌려 받으리란 보장도 없고요..."
“못 된 놈들 같으니라구! 세상에 그런 버러지 같은 놈들은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있더라고..."
“네엥? 다른 시대에도 그런 놈들이 있었어요?”
내 말에 아저씨의 표정이 순간 굳어졌다.
“아...그...그게... 말야.... TV에서 봤어! TV에서... 챠트 쇼라고 아냐? 저어번에~ 역대 사기 사건 인가
뭔가 거기서 봤어 거기서..."
“잠깐만요!
저기 보세요 어느새 역에 다왔어요!"
[2천 이상급의 몹이 다수 감지되고 있습니다. 조심하시기 바랍니다]
내리자 마자 눈 앞에는 거대한 폭포가 장관을 이루고 있었다.
위치 추적기를 보니 폭포 아래쪽에 한 놈이 있었다.
“아저씨! 저기 저 잎이 엄청나게 큰 나무 보이세요? 저 나무에 있는 덩굴을 잡고 내려가야 해요!
할 수 있겠어요?"
“한 번 해보지 뭐... 다른 방법이 없잖아!
늦으면 놈들이 다른 데로 가버리니께!"
“이상하네... 폭포 밑에서 감지가 되는데 밑에는 놈들의 처소가 있는 것도 아니고 상류천이랑 나무
말고는 안 보이는데요..."
“혹시 폭포 뒤쪽에 녀석들이 있는 거 아닐까? 일단 내려가서 살펴보자구!"
아저씨와 나는 덩굴줄기를 꽉 붙잡고 천천히 내려갔다.
내려가서 보니 추측한대로 폭포 뒤에 입
구가 꽤 큰 동굴이 있었다.
위치 추적기에도 동굴 안쪽에 뭔가 있는 것으로 표시가 떴다. 다만 이전보다 희미하게 표시된 것
이 좀 이상하긴 했다.
“근데 추적기에 표시가 희미하게 뜨는데요? 왜 이렇지?"
“밧데리가 다 된 거 아냐?"
“에이 그럴리가요 여긴 가상 세계라서 밧데리가 닳거나 하진 않아요!"
몇 발 들어가지 않았는데도 동굴 안에는 너무 어두웠다.
조심스럽게 천천히 발을 디디며 조금씩 안으로 들어갔다.
“아까 저기 임시 움막 근처에서 밤에 빛이 나는 돌멩이가 보이길래 주워서 주머니에 넣어 뒀었는
데 여기서도 밝혀지는지 한 번 써 보자!”
“와! 밝아지는데요? 이거 자광석이네요! 어두운 곳에 있으면 저절로 발광하는 돌요!"
“아하 그렇구나 누가 이렇게 부수적인 것까지 꼼꼼하게 디자인하고 코딩했는지 대단하다 대단해!"
“이런 것 때문에 사람들이 세콘도라에 접속하는 거잖아요!"
자광석에서 빛이 나긴 하지만 반경 30센티미터 정도에 있는 물체만 식별이 가능한 정도였다.
[8분 후에 몹들이 사라집니다]
“힘들게 여기까지 왔는데 못 잡고 끝나면 너무 허무할 것 같아요!”
손을 더듬어가며 안으로 더 들어갔다.
“잠깐만요 이 소리 뭐죠?”
12화. 불새
웅!
웅!
[불새 속성이 발동합니다]
“아~ 그래! 불새~ 그 소리였지! 근데 아까보다 발동소리 간격이 더 짧네···>
“아악! 저기···저기에 뭐가 있어요!”
아까 작살낸 놈은 대가리가 민머리였는데 앞에 있는 이 놈은 머리가 작은 뿔이 여러 개 돋아 있
었다.
훨씬 센 기운이 느껴졌다.
“이봐 학생~ 저 놈 뒤에 더 있는 것 같은데...”
그랬다. 한둘이 아니었다. 뒤로 다 보이진 않지만 킁킁대는 소리를 들아봐서는 최소한 수십 두는
넘게 있는 것 같았다. 그때 신기하게도 자광석이 더 밝게 빛났다. 덕분에 성에가 덕지덕지 붙은
크라이언들의 거칠고 두꺼운 피부가 조금은 보였다. 그리고 여러가지 톤의 에메랄드 빛이 한데
섞인 스팽글 같은 눈동자가 보였다.
갑자기 크라이언들 무리 속에서 얼음이 쩍쩍 갈라지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나는 직감적으로
뭐가 날라오겠다 싶었다.
“아저씨! 여기 뒤에 바짝 엎드리세요! 어서요!”
나는 우선 아저씨를 바위 뒤에 숨게 했다.
[온도가 급강하합니다. 10초 후에 영하 196도 초저온 한계점에 곧 도달합니다. 즉시 불새 속성을
발동하시겠습니까?]
<빨리요 이러다가 얼어 죽겠어요 무동결 방한복은 없어요?>
급속동결로 얼어 죽지 않으려면 둘 다 무동결 방한복이 필요했다.
[불새 속성과 무동결 방한복은 동시에 작동이 되지 않습니다]
<그럼 어쩌라고요!>
아저씨가 얼어죽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방한복을 곧바로 선택했다.
[무동결 방한복이 지급됩니다]
[불새 발동이 해제됩니다]
불속성의 기운이 사라지니 크라이언들의 몸에서 고드름 같은 스파이크가 튀어나왔다.
아주 뾰족하고 단단해 보였다. 찌르면 한방에 몸이 뚫릴 것 같았다.
금방이라도 던질 것 같아서 나도 재빨리 바위 뒤로 숨었다.
“아저씨, 이러다가 잡기는 커녕 금방 아웃되겠어요~”
<속성으로 대항무기 좀 만들어 주세요>
[인벤토리에 버프 재료가 없습니다]
‘씨바! 뭐 제대로 되는 게 없어! 더 이상 힘들겠다. 이거 딱 쪽박각이다 !
이번에는 여기서 끝나
겠구나~’
피융~!
“아아악!”
바위 뒤에 몸을 숙인다고 숙였는데 놈이 쏜 스파이크가 내 어깨에 그대로 꽂혔다.
“학생~ 여기에 있으면 둘 다 아웃되겠다! 내가 막을 테니까 빨리 도망쳐라~”
“아뇨 아저씨 혼자 둘 순 없어요!”
“빨리 도망치래두!
얘네들 스파이크 여러 개 맞으면 통증 정도가 아니라 쇼크로 정신을 잃을 수
도 있어!”
크라이언들은 더 가까이 다가왔다. 어느새 바위 주위를 둘러쌌다.
그중에 보스 크라이언으로 보이는 놈이 무리를 헤집고 앞으로 나왔다. 이놈은 아이스 브레이커보
다 2배이상 더 큰 아이스 크러셔로 바위를 방망이 휘두르듯이 갈겨 버렸다. 바위는 맞는 순간 얼
음 조각으로 변하며 산산조각이 났다. 이놈은 다른 놈들보다 더 긴 뿔이 돋아 있는데 계속 눈동
자와 같은 옥빛이 돌았다.
[중상급 크라이언, 환산가치는 5천 코인입니다]
현재 둘다 무동결 방한상태를 썼기 때문에 불새 속성이 해제된 상태다.
그놈의 체구에서 뿜어내는 냉기는 엄청났다. 무동결 방한복으로 눈만 내놓고 얼굴을 다 감싸고
있었지만 그놈의 냉기는 방한복을 뚫고 전달될 정도였다.
나는 몸을 일으켜서 보스를 노려보았다.
보스 크라이언의 뿔이 더 밝게 빛나며 꿈틀거렸다.
“여기는 너 같은 족속들이 들어올 곳이 아니다.
괴기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신성한 곳을 더럽힌 죄로 참수형을 받아라! 언젠
가 너처럼 어떤 놈이 겁대가리를 상실하고 들어왔다가 서리가 되어 사라졌다~”
“아저씨는 살려줘라!”
보스 크라이언은 한 손으로 내 얼굴을 덮고 있던 방한후드와 붙어 있던 마스크를 당겨 찢어버렸
다. 뜯어지자마자 얼음가루로 변했다.
“내리치기 전에 얼굴을 드러내고 예의를 갖춰라!”
“이 아저씨는 제발 살려줘!”
아저씨는 뒤에서 여전히 몸을 숙이고 있었다.
내 간곡한 부탁에도 아무 응답 없이 아이스 크러셔를 두손으로 쥐고 번쩍 들어올렸다.
“허락없이 침범한 죄값을 받아라!”
놈은 내 목을 노려보며 들었던 아이스 크러셔를 세고 빠르게 옆으로 휘둘렀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아저씨~ 다음에 봐요...”
“학생! 안돼~~~”
그순간 등뒤에 있던 아저씨가 나를 옆으로 밀치며 달려 나왔다.
그 순간...아저씨는 손을 뻗었다.
크러셔가 아저씨에게 닿으려는
그 찰나의 순간에 몸 전체가 순식간에 불덩어리로 변하며 화염
과 열폭풍이 엄청난 압력으로 발산되었다.
크러셔는 순식간에 녹아버렸다. 이에 놀란 보스의 눈
이 확 커졌다. 동시에 아저씨의 몸 전체에서 화염의 플레어가 어마어마한 강도로 분출되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는던 크라이언 무리들은 눈깜짝할 순간에 전부다 녹아버렸다.
순식간에 크라이언들이 전멸했다. 동굴은 수증기로 가득찼다. 거짓말처럼 아무런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는 뜨거운 열기를 느낌과 동시에 정신을 잃고 말았다.
글래셔(거대 빙하 장벽)의 맨 위에 올라선 그놈이 옥색의 눈빛으로 나를 노려보고 있다.
어느새 파사(거대 뱀)가 뒤에서 스르르 나타나 그 놈을 머리와 몸통 사이에 태우더니 다시 장벽
뒤로 사라진다.
잠시 후 5천 년 동안 한 번도 무너지지 않았던 장벽이 마침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핵폭발을 눈 앞에서 목격하는 듯한 형언할 수 없는 공포감 그 자체였다.
끔찍한 꿈이었다.
<아아악!>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얼굴 쪽에 통증이 느껴졌다. 눈이 확 떠졌다. 수증기가 모두 사라졌다.
아저씨는 보이지 않았다.
“아 아저씨..."
“꿈을 꾸었구나! 표정이 좋지 않구나!”
“아 아저...아니 어르신은 누구세요?”
“나는 저세계의 상제이니라!"
“네? 혹시 뚱뚱한 아저씨 못 보셨어요?"
“현실과 가상 세계가 모두 전례없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어 불시 점검을 하러 왔네!"
“그 그럼 아까 그 아저씨가 바로 어르신이었단 말씀이요?"
“그렇다네”
“와~ 어쩐지 잠시 정신을 잃은 것 같은데 그 직전에 벌어진 일이 꿈인가 했어요 어떻게 그렇게
순식간에 그놈들을 사라지게 할 수 있어요? 대단하십니다 그리고 고맙습니다 어쨌든 구해주셨으
니까..."
“고맙다고 하니 받겠다만 너는 앞으로 더 큰 것을 구해야 하는 운명이다"
“네? 갑자기 그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설명을 하자면 너무 긴 이야기니 오늘은 통성명만 하는 걸로 마무리하고 조만간 다시 봅세!"
“어 어르신! 그냥 가시면 너무 섭섭합니다! 제가 드릴 건 없지만 언제 한 번 오프라인에서 식사라
도...”
“이놈아! 나한테 오프라인이 따로 어디 있느냐 나는 저세계 상제이니라! 허허허!"
“네에? 저세계라고요? 거긴 어느 지역 서버를 사용하고 있나요?"
“이 녀석이 도대체 말이 통하질 않는구나 암튼 됐고... 이건 선물이다 챙겨 두거라!"
[중급, 상급 몹 56두를 제거한 보상으로 더블보너스 포함 100만 코인을 지급합니다]
“배 백만이라구요~? 이렇게나 많은 코인은 난생 처음 봐요”
어른신은 금세 눈앞에서 안개처럼 사라졌다.
“어어? 어르신! 어르신!”
메시지 창이 떴다.
[크라이언들의 남하가 시작되었으니 만반의 준비를 하거라! 아까 그놈들이 게임에 출현한 것은 일
종의 메세지다. 현실 세계뿐만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세계까지도 장악하려는 선전포고 같은 것이야!
그놈들이 현실 세계를 접수함과 동시에 가상 세계를 포맷하려는 것이 목적이란 걸 잊지 말게!]
<그렇다면 좀 더 자세한 방법을 알려 주세요~>
[받은 코인으로 우선 채무를 전액 다 갚고 남은 것으로 수련을 더 하게나! 더 추워지기 전에...
항상 도와주고 싶지만 나는 이곳을 지켜야 하네...]
코인숍 고객센터에서 곧바로 연락이 왔다. 원금과 이자 전액이 완납되었으니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이다.
"이제 자유다!"
저세계 상제의 옥좌.
“상제 폐하, 어디를 다녀오셨나이까? 옥좌에 계실 것이라고 문안을 아뢰고자 왔으나 계시지 않아
매우 놀랐사옵니다. 어디 불시 시찰이라도 다녀오신 것인지요?”
도승지가 물었다.
“아...그랬던가요...도승지도 이미 앞전에 보고를 했지만 하세계와 중세계에 요즘 기괴한 사건이 점
점 빈번히 발생하고 이상한 기운이 퍼져서 도감의 괴물들이 죽어나가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하지
않았소이까...그래서 내가 상황 파악을 위해 불시에 잠시 다녀 왔소이다"
“폐하, 지하 납골당에 전몰 VR용사들을 기리는 의식(儀式)은 예정대로 거행하시겠습니까?"
“해야지 해야지...미스테리한 사고로 운명을 달리한 VR용사들의 영령을 위로해 드려야지.."
“폐하, 프라니아의 아스테리온 가문의 딸인 프로메가 사라졌습니다. 분명히 영령의 상태가 생존으
로 뜨는데 위치 파악이 되질 않습니다. 매우 드물고 괴이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추측컨대... 멀쩡한 타인의 육신에 빙의되었을 것이다. 혼신의 에너지를 방출하지 않고
임사상태 직전까지 가두고 있으면 여기에서도 감지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 정도의 능력이 있다는 건 아스테리온 혈통에 봉인된 능력이 발현되고 있다는 것인데... 수천
년 동안 발현된 능력자가 없었다고 들었습니다만..."
“그러니까 말이요...이제는 그 능력이 필요하다는 때가 되었다는 반증이 아니겠소...황제는 아마 알
고 있을 것이오...”
“화 화 황제 폐하 말씀이십니까?"
눈동자가 두배는 커진 도승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 아이를 찾기 위해 내 특별히 어사를 보내도록 하겠소”
세콘도라(가상세계).
최고 운영자인 크리에이터가 수석 엔지니어와 VR게임 해킹사고 수습에 관해 긴급 회의를 주재하
고 있다.
“나리, 요즘 심상치 않습니다.
비슷한 사고가 게속 발생하고 있습니다. 고가의 아이템을 순식간에
날린 유저들이 실망하고 ‘라나자(가상 세계 이름)'로 이동하고 있습니다.
소송건도 날로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거 큰일이구만... 도대체 어떤 놈들이 못된 짓을 자꾸 일삼는 거냐 말이다...답답하구만..."
“프로그램이나 코드의 헛점을 노리고 온 자들이 아닌 것 같습니다. 기존 방식이 아닌 전혀 새로운
방법으로 뚫고 들어온 것 같습니다."
“혹시 말이오...얼마 전에 톱랭크 VR 유저들 몇 명이 갑자기 접속을 중단하고 실종된 사건 말이
오... 혹시 그것과 연관이 있지 않은지 알아봐야 하지 않겠소?"
“그러면 이렇게 하시지요... 사이버 수사대에 관련 참고인으로 출석하셔서 그곳에 보관 중인 사건
파일을 어떻게든 카피해서 빼오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나리!"
“당장 수사대에 연락해서 출석 날짜를 잡으시오! 이번 해킹 사건은 사안이 너무나 중대하니 내가
직접 해결하겠소!"
-심조한-
"나... 심조한이야..."
갓게이머, RPG의 제왕, 환상의 플레이어, VR 프론티어 등의 수식어가 항상 따라다녔던 게이머가
있었으니 그가 바로 나였다.
캡콤에서 출시한 아케이드게임 던전앤드래곤 같은 고전게임부터 ‘아처 오브 레전드', '엑스데우스’
같은 갓게임을 설계 단계부터 참여하기도 했다. 업계에서는 내 의견을 상당히 많은 부분에 걸쳐
받아들였다. 내가 참여해서 개발했다는 것을 공공연히 홍보로 활용하기도 했다. 물론 공짜는 아니
다. 받을 만큼 다 받고 허용한 것이었다.
때로는 파밍과 레이드 노역을 하면서 게임 아이템을 산 적도 있었다. 다행히 상금이 많이 걸린
대회에서 운좋게 우승이나 입상을 하면서 좀 더 게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운발이나 효린이도 같
은 시기에 선의의 라이벌이었던 유저들이었다.
“나... 심조한이야! 운발아!"
“넹? 조한이 형님이라구요?"
“그래 맞아... 넌 어떻게 여기에 온 거냐? 혹시 저세계의 메신저를 만났냐?"
“네! 맞아요 그걸 어떻게 형님이..."
“난 오퍼레이션 중에 테러범의 자폭으로 처참하게 당했었어... 근데 그때 메신저라는 자가 나타나
서는 은총이 어쩌고저쩌고... 산화가 어쩌고저쩌고 하더라구... 혹시 너도 같은 말을 들었냐?"
“맞아요 형님! 저도... 어? 근데 지금 엑스데우스 팀전하던 중인데... 이거 기시감이 드는 장면인 것
같아요...왜 이러지?"
아마 내가 그때처럼 팀전 마지막 시즌 게임 플레이 도중에 나타났으니 기시감 어쩌고 할 만하다.
일단 지금은 시간이 정지했다. 내 의지대로 된 건지 아니면 가세계의 권력자가 조종하고 있는지
는 잘 모르겠다. VR구현기술이 현실과 차이가 없는 특이점 수준을 넘어선지는 꽤 오래되었다.
그러니 <이승보다는 탑승>이라는 말도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말이 되었다.
13화. 아르카디아 대륙
현실 세계 지구는 환경이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파괴되어 생명유지의 가장 기본적인 요소인 깨끗
한 공기와 물 그리고 최소한의 식량을 확보하기 위한 전쟁이 끝없이 발발하였다.
승리국이든 패전국이든 상관없이 빈부격차도 극악할 정도로 심해져서 시민들은 삶에서 웃음이 사
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나마 그런 현실을 벗어나 이상향으로 가는 방법이 있다는 것이 시민들에게
는 큰 위로가 되었다. 시민들은 가상 세계에 접속하는 것을 유토피아행 기차에 탑승한다고 표현
할 정도로 가상 세계를 일상을 도피할 수 있는 무릉도원으로 생각하고 있다.
현실과 구분이 안되는 가상 속 가상 세계 ‘엑스데우스’
나도 운발이처럼 꿈인지 엑스데우스인지 헷갈려서 오그멘터의 옵티컬장치를 벗기려고 눈쪽으로
손을 올렸다.
그런데 벗길 장치가 없었다. 그냥 이곳이 바로 현실이었다.
“아~ 그때 비싼 아이템만 지르지 않았다면 테러 진압 오퍼레이션은 안 가도 됐었는데...”
후회해 본들 당장 이 현실을 그때로 되돌릴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상제가 반드시 해야 한다고 말한 '산화'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나는 그게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일단 운발이에게 뭘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나 봐야겠다.
“저저...저기 형님! 여기는 어떻게 들어오신 거예요? 이건 형님 아바타가 아닌데요?"
운발이가 먼저 말을 건넨다.
“VR게임계는 발을 들여놓은지 워낙 오랜된 터라... 내가 아는 사람 중에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사
람 아이디를 잠깐 좀 빌렸어~ 좀 민망하긴 하네... 내 아이디로 당당하게 들어와야 하는데... 지금
은 개인 사정으로 세콘도라 계정을 쓸 수가 없거든..."
다른 사람 아이디라고 대충 둘러대긴 했지만 사실 나는 특별한 아이디를 부여받았다.
크리에이
터가 갖고 있는 슈퍼 유니버셜 아이디였다. 특별히 범죄 사건 관련해서 특정 사용자 계정의 디지
털 증거물을 확보하기 위해 수사기관의 공식적인 의뢰가 들어올 경우에만 특별히 사용한다. 세콘
도라에서 피의자가 사용했던 그 어떤 디지털 흔적이라도 슈퍼 유니버셜 아이디를 사용하면 접근
이 가능하다. 아무리 최고 운영자라고 해도 마음대로 사용할 수는 없다. 로그 기록이 남기 때문에
원칙적으로는 사이버수사청의 청장 승인 후에만 사용이 가능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엑스데우스의 방화벽이 즉시 복구가 안되는 상황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아직
시스템 전체의 문제는 아니지만 계속 이렇게 일부 코드가 손상된 채로 둔다면 언제든지 시스템
전체에 치명적인 결함이 확산될 수 있기 때문에 크리에이터는 고심 끝에 큰 결정을 내렸다. 현존
하는 최고의 게이머이자 프로그래머인 나에게 접근 권한을 공개한 것이다.
“아...그렇게 된 거였구나...근데 1년 전에 피시방에서 갑자기 사려졌다고 얼핏 들었는데... 그동안
어디서 뭐하며 지내신 거예요?"
“말하자면 엄청 긴데... 자세한 얘기는 다음에 해도 되겠지? 오늘은 널 도와주려고 온 거니까~ 암
튼 너 혹시 ‘질러’라고 들어봤니?"
“아뇨... 완전 금시초문인데요?"
“내가 그놈들에게 납치당했었어... VR던전앤드래곤 검투아레나에서 대마도사와 승부를 겨루고 있
던 중이었는데..."
“아! 그러니까 플레이하던 VR쉘에서 갑자기 사라졌다고 들었는데...그게 사실은 그놈들에게 잡혀간
거였네요..."
“고생을 조금 하긴 했지... 계속 엑스데우스의 아이디를 요구하더라구...“
“형님 아이디를요?”
“그놈들이 원한 건 사실 단순히 접속 아이디가 아니라 엑스데우스의 결함을 찾아내기 위해서였
어..."
“결함을요? 그걸 알아내서 뭐하려고 그랬을까요?"
