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혼자만 레벨업 0. 프롤로그 [일일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젊은 여성의 명료한 목소리. 절대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니다. 물론 꿈을 꾸는 것도 아니다. 목소리는 분명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허공에는 퀘스트 정보창까지 떠 있다. '설마... 오늘도?' 기도하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정보창을 열어 보았다. 띠링. [일일 퀘스트 : 강자가 되기 위한 준비] 팔굽혀 펴기 100 회 : 미완료 (0/100) 윗몸 일으키기 100 회 : 미완료 (0/100) 스쿼트 100 회 : 미완료 (0/100) 달리기 10km : 미완료 (0/10) ※주의: 일일 퀘스트 미완료 시 그에 상응하는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내용을 확인하자마자 반사적으로 욕이 튀어나왔다. "아오... 이게 벌써 며칠째냐고!" 1. E 급 헌터 E 급 헌터 성진우. 진우가 뭘 하든 간에 꼬리표처럼 따라다니는 수식어였다. 진우의 능력치는 거의 일반인과 마찬가지. 남들보다 조금 튼튼하고 회복이 약간 빠른 걸 빼면 일반인과 별로 다를 게 없었다. 그러다 보니 항상 부상을 달고 살았다. 죽다 살아난 것도 여러 번이었다. 물론 진우라고 좋아서 헌터를 하고 있는 게 아니다. 일은 위험하지, 늘 무시당하지, 심지어 벌이까지 시원치 않다. 만약 헌터협회에 소속된 헌터에게 지급되는 의료비 보조금이 없었다면 지금이라도 당장 헌터증을 반납하고 일반인으로서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겨우 20 대 중반에 특별한 재주도 없는 진우가 매달 수백씩 들어가는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할 방법은 헌터가 되는 것뿐이었다.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고 할까? 그래서 그날도 진우는 울며 겨자 먹기로 하는 수 없이 협회 주관의 레이드에 참가했다. *** 같은 지역에서 활동하는 헌터들은 대개 서로를 잘 안다. 게이트가 열리면 그 지역의 헌터들이 총집합하기 때문이다. 먼저 온 헌터들은 협회 직원이 건네는 따뜻한 커피를 홀짝이며 서로 인사를 나누었다. "어이, 김 씨. 여기야. 여기." "오, 박 씨가 웬일이야? 이제 헌터짓은 그만둔다며?" "그게... 마누라가 덜컥 둘째를 임신해 버려서." "하하하핫. 그래. 헌터들이 한몫 잡기엔 레이드만 한 게 없지." 김 씨가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리자 박 씨도 머쓱하게 따라 웃다가 물었다. "그런데 요즘은 협회 호출이 뜸하네? 게이트가 생기는 횟수가 좀 줄었나?" "에이, 무슨. 요샌 협회보다 길드들이 더 열심이라 그렇지. 큰돈이 움직이다 보니 길드들이 아주 눈에 불을 켜고 덤빈다더만." "그럼 이번 레이드는 협회에서 진행하는 거니 안전하다고 봐도 될런가?" 슬슬 걱정되는지 박 씨가 주위의 눈치를 살폈다. 길드가 움직이지 않는다는 소리는 큰돈이 되지 않는다는 이야기이고, 큰돈이 되지 않는 게이트는 보통 공략 난이도가 현저히 낮았다. 하지만 어떤 일이든 100 퍼센트는 없는 법. 박 씨뿐만 아니라 다른 헌터들도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글쎄..." 남은 커피를 마저 들이켜며 대답을 피하던 김 씨가 멀리서 다가오는 누군가를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어, 저기 온다. 성 씨! 성 씨!" 다른 헌터들도 그를 보고 기쁜 낯빛을 띠었다. "안녕하세요." 목소리의 주인공은 성진우였다. 진우는 반갑게 맞이해주는 김 씨에게 가볍게 목례하고 그대로 지나쳐갔다. 김 씨는 진우가 지나간 것을 확인하고는 흐흐 웃으며 호언장담했다. "진우 왔네. 그럼 여긴 안전해." 눈이 동그래진 박 씨가 김 씨에게 붙어 섰다. "뭐야? 성진우라는 헌터가 그렇게 강해?" "아, 박 씨는 잘 모르겠구나. 박 씨 떠나고 얼마 안 돼서 오기 시작한 헌터야. 여기 헌터들치고 성진우 모르는 사람 없지." "그렇게 세다고? 그런데 왜 협회 소속으로 일한대? 대형 길드나 프리랜서 안 하고." 히죽히죽 웃던 김 씨가 눈을 흘겼다. "저 사람 별명이 먼 줄 알어?"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뜸 들이지 말고 얼른 말해 보우." "인류 최약병기." "...최약병기? 최종병기가 아니고?" "이 사람아. 그건 S 급인 최종인 헌터 별명이고. 저 사람은 최약병기. 아마 대한민국 헌터 중 제일 약할걸." "뭐?" 박 씨는 눈살을 찌푸렸다. 성진우란 헌터가 그렇게 약하다면 왜 다들 그를 반겼단 말인가? 유사시엔 자신의 등 뒤를 맡겨야 할 사람인데. 다른 헌터들의 반응을 이해할 수 없었다. 박 씨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자 김 씨가 웃으며 박 씨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 찔렀다. "에이! 그러니까 성진우가 오는 레이드는 난이도가 낮을 수밖에 없다는 거지. 그 사람한테는 협회가 절대 힘든 일을 맡기지 않거든. 그랬다가 누구 죽는 꼴 보려고?" 그제야 박 씨의 얼굴도 밝아졌다. "그, 그래?" 오랜만의 레이드라 마누라가 옆에서 걱정을 많이 했었다. 실은 자신도 불안해하던 차였다. 그런데 김 씨 이야길 들으니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김 씨는 말을 이었다. "저 양반 E 급 게이트에서도 다쳐가지고 일주일을 입원했다는 소문이 있어." "헌터가 E 급 게이트에서 다쳤다고?" "그렇다니까. 설마 E 급 게이트에서 다칠 사람이 나올 거라고 아무도 예상을 못해서 치유 헌터도 안 데려갔다나 봐." "그래서 병원 신세를 일주일이나? 푸하하하핫!" 박 씨가 너무 크게 웃자 김 씨가 눈치를 줬다. "에끼, 이 사람아. 성 씨 들을라." "아이고, 그걸 생각 못했네." 박 씨는 진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낄낄거렸다. 다행히 거리가 멀어서 그런지 이쪽 이야기를 들은 것 같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오판이었다. '다 들려요, 이 아저씨들아.' 진우는 그들의 눈빛을 애써 모른척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이럴 때는 유난히 밝은 자신의 귀가 원망스러웠다. 아직 레이드가 시작되기는 이른 시간. '너무 일찍 도착했나?' 시간 때울 거리를 찾던 진우는 커피를 나눠 주는 협회 직원을 발견하고 그리로 다가갔다. "커피 한잔 부탁드려도 될까요?" "아, 성진우 헌터님... 이거 죄송해서 어쩌죠? 커피가 방금 다 떨어져버렸는데." "..." 겨울바람이 코끝을 따갑게 스치고 지나갔다. 진우는 검지로 코끝을 훔쳤다. 하필 자신의 차례에서 동난 커피마저 서러운 날이었다. *** "진우 씨는 왜 헌터 일을 고집하는 거예요?" "죄송합니다." 진우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진우 앞에서 치료 마법을 시전하고 있는 미녀, 이주희는 뾰로통한 얼굴로 불만을 표시했다. "진우 씨한테 사과받으려고 하는 말이 아니에요. 진우 씨가 걱정돼서 그렇죠. 매번 이런 식으로 싸우다간 언젠가 진짜 위험해질 거라고요." 진우는 주희 어깨너머로 싸우고 있는 동료 헌터들을 바라보았다.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면 던전이 나온다. 이번 던전의 랭크는 D 급 정도. 십수 명의 헌터들이 별로 힘도 들이지 않고 던전 안의 괴물들을 처리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E 급 헌터인 진우에게는 그마저도 벅찼다. 보통 부상당한 헌터의 처치는 후방에서 대기하는 치유 헌터들의 몫. 레이드마다 부상당하는 진우는 치유 헌터들 사이에서도 유명인이었다. 주희가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헌터 일을 그만두지 못할 이유라도 있는 거예요?" 진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일을 남에게 밝히기는 싫었다. "헌터 일은 취미로 하는 겁니다. 이거라도 안 하면 아마 심심해서 죽을 걸요." 그러자 주희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취미 생활 두 번 하다간 저승에서 레이드하고 있겠네요." 방심하고 있던 진우는 그만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덕분에 주희의 잔소리가 이어졌다. "아아! 웃지 마요, 웃지 마! 상처 벌어진다고요!" 진우가 끅끅거리다 물었다. "아니, 그런 말은 어디서 배웠어요?" "어디서 배우긴요. 조오기- 김 씨 아저씨한테서죠." "아이고, 하여튼 저 아저씨 진짜..." 웃고 떠드는 사이 치료가 끝나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한발 늦었다. 레이드는 어느덧 정리되는 분위기였다. 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오늘 내가 잡은 마수는 겨우 한 마리.' 그것도 E 급 하나. 진우는 손에 쥔 E 급 마정석 하나를 만지작거렸다. E 급 마수에서 나오는 최하급 마정석은 10 만 원도 하지 않는다. 목숨을 건 대가치고는 아주 형편없는 보수였다. 'C 급 마수에게서 나오는 마정석만 해도 천만 원이 넘는다던데...' 그러나 겨우 E 급 헌터에 불과한 진우에게 C 급 마수는 너무 까마득한 상대였다. 그때, 누군가가 외쳤다. "어? 여기 입구가 하나 더 있는데?" 근처의 헌터들이 우르르 몰려갔다. "어, 그러네?" "진짜 입구가 하나 더 있네?" 최초 발견자의 말처럼 던전 안에 또 다른 던전의 입구가 숨겨져 있었다. "이중 던전이라... 이런 게 실제로 있긴 있구먼." 10 년 차 헌터인 송 씨가 던전의 입구를 들여다보며 신기해했다. 동굴 안쪽은 어두워 잘 보이지 않았다. 송 씨는 자신의 장기인 불꽃 마법을 시전해 안으로 던져 보았다. 불꽃이 휙 날아가며 안을 비추었다. 통로는 끝없이 뻗어 있었다. 이내 추진력을 잃고 바닥으로 떨어진 불꽃이 조금 타닥거리다 곧 꺼졌다. 동굴은 다시 어둠에 잠겼다. "흠... 다들 잠깐만 나 좀 보세." 실질적 리더인 송 씨가 헌터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마침 치료가 끝난 진우와 주희도 그리로 모였다. 송 씨는 헌터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다들 잘 알다시피 모든 게이트는 던전의 보스를 잡지 않으면 닫히질 않어. 여길 다 정리했는데도 게이트가 멀쩡한 걸 보니 보스는 저 안에 있는 모양이구먼." 송 씨는 숨겨진 던전 입구를 가리켰다. 헌터들이 서로 눈빛을 교환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견이 있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송 씨는 말을 이었다. "원래 이런 경우에는 협회에 보고하고 결정을 기다려야 하지만... 그랬다가 다른 헌터들에게 보스를 뺏기면 우리 수입이 현저히 줄어드는 수가 있어." 헌터들의 표정이 구겨졌다. 특히 부인의 임신 때문에 목돈이 필요했던 박 씨의 얼굴은 더욱더 굳어졌다. '요즘 산후 조리에 드는 돈만 해도 얼만데...' 목숨 걸고 레이드에 나선 의미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우리끼리 보스를 처치하고 나갔으면 하는데... 다른 사람들 생각은 어떤감?" 헌터들은 생각에 잠겼다. "..." "..." 물론 쉽사리 접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번 던전은 난이도가 매우 낮았다. 그러다 보니 던전 안에 숨겨져 있던 다른 던전도 난이도가 그리 높을 것 같지는 않았다. "흠흠." 송 씨가 헛기침을 했다. "모두 17 명이니까 투표로 결정하자고. 결정되면 딴소리하지 말기로 하고. 어떤감?" 송 씨의 제안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가." 송 씨가 손을 들었다. 그러자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차례차례 손을 들었다. "저도요." "저도 갑니다에 한 표." 박 씨가 가장 먼저 손을 들었고, 김 씨나 다른 헌터들도 손을 들어 올렸다. 당연히 반대표도 많았다. "가지 말죠." "일단 협회의 결정을 기다려 보는 게 좋지 않을까요?" 가자와 말자가 팽팽히 맞서는 가운데, 투표는 돌고 돌아 마지막 남은 두 사람 진우와 주희 차례까지 왔다. "죄송해요..." 주희는 송 씨에게 고개를 꾸벅이고는 안 간다에 한 표를 더했다. 이로써 가자와 말자는 8 대 8. 동점이 되었다. 송 씨는 결정을 망설이는 진우에게 딱 잘라 물었다. "성 씨는?" 2화 진우의 판단에 모든 것이 달렸다. 진우는 손 안에 쥐고 있는 E 급 마정석을 만지작거리다 옆을 돌아보았다. 주희가 진우에게 고개를 저었다. 아마도 불안한 모양이었다. 사실 불안하긴 진우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절대 위험을 무릅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럴 만한 실력도, 그럴만한 배짱도 없었다. 하지만 진우에게는 곧 대학에 들어가야 하는 여동생이 있었다. '모아 둔 돈이 없어...' 진우의 나이는 스물넷. 공부해야 할 나이에 돈이 없어서 대학을 포기했다. 동생에게까지 그런 아픔을 대물림 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은 한 푼이 아쉬운 상황. 목돈이 필요한 건 박 씨만이 아니었다. 진우는 손을 번쩍 들었다. "저도 갑니다." 그러자 옆에서 작은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2. 이중 던전 통로는 끝없이 이어졌다. 선두에게 송 씨를 비롯해 강한 헌터들이 앞장섰다. 맨 앞에서 걷고 있는 송 씨는 손바닥 위에 소환한 작은 불꽃으로 길을 밝혔다. 옆에서 김 씨가 물었다. "너무 깊게 들어가는 거 아닙니까? 슬슬 빠져나갈 시간도 고려해야지요." "우리가 얼마나 걸었는감?" 김 씨가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대략... 40 분 정도 걸었네요." "보스를 잡고 나서 1 시간 후에 게이트가 완전히 닫히니까 아직 20 분 정도는 여유가 있구먼." "20 분 안에도 보스가 안 보이면 철수하도록 하죠." "그래야겄지." 송 씨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더니 엄지로 자신의 등 너머를 가리켰다. "김 씨, 앞쪽은 어두우니까 내 뒤로 와서 서." 김 씨는 송 씨의 불꽃을 물끄러미 보고 있다가 품 안에서 휴대폰을 꺼내 라이트를 켰다. 그러자 앞이 아주 훤해졌다. "..." 송 씨는 자신의 불꽃과 휴대폰 라이트를 번갈아 보다 말없이 주머니를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 일행의 후미에는 심한 부상을 입었던 진우와 전투 스킬이 따로 없는 주희가 섰다. 진우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저기... 미안합니다." "뭐가요?" "억지로 끌고 와서요." "전 괜찮으니까 신경 안 쓰셔도 돼요." 진우는 슬쩍 주희의 표정을 살폈다. 전혀 괜찮지 않은 얼굴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우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진짜 괜찮아요?" 그러자 주희가 이쪽을 휙 돌아보았다. "당연히 안 괜찮죠. 지금 제정신이에요? 아까 진우 씨가 찔렸던 곳이 조금만 더 위쪽이었으면 심장에 구멍이 났을 거예요. 손목이랑 허벅지에 입은 상처는 또 어떻고요? 그걸 겨우 겨우 치료해 드렸더니 이번엔 또 다른 던전을 간다고요? 어떤 곳인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찌나 말이 빠른지 듣다 보니 정신이 다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틀린 말은 없었다. 주희가 협회에서 보기 드문 B 랭크의 뛰어난 치유계 헌터였기에 망정이지, 잘못했으면 헌터 일은커녕 당분간 일상생활도 제대로 하기 힘들 뻔했다. '그러고보니 매번 주희 씨한테 신세를 지네.' 주희는 귀하고 귀하다는 치유계 헌터다. 그것도 B 급의 인재다. 협회에서는 당연히 게이트가 생길 때마다 그녀에게 헌터들의 치료를 부탁했고, 진우는 레이드에 참가할 때마다 거의 한 번도 예외 없이 그녀 앞에 앉아야 했다. "아프시죠? 조금만 참으세요." "낯이 익은데... 혹시 저번에 그?" "또 다치셨어요?" "우리 꽤 자주 보는 거 같네요." "진우 씨라고 하셨죠? 저기 그... 괜찮으신 거예요?" "혹시 헌터 일이 적성에 안 맞으시는 게..." "...또 오셨네요." "팔 내밀어요, 아니, 거긴 집에서 반창고 붙이시면 되고요, 골절된 쪽요." 이젠 감사함을 넘어서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 "..." 진우가 의기소침해 있자 주희도 방금 쏘아붙인 게 미안했는지 약간은 태도가 누그러들었다. "정말 미안해요?" "네."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주희가 진우를 곁눈질하며 입꼬리를 올렸다. "그렇게 미안하면... 밥 한번 사는 건 어때요?" 정말 생각지도 못했던 권유였다. 놀라서 쳐다보니 주희는 사춘기 소녀처럼 장난기 어린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녀라...' 하긴 주희는 이제 갓 20 대에 접어든 처녀다. 내년에 21 살이 된다고 했던가? 긴 생머리 대신 단발을 하고, 지금 입고 있는 옷 대신 교복을 입혀놓으면 영락없이 여고생이리라. 교복 입은 주희를 떠올리니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진우의 대답이 늦어지자 주희는 양쪽 뺨을 풍선처럼 부풀렸다. "뭐야... 나랑 같이 밥 먹는 거 싫어요?" 그때였다. 갑자기 앞쪽이 소란스러워졌다. "나왔다!" "보스방이야!" 진우와 주희의 시선이 앞쪽으로 옮겨 갔다. 거대한 문이 길을 가로막고 있었다. 헌터들은 문을 둘러쌌다. "아니, 동굴 끝에 문이라니?" "여태까지 문이 있던 방이 있었나?" "이런 적은 처음인데..." "이거... 위험한 거 아냐?" 웅성웅성. 헌터들이 불안감을 드러냈다. 목숨이 달린 일이다 보니 신중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신중이 지나치면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는 법. 송 씨는 이번 일이 바로 그 경우라고 판단했다.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참인감?" 송 씨는 문에다 손을 얹었다. "그러려면 그러더라고. 나는 혼자서라도 갈 거구먼." 송 씨는 10 년 차 경력의 C 급 헌터였다. 60 을 넘긴 나이만 아니었어도 대형 길드에서 활동할 수 있을 만한 기량이었다. 그런 헌터가 자신감 있게 말하자, 다들 불안감이 조금씩 누그러들었다. "그러고 보니." 헌터 중 몇몇은 이중 던전에 관한 소문을 떠올렸다. "이중 던전에는 굉장한 보물이 있다던데." "중소 길드가 이중 던전을 발견해서 한 번에 대형 길드로 성장한 사례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던전 안의 마수들은 위치가 어디든 다들 비슷한 레벨이니까 사냥이 어렵지는 않을 테고..." 만약 소문처럼 이중 던전에 진짜 굉장한 보물들이 숨어 있고, 던전 안의 마수들이 앞서 상대했던 놈들처럼 D 급, E 급 수준에 불과하다면? '저 영감 혼자 보물을 독차지하게 둘 수는 없지.' '아무렴.' '산후 조리원에, 큰 애 학원비에, 곧 전세도 올려 줘야 하고...' 헌터들의 이해가 일치했다. 진우도 각오를 다졌다. 'E 급 마정석 하나로 돌아갈 순 없어. 최소한 D 급, 아니 E 급 마수 하나라도 더 잡아야 돼.' 꼭 마수가 아니어도 괜찮다. '보물이라도 나온다면...' 던전에서 나온 보물이나 희귀품은 멤버 수대로 골고루 나누는 것이 관례였다. 자기가 잡은 마수의 마정석만 챙겨야 하는 사냥과는 분배 방식이 달랐다. '여기에서 한몫 잡으면 앞으로 좀 편해질 수 있어.' 진우는 꿀꺽 침을 삼켰다. 진우의 비장한 얼굴을 보고서 주희가 물었다. "그게 취미로 헌터를 하는 사람의 표정이에요?" 진우가 어깨를 으쓱거렸다. "요즘 누가 자기 일에 목숨을 걸어요? 취미로 하는 일이라면 또 모를까." "...예?" 주희가 기가 차다는 얼굴을 하고 있을 때, 송 씨가 밀기 시작한 던전의 문이 열렸다. 그그그그그그-! 육중한 문은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지 60 대 노인의 완력으로도 쉽게 밀렸다. 쿠웅-! 문이 활짝 열리자 넓은 내부가 드러났다. 헌터들이 앞다투어 안으로 들어갔다. "우리도 가죠." 혹시나 뒤처질까 싶어 진우가 주희의 손목을 잡고 앞장섰다. "아..." 주희는 얼굴을 살짝 붉힌 채로 따라 들어갔다. *** 헌터들이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벽면을 빼곡히 채우고 있는 횃불들에서 일제히 불꽃이 치솟았다. 화르륵! 덕분에 안이 환해졌다. "뭐야? 불이 켜지네?" "이런 던전은 처음이군." "뭔가... 달라." 헌터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안은 고대 신전 같은 분위기였다. 지하에 숨겨져 있을 것 같은 낡고 음슴합 신전. 바닥이나 벽면, 천정에는 군데군데 이끼가 끼어 있었다. 몇몇 헌터들이 몸을 움츠리며 부르르 떨었다. "왠지 음산한데?" "누가 보고 있는 거 같지 않아요?" 겁먹은 헌터들을 뒤로하고 강한 헌터들 서넛이 안으로 깊숙이 들어섰다. "쯧! 재수 없는 소리들 하지 말라고." "빨리빨리 끝내고 갑시다." 내부는 지나치게 넓었다. 넓은 돔 형태의 방. 서울 올림픽 경기장 몇 개를 합쳐 놓은 것만큼, 아니 몇 개를 합쳐 놓은 것보다 더 큰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도 왠지 비좁게 느껴졌다. 이유는 분명했다. "저... 저거..." "설, 설마 저게 보스는 아니겠지?" 가장 안쪽에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자기 덩치만큼이나 거대한 의자에 앉아 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크기의 신상(神像)! "맙소사." "와아." 탄성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 순간 진우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이미지는 자유의 여신상이었다. 자유의 여신상이 의자에 앉아 있으면 저 정도의 크기가 되지 않을까? 자유의 여신상은 여성의 모습이고, 의자에 앉은 신상은 남성의 모습이었지만 말이다. '어쩌면 그것보다 더 클 지도...' 헌터들은 거대한 신상의 발아래에서 침을 꼴깍꼴깍 삼켰다. 다들 저것이 보스면 어쩌나 하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 그러나 신상은 움직이지 않았다. 다행스런 일이었다. "후우-" 송 씨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자, 흩어집시다." 여유가 생긴 헌터들이 각자 흩어져서 주변을 뒤지기 시작했다. "여기 마수로 보이는 건 없는 데요?" "그렇죠?" "마수는커녕 벌레 한 마리 안 보여요." 신상이 있는 방은 그 광활한 넓이에 비해 내부 구조가 단순한 편이었다. 벽면에는 조명으로 쓰이는 횃불들이 셀 수도 없이 걸려 있었고, 그 앞에는 사람 키보다 약간 큰 석상들이 촘촘히 늘어서 있었다. "아름답네." "예술품 같은데?" 석상들은 각각 들고 있는 것이 달랐다. 무기를 들고 있는 것도 있었고, 책을 들고 있는 것도 있었고, 악기나 횃불을 들고 있는 것도 있었다. "마치..." "신전의 조각들 같구먼." 김 씨가 하려던 말을 송 씨가 대신 했다. "음?" 송 씨는 발아래에서 뭔가를 발견했다. "이건... 마법진인가?" 신전의 중앙에는 생전 처음 보는 형태의 마법진이 그려져 있었다. 그때. "저기 송 씨 아저씨, 여기 뭐라고 적혀 있는데요? 이거 좀 봐 주시겠어요?" 헌터 하나가 구석진 곳에서 특이한 석상 하나를 발견하고는 송 씨를 불렀다. 마법진을 살피던 송 씨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다른 헌터들도 전부 송 씨가 향하는 석상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독 이 석상만 날개가 달려 있고 석판을 들고 있었다. 헌터들이 주목한 것은 석판에 새겨진 글자였다. 석판을 훑어보던 송 씨가 중얼거렸다. "룬 문자군." 룬 문자. 지구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고, 오직 던전에서만 발견되는 문자로, 마법계열로 각성한 헌터들만이 해석할 수 있었다. "카르테논 신전의 규율." 송 씨가 첫 문장을 읽었다. 진우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송 씨가 읽어 주는 석판의 내용을 듣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팔을 잡아당겼다. 뒤를 돌아봤더니 얼굴이 파랗게 질린 주희가 거기에 있었다. 3화 주희의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진우도 덩달아 놀랐다. "왜요? 어디 아파요?" "저... 저기." 주희의 손끝을 따라 진우의 시선이 옮겨갔다. 거대한 신상. 주희는 신상의 얼굴을 가리키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와 똑같은 모습이었기에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 주희가 말을 더듬었다. "누, 눈동자... 신상의 눈동자가 방금 우리 쪽으로 움직였어요." "예?" 몇 번을 다시 봐도 마찬가지였다. 신상은 그대로였다. "에이... 착각이겠죠." 하지만 주희의 귀에는 이미 진우의 말이 들리지 않는지, 고개 숙인 그녀는 진우의 팔에 달라붙어서 오들오들 떨기만 했다. '잠깐.' 문득 진우도 불길한 기운을 감지했다. 주위가 기괴할 정도로 고요했다. '소리가...?' 타닥타닥 타오르던 횃불 소리도 어느 사이인가 들리지 않고 있었다. "첫째." 그 와중에도 석판을 읽어 내려가는 송 씨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이어졌다. "신께 경배하라. 둘째, 신께 찬양하라. 셋째, 신앙심을 증명하라. 이 규율을 지키지 않는 자, 살아 돌아갈 수 없으리라." 그때였다. 쿠웅! 갑자기 터져 나온 소음에 모두가 화들짝 놀랐다. "뭐, 뭐야?" "갑자기 무슨 소리야?" 이변을 가장 먼저 눈치챈 사람은 진우였다. 감각을 곤두세우고 있었던 터라 어느 쪽에서 소리가 들려오는지 금방 알 수 있었다. "문! 문이 닫혔어요!" 진우가 소리치자 다들 문 쪽을 바라보았다. 열어 두었던 문이 어느새 굳게 닫혀 있었다. "에라이! 더 이상 못 참겠네!" 이중 던전에 들어가는 걸 가장 먼저 반대했던 남자가 욕지기를 내뱉으며 문 쪽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돌아갈 테니까 보스고 보물이고 여러분들이 그냥 다 잡수쇼." 송 씨에게 항의라도 하듯이 눈을 부라리던 남자. 그는 고개를 휙 돌리더니 문고리를 세차게 잡았다. 그 순간. 송 씨의 눈이 커졌다. "안 돼!" 퍼걱! 문고리를 잡았던 남자의 목 위쪽이 사라졌다. 머리를 잃은 몸뚱이는 힘없이 뒤로 넘어갔다. 철푸덕! "꺄아아악!" "으, 으악!" 헌터들이 비명을 내질렀다. 사람의 머리를 철퇴로 박살 낸 석상은 피를 잔뜩 뒤집어쓴 채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원래의 자리인 문 옆으로 가서 섰다. "저, 저거 움직이잖아!" "뭐야? 그럼 여기 있는 석상들이 다 움직일 수 있다는 거야?" "저런 것들과 싸우라고?" "내 눈엔 철퇴 휘두르는 거 보이지도 않았다고!" 하지만 진우는 알고 있었다. 참사가 이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방금 전 주희가 말했었다. "누, 눈동자... 신상의 눈동자가 방금 우리 쪽으로 움직였어요." '정말 그게 사실이라면...' 등 뒤에 소름이 쫙 돋았다. 진우는 뻣뻣하게 굳어버린 목을 억지로 움직여 뒤를 돌아보았다. "아..." 신상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3. 시작된 공격 그 순간 신상의 거대한 두 눈이 붉게 변했다. 헌터의 감? 아니, 생물로서의 본능이 위험을 경고했다. 뭔가가 온다. 감당하지 못할 무언가가! 진우는 뒤의 헌터들을 돌아보며 목청을 다해 외쳤다. "숙여요!" 거의 동시에 신상의 양쪽 눈에서 붉은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진우는 주희를 안고서 몸을 던졌다. 지이이이잉-! 광선은 진우가 서 있던 자리 위를 스쳐 지나갔다. 10 분의 1 초. 아니, 100 분의 1 초. 아슬아슬했던 순간이었다. 하지만 다른 헌터들도 다 진우처럼 운이 좋은 것은 아니었다. "으아아아악!" "으아아악!" 광선에 닿은 헌터들은 말 그대로 증발해 버렸다.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는 헌터들의 잔해만 덩그라니 남았다. 비명은 그들이 아니라 그들의 최후를 목격한 다른 헌터들의 입에서 터져 나온 것이었다. "이, 이게 뭐야?" "으으으-." "어째서 이런 일이..." 헌터들은 경악했다. 16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겨우 11 명. 이런 가공할 만한 공격은 생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숙이라는 소리 덕분에 간신히 피했어.' '방금 성 씨가 소리치지 않았다면...' 헌터들은 진우를 바라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진우는 생명의 은인이었다. 진우가 아니었다면 방금 어떻게 됐을지, 간담이 서늘했다. "..." 진우는 엎드린 채로 신상을 노려보았다. 신상의 눈은 아직 붉게 빛나고 있었으나 더 이상의 공격은 없었다. '공격은... 끝난 건가?' 진우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겁에 질린 주희가 품 안에서 떨고 있었다. 그녀가 B 급의 뛰어난 헌터임에도 대형 길드 대신 협회 소속으로 일하며 간단한 레이드에만 참가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었다. 주희의 숨소리가 점점 더 거칠어지고 있었다. 그녀를 이대로 내버려 둘 순 없었다. 진우가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는데, 누군가가 강한 힘으로 어깨를 잡아 눌렀다. "일어서지 말어." 어느새 다가온 송 씨였다. 진우는 당황해하면서도 순순히 그의 말을 들었다. 송 씨가 다른 헌터들에게도 외쳤다. "다들 움직이지 말어! 그 자세로 가만히 있어!" 송 씨는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다시 진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움직이던 사람들만 당했어. 자네 말 듣고 숙였던 사람들은 살았고." "그렇군요." 송 씨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자네는 다 알고 소리쳤던 게 아닌감?" "전 그냥 뭔가 위험한 거 같아서..." 송 씨의 눈에 이채가 서리었다. '감이 좋은 친구구먼. 이 친구 E 급이라고 했었나? 능력치가 조금만 더 높았어도...' 송 씨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진우를 바라보는 동안, 진우도 송 씨의 상태를 살필 수 있는 여유를 얻었다. 뭔가를 발견한 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저씨... 팔이?" "이건 괜찮어. 견딜 만혀." "그래도..." 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진우의 어깨를 누르고 있는 팔의 반대쪽, 그러니까 송 씨의 왼팔이 사라져 있었던 것이다. "..." 말없이 주희를 내려다보던 송 씨는 통증이 극심할 텐데도 내색하지 않고 입고 있던 티셔츠를 길게 찢어 왼팔에 둘둘 말았다. "끝에 좀 묶어 줄 텐감? 한손으로는 어렵구먼."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간단한 지혈이 끝났다. 송 씨는 비명이나 신음 대신 긴 한숨을 내쉬었다. 헌터 생활 10 년의 오랜 연륜이 묻어 있는 한숨이었다. "후-." 응급 처치가 끝나고 송 씨는 예리한 시선으로 주변을 훑었다. 신상이 공격을 멈췄다고는 하지만 상황은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조금씩 흘러갔다. "으흐흐흐흑..." "우리가 왜 이런 꼴을..." 몇몇 헌터들이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순 없잖아!" 헌터들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다. 진우도 동감이었다. '언제까지고 이렇게 있을 순 없다.' 하지만 어떻게 한단 말인가? 송 씨의 추측이 맞는다면 움직이는 순간 공격을 당하게 된다. 그걸 피해 어떻게 운 좋게 문까지 도망친다고 해도 문 양쪽 옆에는 문지기 석상이 있다. 놈들이 문제다. 아까 문지기의 움직임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빨랐다. 놈들이 공격하기 전에 문을 열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도저히 불가능해 보였다. 즉, 헌터들의 전멸은 시간문제라는 소리였다. '잠깐... 시간문제라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강한 위화감이 들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일어난 것. 하지만 아직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것. '뭔가... 뭔가 놓친 게 있다.' 아마도 답은 그 안에 있으리라. 그때였다. "움직이지 말어!" 송 씨가 멀리 주 씨에게 소리를 질렀다. 하지만 주 씨는 이를 드러냈다. "시끄러워! 저놈이 언제 다시 공격할지 모르는데 여기서 계속 기다리고 있으란 거야?" 주 씨는 전투계 헌터였다. 전투계는 몸으로 싸우는 헌터들로 신체 능력이 일반인에 비해 월등하게 뛰어났다. 게다가 주씨는 실력을 인정받아 대형 길드와 계약을 앞두고 있는 상태였다. "난 이렇게는 못 죽어." 주 씨는 몸을 낮춘 상태로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방향은 문 쪽. 그의 다리 근육이 팽팽하게 부풀어 올랐다. "저런..." 송 씨가 나직이 중얼거렸다. 순간 주 씨가 땅을 박차며 튀어 나갔다. 다다다닥! 진우는 신상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신상의 눈동자가 주 씨를 향하고 있었다. 이내 두 눈동자에서 섬뜩한 광선이 뿜어져 나왔다. 지이이잉! 광선은 주 씨의 등 뒤를 덮쳤다. "꺄아아아악!" 여자 헌터 하나가 자지러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실금했는지 그녀가 앉아 있던 자리에 노란 물이 번져나갔다. 남자 헌터들의 얼굴도 굳어졌다. "맙소사..." 광선이 지나간 자리에 주 씨는 없었다. 잘려진 두 발목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비위가 약한 한 남자는 속에 든 것을 게워 냈다. "우욱- 우웨에엑!" 진우도 미간을 구겼다. 역시 이 녀석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헌터들을 전멸시킬 수 있었다. 그건 벌레를 밟아 죽이는 것보다 쉬운 일처럼 보였다. '그런데 왜... 그러지 않는 걸까?' 죽일 수 있음에도 죽이지 않는다. 헌터들만 보면 다짜고짜 덤벼드는 마수들과는 패턴이 전혀 달랐다. 이 녀석들은 일정한 조건이 갖춰져야만 움직인다. 문에 다가가면 공격하는 문지기, 움직이면 광선을 뿜는 신상의 눈. 마치 규칙이 있는 게임처럼. '설마... 이 방에는 룰이 있는 건가?' 순간 진우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퍼즐이 맞춰졌다. 아까 송 씨가 읽었던 석판의 내용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카르테논 신전의 규율.' 규칙은 룰이고, 룰은 규율이다. 만약 이들의 손아귀에서 살아나갈 방법이 있다면 그 석판에 적혀 있던 경고가 유일한 열쇠였다. "...신께 경배하라." 그게 첫 번째 규율이었다. "음? 자네 뭐라고 했는감?" 송 씨가 진우를 돌아보았다. 진우는 대답 대신 입가에 검지를 붙였다. 생각할 시간을 달라는 제스처였다. '내 생각이 맞다면...' 진우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송 씨가 급히 진우를 잡으려고 했으나, 진우가 비장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살기를 포기한 눈빛은 아니군.' 송 씨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신상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조심스럽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자 신상의 눈동자가 곧바로 진우를 향했다. 지이이잉-! 역시나 광선이 쏘아졌다. 주저앉은 속도가 조금만 더 늦었더라면 머리카락 몇 가닥이 아니라 얼굴이 녹았으리라! 바닥에 납작 엎드린 진우는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헉, 헉." 죽을 뻔했다. 신상과 눈이 마주친 순간 꼼짝 없이 죽는 줄 알았다. 간발의 차로 피했지만 아직도 다리가 떨려 왔다. '그래도...' 소득은 있었다. '움직이는 대상을 공격하는 게 아니야.' 몸을 숙인 상태라면 얼마든지 자세를 바꿔도 눈동자는 움직이지 않는다. 하지만 일어서려고만 하면 어김없이 광선을 퍼붓기 시작한다. '놈은 일정 이상의 높이가 되면 공격하는 거야.' 방금 진우는 그걸 확인해 보기 위해 목숨을 걸었다. 그리고 확신을 얻었다. 첫 번째 규율의 의미를! 4화 4. 세 가지 규율 진우가 헌터들을 향해 소리쳤다. "다들!" 헌터들의 시선이 진우에게로 모였다. 진우는 그들을 둘러보며 말했다. "신상을 향해 절하세요!" 헌터들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절...?" "신상한테 절을 하라고?" 서로 눈치를 살피던 헌터들이 곧 진우에게 욕설을 쏟아 냈다. "씨발...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아니, 이 상황에서 그런 말이 나와?" "벌써 미쳐 버린 거냐, 성진우?" 김 씨는 벌게진 얼굴로 콧김을 뿜어냈다. "내가 성 씨를 아주 잘못 봤구만! 지금 움직일 수만 있었으면 자네 주둥이부터 후려쳤을 거야!" 진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여섯 명의 동료가 저 신상에게 죽었다. 그런 놈에게 절을 하라고 했으니 욕을 먹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헌터들의 심정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건...' 자신에게 논리적 근거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저 감. 감이라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런데. "나는 하겠네." 목소리는 진우의 뒤쪽에서 나왔다. 다들 시선이 그리고 옮겨 갔다. 리더 격이라 할 수 있는 송 씨였다. "송 씨 아저씨...?" "저 빌어먹을 신상한테 절을 한다고요?" 다른 헌터들이 당황하는 동안 송 씨는 진우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자네는 뭔가 발견한 거지?"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감인가?" "...네. 일단은." "그려." 아까 진우의 감 때문에 11 명이 살았다. 지금은 주 씨가 죽어서 10 명이지만. 그런 진우의 감이라면 한 번 믿어 볼만하지 않나? 송 씨는 그렇게 생각했다. 송 씨가 신상을 향해 엎드리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진짜 하는 거야?" 여세를 몰아 진우가 목청에 힘을 실었다. "부탁드립니다! 다들 신상을 향해 엎드려 주세요. 어쩌면 살아나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살 수 있다. 살아나갈 수 있다. 그 한마디가 주는 파급력은 대단했다. '살 수 있다고?' '여기서 나갈 수 있단 말이야?' '그깟 절 한 번에?' 머뭇거리던 헌터들이 한 명씩 엎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절을 하는 형태로. 하나둘 그 숫자가 늘어 갔다. 투덜거리던 김 씨도 결국엔 신상에게 머리를 숙였다. 하지만 신상에는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신상의 두 눈은 여전히 소름 끼치는 붉은빛으로 이글거리고 있었다. 진우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이게 아니었나?' 문득 진우의 시선이 옆의 주희를 향했다. 몸을 바짝 숙인 채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고 덜덜 떨고 있는 주희는 아무리 좋게 봐줘도 절을 하는 모습이라고 보기는 힘들었다. '어쩌면...' 진우는 주희의 손목을 살포시 잡았다. 그러자 주희가 겁먹은 고양이처럼 고개를 들었다. 진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주희가 손에 주고 있던 힘을 풀었다. 진우는 천천히 주희의 자세를 바꿔 주었다. '됐다.' 이제 마지막 한 명만이 남았다. 바로 자기 자신. 진우도 신상을 향해 무릎을 꿇고, 양 바닥을 짚고, 천천히 머리를 숙였다. 그러자 변화가 시작되었다. "어, 어어?" 변화를 알아챈 헌터들이 소리를 질렀다. "신상이? 다들 신상을 봐!" "신상의 눈이!" 신상의 눈에서 이글거리던 붉은빛이 점점 사그라지고 있었다. "뭐야? 진짜 이걸로 되는 거야?" 이윽고 붉은빛은 완전히 사라졌다. 오오-! 헌터들은 환호했다. "불꽃이 꺼졌어!" "살았다고!" 흥분한 헌터들이 자리에서 일어나 마구 소리를 질렀다. 그런데도 신상의 눈은 더 이상 광선을 뿜어내지 않았다. 뒤늦게 고개를 든 진우도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예상대로였다. 이 방은 게임처럼 철저하게 정해진 규칙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아직 게임은 끝난 것이 아니었다. 두 개의 규율이 더 남아 있었다. 둘째, 신께 찬양하라. 셋째, 신앙심을 증명하라. 바로 그때. 쿠구구구구구궁끔찍한 소음과 함께 방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역시...' 예감은 적중했다. 끝이 아니었다. 신상이 그 거대한 몸뚱이를 천천히 일으키고 있었다. "어, 어?" 서로 부둥켜안고 눈물을 흘리던 헌터들이 이변을 깨닫고 돌처럼 굳어 버렸다. "뭐... 뭐야? 끝난 거 아니었어?" "마, 말도 안 돼!" 다들 얼어붙은 채로 말을 잇지 못했다. 그들의 얼굴에 절망감이 드리워갔다. "아... 아아..." 마침내 신상이 완전히 일어섰다. 놈은 주위를 한번 스윽 훑어보더니, 이내 헌터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쿵! 신상이 지면을 밟을 때마다 지축이 뒤흔들렸다. 쿵! 어찌나 큰지 까마득히 높아 보이던 천장에 놈의 머리 끝이 닿을 듯했다. 쿵! 놈의 크기에 압도되고 있는 이 순간에도 놈과의 거리는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봐, 성 씨! 성진우 씨!" "무슨 방법 없어?" 방금 전까지만 해도 진우를 욕하던 헌터들이 황급히 진우 주위로 몰려들었다. "방법이 없는 거야?" "말을 좀 해 봐!" 다 큰 어른들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은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현재 진우만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진우는 얼어 있는 주희를 일으켜 세우며 두 번째 규율에 관해 이야기했다. "신께 찬양하라. 그게 열쇱니다." "아, 그건!" 김 씨가 아는 척했다. "아까 그 석판에 적혀 있던?" "맞아요. 신께 경배하라, 신께 찬양하라, 신앙심을 증명하라. 세 가지 규율을 모두 만족시켜야 해요." 진우의 말이 빨라졌다. 신상은 벌써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쿵! 놈의 거대한 그림자가 헌터들에게 드리웠다. 헌터들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제, 제가 해 볼게요." 평소에 거의 말이 없던 젊은 청년 헌터 하나가 앞으로 한걸음 나섰다. "이봐! 뭘 어쩌려고?" "교회 성가대 출신입니다. 찬양이라면 자신 있어요." 청년은 김 씨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신상 앞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 신상을 올려다보며 호흡을 가다듬던 그가 마지막으로 한 번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주께 가오니-." 방 안에 청아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 주소서." 신상이 그의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오오헌터들은 나직이 탄성을 내질렀다. 신상은 노래에 심취한 듯 꼼짝도 하지 않았다. 방의 모든 소음이 사라졌다. 청년의 목소리만이 고고하게 내부를 울렸다. 용기를 얻은 청년은 더욱 목청에 힘을 실었다.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그들 중 오직 한 사람 진우만이 불길한 예감에 몸서리를 쳤다. '아니... 아니야.' 진우는 몇 번이고 속으로 말을 삼켰다. 이 방 안에는 이 방의 룰이 있다. 지금 청년은 이 방의 룰이 아닌, 기독교라는 자기 종교의 룰로 찬양하고 있었다. 다행히 신상은 움직이지 않고 있었으나, 이걸로 규율을 지켰다고 할 수 있을까?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에도 청년을 말리지 않았던 단 한 가지 이유는 신상을 막을 다른 방법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바로 그때! 쿵! 묵직한 소음이 내부를 울렸다. "꺄아아아아아악!" 여자 헌터가 찢어질 듯한 비명을 질렀다. 신상이 발을 들어 올리자 놈의 발바닥과 바닥 사이에서 으깨진 청년 헌터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다른 헌터들도 비명을 내질렀다. "아아아아-!" "으, 으아아아악!" 여태껏 무표정이었던 신상의 얼굴이 분노로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화났다!" "도, 도망쳐!" 헌터들은 급히 신상에게서 떨어졌다. "꺄아아아아아아악!" 그러나 바로 눈앞에서 청년 헌터가 밟혀 죽는 것을 목격한 여자 헌터는 이미 이성을 잃어버린 듯 제자리에 움직이지 못하고 꺅꺅 비명만 질러댔다. "꺄아아아악!" '젠장...' 주희를 안아 들고 도망가던 진우가 그녀를 구하기 위해 돌아섰다. 그러나 송 씨가 막아섰다. "아저씨...?" "이미 늦었네." 신상은 파리를 때려잡듯 손바닥으로 여자 헌터를 내리쳤다. 콰앙! "큭..." 진우는 고개를 돌렸다. 차마 두 눈 뜨고 보지 못할 참혹한 광경이었다. "이러고 있을 시간 없으이. 그 아가씨까지 죽게 만들 셈인가?" 송 씨의 말에 진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말 그대로였다. 쿵! "으아아악!" 쿵! 쿵! "살려 줘!" 이제 신상은 걷지 않았다.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밟아 짓뭉개고 있었다. 놈이 발을 구를 때마다 방 전체가 흔들거렸다. 쿵! 쿵! 진우는 이를 악물고 달리기 시작했다. 주희는 눈을 꼭 감고서 진우에게 매달렸다. "떨어지세!" "예!" 붙어 있으면 위험하다는 생각에 진우와 송 씨도 흩어졌다. 진우는 날뛰고 있는 신상을 피해 최대한 구석으로 갔다. 하지만 진우보다 빠르게 그쪽으로 달려간 헌터가 있었다. 박 씨였다. 박 씨는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렸다. 가족들 생각에 눈물이 핑 돌았다. "으흑-." 집에는 자신을 쏙 빼닮은 아들과 둘째를 밴 마누라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서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 수는 없었다. 악을 쓴 덕분인지 헌터들 중에서 가장 빠르게 신상에서 멀어질 수 있었다. "하아, 하아." 구석에서 한숨 돌리고 있는 박 씨에게, 그와 친했던 김 씨가 다급히 소리쳤다. "박 씨!" 박 씨는 익숙한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응?" 김 씨가 박 씨의 등 너머를 가리키며 고함을 질렀다. "뒤! 뒤를 보라고!" 그때 박 씨의 뒤쪽에서 뭔가 날카로운 것이 번쩍였다. "어...?" 스걱! 박 씨가 정수리에서부터 사타구니까지 두 쪽으로 반듯하게 쪼개졌다. 찢어진 박 씨의 몸은 각각 양쪽으로 쓰러졌다. "박 씨!" 검으로 박 씨를 내리쳤던 석상은 문지기가 그랬던 것처럼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의 자세로 돌아갔다. 김 씨가 그 모습을 보고 울먹거렸다. "이 씨벌놈들이...!" 쿵! 쿵! 쿵! 뒤에서는 거대한 석상이 사람들을 하나하나 밟아 죽이고 있었고, 놈을 피해 구석으로 달아나면 그곳에 배치된 석상이 사람들을 공격했다. "으아아아악!" "내 팔! 내 팔!" 안은 공포와 혼란의 도가니로 변했다. "헉, 헉..." 진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다리가 점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갈수록 숨도 가빠졌다. 하지만 진우의 머릿속은 오직 한 가지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신께 찬양하라, 신께 찬양하라, 신께 찬양하라.' 머릿속을 맴도는 두 번째 규율. 그 수수께끼를 풀 열쇠는 분명 이 방 안에 있다. 이 안에서 우리가 이용할 수 있는 무언가가! 하지만 헌터들이 처음 이 방에 들어 왔을 때, 주변을 샅샅이 뒤졌으나 뭔가 이용할 수 있는 장치나 도구 같은 것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움직이는 것은 석상들뿐이야.' 잠깐. 무언가가 진우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움직이는 것은 석상뿐이다?' 아차. 진우의 눈이 커졌다.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석상뿐이라면 이용할 수 있는 것도 석상뿐이다. 석상은 사람이 가까이 다가왔을 때만 움직이니 이를 활용해야 하는 것이다. '어쩌면...!' 진우는 숨을 거칠게 헐떡이면서도 방이 떠나갈 정도로 고래고래 소리쳤다. "다들 악기를 든 석상 쪽으로 가요!" 5화 모든 헌터들이 진우의 목소리를 들었다. "-!" "악기?" 헌터들의 눈빛에 희망이 깃들었다. 절하라는 말을 들었을 때와 달리 헌터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물론 진우가 틀렸다면 악기를 든 석상에게 접근하자마자 맞아 죽을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 진우를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송 씨가 가장 먼저 악기를 든 석상 앞에 도착했다. "..." 송 씨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러자 하프를 든 석상이 거짓말처럼 손가락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따라라란- 딴딴아름다운 음률이었다. "정말이다!" "다들 악기를 든 석상으로!" 헌터들은 헐레벌떡 근처의 석상으로 달려갔다. 나팔을 들고 있는 석상은 나팔을 불었고, 피리를 들고 있는 석상은 피리를 연주했고, 리라를 들고 있는 석상은 선을 퉁겼다. "헉, 헉, 헉." 탈진 직전 상태였던 김 씨는 부주카를 든 석상 앞에서 털썩 무릎을 꿇었다. 디링- 디링석상이 연주를 시작하자 김 씨를 쫓아오던 신상이 걸음을 멈추었다. 김 씨는 감정이 북받치는지 꿇어앉은 채로 굵은 눈물을 흘렸다. "으흐흐흐흑, 으흐흑..." 신상이 휙 돌아섰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놈은 금방 다음 먹잇감을 찾아냈다. "젠장." 신상과 눈이 마주친 진우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했다.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왜! 왜 여기만!' 진우는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눈앞의 석상을 올려다보았다. 북을 든 석상은 움직일 기미가 없었다. 쿵, 쿵, 쿵! 신상이 무서운 속도로 거리를 좁혀왔다. 거의 끝과 끝이었던 신상과의 간격이 점점 제로에 가깝게 줄어들었다. 진우는 침을 꼴깍 삼켰다. '혹시 나와 주희 씨 두 사람이 같은 석상 아래에 있어서 연주하지 않는 건가?'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다른 이들이 서 있는 석상들은 하나도 문제없이 연주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진우는 주희를 내려놓고 다른 곳으로 뛸 준비를 했다. "진우 씨..." 겁에 질린 주희가 진우의 소매를 붙들었다. 진우는 차분하게 주희의 귓가에 속삭였다. "같이 있으면 우리 둘 다 죽어요." 주희의 눈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소매를 잡은 손가락 끝이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설명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진우는 주희의 손을 조심스럽게 떼어 놓고는 맞은편으로 무작정 뛰었다. 둥둥둥. 뒤를 돌아보니 주희 뒤의 석상이 느릿하게 북을 때리기 시작했다. '다행이다.' 이제 남은 과제는 하나였다. 무사히 다른 석상으로 달려가는 것! 아직 석상의 보호를 받지 못하는 사람은 진우뿐이었다. 당연히 신상의 모든 분노가 진우 한 사람에게로 집중됐다. 진우는 필사적으로 집채만 한 놈의 발을 피해 가며 방을 가로질렀다. 쿵! 쿵! 넘어지고 구르고 하면서도 진우는 가까스로 신상의 발에 밟히지 않았다. "헉, 헉." 비록 E 급이긴 해도 전투계 헌터의 신체가 이럴 때는 큰 도움이 되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진우는 신상의 움직임을 주시하며 다리에 힘을 주었다. 속도가 빨라졌다. 석상까지의 거리가 불과 몇 걸음 남지 않은 상태였다. "그쪽이 아니야!" 송 씨가 고함쳤다. 신상의 움직임에 온 신경이 팔려 있던 진우가 깜짝 놀라 앞을 돌아보았다. "아!" 악기를 든 석상이 아니야? 멀리서 보기에 악기처럼 보였던 것이 실은 방패였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았다. 석상은 사정없이 방패를 내리찍었다. "헉!" 진우가 옆쪽으로 몸을 날렸다. "꺄아아악!" 주희가 비명을 질렀다. 바닥을 구르던 진우가 고개를 들어 올리니 신상이 코앞에 있었다. "산 넘어 산..." 구르면서 이마가 찢어졌는지 피가 흘러들어와 눈앞이 침침해졌다. 시야가 좁아져 먼 거리는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진우의 고개가 빠르게 좌우로 움직였다. '악기, 악기...' 그러나 근처를 아무리 둘러보아도 악기를 든 석상은 보이지 않았다. 신상이 진우를 향해 발을 들어 올렸다. "헉!" 쿵! 진우는 또다시 몸을 날려 간신히 신상의 발을 피했다. 하지만 이제 정말로 한계였다. 극심한 현기증이 일었고, 이상하게 균형을 잡기도 힘들었다. '제발...' 신이 있다면 기도라도 드리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 진우의 시야에 무기도, 악기도 아닌 것을 들고 있는 석상이 들어왔다. '저건?' 진우는 거기에 마지막 희망을 걸었다. 바닥을 기다시피 움직여 석상 앞에 도착했다. 그리고 간신히 몸을 뒤집어 신상이 달려오는 쪽으로 돌아누웠다. 더 이상은 움직일 여력이 없었다. "하아- 하아-." 진우는 다가오는 석상을 마주 보며 거친 호흡을 몰아쉬었다. 신상은 요리조리 피해 다니는 진우가 무척이나 성가셨는지 아까보다 더 심하게 구겨진 얼굴이었다. 신상이 진우의 앞에 똑바로 섰다. 고층 빌딩만 한 녀석이 앞을 가로막고 있으니 숨이 턱턱 막혀 왔다. "하아- 하아." 다 잡은 쥐라고 생각하는 걸까? 신상은 가만히 내려다보기만 했다. '끝이다...' 진우는 자신을 향하고 있는 신상의 두 눈동자에서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예감했다. 그러나 그때. 우우우뒤편에서 이 세상 것이 아닌 듯 아름다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진우는 고개를 틀어 뒤쪽을 바라보았다. 우우, 우우우책을 들고 있는 석상이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성스러운 노랫소리가 내부를 메아리쳐 울렸다. 우우우, 우신상의 얼굴이 서서히 이전의 표정을 되찾아 갔다. 흉측하게 구겨졌던 얼굴 근육이 말끔히 펴졌다. 신상은 석상들의 노래와 연주가 모두 끝나자 돌아섰다. 그리고 다른 석상들이 그리했던 것처럼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앉았다. 쿵! 신상이 앉는 소리가 신전 안을 울렸다. "하아, 하아, 겨우, 세이프인가?" 진우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반대쪽에 있던 주희가 진우에게로 달려왔다. "진우 씨!" 전속력으로 달려온 주희는 눈물을 흘리며 진우 옆에 주저앉았다. "어쩌면 좋아... 어떡하면 좋아..." 주희는 가지고 있는 모든 마력을 다 써 가며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흩어져 있던 헌터들이 하나둘 진우의 주위로 몰려들었다. 그들의 표정은 하나같이 어두웠다. "어떡해... 진우 씨..." 그 와중에도 주희는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다들 왜 그러지? 진우가 입을 뻐끔거렸다. 이유를 물어보려고 했으나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진우는 삐걱거리는 상체를 일으켰다. "...?" 아래쪽이 피투성이였다. 진우는 뒤늦게 자신의 몸에 일어난 변화를 알아차렸다. "아..." 오른쪽 무릎 아래가 사라져 있었다. 진우의 시선이 방패를 든 석상에게로 옮겨 갔다. 놈의 방패 끝에 묻어있는 핏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사라진 다리는 그 아래에 있었다. 뚝뚝주희의 코에서 핏방울이 흘러나왔다. 이미 주희의 신체가 한계에 도달했다는 증거다. B 랭크 헌터의 치유 마법으로 절단된 신체의 복구는 불가능했다.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주희의 체력은 빠르게 고갈되고 있었다. "됐어요... 주희 씨. 이제 그만..." "내가 치료해 줄게요! 내가 낫게 해줄게요!" 헌터들은 두 사람을 보며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이곳에 들어섰던 17 명 중 여섯 명만이 남았다. 그 여섯 명 중에서도 두 명은 끔찍한 중상을 입었다. 송 씨는 팔을 잃었고, 진우는 다리를 잃었다. 목숨은 건졌지만 누구도 웃을 수 없었다. 그때 또다시 굉음이 울렸다. 구구구구구-! 마법진이 그려진 신전의 중앙 부분이 불쑥 솟아올랐다. 진우는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신앙심을 증명하라...'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5. 마지막 시험 신전 중앙의 바닥에 새겨진 원형의 마법진은 계단 두 개 정도의 높이만큼 솟아오르더니 움직임을 멈췄다. "제단..." 진우의 혼잣말에 헌터들이 민감한 반응을 보였다. '제단?' '방금 분명 제단이라고...' 앞선 두 번의 위기에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은 등급 높은 각성자가 아니라 평소 E 급이라며 무시하던 진우였다. '성 씨가 아니었다면 지금 우리들은...' 헌터들은 모두 같은 생각이었다. 현 상황에서 진우의 말은 생명줄과도 같았다. 그런 진우가 무심코 꺼낸 단어 '제단'. 눈치 빠른 김 씨가 요지를 캐치해냈다. "알겠다, 알겠어." 김 씨는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꺼냈다. 원래는 마수를 베기 위한 용도로 쓰이는 물건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른 의미로 이놈이 꼭 필요했다. "아무리 무식한 나라도 이쯤 되면 무슨 말인지 대충 감이 잡히는구만." 헌터들은 시퍼렇게 날이 선 김 씨의 검을 보고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어이, 김 씨. 갑자기 장비는 왜 꺼내고 그래?" "말로 하자고, 말로." 멤버들 중 가장 랭크가 높은 C 급 헌터 송 씨가 중상을 입은 지금, D 급에서도 꽤 강한 실력을 지닌 김 씨를 제압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김 씨는 검끝으로 제단을 가리켰다. "마지막 규율, 신앙심을 증명하라. 그리고 갑자기 중앙에 생긴 저 제단." 김 씨의 시선이 진우에게로 옮겨 갔다. "요컨대 제물을 바쳐야 한다 이거 아니야, 성 씨?"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생각도 그러했다. 살아남은 여섯 명 중 누군가 한 사람은 제물이 되어야 한다. '아마도 그게 마지막 규율...' 진우가 내린 결론이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들어 보니 이리로 다가오는 김 씨의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다. 진우의 이마 옆으로 땀방울이 하나 길게 흘렀다. "아저씨... 무슨?" "자네는 암말 말고 가만히 있어!" 버럭 소리친 김 씨가 진우 옆에 앉아 진우의 상태를 살피고 있던 송 씨에게 검끝을 향했다. "우리를 여기로 끌고 온 사람이 누구야? 여기 있는 송 씨 아니야? 그럼 송 씨가 마지막까지 책임지는 것이 도리 아니겠어?" "아저씨!" 진우가 발끈하여 일어서려 하자, 송 씨의 고목 껍질 같은 손이 막았다. 진우는 송 씨를 돌아보았다. "..." 송 씨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의 눈빛이 아무 말도 하지 말라 부탁하고 있었다. 진우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으나 속으로 삼켜야 했다. 송 씨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김 씨 말이 맞어. 내가 책임을 져야지." "이제 말이 통하네, 영감." 김 씨가 검을 제단 쪽으로 까딱거렸다. "알았으면 얼른 가자고. 영감 덕분에 죽은 사람이 벌써 10 명이 넘었으니까." 6화 희생자 중에는 김 씨와 친했던 박 씨도 있었다. 이중 던전에 들어온 것은 출발하기 전 모두의 투표로 결정한 일이었지만, 이미 이성을 상실한 김 씨의 머릿속에는 당시의 기억이 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송 씨가 김 씨에게 말했다. "스스로 가고 싶으니 칼은 치워 주겠나?" 김 씨는 단칼에 거절했다. "영감을 어떻게 믿고? 잔말 말고 앞장 서." 송 씨는 나직이 한숨을 내쉰 뒤 제단으로 걸었다. 김 씨는 그의 등에 검을 겨눈 채로 뒤따라 갔다. 진우는 두 사람을 보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송 씨 아저씨의 잘못이 아니다.' 모두가 동의했던 일이었다. 일이 틀어졌다고 이제 와서 모든 책임을 송 씨 아저씨에게 떠넘기는 건 너무나도 비겁한 짓이었다. '하지만...' 진우에게는 김 씨를 막을 힘이 없었다. D 급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김씨와 E 급 중에서도 최약체에 속하는 진우. 힘의 차이는 명확했다. 더군다나 지금은 다리까지 성치 않은 상태. 김 씨에게 대들었다간 자기 자신이나 자신의 치료에 전념하고 있는 주희까지 잘못될 수 있었다. "젠장." 진우는 질끈 눈을 감았다. 오늘만큼 자신의 무력함이 원망스러운 날이 없었다. 그 사이 송 씨가 제단 위에 올라섰다. 화르륵! 그러자 제단의 바깥 부분에서 붉은 불꽃이 하나 치솟았다. 다들 침을 꼴깍 삼키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상황을 주시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불꽃 하나가 생긴 것이 전부였다. "...?" 한참 기다려도 아무런 변화가 없자, 송 씨를 제단 위로 떠민 김 씨는 물론이거니와 다른 이들까지도 당황하기 시작했다. 김 씨가 진우를 돌아보았다. "이 봐, 성 씨. 이게 아니야?" 진우도 고개를 저었다. "저도 잘..." 제물이 될 사람이 제단 위에 올라가면 '신앙심을 증명하라'는 셋째 규율이 완성될 줄 알았다. '제물을 요구하는 게 아니었나?' 하지만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제물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면 송 씨 아저씨를 구할 방법이 있다는 소리였다. 진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진땀을 흘리며 일어서려는 진우를 근처에 있던 헌터 두 사람이 잽싸게 부축했다. "제단을 살펴볼 수 있게 그리로 옮겨 주세요." "진우 씨, 아직 상처가..." 주희도 진우를 따라 일어났다. 너무 많은 마력을 소모한 탓에 주희의 안색이 창백하게 변해 있었다. 그녀의 수고가 있었기에 출혈이나 통증을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었다. '서둘러야 돼.' 주희의 상태, 김 씨의 분노, 송 씨의 상처, 그리고 다른 헌터들의 공포까지. 허락된 시간은 많지 않았다. 진우는 헌터들의 부축을 받아 계단에 도착했다. "제단 위쪽으로 올라가죠." 부축하던 두 사람은 잠깐 흠칫했으나 곧 진우를 믿고 올라섰다. 그러자 불꽃 세 개가 더 올라왔다. 화르륵! 화르륵! 화르륵! 진우의 눈이 번뜩였다. '사람 수와 같다.' 송 씨와 진우, 그리고 진우를 부축한 두 사람. 불꽃은 사람 숫자에 맞춰서 솟아올랐다. 네 개의 불꽃이 제단의 바깥쪽에서 원을 그려 가고 있었다. '불꽃 간의 간격을 볼 때 앞으로 두 개만 더 생기면 원이 완성된다.' 아무래도 남은 사람이 전부 올라와야 무언가가 시작되는 구조인 듯했다. 진우가 송 씨에게 물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으면 우릴 구조하러 다른 헌터들이 올까요?" 송 씨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이 게이트가 생긴 지 일주일째 되는 날이여. 지원이 오기 전에 저것들이 먼저 움직이겄지." "D 급 게이트라고 너무 오래 방치해뒀군요." "협회가 하는 일이 다 그렇지 않은감." 게이트는 7 일이 지나면 완전히 열린다. 그 시간 안에 던전의 보스를 잡아 게이트를 닫히게 만드는 것이 레이드의 진짜 목적이다. 그러지 못한다면 던전 안쪽에 갇혀 있던 마수들이 바깥을 자유롭게 활보할 수 있게 된다. 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의자에 앉은 거대한 신상은 여전히 거만한 눈빛으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런 것이 밖으로 나간다면...' 그 피해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물론 그전에 먼저 이 방의 헌터들 전원이 이동을 시작한 신상이나 석상들에게 죽임을 당하겠지만. 망연히 기다리고 있을 수 없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진우는 주희와 김 씨를 불렀다. "두 사람도 올라와요." 주희가 먼저 제단 위로 올라왔다. 망설이던 김 씨도 금방 따라 올라왔다. 불꽃 두 개가 솟아오르며 원이 완성됐다. 화르륵! 헌터들이 화들짝 놀랐다. "아니?" "이게 왜 이래?" 진우의 예상대로 변화가 일어났다. '온다.' 제단의 가장 바깥 테두리에서 조그마한 푸른색 불꽃들이 차례대로 솟아오르며 원을 그리기 시작했다. 촘촘하게 이어진 푸른 불꽃은 대충 잡아도 30 개는 넘어 보였다. '34, 35, 36.' 빠르게 수를 세던 진우는 원이 완성되고 나서 푸른 불꽃이 모두 36 개임을 알았다. '사람 수대로 솟아오른 붉은 불꽃 여섯 개, 그 바깥쪽에 생긴 푸른 불꽃 36 개. 불꽃의 숫자에 무슨 의미가 있는 걸까?' 그때였다. 덜컹-! 굳게 닫혀 있던 문이 아무런 예고도 없이 갑자기 열렸다. 헌터들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윽...!" 다들 열린 문 쪽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성가대였다는 청년의 최후를 본 터라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앞서 나가다가는 어떻게 죽을지 모르는 것이다. 답을 요구하듯 모두의 시선이 진우에게로 일제히 모였다. 그러나 진우는 입을 일자로 다물었다. "..." 아직은 어떤 결론도 내릴 수 없었다. 문이 열린 것이 함정인지, 아니면 마지막 규율을 지켜서 나갈 수 있게 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모두의 시선이 진우에게 쏠려 있을 때, 방 전체에서 기분 나쁜 소음이 울려 퍼졌다. 끼이이이익끼이이이익여섯 명의 고개가 사방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이건 또 뭐야?" "다, 다가왔어!" "이것들 방금 전부 움직였다고!" 헌터들의 호흡이 가빠졌다. 사람이 가까이 있을 때만 움직이는 줄 알았던 석상들이 이전보다 몇 걸음 가까워져 있었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진우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했다. '아니, 석상이 움직인 게 아니야. 움직인 것은 석상 발밑의 받침대다.' 금방 고막을 때렸던 기분 나쁜 소음은 아마도 석상을 받히고 있는 받침대가 바닥과 마찰하며 일어난 소리인 듯했다. "...이젠 또 안 움직이네?" 김 씨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았다. 모두가 석상들에 정신이 팔려 있을 때, 진우는 시선을 내리깔아 푸른 불꽃을 살폈다. 하나씩 꺼지기 시작한 푸른 불꽃은 이미 세 개나 사라져 있었다. 끼이이이이익누군가 외쳤다. "뭐, 뭐야? 어느 쪽이야?" 진우는 고개를 들었다. 소음은 자신 쪽이었다. 자신의 정면 방향에 위치한 석상들이 조금 더 가까이 이동해 있었다. '어째서 내 쪽만...?' 혹시 한눈을 팔았기 때문인가? 진우는 확인을 위해 눈을 감았다. 그러자 다시 소음이 울렸다. 끼이이이익눈을 뜨자 소음이 멈췄다. 확실히 석상은 조금 더 가까워져 있었다. "뭐냐고 씨벌!" "이, 이건 뭘 어떡해야 하는 겁니까?" 진우가 소리쳤다. "전부 석상들한테서 눈을 떼지 마세요!" 생각해 보면 석상들이 처음 제단 쪽으로 이동을 시작한 것도 아까 모두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려 있었을 때부터였다. '이 녀석들은 보지 않을 때 다가온다.' 순간 푸른 불꽃이 하나 더 꺼졌다. 그러나 일행들이나 석상들에겐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혹시...?' 진우는 석상들에게서 눈을 돌리지 않고 최대한 조심스럽게 손목을 들어올려 시계를 확인했다. '역시.' 푸른 불꽃은 대략 1 분에 하나씩 줄어들고 있었다. '푸른 불꽃은 타이머다.' 36 개의 푸른 불꽃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제단 안에서 이렇게 버티는 것이 세 번째 규율의 핵심인 듯했다. 즉 전원이 석상을 감시하고 있는 동안은 안전하다는 뜻이었다. 어쩌면 마지막 단계에서는 아무도 죽지 않을 수 있을지 몰랐다. 진우는 얼마나 버텨야 하는지 남은 시간을 계산해 보기 위해 마지막으로 푸른 불꽃의 숫자를 확인했다. '이제 남은 건 30 개...' 30 분만 버티면 된다! 하지만 그것은 진우의 실수였다. 푸른 불꽃을 세는 동안 또 진우 쪽의 석상들이 제단 쪽으로 접근해 왔고. 끼이이이이익- "으으으... 으아아아악!" 진우의 반대편에 서 있던 남자가 비명을 지르며 문 쪽으로 달려 나갔다. 등 뒤에서 자꾸만 들려오는 기괴한 소음에 그만 겁을 집어먹은 것이다. 그가 제단을 내려가자 곧바로 붉은 불꽃 하나가 꺼졌다. "안 돼!" 진우가 소리쳤다. 하지만 실성한 듯 달리던 남자는 다수의 예상과 달리 열린 문으로 무사히 빠져나갔다. "뭐, 뭐야? 성 씨, 어떻게 된 거야? 저 사람 살았는데?" 진우는 문과 반대 방향이어서 상황이 어떤지를 알 수 없었다. "뭔가 달라진 건 없어요?" "문이... 문이 조금 닫혔어." "문이 닫히고 있나요?" "아녀. 아녀. 저 사람이 내려가고 나서 조금 움직이고는 멈췄어." 진우는 남자가 제단을 내려갔을 때 붉은 불꽃 하나가 바로 꺼졌던 것을 기억해 냈다. '아뿔싸!'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제단 위에 서 있는 내내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의문이 드디어 풀렸다. 어째서 이것이 신앙심의 증명인가? 그 문제의 대답이 떠올랐다. 그것은 한쪽 다리가 날아가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야만 균형을 지탱할 수 있는 진우에게는, 최악의 조건이었다. *** '열린 문'은 사실 함정이었다. 눈에 보이는 가짜 희망! 제단에 올라서 있던 사람들이 열린 문을 보고 한꺼번에 제단을 내려가면 붉은 불꽃이 모두 꺼지고 문은 완전히 닫혔을 것이다. 남은 것은 피와 비명의 향연뿐. 반면 '제단'은 약속된 땅이었다. 각자가 정해진 시간 동안 자신의 위치에서 자신의 역할을 다하면 전원의 생존이 보장되는 장소였다. 보이는 가짜 희망이냐, 보이지 않는 약속이냐. 세 번째 규율 '신앙심의 증명'이란 다가오는 위협 속에서도 달콤한 유혹에 넘어가지 않고 자신의 자리를 지킬 수 있는가를 시험하는 것이리라. 여기서 두 가지 변수가 작용했다. 첫 번째 변수는 진우의 존재였다. 원래 열린 문을 보고 뛰쳐나가야 했을 사람들이 진우의 대답을 듣기 위해 멈춰 서는 바람에 전원 이탈로 문이 닫히는 참사를 피할 수 있었다. '운이 좋았다.'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었다. 앞선 두 개의 규율을 모두 진우 혼자 알아내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하지만 예기치 못한 두 번째 변수가 발생했다. 이탈자가 나오고 만 것이다. 눈앞에 있는 희망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뻔한 문제였다. 진우를 부축하고 있던 남자도 진우를 내팽개치고 뛰쳐나갔다. 송 씨가 황급히 손을 뻗어 휘청거리는 진우의 등을 잡아 주었다. 슈욱남자가 제단을 내려가자 붉은 불꽃이 하나 더 꺼지며 그만큼 문틈이 또 줄어들었다. 그그그- "어, 어!" 김 씨가 두 번째 이탈자를 보고 손가락질했으나, 첫 번째 이탈자와 마찬가지로 그도 무사히 빠져나갔다. 진우가 붉은 불꽃의 숫자를 확인하고는 소리쳤다. "움직이지 마세요! 더 이상은 안 돼요!" 7화 앞, 뒤, 좌, 우. 사방의 시야를 확보하려면 최소한 네 사람이 필요했다. 자신과 주희와 송 씨와 김 씨. 남아 있는 네 사람 중 한 명만 빠져도 시야에 사각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김 씨가 이마의 땀을 훔치며 물었다. "성 씨, 어떻게 된 거야? 설명을 좀 해 봐." "이대로 버티기만 하면 돼요! 푸른 불꽃이 다 꺼질 때까지." 진우는 자신이 알게 된 모든 것을 털어놓았다. 김 씨는 고개를 끄덕이며 귀를 쫑긋 세웠다. 빠르게 모든 설명을 마친 진우가 끝으로 한마디를 더 덧붙였다. "모두 살아나갈 수 있습니다." 이 방의 규율들은 항상 생존할 수 있는 길을 열어 두고 있었다. 마지막 규율 또한 다르지 않을 것이다. 서로를 믿기만 하면 아무도 다치지 않고 살아 돌아갈 수 있다고, 진우는 확신했다. "..." 하지만 김 씨의 생각은 달랐다. 김 씨가 머뭇거리며 물었다. "저기, 성 씨... 성 씨 말이 맞을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시간이 지나고 문이 완전히 닫혀 버릴 수도 있는 거 아니야?" "..." 진우는 대답하지 못했다. 여러 가지 궁리 끝에 도달한 결론이었지만 결과가 나와 보기 전까진 백퍼센트 장담할 수 없었다. 그러나 김 씨에게는 정답이 필요했다. 불확실한 전원의 생존보다, 확실한 본인의 생존이 더 절실했다. "미안한데... 나도 더는 못하겠어." "아저씨!" "미안해." 김 씨는 그 말을 끝으로 제단을 내려갔다. 그리고 진우의 목소리를 무시한 채 문 쪽으로 달렸다. 문밖에서 잠깐 뒤를 돌아보았던 김 씨는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뿌득. 진우는 이를 갈았다. "제길!" 다른 이들의 목숨을 구해 주었지만 그들에게 돌아온 것은 친절과 감사가 아니었다. 배신감에 치가 떨려 왔다. 예상했던 대로 김 씨가 나가자마자 감시망에 구멍이 뚫렸다. 사방을 3 명이서 감시하긴 무리였다. 보이지 않는 곳에 위치한 석상들이 스르륵 움직이기 시작했다. 끼이이이익끼이이이익석상들이 점점 포위망을 좁혀 오고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던 송 씨가 진우와 주희에게 말했다. "자네들은 가게." 체념한 것 같은 목소리였다. 진우가 돌아보았다. "아저씨...?" "김 씨 말대로 자네들을 이리 데려온 게 나지 않나? 누구 하나가 꼭 남아야 한다면 내가 남는 게 맞지." "그래도!" "조금이라도 살날이 더 많은 자네들이 나가야지." 송 씨는 웃었다. 자신을 남겨 두고 나가야 하는 두 사람의 마음을 편하게 해 주려는 배려였다. "..." 진우는 하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음이 불편했지만 여기서 누가 남을 것인지 설전을 벌일 시간은 없었다. 송 씨는 주희에게 진우의 부축을 맡기려고 했다. "주희 양, 성 씨를 좀 도와주겠나?" "네, 네." 그러나 진우를 도우려던 주희가 갑자기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아..." 주희는 일어나려고 애쓰다가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했다. "다리가... 다리가 안 움직여요." 진우와 송 씨의 얼굴이 굳어졌다. 주희의 상태는 한눈에 보기에도 좋지 않았다. 입술은 새파랗게 변했고, 온몸에 미세한 경련이 일었다. 심신이 지쳐 있는 상태에서 마력을 남발하는 바람에 생긴 후유증이었다. '내 다리를 치료하려다...' 진우는 가슴이 먹먹해져 말문이 막혀 왔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끼이이이이이이익석상들은 이 순간에도 쉴 새 없이 제단을 향해 접근하고 있었다. 진우가 송 씨의 부축을 뿌리치고 털썩 주저앉았다. 송 씨의 눈이 커졌다. "자네...?" 진우는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아저씨는 주희 씨를 데리고 나가 주세요." "내가 남는다고 하지 않았나." "그럼 누가 주희 씨를 부축해요?" 혼자서 제대로 일어설 수도 없는 몸으로 주희를 시간 내에 문까지 데려가기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물론...' 주희를 버리고 간다는 선택지도 있었다. 하지만 주희는 그동안 몇 번이나 자신의 목숨을 구해 주었고, 지금 그녀가 이렇게 된 것도 자신에게 모든 힘을 쏟아부어서였다. 그런 사람을 버리고 살아남아 평생 죄책감에 시달리긴 싫었다. "시간 없어요, 가세요." "..." 송 씨는 굳은 얼굴로 주희를 일으켜 세웠다. 그러나 주희는 눈물을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안 돼요... 진우 씨는 나갈 수 있잖아요. 차라리 내가..." "내가 저녁 사기로 약속했었죠?" 진우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E 급 마정석을 꺼내 주희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이걸로 먼저 먹고 있어요. 여기서 나가면 잔돈부터 받으러 갈 거니까." 진우가 미소 짓자 주희가 화를 냈다. "이 상황에서 농담이 나와요, 진우 씨는!" 진우는 송 씨를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송 씨가 주희의 목 뒤를 수도로 가볍게 내려쳤다. "아." 주희는 의식을 잃었다. 기절한 주희를 송 씨가 한쪽 어깨에 둘러업었다. "...미안하네." "제가 선택한 건데요, 뭘." 송 씨가 진우에게 꾸벅 고개를 숙였다. 마지막 인사를 끝으로 송 씨는 빠르게 제단을 벗어났다. 끼이이이익끼이이이익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석상들은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진우는 꿇어앉은 채로 심호흡했다. "후우, 후우-." 옆에 김 씨가 버리고 간 검이 눈에 들어왔다. 진우는 손을 뻗어 검을 주워 들었다. '이렇게 된 이상 한 놈이라도 데려간다.' 뒤를 돌아보니 송 씨는 주희와 함께 무사히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다행이었다. '죽는 게 나 하나여서...' 희생같이 거창한 의미는 아니었다. 어느 정도 계산이 깔려 있었다. 이대로 돌아가 봤자 평생 다리 하나가 없는 상태로 살아야 한다. 당연히 헌터 일은 불가능하고, 평범한 생활조차 제대로 할 수 있을 지 의문이었다. 고졸에다 배운 기술도 없으니 살 길이 막막하리라. '어머니 병원비에 동생 학비까지...' 그럴 바엔 차라리 가족들에게 보상금 한 푼이라도 더 가게 하자는 생각이었다. '레이드 중에 사망하면 가족에게 돌아가는 보상금이 3 억이던가, 4 억이던가?' E 급 헌터의 보잘것없는 목숨값치곤 과분한 셈이었다. 끼이이이익끼이이이익덜컹. 마침내 놈들이 왔다. 가장 먼저 제단에 도착한 석상이 제단 안으로 첫발을 내디뎠다. 진우는 놈을 주시하며 검을 곧게 세웠다. "와라." 하지만 공격은 뒤에서 들어왔다. 푹! 등을 찌르고 들어온 긴 창이 진우의 가슴을 뚫고 앞으로 튀어나왔다. "컥!" 진우가 한 움큼 피를 토했다. 격통이 해일처럼 밀려왔다. "조금만 더 위쪽이었다면 심장에 구멍이 뚫렸을 거라고요!" 불과 몇 시간 전 주희에게 들었던 잔소리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으, 으아아아악!" 석상은 창을 세웠다. 진우는 창에 관통된 채로 공중으로 떠올랐다. 고통에 발버둥치는 것도 잠시, 곧 석상이 진우를 바닥에 메쳤다. 쾅! "컥!" 전신에서 뼈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통증에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으... 으으..." 바들바들 떠는 진우 주위로 석상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석상들은 진우를 빙 둘러쌌다. 진우는 놈들을 올려다보며 몸서리쳤다. '이렇게... 이렇게 죽기는 싫다.' 막상 죽음의 순간이 다가오니 눈물이 핑 돌았다. 가족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까지 걱정해 주던 주희의 얼굴도 떠올랐다. '죽고 싶지 않아...' 스물넷의 짧은 생애를 이렇게 마감하기는 싫었다. 저벅. 검을 든 석상이 감정 없는 얼굴로 한걸음 다가왔다. 놈은 검을 높이 치켜들었다. 진우는 덜덜 떨면서도 끝까지 놈을 시야에서 외면하지 않았다. 마침내, 놈의 검이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쉬이이익-! '한 번만, 한 번만 더 기회가 있다면!' 진우가 눈을 부릅떴다. 그때였다. 츠츠츠-! 마치 동영상의 일시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무섭게 떨어져 내리던 검이 갑자기 멈추었다. 아니, 멈춘 게 아니었다. 그렇다는 착각이 들 정도로 느려진 상태였다. !분에 1 미리? 느리지만 분명히 검은 아래를 향하고 있었다. '뭐, 뭐지?' 진우는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때 처음 듣는 여성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울려 퍼졌다. ['시크릿 퀘스트 : 무력한 자의 용기'의 완료 조건을 모두 충족하셨습니다.] 시크릿 퀘스트? 완료 조건을 충족? 무슨 소리인지 이해할 수 없었다. '아니, 그보다 어디서 나오는 소리야?' 하지만 목소리는 진우의 의지와 무관하게 계속해서 이어졌다. [플레이어가 되실 자격을 획득하셨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획득했다고? 수락하라고? '뭘 주긴 준다는 이야기 같은데...' 어렸을 때부터 가난하게 자라 온 터라 누가 공짜로 준다는 걸 마다해 본 적은 없었다. 하지만 그것도 다 살아 있을 때 이야기지, 죽고 나면 공짜든 할부든 무슨 소용인가? '...' 진우가 망설이고 있자 머릿속의 목소리가 재촉하듯 다시 물었다. [귀하에게 허락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수락을 거부하실 경우 0.02 초 후 귀하의 심장이 정지합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환청인지 뭔지는 몰라도 죽기 직전이라는 사실만큼은 절대적으로 공감했다. 머리를 향해 다가오는 검 말고도 수많은 무기들이 자신을 노리고 날아들고 있었다. 이쯤 되자 그냥 될 대로 되라는 심정이 됐다. '...줄 거면 주던가.' 입 밖으로 따로 이야기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머릿속으로 생각을 떠올리기만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도 머릿속의 목소리는 즉각 응답했다. [플레이어가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번쩍눈부신 빛이 전신을 휘감음과 동시에 진우는 그대로 의식을 잃었다. 6. 페널티 눈을 떴다. 새하얀 천장과 코를 자극하는 소독약 냄새. 등에 닿는 딱딱한 침대의 느낌. 진우는 어디서 눈을 떴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병원?' B 급 치료계 헌터인 주희를 만나고부터는 부쩍 들어오는 빈도가 줄어들었으나, 아직도 진우에게 병원이란 퇴근하면서 들리는 편의점처럼 친근한 장소였다. 오죽하면 헌터 지정 병원엔 성진우 지정석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겠는가? 진우는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 가슴 부근에 손을 대고 가만히 고동을 느껴 보았다. 심장은 문제없이 뛰고 있었다. '내가 살아 있다고?'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평상시와 달리 몸이 아주 가벼웠다. 보통 병원에서 눈을 뜨면 정신이 혼미하고 몸을 가누기 힘든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그냥 집에서 한숨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상쾌한 기분이었다. '뭐지...?' 의식을 잃기 전의 상황을 떠올리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바로 눈앞에서 검이 떨어지고 있었다. 검은 운 좋게 빗나갔다고 쳐도 사방이 무시무시한 적들로 둘러싸여 있었다. A 급, 아니 S 급 헌터들로 꾸려진 공격대가 들어왔어도 상대가 될까 말까한 놈들이었다. '거기서 살아 나왔다?' 꿈이라도 꾼 걸까. 다행히 확인해 볼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었다. 진우는 덮고 있는 이불을 젖혀 보았다. 진짜였다면 다리가 없을 테고, 꿈이었다면 다리가. "정신이 드셨습니까?" 8화 구석에서 들리는 굵은 목소리에 진우는 화들짝 놀라 옆을 돌아보았다. "놀라셨다면 죄송합니다." "저희도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말이지요." 검은 정장을 입은 남자 둘이 침대 주위로 다가왔다.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물었다. "누구...시죠?" 전혀 기억에 없는 얼굴들이었다. 군인처럼 짧은 머리를 한 사람이 명함을 건넸다. "저희는 이런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진우는 명함을 받아 들었다. '한국헌터협회 감시과 과장 우진철?' 감시과는 헌터협회에서 유일하게 강한 헌터들을 다수 보유하고 있는 부서였다. 헌터들을 관리 감독하는 기관이니 당연히 수준급 헌터들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감시과에서 저를 왜?" 우진철은 의자를 가까이 당겨와 앉았다. 부하 직원인 듯 보이는 남자는 그 뒤에 섰다. 체격이 좋은 두 남자가 옆에 바싹 붙어 있으니 그 압박감이 대단했다. 그들이 전해 주는 이야기는 놀라웠다. "제가 사흘이나 잠들어 있었다고요?" "혹시 의식을 잃기 전 일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예." "기억나는 대로 전부 말씀해 주시지요." 진우는 의식이 끊기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영문 모를 환청만 빼놓고는 모든 것을 사실대로 이야기했다. "그리고는 의식을 잃었다... 그게 답니까?" "네, 눈을 떠보니 여기더군요." 우진철과 부하 직원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당사자인 진우가 아는 게 없으니 곤란한 눈치였다. 사실 어떻게 된 일인지 가장 알고 싶은 사람이 진우였다. "제가 어떻게 여기 잇는 겁니까? 대형 길드가 놈들을 제거한 건가요?" "그게 실은..." 난처해하던 우진철이 어렵게 입을 열었다. "생존자들의 신고를 받고서 감시과 직원들과 함께 '백호' 길드가 현장을 찾았을 땐 이미." 백호 길드는 대한민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드는 초대형 길드였다. 백호 길드를 끌어들였다는 것은 협회도 위험성을 인지했다는 뜻이다. 과연 거기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진우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이미...?" "전부 사라져 있었습니다. 그 방 안에는 의식이 없는 성진우 헌터님만 쓰러져 있었을 뿐, 신상이나 석상들의 흔적 같은 건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예?" 진우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저희도 믿기지 않습니다. 생존자들의 진술에 조금이라도 일관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거나, 희생자들의 신체 일부가 현장에 남아 있지 않았었다면 다른 가능성을 의심해 봤겠지요." 우진철은 턱을 긁적거렸다. A 급 랭크를 받고 감시과에서 일한지 6 년. 산전수전 다 겪었다고 자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이었다. 다른 길드나 타국의 기관에 자문을 구해 보기도 했지만 여타할 소득은 없었다. 그래서. "저희 생각입니다만..." 우진철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곳엔 분명히 뭔가 강력한 것들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은 누군가들, 혹은 누군가에 의해 처리되었습니다. 게이트가 닫히기 전까지 그 게이트에서는 빠져나온 이계의 존재는 없었으니까요." 모든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했다. 극히 희박한 확률이라도 전부 고려해야 했다. 협회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고, 그렇게 해서 하나의 가정이 나왔다. 우진철이 진우의 눈치를 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는... 성진우 헌터님의 각성 후 각성을 의심해 보고 있습니다." 각성 후 각성! 진우가 눈을 크게 떴다. 매우 드문 일이지만 헌터로 각성한 존재가 다시 각성하는 경우가 있다. 흔히들 '재각성'이라고도 부르는 각성 후 각성. 이 과정을 겪은 헌터는 이전과 차원이 다르게 강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원래 한 번 정해진 헌터의 등급은 거의 변동이 없다. 헌터들의 능력치는 헌터로서의 능력을 각성할 때 전부 결정되는 것이다. 하지만 재각성 헌터들은 다르다.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어 C 급이 A 급으로, B 급이 S 급으로 올라가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우진철은 침을 꼴깍 삼켰다. '성진우... 그가 재각성을 통해 S 급, 아니 그 이상의 헌터로 거듭났다면 거기 있었다는 괴물들을 혼자서 처리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특히 거대 신상은 눈빛만으로 C 급 헌터들을 녹여 버렸다고 했다. 그런 괴물을 무의식 상태에서 죽일 수 있는 자라면 대체 어느 정도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말인가? 만일의 가능성을 대비해 이번 일을 극비에 붙이고 모든 관계자들의 입을 철저히 단속했다. 성진우에게 병원 일인실을 제공하고 최고의 의료진을 붙인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우진철의 가슴이 두방망이질을 쳤다. '어쩌면 대한민국에도 국가 권력급의 헌터가...' 세계에서 국가 권력급이라 불리는 헌터는 다 합쳐 봐야 열 손가락을 넘지 않는다. 하나하나가 모두 핵전력을 능가한다는 국가 권력급 헌터를 한국에서도 보유할 수만 있다면! 다행히 재각성 여부를 확인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하던가? 우진철은 부하 직원에게 지시했다. "가져 와." 그러자 부하 직원이 한쪽 구석의 가방에서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왔다. "저건..." 진우가 묻기 전에 우진철이 먼저 설명했다. "마력 측정기입니다." 그는 이 마력 측정기가 소형화되어 있지만, 성능은 협회에 비치된 정식마력 측정기보다 결코 떨어지지 않는 다는 말도 덧붙였다. "여기 마정석에 잠시 손을 얹기만 하면 됩니다." 원판 위에는 주먹만 한 마정석이 박혀 있었다. 블랙홀처럼 빠져들 것 같은 흑색의 마정석! A 급 이상의 마수에게만 나오고 개당 가격이 10 억을 호가한다는 최고급 마정석이었다. 진우가 말없이 마정석을 보고 있자, 우진철이 비장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이번 사건의 조사를 위해 꼭 필요한 절차이니 부디 협조해 주시겠습니까?"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꿈에도 그리던 재각성이라면 앞으로의 인생은 180 도 달라진다. 그걸 공짜로 알아봐 주겠다는데 어째서 마다하랴. 진우는 마정석 위에 손을 올렸고, 곧 마정석에서 은은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진철과 부하 직원의 이마에 식은 땀이 맺혔다. 슈우우우이내 마정석을 감싸고 있던 빛이 사라졌다. 우진철은 급히 선글라스를 벗고 수치를 확인했다. 곧 우진철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이럴 수가!" 숫자를 다시 봐도 변하는 건 없었다. '어떻게...' 어떻게 헌터 자격증을 소지하고 있다는 인간의 마력 수치가 10 밖에 안 되는가? 가장 낮은 랭크인 E 급 헌터들의 평균치가 70~100 사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성진우는 일반인과 거의 다를 바가 없었다. "재각성입니까? 혹시 재각성이라면 랭크는 어느 정도쯤인가요?" 진우는 손에 땀을 쥐었다. 감시과 직원 두 사람의 반응이 심상치 않은 걸 봐선 결과가 예사롭지 않은 모양이었다. 우진철은 진우의 기존 데이터와 현재 측정 수치를 비교해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첫 측정 결과는 12. 4 년 후인 지금은 10. 비록 2 줄어들긴 했지만 오차 범위 이내다.' 마력 측정기의 이상이 아니었다. 성진우의 마력이 도저히 상식적으로 이해되지 않을 만큼 약했던 것이었다. 여태껏 살아남은 게 기적이었다. 이 이상은 시간 낭비라고 판단한 우진철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가지." "네." 우진철과 부하 직원은 빠르게 짐을 챙겼다. "저기, 뭐라고 말씀들을 좀..." 진우가 묻자 우진철이 고개를 숙였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했습니다. 혹시 또 기억나는 것이 있으시거든 연락 주십시오." 두 사람은 뭐가 그리 바쁜지 짐을 챙기기가 무섭게 병실을 나갔다. 꽉 찬 것 같던 병실이 이내 한산해졌다. "..." 진우가 뒷목을 긁적였다. '역시 헛물이었나.' 따지고 보면 몸이 상쾌하다는 것 말고는 딱히 달라진 점도 없었다. 그리고 만약 재각성을 했다고 해도 혼자서 놈들을 전부 상대하기는 무리였을 거다. '최종병기라 불리는 최종인 헌터나 S 급 위의 S 급이라 불리는 고건희 헌터 정도면 놈들과 상대가 될까?' 실제로 두 사람이 싸우는 걸 직접 본 적은 없으니 의미 없는 가정이었다. S 급 헌터들의 정보는 많은 것이 베일에 쌓여 있었다. 그야말로 하늘 위의 구름 같은 존재들. 그렇게 생각하며 고개를 들어 올리던 찰나였다. '어?' 무심코 위를 바라봤더니, 허공에 글자가 떠 잇었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 '...?' 다시 눈을 감았다 떠 보았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글자는 토씨 하나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떠 있었다. 고개를 세게 흔들어보고, 눈을 비벼보기도 했으나 바뀌는 것은 없었다. 진우는 지끈거리는 이마를 한손으로 감싸며 고개를 아래로 떨어트렸다. '환청을 들은 게 불과 얼마 전 일인데, 이제는 헛것까지...' 정말로 머리가 어떻게 되기라도 한 것일까?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라는 것이 있다. 큰 사고나 끔찍한 경험을 겪은 이들이 보이는 이상증세를 일컫는 단어다. 얼마 전 동료 대다수를 잃었고 본인도 죽기 직전까지 갔었으니, 그 여파로 환청이 들리고 헛것이 보여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렇게 단순히 넘기기에는 석연치 않는 점이 좀 있었다. 진우의 시선이 자신의 다리로 이동했다. 석상의 방패에 잘려 나갔던 다리가 지금은 온전하게 붙어 있었다. 이중 던전에 지하 신전,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와 말끔히 치료된 다리, 그리고 눈앞의 메시지까지. 너무 많은 일이 한꺼번에 일어났다. '어쩌면...' 그 일들은 각각 별개의 사건이 아니라, 서로 어떠한 연관이 있을지도 모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지끈거리던 머리가 약간은 맑아지는 느낌이 들었다. '좋아.'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동요가 가라앉고 마음이 편해지니, 문득 메시지의 내용이 궁금해졌다. 메시지 안에 여러 의문을 해결할 수 있는 단서가 있을 수도 있으니까. 진우는 메시지를 확인해 보기 위해 글자 쪽으로 손을 뻗었다. 손은 글자를 통과해 지나갔다. '터치식이 아닌가?' 스마트폰에 너무 익숙해져 있던 모양이었다. 터치 외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메시지를 확인하려면 어떡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는데, 문득 의식을 잃기 전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랬었지." 당시 정체불명의 목소리와의 의사소통은 모두 대화로만 이루어졌었다. '그때처럼 머릿속에 말을 떠올리거나 입으로 직접 말하면 되려나?' 그렇게 결론 지은 진우는 그럴듯한 명령어들을 차례차례 읊어 보기 시작했다. "확인." "메시지." "메시지 확인." "메시지 체크." "본다." "보겠다." "보자." "보여 줘!" 그때였다. "...대체 뭐가 그렇게 보고 싶은 건데?" 따가운 시선이 느껴져 고개를 돌려보니, 반쯤 열린 병실 문틈 사이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교복 차림의 여동생이 시야에 들어왔다. "음..." 진우는 할 말을 잃었다. 천장을 보면서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보여 달라고 애원하고 있는 오빠. 이건 도저히 변명의 여지가 없었다. 9화 *** "머리를 심하게 다친 거 아냐?" 여동생이 멀찍이 서서 묻는 말에 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우의 여동생, 성진아의 눈빛은 여전히 곱지 않았다. "정말 괜찮은 거지?" "그렇다니까." 우두커니 진우의 상태를 훑어보던 진아는 이내 씩씩거리며 다가왔다. 그러곤 평소처럼 가드 자세를 취한 진우를 퍽퍽 야무지게 때리기 시작했다. "그만 좀 다치라고! 얼마나 걱정했는데!" "...미안하다." "남들은 다 괜찮은데 왜 오빠만 늘 다치는 거야!" "...미안." 진우를 때리던 진아의 손에서 힘이 점점 빠졌다. 곧 진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진우는 흐느끼는 동생의 등을 천천히 다독여 주었다. 왠지 콧잔등이 시큰해졌다. '이런 녀석을 두고 죽으려 했었다니.' 살아 돌아와 다행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찔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마치 끔찍한 악몽을 꾼 것 같은 기분. 진우의 시선이 살짝 허공의 메시지로 향했다.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아직도 그 꿈속에서 완전히 헤어나온 것 같지는 않지만...' 이해할 수 없는 일 투성이였다. 그래도 뭐 어떠하랴. 중요한 건 이렇게 살아서 다시 가족들을 볼 수 있게 됐다는 사실 아닌가? "훌쩍." 다행히 씩씩한 여동생의 눈물은 금방 그쳤다. 그러나 잔소리는 그 뒤로도 1 시간이나 더 계속됐다. "알겠어? 한 번만 더 다치면 내가 공부 때려치우고 일하면서 오빠 헌터 일 못 하게 할 거라고." 고운 얼굴에 어울리지 않게 예리한 진아의 눈빛은, 진우와 그것과 몹시 닮아 있었다. "알았어, 알았어." 진우는 내내 질렸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게 몇 번이고 다짐을 받고서야 속이 풀렸는지 진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디 가게?" "학교. 오빠 어떤가 보러 오려고 잠깐 외출만 허락받은 거야. 다시 가야 돼."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수능이 내년이지." 과외 한번 시켜 준 적도, 학원 한번 보내 준 적도 없지만 항상 전교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대견한 동생이었다. 진아의 꿈은 의사. 몇 년 전만 해도 그렇게 놀기 좋아하고 게임 좋아하던 녀석이, 어머니가 아프고 나서는 의사가 되겠다며 책상 앞을 떠나지 않았다. 진우는 동생의 꿈을 꼭 이뤄 주고 싶었다. 그런데 잠깐... 게임이라? 순간 진우의 눈이 번득였다. "나 갈게." 병실을 나가려는 진아를 진우가 급히 불러 세웠다. "진아야." "왜?" "게임 같은 거 할 때 말이야..." 진아가 피식 웃었다. "나 요새 게임 안 해. 고 3 이 며칠 남았다고." "알아. 알긴 아는데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그래? 뭐가 궁금해? 오빠 요즘 게임해?" 과거의 전문 분야여서 그런지 진아가 강한 관심을 보였다. 진우는 아직도 허공에 떠 있는 글자들을 힐끔 쳐다보고는 물었다. "게임에서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을 때, 그 메시지를 보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일단 메시지 함을 열어야지." "메시지 함을 '연다'고?" 띠링! 진우가 '연다'는 말을 꺼내자마자 전자음과 함께 감춰져 있던 메시지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두 개의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습니다.] [플레이어]가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미확인) [일일 퀘스트: 강자가 되기 위한 준비]가 도착하였습니다. (미확인) 진우가 희색을 띠었다. '됐다!' 갑자기 밝아지는 오빠의 표정을 보고 문득 불안감을 느낀 진아가 물었다. "뭐야? 무슨 게임인데? 내가 좀 도와줘?" 진우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혼자 해 보게." 지금 겪고 있는 일들을 말해 주면 동생은 어떤 반응을 보일까? '동생한테 미쳤다는 소리를 듣기는 싫으니까.' 진우는 하고 싶은 말들을 속으로 삼켰다. *** 배웅하는 척 동생이 엘리베이터에 타는 것을 확인한 진우는 빠르게 병실로 돌아왔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순 없지.' 딸깍. 목격자 방지를 위해 문까지 걸어 잠갔다. 만반의 준비를 끝낸 진우는 침대에 걸터앉고서, 눈앞에 떠 있는 메시지들의 제목을 읽어 내려갔다. [플레이어]가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미확인) [일일 퀘스트: 강자가 되기 위한 준비]가 도착하였습니다. (미확인) 첫 번째 메시지의 제목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기억이 있었다. '어디서 들었지? 분명 낯이 익은데.' 우선은 첫 번째 메시지부터. [플레이어]가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미확인) '확인.' 띠링. [본 시스템은 '플레이어'의 성장을 지원합니다.] [본 시스템의 지시에 불응할 경우 페널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보상 지급이 완료되었습니다.] "아아." 뒤늦게 기억이 났다. 기억을 잃기 전 마지막으로 들었던 말이었다. '그때도 플레이어니 뭐니 그런 소릴 했었지.' 하지만 그때와 마찬가지로 지금도 무슨 말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시스템, 성장, 페널티, 보상. 의미가 불명확한 단어들의 연속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성장시키고 뭘 어떻게 보상해 준다는 거야?' 게임 속에서나 볼 수 있는 단어들이 아무런 설명도 없이 나열되어 있으니 이해가 어려울 수밖에. 알아듣기 힘든 말들은 일단 넘어가기로 하고, 차분히 다음 메시지를 열었다. [일일 퀘스트: 강자가 되기 위한 준비]가 도착하였습니다. (미확인) 꼴깍. 진우는 의미심장한 메시지 제목에 무의식적으로 침을 삼켰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확인.' 띠링. [일일 퀘스트: 강자가 되기 위한 준비] 팔굽혀 펴기 100 회 : 미완료 (0/100) 윗몸 일으키기 100 회 : 미완료 (0/100) 스쿼트 100 회 : 미완료 (0/100) 달리기 10km : 미완료 (0/10) ※주의: 일일 퀘스트 미완료 시 그에 상응하는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메시지를 확인한 진우의 입에서 저도 모르게 실소가 흘러나왔다. "하하... 이거 참." 맥이 빠졌다고 해야 하나. 일일 퀘스트, 그것도 '강자가 되기 위한 준비'라는 거창한 제목을 달고 날아온 메시지의 전문이 체력 단련용 운동법이라니. 확실히 퀘스트가 시키는 대로 하면 몸이 조금은 튼튼해질지도 모르겠다. 그게 시스템이 말하는 성장과 보상이란 걸까? '그러고 보니...' 예전에 어떤 책에서 '내면에 문제가 있는 사람은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보라'는 글귀를 읽었던 기억이 났다. '결국 보고 싶은 것이 보이는 거라지.' 얼마나 강해지고 싶었으면 이런 말도 안 되는 망상이 눈앞에 나타나게 됐는지. 웃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마음이 씁쓸했다. "이딴 걸로 강해질 수 있었으면 누가 그 고생을 했겠냐고..."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여러 가지 의문들의 답을 망상일지도 모르는 메시지에서 찾으려 했던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에라, 모르겠다.' 진우는 침대 위에 대자로 드러누웠다. 그리고 말없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 하는 일도 없는데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그렇게 병실 안을 메운 정적의 무게가 조금씩 느껴지기 시작할 무렵. 진우가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그래도...' 그래도 만에 하나 무언가 바뀌는 것이 있다면? 어쩌면 하는 기대감과 설마 하는 의구심이 반반 섞인 채로 '한번 해 볼까'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일단 손해 볼 건 없으니까.' 그냥 가볍게 몸 한번 푼다고 생각하면 못할 이유도 없잖아? 어렵게 결정을 내렸다. 해 보자고. 진우는 침대에서 내려와 짧은 스트레칭을 마친 뒤, 침대 모서리를 짚고서 천천히 팔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1, 2, 3..." 1 에서 시작된 숫자가 가파르게 위를 향해 갔다. "...97, 98, 99, 100." 시작한 김에 100 개를 다 채워 봤지만 기대와 달리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다. 팔이 조금 저리다는 것 빼고는. "내가 뭘 한 거지..." 진우는 피식 웃으며 바로 섰다. [플레이어]가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확인 완료) [일일 퀘스트: 강자가 되기 위한 준비]가 도착하였습니다. (확인 완료) 미확인이라던 메시지가 확인 완료로 바뀌어 있었다. 더 이상 읽지 않은 메시지가 있다는 글자도 뜨지 않았고, 이 이상 망상과 장단을 맞춰 주고 싶은 생각도 들지 않았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진우는 미련 없이 메시지창을 닫았다. "하암-." 진우는 늘어지게 하품하며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갔다. 오랜만에 몸을 움직여서 그런지 슬슬 졸려오기 시작했다. 창밖의 하늘은 어느새 노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나?' 아까 감시과 직원들이 말하길, 이번 병원비는 협회에서 전액 부담한다고 했었다. 기왕 입원한 김에 이것저것 정밀검사도 좀 받고, 건강하다는 사인이 떨어진 뒤 퇴원해도 늦지 않으리라. 진우는 그리 생각하며 자리에 누웠다. '어차피 환각이니 환청이니 하는 것도 시간이 지나면 다 사라지겠지...' 눈꺼풀이 스르르 감겨 왔다. 진우는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째깍, 째깍. 진우가 자는 동안에도 벽면의 시계는 부지런히 바늘을 움직였다. 돌고, 돌고, 돌던 바늘은 어느덧 오후 11 시 59 분 57 초를 가리켰다. 틱, 틱, 틱. 58 초, 59 초, 60 초. 시곗바늘은 정확히 12 시 0 분 0 초에 정지했다. 띠링. [일일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했습니다. 정해진 시간 동안 '페널티 존'으로 이동합니다.] *** 쿠구구구구구궁-! 진우는 온몸을 뒤흔드는 격렬한 진동에 눈을 떴다. "지, 지진?" 벌떡 일어난 진우가 침대 끝을 붙잡았다. 지진이 어찌나 심한지 균형을 잡기가 힘들었다. 쿠구구구궁- 흔들림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더 심해졌다. 그때. 퍼석떨어질라 꽉 쥐고 있었던 침대의 철봉이 부러졌다. 아니, 부러진 것이 아니라 사라졌다. 진우가 급히 손안을 확인했다. 철봉은 어디 가고 모래만이 남아 있었다. '모래?' 퍼석다른 쪽의 철봉도 모래로 변했다. 지진은 한층 더 심해졌다. 쿠구구구구구궁- "으악!" 결국 침대는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병실 안에서 이리저리 튕기며 비명을 질러 댔다. 그러는 동안에도 병실 안의 사물들은 하나둘 모래로 변해 갔다. "으아아아아아-!" 털썩. 내동댕이쳐진 진우가 어디엔가 파묻혔다. 손끝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입자가 고운 모래였다. 지진은 어느새 멈춰 있었다. "퉤, 퉤!" 진우는 입속에 들어온 모래를 내뱉으며 급히 고개를 들었다. "...?" 끝도 보이지 않는 모래의 대지가 펼쳐져 있었다. 진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옷 틈새로 들어왔던 모래가 스르륵 아래로 빠져나갔다. 진우는 가슴에 묻은 모래 먼지를 털며 주변을 훑어보았다. 온 시야가 정말로 모래뿐이었다. "사막...?"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분명 자신은 방금 전까지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대형병원에서 자고 있었다. 그런데 눈을 뜨니 광활한 사막 위라? 진우는 모래를 한 움큼 쥐어 아래로 흘려 보았다. 모래는 아래를 향해 일직선으로 떨어졌다. '바람이 전혀 없다.' 바람만 없는 것이 아니다.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에는 해도, 달도, 별도 보이지 않았다. 새까만 먹물로 채워 놓은 것 같은 텅 빈 하늘. 하지만 어째서인지 주위를 보는 데는 전혀 불편함이 없었다. "대체 여긴 어디야?" 10 화 그때였다. 스르르르륵. 갑자기 옆의 모래가 아래로 움푹 꺼지며 경사가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어, 어어!" 진우는 모래에 빨려 들어가지 않으려고 필사적으로 발을 굴렀다. 모래 구덩이는 점점 넓어지기 시작했고, 결국 진우는 두 손까지 사용해서야 간신히 위로 올라갈 수 있었다. "헉, 헉, 헉." 엉덩이를 땅에 붙이고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기이하게도 모래 구덩이 가장 아래쪽 부근의 모래가 부글부글 끓고 있었다. 한 번만 발을 헛디뎠어도 저기까지 그대로 미끄러졌을 것이라 생각하니 등골이 오싹해졌다. "아니..." 잠깐. 진우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끓는 게 아니야." 자세히 들여다보니 모래 밑에서 뭔가 커다란 것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진우는 본능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예감이 좋지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살며시 뒷걸음치는 진우 앞에 갑자기 모래가 하늘로 솟구쳐 올랐다. 쏴아아-! 폭포가 떨어질 때 나는 소리를, 모래가 냈다. 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벌... 벌레?" 모래 속에서 튀어나온 것은 거대한 지네였다. 키에에엑-!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놈의 머리는 5 층 건물 옥상 높이에 있었다. 진우가 꿀꺽 침을 삼켰다. '말도 안 돼...' 확실히 놈은 말도 되지 않게 컸다. 세상에 이런 크기의 지네가 있다는 소리는 듣지 못했다. 하지만 진우를 놀라게 한 것은 지네의 크기만이 아니었다. "왜 저놈 머리 위에... 이름이 떠 있는 거지?" 꿈이라도 꾸고 있는 걸까? 진우는 눈을 감았다 다시 떠 보았으나 달라진 건 없었다. 여전히 지네의 머리 위로 빨간색의 아홉 글자가 적혀 있었다. 마치 게임 속의 몬스터처럼. '독이빨 거대 모래지네.' 놈의 기괴하고 혐오스러운 생김새만큼이나 마주치기 싫어지는 이름이었다. 특히 신경 쓰이는 부분은 '독이빨' 세 글자였다. 놈의 대가리 아래쪽에 붙어 있는 어린아이 크기만 한 이빨 두 개가 눈에 들어왔다. 저기에 찔리면 어떻게 될 것인가는 놈의 이름만 보고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커다란 이빨과 턱이 쉴 새 없이 열고 닫히는 것을 보고 있으니 꼭... "입맛을 다시는 것 같네." 그때 머릿속에서 다시금 소리가 들려왔다. 띠링. [페널티 퀘스트: 생존] 목표: 요구 시간까지 생존하세요 요구 시간: 4 시간 남은 시간: 4 시간 0 분 0 초. '농담이지...?' 그러나 남은 시간이 3 시간 49 분 59 초가 되자, 지네는 기다렸다는 듯 모래를 헤치며 덮쳐 왔다. 솨솨솨솨솨솨-! "뭐, 뭐야?" 진우는 급히 뒤돌아 달리기 시작했다. 고민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살려면 뛰어야 한다! 머릿속에는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몇 걸음 가지 않아 눈앞에서 또 모래 기둥이 솟아올랐다. 쏴아아! "으악!" 진우는 거센 압력에 밀려 뒤로 넘어졌다. 바닥을 구르다 급하게 몸을 일으킨 진우가 얼굴을 덮친 모래를 허겁지겁 털어 내다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번엔 한두 개가 아니었다. 쏴아아아! 쏴아아아! 어느새 모래 속에서 솟아오른 모래 지네 일곱 마리가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에에에엑! 키에에엑! 괴성을 지르는 지네들 아래에서, 진우의 얼굴이 노랗게 변해 갔다. "젠장..." *** 진우가 다시 병실에 나타난 것은 정확하게 4 시간 뒤였다. 털썩. 진우는 병실 바닥에 엎어져 괴롭게 기침했다. "콜록, 콜록. 퉤! 퉤!" 입안이 자글자글한 느낌으로 가득했다. 모래가 들어갔는지 눈도 매웠다. 한참 신음하던 진우는 결국 바닥에 대자로 뻗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헉... 헉... 대체... 뭐지...?" 가쁜 숨을 몰아쉬는 진우에게 새로운 메시지가 하나 나타났다. 띠링. ['페널티 퀘스트'를 완료하셨습니다.] 진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페널티 퀘스트? 내가 벌받을 만한 짓을 했던가? 가만히 기억을 더듬어 보던 진우는 어제 하다 말고 덮어 둔 [일일 퀘스트]를 떠올렸다. '설마...?' 그러고 보니 분명 퀘스트 미완료 시 그에 상응하는 패널티가 주어진다고 했었다. "헉, 헉, 그게... 그게 망상이 아니었다고?" 망상이 아니었다. 꿈도 아니었다. 굳이 꿈이니 생시니 하며 볼을 꼬집어 볼 필요도 없었다. 뛰어다닐 때는 숨이 턱까지 차올랐고, 지네 다리에 긁혔을 때의 고통은 지금도 생생했다. 모든 것은 현실이었다. 진짜 죽을 뻔했다. "너무 하잖아... 헉... 헉..." 페널티란 게 사람을 사지로 내던지는 것이었다니. 동시에 불길한 예감이 엄습해 왔다. 만약 이 모든 게 정말로 그 일일 퀘스트 때문이라면 이런 일이 이번 한 번으로 끝날 것 같지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또다시 기계음이 울렸다. 띠링. 흠칫 놀랐지만 다행히 다른 퀘스트는 아니었다. [페널티 퀘스트 완료 보상이 도착하였습니다.] [보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Y/N) '보상...?' 보상이라는 단어가 눈에 확 들어왔다. 하지만 문제는 지금 뭔가를 확인하고 자시고 할 여력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도저히 그럴 만한 상황이 못 되었다. '보상이고 뭐고... 일단 좀 쉬자...' 시야가 점점 흐려지기 시작했다. 곧 진우는 기절한 듯 잠에 빠져들었다. *** "어머나! 여기 왜 이래?" 다음 날 아침, 병실로 들어선 간호사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환자는 바닥에 쓰러져 있고, 주위는 온통 모래투성이가 아닌가? 환자의 몸과 옷에도 모래가 가득했다. 간호사는 진료 차트를 침대 위에 던져 놓고 다급히 호출 부저를 눌렀다. "여기 좀 도와주세요!" 곧 주치의가 병실로 들이닥쳤다. "뭐야? 성진우 씨 왜 이래요?" "모르겠어요. 어젯밤까진 멀쩡했는데 오늘 아침에 이렇게." "일단 침대에 눕히죠, 하나, 둘!" 두 사람은 진우를 들어 침대 위로 올려놓았다. 그 과정에서 침대 위에 놔두었던 진료 차트 모서리에 진우의 손등이 긁혀 약간 찢어졌으나 아무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좀 봅시다." 주치의가 이리저리 진우의 상태를 살폈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없었다. "뭐야... 그냥 자고 있잖아?" 주치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헌터협회에서 특별히 잘 봐 달라고 부탁했던 환자였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은 아닌지 가슴이 철렁했었다. "이대로 자게 놔두죠. 곤히 잠든 모양이니." 주치의는 그렇게 말하고 가려다가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검지로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데 이 방... 청소 한 번 해야겠네요. 요라 씨, 여기 뒷정리 좀 부탁드릴게요." "알겠습니다, 선생님." 주치의가 병실을 나가자 간호사 최유라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별일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환자 본인이나 가족들만큼은 아니지만 환자가 잘못되기를 바라는 의사나 간호사는 없었다. 특히 헌터 지정 병원에는 중상자가 많이 찾아온다. 더 이상 자신이 맡은 환자가 잘못되는 일만큼은 사양하고 싶었다. "휴-." 조금 진정된 그녀는 이제 어디서부터 병실 정리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다가, 우연히 바닥의 핏방울을 발견했다. "어머?" 핏방울은 침대 바깥으로 뻗어 나온 환자의 손끝에서 떨어지고 있었다. 놀란 그녀는 상처를 찾아 황급히 진우의 손을 살펴보다 손등을 뒤집었다. "아니...?" 분명 피가 흐른 흔적은 있는데 있어야 할 상처가 없었다. 피를 닦아 내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설마... 상처가 그사이 아물어 버린 거?' 유라는 떨리는 심정으로 조심스럽게 진우의 안색을 살폈다. 진우는 아직 세상모르게 잠들어 있었다. 7. 일일 퀘스트. 띠링. [일일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진우의 눈이 번쩍 떠졌다. 몸을 벌떡 일으킨 진우는 가장 먼저 시간부터 확인했다. 시곗바늘이 막 오후 4 시 30 분을 지났다. 아직 12 시가 되기까지는 7 시간 30 분이라는 여유가 남아 있었다. '좋아.' 진우는 메시지함을 열었다. 띠링. [일일 퀘스트 : 강자가 되기 위한 준비] 팔굽혀 펴기 100 회 : 미완료 (0/100) 윗몸 일으키기 100 회 : 미완료 (0/100) 스쿼트 100 회 : 미완료 (0/100) 달리기 10km : 미완료 (0/10) ※주의: 일일 퀘스트 미완료 시 그에 상응하는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또냐?" 반사적으로 튀어나온 말. 아니, 차라리 잘된 것인지도 모른다. 아예 불가능하거나 해석이 난해한 퀘스트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 몸이 좀 힘들기는 해도 시간만 들이면 어떻게든 끝낼 수 있는 퀘스트니까. 진우는 이번엔 아예 바닥으로 내려가 팔굽혀 펴기를 시작했다. "하나." 또 수상한 곳으로 끌려가 죽기 직전까지 내몰릴 수는 없지 않은가? "둘." 어젯밤에는 운 좋게 살았지만, 오늘도 그러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셋." 잠깐 고개를 들어 퀘스트 내용을 살펴보니 팔굽혀 펴기를 할 때마다 수치가 기록되고 있었다. 띠링. [팔굽혀 펴기 1 회를 성공하셨습니다.] [팔굽혀 펴기 100 회 : 미완료 (7/100)] 띠링. [팔굽혀 펴기 1 회를 성공하셨습니다.] [팔굽혀 펴기 100 회 : 미완료 (8/100)] 혹시나 싶어서 반쯤 내려가다 올라와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카운트에 포함되지 않았다. 어제 왜 카운트가 뜨지 않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대로 된 팔굽혀 펴기가 아니면 기록조차 되지 않는 것이다. '허... 거참.' 진우는 기막혀하면서도 팔에 준 힘을 풀지 않았다. 아직 남은 팔굽혀 펴기 회수는 50 개. 그 후에도 윗몸 일으키기, 스쿼트, 달리기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게 3 시간이 지난 후. 팔굽혀 펴기 100 회 : 미완료 (100/100) 윗몸 일으키기 100 회 : 미완료 (100/100) 스쿼트 100 회 : 미완료 (100/100) 달리기 10km : 미완료 (9/10) "헉, 헉, 헉, 헉." 병원 주위를 한 바퀴 돌고 온 진우는 자신의 병실 앞에서 몸을 기역 자로 숙이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순 없었다. '지금까지 얼마나 고생했는데...' 간신히 문을 열고서 안으로 한 걸음 내디뎠다. 그랬더니. 띠링. [현재까지 달린 거리 : 10km] [달리기 10km 를 완료하셨습니다.] 드디어 끝났다. "헉... 헉..." 진우는 털썩 무릎 꿇었다. 입에서는 단내가 진동했다. 이마와 등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헉... 헉..." 땀을 뻘뻘 흘리며 호흡을 가다듬고 있는 진우에게 낯설지 않은 메시지가 하나 도착했다. 띠링. ['일일 퀘스트: 강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완료하셨습니다.] [완료 보상이 도착하였습니다.] [보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Y/N) 그냥 어제처럼 뻗어 버릴까 잠시 고민했던 진우는 이내 마음을 바꾸었다. 이번에는 그놈의 보상이란 게 뭔지 확인이나 한번 해 보고 싶었다. "확인." 띠링. [아래와 같은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상 1. 상태 회복 보상 2. 능력치 포인트 +3 보상 3. 랜덤 박스 1 개 [전부 수락하시겠습니까?] '뭐가 이렇게 많아?' 보상 내역을 보고서 처음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꽤 유용할 것 같은 보상도 있었고, 정확한 의미가 궁금해지는 보상도 있었다. 일단은 보상 1 번, 상태 회복이 시급했다. 지금 지쳐 쓰러지기 직전이었다. 실패 페널티가 있었으니 완료 보상도 진짜일 가능성이 높았다. 어차피 밑져야 본전 아닌가? 설마 보상을 준다고 해 놓고선 다시 페널티 존에 던져 넣지는 않겠지. "수락." 11 화 말을 내뱉자마자 전신이 은은한 푸른 기운에 휩싸였다. '어... 이 기분은?' 곧바로 주희의 얼굴이 떠올랐다. 부상을 당해 마법으로 치료받을 때도 이와 비슷한 기분을 느끼곤 했다. 굳이 표현하자면 신선한 공기가 폐 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기분이랄까? 슈우욱푸른 기운이 서서히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들었다. 진우는 제자리에서 일어나 콩콩 뛰어 보고 스트레칭으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이럴 수가!" 터질 듯이 뛰던 심장이 진정되고, 거칠었던 호흡도 안정되었다. 피로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쓰러질 것 같았던 몸이 금방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효과는 만점이었다. '대단한데?' 진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마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현상은 자신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능력치 포인트라는 것 역시? 진우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침대 위에 놓인 작은 상자와 눈앞에 떠 있는 상태창이 눈에 들어왔다. '랜덤 박스란 건 저 상자를 말하는 것일 테고...' 중요한 건 상태창이다. 상태창에는 자신에 대한 정보가 간략하게 표현되어 있었다. 이름: 성진우 레벨: 1 직업: 없음 칭호: 없음 HP: 100 MP: 10 피로도: 0 [스탯] 근력: 10 체력: 10 민첩: 10 지능:10 감각: 10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3)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액티브 스킬: 질주 Lv.1 옛날에 온라인 게임을 했을 때 본, 막 생성된 초보 캐릭터의 능력치와 비슷했다. '이게 지금 내 능력치인가?' 현재 레벨 1. 스탯도 전부 기본 수치. E 급 헌터들 중에서도 최약체로 평가받는 자신의 현실을 고려하면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눈에 띄는 것은 스킬 부분이었다. 패시브 스킬의 '근성'과 액티브 스킬의 '질주'. 묘하게 낯이 익었다. "아, 그러고 보니 어제..." 어제, 정확히 말하자면 오늘 새벽 페널티 존에서 지네들에게 쫓길 때 들려온 메시지에 포함되어 있던 단어들이었다. 죽을 힘을 다해 3 시간쯤 뛰어다녔을 때인가? 갑자기 메시지가 날아왔다. ['스킬: 질주 Lv.1'을 배웠습니다.] ['스킬: 근성 Lv.1'을 배웠습니다.] 당시는 달리는 데 집중하느라 무슨 소린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우는 스킬 내용을 확인했다. [스킬: 질주 Lv.1] 액티브 스킬. 필요 마나 5. 달리기가 당신의 다리를 튼튼하게 만들었습니다. 스킬을 시전하면 이동 속도가 30% 증가합니다. 시전 중 1 분당 마나가 1 씩 감소합니다. [스킬: 근성 Lv.1] 패시브 스킬. 필요 마나 없음. 당친은 지치지 않는 근성을 가졌습니다. 체력이 30% 이하로 떨어지면 근성 스킬이 발동해 받는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내가 끈질기게 달렸기 때문에 [질주]와 [근성]을 배울 수 있었던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맞아 떨어졌다. 즉 같은 행동을 반복하여 일정 요구조건을 충족시키면 스킬이 되어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맙소사!" 이건 굉장한 메리트였다. 헌터들이 쓸 수 있는 스킬들은 첫 각성 때 습득하거나 A 급 이상의 마수들에게서 가끔 떨어진다는 룬석으로 밖에 배울 수 없기 때문이었다. 룬석의 가격은 최저 수익에서 비싸면 수백억을 넘어서기도 한다. 최근 경매에서 가장 비싸게 거래된 룬석의 가격은 약 7 백억이었다. 다수의 부상자를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킬 수 있는 스킬이 담긴 룬석으로, 외국의 S 급 치유계 헌터가 사비를 털어 익명으로 구매했다고 한다. 진우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이동 속도가 빨라지는 스킬과 피해를 덜 받게 만드는 스킬. 수백억에 거래됐다는 스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충분히 좋은 스킬들이었다. 그런 스킬들을 공짜로 익히게 된 것이다. 마력이 적어서 제대로 활용하기는 힘들겠지만 그래도 배운 것이 어딘가? '게다가 근성 스킬은 아예 마나 자체가 필요 없다고 하니...' 아마도 마나는 마력을 뜻하는 듯했다. 그렇다면 아무리 마력이 부족한 자신이라도 근성 스킬 만큼은 자유롭게 쓸 수 있다는 소리다. 그것만으로도 큰 소득이었다. "그런데... 이 알 수 없음이란 건 뭐지?"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패시브 스킬의 한 칸을 차지하고 있는 '알 수 없음'. 패시브에 있으니 자동으로 발동되는 스킬이긴 할 텐데, 어떤 정보도 나와 있지 않았다. '이건 단서조차 없네.' 얻을 수 있는 정보가 너무 한정적이었다. 이 상태에서 고민해 봐야 답이 나올 것 같진 않았다. 그래서 진우는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능력치 포인트라...' 아직 보상으로 받은 능력치 포인트 세 개가 미분배 상태로 남아 있었다. [스탯] 근력: 10 체력: 10 민첩: 10 지능:10 감각: 10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3) '스탯을 3 만큼 올릴 수 있다는 거겠지?' 스탯 목록에 있는 능력치는 모두 다섯 개. 레벨이 1 이라 그런지 모든 능력치가 단순했다. 하지만 현실이란 걸 감안하면 그렇게 간단하게 생각할 수는 없었다. 순간의 선택에 따라 실제 능력이 달라진다면 누가 쉽게 결정을 내릴 수 있을까? 진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근력은 힘일 테고...' 힘과 체력, 민첩은 어떤 의미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게임 같은 데서 흔히 접할 수 있는 '스탯'들이니. 문제는 끝부분에 위치해 있는 지능과 감각 능력치였는데, 줄곧 불친절했던 시스템답게 이번 역시 어떠한 설명도 없었다. 지능을 올리면 머리가 좋아지는 건가? 감각을 올리면 예민해지고? 어찌 됐든 지능이나 감각 스탯 모두 그다지 유용해 보이지는 않았다. 자신은 전투계열 헌터. 필요한 건 힘이나 속도, 혹은 체력이었다. '셋 중 하나를 고르라고 한다면 역시 힘이겠지.' 힘이 세지면 여러모로 편리하다. 그리고 스탯의 수치가 올라가면 몸에 어떠한 변화가 일어나는지도 알아 보고 싶었다. 그래서 가장 변화가 뚜렷하게 나타날 것 같은 근력 스탯에 포인트를 전부 투자했다. "근력에 3 포인트." 띠링. [스탯] 근력: 13 체력: 10 민첩: 10 지능:10 감각: 10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끝난... 건가?' 그게 끝이었다. 변화는 눈앞에 홀로그램처럼 떠 있는 근력 스탯 숫자가 10 에서 13 으로 변한 것뿐. 만화나 영화에서처럼 몸에서 주체할 수 없는 힘이 끓어오른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뭔가 달라지긴 했나?" 일단 힘을 한번 써 보자. 진우는 침대 옆에 붙어 서서 침대를 들어 보았다. 약간의 무게가 느껴졌지만 생각보다 쉽게 들렸다. 하지만 이게 침대가 무겁지 않아서 그런 건지, 아니면 근력이 강해져서 그런 건지 구별이 불가능했다. '포인트를 쓰기 전에 미리 한번 들어 볼걸.' 이미 포인트를 다 쓰고 난 뒤라 투자하기 전과 후의 차이점을 알기가 어려웠다. '포인트가 좀 더 있었다면...' 입맛을 다시던 진우에게 번뜩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페널티 퀘스트 보상!" 오늘 일일퀘만 완료했던 게 아니다. 죽다 살아나긴 했지만 페널티 퀘스트도 분명 완료했었고, 보상이 지급됐다는 메시지도 떴었다. 진우는 허겁지겁 메시지창을 불러왔다. [페널티 퀘스트 완료 보상이 도착하였습니다.] [보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Y/N) "역시!" 진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당연히 YES 지! [아래와 같은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상 1. 능력치 포인트 +3 보상 2. 랜덤 박스 1 개 [전부 수락하시겠습니까?] 일일 퀘스트 완료 때와 다르게 상태 회복 옵션은 없었지만, 필요한 건 능력치 포인트였다. 벌칙으로 받은 퀘스트다 보니 보상에 차이가 있을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똑같은 3 포인트를 받았다. 진우는 쾌재를 불렀다. "근력에 3 포인트 추가." 띠링. [스탯] 근력: 16 체력: 10 민첩: 10 지능:10 감각: 10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근력이 13 에서 16 으로 뛰었다. 진우는 다시 침대 앞에 서서 팔에 힘을 주었다. 그랬더니 방금 전보다 훨씬 더 쉽게 침대가 들렸다. 이제는 차이를 확연하게 알 수 있었다. "정말이다...!" 정말로 힘이 강해졌다. 스탯으로만 따지면 본래 수치였던 10 에서 무려 60 퍼센트나 상승한 셈이니 차이를 느끼지 못할 수가 있나. 신이 난 진우는 침대뿐만이 아니라 병실 안의 여러 집기를 들어 올리며 소란을 피웠다. 그러다 마침 우연히 병실 앞을 지나가다 소리를 듣고 들어온 수간호사의 지적을 받고서야 그만두었다. "...죄송합니다." 수간호사가 나가자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하지만 흥분은 가시지 않았다.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쿵쾅쿵쾅. 가슴이 아플 정도였다. 매일 찾아오는 퀘스트와 능력치 포인트 보상! 이 기현상이 갑작스럽게 끝나지만 않는다면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었다. 이건 커다란 기회였다. 거기다 정보창에 떠 있었던 레벨. '어쩌면 레벨도 올릴 수 있지 않을까?'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설마.' 너무도 꿈 같은 이야기였다. 거기까진 바라지도 않았다. 퀘스트와 보상만으로도 충분하니까. 능력치 포인트로 능력을 끌어올린다. 어제보다는 오늘, 오늘보다는 내일. 날마다 점점 더 강해지는 것이다. 'E 급 헌터, 그중에서도 최약병기로 불리는 내가 강해져?' S,A 급까지 멀리 갈 필요도 없다. 동료로 일했던 C,D 급 헌터들이 들어도 웃을 소리다. 배를 잡으며 손가락질을 하겠지. 성진우가 강해진다고? 천하의 그 성진우가? 하지만 비웃음을 당해도 좋았다. 아니, 비웃음 당하는 건 이제 익숙했다. 단지 기회를 손에 넣은 것만으로도 기뻤다. 그런데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혹시 이게 각성 후 각성의 과정일까?' 흔한 일은 아니지만 밑바닥을 전전하던 헌터가 재각성을 통해 일류급으로 거듭나는 경우는 분명히 있었다. 그렇다면 재각성을 통해 강해진 헌터들은 모두 이와 같은 현상을 겪었던 게 아닐까? '한번 찾아보자.' 궁금해진 진우는 병실 구석에 마련되어 있는 컴퓨터 앞에 자리 잡았다. 협회에서 제공한 VIP 룸이다 보니 컴퓨터를 비롯해 이것저것 편리한 것이 많았다. 타닥타닥. 진우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를 빠르게 움직였다. 검색, 검색, 또 검색. 수많은 사이트를 오고 갔다. 헌터자격증 소유자 외에는 접근이 불가능한 사이트에도 접속해 보았다. 유료 정보는 결제까지 해 가면서 관련 문서를 끊임없이 뒤졌다. 하지만 같기는커녕 비슷한 사례조차 없었다. '달라...' 일반적인 재각성과는 완전히 달랐다. 대부분의 재각성 헌터들은 헌터가 될 때와 같은 과정의 각성을 통해 힘을 얻는다. 자신처럼 죽기 직전에 이상한 음성이 들린다거나, 게임처럼 능력치가 보이고 그 수치를 올려 힘을 성장시키는 경우는 전무했다. 12 화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혹시나 싶어 헌터 전용 카페에 익명으로 글을 올려 보았다. [제목: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용: 갑자기 게임처럼 능력치가 보이고, 능력치를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시 저와 같은 일을 겪고 계신 분이 있나요?] 그 밑으로 댓글들이 폭주했다. └익명: ㅋㅋㅋㅋㅋ 아주 지랄을 해라, 지랄을. └익명: 그냥 미친 거 아니냐? └익명: 맛이 갔네. └익명: 게임을 너무 하신 거 같습니다... └익명: 혹시 만화가이신가요? └익명: 가까운 병원으로 ㄱㄱ └익명: 자세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익명: 자격증 있다고 어중이떠중이 다 받지 말고 카페 물갈이 한번 싹 해야 하는데... 수십 개의 댓글이 전부 다 비슷한 내용들이었다. "에휴-." 진우는 한숨을 내쉬었다. 꽤 오랜 시간을 들였지만 건질만 한 소득은 없었다. 카페에서는 미친놈이라며 손가락질까지 당했다. 이 정도까지 했는데 나오는 정보가 없다면... "내 경우가 유일하다고 봐야겠지." 유일무이(唯一無二). 세상 유일한 헌터! 이 기현상이 얼마나 도움이 될지, 어디까지가 성장의 한계일지는 좀 더 시간이 지나 봐야 알겠지만 일단 어감은 나쁘지 않았다. 주변을 둘러보니 벌써 밤이 깊어진 상태였다. "언제 시간이 이렇게..." 진우는 미간을 찌푸렸다. 늦은 시간까지 모니터 앞을 지키고 있었더니 눈이 침침했다. 미간을 만지작거리던 진우가 일어나서 스트레칭을 하며 몸을 풀었다.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길 수차례. 옆구리를 기역 자로 꺽어 대다가 바닥에 떨어져 있는 상자 두 개를 발견했다. "아." 랜덤 박스.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단색의 포장지에 리본으로 묶여 있는 작은 상자 두 개. '아까 난리법석을 떨 때 침대에서 떨어졌구나.' 보상으로 받았던 상자를 깜박 잊고 있었다. 진우는 가까이에 있는 상자 하나를 주워 안을 열어 보았다. "...반창고?" 일견 반창고처럼 보이는 '그것'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더니 녹색 글자로 정보가 떠올랐다. [아이템: 반창고] 평범한 반창고, 작은 상처에 붙이면 좋다. 인벤토리에 보관할 수 있습니다. "진짜 반창고 맞네." 혹시 던전에서 구할 수 있는 보물들처럼 특수한 기능이 있을까 기대해봤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하긴 던전에서 반창고가 나온다는 소리는 못 들어 봤고...' 진우는 실망 반, 기대 반으로 다른 상자도 마저 뜯었다. 거기서는 볼펜이 나왔다. 여기저기 훑어보고 끝을 눌러 볼펜심을 튀어나오게도 해 봤지만 이것 또한 평범한 볼펜이었다. [아이템: 볼펜] 평범한 볼펜, 메모하기에 좋다. 인벤토리에 보관할 수 있습니다. 아무래도 랜덤박스에서는 말 그대로 잡다한 물건들이 랜덤으로 튀어나오는 듯했다. "흠..." 그래도 소득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비록 반창고나 볼펜이 필요했던 것은 아니지만 이 두 녀석 덕분에 인벤토리의 존재를 알게 되었으니. 방 안의 다른 물건들은 정보가 뜨지 않는 걸 봐선 랜덤 박스에서 나온 물건들만의 특징인 듯했다. "인벤토리." 인벤토리를 불러내자 허공에 수십 개의 칸을 가진 그래픽 창고가 생성되었다. 레벨 1 유저의 창고답게 안은 텅 비어... 있지 않았다. 비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인벤토리 첫 번째 칸에 낯익은 물건 하나가 들어가 있었다. "저건...?" 진우는 그것을 꺼냈다. 띠링. [아이템: 김상식의 강철검] 공격력 +10. 지하 신전에서 주웠던 김 씨 아저씨의 검이었다. 게이트 안에 버려두고 나온 줄 알았는데. "반갑다, 인마." 진우는 웃음이 흘러나왔다. 함께 사경을 헤쳐 나온 사이라 그런지 다시 만나게 된 것이 반가웠다. 그리고 그대로 이공간의 미아로 놔두기엔 아까운 물건이기도 했다. '김 씨 아저씨가 이놈을 3 백만 원에 샀다고 했던가?' 헌터들의 무기는 겉으로는 평범해 보여도 실은 그렇지가 않다. 마수들은 마력이 담긴 무기가 아니면 타격을 입지 않는다. 당연히 그런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무기인 만큼 가격이 비싸다. '당분간은 이놈을 써야겠네.' 헌터용 무기를 살 돈이 없어서 맨몸으로 싸우던 처지였다. 싸구려 장검이지만 이 정도면 감지덕지였다. '이젠 내 거다.' 김 씨는 이 검을 보면 돌려 달라고 입에 거품을 물고 달려들지 모른다. 자신을 구해 준 은인을 버리고 달아날 정도로 이기적인 사람이니. 하지만 이 검도, 이 기회도 모두 목숨과 맞바꿔 손에 넣은 것이다. 쉽게 돌려줄 생각은 없었다. 진우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지하 신전에서 진우는 두 가지를 배웠다. 하나는 강해져야 한다는 사실이었다. 약하기 때문에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결과를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성가대 출신 청년을 말리지 않았고, 김 씨 아저씨가 부당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송 씨 아저씨를 돕지 못했다. 살아남기 위해 무엇이 옳은지 알면서도 못 본 척 눈을 감았다. 부끄럽지 않으려면 보다 강해져야 했다. 그리고 또 하나. '불필요한 친절은 베풀 필요가 없다.' 친절 뒤에 돌아온 것은 동료들의 배신이었다. 거동이 불편한 자신을 두고 동료 셋은 도망쳤다. 애타게 불렀지만 그 누구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 준 사람이 누구인지 기억하지 못했다. '기브 앤 테이크.' 이제 조건 없는 선의로 위기를 자초하는 짓은 않겠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스스로의 목숨이 아닌가. 그것이 진우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야 배울 수 있었던 교훈이었다. 보다 강하게, 보다 독하게. "할 수 있다." 진우는 한 번 배운 것을 좀처럼 잘 잊지 않는 사람 중 하나였다. *** 어느 포장마차 안. 간호사 최유라는 간만에 만난 친구와 늦은 시간까지 회포를 풀고 있었다. "아, 맞다." 유라는 친구가 헌터협회의 직원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자신이 헌터 지정 대형병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것도 친구의 덕이 컸다. "너 헌터에 대해서 잘 알지?" "남들만큼은 알지. 왜?" "혹시 다친 상처가 빠르게 아무는 능력 같은 걸 가진 헌터도 있어?" "치유계 헌터들이 그렇잖아. 회복 주문 한방이면 어떤 상처도 빠방~!" "아니, 아니. 마법 같은 거 말구. 무의식중에." "무의식중에?" "예를 들면 기절했다던가 아니면... 잠을 자고 있는 상태라던가." 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에이, 말도 안 돼. 그건 재생이라고 하는 엄청난 능력인데, A 급 이상의 최상급 마수들 중에서도 특수한 놈들만 보이는 특징이야." "사람 중에는 없고?" "응. 그런 능력을 가진 헌터는 들어 본 적 없어." "그... 그렇지?" 역시 잘못 본 걸까? 유라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때 친구가 말했다. "하지만... 몰라, S 급 헌터들이라면 가능할지도." 친구의 말에 유라가 고개를 들었다. "S 급?" "S 급 헌터들은 워낙 괴물 같은 사람도 많고, 세간에 공개된 정보도 별로 없으니까. 뭐라더라? 백호 길드의 백윤호 헌터는 진짜 괴물 같은 걸로 변신할 수 있다고 그러던데." 하지만 성진우는 E 급 헌터였다. 헌터들의 등급은 협회 사이트에 공개되어 있어, 누구나 마음만 먹으면 손쉽게 검색해 볼 수 있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로 호기심이 생긴 유라는 협회 사이트에 들어가 성진우에 대해 알아보았다.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지기에는 그 사람 등급이 너무 낮... 아!' 헌터들의 재각성! 그러고 보니 어제인가 그제 진우의 병실 근처를 지나쳐 갈 때, 안에서 재각성 운운하던 소리가 들렸던 것이 기억났다. '설마 그 사람 상급 헌터로 재각성 한 거야?' 평범한 사람들은 S 급 헌터들과 친해지기는커녕 한 번 마주치기도 힘들다. S 급의 숫자가 워낙에 적은 데다 그들 모두가 정신없이 바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게 웬일, 그런 대단한 사람이 자신의 환자가 되다니. E 급에서 이제 갓 S 급이 된 헌터라. '아직 그 사람의 가치를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면...' 지금 점수를 따 두면 혹시 자신에게도 기회가 돌아오지 않을까. S 급 헌터와 친분을 쌓을 기회는 쉽게 오는 게 아니니 말이다. 남들은 돈을 주고서도 만나기가 힘든 이들이 바로 상급 헌터들이었다.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유라의 얼굴에 점점 미소가 번져 갔다. "어머, 계집애. 뭐 좋은 일이라도 있니? 왜 이야기하다 말고 실실거려?" "아, 아냐. 아무것도 아냐." 유라는 연신 고개를 저으면서도 얼굴에 떠오른 미소를 쉽게 지우지 못했다. 8. 레벨 업! "어머, 저 사람 좀 봐." "저 환자 몸이 원래 저렇게 좋았나?" 젊은 여간호사 둘이 복도를 지나쳐 가는 진우를 보고 속닥거렸다. 진우는 못 들은 척 병실로 돌아갔다. 일일 퀘스트를 시작한 지 일주일째. 여러 가지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중 하나가 몸에 일어난 변화였다. 진우는 병실 구석에 위치한 거울 앞에 가 섰다. "흠, 흠." 전신 거울 앞에서 몸매를 살핀다. 여대생에게나 어울릴 법한 행동을 하는 것이 쑥스러워 보는 사람도 없는데 두어 번 헛기침하고나서야 거울을 똑바로 마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달라졌다. 몸이 변하고 있었다. '근육이 붙었다.' 가장 눈에 띄는 변화는 근육이 늘어난 것이었다. 군살이 사라지고 근육이 늘기 시작했다. 덕분에 어깨도 넓어졌고, 체형 자체가 전보다 커졌다. '그래도 둔해 보이진 않아.' 필요한 곳에 필요한 만큼의 근육. 전체적인 감상평을 말한다면 '날렵해 보이는' 정도라고 할까? 남자인 자신이 봐도 괜찮게 보이니 젊은 여간호사들이 뒤에서 수군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역시 이것 때문이겠지.' 진우는 상태창을 불러 왔다. 띠링. 이름: 성진우 레벨: 1 직업: 없음 칭호: 없음 HP: 100 MP: 10 피로도: 0 [스탯] 근력: 31 체력: 10 민첩: 10 지능:10 감각: 10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액티브 스킬: 질주 Lv.1 어느새 근력이 30 을 넘어가 있었다. 다른 스탯의 효율이 어느 정도인지 알 수 없으니, 일단은 효과가 확실하게 나타나는 근력 스탯에 포인트를 집중적으로 투자했다. 마수를 잡을 때 가장 도움되는 게 힘이기도 하니까. '겨우 며칠 운동했다고 체형이 달라질 리는 없다.' 그렇다면 생각해 볼 가능성은 하나. 근력 수치가 자꾸 상승하니 근육이 최대의 효율을 뽑아낼 수 있는 모양으로 변해 가고 있다는 것. 그 외에 다른 이유는 짐작하기 힘들었다. 너무 근력에만 투자한 것이 아닌가, 잠시 걱정되기도 했지만 달라진 몸을 보고 있으니 흐뭇해지며 걱정 또한 달아나 버렸다. '그래도 너무 눈에 띄긴 하네.' 간호사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횟수가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아무래도 사람의 몸을 다루는 직업을 가진 여성들이다 보니 보는 눈도 다른 것이다. 청력이 좋은 진우는 근처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올 때마다 놓치지 않았다. '슬슬 나가야 할 때가 됐나?' 13 화 많은 시선이 몰리는 건 좋지 않다. 시선 자체가 부담스럽기도 하거니와 이 기현상은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도 싫었다. 괜히 긁어 부스럼 만든다 했던가? 아무도 모르게 조용히 능력치를 올리고 싶었다. '병원을 나가는 데 문제 될 게 없기도 하고.' 다행히 모든 검사 결과가 정상으로 나왔다. 언제라도 퇴원이 가능한 상태였다. 아니, 협회나 병원 쪽에서는 은근히 나가 주기를 바라고 있는 듯했다. E 급밖에 안 되는 헌터의 치료비로 많은 돈을 쓰기가 아까운 것이리라. S 급 헌터들은 특혜 중 하나로 국가에서 모든 치료비를 부담한다고 하지만 진우와는 전혀 관련 없는, 아예 다른 세계의 이야기였다. 그러니 이쯤에서 병원을 나가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이란 생각이 들었다. 마침 확인해 보고 싶은 것도 있었으니까. "어디다 뒀더라..." 주머니를 뒤적거리던 진우의 손에 뭔가가 딸려 나왔다. 금빛으로 빛나는 열쇠였다. 단순한 형태 때문에 얼핏 장신구로 보이기도 하는 열쇠. 진우는 한참 동안 열쇠를 들여다보다가 다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 퇴원 절차를 밟고 있는데 어린 간호사 하나가 헐레벌떡 뛰어왔다. "헉, 헉! 성진우 씨, 지금 퇴원하시는 건가요?" "네? 아, 네." 담당 간호사였던 최유라였다. 유라는 퇴원이라는 말에 아쉬운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한 얼굴이 되었다. 혹시 무슨 실수라도 했나 싶었지만 짚이는 건 없었다. 유라는 머뭇거리다가 작은 메모지 하나를 꺼냈다. "연락처 좀 적어 주실 수 있을까요?" "연락처요?" "네... 괜찮으시면." 나중에 따로 보낼 검사 결과 같은 게 있는 건가? 진우는 별다른 생각 없이 메모지를 받아 들었다. 그런데 유라에게 받은 것은 메모지뿐이었다. 진우가 빤히 쳐다보자 유라가 얼굴을 붉혔다. "왜, 왜요?" "저기... 펜이 없는데." "아, 아, 잠깐만요." 급하게 오느라 생각 못 했는지 유라가 파닥거리며 돌아섰다. '어, 잠깐? 펜이라면...' 생각도 잠시. 어느 순간 볼펜이 손에 쥐어져 있었다. 인벤토리에 넣어 두었던 볼펜을 떠올리자 자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한번 인벤토리에 넣었던 물건들은 생각만으로도 자유롭게 넣거나 찾아올 수 있었다. 인벤토리의 편리한 기능이었다. 손안을 확인한 진우가 유라를 불러 세웠다. "찾아보니 볼펜이 하나 있네요." "아, 그래요? 휴- 다행이다." 유라가 가슴에 손을 얹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우는 폰 번호를 적으며 미소를 지었다. 매번 이런 식이었다. 랜덤 박스에서 나온 물건들은 나중에 꼭 한 번씩 쓸 일이 생겼다. 비옷이 나왔을 땐 다음 날 비가 내렸고, 정수기 종이컵이 떨어지기 전날엔 유리컵이 나왔다. 가끔은 반창고처럼 전혀 필요 없는 물건이 나오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적절하게 쓰였다. "여기요." 진우가 건네는 메모지를, 유라는 기쁜 얼굴로 받아 들었다. 그러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그럼 잘 부탁드릴게요." "아,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유라는 휙 뒤돌아서 어디론가 급하게 사라져 버렸다. 진우는 유라의 뒷모습을 보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근데... 뭘 부탁한다는 걸까?' 귀엽게 생긴 간호사가 인사성도 참 밝네. 진우는 그런 생각과 함께 홀가분한 마음으로 병원을 나섰다. *** 먼저 찾아간 곳은 서울시 구로구에 위치한 헌터협회 건물이었다. 헌터들의 폰은 특수한 기기를 쓰기 때문에 협회에 직접 신청해야 했다. 협회 직원이 모니터를 들여다보다 말했다. "헌터님 폰은 2 주 뒤에나 나올 수 있을 것 같네요." "예? 그렇게나 오래 걸리나요?" 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가지고 있던 폰은 지하 신전에서 신상에 쫓길 때 박살 나 버렸다. 그런데 새 폰이 나오기까지 2 주나 걸리다니. "급하게 폰을 쓰셔야 한다면 임시폰을 빌려 드릴 수도 있는데 이용료가 5 만 원 정도 듭니다." 5 만 원... 사는 것도 아니고 빌리는 데 드는 돈이 자그마치 5 만 원씩이나. 현재의 자금 사정을 생각하면 너무 큰 액수였다. '어차피 딱히 연락 올 데도 없으니까.' 협회에서는 폰으로 연락이 되지 않을 경우 집으로 연락한다. 그러니 굳이 돈을 써 가며 임시 폰을 빌릴 이유는 없었다.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기다릴게요." "알겠습니다. 새 기기는 나오는 즉시 자택으로 보내 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로써 볼일은 끝났다. 오늘도 어김없이 찾아온 일일 퀘스트는 진즉에 끝내놓았고, 협회에 들러 새로 쓸 폰을 신청하는 과정도 빠르게 끝났다. 진우는 협회 건물을 빠져나오며 다시 금빛의 열쇠를 꺼냈다. '이제 이걸 알아볼 차롄가.' 열쇠의 정보가 녹색 글자로 떠올랐다. [아이템: 던전의 열쇠] 입수 난이도: E 급 종류: 열쇠 인스턴트 던전으로 이동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지하철 합정역 3 번 출구에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일일퀘의 보상으로 받은 랜덤 박스 안에 들어 있었다. 처음엔 웬 열쇠인가 했지만 입수 난이도가 뜨는 것을 보고 평범한 물건이 아님을 직감했다. 병원을 나오게 된 결정적인 이유기도 했다. '인스턴트 던전의 입장 열쇠라...' 인스턴트 던전이라고 해도 던전은 던전. 던전이라면 아픈 기억이 많았다. E 급 레이드에 참가했다가 큰 부상을 입고 무려 일주일 동안 병원 신세를 졌던 적도 있었다. 그때는 동료들이라도 있어서 살 수 있었지만... 만약 이 열쇠로 던전에 들어갈 수 있다면 꼼짝없이 혼자 돌아야 하는 것이다. 고민 끝에 결정했다. '잠깐 들어갔다 나오는 거라면 별문제 없겠지.' 여차하면 도망치면 되니까. 요즘 매일 달리기를 10 킬로씩 꾸준히 했더니 도망치는 것 하나는 자신 있었다. *** 그렇게 쉽게 생각했던 게 실수였다. 쿵, 쿵! "벽이... 생긴 건가?" 보이지 않는 벽을 두드리고 바깥을 향해 소리 질러 봤지만 아무런 응답도 없었다. 사람들은 각자 제 갈 길을 분주히 오갈 뿐이었다. 가끔 합정역 안쪽으로 걸어오는 사람도 있었는데, 투명한 벽을 경계로 그들의 모습은 바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이곳과 저 너머는 다른 공간인 듯했다. 진우가 억지로 힘을 써서 나가려고 하자 또다시 메시지가 떴다. 띠링. [던전을 나갈 수 없습니다. 보스를 처치하거나 귀환석을 가지고 오십시오.] 아까부터 같은 말뿐이었다. 가지고 있던 던전의 열쇠는 3 번 출구 안으로 발을 내딛자마자 사라졌고, 일이 틀어졌음을 느낀 진우가 급히 방향을 틀었을 땐 이미 앞이 막혀버린 상태였다. 3 번 출구 어딘가에 던전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게이트나 비밀 문 같은 것이 있으리라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랐다. 거기다 일반적인 던전과는 달리 자유로운 이동도 불가능했다. "던전과 다르다라..." 진우는 한숨과 함께 뒤를 돌아보았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밀림처럼 변해 버린 지하철역이었다. 벽에는 넝쿨이 어지러이 뻗어 있고, 시체가 썩을 때 나는 퀴퀴한 냄새가 진동했다. 멀리서 짐승 울음소리 같은 것도 간간이 들려왔다. "..." 합정역 근처 어딘가에 입구가 있는 게 아니라 합정역 전체가 던전이 되어 있었다. 진우는 인벤토리에서 강철검을 꺼냈다. 띠링. [아이템: 김상식의 강철검] 공격력 +10. 뒤는 막혀 있고 어디 다른 데 연락할 방법도 없으니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진우는 침을 꼴깍 삼킨 뒤 천천히 계단을 내려갔다. 숨을 죽이고 주변을 둘러보았으나 별다른 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방심은 금물이었다. 마수 중에는 등급이 높지 않더라도 기척을 숨길 수 있는 놈들이 많았다. 아니, 오히려 등급이 높지 않기에 기척을 숨기고 기습을 노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화장실을 지나쳐 안쪽으로 들어가니 지하상가들이 나왔다. 가게들은 낡고 부서져 폐허를 연상케 했다. 희미한 형광등 조명 아래 폐허가 된 가게들과 인적 없는 통로를 보고 있으니 음산한 기분이 들었다. 티딩, 티딩. 형광등 몇 개는 수명을 다한 듯 불빛을 깜박였다. 깨진 타일 위로 무성히 자란 잡초들을 밟으며 걸어가던 진우는 뭔가 께름칙한 기운을 느끼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 사방이 고요했지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거기다 이 냄새. 주변에서 동물이 죽어서 파리가 들끓을 때쯤 풍기는 지독한 악취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던전 출입이 잦았던 진우에게는 낯설지 않은 냄새였다. '이 냄새는... 짐승형 마수다.' 하지만 주위 어디서도 기척을 찾을 수 없었다. 마치 먹잇감을 노리고 숨어 있는 것처럼. '숨어서 기회를 엿보시겠다?' 그렇다면 기회를 드려야겠지. 진우는 일부러 돌아서서 등을 보였다. 그리고 왔던 길을 천천히 되돌아가기 시작했다. 짐승은 상대가 등을 보이면 덮쳐 오는 법이다. 짐승형 마수도 크게 다르지 않다. 그렇게 세 발짝쯤 걸었을 때였다. 와장창! 뒤쪽에 있던 옷가게의 쇼윈도가 깨지며 뭔가가 튀어나왔다. 그 뭔가는 지면을 밟고 착지한 뒤 곧바로 진우의 목덜미를 향해 뛰었다. "크릉!" 미리 공격에 대비하고 있었던 진우는 소리가 들림과 거의 동시에 검을 뒤쪽으로 크게 휘둘렀다. 그야말로 반사적인 움직임! 쉬익-! 예리한 검날이 덤벼들던 짐승의 턱을 베었다. 진우에게서 떨어진 놈이 괴성을 지르며 바닥을 나뒹굴었다. "키이이잉, 키잉!" 붉은 털을 가진 커다란 늑대였다. 주둥이가 잘려 나간 늑대는 고통스러운지 이리저리 몸을 비비며 몸부림쳤다. 자세히 보니 페널티 존에서 봤었던 지네처럼 놈의 머리 위에도 이름이 떠 있었다. 강철 이빨 라이칸. 하지만 그때와 달리 붉은색이 아니라 흰색 이름이었다. '우물쭈물할 시간이 없다!' 놈이 상처를 입어서 움직이지 못하는 지금이 기회였다. 진우는 몸을 날렸다. 달려가 검을 강하게 내리치자 놈의 머리가 뎅겅 잘려 나갔다. "캐갱!" 라이칸은 단말마를 내지르며 숨을 거두었다. [강철 이빨 라이칸을 처치했습니다.] "좋아!" 그러나 해냈다는 기쁨도 잠시! 쇼윈도 너머의 어둠 속에서 몸을 숨기고 있던 다른 라이칸 두 마리가 뛰쳐나왔다. 아차, 동료가 있었나? 진우의 눈이 커졌다. "크르릉!" 놈들이 무시무시한 이빨을 드러내며 순식간에 거리를 좁혀 왔다. 진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흥분한 탓에 너무 세게 내리쳤는지, 바닥 깊숙이 박힌 검이 쉽사리 빠지지 않았다. '어딘가에 걸렸다.' 그때 라이칸 하나가 진우의 얼굴을 노리며 뛰어올랐다. "이런!" 진우가 목을 움츠렸다. 진우의 머리 위를 지나친 라이칸은 속도를 주체하지 못하고 바닥에 대가리를 처박았다. 콰직! 놈의 이빨이 꽂히자 돌로 된 바닥에 금이 쫙쫙 갔다. '괜히 강철 이빨이 아니네.' 하지만 감탄하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아직 다른 한 마리가 정면에서 달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검은 여전히 빠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젠장!" 하는 수 없이 검을 포기한 진우가 날아오는 라이칸을 향해 있는 힘껏 주먹을 날렸다. 부웅! 듣기에도 섬뜩한 바람 소리와 함께 주먹이 일자로 뻗어 나갔다. 퍼걱! 일격에 라이칸의 머리통이 터져 버렸다. 머리를 잃은 라이칸 몸통은 천장에 부딪힌 후 사선을 그리며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쾅! "...?" 진우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자신의 주먹을 쳐다보았다. 예상치 못한 괴력이었다. 14 화 진우의 머리 위를 넘어갔던 라이칸도 그 광경을 보더니 꼬리를 내리고 주춤주춤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허...?" 이게 근력 올인의 성과인가? 놀란 진우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을 때, 머리 잃은 라이칸이 다리를 부르르 떨다가 곧 움직임을 멈췄다. 그러자 익숙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띠링. [강철 이빨 라이칸을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레벨이 올랐다고?" 잘못 들은 것은 아닌지 확인하기 위해 진우가 급히 상태창을 띄워 보았다. 이름: 성진우 레벨: 2 직업: 없음 칭호: 없음 HP: 205 MP: 22 피로도: 0 [스탯] 근력: 32 체력: 11 민첩: 11 지능:11 감각: 11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액티브 스킬: 질주 Lv.1 정말로 레벨이 올라갔다. 그리고 레벨이 올라가면서 모든 스탯에 1 포인트가 더해졌다. 능력치에 영향을 미치는 건 퀘스트 보상만이 아니었다. 레벨 업을 통해서도 상태창의 능력치를 올릴 수가 있었던 것이다. '레벨 업이 가능하다니!' 일말의 기대만 갖고 있던 일이 눈앞에서 현실이 되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게다가 추가되는 포인트도 레벨 업 쪽이 더 높아.' 퀘스트 완료 시 받는 능력치 포인트의 총합은 3. 레벨업을 하고 받은 능력치 포인트의 총합은 5. 비록 포인트를 마음대로 배분할 수 없다는 점은 불편했지만 레벨 업 쪽의 성장 폭이 훨씬 더 컸다. 또 퀘스트는 1 일에 한 번이라는 제한이 있는 데 비해 레벨 업은 제한이 없을 가능성이 더 높았다. '두 마리를 잡았을 뿐인데 레벨이 올랐다.' 게임에서도 그렇다. 레벨이 낮은 구간에서는 단시간에 많은 레벨을 올릴 수 있다. 현재 진우의 레벨은 2. 가장 밑바닥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평범한 저랩은 아니었다. 이미 근력 스탯이 30 을 넘어섰다. 1 업에 근력 스탯이 1 씩 오른다고 가정하면, 현재 진우의 근력 수치는 20 레벨 이상에 해당했다. 1 레벨 사냥터에서 20 레벨대 능력치를 지닌 유저가 사냥한다면? '그야말로 폭렙...' 가정을 증명이라도 하듯 방금 주먹을 휘둘렀을 때의 파괴력은 기대치를 아득히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근력 스탯은 세 배 늘었을 뿐이지만... 힘의 차이는 고작 세 배 정도가 아니었어.' 진우의 원래 근력 스탯은 10. 근력 10 과 근력 30 은 수치상으로 세 배의 차이가 나지만 발현되는 힘의 차이는 그 이상이었다. '혹시...?' 능력치가 올라갈수록 가중치가 붙는다면? 그렇다면 이 파괴력도 충분히 설명된다. 게다가 움직임도 이전보다 빨라졌다. 예전 같았으면 전속력으로 덮쳐 오는 짐승의 공격을 가볍게 피한다거나, 주먹을 내지를 때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난다거나 하는 상황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긴 근육의 힘이 세지는데 속도가 빨라지지 않을 수가 있나." 근력 스탯을 높이니 '힘'과 '속도'가 올라간 것이다. 이는 라이칸들과의 전투로 증명됐다. 그럼 민첩을 높이면 뭐가 달라지는 걸까? 호기심을 자극했지만 지금으로서는 알 길이 없었다. 그걸 알려면 능력치는 직접 올려 봐야 한다. '그래도...' 퀘스트 보상으로 받는 포인트를 민첩에 투자하기엔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력을 찍으면 힘과 속도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데 뭐하러 민첩에 포인트를 쓴단 말인가? 그렇다면 남은 방법은 하나. '최대한 빨리 레벨을 올린다.' 레벨 업을 통해 민첩 수치를 올리는 것이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했다. 1 씩 올리다 보면 언젠가 차이가 느껴지겠지. 진우는 바닥에 박혀 있던 검을 뽑아 들었다. '그럼, 시작해 볼까?' 아직 잡아야 할 놈이 하나 남아 있었다. "그런데... 이 자식 어디 갔어?" 분명 조금 전까지 근처에 있었던 라이칸 한 마리가 어느 사이엔가 사라져 있었다. 열심히 주위를 두리번거렸지만 놈의 흔적을 발견하지는 못했다. 아무래도 상태창을 보고 있는 사이 도망친 모양이었다. 어쩐지 꼬리를 내리고 이쪽 눈치를 살살 살피더라니. "쩝." 진우는 경험치가 날아갔다는 생각에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그렇게 지나쳐 가려는데. '이 녀석들, 마정석 같은 건 안 주나?' 문득 드는 생각에 걸음을 멈추었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수들은 모두 체내에 마정석을 하나씩, 혹은 여러개씩 가지고 있었다. 운이 좋으면 룬석이 튀어나오기도 했다. 스킬을 배울 수 있는 룬석은 물론이거니와 여러 용도로 쓰이는 마정석 또한 고가에 거래된다. 레이드에 나서는 헌터들은 기본 보수 외에 이 마정석을 노리고 사냥에 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우도 한 명의 헌터. 사냥을 성공했는데 뭔가 손에 들어오는 게 없으니 섭섭했다. 아쉬운 마음에 죽은 라이칸의 배를 갈라봤지만 역시 헛수고였다. 이놈들은 마수들과 완전 다른 부류인 듯했다. 확실히 여러 던전을 돌아다녀 봤지만 이렇게 늑대와 닮은 마수를 본 적은 없었다. 손을 털고 일어나려던 진우. "음?" 그런데 라이칸의 입안에서 뭔가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진우는 라이칸의 아가리를 벌렸다. 라이칸의 이빨 하나가 반짝반짝 빛을 내고 있었다. 진우가 손을 뻗었더니 이내 메시지가 떴다. [아이템: 라이칸의 송곳니]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획득." [아이템: 라이칸의 송곳니] 입수 난이도: 없음 종류: 잡동사니 크고 날카로운 라이칸의 송곳니. 인벤토리에 보관하시거나 상점에 파실 수 있습니다. 진우는 손안에 들어온 송곳니를 보면서 당황했다. '상점도 있었나?' 세상에 이렇게 불친절한 시스템이 어디 있단 말인가. 유저가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하나 몸으로 겪어 가면서 알아내야만 하는 구조라니. 심지어 페널티 퀘스트 때는 아무런 설명이 없어서 죽기 직전까지 가기도 했었다. 진우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상점을 불러 왔다. "상점." 내심 여느 게임들처럼 '상점' 푯말이 걸려 있고 상인 NPC 가 서 있는 가게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하지만 허공에 떠오른 것은 처음 메시지함을 열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홀로그램처럼 보이는 녹색 글자들뿐이었다. 그것도 단 두 단어. '구매'와 '판매'. "..." 아주 단조로운 상점이었다. 진우는 구매를 선택했다. 주머니에는 땡전 한 푼 없었지만 상점에서 어떤 물건이 거래되는지 궁금해서였다. 하지만 시스템은 냉정했다. [구매를 이용할 수 있는 레벨이 아닙니다.] 돈이 필요한 곳에서 찬밥 대우받는 경험은 이미 익숙했다. "네, 네." 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판매로 눈을 돌렸다. [아이템: 라이칸의 송곳니]를 판매하시겠습니까? "그래." 짤그락 소리와 함께 인벤토리가 떴다. 인벤토리의 가장 아래쪽, 골드라고 적힌 칸에 20 이라는 숫자가 새로이 새겨졌다. 어제까지만 해도 비어 있던 칸이었다. '20 골드라.' 실제 사용할 수 있는 현금도 아니고, 아직 상점을 이용할 수 있는 단계도 아니다 보니 20 골드란 게 어느 정도 돈인지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긴 뭐 E 급 던전에서 나오는 놈들이 쓸 만한 걸 주겠어?' 던전과 인던이란 차이는 있어도 그게 그거겠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다른 놈의 이빨까지 챙겨 가려던 진우가 아차 하며 이마를 짚었다. "머리통을 아예 날려 버렸지..." 진우는 씁쓸한 마음으로 방향을 꺾었다. 가치도 모르는 20 골드가 눈에 아른거렸지만 이 어두컴컴한 지하에서 어디로 날아갔을지 모르는 짐승 이빨을 찾기 위해 시간을 허비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돌아서는 순간, 그런 아쉬움이 눈 녹듯 사라졌다. "크르르르릉." "크르르르." "크르르르륵!" "크륵!" 도망간 줄 알았던 라이칸 한 마리가 동료들을 잔뜩 데리고 온 것이 아닌가! 진우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났다. 언뜻 보아도 20 마리 이상은 되어 보였다. "유레카!" 아니, 이럴 때 쓰는 단어는 아니던가? 뭐 어쨌든. 기쁜 마음을 표현하는 말임은 분명하니까. 진우는 검의 손잡이를 단단히 움켜 쥐었다. "송곳니 빼고 아주 다 씹어 먹어 주마."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한 남자의 살벌한 눈빛에 라이칸들이 겁을 집어 먹고 움찔 몸을 떨었다. 그 순간 진우가 녀석들을 향해 날아올랐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예상대로 레벨은 금방금방 올라갔다. 1 층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라이칸들을 몰살시킨 진우는 순식간에 7 레벨이 되었다. 무려 다섯 계단이나 점프한 것이다. "깨갱!" 꼬리를 감추고 도망가던 마지막 놈을 잡자 이상한 메시지가 떴다. 띠링. [칭호: 늑대 학살자]를 획득했습니다. "칭호?" [칭호: 늑대 학살자] 늑대를 잡는 데 능숙한 사냥꾼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짐승형 몬스터를 상대할 때 모든 능력치가 40% 증가합니다. 상태창을 열어 보니 과연 칭호가 바뀌어 있었다. 이름: 성진우 레벨: 7 직업: 없음 칭호: 늑대 학살자 HP: 766 MP: 81 피로도: 3 [스탯] 근력: 37 체력: 16 민첩: 16 지능:16 감각: 16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액티브 스킬: 질주 Lv.1 짐승형 몬스터를 상대할 때 추가 능력치 보너스라. 대상이 한정적이기는 해도 능력치가 40 퍼센트나 상승한다니 꽤나 괜찮아 보였다. '짐승형 마수도 많은데 놈들한테도 적용되려나?' 그렇게만 된다면 레이드 때 마수들을 손쉽게 처치할 수 있을 텐데. 하지만 거기까지 생각하지 않아도 소득은 짭짤했다. '늑대 이빨이 34 개, 낡은 단검이 두 개, 여행자의 옷이 하나, 귀환석이 하나.' 늑대를 잡다 보니 늑대 뱃속에서 아이템들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나 쓸 만한 것들은 아니었다. 낡은 단검은 지금 쓰는 강철검보다 공격력이 떨어졌고, 여행자의 옷은 착용 아이템이 아니라 흔히 말하는 상점 되팔이용 잡템이었다. 모두 상점에 처분했더니 천 골드가 넘게 들어왔다. [보유한 금액: 1,060 골드] '...라고 해도 전혀 기뻐할 수가 없네.' 아무리 모아 봐야 당장은 쓸데가 없으니 말이다. 골드를 제외하면 남는 거라곤 귀환석 하나뿐. 아까 던전 입구에서 탈출하려고 몸부림칠 때, 바깥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귀환석이 필요하다고 했었다. 이제 마음만 먹으면 다시 밖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갈림길이었다. 눈앞에 지하 2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그리고 손에는 귀환석이 쥐여 있었다. '전진이나, 후퇴냐...' 예전 같으면 망설임 없이 다음을 기약했을 것이다. 그랬기에 형편없는 능력치로도 많은 레이드에서 비교적 무사히 살아남을 수 있었다. 남들은 기적이라 말하지만 나름대로 영리하게 움직였던 결과였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돌아서고 싶지 않았다. 여기서 발을 빼면 다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후퇴는 지겹도록 해 봤으니." 한 번쯤은 부딪혀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진우는 귀환석을 도로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 지하 2 층으로 내려가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15 화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던전과 달리 인던에는 리스폰 개념이 있었다. 2 층 몬스터들을 싹쓸이하는 동안 1 층 몬스터가 리스폰 되고, 1 층 몬스터들을 몰아 잡는 동안 2 층 몬스터가 리스폰 되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진우는 1 층과 2 층을 왕복하며 더이상 레벨이 오르지 않을 때까지 몬스터들을 잡았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지 모르니까.' 그러다 보니 이제 어디서 어떻게 몬스터가 튀어나올지도 예상할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위에서 원숭이가 떨어지고." 천정에서 낙하하는 원숭이 몬스터의 긴 손톱을 사뿐하게 피하고 놈의 가슴에 검을 찔러 넣은 뒤. "끼엑!" "좌우에서 고양이 한 마리씩." 양쪽에서 덮쳐드는 검은 표범의 목을 차례대로 베었다. "캬악!" "캭!" [칼날 손톱 브리가를 처치하셨습니다.] [검은 그림자 라잔을 처치하셨습니다.] [검은 그림자 라잔을 처치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2 층의 끝. 또다시 지하 2 층을 올 클리어했다. 그래도 레벨은 한참 전부터 15 에 고정되어 있었다. 아마도 1,2 층에서는 15 까지가 한계인 듯했다. "스탯." [스탯] 근력: 45 체력: 24 민첩: 24 지능:24 감각: 24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레벨이 15 쯤 되다 보니 스탯도 많이 올라갔다. 민첩 역시 25 에 가까워졌다. 민첩이 20 을 넘기고 나서부터는 근력과 민첩의 차이점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민첩은 속도를 빠르게 만드는 게 아니라 상대의 속도를 느리게 보이게끔 만들어 준다. '마치 슬로우 비디오처럼.' 원숭이가 떨어지는 장면이나 표범이 달려드는 장면이 느릿하게 보였다. 시간을 딱딱 끊어서 사용하는 느낌이라고 할까? 적의 공격을 피하기도 쉬웠고, 적에게 공격을 맞추기도 쉬웠다. 말 그대로 '민첩'해지는 것이다. 속도는 무릇 상대적인 것. 민첩 스탯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서로 간의 격차가 커져, 상대의 눈에는 가공할 만큼 빠른 움직임으로 비칠 것이다. '근력과 민첩이 높아지면 시너지 효과가 상당하겠네.' 그게 민첩 스탯에 대한 최종 평가였다. "그건 그렇고." 진우의 고개가 돌아갔다. "저기는 어쩐다..." 지하 3 층으로 내려가는 계단이 보였다. 3 층에 갈 수 있는 길이 있는데도 1,2 층 사냥을 반복했던 이유는 따로 있었다. '소름 끼치는군.' 감각 스탯이 상승할수록 3 층에서 흘러나오는 음산한 기운이 점점 더 강하게 느껴졌다. 이 밑에는 분명 뭔가 강력한 존재가 있었다.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진우는 입구에서 들었던 메시지를 떠올렸다. [던전을 나갈 수 없습니다. 보스를 처치하거나, 귀환석을 가지고 오십시오.] 보스(Boss)의 존재. 진우는 놈을 상대하기 위해 1,2 층을 수없이 오르내리며 올릴 수 있는 데까지 레벨을 올렸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추었는데도 막상 내려가야 할 때가 오니 긴장되기 시작했다. 진우는 양손으로 가볍게 뺨을 짝짝 때렸다. '던전에 들어왔는데 보스 얼굴도 안 보고 그냥 돌아갈 순 없잖아?' 적당한 긴장감은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하기 위한 필수 요소다. 이 정도가 딱 좋다. 진우는 검을 양손으로 쥐고서 천천히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계단이 평소보다 더 길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한 착각일까?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조명은 1,2 층보다 훨씬 어두웠지만 시야 확보에는 문제가 없었다. '감각 스탯 때문인가?' 시력이 더 좋아진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아래쪽으로 내려가자 지하철이 다니는 선로가 보였다. 아니, 선로였던 곳이 보였다. 지하철이 다녀야 할 길에는 전동차나 레일 대신 검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뭐야, 저건?' 선로가 아니라 무슨... 호수나 강처럼 보였다. 진우가 좀 더 가까이서 살펴보기 위해 한 발 앞으로 내디딘 순간이었다. 물에서 기다란 통나무 같은 것이 튀어나왔다. 쉬이이익-! '빠르다!' 눈 깜짝할 사이에 코앞까지 쇄도한 '그것'은 통나무가 아니라 통나무만한 굵기의 살아 있는 뱀이었다. "헙!" 진우는 급한 대로 검으로 뱀의 대가리를 쳐 냈다. 챙강! 진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돌진해 오던 뱀의 방향을 바꾸는 데는 성공했으나, 요긴하게 쓰던 강철검이 부서지고 말았다. 진우가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뱀도 의외의 반격에 놀랐는지 바로 다시 공격해 오지 않고 멀찍한 곳에 똬리를 틀고서 진우를 뚫어지게 노려 보았다. '늪의 지배자, 푸른 독니 카사카.' 주황색으로 써진 놈의 이름이 선명히 보였다. 흰색 이름을 가진 일반 몬스터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빠르고 단단한 놈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마력이 주입된 검이 쪼개지다니.' 진우가 침을 꿀꺽 삼키며 카사카를 관찰했다. 카사카의 온몸을 덮고 있는 푸른빛 비늘이 번들거렸다. 갑주를 두른 것처럼 비늘은 놈의 전신에 촘촘히 박혀 있었다. 검격이 통하지 않는 비늘이다. 주먹질로는 어림도 없겠지. 진우의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랐을 때, 카사카가 먹잇감에 대한 파악을 끝냈는지 재차 돌진해 왔다. 다시 봐도 엄청난 속도였다. 쉬이이익-! 진우가 눈을 가늘게 떴다. '온다!' 온 정신을 집중하자 처음에는 형태도 제대로 알아보기 힘들었던 카사카의 공격이 제대로 보이기 시작했다. 민첩 스탯의 힘이었다. 카사카가 입을 쩍 벌리고 덮치려는 순간, 진우는 재빠르게 몸을 틀어 녀석의 공격을 흘려보내는 동시에 놈의 머리를 겨드랑이에 끼우고 두 팔로 조였다. 우드득! 진우의 근력 스탯은 50 을 향하고 있었다. 무시무시한 압력이 뱀의 동맥에 가해졌다. 빠져나가지 못하게 된 뱀은 괴로운 지 온몸을 비틀며 몸부림쳤다. 진우는 그럴수록 이를 악물고 힘을 주었다. 쾅! 쾅! 진우는 벽과 바닥에 몸을 부딪치면서도 끝까지 양팔을 놓지 않았다. '만약 올릴 수 있는 곳까지 최대한 레벨을 올리고 오지 않았더라면...' 가정이란 것은 원래 끝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진우의 머릿속에는 여러 생각이 맴돌았다. 한계까지 올려 두지 않았다면. 근력 스탯이 비정상적으로 높지 않았다면. 카사카를 잡는 데 상당한 곤혹을 치렀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여기가 무덤이 되었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2 층에서 바로 3 층으로 내려오지 않았던 판단은 현명했다. 결정이 옳았다. 뿌드득!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카사카의 머리뼈가 부서졌다. ['늪의 지배자 푸른 독니 카사카'를 처치하셨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역시 보스몹. 카사카를 잡았더니 단숨에 2 레벨이 올라 버렸다. 진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15 에 고정되었던 레벨이 17 까지 올라갔다. 오늘 하루 동안 1 레벨에서 17 레벨까지, 그야말로 미친 듯이 올린 것이다. '하지만.' 경험치 때문에 보스몹을 잡는 사람은 없다. 보스몹 하면 뭐니 뭐니 해도 아이템! 축 늘어진 뱀을 살피고 있자니 이내 뱀의 몸속에서 두 개의 빛이 반짝거렸다. '보스라고 아이템이 두 개나?' 진우가 기쁜 낯빛으로 손을 뻗었다. 띠링. [아이템: 카사카의 독니]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겠습니까? [아이템: 카사카의 독샘]을 발견했습니다. 획득하겠습니까? "모두 획득." 말을 하자마자 진우의 손 위로 뼈로 된 단검 하나와 액체가 담긴 주머니 같은 것이 생겨났다. [아이템: 카사카의 독니] 입수 난이도: C 종류: 단검 공격력 +25 카사카의 독니로 만든 단검입니다. 카사카의 독이 남아 있어 공격 시 마비, 출혈 효과를 부여합니다. 인벤토리에 보관하시거나 상점에 파실 수 있습니다. 효과 '마비': 공격받은 대상이 일정 확률로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효과 '출혈': 공격받은 대상의 체력이 1 초에 1%씩 소모됩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뼈가 아니라 이빨로 만든 단검이군. 옵션을 보니 괜찮은 아이템인 거 같은데?' 다음은 주머니 차례였다. [아이템: 카사카의 독샘] 입수 난이도: A 종류: 비약 정제된 카사카의 독액이 담겨 있는 주머니입니다. 카사카를 잡으면 극히 희박한 확률로 얻을 수 있습니다. 독액을 마시면 단단한 피부를 얻게 되지만 독성으로 인해 근육이 영구적으로 손상됩니다. 효과 '카사카의 철갑 비늘': 물리 데미지 20% 감소 부작용 '손상된 근육': 근력 -35 진우의 표정에 희비가 교차했다. 카사카의 독니 같은 경우는 부러진 강철검을 대신할 좋은 무기였다. 강철검의 두 배가 넘는 공격력도 공격력이지만 마비나 출혈 효과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독샘은 좀...' 처음엔 입수 난이도 A 등급의 아이템이 떠서 기뻐했는데, 설명을 찬찬히 읽어 보니 마냥 반길 만한 물건은 아니었다. 물리 데미지 20 퍼센트 감소는 입수 난이도 A 등급에 맞는 훌륭한 옵션이었다. 하지만 근력 스탯이 무려 35 나 떨어진다는 치명적인 패널티가 있었다. 특히 지금은 능력치 포인트를 근력에 집중적으로 투자해 놓은 터라 더 뼈아픈 손실이었다. 양날의 검이라고 할까? 아니, 계륵이란 표현이 더 어울리는 물건이었다. 후에 근력 스탯이 엄청나게 올라서 35 정도는 떨어져도 별 타격이 아닐 때 사용하면 모를까, 지금 당장 마시기는 무리였다. "...일단은 넣어 두자." 씁쓸한 표정으로 단검과 비약을 인벤토리에 넣었다. 차라리 A 급 단검과 C 급 비약이 나왔으면 아쉬움이 덜 했을까, C 급 비약이야 버리면 그만이니. 그때 메시지가 떴다. [보스가 처치되었으므로 던전 내부가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됩니다.] 순간 눈앞이 흐릿해지는가 싶더니 약간의 현기증과 함께 시야가 정상으로 돌아왔다. 주위를 둘러보니 평범한 지하철역이었다. 조명은 언제 그랬나 싶게 밝았고, 선로에 가득 차 있던 물도 없어졌다. "근데 왜 사람이 한 명도 없어?" 사람만 없는게 아니라 지하철도 다니지 않았다. 벌써 지하철이 끊길 시간인가 싶어 시간을 확인했다. 시계는 10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점심때 합정역 안으로 들어왔으니 여기서 무려 9 시간이상을 보낸 셈이다. '많이도 지났네.'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피로도가 회복되지 않았다면 지쳐서 몇 번은 쓰러졌을 시간이었다. '그래도 지하철이 끊기기엔 아직 이른데?' 아무리 기다려도 지하철이 오지 않자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일단 지하철역을 빠져나가기로 했다. 가는 동안에도 내내 사람은 볼 수 없었다. 그렇게 계단을 터벅터벅 올라가는데 누군가 진우에게 소리쳤다. "이봐요!" 사람 목소리가 이렇게 반가울 줄이야. 진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총을 든 군인이었다. "당신 뭡니까? 왜 거기서 나와요? 방송 못 들었어요?" 군인의 표정이 워낙에 심각해서 덩달아 진우의 얼굴도 굳어졌다. "무슨 일 있습니까?"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다가오던 군인이 진우의 손에 들려있는 부러진 검을 발견했다. 부러지고 난 뒤론 인벤토리에 들어가 지지도 않고, 그대로 버려두고 가기에도 뭐해서 일단 들고나온 것이었다. 그걸 본 군인의 눈빛이 갑자기 달라졌다. 그는 진우의 행색을 찬찬히 살폈다. 자세히 보니 진우의 옷 여기저기에 전투의 흔적들이 남아 있었다. 험악하던 군인의 표정이 풀어졌다. "혹시 헌터님이십니까?" 16 화 "예. 그렇기는 한데..." "아, 실례했습니다. 이쪽입니다. 헌터님, 제가 안내하겠습니다." "아... 예." 여기서 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발뺌했다가는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일단 안내를 따르기로 했다. 진우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그러고 보니...' 주변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거리가 텅 비어 있었다. 보이는 사람들이라곤 군인과 경찰들 뿐이었다. 거기다 드문드문 보이는 마수의 사체들과 부서진 차량. 금이 간 건물들. 진우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달았다. '이 근처 어딘가에서 게이트가 열렸나 보네.' 요즘 같이 헌터 시스템이 체계적으로 잘 잡혀 있는 시대에는 거의 없는 일이지만, 외진 곳에 생긴 게이트를 발견하지 못해 가끔 막을 시기를 놓치는 경우가 있었다. 그때는 헌터들이 도착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인근의 군부대에서 군인들이 출동한다. 물론 군인들의 무기가 마수들에게 통할 리 없다. 하지만 시민들을 안전하게 대피시키려면 누군가는 희생을 감수해야 했다. 속된 말로 총알받이가 되는 것이다. 반드시 누군가는 해야 할 그 일을 이 나라의 젊은 청년들이 짊어지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앞서가던 군인이 진우에게 인사를 했다. "네?" "헌터님들이 수고해 주신 덕분에 저희가 무사한 것 아니겠습니까?' "예..." 감사하다라. 오히려 군인에게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군인은 헌터에게, 헌터는 군인에게.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싸우는 사람들답게 서로가 서로에게 감사하고 있었다. 치직무전을 받던 군인의 얼굴이 밝아졌다. "주위 마수들은 거의 다 정리되고 이제 커다란 마수 하나만 남았답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군인의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근방에서 강력한 생명체의 기운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 생명체를 둘러싼 여러 헌터의 기운도 같이 느껴졌다. 높아진 감각 스탯은 보이지 않는 정보를 느낌으로 전해 주었다. 진우는 직감했다. '놈이 보스다.' 곧 놈의 모습이 드러났다. 멀지 않은 공터에서 헌터 십여 명이 암석으로 이뤄진 거인과 대치하고 있었다. 거인의 크기는 전봇대 높이 정도. 골렘형 마수였다. "헉..." 군인이 신음 소리를 내며 한 걸음 물러섰다. 마수를 실제로 보는 것은 처음이었는지 마수를 보는 순간 온몸이 뻣뻣하게 굳어 버렸다. 누구라도 그럴 것이다. 티비나 모니터로 보는 마수들과 현실에서 마주치는 마수들은 차원이 다르니까. 그에 비해 진우는 침착하게 전황을 살폈다. "힐러 분들! 탱커 분한테 힐 좀 몰아주세요!" "저희도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요!" "이거 왜 이렇게 안 쓰러져?" "딜러 분들 뭐 해요? 쓰러질 기미가 안 보이는데!" "저놈 방어력이 너무 높은 겁니다. 하필 마법계열 헌터가 몇 명 없어서!" 급하게 불려 나온 헌터들이라 등급이 그리 높지는 않은 듯했다. 방어도, 공격도 시원치 않았다. 헌터들은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다. 쾅! 골렘이 커다란 돌주먹을 아래로 내려치자, 탱커 역할을 하던 헌터의 무릎이 잠깐이지만 꺾였다. "커헉!" 탱커의 입에서 울컥 피가 나왔다. "아, 안 돼!" "이러다 탱커 분 죽겠어요!" "어쩌란 말이에요! 마력이 바닥나가는데!" "상급 헌터의 지원은 아직입니까?" 헌터들은 한계에 다다른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을 지켜보던 진우의 눈빛이 예리하게 번득였다. '이 정도라면... 할 수 있다.' 진우는 천천히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골렘형 보스는 방어력만 높을 뿐이지 등급 자체는 보기보다 낮아 보였다. 느껴지는 기운으로는 인던에 있던 보스 '푸른 독니 어쩌고'보다 한 수 아래였다. '그러니 놈의 방어만 무력화시킬 수 있다면.' 지금은 저 무식한 돌덩이를 꿰뚫을 강한 한방이 필요한 때였다. 적당히 멀어진 진우는 던지기 자세를 취했다. 부러진 검을 쥔 팔의 근육이 급격하게 팽창하기 시작했다. 굵은 힘줄이 손등에까지 솟아났다. 모든 힘이 오른팔에 실렸다. 잠시 뒤, 활시위처럼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팔이 음속에 가까운 속도로 튀어 나갔다. "가라!" *** D 급 헌터 이한수는 눈앞이 캄캄했다. 이제 더 이상은 무리다. 자랑하던 방패에도 금이 가기 시작했다. 치유 헌터들도 마력이 고갈되어 가는지, 힐량도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었다. 이대로 가면 결국 전부 죽는다. 지금은 선택해야 할 때였다. 헌터들이 도망가는 동안 자신이 마지막으로 시간을 벌고, 이후 상급 헌터들이 골렘을 처치하는 게 유일한 방안이었다. '그게 아니면 여기서 다 같이 죽던가.' 이한수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겨우 결심이 섰다. 이한수가 뒤를 돌아보며 외쳤다. "여긴 제가 맡을 테니 전부!" 그 순간 이한수는 보았다. 멀리서 '번쩍'하며 이쪽으로 날아오는 무언가를. 사실 봤다는 느낌만 있었을 뿐이고, 실제 눈으로는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그 정도로 빨랐다. 쾅-! 그 무언가에 맞은 골렘의 머리가 박살 났다. "뭐, 뭐야?" 이한수의 눈이 커졌다. 머리를 잃은 골렘이 비틀대기 시작했다. 그러자 헌터들은 환호성을 질렀다. 이어 공격에 박차를 가했다. "됐다! 공격이 먹힌다!" "쓰러진다고!" "조금만! 조금만 더 하면 돼!" 다들 공격에 집중하느라 아무도 멀리서 날아온 무언가를 보지 못한 모양이었다. 골렘 바로 앞에 있었던 이한수 외에는! 그어어어결국 골렘이 뒤로 넘어갔다. 쿵! 워낙 무거운 놈이 넘어지다 보니 흙먼지가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와아아-! 헌터들은 소리를 지르며 열광했다. "해냈다!" "우리가 잡았다고!" 오직 모든 것을 지켜본 이한수만이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니야. 우리 공격은 먹히지도 않았다.' 이한수는 급히 쓰러진 골렘 주변을 살폈다. "대체 뭘로 이 돌덩이의 머리를 터트린 거지?" 근처를 뒤적거리던 이한수가 부러진 검의 잔해를 발견했다. 마력이 담겨 있긴 하지만 보잘것없는 철검이었다. '겨우 이딴 걸 던져서 10 명이 넘는 헌터가 공격해도 끄떡없던 보스급 골렘을 쓰러뜨렸다고?' 순간 말문이 막혀왔다. 가만히 골렘의 사체와 검의 잔해를 번갈아 보던 이한수가, 기뻐하는 헌터들 사이를 지나쳐 검이 날아온 방향으로 달려갔다. "이봐요!" 거기에 군인이 한 명 서 있었다. "예? 저 말씀이십니까?" "그래요, 당신!" 산만 한 덩치의 헌터가 쿵쿵거리며 달려오자 군인은 경직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만큼 헌터가 일반인에게 주는 압박감은 대단했다. 이한수는 검을 보여 주며 물었다. "이거 당신이 던진 겁니까?" "아, 이건 여기." 군인이 뒤를 돌아보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어? 여기 분명 헌터 한 분이 계셨는데?" 뒤에는 아무도 없었다. 군인이 당황해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동안, 이한수는 머리를 긁적이며 검의 잔해를 내려다보았다. '그 힘, 그 파괴력... 상급 헌터라도 왔었던 건가?' 장본인이 사라졌으니 알 수 없는 일이었다. *** 그 시각 진우는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골렘이 비틀거리는 것을 보고 바로 돌아섰다. 골렘은 자신이 쓰러트렸다. 본인도 잘 알고 있었다. 원래 죽은 마수에게서 나오는 수익은 전부 쓰러뜨린 사람의 몫이었다. 원한다면 골렘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골렘을 내가 쓰러뜨렸다는 걸 증명해야 한다는 거지.' E 급 헌터의 공격에 거대한 골렘이 쓰러졌다는 말을 누가 믿어 줄까? 변변한 증거도 하나 없이. 부러진 철검 쪼가리나 같이 서 있던 군인이 크게 도움될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결국은 골렘을 잡을 수 있을 만큼 능력치가 상승한 원인까지 밝혀야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득보다 실이 컸다. 유일무이한 레벨 업 능력. 겨우 골렘 사체 하나 때문에 역사상 유례가 없는 능력을 함부로 발설하는 우를 범할 수는 없었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그렇다고 건진 게 아예 없지는 않았다. 아니, 의외로 큰 소득이 있었다. 골렘이 쓰러지는 순간 들렸던 메시지. [레벨이 올랐습니다!] 골렘을 잡은 덕분에 또 1 레벨이 올랐다. '마수를 잡아도 레벨은 오른다.' 좋은 사실을 알았다. 지금은 그걸로 충분했다. 시내 외과에 위치한 낡고 허름한 아파트, 진우의 집은 그 아파트의 9 층이었다. 열쇠를 찾아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은 깜깜했다. '진아 녀석 열심이네.' 동생은 아직 독서실에 있는 모양이었다. 식탁 위에는 식은 밥과 국이 있었다. 어머니는 몇 년째 입원해 계시니 동생의 솜씨다. 옆에 놓인 메모지에 귀여운 글씨가 적혀 있었다. -굶지 마, 다 먹었는지 확인할 거야. 오늘 퇴원한다고 말했더니 바쁜 와중에도 저녁을 만들어 놓고 갔나 보다. 진우는 피식 웃으며 식탁 앞에 앉았다. 하지만 밥보다 먼저 확인하고 싶은 게 있었다. "상태창." 이름: 성진우 레벨: 18 직업: 없음 칭호: 늑대 학살자 HP: 2220 MP: 350 피로도: 2 [스탯] 근력: 48 체력: 27 민첩: 27 지능: 27 감각: 27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액티브 스킬: 질주 Lv.1 하루가 길게 느껴졌다. 그 긴 하루 덕분에 어느덧 18 레벨이 되었다. 근력은 이미 50 에 가까웠고, 다른 능력치도 눈에 띄게 늘었다. 민첩과 감각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도 알게 되었다. '거기다 옵션이 좋아서 꽤 쓸 만한 단검에, 아직 용도는 모르겠지만 오늘 얻은 골드까지 합하면...' 쓰기 애매한 비약은 논외로 하더라도. 인던 공략은 대성공이었다. 9. 도마뱀들 새벽에 집을 나서는 사람은 항상 움직임이 조심스럽기 마련이었다. 가족들이 잠에서 깰 수 있으니까. 그래서 아침 일찍 등굣길에 나선 진아는 곤히 자고 있을 오빠가 깨지 않도록 조용하게 문을 잠그고 돌아섰다. 그런데. "학교 가냐?" "어?" 가까이서 들린 목소리에 진아가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진우가 진아 쪽으로 천천히 달려오고 있었다. 추리닝과 운동화. 후드를 깊게 눌러쓴 모습이 어디서 조깅이라도 하고 온 모양이었다. 진아가 안 그래도 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오빠 일어나 있었어?" "일어난 지 한참 됐지. 차 조심해서 갔다 와라." "으... 응." 집으로 돌아가는 오빠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진아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일도 다 있네. 오빠가 나보다 더 일찍 일어나고.' 진우가 절대 게으른 편이라곤 할 수 없지만, 진아가 또래에 비해 지나치게 부지런한 관계로 보통 하루를 먼저 시작하는 쪽은 항상 진아였었다. '그러고 보니...' 오빠의 등이 예전보다 좀 넓어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에이, 설마. 사람 몸이 고무줄도 아니고 며칠 안 본 사이에 늘었다 줄었다 하는 게 어디 말이나 되나. '착각이겠지.' 17 화. 진아가 고개를 절레절레 젓는데, 진우가 불쑥 우산을 내밀었다. "우산은 왜?" 우산을 받아 든 진아가 위를 올려다봤다. 아직 새벽이라 어둡긴 하지만 하늘은 그럭저럭 맑은 편이었다. "비 안 올 거 같은데?" "가져 가." "무겁단 말이야." "그래도 가져가. 그거 접이식 우산이라 별로 무겁지도 않잖아. 어디서 엄살이야, 엄살은." 쾅. 진우가 문을 닫아버렸다. "씨- 순 지 맘대로야." 불만의 표시로 가볍게 문을 콩콩 차던 진아는 우산을 가방 안 빈 자리에 포개 놓고 걸음을 돌렸다. '잠깐만...' 방금 전 오빠와 자신의 눈높이를 계산해 본다. 이상하다. 분명 전보다 오빠의 시선이 높아졌다. "남자는 스무 살이 넘어서도 키가 크나?" 에이, 설마. 진아는 다시 고개를 가로젓고는 학교로 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철컥. 문을 잠근 진우는 집 안으로 들어서며 인벤토리를 불러냈다. "창고." 창고, 인벤, 인벤토리. 몇 번의 실험 끝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뜻만 통하면 명령어는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메시지함을 열 때도 마찬가지. 열어, 오픈, 열기 등 명령어에 연다는 의미만 포함되면 어김없이 작동했다. 진우는 눈앞에 펼쳐진 디지털 창고에 방금 전 랜덤 박스에서 획득한 우산을 밀어 넣었다. "오늘도 꽝이네." 인던에 들어갔다 온 후로부터 4 일이 지났다. 또다시 인던 입장 열쇠가 나오지 않을까 랜덤 박스를 깔 때마다 기대했지만, 그리 쉽게 나오는 물건은 아닌지 아쉽게도 아직까지 소득이 없었다. '아쉬운 건 아쉬운 거고.' 진우는 방으로 들어가 침대에 걸터 앉았다. 오늘은 결정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스탯." [스탯] 근력: 48 체력: 27 민첩: 27 지능: 27 감각: 27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12) 4 일 치 능력치 포인트가 고대로 쌓여 있었다. 일일 퀘스트는 하루도 빠짐없이 했다. 물론 보상도 꼬박꼬박 다 챙겨 받았다. 하지만 능력치 포인트를 배분하지 못하고 있었다. 무엇이 문제인고 하니. "...어렵다." 그렇다. 결정을 내리기가 너무 어려웠던 것이다. 근력. 좋은 스탯이다. 초반에 투자한 걸 후회한 적이 한 번도 없을 정도로. 민첩. 역시 좋은 스탯이다. 약한 적을 상대로는 상관없으나 적의 수준이 올라갈수록 필요해질 스탯이었다. 속도는 상대적인 거니까. 그리고 체력, 감각. 체력이야 높으면 높을수록 좋은 것이고, 감각도 예상했던 것보다 엄청나게 유용했다. 지능. ...이게 문제다. 유일하게 기능을 알 수 없는 스탯이었다. 레벨이 상당히 올라갔는데도 불구하고 딱히 머리가 좋아졌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다. 암기가 좋아진 것도 아니고, 연산이 빨라진 것도 아니고. '마법과 관련된 스탯일 거 같긴 한데...' 어쩌면 아직은 필요 없는 스탯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남은 건 근력, 민첩, 체력, 감각 이 넷뿐인데. "...그래도 역시 어렵다." 선택지가 하나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고민되긴 마찬가지였다. 확신이 서질 않았다. 일단 근력과 민첩의 상성이 좋다는 것은 알았다. 아무리 강한 데미지를 줄 수 있어도 맞추지 못하면 소용없다. 반대로 아무리 잘 맞춘다고 해도 데미지를 주지 못하면 소용없다. 그러니 근력과 민첩은 세트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은 근력이 높으니까 민첩을 근력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게 좋겠군.' 민첩을 올린다고 치면 체력은 후 순위로 돌려야 한다. 민첩과 체력은 상성이 나쁜 편이니까. 민첩이 높아지면 상대에게 피해를 입을 가능성이 낮아지는 데 반해, 체력은 상대에게 피해를 받아야만 빛을 발할 수 있는 능력치다. '물론 최소한의 체력은 있어야겠지만...' 민첩과 체력을 동시에 올리는 건 무척이나 비효율적으로 보였다. 고민 끝에 우선순위가 결정됐다. 첫 번째는 민첩, 두 번째는 감각, 세 번째는 체력. 근력은 이미 충분히 투자해 뒀으니 보류하고, 민첩을 높일 예정이니 체력보다는 감각을 우선시한다. 결정을 내린 진우는 근력에 2 포인트를 찍었다. 띠링. [스탯] 근력: 50 체력: 27 민첩: 27 지능: 27 감각: 27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10) 일단 근력 스탯을 50 까지는 맞춰놓고 싶었다. 그게 사람 심리 아닌가. 그런 다음 민첩에 8 포인트를 썼다. [스탯] 근력: 50 체력: 27 민첩: 35 지능: 27 감각: 27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2) 이것도 이유는 별반 다르지 않았다. 끝자리를 5 로 맞추고 싶어서였다. '숫자는 뒷자리가 어정쩡한 것보다 5 의 배수로 깔끔하게 끝나는 게 좋단 말이지...' 근력 50 과 민첩 35. 이렇게 5 의 배수로 딱딱 맞아떨어지니 별것도 아닌데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그리고 마지막 2 포인트.' 진우는 남은 포인트 두 개를 전부 감각에 투자했다. 이로써 모든 포인트 분배가 끝났다. [스탯] 근력: 50 체력: 27 민첩: 35 지능: 27 감각: 29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감각을 30 으로 맞추지 못한 것이 옥에 티라면 티라고 할까. '남은 포인트가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지만.' 그거 말고는 다 괜찮았다. 체력이나 지능은 레벨 업을 통한 추가 스탯만으로도 충분할 듯했다. "이 정도면 된 건가?" 어떤 일이든 100 퍼센트 전부 다 마음에 들기는 어려운 법이다. 그래도 심사숙고 끝에 내린 결정들이라 대체로 만족스럽긴 했다. 그때 거실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뚜르르, 뚜르르- '협회에서 온 전환가?' 예전 같았으면 레이드에 불려 나가기 싫어서 최대한 버텼을 진우지만, 지금은 마수들에게 달라진 능력치를 시험해 보고 싶어서 몸이 근질거렸다. 진우는 빠르게 수화기를 들었다. "헌터 성진우입니다." -아이고, 인제 받는구먼. 협회에서 온 전화가 아니었다.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들었다. -진우 학생, 요즘 왜 이렇게 통화가 안 돼?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낯익었다. 진우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생이란 꼬리표를 ?지 벌써 4 년이 흘렀지만, 어릴 적부터 진우를 봐 왔던 집주인은 아직도 진우의 이름 뒤에 학생 자를 꼭 붙였다. "죄송합니다, 주인 아저씨. 사고가 나서 병원에 있었습니다." -쯧쯧, 그랬구먼. 어쩐지. 그건 그렇고 저기, 진우 학생... 아직 이번 달 집세가 안 들어와서 그러는데, 어떻게, 지금 당장이 힘들면 한 두어 달 기다려 줄까? "아닙니다. 좀 이따 넣어 드릴게요." -그려. 너무 무리하진 말고. 엄마랑 동생 보살핀다고 진우 학생이 욕보네. 돈도 좋지만 몸조심부터 혀. "네. 말씀 감사해요." 통화는 그렇게 끊겼다. 진우는 서랍에서 통장을 꺼내 펼쳐보았다. 잔고가 80 만 원이었다. "후-."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집세 50 만 원을 내고 나면 이번 달 생활비는 30 만 원이 전부다. 그나마 그 집세 50 만 원도 아파트가 워낙 시내 외곽에 위치한 낡고 허름한 곳인 데다가, 집주인이 딱한 진우네 사정을 고려해 몇 년 전부터 세를 안 올린 덕분에 나온 금액이었다. 요즘은 월세 50 으로 아파트에 살기 힘들다. 생활비 30 으로 한 달을 버티기는 더더욱 힘들다. "일단 돈부터 벌자." 진우는 우선적인 목표를 정했다. 이제는 E 급 마수 한 마리도 제대로 못 잡아서 벌벌 떨던 며칠 전의 자신이 아니었다. *** 헌터가 돈을 벌려면? 마수를 잡는 게 최고다. S 급이나 A 급 상위에 있는 헌터들이야 스폰도 받고, 광고도 찍고, TV 쇼에도 나오고 하면서 그야말로 재벌 부럽지 않게 돈을 긁어모으지만, 그들은 소수다. 극히 일부다. 그런 극소수의 최상위권 헌터들 말고 대부분의 헌터들은 던전에서 돈을 번다. 랭크가 높으면 높을수록. 경험이 많으면 많을수록. 각자 역량에 따라 수입이 결정된다. 협회 공인 랭크 E 등급에다가 C 급이상 게이트 경험도 없는 진우에게는 다소 가혹한 조건이었다. 진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조건은 둘째치고 일단 공격대에 들어갈 수 있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헌터 사이트의 구인게시판을 보고 몇 군데 전화를 돌려 봤지만 전부 허탕이었다. 아무도 E 급 헌터를 받으려 하지 않았다. 구인란을 이용하는 헌터들은 거의 개인이고, 자기 목숨은 자기가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기에, 팀을 짜거나 타인의 팀에 들어갈 때 무척 신중했다. 길드에 들어가기는 실력이 부족하고 협회에서 일하기에는 등급이 높은 사람들. 다들 그런 어중간한 위치였다. '그런 헌터들조차도 한 달 수입이 천을 넘는다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목숨이 걸린 일이니 벌어들이는 액수도 많을 수밖에. 괜히 헌터들이 선망의 대상이 되는 게 아니다. 진우의 입장에선 속이 타는 일이었다. '차라리 재심사를 받아서 등급을 확 올려 버릴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멍청한 짓이었다. E 급 헌터가 상급 헌터가 됐다! 그게 A 급이든 B 급이든, 심지어 C 급이라 해도 상관없다. 재각성은 분명 화제가 된다. 대중은 가십을 좋아하고, 헌터는 좋은 안줏감이니까. 입이 다섯 개면 눈은 열 개라 했다. 사람들 입에 오르내릴수록 보는 눈이 많아진다는 거다. 능력치는 앞으로도 계속해서 올라갈 텐데, 그러면 특이한 체질이 들통나는 건 시간문제였다. "능력치를 올릴 수 있는 헌터가 있다고?" "시간이 흐를수록 강해져?" "그 헌터는 누구냐?"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어떡하면 그처럼 될 수 있는 거지?" 분명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보일 것이다. 여태까지 이런 헌터는 없었으니까. 그리고 관심을 보이는 이들 중에는 분명히 이용하려 들거나 적의를 가지는 자들도 존재할 터였다. '만약 그런 놈들이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면...' 생각만 해도 끔찍했다. 아직은 힘이 부족했다. 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들기 전까지는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았다. 등급 재심사는 안 될 말이었다. '그래도 돈은 벌긴 해야 하는데.' 그렇다고 평범한 아르바이트를 할 수는 없었다. 협회에서 언제 부를지 모르니까. 던전에 가면 돈과 경험치를 둘 다 잡을 수 있는데, 푼돈 몇 푼에 그 기회를 날릴 순 없지 않은가. 어떻게 해야 할지 고심하고 있는데, 게시판에 눈에 띄는 글 하나가 올라왔다. -등급 관계없이 지금 바로 올 수 있는 아무나 한 분 모십니다! 급구!! 진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방금 막 작성된 따끈따끈한 글이었다. 재빠르게 내용을 확인해 보니 마침 집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진우는 바로 수화기를 들었다. 상대도 어지간히 급했는지 대기음이 한번 울리기도 전에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진우는 간략하게 용건을 정한 뒤 상대방의 대답을 차분히 기다렸다. -아, E 등급이라시고요? 생각보다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 -괜찮습니다. 그냥 오셔서 머릿수만 채워 주시면 돼요. 근데 C 급 게이트라 사냥에 끼시긴 힘드실 테니 배분은 저희끼리 하고 대신 현금으로 2 백만 원 드릴게요. 어떠세요? 지금 바로 오실 수 있으신가요? 일당 2 백만 원! 머릿수만 채우고 받는 돈치곤 꽤 컸다. 괜찮은 조건이었다. 던전에서 나오는 수익을 배분받지 못하는 건 아쉬웠지만, 그것까지 욕심부리다가는 2 백만 원마저 놓칠 가능성이 높았다. '일단 급한 불부터 끄자.' 이런 기회는 흔치 않으니까. 2 백만 원이면 한 달 생활비로는 충분한 돈이었다. 진우는 제안을 받아들였다. "15 분 내로 가겠습니다." 18 화 1 분 만에 나갈 채비를 끝낸 진우는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먼저 온 아홉 명이 진우를 기다리고 있었다. 리더로 보이는 남자가 손을 흔들었다. "여기요! 이쪽입니다." 덩치가 제법 큰 털보였다. 그는 살갑게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성진우 씨죠?" "예." "아이고, 다행히 제대로 찾아오셨네. 이것도 인연인데 인사나 나누고 시작할까요?" 털보가 간단하게 팀원들을 소개했다. 본인을 포함한 여덟 명은 원래부터 같이 다니던 멤버들이고, 한 명은 진우처럼 모자란 숫자를 채우기 위해 모집한 사람이라고 했다. 진우는 팀원들과 인사를 주고받으며 그들의 인상을 살폈다. 높아진 감각 스탯 덕분에 상대의 역량을 대충은 가늠할 수 있었다. '비슷한 등급으로 보이는 이들이 다섯 명. 그 이하로 느껴지는 사람이 네 명. C 급 다섯에 D 급 이하가 넷인가.' C 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는 규칙이 있다. 최소 인원 10 명에 C 급 이상 헌터가 반 이상 포함되어야 한다는 규칙이다. 그래야 협회에서 허가를 내준다. 사냥은 자기들이 할 테니 와서 머릿수만 맞춰 달라는 소리가 빈말은 아닌 듯했다. "다들 인사는 끝났으니 간단하게 요점만 설명하겠습니다." 자신을 C 등급 탱커 황동석이라 소개한 털보는 레이드 경험이 풍부한지 시종일관 여유 있는 얼굴이었다. 그가 이번 레이드에서 숙지해야 할 상황을 모두에게 일목요연하게 알려주는데, 누가 가까이 다가왔다. "저기, 우리들 같은 자투리 신세네요." 밝은 인상의 젊은 청년으로 황동석이 머릿수를 맞추기 위해 데려온 다른 한 명이었다. 다만 진우처럼 비전투 멤버는 아니었다. D 등급으로 직접 전투에 참가하는 멤버였다. 이쯤은 유진호, 나이는 스물둘. 인사를 건네는 유진호에게 진우는 가볍게 목례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대화를 이어 나가려 했던 유진호는 머쓱한지 뒷머리를 긁적이다 자리로 돌아갔다. "형님, 고만하고 들어갑시다." "어차피 우리가 다 잡을 건데 뭘 그리 구구절절 설명해요." "그러게, 귀에 딱지 앉겠네." 기존 멤버들의 원성이 이어지자 황동석은 허허 웃으며 손뼉을 짝 쳤다. "그럼 설명은 여기까지만 하고, 이제 슬슬 들어가 봅시다." 다들 게이트에 들어갈 준비를 시작했다. "아, 그전에 우선 두 분은 이걸 좀." 황동석은 진우와 유진호에게 종이를 한 장씩 내밀었다. 단출한 계약서였다. "끝에 이름 적으시고 사인하시면 됩니다." 사냥에는 관여하지 않고 배분에서도 빠지는 대신 사냥이 끝나는 즉시 2 백만 원 지불. 조건은 전화로 나눴던 이야기와 동일했다. 그보다는 마지막 문항이 유독 눈에 들어왔다. '던전에서 생긴 어떠한 사고에 대해서도 일절 책임을 묻지 않을 것을 약속한다...' 협회에서 진행하는 레이드와 달리 개인적으로 참가하는 레이드에서는 문제가 생겨도 보상을 받을 수 없었다. 그래서 헌터는 보험도 가입도 안 된다. 자기 목숨은 자기가 챙겨라. 이제야 공격대에 들어왔다는 실감이 났다. 조항을 확인하며 옆 유진호의 계약서를 흘깃 살폈다. 역시 자신과는 다르게 2 백만 원 대신 배분을 받는 형식으로 되어 있었다. 사인하기 직전 진우가 황동석에게 물었다. "그럼 전 뭘 하면 됩니까?" "따로 하실 건 없고, 저희들 따라다니면서 짐이나 좀 맡아 주세요." "짐이라면...?" 황동석은 자신의 동생들이 봉고에서 꺼내 오는 커다란 배낭을 가리켰다. "안에서 먹을 도시락이랑, 여분 옷이랑 장비, 구급상자 같은 거 이것저것 들어 있습니다." 잠깐, 던전에 들어가는데 구급상자라니? 진우가 의문을 표했다. "설마 힐러 없이 가는 겁니까?" "아시잖습니까, 개인 공격대에서 치유계열 헌터님 모시기 쉽지 않은 거. 저희는 늘 이렇게 했는데요, 뭘." 황동석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슬아슬하게 최저 기준만 겨우 맞춘 숫자에, 레이드를 소개팅쯤으로 착각하고 있는 보충 멤버 하나에. 힐러 없이 탱커와 딜러만 갖춘 공격대 구성이라니. 옆의 그 보충 멤버는 힐러가 없다는 설명을 듣고도 표정에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완전 초짜라는 증거다. 진우는 속으로 피식 웃음을 삼켰다. '엉터리들이네.' 그럼에도 계약서에 사인하는 까닭은 돈 2 백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이제 내 몸 하나는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겼기 때문이었다. "여기 있습니다." "저도요!" 황동석은 두 사람의 사인을 확인하고서 기분이 좋은지 큰 소리로 외쳤다. "자, 갑시다!" *** 일행은 게이트가 생성된 장소로 향했다. 공사가 중단된 아파트 건설 현장이었다. "요즘 경기가 안 좋다더니..." 황동석은 혀를 끌끌 찼다. 짓다 만 아파트들이 거대한 묘비처럼 을씨년스럽게 듬성듬성 남아 있었다. 거인들의 공동묘지가 이런 분위기일까. "그거 아세요?" 옆으로 다가온 유진호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여기 직원들하고 투자자들은 지금 다들 죽니 사니 하고 있는데 사장은 9 천억 가지고 해외로 튄 게 벌써 두달 전이란 거?" "..." 진우가 이미 여러 번 눈치를 줬지만, 유진호는 진우 옆을 떠나기가 싫은 듯했다. 진우를 제외한 나머지 8 인이 원래 한 팀이었던 까닭에 어울리기 힘든 모양이었다. "형은 원래 그렇게 말이 없어요?" 어느새 호칭이 형으로 변했다. 이제 무시하기도 지친다. "...너는 눈치도 없냐?" "눈치받고 살아 본 적이 없어서. 헤헤." 애가 밝은 건지, 생각이 없는 건지. 진우는 해맑게 웃는 유진호를 보며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하지만 확실히...' 게이트 근처만 가면 평소와 다르게 예민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다른 헌터들에겐 단순한 돈벌이일지 모르지만, 진우에게는 매 레이드가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다. 아픈 기억이 많으니 예민해질 수밖에. "여깁니다." 황동석이 걸음을 멈추었다. 오헌터들이 탄성을 흘렸다. "황 형, 여기 C 급 게이트 맞아요? 좀 큰데?" "그럼 협회에서 구라를 쳤겠냐. 조사원들이 두 번이나 왔다 갔단다." 허공에 떠 있는 블랙홀 같은 구멍. 그걸 게이트라고 불렀다. 내부의 마력 파동 수치에 따라 등급이 나뉘는데, 협회에서 먼저 와 등급을 측정해 고지한다. 그러면 공략하고 싶은 개인이나 길드가 절차에 따라 신청하면 된다. A 급이나 B 급 게이트는 보통 대형 길드들의 몫이었다. 개인이 공략하기엔 너무 위험하니까. 개인 공격대는 주로 그 아래 단계의 게이트를 취급했다. 그러니 C 급 게이트는 소속 없는 헌터들이 공략할 수 있는 최고 난이도인 셈이었다. 황동석이 게이트 앞에 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제가 먼저 갑니다. 다들 잘 따라오세요." 탱커인 그를 선두로 헌터들이 하나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까.' 진우는 만약을 대비해 가볍게 몸을 풀었다. 그 옆에서는 유진호가 하나둘 장비를 꺼냈다. 장비 가방에서 나오는 검과 방패는 아주 번쩍번쩍했다. 한눈에 봐도 고가의 장비들. 초짜 헌터가 혼자 힘으로 마련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눈치받고 살아 본 적이 없다더니 있는 집 자식이었나?' 진우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진우의 시선을 의식했는지 유진호는 의기양양하게 앞으로 나섰다. "형 E 급이라고 하셨죠? 형은 제가 지켜 드릴게요. 제 옆에 딱 붙어 계세요." 진우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누가 누굴 지킨다는 건지. "...그래. 말이라도 고맙다." "우리도 들어가죠." 진우의 심정이야 어쨌든 두 사람도 무사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 던전 내부는 조용했다. "..." 고요하고 어두웠다. 황동석이 첫 지시를 내렸다. "규환아. 불 켜 봐." "예." 마법계열 헌터 조규환이 허공에 빛의 공을 띄웠다. 시야가 환해졌다. 황동석은 방패를 내리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야? 여긴 왜 마수가 없어?" "그러게요. 불도 꺼져 있고." 보통 던전에는 야광석이라는 돌들이 동굴 구석구석에 박혀 있어 시야를 밝혀 준다. 그런데 이번 던전에는 그 야광석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유진호가 진우에게 귓속말을 건넸다. "형, 마수가 없는 던전도 있나요?" "쉿." 진우가 조용하란 제스처를 취했다. 진우의 귀가 움찔거렸다. 멀리서 무수한 발소리가 들려왔다. 진우가 말했다. "없는 게 아니야. 아직 안 온 거지." 유진호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드드드곧 진우가 들었던 소리를 일행도 들을 수 있었다. 그래야 황동석이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야광석이 없는 던전이라면...? "떼 지어 움직이고 어둠 속에 살면서, 빛을 보면 달려드는 게 뭐지?" 아차! 황동석과 동생들의 표정이 일제히 어두워졌다. "벌레들!" "벌레다!" "씨발, 왜 하필 벌레야!" 황동석이 외쳤다. "다들 포지션 잡아! 온다! 정면!" 외길 통로 저편에서 무언가 잔뜩 무리 지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혹시 여기 개미굴은 아니겠지?" "재수 없는 소리 마라." 여러 마수 중에서도 곤충형은 특히 골칫덩이였다. 어지간해선 잘 죽지도 않고, 항상 무리 지어 다니는 데다, 각 개체의 힘이 약한 것도 아니니까. 그중에서도 단연 최악은 개미들이었다. 많은 헌터들이 개미굴에 발을 잘못 들였다 아까운 목숨을 잃었다. 드드드드드드벌레의 다리들이 바닥을 기는 소리가 요란했다. 근처까지 왔다는 뜻이다. 황동석이 방패를 턱밑까지 들어 올렸다. 그런데 벌레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뒤에서 동생들이 떠들어 댔다. "뭐야? 왜 안 보여?" "소리는 가까운데?" "동석이 형, 앞에선 좀 보여요?" 진우가 소리쳤다. "위!" '뭐?' 황동석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드드드드드거대한 벌레들이 위쪽에서 달려오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늦게 발견했다면 놈들이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릴 뻔했다. 벌레들처럼 무리 지어 움직이는 마수들과 싸울 땐 진형이 무너지면 모든 게 끝난다.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황동석은 간담이 서늘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많은 종류의 벌레들 중 개미가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그가 목청에 힘을 주었다. "쏴! 쏴서 떨어뜨려! 내려오면 어글은 내가 잡는다!" 화살이나 마법들이 벌레들을 향해 날아갔다. 쉬익, 푹! 퍼엉! 끼에에엑끼에몇 마리가 헌터들의 공격에 맞고 떨어지자, 남아 있는 녀석들 전부가 지상에 내려앉았다. 헌터들과 싸울 생각이다. 이제부터는 탱커의 역략이 중요했다. 황동석은 도발 스킬을 사용해 마수들의 시선을 끌었다. 마수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황동석을 돌아보았다. "여기다, 벌레들아!" 키에에에에! 수십 마리의 마수들이 황동석에게 돌진했다. 캉캉! 카가가강! 캉! 그의 방패가 벌레들의 공격을 모조리 막아 냈다. 벌레들의 강한 턱과 발톱도 방패를 찢지는 못했다. 탱커인 황동석이 선두에서 안정적으로 잘 버텨 냈다. "대기, 대기, 대기!" 황동석은 타이밍을 쟀다. 19 화. 벌레들이 무섭게 물어뜯고 있는 와중에도 황동석은 일체의 흐트러짐 없이 반격의 순간을 기다렸다. 딜러들이 극딜을 퍼부어도 어글이 튀지 않게 될 때를. '이쯤 하면 됐다!' 이제부터 진짜 사냥의 시작이다. 헌터들이 헌터라 불리는 이유! 황동석이 외쳤다. "딜!" 짧고 굵은 고성과 함께 팀의 모든 화력이 벌레들에게 쏟아졌다. 키이이이엑키에엑여기저기서 마수들의 괴성이 터져 나왔다. 진우는 뒤쪽에 서서 일행들의 전투를 지켜보았다. 그게 이번 레이드의 계약 조건이었다. 그들의 전투를 보며 자신이라면 어떻게 싸울지 머릿속으로 상상해 보았다. '답답하다.' 진우는 몇 번이고 튀어 나가고 싶은 충동을 억눌렀다. 마수들의 빈틈이 너무 많이 보였다. 또 그런 빈틈들을 놓치는 헌터들의 실수도 빈번하게 보였다. 그런데도 가만히 서서 구경만 해야 하니 답답할 수밖에. 그러나 황동석 팀의 피해는 생각보다 적었다. 팀원들의 손발이 잘 맞았기 때문이었다. 레이드를 시작하기 전에 보여 주었던 황동석의 여유가 완전히 허세는 아닌 듯했다. "진석아, 11 시!" "형, 오른쪽에서도 오는데요?" "준태, 석민, 규환! 오른쪽은 너네가 맡어." "예!" "철진, 너 손목 부었네. 일단 뒤로 빠져 있어라." "황 형, 이 정돈 괜찮슴다." "입구만 청소하고 돌아갈래? 얼마나 오래 걸릴지 모르니까 처음부터 너무 달리지 마. 페이스 조절해라." "알았슴다." 오래 호흡을 맞춰 왔는지 서로 간의 의사소통이 원활했다. 원활한 소통은 좋은 팀플을 만들어낸다. 오합지졸 협회의 헌터들과는 달랐다. '의외로 저것도 좀 하고.' 진우의 시선이 유진호에게로 옮겨갔다. 마수 하나가 턱으로 방패를 물어뜯자, 발로 걷어차 마수를 밀어내고 검을 휘둘렀다. 비싼 검은 마수의 머리를 뎅겅 잘라냈다. 초짜 D 급 헌터 주제에 선방하고 있었다. '모자란 실력이나 경험이 장비빨로 커버되네.' 헌터들이 괜히 좋은 장비를 맞추려고 발버둥 치는 게 아니었다. 진우와 눈이 마주친 유진호가 엄지를 척 올렸다. "..." 하도 눈빛이 간절해 보여서 진우도 하는 수 없이 엄지를 들어 올려 주었다. 유진호는 만족스러운 듯 돌아섰다. 끼이이엑어쨌거나 치열했던 전투도 서서히 끝을 보이고 있었다. 대충 주변이 정리되자 황동석이 동생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마정석 전부 챙겨! 정확히 9 등분한다." "옙." "난 이때가 제일 좋더라." "미 투." 동생들의 희희낙락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황동석은 진우에게 다가갔다. "아이고, 덕분에 살았습니다." "예?" "처음에 마수들이 위에서 온다고 말한 거 성진우 씨잖아요. 그거 어떻게 안 겁니까?" "감... 이죠." 진우는 대충 둘러댔다. 감각 스탯이 높아서, 라고는 할 수 없었다. "아, 그래요? 감이라... 운이 정말 좋았네요. 그렇게라도 발견 못 했으면 어찌 됐을지, 휴우-." 황동석은 그렇게 말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런데 그때. 벌레들을 뒤지던 헌터 하나가 황동석에게 손짓했다. "황 형, 여기 좀 와 봐요." 동생들이 한데 모여 있었다. 황동석도 그리로 향했다. "응?" "얘네들 좀 이상한 데요?" 황동석이 도착하자 헌터들이 길을 터 주었다. 황동석은 쭈그려 앉아 주변을 둘러 보았다. 딱히 이상한 점은 보이지 않았다. 어디를 봐도 그냥 죽은 벌레들뿐이었다. "뭐가 이상하다는 거야?" 황동석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동생 중 하나가 가까이 있던 벌레의 다리를 가리켰다. "저거 우리한테 당한 상처 아니지 않아요?" "..." 황동석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유심히 살펴보던 그가 말했다. "뭔가에... 물어뜯긴 거 같은데?" "그쵸? 이런 상처가 있는 놈들이 한 둘이 아니에요. 보세요, 여기도. 또 저기도. 쟤는 아예 날개 한 짝이 다 뜯겼네. 얘네들 우리랑 싸우기 전에 이미 만신창이였던 거 아니에요?" 황동석의 얼굴이 굳어졌다. 어쩐지 마수들 머릿수가 많은 거치곤 전투가 쉽다 했다. "설마 이것들... 다른 놈들과 싸우고 있었나?" 그때였다. 아주 잠시지만 진우는 황동석과 몇몇 멤버들의 시선이 자신 쪽으로 향한 것을 느꼈다. 진우가 의식하자 그들은 금방 시선을 돌렸다. 그걸 보고 진우는 확신했다. '역시...' 처음의 짐작이 맞았다. 손발이 척척 맞는다는 것은 저들끼리 오랫동안 호흡을 맞춰 왔다는 뜻이다. 그것도 희생자 없이. 하지만 힐러 없이 그게 가능할까? 아무리 유능한 헌터들이라도 사람인 이상 실수는 나올 수밖에 없다. 당장 조금 전만 해도 벌레들의 공격에 진형이 어그러질 뻔했지 않은가. 대략적인 그림이 그려졌다. 진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어쩌면... 이용해 먹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예상대로만 움직여 준다면 말이다. 황동석이 웃으면서 일어났다. "자자,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봅시다. 이런 식이면 금방 클리어할 수 있겠네요." 황동석은 일부러 큰 목소리로 말했다. 동생들 들으라고 하는 말은 아닐 것이다. 팀의 기존 멤버들은 전부 황동석 주위에 있었으니. 그사이 유진호가 활짝 웃으며 근처로 다가왔다. "형, 봤어요? 저 보셨죠? 제가 이걸로 마수들을 아주 그냥." 유진호는 검을 쥐고 허공에 붕붕 휘둘러 댔다. 진우가 물었다. "너, 그 칼하고 방패 비싼 거지?" "예? 아, 첫 레이드 간다니까 아버지께서 신경 좀 써 주셨죠." "그럼 너도 조심해야겠다." 진우는 유진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 줬다. 그러고는 안쪽으로 이동하기 시작한 헌터들을 뒤따라갔다. "갑자기 뭔 소리래?" 고개를 갸웃거리던 유진호도 곧 일행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동굴은 한참 안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가는 도중 마수가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외길 던전이니 마주치지 못한 것은 아닐 텐데. "입구에 있던 놈들이 전부였나?" "에이, 설마." "참 별일이긴 하네." "그래도 보스는 있겠지?" "보스가 없는데 게이트가 열려 있겠냐." 크기는 큰데 텅 비어 있는 던전 내부에 헌터들도 서로 의견이 분분했다. "잠깐." 황동석이 멈춰 섰다. 급히 멈추는 바람에 약간의 충돌이 발생했다. 앞사람의 뒤통수에 코를 부딪친 헌터가 울상을 하곤 물었다. "아이 씨- 황 형, 뭐예요?" "규환아, 여기 비춰 봐." 조규환이 정면에 띄워 놨던 빛의 공을 움직여 황동석이 가리키는 구석 쪽을 밝혔다. "맙소사..." "이게 다?" 헌터들이 나직이 신음했다. 벌레들의 날개, 다리, 몸통, 심지어 머리까지. 죽은 벌레들의 잔해가 널려 있었다. 잔해는 동굴 안쪽으로 갈수록 더 많아졌다. 그 끝에 위치한 커다란 방. "보스 방이다." 누군가가 중얼거렸다. 황동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다들 장비 꺼내." 헌터들이 곧바로 무장을 갖추었다. 모두의 얼굴에 긴장감이 맴돌았다. 살금살금. 대장인 황동석을 필두로 나머지 헌터들이 조심스럽게 보스 방으로 진입했다. 하지만 정적도 잠시. "대, 대박이다!" 코가 시뻘건 헌터가 소리쳤다. 아까 남의 뒤통수에 코를 박았던 자였다. 원래 던전 안에서 큰 소리는 절대 금기다. 마주치지 않아도 될 마수가 소리를 듣고 달려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빨간 코에게 주의를 주는 사람은 아마도 없었다. "우와-." "이게 다 얼마야?" "대박인데?" 다들 감탄하기에 바빴다. "홀드." 조규환이 빛의 공을 높은 공중에 고정시키자 방의 형태가 확실하게 드러났다. 동굴 벽면에 솟아 있는 보석 같은 돌들. "마나석이다!" "한쪽 벽면 전체에 마나석이!" 불빛을 반사하는 마나석보다 헌터들의 눈이 더 반짝거렸다. 마나석! 던전에서 발견할 수 있는 보물 중 하나였다. 마수들의 몸에 들어 있는 마정석보다는 마력이 적지만 보통 대량으로 발견되기 때문에 캐 가면 큰돈을 벌 수 있었다. 특히 이번에 발견한 마나석 덩어리들은 그 양이 장난 아니었다. 커다란 동굴 한쪽 벽면을 한가득 채우고 있었으니 말이다. "대충 계산해 보니까." 계산에 밝은 한 명이 손가락을 분주하게 움직였다. "전부 다 캐면 10 억 넘게 나오겠는데? 9 등분해도 각자 1 억 이상씩은 챙기겠어." 오오헌터들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갔다. 뒤에 빠져 있던 유진호가 그 소리를 듣고 진우의 옆구리를 팔꿈치로 쿡쿡 찔렀다. "형, 계약서 좀 줘 봐요!" "계약서는 왜?" "믿고 줘 봐요. 제가 법 쪽으로는 빠삭하거든요." 진우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는 원하는 대로 계약서를 넘겨주었다. 유진호는 그걸 들고 황동석에게로 갔다. "잠깐 선배님들, 말씀 좀 여쭙겠습니다." 기뻐하던 헌터들의 시선이 일순간 유진호에게로 쏠렸다. 유진호는 진우의 계약서를 펼쳐 보여 줬다. "대장님, 이게 진우 형 계약서인데요. 보시다시피 사냥을 통해 나오는 마정석 말고는 분배에 대한 언급이 없습니다." 다들 유진호가 하고 싶은 말을 알아챘다. -던전에서 나온 보물이나 희귀품은 멤버 수대로 골고루 나누는 것이 관례다. 자기가 잡은 마수의 마정석만 챙겨야 하는 사냥과는 분배 방식이 다르다. 즉 마나석은 9 등분이 아니라 10 등분을 해야 한다는 것. 순간 헌터들의 눈빛이 달라졌으나, 황동석이 미소를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물론 공평하게 나눠야죠. 잘 알고 있습니다. 그전에 처리할 것도 있고요." 황동석이 검지를 뻗어 앞을 가리켰다. 유진호가 화들짝 놀랐다. 자신을 가리키는 줄 알았기 때문이었다. 움찔하며 돌아보니 뒤편 구석 멀리에 집채만 한 거미가 가만히 몸을 웅크리고 있었다. "헉...!" 유진호는 거미의 위용을 보고 뒷걸음질 치며 자기 입을 틀어막았다. 잠들어 있는지 거미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놈의 주위에는 벌레들의 껍데기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먹다 만 껍데기도 많고, 타액이 섞여 있어 엎어진 음식물 쓰레기통을 연상시켰다. "보스구만." "저게 던전의 벌레들을 먹어 치운 건가?" "많이도 처먹었네." 헌터들이 거미를 보고 한마디씩 던졌다. 황동석이 헌터들을 불러 모았다. 진우와 유진호도 황동석 앞에 섰다. "다들 잘 아시겠지만 보스를 잡으면 게이트가 닫힙니다. 그러니 거미를 잡기 전에 먼저 마나석부터 캐서 옮겨 두죠."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황동석의 시선이 빡빡머리에게 옮겨갔다. "철진아, 장비는 챙겨 왔냐?" 이철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C 급 던전에서 마나석이 나올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채굴 장비는 다 차에 두고 왔슴다." "인석아... 평소에 좀 잘 챙겨 두라고 형이 말 안 하든?" "죄송함다, 죄송함다. 정말 죄송하게 됐슴다." 이철진은 씩 웃으며 황동석과 팀원들, 그리고 진우에게까지 꾸벅 사과했다. 황동석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이고, 이거 귀찮게 됐네. 그럼 두 분이 여기 좀 지켜 주세요. 저희는 가서 장비 좀 챙겨 오겠습니다." 20 화 헌터들이 다 같이 나가려 하자, 유진호가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보스방에 저하고 진우 형만 있으라고요?" 황동석은 눈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렇게 큰 소리로 떠들었는데도 안 깨는 놈인데 별일 있겠습니까? 애들한테 할 이야기도 있고 해서 같이 가면서 담배나 한 대 피고 오려고요. 금방 갔다 오겠습니다." 진우는 황동석의 장황한 설명을 들으며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는구만. 근데 다 몰려간다니, 우리를 너무 머저리로 보는 거 아닌가?' 랭크가 낮다고 깔보고 있는 거겠지. 예상대로 황동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대했던 상황과는 좀 다르긴 했지만. 진우가 헌터 일을 시작한 지도 벌써 4 년째, 그간 많은 헌터들을 만났다. 그중 한 사람이 오 씨 아저씨였다. 오랜 프리랜서 생활을 정리하고 소일거리 삼아 협회 일을 도왔던 헌터였다. "도마뱀들을 조심해라." 오 씨가 종종 했던 말이었다. 레이드를 하다 보면 위험에 처하는 순간이 온다. 그럴 때 일부 비양심적인 헌터들은 기존 멤버가 아니라거나 혹은 자기보다 힘이 약하다는 이유로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이를 일부러 희생시킨다고 한다. 자기들이 안전하게 대피할 시간을 벌기 위해서. 마치 도마뱀이 꼬리를 버리고 도망치는 것처럼. '꼬리 자르기...' 오씨는 그런 헌터들을 '도마뱀', 그런 행위를 '꼬리 자르기'라고 불렀다. 규정상 C 급 게이트의 최저 공략 인원은 10 명이다. 그런데 황동석 팀의 고정 멤버는 여덟 명이란다. "아시잖습니까, 개인 공격대에서 치유계열 헌터님 모시기 쉽지 않은 거. 저희는 늘 이렇게 했는데요, 뭘." 늘 이렇게 했다고 말할 만큼 자주 C 급 게이트를 들락날락하면서도 말이다. '당연히 빈자리 두 개는 채울 필요가 없었겠지.' 언제든 자를 수 있는 꼬리가 필요하니까. 놈들이 E 급 헌터든, 초짜 헌터든 가리지 않고 받아 준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지금. 황동석은 평소와는 조금 다른 이유로 성진우와 유진호를 버리기로 작정했다. '나한테는 잘된 일이다.' 진우는 황동석의 의도를 읽었음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원하던 바였다. 하지만 일신에 자신이 있는 진우와 오늘 처음 헌터 일을 시작한 유진호는 사정이 달랐다. 유진호는 불안함이 깃든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그래도 그건 좀... 차라리 다 같이 가는 게." 진우는 뒤쪽에 있던 헌터 하나가 허리춤 쪽으로 손을 올리는 걸 보았다. 그래서 유진호 어깨에 손을 얹고 말했다. "갔다 오시죠. 여긴 저희가 지키고 있겠습니다." 허리춤으로 가던 헌터의 손이 멈췄다. "형...?" 유진호가 의아해했지만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개를 살짝 저어 보였다. 좀 시끄러운 녀석이긴 해도 이렇게 죽게 놔둘 수는 없었다. 조금 전에도 자신이 손해 보는데도 굳이 진우의 계약서를 들고 가서 배분에 넣어 주려고 했지 않은가. 황동석은 두 사람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차는 요 앞에 대 놨으니까 오래 걸리진 않을 겁니다. 그럼." 황동석 이하 여덟 명이 보스 방을 빠져나갔다. 발소리는 빠르게 멀어졌다. 유진호가 진우에게 따지듯 물었다. "형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어떡해요? 그러다 저놈이 깨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거미가 어지간히도 무서운 듯했다. '얘는 상황 파악이 전혀 안 되나 보네.' 진우가 속으로 혀끝을 찼다. 하나하나 설명해 주는 것도 귀찮았다. 진우는 대답 대신 천천히 몸을 풀기 시작했다. *** 황동석이 보스 방 쪽으로 돌아선 것은 그때였다. 뒤를 따르던 헌터들도 멈춰 섰다. 보스 방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까지 왔다. 이 정도면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얼굴에서 미소를 지은 황동석이 옆에 서 있던 조규환에게 턱짓했다. "규환아, 보스 방 입구 막아 버려라." "터트려서 무너뜨릴까요?" "그래, 너무 심하게 하진 말고. 좀 있다 우리 들어가야 하니까." 이철진이 물었다. "황 형, 이렇게 복잡하게 할 거 있음까? 걍 거기서 다 죽여 버리고 시작하지." 황동석이 인상을 팍 쓰고 눈을 부라렸다. 이제 접대용 표정을 지을 필요가 없었다. 그거 하난 편했다. "죄, 죄송함다." 이철진은 겁먹은 듯 눈을 내리깔았다. 황동석이 혀를 끌끌 찼다. "거기서 싸우다 거미라도 깨면? 마나석은 언제 캐서 옮기게?" "죄송함다." 조규환이 끼어들었다. "황 형, 거미 이야기가 나왔으니 말인데... 우리가 마나석 캐는 도중에 놈이 깰 수도 있지 않을까요? 그럼 피해가 클 텐데." 그 무시무시한 벌레형 마수들을 먹잇감으로 삼아 배를 채우는 놈이다. 채굴 작업 중 무방비로 습격당했다간 큰 피해를 입을 수 있었다. "그래서." 황동석이 씩 웃었다. "저 두 놈을 먹이려는 거 아니냐." "아-." 조규환이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은 거미가 언제 깨어날지 알 수 없었다. 10 시간 뒤일 수도 있고, 1 시간 뒤일 수도 있고, 1 분 뒤일 수도 있었다. 그러니 일단 거미를 깨워서 먹이를 먹이자는 거다. 입구를 무너뜨릴 정도의 충격이면 아무리 둔감한 마수라도 잠에서 깰 테니. 황동석이 말을 이었다. "마나석은 배가 부른 거미가 다시 잠들면 그때 캐면 돼." 협회에 허가받은 시간은 5 일. 아직 4 일 하고도 반이 더 남았다. 일단 기다렸다 거미가 시간 안에 잠들지 않으면 그냥 처치하고 게이트가 닫히기 전까지 최대한 마나석을 캔 뒤 나가면 그만이다. 1 시간 안에 다 캐지는 못하겠지만 성진우와 유진호 두 사람의 몫이 줄어드니 어느 정도의 손해는 만회할 수 있을 터였다. 그게 불안에 떨며 작업하는 것보다 낫지 않은가? 일단은 안전이 우선이니까. '물론 그건 최악의 경우고...' 운이 좋으면 두 사람 몫도 줄이고, 마나석도 다 캐고, 거미까지 차지할 수 있었다. 유진호가 들고 있던 값비싼 장비들은 덤. '그 검하고 방패, 못해도 몇억은 나갈 거 같던데.' 전혀 손해 볼 게 없는 장사였다. 황동석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입구 막아 놓고 얼른 담배나 피러 가자." "예, 형." 짤막하게 대단한 조규환이 손끝에 눈부신 빛이 모여들었다. *** "..." 유진호의 시선은 거미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숨소리도 조심스럽다. 유진호가 겁먹은 표정으로 물었다. "저 거미 놈, 설마 깨지는 않겠죠?" "글쎄다." 진우는 말을 아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대충은 예상하고 있었지만, 사실대로 말해 줬다간 유진호가 기절할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방금 그게 유진호 입에서 5 분 만에 나온 첫마디였다. 겁이 나긴 되게 나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말 많던 녀석이. 그때였다. 퍼어엉굉음과 함께 보스 방 입구가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어, 어? 어, 어!" 유진호가 급히 입구 쪽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무너진 돌더미는 입구를 완전히 틀어막아 버렸다. 힘껏 밀어 봤지만 돌들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진우도 천천히 그리로 걸어갔다. "끄응-! 형, 같이 좀 밀어 줘요!" 유진호는 아직도 돌 더미를 무너뜨리려고 안간힘을 다하고 있었다. '조규환이라고 했었나?' 굉음이 들리기 전 빛이 번쩍이는 걸 봤다. 빛을 다루는 C 급 마법사. 그놈 짓이 분명했다. 진우는 돌 더미 위에 가만히 손을 얹어 보았다. '마음만 먹으면 충분히 나갈 수 있겠다.' 돌의 무게가 팔을 타고 전해졌다. 생각보다 무겁지 않았다. 살짝 힘을 주자 돌벽이 흔들리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나갈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 돌을 밀다 말고 유진호가 알았다는 듯 소리쳤다. 유진호는 벌겋게 물든 얼굴로 진우를 돌아보았다. "이 개자식들이 우리를 죽이려는 겁니다! 마나석을 나누기 아까우니까 입구를 막아서 거미한테 죽게 만들려는 거라고요!" '참 빨리도 알아챈다.' 진우는 속으로 한숨이 나왔지만 그래도 적당히 맞장구쳐 주었다. "그러게. 큰일이다." "헉!" 순간 유진호의 얼굴색이 붉은색에서 하얀색으로 변해갔다. 핏기가 싹 가시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유는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유진호의 눈동자 위에 거대한 마수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진우가 돌아섰다. "쿠룩, 크루룩." 충격으로 잠에서 깬 거미가 그 육중한 몸을 서서히 일으키고 있었다. 집채만 한 몸집. 수십 개의 눈. 흉측한 입. 길디긴 다리. 살아서 움직이는 걸 보니 가만히 자고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끔찍한 놈이었다. "으..." 유진호는 신음을 흘렸다. 온몸이 돌처럼 굳어 갔다. 반면 진우는 거미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 침착하게 창고에서 '카사카의 독니'를 불러냈다. '저건 내 거다.' 올라간 능력치를 시험해 볼 좋은 기회였다. '카사카의 독니'가 저절로 오른손 안에 나타났다. 스르르마치 처음부터 거기 있었던 것처럼. 진우는 단검의 손잡이를 힘껏 움켜 쥐었다. 헌터가 헌터로 불리는 이유! 이제부터 진짜 사냥의 시간이었다. "자, 잠깐, 형!" 그런데 거미에게 향하는 진우의 소매를 유진호가 잽싸게 붙잡았다. "뭐, 뭐 하시려고요?" 유진호의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진우가 왼손 엄지로 어깨 너머를 가리켰다. "저거 잡아야지." 진우는 단지 그 이유 때문에 여태 황동석 일행을 따라다녔던 거였다. 황동석이 꼬리 자르기를 하면 던전의 마수들을 혼자서 전부 먹으려고. 경험치와 마정석을 독차지할 좋은 기회니까. '보스가 마수들을 다 처먹지만 않았어도...' 건져갈 게 더 많았을 텐데. 그게 아쉬웠다. 하지만 진우의 사정을 모르는 유진호는 믿을 수 없다는 얼굴을 했다. '이 형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어디선가 들었던 말이 있었다. 사람이 도무지 감당할 수 없는 정신적 충격을 받으면 가끔 정신줄을 놓기도 한다고. 눈앞의 E 급 헌터가 혼자서 C 급 던전 보스를 잡겠단다. 이게 미친 짓이 아니면 무엇인가? 유진호가 얼빠진 얼굴로 다시 한 번 물었다. "저걸 형이 잡겠다고요?" 진우는 곤란한 듯 이마 위쪽을 긁적이다 되물었다. "그럼 니가 잡을래?" 10. 기브 앤 테이크 진우는 유진호가 입을 열기도 전에 돌아섰다. 대답은 들을 필요가 없었다. 유진호는 후들거리는 다리로 간신히 서 있었다. 처음부터 유진호에게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 도와준다고 따라나서지 않는 게 차라리 다행이었다. '방해만 될 테니.' 진우는 천천히 거미에게 접근했다. 거미도 이쪽을 발견했는지 여덟 개의 다리를 이용해 방향을 틀었다. 다가온다. 거미는 처음 보는 먹잇감이 신기해서인지 서두르지 않았다. 길고 굵은 다리로 지면을 밀어내며 조금씩 거리를 좁혀 왔다. "후우-." 거대한 몸뚱이가 점점 시야를 잠식해 들어오니 숨이 턱턱 막혀 왔다. 심장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진우는 호흡을 가다듬으며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침착해야 한다. 그러면서 합정역 인던의 2 층 끝에 처음 섰을 때의 느낌을 떠올렸다. 푸른 독니 카사카. 하지만 눈앞의 거미에게서는 그때만큼의 압박감은 전해지지 않았다. 충분히 할 만하단 소리다. 애초에 공략이 불가능한 보스라고 판단했다면 여기에 남지 않았을 거다. "끄루루룩." 거미의 반질거리는 검은색 눈깔에 얼굴이 반사될 정도로 거리가 가까워졌다. 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21 화 '표피가 제법 단단해 보이는데... 단검으로 데미지를 줄 수 있을까?' 단검은 이전에 쓰던 강철검보다 리치가 짧았다. 깊은 상처를 내기 위해서는 보다 힘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다. 진우는 단검을 역수로 쥐었다. 이편이 데미지를 주기 더 쉬울 듯했다. "끄룩." 드디어 거미가 진우 앞에 멈춰 섰다. 그러고는 맨 앞 다리 두 개를 들어 올려 기역 자로 세웠다. '뭘 하려는 거지?' 의문도 잠시. 진우의 눈이 번뜩였다. 쾅! 본능적으로 몸을 틀지 않았다면 거미 다리가 가슴을 꿰뚫었으리라. 뒤편의 바닥을 찔렀던 거미 다리의 관절이 접히며 다시 위로 올라갔다. 후두둑. 다리 끝에서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진우가 힐끔 뒤를 살폈다. 돌로 된 바닥에 휑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맞으면 아프다 정도로는 안 끝나겠네.' 진우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집중이 필요한 때였다. '온다!' 쉬익-! 방금 총탄 같이 내리꽂혔던 거미의 다리가 어느 정도 보이기 시작했다. 좌. 거미의 좌측 다리를 머리를 숙여 피했다. 우. 몸을 측면으로 비틀어 거미의 우측 다리를 흘리고 한 걸음 전진했다. 우. 또다시 머리를 노리는 거미의 다리를 피해 두 걸음 더 다가섰다. 좌. 우. 우. 좌. 우. 우. 우. 좌. 좌.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쾅! 거미의 다리가 귀가 따가울 정도로 시끄럽게 바닥을 뚫어 댔다. 진우는 쏟아지는 거미의 공격을 하나씩 피해 내며 거리를 좁혀 갔다. 유진호는 두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뭐, 뭐하는 인간이야?" 멀리서 보고만 있어도 뒷머리가 곤두설 정도로 살벌해 보이는 공격이었다. 그런데 그걸 마수의 바로 앞에서 전부 피해 가며 거리를 줄여 나가다니. 낭비 없는 침착한 움직임에 소름까지 돋았다. "저게 E 급 헌터라고?" 아니, 그럴 리가. 저기 서 있는 게 성진우가 아니라 자신이었다면 벌써 온몸이 걸레처럼 찢겨 나갔을 거다. 한두 번도 제대로 피할 자신이 없었다. 그런데 진우는 아직까지 단 한 번의 실수도 없이 모두 피해 내고 있었다. D 급 헌터인 자신에게 불가능한 일을 E 급이?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부정 등록자!' 유진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재능이 뛰어난 헌터 중에는 마력을 자유로이 컨트롤할 수 있는 이들이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등급을 낮출 수도 있는 것이다. 마력의 일부를 숨겨서 자신이 원래 받아야 할 등급보다 낮은 등급을 받은 헌터들. 그런 이들을 '부정 등록자'라 불렀다. 그리고 대부분의 부정 등록자들은 굉장히 악의적인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낮은 랭크의 던전에서 하급 헌터들을 학살하는 취미를 가진 살인마라던가...' 던전에서 일어난 일은 당사자들 외에 아무도 알 수가 없으니 범죄를 저지르기에는 최적의 장소였다. 유진호는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거미보다 진우가 더 무서워졌다. '내가 이런 델 왜 온다고 해 가지고...' 문득 울고 싶어지는 유진호였다. 쉭! 쉭! 쉭! 그동안에도 거미의 공격은 쉴 새 없이 쏟아졌다. 진우는 공격을 모두 피해 내며 승리를 자신했다. 조금씩 거리를 줄여 나가다 보니 벌써 거미의 머리가 간격 안에 들어온 것이다. 거미의 패턴이 단조로워서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일단은 눈이다.' 약점을 노리는 건 레이드의 기본. 가장 약해 보이는 눈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이제 저 눈에다 검을 박아 넣기만 하면!' 진우가 그렇게 마음먹었을 때였다. 순간 거미의 공격이 느려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쉭! 쉭! 빠른 공격에 눈이 적응해서 그런가? 쾅! 쾅! 아니, 아니다. 눈은 거짓말을 하더라도 귀는 속일 수 없다. 바닥을 찍어 대던 요란한 소리가 어느 순간부터 한 박자씩 느려져 있었다. 청력 하나는 탁월하다고 자신하던 진우였다. 문득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자세히 보니 거미의 입 주변 근육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어째서 이 타이밍에 입을 벌리려는 거지?' 3 미터 높이에 있는 거미 머리를 향해 도약하려던 진우는 뭔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꼈다. 진우는 재빨리 방향을 선회해 위가 아니라 옆으로 몸을 날렸다. 그때. 쏴아아아-! 거미의 입에서 탁한 액체가 뿜어져 나왔다. 바닥을 구르던 진우가 균형을 잡고서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까지 서 있던 땅이 연기를 내며 까맣게 타들어 가고 있었다. 치이이이이이익바닥의 암설들이 흐물흐물 녹아 갔다. 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만약 그대로 뛰어올랐다면...' 녹는 건 암석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진우의 동요를 느꼈는지 거미가 빠르게 접근했다. 사사사사삭.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거미는 바로 눈앞에 있었다. 쉬익! 진우는 제자리에서 점프해 거미 다리를 피했다. 쾅! 놈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젠장!" 몇 번이나 거미의 머리에 가까이 다가갔지만, 소화액을 피해 다시 뒤로 물러서야 했다. 거미의 공격 패턴이 두 가지로 늘어나자 상대하기가 엄청나게 까다로워졌다. 다리들을 피해 접근하면 소화액이 쏟아졌다. 소화액 때문에 멀어지면 다리로 공격해왔다. "제길!" 답답한 마음에 단검으로 다리를 공격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두꺼운 표피로 덥힌 다리는 아무리 베어도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진우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대론 안 돼.' 거미는 공격에 앞다리 두 개만 쓰는 반면, 자신은 공격을 피하기 위해 온몸을 쓰고 있었다. 누가 먼저 지칠지는 뻔했다. '피로도.' [피로도: 57] 아니나 다를까, 피로도가 급격하게 올라가고 있었다. 피로도가 70 이 되면 속도가 느려지고, 90 을 넘으면 숨이 차서 움직이기 힘들다. 시간이 촉박했다. '좀 더 빠르게 접근할 수만 있다면...' 속도. 속도가 문제였다. 쾅! 쾅! 쾅! 쾅! '잠깐, 속도라면?' 쏟아지는 다리들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다니던 진우의 뇌리를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그게 있었지!'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스킬 하나. 아직 쓸 일이 없었기에 깜박 잊고 있었다. '질주!' ['스킬: 질주'를 사용합니다.] [이동 속도가 30% 증가합니다. 시전 중 1 분당 마나가 1 씩 감소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진우의 몸이 마치 부스터를 단 것처럼 빨라졌다. 거미 다리를 피하기도 한결 쉬워졌다. 쉭! 쉭! 쉭! 쾅! 쾅! 쾅! 번개처럼 내리찍는 거미 다리 사이를 빠르게 지나쳐 순식간에 거미 앞에 도착했다. 당황한 거미가 급하게 소화액을 뿌렸다. 쏴아아아-! 하지만 속도가 빨라진 만큼 진우의 행동에도 여유가 생겼다. 소화액을 가볍게 피한 진우가 거미 머리를 향해 뛰어올랐다. 스걱! 단검이 거미의 눈을 사선으로 그었다. ['효과:마비'가 발동합니다.] [대상의 저항력이 높아 효과가 취소되었습니다.] ['효과:출혈'이 발동합니다.] [대상의 체력이 1 초에 1%씩 소모됩니다.] "좋았어!" 단검 '카사카의 독니'의 특수 효과 출혈이 성공적으로 들어갔다. "꾸롸롸?" 거미가 괴성을 지르며 비틀거렸다. 진우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바닥에 착지하자마자 다시 점프해 거미의 몸을 타고 머리 위로 올라갔다. 거미가 몸부림치며 다리를 휘둘러댔으나 눈먼 공격에 당할 진우가 아니었다. 쾅! 쾅! 쾅! 애꿎은 땅에 구멍만 늘어갔다. 거미의 머리 위에 올라탄 진우는 단검으로 거미 눈을 연속으로 찍었다. 푹! 푹! 푹! "꾸롸롸롸?" 푹! 푹! "끄롸로G!" 거미가 이리저리 발광해 댔지만 진우는 떨어지지 않고 끝까지 버티며 거미의 머리를 쑤셨다. "끄루룩!" 거미가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데미지는 먹히고 있었다. 진우의 손이 점점 빨라졌다. 그 커다란 거미의 몸뚱이가 드디어 기울어졌다. 쿵! 그러나 진우는 손을 멈추지 않았다. 거미의 숨통이 끊어질 때까지. 푹! 푹! 푹! "크룩, 크르르." 거미의 단말마와 함께 메시지가 떴다. [던전의 주인을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됐다!" 거미의 피를 뒤집어쓴 진우가 양손을 번쩍 들었다. 보스라 그런지 레벨이 세 개나 올랐다. "상태창." 이름: 성진우 레벨: 21 직업: 없음 칭호: 늑대학살자 HP: 2600 MP: 391 피로도: 0 [스탯] 근력: 53 체력: 30 민첩: 38 지능: 30 감각: 32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액티브 스킬: 질주 Lv.1 18 레벨에서 단숨에 21 레벨으로 올라섰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레벨 업 메시지 말고도 또 다른 메시지가 떴다. 띠링. [레벨이 20 을 초과하였으므로 '상점: 구매' 이용이 가능해집니다.] '드디어 골드를 쓸 수 있는 건가?' 좋은 소식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한가롭게 상점이나 뒤지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쿠르릉. 동굴이 약간 흔들렸다. [던전의 주인이 처치되었으므로 1 시간 후 던전의 입구가 소멸됩니다.] [남은 시간: 59 분 58 초.] 게이트가 닫히기 전에 나가야 하니까. 상점 구경은 나가서 해도 충분하다. 바닥으로 내려가던 진우는 거미 머리의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반짝이는 빛을 발견했다. '아이템?' 하지만 몬스터의 경우와는 달리 아이템 발견 메시지가 뜨거나 자동으로 획득되지는 않았다. 뭘까? 잠깐 고민하던 진우가 곧바로 이유를 깨달았다. '아, 마정석이 있었지.' 아무리 바빠도 챙길 건 챙겨야지. 진우는 거미 머리 안쪽에 숨어 있던 마정석을 뜯어냈다. 보스 머리에서 나온 C 등급 마정석이니 천만 원은 족히 되리라. 멋진 승리의 전리품치곤 부족하지 않았다. 진우가 거미 머리 위에서 폴짝 뛰어 내렸다. 척. 가볍게 착지한 후 돌아섰는데, 이번엔 거미 배 쪽에서 반짝이는 빛이 보였다. 그것도 여러 개나! 진우는 의아해했다. 마수 하나가 가끔 두세 개의 마정석을 준다는 이야기는 들어 봤지만 저 빛들은 마정석이라 하기엔 개수가 너무 많았다. '대체 뭐지?' 단검으로 배를 슥슥 가르고 위장을 찢었더니 녹다 만 벌레 마수들의 찌꺼기가 쏟아졌다. 빛은 그 벌레들 안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설마?" 진우는 벌레들을 하나하나 뒤졌다. 역시나 전부 마정석이 들어 있었다. 몇 개는 소화되다 말아서 작았으나, 개중에는 아주 멀쩡한 것도 많았다. 다 합치니 10 개가 넘어갔다. "대박이네!" 월세 벌러 왔다가 전세값을 가져가게 생겼다. "형님." 돌아봤더니 유진호가 서 있었다. "여기 담으시지요." 유진호는 자신의 장비 가방에 진우의 마정석들을 차곡차곡 정성스레 담았다. 그리고 장비 가방 구석에 있던 보온병을 꺼내 안에 든 내용물을 뚜껑에 따랐다. "형님, 목마르시죠? 이거 좀 드세요. 물입니다." 뚜껑 겉면에 물이 맺힐 정도로 차가운 냉수였다. '얘가 왜 시키지도 않은 짓을 하지?' 22 화 마침 목이 말랐던 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보온병 뚜껑을 받았다. 벌컥벌컥. 목을 타고 시원하게 넘어갔다. "형님, 어떠십니까?" 그러고 보니 호칭도 어느새 '형님'으로 바뀌어 있었다. "음- 시원하네." 진우는 소감을 말하며 뚜껑을 건넸다. "그리고 너 여기서 본 건." 진우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유진호가 먼저 걱정하지 말라는 투로 딱 잘라 말했다. "그럼요! 절대 말 안 하고 무덤까지 가져가겠습니다." "아니, 딱히 무덤까지는." "그럴 수가 있나요. 형님과의 약속인데." "뭐... 알겠다. 그러겠다면야." "염려 마십시오, 형님." 어차피 E 급 헌터가 C 급 게이트의 보스를 잡았다고 해도 믿을 사람은 없겠지만 말이다. 그래도 알아서 입을 다물겠다고 하니 편하긴 했다. '눈치가 없는 줄 알았더니 이런 건 또 알아서 척척이네.' "또 하실 말씀 있으십니까, 형님?" "...없어." 아무래도 이상한데. 진우는 지나치게 깍듯한 유진호의 태도를 보면서 의아해하다가 나름대로 결론을 도출해 냈다. '하긴 유진호 입장에선 내가 생명의 은인이니까.' 목숨을 구해 준 사람에게 공손해지는 건 당연한 일이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면 이해가 갔다. 실상은 조금 달랐지만 말이다. 쿠구궁던전이 또다시 조금 흔들리다 멈췄다. 이 진동은 잠시 뒤에 게이트가 닫힌다는 신호다. 흔들림은 시간이 갈수록 심해지다가 게이트가 닫히기 일보 직전에는 거의 지진처럼 변한다. "나가자." "예, 형님." 진우는 입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그때 입구 쪽에서 빛이 번쩍이며 돌무더기가 무너졌다. 퍼어엉황동석과 일행들이 안으로 들이닥쳤다. 그들은 진우 뒤에 쓰러져 있는 거미를 보고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뭐야, 진짜 죽었네?" "둘이서 저걸 죽인 거?" "저 거미 새끼 덩치만 크지 별거 아니었나?' "D 급 E 급 둘이서 잡았으면 말 다했지." "황 형, 이제 어쩌죠?" 황동석은 진우와 유진호를 보며 턱을 긁적거렸다. 거미가 죽었으니 게이트는 곧 닫힌다. 지금부터 마나석을 캐기엔 늦은 감이 있었다. 준비도 제대로 다 안 끝났는데, 남은 건 이제 1 시간이 채 안 될 테니. 계획을 바꿔야 할 때였다. 그래서 큰 소리로 유진호를 불렀다. "유진호!" 유진호가 움찔하며 한 걸음 물러섰다. 그런 그의 얼굴엔 긴장감이 가득했다. 황동석은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 장비가 좀 튀어서 검색해 봤더니 아주 대단한 사람 아들이드만? 유진건설 회장 유명한." "그, 그래서?" "너는 우리가 기회를 줄게. 네 아버지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니까. 그런데 여기서 있었던 일이 새어 나가면 우리 입장이 좀 곤란해지거든. 그러니 살고 싶으면 너도 공범이 되어라." "공범?" 황동석이 턱으로 진우를 가리켰다. 그 불쾌한 시선에 진우의 미간이 일순간 꿈틀거렸다. "성진우를 죽여." "뭐?" 유진호가 경악했다. 황동석이 그 표정을 보고 재밌다는 듯 웃었다. 원래는 유진호도 성진우와 같이 죽일 생각이었다. 하지만 밖에서 폰으로 검색해 봤더니 유진호의 아버지는 국내 굴지의 건설 회사 오너였다. 그걸 보고 나자 한 가지 묘안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유진호가 성진우를 죽이는 장면을 촬영하고, 그걸 비밀로 하는 조건으로 유명한에게 돈을 요구하면? '유명한의 재산이 알려진 것만 10 조라지.' 어쩌면 마나석을 캐서 얻었을 돈의 몇 배를 건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네가 살 방법은 그것뿐이다. 네 손으로 직접 성진우를 죽이면 너는 살려 준다. 그게 아니면 너희 둘 다 우리 손에 죽는다." 황동석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뭘 망설여? 어차피 던전에서 일어난 일은 아무도 모르는데. 설마 D 급이 E 급 따위한테 쪼는 거냐?" 유진호는 옆을 돌아보았다. 진우는 어깨를 한번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하라는 뜻이었다. 유진호는 비장한 얼굴로 옆구리에 찬 칼을 뽑았다. '드디어 결심이 섰나 보군.' 황동석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 갔다. 하지만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유진호는 검을 들고서 진우 옆에 나란히 섰다. "호오, 그쪽이랑 편 먹고 우리하고 싸우시겠다고?" 황동석은 속으로 중얼거렸다. 부잣집 도련님이 운 좋게 C 급 보스를 한번 잡더니 아주 간이 배 밖으로 나왔구만. 옆에서 조규환이 속삭였다. "형, 어쩔까요?" 황동석은 진우와 유진호가 듣지 못하도록 나직이 말했다. "일단 성진우부터 처리해. 돈줄은 좀 쥐고 있자. 오늘 손해가 막심하니까." "그러죠, 뭐." 조규환의 양손에 눈부신 빛이 생겨났다. 진우는 눈매가 가늘어졌다. '결국 해보자는 거네.' 헌터와 싸우는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하지만 몇 번이나 목숨을 노려 오는 상대를 봐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런데, 그때! 띠링. 기계음이 울렸다. [긴급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긴급 퀘스트?'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내용을 본다는 말도 하지 않았는데 멋대로 눈앞에 퀘스트 창이 펼쳐졌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긴급 퀘스트: 적들을 처치하라!] '플레이어'에게 살의를 가진 이들이 주위에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처치하여 안전을 확보하십시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그에 해당하는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처치해야 할 적의 숫자: 8 명 처치한 적의 숫자: 0 명 진우의 눈이 커졌다. '퀘스트 완료 조건이 황동석 일행 전원의 죽음이라고?' 갑자기 눈앞에 빛이 번쩍였다. 조규환의 손을 떠난 빛의 화살이 진우에게 작렬한 것이다. 퍼어엉폭발에 떠밀린 진우는 엄청난 속도로 벽에 처박혔다. 쾅! 벽 일부가 무너지며 진우 위를 덮쳤다. 우르르. "형님!" 유진호가 황급히 진우에게 달려가려고 했으나, 그전에 황동석이 먼저 유진호를 불러 세웠다. "유진호!" 유진호가 깜짝 놀라며 멈춰 섰다. "이미 죽은 놈은 신경 쓰지 말고 이리 오시지." 황동석이 손끝을 까닥거렸다. 유진호는 진우가 있는 곳을 돌아보았다. 황동석의 말처럼 진우는 돌들에 파묻힌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이, 살인자들..." 유진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혀 갔다. 황동석과 동생들은 살인자라는 원색적인 비난에도 히죽히죽 웃음을 보였다. 그게 사실이니까. 지금까지 던전에서 자신들 손에 죽어 간 목숨만 몇인지. 그들이 유진호를 보며 웃고 있을 때, 진우는 돌 더미에 눌려 눈을 의심하고 있었다. 틈 사이로 보이는 퀘스트의 내용이 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긴급 퀘스트: 적들을 처치하라!] '&*@##'에게 살의를 가진 이들이 주위에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처치하여 안전을 확보하십시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 ^%@$ #$%#^!&*#$%^$. 처치해야 할 적의 숫자: 8 명 처치한 적의 숫자: 0 명 몇 개의 단어가 깨지더니 스르륵 형태를 바꾸었다. [긴급 퀘스트: 적들을 처치하라!] 당신에게 살의를 가진 이들이 주위에 있습니다. 이들을 모두 처치하여 안전을 확보하십시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당신의 심장은 정지하게 됩니다. 처치해야 할 적의 숫자: 8 명 처치한 적의 숫자: 0 명 명백한 협박이었다. 퀘스트를 하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죽기 싫으면 죽여라?' 경악할 만한 내용이었지만 진우의 당혹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당혹감은 빠르게 안도감으로 변해갔다. 스스로도 믿기 힘들었지만 사실이었다. 퀘스트가 날아오고 능력치가 보이기 시작한 이후로 단 한 번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걱정. -이 기현상이 갑자기 끝나 버리면 어쩌지? 이 모든 게 만약 우연히 일어난 일이라면 언제든지 갑작스럽게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 불안감이 늘 따라다녔다. 하지만 이번 긴급 퀘스트로 명백해졌다. 이것은 우연도, 호의도 아니다. 호의로 발생한 퀘스트였다면 위기를 모면하라고만 하지, 페널티로 목숨을 빼앗아 가겠다고는 하지 않았을 터였다. 시스템에는 목적이 있는 거다. '성진우를 강하게 만들겠다'가 아니라 '강한 성진우가 필요하다'는 목적이. '상황에 따라선 같은 헌터들조차도 가차 없이 죽일 수 있는...' 그러한 의도가 퀘스트 속에서 엿보였다. 진우는 다시금 안도했다. '다행이다.' 우연이 아니어서. 의도가 분명해서. 위기를 겪을 때마다 항상 강해지고 싶었다. 낭떠러지 끝에 간신히 매달린 것 같은 아슬아슬한 삶을 늘 벗어나고 싶었다. 그런데 그날, 가장 위험했던 순간에 기회가 찾아왔다. 시스템의 목적은 진우의 바람과 정확히 일치했다. '시스템은 나를 이용하고, 나는 시스템을 이용하고.' 그러면 되는 거다. 목적이 존재하는 한 이 기현상은 갑자기 사라지는 일은 없을 테니까. 진우가 돌무더기 속에서 일어났다. [체력: 1360 / 2600] 역시 C 급 헌터의 마법이었다. 한 방을 맞았을 뿐인데 체력이 반이나 줄어 있었다. 이제 여유를 부릴 수 있는 여력은 없었다. 진우의 눈빛에 독기가 서렸다. 진우는 황동석을 향해 걸음을 뗐다. "어라?" 겁에 질린 유진호를 둘러싸던 황동석 일행도 뒤늦게 다가오는 진우를 발견했다. "뭐야, 쟤 살았네?" "규환이 형도 많이 죽었는데?" "무슨 망신이야, E 급한테." 황동석이 또다시 턱을 긁적거렸다. "규환아, 제대로 좀 하지 그랬냐?" 조규환의 얼굴이 벌게졌다. "그... 그러게요." 아닌데. 분명 전력을 다한 마법이었는데. 마력을 1/3 을 쏟아부었는데 어떻게 일어난 거지? 혹시 빗맞았나? 아냐, 빗맞았다면 소리가 그렇게 클 수가 없잖아? 많은 의문이 떠올랐지만 물어볼 틈은 없었다. 진우가 먼저 입을 열었기 때문이다. "사람 목숨 가지고 장난을 쳤으니." 황동석 일행의 시선이 진우에게 고정되었다. 진우는 황동석 일행 앞에 걸음을 멈췄다. 유진호는 흠칫 놀랐으나, 다른 헌터들의 반응은 미미했다. 몇몇은 표정에 조소를 보이기도 했다. 진우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만한 각오는 되어 있겠지?" 그 말에 황동석이 허- 하며 코웃음 쳤다. "이 자식이 지금 뭐래는 거야?" "형님, 제가 처리할게요." 뱁새눈 헌터 하나가 다가와 진우의 목에 팔을 척 걸쳤다. "형씨가 지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본데." 팔에 힘을 주던 뱁새눈의 표정이 점점 이상해졌다. '...뭐지? 왜 안 꺾이는 거냐?' 완력으로 헤드락을 걸려고 했지만 암만 힘을 줘도 진우의 상체가 꺾이지 않았다. 이 자식, E 급이라고 하지 않았나? 뱁새눈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갔다. '무슨 힘이 이렇게...' 그때였다. 스걱. 뱁새눈의 머리가 땅에 떨어졌다. 툭. "주, 준태야!" 황동석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뭐, 뭐야? "저 새끼 언제 칼을!" "어디서 난 거야!" 황동석 일당은 급히 무기를 꺼내며 몇 걸음 뒤로 물러섰다. 진우의 손에는 어느새 소환된 '카사카의 독니'가 들려 있었다. 단검 끝에서 피가 뚝뚝 떨어졌다. 띠링. [처치해야 할 적의 숫자: 7 명] [처치한 적의 숫자: 1 명] '일곱 남았다.' 23 화 진우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처럼 황동석 일행을 하나씩 훑어보았다. 황동석은 침을 꿀꺽 삼켰다. 갑자기 놈의 손에 나타난 단검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박준태의 죽음이 더 충격적이었다. 'E 급 헌터가 어떻게 D 급 헌터를 한 번에?'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는 몰라도 더 이상 방심은 금물이었다. 신중해야 했다. 황동석은 옆으로 눈빛을 보냈다. '규환아, 한방 더 먹여 줘라.' 조규환이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이번엔 실수하지 않는다! 속으로 다짐한 조규환의 손끝에 빛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빛의 화살이 손끝을 떠나기 전에, 진우가 먼저 조규환의 코앞에 나타났다. "어, 어?" 조규환이 입을 떡 벌렸다. 진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화력이 강하고 체력이 약한 마법계열 헌터부터.' 이미 머릿속부터 모든 계산이 끝난 뒤였다. 단검이 조규환의 목에 박혔다. 푹! "커헉!" 조규환은 구멍 난 목을 붙잡고 쓰러졌다. 털썩. "죽여!" "으아아아!" 그것을 신호로 주위에 있던 헌터들이 전부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진우는 촉각을 곤두세우고 침착하게 적들의 움직임에 집중했다. 소리가 사라지고, 시간이 느려진다. 38 포인트까지 올라간 민첩 스탯의 힘이 발휘되기 시작했다. 지척에서 빈틈없이 쏟아지는 검, 창, 화살을 차례대로 막거나 피해 냈다. 헌터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 어떻게 E 급이 이런 움직임을?' '너무 빨라!' '공격을 맞출 수가 없다!' 헌터들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해 갔다. 속도는 상대적인 것. 그들의 눈에는 진우의 움직임이 가공할 만큼 빠르게 느껴졌다. 진우는 헌터들 사이를 누비며 그들의 급소를 하나씩 베어 갔다. ['효과:마비'가 발동합니다.] ['효과:출혈'이 발동합니다.] ['효과:마비'가 발동합니다.] 단검 '카사카의 독니'의 특수 효과가 연달아 터지며 헌터들을 혼란에 빠트렸다. "모, 몸이 안 움직여! 으악!" "마법? 마법이야?" "이 개새끼가!" ['효과:출혈'이 발동합니다.] ['효과:마비'가 발동합니다.] ['효과:마비'가 발동합니다.] "컥!" "대, 대체 저 새끼 정체가 뭐야!" "으아아악!" 여기저기서 비명들이 쉴 새 없이 터져 나왔다. 진우를 에워쌌던 다섯이 순식간에 쓰러졌다. 털썩. 털썩. 띠링. [처치해야 할 적의 숫자: 1 명] [처치한 적의 숫자: 7 명] 진우는 마지막 남은 한 명을 돌아보았다. 거구의 털보, 황동석. 황동석은 비장한 얼굴로 방패를 바닥에 내던졌다. 그리고 기합을 넣었다. "우워어어어어어!" 황동석이 이내 바닥을 박차며 돌진했다. 쿵, 쿵, 쿵, 쿵! 그는 달리면서 생각했다. 이쪽은 탱커, C 급에서도 상위에 속했다. 저쪽은 아마도 딜러. 움직임을 보아 제법 민첩하긴 하다만 '강화' 스킬을 뚫을 만한 파워는 없을 터. '겨우 단검 따위로는 내게 치명상을 줄 수 없다!' 부딪치는 순간 박살 나는 쪽은 성진우다!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고, 황동석은 어깨를 들이밀었다. "강화!" 그때 시야가 빙그르르 회전하더니 어느새 던전의 천정이 보였다. 쿵! 머리가 흔들리며 목과 등에 강한 충격이 전해졌다.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애를 쓰던 황동석은 다시 바닥에 드러누웠다. "쿨럭!" 입에서 피가 튀어나왔다. '나를... 나를 집어 던진 건가?' 이 황동석이가 힘에서 졌다고? 힘 싸움에서? "E 급 따위가 어떻게..." 뭔가 착오가 있는 게 분명했다. C 급 다섯에 D 급 셋이 순식간에 당했다. 놈은 절대 E 급 수준이 아니었다. 진우가 황동석 옆에 섰다.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황동석. 이미 승부는 났다. 이것이 스포츠나 대련이었다면 여기서 끝났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자, 잠깐." 황동석이 손을 들어 올렸다. "사, 살려다오! 돈, 돈이라면 주마. 얼마든지 주마. 목숨만 살려 준다면..." "세 번." 진우가 차갑게 말했다. "세 번이나 죽이려 한 상대에게 목숨을 살려 달라니 좀 뻔뻔하지 않나?" 보스 방 입구를 막아서 한 번. 유진호를 시켜서 한 번. 그리고 조규환의 마법으로 또 한 번. 황동석은 모두 세 차례 진우를 죽이려 했다. 방금 싸움은 뺀다고 해도 말이다. 기브 앤 테이크. 지하 신전에서 살아 돌아왔을 때 진우는 받은 만큼 돌려주기로 마음먹었다. 그게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악의는 악의로 갚는다. 타협은 없었다. 목숨 구걸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게 된 황동석이 눈을 부릅뜨며 입에 거품을 물었다. "너, 너 이런 짓을 하고도 무사할 것 같으냐! 내 동생이 누군 줄 알고 너 따위가." 두둑! 목뼈가 부러진 황동석은 말을 잇지 못했다. "컥." 황동석의 눈에 흰자위가 드러났다. 띠링. [처치해야 할 적의 숫자: 0 명] [처치한 적의 숫자: 8 명] 드디어 퀘스트가 끝났다. "후우-." 진우는 여러 의미가 담긴 한숨을 길게 내쉬며 황동석의 머리에서 손을 뗐다. 문득 자신의 손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비록 일방적으로 이기긴 했다지만 방금 전 여덟 명과 생사를 건 사투를 펼쳤음에도 불구하고 손은 전혀 떨리지 않고 있었다. '이래도 되는 건가?' 진우는 가슴 부근에 손을 대고 가만히 심장 박동을 느껴 보았다.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은 평상시처럼 차분하게 뛰고 있었다. '어쩌면...' 지하 신전에서 돌아온 뒤로 변한 것은, 시스템이 보이기 시작한 것뿐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처음으로 들었다. 그러나 상념도 잠시. 곧 익숙한 전자음이 울렸다. 띠링. ['긴급 퀘스트: 적들을 처치하라'를 완료하셨습니다.] [완료 보상이 도착하였습니다.] [보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Y/N)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역시나 보상이 들어왔다. 진우는 망설이지 않고 확인을 선택했다. '확인.' 띠링. [아래와 같은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상 1. 상태 회복 보상 2. 능력치 포인트 +10 보상 3. 스킬: '살기' '10 포인트에다 스킬까지 준다고?' 엄청난 보상에 진우의 눈이 커졌다. 능력치 포인트도 포인트지만 특히 새로운 스킬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만약 거미와 싸울 때 질주 스킬이 없었다면...' 보스를 잡은 건 질주 덕분이었다. 실전에서 스킬의 중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괜히 스킬을 배울 수 있는 룬석이 억 소리 나게 비싼 게 아니었다. 진우는 곧바로 '스킬: 살기'를 확인했다. '보상 3 확인.' 띠링. [스킬: 살기 :Lv1] 액티브 스킬. 필요 마나 100. 강력한 기운으로 지정한 대상을 1 분간 공포 상태에 빠트립니다. 다수의 대상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효과 '공포': 모든 능력치 -50% 비록 일시적이긴 하지만 상대의 모든 능력치를 감소시킬 수 있는 희귀한 스킬이었다. 다른 효과들처럼 저항력이 높은 상대에겐 통하지 않겠지만, 일단 먹히기만 하면 어떤 상대든 손쉽게 제압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됐다. 거기다 다수를 대상으로 지정할 수 있다고 하니 활용 가능성이 무궁무진해 보였다. '좋은데?' 페널티가 컸던 만큼 보상 또한 상당했다. '잠깐... 따지고 보면 그렇지도 않나?' 이쪽은 목숨이 걸려 있었는데. 어디 그것뿐인가? 진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처참한 광경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많은 헌터들의 죽음을 곁에서 지켜봐 왔지만, 역시 시체를 보는 건 쉽게 익숙해지지 않았다. 이게 퀘스트가 원하던 결과였다. 많은 목숨이 걸렸던 퀘스트치고는 보상이 부족한 것 같기도 했다. 퀘스트가 아니었더라도 황동석 일행과의 싸움은 피할 수 없었겠지만.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고...' 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때 또다시 동굴이 흔들렸다. -쿠르르르르릉 흔들림이 이전보다 훨씬 더 심해졌다. 슬슬 던전을 빠져나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러기 위해서 약간의 뒷정리가 필요했다. 일단은 유진호. 진우의 시선이 유진호에게 향했다. 불쌍할 정도로 얼어 있던 유진호가 흠칫 놀라며 시선을 내리깔았다. '저건 어떡한다...' 물론 유진호까지 해칠 생각은 없었다. 그럴 필요도, 이유도 없고. 하지만 여기서 있었던 일이 밖으로 새어 나가면 여러모로 귀찮아질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니 입단속 정도는 시키는 게.' 좋지 않을까, 라고 결론을 내렸을 때 유진호가 잽싸게 달려와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형님, 살려 주십시오!" "..." 생각보다 말이 잘 통하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 유진호는 벌벌 떨고 있었다. 안색도 창백했다. 눈앞에서 여덟 명이 순식간에 죽었으니 그럴 수밖에. 사람을 다루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무기 중 하나가 바로 이 '두려움'이다. 그래서 진우는 상황을 조금 이용하기로 했다. "내가 왜 그래야 하지?" 히익! 방금 유진호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너무 심했나, 하는 죄책감도 잠시. "돈, 돈이 필요하시면 제가 아버지께 말씀드려서." "나를 뭘로 보고!" 진우가 인상을 팍 썼다. 평생 없이 살았지만 죄 없는 사람의 목숨을 인질로 잡고 돈을 뜯어낼 만큼 타락하진 않았다. 그래서야 황동석과 다를 바가 없지 않은가. "죄, 죄송합니다." 유진호가 잔뜩 겁먹은 상태만 아니었다면 뒤통수라도 한 대 후려쳤을 거다. 지금 그랬다가는 애가 심장마비로 쓰러질 것 같아서 최대한 참고 있지만. 진우의 얼굴이 굳어진 걸 보고, 유진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러고 보니 방금 전 황동석이 돈을 주겠다고 했을 때도... 혹시 물욕을 버리고 오직 피와 살육의 길만을 정진하시는 건가?' 유진호의 머릿속에서 진우의 이미지가 더욱더 이상한 쪽으로 굳어지고 있었다. 하지만 아직 단정 짓기는 일렀다. '그렇다면 형님께선 아까 왜 마정석을?' 불과 조금 전 진우는 거미의 뱃속까지 뒤져 가며 마정석을 꼼꼼히 챙겼다. 고도의 에너지 자원, 마법 도구의 제작 재료 등 여러 용도로 폭넓게 쓰이는 마정석이었지만, 헌터에게 마정석이란 단어는 결국 돈의 다른 말이나 마찬가지였다. 유진호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그렇구나!' 그것은 피의 대가인 것이다. 손에 피를 묻힌 정당한 대가이기 때문에 뱃속을 뒤지는 수고까지 마다치 않으셨던 거다. 자신을 건드린 적에겐 일말의 자비도 없지만, 땀 흘리지 않고 얻는 이득에는 관심 없는 피의 수도자. '그런 형님의 자비를 돈으로 사려고 했으니 화를 내시는 게 당연하지.' 그렇다면 지금 필요한 것은 '아버지의 돈' 따위가 아니라 자신이 죽지 않음으로써 형님이 얻을 수 있는 '정당한 이득'이었다. 힐끔 눈치를 살피니 아직도 진우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유진호는 빠르게 말을 이었다. "형님, 저를 살려 주신다면 이번 던전의 수익은 형님께 모두 드리겠습니다." "음?" 역시 진우가 관심을 보였다. "생각해 보세요, 형님. 10 명이 있었던 팀에서 아홉 명이 죽고 형님이 파티의 수익을 독차지하면 누구나 형님을 이상하게 보지 않겠습니까?" 유진호가 보기에 진우는 부정 등록자가 확실했다. 그것도 살인을 즐기는 상위 랭크의 부정 등록자! 당연히 남의 시선이 신경 쓰일 수밖에 없을 처지였다. "그래서?" "반대로 저와 형님이 살아나가면 계약대로 이 던전의 마정석은 모두 제 것이 됩니다. 팀원이 다 죽었다고 해도 형님께 지분이 없으니 아무도 형님 짓이라고 생각 못 할 겁니다." 물론 유진호가 의심받을 가능성도 전혀 없었다. 유진호는 국내 굴지 기업 회장님의 아들이니까. 마정석을 팔아 얻을 수익쯤은 푼돈인 것이다. "형님께서 마땅히 가져가셔야 할 돈입니다. 황동석 일당을 죽이고 저를 구해 주신 게 형님이시니 정당한 대가 아닙니까?" 24 화 유진호는 '정당'이란 단어를 유난히 강조했다. '확실히...' 그게 가장 안전하게 마정석을 챙기는 방법이긴 했다. 마정석들은 지금 주인을 잃은 상태였다. 황동석이 아무리 욕심을 부렸어도 저승까지 마정석을 가져가지는 못했다. 딱 한 사람, 유진호만이 마정석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그 유진호가 알아서 마정석을 바치겠단다. 강제로 뺏는 거라면 사양하겠지만... '굴러 온 복을 걷어찰 필요는 없잖아?' 자신의 도움이 아니었다면 유진호는 벌써 죽었거나 인질로 끌려다니고 있었을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정당한 대가라는 말도 꽤 일리가 있었다. 진우의 표정이 풀어지는 것을 보고, 유진호는 추측이 맞았음을 확신했다. '역시 마정석들은 황동석 일행을 사냥해서 얻은 정당한 피의 대가기 때문에 거부하지 않으시는 거야.' 두 사람이 생각하는 '정당함'의 의미는 크게 어긋나 있었지만 당사자들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좋다." 진우의 승낙에 유진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철저히 자신의 신념을 지키는 진우에게 약간의 경외감마저 들기 시작한 유진호였다. 그런데 진우의 얼굴이 다시 무표정하게 변했다. "하지만 널 어떻게 믿지?" 진우의 머릿속에 처음 목적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애초에 이익을 얻으려고 공포감을 조성했던 게 아니었다. 귀찮은 일을 미연에 방지하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다. "제 목숨을 몇 번이나 구해 주신 형님을 어떻게 배신하겠습니까?" "약속한 건 무시하고 여기저기 떠들어 댈 수도 있잖아?" 사실 떠들고 다녀도 크게 문제 될 건 없긴 했다. 황동석 일행을 죽인 건 100 퍼센트 정당방위니까. 상대는 여덟 명에 모두 무장 상태. 강력한 마법으로 선공까지 가해 왔다. 헌터들의 등장으로 법이 달라진 지금, 이 정도면 확실히 무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래도 되도록 시끄러운 일 없이 조용하게 넘어가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유진호의 협조가 필요했다. 협조를 요구하는 방식에 문제가 있기는 해도 효과는 이게 확실했다. "응?" 진우가 대답을 요구하듯 지그시 바라보았다. 유진호가 비장한 얼굴을 했다. "그렇게 비겁한 짓은 하지 않습니다. 특히 목숨을 구해 준 은인께는 더더욱요." '잠깐만...' 저 눈빛, 어디선가 본 것 같다 싶었는데 아까 황동석 일행의 공범 제안을 거절할 때 유진호가 보여 줬던 것과 같았다. '이 녀석... 진심이구나.' 기브 앤 테이크. 유진호는 목숨의 걸린 기로에서 진우를 택했다. 진우를 믿고 여덟 명의 헌터들과 맞서려고 했다. 그래서 진우도 유진호를 한번 믿어주기로 했다. 물론 지금 바로는 좀 그렇고... 약간의 경각심을 심어 준 뒤에. 진우는 바닥에 내팽개쳐져 있던 황동석의 방패를 집어 들었다. "황동석한테 맞은 뒤통수가 아직도 얼얼한데." 방패를 이리저리 살펴보던 진우가 동굴 벽을 향해 있는 힘껏 던졌다. 쾅! 방패의 절반 이상이 벽 깊숙이 박혔다. 유진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꼴깍 삼켰다. "우리 동생까지 날 실망시키지 않겠지?" "무, 물론입니다, 형님." 그때였다. 또다시 던전이 세차게 흔들렸다. -쿠구구구구구구구궁. 이제 시간이 없었다. 어차피 처음부터 유진호를 해칠 생각이 없었던 진우는 이만하면 충분하다고 판단을 내렸다. 진우가 유진호에게 명령했다. "마정석 전부 챙겨. 던전에서 나간다." "감사합니다, 형님!" 유진호가 일어나 기역 자로 반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유진호의 얼굴에 웃음이 돌아왔다. 진우는 유진호가 가방을 챙기러 간 사이 황동석의 주머니를 뒤졌다. '나도 받을 건 받아야지.' 오늘 받기로 한 일당 2 백. 한 푼도 놓칠 수 없었다. 황동석의 지갑 안에는 5 만 원짜리가 수십 장 들어 있었다. 세어 보니 모두 45 장. 2 백만 원이 조금 넘었다. 끝나는 즉시 현찰로 준다더니 미리 준비해 뒀던 모양이었다. 매번 꼬리 자르기를 쓸 수는 없으니 말이다. "일당은 잘 받아 간다." 진우는 듣는 사람 없는 인사를 하고서 먼저 자리를 떠났다. 뒤늦게 마정석이 담긴 가방을 챙겨 온 유진호가 이미 사라진 진우를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형님?" 주변엔 진우에게 당한 헌터들 시체들 뿐이었다. "히익!" 얼굴이 파랗게 질린 유진호가 혹시나 놓칠세라 헐레벌떡 진우의 뒤를 쫓아갔다. *** 현장에 협회 조사과 직원이 도착했다. 레이드 중 사망자가 생겼을 때의 절차는 간단했다. 협회에 상황을 알리고 조사를 받기만 하면 끝난다. 이번 조사원은 깐깐하게 생긴 아줌마였다. "두 분은 성함이?" "성진우." "저는 유진호입니다." 헌터가 던전에서 죽는 사고야 비일비재하기 때문에 형식적인 절차에 가까웠다. 그냥 기록으로만 남겨 두는 거다. 뭔가 의심스러운 점이 없다면 말이다. "...그런데 C 급 헌터분들이 전멸하고 D 급 한 분, E 급 한 분만 빠져 나오셨네요?" 조사원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물었다. 그녀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보통 레이드의 희생자는 팀에서 가장 약한 헌터인 경우가 대부분인데...' 두 사람을 꼼꼼히 살펴보던 그녀는 무언가를 발견하고 목소리를 높였다. "어머나!"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다가왔다. "이거 마야 사에서 이번에 새로 출시한 장검 '칼리온' 아닌가요? 어멋, 이건 장인 그레도스 씨가 제작한 로열 시리즈 방패네요?" 유진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무기를 좀 아시는군요!" "에이, 알긴요. 그저 신상 목록이나 훑어보는 수준이죠. 호호호호홋!" 장검의 가격은 7 억. 방패의 가격은 5 억 억대를 넘는 마정석과 값비싼 소재들을 이용해 만든 고가의 무구들로, D 급 헌터를 C 급 이상으로도 만들어 줄 수 있는 강력한 장비들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서 던전 안 상황이 자동적으로 그려졌다. '이 정도 장비들이라면...' C 급 헌터들이 전멸하는 상황에서 D 급 헌터가 혼자 보스를 잡는 것도 가능할 듯했다. 'E 급 헌터는 어디 구석에서 숨어 있다가 목숨을 건졌을 테고.' 사실은 정확히 그 반대였지만. 어쨌든 그녀는 결론을 내렸다. 이런 장비를 구매할 수 있는 재력을 가진 사람이 고작 마정석 몇 개 때문에 동료들을 배신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거기다 E 급 헌터 혼자서 C 급 헌터 여럿을 어찌할 순 없었을 테니 황동석 외 일곱 명의 죽음은 사고로밖에 볼 수가 없다고 말이다. "알겠습니다." 조사원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기록지를 덮었다. "조사는 이걸로 끝났으니 이제 가셔도 됩니다. 오늘 많이 힘드셨을 텐데 성실히 조사에 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진우가 두 사람을 대표해 인사했다. 조사원이 탄 승용차가 왔을 때처럼 빠르게 현장을 떠나갔다. "형님도 수고하셨습니다." 유진호가 90 도로 허리를 숙였다. 게이트를 나오고 나서도 그 깍듯한 태도에는 여전히 변화가 없었다. 무섭기는 많이 무서웠던 모양이었다. 진우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너도 수고했다." "제가 뭐 한 게 있나요. 형님이 다 하셨지. 여기, 형님 마정석입니다." 진우는 유진호가 공손하게 두 손으로 건네는 가방을 받아 들었다. 가방 안은 마정석들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C 급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정석의 최고가는 천만 원. 아무리 작은 것도 수백만 원을 호가한다. 진우는 눈대중으로 마정석의 숫자를 세다가 속으로 탄성을 내질렀다. '이게 다 얼마야...?' 자꾸만 웃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참느라 애를 써야 했다. 그런데 갑자기 가방 안에 물방울들이 하나둘 떨어졌다. 톡. 톡.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오후부터 차츰 흐려지던 하늘에서 내리기 시작한 빗방울이었다. '우산... 챙겨 보내기 잘했네.' 진우는 문득 떠오른 동생 생각에 옅게 미소를 지었다. *** 밤이 깊어 가는 시간. 진우는 집에 도착하자마자 상태창을 불러냈다. "스탯!" [스탯] 근력: 53 체력: 30 민첩: 38 지능: 30 감각: 32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10) 긴급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10 포인트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이걸 쓰고 싶어서 몸이 근질근질했다. 일일 퀘로 치면 3 일하고도 1 포인트를 더 모아야 하고, 레벨로 쳐도 2 업을 해야 겨우 받을 수 있는 포인트였다. '최우선은 민첩이다. 그다음은 감각.' 민첩에 7 포인트를 주고 나머지 3 포인트를 감각에 투자했다. [스탯] 근력: 53 체력: 30 민첩: 45 지능: 30 감각: 35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오케이." 능력치가 고르게 상승했다. 민첩은 근력을 많이 따라잡았고, 감각도 어느새 35 포인트나 됐다. 민첩이 근력과 비슷해지면 이제 체력에 포인트를 투자할 생각이었다. 아직 쓰임새를 모르는 지능 말고는 모든 스탯을 골고루 올리고 싶었다. "오늘 성과를 한 번 볼까?" 이름: 성진우 레벨: 21 직업: 없음 칭호: 늑대학살자 HP: 2600 MP: 390 피로도: 0 [스탯] 근력: 53 체력: 30 민첩: 45 지능: 30 감각: 35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액티브 스킬: 질주 Lv.1, 살기 Lv.1 3 계단 뛰어오른 레벨과 새로 얻은 스킬 '살기'가 눈에 들어왔다. 10 포인트가 더해진 덕분에 스탯도 대폭 올랐다. 이 정도만 해도 괄목할 만한 성과인데, 오늘 얻은 것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일당으로 받은 2 백만 원에.' 가방 가득 들어찬 마정석까지. 진우는 마정석의 개수를 세었다. '거미에서 나온 마정석이 11 개, 황동석 팀의 마정석이 38 개.' 다 합치면 49 개! 개당 5 백만 받아도 2 억이 넘는 돈이 생기는 것이다. "하루 사냥으로 2 억이라니." 10 명, 아니 아홉 명이 나눠 먹어야 할 돈을 혼자 챙기니 액수가 엄청나게 커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행운이 넝쿨째 굴러들어 온 셈이었다. '이제 이걸 팔기만 하면 된다.' 마정석을 파는 건 어렵지 않았다. 사려는 이들이 워낙 많아서 매물로 내놓기만 하면 금방 사라지니까. 문제는 어디에 파느냐 하는 것이다. 개인 대 개인으로 거래하는 경우도 많았고, 길드나 기업 같은 단체가 사들이기도 했다. 이번 경우에는 양이 많아서 개인 거래나 온라인 거래보다는 전문 업체에 직접 가서 파는 게 좋을 듯싶었다. '그냥 상점에 팔 수는 없나?' 잡템들처럼 상점에서 마정석을 제값에 사 주면 편할 텐데. 진우는 그런 생각들을 하며 마정석이 담긴 가방을 구석으로 밀어 넣었다. 그러다 문득 오늘의 성과 하나가 더 떠올랐다. '이제부터 상점의 구매 기능을 사용할 수 있다고 했었지?' 진우는 곧바로 상점을 불러왔다. 많은 돈은 아니지만 합정역 인던을 돌 때 모아 두었던 골드가 아직 창고에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구매." 띠링. 익숙한 전자음과 함께 구매 가능한 아이템 목록이 끝도 없이 뜨기 시작했다. 싸구려 포션과 잡다한 장신구에서부터 값비싼 방어구와 화려한 무기들까지. 많은 물건이 골드로 판매되고 있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비쌀수록 옵션이 좋았다. 최상위 아이템 중에는 100 억 골드까지 하는 것도 있었다. "워... 100 억이라." 현재 보유 골드는 고작 11 억 2 천. 쓸 만한 물건을 사기엔 턱없이 부족한 금액이었다. 하지만 서두를 필요는 없었다. 시간은 충분하니까. '골드만 모으면 이걸 다 살 수 있단 말이지?' 진우는 콧노래를 부르며 고가의 아이템들을 계속해서 둘러보았다. 인던을 가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벌써부터 내일의 퀘스트와 보상으로 받을 랜덤 박스가 기다려지기 시작했다. 25 화 11. 정리 C 급 게이트에 다녀온 지 3 일이 지났다. 토요일이라 집에 일찍 온 진아가 코를 킁킁거리더니 빠르게 신발을 벗어던졌다. "오빠 뭐야, 닭 시켰어?" "안 그래도 너 올 시간 딱 맞춰 시켜 놨다." "우왕!" 식탁 옆에 앉은 진우가 손짓하자 진아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쪼르르 달려왔다. "이야, 웬일이셔? 짠돌이 오빠가. 좋은 일이라도 있었어?" "야야, 가방부터 좀 내려놓고 와라. 무슨 여자애가 그리 성격이 급하냐." "됐거든. 가방 하나도 안 무겁거든?" 얼마 전에는 가방 무겁다고 접이식 우산 하나 챙겨 가기 싫어했던 녀석이. 진우는 혀를 끌끌 차면서도 자꾸 새어 나오는 미소를 숨기기 힘들었다. '좋은 일이 있었냐고?' 당연히 있었다. 오늘 통장의 잔고가 80 만 원에서 1 억 8 천 30 만 원으로 늘었다. 1 억 8 천은 마정석을 팔고 받은 돈이었고, 50 만 원은 집주인 아저씨에게 집세로 보내드렸다. 1 억 8 천! 레이드 한 번에 1 억 8 천이란 거금을 손에 쥐게 된 것이다. 헌터 생활은 꾸준히 해 왔지만 이제야 진짜 헌터가 된 기분이었다. 헌터하면 사람들이 돈부터 떠올리는 시대가 됐으니 말이다. 마정석을 들고 찾아갔을 때 마정석 거래소 직원이 지었던 표정이 아직도 생생했다. "이, 이걸 혼자서 다 잡으신 겁니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 "세상에... 대단하십니다." C 급 마정석 49 개. 처음 감정 가격은 3 억이 조금 넘었다. 하지만 세금이 그렇게 셀 줄이야. "세금이 40 퍼센트나 된다고요?" "네. 개인이 판매할 때는 세금으로 40 퍼센트가 나가고요, 길드가 판매할 때는 10 퍼센트가 나갑니다." "길드의 세금이 적은 이유가 있습니까?" "길드들은 개인 공격대와 달리 동원령이 떨어지면 무조건 협조해야 하니까요." 하긴 기억을 더듬어 보면 이중 던전에서 사고가 있었을 때도 협회 감시과 직원들과 함께 '백호' 길드가 현장을 찾았다고 했다. 특혜를 받고 있기 때문에 길드도 그만큼 국가와 협회의 부탁에 협조하는 거다. 그래서 잠깐 고민을 했었다. '차라리 마정석을 가지고 있다가 길드에 가입한 뒤에 처분할까?' 하지만 곧 단념했다. 길드에 들어 활동할 때쯤엔 주 공략 대상이 A,B 급 게이트가 될 것이다. 거기서 나오는 마정석은 C 급 게이트에서 나온 것과 가격을 비교할 수 없을 터. 한 푼이 아쉬운 건 지금이었다. '세금 좀 줄이겠다고 당장 아무 길드 계약서에 함부로 도장을 찍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알겠습니다. 거래하죠." 1 억 8 천은 그렇게 나온 금액이었다. 좋은 일 있냐는 진아의 말처럼 치킨과 맥주는 거금을 얻은 걸 기념하는 축하 파티였다. "잘 먹겠습니다." 슬쩍 맥주 캔으로 손이 가는 진아의 이마를, 진우의 손가락이 강타했다. 딱! "아야!" "넌 이거." 진아 앞에 콜라 캔이 놓였다. "히잉... 장난 좀 친 건데..." 빨갛게 변한 이마를 문지르는 진아를 두고, 진우는 시원한 맥주 캔을 따서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때였다. 띠링. 진우가 기계음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갑자기 웬 시스템 메시지?' [해로운 성분이 감지되었습니다.] ['버프: 해독'의 효과로 치료를 시작합니다.] [3, 2, 1... 해독이 완료되었습니다.] '해로운 성분을 해독했다고? 설마 알콜을 말하는 건가?' 진우는 남은 맥주를 다 마시고, 그 자리에서 한 캔을 더 뜯었다. 꿀꺽꿀꺽. [해로운 성분이 감지되었습니다.] ['버프: 해독'의 효과로 치료를 시작합니다.] [3, 2, 1... 해독이 완료되었습니다.] 역시나 같은 메시지가 떴다. 눈 깜짝할 사이에 맥주 두 캔을 비웠는데도 취기가 전혀 오르지 않았다. 버프인지 뭔지 효과 하나는 확실했다. '뭐지?'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직 버프를 걸어 주는 헌터는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었다. 그런 특별한 능력을 가진 헌터는 대부분 길드에서 일한다. 협회 소속으로는 만날 기회도 없는 것이다. '만약 누군가 몰래 버프를 걸었다고 해도 시스템 메시지가 알려 줬을 텐데.' 그렇다면 가능성은 두 가지. 의식이 없을 때 버프를 받았다거나, 시스템이 작동하기 전에 버프를 받았다는 것. 개인적으로 후자에 더 무게가 실렸다. "오빠, 왜 그래? 체했어? 조심 좀 하지." 진우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진아가 걱정스레 물었다. "갑자기 급한 일이 떠올라서 그래. 너 먼저 먹고 있어." 진우는 방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예전에 혹시 뭔가 놓친 것이 없는지 사소한 기억 하나도 꼼꼼하게 되짚어 보았다. '아.' 번뜩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다. '모든 퀘스트에는 보상이 있었다. 심지어 페널티 퀘스트까지. 그런데 유일하게 보상을 확인하지 못한 퀘스트가 있었지.' 진우는 급히 메시지함을 열었다. 당시는 시스템이 먼지, 보상이 뭔지 몰라서 그냥 넘겼었지만 그때 분명 퀘스트 완료 조건을 충족했다는 메시지가 떴었다. 심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진우는 메시지함 가장 아래에 있는 메시지를 찾았다. [플레이어]가 되신 것을 환영합니다. (확인 완료) 진우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확인." 띠링. [본 시스템은 '플레이어'의 성장을 지원합니다.] [본 시스템의 지시에 불응할 경우 페널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보상 지급이 완료되었습니다.] 역시나. 보상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지하 신전에서 처음으로 들었던 목소리. 목소리는 이렇게 말했었다. ['시크릿 퀘스트: 무력한 자의 용기'의 완료 조건을 모두 충족하셨습니다.] 시크릿 퀘스트도 엄연한 퀘스트. 그러나 아직 그 보상을 확인한 적이 없었다. 그때는 망상이라고 생각했었으니까. [...불응할 경우 페널티가 있을 수 있습니다.] [보상 지급이 완료되었습니다.] [보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Y/N) '예스.' 띠링. '시크릿 퀘스트: 무력한 자의 용기' 완료 보상] 대주술사 칸디아루의 축복 당신의 용기에 탄복한 대주술사 칸디아루가 당신을 위해 특별한 주문을 선물했습니다. 칸디아루의 축복이 함께하는 한 당신은 늘 튼튼하고 건강한 삶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도전자의 앞날에 광명이 있으라." -일시 효과 '재활의 의지': 손상된 신체의 모든 부위를 복구합니다. -지속 효과 '무병장수': 모든 질병과 독성 및 이상 효과에 면역상태가 되며, 수면 시 재생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이제야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다친 다리가...' 잘렸던 다리가 원 상태로 돌아온 것은 퀘스트의 보상 때문이었다. 지금 맺구에 취하지 않는 것 역시. '잠깐, 모든 독에 면역 상태가 된다고?' 진우의 눈이 번쩍 뜨였다. 그럼 설마 이것도...? 진우가 부랴부랴 창고에서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아이템: 카사카의 독샘] 입수 난이도: A 종류: 비약 정제된 카사카의 독액이 담겨 있는 주머니입니다. 카사카를 잡으면 극히 희박한 확률로 얻을 수 있습니다. 독액을 마시면 단단한 피부를 얻게 되지만 독성으로 인해 근육이 영구적으로 손상됩니다. 효과 '카사카의 철갑 비늘': 물리 데미지 20% 감소 부작용 '손상된 근육': 근력 -35 '독성으로 인해 근육이 손상되는 거라면 해독 버프로 막을 수 있지 않을까?' 알아보는 방법은 한 가지뿐. 진우는 눈을 질끈 감고 주머니 안에 든 액체를 마셨다. 꼴깍꼴깍. 끈적끈적한 액체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맛은 역하고 비렸지만 꾹 참고 먹었다. '몸에 좋은 건 입에 쓰다더니...' 독액을 모두 삼키자 메시지가 떴다. [해로운 성분이 감지되었습니다.] ['버프: 해독'의 효과로 치료를 시작합니다.] [3, 2, 1... 해독이 완료되었습니다.] ['부작용: 손상된 근육'이 사라집니다.] "역시!" 진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래도 혹시 몰라 스탯창을 불러 왔다. '스탯.' [스탯] 근력: 53 체력: 30 민첩: 53 지능: 30 감각: 35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물리 데미지 감소: 20% 예상대로 근력의 감소는 없었다. 근력은 53 포인트 그대로였고, 물리 데미지 감소라는 새로운 능력치가 생겼다. 물리 데미지 한정이지만 피해를 20 퍼센트나 격감시켜 주는 경이로운 능력치였다. "좋았어!" 진우가 새 스탯에 기뻐하고 있을 때, 거실에서 진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빠, 유진우라는 사람 알아? 유진우라는 사람이 오빠 찾는데?" "그거 아마 유진우가 아닐걸..." 진우는 거실로 나가 동생이 들고 있는 수화기를 뺏어 들었다. "전화 바꿨습니다." -형님, 접니다. 유진호. 역시나. 수화기 너머 목소리는 낯익었다. "...번호는 어떻게 알았냐?" -협회에 아는 분이 있어서요. 폰으로는 안 받으셔서 부득이하게 전화로. "용건만." -아! 죄송합니다, 형님. 그런데 전화로는 말씀드리기가 좀... 혹시 만나뵙고 이야기 드릴 수 있을까요?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얘는 그런 일을 겪고도 나를 만나고 싶나?' -꼭 좀 부탁드릴게요, 형님. 하여튼 별난 녀석이었다. *** 유진호의 간청에 진우는 딱 1 시간을 허락해 주었다. 약속 장소는 집 앞의 프렌차이즈 카페. [카페 X 네] 평일이라 불구하고 점심시간 직후의 약속이라 카페 안엔 사람들이 꽤 있었다. "형님, 여깁니다!" 유진호가 반갑게 인사했다. 카페에 들어오기 전 감각을 극대화 시켰지만 다른 헌터의 기척은 느껴지지 않았다. 적어도 보복이 목적은 아닌 듯했다. 보복이고 자시고 딱히 앙금이 남을 만한 짓을 한 기억도 없지만. 진우는 유진호의 맞은 편에 앉았다. "또 보게 될 줄은 몰랐네." 테이블 위에는 유진호가 먹다 만 아이스크림이 놓여 있었다. 유진호가 일어서며 물었다. "주문은 하셨습니까? 제가 커피 가져올까요?" "아니, 괜찮아." 유진호는 왠지 시무룩한 표정으로 다시 앉았다. 진우가 먼저 입을 뗐다. "근데 뭐 때문에." 그때였다. "진짜 쟤가 그랬다니까? 완전 장난 아니었지 그때." 진우가 옆을 돌아보았다. 옆 테이블에 덩치가 크고 인상이 험악한 운동부 학생 세 명이 여자 셋과 수다를 떨고 있었다. 진우는 다시 대화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뭐 때문에 보자고." "내가 언제 그랬냐! 이 새끼 또 여자들 앞이라고 지어내는 거 좀 봐라!" "...보자고." "네가 그랬잖아! 와- 내가 사진 보여 줄까? 증거 한 번 쫙 까발려 봐?" 남학생들 목소리도 컸지만 여자들이 깔깔거리는 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 소음에 대화를 이어 나가기가 힘들 정도가 되자 진우는 하는 수 없이 일어서서 조용히 옆 테이블로 걸어갔다. 남학생들의 시선이 일제히 진우에게 향했다. "좀 조용해 주시겠습니까? 여기 다른 사람도 많으니." 남학생 하나가 뒷머리에 손을 얹고는 꾸벅꾸벅 고개를 숙이는 시늉을 했다. "예, 예. 조용히 할게요. 미안하게 됐슴다." 그 모습에 여자들이 킥킥거렸다. "..." 진우는 그들을 가만히 내려다보다가 돌아섰다. 그런데 돌아서자마자 뒤통수에 뭔가가 톡 부딪혔다. 바닥에 떨어진 건 동그랗게 말린 종이 냅킨이었다. "푸하하하하하핫." "낄낄낄." "야, 그러지 마." 남학생들은 대놓고 배를 잡고 웃었고, 여자들은 말리는 척하며 조소를 흘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는 유진호의 얼굴은 서서히 얼어 갔다. "혀... 형님." 진우가 유진호의 아이스크림 옆에 있던 안 쓴 스푼 하나를 집어서 카운터로 갔다. "저거 봐 봐. 이제 고자질하러 가네." "엄마, 저기 떠들어요. 말려 주세요. 푸흡." 그 와중에도 뒷담화는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진우는 조마조마한 표정의 여점원에게 물었다. "이 스푼 얼마죠?"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 매장에서는 따로 스푼을 팔고 있지 않아서요." "만 원보다 비싸지는 않죠?" "예? 아, 예. 아마도..." 진우는 계산대 위에 만 원을 올려놓고 돌아섰다. "손님? 저기, 손님?" 진우가 여점원의 목소리를 무시하고 곧장 운동부 남학생들이 있는 테이블로 향했다. 진우의 눈빛이 심상치 않자 남학생들이 자리에서 스윽 일어섰다. "뭐? 왜?" 카페 안의 모든 시선이 그 테이블에 집중되었다. 진우는 남학생들에게 들고 있던 스푼을 보여 주었다. '...?' '...?' 남학생들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을 때, 진우는 손에 쥔 스푼을 있는 힘껏 구기기 시작했다. 진우의 손안에서 무참히 형태를 잃어 가는 스푼. 남학생들의 얼굴색이 점점 퍼렇게 변하기 시작했다. 톡. 데굴데굴. 테이블 위에 놓인 건 더 이상 스푼이 아니었다. 공처럼 구겨진 쇳조각이었다. "헉!" 남학생들은 침을 꿀꺽 삼켰다. '사람의 힘이 아니야.' '헌, 헌터다.' 서로 눈치를 살피던 남학생들 중 종이 냅킨을 던진 녀석이 먼저 진우에게 고개를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다른 부원들도 연달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저희가 실수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남학생들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몇 번이나 고개를 숙이다가 여자들을 데리고 도망치듯 카페를 빠져나갔다. 우와테이블의 소음을 신경 쓰고 있던 주위 손님들이 진우에게 감사의 눈빛을 보냈다. 진우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유진호가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역시 형님다우십니다!" "됐고." 진우는 다시 본론으로 들어갔다. "뭐 때문에 보자고 한 거야?" "저기... 형님. 제가 많이 생각해 봤는데요. 정말 거듭 생각해 봤는데요. 아무래도 형님께 꼭 말씀드려야겠습니다." 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뭔데 그래?" "형님, 사실은..." 유진호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다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실은 제가 개인 공대 팀을 만들려고 하는." 진우는 단 1 초의 망설임도 없이 말했다. "거절한다." 26 화 1. 거래 유진호가 얼빠진 얼굴을 했다. "형님, 벌써요?" "뒷말은 안 들어도 알겠다." 진우는 단호하게 말했다. 딱히 유진호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조금 이상한 놈 같긴 해도 태도가 싹싹하고 의리도 있어 보였다. 미디어에서 보던 재벌들과는 달랐다. 하지만 부잣집 도련님의 헌터 놀이에 어울려 주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더 할 말 없으면 간다?" "혀, 형님!" 일어서려는 진우를 유진호가 황급히 붙잡았다. "형님, 딱 20 번! 아니, 19 번만 같이 가 주세요!" "어디를? 던전을?" "네! 보수는 톡톡히 드리겠습니다." 유진호의 목소리가 간절했다.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터 일을 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돈과 사명감. 유진호는 둘 중 어느 쪽에도 포함되지 않았다. 아마도 헌터 일을 조금 더 위험한 익스트림 스포츠 정도로 여기는 게 아닐까. 여태까지 진우는 그리 짐작하고 있었다. 얼마 전 던전에서 그런 사고를 겪고도 공격대를 만들겠다고 나선 건 꽤 의외였지만. '세상엔 별별 인간이 다 있는 법이니.' 안전 불감증에 걸린 부잣집 도련님이 하나쯤 있는 것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렇게 단순하게 생각하기에는 유진호의 눈빛이 묘하게 비장했다. '뭔가 의도가 있나?' 톡톡히 드리겠다는 '보수'보다 같이 가 달라는 레이드 '19 번'쪽이 더 흥미를 끌었다. 진우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을 시작했다. '가만... 저번이 첫 레이드라고 치고, 앞으로 19 번의 레이드를 더 해야 한다는 거면...' 설마 이 자식. 결론에 도달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진우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너 혹시 길드 마스터 면허라도 딸 생각이냐?" "네, 형님!" 커피를 안 시킨 게 다행이었다. 마시고 있었다면 지금 이 자리에서 다 뿜어 버렸을 테니까. "네가 길드 마스터가 되겠다고?" "그게 이야기가 좀 복잡합니다, 형님." 유진호는 얼굴을 아까보다 더 심하게 붉히며 말했다. "제발 이야기라도 좀 들어 주십시오, 형님." "..." 어떡할지 고민하던 진우가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다시 앉았다. "그래, 한번 들어나 보자." 아직 약속한 1 시간이 다 안 지났으니까. 이야기 정도는 들어 줄 수 있다. 유진호도 잽싸게 맞은편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형님 말씀대로 전 길드 마스터 면허를 따고 싶습니다." 헌터가 길드 마스터 면허를 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레이드 경험 20 회 이상의 헌터일 것. 이 최저 조건만 갖춰지면 간단한 필기시험을 통해 면허를 획득할 수 있다. 물론 실력 없는 헌터가 만든 길드에는 아무도 들어가지 않을 테고, 최소 길드원 숫자를 유지하지 못하면 길드 자체가 사라지지만 말이다. 유진호가 말을 이어 나갔다. "아직 대외에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지만, 실은 아버지께서 길드를 만들려고 하시거든요." "유진건설에서 길드를?" "네." 유진건설이라면 대한민국에서 손꼽히는 건설 회사였다. 건설 말고도 많은 분야로 사업을 확장해 승승장구하고 있는 기업이었는데, 최근에는 헌터 관련 사업으로 큰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런 곳에서 직접 길드를 만든다?' 진우가 관심을 보이자 유진호도 신나서 설명을 덧붙였다. "강한 헌터들을 영입해 대형 길드로 키우고, 헌터 관련 사업들을 그 밑에 넣으려고 하십니다." 기업이 헌터 쪽 사업을 하려면 길드와의 공조가 필수였다. A,B 급 게이트에서 나오는 마수들의 마정석이나 사체, 마나석 같은 보물들을 수거하려면 대형 길드들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니까. "그걸 이제부터는 자급자족하겠다, 이거군." "정확하십니다, 형님!" 유진건설의 자금력 정도면 길드를 만드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누가 길드를 운영하느냐 하는 것. "아버지께서는 S 급 헌터를 고용해 마스터로 세우고 제 형을 부마스터로 넣어서 길드를 기업으로 운영하실 생각이십니다만..." 진우는 유진호가 하고 싶은 말을 눈치챘다. 그렇게 하면 불안 요소가 생긴다는 거다. 길드에서 마스터가 가지는 권한이 너무 막강하기 때문이었다. 부마스터 측에서 마스터를 고용한 상태라도 후에 둘 사이에 마찰이 생긴다면 마스터가 길드 자체를 장악해 버릴 가능성이 있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절대로 고용주를 배신하지 않을 마스터에게 길드를 맡기면 된다. 이를테면 형제라든가, 아니면 아들이라든가. 회장 유명한에겐 아들 유진호가 있었다. "하지만 제가 마스터 자리를 얻기엔 형의 경력이 만만치가 않습니다. 헌터 관련 사업에 손을 대서 막대한 이익을 얻은 것도 다 형의 아이디어고요." 형은 31 세에 이미 유능한 기업가가 됐다. 그에 비하면 동생은 22 살의 대학생에 불과했다. D 급 각성자라는 특이한 이력이 있기는 해도. 회장은 장남에게 길드를 맡길 생각이었다. 장남은 헌터가 아니라 마스터가 될 수 없지만, 헌터 사업에 대해 잘 알고 큰 실적을 거뒀으니까. 리스크가 있더라도 감수하겠다는 거다. "너는 아버지를 설득시켜 마스터 자리에 앉고 싶은 거고?" "네. 그렇습니다, 형님." 진우는 유진호가 필사적으로 자신을 끌어들이려 하는 이유를 알아챘다. 상급 헌터를 고용해 길드장 면허를 따 봤자 그건 돈으로 산 면허에 불과하다. 하지만 자신 같은 하급 헌터들을 데리고 20 번의 레이드를 성공해 면허를 딴다면? 아버지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다. 헌터들을 이끌 수 있다는 걸 인정받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게 유진호의 계산이었다. 유진호가 길드 마스터가 되면 부마스터에 S 급 헌터를 앉히고 유능한 헌터를 긁어모으면 된다. 마스터와 부마스터 두 자리 중 하나는 실력 있는 헌터로 채워 놔야 다른 헌터도 안심하고 오니까. 그러려면 20 번의 레이드가 꼭 필요했다. "형님, 도와주세요! 형님밖에 없습니다!" 유진호는 고개를 숙였다. 진우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첫 번째 레이드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거미에게 한 번, 황동석에게 한 번. 도합 두 번이나. 믿을 수 있는 든든한 아군이 필요했다. '형님은 믿을 수 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적을 죽일 수 있는 냉혈한이지만, 약자의 목숨을 함부로 하지 않고 부당한 이득은 거들떠보지도 않는 공정한 사나이. 진우야말로 적격이었다. 하지만 진우에게는 유진호가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진우는 물었다. "나한테 돌아오는 대가는?" 고개를 든 유진호가 환한 얼굴로 준비해 두었던 서류 봉투를 꺼냈다. 안에서 나온 것은 건물 조감도였다. 진우가 그걸 받아 들었다. "길드 사무실로 쓰려고 짓고 있는 건물입니다. 예상 시가는 3 백억 정도지만 더 올라갈 겁니다." 협회에서 관리하고는 있지만 던전에서 몬스터들이 튀어나올 가능성은 항상 존재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협회 지부나 대형 길드가 있는 곳 주변의 땅값은 뛰기 마련이었다. 목숨보다 더 귀한 재산은 없으니까. 작은 길드라도 근처에 있으면 안전은 보장된다. 하물며 대형 길드가 입주해 있는 건물이라면? 말할 필요도 없었다. "제가 마스터가 된다면 딱 1 년, 길드가 자리 잡을 때까지만 쓰고 형님 명의로 변경해 드리겠습니다. 물론 공증도 깔끔하게 해서 뒷말 나오지 않게끔 만들겠습니다." C 급 레이드 19 번에 3 백억짜리 건물이라... 진우가 씩 웃었다. "마스터가 될 수 있다면 그래도 남는 장사라 이거냐?" "그렇습니다, 형님." 유진호는 그날, 던전 안에선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배웠다. 어설픈 헌터를 쓰면 목숨을 잃을 수 있다. 그렇다고 유명한 헌터를 쓰면 아버지를 설득시킬 명분이 없어진다. 그러나 진우는 다르다. E 급 헌터면서 C 급 보스와 C 급 헌터 여럿을 혼자서 상처 없이 처리했다. '형님은 최소한 B 급... 아니면 그 이상의 실력자.' 진우와 손잡으면 C 급 레이드 19 회쯤은 아무 문제도 없으리라. 마스터가 될 수 있다면 3 백억도 아깝지 않았다. 남은 건 진우의 승낙뿐. '설마 이런 제안을 걷어차진 않으시겠지?' 유진호는 초조하게 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어떻게 할까? 진우는 고민에 잠겼다. 3 백억. 어마어마한 금액이다. 로또 복권 1 등 당첨금을 15 억이라고 치면 20 번을 연달아 당첨돼야 손에 쥘 수 있는 돈이었다. 심지어 그 가치가 오르기까지 한단다. 평범한 헌터에게는 당장 도장부터 꺼내 들 만큼 솔깃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진우는 평범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유일무이(唯一無二). 성장이 가능한 유일한 헌터인 것이다. 이대로 퀘스트와 레벨업을 반복한다면 언젠가는 S 급까지, 아니 그 이상으로 클 수도 있었다. 'S 급 이상이 될 수 있다면 3 백억은 아무것도 아니다.' S 급 헌터들은 계약금만 수백억이 넘어간다. 그 어떤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도 S 급 헌터들과 몸값을 비교할 수 없었다. 상급 헌터들의 숫자가 곧 국력을 의미하는 시대. S 등급의 대우는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니 지금 진우에게 최우선 과제는 돈이 아니라 성장이었다. 성장을 하기에는 혼자가 편하다. '변수는 줄이는 게 좋지.' 같이 사냥하면 경험치가 줄어들 수도 있고, 보는 눈 때문에 움직이기 불편해질 수도 있다. 이번 던전에서도 귀찮은 일이 생길까 봐 유진호에게 원치 않은 협박까지 해야 했다. 스케줄을 팀에 맞춰야 하는 것도 문제였다. 이래저래 효율이 떨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돈이야 다음에 벌어도 되니까.' 아쉽지만 거절해야겠다고 마음먹은 순간. '잠깐.' 돈과 성장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는 묘안이 하나 떠올랐다. '이 방법이라면...' 고개를 들자 긴장한 눈빛의 유진호가 보였다. 진우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가지 조건이 있다." 유진호의 얼굴이 급 밝아졌다. "뭐든지 말씀하세요, 형님!" 하지만 조건을 듣고도 웃을 수 있을까? 진우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너와 나, 둘만 가는 거다." "예?" 유진호가 화들짝 놀랐다. "혀... 형님, 실례지만 제가 잘못 이해한 게 아니라면... 형님과 저 둘이서만 C 급 던전을 클리어해야 한다, 뭐 이런 말씀이십니까?" "정확하게 이해했네." 유진호의 얼굴은 사색이 됐다. 27 화 보스였던 거미야 진우 혼자서 잡았으니 다른 보스들도 그렇게 처리하면 된다. 하지만 입구로 몰려왔던 벌레 떼 속에서 두 사람만 있다고 가정하면 숨이 콱 막혀 왔다. "..." 할 말을 잃어버린 유진호 앞에서 진우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이 방법이 최고다.' 두 마리 토끼를 잡기에는. E 급 헌터의 몸으로 개인 공격대에 들어가기는 매우 힘들었다.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한 첫날부터 그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던전에 개인 자격으로 가는 걸 포기하거나, 스스로 자기 공격대를 만드는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알아서 공격대를 만들어 주겠단다. 이건 기회가 아닌가? "하, 하지만 형님! C 급 게이트에 들어가려면 멤버가 최소 열 명은 되어야." "머릿수만 채워도 일당을 주겠다고 하면 지원자가 아주 줄을 설걸?" 황동석에게 배운 방법을 응용하는 거다. 목숨 걸고 싸우기는 싫고, 돈이 급한 헌터가 있다면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들 터였다. 유진호는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설마... 던전의 몬스터들부터 보스까지 저희 둘이 다 잡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겠죠?" 정확히는 혼자서 다 잡을 생각이지만. "잘 아네." 그렇게 하면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경험치 손실을 막을 수 있고, 옆에 있는 놈이라곤 유진호 하나가 다일 테니 시선을 의식할 필요도 없어진다. '그러면 폭렙을 할 수 있다.' 거기에 모든 레이드가 끝나면 보너스로 훌륭한 건물까지 굴러 떨어지니 그야말로 일석이조. 이제 유진호를 설득시키는 일만 남았다. 예상대로 유진호는 잔뜩 겁을 먹었다. "그, 그래도 너무 위험하지 않습니까, 형님?" "하나만 알고 둘을 모르네." "예?" 진우가 가까이 오라고 손짓하자 유진호가 몸을 기울였다. "우리 말고 아무도 사냥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바꿔 말하면 우리만 멀쩡하면 아무도 안 다친다는 거지?" "그, 그렇겠죠." "첫 번째 레이드는 너도 꼽사리 끼어서 간 거니까 어쩔 수 없이 사고가 터졌다고 해도, 네가 만든 공대 팀이 아무도 다치지 않고 19 번의 레이드를 무사히 끝낸다고 생각해 봐." 유진호의 눈이 번쩍 뜨였다. 과연...! 그렇게만 된다면 아버지를 설득하기가 한결 더 쉬워질 수 있었다. D 급 헌터라는 이력에 19 번 무사고 공대장이라는 경력이 더해지는 거다. 길드 마스터로서의 자질이 입증되는 것이다. 최고의 광고 효과가 아닐 수 없다. 진우는 유진호의 표정을 보면서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이 녀석... 넘어왔다.' 어디까지나 간절한 사람은 유진호였다. 진우야 굳이 유진호와 레이드를 하지 않아도 협회의 연락이나 랜덤 박스 보상을 통해 던전에 갈 수 있었다. 한편 유진호는 생각했다. 조금 무섭기는 해도 진우 말대로 성공만 하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다고. 저번 레이드에서 압도적인 전투력을 보여 줬던 진우의 모습을 떠올리면 크게 불안할 것도 없었다. 유진호가 간신히 결단을 내렸다. "그렇게 하시죠, 형님. 팀원들은 제가 모아 보겠습니다." "좋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서로의 이해가 일치했다. 진우 앞이라 줄곧 가슴을 졸이고 있던 유진호가 그제야 환한 표정으로 웃음을 지어 보였다. '겨우 형님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됐다.' 이제 남은 레이드가 무섭지 않다. 진우라는 든든한 아군이 합류했고, 공격대를 만들기도 훨씬 쉬워졌다. 진우가 내건 조건이면 공격대에 들어오겠다는 사람이 줄을 설 테니. '이걸로 마스터에 한 걸음 다가선 거다.' 진우도 미소를 지었다. '혼자 C 급 던전을 싹쓸이하고 빠르게 레벨을 올린다.' 두 사람 다 만족한 얼굴로 카페를 나왔다. *** 진우는 유진호를 보낸 뒤 집까지 뛰어서 왔다. 협회에서 언제 연락이 올지 모르니까. 병원을 나온 지 10 일이 넘었으니 근처에서 언제 게이트가 열려도 이상하지 않다. 보통 한 달에 2,3 번은 주변 게이트 정리를 위해 헌터들을 소집했던 협회다. 유진호에게 딱 1 시간만 내주겠다고 했던 이유도 언제 올지 모르는 협회의 전화 때문이었다. '지금은 E 급 던전 하나도 아쉬우니...' 마수를 잡아서 얼른 레벨을 올리고 싶었다. 폰이 없는 게 이렇게 불편할 줄이야. 다행히 며칠 뒤에는 헌터 폰이 도착한다고 하지만. 진우는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 집은 조용했다. 평일이라 동생은 학교에 있었다. 집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진우는 곧장 일일 퀘스트 창을 열었다. '오늘 보상을 받아야지.' 유진호를 만나기 전에 벌써 일일 퀘스트를 끝냈었다. 그런데 보는 눈이 많아 일단 보상을 미루어 뒀다. 갑자기 푸른빛이 몸을 휘감고, 선물 상자가 튀어나오는 장면을 길가에서 보여 줄 순 없는 노릇 아닌가. 띠링! [팔굽혀 펴기 100 회 : 완료 (100/100)] [윗몸 일으키기 100 회 : 완료 (100/100)] [스쿼트 100 회 : 완료 (100/100)] [달리기 10km : 완료 (11/10)] [일일 퀘스트: 강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완료하셨습니다. [완료 보상이 도착하였습니다.] [보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Y/N) "예... 아니, 아니." 습관적으로 보상을 받으려던 진우가 뭔가를 발견하고 급하게 말을 멈추었다. 진우의 시선이 달리기 항목에 고정됐다. [달리기 10km : 완료 (11/10)] 처음엔 단순히 1 킬로가 더 오버됐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이상했다. '왜 목표치를 다 채웠는데도 오버해서 기록을 남기는 거지?' 진우의 시선이 예리해졌다. 이게 과연 우연일까? 바닥에 엎드린 후 팔을 직선으로 뻗었다. 진우의 상체가 쉴 새 없이 내려갔다 올라왔다. 하지만 시선은 허공에 고정되어 있었다. 띠링! [팔굽혀 펴기 1 회를 성공하셨습니다.] [팔굽혀 펴기 100 회 : 완료 (111/100)] 띠링! [팔굽혀 펴기 1 회를 성공하셨습니다.] [팔굽혀 펴기 100 회 : 완료 (112/100)] '역시...' 달리기만 오버 수치가 기록되는 것이 아니었다. 팔굽혀 펴기 또한 계속해서 숫자가 올라갔다. 문득 숫자가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진우의 팔에 힘줄이 솟아났다. 올라간 능력치 덕분에 체중은 느껴지지 않았다. 몸이 솜털처럼 가벼웠다. 백 근처였던 숫자가 순식간에 2 백으로 변했다. 띠링! [팔굽혀 펴기 1 회를 성공하셨습니다.] [팔굽혀 펴기 100 회 : 완료 (200/100)] 띠링! [팔굽혀 펴기 1 회를 성공하셨습니다.] [팔굽혀 펴기 100 회 : 완료 (200/100)] 숫자는 정확히 2 백에서 멈추었다. 몇 번을 더 시도해 봤으나 그 이상은 올라가지 않았다. 윗몸 일으키기도, 스쿼트도 모두 2 백 개가 한계였다. [팔굽혀 펴기 100 회 : 완료 (200/100)] [윗몸 일으키기 100 회 : 완료 (200/100)] [스쿼트 100 회 : 완료 (200/100)] [달리기 10km : 완료 (11/10)] 더도 덜도 아닌 2 백. 무한정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아예 백에서 안 올라가는 것도 아니다. 이건 뭔가가 있다. 감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어쩌면 오버 수치를 다 채웠을 때 뭔가 다른 결과가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확인해 보자.' 진우는 어느 때보다 빠른 걸음으로 집을 빠져나갔다. 달리기 9 킬로는 금방 채워졌다. 진우가 다시 집 앞에 섰을 때 메시지가 떴다. 띠링! [히든 퀘스트: 강자가 되기 위한 준비]를 완료하셨습니다. [완료 보상이 도착하였습니다.] [보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Y/N) 퀘스트의 제목은 달라지지 않았지만 퀘스트 종류가 히든 퀘스트로 바뀌어 있었다. 짐작은 맞았다. 진우는 침을 꿀꺽 삼켰다. '...확인.' 띠링! [아래와 같은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상 1. 상태 회복 보상 2. 모든 스탯 포인트 +3 보상 3. 1)축복받은 랜덤 박스 (선택) 2)저주받은 랜덤 박스 (선택) [전부 수락하시겠습니까?] '모든 스탯 3 포인트 증가!' 눈이 번쩍 뜨였다. 히든 퀘스트답게 보상이 아주 화끈했다. 모든 스탯에 3 포인트 추가라면 3 레벨을 올린 것과 마찬가지였다. 아니, 능력치는 올랐는데 레벨이 오르지 않았으니 오히려 더 이득이었다. 올라간 능력치만큼 레벨을 올리기가 더 쉬워질 테니 말이다. 동시에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어쩌면 앞으로 받는 일일 퀘스트를 전부 히든 퀘스트로 바꿀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보상이 크다면...' 당연히 일회성 이벤트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만약 정말로 히든 퀘스트가 이번 딱 한 번뿐이라면 보상 3 에서는 보다 신중해져야만 했다. 보상 3. 1)축복받은 랜덤 박스 (선택) 2)저주받은 랜덤 박스 (선택) 처음으로 나온 선택 보상이니까. 하나를 선택하면 하나를 잃는다. '두 개 중 하나는 영원히 볼 수 없단 말이겠지?' 일단 이름만 보면 뭘 선택해야 할지 뻔하기는 한데. 의외로 그게 함정일지도 몰랐다. "보상 3 수락." 띠링! [두 개의 랜덤 박스 중 하나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축복받은 랜덤 박스] '플레이어'에게 원하는 아이템을 제공합니다. [저주받은 랜덤 박스] '플레이어'에게 필요한 아이템을 제공합니다. [어느 것을 선택하시겠습니까?] 설명은 심플했다. 그래서 더 선택이 어려웠다. 아마 설명이 없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축복받은 쪽을 골랐을 거다. 하지만 설명을 읽고 나니 둘 중 어느 것을 골라도 다른 하나가 아쉬울 듯했다. '원하는 것과 필요한 것이라...' 얼핏 듣기엔 둘 다 좋은 것처럼 들린다. '하지만 여기엔 함정이 있다.' '원하는 것'은 분명 필요성을 인지하여 원하는 것이다. 하지만 '필요한 것'은 그렇지 않다. 필요하지만 원하지 않는 무언가가 나올 수도 있다. 예를 들면 강력한 무기가 필요한 상황에서 자신을 포함한 일대를 전부 날려 버릴 끔찍한 폭탄이 나온다든가. '그래서 저주받은 랜덤 박스겠지.' 보다 적은 리스크를 택한다. 선택의 결과를 알 수 없을 때는 그 편이 그나마 후회를 남기지 않는 법이었다. 냉철한 고민 끝에 진우가 결정을 내렸다. "축복받은 랜덤 박스." 발아래 작은 상자가 스르르 나타났다. 진우는 상자를 주워 들었다. '설마...?' 28 화 가슴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상자의 크기가 낯익었기 때문이다. 상자를 뜯는 손길이 빨라졌다. '역시!' 진우의 눈이 커졌다. 상자 안엔 황금빛 열쇠가 들어 있었다. 애타게 기다리던 인던의 열쇠였다. 곧 열쇠에 대한 정보가 떴다. 띠링! [아이템: 악마성의 열쇠] 입수 난이도: S 급 종류: 열쇠 '던전: 악마성'에 출입할 수 있는 열쇠입니다. 송파구 대성 타워에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S 급?" 진우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물론 입수 난이도가 곧 던전 난이도를 뜻한다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전혀 별개로 보이지도 않았다. E 급 열쇠로 들어갔던 인던은 E 급 게이트의 던전만큼이나 쉬웠으니까. 그런데 만일 던전의 난이도가 S 급이라면? S 급 헌터들이 팀을 이뤄 공략해도 클리어할 수 있을지, 없을지 가늠이 불가능했다. 확률은 50 대 50? B 급 이상의 게이트부터는 난이도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데다, 전 세계를 통틀어 S 급 게이트가 열린 적이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제주도에 열렸었지.' 그 이후로 제주도는 더 이상 사람이 살지 못하는, 버려진 땅이 되고 말았다. 진우는 손에 들린 열쇠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이게 내가 원하던 거라고?' 한 가지 다행인 점은 '이동'이 가능하다고 적혀 있었던 저번 열쇠와는 달리 이번 열쇠는 '출입'이 가능하다고 적혀 있다는 점이다. 언제든 도망칠 수 있다는 거다. 그리고 만약 열쇠가 갑자기 사라진다고 해도 아직 창고에 쓰지 않은 귀환석이 하나 남아 있었다. 전처럼 보이지 않는 벽에 갇히게 될 염려는 없었다. '어렵게 얻은 기회인데 허무하게 날릴 수는 없지.' 이 열쇠가 정말로 원하던 것이 맞는지 두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2.악마성 대성 타워 앞. 무려 백 층이나 되는 초고층 빌딩이 하늘을 찌를 듯 높게 솟아 있었다. 그야말로 마천루. 올려다보는 것만으로도 정신이 아득해진다. 밤이라 그런지 행인은 적었다. 인적 없는 거리가 음산한 분위기를 풍겼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진우는 주변을 둘러보다 윗옷에 달린 후드를 푹 눌러썼다. 게이트가 열리지도 않았는데 사람이 사라지고 나타나면 소동이 벌어질 수 있다. 더욱이 주변 곳곳에 감시 카메라가 설치되어 있으니 눈에 띄지 않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었다. 마침 진우를 눈여겨보는 사람이 있었다. '웬 놈이지?' 오밤중에 모자를 뒤집어쓰고 건물 주변을 서성거리는 놈이라니. 빌딩 안에서 지켜보던 경비원이 진우를 수상히 여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문 쪽으로 걸어가던 경비가 우뚝 멈춰 서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아, 아니?" 경비가 놀라 뛰쳐나왔다. 분명 이쪽으로 걸어오던 남자가 어느 순간 사라진 것이다. 감쪽같이.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개미 새끼 한 마리 없었다. 경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섰다.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다시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던 경비가 옆에서 뭔가 희끗희끗한 것을 발견하고 무심코 고개를 돌렸다. "으, 으악!" 기겁한 그가 바닥에 엉덩방아를 찍었다. "이, 이게 뭐시여!" 경비가 창백한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공중에 떠 있던 사람 손은 이내 허공으로 사라졌다. 진우는 뻗었던 손을 도로 빼냈다. '바깥과 연결되어 있다.' 저번처럼 보이지 않는 벽으로 막혀있지 않았다. 열쇠도 사라지지 않고 주머니 속에 그대로 있었다. 원한다면 언제라도 여기를 빠져나갈 수 있다는 뜻이었다. '퇴로 확보는 끝났고...' 열쇠의 입수 난이도가 난이도인지라 평소보다 훨씬 조심스러웠다. 진우는 후드를 벗고 뒤를 돌아보았다. "..." 신음이 흘러나올 것 같은 광경이었다. 방금 전 대성 타워 방향으로 몇 걸음을 내디뎠을 때 눈앞의 세계가 순식간에 변했다. 이걸 던전이라고 할 수 있을까? 앞은 완전히 다른 세계였다. 사라진 대성 타워 대신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탑이 있었다. '탑이라고 해야 할지, 성이라고 해야 할지.' 하늘로 끝없이 뻗어 있는 탑은 검붉은 불꽃에 휩싸여 있었다. 불이 난 것이 아니라 탑이 불을 머금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불타는 탑." 악마성이라는 이름보다는 이 명칭이 더 어울리는 곳이었다. 진우는 탑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화르르륵! 가까이 다가갈수록 불꽃이 요동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안으로 들어갈 수는 있을까?' 들어가고 나서도 문제다. 지하철역을 베이스로 생성됐던 저번 던전처럼 이번 던전도 대성 타워가 기반이라면 백 층을 올라가야 클리어가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계산할 엄두도 나지 않았다. '음?' 진우는 걸음을 멈췄다. 문 근처에서 강력한 기운이 느껴졌다. 주변을 찬찬히 둘러보니 문 앞 구석에 황소만 한 검은 짐승이 몸을 동그랗게 웅크리고 잠들어 있었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카사카의 독니를 불러왔다. 띠링! [아이템: 카사카의 독니] 입수 난이도: C 종류: 단검 공격력 +25 카사카의 독니로 만든 단검입니다. 카사카의 독이 남아 있어 공격 시 마비, 출혈 효과를 부여합니다. 인벤토리에 보관하시거나 상점에 파실 수 있습니다. 효과 '마비': 공격받은 대상이 일정 확률로 움직일 수 없게 됩니다. 효과 '출혈': 공격받은 대상의 체력이 1 초에 1%씩 소모됩니다. 자체 공격력이 그리 높은 편은 아니지만, 특수 효과의 힘은 실전을 통해 입증됐다. '마비 효과로 쉽게 죽일 수 있었으면 좋겠는데.' 진우는 발소리를 최대한 죽였다. 그리고 천천히 놈을 향해 다가갔다. 그러나 몬스터의 후각을 속일 수는 없었다. 곧 짐승이 코를 킁킁거리면서 몸을 일으켰다. '쳇.' 진우가 혀를 찼다. 완전히 일어난 놈은 세 개의 머리를 일제히 진우 쪽으로 돌렸다. [지옥의 수문장 켈베로스] 세 개의 머리를 가진 커다란 개. 개 머리 위에 적힌 붉은 이름이 눈길을 끌었다. 몬스터의 레벨이 높다는 증거였다. '붉은색이라면 페널티 존에서 봤었던 거대 지네와 같은 급인가?' 그때는 지네에게서 도망치느라 급급했다. 고작 1 레벨에 불과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짧은 시간 동안 빠르게 성장했다. 놈은 분명 강하겠지만 그래도 압도적인 느낌은 없었다. 날 선 감각이 할 수 있다고 말해 주고 있었다. 감각 스탯을 괜히 높인 게 아니다. 싸워야 할 것인가, 피해야 할 것인가를 가리기 위해 꾸준히 투자해 왔었다. "크르르르륵!" 켈베로스가 적을 인식하고 이빨을 드러내며 위협을 시작했다. 진우의 시선이 놈의 꼬리 쪽을 슬쩍 곁눈질했다. 채찍같이 기다란 꼬리 끝에서 불꽃이 타오르고 있었다. 진우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이빨과 꼬리. 최소한 두 가지 이상의 공격 패턴이다.' 진우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던 켈베로스가 코앞에 멈춰 서더니 눈치를 살폈다. '빈틈을... 찾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 놈이 덤벼들었다. "컹!" 진우의 눈이 커졌다. '빠르다!' 진우는 뛰어오른 켈베로스의 밑으로 슬라이딩하듯 미끄러지며 이빨을 피했다. 땅에 착지한 켈베로스가 곧바로 돌아서서 세 개의 주둥이를 들이댔다. "컹, 컹컹!" 주둥이 사이로 날카로운 이빨들이 빛났다. 띠링! ['칭호: 늑대 학살자' 버프 효과가 발동합니다.] [칭호: 늑대 학살자] 늑대를 잡는 데 능숙한 사냥꾼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짐승형 몬스터를 상대할 때 모든 능력치가 40% 증가합니다. 몸이 가벼워지는 것이 느껴졌다. '좋아!' 진우는 자꾸 엉겨 붙으려는 켈베로스를 피해 뒷걸음질 치며 단검을 휘둘렀다. 쉭, 쉭, 쉬익. 쉭! 캉! 캉캉! 캉! 단검과 이빨이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럽게 울렸다. 단검은 보이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저 켈베로스의 공격을 막아 내는 데 불과한 수준이었다. '버프를 받고 있는데도 이 정도라니!' 켈베로스의 민첩함이 예상을 훨씬 웃돌고 있었다. 진우는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해 살기 스킬을 사용했다. [스킬: '살기'를 시전합니다.] [대상의 저항력이 높아 효과가 취소되었습니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통하지 않아?' 그때 켈베로스의 긴 꼬리가 채찍처럼 날아왔다. 쉬이이익. 진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숙여 꼬리를 피했다. 하지만 그 탓에 쉴 새없이 움직이던 다리가 멈추고 말았다. 그리고 켈베로스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켈베로스의 머리 하나가 진우의 왼쪽 어깨를 덥석 물었다. "으아아악!" 진우는 있는 힘껏 놈의 미간을 단검으로 찍었다. 푹! ['효과: 마비'가 발동합니다.] [대상의 저항력이 높아 효과가 취소되었습니다.] ['효과: 출혈'이 발동합니다.] [대상의 저항력이 높아 효과가 취소되었습니다.] "깨개갱!" 켈베로스가 비명을 지르며 떨어졌다. 다행히 다른 머리가 붙기 전에 떨쳐 내 피해를 최소화했지만 이미 왼쪽 어깨가 너덜너덜해진 상태였다. 무시무시한 치악력이었다. 왼팔에 힘을 줘 보았으나 움직이지 않았다. 진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켈베로스에게도 약간의 데미지를 남겼지만 피해의 정도로만 따지자면 이쪽이 훨씬 심각했다. '마비나 출혈이 먹혔다면 양상이 달랐을 텐데...' 진우가 켈베로스를 노려보며 혀끝을 찼다. 그때였다. '어?' 켈베로스의 눈이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크르르르륵." 갑자기 섬뜩한 느낌이 들었다. '뭐지?' [지옥의 수문장 켈레보스가 스킬:'분노'를 사용합니다.] [3 분간 분노 상태가 지속됩니다.] [켈베로스의 모든 능력치가 2 배 증가합니다.] [켈베로스가 통증을 느끼지 않습니다.] 진우가 소리를 질렀다. "뭐라고?" 마수, 아니 몬스터가 스킬이라니! 순간 켈베로스가 바닥을 박찼다. '제길!' 미처 반응하기도 켈베로스가 눈앞에 나타났다. 급하게 단검을 휘둘렀으나 놈의 머리를 살짝 스쳤을 뿐이었다. 세 개의 주둥이가 동시에 진우를 물었다. 콰직! "으으윽!"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목과 옆구리, 허벅지를 동시에 당했다. 켈베로스는 전속력으로 달려가 진우를 성문에 처박았다. 쾅! 진우의 체력이 순식간에 바닥을 드러냈다. "커헉!" [체력: 411/3,602] 띠링! [체력이 30% 이하가 되어 스킬:'근성'이 발동됩니다.] [받는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다행히 물리 데미지 감소와 근성 패시브 덕분에 즉사는 면할 수 있었다. "크으..." 진우가 눈을 부릅떴다. 29 화 고통에 몸부림치는 건 쉬운 일이지만, 그렇게 놓친 기회는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정신을 잃으면 끝이다. '...178, 179, 180!' 처음부터 3 분을 기다리고 있었던 진우가 마침내 숨겨 뒀던 비장의 카드를 꺼냈다. '보상 1 수락!' 일부러 받지 않고 아껴 두었던 일일 퀘스트 보상 1 번을 수락했다. [보상 1. 상태 회복이 적용됩니다.] 슈우욱! 온몸에 푸른빛이 감돌며 그 즉시 체력이 회복됐다. [체력: 3,602/3,602] 다친 팔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지금이 기회다!' 진우의 눈이 번뜩였다. 이렇게 밀착해 있는 상태라면 아무리 민첩한 놈이라도 피하지 못하리라. 진우는 잽싸게 왼팔을 켈베로스의 목에 두르고, '카사카의 독니'로 켈베로스의 목 가운데를 찔렀다. 푹! 푹! 푹! 분노 상태가 풀렸는지 켈베로스가 진우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깨개갱! 깨갱! 캥! 캥!" 하지만 진우는 강한 팔심으로 놈을 놓지 않았다. 켈베로스가 발버둥 칠수록 더 강하게 목을 조였다. 그동안에도 단검은 켈베로스의 목을 수도 없이 드나들었다. 푹, 푹, 푹! "캐개갱, 캥! 끼잉! 끼이이잉!" 켈베로스가 마지막 발악으로 진우를 물어 댔으나 이미 승기는 기운 뒤였다. 푹! 푹! "깨갱! 깽!" 카사카의 독니는 켈베로스의 목을 지나쳐 놈의 가슴까지 내려갔다. 푹! 푹! 푹! 켈베로스의 저항이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끼잉..." 결국 켈베로스의 고개가 옆으로 젖혀졌다. 띠링! [지옥의 수문장 켈베로스를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순식간에 레벨이 네 개나 올랐다. 그 정도로 힘든 싸움이었다. 진우는 켈베로스의 사지가 축 늘어지는 것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서야 놈의 목을 놓아주었다. 켈베로스의 몸뚱이가 힘없이 바닥에 널브러졌다. 철퍼덕. 진우는 양 무릎을 짚었다. "하아."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토해 냈다. 스킬을 쓸 수 있는 몬스터라니. 비장의 카드를 준비하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았을 터였다. 지금 생각해도 등골이 오싹했다. '참... 아이템.' 애를 먹인 만큼 수확이 있을까? 한숨 돌린 진우가 켈베로스에게 손을 뻗었다. 띠링! [아이템: 파수꾼의 목걸이]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아이템: 성문의 열쇠]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아이템: 켈베로스의 어금니]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 겠습니까? '모두 획득.' 바닥에 켈베로스 목에 채워져 있던 강철 목걸이 하나와 잿빛 열쇠, 짐승의 어금니 세 개가 나타났다. [아이템: 파수꾼의 목걸이] 입수 난이도: A 종류: 목걸이 민첩 +20, 감각 +20 [아이템: 성문의 열쇠] 입수 난이도: A 종류: 열쇠 악마성의 성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문지기를 죽여야 얻을 수 있습니다. [아이템: 켈베로스의 어금니] 입수 난이도: 없음 종류: 잡동사니 "오." 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민첩과 감각 스탯을 20 포인트나 증가시켜 준다고?' 옵션이 눈 돌아가게 좋은 목걸이가 나왔다. 입수 난이도도 A 등급이었다. 그동안 봤던 아이템 중 입수 난이도가 가장 높았다. '하긴 그 고생을 해서 잡았는데...' 입수 난이도가 낮을 리가 있나. 그런데 막상 목걸이를 목에 차자니 망설여졌다. 동그란 금속성 띠에 듬성듬성 가시가 박힌 외양이 어딜 봐도 완전한 개목걸이였던 것이다. "음..." 눈을 감고 고민하던 진우가 일단 써보기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목걸이를 목에 가져다 댔다. 그러자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아이템: 파수꾼의 목걸이'를 착용하시겠습니까?] 잠시 또 고민해 보던 진우가 마지못해 대답했다. "...그래." 그러자 목걸이가 스르르 사라졌다. ['아이템: 파수꾼의 목걸이'를 착용하였습니다.] "어?" 진우는 급히 스탯창을 불러왔다. [스탯] 근력: 60 체력: 39 민첩: 80 지능: 37 감각: 67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물리 데미지 감소: 20% "맙소사!" 정말로 민첩과 감각이 각각 20 씩 올라가 있었다. 옵션이 그대로 적용된 것이다. 아이템을 착용해도 굳이 드러내고 다닐 필요는 없는 모양이었다. 개 목걸이를 하고 돌아다니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감이 들었다. '다음은 어금니.' 진우는 상점을 불러왔다. 잡템 켈베로스의 어금니를 판매로 넘겼더니 개당 15 만씩이나 쳐 주었다. 획득한 어금니는 세 개. 도합 45 만 골드가 손에 들어왔다. [보유한 금액: 562,362 골드] '무슨 잡템이 이렇게 비싸?' 던전의 난이도를 짐작해 볼 수 있는 좋은 척도였다. 그만큼 악마성의 난이도가 높다는 뜻이다. 하지만 나쁜 소식은 아니었다. 몬스터 딱 한 마리를 잡았는데 합정역 인던에서 하루 종일 노가다했던 돈의 네 배 이상을 벌었다. 이 추세로 골드를 모은다면 상점에서 파는 억대의 아이템을 사는 일도 먼 훗날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여기를 클리어할 수 있다면 말이지...' 진우는 불타는 탑을 올려다보았다. 화르르륵! 위쪽은 아예 뿌연 안개 같은 것에 가려져 있었다. 안에 뭐가 있는지는 들어가 봐야만 알 수 있을 듯했다.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다.' 칭호 버프에 퀘스트 보상이라는 꼼수를 쓰고서도 간신히 입구를 지키는 보초 하나를 잡는 데 그친 곳이다. 문 너머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예상할 수 없었다. 지금은 물러서야 할 때였다. 그래도 한 가지는 확실했다. 설명처럼 '악마성의 열쇠'는 원하던 물건이 맞았다. 축복받은 상자는 틀리지 않았다. 렙업과 아이템, 그리고 골드까지. 이곳엔 모든 것이 다 갖추어져 있었다. 적절한 때가 되면 모든 걸 얻을 수 있으리라. 다만 오늘이 아닐 뿐. 아쉽지만 손에 쥐고 있던 잿빛 열쇠를 창고에 넣었다. '돌아온다.' 조만간 반드시. 진우는 웃으며 돌아섰다. 3. 우연 며칠이 조용히 흘러간다. 유진호는 하루에 한 번꼴로 전화해 진행 상황을 보고했다. 마지막으로 본 다음 날부터 정확하게 세 통의 전화가 왔었다. -형님! 접니다, 유진호. "용건만." -네 형님. 사람은 순조롭게 모이고 있는 모양이었다. 곧 팀원이 다 갖춰진다고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말을 연거푸 반복했다. '내가 빠지는 게 어지간히도 겁나나 보네.' 하지만 팀원들이 다 모일 때까지 마냥 손 놓고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래서 진우는 오늘도 헌터 사이트에 들어갔다. 그동안 계속 개인 공격대를 알아봤지만 역시 E 급 헌터를 받아 주는 팀은 없었다. 첫날은 운이 좋았던 거였다. 비록 황동석에게 꿍꿍이가 있었다고는 해도 어쨌거나 개인 공격대에 들어가 보기는 했으니 말이다. '덕분에 돈도 벌고 레벨도 올리고 새로운 스킬까지 얻었지.' 이거 황동석한테 감사라도 해야 하는 건가? 진우는 실소를 흘렸다. 아닌 게 아니라 지금은 도마뱀 같은 얌체 헌터들이라도 만나고 싶은 심정이었다. 개인 공대는 안 구해지고, 협회의 협조 요청은 없고, 인던 열쇠도 나오지 않고. 무료한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꼬르륵. '벌써 밥때가 됐나?' 구인 게시판을 들락거리던 진우가 허기를 느끼고 부엌으로 갔다. 덜컹. 냉장고 문을 열었더니 안이 휑했다. '...' 요새 여러 가지 일로 정신이 없어서 장보기를 며칠째 미루고 있었더니 그만. 오늘은 장이나 보러 갈까? 진우는 하품하며 냉장고 문을 닫았다. 지금 살고 있는 아파트의 몇 안 되는 장점 중 하나가 바로 대형 마트에서 멀지 않다는 점이었다. 진우는 편한 복장으로 집을 나섰다. 걸어서 10 분. 금방 도착했다. 마트 안으로 들어서자 넓은 정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세일 기간이 아닌지 마트 안은 생각했던 것보다 한적해 보였다. 바구니 하나를 챙겨 들고 천천히 걸었다. 어머니께서 입원하신 뒤론 줄곧 가장 역할을 하고 있었던 진우였기에 장보기를 비롯한 집안일에는 비교적 익숙한 편이었다. '오늘은 딱히 살 만한 것들이 없네.' 저녁을 뭐로 할지 고민하며 진열된 상품들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을 때였다. "자네, 이제 몸은 좀 괜찮은감?" 친근한 목소리에 진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누구지?' 높은 감각 스탯의 힘으로 근처에 헌터가 한 명 있다는 사실쯤은 진즉에 알았다. 하지만 여긴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고, 헌터도 장은 보러 다닐 테니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헌터가 말을 걸어올지는 몰랐다. 심지어 아는 헌터일 줄은 더더욱. "송 씨 아저씨?" 진우가 반가운 얼굴을 했다. 송 씨 아저씨, 송치열은 놀라움과 반가움이 섞인 눈빛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자네가 무사하다는 소문을 듣기는 했지만, 이렇게 직접 보고도 믿어지지가 않는구먼." 송치열이 감격스런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송치열의 뜨거운 눈빛이 쑥스러운지 검지로 관자놀이 주변을 긁적였다. 송치열은 말을 이었다. "내가 진작 성 씨를 찾아갔어야 했는데, 협회 놈들이 무슨 생각인지 입을 다무는 바람에 성 씨 소식을 전혀 알 수가 없었구먼. 주희 양도 성 씨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는 거 아는감?" "주희 씨가요?" "그려. 헌터 일을 그만둔다고 했으면서도 지난주에 자네를 만나러 레이드 장소까지 왔었구먼." "지난주라면...?" 송 씨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공교롭게도 황동석의 팀에 들어갔던 날 협회의 레이드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래서 요 며칠 협회가 조용했던 거군.' 협회의 연락이 없었던 것이 아니라, 연락이 왔을 때 받지 못한 것이었다. 작은 의문이 풀리는 순간이었다. 송치열은 여전히 신기하다는 눈빛으로 진우의 여기저기를 살폈다. '그런데 성 씨가 원래 이렇게 컸던감? 지금은 다리도 성치 않을 터인디.' 송치열의 시선이 아래쪽으로 내려갔다. 순간 그의 눈이 커졌다. "자네... 다리가?" 30 화 진우는 차분히 대답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멀쩡해져 있더라고요. 어떻게 된 일인지는 저도 모르겠습니다." 송치열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10 여 년 전 게이트란 것이 나타난 이후로 세상에는 상식 밖의 일들이 계속해서 일어났다. 헌터라 불리는 각성자들이 좋은 예다. S 급의 치유계열 헌터들은 레이드 중 온몸이 찢긴 환자도 숨만 붙어 있으면 원래대로 복구시킬 수 있다는 말이 있었다. 진우가 의식을 잃은 사이 높은 랭크의 치유계열 헌터가 와서 진우의 상처를 치료했다면? 그러니 잘렸던 다리가 다시 붙는 일쯤이야 이변 측에도 끼지 못했다. "젊은 사람이 불구가 되면 안 되지. 다행이구먼, 정말 다행이구먼." 송치열은 자기 일처럼 가슴을 쓸어내렸다. 문득 진우의 시선이 송치열의 왼쪽 팔로 옮겨 갔다. 소매의 끝이 휑하니 비어 있었다. 송치열은 허허 웃으며 왼팔 어깨 부근을 만지작거렸다. "이건 신경 쓰지 말어. 헌터가 사냥을 하다 보면 다칠 때도 있고 그런 법이지. 여태까지 사고가 없었던 것이 운이 좋았던 것이여." 송치열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지만, 다른 사람들의 시선은 그렇지 않았다. "어머, 저기..." "불쌍하게도... 마수한테 당한 거겠죠?" 지나가던 아줌마들이나 학생들이 송치열의 펄럭이는 소매를 보고 속닥거렸다. 신기한 듯 아예 대놓고 쳐다보는 아저씨도 있었다. 진우가 말했다. "자리를 옮길까요?" 정육 코너 주변에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시선이 부담스러웠던 송치열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아직 더 있었다. "그게 좋겠구먼." 두 사람이 사람이 적은 곳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걷는 동안 송치열은 뭔가 이질감을 느꼈다. '성 씨의 발소리가...' 진우의 걸음이 너무 가벼웠다. 바로 옆에 서 있는 데도 기척을 읽기가 힘들었다. 어째서일까? 지금 이 자리에서 진우와 싸워도 손끝 하나도 건드릴 수 없을 것 같은 기묘한 느낌마저 들었다. 자신은 C 급, 진우는 E 급인데도 말이다. '내가 무슨 생각을...' 송치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중요한 건 그게 아니었다. 성 씨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아니, 해야 할 말이 있었다. 송치열은 한적한 곳에서 멈춰 섰다. 진우도 따라서 멈추었다. 송치열이 진우를 돌아보더니 진우가 말리기도 전에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성 씨, 정말 고맙구먼."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고개를 숙이니 진우의 기분도 숙연해졌다. 송치열은 진우가 만류하는데도 고개를 들지 않고 말을 이어 갔다. "나 때문에 11 명이 죽었다면, 자네 덕분에 여섯 명이라도 살아남은 것이여. 내 책임이 가장 크니까 거기 있었던 모든 헌터들을 대신해 내가 인사하는 것이구먼." 송치열의 말 한 마디 한 마디에 진심이 묻어 나왔다. 진우도 이내 송치열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상황은 조금 난처했지만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뭐라고 할까, 뿌듯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어른을 이런 식으로 세워 둘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아저씨, 이제 그만 일어나시죠." 진우가 송치열을 일으켜 세우려는데, 마침 송치열의 폰에 전화가 걸려왔다. 송치열은 진우에게 양해를 구하고 안쪽 주머니에 있던 폰을 꺼내 들었다. "예." 전화를 받던 송치열의 얼굴이 굳어졌다. "알겠습니다. 곧 그리 가지요." 송치열은 전활르 끊고서 말했다. "나는 그만 가 봐야 할 듯허이." 개인적인 볼일이 있다는 말투였다. 하지만 진우는 이미 통화 내용을 다 들었다. 감각 스탯이 높아진 만큼 청각 또한 예민해진 상태였다. 방금 전화는 처리해야 할 게이트가 있다는 헌터 협회의 요청이었다. 혹시나 진우가 따라나설까 봐, 퇴원한 지 얼마 안 된 진우가 레이드에 참가했다 또 다칠까 봐, 송치열은 일부러 통화 내용을 숨긴 것이다. 진우가 직설적으로 물었다. "협회 전화죠?" 송치열이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그것이... 다 들렸는감?" 협회에서 레이드를 할 때는 근방에 사는 협회 소속 헌터들을 모두 불러 들인다. 송치열에게 전화가 왔다는 말은 당연히 진우의 집에도 연락이 갔다는 뜻이었다. 기다리고 있던 소집 명령이었다. 진우가 짤막하게 대답했다. "저도 가겠습니다." "자네..." 진우를 바라보는 송치열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 집합장소에 도착했다. 주택가와 밀접한 도로에 생성된 게이트라 경찰들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었다. 그러나 구경꾼들은 거의 없었다. 협회가 맡는 게이트들은 대개 발견된 지 수일이 지나 위험한 상태가 대부분이고, 게이트 주위에 있어 봤자 헌터들이 싸우는 모습을 직접 볼 수도 없기 때문이었다. 가끔 개구쟁이 꼬마들만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경찰에게 쫓겨 달아날 뿐이었다. 탁. 택시의 문이 닫혔다. 택시에서 내린 진우와 송치열은 헌터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걸어가다 경찰들의 제지를 받았다. "신분증 좀 보여 주시겠습니까?" 송치열이 지갑을 꺼내 자격증을 보여 주었다. "C 등급 헌터 송치열, 이쪽은 동료인 성진우올시다." 신분증의 사진과 송치열의 얼굴을 대조해 본 경찰들이 자격증을 돌려주며 길을 터 주었다. "실례했습니다, 헌터님." "수고들 허시오." 송치열은 경찰들에게 가볍게 인사하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진우가 그 뒤를 따랐다. 게이트 앞에는 협회 소속의 직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동그란 안경을 쓴 젊은 여자였다. 그녀가 두 사람을 보고 다가왔다. "송치열 헌터님! 어? 그런데 성진우 헌터님은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전화 안 받으시더니." 송치열이 대신 대답했다. "같이 있다가 연락받고 왔구먼." "아, 그러셨어요? 전 성진우 헌터님이 또 전화 피하시는 줄 알았죠." 직원이 웃으며 농담을 던졌다. 예전에는 정말로 그랬다. 레이드를 하다 크게 다친 이후에는 던전에 가는 게 무서워서 아예 폰을 꺼 버린 적도 있었다. 협회의 요청에 세 번 이상 불응하면 쫓겨나기 때문에 결국 다시 돌아와야 했지만 말이다. 옛 생각에 진우는 씁쓸히 웃었다. "참, 저기 다른 헌터분들과 와 계셔요. 두 분 가서 이야기들 나누셔요." 직원이 가리킨 곳에는 먼저 온 헌터들이 모여 있었다. 헌터들이라고 해 봐야 두 사람이 전부. 큰 사고가 난 뒤라 인원이 확 줄어 있었다. 오는 길에 아저씨에게 듣기로는 그때 희생당한 헌터들 말고도 사고의 여파로 은퇴를 결심한 헌터가 여럿이라고 했었다. '그중 한 명이 주희 씨고.' 진우가 주위를 둘러봤으나 주희는 보이지 않았다. 진우와 송치열이 가까이 다가가자 헌터 두 사람이 멋쩍은 듯 시선을 피했다. 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럴 만도 하지.' 거기 있던 사람들은 혼자 살자고 달아났던 김상식과 다리 잃은 자신을 내팽개쳤던 남자 헌터였다. 대면하기 껄끄러울 수밖에. "저기, 성 씨..." 뒤늦게 인사라도 하려던 김상식이 진우의 싸늘한 시선에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 김상식은 입을 꾹 다물고 눈치를 살피다가 슬쩍 자리를 피했다. 멀찍이 떨어진 그는 진우 쪽을 힐끔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 인간이 내가 알던 성진우 맞나? 눈빛이 무슨 마수 같네, 마수.' 김상식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니나 다를까, 팔뚝에는 어느새 닭살까지 돋아 있었다. 진우는 살기 어린 시선을 거두었다. 다행히 유진호와 달리 김상식은 눈치가 빨랐다. 눈을 한 번 마주친 뒤론 주변에 얼씬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계속 그래 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성 씨." 옆에 있던 송치열이 어딘가를 보며 미소를 지었다. "저기 오는구먼." 진우는 송치열이 바라보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고개가 미처 다 돌아가기도 전에. "진우 씨!" 뭔가 부드러운 것이 와락 안겨 들었다. "주희 씨?" 진우가 당황하는 사이 주희가 울먹거리며 진우의 몸 여기저기를 살폈다. "괜찮아요? 어디 다친 덴 없어요? 어, 다리? 진우 씨 다리가 어떻게?" 주희가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진우의 얼굴과 다리를 번갈아 보았다. 온도의 차이가 있을 뿐 송치열이 보여 주었던 반응과 다르지 않았다. "아, 그건." 진우가 말을 꾸며 대려는 찰나. "아주 뜨겁네, 뜨거워!" 진우와 주희의 시선이 동시에 소리가 나온 방향으로 향했다. 멀리서 웬 사내가 두 사람을 향해 휘파람을 불어 대고 있었다. 푸른색 죄수복을 입은 사내였다. '근처에서 영화 촬영이라도 있는 건가?' 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승합차 앞 좌석에서 정장을 입은 남자가 내렸다. 그는 죄수복을 향해 나직이 경고했다. "입 다물어." 죄수복은 먼 곳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그러자 정장 입은 남자가 승합차 안을 살펴보는 사이 기다렸다는 듯 주희를 향해 윙크를 날렸다. 진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윽고 승합차에서 두 사람이 더 나왔다. 모두 남자였다. 특이한 점은 그들 전부 죄수복을 입은 채로 수갑을 차고 있다는 것이었다. 정장 입은 남자는 죄수복 사내 세 명을 이끌고 협회 직원에게 다가왔다. 협회 직원이 반갑게 인사했다. "이제 오셨네요." "죄송합니다. 오는 길에 차가 좀 막혀서." 협회 직원이 내민 서류에 정장 입은 남자가 하나씩 사인을 시작했다. 그동안 협회 직원은 헌터들을 불러 모았다. "저분들은 오늘 헌터님들하고 같이 레이드를 하게 된 대체 복역자분들이에요." 헌터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김상식이 앞으로 나섰다. "대체 복역자? 지금 우리보고 범죄자들하고 레이드를 뛰라는 거요?" 죄를 지은 헌터들은 선택을 할 수 있었다. 교도소에서 형기를 다 채울 것인가, 협회에 협조하고 형량을 줄일 것인가. 대부분은 형량 줄이기를 택하는데, 이런 죄수들을 '대체 복역자'라 했다. 직원이 헌터들에게 연거푸 고개를 숙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우리 구역 헌터분들 숫자가 너무 많이 줄어서요. 협회에서도 당분간은 어쩔 수가 없대요. 대신 감시과 헌터분도 함께하시니까 걱정은 안 하셔도 될 거예요." 김상식이 의슴런 눈초리로 물었다. "감시과 헌터분도 같이?" 31 화 "네. 복역자분들은 다 C 등급이시고, 감시과 헌터분은 B 등급이시니 염려하지 않아도 되세요." 김상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B 급 헌터 하나를 이기려면 C 급 헌터 열 이상이 필요하다는 게 정론이었다. B 랭크의 상급 헌터가 감시 겸 레이드를 도와준다는데 마다할 이유는 없었다. 'B 랭크 하나와 C 랭크 셋이라...' 진우는 감시과 헌터와 대체 복역자들의 면면을 훑어보다 고개를 갸웃했다. '뭔가 이상한데?' 저들 사이에서 미묘한 살기가 흘렀다. 이것도 감각 스탯의 작용일까? 아니면 쓸데없는 노파심에 불과할까? 어쨌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엄습해 왔다. 진우는 주희에게 귓속말했다. "주희 씨, 이번 레이드는 빠지세요." 주희는 진우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진우 씨는요?" 진우가 대답 대신 반문했다. "제가 간다면요?" "그럼 나도 갈래요." 어떻게든 따라오겠다는 얼굴이었다. '나를 걱정해서 그러는 거겠지만...' 이런 얼굴을 한 주희가 상당히 고집스럽다는 사실을, 진우는 그간의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내가 있으니 별문제는 없겠지.' C 급 다섯이 섞인 황동석 일행을 혼자서 상대해 본 적도 있으니까.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요, 그럼." 감시과 헌터가 서류 작업을 마치고 모여 있는 헌터들 앞에 나섰다. "감시과에서 일하는 강태식입니다. 설명은 이미 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제가 잘 감시할 테니 저놈들은 신경 쓰지 마십시오." 강태식이 죄수들에게 손짓했다. 죄수들이 터벅터벅 걸어와 손을 내밀었다. 강태식은 능숙한 손놀림으로 그들의 수갑을 풀어 주었다. "아오, 갑갑해서 죽는 줄 알았네." "우리가 노예도 아닌데 이런 식으로 막 여기저기 끌고 다녀도 되는 거야?" 죄수들은 자유로워진 손목을 만지작거리며 투덜거렸다. 강태식은 그들을 무시하고서 다시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오늘 누가 앞장서실 겁니까?" 평소 리더 역할을 해 오던 송치열이 손을 반쯤 들었다. 강태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송치열을 선두로 헌터들이 하나둘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가죠." 진우도 주희와 함께 안으로 들어갔다. 저번 사고의 충격이 아직 남아 있는지 주희는 진우의 소매 끝을 살짝 잡았다. *** 이번 던전에서는 고블린들이 주로 나왔다. 인간 형태의 마수 중에서는 최약체로 분류되는 고블린. 던전 공략은 어렵지 않았다. "키에에엑!" "키엑!" 이 기괴하게 생긴 작은 괴물들은 힘을 얻기 전에도 상대할 만했었다. 진우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고블린들을 때려잡았다. "키에엑!" "칵!" 생각보다 잘 싸우는 진우의 모습에 주희나 송치열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 전력 대부분을 감추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과는 확실히 달랐다. 주희가 다가와서 물었다. "어디서 운동이라도 배우고 있는 거예요?" "그게... 매일 달리기를 하고 있거든요." "달리기요?" 주희가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어쨌거나 거짓말은 아니니까. '그런데... 경험치가 아예 안 들어오네.' "끼엑!" [적의 레벨이 너무 낮아 경험치가 오르지 않습니다.] "카각!" [적의 레벨이 너무 낮아 경험치가 오르지 않습니다.] 진우는 실망스런 표정을 했다. 고블린들이 약해서 경험치를 받을 수 없다는 메시지만 반복됐다. '이래서야 원...' 심지어 고블린들이 주는 마정석까지도 최저 등급이었다. 진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C 급이라는 죄수들은 간만의 자유가 신이 났는지 자신들의 무기로 마음껏 고블린들을 찢어발기고 있었다. "끼이엑!" "켁? 켁!" 이렇게 보니 누가 마수이고, 누가 인간인지 분간이 안 갈 정도였다. '나까지 열심히 할 필요는 없겠네.' 경험치도 안 주고, 돈벌이도 안 되니까. 동시에 이런 생각도 들었다. '매번 이런 식이라면 협회에서 나가는 편이 좋으려나?' 협회에서 들어오는 일은 D, E 급 게이트의 공략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D,E 급으로는 레벨이 오르지 않는다면 굳이 협회의 레이드에 참가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어머니 병원비 정도는 내가 마련할 수 있으니.' 언제든지 협회를 나갈 수 있었다. 이래서 돈이 좋은 거다. 돈이 생기자마자 선택권이 넓어졌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동안, 일행은 점점 던전 안쪽으로 깊숙이 들어갔다. "어?" "음..." 곧 그들 앞에 세 갈래의 갈림길이 나타났다. 강태식이 송치열에게 건의했다. "던전 난이도가 생각보다 낮으니 여기서부터는 나눠서 가는 게 어떨까요?" "그렇게 헙시다." 송치열도 동의했다. 진우는 눈을 감고서 감각을 확장시켰다. '어느 쪽에 보스가 있을까?' 그래도 보스는 경험치를 좀 주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곧 던전 안 생명체들의 기운이 하나하나 기감에 걸리기 시작했다. 눈을 뜬 진우가 송치열에게 말했다. "아저씨, 우린 왼쪽으로 가요." "그려." 진우, 송치열, 주희는 왼쪽 길로, 강태식과 죄수들은 오른쪽 길로, 나머지 두 사람은 중앙 길로 가기로 하고 각자 흩어졌다. 진우는 가슴이 뛰었다. '보스는 이 길 끝에 있다.' 강하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고블린과는 다른 뭔가 독특하고 이질적인 기운이 동굴 끝쪽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빨리 보스를 잡고 싶었다. 그런데 몇 걸음만 옮겨 가도 고블린들이 한 무더기씩 튀어나왔다. "킥킥." "키리리릭." "키익." 이번엔 대략 열 마리 정도. 나무 방망이를 든 놈, 나무칼을 든 놈, 기다란 나무 끝에 돌촉을 매단 놈. 나름대로 열심히 무장하기는 했는데... 전혀 위협이 되지는 않았다. '이놈들은 지겹지도 않나?' 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돈도 되지 않는 놈들이 잔뜩 몰려다니니 성가시기만 할 뿐이었다. "열 마리씩이나..." "어떡하죠? 다른 사람들이랑 합류해서 다시 올까요?" 하지만 다른 두 사람은 제법 진지했다. "그래도 고블린들뿐이니 일단은 한 번 싸워 보는 게 좋을 것 같구먼." "네." 송치열의 손끝에 불꽃이 일렁거렸고, 주희도 치료 마법을 쓸 준비를 마쳤다. 진우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러고 보니 던전 안에 있는데도 전혀 긴장감이 안 드네.' 전과 비교도 할 수 없게 강해져서일까? 이제 겨우 조금은 달라졌다는 자각이 들었다. 송치열이 진우에게 물었다. "성 씨. 준비됐는감?" "예." 진우는 팀원들의 호흡에 맞춰 천천히 고블린들을 잡아 나갔다. 그렇게 열심히 던전을 공략하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어딘가에서 비명이 연달아 울려 퍼졌다. "으아아아아아악!" "으아악!" 고블린이 아니다. 분명 사람의 목소리였다. 진우와 송치열, 이주희는 서로를 쳐다보았다. 잠시 잠잠해지나 했더니 또다시 끔찍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악!" 송치열의 얼굴이 굳어졌다. "가 봄세." 세 사람은 빠르게 소리가 난 쪽으로 달려갔다. 진우는 두 사람을 제치고 앞서 나갈 수 있었지만, 두 사람의 안전을 위해 속도를 맞추었다. 얼마나 달렸을까? 주희가 누군가를 발견하고 소리를 높였다. "저기 사람이...!" 거기엔 감시과 헌터 강태식이 피투성이가 된 채로 무릎 꿇고 있었다. 강태식이 소리쳤다. "조, 조심하세요! 그놈들이 아직 어딘가에 있을지도 모릅니다!" 힘들게 말을 내뱉은 강태식은 고통스러운 듯 바닥에 엎드렸다. "으윽." 보다 못한 주희가 강태식에게 뛰어갔다. "제가 치료해 드릴게요!" 주희에게도 생각이 있었다. 적이 어딘가에 있다고 해도 자신은 B 급에 해당하는 치유계열 헌터였다. 치료 속도는 결코 느리지 않았다. 그러니 적의 공격을 받기 전에 강태식을 치료하는 게 유리하다고 판단했다. "조금만 참으세요." 강태식 앞에 선 주희가 양손을 뻗었다. 은은한 빛이 손끝에 맺혀 갔다. 그때였다. 빠르게 상체를 일으킨 강태식이 마력을 담은 손끝으로 주희의 목 가운데를 노렸다. 쉬익! 손끝이 주희의 목젖에 닿기 직전, 누군가가 아슬아슬하게 강태식의 손목을 붙잡았다. 탁! "아...!" 놀란 주희가 뒷걸음질 치다 주저앉았다. 털썩. 강태식은 의아하다는 얼굴을 했다. '이 간격에서 내 공격을 막아?' 상급 헌터에게 하급 헌터들 몇을 처리하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유일한 걸림돌은 자신과 같은 B 급 여자 헌터 하나였다. 다행스러운 점은 그녀가 비전투계열이라는 것. 스스로 자신을 지킬 힘이 없으니 기습만 성공하면 쉽게 끝날 줄 알았다. 그런데... 기습이 막히다니. 공들여 연기한 보람이 없어진 것이다. 강태식의 시선이 손목을 잡은 손을 따라 올라갔다. 그 끝에는 진우의 얼굴이 있었다. 진우의 눈빛에 강한 살기가 담겼다. 강태식은 인상을 찌푸렸다. "협회의 말단 헌터 따위가!" 쉬익! 강태식의 다른 손이 진우의 얼굴을 향해 날아갔다. 그러나 진우는 고개를 틀어 주먹을 가볍게 흘려 보냈다. '아니?' 강태식은 힘주어 진우의 손을 뿌리쳤다. "허?" 진우도 놀랍다는 얼굴을 했다. 역시 상급 헌터다운 힘이었다. 양팔이 자유롭게 된 강태식이 마구잡이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우도 강태식 못지않은 속도로 움직이며 반격을 시도했다. 파바박! 두 사람의 손과 팔이 끝없는 공방을 주고받았다. 둘은 한 치의 물러섬도 없었다. 그새를 틈타 송치열이 주희를 뒤로 끌고 나왔다. "아, 아저씨..." 주희가 놀라움에 말을 잇지 못했다. 하지만 주희 이상으로 놀라고 있는 사람이 바로 송치열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믿을 수 없는 속도의 공방전이었다. 눈으로 좇기가 힘들 정도였다. 상급 헌터 쪽이야 그렇다 쳐도, 성진우는 자신이 알던 모습이 아니었다. B 급을 상대로 전혀 밀리지 않고 있었다. 'C 등급인 내 눈으로도 움직임을 따라가기가 벅차!' 역시 예감이 맞았다. 지금의 진우는 자기가 알고 있던, 그 약하지만 감이 좋던 E 급 청년이 아니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수백 합을 겨룬 두 사람이 숨을 고르기 위해 한 걸음씩 뒤로 물러났다. 진우가 강태식을 노려보며 미간을 구겼다. "그 옷에 묻은 피... 당신 피가 아니지?" 강태식은 손목을 풀면서 대답했다. "그래, 그 새끼들 피다. 그건 그렇고 이런 데서 너만 한 헌터를 만날 줄이야." 그는 진심으로 감탄하고 있었다. 협회 소속 말단 헌터 중에 상급 헌터가 있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다. '이러면 손해인데.' 오늘이 최적의 타이밍이라고 생각해서 일을 저질렀지만 예상치도 못했던 난관을 만났다. 강태식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물었다. "넌 누구냐? 무슨 랭크지?" 진우가 '카사카의 독니'를 소환해 손에 쥐며 짧게 대답했다. "성진우. E 급이다." 32 화 4. B 급 강태식 강태식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B 급에서도 속도로는 져 본 적 없는 자신과 대등한 움직임을 보이는 놈이 방금 자신을 E 급 헌터라고 소개했다. '이 자식이 누굴 놀리나?' 강태식은 뿌득 이를 갈았다. '아니, 가만...' 그런데 뭔가 걸리는 게 있었다. '진짜 상급 헌터라면 여기 있을 이유가 없잖아?' 협회의 말단 헌터들 일이란 게 뻔하다. 길드나 개인이 돈 안 된다고 포기한 게이트들을 처리하는 게 주 업무다. 다른 헌터들에 비하면 수입이 형편없고, 헌터들 사이에서 인정받기도 힘들다. 놈은 아마 E 등급이 맞을 거다. 다만 실력이 그 이상일 뿐. '그렇다고 부정 등록자가 협회 이름으로 일하고 있지는 않을 테고.' 강태식은 결국 유일한 결론에 도달했다. '...각성 후 각성.' 그러고 보니 얼마 전 이 근처 어딘가에서 각성 후 각성 의심자가 나왔다고 협회 상부가 떠들썩했던 기억이 있었다. '분명 협회 소속 헌터라고 했었지...' 이름을 외워 놓았더라면 좋았을 텐데. 오래되지 않은 일이니 놈이 재등록을 미루고 있었다면 아직 E 등급을 유지한 채 협회 일을 돕고 있을 가능성도 있었다. 하필 이런 날 놈과 마주칠 줄이야. 오늘 레이드에 참여하는 헌터들의 목록을 꼼꼼히 체크했지만 놈의 존재를 간과하고 말았다. '운도 지지리 없군.'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이러면 추가금을 더 받아야겠는데...' 강태식은 며칠 전의 기억을 떠올리며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 며칠 전. 협회 본부 근처의 카페. 강태식은 자리에 앉자마자 물었다. "무슨 일로 저를 보자고 하신 거죠?" 맞은편에 앉은 중년 남자는 어딘지 모르게 많이 수척해 보였다. '무슨 실업 사장이라고 했던가?' 분명 초면이었다. 하지만 연이어 걸려오는 남자의 간곡한 전화에 결국 강태식이 잠시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남자는 혼잣말처럼 입을 열었다. "던전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모른다고 들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강태식은 다시 한 번 물어야 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여기 제가 모은 돈 전부가 들어 있습니다." 남자는 다짜고짜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강태식은 남자와 통장을 번갈아 보다 통장을 확인해 보았다. 안에는 20 억이라는 거금이 들어 있었다. "이걸 왜 제게?" 강태식이 의아스러운 표정을 짓자, 남자는 고개를 떨어뜨리고 말했다. "헌터님께서 맡고 계신 죄수들 중 제 딸을 욕보인 놈이 있습니다. 그 일로 딸애는 목을 매달았고, 애 엄마는 충격을 받아서 아직도 병원에 누워 있지요." 남자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그런 짓을 한 놈이 몇 년 뒤에 멀쩡하게 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니... 제가 잠이나 제대로 잘 수 있겠습니까?" 다시 고개를 든 남자의 얼굴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 차 있었다. "이 정도면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뭔지 알아들으셨으리라 생각합니다."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제발 부탁드립니다, 헌터님!" 두 사람 사이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강태식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고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러다 한참 후에야 입을 열었다. "제가 왜 헌터 협회의 감시과에 들어간 줄 아십니까?" "예?"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강태식의 설명이 이어졌다. "B 급 헌터 정도 되면 상급 헌터로 분류되어 대형 길드에도 종종 러브콜을 받습니다. 그런데 제가 왜 박봉을 받으며 이 짓을 하고 있는지 아십니까?" "모... 모르겠습니다." 강태식은 입꼬리를 올렸다. "전 괴물 같은 것보다 사람과 싸우는 게 훨씬 즐겁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강태식에게 감시과는 천직이나 마찬가지였다. 합법적으로 헌터들을 팰 수 있는 자리니까. 그러다 가끔 피치 못하게 죽이는 경우도 있고. '피치 못하게... 라.' 강태식은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말했다. "말씀하신 벌레를 밟아 죽이는 거야 제게는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던전 안에는 벌레들 말고 다른 헌터들도 있을 거란 말이죠. 제 눈에는 벌레로 보입니다만, 그 사람들 눈에도 그것들이 벌레로 보일까요?" 강태식의 부정적인 어조에 남자는 실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겨우 딸아이의 복수를 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는데.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그러나 강태식은 남자를 비웃기라도 하듯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뗐다. "이 돈에다 다른 헌터들 처리 비용까지 10 억 더. 가능하시겠습니까?" *** 하지만 그 다른 헌터들 속에 재각성 헌터가 포함되어 있다면 30 억으로는 수지가 맞지 않았다. 목숨이 달린 문제니 말이다. 자칭 E 급 헌터는 지금도 예리한 안광을 내뿜고 있었다. 빈틈을 보이면 언제라도 덤벼들 기세였다. 강태식은 침을 꿀꺽 삼켰다. '만만한 상대가 아니다.' 이길 자신은 있었다. 각성자가 되기 전에도 일대일 싸움에선 거의 져 본적이 없었던 강태식이었다. 그러나 이긴다고 해도 쉬운 승리는 아닐 터. 이쯤에서 계획을 약간 수정할 필요가 있었다. 마침 E 급 헌터가 물어 왔다. "그 죄수들... 왜 죽였어?" "그놈들에게 강간당한 여자애 아버지가 직접 찾아와서 부탁하더군. 놈들은 죽어 마땅한 짐승들이었다. 나는 인간이 아니라 사람을 해치는 짐승들을 처분했을 뿐이고." E 급 헌터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어쩌면 대화가 통할지도 몰랐다. 강태식은 본격적으로 회유를 시작했다. "일이 이렇게 됐지만 너희를 해치고 싶지는 않다. 오늘 일을 모른 척 해주지 않겠나? 약속만 해 준다면 나도 더 이상은 너희에게 손대지 않겠다." 물론 화근을 남겨 둘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강태식은 생각했다. 정면 대결은 다칠 가능성이 있으니 일단 여기를 벗어난 다음, 나중에 적절한 때에 기회를 봐서 하나씩 처리해 나가도 늦지 않다고. 그러나 E 급 헌터가 코웃음 쳤다. "그런 말은 손을 대기 전에 했었어야지. 기습이 실패하니까 이제 와서 없던 일로 하자고?" 틀린 말은 아니었다. 강태식도 어이없다는 듯 피식 웃었다. '결국 그렇게 나온다 이건가.' 그렇다면 이쪽도 전력을 다하는 수밖에. 강태식의 눈빛이 살벌해졌다. 날카로운 시선이 E 급 헌터를 위아래로 빠르게 훑고 지나갔다. 강태식의 미간이 잠깐 꿈틀거렸다. '칼은 어디서 나왔지?' 언젠가부터 E 급 헌터 손에 단검이 들려 있었다. '뭐... 상관없나?' 무기가 어디서 나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무엇을 들고 있느냐다. 강태식은 짧은 분석을 끝냈다. 빠른 움직임에 단검을 무기로 쓰는 클래스. 상대는 초근접형 딜러다. 아마도 특기는 '암살'. 공교롭게도 자신의 특기와 동일했다. 하지만 놈은 재각성을 한 지 얼마 안 됐다. 경력의 차이는 분명 압도적일 터. 가진 스킬을 제대로 활용하지도 못하리라. "선배로서 한 수 가르쳐 주지." 강태식이 허리춤에서 나이프를 꺼내며 E 급 헌터에게 조소를 보냈다. "이런 것도 할 수 있나?" 강태식은 '은신' 스킬로 몸을 감추었다. 그러자 E 급 헌터가 크게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놈의 당혹감이 전해져 왔다. '당연히 그렇겠지.' 은신 스킬은 단순히 투명해지는 기술이 아니다. 모습, 소리, 냄새! 시전자의 모든 기척을 일순간 사라지게 만드는 스킬! 그게 바로 은신이었다. 암살형 헌터들 중에서도 은신 스킬을 쓸 수 있는 이는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등급과 관계없이 운이 매우 좋은 이들만 각성 때 은신 스킬을 얻을 수 있었다. '속전속결!' 강태식은 순식간에 E 급 헌터의 뒤로 이동했다. 놈의 등은 무방비로 노출되어 있었다. '끝이다.' 어려운 싸움을 예상했는데 생각보다 싱거웠다. 상대가 은신 스킬을 대비하고 있었다면 이렇게 쉽게 이길 수는 없었을텐데. 역시나 경험의 차이가 승패를 갈랐다. '죽어라!' 강태식의 나이프가 E 급 헌터의 갈비뼈 아래를 노리고 날카롭게 쇄도했다. 그러나 그때! 챙! 두 개의 단검이 맞부딪치며 불꽃을 튀겼다. 은신이 풀린 강태식의 눈이 커졌다. "아니, 어떻게?" E 급 헌터의 단검이 자신의 단검을 정확히 가로막고 있었다. 강태식은 놀란 눈빛으로 E 급 헌터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E 급 헌터가 무심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뜨네." "뭐... 뭐라고?" 이해할 수 없는 E 급 헌터의 언행에 강태식은 문득 영문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 띠링! [긴급 퀘스트: 적을 처치하라!] '플레이어'에게 살의를 가진 이가 주위에 있습니다. 적을 처치하여 안전을 확보하십시오. 지시에 따르지 않으면 그에 해당하는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처치해야 할 적의 숫자: 1 명 처치한 적의 숫자: 0 명 진우는 긴급 퀘스트 메시지를 확인하고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헛수고가 아니었어.' 혹시 강태식에게 선수를 양보하면 저번 황동석 일당들 때처럼 긴급 퀘스트가 뜨지 않을까 했다. 그래서 한번 테스트해 봤는데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강태식이 살의를 보인 순간 메시지가 떴다. 괜히 대화를 나누거나 당황하는 모습이 보이며 허점을 드러냈던 것이 아니었다. '은신을 쓸 줄은 모르지만...' 사실 처음 강태식이 눈앞에서 사라졌을 땐 조금 놀라기도 했다. 은신은 매우 보기 드문 스킬이니까. 하지만 정신을 집중하자 곧 눈을 감고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강태식의 움직임이 세세하게 느껴졌다. 높은 감각 스탯의 힘이었다. 원래는 싸워도 되는 적인가, 아닌가를 가리기 위해 꾸준히 투자한 스탯이었는데 이런 용도도 있었다. '운이 좋았다.' 덕분에 강태식은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고 있었다. "아니, 어떻게?" 이제 놈을 처치하기만 하면 추가 퀘스트 보상을 받을 수 있었다. '기왕 싸울 거라면 받을 건 다 받아야지.' 턴은 넘어왔다. 지금부터는 공격의 시간이었다. 서로 맞댄 단검 두 개가 팽팽히 줄다리기했다. 힘은 대등했다. 순간 진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다른 데서 물꼬를 터 볼까?' 진우의 발이 빠르게 움직여 강태식의 발등을 밟았다. 콰직! "으악!" 33 화 단검에 온 신경을 쏟고 있던 강태식은 갑자기 발끝에서 밀려 올라오는 고통에 화들짝 놀라 급히 물러섰다. 진우는 틈을 놓치지 않았다. '질주!' [스킬 '질주'를 사용합니다.] [이동 속도가 30% 증가합니다. 시전 중 1 분당 마나가 1 씩 감소합니다.] 진우가 빠르게 따라붙었다. 강태식의 눈이 커졌다. '속도가 더 빨라지다니?' 안 그래도 기민한 움직임을 보이던 진우가 한층 더 빨라지니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줄인 진우는 '카사카의 독니'로 강태식의 허벅지를 찍었다. "크악!" 상체 방어에 집중하던 강태식의 빈틈을 노리고 들어간 공격이었다. ['효과: 마비'가 발동합니다.] [대상의 저항력이 높아 효과가 취소되었습니다.] ['효과: 출혈'이 발동합니다.] [대상의 체력이 1 초에 1%씩 소모됩니다.] '좋아!' '카사카의 독니'의 추가 공격 효과가 들어갔다. 마비가 아닌 게 아쉽지만 이것으로 싸움은 한결 더 쉬워졌다. 하지만 강태식 또한 상급 헌터! 저항이 만만치 않았다. 그가 든 나이프가 진우를 노리고 날아들었다. 휙, 휙. 진우는 나이프를 아슬아슬하게 피하며 강태식의 급소들을 공격했다. 강태식은 허벅지에 입은 상처로 다리가 불편한 상황에서도 노련한 헌터답게 진우의 공격을 차분히 막아 냈다. 챙, 챙! 진우와 강태식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속도는 호각!' '속도는 같다!' 두 사람 다 서로의 민첩한 움직임에 감탄하며 초근접 거리에서의 속도전을 이어 나갔다. 단 한 번에 승부의 향방을 결정지을 수도 있는 살상력을 지닌 공격들이 무수히 오고 갔다. 쉭, 쉭, 쉬익, 쉭, 쉭, 쉭, 쉭, 쉭! 보는 사람들의 피가 절로 마를, 살벌한 공방전이었다. '균형을 깨야 한다.' 진우가 눈에 힘을 주었다. [스킬: '살기'를 사용합니다.] 진우와 눈이 마주친 강태식이 흠칫 몸을 떨었다. '뭐지?' ['효과: 공포'가 발동합니다.] [대상의 모든 능력치가 1 분간 50% 감소합니다.] '됐다!' 진우는 승리를 확신했다. 반면 강태식의 동공에는 지진이 일었다. '왜 몸이?' 진우와 눈을 마주치고 난 뒤로 물속에서 허우적대는 것처럼 몸이 무겁게 느껴졌다. 자랑하던 속도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쉬익! 쉭! 강태식의 몸에 상처가 하나씩 늘어갔다. '이, 이럴 수가!' 강태식의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이건 분명 디버프 효과였다. 암살 클래스가 디버프 마법을 쓸 수 있다는 소리는 어디서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암살이 특기가 아니었나?' 아니, 그렇다면 이 속도는 대체? 그러나 강태식은 곧 생각을 멈추어야 했다. 혼란은 경악으로 바뀌어 갔다. 눈앞에서 진우가 깊숙이 쇄도해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강태식은 황급히 진우의 눈을 노렸다. 쉬익! 진우가 급히 목을 뒤로 뺐지만 나이프에 뺨이 살짝 긁히고 말았다. 하지만 이 정도의 피해는 진우도 이미 각오하고 있었다. 결정적인 한 방을 위해서 약간의 위험은 감수해야 했다. 강태식의 얼굴이 구겨졌다. '젠장.' 강태식의 품속으로 들어온 진우가 '카사카의 독니'를 강태식의 가슴팍에 꽂았다. 푹! "커억!" 강태식이 눈을 번쩍 떴다. 그 순간 두 사람 다 동시에 알 수 있었다. 승부가 이것으로 결정 났음을. 강태식의 입속에 시뻘건 핏물이 고였다. 가슴에서부터 솟구쳐 올라온 피였다. 강태식은 피를 머금은 채 피식 웃었다. 하필 이런 날에 D 급 던전 따위에서 재각성 헌터를 만나게 되다니. '지지리 운도 없다니까, 정말.' 강태식의 손에 들려 있던 나이프가 떨어졌다. 숨을 헐떡이던 강태식은 고개를 기울여 진우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였다. "..." 묵묵히 듣고 있던 진우가 강태식의 가슴에서 단검을 빼냈다. 강태식은 옷걸이에서 흘러내린 옷처럼 힘없이 아래로 무너졌다. 털썩. 띠링! ['긴급 퀘스트: 적을 처치하라'를 완료하셨습니다.] 메시지가 떴지만 진우는 표정이 좋지 않았다. 역시 몬스터가 아닌 사람을 죽이는 건 뒷맛이 쓰다. 비록 상대가 먼저 걸어온 싸움이라도 말이다. [완료 보상이 도착하였습니다.] [보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Y/N) 그나마 보상이라도 없었으면 완전히 밑지는 장사였겠지. 진우는 그렇게 위로하며 보상을 확인했다. 띠링! [아래와 같은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상 1. 능력치 포인트 +5 '어라?' 진우가 의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황동석 일당을 처치했을 때보다 보상이 현저히 줄어들어 있었다. '난이도는 이쪽이 훨씬 높았는데?' 상대의 실력과 상관없이 머릿수가 중요하다는 건가? 아니면 다른 조건이 더 필요했던 걸까?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그때, 문득 아래로 향했던 진우의 시선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죽은 강태식의 몸에서 동전만 한 크기의 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진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설마...?' 믿기지 않았지만 그 반짝거림은 몬스터가 가진 아이템에서 나오는 빛과 같았다. 이 빛을 마수에게서 발견했을 때는 마정석이 나왔다. 그런데 지금, 빛은 죽은 강태식에게서 나오고 있었다. '뭘까?' 진우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빛이 새어 나오는 강태식의 심장 부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띠링! 역시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룬석: 은신]을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룬석? 룬석이라면...!' 심장이 거칠게 뛰기 시작했다. 강태식이 썼던 스킬이 룬석이 되어 강태식의 몸에 남아 있었다. 은신은 극소수의 헌터만이 쓸 수 있는 진귀한 스킬이었다. 이게 만약 알고 있는 의미 그대로의 '룬석'을 뜻하는 거라면... '획득.' 손안에 룬 문자가 적힌 작은 돌 하나가 들어왔다. [룬석: 은신] 룬석을 부수면 스킬이 흡수됩니다. 돌을 부숴 스킬을 흡수한다. 의미 그대로의 룬석이 확실했다. 이걸 부수면 은신을 쓸 수 있게 되는 거다. 아직 은신 스킬을 배울 수 있는 룬석이 나왔다는 소식은 들어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 룬석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그때 뒤에서 두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 씨, 괜찮나?" "진우 씨!" 진우는 룬석을 주머니 안에 숨기며 돌아섰다. 송치열과 이주희가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D 급 던전에서도 빌빌대던 E 급 헌터 진우가 B 급 헌터인 강태식을 이겼으니까 말이다. 비전투계열인 이주희는 몰라도 C 급인 송치열은 그게 얼마나 말이 안 되는 일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진우는 자기 몸을 둘러보았다. "예, 괜찮습니다." 일단 눈으로 보기엔 멀쩡했다. 딱히 아픈 데도 없었고. 그러나 고개를 돌리는 순간 턱에 고여 있던 피가 후드득 흘러내렸다. 무심결에 뺨을 만졌더니 아까 베인 상처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아." "치료해 줄게요." 주희 손끝에 잠깐 푸른빛이 맴돌더니 그 작은 상처마저 사라졌다. B 급 헌터를 E 급 혼자 큰 상처 없이 이긴 것이다. 진우를 아는 두 사람에겐 방금 전 B 급 헌터가 자신들을 죽이려 들었던 것보다, 진우가 그를 이긴 것이 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자네가 어떻게..." 송치열이 말을 잇지 못했다. 진우도 송치열이나 주희가 하고 싶은 말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언젠가 때가 오면 다 말씀드릴 테니 지금은 아무것도 묻지 말아 주셨으면 합니다." 진우가 진지한 목소리로 부탁하자 주희가 끄덕끄덕 고개를 움직였다. 송치열도 곧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가 그리 말한다면 이유가 있겠지. 알겠네." 진우는 문득 보스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일이 꼬이긴 했지만 보스를 잡겠다는 계획엔 변함이 없었다. 보스는 되도록 혼자서 잡고 싶었다. 또 두 사람이 없어야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기도 했다. 진우가 송치열을 돌아보았다. "이런 일이 일어났는데 레이드를 계속하는 건 무리겠죠. 일단 두 분은 나가서 협회에 연락해 주세요. 저는 여기 남아서 생존자가 있는지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송치열은 직감적으로 진우가 무엇을 하려는지 알아챘다. '게이트를 닫아 버리려는 게야.' 송치열의 생각에도 그 편이 가장 뒷말이 나오지 않을 듯했다. "그게 좋겠구먼. 주희 양, 우리는 나가지." 송치열의 권유에 주희가 멈칫거리더니 진우에게 달려왔다. "같이 저녁 먹기로 약속했던 거 잊지 않았죠?" 진우가 씩 웃었다. "못 잊죠. 아직 거스름돈도 못 받았는데." "그럼 약속 꼭 지켜요. 밖에서 기다릴 거니까." 진우가 고개를 끄덕이자 주희는 그제야 안심한 듯 물러났다. 던전을 빠져나가는 동안에도 주희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진우는 두 사람의 그림자가 사라지자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최대한 오래 숨기고 싶었는데. 결국 들키고 말았다. 목격자가 두 사람이나 생겼으니 이제는 발뺌할 수도 없었다. '그렇다고 주희나 송 씨 아저씨를 협박하고 싶지도 않고.' B 급 헌터를 처치한 건 아마 정당방위가 될 것이다. 증인이 둘이나 있으니까 그 점은 문제없다. 문제는 E 급 헌터가 어떻게 B 급 헌터를 이겼느냐 하는 것이었다. '재각성 헌터가 제일 설득력이 있겠지.' 그쪽으로 가닥을 잡았다. 재각성 헌터라고 밝히고 등급 재심사를 받자. 시스템이니, 레벨업이니 해 봐야 믿어 주지도 않을 테고, 굳이 이쪽에서 먼저 밝혀야 할 이유도 없었다. 재심사를 받기로 작정하니 시원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좀 더 강해지고 나서 랭크를 받고 싶었지만...' 어디 세상일이 계획대로만 되던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등급은 얼마나 올라가려나?' 강태식과 비등하게 싸우다 이겼으니 B 급에서도 약간 높은 정도일까? 꽤 강해졌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역시 B 에서 S 로 이어지는 상급 헌터들은 강했다. '뭐, 뒷일은 나가서 생각하기로 하고.' 이제 보스를 처치할 시간이었다. D 급 수준의 마력 파동을 보이는 던전에서 E 급 마수들 고블린만 나왔다. 그렇다면 나머지 모든 마력 파동은 보스에게서 나오고 있을 가능성이 높았다. 그 정도 보스라면 레벨업에 필요한 경험치를 충분히 얻을 수 있으리라. '하지만 그전에.' 확인해 볼 게 있었다. 진우는 감각을 극대화시켜 던전 내부의 기운을 샅샅이 훑었다. "찾았다." 진우가 걸음을 옮겼다. 가는 도중 김상식의 시체와 다른 헌터의 시체도 발견했다. 그게 상급 헌터의 힘이었다. 상급 헌터가 마음만 먹으면 하급 헌터 몇쯤은 눈 깜짝할 사이에 숨통을 끊어 놓을 수가 있었다. 진우는 굳은 얼굴로 그들을 지나쳐갔다. 34 화 그리고 잠시 뒤. "읍, 읍, 읍!" 멀지 않은 곳에서 죄수 한 명이 버둥거리고 있는 걸 발견할 수 있었다. 손발이 밧줄로 묶여 있고, 입에는 재갈이 물려 있었다. 죽기 전 강태식이 말했던 그대로였다. "가까운 곳에 강간범을 묶어 두었다. 그녀의 아버지가 최대한 고통스럽게 죽여 달라고 부탁해서 마지막에 처리할 생각이었지." 강태식은 그 말을 끝으로 숨을 거두었다. 죄수는 진우를 보고 더 심하게 몸부림쳤다. 빨리 풀어 달라는 몸짓 같았다. "읍! 읍! 읍!" 자세히 보니 아까 전 주희에게 추파를 던졌던 그 녀석이었다. 진우가 죄수 입에 물려 있는 재갈을 벗겨 내자, 죄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숨을 몰아쉬었다. "헉, 헉, 헉! 강태식, 그 미친놈이, 그 새끼가 다 죽였어, 다 죽였다고! 뭐야? 그 새낀 간 거야? 너 옷에 피는? 너도 당한 거냐?" 진우는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들어 정면을 바라보았다. 보스가 있는 방향이었다. 죄수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일단 이것 좀 빨리 풀어 줘. 강태식이 오기 전에 달아나야 돼. 이 씨발, 줄에 마력이 담겨 있어서 힘으로 끊을 수가 없다고! 장비는 가지고 있지? 너 왜 말이 없냐? 내 말 안 들리냐?" 협회 말단 헌터 따위가 계속 자기 말을 무시하자 죄수는 자기 처지도 잊어버리고 인상을 쓰기 시작했다. 내내 무표정하던 진우가 그제야 입을 열었다. "요 앞에 보스가 있어." "뭐?" 죄수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일반적인 D 급 던전 보스보다 센 놈 같은데, 그놈이 어떤 패턴으로 공격할지 좀 궁금하거든." 듣고 있던 죄수가 참지 못하고 신경질을 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씨발!" 진우는 태연하게 하고 싶은 말만을 계속했다. "그전에 한 가지만 물어볼게. 니가 강간한 여자애 기억하냐?" "뭐? 누굴 말하는 건데? 너 피해자 가족이냐?" 진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방금 맞다, 아니다가 아니라 누구인지부터 물었다. 한두 명을 건드렸던 게 아니라는 소리다. 헌터는 강한 힘을 가지고 있기에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괴물이 될 수 있다. 이 녀석은 그 힘을 여자들을 희롱하는데 써 온 거다. 이걸로 결심을 굳혔다. 진우는 죄수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확인했으니 됐다." "뭐? 읍, 읍!" 죄수가 뭐라고 지껄이기 전에 진우는 바로 녀석의 입을 막아 버렸다. 그리고 발목을 잡고서는 보스가 있는 방으로 천천히 걸어갔다. "읍! 읍! 읍!" 죄수는 끌려가며 악을 썼다. 부릅뜬 양쪽 눈에 실핏줄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놈의 필사적인 발버둥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진우는 기어이 놈을 보스방까지 끌고 갔다. "읍! 읍!" 보스방에는 살아 있는 인간의 내장을 좋아한다는 홉고블린들이 무리를 짓고 있었다. "읍! 읍! 읍!" 죄수는 진우가 무엇을 하려는지 눈치챘다. 그는 홉고블린 무리를 보고서 울부짖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입고 있던 바지가 노랗게 젖어 들어갔다. "후우." 심호흡을 한 번 한 진우는 죄수를 홉고블린 무리에게 던져 버렸다. "으으으읍-!" "끼기기긱." "끼힛." "끼이익!" 싱싱한 생고기 냄새를 맡은 홉고블린들이 일제히 죄수에게 달려들어 뱃가죽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으으읍! 읍! 읍!" 필사적으로 몸부림치는 죄수의 눈에서 실핏줄이 하나둘 터져 나가며 눈 전체가 붉게 물들었다. "으으읍... 으으..." 죄수가 의식을 잃어 가는 동안에도 홉고블린들은 쉴 새 없이 이빨을 놀렸다. 구역질 나는 괴물들에게 산 채로 뜯어먹히는 기분은 어떨까? 진우는 미간을 찡그리며 보스를 찾아 안쪽을 두리번거렸다. '저기 있네.' 보스로 보이는 거대한 홉고블린이 안쪽 구석에 거만하게 앉아 있었다. 부하들이 미끼에 정신이 팔려 보스 곁을 비운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질주!' 홉고블린들 사이를 순식간에 지나친 진우가 홉고블린 보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끼엑!" 홉고블린 보스가 놀란 눈으로 급히 몸을 일으켰지만 자리에서 채 다 일어나기도 전에 놈의 머리가 바닥으로 굴러떨어졌다. 툭. 데굴데굴. 띠링! [던전의 주인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홉고블린 보스의 목을 떨어뜨린 진우가 깜박 잊고 있었던 룬석의 존재를 떠올렸다. '미끼로 유인할 필요 없이 그냥 은신 스킬을 배워서 접근했어도 됐겠는데?' 진우는 이제 사람의 형체라고 말하기도 힘든 죄수의 흔적을 돌아보며 끌끌 혀끝을 찼다. 그래도 동정심은 전혀 들지 않지만. '뭐, 어쨌든...' 작전은 성공이었다. 5.톱니바퀴 대장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홉고블린들을 처리하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키익!" "키아악!" "캭!" 홉고블린들은 진우를 피해 도망 다니다가 순식간에 정리됐다. "키약!" 마지막 놈을 잡았을 때 기분 좋은 메시지가 떴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또 올랐네?' 의외의 성과에 진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진우는 피를 말끔히 털어 낸 '카사카의 독니'와 홉고블린 사체에서 챙긴 마정석들을 인벤토리에 집어넣고서 상태창을 불러냈다. 띠링! 이름: 성진우 레벨: 27 직업: 없음 칭호: 늑대학살자 HP: 5,114 MP: 548 피로도: 0 [스탯] 근력: 72 체력: 43 민첩: 82 지능: 39 감각: 69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5) 물리 데미지 감소: 20%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액티브 스킬: 질주 Lv.1, 살기 Lv.1 [착용한 아이템] 파수꾼의 목걸이(A) 어느덧 레벨이 30 에 가까워져 있었다. 던전 입구에서 고블린들을 상대할 때만 해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는데 홉고블린 대장을 잡아 1 업, 홉고블린 졸개들을 잡아 1 업, 합쳐 레벨을 2 개나 올렸다. 강한 놈들이 전부 보스방에 모여 있었던 게 행운이었다. '아니, 행운이라고 말하기엔 좀 그런가?' 세 개의 갈림길과 보스방의 난이도. 낮은 등급의 헌터들이 고블린을 잡던 자신감으로 무턱대고 보스방에 발을 들였다면 홉고블린의 갑작스런 등장에 큰 사고가 났을 수도 있었다. 홉고블린은 고블린과 달리 그리 만만한 녀석들이 아니었다. '고블린이 등장하는 던전에서 간혹 홉고블린을 만나는 경우가 있기는 하지만...' 이렇게 홉고블린들이 무리를 짓고 있는 일은 드문 편이니까. 던전 안에서는 정말 한 치 앞을 알 수 없다. 누구에게는 행운일 수 있는 상황이 누구에게는 절망적으로 비칠 수 있다. 강한 힘만이 위험들 속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방패였다. 그래서 진우는 더 강해지고 싶었다. 던전에서의 생존도 생존이지만 만약 어머니께서 입원해 계신 병원 근처에서 던전 브레이크라도 일어난다면? 거리를 걷다가 우연히 마수들에게 습격당한다면? 아니, 꼭 마수들만이 문제가 아니다. 헌터는 이미 마수 못지않게 위험한 존재였다. 기관들이 관리한다고 해도 거기엔 분명 한계가 있었다. 스스로를 지킬 힘 정도는 가지고 있어야 했다. '헌터가 강해지는 데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자신에게는 한계가 없었다. 능력치를 올리고 아이템을 갖추며 이론상 무한히 강해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강해질 방법 하나가 더 추가됐다. 바로 룬석! 진우는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룬석을 꺼냈다. 아이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룬석의 정보가 홀로그램 글자로 떠올랐다. [룬석:은신] 룬석을 부수면 스킬이 흡수됩니다. 모르는 사람 눈에는 이상한 글자가 새겨진 조약돌에 불과하지만, 헌터라면 등급에 관계없이 누구라도 군침을 홀릴 만한 물건이었다. 상급 헌터는 자신이 쓰고, 하급 헌터는 상급 헌터에게 팔면 되니까. 특히 '은신'처럼 희귀한 스킬이 담긴 룬석은 큰돈이 된다. 정식 경매에 내놓으면 최소한 수십억 이상, 암시장에서는 그 몇 배를 받을 수도 있었다. 암시장에서 더 비싼 이유는 단 하나. 누가 어떤 돈으로 무엇을 샀는지 공식적인 기록이 전혀 남지 않기 때문이었다. 숨겨진 스킬이 있다는 건 강력한 무기를 하나 더 가지고 있는 것과 같았다. '강태식이 은신을 숨기고 있었듯이.' 감각 스탯이 높지 않았다면 꼼짝없이 뒤를 내주고 말았으리라. 그렇게 생각하면 오싹했다. '일단 판매는 제외하자. 돈은 언제든 벌 수 있으니까.' 당장 눈앞의 금전적 이득에 현혹되지 말자. 지금은 강해지는 것이 우선. 활용 가치가 높은 희귀 스킬 '은신'의 필요성은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이 돌멩이 하나가 집 몇 채, 아니 빌딩 몇 채 가격이라니." 진우는 예전 같았으면 꿈도 못 꿨을 일을 곧바로 실행에 옮겼다. 손에 힘을 주자 룬석이 가볍게 부서졌다. 콰직. 금이 간 룬석의 틈새에서 흘러나온 붉은 기운이 온몸을 천천히 휘감기 시작했다. 마치 회복 마법을 받을 때처럼. 색깔만 푸른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뀌었다고 할까. 어쨌든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주변을 맴돌던 붉은색 기운이 자연스럽게 코를 통해 폐 속으로 스며들자 몸속에서 알 수 없는 힘이 느껴졌다. 곧 익숙한 기계음이 울렸다. 띠링! ['스킬: 은신'을 배웠습니다.] ['스킬: 은신'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좋아!' 스킬을 성공적으로 흡수했다. 룬석을 사용한 스킬 습득은 이번이 처음이라 긴장했었는데, 생각보다 빠르고 간단하게 끝났다. '이제 은신을 쓸 수 있는 건가?' 희귀 스킬을 배웠다는 성취감에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나? 진우는 바로 스킬을 시전했다. '은신.' 생각과 동시에 몸이 스르륵 자취를 감추었다. 발끝에서부터 손끝까지 전부 투명해졌다. 코앞에 있는 손이 보이지 않으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이러면 어떻게 되려나?' 떠오른 김에 단검을 불러내 보았다. 그러자 손에 무언가 쥐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신기하게도 느낌만 들었을 뿐 보이진 않았다. '과연...' 강태식이 들고 있던 나이프처럼 '카사카의 독니'에도 은신이 적용됐다. 역시나 강태식의 나이프가 특이했던 것이 아니라 스킬의 힘이었다. '은신이 어디까지 적용되는 거지?' 35 화 바닥에 있던 돌을 집어 들었더니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이것도 되려나?' 혹시나 싶어 죽은 홉고블린의 어깨에 손을 대 보았지만 아무 변화가 없었다. 스킬의 적용 범위에는 한계가 있는 듯했다. 일단 입고 있는 옷이나 손에 쥘 수 있는 것들이 사라지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때였다. [마나를 모두 소모하여 '스킬: 은신'이 해제됩니다.] "어라?" 갑자기 '은신'이 풀렸다. '쓴 지 몇 초 지났다고 마나가?' 은신 상태에 익숙해지려고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고 있던 진우가, 당황한 표정으로 상태창에서 스킬 목록을 찾아 확인했다.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액티브 스킬: 질주 Lv.1, 살기 Lv.1, 은신 Lv.1 원하는 건 은신 스킬의 정보. 눈앞에 글자들이 떠올랐다. 띠링! [스킬: 은신 Lv.1] 액티브 스킬. 필요 마나 200. 모습을 감춤과 동시에 시전자의 흔적들이 일시적으로 사라집니다. '은신'을 유지하는 동안 1 초당 10 의 마나가 계속해서 소모됩니다. 필요 마나가 2 백에 1 초당 10 의 마나를 쓴다? "하..." 이러니 마나가 버틸 수가 있나. [MP : 7/548] 딸랑 7 남아 있는 마나가 애처로웠다. '진짜 바닥나 버렸네.' 현재 마나의 최대 보유량은 550 가량. 은신을 한 번 쓰면 35 초 정도 유지가 가능했다. 다른 스킬을 쓸 마나까지 고려하면 35 초를 풀로 채울 수도 없다는 소리. '그러고 보니 강태식도 몇 초 만에 금방 은신을 해제했었지.' 놈이 괜히 그랬던 게 아니었다. 은신을 오래 유지할 마력이 안 되었던 거다. 상급 헌터인 강태식이 그 정도라면 하급 헌터들은 스킬을 배워 봤자 쓰지도 못한다는 말이었다. "마나가 문제네." 여태까지 지능을 제외한 모든 스탯에 포인트를 투자해 봤지만 마나양이 늘어난 적은 없었다. 즉 마나를 늘리려면 지능 스탯을 올려야 한다는 건데... '슬슬 지능도 올려 줘야 하나?' 하지만 스킬 하나를 좀 더 오래 써보겠다고 능력치 포인트를 비전투 스탯에 쓰기는 아까웠다. '지능은 다른 스탯에 비해 효율이 너무 떨어진다.' 근력, 체력, 민첩, 감각. 모든 스탯의 효과를 몸소 체험해 보았다. 스탯이 올라갈수록 눈에 띄게 강해졌다. 그런데 이 '지능' 스탯만큼은 아무리 수치가 올라가도 뭐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체감할 수 없었다. '1 레벨일 때보다 무려 네 배 가까이 올랐는데도.' 굳이 달라진 걸 찾는다면 마나양이 커졌다는 것 정도? 그게 전부였다. 그런데 그거 하나만 보고 포인트를 투자하기에는 역시... '너무 아깝다.' 그걸 다른 스탯에 찍으면 그게 다 피와 살이 되는 건데 말이다. 그래서 결국은 마나가 모자라지 않을 때까지 레벨업을 계속하자는 결론에 다다랐다. 능력치 포인트는 더 좋은 스탯에 쓰기로 하고. '능력치 포인트라...' 그러고 보니 긴급 퀘스트를 하고 보상으로 받은 보너스 포인트 다섯 개가 아직 남아 있었다. 잠깐 지능에 찍을까 고민했던 진우는 결국 근력과 체력에 각각 3 포인트, 2 포인트를 썼다. [스탯] 근력: 75 체력: 45 민첩: 82 지능: 39 감각: 69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물리 데미지 감소: 20% '역시 뒷자리는 5 가 깔끔하단 말이야.' 진우가 흡족한 미소를 짓고 있을 때. 쿠르르르르릉. 던전 내부의 진동이 무시하지 못할 정도로 격렬해졌다. '벌써 1 시간이 다 됐나?' 이제 머뭇거릴 시간이 없었다. 진우는 상태창을 닫았다. 일부러 게이트가 닫히기 직전까지 시간을 끌며 기다렸던 것이지만, 여기서 더 지체했다가는 영영 던전 밖으로 나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진우는 보스방을 나가기 직전 뒤돌아서 안을 둘러보았다. '마정석은 챙겼고...' 아무것도 빠트린 건 없었다. 사실을 확인한 진우는 통로 쪽으로 빠르게 사라졌다. 쿠르르르르르르릉. 게이트가 곧 닫힌다고 경고해 주는 것처럼 던전은 방금 전보다 더 세차게 몸을 떨었다. *** 타이밍 좋게 조사과 직원들이 막 게이트 앞에 도착했다. 그들은 닫혀 가는 게이트에서 유유히 빠져나오는 진우를 보고 눈을 둥글게 떴다. "허, 헌터님! 생존자는 없었습니까?" "예." "으!" 직원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들어간 사람은 아홉 명인데 살아서 나온 사람이 세 명에 불과하다니. 이 정도면 대형 사고다. 같은 구역에서 굵직한 사건들이 연달아 터졌으니 협회 직원들로선 아주 죽을 맛일 수밖에. 생존자가 더 있는지 확인하고 싶었지만 게이트가 닫혀 버려서 알 방법이 없었다. 진우가 일부러 아슬아슬한 시간까지 기다렸다가 나온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다. '생존자가 있었다는 걸 들키면 안 되니까.' 이제 살아 돌아온 세 사람의 증언만이 유일한 증거였다. 직원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방금 감시과에서 금강실업 사장님의 자백 전화를 확보했답니다." 송치열이 한걸음 나섰다. "금강실업 사장님이라면?" "감시과 강태식 헌터에게 살인을 청부했던 피해자 아버지입니다." "아..." 금강실업 사장은 강태식이 가해자를 죽이는 데 성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모든 걸 순순히 자백했다고 한다. '사실 강태식이 아니라 나지만...' 경찰은 그리로 가고, 협회는 이리로 왔다. 잠자코 있던 진우가 물었다. "그럼 아무 문제 없는 거 아닙니까?" 진우의 질문에 직원이 난처한 표정을 했다. "예. 그렇죠." 강태식의 범행에는 확실한 증거가 있었고, 세 사람은 살기 위해 공격해오는 강태식과 싸웠다. 진우가 물었던 것처럼 문제가 될 일은 없었다. 다만 한 가지. 직원은 내내 께름칙하던 부분을 물었다. "B 급 헌터인 강태식 씨를 누가 죽인 겁니까?" 직원들이 현장에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아직 자세한 설명을 듣지 못한 듯했다. '하긴 여기서 협회 건물까지 거리가 얼만데. 게이트가 채 닫히기도 전에 도착했으니.' 연락을 받고서 부랴부랴 달려온 것이리라. 다들 얼굴에 피곤한 기운이 역력해 보였다. 진우는 사실을 말하기에 앞서 잠깐 유진호의 얼굴을 떠올렸다. '안타깝지만 더 이상 레이드는 못 도와주겠네.' 재각성이라고 둘러대고 등급 재심사를 받게 되면 유진호의 계획에 더는 어울려 줄 수가 없게 된다. 유진호한테 필요한 건 뛰어난 실력을 가진, 낮은 등급의 헌터니까. 자신의 등급이 올라가 버리면 모든 게 허사가 된다. 그런데 어째서일까? 시무룩해할 유진호의 얼굴을 떠올리니 미안한 마음보다는 웃기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대가로 받기로 했던 빌딩은 아깝게 됐지만. '뭐, 어쩔 수 없지.' 결심이 선 진우가 입술을 떼려는 순간. "내가 그랬구먼."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자연스럽게 고개가 돌아갔다. 거기엔 이주희가 놀란 눈으로 송치열을 보고 있었다. "아저씨...?" 진우가 영문을 묻기도 전에 송치열이 먼저 직원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강태식을 죽인 건 나여." 직원은 여전히 미심쩍은 얼굴이었다. "송치열 헌터님이 강태식 헌터님을 쓰러뜨렸다고요?" 그도 그럴 것이, 송치열은 C 급 헌터에다 왼팔까지 잃은 상태였다. 반면 강태식은 흔히들 상급 헌터라 말하는 B 급 헌터가 아닌가. 상급 헌터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한다. B 급 헌터와 C 급 헌터의 차이는, C 급 헌터와 D 급 헌터의 차이와는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세간의 상식이었다. 그러자 송치열은 허허 웃으며 대답했다. "다들 내 뒤에 누가 있었는지 모르고 있는 건감?" "아!" 모두의 시선이 갑자기 자신에게 쏟아지자 이주희는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이주희는 B 급 헌터다. 전투계열 헌터가 아니어서 언급되지 않고 있었을 뿐, 등급 자체만 놓고 보면 그녀도 강태식과 같은 상급 헌터였다. B 급 힐러가 서포트해 주는데 C 급 헌터가 B 급 헌터를 이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인가. 직원들은 그제야 이해가 간다는 표정을 지었다. 다소 어수선한 틈을 타 진우가 송치열 옆에 바싹 붙어서 조용히 물었다. "왜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송치열도 목소리를 낮추었다. "성 씨가 능력을 숨기려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했구먼. 내가 괜한 짓이라도 한 건감?" 물론 그렇지 않았다. 덕분에 성가신 일들을 피해갈 수 있게 됐는데 괜한 짓이라니. 이래서 연륜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건 아닙니다." "그동안 성 씨에게 도움만 받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다면 다행이여." 조사과 직원 하나가 다가왔다. "송치열 씨는 저희와 같이 가시죠. 잠깐 조서만 도와주시면 됩니다." "갑시다." 송치열은 조사과 직원들과 함께 협회로 떠나고, 현장에는 어느새 진우와 주희 두 사람만 남았다. 벌써 해는 저문 지 오래였다. 주희는 전과 사뭇 다른 분위기를 풍기는 진우가 어색한지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잠깐 같이 걸을래요?" '저녁 약속 이야긴가.' 많이 움직여서 그런지 마침 배도 고팠는데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우는 흔쾌히 수락했다. "그래요."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 누가 앞장서는 일 없이 나란히 가로등 불빛 아래를 조용히 걸었다. "..." 주희는 시선을 발끝으로 모았다. 고개를 들고 있으면 자꾸 옆쪽으로 시선이 갔다. 의식하지 않으려고 해도 소용이 없었다. 예전에는 좀 더 편안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의 진우는 강인함이 흘러넘쳤다. 그래서 말을 붙이기가 힘들었다. '어떻게 된 일일까...?' B 급 헌터를 어렵지 않게 제압한 것도 그렇고. 사람이 완전히 달라졌다. 비밀로 해 달라고 했으니 물어볼 생각은 없지만 엄청난 변화에 계속 신경이 쓰였다. 36 화 '이럴 때 말이라도 걸어 주면 좋을 텐데.' 아무 말도 없는 진우가 왠지 야속하기까지 했다. 결국 멈춰 선 주희가 어렵게 먼저 말을 꺼냈다. "저기... 사실 오늘은 아무것도 못 넘길 것 같으니까 이건 돌려줄게요." 진우는 주희가 건네 마정석을 받아 들었다. 지하 신전에서 그녀에게 맡겼던 마정석이었다. 마정석을 건네는 주희의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그게 며칠 전 일이라고... 오늘 또 눈앞에서 사고가 일어났으니.' 주희는 겁이 많은 편이었다. 오늘 아무것도 못 넘길 것 같다는 말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래도 오늘만 날이 아니잖아요? 굳이 지금 돌려줄 필요는 없는데." 주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다음 주에 집으로 내려가거든요." 헌터를 그만둔다더니 아예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모양이었다. 진우가 안타깝다는 표정을 한다. "그 사고 때문에?" "꼭 그런 건 아니지만..."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주희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진우는 급히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집은 어디예요?" "부산이요. 저기 진우 씨." 갑자기 주희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진우도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덩달아 진지한 얼굴이 됐다. 주희는 진우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보았다. 생명력이 느껴지는 두 눈. 지하 신전에서 모두가 절망에 떨고 있을 때, 진우의 두 눈만은 강렬한 의지로 불타올랐었다. 주희는 가장 가까이서 그 눈을 보았다. '살아남겠다고 외치는 것 같았지.' 그 눈이 놓치지 않은 희망의 실마리는 그녀 자신을 포함한 여러 사람을 몇 번이나 구해 냈다.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일이었다. 두근두근. 그날 일이 떠오르자 또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안 돼...' 적성이 맞지 않아 헌터 일을 그만두는 것에 미련은 없었다. 하지만 앞으로 진우를 만나기가 어렵게 되는 것은 무척이나 아쉬웠다.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물어보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겠지...' 아쉽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법이다. 그런 일에 미련을 두면 괴로워지기 마련. 주희는 결국 배시시 웃으면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혹시 부산에 내려올 일 있으면 연락하세요. 제가 회 사 드릴게요." "좋죠." 진우가 미소 짓자 주희도 따라 미소 지었다. 그렇게 주희는 하고 싶은 말을 남긴 채 간단한 작별 인사를 끝내고 돌아섰다. '...' 집까지 돌아가는 길이 이렇게 멀게 느껴진 적은 처음이었다. *** 주희를 보내고 진우는 집으로 돌아왔다. 멀리 보이는 낡은 아파트 단지. 그곳 9 층에 집이 있었다. 주차된 차들을 지나 건물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나이 든 목소리가 발목을 잡았다. "902 호 청년." 늙은 경비 아저씨였다. 오랫동안 봐 왔던 경비 아저씨기에 진우는 스스럼없이 인사를 건넸다. "아직 퇴근 안 하셨어요?" "오늘 내가 숙직이라." 아하, 하고 진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경비가 경비실에게 택배 상자를 하나 가지고 왔다. "이거 진우 청년한테 온 거야." "아, 감사합니다." 보낸 이가 협회로 되어 있었다. '오늘이었나?' 협회에서 보낸 헌터 폰이 도착하기로 되어 있던 날이. 진우는 상자에서 폰을 꺼냈다. 반짝거리는 새 폰. 요새 헌터들에게 쏟아지는 관심이 과하다 보니 각성자가 아니면서도 헌터 폰을 사려는 사람이 급증하고 있다는 뉴스를 들었던 기억이 났다. '사려는 사람은 그렇다 쳐도, 그걸 또 빼돌려서 팔아먹는 놈들은 대체 어떻게 된 정신머리야?' 나라에 돈이 없는 게 아니라 도둑놈이 많은 거라고 하더니. 하여튼 협회고, 군대고 사람이 모인 곳은 이 비리가 문제다. 비리가 생겨서 돈이 새어 나가면 샌 만큼 지원이 줄어들고, 지원이 줄어들수록 환경이 열악해진다. 결국 혜택을 받아야 할 사람이 피해를 보는 경우가 생기는 거다. '그래서 걱정했지만...' 다행히 새로 받은 폰에는 하자가 없어 보였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동안 할 일도 없고 해서 폰의 전원을 켜 보았다. 부재중 메시지가 잔뜩 와 있었다. '이걸 언제 다 확인하나.' 그런데 두 개의 번호가 유독 많이 눈에 띄었다. 둘 다 익숙한 번호는 아니었다. 하나는 전화를 많이 했고, 하나는 문자를 많이 보냈다. '이렇게 연락할 만한 사람이 없는데?'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우선 메시지 쪽을 먼저 확인해 보았다. _안녕하세요, 그때 병원에서... _이번 주에 시간이 되시면... _혹시 제가 귀찮게 굴었나요? 저는 그냥 가볍게 이야기나... 누군가 하다가 뒤늦게 기억이 났다. 그때 병원에서 번호를 건네주었던 간호사 아가씨였다. '이름이 최유라였나?' 귀찮게 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여기 답장을 하는 순간, 일이 상당히 귀찮아질 것 같은 예감이 팍팍 들었다. '그러니까 이건 패스하고...' 다음은 전화를 많이 건 쪽인가? 진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컬러링으로 경쾌한 최신곡이 시끄럽게 흘러나왔다. 누구 전화인지 대충 짐작이 갔다. 통화는 금방 연결됐다. -여보세요. 역시나. 한치의 예상도 빗나가지 않아서 헛웃음이 살짝 흘러나왔다. "나다. 이제부터 이리로 연락해." -아! 폰을 받으셨군요. 형님! 유진호였다. 번호를 메모해 두긴 했는데 여태 한 번도 먼저 전화를 걸어 본 적이 없어서 생소했던 거였다. 유진호가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침 제가 전화 드리려던 참이었습니다, 형님. 공대원들을 구했으니 내일부터 바로 모시러 가겠습니다! 목소리만 들어도 기뻐하고 있는 유진호의 얼굴이 그려졌다. 진우도 씩 웃었다. "오냐. 내일 보자." 뚝. 진우가 전화를 끊자 타이밍 좋게 1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의 문이 스르르 열렸다. 팅. 드디어 내일부터 본격적인 레이드가 시작된다. 그리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최대한 빨리 레벨을 올리자.' 레벨을 올리고, 능력치를 높여서, 누구보다 강해진다. 강한 헌터가 되면 돈, 명예, 권력 모든 것들을 손에 넣을 수 있다. 내일이 바로 그 첫걸음이었다. *** 미국 동부. 늦은 밤. 북미에서 손꼽히는 길드 '스케빈저'의 메인 헌터이자 S 급 헌터인 황동수는, 방금 전 자택에서 잠들기 직전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형이 어떻게 죽었다고? 천천히, 자세히 말해 봐." 형의 이름은 황동석. 얼마 전 C 급 게이트에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었단다. "...형의 공대원 멤버 여덟 명이 전원 사망하고 나머지 두 사람만 살아 나왔다고?" 그런데 그 두 사람이 각각 D 급과 E 급이다? 뭔가 냄새가 났다. 자신이 아는 형은 약한 팀원을 위해 목숨을 걸 사람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멤버가 보충 인원이라면?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D, E 급 헌터들이 살아 나오고, 형을 비롯한 C 급 헌터들이 모조리 죽었다. '뭔가가 있어...' 황동수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비록 지금은 자신이 미국의 유명 길드에 스카우트되어 떨어져 있지만, 한국에 있을 때는 자신을 어느 누구보다 아끼고 챙겨 줬던 형이었다. 좋은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어도 좋은 형제임은 분명했었다. '조금만 더 자리를 잡으면 이쪽으로 불러오려고 했는데...' 그새 변을 당하다니. 황동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살아남았다는 두 사람 정보를 팩스로 보내 줘. 번호는..." 황동수는 전화를 끊고 매니저의 번호를 눌렀다. 곧 연결됐다. -미스터 황, 이 시간에 무슨 일이에요? "로라, 내가 한국에서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되지?" -진심이에요? "그래." 목소리가 다시 이어지는 데는 약간의 정적이 필요했다. -...아직 한국과 헌터인 범죄자 인도 조약은 체결되지 않았어요. 미스터 황은 미국 국적의 헌터니 미국에서 재판을 받게 될 거고, 아마 정부와의 교섭으로 형량은 그리 많지 않을 거예요. "다행이군. 일이 생겨서 한국에 좀 다녀와야겠어. 스케줄을 비워 줄 수 있나?" -하지만 미스터 황, 이렇게 갑자기 가시면 길드 업무가 마비됩니다. 무슨 일인지 제게 알려 주지 않겠어요? "개인적인 사정이라. 물론 길드에 피해를 끼칠 생각은 없어. 내 스케줄이 언제까지 밀려 있지?" -2 개월 후까진 꽉 차 있어요. "두 달이라... 좋아. 그 뒤로는 스케줄을 비워 줘. 많이도 아니야. 딱 2 주. 2 주 동안만 한국에 다녀올게." -...알았어요. 그런데 위쪽엔 뭐라고 이야기하죠? "형의 장례를 치르러 간다고. 위로 여행을 겸해서." -OK. 그렇게 할게요. 하지만 미스터 황... 혹시라도 제가 도움될 만한 일이 있... 딸깍! 황동수는 전화를 끊었다. 위로나 충고. 어떤 쪽도 달갑게 들을 수 있는 기분이 아니었다. 위이잉! 마침 부탁했던 팩스가 도착했다. 황동수는 팩스에서 나오는 문서를 받아 들었다. 거기엔 헌터 둘의 얼굴이 찍힌 사진과 이름, 간단한 프로필 등이 기재되어 있었다. "D 급 헌터 유진호, E 급 헌터 성진우." 황동수는 두 사람의 사진을 번갈아 보며 각오를 다졌다. '이 둘에게 물어보면 답이 나오겠지.' 그리고 만에 하나 조금이라도 의심스러운 점이 있다면... "거기서 살아 나온 걸 후회하게 될 거다." 황동수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6. 이상한 레이드 다음날 아침. 전화를 받고 내려가니 앞에 커다란 봉고차가 한 대 서 있었다. "...?" 뉘신데 남의 집 앞을 가로막고 있는 거냐고 묻기도 전에 운전석 창문이 알아서 스르르 아래로 내려갔다. 싱글싱글 웃고 있는 그 얼굴은... 유진호였다. "형님, 타시죠!" 유진호는 창문 밖으로 손을 내밀어 봉고차를 탁탁 두르렸다. 전날부터 모시러 온다고 해서 벤츠라도 끌고 오나 했는데... 이건 어딜 봐도 평범한 승합차였다. 평범한 것치고는 좀 크긴 하지만. "너 재벌 2 세라고 하지 않았냐?" "제 차로 움직이면 너무 눈에 띌 것 같아서요. 레이드할 때 쓰려고 한 대 샀습니다." 어쩐지 차에서 반짝반짝 광택이 나더라니. '뽑은 지 얼마 안 된 차였군.' 아침부터 집 앞으로 찾아오는 성실함에, 눈에 안 띄도록 새 차까지 준비하는 조심성까지. 유진호는 만전을 기하고 있었다. 그만큼 이번 일에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겠지. 새 차 구경하는 걸 오해한 유진호가 걱정스레 물었다. "혹시 이런 차는 불편하십니까, 형님?" "전혀." 딱 잘라 말하고는 조수석에 올라탔다. "출발합니다, 형님." 레이드 첫날이라 기분이 좋은지 유진호는 연신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핸들을 이리저리 돌렸다. 한참을 달리던 차가 공터에 멈춰 섰다. 끼익. "형님, 여깁니다." 약속 장소에는 여덟 명의 헌터가 대기하고 있었다. 37 화 그들 너머에 있는 게이트는 C 급치고는 좀 작은 크기로 보였다. 탁. 탁. 봉고에서 내려선 진우와 유진호 곁으로 헌터들이 하나둘 몰려들었다. 어째 멀쩡한 사람이 거의 없었다. 거동이 불편해 보이는 헌터들이 가장 많았고, 환자로 보이는 사람이나 알코올 중독자도 있었다. 심지어 협회나 길드에서 받아 주지 않는 미성년자 여자애까지 있었다. 대충 보니 고등학생 정도 되는 것 같은데. "애를 데려와도 괜찮냐?" "자문을 받아 봤는데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답니다. 그냥 사고가 터지면 문제가 엄청 커져서 잘 안 쓸 뿐이랍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럼 괜찮겠지.' 어차피 게이트 안에는 본인과 유진호만 들어갈 예정이라 사고가 생길 가능성은 0 퍼센트에 수렴했다. 이들은 숫자를 채우는 용도였다. C 급 게이트를 공략하는 데는 모두 10 명의 헌터가 필요하니까. 그래서 나머지 여덟 명을 모집했다. 물론 여덟 명도 자신들이 여기 온 목적을 잘 알고 있었다. 헌터 자격증은 있지만 사정상 헌터 활동을 할 수 없는 이들. 그 때문에 생활고에 시달리던 이들이 주로 모집에 응했다. 유진호가 앞으로 나섰다. "저는 이번 레이드의 대장을 맡게 된 유진호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분은 저와 함께 던전에 들어가실 성진우 헌터님이십니다. 여러분들은 저희가 돌아올 때까지 입구 근처에서 대기만 하시면 됩니다." 헌터 중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었다. "저기... 정말 그렇게만 하면 3 백 만 원을 받을 수 있는 건가요?" 사냥할 필요 없음. 아니, 던전에 들어올 필요조차 없음. 레이드 1 회당 3 백만 원씩 지급. 레이드에 참여했다고 기록상으로 이름만 빌려주는 대가치고는 보수가 너무 좋았다. 대동강 물을 퍼 주는 봉이 김선달도 아니고 조건이 이렇게 좋다 보니 행여 사기당하는 것은 아닌지 다들 불안한 눈치였다. "조건은 보장합니다." 유진호의 목에 잔뜩 힘이 들어갔다. 눈빛도 진지해졌다. "대신 여기서 뭘 보고 들었는지 절대 발설하시면 안 됩니다. 비밀 유지 조항을 어길 경우 계약서에 적힌 대로 받으신 금액의 열 배를 변상하셔야 하니까요." 웅성웅성. 헌터들이 수군거렸다. 대체 저 두 사람은 던전 안에서 뭘 하려고 이런 조건들을 내걸었을까? 궁금했지만 아무도 물을 수 없었다. 그것도 비밀 유지 조항의 일부였다. -던전 안에서의 일에 대해 일절 질문 금지. 진우는 자신의 특이 체질을 알리고 싶지 않아서, 유진호는 마스터가 되겠다는 계획을 위해 팀원들의 입단속을 철저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 헌터들은 두 사람에게 질문하는 대신 자기네들끼리 조용히 귓속말을 나누었다. "아니, 그런데 두 사람이서 C 급 던전을 돌 수가 있나?" "그렇게 강한 헌터들 같진 않은데?" "둘이서 C 급 게이트를 돌 실력이면 차라리 대형 길드에 들어가서 상위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훨씬 낫지 않아?" "그러게 말이야." 다들 의심스럽다는 말투였지만 한 명도 빠지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당연했다. 조건이 너무 좋으니까. 진우도 2 백만 원에 혹했었다. 그때 황동석 일행이 제시했던 돈보다 백만 원 더 얹어 주는 것은 계약에 비밀 엄수 조건을 붙였기 때문이었다. 설명에 시간이 제법 지체됐다. 시계를 보던 진우가 유진호에게 한마디 뱉었다. "슬슬 들어가자." "알겠습니다, 형님." 깍듯하게 대답한 유진호가 박수를 짝짝 쳐서 시선을 모았다. "뭐, 설명은 여기까지 하고요. 절대 강요하거나 그런 건 없습니다. 혹시 지금이라도 못하겠다거나 그만두고 싶으신 분?" "..." "..." 당연히 손을 드는 사람은 없었다. 이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되는 순간. "아, 형님. 잠시만요." 깜박하고 있던 게 생각났는지 유진호가 급히 봉고차 뒤로 달려갔다. 그러고는 뭔가를 주섬주섬 꺼내 챙겨 입더니 곧 뒤뚱거리며 걸어왔다. "그게... 뭐냐?" "이태리 장인 길드에서 만든 강화 갑옷 풀 세트입니다. 형님. 저희 둘이서 던전을 돌려면 이 정도 준비는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진우가 손으로 자기 이마를 짚었다. "..." 머리끝에서부터 발끝을 뒤덮고 있는 쇳덩이는 그냥 옆에서 보고만 있어도 숨이 콱콱 막혀 올 정도로 갑갑했다. "왜 그러십니까, 형님?" 보다 못한 진우는 유진호가 허리춤에 차고 있던 장검을 뺏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어, 어?" 장검을 주우려던 유진호가 균형을 잃고 그대로 엎어졌다. 철퍼덕. 진우는 올라오기 시작한 분노를 속으로 눌러 삼키며 힘겹게 말했다. "좋은 말로 할 때 벗고 와라." "...네." 그런데 유진호가 일어나려다 말고 다시 진우를 불렀다. "형님..." "또 왜?" "저 좀 일으켜 주십시오." 유진호가 내민 손을 바라보던 진우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괜찮습니까, 형님?" "그래." 결국 투구만 쓰는 걸로 합의를 봤다. 유진호는 만족스런 얼굴로 게이트 안에 뛰어들었다. 그 뒤를 진우가 소리 없이 따라 들어갔다. 두 사람이 차레차례 던전 안으로 들어가고 나자 헌터들이 게이트 주변으로 슬금슬금 모여들었다. 한 명이 걱정스레 말했다. "하는 거 보니 영 시원찮던데..." 다른 한 사람이 게이트를 보며 맞장구를 쳤다. "그러니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시작으로 헌터들의 말문이 트였다. 다들 하고 싶은 말을 쏟아 냈다. "저러다 던전 안에서 덜컥 둘 다 죽어 버리면 어떻게 되는 거여?" "저희야 뭐 계약금 다 받았으니..." "그거야 그렇긴 한데." "잠깐, 저 두 사람 이름이 뭐라고 했었죠?" "그러니까 그게." 다리에 깁스를 한 남자가 빠르게 폰을 꺼내 두 사람의 이름을 검색해 보았다. "유진호, 성진우..." 목발을 짚고 있는 그가 아슬아슬해 보였는지, 아니면 검색 결과를 빨리 알고 싶었던 것인지, 다른 헌터 하나가 깁스 남자를 부축하며 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뭐야? 공대장이 D 급?" 그 말에 헌터들이 경악했다. 그런데 더 놀라운 건 다음 검색 결과였다. "그 옆에 있던 사람은 아예 E 급인데요?" "E 급이면 C 급 게이트 들어가는 것 자체가 위험하잖아?' "D 급 E 급 둘이서 C 급 던전을 돈다고?" "그게 가능해?" "게다가 공대장이라는 분 레이드 기록이 아예 없어요." "아니, 젊은 사람들이 왜...?" 그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괜히 협회에서 C 급 게이트를 공략할 때 최소 인원 10 명에 C 급 헌터 다섯 명이라는 최저 기준을 만들어 놓은 게 아니었다. "쯧쯧." 흰머리가 희끗희끗한 남자 헌터가 품속에서 담배를 찾아 꺼내더니 입에 물었다. "젊음의 객기가 여러 사람 잡는 법이지." 담배 연기가 허옇게 피어올랐다. "..." "..." 헌터들은 말이 없어졌다. 남 죽는 데 일조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찝찝했다. 생판 남이라도 자기 눈앞에서, 아니 정확히 말하면 눈앞에 있는 게이트 안 어딘가에서 사람이 죽는 걸 바랄 사람은 없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돈도 아까웠다. 계약금이야 미리 받았다지만 계약서에 적힌 대로 남은 18 번의 레이드를 마저 따라다닐 수 있다면 훨씬 큰돈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두 사람이 살아 돌아올 확률은 희박했다. "이거... 지금이라도 신고해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게. 괜히 우리한테 불똥이 튀면 어떡해?" 그때였다. 우우웅. 게이트에서 진우와 유진호가 튀어나왔다. "헉, 헉, 헉." 유진호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지친 표정의 두 사람에게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오오." "그래도 무사히 도망쳤네!" "다행이구먼." 헌터들이 기쁜 얼굴로 환영해 주었다. 두 사람이 들어갔다 나오는 데 걸린 시간 때문에 입구 근처를 헤매다 간신히 빠져나온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이내 헌터들의 표정이 바뀌기 시작했다. 누가 외치는 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게, 게이트가 닫히고 있어!" 뭐라고? 