"엑스데우스는 오픈월드 VR이라서 영역이 엄청나게 광대하지 않냐...그 넓은 곳 어디 한 두 군데
에는 결함이 있을 테고 그걸 통해 가상 세계 전체에 뚫고 들어가려고 했던 것 같아!"
“와! 엄청난 일을 꾸미고 있었네요... 질러라는 놈들 말예요..."
나는 잠시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어...그런데 형님 그렇게 고초를 당했는데 거기서 탈출은 하신 건가요?”
“아니~ 운발이 네 소울에 들어와 있다”
"소울 소킹!"
"그래 소울 소킹 맞다, 맞다! 넌 아는 구나..."
"형님은 왜 소울 소킹을 했는데요?”
“내 아바타를 숨겨 놨어... 아바타에는 그동안의 모든 전투의 경험치가 머슬메모리처럼 고스란히
저장되어 있어...일종의 데이터 저장 근육세포라고 해야 할까?"
"그러니까 질러라는 그 못된 놈들이 그 경험치를 노렸던 거네요?"
"그렇지”
운발이는 지금 내 이야기에 완전히 빠져 버렸다. 좀전까지 결투장에 간다면서 뭔가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말이다.
"운발아 지금 돌아가야 할 시간이 됐어... 여긴 위치좌표를 알아내서 순간이동으로 왔거든... 지금
글래셔 대전쟁이 일어나서 곧바로 참전하러 가야해! 이것부터 받아라~ 다음 라운드에서 또 사도
가 들이닥칠지 몰라... 그래서 여기에 네가 좀 숨겨 줬으면 해!"
나는 운발이가 있는 지금 여기로부터 1년 후에 일어날 글래셔 대전쟁 전장에서 왔다. 추격자를
따돌리고 위험을 무릅쓰고 여기에 온 것은 글래셔 대전쟁에서 운발이가 해야 할 중요한 것이 있
기 때문이었다.
내가 전해주고 간 것은 작은 도감이다.
“이 도감 잘 챙겨 둬! 절대로 아무한테도 뺏기면 안돼!"
"네에~ 형님. 이건 형님이 힘들게 모은 괴물 도감 아닙니까? 제가 아무도 모르는 곳에 잘 숨겨
놓겠습니다."
나는 운발이에게 엄지척을 하고는 다시 순간이동으로 되돌아갔다.
'이것들은 비밀 인벤토리에 업로딩하고 단단히 봉인해야겠어!'
운발이는 자신만의 비밀 인벤토리에 보관했다.
-질러-
질러는 일단 가세계와 현실 세계 사이 어디쯤엔가 있다.
그곳을 ‘엑스 월드’라고 많이들 부른다.
그들은 자아가 있고 스스로 사고를 할 수 있지만 나머지는 보통의 생명체와는 다르다. 좀비도 아
니고 외계인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고 산 것도 아니고 뚜렷하게 정의내릴 수 없는 특이한 존재
임에 틀림없다.
주로 현실 세계나 세콘도라로 침투해서 육신이나 영혼을 강탈해 간다. 사람이든 괴물이든 마구
납치해서 돌연변이 실험에 사용한다.
그들의 명분은 현실과 가상 세계 내 권력이 한쪽으로 너무 기울어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한다는 것
이었다.
어느 차원에서는 디지털 문명이 부흥을 이루고 있고...
또 다른 차원에서는 짧은 간빙기가 끝나가고 새로운 긴 빙하기가 시작하려 한다.
질러는 겨울이 매년 조금씩 길어지면서 냉혈족인 크라이언들이 남하를 시작하자 그들의 힘을 이
용해 인간 문명을 파괴하려는 프로젝트를 계획한다.
약 5천 년 전.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대륙 아르카디아에는
이다화이트, 핑갈라그린, 수슘나레드, 다크아더 라는 여러 문명이 있었다. 그리고 각기 다른 문명
의 지평 안에서는 유사하게 관습과 질서를 따르고 존속시키는 크고 작은 국가들이 세워져 있었다.
어느날,
이다화이트의 프리미스라는 문명인들이 북쪽에 거주하는 다크사이드(dark scythe)족을 침략하여
거주지를 빼았고 더 추운 위쪽지역으로 몰아내는 사건이 발생한다.
그들은 냉습한 대륙으로 쫓겨나서 궁핍하고 비참한 처지에 놓이게 되었다. 그들의 지도자인 데스
크라이요는 자신을 희생시켜 가며 마지막 방법으로 흑마법이 지배하는 그라운드인 다크아더에에
서 아주 오랜세월동안 동면할 수 있는 방법을 배워와서 백성들을 기나긴 동면상태에 들어가게 만
들었다.
수천 년의 세월이 흐르자 냉습했던 영토에 따사로운 온기가 스며들기 시작했다.
우주의 기운과 지구의 회전각이 미세하게 변하면서 땅 속 깊은 곳에서 마그마가 조금씩 위로 움
직였는데 그것이 이곳의 땅에 변화를 준 것이다.
바야흐로 햇볕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이것이 간빙기였다.
태양과 우주기후의 예상치 못한 변화로 인해 냉습한 땅이 조금씩 녹고 밝아지기 시작했다. 그 이
전에 수 백년을 동면상태로 있다가 잠을 깬 다크사이드는 그들도 굶주린 배를 채워줄 양식을 찾
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간빙기가 도래하기 약 1만 년 전에 만들어진 글래셔라는 거
대한 빙하 장벽 너머에 있는 자신들의 옛 거주지로 돌아갈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것을 주도한 이
는 새 지도자 킹크라이요였다. 선대 데스크라이요의 능력을 물려받은 주술력으로 상상을 초월한
재주를 지니게 되었다.
글래셔의 아래쪽인 북부의 변방에는 엘렉드람이라고 불리는 기전마법 종족들이 있다.
그들은 ‘오르비스트리 숲’에서 살며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리고 그 옆동네에는 거대철인들이 살
고 있었다.
엘렉드람은 영역을 구분하여 서로 침범하지 않고 거대철인들과 살고 있었다.
글래셔를 뚫고 남하한 다크 사이드는 아주 오랜 세월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수렵과 채집을 시
작했다. 그들의 주식인 냉버섯과 갑옷버섯을 채취하기 위해 엘렉드람의 숲을 훼손하기 시작했다.
몇 명씩 부딪쳐 싸우는 집단격투에서 수 십명 이상이 벤치클리어링처럼 뒤엉키는 무력충돌이 자
주 발생하였다. 다크 사이드는 그들의 이름처럼 검은색의 휘어진 날을 만들어서 들고 다녔다. 아
주 차가운 쇠붙이라고 해야 할까~ 이 차가운 날이 닿으면 그 부위는 순식간에 초저온상태로 얼
어붙는다. 얼어버린 부위를 다시 가격하면 얼어붙은 꽃잎처럼 산산조각이 났다.
엘렉드람에게는 그들의 정신적인 지주이자 실질적인 통치자인 미스터리 멘기조가 있었다.
미스터리 멘기조는 다크 사이드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선발대를 보낼 것이라는 조짐을 정확하
게 예상하고 다크 사이드 선발대가 이전에 그들이 뚫어놓은 글래셔 터널을 지나갈 때를 기다렸다
가 기전마법으로 무너뜨려 버린다. 그렇게 수 천명의 다크 사이드 선발대를 빙하에 파묻히게 해
서 몰살시켜 버린다.
다크 사이드의 보스인 킹크라이요는 전열을 가다듬고 초저온 스피어와 브레이커로 무장한 크라이
언들을 내세우며 멘기조가 이끄는 엘렉드람과의 전면전을 선포한다.
엘렉드람에는 기전화살을 쏘는 명궁사들이 있었는데 그들의 활약으로 인해 초반에는 엄청난 승리
를 거둔다. 하지만 전쟁이 길어지자 전황이 한쪽으로만 기울지 않고 엎치락뒤치락 하였다.
그렇게 대략 오백 년 동안 두 종족은 이다화이트 영토의 수렵과 채집에 대한 주도권을 두고 치열
하게 싸웠다. 엘렉드람은 기전술을 더욱 업그레이드시켜 다크사이드의 약점을 계속 강하게 밀어
부쳤다. 그리고 동맹을 결의한 거대철인들의 도움으로 대륙과 붙어있던 빙하를 부수고 빙하와 땅
사이에 운하같은 것을 만들었다. 그리고 땅끝 곳곳에 뇌전을 일으키는 기전 장치를 설치하였다.
다크 사이드가 더 이상 이다화이트로 건너오지 못하도록 한 것이었다. 긴 전쟁에 지친 두 종족은
그렇게 강제 휴전상황이 되었다.
-주운발-
그래 그 때 ‘허'라는 놈한테 들은 이름이 바로 심조한이었다. 그래서 꼭 만나고 싶었는데...
오늘 정말 우연히 소원을 이뤘다. 잠깐이지만 형이 나를 찾아 준 것이 너무 감개무량했다.
나는 하세계에 가기 직전에 다시 이곳에서 가져갈 것이 있어서 왔다.
고가의 아이템을 차지할 수 있는 파쇄장 라운드로 직행했다.
나는 자신이 있었다. 파쇄장에서 최고의 파이터가 될 각오가 되어 있었다.
이왕에 마음먹은 거 채무를 한방에 다 갚고 내가 필요한 그 아이템을 갖기 위해 라운드로 향했다.
주작이 내가 죽었다고 알려주기 전에 그러니까 살아 있을 때 내 채무가 있었다. 알고보니 대회에
서 사용할 허용 아이템을 인벤토리에 채워 넣기 위해서였다.
그전에 대회에서 받은 시상금은 어
떻게 했냐고? 그건... 슬퍼서 말하기가 좀 그렇다... 독자를 위해 조금만 말한다면 행방불명된 형을
찾기 위해 온갖 방법을 시도하는데 그 돈을 사용했다.
그래서 막상 대회에 다시 참가할 때는 코
인충전할 돈이 없었다. 그렇게 됐던 것이다. 암튼 코인숍을 통해 고이자의 코인을 빌려서 아이템
을 채웠다.
마지막 남은 1000코인으로 살 수 있는 것은 워울프였다.
나는 채무를 한방에 다 갚기 위해 파쇄장 라운드로 갔다. 죽든 부활하든 내가 진 채무는 내가 해
결하는 게 당연했다.
“워울프, 잘 부탁해!"
[이번 강제 노역 파쇄장 라운드는 거대 로봇간의 대결입니다]
[승자는 10만 코인과
YF-21 스톰버드를 보상으로 드립니다]
“야호 이거야 이거 내가 바라던 스톰버드!"
나는 이것을 캡슐에 담아 하세계에 들어갈 것이다. 이유는 없다. 이것은 내 최애 피규어이기 때문
이다.
상대는 어떤 로봇 병기를 들고 나올 것인가?
14화. 변신검
-주운발-
나의 워울프는 장난감 자판기에서 뽑은 것처럼 캡슐 안에 아주 작은 피규어 같았다. 캡슐을 던
지자 트랜스포머가 자동차에서 로봇으로 변신할 때 나는 금속소리가 나면서 점점 커졌다.
마침내 완성된 모습으로 우뚝 솟은 거대 워울프를 보면서 나는 감탄을 금치 못했다. 배 아래쪽에
서 사다리처럼 생긴 자동승강기가 내려왔다. 위로 올라가 조종석에 앉았다. 이제는 팔찌를 착용할
때이다. 이 팔찌에는 마이크 기능이 내장되어 있다. 이것이 있으면 음성 명령으로도 워울프를 제
어할 수 있다.
테스트 조종을 시작했다.
조종석 앞에 놓인 콘솔에는 버튼이 줄줄이 달려 있었고, 그 중 하나를 누르자 엔진이 점화되었다.
나는 연료공급밸브를 좀 더 열어주고 양쪽 발끝에 달린 로켓 부스터를 점화시킨 다음 기지를 벗
어나 하늘로 솟아올랐다. 이 때 팔찌에 입을 가까이 대로 '전투기로 변신'이라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자 곧바로 인식을 하고 변신기동을 하기 시작했다.
“역시 가성비 최고야 하하하!”
워울프의 전투기 모드는 마크로스에 등장하는 전투기 YF19호를 많이 닮았다. YF는 전투기도 되고
로봇도 되는 가변형 전투기이다. 음속으로 비행하다 급선회나 급정지가 가능하다. 전투비행과 로
봇 변신을 얼마나 적절하게 잘 운용하느냐가 승리의 관건이다. 로봇으로 변신한 모습을 보면 팔
에 방패가 장착되어서 방어하고 반격하기에 좋다.
상대측에서 캡슐이 굴러왔다.
‘에바'라고 큰 소리의 기계적인 음성이 들렸다.
거대한 생체로봇이
나타났다.
에반게리온 1호기였다.
전혀 예상을 하지 못한 나는 너무 놀라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뭐야~ 저건 반칙이잖아!'
[코인으로 정식 구매한 것이면 규칙에 위배되지 않습니다]
심판진에서 음성이 들렸다.
<근데요...저놈이 어떤 공격타입인지 어떤 무기를 갖고 있는지 저놈 이름 말곤 아는 게 하나도 없
어요~>
나는 인공지능 세리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에바는 엑스데우스에서 거대 생체로봇 중 공격력/방어력 평점 상위 2%에 드는 최강의 생체로봇
입니다.
방어막 AT 필드를 두를 수 있고 기갑부대 1~2개 사단을 순식간에 날려 버릴 만큼 어마
어마한 화력과 방어력을 갖추고 있습니다]
<혹시 에바의 약점이 있으면 알려줘요~>
[전원 케이블이 끊어졌을 때 자체 배터리 가동시간 3분 동안 치명타를 피하면 반격의 기회를 엿
볼 수 있습니다]
“아하! 에바는 3분만 견디면 일단 어느 정도 요리는 할 수 있겠구만!”
물론 마인드 컨트롤하기 위해서 최대한 긍정적을 생각하자면 말이다. 아무리 배터리 가동 제한이
있어도 3분까지 버티고 반격한다는 게 결코 만만치가 않다.
암튼 파쇄장 결투까지 온 것 자체는 안타깝고 서글픈 일이지만 이런 결투 게임을 설계한 프로그
래머가 정말 대단하단 생각이 든다.
일단 시작하기 전에 상대측 에바의 외관을 훑어 특징을 파악했다.
에바의 안면부를 보면 케라톱스가 붙은 각룡류의 두개골과 비슷하고 뿔과 헬멧이 일체로 되어 있
었다.
눈이 렌즈로 가려져있지 않고, 헬멧의 눈두덩 안에 그대로 노출되어있어서 마치 해골같아 보이는
인상이다. 각룡의 입처럼 특별한 경우엔 쩍하고 벌어질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아...3분이면 길다 길어! 어떻게 막아 내지...그것도 케이블을 끊어야 가능하잖아"
에바가 달려오기 시작했다.
“큰일났네!”
워울프를 붙여 봐야 직감적으로 승산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리! 어떻게 해야 해?>
[인벤토리에 대응 적합도 90퍼센트인 변신검이 하나 있습니다]
[워울프를 포기하고 변신검을 사용하시겠습니까?]
“맞다! 변신검이 있었지... 빨리 바꿔! 바꿔!”
[다운로드 컴플리트]
변신검은 검날 옆에 작은 날이 일정 간격으로 가지처럼 돋아 있다.
길이는 180 센티미터쯤 되고, 무게는 크기만큼 꽤 묵직하다.
지축이 울린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인가!
에바의 뜀박질이 지축을 뒤흔들었다.
[에바의 명치를 향해 지금 변신검을 던지세요]
“활이면 잘 할 수 있는데...검은 경험치가 너무 없어...”
[창던지기 하듯이 그렇게 던지세요]
올림픽 경기에서 본 것이 전부인 창던지기. 암튼 시늉이긴 했지만 그럴듯하게 자세를 취하고 투
창처럼 변신검을 온 힘을 다해 던졌다.
저놈은 미처 예상을 못했으리라!
알파고처럼 딥러닝으로 진화해온 저놈의 악성 프로그램이 변신검을 일반적인 검으로 생각했을 것
이다.
변신검은 워낙 고가인데다가 일반 유저들이 사용하는 경우가 아주 드물다. 그러니 당연히
저놈에게 학습이 안됐을 것이다.
당연히 아무런 데미지도 주지 못할 것이라고 여기고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부패균이 묻어있는 치명적인 생선가시처럼 흉곽 부위의 갑옷 바로 아래에 정확하
게 꽃혔다.
“와~ 드디어 변신한다”
가지처럼 보이는 작은 칼날들이 나선형으로 본체에 감기면서 회전하기 시작했다.
흉곽아래를 서서히 파고 들어갔다.
“와!”
변신검이 마치 드릴처럼 에바의 흉곽을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에바 1호기는 고통스러운지 턱이 쩍하고 벌어졌다. 두 손으로 파고드는 변신검을 빼내려고 잡았
다.
하지만 회전하는 검날에 에바의 손가락이 다 잘려 나갔다.
고통이 더 가중되었다. 턱은 더 벌어졌다.
“잘하다! 변신검”
변신검이 에바의 몸체 속으로 들어간지 10여 초가 지나자 밖으로 기다란 뭔가가 나오기 시작했다.
“변신검이 길어졌어!"
큰 줄기날과 가지날이 길어지면서 에바의 몸체안에서 밖으로 뚫고 나온 것이었다.
"와~~! 몸 전체를 다 감아 버릴 모양인데..."
에바가 한 것은 달려온 것이 전부였다. 최상급 레벨의 생체로봇인 에바가 실력 발휘도 전혀 못하
고 있었다.
작은 변신검에 지금 완전히 작살날 판이었다.
온 몸을 칭칭 감긴 에바는 턱을 아래로 쩍 벌리며 고통스러워했다.
그때 갑자기 에바의 체온이 급격히 상승했다. 몸체도 변신검도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내구도가 있는 검이라고 했잖아요! 저렇게 온도를 상승시키면 날을 쓸 수가 없어요>
[놈은 죽을 각오로 궁극 필살기를 사용한 것입니다. 평소에는 적병기를 끌어안고 몸체를 포기하면
서 마지막으로 사용하는 수단인데 변신검 공격에 다른 무기는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으니 마지막
으로 궁극 필살기를 선택한 것입니다]
초고온 블레이저!
변신검은 점점 녹아서 끊어지거나 쇳물이 되어 흘러내렸다.
[에바의 기동시간은 이제 30초가 남았습니다]
에바의 흉곽 갑옷 덮개가 양쪽으로 쩍하고 열렸다.
[순간 온도 섭씨 2천도가 넘는 초고온의 블레이저를 발사할 것입니다. 이것에 닿는 물체는 모조리
순식간에 녹아서 사라질 것입니다. 즉시 피하셔야 합니다]
"아이구야 잘 되가나 싶었더니만...이제 방법이 없어..."
나는 바닥에 털썩 주저 앉아 버렸다.
그냥 에바가 천천히 걸어오는 모습을 넋을 잃고 지켜보고만 있었다.
여기서 지면 파쇄기 속으로 들어가 극도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
그러면 한동안 트라우마때문에
노역소든 어디든 다시 도전할 엄두가 나지 않을 것이다.
환혼석 그냥 포기할까?
부활의 기회를 얻기 위해 첫 삽을 잘 뜨는가 싶었는데 여기서 계획에 차질이 생겼다.
[운발님, 계획에 차질이 생겼습니다]
<아니! 보세요! 지금 염장지르는 거예요? 방금 전 내 생각을 읽고 따라한 거잖아요!>
[브압 한 분이 고가의 아이스 스피어를 구입하라고 코인 10만 코인을 기부하셨습니다]
<네엥? 아이스 스피어요?>
[네 지금 바로 사용하시겠습니까?]
<넵!>
[다운로드 컴플리트]
<근데, 이거 어케 써요?>
[변신검처럼 가슴을 향해 힘껏 던지세요! 서둘러야 합니다!]
에바의 흉곽이 열리며 슈퍼 블레이저를 발사하기 직전이었다.
나는 자세를 재빨리 가다듬고 창던지기를 하듯이 온 힘을 다해 세게 던졌다.
동시에 슈퍼 블레이저도 발사되었다.
나는 앞으로 고부라져 쓰러졌다. 겨우 고개를 들어 앞을 바라보았다.
[아이스 스피어는 불속성 괴물에 대항하는 최고 아이템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2천도가 넘는 슈퍼 블레이저에 녹지 않을까요?>
[아이스 스피어는 3천도까지 견딥니다]
<오 마이 갓!>
[앞을 보세요!]
스피어의 냉기에 블레이저의 열기가 누그러지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스피어가 에바의 열린 흉곽 안으로 정확하게 꽂혔다.
고온의 열기를 누그러뜨릴 만큼의 초저온 냉기가 에바의 갑옷으로 쫘악 퍼지는 것이
보였다. 서리를 맞은 듯 하얗게 얼음결정체가 퍼졌다.
결국 겉과 안의 엄청난 온도 차이로 인해 에바는 그대로 폭발하고 말았다.
<어둠의 사냥꾼>
4일째 되는 날 실험실의 아이들은 모두 죽었다. 단 한 명의 아이만 살아 남았다. 이후 그 아이는
갑작스러운 발작과 경기(驚氣)를 일으켰다. 온몸을 떨던 그 아이는 갑자기 깊은 혼수상태에 빠져
들었다. 눈동자의 색깔이 매일 변했다. 쉴 새 없이 손으로 벽을 긁거나 이불을 쥐어뜯거나 손을
뻗어 마치 날아다니는 새라도 잡으려는 듯 창밖 허공으로 뛰쳐나가려 했다. 숨소리는 점점 더 커
졌고 호흡이 일시적으로 멎었다가 다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아졌으며 , 진한 색의 땀과 끈끈하고
냄새나는 액체들이 피부로 새어 나오고 있었다. 그러자 연구원은 다시 동맥에 이상한 액체를 주
입했다. 이러한 과정이 매일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어느날 아이의 코에서 피가 나고 기침을 심하
게 하다가 구토를 했다. 토한 이후 아이는 완전히 힘이 빠져 전혀 몸을 가누지 못했다.
이후 적절한 대증요법을 실시했으나 2~3일이 경과해도 증상은 완화되지 않았다. 진한색의 땀으
로 뒤덮여 있던 아이의 피부는 점점 건조해지고 검게 변했으며, 부정맥이 발생했다가 정상으로
돌아왔다가 했다. 아이는 그동안 단 한순간도 온전한 정신 상태를 보이지 않았으며, 7일째는 소리
를 지르지는 않았다.