다들 게이트를 돌아보았다. "맙소사!" "저기!" "보, 보스를 잡았다고?" 던전의 보스를 잡았을 때처럼 게이트의 모습이 흐릿해지고 있었다. 헌터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는 가운데, 진우는 그들의 시선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용히 물었다. "다음은 어디냐?" "여기서 1 시간 정도만 가면 됩니다, 형님." "가자." 진우와 유진호가 척척 봉고로 향했다. 헌터들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두 사람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헌터들이 따라오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유진호가 뒤를 돌아보았다. "빨리빨리 갑시다, 헌터님들. 오늘 게이트 두 개 더 돌려면 시간이 모자랍니다." 헌터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툭. 머리가 희끗한 중년 헌터 윤귀원은 너무 놀란 나머지 물고 있던 담배가 바닥으로 떨어진 것도 몰랐다. '둘이서 C 급 던전을 박살 내고 또 레이드를 하러 간다고?' 윤귀원만이 아니다. 헌터들은 동시에 전부 같은 생각을 했다. '저것들은 도대체 뭐하는 인간들이야?' *** 1 일차. 끄어어어어. 좀비들이 떼 지어 달려왔다. "형님, 옵니다!" "오냐." 진우가 몰려오는 좀비들 사이를 매끄럽게 스쳐 지나갔다. 그럴 때마다 좀비들의 머리통이 바닥으로 굴러 떨어졌다. 좀비들의 수는 빠르게 줄어들었다. 마지막 남은 한 마리. 푹! "끄어억!" 진우가 놈의 가슴에 검을 꽂아 넣자 익숙한 기계음이 울렸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뒤로 물러나 있던 유진호가 감탄과 함께 박수갈채를 보냈다. "형님, 멋지십니다!" "마정석." "아, 넵." 유진호는 얼른 가방을 꺼내 마정석들을 수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레벨업 알림에서 그치지 않고 기계음이 연속으로 이어졌다. 띠링! ['스킬: 상급 단검술 Lv.1'을 배웠습니다.] 띠링! ['스킬: 급소 찌르기 Lv.1'을 배웠습니다.] 띠링! ['질주' 스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진우의 표정이 환해졌다. '새로운 스킬들이 생겼네?' 이게 얼마만의 일인지. 진우는 기쁜 마음에 곧바로 스킬 정보창을 띄웠다.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상급 단검술 Lv.1 액티브 스킬: 질주 Lv.2, 살기 Lv.1, 은신 Lv.1, 급소 찌르기 Lv.1 질주 스킬을 자주 썼더니 레벨이 2 로 올라갔다. 그리고 패시브와 액티브에 각각 상급 단검술과 급소 찌르기가 생겨나 있었다. 38 화 [스킬: 질주 Lv.2] 액티브 스킬. 필요 마나 5. 스킬을 시전하면 이동 속도가 40% 증가합니다. 시전 중 1 분당 마나가 1 씩 감소합니다. '이동 속도가 늘었군.' 속도 증가 폭이 30 퍼센트에서 40 퍼센트로 변했다. 10 퍼센트 차이도 컸다. 질주 스킬은 워낙 자주 쓰는 스킬이니까. [스킬: 상급 단검술 Lv.1] 패시브 스킬. 필요 마나 없음. 단검 전용. 오랫동안 단검을 사용하여 이제 단검을 더 능숙하게 사용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단검을 사용할 때 33%의 추가 데미지가 적용됩니다. 단검을 쓸 때 데미지 증가! 그동안 단검을 주 무기로 다루었더니 단검 전용 스킬이 생겼다. '이제 다른 무기를 드는 건 비효율적이게 됐네.' 그만큼 단검을 쓸 때의 효율이 엄청나게 좋아졌다는 것이기도 했다. 어차피 단검이 손에 익기도 했고, 특히 '카사카의 독니'도 정이 들어서 당분간은 무기를 바꿀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굉장한 이득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진우는 흥미로운 눈빛으로 새로이 생긴 스킬을 확인했다. [스킬: 급소 찌르기 Lv.1] 액티브 스킬. 필요 마나 70. 단검 전용. 효율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을 알게 됐습니다. 적의 급소를 찾아 치명적인 피해를 입힙니다. 이것도 단검 전용 스킬이었다. '효율적으로 공격하는 방법이라...' 그러고 보니 강태식에게 마지막 일격을 넣었을 때와 오늘 하나 남은 좀비를 마무리할 때의 손맛이 비슷했다. 짜릿하다고 해야 할까? 단검을 찔러 넣는 순간, 싸움이 끝났음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그게 급소 찌르기였구나.' 우연히 성공한 기술을 스킬로 배워서 원하는 타이밍에 마음대로 쓸 수 있게 되다니! 가슴이 뛰었다. 그냥 마구잡이로 단검을 휘두르는 것 외에 마땅한 공격 방법이 없었던 진우에게 공격형 스킬 '급소 찌르기'는 가뭄에 단비처럼 느껴졌다. '좋았어!' 레벨업에다 새로운 스킬까지. 시작부터 최고였다. *** 2 일 차.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공격 스킬이 추가되어 사냥 속도가 비약적으로 빨라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원샷 원킬! '급소 찌르기'를 맞을 때마다 퍽퍽 쓰러지는 마수들을 보면서, 유진호는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여태 저런 기술을 숨겨 두고 계셨었나?' 도대체 형님의 실력은 어디가 끝이란 말인가? 감탄이 절로 나왔다. 동시에 진우의 실제 랭크가 궁금해졌다. 'C 급 헌터들을 힘들지 않게 잡은 거 보면 B 급 이상은 확실한데...' 직접 물어봤다가는 뒷일을 장담할 수 없으니 그저 입 벌리고 구경만 하는 수밖에. 하지만 빠른 사냥에도 단점이 있었다. [마나가 부족해 스킬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마나가 부족해 스킬을 사용할 수가 없습니다.] 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또야?' 진우는 부족한 마나를 채우기 위해 상점에서 구매한 마나 포션을 꺼냈다. "그게 뭡니까, 형님?" 유진호가 호기심을 보였다. 진우와 같이 있으면서 신기한 일을 한두 번 겪은 게 아니지만, 진우가 틈틈이 마시는 파란색 액체의 정체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거?" 진우는 대답을 보류하고 일단 마나 포션의 정보를 읽어 내려갔다. [아이템: 마나 포션] 입수 난이도: B 종류: 소모품 마나를 회복할 수 있는 물약입니다. 마시면 마나를 500 회복합니다. 창고에 보관할 수 있으나 타인에게 양도는 불가능합니다. 양도가 불가능하다는 설명. '이걸 양도하면 어떻게 된다는 걸까?' 문득 호기심을 자극했다. 진우는 마나 포션을 유진호에게 건네주었다. 유진호의 손에 들어간 마나 포션은 나타날 때처럼 조용히 사라졌다. "마, 마법입니까, 형님?" '이래서 양도가 안 된다는 거였군.' 새로운 사실을 알았다. 양도되지 않는 아이템은 남의 손에 닿으면 자연스럽게 사라져 버린다. 그럼 손이 닿지 않는 경우에는 어떨까? 진우는 상점을 열어 포션 하나를 더 샀다. 그런데 이번엔 항상 사던 마나 포션이 아니라 붉은색 액체가 담긴 힐링 포션이었다. 구매를 확정하자 진우의 손에 스르륵 포션이 나타났다. "혀, 형님! 진짜 신기합니다. 액체가 붉은색으로 바뀌었네요!" 유진호는 마나 포션이 사라지고 힐링 포션이 나타난 걸 무슨 마술쯤으로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포션의 종류를 바꾼 이유는 간단했다. '타인에게도 효력이 있는지 알고 싶으니까.' 진우는 유진호의 자세를 낮추었다. "입 벌려 봐. 위쪽을 보고." "이, 이렇게요, 형님?" "좋다. 그 자세로 가만히." 진우는 힐링 포션이 담긴 병을 기울였다. 곧 붉은 액체가 유진호 입으로 흘러들어 갔다. 조르륵. 순간 유진호의 눈이 커졌다. "어? 이게 뭡니까, 형님? 갑자기 힘이 나는데요?" 장시간 짐꾼 노릇을 하느라 지쳐 있던 유진호의 얼굴색이 순식간에 좋아졌다. 진우가 만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주면 효과가 있네.' 좋은 걸 알았다. 이제 힐러가 없어도 근처에 부상자가 있다면 이런 방법으로 치료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후에 많은 도움이 될 터였다. "피곤하면 말해. 언제든지 더 있으니까." 쓸데없이 퍼 주는 게 아니다. 짐꾼이 지쳐서 발이 느려지면 사냥 속도 또한 떨어지니 결과적으로는 본인의 손해였다. 그런 계산이 들어가 있는 발언이었지만 받아들이는 유진호에게는 의미가 남달랐던 모양이다. "혀, 형님..." "가자." 유진호는 진우의 기상천외한 능력과 자신의 상태까지 챙겨 주는 세심함에 눈물을 글썽거리며 앞서가는 진우의 뒤를 따랐다. *** 3 일 차. "참. 이거 받으세요, 형님." 유진호가 장비 가방을 뒤적이더니 도장이 동봉된 통장 하나를 내밀었다. "이게 뭐냐?" "그제, 어제 이틀분 마정석 정리한 돈입니다, 형님." 그걸 왜 미리 말 안 하고 마수가 우글거리는 던전 안에서 건네주는 거냐는 불만도 잠시. 진우의 눈이 커졌다. '6 억?' 통장을 펼쳐 보니 엄청난 거금이 찍혀 있었다. "여태까지 마정석으로 번 돈을 전부 다 나한테 넘기겠다고?" 유진호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예, 형님. 전 돈이 필요해서 레이드를 하는 것도 아니고, 사실 따지고 보면 마수들은 전부 다 형님이 잡으신 거잖아요. 그런데 어떻게 제가 염치없이 그 돈을 나눠 달라고 하겠습니까?" 유진호는 칭찬을 기대하는 어린아이처럼 눈을 반짝거렸다. '어쭈... 이 자식 봐라?' 요 며칠 같이 지내면서 유진호의 태도가 달라진 것이 느껴졌다. 전에는 무서워도 억지로 참고 따라오려는 느낌이 강했다면, 지금은 진짜 존경하는 선배를 대하는 동생처럼 굴었다. '가만 보니 귀여운 구석도 있네.' 진우는 피식 웃음 지었다. "진짜 가져도 되는 거지?" "이 유진호가 한 입으로 두말할 동생으로 보이십니까, 형님?" 진우가 웃으며 통장을 흔들었다. "알겠다. 이건 고맙게 쓸게." "감사합니다, 형님!" 유진호는 90 도로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이건 뭐, 도대체가 누가 주고 누가 받는 건지 헷갈리는 광경이었다. 한편 던전의 바깥쪽. 팀원들에게도 기다리는 요령이 생겼다. 유진호 대장과 성진우 보조(?)가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헌터들은 삼삼오오 모여 자리를 펴고 각자 할 것을 즐겼다. 그중에서도 역시 가장 인기 있는 그룹은 고스톱팀이었다. 자리 하나에 다섯 명이 둘러앉았다. "이번 레이드가 벌써 몇 번째죠?" "어디 보자... 그제 세 번 돌고, 어제 두 번, 오늘 또 두 번이니까 이제 일곱 번째네." "그 사람들 이런 페이스로 던전을 돌아도 괜찮은 걸까요? 원래 레이드 한 번 뛴 공격대는 일주일 정도 쉬는 게 보통이잖아요." "아이고, 그 사람들 걱정은 하지를 말어. 매번 나올 때 보니까 땀 한 방울도 안 흘리더만. 우리야 통장에 꼬박꼬박 3 백씩 쌓이니 좋지 뭘. 자네 차례야, 얼른 내." "아, 네." 확실히 진우와 유진호는 쉴 새 없는 스케줄 속에서도 지친 기색 한 번 없었다. 그들은 모르지만 모두 포션의 힘이었다. 덕분에 약속했던 19 번의 레이드 중 벌써 1/3 지점을 넘어가고 있었다. 잠시 뒤 게이트의 검은 막이 울렁이더니 두 사람이 튀어나왔다. "엇, 저기 대장님 나오시네요." "다들 일어납시다." 헌터들은 알아서 주변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거기 짐 챙겨요." "주무시는 분들 깨우고요, 잃어버린 거 없는지 확인 한번 해 보시고요." 헌터들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자다 깬 헌터도 벌떡 일어나 이동할 준비를 했다. "갑시다!" 다들 이 기이한 레이드 방식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 인근에 위치한 백호 길드 사무실. 제 2 관리과 과장 안상민은 아침부터 목에 핏대를 세웠다. "현 대리! 당장 신입들 훈련이 내일인데 아직도 게이트 예약이 안 돼 있으면 어쩌자는 거야!" 대리 현기철은 고개를 푹 숙였다. "죄, 죄송합니다, 과장님. 인근에 C 급 게이트가 생길 때마다 손쓸 틈도 없이 낙찰받아 버리는 팀이 있어서요." "뭐? 아니 그럼 돈 좀 더 얹어서 다시 찾아오면 되잖아. 우리 길드에 돈이 없어, 사람이 없어? 도대체 뭐가 문제야?" "저도 그렇게 하려고 했습니다만..." "어허! 뭘 잘했다고 꼬박꼬박 말대답이야!" 안상민의 호통에 제 2 관리과 전체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안상민도 이렇게 화를 낸 적은 오랜만이었다. 백호 길드가 어떤 곳인가? 대한민국 5 대 길드 중 하나로 불리는 곳이다. 그런 만큼 직원들의 실력 또한 남달랐다. 현기철 대리도 입사 직후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눈에 띄는 실수 하나없이 맡은 일을 훌륭하게 해내 왔던, 우수한 직원이었다. 그런데 하필 신입들이 훈련해야 할 게이트를 예약하지 못하다니! 그건 큰 실수였다. 안상민 과장이 관리하는 제 2 관리과는 소속 헌터들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제 1 관리과와는 다르게 신입을 뽑고 훈련하는 업무를 맡고 있었다. "이, 이것 좀 봐 주세요, 과장님!" 현기철은 울먹이며 노트북을 내밀었다. "이게 진짜." 한바탕 더 퍼부으려던 안상민이 노트북에 적힌 숫자들을 보고 입을 쩍 벌렸다. "이, 이억오천? 고작 C 급 게이트 공략 허가에 2 억 5 천을 쓴 놈들이 있다고?" 39 화 안상민은 말문이 막혀 왔다. C 급 게이트에서 건질 수 있는 수입은 2 억 정도가 최대다. 2 억 5 천이면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셈이었다. "원래는 7 천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1 억까지 올리니까 이놈들이 공략 허가권을 2 억 5 천에 사 가더라고요." 백호 길드에서 C 급 게이트 예약에 쓸 수 있는 돈은 1 억까지가 한계였다. 이 정도면 현기철이 억울해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이 새끼들 정체가 뭐야?' 타닥타닥. 안상민의 손이 빠르게 움직였다. 검색 결과가 주르륵 떴다. 현기철의 말대로 특정 팀이 이 주변의 모든 C 급 게이트 공략 허가권을 말도 안 되는 속도로,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사들이고 있었다. "뭐야, 이 미친놈들은...?" 이 주변은 백호의 관할 구역. 처음엔 잠깐 다른 길드의 방해 공작인가 싶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지.' 감히 백호 길드에게 이딴 식으로 대놓고 시비를 걸 간 큰 길드가 존재할리 만무했다. 5 대 길드 중 어느 곳이라도 백호 길드와 정면으로 맞서려면 반파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길드는 아니야...' 그럼 대체 누가 무슨 이유로? 안상민은 침을 꼴깍 삼키며 그 특정 공격대 대원들의 정보를 조회했다. 대장 이름은 '유진호'였다. "처음 보는 이름인데?" 신입들을 스카우트하는 게 안상민의 일이었다. 그런 만큼 프리랜서 헌터들 중에서 조금이라도 이름이 알려진 이들은 죄다 꿰고 있었다. 그런데 이 '유진호'라는 이름은 생소했다. '일단 얘는 넘어가고.' 혹시 아는 헌터가 없는지 천천히 스크롤을 내리며 팀원들의 이름을 차례대로 확인했다. 그중 딱 하나. 낯익은 이름이 있었다. '성진우? 성진우?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인데...' 기억을 더듬어 올라가던 안상민이 2 달인가 전에 관계자들 사이에서 화제가 됐었던 이중 던전 사건을 떠올렸다. 그때 협회를 도운 곳이 바로 이곳 백호 길드였다. "기철아, 두 달 전에 우리 애들이 출동했던 이중 던전 사건 기억하냐?" "네, 기억하죠. 그때 가 보니까 마수는 없고 생존자만 하나 남아 있었다고 그랬잖습니까." "그 생존자 이름이 뭐였지?" 현기철은 머리가 좋다. 특별히 남들에 비해 영리하다고 말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기억력 하나만큼은 정말 기똥차게 좋았다. 별도의 검색 과정을 거칠 필요도 없었다. 현기철이 바로 말했다. "E 급 헌터 성진우요." '역시!' 설마 했었는데 맞았다. 안상민은 직감적으로 알아챘다. 분명 뭔가가 있다. 이런 경우에서 발동하는 자신의 감은 틀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안상민은 직원들에게 소리쳤다. "다들 하던 일 멈추고 D 급 헌터 유진호, E 급 헌터 성진우 이 두 사람에 대한 모든 자료를 구할 수 있는 데까지 싹 다 긁어 와! 지금 당장!" 위기 상황에서 우수한 직원들의 대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다. 엘리트가 괜히 엘리트일까? 보고들이 속속 들어왔다. 사실 유진호는 그다지 주목할 만한 점이 없었다. 유진건설 회장 유명한의 차남이라는 배경만 빼면 평범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성진우는 달랐다. "이중 던전 때부터 지금까지 세 번의 사고가 있었는데 전부 무사히 빠졌나왔네?" 안상민의 말을 현기철이 받았다. "그것도 E 급 헌터가 말이죠." 성진우와 유진호가 만난 것은 유진호의 첫 번째 레이드 때. 거기서 둘만 살아 나왔다. 그리고 그 둘이 지금 팀을 이뤄서 하루에 두세 개라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던전을 클리어해 대고 있다. "이거 냄새가 나는데..." "뭘 하고 있는 걸까요?" "글쎄... 가만, 그러고 보니 최근 유명한 회장이 S 급 헌터들과 물밑에서 접촉을 벌이고 있다는 소문이 있지?" "그런 소문이 있긴 하죠." "유진호는 그 유명한 회장의 아들이고..." 유명한이 길드를 만들려는 움직임이 보인다. 업계에 도는 극비 정보였다. 그게 사실이라면 지금 유진호가 벌이는 기행도 그와 완전히 무관하지는 않을 터. "설마...!" 안상민의 머릿속에서 하나의 퍼즐이 맞춰졌다. 그러면 말이 된다! 달라진 상사의 눈빛에 현기철은 침을 꿀꺽 삼켰다. 안상민이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자식... 재각성 헌터야!" "재각성 헌터요?" 현기철이 토끼 눈을 했다. 안상민은 장담했다. "그래." E 급 헌터는 일반인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사고가 터지면 일단 죽는다고 보면 된다. 하지만 성진우는 최근 전체 인원의 과반수가 죽는 대형 사고들 속에서도 매번 무사히 빠져나왔다. '물론 운이 좋았을 수도 있지. 하지만.' 하지만 이 세 번째 사고. 감시과 헌터인 강태식이 문제를 일으켰던 때는 경우가 좀 다르다. 기록에는 C 급 마법사와 B 급 힐러가 힘을 합쳐 강태식을 막았다고 되어있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감시과들은 같은 헌터들과 싸우는 게 직업인 사람들이야.' 강태식이 바보가 아니라면 가장 등급이 높고 전투 능력이 떨어지는 B 급 힐러를 최우선으로 처리하려고 들었을 거다. '그걸 C 급 마법 계열 헌터가 혼자서 막았다고?' 마법 계열 헌터는 전투 계열, 그중에서도 '암살'이 특기인 헌터들에게 취약했다. 강태식이 방심해서 B 급 힐러의 존재를 무시했다면 모르겠지만... 3 년 경력의 감시과 헌터가 그런 실수를 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그날 강태식을 막은 건 C 급 송치열이 아니라 같이 있던 누군가다.' 물증은 없지만 심증은 확실했다. 성진우는 재각성으로 상급 헌터 수준의 능력을 갖게 됐다. 유진호는 우연히 참가한 레이드에서 그런 성진우의 실력을 보고 아버지가 만드는 길드에 그를 넣으려고 이것저것 테스트해 보고 있다. 그렇게 생각하면 모든 게 맞아떨어졌다. '이건 빅뉴스야.' 성진우가 진짜 재각성 헌터라면 아직 그의 진가를 아는 사람은 유진호를 비롯한 몇 사람뿐. 유명한이 어떤 사람인데 어중이떠중이를 받으려 하진 않을 거다. 그것도 길드 창립 멤버에. 그 유명한이 점찍어 둔 인재를 낚아챌 수 있는 좋은 찬스였다. 'B 급 강태식과 싸워서 이겼다면 그의 실력은 최소한 B 급 이상!' 다른 길드, 특히 유명한의 손에 들어가기 전에 데려오는 게 우선이었다. 등급 재심사 후에는 경쟁이 너무 치열해질 테니. 만약 성진우가 생각하는 것만큼 강자가 아니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전 세계에서 몇 되지 않는 재각성 헌터들은 언론의 주목을 한 몸에 받기 마련이었다. 그건 향후 돈으로도 살 수 없는 광고 효과가 된다. 이래저래 놓칠 수 없는 기회인 것이다. '벌써 유명한과 계약을 맺었으면 어쩔 수 없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았다. C 급 던전에서 테스트를 하고 있다는 게 그 증거다. '확정된 게 없을 가능성이 높아.' 그건 아직 백호 길드에도 기회가 있다는 소리기도 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안상민은 의자 위에 걸쳐 놓은 외투를 입었다. "기철아, 가자." 자신의 오른팔을 대동하는 것도 잊지 않았다. 안상민이 현기철에게만 특히 엄하게 구는 것은 자기 뒤를 맡길 만한 인물이 그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현기철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어디를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과장님?" "어디긴. 신입 스카우트 하러지." "신입을 데려오는데 과장님께서 직접 가신다고요?" "왜? 그럼 안 되냐?" 한마디 쏘아붙인 안상민이 빠른 걸음으로 나가 버리자 현기철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쫓아나갔다. '신기한 일이네...' 안상민이 직접 영입에 나선 건, 그가 2 년 전 과장을 달고 나서 처음 있는 일이었다. 7. 대박의 예감 오늘 유진호 팀이 계약한 던전은 모두 두 곳. 두 게이트 간의 거리가 제법 멀었다. 안상민과 현기철은 추측이 맞는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각각 게이트 주변에서 수시로 연락을 주고 받으며 유진호 팀이 나타나길 기다렸다. '아직 쌀쌀하구먼.' 안상민은 근처의 자판기에서 커피를 뽑아 왔다. 유진호 팀을 기다린 지 1 시간째. 하지만 어떻게 된 일인지 지루함보다 기대감이 앞섰다. 간만에 가슴이 뛰었다. '내 감이 맞다면 오랜만에 나타난 대형 신인이다. 그것도 특급!' 안상민은 젊은 나이에 그 누구보다 빨리 과장을 달았다. 모두 감의 힘이었다. 백호 길드가 대형 길드로 발돋움한 데는 그의 기여가 컸다. 그리고 그 감이 말하고 있었다. 성진우가 백호 길드를 한 단계 더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누가 들으면 미친 소리라고 하겠지만.' 아직 성진우는 공식적으로 E 급 헌터에 불과하니까. 하지만 눈에 보이는 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그랬다면 지금의 자신은 존재할 수 없었다. 그렇게 매 같은 눈으로 게이트를 주시하고 있을 때. 뚜르르. 뚜르르. 현기철에게서 연락이 왔다. "어, 기철아." -과장님, 지금 막 유진호 팀이 도착했습니다. "그래. 흥분하지 말고 잘 보고 있다가 일거수일투족 하나도 빠짐없이 다 보고해." -알겠습니다, 과장님. 어? 어? 과, 과장님! 전화 너머의 목소리가 이상했다. '이 바보가 설마 들킨 건가?' 안상민의 마음도 급해졌다. "무슨 일이야? 말을 해, 말을." -과장님 말씀이 맞았습니다! "뭐?" 안상민의 심장이 빨라졌다. -게이트 안에 유진호, 성진우 두 사람만 들어갑니다. "그래야지. 성진우를 테스트하는 거니까!" 역시나! 추측이 맞았다. 이럴 때 자신의 감각은 빗나가는 법이 없었다. '좋았어!' 안상민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너희가 반신반의할 때 우리는 움직인다. 성진우는 우리 백호 길드에 들어오게 될 거다.' 백호 길드에는 제 2 관리과와 이 안상민이 있으니까. 안상민이 승리감에 도취되어 있는 동안 수화기 너머에서 현기철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전 이제 어떻게 할까요? 제가 그리로 갈까요? "아니, 좀 더 지켜봐." -예? 과장님 말씀은 확인됐지 않습니까? "공략 시간이 궁금해서 그래. C 급 던전을 몇 시간 만에 클리어할지." -A 급 헌터도 C 급 던전에 혼자 들어가면 2 시간 이상 걸리잖습니까? "그래서 못하겠다는 거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혹시나 과장님께서 적적해하실까 봐 걱정돼서 한번 여쭤 본 겁니다. 빛보다 빠른 태세 변환. 이래서 안상민은 현기철을 미워할 수가 없었다. "내 걱정은 말고 그 두 사람이 언제 나오는지나 두 눈 똑바로 뜨고 지켜보고 있어." 40 화 -여부가 있겠습니까. "전화 옆에서 대기하고 있을 테니까 무슨 일 생기면 바로바로 연락하고." -알겠습니다, 과장님. 안상민은 신신당부하며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 나니 문득 허기가 밀려왔다. 꼬르륵. '신경을 너무 그쪽에 쏟고 있었더니...' 벌써 점심시간이 훌쩍 지나갔는데, 성진우를 기다린다고 아직 밥도 못 먹은 상태였다. 언제 유진호 팀이 올지 모르니까 자리를 비울 수가 없었다. 이제 좀 여유가 생긴 안상민은 근처에 어디 밥 먹을 데가 없는지 주변을 둘러보다가 편의점으로 들어갔다. '밥값 아끼려는 건 아니지만...' 누가 뭐라고 하는 것도 아닌데 이상하게 혼자 밥집에 들어가면 눈치가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심사숙고 끝에 고른 게 편의점 컵라면이었다. 뜨거운 물을 붓고 3 분을 기다렸다 나무젓가락을 막 뜯었을 때였다. 뚜르르. "에이! 밥 먹는데 누구야, 귀찮게." 액정을 보니 익숙한 이름이 찍혀 있었다. _오른팔. '현기철 이 자식이...' 안상민이 신경질적으로 전화를 받았다. "고새를 못 참고 전화질이냐." -과장님 그게 아니라요. "아니긴 뭐가 아니야. 별일 아닌데 전화 건 거면 너 앞으로 일주일 동안 점심은 무조건 편의점 컵라면으로 동결한다." -그게 아니고요, 과장님! 지금 두 사람이 나왔습니다! 면발을 막 입에 넣으려던 안상민의 손이 정지한 동영상 화면처럼 멈췄다. "뭐?" -지금 유진호, 성진우가 나와서 공격대 멤버들이 떠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요!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안상민은 급하게 시간을 확인했다. "아직 30 분밖에 안 지났잖아? 도중에 레이드 포기한 거 아냐?" -아닙니다. 게이트가 흔들리고 있어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아무리 C 급 던전 간에 난이도 차이가 있다고 해도 솔플 30 분짜리 C 급 던전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다시 확인해 봐! 게이트 닫히고 있는 거 맞아?" -예, 맞습니다. 영상이라도 찍어서 보내 드릴까요? "...아니, 됐다." 안상민은 전화를 끊고 멍하니 앞을 바라보았다. A 급 헌터가 보통 2 시간 걸리는 C 급 던전을 30 분 만에 돌파해? B 급 이상이 뭐냐. 객관적 자료를 바탕으로 최소한으로만 잡아도. "A 급 이상..." 상상도 못 했던 대박이었다. *** "형님. 오늘 바쁘신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왜?" "이렇게 빨리 사냥하시는 건 처음 봐서요." 유진호는 혀를 내둘렀다. 진우가 강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오늘은 정말 미친 듯이 강력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진우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던전의 마수들이 늑대인간들이었으니까.' [칭호: 늑대 학살자] 늑대를 잡는 데 능숙한 사냥꾼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짐승형 몬스터를 상대할 때 모든 능력치가 40% 증가합니다. '늑대 학살자' 버프는 당연히 늑대인간들을 상대할 때도 적용됐다. 가뜩이나 레벨이 많이 오른 상태에 버프까지 받았으니 C 급 마수 따위가 버틸 재간이 있나? "깨개개갱!" "깨갱!" "키이잉!" 덕분에 유진호는 죽은 마수들의 사체에서 마정석을 캐내느라 손이 열 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안에서 마신 힐링 포션만 다섯 병. 포션 때문에 배가 불러서 밥을 안 먹어도 될 것 같다고 몇 번이나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건 그렇고...'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아까부터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마력이 느껴지지 않는 걸로 보아 헌터는 아닌 것 같은데.' 주변을 둘러봤지만 딱히 수상한 자는 없었다. 찾겠다고 맘먹으면 못 찾을 것도 없지만 살기나 적의가 느껴지지 않아서 찾아내려면 시간이 한참 필요할 것 같았다. '...' 어쩌면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르고. 아니나 다를까. 시선은 금방 사라졌다. "형님, 왜 그러세요?" "...아냐. 출발하자." 시간은 한정되어 있다. 허비할 시간은 없었다. 진우는 다시 한 번 주변을 슥 둘러보고는 이내 승합차 조수석에 올라탔다. 두 번째 게이트가 있는 곳에서는 시선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들어갈 때도, 나올 때도. '내가 너무 예민했었나?' 별일이 아니란 걸 알았으니 그나마 다행이긴 했다. 어느새 다가온 유진호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형님, 죄송합니다. 오늘 게이트는 이게 다네요. 다른 게이트들은 너무 멀어서요." "네가 죄송할 일도 아닌데 뭐." 해가 떨어지려면 아직 한참 남았지만 두 사람의 활약 탓에 인근의 게이트가 씨가 마른 터라 오늘 일정은 여기서 끝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공대장님이 하셨지요." "내일 또 뵙겠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멤버들을 해산시킨 두 사람은 나란히 승합차 앞좌석에 탑승했다. "집으로 모시겠습니다, 형님." 유진호는 어느새 충직한 운전기사가 됐다. 운전기사를 잡은 모습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진우는 딱한 시선으로 유진호를 바라보았다. '길드 마스터 한번 해 보겠다고 부잣집 도련님이 팔자에도 없는 운전수 신세를...' 해맑게 웃으며 액셀을 밟던 유진호가 진우의 시선을 알아차리고 밝은 목소리로 물었다. "엇? 혹시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형님?" "...아니다." 시치미를 떼고 모른 척하던 진우는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지금이 4 시 46 분.' 확실히 집으로 그냥 돌아가기엔 너무 이른 시간이었다. 운 좋게도 마침 해야 할 일이 있긴 했다. '요 근처였지, 아마?' 기억이 맞는다면 말이다. 진우가 말했다. "진호야." "예, 형님." 유진호는 능숙하게 핸들을 돌리며 대답했다. 두 사람이 탄 차가 부드럽게 커브를 돌았다. "미래 백화점으로 가자." "미래 백화점요?" 유진호가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그래." "바로 요 앞이기는 한데... 오늘 사냥하실 때도 그렇고 진짜 무슨 일 있으십니까, 형님?" "...어째 갈수록 말이 부쩍 늘어간다?" 그러자 유진호의 고개가 정면에 못박힌 듯 고정됐다. "빛과 같은 속도로 달려가겠습니다. 형님. 안전띠 꽉 붙들어 매세요." 금세 태도를 바꾼 유진호는 브레이크 한번 안 밟고 번개처럼 차를 몰았다. 멀지 않은 거리여서 금방 도착했다. 끼익. 두 사람이 탄 차가 목적지 앞에 멈춰 섰다. 서울 중심가에 위치한 미래 백화점의 위용은 대단했다. 탁. 진우가 내리자 유진호도 따라 내렸다. 유진호는 문을 닫고서 우두커니 서있는 진우 옆으로 다가갔다. "형님. 우리 길드도 이런 빌딩을 사무실로 써야 하는데 말이죠." 유진호가 백화점 건물을 올려다보며 반쯤 진담 섞인 농담을 건넸다. 그런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 유진호가 황급히 옆을 돌아봤다. "어라?" 이미 진우는 사라져 있었다. "형님?" 주변을 아무리 둘러봐도 진우의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형니임?" *** [보스가 처치되었으므로 던전 내부가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됩니다.] '백화점 인던에서 또 2 업.' 집으로 돌아가는 길, 진우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오랜만에 랜덤 박스에서 나온 열쇠. 미래 백화점에서만 쓸 수 있는 인던열쇠였다. 언제 갈까 타이밍을 재다가 오늘 시간이 난 김에 클리어해 버렸다. -형니임? 사라진 자신을 찾던 유진호의 얼빠진 얼굴은 지금 생각해도 웃겼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뚜르르. 전화를 받기 전 습관처럼 액정을 확인했지만 본 적 없는 번호였다. '누구지?' 고등학교에 다닐 때는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동생을 돌보느라 바빴고, 졸업 후에는 곧바로 헌터 일을 시작해 진우의 인맥은 좁은 편이었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올 일이 없는데...' 고개를 갸웃하는 것도 잠시. 일단은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성진우 씨 맞으신가요? 시원시원한 남자의 목소리. 진우는 목소리를 듣자마자 전화를 끊었다. 뚝. '경험상 이런 전화의 99 퍼센트는 홍보 전화나 대출 권유니까.' 폰을 다시 주머니 속에 넣으려는 순간 또 전화가 걸려왔다. 뚜르르. 같은 번호였다. '어라? 홍보 전화가 아니었나?' 실적을 쌓기 위해 마구잡이로 돌리는 홍보 전화는 끊었을 때 곧바로 다시 걸려오는 경우가 거의 없다. 시간 낭비란 걸 거는 쪽도 아니까. '그럼 진짜 무슨 볼일이 있다는 이야긴데...' 이번에는 제대로 전화를 받았다. "네, 성진우입니다." -아, 맞군요. 방금 전화가 끊기길래 잘못 건 줄 알았습니다, 하하. "..." 목소리가 워낙 그쪽 분위기라 상품 홍보나 대출 권유인지 알고 끊었다고 사과를 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2 초정도 고민해 보다 그만뒀다. '어째 사과를 안 하는 것보다 하는 게 더 무례한 거 같으니.' 잠깐의 정적 후에 영업 사원이, 아니 영업 사원 같은 목소리를 지닌 남자가 뒤늦게 자신을 소개했다. -참, 소개가 늦었네요. 저는 백호 길드에서 일하는 안상민입니다. 진우의 걸음이 멈췄다. '백호 길드에서 내게 전화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백호 길드에서 전화를 걸 이유가 없었다. 굳이 접점을 찾는다면 이중 던전 사고 때 협회를 도운 게 백호 길드라는 것 정돈데... '이제 와서 그냥 일을 물어보려는 건 아닐 테고.' 궁금한 건 참지 못하는 성미다. 안상민이 말을 하기 전에 진우가 먼저 물었다. "백호 길드에서 제게 무슨 일로 전화를 거셨죠?" -전화로는 조금 곤란한데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려도 될까요? 찾아오라는 것도 아니고 직접 찾아와서 이야기하자는데 굳이 거절할 이유는 없었다. 마침 모레 일정이 비어 있기도 했고. '진호 집에 무슨 행사가 있다던가?' 일가족이 모두 참석해야 하는 큰 행사라 피치 못하게 레이드를 쉬어야겠다고 유진호가 양해를 구해 왔었다. '큰 행사라...' 재벌 일가의 행사라고 하니 고급 호텔의 연회장에서 열리는 파티 장면이 떠오르는 건 순전히 드라마 탓일까? 아무튼 약속을 잡기는 편했다. "목요일에 시간이 납니다." -그게... 지금 당장은 안 될까요? 지금 당장? 진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휴대폰 액정에 떠 있는 시계는 오후 8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벌써 여덟 시가 다 돼 갑니다만."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잠깐만 시간 내주시면 됩니다. "근처라면?" -가까운 카페에 있습니다. 안상민은 카페 이름을 말했다. 익숙한 카페였다. 집 앞에 있어서 자주 근처를 지나치는 데다, 유진호를 만날 때 약속 장소로도 썼던 곳. 진우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내 주소를 알고 있군.' 41 화 협회 사이트에도 헌터들의 주소는 나와 있지 않다. 알 수 있는 건 이름과 등급뿐. 헌터가 개인적으로 정보를 추가할 수 있지만, 진우는 그 흔한 연락처 하나도 남겨 놓지 않았다. 그런데도 폰 번호를 아는 건 물론이고 집 근처에 와서 대기하고 있는 걸 보면 따로 조사를 다 해 놓은 모양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문득 떠오르는 게 있었다. "오늘 자꾸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진다 했더니 당신들이었습니까?" 진우의 목소리가 착 가라앉았다. 그러자 상대방이 공손한 목소리로 사과의 뜻을 전해 왔다. -불쾌했다면 죄송합니다. 사실을 확인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헌터님께 피해가 갈 일을 하려고 했다면 이렇게 연락드리지도 않았겠지요. 이야기를 들어 보시면 헌터님도 마음에 드실 겁니다. 진우는 잠깐 고민 끝에 입술을 뗐다. "...곧 가죠." *** "헌터스, 사신, 기사단, 명성, 그리고 저희 백호. 다 한 번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안상민은 대한민국 5 대 길드를 차례차례 언급했다. 그중 넘버원은 헌터스였다. 하지만 헌터스가 처음부터 최고의 길드였던 것은 아니었다. 원래 그 자리에는 사신 길드가 있었다. 그러나 사신에서 백호가 떨어져 나가며 1 위 자리가 바뀌었다. 청출어람이라 했던가? 사신에서 독립한 백호 길드는 이미 사신을 제친 지 오래였다. 그리고 지금은 사신의 원래 위치였던 1 위 자리를 노리는 중이었다. 안상민은 확신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남자, 성진우는 백호 길드가 예전의 영광을 재현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안상민이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_백호 길드 제 2 관리과 과장 안상민. "그 5 대 길드 중 하나인 백호 길드에서 신입 헌터들의 영입과 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제 2 관리과의 과장 안상민입니다." 다른 헌터들이라면 명함을 받기 전에 먼저 고개를 90 도로 숙이고 대화를 시작했을 상황이었다. S 급이나 A 급 상위면 모를까 그 밑의 헌터들에게 백호 길드는 선망의 대상이었다. 사실 안상민도 내심 그런 반응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진우는 달랐다. 별다른 반응 없이 차분하게 제 할말을 물어 왔다. "백호 길드에서 일하시는 분이 어째서 제 뒷조사를 하시는 겁니까?" 안상민은 흠칫 놀랐다. '백호 길드라는 이름을 듣고도 주눅들지 않다니.' 아직 몇 마디 나눠 보지도 않았는데 어쩐지 성진우를 영입하는 게 쉽지않으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반면 그럼에도 꼭 진우를 길드에 합류시키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신입에게 패기란 나쁜 것이 아니니까. '그래. 이 정도 패기는 있어야 어디든지 써먹을 수가 있지.' 안상민은 다시 한번 속으로 각오를 다졌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죠. 저희는 성진우 씨를 영입하고 싶습니다. 무조건 유진건설에서 제시한 조건의 두 배를 약속드리겠습니다." 안상민은 미소를 지었다. 유진건설은 아직 성진우를 테스트하는 중으로 보였다. '멍청한 짓이지.' 그가 C 급 던전을 클리어하는 데 걸리는 시간, 재각성 헌터가 지닌 광고 효과. 그가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 보여 주는 침착함 등등. 어떤 면을 봐도 더 이상 테스트를 할 이유가 없었다. '가치도 모르면서 제대로 된 가격을 지불했을 리가 없다.' 그래서 유진건설이 어떤 조건을 제시했든 간에 두 배, 아니 그 이상의 대우를 보장할 자신이 있었다. 한데 갑자기 진우의 시선이 싸늘해졌다. "어떻게 아신 겁니까?" "예, 예?" 예상과 정반대되는 반응에 안상민은 대형 길드의 노련한 영입 전문가답지 않게 말을 더듬었다. "어떻게 알고 저를 찾아오신 거지요?" 말에 무게가 있다면 방금 그 한마디에 압사당했을 수도 있겠다는 느낌이 들었다. '뭐지, 이 압박감은?' 상대는 자신을 적으로 판단한 모양이었다. 하긴 자신은 진우를 미행하고 일방적으로 만남을 요구했다. 진우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을 충분히 적으로 여길 수 있는 일이었다. 안상민은 황급히 설명했다. "아, 아, 일부러 뒷조사를 붙인 건 아닙니다. 누군가 저희 길드 구역에서 C 급 던전을 너무 빠르게 공략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와 조사하다 보니 성진우 헌터님을 알게 된 겁니다." "..." 진우는 시선을 거두어들었다. '그렇게 된 거구만.' 우려했던 바와 달리 상대가 처음부터 모든 걸 눈치채고 조사를 시작한 게 아닌 듯했다. 빠른 시간에 많은 던전을 공략하다보니 자연스레 눈에 띄게 된 것이다. '딱히 악의가 있어 보이지도 않고.' 진우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두 사람 사이의 긴장감이 조금 누그러졌다. '휴우.' 안상민은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여전히 이야기는 원점에서 머물고 있었다. 여기서부터는 이제 진우의 호감을 살 필요가 있었다. '호감을 얻는데 정보의 공유만큼 좋은 방법이 없지.' 안상민은 영입의 스페셜리스트! 당황했던 표정을 지우고 금방 다시 원래의 미소를 지었다. "극비 정보긴 하지만 저희도 유명한 회장이 새로운 길드를 만들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습니다." "..." 진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안상민이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서 그의 차남 유진호와 성진우 헌터님의 접촉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재각성자가 된 성진우 헌터님을 유진 쪽에서 포섭하려고 하는 거구나, 하고." 역시 안상민은 자신을 재각성자로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 주면 고맙지.' 따로 말을 지어낼 필요가 없어지니까. 안상민은 빠르게 말을 덧붙였다. "성진우 헌터님이 유진 쪽과 계약을 맺으시기 전에 먼저 말씀드려야겠다고 생각해, 이렇게 일방적으로 연락을 드렸습니다. 무례하게 느끼셨다면 한 번 더 사과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처음부터 악의적인 의도로 접근했다면 모를까, 이렇게 정중히 사과까지 하는데 굳이 화를 낼 필요는 없었다. '그보다 중요한 건...' 이 이후의 대처였다. 진우가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동안 안상민이 한발 앞서 질문을 건넸다. "혹시 유진건설과 벌써 계약을 끝낸 상태십니까?" 대답을 망설이는 걸 보고 그런 결론을 떠올렸나 보다.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약간 초조해 보였던 안상민의 얼굴이 금세 환해졌다. '좋았어! 자유의 몸이라 이거지?' C 급 던전을 혼자서 30 분 만에 올 클리어하는 실력자를 잡을 기회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별 도움 안 될 D 급 헌터도 하나 같이 따라 들어가긴 했지만, B 급 이상의 실력자에게 그건 동료라기보다는 짐짝 수준에 더 가까웠다. '성진우가 백호 소속이 돼서 등급 재심사를 받을 때 A 급 정도만 나와준다면!' 안상민은 자꾸 미소가 새어 나와 표정을 관리하기가 힘들었다. 진우는 턱을 긁적였다. '이 사람, 왠지 김칫국 마시고 있는 것 같은데...' 뭐, 백호 정도면 나쁘지 않다. 5 대 길드라 불리는 곳인 데다가 1 등을 노릴 만한 저력도 있다. 하지만 지금 당장 길드에 들어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레벨을 올리면 올릴수록 대우가 달라질 테니까.' 그리고 먼 훗날의 이야기일지도 모르고, 어쩌면 영영 불가능한 일일 수도 있는 이야기지만. '지금 C 급 던전을 도는 것처럼 B 급, A 급 던전을 혼자서 클리어할 수 있게 된다면?' 상급 던전의 수입은 상상을 초월한다. 대형 길드들이 대기업들과 맞먹을 정도로 성장한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고가의 마정석, 마수의 사체, 던전의 광물, 그밖에 룬석이나 아티팩트까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돈이 오고 간다. 그 많은 수익을 독차지할 수 있는데 굳이 길드의 다른 이들과 나눌 필요가 있을까? '레벨업이 멈추지만 않는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러니 길드 가입은 시기상조였다. 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화답의 징조라고 짐작한 안상민이 진우를 따라 방긋 웃었다. "결정을 하셨습니까?" "분명 두 배의 조건을 약속하셨지요?" "예. 그렇습니다. 조건이 헌터님의 실력에 비해 너무 박하다고 생각될 경우 그 이상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 백호 길드가 있는 건물 가격이 얼만가요?" 안상민의 얼굴이 잠시 경직됐다. '설마 백호 길드의 자금력을 의심하는 건가?' 아니, 여기서 흥분할 필욘 없지, 이건 길드를 광고할 기회다. 숨길 필요도, 말 못 할 이유도 없다. 오히려 잘된 일이었다. "감정가는 5 백억 정도 됩니다. 빌딩 전부를 쓰고 있는 건 아니지만 소유주는 백호 길드로 되어 있습니다." 안상민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원래는 세를 주고 살던 건물이었는데, 길드가 자리 잡고 나서 아예 건물을 사 버렸다. 거기까지 걸린 기간이 겨우 1 년. 대형 길드가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 들이는지 알 수 있는 단면이었다. 원한다면 길드의 매출이나 순익까지 설명해 줄 용의까지 있었으나, 진우가 가볍게 내뱉은 한마디에 그만 말문이 콱 막혀 버렸다. "그 건물 넘겨줄 수 있습니까?" "예?" 안상민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귀를 의심하며 다시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진우는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유진 쪽에서는 저한테 3 백억짜리 건물을 준다고 약속했거든요. 백호 빌딩이 5 백억이라면 두 배에서 좀 모자라기는 해도 그 정도면 충분히 감안해 드릴 수 있습니다." "삼, 삼백억요?" 안상민은 벌어진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성진우의 경력은 4 년. 하지만 그건 E 급 헌터로서의 커리어다. 그가 눈에 띄기 시작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다. 최근에 재각성을 겪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이야기. 그런데 얼마나 대단한 능력을 지녔기에 사업 수완이 좋기로 소문난 유명한 회장이 3 백억을 약속했단 말인가? 그것도 등급 재심사를 받기도 전에. '이, 이거 확인할 방법이 없다고 뻥치는 거 아니야?' 안상민이 의심스런 눈초리를 보냈다. 그러자 안상민의 머릿속을 읽은 것처럼, 진우는 폰을 꺼내 어딘가로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뚜르르. 딸깍. -예, 형님. 저녁 시간, 조용한 카페 안에서 진우는 일부러 통화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진호야. 뭐 하나만 물어보자." -얼마든지 말씀하세요, 형님. 진호? 유진호? 안상민은 침을 꼴깍 삼켰다. '설마 나랑 한 이야기를 유진호에게 알릴 생각인가?' 하지만 안상민의 예상은 빗나갔다. 진우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전에 네가 넘긴다는 건물. 그거 가격이 얼마라고 했지?" 42 화 -평가액은 3 백억 정도인데요, 완공되고 저희 길드가 들어가면 훨씬 더 뛸 겁니다, 형님. 참! 그때 공증하신 서류가 필요하신 거면 지금 팩스로 보내 드려요? "잠깐만." 진우는 소리가 흘러들어 가지 않도록 휴대폰을 손바닥으로 막고서 물었다. "안 믿기시면 직접 바꿔 드릴까요?" 안상민은 진땀을 흘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니, 됐다. 끊는다." -네, 형님. 전화가 끝나고 보니 안상민의 눈빛이 이전과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안상민의 눈동자가 연신 흔들렸다. '유진건설이 길드를 만들기도 전에 계약금으로 약속한 돈이 3 백억? 그리고 회장 유명한의 차남 유진호가 꼬박꼬박 극존칭을?' 안상민은 혼란스러웠다. "그, 그 저기... 그렇게 큰 금액은 제 권한을 벗어난다고 할까... 일단 시간을 주시면 길드 윗분들과 상의를 해서..." 진우가 딱 잘라 말했다. "그럼 이야기는 여기까지네요." 안상민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힘없이 고개를 떨군 안상민이 머릿속으로 실패의 원인을 분석했다. '결국은 정보 부족이다.' 너무 일을 서둘렀던 것이 화근이었다. 대박 냄새에 흥분한 나머지 조심성없이 움직였다. 유진 쪽의 조건을 확실히 알아본 다음 길드의 지원을 받아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 나갔다면... '일단은 길드장님께 보고해야겠다.' 유명한 회장이 먼저 3 백억을 제시한 헌터라면 5 백억, 아니 1 천억의 가치가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아직 늦지 않았다. '지원을 약속받고 성진우의 정보를 더 캐낸 다음 강하게 밀어붙인다면...' 그때 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나만 묻겠습니다." 안상민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진우 얼굴에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이제 봄기운이 만연한데 어쩐지 주위가 으스스해진 느낌이었다. 꼴깍. 안상민이 마른 침을 삼킬 때 진우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저에 관해서 알고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됩니까?" "아... 아직은 저뿐입니다. 헌터님을 빠르게 모셔 오고 싶은 마음에 서두르느라 미처 위쪽에 보고할 시간이 없었거든요." 사실 한 명 더 있긴 했다. 자신의 부하 직원이자 오른팔인 현기철. 그래도 현기철의 존재는 숨겼다. 혹시나 진우가 기분 나빠 할까 봐. 하지만 진우의 목소리가 조금 더 낮고 위협적으로 변했다. "서로의 신뢰를 위해 거짓말은 하지 말도록 하죠." 안상민은 당황했다. '뭐지? 우리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아보고 왔나?' 그렇다면 괜히 잡아떼다가 관계가 아예 틀어질 가능성이 있었다. 생각하기도 싫은 일이었다. '그냥 솔직히 말해야겠네.' 헌터와 길드의 관계는 연예인과 소속사의 관계와 비슷했다. 지금 당장 계약을 못한다고 해도 좋은 관계를 유지해 두면 언젠가 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것이다. 최대한 헌터와 마찰을 일으키지 않는 것. 그것이 제 2 관리과의 철칙이었다. 안상민이 입을 열었다. "실은 제 부하 직원 한 사람이 더 알고 있습니다. 이건 정말입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생각대로였다. 혼자서 다 하기엔 너무 많은 일이었다. 조사에, 감시에, 연락까지. 무엇보다 결정적이었던 건 연락 타이밍이었다. 집 근처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전화가 왔다. '어디선가 보고 있다가 연락을 준 거겠지.' 한시라도 빠르게 만나고는 싶은데 급하게 연락을 하다가 유진호에게 들키면 안 되니까 말이다. '그래도 백호 길드 전체가 움직이는 건 아니야.' 아까 반응으로 알 수 있었다. 5 백억 이야기가 나왔을 때. 안상민은 자기 선으로 처리할 수 없는 금액이 나오자 크게 당황했다. 상부의 지시가 있었다면 최소한 그쪽에 연락하는 척이라도 해 봤을 거다. 되든, 안 되든. 그래서 두세 명 단위의 소규모 팀이 아닐까 예상하고 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두 명이서 움직이고 있다고 본인이 실토했다. '다행이다.' 일을 복잡하게 만들긴 싫으니까. 그래도 두 명 정도면 충분히 컨트롤 할 수 있는 범위 안이었다. 그냥 두면 앞으로도 계속 귀찮게 굴 게 뻔했다. 그러니 약간의 경고 정도는 해 둘 필요가 있었다. 진우가 말했다. "실은 유진 측의 제안도 거절했습니다." 진우의 폭탄 발언! 안상민은 화들짝 놀랐다. "예?" 그 순간 진우가 스르륵 사라졌다. "아니!" 안상민은 벌떡 일어섰다. 급하게 주위를 둘러봤지만 진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뭐지? 보이지 않을 만큼 빠른 속도로 이동한 건가?' 당황스러워하던 안상민은 옆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눈치챘다. "허." 등줄기에 소름이 돋아났다. "돌아보지 말고." 목소리는 옆에서 들려왔다. 맞은편에 앉아 있던 진우가 소리 없이 사라지더니 어느새 옆자리로 와서 서 있었다. '으, 은신?' 안상민의 이마가 식은땀으로 젖어갔다. '서... 설마... 나한테 화가 난 건 아니겠지?' 헌터들은 괴물이다. 헌터들을 가장 가까이에서 보고 있기 때문에 잘 안다. 그래서 최대한 공손하게 대했다. '감시에 미행까지 붙인 게 화근이었나? 처음부터 길드에 경호를 요청하고 왔어야 했나? 아니, 상대가 어느 등급인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경호를 요청해...' 머릿속이 복잡해지고 심장이 쿵쾅거리기 시작했다. 꿀꺽, 침 넘기는 소리까지 엄청 크게 느껴졌다. 진우가 나직이 말했다. "천천히 앉으시죠. 겁을 주기는 싫으니까." 안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이 상황도 충분히 무섭습니다만...' 그리고 시키는 대로 천천히 의자에 앉았다. 곧 모습을 드러낸 진우가 자신의 옆자리에 앉았다. '하긴...' 겁을 주기 싫다는 말이 이해가 갔다. 아까 하나만 묻겠다던 진우의 시선은 주변의 공기까지 서늘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이런 상황에서 그 눈빛과 정면으로 마주하게 된다면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맛봐야 했을 터였다. '나름대로의 배려인가.' 그래도 여전히 무섭다는 생각은 지울 수 없었다. 어쨌든 진우가 말을 이었다. "유진 측의 제안을 거절한 이유는 당분간 어떤 길드에도 들어갈 생각이 없기 때문입니다."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마주치지 않고 정면을 응시하며 대화를 이어 나갔다. "그, 그러시군요." "그리고." 진우는 한 템포 뜸을 들인 다음 다시 말했다. "저에 대해 아는 사람이 늘어나는 것도 원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건 간단했다. 길드에 들어갈 생각이 없고,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마라. 안상민은 바로 요점을 알아들었다. 하지만 아직 궁금한 것이 남아 있었다. "저, 저기 그럼 유진호 씨와는 왜 같이 다니는 건가요?" "제 개인적인 볼일을 유진호가 돕고 있는 겁니다. 저의 재각성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고, 믿을 수 있는 친구라 생각해서 제가 부탁했죠. 그러니." 진우의 목소리에 무게가 실렸다. "앞으로 어디선가 저에 대한 이야기가 들려온다면 안상민 과장님이나 부하 직원분의 책임이라고 봐도 되겠습니까?" 이미 진우의 손은 어깨에서 떨어진 지 오래인데 목소리의 무게만으로 짓눌리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그냥 허세를 부리는 게 아니야.' 어째서일까? 진우가 정말로 자신에게 해를 끼칠 수도 있는 인물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사람을 볼 때의 내 감은 거의 정확하다.' 진우는 몇 번의 끔찍한 사고에서 무사히 빠져나왔다. 던전 안의 일은 던전 안에 묻으라고 하던가? 진우가 그 안에서 무슨 일을 저질렀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거기다 이 남자는 은신 스킬 보유자...' 은신 스킬은 골치가 아프다. 은신 스킬 보유자가 범죄를 저지르기로 마음을 먹으면 증거 하나 남기지 않고 뚝딱 해치울 수 있으니까. CCTV, 경비, 방범 시스템 같은 것들이 무용지물이 되는 것이다. 안상민의 이마 옆으로 땀방울이 한줄기 길게 흘러내렸다. '은신을 쓸 수 있을 줄이야...' 뛰어난 능력에 희귀한 스킬까지. 괜히 유진 쪽에서 3 백억을 제시한 게 아니었다. '밑지는 장사를 할 놈들이 아니지.' 두근, 두근. 안상민은 두렵고 떨리는 가운데서도 가슴이 뛰었다. 힘겹게 입술을 뗐다. "저, 절대 불문에 붙이겠습니다. 기철이, 아니 제 부하 직원한테도 단단히 일러두겠습니다." 비밀 유지는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부탁하고 싶은 이야기였다. 소속이 없는 뛰어난 능력자! 소문을 퍼트려서 쓸데없이 경쟁자를 늘릴 필요도 없었고, 여러 사람을 참여시켜 공을 나누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사실 적으로 돌리기에는 무섭다는 게 제일 큰 이유지만...' "믿겠습니다, 과장님." 한마디를 끝으로 옆자리의 인기척이 완전히 사라졌다. 안상민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치 자신만 다른 세계에서 뚝 떨어진 것처럼 카페 분위기는 평화로웠다. "허..." 안상민은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놀란 가슴을 쓸어내릴 뿐. 현기철이 카페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밖에서 유리 너머의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다가 진우가 완전히 모습을 감추자 헐레벌떡 달려온 것이다. "과장님!" 안상민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현기철은 걱정스럽게 물었다. "어떻게 된 겁니까? 성진우랑은 잘 안 풀린 겁니까?" 안상민은 떨리는 손으로 힘겹게 담배를 꺼내 물며 대답했다. "기철아... 우리 생각보다 더 대박을 만난 건지도 모르겠다." 이건 꼭 잡아야 한다. 그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다행히 아직 기회는 있었다. 그때 현기철이 안상민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저기, 과장님." 안상민은 담배에 불을 붙이려다 말고 고개를 들었다. "응?" 현기철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조심스레 귓속말을 건넸다. "여기 금연 구역입니다." 안상민의 손 안에서 담배가 구겨졌다. "이 새끼가 진짜..." *** 집으로 돌아가자마자 진우는 상태창을 불러왔다. 띠링! 이름: 성진우 레벨: 39 직업: 없음 칭호: 늑대학살자 HP: 7,229 MP: 683 피로도: 0 [스탯] 근력: 97 체력: 59 민첩: 97 지능: 51 감각: 81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물리 데미지 감소: 20%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상급 단검술 Lv.1 액티브 스킬: 질주 Lv.2, 살기 Lv.1, 은신 Lv.1, 급소 찌르기 Lv.1 [착용한 아이템] 파수꾼의 목걸이(A) '이러니 눈치채는 사람이 있을 만도 하지.' 43 화 27 에서 39 까지, 자그마치 12 레벨이나 올라갔다. 1 레벨로 첫 인던에 들어가서 17 레벨로 나왔을 때 이후, 이렇게 레벨이 폭등한 건 처음이었다. 그때는 레벨이라도 낮았지. 지금은 그것도 아니다. 그만큼 많은 던전을 빠르게 돌았단 소리였다. '유진호와 같이 레이드를 시작한 지 나흘째, 4 일 만에 벌써 아홉 개의 던전을 돌았으니...' 그것도 C 급 던전 아홉 개다. 개인이 클리어할 수 있는 규모의 던전으로는 가장 높은 난이도를 가진 C 급 던전을 말이다. 정말 미칠 듯한 스피드였다. C 급 던전이 필요했던 다른 헌터들에게는 재앙이나 다름 없었다. 가장 가까이서 지켜본 유진호가 점점 빨라지는 공략 속도에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레벨이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던전 공략은 수월해지니까. 아홉 개의 던전에 12 레벨 상승. 던전 하나를 돌 때마다 1 레벨 이상이 오른 셈이다. 남은 레이드는 10 번. 처음 유진호와 약속했던 19 번의 레이드를 모두 채우고 나면 45 레벨은 거뜬히 넘길 것으로 보였다. 20 레벨 중반일 때 B 급 헌터를 이겼다. 지금은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지게 됐을지 가늠하기도 힘들었다. '가슴이 뛴다.' 진우는 심장 부근에 손을 가져다 댔다. 심장이 거칠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쿵쾅쿵쾅. 나날이 강해진다는 것은 실로 즐거운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게이트에 들어가는 게, 던전을 공략하는 게 이리도 즐겁다니. '내가 강해지는 걸 순간순간 확인할 수 있으니까.' 레벨이 올라갈 때마다. 능력치가 변할 때마다. 마수들을 사냥하며 달라진 자신을 바로 체감할 수 있었다. '사냥이라...' 이제야 진짜 헌터가 된 느낌이었다. 사냥이란 말이 어색하지 않았다. 사냥꾼에게 사냥하는 순간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다음 사냥터를 물색하는 것이라고 했던가. 다음 목적지는 정해져 있었다. '...악마성 던전.' 21 레벨이었을 때였나? 처음 악마성에 발을 디뎠을 때보다 20 레벨 가까이 성장했다.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아직도 그때 만났던 문지기 개 켈베로스를 떠올리면 선뜻 발을 들이기가 조심스러웠다. '성문을 열었는데 감당할 수 없는 녀석들이 무더기로 튀어나온다면...' 소름이 끼쳤다. 은신 스킬로 도망쳐 나올 수 있다면 천만다행이겠으나 그렇게 되지 못할 가능성을 배제할 순 없었다. 10 번 잘해도 한 번 못하면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게 헌터였다. 그러니 확신이 필요했다. 켈베로스 같은 녀석들이 떼거리로 덤벼 와도 상대할 수 있다는 확신이. '켈베로스의 이름은 붉은색이었지.' 몬스터의 난이도는 이름 색깔로 나뉜다. 아직 악마성에서 말고는 붉은색 이름을 가진 몬스터를 본 적이 없었다. 랜덤 박스에서 떨어진 열쇠로 인던에 들어가 보면 대부분 하위 몬스터들이 나왔다. 오늘 들렀던 미래 백화점 인던도 그랬고. 그런데 왜일까? '뭐지?' 악마성 외의 장소에서 붉은색 몬스터를 본 적 없다고 생각했을 때 왠지 석연찮은 기분이 들었다. 꼭 뭔가를 잊은 것 같은 느낌. '악마성 말고도 붉은색 몬스터와 마주친 적이 있던가?' 그럴 리가. 21 렙일 때 켈베로스와 싸우고도 죽을 뻔했는데 그전에 붉은색 몬스터와 마주쳤다면 당연히 죽기 직전까지 갔어야... "아!" 자연스럽게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래, 있었다. 붉은 이름의 몬스터와 마주쳐서 죽기 직전까지 갔던 순간이. '페널티 퀘스트!' 그때 사막에서 본 지네들이 붉은색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독이빨 거대 모레지네] 시간이 좀 흘렀고 의도치 않게 만나게 된 놈들이라 머릿속에서 몬스터라는 인식이 희미해져 있었다. 그래서 쉽게 기억이 안 났다. '그 지네들을 쉽게 잡을 수 있다면!' 악마성 공략도 자신할 수 있게 된다. 지네가 한 마리가 아니었으니 다수를 상대해도 괜찮을지까지 알 수 있을 터였다. 문제는 어떻게 다시 그곳으로 가느냐 하는 건데... '역시 일일 퀘를 빼먹는 수밖에 없나?' 어차피 페널티 퀘스트를 하건, 일일 퀘스트를 하건 보상으로 받는 능력치 포인트는 같았다. 손해 볼 건 없다는 소리. '내일은 페널티 존으로 이동해 보자.' 페널티 퀘스트를 받기 위해 일부러 일일 퀘스트를 빼먹다니. 처음 지네들에게서 죽다 살아 나왔을 때를 떠올리면 웃긴 일이었다. "놈들은 경험치나 아이템 같은 거 안 주려나?"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때. 진우의 기감에 복도 끝에 위치한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치는 한 사람의 기척이 걸려들었다. 여성의 가벼운 발소리. 낯설지 않다. '진아네.' 지금은 밤 11 시. 동생이 올 시간이었다. 진우는 동생이 열쇠를 찾아 주머니를 뒤적이기 전에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덜컹. "올~" 진아가 장난스럽게 감탄했다. 처음엔 갑자기 열리던 문 앞에서 깜짝깜짝 놀라던 녀석이 이젠 놀라지도 않는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하더니. "잘 다녀왔습니다." "오냐." 진아는 반갑게 인사하고는 자기 방으로 총총 걸어 들어갔다. 그렇게 문을 잠그고 돌아서려는데. "오빠." 진아가 방문을 빼꼼 열고 고개를 내밀었다. "혹시 이번 주에 시간 나는 날 있어?" "시간은 왜?" "쌤이 학부모 상담해야 한다고 해서. 안 되면 어쩔 수 없구." 담임의 특명이라도 있었는지 진아의 얼굴이 초조해 보였다. '학부모 상담이라...' 진아가 고 3 이다 보니 학교도 바쁜 모양이었다. 시간 없다고 핑계라도 대고 싶었는데, 아쉽게도 스케줄이 비는 날이 있었다. '하여튼 유진호, 도움이 안 돼요.' 진우가 고민 끝에 대답했다. "목요일." "정말? 오빠 고마워!" 진아의 표정이 환하게 바뀌었다. 금방이라도 달려와 안겨들 것 같은 분위기라 진우는 눈치 빠르게 훠이훠이 손을 내저었다. "칫." 진아는 눈을 흘기니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곧 진우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후-" 쉴 새 없는 레이드에, 패널티 존도 들러야 하고, 모래는 학부모 상담까지. 바쁜 한 주가 될 것 같았다. 8. 전직 퀘스트 진우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오늘은 일정이 꽉 차있었다. 유진호가 게이트를 네 개나 예약해 놨다고 했다. 하루 쉰다고 내일 몫까지 해치울 모양이었다. '하긴, 요즘 클리어 속도를 생각하면...' 하루에 던전 네다섯 개도 거뜬했다. 단지 가까운 곳에 그만큼 C 급 게이트가 한꺼번에 생기는 경우가 드물 뿐이지. 그러니 오늘은 운이 좋은 편이었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아파트 동 입구에 도착했다. 그런데 항상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던 유진호의 봉고가 보이지 않았다. 거기다 수상한 기척까지 느껴졌다. "쯧." 어제 일이 없었다면 모르고 넘어갈 수도 있겠지만 오늘은 어림도 없었다. '분명히 경고했는데...' 진우는 곧바로 모퉁이를 돌아 숨어 있던 양복 차림의 남자를 발견했다. 시계를 보고 있던 남자는 아직 진우의 접근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진우가 코앞에서 남자를 불렀다. "저기요." 남자는 펄쩍 뛰어올랐다. "서, 성진우 헌터님!" 마치 귀신이라도 본 것 같은 표정이었다. '뭐, 그러라고 일부러 기척을 죽이고 움직였던 거지만.' 진우는 속으로 끌끌 혀를 찼다. "백호 길드에서 오셨죠?" "네? 아, 네. 백호 길드 제 2 관리과 현기철이라고 합니다." 어제 안상민 과장인가 하는 사람이 부하 직원을 하나 데리고 있다더니 이 남자인 듯했다. "반갑습니다, 헌터님." 현기철이 눈치를 보며 손을 내밀었다. 악수라도 해 달라는 것 같은데, 진우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말없이 쳐다보고 있으려니 현기철이 얼굴을 붉히며 손을 뺐다. "당분간 길드에 들어갈 생각은 없다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현기철은 급하게 손을 내저었다. "아, 그러려고 온 게 아닙니다." 그러면서 텀블러를 들고 있던 다른 손을 내뻗었다. "이게 뭡니까?" 진우는 반투명 텀블러 안에 든 알록달록한 액체를 보며 물었다. 현기철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야채 주습니다. 제가 직접 갈아 만든 거니 품질은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 계속 내밀고 있는 현기철의 손. 진우는 하는 수 없이 텀블러를 받아 들고서 재차 물었다. "그러니까, 지금 이걸 주려고 새벽부터 절 기다리셨다고요?" "예, 헌터님도 건강관리 하셔야죠!" 왜 내 건강을 백호 길드에서 신경 써 주냐는 의문도 잠시. 현기철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는 해맑게 웃으며 멀어졌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헌터님!" 손을 흔드는 현기철에게 진우도 텀블러를 흔들어 보였다. "...재밌는 사람이네." 현기철이 사라지고 나서 진우는 물끄러미 텀블러를 쳐다보았다. 고객들에게 야쿠르트를 나눠주며 호감을 샀다는 보험왕 이야기는 들어봤지만, 야채를 손수 갈아서 주스를 만들어 오는 사원은 아마 저 인간이 최초일 거다. '아무튼 받은 건데 버릴 수는 없고.' 그럴 일도 없지만, 만에 하나 독을 탔다고 해도 해독 버프가 있으니 문제 될 것은 없었다. 그러니 일단 맛이나 볼까? 쭉. 텀블러에 꽂힌 빨대로 주스를 맛보던 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맛있네?' 그때 귀에 익은 목소리가 뒤쪽에서 들려왔다. "형님!" 돌아보니 유진호가 다가오고 있었다. 언제나처럼 밝은 얼굴의 유진호는 현기철이 사라진 방향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형님, 방금 누굽니까? 아까부터 서 있던데." 진우의 대답은 간단했다. "보험 파는 사람." "아하." 긍정파답게 유진호는 쉽게 받아들였다. 진우는 주위를 둘러보다 물었다. "너 차는?" 현기철이 여기 서 있는 걸 봤다는 말은 유진호 본인도 한참 전에 도착해 있었다는 뜻인데, 이상하게도 유진호의 애마인 봉고가 보이지 않았다. "저쪽에 세워 놓고 왔습니다, 형님." "웬일로?" "최근에 요 근처에서 묻지마 살인사건 몇 번 있었지 않습니까? 제가 여기 사는 사람이 아니니까 다들 좀 수상하게 여기더라고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요즘 뉴스에서 종종 언급되고 있는 사건이었다. 피해자는 주로 젊은 여성. 이번 달에만 벌써 두 건이라고 하던가. 그런 상황에서 못 보던 검은색 봉고가 아파트 입구를 떡 하니 막고 서 있었으니. 주민들이 걱정할 만하긴 했다. 쿠루룩, 쿠루루루룩. 마침 야채 주스가 바닥을 드러냈다. 진우는 텅 빈 텀블러를 흔들어 보다가 차를 세워 놨다는 쪽으로 향했다. "가자." "예. 형님!" *** 이번 던전에선 리자드맨이 나왔다. 리자드맨은 말 그대로 도마뱀 인간이다. 두 다리로 걸어 다니고, 무기도 들고, 가끔 마법을 쓰기도 한다. 마법을 쓰는 리자드맨 주술사들은 숫자가 적다. 그러나 그만큼 까다로운 적이었다. 리자드맨 주술사의 손끝에서 두 개의 화염구가 생겨났다. '마법?' 진우가 접근하려 하자 주술사의 양 옆을 지키는 리자드맨 두 마리가 즉시 창을 세웠다. 파충류다운 순발력이었다. 진우는 뒤로 점프해 아슬아슬하게 창끝을 피했다. 아마 불덩어리들이 연타로 날아왔다. 슈우욱슈욱- "형님, 조심하세요!" 먼발치에서 보고 있던 유진호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콰광! 폭음이 터지며 좁은 동굴 안이 흔들렸다. 44 화 매캐한 연기가 안을 가득 메웠다. "콜록, 콜록." 유진호가 손목으로 코를 막고 기침을 해댔다. 하지만 자신보다 진우가 더 걱정이었다. 리자드맨 주술사의 공격은 그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하나 걱정했던 것과 달리 진우는 멀쩡한 모습으로 연기 속을 헤치고 나왔다. 유진호가 감탄을 터트렸다. '역시 형님!' C 급 던전에서 가장 상대하기 어렵다는 리자드맨. 그것도 주술사의 일격을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피했다. 어째 날이 갈수록 점점 더 빨라지는 것 같았다. '...착각이겠지?' 진우는 입에 들어간 돌가루를 뱉어냈다. "?." 바닥에 떨어진 침 색깔이 까맸다. '이 자식들이...' 겨우 재주 부리는 도마뱀 한 마리 때문에 매연을 들이마셔야 했다는 사실이 매우 불쾌했다. 불쾌함은 바로 얼굴에 드러났다. 진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스킬: '살기'를 사용합니다.] 부릅뜬 두 눈에서 강렬한 살의가 뻗어나갔다. ['효과: 공포'가 발동합니다.] [대상들의 모든 능력치가 1 분간 50% 감소합니다.] 살기에 노출된 리자드맨들은 크게 당황했다. "쑤?" "쑤루까?" 틈을 놓치지 않고 진우는 전력을 다해 '카사카의 독니'를 던졌다. 직선으로 날아간 단검은 리자드맨 창병 한 놈의 미간에 박혔다. 푹! 둔화된 몸으로 피하기에는 진우의 단검이 너무 빨랐다. "쑤콰!" 동료의 죽음을 목격한 창병은 고함치며 분노를 표현했다. 하지만 창끝이 향한 곳에는 진우가 없었다. 어느새 진우는 사라져 있었다. "쑤룩아나까!" 주술사가 흥분해 소리를 질렀다. "쑤룩아나까!" 주술사가 창병에게 연거푸 같은 말을 반복하자, 창병이 주술사 쪽으로 돌아서며 괴성을 내었다. "쑤우콰!" 창병이 이빨을 보이며 주술사에게 다가갔다. 주술사도 기세로는 지지 않았다. "쓰와!" 그때. "칵!" 창병의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얼굴에 피를 뒤집어쓴 주술사는 깜짝 놀라며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쑤?" 스르르. 은신이 풀리며 창병의 가슴을 꿰뚫은 창이 모습을 드러냈다. 창을 쥐고 있는 사람은 진우였다. 진우가 손을 놓자 창과 창에 꿰뚫린 리자드맨이 사이좋게 바닥으로 떨어졌다. 털썩. 그 사이 진우는 다른 리자드맨 창병의 머리에 박혀 있는 '카사카의 독니'를 회수했다. "쑤와아아아!" 주술사의 두 손에 다시 시뻘건 불꽃이 응집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진우는 틈을 주지 않았다. '질주!' 진우와 주술사 사이의 간격이 순식간에 없어졌다. 주술사의 눈이 커졌다. 파충류답게 징그러운 눈동자였다. 슈우욱. 막 뿜어져 나오려는 불꽃을 피해 주술사의 뒤로 돌아간 진우가 놈의 척추에 단검을 박아 넣었다. '급소 찌르기!" 푹! 주술사가 비명을 내질렀다. "키야아아악!" 그러나 다시 놈의 등을 찔렀을 땐 비명이 방금 전처럼 길지 않았다. 푹! "칵!" 리자드맨 주술사가 피를 토하며 앞으로 고꾸라졌다. 털썩. 진우는 속으로 어퍼컷을 날렸다. 되짚어 봐도 깔끔한 싸움이었다. '좋았으!' 승리를 축하해 주려는 듯 시스템이 경쾌한 기계음을 내보냈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플레이어'가 요구 레벨에 도달했습니다.] 익숙한 메시지 뒤의 생소한 메시지. '요구 레벨?' 이때까지만 해도 무슨 소리인지 전혀 감이 오지 않았다. 하지만 다음 기계음이 울렸을 때, 진우는 가슴이 아플 정도로 거칠게 쿵쾅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느라 애를 먹어야 했다. 띠링. [전직 퀘스트가 도착했습니다.] [전직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전... 전직 퀘스트?' 레벨과 스탯을 올리는 데 집중하느라 상태창의 한쪽 칸을 잊고 있었다. [이름: 성진우] [레벨: 40] [직업: 없음] 상태창의 세 번째 줄을 차지하고 있는 '직업'란. '전직 퀘스트가 가능하다는 건...' 없음이란 말 대신 다른 단어가 들어갈 기회가 왔다는 뜻이었다. 직업을 갖는다. 대부분 게임에서 캐릭터는 전직 시 많은 혜택을 얻는다. 게임과 비슷하게 돌아가는 시스템도 크게 다르지 않을 터. 두근두근. 심장의 박동이 거세졌다. 이걸로 강한 힘을 갖겠다는 목표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설 수 있다고 생각하니 도무지 진정되지를 않았다. [전직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 눈앞에서 Yes or No 가 계속 깜박거렸다. '그야 당연히...' 어떤 바보가 이런 기회를 차 버릴까? 진우는 흔쾌히 전직 퀘스트를 수락하려고 했다. 그런데 본능적으로 멈칫했다. '아니, 잠깐.' 무슨 퀘스트가 나올지 모르잖아? 본능의 신호 뒤에 이성의 경고가 이어졌다. '여기는 던전 안이다.' 던전은 세상에서 가장 위험한 장소였다. C 끕 던전에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해도 던전은 던전. 일부러 위험을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게다가 근처에 유진호도 있었다. 유진호를 못 믿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굳이 시스템에 대한 단서를 주거나, 전직할 때 벌어질지도 모를 괴현상을 설명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일이 복잡해질지 모른다. '게다가 퀘스트 내용에 따라 진호한테 피해를 끼칠 수도 있고.' 갑작스럽게 몬스터라도 생성된다면? '차라리 그 정도면 다행이지.' 몬스터야 직접 잡으면 그만이니까. 그러나 그보다 더한 퀘스트도 얼마든지 떨어질 수 있었다. 예를 들면 두 번이나 받았던 긴급 퀘스트 때처럼. '가장 가까이에 있는 헌터를 처치하는 게 목표일 수도 있다.' 만에 하나. 어디까지나 가정이긴 하지만 말이다. 마침 유진호가 다가왔다. "형님!" 리자드맨 주술사가 죽기 직전 날렸던 마법이 근처에 떨어졌었는지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쓴 모양이었다. "방금 갑자기 사라졌다 나타난 거 어떻게 하신 겁니까? 그런 스킬도 있으셨어요?" 유진호는 상기된 얼굴로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희귀 스킬인 은신이 되게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 니 꼴이 더 신기한데.' 진우는 대답 대신 인벤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그제 일일퀘 보상으로 받은 물건이었다. "혀, 형님?" 그걸로 유진호의 얼굴을 사정없이 문질렀다. "우으읍, 프읍!" 새하앴던 손수건이 검게 변했다. 유진호는 진우가 넘겨준 손수건의 상태를 확인하고서야 자신의 얼굴 상태가 어쩐지 깨달았다. 머쓱해진 유진호는 조용히 구석구석 얼굴을 닦았다. "진호야." "네, 형님." "급한 볼일이 생각났다." 유진호가 휙 고개를 들었다. "그럼 가 보셔야 됩니까?" "여기만 마저 돌고." "알겠습니다. 그럼 나머지 게이트들은 예약 취소하겠습니다." 진우 앞이라 티는 못 냈지만 유진호는 예약해 둔 세 개의 게이트가 내심 아까웠다. '이제 슬슬 자금이 떨어져 가는데.' 따로 벌이가 없는 유진호의 자금이란 용돈을 모은 것이 전부였다. 아버지 몰래 하는 짓이라 융통할 수 있는 돈에 한계가 있었다. 게이트를 취소하면 예약하는 데 쓴 돈을 돌려받지 못한다. 생돈이 하늘로 날아가는 것이다. 어찌 아깝지 않겠는가? 안 그래도 독특한 레이드 방식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더 많은 예산을 썼다. 그런데 또 자금을 낭비해야 한다니. 유진호의 어깨가 자연스레 축 늘어졌다. 하지만 진우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돈 아깝게 그걸 왜 취소해?" 유진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예? 게이트 예약해 놓고 이틀 동안 안 들어가면 어차피 자동으로 허가가 취소됩니다. 형님." 물론 진우가 그런 기본적인 사실을 모르지는 않았다. "나한테 맡겨둬."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신가? 유진호는 궁금해하면서도 한편으로 듬직한 기분이 들었다. *** 백호 길드 건물. "안 과장님! 도대체 생각이 있는 겁니까?" 제 2 관리과에서 고성이 터져 나왔다. 목소리의 주인은 백윤호. 백호 길드의 마스터이자 사장인 인물이었다. 다른 이도 아니고 사장이 아래층까지 직접 따지러 내려왔다는 건 상황이 매우 좋지 못함을 의미했다. "아니, 신입들 훈련시킬 게이트가 없다는 게 말이나 됩니까? 벌써 훈련 일정을 사흘이나 미루신 거 아십니까, 모르십니까?" 제 2 관리과 직원들이 모두 눈을 내리깔았다. 다들 불똥이 튈까 봐 조마조마한 눈초리였다. 코앞에서 백윤호의 손가락질을 받는 과장 안상민 또한 고개를 푹 숙였다. "..." 안상민은 자신의 부하 직원 현기철처럼 흥분한 상사에게 꼬박꼬박 말대답해서 상사의 화를 키울 정도로 미숙하지 않았다. 이럴 땐 그저 입을 꾹 다물고 있는 게 제일이었다. 안상민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백윤호는 오늘 아침 제 2 관리과에서 올라온 보고서를 흔들어 댔다. "이걸 핑계라고 대는 겁니까? 다른 팀이 너무 높은 입찰가를 불러 대서 예약할 수가 없다? 우리 길드에 돈 없어요? 아니면 상대방이 무슨 재벌가라도 끼고 있답니까?" 이 순간만큼 정말로 입이 간지러웠으나 안상민은 철인 같은 인내심으로 잘 견뎌 냈다. 진우와 한 약속이 있었다. '지금 입을 열면 유진호와 성진우 이야기까지 자동으로 나오게 돼.' 안상민의 타들어 가는 속도 모르고 백윤호는 사무실이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 댔다. "1 억이든 2 억이든 무조건 게이트를 예약하라 이겁니다! 아시겠어요?" 그때였다. 안상민의 전화가 울렸다. [아! 아까는 못 받아서 미안해, 친구를 만나느라 shy shy shy~♪] 잠깐 곁눈질로 발신자를 확인한 안상민의 눈이 커졌다. "사장님, 전화 좀 받겠습니다." "..." 신입들의 영입이 주 업무인 제 2 관리과는 뭐니 뭐니 해도 타이밍이 생명! 안상민은 그런 제 2 관리과의 보스였다. 아무리 안상민이 실수를 했고 그 때문에 화가 났다고는 ?巒?그에게 걸려오는 전화를 못 받게 하는 건 멍청한 짓이었다. "뭐 해요? 얼른 안 받고." 백윤호가 퉁명스럽게 허락했다. 안상민은 양해해 달란 의미로 백윤호에게 살짝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급히 전화를 받았다. "예. 백호 길드의 안상민입니다." 안상민이 전화를 받는 동안 백윤호가 앞에서 팔짱을 끼고 기다렸다. "네, 네. 알겠습니다. 1 층 카페에서 기다리시면 저희가 바로 가겠습니다. 네, 그럼." 전화를 끊은 안상민이 총알같이 말했다. "사장님, 저 잠시 나가봐야 할 것 같습니다." 제 2 관리과의 에이스. 천하의 안상민 과장이 이런 불편한 상황에서 전화 한 통화에 뛰쳐나가야 할 일이라면... 백윤호의 표정이 조금 누그러졌다. "혹시 신입 스카웃 관련된 전화입니까?" "네." 안상민의 자신 있는 표정에서 백윤호는 뭔가 있음을 직감했다. '그래도 안 과장이 신입을 직접 스카웃하러 나서?' 상대가 보통내기가 아니란 소리였다. 험악하게 일그러져 있던 백윤호의 얼굴에 어느덧 미소가 나타났다. "영입 스페셜리스트가 영입을 못 하게 막아서야 되겠습니까. 여기 일은 신경쓰지 마시고 어서 갔다 오세요." 45 화 안상민이 다시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리고는 현기철에게 빠르게 지시를 내렸다. "현 대리, 계약서랑 도장 챙겨." "네!" 준비가 후다닥 끝났다. 두 사람이 급하게 사무실을 떠나고나자 백윤호가 옆의 남자 직원에게 슬며시 물었다. "뭐야? 무슨 일인데 안 과장이 저리 적극적으로 움직이는 거야?" 남직원은 자기 옆의 여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러나 여직원도 고개를 저었다. 나도 몰라. 여직원의 눈빛이 그리 말했다. '아오...' 남직원은 곤란해하다 결국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렵게 대답했다. "그게... 저도 잘..." 사장의 불벼락이 떨어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사장은 아무 말이 없었다. '부하들한테까지 숨겨가면서 뭔가하고 있다 이거지?' 백윤호가 턱을 만지작거렸다. 백호 길드가 이만큼 성장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사람이 바로 안상민 과장이었다. 그런 사람이 저리 매달리고 있을 정도라면... '우리 안 과장이 또 간만에 한 건 올리시려나?' 백윤호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어올랐다. *** '무슨 커피가 이렇게 써?' 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자판기 커피를 생각하고 주문한 에스프레소는 커피라기보다는 독한 한약에 가까웠다. 그런 주제에 값은 또 왜 이렇게 비싼지. '6 천 원이면 캔커피가 몇 갠데...' 이 쓰디쓴 놈이 캔커피 정도의 맛을 내려면 스틱 설탕을 몇 개나 들어가야 할까 고민하고 있을 때. 딸랑. 카페 문이 열리며 안상민과 현기철이 카페 안으로 들어섰다. "여깁니다." 진우가 손을 들었다. 가게 안을 둘러보던 안상민과 현기철은 진우를 발견하고는 만면에 화색을 띠었다. 꼭 제비가 물어 온 박을 막 켜기 시작한 흥부의 표정 같았다. "이렇게 빨리 다시 뵈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안상민은 그렇게 인사하며 진우의 맞은편에, 현기철은 눈인사 후 안상민 옆자리에 앉았다. 진우는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대신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던가. 안상민은 자리에 앉자마자 곧바로 계약서부터 꺼냈다. "일단 조건에 대해서 서로 논의를." 빨리 계약을 성사시키고 싶은 티가 팍팍 났다. 하지만 진우는 단박에 거절했다. "오늘은 계약 때문에 온 게 아닙니다." 계약서를 꺼내던 안상민의 손이 멈췄다. 한기철도 의아하다는 눈빛이었다. 안상민은 정지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굳어 버린 자세로 물었다. "그럼 저희 백호 길드엔 무슨 일로...?" 기대가 컸던 만큼 실망도 컸다. 제 발로 길드를 찾아온 대형 신인이 계약서를 보자마자 계약을 거절하다니. 그사이 마음이 바뀌기라도 한 걸까? 의문이 더해가는 가운데 진우는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두 분을 도와드리고 싶어서 온 겁니다." "예?" "예?" 안상민과 현기철의 반응이 비슷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가 다시 진우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당황한 두 사람과 대조적으로 진우는 차분하게 말을 이었다. "저희 공격대가 C 급 게이트를 싹쓸이 해대는 바람에 신입들 교육에 애를 먹고 있다고 말씀하셨었죠." "네. C 급 게이트 예약이 힘들다고 신인 헌터들을 상급 던전으로 데려갈 순 없으니까요." "그래서 여기 온 겁니다." 안상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무슨 말씀이신지 도통..." 이쯤이면 됐다고 생각한 진우가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저희가 예약해 둔 C 급 게이트 공략 허가권 세 개를 백호 길드에 팔고 싶습니다." 아현기철이 짧은 탄성을 흘렸다. 백호 길드의 두 사람은 이제야 진우의 진의를 파악할 수 있었다. 안상민은 계약서를 도로 집어넣으며 의문을 표했다. "저희를 돕고 싶으시면 아예 예약을 하지 않는 편이 좋지 않습니까?"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앞으로 당분간은 꾸준히 C 급 던전을 필요로 하는 일이 있어서요." "그럼 오늘은 어째서...?" 진우는 싱긋 미소를 지었다. "당연히 곤란해 하고 있는 두 분을 돕기 위해서죠." 이걸 곧이곧대로 믿어야 할까? 안상민의 머릿속 계산기가 막 돌아가려고 하기 직전 진우의 설명이 이어졌다. "물론 오늘만 특별히 양보해 드리는 겁니다. 저희도 계속해서 일을 미룰순 없어서요. 이 기회를 놓치시면 한동안 C 급 게이트를 예약하기 힘드실 겁니다." 마치 매진 임박이 얼마 남지 않았음을 알리는 홈쇼핑 진행자 같은 태도였다. '흐음...' 안상민은 고민에 빠졌다. 게이트는 수도권에만 생기는 게 아니다. 정 안 된다면 지방으로 내려가서 신입들을 훈련시키고 오는 방법도 있었다. 하지만 그랬다가는 해당 지역의 길드들이나 공대들에 불만을 살 가능성이 높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호남의 명성 길드나 영남의 기사단 길드 같은 각 지방의 대형 길드들에게 얕보일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신입 훈련도 자기네 구역에서 못 시키는 얼간이 길드라는 오명을 뒤집어쓸 수 있는 것이다. '흠... 오명이라곤 할 수 없나?' 명백한 사실이니까 말이다. 어찌됐든 다른 명문들에게 비웃음당하는 길드를 어떤 신인이 좋다고 찾아오겠는가? 이래서 길드의 이미지는 중요했다. "좋습니다." 긴 고민 끝에 안상민은 타당한 결론을 내렸다. "저희한테 허가권을 파시죠. C 급 게이트 세 개면 딱 적당하네요. 전부해서 얼마면 되겠습니까?" 백호 길드도 돈은 많았다. 하지만 유진건설과 자금력 대결을 해 봐야 좋을 것도 없었고, 무엇보다 진우와 사이가 틀어질까 봐 무리하게 나서지 않았다. 그러니 진우가 알아서 게이트를 넘겨준다면 고마운 일 아닌가? 헌데 가격까지 고맙진 않았다. "게이트 하나당 3 억해서 전부 9 억으로 하죠." "컥!" 안상민과 현기철이 동시에 신음 비슷한 소리를 냈다. "그건 너무." 현기철이 끼어들려고 하자 안상민이 급하게 막았다. 저번에 만났을 때도 그랬다. 진우는 가격이 맞지 않자 미련 없이 이야기는 끝이라고 했다. 어떻게 보면 굴러들어 온 기회인데. 이번 기회를 놓치면 진짜 한참 뒤에 C 급 게이트를 예약하거나, 최악의 경우 지방에서 신입들을 훈련시키고 오는 수밖에 없었다. '협상은 한번 해 보고 끝내야지.' 이렇게 빨리 판을 접기는 아쉬웠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게이트 하나당 3 억은 너무 비싼 가격이었다. 요즘 유진호 팀이 허가권을 받아가는 가격은 평균 1 억 가량. 그 세 배를 지불하라는 건 억지였다. 상대도 그 정도는 알고 있을 터. '일단 고가를 한 번 불러보고 절충할 생각이겠지.' 그러고 보니 사무실을 나오기 전에 백윤호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1 억이든 2 억이든 무조건 게이트를 예약하라 이겁니다! 이건 사장의 허가나 다름없었다. 제 2 관리과 직원 전부가 들었으니 나중에 발뺌하기도 힘들 테고. 안상민은 침을 꼴깍 삼키며 절충안을 제시했다. "3 억은 저희로서도 힘든 가격이니 2 억은 어떠십." "좋습니다." 진우는 안상민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오른손을 내밀었다. 안상민이 얼떨결에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이... 이걸로 된 겁니까?" "네. C 급 게이트 개당 2 억씩. 계좌로 넣어 주세요." 어째 이야기가 너무 쉽게 돌아가는 것 같았지만, 어쨌든 간에 안상민 입장에선 다행스런 일이었다. 안상민은 마주잡은 진우의 손을 위아래로 가볍게 흔들며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별말씀을." 진우도 환한 미소를 지었다. 안상민은 이걸로 한시름 놓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단 신입들 훈련 문제가 해결됐고, 진우와의 관계도 조금 더 좋아졌다. '거래는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거니까.' 그래. 이렇게 조금씩 관계를 발전시켜 가는 거다. 그러면 다 넘어오게 되어 있다. 웃는 얼굴에 침 뱉는 사람 없고, 선물 주는데 모른 척하는 사람 없는 법이다. 안상민은 속으로 주먹을 불끈 쥐었다. 진우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다음에 또 뵙죠. 아, 그리고 이거." 진우는 쇼핑백 안에 넣어온 텀블러를 원 주인에게 돌려주었다. "잘 마셨습니다. 맛있더라고요." "입맛에 맞으셨다니 다행이네요." 현기철은 얼굴을 붉히며 쇼핑백을 받았다. 그 길로 진우는 카페를 나갔다. 안상민, 현기철 두 사람과 충분히 멀어진 진우는 유진호에게 연락을 넣었다. 경쾌한 컬러링이 잠시 이어진 뒤. 유진호의 흥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형님, 입금됐습니다. 진짜 6 억 들어왔네요? "..." 진우는 말없이 흐뭇하게 웃었다. 거래는 성공적이었다. 허공으로 날아갈 뻔한 공략 허가권을 사 온 가격의 두 배에 팔아치웠다. 엄청난 이득이었다. 유진호가 신기하다는 듯 물었다. -형님, 도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C 급 게이트를 어디에 파신 거예요? "영업 비밀이다." -예? "잘 쉬고, 모레 보자." 유진호가 당황하고 있을 때, 진우는 자연스럽게 전화를 끊었다. 뚝. 그날 저녁. 제 2 관리과 사무실. 현기철은 급히 안상민을 찾았다. "과장님! 과장님!" "왜?" 안상민이 모니터에서 시선을 뗐다. 현기철은 다급한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가리켰다. "이것 좀 보세요!" "뭔데 그래." 핸드폰 화면을 주시하는 안상민의 눈이 가늘어졌다. '이건...?' 헌터들만 이용 가능한 헌터 협회 공식 사이트. 신고가 접수된 게이트의 위치를 알려 주고 실시간으로 공략 허가권을 판매하는 거래소 화면이었다. "뭐야? 우리 구역에서 C 급 게이트가 남아도네?" '예. 입찰된 가격도 전부 천만 원 이하 가격대입니다." "설마..." 안상민은 아차 싶었다. "유진호 팀은 오늘 한군데도 예약을 안 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어제 성진우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목요일엔 시간이 납니다. 내일은 그 목요일이었다. 유진호 팀은 처음부터 내일 레이드 예정이 없었던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비싼 값에 허가권을 사고 말았다. "허..." 안상민은 실소가 흘러나왔다. 단서는 분명히 있었는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 본인의 실수였다. 결과적으로 그 실수 덕분에 사장님의 분노를 꺼트리는 데 성공하긴 했지만. "저희가 당한 것 같습니다, 과장님." 마침 그때 문자가 도착했다. 띵동. 발신자는 성진우였다. [서로 한 번씩 주고받았네요. 이걸로 절 미행하신 건 없었던 일로 하겠습니다.] '쉽게 볼 수 없는 친구구만, 정말로.' 안상민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진우 말대로 이렇게 해서 남을 수 있었던 앙금이 사라진다면 자신이나 백호 길드 입장에서도 나쁠 건 없었다. 최종적인 목적은 진우의 포섭이니까. 오늘 쓴 금액 정도면 백호 길드에게 큰돈도 아니었고. "성진우한테 투자했다고 생각하자." 투자한 만큼 나오는 게 있다면 좋을 텐데. 메시지를 들여다보던 안상민은 미소를 지으며 문자함을 닫?다. *** 문자를 보낸 뒤 진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람은 없었다. 주변은 숲. 안전한 퀘스트 진행을 위해 일부러 인적이 드문 야산을 골랐다. 현재 시간은 오후 5 시 44 분. 이런 애매한 시간에 등산을 하는 사람이 있을 리도 없었고, 또 현재 위치는 등산로에서도 한참을 벗어나 있는 공터였다. '시작해볼까.' 진우는 메시지 함을 열었다. [전직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메시지가 눈앞에 나타났다. 46 화 꿀꺽, 진우의 목울대가 울렸다. 어떤 퀘스트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건 역시 두려운 일이었다. 하지만 기대감이 더 컸다. 마땅한 곳을 찾는 동안 잠깐잠깐 폰으로 전직에 대해 검색해 봤었다. -새로운 스킬. -성장 혜택. -해당 직업의 전용 무기. -연계 퀘스트. ...등등. 다 게임 이야기였지만, 전직에는 많은 보상이 뒤따른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나는 그 전직 가능 레벨이 40 이었던 거고.' 물론 좋은 이야기만 있었던 건 아니었다. 불길한 게시물도 종종 눈에 띄었다. -직업을 잘못 택해서 고민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짜 다른 클래스 할걸, 씨 X. -순간의 선택 미스로 정든 게임 접고 그만 일상으로 복귀합니다. -이거 캐삭이라도 해야 하나요? ...뭐, 그건 어디까지나 게임 이야기니까. 게다가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게, 이때까지 무기는 거의 단검만 썼다. 스킬도 죄다 암살자 형으로만 얻었다. '단검 스킬이나 은신 같은 것들.' 거기에 능력치까지 민첩과 근력에 집중 투자했으니 암살자 클래스 말고 다른 직업은 떠올리기가 힘들었다. 생각난 김에 진우는 창고에서 단검 '카사카의 독니'를 불러왔다. 스르륵.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 '나한텐 이게 편해.'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단검을 손에 쥔 채로 진우의 시선이 허공에 떠 있는 메시지로 옮겨졌다. '자, 그럼...' 혹시나 모를 사태에 대비도 했겠다, 진우는 마음의 준비를 끝내고서 메시지에 응답했다. [전직 퀘스트를 수락하시겠습니까?] (Y/N) '수락.' 퀘스트를 받아들이겠다고 마음먹은 동시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전직 퀘스트를 수락하셨습니다.] [전직 퀘스트를 위해 던전을 생성합니다.] '던전을... 생성해?' 메시지의 의미를 해석할 시간도 없이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우우웅눈앞에 나타난 검은 구멍. 그게 시작이었다. 우웅, 우우웅처음에 콩만 했던 작은 구멍은 금방 동전만 해졌다가, 다시 배구공만 해지더니, 어느새 사람이 들락날락할 수 있을 만한 크기로 커졌다. '이건...?' 진우의 눈이 커졌다. 퀘스트를 수락했으니 퀘스트 내용이 담겨 있는 다른 메시지 정도가 날아오지 않을까 예상했었는데... 눈앞에 나타난 것은 다름 아닌 게이트였다. '게이트가 만들어지다니...' 여태까지 봐 왔던 게이트들과 다를 것이 없었다. 단지 평소에 보던 것들 보다는 크기가 좀 작을 뿐. 시스템은 어서 들어오라는 듯 메시지를 보내왔다. [게이트를 통해 던전에 입장하시오.] '침착하자.' 진우는 마음을 가라앉혔다. 그래. 따지고 보면 열쇠를 통해 들어가나, 게이트를 통해 들어가나 안에 던전이 있다는 점은 크게 다를 바가 없었다. 그냥 게이트가 인위적으로 생성되는 장면을 봐서 놀랐을 뿐이었다. 생성된 게이트에 들어가기만 해 봤지 만들어지는 모습을 본 건 처음이었으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순간 갑작스런 의문이 들었다. '가만... 이렇게 만들어진 게이트에도 다른 헌터들이 들어갈 수 있을까?' 하지만 실험해 볼 방법은 없었다. 가까운 곳에 도움을 부탁할 만한 헌터도 없었고, 부른다고 여기까지 달려와 줄 헌터 또한 없...지는 않나? 잠깐 유진호의 얼굴이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랬다가 일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뒷감당은 어떻게 하려고.' 그때였다. 진우를 재촉하듯 메시지가 다시 깜박였다. 띠링. [게이트를 통해 던전에 입장하십시오.] 기계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진우는 정신 차리자는 의미에서 양손으로 얼굴을 짝짝 때렸다. '딴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냐.' 성공하면 전직과 그에 따른 보상, 실패하면 결과는 장담할 수 없음. 지금은 집중해야 할 때였다. "후우-." 짧게 심호흡을 끝낸 뒤. 진우는 '카사카의 독니'를 역수로 쥐고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응?' 잔뜩 긴장하고 들어왔는데, 놀랍도록 아무것도 없었다. 평범한 동굴형 던전이었다. "그냥 똑같잖아...?" 상급 던전에 들어가면 종종 이세계와 연결되는 일이 있다고 해서, 혹시 그런 경우가 아닐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우려하던 일은 없었다. 대신 특이한 메시지가 하나 떴다. 띠링. [현재 장소에서는 물약과 상점 사용이 금지되며, 레벨이 상승하더라도 상태가 회복되지 않습니다.] 주변에 마수의 기척이 없음을 확인한 진우가 단검을 창고에 도로 집어 넣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쉽지 않겠네.' 전직을 위한 곳이라 그런지 제약이 많았다. 특히 깎여 나간 체력을 포션이나 레벨업으로 다시 채울 수 없다는 게 컸다. '데미지가 누적된다는 거다.' 부상이라도 당하면 그걸로 끝. 회복할 방법이 없으니 행동 하나하나에 신중을 다하는 수밖에 없었다. '정신 똑바로 차리라는 거군.' 진우는 메시지창을 닫았다. 그리고 던전에 들어오면 늘 하던 것처럼 퇴로부터 점검했다. [전직 과정이 완료되기 전까지 퇴장할 수 없습니다.] 게이트 표면에 손이 닿자마자 메시지가 떴다. 힘을 줘 봤지만 꿈쩍도 하지 않았다. "..." 진우는 뻗었던 손을 거둬들였다. '입구도 막혔고.' 등급 미상, 회복 불가, 퇴로 없음. 이번 던전은 리스크가 무척 컸다. 웬만큼 담이 큰 헌터도 이런 곳을 활보하고 다니진 않으리라. '하지만 리스크가 크다는 게 꼭 안 좋은 것만은 아니다.' 위험이 클수록 보상도 커진다. 이건 경험을 통해 배웠다. 제약이 많아서 공략이 힘들다면 그만큼 좋은 기회가 기다리고 있는 게 아닐까? 확인하는 방법은 하나. '가 보면 알겠지.' 진우는 한걸음 내디뎠다. 시선을 앞으로 향하니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길게 이어진 동물 통로가 한눈에 들어왔다. 근처에 마수는 없는 듯했다. '아니, 시스템의 영역 안에 있으니 마수가 아니라 몬스터라고 해야 하나?' 둘 다 괴물이란 점에서 똑같긴 해도. 아무튼 그거 말고도 차이점이 하나 더 있었다. 동굴 벽면에 횃불이 일렬로 촘촘히 걸려 있었다. '야광석 대신 횃불이라.' 하지만 횃불은 그리 효율 좋은 조명이 아니다. 아무리 많이 배치되어 있어도 주위를 전부 밝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때문에 드문드문 그림자가 남았다. 고오오오음영과 정적이 뒤섞여 기존의 던전보다 훨씬 더 음산한 분위기를 만들어 냈다. '시야에는 전혀 지장이 없지만...' 기분상의 문제라고 할까. 진우는 가장 가까운 횃불 하나를 뽑아 들었다. 횃불을 내밀자 앞이 조금 더 밝아졌다. '확실히 이쪽이 더 낫네.' 진우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잠깐 뒤를 돌아봤던 진우는 횃불을 앞세우곤 천천히 앞으로 나아갔다. ***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을 가다 보니 모퉁이를 도는 곳이 나왔다. 모퉁이 안쪽에서 여러 개의 기척이 느껴졌다. '올 게 왔나.' 진우는 조심스레 횃불을 바닥에 내려놓고 일어섰다. 스르르. 오른손엔 어느새 횃불 대신 단검이 들렸다. 은신으로 후딱 해치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은신 스킬이 잡아먹는 마나를 떠올리곤 그만뒀다. 여기선 잃은 마나를 포션으로 다시 채울 수 없으니까. 함부로 마나를 써 대다간 진짜 필요한 순간에 스킬을 쓰지 못할 가능성이 있었다. '...이리로 오고 있다.' 진우는 벽에 딱 붙은 채로 모퉁이 너머의 적이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철그럭, 철그럭. 놈이 걸을 때마다 쇳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철그럭, 철그럭. 생소한 소음에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사슬 무기라도 들고 있나?' 궁금했지만 조바심 낼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잠시 후면 확인이 가능하니까. '5, 4, 3.' 진우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 호흡을 멈추었다. 숨소리가 새는 것까지 방지하기 위해서였다. '2, 1.' 철그럭, 철그럭. 드디어 놈의 그림자가 나타났다. '...0.' 카운트다운이 끝났을 때, 놈이 막 모습을 드러냈다. 진우는 놈의 옆 목을 노렸다. 캉! 쇠가 부딪치는 소리. 칼은 박히지 않았다. '갑옷?' 진우의 눈이 커졌다. '놈'의 정체를 확인한 진우는 급히 뒤로 빠졌다. "사람?" 전신을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였다. 얼굴은 투구로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진우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불러 봤다. "어이!" 그런데 기사는 일언반구도 없이 진우가 있는 방향으로 뛰어왔다. 쿵, 쿵, 쿵! 맹렬히 돌격해 온 기사가 숄더 어택을 날렸으나 진우는 가볍게 몸을 비틀어 공격을 흘려 보냈다. 기사는 관성을 이기지 못하고 뒤쪽으로 한참을 달려가다 간신히 멈춰섰다. '사람은 아닌가?' 가까이서 다시 한 번 봤더니 알 수 있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존재해야 할 심장의 박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인간은 아닌 듯했다. 어디서도 본 적 없는 타입의 마수, 아니 몬스터였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갑옷으로 무장한 몬스터라니. '이래서야...' 마치 사람과 싸우는 것 같지 않은가. 스르릉! 기사는 돌아서며 옆구리에 차고 있던 칼을 뽑았다. 진우가 그러한 것처럼 기사도 진우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는 듯했다. 서로의 적의를 확인한 진우의 눈빛이 한층 더 예리해졌다. '질주!' [이동속도가 40% 증가합니다.] 선수필승! 놈이 달려들기 전에 진우가 먼저 뛰어들었다. 부웅! 기사가 급하게 휘두르는 장검을 피한 진우는 갑옷 여기저기를 단검으로 찔렀다. 캉! 캉! 그러나 데미지가 들어가지 않았다. '장갑이 두꺼워.' 그냥 두껍기만 한 게 아니라 표면이 미끄럽기까지 해서 정타를 넣어도 날이 박히지 않고 미끄러지기 일쑤였다. 그때 기사가 검을 일자로 크게 그었다. 부웅! 진우는 머리를 숙여 피했다. 검날이 진우의 머리 위를 아슬아슬하게 스쳐 지나갔다. 동작이 큰 만큼 빈틈 역시 컸다. 다시 찾아온 기회! 기사에게 접근한 진우는 역수로 쥔 단검에 온 힘을 실었다. '급소 찌르기!' 콰직! 단검 끝이 갑옷을 뚫고 들어갔다. '통했나?' 하지만 별 타격이 없었는지 기사는 옆구리에 단검이 박혀 있든, 말든 검을 수직으로 내려쳤다. 쉬익! 진우는 몸을 뒤로 날렸다. 캉! 검이 돌바닥을 때리자 불똥이 튀었다. "..." 진우는 몇 걸음 뒤로 물러서서 자세를 추슬렀다. 놈의 옆구리에는 여전히 자신의 단검이 박혀 있었다. 쯧. 진우가 혀끝을 찼다. '그리 센 놈은 아니야.' 그게 솔직한 평가였다. 놈은 갑옷 때문인지 행동이 굼뜨고, 공격 패턴도 무척이나 단조로웠다. 다만 날붙이에 대한 면역이 유달리 강할 뿐이었다. 진우는 소매를 걷어 올렸다. '장갑이 두꺼워서 날붙이가 통하지 않는 적이라면 이미 상대해본 적 있다.' 여유는 경험에서 나오는 것. 마력이 담겨 있는 강철검을 박치기 한방에 깨부셨던 보스몹 '푸른 독니 카사카.' 그 커다란 구렁이를 제압했던 경험이 있었다. '카사카에 비하면 저 녀석은 뭐...' 나쁘지 않은 기억이라 그런지 진우의 입가에 슬쩍 미소가 걸렸다. 쿵, 쿵, 쿵! 기사는 또 갑옷을 믿고 무식하게 돌진해 왔다. '거봐. 역시 단순하다니까.' 진우는 기사의 어깨 공격을 쉽게 피하고, 놈의 뒤로 돌아가 팔뚝으로 목을 조였다. 우드득! 물론 목 부분도 갑옷으로 보호받고 있어서 숨이 막힌다거나 하지는 않겠지만. 드드드득! 진우의 팔뚝이 굵어지며 힘줄이 돋아났다. 진우는 기사의 목을 조르려는 게 아니었다. 진우가 이를 악물고 눈을 부릅떴다. 그러자. 콰직! 끔찍한 소리를 내며 투구가 뽑혀나갔다. 100 을 넘어선 근력 스탯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됐다!' 머리와 목이 분리된 기사는 힘없이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쿵! [기사를 처치했습니다.] 싸움의 종료를 알리는 담백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기사의 갑옷 쪽에서 아이템을 상징하는 빛이 반짝거렸으나 진우의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뭐야? 안에 아무것도 없잖아?' 손에 들린 투구가 비어있었다. 혹시나 해서 갑옷 쪽을 살펴봤지만, 마찬가지로 갑옷 안도 비어 있었다. '그럼 저절로 움직이는 갑옷과 싸우고 있었던 건가?' 그러한 결론에 다다랐을 때, 모퉁이 저편에서 두 명의 기사가 더 튀어나왔다. 뒤늦게 싸움이 벌어진 걸 알아챈 모양이었다. 철그럭, 철그럭. 진우를 발견한 기사들, 아니 갑옷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옆구리에 찬 검을 뽑아 들었다. 스르릉스르릉진우는 들고 있던 투구를 뒤로 던져버리고 목과 어깨를 풀었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여기서부터 시작인 건가?' 쿵, 쿵, 쿵, 쿵! 진우는 달려오는 기사들을 마주 보면서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 던전 공략의 첫걸음은 아주 순조로웠다. 47 화 제약이 크기 때문인가? 아이템이 잘 나왔다. 고작 기사 셋을 쓰러뜨린 게 다인데 두 놈이 각각 하나씩 두 개의 아이템을 떨어트렸다. 확률로 치면 66.6 퍼센트. 다른 곳에선 상상도 못할 만큼 놈은 드랍률이었다. 인던을 수차례 클리어하는 동안 얻을 수 있었던 거라고는 잡동사니나 상점 판매용 아이템이 전부였으니 말이다. [아이템: 상급 기사의 흉갑]을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당연히 획득해야지.' 머리를 잃고 무릎 꿇은 상태로 움직임을 멈추었던 기사. 놈의 흉갑이 스르르 사라지더니 어느새 발 앞에 나타났다. 털썩. 이내 흉갑의 정보가 떠올랐다. [아이템: 상급 기사의 흉갑] 입수 난이도: B 종류: 방어구 물리 데미지 감소 +7% (근력이 80 미만일 경우 움직임이 느려집니다.) 물리 데미지 감소 7 퍼센트 증가! 원래 가지고 있던 옵션과 합치면 무려 27 퍼센트나 되는 물리 데미지를 감소시킬 수 있었다. '그럼 100 퍼센트가 되면 물리 데미지는 아예 면역이 되는 건가?' 잠시 그런 의문이 들었지만 B 급 방어구로 얻는 옵션이 겨우 7 퍼센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떠올리고서 생각이 달라졌다. A 급이라고 해도 막 30, 40 퍼센트로 뛸 것 같진 않았다. 그러니 100 퍼센트를 다 모으는 건 아마도 불가능한 일이 아닐까? '그래도 티끌 모아 태산이라고...' 차근차근 더해 가다 보면 엄청난 효율을 얻을 수 있을 것은 확실해 보였다. 템빨의 힘은 유진호를 통해서도 목격한 바가 있으니까. '이렇게 하면 되나?' 진우는 흉갑을 들어 올렸다. 그러자 예상했던 대로 착용 여부를 묻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아이템: 상급 기사의 흉갑]을 착용하시겠습니까? 어떻게 봐도 입고 돌아다니기엔 상당히 부담스런 디자인이었다. '파수꾼의 목걸이'때의 경험이 없었다면 이번에도 역시 한참을 망설이다 마지못해 승낙했을 테지만... 지금은 달랐다. 'Yes.' 띠링. [아이템: 상급 기사의 흉갑'을 착용하였습니다.] 흉갑이 자취를 감추었다. 진우는 상태창을 불러와 스탯을 확인했다. [물리 데미지 감소: 27%] '물감은 올라갔고.' 진우는 가슴 부근을 더듬어 보았다. 어떤 느낌도 없었다.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봐도 마찬가지. 아무런 이물감도 들지 않았다. 파수꾼의 목걸이를 착용했을 때와 완전히 일치했다. '좋아.' 다음으로 진우는 구석에 처박혀 있는 기사 하나에게 눈을 돌렸다. 엉망으로 찌그러져 가져갈 게 없어 보이는 놈에게서 아이템 신호가 반짝이고 있었다. [아이템: 가죽 주머니]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물론 자신이 그렇게 만든 거지만 좀 너무 했다 싶었다. 맨손으로 싸우려니 어디 힘 조절이 돼야 말이지. '...' 엄숙한 표정으로 다가간 진우는 손을 뻗어 아이템을 가져왔다. '획득.' [아이템: 가죽 주머니]를 개봉했습니다. [3 만 골드]가 들어 있었습니다. [3 만 골드]를 획득했습니다. '허?' 손에 들어오는 것도 없이 다짜고짜 골드를 얻었다는 메시지가 떴다. 기존 아이템과는 좀 다른 녀석인가? 진우가 신기해하며 창고를 열었더니 정말로 소지금에 3 만 골드가 더해져 있었다. [보유한 금액: 863,400 골드] '한번에 3 만 골드나 주네?' 기사들이라 가지고 다니는 게 많아서 그런가? 그러고 보니 게임을 할 때도 다른 놈들보다 유독 인간형 몬스터한테서 많은 아이템을 얻었던 기억이 있었다. 하긴 인간한테서 뺏는 게 짐승이나 벌레한테서 뺏는 것보다 적으면 말이 안 되긴 했다. 그런 게 반영된 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어쨌든 좋은 소식이었다. 골드를 모아 몇 가지 아이템을 사고 싶었는데 계속 이런 식으로 돈이 나와 준다면 생각보다 시기를 많이 앞당길 수 있을 듯했다. '다른 건 뭐 챙겨갈 건 없나?'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던가. 진우는 여기 들어온 목적을 잠시 제쳐 두고 탐욕스러운 눈빛으로 주변을 살폈다. 기사들의 갑옷은 방금 싸울 때 다 뭉개 버려서 가치가 없어 보이고... 진우의 레이더에 기사들이 쓰던 검이 들어왔다. '저건 쓸 만하겠는데?' 새것처럼 깨끗한 장검. 단검이 아니라서 직접 사용하진 않겠지만 상점에 처분하거나 안 된다면 헌터들에게 팔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진우는 검을 주워들었다. 그런데 들어 올리자마자 장검은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녹슬기 시작하더니 곧 가루가 되어 흩어졌다. "이런..."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허락된 물건이 아니라는 건가?'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진우는 손을 탁탁 털고는 아까 바닥에 내려놓았던 횃불을 다시 들었다. 기사들이 나왔던 모퉁이를 돌아 들어가니 또 까마득하게 저편으로 이어진 통로를 볼 수 있었다. "..." 아직 가야 할 길이 멀었다. *** 전투를 복습한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진우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2 시간가량 던전을 공략하면서 만난 몬스터는 모두 네 종류. 기사, 마법사, 자객, 궁수였다. "이번엔 은신이냐?" 갑자기 지척에서 사라진 자객. 진우는 당황하지 않고 바로 감각을 확장시켰고, 곧 뒤쪽에서 살금살금 다가오는 기척을 간파했다. 쉬익! 진우는 자객이 휘두르는 단검을 '카사카의 독니'로 후려친 뒤, 밀려나면서 가드가 벌어진 놈의 빈틈 사이로 재빠르게 역습을 박아 넣었다. 독니는 정확히 가슴 정중앙에 명중했다. 푹! [자객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치명상을 당한 자객은 비명도 없이 그대로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털썩. 그 자리엔 자객이 입었던 가죽옷만 덩그러니 남았다. '왜 하필 전부 인간형 몬스터인지, 원.' 놈들은 처치할 때마다 마치...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은 녀석들의 얼굴을 볼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기사는 투구로, 자객과 궁수는 가죽옷에 달린 후드로, 마법사는 로브에 달린 모자로 얼굴의 대부분을 가리고 있었다. 진우는 가던 길을 마저 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런데 그때! 번쩍- 하고 눈앞에 섬광이 터졌다. 숨죽이며 주문을 외우고 있던 마법사가 섬광 마법을 완성시킨 것이다. 퍼엉! 귀를 찢는 폭음! 그러나 진우는 이미 마법사의 후방으로 이동한 뒤였다. "...!" 마법사는 등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크게 놀라며 급히 주문을 외웠다. 그러나 진우는 틈을 놓치지 않고 단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마법사도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털썩. 진우는 주인 잃은 로브를 내려다보다가 단검을 창고에 넣었다. '방심하다가 비슷한 거 한 번 맞은 적이 있어서 말이지.' 실은 마나가 응집되는 기운을 느꼈을 때부터 이미 대비하고 있었다. 조규환의 섬광 마법. 같은 공격에 다시 달할 정도로 진우는 어수룩하지 않았다. 전투를 복습하는 것 같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그것뿐만이 아니야.' 몬스터들은 각 개체를 처치하는 데 필요한 스탯이 존재했다. 기사는 근력, 자객은 감각, 궁수는 민첩, 마법사는 체력. 해당 스탯을 일정 수준 이상으로 만족시키지 못하면 상대하기가 정말 까다로워지는 구조였다. 근력이 떨어지면 갑옷 안의 기사에게 타격을 줄 수 없고, 감각이 낮으면 자객을 잡는 데 애를 먹어야 하는 식이었다. '골고루 올린 스탯이 이럴 때 도움이 되네.' 지능 스탯은 좀 낮은 편이지만 마나는 아껴 쓰면 되니까. [아이템: 가죽 주머니]를 개봉했습니다. [2 만 골드], [미지근한 물이 담긴 수통]이 들어 있었습니다. [2 만 골드], [미지근한 물이 담긴 수통]을 획득했습니다. 진우는 획득과 동시에 창고로 들어간 수통을 꺼내 벌컥벌컥 물을 들이켰다. "후-." 점점 피로가 누적되고 있었다. '대체 얼마나 더 가야 하는 건지.' 아니, 끝이 있기는 한 건가? 진우는 비어 버린 수통을 바닥에 놓고서 양 옆구리를 짚었다. 이제 던전에 들어온 지 3 시간째. 몸도 정신도 지쳐 가고 있었다. '...조금 쉴까?' 진우는 동굴 벽에 기대앉았다. '상태창.' 띠링. [피로도: 66] 벌써 피로도가 위험 수치에 가까워진 상태였다. 70 위로는 몸과 정신에 직접적인 악영향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잠깐이라도 눈을 붙여서 피로도를 낮춰야 했다. 진우는 머리를 벽에 기댔다. 금방 졸음이 쏟아졌다. 어찌나 피곤했는지 이런 환경에서도 별다른 노력 없이 쉽게 잠들 수 있을듯 했다. 그런데. 쉭-! 공기를 가르는 파열음! 느려진 시간 속에서 진우는 날아오는 화살을 정확하게 잡아냈다. 덥썩! 이윽고 진우의 눈이 떠졌다. 적당히 떨어진 거리에서 궁수가 다음 화살을 장전하고 있었다. '아직 잠들긴 이르다는 거냐.' 진우는 '카사카의 독니'를 소환하며 몸을 일으켰다. *** 콰직! 일격에 복부 흉갑이 흉측하게 구겨진 기사가 진우의 주먹과 벽 사이에서 미끄러지듯 쓰러졌다. 축 늘어진 놈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띠링. [기사를 처치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상태 회복 효과가 없는 게 조금 아쉽긴 해도 전투를 벌일 때마다 레벨은 꾸준히 올라갔다. 점점 쌓여 가는 극심한 피로도 속에서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진우는 살짝 까진 주먹을 쳐다보며 끌끌 혀를 찼다. 조금만 쉬면 회복할 수 있는데. 이놈의 몬스터들은 잠시도 잘 틈을 주지 않았다. 그래도 덕분에 건진 건 많았다. [착용한 아이템] 파수꾼의 목걸이(A) 상급 기사의 흉감(B) 중극 자객의 신발(B) 하급 궁수의 장갑(C) 상급 마법사의 반지 (B) 그 밖에도 쓸 만한 건 모두 창고에 넣어 두었다. '무기를 얻었으면 좋았을 텐데.' 안타깝게도 자객에게서 얻을 수 있는 단검들은 카사카의 독니와 공격력은 비슷한데 추가 효과가 없어 효율이 떨어졌다. 이놈은 뭘 줄까? 진우는 쓰러진 기사에게서 흘러나오는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띠링. [아이템: 상급 기사의 건틀릿] 입수 난이도: B 종류: 방어구 물리 데미지 감소 +3% 추가 효과: 손의 부상을 막아줍니다. (근력이 80 미만일 경우 움직임이 느려집니다.) '오.' 진우는 화색을 띤 얼굴로 '상급 기사의 건틀릿'을 획득했다. 그리고 즉시 장착했다. 다른 아이템들처럼 장갑 또한 신체에 전혀 영향을 주지 않아서 손가락을 움직이는 데 아무런 불편도 없었다. '좋아.'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던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통로의 저 너머. 드디어 횃불이 끝나는 구간이 나타났다. 끝은 거대한 성문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보스방에 문이 달려 있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자연스럽게 얼마 전 발을 들였던 지하신전이 떠올랐다. 그때는 아무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고, 때문에 모두가 너무 큰 피해를 입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진우는 지금까지 온 길을 뒤돌아보았다. '여기까지 오는데 거의 6 시간...' 레벨도 45 가 되었고, 장비도 많이 갖췄다. 준비는 되어 있었다. 쉬어서 체력을 보충하고 싶은 마음은 있었지만, 그럴 때마다 어디서 귀신같이 알고 온 몬스터들이 수면을 방해했다. 또다시 몬스터들을 불러들여 체력을 낭비할 순 없었다. [HP: 4511 / 8300] [MP: 660 / 790] [피로도 : 43] '이걸로 승부를 봐야 한다.' 마지막으로 상태를 점검한 진우는 성문의 양쪽 문고리를 움켜쥐었다. 그그그그그그-! 육중한 몸은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지 힘을 들이지 않고도 쉽게 밀렸다. 48 화 쿠웅-! 보스방의 문이 열렸다. 안은 어두웠다. 감각 스탯의 힘으로 강화된 진우의 시력으로도 한 치 앞을 내다보기가 힘들었다. 보이는 건 발밑뿐. 바닥은 석판으로 깔끔하게 포장되어 있었다. 촘촘하게 이어진 잿빛 석판들은 체감 온도와 무관하게 차갑고 서늘한 느낌을 주었다. 그 석판 위에 발을 내딛자마자. 화르르륵-! 벽면에 걸려 있는 무수한 횃불들이 일제히 타오르며 안을 밝혀 주었다. '역시... 지하신전 때와 같다.' 진우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보며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좌우에는 거대한 기둥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고, 가장 안쪽 깊숙한 곳에는 높은 왕좌가 놓여 있었다. '마치...' 영화에서나 보던 왕의 알현실을 연상시켰다. 규모는 차이가 컸지만. 몇 걸음 걷다 보니 곧 문이 큰 소리를 내며 닫혔다. 쿵! 진우는 잠깐 뒤를 돌아보았으나 당황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이미 예상했던 일이었다. 진우가 다시 앞을 향해 나아갔다. '...강한 기운이 느껴진다.' 전직 퀘스트를 끝내려면 저 왕좌가 있는 곳까지 도달해야 한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리고 그런 종류의 예감은 대부분 빗나간 적이 없었다. 그런데. 열 발짝쯤 떨어진 기둥 사이에 숨어 있던 인영 하나가 천천히 앞으로 걸어 나와 길을 가로막았다. 저벅저벅. 척. 멈춰 선 놈이 이쪽으로 돌아섰다. 꿀꺽. 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놈이 보스라는 사실은 놈의 머리 위에 검붉은색으로 떠 있는 이름만 보고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기사단장 핏빛의 이그리트]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였다. 전신을 갑주로 무장한 것은 다른 기사들과 같았지만, 둔해 보였던 그들과 달리 이쪽은 매우 날렵해 보였다. 눈에 띄는 장비는 투구. 투구 꼭대기에서 뒤쪽으로 이어진 붉은색의 긴 갈기가 말의 꼬리 같아서 매우 인상적이었다. 투구를 살펴보던 진우는 다른 점 하나를 더 발견했다. '쟤는... 눈이 있네?' 눈이라고 해야 할지, 눈동자라고 해야 할지. 아무튼 눈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은빛 광채가 흘러나왔다. 두 개의 광채는 기계에서 나오는 빛처럼 차갑게 느껴졌다. 그 차가운 눈빛이 이쪽을 향했다. 뒷목의 털이 쭈뼛 섰다. '강한 기운의 정체는 저놈이었나...' 어쩌면 저 녀석을 쓰러뜨리는 게 전직 퀘스트의 목표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더욱 신중해야 한다. 진우는 이그리트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주먹 쥔 두 팔을 들어 올렸다. '어차피 단검은 안 먹히니까.' 기사를 잡는 데 필요한 건 타격. 강한 힘이었다. '...' 진우를 가만히 바라보던 이그리트가 갑자기 자신의 붉은 망토를 벗었다. 털썩. 망토가 땅에 떨어졌다. '뭐지?' 놈의 기행은 그걸로 끝나지 않았다. 옆구리의 장검과 허리 뒤쪽에 차고 있던 단검 두 개를 차례대로 바닥에 떨어뜨렸다. 보란 듯이 앞으로 내밀고서는 하나씩. 챙그랑. 챙그랑. 고요했던 보스방 안에 금속과 석판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히 울려 퍼졌다. 무기를 모두 버린 이그리트는 곧 진우를 흉내 내는 것처럼 양 주먹을 움켜쥐고 파이트 자세를 취했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저놈 설마...' 내가 맨손으로 싸우려 드니까 자신도 맨손으로 싸우겠다는 건가? 진우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얕보이고 있다.' 몬스터의 도발 아닌 도발에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갔다. 감정이 격해질수록 머리는 차갑게. 심장의 박동이 점차 빨라지는 것과는 반대로 진우의 눈이 예리하게 빛났다. '와라.' 속으로 중얼거리는 것을 읽었는지, 이그리트가 일직선으로 쇄도해 왔다. 탓, 탓, 탓, 탓! 갑옷을 입었다고 생각하기 힘든 스피드였다. '갑옷의 속도 감소 패널티는 근력이 80 미만일 때만 적용된다고 했었지.' 놈의 근력은 최소한 80 이상! 움직임으로 봐선 민첩 또한 상급 헌터에 전혀 뒤처지지 않았다. 지척까지 다가온 이그리트가 바로 앞에서 점프했다. 탓! 공중으로 도약한 놈은 무릎을 내밀어 진우의 안면을 노렸다. '빠르다!' 하지만 전투태세에 돌입한 진우도 움직임이 가속된 상태였다. 몸을 90 도에 가깝게 뒤로 눕혀 이그리트의 공격을 흘려 보냈다. 진우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돌진 후 한참 뒤쪽으로 밀려나던 여타의 기사들과 다르게 이그리트는 곧바로 땅에 착지했다. 쿵! 깔끔한 동작에 감탄할 새는 없었다. 빠르게 달려간 진우는 이그리트가 완전히 돌아서기 전에 놈의 얼굴을 사선으로 올려 찼다. 하지만 놈은 불안정한 자세에서도 정확하게 팔을 움직였다. 쾅! 진우의 오른쪽 다리가 이그리트의 왼손에 가뿐히 막혔다. '이럴 수가!' 진우의 눈이 커졌다. 한쪽 발이 묶인 사이 이그리트의 주먹이 정면으로 날아왔다. 쉬이익-! 본능적으로 두 팔을 올려 가드했으나 충격은 전혀 완화되지 않았다. 쾅! 가드가 풀리며 몸이 붕 떠올랐다. "뭣?" 진우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건 곧 신음성으로 바뀌었다. "...?" 어느새 이그리트가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어떻게 대처해 볼 틈도 없이 이그리트의 왼쪽 주먹이 진우의 옆얼굴을 강하게 내려쳤다. 쾅! 바닥에 처박혔다가 반동으로 튕겨난 진우는 한참 동안 뒤쪽으로 구르다가 간신히 일어났다. 삐이익귓속에 이명이 들려왔다. 진우는 두어 번 세차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러자 이명이 좀 잠잠해졌다. 그러나 그보다 더 큰 문제가 가까이에 있었다. 흐릿한 시야에 걸어오는 이그리트가 들어왔다. 저벅저벅. 진우는 눈을 부릅뜨고 다리에 힘을 주었다. 결국 이그리트가 진우의 코앞까지 다가와 섰다. 그때부터 난타전이 시작됐다. 이그리트는 진우의 공격을 피하지 않았다. 공격을 몸으로 받아 내고 대신 맞받아쳤다. 퍽! 이그리트의 고개가 살짝 옆으로 꺾였다. 그러나 진우가 자세를 바로잡기도 전에 날카로운 반격이 되돌아왔다. 퍽! 진우의 몸이 휘청거렸다. 퍽! 이번엔 이그리트가 한 발 뒤로 밀려났다. 퍽! 복부를 타격당한 진우는 몸이 기역자로 꺾였다. "컥!" 입에서 울컥 핏물이 올라왔다. '말도 안 되는 일이...!' 지금 진우는 물리 데미지 감소 스탯의 총합이 무려 30 퍼센트를 넘어선 상태였다. 그런데 이그리트에게 맞는 한 방 한 방이 해머로 두들기는 것처럼 아프게 들어왔다. 반면 자신의 공격은 거의 데미지를 주지 못하고 있었다. 공방은 오래가지 않았다. 퍽! 비틀거리던 진우가 결국 무릎을 꿇었다. 털썩. 다시 일어나려고 했으나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털썩. "으윽..." 진우 앞에 선 이그리트가 공격을 멈추고 물끄러미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 의문스러운 시선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진우를 무시하고, 이그리트는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검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검이 딸려 왔다. 이그리트는 검을 양손으로 쥐고는 진우의 옆쪽으로 돌아갔다. 검끝이 곧 하늘을 향했다. 진우는 이그리트의 의도를 눈치챘다. '참수를 하겠다는 건가?' 기사단장이라는 이름값을 톡톡히 하는 놈이었다. 진우가 별다른 저항 없이 최후를 받아들이는 듯 보이자 이그리트는 참수를 집행했다. 그러나 진우는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검이 수직으로 떨어졌다. 쉬이익그러나 진우가 치켜든 왼손이 장검을 가로막았다. 캉! 쇠가 부딪히는 소리! 여기 들어오기 직전 얻었던 건틀릿이 손을 보호해 주었다. 흠칫! 이그리트가 놀라는 것이 느껴졌다. 진우는 틈을 놓치지 않고 오른손 펀치를 날렸다. 예상대로 이그리트는 피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또 반격을 날리겠다는 거겠지.' 한 대 맞더라도 한 대를 돌려주면 자신이 이득이라는 계산. 그러나 놈이 계산하지 못한 것이 있었다. '카사카의 독니!' 스르륵. 찰나의 순간에 소환된 카사카의 독니가 손에 쥐어졌다. 진우는 단검을 놈의 눈에 쑤셔 박았다. 푹! 크아아아아아아아아-! 인간의 것이 아닌 듯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동시에 단검이 꽂힌 이그리트의 눈에서 강렬한 빛이 뿜어졌다. 진우는 몸을 일으켰다. '이제 어떡한다?' 겨우 눈 하나를 잃게 만든 걸로 승부를 뒤집을 순 없었다. 뭔가 강력한 한 방이 필요했다. 그때 문득 진우의 뇌리에 스치는 것이 있었다. 일전에 자신을 죽음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끔찍한 공격! 그 한 방을 이그리트에게 먹여 주자. 의식보다 먼저 몸이 움직였다. 진우가 몸을 숙여 이그리트의 허리를 안았다. 그리고 달리기 시작했다. 크아아악-! 이그리트는 고통에 몸부림치면서도 진우의 등을 수차례 가격했다. 하지만 진우는 이를 악물고 이그리트를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속도를 올렸다. "질주!" [이동 속도가 40% 증가합니다.] 진우의 다리가 더더욱 빨라졌다. 몸 전체가 흔들릴 정도로 빠른 속도가 피부에 와 닿았다. '그래, 이대로.' 이대로 박아 버리는 거다! 진우는 놈의 허리에 두른 손에서 힘을 풀지 않고서, 벽을 향해 있는 힘껏 낼 수 있는 전속력을 다해 달렸다. 물론 이 상태로 부딪치면 자신의 몸에 가해지는 충격도 무시하지 못한다. 하지만 진우에게는 비장의 패시브가 하나 있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어느새 벽이 앞에 있었다. 쿠앙-! 폭음과 함께 이그리트는 벽과 충돌했다. 동시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띠링! [체력이 30% 이하가 되어 스킬: '근성'이 발동됩니다.] [받는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일시적으로 보스방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의 강력한 충격이었다. "크윽." 진우는 한 발짝 물러섰다. 이그리트는 벽에 반쯤 박혀 있는 상태에서도 목숨이 붙어 있었다. 놈의 내면에서 타오르고 있는 생명의 불꽃은 아직 꺼지지 않았다. '...끝내야 돼.' 진우는 놈의 눈에 박힌 카사카의 독니를 뽑아냈다. 그 과정에서 이그리트의 몸이 한번 들썩였다. 진우는 단검을 역수로 쥐고 놈의 목을 향해 내리찍었다. '급소 찌르기!' 캉! 공격은 들어가지 않았다. 다시. '급소 찌르기!' 캉! 단검 끝에서 불꽃이 튀었다. 놈의 목을 보호하는 판금에 작은 흠집이 생겼다. 다시. '급소 찌르기!' 캉! 다시. 캉! 다시. 캉! 그리고 마침내. '급소 찌르기!' 콰직! 카사카의 독니가 놈의 목 깊숙한 곳에 파고들었다. [기사단장 핏빛의 이그리트를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진우는 양손을 번쩍 들었다. 뒤로 물러서던 진우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바닥을 짚었다. "허억, 허억." 진우는 참고 있던 숨을 토해 냈다. 간신히 이겼다. 정말로 아슬아슬했었다. '그런데... 이제 퀘스트가 끝난 거 아닌가?' 한참 동안 숨을 고르던 진우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이놈을 잡으면 전직 퀘스트가 끝날 줄 알았는데, 어떤 메시지도 날아오지 않았다. 주위를 둘러봐도 딱히 달라진 건 없었다. 변한 거라곤 한 가지. 이그리트의 몸에서 새어 나오기 시작한 몇 개의 빛줄기. 아이템 신호였다. '일단은 저거라도 챙겨 두자.' 또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까. 챙길 수 있을 때 하나라도 챙겨 놓는 것이 현명한 판단이었다. 진우는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이템: 붉은 기사의 투구]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룬석: 지배자의 손길]을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아이템: 가죽 주머니]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아이템: 즉시 귀환석]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뭐가 이렇게 많지? 진우는 의아해하면서도 기쁜 마음을 숨길 수가 없었다. '모두 획득.' 그중에서 가장 먼저 가죽 주머니가 창고로 들어갔다. [아이템: 가죽 주머니]를 개봉했습니다. [150 만 골드]가 들어 있었습니다. [150 만 골드]를 획득했습니다. 진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보상의 격이 다르잖아?' 확실히 잡는 데 애를 먹은 만큼 보람이 있었다.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던 가죽 주머니에서 150 만이나 되는 거금이 나왔다. 그 정도면 상점에서 요긴하게 쓸 수 있는 돈이었다. 하지만 진우의 관심사는 다른 데 있었다. 기대도 안 하던 가죽 주머니에서 그 정도 득템이라면 투구나 룬석은 어느 정도의 가치가 있을 것인가. 진우는 두근대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투구의 정보를 오픈했다. 띠링. [아이템: 붉은 기사의 투구] 입수 난이도: S 분류: 방어구 물리 데미지 감소 +15% 체력 +20, 근력 +20 "S 급!" 진우는 환희에 찬 비명을 터트렸다. 49 화 처음으로 입수 난이도 S 급의 아이템이 등장했다. 데미지 감소 15 퍼센트만 해도 더할 나위 없이 훌륭한데 체력과 근력 스탯 +20 이라는 기막힌 옵션까지 붙어 있었다. 옵션만 봐도 가슴이 뛰었다. '입수 난이도 A 등급 아이템들과는 비교가 안 될 정도야.' 여태껏 A 급을 두 번 얻었다. 첫 번째는 카사카를 잡고 얻은 '카사카의 독샘', 두 번째는 켈베로스에게서 나온 '파수꾼의 목걸이' 였다. 이 두 아이템들도 충분히 좋았다. 독샘은 근력이 떨어진다는 패널티가 있긴 했었지만, 물리 데미지가 무려 20 퍼센트나 감소되는 옵션이 있었다. 파수꾼의 목걸이는 또 어떤가? 시간이 흐를수록 중요성을 더 깨닫게 되는 민첩과 감각 스탯을 각각 20 씩 올려 주는 최고의 아이템이었다. 그런데 이번에 나온 '붉은 기사의 투구'는 두 개의 아이템을 합쳐 놓은 것과 옵션이 비슷했다. 그것도 아무 패널티 없이. '단연코 최고다.' 지금 던전 보스방 한복판에 서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미소가 지어졌다. 거기다 사족을 하나 더 달자면 디자인까지 마음에 쏙 들었다. '이건 감추기가 아깝네.' 핏빛을 연상시키는 붉은색 투구와 투구에 연결된 긴 갈기에는 예술 작품 같은 기품이 흘렀다. 비록 아주 잠깐이었지만, 세트로 된 갑옷이 있다면 한번 풀로 갖춰 입어보고 싶은 충동까지 들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이그리트의 다른 갑주들은 아이템이 아닌 듯 빛나지 않았다. 허락된 방어구는 투구뿐이었다.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 하고서 진우는 조심스럽게 투구를 썼다. 스르륵. 늘 그래 왔던 것처럼 투구도 순식간에 자취를 감추었다. 외형을 뽐낼 수는 없었지만 투구 덕분에 능력치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스탯] 근력: 128 (+20) 체력: 87 (+20) 민첩: 107 지능: 66 감각: 89 물리 데미지 감소: 46% (+15%) 가로 안의 숫자가 투구 착용으로 상승한 능력치였다. 근력, 체력은 물론이거니와 올리기 힘든 물리 데미지 감소 스탯까지 엄청나게 상승했다. 그야말로 대만족. 효과를 직접 눈으로 확인하니 심장이 쿵쿵쿵 거세게 뛰었다. '아니.'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퀘스트가 다 끝난 것도 아닌데 너무 흥분하지는 말자.' 봐야 할 아이템도 더 남아 있었다. 진우는 아직 흥분이 여운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아이템들로 시선을 옮겼다. [룬석: 지배자의 손길] [아이템: 즉시 귀환석] 두 개의 돌멩이. 호두과자보다 약간 더 큰 두 개의 돌 중에서 진우의 시선을 먼저 끈 것은 '즉시 귀환석' 쪽이었다. '룬석이야 잘 알고 있지만...' 즉시 귀환석이란 건 뭐지? 호기심은 곧 풀렸다. 금세 즉시 귀환석의 정보가 떠올랐다. 띠링. [아이템: 즉시 귀환석] 등급: ?? 분류: 소모품 전직 퀘스트 전용 아이템입니다. 귀환석을 부수면 즉시 던전 바깥으로 이동할 수 있습니다. 단, 전직 퀘스트가 끝나면 자동으로 파괴됩니다. 창고에 보관할 수 없습니다. 사용법은 룬석이랑 비슷했다. 하지만 사용 시 효과가 스킬 습득 대신 던전 탈출이라니. '잠깐, 전직 퀘스트가 끝난 게 아니었나?' 그랬다면 설명에 적혀 있는 대로 이 아이템은 이미 없어졌어야 했다. 그게 남아 있다는 말은... 순간 어째서인지 등줄기가 오싹오싹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던전에서 바로 탈출할 수 있는 최고의 아이템을 얻었는데 왜 불길한 느낌이 든단 말인가? 만약 시스템에 의해 생성된 던전이 아니라 '진짜 던전'에서 이런 걸 쓸 수 있다면 누구라도 사려고 들 거다. 이 돌멩이 하나가 목숨값과 같은데 어떤 이가 돈을 아낄까? 자신 또한 마찬가지. 이걸로 전직 퀘스트에 대한 부담이 대폭 줄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라도 달아날 수 있으니까. 그런데 마음 한편에 자리 잡은 불안감이 영 가시질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기다렸다는 듯 시스템의 경고음이 울렸다. 띠링. ['플레이어'가 즉시 귀환석을 획득했습니다.] [지금부터 전직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아뿔싸! 이게 퀘스트 시작 아이템이었구나! 순간 아찔해졌다. 밟아서는 안 될 것이 발아래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조금이라도 휴식을 취해 두는 건데.' 하지만 후회해 봐야 무슨 소용. 아무리 경험과 지식을 통해 예측해 봐도 미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진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흘깃. 속으로 '상태창'을 불러온 진우가 남은 HP 와 피로도를 확인했다. [HP: 4161 / 10270] [MP: 390 / 850] [피로도 : 61] '피로도가 좀 높긴 하지만 아직 할 만하다.' 투구의 옵션으로 체력 스탯이 많이 오른 덕분에 전체 체력량이 커지면서 남은 체력량도 덩달아 늘어났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진우는 자신을 격려하듯 손으로 연이어 되새겼다. '할 만해. 아직은.' 물론 목숨 자체가 위험하진 않으리라. 손안에 즉시 귀환석이 있으니까.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 즉시 귀환석은 '퀘스트 포기'를 상징하는 아이템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걸 시작 아이템으로 삼았을 리가 없었다. '퀘스트를 포기한다면...' 전직 기회가 사라지는 것과 다름없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관자놀이를 지난 뒤 턱밑으로 떨어져 내렸다.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진우의 목울대가 움직였을 때, 시스템의 다음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10 초 후 차원의 문이 무작위로 생성됩니다.] '차원의 문?' 의문이 전혀 해결되지 않은 채 상공에 큼지막한 숫자가 생겨났다. [00:00:10] 저건 쉽게 알 수 있었다. 아마도 카운트다운을 의미하는 거겠지. 메시지는 계속 이어졌다. ['플레이어'는 선택할 수 있습니다.] ['즉시 귀환석'을 이용해 던전을 벗어나거나.] ...8, 7, 6. 그 순간에도 시간은 계속 줄어들고 있었다. [최대한 오랜 시간을 버텨 상위 클래스로 전직하는 데 필요한 승급 포인트를 모을 수 있습니다.] "버텨? 뭘 버티라는 거야?" 답답한 마음에 큰 소리가 나왔다. 하지만 진우의 손에는 이미 창고에서 소환된 '카사카의 독니'가 들려 있었다. 룬석은 창고에 넣어 두고, 창고에 들어가지 않는 즉시 귀환석은 일단 뒷주머니에 밀어 넣었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는 와중에도 이미 전투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그게 성진우였다. [곧 전직 퀘스트가 시작됩니다.] ...4, 3, 2. 줄어드는 시간을 초조하게 노려보던 진우가 사방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고개와 시선이 이곳저곳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뭔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주변의 공간들이 점차 왜곡되고 뒤틀리기 시작했다. [00:00:01] [행운을 빕니다.] 뭐? 처음으로 시스템이 감정을 표현했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타이머가 0 초를 가리키는 순간, 곳곳에 게이트가 생기기 시작했다. 우웅우웅한두 개가 아니었다. 대충 주변에 있는 것만 여섯 개. 그리고 그 수는 가파르게 늘어 갔다. 동시에 타이머가 거꾸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00:00:02] 카운트다운은 다시 시작되었다. 시간이 승급 포인트가 된다. 전부 다는 아니지만 시스템이 하는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버틴 만큼 강해진다.' 아니, 정확히는 강한 직업을 얻을 수 있다. 이런 기회를 허무하게 날려버릴 순 없었다. HP 도 MP 도 아직 여력이 있었다. '최대한 버텨 보자.' [00:00:03] 정확히 3 초가 지났을 때, 가까운 게이트들에서 무기 없는 기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두두두두. 철갑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은색 물결을 이루니 땅이 울렸다. 박력에 압도될 만한 상황이지만 진우의 얼굴에는 미소가 떠올랐다. '이놈들이라면 이 상태로도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고마운 상대였다. 저기서 나온 게 이그리트 같이 흉악한 놈들이었으면 초 단위를 버티기도 힘들었을 거다. '은신!' 진우는 여분의 마나를 이용하여 은신을 사용했다. 현재 마나는 390. 은신을 사용할 때 드는 마나는 200. 그래도 190 의 마나가 남는다. '은신 지속 시 소모 마나는 1 초당 1.' 즉, 은신 상태로 돌아다니면 약 3 분의 시간을 공으로 벌 수 있었다. 스르륵. 진우의 형태가 흐려지기 시작했다. 예상대로 진우를 향해 달려오던 기사들의 걸음이 일시에 멈추었다. 그런데 그때. [마법사가 '스킬:탐지의 시선'을 사용합니다.] '띠링'하는 경고음. 진우의 고개가 소리가 들려온 방향으로 돌아갔다. '뭐?'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마법사 하나가 주문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진우는 놈의 머리 위에 떠 있는 눈 모양의 마크를 발견했다. 그 눈이 반짝이는 순간! 순식간에 진우의 은신이 해제되었다. '젠장!' 계산이 처음부터 어긋났다. 휙. 휙. 전봇대처럼 우두커니 서 있던 기사들이 일제히 진우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건 공포 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시켰다. 곧이어 은색 물결이 덮쳐 왔다. 진우는 눈을 부릅뜨고 이를 악물었다. 쾅! 주먹질 한 방에 달려오던 기사 하나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기사는 그 자리에서 절명했다. [기사를 처치하였습니다.] 진우의 눈에서 광채가 번뜩였다. '살기!' [스킬: '살기'를 사용합니다.] [효과: '공포'가 발동합니다.] [대상들의 모든 능력치가 1 분간 50% 감소합니다.] 많은 몬스터들이 공포 효과에 움직임이 둔해졌으나 이 한 번으로 마나가 90%까지 내려갔다. 살기 스킬의 마나 소모량은 100. 두 번은 쓸 수 없었다. '하지만 1 분을 벌었다.' 몬스터들의 능력치가 하락한 1 분 동안 진우는 닥치는 대로 놈들을 때려 눕히기 시작했다. 쾅! 콰직! 쾅! 콰광! 무서운 기세로 기사들을 분쇄해 나갔다. 쾅! 쾅! 콰직! 하지만 기사들이 줄어드는 속도보다 게이트에서 나오는 속도가 더 빨랐다. 두두두두. 정신없이 싸우는 와중에도 진우는 시간을 확인했다. [00:03:19] 3 분 19 초. 포인트로 환산하면 얼마쯤 될까? 이제 여기를 나가도 될까? 하지만 오래 재고 있을 여유는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기사들이 쉴 새없이 물밀듯 밀려 들어오고 있었다. 수많은 기사들을 격파했으나 도저히 머릿수를 감당할 수가 없었다. "으아아-!" 결국 진우는 기사들 속에 파묻혔다. [근성 패시브가 발동합니다.] [근성 패시브가 발동합니다.] 수직으로 떨어지던 체력이 기어코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다. [HP: 1036 /10270] '시간은...?' [00:05:08] 5 분 8 초. 이 정도면 버틸 만큼 버텼다. '...나가자.' 기사들 틈에 갇혀 버린 진우는 숨막히는 은빛 갑옷의 감옥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뒷주머니를 더듬었다. 그런데. 툭. 그만 즉시 귀환석이 손끝에서 미끄러졌다. 데구루루 둥글게 생긴 귀환석은 기사 하나의 발뒤꿈치에 맞아 멀리 굴러갔다. "안 돼!" 진우가 황급히 그리로 손을 뻗었으나 기사들에게 저지당했다. 곧 위에서도 기사들이 덮쳐 왔다. 숨이 턱턱 막혀 왔다. 더 이상 호흡을 하기가 힘들었다. [근성 패시브가 발동합니다.] [근성 패시브가 발동합니다.] 점점 의식이 흐려져 갔다. 퍽! 퍼퍽! 기사들 사이에 이리저리 부딪히며 혼미해지는 정신 속에서 어디선가 낄낄거리는 비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네가 자초한 거잖아? '...' -왜 안전한 길을 놔두고 위험을 무릅쓰는 거지? E 급 헌터가 B 급, C 급이 되는 것도 엄청난 행운 아닌가? '...' -너는 결국 그 정도였을 뿐. '...시끄럽다.' -너를 죽게 만든 것은 바로 너다. 시끄럽다고! 콰앙! 진우를 물샐틈 없이 둘러싸고 있던 기사들이 한꺼번에 튕겨 나갔다. 죽다 살아났음에도 진우의 눈은 아직 살아 있었다. 두 눈에 독기가 흘러넘쳤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어떻게 얻은 기회인데. 절대로. 가장 밑바닥에 있었기 때문에 가장 높은 곳을 갈망했다. 누구보다 약자의 설움을 잘 알고 있었다. 살기 위해 매번 악을 썼고, 살아남아도 손가락질 당했다. -E 급이 무슨 도움이 된다고. -협회도 그래. 전력이 되는 친구를 보내 줘야지 저 친구는... 어휴. -저놈 자꾸 동료 뒤에 숨어서 살아 남는 거 아냐? 늘 바라만 보고 있어야 했던 곳에 올라갈 수 있는 사다리를 얻었는데 그걸 가만히 보고 있으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 '...기억났다.' 아마 머릿속에서 울렸던 소리. 그건 그들의 목소리였다. 항상 등 뒤에서 떠들어 대던 그 소리. 그래, 실컷 비웃어라. 나는 끝까지 발버둥 칠 테니. 체력량이 10. 아니 1 이라도 좋다. 마지막에 마지막까지 발악해 주마. 더 못 움직일 때까지 나는 싸운다. "으아아아-!" 진우가 몸을 날렸다. 콰직! 내지른 주먹. 기사의 흉갑이 움푹 들어가며 뒤로 날아갔다. 놈과 부딪힌 다른 기사들까지 뒤로 넘어갔다. 기사들이 다시 달려들기 시작했다. 진우의 움직임도 한층 더 격렬해졌다. 쾅! 쾅! 쾅! 주먹이든, 팔꿈치든, 무릎이든, 발끝이든 진우의 신체에 닿는 기사들은 예외 없이 종이 인형처럼 부서져 갔다. [피로도가 70 을 넘었습니다.] [움직임이 제한됩니다.] 경고처럼 움직임이 둔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진우의 독기 어린 눈빛은 조금도 약해지지 않았다. 하나둘, 일격에 쓰러지지 않은 기사들이 몸을 부딪쳐 왔다. 진우는 세 번, 네 번을 더 때려서라도 기어코 놈들을 부수었다. 콰직! [...8, 7, 6, 5] 그동안에 무슨 카운트다운이 진행되고 있었다. 싸움에 집중하느라 한 자리 수로 떨어질 때까지 알아채지 못했다. '뭐지? 퀘스트가 끝나가는 건가?' 잠깐 희망을 품어 봤지만 헛된 꿈이었다. [00:06:27] 타이머는 제대로 올라가고 있었다. 타이머와 별개로 뭔가의 카운트가 1 초씩 떨어지고 있었다. [4, 3, 2] '내가 죽는 시간이라도 알려 주려고?' 하긴 처음에도 시스템은 말했다. 플레이어가 되는 것을 승낙하지 않으면 0.02 초 후에 죽게 된다고. 좋다. 진우는 눈을 부릅떴다. '마지막 1 초까지 아낌없이 써 주마.' 쾅! 콰광! 또 기사 두 기가 박살났다. 그러나 진우의 강렬한 의지와 달리 이미 진우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어깨에 들어가는 힘이 약해졌다. 느려진 주먹은 그 뒤를 이어지는 기사들의 돌격을 막기에 부족했다. 앞에서 하나, 뒤에서 하나. 쿵! 앞뒤로 달려든 기사들과 충돌한 진우는 끔찍한 충격에 낮은 신음을 내뱉었다. "컥!" 기사들은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듯 또다시 진우를 사방에서 덮쳐 갔다. 진우는 기사들에게 겹겹이 둘러싸여 손가락 하나도 꼼짝도 할 수 없게 되었다. 두두두두. 그 순간에도 진우 위를 덮치는 기사들의 수는 점점 늘어만 갔다. 은빛 물결이 어느새 은빛 산으로 변했다. 진우는 가쁘게 숨을 몰아쉬었다. "허억, 허억...!" 이대로 질식해 버릴 것 같았다. 놈들 틈 속에서 간신히 뻗어 나온 진우의 손이 의미 없이 하늘을 향했다. HP: 93/ 10270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런데도 진우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아직, 아직 조금은 더...' 하늘을 향해 있던 진우의 손이 간신히 주먹을 움켜쥐었을 때, 마침내 지속되고 있던 의문의 카운트다운이 종료를 알려왔다. [...1, 0] [일일 퀘스트를 완료하지 못했습니다.] [페널티 존으로 이동합니다.] 50 화 진우는 귀를 의심했다. '...페널티 존?' 아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일일 퀘스트를 하지 않았다. 레벨업의 성과를 시험해 보고 악마성 던전으로 가도 될지 말지를 결정하기 위한 선택이었는데. 일이 이렇게 흘러갈 줄이야. 쿠구구구구구구궁병원에서 그랬었던 것처럼 곧 모든 것이 격렬히 흔들리기 시작했다. 퍼석. 퍼석. 진우를 에워싸고 있던 기사들도 하나둘씩 모래가 되어 흘러내렸다. 세계가 변하고 있었다. '하... 하하...' 진우는 소리 없이 실소를 흘렸다. 어째서인지 퀘스트가 시작되기 직전 시스템이 건넸던 한마디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행운을 빕니다. 행운을 빌어 줘야 할 만큼 어려운 퀘스트라는 뜻이었을까? 아니면 행운의 힘을 빌려서라도 내가 높은 포인트를 얻는 것을 응원한다는 뜻이었을까? 행운, 우연, 뭐라고 불러도 좋다. 어찌 됐든 기회는 찾아왔다. 중요한 건 그걸 지금부터 어떻게 이용하느냐였다. 구구구궁진동은 더욱 거세졌다. 진우는 억지로 균형을 잡으려고 애쓰는 대신 흔들림에 몸을 맡기며 살며시 눈을 감았다. '동요하지 말자...' 그러자 몸이 붕 뜨는 느낌과 함께 모든 소리가 일순간 사라졌다. 감았던 눈을 다시 떴을 땐, 사막모래 위 한복판이었다. 진우는 그대로 엎어졌다. "꺼허억- 허억, 허어억-" 양손으로 모래를 움켜쥐고 참았던 숨을 있는 힘껏 토해냈다. 폐를 통해 신선한 공기가 온몸으로 흘러들어 갔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전신을 감싸는 안도감에 진우는 그 자리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아무것도 없는 검은 하늘. 끝없이 펼쳐진 칠흑의 천장이 시야에 들어왔다. 기억 속에 남아 있는 페널티 존의 모습 그대로였다. '아차, 이렇게 있을 때가 아니지.' 하도 위험한 곳에서 빠져나왔더니 여기도 안전한 곳이 아니라는 사실을 그만 깜빡 잊고 말았다. 그래도 일어나기는 싫어서 진우는 드러누운 채로 상태창을 불러 왔다. [HP: 104 / 10270] [MP: 202 / 850] [피로도: 91] 왜 이렇게 움직이기 힘든가 했더니 피로도가 90 을 넘어가 있었다. '피로도가 90 을 넘어간 건 이번이 처음이지, 아마?' 정말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싫었다. 체력도 체력이지만 일단 피로도를 낮추는 게 급선무였다. "상점." 띠링. 허공에 '구매'와 '판매' 두 글자가 나타났다. 암만 생각해 봐도 성의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부실한 상점이지만 오늘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중 가장 비싼 힐링 포션을 골라 구매했다. 구매를 확정하자마자. 스르륵- 대자로 뻗어 있는 손끝에 붉은색 액체가 담긴 유리병이 나타났다. 뽕. 힘겹게 마개를 뽑아낸 진우는 포션을 들이붓듯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꿀꺽꿀꺽. 붉은색 액체가 식도를 타고 몸안으로 내려갔다. [피로가 회복됩니다.] [피로가 회복됩니다.] [피로가 회복됩니다.] 최고급 포션이어서 그런지 딱 한 병을 마셨을 뿐인데 피로도가 계속해서 떨어지는 게 눈에 보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체력량은 전혀 변동이 없었다. [HP: 106 / 10270] [MP: 204 / 850] [피로도 : 0] 결국 병이 다 비어 갈 때까지도 체력은 회복되지 않았다. 피로도가 0 이 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왜지?' 마지막 한 방울을 입안에 톡 털어 넣고 나서야 그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띠링. [잔여 체력이 10% 이하일 때는 힐링 포션으로 체력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이유는 간단했다. 체력이 너무 떨어져 있어서란다. '하긴...' 힐링 마법에도 한계는 있으니까. 생소한 개념은 아니었다. 힐러들의 수준에 따라 치료가 가능한 범위가 정해져 있듯이, 포션도 일정 한계를 넘어서면 치료가 불가능한 모양이었다. '그 한계가 10 퍼센트까지란 말이지.' 좋은 걸 알았다. 괜히 포션만 믿고 있었다가 진짜 위급한 순간에 뒤통수를 맞을 뻔했다. 이래서 경험이 중요한 거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은가? 나를 죽이지 못하는 모든 시련은 나를 강하게 만든다고. 그게 다 경험의 힘이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진우는 이곳 패널티 존에 대한 경험이 있었다. '지금쯤 타이밍이 됐는데...' 아니나 다를까. 아래쪽에서 뭔가 생명체의 기운이 느껴졌다. 진우는 몸을 움츠린 뒤 튕기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포션 덕분에 힘이 완벽히 돌아왔다. 탁! 멀찍이 착지한 진우가 돌아서서 뒤를 바라보았다. 스르르르르륵. 예상했던 대로 방금 누워 있던 자리가 움푹 아래로 꺼지며 모래 구덩이가 만들어졌다. '전에는 저기 미끄러져서 죽는 게 아닌가 했는데.' 지금은 이렇게 여유롭게 구경할 수 있게 됐다. 그렇게 만들어진 모래 구덩이의 가장 아래쪽에서 끓는 것처럼 들썩거리기 시작하다가. 쏴아아아! 모래가 기둥처럼 솟아오르며 거대한 지네가 위용을 드러냈다. "키에에에에에엑!" 모든 게 기억과 일치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렇게 무섭더니...' 지금은 느릿느릿한 슬로우 영상을 보는 것 같았다. 진우의 시선이 좀 더 위를 향했다. 그러자 지네 머리 위에 있는 선명한 붉은 글자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독이빨 거대 모래지네] 붉은색 이름. 악마성 던전에서 봤었던 켈베로스와 같은 색깔이었다. 마침 퀘스트 메시지가 떴다. 띠링! [페널티 퀘스트: 생존] 목표: 요구 시간까지 생존하세요. 요구 시간 : 4 시간. 남은 시간 : 4 시간 0 분 0 초. 메시지 내용을 확인한 진우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이걸로 시간을 벌 수 있게 됐다.' 즉시 귀환석을 이용해 던전을 탈출한 게 아니므로 아직 기회는 남아 있었다. '아마도 페널티 퀘스트가 끝나자마자 다시 그리로 이동되겠지.' 그리고 만약 페널티 존에 있었던 시간까지 버틴 시간으로 인정해 준다면? 승급 포인트는 어마어마해질 터. 그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칠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러나...' 평소 시스템이 자신에게 미치던 영향력을 생각해 보면 이건 엄청난 호재로 작용할 것임이 분명했다. '무려 4 시간!' 10 분을 못 버텨서 즉시 귀환석을 꺼내 들어야 했는데, 페널티존으로 이동한 덕분에 4 시간을 거저 얻었다. 남은 문제는 하나. 겨우 100 정도의 체력을 가지고 여기서 무사히 빠져나갈 수 있느냐 하는 것. 포션으로 체력 회복이 불가능하니 레벨업을 할 때까지 최대한 피해없이 지네들을 잡아내야 했다. 일종의 미션이 생긴 것이다. '...해 보자.' 진우는 '카사카의 독니'를 불러냈다. 그리고. [남은 시간: 3 시간 59 분 59 초] 페널티 퀘스트가 시작되자마자 빠르게 튀어 나갔다. 지네가 미처 움직이기도 전이었다.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들어간 진우가 지네 앞에서 가볍게 점프했다. 탓! 한 번의 도약으로 지네 몸길이의 반쯤 되는 곳의 다리에 착지한 진우는, 지네 몸통을 하나씩 밟아 올라가며 지네의 표피 곳곳에 상처를 남겼다. 콱! 콰곽! 콱! 역수로 쥔 '카사카의 독니'가 스치고 지나간 자리에는 어김없이 표피가 갈라지며 체액이 쏟아졌다. 끼에에에에엑! 지네는 고통스러운지 상처를 입을 때마다 괴성을 지르며 몸부림쳤다. '질주!' 진우의 다리가 더욱 빨라졌다. 탓, 탓, 탓, 탓! 순식간에 몸통을 타고 지네 머리 꼭대기에 도착한 진우가 양손으로 단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그리고! '급소 찌르기!' 스킬을 사용해 있는 힘껏 지네의 머리를 찍었다. 거꾸로 선 날이 지네의 머리를 파고들었다. 콰직! ['급소 찌르기' 스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고!' 간만에 들려온 좋은 소식! 레벨이 올라간 급소 찌르기의 데미지가 상당한지 지네가 머리를 이리저리 흔들며 고통스러워했다. 끼에엑, 끼엑! 진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지네의 머리를 밟고서 놈의 등 뒤쪽으로 이동했다. 무방비 상태의 등이 보였다. 푹! 지네의 등에 단검을 깊숙이 찔러넣은 진우는 그대로 아래를 향해 떨어져 내렸다. 파가가가가가가갓! 120 을 넘긴 근력 스탯에서 나오는 완력과 5 층 건물 높이에서 지상으로 향하는 중력의 도움으로, 지네의 등이 멋지게 갈라졌다. 파가가각! 탁. 진우는 무사히 착지했다. 끼에엑, 끼에에에에! 지네는 체액을 사방으로 뿌리며 그 거대한 몸뚱이를 흔들다가 서서히 앞으로 무너져 내렸다. 쿵! 지네가 쓰러지며 모래 먼지가 피어올랐다. 띠링. [독이빨 거대 모래지네를 처치했습니다.] 진우는 손끝으로 먼지를 쫓아내면서 시간을 체크했다. [남은 시간: 3 시간 59 분 42 초.]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17 초.' 지네를 잡는 데 불과 20 초도 걸리지 않았다. 동급 몬스터인 켈베로스를 잡을 때와는 전혀 딴판이었다. 차원이 다르게 강해졌다. '하긴 그동안 올린 렙이 몇 개고, 갖춘 템이 몇 가진데...'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 이 정도면 체력 손실 없이도 사냥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들었다. '문제는 여기에 레벨업까지 잡을 몬스터가 충분히 있느냐 하는 건데...' 그래야 다시 전직 퀘스트로 돌아가도 승산이 있으니까. 체력을 회복하지 못한 상태로 전직 퀘스트용 던전에 돌아가 봐야 개죽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그때. 주변에서 모래 기둥들이 하나씩 솟아올랐다. 쏴아아악- 쏴아악동족의 피 냄새를 맡고 몰려든 거대지네들이었다. 끼에에엑끼에에엑일순간 진우의 표정이 환해졌다. '대체 몇 마리야. 이게?' 여기저기서 고개를 내밀기 시작한 지네들을 보면서, 진우는 입가에 걸리는 미소를 어떻게 숨길 수가 없었다. ***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장장 4 시간 동안 지네들과 씨름한 끝에 4 업을 더해 51 레벨이 되었다. 어느덧 페널티 퀘스트도 끝나가고 있었다. [페널티 퀘스트: 생존] 목표: 요구 시간까지 생존하세요. 요구 시간: 4 시간. 남은 시간: 0 시간 3 분 19 초. 곧 돌아가야 할 시간. 진우는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사방에 지네들이 사체가 가득했다. 이놈들 덕택에 체력을 회복했다. '아이템이나 골드 같은 부수적인 수입이 없는 건 아쉽지만...' 벌 받으라고 만든 구역에서 그런 게 쏟아진다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 이제 준비를 할 차례였다. '상점.' [보유한 금액: 311 만 5,629 골드] 인간형 몬스터들이 워낙에 돈주머니를 잘 줬던 데다가 이그리트에게서 한꺼번에 150 만 골드를 얻었던 게 컸다. 자금은 넉넉했다. 진우는 골드를 탈탈 털어 무기 하나를 샀다. 마침 딱 맞는 게 하나 보였다. [아이템: 나이트 킬러] 입수 난이도: B 종류: 단검 공격력 +75 기사들의 갑옷을 벨 수 있도록 단단하고 날카롭게 연마된 단검입니다. 칼날이 톱니 모양으로 되어 있어 갑옷에 쉽게 미끄러지지 않습니다. 효과 '기사 죽이기': 중장갑을 대상으로 공격하면 25%의 추가 데미지가 붙습니다. 갑옷을 입은 대상을 처치하는 데 특화된 무기였다. 가격은 280 만 골드. 가진 돈을 거의 다 써야 살 수 있는 무기였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지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골드를 저승까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주저하지 않고 구매를 선택했다. ['나이트 킬러'를 구매하셨습니다.] ['붕대'를 구매하셨습니다.] 진우는 '나이트 킬러'와 함께 붕대를 하나 샀다. 무시무시하게 생긴 톱날 모양의 날을 가진 단검. '나이트 킬러'를 오른손에 꽉 쥔 채로 붕대를 둘둘 감아 단단히 묶었다. 쉭! 쉬쉭! '나이트 킬러'를 휘둘러 봤더니 마치 한 손이 된 것처럼 일체감이 느껴졌다. '최소한 떨어뜨리진 않겠군.' 왼손도 '카사카의 독니'와 묶어버릴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만뒀다. 두 손 다 못 쓰는 건 너무 불편하니까. 적어도 한쪽은 손가락을 움직일 수 있는 게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남은 붕대를 창고에 넣다가 이그리트에게서 얻은 룬석을 발견했다. '참, 이게 있었지.' [룬석: 지배자의 손길] 룬석을 부수면 스킬이 흡수됩니다.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 할 때. 그게 아이템이 됐든, 스킬이 됐든 모을 수 있는 힘은 전부 모아야 했다. 진우는 미련 없이 룬석을 부셨다. ['스킬: 지배자의 손길'을 배웠습니다.] [스킬: 지배자의 손길 Lv.1] 액티브 스킬. 필요 마나 없음.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사물에 물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아...' 설명을 보자마자 떠오른 장면이 있었다. 이그리트가 멀리 떨어져 있는 자신의 장검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그때 장검을 움직인 게 이 스킬이었군.' 원거리에서 의지만으로 물체를 움직일 수 있는 스킬이라니! 게다가 소모 마나도 없었다. '설명처럼 모든 물체를 다 움직일 수 있으면 정말 엄청난 스킬인데.' 진우는 당장 옆에 축 늘어져 있는 지네 사체에 스킬을 시험해 봤다. [숙련도가 낮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숙련도가 낮아 움직이지 않습니다.] 무거운 물체를 움직이려면 숙련도가 꽤나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럼 이건?' 진우는 '카사카의 독니'를 발아래에 떨어뜨렸다. 그리고 바닥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독니가 쉽게 올라왔다. 탁! '오.' 진우는 독니의 손잡이를 낚아채고서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좋아. 이 정도면 도움이 되겠다.' 그렇게 만반의 준비를 끝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요구 시간이 거의 끝나가고 있었다. [남은 시간: 0 시 0 분 4 초] 4 초가 3 초로 바뀌면서 시스템 메시지가 올라왔다. 띠링. [곧 페널티 퀘스트가 종료됩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메시지. 띠링. [페널티 구역에서 사냥을 시도하였으므로 다음 페널티 퀘스트의 난이도가 상향 조정됩니다.] 난이도의 상향 조정. 사냥을 어렵게 만들어서 페널티를 페널티답게 만들겠다는 거겠지. 그런데, 다음이란 게 있긴 할까? 진우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제 전직 퀘스트가 다시 시작된다.' 보스방엔 수백이 족히 넘어가는 몬스터들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터였다. 어쩌면 더 늘었을지도 모른다. 좋게 말해서 돌아간다는 거지, 사실 거기에 던져지는 거였다. 체력, 마나, 피로도, 장비, 스킬. 그리고 마음가짐까지. 모든 상황이 거기 처음 발을 디뎠을 때보다 훨씬 좋았지만, 막상 돌아간다고 생각하니 긴장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두근, 두근, 두근.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심장이 거세게 뛰었다. 진우는 눈을 감았다. 평정심을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이윽고 기계음이 울렸다. 띠링. [페널티 퀘스트를 종료합니다.] '이번이 마지막 기회...' 진우가 다시 눈을 떴을 때. 시야를 가득 메운 것은 일제히 자신을 돌아보기 시작한 은빛 기사들이었다. 중요한 건 녀석들이 아니다. 순간 진우의 눈이 무언가를 찾는 듯 예리하게 번뜩였다. '일단은 마법사부터!' 51 화 마법사를 찾는 이유는 간단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페널티 존에서 자신이 내린 결론이 맞는지 확인해 보기 위해서였다. 두두두두! 기사들이 맹렬하게 돌격해 왔다. 진우는 침착하게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기사들 중 가장 앞에 오는 녀석의 어깨를 밟고 공중으로 도약했다. 그러자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마법사는?' ...찾았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마법사가 하나 보였다. '역시!' 아까 목격했던 것이 맞았다. 잘못 본 게 아니었다. 기사들에게 둘러싸여 간신히 손 하나만을 밖으로 뻗을 수 있었을 때, 진우는 그 좁은 틈을 통해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되는 장면을 보았다. '...' 바로 끊임없이 뭔가를 중얼중얼 캐스팅하고 있는 마법사였다. 주문을 외는 마법사. 언뜻 생각하면 전혀 이상할 것 없는 상황. 하지만 진우는 거기서 강한 이질감을 느꼈다. '그렇다면 어째서...' 한 번도 마법이 날아오지 않았을까? 공격은 오로지 기사들의 몫. 마법사들은 계속해서 주문을 외우고만 있을 뿐, 마법을 완성시켜서 위력을 행사한 적이 없었다. 딱 한 번. 탐지의 시선이라는 스킬로 은신을 해제시켰을 때를 빼고. 그리고 그때, 유일하게 근처에 있던 기사들의 움직임이 멈췄었다. 처음엔 표적이 사라져서 멈춘 건가 생각했다. 하지만 페널티 존에서 거대지네들을 사냥하는 동안 문득 중요한 사실 하나를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여덟 마리째인가? 지네를 잡았더니 뜨는 레벨업 메시지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을 때였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체력이 완벽하게 회복됐다. 그런데 짧은 기쁨 뒤에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뒤따랐다. '이렇게 쉽게 레벨이 오르는데, 거기선 왜 업이 안 됐던 걸까?' 시스템은 레벨업의 회복 효과를 차단한다고 했지 레벨업이 되지 않는다고는 안 했다. 실제로 보스방까지 가는 동안 5 레벨이나 올렸었고. 그런데 전직 퀘스트 도중에만 업이 되지 않았다. 6 분을 버티면서 거의 백여 기에 가까운 기사들을 파괴했었는데도 말이다. 마법을 쓰지 않는 마법사들. 경험치를 주지 않는 기사들. 뭔가 위화감을 주는 두 집단의 행동을 따로 떼서 생각하지 않고 동일 선상에 올려놓는 순간! 진우의 머릿속에 어떠한 가능성 하나가 새롭게 떠올랐다. '어쩌면...' 어쩌면 거기 있었던 기사들은 전부 가짜일지도 모른다라는 생각이. 마법사가 '탐지의 시선' 스킬을 쓸 때 기사들이 전원 멈추었던 이유는, 자신이 사라져서가 아니라 캐스팅을 중지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내 생각이 맞다면!' 지금부터 확인해 봐야 했다. 진우는 자신에게 손을 뻗어 대는 기사들을 무시한 채 그들의 머리와 어깨를 밟으며 마법사에게로 달려갔다. '...!' 자신을 발견한 마법사가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캐스팅이 빨라졌다. 그거 닥치는 대로 공격만 해 오던 기사들이 마법사를 지키려고 주위로 모여들고 있었다. 예감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 갔다. 탁! 진우는 마법사 앞에 착지했다. 그리고 일체의 망설임 없이 오른손에 들린 단검으로 마법사의 심장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급소 찌르기!' 푹! 마법사는 소리 없이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마법사를 처치하였습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우르르르- 진우를 잡으러 달려들던 기사들 수백 기가 일제히 무너져 내렸다.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바닥에 쓰러진 기사들은 그저 주인 없는 갑옷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이게 답이었어!' 진우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고 넘긴 끝에야 간신히 답을 찾아냈다. 기사들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기사들을 조종하는 것은 마법사들. 그들을 처치하는 게 목표였다. '나이트 킬러(Knight killer)로 처음 처치한 게 마법사라니...' 진우는 덩그러니 남아 있는 로브를 보고서 실소를 머금었다. 웃을 수 있을 만큼 여유가 돌아왔다. 하지만 계속 여유를 부리고 있을 틈은 없었다. 아직 퀘스트가 끝나지 않았다. 두두두두바닥이 울리는 소리. 진우가 돌아섰다. 벌써 주위에 기사들이 까맣게 몰려와 있었다. 기사들을 조종하는 다른 마법사들이 또 어딘가에 있다는 뜻이다. 기사들이 덮쳐 들어왔다. 진우의 오른손이 형체를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빠르게 움직였다. 쉬칵! 앞선 옆에 있던 기사들이 일자로 베어졌다. 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와우!' 280 만 골드를 투자한 가치가 있었다. '나이트 킬러'의 칼날은 기사들의 아머를 종이처럼 쉽게 뚫고 잘랐다. 단순히 톱니 모양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대 기사용 전용 단검이라는 아이템 설명답게 '나이트 킬러'에서는 마법적인 힘이 강하게 느껴졌다. '상점표 무기도 좋잖아?' 세간의 인식과는 좀 차이가 있었다. 보통 상점표 무기라고 하면 쓸 만한 무기를 구하지 못했을 때 궁여지책으로 쓰는 것이라고들 생각하니까. '이러면 골드도 무시 못하겠는데...?' 적어도 헌터 전용 무기보다는 훨씬 괜찮아 보였다. 동시에 상점에서 무기를 사 헌터들에게 되팔면 큰돈을 벌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소모품과 달리 무기에는 양도 금지란 설명이 붙어 있지 않았으니까. '집중하자, 집중.' 아직은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기사들은 쉬지도 않고 끊임없이 달려들었다. 쉭! 쉬익! 진우는 이리저리 피해 가며 놈들을 뭉텅뭉텅 썰어 갔다. 하지만. '이래서는 끝이 안 나.' 잠깐만 눈을 돌려도 베어 버린 기사들보다 훨씬 많은 숫자의 기사가 다가와 있었다. 스걱! 또 하나의 기사가 목을 잃었다. '마법사를 찾아내야 돼.' 진우는 목을 잃은 기사가 쓰러지기 전에 놈의 어깨를 밟고서 다시 한 번 위쪽으로 뛰어올랐다. '은신!' 스르륵. 진우의 형태가 흐릿해져 갔다. 물론 은신으로 몸을 숨기고자 함은 아니었다. 진우가 노린 것은 바로. [마법사가 '스킬:탐지의 시선'을 사용합니다.] [마법사가 '스킬:탐지의 시선'을 사용합니다.] [마법사가 '스킬:탐지의 시선'을 사용합니다.] 띠링, 띠링 귀가 따가울 정도로 사방에서 울려 대는 경고음 소리. 진우는 기사들의 머리 위를 뛰어다니며 눈 모양의 마크들이 어디에 있는지를 빠르게 파악했다. '마법사 숫자는 전부 다섯.' 진우는 일단 가장 가까이에 있는 마법사를 노렸다. '...!' 진우가 돌아보자 마법사가 황급히 기사들을 주변으로 끌어모았지만. 쉬익! 진우의 왼손을 떠난 '카사카의 독니'가 일직선으로 날아가 마법사의 이마 정중앙에 명중했다. 콰직! [스킬: '단검 투척'을 배웠습니다.] [마법사를 처치했습니다.] 우르르. 또 기사들 수백 기가 쓰러졌다. '남은 건 넷!' 진우는 기사들의 머리와 어깨를 밟으며 다음 표적이 있는 쪽으로 이동했다. 흘깃. 진우의 시선이 아직 회수하지 못한 '카사카의 독니'에게 옮겨 갔다. 새로운 스킬을 이용할 때였다. '지배자의 손길.' 진우가 떨어져 있는 카사카의 독니를 향해 손을 뻗자 자석끼리 당기는 것처럼 단검이 알아서 되돌아왔다. '그렇지!' 진우는 독니를 낚아챘다. 일일이 단검을 회수할 필요가 없게 되니 동선이 최적화되었다. 그다음 순식간에 다음 마법사 앞에 도착했고. '...!' 마법사가 무슨 시도를 하기도 전에 놈을 사선으로 베어 버렸다. [마법사를 처치했습니다.] 쓰러지는 기사들. 이제 기사들의 수가 채 반도 남지 않았다. 승기는 넘어왔다. 진우의 눈이 번뜩였다. '이제 셋.' 마법사들도 위기감을 느꼈는지 한 자리에 뭉치기 시작했다. 마법사들만 모인 게 아니다. 그들이 부리던 기사들까지 한데 뭉쳤다. 곧이어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웠다. 음산한 목소리가 공동에 울려 퍼지더니 곧 하나의 마법이 완성되었다. 우드득, 우드득. 마법사들을 호위하고 있던 다수의 기사가 공업용 프레스에 들어간 것처럼 우그러들기 시작했다. 그러더니 곧 하나의 거대한 철제 골렘으로 재탄생되어 진우를 노려보았다. 우우우우- '장난 아닌데!' 진우는 놈에게서 느껴지는 압박감에 순수하게 감탄을 터트렸다. 하지만 무섭거나 하지는 않았다. 죽을 고비를 몇 번 넘겨서 그런지 긴장보다는 도리어 기대감이 들었다. 쿵, 쿵, 쿵! 놈이 걸을 때마다 땅이 진동했다. 엄청난 위압감이었다. 부웅-! 진우는 놈이 휘두른 주먹을 자세를 낮춰 가볍게 피해 냈다. 콰직! 주먹에 살짝 스쳤다는 이유로 진우 뒤쪽에 있던 기둥 하나가 반파됐다. '거참, 무시무시하기는 한데...' 진우는 씩 웃었다. 실체를 몰랐다면 이런 괴물을 어떻게 상대해야 할지 전전긍긍했겠지만 지금은 고민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고오오-! 골렘이 깍지 뀐 양손으로 바닥을 내려치려 할 때. 진우는 뒤로 빠지는 게 아니라 '질주' 스킬을 사용해 앞으로 돌진했다. 그리고 슬라이딩-! 눈 깜짝할 사이에 골렘의 가랑이 사이를 빠져나갔다. 골렘이 허둥지둥하는 사이 진우는 무방비로 주문을 외우고 있는 마법사 셋 앞에 도착했다. '...!' '...!' 당황한 마법사들의 어깨가 들썩거렸다. '체크메이트!' 진우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들 하지만, 이번 경우엔 좀 달랐다. 모여 있으니까 오히려 처리하기가 더 수월했다. 진우는 양손에 쥔 단검을 자유로이 휘둘렀고. [마법사를 처치했습니다.] [마법사를 처치했습니다.] [마법사를 처치했습니다.] 세 마법사는 동료들과 마찬가지로 검은 연기가 되어 사라졌다. 그리고 다급히 진우를 움켜쥐려던 골렘도 다시 갑옷 쪼가리가 되어 산산이 흩어졌다. 하지만 진우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끝난 건가? 아니면 또 다른?' 혹시나 모를 이변에 대비하고 있는데 기계음이 들려왔다. 띠링. 진우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러나 우려와 달리 시스템은 퀘스트의 종료를 알려왔다. [시험의 방 내부의 모든 몬스터를 처치하였으므로 전직 퀘스트를 종료합니다.] [잠시 후 직업이 결정됩니다.] [획득한 승급 포인트에 따라 상위 클래스로의 전직이 가능해집니다.] 그제야. 그제야 비로소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후-." 어려운 싸움이었다. 끝까지 즉시 귀환석에 시선이 팔려 있었다면 퀘스트 몬스터들과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도망칠 타이밍만 재고 있었겠지.' 운 나쁘게도, 어쩌면 운이 좋게도 즉시 귀환석을 잃어버려서 전투 자체에 집중할 수 있었다. 결과는 대성공. 이제 그 대가를 받을 차례였다. 진우의 시선이 타이머 쪽으로 이동했다. [04:29:16] 타이머의 숫자가 고정되어 있었다. 무려 4 시간 30 분을 버텼다.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버티기만 해도 되는 퀘스트에서 몬스터를 모두 잡아 퀘스트 자체를 끝내버렸다. 얼마나 많은 점수를 얻을 것이며, 그 점수로 어떤 직업을 택할 수 있을지 가슴이 떨려 오기 시작했다. [플레이어의 행적을 분석하여 합당한 직업을 부여합니다.] '그거 좋지.' 여태까지의 행동으로 직업이 결정된다면 어울리지 않는 클래스가 걸려서 고생할 가능성이 없어진다는 거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플레이어가 머무는 곳에는 항상 사신의 숨결이 깃듭니다. 플레이어가 지나가는 길에는 시체가 쌓이고, 피비린내가 진동합니다.] ...조금 표현이 과격하지 않나 싶었는데, 생각해 보니 마땅히 반박할 말이 없었다. '레벨업을 위해서라지만...' 인던에 들어가면 더 이상 업이 안 될 때까지 몬스터를 때려잡았고, 던전에서도 숨어 있는 마수 한 마리까지 찾아내 숨통을 끊어 놓았다. 또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헌터들과 싸운 적도 여러 번 있었다. 사신, 시체, 피비린내. '어떻게 해석해도...' 처음에 예상했던 것처럼 암살자 클래스로 굳어지는 듯했다. [또한 플레이어는 강한 힘을 갈망하고 있으며, 동료에게 의지하지 않고, 자신의 힘만으로 길을 개척해 냅니다.] 끄덕끄덕. 진우도 시스템의 평가에 대체적으로 동의했다. '애초에 믿을 만한 동료가 있었던 적이 없으니까.' 하지만 그게 왜 전직을 위한 성향 분석에서 언급되고 있는지 바로는 깨닫지 못했다. 시스템의 설명은 이어졌다. [강한 힘에 대한 그대의 열망은 죽음의 골짜기에서 헤매고 있는 망령들을 불러들일 만큼 강력하며, 그대의 명을 따르는 망자들의 군대는 누구의 도움도 없이 오직 당신만을 위해 길을 만들 것입니다.] '...망자들의 군대?' 진우는 그제야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 걸 느꼈다. 그러나. "잠깐!" 뭐라고 항변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시스템이 평소와 같이 담담한 어조로 통보하는 결과를 들어야만 했다. [당신의 직업은 '네크로맨서'입니다.] "...뭐?" 52 화 이게 웬 날벼락이야. 잘 나가다가 어째서 '암살자'가 아니라 '네크로맨서'가 튀어나오는 거지? 진우는 멍하니 메시지를 응시했다. 눈을 비벼 보기도 했으나 달라지는 건 없었다. [당신의 직업은 '네크로맨서'입니다.] 메시지는 그대로 떠 있었다. 처음엔 믿기지 않았고, 다음엔 화가 치솟았다. '지능 스탯은 건드린 적도 없는데 왜!' 수많은 마법계열 헌터들 중에서도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이런 희귀한 직업이 걸린단 말인가. 진우는 E 급으로 각성할 때부터 전투계열이었다. 무기는 처음 강철검을 제외하면 단검만 썼고, 얻는 스킬은 족족 암살자들의 것과 비슷했다. 그래서 설마 다른 계열의 직업이 나올 거라곤 꿈에도 생각 못했었다. 그것도 마법계열, 그것도 하필 네크로맨서라니. 비록 게임 내 직업 설정을 기반으로 한 지식이지만, 네크로맨서가 어떤 일을 하는지는 대충 알고 있었다. 음침한 마법사와 그 뒤를 따르는 언데드 군단.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자신과는 연관성을 찾기가 힘들었다. 눈살을 찌푸리던 진우가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일단은 진정하자.' 머리가 복잡하더라도 대처는 차분하게. 침착함은 진우의 무기였다. 잠깐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니 곧 평정심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이거 어째...' 부정, 다음엔 분노. 지금 자신의 상태가 시한부 판정을 받은 환자들에게서 볼 수 있다는 '죽음의 5 단계' 반응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노... 그다음이 협상이었던가. 타협이었던가?' 하지만 이 건에 대해서는 그다지 타협할 거리가 없었다. 굳이 네크로맨서라는 직업의 장점을 꼽아 보자면... 시스템이 말한 대로 자신만의 군대를 만들 수 있다는 것 정도? '그 군대라는 게 해골과 시체로 만들어진 병사들이라서 문제지.' 그런 걸 데리고 다녔다간 세상이 뒤집힐 거다. 그렇지 않아도 헌터들은 선망의 대상이면서 공포의 대상이기도 한데, 대놓고 '망자들의 군대'를 끌고 다니는 헌터가 되라니. 어울리느냐, 아니냐는 둘째치고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띠링. [직업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시스템이 대답을 요구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선택권이 있어서...' 진우는 한숨 돌렸다. 직업을 강제하지 않는다는 건 다른 기회가 있다는 뜻이리라. 아직 전직 기회가 남아 있다면 이렇게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진우는 흔쾌히(?) 제안을 거절했다. "아니." 그러자 메시지가 다시 물어왔다. [네크로맨서는 '히든 클래스'입니다. 그래도 거절하시겠습니까?] 같은 내용임에도 두 번째 질문에는 쉽게 대답할 수가 없었다. 답하기가 망설여졌다. '히든... 클래스?' 게임에서나 나올 법한 단어였지만 실은 현실에서도 희귀한 능력을 가진 헌터들이 있긴 했다. 실드를 만들 수 있는 헌터라든가. 버프를 걸 수 있는 헌터라든가. '백호 길드의 마스터 백윤호는 마수로 변신이 가능하다는 소문도 있고.' 그런 특이한 힘을 지닌 헌터들은 모두 대형 길드에 영입되어 엄청난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히든 클래스라는 건 그런 헌터들이 가진 독특한 능력을 말하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이건 기회일지도 모른다.' 불현듯 그런 생각이 들었다. 시스템은 말했었다. '내가 강한 힘을 갈구하기 때문에 네크로맨서란 직업을 추구한다고.' 즉 다시 말해서 네크로맨서는 그만큼 강력한 직업이라는 거다. 대부분의 희귀 능력 각성자들이 '보조계열'에 속한다는 걸 떠올리면 굉장히 고무적인 일이었다. 싸울 수 있는 특수 능력자라. 조금씩 심장의 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네크로맨서라는 직업을 체험해 볼 수 있다면 이렇게 고민할 필요도 없을 텐데.' 그런데 그게 어디 쉽나? 모든 일이 그렇게 형편에 맞게 돌아갈 리도 없고, 그런 힘을 가진 사람에 대한 소문도 듣지 못했다. 애초에 자신의 군대를 통솔하여 싸우는 마법사 따위가 존재할 리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아...' 진우는 주위에 널브러져 있는 기사들의 잔해를 빙 둘러보았다. '그 마법사들!' 전직 퀘스트에 등장했던 마법사들이 네크로맨서와 비슷한 능력을 썼다고 말할 수 있었다. 여기에 있는 기사들은 그들의 군대였던 것이다. '확실히.' 자신의 목숨을 아끼지 않고 덤벼드는 기사들은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만약 끝까지 대처법을 알아내지 못했다거나, 마법사들의 전투 능력이 떨어지지 않았다면... '여기 누워 있는 건 이 쇳덩이들이 아니라 나였을 수도 있다.' 기사들을 둘러보던 진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진우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나는 전투 능력까지 갖추고 있다.' 그 마법사들과 자신은 다르다는 이야기. 뛰어난 개인 전투력을 갖춘 마법사가 자신만의 군대까지 동원할 수 있게 된다? 적의 입장에선 그야말로 악몽과 같은 일이지 않을까? '어쩌면...' 생각만 해 왔던 일. B 급 이상의 상급 던전을 혼자서 클리어하는 일이 가능해질지도 모른다. 진우는 침을 꼴깍 삼켰다. 만약 네크로맨서가 된 후에도 지금처럼 계속해서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면 당연히 휘하에 있는 군대의 힘도 갈수록 막강해지리라. 그 시너지 효과는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나 혼자만의 레벨업이 아니다.' 내 군단 또한 같이 성장하는 거다. '설마...?' 순간 소름이 돋았다. 진우가 고개를 들어 허공의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메시지는 조용히 선택을 기다리고 있었다. [네크로맨서는 '히든 클래스'입니다. 그래도 거절하시겠습니까?] 평소와 달리 재촉조차 하지 않고서. 진우는 속으로 물었다. '네가 원하는 게 이거였나?'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고민 끝에, 진우는 결단을 내렸다. 강한 힘을 주겠다면 기꺼이 받아들이겠다. 선택에 망설임은 없었다. [직업을 받아들이시겠습니까?] "그래." 시스템은 기다렸다는 듯 다음 메시지를 띄웠다. 띠링. [직업이 결정되었습니다.] [획득한 승급 포인트에 따라 상위 클래스로 전직할 기회가 주어집니다.] [계산을 시작합니다.] [승급 포인트 계산 중...] 계산이 진행되는 동안 진우는 오른손에 묶여 있는 붕대를 풀었다. 단검을 어찌나 세게 쥐고 있었는지 손바닥이 벌겋게 부어올라 있었다. "물집 생기겠네." 가볍게 혀끝을 끌끌 찼다. 힐링 포션 한 방울이면 해결될 상처인데, 회복이 안 된다는 게 여러모로 불편했다. 붕대를 다 벗겨 내고 쥐고 있던 '나이트 킬러'를 창고에 막 넣으려는 순간, 돌연 기계음이 울렸다. 띠링. 진우는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예상 한계 시간을 초과했습니다!] [가산점이 부여됩니다.] 가산점이라.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예상 시간이 얼마였는지는 몰라도 내가 좀 오래 버티기는 했지.' 그렇게 흡족한 기분으로 웃고 있는데, 갑자기 메시지들이 눈앞을 뒤덮였다. [즉시 귀환석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가산점이 부여됩니다.] [잔여 체력이 50%를 넘습니다!] [가산점이 부여됩니다.] [모든 적들을 처치했습니다!] [가산점이 부여됩니다.] [승급 포인트 한계가 업적 한계치를 넘어섰습니다.] [계약에 따라 특별한 보상이 주어집니다.] 띠링, 띠링, 띠링. '뭐야?' 아주 귀가 따가울 정도였지만 이미 진우의 신경은 다른 곳에 가 있었다. 소리는 들리지도 않았다. '특별한 보상?' 눈에 확 들어오는 단어. 보상. 그것도 '특별한'. 진우는 '나이트 킬러'를 창고로 보내려던 손을 멈추고 메시지창에 주목했다. 시선이 못 박힌 듯 고정됐다. 이윽고 메시지가 이어졌다. 띠링. ['네크로맨서'에서 '그림자 군주'로 전직합니다.] [직업 전용 스킬을 배웠습니다.] [보너스 스탯을 획득했습니다.] [칭호 '역경을 이겨 낸 자'를 획득했습니다.] '그림자 군주?' 생소한 소리에 급하게 상태창을 불러 왔다. [이름: 성진우] [레벨: 51] [직업: 그림자 군주] 과연 직업명에 새로운 단어가 추가 되어 있었다. '네크로맨서가 아니라?' 분명 승급 포인트에 따라 상위 클래스로 전직이 가능하다고 했었다. 또한 승급 포인트 합계가 업적 한계치를 넘었다고도 했었다. 그렇게 나온 결과가 '그림자 군주' 였다. "그럼 이게..." 시스템이 말한 특별한 보상? 그러나 진우는 다음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 눈앞에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홀로그램 메시지 뒤. 잡동사니처럼 널브러져 있는 기사들에게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피어오르고 있었던 것이다. 전직 전까진 없었던 현상이었다. 방금 전까지 주인 잃은 고철들에 불과한 놈들이었다. 그런데. 진우는 상태창을 접고서 주변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한두 개가 아니었다. 검은 연기는 기사들 전원에게서 올라오고 있었다. [그림자 추출이 가능한 대상입니다.] [그림자 추출이 가능한 대상입니다.] [그림자 추출이 가능한 대상입니다.] 그리고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는 대상을 쳐다볼 때는 어김없이 '추출이 가능하다'는 의미를 알기 힘든 글귀가 떠올랐다. '그림자 추출?' 어째서인지는 모르겠다. 진우에게는 스멀대는 검은 연기들이 마치 고통에 몸부림치는 것처럼 보였다. 구해 달라고 자신에게 손을 뻗는 것 같이 느껴졌다. 비명이 들린다...고 하면 이상한 일일까? '하지만.' 확신이 들었다. 그들을 고통에서 해방시켜 줄 수 있다는 확신이. '그림자 추출.' [그림자 추출 스킬의 명렁어를 지정하십시오.] '스킬에 명령어를 따로 지정해야 하는 건가?' 잠깐 고민하던 진우는 본능적으로 한마디를 내뱉었다. "일어나라." 그러자. 우아아아아어디선가 묵직한 신음 소리들이 들려옴과 동시에 기사들의 그림자들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진우는 다시 주위를 돌아보았다. 자신을 둘러싼 그림자들이 전부 움직이고 있었다. 이윽고 그림자에서 검은 손이 뻗어 나왔다. 손은 땅을 강하게 짚더니 스스로를 끌어올렸다. '맙소사!' 진우의 눈이 커졌다. 그건 사람이었다. 사람의 행상을 한 병사들! 전신을 칠흑의 갑주로 무장한 병사들이 하나둘 그림자에서 기어 올라왔다. '이게 스킬이라고?' 진우가 정신을 차렸을 땐 이미 병사들의 숫자가 수십에 달한 뒤였다. [그림자 추출에 성공했습니다.] 수십의 병사들이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다. '이게 대체...' 진우는 그중 가장 가까운 병사에게 다가갔다. 우선 촉감. 손을 대 보니 금속 재질이 느껴졌다. 보기만 갑옷 같은 게 아니었다. 진짜 흑색 갑옷을 입고, 무기를 찬 병사들이었다. '언뜻 보면 사람 같지만.' 사람 또한 아니었다. 생명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았다. 숨소리도 들리지 않고, 심장 박동도 느낄 수 없었다. 게다가. "..." 진우는 신음을 삼켰다. 눈구멍을 통해 투구 안을 슬쩍 들여다보니 안은 어둠 그 자체였다. 빨려들어갈 것 같은 느낌에 진우는 천천히 몇 걸음 뒤로 물러났다. '그림자에서 이런 걸 만들어 낸다고?' 당장 스킬창을 확인했다. 시스템이 알려준 대로 새로운 직업 전용 스킬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직업 전용 스킬] 액티브 스킬: 그림자 추출 Lv.1, 그림자 저장 Lv.1 그중 앞선 스킬을 먼저 확인해 보았다. [스킬: 그림자 추출 Lv.1] 직업 전용 스킬. 필요 마나 없음. 생명이 다한 신체에서 마나를 뽑아내어 그림자 병사로 만듭니다. 대상이 가진 능력치, 대상의 사망 경과 시간에 비례하여 추출 실패 확률이 올라갑니다. 추출 가능한 그림자 수: 30 / 30 스킬 설명을 읽고서야 검은 병사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언데들이었군.' 그림자 병사. 죽은 이의 그림자에서 뽑아낸 괴물들이었다. 진우는 침을 꼴깍 삼켰다. '이 녀석들이 진짜 내 병사들이라면...' 진우가 손을 오른쪽으로 뻗었다. 그러자 병사들이 일제히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손끝을 천천히 정면으로 옮겼다. 병사들 또한 손의 움직임을 따라 천천히 정면을 향했다. 그 중심에 진우가 서 있었다. 진우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손을 아래쪽으로 내렸다. 그와 동시에. 척. 척. 척. 병사들 전원이 자신에게 무릎을 꿇었다. 모든 게 의지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하..." 가볍게 감탄을 터트린 진우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이거 멋진데?' 53 화 아차! 문득 진우의 뇌리에 뭔가가 스치고 지나갔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방금 새 스킬의 힘을 보았다. 처치한 몬스터를 언데드 병사로 만들 수 있었다. 그렇다면 가장 시급히 수하로 만들어야 할 몬스터가 가까이 있지 않던가! 진우는 한때 아이런 골렘이었던 갑옷 더미들을 밟고 꼭대기에 올라섰다. 높이가 높이다 보니 던전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진우의 눈빛이 사뭇 예리해졌다. 찾았다! 방향을 확인한 진우는 곧장 그리로 달려갔다. 탁, 탁, 탁, 탁! 기대감 때문인지 질주 스킬을 쓰지 않았는데도 한걸음에 도착했다. 꿀꺽. 진우는 추출 대상이 될 몬스터의 사체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녀석은 죽었던 장소에 죽었던 모습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핏빛의 이그리트.' 머리를 잃은 채 몸이 반쯤 벽면에 박혀 있는 붉은 기사의 몰골은 당시의 상황이 얼마나 치열했는지를 잘 보여 주고 있었다. 진우는 이그리트 앞에 섰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목숨을 위협했던 무서운 적. 하지만 이제는 최고의 재료였다. 다행히 다른 기사들과 마찬가지로 이그리트에게서도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림자 추출이 가능한 대상입니다.] 진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좋아.' 방법은 알고 있었다. 진우는 짧게 심호흡을 내뱉은 후 나직이 명령어를 읊었다. "일어나라." 그림자 추출 스킬의 시동어. 그러나 스킬은 발동하지 않았다. '...?'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우가 다시 지시를 내리기 직전, '띠링' 하는 기계음과 함께 경고 메시지가 떠올랐다. [추출 가능한 그림자의 수를 초과했습니다.] [다시 그림자 추출을 사용하려면 '추출 해제'를 통해 그림자 병사들 중 일부 혹은 전부를 무(無)의 세계로 돌려보내야 합니다.] [무로 돌아간 그림자 병사는 다시 불러낼 수 없습니다.] 아, 그랬었지. 스킬 설명의 마지막 부분에 그런 내용이 있었다. [추출 가능한 그림자 수: 30 / 30] 그림자 추출의 정원은 30 명. 그러니까 지금 만들어진 병사의 숫자가 딱 30 이라는 건데... 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자신을 따라온 그림자 병사들이 정렬해 있었다. '언제 다 따라왔데?' 그림자 병사라는 이름에 걸맞게 소리 없는 움직임이었다. 아무튼 이그리트의 그림자를 추출하려면 시스템의 경고대로 이들 중 하나를 없애야 했다. '그런데...' 잠깐 봤을 뿐인데도 내 병사라고 생각하니 없애기가 아쉬웠다. 그 사이 정이 든 건지, 원. 진우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그림자 병사들을 하나하나 훑어보았다. 시선이 옮겨갈 때마다 병사들의 이름과 레벨이 떠올랐다. [그림자 보병 Lv.1] 일반 등급 [그림자 보병 Lv.1] 일반 등급 전부 같은 이름과 레벨이었다. '하긴, 원판이 똑같으니까.' 그런데 대부분이 보병인 가운데 뒤쪽에 색다른 녀석들 셋을 발견했다. '저건...?' 보병들과 달리 로브를 뒤집어쓴 병사들이었다. [그림자 마법병 Lv.1] 정예 등급 "아." 금방 정체를 추측할 수 있었다. 아이런 골렘을 움직이던 마법사 셋도 '일어나라'는 명령에 따라 언데드화 된 모양이었다. '보병 27 에 마법사 3 이라.' 이래서 희소성이 좋은 거다. 숫자가 적은 마법사는 해제에서 제외하고, 결국엔 가장 가까운 병사 하나를 선택했다. ...미안하다. "추출 해제." 슈욱병사는 검은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어떤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 녀석이 있었던 곳에 잠깐 애도의 눈빛을 보냈던 진우가 다시 이그리트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이그리트를 그림자로 만들기 위해 아까운 병사까지 하나 희생했다. 그만한 결실을 얻어 내야 했다. 쇠뿔도 단 김에 빼자. 진우는 곧바로 추출을 시도했다. "일어나라." 그러자 방금과 달리 이그리트 밑에 늘어져 있던 그림자가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아까 병사들에게서 그림자를 뽑아낼 때와 같은 반응이었다. '좋아!' 진우는 주먹을 꽉 쥐었다. 느낌이 좋았다. [그림자 추출을 시도합니다.] [추출 시도 중...] 이그리트가 어떤 모습으로 다시 앞에 나타날까? 진우는 손에 땀을 쥐었다. 그러나. 팅! 금속이 깨지는 것 같은 기계음과 함께 알림이 떴다. [그림자 추출이 실패했습니다.] "뭐?" [2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습니다.] "휴우-." 기회가 더 있다는 말에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고 보니...' 스킬 설명에도 분명히 대상의 능력치에 따라 추출 실패 확률이 올라간다고 명시되어 있긴 했었다. 하지만 막상 경험해 보니 황당했다. 처음으로 실패가 뜨니 뒤통수를 한 대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거기다 횟수 제한까지 있다니. '남은 기회가 두 번이라...' 두 번 모두 실패하면 이그리트의 그림자는 방금 희생당한 병사처럼 무(無)로 돌아가는 건가? 최악의 경우를 떠올리니 그만 아찔해졌다.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불길한 생각은 하지 말자.' 긍정적인 생각만. 진심으로 믿으면 우주도 돕는다고 하지 않던가? 진우는 불안과 기대 속에서 두 번째 추출을 시도했다. "일어나라." 하지만 기대는 가차 없이 빗나갔다. 팅! [그림자 추출이 실패했습니다.] [1 번의 기회가 더 남아 있습니다.] '...' 살아서 그렇게 애를 먹이더니 죽어서도 골치를 썩이는구나. 설마설마했는데. 진짜 두 번째까지 실패하니 눈앞이 깜깜해졌다. 후진우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이제 더는 기회가 없었다. 주어진 마지막 기회. 진우는 눈을 감고서 생각을 정리했다. '단순히 확률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이그리트의 그림자를 가지겠다는 간절함이 부족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진우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이그리트에게서 피어오르는 검은 연기가 구원을 호소하며 손을 뻗는 것처럼 느껴졌다. 진우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이어 연기에서 뻗어 나온 손을 마주잡아 주려는 듯 진우도 오른손을 내밀었다. "일어나라."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때 진우는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지만, 진우의 목소리가 낮게 진동하며 울렸다. 그 순간! 으아아아어디선가 묵직한 비명 소리가 들려오며 일대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이건?' 진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이와 비슷한 현상을 겪었던 기억이 있었다. 바로 병사들이 튀어나왔을 때였다. 아아아예상했던 것처럼 길었던 비명이 끝날 때쯤 그림자에서 길고 검은 손이 튀어나왔다. 그 손이 땅을 짚는 순간, 눈앞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그림자 추출에 성공했습니다.] 진우는 환호성을 터트렸다. "좋았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두 번의 실패 끝에 맛본 기쁨이라 더 크게 느껴졌다. 하지만 좋은 소식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군주의 목소리가 망자의 전의를 이끌어 냅니다.] [그림자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그림자의 레벨이 7 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강화 성공?' 무조건 1 레벨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었나? 진우의 눈이 커졌다. 메시지에서 알려 준 대로 그림자에서 걸어 나온 칠흑의 기사는 레벨 7 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었다. "으음!" 진우는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기억하고 있는 이그리트의 모습 그대로였다. 투구에 달린 긴 갈기. 전신을 감싸고 있지만 세련돼 보이는 갑주. 그리고 기품 있는 망토까지. 다른 점이라면 색이 핏빛을 닮은 붉은색에서 칠흑 같은 검은색으로 바뀌었다는 것 정도. 그것 말고는 모두 같았다. 이그리트가 다시 살아 돌아왔다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 새로 태어난 이그리트에게는 아까와 같은 적의가 없었다. 가만히 서서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쿵쾅쿵쾅. 이그리트를 바라보는 진우의 가슴이 뛰었다. 진우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그런데 설레는 한편으로 의문스러운 점도 있었다. 흘깃. 진우의 시선이 이그리트의 머리 위로 이동했다. '얘는 왜 이름이 없지?' [?? Lv.7] 기사 등급 신기하게도 이름 대신 물음표가 떠 있었다. '등급도 다르고.' 레벨이야 강화돼서 높다는 걸 알고 있지만, 평범한 병사들과는 많은 차이점을 보였다. 진우의 생각을 읽은 것일까? 그때. 타이밍 좋게 시스템이 메시지를 보내왔다. 띠링. [기사급 이상의 병사에게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부여한 이름은 그림자가 소멸될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됩니다.] [병사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이름?' 처음에는 생각지도 못한 요구에 막막했으나, 곧 '이 녀석'에게 원래 자기 이름이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리고서 미소를 지었다. 그대로 부르면 문제없겠지. [병사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빨리 이름을 불러 달라는 것처럼 메시지가 깜박거렸다. 진우는 입을 열었다. "핏빛의 이그..." 아니, 잠깐. 이름을 정하라는 건 그 이름으로 계속 불러야 한다는 거다. 그럼 이름을 불러야 할 필요가 있을 때마다 '핏빛의 어쩌고'를 언급해야 된다는 거 아닌가? 상상만 했는데 닭살이 돋았다. '...너무 오글거리네.' 결국 진우는 이름을 간소화시키기로 했다. "이그리트." ['이그리트'로 하시겠습니까?] "그래." 진우가 말을 끝맺자마자 녀석의 머리 위에 있던 물음표가 지워지고 이그리트라는 이름이 새로이 새겨졌다. [이그리트 Lv.7] 기사 등급 원래 이름을 갖다 붙인 것뿐인데도 이름이 그대로 새겨지자 왠지 모르게 뿌듯한 기분이 들었다. 내 병사란 생각이 팍팍 들었다. '내 병사라...' 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29 기의 그림자 병사들이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직은 숫자가 적었다. '겨우 30 명...' 그림자 추출 스킬의 레벨이 낮아서 일 수도 있고, 지능 스탯을 충분히 올리지 못해서일 수도 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병사들의 숫자가 여기서 점점 더 불어날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진짜 군대가 생겼네.' 그것도 해골과 시체가 아닌, 그림자로 만들어진 군대가. 이제 남은 문제는 하나. 얘네들을 어떻게 데리고 다니냐 하는 거였다. 그게 참 골치가 아팠다. '해골이 됐든, 그림자가 됐든.' 이런 녀석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닌다면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디 눈에 띄기만 할까? 각성자의 능력이라고 용인될 수 있는 수준을 넘었다. 집중 감시를 받아야 하거나 운이 나쁘면 소환 해제를 요구당할 가능성도 있었다. '헌터협회 감시과 우진철 과장...' 그렇게 팍팍하게 생긴 아저씨들이 몰려와 성가시게 만들 걸 생각하면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래서 이런 스킬이 있는 거겠지. '스킬.' 진우는 스킬창을 불러 왔다. [직업 전용 스킬] 액티브 스킬: 그림자 추출 lv 1, 그림자 저장 lv.1 스쳐 가듯 확인했던 스킬. 그림자 저장. 분명 이런 상황에서 도움이 될 것 같은 스킬명이었다. 54 화 [스킬: 그림자 저장 Lv.1] 직업 전용 스킬. 소모 마나 없음. 그림자 병사들을 시전자의 그림자 속에 흡수하여 저장해 둡니다. 저장한 병사들은 시전자가 원하는 때 언제든지 소환이나 재흡수가 가능합니다. 저장해 둔 그림자 수: 0 / 20 '역시.'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스킬명이 '저장'이라 병사들을 보관하는 용도일 거라고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예상을 벗어난 부분도 있었다. '정원이 하필...' 저장할 수 있는 그림자 수가 만들 수 있는 그림자 수보다 적었다. 만들기는 30 명을 만들었는데, 20 명만을 저장할 수 있단다. 그러니까 10 명을 또 버려야 하는 것이다. '곤란하네.' 열 손가락 중 깨물어 아프지 않은 손가락이 어디 있다고. 하나도 가슴 아팠는데 이제 열을 버리라니. '흠...' 진우는 씁쓸한 마음으로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기사급인 이그리트는 당연히 제외. 보직이 다른 마법병 셋도 뺀다. 만만한 건 역시 보병들. 아까는 가장 앞에 있던 병사 하나를 선택했으니, 이번엔 뒤쪽에 있는 병사 열을 추출 해제시켰다. '미안.' 잠깐 명복을 빌어 주고. 슈우우욱순식간에 병사들이 먼지가 되어 사라졌다. 그래도 처음보단 아쉬움이 덜했다. 이별에 익숙해진다는 말이 이런 걸 두고 하는 뜻일까. 어쨌든. 진우는 남은 병사들을 둘러보며 '그림자 저장'을 시전했다. 그러자 이그리트를 비롯한 그림자 병사들이 고온에 얼음이 녹아내리듯 그림자로 돌아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그림자들이 속속들이 발밑으로 모여들었다. '이게 그림자 흡수...!' 단어 그대로였다. 그림자들은 진우의 그림자에 스며들듯 흡수되었다. 찰나의 시간. 눈 한 번 깜짝할 사이 병사들은 자취를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눈으로 보고도 못 믿겠군.' 진우는 신기하다는 듯 자신의 그림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이 기계음이 연이어 터져 나왔다. 띠링. [직업 전용 스킬들을 전부 사용해 보셨습니다.] [전직 작업이 완료되었습니다.] [출구용 게이트가 생성됩니다.] '드디어 끝난 건가...' 길고 힘든 과정이었다. 진우는 감회에 찬 시선으로 던전 내부를 둘러보았다. 전투의 증거가 이곳저곳에 남아 있었다. 부서진 기사들. 금이 간 벽면. 반파된 기둥. 기둥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자 지금은 고철 덩어리가 되어 버린 아이언 골렘까지. 하지만 고생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새로운 직업과 스킬들. 그 밖에 여러 가지 것들과 강력한 아군들.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진우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바깥으로 연결된 게이트는 무사 귀환을 축하라도 해 주는 것처럼 조용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한걸음 내딛자 순식간에 배경이 바뀌었다. 동네 아산의 공터였다. 처음 전직 퀘스트를 수락했던 그곳. 벌써 오전 5 시. 어느덧 동이 틀 무렵이었다. 아차. 시계를 들여다보던 진우가 속으로 혀끝을 찼다. '이렇게 늦어질 줄 알았으면 진아한테 미리 연락해 둘걸.' 그래도 다행인 건 협회 일을 할 때도 레이드가 길어져 종종 늦은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진우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방금 빠져나왔던 게이트가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다. '허...' 게이트가 감쪽같이 사라진 장소를 보고 있자니 마치 꿈이라도 꾸고 나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꿈이라고? 아니, 그럴 리가. 진우가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칠흑의 갑주를 걸친 병사들. 속으로 떠올리자마자 그림자 속에서 소환된 병사들이었다. '...' 처음엔 이 녀석들을 괴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림자 병사. 죽은 이의 그림자에서 부름을 받고 걸어 나오는 괴물들. 하지만 이들이 괴물이라면 이들을 마음대로 만들고 부릴 수 있는 사람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진우는 씩 웃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은 없지만...' 진우는 병사들을 다시 그림자 안으로 불러들였다. 비탈길을 내려가는 걸음이 더할 나위 없이 가볍게 느껴졌다. *** 진우는 늦은 시간까지 단잠에 빠져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집에 도착해서 침대에 누웠을 때는 이미 날이 훤히 밝아 있었으니. 따라란~ 따라란~ 진우의 잠을 방해하는 건 휴대폰 기본음 벨소리였다. 머리맡을 더듬던 손이 어렵게 폰을 쥐었다. 진우는 눈도 뜨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목소리가 쩍쩍 갈라졌다. -헐... 오빠 아직도 자는 거야? 지금이 몇 신데! 수화기 너머에서 진아가 놀란 듯 물었다. 그래서 되물었다. "지금이 몇 신데?" -오후 2 시! "뭐?" 실눈으로 휴대폰 액정의 시간을 바라봤다. 진짜였다. -...오빠 오늘 학교 와야 하는 거 기억하고 있지? 걱정스런 목소리. 진우는 그제야 느릿하게 상체를 일으켰다. "언제까지 가면 돼?" -5 시! "안 늦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있어." -역시 오라버니! 근처 오면 나한테 전화 줘! 동생이 애교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긁적긁적. 부스스한 머리를 긁적거리던 진우가 천천히 일어났다. 지금부터 준비하려면 시간이 빠듯했다. '그래도 동생 담임선생님을 뵈러 가는 건데.' 그것도 인생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고 3 시기를 담당할 선생님을. '아무렇게나 입고 갈 수는 없겠지?' 옷장을 열어서 옷을 뒤적거렸다. 퀴퀴한 옷 냄새. 그리 좋은 향은 아니었다. 진우는 미간을 좁혔다. 뒤적뒤적. 열심히 찾아봤지만 입고 갈 만한 옷이라곤 고등학교 졸업식 때 한번 입고 놔뒀던 낡은 양복이 다였다. '입을 수 있으려나?' 혹시나 해서 입어 봤는데 아니나 다를까, 꽉 조여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확실히 체격이 많이 커졌네.' 예전 옷을 입어 보니 분명히 알 수가 있었다. 옷이 터질 것 같았다. ...이제 어떡한다? 입고 나갈 옷을 고민하던 진우의 눈에 마침 유진호에게서 받았던 통장이 들어왔다. 마정석을 처분한 돈이 입금된 통장이었다. 터질 듯이 팽팽한 옷과 도장이 동봉된 통장을 번갈아 보던 진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간만에 쇼핑이나 할까?' 하지만 그전에 확인할 것이 조금 있었다. 아니, 조금이라기엔 아주 많이. 진우는 터질 것 같은 양복을 벗어두고 침대에 걸터앉은 상태로 상태창을 불러 왔다. '상태창.' 눈앞에 긴 문자열이 떠올랐다. 띠링. 이름: 성진우 레벨: 51 직업: 그림자 군주 칭호: 늑대학살자 (외 1) HP: 11,035 MP: 1,022 피로도: 0 [스탯] 근력: 132 체력: 91 민첩: 111 지능: 70 감각: 93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10) 물리 데미지 감소: 46%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상급 단검술 Lv.1 액티브 스킬: 질주 Lv.2, 살기 Lv.1, 은신 Lv.1, 급소 찌르기 Lv.1, 단검 투척 Lv.1 [직업 전용 스킬] 액티브 스킬: 그림자 추출 Lv 1, 그림자 저장 Lv.1 [착용한 아이템] 붉은 기사의 투구(S), 파수꾼의 목걸이(A), 상급 기사의 흉갑(B), 상급 기사의 건틀릿(B), 상급 마법사의 반지(B), 중급 자객의 신발 (C) "허어..."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상태창을 보고 진우는 혀를 내둘렀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여기에 별다른 내용이 없었는데.' 그런 시절도 분명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스킬과 아이템 목록만으로도 눈이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업란만큼은 확연히 눈에 들어왔다. [직업: 그림자 군주] 전날까지 '없음'으로 기록되어 있던 공간이었다. 실은 상태창을 볼 때마다 이 '없음'이란 단어가 적잖이 신경 쓰였다. '없음' 앞에 오는 단어가 직업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헌터는 레이드를 하지 않을 때는 백수와 별반 다를 게 없다. 적어도 남들이 보기엔 그렇다. 그런데 능력치가 기록된 상태창에서조차 '직업 없음'이라는 글귀를 봐야 했으니 어찌 신경 쓰이지 않을 수가 있을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더니, 직업칸을 확인할 때마다 뜨끔한 심정을 숨길 수 없었다. 그게 진짜 직장이 아닌 걸 알고 있어도 신경 쓰이는 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오늘부로 그런 걱정은 깔끔하게 덜게 되었다. 하하! 진우는 저도 모르게 실소를 흘렸다. '이런 걸 자격지심이라고 하는 거겠지.' 그간에 다른 헌터들처럼 목돈을 뭉텅이로 벌어 왔으면 레이드 외 시간을 어떻게 보내던 남들의 시선을 의식할 필요는 없었을 터. 그러나 자신은 그렇지 못했다. 남들에게 자신 있게 자신이 헌터임을 밝힐 수 없었다. 목숨도 부지하기 힘든 E 급이었으니까. -E 급 헌터입니다. 이 말을 했을 때. 헌터에 대해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앞에서는 힘든 일을 한다고 추켜세우면서도 뒤로 가서는 조소를 날렸다. 그래서 더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이제는 멋진 직업, 아니 확실한 특성이 생겼다. 직업은 여전히 헌터고. 굳이 표현하자면 '그림자 군주'라는 특성이 생겼다라고 말하는 편이 옳으리라. '비록 내가 원하던 방향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후회는 없었다. 아니, 대만족이었다. 여기가 방 안만 아니라면 지금이라도 이그리트와 그림자 병사들을 불러내고 싶었다. 병사들의 전력을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그들이 생전의 힘을 백 퍼센트 전부 다 발휘할 수 있다면? '설마 그렇지는 않겠지.' 하나 상상만 해도 가슴이 뛰었다. 두근두근. 진우는 가만히 심장 박동을 느끼며 머릿속으로는 레이드할 때의 시뮬레이션을 해 보았다. 문득 유진호의 반응이 궁금해졌다. 피식. 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입을 다물지 못할 유진호를 떠올리니 웃음이 절로 새어 나왔다. 가만. '그러고 보니.' 사망한 대상을 전력으로 환원시킬 수 있다면, 그리고 그 대상이 몬스터나 마수로 한정되어 있지 않다면... '죽은 헌터의 그림자에서도 병사를 뽑아낼 수 있는 거겠지?' 당연하지만, 사람이기 때문에 하고 싶지 않았던 상상. 죽은 사람의 그림자에서 부름을 받고 걸어 나오는 언데드 병사라니.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약 A 급이나 S 급 헌터의 그림자를 얻을 수 있다면?' 그 전력은 상상을 초월할 터. 실력을 생전의 백 퍼센트가 아니라 50 퍼센트만 발휘할 수 있어도 그림자들을 데리고 상급 던전을 털어 버리기에 충분했다. 가볍게 뛰던 심장의 박동이 거세졌다. 두근, 두근, 두근! 하지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사람을 가지고 언데드화시키는 건 좀...' 몹쓸 짓이었다. 아무리 전력을 강화시킬 수 있다고 해도 그런 짓까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 짓을 당해도 싼 놈이 나타나준다면 모를까. '하지만 같은 헌터끼리 싸울 기회가 쉽게 오는 것도 아니고.' 막상 기회가 주어진다고 해도 여러가지 난관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인간은 몬스터나 마수가 아니니까. 그래. 일단은 지금의 병사들로도 만족했다. '보스몹급이었던 이그리트도 손에 넣었으니.' 레벨 7 의 기사 등급 그림자 병사. 대체 어느 정도의 실력일까? 진우는 문득 다음 레이드가 기다려졌다. 55 화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시선을 내리는데 유독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칭호: 늑대 학살자 (외 1)] '...하나가 더 있다고?' 아. 그러고 보니 전직 퀘스트 보상으로 새로운 칭호도 하나 얻었지. 진우는 숨겨져 있는 칭호를 확인했다. [칭호: 역경을 이겨 낸 자] 역경을 훌륭하게 극복한 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잃은 체력에 비례하여 능력치가 상승합니다(잃은 체력 !%당 능력치 1%). '좋다!' 체력이 깎일 때마다 퍼센테이지로 능력치가 올라가는 훌륭한 버프가 있었다. 짐승형 몬스터 상대로 40 퍼센트의 능력치가 오르는 '늑대 학살자'도 좋은 칭호다. 하지만 조건이 까다롭다 보니 버프 혜택을 보기가 힘들었다. '짐승형 마수가 아니면 칭호 효과가 없는 것과 마찬가지니.' 그런 와중에 효율 좋은 새 칭호를 얻었다. 설명을 읽어 보니 근성 스킬의 패시브 효과와도 아주 잘 어울렸다. 진우는 고민 없이 칭호를 바꾸었다. [칭호: 역경을 이겨 낸 자 (외 1)] 쓰지 않는 칭호는 감춰지고, 필요할 때 다시 언제든지 교체할 수 있었다. '다음은 스탯.' 어제 업적 한계치를 초과한 대가로 받은 보상은 전부 세 개였다. 하나는 상위 클래스 전직. 두 번째는 칭호. 그리고 마지막으로 보너스 스탯. [스탯] 근력: 132 체력: 91 민첩: 111 지능: 70 감각: 93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10) 물리 데미지 감소: 46% 미분배 상태인 포인트가 10 개나 있었다. 예전 같았으면 민첩이나 감각에 투자했을 포인트였지만 이번엔 경우가 좀 달랐다. 진우는 10 포인트를 전부 다 지능에 부었다. 그래도 지능 수치가 80 에 불과했다. 띠링. [스탯] 근력: 132 체력: 91 민첩: 111 지능: 80 감각: 93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물리 데미지 감소: 46% 근력이나 민첩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오죽하면 민첩을 올린다고 등한시했었던 체력보다도 더 떨어졌다. 그만큼 지능 스탯을 괄시해 왔다는 증거였다. '내가 마법을 쓰게 될 줄은 몰랐으니까.' 당분간은 포인트가 생기는 대로 지능 스탯에 몰빵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전투 스타일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새로 얻은 스킬도 암살자 타입이네.' 전투 중에 습득한 새 스킬. 단검 투척. 설명을 볼 것도 없이 단검 전용 스킬이 분명했다. [스킬: 단검 투척 Lv.1] 액티브 스킬. 필요 마나 30. 단검 전용. 단검을 던져 데미지를 입힙니다. 스킬의 레벨이 올라갈수록 추가 데미지와 명중 확률이 높아집니다. '역시.' 이제까지 전투계열답게 싸워 왔다. 새로운 직업과 새로운 스킬을 얻었다고 갑자기 기존의 방식을 확 뒤엎을 수는 없었다. 일단 그림자 스킬은 보조로 쓰고, 단검을 주력으로 사용할 참이었다. '적어도 지능 스탯을 유용할 만큼 끌어올리기 전까지는.' 뛰어난 전투력. 그걸 뒷받침하는 보조 병력들. 전직을 받아들이던 당시의 계획은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예상과 차이점이 있다면...' 생각보다 그림자 병사들의 쓸모가 많아 보인다는 것. 보스몹이 수하가 될 줄은 몰랐다. '...그래도.' 그림자 스킬들을 주력으로 삼기엔 단검 숙련도나 익힌 기술들이 너무 아까웠다. 나이트 킬러를 산 직후기도 하고. '마법계열이 될 줄 알았으면 상점에서 지팡이라도 살 걸 그랬나.' 물론 그랬었다간 전직 퀘스트도 못 끝내고 기사들 틈 속에 파묻혔겠지만. 진우는 상태창을 닫았다. 이 정도면 달라진 건 거의 다 둘러 본 셈이었다. '가만, 시간이?' 여차하는 시간에 20 분이 지났다. 진우가 옆머리를 긁적였다. '좀 서둘러 볼까?' 진우의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스탯의 힘은 마수들과 싸울 때만 도움되는 게 아니다. 정신을 집중하자 시간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진우가 빨라진 거다. 문을 열고 방을 나가. 욕실에서 샤워를 끝낸 다음. 물기를 닦고서. 대충 옷을 골라 입고 다시 거울 앞에 섰다. 여기까지 걸린 시간이 불과 3 분. 더 빠르게도 움직일 수 있었지만 그랬다간 이 낡은 아파트가 남아날 것 같지 않아 최대한 힘을 아꼈다. '아직 머리가 덜 마르긴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20 분 넘게 아꼈으니 발을 동동 구를 필요는 없어졌다. 가볼까? 방을 나서려던 진우가 무언가를 발견하고 우뚝 걸음을 멈췄다. 집 열쇠. 열쇠가 책상 위에 있었다. 평소 같았으면 귀찮은 듯 돌아서서 열쇠를 챙겨 나왔겠지만, 오늘은 그리로 걸음을 옮기는 대신 열쇠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럴 때 아니면 어디다 쓰겠어?' 지배자의 손길! 열쇠가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하더니 곧 강력한 자력에 끌리는 것처럼 손 안에 쏙 들어왔다. 휙! 열쇠를 낚아챈 진우가 씩 웃었다. 그렇게 순식간에 외출 준비를 끝낸 진우는 휘파람을 불며 방문을 닫았다. *** 진우는 우선 은행에 들렀다. 그동안 마정석 처분한 돈이 얼마나 쌓였는지 궁금했다. '바빠서 못 오고 있었지만.' 마정석 관리는 공대장인 유진호가 전부 담당하고 있었다. 듣기론 하루 일정이 끝날 때마다 곧장 마정석을 판매하고 수익금을 통장에 입금해 둔다고는 하던데. 딱히 금액에 대한 언급은 없었다. '진호 녀석, 다른 건 세세한 거 하나하나 일일이 보고하는데 돈 문제는 별로 말을 안 한단 말이지.' 관심이 없다고 해야 할까? 워낙 풍족하게 자라 와서 그런지 유진호의 관심사는 늘 돈과는 거리가 멀었다. 주로 연예인 이야기, 레이드 이야기, 좋아하는 노래와 영화 이야기가 대화의 단골 소재였다. 대화라고는 해도 늘 유진호 혼자서 신나게 떠들어 대다가, 듣고 있던 진우가 가끔식 대꾸하는 게 전부인 수준이지만. '아, 그러고 보니...' 그렇게 말이 많은 녀석이 의외로 가족 이야기는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기억을 되짚어봐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무렵, 진우는 은행에 도착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ATM 기 쪽 기기들은 점검 중이었다. 어쩔 수 없지. 은행 안으로 들어간 진우는 번호표를 뽑고 기다리고 있다가 순서가 되자 은행원 앞에 앉았다. "안녕하세요?" 귀밑까지 오는 단발에 싱그러운 미소. 여직원이 친절하게 물었다. "어떻게 도와드릴까요?" "통장 정리 부탁합니다." "알겠습니다." 여직원은 미소를 유지하며 진우가 내민 통장을 건네받았다. 기다리는 동안 진우는 은행을 둘러보았다. 특별할 것 없는 평일 오후인데도 사람이 많았다. 진우가 사람 구경을 하고 있을 때 여직원은 진우의 통장에 든 잔액을 보고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헉!' [잔액: 14 억 8 천 292 만 원] 단위를 다시 확인해 봤지만 맨 앞자리가 십억이 확실했다. 그것도 평생 모은 게 아니었다. 일주일 동안 매일 억이 넘는 거액이 꾸준히 입금되었다. '나이도 어려 보이는데 어떻게?' 진우를 엄마 심부름으로 통장정리하러 온 대학생쯤으로 여겼던 은행 여직원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여직원은 약간의 사심을 담아 물었다. "어머! 혹시 무슨 일 하세요?" 사심이 담긴 질문이 스스로도 부끄러운지 진우의 눈치를 흘깃 살피는 여직원의 뺨이 약간은 상기되어 있었다. 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헌터입니다." "아..." 여직원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소문이 사실이었다. '헌터들이 그렇게 돈을 잘 번다더니.' 수입이 이 정도일 줄이야. 갑자기 평범한 월급쟁이인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방금 전까지는 흔한 고객이었는데. 지금은 진우가 아예 다른 세계에 사는 사람으로 보였다. '등급이 꽤 높은 헌터시겠지?' 그저 그런 헌터가 만질 수 있는 돈이 아니니까. 처음 만나보는 최상급 헌터. 그 생경함이 여직원을 조금씩 설레게 만들었다. 콩닥콩닥. 가볍게 가슴이 뛰었다. 헌금으로 10 억 이상의 자산을 가진 '젊은 고객'이라면 은행에서도 VIP 다. 그 고객의 직업이 헌터라면 그야말로 VVIP. 여직원은 VVIP 를 놓치지 않기 위해 업무 방침대로 여러 은행 상품을 홍보했다. "저희 은행에서 VIP 고객님들을 위한 상품이 이번에 새로 나왔거든요." 접대용 미소가 아니라 진짜 미소를 짓고서. 여직원의 시선은 진우에게 고정됐다. '어머, 어쩜...' 급하게 나온다고 대충 챙겨 입은 옷과 약간은 부스스한 헤어스타일마저 바쁜 일정 속에서 겨우 짬을 낸 능력남의 일상을 엿보는 거 같아 가슴이 두근거렸다. "고객분들의 반응이 몹시 좋은 상품인데 한번 투자해 보실 생각은 없으신가요?" 하지만 진우는 손을 내저었다. "아뇨, 괜찮습니다." "아... 그러세요." 여직원의 목소리에서 아쉬움이 묻어나왔다. 잘못하면 얘기가 길어질 것 같아 진우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목덜미에 와 닿는 여직원의 시선을 무시하고는 은행을 나갔다. 은행 문이 닫히자마자. "후-."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직업이 헌터라고 밝히자마자 여직원의 시선이 변하는 걸 눈치챘다. 타인의 시선. 그리고 관심. 대부분의 헌터들에겐 일상이지만 진우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일이었다. '그래도 익숙해져야겠지.' 등급 재심사에서 높은 등급이 뜨면 이것보다 훨씬 더 심해질 거다. 헌터들을 따라다니는 기자나 팬들도 많다고 들었다. 문득 고개를 들자. 멀리 빌딩 위에 인기 헌터가 음료를 광고하고 있는 전광판이 눈에 들어왔다. 게이트가 생기기 전에는 스포츠 선수나 유명 아이돌들이 있었던 자리였다. 그렇다. 헌터가 연예인보다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는 시대. 진우에게도 예외일 수 없었다. 요즘 같은 때에 헌터를 싫어하는 사람이라면 보험사 직원 정도뿐이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은행을 나오고서야 진우는 간신히 잔고를 확인해 볼 수 있었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14 억 8 천...!' 아홉 번의 레이드로 얻은 수입의 총합이 약 15 억. C 급 던전 하나당 1 억 6 천이 들어온 셈이었다. 황동석 일행과 함께했던 던전에선 1 억 8 천을 벌었으니 C 급 던전에서 얻을 수 있는 평균 수입이 대충 1 억 5 천에서 2 억 사이라는 말이었다. '이러니 여직원이 놀랄 만도 하지.' 56 화 돈도 확인했고. 큰맘 먹고 백화점에서 정장을 한 벌 맞춘 진우는 그래도 시간이 남자 근처 헤어숍에서 덥수룩한 머리까지 정리하고 나왔다. "흠." 집을 나설 때와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돈이 좋긴 좋구나.' 옷이 날개라더니. 진우는 길가 쇼윈도에 비친 본인의 모습을 감상하다 한번 어깨를 으쓱거렸다. 이 정도면 준비는 완벽했다. '적어도 나쁜 인상을 남기진 않겠지.' 간단히 옷매무새를 다듬다가 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봤더니 오후 4 시 20 분. '5 시까지 오라고 했으니까.' 바로 출발하면 얼추 시간이 맞다. "택시." 택시를 잡아탄 진우는 동생이 말한 시간에 맞춰 여유 있게 학교 앞에 도착했다. 마중 나와 있는 진아의 모습이 보였다. "성진아." 뒤늦게 진우를 발견한 진아가 깜짝 놀랐다. "오빠?" 진아는 토끼 눈을 뜨고는 물었다. "성... 성진우 씨 맞으세요?" "너는 오빠도 못 알아보냐?" 진아가 놀라듯 진우를 위아래로 훑어보다 소리를 높였다. "사람이 완전히 바뀌었으니까 그렇지!" "그럼 동생 담임선생님을 뵙는데 추리닝에 슬리퍼 끌고 오랴?" "와아..." 진아는 여전히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러다 턱 떨어지겠다, 먼저 간다." 동생이 안내할 생각이 없어 보이자 진우는 그냥 자기가 앞장을 서 버렸다. 5 년 전엔 진우도 이 학교 학생이었다. 내부는 빠삭했다. 어차피 교사가 학부모를 만날 장소라면 교무실 아니면 상담실인데, 오늘은 진학 상담을 해야 한다고 했으니 상담실 쪽으로 가면 되겠지. 성큼성큼. 진우의 걸음이 빨라졌다. "오, 오빠! 같이 가!" 진아는 급히 진우를 뒤쫓았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에? 예. 안녕하세요." 가는 도중 진우는 몇몇 선생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생들은 하나같이 멈춰 서서 진우를 돌아봤다. '누구였지?' '졸업생? 저렇게 눈에 띄는 학생을 잊을 리가 없는데.' '신입 교사인가?' 돌아보는 건 선생들뿐만이 아니었다. "와, 잘생겼다." "누구지?" "같이 있는 애 진아 아니야?" "진아 오빤가 봐. 멋있다." 훤칠한 체격과 세련된 정장. 평범한 외모로도 여학생들이 돌아보게 만들 만큼 시너지 효과가 대단했다. 정작 진우 본인은 관심이 없었지만. '...' 진우는 여학생들의 수군거림을 한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걸었다. 오히려 신이 난 쪽은 진아였다. 귀를 쫑긋 세우고 히죽히죽 웃으며 주위의 평가를 귀담아듣던 진아는 앞서가던 진우에게 살짝 붙어 서서는 팔꿈치로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이야. 오빠 인기 좋네?" 첫 번째는 무시했다. "그러고 보니 오빠 아직 여친 없지?" 두 번째도 무시했다. "이 동생이 귀여운 여고생 하나 소개시켜 줄까?" 세 번째에, 진우는 무표정한 얼굴로 동생의 볼을 꼬집었다. "까불지 말고." "죄... 죄송합니다." 진우가 볼을 놔주자 진아는 빨갛게 된 뺨을 문지르며 볼멘소리를 했다. "칫, 자기도 좋으면서..." 투덕거리며 걷다 보니 금방이었다. 진우를 앞질러 나간 진아가 상담실 앞에서 빙그르르 돌아섰다. "오빠, 여기야." 안으로 들어가려던 진우가 진아를 돌아보았다. 진아는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였다. "너는?" "선생님과 학부모 일대일 상담. 오빠 들어가는 거 보고 교실로 갈려구." 아. 진아 말을 듣고 보니 진우도 고 3 때 그 비슷한 걸 했었던 기억이 났다. 당시 아무도 모셔 오지 못했지만. '그때부터 슬슬 어머니께서 거동이 불편해지셨으니까.' 부쩍 입원하는 일이 잦아진 어머니. 괜히 무리하실 것 같아 상담이 있다는 걸 알리지 않았고, 덕분에 담임의 성화에 한동안 시달려야 했다. 그때를 떠올리면 진아가 그렇게 초조해하던 이유도 이해가 갔다. 진우가 씩 웃으며 물었다. "오늘도 야자하지?" "응. 오빠 먼저 집에 가." "오냐." 진우는 기습적으로 진아의 머리를 헝클어뜨리듯 쓰다듬었다. "공부 열심히 하고 와라." "아, 하지 말라니까." "집에서 봐." 씩 웃던 진우가 상담실 안으로 사라졌다. 진아는 머리를 만지며 볼을 부풀렸다. "언제까지 어린애 취급이라니까..." 그래도 내심 싫지만은 않은 기색이었다. 혹시 본 사람은 없었을까?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진아는 아무도 없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마음이 놓인 듯 총총걸음으로 교실을 향했다. *** 진아 담임선생님의 첫인상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음...' 참 후덕해 보이셨다. "진아 오빠 분?" 인자하게 생긴 중년의 여선생님이었다. 밝은 미소가 보는 사람까지 기분 좋게 만드는 그런 인상. 사정을 알고 있는지 진우가 학부모 자격으로 온 것을 전혀 의아해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진아 담임입니다. 진아가 이렇게 멋진 오빠분을 숨겨 두고 있었네요, 호호." 여선생의 넉살 좋은 인사에 진우도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못 보던 분인데.' 아마 자신이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 전근 온 선생님인 듯했다. 사람의 인상은 첫 만남부터 거의 결정된다고 하던가? 인사를 주고받고 나니 어느 정도 마음이 놓였다. '한참 어린 내게 꼬박꼬박 존대를 붙여 주는 것도 그렇고.' 동생의 고 3 시기가 잘못 만난 선생님 때문에 괴롭지는 않을 듯했다. "여기 앉으세요." 그녀는 의자를 권했다. 맞은편의 의자를 뺀 진우가 큰 책상 하나를 두고 진아의 담임과 마주 앉았다. "진아는 걱정하실 필요가 없겠네요." 담임과 학부모 사이에서 오갈 수 있는 평범한 이야기들. 좋은 분위기에서 대화가 오갔다. 진아가 워낙 모범생이라 진우와 여선생이 서로 언성을 높일 이유가 없었다. "진우가 의대를 목표로 하고 계신 건 아시죠?" "네." 여선생은 준비해 뒀던 자료를 읽어갔다. "모의고사 성적도 좋고, 내신 성적도 우수한 편이라 충분히 가능할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너무 애한테 부담감 주진 마시고요." 진우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의 들뜬 얼굴에서 진아에 대한 기대감이 물씬 풍겨 나왔다. 사실 고 3 담임들도 학생들 성적에 따라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한다. 학생들의 인생이 걸린 문제니까 신경 쓰이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서 보통 고 3 담임은 피하려고 한다던데.' 남선생님들이 억지로 떠맡듯이 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그걸 감안하면 지금 진아의 담임은 열정이 넘치는 분이라 할 수 있었다. 보호자 입장에서는 고마운 일이었다. 열정은 곧 관심으로 이어지니까. 15 분쯤 됐을까? 상담은 순조롭게 끝나가고 있었다. "그럼..." 진우가 분위기를 봐서 일어서려는데 눈치를 살피던 선생이 조심스럽게 질문해 왔다. "오빠 분은 헌터 일을 하고 계신다고 들었는데." 갑작스럽게 진지해진 선생의 눈빛. 뭔가 있구나. 진우는 직감했다. "네." "만약... 진아가 각성자 판정을 받는다면 진아에게도 헌터 일을 시키실 건가요?" "아니요." 절대. 진우는 단호히 말했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뭔가 있겠다는 짐작대로 선생의 표정이 확연히 무거워졌다. "역시나..." 진우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선생은 결심을 굳힌 듯 말을 꺼냈다. "실례가 아니라면 제가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일단은 들어나 보자. 그래도 동생의 담임인데 들어 보지도 않고 단칼에 잘랐다간 나쁜 인상을 남길 수 있으니까. 행여 진우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봐, 여선생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여학생 중 하나가 각성자 판정을 받고서 학교를 그만두려고 해서요. 지금은 등교도 안 하고 있고요." '아하.' 흔한 일이었다. 헌터가 하는 일을 직접 체험해 보지 못한 각성자들은 자신이 남과 다르다는 생각에 들떠 현실을 직시하지 못한 경우가 생긴다. 각성하더라도 헌터로서 이름을 날리고 큰돈을 버는 사람은 생각보다 많지 않은데 말이다. 선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대로 결석이 계속되면 학교에서도 조치를 취할 수밖에 없거든요. 헌터가 되더라도 졸업장은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진우는 동의한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긍정적인 반응에 선생의 얼굴이 조금은 밝아졌다. "그 애가 졸업이라도 할 수 있게 설득을 좀 해 주시지 않겠어요?" 선생님은 애써 미소를 지었다. 진우가 궁금한 건 하나였다. "그 학생 각성자 등급이 어떻게 나왔습니까?" "듣기로는... 가장 낮은 등급이라고..." E 급. '...얼마 못 가서 죽겠군.' 진우는 속으로 혀끝을 찼다. 원래라면 던전에 들어가는 것조차도 조심해야 되는 랭크였다. 들뜬 마음으로 섣불리 발을 들였다가는 십중팔구 불구가 되거나 죽게 된다. 동생과 또래인 아이가 그런 일을 겪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분명 가슴 아픈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선택.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다. 안타깝긴 해도 부족한 시간을 쪼개 타인의 결정에 간섭하고 싶지는 않았다. '설득에 성공할 자신도 없고.' 대부분 좋은 소리도 듣지 못하니까. 진우는 그렇게 거절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라고 하면 진아도 알 거예요." 선생의 입에서 학생의 이름이 나오자 쉽게 일어설 수가 없었다. 진우는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선생님, 그 학생 이름이?" "...요. 혹시 그 애를 아세요?" "..." 한국이 좁긴 좋구나." '허...' 진우는 말문이 막혀 왔다. *** 같은 시각. 유진건설 회장 유명한의 자택. 아침부터 쉴 새 없이 번쩍번쩍한 고급 외제차들이 들락거렸다. 이유는 하나. 저녁에 있을 유진그룹의 초대 회장 유병철의 제사 때문이었다. 재계 서열 1 위 유명한. 유병철은 그런 유명한의 아버지였다. 장남인 유명한은 아무리 바쁜 일정이 있더라도 아버지 제사는 꼭 챙겼다. 유명한의 입김이 워낙 막강하다 보니 매년 이날만 되면 유씨 가문의 친인척들이 한자리에 모여들었다. -모 증권 사장. -모 제약 회장. -모 백화점 사장. 하나같이 쟁쟁한 인물들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자식들 또한 엘리트 중에 엘리트들이 대부분이었다. 딱 한 사람만 빼고. 그 예외적 인물은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한쪽 구석으로 가서 쥐 죽은듯 조용히 있었다. 바로 유진호였다. '지겹다.' 빨리 이 시간이 끝났으면. 형님과 던전을 돌아다니는 게 백배천배는 더 즐거웠다. 지금쯤 형님은 뭐하고 계실까? 그러고 보니 형님은 쉬는 날을 어떻게 보낼지 감이 오지 않았다. 그렇게 실없는 생각들을 하며 눈에 띄지 않는 곳에서 애꿎은 음료수만 축내고 있는데. 어디선가 듣기 좋은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이." 아니나 다를까. 누가 봐도 능력 있다는 걸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엘리트의 표본 같은 남자가 뒤에 와 서 있었다. 고급스런 안경. 훤칠한 키. 유진호의 친형, 유진성. 유명한을 대신해서 유진건설을 이어받을 유력한 후계자였다. 코앞까지 다가온 유진성이 유진호를 내려다보았다. "친척들이 오시면 너도 인사를 좀 해라. 언제까지 아이처럼 굴 거냐?" "...남이사." "네가 못나게 굴수록 아버지 이름에 먹칠을 한다는 것만 알고 있어라." 유진성의 말투에 형제애 따위는 조금도 없었다. 노골적인 무시. 물론 유진호도 그런 형이 마음에 들지 않지만 그렇다고 형에게 대들 만한 용기는 없었다. "..." 그도 그럴 것이. 형 유진성은 손대는 분야마다 1 등을 놓쳐 본 적 없는 수재 중의 수재였다. 성적만 뛰어난 게 아니었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서도 아버지 유명한의 일을 도와 모든 면에서 놀라운 성과를 보이고 있었다. 그에 비하면 유진호는 뭐하나 내세울 만한 게 없었다. 대학도 턱걸이로 들어간 수준이니. 유진호는 항상 형 앞에만 서면 유독 작아졌다. "..." "한심하긴, 쯧쯧." 고개 떨어뜨린 유진호를 보며 미간을 찡그리던 유진성은 곧 표정을 바꾸고서 바삐 걸음을 옮겼다. "숙부님." "오, 진성이냐." 유진성이 떠난 뒤에야 유진호는 겨우 고개를 들 수 있었다. 이래서 집에 오기 싫었다. 제사만 아니었어도... 유진호가 한숨을 푹푹 내쉬고 있는데, 뒤에서 곱지만 날선 목소리가 들렸다. "와, 대박. 완전 재수 없어." 유진호가 돌아보았다. 자신보다 한 살 많은 사촌 누나, 유수현이었다. 57 화 "방금 하는 말 들었어? 완전 대박." 어느새 근처까지 다가온 유수현이 유진호의 어깨를 톡톡 쳤다. 유수현의 미간이 곱게 구겨졌다. "이거 봐 봐. 한심하긴, 쯧쯧. 한심하긴, 쯧쯧." 형을 똑같이 흉내 내는 표정에 유진호가 그만 웃음을 터트렸다. "푸흡. 큭. 하지 마. 지금 농담할 기분 아냐." "한심하긴, 쯧쯧." "크흐흐흐, 큭! 아, 좀 그만하라고!" 둘은 나이가 비슷해 친구처럼 지내는 사이였다. 유수현은 유진호 앞에 와 섰다. "왜 그러고 사냐?" "내가 뭘?" "각성자 됐잖아. 설마 각성하고도 일반인을 못 이겨?" "그래서? 형한테 주먹이라도 날리라고?" "그건 뭐 아니라도..." 유수현은 예쁜 입술을 앙다물었다. 유진호가 잘난 형한테 주먹이라도 날렸다간 아버지께 어떤 벌을 받게 될지...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당하고만 있어야 하는 유진호의 심정을 이해 못하는 건 아니었다. 유수현은 유진성이 사라진 곳을 향해 눈을 흘겼다. "하여간 재수 없는 건 여전하네, 저 인간." 유진호만큼 유진호의 형을 싫어하는 게 그녀였다. 스마트한 표정 아래 숨겨진 유진성의 진짜 얼굴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러나 유진호는 동조하지 않았다. 형이라서가 아니다. 이렇게 뒷담화가 아니라 앞에서 정정당당하게 형을 이겨 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유진호가 입을 다물고 있자, 유수현이 조심스레 물어봤다. "저기... 그 계획 아직 유효해?" "응?" "길드 마스터 될 거라며. 저 인간 제치고." 유진호는 대답 대신 미소를 지었다. 말한들 누가 믿어 줄까? 비웃지 않으면 다행이다. 형과 자신의 대결이라니. 그래도 형님이라는 빅 카드를 얻은 덕분에 가능성은 많이 올라갔다. '무사히 마스터 면허를 딴다면...' 승부를 걸어볼 만했다. 아니, 이길 수 있었다. 결의에 찬 유진호의 눈을 본 유수현이 양손을 자기 허리에 얹고 단호히 말했다. "난 죽어도 저 인간 밑으로는 안 들어갈 거야. 너네 아버지랑 싸우기 싫으니까 니가 알아서 잘해." "...고마워." 이게 유수현의 응원 방식이었다. 인기 아역배우 출신에 A 랭크라는 높은 등급을 가진 여헌터. 재벌가의 아가씨라는 배경을 빼고도 유수현에게 눈독 들이는 길드는 별처럼 많았다. 하지만 아쉬울 것 없는 유수현은 모든 제의를 거절하고 간간이 모델 활동만 해 왔다. 그런데 이제 거절하기 힘든 제안이 오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유진길드의 창립 멤버 제의. 유명한 회장의 지시였다. 큰 아버지의 말을 무시할 순 없고, 그렇다고 유진성의 밑으로 들어가기는 싫고. 유수현도 고민이 많았다. 미덥지는 않지만 유진호에게 일말의 희망을 걸어 보는 수밖에. 우우우웅- 우우우웅- 유진호의 주머니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서 유수현이 물었다. "전화 안 받아?" "아." 잠깐 딴생각을 하고 있던 유진호가 그제야 뒤늦게 전화를 꺼냈다. 액정에 뜬 번호가 낯익었다. _형님 발신자를 확인한 유진호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접니다, 형님!" 씩씩하게 전화를 받았다. "네. 네, 형님. 아뇨, 갈 수 있습니다. 네. 금방 가겠습니다, 형님." 유진호는 그렇게 전화를 끊었다. 180 도 바뀐 유진호의 분위기에 유수현이 관심을 보였다. "뭐야? 누구 전환데?" 하지만 여기서 한가롭게 설명이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형님의 부탁 아닌가! 여길 벗어나고 싶은 마음까지 더해서 1 초라도 빨리 나가야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이따 얘기해!" 급하게 달려가는 유진호의 뒷모습을 보고 유수현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저리 신나 있데?" 가족 모임이 있을 때의 유진호는 항상 어깨가 축 처진 모습이었는데 오늘은 달랐다. "...별일이네." 나중에라도 꼭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는 유수현이었다. 한편 유진호는 아버지를 찾아 헤맸다. 곧 저녁 시간. 온 가족, 친척이 모인 식사 시간에 아버지 허락 없이 빠질 수는 없었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유진호. 멀리 사람들 사이에서 대화를 나누고 있는 아버지를 발견했다. 호랑이상의 얼굴. 어지간한 일로는 미소를 잘 보이지 않는 엄한 성격. 유진호에게 아버지는 늘 어려운 상대였다. '아직 말을 꺼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긴장됐다. 하지만 용기를 내야 했다. '약속했으니까.' 유진호는 심호흡을 두어 차례 하고는 천천히 아버지께 걸어갔다. 가는 도중에도 몇 번이나 돌아서고 싶었는지 모른다. 그래도 꾹 참았다. 유진호는 간신히 유명한 앞에 도착했다. "아버지..." 아버지와 아들 사이라고 보기에는 상당히 먼 거리였지만. 유명한의 시선이 유진호에게로 옮겨 갔다. "무슨 일이냐?" 예사롭지 않은 분위기에 유명한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떨어져 나갔다. "아버지, 잠깐 나갔다 와도 되겠습니까?" 아버지를 대하는 유진호의 목소리에는 유난히 힘이 없었다. "저, 저녁 시간 전까지는 돌아오겠습니다." "..." 호통이라도 칠 것 같은 표정으로 서 있던 유명한이 한숨을 삭히더니 마지못해 허락했다. "...갔다 오너라." 유진호는 밝은 얼굴로 꾸벅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그리고 쏜살같이 떠났다. 굳은 얼굴로 유진호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유명한에게 그의 아내가 다가왔다. "여보, 빈에서 연락 왔어요." 마침 기다리고 있던 소식이었다. 유명한이 관심을 보였다. "콩쿠르 결과는?" "우승했대요. 누구 딸인데 당연하죠." 유명한의 얼굴에 나타난 희미한 미소. 그러나 언제 그랬나 싶게 곧 자취를 감추었다. "흠, 한국엔 언제 온다고 합디까?" "학기 내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방학 때나 돼야 올 수 있다네요." 유명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아무리 바빠도 할아버지 제사는 빠지지 말라고 누누이 일러놨거늘." "당신도 참. 요즘 애들이 제사를 그리 중히 여기나요." "쯧쯧." 부인은 조금 흐트러진 유명한의 넥타이를 바로 매 주며 다정히 말했다. "그리고 당신, 진호한테도 신경을 좀 써 주는 게 어때요?" "또 그 소리... 호랑이는 호랑이 새끼를 돌봐야 하는 게요, 고양이 새끼가 아니라." "호랑이든 고양이든 내 배에서 나온 자식이에요. 당신 자식이기도 하고." "흐음..." "그거 아세요? 진호가 중학교 졸업한 이후로 당신 앞에서 처음 웃었다는 거?" 그랬던가? 이채를 띤 유명한의 시선이 유진호가 사라진 방향으로 고정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유명한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했다. "여자 친구라도 생긴 모양이지. 다들 기다리겠소. 우리도 들어갑시다." *** 서울시 구로구에 위치한 헌터협회 본부. 기기를 점검하던 한 직원이 소형 마력측정기 앞에 멈춰 섰다. "뭐야? 이거 왜 이래?" 0 에 멈춰 있어야 할 숫자가 오르락내리락 반복하고 있었다. 완전히 맛이 간 듯했다. 하지만 이내 대수롭잖다는 듯 넘어갔다. 정밀한 기계인 만큼 고장 나는 일은 그리 드문 편도 아니었다. "김군아." "네." 부하 직원이 쪼르륵 달려왔다. "이걸로 층적한 게이트가 몇 군데냐?" "넘버가 어떻게 됩니까?" "N-1744B." 일지를 검색해 보던 부하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엊그제 일곱 군데 돌았습니다." "엊그제? 어디 봐 봐." 정말이었다. 엊그제 정확하게 일곱 군데를 돌았고, 그중 네 개의 게이트가 헌터들에게 닫힌 상태였다. "이걸로 측정한 게이트에서 별문제 없었지?" "네. 별다른 말은 없네요." "그래?" 직원은 수염이 거뭇거뭇한 턱을 북북 긁었다. 원래 마력측정기에서 오류를 발견하면 그 즉시 해당 측정기로 측정한 게이트들은 전부 공략 허가를 취소시킨다. 당연한 일이었다. C 급인 줄 알고 들어간 게이트가 실은 A 급이나 B 급이었다면 헌터들은 어떻게 될까? 결코 무사히 빠져나오지 못한다. 상급 던전은 그런 곳이다. 상급 헌터와 하급 헌터의 경계가 뚜렷하듯 던전도 상급과 하급의 차이가 컸다. 오죽하면 상급 던전은 대형 길드들이 전담에서 맡고 있을까. '지금이라도 공지를 해야 하나?' 뭐 알리는 거야 어렵지 않다. 하지만 허가권을 사 간 팀의 반발도 반발이고, 만약 재측정으로 시간을 끌다가 던전 브레이크라도 터지는 날에는 비난을 피할 수가 없다. 잘못하면 목이 날아갈지도 모른다. '어떻게 들어온 헌터협회인데.' 헌터협회는 공기업급 대우를 받고 있었다. 입사하려면 고시에 맞먹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런 직장을 잃는다고 생각하면 눈앞이 깜깜했다. '안 되지, 안 돼.'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부하 직원도 상관의 고민이 뭔지 대충 눈치챘다. 그래서 조심스레 물었다. "이거... 어떡하죠?" "흠." 벌써 이틀이나 지났다. 문제가 터질 거였다면 벌써 터지지 않았을까? "...내버려 두자." "그, 그래도 되겠습니까?" "뭐, 별일이야 있겠냐? 이틀이나 지났는데." "하긴요." 부하 직원도 고개를 끄떡였다. "보고서엔 N-1744B 어제까지 말짱하다 오늘부터 이상해졌다고 올려." "알겠습니다." *** 백호 길드의 제 2 관리과 과장 안상민. 파를 썰던 안상민이 손질을 멈추고 허리를 곧게 펴자 요란한 소리가 났다. 우두둑- "에고고." 오늘 메뉴는 된장찌개. 자취 생활 8 년 차의 독신 남성답게 이미 어지간한 요리는 마스터했다. 계기는 5 년 전. 인스턴트 음식으로만 배를 채우다 문득 피폐해져 가는 본인의 모습을 발견하고 반성, 살기 위해 요리를 배우기를 결심, 이제는 잠깐 흘러가듯 TV 에 나온 요리도 대충 눈대중으로 만들 수 있을 정도가 됐다. 하지만. 튜닝의 끝은 순정이라도 하던가? 실력이 늘어 갈수록 식탁 위에 올리는 요리는 점점 더 간단한 집 반찬 위주가 되어 갔다. 오늘의 된장찌개처럼. "캬. 이 맛이지." 한 숟갈 맛을 본 안상민이 본인의 실력에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 맛을 볼 수 있는 사람이 하나뿐이라니. 진심으로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식사 초대라도 한 번 해 볼까?' 순간 떠오른 부하 직원의 얼굴이 하나 있었으나 곧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노총각 소리 듣는 것도 지겨운데 남직원을 초대했다가 무슨 오해를 받으려고. '시킨 일은 잘하고 있는지 모르겠네.' 말도 잘 듣고 똑똑한 녀석인데 어딘지 모르게 어설픈 구석이 있단 말이지. '에이, 집에서 무슨 회사 생각이냐.' 밥이나 먹자. 안상민은 된장찌개를 거실에 있는 탁상으로 옮기며 콧노래를 불렀다. 거실에 놓인 TV 를 보며 혼자 저녁을 먹는 게 일상이 됐다. 남자 혼자 식사하기에 부엌의 식탁은 너무 크고 쓸쓸했다. 삑. 리모콘으로 TV 를 틀며 자리에 앉았다. 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오늘의 속보입니다.] 독신 생활의 얼마 되지 않는 장점 중 하나가 바로 누군가와 채널 싸움을 할 일이 없다는 거다. TV 를 틀면 항상 보던 채널이 나온다. 안상민은 벽에 걸린 대형 TV 의 액정 화면을 곁눈질해 가며 밥을 한 숟갈 떴다. [...워싱턴에 위치한 미국 헌터관리국에서 의문의 폭발 사고가 일어나 미국 전역을 충격에 빠트렸습니다. 일각에서는 S 급 헌터들 간의 마찰이 불러일으킨 인재가 아니냐는 소문이 커져 가는 가운데...] "어허... 참 말세다, 말세." 안상민은 안타까운 표정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도 식사 개시를 알릴 반찬을 신중하게 탐색했다. 반찬 종류가 그리 많지는 않았지만. '역시 시작은 김치지.' [...관리국 인근 CCTV 에 촬영된 영상입니다. 갑작스럽게 건물 외벽 일부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뉴스에서 뭐라고 떠들던 수저로 뜬 따끈따끈한 밥 위에 김치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시원한 김치를 올렸다. 그러고는 입으로 가려가려던 순간, 전화벨이 요란하게 울렸다. '아! 또 누구야, 또.' 안상민은 투덜거리며 휴대폰을 들었다가 발신자를 보고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예, 안상민입니다." 전화를 건 사람은 진우였다. 안상민은 밝은 얼굴로 전화를 받았다. 그런데. 진우의 이야기를 듣던 안상민의 표정이 점점 어리둥절하게 변해 갔다. "예? 신입 헌터 훈련 현장을 견학할 수 있냐고요?" 58 화 '됐다.' 진우는 전화를 끊었다. 처음엔 당황하던 안상민 과장도 사정을 듣더니 흔쾌히 오케이 했다. 덕분에 백호 길드 신입들의 레이드를 구경할 수 있게 되었다. '차도 빌렸고.' 유진호가 바쁜 와중에도 나와 주었다. 잠시 빠져나온 거라며 깍듯하게 인사하고 급하게 돌아가는 뒷모습을 보니 참 기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준비는 끝났다. 지금 진우는 그 문제의 학생이 산다는 아파트 단지 앞에 서 있었다. '우리 집이랑 가깝네?' 걸어서 2 분.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였다.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낡은 아파트들이 오밀조밀 밀집된, 좁은 동네. 그 애의 집안 형편 또한 그리 넉넉하지는 못하다는 뜻이었다. 헌터가 됐다고 들뜨는 심정도 이해는 갔다. 한때는 진우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그런 녀석들이 제일 먼저 죽는다.' 본인도 숱하게 다쳤다. 까딱하다 죽을 뻔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어머니가 희귀병에 시달리지 않으셨다면 절대 안 했다. E 급 헌터에게 던전이란 너무 잔혹한 곳이었다. 이대로 놔두면 분명 그 친구는 헌터가 된 걸 후회하게 된다. 어쩌면 후회할 시간도 없이 목숨을 잃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드문 일은 아니지.' 헌터가 죽고 다치는 사고야 하루에도 수십 번은 일어나닌가. 그들 모두를 말릴 수도 없고, 그래야 할 이유도 없다. 각자가 선택한 길 아닌가. '하지만.' 아예 얼굴도 모르는 사이면 모를까 그 문제아의 이름을 듣는 순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진우에게도 낯설지 않은 이름이었다.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어 올리니 마침 그 문제아가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동그랗게 말아 올린 머리, 약간 까칠해 보이는 눈매. 아는 사람이 맞다. "어?" 여고생이 진우를 발견하고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저씨가 왜 여기 있어요?" 진우가 그랬듯이 여고생 또한 한눈에 서로를 알아보았다. '세상 참 좁다니까.' 진우를 검지로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헌터가 되겠다는 여고생. 유진호 공대팀의 유일한 여성 멤버이자 미성년자로, 나이 때문에 팀에 넣어도 괜찮을까 걱정됐던 애였다. -애를 데려와도 괜찮냐? -자문을 받아 봤는데 법적으로는 아무 문제가 없답니다. 그냥 사고가 터지면 문제가 엄청 커져서 잘 안 쓸 뿐이랍니다. '한송이.' 진아의 담임에게 그 이름을 들었을 땐 만감이 교차했었다. 혹시나 몰라 확인해 봤다. 한송이가 학교를 빠지기 시작한 시기도 유진호 공대팀이 레이드를 시작한 시기와 일치했다. 이쯤 되니 마냥 남의 일로 치부해 버리기도 조금 애매해졌다. 일종의 책임감 같은 거다. 괜히 세상 물정 모르는 학생한테 큰 돈을 쥐여 줘서 헛바람이 자리 잡는데 일조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하나는 확실하지.' 언제가 됐든 한송이가 던전에서 죽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면 이유를 불문하고 찝찝해질 거란 사실. 잘못한 것도 없는데 잠자리가 뒤숭숭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딱 오늘 하루만 시간을 내주기로 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니까. "어떻게 된 거예요?" 한송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우를 올려다보았다. 그러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설마 선생님이 소개해 주고 싶다는 헌터가 아저씨?" 자꾸 아저씨라고 하는 게 좀 신경이 쓰이긴 했지만 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자. "선생님이 뭐라고 하셨는지 모르겠는데 전 이제 학교는 관심 없어요. 헌터를 관둘 생각도 없고요." 한송이가 딱 잘라 말했다. 공격대에 있을 땐 조용한 아이였는데 자기 이야기가 나오자 태도가 변했다. 주관이 뚜렷한 요즘 애들답다고 할까? '그런데 그 주관이 뚜렷한 요즘 애라는 거 우리 집에도 하나 있거든.' 진우가 씩 웃었다. 나름 강하게 나간다고 나갔던 한송이는 예상과 전혀 다른 진우의 반응에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진우는 담담히 말했다. "나도 관두라고 말할 생각 없어." 한송이의 눈이 커졌다. "네?" 이런 애들은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려 드는 법이다. 처음부터 대화로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없었다. 그냥 딱 한 번만 현실을 보여 주기만 하면 된다. '나도 그랬으니까.' 첫 레이드 때 깨달았다. 현실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잔인하고 냉정하다는 사실을. 한송이는 최대한 당혹감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물었다. "그, 그럼 여긴 왜 오신 거예요?" 진우가 한 발짝 다가갔다. 한송이는 깜짝 놀라 뒷걸음질 치려다 겁먹은 것처럼 보일까 봐 억지로 참아 냈다. 한송이 앞에 선 진우. 의도하지 않았고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널 훌륭한 헌터로 만들어 주려고." *** 던전에 가자고 힘들게 꼬드길 필요도 없었다. 무려 '백호 길드'의 신입 훈련을 바로 옆에서 볼 기회가 있는데 어쩔 거냐고 묻자마자 좋다고 따라왔다. 진우의 말을 의심도 없이 믿는 눈치였다. 아저씨가 어떻게 선생님을 아느냐는 질문에 진아와 함께 투샷으로 찍은 사진을 보여 준 게 컸다. "아저씨가 진아 오빠였어요?" "..." 아까부터 단어 하나가 묘하게 거슬리고 있었지만 다 계획대로 잘돼 가는 터라 참고 넘어가 줬다. "타." "감사합니다!" 진우는 한송이를 태우고 백호 길드의 저녁 훈련이 있을 장소로 이동했다. 9 시에 훈련을 시작한다고 했으니 아직 시간은 충분했다. 부르릉. 두 사람만 타기에는 너무 큰 검은 승합차가 도로 위를 미끄러지듯 달렸다. 민첩과 감각이 올라서일까? 면허만 따 놓고 차를 굴려 본 적도 없는데 운전이 어렵지 않았다. 조금만 집중해도 차들이 굼벵이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능력치 스탯이 여러모로 편리하네.' 옆에서 한송이가 물었다. "진아는 진짜 집에서도 하루 종일 공부만 해요? 소문에는 벽지 대신 사전을 찢어 붙여서 잘 때도 단어 외우면서 잔다던데." 진아한테 그런 소문이 있었나? 집에선 그냥 치킨 좋아하는 잠순이인데. "진아도 너희랑 같아. 집에 오면 놀고, 먹고, 자." 주로 자지만. "에이... 거짓말. 그런데도 성적이 그렇게 나와요?" "나도 안 믿긴다니까. 중학생 때 나하고 같이 오락실이나 다니던 앤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금방 게이트 근처에 도착했다. 진우는 차를 세웠다. 끼익. 게이트 집중 생성 구역으로 지정된 동네였다.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아서 차를 대기는 편했다. 듣기론 주택 8 할이 폐가라고. 남은 사람이 다 떠나고 나면 구역 전체를 폐쇄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탁, 탁. 진우와 한송이가 차에서 내렸다. 내려서 주변을 둘러보니 음산한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우우우어쩐지 발밑 그림자 속에서 환호성이 들린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적막한 분위기에 조금 겁먹은 거 같았던 한송이도 멀리 모여 있는 헌터들을 보고는 금방 기운을 되찾았다. 눈이 반짝거리는 게 꼭 연예인들을 보는 것 같았다. '하긴 초대형 길드 백호의 헌터들이니.' 헌터를 동경하는 학생에게는 연예인이나 다름없나? 방송에서 보여 주는 헌터들의 모습을 생각하면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오, 진짜 오셨네요." 진우를 발견한 현기철이 뛰어왔다. "저 기억하시죠?" 진우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현기철의 미소가 영업용이 아니라 진짜 반가워해서 나온 거라는 게 느껴져 진우도 절로 웃음이 나왔다. 몇 번 안 봤지만 성격은 참 좋은 사람인 듯했다. "과장님께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아, 이 학생이 그?" "안녕하세요." 한송이가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가볍게 인사를 나누고 있는데 근육질의 덩치가 와서 신경질적으로 툭 쏘아붙였다. "잡담은 고만하고 슬슬 시작합시다. 어디 소풍온 것도 아니고, 벌써 9 시 다 됐으니까." 그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다시 게이트 앞으로 돌아갔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 진우는 현기철에게 물었다. "누굽니까?" "아, 요번에 새로 들어온 A 급 신인인데, 양해를 부탁드렸더니 기분이 좀 상한 모양이에요. 던전에 놀러 가는 거냐고." "A 급?" 현기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콧대 높은 A 급이라면 그럴 만했다. 진우는 다시 물었다. "이번 공격대 멤버들의 수준이 어떻게 되죠?" "A 급 한 명, B 급 일곱 명, C 급 네 명으로 전부 12 명입니다." "C 급 게이트를 공략하는데 A 급, B 급을...?" "등급이 높긴 해도 신인은 신인이니까요. 일단 던전 경험을 쌓게 만드는 겁니다." 현기철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딱 하루, 오늘 훈련을 마치면 바로 상급 던전으로 투입하게 될 즉시 전력감이라는 말도 덧붙였다. '그래도 A 급 하나에 B 급이 일곱이라니.' 진우의 눈빛이 달라졌다. 사실 안상민 과장이 오케이 한 이유가 바로 이거였다. 백호 길드의 뛰어난 신인들을 보여줘서 진우의 마음을 백호 쪽으로 한 번 돌려 보려고. 하지만 안상민이나 현기철의 기대와 달리 진우는 실망스러운 눈빛으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게이트 판정은 C 급. 그에 비하면 멤버가 너무 화려하다 못해 눈이 부신다. '레이드가 너무 쉬우면 효과가 떨어질 텐데.' 그게 걱정이었다. 하지만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직접 보면 느낄 수 있겠지.' E 급 헌터가 던전에 들어가면 얼마나 무력해지는지.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저희는 언제 들어가요?" 진우의 진짜 의도를 전혀 모르는 한송이는 어서 들어가자고 보채 왔다. 옆을 돌아봤더니 잔뜩 상기된 얼굴이었다. '언제까지 들뜰 수 있나 보자.' 진우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고서 현기철에게 말했다. "저희도 가 보겠습니다." "아, 네." 현기철이 주변을 둘러보더니 진우에게 살짝 귓속말했다. 속닥속닥. "저기, 성진우 헌터님이 나서면 너무 레이드가 쉬워지니까 오늘은 구경만 해 주세요." 견학이 목적이었으니 당연한 이야기였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내일부터는 또 유진호와 함께 C 급 인던을 신나게 돌게 될 텐데 백호 길드의 훈련을 방해해서야 쓰나. 다만 유진호와 있을 때는 그림자병사들을 써서 던전들을 공략할 계획이어서 한송이를 이리로 데려왔다. '굳이 이런 일에 그림자병사들을 공개하고 싶지도 않고.' 그림자들로 쉽게 마수들을 때려잡는 걸 보이면 오히려 한송이의 환상이 더 심해질지도 모르니까. 진우와 한송이. 두 사람은 게이트 앞으로 갔다. 아까 A 급 헌터와 달리 의외로 반기는 사람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어차피 수익을 목적으로 한 레이드가 아니어서, 사람 수가 많으면 많을 수록 좋은 일이었다. 관례대로 서로 소개를 나누었다. A 급 헌터의 차례가 돌아오자. "나는 됐어." 그는 먼저 게이트로 들어가 버렸다. "우리도 들어가죠." 백호 길드 신입들이 하나둘 게이트로 들어갔다. 한송이가 들어가기 직전 진우를 돌아보았다. "아저씨는요?" 진우는 팔짱을 끼고 대답했다. "너 들어가는 거 보고." 한송이는 잔뜩 긴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안으로 뛰어들었다. '흠.' 진우는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게이트 앞에 섰다. 시선이 느껴져서 돌아보니 현기철이 손을 흔들며 응원을 보내고 있었다. '...' 시선을 다시 게이트로 옮겼다. 그런데. '...?' 게이트 표면의 울렁임이 멈추지 않고 있었다. '사람이 들어가고 나면 다시 검은 막처럼 고정돼야 하는데?' 지금은 물결처럼 요동치고 있었다. 뭔가 다르다. 진우는 손끝으로 표면을 찍어 보았다. 쭈욱. 표면이 마치 끈끈한 액체처럼 손가락 끝에 붙어 딸려 올라왔다. '설마...?' 진우가 고개를 돌렸다. 진우와 현기철의 시선이 마주쳤다. 현기철도 그제야 뭔가 이상하다는 걸 느꼈다. 진우가 소리를 질렀다. "메인 공격대에 전화해요, 당장!" 그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우는 게이트에 빨려 들어갔다. "뭐, 뭐야 저거?" "혀, 현 대리님!" 현기철이 게이트 앞으로 달려갔다. 백호 길드의 직원들 셋도 다급히 그 뒤를 따랐다. 게이트 앞에 선 현기철이 경악했다. "마... 말도 안 돼!" 헌터들만 신인이 아니다. 직원들도 교육을 위해 신입들로 데려온 것이다. 당연히 이런 일은 생소했다. 직원들이 토끼 눈을 뜨고 현기철을 돌아보았다. "대, 대리님! 게이트 표면이 빨간색으로 변하고 있어요!" 핏방울을 떨어뜨린 것처럼, 게이트 표면에 붉은색이 번지고 있었다. 현기철은 직원들을 무시하고 어디론가 다급히 전화를 걸었다. 딸깍. -어, 기철아. "과장님! 레드 게이트입니다! 지금 애들이 들어간 게이트가 레드 게이트로 변했어요!" -뭐? 안상민의 목소리가 과격해졌다. -무슨 소리야? C 급에서 어떻게 레드 게이트가 나와! 현기철은 고개를 들어 완전하게 붉게 변한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이미 표면의 파동은 멈춰있었다. 현기철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분명 레드 게이트입니다." -뭐!? 59 화 "레드 게이트라니, 그게 무슨 소립니까?" 백호 길드의 사장 백윤호는 연락을 받은 즉시 현장으로 달려왔다. 훈련 담당자 현기철의 얼굴은 흙빛이었다. "그게..." "일단 한 번 봐야겠습니다." 백윤호는 초상집 분위기의 직원들을 지나쳐 게이트 앞에 섰다. '진짜 레드 게이트다!' 백윤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레드 게이트가 무엇인가? 들어가면 다른 세계로 연결되어 그곳의 보스를 잡거나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때까지 돌아올 수 없는 무서운 곳이었다. 일단 한번 발을 들이면 끝. 붉은색으로 변한 게이트는 외부로부터의 영향이 완벽히 차단된다. 안에서 나오는 것도,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불가능했다. 백윤호가 게이트 표면을 짚어 보았다. 역시나 단단히 막혀 있었다. '야단났군.' 이제는 무슨 수를 써도 안의 사람들에게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백윤호는 현기철에게 물었다. "C 급 게이트 아니었습니까?" "C 급 게이트였습니다." "협회에 연락은 해 봤고요?" "네. 그런데... 협회 쪽에서는 분명 C 급 게이트였다고 자꾸 발뺌을..." "이 개자식들이!" 백윤호가 욕지기를 내뱉었다. 레드 게이트는 상급 던전에서만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게이트 너머에 다른 세계가 있는데 거기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겨우 C 급 던전 수준밖에 안 된다고? 애초에 말도 되지 않는 억지였다. 눈앞의 게이트는 최소한 B 급. 운 나쁘면 A 급, 혹은 그 이상일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협회에서 이렇게 배짱을 부릴 수 있는 이유는. "저희가 가진 마력 측정기로 다시 측정해 볼까요?" 현기철의 질문에 백윤호가 고개를 저었다. "레드 게이트에선 마력이 전혀 새어 나오지 않아서 측정이 안 됩니다." 재측정이 어렵기 때문이었다. 문제가 일어난 게이트가 정확히 어떤 등급인지 현재로선 알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게이트의 등급이 아니었다. "안에 우리 애들 몇이나 들어갔습니까?" "12 명 들어갔습니다." "그중에서 상급 헌터는 몇 정도 되지요?" "A 급 김철 헌터님이 리더를 맡고 있고, B 급 헌터님들이 일곱 분이십니다." "A 급 하나에 B 급 일곱이라..." "신입분들... 괜찮을까요?" 백윤호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 죽었다고 봐야 합니다. 운이 좋다면 A, B 급 둘 셋쯤은 살아 나오겠죠." 말 그대로 운이 아주 좋다면 말이다. 그만큼 아슬아슬한 숫자였다. 지금 들어간 멤버들이라면 B 급 던전 중에서도 최하급 레벨을 간신히 클리어할 수 있을 수준. 그 이상은 절대 무리다. 기적이 있지 않은 이상 신입들이 무사히 돌아올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백윤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사장의 눈치를 살피던 현기철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 실은 우리 신입들 말고 안에 들어간 사람이 또 있습니다." 백윤호가 고개를 들었다. 혹시 우연히 근처를 지나가던 상급 헌터가 직원 교육에 호기심이라도 생겨 같이 들어갔나? 기적이 다른 게 아니다. 바로 이런 게 기적! 백윤호의 목소리가 커졌다. "그게 누굽니까?" "최근에 제가 가장 눈여겨보고 있는 헌터입니다." 대답은 옆에서 들려왔다. 백윤호와 현기철이 동시에 돌아보니 땀으로 범벅된 안상민이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늦어서 죄송합니다. 차가 막히는 바람에." 집이 멀었던 탓에 안상민이 가장 늦게 도착했다. 힐끔. 안상민은 게이트를 곁눈질했다. 붉게 물든 게이트가 철옹성의 입구처럼 느껴졌다.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혔다. '하지만 성진우 헌터라면...' 숱한 사고를 헤쳐 나왔던 그 남자라면 모두의 예상과 다른 결과를 만들 수 있을지도 모른다. 막연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백윤호가 급히 안상민에게 다가왔다. "안 과장이 눈여겨보고 있던 헌터라고요?" "그렇습니다." 아. 백윤호에게 언뜻 스쳐 가는 기억들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어쩐지 요즘 안 과장이 바쁘게 돌아다닌다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노리고 있는 헌터가 있었던 거였다. 안 과장의 눈은 틀림이 없다. '혹시...' 백윤호의 가슴속에 희망의 불씨가 타올랐다. "그 헌터 랭크가 어떻게 됩니까? A? 아니면 B?" S 라면 자신이 모를 리 없으니까. 한국에 있는 S 급이라고 해 봐야 고작 10 명 남짓이 전부였다. 그런데 안상민이 고개를 젓는 게 아닌가? '맙소사!' 내내 굳어 있던 백윤호의 얼굴이 한순간에 풀어졌다. "그럼 S 급 헌터가 같이 들어갔단 말입니까?" 안상민은 차분하게 대답했다. "아니요. E 급입니다." 백윤호의 얼굴이 벌레 씹은 듯 변했다. *** 진우는 당황했다. '설마 이게 이세계로 이동하는 게이트인가?' 실제로 보는 건 처음이었지만 인터넷에서 경험담은 읽어 본 적 있었다. 모두들 빨려 들어간다는 표현을 썼다. 진우도 동의했다. 게이트가 덮치고 나자 깊은 어둠이 찾아왔고, 어디론가 미끄러지듯 이동하는 기분이 들었다. '헉!' 눈을 떴을 때는 하얗게 눈이 덮인 숲에 서 있었다. "여긴 어디야?" "던전 안이 아닌 거 같은데?" "게이트도 사라졌어!" 헌터들은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모두가 당황해하는 사이, 진우는 눈을 가늘게 뜨고서 주변을 살폈다. '수상한 기척은 없다.' 시스템에 단련된 덕분에 외딴곳에 떨어져도 금방 침착해질 수 있었다. 일단 눈에 들어오는 건 나무. 한국에서 보기 힘든 커다란 침엽수들이 빽빽하게 군집을 이뤄 하늘을 향해 뻗어 있었다. 나무 위에 가득 얹혀 있는 눈들이 위태로워 보인다고 생각하며 시선을 아래로 내린 순간.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진우와 마찬가지로 사주를 경계하던 A 급 헌터 김철이었다. '...' '...' 잠시 서로를 노려보던 두 사람이 이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한송이가 옷깃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저기... 지금 우리들 뭔가 잘못된 거죠?" 겁먹은 눈동자. 당당한 척하던 태도는 이제 온데간데없었다. 진우가 갑자기 한송이의 얼굴을 향해 손을 훅 뻗었다. '...?' 한송이의 눈이 커졌다. 텁! 진우의 손에 붙들린 화살이 표적을 맞히지 못해 원통하다는 듯 부르르 몸을 떨었다. 한송이의 미간을 노리고 날아든 화살이었다. "아, 아..." 겨우 상황을 파악한 한송이의 얼굴이 파랗게 질려 갔다. 그런데 비명은 다른 곳에서 들렸다. "꺄아아아악!" "으, 으악!" 털썩. 관자놀이에 화살이 박힌 남자 헌터가 피거품을 물고 쓰러졌다. 눈 위로 피가 번져 나갔다. "으, 으으..." 헌터들은 신음을 흘렸다. 한송이를 노린 것과 동시에 날아온 화살이었다. 덕분에 진우가 화살을 낚아채는 장면을 아무도 보지 못했다. "저기다!" "저놈들이야!" B 급 헌터 하나가 까마득히 멀리 떨어져 있는 나무 위를 가리켰다. 그의 손가락이 가리키기 훨씬 전부터 진우와 김철의 시선은 이미 그리로 향해 있었다. 거기에는 두 명이 서 있었다. '두 명? 아니, 두 마리라고 해야 하나.' 백발과 흰 피부에 은색 눈. 그리고 종족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뾰족한 귀. 특유의 아름다운 외모와 상급 던전에서만 볼 수 있다는 희귀성 때문에 꽤 유명한 마수들이었다. '아이스 엘프.' 혹은 백귀. 놈들을 만나 보지 못한 이들은 주로 아이스 엘프라는 단어를 썼고, 놈들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헌터들은 하나같이 백귀라 불렀다. 엘프 같이 아름다운 이름은 녀석들과 어울리지 않는다면서. 진우는 선배 헌터들이 왜 백귀들에게 이를 부득부득 갈았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웃고 있다.' 두 놈은 활을 내리고서 헌터들을 향해 징그러운 웃음을 보내왔다. 마치 먹음직스런 음식을 눈앞에 두고 어느 걸 먼저 먹어야 할지 고민하는 것처럼. '그 고민의 결과가 이거냐?' 진우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가장 좌측에 한 발. 그리고 가장 우측에 또 한 발. 우연이 아니었다. 호살에 맞은 헌터는 얼마 전 C 급으로 각성했다는 30 대 남자. 한송이를 제외하면 일행들 중 가장 약했던 이였다. 그리고 다른 한 발은. '한송이를 노렸지.' 제일 약한 두 사람을 노리고 쐈던 거다. '시스템이 아니었다면 내 머리에 가장 먼저 화살이 꽂혔겠지.' 백귀들의 얕은 계산이 진우의 심기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진우는 백귀들이 볼 수 있게 손을 내밀고서 화살을 아작 냈다. 콰직! 그걸 도전으로 받아들였는지 화살을 쏜 백귀가 진우를 향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피식. 진우는 웃었다. 그러나 눈은 웃고 있지 않았다. '...너는 내 손으로 죽인다.' 마수의 같잖은 도발에 진우는 대답 대신 싸늘한 시선을 보냈다. 곧 백귀들이 나무 아래로 사라졌다. "아무래도 우릴 반기는 건 아닌 거 같군." 드디어 김철이 입을 열었다. 유일하게 A 급인 그가 입을 열자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그에게로 시선을 집중했다. 사실 그는 이번 공격대의 리더이기도 했다. "지금쯤 알아차린 사람이 있을지도 모르겠군. 여긴 레드 게이트 안이다." 김철은 당연하다는 듯이 말을 놓았다. 물론 불평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 말은 우리 모두가 죽거나 던전 브레이크로 게이트가 열릴 때까지는 아무도 여기 들어올 수 없다는 거지." 모두가 나직한 신음을 터트렸다. "으음." "으..." 혹시나 모를 구조의 손길이 기대할 수 없다는 사실이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김철은 말을 이었다. "여기 있다간 얼어 죽던가 놈들의 습격에 당한다. 난 혼자서라도 여길 클리어하고 밖으로 나가겠다. 같이할 사람 있나?" 김철의 강한 눈빛과 넓은 어깨가 유난히 더 믿음직스러웠다. 잠시 서로의 눈치를 보던 헌터들이 이구동성으로 함께할 의사를 밝혔다. "같이 가죠." "저도 끼겠습니다." "살아서 돌아갑시다." "저도 돕겠습니다!" 하지만 김철은 돕겠다고 다가오는 남자 헌터의 가슴을 밀쳐 냈다. "컥!" 힘 조절을 한다고 하긴 했지만 A 급의 완력이었다. 남자 헌터는 뒷걸음질 치며 가슴에서 올라오는 통증에 미간을 찡그렸다. "너는 빼고." "예?" "그리고 너, 너, 너, 너도." 김철은 남자 말고도 몇 사람을 더 가리켰다. 그중에는 진우와 한송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순간 진우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모두 다섯 명. C 급 이하 헌터들이었다. "안 됐지만 너희들까지 데려갈 수는 없다." "뭐라고요?" "레드 게이트에 대해서 아는 게 있나?"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여기서 하루가 바깥의 1 시간이다. 최악의 경우 던전 브레이크나 보스를 잡기까지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혹까지 붙이고 다닐 수는 없어." "우리가 혹이라고요?" 김철에게 호명된 헌터들이 일제히 발끈했으나 김철이 눈을 부릅뜨자 모두 입을 다물었다. 김철은 선심 쓰듯 말했다. "너무 섭섭해하지 말도록. 우리가 보스를 처치할 때까지 살아남으면 너희도 무사히 돌아갈 수 있는 거니까." "아무리 그래도..." 호명된 헌터들은 김철 곁으로 간 헌터들에게 도와 달라는 눈빛을 보냈으나 아무도 나서는 이가 없었다. 다들 시선을 피하기 바빴다. 그때. "저기요." 김철 팀에 있는 B 급 여자 헌터 하나가 손을 들었다. '...?' 김철이 돌아보자 여자가 진우를 가리켰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가는 건 되죠?" "...맘대로." 여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진우 옆으로 왔다. 김철은 여자와 진우를 번갈아 보며 코웃음 치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여기 한 자리 남으니 그쪽에서 딱 한 명만 더 받아주겠어." "저, 저요!" 아까 김철에게 밀려났던 남자 헌터가 행여 김철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봐 후다닥 뛰어갔다. 저게 정상이었다. 진우도 그렇게 생각했다. '이 여자가 이상한 거지.' 진우는 자기 옆에 선 여자를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진우와 눈이 마주친 여자는 남들이 못 듣게 자그마한 소리로 말했다. "김철 저 사람, 화살이 날아오는 거 보지도 못했어요." 상급 헌터라고 모든 스탯이 다 높을 수는 없다. A 급이지만 민첩 스탯이 낮을 수도 있다. 스탯 개념을 아는 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래서요?" 그러자 여자가 싱긋 웃었다. "당신, E 급 아니죠?" 60 화 레드 게이트 앞. 백윤호의 표정은 어두웠다. 안상민이 성진우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해 줬지만 불안감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결국 추측뿐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합니다." 안상민은 순순히 인정했다. 아직 성진우에 대해 증명된 건 아무것도 없는 게 사실이니까. '사장님도 성진우 헌터를 직접 보셨으면 이해하셨을 텐데.' 성진우는 분명 뭔가가 달랐다. 그 점을 어떻게 말로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안상민 본인도 답답했다. 백윤호의 시선이 슬쩍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그럼 역시 믿을 사람은 김철뿐..." 그때였다. "김철은 문제없을 겁니다." 백윤호, 안상민, 현기철이 있는 자리에 한 사람이 더 끼어들었다. 세 사람의 고개가 동시에 그에게로 향했다. 제 1 관리과 과장 주성찬. 그는 세 사람을 둘러보더니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어떤 사고에도 대비할 수 있도록 김철 헌터에게 강도 높은 교육을 시켜 놨습니다." 원래 신입 헌터들의 교육은 제 2 관리과가 전담하지만, A 급 이상의 각성자는 제 1 관리과가 직접 교육을 맡았다. 정예 공격대에 들어가는 인재는 출발점부터 다른 것이다. 주성찬의 강한 자신감에 백윤호의 표정이 약간 풀어졌다. "김철 헌터의 성적은 어땠습니까?" "아주 훌륭합니다. 전투력 자체는 현재 백호 길드의 정예 공격대 멤버들과 비교해도 전혀 뒤처지지 않습니다." "그래요?" 백윤호는 겨우 미소를 되찾았다. 김철은 A 급. 상급 헌터들 중에서도 놓쳐서는 안 될 재목. 이번 공격대의 리더인 그가 B 급 헌터들을 잘 통솔해서 던전을 클리어할 수만 있다면! C 급 헌터들의 피해야 좀 있겠지만 백호 길드 입장에서는 무엇보다 상급 헌터들의 생환이 중요했다. '다행히 김철 헌터의 능력이 출중하다고 하니...' 사그라졌던 희망의 불씨가 다시 살아났다. 사장을 안심시킨 주성찬은 옆의 안상민을 흘겨보았다. "방금 듣자 하니 뭐, 재각성 가능성을 보이는 E 급 헌터? 그런 얘기를 하시던데..." 주성찬이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콧방귀를 꼈다. "그따위 근본도 없는 헌터보다는 우리 김철 헌터가 훨씬 더 쓸 만할 겁니다." 안상민의 표정이 굳어졌다. 노골적인 무시. 하지만 굳이 언성을 높이며 얼굴을 붉히지는 않았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결과가 나와보면 알겠지...' 네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동시에 헌터들이 갇혀 있는 레드 게이트를 올려다보았다. 우우우레드 게이트의 붉은빛이 오늘따라 더 불길하게 보였다. *** "당신, E 급 아니죠?" 여자의 당돌한 질문. 진우는 말했다. "그럼 나도 하나 물어봅시다." "얼마든지요." 진우의 시선이 김철과 그의 주변에 모인 헌터들을 향했다. 출발 전인 그들은 계획을 짜고 있었다. "당신들, 신입들이면서 어떻게 이렇게 침착한 겁니까?" "우리가 제일 먼저 교육받는 게 '던전 안에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라서요." 던전 안에선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 여기 있는 누구보다도 그 말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진우였다. "우리 모두 교육을 받았어요. 특히 저기 있는 김철 저 사람은 아예 특수 교육을 받았죠. 백호 정예 공격대에 들어갈 예정이어서요." 교육을 받았기에 던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진우는 황당했다. 그리고 이들도 한송이와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말로는 교육받았다, 어쩐다 하지만 그게 무슨 소용이 있을까? 던전의 무서움을 하나도 모르고 우쭐대는 것이다. '아는 것과 겪은 것은 전혀 다르다.' 특히 던전을 알고 있다는 자신감에 조금이라도 금이 가는 순간, 구멍 뚫린 둑이 터지며 물이 쏟아져 들어오듯 와르르 무너지리라. 쌓은 건 어렵지만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다. 어쩐지 김철 팀의 앞날이 보이는 듯했다. 겉은 멀쩡해 보여도 이들 역시 어쩔 수 없는 초짜들이었다. "아직 대답 안 하셨어요." "네?" 진우의 시선이 다시 이상한 여자에게로 옮겨 갔다. "제 질문의 대답요." E 급이 맞냐 아니냐는 질문. 생각보다 집요한 여자였다. "그걸 왜 말해 줘야 합니까?" 퉁명스러운 말이 나왔지만 여자, 박희진은 속으로 주먹을 움켜쥐며 쾌재를 불렀다. 나름 많은 사람을 만나 본 박희진은 저 반응이 뜻하는 게 무엇인지를 안다. 그건 자신감이었다. '역시 내가 본 게 맞았어!' 거기다 확신하는 이유는 또 있었다. 백호 길드에서 교육받았을 때 상급 헌터들의 움직임을 꽤 봤다. 하지만 아까 진우의 손. 화살을 잡을 때의 손처럼 빠른 동작은 어디서도 본 적이 없었다. '내 눈으로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간신히 확인만 가능했을 정도였어.' 운동선수 출신에 전투계열로 각성해서 동체시력에는 자신 있는 편이었는데도 말이다. 박희진은 눈을 반짝였다. '이 남자는 적어도 A 급 이상.' 아니, 어쩌면... 박희진이 원하는 답을 이끌어 내기 위해 다시 물었다. "그러지 말고 말해 주시면 안 돼요?" "일 없습니다." 잡담은 여기까지. 진우는 고개를 돌렸다. 괜히 이리저리 문답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고, 무엇보다 김철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김철과 진우의 시선이 마주쳤다. "우리는." 김철의 목소리는 너무 굵고 낮아서 실제 의도가 어떻든 간에 매우 위협적으로 들렸다. "길 쪽으로 간다." 단순히 자기네들의 이동 경로를 보고하러 온 것은 아니었다. 김철의 눈이 너희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고 묻고 있었다. 우리를 따라 오지 말라는 숨겨진 뜻과 함께. '...' 진우는 주변을 둘러보다가 다시 김철에게 시선을 주었다. "우리는 숲 쪽으로 간다." "...행운을 빌지." 진짜 행운이 필요한 쪽은 너희들 같지만. 진우는 말을 아꼈다. "너희도." 진우 팀은 숲 쪽으로 이동했다. 그들의 모습이 수풀 속으로 사라지는 걸 확인하자마자 김철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멍청이들." "네?" "저길 봐." 김철은 팔짱 끼고 있던 손을 풀어 숲의 나무들을 가리켰다. 한두 군데가 아니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마다 거대한 짐승이 할퀴어서 만든 것 같은 자국이 있었다. "저... 저건!" "곰이다." "아이스 베어(Ice bear)!" 맹수형 마수들 중에서도 특히나 위험하다는 곰과의 마수들! 놈들의 영역표시였다. 김철 팀의 헌터들이 그걸 보고서 혀끝을 찼다. "쯧쯧." "차라리 여기서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으면 될 것을." "앞장서서 나선 E 급 하나 때문에 애꿎은 사람들 다 죽게 생겼군." "E 급이 제대로 된 교육이나 받았겠습니까?" 김철은 숲을 향해 조소를 날렸다. '그럼 그렇지. E 급 따위가.' ...가만. 갑자기 김철의 미소가 사라졌다. '저쪽 팀에는 C 급이 대부분이고, 심지어 B 급까지 있었는데...' 그런데 어째서 자신은 진우를 대장으로 생각하고 있었을까? 지금 막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때까지 전혀 위화감이 없었다. 김철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어때.' 곧 죽을 놈인데. 얼마 버티지도 못할 약자들 일보단 자신들의 일을 생각하는 게 더 급했다. 죽을 사람은 어쩔 수 없지만 살 사람은 살아야 할 것 아닌가? 김철이 길 쪽으로 돌아서며 목에 힘을 주었다. "출발." *** 진우가 앞장서 걸었다. 그런데 얼마 못 가 박희진이 진우의 앞을 가로막았다. "뭡니까?" "당신 미쳤어요?" 진우는 불쾌한 기색을 숨기지 않으며 팔짱을 꼈다. 다음 단어는 신중히 고르라는 경고였다. 진우의 의도가 전해졌는지 박희진은 목소리를 낮췄다. "미안해요. 하지만 이 말은 꼭 해야겠어요." 박희진의 손끝이 주변의 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저거 보여요?" 나무에 남은 거대한 손톱자국. "저기도! 또 저기도!" 멀쩡한 나무를 찾기 힘들 정도로 주변의 나무들은 죄다 껍질들이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다. "온통 곰의 영역표시로 도배되어 있잖아요! 이 숲 전체가 곰 마수의 서식지란 말이에요!" 개나 원숭이는 호랑이나 사자보다 약하다. 마수도 마찬가지였다. 개나 원숭이 형태의 마수보다 호랑이나 사자 형태의 마수가 훨씬 더 상대하기 까다로웠다. 그렇다면 곰은? 곰, 그중에서도 백곰은 최강의 육식동물로 손꼽히는 종이었다. 지금 진우 팀은 그런 끔찍한 맹수를 기반으로 한 마수들이 사는 장소에 발을 들인 것이다. 박희진이 열을 낼 만했다. "지금 당장이라도 돌아가야 돼요! 마수들이 몰려오기 전에!" 쯧쯧. 진우가 혀를 찼다. '뭐지?' 박희진은 진우가 화를 내거나, 놀라거나, 순순히 받아들이거나 셋 중 하나의 반응을 보이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섣부른 선택에 일침을 놓은 건 분명히 자신인데, 오히려 진우가 한심하다는 눈빛으로 이쪽을 봤다. '왜, 왜 저런 눈으로 보는 거야?' 박희진은 수치심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뭐, 뭐죠?" 목소리가 다시금 올라갔다. 진우는 한숨을 푹 내쉬더니 입을 열었다. "영역표시가 없는 나무를 찾아보기가 힘드니, 아이스 베어도 한두 마리가 아니라는 거겠죠?" "그, 그러니까 빨리 돌아가야..." "그래서 숲으로 이동하는 겁니다." "네?" 박희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렇게 해 줘도 못 알아듣나.' 어쩔 수 없이 진우는 본론을 얘기했다. "숲에 있는 동안은 아이스 베어만 걱정하면 되니까." "아!" 그제야 박희진은 진우가 하려는 말을 깨달았다. 아이스 베어의 개체가 많다는 말은 아이스 베어를 사냥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마수가 없다는 소리. 더 강한 마수의 등장을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는 뜻이었다.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박희진은 진우 앞에서 큰소리친 게 몸서리치게 부끄러웠다. 목덜미까지 붉어진 그녀는 아래로 떨군 얼굴을 들지 못했다. 진우는 속으로 혀를 찼다. 던전이 무서운 이유는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데 있다. 적을 모르면 대처도 못하니까. 그런데 이곳의 적은 훤히 드러나 있지 않은가? '곰의 형태를 한 마수.' 아이스 베어가 얼마나 강한지는 몰라도 방금 전의 그 엘프 두 놈보다 약한 건 확실했다. 놈들은 곰 가죽으로 된 옷을 걸치고 있었다. 그래서 숲을 택했다. 숲에서 레벨업을 하는 동시에 김철 팀과 백귀들의 동태를 살피며 기회를 노릴 생각이었다. 그게 가장 안전한 방법이었다. '...?' 문득 진우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얼굴이 왜 그렇게 빨개요?" 박희진의 얼굴이 너무 빨갰다. 박희진은 고개도 들지 못하고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 추워서 그래요." "후-" 깊게 한숨을 내쉰 진우가 상점을 불러내어 구매 가능 목록을 뒤지다가 두터운 털옷과 겨울용 신발을 골랐다. 띠링. [아이템: 따뜻한 털옷] 입수 난이도: 없음 종류: 잡동사니 입으면 몹시 따뜻하다. -가격: 10 골드 [아이템: 따뜻한 장갑] 입수 난이도: 없음 종류: 잡동사니 신으면 몹시 따뜻하다. -가격: 10 골드 '털옷과 신발이 각각 10 골드씩.' 옵션이 들어간 아이템과 다르게 옵션이 없는 일반용품은 그다지 돈이 들어가지 않았다. 아니, 가지고 있는 골드에 비하면 아주 쌌다. [보유한 금액: 431,930 골드] '그래도 잡동사니를 돈 주고 사게 되다니...' 진우는 구매를 선택했다. 누구는 주고, 누구는 안 주고 할 수 없으니 진우는 100 골드를 써서 다섯 사람 몫을 전부 샀다. 스르르발 아래 다섯 벌의 옷과 다섯 켤레의 신발이 나타났다. 당연히 진우를 제외한 네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다. "헉!" "뭐, 뭐야? 아공간 마법?" 박희진도 깜짝 놀라 고개를 들어 올렸다. 다른 사람이 놀라든 말든 간에 진우는 담담히 말했다. "하나씩 골라 입어요." 그렇게 말하고 제일 가까이에 있는 털옷을 집으려는 순간, 근처에 있던 한송이가 갑작스럽게 소매를 덥석 잡았다. '...?' 진우와 시선이 마주친 한송이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아, 아저씨 뭐예요? 아까 화살 잡아챈 것도 그렇고, 이상한 마법으로 옷도 막 꺼내고." 진우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이대로 가면 계속해서 질문들이 쏟아지고 그만큼 귀찮아질 것이 불 보듯 뻔했다. '그래, 이 기회에 확실히 말해 두자.' 진우는 단호히 말했다. "너는 내가 데려왔으니 내가 책임지고 지켜 준다. 대신." 진우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아무것도 묻지 마." 진우는 고개를 들어 박희진을 비롯한 다른 헌터들을 돌아보았다. "여러분도 마찬가집니다. 저한테 아무것도 묻지 말고, 아무것도 요구하지 마세요." 그리고 말을 이었다. "제가 마음에 안 들면 그냥 떠나시면 됩니다. 붙잡지 않을 거니까." 진우가 아니라 B 급 헌터인 박희진을 보고 따라왔던 남자 헌터 두 사람은 자신이 입으려던 털옷과 진우를 번갈아 보더니 이내 격렬하게 고개를 저었다. 61 화 그리고 하나 더. 진우가 숲을 선택한 이유가 있었다. '상태창.' [이름: 성진우] [레벨: 51] [직업: 그림자 군주] [칭호: 역경을 이겨 낸 자 (외 1)] 티 나지 않게 상태창을 불러낸 진우가 칭호를 역경을 이겨 낸 자'에서 '늑대 학살자'로 바꾸었다. [칭호: 늑대학살자 (외 1)] 늑대를 잡는 데 능숙한 사냥꾼에게 주어지는 칭호입니다. 짐승형 몬스터를 상대할 때 모든 능력치가 40% 증가합니다. 이런 사기적인 버프를 써먹을 수 있는 기회가 왔는데 마다할 이유가 무엇인가? 띠링. [짐승형 몬스터가 등장하였습니다.] [칭호 효과가 적용됩니다.] 추가된 능력치를 확인한 진우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 그때였다. 헌터들이 비명을 질렀다. "고, 곰이다!" "아이스 베어!" 인간 냄새를 맡은 아이스 베어가 어슬렁어슬렁 다가왔다. 영역을 침범한 적. 아이스 베어의 눈에 곱게 보일 리 없다. 그르르르아이스 베어가 얼음처럼 투명한 이빨을 드러내며 육중한 몸을 느릿하게 일으켰다. 시야를 가려 버리는 몸집! "아..." 북극곰과 생김새가 비슷하지만 크기는 두 배에 가깝고, 가슴에는 마수의 상징인 마정석이 장식처럼 붙어 있었다. 크어어엉! 일대를 울리는 묵직한 포효! 아이스 베어가 울부짖는 소리를 듣고서 진우를 제외한 헌터들이 일순간 얼어붙었다. 박희진의 미간이 구겨졌다. '뭐가 아이스 베어만 걱정하면 된다는 거야!' 저 괴물을 두고 할 소린가, 그게! 성진우의 유창한 언변에 그만 넘어갈 뻔했다. 아이스 베어를 실제로 보자마자 확신이 섰다. '역시 숲으로 들어와서는 안 되는 거였어!' 위기감을 느낀 박희진이 일행들 앞으로 나서며 소리를 질렀다. "제가 시선을 끌 테니 여러분들이 틈을 봐, 꺅!" 강한 악력에 목덜미 옷깃이 당겨진 박희진은 넘어지지 않기 위해 몇 걸음이나 뒷걸음질 쳐야 했다. 간신히 균형을 잡고 보니 어느새 진우가 눈앞에 서 있었다. "뭐예요, 당신!" 진우는 손가락으로 박희진을 가리켰다. "분명히 말해 두는데 앞으로 마수는 나 혼자서 잡습니다." 경험치를 뺏길 순 없으니까. 진우에게 이 곰탱이들은 진짜 적인 백귀들을 상대하기 위해 섭취해 둬야 할 좋은 영양제들이었다. "하?" 박희진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지금 마수를 혼자 잡겠다고 날 잡아당겼단 말이야?' 마법계열인 다른 헌터 두 사람도 캐스팅을 중단하고서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아무리 당신이 강하다고 해도 저놈은 상급 던전의 마수예요!" 등 뒤에서 들리는 박희진의 뿔난 목소리를 무시하고 진우는 아이스 베어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단검을 쓰자니.' 피가 튀어 엉망이 될 것 같고. 진우는 습관적으로 소환한 단검 두 개를 다시 창고로 돌려보냈다. 대신 주먹을 불끈 쥐었다. '원래는 견학만 하기로 약속했지만 지금은 위급 상황이니 이해해주겠지?' 진우와 아이스 베어의 시선이 마주쳤다. 크어! 아이스 베어가 전봇대 굵기만 한 팔을 번개처럼 휘둘렀다. 쉬익-! 하지만 허공을 갈랐다. '덩치고 큰 게 속도도 빠르네.' 아이스 베어의 머리 위로 점프한 진우는 왜 놈의 악명이 자자한지 충분히 이해했다. '그래도...' 지금까지의 레벨업이 헛되지 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아이스 베어가 고개를 들기 직전, 진우는 전력을 다해 놈의 이마를 주먹으로 내려쳤다. 투쾅! 아이스 베어의 대가리가 바닥에 처박혔다. 두개골이 박살 나 버린 아이스 베어는 혀를 밖으로 길게 빼고서 다시는 움직이지 않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렇지! 안 그래도 레벨이 오를 때라고 예상했는데, 박희진을 말리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 당신, 정체가 뭐예요?"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 뒤돌아서니 할 말을 잃은 네 사람의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우가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이런 상황이 싫어서 미리 못 박아놨던 건데.' 아무래도 사람의 기억이라는 게 충격적인 장면을 보게 되면 그리 오래 유지되지가 않나 보다. 어쩔 수 없이 진우는 한 번 더 강조했다. "질문은 안 받는다고 했습니다. 내 방식이 싫으면 저리로." 진우의 손가락이 김철 팀이 있던 방향을 가리켰다. "다시 가시면 됩니다."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박희진의 표정이 돌아왔다. "방금 아이스 베어를 어떻게 잡는지 봤는데 제가 당신 주변을 떠날 거 같나요?" 박희진은 가슴이 벅차올랐다. 김철보다 나아 보여서 직감적으로 선택한 길이었는데, 그게 생각지도 못한 대박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았다. 계산이 빠른 그녀는 바로 결론을 내렸다. 여기서 무사히 나가려면 성진우를 따라야 한다고. 혹시나 진우 입에서 그냥 각자 갈 길을 가자는 말이 나오기 전에 간절한 심정으로 선수를 쳤다. "진우 씨가 리더를 맡아 주세요. 무조건 시키는 대로 따를 테니까." '요구는 안 받는다고 했지만...' 잠깐 고민해 보던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앞일을 생각하면 그게 여러모로 편할 듯했다. 박희진은 뒤를 돌아보았다. 한송이라는 학생은 어차피 진우가 데려왔으니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러면 남은 사람은 두 명. "다른 두 분도 동의하시죠?" 갑자기 시선을 받게 된 헌터 두 사람은 아이스 베어의 사체와 진우를 번갈아 보다가 곧 격렬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 다시 레드 게이트 앞. 현기철이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손수건으로 훔치며 시계를 확인했다. 백윤호가 물어 왔다. "얼마나 지났습니까?" "3 시간 정도 지났습니다." "3 시간... 안에서는 벌써 3 일이 흘러갔다는 얘깁니다." 백윤호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여기 모인 네 사람 중에 오직 백윤호만이 레드 게이트에 들어가 본 경험이 있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S 급의 헌터 중 한 명, 백윤호. 그런 그에게도 레드 게이트는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백윤호가 찹찹한 심정으로 당시의 기억을 떠올렸다. "레드 게이트가 진짜 무서운 점은 거기가 완전히 다른 세계라는 데에 있습니다." 흔히 들을 수 없는 S 급 헌터의 레드 게이트 경험담이었다. 당연히 안상민, 주성찬, 현기철 세 사람의 이목이 집중됐다. 백윤호가 말을 이었다. "게이트를 넘어 도착한 곳이 60 도가 넘는 사막 위일 수도 있고, 독사와 독충이 들끓는 정글 속일 수도 있고, 발끝에 동상이 걸릴 정도로 추운 설원 위일 수도 있습니다." 꿀꺽. 세 사람은 동시에 마른침을 삼켰다. "일단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 거기가 레드 게이트인지 아닌지 아무도 모릅니다. 그러니 무슨 준비를 할 수가 있겠습니까?" 오늘도 그랬다. 평범하게 보였던 게이트가 헌터들이 들어가고 나자 순식간에 붉게 물들기 시작했다. "태양빛에 살갗이 타들어 가고, 밤낮없이 독충에 시달리고, 살을 에는 추위에 피부가 썩고... 그렇게 약한 사람들부터 죽어 나갑니다." "맙소사..." 현기철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신음을 흘렸다. "그런 열악한 환경에서 마수들과 싸워야 하는 겁니다."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암담한 분위기가 전해졌다. 그런데 그게 끝이 아니란다. "간신히 도착한 곳의 환경에 적응했다고 칩시다. 그럼 이제부터는 식량을 구해야 합니다." 최소 몇 주, 길게는 몇 달 동안 먹을거리를 직접 구해야 한다. 보통 일이 아니었다. "혹독한 환경과 잦은 굶주림 속에서 믿을 건 마력나침반 하나뿐." 강한 마력이 있는 곳을 가리키는 마력나침반. 마력나침반을 보고 보스를 찾아가 처치하는 게 던전 브레이크 외에 레드 게이트를 빠져나올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 바늘 하나만 보고 며칠, 몇 주, 몇 달을 버틴다고 생각해 보세요. 사람이 안 미치고 배기겠습니까?" 세 사람이 고개를 끄덕거렸다. 헌터가 아닌 자기들 같은 일반인이 그런 곳에 떨어진다면 마수가 아니더라도 단 하루를 버티지 못하리라. "아까 3 일이 지났다고 했지요?" "네." 현기철의 대답에 백윤호가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아마 지금쯤이면 C 급 이하 헌터들은 다 죽었을 겁니다." 김철은 A 급. 실력이 좋다고 해도 A 급 헌터로는 팀원 전부를 지키기가 불가능하다. 최소한 S 급 정도 되는 헌터가 그들 옆에 있다면 모를까. 그러니. "이제는 상급 헌터들이나 무사히 돌아올 수 있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결론. 백윤호의 머릿속에서 C 급 이하 헌터들은 벌써 죽은 사람들이었다. *** 저녁 시간. 모닥불 위에 큼지막한 고기 덩어리가 노릇노릇하게 익어 갔다. "곰 고기요, 좀 질기지만 먹을 만한데요?" "조금 더 드릴까요?" "아이고, 감사합니다." 고명환은 윤기중이 내민 접시 위에 잘 익은 아이스 베어 고기를 쓱쓱 썰어서 얹어 주었다. 진우 팀의 C 급 헌터 두 사람이었다. 박희진과 한송이도 남자들만큼은 아니지만 오물오물 식사를 이어 나갔다. "언니, 저 후추 좀 주세요." "소금은?" "간은 괜찮아요." 다들 어느 정도 던전에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모닥불에 모포에 천막까지. 딱히 불편한 점은 없었다. 아니, 어떤 점에서는 아늑해 보이기까지 했다. 고명환이 주위를 둘러보더니 말했다. "요즘 아이스 베어 습격이 좀 줄어든 거 같지 않아요?" 박희진이 답했다. "그거야 공대장님이 씨를 말리셨으니까 그렇죠." "그분은 무슨 전생에 곰이랑 원수를 졌는지 아이스 베어만 보면 눈이 이글이글한다니까요. 그럴 때 공대장님을 보면 무서워요, 무서워." 어느새 진우의 호칭은 공대장님이 되어 있었다. 문득 진우의 공백을 느낀 박희진이 고개를 빼고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러고 보니 공대장님은 어디 가셨어요?" 접시에 얼굴을 파묻을 기세로 식사에 집중하고 있던 윤기중이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아까 이 주위를 좀 돌아보겠다고 나가시던데요?" 허. 박희진이 못 말리겠다는 얼굴을 했다. "혼자서 그렇게 상급 던전을 마음대로... 진짜 무섭지도 않나?" 윤기중이 씩 웃었다. "그분은 괜찮지 않을까요?" "하긴, 상급 마수인 아이스 베어를 맨손으로 때려잡는데." 윤기중의 말을 고명환이 받았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근데요... 말이 나와서 말인데...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큰 마수를 무식하게 때려잡으려면 대체 랭크가 어느 정도는 돼야 하는 걸까요?" 뚝. 갑자기 모두들 말이 없어졌다. 다들 궁금하긴 마찬가지였다. 다만 쫓겨나는 게 무서워서 입 밖으로 함부로 꺼내지 못할 뿐. "...밥이나 마저 먹죠." 박희진이 꺼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 숲을 뒤지던 진우가 수풀을 헤치고 나왔다. '이 근처 어딘가인데...' 어디선가에서 다수의 아이스 베어 기척이 느껴졌다. 아이스 베어를 역으로 추적하기 시작한 건 어젯밤부터. 아이스 베어가 계속 같은 방향에서 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주변을 서성이던 진우의 눈빛이 반짝였다. '찾았다!' 수풀 너머로 수십 개의 암석 동굴이 보였다. 그리고 그 동굴 하나마다 한 마리 이상의 기척이 감지됐다. 감각을 활용할 필요도 없었다. 지금도 눈앞에서 아이스 베어들이 동굴에 들어가거나 동굴에서 나오고 있었다. 대략잡아 그 숫자만 30 이상. 그야말로 곰밭이었다. 진우의 입꼬리가 슥 올라갔다. 일부러 혼자 와서 주변에 보는 눈도 없었다. 그림자 병사들을 써 보기 딱 좋은 상황. 이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와.' 속으로 그림자들을 호출하자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이 소리 없이 주위를 에워쌌다. "너희 첫 출동인 거 알지?" 대부분의 인상이 첫 대면에서 결정되듯, 첫 출동에서 너희들의 인상이 결정될 거라 이거다. '...' '...' 그림자 병사들은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꼿꼿이 서 있었다. 좋아. 진우가 씩 웃었다. 킁킁. 진우의 냄새를 맡은 아이스 베어들이 하나씩 동굴에서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저쪽도 준비가 된 것 같으니.' 진우는 아이스 베어들을 가리켰다. "가라."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림자 병사들이 미끄러지듯 달려 나갔다. 62 화 그림자 병사들의 빠른 접근! 하지만 아이스 베어의 성난 손짓은 그림자 병사들의 움직임보다 훨씬 더 빨랐다. 부웅! 콰직! 후려치기 한방에 그림자 병사 하나가 완파됐다. 칠흑의 갑옷 안에 들어 있는 게 그림자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면 사지가 분리되었을 만한 끔찍한 공격이었다. '흠...' 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역시 무리였나?' 힘으로 보나 덩치로 보나 그림자 병사들이 상대하기에 아이스 베어는 조금 과한 적이기는 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헉!' 진우의 눈이 커졌다. 아이스 베어의 앞발에 맞아 가슴이 찢겨진 병사가 쓰러지기 직전 검은 연기가 변한 것이다. 슈와악- 검은 연기는 한걸음 떨어진 곳에서 다시 뭉쳐지며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좋아!' 진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언데드. 잠깐 잊고 있었던 그림자들의 본질을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었다. 자신의 공격이 무위로 돌아간 걸 보고 흥분한 아이스 베어가 크게 울부짖었다. "크어어어!" 그렇게 보병들이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후열에 배치된 마법병들이 주문을 완성시켰다. 쾅! 콰광! 마법병들의 손끝에서 떨어져나간 불덩이가 여기저기 폭발을 일으켰다. 폭발에 휩쓸린 그림자 병사들은 바로 바로 재생되는 반면에, 불이 붙은 아이스 베어들은 고통에 몸부림치며 괴성을 질러댔다. "그어어어!" "크워!" 그림자 병사들은 빈사상태가 된 곰들에게 다가가 지체 없이 검을 쑤셔 박았다. 푹! 푹! 기세등등하던 아이스 베어들이 보병과 마법병의 협공에 쓰러져 가기 시작했다. '이야...' 진우는 흥미진진한 눈빛으로 상황을 관망했다. 보병의 빠른 재생력. 마법병의 강한 화력. 그림자 병사들의 전력은 기대이상이었다. 아이스 베어들은 병사들의 기세에 쫓겨 동굴 입구 쪽까지 밀려났다. 그렇게 전투가 끝나나 했는데. "크어어어억!" 고막을 뒤흔드는 포효와 함께 입구 쪽에서 거대한 무언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저건..." 지켜보고 있던 진우의 눈도 휘둥그레졌다. 근처에 있는 아이스 베어들보다 머리 하나가 더 높고 어깨도 배로 넓은 녀석이었다. "크어!" 놈의 한 방에 그림자 병사들을 휩쓸려나갔다. 붕-! 콰지직! 병사들의 재생 속도가 파괴되는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콰직! 퍼걱! 진우가 신음성을 흘렸다. "우두머리의 등장인가..." 무리가 있으니 개중에 대장격인 놈이 있을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다. 그런데 놈은 예상보다 더 크고, 더 강했다. "크워어어!" 거대한 아이스 베어는 그림자 병사들을 닥치는 대로 분쇄하며 무서운 속도로 접근해 왔다. 그때 메시지가 떴다. 띠링. [마나를 모두 소모하여 그림자 병사의 재생이 불가능해집니다.] [마나를 모두 소모하여 그림자 병사의 재생이 불가능해집니다.] 뭐? 황급히 마나량을 확인했더니 시스템의 경고처럼 마나가 고갈되어 있었다. [MP: 0 / 1860] 마나가 소진된 이후 파괴된 그림자 병사들은 재생되지 않고 그림자로 변해 진우의 그림자 속으로 돌아왔다. 병사들을 재생시키기 위해선 시전자의 마나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놈의 마나...' 이걸로 지능을 찍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진우가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우두머리 아이스 베어의 등장으로 전세가 한 번에 역전되어버렸다. 하지만 진우에겐 아직 여유가 있었다. '저쪽에서 대장이 나왔으면 이쪽도 대장이 나가야지.' 팔짱을 끼고 있던 진우가 그림자 병사들의 대장격을 불러냈다. "이그리트!" 진우의 그림자에서 떨어져나간 그림자 하나. 그 그림자 위로 갈기 달린 투구를 쓴 기사가 스르륵 올라왔다. 진우가 턱짓했다. 이그리트는 진우에게 고개를 숙이더니 우두머리를 향해 뛰쳐나갔다. 탁, 탁, 탁, 탁! 우두머리가 휘두르는 앞발을 피해 가랑이 사이로 슬라이딩. 다리 옆을 지나치며 허리춤의 단검을 빼내 힘줄까지 베었다. "크어어!" 그게 시작이었다. 장검을 뽑아 든 이그리트는 쏟아지는 공격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우두머리의 몸뚱이를 깎아나갔다. 힘줄, 발톱, 앞발, 다리, 우두머리의 신체가 살아 있는 고깃덩이처럼 하나씩 썰어졌다. "허..." 이그리트의 현란한 동작에 진우가 감탄을 터트렸다. 마지막은 머리였다. 스걱! 목에서 분리된 거대한 아이스 베어의 머리. 땅에 닿기 전에 머리를 낚아챈 이그리트가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진우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턱. 머리는 진우 발아래 놓였다. 마치 군주에게 바치는 진상품처럼. 진우는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이그리트를 바라보며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이그리트가 처음부터 검을 썼으면 내가 이길 수 있었을까?' 우두머리를 잃은 아이스 베어들은 우왕좌왕하다 병사들에게 썰렸고, 전투는 곧 마무리 되었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그림자 보병 Lv.2] [그림자 보병 Lv.3] [그림자 보병 Lv.2] [그림자 마법병 Lv.2] 병사들의 레벨이 착착 올라가 있었다. 그림자 병사들 자체가 스킬인 덕분에 진우도 레벨이 3 계단이나 올라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점은. "일어나라." [그림자 추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림자 추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림자 추출에 성공했습니다.] 새로운 친구들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크어어어우두머리 아이스 베어를 포함해, 진우가 선택한 아이스 베어 몇 마리의 그림자에서 검은 덩어리들이 기어 올라왔다. '갑옷을 입은 곰이 나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예상과는 달랐다. '그림자 마수병'이라는 이름이 달린 녀석들은 언뜻 곰의 형상을 하고 있긴 하지만 고체인지 기체인지 모를 괴물들이었다. 숨을 헐떡이는 녀석들의 어깨 위로 계속해서 검은 수증기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비쥬얼이 좀 안타깝긴 해도 아이스 베어의 그림자들이다.' 그 힘, 그 파괴력. 분명 쓰임새가 있을 터. 그때였다. 그워어어어디선가 들리는 곰 울음소리에 진우의 귀가 움찔했다. 그것도 한두 마리가 아니다. '곰밭이 여기가 끝이 아니라 이 말이지?' 오늘은 너무 늦었으니 내일은 저쪽으로 한 번 가볼까. 진우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 "으아아악!" "커헉!" 동료들의 비명. 김철은 눈을 부릅떴다. '이럴 리 없다!' 내가. 이 김철이가 실패를 하다니! 백호 길드의 엘리트가 될 몸이었다. 정예가 되기 위해 특수 교육까지 받았다. 그런데 실패라니? 인정할 수 없었다. 추위와 허기를 견디며 설인 떼와 싸웠다. 다음은 눈거인들이었다. 2 명을 잃긴 했지만 눈거인들도 잡았다. 던전 공략은 순조로워 보였다. 하지만. 하지만! 눈거인들과는 혈투가 끝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백귀들이 후방에서 들이닥쳤다. 이 요망한 것들은 공격대의 체력이 다하기를 어디선가 숨어서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어진 것은 학살. 순식간에 헌터들은 궤멸당했다. "대, 대장!" 쓰러진 헌터가 피 묻은 손을 김철에게 뻗었다. 김철은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어느새 나타난 백귀가 헌터의 등 위에 올라타 단검으로 목을 그었다. "커, 커걱!" 웃으며 목을 긋던 백귀가 김철을 올려다보았다. 김철은 비명을 질렀다. "으, 으아아아아!" 그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숲쪽으로 뛰었다. 숲에 아이스 베어가 있다고? 보이지 않는 곰들은 눈앞에 있는 설인들과 눈거인, 백귀들에 비하면 우스운 존재였다. 김철은 젖 먹던 힘까지 다해 달리고 또 달렸다. 멀어지던 김철의 등을 노려보던 백귀들이 활을 들었다. 조준하고, 쏘려는 순간. 머리카락이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의 백귀 하나가 팔을 들어 저지했다. 백귀들은 활을 내렸다. '...' 장발이 손가락으로 김철을 따라가라는 사인을 보내자, 백귀들의 신형이 하나둘 스르륵 시야에서 사라져갔다. *** 김철이 수풀 속에서 튀어나왔다. "헉, 헉, 헉."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헌터들을 도륙하며 조소를 보내던 백귀들을 떠올리면 아직도 오금이 저려왔다. 문득 손을 내려다보았다. 얼어붙은 손에 감각이 희미해졌다. 발끝은 감각을 잃은 지 오래였다. 지금 상태로는 제대로 싸울 수 없었다. '이 추위 때문에... 아니, 며칠째 굶지만 않았어도 그렇게 당하지는 않았을 거다.' 김철은 끝내 공격대의, 아니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수 없었다. 중얼거리던 김철이 고개를 들었다. '그런데, 어디까지 들어온 거지?' 김철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어디선가 희미하게 피 냄새가 났다. 김철은 그 냄새를 따라갔다.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나무 사이를 지나 시야가 탁 트인 장소가 나오니 믿기 힘든 광경이 펼쳐져 있었다. '이럴 수가!' 동굴 주변에 스무 마리가 넘는 아이스 베어들의 사체가 있었다. 어쩐지 영역 표시가 없는 나무를 찾아보기가 힘들었는데도 아이스 베어가 안 보이더라니! "뭐지?" 김철은 사체들을 살폈다. 모든 사체에 칼자국이 낭자했다. 군데군데 불탄 자국도 있었다. 김철은 머릿속에 성진우와 성진우를 따라간 헌터들이 떠올랐다. "설마... 그 녀석들이 아이스 베어를?" 아니. 김철은 고개를 저었다. 검상을 입은 아이스 베어들은 모두 장검에 베여 있었다. 그가 아는 한, 숲으로 간 멤버 중에 장검을 쓰는 헌터는 없었다. 'E 급 헌터 둘은 아예 무기도 안 들고 있었고.' 냉정히 말하자면 그들이 이곳에서 살아남았을 가능성 자체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결론은 하나. '이 근처에 백귀들이 있는 건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간신히 백귀들을 따돌렸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까운 곳에 머물고 있을 줄이야. 잔뜩 겁먹은 김철은 숨을 죽이고 숲 쪽으로 돌아갔다. 좀 더 멀리, 좀 더 빠르게. 어서 백귀들의 영역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 그 무렵. "우어어엉!" 아이스 베어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림자 병사들이 달라붙어 숨통을 확실하게 끊어 놓았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아." 진우는 또 다른 곰밭에 있었다. 여기 도착한 지 5 일 째. 곰밭만 세 곳을 돌았다. '이제 숲에 있는 곰들은 다 처리한 거 같네.' 그동안 레벨도 많이 올랐다. 병사들의 레벨도 마찬가지. 곰 하나에 둘이 붙어야 간신히 제압이 가능했던 병사들이 이제 혼자서도 곰과 1:1 승부가 가능했다. 만족스러웠다. 병사들의 능력치가 올라감에 따라 아예 역할도 분리했다. 저장할 수 있는 그림자는 30 개. 28 명은 싸우고 1 명은 마정석을 줍고 1 명은 고기를 챙겼다.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사냥과 전리품 획득을 할 수 있으니 무척이나 편했다. '더 이상 마수들의 기운이 느껴지지 않는다.' 숲의 마수들은 얼추 다 정리한 것 같았다. 그렇다면. '슬슬 보스를 잡으러 가야 하나?' 던전 브레이크까지 아무리 못해도 1 개월. 최악의 경우에는 수개월이 걸릴 수도 있다. 언제 열릴지 모르는 게이트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그 건방진 엘프 놈도 잡아야 되고.' 감히 마수 주제에 헌터를 도발했던 놈. 그놈의 건방진 미소가 아직도 아른거렸다. *** 어디선가 나는 고기 냄새. 킁킁. 김철은 허기로 예민해진 코를 씰룩거렸다. 레드 게이트에 갇힌 뒤로 먹은 거라곤 토끼 한 마리가 전부. 음식 냄새에 절로 침이 넘어갔다. '꿀꺽.' 어쩌면 백귀들이 식사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놈들이 소수라면...' 충분히 제압하고 음식을 뺏을 수 있다. 그런 결론을 내릴 정도로 배가 고팠다. '가 보자.' 김철은 최대한 발소리를 줄이고 조심스럽게 냄새가 나는 쪽으로 다가갔다. 그리고 마침내. 수풀 속에 숨어 진우와 함께 떠났던 다른 헌터들을 발견했다. 김철의 눈이 커졌다. '아니?' 고기 냄새는 그들이 피운 모닥불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치들이 어떻게 아직 살아 있지?' 김철이 눈을 번득였다. E 급 헌터 하나가 보이지 않았다. '자신 있게 앞장 서 걷어니 제일 먼저 죽었나 보군.' 그건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당연하지 않은 장면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뭔가 이상했다. '가만, 저 녀석들 복장이...?' 방한용 옷과 담요, 천막, 그리고 여러 장비들이 눈에 들어왔다. 철저히 준비된 상태였다. '대체 이게 어떻게?' 당황하던 김철의 시선이 한곳에 멈추었다. 고기 옆에 놓인 빵. 그들은 식량까지 완벽히 갖추고 있었다. 당혹감이 분노로 바뀌어 갔다. '이놈들이...' 뿌득. 김철은 이를 갈았다. 저렇게 많은 물품들을 준비해놓고 자기네들끼리만 가져갔단 말인가. '내 손이 얼지만 않았어도, 아니 배만 든든히 채웠어도 아이스 엘프들쯤은 충분히 상대할 수 있었다.' 레이드팀에게 고루 지원했어야 할 물자를 자기들끼리만 가로챘다고 생각하자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졌다. 김철은 수풀을 뛰쳐나갔다. "너희들!" 박희진이 깜짝 놀라 일어섰다. "김철? 당신이 어떻게 여기에?" 하지만 거짓말로도 반갑다고 말하기는 힘들었다. 김철의 시선이 너무 살기등등했기 때문이다. 김철은 적의를 숨기지 않았다. "우리 공격대는 식량과 장비가 모자라서 던전 공략에 실패했다. 그런데 너희는 어떻게 그만한 식량과 장비를 갖추고 있는 거냐?" "그건..." 박희진은 말을 잇지 못했다. 여기서 진우 이야기를 꺼냈다간 김철의 분노가 진우에게 향하게 된다. 진우는 은인이나 마찬가지였다. '처음부터 저 인간이 성진우를 바라보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았어.' 박희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김철이 눈을 부라렸다. "나도 너희 전부가 공범이라고 생각하진 않는다. 누가 이것들을 숨겼지? 누구 짓인지만 밝히면 나머지는 눈감아주겠다." 김철의 목에 힘줄이 돋아났다. "누가 장비를 독차지하고 동료를 사지로 몰았느냐 이 말이다!" 고함 소리가 숲 속에 메아리쳤다. 김철은 피를 봐서라도 기어코 동료를 배신한 죄를 물을 생각이었다. "셋을 세겠다. 그때까지 누구 짓인지 불지 않으면 너희 모두 공범이라고 생각하겠다." 한송이가 박희진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어, 언니..." 박희진이 한송이를 안아 주었다. 고명환과 윤기중도 식은땀을 흘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김철은 A 급. 여기 있는 모두가 힘을 합쳐도 감당할 수 없는 상대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진우의 이름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하나." 김철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냈다. 스르릉. "둘." 여전히 하급 헌터들은 입을 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하급 헌터 따위가 말을 안 들어? 그 점이 김철을 더 화나게 만들었다. '이것들이 나를 뭐로 보고...' 김철의 눈이 살기로 번들거렸다. 가장 먼저 이 여자. 공격대를 배신하고 하급 헌터들과 떠난 박희진을 먼저 죽인다. '그래, 뭔가 꿍꿍이가 있으니까 공격대를 떠났던 거지.' 그렇게 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박희진 앞에 선 김철이 마지막 카운트를 내뱉었다. "셋." 박희진이 눈을 꼭 감았다. 그때. "넷." 빡! 뭔가에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김철이 얼굴을 바닥에 처박은 채로 몇 미터를 미끄러졌다. 헌터들의 눈이 커졌다. "공대장!" 어찌나 세게 때렸는지 진우의 손바닥에선 아직도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진우가 어이없다는 듯 말했다. "동료들을 진짜 사지로 내몬 게 누군데 헛소리를 하고 있어?" 63 화 "진우 오빠!" 한송이가 눈물까지 글썽거리며 반가움을 내비쳤다. "공대장님!" 한송이 만큼은 아니지만 남자 헌터 두 사람도 얼굴이 환해졌고, 박희진은 진우의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진우에겐 팀원들의 환대에 응해 줄 여유가 없었다. "쉿." 진우가 입술에 검지를 붙였다. 금방이라도 진우에게 안겨들 것 같았던 네 사람이 일제히 얼음으로 변했다. 박희진이 물었다. "왜, 왜요?" 패 죽여도 시원찮을 자식. 진우는 기절한 김철을 노려보다 뒤돌아섰다. "김철이 혹을 달고 왔어." 숲속에서 무수한 기척이 느껴졌다. 지금은 김철인지 고철인지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진짜 문제는 저쪽이니까. 스르르진우의 시선을 감지한 백귀들이 '은신'을 풀고 모습을 드러냈다. 대략 20 여 마리 정도. 그중 하나. 말을 탄 긴 머리의 백귀에게 진우의 시선이 고정되었다. '...저놈이 보스다.' 아이스 베어, 아니 주변의 백귀들과 비교해도 압도적인 기운이 놈에게서 흘러나왔다. 저런 놈이 던전의 보스가 아니라면 누가 보스가 될 수 있을까? 오랜만에 살이 떨려 왔다. 진우가 놈의 강함에 전율하는 동안, 보스도 진우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정말로 있구나. 쓰레기들 중에서도 쓸 만한 녀석이." "뭐라고?" "...?" 진우가 무심코 내뱉은 말에 보스가 놀랍다는 반응을 보였다. "너, 우리의 언어를 아는가?" 진우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어떻게 대화가 가능한 거지?' 마수의 말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뿐 아니라 마수의 말도 할 수가 있었다. 기억에도 없는 언어가 모국어처럼 줄줄 흘러나왔다. "당신, 마수들 언어도 할 줄 알아요?" 박희진은 하도 놀라서 더 이상 어떻게 놀라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그걸 보고 진우는 지금 보스의 말을 알아듣고 있는 사람이 자신뿐이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것도 시스템의 영향인가?' 자동번역 같은 거. 진우의 시선이 다시 보스에게로 향했다. 보스가 흥미롭다는 눈빛을 보냈다. "대화가 통한다라... 잘됐군. 너에게 소개해 주고 싶은 이가 있다." 보스는 손바닥으로 뒤쪽의 백귀 한 명을 가리켰다. "이미 구면이겠지." 진우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확실히 낯이 익다. '저놈은...' 처음 레드 게이트 안으로 들어섰을 때 한송이에게 화살을 날리고 조소를 보냈던 놈. 그 건방진 낯짝을 어떻게 잊을까. 그놈은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었다. "인간들 중 강한 자가 있다고 알려 준 친구지. 이 친구가 그대와 승부를 내고 싶어 하는데,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진우가 던진 '나이트 킬러'가 일직선으로 쇄도했다. 퍽! 웃고 있던 백귀의 얼굴 정중앙에 단검이 박혔다. "헉!" 비명은 헌터들 쪽에서 나왔다. 윤기중은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내지른 입을 황급히 틀어막았다. 털썩. 백귀가 그대로 쓰러졌다. 진우가 손을 뻗자 백귀 머리에 박혀 있던 '나이트 킬러'가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곧 뽑혀서 되돌아왔다. 진우가 '나이트 킬러'를 역수로 쥐고 자세를 낮췄다. "다른 할 말은?" 보스가 감탄을 터트렸다. "...정말 강하구나." 그러고는 말에서 내려섰다. 하지만 아직 싸울 마음은 없는지 무기를 들거나 적의를 보이지는 않았다. "그러나 너도 알고 있겠지." 그러면서 여유 있는 표정을 일관한 채 계속해서 대화를 유도했다. "이 수를 상대로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스물이 넘는 아이스 엘프들. 수가 중요한 게 아니다. 녀석들 틈에 보스가 끼어 있다는 사실이 위험했다. 나머지 백귀들은 아이스 베어들을 잡으며 최대한 레벨을 올려 둔 진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방금 단검에 맞고 죽은 놈처럼. '보스를 어떻게 처리한다?' 진우가 머리를 굴리는 동안 보스가 말을 이어 갔다. "내가 제안을 하나 하지." "제안?" "그래. 너에게도 나쁜 조건은 아닐 것이다." "..." 진우는 내심 놀랐다. 인간형 마수에게 지능이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져 있었지만, 인간을 상대로 거래를 제시할 정도라고는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래서 일단 한번 들어는 보고 싶어졌다. "...들어 보고." 보스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웃으며 말문을 열었다. "그전에 하나만 묻지." "...?" "너는 왜 인간도 아니면서 인간들 틈에 있는가?" 진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무슨 헛소리야?" "하하, 본인도 모르고 있었던 건가?" 보스는 실소를 터트리며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우리의 머릿속엔 끊임없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간을 죽이라고. 그런데 네 앞에서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군." 아. 그런 이야기였나? 그거라면 진우에게 짐작 가는 구석이 하나 있었다. '인간이라는 말은 아마 헌터를 뜻하는 거겠지.' 자신은 지하 신전을 나온 뒤 시스템에 의해 '플레이어'라는 특이 체질로 변했다. 엄밀히 분류하면 헌터, 즉 각성자들과는 조금 달랐다. '그래서 내가 인간이 아니라고 착각하는 거다.' 그렇게 생각하면 앞뒤가 딱딱 맞아떨어졌다. 진우가 납득했다는 얼굴을 하자 보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다. 이쪽도 쓸데없이 피해를 보고 싶지는 않으니." 보스가 결론을 말했다. "네 뒤의 인간들만 넘겨라. 그러면 네 목숨은 보장하지. 어떤가, 우리의 제안이?" 대답에 앞서 진우가 되물었다. "나도 하나 묻자." "좋다." "너희들은 누구냐? 어디에서 왔으며 왜 인간들을 죽이려는 거지?" "우리는." 그때였다. 줄곧 미소를 띠던 보스의 얼굴이 한순간 굳어졌다. 그것도 잠시. 원래의 표정을 되찾은 놈은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우리는 싸울 필요가 없다. 이쪽도 쓸데없이 피해를 보고 싶지는 않으니." '뭐지?' 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보스는 마치 허락되지 않은 질문을 받은 게임 NPC 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네 뒤의 인간들만 넘겨라. 그러면 네 목숨은 보장하지. 어떤가, 우리의 제안이?" 여유 있는 얼굴. 자신의 행동이 이상하다는 걸 전혀 눈치채지 못한 표정이었다. 뒤의 백귀들도 보스의 이상행동에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 진우가 상황을 지켜보고 있자, 보스가 독촉해 왔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는가?" 진우는 마수들의 정체와 의도를 알아내려고 했었지만 헛수고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남은 건 선택뿐. 대답은 한참 전부터 정해져 있었다. "거절한다." 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냥 보내 주기에는 너무 탐스러운 그림자를 가지고 있거든.' 놈을 처치하고 그림자를 가진다. 처음 보스를 본 순간부터 마음먹었던 계획을 이제 와서 철회할 생각은 없었다. "나와 내 병사들을 상대로 싸울 작정인가? 이 정도의 수적 열세를 혼자서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나?" 진우가 씩 웃었다. 병사들? '너만 있냐? 나도 있다.' 그림자 소환. 시전자의 의지에 따라 진우 그림자 안에 갇혀 있던 병사들이 진우의 등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으, 으악!" 이번에도 또 비명은 헌터들 쪽에서 나왔다. 윤기중은 자기 옆에 소환된 아이스 베어의 그림자, 그림자 마수병을 보고 질겁하여 엉덩방아를 찍었다. "아, 아..." 창백하게 변한 멤버들의 얼굴을 보고 있자니 안타깝기도 했지만 지금은 위기 상황. 일일이 설명하고 있을 시간 따윈 없었다. '뭐, 위기가 아니더라도 설명은 안 했겠지만.' 29 명의 그림자 병사들. 병사들 앞에 선 진우가 보스를 노려보았다. "이제 누가 더 열세지?" 드디어 보스가 적의를 보였다. "...잔재주를 부리는구나. 좋다, 원이라면 죽여 주지." 보스가 양쪽 허리춤에 차고 있던 단도 두 개를 빼 들었다. 바라던 바였다. 진우도 오른손엔 '나이트 킬러'를 왼손에는 '카사카의 독니'를 쥐고서 전투를 대비했다. '잔재주라.' 맞는 말이다. 수적으로는 앞설지 몰라도 보스를 잡기엔 화력이 조금 부족했다. 진우도 알고 있었다. 아마도 보스의 자신감은 거기에서 나오고 있는 것. 강력한 원군이 필요했다. '강력한 원군이라면...' 하나 있긴 했다. 진우의 시선이 힐끔 옆쪽을 향했다. 거기엔 쓰러져 있는 김철이 있었다. "공격!" 보스가 외치자 백귀들이 활시위를 당겼다. "곰탱이들!" 진우는 마수병들을 앞에 세웠다. 푹! 푹! 푹! 푹! 크아악! 화살 세례를 받은 마수병들이 울부짖었다. 백귀들이 다음 화살을 쏘기 전에 병사들이 달리기 시작했다. 마법병도 캐스팅에 들어갔다. 진우의 눈이 번득였다. '내 타겟은 너다!' 진우는 발뒤꿈치로 바닥에 떨어져 있던 김철의 장검을 김철 쪽으로 밀어 주고서 튀어 나갔다. 시선이 고정된 곳은 백귀들의 보스. 보스도 진우가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두 사람이 가진 네 개의 단검들에서 끊임없이 불꽃이 튀었다. 캉! 캉! 카강! 그림자 병사들과 백귀들간의 백병전도 개시했다. 고명환이 박희진을 돌아보았다. "저... 우리도 도와야 하는 거 아닐까요?" 박희진이 고개를 저었다. "이건 우리가 낄 수 있는 싸움이 아니에요." 거대한 검은 괴물이 손톱을 휘둘러 대고, 부서진 검은 병사들이 금방 원상태로 돌아오고, 상급 마수 백귀들의 검과 화살이 난무하는 전장. '여기서 B, C 급인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허락된 것은 기도뿐. 박희진은 긴 머리의 백귀와 아슬아슬하게 싸우고 있는 진우를 가슴 졸이며 바라보았다. "크윽!" 진우의 입에서 신음이 나왔다. 과연 상급 던전의 보스! 비등해 보이는 싸움이었지만 진우만 몸 곳곳이 찢기고 베이는 중이었다. 이대로 3 분이나 더 버틸 수 있을까? 병사들의 재생이 계속되면서 마나도 급격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이윽고 마법병의 주문이 완성됐다. 백귀들의 한복판에 배구공보다 훨씬 큰 불덩어리가 떨어졌다. 쿠아앙-! 레벨업 된 마법병의 힘이었다. 고막을 뒤흔드는 강렬한 폭음에 김철의 정신이 돌아왔다. "으음..." 김철이 고개를 들었다. 캉! 캉! 퍼엉-! 흐릿한 시야에 무시무시한 백귀들의 모습과, 백귀들에 맞서 싸우는 검은 병사들이 보였다. '뭐지... 이건?' 어떻게 된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자신이 왜 여기 누워 있는지는 잘 알고 있었다. 뒤통수를 내려쳤던 손! 뒤에서 들리던 목소리! '그 목소리는 성진우였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수치심과 증오심에 손끝이 부들부들 떨려 왔다. 마침 손끝에 장검의 손잡이가 잡혔다. 어차피 백귀들에게 포위당했다면 살아나갈 방법은 없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성진우 그 새끼 숨통은 내가 끊어 놓고 만다.' 비열한 눈빛에 진우의 뒷모습이 비쳐졌다. ...찾았다! 놈은 백귀 하나와 싸우느라 뒤쪽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이건 기회였다. 김철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달려 나갔다. "으아아아-!" 다가오는 김철의 기척에 진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그래, 너라면.' 진우는 김철을 믿었다. 전력을 다해 달리던 김철이 진우의 목을 노리고서 있는 힘껏 장검을 휘둘렀다. "뒈져라!" 앞에는 보스가, 뒤에는 김철이. 꼼짝하지 못할 상황에서 진우가 외쳤다. "이그리트!"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이그리트가 김철의 검을 쳐 냈다. 채앵! "아니!" 김철의 눈이 커졌다. 핏발 선 눈! 하지만 그가 무슨 말을 채 하기도 전에 이그리트의 검이 가슴 깊숙이 박혔다. 푸욱! 검은 가슴으로 들어가 등을 뚫고 나왔다. "커억!" 진우는 급히 뒤로 빠졌다. '김철이라면 이렇게 나올 거라고 믿었다.' 자기감정에 따라 앞뒤 생각하지 않고 움직이는 사람. 짧은 시간이었지만 김철을 파악하는 데는 충분했었다. 진우를 노려보는 김철. "너... 너..." 김철은 그 말을 끝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그리트가 보스를 막아서는 사이 물러선 진우가 쓰러진 김철의 그림자에게 명령했다. "일어나라!" 그러자. 으아아아아묵직한 비명 소리와 함께 그림자에서 커다란 손이 튀어나왔다. 64 화 [그림자 추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렇지!' 진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보스 레이드의 마지막 퍼즐 조각이 맞춰졌다. 김철의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검은 기사는 김철의 원판보다 훨씬 크고 두꺼웠다. 거기다 한손에 들린 거대한 망치. 다른 손에는 성인의 키만 한 방패를 들고 있어 위압감이 엄청났다. '김철도 근육질의 덩치였는데 이 그림자는 정말...' 긴박한 와중에도 진우의 입에서 감탄성이 흘렀다. [병사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아, 이름.' 진우가 슬쩍 곁눈질했다. 감당하기 벅찬지 이그리트는 보스에게 밀리고 있었다. 재생력을 이용해 간신히 시간만 벌고 있는 상황이었다. 스걱! 방금 이그리트의 한쪽 팔이 잘려 나갔다. '이러고 있을 시간이 없다.' 이름. 아무거나, 그냥 김철로 할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래도 살아 있었던 사람의 이름으로 언데드를 부리기에는 언짢은 부분이 있었다. '그래, 김철. 철이니까 아이언!' 이름을 정했다. 진우가 결정을 내리자마자 새로 태어난 그림자에게 이름이 하사되었다. [아이언 Lv.1] 기사 등급. 기사 등급! 이그리트와 같은 등급이었지만 기뻐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꾸물거릴 시간이 없어!' 진우가 보스를 향해 턱짓했다. "아이언!" 아이언이 육중한 몸을 뒤흔들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쿵, 쿵, 쿵! 덩치 하나는 마음에 들지만 저 속도로 민첩한 보스를 건드릴 수나 있을까 하는 걱정도 잠시. 아이언이 가슴을 펴고서 함성을 내질렀다. 우워어어어-! '뭐지?' 당황해 하는 진우의 눈앞에 메시지가 연달아 떴다. 띠링. [아이언이 '스킬: 도발의 함성'을 사용합니다.] [던전의 주인이 도발 상태가 됩니다.] "도발 스킬!" 김철은 A 급 탱커였다. 당연히 높은 수준의 어그로 스킬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의 그림자인 아이언은 그 스킬을 완벽히 재현해냈다. 보스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눈앞에 당장 끝장낼 수 있는 이그리트를 두고 귀신에 홀린 것처럼 아이언을 향해 달려들었다. 아이언은 '강화' 스킬을 사용해 매섭게 꽂히는 보스의 단검 공격들을 버텨 냈다. '좋아!'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사이 이그리트의 잘렸던 팔이 복구되었다. 스르르르 절단면에서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한 검은 연기가 뭉쳐지더니 곧 온전한 팔이 됐다. 보스는 아직 아이언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상태. 진우와 이그리트의 협공이 시작됐다. '...' 박희진은 눈앞의 광경에 할 말을 잃었다. 너무도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더 이상 물어보고 싶은 맘조차 생기지 않았다. 옆에서 한송이가 자그마한 목소리로 물어 왔다. "언니..." 박희진이 뒤늦게 반응했다. "어, 응?" "헌터들의 싸움이란 게 다 저런 식이에요?" 겁을 먹었는지 한송이의 음성은 떨리고 있었다. 박희진이 먹먹한 심정으로 대답했다. "...그랬으면 내가 자격증을 땄겠니." 고명환이 멍한 눈으로 말했다. "우리가...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닐까요?" 이게 꿈이라면 분명 악몽이겠지. 박희진은 마수들과 새까만 '무언가'들이 뒤엉켜 싸우고 있는 현장을 보면서 침음성을 흘렸다. 동시에 다른 걱정 하나가 떠올랐다. '여기서 나가면 분명...' 생존자로서 조사를 받게 될 것이 확실했다. 그땐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박희진은 레드 게이트 안에서 일어난 일들과 성진우란 사람에 대해 설명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렇게 말했더니. "저기, 하지만요." 바닥에 주저앉아 덜덜 떨고 있던 윤기중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나가서의 일을 걱정한다는 건 엄청 대단한 일 아니에요?" 멤버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상급 던전. 그것도 레드 게이트. 절대 살아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았던 이곳에서 이제 밖에 나가서의 일을 걱정하고 있었다. 전부 한 사람의 힘 덕분이었다. 박희진의 시선이 진우에게로 향했다. '성진우 씨, 당신...' 감사함과 놀라움을 넘어 경외감에 가까운 마음이 생겨났다. 푹! 보스의 어깨에 '카사카의 독니'가 꽂혔다. ['효과:마비'가 발동합니다.] [대상의 저항력이 높아 효과가 취소되었습니다.] ['효과:출혈'이 발동합니다.] [대상의 저항력이 높아 효과가 취소되었습니다.] 적들의 레벨이 높아지면서 요즘 '카사카의 독니' 추가 효과는 거의 먹히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상처를 남긴 것만 해도 컸다. '좋아!' 상처가 점점 늘어나면서 보스의 빠른 움직임에 조금씩 제동이 걸리기 시작했다. "크아악!" 이미 보스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지워진 지 오래였다. 진우, 이그리트, 아이언 3 인의 공격을 자유롭게 피해 내던 보스가 숨을 헐떡이고 있었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아이언이 보스를 끌어안았다. "지금!" 진우가 신호하자 이그리트가 뒤로 빠졌다. 진우도 같이 뒤로 물러났다. 보스의 눈이 커졌다. "무슨...?" 시전이 끝난 마법병의 폭발 주문이 아이언에게 쏟아졌다. 콰과광-! 퍼엉! "커헉!" 보스가 처음으로 신음을 흘렸다. 놈이 몸을 비틀자 아이언의 팔이 떨어져 나갔다. 콰드득! 보스의 독기 어린 시선이 진우를 향했다. "크아아아악-!" 진우는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저런 상처를 입고서도 아직 저 정도의 힘이!' 과연 상급 던전의 보스였다. 그러나 승부의 추는 이미 기울어져 있었다. '단검 투척!' 아까 그 백귀에게 던졌던 것처럼 단검 투척으로 '나이트 킬러'를 날리고 지배자의 손길로 추진력을 더했다. 슉-! 단검이 눈 깜짝할 사이에 쇄도해왔다. '큭!' 피하기 어렵겠다고 직감한 보스가 자신의 단도로 날아오는 단검을 쳐냈다. 콰직! '나이트 킬러'가 어찌나 빠른 속도로 날아왔는지 막아 내는 단도에 쩌억 금이 갔다. 동시에. '은신' 스킬과 '질주' 스킬로 보스에게 접근한 진우가 '카사카의 독니'를 놈의 옆구리에 박아 넣었다. 푹! 보스의 눈이 커졌다. "커헉!" 하지만 그 와중에도 놈은 진우의 손목을 붙들었다. 곱게 죽어 주진 않겠다는 의지가 엿보였다. "크아악!" 보스가 다른 한손으로 단도를 머리 위로 들어 올리는 순간. 진우가 씩 웃었다. 거대한 망치가 보스의 머리를 내려찍었다. 투쾅! 보스는 그대로 눈 위에 머리를 처박았다. 보스의 뒤에는 어느새 두 팔이 재생된 아이언이 망치를 들어 올리고 있었다. 또다시 망치가 아래를 향했다. 부웅콰직! 다음 공격을 준비하던 이그리트가 검을 허리에 달린 검집에 밀어 넣었다. 진우도 단검들을 창고로 돌려보냈다. 예상대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던전의 주인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휴, 겨우 끝났다.' 진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힘든 승리였다. 이제 숨 좀 돌리려는데 아이언을 보는 진우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야, 야, 그만 좀." 진우가 황급히 만류했다. 또 망치를 내려치려던 아이언이 그제야 손을 멈췄다. 원본을 닮아서 그런지 끝까지 무식한 놈이었다. 이미 보스의 사체는 심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하지만 그림자는 상관없지.' 진우가 피식 웃었다. 어려운 싸움 끝에 값진 보상. 원하던 것이 발아래 있었다. 진우가 나직이 명령했다. "일어나라." *** 벌써 새벽 3 시. 레드 게이트 근처를 지키는 네 사람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보다 못한 현기철이 말을 꺼냈다. "여기는 저희가 지키고 있을 테니 사장님은 먼저 들어가시는 게 어떠십니까?" "길드원들이 저 안에 갇혀 있는데 제가 집에서 쉴 수 있겠습니까?" 백윤호는 단호했다. 한 길드의 수장이자 현역 S 급 헌터로서 안 될 말이었다. 그때 안상민의 눈이 커졌다. "어? 레드 게이트가!" 현기철, 주성찬도 레드 게이트의 이상을 발견했다. "레드 게이트가 열립니다!" "던전이 클리어 됐어요!" "사람들이... 사람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백윤호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김철이! 김철이 해낸 건가!' 우르르전원이 게이트 앞으로 몰려갔다. 흥분을 감추지 못하는 백윤호의 시선이 리더인 김철을 찾아 헤맸다. 하지만 모든 인원이 다 빠져나올 때까지 김철은 보이지 않았다. '어? 어? 이상한데?' 김철만 믿고 있으라던 주성찬도 자신만만한 태도는 어디 가고 점점 표정이 이상해졌다. "박희진 헌터님! 고명환, 윤기중 헌터님!" "성진우 헌터님!" 한송이와 뒤따라 나오는 진우를 발견한 안상민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그럼 그렇지!' 주성찬의 굳은 얼굴과 대비됐다. 하지만 미소는 금방 사라졌다. 성진우를 포함한 다섯 명이 나오자 게이트가 스르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설마... 여기 계신 분들이 전부입니까?" 지친 표정의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질문했던 현기철의 얼굴이 굳어갔다. '이럴 수가...' 현기철은 눈물을 글썽거리며 들고 있던 명단에서 사망자들의 이름에 줄을 그었다. 슬프지만 해야 할 일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백윤호가 기함을 내질렀다. '하급 헌터들만 돌아왔다고? A 급은커녕 B 급은 한 명뿐?'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가자. 데려다줄게." 한송이를 데리고 현장을 빠져나가려는 진우의 손목을 백윤호가 붙잡았다. "이봐요, 잠깐만." 탁! 진우가 손을 뿌리쳤다. 그러자 백윤호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잠깐 이야기 좀 합시다." 진우가 돌아보았다. "지금은 피곤합니다. 물어볼 게 있으면 댁의 길드원들에게 물어보시죠." 참다못한 백윤호가 신원을 밝혔다. "나 백호 길드의 마스터인 헌터 백윤호입니다." 하지만 진우의 눈빛은 여전히 싸늘했다. "그래서요?" 진우의 냉담한 반응에 백윤호의 눈동자가 마수처럼 변해 갔다. 완전히 짐승의 두 눈이었다. "우리는 이번 일로 아홉 명의 길드원을 잃었습니다. 사장인 내가 몇 가지 물어볼 권리 정도는 있을 텐데요?" 이건 부탁이 아니다. 명령. 혹은 협박. 뭐라고 불러도 진우를 순순히 보내 줄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진우가 눈을 부릅떴다. S 급인 백윤호가 진심으로 내뿜는 적의에도 전혀 밀리지 않았다. "내가 그 나머지 세 사람을 구했어. 당신이 사장이라면 먼저 감사부터 하는 게 도리가 아닌가?" 숨 막히는 압박감에 백윤호가 적의를 거둬들였다. 구구절절 맞는 말. 반박할 구석 따윈 없었다. "...미안합니다." 백윤호가 고개를 숙이자, 진우가 다시 돌아섰다. "한송이, 가자." "네." 한송이가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진우를 따랐다. 이윽고 두 사람은 승합차를 타고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갔다. '말도 안 되는...' 머릿속이 헝클어진 백윤호가 생존자들 중 유일하게 상급 헌터인 박희진에게 뛰어갔다. "저기, 박희진 씨." 현기철이 내준 따뜻한 차를 마시며 몸을 녹이던 박희진이 고개를 들었다. "저 사람 뭡니까? 왜 저렇게 저기압인 겁니까?" 천신만고 끝에 레드 게이트에서 돌아왔을 텐데 분위기가 너무 살벌하지 않은가? 박희진이 자기도 의문이라는 듯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어요. 보스를 잡고 나서 그 앞에서 뭐라고 세 번 외치더니 그 다음부터는 계속..." "그전까진 괜찮았습니까?" 박희진이 고명환과 윤기중을 돌아보았다. 둘은 동시에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 별난 사람이네..." 백윤호는 진우가 사라진 골목을 보면서 중얼거렸다. 그러자 안상민이 자기가 잘못한 것처럼 몸둘 바를 몰라 했다. "죄송합니다, 사장님. 오늘은 아마 피곤해서 그런 걸 겁니다. 제가 보기에 나쁜 사람은 아닙니다." "아니, 그게 문제가 아니에요." "예?" 백윤호가 안상민을 돌아보았다. "왜 아직 저 사람을 영입 못한 겁니까?" "예에?" 안상민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백윤호가 느꼈던 당혹감만큼은 못하리라. '나를 상대로...' 백윤호는 방금 마주쳤던 진우의 눈빛을 떠올리며 마른침을 삼켰다. 꿀꺽. 순간 눈앞의 사내와 싸우려면 자신도 팔 하나는 잃을 각오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이상일지도...' 백윤호의 의도를 알아챈 안상민이 급하게 답했다.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런 말로는 부족합니다." 백윤호의 눈이 빛났다. 성진우. 역시 안 과장의 눈은 틀리지 않았다. "앞으로 모든 걸 지원해 드리겠습니다. 저 남자를 꼭 우리 길드로 데려오세요." 65 화 돌아가는 길. 부르릉달리는 차 속에서 진우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쩝...' 추출 대상과 자신의 능력치 격차가 너무 커서일까? 안타깝게도 그림자 추출 스킬은 실패하고 말았다. '아깝지만 어쩔 수 없지.' 상급 던전의 보스는 언제라도 잡을 수 있다. 중요한 건 다시 기회가 왔을 때 놓치지 않도록 능력치 차이를 줄여 놓는 것이었다. 레벨업. 그건 진우가 가장 잘하는 일 중 하나였다. 그리고. 잠시 운전대에서 떨어진 진우의 왼손에 유려한 곡선의 단검 하나가 나타났다. [아이템: 바루카의 단도] 입수 난이도: A 종류: 단검 대전사 '바루카'가 사용했던 단도입니다. 경량화 마법이 걸려 있어 사용자의 움직임을 보다 민첩하게 만들어 줍니다. 공격력 +110 민첩 +10 아예 빈손으로 나오지는 않았다. 보스가 쓰던 단검. 부서진 하나는 버리고, 나머지 하나를 챙겼다. '바루카의 단도.' 높은 자체 공격력에 추가 민첩 스탯까지. C 급인 '카사카의 독니'는 말할 것도 없고, 거금을 주고 마련한 B 급 '나이트 킬러'와도 비교가 되지 않는 단검이었다. 무려 입수 난이도 A 급! 점점 힘이 빠져 가는 '카사카의 독니'를 대체할 최고의 무기였다. '그립감도 좋고.' 레드 게이트에서의 일을 되짚어보는 사이 금방 한송이의 집 근처까지 도착했다. 끼익. 있는 듯 없는 듯 조용하게 앉아있던 한송이가 보조석에서 내려서 꾸벅 고개를 숙였다. "조심히 가세요." "그래." 돌아서는 한송이. 축 처진 어깨와 힘없는 걸음걸이를 보고 있으니 소기의 목적은 달성한 듯싶었다. '일이 좀 꼬여서 그렇지 애초에 한송이를 설득하려고 시작한 일이었으니까.' 앞으로 한송이가 헌터가 된다고 나설 일은 없어 보였다. 처음 들어가 본 던전이 하필 레드 게이트라면 누구라도 마찬가지. 일단은 거기에 만족하고 차를 출발시키려는데, 갑자기 보조석 문이 벌컥 열렸다. '...?' 진우가 돌아보았다. 되돌아온 한송이가 문을 잡고 서 있었다. '얘가 왜 이러지?' 궁금증도 잠시. 한송이가 다시 깍듯하게 고개를 숙였다. "오늘 감사했습니다, 오빠." 그러고 보니 언제쯤인가부터 호칭이 '아저씨'에서 '오빠'로 바뀌어 있었다. "어, 그래." "저..." "음?" "내일, 아니 이따 봬요." 이따? 뜻을 묻기도 전에 한송이는 후다닥 뛰어 올라가 버렸다. 한송이의 뒷모습이 사라지고 나서야 뒤늦게 생각이 났다. '아하.' 오늘부터는 또 유진호와 남은 레이드를 마무리 지어야 했다. 팀원인 한송이와는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그 얘기였군.' 그래도 다행이었다. 이번 일로 한송이가 아예 집에 틀어박혀 버렸으면 일정에 차질이 빚어질 수 있었는데. '잘됐다.' 이제 그림자 병사들을 이용해서 한층 더 빠르게 C 급 던전들을 클리어할 수 있었다. 남은 레이드를 최단기간에 끝낼 자신이 있었다. 거기에 더해 곧 병사들과 첫 대면을 하게 될 유진호의 반응 또한 기대됐다. '윤기중이라는 사람 리액션은 정말 일품이었지.' 진우는 피식 웃으며 천천히 핸들을 움직였다. *** 다음 날 아침. "하암-" 진우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아파트 공동현관으로 내려왔다. 눈을 붙이자마자 어느덧 약속 시간이 되어 있었다. "형님, 좋은 아침입니다!" 활기찬 목소리. 유진호가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차도 없는 녀석이, 뭐 타고 왔어?" 레이드 팀의 애마 '봉고'는 진우가 전날 끌고 갔다 근처의 주차장에 얌전히 주차되어 있었다. "택시 타고 왔습니다, 형님." "아, 택시." 오늘은 입장을 바꿔 이쪽에서 한번 데리러 갈까 했더니. "괜찮습니다. 형님. 제가 도움받는 입장인데요. 당연히 제가 모셔야죠." 유진호가 실실 웃으며 마다했다. 평소와 다름 없는 아침이었다. 그러던 중. "엇?" 유진호가 무언가를 발견했다. 진우 손에 들린 긴 원통형의 무언가. 유진호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형님, 그게 뭡니까?" "아, 이거?" 진우가 씩 웃었다. "오늘 던전에서 쓸 거." 헉. 순간 유진호의 간담이 서늘해졌다. '던전에서 쓸 무기신가?' 보통 때도 남다른 모습만을 보여주는 형님이신데, 이번엔 또 얼마나 흉악한 무기를 들고 오신 걸까. 벌써부터 긴장되기 시작했다. 꿀꺽. 마른침을 삼킨 유진호가 겨우 결심이 선 듯 고개를 들었다. "형님, 가시죠." "잠깐만." 진우가 손을 들더니 이내 다이얼을 눌렀다. "한 명 같이 데려가자." "네? 누구를?" "어. 송이야. 나와, 게이트까지 태워 줄게." 송이... 송이라면? 진우가 전화를 끊자마자 유진호가 물었다. "형님, 설마 데려가자는 사람이 우리 팀의 그 고딩입니까?"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차피 한송이 집도 요 근처고 목적지도 같은데 따로 가야 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유진호에겐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한송이. 머리를 동그랗게 말아 올리고 다니는 귀염상의 여고생. '그 애 번호도 알고 계시고 친근하게 대화까지... 형님과 그 여자애는 벌써 깊은 관계이신 걸까?' 확실히 형님은 같은 남자가 봐도 멋있다. '특히 단검 하나 들고 거대한 마수들을 요리하실 때는 정말...' 형님이야 관심 없으시겠지만 그 여학생이 형님께 반하는 것도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유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그렇게 된 거라면 정해 놔야 할 문제가 있었다. "형님. 이제부터 한송이 양을 형수님이라고 부르면 되는 겁니까?" 이 자식이 아침부터 뭘 잘못 먹었나. 진우의 눈빛이 딱 그랬다. 아무리 눈치 없는 유진호라도 그 정도는 알아챌 수 있었다. "어... 두 분 사귀시는 거 아니셨습니까?" "그냥 동생 친구." "아, 아아." 그렇게 된 거였구나. 유진호는 겨우 상황을 이해했다. 그것도 모르고 뜬금없이 형수님이라고 불렀으니. 낯이 다 화끈거렸다. 곧 한송이가 나왔다. 평소 레이드 할 때보다 한껏 차려입고서. 유진호가 씩 웃었다. '친구 오빠에게 잘 보이고 싶어 하는 10 대 소녀답구나.' 공대장답게 모처럼 신경 써서 나온 공대장의 복장을 칭찬해 주려는데, 진우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잠은 좀 잤어?" 일순간 유진호의 표정이 굳어졌다. '...' 한송이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한숨도 못 잤어요." "피곤할 텐데 차에서라도 좀 쉬어." 두 사람의 대화에 유진호의 머릿속이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어, 어어?' 이번엔 한송이가 진우에게 물었다. "오빠는 좀 주무셨어요?" "눈만 붙이고 나왔지, 뭐. 집에 들어가니까 4 시가 넘었던걸." "하긴..." 밤? 한숨도? 피곤? 집에 들어가니 4 시? 유진호가 당황을 넘어 경악을 느끼고 있을 때, 봉고로 향하던 진우가 유진호를 뒤돌아보았다. "유진호, 뭐해?" "저... 그, 형님?" "...?" "저기, 한송이 양은 미성년자입니다, 형님." "그런데?" "...아닙니다, 형님." 역시 형님은 상남자시다. 유진호는 세간의 이목 따위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 진우의 거침없음에 감탄하면서. '역시 보통이 아니셔.' 일반인의 기준으로 형님에게 잣대를 들이댄 자신을 깊이 반성했다. *** 같은 시각. 백호 길드의 소회의실. "제가 본 건 거기까지입니다." 박희진이 말을 맺었다. 그녀는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백윤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조사에 응했다. 자신은 거기서 비교적 편하게(?) 있었다면서. "..." "..." 조사를 진행한 상급자 두 사람, 사장 백윤호와 가장 안상민은 할말을 잃었다. 담당자인 현기철은 대처를 논의하기 위해 협회에 간 상태였다. 그래서 회의장에는 세 사람이 전부였다. 안상민이 정적을 깼다. "그게 전부 사실입니까?" "고명환, 윤기중 두 사람에게 연락해 보세요. 아마 똑같이 말해 줄 거예요." 가족이 보고 싶다며 집으로 돌아간 두 사람. 박희진은 그 두 사람의 증언과 자신의 증언이 다르지 않으리라 장담할 수 있었다. '내가 직접 겪은 일들만 설명했으니까.' 그 남자가 없을 때 먼 숲에서 간간이 아이스 베어들의 비명이 들려왔다거나, 남들 다 자는 사이 일어난 그 남자가 혼자 팔굽혀 펴기를 하고 있었다거나. 자신 외의 멤버들이 보고 들은 일은 아예 입에 담지도 않았다. "허..." 안상민은 신음인지 침음인지 모를 소리를 냈다. A 급 헌터를 한방에 기절시키고, 아공간을 자유자재로 이용하고, 수십의 소환수를 다룰 수 있다. 온통 믿기 힘든 이야기들뿐이었다. 무엇보다 놀라운 점은. "상급 던전을 거의 혼자서 클리어했다는 것." 침묵을 지키고 있던 백윤호의 한마디. S 급이기에 말할 수 있었다. "그거 참 대단한 일입니다." 소환수들과 같이 싸웠다지만 소환수들은 동료가 아니라 성진우 헌터의 스킬. 결국 성진우 혼자 던전을 클리어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아무리 높은 랭크의 헌터라도 상급 던전을 혼자 힘으로 공략하기는 힘듭니다." 그것도 무려 레드 게이트를. 자신이 나선다면? B 급 레드 게이트 정도나 간신히 클리어할 수 있을까? 하나가 아닌 다수의 소환수를 다룰 수 있는 성진우 헌터이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안상민이 놀랍다는 듯 말했다. "그가 희귀 능력 각성자임은 틀림없군요." 백윤호도 동의했다. "소환수를 부리는 헌터 자체도 드물지만, 다수의 소환수를 부릴 수 있는 헌터라니..." S 급 헌터로 활동하며 수많은 헌터를 만나고, 그들과 대화를 나눠봤지만 들어 본 적 없었다. "일반적인 희귀 능력보다 한 차원 더 높은 수준의 희귀 능력 각성자..." 백윤호가 감탄했다. 문득 떠오른 안상민의 질문. "성진우 씨의 능력을 몸값으로 환산하면 지금 얼마쯤 될까요?" "..." 백윤호도 선뜻 답을 낼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현재 성진우의 몸값을 얼마로 산정하든 등급 재심사가 끝나는 순간 그 몇 배로 뛴다는 것. 그렇게 되기 전에 잡아야 한다. 이미 백호 길드는 A 급 헌터 하나와 B 급 헌터 다수를 잃었다. 여기서 성진우라는 보장된 카드를 붙잡지 못한다면 그 손실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었다. "안 과장님만 믿습니다." 백윤호가 신뢰의 눈빛을 보냈다. 안상민이 비장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였다. "음?" 백윤호와 안상민의 시선이 동시에 박희진에게 향했다. 박희진이 손을 들고 있었다. 백윤호가 물었다. "뭔가 질문하실 거라도 있습니까?" 두 사람의 시선을 모으는 데 성공한 박희진이 손을 내리며 말했다. "저도 돕게 해주세요." "뭐를요?" "공대장님, 아니 성진우 헌터님의 영입요." 백윤호와 안상민이 잠깐 서로를 마주 보다가 다시 박희진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영입 담당자인 안상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박희진 헌터님이 왜...?" "제가 백호 길드의 누구보다도 성진우 헌터님과 오랜 시간을 같이 보냈으니 다른 분들보다 훨씬 도움이 될 거 같아서요." 현실에서의 6 시간. 레드 게이트 안에서는 거의 일주일이었다. 박희진의 제안은 백윤호나 안상민이 듣기에도 그럴싸하게 들렸다. 거기다 박희진은 미인. 사람을 끌어들이는 데 있어서 외모의 힘은 절대적이라 할 수 있다. 사장과 과장의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 박희진이 드디어 본론을 얘기했다. "대신 조건이 있습니다." 백윤호가 물었다. "뭡니까?" "성진우 헌터님이 백호 길드에 들어오면 저를 무조건 그분 공격대에 넣어 주세요." 66 화 박희진은 알게 되었다. 상급 던전이 얼마나 무서운 곳이며 자신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지. '성진우 씨가 한송이에게 알려 주려고 했던 걸 내가 배우게 된 꼴이잖아...' 부끄럽지만 어쩌겠는가? 무서워해야 하는 것을 무섭지 않다고 우기는 건 만용이며 어리석은 짓이다. 레드 게이트에서 있었던 일은 분명 살 떨리는 경험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B 급 헌터가 누릴 수 있는 대우와 지위를 포기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높은 연봉! 많은 혜택! 그리고 사회적 인식까지! 위험하다는 점만 빼면 헌터는 완벽에 가까운 직업이었다. 즉 리스크가 크기 때문에 돌아오는 것도 많다는 이야기. 하지만 박희진은 거기서 리스크까지 줄일 방법을 찾아냈다. '성진우 공대장님과 함께 레이드를 하는 거.' 레드 게이트 안에 있는 동안 박희진이 가장 부러워했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한송이였다. 이유는 단 하나. 첫날 성진우가 한송이에게 했던 약속 때문이었다. -너는 내가 데려왔으니 책임지고 지켜 준다. 그 말을 다르게 해석하면 한송이를 제외한 다른 팀원들은 책임지고 지켜 줄 이유가 없다는 뜻. 그냥 덤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행여 두 사람이 몰래 떠나버리지는 않을까 내내 마음을 졸였었다. 그리고 6 일째 되던 날. 정말로 성진우는 혼자서 상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한송이를 무사히 집으로 돌려보냈다. 약속을 지킨 것이다. 그 모습을 보며 박희진은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아. 저 사람 밑에서 레이드를 하면 위험에 빠질 일은 없겠구나, 하고.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가슴이 뛰었다. 그 두근거림은 아직도 진정되지 않았다. 냉철한 판단력. 뛰어난 능력. 그리고 책임감까지. 다음 레이드에도 꼭 성진우와 함께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건 조건이었다. '무조건 성진우 공대장이 있는 공격대에 넣어 달라는 조건.' 백윤호와 안상민이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를 나눴다. 잠시 후. "좋습니다." 백윤호가 호쾌하게 웃었다. "그럼 박희진 씨는 당분간 안 과장님과 같이 움직이세요." "감사합니다." 하지만 스카웃은 쉽지 않을 게 분명했다. 성진우는 자신이 가진 능력의 가치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레드 게이트에서도 늘 자신감이 넘쳤으니까.' 그를 움직이게 만드는 건 분명 만만치 않을 거다. '그래도...' 다시 만날 수 있는 가능성이 생겼다. 박희진은 보이지 않게 미소를 지었다. 무언가를 고민하던 백윤호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안 과장님." "네." "성진우 씨 연락처를 알고 싶습니다." "사장님, 그게..." 안상민은 털어놓았다. 왜 자신이 진우 이야기를 숨겨 왔었는지. 백윤호가 곰곰이 들어 보더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만한 능력들을 가지고 있으면 숨기고 싶을 만도 하죠. 세상엔 남들 눈에 띄는 걸 싫어하는 사람도 있는 법이니까." 그런 남자가 많은 사람들 앞에서 자기 능력을 보였다. 위급한 상황인 것도 있겠지만 슬슬 세상에 자신을 드러내도 괜찮으리라는 자신감의 발로이기도 할 거다. "일을 크게 만들지만 않으면 성진우 씨도 안 과장님을 탓하지는 않을 겁니다." 안상민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이 이야기가 밖으로 새어 나가게 할 생각은 없었다. 성진우도 성진우지만, 협회나 백호 입장에서도 알려져서 좋을 게 없었다. "그건 그렇습니다만..." 안상민이 걱정하는 것은 따로 있었다. 성진우 헌터의 단호한 성격을 모르는 사장님이 서두르다 일을 그르치는 거. 그것만은 막고 싶었다. "사장님이 직접 연락을 취하시는 건 아무래도..." 백윤호도 안상민이 뭘 걱정하는지 눈치챘다. "아, 영입 문제 때문에 연락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예? 그럼 왜...?" "성진우 씨가 어제 했던 말 그대롭니다." 백윤호는 박희진이 해 주는 얘기를 듣고 깨달았다. 성진우는 백호 길드의 은인이었다. 백호 소속의 신입 세 명을 구했다. 거기다 레드 게이트를 없애 백호 길드의 명성에 금이 가는 일도 막았다. 실수는 협회가 했다고 해도, 이 일이 공론화되고 백호 길드가 신입들을 모두 잃었다는 사실이 대외에 알려지면 길드 이미지가 얼마나 추락했을까? 상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몸서리쳐질 만큼. '그럼 사람을 다짜고짜 붙들고 조사하려고 했으니.' 그가 기분 나빠 했던 이유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 사실을 몰랐다면 모를까. 알았다면 사람으로서 마땅히 해야할 일이 있었다. "백호 길드의 대표로서 성진우 씨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습니다. 어제 일도 확실하게 사과해 둘 겸." '아, 그런 얘기라면...' 안상민도 충분히 납득했다. 맞으면 맞고, 아니면 아닌 백윤호의 성격에 감사한답시고 영입 문제를 들먹이며 성진우를 귀찮게 하는 일은 없을 터.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고맙단 말을 전하고 싶었다. "알겠습니다." 안상민은 폰을 꺼냈다. 금방 성진우의 번호를 찾았다. "번호가 어떻게 됩니까?" 백윤호도 연락처를 받아 적기 위해 폰을 꺼내 들었다. 그때. "번호가..." 막 번호를 읊으려던 안상민이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저기, 박희진 헌터님은 왜?" "아, 네..." 박희진은 왠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연락처 추가 화면이 떠 있던 폰을 슬그머니 감추었다. ***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헌터스. 헌터스의 사장이자 현역 S 급 헌터인 최종인에게 흥미로운 정보가 하나 흘러들어왔다. "이거... 확실한 겁니까?" 확실하지도 않은 이야기로 사장실의 문을 두드렸을까? 영입담당부 부장 조명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 오늘 협회에서 얻어 낸 정보입니다." 대형 길드들은 협회에 정보원을 하나씩 두고 있었다. 떳떳한 일은 아니지만 그래야 상급 각성자가 나타났을 때 한발 앞서 연락할 수 있으니까. 그런데 오늘은 정보원이 묘한 이야기를 흘렸다. 조명기는 고민 끝에 사장실로 올라왔다. '최근 상승세인 백호 길드는 헌터스의 자리를 넘보고 있는 초대형 길드니까.' 보고할 만한 가치가 있겠다고 생각했다. 조명기의 예상대로 최종인은 깊은 관심을 보였다. "A 급 하나, B 급 여섯이 죽은 레드 게이트에서 C 급 둘이 살아 나왔다? 그것도 던전을 클리어하고? 말도 안 되는 얘깁니다, 이건." B 급 하나가 껴있는 건 그렇다 쳐도. 메모를 읽어 내려가던 그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분명 여기 나와 있지 않은 다른 조력자가 있었던 겁니다." 최종인은 확신했다. 오랜 레이드 경험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조명기가 대답했다. "협회에서도 그쪽을 의심해 봤나 봅니다. 그런데..." "그런데요?" "백호가 입을 다물었답니다." "그래서 그냥 넘어간답니까?" "아무래도 이번에는 협회 쪽 잘못이 커서 크게 문제 삼고 싶지 않아 한다더군요." "흐음..." 최종인이 턱 끝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가 생각에 잠길 때의 버릇이었다. 협회는 그렇다 쳐도, 백호는 왜 쉬쉬할까? 결론은 하나다. "백호 쪽에서 밖으로 알리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거구만."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두 사람의 의견이 일치했다. 최종인의 머리가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상급 헌터 다수가 죽었던 높은 난이도의 던전에서 하급 헌터들을 구해 낸 이름 없는 조력자라...' 정체가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아직 각성자 판정을 받지 않은 신인? 아니면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범죄자?' 어느 쪽이라도 좋다. 신인이라면 헌터스로 데려와야 할 것이고, 범죄자라면 백호의 이름에 먹칠할 수 있다. 최종인의 눈이 반짝였다. "거기 누가 있었는지 알아야겠습니다." "좋은 방법이라도 있으십니까?" "숨어 있는 너구리를 잡으려면 너구리굴에 불을 질러야지요." 조명기가 눈을 뎅그렇게 떴다. "백호 길드에 불이라도 지르실 생각이십니까?" "내가 미쳤어요? 멀쩡한 남의 회사에 불을 지르게." "아, 죄송합니다. 사장님께서 워낙 훌륭하신 마법계열 헌터시다 보니..." 오죽하면 별명이 최종병기일까? 최종인이 마음먹고 스킬을 쓰면 빌딩 하나 날리는 건 식은 죽 먹기긴 했다. 아무튼 최종인이 말을 이었다. "그게 아니라, 화제를 만드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을." 최종인의 눈매가 매서워지자 조명기가 입을 다물었다. "언론에 제보합시다." '그런!' 조명기의 눈이 커졌다. "헌터 협회의 실수, 대형 길드의 참사, 그 뒤에 감춰진 미스터리. 이거 언론이 딱 좋아할 소재 아닙니까?"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최종인은 후후 웃었다.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으면 백호길드도 제풀에 지쳐서 조력자의 정체를 공개하게 될 겁니다." "그런 방법이 있었군요!" 조명기도 따라 웃었다. 헌터스의 뒤를 바짝 추격해 오는 백호에게 한 방 먹여 줄 기회. 최종인의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기자들에게 당장 연락하세요." ***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진우는 던전에 들어가자마자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흠.' 며칠 필드형 던전 안에 갇혀 있었더니, 동굴형 던전의 공기가 새롭게 느껴졌다. 곧 유진호가 따라 들어왔다. "이번 던전에선 어떤 마수가 나올까요?" "글쎄..." '분명 기척은 가까이 있는데.' 기척은 가까운데 보이지가 않았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여기저기서 동굴 바닥이 몸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우두두두. 우두두. 사람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피부가 암석으로 이뤄진 마수들. 유진호가 사람들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형님, 스톤맨들입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급 던전에서 볼 수 있는 마수들 중 가장 표피가 단단하다고 알려진 놈들. 대개 스톤맨을 잡을 때는 마법을 써야 한다는 게 상식이지만. "잠깐 들고 있어." 진우는 원통형의 비닐팩을 유진호에게 맡기고 마수들에게 걸어갔다. '헉!' 안에 든 게 무기인 줄 알고 있던 유진호가 잠깐 움찔했으나 별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기가 아닌가?' 그사이 스톤맨들 앞에 선 진우가 '바루카의 단도'와 '나이트 킬러'를 불러냈다. 스걱! 순식간에 맨 앞에 있던 스톤맨의 머리가 굴러떨어졌다. 진우는 '바루카의 단도'를 바라보며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쓸 만하네?' 씩 웃던 진우의 신형이 순간 사라졌다. 착. 진우가 스톤맨들 뒤에 나타난 것과 동시에 10 여 마리가 넘었던 놈들이 일제히 쓰러졌다. 후두두두둑. '레드 게이트에서 나온 뒤로 몸이 한층 더 가벼워졌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현재 레벨은 60. 곰들과 백귀를 잡고 51 이었던 레벨이 아홉 계단이나 올라갔다. C 급 마수들이 예전 E 급 던전에서나 볼 수 있었던 고블린처럼 느껴졌다. '이 정도면 무기를 꺼낼 필요도 없겠다.' 몸풀기는 이 정도면 됐고. '사냥 속도를 좀 더 올려 볼까?' 병사들을 쓸 때가 됐다. 마침 동굴 안 저편에서 또 한 무더기의 스톤맨들이 어슬렁어슬렁 접근해 왔다. '소환.' 지시를 내리자 진우의 그림자에 갇혀 있던 그림자 병사들이 진우의 뒤편에서 스르르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아차. 진우가 이마를 짚고서 돌아보았다. '저 녀석이 있었지.' 너무 신을 내다 보니 유진호의 존재를 깜박하고 말았다. "혀, 혀형님." 유진호는 엉덩방아를 찧은 채 손가락으로 자기 옆에 나타난 그림자 병사들을 가리켰다. "이, 이것들이 다 뭡니까?" "설명하면 복잡한데... 일단은 내 스킬." "스, 스킬로 이런 것들을 불러내실 수 있다고요?"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호는 벌린 입이 다물어 지지가 않았다. "아..." 형님과 함께 던전에 들어 온 지도 벌써 11 번째. 더 이상 놀라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오산이었다. 역시 형님은 예상을 뛰어넘는 존재였다. 꿀꺽. 살벌한 기운을 풍기는 검은 갑옷의 병사들을 바라보며 유진호는 힘들게 침을 삼켰다. 진우가 다시 시선을 옮겼다. 느리게만 보였던 스톤맨들이 어느새 근처까지 도착해있었다. 진우가 놈들을 향해 턱짓했다. "출동."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병사들이 달려 나갔다. 두두두두. 사십 가까이 되는 병사들이 한꺼번에 움직이자 동굴 바닥이 흔들렸다. 확실히 아이언과 마수병들 같은 덩치들이 느니 병사들의 무게감이 늘었다. '꼭 전차부대를 보는 거 같네.' 진우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병사들이 휩쓸고 지나가자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던전이 깔끔하게 정리됐다. 주변엔 온통 진흙 쿠키처럼 부서진 스톤맨들의 잔해뿐. C 급 던전 하나가 한순간에 박살났다. 호진우가 감탄했다. '이 정도면 남은 레이드도 금방 끝낼 수 있겠는데?' 남아있는 여덟 번의 레이드가 그렇게 오래 걸릴 거 같지 않았다. 척, 척, 척. 전투가 끝나자 마정석을 수거한 그림자 병사들이 진우 앞으로 반듯하게 정렬해 섰다. 맨 앞에는 이그리트와 아이언. 두 기사가 나왔다. 병사들이 모든 움직임을 멈추자 그제야 유진호가 살며시 진우 옆으로 다가왔다. "형님, 여기..." 진우에게서 넘겨받았던 비닐팩을 돌려주었다. 진우는 비닐팩에 쌓여 있던 텀블러를 꺼내 빨대를 물었다. "형님 그게 뭡니까?" "채소 주스." "아..." "마셔 보니 괜찮더라고." 쿠르륵 쿠륵. 텀블러가 거의 다 비었을 때쯤 유진호에게 물었다. "진호야, 오늘 게이트 몇 개 잡았지?" 조심스럽게 마수병의 털끝을 만져보려던 유진호가 동작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네 개입니다, 형님." 오늘 네 개를 끝내면 남은 게이트는 다섯 개. 질질 끌 이유가 없었다. "그럼 내일 끝내 버리자. 좀 멀리까지 가도 상관없으니까." "내일 말씀이십니까?" 문득 유진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사방에 널브러져 있는 스톤맨들의 잔해를 돌아보던 유진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이 속도라면...' "알겠습니다, 형님. 그런데." 머뭇거리던 유진호가 어렵게 말을 이었다. "마정석은 제가 주우면 안 되겠습니까?" "왜?" "제 자리를 뺏긴 거 같아 분합니다, 형님." 진우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하여간 별난 녀석이라니까.' 그로부터 하루 뒤. 진우는 유진호와 약속했던 19 번의 레이드를 모두 채웠다. 67 화 "형님! 레이드도 끝났는데 회식 어떠십니까?" 돌아가는 차 안에서 유진호가 조심스럽게 물어 왔다. "회식? 아무도 없는데?" 공격대는 마지막 레이드가 끝나고 바로 해산시켰다. 한송이도 따로 갈 데가 있다고 해서 차에는 진우와 유진호 두 사람뿐이었다. 유진호가 쑥스러운 듯 말했다. "형님께 계속 도움만 받았으니 오늘은 제가 한 끼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요." 밥 한 끼 먹자는 말을 왜 이렇게 어렵게 할까? 진우는 피식 웃었다. 그냥 같이 먹자는 것도 아니고 한 턱내고 싶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좋지." 진우가 흔쾌히 수락하자 유진호의 얼굴이 알아보기 쉽게 밝아졌다. "형님! 제가 잘 아는 호텔 레스토랑이 있는데 그리로 모실까요? 거기 스테이크가 아주 끝내줍니다." "그런 거 말고." 꼭 참석해야 할 자리에서 그런 메뉴가 나왔다면 모를까, 유진호와는 편한 장소로 가서 마음 편하게 먹고 싶었다. 마침 적당한 곳이 눈에 들어왔다. 톡. 진우의 손가락 끝이 차 유리를 찍었다. "저긴 어때?" "아, 한우 드시고 싶으셨습니까?" "아니, 그 옆에." 유진호의 눈이 가늘어졌다. 옆에 있는 식당이라면... 한 곳밖에 보이지 않았다. [삼겹살 꽃피는 날에- 대패 삼겹 전문] "혹시 대패 삼겹살집 말씀이십니까, 형님?" "삼겹살 싫어하냐?" 그러자 유진호가 싱긋 웃었다. "아닙니다. 저도 좋아합니다, 형님." 근처 주차장에 차를 대 놓고 가게 안으로 들어섰더니 바쁘게 움직이는 알바생들과 손님으로 가득 찬 내부가 한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오후 7 시. 음식점이 붐빌 시간이긴 했다. "어서 오세요." 알바생이 미소를 짓고 다가왔다. "몇 분이세요?" "두 사람요." "이리로 오세요." 유진호의 대답에 알바생이 두 사람을 구석진 자리로 안내하려 했다. 그런데. "잠깐만요." 가게 내를 둘러보던 유진호가 창가 쪽의 빈자리를 가리켰다. "저기는 안 될까요?" "아, 저기는 지금 예약이 있어서..." 단체 예약 손님이 있는지 식탁 여러 개를 붙여 놓은 자리가 전부 비어 있었다. 유진호는 널찍한 빈자리들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결국 두 사람이 앉게 된 곳은 가게의 가장 안쪽, 후미진 자리였다. 유진호가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합니다, 형님." "네가 죄송할 일이 뭐 있냐. 여기 오자고 한 것도 난데." "그래도 제가 좀 더 좋은 곳으로 모셨어야 하는데." 진우가 씩 웃으며 유진호의 어깨를 툭 쳤다. "그런 걱정 말고 먹기나 잘해, 인마." 오히려 진우는 이런 싸구려 고기가 도련님 입맛에 맞을까가 걱정이었다. '그리고 말을 아꼈지만...' 진우가 주변을 둘러보았다. 사람들, 그리고 또 사람들. 항상 조용한 집에서 대부분 시간을 보냈기 때문인지 이런 복작복작한 분위기도 싫지 않았다. "삼겹살 3 인분, 소주 2 병 나왔습니다." 곧 주문한 삼겹살과 소주가 나왔다. 치이이익불판 위에 올린 고기가 먹음직스럽게 익어 갔다. 한 점, 두 점, 고기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다행히 유진호 입맛에도 맞는 모양이었다. "저 친구들하고 삼겹살집 자주 갑니다, 형님." "그래? 대학 친구들?" "네, 형님. 비싼 사립초중고 나온 친구들보다 평범한 대학 친구들이 저랑 더 잘 맞더라고요." 진우는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호라면 그럴 만도 했다. "한 잔 받으세요, 형님." "너도." 꼴꼴꼴. 서로 잔을 채우고, 살짝 건배 후 원샷. "캬하." 그러나 소주를 음미하는 유진호와 달리 진우는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엇? 형님, 입맛에 안 맞으십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진우는 빈 술잔을 허탈하게 내려다 보았다. 그동안 정신없이 바쁘게 보내서 그만 깜박하고 있던 것이 있었다. 띠링. [해로운 성분이 감지되었습니다.] ['버프: 해독'의 효과로 치료를 시작합니다.] [3, 2, 1... 해독이 완료되었습니다.] '이제 취할 수 없게 됐었지, 참.' 몇 잔을 마셔도 마찬가지. 띠링, 띠링, 띠링. 모든 해로운 효과를 차단해 버리는 '무병장수' 버프가 있는 한 소주는 그냥 맛이 좀 씁쓸한 맹물이나 다름없었다. 진우는 속으로 욕지기를 내뱉었다. '젠장.' 쓸데없이 쓰기만 한 물을 마시느니 차라리 음료를 마시고 말지. "저기요." 알바가 쪼르르 달려왔다. "삼겹살 2 인분 더 추가에 사이다 1 병 주세요." "네." 알바가 가고 나서 유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형님, 왜 술을 더 시키지 않으시고요?" "내가 술을 잘 못 마셔." 진우가 얼굴빛 하나 바뀌지 않고 대답했지만, 유진호는 역시 평소답게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러고는 취기가 올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헤벌쭉 웃었다. '형님께도 이렇게 인간적인 면모가...' 유진호가 색다른 시선을 보내왔지만, 진우는 그냥 깔끔하게 무시해 버렸다. '저 녀석이 이상했던 게 어제 오늘 일도 아니고.' 유진호에게 궁금했던 건 따로 있었다. "앞으로 어떻게 할 예정이야?" 진지한 질문이 나오자 유진호는 면접관을 앞둔 취준생처럼 정자세를 했다. "협회에서 간단한 필기시험을 치르기만 하면 길드 마스터 면허가 바로 나옵니다. 형님. 그걸 가지고 저희 아버지와 딜을 한번 해 볼 생각입니다." 유진호의 눈에 비장감이 넘쳤다. 그걸 위해 투자한 돈도 크고,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었다. '게다가 형님과의 약속도 걸려 있어.' 진우에게 주기로 한 길드 빌딩. 그건 아버지, 유명한 회장에게서 길드 마스터 자리를 넘겨받아야 지킬 수 있는 약속이었다. 반면 진우는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3 백억짜리 빌딩이야 받으면 좋긴 하지만.' 어차피 그건 덤이었을 뿐이다. 진짜 목적은 레벨업. C 급 게이트를 들락거리는 동안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높은 레벨이 되었다. 목표는 이미 이룬 셈이었다. 레벨업의 결과? 수십억 이상의 연봉이 보장되어 있었을 A 급 헌터 김철이 뒤통수 한 방에 나가떨어져 의식을 잃었다. '적어도 녀석보다는 많은 돈을 받을 수 있게 됐단 말이지.' 실력이 뛰어나면 돈은 따라오게 되어 있다. 초조해할 필요가 전혀 없었다. 그런 여유로움이 표정에서부터 묻어나왔다. 진우가 지난 며칠간을 회상하며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고 있을 때, 유진호가 물었다. "형님은 이제 어떻게 지내실 예정이십니까?" "나?" 혹시 물어선 안 될 것을 물은 건가? 잠깐 흠칫했던 유진호가 진우의 부드러운 표정에 한숨을 놓았다. "당분간 연락이 안 될 거야. 어디 가야 할 데가 있어서." 그 한마디에 유진호의 얼굴이 경직됐다. 버림받은 강아지 같은 표정을 하고 있던 유진호가 앞에 놓여 있던 술잔을 순식간에 비웠다. 탁. 술잔을 테이블 위에 놓은 유진호. 한 잔을 더 비우고 나서야 어렵게 입을 열 수 있었다. "형님, 제가 만약에 번거로우신 거라면 말씀하세요. 앞으로 더 이상 형님을 귀찮게 하지 않겠습니다." '이 녀석...' 연락이 안 될 거라고 해서 이상한 쪽으로 오해한 모양이었다. 옆머리를 긁적이던 진우가 대답에 앞서 물었다. "진호야." "예. 형님." "넌 날 어떻게 생각하냐?" "저는..." 마땅한 대답이 떠오르지 않는 듯 눈을 굴리던 유진호가 고개를 들었다. "저한테 10 살 이상 차이 나는 형이 하나 있습니다, 형님." 들은 적 있었다. 유명한의 장남, 유진성. "형은 저를 좋아하지 않아서 형과 단둘이 있었던 시간이 아마 형님과 보낸 시간보다도 적을 겁니다. 그에 비하면 형님께선 제 목숨도 구해주셨고, 제 일도 도와주셨고..." 유진호가 눈을 똑바로 뜨고 말했다. "제게는 형님이 친형보다 더 형 같습니다." 아직도 진우가 무섭긴 했다. 그래도 요 며칠간 진우를 따라다니던 순간은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무서운 마음보다 존경하는 마음이 더 컸다. "네가 나를 형으로 생각한다면." 진우가 미소를 띠고 말을 이었다. "나도 너를 동생으로 생각하마." "혀... 형님." 코끝이 빨개진 유진호가 울먹거리기 시작했다. 그것뿐이라면 다행인데 자꾸 달라붙으려고 했다. "형님! 한번 안아 드려도 되겠습니까?" "야, 야! 너 취했어, 인마!" "아닙니다, 형님! 저는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맨정신입니다, 형님!" "눈이나 제대로 뜨고 말해!" "으허어어엉!" 감격한 건지, 주사가 심한 건지 진우는 테이블에 엎드려 눈물을 뿌리기 시작한 유진호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곧 잠이 든 유진호가 조용해졌다. "하... 가지가지 하는 녀석이네." 진우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혀끝을 찼다. 유진호. 여러모로 귀찮은 녀석이었지만 이상하게 그다지 밉지는 않았다. -다음 소식입니다. 문득 진우의 시선이 그리로 향했다. 고기집의 TV 에선 한참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벌써 9 시가 됐나?' 그렇게 별생각 없이 TV 화면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낯익은 인물이 나왔다. '어?' 진우의 눈이 커졌다. 길드 건물을 빠져나오며 기자들의 질문 세례를 받고 있는 인물은 백윤호였다. "신입 훈련 과정에서 큰 사고가 있었다는데, 그것이 사실입니까?" "상급 헌터가 전부 사망하고 하급 헌터들만 살아 나왔다는 게 맞습니까?" "일각에서는 생존자들을 도운 누군가가 있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데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기자들을 무시하려던 백윤호가 하는 수 없이 대답한다. "이미 협회와 조사가 끝난 부분입니다. 사고가 난 것은 맞지만 조력자 같은 건 없었습니다. 저희 백호 소속 헌터들이 힘을 합쳐 상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왔다. 그 과정에서 다수의 헌터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게 전부입니다." 기자가 묻는다. "그럼 어째서 생존자들과의 인터뷰를 차단하고 계신 겁니까?" "그분들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왔습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이런 피곤한 질문을 해야겠습니까? 대답은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황급히 차를 타고 빠져나가는 백윤호. 진우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거 내 얘기 아냐?' *** 얼마 전 미국 동부. 던전 안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아아아악-!" 제임스가 털썩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는 바닥을 기어 도망치다 막다른 벽에 몰렸다는 걸 깨닫고 절망스런 표정을 지었다. "지저스!" 게이트의 랭크는 A 급. A 급 게이트를 공략하기 위해 그에 맞는 정예 멤버를 꾸려 들어왔다. 그런데 그 멤버들이 전멸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기절한 것뿐이지만. '믿을 수 없어!' 벽에 등을 기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던 제임스가 고개를 수차례 가로저었다. 정말로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던전에 들어왔을 때, 공격대는 어떤 마수도 발견하지 못했다. 마수가 한 마리도 없었다. -마수가 없는 던전? -그런 게 있었어? -그럼 게이트 밖에서 측정한 마력은 어디서 나왔던 거야? 헌터들의 의견이 분분했다. 그것도 믿기지 않는 일이었는데, 더 놀라운 일은 보스방에서 일어났다. 보스방에 들어갔더니 마수가 있었던 것이다. 인간과 똑같이 생긴 마수 하나가. 그런데 단 하나. 그 마수 한 마리의 공격에 공격대가 전원 의식을 잃고 말다니. 이건 강해도 너무 강했다. 제임스만 겨우겨우 보스방을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설마 이 던전 전체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그 마수 하나에게서 비롯된 것인가?' 저 멀리 게이트 밖으로 흘러나오는 마력만 쟀는데도 무려 A 급을 넘어선다고? 제임스는 다시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야.' 그런데. "하... 이거 참." 그 마수가 어둠 저편에서 걸어 나왔다. 마수를 발견한 제임스가 비명을 내질렀다. "으, 으아아아악!" "어휴, 귀 아파라." 마수, 아니 머리와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동양인 남자는 정수리를 북북 긁었다. "아, 아아..." 제임스는 이제 비명 대신 신음 소리를 내었다. 제임스 앞에 선 남자가 옆구리에 손을 얹었다. "아니, 그러게 왜 다짜고짜 공격하냐고? 나 마수가 아니고 인간이라니까." 제임스가 알아들을 수 없는 기괴한 언어였다. 그의 안색이 창백해져 갔다. 겁먹은 제임스를 고민스런 시선으로 내려다보던 동양인. 한숨을 푹 내쉬었다. "이거 뭐 코쟁이들이랑 말이 통해야..." 아무튼 또 다시 대화를 시도했다. 쭈그려 앉아서 코쟁이와 눈높이를 맞추고, 목소리도 되도록 친절하게 들리게끔 했다. "헤이, 헤이." 떠오르는 몇 개의 영어 단어. 그러나 짧은 지식으로는 이게 문법에 맞는지조차 알 수 없다. "아임 코리언." 그래서 최대한 또박또박 발음을 내뱉었다. "아이 원트 투 고 홈." 68 화 전대미문의 사건! 던전에서 살아 있는 사람이 나오다! 헌터관리국에 비상이 걸렸다. 소식을 들은 부국장이 직접 취조실을 찾았다. 매직미러의 안쪽. 얌전히 수갑을 차고 앉아 있는 동양인 남자가 보였다. "저 남자인가?" "그렇습니다." "겉보기에는 일반인과 다를 바 없는데?" "그렇습니다." 말 그대로였다. 덥수룩한 머리와 수염만 정리하면 동양의 흔한 중년 남성으로 보일 것 같은 외모였다. "신원은 알아냈나?" "자신을 한국의 헌터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한국?" "그렇습니다." "한국의 헌터가 어떻게 지구 반대편의 던전에서 나왔다는 건가?" "10 년 전에 던전을 갇힌 채로 게이트가 닫혔는데." "눈을 뜨고 보니 미국이었다?" "그렇게 주장하고 있습니다." 부국장은 이마를 짚었다. 이걸 국장한테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벌써부터 머리가 아파 왔다. "그런데 자네들은 여기서 뭐 해? 들어가면 뭐라도 캐오지 않고." 어쩌면 국장이 아니라 그 윗선, 아니 그 위의 윗선까지 보고해야 할지도 모르는 문제. 이렇게 구경만 하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하지만 담당 부장의 생각은 달랐다. "저희는 저 남자가 인간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마수일 가능성에도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취조 과정에서 본색을 드러내면 워싱턴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일리 있는 말이었다. A 급이 다수 섞인 공격대도 꼼짝없이 당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조사할 때 실력 있는 헌터를 대동해야겠군." 기왕이면 S 급으로. 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가까운 곳에 한국어가 가능한 S 급 헌터가 한 분 계십니다." 부국장의 얼굴이 밝아졌다. 명색이 헌터관리국 부국장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S 급 헌터의 명단쯤은 훤히 꿰고 있었다. "미스터 황! 그가 오고 있나?" "그렇습니다." 스케빈저 길드의 메인헌터 황동수. 그를 귀화시키기 위해 헌터관리국 전체가 얼마나 애를 썼는지 모른다. '그라면...' 어떤 문제가 생겨도 끄떡없다. 부국장은 미소를 지었다. "아참." 뒤늦게 떠오른 질문. 위에 보고하려면 대상의 이름 정도는 외워 둬야 했다. "저 남자 이름이 뭐라고 했지?"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다. 부장은 부하들이 올린 보고서를 한 번 더 확인하며 말했다. "한국의 헌터 성일환이라고 했습니다." *** 황동수는 자비심이 없었다. 특히 마수들에게는 더. 던전 브레이크로 부모님을 모두 잃고 형 밑에서 자랐다. 때문에 S 급 각성자가 됐을 땐 하늘이 주실 기회로 여겼다. '원 없이 마수들을 찢어 죽일 기회!' 그래서인지 취조실에 들어서는 황동수의 시선은 싸늘했다. 던전에서 나온 남자. 심지어 마력 파장까지 마수들과 같은 패턴을 보인다고 한다. '마수가 인간의 흉내를 내고 있는 거라면...' 이 자리에서 숨통을 끊는다. 그럴 생각으로 헌터관리국의 요청을 받아들였다. 남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 '...' 시선의 교환. 황동수는 남자의 정보가 담긴 파일을 책상 위에 올려 두고 의자를 빼내 앉으며 입을 열었다. "나한테 협조적으로 구는 게 좋을 거야. 내 한마디에 당신이 인간이냐 마수냐가 결정되는 거니까." "그러지." 본격적인 취조에 앞서 황동수는 개인적인 질문을 하나 떠올렸다. 던전에서 죽었다는 형. 황동석이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없는 걸까? 그걸 먼저 알고 싶었다. "다른 헌터들도 당신처럼 돌아올 가능성이 있는 건가?"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순간 황동수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어떻게 확신할 수 있지?" "나는 내가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를 알고 있으니까." "이유? 무슨 이유?" "그전에 나도 하나 묻지." "...질문은 내가 한다." 황동석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나 남자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게이트, 마수, 던전 브레이크. 그것들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나?" "..." 시시한 질문이었다면 황동수는 힘으로라도 남자의 입을 틀어막았을 거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10 년 전 처음 게이트가 생성되고, 각성자가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로 수많은 이들이 도전했으나 아무도 답을 찾지 못했던 질문. 어쩌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는 순간이었다. "부국장님..." "쉿." 매직미러 바깥에서 취조를 지켜보던 헌터관리국 직원들도 침을 꼴깍 삼켰다. ?동수가 물었다. "너는 알고 있다는 건가?" "던전, 게이트, 마수... 그런 건 진짜 전쟁의 서막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진짜들 중에서도 최악의 재앙이 될 힘이 얼마 전에 눈을 떴지." "그럼 네가 온 목적이란 건?" "재앙을 막기 위해서." "그 최악의 재앙이란 건 뭐지?" "...그건 말할 수 없군." 황동수가 피식 웃었다. "재앙을 막기 위해 왔다는 인간이 그 재앙이 뭔지 밝힐 수가 없다? 그게 뭔지는 몰라도 혼자 하는 것보다 여럿이 하는 게 낫지 않나?" 남자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숫자는 그 힘 앞에서 무력하다. 어설픈 이들이 뭉쳐 봐야 먹히고 이용당할 뿐이니까." "그래서 당신만이 막을 수 있다?"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황동수가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미쳐도 단단히 미쳤군.' 던전 안에서 10 년을 갇혀 있었다면 이해 못할 바도 아니었다. 아니면 마수가 인간을 흉내 내는 과정에서 오류가 생겨 머리가 어떻게 회까닥했다던가. 그래서 적당히 맞장구쳐 주었다. "실력에 어지간히 자신이 있나 보군." "실력 외의 요건도 있다고 해 두지." "뭐...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 정신이 나간 남자에게서 무슨 정보를 얻어 내겠는가? 황동수는 질문을 그만뒀다. 대신 헌터관리국에 부탁받은 대로 남자의 신원 조회를 하기 위해 파일 케이스를 열었다. "이름은 성일환..." 사진은 확실히 일치했다. '하지만 10 년이 아니라 몇 주에서 몇 달 정도 지난 것 같군.' 하지만 황동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상급의 헌터는 노화도 비켜 나간다고 하니까. "헌터였을 때의 이력이 화려하군. 요즘 같았으면 돈 좀 만졌겠는데?" 성일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시는 헌터 체계가 잡혀 있지 않던 시절. 헌터의 등급조차 없던 시기였다. 황동수는 문서를 읽어 나갔다. "배우자는 박경혜. 자녀가 두 명. 아들은..." 담담히 자녀들의 프로필을 훑어보던 황동수의 눈이 잠깐 커졌다. '성진우?' 하지만 아주 잠깐이었다. 황동수는 최대한 내색하지 않고 할 말을 이어 갔다. "...성진우, 딸 이름은?" "성진아." "오케이. 다음." 그런데. "잠깐." 다음 장으로 넘어가려 했던 황동수를 성일환이 저지했다. 황동수가 무심히 고개를 들었다. 성일환의 시선은 황동수의 시선만큼이나 싸늘해져 있었다. "어째서 내 아들을 언급할 때 살의가 느껴졌던 거지?" "..." 툭. 황동수가 파일을 책상 위에 놓았다. 그리고 바깥과 연결된 마이크를 껐다. "질문은 내가 한다고 했을 텐데." "답을 들어야겠다." "대답하지 않겠다면?" "힘으로라도 말하게 만들어야겠지." 성일환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그는 조금도 물러설 기색이 없어보였다. 그러자 황동수가 피식 웃었다. "알겠다. 넌 마수로군." 어디서 마수 따위가 헌터에게 협박을? 자신을 향한 강한 적의. 마수의 증거로 삼기에 충분했다. '아니, 어쩌면 하늘이 주신 두 번째 기회인지도 모르지.' 그렇게 멋대로 결론을 내린 황동수가 방금 껐던 마이크를 다시 켰다. 삑. "부국장님, 이 남자는 마수입니다. 공격이 시작될 것 같으니 어서 대피들 하십시오." -뭐? 자, 잠깐! 삑. 매직미러 너머에서 허둥대던 기척들이 순식간에 밖으로 빠져나갔다. 곧 건물에 사이렌이 울렸다. 황동수의 두 손이 은색으로 빛나기 시작했다. "좀 있다 한국에 들릴 예정이다." 준비를 끝낸 황동수가 성일환을 향해 비릿한 미소를 지었다. "네 아들한테 아버지의 유언이 뭐였다고 전해 줄까?" *** TV 에선 계속 레드 게이트에 대한 뉴스가 흘러나왔다. 진우는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일이 시끄럽게 됐구만.' 그래도 전혀 곤란하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냥 좀 미묘한 기분? 자신이 없는 곳에서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알아내려고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생경했다. 정체가 들키면? 그래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내가 원하는 수준까지는 끌어올렸다.' 처음 힘을 숨기고자 마음먹었던 이유는 혹시나 누군가에게 휘둘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 때문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어떤가. 백윤호. 백호 길드의 마스터이자 S 급 헌터인 백윤호가 붙잡는데도 손을 뿌리칠 수 있는 수준이 됐다. 예전 같았으면 어림도 없는 일. '눈만 마주쳤어도 오금이 저렸겠지.' 진우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이럴 때 회상을 안주 삼아 취기에 몸을 맡겨야 하는데. 띠링. [해로운 성분이 감지되었습니다.] ['버프: 해독'의 효과로 치료를 시작합니다.] [3, 2, 1... 해독이 완료되었습니다.] 아쉽게도 거기까진 허락되지 않았다. 진우는 씁쓸히 웃었다. 하지만 술잔을 내려놓고 난 뒤의 표정은 그 어느 때보다 진지했다. '그래도 여기서 멈출 생각은 없어.' 진우는 상태창을 불러 왔다. 띠링. [이름: 성진우] [레벨: 61] [직업: 그림자 군주] [칭호: 역경을 이겨 낸 자 (외 1)] [HP: 13,001] [MP: 1,677] [피로도: 0] [스탯] 근력: 142 체력: 101 민첩: 121 지능: 89 감각: 103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물리 데미지 감소: 46% 레벨 61. 일일 퀘스트에서 얻은 포인트를 전부 투자한 덕분에 지능도 이제 100 에 가까워졌다. '그래도 갈 길이 멀지만...' 아직 올라갈 수 있었다. 좀 더 높은 곳으로. 어쩌면 아무도 닿지 못할 곳으로. 그 사실이 가슴을 설레게 만들었다. 시작은 악마성부터. '분명 내가 원하는 아이템이라고 했겠다.' 처음 축복받은 랜덤 박스를 얻었을 때를 떠올렸다. [축복받은 랜덤 박스] '플레이어'에게 원하는 아이템을 제공합니다. 거기서 악마성 열쇠가 나왔다. 높은 등급의 몬스터, 그리고 화끈한 보상. 두 가지를 이미 확인하고 나왔다. 위층에는 뭐가 있는지 모르지만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 이제 거둬들일 때였다. 아예 안으로 들어가서 며칠 동안 머물 작정이었다. 진우의 걱정은 하나. '들어가면 연락이 안 될 텐데...' 동생에겐 뭐라고 말해 놓는다? 집에 가는 동안 좋은 핑곗거리라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툭툭. "진호야." 툭툭. "유진호." "음냐." 흔들어도 보고 살짝 때려도 봤지만 유진호는 인사불성이었다. 이걸 어쩐다? '내일 협회로 가서 필기시험 봐야 한다던 놈이...' 시험은 시험이고, 일단은 집에 돌려보내는 게 급선무였다. 진우는 유진호의 폰을 들었다. "유명한 회장이나 유진성은 당연히 제외고." 누구를 불러내서 데리고 가게 만들어야 유진호에게 피해가 없을까? 고민하던 진우가 이름 하나를 발견했다. '유수현?' 아버지나 형과는 다르게 유독 많은 메시지를 주고받은 상대였다. 이름만 보면 여자인데... 그녀를 부를까 잠깐 고민했던 진우가 폰을 내려놓았다. '혹시.' 혹시나 싶어서 확인한 상점. 역시나 찾던 물건이 있었다. 찾았다! [아이템: 상태 회복 포션] 입수 난이도: E 종류: 소모품 상태를 회복할 수 있는 물약입니다. 마시면 이상 상태가 회복됩니다. 창고에 보관할 수 있으나 타인에게 양도는 불가능합니다. 구매를 확정하자 테이블에 노란색 약병이 생겼다. 힐링 포션의 붉은색이나 마나 포션의 푸른색과는 대조되는 밝은 색이었다. 진우는 주변을 살펴본 뒤 재빨리 유진호의 고개를 젖혀 상태 회복 물약을 입에 흘려 넣었다. 순간. 유진호가 눈을 번쩍 떴다. "형님?" "정신이 드냐?" 젖혀진 고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형님. "형님, 거기서 뭐하고 계십니까?" "..." 마땅히 설명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이럴 땐 모른 척이 최고다. "가자." "네, 형님!" 벌떡 일어난 유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몸이 왜 이렇게 개운하지?'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보던 유진호가 상쾌한 얼굴로 진우를 쫓아 나갔다. 그 뒤로 뉴스가 이어지고 있었다. [다음 뉴스입니다. 얼마 전 미국 헌터관리국 본부 건물에서 일어난 폭발 사고에 대해 여전히 미국 정부가 공식 발표를 미루고 있는 가운데...] 69 화 진우는 날이 밝자마자 대성타워로 갔다. '다시 봐도 크네.' 100 층짜리 고층 빌딩. 가까이서 꼭대기를 올려다보려니 목이 아플 정도다. '그런데 사람이 너무 많네.' 전에 왔을 때와 달리 대성타워를 드나드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밤과 낮의 차이는 컸다. 입구뿐만 아니라 거리에도 사람들이 끊임없이 오갔다. '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갑자기 사라지거나 하면 또 시끄러워지겠지.' 안 그래도 요즘 의문의 조력자니 뭐니 해서 스포라이트를 받고 있는 마당에 일부러 나서서 관심을 끌 필요가 있을까? '당연히 아니지.' 진우는 눈에 띄는 걸 즐기는 성미가 아니었다. 일단 한적한 곳으로 이동한 진우가 인벤토리에서 악마성 열쇠를 꺼냈다. 금빛을 띠는 기다란 열쇠. 언뜻 보면 장식품 같기도 한 아이템이었다. '아무도 없겠지?' 주위를 둘러본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서 가자.' 진우는 은신 스킬을 시전했다. 스르륵. 형태가 사라진 진우가 대로로 나와 사람들 사이를 스쳐 가며 빌딩 가까이까지 걸어갔다. 툭. 툭. 대낮의 도심 한복판 도로답게 얼마 되지도 않는 거리를 가는 동안 인파에 섞여 몇 번이나 어깨를 부딪쳤다. 하지만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다. '은신 스킬 악용하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겠는데?' 이래서 상급 헌터가 은신 스킬을 보유하고 있으면 집중 관리 대상이 되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잡생각도 잠시. 화르르륵. 처음 왔을 때처럼 보이지 않는 경계 안으로 발을 들이자 주변 환경이 완전히 변했다. '이렇게 멀리서도 불꽃이 타오르는 소리가 들리네. 도대체 얼마나 뜨거운 거지?' 불타고 있는 거대한 탑. 대성타워가 있던 자리를 대신 차지하고 있는 악마성이 시야를 가득 메웠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고 했던가? '그래도 처음보단 덜하네.' 확실히 악마성을 처음 봤을 때보다는 긴장감이 훨씬 덜했다. 아니, 어쩌면. '내가 그만큼 성장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진우는 악마성 열쇠를 창고로 돌려보내고 이번에는 잿빛을 띠는 열쇠를 꺼냈다. [아이템: 성문의 열쇠] 입수 난이도: A 종류: 열쇠 악마성의 성문을 열 수 있는 열쇠입니다. 문지기를 죽여야 얻을 수 있습니다. 문지기 개, 켈베로스를 죽이고 획득했던 성문 열쇠였다. 전에는 켈베로스에게 호되게 당해 차마 안으로 들어가진 못했는데, 이제 겨우 쓸 수 있게 되었다. 스르륵. 다음으로 불러낸 것은 무기. 진우는 왼손에 성문 열쇠, 오른손에 '바루카의 단도'를 들고서 성문 앞으로 조심스럽게 걸어갔다. 켈베로스는 보이지 않았다. '악마성 던전에서는 몬스터들이 리스폰되지 않는 걸까?' 단정할 순 없겠지만 켈베로스와 마찬가지로 그럴 가능성이 높았다. '그렇다면...' 몬스터가 리스폰 되던 기존의 인던들과는 구조가 다를 수도 있다는 이야기. 진우는 감각을 날카롭게 유지했다. 두근, 두근, 두근! 스탯 수치가 100 을 훌쩍 넘어간 감각을 확장시키자 자신의 심장 뛰는 소리도 천둥소리처럼 들려왔다. '하지만 무섭지는 않다.' 이전과 달리 지금은 압도적인 강함에서 나오는 자신감이 있었다.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과 두려움에 떠는 것은 다른 이야기였다. 띠링. 성문 앞에 서자 메시지가 떴다. [성문의 열쇠를 사용하여 안으로 들어가겠습니까?] Y / N '그럼 여기까지 와서 되돌아갈까?' 가당치도 않은 소리에 진우는 피식 웃으며 Yes 를 선택했다. 끼이이익그러자 손을 대지도 않았는데 경첩이 삐걱대며 거대한 문짝 두 개가 움직였다. 덜컹! '어라...?' 진우는 당황했다. 감각을 날카롭게 세우고 있는데도 성문 안쪽에서 몬스터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몬스터가 없다고?' 오히려 그 반대의 상황을 걱정했던 진우였다.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튀어나올까봐 패널티 존으로 가서 모래지네를 잡으며 특훈을 해 볼까 생각했던 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이게 뭐람? 노력이 무색했다. 안은 썰렁할 정도였다. '허... 이것 참.' 진우는 허탈한 심정으로 '바루카의 단도'를 도로 창고에 돌려보내고서 악마성 안에 발을 디뎠다. 그 순간. 띠링. 울리는 기계음에 진우가 번개처럼 단검 두 개를 불러냈지만, 그냥 메시지가 왔음을 알려 주는 소리였다. '엇?'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퀘스트가 도착했다고?' 일일 퀘스트가 아니라? 하긴 일일 퀘스트 메시지 알림이어도 이상한 것이, 여기 오기 전에 일찌감치 일일 퀘스트를 끝내 놓고 보상까지 챙겨 왔다. 그럼 일반 퀘스트란 말인데... 처음 있는 일이었다. '여태까지는 히든 퀘스트나 긴급 퀘스트만 받아 봤으니까.' 싫든, 좋든 매일 받게 되는 일일 퀘스트를 제외하면 말이다.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메시지의 내용을 확인했다. '확인.' 그러자 퀘스트에 대한 자세한 정보가 나왔다. 띠링. [일반 퀘스트: 악마의 영혼을 모아라! 1] 악마성은 악마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악마를 잡고 영혼을 수집해 특별한 보상들을 획득하십시오. 영혼은 악마 한 마리당 하나를 얻을 수 있지만, 상층에는 다수의 영혼을 지닌 악마도 있습니다. 퀘스트 발생 조건: -악마성 입장 퀘스트 완료 조건: -악마의 영혼 10,000 개 보상: -1. 모든 아이템 중 택 1 -2. 보너스 스탯 +20 -3. 공개되지 않는 보상 보너스 스탯 20 개! 무엇보다 가장 먼저 진우의 시선을 끈 것은 보너스 스탯이었다. '지능을 20 포인트나 올릴 수 있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마나의 부족함은 뼈저리게 느꼈다. '그림자 병사들을 재생시키려면 많은 마나가 드니까.' 어디 마나만 문제인가? 지능이 올라갈수록 추출할 수 있는 그림자 수와 저장할 수 있는 병사들의 수가 늘어난다는 사실도 확인했다. 지능 스탯이 절실했다. '레벨업이나 일일 퀘스트로만 올리기에는 한계가 있었는데...' 퀘스트 보상으로 보너스 스탯 20 포인트를 얻을 수만 있다면 모든 문제가 깔끔히 해결된다. 꿀꺽. 군침이 돌았다. '게다가.' 진우의 시선이 위로 올라갔다. [보상] -1. 모든 아이템 중 택 1 -2. 보너스 스탯 +20 보너스 스탯만으로도 감지덕지인데 모든 아이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 가질 수 있단다. '정말 아무거나 다 되는 건가?' 진우는 전에 상점 목록에서 봤던 고가의 장비들을 떠올렸다. '분명 그때...' 입수 난이도 S 등급의 템들 중에서는 수십억, 심지어 100 억까지 나가는 아이템도 있었다. 그 100 억이 현금이 아니라 시스템상으로만 존재하는 화폐인 골드긴 하지만. 그래도 그게 어딘가? 당장 지금 쓰고 있는 '나이트 킬러'만 해도 3 백만 골드짜리 아이템인데 이렇게 요긴하게 쓰고 있었다. '3 백만짜리 B 급 아이템이 이 정도 성능이면 수억, 아니 수십억짜리 S 급 아이템은 어느 정도일까?' 호기심을 자극했다. 보상 두 개를 보니 공개되지 않는 보상을 제쳐 놓고서라도 놓쳐서는 안 될 퀘스트였다. '이 정도 보상에 비하면 몬스터 한두 마리 잡는 건 식은 죽 먹기지.' 후딱 퀘스트를 해치우고 보상을 받을 생각에 들뜬 마음으로 완료조건을 확인하던 진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1 만 마리?" 당혹감에 소리가 터져 나왔다. 몬스터 한두 마리라고 웃어넘길 수준을 넘어섰다. '보통 노가다가 아니잖아?' 악마란 놈들이 어떤 몬스터인지는 몰라도 만 마리라면 엄두가 나지 않는 숫자였다. 하지만 진우는 씩 웃었다. '혼자였다면 말이지.' 현재 그림자 병사들 수는 50 명. 두당 2 백 마리만 잡으면 퀘스트를 완료할 수 있다. 병사들을 쥐어짜면 이까짓 퀘스트 쯤이야. [일반 퀘스트: '악마의 영혼을 모아라! 1'을 수락하시겠습니까?] '물론이지.'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퀘스트를 수락하였습니다.] 실패 패널티라고 해 봐야 시간이 좀 낭비될 수 있다는 것뿐. '다른 퀘스트들 생각하면, 어휴...' 일단 목숨부터 걸고 봐야 했던 전직 퀘스트나 긴급 퀘스트에 비하면 정말로 은혜로운 퀘스트가 아닐 수 없었다.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앞으로 저기 다 표시되는 건가?' 퀘스트를 수락하자마자 위쪽에 못보던 카운트가 떴다. [수집한 악마의 영혼 : 0 / 10,000] '1 만... 까마득하네.' 머릿속에 추상적으로만 남아 있던 목표량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나니 헛웃음이 나왔다. 그러다가 그 왼쪽, 허공에 떠 있는 다른 카운트를 발견했다. '어?' [다음 레벨업까지 남은 경험치: 60, 000] 홀로그램으로 선명하게 찍혀 있는 6 만이라는 숫자. 그걸 다 채우면 레벨이 올라간다고 적혀 있었다. '이제 경험치까지 표시되는 건가?' 하지만 악마성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수치였다. '어디...' 진우는 한걸음 물러서 악마성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영혼 숫자와 경험치 수치가 전부 사라졌다. 다시 안으로 들어가니 언제 그랬냐 싶게 둘 다 나타났다. '악마성 안에서만 활성화되는 거네.' 밖에서 볼 수 없다는 사실은 아쉬웠지만 악마성 안에 있을 때만큼은 정말 편리할 듯했다. 반대로 생각하면. '그만큼 여길 공략하려면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게 아닐까?' 그런 추측도 가능했다. 다시 한 번 퀘스트 내용을 꼼꼼히 확인한 진우가 메시지 창을 닫았다. '퀘스트는 이 정도면 됐고.' 이제 겨우 악마성 내부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다. '헉!' 진우의 눈이 커졌다. 우우우우안에는 폐허로 변한 도시가 있었다. 예상치 못했던 필드형 던전이었다. '이건 뭐지? 서울인가?' 서울에 사는 사람들이 모두 죽고 백 년쯤 지나면 이런 분위기일까? 생기를 잃고 회색빛으로 변한 도시에서 가로등 불빛만이 점멸하듯 깜박이고 있었다. '설마 필드형 던전일 줄이야...' 그것도 대도시 서울을 기반으로 한 던전이었다. 지하역이나 백화점같이 특정한 장소에 한정돼서 변형이 일어났던 인던들과는 비교를 불허하는 규모였다. 진우는 눈이 가늘어졌다. '어디로 가야 하지?' 목적지는 어디일까? 진우의 시선이 이리저리 옮겨 다녔다. 하지만 다행히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 멀리, 남산 타워가 있어야 할 방향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빛의 기둥이 하늘로 뻗어 있었다. '저쪽으로 가 보자.' 진우는 그리로 걸음을 옮겼다. 혹시나 길을 잃었을 때를 대비해 성문이 있는 주변을 잘 기억해 두고서. 그런데. 얼마가지 못해 걸음을 멈춰야 했다. "킥킥." "키키킥." 건물과 건물 사이사이에서 자그마한 체구의 몬스터들이 한두 마리씩 슬금슬금 기어 나왔다. [하급 악마] 놈들 머리 위에 검붉은색으로 적힌 이름을 보고 진우는 놈들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생김새가 꼭...' 가고일이라는 마수에서 날개를 떼면 딱 저렇게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드는 놈들이었다. 놈들은 모두 여덟 마리. 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일단 영혼 여덟 개 확보다.' 순간. 콰직! 한 놈의 미간에 '바루카의 단도'가 박혔다. [하급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100 을 획득합니다.] [악마의 영혼 1 개를 획득합니다.] "키악?" "키엑?" 단검을 맞은 녀석에게 놈들의 신경이 분산된 사이 진우는 다른 한 놈에게 다가가 놈의 머리를 목과 분리시켰다. 스걱! [하급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100 을 획득합니다.] [악마의 영혼 1 개를 획득합니다.] 이놈 역시 경험치 100 을 줬다. '필요 경험치가 6 만이라고 했으나...' 하급 악마 6 백 마리만 잡으면 레벨업이 가능하다는 소리였다. 나머지 놈들도 순식간에 정리됐다. "키이에엑!" "켁!" 현재 수집한 영혼 수 여덟 개. 획득한 경험치는 8 백. '이거 괜찮은데?' 천릿길도 한걸음부터라고, 진우는 다음 사냥감을 찾아 눈을 반짝였다. *** 백호 길드 사장실. 며칠 바빴던 탓에 손 대지 못하고 있었던 서류들을 훑어보던 백윤호. 삑호출음에 수화기를 들었다. -사장님, 민병구 헌터님이 통화를 원하시는데 어떻게 할까요? "연결해 주세요." -네. 잠시 뒤, 수화기 너머에서 낯익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백 형, 전화기는 왜 꺼 놨어요? 백윤호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기자들 때문에. 잠잠해질 때까지 잠수나 타고 있으려고." -아, 그거! 레드 게이트! 저도 일본에서 뉴스 봤습니다. 형 화면빨 잘 받으시던데요? "속 긁지 마라. 지금 장난할 기분 아니야. 언론에 누가 흘린 건지 걸리기만 하면 아주." -형, 그거 너무 신경 쓰지 마세요. 곧 잠잠해질 겁니다. 빅뉴스가 하나 있거든요. "빅뉴스? 일본에서?" -네, 생각보다 문제가 심각한 거 같아요. 한국에서도 좀 있으면 전파 탈 겁니다. "왜? 무슨 일인데?" 일주일 전 일본에서 헌터협회와 한국의 대형 길드들에 비밀스럽게 연락을 보내왔다. 한국 헌터들의 자문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그로부터 이틀 뒤 한국을 대표하는 헌터들 몇 명이 일본으로 건너갔다. 민병구도 그중 한 명이었다. 안 그래도 그쪽 소식이 궁금했던 참이었다.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해 봐. 일본 놈들이 우리한테 자문 구한 거 이번이 처음이잖아. 뭔데 그 난리래? 그 콧대 높은 자식들이?" -백 형... 전에 제주도 개미들 기억하시죠? 4 년 전 제주도에 열렸던 S 급 게이트. 거기에서 나왔던 개미들. 세 번의 토벌 작전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다. 결국 한국 정부는 제주도를 포기했고, 제주도는 마수들의 땅이 되고 말았다. "그걸 어떻게 잊냐? 나도 죽다가 살아나왔는데." -그거 변종이 생긴 거 같답니다. "변종? 어차피 관계없잖아. 지들끼리 섬 안에서 치고받고 하라지." -그게... 전화 속의 목소리는 난처하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일본 근해에서 날개가 달린 개미의 사체가 발견됐습니다. 70 화 [하급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100 을 획득합니다.] [악마의 영혼 1 개를 획득합니다.] . . 경험치 100 을 획득합니다.] [악마의 영혼 1 개를 획득합니다.] 2 시간 동안 닥치는 대로 하급 악마들을 잡았다. 진우는 영혼 개수를 확인했다. [수집한 악마의 영혼: 309 / 10,000] 퀘스트 3 퍼센트 완료. 만약 같은 속도로 계속 사냥할 수 있다면 2 시간 후에는 레벨까지 오른다는 계산이 나온다. 현재 레벨은 61 레벨. 60 레벨에서 61 레벨로 올라가는 데 C 급 던전 아홉 개 분량의 경험치가 필요했다. 소요된 시간은 이틀 정도였다. 그런데 여기서는 4 시간이면 1 레벨을 올릴 수 있다? '미친 거지.' 진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렇게 즐겁게 사냥하는 게 얼마만일까? '그때 이후로 처음인가?' 합정역 인던에서 더 이상 레벨이 오르지 않을 때까지 지하 1, 2 층을 왕복했던 기억 이후로는 없는 것 같았다. "끼엑!" 진우의 단검이 번쩍이면 어김없이 하급 악마가 하나씩은 쓰러졌다. "끼아악!" "키엑." "케? 켁!" 때로는 여러 마리도. 잠깐 사이 진우는 또 하급 악마 20 마리를 잡았다. '대박인데?' 경험치와 영혼 수가 순식간에 잡은 악마들 숫자만큼 늘었다. 거기에 아이템은 덤이다. 아이템을 수거하는 진우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뿔은 거의 무조건 나오네.' [아이템: 하급 악마의 뿔] 입수 난이도: 없음 종류: 잡동사니 하급 악마의 머리에 달린 작은 뿔 2 개. 악마의 뿔은 고급 마법의 재료로써 비싼 값에 팔려 나간다. 잡동사니 '악마의 뿔'. 상점에 팔기만 해도 20 만 골드를 얻을 수 있었다. '저번에 켈베로스도 이빨 하나에 15 만씩 얹어 주더니... 악마성 몬스터들이 후하긴 후하구나.' 근래 몇 차례 상점의 유용함을 맛본 진우에게 잡동사니는 이제 잡동사니가 아니었다. 나중에는 이게 다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골드란 말씀. '뭐 하나 버릴 게 없네.' 진우는 기쁜 마음으로 팔 건 팔고, 창고에 보낼 건 보내면서 하급 악마들의 사체를 뒤졌다. 그러던 중. '저건 뭐지?' 처음 보는 아이템을 발견했다. 악마의 터져 나온 내장 사이에 빼꼼 고개를 내밀고 있는 그것은. [아이템: 진입 허가서] 입수 난이도: ?? 종류: ?? 악마성 2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허가서입니다. 층간 이동 마법진의 1 층에서만 사용 가능합니다. 돌돌 ?뻔?있는 두루마리 문서였다. '진입 허가서?' 문서를 펼쳐 보니 안에는 이해 못할 각종 도형과 문장이 그려져 있었다. 결국 도움이 될 만한 단서는 아이템 설명이 다였다. '1 층에서 2 층으로 올라가게 만들어 주는 아이템...' 설마? 진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여긴 악마성 내부이기도 하지만 대성타워의 안이기도 하다. 악마성에도 층이 나뉘어 있다면 여기가 1 층이 된다. '필드형 던전이라 층이 나뉘어 있다고는 생각도 못했는데...' 그럼 대성타워처럼 100 개의 층이 있을 수도 있다는 소리? 진우는 던전의 규모에 혀를 내둘렀다. '...진짜 100 층은 아니겠지?' 그걸 확인해 볼 방법은 하나였다. 마법진을 찾는 거. '여기서 층간 이동 마법진이 있을만한 장소는...' 진우의 시선이 하늘을 향해 뻗어있는 빛의 기둥에서 멈췄다. '저기뿐이다.' 처음부터 목적지로 정하긴 했지만 하급 악마들을 정신없이 사냥하느라 어느새 다른 쪽으로 온 상태였다. '슬슬 가 볼까?' 가야 할 때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 근처에 있던 하급 악마들을 다 잡기도 했고. 진우가 씩 웃었다. '소환.' 그림자 저장 스킬로 봉인해 둔 그림자 병사들을 추출 스킬을 쓸 때와 달리 별다른 주문이 필요 없었다. 그냥 의지로 불러내기만 하면 된다. 스르륵. 진우의 눈앞에 아이스 베어 우두머리의 그림자를 추출해 만들었던 거대한 마수병이 나타났다. "크르르륵." 두 발로 서 있는 괴물 곰. 크기가 집채만 했다. 하지만 진우 앞에서는 온순한 강아지나 다름 없었다. "숙여." "크릉." 마수병이 얌전히 엎드리자 진우가 냉큼 그 위에 올라탔다. "이랴!" 진우가 발로 옆구리를 차자마자 마수병은 빛의 기둥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달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쿵! 몸집도 어마어마하게 큰 놈이 민첩하기까지 하니 목적지와의 거리가 빠르게 줄어들어 갔다. 가끔 방해꾼이 튀어나와도. "키릭!" "킥킥!" 크어어엉! 마수병의 번개 같은 후려치기 한방에 금방 상황이 종료되었다. 호오. 진우가 대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재미로 한번 타 봤는데 괜찮네?' 자주 써야겠다는 생각으로 즉석에서 이름까지 붙여 줬다. "앞으로 네 이름은 탱크다." "그워어어!" 마수병, 아니 탱크가 목을 빼며 길게 울었다. 좋다는 거야, 싫다는 거야? 워낙 목청이 좋은 놈이라 어떤 의민지도 모르겠다. 그사이에도 빛기둥이 점점 가까워졌다. 점차 속도를 줄이던 탱크가 빛기둥 앞에서 멈춰 섰다. "잘했다." 바닥에 내려선 진우가 탱크를 한번 쓰다듬어 주고는 다시 그림자 속으로 돌려보냈다. 진우가 돌아섰다. 그러자 '띠링'하고 익숙한 기계음이 떴다. [층간 이동 마법진을 발견했습니다.] 바닥에 새겨진 원형의 마법진. 그 마법진에서 발사된 빛이 하늘까지 닿아 있었다. 진우는 안으로 발을 들였다. '...' 아무 일도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우가 몇 걸음 더 걸어서 원의 중앙에 섰다. 그제야 메시지가 떴다. [개방된 층이 없습니다.] [어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몇 층까지 있는데?"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디가 끝인지 알려면 직접 올라가 보는 수밖에 없나?' 진우는 잠시 고민했다. 경험치도 얼마 안 남았는데 레벨을 올리고 올라갈까, 아니면 올라가서 올릴까. '여기는 다른 인던과 다르게 몬스터 리스폰이 안 되니까 계속 한 자리에 머물러 있는 건 비효율적이지.' 게다가 상층에는 다수의 영혼을 가진 악마도 있다고 했다. 경험치 면에서나, 퀘스트 면에서나 최대한 빨리 위로 올라가는 게 이득이 아닐까 하는 결론에 다다랐다. '좋아.' 올라가자. 진우가 말했다. "2 층." [진입 허가서가 필요합니다.] 진우는 지시에 따라 창고에 넣어 두었던 두루마리를 꺼냈다. 두루마리는 꺼내자마자 빛과 함께 사라졌다. [악마성의 2 층이 개방되었습니다.] [2 층으로 올라갑니다.] 우우웅마법진에서 강렬한 빛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동시에 진우가 깨달았다. '아... 그러니까 이건.' 그냥 엘리베이터였군. 빛기둥의 실체를 알게 된 순간, 진우는 눈부신 빛과 함께 2 층으로 전송됐다. *** 2 층, 3 층, 4 층... 그리고 27 층. 이틀간의 성적이었다. 진아에게는 일주일 정도 여행을 다녀오겠다고 해 놨다. '남은 시간은 5 일.' 점차 빨라지고 있는 공략 속도를 감안했을 때, 어쩌면 꼭대기일 것으로 짐작되는 100 층까지는 5 일도 채 안 걸리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진우는 문득 주변을 둘러보았다. 완전히 황폐화된 도시. '이제는 여기가 어디를 베이스로 만들어졌는지도 모르겠네.' 층마다 매번 다른 도시들이 나왔다. 그런데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점점 파괴된 정도가 심해져서, 현재 자신이 있는 27 층은 도시의 형태도 알아보기 힘들었다. 도심 한복판에 융단폭격이라도 떨어지면 이렇게 되지 않을까? 진우는 상념을 떨쳐 버리려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손목의 시계를 확인했더니 벌써 오후 11 시였다. 여긴 낮이나 밤이 없었다. 일정은 시계에 의존해야 했다. 11 시라면 눈을 좀 붙여 둬야 할 시간이었다. 내일 또 던전을 공략할 수 있으려면 말이다. 하지만 그전에. '성과를 좀 확인해 볼까?' 진우는 퀘스트 진행률을 응시했다. [수집한 영혼의 개수: 2,116] '2,100 개...' 하루에 거의 악마 천 마리씩. 이틀간 많이도 잡았다. 아직 만 마리까지는 한참 남았지만 다수의 영혼을 가지고 있다는 상층의 악마들에 기대를 걸고 있었다. '일단 위로 가는 게 급선무네.' 다음은 레벨. "헉!" 진우의 눈이 커졌다. [레벨: 67] 금세 레벨이 67 까지 올라왔다. 경험치 100 짜리 하급 악마를 잡다가 경험치 300 을 주는 중급 악마를 잡으니 레벨업 속도가 대폭 증가했다. '레벨은 진짜 잘 오르네.' 가득한 몬스터, 풍부한 경험치, 적절한 난이도. 악마성은 최고의 레벨업 장소였다. 그리고 올라가는 건 레벨뿐만이 아니었다. 진우는 틈틈이 스킬의 숙련도까지 올렸다. 지금도 진우의 손바닥 위 허공에는 '나이트 킬러'가 둥둥 떠 있었다. 스킬 지배자의 손길. 손을 대지 않고도 물리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힘. 이렇게 가만히 앉아 있을 때조차 스킬 숙련도를 올리는 데 할애했다. '어차피 지배자의 손길은 마나도 안 드니까.' 신경을 계속 집중하고 있어야 한다는 게 좀 피곤하긴 해도 스킬의 활용도에 비하면 싸게 먹히는 거였다. 마침 좋은 소식이 들려왔다. ['지배자의 손길' 스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았어!' 진우는 씩 웃으며 등을 벽에 기댔다. 조금씩, 조금씩 강해지는 게 느껴질 때마다 마음이 편안해졌다. 눈이 스르르 감겨 왔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이면 길드장 면허도 나왔겠네.' 유진호는 잘하고 있을까? 오랜만에 혼자 움직이고 있어서 그런지 문득 늘 뒤에 붙어 다니던 유진호의 얼굴이 떠올랐다. 이미 훌륭한 사업가로 성공한 장남과, 마스터 자격은 있지만 학생인 차남. 절대 쉬운 싸움은 아니었다. '힘내라, 유진호.' 마음속으로나마 유진호를 응원한 진우는 천천히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 유진호는 비장한 얼굴로 고급 한정식당에 들어섰다. 아버지의 취향을 고려해 직접 선택한 장소였다. "회장님은?" "와 계십니다." 유진호가 꿀꺽 침을 삼켰다. "이리로." 안내를 받아 아버지 유명한이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 드르르르. 미닫이문이 열리고 아버지의 얼굴이 보이자 긴장감이 몇 배나 상승했다. 잠깐 약해지나 했지만. 유진호는 다시 한 번 마음을 굳게 먹고 아버지의 맞은편에 앉았다. "웬일이냐? 네가 먼저 약속을 다 잡고." "아버지, 용건을 말씀드리기 전에 이걸 봐 주셨으면 합니다." "이건...?" "제 길드 마스터 면허증과 그간의 레이드 기록입니다." "마스터... 면허증? 네가?" 유명한이 의외라는 눈빛을 하자 유진호가 기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 유명한은 말없이 유진호가 건넨 문서들을 훑어보았다. 그의 눈에 점점 이채가 어리어 갔다. "..." 아버지가 침묵을 지키는 동안 유진호는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어서 제대로 숨을 쉬기조차 힘들었다. "그래서." 유명한은 슬며시 서류들을 상 위에 올려 놓으며 말을 이었다. "유진 길드를 네가 맡아 보고 싶다는 게냐?" "그렇습니다." "흐음..." 순간 유명한의 얼굴에 놀랍다는 감정과 함께 고민의 흔적이 나타났다. '아버지께서 나와 형을 두고 고민하시다니.' 유진호가 감격했다. 그 정도만 해도 유진호에게는 큰 결실이었다. 평소 같았으면 여기서 만족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아버지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외부인에게 길드 마스터의 전권을 위임하는 것은 너무 리스크가 크고." "그만." 유명한이 손을 들었다. 동시에 유진호의 입이 멈추었다. 아버지의 '그만'은 유진호 집안에서는 그 누구도 어길 수 없는 절대적인 명령이었다. "네게 소개시켜 주고 싶은 사람이 있다." "예?" 유진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오늘 먼저 연락해 약속을 잡은 건 자신이었다. 그런데 대뜸 소개해 주고픈 사람이 있으시다니. 누굴까? 유진호의 호기심이 극대화됐을 때, 유진호가 들어왔던 문 말고 다른 쪽 문이 드르르 열렸다. "아... 안녕하세요." 20 대 후반? 30 대 초반? 그 정도로 보이는 남자 한 사람이 유진호에게 어색하게 인사를 건넸다. 누구지? 아무리 봐도 모르는 사람이었다. 유명한이 턱짓하자 남자는 유명한 옆에 와서 앉았다. "이쪽은... 고명환 헌터님." '고명환?' 유진호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었다. 아버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더니 말을 이었다. "요즘 시끄러운 백호 길드 레드 게이트 사건에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 중 한 분이시다." 71 화 유진호는 당황스러웠다. '...레드 게이트?' 왜 갑자기 그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워낙 말이 많은 사건이라 무슨 일인지 모르지는 않았으나, 타이밍이 공교로워 아버지의 의도를 짐작하기가 힘들었다. '거기다 저 사람...' 생존자라는 남자. 언론들이 애타게 찾고 있는 생존자가 어째서 여기까지 불려 나온 걸까? 유진호의 궁금증은 커져 가기만 했다. 그런 그를 지켜보던 유명한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거기까지는 모르는 것 같구나." "예?" 유명한은 혼란스러워하는 유진호를 내버려 두고,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는 고명환을 돌아보았다. "헌터님." "네." "그날 거기에 백호 길드의 신입들 말고 누가 있었는지 내 아들에게도 알려 주시오." "알겠습니다." 고명환의 시선이 유진호를 향했다. 의도치 않게 고명환과 시선을 마주하게 된 유진호의 얼굴에는 물음표가 떠올랐다. 그러는 사이 고명환이 말했다. "고등학생쯤 되는 어린 여자 헌터 하나와." '어린 여자 헌터?' 그때까지만 해도 유진호는 고명환의 입에서 누구의 이름이 나올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성진우 씨입니다." 덜컥. 유진호는 자기 가슴이 내려앉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혀, 형님께서 레드 게이트에?' 어떻게 된 일일까? 안 그래도 혼란했던 머릿속이 더 복잡해졌다. 그런데 그때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며칠 전...' 형님께서 생전 아는 척도 안 하던 한송이와 익숙하게 대화를 나누셨었다. "혹시 그 어린 여자 헌터 이름이?" "한송이 양입니다." 이럴 수가. 유진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이해할 수 없었던 두 사람의 관계에 그런 비밀이 있었을 줄이야. '그렇다면 설마?' 그동안 뉴스에서 내내 가능성을 언급해 오던 조력자의 정체가 바로... 유진호가 하고 싶은 말을 알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고명환은 재빠르게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한송이 양과 저희 백호 길드원들은 성진우 씨 덕분에 레드 게이트에서 무사히 빠져나올 수 있었습니다." '하, 하하...' 형님, 대체 거기서 뭘 하신 겁니까. 