마침내 9일째 되는 날이 왔다. 아이는 마치 꿈이라도 꾸다 일어난 것처럼 깨어나 눈을 떴다. 그
런데 아이의 눈동자가 마치 고양이의 눈처럼 변해 있었다.
*다크 헌터로 변신하는 것을 본 실제 목격담을 기록함.
(괴물 관리국 1급 기밀)
-윤도훈-
[정보 제공]
[불새와 피닉스를 혼동하지 마시오]
<엥?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래요?
왠지 학습받는 것 같은 이 느낌은 뭐죠?>
[피닉스는 불속성이 아니라 불사의 집혼석이 필요합니다. 불사라는 것은 죽어도 다시 부활하는 것
인데 게임의 엑스트라 라이프 같은 것입니다. 반면에 불새는 불속성을 가진 영물인데 온 몸이 말
그대로 화염으로 변하는 새입니다. 소환하려면 불기운의 집혼석이 있어야 합니다]
<전설의 게이머들만이 소유하고 통제할 수 있었다던 바로 그 집혼석 말이죠?>
[네, 그렇습니다. 집혼석을 갖는다는 것은 그것의 집혼력을 감당해내고 지배하고 통제한다는 것입
니다]
<근데 집혼이 정확한 무슨 뜻입니까?>
[집혼이란 집혼석에 괴물의 영혼을 흡수해서 저장하는 것을 뜻합니다. 괴물의 혼을 흡수하면 집혼
석의 파워가 올라가고 흡수한 집혼석으로 고차원의 속성을 발휘할 수 있다. 괴물 도감에는 필수
적인 요소입니다]
<그러면 그걸 어떻게 구할 수 있는데요?>
[일단 집혼을 하려면 몹을 사냥해야 합니다. 힘들긴 하지만 중상급이나 중간 보스급 괴물을 사냥
하면 랜덤으로 떨어진다.
의 파워도 점점 강해진다.
중급이상 괴물을 잡고 집혼석을 얻어 영혼을 많이 모을수록 해당 속성
그리고 일정 수준 이상 파워를 더 올리려면 더 센 놈이나 보스급을
잡아야 합니다]
<그러면 많이 때려 잡기만 하면 되는 겁니까?>
[여기서 주의해야 하는 것은 무조건 많이 잡는다고 능사가 아닙니다. 집혼의 파워가 너무 강해져
통제력을 잃게 되면 오히려 집혼석에 정심감응을 당하면 되돌리는데 상당히 힘이 듭니다]
<아이고...힘들겠네요>
[정신감응력이 고도의 수준이 이르지 못하면 집혼석에 모인 영혼에 의해 정신세계가 잡아먹히고
맙니다]
<머리 아파서 안 할랍니다>
[예를 들어 불사의 속성을 얻기 위해서는 언데드 크리퍼를 잡아야 한다. 그런데 크리퍼의 영혼을
모은 집혼석이 점점 강해져서 오히려 게이머가 정신감응을 당하게 되면 집혼석이 파괴되지 않는
이상 크리퍼로 활동하 됩니다]
<속성 다시 정리해 주세요>
[불새는 불의 속성이고 피닉스는 불사의 속성입니다]
윤도훈은 곧 괴물 도감을 본격적으로 만들기 위해 괴물 도감 인공지능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아하~ 그렇구나!"
"추운 곳에서 싸우게 되면... 둘 다 갖는게 가장 이상적이겠네요~"
"앞으로 이 두 속성이 꽤 많이 사용될 것 같은데 헷갈리지 말고 잘 사용하라는 말이겠지~"
[가장 강력한 다크 헌터가 되면 괴물 도감은 절대 도감으로 격상시킬 수 있습니다]
<그래요? 그럼 다크 헌터에 대해 간단히 설명 좀 부탁해요>
[다크 헌터로 빙의해서 실전을 경험하시죠]
선택을 물어보기도 전에 이미 테스트 라운드가 차려졌다.
이곳은 너무 추웠다.
“하필이면 이런 추운 데를 선택했지?”
15화. 최강의 소울 무버를 만나다.
-윤도훈-
[서버에서 열이 발생하기 때문에 식히려고 그런 것 아닐까요]
<오호! 똑똑한데~>
나는 난데없이 이런 상황에 내던져진 것을 불평하면서도 도감A.I.의 재치에 웃을 수밖에 없었다.
[크라이언이 도전을 신청하였습니다. 받으시겠습니까?]
‘뭐~어~? 도전~~이라고?’
<혹시 크라이언이란 놈이 좀 센 놈인가요?>
[아마도요...]
<아마도요? 아~왜~처음부터 센 놈을 보내요?>
[테스트지만 1만 코인은 깔아 드립니다. 이기면 5만 코인이 바로 지급됩니다]
<지면요~? 지면 어떻게 되는데요?>
[대결에서 질 경우에는 이번 라운드를 통과할 때까지 불새 속성 없이 싸워야 합니다]
<에헤이~ 딱보니까 연습이 연습이 아니구만~ 계속 어떻게든 나를 굴리려고 만든 거네! >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선택은 무슨 선택! 강제 노역이구만!’
<어차피 밖에는 더 센 놈들이 많을 텐데...까짓것 할게요! 콜!>
[확률은 반반입니다]
<오케이 콜!>
[결투 장소로 이동합니다]
<이번엔 뭔가 느낌이 다른데...>
[눈밭에서 라운드를 시작합니다]
이놈의 크라이언은 폭이 어른 손 한뼘에 길이는 어른 키 정도 되는 제이드 글레이브를 들고 있었
다. 장검은 옅은 옥빛을 내고 있었다.
갑자기 검을 앞으로 향하며 번개처럼 빠르게 달려왔다. 이
놈은 눈밭을 밟고 달리는 게 아니라 약간 떠서 순간이동 하듯이 오고 있었다.
<어어! 시작 휘슬도 안불렀잖아요~>
[조심하세요!]
도감A.I.가 목소리가 귀에 쏙 꽂혔다.
[인벤토리를 열었습니다]
<뭐야 낫 밖에 없어요?>
[지금은 쿠크리만 가능합니다]
<아니 왜 이런 건 미리 알려줘야죠 무기가 불리한데 내가 왜 도전을 받겠어요~! 이거 완전히 실
패각이예요!>
[쿠크리는 불리한 무기가 아닙니다]
쿠크리는 손잡이가 짧고 날이 반원 모양으로 구부러진 단검이다.
놈이 먼저 제이드 글레이브로 선빵을 휘두르는 바람에 균형을 잃고 넘어졌다. 놈의 장검이 허공
을 갈랐다. 다시 번쩍 들어 휘둘 자세를 잡았다. 이번엔 쿠크리로 겨우 막았다. 챙 하는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고막을 때렸다..
눈밭 한켠에는 나무 기둥이 곳곳에 박혀 있었다.
나는 재빨리
그쪽으로 내달렸다. 크라이언은 금새 쫓아왔다. 이쪽으로 와서도 계속 장검을 휘둘렀다. 나무기둥
들이 마구 잘려나갔다.
‘뭐가 불리하지 않다는 거야! 두 번만 부딪치면 박살나겠구만!'
이번엔 막다가 손에서 그만 놓쳐 버렸다. 크라이언은 등뒤로 장검을 돌려 세차게 앞으로 휘두르
며 내 얼굴쪽으로 내려 찍었다. 나는 잘려나간 나무토막을 반사적으로 들어서 막았다. 날이 나무
에 찍혔다. 나무통이 굵어서 겨우 살았다.나무통을 잡고 옆으로 세게 제꼈다. 크라이언은 당황한
나머지 손에서 장검을 놓쳤 버렸다.
나는 재빨리 쿠크리를 집어 들었다.
‘아니 근데 이걸로 뭘 어찌 하라고’
[쿠크리에 불속성의 집혼석을 사용하세요]
<어떻게 하면 되는데요?>
[집혼석을 기운을 불러내는데 한 번에 1만 코인이 필요합니다. 사용하시겠습니까?]
<와~ 어쩔 수 없이 아까 기본으로 받은 거 다 써야 되겠네요! 콜!>
[쿠크리에 불속성이 스며들었습니다. 지금부터 휘두르면 금속도 잘리는 커터빔이 날아갑니다]
쿠크리의 날이 좀 더 휘고 길어졌다. 모양이 점점 낫과 비슷해졌다. 그리고 붉은 빛이 돌기 시작
했다.
나는 어리둥절했다.
‘집혼석을 사용하면 이렇게 무기가 향상되는구나!'
<실전에서도 이렇게 하면 다 쓸어버리겠는데요>
[실전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변수가 아주 많습니다]
쿠크리를 마구 휘둘렀다. 반원모양의 커터빔이 웅웅 소리를 내며 빠르게 크라이언에게 날아갔다.
놈은 굵은 나무에 박힌 글레이브를 다급히 빼내고 돌아서며 커터빔을 겨우 막아냈다.
“다크 사이드의 이름으로 너를 처단하겠다"
“뭥미? 다크...뭐라고?"
놈이 다크 어쩌고저쩌고하면서 이상한 말을 자꾸 하길래 짜증이 나서 빨리 처리하고 싶어졌다.
쿠크리를 아주 빠르게 엑스자로 휘둘렀다. 휘두르는대로 커터빔이 생성돼 날아갔다.
크라이언은 장검으로 한 두개는 막았으나 워낙에 크고 무거워서 계속 날아오는 빔을 재빠르게 피
해 다니는 게 힘들었다. 결국 연속으로 날아오는 것들은 미처 막지 못했다. 정통으로 맞은 팔다리
는 모두 다 잘려나갔다.
“크어어억! 크어어억!" 크라이언이 거친 괴성을 냈다. 고통의 소리가 아니라 어떻게든 움직여 보려
고 발악하는 소리로 들렸다.
잘린 손에 쥐어져 있는 제이드 글레이드를 바라보았다.
<이제 게임 끝난 거 아닌가요?>
[적의 숨통이 끊어져야 결투가 종료됩니다]
<그러면 집혼석 없이 그냥 사용할게요>
[불속성의 집혼석을 회수하겠습니다]
몸이 모두 잘려서 저항을 하지 못하는 놈에게 마지막으로 한마디 했다.
“실전같은 연습이긴 하지만 결투는 결투니 네가 이해해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놈의 목을 향해 쿠크리를 휘둘렀다.
[다크 헌터 체험을 종료합니다]
[이제 도감으로 이동합니다]
“어? 여...여기가 어디야?"
-화닌-
여전히 냉기가 누그러질 기미가 없던 어느 날.
붉은 벽의 성이 불타는 꿈을 꾼 화닌은 서둘러 떠날 채비를 꾸렸다.
숲의 수호신들에게 받은 산양 땅빛을 타고 선지자의 나무로 부터 프로메가 갇혀 있는 붉은 벽의
성을 찾아 나선 것이다.
화닌은
얼어 붙은 손을 비비며 입김을 불었다. 빛의 속도로 선지자의 나무를 따라 이동하는 것
을
마스터하고 본격적으로 프로메를 찾아 나섰다.
화닌은 수호신들에게 배운 불마법을 요긴하게 사용했다. 살을 에는 듯한 냉기는 사라지고
인삼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체질처럼 목아래부터 열기가 느껴졌다. 웅크렸던 몸을 쫙 펴니 냉기에
뼈가 쑤시는 고통스런 느낌도 사라졌다. 더불어 배고픔도 느껴지지 않았다. 화닌은 불마법이 제대
로 효과를 나타내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마침내 냉기가 가득한 미혹의 숲을 빠져나왔다. 마법이 걸린 숲에서는 마법으로 그것을 이겨내야
함을 깨우치는 계기가 됐다. 흰머리 산을 넘어가면 붉은 벽의 성으로 가는 비교적 평탄한 길이
나올 것이다.
이른 아침이나 해가 넘어가기 직전 해가 구름 사이를 뚫고 비칠 때 드물게 황금빛
으로 빛나는 눈 쌓인 흰머리 산을 바라보았다.
이제 산맥에 가까워진 만큼 조금 더 주의해야만
했다.
라넬 지방 주위의 땅은 험하고 사람이 닿지 못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었고, 지금 목표로 잡고 향
하고 있는 화강암 지대의 골짜기는, 이 지역에 익숙하지 않은 눈으로는 길을 찾기가 어려운 곳이
었다. 수많은 계곡이나 협곡으로 한 번만 잘못 꺾어 들어가도 길을 잃어버리기 딱 좋다.
여러 번 가본 길이라도 해도 자칫 잠깐이라도 정신줄을 놓으면 헤매기 십상이다.
내 앞에는 커다란 바위로 가득한 넓은 계곡이 펼쳐졌다. 반대편 끝에는 급경사로 이어져 있었다.
계곡 가운데로 얇은 얼음이 낀 얕은 강물이 흐르고 있었다. 산양을 타고는 어렵지 않게 건널 수
있었다.
물이 차가워서 산양이 더 힘들어질까봐 최대한 빨리 건너도록 옆구리에 박차를 가했다.
나는 반대편에 다다른 직후 하늘을 쳐다보았다. 냉기가 점점 더 몰려올 것 같았다. 흰머리산을 넘
다가 눈보라를 맞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 어두워지기 작은 동굴이라도 찾아야 했다. 혹
시라도 눈뎦인 산을 넘다가 길을 헤맬 것이 우려되면 숲의 수호신들에게 배운 스캔능력을 써먹을
것이다. 어차피 추위에서 최대한 써먹을 수 있는 방법을 배워뒀기 때문에 그나마 다행이다 싶었
다.
흰머리산은 그다지 높은 산이 아니었다. 붉은 벽돌의 성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이기도 하고
아주 험한 지형이 아니었다. 바위 위에서 부는 바람은 이미 눈비에 섞여 얼굴을 에는 것도, 매섭
게 휘몰아치지도 않아 비교적 따뜻하게 느껴졌다.
갑자기 산양이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경사가 가파른 눈길로 향하던 것을 중단하고 좀 돌아
가지만 빽빽한 숲 길을 선택했다. 산양의 걸음걸이가 훨씬 가벼워진 것 같았다.
“야~ 땅빛! 너 좀 수월하냐?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다” 숲 길 입구에서 잠시 내려서 배낭에 있
던 물을 먹였다. 나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지나간 흔적을 찾았다. 이 쪽에는 크라
이언들이 자주 출몰해서 향료 상인들이 요즘에는 이쪽 루트로 지나다니지 않았다. 잡풀이 길을
다 덮어버린지 꽤 오래되었기 때문에 예전에 상인들이 다녔던 흔적을 찾으려고 이곳저곳을 자세
히 둘러보았다. 말을 타고 달리는 도중에 쳐낸 나뭇가지가 혹시 잡풀 아래 흙바닥에 남아 있는지
꼼꼼히 살펴보았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이 길이 아닌가벼...”
실망하고 그냥 새 루트를 뚫어야겠다고 마음을 먹으려는 그때, 숲 사이로 흐릿하지만 침엽수에
박혀 있는 화살이 보였다. 잘못 봤을까봐 눈을 비비고 다시 촛점을 맞췄다.
“뭐야? 여기에 웬 화살이..."
땅빛은 이미 잡풀을 뜯기 시작했다. 이놈을 타고 더 둘러 보고싶었으나 배가 많이 고플 것이 안
쓰러워 그냥 뛰어서 확인하러 갔다. 곳곳에 화살이 보였다. 가만히 보니 말을 타고 활쏘기를 연습
한 것이 분명하다. 나무 몇 개마다 일정 간격으로 화살일 박혀 있었던 것이다.
붉은 벽돌의 성에서 호위병들이 신병을 뽑고 훈련을 시킬 때 성에서 가까운 숲의 일부를 훈련장
으로 활용했었다는 것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주변국들과 전쟁에 거듭 패하면서 영주와 백성들이
다른 영토로 피난을 간 뒤로는 이곳도 방치되었다. 그렇게 사람들의 기억에서 이 숲은 사라졌던
것이다.
그런데 웬 화살이...
둘러보다 보니 숲 속 낮은 계곡과 절벽까지 가게 되었다. 이 지점에는 이끼가 뒤덮인 바위들이
곳곳에 자연적으로 놓여 있었다.
바위를 둘러보다가 나는 깜짝 놀랐다.
“이럴 수가! 바위에도 화살이 박혀 있다니!"
그때였다. 주위 침엽수 중 어딘가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재빨리 360도를 회전하면서 둘러보았다. 건조한 나무껍질을 발로 디디는 소리였다.
계속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어디에 숨은 거야?"
누군가 있는 게 확실했다. 날다림쥐처럼 나무와 나무를 옮겨 다니고 있는 게 분명했다.
눈을 잠시 감고 놈의 방향을 추측했다. 계곡쪽으로 향했다. 재빨리 뛰었다.
몇 초후에 계곡 가파른 면에서 비명소리가 들렸다. 그쪽으로 다시 황급히 뛰어 갔다.
낭떠러지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떨어지면 큰 부상을 입을 수 있는 지점에 한 아이가 나뭇가지를
붙들고 겨우 매달려 있었다.
“어서 잡아!"
다행히 놈은 그리 무겁지 않아서 두 손으로 무사히 끌어 올리는 데 성공했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지는 흙칠을 한 얼굴에 팔뚝에 근육이 울룩불룩해서 남자 아이인줄 알았다.
“나무에서 미끄러 떨어졌나 보구나!"
떨어지면서 나무 가지와 바위에 부딪치며 생긴 찰과상에 피가 났다.
“아이고 아파겠네! 난 나쁜 사람 아니니까 안심해라! 진짜야!"
눈에는 겁을 잔뜩 먹은 기색이 역력했다.
“겁먹지마! 아저씨는 널 도와주려는 거야 우선 상처가 깊어지지 않도록 이걸 좀 바를 게”
마침 이곳에 주목이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주목 껍질이 떨어져 서서히 자연적으로 부패된 자리
의 촉촉한 흙을 살살 긁어 뭉쳐서 상처에 바르면 곪는 것을 막아준다.
“많이 아프지 않냐?"
아이는 상처에 손을 대니 대답하는 대신 벌떡 일어났다가 씩씩거렸다.
나는 머리 두건을 벗어서
일정 간격으로 찢어서 상처를 싸맸다.
“겁먹지마!" 나는 계속해서 몸을 최대한 낮춘 채 아이가 무서워하지 않게 다독거렸다.
“네가 바위로 철퍼덕 하고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이쪽으로 한숨에 달려 온거야..."
“저어기서 미끄러졌어"
여자 아이는 퉁명스럽게 첫마디를 내뱉었다.
“아! 그랬구나... 많이 아팠지..."
나는 살짝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고는 뒤에 두고온 산양을 데리고 오기 위해 일어나려고 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허벅지에서 피가 배여 나왔다.
"엉? 웬 피야?”
아이를 구하기 위해 급히 달려와서 슬라이딩 하다가 그만 날카로운 나뭇가지에 찔렸던 모양이었
다. 바지가 뚫렸고 상처가 조금 깊었다.
"이런...나도 흙을 좀 발라야겠다"
우선 허벅지 상처쪽에 옷을 조금 찢어야했다.
“학생! 그 나이프 잠시만 빌려 줄래?"
“나 학생 아냐!”
“아아... 미안 너무 어려 보이길래 학생인 줄 알았어!"
“효린이야! 김효린”
“응? 효린이라고? 왠지 이름이 낯설지가 않네…”
“난 궁사야! 여기서 괴물을 기다리고 있었어”
“오호! 꽤 씩씩한데~”
“아저씬 괴물 본 적 있어?"
16화. 붉은 벽의 성 1
-화닌-
“괴물? 많이 봤지 몇 날 몇 일을 싸우기도 했어!"
“그래...여기 칼... 뭐하게?"
아이는 나에게 약간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널 구하다가 나무가지에 찔렸다 왜!”
살짝 미간을 찡그리며 입으로는 웃는 표정을 지으며 말했더니 허리춤 칼집에서 툭 빼서는 무심하
게 내 앞으로 팔을 뻗었다.
나는 계속 웃음을 띤 얼굴을 유지하며 칼을 받았다. 최대한 빨리 아이가 경계심을 풀 수 있게 하
기 위함이었다. 받은 칼로 바지를 찢어 상처부위를 확보하고 주목 밑에 있는 흙으로 신속히 처치
를 했다.
“나는 사람으로 둔갑한 괴물이 아니야... 내 이름은 화닌이야!"
“난 가야 해! 하늘에서 이상하게 생긴 괴물들이 자꾸 내려와서 잡아야해!"
칼을 칼집에 도로 집어넣으면서 아이는 자꾸 괴물을 잡으러 가야한다고 했다.
나는 재빨리 손을 잡았다. 선지자의 눈으로 아이의 정체를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아이는 순간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 깨어나도 이 순간을 기억하지 못한다.
나는 기억의 계곡으로 매처럼 들어갔다. 기억의 단편을 찾아 스토리가 되도록 이어 붙여야 한다.
아이의 시점으로 기억의 조각을 맞춰야 한다. 기억은 필름처럼 순서대로 나열되어 있지 않다. 퍼
즐의 조각 중에 가장 선명하게 남아 있는 것을 찾아 짜 맞춰야 한다. 그렇게 그녀가 마지막 순간
에 보았던 조각들을 찾았다. 다행히 얼마 지나지 않아 장면의 조각을 모두 맞췄다.
“이게 뭐야?! 빛이 번쩍하더니 끝나버렸네?"
장면을 분석해보았다. 2초 남짓 되는 기억의 영상이었다. 창문에 뭐가 번쩍하더니 화면 전체가 하
얗게 빛이 퍼지며 끝났다.
“공중에서 지상으로 발사한 포톤 블라스트야! 저 정도면 엄청난 파괴력인데...”
손을 놓았다.
놓자마자 아이는 아무렇지 않은 듯이 눈을 떴다.
“아저씨 가볼게요!"
“그래 만나서 반가웠다. 몸조심하렴!"
“네에..."
저 아이를 도중에 우연히 만나게 되어 시간이 좀 지체되긴 했다.
곧바로 붉은 벽의 성으로 향했다.
또 다른 절벽을 지나 길고 둥근 언덕을 올랐다. 여기서부터는 이미 돌이 드러나 있는 조르 보룬
성의 폐허가 보였다. 이곳저곳 무너진 사다리꼴의 방어벽과 남아 있는 망루와 대문, 지하 감옥의
둔탁한, 금 간 기둥들도.
남아 있는 다리를 통해 해자를 건널 때 말은 숨을 내뿜고 거칠게 머리를 흔들었다. 화닌은 산양
의 고삐를 꽉 쥐었다. 해자 바닥의 오래된 해골들과 뼈들에도 화닌은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이미
옛날에 본 것들이었다.
“저건 싫어!”
갑자기 좀 전에 만났던 그 여자아이가 불쑥 나타나서 말했다.
“엉? 너 여기까지 따라왔냐?"
“저렇게 되어서는 안 돼. 죽은 자들은 땅 안에 묻어 줘야 하는 거야. 무덤에... 그렇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하지만 클리버들은 저 무덤을 마치 잊지 말자는 맹세처럼 생각하지”
“뭘 잊지 말자고?”
“조르 보룬.”
나는 무너진 아치 밑으로 말을 향했다.
“조르 보룬은 기습공격을 받았어. 잔치마당이 순식간에 피바다로 변했어... 밤늦게까지 즐겁게 감
사절을 보내고 있던 성문 안 백성들의 하얀 옷은 빨갛게 물들었고, 클리버들은 거의 다 몰살당했
어. 바로 그때 야간 순찰 경비를 위해 성 밖으로 나갔던 클리버들만 살아남았어”
“누가 왜 그런 잔인한 짓을 한 건데요? 왜 ?”
“나도 더이상은 몰라.” 나는 모른 척 했다.
“그건 아주 옛날 얘기야... 효린이라고 했지? 나중에 살아남은 클리버들을 만나게 되면 꼭물어봐”
“이미 물어봤어...”
“엥? 정말 그랬니?"
“응, 하지만 그들도 자세히 얘기해주지 않았어”
“음...나도 클리버들을 이해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궁사가 되려고 훈련하는 이 아이에게, 게다가 아직 돌연변이의 변화도 거치지 않은 아이에게 그
런 이야기는 할 수 없다. 이 아이에게 언젠가는 조르 보룬에 몰려들었던 광기 어린 자들이 클리
버들에게 외쳤던 그 단어들을 듣게 될 날이 올지도 모른다고 미리 겁줄 필요는 없다. 돌연변이.
괴물. 신들로부터 버림받은 자들. 자연의 섭리에 거스르는 것들. 아니, 클리버들이 너에게 그런 얘
기를 해 주지 않은 것이 나는 조금도 이상하지 않아, 효린아, 그리고 나도 너에게 그런 얘기는 해
주지 않을 거야>
나는 게다가 입을 다물어야 할 이유가 더더욱 있었다. 왜냐하면 나는 소울 무버니까. 그리고 변절
한 소울 무버들의 도움 없이는 그 광기 어린 사람들이 그때 이 성을 절대로 점령하지 못했을 거
야. 그 광기를 더욱더 부추겨 무서운 폭력에 이르게 한 흉악한 최면 마법과 대규모로 동원된 괴
물들도 아마 내가 아직 알지 못한 소울 무버의 작품이었겠지.
하지만 효린아, 난 우리 동족이 한 일에 책임을 질 수는 없어. 내가 태어나기 반세기도 이전에 있
었던 일을 사과할 수는 없어. 이 해골들, 잊지 말자는 영원한 맹세인 이 뼈들도 삭아서 먼지가 되
어 망각 속으로 사라지겠지. 벼랑을 쉴 새 없이 때리는 바람에 휘날려.
“저들은 저기 누워 있는 걸 싫어해.”
갑자기 효린이가 말했다.
“상징이 되는 것도, 양심의 가책이나 경고가 되는 것도 싫어한다고. 그리고 바람에 휘날려 흩어지
는 것도 원하지 않아.”
나는 효린이의 목소리가 변하는 것을 듣고 고개를 들었다. 순간적으로 소울 무버의 아우라를 느
꼈다. 나는 피가 머리에서 소리를 내며 솟구치는 느낌이 들었다. 긴장하고 몸을 꼿꼿이 세웠지만,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을 방해하게 되거나 중단시킬까 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보통 무덤이면 돼.”
효린이의 목소리는 점점 더 부자연스럽고 금속성인, 차갑고 화난 목소리로 변해 가고 있었다.
“쐐기풀이 자라는 흙 한 줌. 죽음의 눈은 파랗고 차갑다. 묘비의 높이는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
그 위에 새겨진 말도 아무런 의미가 없다. 이걸 너보다 잘 알고 있는 자도 없겠지, 이리우스 화닌,
미혹의 숲에서 살아나온 스물아홉 번째 소울 무버!”
나는 걱정이 되었다. 효린이의 손이 산양의 뿔을 꼭 쥐고 있는 것이 보였다.
“너는 이미 괴물들에 의해 한 번 죽었다, 이리우스 화닌”
나를 아는 누군가가 효린이에게 빙의하여 노여운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왜 여기에 왔느냐? 돌아가라. 당장 돌아가라. 그리고 이 불쌍한 아이도 데려가거라. 이 아이가
속한 곳에 데려다 주어라. 서른 번째 소울 무버가 되도록 하라, 그렇게 하라.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너는 다시 죽게 되리라. 생명의 숲이 공동묘지로 바뀔 때까지 비극이 너를 찾아오리라”
산양은 평소와는 다른 이상한 동물 소리를 내며 머리를 흔들었다. 효린이는 갑자기 온몸을 떨기
시작했다.
“효린아! 방금 왜 그런거야? 잠꼬대한 거야?”
나는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물었다.
효린이는 기침을 하더니 양손을 머리카락 속에 묻고 얼굴을 비볐다.
“응? 아무것도, 아무것도 아냐"
그러나 목소리에는 자신이 없었다.
“너무 피곤해서...깜박 잠이 들었나봐... 아까 거기서 좀 쉬었어야 했는데 괜히 아저씨를 따라 왔
어...괜히...”
하지만 좀 전의 이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니었어.
나는 이 이상한 상황에 대해 다시 되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옛 성의 출입구로 통하는 끝이 보이
지 않는 컴컴한 통로에서 철로 고정된 문이 삐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괴물이 사람의
냄새를 맡고 덤비지 않을까 하는 긴장감에 아드레날린이 솟구치는 것 같았다. 다가갔을 땐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행히 바람때문에 낡은 철제문이 덜컹거리며 내는 소리였다.
아이는 내 뒤에 앉아 내 옆구리의 옷을 잡고 기대어 잠이 들었다. 내 털가죽 망토를 덮고 있어
포근함에 금방 잠이 들었을 것이다. 나는 비로소 마음이 놓였다. 지금 뭐라도 나타난다면 이렇게
산양 위에 몸을 싣고 아이를 두고 제대로 대응하기가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내 옛 동지들이 있었던 경비초소 캠프를 향했다.
‘화이트 타워’라는 별칭을 갖고 있는 장벽 중간 초소였다. 최소 20명 이상의 경비대원들이 상시
대기를 하고 경비근무를 보고 있는 곳이었다.
바람이 심해져더 추워지기 전에 빨리 그곳에 도착해야 했다.
“아이구! 오랜 만일세 화닌! 이 곳엔 어쩐일인가?”
"정말 오랜 만이군! 잘 지냈는가? 마조!"
"어쩐 일인가 그동안 고생을 많이 한 것 같구만~ 얼굴에 다 쓰여 있어"
"일정이 있어 이 부근을 지나가던 차에 예기치 못한 일이 생겨 일행인 이 아이와 여기서 며칠동
안 신세를 좀 지러 왔소!"
"그래 누추하지만 막사에 여유자리가 있으니 거기서 당분간 묵으시오! 근데 이 아이는 어디서 데
리고 왔소?"
"아... 옛 조르 보룬 터를 지나다가 보호자도 없이 혼자 있길래 데리고 왔소"
"알겠소... 어서 막사에 들어가 몸을 좀 녹이고 간단하게나마 스프와 빵으로 허기를 달랜 후에 푹
쉬도록 하시오"
"고맙소이다!"
다음날 해 뜨기 전.
나는 목이 말라 잠시 일어났다가 갑자기 걱정이 몰려왔다.
아이를 이 곳에 맡기고 떠난다면 분명히 본부로 데리고 가서 돌연변이 실험을 할 것이 불을 보듯
뻔했다. 전쟁 후엔 남자들이 많이 줄어들었고 그래서 최근엔 어린 아이들을 보기가 점점 어려워
졌다. 그러니 조금 큰 아이이긴 하지만 실험에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돌연변이로 만들려면 약초도 여러가지가 필요하다. 미묘한 차이를 알고 조제하는 경험이 없으면
매번 이상한 결과만 나온다. 실험대상이 죽을 수 있다는 말이다. 경험이 좀 있는 약술사들은 몇
명 남지 않았다.
일단 지금은 화이트캐슬 막사에서 거처를 정할 것이기 때문에 괜찮지만 어쨌든
아이를 주민들이 거주하는 성에 데려다 주어야 한다.
붉은 벽돌의 성지하에 숨겨진 실험실, 전설의 영약이 든 먼지 쌓인 병들, 실험 도구들을 빨리 찾
아서 사용할 건 하고 버릴 건 버려야 한다. 하지만 아무도 그걸 어떻게 써야 할지 모른다.
왜냐
하면 확실한 건 유전인자를 변화시키는 영약들은 먼 옛날 어떤 배반자인 약술사들이몰래 연구하
다가 만든 거고, 그 후 몇 년 동안 술법을 이어 받은 후계자를 찾았으나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비책을 기록한 문서가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기술의 전수가 어느날 끊어지고 만 것이다. 이제
는 그런 술법에 관한 지식과 능력이 없어진 것이다.
혹시나 자기들끼리 시도해 봤을지 누가 알 수 있을까? 아이들에게 마법 없이 자신들이 만든 약
을 마시게 했을지도?
나는 그랬을 때 아이들에게 어떤 일이 생겼을지를 생각하고는 온몸을 떨었다 그렇게 하다가 죽
지 않으면 형체가 기이하게 변한 괴물이 된다. 만약 그렇다면 살아 있는 술사들 누구도 보지 못
한 것을, 살아 있는 술사들 누구도 알아내지 못한 것을 내가 보게 되는 것이다. 유명한 영약과 약
초, 약술사들의 문화 속에 가장 깊은 비밀로 남겨진 그것들, 전설처럼 이야기만 다양한 제조법이
적힌 비책을 찾아내야 한다.
그러면 머리카락이 회색으로 변한 아이에게 약을 투여하고, 돌연변이의 변화 과정을 관찰하고,
내 눈으로 직접 고통스러워하다가 죽어가는 아이들을 또 봐야하겠지!
안 돼! 나는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절대로, 절대로 그런 대가를 치르지는 않을 거야.
아니, 어쩌면 내가 너무 빨리 흥분한 걸지도 몰라. 그것 때문에 나에게 오라고 한 건 아닐 거야.
그랬다면 지난 밤 식사에서 이 얘기 저 얘기가 나왔겠지.
예전에 프라니아에 평화가 가득했을 때 몇 번이나 ‘놀라운 선물’로 클리버들이 탄생하고 탈 없이
잘 자랐고 전쟁이 발발했을 때마다 커다란 공을 세웠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런 실험은 인간성을
말살하는 것이라는 인권단체들의 저항때문에 결국 폐기되었다.
효린이는 일어나자 여기 식사에는 왜 고기가 없나며 투덜거렸다었다. 모두들 남쪽에 이송해온 우
유와 빵을 먹었다. 하지만 효린이는 고기를 달라고 떼를 섰다.
"고기는 어디 있냐고! 고기를 먹어야 기운을 내지!" 어제와는 전혀 다른 양상을 보이는 아이의 행
동에 어떻게 대처를 해야할지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 이 깡토에 담긴 햄이라도 좀 먹어봐라!" 마조 대장이 특별히 자기의 몫으로 받은 연찬이었다.
"고기 어디 있어!" 아이가 고함을 지르자 나는 다가가서 야단을 쳤다. 무섭게 야단을 치며 포크
도 내리고 팔도 내리게 했다.
"고기는 아주 귀한 겨울 식량이다. 나중에 말린 것이라도 구하게
되면 먼저 챙겨 줄테니 지금은 이 깡통햄도 고맙게 여기고 충분히 먹도록 해"
그제서야 알아들었는지 그냥 햄이랑 먹겠다고 했다.
야단치고 나는 생각했다. 약술사를 찾아서 틈틈이 이 아이에게 전설의 동굴에서 자라는 기생 식
물과, 입증된 산속의 약초를 먹이고 가능한 처음에는 농도를 낮춰 약초 음료를 마시게 하는 거야.
그러면 이 아이는 건강하게 빨리 자랄 것이다.
"우선 체력을 회복하고 다음 목적지인 붉은 벽돌의 성에 데리고 가서 진짜 프로메 공주가 있는
확인하고 만일 없으면 그곳에서 이 아이를 돌봐줄 사람들을 구해야겠어... 아까 누군가가 빙의하
여 이르기를 이 아이를 소울 무버로 만들라는 거야 안 그러면 위험이 닥칠 거라고 하면서"
"그래 화닌!
안전이 확보된 장소를 찾으면 힘들겠지만 그 성안에 있는 약술사를 꼭 만나보게나!
그런 다음에 아이의 적합도를 파악하고... 괴물로 변하지 않도록 호르몬을 해치는 일 없이 말이지.
하지만 이런 일들이 밖으로 자꾸 알려지면 안되니 자네도 흔적을 최대한 없애면서 비밀리에 아이
를 돌봐야 할걸세!"
나는 마조의 말을 새겨듣고는 혼자 생각에 잠시 빠졌다.
'도대체 이 아이를 만나게 한 건 누군가의 의도된 짓일까? 왜 자꾸 그런 생각이 드는 거지?
프로메 공주와도 무슨 연관이 있을지 몰라'
나는 비장한 마음이 들었다.
언제 터질 전쟁에 대비해 지휘관이 될 공주를 찾아야 하고 일반병
사를 소집하고 다양한 무기들을 자유자재로 장착하고 다룰 클리버들을 길러내야 한다.
다른 클리버들은 진짜 남아 있긴 한 건가?
잠시 마조와 함께 막사를 나가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화이트 타워의 망루에 올라
가서 냉혈족이 있을 법한 방향으로 하늘과 풍경을 바라보았다.
아이가 식사를 다 했는지 확인하기 위해 내려왔다.
그런데 아이는 숟가락과 그릇을 손을 대지 않고 공중에 조금 띄우려는 행동을 하고 있었다.
'확실히 보통 아이는 아니야!'
앞서 갑자기 빙의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과연 누구일지 계속 떠올랐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된다면 이 아이는 프라니아에 가져다줄 ‘놀라운 선물’이 될 것인지 그것이 궁
금할 뿐이었다.
어느새 이곳도 낮이 짧아지고 밤이 점점 길어지고 있었다.
화이트 타워에서 서쪽을 바라보니 어제와는 또 다른 붉은 기운이 퍼지고 있었다.
17화. 붉은 벽의 성 2
-윤도훈-
“그걸 말이라고 하시오!"
화닌 종사관이 벌떡 일어서서 말했다.
“이 아이는 프로메 공주와 같은 능력을 갖고 있는 게 틀림없소. 그런데 중앙정부에 넘기면 분명히
그들에게 위협이 된다고 판단하고 처단하고 말 것이오"
진정석이 말을 이었다.
“아마도 이 아이와 함께 실험대상이 되었던 아이들은 시설에서 데리고 온 아이들이거나 길거리에
서 부랑하던 아이들일 겁니다. 나도 마찬가지였어요...그런 아이들이 지하 연구소에서 질러 놈들의
실험 모르모트나 다름없이 취급을 당했을 것을 상상이나 했겠소?"
“효린이라는 이 아이는 어떤 혈통을 이어받았는지는 알 수 없소만 이십 년 동안 끊긴 어린 클리
버를 발견했다는 자체를 받아들이고 여기서 끝까지 책임지고 돌봐야 할 것이오" 화닌은 다시 강
한 어조로 다른 헌터들을 설득했다.
주운발이 말을 듣고 있다가 맞서는 의견을 내놓았다.
“아주 귀하고 놀라운 선물인 것 맞소이다 하지만 지금 대전쟁이 언제 발발할지 일촉즉발의 시국
에 질러가 됐든 냉혈족이 됐든 그냥 가만히 두겠소이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아이가 있는 곳을 찾
아낼 것이요~ 그러면 다 같이 위험에 빠지게 되오! 그러니 주민들과는 멀리 떨어뜨려 놓아야 하
오!"
“나도 주운발과 같은 생각이오!” 심조한이 주운발의 발언에 힘을 실어주었다.
“돌본다는 것 자체를 반대하진 않지만 성곽에 머무르게 하는 것은 반대하오"
“아니 그럼 대안을 내놓으시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지 않도록 보안을
물샐틈없이 한다면 아이의 능력이 한편으로는 우리를 살릴 최후의 보루가 될 수도 있겠지만 그
반대로 밀고하거나 첩자에게 발각되면 우리의 운명까지도 휘말릴 수 있다는 것이오...각자 처소로
돌아가 거듭 고심하여 내일 다시 모여서 방안을 의논해 봅시다"
나의 발언을 마지막으로 모두 자신의 처소로 돌아갔다.
잠시 후 화닌을 따로 불러냈다.
“나리! 두 종사관의 의견은 아무런 근거도 없어요. 전혀 사실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고요... 질러나
냉혈족들은 지금 우리가 상대할 수 없는 규모와 능력을 갖췄단 말입니다 우리로서는 한 명이라도
더 클리버의 재능을 갖고 있는 아이들을 데리고 있어야 해요!”
화닌은 인상을 찡그리며 내가 보고 있던 괴물 도감에 대한 구상도를 보면서 자신의 논리를 폈
다.
“소수국의 술사들이 도감을 구동할 ‘소스코드’를 만들어 내기 위해 눈이 벌겋다는 소문이 파다
한 것을 알고 있느냐? 이제 클리버의 재능이 있는 아이들을 사냥하던 시대는 지났어” 나는 화닌
에게 이제는 현실을 직시해야 함을 일깨워 주어야 했다.
“두 종사관의 생각 자체는 틀리지 않으나 이제는 누구를 찾아내고 잡아가거나 제거하는 시대가
아니라는 거야! 이제는 전쟁을 눈앞에서 일으키질 않는다네! 모두 가상 세계에서 대리전으로 바뀐
지 오래됐네! 그래서 VR용병이라는 말이 따로 있지 않은가!"
“아니 그러면 지금껏 이곳에서 권력을 쟁취하기 하기위해 핏줄도 처단하는 그런 동족상잔의 비극
을 목도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씀입니까? 그렇다면 굳이 클리버든 소울 무버든 양성하거나 찾아서
몰래 돌볼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바로 그렇다네 이제는 가상 세계에서 전쟁을 누구와 어떻게 할 것인가가 중요하네 그래서 내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것이 바로 그 앞에 구상도에 있는‘괴물도감’이야!"
“나리, 그럼 이 도감을 아까 말씀하신 가상 세계 거기서 사용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아직 베타버전만 운용할 수 있지만 조만간 정식으로 가동할 수 있을 날이 얼마남지 않았어"
“나리 제가 이곳에 오기 전에 미혹의 숲에 갇혀 어쩔 수 없이 그곳 숲의 수호신들과 잠시 있게
되었는데 말입니다. 거기서 이런 얘기를 들었습니다. 머지 않아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요...혹시
짚이는 데가 있으십니까?"
“전쟁이 어디 예고가 있던 적이 있었나...포가 날아들기 전까진 알 수 없는 게 전쟁이요 전쟁!"
“아 그리고 제가 꿈인지 생시인지 바로 몇일 전인데 누군가 낯선 목소리로 이 아이를 소울 무버
로 만들어라는 꿈이 있었어...”
주운발이 심조한이 각자의 처소가 있는 곳으로 가기 전에 잠깐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네가 그렇게는 하지 않을 건 우리가 잘 알고 있잖아. 하지만 우리가 술법사 원로들의 위원회에
효린이를 보고해야만 한다는 것도 알고 있어. 그게 어제오늘 일이 아니라, 위원회 소속 모두가 항
상 그러한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도 알아...요즘엔 술법사들은 재능 있는 아이들을 부모나 돌보
는 사람들로부터 빼앗지 않아...능력이 잠재된 아이들을 멀찌감치 관찰하고 있다가 2차 성징이 시
작되면 술사가 만든 약물이나 정신감응으로 아이들 스스로 클리버가 되도록 만들어 버리지..."
“그래 맞아...그런 다음에 클리버를 괴물을 잡는 헌터가 되게끔 하는 시대가 되었어! 인정!"
“그러니까 저 아이를 헌터 양성소로 보내자는 거구만!"
“빙고!”
주운발이 의중을 맞히자 심조한은 입꼬리 한쪽을 올리며 미소를 지었다.
윤도훈과 화닌은 효린이가 잠들어 있는 처소로 이동해 계속 대화를 이어가고 있었다.
“아이에 대해서는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겠어요. 위원회에도요... 도대체...왜 걱정들을 그렇게 하는
지 모르겠습니다...”
“비밀을 지키겠다고?
그렇게 쉽게 맹세하는 것이 쉽지가 않을 텐데...”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미안하네... 종사관. 언잖게 하려는 건 아니지만, 도대체 그럼 대위원회와 최고위원회에 대한 술
법사들의 고귀한 충성은 어떻게 된 거요?”
“많은 전쟁이 많은 것을 바꿔 놓았어요. 전투는 더 그랬고요. 갑자기 정치 이야기로 지루하게 만
들 생각은 없어요. 게다가 어떤 문제나 사건들은, 죄송하지만, 아직도 비밀이고, 제가 입 밖에 내
서는 안 되는 일들이죠. 충성은······ 저는 모두를 위해 충성해요. 권력을 대리하는 자들이 아닌 그
권력을 준 진짜 주인들에게 충성하려는 겁니다 나리!”화닌의 생각은 굳건했다.
“종사관 마음은 백 번 이해하오~ 하지만 원로들에게 중대한 사안을 얘기하지 않기란 굉장히
어려운 일이오. 숨기려 하다가 보통은 잘되는 경우가 없었지요”
나는 깊이 잠들어 있는 효린이를 바라보았다. 효린이는 공기돌을 손바닥 위에 놓고 약간 띄워서
자신의 의지대로 상하좌우로 돌리며 놀다가 잠이 들었다. 아까 보았을 때 그녀는 꽤 집중하고 있
었다.
“종사관!”