유진호는 놀라움과 반가움이 반반쯤 섞인 표정을 지었다. 그러다가 아버지 앞이라는 사실도 까맣게 잊고서 물었다. "레드 게이트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거죠?" 고명환은 옆을 돌아보았다. 유명한이 고개를 끄떡였다. 입이 간지러워 죽을 것 같은 표정이었던 고명환이 그제야 신이 난 얼굴로 설명을 이어 갔다. "그게 말입니다." 듣는 유진호도 눈을 반짝였다. "처음에는 웬 E 급 헌터 둘이 신입 훈련 과정을 견학하러 온다고 해서 좀 황당했었죠. 그런데..." 고명환은 그날 있었던 일들을 마치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선물받은 아이가 친구처럼 자랑하는 것 같이 들뜬 목소리로 이야기했다. 그런데. "A 급 헌터를요?" 들뜬 사람은 고명환 하나만이 아니었다. "그렇다니까요! 이렇게 손바닥을 펴서 딱! 뒤통수를 내려쳤는데 그 자리에서 김철이..." "허..." 형님의 활약상을 들을 때마다 유진호는 자기 일처럼 가슴이 뛰었다. '역시 형님이시다.' 상급 마수를 때려잡은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A 급 헌터를 한 방에 쓰러뜨리다니. 그런 대단한 사람의 옆에 자신이 있었다는 사실이 감격스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했다. 고명환의 이야기는 계속됐다. "...아이스 엘프 수십 마리가 눈 앞에 나타났을 때는 정말 꼼짝없이 죽는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너무 집중해 들었기 때문일까? 시간은 금방 흘러갔다. 결코 짧지 않았던 그날의 경험담도 슬슬 끝이 보이기 시작했다. 흥분한 고명환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말이 안 됩니다. 성진우 씨는 거기 있었던 전원의 은인이에요." 유진호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고명환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도 도움받은 적이 있었으니까. "그런데 성진우 씨의 존재를 알리지 마라니요? 저는 백호 길드의 결정을 선뜻 받아들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회장님께서 제게 연락을 주셔서." 그때 유명한이 정중하게 고명환의 말을 가로막았다. "고명환 헌터님." "네?" "그 정도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아, 제가 좀 흥분했네요. 죄송합니다." 고명환은 민망해하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유명한의 시선이 다시 유진호를 향했다. "그렇게 성진우 헌터를 알아보는 과정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하나 나오더구나." 유명한의 손끝. 검지가 가리키는 곳에는 유진호의 이름이 있었다. 유진호가 아까 유명한에게 건넨 레이드 자료였다. 검지가 스르르 움직이더니 이번엔 '성진우' 석 자 밑에서 멈추었다. 공대장 유진호, 공대원 성진우. 발뱀할 수 없는 증거였다. '들켰다...' 길드 마스터 면허 습득 과정에서 형님의 도움이 있었다는 사실이 알려지고 말았다. 유진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네가 길드장 면허를 따는 데는 성진우 헌터의 도움이 컸다. 인정 하느냐?" "...인정합니다." "더 할 말이 있느냐?" "..." 유진호는 눈앞이 깜깜해졌다. 길드 마스터 면허증 취득에 형님의 개입이 있었다는 게 알려진 이상, 유진 길드를 맡을 자격이 있다고 아버지를 설득하기가 불가능해졌다. '...' 아버지의 엄한 눈빛. 예전부터 저 눈빛만 보고 있으면 다리에 힘이 풀렸다. '하지만.' 이렇게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유진호는 처음으로 아버지 앞에서 용기를 냈다. 고개를 숙이고 소리를 높였다. "제게 유진 길드를 맡겨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알겠다." "예?" 시원스런 대답에 유진호의 고개가 들렸다. "네게 유진 길드를 맡겨 보마." "어째서...?" "네가 말했지 않느냐. 외부인에게 길드를 맡기는 것은 위험하다고. 네가 있으니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있느냐?" "하, 하지만 저는 아버지를 속이려 했고." "그래서 내가 혼이라도 내고 쫓아낼 줄 알았더냐?" 어째서일까? 왠지 아버지의 얼굴이 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입은 언제나처럼 일자로 꾹 닫혀 있었는데 말이다. "네가 아무 대책도 없이 무작정 던전에 들어갔다면 그리했을 것이다. 나는 그런 바보를 아들로 둔 기억이 없으니." 유진호는 순간 얼굴이 화끈했다. '형님을 못 만났다면 지금쯤 아버지께 혼나고 쫓겨났겠구나.' 아니, 그전에 이미 죽었겠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유진호였다. "대신 조건이 있다." "네." "이 성진우라는 헌터... 유진으로 데려올 수 있겠느냐?" 유진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님을요?" '형님?' 유명한의 눈에 이채가 어리었다. 하지만 오래가지 않았다. "그래." 유진호는 말문이 막혀 왔다. '끄응...' 여기서 자신감을 피력하는 게 좋은 인상을 남길 거라는 사실은 코흘리개 애들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상대는 형님이다. 부탁은 해볼 수 있겠지만 그 이상은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솔직하게 말했다. "잘 모르겠습니다." "잘 됐구나. 조건이 너무 쉬우면 의미가 없으니." 유명한 회장은 물을 한 모금 마신 후 손수건으로 입가를 닦았다. "네가 실패하면 길드는 네 형에게 넘기겠다. 한번 해 보겠느냐?" 유진호의 얼굴이 비장해졌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여기서 물러선다면 마지막까지 도와주신 형님께도 면목이 없었다. 유진호가 진지한 눈을 하고서 말했다. "해 보겠습니다." "좋다." 아버지의 대답을 끝으로 부자간의 딜은 끝났다. 유명한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유진호는 일어서 인사를 하고 나갔다. 유명한은 손수건을 입에서 뗐다. 자꾸만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숨기기가 힘들었다. '녀석...' 유진 길드를 달라니. 약속을 잡을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당돌하게 나올 줄은 몰랐다. '호랑이의 자식은 호랑이인 게야.' 유명한의 입가에 미소가 점점 번져 나갔다. '그 유명한 회장이 웃고 있어!' 고명환의 눈이 커졌다. 유명한 회장의 별명은 포커페이스. 기쁜 일에도 슬픈 일에도 감정을 보이지 않는 것으로 이름난 인물이었다. 고명환이 신기한 듯이 바라보고 있자, 유명한 회장이 옆을 돌아보고 물었다. "헌터님, 혹시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갑작스런 시선에 당황한 고명환은 황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 아닙니다." *** ...47, 48, 49, 50. 진우는 무서운 속도로 상층을 향해 나아갔다. [중급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300 을 획득합니다.] [악마의 영혼 1 개를 획득합니다.] . . [중급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중급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몬스터를 잡을 때마다 올라가는 경험치와 쌓여 가는 영혼들을 보고 있노라면 힘든 줄도 몰랐다. [수집한 영혼의 개수: 4,388] '아직은 반 정도인가?' 여기 들어 온 뒤로 정말 끝도 없이 악마들을 잡은 것 같은데 역시 만 마리의 벽은 높았다. 하지만 레벨은? [레벨: 69] 하루 만에 다시 2 업. 처음보다는 느려졌으나 그래도 영혼 수집 속도에 비하면 엄청 빨랐다. 지금도 착착 경험치가 쌓여 갔다. "끼에에엑!" [...를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300 을 획득합니다.] [악마의 영혼 1 개를...] "휴-!" 눈에 보이는 마지막 악마를 처치하고서, 진우는 허리를 펴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늠름하게 서 있는 그림자 병사들 발아래 중급 악마들의 사체가 무수히 널브러져 있었다. 짝. 진우는 웃으며 손바닥을 마주쳤다. "수고했다." 열심히 싸운 병사들은 순식간에 그림자로 돌아갔다. 마정석은 병사들이 주울 수는 있어도 아이템은 진우만이 획득 가능했다. [...를 획득하시겠습니까?] 일일이 시스템 메시지를 승낙해야 하니까. '이건 좀 불편하구만.' 그래서 악마들의 수가 많지 않을 땐 혼자서 후딱 해치우고 이렇게 떼거리로 몰려올 땐 병사들과 함께 싸웠다. 그리고 싸움이 끝나면 수금이 시작되는 거다. '이게 뭐가 재밌다고 진호는 계속 시켜 달라 했던 거지?' 진우는 몬스터 사체에서 아이템을 꺼내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불편한 거 하나 더. 악마성에서는 그림자 병사들의 충원이 불가능했다. 중급, 하급을 막론하고 악마들의 사체에서는 추출 가능 대상임을 알리는 검은 연기가 올라오지 않았다. '눈으로 사체를 응시하고 있어도.' [오염된 마나입니다.] [그림자 추출이 불가능합니다.] 마나가 오염되어서 추출이 안 된다는 메시지뿐. '뭐, 어쩔 수 없나?' 진우가 안타까운 마음으로 사체들을 훑어보고 있자 메시지가 떴다. 띠링. ['아이템: 중급 악마의 뿔' 29 개를 발견하였습니다.] [모두 획득하시겠습니까?] 진우가 씩 웃었다. '물론!' 언제나처럼 잔뜩 쏟아지는 아이템을 보며 그림자 추출에 대한 아쉬움을 떨쳐 버리는 진우였다. '직접 사용할 만한 건 없네.' 전부 판매! 잡다한 아이템들을 상점에 처분하니 짜르륵 골드가 입금됐다. [보유한 금액: 914,690,772 골드] 헉! 무심코 창고를 확인한 진우의 눈이 커졌다. 창고에 쌓인 골드가 벌써 9 억을 넘어서고 있었다. '하긴 악마의 뿔 하나 가격이 20 만원인데 4 천 마리를 넘게 잡았으니.' 그 밖에 기타 잡템들을 처분한 가격까지 차곡차곡 더해지니 골드가 무시무시하게 쌓여 갔다. 'S 급 무기나 방어구 하나 살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 필요성이 느껴지지도 않는데 돈이 모였다고 억지로 쓸 필요는 없으니까. '언젠가 적절히 쓰일 때가 있겠지.' 진우는 창고를 닫고서 손을 탁탁 털었다. 대충 주변 정리는 끝났다. 필수품인 51 층 진입 허가서는 한참 전부터 획득해 놨고, 이제 마법 엘리베이터에 올라서기만 하면 되는 건데... 진우의 시선이 빛의 기둥을 향했다. 약간 떨어진 마법진 앞. 거대한 악마 하나와 다수의 상급 악마들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거대 악마의 이름이 검은색으로 진하게 박혀 있었다. [하층의 지배자, 탐욕스런 볼칸] 수십 톤, 아니 수백 톤은 나갈 것 같이 보이는 육중한 살덩어리. 놈의 한손에 들린 어마어마한 크기의 몽둥이가 흉악스러웠다. 하지만 진우는 미소를 지었다. '저게 중간 보스란 말이지?' 인던의 보스들에게는 나쁜 기억이 없었다. 항상 높은 경험치와 좋은 아이템을 받았다. 고생만 하고 보상은 적은 보스급 마수들에 비하면 보스 몬스터들은 선물상자나 다름없었다. 저놈은 어떤 아이템을 쏟아 낼까? 꿀꺽. 진우는 웃으며 군침을 삼켰다. 72 화 '시작해 볼까?' 진우의 등 뒤로 그림자 병사들이 소환됐다. 일반 병사들은 물론 마법병, 마수병, 그리고 두 명의 기사들까지. 그들의 선두에 진우가 있었다. 두 명의 기사들이 걸어 나와 진우의 좌우에 자리를 잡았다. 오른쪽의 이그리트, 왼쪽의 아이언을 한 번씩 곁눈질한 진우가 씩 웃었다. '든든하네.' 비록 본인의 스킬이라고는 해도, 옆을 지키는 동료들이 있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정감을 주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면전을 하기에는 좀...' 위험해 보였다. 다른 게 아니라 볼칸이 쥐고 있는 나무 재질의 몽둥이 때문이었다. '저만한 크기의 나무가 있었다는 게 신기하다, 참.' 볼칸의 덩치와 몽둥이의 크기로 짐작하건데, 일격에 병사들을 전부 쓸어버릴 수 있을 듯했다. '쓸리는 거까지는 괜찮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그렇게 쓰러진 병사들을 재생시키는 데 드는 마나였다. 저렇게 무식한 무기에 갈려 나가는 병사들을 되살리다 보면 금세 마나가 동날 게 뻔했다.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 '저 덩어리는 내가 맡는다.' 볼칸의 졸개들은 병사들에게 맡기고 그사이 혼자서 볼칸을 처치하는 것. 그게 최선이라 생각됐다. '안 맞고 잡으면 되는 일이니까.' 병사들과 달리 자신은 볼칸의 공격을 피해 낼 자신이 있었다. 그러려면 볼칸을 놈의 부하들과 떼 놓는 게 우선. 진우는 마법병에게 선공을 지시했다. '원거리 공격으로 볼칸의 부하들을 먼저 불러들이고 뒤떨어져서 오는 볼칸을 일대일로 제압한다.' 간단명료한 작전이었다. '지금.' 진우가 수신호를 내리자, 마법병의 손끝에서 불덩이들이 날아갔다. 슈우욱슈우욱퍼엉! 불덩이가 볼칸의 졸개 근처에서 폭발하며 작전이 시작됐다. 띠링! [하층의 지배자, 탐욕스런 볼칸이 침입자를 발견했습니다!] [볼칸의 호위병이 침입자를...] [볼칸의 호위병이 침입자를...] 띠링, 띠링, 띠링! 경고음이 무서운 속도로 이어졌다. 그리고 경고음과 동시에 볼칸과 졸개들의 고개가 이쪽을 향했다. '좋아...' 주의를 끄는 데 성공했다. 진우는 볼칸의 졸개들에게 들키지 않고 놈들의 뒤로 돌아가 볼칸을 치기 위해 은신으로 모습을 감췄다. 스르르. 모든 것은 계획대로 되고 있었다. 분명 그렇게 생각했는데. 두다다다다다다다-! '...!' 볼칸이 예상을 깨고 가장 먼저 달려왔다. '뭐야? 영상을 몇 배속으로 돌린 것 같은 저 움직임은?'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졸개들을 제치고 온 볼칸이 그림자 병사들 앞에 섰다. '낭패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덩치는 산만 한 녀석이 빠르기는 상상을 초월했다. "으음!" 볼칸이 몽둥이를 쳐들었다. 하늘로 향한 몽둥이가 무방비로 노출된 마법병들을 덮치기 직전, 어디선가 튀어나온 아이언이 칠흑의 방패를 세웠다. 부웅콰직! 가까스로 공격은 막았지만... 아이언의 두 팔이 박살나버렸다. 그림자 병사들 중 가장 단단한 녀석이 한 대를 못 버티고 전투 불능 상태가 됐다. 후두둑 부서진 아이언의 팔이 조각난 상태로 바닥에 떨어져 내렸다. "으음? 으음?" 방금 일격이 시원찮았는지 볼칸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몽둥이를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놈이 다시 몽둥이를 내려찍었다. "으음!" 콰직! 방어할 수단을 잃은 아이언과 그의 뒤에 있던 마법병들이 무력하게 파괴됐다. 빠직. 그 장면을 목격한 진우는 속에서 뭔가가 뚝하고 끊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이 새끼가...' 진우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성의 명령이 아니었다. 팟!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볼칸을 향해 뛰어오른 뒤였다. 타깃은 정해졌다. 산 같은 덩치와 다르게 몸에 붙어있는 혹처럼 조그만 머리. 진우는 공중에 떠 있는 상태로 허리를 뒤틀었다. 뒤로 당겨진 어깨와 팔의 근육이 부풀어 올랐다. 꽉 움켜쥔 오른손에 온 신경을 집중하자 스르륵 은신이 풀렸다. "으음?" 뒤늦게 볼칸이 진우를 발견했다. 하지만 코앞에 두고서도 피할 수 있을 정도로 진우는 주먹을 느리지 않았다. 쉬익-! 총탄처럼 쏘아진 주먹이 볼칸의 옆얼굴을 강타했다. 투쾅! 볼칸이 튕겨져 나갔다. 한참 동안 바닥을 구르던 볼칸은 뼈대만 남은 건물의 잔해에 처박히고서야 간신히 움직임을 멈췄다. 와르르! 그나마 남아 있던 건물의 형체가 무너지며 볼칸에게 떨어졌다. 탁. 가볍게 착지에 성공한 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가 이렇게 가볍게 날아가?' 스스로도 안 믿기는지 자신의 주먹을 내려다보았다. 저 덩어리를 날려 버린 주먹에는 생채기 하나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문뜩 떠오른 기억. '아, 그러고 보니...' 진우는 고개를 들었다. 머리 위엔 금방 호출한 스탯창이 떠 있었다. [스탯] 근력: 150 체력: 109 민첩: 139 지능: 109 감각: 111 '...그랬었지.' 스킬은 암살자 타입으로 얻고, 직업은 마법 계열로 정해져서 깜박 잊고 지냈던 것이 있었다. [근력: 150] '...' 모든 스탯 포인트를 지능 쪽에 쏟아붓고 있는데도 아직 근력이 지능보다 1.5 배 가까이 앞선 상태였다. '정말 무식하게도 힘에만 투자했었구나.' 거기다 지금은 레벨까지 폭발적으로 끌어올린 상태. 스탯을 하나하나 살펴보니 그간의 성과를 실감할 수 있었다. 그 결과가 저거. 처박혀 있는 볼칸을 바라보던 진우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허..." 일반 몬스터인 하급 악마, 중급 악마들을 학살할 때는 알기 힘들었다. 그런데 보스급을 마주하고 나자 확신할 수 있었다. '확실히... 강해졌다.' 불끈. 움켜쥔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고양감이 몸속을 채워 갔다. 그때. 익숙한 기계음이 들렸다. 띠링. '뭐지?' 진우는 고개를 들었다. "으음? 으음?" 쓰러졌던 볼칸이 몽둥이를 지팡이 삼아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넘어진 몬스터가 일어난다고 경고음이 울렸던 경우가 있었나?' 시스템이 그리 친절했던가? 고개를 갸웃거리는 진우의 눈앞에 기계음의 원인으로 보이는 메시지가 떴다. [하층의 지배자 탐욕스런 볼칸이 스킬: '분노'를 사용합니다.] '어?' 띠링, 띠링, 띠링. 연달아 경고음이 울렸다. [분노 상태가 계속해서 유지됩니다.] [볼칸의 능력치가 50% 증가합니다.] [볼칸이 느끼는 통증이 감소합니다.] '저 스킬...?' 진우가 켈베로스에 대한 기억을 채 꺼내기도 전에 두 눈이 붉어진 볼칸이 쏜살같이 달려왔다. 두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다! 요란한 발소리와 함께 지면이 흔들렸다. 진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서는 볼칸의 부하들과 그림자 병사들의 전투가 한창이었다. "그워어어어!" "키에엑!" 악마들과 병사들이 뒤섞여 있는 가운데서 진우는 아이언을 찾아냈다. 어찌나 충격이 컸었는지 아이언은 아직도 재생이 진행되는 중이었다. "아이언!" 진우가 소리쳤다. 그러자 아이언이 자신의 방패를 힘껏 진우에게 던졌다. 방패를 넘겨받은 진우. 시선을 다시 앞으로 향했을 땐 이미 볼칸이 서 있었다. '내가 피하면 병사들이 휩쓸린다.' 병사들 없이는 볼칸과 놈의 부하들을 모두 사냥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진우는 최대한 병사들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방패를 치켜들고, 팔에 힘을 주었다. "으음!" 곧 볼칸이 몽둥이를 내리쳤다. 쾅! 쾅! 쾅! 땅이 울릴 정도로 무시무시한 공격이 숨 쉴 틈 없이 쏟아졌으나, 진우는 침착하게 버텨 냈다. 높은 물리 방어력과 올라간 체력 스탯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음? 음?" 공격이 먹히지 않자 흥분한 볼칸이 사정없이 몽둥이를 휘둘렀다. 쾅! 쾅! 쾅! 쾅! 하지만 진우의 무릎이 굽혀지는 일은 없었다. '그래도...' 이렇게 버티는 것만으로는 저 덩어리를 잡지 못한다. 진우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켈베로스의 경우와 다른 것이, 볼칸의 분노 스킬은 효율이 조금 떨어지는 대신 지속 시간에 한계가 없었다. 언제까지 이 상태로 있어야 할지 알 수 없다는 뜻이었다. 쾅! 쾅! 진우는 이를 악물었다. '맞고만 있는 건 성미에 안 맞기도 하고...' 쾅! 마지막으로 부딪힌 몽둥이가 방패에서 떨어질 때. 반격을 준비하던 진우가 볼칸의 머리를 향해 뛰어올랐다. 하지만 기회를 노리던 건 진우만이 아니었다. "으음!" 진우가 뛰어오르는 타이밍에 맞춰 볼칸이 상체를 뒤로 멀찍이 뺐다. '뭣?' 그리고 옆에서 궤적을 그리며 날아오는 몽둥이. '...당했다.' 손이나 발이 닿을 곳이 있다면 모를까. 공중에서는 피할 길이 없었다. 막아 낸다 해도 그 충격으로 인해 어디로 튕겨 나갈지 모른다. 부웅-! 느려진 시간 속에서 진우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는 몽둥이를 보며 침음성을 흘렸다. '방법이, 방법이 없을까?' 몸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어떻게든 피해 볼 수 있을 텐데.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른 순간. '몸을 움직인다?' 머릿속에 번뜩 떠오른 아이디어. 계산하고 있을 틈은 없었다. 생각과 동시에 진우는 '지배자의 손길'을 써서 볼칸을 밀었다. "으음?" 물론 볼칸같이 육중한 녀석을 움직이기에 '지배자의 손길' 스킬의 힘은 터무니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 반동으로 자신이 뒤로 밀려났다. 부웅-! 몽둥이의 끝이 아슬아슬하게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됐다!' 나가떨어진 진우는 바닥을 몇 바퀴 구르기는 했으나 몽둥이에 맞았을 경우와 비하면 비교적 무사히 지면에 착지했다. "휴-!" 균형을 잡는 데 성공한 진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으음?" 반면 볼칸의 얼굴은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회심의 일격이 무위로 돌아가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양이었다. "으음, 으음!" 붉어지는 볼칸의 얼굴을 보고 있던 진우가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이걸 어쩐다?' 정면으로 뛰어오르니 어렵지 않게 피해 버린다. 그렇다고 머리 말고 다른 곳을 공격하자니 온몸을 둘러싼 살 때문에 치명상을 입힐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피할 수 없는 상황을 만드는 수밖에 없나?' 문득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이윽고 뒤돌아선 진우가 달리기 시작하자 그걸 도망치는 것으로 착각한 볼칸이 급하게 뒤쫓아 왔다. 두다다닷-! 볼칸이 따라올 수 있도록 속도를 조절하며 달리던 진우가 적당한 건물을 발견하고는 눈을 빛냈다. '저거다.' 한편. "으음!" 볼칸은 진우와의 거리가 좁혀지자 몽둥이를 뒤로 젖혔다. 벌레 같은 생물! 자꾸 귀찮게 구는 놈을 박살 낼 수 있는 찬스가 왔다. 볼칸의 얼굴에 징그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몽둥이를 내려치려는데. 벌레 같은 것이 갑자기 속도를 내더니 무너지다만 건물의 외벽을 빠르게 밟고 올라갔다. "으음?" 뭔가 꺼림칙한 느낌이 들었지만 속도를 줄이기에는 이미 불가능했다. "으음, 으음?" 순식간에 자신의 눈높이까지 건물을 타고 올라간 벌레가 벽을 강하게 박찼다. 콰직! 거미줄처럼 금이 번져 나가는 벽에서 여태껏 한 번도 본 적 없는 속도로 무언가가 쏘아졌다. 그 벌레였다. "으음!" 볼칸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 눈을 마주한 진우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졌다. 진우는 오른손에 쥔 바루카의 단도로 목에 불뚝 튀어나와 있는 볼칸의 동맥을 베었다. 스걱! 몸뚱이만큼이나 큰 핏줄에서 혈액이 분수처럼 솟구쳤다. 쏴아악! "으음? 으음!" 볼칸은 몽둥이를 버리고 급하게 손으로 상처를 틀어막았다. "으음!" 하지만 흘러나오는 피를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순간 볼칸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으, 으음?" 어느새 놈의 등을 타고 올라간 진우가 양손에 쥔 단검 두 개를 놈의 목에 깊이 박아 넣었다. '한 번으론 부족한가?' 고개를 갸웃거린 진우가 단검을 뺐다가 다시 스킬을 썼다. '급소 찌르기!' 두 개의 단검이 또 한 번 볼칸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푹! 푹! 그제야 기다리고 있던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하층의 지배자 탐욕스런 볼칸을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150,000 을 획득합니다.] [볼칸이 위장에 남아 있던 악마의 영혼들을 전부 토해 냅니다.] [악마의 영혼 72 개를 획득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73 화 쿵! 볼칸이 쓰러졌다. 뿌옇게 피어오른 먼지 속에서 진우가 유유히 걸어 나왔다. 진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로 그림자 병사들을 도우러 갈 생각이었는데, 마침 저쪽도 정리가 끝나가는 듯 보였다. "키에에엑!" "케?" "케에엑!" 그림자 병사들의 칼질에 볼칸의 부하들의 수가 가파르게 줄어들고 있었다. '상태창.' 진우는 불러낸 상태창을 살폈다. 방금 레벨업된 상태라 체력과 마나가 모두 가득 차 있었다. '마나는 충분하니까 딱히 도울 필요 없겠네.' 마나가 건재하는 한 그림자 병사들은 불사신에 가까웠다. 그게 언데드 군단의 힘. 패잔병 처리는 병사들에게 맡기기로 하고, 진우는 전리품을 수거하기 위해 돌아섰다. "흠." 포장된 선물 상자를 뜯는 기분이라고 할까? 볼칸의 사체를 보니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어떤 게 나왔을라나?' 사체에서 여러 개의 빛이 반짝였다. 진우는 늘 하던 것처럼 빛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이템 획득 메시지가 떴다. 띠링! [아이템: 악마 군주의 귀고리]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아이템: 탐욕의 구슬]을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아이템: 볼칸의 뿔] 2 개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재료 아이템: 세계수의 파편]을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어쩐지 볼칸과 싸우기 전부터 묘하게 기분이 좋더라니. 예상했던 대로 아이템이 쏟아져 나왔다. 목록을 확인하는 진우의 얼굴에 희색이 돌았다. '볼칸의 뿔은 보나마나 잡템일 테고.' 아이템 이름이나 개수로 봤을 때, '볼칸의 뿔'은 악마 몬스터를 처치하고 얻은 '악마의 뿔'처럼 골드 벌이용 잡동사니가 분명했다. 그럼 나머지 세 개가 진짜들인데... 그중에서도 유독 시선을 끄는 아이템이 하나 있었다. [재료 아이템: 세계수의 파편]을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재료 아이템이 뭐지?' 이걸로 뭘 만들 수 있다는 걸까? 아니면 퀘스트의 재료가 된다는 걸까? 처음 보는 형식의 아이템이 진우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아이템의 설명을 읽어 보려면 먼저 아이템을 구체화시켜야 한다. 그래서 일단 아이템 획득 여부를 묻는 메시지들을 전부 수락했다. "모두 획득." 볼칸의 사체 여기저기서 반짝이던 빛들이 승낙과 동시에 아이템으로 변해 발 앞에 스르르 나타났다. 귀고리 두 개와, 붉은 구슬 하나와, 성인 여성 크기의 커다란 목재 덩어리. 어느 것이 '세계수의 파편'인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진우는 목재를 응시했다. 그랬더니 아이템 정보가 떠올랐다. [재료 아이템: 세계수의 파편] 입수 난이도: ?? 종류: 재료 세계수의 가지를 꺾어 만든 '볼칸의 몽둥이'에서 오염된 부분을 제거하고 남은 목재입니다. 세계수에서 얻어 낸 목재는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어 최고급 마법도구의 재료로 쓰입니다. '최고급 마법도구의 재료라.' 이걸로 뭘 만들 수 있는지 궁금했지만 안타깝게도 거기까진 나와 있지 않았다. 그래도 보통 물건이 아님은 확실했다. 가까이 두고 있는 것만으로도 강한 기운을 느낄 수 있었다. '이 나무... 유용하게 쓰일지도 모르겠다.' 진우는 '세계수의 파편'을 상점에 넘기는 대신 창고로 보냈다. 그 후 다른 아이템들도 하나씩 정보를 확인해 보았다. [아이템: 악마 군주의 귀고리] 입수 난이도: S 종류: 장신구 근력 +20, 체력 +20 악마 군주의 목걸이, 악마 군주의 반지와 함께 착용하면 세트 효과가 개방됩니다. 세트 효과 1. (개방 안 됨) 세트 효과 2. (개방 안 됨) '이건 세트 효과가 있네?' 단일 옵션만 놓고 보면 A 급이었던 '파수꾼의 목걸이'와 비슷했지만, '악마 군주의 귀고리'에는 아직 밝혀지지 않은 세트 효과가 있었다. 세트 효과를 뺀다고 해도 훌륭했다. 근력과 체력이 각각 20 씩. '1 업 당 능력치 포인트가 5 개 오르는 셈이니까.' 능력치 포인트로만 계산하면 8 업을 해야 얻을 수 있는 수치였다. 진우는 기쁜 마음으로 귀고리를 집어 들었다. [아이템: 악마 군주의 귀고리]를 착용하시겠습니까? '착용.' 귀고리 역시 다른 아이템들처럼 형태가 감춰지며 옵션이 적용되었다. 올라간 스탯을 보며 진우는 만족스럽게 웃었다. 악마 군주의 장신구 시리즈라. '분명 다른 장신구들도 여기서 나오겠지?' 악마라는 이름이 붙어있는 걸 보니 악마성에서 나오는 아이템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어떤 세트 효과가 있을까? 이제 겨우 파츠 하나를 손에 넣었을 뿐인데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하지만 진우의 미소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건...?' [아이템: 탐욕의 구슬] 입수 난이도: A 종류: 마법 도구 고위 악마 볼칸의 피를 굳혀서 만든 구슬이었다. 마법 효과를 증폭시켜 더 많은 피해를 입힙니다. 효과 '파괴 욕구': 마법 데미지를 2 배 증가시킵니다. 당구공 크기의 붉은색 공. 진우는 '탐욕의 구슬'을 손에 쥐었다. 스탯의 상승은 없었다. 마법이라고 할 수 있는 직업 전용 스킬창들을 꺼내 살펴 봤지만 추출할 수 있는 그림자 수나 저장할 수 있는 그림자 수도 변하지 않았다. '내가 쓸 수 있는 템이 아닌가?'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마법 데미지 두 배 증가. 성능은 정말 엄청났다. 원래 마법을 증폭시키는 도구는 엄청나게 비싸서 소수의 마법 계열 헌터만 사용이 가능했다. 하지만 그런 고가의 아티팩트 중에서도 출력을 두 배로 높여 주는 물건이 있다는 소리는 아직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게 있다면 특종으로 난리가 났을 거다. 여태 몰랐을 리가 없다. 그런데 이 '탐욕의 구슬'인가 뭔가하는 아이템은 마법 데미지를 두 배나 올려 준다고 되어 있었다. '그럼 뭐하나? 나한테 도움이 안 되는걸.' 진우는 입맛을 다셨다. 단순히 마법 데미지를 두 배로 만들어 주는 물건이라면 자신에게는 아무 영향도 끼칠 수 없었다. 그림자 추출과 그림자 저장은 데미지와 무관하니까. 다른 스킬들은 아예 마법도 아니고. 차라리 지능을 올려 주는 아이템이 나왔으면 더 좋았을 텐데. '쯧.' 진우가 아쉬운 눈빛으로 '탐욕의 구슬'을 가볍게 던졌다 받았다 하며 노는 동안, 졸개들 정리를 끝낸 그림자 병사들이 하나씩 다가왔다. 가장 빠른 녀석은 이그리트였다. 오른손에 세 개, 왼손에 세 개. 총 여섯 개나 되는 악마의 머리를 양손에 들고 와 진우의 앞에 떡하니 내려놓았다. "..." 진우는 무릎 꿇는 이그리트를 바라보면서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그거 좀 안 하면 안 될까?" 물론 정중히 고개를 숙인 이그리트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니가 그러니까..." 진우의 시선이 아이언에게 향했다. 아이언은 언제 잘랐는지 모를 볼칸의 머리를 질질 끌고 와서는 똑같이 무릎을 꿇었다. "...쟤도 따라 하잖아." 심지어 저건 내가 잡은 건데. 진우는 아이언에게 시선을 고정시킨 채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문득 재미난 생각이 들었다. '아이언의 방패를 내가 썼었던 것처럼 '탐욕의 구슬'을 한번 얘들한테 써 보게 할까?' 마침 일반 병사들 뒤로 느릿하게 걸어오는 마법병들이 보였다. 마법병은 기사는 물론이거니와 일반 병사들보다도 발이 느렸다. 진우는 그 셋 중 가장 빨리 도착한 녀석을 불러냈다. 손가락을 까딱거리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병 하나가 부지런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냥 내가 가고 말지.' 고개를 가로젓던 진우가 성큼성큼 걸어가 마법병의 손에 '탐욕의 구슬'을 쥐여 주었다. 그러고는 아까 자신이 뛰어오르는데 사용했던 건물을 가리켰다. 어차피 그림자 병사들은 본인의 의지만으로도 움직일 수 있었기 때문에 따로 설명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다. 진우가 사인을 내렸다. "발사." 그 순간 하늘로 치켜든 마법병의 손 위에 평상시의 두 배쯤 되는 불덩어리가 생겨났다. '헉!' 진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놀라고 있을 틈도 주지 않고, 손끝의 불덩어리는 금방 마법병의 손을 떠났다. 슈우우욱퍼어어어엉! "허!" 진우는 입이 쩍 벌어졌다. 폭발에 휩쓸린 건물은 종이로 지은 장난감 집처럼 부서져 내렸다. 건물을 태우는 불길은 쉽게 사그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타닥, 타닥! 치솟아 오르는 불꽃을 놀란 눈으로 지켜보던 진우가 급히 마법병에게서 '탐욕의 구슬'을 넘겨받았다. 그리곤 다시 아이템 정보를 꼼꼼히 확인했다. '없어. 확실하게 없다.' 몇 번이고 다시 읽어 봐도 '탐욕의 구슬' 정보에는 타인에게 양도가 불가능하다는 설명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걸 거래할 수 있다는 뜻인가? 꿀꺽. 진우가 마른침을 삼켰다. 진우의 시선이 다시 건물로 옮겨갔다. 화르륵! 아직도 불이 타오르고 있는 건물 일부분이 또 요란한 소리를 내며 무너졌다. 그걸 보는 진우의 입가가 씰룩거렸다. '이거 참...' 마법계열 헌터 분들이 아주 환장을 하시겠는걸? 처음의 아쉬웠던 눈빛은 어디가고, 진우의 시선은 점점 기대감으로 물들어 갔다. *** 햇볕이 쨍쨍한 오후. "902 호 청년요?" 아줌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잠시 후 대답했다. "글쎄요, 요즘 안 보이던데." "아, 네. 감사합니다." 현기철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성진우 헌터가 사는 낡은 아파트 근처에서 그를 기다리기 시작한 지 벌써 사흘째. 아직 한 번도 마주치지 못했다. 매일 직접 갈아오고 있는 야채 주스가 무안할 지경이었다. 현기철은 한숨을 내쉬며 폰을 들었다. 뚜르르, 뚜르르. 곧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어, 기철아. "과장님." 상대는 안상민 과장이었다. "성진우 헌터님이 통 보이지가 않습니다. 아파트 주민들도 요즘엔 본적이 없다고 하네요." -그래? "네." -어쩔 수 없지. 그럼 너도 내일부터는 다시 사무실로 와라. "네, 알겠습니다." 뚝. 안상민은 전화를 끊으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성진우 헌터는 대체 어딜 간 걸까? 며칠 전부터 도무지 연락이 되질 않았다. 일부러 전화를 피하나 싶어 현기철을 보내 봤더니 집 근처에서도 보이질 않는단다. 문득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걱정이 들었다.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는 모르겠다만.' 여하튼 기분이 좀 싱숭생숭했다. 톡톡. 누가 어깨를 두드려서 돌아보니 박희진 헌터가 옆에 와 서 있었다. "동생에게는 일주일 정도 친구와 여행을 다녀온다고 말했다는데요?" "성진우 헌터님이요?" "네." "그렇다면... 목적지가 지구 위는 아닐 겁니다." "네?" 박희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안상민이 빠르게 설명했다. "해외로 나간 흔적은 당연히 없으시고, 요 며칠간 은행에서 돈을 찾은 기록도, 카드를 쓴 기록도 전혀 없어요." "그런 것도 알 수 있어요?" "저야 헌터 분들 따라다니는 게 일이니까요." "어머나." "거기다 협회의 위치 추적 기록에 의하면 마지막으로 통신이 끊긴 곳이 시내 한복판이랍니다. 그것도 5 일 전. 정말 미스터리 하지 않습니까?" "설마 납치라도 당한 건 아니겠죠?" 얼떨결에 던진 박희진의 한마디.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피식 웃었다. 성진우가 누군가? 상급 던전, 그것도 레드 게이트를 혼자서 클리어한 인물이다. 안상민이 볼을 긁적거리며 말했다. "성진우 헌터님을 데려가려면 전원 헌터로 구성되어 있다는 중국의 특수부대 정도가 와야 할 만할 겁니다." 박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웃음 짓고 있던 안상민이 문득 이상하다는 생각에 질문을 던졌다. "그런데 여행 간다고 말했다는 건 어떻게 아셨어요?" "아, 한송이요. 송이랑 연락 주고 받고 있거든요. 그 애가 성진우 씨 동생이랑 같은 학교라서 한번 물어봐 달라고 했죠." "아하..." 안상민의 대답을 끝으로 두 사람의 대화가 일시적으로 끊겼다. 그리고 둘은 같은 생각을 했다. '도대체 어디 있는 거야, 이 사람은?' 74 화 '상층은 차원이 다르구나.' 진우는 악마성에서 만난 처음이자 마지막 보스급 몬스터인 '탐욕스런 볼칸'을 떠올렸다. 녀석의 칭호는 '하층의 지배자'. 놈이 있었던 50 층을 벗어나자 난이도가 거짓말처럼 급격하게 상승했다. 하루에 10 층 이상, 많게는 20 층 가까이 올라갔었던 속도도 눈에 띄게 줄어들어 이제는 하루 7, 8 층을 오르기가 힘들어졌다. 지금 서 있는 곳은 74 층. 일반 몬스터로 나오는 최상급 악마나 가끔 보이는 고위 악마는 크기부터가 아래층부터 보던 악마들과 궤를 달리했다. 푹! 2 층 건물만 한 크기의 최상급 악마가 가슴에 단도가 박힌 채 천천히 쓰러졌다. 쿠웅! [최상급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1,700 을 획득합니다.] [악마의 영혼 1 개를 획득합니다.] 진우가 쓰러진 악마의 가슴에 박혀 있는 '바루카의 단도'를 뽑아냈다. 방금 잡은 놈이 마지막. 또 한 번의 전투가 끝났다. 전투에서 승리한 그림자 병사들이 진우 주위로 모여들었다. 진우는 병사들을 살폈다. 언데드 군단이니 그럴 가능성은 없지만, 어쩐지 병사들도 지친 기색으로 보였다. 그만큼 몬스터의 레벨이 높았다. 그나마 이번 전투는 고위 악마가 끼어 있지 않아서 좀 쉽게 끝난 편이었다. '한 마리 한 마리가 보스급과 맞먹네.' 근거 없이 그냥 체감상으로 해 본 말이 아니었다. 볼칸을 잡고 얻었던 '탐욕의 구슬'. 구슬에는 고위 악마 볼칸의 피를 굳혀서 만든 아이템이라는 설명이 붙어 있었다. 그 고위 악마라는 말이 볼칸의 등급을 뜻하는 거라면 상층의 몬스터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70 층 이상부터는 고위 악마가 심심치 않게 등장했으니까. '단순히 몬스터 레벨만 높아진 거라면 모르겠는데...'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상층에서부터 바뀌기 시작한 배경. 51 층 위부터 나오는 도시들은 전부 불타고 있었다. 그리고 불꽃은 위층으로 갈수록 점점 더 거세졌다. 70 층을 넘어가니 가만히 서 있어도 체력이 줄줄 새어 나갈 정도로 뜨거워졌다. 몸을 조금만 움직여도 피로도가 금방 가득 찼다. '악마성'이 아니라 '불타는 탑'. 여기 들어오기 전에 느꼈던 예감이 정확했다. '...내려가자.' 이번 공략은 여기까지. 불길을 막을 수 있는 대책이 시급했다. '화속성 마법을 방어할 수 있는 아티팩트를 구해 와야겠는데.' 상급 헌터들이 쓰는 장비들은 가격이 엄청나다. 거기에 보호 마법까지 걸려 있다면 두말 할 필요가 없다. 비싼 건 수백억을 호가한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유진호와 같이 다니는 동안 꽤 많은 돈을 모았지만 아티팩트 가격을 감당할 수 있을지 살짝 걱정이 되긴 했다. 그래서 보험이 필요했다. '이걸 팔면 충분하겠지.' 진우는 창고에 고이 모셔놓은 '탐욕의 구슬'을 보면서 미소 지었다. 마법계열 헌터라면 누구라도 군침 흘릴 아이템이었다. 탐욕의 구슬을 경매로 내놓는다면 가격이 얼마쯤이나 나올까? 성능만 확실히 입증한다면 마법계열 상급 헌터들이 줄을 설 거 같긴 했다. 진우는 창고를 닫았다. 던전에 들어오기 전 목표했던 대로 많은 레벨을 올리는 데는 성공했다. 그래서 던전 클리어를 다음으로 미루는 것은 아쉽지 않았다. 하지만 딱 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진우의 시선이 문득 위를 향했다. [수집한 영혼의 개수: 9,624] '남은 영혼은 4 백 개.' 악마의 영혼을 조금만 더 모으면 퀘스트를 끝낼 수 있었다. 마침 오늘이 6 일째. 퀘스트 완료까지 하루 정도면 충분했다. 상층의 유일한 장점은 악마 하나를 잡아도 여러 개의 영혼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었다. 4 백 개쯤이야 금방이었다. '퀘스트만 끝내고 나가자.' 그렇게 다짐한 진우가 돌아섰다. 확실한 목표가 세워져서 그런지 걸음에 더 힘이 들어갔다. [1 층부터 74 층까지 개방되어 있습니다.] [어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마법 엘리베이터, 아니 층간 이동 마법진의 정중앙에 선 진우가 말했다. "75 층." *** 이게 웬 떡일까? 진우는 저 멀리, 층간 이동 마법진 앞을 지키고 있는 몬스터를 보면서 미소 지었다. [망령의 인도자 메투스] 이름을 보아하니 보스급 몬스터. 검은 로브를 입은 놈이 은색 목걸이를 메고 있으니 확연히 눈에 띄었다. '저게 악마 군주의 목걸이겠지.' 퀘스트 완료하려다 세트 아이템이 파츠 하나를 더 모으게 생겼다. 하지만 진우가 웃는 이유는 아이템 때문이 아니었다. 아무리 좋은 아이템을 주는 몬스터라도 잡을 수 없다면 아무 소용이 없는 법. 진우는 단검 두 개를 손에 쥐었다. 그리고 앞으로 달려 나갔다. 곧 검은 로브를 걸친 해골 마법사가 달려오는 진우를 발견했다. 띠링! [망령의 인도자 메투스가 침입자를 발견했습니다!] 놈은 보스급 몬스터답게 순식간에 주문을 완성했다. 놈의 발밑에 핏빛의 마법진이 생기는 것과 동시에 주변으로 음산한 기운이 몰려들었다. [망령의 인도자 메투스가 스킬: '저주받은 목소리'를 사용합니다.] 메투스의 부름을 받은 언데드 군단이 땅에서 일제히 솟아올랐다. 그 수가 무려 수천! 평범한 이라면 마주치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힐 만큼 끔찍한 군대였으나 그들에게 둘러싸인 진우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았다. '역시나...' 예상했던 대로였다. 이상하게 유독 이 주변에서만 검은 연기가 끝도 없이 올라오고 있었다. 그걸 보고 메투스가 어떤 타입의 몬스터인지 예상하기는 어렵지 않았다. '망령의 인도자.' 놈이 가진 칭호는 예상을 확신으로 만들어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메투스는 강력한 언데드 군단을 불러냈다. 그리고 그 분야에서 진우는 최고의 직업을 가지고 있었다. "일어나라!" 으아아아아아아-! 고통스런 비명들과 함께 언데드들의 그림자에서 병사들이 기어 올라왔다. 그 수는 수백! 메투스의 군대에 비하면 턱없이 모자란 숫자였으나 그 정도만으로도 충분했다. 진짜는 따로 있었으니까. "길을 뚫어!" 진우의 그림자에서 나온 검은 병사들. 이쪽이 진짜였다. 그림자 추출로 만들어 낸 병사 수백이 시간을 끄는 동안 악마성에 들어온 뒤로 착실히 성장시켜 두었던 진우의 직속 부대원들이 길을 만들었다. 목적지는 하나! 앞장선 이그리트와 아이언이 무서운 속도로 언데드들을 부수기 시작했다. 메투스와의 거리가 순식간에 좁혀졌다. '이 정도면 됐다.' 진우가 앞으로 치고 나왔다. '질주!' ['질주' 스킬의 레벨이 올랐습니다!] 넓은 악마성 안을 뛰어다니다 보니 질주 스킬 레벨이 한 계단 더 올라갔다. '좋아.' 진우는 씩 웃었다. 언데드 군단의 포위를 빠져나온 진우가 눈 깜짝할 사이 메투스 앞에 섰다. 그때 진우와 메투스의 눈이 마주쳤다. '이렇게 될 줄은 몰랐지?' 진우는 승리의 여유가 담긴 눈빛을 보냈으나, 메투스는 진우의 시선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아니, 어깨를 떤 듯했다. '몬스터도 공포를 느끼나?' 그런 생각도 잠시. 진우의 단검이 수십 번의 잔상을 만들었다. 털썩. 보스급 몬스터가 맥없이 쓰러졌다. 수하를 조종하는 마법사 계열 몬스터들이 1:1 대치 상황이 됐을 때 얼마나 약해지는지는 이미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처음 메투스를 본 순간 지금 상황이 머릿속에서 그려졌었다. 진우는 단검을 창고로 돌려보냈다. 곧 메시지가 떴다. 띠링. [망령의 인도자 메투스를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200,000 을 획득합니다.] [메투스의 팬던트에 봉인되어 있던 악마들의 영혼을 발견했습니다.] [악마의 영혼 220 개를 획득합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진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 번에 영혼 220 개. 생각지도 못했었던 성과였다. [수집한 영혼의 개수: 9,971] 진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얼마 안 남았네.' 남은 영혼은 겨우 30 개 남짓. 악마 몇 마리만 잡아도 채울 수 있는 양이었다. 퀘스트부터 얼른 끝내고 싶어진 진우는 서둘러 아이템을 챙기고 이동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76 층." *** 미국 동부. 악몽을 꾸는 듯 이리저리 몸을 비틀어 대던 황동수가 벌떡 일어났다. '...?' 가장 먼저 하얀 천장이 눈에 들어왔다. 낯선 배경에 황동수가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병...원?" 꿈이. 꿈이 아니었단 말인가? 황동수는 턱밑을 흐르는 땀방울을 손등으로 닦아 냈다. 그리고 동시에 발견했다. 자신이 입고 있는 환자복과 팔뚝에 꽂혀 있는 링거를. 황동수의 인상이 무섭게 굳어졌다. 이어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할 말이 있으시면 어서 하고 가시죠." 헌터관리국의 부국장. 검은 머리보다 흰머리가 더 많은 중년의 백인 남성이 천천히 황동수에게 다가갔다. "자네에게 직접 묻고 싶은 게 있어서 기다리고 있었다네." 뭘 묻고 싶다는 거지? 황동수가 고개를 들었다. 그의 시선을 똑바로 마주 보며, 부국장이 물었다. "성일환이라는 남자... 그는 정말 마수가 맞았나?" "그럼 제가 멀쩡한 사람을 공격했단 말입니까?" "자네를 못 믿는 것은 아니네. 다만 내 눈으로 본 걸 확인하고 싶었을 뿐이야." 부국장은 황동수에게 자신의 폰을 내밀었다. 폰에서는 어떤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이건...?" "그날 인근의 감시 카메라에 찍힌 영상일세." 영상 안에서는 동양인 남자가 무너지는 관리국 건물로부터 직원들을 구해 내고 있었다. 그 남자가 누군지 물을 필요는 없었다. 어떻게 잊을 수 있을까? 기억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봤던 얼굴을. 남자는 성일환이었다. 부국장이 어두운 얼굴로 말했다. "나는... 여태 한 번도 인간을 도운 마수 이야기를 들어 본 적이 없네. 그가 마수라는 자네의 생각은 여전히 변함이 없나?" "...틀림없는 마수입니다." "알겠네." 부국장은 폰을 챙겨 넣고는 말을 이었다. "치료가 끝나면 관리국에 들려 주게. 몇 가지 작성해야 할 서류가 있으니." 돌아서는 부국장에게 황동수가 물었다. "그 남자는 어떻게 됐습니까?" "자네와 싸운 직후 사라져 버렸네. 관리국에서 쫓고 있긴 하지만 자네를 쓰러뜨렸을 정도의 능력을 가진 남자가 과연 잡힐지는..." 병실을 나가기 직전 부국장이 어렵게 입술을 뗐다. "혹시 그가 어디로 갈지 짐작이 가는 곳은 없나?" "..." 황동수가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입을 다무는 걸 보고 부국장이 병실을 빠져나갔다. 부국장이 나가자마자 황동수는 거칠게 링거를 뽑아 버렸다. "젠장!" 굴욕적인 패배였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깨닫기도 전에 자신은 성일환의 발에 목이 밟혀 있었다. 그것도 바닥에 누워 꼴사납게. 켁켁대는 자신에게 성일환은 말했다. -한국에는 절대 발을 들이지 마라. 내 아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너를 위해서. 너는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할 거다. 그 뒤로는 기억이 없었다. 의식을 잃었다가 눈을 떠보니 이곳이었다. '죽어서도 눈을 감지 못한다?' 그게 무슨 뜻일까? 눈을 감지도 못할 만큼 처참하게 죽여 버리겠다는 협박인가? '감히... 나를 협박해?' 황동수의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마수에게 진 것도 모자라 씻지 못할 치욕이 생기다니. '놈이 어디로 갈 지는 알고 있다.' 다시 놈을 잡고 만다. 그런데 어떻게? 놈의 정체가 마수든 아니든 간에 강하다는 사실만큼은 부인할 수 없었다. '놈을 잡으려면 장비가 필요해.' 다행히 장비를 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길드에 연락하자.' 황동수가 속한 스케빈저는 세계에서도 손꼽히는 길드였다. 스케빈저가 보유하고 있는 아티팩트들의 가격만 따져도 작은 나라의 한 해 예산을 가볍게 넘는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돌 정도였다. '아티팩트만 갖추면 문제없다.' 황동수의 두 눈이 광기로 번들거렸다. 한국으로. 황동수는 목적지를 정했다. *** [고위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2,200 을 획득합니다.] [악마의 영혼 1 개를 획득합니다.] [노예 악마의 영혼 3 개를 획득합니다.] '끝났다!' 진우가 희색을 감추지 못했다. 운 좋게도 마지막에 잡은 몬스터에게서 네 개의 영혼을 얻었다. 그 결과 퀘스트 목표치를 달성할 수 있었다. [보유한 영혼의 개수: 10,001] 띠링. [일반 퀘스트: 악마의 영혼을 모아라! 1]을 완료하였습니다. [완료 보상이 도착하였습니다.] [보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Y/N) '당연하지.' 대답이 끝나자 보상 목록이 떠올랐다. 띠링. [아래와 같은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상 1. 모든 아이템 중 택 1 보상 2. 보너스 스탯 +20 보상 3. 공개되지 않는 보상 [전부 수락하시겠습니까?] 다른 보상들도 눈에 확 띄지만 현재 진우의 가장 큰 관심사는 1 번이었다. 1 번을 위해 퀘스트를 끝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보상 1 수락.' 띠링! [모든 아이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아이템이 있습니까?] 원하는 아이템이라. 당연히 있었다. 퀘스트를 처음 봤을 때부터 진우는 생각해 둔 아이템이 있었다. 다른 선택을 했다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그날 이후로 늘 궁금했었다. 그게 아이템으로 취급되는지는 모르겠다만 밑져 봐야 본전이니까. [모든 아이템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원하는 아이템이 있습니까?] 시스템이 재촉하듯 다시 물어왔다. 고민 끝에 진우는 대답했다. "저주받은 랜덤 박스." 75 화 이전에 한번 갈림길에 섰을 때 진우는 '저주받은 랜덤 박스' 대신 '축복받은 랜덤 박스'를 골랐다. 선택의 결과는 악마성의 열쇠. 덕분에 악마성 던전에 들어와 많은 것을 얻었다. 레벨도 많이 올랐고, 아이템도 늘었고, 골드는... 이제 조금은 써 줘야 하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벌었다. '다시 기회를 준다고 해도 주저없이 같은 선택을 하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택의 다른 결과가 궁금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원하는 것을 준다고 했던 '축복받은 랜덤 박스'와 필요한 것을 준다고 했던 '저주받은 랜덤 박스'. 다른 한쪽엔 뭐가 들어 있었을까? '축복받은 랜덤 박스에는 확실히 내가 원하던 게 있었는데 말이야.' 지금 그 궁금증을 해소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 진우는 조마조마하게 시스템의 대답을 기다렸다. 평소와 달리 시스템의 대답이 느려진 것 같았다. 띠링! 걱정은 기우에 불과했는지 잠시 뒤 시스템이 응답해 왔다. [아이템: '저주받은 랜덤 박스'를 선택했습니다.] [선택한 아이템이 제공됩니다.] 스르르. 발 앞에 작은 상자가 나타났다. '좋았어!" 진우는 떨리는 심정으로 상자를 주워 들었다. 그런데 상자의 무게가 익숙하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았다. 설마? 급히 상자를 열고 안을 확인한 진우가 눈을 크게 떴다. "...이건?" *** 악마성을 나온 진우는 곧장 집으로 향했다. 일단 좀 씻고 싶었다. 던전 안에 있는 동안 한 번도 씻지를 못했다. 물이야 상점에서 구하면 되지만 씻지 만한 공간이나 시간이 없었다. '사방에 몬스터가 가득한데 한가롭게 샤워나 하고 있을 여유가...' 쏴아악집에 도착해 온수에 몸을 맡기니 이제야 진짜 던전을 벗어난 기분이 들었다. '역시 집이 좋구나.' 옷까지 새로 다 갈아입은 진우가 젖은 머리 위에 수건을 얹고 나와 침대에 걸터앉았다. 이제 정리를 좀 해야 할 시간이었다. 먼저 상태창을 불러냈다. '상태창.' 띠링. 눈앞이 어지러울 정도로 긴 문자열이 떠올랐다. 진우의 시선이 스탯창에서 멈췄다.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20] 퀘스트 완료 보상으로 받은 능력치 포인트가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당연히 전부 지능을 찍었다. 띠링. [스탯] 근력: 178 체력: 137 민첩: 147 지능: 149 감각: 119 이제야 간신히 지능이 다른 스탯을 앞서게 됐다. 아직 근력에는 못 미치지만 그래도 지능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얼마 전까지의 상황을 떠올리면 장족의 발전이라 할 수 있었다. 근력, 체력, 민첩, 지능, 감각. 균형이 잡혀 가고 있었다. '무엇 하나 버릴 스탯이 없었지.' 어쩌다 보니 하나씩 전부 다 집중적으로 투자해 본 기간이 있었고, 모든 스탯이 각자의 영역과 장점을 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잠깐...' 기왕 이렇게 된 거 어떤 스탯 하나에 집중할 게 아니라 모든 스탯을 고루 올리는 것이 어떨까? 올 스탯 플레이어. 문득 그런 욕심이 생겼다. 어느 하나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스탯이 없어서 할 수 있는 행복한 고민이었다. '지능이 근력보다 높아지면 다른 스탯들도 조금씩 맞춰 가자.' 결론을 내린 진우는 스킬창으로 눈을 돌렸다. 거기에 세 번째 보상이 있었다. [보상 3. 공개되지 않는 보상] 첫 번째 보상인 '원하는 아이템'과 두 번째 보상인 '보너스 스탯'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사실 세 번째 보상에는 크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그냥 호기심 정도? 하지만 막상 보상을 받고 나서는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보상 3 이 지급됩니다.] 메시지와 함께 손안에 나타난 것은 '진입 허가서'와 비슷한 크기의 두루마리 문서였다. '뭐지?' 생각지도 못했던 보상 방식에 진우는 놀란 눈으로 두루마리를 펼쳤다. [도안: 생명의 신수] 아이템 '생명의 신수'의 제작 방법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아이템을 직접 만들 수 있다고?' 마력이 담긴 무기는 마법 계열 각성자들만 만들 수 있는 줄 알았는데... 생각해 보니 자신도 마법계열이긴 했다. '그래도 도안만 있으면 아이템을 만드는 방법을 알 수 있다니...' 진우의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동시에 의문이 떠올랐다. 무엇을 만들 수 있게 된다는 걸까? '생명의 신수가 뭐지?' 진우는 도안에 적힌 '생명의 신수' 아이템에 대한 정보를 읽어 내려갔다. [아이템: 생명의 신수] 입수 난이도: S 종류: 소모품 강한 마법의 힘으로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신비로운 물약입니다. 한 병을 모두 사용했을 때만 온전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모든 병을... 치료할 수 있다?' 진우는 설명을 읽자마자 병원에 계신 어머니를 떠올렸다. 아이템의 효과가 타인에게도 적용된다는 사실은 이미 유진호를 통해 몇 번 확인을 끝냈다. 정말 '생명의 신수'를 만들 수 있다면 어머니를 구할 수 있다는 말. 두루마리를 쥐고 있는 손끝이 흥분으로 가볍게 떨렸다. 재료도 간단한 편이었다. '세계수의 파편.' 50 층에서 볼칸을 죽이고 얻었다. '메아리 숲의 샘물.' 이건 75 층의 네크로맨서 메투스를 잡고 획득했다. 그리고 마지막 하나. '...정화된 악마왕의 피.' 아직 나오지 않은 템이다. 하지만 앞선 두 개의 재료템들이 보스들에게서 나왔음을 생각하면 '악마왕의 혈액' 또한 어디서 구할지 쉽게 짐작해볼 수 있었다. 위쪽. '아마도 꼭대기에 있을 악마성의 최종 보스를 말하는 거겠지.' 즉 악마성 던전을 클리어해 나가면 '생명의 신수'를 제작할 수 있는 재료가 순서대로 하나씩 모인다. 그때. "아." 저도 모르게 입 밖으로 흘러나간 침음성. 그만큼 진우는 놀랐다. 어쩌면... 축복받은 랜덤 박스에서 말하던, 내가 원하는 아이템이란 이 생명의 신수가 아니었을까? '어머니...' 건강해진 어머니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우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그때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도안: 생명의 신수'를 통해 제작 스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제작 스킬을 습득하시겠습니까?] 기계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생명의 신수를 제작하기 위해선 악마성 던전 공략에 성공해야 했다. 그러려면 한시라도 빨리 공략 장비를 갖추고서 다시 돌아와야 한다. 감상에 젖어 있을 시간은 없었다. "...배운다." ['아이템: 생명의 신수' 제작 스킬을 습득하였습니다.] '이게 꿈은 아니겠지?' 하지만 기억이 잘못되지 않았다고 말해 주고 있는 것처럼 스킬창 맨 끝에는 [제작 스킬] 칸이 생겨나 있었다. [제작 스킬] 소모품: 생명의 신수 (2/3) 뒤에 있는 숫자는 아마도 세 개의 재료 아이템 중 두 개, '세계수의 파편'과 '메아리 숲의 샘물'이 있다는 뜻이겠지. '참.' 진우는 창고를 열어 샘물 옆에 있는 아이템 하나를 꺼냈다. 작은 동물의 머리뼈들을 엮어서 만든 것 같은 목걸이였다. [아이템: 악마 군주의 목걸이] 입수 난이도: S 종류: 장신구 민첩 +20, 지능 +20 악마 군주의 귀고리, 악마 군주의 반지와 함께 착용하면 세트 효과가 개방됩니다. 세트 효과 1. (개방 안 됨) 세트 효과 2. (개방 안 됨) 망령의 지도자가 메투스에게서 얻은 아이템은 '메아리 숲의 샘물' 하나만이 아니었다. 이 악취미가 느껴지는 혐오스런 디자인의 목걸이도 같이 나왔다. '어째 목걸이들은 하나같이...' 현재 착용 중인 개목걸이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리던 진우가 '악마 군주의 목걸이'를 목에 가져다 댔다. 띠링. ['파수꾼의 목걸이'를 '악마 군주의 목걸이'로 교체하시겠습니까?] 파수꾼이나 악마 군주나 옵션은 비슷하다. 스탯 두 개를 +20 씩. 하지만 악마 군주에는 세트 옵션이 있었다. '교체.' 스르륵. ['아이템: 악마 군주의 목걸이'를 착용하였습니다.] 해골 목걸이가 사라지고 대신 그 자리에 개목걸이가 나타났다. 개목걸이를 창고에 쑤셔 넣은 진우가 악마 군주 장신구 시리즈의 옵션을 확인했다. [아이템: 악마 군주의 목걸이] 세트 효과 1. 모든 스탯 +5 세트 효과 2. (개방 안 됨) '스탯이 전부 5 씩 올라갔다.' 세트 효과 하나만 개방됐을 뿐인데도 무려 5 레벨을 올린 효과가 났다. 거기다 아직 시리즈 전부를 모았을 때의 효과가 남아 있었다. '악마 군주의 반지...' 보통 세트 옵션은 부분을 모았을 때보다 전부를 모았을 때가 더 크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엄청난 성능이었다. 하지만 S 급 장신구들은 악마성에 들어가 얻은 성과 중 일부에 불과했다. 진짜 소득은 껑충 뛰어 버린 레벨. 진우는 어느덧 77 까지 올라 있는 자신의 레벨을 보면서 뿌듯한 미소를 지었다. '일주일 만에 16 레벨을 올렸다.' C 급 던전에서는 꿈도 꾸지 못할 속도의 레벨업이었다. 7 일 동안 오지(?)에서 고생한 대가를 톡톡히 챙겨 나온 것이다. 아직 볼일이 남아 있긴 했지만 이번 악마성 던전 공략은 어떻게 봐도 성공적이었다. '단지...' 단 하나,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 있을 뿐. 진우는 저주받은 랜덤 박스에서 나온 아이템을 형광등 불빛에 비쳐 보았다. '이건 대체 뭐지?' 빛을 전부 흡수해 버리는 것같이 검은 열쇠. 어떤 정보도 뜨지 않았다. '정보가 아예 안 뜨는 아이템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데...' 인던 열쇠 아이템 종류야 그냥 랜덤 박스에서도 가끔 튀어나올 정도로 흔하지만 이런 녀석은 처음이었다. '어디에 쓰는 걸까?' 저주받은 랜덤 박스에서 나온 아이템이어서 그런지 불길한 기운도 살짝 맴도는 듯했다. 그래도 힘들게 얻은 건데 버릴 수야 없는 노릇이고. '언젠가 필요한 때가 생기겠지.' 저주받은 랜덤 박스는 필요한 아이템을 제공해 준다고 했으니까. 열쇠까지 창고로 보낸 진우가 몸을 일으켰다. 악마성을 완벽히 공략하기 위해서 구해야 할 아티팩트들이 있었다. '팔 것도 좀 있고.' 그런데 문제는 E 급 헌터가 상위급 아티팩트들을 사고팔기가 현실적으로 힘들다는 거다. 상급 헌터들도 구하기 힘든 귀한 물건들을 하급 헌터. 그것도 가장 밑바닥의 헌터가 가져온다면 누군들 의심을 안 할까? 사는 것도 마찬가지. E 급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이상 돈의 출처를 밝히기가 곤란해진다. '고가의 아티팩트를 어디에다 쓸 거냐는 질문에도 답하기가 힘들겠군.' 여러모로 난처한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이제..." E 급 흉내는 그만두자. 등급 재심사. 이제 진짜 실력에 맞는 등급을 받아야 할 때가 왔다. 진우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 정도까지 레벨을 끌어올렸으면 타의에 휘둘리지는 않겠지.' 애초에 목적은 그것. 더 큰 힘에 좌지우지되는 상황을 피하려고 다소 불편함을 무릅쓰고 여태 E 급으로 지내 왔다. 그런데 지금은? 백호 길드의 마스터 백윤호를 앞에 두고도 흔들리지 않았다. 아니, 백윤호가 아니라 다른 누가 오더라도 당당할 자신이 있었다. 더 이상 실력을 숨겨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두근, 두근, 두근. 지긋지긋하게 뒤를 따라다녔던 E 급 꼬리표를 뗄 생각에 심장 박동이 조금씩 커져가기 시작했다. '그 전에.' 먼저 확인할 게 하나 있었다. 진우는 헌터폰의 전원을 넣었다. 일주일 만에 켜 본 거라 연락이 여기저기서 많이도 와 있었다. 대부분이 모르는 번호. 당사자들에게는 안타깝지만 하나하나 확인하고 있을 만큼 한가하지가 않았다. '급하면 알아서 다시 연락하겠지.' 그런 쿨한 마인드로 통화 목록을 쭉쭉 내리던 진우는 그 속에서 원하던 번호를 찾아내 통화를 눌렀다. [따라라~ ♩♪] 경쾌한 노랫소리가 채 두 마디도 나오기 전에 상대가 칼같이 전화를 받았다. -형님! 던전에 너무 오래 있었나? 이 녀석 목소리가 반가울 때도 있네. 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뗐다. "아버지와는 이야기 잘됐냐?" -네! 잘됐습니다, 형님! '오호?' 듣던 중 반가운 소리였다. 유진호와 아버지의 거래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등급 재심사를 받을 순 없으니 전화를 걸었던 거다. 그런데 그쪽 문제가 끝났다면 정말 거리낄 것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들떠 있을 때부터 짐작하긴 했지만 그래도 본인에게 직접 확인을 받으니 진우도 기분이 좋아졌다. -형님! 안 그래도 제가 그 일 때문에 형님을 찾아 뵙. 뚝. '뭐지?' 전화가 이상하게 끊긴다 했더니 배터리가 다 닳아 있었다. '하긴... 악마성에 들어가기 전부터 배터리가 간당간당하긴 했었지.' 그나마 용건을 모두 확인한 것이 다행이었다. 진우는 옷을 챙겼다. 헌터 협회 본부는 여기서 멀지 않다. 금방 재심사 과정을 끝낼 수 있었다. "아차차." 문을 나서려던 진우가 급히 안으로 되돌아왔다. 동생 때문이었다. 일주일 만에 돌아온 오빠가 또 말없이 집을 나가면 걱정을 할지도 모르니까 동생을 위해 식탁 위에 간단한 메모를 남겼다. -오빠 왔다 간다. 진우는 만족스런 미소를 짓고서 돌아섰다. *** 각성자 등급 심사 접수처는 진짜 오랜만이었다. '그게 벌써 4 년 전인가?' 아니면 5 년 쯤? 진우는 감회에 젖은 얼굴로 접수처를 담당하고 있는 직원 앞에 섰다. 직원은 얼굴도 들지 않고서 말했다. "신분증하고 연락처 적어서 주세요." 대략적인 절차를 기억하고 있었던 진우는 미리 준비해놨던 신분증과 연락처를 능숙하게 내밀었다. '응?' 직원이 진우의 신분증을 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거 헌터 자격증이신데요?" "예." 직원이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등급 판정에 불만이 있으시면 저희 부서가 아니라." "아니요. 재심사를 받고 싶습니다." "예에?" 진우의 얼굴과 헌터증의 사진을 번갈아보던 직원이 손가락을 들어올렸다. "자, 잠시만요." 직원은 뒷자리에 앉아 있는, 신경질적인 인상의 중년 남성에게 달려갔다. "대리님. 웬 헌터 분이 재심사를 받고 싶다고 찾아오셨는데요?" "재심사? 지금 등급이 어디길래?" "E 급입니다." 대리는 고개를 슥 내밀고 접수처에서 기다리고 있는 진우의 얼굴을 보더니 다시 자세를 바로 했다. "가끔 있어. 자기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고 망상에 빠져 있다가 혹시 하면서 찾아오는 헌터들." "그럼 저 남자도?" 대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각성은 무슨... 남들은 헌터하면서 돈도 많이 벌고, 이름도 알리는데 자기는 그게 아니니까 현실도피를 하는 거지." "아하." "저런 사람 오래 상대하면 피곤해지니까 재심사 비용은 본인한테 청구된다는 거 알려 주고 대충 측정실로 보내." "옙." 직원은 복통이 말끔히 사라진 것 같은 얼굴을 하고서 제자리로 돌아갔다. 대리는 직원과 진우를 바라보면서 혀를 끌끌 차더니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다. 그런데. 대리의 손가락이 멈췄다. 아까 헌터중에 적힌 이름... 어디선가 들은 적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였더라?' 대리는 남자가 측정실 건물로 사라지고 나서 직원에게 슬며시 다가가 물었다. "방금 그 E 급 헌터, 이름이 뭐라고?" "성진우라고 하던데요. 혹시 아는 사람이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자꾸만 어디서 본 것 같은 이름이란 말이지. 기억을 떠올리려고 애쓰던 대리가 문득 뇌리를 스친 생각에 눈을 크게 떴다. '아!' 그 양반이 부탁했었지! 혹시 성진우라는 헌터가 이리로 오게 되면 연락 좀 해달라고. 왜 그게 기억이 안 났을까? 대리는 한적한 곳으로 자리를 옮긴 뒤 부랴부랴 폰을 들었다. 뚜르르, 뚜르르. -예, 백윤홉니다. "아, 백 사장님. 다름이 아니고 저번에 말씀하셨던 헌터 말입니다. 그 성진우라는 헌터요. 진짜 왔습니다. 아니, 어떻게 그 사람이 여기 올지 어떻게 아셨어요?" -성진우 씨가 거기 왔다고요? "네. 방금 와서 재심사 신청했습니다." -... 갑자기 대화가 끊기며 정적이 감돌았다. 하지만 얼마 가지 않아 수화기 너머에서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잠시만이라도 재측정 시간을 연기해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제가 당장 그리로 가겠습니다. 대리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착각인가? 천하의 백호 길드 마스터가 초조한 듯한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 '별 일도 다 있지.' 그러나 그것과는 별개로 이미 재심사 과정은 자신의 손을 떠나 있었다. 대리는 옆머리를 긁적거리며 대답했다. "그 사람 벌써 측정실 건물로 갔는데요?" 76 화 '잠깐만,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정기수는 백윤호와의 통화를 끝내고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E 급 헌터가 재심사를 받겠다고 나선 것만 해도 신기한 일인데, 백호 길드의 대표가 그 헌터의 재심사 결과를 바로 알려 달란다. '진짜 뭐가 있긴 있는 건가?' 다른 사람도 아닌 백윤호가 심각하게 이야기를 하니 정말로 뭔가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러나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에이, 설마.' 각성 후 각성은 그리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몇 달 전인가? 재각성 의심자가 나왔다고 협회 전체가 발칵 뒤집힌 일이 있었다. 물론 그것도 해프닝으로 끝났다. 그만큼 실제 사례는 손에 꼽히고, 오해는 빈번한 게 재각성이었다. '자기가 재각성자가 됐다고 착각해서 왔다가 재심사 비용만 물고 가는 애들이 한둘도 아니고...' 백호 길드에서 뭘 단단히 착각한 모양이겠지. 그래도 백호 길드와의 관계를 생각해서 백윤호 사장의 부탁을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나 어디 좀 갔다 올게." "예? 어디 가시게요, 대리님?" "B 동에 볼일이 있었던 게 이제 생각나서 말이야." B 동은 협회 직원들 사이에서 마력 측정실이 있는 건물을 가리키는 일종의 은어였다. "네, 알겠습니다."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고." "네." 정기수는 속으로 '재각성은 무슨'하고 단정 지으면서도, 지금쯤 출발했을 백윤호의 얼굴을 떠올리며 B 동으로 향했다. *** 진우는 대기자 좌석의 끝쪽에 엉덩이를 붙였다. 현재 대기자는 세 명.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들이었다. 진우는 그들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심사 결과에 따라 앞으로의 인생이 결정되는 거니까.' 처음 협회를 찾았을 때의 진우도 이들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내가 A 급이 되면, 아니 B 급만 돼도, 이러다 혹시 S 급이 뜨는 거 아니야? 행복한 단꿈에 젖어 있다 E 급으로 판정 났을 때의 충격이란. 문득 4 년 전을 떠올리며 진우는 피식 웃었다. '뭘 보고 웃는 거지?' '것보다 지금 웃음이 나오나?' 옆의 대기자들이 이상하다는 눈빛을 보내왔지만 진우는 여전히 담담했다. '타고난 강심장인가?' '긴장도 안 되나 보네.' 하도 의연한 반응에 머쓱해진 대기자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각자의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때와 별로 달라진 게 없구나.' 이것도 진우의 기억에 있었다. 괜히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신경 쓰이고, 나 말고 다른 사람의 등급은 어떻게 나올지 궁금했었다. 미소 짓던 진우가 찬찬히 건물 내부를 둘러보았다. 사람들이 마찬가지로 건물도 별반 달라진 것이 없었다. 헌터 협회 자체가 생긴 지 10 년이 안 되다 보니 건물도 새것처럼 깔끔했다. 내부는 거의 기억과 같았다. 다만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저 사람들.' 진우가 맞은편에 몰려 있는 깔끔한 복장의 남녀들을 지그시 바라보고 있자, 옆자리의 남자가 말을 건네 왔다. "다 길드에서 나온 사람들이래요." "길드에서요?" "네. 작은 길드는 아무래도 찾아오는 헌터들이 적다 보니까 저렇게 죽치고 앉아 있다가 등급 판정받고 나오는 각성자들을 꼬드겨 가는 거죠." 어쩐지 저들 사이에서 냉랭한 기운이 감돌더라니. '이쪽을 향한 눈빛도 매섭고.'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혹시 몰라서 말씀드리는데, 저런 길드는 안 가는게 좋아요." "왜죠?" "들어 보니까 작은 길드들은 위험한 레이드도 많이 하고 헌터들 사망률도 높다더라고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작은 길드들은 포지션이 애매할 수밖에 없다. 개인 공격대들처럼 하급 던전에 들어가기엔 성이 안 찰 것이고, 그렇다고 상급 던전을 공략하기엔 헌터들의 기량이 부족한 편이다. 그래서 사고가 자주 일어난다. '그러니 헌터들을 충원하는 게 중요한 문제일 테고.' 결국 이렇게 협회 건물까지 따라 들어와 신참들을 노려야 하는 수준까지 이르게 된 듯했다. "아." 훤히 벗겨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수건으로 톡톡 찍어 내던 남자가 진우에게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서로 인사나 할까요? 저는 윤정훈입니다." "성진우입니다." 짤막하게 인사가 끝나고 두 사람은 조용히 각자의 차례를 기다렸다. "다음 분." 측정 장소는 탁 트여 있어서 마력 측정이 끝난 사람의 표정이나 직원들의 반응을 읽을 수 있었다. 방금 측정을 끝낸 각성자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D 나 E 인가 보네.' 길드에서 나온 사람들도 진우와 같은 생각을 했는지, 각성자가 앞을 지나가는데도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솔직한 반응이라고 할까? 어쩌면 따로 결과를 알 방법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음 분 오세요." 또 한 명의 결과가 나왔다. 이번에도 역시 좋은 소식은 아닌 듯했다. 밖으로 향하는 각성자의 걸음이 무거웠다. 당연한 일이었다. '상급 헌터가 그리 자주 나왔다면 그렇게 높은 연봉이 보장되지 않았겠지.' 일반인들에겐 C 급만 해도 대박이었다. 개인 공대에 들어가도 큰돈을 쥘 수 있고, 운 좋으면 대형 길드까지 넘볼 수 있었다. 백호 길드의 신입 중에서도 C 급이 넷이나 있었으니까. 대형 길드에 들어가는 데 성공하면 어지간한 의사나 변호사 부럽지 않은 수입이 보장되었다. 옆의 아저씨가 다시금 말을 붙여왔다. "대형 길드에 들어가면 계약금으로 목돈을 준다죠?" 손수건을 쥔 아저씨의 손끝이 가볍게 떨리고 있었다. "사실 제가 빚이 좀 있거든요. 그거 때문에 지금 딸이랑도 떨어져서 살고 있고. 그래서 더 떨리네요." 중얼거리던 아저씨가 화들짝 놀라더니 진우에게 급히 고개를 숙였다. "아이고, 처음 보는 사람을 앞에 두고 무슨 말을... 참 주책이죠? 제가 긴장하면 괜스레 말이 많아져서." "괜찮습니다." 진우도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아저씨는 긴장된다는 게 빈말이 아니었는지 연신 심호흡을 했다. 또 한 명의 각성자가 나가고. "다음 분 오시면 됩니다." 아저씨의 차례가 됐다. 그런데 식은땀을 흘리던 아저씨가 진우의 소매를 조심스럽게 흔들었다. 어디 아픈 걸까? "아프신 데라도 있으세요?" 진우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아저씨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런 건 아닌데... 먼저 하실래요? 제가 지금 너무 긴장돼서." 아저씨의 눈빛이 간절했다. 차례를 양보해 준다는데 사양할 이유가 있나? 진우는 흔쾌히 승낙했다. 이 몇 분간의 결과가 남은 평생을 좌우할 수 있다면 누군들 떨리지 않을까. 아저씨 대신 일어난 진우가 직원 앞으로 갔다. 직원은 사무적인 말투로 물었다.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성진우입니다." "성진우 씨... 네, 저기 검은 판 위에 손을 얹고 기다리시면 됩니다." 진우는 직원의 지시대로 측정기로 걸어가 검은 판 위에 손을 얹었다. '어라? E 급 각성자 판정을 받았던 사람이네?' 서류를 들여다보던 직원은 신기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어째 재심사를 받겠다고 찾아오는 헌터들은 죄다 E 급인지 원. 한심한 눈빛을 보내던 직원이 뒤늦게 측정기를 돌렸다. 꾸욱. 우우웅잠시 소음을 내며 돌아가던 마력 측정기가 곧 작동을 멈추었다. 결과는 모니터에 나타났다. '어? 이게 왜 이러지?' 직원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손을 떼는 진우에게 말했다. "잠깐만요." "네?" "한 번 더 해 볼게요." "네." 진우는 다시 손을 얹었다. 꾸욱. '어?' 이게 이런 적이 없는데? 직원의 표정이 점점 굳어 갔다. 왜 하필 이럴 때 측정기가 말썽인지. 직원은 진우에게 한 번 더 양해를 구했다. "죄송합니다. 한 번만 더 다시요." "..." 거듭된 재측정 요구에 진우는 아예 손을 떼지 않고 기다리기로 했다. 꾸욱. 꾸욱. '이게 진짜 왜 이래?' 직원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갔다. 술렁술렁. 이쯤 되자 다른 사람들도 하나둘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기 시작했다. '뭐지? 무슨 일 있는 건가?' '벌써 몇 번째 측정기를 돌리는 거지?' '뭔가 문제가 생긴 거 같은데?' 시선이 쏟아지자 직원의 식은땀이 더 흥건해졌다. 꾸욱. '아, 진짜, 나보고 어쩌라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그때. "뭐야? 창식이는 어디 가고 너 혼자 이러고 있어?" 직원이 뒤돌아보았다. 거기엔 접수과의 정기수 대리가 서 있었다. "정 대리님!" 생각지도 못한 지원군의 등장에 직원의 얼굴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선배는 잠시 화장실 가셨습니다." "이 자식은 지금 때가 어느 땐데 근무 시간에 자리를 비우고..." 정기수는 말을 맺을 수가 없었다. '...나도 똑같네.' 흠흠. 어쨌든 시기적절하게 잘 온 듯했다. 지금 상급자가 자리를 비운 사이 신입 직원이 진땀을 흘리고 있지 않은가? 이럴 때 베테랑이 나서야지. "뭐야? 무슨 일이야?" 정기수가 관심을 보였다. "측정기가 좀 이상합니다." "측정기가?" "보십시오. 자꾸 오류가 뜹니다." 비켜서는 직원 대신 정기수가 측정 결과를 표시하는 모니터 앞에 섰다. 정기수의 얼굴이 경직됐다. "...너 여기서 일한 지 얼마나 됐냐?" "반년쯤 됐습니다. 제가 혹시 뭘 잘못 누른 겁니까?" "아냐. 그냥 창식이한테 전화해서 빨리 오라고 해." "네?" "지금 화장실이 중요한 게 아니니까 빨리 불러오라고!" 정기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직원이 움찔 놀라며 물었다. "왜, 왜 그러세요, 대리님?" "이거 오류가 아니고 측정 불가잖아! 측정 불가가 뭔 뜻인지 몰라?" "예에? 그거 오류 메시지 아닙니까?" 신입들이란 어떻게 다 하나같이 이리 얼빵한 걸까? 정기수의 시선이 신입을 떠나 측정 대상을 바라보았다. '어떻게 이런 일이...' 성진우. 백호 길드 마스터가 결과를 알려 달라고 했던 남자. 정기수는 성진우에게 시선을 떼지 않고서 신입에게 말했다. "우리 측정기로는 대상의 마력을 잴 수가 없다는 뜻이다, 멍청아." "예? 그, 그거 설마?" 얘가 일한 지 반년이라고 했나? 반년은 무슨. 근 2 년간은 나타난 적이 없었으니 신입 녀석이 모르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정기수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래... S 급이다." 스페셜. 널리 쓰이고 있어서 마치 정식 등급인 듯 보이지만 실은 측정을 할 수 없는 등급을 뜻하는 말이었다. "그러니까 빨리 창식이 불러와." "바로 전화하겠습니다." 연락을 받고 튀어온 김창식이 숨을 헐떡이며 엉거주춤 바지를 올렸다. "헉, 헉, 어디 봐." 모니터를 확인한 김창식의 얼굴이 하얗게 변해 갔다. 곧이어 진우에게로 향한 김창식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이 사람이 한국의 열 번째...' 김창식은 진우에게 다가갔다. 그제야 진우의 손이 측정기 위에서 떨어졌다. "저... 지금 기기로는 성진우 씨." 곧 김창식은 진우가 자격증을 보유한 헌터라는 사실을 떠올리고 호칭을 바꿔 불렀다. "아니, 성진우 헌터님의 마력을 측정하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정밀 측정기를 사용하려면 상부의 허가를 받아야 하니 3 일 뒤에 다시 협회를 방문해 주시겠습니까?" 김창식은 절차대로 고지를 했다. 이 말을 해본지가 대체 얼마만인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지경이었다. 헌터로서 경력이 있는 진우는 그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좋아.' 측정 보류 판정. 다시 말해 3 일 뒤에 있을 정밀 측정에서도 측정 불가가 뜨면 S 급이 된다는 이야기였다. '잘했다.' 지금 A 급 판정이 났으면 능력치를 더 올려서 협회를 다시 찾아와야 했을 거다. 하지만 각성 후 각성도 희귀한 마당에 거기서 각성을 한 번 더 했다고 말한다면? 재각성까지는 운이지만 3 차 각성부터는 의심스럽다는 시선을 받게 될 지도 몰랐다. 귀찮은 일에 연루되어 시간을 낭비하는 건 사양하고 싶었다. '후-' 다행스런 결과에 진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돌아섰는데. "어?" 협회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을 향하고 있었다. *** "아이고, 바쁘실 텐데 뭘 또 찾아오고 그러십니까." "에이, 그래도 헌터협회 박 부장님을 뵙는데 전화로 되겠습니까? 직접 얼굴을 맞대고 말씀드려야지." 최종인이 눈웃음을 보내며 살갑게 이야기하자, 불혹을 넘긴 박 부장이 허허하며 웃음 지었다. 눈앞의 사내가 누군가? 한국 최고의 길드인 '헌터스'를 이끄는 남자다. 최종병기, 최종인. 그가 한마디만 하면 국내 최강의 정예 공격대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 그런 남자가 이리 비위를 맞춰 주는데 어째 기분이 나쁠 수 있을까? 최종인이 담배 한 개비를 들고서 물었다. "담배 한 대 괜찮습니까?" "아, 물론이죠." "부장님도?" "아뇨, 전 됐습니다." 불을 붙인 담배를 입에 문 최종인은 젊은 나이에 모든 것을 다 가진 남자다운 여유가 흘러넘쳤다. '이런 게 카리스마인가?' 홀린 듯 자신을 바라보는 부장에게, 문득 최종인이 물었다. "그런데 오늘 B 동 쪽이 좀 시끄럽네요?" "B 동이요?" 부장이 B 동 쪽을 바라보았다. 사실 부장 귀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하지만 최종인은 S 급 헌터였다. 오감이 일반인들과는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이었다. 최종인이 시끄럽다고 했다면 아마 정말로 무슨 일이 일어났을 터. 귀한 손님이 계신데 이게 무슨 망신이란 말인가. 부장은 눈살을 찌푸리고는 말했다. "제가 한번 보고 오겠습니다." "아니요." 최종인은 담배를 바닥에 버리고 발로 비벼 껐다. "무슨 일인지 저도 궁금하네요." 고개를 든 최종인의 눈에 이채가 흘렀다. 동시에 그의 입가에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같이 가시죠." 77 화 B 동 전체가 일순간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방금 분명히 측정 불가라고...' '그럼 저 사람이 S 급?' '말로만 들었지 측정 불가 등급을 실제로 보는 건...' 꼴깍. 길드에서 나온 영입담당 직원들은 자신들 방향으로 돌아선 진우를 보며 마른침을 삼켰다. 하지만 아무도 말을 걸려고 하지 않았다. "..." "..." C 급만 돼도 어떻게든 길드로 모셔가기 위해 신경전이 벌어지고, 한마디 말이라도 붙이려고 길게 줄을 선다. B 급은? 길드 간부 위치 보장. 길드 지분 분배 등등 저마다 파격적인 조건을 내세우며 아주 죽기 살기로 달려든다. 옆에서 보면 전쟁이 따로 없다. 상급 헌터인 B 급이 가진 가치와 영입에 성공했을 때 받을 특혜를 생각하면 이상할 것도 없는 일이었다. 간혹 용의 꼬리보다 뱀의 머리가 되고 싶은 B 급들이 설득에 넘어오는 경우가 있으니까. 그러나 A 급부터는 이야기가 다르다. A 급은 중소길드가 아니라 대형길드로 가도 특별한 대우를 받는다. 정예 공격대 멤버는 당연하고, 정예들의 주 수입원이 상급 던전인 만큼 보상도 어마어마하다. 어디 그뿐인가? 정 마음에 맞는 길드가 없다면 본인이 직접 마스터가 되는 방법도 있다. 중소길드쯤이야 자신이 만들면 되는데 굳이 남의 길드에 들어가려 할까? A 급은 그런 레벨인 것이다. 그런데. 방금 막 마력 측정을 마친 저 남자는 S 급이라고 한다. S 급, S 급 말이 쉽지 대한민국에는 딱 아홉 명만 존재하는 각성자들이었다. '저 남자까지 하면 이제 10 명인가?' '10 번째 S 급 헌터...' 중소길드의 영입 담당자들이 어떻게 비벼 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꿀꺽. 다들 소리 없이 계속해서 침만 삼켜 댈 뿐. 그야말로 그림의 떡이었다. 하지만 그때. '잠깐...' '이거 혹시 기회 아냐?' 몇몇 소수의 약삭빠른 스카우터들의 머릿속에 기막힌 생각 하나가 번뜩 스치고 지나갔다. S 급 각성자를 대형길드와 이어 주는 건 어떨까? S 급은 계약금이 최소 수백억을 능가한다. 그 돈의 1 퍼센트만 인센티브로 먹어도 지금 직장을 때려치우는 데 아무런 여한이 없을 터. 그러다 운 좋게 저 남자의 눈에 들어 개인 매니저라도 된다면 그때는 정말로 인생이 피는 거다. 어떤 S 급 헌터의 개인 매니저는 생일 선물로 포르쉐를 선물 받았다고 하던가? 스카우터라고는 하지만 D 급이 대부분인 그들의 입장에서는 군침이 도는 상상이었다. '...해 볼까?' '나 정도면 어디서 못 먹힐 말빨은 아닌데...' '그냥 눈 딱 감고 덤벼 봐?' 짧은 시간 스카우터들의 머릿속에 많은 생각이 오고 갔다. 실패의 비웃음은 잠시지만, 성공의 달콤함은 평생이다. 스카우터들이 서로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앞으로 나서려 하는 그때. 누구 하나가 입을 열었다. "어? 저 사람...?" 다들 긴장하고 있어서일까?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모두 동시에 처음 입을 연 사람이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스카우터들의 눈이 커졌다. "헉!" B 동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세련된 정장의 남자. 여기 있는 이들 중 그 남자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최... 최종인?" "헌터스의 대표가 왜 여기에?" 아니나 다를까. 최종인은 시선을 의식한 듯 가볍게 옷매무새를 한 번 정리하고는 곧장 진우에게로 걸어갔다. '연락을 받고 찾아왔다기에는 너무 이른데?' '설마 저 남자, 이미 헌터스에 들어가기로 예정되어 있던 건가?' '헌터스와 연이 있었던 거야? 최고의 길드는 뭐가 달라도 다르네.' 그러면 그렇지. 스카우터들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말을 쉽게 받아들였다. 말을 걸지 않은 것이 다행이었다. 추파를 던지다가 최종인과 마주치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우스꽝스러웠을까? '이야...' '최종인이 나타나니 그림이 되네.' '멋지다.' '헌터스의 대표라니... S 급 대우는 역시 다르구나.' 다들 각자의 이유로 조금씩은 아쉬워하면서도, 최고의 길드 대표와 최고 등급을 받은 각성자의 만남을 훈훈한 시선으로 응시했다. 최종인이 진우 앞에 섰다. '다행이다.' 너무 많은 시선이 몰려 어떻게 해야 하나 잠시 고민하고 있었던 진우는 일시적으로 분산된 시선에 감사하며 최종인을 지나치려 했다. '어? 이게 아닌데?' 최종인이 급히 진우를 불러 세웠다. "잠시 저 좀 보시죠." 진우가 가던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다. '이 남자가 열 번째...' 진우의 얼굴을 들여다보던 최종인의 눈이 빛났다. 부장에게는 같이 알아보자니 뭐니 둘러댔지만 실은 여기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다 알고 있었다. '그렇게 큰 소리로 측정 불가니 기기 오류니 떠들어 대는데 내가 못들을 수가 있나?' 덕분에 이렇게 큰 기회를 얻다니. 무려 S 급이다, S 급? 이 남자를 데려오면 헌터스는 S 급을 세 명이나 보유한, 한국은 볼 것도 없고 전 세계 최고의 길드들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는 수준이 된다. 어찌 군침이 돌지 않을까? '측정기를 빌릴 필요도 없겠군.' 눈만 마주쳤는데 상대의 강함을 느낄 수 있었다. 틀림없는 최상급 헌터. 사흘 뒤를 기다릴 여유는 없었다. 흠흠. 목소리를 가다듬은 최종인이 특유의 상쾌한 미소와 함께 말을 건넸다. "저는 헌터스의 대표 최종인이라고 합니다." 진우도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TV 를 틀면 뉴스 같은 데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얼굴이니. 이렇게 유명한 사람이 왜 협회까지 와서 말을 거는지 궁금하긴 했지만 일일이 묻고 있을 만큼 여유가 없었다. 힐끔. 진우의 시선이 벽면에 걸린 시계를 향했다. '지금이 5 시 50 분이니까.' 가는 시간까지 생각하면 지금도 빠듯했다. 소개는 됐고 용건이나 빨리 말하라는 얼굴을 하고 있었더니 최종인이 약간은 당황해하며 말을 이었다. "아, 다름이 아니고... 방금 각성자 판정을 받으신 걸로 아는데." "네." "혹시 생각해 둔 길드가 있으십니까?" "아니요." 대답을 듣고 난 최종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됐어, 된 거야.' 세계 3 대 길드 중 하나 '헌터스'. 이 얼마나 달콤한 단어인가? '넌 내 거다.' 최종인은 부푼 가슴을 안고 역사에 기록될지도 모르는 한마디를 꺼냈다. "그 문제로 대화를 나누고 싶은데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진우는 짤막하게 사양하고는 곧바로 협회를 나갔다. "..." 너무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최종인은 미처 잡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진우를 보냈다. 협회의 직원들이나 스카우터들도 뒤늦게 상황을 파악하고는 경악했다. "설마 최종인 대표가 까인 거야?" "뭐지?" "암만 봐도 무시당한 거 아닌가?" 웅성웅성. 장내가 소란스러워졌다. 최종인은 애써 침착함을 유지하며 옆을 돌아보았다. "박 부장님." "예?" 부장이 어색한 얼굴로 대답했다. "혹시 방금 제가 제 소개를 빼먹었던가요?" "그... 글쎄요. 저도 잘." 물론 부장은 옆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다 들었다. 그런데 지금은 곧이곧대로 이야기할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부장이 입을 다물어 버리자, 무안해진 최종인이 검지로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내가 너무 거저먹으려고 했나...' 그래도 실망할 필요는 없었다. 분명 다른 길드들보다는 훨씬 앞서 있는 상황이니까. 'S 급의 등장을 아는 사람은 나뿐이다.' 재측정은 3 일 후. 아직 공식 발표까지는 시간이 있었다. '어떻게든 다시 한 번 자리를 마련하고 싶은데...' 좋은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고 있던 최종인의 시선에 협회 쪽으로 헐레벌떡 달려오고 있는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 저 남자는?' 낯익은 얼굴. 남자가 유리문을 밀고 들어 왔을 때 최종인이 놀란 듯 입술을 뗐다. "백 사장이 어떻게 여길...?" 백윤호도 최종인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 대표?" 최종인은 빠르게 백윤호의 표정을 읽었다. '뭔가를 들켰다는 얼굴...' 정보원의 연락을 받고 달려온 게 아니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도착 시간이 맞지 않았다. '백호 빌딩에서 헌터 협회까지 거리가 얼만데...' 그래. 백윤호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거다. 여기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방금 그 남자의 존재를 알고 있었나?' 아니, 그랬다면 이렇게 순순히 등급 심사에 내보내지 않았을 텐데? '나였다면 계약서에 도장부터 찍고 나서 등급 심사를 시켰겠지.' 그 순간, 최종인의 머릿속에서 흩어져 있던 퍼즐 조각들이 한꺼번에 맞춰지기 시작했다. '...설마?' 백호 길드. 훈련 도중 일어난 사고, 레드 게이트, 의문의 조력자, 그리고 새로이 등장한 S 급 각성자까지. -백호 쪽에서 밖으로 알리고 싶지 않은 누군가의 도움을 받은 거구만. -아직 각성자 판정을 받지 않은 신인? 아니면 신분을 드러낼 수 없는 범죄자? 모든 것이 맞아떨어졌다. ...찾았다. '그 남자였구나.' 얼마나 급하게 달려왔는지 숨을 헐떡이는 백윤호. 최종인은 그런 백윤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당신은 놓쳤군.' 나는 당신과 다르니까. '기회는 고맙게 받지.' 최종인은 백윤호에 말 한마디 걸지 않고 유유히 옆을 지나쳐갔다. 백윤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진우는 안 보였다. '너무 늦게 왔나?' 백윤호는 멀어지는 최종인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나직이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하필 여기 이 시간에 헌터스의 마스터가 있었을 줄이야. 백윤호가 뒷머리를 긁적거리며 중얼거렸다. "일이 꼬이는구나." *** 서울 일신 병원의 환자 면회 가능 시간은 오후 8 시까지였다. "박경혜 환자분 보호자시죠?" "네." "면회 가능합니다. 면회 가능 시간은 아시죠?" "네, 압니다." 진우는 어머니가 계신 병실로 걸음을 옮겼다. 서두른 덕분에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덜컹. 문을 열고 들어선 진우가 잠자는 듯 누워 있는 어머니 옆에 앉았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아무렇지 않게 눈을 뜨신 것 같은데...' 깨어날 수 없는 수면. 게이트가 열리고 나서부터 생겨난 병이었다. '이 병원에만 해도 같은 증상을 보이는 환자가 10 여 명이 넘는다던가?' 진우는 살며시 어머니의 손을 잡았다. "엄마..." 다행히 마정석을 이용한 생명 유지 장치는 수년에 가까운 긴 잠에서도 어머니의 손이 수척해지는 걸 막아 주었다. 그러나 마정석은 비싸다. 한 달 내내 기계를 돌리는 데 드는 마정석 값만 5 백을 넘어간다. 협회의 헌터로 일하며 의료비를 지원받지 않았다면 절대 20 대 청년이 감당할 수 없는 병원이었다. 그렇게 애를 썼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어머니의 손을 잡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그냥 숨이 붙어 있는 것에 만족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어머니를 낫게 해 드릴 수 있다. 생명의 신수. 시스템이 선물해 준 치료제. 믿고 말고는 나중의 일이었다. 지금은 만드는 게 우선이었다. "내가 구해 줄게." 실종된 아버지 대신 약한 몸을 이끌고 가정을 책임지셨던 어머니. 다시 어머니를 보게 될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어머니 곁을 얼마나 지키고 있었을까? 한참 후 진우가 일어섰다. 짧지 않은 면회를 마친 진우는 소리 없이 병실을 걸어 나와 문을 닫았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돌아섰더니, 낯익은 얼굴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역시 그날... 이중 던전의 마수들을 제거한 건 당신이었습니까?" 낮고 굵은 목소리. 매서운 눈매. 감시과 과장 우진철이었다.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이유도 없고, 대답할 마음도 없었다. 대신 묻고 싶은 걸 물었다. "제가 여기 있는 건 어떻게 아셨습니까?" "헌터님이 가실 만한 곳을 몇 군데 예상해 보았습니다. 병원에 연락해 봤더니 여기 계시다고 알려주더군요." 어머니의 병원비를 내주고 있던 곳이 협회다. '지금은 아니지만.' 어쩌면 협회에서 가장 먼저 확인해 본 곳이 병원일지도 몰랐다. "그날 일을 물어보려고 여기까지 찾아오신 겁니까?" "아닙니다." "그럼 무슨 일로?" "헌터님을 뵙고 싶어 하시는 분이 계십니다. 잠깐 같이 가 주시겠습니까?" 협회의 감시과. 감시과의 주 업무는 요주의 헌터들을 감시하고 단속하며, 법을 어긴 헌터를 처벌하는 데 있다. 헌터의 입장에선 그다지 달갑지만은 않은 존재들. 진우의 시선도 곱지는 않았다. "그건 명령입니까?" "아닙니다." 우진철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리고 직각에 가깝게 허리를 숙이며 정중히 말했다. "부탁을 드리는 겁니다." "..." 마냥 엄하게만 보이던 우진철이란 남자가 이렇게 저자세로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조금 고민해 보던 진우가 누군지 알아나 보자고 판단했다. "절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누구죠?" 그제야 우진철이 고개를 들었다. "헌터협회 고건희 회장님." 우진철의 손바닥이 자신의 뒤쪽 모퉁이 너머를 가리켰다. "여기 협회장님이 와 계십니다." 78 화 헌터 협회 협회장실. 고건희를 진찰하는 주치의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주치의가 가슴에 대고 있던 청진기를 뗐다. "협회장님." "아냐. 말 안 해도 돼. 자네 표정만 봐도 알겠군." 고건희는 풀어헤쳤던 와이셔츠의 단추를 하나씩 잠그며 허허 웃었다. 주치의는 입을 떼지 못했다. '고건희 협회장... 이 정도면 걸어 다니는 것 자체가 기적이다.' 그럼에도 왕성한 활동을 조금도 줄이지 않는다. 오죽하면 병원에 들를 시간도 없어서 주치의를 직장으로 불러들일까? "나는 말이야." 고건희 협회장이 정장 웃옷에 팔을 넣었다. "힐러들이 생기고 치유 마법이란 게 나왔을 때 다시 젊음을 되찾을 수 있겠구나, 이제 이 지긋지긋한 늙은 몸뚱이도 안녕이구나, 이렇게 생각했었지." 고건희는 또 허허 웃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더군." "차도가 없었습니까?" "노환이라는 건 상급 헌터들의 치유 마법으로도 어쩔 수 없다지 뭐야." 치유계열 헌터들의 마법으로 모든 병을 없앨 수 있었다면, 아마 전국의 병원이 모두 문을 닫고 의사들은 전부 다 깡통을 찼을 거다. 하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재생을 돕는 것. 치유 마법의 한계는 외상을 사라지게 만드는 것까지였다. 잘려 나간 팔을 기적처럼 자라게 만들 수는 있어도, 감기에 걸린 아이의 열을 내리게 만들지는 못했다. '덕분에 실업자 신세는 면했지만...' 주치의는 벌써부터 나갈 준비를 하는 고건희 협회장을 바라보았다. '협회장님 같은 분은 마법의 힘을 빌려서라도 완쾌시켜드려야 할 텐데.' 그러나 치료 마법도, 현대 의학도 지금 단계에선 별반 소용이 없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조언뿐. "절대 안정을 취하셔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쉬셔야 해요." "나도 그러고 싶지." 하지만 그러면 헌터 협회가 어떻게 될 것 같나? 고건희는 웃음으로 뒷말을 대신했다. '이 고건희가 없는 협회라.' 대형길드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시시각각 몸집을 불려 나가고 있었다. 그들의 힘은 이미 웬만한 국가의 군사력과 맞먹는다. 그 와중에도 협회가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건, 협회 뒤에 있는 정부가 아니라 협회 위에 있는 고건희 덕분이었다. 협회가 힘을 잃는 순간 헌터들은 고삐 풀린 망아지가 된다. '아직은... 아직은 안 돼.' 아직 은퇴는 이르다. 지금 협회는 그들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한 목줄이었다. 아무런 대안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자신이 빠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협회가 건재하다는 걸 보여 주려면 내가 있어야 한다.' S 급 위의 S 급. 고건희라는 이름 석 자가 필요했다. 그때까지 어떻게든... "으음!" 고건희가 고통스런 신음을 흘렸다. 가슴을 움켜쥔 손에 말끔했던 와이셔츠가 구겨졌다. "협회장님, 여기..." 주치의는 말없이 진통제와 물을 준비해 왔다. "고맙네." 진통제가 들어가니 겨우 살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때였다. '응?' 전화에서 신호가 울렸다. 주치의가 있는 동안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연락을 말라고 일러 놨거늘. 고건희가 눈살을 찌푸리며 수화기를 들어올렸다. "지금 진찰 중이네." 그러자 수화기 너머에서 남자 비서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협회장님. 너무 급한 소식이라. "또 일본에서 연락이 왔나?" -연락은 왔었지만 그것 때문은 아닙니다. 순간 고건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제주도 개미 놈들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고?' 대체 무슨 일일까? "무슨 일인데 그래?" 고건희의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기 직전, 비서가 아슬아슬하게 대답했다. -심사과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심사과에서?" 심사과가 하는 일이란 게이트나 각성자의 등급을 매기는 게 전부다. 딱히 큰 문제를 일으킬 만한 부서가 아니었다. '아니면 혹시...' 또 게이트 측정 오류라도 냈나? 얼마 전 백호 길드와 빚었던 마찰을 떠올리며 고건희는 미간을 구겼다. 그러나 불쾌함도 잠시. 비서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고건희가 예상하던 '문제'의 범주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었다. -방금 심사과에서... 측정불가 등급의 각성자가 나왔다고 합니다. *** "헌터협회 고건희 회장님?" 방금 제대로 들은 게 맞나? 진우는 귀를 의심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헌터라 불리는 사람이 나 하나를 만나자고 이 시간에 병원까지 쫓아 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진우가 반신반의하고 있을 때 우진철이 뒤쪽을 가리키며 쐐기를 박았다. "여기 협회장님이 와 계십니다." 대답을 기다리는 우진철의 초조한 눈빛. 농담이 오고 갈 분위기는 아니었다. '...정말인 거 같네.' 어째서 고건희 같은 사람이 날 찾는 걸까? 진우는 강한 의문이 들었다.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등급 재심사의 결과 때문인데... '협회로 끌어들이기 위해서?' 하지만 협회는 비영리 단체다. 헌터 하나를 데려오겠다고 협회장이 감시과 직원을 대동해서 움직일 필요가 없는 곳이었다. 심지어 자신은 아직 재측정도 끝나지 않은 상태. 생각하면 할수록 협회장의 의중이 궁금해졌다. "좋습니다." 진우가 수락했다. 우진철은 방금 전의 긴장감이 무색할 정도로 금세 환한 표정을 지었다. "감사합니다!" 목소리에 진심이 묻어나왔다. '저 무뚝뚝해 보이는 아저씨가 이런 표정도 지을 수 있구나.' 진우는 신기해하며 우진철의 뒤를 따라갔다. 모퉁이를 돌아서자 딱딱한 병원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있는 노인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저 사람이...' 진우가 침을 꼴깍 삼켰다. 천외천. 하늘 위의 하늘이라 불리는 S 급의 고건희 헌터. 스윽. 진우를 발견한 고건희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진우 헌터님?" 80 이 넘는 고령에도 불구하고 풍채가 대단한 노인이었다. 은퇴한 레슬러나 씨름선수를 연상시키는 덩치였다. 그러나 고압적인 태도는 전혀 없었다. '의외네?' 풍모로 보나, 위치로 보나 잔뜩 무게를 잡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그보다 그의 옆에 있는 수행원이 더 무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제가 성진우입니다." 진우가 대답했다. 고건희는 환한 얼굴로 반갑게 손을 내밀었다. "반갑습니다. 고건희입니다." 두 사람은 짧은 악수를 나누었다. 고건희는 미리 서로 마주 볼 수 있도록 배치를 바꿔놓은 대기실 의자를 가리켰다. "앉아서 이야기하시죠." "감사합니다." 진우가 먼저 앉고 나서 고건희도 의자에 엉덩이를 붙였다. 문득 진우의 시선에 고건희의 양복 깃에 붙어 있는 금배지가 들어왔다. 현직 국회의원인 동시에 헌터 협회 협회장인 남자. '거기에 S 급 각성자.' 고건희는 만나고 싶다고 해서 아무나 다 만날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정재계의 인사들은 물론이거니와 해외의 거물들까지.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인물들은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더 궁금했다. 왜 고건희 같은 사람이 이리 급하게 자신을 찾아왔는지. 그러고 보니. '최종인 다음은 고건희인가?' 오늘 하루 최고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두 사람을 연이어 만났다. 아직 S 급이라고 확정 난 것도 아닌데 말이다. 마침 고건희가 말을 꺼냈다. "S 급 헌터가 되신 것을 축하합니다." 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직 재측정 결과가 남아 있습니다." 그러자 고건희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재측정은 별 의미가 없는 겁니다." "예?" 의아스런 표정의 진우에게 고건희가 부드러운 미소를 보였다. "정밀 측정기는 측정 결과를 세분화시켜 주는 기계지. 측정 범위 이상을 재기 위한 도구가 아닙니다." "그럼 어째서..." "재측정이라는 절차를 만들었냐는 말씀이시지요?" 그 말이 맞았다. 어차피 결과가 똑같이 나온다면 왜 번거롭게 일을 더 늘리는 걸까? 고건희의 답은 명쾌했다. "유예기간입니다." '유예기간...?' 진우가 묻기도 전에, 고건희가 쑥스러운 듯 말을 이었다. "저희가 성진우 헌터님 같은 분들을 먼저 만나기 위해 벌 수 있는 최소한의 시간이지요." 아진우는 협회장이 하고자 하는 말을 완벽하게 이해했다. "아시다시피 협회에는 규모와 달리 우진철 과장님같이 뛰어난 헌터분들의 수가 많지 않습니다." 대형길드 때문이다. "대형길드들이 있으니까요." 역시.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대형길드에 가면 수입과 명성이 보장되는데 누가 협회에 오려고 하겠습니까?" 협회 헌터들의 수입도 적지 않다. 하지만 그들이 대형길드에서 벌 수 있는 돈에 비한다면 그건 정말로 푼돈에 불과했다. 인기도 마찬가지. "대형길드의 정예 공격대 멤버들의 이름을 줄줄 외우는 사람은 있어도, 우리 우진철 과장님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지요." 정예 멤버라는 말에 진우는 A 급 헌터였던 김철을 떠올렸다. 감각 스탯은 상대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게 해 준다. 진우가 판단하기에는 김철보다는 우진철의 실력이 확실히 한 수 위였다. '같은 A 급이지만 실력은 다르다.' 진우가 우진철을 돌아보았다. 우진철은 협회장의 칭찬과 진우의 시선이 부담스러운지 상기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김철이 문제없이 헌터로 데뷔했다면 우진철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벌고 훨씬 더 유명해졌을 것이다. 그게 협회 소속 헌터와 길드 소속 헌터의 차이점이었다. "그래서 저희는 정말 뛰어난 각성자분들이 협회를 방문했을 때를 대비해 작은 꼼수 하나를 만들어 두었습니다." 그게 재측정이란 말인가? '하긴...' 측정 결과가 공표되고 여기저기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면 협회가 이렇게 대놓고 접근할 수 있었을까? 설득력 있는 방법이었다. "거두절미하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어느덧 협회장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저희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에 많은 돈을 약속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가슴께를 만지작거리던 고건희가 뭔가를 움켜쥔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다른 길을 도울 수는 있지요." "무슨 말씀이신지...?" "성진우 헌터님을 다른 쪽으로 키워 드릴 수 있다는 얘깁니다." 움켜쥔 주먹이 펴졌다. 고건희의 손바닥 위에서는 금배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권력... 인가?' 하지만 진우는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영문을 모르겠군요." "예?" "저에게 이렇게까지 하실 필요가 있습니까?" 타당한 질문. 진우를 바라보는 고건희의 눈빛에 이채가 어렸다. '내 배경에 겁먹거나 눈앞의 이익에 현혹되지 않고 차분히 자신의 의문점을 제기하다니...' 내가 너무 서둘렀나? 누가 그랬던가. '늙으면 인내심이 줄어든다고.' 틀린 말이 아니었다. 고건희는 속으로 웃음을 삼키며 말을 이었다. "5 대 길드를 알고 계시겠지요?"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진우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다섯 마리의 공룡이 간신히 밸런스를 맞추고 있습니다." 수도권의 헌터스, 백호, 사신. 지방의 명성, 기사단. "헌터님께서 다섯 개의 길드 중 어디에 들어가도 균형이 깨지고 판도가 크게 뒤바뀔 겁니다." 지금도 대형길드들의 위세는 하늘을 찌른다. 그런데 그중 어느 한 곳이 또 한 명의 S 급 헌터를 얻고 그걸 원동력 삼아 위로 치고 올라온다면? 그때도 협회의 말이 먹힐까? 협회는 강한 힘으로 헌터들 간의 중심을 잡아 주는 역할을 해야 했다. "법과 제도, 평범한 공권력으로는 헌터들을 묶어 두기에 역부족입니다." 진우도 일전에 같은 생각을 했었다. 마수들만이 괴물이 아니다. 헌터들 또한 마수들 못지않은 괴물들이다. '힘'만을 따진다면 마수들보다 더 위험한 괴물들이 바로 헌터들이었다. "그래서 협회가 필요한 겁니다." 고건희의 얼굴이 사뭇 진지해졌다. "그리고 협회는 성진우 헌터님을 필요로 합니다." 당신과 같은 강한 힘을 지닌 사람이. 고건희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옆에 두고 어느 정도 지켜보긴 해야겠지만...' 성진우만 OK 한다면 그를 전심전력으로 밀어줄 의사가 있었다. S 급은 그만한 대우를 받을 만한 가치가 있는 이들이니까. '이 정도면 설명이 됐겠지.' 그러니. 아주 오랜만에, 고건희는 긴장과 설렘이 반반쯤 섞인 심정을 맛보며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헌터님?" 79 화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고건희가 등을 밀어준다면 평범한 사람도 금방 출세가도를 달릴 수 있다. 국회, 정부, 협회, 언론까지. 고건희가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을 찾아보기가 힘들 정도니까. 하물며 그의 지원을 받는 사람이 S 급 헌터라면? '어디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 짐작도 안 되네.' 문득 진우는 깔끔한 정장을 입고 고건희 의원의 옆 좌석에 나란히 앉아 있는 자신의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가슴이 조금 뛰었다. '쉽게 오는 기회는 아니겠지.' 고건희가 제안한 '다른 길'은 걷고 싶다고 해서 누구나 함부로 발을 들일 수 있는 길이 아니니까. 하지만. 거기엔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다. '협회로 가면 더 이상 레벨을 올릴 수가 없게 된다.' 협회 소속의 상급 헌터들은 사냥을 하지 않으니까. 그들의 주 업무는 다른 헌터들을 상대하는 것이지, 마수 사냥이 아니었다. 겨우 허락을 받아 협회의 레이드에 낀다고 해도. '협회가 맡는 던전이라고 해 봐야 길드들이 거들떠보지도 않는 D, E 급 수준.' 경험치도 주지 않는 저렙들을 잡고 살 건가? 아니, 그럴 순 없지. 진우는 속으로 강하게 부정했다. '나는 더 강해지고 싶다.'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갈 수 있는 곳까지 올라가 보고 싶었다. 아예 불가능하다거나 확신이 없다면 모를까, 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 그걸 포기하라고? 어림없는 소리. '레벨업이 멈추지 않는 한 나는 계속 성장할 수 있다.' 두근. 두근. 아까 고건희 협회장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자신을 상상했을 때보다 더 강하게 심장이 요동쳤다. 고건희도 진우의 변화를 느꼈다. '갑자기 호흡이 빨라졌군. 드디어 결단을 내린 건가?' 부디 좋은 결과면 좋으련만. '아니. 꼭 좋은 결과여야 한다.' 남은 시간을 생각하면. 진우만큼 흥분된 심정으로 고건희는 대답을 기다렸다. 1 초가 1 분 같은 시간이었다. 진우가 입술을 뗐다. "죄송합니다." 고건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방금 의지가 넘치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었는데... 내 착각이었나?' 실망감을 감출 수가 없었다. '결국 성진우라는 남자의 그릇은 이 정도였던 거군.' 다른 길을 돕겠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실은 그 이상을 생각했다. '2 년 만에 나타난 S 급...' 가장 가까운 곳에 두고 일을 가르치면서 가능성이 보일 경우 자기 뒤를 잇는 재목으로 키우려 했다. 자신이 사라졌을 때 협회를 지탱할 수 있는 강한 힘이 필요했으니까. 그건 곧 자신이 가진 모든 걸 물려주겠다는 소리였다. 그런데 결과가 이 모양이라니. '꼴이 우습게 됐군.' 고건희는 내밀었던 배지를 거두며 푸념처럼 물었다. "역시... 돈입니까?" 진우는 칼같이 대답했다. "아닙니다." 고건희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다들 말은 고상하지.' 하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모두 같다. 결국은 돈이다. 거기에 인기까지 따라오면 금상첨화고. '하기야...' 재물을 좇는 것이야 인간의 당연한 본성인데 그걸 힐난할 생각은 없었다. 단지 스스로 솔직하지 못하는 이들이 가소로울 뿐. "그럼 어째서 거절하신 겁니까?" 고건희는 답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물었다. 그냥 반응을 한번 보고 싶었다. 그런데. "저는 싸우고 싶습니다." 망설임 없이 나온 진우의 한마디가 고건희의 뒤통수를 때렸다. '뭐라고?' 머리를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건... 마수들과 싸우고 싶다는 뜻입니까?" "예." 진우는 불필요한 설명은 전부 덜어내고 솔직하게 진심을 밝혔다. "게이트로 들어가 마수들을 처치하고 싶습니다. 제가 있어야 할 곳은 던전 안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럴 수가.' 고건희의 눈이 커졌다. 수많은 이들의 위에 서 있는 사람은 다른 이의 눈빛만 봐도 그가 진실을 얘기하는지, 거짓을 이야기하는지 알 수가 있다. 그 위치는 그래야만 올라갈 수 있는 자리니까. 그래서 고건희는 알 수 있었다. '저 눈은... 진심이다.' 진우를 바라보는 고건희의 눈빛이 180 도 달라졌다. '이런 느낌이 얼마 만이지?' 힘을 각성했을 때 이미 고건희는 너무 노쇠한 몸이었다. 그래서 마수들과 싸우는 대신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했다. 자기 소유의 사업체를 처분한 돈으로 협회를 세우고, 헌터들을 모으고, 인기를 토대로 국회로 진출해 헌터 관련법들을 제정했다. 하지만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녀도 채워지지 않았던 근원적인 아쉬움. '나도 20 년, 아니 10 년만 더 젊었어도 이런 젊은이들과 함께...!' 두근, 두근, 두근. 고건희는 가슴에 손을 얹었다. 언제 멈춰도 이상하지 않았던 심장이 지금은 가쁘게 뛰고 있었다. '내 심장이 아직 이런 소리를 낼 수 있었구만.' 기분 좋은 고동이었다. 반면 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한데?' 협회와 등질 각오까지 하고 협회장의 제안을 걷어찼는데, 협회장은 어딘지 모르게 기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으니.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동생 혼자 집을 지키고 있어서 이만 가 봐야겠습니다."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진우를 따라 일어난 고건희가 품에서 뭔가를 꺼내 내밀었다. "그리고 이거." 손에 들린 건 명함이었다. '...?' "제 도움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연락하십시오." 고건희는 환하게 웃었다. 진우의 말이 맞았다. 강한 헌터는 던전에 있어야 했다. 비록 성진우를 포섭하는 데는 실패했지만 헌터협회의 장으로서, 혹은 한 명의 헌터로서 고건희는 가능한 한 성진우를 돕고 싶어졌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이 청년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조언할 것도 좀 있었다. 장소리란 무릇 관심에서 비롯되는 것이니까. "혼자서 상급 던전에 들어가는 건 불가능합니다. 그러니 길드를 선택하실 때에는 부디 신중하시길." 당신의 선택에 따라 판도가 크게 달라질 테니. 고건희의 진심 어린 조언을 들은 진우가 짧은 순간 묘한 미소를 보였다. "감사합니다." 명함을 지갑에 넣은 진우가 고건희와 우진철에게 가볍게 인사를 남기고 자리를 떠났다. "후-" 한숨과 동시에 고건희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괜찮으십니까?" 고건희의 심기가 불편할 것이라 지레짐작한 우진철이 재빠르게 다가왔다. 하지만 고건희는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야. 난 괜찮네." 암, 괜찮다마다. 이 얼마나 오랜만에 맛보는 만남의 즐거움인지. 한참 동안 미소를 머금고 있던 고건희가 고개를 돌려 수행원에게 지시를 내렸다. "오늘 약속은 전부 취소해 주게." "하지만 오늘은 장관님들과의 약속이."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그렇게 말하며 씩 웃었다. "오늘은 그 꼰대들에게 감정을 낭비하기 싫으니 말일세." 이 기분 좋은 여운을 오늘 하루만이라도 간직하고 싶었다. 문득 우진철에게 향하는 고건희의 시선. 협회장의 보기 드문 미소에 우진철도 들뜬 마음이 됐다. "하실 말씀이 있으십니까?" "다른 게 아니라 말이야, 자네..." 약간 뜸을 들이던 고건희가 턱밑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나하고 술 한잔하겠는가?" 생각지도 못한 말에 우진철이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술을 못해서... 그래도 괜찮으시겠습니까?" "어허, 이 사람 그렇게 안 봤더니." 고건희가 장난스럽게 혀끝을 끌끌 찼다. "사내는 자신이 마실 수 있는 술잔의 크기만큼 세상을 담을 수 있다는 말도 모르는가?" "죄송합니다, 협회장님." 우진철은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히며 뒷머리에 손을 얹었다. "농담일세. 기분이 좋으니 농담도 슬슬 나오는군." 사실 진짜 술잔을 나눠보고 싶은 상대는 따로 있기도 하고. 고건희의 시선이 진우가 사라진 복도 끝으로 향했다. '성진우 헌터...' 저 친구는 주량이 얼마나 될까? 언제 한번 꼭 같이 잔을 나눠 보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 고건희는 옅게 미소를 지었다. *** 끼익. 덜컹. 진우는 멈춰선 버스에서 내려섰다. '동생 핑계를 대고 나왔지만...' 시계를 보니 아직 동생이 도착하긴 이른 시간. 진우는 천천히 집으로 향했다. 틱, 틱. 익숙하지 않은 소음에 고개를 돌렸더니 멀리에 맛이 간 가로등 하나가 보였다. '그러고 보니.' 주위가 너무 어두웠다. 워낙 후미진 동네라서 조금만 큰 길을 벗어나도 이렇게 어둡고 인적 드문 장소가 나온다. 그러다 문득 얼마 전에 들었던 뉴스를 떠올렸다. '요 근처에서 일어난 묻지마 살인사건.' 피해자는 모두 여성이었던가? 지금 이 길도 동생이 자주 다니는 길이었다. 그것도 밤 늦게. '동생 학교가 가까워서 마음대로 이사 갈 수도 없고.' 괜히 걱정되기 시작했다. 발견만 하면 범인을 잡는 거야 어려운 일이 아니지만, 걱정된다는 이유로 밤마다 길에 서 있을 수도 없는 노릇. 무슨 방법이 없을까? 팔짱을 끼고서 머리를 굴려 보던 진우가 갑자기 미소를 지었다. '나 대신 다른 애들을 세워 놓으면 되지.' 이럴 때 딱 쓰기 좋은 애들이 있지 않은가? "나와." 진우의 부름에 그림자 병사들이 나타났다. '다섯 명 정도면 충분하겠지.' 같이 악마성 원정을 다니면서 잘 키워 둔 병사들이다. 보기만 해도 든든했다. "앞으로 너희가 이 동네 자경단이다. 지금부터 순찰 실시." 말이 끝나자마자 병사들은 그림자 상태로 돌아갔다. 그리고 건물이나 다른 사물의 그림자들에 흡수됐다, 나왔다를 반복하며 이동을 시작했다. '그래. 그렇게 다른 사람 눈에 띄지 않게 조심히 돌아다녀라.' 아오, 귀여운 녀석들. 묻지 살인범이 상급 헌터 수준이 아니고서야 그림자 병사를 당할 길은 없었다. 만에 하나 그렇다고 해도 병사들에게 이상이 생기면 자신이 바로 알 수 있었다. S 급 헌터. '아니, 아직 정식 자격증은 안 나왔으니 S 급 각성자라고 해야 하나?' 뭐 아무려면 어떤가 헌터든 각성자든 S 급이 지켜 주는 동네라니. 24 시간 무료 방범 시스템이 세간에 알려지면 모르긴 몰라도 땅값이 몇 배로 폭등하지 않을까? 피식 웃음이 나왔다. '좋아.' 이 정도면 안심이다. 주위를 둘러보던 진우가 흡족한 얼굴로 돌아섰다. *** "밥 먹자고 해서 급하게 달려 나왔더니 대패 삼겹살이야?" "어? 지금 삼겹살 무시해?" "..." "여긴 나와 형님의 추억이 담겨 있는 곳이라고!" 얼굴이 벌겋게 변한 유진호가 술잔을 내려놓으며 콧김을 내뿜었다. "그래서 그 추억의 장소에 나는 왜 불러들인 건데?" 유수현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자려고 누웠다가 방금 전 유진호의 전화를 받았다. -누나, 나 위로 좀 해 주라. -웬일로 누나래? -누나아아아- 징징거리는 목소리가 하도 불쌍해서 나와 줬더니 데려온 곳이 이런 데라니. 재벌가의 아가씨로 곱게 자라 지금은 모델로 활동하고 있는 유수현이 못마땅해하는 것도 당연할 수밖에. 힐끔 힐끔. 급하게 나온다고 대충 꾸민 데다가 모자까지 눌러썼는데도 주위 남자들의 시선이 계속해서 날아들었다. "뭔데 그래? 말을 해 봐, 말을." 비어 있는 유진호의 잔에 소주를 따라 주며 유수현이 물었다. "봐 봐, 이거. 형님이 내 전화 피하시는 거 맞지?" 유진호가 울먹이며 폰을 내밀었다. 액정에는 통화 기록이 길게 남아 있었다. 한 번의 통화와 네 번의 통화 실패. 그나마 처음 연결된 통화 한 번도 대화 도중 끊겼다고 한다. "지금 아는 사람이랑 통화가 안 된다고 나를 불러낸 거야?" 끄덕끄덕. 유진호는 고개를 움직였다. "하-" 기가 찬 유수현이 유진호의 전화를 뺏어들었다. "어디 줘 봐." 빠르게 전화 모양의 아이콘을 누르자. 뚜르르울리던 신호가 잠시 뒤 끊겼다. 그러자 유수현이 도끼눈을 떴다. "야이." "응?" 유진호가 고개를 들었다. "딱 15 초 울리고 끊기잖아. 이건 전화를 피하는 게 아니라 전화기가 꺼져 있는 거고, 통화 중에 끊겼다면 배터리가 나간 거겠지." "...정말?" "안 믿기면 다시 걸어 보던가." 뚜르르유수현의 말대로 15 초 만에 신호가 끊어졌다. "진짜네?" 유진호의 얼굴이 환해졌다. "이제 해결됐지? 나 간다." 매몰차게 떠나려는 유수현의 소매를 유진호가 붙들었다. "누나아아- 마시던 것만 다 비우고 가자!" "이럴 때만 누나다, 누나야." 평소에는 잘도 너, 인마, 야로 부르는 녀석이. 결국 유수현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어? 누나도 마시게?" "마시던 것만 비우고 가자며? 혼자서 마시는 걸 언제 다 기다려." "역시 우리 누나밖에 없다." "됐거든?" 말은 그렇게 해도 어느새 두 사람은 화기애애하게 술잔을 비워 갔다. "그런데 그 형님이란 사람, 도대체 누구야?" "곧 알게 될 걸?" 유진 길드에 들어온다면. 그렇게 말하려던 유진호가 높은 곳에 설치해 놓은 가게 안 TV 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저 사람...?" 유수현도 TV 쪽을 돌아보았다. 화면 속 뉴스에서는 최근 톱스타로 활약 중인 배우 이민성의 각성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구름처럼 모여든 기자들 앞에서 이민성이 쑥스러운 듯 입을 열었다. -아직 촬영 일정이 끝나지 않아서... 각성자 등급이 나와 봐야 알겠지만... 아래 자막에는 이민성이 조만간 헌터협회에 들러 등급 심사를 받을 예정이라고 한다. "와... 역시 한류 스타 이민성! 기자들 수 좀 봐. 저기 중국 기자도 와 있네." 유진호가 감탄을 터트렸다. 그러나 유수현은 눈살을 찌푸렸다. "어떻게 저리 많은 사람들 앞에서 뻔뻔하게 거짓말을 해 대지?" "엉?" "아는 사람은 다 알거든. 저거 다 쇼라는 거. 이미 A 급을 받아 놓고서 언론에 크게 터트리려고 언플하고 있는 거래." "쇼를 한다고? 겸손의 상징 이민성이?" 유수현이 혀를 찼다. 쯧쯧. '어쩜 다들 이리도 모를까?' 뒤에서 남 험담하는 거 같아 참고는 있지만, 이민성을 실제로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그의 평가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카메라가 있을 때와 없을 때의 차이가 요즘 흔히 하는 말로 넘사벽인 남자. 유수현이 정말 싫어하는 부류였다. 그냥 이중적인 것뿐이라면 모른 척 넘어가겠는데, 또 치근덕대기는 얼마나 치근덕대는지. 얼마 전에도 뜬금없이 연락해 와 '같은 헌터'가 됐다면서 작업을 걸어오는 통에 전화를 끊느라 한참 애를 먹었었다. '재수 없는 인간...' 각성자가 되기 전에도 건방이 하늘을 찌르던 인간인데 A 급 헌터가 되면 얼마나 더 콧대가 높아질까? 거기에 A 급 판정을 받는 장면이 카메라를 통해 전국에 생중계되게 생겼으니. '이런 쪽으로는 진짜 머리 잘 굴린다니까.' 유수현은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술잔에 남은 술을 마저 들이켰다. 80 화 -저 짤리면 책임져 주실 겁니까? "예?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어제 일, 협회장님께서 함구령을 내리셨습니다. 만약 각성자 신원이 새 나가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끝까지 잡아 내서 반드시 처벌하시겠답니다. "고건희 협회장님께서요? 여태까지 한 번도 이런 적 없었잖습니까?" -협회장님 마음을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 -더 하실 말씀 없으시면 끊겠습니다. "...다음에 또 연락드리죠." 딸깍. 전화는 그렇게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놓는 사신 길드의 마스터 임태규의 얼굴은 좋지 못했다. '이게 무슨 일이래...' 2 년 만에 초대형 신인이 나타났다는 소식에 사장인 본인이 직접 전화를 걸었다. 그런데 이런 답변이 돌아올 줄이야. 잘리면 책임져 줄 거냐고? 다른 이도 아니고 고건희 협회장에게 찍혀서 쫓겨난 협회 직원을 받아 줄 간 큰 길드가 있을 리가. 각성자 신원을 안다고 영입에 성공한다는 보장도 없는데 말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잡아내 처벌한다...' 고건희라면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데 이 영감탱이가 갑자기 노망이 들었나 왜 안하던 짓을 하지?' 무슨 바람이 분 걸까? 각성자의 신원 유출 금지라니. 유례가 없는 일이었다. 덕분에 정식 발표가 날 때까지 사신은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 하는 신세가 됐다. 억울한 건 그것뿐만이 아니다. '그럼 대체 최종인, 백윤호는 어떻게 알고 어제 거기 있었던 거야?' 정보력의 차이인가? 그만큼 이 바닥에서 사신 길드의 영향력이 죽었다는 뜻일까? 만약 어제 나타났다는 초대형 신인이 헌터스나 백호에 들어간다면 안 그래도 벌어진 격차를 영영 따라잡을 수 없게 될 터. 상황이 이런데 난데없는 떨어진 함구령이 사신의 앞길을 가로막아 버렸다. '이 영감은 전생에 나랑 무슨 원수를 졌나?' 백윤호가 사신 길드를 탈퇴할 때 백호 길드가 무사히 만들어지도록 도운 것도 그 영감이었다. 그 여파로 사신은 최고의 길드라는 자리에서 밀려났다. 헌터스와 백호는 저만큼 앞서가고 있는데, 사신은 계속해서 제자리만 맴돌고 있었다. '이쯤 했으면 이제 사신도 좀 도와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문득 고건희가 원망스러워졌다. 그러나 뾰족한 수가 있나? 임태규는 안타까운 마음에 발만 동동 굴러댈 뿐이었다. *** '일일 퀘스트는 끝냈고.' 진우는 가벼운 마음으로 인터넷을 뒤적거렸다. 재측정까진 남은 시간은 이틀. 그동안 아티팩트 거래에 대한 정보나 모으려고 컴퓨터를 켰다. '헉!' 경매 정보를 훑어보던 진우의 눈이 커졌다. '최소 단위가 억이네.' 어디 그뿐인가? 좀 괜찮다 싶은 물건들은 기본 수십억이 넘어갔다. '하긴...' 헌터에게 장비는 목숨줄과 같았다. 좋은 장비를 쓸수록 더 안전해지는 건 말할 필요가 없었다. 헌터들의 수입이 적은 편도 아니고, 더 안전하고 빠르게 사냥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도구가 있는데 돈을 아낄 이유가 있을까? 이해는 할 수 있었다. 할 수는 있지만 역시 놀랍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았다. 아티팩트 가격들을 보니 슬슬 불안해졌다. '이거 지금 가진 돈으로는 아무래도 안 되겠는데?' 경매에 올라와 있는 화속성 방어 아티팩트를 발견하지는 못했지만, 높은 등급 방어구를 구매하려면 지금 가진 돈으로는 턱도 없을 듯했다. '돈은 충분히 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건 일반인의 관점이었을 뿐 헌터들의 관점에서는 아직 한참 부족했다. 통장에 든 돈이 얼추 17 억 정도. 원하는 아티팩트를 구매하려면 역시 '탐욕의 구슬'을 파는 수밖에 없었다. 판매자의 입장이 되자 진우의 표정이 달라졌다. '아티팩트를 사는 데 많은 돈이 든다는 건 반대로 내가 가진 아티팩트를 비싸게 팔아먹을 수 있다는 소리.' 딸깍. 마우스를 움직여 검색하자 현재 판매 중인 마법 도구들이 주르륵 떴다. '...' 아무리 눈여겨보아도 마법 데미지를 두 배나 증가시켜 주는 아티팩트는 없었다. 끽해야 원래 힘에서 20~30 퍼센트 추가되는 수준. 그런 아티팩트들도 믿기지 않을 정도로 고가였다. '마법 도구들 가격은 장난이 아니구나.' 생각해 보니 20 퍼센트도 적지 않았다. 이런 고가의 아티팩트들을 살 수 있는 건 상급, 아니 최상급 헌터 정도다. 그런데 그런 이들의 힘을 20 퍼센트나 올려 준다? 그 차이는 어마어마할 터. 상급 헌터들도 그걸 아니까 이만큼 돈을 주고 아티팩트를 구매하는 거다. 실제로 방금까지 판매 중이었던 물건에 판매완료 표시가 붙는 경우가 종종 보였다. 하물며 20 퍼센트짜리도 이럴진대... '이건 대체 얼마에 팔면 되는 거지?' 꿀꺽. 진우는 침을 삼켰다. 아티팩트 같은 건 꿈도 못 꾸던 때가 바로 얼마 전이라, 지금 단계에서는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그러니까 경매가 있는 거겠지.' 탐욕의 구슬을 경매에 내놓았을 때 부디 괜찮은 가격이 나오기를. 진우는 만족스런 미소를 지으며 경매정보창을 닫았다. 알아본 결과 아티팩트를 파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하나는 정식적인 루트를 통해 파는 것. 다른 하나는 블랙마켓. 즉 암시장을 통해 파는 것. 하지만 암시장은 접근할 방법이 없었다. 인터넷으로 접할 수 있는 정보에는 한계가 있으니까. '마우스 클릭 몇 번으로 접촉할 수 있다면 블랙마켓이라고 불리지도 않았겠지.' 탐욕의 구슬은 뒤가 구린 물건이 아니니 굳이 블랙마켓을 거쳐야 할 필요도 없고. 그러니 현재 가장 좋은 방법은 판매의 전문가들인 아티팩트 거래소에 탐욕의 구슬을 맡기고 경매로 처분하는 것이었다. 세금과 수수료가 떼이기는 해도 가장 빠르고 뒤끝이 없는 방법이었다. '문제는 내가 이걸 얻게 된 경위를 밝혀야 한다는 건데...' E 급 헌터가 현존하지 않는 말도 안 되는 아티팩트를 가지고 왔다. 이걸 조용히 넘어가줄까? 한국 헌터옥션은 헌터 간의 거래를 중개하는 가장 큰 기업이다. 의심쩍은 부분은 하나하나 확실하게 짚고 넘어가리라. '그래서 자격증이 필요한 거지.' S 등급이 찍혀 있는 새로운 헌터 자격증이. 그걸 위해 재심사를 받았다. 결과는 성공적. 고건희 협회장의 말을 신뢰한다면 이틀 후에는 새 자격증을 문제없이 손에 쥘 수 있었다. 괜히 협회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거절하는 바람에 차질이 빚어지지 않을까 잠깐 걱정도 했지만... '협회장님이 그럴 분은 아닌 거 같아서 다행이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그 순간까지도 협회장의 입가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었다. 오랜 시간 남들의 눈치를 보고 살면 분위기 파악에 도가 트는 법이다. 딱 진우가 그랬다. E 급으로 4 년 동안 다른 헌터들의 눈치를 보며 살았다. 그래서 어지간한 상황은 사람들의 표정만 봐도 대충 파악할 수 있었다. 절대 고건희의 표정은 가식이 아니었다. 적어도 진우의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그러니 걱정할 것 없이 이틀 뒤에 있을 재측정만 기다리면 될 듯 했다. '그런데... 그동안 뭐한다?' 진우는 의자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이틀. 뭔가 하기에는 짧고, 마냥 놀기엔 긴 시간. '한번 둘러보기라도 할까?' 반쯤 흥미 삼아 마우스 커서를 헌터 사이트의 구인 게시판 쪽으로 움직였다. 딸깍. 클릭 한 번에 수많은 게시물이 화면을 채웠다. 특히 요 근처에서 개인 공격대를 모집한다는 글들이 많이 보였다. '...' 원인은 뻔하다. 자신과 유진호가 며칠간 일대의 C 급 게이트들을 독차지해 버려서 주변 공격대들의 일자리가 잠시 끊겼었다. 그 반동으로 그때 손 놓고 있었던 공격대들이 지금 활발하게 레이드를 하고 있는 듯했다. 진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페이지를 넘겼다. '이제 C 급 던전에서는 업이 되지 않으니.' 마지막으로 C 급 던전에 들어갔을 때는 1 업 하는데 하루 종일 걸렸다. 아니, 하루도 모자라 이틀을 달리고 나서야 겨우 1 업이 됐다. 지금은 그때보다 15 레벨 이상 올라간 상태. 경험치에 눈금이 있다면 미동조차 않을 상황이었다. '지금 C 급 게이트는 나한테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그러나 안타깝게도 상급 던전을 공략할 멤버들을 구하는 게시물은 없었다. 개인 공격대가 상급 던전을 공략한다는 건 자살행위고, 길드들이 이런 데서 대체 멤버를 구할 가능성은 없으니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검색 조건을 바꿔 볼까?' 진우는 상급 던전만 뜨도록 검색 조건을 바꾸었다. 딸깍. 설마 있을까 하면서도 전혀 기대는 안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 진짜 뜨는 글이 있었다. *** "E 급이시라고요?" "네." "이런 일 해 본 적은 있으시고?" "없습니다." "혹시... 특성은 어느 쪽으로?" "전투 계열입니다." '그건 다행이고만.' 안전모를 쓴 팀장의 시선이 진우를 아래위로 한번 쓱 훑었다. 'E 급치고는 상당히 탄탄해 보이는 몸인데? 눈빛도 괜찮고.' 진우는 차분히 팀장의 대답을 기다렸다. 곧 팀장이 진우의 자격증을 돌려주며 호쾌하게 웃었다. "하하하, 여기 진우 씨 같은 사람 많습니다. 긴장하지 말고 잘해 봅시다." 불혹의 나이를 넘겼음에도 아주 에너지가 넘치는 아저씨였다. 콧수염이 잘 어울리는 건 덤. "여기 대기하고 계시다가 다들 왔을 때 같이 들어가시면 됩니다. 들어가기 전에 장비 잊지 마시고요." "장비라면...?" "저기 바닥에 있는 거 아무거나 하나 들고 가시면 됩니다." "...네." 진우는 한곳에 잔뜩 모아 놓은 곡괭이들을 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목에 수건을 걸친 아저씨 한 사람이 급히 다가왔다. "배 씨! 우리 팀도 지금 일손이 부족해 죽겠는데 그렇게 마음대로 사람을 데려가면 어떡해?" "아이고, 수거팀이 그 정도면 됐지. 작업 차질 생겨서 게이트 폐쇄 타이밍 못 맞추면 자네들이 책임질 거여?" "아니, 그래도." 수염 아저씨는 수건 아저씨를 돌려세우며 진우에게 미소 지었다. "성 씨는 거기서 쉬고 있어. 우리끼리 이야기 좀 하고 올 테니까." "그냥 여기서 얘길 하지 또 어딜 간다고 그래?" "글쎄, 와 보라니까." 두 사람은 옥신각신하며 금방 어디론가 사라졌다. '다른 분은 수거 팀인가...' 상급 던전은 규모가 커서 공격대 하나가 모든 일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분업을 한다. 던전을 공략하는 공격대, 던전 안의 광석을 캐는 채굴 팀, 마수의 사체를 수거하는 수거 팀. 채굴 팀과 수거 팀은 보스를 제외한 마수들이 전부 처치되면 던전 안으로 투입된다. 진우는 채굴 팀에 지원했다. '...도구는 이게 다인가?' 떨떠름한 얼굴로 곡괭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약하긴 해도 마력이 느껴졌다. '마력이 실려 있네.' 전기를 이용하는 현대 기계들은 던전 안에서 작동하지 않는다. 때문에 이런 구식 도구들에 마력을 불어넣어서 사용하는 모양이었다. '...' 곡괭이를 쥐어 보니 확실했다. 채굴 팀 헌터들을 괜히 던전 광부라고 놀리는 것이 아니었다. 진우는 고개를 돌려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허공에 떠 있는 거대한 구멍. C 급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크기의 게이트가 눈앞에 있었다. '이게 A 급 게이트...' 여기에 온 목적이 바로 이 녀석 때문이었다. '상급 던전을 직접 눈으로 보고 싶다.' 비록 보스 말고는 모든 마수들이 제거된 상태지만 그래도 A 급 던전의 내부 구조를 육안으로 한번 확인해 보고 싶었다. '언젠간 나도 들어가야 하니까.' 아는 건 힘이다. 하지만 책이나 인터넷을 통해 간접 체험으로는 한계가 있다. 백호 길드의 신입들도 그 사실을 간과하는 바람에 큰 피해를 입지 않았던가. '내가 없었으면 아무도 살아 나오지 못했겠지.' 아는 것과 겪은 것은 다르다. 진우는 기회가 생겼을 때 A 급 던전을 눈에 새겨 두기 위해 채굴 팀에 자원했다. 볼품없는 곡괭이들을 봤을 땐 잠깐 후회가 들기도 했었지만 무시무시한 게이트를 보고 있으니 그런 마음이 싹 가셨다. '잘 온 것 같네.' 재측정까진 시간도 좀 남아 있으니 좋은 기회가 아닌가. 이야기가 잘 풀렸는지 곧 수염 아저씨, 아니 배윤석 팀장이 웃으며 달려왔다. "이제 들어가자고, 다들 준비됐다네." 곡괭이를 움켜쥔 진우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81 화 똑똑. "부탁하신 파일입니다." "들어오게." 우진철은 협회장실로 들어갔다. 고건희는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환한 얼굴로 우진철을 맞이했다. 우진철이 건넨 서류철을 펼치자 낯익은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진우였다. 증명사진 속의 진우는 앳된 모습이어서 지금과 분위기가 많이 달랐지만, 그래도 누군지 알아보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흐음." 활동 내역을 읽어 내려가는 고건희의 눈빛이 사뭇 진지해졌다. 'E 급 중에서도 최하위에 속하면서 4 년이나 헌터로 활동을?' 이건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아무리 협회가 담당하는 게이트들이 길드나 개인이 가져가는 게이트에 비해서 수준이 떨어진다고 해도 E 급에게는 숨이 막혀 오는 레벨일 터! 아니나 다를까. 진우는 헌터로 활동했던 경력만큼이나 오랜 시간을 병원에서 보냈다. "이렇게 부상이 잦았는데도 용케 버텼군." "어머니의 치료비 때문에 협회를 그만둘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요즘 보기 드문 청년이군." 고건희의 눈에 이채가 감돌았다. '실종된 아버지를 대신해 아픈 어머니와 학생인 동생을 혼자 보살피고 있다라...' 성진우가 재각성자라는 소리를 듣고서 반쯤은 흥미 삼아 그의 파일을 열어 보았는데 이게 웬걸.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내였다. '길드에 넘겨주기에는 참 아까운 헌터인데.' 자료를 보다 보니 진우를 협회로 끌어들이지 못한 것이 더욱더 아쉬워지는 고건희였다. 쩝. 입맛을 다시며 다음 장을 넘기는데 어느덧 마지막 페이지가 나왔다. 고건희는 흡족한 얼굴로 서류철을 덮었다. "잘 됐네." "감사합니다." 서류철을 돌려받은 우진철이 돌아서 나가려다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저기... 협회장님." "음?" 고건희가 고개를 들었다. 우진철의 얼굴에 난처한 기색이 역력해 보였다.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나올 것 같은 우 과장이 저런 얼굴을 다 하고...' 말하기 어려운 얘기라도 있는 것일까? 고건희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무슨 일인가?" 망설이던 우진철이 대답했다. "말씀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 실은 방금 전 말씀드린 성진우 헌터가 레이드 팀에 들어갔다는 보고가 있었습니다." "벌써? 그래, 어느 팀인가?" "헌터스 길드의 레이드 팀입니다." "흐음... 헌터스라." 성진우가 헌터를 선택했다. 그것도 하루 만에. 고건희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마 말만 번지르르하게 해 놓고 사실은 헌터스가 제안한 거액의 계약금이 탐나서?' 그렇다면 실망스런 일이었다. 정말 오랜만에 헌터다운 헌터를 만났다고 감격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제의 태도나 그간의 자료를 토대로 생각했을 때, 진우가 그렇게 손바닥 뒤집듯 말을 바꿀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뭔가 다른 이유가 있으리라. 이를테면. "확실히 강한 마수들과 싸우고 싶다면 헌터스가 가장 적격이긴 하지." 고건희는 그리 납득하려고 했다. 그러나 우진철이 빠르게 태클을 걸어왔다.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협회장님." "뭔가 들은 게 좀 있나?" "확인된 바에 의하면... 성진우 헌터는 공격대가 아니라 채굴팀으로 들어갔습니다." 고건희가 벌떡 일어났다. "뭐? S 급 헌터가 광부로 지원했다고?" 믿을 수 없다는 목소리였다. 사실은 우진철도 그랬다. 그래서 몇 번을 거듭해 확인해 봤는데도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이래서 말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했던 건데...' 대체 성인우는 무슨 생각인 걸까? 우진철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렇다고 합니다." 고건희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허허 하고 실소를 터트렸다. "정말 종잡을 수 없는 사내로구만." *** 진우는 지급받은 안전모와 작업복을 착용하고 배윤석 팀장의 뒤를 따라갔다. 게이트 근처에 안전모를 쓴 헌터들이 잔뜩 모여 있었다. 대략 20 명 정도? 모두의 시선이 배 팀장에게로 모였다. 배 팀장은 진우를 소개했다. "여기는 오늘 같이 일하게 된 성씨." "안녕하세요." 진우는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들어 올리며 채굴팀 멤버들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폈다. "..." 다들 반응이 시큰둥했다. 이해는 갔다. '하긴.' 이쪽은 내일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일용직이고, 저쪽은 길드와의 정식 계약을 통해 채굴팀으로 고용된 헌터들. 채굴팀 입장에선 친절하게 대해줄 이유가 없었다. "아이참. 사람들하고는... 그래도 같이 일할 동료가 왔는데." 배 팀장이 어색하게 웃으며 맨 끝에서 있는 인상 험악한 남자를 가리켰다. "성 씨는 저기 목 씨 옆에 딱 붙어 다니면서 모르는 거 있으면 배우고 그래. 목 씨가 말수가 적어서 그렇지 여기선 제일 베테랑이야." "...알겠습니다." 진우는 군말 없이 목 씨라는 남자 옆으로 가서 섰다. 목 씨는 진우와 눈이 마주치자 들릴 듯 말 듯 흘러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목진수요." "성진우라고 합니다." 소개는 그걸로 끝. 어느새 목진수의 시선은 팀장에게로 옮겨 가 있었다. '참 친절들 하시군.' 진우도 시선을 돌렸다. 팀장은 좀 떨어진 곳에서 길드 직원으로 보이는 일반인과 심각한 표정으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조금 집중하자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모두 들을 수 있었다. "...공략팀은 아직이야? 아까 다 끝났다더니 지금이 몇 분째야?" "이제 진짜 얼마 안 남았답니다. 이게 다 팀장님과 팀원들 안전을 위해서니까 안에 마수들 전부 정리될 때까지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그 말만 벌써 세 번 들었어." "에이, 팀장님. 대충대충 정리했다가 작업 중에 숨어 있던 마수라도 튀어나오면 다들 곤란해지시는 거 잘 아시잖습니까?" 아들뻘 되는 남직원이 눈웃음을 지으며 애교를 부리자, 배 팀장도 차마 화를 내지는 못하겠는지 고개를 돌리며 피식 웃었다. "알았다, 알았어." "엇? 팀장님, 이제 화 좀 풀리셨습니까?" "알겠으니까. 가 봐." "옙. 제가 공략팀 나오면 숨도 안 쉬고 이리로 바로 튀어 오겠습니다. 참, 그리고 오늘 작업 끝나고 다 같이 한잔, 아시죠?" "아이고. 알겠으니까, 고만 가 보라고, 이 친구야." 다행히 별 마찰 없이 이야기가 끝나는 것처럼 보였다. 직원의 대처가 좋았다. '남들은 대형 길드 다닌다면 어디서건 다 큰 소리치고 다니는 줄 알지만...' 길드 사무직들은 일반인들이고, 현장에서 뛰는 헌터들은 각성자들이다. 각성자들이 해 줘야 할 일은 많은데 각성자들의 수는 한정되어 있었다. 각성자들을 공장의 기계 부품 갈아 끼우듯 마음대로 뽑았다 잘랐다 하기가 불가능하다는 소리. 그러니 직원들이 헌터들의 눈치를 살필 수밖에. 남들 눈에는 출세한 걸로 비치는 대형 길드 직원들에게도 그들만의 남모를 속사정이 있었다. 그런데. '...음?' 팀장과 직원의 대화에 귀 기울이고 있던 진우에게 문득 옆에서 소곤거리는 소리들이 들려왔다. "얘기 들었어? 오늘 온 신참 E 급이라던데?" '또 내 얘긴가.' 진우는 가끔 뛰어난 청력이 원망스러웠다. '그렇다고 아예 귀를 막고 지낼 수도 없고...' 씁쓸히 웃고 있는 사이 헌터들의 조심스런 담화는 계속됐다. "뭐? E 급?" "E 급을 뽑아 왔다고?" "그렇다니까." 뒤통수에 날아와 꽂히는 따끔따끔한 시선들이 느껴졌다. "아니, 팀장님은 무슨 생각으로 E 급을 뽑았대?" "E 급이 힘이나 제대로 쓰겠어?" "그러게 말이야." "오늘 작업, 시간 내에 끝낼 수 있을런가 모르겠다." 여기저기서 나오는 걱정스런 목소리들. 그래도 나름대로의 배려인지 최대한 소리들을 낮추고 있기는 한데, 그런 수고도 진우에게는 무의미했다. 진우는 실소를 삼켰다. '시선이 곱지 못했던 이유가 하나 더 있었네.' 역시 E 급은 어딜 가나 찬밥 신세였다. 워낙 익숙한 일이라 이제는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어차피 오래 볼 사이도 아니니까.' 그런데 그때였다. 웅성웅성. 갑자기 게이트 정면 쪽이 시끄러워졌다. "공략팀 나왔구먼." "드디어 끝났나 보네." 기다림에 지쳐 있던 채굴팀 헌터들의 표정이 조금씩 밝아졌다. 상황을 지켜보던 배 팀장이 헌터들에게 손짓했다. "자자, 이동합시다." 채굴팀 헌터들은 각자 장비를 챙겨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진우도 헌터들 틈에 섞여 따라갔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다들 수고하셨습니다!" 게이트 앞에서는 헌터스 길드의 직원들이 막 레이드를 끝내고 게이트에서 빠져나오는 공격대 멤버들을 반갑게 맞아주고 있었다. 현장에서 쓰이는 공략팀이란 말은 아마도 공격대 멤버들을 뜻하는 듯했다. '이들이... 국내 최고의 공격대.' 상급, 아니 최상급 헌터들의 면면을 훑어보는 진우의 눈매가 예리해졌다. 그중엔 그가 아는 얼굴도 있었다. '...최종인.' 헌터스의 대표이자, 마법 계열 S 급 헌터. 괜히 최종인이 자신을 알아보면 귀찮아질 것 같아서 진우는 안전모를 깊이 눌러썼다. 다행히 주변에는 비슷한 복장의 헌터들이 많았다. 진우는 자연스럽게 배경에 녹아들 수 있었다. 그렇게 던전 광부들 옆에 조용히 서서 국내 최정예 공격대 멤버들을 지켜보는 진우의 심정은. '...이게 진짜 헌터스의 정예들이라고?'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었다. 생각보다 강한 기운을 가진 헌터를 찾기가 힘들었다. 최종인은 최종병기라는 별명에 부끄럽지 않게 엄청난 마력이 느껴졌지만, 그 외에는 정말 별 볼 일 없었다. '저들이 약한 걸까?' 말도 안 되는 소리.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국내 최고라는 타이틀을 달고 있는 길드에서도 정예들을 고르고 골라 만든 1 군 멤버들이다. '마스터가 레이드에 참가하는데 멤버를 허술하게 구성하지는 않았겠지.' 약하다는 말은 저들과 가장 거리가 먼 단어였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 '내가 강해진 거다.' 진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강함은 상대적인 것. 몇 달 간의 노력은 결과를 배신하지 않았다. 방금 A 급 던전을 공략하고 나온 공격대가 약해 보일 정도로 능력치가 껑충 뛰어오른 것이다. 상대와의 차이를 통해 자신의 강함을 인식할 수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그건 가슴이 뛰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아무도 시키지 않았고, 어떤 소리도 없었는데, 진우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게이트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고는 감탄을 터트렸다. '이럴 수가...' 게이트에서 유유히 걸어 나오고 있는 짧은 머리의 여성. 전혀 꾸미지 않은 민낯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크고 맑은 두 눈이었다. 새하얀 피부나 뚜렷한 이목구비도 눈길을 끌었다. 남자가 100 명 있다면 99 명 정도는 주저하지 않고 예쁘다고 칭찬할 만한 외모를 가진 여자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진우의 시선을 잡아 끈 것은 그녀의 외모가 아니라 그녀의 내면이었다. 그녀의 안에 있는 힘. 무표정한 얼굴의 여자 헌터에게서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있는 막대한 양의 마력이었다. '적어도 최종인과 동급.' 어쩌면 그 이상. 주변을 압도하는 아우라를 가진 여자였다. 놀라움이 진정되고 이성이 감정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몰아내는데 성공했을 때, 진우는 여자의 이름을 떠올렸다. '저 여자가 바로...' 국내 유일한 여성 S 급 차해인. 최종인과 함께 헌터스의 한축을 맡고 있는 최상위급 헌터였다. '다른 사람은 생각할 수 없다.' 이만한 기운을 가진 여자가 한국에 몇이나 될까? 그런 희귀성에 비해 차해인의 얼굴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았다. 그녀 스스로 방송에 노출되는 걸 상당히 꺼리는 까닭이었다. 그래서 진우도 오늘 처음 차해인의 얼굴을 봤다. '소문처럼 이상하게 생긴 것도 아닌데 왜 카메라를 싫어하는 거지?' 20 대 초반의 여성 거의 대부분이 카메라 앞에 서는 걸 즐기는데 말이다. 물론 휴대폰 쪽 얘기지만. 시선이 좀 노골적이었는지 차해인의 눈길이 진우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은신... 까지는 필요 없겠지?' 진우는 가볍게 기척을 숨겼고, 진우가 있던 곳 주변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차해인은 이내 고개를 갸웃거렸다. '뭐지? 방금 강한 기운이 느껴졌는데?' 착각이었을까? 처음엔 고건희 협회장이 현장에 들른 줄 알았다. 그런데 지금은 거짓말처럼 완벽하게 기운이 사라져 있었다. '협회장님같이 바쁘신 분이 예고도 없이 방문을 하실 리가 없지.' 착각의 대가는 컸다. 강한 기운의 흔적을 쫓느라 잠깐 감각을 곤두세웠던 탓에 악취가 평소보다 몇 배나 지독하게 코를 찔러 왔다. '윽.' 차해인은 늘 하던 대로 손수건을 꺼내 코를 틀어막고는 비틀비틀 헌터들 틈을 빠져나갔다. '생각보다 감각이 좋은 여자네.' 진우는 차해인이 멀어지는 걸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로써 공략팀 전부가 게이트를 빠져나왔다. 이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채굴팀의 팀장 배윤석이 팀원들을 향해 돌아섰다. 양손으로 짝 소리 나게 박수를 친 그가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자, 이제 우리 차례니까 다들 잘해 봅시다!" 작업 특성상 수거팀이 먼저 게이트로 들어간 후 채굴팀이 뒤를 이었다. 진우는 게이트 앞에서 멈춰 섰다. '...' 그렇게 가만히 서서 처음 보는 A 급 게이트의 위용을 말없이 감상하고 있을 때, 배윤석이 다가왔다. "성 씨, 뭐 해? 우리도 들어가야지." "예." 짧게 대답한 진우가 다른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게이트 안에 발을 내딛었다. 그러자 곧 익숙한 메시지가 떴다.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82 화 '던전 안에서 바람이 불다니?'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동굴 깊숙한 곳에서부터 불어오는 스산한 바람을 느낄 수 있었다. 갑자기 등골이 서늘해졌다. 동시에 진우는 바람의 정체가 무엇인지 깨달았다. '단순한 바람이 아니야.' 마력의 파장. A 급 던전의 보스가 내뿜는 강대한 마력이 실체화되어 진우의 몸에 닿은 것이다. S 급 던전이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이 마력의 주인은 진우가 실질적으로 만날 수 있는 마수들 중 가장 높은 레벨이라 할 수 있었다. 'A 급 던전의 보스...' 놈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진우는 털끝이 쭈뼛쭈뼛 솟아오를 정도의 오싹함에 몸서리치면서도, 한편으로는 미소를 감출 수가 없었다. 사냥꾼의 본능이라고 할까. 강한 맹수 앞이라면 총구를 들이대 보고 싶어지는 것이 사냥꾼, 즉 헌터의 마음 아닌가. 그때. 툭. 뒷사람이 진우와 어깨를 부딪쳤다. "에이, 앞에 빨리빨리 좀 갑시다." 이성구는 눈살을 찌푸리며 볼멘소리를 냈다. A 급 던전 안은 넓다. 앞사람을 피해 돌아갈 공간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앞에 가만히 서서 움직일 생각이 없어 보이는 신참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창피나 줘 볼까 하고 한번 부딪혀 본 건데... '이 새끼 뭐야. 지가 무슨 돌기둥이야?' 막상 부딪치고 나니 신참이 아니라 자신이 밀려났다. 짜증이 솟구칠 수밖에. 'E 급이란 놈이 뭐가 이렇게 단단해?' 그래 봐야 E 급이다. 자신은 C 급. C 급 헌터들 중에서도 실력이 떨어지는 편이라 채굴 작업에 동원되고 있긴 하지만, 그래도 E 급 앞에서 기가 죽어서야 쓰나? 그런데 신참은 미동도 없었다. 이성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어쭈, 이놈 봐라?' 슬슬 약이 오르기 시작한 이성구가 눈을 부릅뜨고 목에다 힘을 주었다. "이봐, 부딪혔으면 사과를 해야 할 거 아냐?" 슥. 진우가 돌아보았다. 흠칫 놀란 이성구는 한 발짝 물러섰다. '헉!' 진우의 눈에서 광채가 번득이는 듯했다. 숨이 콱 막혀 오는 기분을 느끼며 이성구가 당황하고 있을 때, 진우의 입이 열렸다. "죄송합니다." "아, 아니..." 떠듬거리던 이성구는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그럴 수도 있지... 요." 생각지도 못하게 존댓말까지 붙이게 된 이성구가 벌게진 얼굴을 푹 숙이고는 진우 옆을 빠르게 지나쳐갔다. "휴우-" 이성구는 신참과 거리가 좀 멀어지고 나서야 겨우 가슴을 쓸어내릴 수 있었다. '뭐야, 저 눈빛은? 거기다 왜 웃고 있는 건데?' 잠깐 눈이 마주쳤던 것뿐인데 몸이 뻣뻣하게 경직되어 목소리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눈을 내리깔지 않은 것은 최소한의 자존심이었다. '...저거 진짜 E 급 맞나?' 부딪혔을 때도 그렇고, 살벌한 시선도 그렇고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에라, 모르겠다. 상념을 떨치려는 듯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은 이성구는 바삐 걸음을 옮겼다. "이런." 순식간에 자신을 앞질러 가 버린 이성구를 보고 진우는 옆머리를 긁적거렸다. '보스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상태여서...' 그만 겁을 준 것처럼 되고 말았다. 수련이 부족한 거다, 수련이. 진우는 민감하게 반응했던 자신을 반성하며 앞서가는 채??팀원들의 뒤를 쫓아갔다. 합류는 금방이었다. 진우는 행렬의 끝에 붙어 팀원들과 보폭을 맞춰 걸었다. '내 속도로 걸으면 아무도 못 따라오니까.' 자신이 맞춰 줘야 했다. 그런데. 안으로 들어가면 들어갈수록 보스급 마수로부터 흘러나오는 마력의 파장이 커졌다. '감각 스탯이 많이 오르긴 올랐구나.' 던전의 가장 안쪽. 보스방에 있을 마수의 기운을 이렇게 떨어진 곳에서도 생생히 느낄 수 있다니. 덕분에 괜히 심장의 박동이 빨라졌다. '이래서야 작업에 집중할 수나 있을까?' 자문에 대답이라도 해 주려는 듯 앞쪽에서 우렁찬 기합 소리가 들려왔다. "으차! 으차!" 채굴팀보다 한발 먼저 던전으로 들어온 수거팀은 벌써 작업에 한창이었다. 거대한 마수의 사체를 밧줄로 묶어 끌고 가는 중이었다. "하나, 둘!" "여차!" 전투계열 헌터들의 완력이 워낙 좋다 보니 별다른 기구의 도움 없이도 작업이 척척 이뤄졌다. 진우는 상급 던전의 공략 과정을 하나씩 눈에 새겼다. '일단 공략팀이 앞장서 들어가 보스를 제외한 모든 마수들을 처치한다.' 그 뒤 수거팀이 마수들의 사체를 끌어내고, 마지막으로 채굴팀이 동굴 벽면에 있는 광석들을 캐낸다. 이익을 극대화하려면 어느 한 과정도 빠트릴 수 없었다. 마정석과 마석은 물론이고, 다양한 용도로 쓰이는 상급 마수의 사체 또한 큰돈이 되니까. '뼈, 가죽, 살 등등 상급 마수의 사체는 뭐 하나 버릴 게 없다지?' 그게 하급 던전에서 볼 수 있는 마수들과 상급 던전에서 나오는 마수들의 차이점이었다. 그렇게 던전 안에 돈이 될 만한 것들을 싹 다 긁어내고 나서. '보스를 처치하고 게이트를 닫는다.' 이 네 가지 과정이 오롯이 끝나야 상급 던전을 완벽히 클리어했다고 말할 수 있었다. 적어도 길드 입장에선 그랬다. 그런데. '저런 단순 노동이라면 내 병사들로도 충분하지 않을까?' 땀을 뻘뻘 쏟는 수거팀 헌터들을 지나쳐 가며, 진우는 문득 그런 생각을 떠올렸다. 실제로 업이 잘 된 그림자 병사들의 힘은 전원 C 급 이하로 구성된 수거팀 헌터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병사들을 나눠 한쪽은 사냥, 한쪽은 수거, 한쪽은 채굴을 담당하게 만든다면... '어쩌면 정말로 혼자서 상급 던전을 공략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네.' 진우는 흡족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여기 온 목적은 답사. 시간 내서 와 보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성 씨, 뭐 좋은 일이라도 있는겨?" 팀장이 옆에서 말을 붙여 왔다. 상급 던전 경험이 전혀 없을 E 급 헌터가 조용히 웃고 있으니 이유가 궁금했나 보다. "생각했던 것보다 마수들이 너무 큰 게 기가 막혀서요." 대충 얼버무린 진우의 대답에 만족했는지, 팀장은 기억을 더듬으며 맞장구를 쳐 주었다. "그런 거였어? 하기야 나도 처음 들어 왔을 때는 입이 쩍 벌어져서 다물어지지가 않았지." 말이 나온 김에 진우는 몇 가지를 물었다. "일반 마수는 다 제거했다고 해도 아직 여기 보스는 살아 있는 거 아닙니까?" "그렇지. 보스를 죽이면 게이트가 닫혀 버리니까." 수거와 채굴 작업을 모두 끝낼 때까지는 보스를 잡을 수 없다는 대답이었다. "만약 보스가 보스방을 뛰쳐나오면 어떻게 되는 거죠?" "그런 경우는 거의 없지만... 그렇게 되면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 전부 다 죽겠지." 당연하다면 당연한 소리였다. 던전을 나간 공격대는 보스 레이드까지 휴식을 취하다 올 거고, 채굴팀이나 수거팀 헌터들에게 A 급 던전 보스를 상대할 만한 힘은 없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던전 브레이크가 시작되기 전에는 보스가 거의 보스방에서만 머무른다는 것이 상식이었다. 그래서인지 팀장의 얼굴에도 별로 두려운 기색이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끔찍한 놈이 등 뒤에 있는데도 안 무서우세요?" "전혀." 배 팀장은 단호했다. "내가 헌터스에서 일한 3 년 동안 그런 사고는 단 한 번도 없었거든. 성 씨도 너무 걱정하지 마." 진우는 자신의 어깨를 툭 치며 씩 웃는 배 팀장을 보고서 잠깐이지만 부럽다는 생각을 했다. '때로는 모르는 게 약이라더니.' 가만히 있어도 보스의 마력 파장에 몸이 떨려 오는 수준인데. 아무래도 보스의 기운을 감지할 수 있는 사람은 여기서 자신 혼자뿐인 듯했다. "오, 여기서부터구만!" 배 팀장은 동굴 벽면에 나 있는 마석밭을 발견하고는 기뻐했다. 노련한 채굴팀 헌터들은 누가 시킬 새도 없이 차례대로 마석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툭, 툭. 짐을 내려놓고 곡괭이를 들었다. 진우도 마석밭 끄트머리에 가서 섰다. '이걸 그냥 내려치면 되는 건가?' 무조건 힘으로 내려쳤다가는 마석이고 곡괭이고 다 부서질 것 같다는 불안감이 앞섰다. '어떡한다?' 바로 작업을 시작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던 진우. 그의 눈에 배 팀장으로부터 베테랑 채굴팀원이라 불렸던 목진수의 모습이 들어왔다. 휘익! 콱! 휘익! 콱! 목진수는 리듬감 있게 마석을 캐내고 있었다. 그가 벽을 내리칠 때마다 투둑, 투둑 소리가 나며 마석이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과연...' 베테랑이라 불릴 만한 솜씨였다. 그는 주변 동료들보다 두 배 이상 빠른 속도를 보여 주고 있었다. 진우의 눈빛이 빛났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진우는 목진수의 자세와 호흡, 근육의 움직임 등을 배워 나갔다. 목진수의 효율적인 동작이 진우의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 재생되었다. '알겠다.' 감이 잡혔다. 진우는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마치 목진수가 거울에 비친 듯 비슷한 자세였다. 휘익! 콰각! 휘익! 콰각! 같은 동작이라도 진우의 힘은 목진수가 범접할 수 없는 수준. 진우가 벽면을 내려칠 때마다 마석들이 덩어리째 데굴데굴 떨어져 내렸다. 휘익! 콰각! 휘익! 콰각! 끝 쪽에서 들려오는 시원한 소리. 채굴팀 헌터들이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어... 어이." "왜?" "저기 좀 봐 봐." "헉!" "쟤 뭐야?" 채굴팀 헌터들이 하나둘 손을 멈추고 멍하니 진우를 바라보았다. 쉼 없이 움직이던 목진수의 손도 멈추었다. '...' 다들 할 말을 잃었다. 던전 광부일은 처음이라던 E 급 헌터가 숙련된 동작으로 마석밭을 박살 내고 있는 것 아닌가! "아니, 이 사람들아! 일하라고 불러왔더니 다들 이렇게 넋 놓고 있으면 어떡해!" 마석밭의 규모를 장부에 적어 내려가던 배 팀장이 채굴팀 전원의 태업에 놀라 달려왔다. "팀장님, 저것 좀 봐요." "뭘?" 배 팀장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의 눈이 커졌다. "헛!" 팀장도 마찬가지. 남들보다 세 배는 빠른 진우의 작업 속도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팀장님, 쟤 오늘이 처음이라고 안 했어요?" "...했었지." 진우의 정체를 궁금해하던 이성구가 불쑥 끼어들었다. "저 사람 E 급은 맞아요?" "당연히 자격증 확인 다 했지. 내가 초면인 헌터를 신분증도 안 보고 팀으로 받았을까 봐?" "그럼 저건 어떻게 된 겁니까?" "..." 묵묵히 진우를 지켜보던 배 팀장이 상기된 얼굴로 침을 꼴깍 삼켰다. "분명... 성 씨는 하늘이 내리신 광부인 거여." 어쩐지 면접을 볼 때부터 탄탄한 가슴근육이 눈에 확 들어오더라니. '내가 사람 하나는 잘 본다니까.' 배 팀장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갔다. *** 삐빅, 삐빅, 삐빅. 배 팀장의 손목시계에서 알람이 울렸다. 배 팀장은 손목을 들어 시계를 확인했다. '아이고, 시간이 벌써 이렇게...' 어느덧 점심시간이었다. "다들 밥 먹고 오자고." "옙!" 다들 장비를 놓고 손을 털었다. 팀원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나가는데도, 진우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자 배 팀장이 슬며시 다가가 물었다. "성 씨는 안 가?" "저는 생각이 없어서요." "그래도 밥 안 먹고 어떻게 일하려고 그래?" "괜찮습니다. 아침을 늦게 먹기도 했고."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같이 밥이라도 먹으면서 서로의 앞날에 대해 여러 가지 진지한 이야기들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강제로 끌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배 팀장은 아쉬워하며 게이트 쪽으로 돌아섰다. 그 순간 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진우는 멀어지는 팀원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이렇게 좋은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겨우 혼자 남게 되었다. 채굴팀도, 수거팀도 모두 던전을 빠져나갔다. 앞으로 약 1 시간의 자유. 던전 안쪽에 숨어있는 보스급 마수를 찾아갈 절호의 찬스였다. 진우는 곡괭이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보스방이 있는 방향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수의 기운이 진득하게 느껴졌다. '한번 보고 오기만 하자.' 뭘 어떻게 할 생각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냥 보스가 한번 보고 싶었다. 두근, 두근, 두근. 보스를 볼 수 있다는 생각에 벌써부터 가슴이 뛰었다. 진우는 떨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걸음을 옮겼다. 보스의 기운을 따라 동굴의 안쪽을 향해 걸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한참 걷다가 보니 곧 거대한 방 하나가 나왔다. 보스방이었다. 동굴 통로도 무지막지하게 넓었는데, 보스방은 그 이상으로 훨씬 더 컸다. 상급 던전은 다 이렇게들 스케일이 큰가? 하는 의문이 들었을 무렵. 보스를 발견하고서 이번 던전은 클 수밖에 없었겠구나, 자동으로 납득이 되었다. '저런 놈이 밖으로 나가려면...' 눈이 하나밖에 없는 거대한 인간형 마수가 제일 안쪽 구석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진우의 눈이 갖고 싶었던 장난감을 손에 넣은 어린아이처럼 빛났다. '거인형 마수.' 들어 본 적은 많았지만 실물을 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거인형 마수는 몸뚱이가 커서 사체를 옮기기 불가능하기 때문에 던전 브레이크 때를 제외하면 볼 기회가 전혀 없는 놈이었다. 그런 놈 앞에 서 있으니 가슴이 설 다. '강한 놈이다.' 털이 곤두설 정도니까. 하지만 어째서인지 잡기가 불가능하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지금의 나라면.' 충분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꼴깍. 이놈을 잡으면 경험치는 얼마나 떨어질까? 악마성에서 그 고생을 하고 일주일간 15 레벨 정도를 올렸다. 그런데 보스급 하나를 잡고 2, 3 레벨을 올릴 수 있다면... '이러면 안 되는데.' 안 된다고 되뇌면서도 진우의 두 손에는 어느새 '바루카의 단도'와 '나이트 킬러'가 소환되어 있었다. 거기다 해서는 안 되는 일을 앞에 두고 갈등하는 얼굴도 아니었다. 그냥 콱 질러 버려? 입가로 자그마한 흥분이 흘렀다. 그런데. 웃으며 고민하는 진우의 등 뒤에서 날 선 여성의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지금 거기서 뭐 하는 거예요?" = 83 화 순간 진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언제 왔지?' 보스에 정신이 팔려 누가 오는 줄도 몰랐다. '들켜 버렸네.' 진우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쩝. 하지만 목격자가 생긴 이상 더 이상 보스에게 눈독을 들일 수는 없는 일이었다. 헌터스가 이번 게이트의 공략 허가권을 샀으니, 던전의 보스 또한 헌터스의 재산이라 할 수 있었다. 거기다 보스를 잡으면 게이트가 닫혀 버리기에 헌터스 입장에서는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게 된다. '큰일 날 뻔했네.' 레벨업 욕심에 눈이 멀어 남의 것에 손을 댈 뻔했다. 겨우 정신을 차린 진우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사이, 목소리의 주인이 다가왔다. "뭐 하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진우는 민망한 듯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길을 잃어서 그만 여기까지 왔네요." "길을 잃었다고요?" 황당하다는 말투. 진우는 그제야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 이 여자는...?' 던전에 들어오기 전에 봤던 얼굴. S 급 여성 헌터 차해인이었다. 차해인은 천천히 거리를 좁혀 오며 진우의 양손을 살폈다. '분명 무기를 들고 있는 걸 봤는데?' 잘못 봤나? 그게 뭐가 됐든 어느새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차해인의 시선이 진우의 위아래를 훑었다. '안전모와 작업복... 우리 채굴팀 헌터인가?' 길을 잃었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어쩌다 그렇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보스방은 위험한 장소. 이유는 둘째치고 일단 이 남자를 돌려보내는 것이 우선이라고 차해인은 판단을 내렸다. "여긴 보스가 있는 곳입니다." 차해인은 늘 하던 대로 손수건으로 코를 틀어막고 진우 앞에 섰다. "어서 밖으로 나가세요. 어글이라도 튀면 던전 안에 있는 사람들 다 죽을 수도 있어요." "아, 죄송합니다." 다행히 연기가 먹힌 것 같다. 진우는 만족스런 얼굴로 차해인을 지나쳐 갔다. 그때. '어?' 차해인이 진우에게 고개를 돌렸다. 있을 수 없는 일. 눈을 동그랗게 뜬 차해인이 저도 모르게 진우를 불러 세웠다. "저기, 잠깐만요." "네?" "잠깐 저 좀 봐요." 이 여자가 왜 이러지? 도둑이 제 발 저린다고 진우는 차해인이 다가오는 게 달갑지 않았다. 하지만 차해인은 금방 진우 코앞까지 붙어 섰다. "왜... 그러시죠?" 진우가 떨떠름한 표정으로 물었지만, 차해인은 대꾸도 없이 진우의 근처에서 가볍게 숨을 들이마셨다. 코를 가리고 있던 손수건은 이미 치운 뒤였다. '뭐지?' 진우는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냄새는 왜 맡는 거야?' 당황하는 진우. 하지만 차해인의 당혹감은 진우보다 몇 배 더 컸다. '악취가... 안 나.' 악취가 나지 않는 헌터를 만난 것은 처음이었다. 차해인은 놀란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의 얼굴에 물음표가 떴다.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당신... 헌터 맞아요?" 말이 필요 있을까? 진우는 목에 걸고 있던 헌터 자격증을 내밀었다. 차해인은 헌터증을 받아 들고서 진우의 얼굴과 자격증의 사진을 번갈아 보았다. 'E 급... 성진우...' 등급이 너무 낮아서인가? 진우에게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아니, 좋은 냄새가 났다. 진우는 차해인의 손에서 자격증을 살짝 빼냈다. "저 가 봐도 되는 거죠?" "저기..." 차해인은 진우를 불렀으나 더 할 말도, 붙잡을 만한 구실도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닙니다. 조심해서 돌아가세요. 던전은 넓으니까요." "아, 예." 진우는 눈인사하고서 작업 현장 방향으로 돌아섰다. 그의 뒷모습은 금방 동굴 저편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차해인의 시선은 한참 동안 진우가 사라진 길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좋은 냄새가 났어.' *** 식사를 마친 채굴팀 헌터들이 하나둘 작업 현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를 쑤시며 걸어오던 배 팀장은 던전 안쪽에서 나오는 진우를 발견하고는 화들짝 놀랐다. "어, 어? 성 씨가 왜 그쪽에서 나와?" "아, 그게..." 진우는 잠깐 보스가 있는 방향을 돌아보았다. 'A 급 던전 보스가 어떻게 생겼는지 궁금해서 갔다 왔다고는 할 수 없겠지?' 진우의 시선이 다시 배 팀장으로 옮겨 갔다. "화장실을 찾다 보니 그만 길을 잃어서요." "아이고, 조심해야지! 던전 안은 거기가 거기 같아서 한 번 길 잃으면 찾아오기가 쉽지 않거든. 그런데 용케 잘 찾아왔네?" "오다가 차해인 헌터님을 만나서..." "아, 차 헌터님? 혹시나 보스가 뛰쳐나올까 봐 지키러 간 거야. 그 아가씨도 성 씨 못지않게 걱정이 많은 편이거든." 배 팀장은 호탕하게 껄껄 웃어 댔다. 아까 보스를 걱정하던 진우의 모습이 뇌리에 깊게 박힌 모양이었다. 진우가 씁쓸하게 웃었다. '팀장님은 보스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르니 이렇게 웃을 수 있는 거지.' 작업반 헌터들과 공격대 헌터들의 차이점이었다. 차해인은 마수가 얼마나 무서운 존재인지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남들이 신경 쓰지 않는 부분까지 대비하고 있는 것이리라.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선 그런 면이 또 있었네.' 보스가 뛰쳐나오면 위험해지는 건 공격대가 아니다. 공격대가 빠진 사이 작업하고 있는 인부들. 그 생면부지의 사람들을 위해 그녀는 달콤한 휴식을 반납하고 보스방 입구를 지키러 간 것이었다. '...대단한 여자.' 차해인에 대한 진우의 솔직한 감상이었다. 그때 문득 진우의 머릿속에 그녀의 독특한 버릇이 떠올랐다. '왜 손수건으로 코를 가리고 다니는 걸까?' 그러고 보니 방금 전 한순간을 빼놓고는 항상 손수건을 놓지 않았다. "팀장님." "응?" 귀찮아할 만도 한데, 배 팀장은 진우가 부를 때마다 사근사근 친절히 대했다. '아까 작업할 때 반응이 좋더니만.' 역시 일은 잘하고 볼 일. 덕분에 진우는 편하게 이것저것 물을 수 있었다. 오히려 배 팀장이 독촉해왔다. "성 씨, 사람을 불러 놓고 왜 말이 없어?" 진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다름이 아니고요... 혹시 차해인 헌터가 왜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는지 아시나요?" "아? 그거? 차 헌터가 유별나서 그렇지." "유별나다고요?" 무슨 뜻일까? 되묻지 않아도 배 팀장이 친절하게 설명해 주었다. "차 헌터는 헌터들한테서만 나는 냄새를 맡을 수 있는데, 그게 그렇게 고약하게 느껴진다나 봐." "헌터들의 냄새를요?" "특이체질인가 뭔가 하는 이야기가 있더라고." 특이체질이라. 진우도 그거 비슷한 게 있기는 했다. 뛰어난 청력. 원래부터 귀가 나쁜 편은 아니었지만 각성자가 되고 나서는 더욱더 좋아졌다. '차해인의 후각도 그 연장 선상에 있는 거겠지.' 그래서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었다. "참 유별나지?" 진우가 집중해서 귀 기울이는 모습이 마음에 들었는지, 배 팀장은 설명을 이어 갔다. "그 냄새 때문에 헌터들이 옆에 있을 때는 숨쉬기가 힘들다고 하더구먼." "..." 그래서였나? '나보고 헌터냐고 물었던 건.' 다른 헌터들과 달리 내게서는 냄새가 나지 않았기 때문에? 전에 레드 게이트에서 만난 백귀 대장도 그런 종류의 얘기를 하긴 했었다. -우리의 머릿속엔 끊임없이 목소리가 들려온다. 인간을 죽이라고. 그런데 네 앞에서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군. 그때 녀석이 말했던 것과 비슷한 맥락일까? 헌터 특유의 냄새도 없고, 죽이라는 목소리도 들리지 않고. '내가 플레이어이기 때문에...' 시스템의 혜택을 받는 유일한 존재. 플레이어란 대체 무엇일까? 잠깐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의문을 떠올렸던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차피 지금은 답이 안 나오는 문제인데.' 진우는 머릿속을 비웠다. 고민으로 해결이 안 되는 문제를 머리에 담고 있어 봐야 지치기만 할 뿐이다. 콱! 콱! 그때 동료들이 작업을 재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우는 다시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A 급 보스... 잡아보고 싶었는데.' 그때 차해인이 오지 않았다면 어떻게 됐을까? 그게 못내 아쉬웠다. *** 진우의 눈부신 활약 덕에 채굴팀 작업은 저녁 시간이 되기 전에 끝났다. 팀장 말로는 예정보다 2 시간이나 빨랐다나. 그쯤 되니 채굴팀 동료들의 눈빛도 달라졌다. "수고했어, 성 씨!" "잘하던데?" "난 마석 떨어지는 거 보고 어디서 굴삭기라도 가져온 줄 알았다니까." 진우를 둘러싼 헌터들이 한마디씩 칭찬을 늘어놓았다. 게이트에 들어오기 전 부딪혔던 쌀쌀맞은 눈빛들은 온데간데없었다. 진우도 기분 나쁜 얼굴은 아니었다. 던전 광부로서의 경험도 흥미로웠고, A 급 던전에 온 목적도 달성했으니까. "이제 나가자고." "옙!" "갑시다!" 배 팀장의 지시에 따라 채굴팀이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하나, 둘." "여차!" 아직도 작업에 시달리고 있는 수거팀 헌터들을 뒤로 하고, 게이트를 빠져나온 채굴팀은 환복한 뒤 다시 한자리에 모였다. 정규직원인 다른 팀원들과 달리 진우는 일당이 현금으로 바로 나왔다. "여기 성 씨 거." "감사합니다." 배 팀장은 일당이 담긴 봉투를 건네주며 슬그머니 물었다. "우리 지금 회식하러 갈 건데, 성 씨도 같이 갈 텨?" 말투는 가벼웠지만 배 팀장의 눈빛은 진지했다. '뭔가 하실 말씀이 있는 거 같긴 한데...' 간절함이 느껴졌다. 그러나 진우는 정중히 사양했다. "죄송합니다." "음... 그래?" 배 팀장이 턱을 긁적였다. '이런 건 술이 좀 들어가고 나서 해야 하는 이야기지만...' 그는 작전을 급히 변경했다. "내가 이 일을 몇 해나 해 보면서 많은 사람을 만났는데 말이여." "네." "자네 같은 사람은 정말 처음이더만. 자네는 광부가 될 소질이 아주 타고났어." 배 팀장은 진우가 어지간히도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하하... 이것 참.' 진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못한 채 어색하게 웃음을 흘렸다. 그 미소를 좋은 조심이라고 판단한 배 팀장이 자신감 있게 본론을 꺼냈다. "내가 웬만해선 이런 얘기까지는 잘 안 하는데... 자네 내 밑에서 일해 볼 생각 없어? 내가 섭섭지 않게 챙겨 줄게." 성진우라는 청년. 광부일 첫날부터 웬만한 베테랑 광부보다 서너 배는 더 많은 작업량을 해치우는 걸 보여 줬다. 이런 보물 같은 인재를 잡지 못한다면 그야말로 팀장 자격 실격이 아닌가? 담당자를 설득해서 성과급을 따로 지불하는 일이 있더라도 성진우를 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하지만. 진우는 단호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제가 준비하는 일이 있어서요." 진우의 한마디에 배 팀장은 나라를 잃은 듯 시무룩한 얼굴이 되었다. "그... 그래?" 진우는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재미있는 분이시네.' 감정이 이렇게까지 표정에 드러나다니. 아마도 배 팀장님은 자신이 E 등급에 숨어 있는 보석을 발견했다고 생각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고민하던 배 팀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내일은 어때? 내일은 나와줄 수 있어?" "내일은, 흠..." 사실 내일까지 한가하긴 했다. 모레가 재측정이니. 그런데 또 광부로 지원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대략적인 공략 과정은 파악했고, A 급 보스 구경도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그때. '잠깐만.' 거절하려고 입을 열었던 진우의 뇌리에 빠르게 스쳐 가는 의문이 있었다. "그럼 내일도 헌터스의 레이드가 있는 겁니까?" "있지. 그것도 A 급 게이트야." "그게 가능합니까? 오늘 레이드가 끝났는데." 레이드를 하고 난 공격대는 일주일 정도는 쉬어 주는 게 보통이다. '이번 레이드는 어제 오후부터 시작됐다고 했다.' 그렇다면 헌터스의 정예들은 어제와 오늘, 이틀 연속으로 레이드를 한 셈이다. 아마 수거 작업 후 보스를 처치하고 나면 새벽이 될 터. 내일 레이드를 한다는 말이 선뜻 이해가 가질 않았다. 진우가 관심을 보이자 배 팀장도 흥이 났다. "내일은 A 공략팀 대신 B 공략팀이 나설 거거든." B 공략팀? 설마 A 급 던전을 2 군으로 클리어 하겠다는 건가? "이게 바로 헌터스 길드의 저력이지. 대한민국에 A 급 게이트를 두 팀으로 나눠서 공략할 수 있는 길드는 헌터스 뿐인걸?" 배 팀장은 자랑스럽게 말했다. "헌터스의 레이드는 계속 이런 식이었습니까?" "아니, 아니. 평소에는 팀을 나눌 만한 일이 없었지. 그런데 이번에는 일정이 겹쳤나 봐." 헌터스가 담당하는 구역에 A 급 게이트가 동시에 나타나는 바람에, 두 개 게이트의 허가를 동시에 따내느라 최종인 사장이 진땀을 뺐다고 한다. '아, 어제 협회에서 최 대표를 만났던 건...' 최종인같이 바쁜 사람이 아무 이유도 없이 협회를 찾았을 리 없지.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2 군으로만 레이드를 시도하는 건 처음이란 말씀이죠?" "그렇지. 그런데 헌터스의 2 군은 2 군이 아니야. 어지간한 대형 길드 1 군보다 뛰어나다고." "그래도 오늘보다는 훨씬 위험하겠죠?" 배 팀장은 말문이 막혔다. 당연한 이야기였다. 오늘 레이드는 S 급만 두 명이 참가했다. 반면 내일은 A 등급 이하로만 공략을 진행한다. 내일 공략할 게이트는 오늘 것보다 규모가 작다고 듣긴 했지만, 그래도 S 급 둘이 빠진다는 건 큰 타격이었다. S 급 공격대가 근처에 있는 상황에서도 보스급 마수를 걱정하던 성 씨인데.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수도 없고.' 내일도 같이 작업하며 마음을 돌려보려고 했던 배 팀장은 이제 다 틀렸다는 생각에 아쉬운 낯빛을 했다. "훨씬 더 위험한 셈이지. 잘못하다간 레이드 자체를 실패할 수도 있고." 그러자 진우의 눈빛이 변했다. = 84 화 고민은 길지 않았다. 진우가 말했다. "알겠습니다." "성 씨 생각이 정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내일 어디로 가면 되죠?" "잉?" 뜻밖의 대답에 배 팀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말을 제대로 한 것이 맞나?' 분명 오늘보다 내일이 더 위험하다고 했을 텐데. 이야기를 들은 성 씨 표정이 그다지 좋지가 않아서 깔끔하게 단념하려던 차였다. 한데 이게 웬일. 성 씨 덕분에 내일 다시 보충 멤버를 구해야 하는 수고를 덜게 생겼다. '어디 그뿐이야?' 혼자서 네다섯 사람 몫을 뚝딱 해치우는 성 씨다. 그것도 첫날에. 채굴팀의 에이스, 목진수를 감탄시킨 그의 작업 속도를 목격했을 때의 충격은 정말이지... 진우가 오겠다는 소리에 배 팀장은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해졌다. "성 씨, 잘 생각했어!" 배 팀장이 콧수염을 씰룩거리며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하룻밤 사이에 진우의 마음이 바뀌기라도 할까 봐 이례적인 조건을 제시했다. "내가 담당자랑 상의해서 성 씨 내일 일당은 특별히 두 배로 달라고 할게." "그래도 괜찮으세요?" "암. 내가 성 씨한테 그 정도도 못 해 줄까 봐?" 배 팀장은 자신의 가슴을 팡팡 두드렸다. "성 씨는 걱정 말고 내일 나오기만 해." 아무렴. 4, 5 인분을 해내는 일꾼에게 그깟 일당 두 배가 아까울까? 자신이 사장이었다면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아니 앞날을 생각해서 그 이상도 줄 수 있었다. '내가 헌터스 사장이 아닌 게 아쉬운 날도 있네.' 배 팀장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때 진우가 물었다. "참, 내일 저녁에 약속이 있는데 시간이 맞을까요?" 오늘 아침 유진호에게서 전화를 받았다. -형님, 제가 한번 찾아봬도 되겠습니까? 초췌한 목소리. '이 녀석, 어제까지만 해도 일이 잘됐다고 좋아하더니...?' 진우는 적잖이 놀랐다. 하지만 하필 광부 모집에 지원하고 난 뒤였던 터라 약속은 내일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배 팀장은 껄껄 웃었다. "듣자 하니 내일 던전은 오늘 것보다 규모가 작다고 하드만. 6 시 전까지는 충분할 거여." 오늘도 5 시에 작업이 끝나지 않았는가. 내일은 더 빠르면 빨랐지 늦어지진 않을 듯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그려. 조심히 들어가." 돌아서는 진우를 보면서 배 팀장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결혼을 했으면 저만한 아들이 있을 것인데.' 뒷모습도 어쩜 저리 듬직한지. 세상에 성 씨 같은 신입들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배 팀장의 얼굴에서 연신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웃고 있는 사람은 배 팀장만이 아니었다.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진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내일 공격대가 실수하길 바라는 건 아니지만...' 만약 문제가 생길 경우 자신의 존재가 공격대나 채굴팀에게 큰 도움이 될 수 있었다. 달리 마음을 바꾼 것이 아니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사실 A 급 게이트는 아래 등급 게이트들보다 공략 성공률이 높은 편이다. '일단 협회에서 아무 길드에게나 허가를 내주지 않고.' 기회를 얻은 길드도 전력을 다해 덤비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헌터스 길드는 내일 공략에 전력을 다하지 않는다.' 하나의 정예 공격대를 두 개로 나눠 두 개의 A 급 게이트를 노리다니. 업계 1 위다운 자신감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위험천만한 짓이기도 했다. '어느 쪽이라도 내가 손해 볼 일은 없어.' 레이드가 무사히 끝나면 최고의 결과. 반대로 사고가 터지면 헌터스를 도와주는 대신 상급 마수들을 차지한다. '좋아.' 진우는 미소를 머금은 채로 버스에 올랐다. *** 늦은 밤. 차해인은 이리저리 몸을 뒤척였다. '왜 그 사람만 다른 걸까?' 보스방에서 만났던 남자 생각에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능력을 각성하고 2 년 동안 많은 헌터들을 만나 왔지만 한 번도 예외는 없었다. 헌터들, 정확히는 각성자들에게 다가가면 불쾌한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처음엔 병인가 싶어 많은 의사들을 만났다. 하지만 차도가 없었다. 그때 상담을 나눴던 한 의사는 조심스럽게 자신의 견해를 털어놓았다. -혹시 차 헌터님은 후각으로 마력을 느낄 수 있는 게 아닐까요? 설득력 있는 추측이었다. 등급이 높은 헌터일수록 악취는 심했고, 등급이 낮은 헌터일수록 악취가 덜했다. 당연히 일반인에게선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그런데. '...좋은 냄새가 났던 건 그 사람이 처음이야.' 오늘 일을 떠올리자 갑자기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져서 레이드가 끝나자마자 협회 사이트에 들러 남자의 신원을 조회했었다. E 급. 성진우. 헌터 자격증에서 봤던 남자의 정보가 그대로 나와 있었다. '연락처가 없네...' 연락처를 알아내서 뭘 어떻게 할 생각이었을까? 협회 사이트에서 더 이상 알아낼 정보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도 모르게 영입담당부 부장 조명기의 번호를 누르고 말았다. -아니, 차 헌터님이 이 시간에 무슨 일이세요? 그때 시간이 벌써 새벽 1 시. 발신인이 대한민국의 유일한 여성 S 급 헌터이자, 자신이 속한 헌터스 길드의 부사장이 아니었다면 절대 받지 않았을 전화였다. 잠이 덜 깬 조명기의 목소리에 괜한 짓을 했나 하는 후회도 잠시. 차해인은 어렵게 입술을 뗐다. "성진우 헌터에 대해 좀 알아봐 줄 수 있나요?" -예? 설마 협회 소속이었던 E 급 헌터 말씀이십니까? 차해인은 깜짝 놀랐다. 조명기는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에서 영입부장을 맡고 있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어떻게 E 급 헌터의 이름을 아는 걸까? "아는 사람인가요?" -아, 그게... 어제 최 대표님께서 같은 부탁을 하셨거든요. 그 사람에 대한 정보를 알아보라고요. "최 대표님이요?" -네. "무슨 일인지 아시나요?" -글쎄요. 저도 그것까진... "...그래서 어떻게 됐나요?" 수화기 너머에서 한숨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저도 알아본다고 애를 써 봤는데, 협회에서 락을 걸어 놨더라고요. 최상급 헌터도 아니고 일반 헌터의 정보를 막아 놓은 경우는 저도 처음 봅니다. "아..." -그런데 차 헌터님은 무슨 일로 그 사람을 찾으시는 겁니까? 제가 도와 드릴 일이 있을까요? "아니에요, 늦은 시간에 죄송했습니다." 딸깍. 그게 3 시간 전의 대화였다.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 용기를 냈는데, 그랬다가 오히려 궁금한 점만 더 늘었다. 헌터스의 대표가 정체를 알고 싶어 하고, 협회가 정보를 숨기려 드는 E 급 헌터라. '분명 뭔가 있어.' 아니, 제발 뭔가가 있었으면... 간절히 바랐다. 어쩌면 2 년 전, 능력을 각성했던 21 살부터 지금까지 줄곧 자신을 괴롭혀 온 이 특이체질의 비밀을 풀어 줄 단서가 될지도 모르는 사람이니까. '그 사람,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혹시 영영 다시 만나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막연한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나 다행히 그때 차해인은 성진우의 안전모를 떠올렸다. 그의 안전모와 작업복에 헌터스 길드의 마크가 찍혀 있었다는 사실이 기억났다. '그러고 보니 채굴팀에 있었지.' 본인이 속한 A 공략팀과 달리 채굴팀은 오늘도 작업이 있었다. 만약 성진우가 아직도 채굴팀을 떠나지 않았다면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몰랐다. '한번 가 보자.' 길드의 부사장인 자신이 레이드 현장을 방문하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자연스럽게 가서 그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만 보고 오는 거야.' 어째서일까? 그 수상한 헌터를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 '그러려면 좀 자 둬야 해.' 오늘의 일정을 위해 차해인은 감기지 않는 눈을 억지로 붙였다. *** 동도 트기 전. 진우는 새벽같이 약속 장소로 출발했다. 레이드 도중 합류해서 여유가 있었던 어제와 다른 점이었다. '괜한 걱정이었나?' 너무 일찍 나온 게 아닐까 걱정했는데. 게이트 앞에는 이미 많은 헌터들이 도착해 있었다. "어어? 성 씨! 성 씨!" 가장 먼저 배윤석 팀장이 알은척 했다. "성 씨 왔네." "여어, 성 씨!" 다른 헌터들도 어제와 다르게 눈인사를 보내거나 가슴께까지 손을 들어 진우를 반겼다. 한 사람 한 사람 일손이 중요한 일이다 보니 솜씨 좋은 동료는 언제든 환영이었다. 채굴팀 헌터들의 표정에서 반가움이 드러났다. '뭔가... 어색하네.' E 급 헌터가 되고 나서 항상 박대만 받아오다가 처음으로 환대를 받으니 얼떨떨했다. 그래도 그들의 솔직한 반응이 기분 나쁘지는 않았다. "..." 진우는 말없이 고개를 숙여서 인사에 답했다. "하나, 둘, 서이." 팀원들의 수를 헤아려 보던 배 팀장이 쪽지에 숫자를 적었다. "열여덟, 열아홉. 거진 다 왔네." 이만하면 충분했다. 뭐, 오늘 같은 날은 한두 사람쯤 빠져도 괜찮았다. '에이스가 둘이나 있으니까.' 목진수, 성진우와 눈이 마주친 배 팀장이 배시시 웃자 목진수는 시선을 피했고, 성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때. "저기 배 팀장님." "아이, 깜짝이야." 갑자기 옆에서 흘러나온 목소리에 배 팀장이 어깨를 움찔하고 말았다. 기척 없이 움직일 수 있다는 것은 실력이 뛰어나단 증거. 아니나 다를까. 배 팀장의 원망스러운 시선을 받고 있는 이는 이번 공격대의 리더 손기훈이었다. "아이고- 간 떨어지겠습니다, 손 헌터님." "죄송합니다. 던전에서 하는 버릇이 습관이 돼서 그만." 겸연쩍게 웃는 손기훈. 손기훈 뒤에서 수거팀 팀장이 불쑥 튀어나왔다. "영감이 주책은..." "얼레? 자네까지? 채굴팀 모인 데 무슨 일이여?" "무슨 일이긴 무슨 일이야. 볼일이 있으니까 왔지." 배 팀장은 의아한 눈빛으로 손기훈을 바라보았다. 손기훈이 채굴팀 헌터들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저희 짐을 들어 주실 분이 안 와서요. 아무래도 채굴팀 한 분을 빌려야겠습니다." "잉?" 배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힘 좋고 짐 잘 나르는 수거팀이 있는데 왜 우리 팀에서...?"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수거팀 팀장이 발끈했다. "어제 우리 애들 저녁도 못 먹고 3 시간 내내 잔업해서 겨우 작업 끝냈어. 그런데 이제는 짐꾼까지 뽑아 가라고?" 어제 수거팀이 저녁도 못 먹고 잔업을 해야 했던 이유는 하나. 채굴팀 작업이 너무 빨리 끝났기 때문이다. '허긴 평소 같았으면 7 시까진 해야 했을 일을 성 씨 덕에 5 시 좀 넘어서 끝내 버렸으니...' 수거팀 팀장이 도끼눈을 뜨고 목에 핏대를 세우자 배 팀장은 할 말이 없어졌다. 설명은 이쯤 하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손기훈이 채굴팀 헌터들에게 물었다. "혹시 공격대와 같이 가실 분 있습니까? 위험수당은 레이드가 끝나는 즉시 추가로 드리겠습니다." "..." 손기훈이 애타는 눈빛을 이리저리 보내 봤지만 아무도 나서려는 사람은 없었다. 다들 발끝을 보거나 하늘을 바라보며 시선을 피했다. 당연히 그럴 수밖에. '돈 몇 푼에 목숨을 걸 일 있나?' '때려 죽어도 못하지...' 채굴팀 헌터들은 제일 높은 등급이 C 급. 대다수가 D 급이었다. 심지어 일부는 E 급도 있었다. 그런데 지금 손기훈이 데려가려는 곳은 최상위로 분류되는 A 급 던전이었다. B 급 던전이라도 해도 갈까 말까한데 무려 A 급이라니? 스쳐도 죽는다. 아니, 발만 한번 헛디뎌도 목숨을 잃는다. 하급 헌터들이 감당할 수 있는 장소가 아니었다. 짐꾼이 하는 일이라고 해 봐야 공격대 멤버들의 짐을 들어 주는 게 다였지만... 채굴 작업에 비해 너무 위험했다. "아무도... 안 계십니까?" 손기훈의 표정이 점점 난처해졌다. 다시 짐꾼을 구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까딱하다가는 반나절에서 한나절이나, 운 없으면 하루를 그냥 날릴 가능성도 있었다. '이거 큰일인데.' 그러다 한 명의 헌터와 눈이 마주쳤다. '어?' 옆의 헌터들과 달리 그는 자신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진우였다. '흠...' 손기훈이 자신을 바라보는 동안 진우도 손기훈의 면면을 찬찬히 살폈다. '탱커치고는 샤프한데?' 리더는 대개 탱커가 맡는 것이 상식. 손기훈은 여타 랭커들에 비해 호리호리한 체격이었다. 키도 훤칠하게 커서 헌터라기보다는 농구 선수에 가까운 이미지였다. '...' 손기훈을 응시하던 진우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갔다. "후아-" 그제야 손기훈이 참았던 숨을 토해 냈다. 왜일까? 방금 숨을 안 쉬고 있다는 걸 잊어버렸을 정도로 몸이 경직되어 있었다. 영문 모를 일이었다. '내가 리더를 맡는 첫 레이드라서 너무 긴장했나?' 항상 부탱커로만 레이드에 참여해왔다. 그래서 오늘 기회는 그에게 더 특별했다. 이런 날 실수를 할 수는 없지. 기역 자로 엎드려서 가쁘게 숨을 내뱉고 들이마시던 손기훈이 상체를 들었다. 웅성웅성. 자신의 추태 때문인지 주위가 소란스러웠다. 그러나 곧 자신 때문이 아니란 사실을 깨달을 수 있었다. 채굴팀 헌터들 쪽으로 돌아간 손기훈의 시야에 하늘로 향한 손 하나가 들어왔다. 애타게 기다리고 있던 짐꾼 지원자였다. 손기훈의 표정이 밝아졌다. 진우가 한 걸음 앞으로 나서자 모두의 시선이 진우에게 모였다. "제가 하겠습니다." = 85 화 E 급 헌터가 A 급 던전에 들어가겠다니! 아주 난리가 났다. "상급 마수들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있는데 거길 들어가려고?" "성 씨, 대체 어쩌려고 그래?" "아직 앞날이 창창한 사람이 그렇게 돈 몇 푼에 목숨을 걸면 못 써!" 채굴팀 팀원들이 우르르 진우에게 몰려왔다. 배 팀장은 손기훈에게 설명했다. "아이고, 저 친구가 어제 일을 처음 시작해서 아무것도 모르고 손을 들었나 봅니다." "저분 랭크가 어떻게 됩니까?" "그게..." 진우 쪽을 살짝 돌아본 배 팀장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E 등급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등급이 너무 낮은데 다른 헌터를 데려가시죠. 저 친구를 데려가는 건 너무 위험합니다." 손기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저 사람이 E 등급이라고...?' 아까 눈이 마주쳤던 남자. 확실히 그에게서 남다르다고 할 만한 마력이 감지된다거나 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뭐라고 할까?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날카롭고 잘 정돈된 기운 같은 것이 느껴졌다. 'E 급은 아닌 거 같은데.' 암만 봐도 최하급 헌터로는 보이지 않았다. 물론 배 팀장이 거짓말할 이유는 없지만 적어도 자신이 보기에는 그랬다. '그리고 짐꾼 등급이 뭐 그리 중요하겠어?' 짐꾼은 짐만 잘 들면 된다. 공격대 말미에 위치한 짐꾼이 위험할 정도의 상황이라면 이미 그 레이드는 완전히 실패했다고 봐야 한다. 그렇게 되면 A 급도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데, 짐꾼 등급이 C 급이건 E 급이건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죽는 건 다 똑같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이렇게 고민하는 시간도 아까워졌다. 아직 레이드는 시작도 못했는데 너무 오래 지체했다. 손기훈은 진우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뇨, 저 사람으로 할게요." *** "무겁지는 않습니까?" 손기훈이 물었다.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등에 멘 짐에는 공격대가 쓸 여분의 옷이나 무기, 방어구 등이 잔뜩 들어 있었다. 부피는 상당했지만 정말로 무겁지는 않았다. 근력 스탯의 힘이었다. '무리하는 거 같이 보이지는 않네.' 진우의 안색을 살피던 손기훈이 게이트 쪽으로 돌아섰다. 진우도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는 어제 봤던 것만큼이나 거대한 게이트가 떠 있었다. '아니, 이쪽이 좀 더 큰가?' 그래도 마력량은 오늘 게이트가 어제보다 더 적다고 한다. 공략 난이도는 게이트의 크기가 아니라 마력량으로 결정되기 때문에 2 군이 이번 게이트를 맡게 되었으리라. '진짜... 흘러나오는 마력은 어제에 비해서 턱없이 적네.' 게이트 앞에 서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협회의 측정 결과가 틀리진 않은 듯했다. 그런데 왜일까? 전에 레드 게이트 앞에 섰을 때처럼 묘하게 불길한 느낌이 스쳐 갔다. '...기우겠지?' 손기훈이 지시를 내렸다. "들어가죠." 게이트 앞에서 잠시 대기했던 공격대가 지시에 따라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헌터들이 하나둘 던전 안으로 들어갔다. '...' 게이트를 올려다보던 진우도 그들을 따라 들어갔다.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던전 안은 평범했다. 묘한 느낌에 긴장하고 있던 진우는 어제보다 훨씬 작은 규모의 통로를 보고 한숨을 놓았다. '휴.' 다행히 다른 세계로 이동되지도 않았다. 하기야 레드 게이트에 발을 들여도 클리어가 가능한 수준의 멤버들이다. A 급 11 명, B 급 6 명. 헌터스가 아니라 다른 길드였다면 절대 2 군으로 분류되지 않을 구성원들이었다. 진우는 피식 웃었다. '공격대 일원으로 낀 것도 아닌데 너무 신경 쓰지 말자.' 어제와 오늘. 굳이 따지자면 놀러 온 것에 가까웠다. 오늘은 좀 더 구경거리가 늘었을 뿐. 예민하게 굴 필요가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이 좀 편해졌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옆에서 치유계열의 여성 헌터가 말을 걸어왔다. 나이는 20 대 후반쯤?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있으니 긴장감을 좀 풀어 주고 싶은 모양이었다. "기훈 오빠, 아니 리더님을 비롯해서 여기 계신 분들은 진짜 다 쟁쟁한 헌터분들이시거든요. 저만 빼고." 싱긋 웃는 힐러. 처음부터 공포심 같은 건 없었지만, 여자 헌터의 태평한 얼굴을 보고 있는 동안 바람 새는 풍선처럼 긴장감이 빠져나갔다. 진우는 실소를 머금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예." 성과에 만족했는지 힐러는 뿌듯한 얼굴이 되었다. 마침 입구 근처에 마수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선두가 출발 사인을 내렸다. "이동." 진우와 힐러도 공격대의 보조에 맞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주변을 경계하며 이동하는 바람에 속도는 느렸다. "무거우시면 제가 좀 도와드릴까요?" 진우의 짐을 힐끔거리던 힐러가 물어 왔다. 진우는 말없이 왼손에 들고 있던 물통을 건넸다. "꺅!" 휘청거리는 힐러의 손에서 잽싸게 물통을 낚아챘다. 급정지한 공격대 전원이 힐러를 응시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힐러는 이쪽저쪽으로 연거푸 고개를 숙여야 했다. 당연히 그 뒤부터 도와준다는 소리는 일절 들리지 않았다. 따가운 눈빛은 덤. 진우는 큭큭 웃음을 삼키며 모른 척 걸었다. 던전에서 오랜만에 웃어 보는 것 같았다. '조금만 한눈을 팔아도 금방 위험해지니까.' 요즘 들어서 특히. 악마성 상층의 난이도는 지금 돌이켜 봐도 몸서리쳐졌다. 그런데 오늘은 다르다. 가끔은 이렇게 제삼자로서 레이드에 끼는 것도 괜찮은 느낌이었다. 그때. 진우의 걸음이 멈췄다. 진우보다 한발 늦게 공격대 헌터들도 이변을 알아차렸다. "옵니다!" 손기훈의 명령이 떨어지기도 전에 공격대 헌터들 전부가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그야말로 눈 깜짝할 사이. 진우는 감탄했다. '이게 상급 헌터들의 레이드...' 그동안 봐 왔던 어중이떠중이 공격대들과는 급이 달랐다. 어수룩해 보이던 여힐러의 손에서도 벌써 맑고 투명한 빛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내가 나설 차례는 없겠네.' 진우는 안심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어쨌든 마수가 도착했다. 짐승? 개? 손기훈의 눈이 가늘어졌다. 다다다다다다. 하이에나와 흡사한 생김새의 마수들이 떼 지어 몰려왔다. 크기가 중형차 한 대만 한 놈들이었다. 손기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던전 자칼?' 가까워지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던전 자칼이었다. 방패를 앞세우고 있던 손기훈은 도발 스킬도 쓰지 않고 방어 자세를 풀었다. 그리고 자신의 목을 노리고 뛰어오른 던전 자칼을 방패로 내려찍었다. "캐갱!" "뭐야?" "던전 자칼이야?" 잔뜩 긴장하고 있던 다른 팀원들도 고개를 갸웃거리며 움츠리고 있던 몸을 폈다. 곧 자칼들의 단말마가 동굴 안에 울려 퍼졌다. "키잉!" "캥!" "캐갱!" 자칼들은 금방 정리됐다. 십여 마리가 넘던 자칼들이 순식간에 사체로 변했다. 헌터들은 손을 탁탁 털면서 의아해했다. "뭐지?" "나 캐스팅한 마법 쓸 시간도 없이 끝났어." "왜 던전 자칼이 A 급 던전에서 나와?" "그러니까." "협회 놈들 또 삽질한 거 아니야?" 목소리가 높아졌다. 원래 던전에서는 큰 소리를 내지 않는 것이 원칙. 하지만 그런 기본적인 것도 잊어 버릴 만큼 던전 자칼의 등장은 충격적이었다. "흠..." 자칼들의 사체를 들여다보던 손기훈이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왜 C 급 던전에서나 나오는 마수가 여기서?' 손기훈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다들 비슷한 표정들이었다. 그런데 단 한 사람. 진우만이 심각한 눈빛으로 자칼의 사체를 응시하고 있었다. '평범한 자칼이 아니다.' 진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자칼들의 목 주변에 털이 눌린 자국이 선명했다. 어딘가에 묶여 있었다는 증거였다. '이 녀석들을 기르던 놈들이 따로 있다는 이야기...' 지성을 가진 마수라. 진우는 레드 게이트에서 만났던 백귀들을 떠올렸다. 지성을 가진 마수들은 어떤 종족이든 상대하기가 쉽지 않다고 알려져 있다. '어쩌면... 내 예감이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좋은 징조는 아니었다. "뭘 그리 심각하게 봐요?" 여힐러가 진우처럼 자칼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쉿!" 진우가 검지를 들었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동굴 안쪽에서 발맞춰 걷는 소리가 들려왔다. '진짜들이 온다.' 진우가 몸을 일으켰다. 헌터들도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눈치챘다. "맙소사..." "저... 전투 준비!" 손기훈이 억지로 목소리를 쥐어짜냈다. 드디어 동굴의 어둠 저편에서 적들의 윤곽이 서서히 드러났다. 헌터들의 눈이 커졌다. "하이오크?" "아니, 왜 하이오크가?" 잘 훈련된 것으로 보이는 하이오크 전사들이 열을 맞춰 서 있었다. 숫자는 스물둘. 그냥 하이오크도 아니고 하이오크 전사 스물두 마리라면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뭔가... 뭔가 잘못됐어." 누군가 중얼거렸다. 하급 마수 다음엔 느닷없이 상급 마수들 중에서도 강하기로 이름난 마수들이 나오다니. 척! 척! 하이오크들의 긴 창이 헌터들을 향했다. '헌터들이나 하이오크들이나 기세는 비슷하다.' 진우는 구석으로 피했다. 조용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다 자신이 나설 타이밍을 잡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여힐러는 다르게 생각했나보다. "거기 얌전히 숨어 계세요! 다치지 않게." 묘하게 열 받는다. 진우는 눈을 감고 조용히 심호흡을 하며 열을 가라앉히기 위해 노력했다. 곧 전투가 시작됐다. "크아아아아!" 덤벼드는 하이오크들을 향해 손기훈이 광역 도발 스킬을 시전했다. 하지만 하이오크들은 쉽게 도발에 걸리지 않았다. 곧 하이오크들과 전투계열 헌터들이 뒤섞였다. 쉬익! 쉭! 콰직! 선혈이 튀어 오르고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이내 마법계열 헌터들 쪽에서 날아온 마법들이 하이오크들에게 쇄도했다. 퍼벙! 퍼버벙! 빛의 화살에 맞은 하이오크들의 머리통이 날아갔다. 하지만 다음 공격은 날아오지 않았다. 마법의 효과는 좋았지만 캐스팅에 시간이 걸린다는 단점이 있었다. "으아아악!" 백병전에서는 하이오크들이 우세했다. "힐! 힐!" "빠, 빨리!" 부상자가 속출했고, 힐러들이 바빠졌다. "히... 힐러님!" 여힐러도 여기저기 분주히 뛰어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갑니다! 갈게요!" 한쪽 팔을 잃고 끙끙거리는 헌터 옆에 꿇어앉은 여힐러가 주문을 외웠다. 우우우웅그러자 눈 부신 빛과 함께 천천히 팔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A 급 힐러만이 가능한 재생의 빛이었다. 그렇게 환자의 상처에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눈앞에 긴 그림자가 드리웠다. 힐러는 고개를 들었다. 죽은 줄 알았던 하이오크 한 마리가 도끼를 들고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아..." 힐러의 얼굴색이 창백해졌다. 안타깝게도 주변에는 아군이 없었다. 오크가 도끼를 쳐들었을 때, 힐러는 도망가는 대신 환자를 몸으로 덮었다. "안 돼!" 그런데 아무리 기다려도 통증이 느껴지지 않았다. 1 초가 1 분 같은 시간. 힐러는 빼꼼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신기한 광경을 볼 수 있었다. "크... 크엑..." 공중에 뜬 오크가 바들바들 떨어대고 있었다. "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힐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때. 투둑. 하이오크의 머리가 뽑혀 나가며 척추 일부가 딸려 올라왔다. 무시무시한 힘이었다. 털썩. '...?' 바닥에 떨어진 하이오크의 몸뚱이를 보며, 여힐러는 이해할 수가 없다는 얼굴을 했다. '어...?' 하이오크의 머리가 아직 공중에 떠 있었기 때문이다. '...피 튀었네.' 진우는 눈살을 찌푸리며 들고 있던 하이오크의 머리통을 내던졌다. 빡! 난데없이 동료의 머리에 맞은 하이오크 하나가 바닥을 뒹굴었다. 목이 이상한 방향으로 틀어진 게 회생은 어려워 보였다. '둘 해치웠고.' 진우가 방향을 틀었다. 지금은 은신 상태. 하이오크들이나 헌터들은 자신의 존재를 전혀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있었다. 괜히 나섰다가 남의 레이드를 방해했다고 손가락질당할까 싶어 적당한 시기를 엿보고 있었는데, 뒤늦게 '은신' 스킬이 떠올랐다. 이거라면 마음대로 날뛰어도 거치적거릴 게 없지 않은가? 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그럼 시작해 볼까?' 그때. "으아아아-!" 마침 하이오크 세 마리와 혈투를 벌이고 있는 공격대 리더, 손기훈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 86 화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 다리에 조금 힘을 주는 것만으로 땅과 순식간에 멀어져, 다시 바닥에 내려설 때는 어느새 하이오크들의 넙적한 등이 눈앞에 있었다. 착. 착지하는 동시에 생각한다. '이대로 하이오크들을 해체해 버리는 건 쉬워.' 하지만 그래서는 은신 스킬로 몸을 숨긴 의미가 없다. 손기훈을 포함해 주위의 헌터들은 모두 국내에서 최고라 일컬어지는 헌터스의 정예들. 하이오크들이 보이지 않는 힘에 찢어지는 걸 보이면 푼수기가 다분한 여힐러가 아니고서야 금세 은신을 깨달을 지도 모른다. '뭐, 들켜도 문제가 될 건 없지만.' 등급 재측정 결과가 나오기 하루 전날인 오늘 괜한 시비를 불러일으키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레이드가 완전히 실패할 때까지 기다려 볼까도 싶었는데... 그랬다가는 헌터들의 피해가 너무 커질 것 같았다. 당장 여힐러만 해도 방금 한번 죽을 뻔했고. 그러니. 진우의 눈에서 광채가 번들거렸다. '눈에 띄지 않게 취할 것만 취한다.' 이번 전투의 방식을 정했다. 여기까지 고민하는데 걸린 시간이 1, 2 초. 직후 의식의 명령보다 빠르게 반사적으로 불러낸 '바루카의 단도'와 '나이트 킬러'가 양손에 들려 있었다. '언제 불러 왔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익숙한 그립감에 쿵쾅거리던 심장의 박동이 차차 안정을 찾아갔다. 다행이었다. 은신 상태라 아무도 표정을 볼 수 없는 것이. 인간들과 하이오크들이 엉망으로 뒤엉켜 싸우는 전장 한가운데서 혼자 웃고 있는 미친놈이 되고 싶지는 않았으니까. 특히나 하이오크 셋에 둘러싸여 진땀을 흘리고 있는 공격대의 리더가 보면 환장할 노릇이리라. '일단은 이놈들부터.' 진우가 움직였다. 몸을 숙이고서 역수로 쥔 단검으로 하이오크 하나의 아킬레스건을 그었다. "크아아아악!" 난데없이 발 뒷목이 끊어진 하이오크 전사가 고통에 울부짖었다. 그게 시작이었다. 춤을 추듯 매끄러운 연속 동작으로 그 옆 놈의 옆구리에 '바루카의 단도'를 찔러 넣었다 뺀 다음, 다른 한 놈은 무릎 뒤쪽을 베었다. "크르륵!" "크학!" 전투의 흥분만으로는 통증을 무마시키기 역부족이었는지, 전혀 생각하지 못한 타이밍에 급소를 공격당한 하이오크들의 몸이 일순간 빳빳하게 경직되었다. 그걸로 충분했다. 물꼬를 트자 격류가 쏟아져 들어오는 것처럼, 하이오크들이 당황한 틈을 타 손기훈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푹! "크르... 크르륵." "하아, 하아." 손기훈이 고개를 들었다. 자신의 손에서 길게 이어진 검이 하이오크 하나의 심장을 관통해 있었다. "끄륵." 입가를 부르르 떨며 노려보던 하이오크는 곧 눈을 까뒤집고서 뒤로 쓰러졌다. 털썩. 손기훈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좋아! 할 수 있다!' 자신을 포위한 하이오크들을 하나씩 쓰러뜨리며 손기훈이 속으로 쾌재를 부르는 동안, 진우는 쉴 틈 없이 던전 구석구석을 누볐다. "크아아악!" "크으윽!" 느려진 시간 속에서 홀로 자유롭게 움직이며 티 나지 않게 조금씩 균형을 무너뜨려 갔다. 스윽! 진우가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하이오크들의 몸에 크고 작은 상처가 생겨났다. "크르륵!" "크악?" 하이오크들이 갑작스런 상처에 몸이 경직되며 신경이 분산되면 그걸로 끝. 빈틈을 놓치지 않는 최상급 헌터들의 공격이 이어졌다. '뭔가... 싸우기가 편해졌다.' '뭐지?' '이렇게 많은 하이오크들을 상대로 피해없이 이기는 건가?' 공격대는 의아해하면서도 한편으론 가슴이 벅차올랐다. 적어도 한둘은 죽을 각오를 하고 임했던 전투에서 모두가 기대 이상으로 잘 싸우고 있었던 까닭이었다. 퍼걱! 헌터 하나가 휘두른 메이스에 하이오크 한 놈의 머리가 깨졌다. 그때 진우의 귓가에 반가운 소식이 들려왔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오.' 힘들게 돌아다닌 보람이 있었다. 레벨이 올라갔다. 적의 숨통을 끊거나 치명상을 입히지 않아도 경험치는 들어오는 모양이었다. '직접 처치한 게 두 마리.' 처치하는 걸 도운 것이 13 마리 이상. 경험치가 아예 들어오지 않는 게 아니라면 레벨업이 될 만했다. 흥이 난 진우의 움직임이 더욱더 빨라졌다. 스걱! 푹! "크아아악!" 진우의 암약에 힘입어 전투도 슬슬 막을 내려가고 있었다. '후-!' 한걸음 뒤로 물러선 진우가 단검들을 창고로 돌려보내고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정도면...' 상황은 거의 정리된 듯했다. 거기에 보너스로 1 업까지. 문득 진우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바닥에는 스무 구에 가까운 하이오크들의 사체들이 뒹굴고 있었다. '혼자서 이 녀석들을 다 잡았다면 1 레벨은 더 올랐을 거 같지만.' 아쉽게도 여긴 헌터스가 큰돈을 주고 공략을 허가받은 그들의 사냥터였다. 이 정도가 최선이 아닐까. '좋아.' 진우는 만족스런 얼굴로 원래 짐꾼이 숨어 있어야 할 곳, 던전의 으슥한 구석으로 돌아갔다. "크아아아!" 어느새 입장이 뒤바뀌어 헌터들에게 포위당한 마지막 하이오크 한 놈이 비명을 질렀다. 놈의 비명이 동굴 안을 쩌렁쩌렁 울렸다. 진우는 하이오크가 쓰러지는 걸 보면서 은신을 해제했다. 스르르. 헌터들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두리번두리번. 고개를 돌려봐도 서 있는 하이오크는 없었다. "이... 이긴 건가?" "끝났어?" "잠깐." 승리의 기쁨을 만끽하기에 앞서, 리더인 손기훈이 부상자를 확인했다. "다친 사람! 누구 다친 사람 없어?" 사실 상급 힐러가 있는 공격대에서 부상자는 잘 나오지 않는다. 목숨만 붙어 있다면 마법으로 금방 치료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손기훈은 부상자의 여부를 물은 것이 아니었다. 그는 팀 내에 죽은 사람이 있는지를 간접적으로 돌려 묻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여힐러가 고개를 저었다. 부상자는 있으되 사망자는 없었다. 그리고 방금 모든 부상자의 치료가 끝이 났다. "그럼..." 그러자 공격대 전원의 얼굴이 희열로 물들었다. "이겼다!" "이겼다고!" "와아-!" 헌터들은 서로를 얼싸안고 기뻐했다. 진우는 팔짱을 끼고 흐뭇한 표정으로 헌터들을 지켜보았다. '하이오크란 놈들이 그렇게 강한가?' 체감상으로는 글쎄... 상급 던전 레이드 경험이 없는 진우에게는 공격대의 환호가 피부로 잘 와 닿지 않았다. 진우는 몰랐다. A, B 급의 상급 던전들은 등급뿐만 아니라 마력량까지 세부적으로 계산해 공략을 시도한다는 사실을. 하이오크는 A 급 던전에서도 높은 수준의 마수였다. 그것도 평범한 하이오크가 아니라 20 마리 이상 모인 하이오크 전사들이라면... 지금의 결과는 기적에 가까웠다. 기적의 원인이 된 주인공, 진우는 자신이 한 일의 가치도 알지 못하고 그저 조용히 공격대의 승리를 축하해 주었다. '음?' 그 와중에 여힐러가 진지한 얼굴로 손기훈에게 다가갔다.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는 눈빛이었다. 진우는 그쪽에 귀를 기울였다. "저기 기훈 오빠." "응?" "아까 하이오크랑 싸울 때요..." 여힐러는 조심스럽게 방금 전 자기가 본 일을 천천히 설명했다. 공중으로 떠오른 하이오크가 자기 머리를 뽑아 버리더니 다른 하이오크를 공격해 죽였다는 이야기를. 아주 심각한 표정으로. "..." 손기훈은 할 말을 찾지 못했다. "진짜라니까요!" 붉게 상기된 얼굴로 억울함을 호소하는 여힐러를 보면서 진우는 끅끅 웃음을 눌러 삼켰다. 그렇게 승리의 여운을 즐기는 것도 잠시. 헌터들이 하나둘 리더인 손기훈 주변으로 둥글게 모여들었다. "대장, 계속하실 겁니까?" "이거 좀 위험하지 않아요? 입구에서 얼마 떨어지지도 않았는데 하이오크라니." "일단은 철수하는 게 어때요?" 손기훈은 동굴 저편을 보면서 입을 굳게 다물었다. '쉽지 않겠지.' 