나는 일부만 완성된 괴물 도감 사본을 화닌에게 건넸다.
“이 사본을 보관하고 있겠나 혹시 내가 잘못되면 자네가 계속 작업을 이어가게!"
“나리..."
“아 그리고 말이야...효린이를 거기 조르보룬 터에서 발견했을 때, 무슨 계시인가 소리인가 들렸다
고 하지 않았나? 그래서 떠오른 것이 지금 저세상과 현실의 벽도 붕괴되었고 가상 세계와 현실의
벽도 붕괴되었다는 것을 직시해야 하네!”
“그 말씀은..."
“그래... 다른 차원에 있던 괴물이 여기저기에 다 출현할 거란 말일세! 과거엔 적이 분명했지만 이
제는 정체와 편을 알 수 없는 괴물들과 싸워야 하네!”
“그럼 나리께서는 그런 와중에 어떻게 하시려고 그러십니까?”
“조른보룬에서 효린이를 통해 나온 목격한 낯선 목소리는 상제가 분명해!”
“저세상의 수문장 상제 말씀입니까?"
“그래 맞아! 상제가 직접 움직이고 있다는 반증이야! 그만큼 사안이 위급하다는 거야! 괴물들을
먼저 길들이고 이용하려는 존재들이 있을 것이고 그들이 우리의 적이 되는거야! 아이를 소울 무
버로 만들라고 하지 않았는가?"
“네 분명히 그렇게 들었습니다 나리"
다음 날 다시 클리버들과 헌터들의 회의가 이어졌다.
“그렇습니다. 누군가의 계시대로 소울 무버나 클리버가 되는 것을 원한다면 효린이는 그렇게 될
거예요. 대위원회도, 최고위원회도 효린에 대해서 알 필요도, 관찰하거나 설득할 필요도 없어요.
클리버와 헌터들이 비밀을 지켜 주면 나도 위원회를 배신하는 것이 아니죠. 애초에 이 아이는 여
기에 없는 것이 되죠...그렇지 않습니까?
다만 비밀을 유지하는데 장애물이 하나 있습니다.”
“장애물이라면...”
“아주 강한 능력을 타고 났을 때 함께 따라오는 것이죠...폭주하는 것 말입니다"
“폭주라 하면..."
“통제할 수 없는 범위 밖으로 폭주하면 아무도 막을 수가 없습니다.”
진정석은 옆에서 다 느껴질 만큼 크게 한숨을 쉬었다.
“아니 왜 진 종사관이 한숨을 그리 크게 쉬는 것이오? 폭주에 관해 경험이라도 있소?"
진정석은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이리우스 종사관 계속 말을 하시오”
“효린이는 크기를 알 수 없는 능력이 잠재된 아이입니다. 그대로 두면 파워가 어디로 튈지 알 수
가 없어요. 적이 아닌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감당할 수 없는 폭주상태가 되면 이성이 지배
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아이입장에서는 아군과 적군의 구분이 없게 됩니다. 그걸 그대로 둔다면
우리도 위험해집니다.”
“어떻게 위험하단 거죠?”
“통제력을 상실하고 폭주하면 제 개인적인 의견이긴 합니다만 SR등급을 능가할 겁니다. 레드캐
슬 규모의 성곽은 이 아이가 만들어 내는 블라스트 몇 방에 완전히 파괴될 것이입니다.”
“제기랄!”
진정석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한마디 뱉었다.
“잘 보살펴 줘야 합니다. 비난하고 경멸하는 말을 절대로 하면 안됩니다. 이런 아이를 전에도 본
적이 있습니다. 신분이 높은 자들이 흔히 범하는 착각때문에 폭주를 부추기는 경향이 종종 있습
니다. 이 아이들은 서커스단의 사자가 아닙니다. 우리가 존경해야 할 대상입니다. 그것을 여기 있
는 여러분들이 명심하셨으면 합니다.”
“완전 공감하오! 자 그럼 이제 투표를 시작합시다. 이 아이의 존재를 원로 위원회나 다른 사람들
에게 절대로 알리지 않는다에 각자 가부를 적어주시오!"
이때 심조한이 앞으로 불쑥 나와서 윤도훈 총경의 회의 진행을 잠시 막았다.
“잠깐만요! 두 종사관이 말하는 걸 들으니, 효린이는 폭주를 당연히 할 것처럼 아주 단정적으로
말을 하는데... 너무나 능력을 너무 과장하고 있소! 마치 기적이나 요행수가 당장 눈앞에 일어날
것처럼 말이요...너무 지나친 과대망상이요...계속해서 같은 주장을 하려면 정신치료부터 받고 오시
오!
화닌 종사관은 놀라운 선물을 받은 것이 아니라 그냥 출신을 알 수 없는 고아 한 명을 발견한 것
뿐이오! 이 아이에게는 변방에 자주 출몰하는 괴물이나 냉혈족을 사냥하는 헌터의 검술을 가르치
면 가장 적합할 것이라는 생각이오! 지금 당장 여기에 숨기고 안숨기고가 중요한 게 아니오...빨리
다른 아이들처럼 헌터 교육을 받게 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바요”
“나도 같은 생각이오” 주운발이 계속 말을 이어갔다.“알다시피 요즘엔 술사들도 출신을 모르는 아
이들을 데려와서 실험이나 훈련에 참여시키지 않습니다!
조금이라도 능력이 보이면 각자 준비해서 직접 자발적으로 헌터 양성소나 술사의 채택을 받기 위
해 템플로 가는 추세입니다. 효린이와 비슷한 아이들이 실제로는 생각보다 많소이다. 너무 지나친
기대와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우려한 나머지 별도로 관리하고 보호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일이라
고 생각합니다.”
심조한이 또다시 나서서 언급한다.
“이 아이는 우리가 다 무릎을 꿇고 하늘을 바라봐야 할 정도로 특별한 아이는 아니오. 이 세상에
이런 여자 전사들이 없는 것도 아니지 않소? 내가 장담하건대, 효린이는 이곳에서 건강하고 평범
하게 자기 삶을 살 수 있는 사람이 되어 나갈 거요. 그리고 분명 폭주나 발작은 없을 것이오. 화
닌 총사관이 그 애한테 특별히 스트레스를 주지 않으면 말이오 ”
“심 총사관 이제 그만하시오 나의 진행을 한 번만 더 방해하면 이 회의장에서 영구퇴출 시킬 것
이오”
화닌은 의자에서 심조한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조한아 많이 컸구나 내가 이렇게 이름이나마 지껄인 것은 이번이 마지막인 줄 알아!다음엔 사람
들이 네 이름을 묘비에서나 볼 수 있을 거야!"
“뭣이오? 선배면 다요? 어디서 그런 말을..." 조한이 거칠게 항의하자마자 윤도훈이
고함을 질렀다. "심조한! 이리우스! 모두 정숙하게 발언하시오! 또 한번 무례하게 언쟁이 일어나면
즉시 회의장에서 퇴출하겠소!"
“의장님 저에게 발언기회를 주시겠습니까?” 주운발이 손을 들었다.
“제가 뭔가를 보여드리고자 합니다"
“어디 봅시다!"
주운발은 손을 뻗어 벽난로 쪽으로 향했다.
벽난로에 놓여 있는 장작에서 불꽃이 파바박 튀더니 불꽃이 확 커졌다. 주운발이 손을 당기는 제
스처를 하자 불꽃이 더 크게 일면서 헌터들이 있는 쪽으로 뻗쳤다.
주운발이 손을 툭 내려놓자 확산된 불꽃은 다시 장작더미의 작은 불꽃으로 돌아갔다.
윤도훈, 화닌, 진정석, 심조한 그리고 김효린은 이 모습을 그 자리에서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효린을 제외하고는 모두 인상을 찌푸렸다. 주운발이 왜 이것을 시연했는지 아는 듯했다. 효린은
이 불꽃 쇼의 의미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화닌은 주운발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마디 던진다.
“이것을 보여주는 이유가 뭔가? 이 아이가 이것을 보고 놀라 자빠지기를 원했는가?
“불꽃이 자신 앞으로 들이닥치면 클리버는 본능적으로 밀어내게 됩니다. 그러니까 보통 사람이 아
닌 여기 있는 분들은 이 불꽃이 더 들이닥칠지 아닐지를 알기 때문에 움찔하지 않지만 이 아이는
그런 경지가 아니라고 봤을 때 본능적으로 움찔하고 불꽃을 밀어내는데 그렇지가 못하다는 겁니
다."
“이 한가지로 판단하겠다는 겁니까? 주 종사관?" 화닌이 계속 쏘아붙였다.
“이 한가지만 봐도 알 수 있지요... 이런 최소한의 능력도 발현되지 않는 아이가 무슨 폭주를 일으
킨단 말입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그부분입니다. 이 아이는 평균적인 클리버나 헌터들보다 능
력이 더 떨어진다고 판단합니다. 그러니 차라리 헌터 양성소에 보내 거기서 훈련을 시켜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그것이 가장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화닌은 눈치채지 못할 만큼 아주 살짝 콧웃음을 친 후 발언을 했다.
“효린은 우리와는 능력의 근원 자체가 다릅니다. 그것을 구분해내지 못하면 잠재성의 크기 자체를
가늠할 수 없습니다.”
“종사관, 좀 더 알기 쉽게 풀어주시면 안되겠소?” 윤도훈이 요청했다.
“네 알겠습니다. 우리는 특별하기는 하지만 능력치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물론 훈련을 통해서 조
금 더 끌어 올릴 수는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 아이는 자신의 한계가 있는 능력의 차원이 아닙니
다. 이 아이는 모든 에너지와 순간 접속을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능력이라면 능력입니다. 우리
의 에너지, 이 성곽에 있는 사람들의 에너지, 이 대륙의 에너지, 이 지구의 에너지, 달의 에너지,
태양과 태양계 행성의 에너지를 모두 끌어당겨 사용할 수 있습니다.”
“어엉?”
회의에 참석한 헌터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해 반쯤 넋이 나간 채 입을 벌리고 있었다.
18화. 괴물 스카우팅 리포트 1
-화닌-
오랜만에 다른 사람의 소울 속으로 들어갔다.
회의에서 난리가 난 후로 나와 윤도훈 총경에 거슬리는 헌터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효린에게
좀 더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소울 무버가 될 수 있을지 가늠하기 위해 그녀의 무의식 속으로
다이브했다.
짙은 먹구름이 온 하늘을 뒤덮고 바다는 출렁이고, 용오름이 하나둘씩 생겨나더니 구름과 바다를
잇는다. 큰 소리를 내는 파도가 바위 해안으로 철썩이고, 큰 바위 사이에는 커다란 간헐천들이 하
늘 높이 물을 뿜어냈다. 나는 짭짤한 바닷바람을 가르며 날개를 움직였다. 알 수 없는 기쁨으로
가득 차 아래로 수직 강하해서는 어릴 적 친구들의 뒤를 쫓아서 앞발로 파도의 머리 부분을 건드
렸다가는 다시 한 번 물방울을 튀기며 하늘 위로 높이 솟구쳐 오르고, 바람을 탔다가는 꽁지깃으
로 소리 나는 회오리바람에 몸을 맡겼다.
‘무의식에서 자주 일어나는 연상 작용이야’ 나는 정신을 차리고 생각했다. 연상 작용일 뿐이라고.
알바트로스다!
아저씨! 화닌 아저씨!
효린이니? 어디야?
아저씨! 아저씨...
효린이는 내가 그녀의 소울로 다이브한 것을 알아챘다. 알바트로스 형체로 나타난 그녀의 소리
가 잦아들었다. 알아챘다가 꿈으로 취급하고 이내 의식이 잠잠해졌다. 나는 아직도 얼굴을 때리는
파도 거품을 느꼈지만, 이미 아래에 있는 것은 바다가 아니었다. 바다 대신 나타난 것은 끝없는
벌판, 수평선까지 끝없이 이어진 평야였다. 나는 내가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동파라는 언덕 꼭대기
에서의 풍경이라는 것을 알아차리고 전율이 올랐다. 냉혈족이 거주지와 가장 가까운 포인트인 글
래셔 서북벽과 가까와 항상 감시의 끈을 놓을 수 없는 동파를 보고 있다니... 효린의 무의식에서
이걸 볼 수 있을거라곤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더니 그림자들이 어둑어둑 드리워졌다. 나는 사람의 형체를 한 것들이 천
천히 아래에서 줄지어 솟아 나오는 것을 보았다. 속삭임 소리가 점점 더해져 이해할 수 없는, 두
려운 합창 소리처럼 되어 갔다.
효린은 등을 돌린 채 옆에 서 있었다. 바람이 효린의 회색빛 머리를 날렸다.
희뿌연, 잘 보이지 않는 형상의 존재들이 끝을 모르게 점점 더 불어나고 있었다. 냉혈족의 크라
이언들이었다.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평안한, 죽어 버린 그들의 무표정한 얼굴을 보고 나는
비명을 참았다. 대부분은 내가 모르는, 알아볼 수 없는 얼굴들이었다. 미혹의 숲에 들어가기 전에
잠깐 본 적이 있지만 이런 형상은 아니었다. 가만 어? 본래 냉혈족의 크라이언들이 아니라 동가
와 수십 명의 수색대원들이었다.
남준, 정국, 지민, 태형, 석진, 호석, 윤기.....
“효린아, 왜 나를 여기로 데려온 거니?”
나는 속삭였다.
“왜?”
효린이가 몸을 돌렸다. 효린이는 손을 쳐들었다. 나는 피 한 줄기가 효린이의 생명선을 타고 손
목 쪽으로 흐르고 있는 것을 보았다
“찔레꽃 때문이야.”
효린이는 아무런 동요 없이 말했다.
“요정의 찔레꽃에 찔렸어. 아무것도 아냐. 피일 뿐이야....”
하늘이 더욱더 시커멓게 변하더니, 잠시 후 무시무시한, 눈이 멀 정도로 강력한 빛으로 번개가
쳤다. 순간 정적이 흐르고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한 발짝 다리를 옮겨 보았다. 자기가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 확인하고 싶어서였다. 그러고는 효린의 옆에 섰다. 그 바로 앞은 끝없는,
불빛에 비춘 듯한 연기가 자욱한 벼랑이었다. 또다시 아무런 소리가 없는 번개가 번쩍하자 갑자
기 벼랑 아래로 내려가는 기다란 대리석 계단이 나타났다.
“이렇게 해야 해.”
효린의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다른 길은 없어. 저 길뿐이야. 계단으로, 아래로 내려가야 해...”
“계속해.”
나는 속삭였다.
“말해 봐, 효린아”
“차가운 피... 안 돼, 안돼!”
“효린아!”
“검은 갑옷의 기사. 투구에 푸른색의 깃털을 꽂고 있어. 나에게 무슨 짓을 한 거지? 그때 무슨
일이 일어난 거지? 무서웠어. 지금도 무서워. 끝나지 않은 거야, 절대로 끝나지 않을 거야. 러프울
프는 죽었어... 싫어, 싫어, 싫어”
“효린아!”
“싫어!”
효린이는 몸에 힘을 빼고 눈을 꼭 감았다.
“안 돼! 안 돼! 싫다니까! 날 만지지 마!”
효린의 얼굴은 갑자기 변했다. 표정이 굳더니, 목소리는 금속성으로 차갑고 적대적으로 변하고,
그 안에서는 무섭게 잔인한 비웃음이 느껴졌다.
“이 아이를 따라 이곳까지 왔느냐, 이리우스 화닌? 여기까지? 열 번째, 너는 너무 멀리 왔다. 경고
를 했을 텐데.”
“당신은 누구죠?”
나는 몸을 떨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은 듯 보이기 위해 최대한 목소리는 떨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될 것이다.”
“지금 알아내고 말 거야!”
나는 손을 들고 갑자기 확 펼치며 정체를 밝히려고 온 힘을 쏟았다.
나아가니 보이지 않는 막이 있었다.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그 막을 찢으려고 할퀴고 때리고 한참을 씨름했다. 마침내
보호막에는 금이 갔지만, 그 뒤에는 또 다른 막이 있었다. 세 번째. 네 번째.... 나는 신음 소리를
내며 무릎으로 꿇어앉았다. 현실은 계속해서 금이 가고, 다음번 문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때까
지 끝없이 열어젖히고 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을 때까지.
“너의 착각이다, 열 번째.”
쇳소리 같은, 이상하게 변조된 듯한 인간의 것이 아닌 목소리가 말했다.
“연못에 비친 그림자와 별이 떠 있는 하늘을 착각한 것이다.”
“무슨 말이야? 만지지 마. 그 아이에게서 손 떼!” 나는 소리쳤다.
“그 막은 내가 만든 게 아니야 네가 만든 것이지...그리고
아이가 아니다.”
효린의 입술이 움직였다. 하지만 나는 효린의 눈이 힘없이 번들거리고 의식이 없는 것을 보았
다. 나말고 또 다른 존재가 효린의 소울에 다이브했다.
“아이가 아니다. 아이가 아니다”
같은 소리를 계속 되풀이했다.
“이것은 불꽃, 백색 불꽃이다. 이 세상이 일어나고 타 버리는 불꽃."
"알아들을 수 있게 말을 좀 해라! 좀!"
"이것은 오래된 피, 요정의 피다. 아니 괴물이다. 괴물의 피가 세상을 구할 것이다.
싹을 틔우지 않고 있지만 불꽃으로 폭발하는 씨앗. 괴물의 피가 씨앗이 되어 끝을 낼 것이다. 괴
물 도감을 완성하라! 마침내 끝의 시간이 올 것이다”
“우리의 죽음을 예언하나!”
나는 외쳤다.
“할 줄 아는 게 그거밖에 없지? 죽음을 예언하는 것! 살아있는 건 언젠가 모두 다 죽는다! 당연
한 걸 가지고 무슨 수작이냐!”
“오호! 한 번은 죽지! 하지만 넌 이미 여러 번 죽었다!
열 번째. 이미 네 안의 모든 것이 여러
번 죽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목소리는 더 크게 외쳤다.
“우주의 모든 힘을 걸고!”
나는 남은 힘을 모두 모으고 팔을 허공에 뻗어 만다라같은 원형의 심벌을 만들었다.
막을 찢으려고 하다가는 하세월이 걸릴 상황이었다.
“물과 불과 땅과 흙의 모든 힘을 모아 너를 끌어낸다. 생각 속에서, 꿈에서, 그리고 죽을 때까지,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지금 존재하는 모든, 앞으로 생길 모든 것을 다 모아 너를 끌어낸다. 넌
누구냐?
좋은 말 할 때 네 정체를 드러내라!”
“그 사람을 괴롭히지마 아저씨!"
“효린아! 왜 그래?"
“그 사람은 공주님이야! 프라니아의 마지막 공주 프로메 아스테리온!"
“뭐어? 공주님이라고? 내...내가 그토록 찾던 프로메 공주님이라고?"
“지금은 알려고도 보려고도 하지마! 그놈들에게 발각되면 안돼!”
“그놈들이 누군데?"
“그녀를 잊어버려! 잊어버려! 화닌 아저씨!"
“잊어버리라고?"
“화닌! 화닌! 화아아아~니이이이인~!"
“화닌! 화닌아!”
나는 눈을 떴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장면들이었다.
“화닌, 나야 윤도훈 총경이다"
<아...꿈이었나? 분명히 소울 다이브한 것 같았는데... 내가 꼭 꿈을 꾼 것 같아...>
“나리....제가 다이브하는 동안 제 입에서 뭐 이상한 말을 하던가요?”
“메멘토 모리! 를 갑자기 외치더니 그 다음 조금 길게 뭐라고 했는데...음..."
윤도훈 총경은 인상을 찌푸리며 기억을 떠올리려는 표정이 역력했다.
“아, 그래!
‘사람은 누구나 죽어. 헌터도 소울 무버도 날아다니거나 헤엄치거나 뛰어다니는 모든 괴물들도 언
젠간 죽어. 중요한건 언제 죽느냐가 아니야, 어떻게 죽느냐는 거지.’ 라고 하더라”
“정말요 제가 그런 말을 했다구요? 한 번도 그런 문장을 읽어보거나 적어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그런지... 목소리의 톤이 평소의 네 스타일이 아니었어...”
“효린이에게 다이브를 했을 때 효린의 소울만 있었던 게 아니었어요... 이상하긴 했지만 효린이는
프로메 공주라고 하더라구요..."
“아무튼 다른 스타일의 목소리가 들릴 때마다 구분하려고 집중했는데... 누구의 것인지는 다 알지
못하겠더라고..."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가다듬기 위해 얼굴을 손으로 문질렀다.
“나리, 효린이는 기대이상의 아이예요! 저를 능가합니다. 엄청나게 센 소울 무버예요. 효린이가 누
군가와 접신을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러니까 그게 사람인지 괴물인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지
만... 효린이의 접신 능력은 끝이 없어요.”
“그러니까 접신이라는 건 앞서 회의때 말한 다른 대상의 에너지에 접속하고 통제까지 할 수 있다
는 거냐?"
“맞습니다! 그런데 무언가가 효린이를 지배하려는 걸 느꼈어요...무언가가요. 나에게는 너무 힘센
상대예요. 효린이가 통제할 수 있을지 그것 때문에 걱정이 돼요. 통제하지 못하면 정신병으로 미
쳐버릴지도 모릅니다. 나는 이것을 제어할 힘이 없어요, 할 줄도 모르고 그럴 능력도 되지 않아요.
정말로 필요한 순간이 와도 나는 끊어 버리거나, 효린에게 침범한 다른 소울 무버의 능력을 약화
시키거나 쫓아낼 수 없어요. 정말로 그래야만 할 위험한 순간이 오면 효린의 능력을 없애 버릴
능력이 없어요. 다른, 다른 무버들의 힘을 빌릴 수밖에 없어요. 나보다 더 능력 있는, 더 경험이
많은..., 나리, 제가 누구를 얘기하는지 아시겠습니까?”
“알고 있어..."
윤도훈은 고개를 돌리고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나리, 저 때문에 화가 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런데 그 어떤 소울 무버라고 해도 그녀만큼은
안될 겁니다. 저는 나리와 함께 괴물 도감에 집중하고 효린이의 훈련과 통제에 대해 믿고 맡길
수 있는 사람은 길미진 마스터뿐입니다. 아픈 부분이 있으시겠지만 지금은 다른 선택을 할 수가
없습니다. 제 진심을 부디 너그러이 헤아려 주십시요~ 나리!”