진우는 손기훈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S 급 헌터가 둘이나 있는 헌터스에서 손기훈이 정예 공격대를 맡는 일은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지도 모른다. 자신의 첫 커리어나 마찬가지인 레이드에서 이렇게 단 시간 만에 후퇴라니. '누구나 클리어에 욕심이 날 만한 상황이다.' 하지만 현명한 대장이라면... 결심을 굳혔는지 손기훈의 입술이 천천히 달싹거렸다. 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다행히 손기훈은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다. "일단 철수하겠습니다." 던전에서 리더의 결정은 절대적. 공격대의 일원으로 속한 이상, 공격대 대장이 내린 결정에는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는 불문율이 있었다. 왜, 전시에 명령 불복종 병사는 즉결 처형한다고도 하지 않는가? 던전은 어떤 의미에서는 전장보다 훨씬 더 위험한 곳이었다. 그래서 어떤 리더를 만나는가가 생사와 직결되는 문제 중 하나였는데, 손기훈은 팀원들을 실망시키지 않았다. 손기훈의 후퇴 지시에 공격대 전원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휴우-" "난 또 손 형이 끝까지 가 보자고 할까 봐 가슴 졸였네." 손기훈은 씩 웃으며 발언의 주인공 어깨를 툭 쳤다. "나도 그렇게 꼴통은 아니다." "알지. 그런데 봐 봐, 형. 나 손 떨리는 거." "엄살은 그만하고. 자, 다들 이동합시다." 진우는 짐 가방을 둘러멨다. 손기훈의 지시에 따라 공격대의 이동이 재개됐다. 방향은 반대가 됐지만. 진우가 씁쓸히 웃었다. '좀 더 안쪽으로 들어가 보고 싶었는데.' 어쨌거나 자신은 손님이었다. 손님 입장에서 주인의 결정에 왈가왈부할 수는 없는 일. 아쉽지만 오늘은 여기까지인 듯했다. "아..." 여힐러는 자기 말을 눈꼽만큼도 믿어 주지 않는 대장이 야속한지 툴툴거리며 진우 곁으로 왔다. "진짠데." 입이 삐죽 튀어나와 있던 그녀가 한 가닥 희망을 걸고 진우를 바라보았다. "저기 혹시 아까 하이오크가." "못 봤습니다." "히잉..."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다. 진우는 웃음을 삼키고 있는 걸 들키지 않도록 애를 써야 했다. 그런데 얼마나 이동했을까? 갑자기 선두에서 급하게 걸음을 멈췄다. 손기훈이 오른손을 들었다. "저, 정지!" 그의 목소리에서 당혹감이 묻어나왔다. 지친 걸음으로 걷던 다른 헌터들과, 혹시나 추격해 오는 마수가 없는지 후미에서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진우도 일제히 멈춰 섰다. 웅성웅성. 헌터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야?" "이건 또 뭐야?" "왜 길이 막혀 있는 건데? 올 때는 멀쩡했잖아?" 소란스런 그들을 지나친 진우가 앞으로 나와 손을 뻗어 보았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막혀... 있다?' 길이 보이지 않는 투명한 벽으로 가로막혀 있었다. 처음엔 인던을 떠올렸다. 인던과 현실 세계의 경계를 나누어 주던 벽들. 그러나 곧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것과는 다르다.' 이 벽에서는 인위적인 냄새가 강하게 났다. 마력이 섞여 있는 걸 봐서는 지성있는 마수가 걸어 놓은 마법인 듯했다. '하지만 어째서?' 왜 오는 길을 막은 게 아니라 나가는 길을 막은 걸까? 그때. 진우가 고개를 휙 돌렸다. '...?' 마치 기다렸다는 듯 끔찍한 양의 마력 파장이 저 멀리 동굴의 끝쪽에서부터 성난 해일처럼 밀려왔다. '이럴 수가...' 이게 이번 던전의 보스라고? 게이트 밖에서나 처음 던전 안에 들어섰을 때 느낄 수 있었던 마력 파장과는 스케일이 달랐다. 다른 헌터들도 그 어마어마한 마력을 느꼈는지 오싹 몸을 떨었다. "뭐, 뭐야?" "갑자기 소름이 돋는데?" 점점 창백해져 가는 헌터들의 얼굴을 보면서 진우는 한 가지 가설을 떠올렸다. '설마 자신의 기척을 숨길 수 있는 보스가 있다고 한다면...' 오는 길에는 없었던 벽. 그리고 벽을 생성하고 난 뒤 이빨을 드러내기 시작하는 보스. '설마... 함정을 파고 헌터들을 끌어들인 건가?' 그렇게 생각하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저벅저벅. 저벅저벅. 던전의 어둠 너머에서 아까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 무수한 발소리가 울려 퍼졌다. = 87 화 신기한 현상이었다. 저편에서 들리는 발소리가 크고 가까워질수록 헌터들이 내는 소리가 점점 줄어들어 갔다. "손 형..." "..." 일대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쫑긋. 진우의 귓바퀴가 움직였다. 주변이 조용해진 틈을 이용해 진우는 들려오는 발소리로 놈들의 숫자를 가늠해 보았다. 저벅저벅. 저벅저벅. 발달된 청각과 높은 감각 스탯 덕분에 발소리 하나하나를 구별할 수 있었다. '48, 49, 50, 51.' 전부 51 개의 발소리. 아까 전 하이오크 전사들이 내었던 발소리와 같았다. 진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 헌터들의 얼굴엔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들 또한 기척을 통해 적들의 대략적인 규모를 눈치챈 것이다. 방금 22 마리의 하이오크 전사들을 상대로도 아슬아슬하게 승리를 거뒀던 공격대다. 그런데 이제는 51 마리. 두 배가 넘는 숫자. '...승산이 없어.' 이들, 공격대에겐 말이다. 문득 진우는 자신의 그림자를 돌아보았다. 그림자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우우우피를 보고 싶어 하는 그림자 병사들의 원성이 들려오는 듯했다. 진우는 다시 고개를 돌렸다. 쿵, 쿵, 쿵. 여태까지 잠잠하던 심장이 거세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기다려...' 아직은 때가 아니다.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인 진우는 조용히 전방을 응시했다. 마침내 놈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척. 하이오크들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 헌터들 앞에 멈춰 섰다. "크르르르." "크륵."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으르렁거리는 하이오크들. 쉰이 넘는 하이오크 전사들의 위압감은 말로 이루 다 표현할 수가 없었다. 싸우지 않아도 결과는 뻔했다. "미치겠네." "이런 말도 안 되는 경우가..." "으..." 헌터들은 탄식했다. 위압감에 짓눌려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지만, 안타깝게도 퇴로는 막혀있었다. 이제 어떻게 할 것인가? 다들 싸울 준비는 한참 전에 끝냈지만, 아무도 나서지 못하고 리더인 손기훈의 눈치만 살폈다. 손기훈은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젠장...' 이럴 때 최종인 대표나 차해인 헌터, 둘 중 어느 한 사람만 있었어도... 그의 미간이 구겨졌다. S 급에겐 불리한 전황을 뒤집을 수 있는 막강한 힘이 있었다. 그들만 있다면 이런 하이오크들쯤이야 아무것도 아닐 텐데. '왜 하필 이럴 때에...' 그 두사람이 없는 걸까? 항상 그들과 함께 싸웠던 손기훈은 자신이 얼마나 무력한지를 지금 절실히 느끼고 있었다. S 급의 부재가 너무도 뼈아팠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한탄만 할 수는 없었다. 이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여기서 싸우는 건 개죽음이야.' 하지만 뒤가 막혀 있는 이상 선택의 여지는 존재하지 않았다. 헌터가 되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던전에 첫발을 내디뎠을 때, 그리고 중상을 입고 처음 의식을 잃었을 때. 언젠가 이런 날이 오리라 막연히 짐작하고 있지 않았던가. '그래, 그랬었지.' 죽음을 각오한 손기훈이 장검을 빼 들었다. 스르릉. 손기훈이 돌아보자 리더의 지시를 기다리고 있던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손기훈의 고개가 다시 앞을 향했다. 턱밑까지 방패를 치켜든 그는 아직까지도 움직일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하이오크들을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드디어 결심이 섰나?' 진우도 준비를 갖췄다. 등 뒤로 감춘 오른손에 '바루카의 단도'가 스르르 나타났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미칠 듯이 박동하던 심장이 전투를 앞두고서는 오히려 차분히 가라앉아갔다. 두근, 두근, 두근. 쓸데없는 힘을 빼고, 고르게 호흡을 한다. '...좋아.' 다시 뜬 진우의 두 눈에서 예리한 안광이 번뜩였다. 꼴깍. 헌터들이 잘 넘어가지 않는 마른 침을 억지로 삼켰다. 그들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갔다. 반면 진우는 군침을 삼켰다. 꿀꺽. '이놈들은 경험치를 얼마나 줄까?' 진우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져갔다. 그런데 그때. 하이오크 하나가 앞으로 나섰다. 앞서 있던 오크들을 거칠게 해치고서 걸어 나온 놈은 짐승처럼 번들거리는 두 눈으로 헌터들을 둘러보았다. "그르르르..." 다른 놈들보다 덩치가 훨씬 크고 어금니가 긴 녀석. '저놈이 대장인가?' 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지금 당장 저 녀석을 해치워 버리면 싸움이 훨씬 쉬워지지 않을까. 어떡한다? 진우가 '바루카의 단도'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고민하는 사이, 하이오크의 입이 열렸다. "크레락 투 쉬나 위그두 아락나카." 우렁찬 목소리. 하이오크의 시선은 공격대의 선두 손기훈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크레락 투 쉬나 위그두 아락나카!" 웅성웅성. 헌터들의 시선이 분주해졌다. "뭐지?" "지금 우리한테 말을 거는 거?" "뭐라고 하는 거야?" 그 순간. 하이오크의 안면 근육이 부르르 떨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떨림이 멈췄을 때, 놈의 입에서는 방금 전과는 전혀 다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인간들..." 마치 놈의 입을 빌려 다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인간들이여..." 자세히 보니 멀쩡했던 놈의 눈도 죽은 지 오래된 생선처럼 흐릿하게 변해 있었다. 헉! 헌터들은 뒤통수를 세차게 얻어맞은 듯 경악했다. 오크가 인간의 언어로 말하다니! '어떻게 오크가 우리말을?' '마법? 마법인가?' 예상치 못한 사태에 헌터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대장 하이오크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는... 카르갈간... 너희... 인간들을... 만나고... 싶다... 이... 녀석을... 따라와라." 마수가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어 한다고? 지금껏 한 번도 보고된 적 없는 일이었다. 유례없는 상황에 손기훈은 물론, 공격대 전원이 크게 혼란스러워했다. "기훈이 형. 설마 마수가 하는 말을 믿는 건 아니겠죠?" "무시하세요." "기훈아, 이건 함정이야. 죽이 되든 밥이 되든 그냥 여기서 끝장을 보자." "그래도 말이 통하는 오크라면 혹시..." "너 인마, 그렇게 던전을 들락날락해 놓고 아직도 마수들을 모르냐?" 짧은 시간, 자기들끼리도 의견이 엇갈렸다. 이내 침묵을 지키던 손기훈이 목소리에 응답했다. "카르갈간, 동굴을 막은 것은 너인가?" "그렇다... 나는... 긍지... 높은... 오르크의... 대주술사... 내... 마법은... 너희... 인간의... 힘으로... 부술... 수... 없다." "이 동굴 안에 너보다 강한 존재가 있는가?" "누가... 감히... 이... 나에게... 대적한단... 말인가!" 쩌렁쩌렁 목소리가 울리며 헌터들의 고막을 때렸다. 많은 헌터들이 인상을 쓰거나 귀를 막았지만, 손기훈만은 침착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상이 맞았다. 지금 저 하이오크의 입을 빌려서 말하고 있는 존재는 이번 던전의 보스가 틀림없었다. 던전 브레이크 전까지는 보스방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에, 헌터들을 자신이 있는 곳으로 불러들이는 거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손기훈의 대답이 늦어지자 대장 하이오크가 머리 위로 도끼를 치켜 들었다. "선택해라... 여기서... 내... 병사들에게... 죽던가... 아니면...내... 병사들을... 따라오던가." "가겠다." 손기훈의 즉답에 헌터들의 눈이 커졌다. "훈이 형!" "기훈 씨!" 만류하는 동료들을 저지한 손기훈이 하이오크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따라와라... 인간." 그 말을 끝으로 대장 하이오크의 탁한 눈이 원래의 색을 되찾았다. 짐승같이 흉흉한 두 눈빛. 놈이 말했다. "아쉬 투 레카." 그 한마디에 방금 전까지 적의를 불태우고 있던 하이오크 전사들이 거짓말처럼 철수하기 시작했다. 철수하지 않고 남아 있던 대장 하이오크가 손기훈에게 따라오라는 듯 손짓했다. "우리도 가죠." 손기훈이 가장 먼저 발을 뗐고, 주저하던 헌터들도 이내 하나둘 손기훈의 뒤를 따랐다. '무슨 생각이지?' 진우는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보스방에는 보스를 비롯해 이것보다 더 많은 하이오크들이 있을 테고, 당연히 싸워 이길 확률은 더 낮아진다. 그런데도 놈들을 따라가려는 손기훈의 의도를 짐작할 수가 없었다. '보스와 협상이라도 해 보려는 걸까? 살아서 돌아가기 위해?' 성공 가능성은 낮아 보인다만... 아니. 어쩌면 잘된 일 일지도 모른다. 잡몹 몇 마리 잡는 데서 그칠 줄 알았던 이번 레이드에서 보스를 만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진우는 쥐고 있던 단검을 창고로 돌려보냈다. 그리고 천천히 일행을 따라갔다. 얼마나 걸었을까? 서서히 걸음을 늦춘 손기훈이 어느새 옆까지 와 있었다. 그가 낮은 목소리로 진우를 불렀다. "헌터님." "예." 진우는 앞을 보며 대답했다. 손기훈 역시 전방에서 앞장서 걷는 하이오크들의 등에서 눈을 떼지 않고 말을 이었다. "우리는... 보스와 만나게 되면 놈을 급습할 겁니다. 그러면 기습이 성공하든 못하든 놈은 길을 막고 있던 마법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겠죠." 가정은 그럴 듯했다. 저주계열 마법이 아닌 이상, 마법을 유지하고 있으려면 그쪽에 정신을 집중해야 했다. 특히 수준 높은 마법일수록 고도의 집중력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그게 뭐 어쨌다는 걸까? 보스를 죽이는 데 성공하거나 보스의 마법을 막는다고 해도, 금방 하이오크 전사들에게 포위당해 보스방에서 옴짝달싹 못하게 될 텐데. 공격대가 살아 돌아갈 가능성은 여전히 희박하다는 이야기였다. 진우의 궁금증을 해소해 주려는 듯, 손기훈은 비장한 얼굴을 하고서 말했다. "놈들의 시선이 저희에게 팔린 사이 헌터님은 보스방에서 달아나세요. 던전을 빠져나가 메인 공격대에 연락해 주십시오." S 급 헌터가 포함된 공격대가 여기 도착할 때쯤이면 이미 모든 게 끝나 있을 터. 손기훈은 죽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보스를 잡고 당신들도 죽겠다는 겁니까?" 진우가 슬쩍 손기훈의 안색을 살폈다. 그의 표정은 굳어 있었지만 눈빛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우리 일은 던전에서 살아나가는 게 아니라 게이트를 닫는 겁니다. 그걸 위해 많은 사람들이 우리에게 큰돈을 지불하고 있죠." 손기훈은 힘주어 말했다. "우리는 그동안 우리가 배웠던 대로 우리 일을 할 겁니다. 하지만 당신은 아니에요. 당신은 여기서 죽을 필요가 없습니다. 부디 살아서 여길 나가세요." 그의 목소리에서 강한 신념이 느껴졌다. 필사의 각오가 담겨 있었다. 여기선 어떤 말을 해도 손기훈에게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그래서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 차해인이 현장에 도착했다. 모자를 푹 눌러쓰고 와서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그녀는 채굴팀 헌터들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몇몇 헌터들이 그녀 옆을 지나치며 힐끔거렸지만 길드 관계자겠거니 하고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는 않았다. 멀리 배 팀장이 보였다. 그의 근처에 모여 있는 채굴팀 헌터들도. 두근, 두근.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 발짝 떨어진 곳에서 채굴팀 헌터들의 면면을 훑어보았다. '그 사람은...?' 진우는 보이지 않았다. 뭐라고 할까?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채굴일은 그만둔 걸까?' 1 분만 더 기다려 보자.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일 수도 있으니까. 3 분만 더. 아니, 5 분만 더. 그렇게 15 분을 기다려 봤지만 끝내 진우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후-" 긴 한숨과 함께 차해인이 돌아섰다. 그러나 이내 몇 발짝 떼지 못하고 다시 서 있던 곳으로 되돌아왔다. 모자를 벗고 심호흡하던 그녀가 배 팀장에게 걸어갔다. 채굴팀 헌터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했다. 다행히 채굴팀 모두 낮은 랭크의 헌터들이라 그런지 냄새는 심하지 않았다. "어어?" 차해인을 알아본 배 팀장이 냉큼 달려왔다. "차 헌터님, 오늘은 쉬시는 날 아니셨습니까?" "안녕하세요." 간단히 인사를 주고받은 차해인은 누구 듣는 사람이 있는지를 살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여기... 성진우 헌터라고 있나요?" "성 씨요?" 뜻밖의 이름에 배 팀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성 씨라면 아까 짐꾼 대타로 들어갔는데..." "짐꾼요?" 차해인은 화들짝 놀랐다. "게이트로 들어갔단 말씀이신가요?" 배 팀장은 사실은 자신도 어이가 없다는 듯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다니까요." E 급 헌터가 A 급 던전에 자원해서 짐꾼으로 들어갔다고? 목숨이 수십 개 있는 것도 아닌데. '무슨 생각인 걸까?' 그러고 보니 그 사람 어제도 보스방에서 무기를 들고 서 있었지. 역시 잘못 본 게 아니었다. 수상한 건 또 있었다. 어제는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냥 넘어가긴 했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헌터 경력 4 년 차가 던전에서 길을 잃은 것도 충분히 이상한 일이었다. '알아봐야겠어.' 대체 성진우란 사람이 헌터스 길드에서 뭘 하려는 건지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걸 알려면 던전으로 직접 들어가 볼 수밖에. 자신은 헌터스의 부사장이자, 현직 S 급 헌터였다. 헌터스의 레이드가 한참인 던전에 들어가겠다고 해도 말릴 사람은 없을 터. 엄지손톱 끝을 깨물며 고민을 거듭하던 차해인이 결정을 내렸다. "저, 게이트에 들어가 봐야겠어요." = 88 화 배 팀장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헛... 사고라도 생긴 겁니까? 길드에 증원 요청이라도 할까요?" "아뇨, 개인적인 일입니다. 그 사람한테 개인적인 용무가 있는 거니까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아... 알겠습니다." 차해인은 게이트 쪽으로 몸을 틀었다. 그런데. 옆구리가 허전했다. '아... 내 무기.' 허리 주변을 더듬거리던 그녀는 검을 집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렸다. 비번인 오늘 던전에 들어가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차해인의 미간이 곱게 구겨졌다. '리더를 맡고 있는 기훈 씨는 믿을 만한 사람이고, 팀원들도 모두 훌륭한 헌터들이지만.' 그래도 무기 없이 던전에 발을 들인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 잠깐의 고민 끝에 배 팀장을 돌아보았다. "하실 말씀이라도...?" 배 팀장은 눈을 말똥말똥 떴다. "팀장님, 혹시 무기 좀 빌릴 수 있을까요?" "예?" 망설이던 배 팀장이 근처를 지나가던 헌터에게 지시했다. "이봐, 석 씨. 가서 장비 하나 갖고 와 줘." "예." 석 씨가 재빠르게 가져온 장비는 채굴팀이 쓰는 곡괭이였다. "..." 차해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저기... 다른 건 없나요?" "다른 거라면...?" "검이라던가, 창이라던가." "저희한테서 그런 걸 찾으시면..." "..." 차해인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알겠습니다." 배 팀장이 건네주는 곡괭이를 정중히 사양한 그녀가 게이트를 향해 걸어갔다. 배 팀장은 멀어지는 차해인의 뒷모습을 향해 걱정스럽게 물었다. "차 헌터님, 빈손으로 괜찮으시겠어요?" 우뚝. 그 자리에 멈춰 선 차해인이 잠시 고민하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되돌아와 배 팀장이 들고 있던 곡괭이를 받아 들었다. 배 팀장은 껄껄 웃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아무래도 던전에서 맨손은 좀 위험하죠." "그럼..." 돌아서는 그녀의 귓바퀴가 붉게 물들어 있었던 것을 배 팀장은 발견하지 못했다. *** 공격대 전원의 얼굴에서 비장감이 맴돌았다. 모두 다가올 운명을 예감하고 있는 듯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와중에, 여힐러가 다가와 진우의 짐을 뒤적거렸다. 진우가 목만 옆으로 돌리고는 물었다. "뭐해요?" "잠시만요." 그녀 손에 딸려 나온 것은 아기자기한 여성용 가방이었다. "예전부터 가방이 멀리 떨어져 있으면 이상하게 불안해서요." 묻지도 않았는데 친절한 설명까지. 가방 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낸 여힐러가 수첩에 뭔가를 꼬물꼬물 적기 시작했다. 앞을 안 보고 걷는 바람에 몇 번이나 진우의 어깨에 머리를 콩콩 부딪쳤다. 슥. 잠시 뒤 그녀가 수첩을 닫았다. 글을 적는 동안 어깨에 둘러메고 있던 자기 가방은 진우의 짐 가방 안에 도로 집어넣었는데, 수첩은 여전히 손에 남아 있었다. 뭘 어쩌려는 건가 유심히 보고 있던 진우에게 여힐러가 수첩을 내밀었다. "...?" 수첩을 받아 든 진우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여힐러가 울먹이며 말했다. "가족들한테 하고 싶었던 말 적었거든요. 밖에 나가시면 꼭 전해 주세요." 여기서 웃어 버리면 상처받겠지. 진우는 웃음을 꾹 눌러 참으며 수첩을 주머니에 넣었다. "일단 가지고 있긴 하겠지만 이걸 배달할 일은 없을 겁니다." "괜찮아요." 여힐러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이오크 전사들이 저렇게 눈을 시퍼렇게 뜨고 감시하는데 무사히 빠져나가긴 힘들겠지.' 짐꾼 씨는 E 급에 불과하니까. 아직 그녀는 진우의 말이 무슨 뜻이었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곧 보스방이 드러났다. 헌터들의 긴장감이 공기를 타고 넘어와 피부로 전해졌다. 드넓은 공동. '...' 진우는 보스방 안을 훑어보았다. 어제 거인이 있었던 방보다 더 컸다. 하지만 어제와 달리 보스방이 크다는 느낌은 별로 들지 않았다. 안을 가둑 메운 하이오크들 때문이었다. 공격대를 데리고 왔던 하이오크들의 두 배 넘는 숫자가 거기에 있었다. '한 백 마리... 아니, 좀 더 되나?' 던전 내부에 마수가 하나도 없었던 대신, 전부 보스방에 몰려 있었다. 줄지어 늘어선 하이오크들을 둘러보는 손기훈의 안색이 창백히 식어갔다. '이 정도 숫자의 하이오크들이 게이트를 빠져나간다면...' 최상급 헌터들이 도착하기 전까지 작은 시 하나는 박살 낼 수 있는 규모였다. 등 뒤에 식은땀이 흘렀다. '적어도 보스만이라도 해치워야 한다.' 마른침을 힘겹게 목 안으로 넘기듯, 굳은 각오를 마음속 깊이 꾹꾹 눌러 담았다. 보스방에 있던 하이오크들이 길을 터 주었다. "아 샤크." 대장 하이오크가 다시 손짓했다. 안내를 맡았던 하이오크들과 뒤를 따르는 공격대는 보스방 구석에 있는 제단 쪽으로 걸었다. "저기!" 헌터 하나가 제단 위를 가리켰다. 거기에는 가면과 뼈 목걸이, 뼈 귀고리 등 장신구로 정신을 주렁주렁 치장한 하이오크 주술사가 있었다. '저놈이 보스...' 손기훈의 얼굴이 굳어졌다. 던전 안을 채운 무시무시한 마력은 대부분 놈에게서 흘러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놈의 주변. 놈을 지키고 있는 예리한 눈빛의 호위들 넷에게서도 범상치 않은 기운이 느껴졌다. '좋지 않아.' 저 호위들을 제치고 주술사를 단번에 처치할 수 있을까? 헌터들 모두 다들 비슷한 생각을 했다. 공격대는 주술사 앞에 멈춰 섰다. 공격대 헌터들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둘러싸고 있는 하이오크들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흘렀다. "흐흐." 하지만 주술사는 주변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가면 밑으로 드러난 흉측한 아가리를 벌리며 킥킥 웃었다. "인간들이여, 환영하노라." 공격대 헌터들은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손 형이 신호하면.' '다 같이 뛴다.' '무조건 주술사만 노려.' 공격할 타이밍을 잡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별안간 주변의 공기가 싸늘히 얼어붙기 시작했다. 공격대는 모두 일류 헌터들. 그들은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한기에 일제히 고개를 돌렸다. 원인은 주술사. 놈이 쓰고 있던 가면을 벗고 있었다. 그러자 감추고 있던 놈의 마력이 가감없이 드러났다. 화악전율스런 마력 파장이 놈을 중심으로 동심원을 그리며 사방으로 뻗어나갔다. 평범한 인간이 바로 코앞에서 사자나 호랑이와 마주친 것처럼, 헌터들의 몸이 돌처럼 굳어 버렸다. "마, 맙소사..." "어떻게 이 정도의 마력이...?" "이, 이런 놈과 싸우라고?" 좌절, 한탄, 원망, 후회. 갖가지 형태의 절망들 앞에서 주술사는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내가 두려운가, 인간들이여?" 아랫입술을 질끈 깨문 손기훈이 어렵게 한 발 앞으로 나섰다. 그러고는 물었다. "왜 우리를 여기까지 불러 왔지? 우리를 죽이는 건 전사들만으로도 충분했을 텐데." 주술사가 씩 웃었다. 보는 것만으로 소름이 돋는 미소였다. "여흥이다." "뭐?" 손기훈은 말문이 콱 막혔다. 겨우 그런 이유로 자신들을 여기까지 불러 왔단 말인가? 주술사는 말을 이었다. "여기서 남은 시간 동안 너희들을 하나씩 죽이며 병사들의 흥을 돋울 것이다!" 우워어어어어-! 하이오크 전사들이 흥분에 찬 함성을 내질렀다. 헌터들은 오크들의 위압감에 짓눌려 숨도 제대로 쉬기 힘들었다. 눈물을 보이는 헌터도 있었다. "한데..." 주술사의 말이 끊겼다. 놈의 시선이 일행의 맨 끝에 있는 진우에게 멈춰졌다. "...인간 중에 묘한 것이 섞여있구나." 순간 손기훈의 눈이 번뜩였다. '주술사가 한눈을 파는 지금이 타이밍이다!' 그의 목에 핏대가 섰다. "지금!" 목청껏 외친 손기훈이 검을 뽑으며 뛰쳐나갔다. 하지만 뒤가 조용했다. '어째서...?' 달리며 뒤를 돌아보니 동료들은 감히 움직일 생각도 못하고 모두 뻣뻣이 굳어 있었다. 너무도 압도적인 힘 앞에 그들은 이미 전의를 상실해 버린 상태였다.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아...'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다. 여기서 멈출 수는 없는 노릇. 시선이 다시 앞을 향했다. 허를 찔렸는지 주술사는 아직 웃고 있었고, 호위들 역시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 운이어도 좋다. 요행이어도 좋다. 제발 이 검이 닿을 수만 있다면... 탓, 탓, 탓! 맹렬히 돌진하던 손기훈이 검을 뒤로 젖혔다. "으아아아-!" 그러나 검을 휘둘러보지도 못하고 무언가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쾅! 실드 마법이었다. "컥!" 반동으로 나가떨어진 손기훈이 바닥을 데굴데굴 굴렀다. 허나 그것도 잠시. "여기 첫 번째 지원자가 나왔구나." 주술사의 조롱과 함께 손기훈의 몸이 공중으로 붕 떠올랐다. 우우웅역중력 마법. "..." 주술사의 입술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손기훈을 2 층 건물 높이까지 들어올린 주술사는 이번엔 다른 주문을 외웠다. "..." 중력 가속. 쾅! 송기훈은 그대로 바닥에 처박혔다. "커헉!" 그러나 고통에 몸부림칠 새도 없이 다시 공중으로 떠올랐다. "역중력." 킥킥킥. 주술사는 물론이고, 하이오크들 모두 긴 어금니를 내보이며 조소를 흘렸다. 쾅! "커헉!" 우우웅쾅! "컥!" 주술사는 몇 번이고 손기훈을 들어 올렸다 떨어뜨리며 그를 농락했다. 네 번째 바닥에 부딪혔을 때, 손기훈의 입에서 왈칵 핏물이 쏟아졌다. 그 모습을 보는 헌터들의 얼굴이 점점 새파랗게 질려 갔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나설 엄두를 내지 못했다. "기, 기훈 형..." 모두가 덜덜 떨며 손기훈이 망가지는 장면을 보고만 있었다. 털썩. 여힐러는 서 있을 힘도 없는지 그만 주저앉았다. 기어코. 주술사는 다섯 번째 손기훈을 공중으로 띄웠다. "목숨 한 번 질긴 놈이군." "으으..." 손기훈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러나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 손에 쥔 검만큼은 끝까지 놓지 않았다. 우우웅! 쿵! 우우웅! 쿵! 우우웅! 허공과 바닥을 수차례 왔다 갔다하는 사이, 손기훈은 마침내 쥐고 있던 검을 손에서 놓쳤다. 챙그랑. 그때. 바닥으로 낙하하던 손기훈이 휙 하고 사라졌다. "응?" 주술사의 눈이 커졌다. 전신의 뼈가 조각났을 인간 놈이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주술사가 손기훈의 기척을 찾아 눈을 굴렸다. '저건...?' 얼마 떨어지지 않은 구석에서 누워 있는 손기훈을 발견했다. 그와 동시에 옆에 앉은 사내를 보았다. 진우였다. 진우는 손기훈을 바로 눕히고, 주술사를 노려보며 물었다. "리더 씨, 하나만 물어볼게요." "...?" 그때까지 손기훈은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지 못했다. "내가 여기 있는 마수들을 다 죽여도 되겠습니까?" "당신... 무슨 소리를...?" 인상을 찌푸리던 주술사가 턱짓하자, 주술사의 호위 하나가 곡도를 빙글 돌리며 진우에게 달려왔다. 놈을 노려보는 진우의 눈빛에 광채가 흘러나왔다. 진우는 손을 뻗었다. '지배자의 손길.' 그러자 마치 보이지 않는 거대한 손에 움켜잡힌 것처럼 호위가 공중으로 떠올랐다. "크, 크롸?" 놈이 허공에서 발버둥 쳤다. '아니...?' 주술사의 눈이 커졌다. 진우는 손끝을 아래로 내렸다. 쾅! 호위가 바닥에 처박혔다. 어찌나 세게 박았는지 바닥에 금이 쫙 갔다. 하지만 진우는 거기서 그치지 않고 주술사가 손기훈에게 했던 것처럼 호위를 다시 공중으로 띄웠다. 쾅! 쾅! 쾅! 호위는 바닥과 손을 오가는 농구공처럼 천장과 바닥을 번갈아 처박으며 굉음을 내다가, 결국 천장에 머리가 처박혔다. 쾅! 후두두둑. 돌가루가 떨어져 내렸다. 대롱대롱 흔들리는 호위의 목 아래를 보면서, 하이오크들과 헌터들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손기훈이 파르르 떨며 물었다. "당신... 도대체 정체가...?" "다시 묻겠습니다." 여기는 헌터스의 사냥터다. 지금 여기서 헌터스를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진우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여기 있는 마수들... 전부 제가 가져도 되겠습니까?" 왜일까? 이제 짐꾼의 정체 따윈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저 분했다. 장난감처럼 마수 따위에게 농락당한 자신이 분했다. 손기훈의 눈에서 주르륵 눈물이 흘렀다. "부탁... 부탁합니다." 됐다. 진우가 일어서자 하이오크들이 다가왔다. 그 뒤에는 주술사가 있었다. 주술사가 비웃었다. "인간 주제에 제법 신기한 재주를 가지고 있구나." 그가 손짓하자 하이오크들이 진우를 둥글게 둘러쌌다. "그러나 그 재주가 어디까지 통할 성싶으냐?" 진우의 시선이 차갑게 변했다. 단 한 번도 마수가 좋았었던 적은 없었지만, 이렇게까지 베어 버리고 싶은 놈은 처음이었다. "너는 제일 마지막이다." 즐거움을 알고 있다면 두려움 또한 느낄 수 있겠지. 진우가 읊조렸다. "그림자들..." 진우의 양손에 두 개의 단검이 스르르 나타났다. "나와라." = 89 화 끼익. 도로 옆에 검은색 승용차 한 대가 멈춰 섰다. 선글라스와 블랙슈트. 운전석에서 내려선 남자는 헌터협회 감시과 과장 우진철이었다. 이어 조수석과 뒷자리에서도 세 명의 남자가 나왔다. 모두 감시과의 헌터들이었다. "과장님, 저희 협회로 가던 길 아니었습니까?" "여기 볼일이 좀 있어서." 우진철은 고개를 돌려 먼발치에 있는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A 급 게이트는 언제 봐도 무시무시하군.' 우진철은 눈살을 찌푸렸다. 만약 저 거대한 구멍의 문이 열리고 마수들이 한꺼번에 뛰쳐나온다면... 상상만 해도 몸서리쳐지는 일이었다. '그런데 그 남자는 왜 이런 끔찍한 곳에 광부로 지원한 걸까?' 그것도 하루가 아니라 이틀씩이나. 고건희 협회장님의 개인적인 부탁이 아니었더라도 한 번쯤 알아보고 싶었던 일이었다. '뒷조사는... 불가능하다.' 상대는 S 급의 각성자다. A 급에 불과한 자신이 들키지 않고 S 급을 몰래 조사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냥 당당하게 찾아왔다. 마침 근처에 일이 있기도 해서 지나던 길에 들렀다고 인사하고, 몇 가지 간단히 물어볼 생각이었다. '설마 물어보는 걸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겠지?' 이미 S 급 판정이 확정된 헌터가 던전에서 땅이나 파고 있다면 누구라도 사정이 궁금할 거다. 게다가 성진우는 현태 헌터협회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존재 아닌가? 특히 협회장님께서는 그가 마음에 드셨는지 그의 동향 하나하나에 눈과 귀를 기울이고 계셨다. '이상한 건 내가 아니야.' 궁금한 게 당연한 거고, 물어보는 게 정상인 거다. 우진철은 그렇게 되뇌며 헌터스 길드의 관계자를 찾았다. "채굴팀을 찾고 있습니다." "누구... 시죠?" "협회에서 나왔습니다." 우진철의 신분을 확인한 길드 직원은 채굴팀이 대기하고 있는 장소를 손가락 끝으로 가리켰다. "저쪽으로 가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네 명의 감시과 헌터들이 채굴팀을 방문했다. 미리 연락을 받았는지 팀장 배윤석이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아이고, 협회 감시과 헌터 분들이 여긴 어쩐 일로 다 오셨습니까?" 편히 쉬고 있던 채굴팀 헌터들의 얼굴에 긴장한 낯빛이 스치고 지나갔다. 헌터들에게 '감시과'란 단어가 주는 압박감은 컸다. 공권력이 감당할 수 없는 각성자들을 잡아들이고, 교화시키고, 때로는 제거하기도 하는 존재들. 그런 이들이 모인 곳이 바로 '감시과'였다. "무슨 일이래?" "감시과 헌터들이 왔대." "감시과가 여길?" 무슨 일이 터지겠구나. 채굴팀 헌터들이 호기심을 보이며 하나둘 배 팀장 곁으로 모여들었다. 우진철은 선글라스를 벗었다. '...' 성진우가 있는지 훑어보던 우진철이 결국 배 팀장에게 그의 행방을 물었다. "성진우 헌터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내 그럴 줄 알았지!" 갑자기 헌터들 사이에서 한 명이 뛰어나왔다. 어제 던전에서 성진우와 어깨를 부딪쳤던 이성구였다. 이성구가 침을 튀기며 열변을 토했다. "그 새끼가 나를 돌아보면서 씩 웃는데 아주 사람을 잡아먹을 눈빛이었다니까! 어휴, 어찌나 간이 떨리던지 지금 생각해도 진짜." 우진철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사람을 잡아먹을 눈빛?'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웅성웅성. 헌터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우진철은 소음을 무시하고서 이성구에게 물었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아, 그게..." 이성구는 대답을 하려다가 자기가 잘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걸 깨닫고는 손을 내저었다. "그거는 크게 중요하지 않고요, 그 사람 눈이 되게 무섭더라고요." "..." 우진철의 시선이 다시 배 팀장에게로 향했다. "성진우 헌터님은 어디 계시죠?" "성 씨는... 지금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는데요." 성진우가 레이드 진행 중인 A 급 게이트 안으로? 우진철의 눈이 커졌다. "성진우 헌터님이 왜 던전에?" "오늘 짐꾼이 안 나왔거든요. 던전에 대신 들어가려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지원한 성 씨가 짐꾼으로 들어갔습니다." "..." "근데 참 요상하네요." "무슨 말씀이시죠?" "아니요. 별건 아닌데... 방금 차 헌터님, 아니 차해인 헌터님도 성 씨를 찾더니 게이트 안으로 따라 들어갔거든요? 참 요상하다 싶어서..." 배 팀장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대답을 듣고 있던 우진철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헌터스의 부사장인 차해인이 성진우를 찾는다? 그것도 모자라서 그를 따라 던전에까지 들어가?' 일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건지. 성진우에게 안부를 물으러 온 것 뿐인데, 뭔가 일이 커져 가는 느낌이었다. '일단 게이트로 가 보자.' 지금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 정도가 최선인 듯했다. "잠깐 게이트 좀 둘러보고 가겠습니다." "예, 그러세요." 배 팀장이 허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철이 부하 직원들과 함께 돌아서려는데 이성구가 급하게 붙잡았다. "저기 헌터님!" 이성구는 무언가 잔뜩 기대하는 얼굴로 물었다. "그놈, 성진우라는 놈이 사고라도 쳤습니까? 혹시 사람 죽인 거 아닙니까? 그러고도 남을 놈처럼 보이긴 하던데." 우진철은 눈살을 찌푸렸다. 문득 성진우가 이 남자에게 무서운 눈빛을 보냈던 이유가 이해될 것 같았다. '성진우가 콧방귀만 껴도 날아갈 것 같은 놈이...' 그래도 여긴 보는 눈이 많았다. 협회 소속의 헌터로서 함부로 타인에게 짜증을 내거나 할 수는 없었다. 이래서 공인은 귀찮다. 한숨을 푹 내쉰 우진철은 최대한 점잖게 대답했다. "내일 저녁 뉴스를 보시면 알게 될 겁니다." 어느 정도 원하던 대답이 됐는지, 이성구는 역시 그럴 줄 알았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거 봐, 내가 그랬지? 그 인간 수상하다고." "그렇게는 안 보이던데..." "그러게. 일도 싹싹하게 잘하고." 이성구는 동료들의 미적지근한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안목이 얼마나 대단한지를 늘어놓았다. '쯧.' 그런 그를 한심하게 쳐다보던 우진철은 부하들을 데리고 게이트 쪽으로 이동했다. 그런데. 멈칫. 게이트를 몇 발짝 앞둔 위치에서 우진철은 본능적으로 발을 멈추었다. "과장님?" 부하들은 갑자기 얼굴이 굳어 버린 우진철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이럴 수가... 이건 말도 안 돼.' 우진철은 폰을 꺼냈다. 그리고 협회 정보실에 들어가 오늘 헌터스가 공략하기로 되어 있는 A 급 게이트의 정보를 열람했다. 우진철의 눈이 커졌다. '왜 이렇게 마력값이 낮은 거지?' 저절로 고개가 가로저어졌다. '측정 결과가 잘못됐어.' A 급 헌터라도 다 같은 A 급이 아니다. 우진철은 A 급 중에서도 가장 위쪽에 위치한 헌터였다. 그런 감각이 말해 주고 있었다. 마력 측정값이 틀렸다고. 우진철은 옆의 부하에게 재빨리 지시를 내렸다. "마력 측정기." 그의 표정이 심상치 않다는 걸 느낀 부하 직원이 빠르게 차가 주차된 곳으로 달려갔다 왔다. 감시과에서 쓰는 소형 마력측정기는 일반적인 협회 직원들이 쓰는 측정기와 궤를 달리하는 물건. 10 억을 호가하는 최고급 마정석을 이용해 만든 측정기답게 오류나 오차는 거의 발견하지 않는다. 빽. 결과가 나왔다. '역시...' 협회 측정 결과와는 뚜렷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만약 협회의 발표를 믿고 공격대를 꾸렸다면 큰 위기가 발생할 수도 있는 상황. '안에 S 급이 둘이나 들어갔다니 별일은 없겠지만...' 우진철이 땅에 놓은 측정기를 들고 일어서려는 그때. 우웅게이트가 진동했다. 갑자기 터져 나온 강력한 마력 파장에 우진철은 물론 그보다 감각이 떨어지는 부하 세 사람조차도 움찔하며 몸을 떨었다. "과, 과장님?" "이게 대체?" 우진철은 안색이 창백하게 변한 막내를 바라보았다. "괜찮나?" "괘, 괜찮습니다." 막내는 대답 후 조심스럽게 자신의 손등을 바라보았다. 좁쌀 같은 소름이 돋아 있었다. 우진철이 몸을 일으켰다. "안으로 들어간다." "예?" "저길 들어간단 말씀이십니까?" 우진철은 단호했다. "무서운 사람은 빠져도 좋다." 측정 결과가 잘못됐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지금 자신뿐. 어떻게든 안에 있는 헌터들에게 알려야 했다. 헌터들을 관리하고, 감시하며, 헌터들의 일을 돕는 것. 그게 협회 소속 헌터들의 임무였다. "아, 아닙니다." "같이 가시죠." 우진철은 고개를 끄덕였다. "막내, 넌 여기 남아서 측정 결과를 협회에 보고해라." "네, 네?" "할 수 있겠지?" 우진철이 어깨를 툭 치자 얼어 있던 막내가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습니다." 우진철은 고개를 돌렸다. 게이트가 보였다. 지나치게 높은 자체 마력량에도 불구하고 방금 또다시 거대한 마력 해일이 게이트 바깥까지 밀려 나왔다. '대체 안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우진철을 시작으로, 감시과 헌터 두 사람은 게이트 안으로 동시에 몸을 던졌다. *** 그 시각. 차해인은 던전 안에서 공격대의 흔적을 쫓아가고 있었다. '이상하네. 왜 마수들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 걸까.' 평범한 던전이라면 입구 근처에서부터 보스방까지 여기저기 마수들의 사체가 있어야 한다. 마수들이 어디 한곳에 모여 있기라도 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걸음을 옮기는 와중에. '어?' 드디어 사체를 발견했다. 탓, 탓, 탓. S 급의 전투 계열 헌터답게 차해인은 눈 깜짝할 사이 전투가 벌어졌던 곳에 도착했다. '이럴 수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사체들은 전부 하이오크들. 평범한 오크들과 다르게 붉은 피부와 긴 어금니를 가진 놈들이라 쉽게 분간이 가능했다. '어떻게 손기훈 씨 팀이 이 정도 숫자의 하이오크들을 상대로 이길 수 있었던 거지?' 어디 그뿐인가? 단 한 명의 피해자도 없었다. 물론 피해자가 나왔다면 이렇게 번거롭게 찾아갈 필요도 없이 알아서 공격대 쪽이 후퇴를 했겠지만. '내가 A, B 급 헌터들을 너무 과소평가하고 있었나?' 어쩌면 그럴지도. 현장을 둘러보니 전투는 아주 일방적이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이건...?' 무언가를 발견한 차해인이 자세를 낮추고 사체를 살폈다. 그녀의 눈이 더욱 커졌다. 몸을 일으킨 그녀가 다른 사체들을 빠르게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여기도... 또 여기도...' 의심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 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거의 모든 하이오크들의 사체에 짧고 날카로운 무기로 공격당한 것 같은 흔적이 남아 있었다. '숨통을 끊을 만큼 치명적인 공격은 아니지만...' 하이오크들의 행동을 억제할 만큼의 위력은 충분히 느껴졌다. 결국 다른 헌터들은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만 얹었을 뿐. 한 사람의 헌터가 20 마리의 하이오크들을 대량 학살한 것이나 다름 없었다. 그중 두 마리의 하이오크만이 다른 형태로 죽어 있었다. 하나는 목이 강한 힘에 뜯겨 나갔고, 하나는 머리에 둔기를 맞고 죽었다. '그럼 이 둘을 제외한 나머지 오크들은 누군가가 혼자서 다 빈사상태로 만들었다?' 이게 가능한 일일까? 속도에 자신 있는 그녀도 같은 상황에서 같은 일을 할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녀가 알고 있는 한, 손기훈 팀에 단검이나 단도를 쓰는 암살자형 헌터는 없었다. '단검?' 그때 어떤 광경이 머릿속을 팟 스쳐 지나갔다. 어제 보스방 앞에 서 있었던 남자. 성진우는 분명 양손에 무언가 짧은 무기를 쥐고 있었다. '설마 그 남자가?'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차해인의 고개가 던전 안쪽으로 휙 돌아갔다. 그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던전 저 깊숙한 곳에서 여태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강한 마력 파장이, 아니 마력 진동이 일어나고 있었다. 공기가 떨렸다. '안 돼!' 차해인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이것이 만일 보스급 마수의 마력이라면 손기훈 팀은 결코 단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한다. 그녀는 보스방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 90 화 "나와라." 모든 것은 그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화악주술사에게서 흘러나왔던 마력 파장보다 훨씬 더 거대한 진동이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그러나 변화는 그것만으로 그치지 않았다. 마력 개방과 동시에 진우의 발밑에서 그림자가 번져 나갔다. 그림자는 곧 수면에 검은 잉크를 들이부은 것처럼 무서운 속도로 바닥을 뒤덮었다. "헉!" "뭐, 뭐야?" 손기훈 팀 헌터들은 발밑을 지나가는 그림자를 보고 경악했다.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경험 많은 헌터들조차도 난생처음 보는, 심지어 들어 본 적조차 없는 현상이었다. 덜덜덜. 막연한 두려움이 밀려들었다. 바닥에 힘없이 누워 진우를 바라보던 손기훈도 전율에 몸을 떨었다. '무얼...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손기훈의 의문에 대답이라도 하듯 그림자가 보스방의 바닥 전체를 덮었을 때. 스르르륵. 그림자의 표면이 일렁이며 칠흑의 갑주로 무장한 병사들이 하나둘 올라왔다. ['스킬: 군주의 영역'이 시전되었습니다.] [시전자의 그림자 위에서 싸우는 그림자 병사들의 능력치가 50% 상승합니다.] 진우가 옅은 미소를 지었다. '좋아.' 악마성에서 70 레벨을 달성하고 새로이 습득한 직업 전용 스킬이었다. 한층 더 강해진 병사들의 사기가 느껴졌다. 자연히 만족스런 얼굴이 되었다. 소환된 그림자 병사 50 기는 진우를 호위하려는 것처럼 진우 주변을 둘러쌌다. "크, 크르륵!" "그륵!" 용맹하기로 둘째가라면 서러운 하이오크 전사들이 진우와 그의 병사들이 주는 위압감에 지레 겁먹고 한 걸음,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오, 오크들이 물러서고 있어!"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헌터들은 믿기 힘든 장면에 파르르 몸을 떨면서도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기 시작했다. "너도 느꼈어?" "그래." "이게... 이게 말이 돼?" 마력에 민감한 마법계열 헌터들은 빨라지는 심장 박동을 자의로 멈출 수가 없었다. 고작 E 급으로 알고 있던, 그것도 대타로 데려온 짐꾼에게서 압도적인 양의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아니, 애당초 이게 마력이 맞긴 한 건가?' '하이오크 주술사의 것보다 더 불길한 마력이라니...!' 보스룸을 가득 메운 마력의 압력에 숨쉬기가 힘들 정도였다. 이만한 힘이 자신들에게 적대적이지 않다는 사실에 절로 안도가 되었다. 반면 하이오크들 사이에선 극도로 고조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림자 병사들의 출현으로 1 대 150 이었던 격차가 50 대 150 으로 줄었다. 더욱이 그 50 은 단순한 50 이 아니었다. 숫자로 취급할 수 없는, 궤를 벗어난 강함! 그 사실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진우가 가장 먼저 튀어 나갔다. 그러자 주술사가 소리쳤다. "뭐 하느냐! 당장 저 인간 놈을 쳐 죽이지 않고!" 마력을 가득 실은 목소리에 등을 떠밀린 하이오크들이 괴성을 지르며 무기를 들었다. "크아아아아아!" 샤샤샥, 스걱! 군주의 영역 스킬은 그림자 병사들만을 위한 것. 하지만 능력치 상승 버프가 없어도 진우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보여 주었다. "크아아악!" "크아, 크아아!" 하이오크들이 비명을 질렀다. 진우의 단검 두 자루에 잘려 나간 하이오크들의 신체가 피와 함께 사방으로 흩날렸다. 어찌나 빠른지 일류급 헌터들의 눈에도 잔상이 새겨질 정도였다. "저거..." "그래, 꼭 부사장님처럼." 차해인의 별명은 무희였다. 평소에는 얌전하다가도 일단 전투에 돌입하면 빠른 템포의 춤을 추는 듯 기민하게 마수들을 베어 넘기는 모습에 붙은 별명이었다. 부끄럽다는 이유로 당사자가 금지시키는 바람에 널리 쓰이지는 못했지만 지금도 종종 언급되는 별명이었다. 지금 짐꾼은 그런 차해인과 동등한, 아니 그 이상의 움직임을 보여 주고 있었다. 차해인이 춤이라면, 짐꾼은 폭풍이었다. 폭풍의 중심이 되어 마수들을 분쇄하고 있었다. 그어어어! 그림자 병사들도 지지 않았다. 아이스 베어의 우두머리였던 탱크의 앞발을 시작으로 그림자 병사의 진격이 시작되었다. 아이언이 선두로 나섰다. 아이언은 언제나처럼 본격적인 전투에 들어가기 앞서 가슴을 펴고서 함성을 내질렀다. 우워어어어어! [아이언이 '스킬: 도발의 함성'을 사용합니다.] [대상들의 저항력이 높아 효과가 발동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스킬이 먹히지 않자 화가난 아이언이 괴성을 질렀다. 그러고는 육중한 쇠망치로 하이오크들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부우웅콰직! 빠각! "크하악!" "키엑!" 오죽하면 아이언 앞에 있는 하이오크들이 불쌍할 지경이겠는가. 반면 이그리트는 아이언과 대조될 정도로 우아하고도 효율적으로 적들의 목을 베어 갔다. 이그리트에게 걸린 하이오크들은 비명을 지를 새도 없이 숨이 끊어졌다. 스걱! 이그리트의 검이 원을 그리자 또 하나의 하이오크가 머리를 잃었다. 일반 병사들은 하이오크들을 상대하기가 버거웠으나 그들에게는 지치지 않는 체력과 무한에 가까운 재생력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끌기만 하면 어김없이 마법병의 불벼락이 떨어져 내렸다. 쿠아아아앙-! 화르륵! 하이오크들의 수가 가파르게 줄어갔다. 주술사가 돼지 같은 볼살을 푸르르 떨었다. '이 건방진 인간 놈이!' 놈의 시선은 진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일단은 저 인간 놈을 잡아야 했다. 검은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인간놈이 소환해 낸 소환수! 인간을 죽이면 병사들 또한 사라질 터. 진우를 잡기 위해 주술사가 주문을 외웠다. "..." 주술사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였다. 둔화의 노래, 실명의 노래, 고열의 노래, 격통의 노래, 수마의 노래. 다섯 가지의 강력한 저주가 순식간에 완성되어 상대에게 날아갔다. "됐다!" 주술사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저주가 완성되는 순간 진우도 마력의 이동을 느꼈다. '마법?' 진우와 주술사의 눈이 마주쳤다. 주술사가 히죽 웃었다. '이미 늦었다, 인간.' 저주는 평범한 마법과 달리 피할 수가 없다. 발동하는 순간 끝장인 것이다. 온갖 저주로 걸어 다니는 시체가 된 놈은 이제 전사들의 곡도에 갈기갈기 찢겨 죽을 운명. 분수도 모르고 설쳐 대는 인간에게 어울리는 최후였다. 그러나 그때. 진우의 귓가에 익숙한 기계음이 들려왔다. 띠링. [이상 상태가 발생하였습니다.] ['버프: 면역'의 효과로 이상 상태가 제거됩니다.] 띠링, 띠링, 띠링. 기계음이 빠르게 이어졌다. ['저주:둔화'가 사라집니다] ['저주:실명'이 사라집니다.] ... ... 다섯 개의 저주가 발동할 틈도 없이 제거됐다. 씨익. 이번엔 진우가 웃었다. 자신에겐 플레이어가 되면서 받았던 버프가 있었다. [대주술사 칸디아루의 축복] -지속 효과 '무병장수': 모든 질병과 독성 및 이상 효과에 면역상태가 되며, 수면 시 재생 능력이 폭발적으로 증가합니다. 덕분에 저주 같은 상태 이상 마법은 무서워할 필요가 없었다. "아, 아니!" 주술사는 흠칫 몸을 떨었다. A 급 던전의 보스답게 놈은 자신이 건 저주가 무언가 다른 힘에 무력화되었음을 금방 눈치챘다. '어떻게 이 몸이 건 저주를?' 말이 되지 않는 일이었다. 저주를 무력화시키려면 그보다 더 뛰어난 힘을 가진 자의 축복이나 해제 마법이 필요하다. '인간 중에 이 몸보다 뛰어난 주술사가 존재한단 말인가?' 그러나 고민이 길어지기 전 발등에서 올라오는 격통에 주술사는 비명을 질러야 했다. "크아아아아악-!" 아래를 내려다보니 발등에 단검이 하나 박혀 있었다. "끄으으으..." 진우의 단검 '나이트 킬러'였다. 주술사는 고개를 들어 핏발 선 눈으로 진우를 노려보았다. "네놈이 감히..." 자신에게 달려드는 하이오크 하나를 베어 넘긴 진우가 주술사에게 입 모양으로 의사를 전달했다. -얌전히 차례를 기다려라.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진우를 응시하던 주술사의 얼굴이 잘 익은 감처럼 붉게 달아올랐다. "인간 따위가!" 아직도 화를 낼 여력이 있구나. 진우의 표정이 싸늘히 식었다. 사실 마음만 먹었으면 전투가 시작하자마자 주술사를 제거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주술사가 헌터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주술사에게도 두려움이란 감정을 심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저 오만한 마수의 두려움을 일깨우기에는 이 정도로 부족한 듯했다. 놈의 눈빛은 여전히 살아 있었다. 그렇다면. '재미있는 광경을 보여 주마.' 지금부터가 진짜 네크로맨서의 영역이었다. 그림자 군주로서 바라보는 주변의 광경은 그야말로 산해진미로 가득한 축제의 현장이었다. 검은 연기가 곳곳에 널브러진 하이오크들의 사체에서 진우의 부름을 기다리는 듯 스멀스멀 피어 올라왔다. 진우는 그들을 불러냈다. "일어나라." [그림자 추출을 시도합니다.] 스킬이 발동되었음을 알려 주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어디선가에서 단말마를 닮은 끔찍한 비명 소리들이 들려왔다. 으아아아아아아주술사의 눈이 커졌다. "이 무슨!" 주술사는 뒷말을 잇지 못했다. 말을 맺기도 전에 하이오크 사체들의 그림자에서 검은 손들이 솟아올라왔기 때문이다. [그림자 추출에 성공했습니다.] 진우는 그림자 군단에 합류한 신참들을 보고 미소를 지었다. '내 전사들이 언데드로...!' 주술사는 부르르 떨었다. 목숨을 잃은 전사들의 숫자가 대략 오십. 딱 그 정도의 숫자가 검은 갑옷의 병사들로 변했다. '그렇다면 저놈이 가진 병사들 또한 전부...?' 주술사는 드디어 정체불명의 인간이 평범한 소환수를 다루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상대의 힘이 자신들에게 얼마나 불리하게 작용하는지도. 50 대 150 의 싸움이 100 대 100 으로 바뀌었다. 자신보다 강한 적을 상대로도 용맹하게 싸우던 하이오크족 전사들이었지만, 그림자 병사들로 되살아난 동료들을 보고는 급격히 전의를 상실해갔다. "크... 크르륵." "크륵." "크악." 피 보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하이오크 전사들이 대놓고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죽어서 전사들의 성지로 올라가지 못하고 적의 꼭두각시가 되어야 한다는 사실은 하이오크 전사들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확실히 그림자 추출 스킬을 보여준 효과가 있었다. '전사들에겐 먹혔는데, 주술사는 어떤지 볼까?' 진우는 주술사의 안색을 살폈다. '오.' 진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드디어. 놈의 눈동자에서 공포심을 발견했다. 주술사는 부르르 떨면서 죽은 자를 그림자로 되살리는 능력을 지닌 존재를 기억해 냈다. 그런 힘을 가진 이가 둘 이상 있을 리가 없었다. 그는 그다. '저분이 바로... 그렇다면 우리는 어째서 여기에?' 주술사가 '자신'과 '자신들'에 대해 인식한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지며 기억이 깨끗하게 사라졌다. 그 자리에 남은 감정은 두려움뿐이었다. 진우는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그래, 그렇게 있어라.' 주술사 놈은 맨 마지막에. 주술사를 마지막까지 두려움에 떨게 만들겠다는 계획은 성공적이었다. 그렇게 웃으며 돌아서는데, 멀리 입구 문턱에서 낯익은 여자가 하나 보였다. 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더라?' 낯익다기엔 또 거리감이 느껴지는. 그래서 찰나의 시간이 지난 뒤에야 그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헌터스 소속의 S 급 차해인. '근데 저 여자가 왜 여기 있지?' 진우가 차해인을 보고 놀란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놀란 차해인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진우와 그림자 병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 91 화 '소환수?' 차해인은 그림자 병사들을 보고 가장 먼저 소환수를 떠올렸다. 하지만 소환수라고 하기엔 그 숫자가 너무 많았다. 소환 마법이 특기인 마법계열 헌터들이 다룰 수 있는 소환수의 숫자는 끽해야 하나둘. 둘만 다뤄도 대접이 달라지며 셋을 다루는 소환사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저 숫자는 뭐란 말인가? '이게 말이 돼?' 한 사람이 불러낸 소환수가 100 여 마리를 넘어서고 있었다. 그것도 소환하는 데 오래 걸리지가 않았다. 수십의 소환수를 한꺼번에 불러냈다. '내 눈으로 직접 본게 아니라면 믿기 힘들었을 거야.' 한국에서 열 손가락 안에 드는 헌터인 그녀가 다른 헌터의 능력을 보고서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야.' 그녀의 시선이 그림자 병사들을 지나쳐 공격대를 향했다. 다들 안색이 좋지 않았다. 몇몇은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주저앉기까지 했다. 성진우라는 남자의 정체가 무엇이든,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든 간에 일단은 그를 도와 한시바삐 하이오크들을 정리해야 했다. 생각은 간단히, 행동은 빠르게. 차해인은 무기를 양손으로 고쳐쥐고서 하이오크들을 향해 한 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그때. 성진우와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빛이 강하게 말하고 있었다. 필요없다고. 방해하지 말고 지켜만 보라고. 차해인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어째서...?' 성진우가 많은 소환수를 다룰 수 있다는 건 알겠다. 하지만 아직 비슷한 숫자의 하이오크들과 필시 강한 힘을 가지고 있을 보스가 남아 있었다. 저리 많은 소환수들을 불러냈고, 또 유지하고 있으니 이미 마력이 바닥났거나 슬슬 바닥나 가고 있을 텐데. '혼자서 뭘 어쩌려는 걸까?' 의아했지만 결국 차해인은 순순히 무기를 늘어뜨렸다. 그 무기가 채굴팀에서 빌린 곡괭이여서만은 아니었다. 저 남자, 성진우라는 헌터가 하이오크들을 상대로 무엇을 하려는지 한번 지켜보고 싶어졌다. 기대감. 이성적인 판단과 기대감의 대결에서 기대감이 압승을 거뒀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휴, 다행이다.' 진우는 차해인의 반응을 보고서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부터가 진짜인데 훼방꾼이 있어서야 안 되지. 혼자 마수들을 차지하기 위해 일부러 보스에게 공격당하는 손기훈을 아슬아슬한 순간까지 방치했다. '여력이 남아 있으면 어떻게든 함께 싸우려 들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 손기훈의 손에서 검이 떨어졌을 때야 비로소 움직였다. 당장 달려 나가 빌어먹을 주술사 놈의 머리를 날려 버리고 싶었던 마음을 꾹꾹 눌러 참으면서 말이다. 바로 이 순간을 위해. '역시 감이 좋은 여자야.' 차해인이 눈치가 빨라서 다행이었다. 언성을 높일 필요 없이 알아서 물러나 줬으니까. 진우가 웃으며 돌아섰다. "그림자들!" 내부를 쩌렁쩌렁 울리는 진우의 외침에 그림자들이 조금의 어긋남도 없이 일제히 전투태세를 갖추었다. 착! 짧은 순간 정적이 내리 앉았다. 정적을 깨부순 것은 진우가 하이오크 주술사를 가리키며 던진 한마디였다. "가라." 그러자 일백을 넘어선 그림자 병사들이 두려움에 떨고 있는 하이오크 전사 무리를 향해 돌격을 시작했다. 두두두두두-! 병사들의 돌진에 땅이, 동굴이, 그리고 지켜보는 사람들의 눈동자가 쉼 없이 흔들렸다. *** 우진철이 헐레벌떡 뛰어왔다. "헉, 헉, 헉." 어찌나 뛰었는지 입에 단내가 났다. 잠시 숨을 고르고 상체를 일으키니 입구 근처에 서 있는 짧은 머리의 여성이 시야에 들어왔다. 누군지는 한눈에 알아봤다. '차해인...' 저만한 기운을 품은 여성 헌터가 달리 어디 있을까? '그런데 왜 가만히 있지?' 우진철은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지켜만 보는 그녀를 의아하게 생각하며 옆으로 다가갔다. 그러자 안의 상황이 훤히 보였다. "이, 이게 대체...?" 흑색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하이오크라는 강한 마수들을 일방적으로 도륙하고 있었다. "크, 크아아악!" "키악!" "크에에엑!" 하이오크들이 내지르는 비명으로 귀가 먹먹해질 지경이었다. 사람의 형상을 한 병사들만 있다면 좀 덜 놀랐을지도 모른다. 한데 저기 저 무식하게 큰 데다 연기까지 올라오는 검은 곰들과 흑빛 갑주를 걸친 하이오크들은 뭐란 말인가? "오랜만이에요, 우진철 과장님." "아, 예. 오랜만입니다. 그런데 저것들은 다 뭡니까? 마수 같지는 않은데..." "저 남자가 불러낸 소환수예요." 우진철에게 먼저 인사를 건넨 차해인은 진우를 가리켰다. 우진철은 선글라스를 벗고 병사들의 중심에 서 있는 진우를 보았다. 그는 단검 두 자루를 쥔 채 최전선에서 하이오크들의 진형을 붕괴시키고 있었다. '어떻게 봐도 최상급의 전투계열 헌터가 아닌가?' 그런데 소환 마법까지 쓸 수 있다고? 아니나 다를까. 그의 입술이 움직이자 또 수십의 소환수들이 바닥에서 올라왔다. "맙소사!" 우진철의 입이 쩍 벌어졌다. 대체 소환수를 몇 마리나 부릴 수 있단 말인가? '이게 성진우 헌터의 능력...' 벌린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고건희 협회장은 이런 성진우 헌터의 실력을 일찍이 알아보셨던 걸까? 그렇다면 성진우 헌터에 대한 그분의 높은 관심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참 동안 진우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던 차해인이 뒤늦게 우진철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런데 우 과장님이 여기 어떻게...? 벌써 감시과에 연락이 갔던 건가요?" 차해인의 물음에 우진철은 놀란 감정을 가까스로 추스르며 대답했다. "그건 아닙니다. 우연히 이 근처를 지나가다 여기 게이트에서 이상현상을 발견해 공격대를 피신시키려고..." 말을 이어 나가던 우진철의 고개가 다시 진우를 향했다. "한데 그럴 필요가 없게 됐군요." 처음으로 성진우 헌터의 실력을 보았다. 그가 혼자 힘으로 A 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있는 광경을. 거기엔 누구의 도움도 필요치 않을 듯했다. "네. 지금은 가만히 있는 게 정답인 것 같네요." 차해인 또한 동의했다. 그의 싸움엔 S 급인 자신조차 끼어들 만한 틈이 보이지 않았다. "저 남자를 아시나요?" 차해인이 물었다. 우진철은 성진우의 정체를 궁금해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능력에 감탄하고 있었다. 또 그는 성진우의 정보를 차단한 협회의 일원이기도 했다. '어쩌면 우진철은 저 남자에 대해 알고 있지 않을까?' 예상은 들어 맞았다. "조금은 압니다." "저 사람... 대체 정체가 뭔가요?" 우진철은 다시 선글라스를 쓰며 대답했다. "알려 드릴 수 없습니다." *** 주술사는 분노했다. 이곳에서 눈을 떴을 때 머릿속에서 단 하나의 명령만이 들려왔다. -인간들을 사냥하라! 하나 지금 이 꼴은 무엇인가? 겨우 인간 하나에게 부족 전체가 사냥당하고 있지 아니한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아니, 있어서는 안 될 일이다. 학살당하는 부하들을 보는 주술사의 눈이 붉어지기 시작했다. '벌레 같은 놈들, 밟아 죽여 주마!' 적에게 저주가 통하지 않는다면 스스로에게 축복을 걸어 상대하면 된다. "분노의 노래, 강화의 노래, 거인의 노래, 화룡의 노래." 주무이 완성되며 주술사의 몸이 10 미터에 육박할 만큼 커졌다. 근력이, 민첩이, 체력이, 자신감이 증가하며 온몸에 힘이 꽉 들어찼다. 곧이어 주술사는 거대해진 팔로 그림자 병사들을 날려 버리고,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그리고. "후우욱-!" 주술사가 숨결을 토해 내자 입에서 검붉은 화염이 쏟아져 나왔다. 화르르르륵! 화염에 직격당한 병사들이 순식간에 증발하여 사라졌다. 스치기만 한 병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는 아니어도 몸 일부분이 날아가 전투 불능이 됐다. 화염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놈의 입에서 두 번의 불길이 연거푸 뿜어져 나왔다. 연이은 공격으로 병사들의 수를 꽤 줄인 주술사가 자신감을 드러내며 목청이 터져라 포효했다. "이래도 이 카르갈간 님이 우스워보이느냐!" 대답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어." 주술사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는 동시에 황급히 방어 주문을 외웠지만. 하지만 진우가 한발 더 빨랐다. 진우의 주먹이 놈의 정수리를 내리 찍었다. 투쾅-! 콰직! 주술사의 머리가 그대로 바닥에 내리꽂혔다. 바닥에 거미줄처럼 금이 갔다. 이미 주술사보다 덩치가 훨씬 더 컸던 볼칸도 주먹으로 날려 버린 경험이 있던 진우였다. [던전의 주인을 처치하였습니다.] 착. 사뿐히 바닥에 착지하는 순간 기분 좋은 메시지가 연달아 떠올랐다. 띠링.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렇지!" 진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아까 은신으로 싸울 때 1 업, 여기서 오크들을 때려잡아 1 업, 그리고 방금 보스를 잡고 1 업. A 급 던전을 클리어하고 레벨을 세 개나 올렸다. 기대 이상의 성과였다. 어제, 내일도 같이 일하지 않겠냐고 제안해 준 배 팀장이 고마워졌다. '좋았어.' 진우는 기쁜 마음으로 보스에게 다가갔다. 버프로 몸을 키웠던 주술사는 어느새 다시 원래 크기로 돌아가 있었다. 놈의 목걸이에 박힌 씨알 굵은 마정석이 눈에 들어 왔으나 욕심내지 않았다. '경험치를 얻은 걸로 충분하다.' 여긴 헌터스의 던전. A 급 던전의 마정석이 필요하면 남의 던전이 아니라 자신이 산 던전에서 구하면 되는 일이었다. 진우가 노리는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보스의 사체에서 올라오기 시작한 검은 연기. 꿀꺽. 진우가 군침을 삼켰다. 문득 레드 게이트에서 놓쳤던 바루카의 사체가 뇌리에 떠올랐다. '그때와는 다르지.' 그때는 지금보다 능력치가 많이 딸렸다. 놈을 잡는 것도 쉽지 않았다. 기사 등급인 이그리트와 아이언의 도움을 빌려 간신히 잡았었다. 하지만 이 주술사 놈은 비교적 손쉽게 잡을 수 있었다. 악마성에서의 일주일. 그 고된 7 일의 과정이 헛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진우는 넘실거리는 칠흑의 증기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일어나라." 그와 동시에 스산한 바람이 두 뺨을 스치고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됐구나!' 진우의 얼굴에 웃음꽃이 피었다. 크아아아아아-! 찢어지는 비명 소리와 함께 주술사의 그림자에서 로브를 뒤집어쓴 검은 마법사가 올라왔다. '어?' 진우는 심상찮음을 느끼고 놈의 정보창을 확인했다. [?? Lv.1] 정예 기사 등급 '정예 기사?' 지금까지 확인한 그림자 병사들의 등급은 세 가지가 전부였다. 일반 등급. 정예 등급. 기사 등급. 그런데 이번에 처음으로 정예 기사 등급이 나왔다. 기존에 있던 기사 등급에 정예라는 표현이 붙은 걸 봐선, 이그리트나 아이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병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확실히 느껴지는 마력도 두 기사보다 강해.' 과연 A 급 던전의 보스로 만든 그림자 병사다웠다. 띠링. [병사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기사급 이상이 나왔기 때문에 예상대로 이름을 부여해 달라는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이름이라...' 지금은 로브에 가려져 얼굴이 안 보이지만, 하이오크하면 역시 크고 긴 어금니 아닌가? '어금니로 하자.' 따로 지시를 내릴 필요 없이 생각만으로 놈의 이름이 정해졌다. [어금니 Lv.1] 정예 기사 등급 물음표 대신 이름이 생겼다. 죽기 직전까지 오만하게 굴던 주술사 놈이 들으면 기절할 만한 이름이지만, 뭐 어쩌겠어? 이미 죽은 놈인데. 진우는 흡족한 얼굴로 그림자 병사들을 거둬들였다. 저장 가능한 그림자 수는 약 130 개. 나머지는 안타깝지만 전부 무(無)로 돌려보냈다. '이만하면 됐다.' 웃으며 제단 아래로 내려서자 많은 사람들이 진우에게로 몰려들었다. 공격대의 헌터들과, 차해인과, 검은 양복의 사내들. 양복 사내들 중에는 아는 얼굴도 하나 있었다. '우진철 과장은 또 언제 왔대?' 우진철의 표정을 보아하니 그도 그림자 병사들을 본 모양이었다. "성진우 씨." "성진우 헌터님." "짐꾼 씨?" 동시에 진우를 부른 이들이 각자 서로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힘을 숨길 이유도 없겠다, 원 없이 싸운 것까진 좋았는데... '이제 여길 어떻게 빠져나간다?' 진우는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보고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 92 화 선수는 우진철이 쳤다. 다들 눈치를 살피는 사이, 진우 옆으로 다가간 그가 자신의 신분증을 꺼내 들어 헌터들에게 보여 준 것이다. "협회 감시과에서 나왔습니다." 상급이든, 하급이든 헌터들은 감시과라는 이름을 들으면 긴장하기 마련. 작전은 주요했다. 차해인을 제외한 헌터스 길드원들의 얼굴에서 잠깐이지만 긴장된 기색이 스쳐 지나갔다. 우진철은 그 틈을 타 매끄럽게 말을 이었다. "여기 계신 성진우 헌터님의 신원은 저희 협회에서 전담해 관리하고 있으며, 외부로 일체 발설할 수 없는 상급 기밀 사항입니다." 진우는 우진철의 연기력에 혀를 내둘렀다. 표정과 말투가 너무 자연스러워서 미리 거울을 보고 연습해 온 대사가 아닐까 생각됐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의 의도만은 확실하게 전해졌다. 마침 우진철이 진우에게 눈빛으로 살짝 사인을 보내왔다. '이곳에서 시끄럽지 않게 나갈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습니다.' 왜 감시과에서 자신을 돕는지는 모르겠으나, 알아서 뒷정리해 주겠다는데 마다할 필요가 있을까?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바였다. 눈치 빠른 우진철의 부하 직원들이 금방 진우의 주위를 에워쌌다. "질문이 있으시다면 차후 협회를 통해서 해 주십시오. 성진우 헌터님은 저희가 모셔 가겠습니다." 이견은 받지 않겠다는 뉘앙스가 팍팍 풍겨져 나왔다. 쇠도 잘라 버릴 것 같은 우진철의 단호한 태도에 진우에게 하고 싶은 말, 묻고 싶은 말이 가득했던 헌터스의 헌터들은 전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가시죠." 진우는 감시과의 에스코트를 받으며 헌터들을 지나쳐갔다. '고맙기는 한데...' 조금 묘한 기분이 들었다. 왜 우진철 과장이 부탁하지도 않은 일을 하는 걸까? 헌터들과 거리가 조금 벌어진 후 조용히 물었다. "갑자기 이러는 이유가 뭡니까?" "혹시 헌터님께서는 헌터스 길드에 들어가실 생각이십니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우진철은 재빠르게 대답했다. "방금 헌터님께서는 대한민국에서 자금과 직원이 가장 많은 길드 앞에서 S 급을 능가하는 힘을 보이신 겁니다. 귀찮은 일을 피하시려면 이 방법이 최선입니다." 하기야. 여유가 넘치는 헌터스 길드라면 S 급 헌터 하나를 확보하기 위해 어떤 공을 들일지 아무도 모른다. 다른 헌터들이라면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만, 진우는 달랐다. 그리고 그건 헌터협회도 마찬가지였다. 특정 길드에 힘이 집중되는 일을 막으려는 협회와 길드들의 구애(?)가 귀찮은 진우의 이해가 일치했다. 한쪽의 일방적인 호의라면 모를까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이런 상황은 부담스럽지 않았다. '협회 덕분에 편하게 됐네.' 일이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잘 풀린 까닭에, 진우의 입가에 희미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렇게 보스방 입구를 막 빠져나가려고 하는데. "자, 잠시만요!" 뒤에서 급한 외침이 들려왔다. 무심결에 돌아보니 손기훈이 덩치 큰 동료의 부축을 받아 이리로 오고 있었다. 상처는 말끔히 치료됐지만 피를 많이 흘린 탓인지 안색이 창백했다. '움직이지 않는 게 좋을 텐데.' 진우의 걱정에도 불구하고 손기훈은 기어이 진우 앞에 섰다. 그러고는 고개를 깍듯이 숙였다. "감사합니다." 이어 손기훈은 가식 없는 본심을 털어놓았다. "헌터님 덕분에 저희가 무사할 수 있었습니다. 공격대 전원을 대신해 제가 감사를 드리겠습니다." 감시과 헌터의 말을 따르면 저 사람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서는 안 될 무슨 사정이 있는 듯했다. '그 정도 힘을 가지고 있다면 어떤 사정이 있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런데. 정체가 발각될 위험까지 무릅쓰고서 자신과 자신의 대원들을 도왔다. 어디 그것뿐인가? 그는 아무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 헌터스 길드에 마수들의 사체나 공격대의 목숨값을 청구할 수 있었는데도, 군말 없이 물러났다. 이러니 어찌 허리를 굽히지 않을 수 있을까? "...감사합니다!" 감정이 격해진 손기훈이 다시 한번 허리를 90 도로 숙였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몸이 비명을 질렀지만 그것마저 달가웠다. 마수에게 농락당한 자신을 대신해 그가 마수를 똑같은 방법으로 처치해 줬을 때, 가슴이 울컥했었다. 그 순간을 떠올리면 이까짓 '감사하다'는 말 정도는 골백번도 더할 수 있었다. 공격대 헌터들은 고개 숙여 인사하는 자신들의 리더를 보고, 그제야 혼란스러움에서 벗어났다. '저 사람이 아니었으면...' '생명의 은인이잖아?' '그러면 여기서 이렇게 멍하니 보고 있을 게 아니라.' 모두 앞다투어 달려와 고개를 숙였다. "고맙습니다, 짐꾸... 아니, 헌터님." "진짜 헌터님 아니었으면..." "덕분에 제 마누라가 과부 신세를 면했네요." 손기훈이 공략 포기를 결정했을 때 손을 내보이며 엄살을 떨었던 어린 남자 헌터는 눈물을 글썽이며 다가왔다. "헌터님 저기... 너무 고마워서 그러는데 제가 한번 안아 드려도 될까요?" "에이, 너무 갔다." "쟤 또 저러네. 누가 좀 말려 봐." "그럼 형이라도 안아 주던가!" 와락. "으헉! 소름 끼치니까 떨어져!" 와하하하하이번 A 급 던전에 들어오고 처음으로 공격대 멤버들 사이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진우도 그런 헌터들의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공치사를 위해 그들을 도운 것은 아니었지만, 진심으로 감사하는 모습에 미소가 저절로 새어 나왔다. "아." 진우는 구석에서 팔딱팔딱 뛰며 기뻐하는 여힐러에게 다가갔다. '체구가 작아서 뒤에 서 있으니 잘 보이지도 않네.' 그녀에게 받았던 수첩을 내밀자, 여힐러는 얼굴을 붉히며 두 손으로 다소곳이 받아들었다. "고, 고맙습니다..." 여힐러는 그러면서 속으로 얼마 전의 자신을 구박했다. '아휴, 괜히 그런 말을 해 가지고.' 자기 전에 떠오르면 이불을 차야할 일이 하나 더 늘었다. 던전 보스를 손쉽게 때려잡는 짐꾼 씨 입장에서는 유서랍시고 메모를 해 건네주던 자기가 얼마나 우스워 보였을까? 슬쩍 고개를 들어 보니 다행히 비웃고 있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약간은 엄한 목소리가 나왔다. "힐러님." "네?" 여힐러가 태도를 지적당한 학생처럼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앞으로 공격대 짐가방에 개인 소지품 넣지 마세요. 부피 늘어나니까." "네?" 여힐러가 할 말을 잃고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진우는 씩 웃었다. 하고 싶은 말은 다 했다. 저쪽도 대충 하고 싶었던 말은 다한 듯 보였다. 그래서 벙 쪄 있는 여힐러를 뒤로 하고서 쿨하게 돌아섰다. "갑시다." 진우가 발을 떼자 기다리고 있던 감시과 헌터들도 같이 움직였다. 유일하게 한 사람. '아...' 진우에게 말을 붙이지 못했던 차해인만이 손을 뻗으려다가 그만두었다. '연락처라도 물어보고 싶었는데...' 그냥 조금만 시간을 내줄 수 없을지 묻고 싶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아직 상황이 정리되지 않은 현시점에서 당사자에게 그 말을 하기에는 오해의 여지가 많았다. 그때. 여자 헌터 하나가 차해인에게 다가왔다. "저기... 부사장님." "네?" 차해인이 돌아보자 여자 헌터는 차해인의 손끝을 가리켰다. "곡괭이는 왜 들고 오셨어요?" 들어 올린 곡괭이의 머리 부분을 바라보던 차해인의 얼굴이 점점 불그스름하게 변해 갔다. 그녀는 곡괭이를 내리고 물었다. "저 이상하게 보였을까요?" 여마법사는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 "누구한테요?" 그러자 차해인의 얼굴이 목덜미까지 붉게 변했다. 게이트에서 막 나왔을 때였다. 우진철이 시계를 보더니 물었다. "저희는 협회로 돌아갈 예정인데... 괜찮으시다면 헌터님도 같이 가셔서 협회장님과 식사라도 하시겠습니까?" "지금 몇 시죠?" "5 시 15 분입니다." '음...' 빠듯하긴 해도 아직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이었다. 진우는 우진철의 제안을 정중히 사양했다. "선약이 있어서 이만." *** 씁씁, 후후. 유진호는 어떤 영화에서 본 대로 깊은 심호흡을 하며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온다.' 형님의 선택에 따라 자신의 운명이 결정되는 것이다. 며칠 전, 유진 길드를 맡겨 달라고 아버지와 담판을 지었을 때보다 더 설레고 긴장됐다. '초심으로 돌아가자, 초심으로.' 약속 장소로 형님과 처음 만났던 카페를 선택한 것도 우연이 아니었다. '형님의 도움이 아니었으면 내가 여기까지 올 수도 없었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카페 내부를 둘러보니 감회가 새로웠다. 마침 위치도 그때 그 자리였다. 딸랑. 종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며 진우가 안으로 들어섰다. "형님!" 진우를 발견한 유진호가 반가운 얼굴로 벌떡 일어나 깍듯이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진우는 간단히 눈인사로 대신하고 유진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제야 유진호도 앉았다. "무슨 일이야?" 고개를 들던 유진호의 눈이 커졌다. "형님, 옷이...?" "아, 이거?" 하이오크들과 싸우고 바로 이쪽으로 달려온 터라 옷이 좀 더러웠다. 상의에는 하이오크 피까지 약간 튀어 있었다. 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던전에 들렀다 바로 이리로 오느라." '헉!' 유진호는 다시 한 번 놀랐다. 형님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수준에 불과한 자신은 마스터 면허를 따고 난 뒤 술이나 마시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형님은 어떠한가? 그렇게 강한 힘을 가지고 계시면서도 아직도 틈틈이 던전에 들어가 수련을 하고 계시지 않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역시 형님이시다...' 그리고 동시에 형님이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옷에 튄 피를 닦지도 않고 그냥 다니시는 것 또한 수련의 과정을 숨길 필요를 느끼지 못할 만큼 당당하시기 때문이리라. '형님께 싸움의 흔적이란 스스로 얻어 낸 훈장 같은 거니까.' 유진호가 굳은 표정을 지었다. 형님이 내린 결정이라면 어떤 방향이든 두말없이 따를 준비가 됐다. 그러니 있는 사실대로 말하자. "형님, 실은..." 유진호는 그날 아버지와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진우에게 보고했다. 고명환의 증언으로 레드 게이트에서 백호 길드의 헌터들을 구해 준 사람이 누군지 알게 되었다는 사실까지 전부. '그 아저씨, 쓸데없는 짓을...' 그래도 나를 위해서 그랬다는데 화를 낼 수도 없고. 어쩐지 레드 게이트의 이야기를 하는 유진호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어 있었다. 아무튼. 유진호가 하는 말은 알았다. "그러니까 네가 유진 길드의 마스터가 되려면 내 도움이 필요하다는 거지?" 모든 이야기를 끝맺은 유진호가 차분히 진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평소처럼 촐싹대지도, 감언이설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상대는 형님이니까.' 전적으로 형님의 뜻에 맡길 생각이었다. 유진호의 고민만큼 깊은 침묵에 빠져 있던 진우가 아래로 내리고 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진호야, 나는." 꿀꺽. 유진호는 마른침을 삼켰다. *** 헌터스 길드의 최종인 사장도 연락을 받았다. 하던 일도 내팽개치고 개인실로 들어가 목소리를 높였다. "예? 성진우가 어제 오늘 우리 레이드에 왔었다?" 새로이 나타난 S 급 헌터. 그가 자신의 길드 앞에 떡하니 나타났는데 왜 그걸 몰랐을까! 굴러 들어온 호박을 제 발로 걷어찬 것이나 다름없었다. 복장이 터질 일이었지만. "예에? 어제는 채굴팀에 있었고 오늘은 짐을 날랐다고요?" ...듣고 보니 모를 만했다. '일단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는 접어 두자...' 어차피 그걸 고민해 봤자 머리만 아프고 결론은 나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백호에 이어 우리 헌터스까지 도움을 받았군.' 성진우에게 은혜를 입었다. 그를 포섭하기 전에 최대한 동등한 위치에서 이야기하고 싶었는데, 이제 백호의 입장과 다를 바가 없어졌다. '그래도 10 번째 S 급의 존재를 먼저 안 게 어디야?' 그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남자의 능력이었다. "성진우 헌터, 어떤 타입이었습니까?" -... 수화기 너머의 설명을 듣고 있던 최종인의 말수가 차츰 줄어들었다. 지금 통화를 나누는 상대. 오늘 공격대의 리더를 맡았던 손기훈은 없던 사실을 말하거나 작은 일을 부풀려 말할 친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반사적으로 말이 나왔다. "그게 정말입니까?" -네. 제가 본 건 그게 답니다. '그게 다라고...? 그럼 더 있을 수도 있단 말인가?' 만약 그 남자가 그렇게 강하다면... "나와 비교하면 그 사람, 어떤가요?" 조금 유치한 질문일지도 모르지만, 상대의 강함을 알기 위해서는 이만한 질문이 없었다. 잠시 뜸을 들였던 손기훈이 말을 이었다. -대표님께서는 A 급 중에서도 상위 던전을 혼자서 클리어하실 수 있으십니까? "...불가능하죠." -그런데 그 사람은 해냈습니다. 도우려는 차 헌터님을 말리면서까지. '차해인이 거기 있었다고?' 조금 의아했지만 지금 그녀가 거기 있었는가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그 던전이 A 급 상위 던전이 아니었을 가능성은 없습니까?" -그랬다면 저희가 애먹을 일도 없었을 겁니다. 그 사람이 저희 모두를 살렸어요. "..." 최종병기로 불리는 남자, 최종인. 어떻게 해석하면 무시당했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기분이 나쁘긴커녕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 차해인. 그리고 성진우.' 정말로 한국, 아니 아시아, 아니 성진우의 실력 여하에 따라서는 세계에서 이름을 날리는 길드가 될 수 있는 기회였다. -최 대표님. 제가 길드 운영에 대해서 뭐라고 말씀드릴 입장은 아니지만... 실제로 손기훈은 주제넘게 길드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 나서는 성격이 아니었다. 그래서 더욱 그가 할 말이 궁금해졌다. "아닙니다. 말씀하세요." -그 남자... 성진우 헌터님 꼭 모셔 오세요. 어쩌면 대표님의 꿈이 이뤄질지도 모릅니다. 두근. 최종인은 심장이 뛰었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를 들키지 않으려고 최대한 애를 쓰며 말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 *** 한국 협회 건물 앞. 이민성을 취재하려고 몰려든 인파들이 협회 건물 앞에서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을 넘어 아시아의 슈퍼스타라 불리는 이민성이 헌터가 된다! 온 나라의 카메라들이 전부 여기로 향해 있다고 과언이 아니었다. 발 디딜 틈도 없다 보니 기자들끼리의 신경전도 치열했다. "저기요! 여기 우리가 맡아 놨던 자린데요?" "이 사람아! 눈이 있으면 여기 몇이나 왔는지 봐. 니 자리 내 자리가 어디 있어? 서 있는 그 자리가 자기 자리지." "아오..." 건물 안에서 유리 너머로 차도까지 밀려 있는 기자들을 바라보는 이민성의 만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이 정도는 와야지." 일부러 시간을 끌며 세간의 관심을 끌어모았던 보람이 있었다. "저기 민성 씨. 내일 헤드라인으로 이렇게 나갈 건데 민성 씨 생각은 어때?" 한국 최고의 신문사 기자가 내일 1 면에 게재될 원고를 보여 주며 물었다. "이걸 제목으로 쓰기엔 너무 밋밋하지 않아요?" "그래?" "흠... 이건 어때요? '모든 것을 가진 남자 이민성. 인간을 초월한 힘까지 손에 쥐다.'라던가?" "그렇게 멘트를 세게 치면 일부 독자들이 불편해하지 않겠어?" "제가 틀린 말한 것도 아니고, 또 한국에서 누가 감히 나를 욕하겠어요? 언론과 팬들이 두 눈 뜨고 지켜보고 있는데." "알겠어. 그럼 그걸로 할게."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민성은 넉살 좋게 꾸벅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어차피 시키면 할 거면서 말은 왜 저리 많은지.' 그때 협회 주차장에 두 대의 고급 외제차가 도착했다. 탁. 탁. 거의 동시에 내린 두 사람은 백호 길드의 백윤호와, 헌터스의 최종인이었다. "어? 저기!" "백윤호다!" "최종인도 왔어!" 문 앞을 가로막고 있던 기자들이 두 사람 곁으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백윤호와 최종인은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이 기자들은?' '오늘 왜 이렇게 복잡해?' 찰칵찰칵찰칵. 카메라 플래시가 터져 나오는 소리가 요란했다. 기자들은 두 사람을 둘러싸고 질문공세를 쏟아부었다. "두 분도 이민성 씨를 영입하기 위해서 협회에 들리신 건가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헌터로서 이민성 씨의 연예계 은퇴 가능성,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이민성 씨의 등급은 얼마나 나올 것 같습니까?" "이민성 씨에 대해 한마디씩 해 주세요." 성격 급한 백윤호는 귀찮다는 듯 손을 훠이훠이 내저었고. "그 사람 때문에 여기 온 거 아닙니다. 할 말 없어요." 최종인은 감정 없이 담담히 사실만을 늘어놓았다. "이민성 씨가 사신 길드와 계약했다는 건 업계 관계자라면 대부분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오늘은 다른 용무로 협회를 찾은 겁니다." 기대에 못 미치는 대답들이 이어지자 기자들은 투덜거리며 돌아섰다. '에이, 뭐야.' '기삿거리가 좀 될 줄 알았더니.' '좋다 말았네.' 그래도 S 급 헌터 앞이라 대놓고 불만을 표시하진 못했다. 기자들은 다시 자리를 잡고 이민성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기자들이 떠나고서 백윤호와 최종인은 눈을 마주쳤다. 백윤호가 먼저 알은체를 했다.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어제 헌터스'도' 큰일 날 뻔했다죠." 일부러 '도'를 강조해 말하는 백윤호였다. "A 급 신인까지 잃은 백호만큼 큰일 나긴 했겠습니까." 기자들의 신경전 못지않게 두 사람의 신경전 또한 치열했다. 잠깐 열을 올렸던 백윤호가 한숨을 살짝 내쉬더니 말했다. "어쨌든 우리와 헌터스 둘 다 그 사람의 도움을 받았군요." "천만다행이죠. 그가 없었다면 우리 정예 2 군 팀이 전멸할 뻔했습니다." 이미 서로 다 알고 있으면서도 마지막까지 이름을 언급하지 않는 것은 최후의 신경전이라 할 수 있었다. 최종인이 백윤호에게 한발 다가갔다. "그래서 도의적으로 그분을 '꼭' 저희 길드에서 모시고 싶습니다." 백윤호도 지지 않았다. 백윤호는 최종인과 이마가 닿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갔다. "우리는 피해자까지 나왔습니다. 전력 보충 차원에서도 그분을 저희가 데려가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체 뭘 하시려고 전력 보충을 S 급으로 합니까? 어디, 북한이라도 치러 가실 겁니까?" "그쪽이야말로 언제부터 그렇게 도의를 챙겼다고 도의를 말합니까, 도의를." 두 사람의 눈빛에서 불꽃이 튀었다. '어?' 기자회견 시간에 딱 맞춰 현장에 도착한 사신 길드의 마스터 임태규는 눈싸움하는 두 사람을 보고 히죽 웃었다. 저런 걸 뭐라더라?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든가? 평소 두 길드에 재원을 뺏기기만 했던 임태규로서는 신나는 일이었다. 자꾸 올라가는 입꼬리를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며, 임태규는 두 사람 곁으로 다가갔다. "어이, 두 사장님들. 설마 우리 민성이 때문에 그러고 있는 거야?" 그러자 백윤호와 최종인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동시에 임태규를 휙 돌아보았다. '뭐야 이 병신은?' '이민성인지 이민군지 관심도 없다니까.' 자신을 노려보는 무시무시한 두 사람의 눈빛에 임태규는 흠칫 놀라며 저도 모르게 한발 물러섰다. '이놈들 이거 왜 이래?' *** "뭐야? 최종인에 백윤호까지?" 이민성이 씩 웃었다. 그 옆에 있는 임태규 사장은 계약하면서 안면을 익힌 상대였다. 국내 1, 2 위 길드를 두고 이전만 못하다는 평가를 듣는 사신 길드와 계약한 것도 사실 다 계산이 있어서였다. '그래야 약자의 편에 서는 이미지가 붙지 않겠어?' 연예인은 속되게 말해 이미지를 팔아먹고 산다. 이미지 관리만큼은 철저하게 하는 이민성이었다. '국내 최고의 길드들이 나를 두고 다툰다라...' 오래 할 헌터 생활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자연스럽게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곧 매니저가 문을 열고 들어왔다. "민성아, 준비 다 됐단다. 일단 인터뷰부터 시작하자." "예." 매니저가 앞장섰다. 유리문이 열리고 이민성이 협회 건물을 나와 모습을 드러내자 카메라 플래시가 무섭게 쏟아졌다. 촤촤촤촤촤촤촤촤이민성은 자신을 둘러싼 수백 개의 유리 눈들을 향해 으레 하던 것처럼 가식적인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때. 진우가 협회 앞에 도착했다. '...?' 사전에 들었던 대로 3 일이 지난 오늘 협회에 방문한 참이었다. '뭐가 이렇게 복잡해?' 그런데 이 상태론 도저히 안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물론 은신을 쓰든, 기자들 머리 위를 뛰어넘든, 심지어 뒷문으로 돌아가든 얼마든지 지나갈 방법은 많았다. 그런데 3 일 전에 미리 재측정을 예약까지 하고 온 상황에서 멀쩡한 문을 두고 기자들을 피해 가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안 들었다. '내가 무슨 죄를 지은 것도 아니고.' 정문으로 들어가지 못할 이유도 없었다. 진우는 빼곡히 들어찬 기자들을 밀치고 억지로 길을 만들며 안으로 들어갔다. "좀 지나가겠습니다." "아이, 뭐야?" "아나, 이거 원." "쟤 뭐야?" S 급 헌터의 완력이다. 기자들은 속절없이 밀려나며 눈살을 찌푸렸다. 순식간에 길이 열리고 진우는 협회 입구로 향하는 계단을 밟을 수 있었다. 그런데 채 한 발을 내딛기도 전에 거구의 근육질 남자가 진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어이!" 이민성의 매니저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윽박질렀다. "너 뭐야? 협회 사람이야?" 진우는 매니저의 시선을 조금도 피하지 않고서 고개를 저었다. '어쭈? 이놈 봐라?' 매니저의 굵은 눈썹이 꿈틀거렸다. "지금 기자들 쫙 깔려 있는 거 안 보여?" 진우는 잠시 기자들을 돌아보았다. 다들 불만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인터뷰로 바쁘다는 사실은 알겠다. 하지만 길을 전세 낸 것은 아니지 않은가? 개인이 기자들을 쫓아낼 수 없듯이, 기자들도 개인을 쫓아내서는 안 되는 게 상식이었다. 그러나 보는 눈도 많은데 언성을 높이기는 싫고 해서 그냥 무시하고 지나치려 했다. 그 순간. "돌아가. 여기 못 가. 가, 인마." 다시 앞을 막고 선 매니저가 진우의 가슴팍을 밀었다. 진우의 눈빛이 변했다. '뭐지?' 매니저는 깜짝 놀랐다. D 급의 전투 계열 능력자인 자신이 망신 좀 당해 보라고 힘을 줘서 밀었는데 상대는 다리에 못 박힌 듯 꼼짝도 않는 것 아닌가? 일반인이면 크게 다칠 수도 있는 위력이었다. 진우도 그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 그래서 그저 말없이 노려보는데, 그것만으로도 매니저의 얼굴이 조금씩 하얘져 갔다. "뭐야? 왜 저래?" "어떻게 된 거야? 둘이 시비라도 붙은 건가?" 웅성웅성. 기자들도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시끄러워졌다. 매니저는 식은땀을 흘렸다. 보는 눈이 없었다면 그냥 이쯤에서 한 수 접어주고 길을 비켰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지금은 기자는 둘째 치고 고용인인 이민성이 보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온 이민성이 인상을 쓰며 작게 말했다. "아, 형. 뭐야. 걔 빨리 치우고 끝내." "어... 그, 그래." 여기서 잘못 보이면 직업을 잃을 지도 모르는 상황. 매니저가 인상을 쓰며 목청을 돋웠다. "여긴 못 지나가니까 저리 가라고!" "누구 맘대로 여길 못 지나간다는 겐가?" '엇?' 목소리는 앞이 아니라 뒤에서 들려왔다. 매니저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유리문 앞. 거기엔 고건희 한국 헌터협회 회장이 떡 버티고 서 있었다. 기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어찌나 놀랐는지 셔터를 누르는 것도 잊었을 정도였다. "고건희?" "고건희 협회장?" 시끌벅적하던 일대의 분위기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인물의 등장으로 착 가라앉았다. 고건희는 계단 앞까지 다가와서 말했다. "그분은 우리 손님입니다." 고건희가 이민성을 바라보았다. "여기서 기자회견을 할 수 있도록 허가해 준 게 누군지는 알고 있겠지요, 이민성 씨?" 이민성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무, 물론입니다." 헌터가 된 첫날 협회장의 눈 밖에 나 기자회견 장소를 빼앗긴다. 보는 눈이 몇 갠데 그런 바보 같은 꼴을 당할 수는 없었다. 이민성이 얼굴을 찡그리며 매니저에게 눈치를 주자, 매니저가 고건희와 진우에게 차례대로 고개를 숙이고는 순순히 옆으로 물러났다. "들어가시죠, 성진우 헌터님." 진우가 고건희의 안내를 받아 협회 건물로 사라지고 나자 기자들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웅성웅성. "뭐야?" "저 사람은 누군데 협회장이 저렇게 알아서 챙겨?" "누구 방금 그 남자 아는 사람 없어?" 기자들은 답답한 마음에 목소리를 높였으나 아무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 93 화 이민성의 얼굴이 굳어졌다. 기자들을 가로질러 간 남자와, 그 남자를 데려간 고건희 협회장. "오늘 고건희 협회장 스케줄이 어떻게 돼 있어?" "오전 일정이 싹 비었다는데요?" "방금 그 사람 때문에 협회장이 오전을 전부 비웠다는 거야?" 웅성웅성. 두 사람의 등장으로 어수선해진 현장은 더 이상 인터뷰를 진행할 만한 분위기가 아니었다. 오늘을 위해 얼마나 힘을 쏟았던가? 이민성이 벌레 씹은 표정으로 매니저를 쏘아보았다. '매니저란 새끼가 저런 거 하나 똑바로 처리를 못해서.' 매니저는 차마 시선을 마주치지 못하고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이민성이 A 급 각성자가 된 지금, 전과는 달리 이제 완력으로도 그를 당해 낼 수가 없었다. 눈치껏 굽혀야만 했다. '...' 한참 매니저를 노려보던 이민성의 고개가 자연스레 옆쪽으로 돌아갔다. "큐!" 아뿔싸!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제 방송국 카메라까지 돌아가려 하고 있었다. 저건 생방송이다. 이런 산만한 광경이 전파를 타고 전 국민에게 생중계 된다면, A 급 헌터가 되어 브랜드 가치를 한껏 끌어올리려 했던 자신의 모든 노력이 물거품으로 돌아갈 가능성이 있었다. 하지만 인터뷰를 재개해 분위기를 진정시키기에는 고건희 협회장의 등장 여파가 너무 컸다. 하필 그런 거물이 이런 중요한 순간에 등장해 가지고... '어떻게 분위기를 반전시킬 방법이 없을까?' 약삭빠른 그의 두뇌가 빠르게 회전을 시작했다. '그래, 역시 분위기를 반전시키는 데는 큰 거 한 방만 한 게 없지.' 기자들은 등급 심사를 앞둔 자신의 심경 따위가 궁금해서 온 게 아니다. 대스타 이민성이 어떤 등급의 헌터가 될지, 그리고 헌터 자격증을 발급받고 난 다음의 행보가 어떻게 될지. 그걸 알려고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다. 원하던 답을 주면 모든 게 제자리를 찾아가리라. '일정을 좀 앞당겨서 바로 심사를 시작하자.' 이민성의 얼굴에 비릿한 미소가 떠올랐다. 과연 주위의 평가처럼 이런 쪽으로의 잔머리는 대단히 빨랐다. "저기, 잠시만요. 협회 관계자분들과 오늘 일정에 대해 잠깐 이야기 좀 하고 오겠습니다." 그렇게 대충 기자들에게 둘러댄 이민성이 협회 건물로 향했다. 바뀐 일정을 '논의'가 아니라 '통보'하기 위해서였다. '우리 아버지가 지원하는 돈이 얼만데. 협회고 뭐고 당연히 알아서 기어야지.' 그런데. '어?' 유리문을 밀고 막 들어가기 직전, 안에서 우르르 몰려나온 감시과 헌터들에 의해 뒤로 밀려났다. 헌터들은 일렬로 서더니 건물 입구를 봉쇄했다. '뭐야, 이건 또?' 이민성의 이맛살이 구겨졌다. 이민성은 남자의 가슴에 달린 명찰을 확인했다. '헌터협회 감시과 과장 우진철?' 이민성이 우진철이란 사내에게 물었다. "뭡니까? 왜 입구를 막는 거죠?" 우진철은 선글라스를 낀 채로 이민성을 내려다보았다. "현재 다른 각성자분의 등급 심사 재측정 과정이 진행 중입니다. 심사가 끝나는 11 시까지 아무도 건물 안으로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뭐라고요?" 다른 각성자라면 방금 협회장을 따라 들어간 그 남자를 말하는 건가? 이민성은 시계를 들여다보았다. 지금은 오전 10 시 30 분. 11 시라면 자신의 등급 심사가 예약된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아무도 못 들어간다? 등급 심사를 앞당겨서 분위기 반전을 꾀하려던 계산이 수포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처음에는 좋게 말했다. "그러지 말고 좀 들여보내 주시죠. 관계자분들과 논의할 게 있다니까요." "죄송합니다." 우진철은 그 한마디를 끝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답답해진 이민성이 참지 못하고 슬슬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봐요, 당신 내가 누군지 몰라? 나 이민성이라고, 이민성." 안 되겠다 싶었는지 이민성의 말투가 격해졌지만, 우진철은 조금도 비켜 줄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 이민성이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내뱉었다. "어이. 헌터협회의 가장 큰 스폰서가 유진건설이란 건 알지?" 이민성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유진건설 이원규 부사장님이 내 아버지야. 그리고 저 사람들 보여?" 이민성은 계단 아래 쫙 깔린 기자들을 가리켰다. "저렇게 많은 기자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 그 유진건설 부사장의 아들을 이렇게 취급해도 돼? 당신 이거 감당할 수 있겠어?" 우진철의 대답은 간단했다. "감당할 수 있습니다." "뭐?" 이민성은 기가 막혀 왔다. 도대체 그 남자가 뭐라고 협회장이 마중을 나오고, 등급 심사를 위해서 건물 전체를 통제한단 말인가? 거기다 부장급도 아닌, 겨우 과장 나부랭이가 이렇게 기고만장이라니. 이민성이 양 옆구리에 손을 얹고서 따지듯 물었다. "그 다른 각성자란 게 뭐 하는 사람인데 이렇게 협회에서 싸고도는 겁니까?" 그제야 우진철이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걸 제가 말씀드리면." 흠칫. 맹금류를 닮은 우진철의 부리부리한 눈매가 드러나자 이민성은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물러섰다. 우진철은 이민성에게서 눈을 떼지 않고서 나직이 말을 이었다. "이민성 씨야말로 감당하실 수 있겠습니까?" *** 건물 안은 한산했다. 등급 심사 대기자 한 명 없이 텅 빈 홀에는 협회 직원들만 간간이 지나다닐 뿐이었다. 아마도 바깥에 기자들이 잔뜩 몰려와 있는 이유와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예." 고건희의 안내를 따라 정밀 측정실로 향하려던 진우의 시선에 낯익은 얼굴 두 사람이 들어왔다. '어라?' 맞은편 휴게실 의자에 백윤호, 최종인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3 일 전 재심사를 받으러 왔을 때 깔끔하게 차려입은 길드 직원들이 몰려 있던 장소였다.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이 동시에 일어나 목례를 보내 왔다. 진우도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서 홀을 지나쳤다. 조용한 복도를 걸으며 고건희가 넌지시 미소를 지었다. "저 두 사람, 한 시간 전부터 와서 헌터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두 길드의 수장이 한 시간씩이나 먼저 와 재측정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고? 진우의 눈빛을 읽었는지, 고건희가 평온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2 년 만에 나타난 S 급 헌터입니다. 게다가 최종인 쪽은 헌터님의 힘을 보았으니 더 애가 탈 테지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어머." "협회장님." 가는 도중 만난 협회 직원들이 고건희에게 깍듯이 인사하고는, 옆에 있는 진우를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옆에 남자는 누군데 협회장님이 직접 안내를 해 주시는 거지?' '혹시 엄청 대단한 사람 아냐?' '저렇게 젊은 사람이 어떻게 협회장님을 아는 걸까?' 장관급이 와도 마중 한번 나가는 일이 없었던 고건희가 직접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 직원들에게는 그저 놀라울 따름이었다. 고건희가 앞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말을 건네는 고건희의 표정은 어딘지 모르게 즐거워 보였다. 실제로 고건희는 들떠 있었다. 성진우가 흔해 빠진 헌터들과는 다를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이 들어맞았으니까. 우진철에게 성진우의 활약상을 전해 들었을 때는 마치 본인이 현장에 있었던 것처럼 손에 땀을 쥐었다. '물론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뒤에 성진우가 보여 준 깔끔한 대처는 더욱더 마음에 들었다. 보스를 포함해 던전을 거의 혼자 클리어했는데도 부산물 등에는 일절 욕심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목적이 진짜 큰돈을 벌고 유명세를 얻는 대신 마수들과 싸워 사람들을 지키는 것에 있다면, 협회는 아낌없이 지원해 줄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건 협회의 설립 취지와도 부합하는 일이었으니까. '할 수만 있다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협회로 끌어들이고 싶구먼.' 그러나 어쩌겠는가? 일전에 그가 말했던 대로 협회에 들어오게 되면 마수들과 싸울 기회가 거의 없어진다. 어제 전해 들은 성진우의 힘. 던전 바깥에서 썩히기에는 너무 아까운 능력이었다. 이윽고 건물 안쪽에 있는 검사장에 도착했다. "재측정 전에 헌터님의 능력을 확인해서 계열을 분류할 겁니다." 진우도 알고 있었다. 헌터들은 자신이 가진 능력에 따라 전투, 마법, 치유, 보조 등으로 구별 되어 필요한 곳에서 역량을 펼친다. 검사장에서 대기하고 있던 직원이 고건희에게 허리를 90 도로 숙이고는 진우를 인계받았다. "이리로 오세요." 진우는 검사장의 중앙에 섰다. 검사장은 어디서나 쉽게 볼 수 있는 실내체육관 같은 구조였다. 평범한 체육관과 차이점이 있다면, 벽면과 바닥에서 강한 마력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만약의 사고를 대비해 마법까지 동원해 튼튼하게 지은 모양이었다. 검사관들이 물었다. "어떤 능력을 쓸 수 있으시죠?" 아직 돌아가지 않은 고건희 협회장이 구석에서 흥미로운 눈빛으로 검사 과정을 지켜보았다. 그가 진우를 마중 나온 이유. 조금이라도 빨리, 두 눈으로 직접 진우의 능력을 확인해 보고 싶어서였다. "이런 걸 할 수 있습니다." 진우는 그림자 병사 하나를 불러냈다. "헉!" 검사관들이 움찔 놀랐다. 전신을 흑색 갑옷으로 무장한 병사가 바닥에서부터 스르륵 올라오는데 어느 누가 태연할 수 있을까? 일부러 일반 병사 중에서도 가장 레벨이 떨어지는 녀석을 골랐는데도 일반인에게는 견디기 힘들 정도의 위압감이 흘러나왔다. "이건... 소환수인가요? 소환수를 부리시는 겁니까?" 검사관의 목소리가 떨렸다. 마음 같아서는 전혀 위험하지 않다고 친절히 설명이라도 해 주고 싶었지만. 진우가 안쓰러운 표정으로 대답했다. "...뭐, 비슷한 거 같네요." "그, 그렇다면 소환수는 몇 마리나 불러 낼 수 있습니까?" '거짓말은 소용없겠지.' 어제 전부 소환한 그림자 병사들을 본 목격자가 어림잡아 스무 명을 넘어가는데. 진우는 그림자 저장 스킬로 봉인해 둔 병사들의 숫자를 조금 줄여 말했다. "백 마리 정도..." 100 이라는 숫자에 검사관들의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배, 백이요?" "네." 반면 진우는 담담했다. 그때. 그림자 병사를 바라보는 고건희의 눈빛이 반짝였다. '저런 걸 백 마리나...' 병사는 언뜻 보기에 B 급 헌터 수준의 마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런 걸 100 마리나 불러낼 수 있다면 이미 그 개인으로도 어지간한 대형 길드 하나를 능가하는 힘을 가졌다고 볼 수밖에 없었다. 실로 대단한 능력이었다. 고건희의 뜨거운 시선이 피부로 느껴졌다. 진우는 주변의 반응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일반 병사 하나에 이정도 반응이면...' 병사들 중 가장 레벨이 높은 '이그리트'나 어제 포획에 성공한 보스급 마수 '어금니'를 불러내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어쨌든 이걸로 어떤 능력을 가졌는가 하는 것은 증명된 셈이었다. "그럼... 성진우 헌터님은 마법계열이시군요." 검사관은 기록지에 뭔가를 열심히 끄적거리더니, 만족한 듯 고개를 들었다. "이제 측정실로 가시면 됩니다." *** 진우는 새로 발급된 헌터증을 받아 들었다. 성진우, S 급, 마법계열. 사진란에 떡 하니 자기 얼굴이 박혀 있는데도 믿기지가 않았다. '좋아. 일단 여기까진 순조롭게 왔다.' 진우는 헌터증을 지갑에 밀어 넣었다. 복도 끝으로 나오자 기다리고 있던 백윤호, 최종인이 다가왔다. "성진우 씨, 시간 좀 내주시겠습니까?" "성진우 헌터님." "죄송합니다. 제가 할 일이 좀 밀려있어서요." 진우는 그들을 무시하고 유리문으로 걸음을 옮겼다. "어, 어?" 백윤호가 걱정스럽게 말했다. "저라면 그리로는 안 나갈 겁니다." '나가는 걸 후회할 만큼 좋은 조건이 준비되어 있다는 건가?' 어떤 조건이든 관심이 없었던 진우는 백윤호의 만류를 무시하고 유리문을 휙 열어젖혔다. 그러자.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 계단 위를 넘어 올라와 감시과 헌터들과 몸싸움을 하고 있던 기자들이 일제히 플래시를 터트렸다. '뭐야, 이건?' 진우는 눈도 뜨기 힘들 정도로 터져 나오는 불빛 앞에서 할 말을 잃었다. *** 진아는 언제나처럼 3 교시를 마친 후 매점에 들러 바나나맛 우유 하나를 사 들고 올라왔다. 점심까지 아직 1 시간 정도 남은 이 시간. 우유로라도 배를 채워 두지 않으면 허기 때문에 집중이 잘 안 되었다. 아니나 다를까. 꼬르륵. 벌써부터 위장이 연료를 넣어 달라고 아우성치고 있었다. 진아가 허기진 배를 문지르며 교실로 들어서려는데, 놀란 눈으로 튀어나온 친구 하나가 진아를 불렀다. "지, 진아야!" "왜, 왜?" 친구가 놀라니 덩달아 진아도 놀랐다. "너희 오빠! 너희 오빠가 TV 에 나와!" "뭐? 우리 오빠가 왜?" 진아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또 크게 다친 걸까? 그게 아니면 설마... 친구는 설명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진아의 손목을 잡아끌고 교실로 들어갔다. 진아의 눈이 칠판 옆, 커다란 TV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오... 오빠?" TV 화면을 본 순간 진아의 손에 들려 있던 바나나 우유가 바닥에 툭 하고 떨어졌다. = 94 화 10 분 전, 헌터 협회 앞. 등급 심사를 앞당길 수 없게 되자 위기감을 느낀 이민성이 결국 폭탄 발언을 터트렸다. "저, 이민성은 심사 결과에 상관없이 연예계를 은퇴하고 헌터로서 여러분들께 봉사할 겁니다!" 고건희의 갑작스런 등장으로 차갑게 식어 버린 기자회견 분위기를 되살리기 위해 던진 마지막 한 수였다. 효과는 확실했다. "뭐?" "이민성이 은퇴하겠다고?" "등급에 상관없이?" 금방 분위기가 달아올랐다. 찰칵, 찰칵, 찰칵! 수많은 카메라가 이민성을 향했고, 흥분한 기자들의 질문들이 쉴 새없이 쏟아졌다. "이민성 씨 여기 좀 봐주세요!" "아시아 최고의 스타라는 이름을 버리고 하급 헌터를 선택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입니까?" "배우로서 쌓아 올린 모든 걸 내려놓고 말입니까?" '좋았어!' 이민성은 다시금 자신에게로 집중된 관심에 대만족했다. "만약 결과가 좋지 않아 낮은 등급을 받더라도, 많은 분들이 제게 보내 주신 사랑에 보답하기 위해 저는 마수들과 싸울 겁니다."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었다. 딱 2 년. 2 년만 A 급 헌터로서 고액의 연봉을 받으며 사신 길드의 홍보 활동을 도울 생각이었다. 아버지의 도움으로 빠졌던 군대 문제나, 요즘 들어 조금씩 슬슬 새어 나오고 있는 잡음들을 한 방에 무마시키기 위해서는 이것이 최선이었다. 최고의 위치에서 내려와 목숨을 걸고 시민들을 보호하다! 흔히 말하는 평생 까임 방지권을 획득할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다. 이민성은 모든 게 계획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짜릿한 기분을 맛보며 인터뷰를 이어 나갔다. "또 저와 뜻을 함께해 주신 사신 길드의 마스터 임태규 사장님과." 그렇게 한창 기자들이 이민성의 포부를 귀 기울여 듣고 있을 때였다. 띠리릭, 띠리릭, 띠리릭. 핸드폰이 울렸다. 주위 몇몇 기자들이 눈치를 줬다. 핸드폰의 주인은 재빨리 전화를 끊은 후 연신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 탓에 인터뷰가 방해받았지만 다행히 중단 되는 일은 없었다. 이민성도 못 들은 척 기자회견을 이어갔다. 그런데 또. 다른 누군가의 벨소리가 울렸다. "아, 거 참." "누구 핸드폰입니까?" "인터뷰 전에 폰 체크해 두는 건 상식 아닙니까?" "당장 꺼요, 좀." 점수를 딸 기회라고 생각한 이민성은 웃으며 말했다. "전 괜찮습니다. 다들 한 통화씩 하시고 계속하시죠." 하하하하하이민성의 순간적인 재치에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런데 그게 시작이었을 줄이야. 우우웅- 우우웅윙- 윙- 윙- 갑자기 여기저기서 폰이 울려 대기 시작했다. "뭐지?" "어, 나도?" 처음에는 황급히 전화를 껐던 기자들도 이쯤 되자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연락 내용을 확인한 기자들의 눈이 커졌다. "협회에서 연락이 왔다고?" "아니, 왜 그걸 지금 말해!" 기자들은 급하게 협회 사이트로 들어갔다. 그러자 사전에 준비해 뒀다는 듯이 새로운 S 급 헌터의 사진과 이름이 올라와 있었다. 측정 결과 발표는 오늘이었다. '그런데 오전에는 측정실을 쓰지 못한다고 했지 않나?' '이민성 때문에 그런 거 아니었어?' '그럼 측정실을 비운 건 이민성의 등급 심사 때문이 아니라 이 S 급 헌터를 위해서?' 그때 기자들의 머릿속에 한 남자의 얼굴이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방금 그, 고건희 협회장을 따라 안으로 들어간 남자! 오늘 측정실을 쓴 사람은 그 남자가 유일했다. 지금이라도 따라 들어가면 그 남자를 찍을 수 있지 않을까? "기, 기자님들?" 굶주린 짐승의 눈으로 변한 기자들이 이민성을 무시하고 협회 건물을 향해 달려들었다. 우르르르우진철이 눈빛으로 사인을 보내자 감시과 헌터들이 손을 펼쳐 바리게이트를 만들었다. "좀 들어갑시다!" "S 급이 나왔다면서요! 그런 건 미리 고지를 해 주셔야 하는 거 아닙니까!" "비켜 보라고요!" 기자들이 맹렬히 달려들었지만 전원 헌터들로 이뤄진 감시과 직원들의 벽을 넘지는 못했다. "뭐, 뭐야?" 순식간에 찬밥 신세가 된 이민성이 당황한 얼굴로 매니저에게 달려가자, 매니저가 방금 자신이 확인한 핸드폰 화면을 보여 줬다. "S 급?" 이민성은 넋이 나간 얼굴이 됐다. "하필 오늘 S 급 헌터가 나왔다고?" A 급 헌터가 되어서 세간의 이목을 한 몸에 받으려고 했는데, 어디서 튀어나온 S 급 헌터 하나가 모든 걸 망쳐버리다니. 이민성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분명 뭔가 잘못된 거다.' S 급이 무슨 자판기 커피처럼 동전만 넣으면 툭 튀어나오는 등급도 아니고. 혹시 기자들이 여기에 대해 뭔가 알고 있는 게 없을까? 마침 이민성의 눈에 누군가와 통화하며 뒤늦게 계단을 올라가는 기자 한 사람이 들어왔다. 내일 나갈 기사 제목이 어떠냐고 조언을 구하던 그 신문사 기자였다. "저기, 임 기자님!" 이민성의 다급한 목소리에도 임 기자는 건성으로 대답하고 지나쳤다. "아, 이민성 씨. 제가 좀 있다 연락 드리겠습니다." "네? 임 기자님. 임 기자님!" 이민성은 임 기자의 등 뒤에서 점점 멀어져가는 그의 통화 내용을 엿들을 수 있었다. "...그래. 내일 헤드라인은 '눈물의 E 급, 환희의 S 급 되다' 이걸로 쫙 깔라니까." 이민성이 힘없는 눈빛으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미 자기 주변엔 아무도 없었다. 이민성은 털썩 주저앉았다. "뭐야... 이게." 그가 힘없이 중얼거리고 있을 때, 협회 문이 확 열리고 대한민국 10 번째 S 급 헌터가 모습을 드러냈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 진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야, 이건?' 카메라 정면에서 대문짝만하게 찍힌 진우와 그 뒤에서 안타까워하는 백윤호, 그 옆에서 쓴웃음을 짓는 최종인까지 함께 렌즈에 담겼다. *** 점심시간. 오전 작업을 마친 채굴팀 헌터들이 옹기종기 모여 앉아 점심을 들었다. 채굴이 주 업무이지만 낙반이나 붕괴 사고가 일어날 일이 없다 보니 분위기는 자유로웠다. 밥 한 공기를 뚝딱 해치우고 드러누운 헌터들도 있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며 시시덕거리는 헌터들도, 안주 하나를 놓고 둘러앉아 반주를 즐기는 헌터들도 있었다. "어?" 핸드폰을 만지작거리던 헌터 하나가 깜짝 놀라며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이거 성 씨 아녀?" 이성구가 귀를 쫑긋 세웠다. "진짜네?" "성 씨가 뉴스에 나오는데?"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반주 석 잔에 얼굴이 벌게진 이성구가 기다렸다는 듯 동료들이 모인 곳으로 뛰어갔다. 그러면서도 그의 입은 쉴 줄을 몰랐다. "내 그놈이 눈을 부라릴 때부터 알아봤어! 그 막돼먹은 놈이 얼마나 몹쓸 짓을 저질렀는지 나도 한번 보자고!" 이성구의 목소리가 하도 컸던 까닭일까? "성 씨가?" "성 씨가 뭔 죄를 저릴렀댜?" 배 팀장을 포함, 근처에 있던 채굴팀 헌터들이 죄다 몰려왔다. 손바닥만 한 핸드폰 액정을 꽉 채운 진우의 얼굴 아래로 커다란 자막이 지나가고 있었다. [...황동석, 차해인을 이은 대한민국의 열 번째 S 랭크 헌터 성진우 씨가 지금 막...] "헉!" 진우를 발견한 이성구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 유진건설 회장실. 문 앞에선 유진호가 짧게 숨을 내쉬었다. "후." 덜컥. 매끄럽게 열린 문을 따라 시선을 들어 올리니, 서류를 검토하며 고개도 돌리지 않는 아버지가 보였다. "들어와라." 대답을 하면서도 유명한은 서류에 사인 중이었다. 유진호는 유명한 곁에 섰다. 잠깐 아들의 얼굴을 확인했던 유명한은 계속해서 작업을 이어 나갔다. '여전하시네, 아버지는.' 예전 같으면 이런 아버지의 모습에 기가 눌려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도망쳤을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성진우 헌터에 대한 이야기냐?" "네." 유명한이 드디어 고개를 들었다. "그래. 어떻게 됐." 그때였다. 유명한의 폰이 울렸다. 드르르르- "잠깐." 유명한이 손을 들어 유진호의 말을 막았다. 메시지를 확인한 유명한의 눈이 조금 커졌다. '아버지가 놀라실 때도 있네?' 유진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네가 봐야 할 게 있다." "예?" 유명한은 대답 대신 빠르게 리모컨을 움직여 벽면에 걸린 대형 TV 를 켰다. 그러자 속보가 흘러나왔다. [네. 방금 확인됐습니다. 오늘 S 등급으로 판명 난 헌터는 각성 후 각성을 거친 재각성자이며, 협회 소속으로 활동했었던 E 등급 헌터 성진우 씨라고 합니다.] 리포터의 들뜬 목소리가 현장의 분위기를 잘 말해 주고 있었다. 무심하게 듣고 있던 유진호가 '성진우'라는 이름에 화들짝 놀랐다. '헉!' 그 이어 바뀌는 화면. 화면 안에는 분명히 자신이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무표정한 얼굴로 전방을 주시하고 있었다. 형님이었다. '확실해. 형님은 지금 귀찮으신 거야.' 한동안 형님께 착 달라붙어 지냈더니 표정만 봐도 무슨 생각인지 느껴졌다. 아니, 그것보다 S 급이라니? 형님이 대단한 거야 알고 있었지만, 그 대단함의 정도가 자신의 예상을 아득히 초월하고 있었다. 동시에. '그런 힘을 가지고서도 매일 던전에 들어가 수련에 매진하셨던 건가?' 밀려드는 경외감. TV 에서 진우의 이름을 연신 떠들어 대자 계속해서 그의 옆을 지켰었던 유진호의 가슴이 벅차올랐다. 삑TV 가 꺼지며 형님의 얼굴도 사라졌다. 유진호는 아쉬운 표정을 했다. "계속하거라." 이야기를 계속해 보라는 말. 유진호는 미리 준비했던 대로 크게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아버지. 형님의 마음을 돌릴 수는 없었습니다." 유명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 성진우 헌터는 뭐라고 말하며 거절하더냐?" "그게 형님께선..." 머뭇거리던 유진호가 고개를 빼꼼 들고 말했다. "길드를 만들 거니까 부사장 자리가 탐나면 들어오라고..." 멈칫. 화를 내시거나 무시할 거라고 생각했던 아버지의 얼굴이 순간 경직됐다. 그리고 이내. 피식. 유명한이 소리 없이 웃었다. 포커페이스로 알려진 유명한 회장이 아들 앞에서 표정 변화를 보인 것이다. '왜 저러시지?' 차마 이유를 묻지는 못하고 눈만 이리저리 굴리는 유진호. 유명한이 웃음기를 지우고 물었다. "내가 왜 유진 길드를 만들려고 하는 줄 아느냐?" "헌터 사업은 돈이 되니까...가 아닙니까?" "아니다." 유명한은 단호히 말했다. "돈이라면 지금도 썩어 넘칠 정도로 많다. 그 돈 몇 푼을 더 벌자고 대형 길드들과 마찰을 빚을 수도 있는 짓을 진행할 것 같으냐?" 돈 때문이 아니라는 말일까? 유진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유명한이 들고 있던 펜을 책상 위에 조용히 놓았다. "우리를 지키기 위해서다." 유명한의 진중한 눈빛에 유진호도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헌터들의 힘은 점점 더 커지고 있다. 한 사람의 힘이 국가의 무력과 맞먹는 경우도 이제 드물지 않지." 이른바 국가 권력급이라고 불리는 전 세계 최강의 헌터들. 유명한은 그런 이들을 일컫고 있었다. "이미 약소국 일부에선 헌터들이 왕처럼 군림한다고 하더구나. 이런 상황에서 법과 공권력이 언제까지 우리를 지켜줄 수 있을 것 같으냐?" 유명한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하지만 설명을 듣고 있는 유진호는 문득 자신이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어째서일까? '아...' 나까지 포함해서 우리라고 말해주셨다. 처음으로 부정의 단면을 엿본 것 같아 유진호는 조금 기뻤다. 유명한의 설명은 이어졌다. "나는 길드를 만들어 신뢰할 만한 헌터들을 모으고 싶었다. 돈이나 인맥이 필요해서가 아닌, 인간적으로 믿고 의지할 수 있는 헌터들을." 유명한은 다시 얼굴에 희미한 미소를 띠웠다. "너는 벌써 그런 사람을 얻은 것 같구나." "예." 유진호는 즉답했다. 아버지가 말하시는 의도를 정확히 판단하기는 힘들었지만, 형님을 믿고 의지할 수 있다는 사실 만큼은 확실했으니까. 유명한은 고개를 끄덕였다. "좋다." "네?" "합격이다." 무엇을 합격했다는 말일까? 유진호는 여전히 숙이고 있었던 고개를 뒤늦게 들어올렸다. "너에게 유진 길드를 맡기마." "예?" "유진 길드를 키워 보거라. 믿고 신뢰할 수 있는 강한 헌터들을 네 사람들로 만들어라. 앞으로 그들이 그 어떤 형태의 재산보다 귀해질 것이다." 유명한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확신이 컸던 만큼, 유진호의 기쁨도 컸다. 아마도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의 인정을 받은 게 아닐까? "감사합니다, 아버지!" 만면에 미소를 띤 유진호가 90 도에 가깝게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 모습을 유명한은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그런데 이어지는 유진호의 대답은 유명한의 기대와 전혀 다른 것이었다. "하지만 저는 못할 것 같습니다." "음?" 유명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유진 건설의 자금력은 차후 만들어질 유진 길드에 날개를 달아줄 수 있었다. 벌써 S 급 헌터 몇몇과는 구체적인 이야기까지 오고갔다. 유진 길드가 대한민국에서 내로라하는 초대형 길드가 될 수 있음은 자명한 사실. 유진호도 그걸 모르지는 않을 터였다. '그러니 마스터가 되겠다고 했겠지.' 헌데 막상 길드를 주겠다니 사양하는 것은 또 무엇인가? 그새 겁이라도 난 것일까? 유명한은 유진호에 대한 실망과 분노를 간신히 눌러 잡으며 억지로 목소리를 냈다. "...어째서냐?" 그러자 고개를 든 유진호가 기분 좋아 보이는 얼굴로 미련 없이 대답했다. "저는 형님 길드로 갈 겁니다." = 95 화 기자들에 둘러싸인 진우는 심히 당황스러웠다. '이 사람들, 찍으라는 이민성은 안 찍고 왜 내 앞에서 이러고들 있어?' 혹시 뒤에 이민성이라도 있나 싶어 잠깐 돌아보았지만 뒤쪽엔 백윤호, 최종인 두 사람뿐이었다. 그때 허벅지가 떨려 왔다. 우우웅- 우우웅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었다. '진아가 이 시간에 전화를?'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동생의 다급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오빠! 오빠가 TV 에 나와! 당연히 그렇겠지. 여기 있는 방송국 카메라만 몇 댄데. 어떤 채널을 돌려도 마찬가지일 거다. 학교에 있을 동생의 전화라 잠깐 긴장했던 진우는 한숨을 돌렸다. "음... 별일은 없지?" -별일? 지금 그런 말이 나와? 재각성은 뭐야? 또 S 급은 뭐고? 목소리를 들어 보니 애가 많이 놀란 것 같긴 했다. 하지만 여건상 하나하나 차분히 설명하고 있을 상황이 못 되었다. "오빠가 지금 좀 바빠서... 나중에 집에서 얘기해 줄게." -오빠? 오빠? 오빠를 애타게 찾는 동생의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전화를 끊었다. 띠릭. 그리고 왜 이런 사태가 발생했는지 알게 되었다. '...메시지가 와 있었네.' 헌터협회는 어플을 통해 정보를 실시간으로 전달해 준다. 보통은 A 급 이상의 던전 위치나 던전 브레이크 발생 장소 등을 알려 주지만, 오늘은 달랐다. '허.' 메시지를 확인한 진우는 빠르게 협회 사이트에 접속했다. 아니나 다를까. S 급 자격증에 잉크가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벌써 최상급 헌터 목록이 갱신되어 있었다. [성진우, S 급, 마법계열] 헌터중에 적힌 그대로였다. '...이런 건 또 쓸데없이 빠르네.' 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구겨 넣은 진우는 앞을 바라보았다. "성진우 씨! 협회 소속이었던 E 급 헌터 성진우 씨 맞습니까?" "흔치 않은 재각성자가 되셨는데요! 지금 소감이 어떠십니까!" 기자들은 진우의 모습이나 목소리를 조금이라도 더 카메라에 담으려고 필사적으로 몸부림쳤다. 그러나 기자들의 폭발적인 관심은 진우에게 귀찮기만 할 뿐이었다. '일단 여길 좀 벗어나긴 해야겠는데.' 공손히 비켜 달라고 해 봤자 먹히지도 않을 것 같고. 진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냥 그림자 병사들을 불러내서 길을 뚫고 나가 버려? "여기요! 성진우 씨, 이쪽도 좀 봐주시죠!" "성진우 씨! 전 국민들이 다 보고 있는데, 한번 웃어 주기라도 해 주세요!" 점점 가까워지는 카메라 렌즈들과 마이크들 앞에서, 진우는 진짜 '탱크'나 '어금니' 같은 그림자 마수병들을 불러낼까 2 초 정도 진지하게 고민했다. 진우의 뒤편. 기자들에게 가로막혀 오도 가도 못하게 된 진우를 보고 있던 최종인. 그가 백윤호에게 다가갔다. "아무래도 우리 신입 헌터님께서 지나친 관심에 곤란해하시는 거 같은데." "누구 맘대로 성진우 헌터님이 댁네 신입이라는 겁니까?" "농담도 못합니까, 농담도." 또다시 눈싸움을 주고받던 두 사람. 결국 최종인이 한발 물러났다. 한숨을 내쉰 그가 말했다. "어쨌든 여기서 시간이 끌리면 다른 길드에게도 기회를 주는 꼴이 될 겁니다." 백윤호도 동의했다. 이민성 때문에 우연히 여기 오게 된 사신 길드 마스터 임태규는 물론이고, 남은 두 대형 길드들도 성진우 헌터와 접촉하기 위해 혈안이 됐으리라. 백윤호가 기자들을 돌아보았다. "그러니까 최 대표님 말씀은..." "파리들이 냄새 맡고 몰려오기 전에 우리 두 사람이 성진우 헌터님을 댁까지 모셔드리자는 거죠. 가면서 같이 이야기도 할 겸." 괜히 라이벌 늘릴 필요 없이 두 사람이 힘을 모으자는 것이다. 성진우 헌터가 어떤 능력을 가졌든 상급 던전을 돌려면 길드는 꼭 필요할 테니, 오늘 잘만하면 백호나 헌터스 둘 중 한곳에 S 급이 하나 더 생길 수 있었다. 최종인은 자신이 이끄는 헌터스에 자신이 있었고. "좋습니다." 백윤호도 나쁘지 않았다. 백호가 헌터스 만큼 크지는 않아도 충분히 비전이 있는 길드인 데다. '우리 안 과장과 현 대리는 훨씬 이전부터 성진우 씨와 알고 지냈단 말이지.' 적어도 헌터스보다는 더 밀접한 관계라는 확신이 있었다. 두 사람의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묘한 눈빛을 주고받은 두 사람은 방향을 틀어 진우에게로 다가갔다. 먼저 말을 건넨 사람은 백윤호였다. "헌터님." 진우가 돌아보았다. "예?" 선수를 뺏긴 최종인이 속으로 혀끝을 찼지만, 협력하자는 약속대로 훼방을 놓지는 않았다. 백윤호가 최대한 밝은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을 이었다. "기자들이 몰려와서 난처하시죠? 저희가 댁까지 편안하게 모셔드릴 테니 같이 가시죠. 이런 일은 또 저희가 전문이거든요." 다소 과장이 섞여 있긴 해도 빈말은 아니었다. S 급 헌터라면 누구나 한 번쯤은 겪어 본 일인 데다, 대형 길드를 운영하며 사람들의 관심에 어떻게 대처해 하는지 배웠기 때문이다. 최종인도 거들었다. "저희와 같이 가시죠. 가면서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습니다." 하지만 진우는 두 사람의 친절을 웃으며 거절했다. "괜찮습니다." 그리고 후드티에 달린 모자를 푹 눌러썼다. "들러야 할 데가 있어서요." "예? 지금 사방에 기자들이 쫙 깔렸는데 어떻게 빠져." 최종인은 말을 잇지 못했다. 휘익! 기자들 쪽으로 돌아선 진우가 수십 미터를 뛰어올라 그들의 반대편에 착지해 버렸기 때문이다. "어, 어?" 진우는 당황한 기자들이 반응하기도 전에 인파 속에 섞여 사라져 버렸다. 최종인은 할 말을 잃었다. S 급인 자신조차도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던 움직임이었다. 일반인인 기자들이 눈으로 좇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 최종인은 실소를 흘렸다. 'S 급 헌터로 등록되자마자 슈퍼맨 놀이입니까?' 저런 운동신경을 가지고서 마법계열 헌터라니. 같은 마법계열 헌터로서 열 받는 일이었다. 그럼 전투계열 S 급의 눈에는 방금 그 모습이 어떻게 비쳤을까? "방금." 물어보려고 백윤호에게 고개를 돌리던 최종인이 흠칫 놀라며 반사적으로 물러섰다. "백 사장, 당신 눈이?" 너무 놀라 존칭도 잊었다. "아...! 미, 미안합니다." 백윤호는 황급히 한 손으로 눈을 가리며 돌아섰다. 잠시 후 다시 그가 눈을 떴을 땐, 괴물 같은 눈동자가 아닌 인간의 눈동자로 돌아와 있었다. 그러나 눈동자가 돌아왔다고 해서 충격까지 가신 건 아니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백윤호는 몸을 떨었다. 방금 진우가 점프하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을 때, 그가 숨기고 있던 마력이 잠깐 모습을 드러냈었다. 아무리 뛰어난 헌터라 할지라도 그 찰나를 간파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나 강한 마력에 백윤호는 자신의 능력, 맹수의 눈을 본능적으로 꺼냈고, 그 눈은 진우의 힘을 감지하는 데 성공했다. '강하다.' 그가 강하다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던 것이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전에 한번 레드 게이트 앞에서 그와 실랑이가 붙었을 때, 본의 아니게 맹수의 눈을 뜬 적이 있었다. 그때 백윤호는 진우의 힘을 눈에 새겼다. 분명 강했다. 아무리 자신이라 해도 팔 한쪽 정도의 희생이 없으면 이기기 어려울 정도로. 하나 그뿐이었다. 어느 정도의 희생을 감수하면 언제든 이길 수 있는 수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강함의 차이란 무엇인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마력이 느껴졌다. 그는 강해졌다. 그때보다 훨씬. 재각성이라면 이미 오래 전에 끝났을 텐데. 대체 왜? 순간 백윤호의 머릿속에 한 가지 말도 안 되는 가설이 떠올랐다. '설마 그는... 성장할 수 있는 건가?' 어쩌면 그는 재각성이 아니라 성장을 통해... 여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이봐요, 백 사장. 당신 괜찮습니까? 안색이..." 최종인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백윤호가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고개를 휙휙 저었다. "갑자기 머리가 좀 어지럽네요. 이젠 괜찮습니다." "젊은 사람이... 조심하셔야죠." 백윤호는 최종인과 대화를 계속하면서도 줄곧 진우가 사라진 방향으로 시선을 향했다. '이미 평범한 S 급을 넘어선 그가 여기서 더 힘을 키울 수 있다면...' 부르르. 백윤호는 전율에 몸이 떨려 왔다. *** "택시." 기자들을 따돌린 진우는 한적한 도로에서 택시를 잡아탔다. 원하던 대로 S 급 자격증을 손에 넣었다. 레벨업도 좋고, 던전도 좋지만, 지금 무엇보다 급한 것은 어머니의 치료였다. '생명의 신수...' 정말로 '생명의 신수' 아이템이 어머니를 낫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천분의 일, 아니 만분의 일이라도 가능성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악마성 던전을 클리어하고 재료를 모아 '생명의 신수'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악마성의 열기에서 몸을 지켜 줄 아티팩트가 필요했다. 진우는 뒷좌석에 앉으며 목적지를 말했다. "한국 헌터옥션요." 백미러로 진우를 힐끔 쳐다본 택시 기사는 싱긋 웃었다. "뭐 좋은 거 파시러 가나 봅니다. 헌터옥션에서 거래하는 물건들은 최소가가 수천 단위라면서요?" 진우는 대답 대신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꿀꺽. 기사는 침을 꼴깍 삼켰다. 헌터옥션에 뭔가를 팔러 간다는 소리는 당사자가 헌터라는 이야기고, 헌터를 상대할 때는 특히 조심 해야 하니까. 헌터 중에는 가진 힘만큼이나 성격이 괴팍한 사람이 많았다. 잘못해서 시비라도 붙으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다. '저 청년은 그렇게 안 보이지만 어쨌든 조심하는 게 좋겠지.' 기사는 진우의 눈치를 살피며 입을 다물었고, 덕분에 택시 안이 조용해졌다. 진우는 헌터옥션에 가는 막간을 이용해 인터넷을 뒤져 보았다. 인터넷 기사나 SNS, 포털 커뮤니티 등등 어느 곳 할 것 없이 전부 다 새로운 S 급 이야기뿐이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검색어 순위 1 위가 이민성이었는데, 지금은 10 위권에서도 찾아볼 수가 없었다. 쯧. 진우는 혀끝을 찼다. '이 정도까지는 예상 못했는데.' 어느 정도의 관심은 생각했었지만, 이렇게까지 뜨거울 것이라고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하긴. 한국에서 딱 10 명. 그것도 죽거나 한국을 떠난 사람을 포함하면 여덟 명이 전부인 S 급인데 어떻게 반응이 뜨겁지 않을 수가 있을까? '그런데 왜 차해인 때는 조용했지?' 아홉 번째 S 급이었던 차해인은 언론에 거의 노출이 안 됐기 때문에, 진우는 자신도 그렇게 조용히 넘어갈 줄 알았다. 해서 이리저리 검색해 보니 차해인은 S 급이 되고 난 뒤 협회에 정보보호를 요청했다고 한다. '협회에 요청만 하면 언론이고 길드고 법적으로는 접근할 수가 없게 되네.' 이런 편한 방법이 있는데 왜 협회장님은 알려 주시지 않았을까? 아. 진우는 검사장으로 가면서 들었던 질문을 떠올렸다. 협회장이 물었다. "생각해 둔 길드가 있으십니까?" "아직은요." 이것 때문에 물어본 거였나? 정보보호를 신청하면 길드에서도 접근할 수 없기에 협회장이 따로 말하지 않은 듯했다. '그럼 이건 됐고.' 진우는 온라인으로 협회에 정보보호 신청을 접수해 두고, 한국 헌터 옥션에 전화를 걸었다. 띠릭. -한국 헌터옥션입니다. "아티팩트를 감정받고 싶습니다. 지금 헌터옥션으로 가는 중인데 괜찮겠습니까?" -물론입니다. 그런데 감정받으시려는 아티팩트는 어떤 종류입니까? "마법을 증폭시켜 주는 효과가 있는 구슬입니다." -아, 증폭 효과가 있는 마법구... 그런데 효과를 정확히 아시는 걸 보니 어디 다른 곳에서 감정받은 적이 있으신 물건인가 보군요. "그렇긴 한데 공신력이 없는 곳이라서 헌터옥션의 평가를 받고 싶습니다." -하하,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희만큼 아티팩트의 가치를 제대로 판단할 수 있는 곳이 없죠. 뭔가를 적는 듯 잠깐 끊겼던 대화는 잠시 후 재개됐다. -이전 감정에선 증폭 효과가 얼마나 되는 것으로 나왔습니까? "100 퍼센트." -예? "100 퍼센트의 증폭 효과가 나왔습니다." -... 목소리는 잠시 뒤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만, 혹시 판매자분은 헌터신가요? "네." -원활한 감정을 위해 판매자분의 신원이 필요합니다. 등급과 성함이 어떻게 되십니까? 진우는 입꼬리를 올렸다. '이럴 줄 알았지.' E 급 헌터가 이런 말도 안 되는 아티팩트를 판다고 한다면 헌터옥션 측에서 상대나 해 줬을까? 이 순간을 위해서 재심사를 받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S 급. 성진우입니다." = 96 화 헌터옥션에 도착했다. 본사 건물은 낮은 대신 넓게 지어져 있어 회사 빌딩이라기보다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을 연상시켰다. 경매 참가자가 백이든, 천이든 전부 수용해 주겠노라 외치듯 드넓은 주차장. 그 주차장 중간에 떡 하니 세워진 으리으리한 건물. 헌터옥션이 아티팩트 거래를 통해 얼마나 많은 돈을 벌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택시에서 내려선 진우가 건물 쪽으로 향하자, 채 몇 걸음도 떼기 전에 안에서 격식 있게 차려입은 남자 하나가 뛰어나왔다. "성진우 헌터님 되십니까?" "네." 남자는 진우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놀란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곧 자신의 본분을 떠올리고는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연락받았던 헌터옥션 감정팀 김정기입니다. 이리로 오시죠." 진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김정기는 진우를 감정실로 안내하며 오만 생각을 다 했다. '방금 기자들 앞에서 자취를 감춘 S 급 신인이 내 뒤에 있다니.'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땐 장난전화인 줄 알았다. 일단 아티팩트 효과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고, 하필 오늘 S 급이 된 헌터라고 밝힌 점에서 더 그랬다. '하마터면 S 급 헌터한테 욕을 날릴 뻔했잖아?' 헌터협회에서 성진우 헌터의 번호가 맞다고 확인해 줬을 땐 어찌나 간담이 서늘하던지. 매뉴얼대로 무례하지 않게 군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급으로 새로이 등록된 성진우 헌터는 각성 후 각성을 거쳐 E 급에서 S 급으로 무려 다섯 단계를 건너뛰었으며, 마법계열의 능력을 지닌 것으로...] 아직도 건물 내부 곳곳에 비치된 TV 에선 그의 얼굴이 나오고 있었다. 본인도 신경 쓰이는지 후드를 다시 눌러썼다. 자기 이야기도 아닌데, 김정기는 연신 진우를 언급하는 뉴스들을 보며 왠지 모르게 우쭐해졌다. '셀카라도 같이 찍자고 해 볼까?'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여기가 직장만 아니었어도 셀카나 사인 같은 걸 요구해 봤을 거다. 하지만 중요한 거래를 위해 찾아온 손님에게 그런 무례를 범할 수는 없었다. 인내심이 필요한 순간이었다. '입구에서 여기까지 길이 이렇게 짧았었나?'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사이 금방 감정실이 나왔다. 김정기는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이쪽입니다." 넓은 방 안에는 점심도 포기하고 달려온 감정팀 팀장과 수석 감정사가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었다. 진우를 발견한 팀장은 눈을 동그랗게 떴고. '진짜 뉴스에 나오는 그 사람이네?' 수석 감정사는 마른침을 힘겹게 꼴깍 삼켰다. '그럼 마법 증폭구도 정말로...?' 아니야, 아직은 모른다. 사람이 진짜라고 물건까지 진짜란 법은 없지. 수석 감정사는 자신을 달래듯 그렇게 속으로 되뇌었다.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아티팩트 제작자가 최고의 재료들로 혼신을 기울여 만든 마법 증폭구의 증폭률이 50 퍼센트를 조금 넘는 수준이었다. 그마저도 재료 모으기가 쉽지 않고, 제작에 필요한 인원과 시간이 많아 몇 년에 한 번 볼 수 있을까말까다. 사겠다는 마법계열 헌터들이 전 세계에 까마득히 줄지어 서 있는데도 물건이 없어 팔 수가 없는 것이다. 뭐, 세계까지 갈 것도 없다. 국내에서만 해도 최종병기라 불리는 마법계열 헌터, 최종인이 50 퍼센트 이상의 증폭구 구매를 벼르고 있었다. 그런데 등급만 S 급일 뿐이지 아직 이름도 잘 안 알려진 헌터가 증폭률이 100 퍼센트나 되는 물건을 들고 왔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 상대가 최상급 헌터만 아니었어도 엉덩이를 걷어차서 내쫓았을 만큼 허무맹랑한 이야기였다. 하지만. S 급 헌터를 문전박대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만약 이번 일이 해프닝으로 끝난 다고 해도 앞으로 오랫동안 중요한 거래처가 될 사람이니까. '밑져야 본전이다.' 수석 감정사는 약간의 기대감과 그 몇 배 이상의 의구심이 섞인 낯빛으로 진우에게 말했다. "그... 아티팩트를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김정기와 감정팀 팀장도 잔뜩 긴장한 얼굴로 진우를 응시했다. "그러죠." 진우는 주머니에서 꺼내는 척하며 창고에 있는 '탐욕의 구슬'을 불러냈다. "이게 그..." 수석 감정사는 안경을 고쳐 썼다. 아름다운 핏빛의 구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성을 자아내게 만드는 힘이 담긴 물건이었다. 감정팀 두 사람은 작게 감탄했다. "흐음-" 하지만 수석 감정사는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건 마정석이나 마석의 힘으로 만든 아티팩트가 아니군요?" "아닙니다." 수석 감정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감정사를 시작한 지 7 년. 꽤 오랜 시간 아티팩트를 관찰해 왔지만 붉은색을 띠는 수정구는 여태 본 적이 없었다. 평범한 수정구는 맑고 푸른빛을 띠며, 상급으로 갈수록 검은색에 가까워진다. 그런데 붉은색이라? 수석 감정사는 거듭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수정구를 넘겨받았다. 그러자. '뭐, 뭐지?' 돌연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수정구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힘 때문이었다. '설마...?' 그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마법구를 내려다보았다. 수석 감정사 자신도 B 급의 마법계열 각성자. 자신이 들고 있는 것이 어떤 물건인지 바로 직감할 수 있었다. 전신에 식은땀이 흘렀다. '맙소사!' 마법구에서 퍼져 나오는 힘에 소름이 돋아 황급히 고개를 쳐드니, 진우가 담담히 바라보고 있었다. '이걸 가져온 사람이 낮은 등급의 헌터였으면...'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그간 초고가의 아티팩트를 수도 없이 접해 왔지만, 감정을 맡긴 사람을 때려눕히고 아티팩트를 강탈하고 싶어진 적은 이번이 유일했다. 그런데 상대는 S 급. '...?' 진우가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에 감정사는 간신히 자신의 욕망을 추스릴 수 있었다. 'S 급을 상대로 강탈을?' 감히 시도는커녕 상상도 해 보기 힘들 정도의 격차가 있는 헌터였다. 감정사가 마법구를 보고 그랬던 것처럼, 진우도 감정사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지?' 어디 아프기라도 한 걸까? 어쨌든 감정사는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훔쳐 내며 팀장에게 물었다. "팀장님, 카메라 켜 주세요." "아! 예, 예." 카메라를 켜 달라는 건 지금 감정사가 들고 있는 물건이 엉터리가 아니라는 뜻. 팀장의 심박이 빨라졌다. 진우의 연락을 처음 받았던 김정기의 표정도 다르지 않았다. "촬영 시작합니다." 팀장은 카메라 렌즈를 감정사 쪽으로 돌렸다. 감정사는 원판형의 마력 측정기 앞에 섰다. 처음은 마법구를 내려놓고. 삑수치가 나왔다. 그리고 두 번째는 마법구를 손에 쥐고 다시 한 번 측정. 감정사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 측정값이 순식간에 두 배로 증가했다. 삑측정 결과를 확인한 김정기의 안색이 파래졌다. "이럴 수가..." 팀장도 달려와 결과를 확인했다. '100 퍼센트? 정말로 100 퍼센트의 증폭률을 가진 마법구라고?' 심장이 벌렁거렸다. 헌터옥션에서 아티팩트 거래를 돕고 받는 수수료가 평균 5 퍼센트 가량. 천억만 받아도 50 억을 챙길 수 있는 장사다. 그런데 이 붉은 마법구의 가격이 얼마나 나갈지는 자신의 오랜 경력으로도 도저히 예측이 불가능했다. '대박이다! 대박이야!' 보는 눈들만 없었다면 당장 만세를 부르며 옆의 부하 직원을 끌어안고 싶은 기분이었다. 거래에 성공하면 인센티브는 얼마쯤 나올까? 흥분에 숨이 콱 막혀 왔다. 김정기의 반응도 상관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상기된 얼굴로 주먹을 꽉 쥐었다. '좋았어!' 이번 일만 제대로 맡으면 승급은 따놓은 당상이었다. "시... 시연을 해 보겠습니다." 감정사가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하자 붙어 있던 감정팀 두 사람이 멀찍이 떨어졌다. 진우도 눈치껏 물러섰다. 카메라는 아직 잘 돌아가고 있었다. 구매자들에게 어필하려면 단순한 수치보다는 영상 쪽이 훨씬 더 효과적이었다. 감정사의 시선이 카메라를 향했다. "시작합니다." 감정사의 오른손 위에 트럭 바퀴만 한 규모의 눈보라가 휘몰아쳤다. 감정사는 말을 이었다. "마력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마법구에 접촉해 보겠습니다." 그의 왼손이 '탐욕의 구슬'에 닿는 순간. 휘이이이잉-! 손 위에서 춤추던 눈보라가 방 전체를 뒤흔들었다. "헉!" 깜짝 놀란 감정사가 즉시 마법을 거두지 않았다면 방 전체가 얼어붙을 뻔했다. "카메라 꺼 주세요." "예, 예." 팀장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달려가 카메라를 껐다. 이로써 아티팩트 감정 과정이 모두 끝이 났다. '후-' 감정사의 손끝에서 순간적으로 폭발하는 마력을 느끼며 조마조마했었던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진우뿐 아니라 방에 있는 모두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한숨을 내쉬었다. 일시적으로 방안에 정적이 내려앉았다. 진우가 물었다. "얼마나 나가겠습니까?" 이걸 팔면 원하는 아티팩트를 구할 수 있을까? 아니, 그것도 그거지만 100 퍼센트 증폭 마법구라면 얼마나 받을 수 있을지 순수한 호기심이 일었다. 감정사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탐욕의 구슬'을 들여다보았다. "이걸... 이런 물건에 제가 어떻게 가격을..." 그의 시선이 진우에게로 옮겨 갔다. 꿀꺽. 그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 남자는 대체 어디서 이런 아티팩트를 구해 왔단 말인가? 감정사가 관여할 문제는 아니지만, 그걸 알면서도 참지 못하고 물었다. "어디서 구하신 겁니까?" 진우는 감정사가 아니라 김정기 쪽을 바라보며 되물었다. "그것도 원활한 판매를 위한 질문인가요?" 김정기는 머쓱한지 시선을 피하며 목 뒤쪽을 긁적였다. 감정사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닙니다. 단지 저는... 너무 놀라워서. 하지만 이런 마법구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모두들 어디서 나온 물건인지 궁금해할 겁니다." 과연 다른 두 사람도 궁금해 죽겠다는 눈치였다. '뭐, 상관없나?' 물어본다면 말 못해 줄 이유도 없긴 했다. 떳떳하지 못한 방법으로 습득한 것도 아니고, 알려 준다고 남이 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진우의 입술이 떨어졌다. 진우를 제외한 세 사람은 과연 어떤 대답이 나올지 숨소리도 멈추고서 대답에 집중했다. 진우는 웃으며 말했다. "던전에서 주웠습니다." *** 백윤호는 사장실로 들어갔다. "혼자 있고 싶으니까 아무도 들이지 마세요." 비서에게 따로 지시한 것도 모자라 문을 걸어 잠근 그는 컴퓨터를 켰다. 그리고 S 급 헌터이자 길드 마스터라는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손에 닿을 수 있는 모든 정보를 열람하기 시작했다. '있을 수 있는 일인가?' 백윤호의 머릿속에 진우에 대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성장이 가능한 헌터라니? 그러나 그게 아니라면 며칠 사이에 몰라보게 달라진 그의 힘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의 손가락이 바삐 움직였다. 전 세계의 최상급 헌터들만 이용할 수 있는 헌터 사이트에서도 관련 자료를 찾아보았다. 그러나 허사였다. '없어...' 스스로 능력치를 끌어올릴 수 있는 헌터는 없었다. 각성이나 재각성이라는, 순전히 운을 통해서만 성장할 수 있을 뿐. 헌터를 달리 신의 선택을 받은 자라 부를까? 수많은 창이 떴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수없이 많은 글자들이 화면 위를 쉴 새 없이 오갔다. 그러길 3 시간째. 장시간 검색에 지친 백윤호가 의자에 등을 기대었다. '내가 너무 과민하게 반응한 건가?' 어쩌면 그럴 수도 있다. 성진우 헌터가 생각보다 강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놀란 나머지 말도 안 되는 가정을 떠올려버린 건지도 모른다. "하하." 한창 바쁜 시간에 뭐하는 거람? 이럴 시간에 성진우 헌터에게 문자나 한 번 더 보내야 하는 건데. 약삭빠른 최 대표가 벌써 성진우 헌터를 찾아 게약서를 들이밀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백윤호는 실소를 흘리며 창을 하나씩 꺼 나갔다. 그리고 마지막 창이 남았을 때. '가만...' 반쯤은 장난으로 검색 사이트에 '헌터 성장 능력'이라고 쳐넣었다. 물론 성과는 없었다. 백윤호도 딱히 뭔가를 기대하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그냥 검색이 필요할 때마다 하던 행동을 무의식적으로 반복한 것에 불과할 뿐. '그러고 보니... 오늘 점심도 안 먹었구나.' 뒤늦게 느껴지는 허기에 배를 문지르며 입맛을 다시던 백윤호가 검색창을 끄려는 순간, 그의 눈이 번뜩였다. '...?' 검색 결과 다섯 번째 페이지쯤에 링크된 글 하나. 링크 주소가 헌터들만 가입 가능한 전용 카페의 주소가 아니었다면 그냥 넘겨 버렸을 글. 백윤호는 마우스를 움직였다. [제목: 이상한 일이 일어났습니다.] [내용: 갑자기 게임처럼 능력치가 보이고, 능력치를 올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혹시 저와 같은 일을 겪고 계신 분이 있나요?] 익명으로 써진 글이었다. 그런데 뭐라고 할까. 글을 읽어 내려가며 호흡이 빨라지고 심장이 뛰는 느낌이 들었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하겠지?' 그래도 한번 확인해 봐서 나쁠 건 없지 않은가. 백윤호는 수화기를 들었다. -네, 사장님. 곧 제 2 관리과의 안상민 과장이 전화를 받았다. "안 과장님이 하나 알아봐 주셨으면 하는 게 있습니다." 이 익명의 글이 올라온 날에 성진우 헌터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고 싶어졌다. -예. 알아보겠습니다. 담백한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겼다. 안 과장은 능력 있는 직원이다. 기다리고 있으면 어떤 방법으로든 알아봐 줄 사람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생각보다 더 빨랐다. '벌써?' 백윤호는 금방 울리는 전화를 들었다. -남아 있는 기록이 있어서 얼마 안 걸렸습니다. "그래요?" 백윤호는 반색했다. 그러고 보니 안 과장의 지시로 제 2 관리과 전체가 성진우 헌터에 대해 모을 수 있는 정보를 다 모은 적이 있다고 했었지. 덕분에 기다리는 시간이 짧아졌다. -예, 그날 성진우 헌터님은... 아, 이때가 그때인가 보네. 왜 그 몇 달전에 이중 던전 사건 있지 않았습니까? "있었죠." -성진우 헌터님이 그 이중 던전 생존자셨거든요. 아마 입원해 있는 동안 계속 의식이 없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아... 그렇습니까." 백윤호는 실망스런 눈빛을 했다. 의식이 없는 사람이 인터넷에 글을 올릴 수는 없는 일이다. '능력치를 올리다니... 그런 일이 가능할 리 없지.' 정말 웃기지도 않은 해프닝이었다. 어쩐지 피곤해졌다.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가서 눈이라도 좀 붙여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때. -어? 잠깐만요. 내내 기절해 있기는 했는데... 수화기 너머에서 신기하다는 듯 안상민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딱 그날 눈을 뜨셨네요. = 97 화 그 소리를 듣자마자 백윤호는 편히 앉았던 자세를 바로 했다. '하필 그날 눈을 떴다고?' -아, 정확히는 그 전날에 깨어났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내 안상민이 대답을 정정했지만, 백윤호가 생각하기에 하루 정도의 시간차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정말 중요한 것은 이 글을 올린 사람이 성진우 헌터일 가능성이 사라지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만하면 됐습니다. 수고하셨어요." 그렇게 전화를 끊은 백윤호는 보고서 파일들이 저장된 폴더를 찾아 문서 하나를 열었다. 제 2 관리과에서 성진우에 대해 조사해 보낸 보고서였다. 딸깍, 딸깍. 백윤호는 다른 것보다 진우의 최근 행적을 주의 깊게 살폈다. 그전까지 그는 별다른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툭하면 다치고 수입도 별로인, 전형적인 E 급 헌터의 삶을 살고 있었다. 그런데. '이중 던전 사고...' 그날 백윤호도 현장에 있었다. 협회는 가장 가까운 거리에 있는 대형길드 백호에게 급히 도움을 요청했고, 백윤호는 기꺼이 정예 공격대와 함께 그곳을 찾았다. 위용, 위용! 거기서 그는 의식을 잃은 채 구급차에 실려 가는 한 남자를 보았다. '그때는 그 남자가 성진우인지 몰랐지만...' 그 안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어쨌든. 이때를 전후하여 성진우는 완전히 달라졌다. 얌전히 협회 일만 돕던 그가 일반인 공격대에 들어가는가 하면, 갑자기 C 급 게이트를 하루에 몇 개씩이나 클리어하기 시작했다. 분명 그의 안에서 무언가가 변했다. 백윤호는 확신했다. '평범한 재각성은 아니다.' 안 과장은 재각성한 성진우 헌터의 힘을 유진건설 쪽에서 테스트해 본 것이라는 가설을 세웠지만. '아니.' 그렇다면 재각성이 끝나고 나서도 부쩍 성장해 버린 그의 힘을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러니 정말로. '...자신의 힘을 성장시킬 수 있는 헌터가 있다면?' 게다가 불과 몇 달 사이에 E 급이었던 능력을 S 급까지 끌어올릴 수 있을 정도로 성장 속도가 빠르다면? "..." 백윤호는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흘렸다. 소름 돋는 일이었다. 물론 그 정체불명의 게시물을 쓴 사람과 성진우 헌터가 동일인이라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었다. 하지만 그 글에서처럼 성진우 헌터가 자신의 능력치를 올릴 수 있다면, 여기서 얼마나 더 위로 올라가게 될지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아찔해졌다. 그와 동시에. '내가 어리석었다.' 성진우 헌터가 왜 그리도 길드에 관심을 가지지 않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입장을 바꿔 생각해 봐도...' 자신에게 한계 없이 계속해서 성장할 수 있는 능력이 주어진다면 과연 남의 길드에 들어가고 싶을까? 백윤호는 고개를 저었다. '차라리 길드를 만들고 말지.' 국내 1 위, 2 위 길드가 다 무슨 소용일까? 어차피 자기가 있는 곳이 최고가 될 텐데. '이거 최종인 대표나 나나 완전히 헛물켜고 있었구만.' 지금도 성진우 헌터를 찾아 발바닥에 땀 나도록 돌아다니고 있을 최 대표를 생각하니 절로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내 가정이 사실이라면 그냥 웃어넘길 일이 아니다.' 머지않아 그는 대한민국 헌터계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존재가 된다. 아니, 전 세계의 헌터들이 그를 주목할지 모른다. 성진우 헌터에 대한 플랜을 완전히 다시 짜야 할 때였다. 그러나 그전에 먼저. '일단 그를 만나서 확인을 한번 해 봐야겠어.' 백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성진우 헌터를 만나는 게 가장 급선무였다. 그런데. '...어떻게 시간을 좀 내 달라고 하지?' 백윤호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 그동안 숱하게 보냈던 요청에 답장 한번 주지 않았던 사람을 만나야겠다고 마음먹으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리기 시작했다. *** 감정사는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던전에서 주웠다고요?"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악마성 '던전'에서 탐욕스러운 볼칸을 잡고 '주운' 거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던전에서 저런 걸 주울 수 있다고?' '지금 제작 기술로는 만들 수 없는 물건이긴 한데...' 물어본 감정사나 같이 대답을 들은 감정팀 두 사람이나 믿기 어렵다는 얼굴들이었지만, 당사자가 그렇다니 그리 알고 있을 수밖에. 사실 지금 붉은 마법구가 어디서 나왔는지가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이걸 헌터님께서 앞으로 어떻게 하실지가 중요한 거지.' 팀장이 앞으로 나섰다. "진품이 확실하군요." 그의 시선이 진우의 손에 들린 구슬 쪽으로 향했다. "저희 측에서 경매를 진행하시겠습니까? 최고의 값을 받게 도와 드리겠습니다." 어떡한다? 진우는 탐욕의 구슬을 어떻게 할 지 결정하기에 앞서 이곳에 들린 다른 용건을 물었다. "혹시 화속성 방어 아티팩트를 살 수 있습니까?" 팀장과 김정기가 서로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은 조금 어색한 표정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의아했다. "제가 못 물을 거라도 물었나요?" '아닙니다." "그럼 화속성 방어구를 구하기가 상당히 어렵다던가?" "실은..."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그 반대입니다. 너무 구하기 쉬운 거라." "인터넷에 없던데요?" "속성이 붙은 무기나 방어구는 워낙 고가라 인터넷으로는 잘 내놓지 않습니다. 그래도 구하려면 금방 구해지는 물건입니다. 공격 마법 중에는 화속성 마법이 가장 흔하니까요." 하긴. 여태껏 만났던 마법계열 헌터는 대개 불이나 빛을 다루었다. S 급인 최종인 헌터도 화염계 마법이 특기라고 들었다. 심지어 진우 본인이 다루는 그림자 마법병들도 불을 썼고, 특히 어금니는 입으로 직접 불을 뿜기까지 한다. 그만큼 흔하다는 소리다. '구하기 쉽다니 다행이네.' 고가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긴 했지만 어머니의 치료가 달려 있다. 빨리만 구할 수 있다면 가격이야 얼마든지 지불할 생각이 있었다. 여차하면 탐욕의 구슬을 팔아도 되니까. "한번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네, 알겠습니다." 팀장은 감정실을 나가려다 말고 김정기를 돌아보았다. "정기 씨. 여기서 기다리게 만드시는 것도 뭐하니 헌터님께 경매품들이라도 보여 주고 있는 건 어때요?" "아, 그러겠습니다." 김정기가 앞장섰다. "따라오시죠." 두 사람은 전시실로 갔다. 경매를 앞두고 있거나 아직 구매자가 나타나지 않은 초고가 아티팩트들을 모아 둔 VIP 전용 전시장이었다. 무기나 방어구, 룬석 등등이 투명한 상자 속에 진열되어 있었다. 진우는 그중 하나. 장검이 들어 있는 유리 상자를 보고 멈춰 섰다. 김정기가 다가왔다. "맘에 드는 물건이라도 있으신 가요?" "아뇨, 그게 아니라." 진우는 노크하듯 유리 상자를 톡톡 쳤다. "이렇게 얇은 상자 하나로 아티팩트를 지킬 수 있나요? 별다른 보안 장치도 없는 듯한데." 그러자 김정기가 자신만만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 보여도 최고의 제작자들이 마력을 투여한 강화 유리입니다. A 급 전투계열 헌터가 전력으로 때려도 아무 이상이 없는 물건이에요." "A 급이 쳐도...?" 진우가 반신반의하자 김정기는 피식 웃으며 말했다. "못 믿으시겠으면 한번 쳐 보시겠습니까? 만에 하나라도 부서진다면 안에 든 아티팩트를 헌터님께 드릴 수도 있습니다." "흠..." 정말 이 강화 유리란 게 그렇게 튼튼한 걸까? '마력이 느껴지긴 하는데.' 호기심이 생긴 진우는 오른팔에 힘을 주었다. 후욱순간적으로 어깨와 팔뚝이 팽창하며 주변의 공기가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자, 잠깐만요!" 김정기가 급하게 가로막았다. "말이 그렇다는 거죠. 실제로 쳐 보란 얘기가 아니라." "아, 예." "진짜로 깨지기라도 하면 헌터스의 정예들이 달려옵니다. 저희 옥션과 헌터스는 보호 계약을 맺었거든요." "아하." 농담 한번 진담처럼 하네. 진우는 힘을 거뒀다. 진우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위압감이 사라지자 김정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이 사람, 마법계열 헌터라고 하지 않았나?' 무슨 마법계열 헌터의 기세가 이리도 무지막지한지... 사실 쳐 보란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S 급 헌터라고 해도 마법계열인데 근력이 대단해 봐야 얼마나 대단하겠냐는 생각에서였다. 그런데 진우가 집중하는 순간 털이 곤두서면서 본능적으로 그를 막아야겠다는 직감이 들었다. 다행히 진우는 순순히 물러났다. '뭐, 잘못하면 헌터님의 손이 다쳤을지도 모르니까.' 김정기는 그렇게 위안 삼으며 다른 아티팩트들을 안내했다. 내부를 한 바퀴 둘러 본 진우가 물었다. "만져 볼 수 있는 무기는 없나요? 단검 종류로." 무기에 의존하는 타입이 아니어서 그동안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지만, 전시된 각종 장비들을 보니 돌연 관심이 생겼다. 김정기의 얼굴이 환해졌다. 헌터들에게 아티팩트들을 관람시키는 건 다른 이유에서가 아니다. 바로 이런 순간을 위해서다. 헌터는 판매자이기도 하지만, 귀한 고객이기도 하니까. "물론 있습니다." 그렇게 대답한 뒤 목 아래에 부착된 마이크로 무기류 담당 직원을 호출했다. 그새 마음이 바뀔까 싶었는지, 담당자가 금방 뛰어왔다. "이분이?" 담당자가 눈빛을 보내자 김정기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반갑습니다. 무기 쪽은 제가 담당하고 있습니다. 같이 가시죠." 담당자는 진우를 데리고 VIP 전시실을 빠져나갔다. 두 사람을 보낸 김정기가 다시 한번 한숨을 쉬었다. '성진우 헌터님은 사람을 깜짝깜짝 놀라게 만드는 재주가 있으시네.' 어느 정도 안정을 찾은 김정기가 별생각 없이 주변을 둘러보다가 아까 진우가 관심을 보였던 그 장검 앞에 섰다. 진우와 진열창 위치가 너무 가까웠기에 지문이라도 묻었는지 살펴보던 그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응?" 상자 위쪽. "어라?" 상자 위쪽 한 모퉁이에 눈에 띄지 않을 만큼 미세하게 금이 간 부분이 있었다. "이건 또 언제 이렇게 됐어?" 손수건을 꺼내 문질러 봤지만 지워지지 않았다. 때가 묻은 게 아니라 금이 간 게 맞았다. "참나." 김정기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요 고객이 될지도 모르는 성진우 헌터가 이걸 봤으면 얼마나 실망했을까? 잘 안 보이는 모서리 근처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쯧쯧. 혀끝을 차며 관리팀을 호출해 둔 김정기가 진우를 따라 VIP 전시실을 나섰다. *** 진우는 담당자가 보여 주는 단검을 들어 보았다. 솔직히 말해 형편없었다. '입수 난이도 B 급의 나이트 킬러보다도 안 좋네.' 공격력이 '나이트 킬러'의 반도 되지 않았다. 진우는 실망스런 얼굴로 단검을 돌려주며 물었다. "이건 얼마죠?" "3 천만 원입니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이딴 게 얼마라고? "얼마라고요?" "3 천만 원입니다, 헌터님." "잠시만요." 진우는 돌아서서 품속을 뒤지는 척하며 나이트 킬러를 보여 주었다. "이런 건 얼마나 합니까?" 직원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헌터님 물건입니까? 이야, 섬세한 장인의 손길이 느껴지는 단검이네요!" 아니, 그거 상점표인데... 약간 망설이던 직원이 웃음을 띠고 말했다. "제가 전문 감정사가 아니라 정확한 평가는 힘들지만, 못해도 얼추 1 억 이상은 갈 듯한 물건으로 보이네요." 진우의 표정이 굳었다. '이거 상점에서 3 백만 골드 주고 산 건데?' 정확히는 280 만이었던가? 진우의 표정을 확인한 직원이 민망한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가 틀렸습니까? 무기류는 제가 전문이라 주제넘게 말씀드려 본 겁니다만." "그런 건 아닙니다." 그냥 터무니없이 비싼 아티팩트 가격에 놀랐을 뿐이었다. 하긴. 처음 손에 쥐었던 공격력 10 짜리 김상식의 강철검도 3 백이나 한다고 들었고, 별로 쓰이지 않은 유진호의 장비들도 억대를 호가했다. 시스템 상점에서 판매하는 높은 능력치의 아이템들이 고가로 거래될 수 있다는 사실은 따지고 보면 그리 놀랄 만한 일도 아니었다. '내가 신경 쓰지 않았을 뿐이지.' 돈에 크게 관심이 없었으니까. '잠깐만...' 지금 골드는 창고에 넘치도록 쌓여 있었다. 그런데 골드로 살 수 있는 상점표 아이템을 이렇게 비싸게 팔 수 있다면? 진우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굳이 탐욕의 구슬을 안 팔아도 되겠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와아아기분 탓일까? 발밑 그림자 속에서 마법병들의 환호성이 들린 것만 같았다. = 98 화 "와! 오빠, 기자들 아직도 있어." 진아가 창밖을 내려다보며 말했다. 늦은 시간. 아직도 떠나지 않은 기자들이 아파트 입구 주변에 구름같이 모여 있었다. "저기!" 인영을 발견한 기자들이 진우인 줄 알고 허겁지겁 셔터를 눌러댔다. 찰칵 찰칵 찰칵! 갑자기 여기저기서 플래시가 터져 나오자, 진아는 화들짝 놀라 커튼을 쳤다. 촤르륵돌아선 동생이 작은 동물처럼 숨을 내쉬었다. "휴-." 헌터옥션에서 다녀온 뒤, 모처럼 집에서 휴식을 취하려고 했던 진우의 얼굴이 살짝 굳어졌다. "내려가서 한 마디 하고 올까?" 휴식이 방해받는 건 괜찮다. 하지만 동생의 공부에 방해가 될까봐 걱정됐다. 진아는 고 3 수험생. 좀 민감하다 싶은 애들은 방밖에서 발소리만 들려도 거슬린다고 신경질을 내는 시기가 아닌가? '진아가 까탈을 부리는 성격이 아니긴 하지만...' 그래도 주위가 이렇게 시끄러워서야 어디 집중이나 제대로 할 수가 있을까. 진우가 나서려고 하자. "하지마, 하지마." 진아가 손을 내저었다. "안 그래도 오빠 지금 인터넷에서 욕 먹고 있는데, 기자들까지 쫓아내면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욕?" 내가 언제 욕먹을 만한 짓을 했던가? 고개를 갸웃하는 진우에게 진아가 인터넷 기사 하나를 내밀었다. 진우는 진아의 폰을 받아들었다. '...' 화면 속에는 협회 문 앞에 서서 기자들에게 둘러싸인 채로 태연스럽게 전화를 받고 있는 자신의 사진이 떠있었다. 역시 전문가가 찍어서 그런지 평범한 모델로도 제법 근사한 사진이 나와 그럭저럭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기사를 조금 내려보니. '태도가 건방지다.' '벌써부터 기자들은 안중에도 없다.' '완전 쿨하다.' 같은 댓글들이 주르르 달려있고, 그중 가장 추천이 많은 댓글은 '엄마, 나 S 급 합격했어요!' 였다. 사진과 댓글이 너무 절묘하게 어울려서 진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진아가 그걸 보고 기막혀했다. "오빠는 웃음이 나와?" "웃기잖아." "..." 진우가 베스트 댓글을 보여주자 진아도 웃음을 터트리려다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 반동일까? "아니,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진아는 약간 상기된 얼굴로 목소리를 높였다. "왜 거기서 전화를 받은 거야? 기자들이 그렇게 많은데. 덕분에 내 이름까지 다 퍼졌잖아." 진우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담담히 말했다. "내가 동생 전화 받는 것도 기자들 눈치를 봐야 하냐?" "윽!" 진아는 할 말이 없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맞는 말이라 딱히 반박할 구석이 없었다. '...말로는 못 당하겠다니까.' 진우는 폰을 넘겨주었다. "자." 조금 분한 얼굴로 폰을 돌려받은 진아가 말했다. "어쨌든 난 괜찮으니까. 오빠도 기자들 신경쓰지마." "오케이."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런 상황이 계속 지속돼야 한다면 몰라도, 하루 이틀 뒤면 기자들에게 접근금지 명령이 떨어질 거라는 협회의 연락이 있었다. '그 정도는 참지 뭐.' 더 이상 일이 커지는 걸 진아가 원하지 않고 있기도 하고.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이래." 진아가 신기하다는 듯 진우를 바라보았다. "오빠가 S 급 헌터가 되고, 기자들이 집에 몰려오고..." 살면서 한번 마주치기도 힘들다는 S 급 헌터가 바로 눈앞에 있고, 그게 자기 오빠라니.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진아 역시 믿기 어렵다는 목소리였다. 하지만 곧 진아도 바뀐 현실에 적응해나갈 것이다. '내가 그랬듯이.' 진우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아직도 놀란 가슴이 다 진정되지 않았을 동생을 다독여주는 의미로, 진아의 볼을 살짝 잡아당겼다. 진아는 평소처럼 즉시 발차기로 대응했지만. "아!" 도리어 자신의 발등을 붙들고서 사방을 콩콩 뛰어다녀야 했다. "히잉." 진아는 너무하다는 표정으로 눈을 흘겼고, 진우는 어깨를 으쓱했다. 아직 자기 오빠가 S 급 각성자라는 사실에 적응하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할 듯 보였다. "오빠 이제부터 바빠지겠네?" 진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음."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하고 싶은 일도 많고, 해야 할 일도 많지만, 일단은 악마성 클리어부터였다. 상층부 공략을 위해 화속성 방어구 아티팩트들까지 구했으니까. 가진 돈으로는 한참이나 부족해서 철렁했지만, 다행히 상점표 A 급 아이템들을 담보 삼아 헌터옥션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었다. 'S 급 헌터가 되자마자 빚이라니...' 왠지 웃음이 나왔다. 상점표 아이템들이 경매에서 높은 가격을 받고 팔린다면 빚이야 금방 청산되기야 한다만. "그럼 오빠 보기 더 힘들겠네." 앞으로 바빠진다는 말에 진아가 약간 아쉬운 표정을 했다. 혼자 있으려면 쓸쓸하겠지. 진우는 진아 머리 위에 말없이 손을 얹었다. 앞으로 며칠. 악마성 던전을 클리어하고 나면 이제 동생 혼자서 집을 지켜야 하는 일은 없어질 거다. '내가 꼭 그렇게 만들 테니까.' 그때. 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시선이 문 쪽으로 향했다. '누가 이쪽으로 온다.' 진아도 오빠의 이상을 눈치챘다. 동생이 불안한 눈초리로 물었다. "오빠?" "넌 들어가 있어." "무슨 일인데?" 엘리베이터에서 내려선 기척 하나가 곧장 이리로 오고 있었다. '헌터...?' 수상한 기척은 미약하게나마 마력을 품고 있었다. 기척에게서 딱히 적의 같은 것을 느끼지는 못 했지만, 그래도 허락받지 않은 손님이 달갑지는 않았다. 길드에서 보낸 사람일까? 아니면 각성자의 힘을 맹신해 대담하게 움직인 기자? 어느 쪽이든 밤 10 시가 넘는 시간에 예고도 없이 남의 집을 방문하려는 불청객에게 웃으면서 대할 정도로 아량이 넓지는 않았다. 진우는 문 앞에 섰다. '이 정도면...' 무기를 불러낼 필요도 없다. 진우는 몸을 가볍게 풀었다. 목을 좌우로 움직이자 우두둑 소리가 났다. 예상대로. 쿵쿵. 누군가 문을 두어 번 두드렸고, 놀란 동생은 후다닥 방으로 뛰어들어갔다. 진우는 침착하게 문을 열었다. 덜컹. 천천히 열리는 문틈 사이로 낯익은 젊은 남자 하나의 얼굴 하나가 보였다. 남자는 말했다. "형니임..." 훌쩍이면서. 코까지 빨개진 유진호가 문 앞에 서서 훌쩍대고 있었다. "..." 하도 어이가 없어서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더니, 유진호가 울먹이며 말했다. "형님, 저 쫓겨났습니다. 아버지께서 쫓아내셨습니다." "..." 그러고 보니 유진호는 등에 지 덩치만한 백팩을 짊어지고 있었다. 손 양쪽에도 짐이 한 가득이었다. "...너 원래 따로 살지 않았었냐?" "그게..." 훌쩍. "제가 살던 빌라도 아버지 이름으로 돼있던 거였는데 뺏겼고, 제 계좌들까지 전부 다 막혔습니다." 아버지가 아들의 은행 계좌를 전부 막는다라. 영화 같은 이야기였지만, 대한민국 제계의 일인자로 일컬어지는 유명한 회장이라면 충분히 가능할 것 같긴 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대체 뭔 짓을 저질렀기에 그렇게 아버지의 미움을 단단히 사게 된 걸까? 진우가 의문스런 시선으로 빤히 바라보고 있을 때, 유진호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래서 말인데요. 형님. 제가 당분간 신세 좀 지면 안 되겠습니까?" 끼이익덜컹. 진우는 차분히 문을 닫고 걸어잠그기까지 했다. 철컥. 돌아서는 진우에게, 상황을 걱정스럽게 지켜보고 있던 진아가 쪼르르 달려와 물었다. "오빠, 방금 누구야? 아는 사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처음 보는데." "모르는 사람이야? 그런데 우리 집엔 왜 왔대?" "신경 쓰지 마. 집을 잘못 찾아왔나 봐." "...정말?" 아닌 것 같던데. 미심찍어 하는 진아를 방으로 밀어 넣는 진우의 등 뒤로, 유진호의 서글픈 목소리가 이어졌다. 쿵쿵! "형니이임-임! 형니임!" *** "여보, 오늘 진호한테 너무 심하셨던 거 아니에요?" "흥." 유명한은 넥타이를 거칠게 풀어헤쳤다. 고얀 녀석. 앞으로 유진 건설의 주력 사업 중 하나가 될 유진 길드를 넘겨주겠다고 했는데 돌아오는 대답이 그 따위라니. "저는 형님 길드로 갈 겁니다." 뭐? 형님을 따라가? "그 녀석은 그래도 싸다오." 유명한은 콧방귀를 꼈다. 홀로 서기를 원한다면 오롯이 혼자 힘으로 서야지. 모든 서낵에는 책임과 결과가 따른다는 사실을 몸으로 직접 깨닫게 해줄 생각이었다. 흥분한 상태여서일까? 오늘따라 더 넥타이가 풀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서툰 손놀림에 결국 넥타이가 엉키기 시작하자, 유진의 안주인이 손을 뻗었다. "제가 해드릴게요." 이내 넥타이가 매끄럽게 풀렸다. 유명한은 가만히 부인의 손길에 몸을 맡겼다. 그런데. 부인이 다 풀린 넥타이를 손에 쥐고서 쿡쿡하고 웃었다. "왜 그러시오. 부인?" 유명한은 의아했다. 자기 대신 평생 메어주고 풀어주던 넥타이다. 이제 와서 엉킨 넥타이가 웃기지는 않을 텐데. "당신. 정말 화가 난 거 맞아요?" "음...?" 이 사람이 뭘 잘못 먹었나. 무슨 실없는 소리를. 유명한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응시했다. '아니...' 스스로 놀랐다. 입으로는 방금 전까지도 투덜대고 있었던 자기 모습이 어째서 이렇게 기분 좋은 것처럼 비춰지고 있는 걸까? 민망해진 유명한이 자신의 뺨과 턱을 만지작거렸다. "오늘 처음이었죠?" "뭐가 말이오?" "진호가 당신께 대든 것." "..." 그래서 화가 난 것이다. 기업은 위에서 아래로 물 흐르듯 지시가 전달되지 않으면 거대한 몸뚱이를 감당할 수가 없다. 가정도 그렇다고 믿어왔다. 때문에 항상 집에서도 회사에 있을 때와 같은 태도를 고수해왔고, 결정에 반발하는 일은 일체 용납하지 않았다. 헌데. 오늘은 어째서 화가 나는데도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 않은 것일까? '화가 나는데 기분이 나쁘지 않다?'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말이 되지 않는 상황이었다. 부인은 남편의 속마음을 다 읽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아이를 달래듯 부드럽게 말했다. "진호가 처음으로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하려고 하고 있잖아요. 당신도 너무 화내지 마시고 응원해주시는 게 어때요?" "..." 유명한은 입을 꾹 다물었다. 자신도 자기 마음을 정확히 헤아리기 힘들었다. "일단... 조금 더 지켜보겠소." "그러셔야죠." 부인은 자상한 미소를 지으며 남편이 벗는 상의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그때. 유명한이 아내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참 이상하구려." "뭐가 이상하단 말씀이신가요?" "당신 얼굴이 두 개로 보이니 말이오." "네?"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유명한이 중심을 잃고 비틀거렸다. "여보?" 놀란 부인이 급히 유명한을 부축했다. 연신 고개를 저어대던 유명한이 거친 숨을 토해냈다. "허억, 허억." 부인의 눈이 커졌다. '무슨 식은땀을 이렇게!' 유명한은 갑자기 쏟아지는 졸음을 떨쳐내려고 눈을 부릅떴으나, 결국 의식을 잃고 말았다. *** 유명한은 국내 최고의 대학병원 VIP 실에서 눈을 떴다. 순번을 정해 24 시간 돌아가며 그의 병실을 지키고 있던 전담의가 다가와 유명한의 안색을 살폈다. "정신이 드십니까, 회장님?" "..." 잠깐 주변을 둘러본 유명한이 금세 상황을 파악했다. "내가 여기 얼마나 있었나?" "꼬박 이틀을 잠들어 계셨습니다." 이틀이나? 성실함의 대명사로 꼽히는 사람이 유명한이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하루 다섯 시간 이상 눈을 붙인 적이 없었다. "..." 입을 굳게 다물고 있던 유명한이 곧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많이 지쳤었던 모양이군." 최근 여러 가지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기는 했다. 갑작스런 현기증과 떨칠 수 없었던 졸음은 그 여파이리라. 그러나 전담의는 심각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유명한은 수십만 직원을 아래에 두고 있는 국내 굴지 기업의 오너. 사람의 표정을 읽는 데는 도가 튼 사람이었다. 굳어지는 의사의 얼굴을 보고 유명한이 물었다. "혹시... 내 몸에서 무슨 이상이라도 발견된 건가?" = 99 화 "혹시 가까운 사람 중에 헌터나 지금은 헌터가 아니지만 각성자 판정을 받은 분이 계십니까?" 의사가 대뜸 이상한 소리를 했다. 어디가 아픈지를 물었는데 어째서 헌터 이야기가 나오는 것일까? 유명한은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린가? 갑자기 헌터라니." "익면증에 대해서 들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익면증이라는 단어에 줄곧 침착함을 잃지 않고 있었던 유명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익면증. 깨어날 수 없는 수면. 단순히 잠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환자의 생명력을 빠른 속도로 소진시키기 때문에 마력을 이용한 생명유지 장치가 필수였다. 게이트가 발생한 이후 등장하기 시작하여 생명유지 장치를 빌릴 여력이 없는 많은 사람들을 죽음에 몰아넣은 무서운 병이었다. "수시로 졸음이 쏟아지다가 결국 잠에서 영영 깨어나지 못하게 되는 병입니다." 의사는 착잡한 얼굴이었다. 아직까지 익면증에 걸린 환자가 잠에서 깨어난 사례는 없었다. 목숨을 연장한다고 눈을 뜰 수 없는 것은 마찬가지. 환자에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 유명한은 의사의 설명이 끝나길 기다렸다 물었다. "그런데 그게 헌터와 무슨 상관인가?" "익면증은 마력과 깊은 연관이 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선천적으로 마력을 잘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이들이 오랜 시간 주변의 마력에 노출되어 발생하는 이상 증상중 하나가 익면증이었다. "환자에게 생명력을 공급하는 장치는 마력을 이용한다고 하지 않았나?" "그렇기는 합니다만." 핵 원료는 위험한 물질이지만 거기서 나온 전기는 안전하게 쓸 수 있듯이, 마력을 이용한 마법은 해를 입히지 않는다고 의사가 설명했다. "조심해야 할 것은 마정석이나 마석, 그리고 마력을 품은 사람들입니다." '마력을 품은 사람들...' 유명한은 가족 중 유일한 각성자인 유진호를 떠올렸다. 의사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회장님의 차남분이 헌터라고 들었습니다." 유진호의 이야기가 나오자 유명한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서... 지금 나더러 내 아들을 만나지 말라는 이야기인가?" "가급적 그렇게 하시는 편이..." "웃기는 소리 말게!" 유명한은 딱 잘라 말하고는 거듭 강조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러고는 귀찮다는 듯 손짓으로 의사를 물렸다. "회장님..." 의사는 어떻게 해야 할지 주저하다가 유명한의 엄한 눈빛에 도망치듯 병실을 빠져나갔다. 유명한은 의사가 나간 문을 노기가 담긴 눈으로 노려보았다. '병이 심해지는 것이 무서우면 아들을 멀리하라니. 그게 아버지에게 할 소리인가?' 설사 그렇다고 치자. 만에 하나 그 소식을 진호가 듣게 되면 어떤 생각을 할까? 아버지로서 아들에게 그렇게 큰 짐을 물려줄 수는 없었다. 적어도 유명한은 그리 생각했다. '게다가...' 마력은 날이 갈수록 점점 그 쓰임새가 확장되고 있었고, 마력을 지닌 사람들의 수 또한 꾸준히 늘어나고 있었다. 그런 세상에서 마력을 견디지 못한다는 말은 이미 도태되었다는 소리가 아닌가? 유명한은 콧방귀를 꼈다. '이 유명한이 도태되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나는 지지 않는다.' 모두가 안 될 거라며 손가락질했던 일들도 보란 듯이 해내 왔다. 재계 30 위권에 간신히 들까 말까 했던 유진건설을 물려받아 국내 1 위 기업으로 성장시킨 것도 그다. '그런데 이제 와서 이까짓 병 따위에 무릎을 굽힐까.' 나는 지지 않는다. 유명한은 그렇게 몇 번이고 속으로 되뇌었다. *** 진우는 나가기 전에 동생의 방문을 조심히 열었다. 아직 이른 시간이라 진아는 누가 업어 가도 모를 정도로 깊이 잠들어 있었다. 문득 걱정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없는 사이 동생에게 접근하려는 사람이 있을지도 몰라.' 물론 S 급 헌터의 여동생에게 해코지하려는 간 큰 놈은 없겠지만, 그래도 사람 일은 알 수 없다. 최소한의 대비책은 필요했다. '가만, 그러고 보니 내 병사들은 그림자 속에 숨을 수 있었지?' 진우는 묻지마 살인범이 동네에 나타날까 봐 그림자 병사들을 순찰시켰을 때를 떠올렸다. 그때 병사들은 사물의 그림자 속에 숨어들어 이동했었다. 그걸 좀 응용하면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고 동생을 보호할 수 있을 듯했다. 마침 쓸 만한 녀석들도 있고. '나와.' 진우는 살아생전 어금니의 호위를 맡고 있던 마수병들을 불러냈다. 스르르. 하이오크들 중에서도 떡대가 장난 아닌 녀석들이 동시에 셋이나 튀어나오니, 그렇지 않아도 작은 동생 방이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어라? 왜 셋이지?' 분명 호위는 넷이었는데? 기억을 더듬던 진우가 소리 없이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 뒤늦게 호위 중 한 놈을 천장에다 꽂아 버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놈 그림자를 추출하는 걸 그만 깜박했다. '다음엔 신경 써야겠다.' 진우는 피식 웃고는 하이오크족 호위 출신의 마수병 셋을 보았다. 전부 정예등급. 일반등급이었던 보통의 하이오크 그림자들과는 급이 달랐다. 이 셋이라면 A 급 헌터가 상대라도 끄떡없을 거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헌터스의 공대장이었던 A 급 손기훈도 보통 하이오크 셋에게 진땀을 흘렸으니까. 하물며 이놈들은 말할 것도 없었다. 진우가 진아 쪽을 턱짓했다. 그러자. 스르르그림자 형태로 돌아간 호위들이 바닥을 타고 움직이더니 이내 진아의 그림자에 흡수되었다. '좋았어.' 그렇게 얌전히 숨어 있다가 진아가 위험해지면 상대가 누구든지 봐주지 말고 해치워 버리도록. 진우는 호위들에게 지시를 내려 놓고 조심히 방문을 닫았다. '이제 안심이다.' 마음이 한결 놓였다. 문단속을 철저히 하고 아파트 입구로 내려가니, 약속대로 유진호가 기다리고 있었다. "형님!" 유진호는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자는 데 불편하지는 않던?" "네, 형님. 요새는 모텔도 시설이 아주 괜찮던데요?" 집에는 동생도 있고 해서 진우는 유진호를 근처 모텔에 묵게 했다. 다행히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길드 사무실 구할 때까지만 거기서 지내." "알겠습니다, 형님." 뭐가 그리 좋은지 유진호는 히죽히죽 웃었다. 이야기는 어제 대충 들었다. 자초지종을 들으며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길드 마스터 자리를 박차고 왔을 줄이야. 듣고서 하도 어이가 없어 물었더니, 유진호는 억울하다는 듯 대답했다. "오란다고 진짜 오냐?" "형님이 오라고 하셨잖아요!" 그래도 나 좋다고 사장급 직함을 박차고 나온 녀석을 욕할 수도 없고. "가자." "네, 형님." 유진호는 운전석에 탔고, 진우는 보조석에 올라탔다. 두 사람을 태운 봉고는 대성타워로 향했다. 유진호가 진우를 흘깃거렸다. '이 이른 시간에 대성타워에 무슨 볼일이 있으시지?' 궁금했지만 형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는 것이 건방지다고 생각해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끽. 봉고가 대성타워 앞에 섰을 때야 비로소 용기가 생겼다. "그런데 형님, 저기 대성타워엔 왜..." "갔다 온다." "네?" 유진호가 급히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어느새 봉고의 문이 열려있고, 형님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에도 여기서 비슷한 일을 겪었던 거 같은데. 유진호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형님은 언제 봐도 정말 신출귀몰하시다니까.' *** [악마성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진우는 은신 스킬을 해제했다. '겨우 돌아왔다.' 마음껏 날뛸 수 있는 장소로 다시 돌아왔다는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성문 입구를 넘어서니 기다렸다는 듯 기계음이 들려왔다. 띠링. [퀘스트가 도착하였습니다.] 첫 번째 방문과 달리 진우는 놀라지 않았다. 그때 받았던 퀘스트 이름이 '악마의 영혼을 모아라! 1' 이었으니까. 언제가 될지는 몰라도 다음 퀘스트가 날아오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진우는 메시지창을 열었다. 띠링. [일반 퀘스트: 악마의 영혼을 모아라! 2] 악마성 최상층에는 악마들의 군주 '바란'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바란을 처치하고 그의 영혼을 거두십시오. 악마왕의 영혼을 봉인하는 데 성공한다면 훌륭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입니다. 퀘스트 발생 조건: -[일반 퀘스트: 악마의 영혼을 모아라! 1] 완료 -악마성 재 입장 퀘스트 완료 조건: -악마왕 처치 보상: -1. 최상급 룬석 -2. 보너스 스탯 +30 -3. 공개되지 않은 보상 '퀘스트의 목적이 악마왕 처치네?' 진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퀘스트를 위해 돌아갈 필요 없이 악마성 최상층까지 최대한 빨리 올라가기만 하면 되었다. 거기다 보상도 좋았다. '보너스 스탯 플러스 30!' 저번 퀘스트는 악마의 영혼을 1 만개나 모아야 하는 노가다의 극치였다. 그 고생을 하고 받은 보너스 스탯이 20 개. 그런데 이번에는 악마왕 하나를 잡으면 스탯을 서른 개나 준단다. 일일 퀘스트로는 10 일 치. 레벨로는 여섯 번을 더 올려야 얻을 수 있는 스탯이었다. 기대하지 않았던 많은 보상에 미소가 절로 나왔다. '그런데 최상급 룬석은 뭘까?' 진우는 1 번 보상을 확인했다. 띠링. [최상급 룬석: 그림자 교환] 최상급 룬석을 부수면 직업 전용 스킬을 배울 수 있습니다. '직업 전용 스킬을 배울 수 있다고?' 진우의 눈이 커졌다. 지금까지 얻은 직업 전용 스킬은 모두 세 개다. 그림자 추출. 그림자 저장. 군주의 영역. 어느 것 하나 버릴 것 없는, 대단한 스킬들이었다. 거기에 새로운 스킬을 하나 더 추가할 수 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뛰었다. '어떤 스킬이지?' 스킬 정보를 확인하려고 했으나 뜨는 것은 스킬 이름뿐, 자세한 설명까지는 나와 있지 않았다. 쩝. 진우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뭐, 퀘스트를 완료하고 직접 확인해 보면 되겠지.' 직업 전용 스킬과 보너스 스탯 30 개. 공개되지 않는 보상을 뺀다고 해도 이미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지금 당장이라도 최상층까지 뛰어올라가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그래도 시작하기 전에...' 진우는 오랜만에 상태창을 불러냈다. 띠링. [이름: 성진우] [레벨: 80] [직업: 그림자 군주] [칭호: 역경을 이겨 낸 자 (외 1)] [HP: 24,406] [MP: 5,019] [피로도: 0] [스탯] 근력: 186 체력: 145 민첩: 175 지능: 189 감각: 126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물리 데미지 감소: 46%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상급 단검술 Lv.2 액티브 스킬: 질주 Lv.max, 살기 Lv.1, 은신 Lv.2, 급소 찌르기 Lv.max, 단검 투척 Lv.2, 지배자의 손길 Lv.2 [직업 전용 스킬] 액티브 스킬: 그림자 추출 Lv 1, 그림자 저장 Lv.1, 군주의 영역 Lv.1 [제작 스킬] 소모품: 생명의 신수 (2/3) [착용한 아이템] 붉은 기사의 투구(S), 악마 군주의 귀고리(S), 악마군주의 목걸이(A), 상급 기사의 흉갑(B), 상급 기사의 건틀릿(B), 상급 마법사의 반지(B), 중급 자객의 신발 (C) 80 까지 오른 레벨. 그리고 능력치 포인트를 몰빵한 덕분에 근력 스탯을 넘어서게 된 지능 스탯이 눈에 들어왔다. '벌써 지능 스탯이 2 백에 가까워졌네.' 그 결과 최대 마나량은 이미 5 천을 넘겼다. 마나는 다른 게 아니다. 그림자 병사들을 무한히 부활시킬 수 있는 맷집이나 마찬가지. 앞으로 병사들의 수가 더 늘 걸 생각하면 5 천으로도 부족한 감이 들었다. '좋아, 시작하자.' 1 초가 아깝다. 진우는 상태창을 닫았다. 여긴 악마성 1 층. 이곳에서부터 공략을 완료했던 76 층까지는 시간을 들일 필요가 없었다. 때문에 곧장 층간 이동 마법진으로 들어갔다. [1 층부터 76 층까지 개방되어 있습니다.] [어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진우는 망설임 없이 말했다. "76." 빛이 번쩍였다. 눈을 한번 떴다 감은 사이 시야가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활활 불타고 있는 도시들. 층간이동 마법진 안에서는 바깥의 영향을 받지 않는데도 피부가 화끈거리는 느낌이 들었다. 진우는 들고 온 짐을 내려놓고 거기서 아티팩트 두 개를 꺼냈다. 하나는 제작자가 '바람의 로브'로 이름 지은 검은 옷이었고, 나머지 하나는 수속성 마법이 걸려 있는 이름 모를 반지였다. 진우는 로브와 반지를 착용했다. 로브를 입고서 후드까지 쓰고 나니 진짜 마법계열 헌터가 된 기분이 들었다. '...몸이 서늘해지네.' 착용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원한 동굴 안에 서 있는 것 같았다. '과연 악마성의 불꽃에도 통할까?' 진우는 천천히 층간 이동 마법진을 나섰다. 과연. 비싼 값을 한다고 할까. 전에 왔을 때와 달리 바깥의 고온이 전혀 영향을 주지 못했다. '로브라서 불편하지는 않을까?' 혹시 몰라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봤는데 생각보다 편했다. 바람의 로브란 이름답게 옷 자체가 공기처럼 가벼웠다. '좋아.' 준비는 됐다. 그런데 준비가 끝난 것이 이쪽만이 아니었는지, 인간 냄새를 맡은 악마들이 떼를 지어 이리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예전 같았으면 몸풀기 삼아 적당히 상대하거나 층 내부를 구석구석 순회하며 레벨을 올렸을 거다. '하지만 지금은...' 어머니의 치료가 달린 만큼 조금의 시간도 허비할 수 없었다. 진우는 평소처럼 단검을 불러내는 대신, 병사들을 소환했다. 스르르. 믿음직한 그림자 병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금니는?' 진우는 어금니를 찾았다. 계급이 높을수록 가까운 위치에서 나올 수 있는 건지, 어금니는 바로 뒤쪽에 소환되었다. 진우는 창고에서 '탐욕의 구슬'을 꺼내어 어금니의 손바닥 위에 올려주었다. "오늘은 네가 써라." 마법계열이라고 해도 자신은 '탐욕의 구슬'의 증폭 효과에 전혀 영향을 받지 않지만, 어금니의 주술사에는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 어금니는 마치 감사를 표현하려는 것처럼 고개를 깊게 숙였다. 쿵, 쿵, 쿵. 드디어 거대한 악마들이 육안으로도 보이기 시작했다. '시작해 볼까?' 진우는 병사들에게 전투 준비를 지시하고 난 뒤 '바루카의 단도'와 '나이트 킬러'를 손에 쥐었다. 악마들이 코앞에서 벌레처럼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이쪽에도 숫자는 만만치 않게 많다. 저번처럼 여유로운 표정으로 타이밍을 재던 진우가 소리쳤다. "가!" 아니, '가자'고 소리치려 했다. 그런데 목소리가 채 나오기도 전에. 쿠우우우우우우우우머리 위 어딘가에서부터 사선으로 떨어져 내린, 끔찍한 굵기의 불기둥이 적들을 휩쓸었다. "뭐, 뭐야?" 쿠우우우우우불길이 스치는 순간 악마고 땅이고 간에 모조리 녹아내렸다. "키에에에에에엑!" "끼웨에엑!" 순식간에 악마들이 증발하고, 익숙한 기계음들이 이어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설마...' 진우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뒤를 바라보았다. 거기엔 던전 안에 있을 때보다 두 배는 더 커진 어금니가 입에서 회색 연기를 내뿜으며 서 있었다. 꿀꺽. 진우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탐욕의 구슬 위력인가?' 악마성에 살고 있어 화염 공격에 어느 정도 내성이 있을 몬스터들인데도 전부 태워 버렸다. 허허. 상황을 파악하고 나자 절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이거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클리어할 수 있겠는데?' 진우는 아직도 불꽃이 꺼지지 않은 악마들의 사체와 새까맣게 그슬린 땅을 보면서 속으로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 100 화 아이템 '탐욕의 구슬' 버프를 받은 어금니의 힘은 대단했다. 후욱. 주위의 공기가 일순간 싸늘해질 정도로 힘껏 숨을 들이마신 어금니가. 쿠우우우우우거대한 불기둥을 좌우로 뿜어내며 적들을 녹이기 시작했다. [최상급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1,700 을 획득합니다.] [고위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경험치 2,200 을 획득합니다.] . . [최상급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적을 처치했다는 메시지와 경험치를 획득했다는 메시지가 끝도 없이 주르륵 올라갔다. 띠링, 띠링 하는 기계음이 한참 동안 끊이지가 않았다. 진우는 미소를 지었다. '대박이다!' 마나가 고갈됐는지 어금니가 공격을 멈추었다. 방금 한번의 공격으로 무리 지어 덤벼들던 악마들의 대다수가 증발했지만, 운 좋게 불길을 피해 살아 남은 녀석들도 있었다. 그런 놈들은 그림자 병사들을 시켜 정리했다. 두두두두- 100 명이 넘는 그림자 병사들이 일사불란하게 뛰쳐나가는 모습을 뒤에서 가만히 지켜보니, 이제야 진짜 '그림자 군주'가 된 기분이었다. [최상급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최상급 악마를 처치하였습니다.] 기분 좋은 메시지는 다시 이어졌다. 진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그림자 병사들만을 이용해 몬스터들을 전멸시켰다. 그중 가장 큰 수훈자는 누가 뭐라해도 어금니였다. '어금니 녀석...' 진우의 고개가 뒤로, 좀 더 정확히는 뒤쪽의 위를 향했다. 거인처럼 커진 하이오크족 주술사 출신의 마법병과 녀석의 몸집에 맞게 거대해진 '탐욕의 구슬'이 눈에 들어왔다. 탐욕의 구슬은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시전자가 사용하는 마법의 데미지를 두 배로 끌어올려 주는 아이템. 그림자 병사가 되면서 너프되었을 어금니의 힘을 충분히 보충해 주고도 남는 것처럼 보였다. '탐욕의 구슬은 당분간 어금니에게 맡겨야겠다.' 마법계열이라고는 해도 증폭 효과를 볼 수 있는 스킬이 전무한 진우에게는 선택의 폭이 넓지가 않았다. 진우는 스킬 정보를 열었다. [추출 가능한 그림자 수: 127/820] [저장 가능한 그림자 수: 127/155] '그림자 추출, 그림자 저장, 군주의 영역.' 전부 다 '탐욕의 구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스킬들이었다. 추출이나 저장할 수 있는 그림자 수를 늘리려면 현재로선 지능 스탯을 올리는 방법만이 유일했다. 진우는 스킬 정보를 닫았다. 척, 척, 척. 전투를 끝낸 병사들이 하나둘 다시 진우 앞으로 모여들었다. 수북이 쌓인 악마들의 사체를 살펴보던 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악마들 머릿수가 머릿수다 보니 아이템들도 엄청 나왔네.' 띠링, 띠링, 띠링. 이번엔 아이템 획득 메시지가 끝도 없이 올라갔다. '챙길 건 다 챙겼고.' 미소를 지으며 아이템들을 획득해 나가던 진우가 수거 작업을 끝마치고서 아이스 베어 마수병인 '탱크' 위에 올라탔다. 아직 다음 층으로 이동할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아이템인 '진입 허가서'가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은 몬스터들을 더 잡아야 한다는 이야기. 진우는 이동을 지시했다. "이랴!" 탱크가 어슬렁어슬렁 앞으로 걷기 시작하자, 그림자 병사들이 일제히 진우의 뒤를 따랐다. *** '전군을 다 같이 움직이는 건 비효율적이다.' 120 명이나 되는 그림자 병사들을 한데 뭉치는 것은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개인이 약하면 모를까 기존의 병사들은 레벨업이 잘되어 있어 악마를 상대로도 그럭저럭 전과를 올릴 수 있었다. 게다가 지금은 A 급 던전의 마수들까지 그림자 병사들에 합류한 상태였다. 당연히 병사들 전체의 질이 크게 올라갔다. "끼에에에엑!" "키악-!" [최상급 악마를 처치...] [최상급 악마를 처치...] 병사들의 무력 수준이 이렇게 확 뛰어 버리니 몬스터를 잡는 시간보다 몬스터를 찾아 이동하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그런데. 문제는 악마성의 한 층이 웬만한 도시 크기에 필적할 만큼 넓다는 거였다. '이래서야 끝이 없겠어.' 진우는 병사들을 20 명씩 여섯 개 조로 나누었다. 그리고 사방으로 흩어져 몬스터들을 사냥하게 했다. 내린 명령은 두 가지. '하나, 보이는 모든 적들을 처치할 것.' '둘, 층간 진입 허가서 아이템이 나오면 알릴 것.' 병사들과 정확한 의사소통은 불가능하지만, 간단한 신호를 주고받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병사들이 아이템을 주울 수가 없으니 허가서를 획득하려면 본인이 직접 가는 수밖에. '층간 진입 허가서' 말고 다른 아이템들은 모두 버려야 하겠지만, 지금 급선무는 최대한 빨리 최상층으로 가는 거였다. "출발." 지시에 따라 여섯 개 조는 각자 길로 흩어졌다. 그리고 얼마 후. [경험치 1,500 을 획득했습니다.] [경험치 1,500 을 획득했습니다.] [경험치 900 을 획득했습니다.] [경험치 1,100 을 획득했습니다.] 사방에서 경험치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다. '그림자들이 사냥을 시작했나 보다.' 진우는 올라가는 경험치를 보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곧 의아한 사실 하나를 발견했다. '들어오는 경험치가 줄었네?' 상층으로 올라오고 나서부터는 아래층부터 자주 봤던 하급이나 중급, 상급 악마를 만날 수 없었다. 가장 흔하게 보이는 몬스터는 최상급 악마고, 최상급 악마들 속에 가끔 고위 악마가 섞여 있는 수준이었다. 최상급 악마가 주는 경험치는 1,700. 그보다 한 단계 더 높은 몬스터인 고위 악마에게는 2,200 의 경험치를 고정적으로 받았었다. 한데 지금 들어오는 경험치는 그에 한참 못 미쳤다. '혹시 거리가 멀어질수록 들어오는 경험치가 줄어드는 것일까?' 진우는 쉴 새 없이 올라가는 경험치 메시지를 가만히 지켜보았다. 획득량이 조금씩이지만 착실히 줄어갔다. 병사들과의 거리가 경험치 획득량에 영향을 주는 게 확실한 것 같았다. '좋은 걸 알게 됐다.' 경험치 정보를 알려 주는 악마성 던전 만의 독특한 시스템이 없었다면 깨닫기 어려운 사실이었다. 또 하층에서는 몬스터들과 직접 싸우며 전투 감각을 익히고, 퀘스트용 아이템이었던 '악마의 영혼'을 하나도 놓치지 않기 위해 병사들을 따로 내보내지 않았는데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줄어든 경험치가 크게 아깝지는 않았다. '경험치 획득량이 줄긴 했지만...' 넓은 사냥터에서 효율적인 몬스터 사냥이 이루어져 전체적인 획득량은 오히려 훨씬 더 늘었다. 지금도 경험치 메시지가 빗발치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하다 보니 첫 번째 전투 이후 정체되어 있던 레벨업에도 다시 불이 붙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진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버려져야 하는 아이템들이 조금 아깝기는 해도. '레벨업과 공략 속도,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잡는다.' 진우는 순식간에 두 단계나 건너뛴 레벨을 보며 흡족해했다. *** 계획은 적중했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빠르게 80 층까지 올라갈 수 있었다. 진우는 80 층에 도착하자마자 다시 병사들을 불러냈다. 스르륵. 일제히 소환된 199 명의 병사들. 각자 따로 흩어져서 몬스터를 잡으며 경험치를 먹다 보니, 병사들의 레벨도 가파르게 올라갔다. '어라? 탱크는 못 보던 사이에 10 업이나 했네?' 진우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인의 관심 어린 시선에 기분이 좋아졌는지, 어제 막 28 레벨이 된 탱크가 두 발로 일어서서 하늘을 향해 '우웅'하는 소리를 냈다. 효율적인 사냥에 이득을 보는 건 진우만이 아니었다. 진우가 씩 웃었다. "좋다, 출발!" 하던 대로 병사들을 여섯 조로 나누어 출발시키고, 본인은 혼자 길을 나섰다. 혼자 움직이는 게 익숙하기도 했고, 병사들의 도움이 필요 없기도 했다. '탐욕의 구슬' 아이템 버프를 받은 어금니를 제외시킨다면 그림자 병사들 전원과 싸워도 이길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어금니를 포함하면 어떨까?' 글쎄... 어금니까지 끼면 확실히 재미가 있을 것 같긴 한데. 어차피 실현 불가능한 상상이었다. '일주일 전이었나?' 재미삼아, 혹은 실험삼아 그림자 병사에게 자신을 공격해 보라고 명령한 적이 있었다. 그림자 병사는 처음으로 자신의 명령을 거부했다. '그게 충성심인지, 아니면 다른 힘의 작용인지는 알 수 없지만...' 끝내 그림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뭐, 녀석들을 부하로 부리고 있는 입장으로서는 기분 나쁘지 않은 결과였다. 그런데. '악마들이 왜 안 보이지?' 진우는 창고에서 불러온 '바루카의 단도'를 위로 던졌다, 받았다 하며 몬스터의 기척을 찾았다. '이 근처인 거 같은데...' 진우는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기척은 분명히 근처에서 느껴지는데, 몬스터가 보이지 않았다. 언제였더라? 전에도 한 번 이런 경험이 있지 않았던가. 그때 땅이 몇 번 들썩거리는가 싶더니 확 하고 흙더미가 솟아올랐다. "킥킥." "키히히-" 동시에 바닥에서 튀어나온 고위 악마 셋이 진우를 둘러싸고서 듣기 싫은 웃음소리를 냈다. 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그걸 보고 먹잇감이 겁을 먹었다고 판단한 악마들이 누가 먼저 할 것 없이 먹잇감의 머리를 향해 있는 대로 벌린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가장 맛있다는 인간의 머리를 선점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그 먹잇감이 뛰어올라 공중에서 한 바퀴 회전하자. 쉬익! 진우의 발이 채 땅에 닿기도 전에 악마들의 머리가 먼저 바닥으로 툭, 툭 떨어져 내렸다. [고위 악마를 처치했습니다.] [고위 악마를 처치...] "아." 진우가 손을 마주쳤다. 언제인가 했더니 유진호와 마지막으로 돌았던 C 급 던전에서였다. '그때 스톤맨들이 이렇게 땅속에 숨어 있었다가 나왔었지.' 기억이 안 나서 잠깐 어두워졌었던 진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진우는 환한 얼굴로 몬스터 사체에서 나온 아이템들을 다 챙기고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몇 발짝 안 가서 멈춰 섰다. "..." 진우의 시선은 못 박힌 듯 아래에 고정되어 있었다. 진우가 발밑을 노려보며 말했다. "근데 니들은 왜 안 나오냐?" 그때 떨린 것이 따잉었는지, 아니면 악마들의 동공이었는지, 이제는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 진우는 쉽사리 80 층을 벗어나지 못했다. '어딘가에 강한 녀석들이 있나?' 또 한 개의 조가 그림자로 변해 진우에게 돌아왔다. 마나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파괴와 재생을 반복해서 진우가 병사들을 거두어들인 것이다. 이런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76 층에서 80 층까지. 네 개의 층을 오르는 동안 흩어져서 사냥하는 방식은 최고의 효율을 보였다. '고위 악마라서 버거운 건가?' 확실히 80 층부터는 최상급 악마 대신 고위 악마가 주를 이루었다. 고위 악마는 땅에 숨는 잔재주까지 썼다. 그래도 고위 악마에게 병사들을 이렇게 몰아붙일 만한 힘이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습격을 받는 병사들은 전부 대장급이 없는 조였다는 사실이다. 어금니, 이그리트, 아이언, 탱크가 있는 조는 멀쩡한데, 대장급이 없는 두 개의 조만 공격을 받았다. '설마 일부러 약한 쪽을 골라서 공격하는 건가?' 그렇다면 상대의 약점을 간파할 수 있는 수준의 지성을 지닌 몬스터가 존재한다는 얘기가 된다. 강한 데다 지성까지 있다. 어떤 녀석들인지 몰라도 성가신 놈들임에는 틀림없었다. 남은 조는 네 개. 굳이 자신까지 포함시킨다면 다섯 개. '병사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다면 다음 목표는 뻔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진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 101 화 진우는 금세 탱크가 있는 곳 주변에 도착했다. 저 멀리 몸에서 검은색 증기가 올라오는 까만 곰들과, 칠흑빛 갑옷으로 전신을 무장한 하이오크들이 반반쯤 섞인 마수병 부대가 보였다. 맨 앞에는 탱크가 의젓하게 걷고 있었다. '아마도 다음 타깃은 이쪽이 되겠지.' 탱크는 원래 아이스 베어들의 우두머리로, 살아 있을 당시 혼자서 그림자 병사들을 압도했던 괴력의 마수였다. 그림자가 된 지금도 힘으로는 당해 낼 병사가 몇 없었다. 하지만 비교 대상이 좋지 않았다. 다른 조의 대장격인 아이언, 이그리트, 어금니는 일단 등급부터가 달랐다. 탱크가 아무리 레벨이 높다고는 해도 녀석은 그냥 정예병사 등급. 그런데 이그리트, 아이언은 기사등급이고, 어금니는 기사 앞에 정예까지 붙어 있었다. 게임이 안 되는 것이다. 그러니 적들에게 상대의 약점을 간파할 수 있는 지성이 있고, 병사들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있다면 다음은 여기다. '잠깐 지켜보자.' 진우는 기척을 최대한 숨기고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마수병들과 같이 움직였다. 마수병들조차 진우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한참을 기다려도 적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자,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내가 잘못 짚은 걸까?' 강한 적들이 있었던 게 아니라 피해를 입은 병사들이 있던 곳에 하필 몬스터들이 잔뜩 몰려 있었던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온다.' 적들도 거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기척을 숨기고 있었는지, 평소보다 늦게 적들의 접근을 깨달았다. 진우는 눈을 감고 감각에 집중했다. 놀랄 만큼 향상된 감각 능력이 마치 레이더처럼 일대의 모든 기척을 샅샅이 훑어 가기 시작했다. '다가오는 기척이 넷, 내 병사들이 스물, 땅에 숨은 악마들이 다섯.' 진우가 눈을 떴다. 땅속에서 죽은 척하고 있는 악마 다섯은 이따가 손보기로 하고. '은신.' 스르륵. 진우는 은신 스킬로 몸을 감추고 마수병들에게 다가갔다. 곧 육안으로도 적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말을 타고 오네?' 두두두두- '거기다 무장까지?' 놈들은 물론이거니와 타고 있는 말까지 갑옷을 걸치고 있었다. 가까이 오자 놈들의 이름이 보였다. 어쩐지 기존의 악마 몬스터들이 하급이건, 상급이건 전부 맨몸으로 다니던 것과는 너무 다르다 했더니, 이름에서부터 차이가 좀 있었다. '악마 귀족과 악마 기사 셋.' 처음 보는 이름이 검은색으로 선명했다. 그 넷에게서 강한 적의가 느껴졌다. '아무래도 병사들을 공격한 게 저놈들이 맞는 거 같은데?' 강한 기운에 강한 적의. 진우는 은신을 유지한 채로 잠시 상황을 관망하기로 했다. '어떻게 하는지 보자.' 새로이 등장한 몬스터들이니 만큼 실력이나 전투 방식 같은 것들을 눈으로 직접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림자 병사들을 압살하는 몬스터들이라...' 내심 기대도 되었다. 진우는 마수병 부대와 새로운 악마들의 싸움에 방해가 되지 않을 지점에 멈춰 섰다. 그륵? 탱크가 악마들을 발견했다. 악마들은 지척까지 다가와 말에서 내렸다. '말은 그냥 이동 수단일 뿐이네.' 진우는 흥미진진한 눈으로 악마들을 지켜보았다. 곧 적의 등장에 흥분한 마수병들이 괴성을 지르며 먼저 달려들었고, 두 집단 간의 격렬한 전투가 시작됐다. 그워어어어어! 탱크가 선두에 나섰다. 네 발로 전력을 다해 뛰쳐나간 탱크는 적들 앞에서 그 큰 몸뚱이를 일으켰다. 평범한 인간이라면 위압감만으로 실신할 것 같은 상황. 그러나 악마들은 침착했다. 탱크가 커다란 앞발을 야구 방망이처럼 있는 힘껏 휘두를 때까지 미동도 하지 않았다. 부웅! 탱크의 앞발이 허공을 그었다. 육중한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민첩한 공격이었다. 그런데. 탱크가 노렸었던 악마 귀족이 사뿐한 몸놀림으로 탱크의 앞발을 뛰어넘었다. '...!' 진우의 눈이 커졌다. 놀라운 광경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귀족은 공중에서 회전하며 쥐고 있던 창을 탱크의 가슴에 쑤셔 박았다. 쿠앙-! 마력이 담긴 일격은 탱크의 가슴에 수박만 한 구멍을 만들었다. 작은 체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폭발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게다가 깔끔하고 아름다운 동작. 진우는 흥미가 생겼다.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야.' 귀족뿐만 아니라 녀석을 지키는 기사들 셋도 눈에 띄게 강했다. 전투는 일방적이었다. 마수병들은 새로운 악마들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덩치만 크지 쉽게 사냥당하던 고위 악마들과 달리, 인간 형태의 귀족 악마들은 너무도 쉽게 마수병들을 유린했다. '이래서 병사들의 재생력이 버틸 수 없었던 거군.' 진우의 얼굴이 굳어 갔다. "그워어어!" "크아악!" 마수병들은 재생되기가 무섭게 악마들의 창과 검에 썰려 나갔다. 진우는 미간을 구겼다. 자신의 마나가 동나지 않는 한 마수병들이 불사의 몸인 것은 알고 있었다. 마나가 떨어진다고 해도 그림자가 되어 다시 돌아올 뿐이었다. "크악!" 그래도 내 병사들이 몬스터들에게 두들겨 맞는 장면을 보는 것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어디서 맞고 들어온 동생을 보는 형의 심정이라고 할까? '그만하면 됐다.' 보다 못한 진우가 마수병들을 불러들였다. 그림자로 돌아간 마수병들이 금방 진우의 발밑으로 이동해 그림자와 합쳐졌다. 공격을 견디지 못한 마수병들이 사라지자, 귀족 악마들은 서로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승리를 자축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그런데 그때. 스르륵. 그들 사이 한복판에서 진우가 은신을 풀었다. 흠칫! 악마들은 화들짝 놀랐으나, 실력자들답게 진우의 적의를 읽고서 즉시 공격해 들어왔다. 쾅! 쾅! 진우는 맨주먹으로 옆에 있던 기사 둘을 쳐 쓰러뜨리고, 달려오는 기사를 잡아 땅에 내리꽂았다. 콰직! 바닥에 거미줄 같은 줄이 생기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악마 기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3,000 을 획득합니다.] 같은 메시지가 세 번. 한 번의 공격에 한 마리씩, 1 초도 안 되는 시간에 몬스터 셋의 숨통을 끊었다. '어차피 얘들은 잔챙이고, 저쪽이 진짜지.' 진우의 시선이 악마 귀족을 향했다. 눈이 마주친 악마 귀족이 움찔하더니 창끝을 겨누었다. '전에 몬스터도 두려움을 느끼는지 궁금했었는데...' 지금 보니 확실히 알겠다. 악마 귀족의 창끝이 마수병 부대를 상대할 때와 달리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적의 기량을 파악할 수 있는 것도 실력의 일부니까. '그렇다고 봐줄 생각은 없지만.' 진우는 몸을 날렸다. 악마 귀족이 창을 내찌른 것도 동시였다. 진우가 고개만 슥 돌려 찌르기를 피해 냈다. 하지만 놀랍게도 공중에서 몇 번이나 방향을 선회하며 끈질기게 공격해 왔다. 처음은 미간, 다음은 목, 그 다음은 심장. 예사 실력이 아닌 듯 물 흐르듯 유려한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번번이 진우의 단검, '바루카의 단도'에 가로막혔다. 심장을 노린 마지막 공격이 허사로 돌아갔을 때, '바루카의 단도'가 창의 자루 부분을 스걱 잘라 냈다. '...!' 귀족은 반 토막 난 창을 보고 일순간 경직됐다. 그걸로 승부는 끝났다. 'A 급 헌터라면 서넛이 한꺼번에 덤벼도 감당이 안 될 적이지만...' 진우는 악마 귀족의 능력을 높게 평가했다. 단지 상대가 나빴을 뿐이다. 진우는 왼손으로 적의 투구를 움켜쥐었다. "큭!" 적은 놀라 당황한 나머지 황급히 목을 뒤로 빼내려고 했으나 진우의 악력에 꼼짝달싹할 수 없었다. 진우는 투구를 벗기고 목을 벨 생각으로 왼손에 힘을 주었다. 예상대로 투구는 쉽게 떨어져 나갔다. 훌렁. 진우는 '바루카의 단도'를 치켜들었다. "항복! 항복합니다!" 진우가 눈살을 찌푸리며 동작을 멈추었다. "여자?" 투구 속에서 드러난 얼굴은 완벽히 여성체였다. 사실 진우에게 몬스터가 남자인가, 여자인가 하는 점은 크게 상관이 없었다. 그런데 항복한다며 손을 번쩍 들었던 몬스터가 대화가 통한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바닥에 넙죽 엎드리며 머리를 조아린 순간. '...' 거기다 대놓고 단검을 내려찍기가 꺼림칙해졌다. "죄, 죄송합니다. 저희가 잘못했습니다. 모, 목숨만 살려 주세요!" 재빠른 태세전환도 모자라 이번엔 목숨 구걸까지? 몬스터가? "하...?" 진우는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발밑에 엎드린 몬스터의 작은 등을 한참이나 쳐다보았다. *** 지성 있는 마수가 존재하니 지성 있는 몬스터가 나오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얘는 분명히 이상한 놈이다. '...' 