“길 마스터는 아마 지금 다른 차원에 있을 걸세”
“그러면 며칠 후에 이곳을 정리 좀 하고 떠나겠습니다. 이 아이도 함께 데리고 가야겠어요.. . 여기
두었다가 폭주라도 되면 이곳의 주민들도 위험해져요... 나리도 막을 수 없습니다. 이런 급의 소울
무버를 상대하기 위해서라도 하루 빨리 괴물 도감을 완성해야겠습니다 나리! 제가 도와드리고 싶
지만 이해해 주십시요...”
“알겠네, 화닌. 일단 이곳은 염려하지 말고 천천히 떠날 채비를 하게나”
“네, 이대로 출발하기엔 외부 위험요소가 너무 많으니 며칠동안 효린에게 활과 검 훈련을 시킨
다음에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윤도훈-
이번엔 겨울이 이전보다 훨씬 빨리 시작되었고 왠지 더 길어질 것만 같았다. 눈이 예년보다 아주
많이 내렸다. 동지가 지나자 곧 눈은 더 이상 내리지 않았다. 추위만 계속되었다.
화닌은 성을 더 과거보다 튼튼하게 재건하는 일에 참여하면서도 낮이나 밤이나 효린에게 신경을
썼다. 효린을 지키고 세세하게 보살폈다. 보이게도, 보이지 않게도. 효린이는 거의 매일 밤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다. 환상을 보고, 뺨에 손을 얹고 고통스럽게 울었다. 화닌은 증세에 따라 손의 기
운이나 약초로 만든 영약으로 증세를 달랬다. 효린이를 팔에 안아 흔들어 다시 재웠다. 그러고는
효린이가 잠결에 한 말들과 깨어난 후 한 말들을 생각하며 본인도 오랫동안 잠들지 못했다. 그리
고 점점 더 커지는 두려움을 느끼는 것 같았다. 메멘토 모리... 그런 것 말이다.
그렇게 일주일 동안 계속되었다. 그러고는 지나갔다. 독감을 앓은 거처럼 폭풍이 지나간 것처럼
효린이는 온전한 상태를 되찾았다. 씻은 듯이 나았다. 별다른 후유증도 남기지 않았다. 효린이는
다시 평온을 되찾고, 꿈도, 환상도 없이 편안하게 잘 수 있었다. 하지만 화닌은
효린이를 지키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중간중간 틈틈이 효린의 옆에 다가가 놀이도 하고 이러저런 얘기를 들려주
었다. 내가 일일이 다 알 수는 없지만 보이든 안 보이든 지극한 정성으로 효린을 지키고 있었다.
떠나기 전에 위험에 대처하기 위해 훈련이 필요하다고 해서 심조한에게 맡겼다.
“자, 길 마스터를 찾으러 가다가 혹시나 괴물들을 만날지도 모르니까 활쏘기와 격투술을 연습하자
효린아!"
19화. 괴물 스카우팅 리포트 2
심조한과 효린은 성곽 바깥의 훈련장으로 갔다.
“더 빨리! 앞으로 한 발! 쏘고! 뛰어서 물러나! 반대로 회전! 또 쏘고, 이번엔 활은 넣고 검을 들
어! 앞으로 한 발! 내리치고! 반보 뒤로 물러나서 반대로 회전! 또 내리치고! 자 뒤로 물러나고!
어허이! 중심을 잘잡아. 왼팔을 옆으로 뻗어서 중심을 잡아!화살 주워서 열두발 다 떨어질 때까지
쏘고 그 다음 곧바로 검을 잡고 같은 동작으로 연습하는 거야! 다리 벌린 채 떨어지면 거기가 엄
청 아프다!”
“뭐라고요?”
“아니다~ 좀 쉬었다가 하자.”
“괜찮아요, 아저씨! 아직 더 할 수 있어요. 내가 그렇게 약하다고 생각지 말아요. 나무타고 오르
기도 한 번 해볼까요? 아니면 외나무 밑에 불을 피워 놓고 해볼까요?”
“야! 그런 위험한 소리 하지 마! 그러다가 다치면 화닌 종사관님이 내 조인트를 심하게 깔 거야!
으 생각만 해도 통증이 느껴진다!”
“저는 안 넘어져요!”
“한 번 말했으니 되풀이는 없다. 잘난 척하지 말고! 다리를 확실히! 그리고 동작을 바꿀 때마다
호흡을 하고.
효린아, 숨을 쉬어야지!
도 방어도 제대로 할 수가 없어!”
“안 그랬어요!”
숨이 차서 씩씩거리면 자세가 금방 흐트러지고 빠른 공격
“자꾸 변명하지 말고! 훈련에 집중하고 가르쳐 준대로만 해!
앞으로 한 발! 쏘고! 뛰어서 물러나!
반대로 회전! 또 쏘고, 이번엔 활은 넣고 검을 들어! 앞으로 한 발! 내리치고! 반보 뒤로 물러나서
반대로 회전! 또 내리치고! 자 뒤로 물러나고!
자, 외나무 기둥을 살짝 흔들테니 중심을 잘 잡고 다시 한 번 더! 흔들리지 말고! 앞으로 한 발
쏘고 뒤로 돌면서 검을 잡고 내리쳐! 한 번 더 내리치고! 점프하고 일자로 가운데를 베어! 바로
그거야! 아주 잘했어!”
“정말로요? 정말로 잘했나요, 조한 아저씨?”
“내가 그런 소리를 했어?”
“아저씨가 좀 전에 그랬잖아요!”
“말이 잘못 나왔거나 네가 잘못 들었겠지!
자 다시 중심잡고! 뛰어서 물러나고! 다시 한 번!
효린아, 앞으로 전진하면서 쏘으라니까? 전진은 왜 안해? 내가 같은말을 몇 번이나 해야 하니? 뛰
어서 피한 후에는 바로 전진!
그리고 머리와 목을 보호하기 위해 앞뒤 좌우 재빠르게 몸을 회전
하면서 쏘거나 검을 써야 한다고!”
“적이 한 명일 때도요?”
“몇 명과 싸울지는 절대로 알 수 없어. 너 뒤에, 등 뒤에 뭐가 있는지는 절대로 몰라. 항상 머리
와 몸을 움직이면서 적의 공격을 회피해야 하는 거야. 지금 하는 것이 하체동작과 무기를 신속히
다루는 훈련이야! 그리고 빠른 회전과 반동. 진짜 전투였다면 넌 벌써 끝났다고. 자 숨 고르고 한
번 더 해봊자!
그래! 바로 그거야! 자, 전진을 하니 얼마나 멋지니? 그러다가 언제라도 칠 수 있
어. 해야 한다면 뒤쪽으로 칠 수도 있고. 자, 회전을 하고 뒤로 쳐 봐.”
“하이고! 숨 차 죽겠습니더~”
“아주 잘했다. 이제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지? 이제 좀 전달이 됐나?”
“내가 바본 줄 알아요!”
“넌 여자잖아 여자는 남자들보다 공간을 읽는 능력이 부족해서 좀 더 훈련을 해야 해. 자꾸 훈련
하다보면 어느 순간 주위 공간에 뭐가 있는지 얼만큼 움직여야 하는지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을거
야!”
“으아, 아저씨, 이걸 길 마스터가 듣게 된다면!”
“알았다, 알았다. 내가 말실수를 했다! 길마스터를 찾아도 내가 그런 말 했다는 건 절대로 말하지
마라!
오늘은 이제 그만하고. 들어가 쉬자.”
“난 안 지쳤다니까요!”
“내가 지쳤다 지쳤어... 자 이제 내려와!”
“에이~ 보기보다 약골이시네요 아저씨... 약골 맞죠?”
“훈련시간 초과야 초과! 자, 뛰어내려! 걱정 말고! 내가 잡아 줄게.”
“넵! 으차!”
“생각보다 잘하는구나! 제법인데~ 이제 눈가리개를 풀어라.”
효린과 운발이 윤도훈의 미완성작인 괴물 도감을 보고 있다.
“보자... 가장 많이 출몰하는 이놈, 이놈을 잘 기억해라. 골렘 말고 이거 말이다. 아니그 그림 말고
이것 말이다. 이건 구울이란 놈이다. 좀비랑 비슷하게 보이는 이 괴물말이야. 자, 효린아, 네가 구
울에 대해서 뭘 배웠는지 보자.”
엥? 시험인가요?"
“아냐... 어차피 숙지해야 하니까 나가면 온천지에 이놈들이 깔렸다. 근데 너 밤새 잠도 안자고 공
부했나 보구나 다크서클이 장난이 아니네..."
“이거 아이새도우 바른 건데요! 히히"
“뭐야? 이 녀석이! 하긴 워낙 동안이라 그렇지 꾸밀 나이가 되긴 됐다. 암튼 구울에 대해 말해
봐라.”
“네, 운발이 아저씨! 구울은 아랍어로 귀신이나 악마를 뜻하는 말인데..."
<괴물 도감>
구울.
구울은 언데드에 준하는 괴물 종족으로 취급되고 있다. 엑스트라처럼 쉽게 박살나는 좀비와는
달리 행동이 재빠르고 돌진 공격으로 팔을 휘두르거나 물어 뜯는다.
지성을 갖춘 놈이 가끔 있는데 자연스럽게 리더가 된다. 시체가 변한 것이 아니라 다른 차원의
세계가 중첩될 때 넘어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얼핏 보면 좀비와 착각하기 쉽지만 전염되는 종
족은 아니다.
이들을 죽이려면 은으로 만든 언월도로 놈들의 목을 자르거나 몸을 확실히 반으로 갈라야 한다.
배만 가르거나 다른 부위만 자르면 당장에는 힘을 쓰지는 못하지만 결국엔 다시 쌩쌩하게 살아난
다.
불에 태워도 되지만 심장이 타지 않으면 결국 다시 살아난다. 보통 서너 마리 이상 떼로 다니는
데 여러 마리를 돌아가며 타격하는 식으로 체력을 깎으려 하지 말고 한 놈씩 집중 공격해서 빨리
제거해야 한다.
“그러니 죽은 사람에게만 위험한 거지?”
“아니오, 그렇지 않아요. 산 사람에게도 덤벼요. 만약 배가 고프거나, 흥분했거나 하면. 만약 전
쟁으로 인해서서 사망자가 많이 생기면······.”
“효린아, 왜 그러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효린아, 들어 봐. 그건 잊어버려. 그건 다시는 돌아오지 않아.”
“나는 봤어요.
강변 마을의 들판에 온통 시체들이 누워 있었어요. 늑대들과 야생이 되어 버린
개들이 그들을 물어뜯었어요. 독수리와 까마귀들도 뜯어먹었어요. 거기엔 분명 구울도 있었을 거
예요...”
“그래서 네가 아주 참혹한 장면을 보았구나! 그래 어디든 볼 수 있지만 우리를 공격하는 무서운
괴물이기 때문에 지금 네가 구울에 대해서 배우는 거야, 효린아. 알고 있는 것은 이제 악몽이 되
지 못해. 내가 싸우는 법을 아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아. 그럼 구울과는 어떻게 싸
워야 하지?”
“은으로 만든 언월도로 심장을 베야 해요! 구울은 은에 약해요.”
“그리고 또 어디에 약하지?”
“밝은 빛에요. 그리고 불에도.”
“그럼 불빛과 불을 가지고 구울과 싸울 수 있는 건가?”
“가능은 해요. 하지만 위험하죠. 헌터들은 횃불이나 자광 지팡이를 쓰지 않아요. 그것들이 그림
자를 만들어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죠. 헌터들은 태생적으로 아주 미미한 빛도 감지할 수 있는 시
각세포가 있기 때문이죠."
“아주 잘했다. 잘 기억하고 있구나. 확실히 화닌 종사관의 말대로 똑똑하구나. 자, 그러면 여기를
봐라, 이 그림을.”
“우엑~ 이 이게 뭐예요 완전 더럽게 생겼어요.”
“뭐, 사실 이게 평범하게 생겼다고는 할 수 없는 괴물이지. 이건 라스알굴이야. 구울의 변형된 종
류 중에 가장 센 놈이야. 구울과 아주 비슷하지만 훨씬 더 크지. 또, 보다시피 해골에 돌출된 머
리뼈 세 개가 있어. 나머지는 시체를 먹는 괴물들과 같지. 집중해라. 손톱은 짧고 둔해서 무덤을
파헤치고 땅에 구멍을 파는 데 적합하게 되어 있어. 강력한 이빨은 뼈도 씹어 먹고, 길고 가는 혀
가 있어 쓰러진 적의 뼈에서 골수를 핥아 먹지. 오래되어 냄새를 풍기는 골수야말로 라스알굴이
가장 좋아하는 특식이야. 효린아 근데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니에요.”
“얼굴이 창백한데?
연두빛이 되었어. 제대로 먹지 못한 거 아냐? 아침은 먹었니?”
“네! 먹었어요.”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었더라······. 아하, 잊어버릴 뻔했네. 중요한 건데. 라스알굴, 구울, 그리고
이런 종류에 속하는 다른 놈들은 자기들 고유의 생태계가 없어. 이놈들은 차원이 다른 세계들끼
리 중첩되었을 때 넘어 들어온 거야. 이들을 죽인다고 하더라도 다른 동물들처럼 지금 우리가 살
고 있는 세상의 자연 질서가 깨지거나 파괴되거나 하는 일은 없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서 이 괴물들은 애초부터 자연계의 일부로 생긴 것이 아니라는 거야! 이해하겠니, 효린아?”
“알겠어요, 운발 아저씨. 화닌 아저씨도 윤도훈 아저씨도 나에게 설명해 주었어요. 저도 알아요.
우리의 생태계에 대해서...”
“좋아, 좋아. 나는 뭔지 아니까, 만약 그분들이 설명해 줬다면 나한테 다시 외워서 말해줄 필요
는 없다. 그럼 라스알굴로 다시 돌아가자. 라스알굴은 아주 드물게만 나타나는데, 다행이지, 정말
위험한 놈이니까. 라스알굴이랑 싸우다 조그만 상처라도 입으면 시체 독에 감염되고 만다. 시체
독은 어떤 영약으로 치료하지, 효린?”
“마명조의 꼬리로 만든 영약이요.”
“정답이다. 하지만 상처를 입지 않는 편이 좋다. 그러므로 라스알굴과 싸울 땐 놈의 옆으로 다
가가선 안 돼. 항상 거리를 두고 싸우고, 칠 때는 멀리서 달려와 뛰면서 벤다.”
“흠, 그놈은 어디를 치는 게 가장 좋은데요?”
“바로 이제 그걸 배울 차례란다. 봐라.”
<괴물 도감>
라스알굴.
구울이 강화된 괴물. 구울의 우두머리가 되거나 같은 놈들끼리 무리지어 다닌다.
헌터를 만나면 몸에서 가시가 돋아난다. 먼저 공격하다가 가시에 찔리면 온몸이 경직된다. 방어력
이 높고 외피가 두꺼워 언월도로 베어도 칼날이 한번에 잘 들어가지 않는다. 강한 전기가 발생하
는 화살에 맞아도 아주 빠르게 체력을 회복한다. 쉽게 덤벼들 대상이 아니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은 ‘번아웃’ 마법을 사용하는 것. 헌터가 손으로 발동하는 마법이다. 이것을 사용하면 일시적으로
괴물의 정신줄을 놓게 만든다. 이때 목을 치고 심장을 완전히 찔러야 제거할 수 있다.
(번아웃 팁: 사람이나 헌터들에게 사용할 때도 있다. 협상에서 대화 설득이나 회의석상에서 요주
의 인물 하나를 잠재워 좀 더 여유로운 분위기로 유도할 수 있다. 아니면 괴물과 싸우지 않고 아
이템만 파밍하고는 잽싸게 도망칠 목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다. 번아웃 마법력을 강화하면 동시에
여러명의 대상에게 효과를 적용할 수 있다.)
“한 번 더, 효린아. 이제 천천히 다시 해 보자. 움직임 하나하나를 네가 완전히 통제할 수 있을 때
까지 말이야. 봐라, 내가 막기 자세에서, 마치 찌를 것처럼 자세를 취하면... 엉? 왜 물러나는데?”
“왜냐하면 그건 속임수니까요! 왼쪽으로 넓게 올 수도 있고 안쪽 상단을 칠 수도 있으니까요. 그
러니까 난 뒤로 물러났다가 역습을 노릴 거예요!”
“그렇게 한다고? 만약 내가 이렇게 하면?”
“아우! 천천히 하기로 했잖아요! 내가 잘못한 거 있어요? 아저씨, 말해 봐요!”
“아니 그냥 내가 더 크고 힘이 셀 뿐이야.”
“그건 정직하지 않아요!”
“정직한 싸움이란 없어. 싸움에서는 내가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나은 면을 이용하고, 어쩌다 생기
는 이점을 반드시 써먹어야 해. 너는 뒤로 물러나면서 내가 더 큰 힘으로 칠 수 있는 기회를 제
공했지. 뒤로 물러나는 대신 반 회전을 이용해서 왼쪽으로 돌고 아래에서부터 나를 쳐서 왼쪽 상
단, 턱 밑이나 뺨, 아니면 목구멍을 노렸어야 해.”
“그렇게 하게 놔두지도 않았을 거면서! 그랬다면 반대편으로 돌아 내가 날로 막고쳐내기를 하기
도 전에 왼쪽으로 내 목을 움켜잡았을 거잖아요! 상대가 어떻게 할지 내가 미리 어떻게 알아요!”
“실전에 나서기 전에 알아야만 해. 넌 잘 할 수 있어.”
“하이고 잘도 되겠네요!”
“효린아, 우리가 지금 하고 있는 건 싸움이야. 난 너의 적이고. 나는 너를 이기기를 원하고, 꼭
그래야만 해. 왜냐하면 목숨이 달렸으니까. 그러니까 보라 방금 전 상황에선 내가 뭣하러 회전을
도냐? 난 이미 왼쪽에 와 있다고, 봐. 무언가 더 간단한 걸로 순간적으로 겨드랑이 아래를, 어깨
안쪽을 찌르는 게 낫지 않겠어? 네 대동맥을 끊으면 넌 몇 분 안에 죽어. 거기를 철저히 방어해!”
20화. 하세계 1
효린이는 다시 자세를 취했다.
“하아앗!”
“아주 잘했다. 좋아, 좋아. 자, 손목의 유연함을 훈련한 게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알겠지? 이제
조심해. 칼을 쓰는 헌터들은 가만히 정지하는 자세에서 가장 실수를 많이 하지. 잠시 굳어 있기
때문에 바로 이렇게 놀라는 사이에, 일격을 당한다구. 자, 다시!”
“하아앗!”
“오케이! 하지만 뛰어야 해, 옆으로 물러나 뛰면서 회전 베기! 내 왼손에 단검이 있을 수도 있
어. 주의하고!
좋아, 아주 좋아. 지금은? 이제는 어쩔 거지?”
“내가 어떻게 알아요?”
“내 발을 봐! 내가 지금 몸의 무게를 어떻게 버티고 있지? 이런 자세로는 무얼 할 수 있지?”
“무엇이든 가능하죠!”
“그러니 돌아, 돌라고! 나를 이 자세에서 흩뜨려야지!
방어해! 좋아! 내 칼을 보지 마! 상대의
눈을 봐! 칼은 착각을 하게 할 수 있어! 방어해! 좋아! 다시 한 번! 좋아! 그리고 다시!”
“아우우우! 또 빗나갔다!”
“아니, 괜찮아.”
“아우~, 왜 빗나갔지... 이번엔 뭘 잘못했나요?”
“아니 아니. 아주 잘 했어! 내가 그냥 빨리 피했을 뿐이야. 잠시 앉아서 쉬자. 너도 분명 엄청
피곤할 거야. 땀 흘리는 것 좀 봐라! 아침부터 오전내내 달렸잖니!”
“난 피곤하지 않아요. 배가 고플 뿐이에요.”
“그래, 점심 먹으러 들어가자! 우선 그 40킬로짜리 철갑옷부터 벗어라!"
“효린아, 조심해라. 이제는 세 번째 추를 매달 거야. 심조한과 주운발 종사관이랑 했던 훈련은 잘
마무리했으니... 이번이 떠나기 전에 하는 마지막 훈련이다. 스텝은 두 개 있을 때랑 똑같아. 그냥
피하기만 한 번 더 하면 돼. 준비됐지?”
“넵”
“항상 호흡에 집중해라. 들이쉬고 공격, 다시 내쉬면서 전진!”
“으윽, 아우~씨바!”
“욕하지 마라. 아프니?”
“으, 그냥 살짝 걸린 것뿐이에요. 어디서 잘못한 거죠?”
“너무 규칙적인 리듬으로 움직여서 그래!
두 번째 반 회전은 너무 성급했고, 속이기 공격은 너무
크게 했어. 그래서 추가 딱 지나갈 때 서게 된 거지.”
“아우~ 화닌 아저씨, 저긴 피할 데도, 몸을 돌릴 데도 없어요! 추들이 너무 가까이 걸려 있다고요!”
“공간은 얼마든지 있어. 하지만 몸을 피할 때도 역시 몸이 정해진 리듬을 타지 않도록 해야 해.
효린아, 이건 전투야, 율동이 아니라고. 전투에서는 리듬에 맞춰 움직이면 절대 안 돼. 규칙적으로
움직이면 곧바로 적의 먹잇감이 돼! 상대를 교란하고, 헷갈리게 하고, 상대의 반응을 늦춰야 하는
거야. 다시 해보자, 준비됐지?”
“넵, 준비됐습니다!”
“잘 안되도 욕은 하지 말고. 자, 긴장 풀고. 공격 시작!”
공격 연습 한 세트가 끝났다. 효린이는 숨을 고르며 웃음을 지었다.
“하~ 이번엔 어때요, 스치고 지나가지도 않았어요!”
“다시 말하는데, 이건 전투야. 율동도 서커스도 아니야!”
“그렇게 생각 안했어요!”
“아니, 그렇게 했다는 게 아니라...연습을 실전처럼 최면을 걸고 해 보란 말이야...긴장 풀고. 손목
붕대 다시 감고 손을 그렇게 꽉 쥐면 안 돼. 집중력이 흩어질 뿐 아니라 회전할 때 균형도 깨져.
편안하게 호흡하고, 준비됐지?"
“네."
“가자!"
“우엑! 아저씨, 이건 도저히 할 수가 없어요. 추를 빨리 지나가려고 하니까 발이 자꾸 꼬여서 균형
을 잡기가 어려워요.”
“여기 내 옆에 와서 앉아라. 좀 쉬어."
“난 피곤하지 않아요. 아저씨, 난 아무리 해도 저 세 번째 추는 넘어갈 수가 없어요. 지금부터 1년
동안 쉰다고 해도 지금보다 더 빠르게는 안 돼요."
“더 빠를 필요도 없어. 지금도 너는 충분히 빠르다."
“그럼 어떻게 하는 건지 알려 주세요. 동시에 반 회전을 돌고 뒤로 빠지며 가격하는 건가요?"
“아주 간단해. 네가 주의를 덜 한 거지. 시작하기 전에 한 번 더 피하는 것이 필수라고 했지. 피해.
그러면 반 회전을 돌 필요가 없어. 두 번째는 모든 걸 잘해서 추들을 다 피해서 왔잖니."
“하지만 자루는 맞추지도 못했어요. 왜냐하면 아저씨, 반 회전이 없으면 가격할 수가 없어요. 왜냐
하면 속도가 점점 줄어들어서... 그거, 그 뭐였더라?"
“가속도 말이냐? 그건 사실이야. 그럼 가속도와 에너지를 더 붙여. 하지만 회전과 발 바꿈을 통해
서가 아니야. 그걸 할 시간은 없으니까. 추를 칼로 쳐."
“추를요? 난 자루를 쳐야 하는데!"
“시리, 이건 전투야. 자루는 네 적의 약한 부분을 모방하고 있고, 거기를 맞춰야만 해. 추는 적의
무기, 무기는 피하고, 몸을 숙여야 하지. 추들이 너를 건드리면 너는 상처를 입는 거야. 진짜 전투
에서는 이미 일어날 수 없게 되겠지. 그러니 추는 너를 건드리면 안 돼. 하지만 너는 추를 건드릴
수 있어. 왜 그런 우울한 표정을 짓지?"
“나는...나는 추를 칼로 치면서 덤빌 수 없을 거예요. 실제로 괴물을 덤벼들면 어떻게 막으면서 공
격을 할 수 있겠어요? 생각만 해도 겁나요!"
효린이는 눈물,콧물을 흘렸다.
“애기야, 이걸로 코를 닦아라. 진정이 되면 내 말을 잘 들어 봐. 이 세상의 헌터도, 마법사도, 소울
무버도
그리핀의 빠르기와 발톱에 쉽게 맞서지는 못해. 그리고 바로 그런 빠르기과 발톱 공격을
모방하는 것이 왔다갔다 하는 저 뾰족뾰족한 추들이야. 그러니 덤빌 생각은 아예 하지 마. 너는
추를 절대로 물리치지 못해. 너 자신을 추로부터 분리해 낼 수는 있지만. 네가 가격을 하는 데 필
요한 힘을 추의 운동에너지로부터 받는 거지. 아주 가볍게 무기를 들고 추에 다가올때 살짝 기댔
다가 추의 속도가 감지되면 그대로 한바퀴 회전하고 강하게 베! 추의 힘을 튕기듯 받고 그대로
다시 돌려준다! 알겠니?"
<괴물 도감>
그리핀.
보통 사자를 ‘짐승의 왕’, 독수리를 ‘하늘의 왕’으로 취급하므로, 그리핀은 이 둘의 힘을 합친 힘세
고 당당한 동물로 묘사된다. 그리핀의 눈은 몇천 리 밖에 있는 것을 감지할 수 있고 부리는 다이
아몬드보다 단단하고 예리하며 깃털로 만든 부채를 휘두르면 큰 폭풍이 일어나며 수컷의 발톱은
독을 만들어내고 암컷의 발톱은 독을 없앤다고 한다.
그리핀은 아무것이나 닥치는 대로 잡아먹는다. 특히 말을 좋아하는데 그리핀이 공격하지 않는 동
물은 코끼리와 사자뿐이다. 중세시대의 동물우화집에는 그리핀이 날카로운 부리와 발톱으로 은하
선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발겨서 내장을 꺼내어 먹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리핀이 가장 열중하는 일은 산에서 금은보석을 찾아내서 보금자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리핀은
본능적으로 금이 매장되어 있는 곳을 안다. 때문에 금광의 파수꾼 역할을 담당하여 금을 빼앗으
러 오는 자들과 전력을 다하여 싸워 지켜낸다고 한다.
이 놈에게 맞지 않고 잡는 게 과연 가능은 한 건가 라는 생각이 절로 들 것이다.
그리핀이 어렵게 느껴지는 가장 큰 이유는 사기적인 공격 범위와 유도성능에 있다. 행동 패턴 또
한 처음 만나는 보스 치고는 이상할 정도로 잘 짜여져 있다. 가령 전방 일정 각도 내에서의 대응
이 가능하도록 물기, 날개치기 등등의 패턴을 구비하고 있으며 어찌어찌 뒤로 돌아가 때리다보면
금새 반전하면서 죽빵을 날린다. 비행 패턴의 경우 활강하다 급강하하는 공격은 의외로 회피가
쉽지만 날아가는 척하고 솟았다가 곧바로 아래로 찍어버리는 페이크 공격이 상당히 아프다. 도망
가려면 정말 집요할 정도로 거리를 좁히기 때문에 구르기나 회피보다는 달리기로 빠져나와야 한
다. 그런데 이렇게 거리를 벌리면 곧장 저공비행으로 바로 돌진해온다. 대책없이 그리핀의 패턴에
말려들 경우 거의 헌터를 가지고 놀다 죽일 정도다. 시간을 벌어 가면서 직감적으로 상대해야 한
다. 변칙적으로 급돌진 공격을 하기 때문에 회피 스킬이 효과가 없다.
전혀 안 되어있는 상태이
므로 구르기는 공격 자체를 피하기보다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용도로 쓰고 기력이 회복되기까
지 버텨서 경직마법을 날린 후 1차 가격하고 도망가면서 반복해야 한다. 화닌이 지금 효린에게
훈련시키는 목적이 바로 그 공격방식을 몸에 배게 하기 위함이다.
“음...일단 해볼게요~"
“속도야, 효린아, 힘이 아니라고. 힘은 골렘들이 무지막지하게 사용하는 것이고 그리핀이 보여주는
것처럼 속도를 지배해야 해! 속도를 이용해 힘을 배가시키는 거야!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
지?"
“음, 추를 피하지 말고 속도를 무기로 흡수하고 그대로 되돌려 줘라!"
“좀 쉬었다가 할래?”
“난 괜찮아요."
“그러면 좋아 몇 번만 더 연습하고 마무리하자! 이제 어떻게 할지 알겠지? 아까랑 똑같은 스텝으
로, 속이기 동작 다음에 피하고 다시 전진..."
“알아요."
“공격!"
마지막 추를 피하고 기둥의 끝에서 모래자루를 목검으로 내리쳤다.
“하아앗! 이겼다! 그리핀을 해치웠어! 아저씨 봤어요?"
“일단 호흡부터 고르고..." 검지손가락을 세워 좌우로 흔든다.
효린은 목검을 내리고 좌우를 살피면서 호흡을 정리한다.
“자! 호흡도 안정됐어요...내가 진짜로 해냈어요! 잘했죠?"
“하하! 그래 그래, 효린아, 정말 잘했다! 모레는 출발해도 되겠다"
멀리 남쪽 바다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과 글래셔 넘어 북쪽에서 넘어오는 냉기가 만나 자주
먹구름이 만들어졌다. 아래쪽엔 비가 내리고 글래셔 근처에선 싸라기눈이 내렸다.
“이제 모레면 마스터를 찾아 길을 떠나는구나! 길에 나가면 무엇을 만날까?"
효린은 도감에서 보거나 말로만 전해 들은 괴물들을 만날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리핀, 그렌델,
라스알굴, 골렘, 뱀파이어, 라미아, 너크, 와이번, 레센,바실리스크, 만티코어 등 모험에서 만날 괴
물들에 대한 생각으로 들떠 있었다.
“자, 이제 출발이다!”
“짐은 최대한 줄인다고 줄였는데 더는 못줄이겠어요···”
“에엥? 너, 어디 관광여행가냐?”
“아뇨, 길마스터님 찾으러 가야하잖아요!”
“근데?”
“그러니까 짐을 쌌죠!”
“아~? 네가 우리가 직접 걸어서 찾으러 가는 것으로 생각했구나··· 효린아, 잠시만 나를 따라 오렴
···”
“네에···아···알겠어요···”
화닌은 붉은 벽의 성 지하 대피소로 갔다.
“여기야!”
“엥? 이건 뭐예요?”
“이건 다른 차원으로 가는 일종의 접속 장치야!”
“어떻게 하는 건데요?”
“여기 이 갑옷을 입고 얼굴에 이 특수 마스크를 끼고 그리고 저 변환장치에서 나온 뇌전선과 갑
옷의 뇌전선을 서로 연결하면 된다.”
“그러면 어디서 번개를 끌어온다는 건가요?”
“역시 이해가 빠르구나! 저 위에 꼭대기 첨탑에는 번개를 유도하는 피뢰침이 있어. 그리고 거기에
서 이곳까지 구리선이 연결되어 있단다.”
“아하! 그럼 이제 어떻게 하면 되죠?”
“응 바깥의 공기 원소를 변환시켜 번개를 일으키는 적란운을 만들면 돼!”
“아하! 그건 누가 하는데요?”
“으응~ 그걸 잘하는 놈들이 있단다. 나머지는 윤도훈 나리께서 알아서 해주실 거야!”
“아저씨 근데 이렇게 해서 가야할 곳이 어딘데요?"
“하세계와 가상 세계"
다른 차원으로 가는 출발점은 동굴이었다.
-효린-
거인족들이 거대 동물을 타고 떼지어 지나가는지 한참동안 동굴 안까지 진동이 느껴졌다. 동굴
속에서 나왔을 때, 매순간 조심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던 크라이언은 다행히 보이지 않았다. 화닌은
바깥 공기를 한껏 들이마시고 들어왔다.
'아저씨는 하세계로 가야 한다고 했지만
그 이유를 완전히 설명해 주지는 않았다. 출발하기 전이
나 훈련하는 동안에는 왜 설명해 주지 않은 걸까?'
하세계의 지도를 보며 가야할 길과 방향을 점검했다. 이곳에서 보이는 지평선 가까이의 동쪽 하
늘은 짙은 보라빛이었으나, 더 높은 곳을 바라보니 색깔은 점점 옅어졌다.
하세계를 통해 가상 세계라는 곳을 가는 것인지 아니면 서로 다른 차원의 세계인지는 확실히 알
수 없었다. 우선 하세계에서 '막그'라는 괴물을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리고 또한 환혼석을 찾아
야 한다고 했다. 그게 있어야 저세상 너머 황극으로 가기 전에 언제든지 부활할 수 있단다. 아마
도 내 생각에는 그걸 사용할 만큼 곳곳에 강력한 괴물들이 있다는 것이 아닐까?
아직도 남쪽 하늘에 검투사 별자리가 떠있었고, 검투사의 손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푸른 별은 새
벽의 아쿠아마린처럼 광채를 뿌리고 있었다. 검푸른색을 띠며 어두컴컴했던 숲은 다시 한번 가넷,
사파이어, 오팔, 토파즈빛으로 차츰 변해 가고 있었다. 그리고 소나무, 전나무, 떡갈나무와 주목이
무성한 숲 뒤로 모습을 드러낸 황혼지대. 그곳에는 거대한 빙벽의 일부가 뿌연 안개 속에 희미하
게 드러나 있고 딱 집어서 형언할 수 없는 터키석같은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대충 봐도 높이가 남산보다 훨씬 높아 보였다. 누가 이런 걸 여기에다 세웠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곧바로 화닌에게 물었다.
"이건 세워진지가 5천년도 더 지났다고 들었어. 물론 기록 이전에도 존재했을 거라고 추측은 해
보는데...암튼 나도 너만큼 궁금한 게 많아서 이곳에 있는 동안 좀 더 찾아보려고 해"
21화. 하세계 2
하세계는 막연하게 지하세계라고 생각했었지만 그게 아니었다. 그냥 또다른 세계였다.
화닌은 이미 몇 번 왔었다고 했다. 지난 번에 왔을 땐 동쪽과 서쪽 양쪽 끝과 정중앙 그리고 그
둘 사이에 한 곳씩 망루를 설치해서 각각 삼십 명 정도의 경비대원을 보냈다고 했다. 크라이언들
을 포함해 장벽 너머에 있는 정체불명의 여러 괴물들이 넘어 올 조짐이 보이면 즉시 후방에 신호
를 보내도록 했다.
"크라이언들은 소재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검과 창으로 무장했어 그들은 어떤 이유인지 하세계에
도 있고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 세계에도 있어. 기이한 소리를 내는 전투 나팔을 불면서 행군을
하며 주로 밤에 이동해”
그런데 더 무서운 건 그들이 나타나면 블리자드가 발생해서 앞을 제대로 볼 수가 없으며 그곳에
서 도망나오지 못하고 길을 헤매다가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참수를 당한다고 했다. 피도 눈물도
없는 그야말로 이름대로 냉혈족이었다.
화닌은 언젠가 '허'라는 문지기 괴물로부터 동쪽으로 빙벽은 마치 하나의 면도날과 같으나, 서쪽
으로는 한 마리의 구렁이와 같다고 하는 말을 들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그건 사실이었다. 빙벽
은 하나의 거대한 혹 같은 둥근 언덕을 지나 계곡 밑으로 하강했고, 면도날처럼 날카로운 기다란
화강암의 능선을 따라 다시 상승한 후, 한 들쭉날쭉한 산봉우리 옆으로 이어지다가 다시 더 깊은
계곡 밑으로 하강한 다음, 서부의 산맥으로 향하는 언덕들을 따라 다시 높게 솟아 오르고 있었다.
화닌은 이 곳 능선 부근의 빙벽을 사수하는 것이 특히 중요하다고 말했다. 하세계에서 빙벽을 거
론하는 이유는 '막그'라는 괴물이 이곳에 오면 순식간에 빙벽이 녹아버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나
는 그말을 듣고 당연히 '막그'를 우리가 제거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 반대였다. '막그’는
나중에 냉혈족인 크라이언들을 무찌르는데 꼭 필요한 괴물이기 때문에 괴물 도감에 봉인해야 한
다고 했다.
"그러면 그동안 괴물을 잡으려는 이유가 없애려는 것이 아니었어요?"
"물론 없애야 하는 괴물도 있어 하지만 일단은 단 한 놈이라도 산 채로 괴물 도감에 봉인해야
해!"
"괴물 도감이 책 아니었어요?"
"엄밀히 말하면 책 이미지를 갖고 있는 거대한 데이터 베이스며 가상의 인벤토리라고 보면 돼"
"가상의 인벤토리요?"
"네가 눈을 가린 채 그리고 무거운 철갑옷을 입고 연습한 이유가 바로 하세계나 가상 세계로 들
어가 그곳 괴물과의 전투에서 이기기 위해서야”
“물론 그렇겠죠!”
“근데 검술과 회피만으론 괴물의 어마무시한 파워를 제압하지 못해! 그래서 때론 괴물도감을 활
용해서 이이제이 전법으로 괴물을 괴물로 물리치려는 거야!”
"아, 윤도훈 나리가 특히 가상 세계처럼 다른 차원의 세계에 사용하기 위해서 그렇게 위험을 감수
하고 애를 쓰신 거네요"
"그렇지 나리께서는 자나깨나 항상 나에게 어느 세계에서나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전천후 만능 도
감을 만드는 게 최종 목표라고 하셨어... 이름하여 절대 도감!”
그리고 화닌이 하세계와 관련된 오래 전 얘기를 들려 주었다.
빙벽 높이의 반은 얼음이 아닌 흙과 암석이라고 했다. 전부 얼음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었던 것이
다. 이것을 주도적으로 만든 것은 흙, 바위, 얼음의 정령들이었으며 정령을 도와 트롤과 골렘들이
합세해서 쌓아 올렸다고 했다. 그리고 이후에 여명의 시대에 살았던 술법사와 마법사들이 더 증
축한 것이라고 했다. 5천년 전에 있었던 대전쟁으로 인해 이곳은 처참하게 파괴되었지만 두 번에
걸쳐 정령, 트롤, 골렘, 술법사, 마법사들의 힘으로 지금의 모습으로 쌓아 올린 것이었다. 누구든지
이 광경을 처음 보는 이가 있다면 아마도 외계인이 와서 쌓아 올려놓고 그들의 고향으로 돌아간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숲의 아이들과 만났을 때 들었던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들의 조상들이 그 때 그 전쟁에 참여
했었는데 당시의 조상들은 훨씬 훌륭한 기술을 갖고 있어서 인간들에게 불의 검을 만들어 주었다
고 했다. 불의 검이 없었더라면 아마도 이 세상은 냉혈족들이 지배하여 얼음과 서리와 눈으로 뒤
덮었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사실 대번에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아저씨 제가 궁금한 게 있으면 참지 못하는 성격이라서요...하나 물어봐도 되요?"
"혹시 크라이언에 관한 거니?"
"와하하! 족집게시네요! 그러니까 도대체 크라이언들의 정체가 너무 궁금해서요 어떻게하다가 그
런 놈들이 생겨났는지 너무 궁금했거든요!"
화닌은 자신도 완전히 믿을 만한 얘기라고 할 수는 없다고 하면서 알고 있는 것을 들려주었다.
<괴물 도감>
크라이언.
일반 인간이 대적할 수 없는 강력한 존재. 크라이언의 우두머리이자 리더격인 킹크라이요는 괴물
도감에서 몇 되지않는 최상급 괴물 중 하나이다. 크라이언도 각 개체마다 전투기술과 체력한계에
차이가 있다. 화닌 본인도 불속성의 집혼석이 없었다면 아예 대적상대가 되지 못했을 것이라고
술회했다. 복부를 한대 맞았는데 완전히 창자가 완전히 뒤틀려 죽을 뻔 했다고 했다. 데굴데굴하
던 화닌에 창으로 내리찍으려던 찰나에 불속성 집혼석이 발동하여 순식간에 불에 달궈진 것 처럼
변한 구지검으로 막아더니 놈의 창이 증발되버렸고 검에 닿은 놈도 곧바로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아마도 특별한 소재의 금속의 검이나 불속성의 마법을 사용해야만 제거할 수 있을 정도라고 했다.
수천년 전에 있었던 기록이 따로 없고 구전으로만 전해내려왔기 때문에 확실한 필살기는 없었다.
절대 서두르는 모습이 없고 표정의 변화가 없기 때문에 그야말로 얼어붙을 만큼 공포스러운 존재
들이다. 전혀 보이지 않을 정도로 항상 여유가 넘치는 모습들을 보이는 게 특징이다.
크라이언들은 몸에 마치 하얀 갑옷처럼 성에나 서리가 덕지덕지 붙어 있다. 이들은 에메랄드 빛
깔의 눈동자를 갖고 있다. 검과 창도 같은 빛을 띠고 있다. 재질은 추측하건대 특별한 기운이 깃
든 에메랄드 비슷한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그들의 피는 터키석의 빛깔과 유사하다. 킹크라이요는
소울무버가 접신을 시도할때 차단할 수 있다. 반대로 사람이든 괴물이든 그가 뿜어내는 이상한
냉기로 동시에 여럿을 냉혈족으로 만들어 버릴 수 있다.
가장 많은 공감을 받는 이들의 기원설은 거대한 뱀에게 제물로 바치려던 인간의 아이를 얼음의
정령이 가엾게 여겨 늙지 않는 극초저온 냉기를 불어넣어 아주 오랫동안 살 수 있는 냉혈족으로
만들었다는 설이다.
얼음 마법을 사용해 얼음으로 상상도 못할 것들을 만들어낼수도 있다고 한다. 기묘한 옥빛으로
빛나는 검과 창은 세상 어떤 칼보다도 날카로워 아무리 강한 금속으로 만든 무기라고 해도 버티
지 못한고 부서진다. 5천년 동안 더 강해진 크라이언들은 불의 검이나 불속성의 내성을 갖고 되어
거의 불사의 괴물에 이르렀다.
"아니 그러면 얘네들을 뭘로 없애요?"
<괴물 도감>
만티코어.
사자와 호랑이 같이 위협적인 그 존재는 서로 정확하게 들어맞고 맞물리는 톱니와도 같은 뾰족하
고 예리하며 날카로운 긴 이빨들이 3줄으로 늘어서 있으며, 얼굴과 귀의 모양은 흡사 인간과도
같지만 입은 귀까지 찢어질 정도로 크고, 눈은 회색, 신체의 피부색은 피처럼 불그스름 하며, 목
은 길고 거대한 몸뚱이는 사자와 닮았다. 긴 꼬리에는 전갈과 마찬가지로 상대를 찔러 공격할 수
있거나 총알이나 화살처럼 쏘아 발사할 수 있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나 달려있다. 목소리는 마
치 그리스 신화 속 목동의 신인 판의 피리 소리와 트럼펫을 섞어놓은 것처럼 들린다. 놀라울 정
도로 매우 재빠르며 신선하고 싱싱한 인육을 가장 좋아하고 즐긴다.
(플리니우스,‘박물지')
꼬리도 사자의 꼬리나 전갈의 꼬리 끝부분에 달린 둥근 곤봉에 수많은 긴 가시 등뼈 독침들이 성
게, 고슴도치, 밤송이나 가시 철퇴처럼 여러개 돋아나 있다는 묘사와 또는 사자 꼬리나 전갈 꼬리
끝부분에 긴 가시 등뼈 독침들이 여러개 돋아나 있는 묘사가 있으며, 사자 꼬리 전체에 가시나무
처럼 수많은 긴 가시 등뼈 독침들이 여러 개 돋아나 있다는 묘사가 있다. 그리고 꼬리 끝의 독침
이 낫으로 되어있는 묘사가 있고, 사자 꼬리털에 숨겨두어 감춰둔 독침들을 쏘아서 발사하거나
일부만 꺼내서 전갈의 꼬리처럼 공격한다는 묘사도 있다. 혹은 꼬리 전체 자체가 가시 독침털들
로 되어있는 묘사가 나오는 경우도 있다. 더구나 꼬리를 채찍이나 철퇴처럼 휘둘러서 공격과 방
어를 하거나 희생자를 후려치거나 찍어버린다.