말문이 막혀서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잠시 고민하던 진우가 어렵게 입술을 뗐다. "내 병사들을 공격해 놓고 이제와서 물려 달라고?" "주,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악마 귀족은 이마를 바닥에 찧고서 말을 이었다. "하지만 이곳을 지켜야 하는 저희 가문의 입장에서 악마들을 마구잡이로 사냥하는 놈... 헉! 아니, 분들을 방관할 수가 없었습니다. 용서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 악마들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짜고짜 쳐들어와 악마들을 잡고 다닌 건 이쪽이니까. 그래서 진우는 질문을 바꿔 봤다. "네 병사를 죽인 나에게 목숨을 구걸해도 되는 거냐?" "기사들의 본분은 주군을 지키는 것. 저만 무사할 수 있다면 기사들도 기뻐할 겁니다." 진우는 관자놀이를 긁적거렸다. 대답이 참 어처구니가 없었다. '이거 뻔뻔한 건지. 아니면 심하게 낙천적인 건지.' 살짝 고개를 든 악마 귀족이 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헉!' 점점 상황이 자신에게 불리해지고 있다는 느낌이 왔다. 다시 머리를 조아린 그녀에게서 다급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목숨만 살려 주신다면 원하는 것은 뭐든지 드리겠습니다." 진우는 옆구리에 손을 얹었다. 악마 귀족은 강한 몬스터였지만, 무장이 완벽하게 해제된 지금 놈을 처치하는 건 식은 죽 먹기보다 쉬웠다. '이걸 어쩐다?' 진우는 고민했다. 살려줄까, 말까가 아니라 이 녀석을 잡고 얻을 경험치와 아이템보다 더 값진 것이 뭐가 있을까 하는 고민이었다. '아.' 딱 하나가 있었다. "층간 진입 허가서." "네?" 휙. 악마 귀족이 놀란 눈빛으로 고개를 들었다. 아까 입을 벌렸을 때 본 유난히 길고 뾰족한 송곳니 말고는 영락없는 인간 여자의 모습이었다. 진우는 무심히 물었다. "구할 수 있어?" "..." 진우와 눈이 마주치자 안색이 파래진 몬스터가 이마를 바닥에 붙였다. '하긴 몬스터가 아이템을 알 리가 없지.' 거래는 끝났다. 진우는 창고로 돌려보냈던 '바루카의 단도'를 불러냈다. 어째서 몬스터에게 지성이 있고, 그 지성으로 자비를 구하는 건지 모르겠지만 경험치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다. '악마 기사가 경험치 3 천을 줬으니 이 녀석은 그 이상이겠지?' 어쩌면 이 녀석을 잡았을 때 허가서가 떨어질지도 모르는 일이니까. 그런데. "드, 드릴게요." "뭐를?" "층... 층간 진입 허가서." 고개를 든 몬스터가 진우의 손에 들린 단검을 발견하고 식은땀을 흘렸다. "네가 허가서를 줄 수 있다고?" 악마 귀족이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저를 무사히 데려다주시면 허가서를 넘겨드리겠습니다." 악마들이 허가서를 지키고 있다? 진우가 턱 끝을 만지작거렸다. 확실히 80 층에 올라오고 나서 꽤 시간이 흘렀고, 잡은 악마들의 수도 적지 않은데 영 허가서 소식이 들리지 않았다. '처음엔 그냥 층이 높아지면서 드랍율이 떨어졌거나 중간 보스가 가지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진짜 이 녀석 말대로 몬스터들이 숨겨 두고 있는 거라면 충분히 말이 됐다. 진우가 말없이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제 발 저린 악마 귀족이 말을 덧붙였다. "위층의 허가서가 어디 있는지도 다 알고 있습니다. 저와 저희 가문의 안전을 보장해 주신다면 전부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진우의 눈빛이 약간 달라졌다. 그건 좀 솔깃했다. 최단 시간으로 최상층까지 올라가고 싶은 진우에게 허가서의 위치를 전부 안내하겠다는 제안은 꽤 매력적으로 들렸다. 한데. '문제는 이 녀석을 신뢰할 수 있느냐 하는 거지.' 진우는 손을 뻗어 악마 귀족의 턱을 들어 올렸다. 그녀가 당황하는 것이 느껴졌으나 손에 준 힘을 빼지는 않았다. 진우는 악마 귀족과 시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살기.' [스킬: '살기'를 사용합니다.] 화악진우의 눈에서 소름 끼치는 기운이 뻗어 나갔다. 악마 귀족은 겁에 질려 입술을 떨었다. "너를 믿어도 될까?" "거... 거짓말이 아닙니다." 처음 시스템의 힘을 얻었을 때 다짐한 게 있었다. 기브 앤 테이크. 상대가 몬스터라도 원칙은 변함없었다. 몬스터가 약속을 지킨다면, 자신 또한 약속을 지키리라. "좋아." 진우는 살기를 거뒀다. "허가서만 내 손에 넘겨준다면 조용히 떠나줄게." "저, 정말이십니까?"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 녀석을 포함해서 '층간 진입 허가서'를 지키고 있다는 몬스터들의 경험치가 아깝기는 하지만, 그것보다 허가서를 찾아 헤매는 시간이 더 아까웠다. 80 층에서 벌써 예상보다 많은 시간을 지체한 상태였다. 그리고 만약 이 녀석이 허튼수작을 부린다면 그거야말로 바라던 바였다. 이 녀석들의 본진에서 마음껏 날뛸 수 있게 되는 거니까. "감사합니다!" 악마 귀족의 얼굴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환해졌다. 감정에 솔직한 건지, 아니면 그냥 단순한 건지. 진우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차면서도, 그동안 늘 궁금해하던 것을 물었다. "그 전에 먼저... 너흰 대체 뭐냐?" = 102 화 "저는 라디르 가문의 장녀 에실이고, 저희 가문은." "그거 말고." 진우는 에실의 말을 끊었다. 알고 싶은 것은 몬스터의 세부 설정 따위가 아니라, 어째서 몬스터와 인던이 존재하느냐 하는 점이었다. 몬스터의 입에서 답이 나오게 하려면 어떻게 물어야 할까? 아니, 답이 아니라도 좋다. 아무거나 단서라도 하나 얻을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마수에게도 같은 시도를 해 봤었지만, 알게 된 사실은 놈들의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인간을 죽이라'는 명령이 들린다는 것뿐이었다. '그럼 이 녀석들에게도 명령 같은 게 내려오고 있을까?' 진우는 마수들과 비교할 수 있도록 질문을 조금 단순화시켜 봤다. "너희들 머릿속에서도 계속 인간을 죽이라는 목소리가 들려?" "예?" 에실이 고개를 들고 빤히 쳐다봤다. 아직 엎드려 있는 자세의 그녀와 시선을 맞추려면 계속 아래쪽을 내려다보는 수밖에 없는데, 이게 은근히 불편했다. '쯧.' 진우는 혀를 가볍게 차고는 에실을 아이 다루듯 달랑 들어서 일으켰다. 그러고는 다시 그녀와 시선을 마주했다. 예고 없는 접촉이 무서웠던 것인지, 그녀의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청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진우는 다시금 질문했다. "머릿속에 누군가가 계속 인간을 죽이라고 속샥이느냔 말이야." "아..." 고민하던 에실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아니요. 하지만 다른 목소리라면 계속해서 들려옵니다." "어떤?" "머물고 있는 공간을 지키라고...요." 에실은 진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몬스터는 존재의 목적이 마수들과 다르다.' 사람을 죽이는 것이 목적인 마수와 인던을 지키는 것이 목적인 몬스터. 둘은 방향성이 달랐다. '가만...' 그러고 보면 몬스터들에게는 내가 마수 같은 존재인 건가? 살기 스킬을 정면에서 마주한 뒤로 안색이 창백해진 에실을 보고 있으니 조금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주 조금. "목소리는 언제부터 들려왔는데?" "저희가 여기서 눈을 뜨고 나서부터입니다." '여기서 눈을 떴다?' 그렇다면 이 녀석들은 다른 장소에서 살고 있었다는 이야기인가? 그게 진짜 기억이든, 가짜 기억이든 이 녀석들의 머릿속에는 그렇게 각인되어 있다는 거겠지. 어쩌면 시스템의 본질에 다가갈 수 있는 실마리가 될지도 모른다. 진우는 질문을 이었다. "그럼 여기서 눈을 뜨기 전에는 어디에 있었어?" "악마계예요.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곳이었습니다." "악마계에선 뭘 하고 있었는데?" "전쟁을... 준비하고 있었습니다." "전쟁?" "네." 당시의 기억을 떠올린 걸까? 에실의 얼굴에는 방금 목숨을 구걸할 때와는 사뭇 다른 비장감이 맴돌았다. "악마계에 흩어져 있는 악마들이 전부 모여야 할 정도로 끔찍하게 강한 적과의 전쟁을 앞둔 상황이었는데." 거기서 에실의 말은 끊겼다. "..."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에실은 계속 말을 하고 있었다. 입술이 달싹거리는 게 보였다. 그러나 그녀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대신 시스템이 내뱉는 기계적인 음성이 들려왔다. [허용된 정보 기준치를 넘어섰으므로 대화를 차단합니다.] [허용된 정보 기준치를 넘어섰으므로 대화를 차단합니다.] [허용된 정보 기준치를...] 에실의 대답이 끝날 때까지 같은 메시지가 반복됐다. 진우의 눈빛이 번뜩였다. '차라리 그냥 놔뒀으면 눈치채지 못했겠지만.' 에실의 설명을 시스템이 몬스터에게 부여한 설정 정도로 치부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른다. 레벨업, 인던, 퀘스트, 임무의 보상과 패널티에 전직 과정까지. 줄곧 게임과 비슷한 상황이 이어졌으니까 몬스터에게 게임 같은 설정이 추가된다 해도 이상할 건 없었다. 그러나 시스템에 의해 강제적인 힘이 동원된 순간, 진우는 확신했다. '이 녀석과의 대화가 단서가 될 수 있다는 거지.' 명백한 시스템의 실수였다. "제...제가 무슨 실수로 했나요?" 진우의 표정이 심각해지자 에실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시스템이 숨기고 싶은 것은 악마들이 싸운 대상일까, 아니면 싸움의 이유나 결과일까?' 진우는 그걸 알아내기 위해 질문의 범위를 좁혔다. "그 끔찍하게 강한 적들은 정체가 뭐였지?" 그런데 그 순간. 에실은 배터리가 나간 장난감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아..." 얼어붙어 있던 그녀가 이내 의식을 잃고서 힘없이 쓰러졌다. 진우는 그녀를 잽싸게 낚아채서 바닥에 눕혔다. 호흡이 일정한 걸 보니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 하나 얼굴을 찡그리는 걸 보니 어딘가 답답해 보였다. 숨 쉬는 데 좀 힘들어 하는 것도 같았다. 진우는 에실이 편히 쉴 수 있도록 맨손으로 그녀의 갑옷을 뜯어냈다. 우드득. 갑옷은 쉽게 벗겨졌다. 그러고는 갑옷 뒤에 달린 망토를 잘라 내 돌돌 말아서 베개 대용으로 괴어 주었다. 몬스터를 위한 것치곤 번거로운 작업이었지만, 과한 친절은 아니었다. 이 녀석이 이 지경이 된 덕분에 어느 정도 힌트를 얻게 됐으니까. '악마들이 싸운 적...' 시스템은 적들의 정체에 과민하게 반응했다. '혹시 그들에게 뭔가가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이 초월적인 힘을 가지고 있고, 어떠한 이유로 지구나 나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라면... 진우는 상점을 불러냈다. 포션을 사용해 에실을 깨우려고 해 봤지만 별다른 차도가 없었다. '기다리는 수밖에 없나?' 털썩. 진우가 에실 옆에 앉았다. 그리고 그녀가 눈을 뜰 때까지, 그녀에게서 입수한 단서의 조각들을 하나하나 차분히 머릿속에 정리했다. *** "어?" 에실이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기척을 느끼고 옆을 돌아본 그녀가 말없이 앉아 있는 진우를 발견하고는 움찔 어깨를 떨었다. '꿈이 아니었구나.' 서서히 현실을 인지하기 시작한 에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곳곳에 고위 악마들의 사체가 가득했다. 에실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지성이 없는 악마들은 지성이 있는 악마들을 동족으로 여기지 않는다. 의식이 없는 자신은 좋은 먹잇감에 불과했을 터다. 그런데. 자신이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은... "저를 지켜 주신 겁니까?" 진우는 대답 대신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에실에게 손을 뻗었다. 에실은 되게 감동한 것 같은 얼굴로 진우의 손을 잡고 조심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감사합니다." "허가서가 있는 곳까지는 얼마나 걸리지?" "여기서 금방이에요. 안내하겠습니다." 에실은 양쪽 손목을 붙인 채로 진우에게 내밀었다. "...?" "...?" 진우와 에실 둘 다 서로에게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답답해진 에실이 먼저 말했다. "저는 포로니까 손을 묶고 이동하셔야." "됐어." 포박 같은 거 없이도 저항이나 도주쯤은 충분히 차단할 자신이 있었다. 쓸데없는 짓을 하기엔 시간이 너무 지체됐다. 진우는 에실을 돌려세우고 등을 툭 떠밀었다. 아직도 겁먹고 있는 것인지, 에실의 심박이 조금 빨라진 것이 느껴졌으나 진우는 내색하지 않았다. 진우의 시선이 몬스터들이 타고 왔던 말로 향했다. "말은?" "제가 데려가겠습니다." 에실은 상기된 얼굴로 말 세 마리의 고삐를 쥐고 앞장섰다. 진우는 조용히 그 뒤를 따랐다. *** 에실의 말대로 얼마 가지 않아 허가서가 있을 만한 장소가 나왔다. 거대한 성채였다. '악마성 안에 또 악마성이라...' 악마성 던전이 이름만 성이지 탑의 모습을 하고 있다면, 눈앞의 성채는 정말로 중세의 고성을 본 떠만든 듯했다. 성문을 지키고 병사들이 진우를 보고 일순간 긴장했다. 그러나. "손님." 에실이 무심하게 말하며 턱짓하자 병사들이 금방 성문을 열어주었다. 곧 성 안쪽에서 기사들 한 무리가 떼 지어 나왔다. "에실 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버지는?" "알현실에 계십니다." "알겠어." 기사가 진우를 힐끔 보고는 물었다. "에실 님... 뒤의 사내는?" "중요한 손님이시니 예의를 갖추도록." 에실의 근엄한 한마디에 기사들이 길을 터주며 고개를 숙였다. 진우는 에실을 따라 성의 가장 깊은 곳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한참 걸어간 끝에 던전의 보스방 같이 넓은 방 하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여기가 알현실인가?' 진우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측면에 듬성듬성 천정을 향해 뻗어 있는 기둥들을 빼면 휑하니 비어 있는 공간. 마치 싸우라고 만들어 둔 곳 같았다. '만약 싸우면서 왔었다면 여기에서 보스전이 시작됐겠구나.' 그렇다는 말은 저기 알현실 끄트머리 단상 위의 커다란 의자에 앉아 있는 악마 귀족이 이 건물의 보스라는 이야긴데. 에실과 진우가 보스 앞에 멈춰 섰다. 보스가 먼저 말했다. "에실." "아버지 이쪽은..." 에실이 설명을 하기도 전에 진우와 시선이 마주친 보스가 눈을 크게 떴다. 보스의 동공이 떨렸다. "너, 너! 대체 누굴 데려온 게냐?" "아버지. 이분은 손님으로." 에실의 필사적인 설명에도 보스의 흥분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손님? 도대체 어떤 손님이 주인의 집에 군대를 이끌고 들이닥친다고 하더냐?" "네?" 에실이 진우를 돌아보았다. 여기 어디에 군대가 있다는 말일까? 보스는 진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떨리는 목소리를 냈다. "에실, 네 눈에는 보이지 않느냐? 저 남자의 어둠 속에 숨어 있는 무수한 병사들이." 진우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에실은 달라진 분위기에 화들짝 놀라며 한 걸음 물러섰다. 진우는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기감이 좋은 녀석인가?' 아마도 보스는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병사들을 볼 수 있는 모양이었다.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불행이라고 해야 할지.' 행여나 전투가 벌어질 것을 대비해 각지에 흩어져 있던 그림자 병사들을 전원 그림자 속으로 불러들인 상태였다. "감히 내 집에 병사들을 몰고 와?" 보스의 높아진 언성을 듣고 기사들이 우르르 안으로 몰려왔다. "아버지!" 에실이 큰 목소리로 보스를 불렀다. 보스는 어느새 자리에서 일어나 노기 띤 시선을 보내왔다. 묵묵히 상황을 지켜보기만 하던 진우가 뒤늦게 입을 열었다. "약속했다." 진우에게서 전혀 긴장하는 낯빛을 찾아볼 수 없자 보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얼 약속했단 말이냐?" "진입 허가서." 진우는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진입 허가서만 넘겨주면 조용히 떠나 주겠다고." 보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악마들을 무서운 속도로 잡으며 올라오고 있다는 남자가 저 자인가?' 믿었던 볼칸과 메투스마저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을 땐 눈앞이 캄캄했다. 비록 귀족 가문이라고 해도 라디르 가는 악마 서열 20 위에 불과한 최약체 중 하나. 볼칸과 메투스를 어렵지 않게 제압한 적이 상대라면 적지 않은 피해를 각오해야 했다. 그런데 그 무시무시한 적이 제 발로 떠나 주겠단다. '이걸 믿어도 될지...' 보스는 반신반의하며 물었다. "요구 조건은 그것뿐이냐?" 진우는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그리고." 그럼 그렇지. 예상했던 수순에 보스의 미간이 구겨졌다. 강자의 요구는 끝이 없는 법. 또 얼마나 무리한 요구를 들먹이며 가문을 모욕하고 병사들을 도발해 올지 듣기도 전에 벌써 가슴이 답답해졌다. 아니나 다를까. 남자는 딸 아이의 어깨를 짚으며 말했다. "이 녀석을 좀 빌리고 싶은데." "뭐?" 보스와 기사들이 일제히 경악성을 터트렸다. 진우의 시선이 주위를 훑었다. '음?' 에실은 상층의 허가서가 어디 있는지 다 알고 있다고 했다. 허가서의 위치를 안내받으려면 그녀가 필요하니까 잠시 빌려 가겠다고 한 것뿐인데... '내가 뭘 잘못 말했나?' 진우는 부들부들 떨고 있는 보스와, 경악한 표정의 기사들, 그리고 얼굴을 붉게 물들인 에실을 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 103 화 "길 안내?" 에실의 설명과 진우의 동의로 보스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그가 다시 의자에 앉았다. '허가서와 길 안내. 겨우 그 정도로 괜찮단 말인가?' 이곳에 갇히게 된 이후로 끊임없이 이 일대를 보호하라는 명령이 들려왔다. 명령에 강제성은 없었다. 하지만 배가 고프면 먹어야 하고, 졸리면 눈을 붙여야 하듯 당연한 본능처럼 따라야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검은 병사들이 쳐들어와 악마들을 사냥하고 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땐 올 것이 왔구나, 하고 가슴이 철렁했다. 고민하던 보스는 토벌을 명령했고, 검은 병사로 이루어진 부대들은 의외로 쉽게 소탕할 수 있었다. 하지만 정찰병의 보고에 의하면 앞서 제거에 성공했던 검은 병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적들이 있다고 했다. 불을 뿜는 괴물과 덩치 큰 기사, 기다란 깃이 달린 투구를 쓴 기사가 이끄는 부대는 라디르 가의 총 전력으로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다고. 그래서 그들의 소탕을 위해 라디르 가문의 전군이 출전을 앞두고 있었던 상태였다. 그런데 그 보고에는 눈앞의 사내에 대한 이야기가 빠져 있었다. 한마디로 적들의 주 병력은 따로 있다는 말이었다. '이런 괴물 같은 인간이 검은 병사들의 주인인 줄 알았다면 싸움은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보스의 눈에는 보였다. 갑자기 자취를 감춰서 좋아했던 검은 병사들이 다름 아닌 이곳, 자신의 눈앞에 모여 있었다. 남자의 어둠 속에 숨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그림자 속, 무수한 병사들의 살기 어린 시선에 소름이 돋았다. '한낱 인간과 타협하는 것은 자존심 상하는 일이지만...' 지켜야 할 목록에는 물론 '진입 허가서'라는 이름을 가진 두루마리까지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그 두루마리 하나를 지키기 위해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도 크지 않은가? 아니, 전군을 희생한다고 해도 이 남자의 병사들을 이길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이 남자. '...자기 실력을 숨기고 있다.' 무엇을 노리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고요한 수면 위 빙산의 일각처럼 자신을 철저히 숨기고 있었다. 전력을 파악할 수 없는 적과 대치하는 것은 실로 두려운 일이었다. 보스가 긴장한 낯빛으로 말했다. "정말로... 그 정도면 되겠는가?" 허가서 하나를 내주고 전부를 지킬 수 있다면 못 내줄 이유도 없었다. 이 일대의 보다 많은 것을 지키기 위함이니 명령에 위배되지도 않는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딸에게 위해를 가하지는 않겠지?" 흘깃. 에실의 시선이 느껴졌다. '딸을 걱정하는 몬스터라...' 진우는 신기해하면서도 다시금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고민하던 보스가 이내 미소를 지었다. "그럼 그렇게 합시다." 일단 넘겨주기로 마음먹으니 앓던 이가 쏙 빠지는 기분이었다. 그깟 종이쪼가리 하나로 예고된 재앙을 막을 수 있다면 그것이 경사가 아니고 무엇일까? "아니, 그렇게 해 주시면 고맙겠소." 보스의 해맑은 미소에, 다른 쪽 방향의 전개도 생각하고 있던 진우가 몸에서 힘을 빼며 피식 웃었다. '에실은 자기 아빠 성격을 쏙 빼닮은 거였군.' 이것도 시스템의 설정일까, 아니면 그녀의 말대로 진짜... 상념을 떨쳐 낸 진우가 대답을 기다리고 있는 보스에게 확답을 주었다. "약속은 지킨다." "좋소." 보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병사가 커다란 두루마리 하나를 가져와 진우 앞에 바쳤다. 진우는 두루마리를 펴 보았다. '진짜 진입 허가서네.' 내용을 확인하는 진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아이템: 진입 허가서] 입수 난이도: ?? 종류: ?? 악마성 81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허가서입니다. 층간 이동 마법진의 80 층에서만 사용 가능합니다. 대화만으로 몬스터들에게서 아이템을 얻어 낼 수 있을까 의심스러웠는데, 허가서가 맞았다. 아래층 허가서와의 차이점이라면 허가서 끝에 라디르 가문의 문장이 붉은색으로 찍혀 있다는 것. '이 위층부터는 각 가문에서 허가서를 뺏어야 하는 구조인가?' 진우의 입꼬리가 올라갔다. 몬스터를 잡으며 언제 나올지 모르는 허가서를 마냥 기다리고 있는 것보다 이쪽이 훨씬 더 마음에 들었다. 진우는 허가서를 돌돌 말아 창고에 넣었다. "바로 출발할 수 있지?" 에실을 독촉하며 입구 쪽으로 돌아섰는데,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입구를 막아섰다. '...?' 진우가 의아스런 눈길로 돌아봤더니, 에실은 싱글싱글 웃기만 했다. 이건 또 무슨 상황일까?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온 보스가 진우 앞에 멈춰 섰다. "라디르 가를 방문한 손님을 이렇게 돌려보내는 법은 없네." 보스의 큰 덩치에 자칫 고압적으로 느껴질 수 있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 나타난 친근한 아저씨 같은 미소를 보면 겁을 주려는 의도는 아닌 듯했다. 보스는 간곡히 부탁하는 어조로 말했다. "협상이 잘 마무리된 기념으로 식사나 들고 가지 않겠나? 딸애도 먼 길을 떠나려면 준비가 필요할 것 같으니." 진우의 시선이 에실에게로 향했다. 에실은 진우의 눈치를 살피면서 내심 그래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녀는 약속을 지켰다. 그렇다면 이쪽도 신사적으로 나가는 게 좋지 않을까? 어차피 밥은 먹어야 하는 데다, 슬슬 시스템 상점에서 파는 빵과 고기가 질려 가던 참이었다. "...그러지." 진우가 고민 끝에 수락하자 보스가 웃음을 터트렸다. "고맙네!" 에실과 기사들의 얼굴도 환해졌다. 곧 보스가 부하들을 향해 소리쳤다. "뭐 하고 있나? 어서 식사를 준비하지 않고!" *** 80 층에서 지체했던 시간이 길었던 만큼, 다른 층에서 시간을 허비할 생각은 없었다. 다만 안내자로 나선 에실이 이동 마법진을 이용할 수 있을까가 걱정이었는데, 그 문제는 의외로 쉽게 해결되었다. [악마 귀족이 동행을 신청했습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수락하면 동행은 이동 마법진을 이용할 수 있으며, 기여도에 따라 경험치를 나누는 것이 가능합니다.] '경험치를 동행과 나눠 가진다고?' 경험치를 나눈다는 표현이 살짝 거슬렸으나, 자세히 살펴보니 기여도에 따른다는 설명이 있었다. 즉, 동행에게 싸울 기회를 주지 않으면 경험치를 나누지 않아도 된다는 소리나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진우는 에실에게 단단히 못박아 두었다. "혹시 전투가 일어나더라도 넌 절대 끼어들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테니." "...네." 에실은 수줍은 듯 대답했다. '...?' 어쨌든 동행을 수락한 진우는 걸음을 서둘렀다. 에실은 진우의 몇 걸음 뒤에서 자기 덩치의 몇 배나 되는 짐 보따리를 들고 간신히 쫓아 왔다. 짐이 무겁지는 않았지만, 휙휙 나아가는 진우의 걸음을 따라잡기가 여간 힘들지 않았다. 진우는 간간이 멈춰 서서 그녀가 따라올 수 있도록 기다려 주었다. "저기 보이네요." 81 층의 지도를 살펴보던 에실이 멀리 윤곽이 보이기 시작한 성을 가리켰다. 진작 알고 있던 진우도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만요." 에실은 커다란 짐을 바닥에 내려놓고는, 안을 뒤적거렸다. 곧 그녀의 손에 사기로 된 술병 하나가 올라왔다. 진우가 물었다. "그건 왜?" "가르쉬 가문의 가주가 좋아하는 술입니다. 이걸 들고 가시면 협상에 유리..." "협상?" 진우가 씩 웃고는 그림자 병사들을 불러냈다. '나와라.' 진우의 부름을 받은 병사들이 일제히 모습을 드러냈다. 스르르- '이럴 수가...' 에실은 눈을 의심했다. 상급 귀족과 맞먹는 검은 병사가 셋이나 있었다. 병사들을 불러낸 장본인의 손에도 어느새 단검 두 자루가 들렸다. 옆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피부가 베일 듯한 예리한 기세에, 에실은 눈앞의 남자가 방금 전까지 자신과 대화하던 그 사람이 맞는지 눈을 의심했다. "혀, 협상하러 가시는 거 아닌가요?" 진우는 대답 대신 되물었다. "혹시 너희, 가르쉬 가문과 친해?" "아, 아니요. 귀족들끼리는 악마계에서도 항상 서열 다툼을 해 오던 터라... 그래도 말은 통하는 상대에요." 그 말에 진우는 씩 웃었다. "그럼 됐네." 예외는 한 번이면 족하지. 허가서를 얻는 것 이상으로 레벨을 올리는 일도 중요했다.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진우는 그렇게 대답하곤 병사들을 이끌고서 성채로 향했다. "자, 잠시만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에실이 뒤늦게 진우가 사라진 방향을 향했다. "헉!" 그 짧은 시간에 벌써 가르쉬 가문의 성이 불타올랐다. 쿠우우우우거인처럼 까마득한 괴물이 불을 뿜자 성문과 성벽이 속절없이 녹아내리고, 놀라 뛰쳐나온 가르쉬 기사들은 검은 병사들의 손에 차례대로 썰려 나갔다. "맙소사..." 에실이 신음인지 침음인지 모를 소리를 흘렸다. "크아아아악!" "으아아-!" 라디르 성보다 몇 배는 더 견고해 보이는 가르쉬 성이 무력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에실은 침을 꼴깍 삼켰다. '아버지께서 순순히 허가서를 내주지 않았다면...' 지금 보는 가르쉬 성의 모습이 라디르 성의 모습이었을 수도 있었다. 생각만 해도 아찔해졌다. 동시에 이야기가 잘 풀려서 천만다행이란 생각도 들었다. 쿠궁! 성벽 너머에 있던 탑 하나가 또 굉음을 내며 무너졌다. '저런 괴물들과 어떻게 싸우라고...' 에실은 턱밑을 흐르는 땀을 손등으로 훔치며, 자신의 가문이 재앙을 피해 가게 된 것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일본 헌터협회의 임원들과 일본정부의 고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무거운 공기가 회의장에 착 가라앉아 있는 가운데, 협회장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요즘 한국은 열 번째 S 급의 등장으로 떠들썩한 분위기더군요." 고관들이 피식 웃었다. 일본에선 S 급 헌터의 숫자가 벌써 스물을 넘었다. 고작 열 번째 S 급에 기뻐하는 수준이라니. 아니, 사고와 이민으로 잃은 두 사람을 제외하면 S 급 헌터가 겨우 여덟이 전부인 나라인 당연하다면 당연하다고 할까? 어쨌든 오늘 회의는 한국을 조롱하기 위한 자리가 아니었다. 그랬다면 분위기가 이렇게 무거울 이유도 없었다. 찌푸린 얼굴로 앉아 있던 방위대신이 입을 열었다. "그게 오늘 회의와 무슨 상관입니까?" 방위대신의 불편한 심기가 목소리에 섞여 나왔다. 현재 한국의 남쪽 땅 제주도는 던전 클리어에 실패해 마수들에게 점령당한 상태였다. 그것도 보통 마수가 아니라 엄청난 집단생활과 엄청난 번식을 자랑하는 개미형 마수에게. 그뿐이라면 한국 정부를 비웃으며 좋아할 일본 정부지만, 문제는 그 피해가 일본 본토까지 오고 있다는 점이었다. 어제도 제주도에서 날아온 것으로 추정되는 개미 한 마리에 작은 마을 하나가 지도에서 사라졌다. 더 이상 피해를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시급한 문제는 대책을 촉구하고 있는 내각총리대신의 성화를 한시라도 빨리 진정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렇듯 여러 사람의 목이 달려 있는 중요한 자리에서 시시껄렁한 잡담이라니. 자연스레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그러나 협회장이 말을 이었다. "사람은 들떠 있을 때 가장 실수하기 쉽지요." 협회장의 하얗게 센 머리와 얼굴 가득한 주름이 그의 연륜을 짐작게 했다. "저는 지금이 적기라도 생각되는군요." 의미심장한 발언에 다소 산만했던 회의장 내부의 이목이 쏠렸다. 방위대신은 언성을 높였던 방금 전과 달리 긴장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좋은 방법이라도 있는 겁니까?" "좋다는 표현보다는 온당하다는 표현이 더 어울리겠지요." 방위대신을 포함한 모든 고관과 협회 관계자들이 협회장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협회장은 이 순간을 위해 일부러 뜸을 들였다는 듯 뒤늦게 입을 열었다. "땅을 지킬 힘도 없는 이들이 그 땅을 자기 것으로 주장한다고 해서, 그들을 주인으로 인정할 수가 있겠습니까?" "..." 좌중에 침묵이 흘렀다. 협회장은 대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일까? 한국과 일본의 관계를 생각했을 때, 세간에 알려지면 한 노인의 망언 정도로 그칠 발언이 아니었다. 더군다나 그는 현재 일본의 헌터 협회를 이끌고 있는 몸 아닌가. "...그래서 하시고 싶은 말씀이?" 국무대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협회장은 좌중을 둘러보며 자신만만하게 선언했다. "우리가 제주도의 마수들을 제거할 겁니다." 술렁술렁. "그리고." 일순간 소란스러워졌던 내부가 협회장의 목소리에 다시 잠잠해졌다. 협회장은 말을 이었다. "제주도를 가져올 겁니다." = 104 화 제주도를 가져온다? 일본 헌터협회의 관계자들은 협회장으로부터 사전에 언질이 있었던 것인지 대체로 침착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일본 정부 고관들은 그러지 못했다. "그게 대체 무슨 소립니까?" "지금 한국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벌이겠다는 거요?" "전쟁만 60 년 이상을 준비해 온 나라입니다." "말씀이 되는 소리를 하셔야지!" 고관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지금 개미 마물 사건으로 발등에 떨어진 불이 발목까지 옮겨붙은 상황이다. 빨리 총리와 언론에 명쾌한 답변을 내놓지 못하면 앞으로 몇 사람의 목이 날아갈지 모른다. 그래서 해결책을 제시해 달라고 헌터협회 회장을 불러 왔더니, 뭐? 제주도가 어쩌고저째? 바쁜 사람들 앞에서 그따위 허무맹랑한 소리나 지껄이고 있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을 수 있을까. 마쓰모토 시게오 협회장의 양옆을 지키고 있을 헌터들만 아니었다면, 진즉에 욕을 한 바가지 쏟아 냈을 터였다. '어떻게 이렇게 한 치도 예상을 빗나가지가 않는가.' 마쓰모토는 자신을 향한 거센 비판들 속에서도 미소를 보였다. 그들의 반응조차 전부 그의 계산 안이었다. '쯧쯧.' 속으로 가볍게 혀를 찬 마쓰모토가 한동안 다물고 있던 입을 다시 열었다. "저는 한국과 전쟁을 하겠다는 게 아닙니다. 강제로 땅을 빼앗아 오자는 이야기도 아닙니다." "뭐요?" "그럼 대체 뭘 어떻게 하겠다는 겁니까?" "속 시원히 말 좀 해 보십시오." 마쓰모토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한국이 스스로 땅을 바치게 만들어야지요." 달아올랐던 회의장의 열기가 마쓰모토의 냉소적인 태도에 차갑게 식어 갔다. 발언의 강도나 본인의 태도를 봤을 때 아무래도 마쓰모토 협회장은 진심인 것 같았다. '...' 냉철하기로 소문난 부총리가 오늘 처음으로 말문을 뗐다. "마쓰모토 협회장님." 그는 현 총리의 최측근이자 대변인. 총리를 대신해 참석한 이번 회의에서 그의 발언은 총리에 준하는 힘을 가지고 있었다. "방금 하신 말씀... 어떻게 하면 그리되겠습니까?" 명실상부 일본 내각의 이인자라 할 수 있는 그가 마쓰모토 협회장의 계획에 관심을 보였다. 귀를 기울여 주는 사람이 생겨서일까? 마쓰모토는 진중하게 설명을 시작했다. "한국은 S 급 게이트를 처리할 힘이 없습니다. 4 년 전 처음 개미들이 튀어나왔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여전히 그렇겠지요." 부총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제주도는 한국 전체 면적의 2 퍼센트나 달하는 큰 섬이다. 그만한 땅을 마수들에게 빼앗기고도 손을 쓰지 못하고 있는데, 더 이상 설명이 필요할까? 세 번의 토벌 실패 끝에 한국은 비공식적으로 제주도를 포기했다. 이것이 정설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 일본의 S 급 헌터들이 개미 토벌을 돕겠다고 제안하면 그들이 어떻게 하겠습니까?" 일부 변종 개미들이 날아다닐 수 있게 됐다는 소식이 한국에도 전해졌다. 한국 본토가 공격받게 되는 일도 이제 시간문제. 한국의 결정권자들이 미친 것이 아니고서야 도움을 마다할 리가 있나. 하지만. "우리가 돕는다고 한국이 제주도를 바칠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부총리의 말처럼 협회장의 논리에는 비약이 많았다. 여기저기서 관료들이 피식거렸다. 하지만 부총리는 비웃지도, 화내지도 않고 차분히 말을 이었다. "협회장님 말씀대로 우리가 한국을 도우면 제주도 개미들을 처리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한일 양국의 헌터 전력을 가장 잘 알고 있을 마쓰모토 협회장이 개미 퇴치를 자신했다. 거기에 이견은 없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 우리가 얻을 수 있는 게 뭡니까?" 일본 국민들에게 피해가 생겼다고는 해도, 제주도 개미들은 한국이 처리해야 할 문제. 한국을 도와주기 위해 자국 헌터들을 희생할 수는 없었다. '어림도 없는 소리지.' 잇속에 밝은 부총리는 속으로 콧방귀를 뀌었다. 하나를 내주면 하나를 얻는다. 정치의 기본 중 기본. 자국의 헌터들을 내어 준다면 그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얻어 내야 한다. '적어도 제주도 정도는 받아 내야 수지가 맞지 않겠나.' 그 부분에서 협회장과 생각이 일치했기 때문에 관심을 보였던 것이었다. 그런데 돌아오는 대답은 뜬구름 잡는 소리. 당연히 부총리의 관심은 누구보다 빠르게 식어 갔다. 그때 협회장이 웃었다. "누가 한국을 돕는다고 했습니까?" 부총리가 눈살을 찌푸렸다. '지금 나와 말장난하자는 건가?' 시간 낭비는 그만하자고 점잖게 협회장을 타이르려는 찰나. '잠깐...' 부총리의 눈이 커졌다. 협회장은 도움의 손길을 제안한다고 했지 돕는다고는 하지 않았다. "당신, 설마..." "생각하시는 대로입니다." 협회장은 순순히 인정했다. 경악에 가득 찬 부총리의 표정을 발견한 순간, 협회장은 그가 자신과 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을 직감할 수 있었다. "한국의 헌터들을... 개미굴에 집어넣을 작정이오?" 역시나. '똑똑한 양반이라는 말이 많이 들려오는 이유가 있었군.' 협회장은 말귀가 밝은 부총리에게 만족스런 미소를 보냈다. "한국의 최상급 헌터들이 우리의 지원을 믿고 여왕을 잡으러 들어가면 우리는 헌터들을 철수시킬 겁니다." 이미 한국은 세 번의 실패를 겪었다. 그것이 네 번째가 된다고 해도 누가 일본 헌터들의 배신을 의심할까? 아니, 의심해도 상관없다. 그때는 이미 모든 것이 끝나고 난 뒤일 테니까. 부총리의 목소리가 떨렸다. "한국의... 한국의 최상급 헌터들을 전멸시킬 작정입니까?" "제주도에 그들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게이트가 열렸을 때, 그들의 운명은 그렇게 정해진 것입니다." 협회장은 다시 한 번 자신의 운명론을 강조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구차한 목숨을 연명해 왔던 거지요." "그런..." "그렇게 최상급 헌터들이 전부 사라지고 나면 더 이상 한국은 여유를 부리지 못할 겁니다." S 급이 전멸한 한국에 비행 가능한 변종 개미들이 하나둘 날아들기 시작한다면? 그때도 지금처럼 한국이 모르쇠로 일관할 수 있을까. 개미가 한두 마리라면 길드들이 어찌어찌 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통계가 보여 주듯 시간이 지날수록 변종 개미들의 수는 시간이 지날수록 변종 개미들의 수는 점점 가파르게 늘어날 테고, 결국은 한국 전체가 흔들릴 수밖에 없다. '아마 울며불며 타국의 헌터들에게 도움을 요청해야 하겠지.' 그런데 누가 한국을 도와줄까? 헌터들은 많지만 그만큼 지켜야 할 땅덩이도 어마어마한 중국이나 러시아? 처음 S 급 게이트가 열렸을 때도 도움을 거절한 미국? S 급 헌터들을 이끌고 와 서울을 점령해 버릴지도 모르는 북한? '아니, 우리 일본뿐이지.' 변종 개미가 많아지면 곤란해지는 것은 일본도 마찬가지니까. 어쩔 수 없이 한국은 일본에 매달려야 하고, 일본은 한국에 무엇이든 요구할 수가 있다. '그때가 되면 정말로 한국이 알아서 제주도를 바치겠다고 할지도...' 과연 협회장의 말 그대로였다. 순간 소름이 돋았다. 자신의 계획을 실행시키기 위해 일국의 최상급 헌터들을 모두 죽음으로 몰아넣겠다니. 자칫하면 그로 인해 한 나라가 무너질지도 모르는 일 아닌가? '정말로 무서운 인간이다. 마쓰모토 시게오 협회장.' 부총리는 협회장의 끔찍한 계획에 몸서리쳤다. 하지만 그게 끝이 아니었다. 협회장은 말을 이었다. "제주도는 시작일 뿐입니다." 하나씩 하나씩. 한국이 S 급 헌터들의 힘을 필요로 할 때마다 한국은 일본의 밑으로 기어들어 와야 하리라. 총알 한 발 쏘지 않고 한국을 집어삼키는 일이 실현 가능했다. "...라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만." 협회장의 긴 설명이 끝나고 나서야 각료들은 참고 있던 숨을 간신히 내쉴 수 있었다. 그를 반쯤 미치광이 취급했던 이들이 이제는 식은땀을 흘려 가며 경청하고 있었다. 협회장은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부총리 각하." 모두의 시선이 협회장에게서 부총리로 향했다. "..." 부총리는 침을 꼴깍 삼켰다. 현재 자신의 발언은 총리의 의사를 대변한다. 물론 자신을 신임하고 있는 총리 또한 이 자리에서 내려진 결론을 번복하지 않을 터였다. 신중히, 또 신중히. '...' 부총리는 거듭 고민한 끝에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정부가 어떻게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 [악마 기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3,000 을 획득했습니다.] [악마 기사를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3,000 을 획득했습니다.] [악마 귀족을 처치했습니다.] [경험치 4,500 을 획득했습니다.] 그림자 병사들이 성안의 악마들을 처치할 때마다 경험치 획득 메시지가 쉴 틈 없이 쏟아졌다. 진우는 최상층에서의 결전에 대비해 착실히 레벨을 올려 갔다. 보상이 크면 위험도 크다. '생명의 신수, 보너스 스탯, 최상급 룬석 등등...' 악마왕을 잡아서 얻을 수 있는 보상을 생각하면 한시도 레벨업을 게을리할 수 없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마침 주변의 악마들도 거의 다 정리됐겠다. 진우는 상태창을 불러와 레벨을 확인했다. [레벨: 87] 악마성에 들어오기 전까지만 해도 80 이었던 레벨이 어느새 87 까지 올라와 있었다. 늘어난 스탯들을 보고 있자니 미소가 흘러나왔다. '좋아.' 진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악마 귀족을 처치했습니다.] [악마 귀족을 처치했습니다.] 그사이 그림자 병사들이 남아 있던 악마들을 잡아냈다. 깔끔한 승리였다. 전투가 끝나자 병사들이 평소처럼 진우 앞으로 몰려들었다. 그중에서도 아이언이 가장 빨랐다. 척. 아이언은 마치 칭찬이라도 기대하고 있는 것처럼 가슴을 쭉 펴고서 차렷 자세를 유지했다. 진우는 시야를 가로막고 있는, 산만한 덩치를 보고 피식 웃었다. "다 끝냈어?" 아이언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해?" 아이언이 힘차게 다시금 고개를 끄덕거렸다. 진우가 씩 웃으며 기감을 확대시켰다. 그리고 뒤쪽으로 돌아서는 동시에 '바루카의 단도'를 던졌다. '단검 투척!' 단도는 눈 깜짝할 사이에 벽면까지 쇄도했다. 그러나. "커헉!" 단도는 벽이 아니라 벽면에 붙어서 은신한 채 진우가 병사들과 떨어지는 순간만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던 악마에게 박혔다. "으윽." 악마는 왼쪽 가슴 위에 박힌 단도를 보고 경악했다. '어떻게 알았지?' 인간이었다면 심장이 있었을 위치. 상급 귀족인 자신이 사용한 은신마법을 완전히 꿰뚫어 보고 있었다는 뜻이다. '인간 따위가.' 상처를 바라보던 악마가 놀란 시선을 들어 올렸을 때, 진우는 이미 코앞에 서 있었다. 악마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어떻게...?" 진우는 '바루카의 단도'를 빼내 유일한 근접 공격 스킬을 사용했다. '급소 찌르기!' 푹! 간신히 단검 투척 데미지를 버텨냈던 악마가 스킬 레벨이 한계치에 도달한 '급소 찌르기' 한 방에 절명했다. [악마 귀족을 처치했습니다.] 진우는 '바루카의 단도'를 창고로 돌려보내고서 다시 아이언 앞에 섰다. "이건 어떻게 설명할래?" '...' 아이언은 무안했는지 눈을 내리깔고서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뒷머리라고 해 봐야 투구 뒷면이지만. 곧 성 안쪽 깊숙한 곳까지 들어가서 숨어 있던 악마들을 잡아낸 이그리트가 돌아왔다. 그런데. '응?' 이그리트에게서 이질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무슨 일이지?' 진우가 이그리트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아니나 다를까. 빠르게 다가온 이그리트가 진우의 앞에서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여기까지라면 그다지 낯설지 않은 모습이었다. 한데 여느 때와 다르게 '띠링'하고 기계음이 울렸다. '시스템 메시지?' 진우는 침을 꼴깍 삼켰다. 105 화 [기사 '이그리트'가 승급 허가를 요청합니다.] [승급을 허락하시겠습니까?] '승급 허가?' 처음 보는 형태의 시스템 메시지에 놀란 진우가 급히 이그리트의 정보를 확인했다. [이그리트 Lv.Max] 기사 등급. 요구 레벨을 충족하여 승급이 가능해졌습니다. 군주의 허가를 받으면 다음 단계로 승급합니다. '이그리트의 레벨이...?' 삼십 후반이었던 레벨이 맥스로 바뀌어 있었다. 레벨이 한계치에 도달하면 더 이상 올릴 수 없는 대신 다음 단계로 승급이 가능한 모양이었다. '승급 포인트는 삼십 후반에서 사십 초반 사이인가?' 전투 한 번으로 올릴 수 있는 레벨을 생각해 봤을 때, 아마도 요구 레벨은 그쯤이 아닐까 싶었다. 아직 병사들의 평균 레벨이 이십 초반인 걸 생각하면 꽤 까다로운 조건이었다. '거기다 내 동의까지 필요하네.' 어쩐지 아까 이쪽으로 달려오던 이그리트의 눈빛에서 뭔가 간절함이 엿보인다 했더니. '...' 이그리트는 숙인 고개를 여전히 들지 않고 있었다. 미동 하나 없이 주인의 결정을 기다리고 있는 녀석의 자세에서는 비장감마저 느껴졌다. 그동안 잘해 왔다고 어깨라도 두들겨 주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녀석...' 진우의 시선이 다시 시스템 메시지로 옮겨 갔다. [승급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메시지는 대답을 독촉하듯 천천히 깜박이고 있었다. 가장 먼저 병사가 되어 제일 열심히 싸워 왔던 이그리트다. 승급을 허락하지 않을 이유가 있을까? 진우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시스템에 대답했다. "허락한다." [명령어를 지정하십시오.] '이런 것까지 명령어가 필요한가?' 진우는 잠깐 눈살을 찌푸렸으나 곧 생각을 바꾸었다. '하긴.' 한낱한시에 그림자 병사가 된 녀석들이 꽤 있다. 지금은 이그리트 하나지만, 후에 병사들이 한꺼번에 승급 허가를 요청한다면 일일이 답해 주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그게 전투 중이라면 더욱더. 그럴 때 명령어가 요긴하게 쓰일 수 있으리라. 잠시 고민 끝에 진우가 말했다. "허가." 심플 이즈 베스트. 명령어가 결정되자마자 변화가 시작되었다. 변화는 이그리트의 발밑에서부터 일어났다. 으아아아아아어디선가 들려오는 비명 소리와 함께 이그리트의 발아래 그림자 속에서 무수히 많은 검은 손들이 튀어나왔다. 검은 손들은 이그리트의 몸 여기저기를 붙잡았다. '뭐지?' 진우는 흥미롭게 승급 과정을 지켜보았다. 처음엔 검은 손들이 이그리트를 그림자 아래로 끌고 들어갈 것처럼 보였는데,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그리트를 잡고 있던 손들이 검은 연기로 변해 주변을 맹렬하게 맴돌더니, 이내 이그리트의 안으로 스며들어 갔다. 마치 이그리트가 검은 연기를 다 흡수해 버린 것처럼. 슈아아악연기가 걷히고 나자 이그리트에게서 예전과는 격이 다른 기운이 뿜어져 나왔다. 띠링. 시스템 메시지가 변화의 결과를 알려 주었다. [기사 '이그리트'가 '기사 등급'에서 '정예기사 등급'으로 승급하였습니다.] '좋았어!' 진우는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다시금 이그리트의 정보창을 확인했다. [이그리트 Lv.1] 정예기사 등급 '레벨은 초기화됐지만 등급이 어금니와 같아졌다.' 최근 그림자 병사에 합류한 어금니는 원래 A 급 던전의 보스였던 마수. 그런 무시무시한 녀석과 같은 등급이 됐다는 것은 그만큼 이그리트의 능력치가 상승했다는 뜻이었다. 두근. 진우는 가슴이 뛰었다. 처음 그림자 군주가 되었을 때 생각했던 것이 맞았다. '나만 성장하는 게 아니야.' 진우의 시선이 그림자 병사들을 하나하나 훑고 지나갔다. '이 녀석들 모두가 나와 같이 성장하고 있는 거다.' 이번 승급으로 확 달라진 이그리트를 보고서 병사들이 성장하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다른 병사들도 어서 키워 승급시키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다. '해야 할 일이 하나 늘었네.' 그렇게 병사들을 둘러보며 뿌듯해 하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도망갔던 악마의 사체를 물어 오는 탱크가 보였다. '어?' 그런데 허겁지겁 달려오는 탱크의 눈빛도 심상치가 않았다. 저 눈빛, 이 기운. 가만히 지켜보던 진우가 기막히다는 얼굴로 말했다. "설마 너까지?" 진우의 코앞에서 멈춰 선 탱크가 기껏 물어 온 사체를 옆으로 던져버리고는 앞발 두 개를 모아 넙죽 엎드렸다. "우웅." 이번에도 역시 메시지가 떴다. 띠링. [정예 '그림자 마수병'이 승급 허가를 요청합니다.] [승급을 허락하시겠습니까?] 맙소사. 진우는 이마를 짚었다. 탱크의 정보를 확인해 보니 녀석의 레벨도 한계치에 도달해 있었다. [그림자 마수병 Lv.Max] 정예 등급. 요구 레벨을 충족하여 승급이 가능해졌습니다. 군주의 허가를 받으면 다음 단계로 승급합니다. '가만...' 진우는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림자 강화 성공으로 처음부터 7 레벨에서 시작해 줄곧 최고 레벨을 유지해 왔던 전투기계 이그리트와 달리, 탱크는 아직 승급 포인트로 추정되는 레벨까지 한참 남았던 상태였다. 그런데 이그리트와 탱크가 거의 비슷한 시기에 승급이라니. 두 녀석의 레벨 격차는 이번 전투 한 번으로 어떻게 극복해 볼 수준이 아니었다. '설마... 등급마다 요구 레벨이 다른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 말이 된다. 정예 등급인 탱크는 요구 레벨이 낮아 승급이 좀 더 빨라졌고, 기사 등급인 이그리트는 그 반대로 승급이 늦추어졌다고 보면. 공교롭게 둘의 승급 타이밍이 겹치는 일도 가능한 것이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어떤 가능성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혹시 내게도 승급 포인트 같은 게 있는 걸까?' 요구 레벨이 너무 높아서 아직 도달하지 못했다고 한다면. 에이, 설마. 진우는 피식 웃고 말았다. 동시에 승급을 허락했다. "허가."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탱크에게도 이그리트 때와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는 손들, 곧 손들이 검은 연기로 변하고, 연기는 탱크에게 흡수되었다. 슈아아악탱크도 이그리트와 마찬가지로 한층 더 강해졌다. [정예 '그림자 마수병'이 '정예 등급'에서 '기사 등급'으로 승급하였습니다.] 하지만 차이점도 있었다. 띠링, 띠링, 띠링. 기계음이 연속적으로 울리며 시스템 메시지가 연달아 떴다. [기사급 이상의 병사에는 이름을 부여할 수 있습니다.] [부여한 이름은 그림자가 소멸될 때까지 계속해서 유지됩니다.] [병사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탱크는 임시로 붙여 둔 이름. 기사급 미만에게는 이름을 부여할 수 없기 때문에 탱크의 정식 명칭은 아직 '그림자 마수병'이었다. 다른 곰탱이들보다 두 배는 더 큰 덩치가 아니면 탱크를 구별할 방법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녀석에게도 이름을 지어 줄 수 있게 됐다. 진우가 씩 웃었다. "탱크." ['탱크'로 하시겠습니까?] "그래." 진우가 확답하자 '그림자 마수병'의 정보에 변화가 생겼다. [탱크 Lv.1] 기사 등급. 승급 과정이 끝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는 건지 탱크가 몸을 일으켰다. 앞발을 들고 뒷발로 몸을 지탱하니 어지간한 2 층 주택만 한 높이가 되었다. 진우가 대견해하며 말했다. "드디어 진짜 이름이 생겼구나, 탱크." 기분 좋아진 탱크가 고개를 쳐들고 우웅 하고 울었다. "다들 수고했다." 이제 다음 층까지 푹 쉬도록. 진우는 병사들을 그림자 안으로 불러들였다. 올드 멤버 중 유일하게 승진에서 밀려난 아이언의 축 늘어진 어깨가 유독 눈에 들어왔다. 스르르병사들이 모두 그림자가 되어 사라지고 난 뒤, 진우는 성을 빠져나갔다. 밖에서는 에실이 핼쑥해 보이는 얼굴로 기다리고 있었다. "저기, 진우 님." "님 자는 안 붙여도 된다니까." "네." 진우의 지적에 주저하던 에실이 다시 입을 열었다. "저기, 진우... 님." 아무래도 악마족은 서열에 너무 민감한 듯했다. "왜?" "지금까지 가문 몇 개가 사라졌는지 아시나요?" 여기가 지금 89 층. 에실이 있었던 80 층은 걸렀으니까, 아홉 개 정도인가? 가는 층마다 가문이 하나씩 사라지니 에실도 슬슬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90 층부터는 고위 가족들 가문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상급 귀족들하고는 수준이 달라요." 진우는 걸음을 늦추지 않으며 물었다. "그래서?" "이제부터라도 대화로 풀어 보시면 안 될까요? 좋게 말로 타이르시면 저희 가문에서처럼 허가서를 내어 줄지도..." 진우가 말을 잘랐다. "내가 너희들보다 약했다면 그때도 너희가 대화를 시도했을까?" 그러자 에실은 입을 다물었다. 하찮은 인간이 감히 악마가 사는 성에 초대도 없이 찾아오는 것도 모자라 성에 있는 무언가를 요구한다? 살아 돌아갈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 거야." 진우는 씩 웃었다. 마수가 됐든, 몬스터가 됐든 사람과의 관계는 딱 이 정도다. '약한 쪽이 먹힌다.' 진우도 거기에 동의했다. 그리고 허가서와 레벨업 모두 시급한 진우는 어느 한쪽도 양보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 진우가 에실을 곁눈으로 보았다. 아까부터 한마디도 없이 의기소침해 있는 모습이 의아해 물었다. "다른 가문이 줄어드는 건 좋은 일 아냐?" "옛?" "악마 가문들끼리는 항상 서열 경쟁이 치열하다며." "아... 그렇기는 해요. 하지만." 이 위부터는 강력한 고위 귀족 가문들의 영역이었다. 만에 하나 진우가 공략에 실패하면 당연히 고위 귀족의 분노는 자신과 자신의 가문에까지 향하게 된다. 에실은 그게 걱정이었다. 진우가 말했다. "라디스 가문이 서열 1 위가 되게 해 줄게." '...저희 가문은 라디르인데요.' 에실은 소심하게 마음속으로만 따져 보았다. 곧 위층으로 올라가게 된다. 겨우 한 사람이서 고위 가문들까지 모두 박살 낼 수 있을까? '...에이, 모르겠다.' 길 안내를 맡았으니 길 안내만 잘 하면 되지, 뭐. 에실은 생각을 포기했다. '참...' 하지만 묻고 싶은 게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었다. "저기 진우... 님." "응?" 진우가 돌아보았다. 왠지 그가 악마 가문들을 차례로 무너뜨리는 것을 목격한 이후로 눈이 마주치는 것은 겁이 나, 에실은 시선을 발끝으로 모으며 물었다. "저희 가문은 왜 봐주신 건가요?" 분명히 라디르 가는 이 남자의 상대가 될 수 없었다. 누구보다 가문의 전력에 대해 잘 알고 있고, 진우의 힘을 봤기 때문에 확신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이 무자비한 남자로부터 라디르 가문은 무사했다. 왜일까? 그것이 궁금했다. 층간 이동 마법진 위로 올라간 진우가 돌아서서 에실을 바라보았다. "네가 마음에 들어서." 몬스터 주제에 항복할 줄도 알고, 거래를 할 줄도 알고, 무엇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했다. "예에?" 화들짝 놀란 에실은 목덜미까지 붉어졌다. 그러고는 제자리에서 손가락 꼼지락거리며 우물쭈물했다. 에실이 움직이지 못하는 동안 시간이 정체되자 진우가 물었다. "안 타?" 그러면서 어디로 가겠느냐는 시스템 메시지를 힐끔 쳐다보았다. "안 타면 80 층부터 다시 갔다 온다?" "죄, 죄송합니다." 에실은 붉게 익어 버린 얼굴로 재빨리 마법진에 올라탔다. '...' 하지만 푹 떨군 고개는 다음 층에 올라가서도 좀처럼 들지 못했다. *** 인천 공항. 일본 헌터협회 관계자들이 제주도 개미 일을 논하기 위해 한국을 찾았다. 이미 한국의 주요 인사들과 회의가 약속되어 있었다. 마쓰모토 시게오 일본 헌터협회 협회장과 일본 제일로 일컬어지는 S 급 헌터 고토 류지가 공항 안으로 들어섰다. 어쩐지 어수선한 공항 분위기에 마쓰모토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무슨 일이지?" "...주변에 강한 자가 한 사람 있습니다." "설마 자네보다 더?" 고토는 피식 웃었다. 자신감 넘치는 고토의 표정을 보고 마쓰모토도 더 이상 묻지 않았다. '한국에 그런 인물이 있을 리 없지.' 곧 마중을 나오기로 했던 한국 헌터협회의 직원이 달려왔다. "죄송합니다. 안이 너무 혼잡해서 헤매다 보니 조금 늦었습니다." 직원은 고개를 숙였다. 마쓰모토는 불쾌한 감정을 감추고 미소를 지었다. "괜찮습니다. 한데, 공항에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아... 별일은 아니고 미국에서 헌터 하나가 왔답니다." "미국의 헌터가 한국엔 어쩐 일로?" "개인적인 볼일이랍니다.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직원은 마쓰모토 협회장이 던전 브레이크라도 걱정하는 줄 알고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마쓰모토의 표정은 여전히 어두웠다. '미국의 헌터라... 이번 일과는 연관이 없겠지?' 고토의 시선은 아까부터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아마도 거기에 그 미국인 헌터가 있으리라. 마쓰모토는 시간을 확인했다. 회의에 늦지 않게 참석하려면 지금 출발해도 빠듯할 듯했다. 마쓰모토가 말했다. "가세." = 106 화 고건희 협회장과 마쓰모토 협회장이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두 사람의 양옆으로는 한일 양국의 헌터협회 관계자들과 각계 부처의 인사들이 길게 늘어앉아 있었다. 사안이 사아인 만큼 회담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최상급 헌터들로 구성된 일한(日韓) 연합 공격대를 만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마쓰모토 협회장의 파격적인 제안에 한국 관계자들이 놀란 낯빛을 띠었다. 이번 회담은 당연히 일본이 받은 피해를 어떻게 보상할 것인지 논하는 자리가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저쪽에서 먼저 골칫덩이를 제거해 주겠다니? 이게 웬 떡인가. 놀람도 잠시, 한국 측 참석자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그중에서 단 한 명. 고건희 협회장만이 예리한 시선으로 마쓰모토 협회장을 응시했다. "연합팀을 구성해 개미들의 본진을 치겠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렇습니다." "일본의 최상급 헌터들이 우수하다는 사실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주도로 직접 쳐들어가는 것은 너무 위험합니다." 더욱이 한국에서 실시했던 토벌 작전이 실패로 돌아갔던 2 년 전보다 놈들의 숫자가 몇 배로 더 불었다고, 고건희 협회장은 설명을 덧붙였다. 마쓰모토 협회장이 음침해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아무런 작전도 없이 적진에 쳐들어간다면 당연히 위험할 수밖에 없겠지요." 선뜻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일본의 말에 혹해 있던 한국 정치인 하나가 기쁜 기색으로 물었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으십니까?" "예." 즉답으로 모두의 시선을 끌어모은 마쓰모토 협회장은 조금 뜸을 들인 뒤 말을 이었다. "물론입니다." 그가 지시하자 사람 수에 맞게 준비된 파일들이 한국 측 참석자들의 앞에 하나씩 놓였다. "저희가 개미 마수들을 관찰한 자료입니다." 한국 측 참석자들이 파일을 뒤적이는 사이, 마쓰모토 협회장이 차근차근 설명을 시작했다. "개미들은 하나하나가 상급 헌터와 비견될 정도로 강하지만 그들에게도 약점이 있습니다. 바로 수명." 개미들이 1 년밖에 살지 못한다는 점이었다. "즉 개미들의 여왕만 제거하면 1 년 후에는 자연스럽게 제주도 안의 모든 개미들이 박멸될 것입니다." 과연. 한국 측 참석자들이 꼼꼼하게 작성된 연구 자료를 읽어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여왕만 제거하면 된다. S 급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수천 마리의 특급 마수들을 전부 다 처치하는 쪽보다 훨씬 더 현실적으로 들렸다. 하지만 고건희 협회장의 시선은 싸늘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는 알고 있었다. 여왕 하나를 제거하는 일이 수천 마리의 특급 마수들을 전부 다 처치해야 하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음을. "개미들이 자기들 여왕을 위해서 목숨도 불사하는 것을 모르고 하시는 말씀이십니까?" 고건희 협회장의 지적을 마쓰모토 협회장이 웃으며 받아넘겼다. "예. 여왕을 잡으려면 수천 개미들의 방어진을 돌파해야겠지요." 마쓰모토의 여유로운 태도에 고건희 협회장이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대체 뭘 어쩔 생각이지?' 마쓰모토가 입꼬리를 올렸다. "하지만 개미들이 전부 굴을 비우는 때가 있다면?" 개미굴의 가장 깊숙한 곳에 개미여왕이 산다. 여왕과 알을 지켜야 할 개미들이 동시에 굴을 비우는 경우는 있을 수가 없을 터인데? 고건희와 한국 측 참석자들의 얼굴에 강한 의문이 떠올랐을 때, 마쓰토모가 입을 열었다. "있었습니다. 딱 세 번." 세 번? 세 번이나 그런 일이 있었단 말인가? 아니, 있었다고 한들 어떻게 일본이 그리 자세히 알고 있는 것일까? 대답은 금방 나왔다. "토벌을 위해 한국의 헌터들이 제주도에 상륙했을 때, 개미들은 세 번 다 굴을 비우고 전부 그쪽으로 몰려 나갔었지요." 크윽. 고건희 협회장은 무릎 위에 올려둔 주먹을 움켜쥐었다. 한국의 헌터들이 목숨을 걸고 마수들과 싸우는 동안 일본은 은밀하게 관찰하고 있었던 것이다. 누구도 일본이 한국을 돕지 않았다고 욕하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이웃 나라의 불행을 자신들의 연구 자료로 삼고, 그것을 당사자에게 자랑스럽게 공개해서는 안 되는 것 아닌가? S 급 하나가 세 번째 토벌에서 목숨을 잃고, 그 외에도 수많은 헌터들이 목숨을 잃었다. 고건희 협회장은 가장 가까운 곳에서 그들의 죽음을 지켜봐 왔다. 그의 주먹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음...?' 고건희 협회장의 안색이 심상치 않자 일본 최강의 헌터 고토 류지가 마력을 개방했다. 수상한 짓을 하면 이쪽도 움직이겠다. 그런 경고였다. 고건희의 경호원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한 우진철이 급하게 고건희 곁으로 다가왔다. "협회장님?" "...이제 괜찮네." 고건희는 우진철을 물렸고, 우진철은 얌전히 물러났다. 일본의 태도야 어쨌든 간에 그들의 연구 결과가 정확하다면 개미 마수들을 일망타진할 기회였다. '그런 기회를 사사로운 감정으로 깨트릴 수 없지.' 고건희는 속으로 분을 삭였다. 팽팽했던 긴장감이 흐트러지자 마쓰모토는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그 역할을 우리 일본의 헌터들이 맡겠습니다." 일본의 S 급 헌터들이 조를 나누어 제주도의 사방을 습격한다. 개미들은 공격을 받는 곳으로 모조리 달려 나갈 테고, 여태껏 그래왔던 것처럼 여왕이 있는 굴은 비게 된다. "여왕을 처치하는 일은 한국의 최상급 헌터들이 맡아 주십시오." 헬기로 잠입한 한국의 S 급 헌터들이 여왕을 제거한 뒤, 다시 헬기를 타고 섬을 빠져나간다. 웅성웅성. 제법 구체적이고 실현 가능성 높은 일본의 계획에 한국 관계자들이 흥분하기 시작했다. "일본 말대로 하면 제주도를 되찾을 수 있는 것 아니오?" "일본 놈들, 자기네들이 피해를 입기 시작하니까 드디어 움직이는구먼." "이거 기회군요." "이참에 일본 헌터들을 이용해 제주도를 수복합시다." 고건희는 관계자들의 대화에 끼지 않고 혼자 조용히 마쓰모토가 제안한 계획을 머릿속으로 검토해 보았다. '확실히 가능성은 있다.' 일본의 S 급 헌터 숫자는 21 명. 그에 비해 한국은 여덟 명. 움직이기 힘든 자신이나 은퇴한 다른 한 명을 제외하면 실제로 대동할 수 있는 인원은 여섯 명이 전부였다. '고작 여섯 명으로 수천 개미들의 시선을 분산시킬 수는 없어.' 그렇기에 스물이 넘는 일본의 최상급 헌터들이 필요했다. 다섯 명씩 나누어 조를 짜도 네 개의 공격대가 되고, 그 정도면 충분히 시간을 벌어 줄 수 있었다. 문제는 한국의 최상급 헌터들이 S 급 던전의 보스인 여왕을 잡을 수 있는가, 하는 것. '가능할까?' 그때 문득 고건희의 머릿속에 성진우라는 이름이 떠올랐다. A 급 게이트의 보스를 혼자서 잡았던 성진우가 다른 S 급 헌터들과 함께 호흡을 맞춘다면? 두근, 두근. 고건희의 심장이 뛰었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개미 마수들은 빠른 속도로 진화를 거듭하고 있었다. 언제 개미 군단 전체가 비행이 가능해질지 모른다. 10 년 후일 수도 있고, 5 년 후일 수도 있고, 당장 내년일 수도 있다. 그런 일이 벌어지기 전에 타국의 손을 빌려서라도 저 지긋지긋한 개미들을 제거해 놓아야 했다. 그전에 먼저. "그 대가로 일본이 원하는 조건은 무엇입니까?" 고건희 협회장은 중요한 것을 놓치지 않았다. 마쓰모토 협회장은 최대한 인자해 보이는 미소를 지으려고 노력했다. "1 년이 지난 뒤 개미들이 전부 죽으면 놈들의 마정석을 반 나누어 주십시오." 겨우 그 정도로? 고건희 협회장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 정도로 되겠습니까?" 고건희의 발언에 근처에 있던 정부 인사들이나 정치인들이 눈살을 찌푸렸다. '적은 대가로 도와주겠다면 감사히 받을 일이지 뭘 또 일일이 따지나?' '저러다 일본이 마음을 바꾸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고건희 협회장, 기업체를 운영하던 양반이라 그런지 의심이 지나치구먼.' 그들의 따가운 시선이 고건희에게 날아와 박혔다. 하는 수 없이 고건희는 입을 다물었다. 잠깐 한국 측 참석자들끼리 의견을 나누었으나 아무도 반대하는 사람은 없었다. 결국 일본의 제안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회의가 끝나자 마쓰모토 협회장이 웃으며 다가와 고건희 협회장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양국의 미래가 달린 중요한 일입니다. 서로 힘을 합쳐 잘해 봅시다." *** 호텔로 돌아온 마쓰모토 시게오 협회장이 담배를 입에 물었다. 곁에 있던 고토 류지가 담배에 불을 붙였다. "오늘 수고하셨습니다." "고토, 자네야말로 수고가 많았지." "별말씀을 다." "별말씀이 아니네. 그때 고건희의 얼굴을 보지 못했나?" 마쓰모토가 씩 웃었다. 고건희의 얼굴을 스치고 간 감정. 그건 분명 분노였다. 대한민국 최강의 능력을 가졌다는 S 급 헌터의 분노 앞에서도 여유를 보일 수 있었던 것은, 뒤에 강력한 아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토 류지. 일본 제일의 전투계열 헌터. 마쓰모토는 고건희의 표정을 떠올리며 조소했다. "상대하기 싫은 대상의 손이라도 빌려야 한다니. 약자의 입장이라는 건 참 견디기 어려운 것이지." 고토도 피식 웃었다. 결국 마쓰모토 협회장의 계획대로 한국은 일본의 손을 잡았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한국은 시작일 뿐일세." 마쓰모토가 말했다. "헌터는 새로운 힘, 새로운 권력이야. 나는 우리 일본에 내려진 이 힘으로 새로운 제국을 건설할 걸세." 그의 시선이 고토에게 향했다. "그리고 다음 황제는 자네가 되겠지." 마쓰모토가 지략으로 제국을 건설한 1 대라면, 고토는 힘으로 제국을 이어받는 2 대가 된다. 고토가 마쓰모토를 상관처럼 깍듯이 모시는 데는 그런 이유가 있었다. 그때. "참." 뭔가를 떠올린 마쓰모토가 담배를 비벼 끄며 물었다. "한국의 새로운 S 급에 대한 정보는 아직인가?" "그 남자에 대해서는 아직 한국도 별로 아는 게 없는 모양입니다." "...그렇구만." 한국 최상급 헌터들의 정보야 이미 빠삭하게 알고 있었다. 그런데 단 하나. 가장 최근에 S 급으로 등록된 헌터에 대한 정보가 전무했다. 알지 못하는 것은 변수가 될 수 있다. 이번 작전으로 야심을 드러낸 마쓰모토 입장에서 변수의 존재는 그리 달갑지 않았다. '한 사람의 힘으로 뭘 할 수 있겠느냐마는...' 전 세계에 다섯 명. S 급조차 범접하지 못한다는 최강의 헌터들이 있다. 한 사람의 힘이 국가 하나의 권력과 맞먹는다는 의미로, '국가 권력'급 헌터라 불리는 이들. 그들의 공통점은 모두가 S 급 게이트를 한 번씩은 클리어해 본 경험이 있다는 것이었다. 확실히 그 정도의 능력을 지닌 헌터라면 방해가 될 수 있다. '하나 그럴 확률은 지극히 낮다.' 전 세계 인구를 70 억으로 잡으면 10 억 분의 1 도 되지 않을 확률. 그만한 힘을 가진 헌터가 나왔다면 한국 쪽에서 이리 잠잠할 리가 없을 텐데, 최근 분위기를 봐서는 걱정할 필요가 없을 듯했다. '쓸데없는 노파심에 일을 그르칠 수는 없지.' 마쓰모토는 전화를 들었다. 그리고 자신의 연락을 목 빼고 기다리고 있을 협회에 지시를 내렸다. "한국이 우리 손을 잡았으니 예정대로 S 급들을 전원 소집하도록." *** 고건희 협회장도 한국 헌터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일단은 그들에게 상황의 심각성을 설명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서 회의의 일정을 조율하려고 했는데. "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어왔다. "성진우 헌터에게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유일하게 성진우만이 연락되지 않고 있었다. "며칠째 폰이 꺼져 있어 위치도 파악할 수가 없었습니다." '...' 입을 꾹 다물고 있던 고건희가 하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그럼 그를 제외한 헌터들이라도 최대한 빠르게 모아 보게." "알겠습니다, 협회장님." 직원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후다닥 뛰쳐나갔다. 고건희가 굳은 얼굴로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어디에 있는 걸까?' 성진우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보고를 들은 후로부터 고건희는 문득 불길한 예감이 들기 시작했다. = 107 화 에실의 언급처럼 90 층부터 공략 난이도가 급격하게 올라갔다. 성채를 지키는 몬스터들의 능력과 숫자가 아래층들과는 비교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지능을 올린 보람도 없이 거의 항상 최대치를 유지해 오던 마나양이 전투 때마다 요동치기 시작했다. 그만큼 많은 그림자 병사들이 파괴와 재생을 반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진우도 요행으로 90 층을 넘어선 게 아니었다. 최하층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 달군 쇠를 망치로 두드리듯 오랜 시간 자신을 연마해 왔다. 90 까지 다다른 레벨이 그 증거였다. 고위 귀족들의 저항이 거세질수록 그들의 방어를 뚫는 진우와 그림자 병사들의 공격은 더 강력해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97 층의 진입 허가서를 들고나오는 진우의 몸에서 아지랑이 같은 것이 피어올랐다. 한계를 넘어선 움직임이 만들어 낸 열기가 땀방울을 증발시키며 만들어낸 수증기였다. 그만큼 이번도 격전이었다. 진우의 얼굴에 승리의 만족감이 떠올랐다.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에실이 진우를 발견하고 달려왔다. 진우 뒤로 불타는 성과 그의 손에 들린 허가서. '서열 5 위 리카도 가문에 이어 서열 4 위인 아락카스 가문까지...' 에실은 더 이상 놀랄 기운도 없었다. 모든 침입자가 다 이런 식이라면 자기 구역을 지키기는커녕 침입자를 피해 살아남기도 힘들 것 같았다. "다른 인간들도 다 당신처럼 강한가요?" 에실이 걱정스레 물었다. 진우는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다 적당히 대답했다. "두 명 정도는?" 고건희와 차해인. 그 두 사람은 확실히 다른 S 급들보다도 강하다는 느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외 나머지 S 급 헌터들, 그러니까 백윤호나 최종인, 임태규는 크게 강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특히 최종병기라 불리는 최종인은 국내 최고의 길드 '헌터스'를 소유하고 있기 때문에 실력보다 더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듯했다. '기운으로만 평가하자면 최종인보다 차해인 쪽이 한 수 위였지.' 이렇듯 같은 S 급들 사이에서도 격차는 존재했다. 아니, 오히려 측정이 불가능한 등급 외 등급인 만큼 그 격차가 다른 등급보다 더 심할지도 몰랐다. 진우는 피식 웃었다. '여기서 나가면 또 어떻게 느껴질까?' 처음 백윤호를 만났을 때와 그다음 그를 만났을 때의 느낌이 달랐던 것처럼, 고건희 협회장을 바라보는 자신의 시선에도 변화가 생길까? 진우는 달라진 자신의 모습을 확인할 생각에 가슴이 뛰었다. '그러려면 우선...' 악마성 던전의 마무리부터. 남은 층은 이제 전부 다 합쳐도 네 개에 불과했다. 진우가 에실에게 말했다. "넌 이제 내려가." 진우만큼 강한 인간이 두 명이나 더 있다는 소리에 풀 죽어 있던 에실이 놀라 고개를 들었다. "네?" "이 위층부터는 알아서 찾아갈게." 에실이 길을 찾아 준 덕분에 빠르게 귀족들의 성채를 찾아 공략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녀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전보다 더 올라간 감각 스탯 영향도 있겠지만...' 고위 귀족들의 기운이 워낙에 강력해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쉽게 찾아갈 수 있었다. 길 안내 외에는 그녀의 역할이 없었으니 굳이 짐 하나를 더 붙이고 돌아다닐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설명을 했더니. "저, 저는 이제 쓸모가 없어진 건가요?" 에실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갔다. '끝까지 재미난 녀석이네.' 진우는 항상 예상 밖의 리액션을 보여 주는 에실을 보며 웃음을 삼켰다. 그러고는 그녀의 코앞까지 다가갔다. '헉!' 에실은 가까워지는 진우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제거당하는 걸까?' 쿵쾅쿵쾅. 심장 뛰는 소리가 마치 천둥소리처럼 크게 울렸다. 그때 진우가 손을 슥 들어 올리는 것이 보였다. 자신의 얼굴을 향해 천천히 다가오는 그 손끝에 에실은 공포에 질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데. '어?' 손은 자신의 어깨 위에 가볍게 놓였다. 에실이 슬쩍 눈을 떴다. 진우의 얼굴이 가까웠다. 진우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동안 수고했어, 고마웠다." 이걸로 됐다. 나름대로 작별 인사를 마친 진우가 이동 마법진 안으로 들어갔다. 띠링. [1 층부터 96 층까지 개방되어 있습니다.] [어디로 이동하시겠습니까?] 돌아서서 에실의 얼굴을 보니 표정에 놀라움과 아쉬움이 반반씩 섞여 있었다. 공포, 걱정, 놀라움, 아쉬움... 지성 있는 몬스터들이 보여 준 감정의 표현들. 에실의 말대로 그들은 다른 세계의 주민이었을까, 아니면 시스템이 만들어 낸 몬스터에 불과한 걸까? '아직은 알 수 없다.' 하지만 이렇게 조금씩이라도 단서를 모으다 보면 언젠가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저기..." 에실이 진우를 불렀다. 거의 동시에 고개를 든 진우가 시스템 메시지를 향해 대답했다. "97 층." *** 97, 98, 99. 진우는 드디어 악마왕의 거처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를 손에 넣었다. [아이템: 진입 허가서] 입수 난이도: ?? 종류: ?? 악마성 100 층으로 올라갈 수 있는 허가서입니다. 층간 이동 마법진의 99 층에서만 사용 가능합니다. 진우는 100 층으로 올라가기에 앞서 상태를 점검했다. [레벨: 93] 레벨은 어느덧 100 을 바라보고 있었다. 늘어난 스탯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전신에 힘이 넘쳐흘렀고, 감각도 더욱 예민해졌다.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좋아.' 진우는 상점을 불러냈다. 구매한 포션으로 체력과 마나를 풀로 채웠다. 그리고 추가로 붕대를 구입했다. 전에 한번 그랬던 것처럼 단검 쥔 손을 붕대로 감았다. 이런 긴장감은 오랜만이었다. 몸을 천천히 움직여 보았다. 그러다 조금씩 조금씩 더 빠르게 움직였다. 몸은 생각한 대로 정확하게 움직여 주었다. 착. 사방에 그림자를 만들며 맹렬하게 움직이던 진우가 딱 멈췄다. 그의 어깨에서 감이 피어올라 왔다. 예열 작업이라고 할까. 준비는 끝났다. "후-"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쉰 진우가 이동 마법진 위로 올라갔다. "100 층." 목적지를 말하고 눈을 깜빡였을 땐 이미 배경이 바뀌어 있었다. 진우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불이 없어?' 아래층까지 활활 타오르고 있던 끔찍한 불꽃들이 전부 사라지고, 주변에는 타고 남은 찌꺼기들만 남아 있었다. 문득 고개를 들어 보니 하늘에서는 눈이 떨어졌다. '눈?' 눈치고는 색이 이상해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손바닥에 떨어진 눈은 이상하게도 녹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재였다. 하늘에서 재가 눈처럼 하나둘 떨어지고 있었다. 그때. '띠링'하고 기계음이 울렸다. 날카로워진 진우의 시선은 하늘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위인가...' 곧 시스템 메시지가 적의 등장을 알려왔다. [악마들의 왕, 바란이 침입자를 발견했습니다!] 상공을 부유하던 검은 점. 점은 점점 땅에 가까워지더니 저멀리에 내려앉았다. 날개 달린 도마뱀 같은 것을 타고 있는 기사였다. 놈의 머리 위에 다섯 글자가 선명했다. [악마왕 바란] 진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범상치 않은 기운이 놈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역시 이런 거대한 던전의 최상층을 지키고 있는 보스다운 기세였다. 진우의 시선이 옮겨 갔다. '음?' 놈이 타고 있는 도마뱀처럼 생긴 몬스터에도 이름이 있었다. [비룡 카이셀린] '저거 아무리 봐도 악마족은 아닌 거 같은데...' 악마족들은 애써 처치에 성공해도 그림자 추출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악마성에서는 그림자 병사들이 늘어날 거라는 기대를 안 하고 있었는데, 보스가 타고 있는 몬스터는 좀 달라 보였다. 날아다니는 몬스터라. '꽤 쓸 만해 보이잖아?' 가지고 싶다. 백귀들의 수장이었던 바루카 이후로 간만에 손에 넣고 싶은 그림자를 만난 진우가 침을 꼴깍 삼켰다. 그때 바란이 한 손을 치켜들었다. 띠링. [악마왕 바란이 악마 군사들을 소환합니다!] 메시지와 함께 놈의 주변에 병사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숫자는 척 봐도 수백에 이르렀다. '시작인가?' 진우의 시선이 가늘어졌다. 하늘로 향해 있던 바란의 손이 거만하게 이쪽을 가리키자, 소환된 악마 병사들이 떼를 지어 달려왔다. 두두두두그들의 사나운 기세에 땅이 울렸다. '병사라면 이쪽에도 있다.' 진우가 악마왕의 군세를 보며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그림자들." 진우의 그림자가 일렁이며 주위로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스킬 군주의 영역. 악마왕의 병사들이 검게 물든 대지 위에 발을 들였을 때, 진우가 그림자 병사들을 불러냈다. "집합." 그림자들이 일제히 솟아올랐다. '...!' 적들이 당황하는 게 느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아이언과 탱크 두 육체파 기사들이 전력으로 달려가 몸을 부딪쳤다. 투쾅! 그워어어어어! "크아아악!" "케?" 두 녀석의 괴력에 악마들이 비명을 지르며 나가떨어졌다. 그 뒤로 백이 넘는 그림자 병사들이 파도처럼 밀려들어 갔다. [악마왕 바란이 악마 군사들을 소환합니다!] [악마왕 바란이 악마 군사들을 소환합니다!] 그림자들의 기세에 놀란 것인지, 바란은 병사들의 수를 충원했다. 그러나 뒤쪽에 소환된 악마 병사들의 머리 위로 어금니의 스킬 '화룡의 노래'가 작열했다. 쿠우우우우우우우우거센 불기둥이 악마 군단 하나를 통재로 날려 버렸다. '...' 비룡을 띄워서 불기둥을 피한 바란이 조금 떨어진 곳에 착지했다. 그러고는 비룡에게서 내려섰다. 진우는 악마 귀족들의 전투 방식을 떠올렸다. '저 녀석들, 탈것을 타고 싸우는 걸 싫어했었지.' 그림자들과 악마들이 뒤엉겨서 있는 전장을 향하던 바란의 걸음이 점점 빨라지더니 급기야 달리기 시작했다. 최전방에서 악마들의 진열을 깨부수던 아이언이 자신의 워해머로 악마 하나의 머리를 내려치려 할 때. 바란이 손을 뻗었다. 그러자 아이언이 공중으로 솟구쳤다. '...지배자의 손길?' 진우도 지배자의 손길을 사용해 떨어지던 아이언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바란의 시선이 진우에게 옮겨 갔다. 놈도 가장 먼저 해치워야 할 적이 누구인지 깨달은 듯했다. '...' 바란이 검을 뽑아 들고 달려왔다. 진우도 단검을 움켜쥔 양손에 힘을 주었다. 그러고는 상대를 향해 마주 달려갔다. 바람같이 움직인 두 군주가 정확히 중간쯤 되는 지점에서 맞부딪쳤다. 바란의 검과 진우의 단검들 사이에서 불꽃이 튀기 시작했다. 카가가가강, 카강, 카가가강! 진우의 공격은 바란의 몸에 조금씩 닿고 있었지만, 바란의 갑옷을 뚫을 만큼의 데미지를 주지는 못했다. '단검과 갑옷의 상성은 좋지 않다.' 그렇다고 다른 갑옷들처럼 맨손으로 때려잡기엔 상대가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틈새를 노려야 하는데. '투구? 아니면 관절?' 진우가 빈틈을 엿보고 있는 사이 바란이 무형의 스킬로 진우의 가슴을 후려쳤다. "컥!" 잠시 공중으로 몸이 붕 떴던 진우는 지배자의 손길로 다시 균형을 잡았다. '역시 지배자의 손길 맞네.' 맞아 보니 확실했다. 바란은 아까부터 지배자의 손길을 자유자재로 쓰고 있었다. 놈이 손을 뻗었다. 이번에는 진우도 놈을 향해 손을 내뻗었다. 쾅! 쾅! 진우와 바란 둘 다 강한 힘에 튕겨져 나갔다. 진우와 바란이 동시에 균형을 잡았을 때는 서로 한참을 뒤로 밀려난 상태였다. 그때 진우의 머릿속에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바루카의 단도 쪽이 공격력이 셌었지?' 바루카의 단도는 A 급, 나이트 킬러는 B 급. 진우는 '나이트 킬러'로 '바루카의 단도'를 묶고 있는 붕대를 찢었다. 그리고 '바루카의 단도'를 전력을 다해 던졌다. '단검 투척!' 바루카의 단도가 맹렬한 속도로 날아갔으나, 바란은 고개를 옆으로 비트는 것만으로 가볍게 피해 냈다. 무릎을 잠시 굽히는가 싶었던 바란이 한 번의 점프로 전장을 가르고 진우 앞에 내려섰다. 착. 가볍게 착지한 바란이 검을 일자로 휘둘렀다. 캉! 왼손이 아려 왔다. 진우는 미간을 찡그렸다. 단검 두 개로 막던 공격을 하나로 상대하려고 하니 손목에 부담이 갔다. 구겨지는 진우의 얼굴을 보고, 승기를 잡았다 싶었는지 바란은 공격에 박차를 가해 왔다. 캉! 카강! 캉! 진우의 몸에 상처가 늘기 시작했다. '큭!' 그러나 진우는 방어에 치중하며 조용히 때를 기다렸다. 그리고 마침내 기회가 왔을 때, 오른손을 내밀어 바란의 투구를 움켜쥐었다. '...?' 투구 너머로 바란이 의아해하는 시선이 전해졌다. 진우가 씩 웃었다. 그리고 온 힘을 다해 투구를 당기자 에실이 그랬던 것처럼 바란이 목을 뒤로 뺏고, 투구와 목을 이어주던 부분에 약간의 틈이 생겼다. '지배자의 손길.' 아까 던지고 난 뒤 내내 허공에 떠 있던 '바루카의 단도'가 그제야 바란을 덮쳤다. 푹! 바란의 뒷목에 바루카의 단도가 박혔다. 놈의 눈동자가 커졌다. '...!' 진우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어깨로 바란을 밀쳐 낸 뒤, 놈이 균형을 잡기 전에 양손으로 잡은 '나이트 킬러'를 목에 찔러 넣었다. '급소 찌르기!' 푹! 바란은 검을 떨어뜨리며 쓰러졌다. 하지만 두 번의 치명적인 공격에도 놈은 목숨이 붙어 있었다. 그대로 바란 위에 올라탄 진우가 주먹을 내려쳤다. 쾅! 쾅! 쾅! 쾅! 근력 스탯 2 백에 달하는 괴력이 보스급 몬스터의 체력을 급격하게 깎아 내려갔다. 그리고 마침내. 투쾅! '띠링'하는 소리와 함께 반가운 메시지가 떴다. [악마왕 바란을 처치하였습니다.] [바란의 영혼을 획득하였습니다.] [퀘스트 '악마의 영혼을 모아라 2'가 완료되었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 108 화 "후-"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짧게 내쉬었다. 악마성 던전의 1 층에서부터 100 층에 이르기까지, 길었던 대장정이 드디어 막을 내리는 순간이었다. 감정의 격류를 진정시키기 위해 잠깐 눈을 감았던 진우의 눈앞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올랐다. '...' 다시 눈을 떴을 땐, 아직 사라지지 않은 시스템 메시지가 시야에 들어왔다. 레벨업 알림이 무려 네 개나 연이어 떠 있었다. '한 번에 4 업씩이나?' 진우의 얼굴이 밝아졌다. 90 레벨을 넘기고 나서 레벨업 속도가 얼마나 더뎌졌는가를 생각하면 믿기지 않는 쾌거였다. 바로 상태창을 확인해 보았다. [레벨: 97] 레벨은 정확하게 4 만큼 올라가 있었다. '좋았어!' 진우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던전을 클리어했다는 안도감 위에 짜릿한 성취감이 덧씌워졌다. 하지만 기쁨은 뒤로 미루었다. 지금은 레벨업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게 있었으니까. '정화된 악마왕의 피.' 아이템 '생명의 신수'를 만들기 위한 마지막 조각. 손에 감고 있던 붕대를 벗겨 낸 진우가 악마왕 바란의 사체에서 반짝이는 빛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이템: 악마 군주의 반지]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아이템: 악마왕의 장검]을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아이템: 악마왕의 단검]을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아이템: 악마왕의 단검]을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아이템: 바란의 뿔] 2 개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재료 아이템: 정화된 악마왕의 피]를 발견했습니다. 획득하시겠습니까?] 쉴 새 없이 올라가는 아이템 발견 메시지들을 보면서 진우는 기뻐하기는커녕 오히려 초조해졌다. 원하는 아이템이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마지막에 나온 재료 아이템 '정화된 악마왕의 피'를 보고서 환호성을 내질렀다. '됐다!' 진우는 일단 모든 아이템들을 획득해 둔 뒤 '정화된 악마왕의 피'로 보이는 것을 집어 들었다. [재료 아이템: 정화된 악마왕의 피] 입수 난이도: ?? 종류: 재료 악마들의 군주 '바란'의 피를 정제해 만든 액체입니다. 강한 마력을 품고 있으나 정제 후에도 독성이 남아 있어 약재로 쓰러면 독성을 중화시켜 줄 '세계수의 파편'과 '메아리 숲의 샘물'이 필요합니다. 투명한 유리병에 담긴 붉은 액체가 기울어진 각도에 따라 찰랑거렸다. '이게 악마왕의 피...' 나머지 재료인 '세계수의 파편'과 '메아리 숲의 샘물'은 이미 준비된 상태였다. 무엇을 망설일까? 진우는 제작 스킬을 불러 왔다. [제작 스킬] 소모품: 생명의 신수 (3/3) 전에 봤을 때와 다르게 '생명의 신수'라는 글자가 깜박이고 있었다. 내용을 확인해 봤더니 제작 가능이라는 단어가 눈에 띄었다. [생명의 신수] -제작 가능 -재료 정화된 악마왕의 피 (1/1) 세계수의 파편 (1/1) 메아리 숲의 샘물 (1/1) [아이템: 생명의 신수]를 제작하시겠습니까? 어서 빨리 결과물을 보고 싶었던 진우는 주저하지 않고 제작을 선택했다. "제작." -[아이템: 생명의 신수]를 제작합니다. -10, 9, 8... 진우는 숨죽이며 결과를 기다렸다. -7, 6, 5... -제작자의 지능 수치에 따라 '제작품의 성공 확률'과 '제작 결과물의 개수'가 달라집니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제작 성공 확률과 완성품 개수가 지능 수치에 따라 달라진다고?' 머리가 멍청하면 제작도 못한다는 말인가? ...묘하게 설득력 있어서 진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는 와중에도 카운트다운은 계속되고 있었다. -4, 3, 2... 왜 이렇게 성공 확률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리는 것일까? 뒤늦게나마 지능 스탯의 중요성을 알아차리고 모든 포인트를 투자했다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었다. -1, 0. -제작이 완료되었습니다! -제작에 성공하였습니다! -[아이템: 생명의 신수] 6 개를 획득했습니다! "그렇지!" 가슴 졸이고 기다리던 진우가 제작이 성공했다는 메시지를 보며 양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어?' 그러다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악마왕의 피가 담긴 병이 아직 오른손에 남아 있었다. '피가 조금 줄긴 했지만...'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창고에서 '세계수의 파편'과 '메아리 숲의 샘물'을 불러 왔다. 그러나 바닥에 놓인 것은 일부가 깎여 나간 '세계수의 파편'뿐. 창고를 열어 안을 뒤져 봐도 샘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설마...?' 혹시나 싶어 제작 스킬을 확인해보니 역시나 예상대로였다. -재료 정화된 악마왕의 피 (1/1) 세계수의 파편 (1/1) 메아리 숲의 샘물 (0/1) 재료 중에 메아리 숲의 샘물만 개수가 0 으로 변해 있었다. '재료가 전부 없어지는 게 아니라 딱 필요한 만큼만 소모되는 건가?' 여분이 남아 있는 다른 재료와 달리 '메아리 숲의 샘물'이 동나 제작이 멈춘 듯했다. 악마왕의 피는 원래 제작 시 소모량이 많지 않은 것처럼 보였고, 세계수의 파편은 처음 획득했을 때부터 엄청 큰 나무 덩어리였다. 작은 병에 담겨 있던 메아리 숲의 샘물이 먼저 바닥나는 게 당연하다면 당연해 보였다. 진우가 미소를 지었다. '나쁜 소식은 아니네.' 어디선가 다시 '메아리 숲의 샘물'을 구할 수 있다면 또 '생명의 신수'를 제작할 수 있다는 이야기니까. 아니, 다음은 두 번째 문제다. 딱 한 병의 '생명의 신수' 아이템이 절실했던 진우는 발아래에 가지런히 나타난 여섯 개의 목제 물병을 보고 터질 듯이 뛰는 심장을 억눌러야 했다. [아이템: 생명의 신수] 입수 난이도: S 종류: 소모품 강한 마법의 힘으로 모든 병을 낫게 하는 신비로운 물약입니다. 한 병을 모두 사용했을 때만 온전한 효과가 나타납니다. 과연 이 아이템으로 어머니의 병이 나을 수 있을까? '... 오늘 알 수 있겠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진우는 조심스럽게 생명의 신수 여섯 병을 창고로 보내 놓고, 남은 재료 아이템들도 창고에 넣었다. 그런데도 아직 남아 있는 아이템이 가득했다. '반지 하나에 장검 하나, 단검 두 개에다 잡템 두 개까지.' S 급 인던 보스라고 많이도 주네. 푸짐한 아이템들이 눈을 즐겁게 만들었으나 지금은 하나하나 살펴볼 여유가 없었다. 어서 여기를 빠져나가 어머니를 만나는 게 우선이었다. 진우는 악마왕의 사체에서 획득한 아이템들도 뭉뚱그려 창고에 밀어넣었다. 그러고선 손을 탁탁 털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쁜 일이 있다고...' 놓치는 게 있어서는 안 되지. 왜,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진우가 돌아보자 10 배가 넘는 적을 상대로 승리한 그림자 병사들이 간격을 맞춰 도열해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들의 뒤에는 악마 병사들의 사체들이 널려 있었다. '비룡은?' 진우의 시선은 악마왕이 타고 있던 몬스터를 찾아 헤맸다. 하지만 어딜 둘러봐도 잔뜩 쌓여 있는 악마 병사들의 사체들뿐, 비룡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싸움 중에 날아가 버린 건가?' 걱정도 잠시. 아이언이 축 늘어진 사체 하나를 질질 끌고 왔다. 비룡 카이셀린이었다. "아이언, 니가 웬일이야?" 간만에 나온 진우의 칭찬에 아이언이 쑥스러운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래 봐야 투구 뒷면이었지만. 진우는 아이언의 어깨를 툭 쳐 주고서 비룡의 사체 앞에 섰다. '예상대로다.' 이름과 모습을 보고 짐작했었던 것처럼 비룡의 사체에게선 검은 연기가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그림자 추출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진우가 손을 뻗었다. "일어나라." 훌쩍 뛰어 버린 레벨 덕분인지 그림자 추출이 너무도 쉽게 이루어졌다. 키아아아악짐승의 단말마 같은 것이 들려옴과 동시에, 비룡의 그림자에서 검은 기체가 뒤덮인 짐승 하나가 기어 올라왔다. 비룡의 그림자는 바로 주인을 알아보고서 진우에게 다가와 머리를 숙였다. [병사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오.' 진우가 의외라는 눈빛을 했다. 싸우는 모습을 못 봐서 그냥 탈 것이라고만 생각했었는데, 의외로 전투가 능숙한지 비룡의 그림자는 기사 등급이었다. 그림자 군단의 에이스인 이그리트가 얼마 전까지 기사 등급이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대단한 일이었다. 하긴. 악마왕 쯤이나 되는 녀석이 허접한 몬스터를 타고 다닐 리는 없겠지. 진우는 새 병사의 등급에 만족하며 메시지에 답했다. "카이셀린... 아니." 문득 네 글자는 너무 길다는 생각이 들었다. "카이셀." 새로운 이름을 부여받은 비룡의 그림자가 머리를 쳐들고 허공을 향해 긴 울음소리를 토해 냈다. 키에에에엑- "모두들 수고했다." 그 한마디를 끝으로 진우는 카이셀을 포함한 그림자 병사 전원을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불러들였다. 이제 슬슬 악마성을 나가야 할 때. 남은 일은 하나였다. 진우는 퀘스트 완료 메시지가 도착해 있는 메시지함을 열었다. [일반 퀘스트: 악마의 영혼을 모아라! 2]를 완료하셨습니다. [완료 보상이 도착하였습니다.] [보상을 확인하시겠습니까?] (Y/N) '예스.' 대답이 끝나자 보상 목록이 주르륵 떠올랐다. 띠링. [아래와 같은 보상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보상 1. 최상급 룬석 보상 2. 보너스 스탯 +30 보상 3. 공개되지 않는 보상 [전부 수락하시겠습니까?] '그림자 교환'이라. 대체 뭘까? 진우는 처음 퀘스트를 받았을 때부터 정체가 궁금했던 최상급 룬석을 우선해 선택했다. '일단 1 번 보상부터.' 띠링. [최상급 룬석: '그림자 교환'이 지급되었습니다.] 메시지가 끝나고 나자 손안에 작은 돌 같은 촉감이 느껴졌다. 코앞에서 손바닥을 펴 보니 일반 룬석의 색과는 전혀 다른 검은빛의 룬석이 놓여 있었다. 평범한 검은색과는 비교할 수 없는 신비로운 색감이었다. 퍼석. 손목에 힘을 줘서 깨트려야 했던 예전과 달리, 지금은 힘을 줘야겠다는 생각이 떠오른 것과 동시에 룬석이 바스러졌다. 룬석에서 피어오른 검은 기운은 몸 주변을 감싸더니 곧 흡수되었다. 진우는 바로 스킬창을 확인했다. [스킬: 그림자 교환 Lv.1] 직업 전용 스킬. 필요 마나 없음. 지정한 그림자 병사와 시전자의 위치를 뒤바꿀 수 있습니다. 한번 시전한 후에는 3 시간의 대기 시간이 지나야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기시간은 스킬 레벨에 따라 달라집니다. '헉!' 스킬 설명을 읽어 내려가던 진우의 눈이 커졌다. 대기시간이라는 약간의 제약이 있긴 하지만, 아니 제약이 있어야 할 정도로 엄청난 스킬이었다. '그림자 병사가 어디에 있든 상관없이 위치를 바꾸는 게 가능하단 말인가?' 사용하기에 따라서는 거의 순간이동이나 마찬가지인 스킬이었다. 당장 병사 하나를 꺼내서 스킬을 테스트해 볼까 마음먹었던 진우는 곧 생각을 바꾸었다. '기왕 테스트해 볼 거면 좀 더 멀리 있는 녀석이 좋겠지.' 마침 악마성 바깥에 남겨 두고 온 병사들이 있었다. 한쪽은 동생의 그림자에 심어 두었고, 한쪽은 동네를 순찰하도록 해놓았다. '고민할 것도 없네.' 스킬의 여파가 어느 정도 일지도 모르는데 무턱대고 동생의 근처로 이동할 수는 없었다. 동생이 놀라는 건 둘째 친다고 해도 말이다. 그래서 진우는 동네를 순찰하게 한 그림자 병사 다섯 중 하나의 신호를 잡았다. "그림자 교환." 진우가 입을 열자마자. "어, 어?" 진우는 강한 중력에 이끌리듯 자신의 발밑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 109 화 그림자에 완전히 삼켜지기 직전, 시스템 메시지가 들려왔다. [보스가 처치되었으므로 던전 내부가 원래의 모습으로 복구...] 아래로 떨어진다는 느낌은 오래가지 않았다. 갑자기 중력의 방향이 반대가 되어 떨어지던 속도 그대로 위로 치솟기 시작한 것이다. 어둠에 잠겼던 시야가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왔다. '여기는...?' 진우는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틱, 틱. 맛이 갔는지 불이 깜빡이는 가로등, 벽에 비스듬히 세워 둔 리어카, 뜯기다 만 광고가 붙어 있는 전봇대. 집에 가다 보면 자주 지나치게 되는 인적 드문 골목이었다. '우리 동네잖아?' 공교롭게도 그림자 병사 다섯에게 처음 동네를 순찰하라고 지시했던 바로 그 장소였다. '정말로 위치가 바뀌었다.' 진우는 놀라움을 금치 못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침착하게 자신의 발아래를 확인했다. 그림자 병사들을 소환했을 때처럼 자신도 이 그림자에서 솟아올랐다. 발끝으로 조심스럽게 그림자를 밟아보았다. '...' 스킬이 발동되던 당시에는 마치 수면 위를 밟은 것처럼 푹 꺼지더니 지금은 평범한 그림자로 돌아와 있었다. 진우는 감탄하며 스킬 정보를 확인했다. 스킬 설명에 적혀 있던 것처럼 정확히 3 시간의 재사용 대기시간이 적용되고 있었다. [스킬: 그림자 교환 Lv.1] 직업 전용... ...2 시간 59 분 57 초 후 스킬 사용이 가능합니다. '대박이다.' 스킬의 힘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한 진우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이렇게 순식간에...' 그림자에 빨려 들어갈 때부터 집중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집중 상태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리게 느껴진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야말로 찰나의 시간에 이동한 것이다. 목을 타고 침이 꼴깍 넘어갔다. 그림자 교환. 어떻게 쓰냐에 따라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스킬이었다. '참, 이럴 때가 아니지.' 진우는 흥분을 가라앉히고 마력을 거두었다. 겨우 어머니를 치료할 약을 손에 넣었는데, 여기서 이렇게 시간을 지체할 수는 없었다. 마음이 급해진 진우가 헌터폰을 켜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시간이...' 진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액정의 숫자가 오후 10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면회가 가능한 시간이 아니었지만 비룡의 그림자를 불러내는 진우의 행동에는 망설임이 없었다. '카이셀.' 키에에엑주인의 부름을 받은 카이셀이 기쁜 듯 울며 땅 위로 머리를 내밀었다. 곧 팔이 없는 대신 커다란 날개를 달고 있는 트럭만 한 도마뱀이 전신을 드러냈다. 카이셀이 날개를 펼치자 그렇지 않아도 좁았던 골목이 완전히 꽉 차 버린 느낌이었다. 근처에 사랑이 없는 것이 다행이라고 할까. 진우가 다가가자 카이셀은 그가 타기 쉽게 알아서 몸을 숙였다. 진우는 가볍게 그 위에 올라탔다. 처음 타 보는 데도 예전부터 오랫동안 타고 다녔던 것처럼 익숙한 느낌이 들었다. 이대로라면 하늘을 나는 것도 문제 없을 듯했다. '누가 막아도 상관없다.' 병원 관계자가 아니라 경찰이나 군대가 앞을 막아선다고 해도 돌파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누구에게도 방해받고 싶지 않았다. '가자.' 진우가 비장한 얼굴로 명령을 내리자, 카이셀이 커다란 날개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키에에에엑금방 공중으로 날아오른 카이셀은 진우가 원하는 방향으로 빠르게 날아갔다. *** 헌터협회에서는 늦은 시간까지 회의가 한창이었다. 한일 연합팀의 레이드가 코앞으로 다가온 시기. 제주도 개미 마수들을 성공적으로 토벌하기 위해서 협회도 심혈을 기울이는 중이었다. "일본에서 보내온 자료입니다." 직원이 리모컨 버튼을 눌렀다. 대형 화면에 일본 위성이 마력탐지 카메라를 이용해 촬영한 개미 마수들의 영상이 흘러나왔다. 1, 2, 3 차 토벌 작전 때의 기록이었다. 고건희의 눈이 가늘어졌다. '여왕개미와 여왕의 호위들 빼고는 모든 개미들이 빠져나가는군.' 과연. 개미들은 일본이 했던 말 그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호위 개미들의 존재가 거슬리기는 하나 상급 던전이라면 어느 곳에나 보스급을 지키는 마수들이 몇 마리 정도는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위험이 사라졌다고는 말할 수 없었다. 한국 측 책임자인 고건희는 만에 하나의 가능성까지 생각했다. "여왕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개미들이 예정보다 빠르게 방향을 돌릴 가능성은?" 일본은 이에 대한 대책도 준비해 두었다. "방해 전파를 쓸 거라고 합니다." "방해 전파?" "개미 마수들은 일반적인 개미들과 달리 자기들만의 특수한 파장으로 의사를 나눈다고 합니다." 수천이나 되는 군단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려면 그만한 지시 체계 정도는 있어야 하리라. 고건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걸 방에 전파로 교란시킬 수 있다?" "그렇다고 합니다, 협회장님." "우리는 여왕과 호위만 신경 쓰면 된다는 건가..." 토벌 작전은 간단했다. 간단하면서도 그 어떤 토벌 작전보다 성공 가능성이 높았다.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마음 한편이 불안한 것일까? 고건희는 턱을 괴었다. '혹시 내가 불안한 이유가...' 그때. 고건희가 크게 뜬 눈을 창밖으로 휙 돌렸다. 협회장의 갑작스런 행동에 회의실 안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움찔했다. 협회장의 옆을 지키던 우진철 과장이 빠르게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방금..." 고건희가 우진철을 바라보았다. 우진철의 표정은 평소와 같았다. "자네는 느끼지 못했나?" "예? 무슨 말씀인지 저는 잘..." "..." 방금 창밖 저 멀리 어디선가에서 엄청난 마력 파장이 흘러들어 왔다. 짧은 시간 이어졌던 마력 파장은 금세 자취를 감추었지만 고건희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 창밖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 협회장에게 회의를 진행하고 있던 직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협회장님...?" 그제야 고건희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시선을 옮겼다. 갑자기 나타났던 강한 마력 파장의 정체도 신경 쓰이지만, 지금은 회의에 집중해야 할 때였다.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던 고건희가 담당자에게 물었다. "성진우 헌터의 연락은 아직인가?" *** 백윤호는 뒤로 향해 있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물었다. "너도 느꼈냐?" 민병구가 대답했다. "은퇴했다고 어디 등급까지 떨어진 답니까." 단골 포장마차에서 모처럼 만나 잔을 나누고 있던 두 사람 사이에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백윤호는 고개를 바로 했다. "방금 뭐였지?" "최종인이랑 차해인이 헌터스 지분때문에 멱살이라도 잡았나 보죠." 술잔을 쥔 채로 멈춰 있던 민병구가 낄낄 웃으며 소주를 톡 털어 넣었다. 백윤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거 웃기려고 한 얘기야?" "안 웃겨요, 형?" "...아니다. 됐다." 하긴. 개그 센스까지 포함해서 민병구는 어딘가 좀 이상한 녀석이었다. '사지 멀쩡한 상태에서 은퇴한 세계 최초의 S 급 헌터라지, 아마.' 세계 최초에다가 아직까진 세계 유일이기도 했다. S 급 헌터가 벌 수 있는 돈이 얼만데 하기 싫다고 대뜸 집어치울 수 있는 인간이 얼마나 될까? 원래부터 집에 돈이 많았던 것도 아닌데 말이다. 백윤호의 시선을 느꼈는지 민병구가 물었다. "형, 진짜 갈 겁니까?" "어." "은석이 형 어떻게 죽는지 봤잖아요." "그러니까 더 가야지." 민병구가 의외라는 듯 돌아보았다. 백윤호는 잔을 비우고서 대답했다. "개미들 그대로 놔두면 한국 전체가 그렇게 될 텐데." "언제부터 그리 애국자셨다고..." "어차피 해야 하는 거 이유라도 멋지게 붙이는 거지." 길드들은 협회의 호출을 거절할 수 없었다. 협회가 길드의 편의를 봐주는 만큼 길드도 협회의 부름에 응해야 했다. 정 원치 않을 때는 나라를 떠 버리는 방법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고난이도의 레이드에서 도망친 상급 헌터를 반겨 주는 선진국은 없었다. 받아 줬다가는 언제 또 뒤통수를 치고 도망갈지 모르는 일 아닌가? '도망가기도 싫지만.' 백윤호가 피식 웃었다. 민병구는 딱 잘라 말했다. "저는 안 갈 겁니다. 절대 안 가요. 저 데려가려고 오신 거라면 번지수 잘못." "아니야." 백윤호는 술값을 올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 술병을 모두 비운 참이었다. "혹시 모르니까 인사해 두러 온 거야.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르니까." "형..." 민병구는 벌써 저만치 멀어져서 손을 흔드는 백윤호를 보고 그를 설득하길 포기했다. 백윤호도 이번 토벌 작전의 위혐성은 충분히 알고 있으리라. '그러면서도 간다니.' 두려움에 떨면서 억지로 끌려나가는 표정이 아니었다. 오히려 이번에야말로 개미 새끼들을 모조리 다 밟아 버리겠다는 얼굴. 어느 정도는 기대에 찬 표정이었다. 기가 막힌다는 얼굴로 남은 안주를 씹고 있던 민병구가 젓가락을 멈추었다. '가만... 그러고 보니 헌터들 중에는 마수와 싸우는 걸 싫어하는 사람이 별로 없네?' 힐러들 중에는 가끔 있긴 한데, 대신 걔네들은 타인을 치료해 주는 걸 끔찍이 좋아했다. 멍하니 오뎅 국물을 바라보고 있던 민병구가 옆머리를 북북 긁었다. '설마 싸움을 즐기는 성격이 각성자가 될 수 있는 조건인가?' 에이, 그렇기야 하겠어. 민병구는 뭐가 웃긴지 또 혼자 껄껄 웃다가 남은 국물을 들이마셨다. *** 진우는 금방 병원에 도착했다. '분명... 305 호실이었지.' 처음부터 정문으로 들어갈 생각이 없었던 진우는 카이셀을 탄 채로 어머니가 계신 병실 창문을 찾았다. '지배자의 손길.' 창을 가리고 있던 커튼이 스르르 움직였다. 어머니는 침대 위에 조용히 잠들어 계셨다. 마지막에 들렀을 때 모습 그대로. 진우는 다시 한 번 지배자의 손길을 이용해 창문을 열고 조용히 병실 안으로 들어섰다. 카이셀은 이미 진우의 그림자가 되어 사라진 뒤였다. 진우가 침대 옆에 섰다. 결과를 알 수 있는 순간이 오니 가슴이 두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잘못되면 되돌릴 수 없어.' 어머니는 오랫동안 의식이 없는 상태였다. 생명의 신수를 아예 넘기지 못할 수도 있고, 넘긴다고 해도 멀쩡하리라는 보장은 없었다. '하지만...' 진우는 그동안 시스템이 일으킨 많은 기적들을 보았다. 남에게서 들었다면 믿지 못했을 이야기들. 멀리 갈 것도 없이 가장 확실한 증거가 바로 여기에 있지 않은가? 'E 급이었던 내가 여기까지 왔다.' 전부 시스템의 힘이었다. 말없이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던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부르면 금방이라도 잠에서 깨어날 것 같은 어머니가 눈앞에 있었다. 진우는 창고에서 '생명의 신수' 아이템을 불러 왔다. 스르륵. 손 위에 나무로 된 병 하나가 놓였다. 행여나 놓친 것이 있을까 봐 아이템의 정보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다시 읽었다. 그렇게 수차례 반복한 후 아이템 정보를 완전히 외울 지경이 되어서야 겨우 목제 물병의 마개를 뽑을 용기가 생겼다. 뽁. 목숨을 걸고 악마왕과 싸우던 순간에도 멀쩡했던 손이 떨려 왔다. 진우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긴 숨을 내쉬었다. '내가 실수하면 어머니가 다친다.' 결코 실수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다짐하는 순간, 거짓말처럼 평소의 눈빛을 되찾았다. 어느덧 손의 떨림도 멎었다. '...됐다.' 진우가 침착하게 왼팔로 어머니 박경혜의 뒷목을 받쳤다. 그러고는 병의 입구를 입술에 갖다 댔다. 벌어진 입술 사이로 '생명의 신수'가 조르륵 흘러들어 갔다. 진우는 서두르지 않고 신중히 소량만을 흘려 보냈다. '이 상처는...' 문득 어머니의 목 양쪽 측면에 남아 있는 화상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화상 자국은 뒷목으로 이어져 있었다. 이 각도에선 보이지 않지만 어머니의 목덜미 전체와 뒷머리 일부까지 화상으로 일그러져 있음을 진우는 잘 알고 있었다. '나 때문에 생긴 상처니까.' 그냥 어머니의 머리를 감겨 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머니가 어린 진아의 머리에 하고 있던 것처럼. 하지만 목욕탕을 방문한 횟수조차 얼마 되지 않은 어린 진우에게는 물의 온도를 구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었다. 콸콸콸. 끼익. 목욕탕 바가지에는 펄펄 끓어도 이상하지 않을 고온의 물이 가득 담겼다. 애써 담은 온수를 흘리지 않게 진우는 최대한 조심조심 어머니의 등 뒤로 다가갔다. 그리고. 촤악. 바가지에 있던 물이 쏟아졌다. 잠깐 움찔했던 어머니는 자신이 피해 버리면 딸의 얼굴에 물이 튈까 봐 진아를 꼭 끌어안고서 살이 벌겋게 익을 때까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셨다. 아무 소리도 없이. 비명 소리는 잠시 후 어머니가 아니라 근처에 있던 다른 아줌마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어머나, 어떡해!" "진우 엄마!" 진우는 그제야 무언가 잘못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냥 엄마를 도와주고 싶었을 뿐이었는데. 바가지를 떨어뜨리고 막 울음을 터트리려고 하는 진우의 어깨를 어머니가 꽉 붙들었다. 그리고 물었다. "진우야, 괜찮아? 어디 다친 데 없어?" 어린 마음에도 크게 혼이 날 거라고 생각했던 진우는, 그날의 기억을, 그때 어머니의 한마디를 지금까지도 잊을 수가 없었다. '누구한테도 빚진 적은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아버지가 실종되고 나서 여자 홀몸으로 진우, 진아 두 자녀를 떠맡아 키운 것도 어머니였다. 빚지는 것도, 빚지게 만드는 것도 싫어하는 성미라 평생 빚 갚을 일은 없을 줄 알았는데. 어머니에게만은 감당할 수 없는 빚을 졌다. 그때. 마지막 한 방울이 어머니의 입안으로 떨어졌다. 톡. 진우는 병을 세우고 어머니를 바로 눕혔다. 그리고 조용히 서서 기도하는 심정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쿵, 쿵, 쿵! 가슴이 아플 정도로 심장이 요동쳤다. 침이 꼴깍 목을 타고 넘어갔다. '...' 그러나 변화는 없었다. 진우의 꽉 움켜쥔 주먹에서 핏방울이 떨어져 내리려는 그때. "허헉-!" 물에 빠졌다가 간신히 살아 나온 사람처럼 어머니가 눈을 감은 채로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 진우의 눈이 커졌다. 약간 창백했던 어머니의 얼굴에 혈색이 돌아오고 있었다. 마치 흑백 화면에 컬러가 번져 나가는 것처럼 어머니는 건강한 모습을 되찾아 가고 있었다. 1 초가 1 시간 같이 느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어머니가 천천히 눈을 떴다. 잠깐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시선이 곧 진우에게서 멈추었다. "누구... 혹시 진우니?" 잠깐 심장이 덜컹했던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못 알아보는 게 당연하다. 벌써 4 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간 데다, 그때보다 체격도 많이 커졌다. 진우는 재촉하지 않고 차분히 기다렸다. 빈 그릇에 서서히 물이 차오르는 것처럼 4 년이라는 공백을 뛰어넘은 기억들이 진우의 어머니, 박경혜의 머릿속을 차츰차츰 채워 나갔다. 왜 자신이 병원에 누워 있는지 깨닫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엄마가 얼마나 누워 있었어?" "4 년." 4 년하고도 며칠이 더 지났는지까지 말할 수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어머니에게 최대한 안정이 필요한 상황이니만큼 일부러 말투나 표정도 담담하게 굴었다. 4 년이라는 말을 듣고 놀라는 듯했던 어머니가 이어 물었다. "진아는? 진아는 괜찮아?" 진우는 마음속 깊숙이에서 무언가가 울컥 솟아오르는 걸 느꼈다. 4 년 동안 생사의 경계를 헤매다 지금 막 돌아와서 하는 말이 동생의 안부를 묻는 거라니. 입술을 꽉 깨물지 않으면 눈물이 흐를 것 같았다. '동생을 걱정할 때가 아니잖아요.'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감정을 최대한 억누르고서 옅은 미소를 지어 보였다. "응, 잘 있어." 어머니는 진심으로 안도하는 표정과 함께 한숨을 내쉬었다. 본인 생각도 좀 하기를 바랐던 진우도 변함없는 어머니의 모습에 마음 한편으론 안심이 되었다. '이제 모든 게 정상으로 돌아가는 거야.' 어머니의 병이 나았다는 것이 실감나면서 가슴이 설레기 시작했다. 그러다 흠칫 놀랐다. 어느새 어머니가 왼손을 붙들고 계셨다. "엄마?" "고마워, 아들. 약속 지켰네." 약속? 아, 잊고 있었다. 그동안 너무 당연하다고 생각해서 약속이라는 의미조차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점점 깊은 잠에 빠져들어 다시는 깨지 못하게 되는 병. '익면증'. 날이 갈수록 수시로 다가오는 수마에 거동이 불편해지던 어머니는 어느날 진우에게 부탁했다. -엄마가 만약에 이대로 못 일어나게 되면 동생 잘 보살펴 줄 거지? 간단한 심부름을 시키는 것처럼 가벼운 미소를 지으며. 그래서 견뎌 왔던 거였다. 원망하지는 않았다. 어머니가 견디던 짐의 무게를 대신 이어받은 것뿐이니까. 그러나 어머니는 다 알고 있다는 듯 손을 꼭 쥐었다. "아들... 많이 힘들었지?" 진우는 아무렇지 않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웃으며 어머니를 안심시키고 싶었다. 그러나 그럴 수가 없었다.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리며 입술이 저절로 열렸다. "응." = 110 화 "뭐?" 서울일신병원의 원장 이성출은 놀라운 소식을 들었다. 익면증 환자 중 한 사람이 '최후의 수면' 상태에서 깨어났다는 것이다. "그게 정말인가?" "그렇습니다, 원장님. 제가 직접 확인했습니다." 남의 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의료인 입장에서 귀가 쫑긋할 상황인데, 이 병원에 있는 환자란다. '이런 행운이 찾아올 줄이야!' 이성출 원장의 비상한 두뇌가 주판을 두들기기 시작했다. "이거 지금 세계에 유례가 없는 일 아닌가?" "그렇습니다, 원장님." 담당의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성출의 입이 귓가에 걸리다 못해 찢어질 지경이 되었다. "잘했어! 닥터 최!" "예? 원장님, 전 아무것도..." "어허, 이 사람!" 이성출은 담당의에게 슬쩍 눈치를 주었다. "과정이야 뭐 어떻게 갖다 붙이건 간에 일단 환자가 나았으면 의사는 당연히 칭찬을 받아야지!" 물론 그 의사가 몸담은 병원까지 같이! "아, 네... 감사합니다, 원장님." 담당의는 마지못해 원장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담당자의 미지근한 반응에도 뜻밖의 호재를 접한 이성출의 얼굴에서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잘하면 전 세계의 시선이 일신병원에 모일 수 있다!' 계속 좋은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는 것은 그야말로 백익무해. 좋으면 좋았지 나쁠 것이 없었다. 이 소식이 알려지면 세계의 기자들이 모두 병원으로 몰려들어 조금이라도 더 관련 정보를 캐 가려고 아우성칠 터. 돈 한 푼 안 들이고 가만히 앉아서 병원 이름을 알릴 절호의 기회였다. '기자들이 원하는 것은 치료 방법이겠지만...' 그거야 환자를 곁에 두고 차근차근 알아보면 될 일이다.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었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담당의가 난처하다는 듯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환자의 보호자분이 퇴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뭐?" 안 되지, 안 돼! 환자가 병원에 있어야 기자도 몰릴 것이 아닌가? 아니, 기자는 둘째치고 병이 치료된 원인을 알아내기 위해서라도 환자를 잡아 둘 필요성이 있었다. 이성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환자의 상태는?" "전부 정상이었습니다." "4 년이나 꼼짝 않고 잠들어 있었는데 몸이 멀쩡하다는 말인가?" "생명유지장치 때문이 아닐까요?" "흐음..." 하여간 기계의 성능이 너무 좋은 것도 문제라니까. "경과를 살펴봐야 한다고 둘러대고 퇴원을 최대한 미루게." "저도 보호자분께 그렇게 말씀드렸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환자가 나가겠다는데 이유도 없이 억지로 잡아둘 수도 없고...' 그렇다면 방법은 하나뿐. 환자가 퇴원하기 전에 먼저 소식을 알리는 것이다. "아직 우리 병원에 있을 때 얼른 언론에 제보하지." 그러자 담당의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게... 어렵습니다, 원장님." "어째서?" "환자의 신원을 저희가 노출할 수가 없습니다. 이거 잘못하면 큰일납니다, 원장님." 뜬금없는 말에 이성출이 당황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담당의의 눈빛을 보니 그냥 하는 말은 아닌 듯했다. 이성출의 태도가 신중해졌다. "환자가 그렇게 대단한 사람인가?" "환자 쪽이 아니라 환자의 보호자 쪽이 좀... 정보 보호도 보호자분이 신청해 놓은 겁니다." 그러고 보니 닥터 최는 아까부터 그 보호자란 사람에게 꼬박꼬박 존칭을 쓰고 있었다. "대체 뭐하는 사람인데 그래?" 어떤 사람이기에 가족이 신원 보호를 받고, 닥터 최가 자연스레 존칭을 붙이고 있을까? "성진우 씨라고 알고 계십니까?" "성진우?" 저력 있는 정치인인가? 아니면 대기업의 총수?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이름인데 마땅히 떠오르는 얼굴은 없었다. 이성출은 고개를 저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담당의는 빠르게 설명을 이었다. "최근에 S 등급을 받으신 헌터님이십니다." "S 급!" 닥터 최가 조심스런 태도를 보였던 이유가 있었다. 하필 환자의 보호자가 S 급 헌터라니. '이거 섣불리 행동했다가 일이 꼬이기라도 하면 끝장이다.' S 급 헌터가 지닌 사회적 영향력 자체도 어마어마하지만, 만에 하나 그 헌터가 분노에 이성을 잃기라도 한다면...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튀어나오자 이성출은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큰일 날 뻔했군.' 굳은 표정을 짓던 그가 돌연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당장 퇴원 수속 시작하게." "그래야겠죠?" "암, 그래야지." 허허,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가 이성출의 입가에 걸리었다. 당연히 보내야지. 무슨 꼴을 보려고 S 급 헌터의 심기를 건든단 말인가? 대충 그 비슷한 내용을 상식적인 표현을 섞어 둘러 말했다. "몸 건강한 환자를 병원이 억지로 붙잡아 둘 수는 없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원장님." 담당의는 곧바로 일어섰다. 그가 나가고 나자. "휴-" 이성출은 닫힌 원장실 문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 연락받은 진아가 만사를 제쳐두고 병원으로 달려왔다. 어머니의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진우는 빠르게 가까워지는 동생의 기척을 느끼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덜컹. 병실 문이 열렸다. "엄마? 엄마?" 안으로 들어서기도 전에 이미 진아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우리 딸, 많이 컸구나." 박경혜가 진아를 마지막으로 본 것은 진아가 중학생 때였다. 훌쩍 커 버린 딸을 놀랜 눈빛으로 바라보던 그녀는 곧 푸근한 웃음을 지으며 진아를 향해 두 팔을 널찍이 벌렸다. 그러자. '엄마!" 진아가 와락 안겨들었다. 진우는 멈칫했다. 4 년 만에 의식을 회복한 환자에게 해서는 안 될 행동이었지만, 품에 안겨 엉엉 울고 있는 동생을 보니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엄마..." 다 큰 척 하고 있었지만 진아 역시 아직 애였던 것이다. 평소 씩씩하던 진아의 모습이 겹쳐 보이며 코끝이 아릿해졌다. "이제..." 진아가 진아를 떼 놓으려고 하자 박경혜가 검지를 입술에 붙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다른 한손으로는 여전히 딸의 등을 토닥이며. 진우는 나직이 숨을 내쉬고서는 물러났다. 어머니에게 안긴 동생과 어머니의 온화한 표정을 지켜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졌다. '내 노력은 틀리지 않았어.' 그동안의 수고가 지금 이 순간 전부 보상받는 느낌이었다. 가슴 한구석을 콱 틀어막고 있던 무언가가 사르르 녹아서 흘러내려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럼, 조금만 더 놔둘까? 동생이 자기 감정을 추스릴 수 있을 때까지. 똑똑한 녀석이니 어머니에게 부담을 줘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거다. 다만 시간이 조금 필요할 뿐. 진우는 피식 웃으며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가족의 재회를 축하라도 해 주려는 듯 화창한 날씨였다. 우두커니 계속 창밖만 바라보고 있기가 그래서 진우는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 무시무시할 정도로 많은 연락이 와 있어서 하나하나 답장을 보낼 엄두가 나지 않았다. 미수신 통화와 문자 목록을 주르륵 내리던 진우가 창을 닫았다. '급한 일이면 알아서 다시 연락들 하겠지.' 응답을 포기한 진우는 인터넷 창을 띄웠다. 그런데. '헉!' 무심코 포털 뉴스로 들어갔던 진우가 이마를 짚었다. [서울 도심 상공에 마수 출현?] [비행 마수의 목적지는 어디?] [대응하지 못한 헌터협회. 시민들의 안전은?] 인터넷 뉴스들이 카이셀의 사진으로 도배되어 있었다. 집 근처에서 이곳 병원까지. 거리는 멀지만 순식간에 날아와서 별말 안 나올 줄 알았더니. '짧은 시간에 많이도 찍혔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이라면 카이셀 위에 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은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 어제 카이셀을 불러낼 때는 남들의 시선 따위 신경 쓰지 않겠다는 마음가짐이었는데, 막상 화제가 된 걸 보니 기분이 묘했다. '하긴.' 누구라도 하늘에 떠 있는 마수를 보면 심장이 철렁하겠지. 진우는 불안감으로 가득 차 있는 기사들을 훑어보면서 앞으로는 조심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일부러 사람들을 겁줄 필요는 없으니까.' 애초에 네크로맨서라는 직업이 꺼림칙했던 이유도 사람들의 시선을 감당하기가 힘들까 봐서가 아니었던가. '근데 겨우 날개 달린 도마뱀에 이 정도 열기라면 거대화시킨 어금니 반응은 진짜 볼 만하겠는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무렵. 우우웅- 우우웅전화가 몸을 떨기 시작했다. '누구지?' 못 보던 번호에 진우는 병실을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성진우 헌터님. 중저음이지만 어둡지 않은 노인의 목소리. 진우는 단박에 목소리의 주인을 기억해 냈다. "협회장님?" -예. 헌터협회 고건희입니다. '협회장님이 전화를?' 천하의 헌터협회장이 무슨 일로 직접 전화를 다 걸었을까? 병원 복도에 사람들이 좀 오고 가는 걸 본 진우는 한적한 곳을 찾아 이동하며 물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이미 소식은 들으셨겠지요. '소식?'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안 되겠다 싶어 다시 물었다. "무슨 소식을 말씀하시는 건지...?' -혹시 뉴스 보신 적 없으십니까? 이야, 소식 한번 빠르네. 진우는 순순히 인정했다. "그건 죄송하게 됐습니다. 앞으로는 조심하겠습니다." -예? 당혹해하는 고건희의 목소리에서 진우는 자신이 뭔가 잘못 짚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카이셀 이야기가 아닌가?' 그거 말고 신문에 나올 짓은... 이중 던전, 레드 게이트, A 급 던전 클리어, '탐욕의 구슬' 등등. 따지고 보니 너무 많았다. "...무슨 일이죠?" -정말 아무 말도 못 들어 보신 모양이군요. "연락이 좀 힘든 곳에 있다 와서요."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놀랍다는 반응을 보이던 고건희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낮게 깔리었다. -헌터님. 경험상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가 본론이라는 의미였다. -제가 찾아뵙고 말씀드려도 되겠습니까? 진우의 의아함은 처음 전화를 받았을 때보다 더 커졌다. '협회장님이 직접 전화를 건 것도 모자라서 만나러 오기까지 한다고?' 얼마나 중대한 사안이기에 몸소 나서는 것일까? 그래도. 진우는 어머니가 계신 병실 쪽을 바라보았다. '여기로 협회장을 부를 수는 없지.' 괜히 어머니 일로 말을 지어 내야 할 필요가 생길지도 모르니까. "제가 가겠습니다." -그래 주시겠습니까? "네." 그편이 더 편했다. 빠르게 약속을 잡은 진우가 어머니께 잠시 어디 좀 다녀오겠다며 인사를 드리고 병원을 나섰다. 태양이 없던 악마성에서만 지내다 햇살을 마주하니 눈이 간질거렸다. 진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귀찮은데 그냥 카이셀을 불러 낼까?' 잠깐 고민하던 진우가 피식 웃으며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택시로 향했다. = 111 화 영상은 충격적이었다. 도로 위 감시 카메라에서 녹화된 영상이었다. 한적한 찻길. 영상을 빠른 속도로 재생해도 지나치는 차량이 몇 대 없을 정도로 매우 조용한 도로였다. 인적 드문 시외나 시골 같은 곳에서 촬영된 것이 아닐까 짐작되는 영상이었다. 곧 빠르게 재생되던 화면이 느려지기 시작했다. 그때. 화면 끝부분에서 승용차 한 대가 나타났다. 차는 빠르게 달리고 있었다. 느린 영상 속에서도 차의 속도가 느껴졌다. 그런데 눈 깜짝할 사이. 달리는 차 앞에 검은 물체 하나가 내려섰다. 인간처럼 두 발로 서 있는 검은 생명체였다. 갑작스런 상황에 차는 속도를 줄이지 못했다. 그러나 차와 생명체가 부딪치는 일은 없었다. 충돌하기 직전, 차가 공중으로 솟구쳐 버린 것이다. 정면에서 달려오는 중형급 승용차를 한 손에 던져 버린 검은 생명체는, 뒤집힌 차에서 의식을 잃은 사람을 끄집어내 머리부터 먹기 시작했다. 와그작, 와그작감시 카메라에 녹음 기능이 있다면 분명 그런 소리가 날 것 같았다. 영상은 거기서 끊겼다. 진우는 협회장실의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한 대형 TV 에서 눈을 떼고, 맞은편의 고건희 협회장을 바라봤다. 고건희는 탁자 위에 리모컨을 조용히 내려놓았다. "3 백 명." 누구와는 다르게 그는 이웃 나라의 불행을 가볍게 이야기하지 않았다. "저 개미 한 마리가 죽인 사람의 숫자입니다." "일본의 대응이 늦었던 겁니까?" "그렇지는 않습니다." 고건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헌터들이 현장에 도착하기까지 채 30 분이 걸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짧은 시간 사이에 마을 하나가 사라졌지요." 일본은 아시아에서 손꼽히는 헌터 시스템 선진국. 그런 일본에서도 이만한 피해자가 나왔는데, 개미가 한국으로 날아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몇 번이나 돌려 본 영상이지만 아직도 아찔함을 느끼는 고건희였다. '더 늦기 전에 개미 녀석들을 박멸해야 한다.' 작전 개시는 나흘 후. 일본 측에서 얼마 전부터 작전에 참가하는 한국 헌터들의 최종명단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고건희가 한국 측 대표의 권한으로 최종명단 발표를 연기시켰다. 이유는 단 하나. 그동안 진우와 연락이 닿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최종명단을 확정 지을 수 있는 순간이 왔다. 고건희는 떨리는 심정으로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제주도로 가서 개미 놈들을 제거할 겁니다." 이어 간절한 눈빛으로 말했다. "그러려면 성진우 헌터님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고건희는 긴장된 낯빛을 했다. 만약 진우가 거절한다 해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진우는 길드에 소속되어 있는 것도 아니고, 협회의 요구를 이행해야 할 의무도 없었다. 결정은 전적으로 진우의 의사에 달려 있었다. 고민 끝에 진우가 입을 열었다. "저는." *** 협회장과의 면담을 끝낸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나려다 무언가를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뭐지?' 가까운 곳에서 마력 충돌이 이어지고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 처음엔 어디서 던전 브레이크라도 일어났나 싶었지만, 이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수의 기척은 전혀 없이 헌터들의 마력만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무슨 일 있으십니까?" 진우를 배웅하기 위해 먼저 일어나 문 쪽에 다가가 있던 고건희 협회장이 뒤돌아보았다. "별일은 아닙니다만... 근처에서 헌터들이 싸우고 있는 것 같아서." "그럴 리가요." 고건희는 허허 웃음을 터트렸다. 어떤 간 큰 헌터들이 감히 헌터협회 본부 근처에서 싸움을 벌인단 말인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가만... 성진우 헌터님의 고개가 향하는 방향이?'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지금 체육관에서 S 급 헌터들이 몸을 풀고 있을 겁니다. 혹시 그걸 말씀하시는 겁니까?" '몸풀기?' 확실히 그거라면 이렇게 연속적으로 발생하면서도 절제된 마력 충돌이 설명된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렇군요." 진우는 바라보는 고건희의 시선에 놀람이 어렸다. '이 거리에서 그게 느껴진단 말인가?' 협회의 체육관은 밖으로 흘러나가는 마력량이 최소화되도록 설계되어 있었다. 실제로 고건희 본인조차 아무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런데 진우는 그곳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을 눈치챘을 뿐만 아니라, 마력끼리 부딪치고 있다는 것까지 맞췄다. '도대체 기감이 얼마나 뛰어난 것인지...' 도저히 짐작조차 힘들었다. "참, 헌터님도 한번 가 보시겠습니까?" 고건희가 가볍게 권유했다. S 급들이 한자리에 모이는 일은 흔치 않았다. 다른 S 급들의 실력을 가까이서 체감해 보는 것도 최근에 S 급이 된 성진우 헌터에게는 많은 공부가 되리라. "고토 류지 씨도 거기 같이 있습니다." 가벼운 마음으로 구경이나 한번 해 볼까 했던 진우가 멈칫했다. "고토 류지라면 혹시...?" "예." 헌터라면, 아니 헌터가 아니더라도 누구나 한번쯤 들어 봤을 일본 최강의 이름이었다. "그 고토 류지 씨가 맞습니다. 한국에 머물면서 한일 양측 헌터들의 의견을 조율하고 있지요. 내일 떠난다고 하니 오늘이 아니면 만날 기회가 없을 겁니다." 국내 최고의 헌터들이 모여 있는데다 일본 최강까지 같이 있다? '이런 기회를 놓칠 수는 없지.' 진우는 흥미로운 얼굴로 고건희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 그 시각 고토는 필사적으로 하품을 참고 있었다. '이게 한국 최고라는 것들의 실력인가?' 형편없다. 아니, 보잘것 없다. 형편없다는 것은 객관적인 평가라 할 수 있었고, 보잘것없다는 것은 평가에 동정심을 섞은 결과였다. '이런 이들의 손에 안전을 맡겨야 할 국가라면 차라리 우리 일본의 보호를 받는 것이 낫지 않은가?' 고토는 비릿하게 웃으며 헌터들을 둘러보았다. 딱 하나. 한국에서 만난 S 급 중 유일하게 쓸 만한 헌터가 보였다. '차해인이라고 했던가?' 하지만 그래 봤자 일본의 최상급 헌터들과 엇비슷한 수준일 뿐. 일본의 베스트 멤버들과 견주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하긴 어쩔 수 없는 일인가.' 한국은 작은 나라에 인구도 얼마 없었다. 그런 곳에서 최고의 능력을 각성한 이가 하필이면 살날이 얼마 남지 않아 싸우기도 힘든 노인이라니. '고건희 정도면 우리 베스트 멤버와 견주어도 손색이 없겠지만...' 한국 입장에서는 운이 나빴다고 할 수밖에. 한국 헌터들의 역량 파악은 대충 끝이 났다. 한국에 있었던 진짜 목적을 달성한 것이다. '토벌 때 우리가 철수하면 5 분도 못 버티고 나자빠지겠군.' 더 이상 볼 것도 없다고 판단한 고토가 돌아서려는데, 입구 쪽으로 다가오는 누군가가 보였다. '음...?' 고토의 눈썹이 씰룩거렸다. 이렇게 거리가 가까워질 때까지 누군가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눈으로 보고 있는 지금도 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암살자 타입의 헌터인가.' 고토가 옆의 통역을 담당하는 헌터협회 직원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누구입니까?" 직원이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한참을 응시하더니 겨우 대상의 얼굴을 알아보고 미소를 지었다. "아, 요번에 새로 S 급 헌터로 등록하신 분입니다." "아하..." 그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는 재각성자 말인가. 한국에 남아 있는 동안 그의 정보도 캐 가고 싶었는데 마침 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토는 빙글빙글 웃으며 물었다. "제법 뛰어난 암살자인가 보군요." "예?" 직원이 뭔 소리인가 하는 얼굴로 돌아보자 고토도 의아해했다. "제가 무슨 실수라도?" "아뇨, 그게 아니라." 직원은 입구로 돌아서는 진우를 가리키며 말했다. "저분은 마법계열 헌터시거든요." '그럴리가?' 고토는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으로 직접 헌터협회 사이트에 접속해 S 급 헌터 목록을 확인했다. 번역 프로그램이 한국어로 된 S 급 헌터들의 정보를 바로 읽을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성진우, S 급, 마법계열.] 진짜였다. 프로필 사진과 대상의 얼굴은 일치했다. '진짜 마법계열이라고?' 고토가 경악하며 놀란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남자는 어느새 지척까지 다가와 있었다. *** '이 사람이 고토 류지인가?' 진우는 한눈에 일본 최강의 헌터를 알아보았다. 샤프한 스타일의 장신. 깔끔하게 다듬은 수염. 언뜻 보면 일본의 배우 같은 느낌이 드는 남자였다. '근데 왜 날 계속 쳐다보는 거야?' 뚫어져라 보고 있는 시선이 막 불쾌하게 느껴지려 할 때, 그가 눈인사를 보내왔다. 처음 보는 얼굴이라 그랬나. 진우도 별생각 없이 가볍게 눈인사로 답했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실내의 중앙에서 웃통을 벗고 있는 백윤호와 초거구의 중년 사내가 대련을 하고 있었다. 고토를 제외한 모두가 흥미로운 시선으로 그들을 지켜보았다. 쉭-! 백윤호는 순식간에 다가오는 사내의 손을 쳐 내고 하체를 비틀어 강한 로우킥을 넣었다. 퍽! 그러나 예상과 달리 얼굴을 찡그린 쪽은 백윤호였다. '오호.' 진우는 알 수 있었다. 그 찰나의 순간에 초거구의 사내가 강화 스킬을 사용해 다리를 방어했다. 몸집이나 스킬로 봐서는 탱커 계열인 것 같은데 민첩 스탯도 보통 수준을 넘어선 듯했다. S 급답다면 답다고 할까. 초거구가 피식 웃었다. "백 사범! 젊은 사람이 이렇게 힘을 못 써서야." "저는 사범이 아닙니다, 마 사범님." 마 사범이라 불린 초거구가 허허 웃으며 자기 도복의 허리끈을 쥐었다. 스모를 할 것 같은 덩치로 유도복을 입고 있어서 그런지 어색한 느낌이었다. "그럼." 잠시 옷깃을 여미던 초거구가 다시 득달같이 달려들었고, 백윤호도 마력을 해방하며 반격을 시작했다. 두 사람 다 즐거운 표정. 밀어붙이는 마 사범도, 밀리는 백윤호도 신나 보였다. 아무래도 S 급끼리 만나는 자리가 흔치 않다 보니 평소 억눌러 두었던 힘을 발산하며 실컷 즐기는 모양이었다. "그래도 백윤호 씨가 진짜 전력을 다해 싸우면 마동욱 씨는 버틸 수 없을 겁니다." 최종인이 옆에서 말을 걸어 왔다. 진우가 돌아보자 그가 목례를 했다. 진우도 인사를 받았다. 대화는 그 뒤에 이어졌다. "저 도복 입은 사람이 명성의 마동욱입니다." 아. 어디서 들어 본 이름이다 했더니, 명성 길드의 마스터였다. 고개를 끄덕이던 진우가 넌지시 물었다. "딱히 봐줘야 할 정도로 약한 상대도 아닌 것 같은데 왜 힘을 숨기는 거죠?" "보는 눈이 많으면 힘을 쓰기가 좀 그렇죠. 백 사장은 싸울 때 진짜 괴물로 변하거든요." 레드 게이트. 그 앞에서 진우는 백윤호의 짐승 같은 눈을 본 적이 있었다. '눈만 변하는 게 아니었나 보네.' 백윤호의 변신 능력처럼 가끔 최상급 헌터들 중에서는 독특한 힘을 가진 이들이 있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힘. 남들 눈에는 자신도 마찬가지로 보일 터였다. '괴물로 변하는 사람이나, 괴물들을 불러내는 사람이나.' 자신이 신기해하는 만큼 남들도 자신을 신기하게 여길 거라 생각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단지 백윤호가 괴물로 변할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다고 느꼈을 뿐. 백윤호와 마동욱의 대결 자체는 그다지 볼 것이 없었다. '느려.' 굳이 집중하고 있지 않아도 두 사람이 주고받는 공방을 모두 읽을 수 있을 정도였다. 그때. "어?" 무언가를 발견한 백윤호가 움직임을 멈췄다. 동시에 마동욱도 정지했다. 두 사람의 시선이 사전에 짜기라도 한 것처럼 동시에 진우를 향했다. 지루하다고 생각한 게 너무 티가 났던 걸까? '...?'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려 있었다. 진우는 곧 이유를 알았다. '내가 아니라, 내 뒤...' 고개를 돌리자 고토가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 눈빛. 옆의 통역이 고토를 대신해 말을 전해 주었다. "헌터님, 고토 씨가 헌터님께 드릴 말씀이 있다고 합니다." 고토가 접근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말을 걸지는 몰랐던 진우가 의아하다는 시선을 보냈다. '이 사람, 아까부터 시선이 이상하더니...' 진우의 불쾌함이 전해졌던 걸까. 고토가 조용히 물었다. "당신과 한번 겨뤄 볼 수 있겠습니까?" = 112 화 별 뜻은 없었다. 고토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은 한국 최상급 헌터들의 기량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기 위한 것. 그들 중 조금 특이한 자를 발견해 호기심이 생겼을 뿐이다. '진짜 마법계열인지 아닌지는 금방 알게 되겠지.' 고토는 아직도 눈앞의 사내가 전투계열 헌터가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다. 데이터(Data). 이번 토벌 작전 때 혹시나 모를 변수를 제거하기 위해서라도 성진우의 정보가 필요했다. '반쯤은 그냥 재미 삼아서지만...' 고토는 씩 웃었다. 고토가 하는 말을 듣고 있던 통역 담당이 화들짝 놀라며 물었다. "고, 고토 씨, 진심이십니까?" "제가 방금 했던 말 그대로 이분에게 전해 주시길." "아니, 그래도..." "무슨 문제라도 있습니까?" 고토는 능청스럽게 물었다. 한국 헌터들은 모두 몸을 풀고 있는데 왜 자신은 안 되냐는 말투였다. 통역은 진땀을 흘리다 마지못해 대답했다. "아... 알겠습니다." 고개를 돌려 진우와 눈이 마주친 통역이 머뭇거리다 말했다. "고토 씨가... 한번 연습해 보실 생각이 없냐고..." 무엇을 연습하자는 말인지는 따로 설명할 필요도 없었다. 진우의 시선이 고토를 향했다. 고토는 속을 알 수 없는 미소를 보이며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 실력을 한번 보고 싶다는 건가?' 고토 류지 정도 되는 유명인이 고작 자기 실력을 뽐내려고 이렇게 눈에 띄는 짓을 벌일 리가 없었다. 그게 목적이었다면 차라리 국내 1, 2 위 길드를 이끄는 최종인이나 백윤호를 노렸을 터. '무슨 속셈인지는 몰라도...' 아까부터 보내던 노골적인 시선도 그렇고, 아무래도 고토의 관심사는 자신인 듯했다. 그런데. 진우는 느닷없이 고토의 제안이 싫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흥미로웠다. 악마성에서 키운 힘을 시험해 보고 싶기도 했고, 일본 최고라는 헌터의 실력이 궁금하기도 했다. 상대의 실력이 궁금한 것은 고토 뿐만이 아니었다. '...음?' 미소를 짓던 고토의 얼굴에 미묘한 주름이 생겼다. '웃어?' 당연히 난처해하다 내뺄 것이라는 자신의 예상과 달리 성진우라는 자의 얼굴에 여유가 보였다. 믿는 구석이라도 있는 것일까? 아니면 이 상황이 너무 곤란한 나머지 실소를 흘린 것일까? 답은 금방 나왔다. 진우가 통역에게 뭔가를 이야기했고, 통역은 듣자마자 펄쩍 뛰어올랐다. 만류하려는 듯 보이는 통역과 웃으며 진정시키려 하는 진우. 죄다 한국어라 알아들을 수 없었던 고토가 이맛살을 찌푸렸다. '뭐라고 하는 거야, 대체...' 예스 혹은 노우. 이렇게 간단하게 답이 나올 문제에 제삼자인 통역 담당이 저리 쩔쩔맬 이유가 어디 있을까? 슬슬 인내심이 바닥을 드러내 가는 고토에게 통역이 진우의 눈치를 살피며 말했다. "저어... 고토 씨." 보는 눈들만 아니었으면 뜸 들이지 말고 빨리 말하라며 닦달이라도 했을 텐데. 고토는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억지로 눈썹을 씰룩이며 통역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성진우 헌터님이 승낙하셨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조건이 있으시답니다." '조건?' 꽁지를 내릴 줄 알았던 상대가 제안을 받아들인 데다 조건까지 내걸다니. 이번에는 고토도 당혹감을 숨기지 못했다. "무슨 조건입니까?" "성진우 헌터님께서..." 통역은 다시 한 번 진우의 눈치를 살폈고,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고토 씨가 전력을 다할 생각이 있으시면 응하겠다고 하십니다." 고토의 시선이 휙 돌아갔다. '진심으로 하는 소린가?' 진우의 표정을 보니 농담으로 하는 소리는 아닌 듯했다. 고토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설마... 내가 누군지 모르나?' 아니, 설사 지금까지 몰랐었다고 하더라도 방금 통역 담당에게 설명을 들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뜻을 굽히지 않았음은 오만인가, 착각인가. '...재미있겠군.' 어느새 고토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가볍게 수준을 맞춰 가며 상대의 실력이나 한번 살펴보고 끝낼 작정이었는데, 생각이 달라졌다. 다행히 근처에 S 급 힐러도 있으니 큰 사고는 없으리라. "좋습니다." "헉!" 통역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성진우 헌터야 이제 막 S 급이 돼서 넘치는 혈기를 주체하지 못한다고 해도, 산전주전 다 겪은 고토 씨까지 왜 이러실까? 그러나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분위기가 되어 가고 있었다. "저기 일본 헌터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야?" "저거... 성진우 헌터인데?" "뭐야? 대련이라도 할 참인가?" 마주 선 두 사람 주위로 체육관에 남아 있던 S 급 헌터들과 협회 관계자들이 몰려들었다. 다들 걱정 반 기대 반으로 상황을 지켜보고 있는 가운데, 차해인도 헌터들 옆에 가서 섰다. '괜찮을까...?' 상대는 S 급 헌터만 스무 명이 넘는 일본에서도 정점에 선 남자. 그리고 성진우 헌터는 E 급 때의 경력을 제외하면 S 급이 된 지 이제 며칠밖에 되지 않은 신참이었다. 원래라면 성진우 헌터를 말려야 하는 게 맞을 것이다. 차해인이 소속된 헌터스 길드 입장에서 성진우 헌터는 정예 공격대 전원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 은인이 다치는 것이 불 보듯 뻔한 데도 가만히 지켜보고 있을 정도로 차해인은 염치없는 여자가 아니었다. 하지만. 말리러 나서려고 할 때마다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A 급 던전의 보스와 백 마리가 넘는 하이오크들을 앞에 두고서도 방해하지 말라는 시선을 보내던 진우의 모습이. 당시 진우가 보여 주었던 강렬한 시선만 떠올리면 가슴이 뛰면서 묘한 기대감이 솟구쳤다. 그래서 앞으로 나서지 못하고 아랫입술만 살짝 깨물었다. 그때. "오늘은 헌터들 옆에 있어도 괜찮으신가요?" 어느새 옆에 선 백윤호가 물어 왔다. 과거에 몇 차례 같이 레이드를 펼친 적 있던 백윤호는 차해인의 증상을 알고 있었다. "제주도에 가서도 코를 막고 있을 순 없으니까요." 차해인의 대답에 백윤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엔 차해인이 물었다. "백 사장님은 성진우 헌터와 구면이라고 하셨죠?" "네." 차해인은 백호 길드도 헌터스와 마찬가지로 성진우 헌터에게 도움을 받았다는 기억을 상기했다. "그럼 성진우 씨를 말려야 하시는 거 아닌가요?" "그게 정상이겠죠." 상대는 그 '고토'니까. 차해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럼 왜...?" 백윤호는 고개를 돌려 차해인과 시선을 마주하며 대답했다. "차 헌터님과 같은 이유입니다." 움찔. 차해인은 백윤호에게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놀랐다. 늘 담담하던 그녀의 표정에 약간의 변화가 생겼다. "무슨..." "이상하게 기대감이 들지 않습니까?" 부인할 순 없었다. 지금도 '혹시 성진우 헌터라면' 하는 마음에 가슴이 뛰고 있었으니까.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싱긋 웃으며 대답한 백윤호가 다시 진우와 고토 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의 시선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 성 헌터가 내 예상대로 성장이 가능한 각성자라면...' 드디어 확인할 수 있는 순간이 온 것이다. 고토가 먼저 주먹을 들었다. 가까이 있던 통역 담당은 허둥지둥 자리를 벗어났다. S 급 두 사람이 맞붙는 데다, 한 사람은 일본 최강의 헌터라고 일컬어지는 사내였다. 일반인은 휘말리기만 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 통역 담당이 안전한 거리까지 빠지는 것을 지켜보던 진우도 뒤늦게 손을 들어 올렸다. 아니, 들어 올리려고 했다. 그때. 쉭! 조금의 딜레이도 없이 뻗어진 고토의 주먹이 진우의 머리가 있던 곳을 갈랐다. 고토의 눈이 커졌다. '빗나갔다?' 진우를 한 방에 쓰러뜨리고 구겨진 체면을 회복하려 내질렀던 일격이 허사로 돌아간 것이다. 고개를 옆으로 숙여 주먹을 피해낸 진우가 가볍게 거리를 벌렸다. 반응 속도가 놀라울 정도였다. '이러고도 마법계열이라고?' 웃기는 소리. 역시 자신의 눈은 정확했다. 왜 한국 헌터협회에서 저 남자의 능력을 숨기고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저 남자는 전투계열, 그것도 암살자 타입이 분명했다. 민첩한 움직임과 소리 없는 걸음. '남들은 다 속일 수 있을지라도 내 눈은 속일 수 없지.' 고토가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좀 더 벗겨 내 주마. 네가 가진 밑천을 다 드러낼 때까지. 고토는 오랜만에 흥미가 끓어올랐다. 고토와 적당히 멀어진 진우는 가만히 서서 자신의 심장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두근, 두근, 두근. 가슴이 뛰었다. 고토에게서는 다른 S 급 헌터들과는 격이 다른 강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고토의 남다른 기운이 피부에 와닿을 때마다 가슴속에 차오르는 감정은 강한 자신감이었다. '저 남자가 일본 최고...' 레벨을 97 까지 올리는 동안 자신이 얼마나 달라졌는지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강한 자신감은 표정에 뚜렷하게 나타났다. 반대로 고토의 얼굴은 굳어졌다. '또 웃어?' 감히 내 앞에서? 고토가 숨을 훅 뱉어냈다. 그가 내뿜는 어마어마한 마력이 내부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지켜보던 헌터들이 화들짝 놀랐다. '이거 말려야 하는 거 아냐?' '고토 류지, 이거 진짜로 할 생각인가 본데?' 반면 진우는 옅게 웃었다. 바라던 바였다. 고토는 자신이 마력을 개방했는데도 진우에게서 주눅 드는 낌새가 없자, 속에서 뭔가 욱하고 올라오는 것을 느꼈다. 번뜩이는 고토의 안광! 다른 헌터들이 막아서기 전에 고토가 먼저 성난 맹수처럼 달려들었다. 순식간에 좁혀진 거리, 뻗어 나온 고토의 손끝, 그러나 진우는 아슬아슬하게 몸을 젖혀 피했다. '...!' 고토의 눈동자가 떨렸다. 이걸 피해? 이것도 우연인가, 아니면...? 머릿속에서 여러 생각이 교차하는 동안에도 손은 멈추지 않고 무차별적인 공격을 쏟아내었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제대로 적중하지 못하고 전부 아슬아슬하게 빗나가거나 막혔다. '어떻게 이런 일이...?' 고토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현란하게 공격하는 고토와 가까스로 피해내는 진우. 헌터들은 두 사람을 보고 감탄했다. "무서운 공격이다." "눈으로 좇아가기도 힘든 움직임이야." "성진우 헌터도 잘 버티는데?" "일본 최강을 상대로 저만큼 피해낼 수 있는 게 어딘가?" 차해인은 속으로 몇 번이나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진우 헌터는 지금 버티고 있는 게 아니야.' 다른 이들의 눈에는 진우가 고토의 끊임없는 공격에 손쓸 틈 없이 끌려다니는 것으로 보였지만, 실상은 그 반대였다. 차해인은 경악스런 눈으로 침을 꼴깍 삼켰다. '고토의 공격이 끊임없이 이어지도록 다음 공격을 유도하고 있어!' 자신의 눈이 틀리지 않았다면... 성진우 헌터는 수준을 맞춰 가며 상대의 역량을 파악하고 있었다. 그건 상대보다 몇 수 위의 실력을 가지고 있을 때만 가능한 일이었다. '말도 안 돼...' 그 말도 안 되는 일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었다. 어쩌면 저 두 사람을 말려야 하는 이유는 성진우 헌터가 위험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반대로... 차해인의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차해인은 옆에서 부들부들 떨고 있는 백윤호를 발견했다. "백 사장님...?" 자그마한 목소리로 불렀지만 백윤호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진우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백윤호의 안색을 살피던 차해인이 흠칫 놀랐다. '백 사장님의 눈이...' 백윤호의 두 눈은 짐승의 그것처럼 노랗게 빛나고 있었다. 세로로 쭉 찢어진 눈동자가 충격에 잘게 떨렸다. 차해인이 걱정스럽게 쳐다봤지만 백윤호는 그녀가 자신을 바라보는 줄도 모르고 있었다. 백윤호는 지금 '마수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내가... 내가 맞았어.' 진우의 힘은 협회 앞에서 그를 마지막으로 봤을 때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강대해져 있었다. '성장하는 헌터라니...!' 온몸이 전율로 떨려왔다. 그때. "아." 진우를 응시하던 백윤호가 순간 무의식적으로 침음성을 내었다. 옆에 있던 차해인도 소름 끼치는 기운을 느끼고 급히 고개를 돌렸다. "아!" 불과 몇 초전. 자신이 진우의 페이스에 휘말려 들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사람이 바로 고토였다. 항상 '최강'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던 고토는 자존심이 송두리째 하수구로 처박히는 느낌이었다. '감히 나를 상대로...?' 빈틈을 정확히 노리고 들어갔던 일격마저 진우가 간발의 차로 흘려보내자, 분노한 고토의 두 눈에 진득한 살기가 어리었다. '죽인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고토의 살의가 찌릿하게 피부로 느껴졌다. '살기?' 심장이 철렁했다. 누군가가 자신에게 살의를 품으면, 시스템은 메시지를 띄운 후 긴급 퀘스트를 부여한다. 만약 여기서 고토를 죽이라는 퀘스트가 뜬다면...? 띠링! 때마침 터져 나온 기계음에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경고! 살의를 가진 이가 주변에 있습니다!] 다행히 경고 메시지만 떴을 뿐, 황동석이나 강태식 때와 달리 긴급 퀘스트는 뜨지 않았다. 그러나. 쉭-! 진우의 눈을 노리고 날카롭게 들어온 고토의 손끝이 진우의 뺨을 베었다. 극한에 이른 반사신경으로 반응하여 고개를 틀지 않았다면 한쪽 눈을 잃었으리라. 명백한 살의가 담긴 공격이었고, 정확히 급소를 노리고 들어왔다. 연습 대결 중에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다. 뿌득. 순간, 공기가 변했다. "아." 진우를 응시하던 백윤호가 무의식적으로 침음성을 내었다. 바뀐 공기를 가장 먼저 느낀 이는 고토였다. 하나 몸으로는 이해했으되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했다. 싸늘한 한기에 소름이 돋고, 뒷목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처음 겪어보는 감각이었다. '이게 대체...?' 미처 뇌가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팔목이 진우에게 붙잡혔다. 힘을 줘봐도 뺄 수가 없었다. '무슨 힘이...' 잠깐 팔목으로 향했던 시선이 진우의 얼굴로 옮겨갔다. 얼음장같이 차가운 시선. 그러나 진우의 눈보다 더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잔뜩 팽창한 진우의 오른쪽 어깨와 팔뚝이었다. 힘껏 젖혀진 진우의 팔이, 팔 끝의 주먹이, 자신의 얼굴을 겨냥하고 있었다. 주변에 가라앉은 묵직한 공기가 어깨를 짓눌렀다. 갑자기 숨이 덜컥 막혀 왔다. 어째서일까? 그 순간 문득 고토는 머릿속에 '죽음'이라는 단어를 떠올렸다. 그때. "그만!" 본능적으로 달려 나온 백윤호와 차해인이 진우의 오른팔을 붙들었다. 백윤호는 거의 매달리다시피 해서 어깨를 안았고, 차해인은 양손으로 있는 힘을 다해 손목을 잡았다. 진우가 돌아보자 백윤호가 고개를 저었다. 차해인도 겁먹은 것처럼 보이는 얼굴로 긴장한 눈빛을 보내왔다. '...' 몸을 사리지 않았던 두 사람의 필사적인 만류 덕분에 진우는 겨우 흥분을 가라앉힐 수 있었다. "후." 진우는 짧게 숨을 내쉬며 고토의 손목을 놓아 주었다. 고토는 자유로워진 손목을 문지르며 뒤로 몇 걸음 물러섰다. 통역이 빠르게 고토 옆으로 다가왔다. 백윤호는 통역에게 말했다. "분위기가 너무 격해지는 것 같으니 연습 대결은 여기까지 하는 걸로 하죠. 일본인에게 말해 주십쇼." 통역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백윤호의 의사를 일본말로 전해 주자, 고토는 진우를 노려보다 인사도 없이 휙 돌아서 체육관을 나갔다. "고, 고토 씨!" 고토를 따라 나가는 통역의 목소리가 애처로웠다. 안도의 한숨을 내쉰 백윤호가 진우에게 머리를 숙였다. "방해해서 죄송합니다." "..." "저 사람은 며칠 뒤 일본 팀을 이끌어야 하는 사람입니다. 일이 잘못될 가능성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가만히 보고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백윤호는 진우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물었다. "제가 괜한 짓을 한 겁니까?" '아닙니다." 진우는 순순히 인정했다. 백윤호의 말이 옳았다. 고토가 잘못되기라도 해서 계획에 차질이라도 생긴다면 양국의 피해가 이만저만이 아닐 터. 시기적절하게 달려 나온 백윤호와 차해인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와상황이 정리된 듯하자 고토와 진우의 대결을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진우에게 다가왔다. 사람들의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먼저 다가온 사람은 명성 길드의 마스터이자 초거구를 지닌 마동욱이었다. "허허!" 마동욱은 웃으며 말을 붙였다. "그 천하의 고토를 상대로 볼에 작은 상처 하나 입고 끝내다니 보통이 아닌걸!" 아쉽게도 차해인과 백윤호 말고는 방금 무슨 일이 벌어졌었는지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오! 몸이 아주 단단해! 훌륭한 체격이야!" 마동욱은 진우의 어깨와 팔을 만져 보더니 감탄했다. "우리 길드는 죄다 마법계열들뿐이라 전투계열이 너무 부족해. 성 사범. 혹시 마음에 둔 길드가 없다면 우리 쪽으로 오지 않으시겠나?" "저기, 마 사범님." 한걸음 물러서서 조용히 사태를 관망하던 최종인이 나섰다. "음?" 마동욱이 고개를 돌리자, 최종인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성진우 헌터는 마법계열입니다." 마동욱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뭐?!" 한편. 체육관을 빠져나간 고토는 통역에게서 빠르게 멀어진 뒤 손목을 확인해보았다. '...' 손목에는 온통 시퍼렇게 멍이 들어있었다. 덥지 않은 날씨임에도 그의 이마에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는 폰을 꺼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대기음이 몇 번 울린 후 수화기를 들어 올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딸깍. -마쓰모토입니다. "협회장님." -고토? 자네 목소리가 왜 그런가? 고토는 떨리는 목소리를 진정시키려 애쓰며 말했다. "한국에... 한국에 엄청난 헌터가 있습니다." -자네보다 더?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 "계획을 조금 달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한참 말이 없던 마쓰모토가 무언가를 뒤적거리더니 다시 물었다. -그 헌터의 이름은? "성진우. 최근에 S 급이 됐다는 재각성자입니다." -이상하군. 그런 이름은 없네. "예?" 그런 이름이 없다니. 그럼 방금 만난 헌터가 귀신이라도 된다는 소리인가? 하긴, 귀신에 홀린 것 같은 기분이기는 했다. 하지만 자신이 직접 협회 홈페이지에 들어가 마법계열이라는 것까지 확인하지 않았던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성진우가 없다니요." -실은 방금 전 한국에서 최종명단을 보내왔다네. "거기 성진우가 없다는 말씀이십니까?" 그럴 리가. 고건희 협회장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렇게 강한 헌터를 빼놓고 레이드 멤버를 구성할 리 없지 않은가? 수화기 너머에서 마쓰모토가 차분히 말을 이었다. -최종인, 마동욱, 백윤호, 차해인, 임태규, 민병구. 계획의 변경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을 어필하려는 듯 마쓰모토가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이 여섯 명이 나흘 후 출발할 한국 팀 전력의 전부일세. *** 백윤호는 심호흡을 했다. 체육관 안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두 사람이 떠난 뒤에도 심장 소리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그게 가능한 일이었나?' 머릿속으로 가정만 하고 있던 일을 현실에서 직접 목격하자 백윤호는 경악을 감출 수 없었다. '정말로 성장하는 각성자라니...' 그의 가치는 얼마나 될까? 백윤호로서는 감히 짐작도 할 수 없었다. 진우를 영입하려는 최종인, 마동욱, 임태규의 노력을 멀리서 그저 지켜만 보고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손 놓고 있는 자신을 의아하게 바라보던 최종인의 눈빛이 아직도 기억난다. '나라도 다른 길드에는 안 들어가지.' 그래. 성진우 헌터를 영입하려는 시도는 헛수고다. 그러나 영입이 아니더라도 뛰어난 헌터와 관계를 이어 갈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었다. 플랜 B 를 가동시킬 차례였다. 그런데. 우웅핸드폰이 부르르 몸을 한번 떨었다. 떨림이 계속되지 않는 걸로 봐서는 분명 문자인데. 백윤호는 별생각 없이 주머니 속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협회에서 알리는 소식이었다. 나흘 후 개밀 토벌에 참여하는 최종명단의 공개. 길게 이어진 일본 헌터 목록을 슥 지나쳐 한국 헌터들을 살펴보던 백윤호의 눈이 커졌다. 벤치에 앉아 있던 그가 벌떡 일어났다. "성진우 헌터가 없잖아!" = 113 화 매스컴들이 후끈 달아올랐다. -제주도를 불모의 땅으로 만든 마수들을 퇴치하기 위하여 한일 두 나라가 손잡고 연합팀을 결성한다! 국민들의 호기심을 이보다 더 자극할 수 있는 이야기가 어디 있을까? TV 에선 매일같이 관련 프로그램을 내보냈고, 신문의 1 면은 항상 한일 연합팀 소식이었다. 하지만 들떠 있는 곳은 한국뿐. 작전에 참여하는 일본 헌터가 한국 헌터의 세 배가 넘는데도, 이상하리만큼 일본의 매스컴들이 조용하다는 사실을 눈치챈 사람은 없었다. 몇 개 안 되는 기사에 달린 일본인들의 댓글마저 부정적 반응 일색이었다. └한국이 허접해서 게이트 못 닫은 걸 어쩌라고?w └왜 우리가 한국이 싼 똥을 치워야 하냐 └개미들에게 입은 피해 보상은 해 주고 하는 말이지? └무능한 일본 헌터협회와 무책임한 한국 헌터놈들. 전부 제주도에서 나란히 뒈져 버렸으면 동상이몽. 같은 상황을 두고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는 가운데, 오직 시간만이 묵묵히 작전일을 향해 흘러가고 있었다. 그리고. 진우에게는 그 며칠이 어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이후부터 지금까지,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많은 것들이 달라졌다. 먼저 퇴원한 어머니를 모시고 집으로 돌아왔다. 덜컹. 문을 열었더니 진우가 악마성에 가 있는 동안 혼자 있었던 진아가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은 안쪽이 보였다. "..." 진아의 볼을 힘껏 잡아당기는 진우를 어머니는 웃으며 말려야 했다. 4 년 만에 의식을 찾은 어머니가 집으로 돌아와 첫 번째로 하는 일이 청소라니. 진우는 거듭 만류했지만 결국 어머니의 고집을 꺾을 수가 없었고, 가족 전원이 팔을 걷어붙였다. 집이 깨끗해지는 만큼 세 사람의 얼굴로 밝아졌다. 어머니가 입원한 뒤로 허전하게만 느껴지던 집이 드디어 꽉 찬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아주 오랜만에, 진우는 아무런 근심 걱정 없이 두 발 뻗고 눈을 붙일 수 있었다. 그리고 다음 날 아침 눈을 떠 거실로 나왔을 때. 식탁 위에 아침 식사가 차려져 있는 것을 보고 어머니가 돌아왔다는 사실을 비로소 실감할 수 있었다. 파를 다듬던 박경혜가 진우를 돌아보며 물었다. "잘 잤어, 아들?" 진우는 잠이 덜 깬 얼굴로 웃으며 대답했다. "...네." *** TV 속 전문가가 말했다. "개미 마수들이 보여 준 진화 속도는 정말 경이로울 정도입니다." 전문가 옆의 게스트는 과장된 표정을 지으며 물었다. "마수가 진화라뇨? 일본에서 발견된 개미는 그냥 변종이 아니었나요?" "맞습니다. 그리고 변종의 개체 수가 늘어나 집단 전체를 장악하게 되는 것, 그것을 우리는 진화라고 합니다." 이어 준비된 영상이 흘러나왔다. 1, 2 차 토벌 때 촬영된 개미 마수들의 모습이었다. 처음 나타났을 때만 해도 놈들은 보통 개미처럼 바닥을 기어 다녔다. 겉만 보면 크기가 어마어마하게 큰 개미와 다름없었다. 그러나 얼마 뒤. "이것이 3 차 토벌작전 때 찍힌 개미들의 모습입니다." 개미 마수들은 인간처럼 직립보행을 하고 있었다. 거대했던 머리가 훨씬 작아졌고, 좀 더 날렵하게 움직일 수 있게 되었으며, 네 개의 다리를 손처럼 쓸 수 있게 되었다. 개미와 인간이 반반씩 섞인 듯한 모습. 불과 2 년 만에 종의 특징 자체가 바뀐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가장 최근에 찍힌, 일본에 큰 피해자를 냈던 개미 마수의 모습입니다." 와아영상을 본 방청객들이 일제히 놀라움을 표현했다. 놀랍게도 개미의 모습은 더 인간과 비슷해져 있었으며, 등에는 커다란 날개까지 달려 있었다. 게스트로 참석한 개그맨이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저런 게 하늘을 날아다닌다고요?" "그렇습니다. 이번 한일 연합팀이 만들어진 결정적인 계기이기도 하지요." 한일 연합팀. 진우는 그 단어가 나오자 조용히 TV 를 껐다. 진우도 이번 작전에 빠지고 싶지 않았다. 고건희 협회장에게 참여해 달라는 제의를 받았을 때는 경험치를 쌓을 생각에 가슴이 다 두근거렸을 정도였다. 하지만. 흥분은 금세 가라앉았다. 그러자 상황을 좀 더 객관적이고 냉철하게 볼 수 있었다. '어머니가 깨어나신 지 만 하루도 되지 않았어.' 아직 아들이 헌터가 됐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어머니다. 그리고 옛날, 아버지가 게이트에서 실종됐다는 소식을 듣고 몇 달이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셨던 어머니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런 기억을 가지신 어머니를 두고 제주도에 가겠다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적어도 며칠 동안은 가족과 함께 있고 싶다. 간절히 기다려 오던 순간을 다른 일 탓에 제쳐 두고 싶지 않았다. "저는." 간신히 결심히 선 진우가 어렵게 말했다. "...빠지겠습니다." 경험치보다 더 소중한 것. 진우가 지금까지 이를 악물고 힘을 길러 왔던 이유였다. 그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단지. └근데 왜 한국 명단에 성진우는 빠져 있음? └S 급 됐다고 천성이 어디 가겠냐? 한번 E 급은 영원히 E 급이지. 오줌 지리면서 도망갔을 듯ㅋ └일본은 S 급 21 명 전원+한국도 은퇴한 헌터까지 참여... 근데 성진우는? └S 급이 돼 가지고 그러고 싶을까? 정말 쪽팔린다;; 사정을 알지도 못하는 불특정 다수의 손가락질이 신경 쓰일 뿐이었다. 정확히는 동생의 스트레스가. '나야 남이 뭐라 하던 상관없고, 어머니도 인터넷을 안 하니까 괜찮지만.' 진아는 이런 거 은근히 찾아보는 듯하던데. 쯧. 진우는 혀를 차며 핸드폰을 내려 놓았다. 하필 타이밍이 맞물려서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어머니는 일찍 잠자리에 드셨고, 동생이 올 시간은 아직 멀었다. 기분전환으로 바람이나 쐬러 나갈까 하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기가 막히게 전화가 울렸다. 진우가 발신인을 보며 씩 웃었다. 틱. -형님! 접니다, 유진호! "어. 진호야." 그러고 보니 진호는 아직도 모텔에 있는 건가? "방은? 아직도 모텔이냐?" -아닙니다, 형님. 얼마 전에 새로 방을 하나 구했습니다. 다행히 어머니께서 연락을 주셔서... 헤헤 웃는 소리를 간만에 들으니 나름대로 반가웠다. 잠깐 자신의 근황을 설명하던 유진호가 볼일이 생각났다는 듯 빠르게 말을 이었다. -참, 형님. 사무실 하나 봐둔 게 있는데 보러 오실 수 있으십니까? 무슨 사무실을 말하는 것일까? "사무실?" 진우가 의아한 목소리로 되묻자, 유진호가 당당하게 대답했다. -저희 길드 사무실 말입니다! 길드를 만들려면 사무실도 있어야죠, 형님. 유진호 이 녀석... 아무래도 자기가 부사장이 될 길드를 헌터스나 백호같이 그럴듯한 대형 길드로 키우겠다는 당찬 포부를 품은 듯했다. 진우가 턱을 긁적거렸다. '소속 레이드 멤버가 앞으로도 쭉 나 혼자라는 걸 알면 기겁하겠네...' 반쯤 지나가는 말로 이쪽으로 오라고 부르긴 불렀는데, 막상 자신이 구상한 길드에 대해 설명해 줘야 할 때가 오자 막막해지는 진우였다. *** "어떠십니까, 형님?" 유진호가 자신 있게 말을 꺼낸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진우는 사무실 내부를 둘러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위치도 좋고. "형님 자택에서 멀지 않은 곳 중 가장 좋은 데로 골랐습니다." 깔끔하고. "일부러 첫 분양 사무실로 얻었습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으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형님?" 결정적으로 더럽게 넓었다. '...' "앞으로 5 대 길드를 뛰어넘는 길드로 키워 보이겠습니다, 형님!" 유진호는 의욕에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본인이 불타오르는 것까지는 좋은데 나는 좀 빼 줬으면...' 진우는 심각하게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다시 유진 길드로 돌아가라고 할까? 아들 계좌까지 막아 버린 회장이 받아 줄 것 같진 않지만. 생각에 잠겨 있는 진우를 보고 유진호가 헉 하는 표정을 지었다. "형님... 마음에 안 드십니까?" "...아니다." "그럼 여기로 계약해도 되겠습니까, 형님?" "...그래." 크기를 보니 월세는 많이 들어가겠지만, 길드 수입에 비하면 월세 정도는 푼돈일 테니까. '당분간 꿈 정도는 꾸게 해도 괜찮겠지.' 앞으로 이 넓은 사무실을 너와 나만 쓰게 될 거라는 말을, 진우는 할 수 없었다. "아." 유진호가 손바닥을 쳤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은 누구로 하실 겁니까, 형님?" "남은 한 사람?" 뭔가 자리를 만들어 주기로 한 약속이 있었던가? 어지간한 약속은 거의 잊어먹지 않는 진우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보내자, 유진호가 신나서 설명을 이었다. "길드를 처음 만들 때는 최소한 세 명의 헌터가 있어야 합니다, 형님." 사장, 부사장, 직원. 이렇게 세 명이 창립 멤버의 최저기준인가? 가장 낮은 랭크인 E 급 게이트의 최소 공략 멤버 수가 세 명이란 것과 무관하지 않은 듯했다. '실제로 E 급 게이트를 공략하려는 길드는 없겠지만...' 창립 멤버라. 진우의 머릿속에 남은 한 명의 멤버를 누구로 할지를 두고 여러 얼굴들이 하나씩 스쳐 지나갔다. 조건은 헌터일 것. 그리고 기왕이면 활동할 의지가 전혀 없어서 머릿수만 채울 용도일 것. '어째 여자들 얼굴만 자꾸...' 헌터가 되기를 포기한 고딩이나 부산으로 돌아간 힐러의 얼굴이 잠시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때. "참." 유진호가 입을 열었다. 진우는 물었다. "누구 적당한 사람이라도 떠올랐어?" "아니요, 형님. 그게 아니라 형님을 찾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나를?" "네, 형님." 진우가 관심을 보였다. 직접 연락을 취하지 않고 유진호를 통해 우회적으로 연락을 시도한 걸 보면 자신을 꽤 조사한 듯 보였다. '아직 유진호와 공개적인 접점은 없는 상태니까.' 둘은 기껏해야 공대장과 공대원 사이에 불과했다. 그런데도 유진호를 통해 나를 찾고 있다? 진우의 눈매가 살짝 가늘어졌다. "누군데?" "저도 모르겠습니다, 형님. 영어를 쓰는 외국인이었는데, 잠시." 품을 뒤적거리던 유진호가 지갑에서 메모지 하나를 꺼냈다. "17 일까지 한국에 머무니까 꼭 좀 연락해 줬으면 좋겠다고 했습니다, 형님." 받아 든 메모지에는 휴대폰 번호와 호텔 방 번호, 딱 두 개만 남아 있었다. 뒷면을 뒤집어 봤지만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았다. '17 일이면 앞으로 3 일...' 영어를 쓰는 외국인이라, 누굴까? 마땅히 떠오르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집에 좀 가 봐야겠다." 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예? 벌써 들어가십니까, 형님?" 오랜만에 진우와 회식할 생각에 들떠 있던 유진호가 나라를 잃은 듯한 표정을 했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진우는 동생의 마음을 헤아려 주지 않았다. "먼저 들어갈게." 유진호는 금세 실망한 기색을 감추고 언제나처럼 깍듯하게 허리를 숙였다. "들어가십시오, 형...님?" 고개를 들었을 땐 이미 진우가 사라진 뒤였다. *** 골목골목 사이마다 깊은 어둠이 내려앉은 시간. 집으로 돌아가는 여대생 은지민의 심장은 미친 듯 쿵쾅거렸다. '아니겠지...' 뒤에서 따라오는 남자. 분명히 가는 길이 같아서 어쩔 수 없이 계속 발소리가 이어지는 중이리라. '게시판에서 봤어.' 이런 경우에는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도 몹시 곤란하다고. 걸음걸이는 남자가 더 빠르거나 비슷한데, 제치고 가자니 여자가 겁먹고, 따라가자니 의심을 사게 마련이고. 게다가 이 코너를 돌아가면 고장난 가로등까지 있는 음산한 골목이 나와서 양쪽 다 난처해질 수 있다. 은지민은 뒤를 힐끔 바라보았다. 모자를 쓰고 고개를 푹 숙인 남자는 조용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수상하긴 하지만 모자를 쓰고 다니는 게 죄는 아니다. 이렇게 거북한 동행이 이어질 바에는 차라리 내가 먼저... 은지민은 운동화 끈을 묶는 척하면서 걸음을 멈췄고, 남자는 그녀를 그대로 휙 지나쳐 앞으로 갔다. "휴-" 남자가 사라진 걸 보고 은지민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기도하듯 두 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다. '의심해서 죄송합니다, 이름 모를 아저씨.' 주변을 둘러보다 옷깃을 추스린 은지민이 미소를 띠고서 다시 힘차게 걸음을 옮겼다. 밀린 과제가 산더미! 기말시험까지 준비하려면 뛰어가도 시간이 부족했다. '범위가 어디까지더라?' 밤새 공부할 생각에 어깨를 축 늘어뜨리며 코너를 돌던 은지민의 눈이 커졌다. "소리 지르면 죽는다." 아까 자신을 지나쳐 갔던 남자가 모퉁이 바로 앞에서 식칼을 들고 눈을 희번덕거리고 있었다. "여기서 몇 명 죽은 거... 너도 알지?" "아..." 은지민은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파랗게 질린 얼굴로 얼어붙었다. 남자가 쓰고 있던 하얀색 마스크를 내리며 씩 웃었다. "따라와." 틱, 틱. 주변엔 사람 하나 없이 고장 난 가로등만이 깜박이고 있었다. = 114 화 "아... 사, 살려..." 은지민이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내며 뒷걸음질 쳤다. 아니, 치려고 했다. 하지만 발목에 무거운 쇳덩이라도 매달린 듯 걸음이 떼 지지가 않았다. 그저 눈물만 나올 뿐이었다. 남자는 주변을 살폈다. 여자가 움직이지 못할 것 같으니 그냥 여기서 해치울 생각이었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이런 후미진 골목에 감시 카메라 같은 게 있을 리도 없고. '이래서 이 동네가 좋다니까.' 남자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은지민의 복부를 향해 칼을 들이밀었다. 그러나 그 순간.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손이 칼날을 덥석 잡았다. "어?" 고개를 들어 보니 웬 사내놈이 서 있었다. 후드를 눌러쓰고 있어서 턱선밖에 보이지 않는,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었다. '장갑... 같은 걸 끼고 있나?' 칼날을 잡은 손에서는 피 한 방울 흐르지 않고 있었다. "너 뭐야?" 연쇄살인범은 몇 번 팔에 힘을 줘 보다가 칼이 꿈쩍도 하지 않자 손잡이를 놓고서 휙 돌아섰다. 그리고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별 이상한 새끼가..." 연쇄살인범은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그 이상한 놈이 주위를 둘러보며 계속 자신을 따라오고 있었다. '뭐야 저놈...?' 연쇄 살인범은 방향을 틀어 여자를 끌고 오려고 했었던 으쓱한 공터로 상대를 유인했다. 손을 뭔가로 보호하고 있다면 다른 곳을 공격하면 된다. 목적지에 다다르자 연쇄살인범은 조금씩 걸음을 늦춰 갔고, 속도를 유지하고 있는 이상한 놈과 슬슬 거리가 좁혀졌다. 둘의 간격이 한 발짝 정도가 되었을 때. "이 새끼가 보자 보자 하니까." 연쇄살인범은 휙 돌아서며 품속에 지니고 있던 송곳을 꺼내 남자의 가슴에 박았다. "내가 만만해 보이냐?" 푹! 가슴을 찌르고 있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뭐가 이렇게 단단해?' 방검복? 아니면 뭘 받히고 있나? 연쇄살인범이 물었다. "뭐야, 너? 안에 뭘 껴입고 있는 거냐?" 그가 조금이라도 마력을 느낄 수 있었다면 이런 멍청한 질문은 하지 않았을 테지만, 두 차례나 공격해도 가만히 있는 상대에게서 헌터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못했다. 후드 안에서 낮은 소리가 흘러나왔다. "나도 궁금한 게 있는데." 진우의 목소리였다. 진우는 아까 연쇄살인범에게 뺏었던 식칼을 바닥에 던졌다. "이런 짓은 왜 하는 거냐?" "왜? 설교라도 하시게?" "무슨 이유라도 있는지 궁금해서." 연쇄살인범은 코웃음 쳤다. 갑자기 튀어나와서 여자를 구해 주고, 그것도 모자라 계속해서 따라오기에 정의의 사도 흉내라도 내고 있는 줄 알았더니. '그냥 또라이잖아?' 어쩌면 자신과 같은 부류가 아닐까? 잘 구슬리면 좋게 끝날 수도 있겠다 싶어서 연쇄살인범은 흔쾌히 어울려주었다. "이유는 무슨. 뭐 굳이 찾는다면... 재밌으니까?" "재미?" "나는 이상하게 나보다 약한 걸 보면 막 괴롭혀 주고 싶단 말." ...이지. 연쇄살인범은 말을 잇지 못했다. "으아아아악! 으악!" 그는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인대가 끊어진 왼쪽 발목을 움켜쥐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어느새 진우의 손에 식칼이 들려 있었다. '바닥에 던져 놓은 걸 언제 주워서...?' 그때 또다시 진우의 인영이 흐릿하게 사라졌다. "으아아악!" 이번엔 오른쪽 발목. 연쇄살인범은 바닥을 뒹굴었다. 진우는 양쪽 발목 인대가 끊어져 움직이지 못하는 살인범의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과 지갑을 꺼냈다. "너, 너 뭐야, 이 새끼야!" 악을 쓰는 살인범을 무시하고 진우는 침착하게 119 에 전활르 걸어 구급차를 부른 뒤, 지갑에서 꺼낸 신분증을 확인했다. 그리고 핸드폰과 지갑을 파르르 떨고 있는 살인범의 손에 쥐여 주며 말을 이었다. "내일 오전 0 시까지 자수해라." "뭐?" "살고 싶으면." 할 말은 다 했다.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나기 전에 그림자 병사 하나를 연쇄살인범의 그림자에 심었다. 그리고 그림자 병사에게도 비슷한 명령을 내려놓았다. '하이오크 그림자가 얼마나 인내심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기다리는 건 못해도 그다음 명령은 하이오크의 전문 분야니까. "난 네가 살았으면 좋겠다." 목숨이 붙어 있어야 오랫동안 자기 잘못을 반성할 수 있겠지. "뭐... 뭐냐고, 대체 너?" 진우는 통증과 두려움에 벌벌 떨고 있는 연쇄살인범을 두고 천천히 공터를 벗어났다. 멀리서 구급차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한참 떨어진 곳까지 이동한 진우가 주변에 기척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 후드를 벗었다. "휴." 연쇄살인범을 발견한 병사가 신호를 보내와서 늦지 않게 도착할 수 있었다. 그림자 교환. 쓰면 쓸수록 편리한 스킬이었다. '괜히 최상급 룬석이 아니네.' 최근 여러 차례 그림자 교환의 위력을 실감한 진우가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스킬 레벨이 오르고 쿨타임까지 줄어든다면 앞으로 얼마나 더 활용성이 높아질지, 지금은 짐작도 가지 않았다. 그렇게 집으로 돌아가다가. '음?' 문득 고개를 들었더니 달이 어느덧 머리 꼭대기까지 와 있었다. '그러고 보니... 벌써 내일인가?' 한일 연합팀의 레이드. 코앞까지 다가왔다. 연합팀에 들어가지 않은 자신도 가슴이 뛰는데, 레이드 멤버들의 심정은 어떨까? 진우는 자신이 알고 있는 레이드 멤버들의 몇몇 얼굴을 떠올리며 레이드가 무사히 끝나기를 마음속으로 응원해 주었다. *** 야심한 시각. 고토는 일본 헌터협회의 도장에 나와 있었다. 고토의 앞에 두 명, 뒤에 한 명. 그와 같은 등급인 S 급 헌터들이 주변을 둘러싸고 있었다. 심호흡하던 고토가 눈을 떴을 때. "타하앗!" 기회를 엿보던 헌터들이 동시에 그를 향해 맹렬히 달려들었다. 그러나. 쿵! 쓰러진 것은 세 명의 헌터들이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역시 고토 상!" "상대가 안 되는군요." 도장의 나무 바닥에 누워 있던 세 명의 헌터가 훌훌 털고 일어났다. 고토가 힘 조절을 했기 때문이다. 고토는 수고했다는 의미로 말없이 그들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역시 내 컨디션에는 문제가 없다.' 굳이 평가를 내리자면 최상. 한국을 집어삼킬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컨디션이 쑥쑥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어째서... 고토는 세 명의 헌터가 떠나 텅 비어 버린 도장을 우두커니 바라보며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성진우. 그의 정체는 무엇인가? '...' 기억을 떠올리면 떠올릴수록 입맛이 썼다. 곧 고토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상관없는 일이다.' 어차피 성진우라는 자는 이번 레이드에 참여하지 않고, 협회장의 계획은 차질 없이 진행된다. 이번 일로 한국이 S 급 헌터들을 잃으면 주도권은 일본에게로 넘어올 수밖에 없다. 지금 한국에게서 타당한 대가를 받아 내라고 외치는 국민들의 원성도 그때쯤에는 이미 환호성으로 바뀌어 있을 터. 그때가 되면. '성진우 혼자서 무얼 할 수 있을까?' 성진우가 진짜 강한 헌터든, 아니면 자신의 착각에 불과했든 간에 그가 내일 레이드에 참가하지 않는 것은 일본의 호재였다. 거슬리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결전은 내일. 달빛이 비치는 적막한 도장 안에서 고토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방송국 국장이 일개 카메라맨에게 고개를 숙였다. 있을 수 없는 일. 하지만 국장의 앞에 있는 남자는 평범한 카메라맨이 아니었다. 무려 A 급 헌터 자격증을 소지한 현역 헌터인 것이다. "이번 레이드에 저희 방송국의 사활이 달려 있습니다." 중계권을 따 내느라 방송국 전체예산의 절반을 때려 부었다. 경쟁자들이 너무 몰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과감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배경이 있었다. S 급 게이트는 전 세계에서 몇 번 열리지 않았다. 게이트가 생성된다 해도 촬영 장비를 안에 가지고 들어가서 영상을 찍어오는 것은 불가능. 즉, 일반인들이 S 급 레이드를 볼 기회는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인 것이다. 또다시 어딘가에서 S 급 게이트가 열려 버리는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는다면 말이다. 게다가 이번 방송은 녹화가 아닌 생중계로 이뤄진다. 10 분 정도의 딜레이가 있긴 해도. 시청률이 얼마나 나올까? 70 퍼센트? 80 퍼센트? 영상을 타국에 판매하는 데서 생길 수익까지 계산하면 예산의 반이라는 투자가 아깝지 않았다. '레이드가 실패만 하지 않는다면!' 레이드에 참여한 최상급 헌터들이 마수들에게 먹히는 영상을 보고 싶어하는 시청자들은 없을 것이다. 아니, 있다고 한들 방송에 내보낼 수 없다. 국장은 이번 4 차 토벌작전의 성공 가능성에 자신의 모든 것을 걸었다. 그런 영상을 촬영할 기사님에게 고개 몇 번 숙이는 것쯤이야. 원한다면 절이라도 할 수 있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국장님." 카메라맨은 불안감에 떨고 있는 국장을 안심시켰다. 헌터가 되기 전에는 카메라로 밥을 먹었고, 이 일을 수락하고 나서는 열심히 공부도 했다. 전 국민이 다 지켜볼 방송을 자신의 실수로 망치고 싶은 마음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만큼 돌아오는 것도 컸고. '방송 수익의 일부를 떼 주겠다니.' 이미 A 급 헌터로서 많은 돈을 벌고 있었지만, 그런 그가 흥분할 만큼 고액이었다. 제대로 일을 끝내면 작전에 참가한 S 급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어마어마한 돈과 명성을 손에 쥘 수 있었다. 아마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A 급 헌터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기분 좋은 상상에 카메라맨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그런데 고건희 협회장님께서 용케 촬영을 허락하셨네요? 그 고지식한 분이 돈 때문에 이러는 건 아닐 텐데." 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저희가 낸 돈은 다 작전 참가 헌터들에게 분배한다더군요." "그럼 왜...?" 왜 촬영을 허락해 준 것일까? 국장은 자신의 추측을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제 생각에는... 국민들을 위로해 주기 위해서가 아닐까 싶습니다." 이미 한국 헌터협회는 개미들에게 세 번이나 고배를 마셨다. 잇단 실패로 많은 피해를 입은 협회는 신뢰를 잃었고, 국민들은 개미들에게 이길 수 없다는 무력감에 빠졌다. 그런 상황에서 드디어 역전의 기회가 생긴 것이다. '사람들의 반응은 요즘 인터넷만 봐도 알 수 있지.' 협회장은 거기서 한발 더 나아가길 원했다. 승리의 순간을 카메라에 담아 국민들에게 알리자고. 더 이상 실패가 없어야 한다는 필사의 결의가 그 뜻에 담겨 있었다. 국장의 설명에 카메라맨도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는 손목의 시계를 보더니 비장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시간이 다 됐네요. 이만 일어나겠습니다." 국장은 다시 한 번, 카메라맨에게 깍듯하게 허리를 굽혔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헌터님!" *** 타타타타타타타타타-! 헌터들을 태운 헬기가 날아올랐다. "..." "..." 항상 허허하고 웃는 마동욱도, 매사에 자신감을 보이는 최종인도, 긍정적인 성격의 백윤호도 지금 이 순간만은 엄숙한 표정이었다. 카메라맨은 마지막으로 촬영 장비를 점검했다. 머리에 끼우고 다니기만 하면 되는 방식이라 움직임에는 전혀 지장을 주지 않는 물건이었다. '몸을 불편하게 만들 카메라였으면 여기 오지도 않았지.' 지금 이 헬기가 향하는 곳은 대한민국에서, 아니 어쩌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할지도 모르는 곳이다. 목적지를 떠올린 카메라맨은 침을 꼴깍 삼켰다. 태연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 봐도 슬금슬금 피어오르는 긴장감은 어쩔 수 없었다. 긴장하는 건 S 급 헌터들도 마찬가지였다. 긴장감을 풀기 위해, 백윤호는 친한 동생에게 말을 걸었다. "병구야, 난 네가 여기 올 줄은 몰랐다?" 민병구가 씩 웃었다. "제 힐이 없으면 이 중에서 형이 제일 먼저 죽을 것 같아서요. 형은 마수만 보이면 일단 덮치고 보니까." "아니, 넌 꼭 말을 해도 그런 식으로. 내가 마수를 덮치긴 왜 덮치냐?" 두 사람의 대화에 헌터들이 피식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대한민국의 힐러 중 유일하게 S 급인 민병구. 은퇴했던 그가 특별히 이번 레이드에 참가한다는 소식을 듣고 멤버들 전원이 환영했다. 힐러가 있고 없고는 차이가 컸다. 부상을 걱정하지 않고 싸울 수 있으니까 말이다. 백윤호와 민병구의 대화로 얼어붙어 있던 분위기가 풀려가는 가운데, 백윤호 옆의 차해인이 조용히 물었다. "백 사장님, 혹시 성진우 씨 만나고 오셨어요?" "성진우 씨요?" "네." 백윤호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데 그건 왜?" "아... 아닙니다. 제가 좀 착각했나 봐요." 그때. 마동욱이 허허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허허, 드디어 시작이구만." 그가 가리키는 방향으로 헌터들의 시선이 돌아갔다. 헬기의 창 유리 너머로 이미 마수들의 땅이 되어 버린 검은 대지가 조금씩 보이고 있었다. = 115 화 헬기를 발견한 변종 개미들이 날아올랐다. 부웅부웅아직 비행이 가능한 개체는 얼마 되지 않는지 일단 눈에 보이는 숫자는 일곱에 불과했다. "제가 처리하죠." 팀 내 유일한 마법계열 헌터인 최종인이 나섰다. 스킬 '플레임 스피어'. 캐스팅이 끝나자 나타난 일곱 개의 불꽃이 창처럼 길게 꼬리를 그리며 날아가 개미들에게 적중했다. 콰과광-! 분산된 화력으로 개미 마수를 한 방에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 그러나 놈들의 날개를 태워 버리기엔 충분했다. 키엑캬악날개가 타 버린 개미들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최종인은 그런 놈들을 바라보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하지만 승리의 여운을 즐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돌아선 최종인이 마동욱에게 물었다. "일본 쪽은 어떻습니까?" 개미들이 접근을 눈치채고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말은 더 이상 여유 부리고 있을 시간이 없다는 뜻이었다. 치익마동욱은 귀에 꽂은 수신기에 귀를 기울였다. 탱커인 그가 이번 한국 측 공격대의 리더를 맡고 있었다. "이제 들어간다네." 퍼엉-!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폭음이 들려왔다. 콰광! 쾅! 그것이 신호가 된 듯 섬 곳곳에서 폭음이 연달아 들려오고 매캐한 연기가 피어올랐다. 4 차 토벌작전의 시작이었다. 사신 길드의 마스터 임태규가 헬기에서 지상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일제히 개미굴을 빠져나온 개미 수천 마리가 네 갈래로 흩어져 섬의 동서남북을 향해 이동하고 있었다. "아주 징그럽구만, 징그러워." "다 빠져나간 거 같은데요?" "...그렇구먼." 길게 이어지던 개미들의 줄은 금방 끝나고, 남은 것은 지면에 뚫려 있는 커다란 구멍 하나. 개미굴의 입구였다. 개미굴 규모가 어찌나 큰지 입구 크기부터가 고속도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터널만 했다. 저 개미굴의 가장 안쪽에 여왕개미가 있으리라. 공격대의 목표는 오직 하나. 여왕의 제거였다. "다들." 개미굴로 침투하기 직전 마동욱이 손짓으로 팀원들을 전부 불러 모았다. 머뭇거리던 카메라맨에게도 손짓했다. 이번 작전에 참여하는 전원이 이마를 맞댔다. "수백 번의 시뮬레이션에서 일본 헌터들이 끌 수 있었던 시간은 대략 1 시간. 우리는 그 1 시간 내 무조건 여왕을 처치해야 하네." 굳이 '실패했을 경우' 같은 말은 하지 않았다. 1, 2, 3 차 토벌작전 때와 달리 이번 작전에서는 달아날 길이 없다. 그대로 개미굴 속에 고립되는 것이다. 마동욱이 팀원들을 얼굴을 하나씩 훑어보자, 다들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최고의 팀원들이다.' 아마 또다시 이러한 비극이 생기지 않는 한, 이만한 팀과 함께할 기회는 없을 터. 마동욱은 팀의 리더를 맡은 것을 영광이라 생각했다. 각자의 짧은 각오가 끝나고. "갑시다." 헬기 위에서 공격대 멤버 여섯 명, 카메라맨 한 명. 모두 합쳐 일곱 명의 헌터들이 뛰어내렸다. *** "한국 놈들이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지?" 고토가 물었다. "잠시." 원래 컨트롤 센터와의 연락은 리더인 고토의 몫이지만, 몸에 거치적거리는 걸 붙이기 싫어하는 그 대신 연락을 맡은 헌터가 대답했다. "10 분이 조금 안 됐답니다." "10 분이라." 슬슬 빠질 준비를 해야겠군. 고토는 제주도를 떠날 준비를 하기에 앞서 잠깐 주변을 둘러보았다. 학살당한 개미들의 사체가 수북이 쌓여 있었다. 이번 레이드에서 일본팀의 표면적 목표는 시선 분산. 개미 제거보다는 시간 벌이에 집중해 후퇴에 전투를 반복하며 싸웠는데도 이만한 성과를 올렸다. '한국에겐 버거운 상대일지 몰라도 우리 일본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강한 자신감에 고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고토는 발끝에 거치적거리는 개미 사체 하나를 멀리 차 버리고는 퇴각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일본팀의 진짜 목표를 위해 움직여야 할 순간이 왔다. 그런데. "저기, 고토 상." "음?" 연락을 맡은 헌터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아까부터 3 팀과 연락이 되지 않고 있답니다." '기기 고장인가...' 몇 번의 점검에도 멀쩡하던 기계가 중요한 일을 앞둔 순간이나, 중요한 일이 진행되는 도중에 고장나는 경우가 그리 드물지 않다. 3 팀 상륙 지점은 남쪽. 서쪽에 상륙해 계속 아래쪽으로 이동해 온 자신의 1 팀과는 거리상으로 그다지 멀지 않을 터. "현재 우리 위치에서 3 팀의 연락이 끊어진 지점까지 거리가 얼마나 되지?" "지금 저희 이동 속도로 10 분이면 도착할 수 있답니다." 예상했던 대로 멀지 않았다. 이대로 두면 퇴각 명령을 듣지 못한 3 팀이 혼자 섬에 남았다가 봉변을 당할 수 있었다. '...' 다음 일본팀 단독 토벌작전을 생각해서라도 S 급 헌터 다섯을 낙오자로 만들 수는 없는 일. 특히 3 팀은 개미굴과 가장 가까운 남쪽에서 상륙하는 만큼 최정예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들을 잃는다는 것은 일본 입장에서 뼈아픈 손실이었다. '뭐, 별일이야 없겠지만...' 분명 약간의 착오가 있었던 것이리라. 고토는 잠시 고민해 본 끝에 결론을 내렸다. "일단 우리가 한번 가 보지." *** 착. 진우가 멈춰 서자 익숙한 기계음이 나왔다. 띠링. [현재까지 달린 거리: 10Km] [달리기 10Km 를 완료하셨습니다.] 처음 일일 퀘스트를 접했을 때와는 180 도 다르게, 진우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았다. 하도 매일같이 일일 퀘스트를 반복했더니 이제는 그냥 생활의 일부 같은 느낌이었다. 곧 완료 메시지와 함께 완료 보상이 날아왔다. '스탯.' 진우는 보상으로 받은 능력치 포인트 중 2 를 민첩에, 나머지 1 을 다시 근력에 찍었다. [스탯] 근력: 219 체력: 200 민첩: 230 지능: 250 감각: 200 (분배 가능 능력치 포인트 : 0) 물리 데미지 감소: 46% 끝자리가 0 이 돼 가는 스탯들을 보며 진우는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포인트가 1 만 더 있었어도...' 아쉽지만 포인트를 만들어 낼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래도 고르게 올라간 스탯들을 보며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좋아.' 지능을 250 까지 올린 뒤로는 뒤처지는 스탯이 없게 전체적인 밸런스를 맞추고 있었다. '다섯 개 스탯 모두 버릴 것이 없어.' 그것이 오랜 시간 레벨과 스탯을 올리면서 내린 결론이었다. 수치가 높아진 스탯은 무엇이든 언제나 자신을 실망시키지 않았으니까. '그러니...' 앞으로도 별일이 없다면 당분간은 스탯 밸런스를 맞춰 갈 생각이었다. 진우는 만족스런 얼굴로 스탯창을 닫았다. 그러고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원래 한산한 동네기는 했지만 오늘은 인적이 뚝 끊긴 상태였다. 이유는 충분히 짐작이 가능했다. 진우는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역시나.' 지금쯤이면 한참 한일 연합팀의 레이드가 진행되고 있을 타이밍. 전 국민이 TV 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으리라. 진우는 방향을 틀었다. 퀘스트는 이미 끝났지만 집으로 가는 발걸음은 평소보다 빨랐다. *** 작전은 순조로웠다. 마동욱 팀은 일본이 예고했던 대로 아무런 방해도 없이 개미굴의 깊숙한 안쪽까지 들어왔다. 개미굴 안은 동굴형 던전과 비슷한 구조였다. 다만 차이점이 있다면 야광석이 없어 안에 들어간 헌터들 스스로가 시야를 밝혀야 한다는 점일까? '...' 꼴깍. 던전 경험은 꽤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카메라맨이 긴장감에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위치는 맨 뒤. 제일 앞에선 최종인이 불을 밝히고 나머지 헌터들이 그 뒤를 바싹 붙어 따라가는 형태였다. 카메라맨의 이마에도 촬영을 위한 라이트가 붙어 있었다. 하지만 마력이 녹아든 짙은 어둠속에서는 S 급 헌터의 마법만큼 도움이 되지 않아, 눈앞만을 겨우 밝혀 줄 수 있는 수준이었다. "조용하네요." 최종인이 무심코 건넨 말에 옆에 붙어서 있던 마동욱이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했다. "음." 리더이자 탱커인 그에게는 최전방에 서 있는 마법계열, 최종인을 보호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 그래서일까? 마동욱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연신 사방을 경계했다. 평소 호탕하던 모습은 찾아볼 수 없었다. 백윤호도 평소와 달랐다. 처음부터 '마수의 눈'을 뜨고서 개미굴로 들어온 그는, 말 한마디 없이 조그마한 마력의 흐름도 놓치지 않기 위해 애를 썼다. 민병구와 카메라맨도 잔뜩 긴장한 기색이었다. 오직 차해인만이 평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검 손잡이에 손을 얹고서 묵묵히 걸었다. 그때였다. "저기..." 뭔가를 발견한 듯 최종인이 목소리를 냈다. "허." "음..." 헌터들이 침음성을 냈다. 벽과 천정에 빼곡히 들어차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개미의 알들. 반투명의 뿌연 껍질 안에서 꿈틀거리는 거뭇거뭇한 유충들이 보였다. 음침한 분위기와 퀴퀴한 악취가 뒤섞인 산란장을 앞에 두고 느낄 수 있는 감정은 딱 하나. 역겨움이었다. "이거 싹 불태워 버릴까요?" 최종인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마동욱이 개미굴에 들어오고 나서 처음으로 웃었다. "나도 그러고 싶은 생각이 굴뚝같네만 시간이 없으니 그만두지." 어차피 이 녀석들이 모조리 부화한다고 해도 수명은 1 년. 놈들의 어미만 처치할 수 있다면 신경 쓸 필요가 없는 존재였다. "옵니다." 백윤호가 어둠 속을 가리키며 경고했다. 그리고 그가 말하기도 전에 차해인은 이미 검을 뽑아 들고 있었다. 마동욱이 자신의 몸집만큼 커다란 방패를 턱까지 들어 올리고 전방을 경계했다. 사사사삭. 열 마리 정도 되는 개미 떼들이 일제히 나타났다. 제주도에서 태어난 변이한 놈들인 듯 하나같이 눈이 퇴화해 있었다. "여왕의 호위인가?" 최종인이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아마도 산란장을 지키는 놈들 같습니다." "그럼 어렵지 않겠군." 보스의 호위가 아니라 일반 몬스터라면 전원이 S 급으로 이뤄진 공격대의 화력을 버틸 수 없을 터! 남은 시간이 얼마 없음을 잘 알고 있는 마동욱이 먼저 덤벼들었다. "가세!" 헌터들이 뒤따라 들어갔다. 이어 최종인의 손끝에서 불꽃이 몇 번 번쩍였고, 임태규가 쏜 화살이 공기를 갈랐다. 마동욱의 짐작대로 싸움은 금방 끝이 났다. 키엑! 마지막 개미의 목이 떨어졌다. 차해인이 검에 묻은 체액을 털었다. 마동욱이 말했다. "산란장이 여기 있다는 건..." 대답은 최종인의 입에서 나왔다. "여왕의 침실이 가까이에 있다는 뜻이죠." 잠시 뒤 만날 여왕과의 결전을 위해 각자 잠시 정비의 시간을 가지는 동안, 여기저기를 둘러보고 있던 카메라맨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헉!" 헌터들의 시선이 그리로 몰렸다. "죄, 죄송합니다." 자신이 머리에 찬 카메라로 전 국민이 방송을 지켜보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한 그가 헌터들을 향해 고개를 꾸벅 숙였다. 백윤호가 호기심을 느끼고 가까이 다가왔다. "뭐가 있습니까?" "아, 다른 게 아니라... 저기에." 카메라맨은 겸역쩍게 웃으며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부화한 알들이 잔뜩 쌓여 있는데 유독 하나만 크기가 엄청나게 커서요." '...!' 백윤호의 눈이 커졌다. 말 그대로였다. 다른 개미들의 알이 자전거 바퀴만 한 크기에 그치는 데 비해 그가 가리키는 알은 유독 사람 크기... '아니.' 길쭉하고 타원형인 것이 개미 성체가 나왔다고 해도 무방할 크기였다. '설마 이것도 개미 알인가?' "대체 여기서 뭐가 태어난 거지?" 어느새 다가온 민병구도 놀란 표정을 지었다. 잠시 얼굴이 굳어 있던 백윤호가 표정을 싹 바꾸더니 씩 웃으며 민병구의 등을 툭 쳤다. "우리는 여왕만 잡으면 돼. 다른 건 신경 쓸 필요 없어." "...네." 민병구는 꺼림칙하다는 얼굴로 돌아서 헌터들이 있는 곳으로 갔다. 하지만 백윤호는 다시 한 번 그 알을 뒤돌아보았다. '말도 안 돼...' *** '말도 안 돼...' 고토는 눈을 의심했다. "헉!" "음...!" 다른 헌터들은 경기를 일으키거나 침음을 삼켰다. 고토가 주위를 둘러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3 팀 헌터들은 연락이 끊어진 그 자리에 있었다. 다섯 명 모두 머리를 잃은 채로. 동료였던 헌터 다섯이 시체가 되어 바닥에 굴러다니는 광경은 헌터들에게도 충격적이었다. '...' 말없이 관자놀이를 주무르던 고토가 다가가 헌터들의 주검을 살폈다. '날붙이에 잘려 나간 게 아니다.' 헌터들은 모두 목이 찢겨 나간 상태였다. '얼마나 강한 힘으로 물어뜯었으면 목이 이렇게 될까?' 고토가 경악하고 있는 사이 가까이 다가온 헌터 하나가 분노를 토했다. "이 개미 새끼들이..." 고토는 고개를 저었다. "들이 아니다." "네?" "개미가 됐건 뭐가 됐건 적은 하나였다." "그, 그럴 리가?" 고토는 침을 꼴깍 삼켰다. 눈을 아무리 크게 뜨고 뒤져 봐도 주위에 싸움의 흔적이 없었다. 개미들이 숫자로 밀어붙여서 3 팀이 전멸했다면 죽은 개미들이나 기타 흔적이 남아 있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게다가 헌터들의 상처들. 공격당한 위치를 봐서는 아무래도 한 놈에게 당한 듯했다. '어떻게 일본 최정예 헌터들을 마수 하나가...' 만에 하나라도 이런 짓을 할 수 있는 놈이라면 S 급 던전의 보스뿐. 고토는 옆의 헌터가 쓰고 있던 송수신기를 뺏어 목청에 힘을 주었다. "고토다." -말씀하십시오. "여왕개미는 어디에 있지? 놈이 굴을 빠져나왔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위성에 부착된 마력 탐지 카메라. 전 세계에서 미국, 일본, 중국만이 보유한 기술이었다. 그중 하나인 중국조차 미국 기술을 해킹해 카피한 수준에 불과하니, 오리지널이라 할 수 있는 기술 보유국은 미국, 일본 두 나라가 전부. 일본이 세계에 자랑하는 그 기술로 실시간 감시하고 있던 여왕의 위치가 수신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아닙니다. 여왕은 내내 침실에 있었습니다. 아, 지금 한국 헌터들이 침실로 침투 중입니다. "뭐?" 고토가 벌떡 일어났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을 느꼈다. '여왕의 짓이 아니라고?' 고토의 호흡이 빨라졌다. 일이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었다. 고토는 서둘러 말했다. "철수 명령을... 모든 일본 헌터들에게 한시라도 빨리 섬에서 떠나라고 알려라." -치익, 알겠습니다. = 116 화 고토는 통신을 끊었다.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우리가 놓친 게 있었나?' 원하는 것을 성공적으로 얻어 내기 위하여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가능성을 고려했다. 한데. 최정예 헌터 다섯이 뭉친 팀 하나가 일시에 몰살당하는 일은 예상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것이었다. '잠깐...' 그때 문득 떠오른 기억. 4 개월 전에도 한 번 기이한 일이 있었다. 위성으로 24 시간 감시하고 있었던 여왕개미의 마력이 갑자기 큰 폭으로 떨어졌던 것이다. 평소의 절반 이하! 연구팀에서는 그것을 여왕개미의 수명이 다한 결과로 보고 수차례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다. 여왕개미가 서서히 마력을 회복하기 전까지는. '딱 한 달 걸렸었나?' 오래지 않아 여왕은 본래의 마력을 되찾았다. 수명 이야기를 꺼냈던 관계자들은 예상을 크게 엇나간 결과에 전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고토 씨." 팀원의 목소리에 고토가 상념에서 깨어났다. "음." 3 팀 헌터들의 주검을 살피느라 한쪽 무릎을 땅에 대고 있던 고토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지금은 딴생각을 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너무 내륙 쪽으로 들어 왔나...' 사사사삭. 어느새 뒤를 쫓아 몰려든 개미들 수백 마리가 입맛을 다시듯 하나씩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 한편. 한국팀은 보스방, 통칭 '여왕의 침실'로 들어섰다. 여기까지 15 분. '돌아가는 데 비슷한 시간이 걸린다고 치면...' 아직 30 분의 시간이 남아 있다. 한번 지나갔던 길이니 돌아가는 시간을 더 단축시킬 수 있다고 가정했을 때, 시간은 제법 넉넉한 편이었다. '좋아.' 손목시계를 확인하던 마동욱이 고개를 끄덕였다. 순조로운 흐름이다. 중요한 것은 이제 어떻게 마무리를 짓느냐. 백윤호가 '마수의 눈'을 이용해 어둠 저 너머에 있는 적의 숫자를 정확히 파악해 주었다. "여왕은 가장 뒤쪽. 그 앞에 호위 여덟이 있습니다." 여왕의 호위들은 일반 개미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하다. 혼자서 여왕과 호위 모두의 공격을 감당하기는 벅찰 터. 여기서부터는 보조 탱커 역할을 해 줄 사람이 필요했다. 마동욱이 옆을 돌아보았다. "차 헌터." "예." "내가 여왕을 보는 동안 호위들을 맡아 줄 수 있겠나?" "맡겨 주세요." 차해인이 짧게 대답했다. 헌터스에서 레이드할 때는 메인 탱커 노릇을 해 왔던 그녀다. 서브 탱커 정도야 식은 죽 먹기였다. 마동욱은 팀원들을 둘러보았다. 여기 있는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마수 사냥의 스페셜리스트들. 자질구레한 설명은 시간 낭비였다. "갑시다." 마동욱이 개미들을 향해 돌아서자마자 최종인이 거대한 광구를 만들어 보스방 꼭대기에 띄웠다. 그러자 보스방 전체가 환해졌다. "헉." 어마어마한 광구의 크기를 보고서 카메라맨이 조용히 신음을 흘렸다. 그는 입술 옆의 작은 마이크에 대고 빠르게 소곤거렸다. "저도 A 급 헌터로서 많은 레이드에 참여해 왔지만 저 정도로 커다란 라이트(light) 마법은 처음이네요. 과연 한국 최고의 마법계열 헌터답습니다." 그의 목소리가 마이크를 타고 전국의 시청자들에게 퍼졌다. 그는 방금 막 자신이 촬영하고 있는 방송의 시청률이 80 퍼센트를 넘었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욕심이 생긴 그가 좀 더 좋은 영상을 담기 위해 앞서 나가려 하자, 뒤에 있던 민병구가 그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컥!" 강한 악력에 카메라맨은 속절없이 민병구 쪽으로 돌아섰다. 어깨가 아파 입이 쩍 벌어질 정도였다. '무슨 힐러 힘이 이렇게...' 놀랄 틈도 없이. 카메라맨은 핼기 안에서 서로 농담을 주고받을 때와는 전혀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민병구와 마주해야 했다. "여긴 S 급 던전의 보스가 있는 곳 입니다. 아무도 당신 목숨을 책임져 주지 않아요." 민병구의 노기 어린 목소리에 카메라맨은 제대로 된 대답도 못하고 연신 고개만 끄덕거렸다. "알아들으셨으면 제 뒤에 서 계셔요. 이제부터 진짜 시작이니까." S 급 헌터의 박력. 모든 계열 중에서 전투력이 가장 약하다는 힐러조차 A 급 헌터를 압도하는 기세를 뿜어냈다. 그게 S 급과 A 급의 격차. 그런 괴물 같은 이들이 힘을 합쳐 전투를 벌이는 곳에서 자신이 과연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카메라맨은 헌터가 된 뒤 처음으로 스스로에게 무력감을 느끼며 급히 민병구의 뒤로 가 섰다. 아니나 다를까. "온다." 거대한 개미 한 마리가 헌터들을 발견하고서 여섯 개의 다리를 움직여 천천히 기어 왔다. "저게 여왕..." 백윤호가 침을 꼴깍 삼켰다. 다른 헌터들의 얼굴에서도 긴장된 낯빛이 역력했다. 여왕의 압도적인 위용! 그들은 수백, 수천에 달하는 개미 군단의 방벽을 넘어 최초로 여왕을 목격한 헌터들이 됐다. '오늘 이 지긋지긋한 개미들의 명줄을 끊는다.' 백윤호는 저 커다란 덩치를 쓰러뜨릴 생각에 가슴이 떨려 왔다. 그러려면 우선. 잠시 여왕에게 고정되어 있던 백윤호의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저놈들부터...' 여왕의 한걸음 앞에서 걸어오는 여덟 마리의 개미들. 호위들을 제거하는 게 먼저였다. "하압!" 팀원들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팀의 메인 탱커인 마동욱이 최전방으로 뛰쳐나갔다. 마동욱의 목에 굵은 힘줄이 돋았다. "개미들아, 와라!" 우렁찬 함성! 눈이 퇴화한 대신 소리에 민감한 호위들이 이빨과 발톱을 세우고 마동욱에게 달려들었다. 마동욱이 뒤를 돌아보았다. "차 헌터, 지금!" 마동욱과 거리를 유지하며 달려오던 차해인이 허리춤에서 장검을 뽑아냈다. 그러고는 양손으로 움켜쥔 뒤 있는 힘껏 지면에 내리꽂았다. 스킬 '도발의 진동'. 콱! 바닥에 꽂힌 검에서 원형으로 된 마력 파장이 퍼져 나갔다. 마동욱을 노리던 호위들이 뭔가에 홀린 듯 일제히 방향을 틀어 차해인에게 덤벼들었다. '그렇지!' 자신을 지나쳐 차해인을 향해 돌진하는 호위들을 보며 마동욱은 속으로 주먹을 움켜쥐었다. 차해인이 호위 개미들의 어글을 성공적으로 가져갔다. 다음은 자신의 차례. 마동욱은 차해인 쪽으로 거대한 몸을 움직이고 있는 여왕 앞에 섰다. "너는 이쪽이다." 자신의 앞을 가로막은 적이 불쾌한지 여왕은 포효를 내질렀다. 키에에에엑어지간한 탱커였으면 위압감에 짓눌리다 못해 귀를 틀어막았을 끔찍한 포효였지만, 국내 최고의 탱커인 마동욱에게는 어림없는 수작이었다. "합-!" 스킬 '도발의 기합'. 광역 도발을 시전한 차해인과 달리, 마동욱은 여왕을 향해 일대일 도발 스킬을 사용했다. 포효를 내지르던 여왕이 마동욱을 노려보았다. 도발은 성공적으로 먹혔다. '좋다!' 목표는 뒤의 동료들이 호위들을 다 처치하고 오기 전까지 보스의 공격을 견뎌 내는 것. 그건 세상에서 가장 자신 있는 일이기도 했다. 육중한 방패를 턱 바로 밑까지 들어 올리는 마동욱의 눈빛이 비장했다. 그는 늘 하던 것처럼 이번에도 역시 마음속으로 기도했다. '나 자신과 동료들을 지킬 수 있는 힘을 주소서.' 콰과과광! 때마침 등 뒤에서 터져 나오는 폭음과 함께, 많은 이들의 운명을 건 여왕개미 레이드가 시작되었다. *** "영감, 오늘 헌터들 나온다는데 안 볼 것이요?" "일없네." "그러지 말구... 아까 TV 에서 그러는데 오늘은 진짜 때려잡을 수 있다고 하니까 같이 봅시다." "아, 그놈들 매번 하는 소리가 다 그렇지. 일없다니까." 할아버지는 휙 돌아앉아서는 신문을 넘겼다. 굽어 있는 등 너머에서 곧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려왔다. "쯧쯧쯧. 이놈의 신문들도 다 헌터 얘기라 볼 것이 없구먼." 할머니는 남편의 볼멘소리를 들으며 조심스럽게 안방 문을 닫았다. "휴-" 불과 2 년 전까지만 해도 남편은 누구보다 제주도 소식에 관심을 가지고 헌터들을 응원했던 사람이었다. 하나밖에 없는 자식을 제주도 개미들에게 잃었으니까. 억장이 무너지는 것 같은 깊은 절망은 곧 마수들을 향한 강한 분노로 바뀌었다. 남편은 토벌 작전이 있을 때마다 헌터협회에 거금까지 기부해 가며 헌터들을 격려했다. 작전 당일에는 긴장한 나머지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그러나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모든 전력을 다 동원한다던 3 차 토벌 작전까지 큰 피해를 입고 수포로 돌아갔을 때, 남편은 며칠 동안 멍한 눈으로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그 이후로 남편은 일절 헌터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기대도 희망도 품지 않게 된 것이다. "휴-" 다시 한 번 한숨을 내쉰 할머니는 거실에 앉아 리모콘을 틀었다. TV 를 틀자마자 레이드 방송을 진행하는 사회자의 입에서 감격에 찬 멘트가 터져 나왔다. -지금 막 자랑스러운 우리 대한민국의 헌터들이 여왕개미 레이드의 첫발을 내디뎠습니다! 마침 헌터들의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할머니는 양손을 가슴 앞에 모아 쥐고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TV 를 시청했다. 헌터들이 다칠 때면 안타까운 마음에 눈을 돌리고, 헌터들의 공격이 적중할 때면 기쁘게 박수를 쳤다. "아이고! 아이고!" -아, 아! 드디어! 첫 번째 마수가 쓰러졌습니다! 그게 시작이었다. 헌터들의 분투에 무시무시해 보이던 개미 괴물들이 하나둘 쓰러져갔다. 그때마다 사람들이 내지른 함성과 환호성으로 아파트 전체가 들썩거렸다. "아이고, 아이고!" -넷! 이제 넷 남았습니다! 벌써 반을 처치한 겁니다! 그 말에 할머니는 갑자기 눈물이 핑 돌았다. 첫 번째로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워 주는 헌터들이 고맙고 감사해서 그랬고. 두 번째로 제주도의 대기업에 합격했다며 기뻐 날뛰던 아들 얼굴이 생각나서 그랬다. -남은 호위는 둘! 호위 둘만 더 해치우면 여왕을 칠 수 있는 겁니다! 레이드 성공까지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때였다. 벌컥! 안방 문이 열리며 얼굴이 시뻘게진 할아버지가 달려 나왔다. "영감..." 할머니의 부름에도 대꾸조차 없이, 할아버지는 붉어진 눈시울로 말없이 TV 화면만을 응시했다. 굳게 쥐어진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고 있었다. 사회자도 숨죽이며 상황을 지켜보다가. -강력한 호위 개미들을 전부 처치했습니다! 이제 남은 개미는 여왕뿐! 여왕만 잡으면 개미들을 박멸할 수 있습니다! 헌터들, 틈을 주지 않고 바로 공격을 시작합니다! 여왕개미를 상대로 잘 버텨 준 마동욱의 뒤에서 다섯 명의 헌터가 일제히 달려드는 모습이 TV 에 나왔을 때. 할아버지는 자신도 모르게 굵은 눈물을 흘리며 양손을 힘차게 내질렀다. "으아아아-!" *** 방송국. 전국에서 폭주하는 응원 전화들에 국장은 즐거운 비명을 질렀다. "국장님. 방금 시청률 85 퍼센트를 넘어섰습니다!" "됐어!" 국장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시청률 85 퍼센트. 이건 대한민국이 월드컵 결승전에 올라가도 깨지지 않을 기록이었다. 게다가 외국에서 들어온, 또 앞으로 들어올 이익까지 생각하면... '대박이다.' 의자에 털썩 주저앉으며 양손으로 얼굴을 훔쳤다. 상황실에 있는 다른 직원들도 기쁨을 감추지 못하는 국장의 얼굴을 보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송출 화면에서는 계속해서 한국팀 헌터들이 여왕개미를 시원하게 두들겨 패는 장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미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 S 급 게이트를 클리어한 나라 목록에 우리 대한민국이 추가되기 직전입니다! 국장은 손수건을 꺼내 식은땀으로 반질반질해진 이마를 슥슥 문질렀다. '좋아, 좋아!' 여왕은 거의 빈사 상태였고, 이제 헌터들이 여왕을 처치하고 무사히 개미굴을 빠져나오는 일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그런데.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 "깜짝이야!" 화들짝 놀란 국장이 뒤를 돌아보자, 피디가 급하게 볼륨을 줄였다. 국장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리로 움직였다. "나 피디, 방금 무슨 소리야?" "아, 이게... 제주도에서 오고 있는 오리지널 영상인데, 여왕개미에게서 나온 소리 같습니다." "여왕이?" 현재 방송 화면과 오리지널 영상 사이에는 약간의 시간적 간격이 있었다. 레이드 도중에 무슨 일이 일어날 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리얼 타임으로 생중계할 수 없는 것이다. 영상을 지켜보던 국장이 흐뭇하게 웃으며 지시했다. "이렇게 역사적인 승리의 순간에 마수의 괴성이 요란하게 울려 퍼지는 건 좀 그렇구먼. 요 부분은 편집하거나 소리를 좀 줄이지?" "네." 나 피디는 고개를 끄덕였고, 국장은 격려하는 차원에서 피디의 오른쪽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때. 직원 하나가 굳은 얼굴로 급하게 달려왔다. "국장님, 피디님!" 국장은 고개를 돌렸다. 경험상 이런 상황에서 저런 얼굴을 한 직원의 보고가 좋은 소식이었던 적은 없었다. 보고를 듣기도 전에 막연한 불길함이 스쳐 지나갔다. 오늘만큼은 자신의 예감이 틀렸기를 간절히 기도하며, 국장은 직원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무슨 일인가?" 그러나 불길한 예감은 여지없이 맞아떨어지는 법. 직원은 당혹스런 목소리로 말했다. "지금, 일본 헌터들이 전부 제주도를 빠져나가고 있답니다!" "뭐?!" *** 마동욱이 팀원들을 독려했다. "조금만 더! 여기서 조금만 더 밀어붙입시다!" 조금만 더 밀어붙이면 된다는 그의 말처럼 여왕개미는 지금 쓰러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여왕개미의 머리에는 임태규가 쏜 화살들 수백 개가 빽빽하게 박혀 있어 고슴도치를 연상케 했다. 피융-! 콰직! 또 하나의 화살이 날아가 여왕의 미간에 박혔고, 여왕은 고통스러운 듯 괴성을 지르며 머리를 가로저었다. 끼에에엑! 곧 정신을 차린 여왕이 방 전체에 산성 독액을 뿜어냈다. 쏴아아악- 워낙 광범위한 공격이라 미처 피하지 못한 헌터들의 피부가 까맣게 타들어 가기 시작했으나, 이내 민병구의 치료 스킬로 말끔하게 치료 되었다. 