또한 만티코어의 이빨 강도와 치악력은 금속 강철 갑옷과 돌, 바위, 암석 같은 단단하고 딱딱한
물체들을 단숨에 부수는 건 물론이고 한번 물리면 그 신체를 절단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빠져나
갈 수 없을 정도의 위력을 가졌다. 그리고 이빨은 부러지거나 깨지거나 빠지면 재빠르게 다시 나
고 턱뼈와 턱근육은 뱀과 상어처럼 자유자재로 늘릴 수 있어 희생자들의 수와 크기 덩치 상관없
이 마음껏 집어 삼켜 먹어치운다. 또 단도 같은 사자 발톱들로 자신에게 저항하거나, 도망치거나
공격하는 대상을 베어버리기 때문에 만티코어 온 발톱 전체에는 희생자들의 피들로 범벅으로 묻
어있다. 심지어 발톱의 강도는 이빨 강도와 치악력에 맞먹는다.
게다가 엄청나게 질기면서 탄성이 좋고 튼튼한 두꺼운 피부와 어마어마하게 발달되어 밀집도가
높고 단단한 근육 때문에 총알과 화살, 창, 도끼, 칼, 가시, 철퇴, 쇠망치 등 무기들의 공격들을 퍼
부어봤자 그 무기들이 그냥 부러지거나 튕겨져 나가버린다. 그리고 사막 지역에서 사는 만티코어
개체들은 피부가 카멜레온처럼 보호색으로 되어있어 찾아보기가 불가능이라고 한다.
그리고 이 꼬리의 맹독은 위협적이고 치명적이면서 굉장한 위협적인 맹독으로, 기본적으로 신경
을 마비시키고 근육을 굳게하는 신경독이다. 삼림 지역에 사는 개체들은 신경맹독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일부로 자신의 독침에 독을 가진 동식물들의 독과 독충들의 독을 바른다고 한다. 이 독침
에 스치는 것만으로도 바로 순식간에 온몸에 퍼져서 근육이 굳고 신경이 마비되어 치사에 이르다
가 100% 즉사하며, 살아날 가망은 없다고 한다. 만티코어는 이렇게 포획한 싱싱한 인간을 들어있
는 물건, 옷가지 할 것 없이 게걸스럽게 악어처럼 통체로 씹어 삼켜서 먹어치운다고 한다.
묘사되는 덩치 크기도 보통의 사자와 흡사하며 어마어마하게 발달된 단단한 근육 덕분에 움직임
과 스피드, 점프력 역시 기겁할 정도로 재빠르고 민첩하며, 신속하고 날렵해서 인간의 다리 따위
로는 도망쳐본들 헛된 발악일 뿐이다.
(출처:나무위키)
발자국 소리가 들려왔다. 네 명, 아니면 다섯 명, 지금으로써는 정확히 몇 명인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얼른 전략을 수정했다. 만약에 다가오는 놈들 중 헌터 킬러가 있다면 나 혼자 이들을 일시
에 제압할 수 있는 확률은 아주 적었다. 효린도 함께 싸워야 했지만 나는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일단 빨리 여기에서 도망치는 것이 지금으로선 신의 한수에 버금가는 것이었다. 첫째로, 일단 지
금 힘을 빼면 강한 괴물이 나올 때 이기는 경우의 수가 줄어 든다. 길미진 마스터에게 최상급 기
술을 전수받으러 가는 여정인데 도중에 비명횡사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가능한 피해서 돌아가는
방법으로 바꾸려는 것이다. 두 번째로는 싸우다가 도망치면 현상금을 노리는 헌터 킬러들의 집요
한 추적을 벗어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일단 우회로를 찾아
빨리 이곳을
벗어나야 그나마 그
들을 따돌릴 수 있을 것이다.
효린과 나의 발걸음은 아주 조심스러웠다. 발각되면 정말 힘든 일전을 벌여야 했다.
아~ 그런데 여우 피하다가 호랑이 만난다고 했던가! 우회하는 숲길의 중간에 만티코어가 잠자고
있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전에 한 번도 본 적이 없었지만 본능적으로 엄청난 파워를 가진 놈이
라는 것이 느껴졌다. 길 마스터라면 이 정도로 쫄진 않았을 것이다.
포타미아 지방을 혼자 순례여행을 다니며 심신수행을 할 때였는데
라미아와 바실리스크를 멀리
서 본 적이 있었다. 여러 마스터의 사사를 받다가 원인불명의 다발성경화증이 심해져서 어쩔 수
없이 수행을 중단하고 고향으로 돌아가서 치료와 요양의 시간을 보냈다. 회복되기까지는 생각보
다 시간이 한참 걸렸다. 그리고 2년쯤 지났을 때 다행히 몸은 거의 회복되었다. 하지만 예전의 운
동신경과 감각이 되살아나지 않았다. 다시 몸과 마음을 단련하기 위해 순례여행을 시작했는데 그
때 말로만 듣던 괴물들을 처음 보고 얼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화닌! 지금 만티코어랑 맞짱뜨다가는 뼈도 못추려!"
"뭐! 너희들같이 현상금만 노리는 놈들이 관여할 수준이 아니다."
"아저씨 아무래도 이 사람들이 계속 미행했던 것 같아요! 아까 동굴근처 나무뒤에 숨어 있던 걸
제가 우연히 발견했거든요..."
나는 바로 왜 그런지 알아챘다. 나와 효린은 이미 가까운 영주들에게 소문이 쫘악 퍼졌다. 괴물
도감의 기술을 빼가기 위해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다면 누구든 강제로 데리고 가려고 혈안이 되있
던 상황이었다.
"넌 어디 소속이냐? 혹시 지림성에서 보낸 자객이 맞느냐!"
"흐흐흐 듣던대로 머리도 나쁘지 않구만! 영주를 정중히 알현하면 험한 꼴 보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이미 캐치하고 있겠지?!"
"예의를 갖추어라! 감히 어디 먼저 오라 마라 하느냐!"
자객단의 우두머리로 보이는 라이넬이 받아쳤다.
“찾아다닐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야. 알아서 내가 원하는 곳에 네가 이렇게 나타나니 말이지.”
“내가 다니는 곳을 안다는 것은 여기에 너도 뭔가 냄새를 맡고 똥개처럼 따라 다녔단 말이구나!”
나는 차분하게 말했다.
"농담도 싸가지 없이 잘하는구나! 나는 중세계 괴물 정보국 소속 라이넬이다! 어디 비유할 데가
없어서 똥개를 갖다 쓰느냐! 에이 퉤!”
"솔직히 말해라 원하는게 뭐냐!"
22화. 하세계 3
“최병우와 질러가 내통했다는 첩보가 접수됐다. 그리고 네가 중간에 다리를 놨다는 증거를 입수했
다. 죽은 괴물들을 살려서 질러 군단을 만들려고 하는 큰그림에 네가 일조를 하고 있다는 증거가
있어...환혼석인가 뭔가를 네가 찾으러 다니는 걸 여럿이 목격했으니까...좋은 말 할때 여기서 다
불어라!
환혼석을 어디에 갖다 바치는지 경로만 알려주면 네 목숨은 살려준다고 약속하마!"
"무슨 헛소리를 듣고 여기서 지랄이야 지랄을! 내가 경고하는데 엉뚱한 사람 잡지마라!그리고 이
아이와 나를 어떻게 하든 상관은 없는데 아닌 몇 명이든 덤벼라 근데 여기서 소란을 피우면 저기
잠자는 만티코어가 아마도 성질을 낼 것 같은데 말야...알아서들 조심해라 독침에 뒈지고 싶지 않
으면!"
“그래서 이곳에서 널 기다렸어 와! 진짜 이렇게 타이밍 맞추기가 힘들지는 몰랐다. 지금 여기서
일주일동안 풍찬노숙하며 기다렸다. 솔직히 징그럽다 징그러워! 순순히 우리에게 환혼석을 어디로
갖다주는지 세부적인 루트를 넘기지 않으면 너와 계집애를 나무에 묶어두고 만티코어를 깨운 다
음에 우리는 돌아갈 것이다."
"넌 보아하니 모태쫄보구나! 처음부터 줄행랑칠 생각부터 하고 온 걸 보니!"
"그건 니 생각이고!”
“생각이라고? 넌 단지 도구일 뿐이야. 남들의 더러운 일들을 해결해 주기 위해 고용된 악당일 뿐
이지. 불량배, 누가 널 고용했다고? 위화성의 영주는 청부한 일이 실패한다 해도 눈도 깜짝하지
않아!”
“그냥 듣자하니까 너 꼴리는대로 지껄이는구나, 나를 불량배라고? 네가 뭔지 너는 아나? 넌 구두
가 더러워지는 걸 피하기 위해서 치워야 하는 똥덩어리야. 아니, 그 누가 누군지 너에게 알려 주
진 않겠어, 말할 수는 있지만. 대신 지옥에 가는 길에 생각할 거리는 주지. 난 네가 보호하는 그
코흘리개가 어디 있는지 이미 알아. 나는 네가 길미진에게 마음이 아주 많이 있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여기서 네가 순순히 따르지 않으면 이아이 뿐만 아니라 그녀도 제거대상 리스트에 오를 것
이다. 과거에 길미진과 불장난을 한 것을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그럼, 반드시 후회하게 될 거
야. 아주 오랫동안.”
“그런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나는 이렇게 아드레날린과 반응하는 마법을 부리는 순간을 느끼며 싸움의 즐거움을 기대하고는
잔인하게 웃었다.
“그 말을 하기 전까지는 목숨을 건질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이제는 그것도 없군.”
내가 갖고 있던 메달이 강력하게 움직이며 갑작스러운 공격을 경고했다. 나는 풀쩍 뛰면서 번개
같이 검을 빼어 들었다. 효린이가 실전에서는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상황이어서 다치지 않을까 걱
정이 들었지만 피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내가 검을 뽑아들자 라이넬은 몸을 피하고는 손을 쳐들
어 반격의 마법을 부리려고 했지만 마지막 순간에 만티코어의 포효소리를 듣고 겁을 먹고 말았다.
마법 주문은 외우지도 못하고 황급히 숲과 덤불이 있는 곳으로 아주 신속히 그리고 깊숙이 몸을
피했다. 나는 라이넬를 쫓아갈 수 없었다. 바로 그때 어둠 속에서 아직 들키지 않았다고 생각했던
네 명이 덤벼들었던 것이었다. 칼들이 번쩍였다.
역시 선수들이었다. 네 명 모두. 경험이 많고 숙달된, 호흡이 잘 맞는 전문가들이었다. 나를 공
격하는 것은 짝을 지어 했다. 왼쪽에서 두 명, 오른쪽에서 두 명. 짝을 지어 한 명은 언제나 다른
한 명의 등 뒤에 숨어 있는 식이었다. 나는 왼쪽에 있는 두 명을 골랐다. 영약이 일으킨 흥분에
분노가 더해졌다. 즉 내 능력의 한계치를 뚫은 폭주상태라는 것이다.
첫 번째 놈은 위장하며 왼쪽에서 공격했는데, 그건 어디까지나 옆으로 물러나 등 뒤에 있는 두
번째 놈이 갑자기 찌를 수 있도록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나는 빙빙 돌며 이들에게서 벗어나
칼끝으로 뒤쪽에 있는 놈의 머리 아래에서부터 뒷목과 등을 베었다. 나는 이미 폭주한 상태여서
일격에 힘을 가했다. 분수 같은 피가 벽에 튀었다.
첫 번째 놈과 짝처럼 붙어있던 두 번째 놈은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팀공격이 몸에 배어 있
을 텐데, 이제는 단독으로 공격해야 했다. 이미 승부가 기울어진 것이나 다름 없었다.
"너는 털끝
하나라도 건들 수 없다"라고 말하자 미세하게 움찔하는 것이 보였다. 그때를 노렸다. 놈이 자세를
잡기 전에 두 스텝 전진 속공으로 흉부를 향해 찔렀다. 하지만 다른 두 놈이 마법으로 검끝을 휘
게 만들어버렸다. 생사를 건 검투에서는 변칙도 계산에 넣어야 했다. 아무래도 효린이 위험에 빠
지지 않을까 신경을 쓰지 않을 수가 없기에 오로지 검투에만 집중할 수 없었던 것 같다. 검에 방
어마법을 걸었어야 하는 걸 깜박해서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두 번째 놈은 상대하지 않고 회전을
하며 세 번째, 네 번째 놈들에게 돌진했다. 둘 사이로 재빨리 들어가 양쪽을 번갈아 막아서고 공
격했다. 두 번째 놈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세 번째 놈이 옆구리를 공격하면 내가 옆으로 피할 것이고 그것을 노린 네 번째 놈이 목 뒤로 돌
아 공격할 것이며 이것이 실패하면 두 번째 놈이 네 번째 놈 뒤에 있다가 내 목을 벨 것이다. 이
것이 나의 시뮬레이션이었다.
세 번째 놈은 고양이처럼 날렵하게 옆으로 빠지면서 내 옆구리를 베려고 시도했지만 나는 구르기
로 회피했다. 목을 노렸던 네 번째 놈은 타이밍을 놓쳐 허공을 갈랐고 나머지 두 번째 놈은 스텝
이 엉켜 균형을 잃고 넘어지고 말았다. 등을 보이고 엎어진 것이었다. 나는 이미 이들 뒤로 두번
을 굴러 공격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두 번째 놈이 재빨리 돌아서 일어서려고 할 때 회전법으로
몸을 돌리며 가속도를 붙여 그를 십자로 베었다. 나는 이미 폭주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제어는 잘
안되지만 속도는 엄청 빨랐다. 한 번 더 베고는 직선으로 찔렀다. 그런데 베는 순간 놈의 몸이
180도 돌았다. 직선으로 찔렀을 때는 이미 나의 날카로운 검 끝이 놈의 척추를 파고드는 것이 느
껴졌다.
으아아아악!
“나...마스터 길이라고 해”
효린이가 감응기를 갖고 있지 않았더라면 이 호숫가에 있을 거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어떻게 지니게 되었을까?
이 아이도 왜 자신의 주머니에 있었는지 알지 못한다고 했다.
일단 이 아이를 믿고 맡길 만한 템플이 부근에는 없었다. 어쩔 수 없이 여정의 최종 목적지인 동
북쪽 천만고원에 함께 가기로 했다. 천만고원에는 공중 도시가 있다. 공중 도시 옆에는 모나드라
고 하는 가상과 현실이 혼재된 영역이 있다. 이곳에 헌터와 마법사 능력을 가진 아이들을 육성하
는 학교가 있다. 도시와 모나드에는 긴 다리가 놓여져 있다.
다음날 아침, 나는 효린과 이동하기 위해 말 한필과 그에 딸린 작은 승용수레를 다음 중간 기착
지인 진강읍까지 대여했다.
좁은 숲길을 한참 가고 있었는데 앞에 마차 여러 대가 멈춰 있었다. 내려서 앞을 확인해보니 심
하게 막혀 있었다. 이러다가 여기에서 날이 저물게 되면 완전히 깜깜한 숲 속에서 밤을 보내야
한다. 추위와 배고픔에 떨 것을 생각하니 가슴이 답답했다.
“이게 무슨 일이죠?”
바로 앞에 있는 늙은 마부에게 물었다. 술 냄새를 풍기는 졸리는 눈을 하고 있었고 내 말을 바로
알아듣지 못한 것 같았다.
“어르신, 도적떼의 공격이라도 있었던 건가요? 무슨 일입니까? 빨리 가야하는데...”
대답을 듣기도 전에 숲에 가려 보이지도 않는 마차 줄 앞쪽에서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내려서
기다리고 있던 마부들은 거친 욕설을 퍼붓고는 말들과 소들을 향해 채찍질을 하며 마차 안으로
급히 들어갔다. 곧이어 늘어선 마차 행렬이 느릿느릿 움직였다. 하품을 하던 노인은 정신을 차리
고 턱수염이 움직일 만큼 빽 소리를 지르며 노새들의 엉덩이를 채찍으로 내리쳤다.
“아니 꿈쩍도 않더니만 비명 소리가 들리고 나니까 마차들이 움직이네그려!"
노새를 몰고 가던 어르신이 말했다.
“바로 딱 맞는 때지. 아까 왔으면, 우리랑 같이 여기서 내내 기다렸을 테니까. 우리 모두가 급하지
만 기다릴 수밖에 없어. 길이 막혔다는데 어떻게 가겠어?”
“길이 막혔다고요? 어떻게요?”
“사람을 잡아먹는 무서운 놈이 나타난 거야, 젊은이. 어떤 기사 양반이 하인 하나를 데리고 이 길
로 갔다고 해. 그런데 괴물 한 마리가 그 기사의 투구와 함께 머리를 뽑아버리고, 말은 창자가 다
튀어나왔다네. 하인 놈은 도망쳐서 횡설수설하는데, 괴물은 한 놈이고 길이 온통 짐승의 피로 물
들었다는군.”
“그래요? 아이구야! 도대체 그 괴물은 정체가 뭐라던가요? 드래곤입니까?”
나는 어르신과 이야기를 계속하기 위해 잠시 말을 멈춰 세웠다.
“아니, 드래곤은 아냐.” 어르신이 고개를 저었다.
“거 뭐라더라...마... 만티...코어...라고 하던가... 암튼 도망친 그 하인 놈이, 괴물이 날아다닌다고, 엄
청나게 크다고 했어. 거기다 미쳤다고 하더라고. 그 기사만 먹어 치우고 달아나버릴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야! 길 한가운데 앉아서 말이지, 젠장, 삐죽한 비늘을 드러내고는 씩씩거리면... 아니, 글
쎄 병에 끼운 코르크처럼 이렇게 길을 막고 있다니까! 그 괴물을 본 사람들이 죄다 마차를 버리
고 도망쳤으니 말이지. 그래서 마차가 반 마일이나 늘어섰고, 이 근처는 자네도 알겠지만 수풀이
무성하고 늪까지 있어서 우회를 할 수도, 뒤로 돌아갈 수도 없어.”
“맙소사! 그래서 이렇게 서 있었단 말입니까! 아니, 무기로 그 괴물을 길에서 쫓아버리든지 죽이
든지 해야죠.”
나는 답답하다는 듯 언성을 높였다.
“뭐, 몇 명이 시도는 했지.”
행렬이 조금씩 움직이자 노새를 몰며 노인이 말했다.
“자강 요새로 행군을 하던 젊은 병사들이 떼로 덤볐어. 그런데 그 괴물이 그들을 갈가리 찢고 물
어뜯어 버렸어... 겨우 몇 명만 살아서 돌아갔어...”
“들어보니 그리핀보다 더 무서운 괴물인 것 같으네요...병사들이 갖고 있던 무기가...”
내가 말하는 도중에 바로 앞 마차의 마부 어르신이 끼어들어 한톤 높은 목소리로 외쳤다.
“군인들은 도망쳤다고~, 그 만티코어인지 뭔지를 보자마자 말이야. 한 놈은 바지에 오줌을 지리더
라니까! 저저 저거 보라구 저놈이야!”
“도대체 뭐 하러 똥 싼 놈을 나에게 알려주려는 거예요? 관심도 없는데.”
노새를 몰던 어르신이 그 얘기를 듣더니 조금 짜증을 내며 말했다.
“그게 아니라, 괴물 말이야! 죽은 괴물! 병사들이 그 괴물을 마차에 싣고 있어, 보이냐고!”
나는 안장 위에 올라섰다. 꽤 어둑어둑했고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몰려든 탓에 자세히 볼 수는
없었지만 병사들이 옮기고 있는, 누르스름하고 거대한 몸체가 보였다. 괴물의 박쥐같은 날개, 전
갈처럼 생긴 꼬리가 땅에 축 늘어져 있었다. 병사들은 한목소리로 구령을 붙이며 괴물의 몸뚱이
를 간신히 들어 올려 마차에 실었다. 마차에 묶인 말들은 피비린내와 썩은 고기 냄새에 울부짖으
며 마차에서 벗어나려고 했다.
“서 있지 마시오!”
병사 열 명을 거느린 분대장이 마부들에게 소리쳤다.
“앞으로 가세요! 길을 막고 서 있지 말고!”
“그러니까, 저 병사들이 괴물을 처치한 거죠?”
“무슨~”
마부 어르신은 고개를 저었다.
“저 병사들은 사람들 앞에서 소리나 질러댔지, 여기 서라, 이쪽으로 와라, 이래라저래라...
처치할 생각은 전혀 없었어. 대신 괴물 헌터를 불렀지.”
괴물을
“괴물 헌터를요?”
“그렇지.”
옆에서 잠자코 듣고 있던 다른 마부 어르신이 말했다.
“누군가 마을에서 괴물 헌터를 봤다고 해서, 거기로 사람을 보냈지. 그래서 이리로 왔고. 머리카락
은 하얗고, 얼굴은 끔찍한데다가 무서운 칼을 등에 차고 있었어. 한 시간도 되지 않아서 누군가
저 안쪽에서 소리를 쳤지. 이제 곧 갈 수 있다고, 헌터가 만티코어를 처치했다고 말이야. 그래서
드디어 움직일 수 있게 됐는데, 당신이 때맞춰 여기 온 거야.”
나는 생각에 잠긴 채 말했다.
“그러고 보니 이곳저곳 참 많이 쏘다녔지만, 괴물 헌터를 본 적은 한 번도 없군요.혹시 헌터가 괴
물을 처치하는 걸 본 사람은 있나요?”
“제가 봤어요!”저 앞에까지 들리게 소리를 크게 외쳤다.
조금 앞에 있던 머리가 노란 남자 아이 하나가 외쳤다. 안장도 얹지 않고 입마개도 하지 않은 조
랑말을 타고 있었다. 아주 여유있는 모습이었다.
“내가 다 봤다고요! 병사들 맨 앞줄에서 칼을 뽐아들더니 엄청 빠르게 달려들었어요~!"
“맹랑한 녀석 같으니라구.”
마차 행렬의 가장 연장자로 보이는 하얀 수염이 덥수룩한 어르신이 말했다.
“아직 젖내도 다 빠지지 않은 꼬맹이 녀석이 어디 아무데서나 자랑질이냐! 혼나봐야 입을 다물겠
니?”
남자아이는 전혀 겁먹지 않고 내가 있는 뒤쪽으로 달려와서 서둘러 이야기를 시작했다.
“헌터 이름도 알고 얼굴도 알아요!"
"엉? 그래 아주 씩씩하고 똑똑한 아이구나! 그 헌터의 이름이 뭐였지?"
"이리우스 화닌요!"
1부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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