키에엑! 독액 공격이 통하지 않자 분노한 여왕이 톱니 같은 거대한 이빨로 선두에 서 있던 마동욱을 물었다. 콱! 그러나 '상급 강화' 스킬로 전신을 방어한 마동욱은 무시무시한 여왕의 공격을 버텨낼 수 있었다. 이빨의 한쪽은 방패에, 다른 한쪽은 왼손에 막혔다. 마동욱이 시간을 벌고 있는 사이 여왕의 옆구리에서 엄청난 불길이 치솟았다. 콰가가가광-! 최종인의 마법이었다. 키엑! 여왕이 비틀거리며 몸을 가누지 못하는 틈을 타, 짐승형 마수로 변한 백윤호가 빠르게 뛰어올라 맨손으로 여왕의 이빨 한쪽을 뜯어냈다. 콰직! 바닥에 가볍게 착지한 백윤호는 거친 숨을 토해 내며 확신했다. '여왕은 끝났다.' 오랜 경험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땅을 많은 희생자들의 피로 검게 물들였던 마수들의 대장을 잠재울 수 있는 순간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그렇게 생각하자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벅찬 감동이 밀려 올라왔다. 그런데 그때. 별안간 여왕이 고개를 하늘로 빳빳이 쳐들었다. 그리고. 키아아아아아아아아아고막이 찢어질 것 같은 고성이 개미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백윤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뭐지? 포효? 단말마?' 아니, 그런 것들과는 좀 다른 느낌. 저 고음은 흡사 멀리 있는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짖는 소리처럼 들려왔다. '누군가를 부른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순간 어떻게 된 일인지 간담이 서늘해졌다. "막아야 돼!" 백윤호가 나서기 직전, 우아하게 점프한 차해인이 양손으로 쥔 검을 힘차게 내리그었다. 스걱! 차해인이 땅에 내려서기도 전에 여왕의 머리가 먼저 바닥으로 떨어졌다. 쿵! 숨죽이며 S 급들의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카메라맨이 눈물을 글썽거리며 두 손을 번쩍 들었다. 4 년 동안이나 이어졌던 끔찍한 싸움의 막이 내려가는 순간이었다. "헉, 헉." 가삐 숨을 몰아쉬던 마동욱이 팀원들에게 엄지를 들어 보였다. 차해인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최종인은 안경을 고쳐 쓰며 씩 웃었으며, 임태규는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들 각자의 방법으로 승리의 희열을 표현했다. 그들 중 오직 백윤호만이 가슴 한 구석에 자리 잡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함에 몸서리를 치고 있었다. "형, 우리가 세계에서 일곱 번째로 S 급 게이트를 클리어한 팀이 됐는데 표정이 그게 뭐..." "잠깐." 그때였다. 컨트롤 센터와 연락을 주고받던 마동욱의 표정이 험악하게 굳어졌다. 이럴 시간이 없다. 마동욱은 주위에서 휴식을 취하던 팀원들에게 황급히 소리쳤다. "일본 헌터들이 퇴각하는 바람에 지금 개미들이 이리로 몰려오고 있다고 하네. 어서 빠져나가야 돼!" "예?" "아직 시간은 많이 남았잖아요?" "S 급 2 명이 1 시간은커녕 30 분도 못 버틴다고요?" 당황하는 팀원들에게 마동욱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자세히는... 협회가 지금 상황을 알아보고 있다고는 하는데, 일본 쪽에서 일방적으로 교신을 끊은 상태라." "이 새끼들이..." 최종인이 욕지기를 내뱉었다. 여기 있는 게 한국 헌터가 아니라 일본 헌터들이었어도 그리 쉽게 버티기를 포기하고 물러났을까? 하지만 화를 내는 것도 살아 있어야 할 수 있는 일이다. 마동욱은 팀원들의 동요를 막기 위해 최대한 감정을 억제하고 침착한 얼굴로 탈출을 서둘렀다. "어서!" 한국팀 전원은 '여왕의 침실' 입구 방향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가장 먼저 백윤호가 걸음을 멈췄다. "아..." "형?" 뒤따라 달리던 민병구도 멈췄고, 연쇄 반응처럼 모두가 정지했다. 말없이 멈춰 선 백윤호가 시선을 한곳으로 고정한 채 덜덜 떨기 시작했다. "마, 말도 안 돼..." 있을 수 없는 일. 아니, 있어서는 안 되는 일. 그는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며 문득 산란장에서 보았던 인간 모양의 알 하나를 떠올렸다. '이게... 이게 마수 한 마리가 지닌 힘이라고...?' 백윤호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의아해하던 헌터들도 곧 이변을 눈치채고는 입구에서 한 걸음 물러섰다. "뭐지?" "벌써 개미들이 돌아온 건가?" 헌터들이 혼란스러워하는 사이. 어둠에 잠긴 개미굴 저편에서 단 한 마리의 날개 달린 개미가 헌터들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오고 있었다. = 117 화 차해인은 안으로 들어선 개미 마수를 보고 강한 위화감을 느꼈다. '기척이... 없어?' 눈으로 계속 보고 있지 않으면 놈의 위치를 파악하기도 힘들 정도로 기척을 읽기가 어려웠다. 여태껏 그러했던 상대는 헌터와 마수를 통틀어서 딱 둘뿐. 하나는 지금 눈앞에 있는 개미 마수,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진우 씨.' 그녀는 며칠 전 일본 최강의 헌터 앞에서 감추고 있던 이빨을 드러냈을 때의 성진우를 떠올렸다. 만약 그가 지금 적이 되어 눈앞에 서 있다면? 오싹. 숨이 턱하고 막혀 오며 등줄기에 소름이 돋았다. '...'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차해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여왕과의 싸움으로 지쳐 있는 한국팀 헌터들에게 정체를 알 수 없는 개미의 등장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저거..." "뭔가 이상하지 않아요?" "왠지 으스스한걸." 백윤호나 차해인 만큼은 아니지만, 다른 헌터들도 이질감을 깨달았다. 꿀꺽. 마수 하나가 다가왔을 뿐인데 주변의 공기가 변하고 있었다. '어떡한다?' 마동욱은 고민했다. 예상하지 못한 상황과 마주했을 때, 리더는 신속히 결정을 내려야 한다. 특히 지금처럼 시간이 없는 경우는 더욱 그렇다. '마수가 나왔으니 그냥 처치해 버리면 될 일이지만...' 한데. 어째서 이리도 꺼림칙한 기분이 드는 걸까? 그렇게 고민하고 있는 사이, 개미 마수가 지척까지 다가왔다. 소름 끼치도록 조용한 움직임이었다. '이렇게 망설이고 있을 여유가 없다.' 마동욱이 본능의 경고를 억누르고서 간신히 이성적 판단을 내렸을 때. 놈이 사라졌다. "어디?" 마동욱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다른 헌터들의 상황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뒤..." 사방을 둘러보던 카메라맨이 뒤늦게 놈의 위치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뒤쪽에!" 헌터들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헌터들이 인식하지도 못할 속도로 헌터들을 지나친 개미 마수는 어느새 여왕개미의 사체 앞에 서 있었다. '우리를 지나쳐 갔다고?' '어떻게...?' 백윤호가 '마수의 눈'으로 앞서 보고 있었던 것을 한국팀 헌터들도 서서히 체감하기 시작했다. 쿵, 쿵, 쿵. 심장 박동이 빨라지고, 호흡이 거칠어져 갔다. '...보통 놈이 아니다.' 마동욱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개미 마수는 헌터들에게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고 가만히 죽은 여왕만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고개를 위로 쳐든 놈은.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에개미굴 전체가 뒤흔들릴 정도의 끔찍한 포효를 끝없이 토해 냈다. 털썩! 가장 먼저 카메라맨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털썩! 털썩! 그 뒤로 위압감에 짓눌린 헌터들이 버티지 못하고 하나둘 차례대로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마동욱 역시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땅을 짚었다. '내가... 내가 고작 포효 따위에?' 에에에엑-!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놈의 포효가 끝났을 때, 온전히 서 있는 사람은 차해인 한 사람뿐이었다. 그나마 차해인도 버티는 것이 고작이었는지 두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었다. 반격은 꿈도 꿀 수 없는 상황. 그제야 비로소 개미 마수가 헌터들에게 관심을 보였다. 극명한 적의를 가지고. '...!' 차해인의 눈이 커졌다. 헌터들을 향해 돌아서는 놈의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마치 여왕의 죽음에 화를 내고 있는 것처럼. 차해인은 침착하게 손을 검 손잡이 위로 가져갔다. 그러나 차해인이 허리춤에 찬 검을 뽑는 속도보다 개미 마수가 움직이는 속도가 한발 더 빨랐다. 피슉일순간 시야에서 사라졌던 개미 마수가 코앞에서 다시 나타났다. 차해인의 눈동자가 떨렸다. 미처 방어할 생각도 못한 채. 투쾅-! "악!" 옆머리를 가격당한 차해인이 직선으로 튕겨져 나가다 벽에 부딪힌 후 바닥으로 떨어졌다. 후두둑단 한 방에 차해인이 정신을 잃었다. 그 모습을 보고 동료들은 경악했다. 가장 강한 멤버가 일격에 쓰러진 것이다. 하지만 놀라고 있을 틈은 없었다. 적의 강함은 충분히 확인했다. 머뭇거리는 시간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생존 확률이 낮아진다는 사실을 헌터들은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탱커인 마동욱이 먼저 나섰다. "헙-!" 마동욱은 뒤에서 개미 마수를 끌어안고, 양팔에 힘을 주었다. 아름드리나무도 뿌리째 뽑아낼 수 있는 힘으로 개미 마수의 몸통을 조여 갔다. 그의 목과 팔뚝 여기저기에서 굵은 힘줄이 솟았다. 그러나. "으아아아악-!" 개미 마수가 힘을 주자 마동욱의 양팔이 허무하게 떨어져 나갔다. 마동욱이 털썩 양 무릎을 꿇었다. "안 돼!" 백윤호가 튀어 나갔다. 놈의 시선을 돌리지 않으면 양팔을 잃어 방어 수단이 전무한 마동욱은 곧바로 목숨을 잃는다. 백윤호는 이를 악물었다. 몸에서 하얀 털이 솟아나고, 손톱이 길고 날카롭게 변한 그가 짐승처럼 달려들었다. 피슉다시 놈이 사라졌다. '어디...?' 백윤호가 다시 '마수의 눈'으로도 놈의 움직임을 쫓기가 불가능했다. 비명은 뒤에서 나왔다. "으아아악-!" 캐스팅을 하고 있던 최종인이었다. 개미 마수의 손톱에 상반신이 사선으로 길게 베여진 최종인은 신음을 흘리며 쓰러졌다. 다섯 발짝 정도 떨어진 곳에서 기척을 죽이고 빈틈을 노리고 있던 임태규가 개미 마수를 향해 마력을 실은 화살을 날렸다. '이 거리에서는 절대 빗나가지 않는다!' 강한 자신감이 담긴 일발이었다. 쉭-! 그러나. 덥썩. 임태규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헉!' 개미 마수는 날아오던 화살을 낚아챈 후 가볍게 부숴 버렸다. 콰직! 임태규는 서둘러 다음 화살을 장전하려 했으나, 화살을 끼우고 활을 들었을 때는 이미 놈이 바로 앞에 서있었다. "...젠장." 퍼걱! 안면을 직격당한 임태규가 한방에 나가떨어졌다. 개미 마수가 등을 보이고 있을 때 덤벼든 백윤호마저 순식간에 돌아선 놈의 손에 뒷머리를 잡혀 바닥과 충돌했다. 쿵! 백윤호가 움찔 몸을 떨었다. 그리고 한 번 더 백윤호를 땅에 처박으려 했을 때, 돌진해 온 마동욱이 어깨로 개미 마수를 들이받았다. 쾅! 개미 마수는 바닥을 구르다 몸을 일으켰다. 방금 분명히 팔이 잘려나갔던 마동욱이 다시 멀쩡해진 몸으로 덤벼들고 있었다. 개미는 또 마동욱을 쓰러뜨리고, 또 다른 헌터들도 쓰러뜨렸다. 하지만 다친 헌터들이 금방금방 회복해서 덤벼들었다. 그제야 개미는 힐러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힐러를 찾아 주위를 탐색했다. 하지만 민병구는 침착했다. 그의 유일한 자기 보호 스킬 '위장'. 은신처럼 자취를 완벽히 감출 수 있지만 움직이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도 힐러에게 그 정도면 충분했다. 한곳에 가만히 서서 힐만 날리고 있으면 되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꾸만 치료스킬이 날아오자 개미 마수는 작전을 바꿨다. 놈은 헌터들 중 가장 튼튼해 보이는 마동욱의 다리를 쥐고 거꾸로 들어 올렸다. '무슨 짓을 하려는 거지?' 민병구가 깜짝 놀랐다. 개미는 마동욱을 천천히 부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민병구는 계속해서 힐을 날렸다. 어쩔 수 없었다. 힐을 멈추는 순간 마동욱의 목숨이 끊어질 테니까. 민병구는 땀을 뻘뻘 흘리며 치료 마법을 계속했다. 연이어 쏟아지는 힐의 마력을 찾아 헤매던 개미가 민병구가 있는 곳을 휙 돌아보았다. '설마?' 심장이 철렁했던 것도 잠시, 눈을 깜박이고 보니 개미가 사라져 있었다. '뭐야?' 이번엔 어디로 간 것일까? "병구야!" 백윤호가 소리를 질렀다. 그때. 푹! "컥!" 민병구가 피를 뿜었다. 불에 데인 듯한 통증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배에 큰 구멍이 뚫려 있었다. 구멍을 뚫고 튀어나와 있는 것은 개미 마수의 검은 팔. 고개를 들어 올리던 민병구와 백윤호의 시선이 마주쳤다. 민병구가 말했다. "형... 도망가." "병구야!" 백윤호가 몸을 일으키려 했으나 이미 부상을 입은 다리에 제대로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콰직! 개미 마수가 민병구의 머리를 물어뜯었다. 콰직! 콰직! "으아아아아-!" 백윤호가 비틀거리며 달려 나갔다. 개미 마수는 머리를 잃은 민병구를 버리고 덤벼드는 백윤호의 목을 한손으로 움켜쥐었다. 백윤호가 힘껏 발버둥 쳤으나 놈의 억센 아귀힘을 벗어나기엔 역부족이었다. 개미 마수가 입을 열었다. "형... 도망가... 형... 도망가." "...?" 백윤호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눈을 부릅떴다. 개미 마수는 민병구의 말투를 완벽히 흉내 내고 있었다. 목소리가 괴이하게 갈라지는 것을 빼면 민병구와 같았다. "도망가... 형." 한참을 같은 말을 반복하던 개미 마수가 백윤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너희는... 약하다." 개미 마수의 입에서 익숙한 언어가 나왔다. 어눌하긴 하지만 확실한 한국어였다. "무슨...?" 백윤호의 눈이 커졌다. "이쪽은... 여왕이 당했다... 병졸들을 죽여도... 계산이 맞지 않다... 너희들의 왕은 누구냐?" "...왕?" 개미 마수가 백윤호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컥." "너희들의 왕... 어디에 있나?" 백윤호가 생각했다. 한국팀에서 가장 강한 차해인이 의식을 잃고 있는 지금, 조금이라도 시간을 벌어 줄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백윤호는 현재 한국팀을 버리고 철수 중이라는 일본팀, 그 일본팀의 헌터 중에서도 가장 강한 고토를 떠올렸다. "바... 바깥에." "바깥..." 개미 마수가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를 찾는 듯 하던 놈이 만족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있다... 강한 녀석." 그러고는 상대할 가치도 없다는 듯 백윤호를 떨어뜨리고 무서운 속도로 사라졌다. 컥, 컥. 바닥에 엎어진 백윤호는 한참 숨을 몰아쉬다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럴 때가 아니었다. 놈이 돌아오기 전에 어서 이곳을 빠져나가야 했다. 하지만. 사사사삭. 강력한 개미 마수와 사투를 벌이는 사이, 어느새 둥지로 돌아온 개미 군단이 서서히 침실로 밀려들어오고 있었다. *** "흠." 고토는 검집에 검을 꽂아 넣었다. 그의 주위에 개미들의 사체가 빼곡히 산을 이루었다. 어림잡아 백 마리 이상. 일본 최강의 실력이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대충 정리된 것 같군." "예." 믿음직스러운 고토의 모습에 같은 팀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옆에 있으면 최소한 죽을 일은 없어 보였다. "우리만 빠져나가면 된답니다." 본부로부터 연락을 받은 헌터가 보고했다. 고토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해안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이쪽으..." 고토는 말을 끝맺지 못했다. 쉭-! 어느새 나타난 개미 마수 하나가 그의 눈앞에 서 있었기 때문이다. '...' 고토는 한눈에 적의 기량을 알아보았다. '평범한 개미가 아니군.' "고토 상!" 고토는 자신을 도와 나서려던 동료들을 저지했다. "여긴 내가 맡지." 이렇게 강한 적이 상대라면 오히려 동료들은 방해만 될 뿐. 혼자가 편했다. 고토를 믿는 팀원들도 그의 명에 따라 그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순순히 뒤로 물러섰다. 고토는 신중한 얼굴로 검을 뽑아냈다. "개미... 제법 날카로운 기운이구나." 개미 마수도 자신의 힘을 눈치챘는지 그 자리서 꼼짝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긴, 조금만 움직여도 녀석은 이 검에 수백조각이 나리라. 개미 마수가 입을 열었다. "네가... 왕인가?" "왕?" 고토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개미가 말을 하다니. 하지만 지성을 지닌 마수들이 자신들만의 언어를 쓴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그렇다면 마수가 인간의 언어를 흉내내는 일도 불가능하지는 않을 터. 고토는 피식 웃었다. '왕이라...' 마쓰모토 협회장이 헌터들의 제국을 건설한다면, 자신이 왕좌에 앉을 만한 유일한 인물이긴 했다. "그래, 내가 왕이다." 키킥. 원하던 대답을 듣자마자 개미 마수가 마력을 해방했다. 화악놈에게서 새어 나오던 마력의 일부. 빙산의 일각만 보고 전체의 힘을 오판하고 있었던 고토의 동공이 잘게 떨렸다. '이게 대체...?' 싸늘한 한기에 소름이 돋고, 뒷목의 털이 쭈뼛 곤두섰다. 이 감각은 일전에 한번 경험해본 적이 있었다. '...성진우?' 스걱. 개미 마수가 움직임과 동시에 고토의 머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 "으아아아!" 한국팀은 개미들에게 둘러싸였다. 마동욱도, 임태규도, 최종인도, 심지어 카메라맨까지 밀려드는 개미들과 싸웠다. 하지만 개미들의 파도는 끝이 없었다. 허억, 허억, 허억. 모든 소리가 사라지고 자신이 내뱉는 거친 숨소리만이 가득했다. '여기까지인가.' 백윤호는 눈썹 아래로 흘러내려 오는 피를 손등으로 닦아냈다. 유일한 치료 계열 헌터가 사라진 지금, 이만한 수의 병력을 상대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다. 무의미한 저항일 뿐이었다. 그럼에도 쉽게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소중한 사람 둘이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기 때문에. 그들이 묻힌 자리에 자신까지 눕기는 싫었다. "으아아아아-!" 개미 머리 하나를 또 박살냈다. 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많은 수의 개미가 자신을 덮쳐왔다. 키에엑! 키엑! 개미들을 있는 힘껏 뿌리친 백윤호는 벽을 등지고 섰다. 이렇게 하면 최소한 사방이 포위당할 일은 없어지니까. "허억, 허억." 고개를 들어 다른 헌터들을 찾았다. 방금 전까지 같이 싸우고 있던 헌터들의 모습이 개미들에게 둘러싸여 보이지 않았다. 설마,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던 그가 등뒤에서 갑자기 나타난 인기척에 흠칫 놀랐다. 급히 돌아서서 주먹을 날리던 그가 멈춰 섰다. 뒤에 서 있는 건 개미가 아니었다. '뭐지?' 검은 갑옷을 입고 있는 병사. 실제로 본 것은 처음이었지만, 레드 게이트에 들어갔던 박희진에게서 '이것'에 대한 설명을 수도 없이 들었던 적이 있었다. '분명 이건...?' 백윤호가 놀라 소리쳤다. "이게 왜 여기 있는 거야?" 그때. 병사에게서 낯익은 음성이 들려왔다. -교환. = 118 화 한일 연합팀이 섬을 방문하기 1 년 전쯤. 여왕은 생각했다. -섬을 버려야 한다. 먹이가 되어 줘야 할 생명체들이 자취를 감춰 버려, 이제는 아이들이 서로를 잡아먹는 일까지 비일비재했다. 이 땅에는 수천까지 증가한 왕국의 주민들을 부양할 식량이 없었다. -이대로는 안 돼. 기존의 왕국을 버리고 생명체가 넘치는 곳을 찾아가 새로운 왕국을 건설한다. 첫 번째 과제가 섬을 장악하는 것이었다면, 이것이 왕국에게 내려진 두 번째 과제였다. 하지만. 여왕은 떠올렸다. 몇 번이나 섬에 발을 디뎠던 강력한 침입자들. 간신히 그들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왕국 또한 크나큰 피해를 입었다. 수많은 아이들이 싸움에서 희생되었다. 다른 땅에서도 그들을 이길 수 있을 것인가? -좀 더 강한 병사들. 왕국의 주민들을 이끌어 줄 최강의 병사가 필요하다. 그렇게 여왕은 진화의 방향을 결정했다. 그 후로 반년. 자체적으로 보유하고 있던 마력과 그간 충분히 섭취해 두었던 양분을 모두 모아 하나의 생명을 잉태했다. 오로지 강한 인간들을 상대하기 위해 태어난 최강의 전투 병기를. 강한 병사를 만들겠다는 여왕의 일념과 모든 인간을 말살하려는 태초의 명령이 합쳐져 상식을 뛰어넘는 끔찍한 괴물이 탄생했다. 그 괴물이 타고난 스킬 '포식'. 괴물은 대상을 섭취하는 것만으로 대상이 가지고 있던 마력과 지식의 일부를 자신의 것으로 만들 수 있었다. -더 강해지고 싶다. 자신의 능력을 깨달은 괴물은 심지어 동족까지 먹어치우기 시작했으나, 여왕은 이를 방관했다. 괴물이 원하는 것과, 여왕이 원하는 것은 같았으니까. 여왕은 나날이 강해지는 '그'를 보며 즐거워했다. 자신을 아득히 초월해 버린 '그'가 이끌게 될 새로운 병사들도 순조롭게 준비되는 중이었다. -이제 조금만 더 있으면... 그러던 중. 또다시 이 땅에 다수의 침입자들이 찾아왔다. 수는 적지만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한 침입자들. 하지만 여왕은 웃었다. 다른 땅에서 인간들과 전쟁을 벌이기 전에 먼저 '그'의 힘을 확인해 볼 기회였다. 여왕은 왕성을 지키는 모든 병사들과 함께 '그'를 내보냈다. '그'는 여왕의 바람대로 자신에게 내려진 첫 번째 임무를 완수했다. 그러나 '그'가 돌아왔을 때, 이미 여왕은 목숨이 끊어진 뒤였다. '그'는 분노했다. 그리고 다행스럽게도, 이 섬 위에는 분노의 대상이 되어 줄 강한 인간들이 아직 많았다. 일단은 인간들의 왕부터. 그리고 왕의 곁에 있던 수하들도 깔끔히 처리했다. 그때 수하 중 하나가 죽기 전 울면서 소리쳤었다. 넌 대체 뭐냐고. 스킬 '포식'으로 인간들을 섭취하여 사고력까지 갖추게 된 '그'는 생각해 보았다. '나는 무엇인가?' 이전까진 여왕의 병사였다. 그러나 인간들에게 여왕을 잃고만 지금, 자신을 무엇이라 말해야 좋을까? 왕국의 병사들을 이끌 수 있는 유일한 존재. '그'는 그러한 존재를 칭하는 단어를 하나밖에 알지 못했다. '...왕.' 이미 적들의 왕을 처치했으니 왕이 될 자격은 충분하리라. 덥석. 개미왕은 마지막 남은 인간의 머리를 물었다. 그런데 그때. 갑자기 개미왕의 고개가 왕성이 있는 방향으로 홱 돌아갔다. 여왕이 있던 곳에서 폭풍처럼 밀려 나오는 어마어마한 기운. 일개 병졸들이 보일 수 있는 힘이 아니었다. '...왕?' 자신을 위협하는 적이 나타났음을 직감적으로 깨달은 개미왕은 왕성을 향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 이게 무슨 날벼락일까? 금방까지 잔칫집 분위기였던 방송국 상황실은 초상집 분위기로 변했다. 잘 나오던 방송이 날개 달린 개미의 등장 이후로 갑자기 끊기자, 시청자들의 항의와 문의 전화가 빗발쳤다. 뚜르르-! 뚜르르-! 국장에게 다가간 직원이 조심스럽게 보고했다. "국장님, 지금 시청자들의 전화로 통신망이 마비될 지경이랍니다." 국장이 고개를 들었다. "그래서 뭐? 지금 개미 새끼 한 마리한테 헌터들 찢어지는 장면을 전국에 생중계라도 하자는 말이야?" "아, 아닙니다." 하필 헌터들이 개미 마수에게 일방적으로 당하는 장면에서 방송이 끊겼다. 시청자들의 궁금증이 폭주할 수밖에. 그러나 마동욱 헌터가 고문당하고, 민병구 헌터가 잡아먹히는 장면을 내보낼 수는 없었다. 국장은 양손에 얼굴을 파묻고 신음을 흘렸다. "다 끝났어... 다 끝났다고." 방송사의 운명을 걸고 임했던 일생일대의 도박이 개미 한 마리 때문에 어이없이 무너져 버렸다. "끝났어..." 상황실 안에는 무거운 정적이 흘렀다.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런데 유일하게 한 사람. "어?" 검게 변한 얼굴로 묵묵히 오리지널 영상을 모니터링하던 피디가 입을 열었다. "구, 국장님!" "...왜?" "지금 현장에 누군가가 나타났습니다." 국장은 양손에 파묻은 얼굴을 들지도 않고 말했다. "예수님이라도 나타난 거 아니면 일일이 보고할 필요 없어." "하지만...!" "다 끝났다고." 말로 해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피디는 줄였던 볼륨을 확 올렸다. 키에에에엑키에에엑! 상황실 전체가 개미들의 비명 소리로 가득 찼다. 국장이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어디 국장뿐일까? 상황실에 있던 모든 직원들이 후다닥 모니터링 화면으로 다가왔다. 오, 오, 하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 멍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국장이 겨우 의자에서 엉덩이를 뗐다. 그가 다가오자 직원들이 길을 터 주었다. 국장의 눈동자에 모니터링 화면이 반사되었다. "오, 하나님... 맙소사." 국장은 믿지도 않는 하나님을 찾더니, 이윽고 직원들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얼른 방송 재개할 준비 안 하고 여기서 뭣들하고 있어? 시청자들이 이거 놓치면 너희들이 책임질 거야?" 흥분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국장을 피디가 급히 만류했다. "국장님! 지금부터 다시 방송을 시작하면 완전히 생중계가 됩니다. 송출 지연 없이 바로 리얼타임 방송이 됩니다. 비상 상태가 일어나도 수습할 수가 없어요!" 10 분이었던 방송 딜레이 시간은 끝이 났다. 이제는 리얼타임이냐, 방송 중단이냐만 남겨 둔 상황. "...이판사판이야." "예?" "어차피 이미 한 번 방송을 중단한 상태니 여기서 더 나빠질 것도 없잖나." "그... 그렇긴 하죠." 갑자기 카메라에 잡힌 헌터. 그가 한국인인지, 일본인인지, 아니 헌터인지조차 알 수 없지만 끝나 버린 줄 알았던 도박에 다시 한번 기회가 찾아왔다. 국장은 비장한 얼굴로 지시를 내렸다. "틀어, 무조건 틀어." 그리고 의자를 하나 빼내 피디 옆에 앉으며 말했다. "이제 우리 방송국 운명도 저 사람과 같이 가는 거야." *** "으으윽!" 벼랑 끝까지 몰려 있는 상황에서도 카메라맨은 후회하지 않았다. 어렸을 적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지 않았는가? 영웅이 되고 싶다고. 그게 불가능하다면 적어도 영웅의 조력자 정도는 되고 싶었다. 방송국에서 허드렛일을 도맡아 하며 경력을 쌓을 때도 자신에게 기회가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러다 A 급 헌터가 되고 등급에 걸맞는 경력을 쌓아 마침내 여기까지 왔다. 덕분에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헌터들이 S 급 게이트 보스를 사냥하는 장면을 카메라에 생생히 담을 수 있었다. '그걸 내가 찍은 거야.' 이 영상으로 개미들이 박멸된 데는 S 급 헌터들의 희생이 있었음을 많은 이들이 알게 되리라. 그걸로 충분했다. 카메라를 공부하고 헌터로서 활동했던, 그동안의 노력들이 모두 보상받는 기분이었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아버지...' 어머니를 암으로 여위고 자신을 혼자 돌봐 주신 아버지. 아버지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는 사실에 가슴이 아파 왔다. 콰직! 개미에게 어깨를 물렸는데 감각이 없었다. 팔은 이미 움직이지 않게 된 지 오래였다. 탱커여서 그럭저럭 버텨 왔지만 이젠 정말로 한계였다. 털썩. 무릎을 꿇었다. 그 와중에도 머릿속은 온통 아버지 생각뿐이었다. '하필 아버지와 나눈 마지막 대화가 식사하셨어요? 라니.' 이럴 줄 알았으면 좀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눌걸. 그날, 아버지께서 서울에 올라오셨을 때 그냥 약속을 취소해 버릴걸. 하지만 언제나 시간은 빠르고 후회는 늦는다. 카메라맨이 고개를 들었다. 개미 마수의 끔찍한 이빨이 머리로 다가왔다. '강화' 스킬을 쓸 마력까지 바닥난 지금 마수들의 공격에 버틸 방도가 없었다. 그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아빠, 미안.' 그때. 콰직! 껍질이 바스러지는 소리와 함께 카메라맨의 얼굴에 개미의 체액이 튀었다. "어?" 차가운 은빛 칼날이 개미의 머리를 관통해 있었다. 검을 따라 고개를 들어 보니, 거기에는 머리에 기다란 붉은 깃을 달고 있는 개미가 있었다. '개미가 어째서 개미를?' 아니, 개미가 아니었다. 똑같이 새까매서 착각했다. 검은 갑주로 전신을 무장한 정체불명의 병사가 검을 뽑아냈다. 털썩. 머리를 관통당한 개미는 힘없이 늘어졌다. "대체 이게 어떻게...?" 검은 병사가 옆으로 비켜서자 어디서 많이 본 듯한 얼굴의 남자가 다가와 소리쳤다. "입 벌려요." "예?" 남자는 대화의 요지를 이해할 시간도 주지 않고 강제로 턱을 잡은 후, 정체를 알 수 없는 액체를 들이부었다. "컥, 컥!" 쿨럭거리면서도 액체를 전부 삼킨 카메라맨은 입가를 손으로 가리며 물었다. "다, 당신 뭐예요?" 하지만 남자는 대답하지 않고 개미들에게 돌아섰다. '뭐, 뭐야?' 카메라맨은 당황하면서도 얼른 자리에서 일어섰다. '잠깐...' 다리가 움직이고 있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뒤늦게 알게 됐지만 액체를 들이마신 후부터 팔도 멀쩡해졌다. '이게 어떻게 된 일이지?' 방금 남자가 자신에게 무슨 짓을 한 건가? 그거 말고는 마땅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다. 그 순간. 불현듯 카메라맨은 남자의 얼굴을 어디서 봤는지 기억해 냈다. '설마, 저 사람?' *** 진우는 침착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 일전에 헌터협회의 체육관에서 한국팀 멤버들을 만나게 됐을 때, 만약을 대비해 백윤호의 그림자에 병사를 숨겨 둔 것이 다행이었다. 생방송이 아니었던지 상황은 TV 로 보고 있던 것보다 더 심각했다. 이 중에서 가장 약한 카메라맨을 먼저 구했지만, S 급 헌터들은 아직 개미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어떡한다?' 어금니를 불러내서 불기둥으로 개미들을 한 번에 확 쓸어버리는 게 제일 빠른 방법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S 급 헌터들의 안전을 보장할 수 없었다. 그러니 다른 방법이 필요했다. 빠른 결론을 내린 진우가 아이언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이언!" 아이언이 맡겨 달라는 듯 자기 가슴을 툭 쳤다. 육중한 몸을 뒤흔들며 앞으로 걸어 나가던 녀석이, 가슴을 활짝 펴더니 우렁찬 함성을 내질렀다. 우워어어어어어어-! 띠링. [아이언이 '스킬: 도발의 함성'을 사용합니다.] 효과는 굉장했다. 헌터들을 공격하던 개미들이 모두 아이언 쪽으로 고개를 휙 돌린 것이다. 곧 놈들이 달려들었다. "잘했다." 진우는 아이언의 등을 툭 치고서 악마왕을 처치하고 습득한 단검 두 개를 불러냈다. '악마왕의 단검.' 푸른빛을 띠는 단검이 라이트 마법의 불빛을 받아 번쩍거렸다. 끼에에에엑-! 키에엑! 수백 마리의 개미들이 괴성을 지르며 미친 듯 한꺼번에 뛰어들어오자 눈앞의 시야가 온통 까매졌다. 꽈악. 단검을 쥔 진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이내 진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키에에엑! 곧 개미들과 병사들이 한데 섞여 혈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그사이 그나마 멀쩡했던 백윤호가 쓰러져 있는 다른 헌터들을 급히 구석으로 옮겼다. 다행히 모두 숨이 붙어 있었다. 이어 합류한 카메라맨도 백윤호를 도왔다. 진우가, 정확히는 진우의 소환수가 모든 개미들의 어글을 끌어 준 덕분에 무사히 끝마칠 수 있었다. "허억, 허억, 허억." 마동욱은 벽에 등을 기대고 거친 숨을 몰아쉬다가 자신을 여기까지 옮겨 준 백윤호의 팔을 잡고서 물었다. "무, 무슨 일이 일어난 건가? 지금 누가 싸우고 있어?" 그런 마동욱의 눈동자에는 초점이 잡히지 않았다. 눈이 다쳐 앞이 잘 보이지 않는 모양이었다. 백윤호는 마동욱의 손에 자신의 손을 얹었다. "마 사범님, 이제 괜찮습니다. 괜찮을 겁니다." "..." 그러고는 진우를 바라보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백윤호는 어느 정도 짐작하고 있었다. 성진우에게 얼마만 한 힘이 있는지. 갑자기 검은 갑옷의 병사가 사라지고 눈앞에서 그가 나타났을 때는 크게 당황했었지만, 이내 자신도 모르게 큰소리로 외치고 말았다. 제발, 도와 달라고. 그리고 그가 자신이 소환한 검은 병사들과 함께 개미들을 향하는 움직임을 보고 나서는 안도감에 다리가 풀릴 정도였다. 아니나 다를까. 성진우는 자신들을 그렇게 애먹이던 개미들을 장난감 인형처럼 무서운 속도로 부숴 갔다. 키에에엑-!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개미들의 비명이 어지러웠다. 백윤호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제 괜찮다.' 마동욱에게 하는 소리가 아니었다. 자신에게 하는 소리였다. 생환의 희망이 되살아났다. 20 명이 넘는 일본의 S 급 헌터들보다 성진우 한 사람의 도움이 더 듬직하게 느껴졌다. '...내가 나설 자리는 없겠지.' 백윤호는 미소를 지으며 마동욱의 옆에 앉았다.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이렇게 가만히 앉아 성진우 헌터의 사냥을 지켜보는 것뿐이었다. 그러다 카메라맨에게 진우를 가리켰다. "저 사람 제대로 따라가 주세요. 곧 재미난 걸 보게 될 테니까." 레드 게이트에 있었던 일, 헌터스의 레이드 때 사건. 전부 이야기로만 전해 들었던 모습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할 기회였다. "예!" 카메라맨은 싸움에 방해가 되지 않도록 거리를 유지하면서도 진우를 놓치지 않기 위해 애썼다. 공격대 헌터들의 일은 끝났지만, 아직 자신의 일은 끝나지 않았다. 꼴깍. 그는 힘겹게 침을 삼켰다. 키엑! 마침 진우의 손에 개미가 위아래로 깨끗하게 잘려나갔다. 진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개미들의 수는 많이 줄어, 이제 절반이 조금 넘었다. 세기도 힘든 숫자의 개미들을 베어 넘겼지만, 진우의 호흡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있었다. 사실 악마성 최상층에 비하면 이곳은 편한 편이었다. '여기서 조금 더 속도를 올려 볼까?' 힐끗. 잠깐 아래를 흘겨봤던 진우가 검은 연기를 피워올리고 있는 개미의 사체들에게 명령했다. "일어나라!" = 119 화 카메라맨은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뭐지?' 무슨 일이 일어나려는 걸까? 바람이 지나다닐 리 없는 깊은 땅굴 속에서 싸늘한 공기가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주위가 지나치게 고요한 것이 아닌가 의문이 들었을 때. 키에에에엑묵직한 비명 소리들이 울려 퍼지며 바닥에서 검은 손들이 일제히 솟구쳐 올라왔다. 턱. 턱. 지면을 움켜쥔 손들이 자신의 몸을 끌어 올렸다. "헉!" 카메라맨은 자신도 모르게 신음을 내뱉었다. 눈을 동그랗게 뜬 그의 숨소리가 거칠어졌다. A 급 헌터인 자신도 믿기 어려운 광경인데 이걸 지켜보고 있는 시청자들의 심정은 어떨까? 카메라맨이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는 사이, 어느새 검은 손의 주인들이 바닥에서 완전히 올라왔다. '개미 마수?' 언뜻 개미 마수의 형상을 하고 있는 듯했으나, 놈들의 몸에선 끊임없이 검은 연기가 올라오고 있었다. 고체인지, 기체인지 분간이 힘든 괴물들이었다. 검은색 드라이아이스로 개미 마수의 모양을 본 떠 조각상을 만든다면 저런 형태가 나오지 않을까? 그런 것들이 수백 기나 바닥에서 솟아올랐다. 카메라맨은 심장이 너무 뛰어 숨도 쉬기 힘들 지경이었다. 그 장면을 본 백윤호도 침음을 흘렸다. 카메라맨보다는 침착했지만 그래도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저게... 저게 다 소환수라고?' 할말을 잃어버린 두 사람과 달리 진우는 새로 추가된 그림자 병사들을 보며 흡족한 얼굴이 되었다. '좋아.' 이제 그림자 병사들이 개미 마수들을 수적으로 압도하고 있었다. '이 정도면 내가 나설 필요도 없겠네.' 진우는 악마왕의 단검들을 창고로 돌려보냈다. 그 후 새 병사들에게 첫 번째 명령을 내렸다. '가라. 한 놈도 남기지 마라!' 키에에에엑-! 처음 개미들이 여기로 들이닥쳤을 때 그랬듯이, 이번엔 진우의 새 마수병들이 물밀듯 들이쳤다. 끝이 없을 것 같이 이어지던 개미 마수들의 행렬이 검은 파도에 휩쓸리기 시작했다. *** 와아아-! 방송국 상황실에서 커다란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국장은 일어서서 박수를 쳤다. "됐어! 됐어!" 역겨운 개미 마수 놈들이 쓸려나가는 걸 보니 아주 막혔던 속이 뻥 뚫리는 것 같았다. 십년 묵은 체증이 내려가는 듯 했다. 보는 눈들만 없었으면 피디에게 이 장면만 따로 떠서 보내 달라고 하고 싶었다. 몇 달, 몇 년이 지나도 이 장면을 보면서 스트레스를 해소할 수 있게. 민병구 헌터의 비보는 분명 안타까운 일이었다. 팀의 유일한 힐러가 마수에게 당하는 장면을 봤을 때는 하늘이 노래지는 것 같았다. 그래도 만약 저 정체를 알 수 없는 헌터의 도움으로 한국팀 헌터들이 무사히 개미굴을 빠져나올 수 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한국팀은 이미 여왕을 처치해 애초의 목표를 달성한 상태다. 번식할 방법을 잃어버린 개미들이 머지않아 섬에서 사라질 것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거기에 일본팀. 일본팀은 또 어떤가? 중요한 작전을 나 몰라라 내팽개치고 달아났으니 약속했던 대가를 줄 필요가 없는 것은 당연하고, 후에 책임을 물을 수도 있다. 물론 레이드 영상이 날개 돋친 듯 팔려 나가는 건 덤이었다. 국장의 얼굴이 환해졌다. '대체 이 복덩이는 어디서 뚝 떨어진 거야?' 화면에 비치는 진우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그때. 직원 하나가 또 달려왔다. "국장님!" 국장이 화들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또 뭔가?" 국장의 얼굴이 굳어졌다. 잠깐 행복에 젖은 꿈을 꾸는가 했더니 또 무슨 변고가 생긴 것일까. 벌써부터 심장이 벌렁거렸다. 일이 이쯤 되니 이제는 보고하는 직원들까지 미워 보였다. 직원의 입을 틀어막아서 악재가 없던 일이 될 수 있다면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내가 점점 미쳐 가는군...' 그런 상사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직원은 잔뜩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저 남자, 정체를 알아냈습니다!" 국장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뭐?!" *** 헌터협회 협회장실. 콰직! 고건희는 소파 팔걸이에서 급히 손을 뗐다. 곁에 있던 주치의가 고건희를 돌아보았다. "협회장님." "...잠시 흥분했군." 무심코 손에 힘을 줬더니 이 모양이 됐다. 하지만 저 장면을 보고도 어찌 흥분하지 않을 수 있을까? 대형 화면에 비치는 진우의 활약상을 보고 있었더니, 저도 모르게 가슴이 뜨거워졌다. 몸만 허락해 준다면 자신도 함께 하고 싶었다. "흥분은 몸에 좋지 않습니다." 고건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협회장인 그가 작전 지휘실에 가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이번 토벌 작전이 성공하든, 실패하든 간에 약해진 그의 심장에 무리가 갈 수 있어서였다. 방송으로 보는 것조차도 마냥 안심할 수가 없어서 이렇게 주치의가 곁을 지키는 중이었다. '역시 아예 보지 못하게 막는 편이 옳았나?' 주치의는 잠깐 자신의 판단을 걱정했지만, 협회장의 표정을 보고 고개를 가로저었다. 성진우라는 헌터가 나타난 뒤로 협회장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떠날 줄을 몰랐다. "저 친구 성진우잖아!" 위기의 순간, 절망이 환호로 뒤바뀔 때 협회장이 내지른 소리가 아직도 귓속을 때리는 듯했다. 고건희는 웃었다. '믿을 수가 없군.' 그러고는 다시 소파의 팔걸이를 조심스럽게 쥐었다. 뭐라도 잡고 있지 않으면 몸이 근질거려서 참기가 힘들었다. '성진우 헌터가 어떻게 저기 있을 수 있는 거지?' 처음에는 그게 몹시 궁금했었다. 섬 전체에 개미들이 바글바글할텐데 어떻게 이렇게 아무도 몰래 나타날 수 있었을까? 그런데 지금 중요한 건 그따위 것이 아니었다. 중요한 건 지금 성진우 헌터가 저기 있다는 것. 그 덕분에 헌터들에게 희망이 생겼다는 것. 이 두 가지뿐이었다. 그때. 진우가 개미 마수들의 사체에서 그림자를 추출해 병사를 만드는 장면을 본 고건희의 눈이 커졌다. '저 친구, 나한테 거짓말을 했구먼.' 저게 어딜 봐서 소환수 백 마리인가? 대충 훑어봐도 3 백은 넘어 보이는데. 하지만 고건희의 표정은 속았다는 사람의 얼굴이 아니었다. 기분 좋은 미소가 그득했다. '마수들과 싸우고 싶다고 했었지.'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이제는 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저런 힘을 가지고서 어떤 마수가 두려울까? 확실히 마수들과 싸우는 진우의 모습은 신나 보였다. 보고 있는 사람의 가슴을 들뜨게 만들 정도로. 그런데. 저렇게 마수들과 싸우고 싶어 하는 성진우 헌터가 왜 한국팀에 합류해 달라는 제안을 거절했을까? '분명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었겠지.' 고건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지 않고서야 마수 앞에서 저런 얼굴을 할 수 있는 남자가 레이드 팀에서 빠질 리가 없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문득 진우가 빠진 이유가 궁금해진 고건희였다. *** 탕탕. 방에서 공부하던 진아가 소음을 듣고 거실로 나왔다. "엄마?" "미안하다. 너무 시끄러웠지?" 진아는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도 딸 공부한다고 TV 볼륨도 거의 안 들릴 정도로 낮추는 어머니에게 더 부담감을 주긴 싫었다. "아니, 그건 괜찮은데 왜 그래? TV 고장 났어?" "갑자기 안 나오네." "오빠는?" "오빠는 여기." 돌아보던 어머니가 깜짝 놀랐다. "어머나, 얘가 어디 갔대? 방금까지 여기 있었는데." 진아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진우의 방문을 열었다. "오빠?" 화장실에도 없고. 집 구석구석을 뒤지던 진아가 어머니에게 돌아서서는 물었다. "같이 뭐 보고 있었어?" "제주도 레이드." "..." 문득 영문을 알 수 없는 불안감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상하게 아파트 단지 전체가 시끄러운 듯했다. '설마...?' 진아는 황급히 방으로 뛰어들어가 휴대폰을 켰다. 그러자. 와아아아위아래 층에서 격렬한 환호성이 터져 나옴과 동시에 폰 액정을 확인하는 진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오빠?" *** 여왕의 침실에 들어왔던 개미 마수들을 전부 정리한 진우가 병사들을 다시 그림자에 집어넣었다. 아직도 섬 곳곳에 퍼져 있던 많은 개미들이 개미굴로 돌아오고 있었다. 놈들과 마주치기 전에 일단 여기 있는 헌터들을 안전한 곳으로 내보내는 것이 급선무라고 판단했다. '부상자도 있으니까.' 진우는 헌터들에게 다가갔다. 백윤호와 카메라맨 말고는 다들 상태가 좋지 않았다. 차해인은 아직도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고, 그 외 나머지 세 사람도 부상이 심각해 보였다. 진우가 물었다. "민병구 헌터님은?" 백윤호가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 진우는 포션을 꺼내 헌터들을 차례로 치료했다. 포션은 자신의 손을 떠나면 무용지물이 되기 때문에 한 사람 한 사람 직접 먹여 주었다. "으음..." 포션을 들이켠 헌터들이 하나둘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뭐야?" 상체를 벌떡 일으킨 임태규가 몸을 더들어 보더니 감탄사를 내뱉었다. "아니..." 최종인도, 마동욱도 원래의 몸을 되찾았다. "흠." "쿨럭." 최종인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모르는 터라 진우를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성진우 씨가 어떻게 여기에?" "나가서 얘기하죠." "아..." 주변을 둘러보던 최종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여긴 개미굴의 가장 깊은 곳. 잡담을 나눌 만한 장소는 아니었다. "성 사범!" 시력을 되찾은 마동욱이 진우의 손을 덥석 잡았다. "자네가 저 개미들과 싸운 게지? 고맙네, 정말 고마워!" 진우는 마동욱에게도 같은 대답을 했다. "나가서 얘기하시죠." "알겠네." 마지막으로 차해인. 차해인 앞에 선 진우의 얼굴에 주름이 생겼다. '이상한데... 기척이 너무 약해.' 불길한 기운을 느끼며 진우는 그녀의 입에 포션을 조심스럽게 부었다. 아니나 다를까. 금방 메시지가 떴다. 띠링. [잔여 체력이 10% 이하일 때는 힐링 포션으로 체력을 회복할 수 없습니다.] 진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그녀의 머리를 받쳤던 손을 빼보니 피가 흥건히 묻어나왔다. '...' 그 개미 놈. 한국 헌터들 중에서도 발군이었던 차해인에게 단 한 방으로 치명상을 입혔다. 여기 있는 다른 헌터들이 살아남은 것도 그들이 강해서가 아니었다. 그놈이 이들을 가지고 잠시 장난을 쳤던 것이다. 진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하지만 그전에 우선...' 차해인의 상처가 급했다. 포션으로 치료가 불가능한 상처라면 한시바삐 섬을 떠나 치유계열 헌터를 만나야 했다. "서두르죠." 진우가 그녀를 안고 몸을 일으켰다. 헌터들도 일어섰다. 모두가 서둘러 여왕의 침실을 빠져나가려는데, 선두에서 걸어가던 진우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 백윤호는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진우가 차해인을 백윤호에게 맡겼다. 진우 대신 그녀를 안아 든 백윤호가 당황스런 표정으로 말했다. "저도 돕겠습니다." 진우는 백윤호를 비롯한 헌터들을 둘러보며 단단히 못을 박았다. "절대 제 앞으로는 나서지 마세요. 그 편이 빠르니까." "성진우 씨, 그 말은." 아직 상황을 알지 못하는 최종인이 한마디 하려 하자 마동욱이 그를 만류하며 고개를 저었다. 마동욱은 눈으로는 보지 못했지만 기감으로 진우가 개미들을 어떻게 만들었는지 처음부터 끝까지 감지했다. 진우의 말이 맞았다. 그러나 백윤호가 끼어들었다. "성진우 헌터님." 진우가 돌아보았다. "당신이 강하다는 건 알고 있습니다. 아마 저만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하지만." 백윤호는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당신은 이미 너무 많은 소환수를 부렸지 않습니까?" 그게 무슨 문제가 된다는 걸까? 진우가 의아하게 바라보자 당황한 백윤호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미 많은 마력을 소모하셨을 텐데 마력이 바닥이라도 나면 어쩌시려고 하십니까?" 아, 그 말이었나. 그의 말로 짐작해 보건대 아마도 소환 마법을 쓰는 다른 헌터들은 소환에 많은 마력이 드는 모양이었다. '굳이 그림자 병사들에게는 마력이 들지 않는다는 걸 밝힐 필요는 없겠지?' 안 그래도 다른 이들의 눈에는 평범한 소환으로는 보이지 않을 텐데 말이다. 그래서 진우는 표현을 살짝 바꾸었다. "제 소환수들은 마력을 많이 잡아 먹지 않습니다. 그러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네?" 백윤호와 카메라맨이 동시에 대답했다. 그만한 소환수를 부리는 데 마력 소모량도 얼마 되지 않는다니? 그럼 대체 약점이 무어란 말인가? '...' 진우는 설명이 길어질 것 같아 그냥 동굴 쪽을 향해 돌아섰다. 타이밍 좋게 개미들이 안으로 몰려들어 오고 있었다. '많기도 많구만.' 여긴 환자가 있다. 여유를 부릴 시간이 없었다. 진우는 최고의 효율을 위해 스킬 '군주의 영역'을 시전했다. 발 아래가 검게 물들어갔다. 그렇게 병사들을 불러낼 준비가 끝나갈 때 즈음에, 동굴 저편에서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 진우는 음산한 기운이 흘러나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중에 하나. 개미들 틈 속에 놈들과 비슷하게 생겼지만 전혀 다른 한 종류가 섞여 있었다. '그놈이다.' 진우는 한눈에 개미왕을 알아보았다. 개미왕도 진우를 알아보았다. 개미왕은 서두르지 않고 천천히 진우에게로 걸어 나왔다. "인간... 제법 날카로운 기운이구나." 고토의 말투를 흉내 내면서. 놈을 보고서 방금 전의 악몽을 떠올린 헌터들이 흠칫하며 물러났다. 반면 진우는 미동도 없이 조용히 놈을 노려보았다. 개미왕은 진우 앞에 와 섰다. "네가 인간들의 왕인가?" "...벌레가 말을 다 하네." 진우가 담담한 얼굴로 말하자 개미왕의 얼굴이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여왕에게서 물려받았던 힘. 또 포식을 통해 모았던 힘. 가지고 있던 모든 마력을 일순간 해방하자 개미왕의 몸집이 거대하게 부풀어 올랐다. 진우와 엇비슷한 키가 거의 1.5 배 정도로 벌어졌다. 개미왕은 진우의 코앞에서 있는 힘껏 포효를 내질렀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눈 하나 깜짝 않던 진우가 그제야 씩 웃었다. "이제야 좀 벌레답네." 그리고 자신의 마력을 해방했다. = 120 화 "고토와 연락이 끊겼다고?" 마쓰모토 협회장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직원은 수신기를 마쓰모토에게 넘기며 물었다. "직접 들어 보시겠습니까?" 마쓰모토는 직원의 손에서 빼앗듯 넘겨받은 수신기를 머리에 쓰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 녹음 파일이 재생되었다. -개미... 제법 날카로운 기운이구나. -네가 왕인가? -그래, 내가 왕이다. -고토 상! -으아악, 으아아악! -컥! -으, 으으... -너, 넌 대체 뭐야! 삑. "여기서 연결이 끊겼습니다." 수신기를 벗는 마쓰모토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중간중간 들려오는 기분 나쁜 노이즈와 마수가 내는 끔찍한 소리. 다른 상황은 떠올릴 수 없었다. '개미가 인간의 말을 사용해? 게다가 고토가 그놈에게 당했다고?' 이런 일은 예정에 없었다. 분명 계획과 준비는 완벽했을 텐데 어째서... 마쓰모토의 손끝이 잘게 떨렸다. "...협회장님?" 그는 직원들의 시선이 자신의 손으로 향하는 것을 깨닫고는 슬그머니 손을 감추었다. 그러고는 말을 돌렸다. "고토를... 아니, 말하는 마수는 어디에 있나?" 차마 '고토를 죽인 마수'라고는 할 수 없었다. "사라졌습니다." "사라졌다고?" 고토를 죽인 놈이다. 제주도를 감시하고 있는 위성의 마력 탐지 카메라가 그만한 마수를 놓칠 수가 있단 말인가? 직원은 협회장이 무슨 말을 할지 알고 있다는 듯 모니터를 가리켰다. "저 빛이 그때 나타난 마수의 마력입니다." 마력 탐지 카메라는 마력을 빛으로 인식한다. 화면 위에 나타난 하얀 점이 크고 밝을수록 강력한 마력을 지닌 존재라는 뜻이었다. 고토와 주변 헌터들의 점이 모두 사라지고 나자 크고 밝은 점 또한 금방 자취를 감추었다. "맙소사..." 마쓰모토는 신음을 내었다. 적은 자신의 마력을 완벽하게 컨트롤하고 있었다. '이러니... 이런 녀석이니...' 연구팀이 캐치할 수 없었지. 완벽한 실착이었다. 그 대가로 일본은 10 명의 최상급 헌터를 잃었다. 그중에는 일본 최고의 헌터가 포함되어 있었다. 실수 하나의 결과치고는 너무 뼈아픈 대가였다. 그리고 대가는 아직 끝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저런 말도 안 되는 괴물이 만약 바다를 넘어온다면...' 떨쳐 내려 해도 자꾸만 참혹한 상상이 머릿속을 가득 메워 갔다. 그런데 그때. "찾았습니다! 놈이 다시 나타났습니다!" 마쓰모토의 눈이 번쩍 뜨였다. "놈은 어디에 있나?" "여왕의 침실입니다." "..." 그곳에는 개미굴로 돌아오기 시작한 개미들과 맞닥뜨린 한국 헌터들이 남아 있었다. 꽤 분투하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상대는 상식을 뛰어넘는 괴물이다. '결국 한국 놈들도 끝났군.' 그렇게 생각했었던 마쓰모토의 눈이 커졌다. '...?' 그 끔찍한 괴물의 바로 앞에 갑자기 나타난 빛. "이, 이게 대체?" 마쓰모토가 화들짝 놀라며 직원을 바라보았다. 연구팀 소속인 직원은 급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저도 이런 건 처음 봅니다." 거의 그 마수만큼이나 크고 밝은 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 마수 이상일지도 몰랐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커다란 빛 주위를 수백 개의 작은 빛들이 맴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수년간 탐지 영상을 분석해 왔던 연구팀의 분석팀장조차 한 번도 본 적 없는 장면이었다. '아...' 잘게 쪼개졌다 합쳐졌다를 반복하는 아름다운 빛무리에 감탄이 절로 흘러나왔다. 그러나 마쓰모토에겐 감탄하고 있을 여유 따윈 없었다. "한국팀. 그놈들이 분명 공략 과정을 촬영하고 있었지?" 아직 한국팀들이 멀쩡히 활보하고 있다는 것은 방송이 계속되고 있을 수 있다는 말. 마쓰모토는 상황이 어떻게 되어 가고 있는지 궁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한국팀 방송! 한국팀 방송을 메인 화면에 띄워!" 그가 소리치자 곧바로 컨트롤 센터의 벽면에 배치된 초대형 화면에 개미와 대치하고 있는 한 남자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쓰모토는 남자의 얼굴을 보며 꼴깍 침을 삼켰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땀방울이 턱에 맺혔다. '저 남자... 저 남자가 이 빛 덩어리들의 주인인가?'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커다란 개미 마수. 보통 개미보다 1.5 배는 더 큰 녀석이었다. 화면을 통해 보고 있을 뿐인데도 위압감에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 마쓰모토의 얼굴이 더욱더 딱딱하게 굳어졌다. 마침 그때. 개미가 먼저 움직였다. *** 개미왕의 주먹이 진우의 얼굴을 내려쳤다. 투쾅! 상체가 꺾일 뻔했던 진우가 발끝에 힘을 줘 버텨 냈다. '...!' 주먹에 전력을 실었던 개미왕은 내심 크게 놀랐다. "내 힘을... 버텨 내?" 숨통을 끊을 생각으로 휘두른 일격에 나가떨어지기는커녕 고개만 살짝 돌아간 수준이라니. 그러나 놀라고 있을 틈도 없이 진우의 주먹이 날아왔다. 슉투쾅! 안면을 직격당한 개미왕이 건너편의 벽에 처박혔다. 쿵-! 운석이 떨어진 흔적처럼 벽이 움푹 들어갔다. 잠깐이지만 개미굴 전체가 흔들린 것 같은 느낌을 받게 만들 정도로 강렬한 충격이었다. "무슨 개미가 말이 이렇게 많아?" *** 방송이 갑자기 중단되고 방송사고 메시지가 떴을 때, 많은 시청자들이 망연자실해 했다. "헌터들은... 헌터들은 어떻게 되는 거야?" "방금 그 개미는 뭐지?" "아니, 방송을 여기서 끊으면 어떡하냐고!" 난데없이 등장한 개미 마수 하나에게 너무도 무력하게 당하는 헌터들. 여왕을 처치하는 장면을 보고 기뻐하던 시청자들에게 찬물을 확 끼얹는 영상이었다. 이윽고 방송사고 화면이 끝나고 사회자가 나타났다. -아... 방금 확인된 소식입니다. 그는 침울한 목소리로 민병구 헌터의 부고를 전했다. 그리고 아직 개미굴에 남아 있는 다른 헌터들의 안전도 장담할 수 없다는 말을 덧붙였다. "에라이!" "여왕을 잡았는데 왜 헌터들이 죽는 거야!" "일본은?" "연합팀이라면서 대체 일본은 뭐하고 있는데?" 누군가는 격분했고, 누군가는 걱정했으며, 누군가는 슬퍼했다. 목숨을 걸고 싸워 준 헌터들이 비참한 최후를 맞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 나갔다. 중계화면이 끊어진 레이드 방송의 시청률이 중계가 원활히 되고 있을 때보다 더 오르는 기현상이 벌어졌다. -아! 급한 연락을 받은 사회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지금 현장에 소속이 확인되지 않은 헌터 한 분이 나타났다고 합니다! 다시 중계를 이어 가겠습니다. 그 한마디는 TV 앞에 있던 사람들의 지쳐 가던 눈빛에 강한 활기를 불어넣기 충분했다. 이어 현장 화면이 들어오고. "뭐야?" "아니!" TV 를 보던 사람들이 화면을 가득 채운 검은 병사들을 보고 벌떡 일어났다. 검은 병사들은 여왕의 침실 안으로 끝없이 밀려들어 오는 개미 마수들과 맞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이리저리 현장을 비추던 카메라가 한 사람에게 고정됐다. 거리가 멀어 얼굴을 구별하기는 어려웠다. -갑옷을 입은 병사들은 지금 영상에 비치는 헌터의 소환수들이라고 합니다. 또한, 대부분의 헌터님들이 무사하다는 소식입니다. 조마조마하게 지켜보던 사람들은 그 소식에 환호했다. 그리고 이름 모를 헌터를 응원하기 시작했다. "다 때려 부숴 버려!" "잘한다! 밀고 나가라!" "가라!" 그리고 마침내. 이름 모를 헌터가 엄청난 숫자의 새로운 병사들을 불러내고, 그들이 개미들을 도륙하기 시작했을 때. 와아아아-! 사람들은 두 주먹을 하늘로 쳐들고 열광했다. 가족이나 친구를 잃고 개미들에게 복수를 원했던 사람들은 시원한 장면에 눈물까지 글썽거렸다. 마치 타이밍을 노리고 있었던 것처럼 결정적인 순간에 사회자가 목소리를 높였다. -아, 헌터님의 신원이 방금 막 밝혀졌습니다! 사람들은 눈과 귀가 모두 화면으로 향했다. 과연 저 남자는 누굴까? S 급 마수가 가득한 곳에서 S 급 헌터들을 구해 올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헌터의 정체는? -대한민국의 10 번째 헌터, 성진우! 마법계열의 헌터로 특기는 소환 마법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저렇게 뛰어난 능력을 지닌 헌터가 일본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더 기뻐했다. 그 많던 개미들이 삽시간에 정리됐다. 그렇게 탈출만을 남겨 두고 있는 상황에서 또 다시 맞닥뜨린 개미떼. "어? 어?" "저거는..." 아까 방송이 끊기기 전에 봤었던 날개 달린 개미 마수가 개미떼를 헤치고 유유히 걸어 나왔다. 날개 달린 개미 자체가 거의 없는 편이고, 얼굴 생김새가 달라 쉽게 구분이 가능했다. 시청자들은 혼란에 빠졌다. "뭐야? 저 새끼 죽은 거 아니었어?" "아까 저 괴물한테 헌터들이 전부 당했잖아?" "여기서 저놈이 왜 또 나와!" 날개 달린 개미는 성진우 헌터 앞에 섰다. 능력의 상성 관계를 어느 정도 알고 있는 사람들은 둘이 마주 선 걸 보고 안타까운 마음에 발을 동동 굴렀다. "아이고, 저거 죽었다, 죽었어." "마법계열이 저렇게 쉽게 거리를 주면 어떡해?" "지금이라도 도망가라고!" 전투계열인 차해인 헌터를 한 방에 날려 버린 마수다. 일이 어떻게 흘러갈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그냥 마주 보고 서 있는 것만으로도 불안한데, 갑자기 개미 마수의 덩치가 훨씬 더 커졌다. 화면을 보고 있던 사람들이 경악성을 내질렀다. 그리고. 퍽! 담이 약한 일부 시청자들은 눈을 질끈 감았다. 마수의 주먹에 맞는 순간, 헌터의 머리가 터지기라도 할 줄 알았던 것이다. 그런데 의외로 멀쩡했다. '어?' '탱커인 마동욱 헌터를 한 방에 쓰러뜨린 펀치를 마법계열이 견뎌냈어?' 사람들의 눈이 커졌다. 그때. 투쾅! 개미가 벽에 처박혔다. "..." "..." 시청자들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파악하는 데는 조금 시간이 걸렸다. 그러나 카메라가 벽에 처박혀 있는 개미왕을 보여 준 순간. 와아아아아아아-! 또다시 격렬한 환호성이 터졌다. *** "헉!" 카메라맨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성진우 헌터가 개미의 주먹에 맞았을 때만 해도 아찔했다. 차해인 헌터는 그 한방에 의식을 잃었으니까. 그런데 성진우 헌터는 오히려 개미를 날려 버렸다. S 급 헌터 여섯을 가지고 놀던 녀석을.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S 급 헌터가 약했던 걸까?' 아니, 그럴 리가. 용맹하게 싸운 한국팀 헌터들은 S 급 보스인 여왕개미를 훌륭히 제거했다. 그런 헌터들을 우습게 상대하는 저 변종 개미가 이상한 것이고, 그 변종 개미를 날려 버린 성진우 헌터가 더욱 이상한 것이었다. 꿀꺽. 카메라맨은 흥분을 억누르며 마른 침을 넘겼다. 다른 헌터들의 반응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모두가 흥분에 찬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고 있을 때, 최종인은 문득 주위를 둘러보았다. 주위에 가득한 개미의 사체들. 자신이 기절해 있는 동안 헌터들이 합심해서 처치한 개미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방금 진우를 보고 생각이 달라졌다. '설마 이거... 성진우 씨가 혼자서?' 개미들의 숫자를 대략 훑어보던 최종인의 눈동자가 잘게 떨렸다. 키에에에에에엑-! 난데없이 터져 나온 괴성에 최종인의 고개가 홱 돌아갔다. 벽에서 빠져나온 개미왕이 분노를 표출하고 있었다. 내부의 공기가 파르르 떨려 왔다. '호오?' 진우는 놀랍다는 눈빛으로 개미왕을 바라보았다. 생각했던 것보다 데미지가 적어보였다. '외골격... 때문인가.' 녀석의 온몸을 덮고 있는 검은색의 딱딱한 껍질. 그건 이미 평범한 유기물 수준을 넘어서고 있었다. 그렇다면 힘으로 깨부순다. 갑옷을 부술 수 있는 건 검이나 창이 아니라 거대한 망치. 진우의 어깨와 팔 근육이 팽창하며 힘줄이 솟았다. 묵직한 공기가 주변에 착 가라앉았다. 개미왕도 포효를 멈추고 흉측하게 일그러진 얼굴을 진우에게 향했다. "감히!" 서로를 향해 걸어가는 둘의 간격이 빠르게 좁혀졌다. 이윽고 마주 선 진우와 개미왕. 둘의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전력을 다한 공격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투쾅! 쾅! 콰광! 헌터들은 경악했다. 진우와 개미왕이 서로를 타격할 때 생기는 마력의 충격파로 동굴 안이 떨리고 있었다. 오죽하면 마력을 다루는 데 일가견이 있는 최상급 헌터들조차 속이 울렁거릴 정도였다. "우욱..." "괜찮아요?" "괘, 괜찮습니다." A 급에 불과한 카메라맨은 자꾸만 속에서 올라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아 냈다. 현기증까지 일었다. '우욱.' 그러나 얼굴이 하얗게 질려 가면서도 웃을 수 있는 이유는. 쿵! 쿵! 쿵! '어떻게 저런 괴물을 상대로 헌터 한 명이 혼자서...' 희망을 봤기 때문이다. 투쾅! 분명 성진우 헌터도 타격을 입고 있긴 하지만, 개미왕의 껍질은 확실하게 부서져 가고 있었다. = 121 화 개미왕은 자신이 자랑하던 육체에 나타난 변화를 눈치챘다. 찌직. 찌직.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금속보다 단단할 터인 자신의 피부 곳곳에 미세한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반면 적은 자신의 공격을 견뎌 내고 있었다. 설마. 있을 수 없는 가정 하나가 개미왕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내가... 내가 힘에서 밀린다?' 그것도 크기가 내 반 밖에 되지 않는 인간 따위에게? 하필 그때. 콰직. 방금 강하게 얻어맞은 옆구리 쪽의 상처가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다. 소리가 좋지 않았다. 개미왕은 통각이 없는 외골격의 상태를 확인해보기 이해 아주 짧은 시간 그쪽을 살폈다. 흘깃.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갈라졌다.' 작은 흠집에 불과했던 금이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커지고 있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는 경고나 마찬가지. 개미왕은 빠르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아무리 짧은 시간이라고 해도 상대가 한눈을 판 틈을 놓칠 만큼 진우는 어설프지 않았다. 투쾅! 왕의 얼굴이 옆으로 돌아갔다. '...?' 강철 같은 안면 외골격을 무시하고 들어오는 강렬한 충격에 개미왕은 한순간 휘청거렸다. 뒷걸음질 치기 직전 간신히 균형을 잡았지만, 이번엔 공격이 아래에서 위로 올라왔다. 쾅! 턱이 하늘로 들렸다. '감히 인간 따위가...!' 왕은 고개가 들린 상태에서 격노가 담긴 시선을 아래로 향했다. 이 인간의 힘, 강하다. 하지만 힘밖에 내세울 수 없는 적에 비해 자신에게는 여러 가지 강력한 무기들이 있었다. 예를 들면. 개미왕은 고개를 바로 하는 것과 동시에 입을 벌려 독침을 쏘았다. 기다란 촉수 끝에 달린 독침이 순간적으로 튀어 나갔다. 피할 수 없는 거리에서 적의 얼굴을 노린 공격이었다. 슉인간은 제법 빠르게 고개를 틀어 독침을 피했지만, 결과를 지켜보는 개미왕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인간의 뺨이 독침 끝에 살짝 긁히며 상처가 생겼던 것이다. '됐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우연히 섭취하게 된 청자고둥에서 흡수한 능력 '마비독'. 생명체가 만들어 낼 수 있는 가장 치명적인 독 중 하나가 개미왕의 체내에서 마력과 섞이고 농축되어 훨씬 더 극악한 독으로 변했다. 스킬 '포식'이 진화시킨 최악의 맹독이었다. '애먹였구나, 인간 놈.' 살짝만 스쳐도 눈 깜짝할 사이 모든 신경제가 마비되어 감각을 잃고 몸을 제어할 수 없게 된다. 이제 남은 일은 저항하지 못하게 되어 버린 상대를 철저히 부숴 버리는 것. "...?" 마침 독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는지 인간은 당황스럽다는 얼굴이 되었다. "이것이 왕의 힘이다!" 개미왕은 만면에 미소를 띠고서 걸어가 인간의 얼굴을 후려쳤다. 하지만. 쾅! 인간이 왼손을 들어 가볍게 막았다. '...?' 어떻게 아직 움직일 수 있냐는 의문이 떠오른 것도 잠시. 투쾅! 반대쪽에서 날아온 인간의 오른손에 맞은 왕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키엑!" 처음으로 왕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 띠링. 진우는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나타난 시스템 메시지를 확인했다. [해독이 완료되었습니다.] '왜 혼자 기뻐하고 있었나 했더니, 이거 때문이었나?' 어지간히도 믿음직한 독이었는지 방금 개미왕에게서 심한 당혹감이 느껴졌었다. 신기한 일이었다. 물론 버프로 독이 해독되었다는 쪽이 아니라, 곤충에 가까운 마수의 감정을 자신이 느꼈다는 것이. 언제부터인가 마수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하이오크 때부터였나?' 그때는 하이오크들의 표정과 몸짓을 보고 감정을 읽었다고 생각했었는데, 개미의 경우를 보니 그것도 아닌 듯했다. 녀석은 얼굴을 일그러뜨리는 것 외엔 표정이 없었으니까. '그럼... 이것도 감각의 힘인가?' 모든 스탯이 대폭 상향된 만큼 감각 스탯도 몰라보게 올라갔다. 일정 이상까지 올라간 감각 스탯에는 지금까지 미처 알지 못했던, 다른 기능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걸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일단 놈의 숨통을 끊고 여기를 탈출하는 게 우선이다. 진우는 인제 막 몸을 일으키려 하는 개미왕을 향해 달려갔다. '...!' 개미왕의 초조함이 와 닿았다. 연이은 공격으로 개미왕의 외골격을 거의 부숴 놓은 상태. 이제 조금만 더! 그런 생각으로 순식간에 거리를 좁히고 들어간 진우가 뛰어올랐다. 그리고 발을 내뻗었다. 콰앙-! 하지만 개미왕은 이미 사라져 있었다. 애꿎은 바닥만 깊게 파였다. "어디지?" "사라졌어!" 헌터들이 왕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사이, 진우는 차분하게 고개를 들어올렸다. 놈은 날개를 이용해 머리 위에 떠 있었다. '이런 점은 편리하네.' 진우는 씩 웃었다. 감정이 느껴지니 기척을 좇기가 훨씬 더 쉬워졌다. 당혹감에서 일순간 불안감으로 바뀌었던 놈의 감정이 이제는 다시 기쁨으로 바뀌고 있었다. 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또 뭘 꾸미고 있나?' 진우의 짐작대로 개미왕은 작전을 변경했다. 왕은 공중에서 가만히 진우를 내려다보았다. '저 인간의 특기가 힘이라면 굳이 맞붙어 줄 이유가 없다.' 자신의 진정한 무기는 속도. 자칭 인간의 왕이라며 허세를 떨던 남자도 자신의 공격에 아무 반응 못하고 그대로 목을 내어 주었다. 놈을 힘으로 누르려 한 것은 일종의 과시욕. 개미왕은 사심을 버리고 적에게 전력을 다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스스슥. 커졌던 육체가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며, 양쪽 손톱이 칼처럼 길고 날카롭게 변했다. '손톱이...' 진우는 개미왕의 신체 변화를 지켜보며 놈이 이제부터 공격 패턴을 바꿀 것이라 직감했다. 스르륵. 진우의 양손에 단검 두 개가 쥐여졌다. 그때. 개미왕이 급강하하며 진우를 향해 쇄도했다. 방금 전과는 비교를 할 수가 없는 속도였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진우는 집중했다. 그러자 시간이 느려지면서 놈의 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시야에 들어왔다. 속도전은 진우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였다. 진우는 위에서 빠르게 내리꽂히는 개미왕의 손톱을 단검 끝으로 자연스럽게 흘려 보냈다. 캉! 내려선 개미왕의 손톱과, 뒤로 돌아선 진우의 단검이 다시 한 번 부딪혔다. 캉! 그것이 신호가 되어 둘의 공격이 맹렬하게 맞부딪히기 시작했다. 카가강! 캉! 카강! 카강! 캉! 순간 개미왕은 경악했다. 공방을 쉴 새 없이 주고받는 동안 내내 경악을 멈출 수가 없었다. '...?' 적은 자신의 속도를 따라잡고 있었다. 아니, 그뿐만 아니라 시간이 갈수록 몸이 풀려가는 듯 움직임이 점점 더 빨라지고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힘으로 겨룰 때도 뒷걸음질만은 피했었던 왕이 서서히 밀려나기 시작했다. 한 발짝, 한 발짝. 뒤로 향한 걸음이 늘어날 때마다 외골격에 상처가 늘어 갔다. 반면 진우의 눈에는 확신이 들어갔다. '끝낼 수 있다.' 왕이 받고 있는 정신적 충격이 고스란히 진우에게로 전해졌다. 놈은 지금 동요하고 있었다. 일국의 최정예 헌터들을 어린아이 다루듯 가지고 놀았던 녀석이 자신을 넘어서는 속도 앞에서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진우는 상대를 통해 자신의 능력치가 얼마나 상승했는지 실감했다. '고생은 헛되지 않았어.' 기분 좋은 고양감과 함께 가슴이 벅차올랐다. 이제 끝을 내자. 그렇게 결심한 진우는 개미왕이 또 한 발짝 물러선 순간 두 발을 더 내디뎠다. 그리고. '급소 찌르기!' 진우의 스킬이 개미왕의 몸에 박혔다. 급소 찌르기는 급소를 정확히 찌를 경우 추가 데미지를 주는 스킬. 외골격 곳곳이 부서진 개미왕에게는 온몸 전체가 급소나 마찬가지였다. 파바박! 수십 번의 급소 찌르기가 연속으로 박혔다. "키에에에엑!" [스킬 '급소 찌르기'가 최종 형태 스킬 '난도'로 상향됩니다.] '난도?' 새 스킬을 얻은 김에 진우는 곧바로 난도를 사용해 보았다. 그러자 단검이 개미왕의 빈틈을 찾아 들어가 찰나의 시간을 두고 수십 번 난도질했다. 다다다다다! "키에에에엑!" 개미왕이 비명을 질렀다. 놈이 고통에 몸부림치는 사이 진우는 단검을 내리그어 놈의 팔을 잘라 냈다. 스걱. 놈의 검고 긴 팔이 바닥에 툭 떨어졌다. "키엑!" 그쯤 되자 개미왕은 자존심도, 복수심도 잊어버리고 허둥지둥 하늘로 날아올랐다. 살아야 한다는 생존 욕구가 무엇보다 우선했다. 그러나 진우는 조금의 빈틈도 용납하지 않았다. 다리에 힘을 주어 뛰어올랐다. 누군가가 다가오는 기척을 느낀 개미왕이 뒤를 돌아보았다. '인간이... 날아서 쫓아온다고?' 지배자의 손길로 자신의 몸을 띄운 진우가 왕의 뒤로 접근해 한쪽 날개를 잘랐다. "키에에엑!" 날개 잘린 왕은 볼썽사납게 떨어졌다. 하지만 땅을 향해 추락하는 그 짧은 시간에도 왕은 이 위기에서 탈출할 방법을 떠올리기 위해 애를 썼다. '적보다, 적보다 앞서있는 것을 생각해내야 한다.' 힘, 속도, 비장의 무기 '독'까지 어느 것 하나 통하지 않았다. '저 인간보다 내가 앞서는 것이 하나도 없단 말인가?' 그렇게 절망하기 직전, 개미왕은 어렵게 해답을 찾아냈다. 유일한 하나가 떠올랐다. 바로 머릿수. 적은 혼자고 자신에게는 수천의 군대가 있었다. 지금도 자신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많은 전사들이 여왕의 침실 입구 앞에 서있지 않은가. 철푸덕. 바닥에 처박혔던 개미왕이 급히 몸을 일으키며 하나 남은 손으로 진우를 가리켰다. "끼에에에에에엑-!" 분노에 가득 찬 왕의 포효에 기다렸다는 듯 개미들의 물결이 밀려들어 왔다. 어떠냐, 인간! "끼에에에에에엑-!" 왕은 끝없이 포효했다. 무너진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또 한편으로는 병사들의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자신만만하게 인간을 노려보는데. "...?" 저쪽에서도 검은 파도가 밀려왔다. '가라!' 진우는 그림자 병사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처음 발동시켰던 '군주의 영역'은 아직도 유지되고 있었다. 한층 더 강력해진 그림자 병사들이 무서운 속도로 적들을 향해 돌진했다. 두두두두두두요란한 발소리가 개미굴 전체에 울려 퍼졌다. 곧 개미들의 물결이 부서지기 시작했다. 잠깐 전투 양상을 바라보던 진우가 마지막으로 어금니를 불러냈다. '...나와.' 혼자만 덩그러니 소환된 어금니가 머쓱한지 주위를 둘러보다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진우는 어금니의 손에 탐욕의 구슬을 쥐여 주며 단단히 경고했다. "개미들만 노려. 만에 하나 불길이 사람한테도 튀면 넌 영원히 소환 금지다." 어금니는 자신 있다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곧 '거인의 노래'로 거대해진 어금니가 개미들을 향해 무시무시한 불기둥을 토해 냈다. 쿠아아아아아아아아아-! 자주 보던 모습이었지만 진우는 오늘도 또 한 번 감탄을 터트렸다. '어째 저 녀석 불기둥은 나날이 더 굵어지는 것 같네.' 레벨이 올라서 그런가? 항상 보던 진우였으니 그 정도 반응이었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의미가 달랐다. 구석에서 진우와 개미왕의 전투를 숨죽인 채 지켜보던 헌터들은 갑자기 나타난 괴물의 모습에 신음을 토했다. 격한 반응도 나왔다. "저, 저게 소환수야? 소환수라고, 저게?" 임태규가 어금니를 가리키며 목청을 높였다. 헌터들은 그저 입을 쩍 벌리고 있을 뿐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했다. 모두 비슷한 생각이었다. 저게 소환수라고? 모습으로 보나, 능력으로 보나 저건 소환수가 아니라 인세에 강림한 마왕 같지 않은가? 어쨌든 그 강력한 불꽃에 개미들은 참 잘 타들어 갔다. 개미왕은 떨기 시작했다. '이게 저 인간의 병사들이라고...?' 단 1 분도 되지 않는 사이 자신의 병사들 수백이 증발했다. 단지 표현으로서가 아니라 이상한 괴물의 불꽃에 맞은 병사들은 말 그대로 정말 '증발'해 버렸다. 처음으로. 개미왕은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공포와 마주했다. 벽을 느꼈다. 자신이 가진 그 어떠한 것으로도 적을 뛰어넘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았다. 완벽한 패배였다. 하지만 어째서...? '나는 강한 인간들을 죽이기 위해서 태어났을 텐데...' 그것이 유일한 사명. 목표를 위해 성장에 성장을 거듭했다. 심지어 인간들의 힘까지 흡수했다. 그런데도 상대가 되지 않다니. 개미왕은 벌벌 떨면서 등을 보였다. 멀리, 조금이라도 더 멀리 저 인간과 떨어져야 한다. 개미왕의 머릿속에서 왕국과 병사들에 대한 생각이 말끔하게 사라졌다. 오직 살아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개미왕은 아직 완벽하게 자기 것으로 만들지 못한 치료 스킬로 급하게 날개를 회복하고는 날아올랐다. '조금이라도 더 멀리...' 그러나 그때. 쿠웅! 돌연 위에서 내리누르는 거대한 힘에 눌려 바닥에 엎어졌다. "키엑!" 땅에 부딪힌 개미왕이 울컥, 하고 체액을 쏟아 냈다. 지배자의 손길을 파리채처럼 휘두른 진우가 곧장 그리로 다가갔다. '저 녀석을 놓칠 수는 없지.' 강력한 마수다. 녀석의 그림자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병사로 만들고 싶었다. 그러려면 먼저 놈을 처치하는 게 우선. 자신에게 다가오는 진우를 발견한 개미왕의 얼굴이 불쌍할 정도로 겁에 질려 갔다. "키, 키엑!" 결국 개미왕은 네 발로 기어서 도망치기 시작했다. 처음에 보여준 위용은 온데간데없고, 이제는 완전히 벌레 같은 모습이었다. 금방 개미왕을 따라잡은 진우가 놈의 등에 대고 스킬 '급소 찌르기', 아니 '난도'를 사용했다. 파바바밧! 수십 번의 공격이 동시에 박히자마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띠링! [적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좋았어!' 진우는 주먹을 움켜쥐었다. 단숨에 2 레벨이 올랐다. 현재 레벨은 99. 아직 남아 있는 개미들의 숫자를 생각하면 오늘 안에 100 레벨도 가능하겠다는 생각이 들며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 "성진우 헌터님!" 백윤호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니 그의 표정이 어두웠다. 진우가 그리로 달려갔다. 괴물 개미가 쓰러진 것을 기뻐하던 다른 헌터들의 관심도 백윤호에게로 옮겨갔다. 백윤호는 진우에게 말했다. "차해인 헌터가..." 그의 말처럼 차해인의 기척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상황이 좋지 못했다. 진우의 표정 또한 굳어졌다. 시간이 없었다. 당장 카이셀을 타고 날아간다고 해도 언제 도착해서, 또 언제 힐러를 찾아내어 치료를 받게 만든단 말인가? '뭔가 다른 방법이...' 찰나의 고민 끝에 진우는 차해인을 구할 방법을 떠올려 냈다. 차해인의 안색을 살피느라 자세를 낮추고 있었던 진우가 몸을 일으키며 카메라맨을 돌아보았다. "잠깐 카메라 좀 꺼 주실 수 있겠습니까?" = 122 화 "예? 카메라를요?" "네." 카메라맨은 당황스럽다는 시선으로 진우를 바라봤다. 진우의 표정은 진지했다. "갑자기 카메라는 왜...?" 카메라맨의 질문에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 카메라맨은 쉽게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성진우 헌터는 생명의 은인. 지금도 여러 사람의 목숨줄을 쥐고 있는 그의 부탁이라면 못 들어줄 이유가 없었다. '그런데 하필 카메라를 꺼 달라는 것이라니...' 지금 전 국민이 다 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방송이었다. 전직 방송인 입장에서는 카메라의 전원을 누르기가 힘들었다. 그가 고민하며 망설이자 진우가 지체 없이 말했다. "안 끄면 부술 겁니다." 진우의 차가운 목소리에 카메라맨은 움찔 떨었다. 성진우 헌터가 작정하고 카메라를 부수려 든다면 여기 모인 헌터들이 모두 합심한다고 해도 막을 수 있을까? 이유를 불문하고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아, 알겠습니다." 카메라맨은 머리에 쓰고 있던 카메라를 벗어 전원을 껐다. 전원의 불빛이 꺼지는 것을 확인한 진우가 백윤호에게 안겨 있던 차해인을 넘겨받았다. '촬영기사를 겁먹게 만들고 싶지는 않았지만...' 차해인을 도우려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를 안아 들고 주위를 둘러보던 진우가 가볍게 심호흡을 한 후 지그시 눈을 감았다. '뭘 하려는 거지?' 헌터들의 관심이 전부 진우의 행보에 쏠렸다. 곧 진우가 눈을 떴다. 필요한 것의 위치를 파악한 진우는 돌연 개미굴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기 시작했다. 빠른 발걸음이었지만 차해인의 상태를 염려해 달리지는 않았다. 사람들은 진우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이내 정신을 차리고 그 뒤를 따라갔다. 이윽고 멈춰 선 진우가 차해인을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러고는 근처에 쌓여 있던 개미 마수 사체를 치웠다. "헉!" 무언가를 발견한 카메라맨이 신음을 토해 냈다. "음..." 다른 헌터들도 침음을 삼켰다. 싸늘하게 식어 버린 민병구의 주검이 거기에 있었다. 목 윗부분이 없는 처참한 모습이었다. 방금 전 성진우 헌터가 카메라를 꺼 달라고 했던 이유를 다들 이제야 짐작할 수 있었다. 누구도 이런 장면을 보고 싶지는 않으리라. "큭." 민병구와 누구보다도 친했던 백윤호는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렸다. 그런데 그때. '잠깐...' 그의 머릿속에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었다. '성진우 헌터는 이 많은 마수의 사체들 속에서 어떻게 병구가 있는 곳을 알아낸 거지?' 답은 곧 나왔다. 특별한 스킬이 아니라면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인간과 마수는 흘려 보내는 마력 파장이 미세하게 다른데, 진우는 그 차이를 구분하여 파장이 채 사라지지 않은 민병구의 시신을 찾아낸 것이다. 사실이라면 정말 놀라운 기감이라고밖에 말할 수가 없었다. 그건 그쪽으로 특화된 '마수의 눈'으로도 불가능한 작업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백윤호는 다시 진우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구의 모습에 가슴이 미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무슨 일이 일어날지 두눈으로 똑똑히 봐두고 싶어서였다. '성진우 헌터... 당신은 대체 뭘 하려는 겁니까?' 진우와 민병구, 그리고 차해인을 지켜보는 백윤호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혀 갔다. 그사이 진우는 민병구의 상태를 확인했다. 시신에서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림자 추출 스킬이 가능하다는 뜻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띠링. [그림자 추출이 가능한 대상입니다.]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가 할 수 있는 일임을 친절히 상기시켜 주었다. 물론 진우는 민병구 헌터가 변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부터 그를 그림자 병사로 만들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단지 하고 싶지 않았을 뿐. 죄 없는 사람을 언데드화시켜서 병사로 부리다니. 그것이 S 급 헌터의 시신이라고 해도 사양이었다. 그건 사람이 할 짓이 아니었다. 하지만. 진우는 점점 더 창백해져 가는 차해인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게 최선이겠지.' 촌각을 다투는 급박한 상황에서 대한민국 최고의 힐러에게 부상자를 맡길 수 있다면? 무슨 고민이 더 필요할까. 만약 민병구 본인에게 선택을 맡길 수 있다고 해도 백이면 백 같은 판단을 내릴 터. 진우는 비장한 얼굴로 그림자를 향해 명령을 내렸다. "일어나라." 그러나 결과는 예상과 달랐다. 띠링! [그림자 추출이 실패했습니다.] 진우의 표정에 의아함과 초조함이 감돌았다. 상대의 능력치에 비해 그림자 추출의 스킬 레벨이 낮아서일까? 아니면 이번 추출이 영 내키지 않아서일까? 진우는 잡념을 떨쳤다. 그리고 목소리에 강한 의지를 담아 말했다. "일어나라." 변화는 그때 시작됐다. 으아아아아아아함성이라고 해야 할지, 비명이라고 해야 할지 모를 묵직한 저음이 울리며 일대에 스산한 바람이 불었다. 헌터들은 등줄기를 스쳐 가는 오싹한 느낌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맙소사!" "저건!" 민병구의 그림자에서 검은 손이 하나 솟아올랐다. 검은 손은 다시 그림자 속으로 들어가기 싫다는 듯 땅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덥석. 그러고는 스스로를 그림자에서 끄집어내었다. '이럴 수가!' 지켜보던 백윤호는 심장이 터질 것만 같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신의 눈에는 분명히 보였다. 그림자에서 뽑혀 올라온 민병구의 마력이 서서히 사람의 형태를 갖춰 가고 있었다. 정확히는 흑색 갑옷을 입은 병사의 모습으로. 이윽고 소환수가 완전한 모습을 드러내었다. "..." 헌터들은 모두 할 말을 잃고서 넋이 나간 듯 진우가 불러낸 새로운 소환수를 바라보았다. 소환수에게서 최상급 헌터에 맞먹는 강대한 마력이 느껴졌다. '아니, 설마...?' 눈치 빠른 최종인이 흠칫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모두가 숨죽이고 지켜보는 가운데, 진우는 침착한 눈빛으로 민병구의 그림자를 응시했다. 시선이 마주친 그림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림자는 병사로 만들어지는 즉시 진우와 연결되게 된다. 그들은 주인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 수 있었다. 따로 지시를 내릴 필요도 없이. 몸을 숙인 민병구의 그림자가 차해인에게 치료 마법을 시전했다. 우우우웅그림자 병사의 두 손에 따스한 빛이 어림과 동시에 차해인이 안색을 되찾아가기 시작했다. 최고 수준의 힐이었다. '역시나!' 최종인은 전율했다. 차해인을 치료하는 손길을 보고서야 확신할 수 있었다. 검은 병사의 정체는 다름 아닌 민병구였다. 그제야 다른 헌터들도 하나둘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어렴풋이 눈치챘다. 민병구의 그림자에서 손이 올라올 때부터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던 마동욱이 끝내 감탄을 터트렸다. "성 사범 자네, 평범한 소환사가 아니었구먼." 진우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들이 누구인가? 한 명 한 명이 대형 길드를 대표하고 있을 정도로 뛰어난 헌터들. 대답을 듣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설마... 성진우 헌터님은 망자들의 힘을 이용할 수 있는 겁니까?" 최종인이 긴장한 눈빛으로 물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까지 와서 능력을 숨길 이유도 없었고, 그러기 위해 말을 지어내고 싶지도 않았다. '뭐, 둘러댄다고 속아 넘길 수 있는 사람들도 아니고.' 능력에 대해 털어놓고 나자 속이 시원했다. 다른 사람들이야 좀 무섭게 여길지 몰라도 진우에게는 자신을 여기까지 끌어올려 준 고마운 능력이었다. 그림자 군주로서의 힘에 자부심이 있었다. 자신감에 찬 진우의 눈빛을 마주보는 헌터들은 진우가 가진 힘의 정체에 두려움을 느꼈다. '망자의 힘을 이용해 소환수를 불러낸다고?' '전장이 치열해지면 치열해질수록 더 강해지는 힘이라니... 이 얼마나 무서운 능력인가?' '정말이지 말이 안 나오는군.' 오늘 진우의 능력을 눈앞에서 생생히 목격한 헌터들에게는 남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거기다 백윤호는 한 가지 비밀을 더 알고 있었다. '본인의 힘이 계속 성장하는 데다 자신이 처치한 적까지 소환수로 부릴 수 있다면...' 지금도 한계를 짐작하기 힘든 성진우 헌터가 훗날 가지게 될 힘을 떠올리니 절로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카메라맨이 뭔가를 떠올린 듯 말을 꺼냈다. "아, 그럼 아까 카메라를 꺼 달라고 했던 이유가..." 일국의 최상급 헌터들도 두렵게 만드는 힘이다. 그런 힘을 전 국민이 보는 앞에서 공개하고 싶지 않았으리라는 사실은 쉽게 유추할 수 있었다. 그때. 민병구의 그림자가 일어섰다. 치료 과정이 모두 끝났는지 어느새 차해인 헌터의 얼굴에는 붉은빛이 감돌고 있었다. '휴우-' 그녀의 상태를 확인한 진우는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는 않았으나, 호흡도 맥박도 정상으로 돌아왔다. 상처는 완벽히 치료된 후였다. 진우는 민병구의 그림자 어깨에 손을 얹었다. 수고했다는 의미였다. '...' 자신을 돌아보는 그림자의 따뜻한 눈빛에서 진우는 민병구가 생전에 어떤 사람이었는지 대략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진우는 그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그리고. '추출 해제.'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를 돌려보내 주었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마수와 목숨 바쳐 싸웠던 그를 병사로 부릴 권한 같은 것은 없었다. 전사자에 대한 도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나가자.'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 한 채, 진우는 눕혀 놓았던 차해인을 번쩍 안아 들었다. 여왕과 왕, 두 우두머리를 잃은 개미 마수들은 이미 그림자 병사들을 피해 섬 곳곳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개미가 바글바글했던 동굴이 텅 비어 있었다. 몇 발짝 앞서 나가던 진우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가시죠." 포션 덕분에 육체적인 피로는 거의 회복됐으나 정신적으로는 녹다운에 가까웠던 헌터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밝아졌다. 드디어 끝났다. 미소가 가득한 얼굴들이 감정을 대변해 주고 있었다. 무사히 개미굴을 빠져나가니 타이밍 좋게 도착한 헬기가 하늘 위를 맴돌고 있었다. "저기 헌터님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좋았어!" 헌터들을 발견한 헬기가 조심스럽게 지상에 착륙하자 헌터들이 하나둘 안으로 탑승했다. 마지막으로 서 있는 두 사람. 진우와 백윤호. 앞서 있던 진우는 헬기에 타는 대신 안고 있는 차해인을 백윤호에게 살며시 넘겨주었다. "성진우 헌터님은?" "여기서 아직 할 일이 좀 남아 있어서요." 그 말을 들은 백윤호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아직도 제주도 안에는 처치하지 못한 개미 마수들이 다수 남아 있었다. 다른 사람이 이런 곳에 혼자 남겠다고 했으면 미쳤냐고 반문했겠지만, 눈앞의 남자에게는 해당이 되지 않았다. 괴물은 괴물에게. 백윤호는 진우가 여기서 무엇을 하건 놀라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저기." 섬을 떠나기 직전, 백윤호가 마지막으로 물었다. "그럼 병구... 아니, 그 병구에게서 나온 소환수는 어떻게 되는 겁니까? 병사가 되어서 영원히 싸우는 겁니까?"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소환을 해제해 버려서 이제 다시는 볼 수는 없을 겁니다." 고개를 끄덕이던 백윤호가 만족스런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네요." "예?" "그 녀석. 어지간히도 싸우는 걸 싫어했거든요. 아마 성진우 헌터님께도 감사하고 있을 겁니다." 그렇게, 용감히 싸웠던 여섯 명의 전사들과 한 명의 촬영기사가 제주도를 떠나갔다. 그들의 싸움은 끝났다. 하지만 진우에겐 이제부터가 진정한 시작이었다. '100 레벨까진 앞으로 1 업.' 남은 마수들을 생각하면 충분했다. 게다가 개미굴 안에는 아직 추출해야 할 그림자들이 잔뜩 남아 있었다. 그럼 시작해 보실까? '일단은 도망친 개미들 정리부터...' 진우는 미소를 지으며 카이셀을 불러냈다. *** 일본 헌터협회. 마쓰모토 협회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대형화면을 껐다. 일본의 정상급 헌터 10 명을 단숨에 해치운 괴물을 한국의 헌터 단 한 명이 처리했다. '어째서, 어째서...' 마쓰모토는 떨리는 손끝으로 몇 가닥 남지 않은 옆머리를 쥐어뜯었다. 말도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덕분에 일본 헌터들의 전력은 반 이하로 격감했고, 이번 일로 협회장인 자신의 자리마저 위험해졌다. 차라리 한국마저 실패해 버렸으면 유야무야 넘어가 세계 사회에 도움을 구할 수 있었겠지만. 한국은 여왕을 깔끔히 잡은 데다 괴물 개미와 수천의 개미 군단을 상대로도 무사히 빠져나갔다. 성진우. 한 명의 헌터가 모든 것을 박살내 놓았다. '성진우... 성진우...' 문득 과거 한국에 있던 고토와 나누었던 통화 내용이 귓가에 아른거렸다. -한국에... 한국에 엄청난 헌터가 있습니다. -자네보다 더? -어쩌면 그럴지도 모릅니다. -... -계획을 조금 달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때. 그때 고토가 해 준 말에 귀를 기울여야 했다. 그는 누구보다 헌터 간 힘의 차이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인물이 아니었던가. 그가 처음으로 '대단하다'고 평가한 한국인 헌터가 있었는데 어째서. 어째서 이리도. 차라리 성진우를 완벽히 분석했다면 한국과 손을 잡고 아무 탈 없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었다. 아니, 가만히 내버려뒀어도 한국이 스스로 나서서 문제를 해결했을 지 모른다. 그랬던 것을 괜한 꾀를 부리는 바람에 제 무덤을 파게 된 꼴이 되었다. "혀, 협회장님?" 파리해진 그의 얼굴을 본 직원이 걱정스럽게 불렀다. 그러나 마쓰모토는 얼굴 한번 들어 보지도 않고 손짓만으로 직원을 물렸다. 직원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도망치듯 놀아 나갔다. 마쓰모토의 얼굴이 구겨졌다. '내가 살아날 길은 하나뿐이다.' 다시 일본 헌터협회를 강하게 일으켜 세우는 것. 그러려면 딱 한 명이 필요했다. '성진우...' 어떻게든 그를 모셔 와야 한다. 고토가 허무하게 목숨을 잃은 지금, 일본 헌터협회를 부흥시킬 방법은 그것 하나뿐이었다. 성진우 헌터의 활약을 한국의 전국민이 지켜봤으니 결코 쉬운 일은 아니겠으나, 한국은 이미 한번 자국의 헌터를 유출한 전례가 있었다. '어떻게 해야 성진우 헌터를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수 있을까.' 좌절감으로 잠깐 멈췄었던 마쓰모토의 두뇌가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 미국 동부. 따르릉- 따르릉- 따르릉끝없이 울리는 벨소리. 참다못한 데이비드 브레넌이 결국 수화기를 잡았다. '어느 미친놈이 이 시간에 전화질이야?' 그는 미국에서 가장 강력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기관인 헌터관리국의 수장. 만약 이게 장난전화라면 전화 건 놈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감방에 처넣겠다는 각오로 수화기를 들었다. 딸깍. "여보세요?" -국장님, 접니다. "부국장...?" 익숙한 목소리에 잠이 깬 데이비드가 상체를 일으켰다. "이 시간에 무슨 일인가?" -꼭 보셔야 할 영상이 있습니다. "영상...?"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일곱 통의 부재중 전화와 함께 동영상 파일이 하나 남겨져 있었다. 소리를 꺼 놓는 바람에 연락을 놓친 모양이었다. "알겠네. 내 곧 확인하고 전화 주지."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지금 댁 앞에 와 있습니다. "뭐라고?" 벌떡 일어선 데이비드가 탁상시계를 확인했다. 정확히 새벽 4 시 12 분이었다. 전화를 집어 던지듯 내려놓고 창가로 달려가 보니 정말로 부국장이 집 앞에 차를 대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부국장이 인사를 보내왔다. 데이비드는 기가 막히다는 듯 보고 있다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돌아섰다. '무슨 일이지?' 뭔가 심상치 않은 사건이 터졌음을 느낀 그는 동영상이 대기 중인 핸드폰을 쥐었다. = 123 화 영상의 재생이 끝났다. "..." 동쪽 끝 작은 나라에서 방금 전 일어났던 레이드 기록 영상은 데이비드 브레넌 헌터관리국 국장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던져 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부국장이 조심스레 물었다. 국장은 즉답했다. "어떻게 생각하고 자시고,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아니까 이 시간에 날 찾아온 거 아닌가?" 맞는 말이었다. 헌터관리국의 국장과 부국장이 새벽 4 시에 만나는 것도 신기한 일인데, 그 장소가 무려 국장의 집 부엌이라니. 식탁에 마주 앉은 두 사람 사이에 잠시 정적이 내려앉았다. 뻐끔뻐끔. 국장은 다시 한 번 영상을 돌려보며 담배를 피웠다. 남편을 찾아 2 층 계단까지 내려온 국장의 아내가 1 층의 불빛을 보고 그의 애칭을 불렀다. "데이브, 괜찮아요?" 국장은 손을 내젓자 국장의 아내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돌아서 다시 2 층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정확히 세 개비째 담배를 다 태웠을 때, 국장이 입을 열었다. "한국같이 작은 나라에 있기에는 아까운 인재군." "동감합니다."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있나?" 부국장은 성진우의 정보가 담긴 파일을 꺼내 놓았다. 문서를 훑어본 국장은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었다. "좋군." 극동의 땅, 제주도에서 레이드가 끝난 지 채 한 시간도 안 돼서 관련 정보가 자신의 손에 올라왔다. 그것도 헌터의 계열부터 인간관계까지 방대한 양이었다. 이게 바로 헌터 강대국 미국의 저력이 아니겠는가. 부국장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운이 좋았지.' 미국의 정보력도 정보력이지만 이번에는 운도 따라 주었다. 일명 '성일환' 사건. 던전에서 나온 인간인지, 마수인지 모를 어떤 존재가 자신을 한국의 헌터라고 주장했고, 그때 수집해 놓은 정보가 아직 관리국에 남아 있었다. 한국을 제외한 다른 나라들이 성진우라는 헌터의 이름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는 지금, 미국은 벌써 두 발짝이나 앞서 나가게 된 것이다. 갓 브레스 유. 이것이 진정 하늘의 도움이 아니고 무엇일까? 그러나 약간의 행운에 일일이 흥분해서는 될 일도 되지 않는다. 행운을 기회로 만드는 것은 어디까지나 당사자의 능력에 달린 일. 부국장은 사뭇 진지한 눈빛을 했다. "그는 헌터였던 아버지가 게이트에서 실종됐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했습니다." "흐음..." "게다가 최근 재각성이 있기 전까지는 어머니의 병원비를 감당하기 위해 수차례 사선을 넘나들어야 했다고 합니다." "...있을 수 없는 일이군." 나라를 위해 마수들과 싸우다 목숨을 잃은 영웅의 아내와 아들이 이런 대접을 받다니? 이곳 미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이건 아직 확인되지 않은 정보긴 합니다만..." 문서를 확인하던 국장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뜸을 들이던 부국장이 나직이 말했다. "그는 아직 어떤 길드에도 들어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 귀가 번쩍 뜨이는 소식이었다. 국장은 파일을 덮었다. "이건 황동수 때와는 달라." 국장의 입에서 익숙한 이름이 나오자 부국장의 눈빛이 달라졌다. "한 나라에서 두 명의 S 급 헌터를 데려온다... 이건 그 나라와 완전히 등을 돌리겠다는 소리와 마찬가지지." 한국은 미국의 오랜 동맹국. 그만큼 이번 일이 적지 않은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라는 의미였다. 그러나 부국장은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인물 아닙니까?" "..." 국장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래서 대답 대신 반문했다. "할 수 있겠나?" 부국장은 황동수 때와 같은 대답을 들려주었다. "해 보겠습니다." 그 한마디로 부국장은 승진에 승진을 거듭해 결국 이 자리에 앉게 된 것이다. 그리고 부국장이 두 번째로 눈독을 들인 사내. 이미 국가 권력급이라 일컬어지는 세계 최강의 헌터들을 둘이나 보유한 미국이지만, 그래도 국장은 이 사내를 꼭 미국인으로 만들고 싶었다. 국장은 네 번째 담배를 입에 물며 무겁게 말했다. "그가 어떤 조건을 제시하든 반드시 그를 내 앞으로 데려와 주게." *** 진우는 카이셀을 타고 날아다니며 그림자 병사들이 놓친 개미들을 하나하나 찾아내 처치했다. 끼에에엑! 단검 투척에 당한 개미 하나가 또 픽 쓰러졌다. 진우는 카이셀에서 내려서지도 않은 채 지배자의 손길을 이용해 단검을 손쉽게 회수했다. '슬슬 레벨이 오를 때가 됐는데.' 이제 개미도 얼마 남지 않았다. 진우는 웬만하면 남은 개미들로 레벨업을 해 두고 싶었다. 우선 1 레벨만 더 올리면 100 레벨을 찍게 된다. 5 의 배수로 딱 맞아떨어지는 숫자를 좋아하는 진우 입장에서는 놓치기 싫은, 환상적인 레벨이었다. 아직 예약해 놓은 게이트가 없으니 제주도를 떠나고 나면 한동안은 경험치를 얻을 곳이 없다. 운 좋게 랜덤 박스에서 열쇠가 떨어지거나 근처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지 않는 한은 말이다. '던전 브레이크를 운 좋다고 표현하기는 좀 그런가?'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려면 최소한 하나 이상의 공격대가 레이드에 실패해야 하니까. 그리고 또 하나의 이유. 민병구 헌터의 그림자를 추출할 때 아픈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백귀들의 대장, 바루카. 세 번의 시도 끝에 결국 녀석을 그림자 병사로 만드는 데 실패했었다. 오늘 첫 번째 시도를 실패하면서 이번에도 그렇게 되는 것이 아닌가 가슴이 철렁했었다. '어떻게 두 번의 시도 끝에 성공하긴 했지만...'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던가? 괴물 개미의 그림자를 추출할 때 바루카의 경우처럼 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었다. 놈의 능력치는 민병구 헌터와 비교가 불가능한 수준. 조금이라도 성공 확률을 높이기 위해 놈의 그림자를 추출하기 앞서 레벨을 올려 두고 싶었다. 그게 단 1 레벨 차이라고 해도 분명 도움이 될 터였다. '어?' 뭔가를 발견한 진우가 카이셀에게 착륙을 지시했다. 키악! 카이셀은 날개를 퍼덕이며 지면에 내려앉았다. 녀석의 등 위에서 내려선 진우는 근처를 살폈다. '이 근처인데...' 수풀을 뒤지던 진우가 시체들을 발견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주변 여기저기에 일본 헌터들의 시선이 남아 있었다. 깔끔하게 머리만 사라진 시신이 있는가 하면, 심하게 훼손돼 알아 보기 힘든 시신도 있었다. 진우는 시신들을 살펴보았다. '강한 마력...' 그들은 강자들이었다. 이런 곳에서 객사할 실력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여기에 누워 있다는 것은 그만큼 강한 무언가가 이곳을 들렀다는 뜻이었다. '그 괴물 개미 짓이겠지.' 다른 놈의 짓이라고는 생각하기 힘들었다. 처음 놈에게 머리를 얻어맞았을 때는 턱이 아플 정도였으니까. 다른 헌터라면 한 대도 제대로 버티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씁쓸히 일대를 돌아보던 진우가 어느 한 곳에서 우뚝 멈춰 섰다. '이 느낌은...' 진우는 몸을 숙여 바닥을 살폈다. 지면의 흙이 엄청난 양의 피에 젖어 있어 질척질척했다. 땅 위에 아주 희미하게 남아 있는 마력의 흔적. 전에 한 번 마주한 적 있는 마력 파장이었다. '고토 류지.' 진우는 주위를 살폈다. 고토의 마력은 남아 있지만 그의 신체는 어디서도 찾을 수 없었다. 아마도 괴물 개미에게 완전히 먹혀 버린 듯했다. 쯧쯧. 진우는 일본 최강의 허무한 최후에 혀끝을 차며 몸을 일으켰다. 때마침 섬 각지로 사냥을 내보냈던 그림자 병사들이 개미 잔당들을 모두 처리했음을 알려왔다. 기감을 확장시켜 봐도 걸려드는 개미 마수는 없었다. '...결국 다 잡았나?'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백이면 백 만세를 부를 소식이지만, 진우는 아쉬움에 입맛을 다셨다. 레벨을 올리지 못했으니까. 이제 남은 마수도 없으니 이대로 개미굴로 돌아가 괴물 개미와 여왕 개미의 그림자를 추출하는 수밖에. 그때. 진우의 걸음이 멈췄다. '잠깐만... 남은 마수가 있다고?' 확장된 기감에 걸려드는 마수들이 주변에 있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한 숫자가! 아쉬움이 남아 있던 진우의 얼굴에 금방 미소가 떠올랐다. 진우는 밝은 표정으로 카이셀 위에 올라탔다. "가자!" *** 역시나. 개미굴의 깊은 안쪽, 산란장으로 들어선 진우의 눈이 반짝거렸다. 바닥부터 벽면, 기둥, 천정까지 끝도 없이 늘어서 있는 알들. 반투명한 껍질 아래에서 꿈틀대는 움직임을 보니 이것들도 확실한 살아 있는 마수였다. '경험치가 얼마나 들어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이 정도 숫자라면 모자란 경험치를 충분히 채울 수 있을 듯했다. 진우는 범위 공격에 특화된 그림자 병사들을 불러내었다. "집합." 등급 순서대로 어금니와 마법병 셋이 나란히 섰다. 진우는 어금니의 손에 '탐욕의 구슬'을 쥐여 주고는 네 병사들을 차례대로 둘러보았다. "해야 할 일이 뭔지 알고는 있겠지?" 마법병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알들을 가리켰다. "실시." 그러자 거대화환 어금니의 입에서 끔찍한 불길이 쏟아져 나오고, 캐스팅을 끝낸 마법병들이 여기저기 큼지막한 불덩이를 던져댔다. 쿠아아아아아-! 퍼버엉! 펑! 저항할 수단이 없는 알들은 삽시간에 타들어 갔다. 키에엑-! 진우는 알이 아닌 한쪽 구석의 개미 번데기들을 자세히 살폈다. 이내 번데기 껍질이 녹아내리면 안쪽에 있는, 성충이 되기 직전이었던 개미들의 사체가 보였다. 놈들은 하나의 예외도 없이 전부 날개를 달고 있었다. '성충이 된 이 녀석들이 괴물 개미와 함께 바다를 건너왔다면...' 여왕을 제거하는 데 성공했어도 한일 양국은 큰 피해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지금이라도 막을 수 있어 다행이었다. 퍼엉-! 쾅! 땀을 뻘뻘 흘리는 부하들을 지켜보던 진우가 창고에서 '악마왕의 장검'을 꺼냈다. 푸른빛이 일렁이는 멋들어진 장검은 움직일 때마다 파직파직 하고 검신에 전기가 일었다. 진우가 주 무기인 단검 대신 잘 쓰지 않는 장검을 꺼낸 이유는 하나였다. 부웅-! 있는 힘껏 장검을 휘두르자. 콰지지지지지지지직-! 전방에 번개들이 번쩍이며 청색 폭풍이 일었다. '오!' 진우가 미소를 지었다. 악마왕이 사용했던 스킬 만큼의 파괴력이나 스턴 효과는 없었지만, 알들을 태워 버리기엔 충분했다. 그렇게 합심해서 열심히 알들을 제거하고 있었더니 마침내 '띠링'하고 반가운 기계음이 울렸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드디어!' 진우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곧바로 '악마왕의 장검'을 창고로 돌려보낸 진우는 뒷정리를 병사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여왕의 침실로 향했다. 당연한 일이지만 괴물 개미는 죽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엎어져 있었다. 진우가 그 앞에 섰다. 괴물 개미를 병사로 두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지 벌써부터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러나. 민병구 헌터의 그림자를 추출할 때 진우는 집중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깨달았다. '진정하자.' 이내 진우의 시선이 차갑게 식으며 호흡이 안정을 되찾아갔다. '...좋아.' 컨디션은 최고였다. 진우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괴물 개미의 사체에서는 다른 마수들에게는 볼 수 없었던 짙고 흉흉한 순혹빛 연기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놈의 마력이 비교 대상을 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강대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며 진우는 검은 연기를 향해 차분히 손을 뻗었다. "일어나라." 124 화 그 순간. 수명이 다한 형광등이 깜빡이는 것처럼 주위가 어두워졌다 밝아졌다를 빠르게 반복했다. 진우는 고개를 들었다. 여왕개미 레이드를 위해 최종인이 공중에 띄워 놓았던 빛 덩어리가 깜박거리고 있었다. '마법이 해제되는 건가?' 처음에는 막연히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한국팀 헌터들이 여기 발을 들인지 아직 1 시간도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벌써부터 마법의 효과가 사라지져 한다? 그것도 S 급 마법계열 헌터가 목숨이 걸린 레이드를 원활히 진행하기 위해 시전해 두었던 마법이? 있을 수 없는 이야기였다. 그렇다면. '...설마?' 방금 괴물 개미에게 사용한 그림자 추출 스킬이 원인인가, 하는 생각이 막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을 때. 팍주위가 완벽히 어두워졌다. 티끌만 한 빛이라도 새어 들어왔다면 감각 스탯의 힘으로 주변을 볼 수 있었을 텐데, 그마저도 불가능할 정도로 깊은 어둠이었다. 체감으로 1 초나 흘렀을까? 아주 짧은 시간, 유지되던 어둠이 가시고 주위가 환해지자 눈앞에서 괴물 개미가 마주 보고 있었다. '...!' 진우는 흠칫 놀라 물러섰다. 거의 동시에 떠오른 '그림자 추출에 성공했습니다'라는 메시지가 아니었다면, 괴물 개미가 되살아난 줄 알고 공격할 뻔했다. "휴- 깜짝이야." 진우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확실히 한걸음 떨어진 상태에서 냉정하게 살펴보니 살아 있을 때의 놈과는 좀 달랐다. 몸에서 검은 아지랑이가 끊임없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게 괴물 개미의 그림자...' 다른 능력치는 어떻게 변했을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불길함만큼은 이전보다 몇 레벨 더 높아진 듯했다. 진우는 개미의 그림자 앞에 섰다. 막강한 마력이 느껴졌다. 이렇게 앞에 서서 녀석의 마력을 느껴 보니 이제야 괴물 개미가 내 병사가 됐다는 게 실감 났다. '흠...' 침착하고 싶은데 자꾸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두근, 두근, 두근! 바라던 선물을 손에 넣은 아이처럼 가슴이 뛰었다. 곧 그림자의 정보가 떠올랐다. 그림자의 머리 위 정보를 바라보는 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 Lv.1] 장군 등급 등급을 확인한 진우가 주먹을 콱 움켜쥐었다. 처음 보는 등급이 떴다. 그 말은 이 녀석이 지금까지의 병사들과는 차원이 다른 강함을 지니고 있음을 의미했다. '생전의 능력치를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이기는 하지만.' 등급 이름만 봐도 예사로운 병사가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손에 넣고자 했었던 보람이 있었다. 그때. 스윽. 진우와 눈이 마주친 그림자가 무릎을 꿇었다. 그림자 병사들에게 내재되어 있는 '절대적인 충성심'은 이 녀석에게도 예외가 아닌 모양이었다. '좋아.' 다음은 여왕 차례. 진우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돌아섰다. 그런데. "왕이시여..."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진우가 우뚝 멈춰 섰다. 여태껏 담이 약하다고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이 순간만큼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기분이었다. ...환청일까? 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돌아보지 않아도 기척으로 알 수 있었지만, 뒤엔 개미의 그림자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는 여전히 무릎을 꿇고서 고개를 숙인 채 있었다. '...' 진우는 그림자를 응시하며 천천히 돌아섰다. "너냐?"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녀석이 입을 열었다. "제게도... 이름을..." 어눌하지만 분명히, 개미의 그림자가 말을 건네 오고 있었다. *** 헌터들을 태운 헬기는 곧장 서울로 향했다. 타타타타타타타타타-! 헌터협회에 도착한 헬기가 지면에 내려앉자, 초조하게 기다리던 고건희 협회장이 손수 헬기문을 열며 물었다. "차해인 헌터님은?" 헌터들의 시선이 차해인이 있는 곳을 가리켰다. 아직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그녀는 모포가 깔린 헬기 바닥에 반듯이 눕혀져 있었다. "어서 이리로!" 고건희의 지시에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A 급 힐러 두 사람이 급하게 달려와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 "...?" 그러고는 서로 의아하다는 눈빛을 교환했다. "무슨 일입니까?" 고건희의 질문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거의 동시에 비슷한 대답이 튀어나왔다. "다친 곳이 없어요." "정상입니다." "차 헌터를 치료할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까?" 힐러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설명을 덧붙였다. "누군지 몰라도 엄청난 회복마법을 걸어 놨습니다. 저희가 손 쓸 곳이 하나도 없습니다." 고건희는 당황스러웠다. 생중계로 차해인의 상태를 확인했을 때, 그녀의 부상은 사뭇 심각해 보였다. 보고로 듣기에도 상태가 심각해 계속 정신을 차리짐 ㅗㅅ하는 중이라고 했다. 그래서 사방으로 알아본 끝에 A 급 힐러 두 사람을 급히 불러 대기 시켜 놨던 것이다. 그런데. '치료할 곳이 없다?' 고건희의 시선이 차해인을 훑었다. 확실히 그녀의 혈색은 나쁘지 않았다. 마치 잠들어 있는 것 같은 모습이었다. 카메라가 꺼졌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고건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기에는 힐러도 없었을 텐데...' 유일한 힐러였던 민병구가 그렇게 끔찍히 당했으니 말이다. 고건희는 팀의 리더를 맡고 있는 마동욱에게 물었다. "이게 어떻게 된 겁니까, 마 헌터?" "그게..." 마동욱이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고민하며 망설이는 사이, 힐러 하나가 소리쳤다. "헌터님이 깨어납니다!" 모두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녀의 머리맡에 조심스럽게 앉은 고건희가 물었다. "차 헌터님, 정신이 좀 드십니까?" 차해인이 서서히 눈을 떴다. "여긴...?" "헬기 안입니다. 지금은 헌터협회에 착륙해 있는 상태고, 곧 헌터님을 병원에 이송할 예정입니다." "병원..." 잠깐 주위를 둘러보던 차해인이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자신의 몸에 성진우 헌터의 냄새가 배어 있었다. 그녀는 흐릿한 시선으로 고건희를 바라보았다. "...성진우 헌터님이 왔었나요?" 내내 기절해 있었던 그녀의 입에서 성진우라는 이름이 나오자 헌터들은 내심 놀랐다. 고건희는 대답 대신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차해인이 옅은 미소를 지었다. '역시... 꿈이 아니었어.' 깨어나는 듯했던 차해인은 그렇게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안정된 숨소리를 확인한 고건희는 수행원들을 시켜 그녀가 편히 쉴 수 있도록 병원으로 옮기라 지시했다. 그러고 보니 성진우 헌터가 자리에 없었다. 고건희는 다시 마동욱에게 시선을 옮겼다. "그런데 성진우 헌터님은 어디 계십니까?" 듣고 있던 백윤호가 두 사람의 대화에 참여했다. "성진우 헌터는... 남겠답니다." "남겠다니요?" 고건희는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을 했다. 마력 엔진을 이용한 헬기는 제주도에서 헌터들을 태운 뒤 곧장 여기까지 온 것으로 알고 있었다. 도중에 어디 거치는 곳도 없었는데, 어디에 뭘 어떻게 남는다는 말일까? 고건희는 다시금 물었다. "어디 남는다는 말씀이십니까?" "제주도에서 아직 할 일이 남았다고 들었습니다." "...아예 헬기에 타지도 않았단 얘깁니까?" 당황해 묻는 고건희에게 백윤호는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 "어떻게 말할 수 있는 거지?" "할 수... 있었습니다." 개미의 그림자는 질문에 빠짐없이 꼬박꼬박 대답했지만, 아쉽게도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림자가 되기 전부터 말을 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림자가 되고 나서도 말을 할 수 있다? '아니.'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충직한 기사 '아이언'이 되어 버린 전직 헌터 김철은 말을 할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아예 인간이었다. 그런데도 대화는 불가능했다. 민병구도 마찬가지. 단 한마디의 말도 하지 못한 채 무의 세계로 돌아갔다. 생전에는 잘만 떠들어 대던 마수, 어금니도 그림자 병사로 편입되고 나서부터는 영원히 입을 닫았다. 한데. 한데 어째서 이 녀석만은 말을 할 수 있는 것일까? 말을 할 수 없는 녀석들과 이 녀석의 차이점이라고는 딱 하나였다. '등급...' 정예기사나 기사 등급이었던 다른 병사들과 다르게, 이 녀석만 '장군'이라는 새로운 등급을 달고 있었다. 즉 일정 이상의 등급이 되면 말을 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아직은 확실한 증거가 없지만 지금으로서는 그것이 가장 신빙성 높은 가설이었다. '그럼 지금 내 밑에 있는 녀석들도 레벨이 오르면 말을 할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는 건데...' 병사들의 레벨을 올려야 하는 이유가 하나 더 늘어난 듯 했다. 잠깐 생각에 잠겼던 진우는 항상 병사들에게 묻고 싶었던 질문을 개미의 그림자에게 물었다. "너를 죽인 건 나다." "..." "그런데도 순순히 나를 따를 마음이 들어?" "저는..." 녀석은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대답을 내놓았다. "죽은 것이 아니라... 주군의 힘으로... 다시 태어난 것입니다."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서로 시선을 마주한 채로 녀석은 말을 이었다. "지금 제 안에는... 기쁨이 흘러 넘치고... 있습니다. 영원히 주군만을... 따르겠나이다." 두근. 어째서일까? 진심이 느껴져서일까? 개미의 그림자가 영원한 충성을 맹세할 때, 진우는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뛰었다. 거칠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가슴 위에 슬며시 손을 올렸다. 심장은 평소와 같이 빠르게 안정을 찾아갔다. 그때, 녀석이 다시 고개를 숙이며 간절히 청했다. "왕이시여... 제게도 이름을..." 이야기는 원점으로 돌아갔다. 시스템의 독촉 대신 본인의 간청을 받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이름, 이름이라. 애초에 병사의 이름을 크게 신경쓰는 편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개미니, 앤트니 하는 것도 좀 그렇지?' 같은 개미가 수백 마리나 있는데 장군이란 녀석의 이름이 '개미'라서야 체면을 세울 수가 있을까. 그러니. 잠깐 이름을 고민해 보던 진우가 씩 웃었다. "베르." 순간 '개미'라는 소설로 유명한 소설가의 이름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결정은 짧았던 고민보다 더 빨랐다. "네 이름은 베르다." 진우가 이름을 정해 주자, 베르는 감격했다는 듯 숙이고 있던 고개를 더 아래로 향했다. "감사합니다... 주군이시여." 베르의 머리 위에는 이미 정보가 갱신되어 있었다. [베르 Lv.1] 장군 등급 '됐다.' 진우는 바뀐 이름에 뿌듯해하며 여왕 쪽으로 돌아섰다. 이제는 정말로 여왕 차례. 방금 베르를 그림자 병사로 만들며 자신감을 얻어서 그런지 여왕의 추출은 간단히 끝났다. "일어나라." 키아아아아아악단말마와도 비슷한 비명 소리와 함께 여왕을 꼭 닮은 마수병이 그림자에서 올라왔다. "좋았어!" 연이은 성공으로 기쁨을 표출했던 진우가 뭔가 이상함을 느끼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라?' 여왕의 그림자가 만들어지고 나자 개미 마수 출신의 그림자들과 연결이 희미해졌다. 서로를 연결해주던 끈이 희뿌연 안개에 가려져 버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베르." 채 다 부르기도 전에 베르는 어느새 옆에 다가와 있었다. 척. 200 이 넘는 감각 스탯이 아니었으면 눈으로 따라가기도 벅찬 움직임이었다. 그런 녀석이 이제 충성스러운 병사가 된 것이다. 진우는 어깨에 절로 힘이 들어갔다. "왜 이런 줄 알아?" 진우가 여왕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베르는 개미 군단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병사였다. 베르가 공손한 자세로 대답했다. "개미 군단 지배는... 여왕의 고유한 능력입니다." 아하. 그러니까 여왕이 있으면 개미 군단의 통솔권은 자동으로 그녀에게 넘어간다는 것인가? '그건 좀...' 아무리 자신이 여왕을 복종시킬 수 있다고 하더라도, 개미 병사들을 맡기기에는 꺼림칙한 부분이 있었다. 명령을 내릴 때 여왕을 통해서 해야 한다는 소리니까. 턱을 만지작거리던 진우가 베르에게 다시 물었다. "그럼 여왕의 마력이 줄어든 건?" "여왕의 마력 대부분은... 번식을 위한 것입니다. 번식은 육체가 없이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진우가 말을 잘랐다. "마력이 반 토막 난 것이다?" "그렇습니다... 주군." 결국 베르의 말을 종합해 보면 여왕은 그다지 쓸모가 없다는 소리였다. 진우는 고민 끝에 여왕을 소환 해제하기로 했다. 제대로 힘도 못 쓰는 주제에 밥만 축낼 것 같은 부하를 굳이 부려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키에에엑-! 여왕의 그림자는 순식간에 연기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졌다. [저장해 둔 그림자 수: 570 / 570] 병사들도 이미 꽉꽉 채워 담았고. '남은 건 마정석 정도인가?' 진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S 급 게이트에서만 볼 수 있는 최상급 마정석들이 평범한 돌덩이처럼 발에 차이고 있었다. 어차피 보는 사람도 없고 놈들을 처치한 것도 자신이니 원한다면 다 쓸어 갈 수도 있었다. 하지만 진우는 그만뒀다. 여기 있는 마정석들은 제주도에서 피해 입은 사람들에게 보상하고, 제주도를 다시 이전의 모습으로 재건하는 데 쓰인다고 했다. 소유권이 없는 물건을 탐할 정도로 진우는 궁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거 하나는 챙겨 가도 되겠지.' 진우는 베르의 본체에 있던 마정석을 꺼냈다. 완전한 검은색의, 보석 같은 아름다움을 지닌 마정석이었다. 마정석을 주머니에 넣는 진우가 카이셀을 불러냈다. 키아아악-! 카이셀이 날개를 퍼덕이며 날아갈 준비를 마쳤다. 등 위에 가볍게 올라탄 진우가 여왕의 침실을 한번 쓱 훑어보았다. 그렇게 소란스럽던 곳이 이제는 쥐 죽은 듯 고요했다. '...' 제주도 원정은 끝났다. 내부를 살피던 진우의 눈빛이 입구쪽으로 향했다. "집으로." 그러자 카이셀이 힘차게 날아올랐다. = 125 화 카이셀이 헌터협회 앞에 내려앉았다. 키아악난데없이 커다란 마수가 서울에, 그것도 헌터들의 중심지인 헌터협회 앞마당에 나타나자 협회 사람들이 놀라서 뛰어나왔다. 마력을 지닌 존재의 접근을 감지했던 감시과 헌터들도 무기를 들고 달려왔다. 그러나 그 위에서 진우가 내리는 걸 보고 다들 아연실색했다. '돌아가.' 진우의 명령에 따라 카이셀은 곧 진우의 그림자가 되어 사라졌다. 사람들은 진우를 알아보았다. '서, 성진우 헌터의 소환수인가?' '저런 괴물까지 부리고 있단 말이야?' 그들은 티비를 통해 진우의 능력을 확인했다. 괴물을 다루는 것도 이상하지 않았다. 진우가 눈에 익은 직원 하나에게 다가가 물었다. 평소 협회장을 수행하던 감시과 헌터였다. "협회장님을 뵙고 싶습니다." 협회장은 만나고 싶다고 아무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장관급이 요청하더라도 일주일은 기다려야 하는 게 협회장이다. 하지만 누가 눈앞의 사내에게 안된다고 말할 수 있을까. 레이드 멤버에도 포함되어 있지 않은 헌터가 갑자기 등장해 S 급 헌터들을 농락하던 괴물을 간단히 제압해 버렸다. 그러니 누구보다 그를 만나고 싶어 하는 사람이 협회장 아닐까? 직원은 말했다. "협회장님은 지금 병원에 계십니다." "아프십니까?" 진우는 협회장의 건강 상태가 안 좋다는 것을 떠올리고는 물었다. 어쩌면 레이드 중계를 보면서 심장에 무리가 갔을 수도 있으리라. "아니요, 차해인 헌터의 경과를 지켜보러 가셨습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은 만나기 힘든 걸까? 그렇게 돌아서려던 찰나, 직원이 말했다. "협회장님께 연락드리겠습니다. 응접실에서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알겠습니다." 진우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최대한 빨리 말해 주고 싶은 사실이 있었으니까. *** 차해인은 협회 지정의 대형병원에 입원했다. 결과를 기다리는 협회장에게 그의 주치의가 다가왔다. 협회장이 물었다. "어떻게 됐나?" "정밀 검진을 한 것은 아니지만... 일단 겉으로는 완벽히 정상입니다. 편안히 잠들어 있는 상태입니다." "그렇군..." 협회장은 그럼 그렇지, 속으로 되뇌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치의도 협회장의 옆에서 레이드 방송을 보았다. 그에게도 차해인의 상태는 미스터리였다. "과다출혈 때문에 안색이 창백해질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던 헌터 분이 어떻게 저렇게 좋아진 겁니까?" "..." 협회장은 한국팀 멤버들에게 자세한 보고를 들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말한다고 믿을 수 있을까?' 성진우 헌터가 죽은 민병구 헌터의 힘을 빌려와 쓰러진 차해인 헌터를 치료했다는 사실을? 성진우 헌터가 카메라를 꺼 달라고 했던 것은 자신의 능력을 밝히기 싫다는 뜻. 그걸 남들에게 떠벌릴 정도로 협회장은 어리석지 않았다. 물론 다른 헌터들도 비슷하게 생각하는 듯했다. "내가 대기시켜 놨던 A 급 힐러들이 그녀를 치료했네." "상당히 위험해 보였는데... 늦지 않아 다행이군요." 다행히 그렇게 넘어가는 듯했다. "아." 주치의가 뭔가 떠오른 듯 이야기를 꺼냈다. "그 성진우 헌터 말입니다." 성진우라는 이름에 협회장이 귀를 종긋 세웠다. "성진우 헌터가 왜?" 협회장의 눈빛이 달라지자 주치의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헌터님 모친이 저희 병원에 계시지 않았습니까?" "익면증이라고 했었지." "예." 협회장은 진우에 대해 알아보며 그의 가족 관계가 어떻게 되는지도 읽은 바가 있었다. 문득 최악의 상상이 떠오른 협회장이 얼굴을 굳히며 물었다. "설마... 돌아가신 건가?" 주치의는 고개를 저었다. "그 반대입니다." "반대라면?" "최후의 수면 상태에서 깨어나 집으로 퇴원했답니다." "그게 정말인가?" "안 그래도 그 이야기 때문에 난리더군요. 공식적으로 발표는 안 했지만 저희 병원에서 일어난 일이다 보니." 병원 관계자들도 오늘 레이드 방송을 보았다. 자연히 성진우라는 이름이 쉴 새 없이 입에 오르내렸고, 주치의의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다. "익면증이 치료되다니? 그게 가능하단 말인가?" "저도 이번 사례가 최초로 알고 있습니다." "모친이 깨어나신 게 언제였지?" "아마도..." 날짜를 머릿속으로 계산해 보던 주치의가 말했다. "5 일 전쯤이군요." "..."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자신이 진우에게 레이드 멤버에 들어오라고 한 시기와, 진우의 어머니가 깨어난 시기가 거의 일치했다. '성진우 헌터의 아버지가 게이트에서 실종됐다고 했었지.' 레이드로 남편을 잃은 아내. 그런 어머니를 둔 성진우 헌터가 어머니를 홀로 두고 제주도 레이드에 참가하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그것도 이미 세 번이나 실패한 적 있는 토벌작전에 말이다. 협회장은 사정을 알아보지 않은 자신의 경솔함을 반성했다. '그래서 이번 레이드에 참가하지 못했던 것이군.' 진우의 상황과 오늘의 활약이 합쳐져 혹시나 생길 뻔했던 오해가 씻은 듯이 내려가며 가슴이 뛰었다. 역시 요즘 보기 드물게 마음에 쏙 드는 청년이었다. 그때 협회 직원이 다가왔다. "협회장님." "무슨 일이지?" "민병구 헌터의 가족들이 연락을 받지 않습니다." "어머니 말인가?" "네." 그럴 만도 하지. TV 를 통해 아들의 사망 소식이 알려졌다. 그리고 그녀는 떨리는 목소리로 협회에 전화를 걸어왔다. 협회는 담담히 사실을 알리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직접 가겠네." "협회장님이 직접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아들을 잃은 부모가 시신도 없는 장례식을 치러야 하는데 전화를 받을 정신이 있겠나?" "그, 그건 그렇지만." "내가 직접 가서 이번 일에 관련된 소식을 전하고 조의를 표하겠네." "...알겠습니다." 직원은 굳은 얼굴로 돌아서려 했다. 그런데 그의 전화가 바쁘게 울렸다. 협회에서 온 전화라 그는 협회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전화를 받았다. "응? 협회장님을 뵙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다고? 뭐!? 그분이?" 고건희는 고개를 저었다. "오늘은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네." 직원은 손으로 핸드폰을 가려 음성을 막고는 말했다. "저, 협회장님을 뵙고 싶어 하시는 분이... 성진우 헌터님이십니다." "성진우 헌터가?" 협회장의 눈동자가 커졌다. 그는 곧바로 발언을 철회했다. "당장 간다고 전하게." *** 진우는 직원의 안내를 받아 협회장실로 이동했다. 도착해 자리에 앉아 직원이 살갑게 물었다. "마실 거라도 드시겠습니까?" 사양하려던 진우는 문득 갈증이 느껴졌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격렬한 싸움을 벌인 뒤인데도 물 한모금 마시지 않고 있었다. "물이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 뭐가 감사하다는 걸까? 긴장해서 말이 헛나온 직원은 얼굴을 붉히며 작은 생수병을 진우 앞에 내려놓고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용건이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 주십시오." "네." 전에 협회장실에 들렀을 때보다 훨씬 더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태도가 느껴졌다. '아마도 레이드 방송 때문이겠지.' 앞으로 그 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의 시선이나 태도가 달라질 수 있음을 진우는 짐작했다. 곧 협회장이 들어왔다. "성진우 헌터님!" 진우는 일어서려 했으나 헌터협회 협회장 고건희가 만류했다. 방금 막 제주도에서 돌아온 진우다. 싸웠던 개미들 중에는 S 급 헌터들을 전멸시킬 뻔했던 괴물 개미도 있었다. 지금 진우는 귀빈 중의 귀빈. S 급 헌터들의 목숨을 구해 온 그를 소홀히 대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는 고건희였다. 고건희는 상석이 아니라 진우를 마주 보는 자리에 앉았다. "개미굴에서의 일은 들었습니다." "아, 네." 그렇다면 대화가 빨라지겠네." 진우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고건희가 말을 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어떻게 오셨는지도." 많은 협회 사람들이 카이셀을 봤다. 협회장 귀에 안 들어갈 수가 없었다. "혹시 제주도에도 그걸 타고 가신 겁니까?" 갈 때는 그림자 교환을 통해서 갔지만 자신이 가진 카드를 일부러 드러낼 필요가 있을까? 진우는 말을 아꼈다. "그런 셈입니다." 며칠 전 서울 상공에 나타났던 마수의 범인이 자신임을 자백하는 꼴이었지만, 앞으로 편하게 카이셀을 타고 다니려면 이 방법이 편했다. "그렇군요." 과연. 협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는 죽은 마수의 힘을 이용할 수 있다. 어디선가 비행이 가능한 마수를 처치했다면 마수를 타고 날아다니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궁금증은 풀렸다. 이제 본론을 나눌 차례였다. "저를 뵙고 싶어 하신다고...?" "예." "무슨 일이십니까?" "제주도 개미들, 모두 처치했습니다." "예?" 협회장이 벌떡 일어섰다. "그 많은 개미들을 전부 처치했단 말입니까?" "네." 진우는 확답했다. "이제 제주도에 마음대로 들어가셔도 됩니다." "어떻게..." 아니, 방법이라면 알 것도 같았다. 화면에 잡혔던, 수백에 달하던 진우의 소환수들. 그 녀석들이 이 잡듯 제주도를 뒤졌다면 이 짧은 시간에 개미들을 전멸시키는 것도 문제는 아니리라. 제주도에 출입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그건 개미굴 가장 깊은 곳에 잠들어 있는 민병구 헌터의 시신을 수습해 올 수 있음을 의미했다. 민병구 헌터의 시신을 마수들이 사라질 때까지 방치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고건희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고건희는 진심을 다해 말했다. "감사합니다, 성진우 헌터님." *** 한국의 특급 호텔 스위트룸. 최근 제주도 레이드 같은 큼지막한 이슈들로 묻혔으나, 현재 이곳에는 전 세계 최강의 헌터 중 하나가 묵고 있었다. 토마스는 레이드 특집 방송을 껐다. 그는 녹화한 영상을 벌써 세 번이나 돌려 본 참이었다. 수행원으로 따라온 로라가 물었다. "어떤가요?" "뭐... 보는 대로." 그는 등을 소파에 기대고 다리를 탁자에 쭉 뻗었다. 금발에 높은 코. 실내에서 선글라스를 낀 그의 얼굴에는 계속 싱글싱글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미스터 황이 조사했던 헌터가 저 자 맞나?" "네." "한국에서 사람을 죽이면 어떻게 되느냐고도 물었고?" "네." 로라에게 보고를 받았던 토마스는 몰래 따로 황동수와 성진우, 두 사람의 관계를 조사했다. 접점은 하나. 황동수의 형, 황동석. 황동석과 성진우가 같이 들어갔던 던전에서 성진우는 살아 나오고 황동석은 소식이 끊겼다. 던전 안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세계의 상식이 되어 버린 말이었다. "복수인가." "그런 것 같습니다." "가족은 없는 줄 알았는데, 잘도 한마디도 없었군." "미스터 황의 형 쪽에서 동생과 연관되는 것을 철저히 숨겼다고 합니다." "그만큼 뒤가 구렸다는 소리겠지." 하던 짓이 밝혀지면 동생에게 피해가 갈 정도로. 로라는 그 질문에 침묵으로 긍정했다. 그리고 제주도 레이드가 터졌다. "이런 일이 터졌으니 더더욱 성진우를 만나기 힘들어지겠군." "그렇겠죠." 로라는 담담히 말했다. 세계적인 헌터이자 손꼽히는 길드 스케빈저의 마스터인 토마스가 특별 휴가까지 내고 이런 작은 나라를 방문한 이유는 오롯이 성진우 때문이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스터 황이 성진우와 붙었을 때 어떻게 될지 가늠하기 위해서였다. 길드 임원들에게는 한국의 S 급 헌터를 영입하기 위해서라고 둘러 대었다. "만나 보고 싶었는데 아쉽게 됐군." 그렇게 중얼거리는 토마스의 말투에서는 아쉬움이 진하게 묻어났다. 로라는 조심스레 물었다. "역시 미스터 황과 성진우 헌터를 만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 좋겠죠?" "뭐..." 토마스는 턱을 문지르다가 씩 웃으며 말했다. "한국이 미스터 황을 살린 거지." 한국은 S 급이 된 뒤 모국을 버리고 미국으로 떠난 황동석의 입국을 단칼에 거절했다. 자칫 외교 마찰로 번질 뻔한 일이었으나 그렇게 번 시간으로 토마스가 한국을 찾았다. 그러나 미스터 황은 겨우 입국 거부로 하고자 하는 일을 그만둘 자가 아니었다. 하물며 그 목적이 복수라면야. 사실 토마스는 그렇게 꽉 막힌 성격이 아니다. 미스터 황이 가족의 복수를 하겠다는데 그의 반감을 사면서까지 말릴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그는 스케빈저의 중요한 전력이었다. 그런 만큼 같은 S 급인 성진우 헌터의 실력을 미리 알아둘 생각이었다. 만에 하나라도 미스터 황이 역으로 당해 버리면 곤란하니까. 그런데. 성진우를 본 소감은 천만다행이란 점이었다. "절대 미스터 황이 한국에 발을 들이게 해선 안 돼. 그러면 둘이 만날 일도 없겠지." "알겠습니다. 소송도 취하하겠습니다." "미스터 황에게는 내가 말해 두지. 성격이 불같은 친구니까 좀 둘러대야 할 거야." 로라는 마스터의 말을 하나도 빠뜨리지 않고 꼼꼼히 메모했다. 그러다 문득 의문이 들었다. "만약에... 이렇게 조심했는데도 두 사람이 싸우게 되면 어떻게 하실 거죠?" "로라. 아직도 나를 몰라?" 토마스가 씩 웃었다. "미스터 황은 스케빈저 길드의 재산이야. 스케빈저 길드는 내 것이고." 입은 웃고 있지만 선글라스 안의 눈매는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날카로운 눈매를 가리기 위해 항상 선글라스를 착용했다. 소파에 기대고 있던 등을 바로 하며, 토마스가 목소리를 낮추었다. "나는 내 재산을 건드리는 사람은 누구도 용서하지 않지. 그게 미국 정부라 할지라도." 한 사람의 권력이 일개 나라와 맞먹는다. 토마스 안드레. 다섯 헌터 중에 한 사람. 국가 권력급 헌터만이 가질 수 있는 자신감이었다. = 126 화 "저희가 댁까지 모셔드리겠습니다, 성진우 헌터님." 고건희 협회장이 일어서려 하는 진우에게 급히 말했다. "예?" 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여기서 잠깐만 기다리시면 저희 직원들이 차를 가져올 겁니다. 그걸 타고 돌아가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 헌터 협회, 고건희 협회장이 자신에게 감사하고 있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특별한 취급을 받고 싶지는 않았다. "아뇨, 괜찮습니다." 진우는 정중하게 사양했다. 그러나 그냥 한 번 꺼내본 말이 아니었던 듯 고건희는 다시 한 번 진지하게 권유했다. "아마... 타고 가시는 게 편하실 겁니다." "그게 무슨." 진우가 다 말을 잇기도 전에 일어난 고건희가 창가로 가 섰다. "잠깐 여기를 봐주시겠습니까?" 진우도 창가로 다가갔다. 그러자 보였다. 창밖. 불과 1 시간 전만 하더라도 한적했던 협회 본관의 입구 앞에 어느새 발 디딜 틈 없이 수많은 인파가 몰려와 있었다. "모두 성진우 헌터님이 여기 왔다는 소식을 듣고 헌터님을 보기 위해 나온 사람들입니다." 어떻게 알고... 라고 물을 필요도 없었다. '여기 카이셀을 타고 왔었지.' 요즘은 사람들 손에 최소한 카메라 하나씩은 다 가지고 있는 시대. 진우가 카이셀을 타고 헌터 협회에 내려서는 모습은 SNS 를 통해 빠르게 번져나갔고, 소식을 접한 사람들 중에는 물론 인터넷 기자도 있었다. 딱 한 줄. 기사는 길지도 않았다. '헌터 협회에 내려선 의문의 마수, 주인은 누구?' 소식을 듣고 진위를 확인해보려는 사람들과, 진우를 만나보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합쳐져, 현재 협회 앞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진우는 몰려있는 사람들을 보고서 만감이 교차했다. 옆에서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던 고건희가 차분히 입을 열었다. "충분히 알고 계시겠지만... 국민들은 승리에 목말라 있었습니다." 4 년 전 대참사. 제주도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한 이후, 한국은 전 세계에서 유일하게 마수들에게 땅을 뺏긴 나라가 됐다. 많은 나라들이 겉으로는 애도를 표하면서도 속으로는 한국 헌터들의 무능함을 비웃었다. 3 번의 토벌 작전이 모두 실패로 돌아갔을 때, 그 평가는 극에 달했다. 그렇게 치욕의 2 년. 4 차 토벌 작전은 일본과 같이 한다는 소식이 알려졌다. 항간에서 일본의 도움 없이는 마수조차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가 하는 회의적인 목소리도 있었다. 그런데. S 급 헌터만 스물이 넘어간다는 그 강력한 일본이 등을 보이고 도망쳤던 그 레이드에서, 진우가 검은 병사들을 이끌고 등장한 것이다. 어찌 보면 사람들의 열광은 당연한 것이었다. 목마른 이들이 오아시스에서 갈증을 해소하듯, 사람들은 진우의 활약을 보며 무력감을 벗어 던졌다. 기쁜 마음을 주체하지 못해 거리로 뛰쳐나왔다가 진우 소식을 접하고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이다. "물론 오셨을 때처럼 마수를 타고 날아가는 방법도 있겠지요." 고건희는 허허 하고 웃었다. "하지만 저분들과, 협회의 입장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 내려가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 진우가 유리문을 밀고 협회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일시에 소란이 사라졌다. 모인 사람들 전부 거짓말처럼 입을 다물고서 조용히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의 옷 여기저기에 전투의 흔적이 남아있었다. 개미 마수들의 체액이 튄 곳도 있고, 괴물 개미 손에 찢어진 곳도 있었다. 하지만 아무도 진우를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 시민들은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뜨거운 무언가를 느끼며, 그저 조용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마주보고 있는 진우와 시민들 사이에서 무거운 정적이 가라앉아 갈 때 즈음에. "헌터님, 이쪽으로." 진우의 에스코트를 맡은 우진철이 말했다. 감시과 직원들이 앞서나가며 일일이 양해를 구했고, 앞에 있던 시민들은 순순히 길을 터주었다. 그러나 사고는 항상 예상치 못하는 곳에서 생기는 법. 대기하고 있는 차와의 거리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할아버지 한 분이 진우 앞으로 걸어 나왔다. "헌터님..." 할아버지를 막아섰던 감시과 직원은 노인의 얼굴을 흠뻑 적신 눈물을 보고 멈칫했다가 물러났다. 진우가 감시과 직원을 제지했기 때문이었다. 간신히 진우 앞에 설 수 있게 된 할아버지는 굵은 눈물을 뿌리며 목멘 소리로 거듭 진우를 불렀다. "헌터님... 헌터님 덕분에... 제 아들이 편히 눈을 감을 수 있게 됐습니다." 다리에 힘이 풀렸는지 쓰러지려는 할아버지를 진우가 황급히 부축했다. 할아버지는 진우의 손과 팔을 잡고 몇 번이고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헌터님... 정말... 감사합니다..." 부축을 돕던 우진철이 부하 직원에게 할아버지를 맡기고는 진우의 귓가에 속삭였다. "헌터님. 사람들이 점점 몰리고 있습니다. 이제 그만 가셔야." "알겠습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진철이 대기하고 있던 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진우는 차에 타기 전 모인 사람들을 다시 한 번 둘러보았다. 누가 먼저 시작했을까? 진우와 시선이 마주친 누군가가 진우에게 감사의 의미로 잠깐 고개를 숙였다 들자, 모두가 그를 따라하기 시작했다. 진우의 눈길이 지나가는 곳마다 진심어린 인사가 되돌아왔다. "헌터님." 초조함이 섞인 우진철의 목소리를 듣고서야 진우는 겨우 차에 올라탔다. 탁, 탁. 운전석에는 우진철의 부하가, 조수석에는 우진철이 타고, 시동이 걸린 차가 서서히 협회 부지를 벗어났다. 진우는 말없이 창밖을 응시했다. 사람들은 차가 완전히 시야를 벗어날 때까지도 시선을 돌리지 않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고개를 바로 한 진우가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두근, 두근, 두근. 기분 좋은 고양감이 심장을 고동치게 만들고 있었다. 사람들을 만나보는 게 어떻겠냐는 협회장의 제안을 처음 받았을 때는 난처했었지만, 지금은 그냥 지나치지 않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아." 진우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에 우진철이 급히 고개를 뒤로 꺾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헌터님?" "...아무 것도 아닙니다." 진우는 어머니의 충격을 조금이라도 덜기 위해 다짜고짜 부셔놓고 온 TV 를 떠올리고는 이마를 감싸쥐었다.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드려야 한다?' 아니나 다를까. 폰의 전원을 켜보니 부재중 전화 목록에 집에서 걸려온 전화가 13 통이나 남아있었다. *** 인터넷에선 아주 난리가 났다. 그도 그럴 수밖에. 이번 제주도 토벌 작전은 진우가 S 급이 된 이후 공식적으로 처음 모습을 보인 레이드였다. 진우에겐 데뷔전이나 마찬가지. 그런 상황에서 모두를 경악하게 만들었던 괴물 개미를 압도하고, 퇴로로 밀려들어오던 수천의 개미떼들을 소환수로 쓸어버렸으니. 스포츠 경기를 보고 흥분한 사람들이 거리로 뛰쳐나오듯, 레이드 방송을 본 사람들은 전부 온라인으로 모여들었다. '와... 할 말이 없다...' '내가 알기로 소환수라는 거 저렇게 많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게 아닌 걸로 아는데?' '성진우 헌터님의 소환수 어택땅을 보고 십년 묵은 암이 다 나았습니다.' '근데 위에 분 십년간 달고 살 정도면 별 거 아닌 암 아닌가요?' '하여튼 어딜 가나 분위기 파악 못하는 사람들이 문제...' '멋지다. 최고였습니다.' '4 년 전 아들을 잃은 애비입니다. 성진우 헌터님이 이 글을 보는 일은 아마도 없겠지만...' 온 국민의 관심사가 쏠려있던 작전이었던 만큼 수많은 게시판에 레이드에 대한 얘기가 범람했고, 그럴 때마다 진우의 이름은 빠지지 않았다. 특히 급을 나누기 좋아하는 네티즌들은 진우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가를 두고서 열띤 논쟁을 주고받았다. '저 정도면 우리나라에서도 국권급 나온 거 아닌가?' '에이, 그 정도는 ㄴㄴ. 김치 국물 드링킹은 좀 적당히.' '아니, 왜? S 급 던전을 거의 혼자서 클리어 한 거고, 다른 S 급들과도 실력 차이가 엄청났는데?' '성진우 헌터는 아직 경력이 없잖아. 진짜 실력이 있으면 가만히 있어도 곧 사람들이 알아서 인정해주겠지.' '아무튼 쩐다 쩔어.' 'E 급이면 일반인들보다 조금 나은 정도라던데, 그랬던 사람이 갑자기 저렇게 강해져도 되는 거?' '성진우 헌터 재각성자였나요?' '의외로 아직 성진우 재각성자인 거 모르는 사람들이 많음. 본인이 바로 정보보호 신청을 해가지고...' 물론 그중에서는 진우에게 불만을 가지는 사람도 있었다. '그런데 가만... 이거 성진우가 첨부터 레이드에 꼈으면 민병구가 죽을 일도 없었던 거 아냐?' '첨에 빠진다고 했다가 왜 중간에 들어온 거?' '위엣 분들 협회가 내놓은 해명 기사 못 보셨나 보네.' '무슨 기사요? 링크 좀.' 기사의 내용은 이랬다. 협회에서는 S 급이라고는 하나 상급 던전 경험이 전무한 진우를 무턱대고 레이드 멤버로 합류시키는 대신, 만약을 대비해 인근에 대기시켜놨다 상황을 보고 투입을 결정했다는 것. 급하게 지어낸 얘기였지만 사람들을 이해시키기에는 충분했다. '내가 성진우 헌터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이게 최선이다.' 그렇게 고건희는 발 빠른 대처로 진우의 개인사를 숨기면서도, 진우에게 돌아갈 수도 있었던 비난의 화살을 막을 수 있었다. 덕분에. 성진우의 기량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협회의 무능함에 대한 질타는 있었어도, 진우 본인이 손가락질 당하는 일은 없었다. 아니, 진우의 평가는 오히려 더 높아졌다. 시간을 끌어주던 일본팀이 철수하고 한국팀이 전멸을 앞두고 있었던 최악의 상황에서, 군말 없이 단신으로 개미굴에 뛰어들었다는 얘기였으니까. '나 같으면 제발 가달라고 등 떠밀어도 무서워서 못 가겠다.' '동감.' '어떻게 거길 들어갈 생각을 했지?' '성진우야 말로 진짜 헌터들의 귀감 아니냐?' '전에 성진우 혼자 레이드 멤버에서 빠졌다고 욕했던 새끼들 다 머리박고 반성해야 되는 각 아니냐?' 'ㅋㅋㅋㅋㅋㅋ 그러게 사정이나 좀 알아보고 지껄이던가.' 일찌감치 정보보호를 걸어뒀던 진우로서는 당황스럽게도, 이번 레이드로 인해 진우는 한국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가 되어가고 있었다. *** 이틀 뒤. 민병구 헌터의 시신을 찾아오기 위해 군부대와 헌터들이 상륙했다. 5 대 길드 중 하나면서도 S 급 헌터가 없어 레이드에 참여하지 못했던 영남 지방의 대표 길드 기사단. 그들이 줄어드는 입지를 느끼고 자발적으로 나선 덕분에 일이 빠르게 진행됐다. 특수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망설이는 걸 보고 헌터들이 앞장섰다. "아따, 고마들 오소." "느껴지는 마력이 전혀 없다니까요. 아, 다들 속고만 사셨나." 멀찍이 앞서가던 헌터들이 손짓하자 그제야 군인들이 사주를 경계하며 뒤를 따랐다. 헌터들이 보기엔 답답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일반인들은 마력을 느낄 수도 없고, 마수에 대항할 수단도 없으니. 그냥 최대한 조심해 다니는 수밖에. "쯧쯧." 혀를 차던 기사단의 마스터가 주위를 빙 둘러보았다. '허...' 입이 쩍 벌어졌다. 개미굴 근처로 갈수록 점점 더 많은 숫자의 사체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아니, 산더미를 이루고 있었다. 친한 동생이자 오랫동안 헌터 생활을 같이해온 부마스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행님... 이거 보이십니까? 이걸 성진우 혼자 다 했다고예?" "..." 3 차 토벌 작전 때, 기사단 길드도 제주도 땅을 밟았다. 그래서 누구보다 이 개미 녀석들의 무서움을 잘 알고 있었다. "개미들을 완전히 찢어놨네." "와... 성진운가 뭔가 하는 자식 이거 보통 놈이 아니네예."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부마스터가 질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어떻게 이 넓은 섬에 개미 새끼 한 마리를 안 남기고 싸그리 다 조질 수가 있습니꺼?" "그러니까." 마수에 대해 일가견이 있는 기사단의 정예 멤버들은 온통 수북이 쌓인 사체를 보며 혀를 내둘렀다. 내내 감탄하며 걷던 그들은 곧 개미굴 입구 주위에 도착했다. "행님, 보입니더." "그래, 보인다." 헌터들은 약간의 거리를 두고서 뒤를 따라오는 군인들과 같이 들어가기 위해 일단 개미굴 앞에서 정지했다. 부마스터는 기다리는 동안 할 것도 없고 해서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런데. 툭. 그의 입에서 힘없이 담배가 떨어지는 것을 보고 마스터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이, 왜 그래?" "해, 행님!" 부마스터가 마스터의 어깨를 급하게 툭툭 때리며 앞을 가리켰다. 그제야 뭔가 이상함을 느낀 마스터도 고개를 앞쪽으로 향했다. "헉!" 움찔 놀란 마스터가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물었다. "다, 당신... 뭐야?" = 127 화 기사단 길드의 마스터, 박종수는 두 눈을 의심했다. 멀쩡하게 생긴 외국인 남성 하나가 개미굴 입구에서 천천히 걸어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개미들이 전멸했다는 소식은 아직 극비일 텐데?' 지금 발밑에 깔린 게 전부 다 최상급 마정석들. 한탕을 노리고 몰려드는 이들을 방지하기 위해, 대책이 마련될 때까지 협회는 토벌이 완료된 사실을 숨기기로 했다. 따라서 현재 이 섬에 마수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기껏해야 우리에게 임무를 맡긴 협회와 군인들, 그리고...' 장본인인 성진우 헌터 정도. 하지만 박종수는 지금 개미굴 입구에 서 있는 남자가 성진우가 아니라는 데 전 재산을 걸 수도 있었다. 어떻게 그 얼굴을 잊을 수 있을까? 지금 한국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헌터이자, 기사단의 영입 목록 0 순위에 빛나는 인물을. 그래서 박종수는 다시 물었다. "당신 뭐 하는 사람이냐니까? 왜 거기서 나와?" 남자는 말을 알아듣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아예 대답할 생각이 없는지 빙글빙글 웃기만 했다. 기사단의 부마스터, 정윤태가 의아하다는 눈빛으로 박종수 옆에 붙어 섰다. "행님, 저거 사람 맞아요?" "나도... 나도 모르겠다." 남자에게서 마력을 느낄 수 없으니 헌터나 마수가 아닌 것은 분명한데... 어째서인지 묘한 기운을 풍기는 사내였다. 말보다 주먹이 빠른 편인 정윤태도 불길한 기운을 감지하고 조심스럽게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군인들에게는 헌터들만큼의 기감이 없었다. 철컥, 철컥. 뒤늦게 남자를 발견한 군인들이 총을 들었다. 괜한 사망자가 나올까 봐 박종수가 황급히 군인들을 말렸다. "어이, 어이! 쏘지 마요! 저거 마수 아냐!" "그럼 사람입니까?" "그건... 아마도." 박종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수가 아니면 사람이겠지.' 박종수의 짧은 식견으로는 그 정도의 판단이 한계였다. 지휘관은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이제부터 저 남자의 신병은 저희가 맡겠습니다." "예? 당신들은 민병구 헌터의 시신을 가지러 온 거 아닙니까?" "저희는 민병구 헌터의 시신 수습과 함께 제주도의 상황을 통제하라는 명도 받았습니다." 박종수는 알았다는 듯이 뒤로 물러났다. 상대가 헌터나 마수가 아니라면 기사단이 나서야 할 이유는 없었다. 이렇게 한 발짝 물러서 지켜보고 있으면 쓸데없는 일에 휘말릴 일도 없으리라. 지휘관은 남자에게 소리쳤다. "당신은 지금 출입금지 구역에 들어와 있습니다. 저희의 지시에 얌전히 따르지 않으면 발포하겠습니다." "..." 하지만 남자는 긴장감 하나 없는 낯빛으로 계속해서 웃고 있을 뿐이었다. 꼴깍. '정말 쏴야 하나?' 라는 생각이 든 군인들이 침을 꿀꺽 삼켰다. 마수도 아니고 사람을 상대로 방아쇠를 당겨 본 적은 한 번도 없으니 당연한 반응이었다. 헌터들도 덩달아 긴장한 얼굴이 되었다. 저 기이한 남자가 이런 상황에서도 웃고만 있으니 분명 뭔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그때 남자가 두 손을 바지 주머니에 꽂았다. '저거... 진짜 사람 맞나?' 어떻게 사람이 총구를 앞에 두고서 저토록 여유로울 수 있을까? 박종수의 얼굴이 굳어졌다. 철컥, 철컥! 남자의 손이 보이지 않게 되자 군인들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쏘지 마! 쏘지 마! 아직!" 부하들을 돌아보는 지휘관의 목에 굵은 힘줄이 튀어 올랐다. 그런데. "부대장님!" 다급한 목소리에 지휘관이 남자쪽을 돌아보자, 남자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모르는 게 아니라 아예 이 세상에 존재하는 언어가 아닌 것 같은 발음과 목소리. "뭐야?" "뭐라는 거야?" 난생처음 겪는 상황에 군인들이 어찌할 줄 모르고 있을 때, 박종수의 입이 저도 모르게 열렸다. "마, 마수어?" 상급 던전에서 가끔 만날 수 있는, 지성을 가진 마수들. 그들이 쓰던 말과 흡사하게 들렸던 것이다. "그럼 저게." 마수란 말입니까, 하고 지휘관이 채 묻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주머니에서 빠져나왔다. 타앙-! 귀를 찢는 굉음이 일대에 울려 퍼졌다. 잘 훈련받은 특수 부대원의 손이 남자의 수상한 행동을 보고 반사적으로 방아쇠를 당긴 것이었다. '헉!' 지휘관의 놀란 눈이 곧바로 남자를 향했다. 남자의 이마를 파고 들어가지 못한 총알이 톡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느새 남자의 얼굴에서는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마, 마수다!" "인간이 아니야!" 소리쳤던 것도 잠시. 남자의 눈이 붉게 변한 것과 동시에 헌터들과 군인들 모두 심장을 옥죄는 압박감을 느꼈다. "아, 아-!" "아..." 비명을 지를 새도 없었다. 딱! 손가락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그들 모두가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힘없이 쓰러졌다.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나타난 중년 남성이 뒤에 서 있었다. "시끄럽게 만들 필요 없잖나." 중년이 쓰는 말도 인간의 언어가 아니었다. "...그래." 남자는 아쉬운 듯했지만 순순히 납득했다. 중년이 개미굴 안쪽을 돌아보며 물었다. "확인해 봤나?"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힘이 확실해." "이상한 일." 중년의 시선이 이번엔 쓰러져 있는 헌터들을 향했다. "왜 그가 인간들을 돕는 건지 모르겠군." "그의 속을 누가 알겠나. 궁금하면 직접 가서 물어보지그래?" "...사양하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중년이 입을 열었다. "사냥은 예정대로 시작한다. 달라진 건 없어." "알겠다." 중년이 손을 가볍게 휘젓자 허공에 사람 하나가 들어갈 만한 크기의 검은 구멍, 게이트가 열렸다. "참." 남자의 목소리에 중년이 잠깐 뒤를 돌아보았다. 남자는 말을 이었다. "하나는 여기 와 있는 거 같던데." "한국에?" "온 김에 녀석부터 처리하고 가는 건 어때?" 중년은 살짝 눈을 감았다. 곧 남자가 말한 정보가 중년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하지만 중년은 영 내키지가 않았다. "이 근처는... 그의 손에 맡겨두지." "엮이고 싶지 않다는 건가?"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지. 마음대로 생각해라." 중년의 목소리가 게이트 저편으로 사라진 뒤, 게이트도 닫혔다. 스윽. 게이트가 완전히 닫혔음을 확인한 남자가 중얼거렸다. "겁쟁이 녀석..." 그의 시선에 늘어져 있는 인간들이 들어왔다. 잠깐 잠들어 있을 뿐 곧 정신을 차릴 터였다. 흥. 남자는 코웃음 치며 인간들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 다시 조용히 거두어들였다. "뭐, 시끄럽게 만들 필요는 없겠지." 허공을 맴돌던 남자의 목소리도 금방 다른 게이트 속으로 사라졌다. *** 늦은 밤. 방바닥에 앉은 진우는 단검을 살펴보고 있었다. 지금은 그림자 병사 '베르'가 된 괴물 개미와의 싸움에서 톡톡히 활약한 '악마왕의 단검'이었다. [아이템: 악마왕의 단검] 입수 난이도: S 종류: 단검 공격력 +220 악마왕 바란에게서 얻은 단검입니다. '악마왕의 단검' 두 개를 사용하면 세트 효과가 적용됩니다. 세트 효과 '둘이서 하나': 근력 스탯 수치만큼의 공격력이 각각의 단검에 추가됩니다. 정말 눈이 휘둥그레지는 공격력과 추가 옵션이었다. 처음 이 녀석의 정보를 읽고 몇 번이나 다시 확인해 봤는지 모른다. 그도 그럴 만한 게 입수 난이도 A 급이었던 '바루카의 단도'의 공격력이 겨우 110 에 불과했으니까. 혹시나 싶어 상점을 뒤져 봤지만, 상점에서 파는 S 급 단검들 사이에서도 200 을 넘는 공격력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거기다가...' '악마왕의 단검' 두 개를 들면 근력 스탯이 공격력으로 변환된다는 점도 마음에 쏙 들었다. 이미 근력은 200 을 넘어 250 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그런데 그 높은 능력치가 전부 다 공격력으로 쓰인다? 뒷자리를 생략하고 단순히 더하기만 해도 '바루카의 단도'가 가진 공격력의 네 배에 달하는 무시무시한 수치가 나왔다. '왠지 휘두를 때마다 베는 맛이 있더라니.' 아마 다른 헌터들에게도 아이템의 능력치가 보였다면 거품 물고 달려들었을 물건이었다. 장검은 또 어떤가? [아이템: 악마왕의 장검] 입수 난이도: S 종류: 단검 공격력 +350 악마왕 바란의 힘이 담겨져 있는 장검입니다. 검을 한번 휘두를 때마다 '백염의 폭풍' 효과가 발생합니다. 효과 '백염의 폭풍': 일정 지역 안에 끊임없이 번개가 몰아치는 폭풍을 소환합니다. 장검은 하나만 들 수 있는 반면 단검은 양손에 들 수 있으니 장검 쪽이 단검 쪽보다 훨씬 더 높은 공격력을 가진 거야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검이 가진 특수 효과는 당연하지가 않았다. '그냥 휘두르는 걸로 광역공격을 할 수 있다고?' 다수의 적을 상대할 때 가치가 빛나는 무기. 실제로 바란의 마법 공격에 그림자 병사들 전체가 쩔쩔맸던 당시를 떠올리면 아직도 등골이 서늘해졌다. 물론 바란이 쓰던 마법에 비할 바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매우 만족스런 수준이었다. '단검 스킬들만 아니면 장검을 쓰는 것도 한번 고려해 볼 텐데...' 무심코 방 안에서 스윙을 해 보려던 진우가 멈칫했다. '...' 아무리 늦은 시간이라도 옆방에서 번개가 치는데 깨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더 이상 어머니를 놀라게 만들 수는 없었다. 진우는 얌전히 장검을 내려놓았다. '그래도 다행이다.' 어머니가 반대하지 않으셔서. 그날, 집으로 돌아온 진우는 시스템에 대한 것만 빼고 자신이 처한 상황을 전부 말씀드렸다. 우연히 재각성을 해서 S 급 헌터가 되었으며, 앞으로도 계속 헌터를 하고 싶다는 이야기까지. 잠깐 걱정하는 듯 보였던 어머니는 결국 응원해 주기로 하셨다. -엄마는 진우가 하고 싶은 걸 했으면 해. 단, 무리하지 말 것. 그것이 어머니가 내건 유일한 조건이었다. '그런데 나한테 무리가 될 만한 상황이라면...' 왠지 끔찍한 상상이 이어질 것 같아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자 문득 어머니께서 하셨던 말씀이 떠올랐다. -그 양반이 이런 일이 있을 줄 알고 나타났었나? -그 양반이라뇨? -병원에 잠들어 있을 때 아버지 목소리가 들리지 뭐니. -뭐라고 하시던가요? -그게... 그 이전에도, 그 이후에도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거나 꿈을 꾼 적은 없다고 하셨다. '역시 어머니는 아직 아버지를 잊지 못하고 계신 거겠지.' 그럼에도 헌터가 되겠다는 아들을 말리지 않으시는 건, 그만큼 자식을 믿고 있다는 증거이리라. 진우는 어머니를 실망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생존. 그것은 언제나 최우선 목표였다. 위험한 상황에서도 끝까지 목숨을 포기하지 않고 발버둥 쳤기에 지금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다. '...좋아.' 걱정이었던 어머니의 반대마저 없어졌으니, 이제 던전에 들어가는데 걸릴 것이 없었다. 길드를 만들고 상급 던전을 독차지해 빠르게 레벨을 올린다. 진우는 가슴이 뛰었다. '레벨을 올려야 할 다른 이유가 생겼으니까.' 스르륵. 진우의 명에 의해 소환된 이그리트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해 온 병사였다. '그리고...' 시스템이 제공해 준 유일한 기사급 병사이기도 했다. 즉, 이그리트는 진우의 병사 중 현재 시스템과 가장 가까운 존재라고 할 수 있었다. "너도 등급이 올라가면 대화를 나눌 수 있겠지?" 이그리트에게는 특히나 묻고 싶은 것들이 많았다. 물론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 녀석은 언제나처럼 침묵으로 응답했다. 침묵이 소리라면 아마도 이 녀석은 세상에서 가장 시끄러운 병사가 아닐까? 피식 웃으며 옆머리를 긁적이던 진우가 악마왕 무기들을 집어 들었다. '창고.' 무기들을 집으려던 진우의 눈에 뭔가 번쩍번쩍하고 불빛이 반사됐다. '...뭐지?' 진우의 눈이 커졌다. 인벤토리에 처박아 두고 잊고 있었던 아이템 하나가 반짝이고 있었다. = 128 화 검은 열쇠. 저주받은 랜덤박스에서 나왔던 검은 열쇠가 자기 위치를 알려주고 싶기라도 한 것처럼 빛을 내고 있었다. 신기한 광경에 넋을 잃고 바라보던 진우가 들고 있던 무기들을 조심스레 내려놓고 인벤토리 쪽으로 손을 뻗어 열쇠를 움켜쥐었다. '...' 그리고 손을 펴보자. [아이템: 카르테논 신존의 열쇠] 입수 난이도: ?? 종류: 열쇠 '요구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카르테논 신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입니다. 지정된 게이트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정된 게이트의 위치는 일정 시간이 지난 후에 공개됩니다. 남은 시간: 417 시간 06 분 52 초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아이템의 정보가 떠올랐다. '카르테논 신전?' 어째서일까? 들어 본 적 없는 이름이 어딘지 모르게 낯익었다. '아니, 들어본 적이 있다.' 곰곰이 기억을 되짚어보던 진우가 눈을 번쩍 떴다. '이중 던전!' 그리고 그 끝에 위치해 있던 낡은 신전. 신전과 석상, 석상이 쥐고 있던 석판. 차례차례 기억이 떠올랐다. '분명...' 석판에 적힌 첫 문장을 읽던 송치열 아저씨의 목소리가 아련히 들려오는 듯했다. -카르테논 신전의 규율. 석판은 끔찍한 석상들이 잔뜩 늘어서 있던 신전의 이름을 카르테논 신전이라고 알려줬었다. 그렇다면 이것이. '그리로 다시 들아갈 수 있는 열쇠라고?' 안개에 가려진 듯 어렴풋이 윤곽만 알아볼 수 있을 정도였던 기억이 점차 또렷해지며 확실한 형태를 갖추어가자, 진우는 등과 팔뚝에 소름이 돋아났다. '설마...' 아니, 설마가 아니다. 시스템이 다시 부르고 있었다. 모든 것이 시작된 장소로. 반짝이는 아이템, 그리고 정보에 나와 있는 장소, 이건 어떻게 해석해 봐도 시스템의 호출이었다. 그런데 왜 하필 지금일까? 진우는 첫 번째 알려지지 않은 보상으로 '저주받은 랜덤 박스'를 획득했다는 것을 기억했다. 그래서 악마성에서 받았던 두 번째 알려지지 않은 보상을 확인했다. '칭호.' 띠링, 하고 기계음과 함께 정보가 떠올랐다. [칭호: 악마 사냥꾼] '요구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변함이 없었다. '이건 아니고.' 그 다음으로 풀 세트를 모은 악마군주의 액세서리도 확인했다. [아이템: 악마군주의 반지] 입수 난이도: S 종류: 장신구 감각 +20, 지능 +20 악마군주의 귀고리, 악마군주의 목걸이와 함께 착용하면 세트 효과가 개방됩니다. 세트 효과 1. 모든 스탯 +5 세트 효과 2. 모든 스탯 +10 악마군주 시리즈 장신구 중 악마왕을 잡고 마지막으로 얻었었던 반지. 혹시나 또 다른 세트 효과가 개방된 것인지 확인해봤지만 그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남은 가능성은 하나. 진우는 칭호 위의 정보로 눈길을 돌렸다. [레벨: 100] '아이템이 말하는 요구 조건이란 이것이겠지.' 이쪽이 가장 유력하긴 했다. 창고에 한번 넣어둔 아이템은 마음속으로 떠올리는 것만으로 불러내거나 넣어둘 수 있어 대개의 경우 창고 안을 직접 확인해보는 일은 드물었다. 그래서 100 렙이 된 지 며칠이 지난 지금에서야 열쇠의 변화를 발견한 것이다. 오늘도 아마 악마왕 무기들을 꺼낸 김에 창고나 한 번 정리해야겠다고 마음먹지 않았다면, 오늘은 물론이거니와 앞으로도 한동안 열쇠를 발견하지 못했을지 모른다. 불행 중 다행이었다. '아직 시간이 2 주 이상 남아있으니까.' 시스템은 여태껏 거짓말을 한 적이 없었다. 열쇠에 게이트가 열린다고 적혀있으니 분명 지정된 장소와 시간에 게이트가 열릴 것이다. '최소한의 준비는 해둬야...' 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을 때. 진우는 깜짝 놀랐다. '가만... 내가 지금 거길 다시 들어갈 생각을 하는 건가?' 비록 협회의 하급 헌터들이라지만 거기 들어갔던 공격대 과반수가 죽었고, 심지어 본인도 몇 번이나 죽을 뻔했다. '거기서 다리까지 잘렸었지.' 돌이켜봐도 끔찍한 기억. 그때 보았던 무릎 아래쪽의 휑한 공간을 떠올리면 아직도 소름이 돋았다. 그러나.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그런 확신이 있었다. 게다가 늘 그래왔듯 시스템이 부름에 응하지 않는다면 어떤 패널티가 붙을 지도 몰랐다. 열쇠를 쥔 손에 흥건히 땀이 고였다. 꼴깍. 침이 거칠게 식도를 타고 넘어갔다. '흥분하지 말자.' 언제나처럼 침착하게. 스스로 자신을 다독이자 진우의 심장 박동이 차분히 제자리를 찾아갔다. 호흡이 진정되길 기다렸던 진우가 눈을 떴다. "좋아." 시스템이 내게 용건이 있다면, 그건 다른 기회일 수도 있다. 저주받은 랜덤 박스. 내게 필요한 것을 준다고 했던가? '그래도 어느 정도 대비는 있어야겠지.' 최소한의 대비가. 일단은 잠시 뒤로 미뤄두었던 길드 만들기부터. 그래야 게이트에 들어가기도 편하고, 본인과 그림자 군단의 레벨을 올리기도 쉬워진다. '어느 정도 진척이 되고 있나?' 진우는 유진호에게 전화를 걸려다가 시간을 확인하고는 전화를 내려놓았다. '너무 늦었네.' 지금은 너무 늦은 데다 내일 다른 볼일도 있고 하니 차라리 직접 찾아가는 편이 나을 듯 했다. '내일은 사무실에 들러야겠다.' *** 유진호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흡사 먹잇감을 노리는 매의 눈빛처럼 모니터를 훑는 그의 시선은 날카로웠다. 번쩍.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형님의 앞길을 가로막는 것들은 용서 없다!' 유진호는 빠르게 게시물과 댓글들을 캡처한 후 양식에 맞춰 후다닥 고소장을 작성했다. 오늘도 또 한 건. "휴-" 유진호는 뿌듯한 시선으로 숨을 크게 내쉬며 이마 위를 흐르는 한줄기의 땀을 손등으로 닦아냈다. 형님은 길드의 얼굴이자 등불. 형님을 욕하거나 유언비어를 퍼트리는 것들은 그 자체로도 용서받을 수 없는 천인공노할 놈들이었지만, 길드의 미래를 생각해서라도 가만 놔둘 수 없었다. 곧 자신이 부사장이 될 길드가 아닌가. 이것은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앞으로 만들어질 길드를 위한 공무의 일종이었다. 그런데 가만. '아직 형님께 우리 길드 이름을 여쭤본 적이 없네?' 유진호는 고민에 잠겼다. 길드 이름은 성진우의 성과 유진호의 유를 따 성유 길드라고 지으면 어떨까? 그러다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취지는 좋지만 어감이 좀...' 어감을 따지자면 순서를 바꿔 유성이 낫긴 한데, 감히 부사장의 성이 사장이자 형님의 성보다 앞에 와야 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일단 형님이 오시면 상의해봐야 겠다.' 사무실에 입주한 지도 이틀 째. 제주도 레이드로 인해 세간의 주목을 받게 된 형님 대신 텅 빈 사무실을 홀로 지키는 시간이 많아진 유진호였다. '차라리 형님의 성함과 내 이름의 끝 글자 두 개를 따서 우호 길드라고 하면.' 그때. "뭘 그렇게 심각하게 고민해?" "헉!" 유진호가 펄쩍 뛰었다. 놀라 일어선 유진호가 황급히 뒤를 돌아보니 어느새 진우가 옆에 와 서 있었다. "혀, 형님!" 언제 오신 거지? '진짜 기척을 안 하시면 가까이 있는 줄도 모르겠다니까...' 딱히 집중하고 있었던 것도 아닌데 어떤 소리도 듣지 못했다. 여전히 신출귀몰한 형님이셨다. 과하게 놀랬던 것이 민망한지 유진호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형님?" "방금." 간단하게 대답한 진우가 유진호가 보고 있던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금방 유진호가 그 앞을 막아서고는 비장하게 말했다. "형님은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런 놈들은 제가 다 알아서 해결하겠습니다." "...너였냐." 요즘 자신에 대한 악플이나 허위성 기사가 뜨면 어김없이 달려와 삭제 요구를 하는 사람이 있다더니만. 유진호가 얼굴을 붉혔다. "아이, 형님도 참... 그 정도는 당연히 제가 해야 할 일인데요. 뭘." 칭찬이라도 기대하고 있는지 눈을 반짝이는 유진호를 보고 있으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래, 잘 했다." 그 미소를 만족의 표현이라고 받아들인 유진호는 앞으로 더 활발한 활동을 이어나가겠노라고 속으로 굳게 다짐했다. 그러다. "어? 형님 오늘 어디 가세요?" 문득 진우의 복장이 평소와 달라졌음을 알아채린 유진호의 질문이었다. 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오늘 볼일이 좀 있어서." "아하..." 유진호는 내심 감탄을 터트렸다. 그동안 진우가 움직이기 쉬운 복장을 입고 있던 모습만 봐왔던 유진호에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 정장을 입은 진우의 모습은 낯설면서도 놀라웠다. 그러나 자세히 설명할 시간이 없던 진우가 손목의 시계를 내려다보았다. '벌써 시간이...' 진우는 고개를 들고 물었다. "길드 마스터 면허 딸 때 따로 챙겨가야 되는 건 없지?" "네! 협회로 가시면 간단한 테스트 후에 바로 면허가 나옵니다, 형님." "오케이." 협회에 가시는 거였나? 유진호는 잠시 고개를 갸웃거렸다가 곧 납득했다. '이제 형님도 유명인이 되셨으니 복장을 항상 신경쓰셔야겠지.' 유명하다는 건 좋은 면도 있지만 피곤한 면도 있는 법이다. 주위에 이름 석 자만 말해도 전국민이 알 만한 사람이 잔뜩 포진해있는 유진호는 그들을 위해 속으로나마 작게 애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진우가 멀찍이 떨어진 책상 위를 가리켰다. "차 좀 가져간다." 손가락 끝은 차키를 향해 있었다. "마음대로 쓰십시오, 형님!" 차키를 집으려던 유진호. 그러나 뻗은 손이 무색하게 마치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진우의 손바닥 안으로 들어가는 차키를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형님, 방금 대체...?" "스킬." "..." 유진호는 할 말을 잃었다. 이제 형님이 막 스킬로 하늘을 날아다닐 수 있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형님은 대체 못하시는 게 뭘까?' 까도 까도 또 깔 게 있는 양파처럼, 형님은 알면 알게 될수록 놀라운 분이었다. '참,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니지.' 유진호는 정신을 차렸다. 형님께 몇 가지 물어봐야 할 것이 있었다. 형님이 사무실에 들른 지금이 기회였다. 진우는 유진호의 눈빛을 보고 뭔가 할 말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응?" "형님, 구인 글을 올린 지 하루 만에 길드 창립 멤버 지원자들이 벌떼같이 몰려들어서 리스트를 뽑아봤습니다만." "아, 그건 갔다 와서." 지금도 시간이 애매하니까. 진우가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자 유진호의 마음도 조급해졌다. "아, 형님! 그럼 길드 이름은 정하셨습니까?" 역시 이게 젤 중요한 문제였다. 콩닥콩닥, 진우의 대답을 기다리는 유진호의 가슴이 뛰었다. 정 결정을 내리기 어려워하시면 자신이 고민해둔 이름을 제안해볼 생각이었다. '성유, 진진, 우호... 마음에 드시는 게 있을까?' 그렇게 유진호가 기대하고 있을 때, 잠시 고민해보던 진우가 씩 웃으며 대답했다. "솔플 길드는 어때?" "예?" 유진호는 눈을 끔벅끔벅 떴다. 여기서 웃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렇다고 보기에는 진우의 표정이 농담 같지가 않았다. 딱히 리액션을 기대한 것은 아닌듯, 진우는 문을 향해 돌아섰다. "이따 보자." 사무실을 나가는 진우의 뒷모습을 보고 유진호는 생각했다. '형님...도 못 하시는 게 있구나.' 역시 형님도 한명의 사람. 정말로 길드 이름이 '솔플'이 될까 두려우면서도, 형님의 인간적인 면모에 조금은 마음이 놓이기도 하는 유진호였다. *** 민병구 헌터의 영결식 현장. 원래는 비공개로 가족들만 있는 자리에서 조촐히 이뤄질 계획이었으나, 추모를 하고 싶다는 사람들이 많아 공개장으로 바뀌었다. 많은 사람들이 민병구 헌터의 희생을 기리기 위해 빈소를 방문했다. 하지만. 모두가 민병구 헌터만을 위해서 모인 것은 아니었다. 조심스런 눈빛으로 누군가를 찾는 이들도 심심치 않게 보였다. 그리고 잠시 후, 그들의 눈이 번득였다. '어어, 저기...?' '드디어 왔다.' '진짜네.' 웅성웅성. 진우를 발견한 사람들이 흥분한 눈길로 수군거리기 시작했다. = 129 화 진우는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주변의 시선을 그다지 의식하지 않는 편이었다. 귀찮게만 굴지 않는다면 얼굴이 알려지는 것도 크게 상관은 없었다. 그래서 남들이 자신을 알아보고 자기네들끼리 무슨 이야기를 나누든 딱히 신경 쓰지는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때와 장소는 구별들 좀 해야지.' 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여기는 민병구 헌터의 희생을 추모하기 위한 장소가 아닌가? 엄숙해야 할 영결식장이 자신 때문에 소란스러워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진우는 마력의 일부, 아니 일부라고 말하기도 힘들 정도로 극히 미미한 양을 잠깐 개방했다. '...!' 효과는 그걸로 충분했다. 일대에 공기가 착 가라앉으며 정적을 만들어 냈다. 조문객들의 호흡마저 조심스러워졌다. "..." "..." 방금까지 떠들어 대던 이들이 전부 거짓말처럼 동시에 입을 콱 다물었다. '좋아.' 소리 없는 시위로 만족스러운 분위기를 만들어 낸 진우가 잠깐 멈췄던 걸음을 다시 옮겼다. 그러나 이내 할머니라고 부르기에는 너무 젊고, 아주머니라고 하기에는 연세가 있으신 중년 부인 한 분이 진우의 앞을 가로막고 섰다. 바로 민병구 헌터의 어머니였다. 마주 선 그녀와 진우를 보고 사람들이 술렁거렸다. '어, 어?' '이거 욕이라도 먹고 쫓겨나는 거 아니야?' 하지만 사람들이 걱정했던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오셨군요." "예." 진우가 이곳에 들러 주기를 간곡히 부탁했던 이가 바로 민병구 헌터의 어머니였기 때문이다. "꼭 직접 뵙고서 말씀드리고 싶어서 연락을 드렸습니다. 혹 폐가 되지는 않으셨나요?" "아닙니다." "제 아들을 데려올 수 있도록 거기 있었던 괴물들은 모두 없앤 분이 헌터님이라고 들었습니다." 민병구 어머니는 본인이 들은 사실을 확인하고 싶은 것인지, 잠시 말을 멈추고 진우를 올려다보았다. '...' 진우가 제주도 개미들을 잡은 데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하지만. 분명 민병구 헌터의 시신을 개미굴의 가장 깊은 곳에서 썩게 만들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그래서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제 아들이 그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잠들지 않게 해 주셔서..." 민병구 어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뚝뚝 흘리며 말을 이었다. "헌터님 덕분에 이렇게라도 다시 아들을 만날 수 있게 됐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성진우 헌터님." 자식 잃은 부모를 어떤 말로 위로할 수 있을까? 진우가 침통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있자, 민병구 어머니의 친척들이 다가와 말을 잇지 못하는 그녀를 조심스럽게 안쪽으로 데려갔다. 민병구 어머니는 부축을 받아 멀어지면서도 몇 번이고 고개를 숙여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 문득 진우의 눈에 민병구 어머니의 얼굴과 10 년 전, 아버지가 게이트 안에서 실종됐다는 연락을 받았던 어머니의 얼굴이 겹쳐 보였다. 가슴이 뭉클했다. '그래도.' 아버지가 목숨을 희생해가며 많은 동료를 살려 냈듯이 민병구 헌터의 죽음도 헛되지 않았다. 그의 헌신적인 힐이 아니었다면 거기 있었던 헌터들은 살아서 개미굴을 빠져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죽어서까지 자신의 힘으로 다른 헌터의 생명을 살렸다. 민병구의 그림자는 점점 혈색이 돌아오는 차해인 헌터의 얼굴을 바라보며 안도했다. 진우는 동료를 생각하는 그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침 헌화를 위해 영정이 놓인 방향으로 걸음을 옮기던 진우의 시선에 멀리 차해인의 얼굴이 들어왔다. 진우와 눈이 마주친 차해인은 움찔하고 당황했다. '다들 같이 온 건가.' 차해인 주변의 한국팀 헌터들은 진우에게 눈인사를 보내오는 반면, 차해인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어라, 저 여자가 저런 표정을 지을 때도 있네?' 무표정한 얼굴 말고는 본 적이 없는 것 같은데, 역시 사람은 오래 살고 볼일이었다. 고개를 돌린 진우가 영정 앞에 섰다. 사진 속의 민병구 헌터는 근심 하나 없는 얼굴로 활짝 웃고 있었다. 손에 쥔 꽃을 영정 앞에 놓은 진우가 잠시 눈을 감았다. '부디 좋은 곳으로 가시기를.' 그렇게 명복을 빌어 주고는 돌아서서 나오는데, 낯익은 얼굴 하나가 가까이 다가왔다. "성진우 헌터님." 낮고 굵은 목소리의 주인은 고건희 협회장이었다. "협회장님."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드리려고 했었는데, 여기서 뵙는군요." "제게 연락을요?" 협회에서 헌터를 찾는 일이야 뻔할 뻔자다. 레벨을 올릴 곳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진우가 기대를 띤 눈빛을 보내자, 고건희는 허허 웃으며 안타깝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헌터님께서 원하시는 그런 용무는 아닙니다." "아, 예." 좋다 말았네. 진우는 아쉬움에 속으로 입맛을 다셨다. "해서 잠깐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괜찮으시겠습니까?" 안 그래도 길드마스터 면허 문제로 협회에도 들릴 예정이었던 진우는 쉽게 승낙했다. "협회에 볼일도 있고 하니 가서 말씀하시죠." "헌터님께서 협회에 볼일이라니... 무슨 일이십니까?" "길드마스터 면허가 필요해서요." "예?" 고건희의 얼굴에 물음표가 떠올랐다. "S 급 헌터증을 가지신 분이 왜 길드마스터 면허를 필요로 하십니까?" "S 급 헌터는 면허 없이 길드 설립이 가능합니까?" "그렇지요." 고건희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길드를 만들고 싶으시다면 협회에 전화 한 통만 넣어 주시면 됩니다. 나머지는 저희가 다 알아서 해 드리겠습니다." "..." 불과 반년 전까지만 해도 본인이 속하리라고는 꿈도 꾸지 못했던 등급이라, 진우는 S 급 헌터들이 받는 혜택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다.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어 처음엔 좀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결과적으로는 잘된 일이네. 이참에 S 급 헌터의 혜택을 좀 알아봐야 겠다.' 그것도 고건희 협회장과 다이렉트로 연락이 가능하니, 자격 요건만 갖추면 길드는 금방 만들어질 듯했다. 이래서 성공하려면 줄을 잘 서야한다고 하던가. 남들은 한 번 만나 보기도 힘든 헌터협회장이 진우에게는 어느새 든든한 백이 되어 있었다. 고건희가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자리를 옮겨야 할 만큼 긴 얘기도 아닙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고건희 협회장이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혹시 제주도에 결계 같은 것을 걸어 두셨습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갑자기 결계 마법이라니. 자신이 개미들을 다 처리하고 제주도에서 떠난 후 무슨 일이 생기기라도 했던 걸까? 고건희는 차분히 상황을 설명했다. "민병구 헌터의 시신을 수습하는 과정에서 같은 장소에 있던 군인들과 헌터들 모두가 정신을 잃는 사고가 발생했었습니다. 아, 이 경우에는 정신을 잃었다기보다는 잠에 빠졌다는 표현이 맞겠군요." 같은 장소에 있었던 이들이 동시에 잠들었다? 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듣기로는 상태이상 광역마법 같은데.' 악마왕 바란의 번개 공격에 갇힌 그림자 병사들이 일제히 스턴에 걸렸던 것처럼. 그런데 문제는 거기 있던 헌터들이 평범한 헌터가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제주도에는 기사단 길드의 정예멤버들이 가지 않았습니까?" 진우의 질문에 고건희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부 A 급 중에서도 상위권에 속하는 헌터들이나 A 급에 가까운 B 급 헌터들이었지요." 그만한 헌터들을 하나도 아니고 수십씩이나 동시에 잠재우다니. 어지간한 S 급 마법계열도 시도는커녕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혹시나 성진우 헌터님께 여쭈어 본 겁니다. 결계를 쳤던 걸 잠깐 깜박하셨던 게 아닐까 하고." 그만큼 진우가 고건희나 헌터협회에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상태이상 마법 결계는 진우의 전문 분야가 아닐뿐더러, 그런 무서운 마법을 시전해 놓고 잊었을 가능성은 더더욱 없었다.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런 적은 없습니다." "역시... 그렇겠지요." 고건희 협회장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웠다.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가장 희망적인 예상이 빗나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헌터들은 뭐라고 말하던가요?" "그게..." 설명하기 곤란하다는 표정을 짓고 있던 고건희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군인들은 물론이거니와 헌터들까지 정신을 잃기 직전의 일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은 허탈한 목소리로 덧붙였다. "사실 마법에 당한 것인지, 아닌지조차 알 수 없는 상황이지요." "..." 일반인인 군인들만이면 모를까 신체능력이 월등한, 그것도 A 급 헌터들까지 당했다면 수면 가스같이 평범한 무기는 아닐 것이고. '설마 개미 녀석들이 파 놓았던 함정이라도 남아 있었나?' 진우는 당장이라도 베르를 불러내 물어보고 싶었지만. '...' 그랬다가는 영결식 장소가 피 튀기는 레이드 현장으로 변할 터였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상급 헌터들 숫자만 대충 헤아려 봐도 수십은 가뿐히 넘었으니까. 물론 진우는 베르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괴물 개미를 상대해야 하는 헌터 쪽이 걱정인 거지. 그때. 협회의 직원으로 보이는 젊은 남자가 다가와 고건희 협회장에게 무언가를 속삭였다. 고건희 협회장이 안타깝다는 얼굴로 진우에게 말했다. "손님이 예정보다 일찍 도착하셨다고 해서 먼저 가 봐야겠군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했습니다." "별말씀을." 짧은 작별 인사가 끝나고 고건희 협회장은 직원과 함께 빠르게 사라졌다. 협회에서의 용무가 사라진 진우도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차를 세워 둔 장소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뭐지?' 아까부터 묘한 인기척 하나가 뒤에 따라붙고 있었다. 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미행이라면 보통은 들키지 않게 노력해야 하는 게 아닌가?' 그에 앞서.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사실 S 급 헌터를 미행할 생각조차 안 하는 것이 보통이긴 하다만은. 저벅저벅. 카메라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니 기자도 아니고, 그렇다고 기척을 숨기려고 무슨 노력을 하는 것도 아니고. 진우는 인기척이 언제까지 따라올지, 따라와서 무슨 짓을 할지 궁금해 '봉고' 앞까지 말없이 걸었다. 물론 그동안 인기척도 꾸준히 뒤를 따라왔다. '허 참...' 진우는 기가 막혔다. 상대의 수준이 이 정도까지 허술하면 진지하게 임할 마음도 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처음 깨달았다. 그런데. 진우가 봉고의 차문을 열려고 손잡이를 잡은 순간. "성진우 씨 되십니까?" 뒤쪽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우는 이제야 본색을 드러내냐는 생각에 피식 웃으며 돌아섰다. "네, 그렇습니다만." 상대의 얼굴을 확인하던 진우의 동공이 잠깐이지만 흔들렸다. '외국인?' 한국어 발음이 너무 능숙해서 외국인이라고는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깔끔함을 넘어 세련되기까지 한 정장을 갖춰 입은 서양인 청년은 자신의 금발 머리를 닮은 밝은 미소를 지었다. "저는 이런 사람입니다." 남자는 품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스윽 내밀었다. 명함에는 남자가 속한 기관명과 그의 이름, 그리고 전화번호가 큼지막하게 적혀 있었다. [미합중국 헌터 관리국, 상급 요원 애덤 화이트.] '헌터 관리국?' 미국에서 가장 끗발이 세다는 기관의 엘리트 요원께서 나한테 무슨 볼일로 찾아왔을까? 아니, 헌터 관리국에서 볼일이라면 하나밖에는 없나? 진우가 고개를 들자 요원은 시원한 목소리로 자신을 소개했다. "편하게 애덤이라고 불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성진우 헌터님." = 130 화 애덤 화이트. 진우는 자신의 소속을 헌터 관리국이라고 밝힌 미국인 청년의 눈을 마주했다. '...' 그가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건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미국이 막대한 자금력을 바탕으로 전 세계의 헌터들을 끌어모으고 있음은 새삼스레 숨길 필요도 없는 자명한 사실. 그래서 소개가 끝난 뒤 자연스럽게 미국행 권유가 나오리라 생각했다. 한데 애덤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말을 꺼냈다. "헌터님께 드리고 싶은 정보들이 있습니다." "정보...?" "아마도 현존하는 어느 나라, 어느 기관에서도 들을 수 없는 정보일 겁니다. 저희를 제외하면요." 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 정보의 극비 정보를 일면식도 없는 외국인 헌터에게 제공하겠다는 이유가 뭘까? "그런 정보를 내게 제공하겠다는 이유가 뭡니까?" 냉정한 진우의 질문에 애덤이 싱긋 웃어 보였다. "특정 인물들에게는 정보를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저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습니다." 특정 인물들. 이번 경우에는 진우도 그 '특정 인물'의 범주에 들어간다는 소리였다. 진우는 호기심이 생겼다. "일단 들어 보죠." "제가 헌터님과 나눌 수 있는 대화는 여기까지입니다. 이 뒷부분은 저희 부국장님께서 이어 나가실 겁니다." 헌터 관리국의 부국장. 어지간한 나라의 장관급 이상 파워를 지닌 그가 한국까지 왔다? '예삿일은 아니라는 소리긴 한데.' 애덤은 진우의 호기심을 자극하는데 성공했다고 판단했는지, 아껴뒀던 본론을 꺼내었다. "부근에 차를 대기시켜놨습니다. 부국장님을 만나 보시겠습니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선택권은 진우가 가지고 있었다. '정보라...' 어차피 두 가지 중 하나가 아닐까. 알게 되면 이익을 볼 수 있는 소식이거나, 누군가가 나를 노리고 있다는 제보. 하지만 둘 중 어느 것도 반드시 알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이익을 볼 수 있는 곳이 있어도 지금은 검은 열쇠에 집중하고 싶었고, 또 누가 적이 되어서 덤벼든다고 해도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애초에 이 녀석들이 준다는 정보를 신뢰할 수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아니면 정보를 주겠다는 말 자체가 아예 거짓일 가능성도 있었다. 상대가 가진 카드가 내게 필요할지 아닐지, 혹은 카드가 있는지조차 확실하지 않은데, 상대방의 뜻대로 끌려다닐 필요가 있을까? 결론은 금방 나왔다. "생각해 보고 연락드리겠습니다." "...!" 예상하지 못했던 대화의 흐름에 애덤은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을 느꼈다. '아니, 헌터 관리국의 부국장이 이 머나먼 곳까지 와서 극비 정보를 넘겨주겠다는데 그냥 무시하고 갈 길을 간다고?' 하지만 상대는 빈말을 던진 것이 아닌지 덜컥 차문을 열었다. 이대로 성진우 헌터가 가 버리면 다음 기회는 언제가 될지도 모른다. 아니, 아예 오지 않을 가능성도 있다. 그가 노리고 한 말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확실히 그를 보내면 아쉬운 쪽은 자신들이었다. "그럼 이만." 진우가 봉고에 올라타려고 하자 안절부절못하던 애덤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자, 잠시만!" 진우의 시선이 애덤에게로 향했다. 애덤은 조금이라도 더 진우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서 빠르게 말을 이었다. "업그레이더..." "업그레이더?" 애덤은 완전히 졌다는 얼굴을 하고 자신이 내뱉은 단어를 설명했다. "각성자의 능력치를 올려 줄 수 있는 각성자에 대해 알고 있으십니까?" 처음부터 그렇게 나오셨어야지. 진우는 애덤 요원이, 아니 정확히는 헌터 관리국의 부국장이 알려 주겠다는 정보가 정보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음을 눈치챘다. '각성자의 능력치를 올려 주는 각성자라...' 드디어 진우의 마음이 동했다. 진우가 봉고에 걸치고 있던 한쪽 발을 내리고 차문을 닫자 애덤이 안도한 나머지 긴 한숨을 내쉬었다. "휴-" 그렇게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자 어느새 눈앞에 진우가 서 있었다. "지저스!" 깜짝 놀란 애덤이 급히 물러섰을 때, 진우가 기다렸다는 듯 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면 됩니까?" *** 끼익. 두 사람이 탄 검은 세단이 유명한 특급 호텔 앞에 멈춰 섰다. "여깁니다." 그러고 보니 호텔 이름이 전에 유진호에게서 받았던 메모에 적혀 있는 곳과 같았다. '영어를 쓰는 외국인이 찾고 있다더니 이 사람들이었나?' 진우는 요원을 따라 부국장이 기다리고 있다는 방으로 올라갔다. 헌터 관리국의 마이클 코너 부국장은 부하의 뒤에 서 있는 남자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좋았어!' 거래에서 가장 힘든 과정은 상대를 협상 테이블에 앉히는 것이었다. 일단 앉히기만 하면 반쯤은 성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부국장은 활짝 웃으며 진우에게 오른손을 내밀었다. "헌터 관리국 국장 마이클 코너입니다." 영어로 말한 그의 인사말을 애덤이 유창한 한국어 실력으로 번개같이 빠르게 통역해 주었다. 진우는 부국장의 손을 맞잡았다. "헌터 성진우입니다." 간단히 소개를 끝낸 두 사람은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마주 보며 앉았다. 애덤은 앉지 않고 부국장의 옆에 가 섰다. "혹시 타국의 헌터 관계자와 만나신 적이 있습니까?" 부국장은 그렇게 운을 띄워 보았다. "없습니다." 기대하고 있었던 대답이 나오자 부국장은 싱긋 웃었다. '역시 미국보다 빠른 나라가 있을 리 없지.' 남들보다 한 발 앞서 있는 공격수만이 골을 넣을 수 있는 법. 부국장은 남들보다 먼저 손에 넣은 허투로 만들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특히나 상대는 상관에게서 무슨 수를 써서든 데려오라는 명을 받은 최상급, 아니 특급 헌터. 애매한 화법 따위는 애초에 생각지도 않고 자리에 앉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성진우 헌터님." 부국장은 자신 앞에 수북이 쌓여있는 서류 더미를 진우에게 내밀었다. "저희 미합중국은 성진우 헌터님을 원하고 있습니다." "이건...?" "미국 이민 서류입니다. 원래는 1 년에서 2 년이 걸려야 할 서류들입니다. 하지만 성진우 헌터님께는 다릅니다." 부국장은 검지를 들어 보였다. "1 초." 그러고는 자신감 있는 목소리로 단언했다. "하겠다고 한마디만 하시면 단 1 초 안에 미국인이 되실 수 있으십니다. 물론 평범한 시민이 아닌, 자국의 최상급 헌터들과 완벽히 동등한 수준의 대우를 받게 되실 겁니다." "..." 여기까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대화였다. 하지만 진우가 알고 싶은 것은 '업그레이더'라는 각성자의 정보였다. 진우의 시선이 닿자 흠칫하며 애덤이 눈길을 돌렸다. 진우는 다시 부국장을 바라보며 말했다. "저는 정보를 준다는 말을 듣고 찾아왔습니다만." 그러자 부국장이 호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제가 방금 드렸던 말씀과 무관한 얘기가 아닙니다." "예?" "헌터님이 미국의 헌터가 되어 주시겠다고 약속하시면, 저희는 헌터님이 가진 능력을 한 단계 더 높은 곳으로 끌어올려 드릴 겁니다." 업그레이더. 아무래도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지닌 각성자인 모양이었다. 애덤 요원의 말이 빈말이 아니었음을 알게 된 진우는 반신반의했다. '정말로 그런 능력을 지닌 각성자가 있었단 말인가.' 그래서 물었다. "그게... 가능한 일입니까?" 진우가 관심을 보이자 부국장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실은 이곳에 와있습니다." 진우는 알고 있었다. 닫힌 문틈 사이로 조금씩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으니까. 마력의 양이 크지 않아 헌터 관리국 부국장 같은 중요한 인물의 호위를 맡기기에는 부적합해 보였다. 그렇다고 전투가 아닌 특수한 능력을 지닌 각성자가 아닐까. 진우는 그런 결론을 내리고 있었던 차였다. 아니나 다를까. 부국장은 방 안에 대기하고 있던 요원들에게 지시를 내렸다. "셀너 부인을 모시고 나오게." 딸깍. 부국장의 명령이 떨어지자마자 문이 열리며 두 명의 요원이 중년의 흑인 여성 한 사람을 데리고 나왔다. 진우는 부인에게서 느껴지는 묘한 기운에 눈을 가늘게 떴다. '...' 확실히 일반적인 각성자와는 다른 분위기가 있었다. 부인이 테이블 옆에 멈춰 서자 요원이 비어 있는 의자 하나를 빼냈다. 그제야 부인은 천천히 의자 끝에 엉덩이를 붙였다. 셀너 부인은 단박에 진우를 알아보고서 흥미를 보였다. "당신이 바로 그 영상의..." 이미 성진우 헌터에 관한 자료는 부인에게 충분히 제공된 상태였기 때문에, 부국장은 진우에게만 부인을 소개했다. "이쪽은 노마 셀너 부인. 전 세계에 단 한 명, 각성자들의 능력을 한계치 이상으로 올려 줄 수 있는 각성자입니다." 소개가 끝나자 셀너 부인은 진우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보냈다. 진우도 마찬가지로 눈인사를 했다. "셀너 부인. 헌터님께 본인의 능력을 간단히 설명해 주시죠." 부인은 아직도 의심의 눈빛을 보내고 있는 진우를 바라보며 장난기어린 미소를 지어 보였다. "모두들 처음에는 헌터님처럼 그런 눈빛을 보내지요. 하지만." 부인은 진우에게 상체를 기울이고는 속삭이듯 말했다. "한 번 경험하고 나면 다들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된답니다." "부인..." "알고 있어요, 부국장님. 중요한 분이시라는 거." 셀너 부인은 미소를 유지하며 설명을 이어 나갔다. "성진우 헌터님. 모든 헌터에게는 한계점이 존재한답니다. 누구도 한계점을 넘어설 수는 없지요." 그래서 각성자들의 랭크가 변하는 일이 없는 것이다. 헌터라면 모두가 알고 있는 상식이었다. "그럼 부인께서는..." 진우가 채 묻기도 전에, 셀너 부인이 마지막에 먹으려고 아껴 둔 케이크 위의 딸기를 집어 든 아이같이 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맞아요." 진우의 눈이 커졌다. "저는 세 단계에 걸쳐서 그 한계점을 높여 줄 수가 있답니다. 강제 재각성이라고 해야 할 지, 잠재력을 끌어올린다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요." 굉장한 능력! 그녀의 방금 한마디는 최상급 헌터들의 마음을 뿌리째 뒤흔들 수 있는 강력한 폭탄과도 같은 발언이었다. 진우의 시선이 부국장을 향했다. 부국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말은 모두 사실입니다. 단 그녀의 능력에는 텀이 있어서 한 번 힘을 쓰고 나면 오랫동안 쉬어야 다시 능력을 쓸 수 있기 때문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각성자는 일 년에 세 네 명이 전부입니다." "...효율은 얼마나 됩니까?" "사람마다 다르지만 세 단계가 전부 끝나고 나면 적게는 2 할에서부터 많게는 3 할까지도 힘이 성장했다고들 느끼더군요." 2 할에서 3 할! 이미 평균 스탯이 250 에 가까워진 진우가 그 정도의 능력치 향상 버프를 받는다면 평균 스탯이 300 을 거뜬히 넘길 수 있었다.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치였다. "이런 능력이 밖으로 알려지면..." 진우가 걱정하고 있는 것을 부인 또한 염려했고, 부인은 고민 끝에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면서도 안전을 지킬 수 있게 헌터 관리국으로 들어갔다. "저희는 부인을 지켜 주면서 합당한 보수를 지불하고, 부인은 저희에게 협력하는 헌터들의 능력치를 올려 주고, 그런 상호협조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부국장은 그렇게 설명을 매듭지었다. 이제 본론을 얘기할 때가 된 것이다. 처음부터 타이밍을 재고 있었던 부국장이 드디어 기회를 잡았다. "저희가 헌터님께 드릴 수 있는 선물입니다." "선물..." 헌터에게 이보다 큰 선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헌터님께서 미합중국의 헌터가 되시면 헌터님께 가장 우선적으로 혜택을 드리겠습니다. 또한 최고의 조건으로 계약이 성사되도록 원하시는 길드를 주선해 드리겠습니다." 헌터 입장에선 도저히 거부하기 힘든 조건들이었다. 황동수가 온 국민의 손가락질을 받으면서도 과감히 미국행을 결심했던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미국이 제시했다면 막대한 금액은 그저 진짜 '이유'를 가리기 위한 눈속임에 불과했을 뿐. 평범한 헌터들에게도 눈이 뒤집혀서 덤벼들만한 이야기인데, 최상급 헌터에게 능력을 끌어올려 준다는 말을 한다면? 과연 누가 거절할 수 있을까? 하지만. 진우는 중요한 사실 하나를 지적했다. "그런 힘이 있다는 사실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죠?" 그러자 부인이 끼어들었다. "서두르지 말아요. 오늘은 첫 번째 단계를 해제시켜 주러 온 거니까." 진우는 그제야 부인이 처음에 했었던 말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한 번 경험하면 다들 매달린다고 했었나?' 백이면 백. 그녀의 능력을 확인한 헌터들은 미국행을 택했다. 부국장은 넌지시 물었다. "그녀가 말씀하신 대로입니다. 첫 번째 해제에 동의하십니까?" "아무 대가 없이...?" "서비스라고 생각하세요, 헌터님." 셀너 부인이 진우의 손목을 가볍게 잡았다. 진우가 돌아보자 그녀는 인자한 미소를 지으며 좀 더 가까이 오라는 듯한 손짓을 했다. "내 눈을 들여다봐요, 자세히. 그게 첫 번째 과정이니까." 부국장은 의자에 등을 맡긴 채 두 사람을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됐어. 넘어왔어.' 게임은 끝났다. 첫 번째 해제가 끝나고 나면 성진우 헌터가 알아서 다음 연락을 해 올 것이다. 아니, 그가 좀 급한 성미를 지녔다면 이 자리에서 바로 이민 서류에 사인을 할지도 모른다. 이제 부국장의 관심사는 그다음에 있었다. '과연 그의 한계는 어느 정도일까?' 팔짱을 풀고 턱을 만지작거리며, 부국장은 흥미롭게 진우를 응시했다. 그런데 그때. "헉!" 신음 소리를 내뱉은 셀너 부인의 눈동자가 격렬히 떨리기 시작했다. = 131 화 노마 셀너. 흔히 셀너 부인, 셀너 여사로 통하는 46 세의 흑인 여성은 현재 헌터 관리국 내에서 미국 대통령보다 높은 보호 등급을 받고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즉 그녀와 대통령이 동시에 목숨의 위협을 받게 되면, 헌터 관리국은 그녀를 우선해서 구한 뒤에 대통령을 생각한다는 얘기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전 국장이 헌터 관리국을 떠나며 현 국장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과정에서, 그녀에 대해 이렇게 표현했다. -대통령이 누가 되든 세계 최강의 헌터국이라는 미국의 입지가 흔들릴 일은 없지만, 그녀가 사라지고 나면 미국은 당장 외곽 소도시들부터 게이트를 걱정해야 할 것이다. 그렇다. 그녀가 세계의 S 급 헌터들은 한데 모아준 덕분에, 미국 국민들은 그 넓은 땅덩이에도 불구하고 상급 게이트가 어디에 생기든 신경쓰는 일 없이 두 발 뻗고 잠자리에 들 수 있었다. 그녀의 손에 이끌려 국적을 옮긴 최상급 헌터들의 수만 26 명. 헌터 강국이라 불리는 어지간한 나라들의 S 급 숫자보다 많았으며, 헌터 관리국에서 선별해 접촉하는 까닭에 질 또한 매우 우수했다. 그러니 셀너 부인은 수면 아래에서 미국을 지켜주는 수호신이라 할 수 있는 존재였다. 아무리 S 급 헌터들의 지위가 높고 대접이 좋다고 해도 셀너 부인보다 우선될 수는 없었다. 그녀의 존재 자체가 대통령도 함부로 접근할 수 없는 절대적 기밀. 당연히 그녀를 만날 수 있는 S 급 헌터들도 헌터 관리국의 까다로운 기준에 의해 철저하게 추려졌다. 애덤 화이트 요원이 언급했었던 특정 인물들. -특정 인물들에게는 정보를 공개하는 것만으로도 저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있습니다. 그 특정 인물들의 범주에 들어가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진우를 포함한 대다수의 S 급 헌터들이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그러나. 셀너 부인의 능력에 의해 리미터(한계점)가 깨지고 나면 그때야 비로소 헌터들은 자각하게 된다. 자신이 누구에게 선택을 받았으며, 그게 어떤 의미인가 하는 사실을! 어떤 헌터는 온몸에서 넘치는 힘에 감동한 나머지 그녀 앞에서 무릎을 꿇고 눈물을 보였다고 한다. 다음 날 그의 국적은 콩고에서 미합중국으로 바뀌었다. '늘 그래왔었지.' 그래서 마이클 코너 현 헌터 관리국 부국장은 한 치도 의심하지 않았다. 성진우 헌터도 다른 헌터들과 마찬가지로 경악에 가득 찬 감탄성을 내지르며 신을 찾게 될 거라고. 매달린다. 그만큼 적절한 표현이 또 있을까? 조금의 의심도 없이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다. 헌데. 경악에 가득 찬 소리는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왔다. "으아아악!" 한참 진우의 눈을 들여다보던 셀너 부인이 못 볼 것이라도 본 사람처럼 비명을 지르며 나가자빠졌다. 그녀를 호위하는 두 명의 요원이 본능적으로 품속에 숨겨두고 있던 총을 꺼내 진우를 겨누었다. "그만! 자네들 미쳤나!" 두 요원들의 만용을 목격한 부국장이 기겁하며 소리쳤다. 벌떡 일어선 부국장은 두 요원들의 총을 양손으로 짓누르며 욕설을 섞인 고성을 내질렀다.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 몰라서 이 따위 물건을!" "하지만 부인이." "이 얼간이들이! 셀너 부인이 걱정되면 그녀를 먼저 돌보게!" "죄, 죄송합니다." 요원들은 곧바로 총을 집어넣고서 바닥에 쓰러진 채 파르르 떨고 있는 셀너 부인을 부축했다. 셀너 부인의 안색은 안쓰러울 정도로 파랗게 질려있었다. 부국장은 돌아서서 진우에게 90 도 가까이 허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헌터님. 저희 요원들이 실례를 저질렀습니다." 여유 만만하던 부국장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는 것을 보니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아무리 부인의 안전을 최우선하도록 훈련을 시켰다지만, S 급 헌터에게 총구를 내밀 줄이야.' 만약 상대가 불같은 성미를 지닌 헌터였다면 요원 두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관련자인 자신의 목 또한 온전하지 못할 터였다. 총기 반입이 금지된 나라에서 최상급 헌터의 면전에 총을 들이밀었으니 어떤 변명도 입에 담을 수 없다. 셀너 부인이 비명을 지르며 넘어질 때 한 번, 두 젊은 요원이 품속에서 총을 꺼낼 때 한 번. 두 번이나 철렁했던 심장은 아직도 쿵쾅쿵쾅 시끄럽게 날뛰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당황스럽기는 진우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이래?' 갑자기 부인이 비명을 지르더니 쓰러지고, 헌터 관리국 요원들이 총을 꺼내 겨누더니, 부국장이 길길 날뛰며 허리 숙여 사과한다. 처음에는 황당했고, 다음은 기가 막혔으며, 마지막으로는. "...괜찮습니다. 아직 다친 사람은 없으니까." 화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한 나라 최고 기관의 2 인자가 먼저 나서서 부하들의 실수를 인정하고 저리 깍듯하게 사과해오는데, 거기다 대놓고 윽박지르는 것도 꼴사납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감사합니다, 헌터님." 진우가 괜찮다고 말하고 나서야, 부국장이 고개를 들었다. 진우의 얼굴을 보아하니 비꼬는 것은 아닌 듯 했다. 정말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만에 하나 토마스 안드레나 중국의 류즈캉 앞에서 이런 일이 있었다면...' 자신이 채 사과를 하기도 전에 이미 총을 꺼낸 두 사람의 심장은 멈춰 있었을 터였다. 성진우 헌터가 신사적인 성격이어서 겨우 대화를 시도할 수 있었다. '휴-.' 부국장은 안도의 한숨을 내쉰 후, 콧잔등 위에 맺혀 있던 식은땀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일단 발등 위에 떨어진 불은 끄는데 성공했다. 다음은 주위로 눈을 돌릴 차례. 다시 한 번 진우에게 고개를 숙인 부국장은 황급히 부인의 상태를 살폈다. "셀너 부인, 무슨 일입니까?" "마, 마이클..." "부인...? 땀이 어째서 이렇게?" 부국장도 방금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에서 식은땀을 잔뜩 흘렸었지만, 부인은 아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무슨 일이지?' 부인의 상태가 걱정된 진우가 일어서 다가가자 부인이 시선을 똑바로 하지 못하고 몸서리쳤다. 부국장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 상태로는 도저히...' 어렵게 성진우 헌터를 테이블에 앉히는데 성공했지만, 협상을 이어 갈 수 있는 중요한 카드가 사라지고 말았다. 부인이 능력을 사용할 만한 상황이 아니었다. 돌아선 부국장은 침통한 표정으로 진우에게 말했다. "오늘은 셀너 부인의 컨디션이 좋지 않은 듯합니다. 후에 다시 연락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 한편. 한국 헌터 협회 협회장실에는 중요한 손님이 방문했다. 바로 일본 헌터 협회 회장 마쓰모토 시게오였다. 두 명의 협회장이 수행원 하나없는 방안에서 각자의 통역만 세워놓은 채 서로를 마주 보고 앉았다. 고건희가 먼저 입술을 뗐다. "고토 씨 일은 들었습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잠깐 씁쓸한 표정이 스쳐지나갔던 마쓰모토의 안색이 싹 바뀌었다. "하지만 저는 과거의 일이 아닌, 앞으로의 일을 논하러 온 겁니다." 고건희도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 사이에는, 아니 한국과 일본 사이에는 처리해야 될 문제가 몇 가지 남아있었다. 우선은 마정석 분배. 원래는 1 년 뒤 개미들이 모조리 죽고 나서 분배를 시작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진우가 개미들의 씨를 깔끔히 말려버린 상태. 위성 감시 카메라로 진우의 경악스런 행각을 발견한 일본도 이 사실을 모르지 않았다. -저, 저 인간 대체 뭘 하려는 거야? -개미들이... 성진우 근처의 개미들이 사라져 갑니다. -그가 부리는 소환수들이 사냥을 시작했습니다! -소환수들이 섬 전체로 퍼져나갑니다. -뭐야, 저 인간? 설마...? 설마가 사람을 잡는다더니. 순식간에 제주도에서 모든 마력의 흔적이 사라졌다. 딱 하나. 성진우 헌터의 것으로 예상되는 거대한 마력 덩어리를 빼놓고는. '강한 힘. 예측불허의 행동력. 굳이 죽이지 않고 놔둬도 되는 마수들을 일부러 처치하는 잔혹성까지.' 우리 일본에 이렇게 어울리는 헌터가 이 세상 천지에 또 어디 있을까? 마쓰모토는 그때 상황실 분위기를 떠올리며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가져왔던 문서 몇 장을 고건희에게 내밀었다. "이게 뭡니까?" 고건희는 문서를 받아들며 물었다. "일본이 제주도 마정석의 소유권을 포기하겠다는 각서입니다." "...?" 반신반의하며 문서를 훑어 내려가던 고건희의 눈이 커졌다. 마쓰모토의 말은 사실이었다. "어째서?" 어째서 적지 않은 타격을 입었을 일본 헌터 협회가 이리도 쉽게 큰 이익을 포기하려는 것일까? 답은 금방 나왔다. "대신 성진우 씨를 저희에게 넘겨주시지요." "허허." 고건희는 실소를 터트리며 소파의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아쉽지만 그는 헌터 협회 소속이 아닙니다." 헌터 협회 소속이라고 해도 그만한 헌터를 타국에 넘겨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지만 말이다. "알고 있습니다." 마쓰모토는 기다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하지만 그는 헌터 협회와 아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고, 또 지금은 협회를 통하지 않으면 그에게 연락조차 할 수 없게 되어 있지요." 아쉽게도 일본 헌터 협회에게는 미국 헌터 관리국만큼의 정보력이 없었다. 그 말인즉슨 마쓰모토가 진우에게 연락할 수 있는 방법은 헌터협회를 설득시키는 것뿐이라는 뜻. "그를 어떻게 해달라는 소리가 아닙니다. 그와 교섭을 해볼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것이지요." "그 기회 때문에 이 천문학적인 금액을 포기하겠다는 겁니까?" 끄떡. 마쓰모토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일로 일본은 10 명의 최상급 헌터를 잃었다. 그들에게 돌아갔어야 할 돈이 수중에 그대로 남아있는 상태. 돈은 썩어 넘치도록 많았다. 성진우 만한 헌터를 얻는 대가라면 마정석 따윈 아깝지 않았다. 하지만. "거절하겠습니다." 돌아오는 답변은 마쓰모토의 예상과 달랐다. "거절하겠다니요?" 마쓰모토가 화들짝 놀랐다. 물론 자신에게는 성진우 헌터를 일본으로 반드시 데려올 자신감이 있었지만, 고건희에게는 그저 교섭의 기회를 달라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저쪽이 먼저 제안을 걷어찰 줄이야. "일본에게 성진우 헌터를 뺏길까봐 이런 기회를 마다하는 겁니까?" 고건희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당신들에게는 처음부터 단 하나의 마정석도 가질 자격이 없음을 말하고 있는 겁니다." 고건희의 의미심장한 발언에 통역이 눈치를 살폈다. "협회장님, 정말 그대로 말씀드려도 괜찮겠습니까?" "물론이네. 한 글자도 빼먹지 말고 그대로 말하게." 통역의 말을 듣고 있던 마쓰모토의 얼굴색이 붉어졌다. "고건희 협회장! 그게 무슨 망발이오!" 자연스레 언성 또한 높아졌다. 그때. 고건희의 입에서 천천히 일본어가 흘러나왔다. "통역들 없이 우리 둘이서만 얘기를 나누고 싶소." 마쓰모토가 흠칫 놀라 물었다. "당신... 일본어를 할 수 있었나?" "어렸을 적 아버지께서 일본에서 자그마하게 사업을 좀 하셨지. 오래전 얘기라 유창한 대화는 어렵겠지만." 끄떡. 마쓰모토의 동의하에 두 명의 통역이 협회장실을 나갔다. 시작은 마쓰모토였다. "우리는 당신들을 위해 S 급 헌터 10 명을 희생했소." 희생자 명단에는 일본 제일의 헌터 고토 류지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당신이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겠다면 어쩔 수 없지. 마정석의 반에도 그들의 피해보상까지 전부 다 더해 한국 정부에 청구하도록 하겠소." 하지만 고건희는 코웃음 쳤다. "마쓰모토 협회장... 아직 당신은 당신이 우위에 서 있다고 착각하고 있구먼." "고건희 협회장!" 마쓰모토가 눈을 부릅뜨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그게 당신을 위해 싸워준 우리에게 할 소린가?" 흥분한 마쓰모토와 달리 고건희는 끝까지 침착했다. "나는 계속 궁금했었소." 고건희의 차분함에 열이 식은 것인지 마쓰모토도 다시 천천히 자리에 앉았다. 마쓰모토가 완전히 앉기를 기다려 고건희가 말을 이었다. "어째서 국제 사회에 이름을 알리기 좋아하는 당신들이 레이드의 가장 핵심적인 과정이라 볼 수 있는 여왕 사냥을 우리에게 맡겼는지." "그거야 한국은 개미 군단을 상대로 시간을 벌어줄 자체적 역량이 없으니." "정 그렇게 생각했다면 일본팀을 4 개조로 나눈 것처럼 한국팀을 하나의 조로 끼워 넣고, 일본 최정예 팀이 개미굴로 들어가 여왕을 사냥하는 편이 더 낫지 않았겠소?" 과연. 마쓰모토의 눈빛이 달라졌다. "...그래서 지금 하고 싶은 얘기가 뭡니까, 고건희 협회장." 어째서인지 그는 고건희라는 이름을 분명하게 언급했다. "당신들이 철수한 타이밍... 괴물 개미 때문이 아니라 처음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은 아니오?" "당신, 미쳤군." "미친 건 당신들이지. 대체 우리 헌터들을 죽음으로 몰아넣고 뭘 어떻게 할 생각이었나?" 고건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그러자 마쓰모토가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하." 이윽고 그의 주머니에서 녹음기가 나왔다.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을 이었다. "방금 당신이 했던 발언. 여기 고스란히 다 담겼소. 아무 증거도 없이 일본 헌터들을 모욕하고 그걸 빌미로 약속했던 배분까지 미룬 죄." 마쓰모토의 입가에 음흉한 미소가 어리었다. "국제 사회의 심판을 받게 해주지." 고건희의 발언이 담겨 있는 이 음성 파일 하나면 일본 헌터들이 작전 중에 후퇴했다는 사실을 덮고도 남았다. 여론은 바뀔 것이다. 앞뒤를 가리지 않고 심증을 믿은 고건희의 명백한 실수였다. 만약 그가 눈이 뒤집힌 나머지 자신에게 손이라도 댄다면? 더더욱 빼도 박도 못할 증거. 음성 파일은 이미 본국의 상황실 컴퓨터로 전송된 뒤였다. 하지만. "증거? 당연히 있지." 고건희도 품속에서 작고 검은 사각형 물체 하나를 내놓았다. "...?" "성진우 헌터가 현장에서 발견해 가져온 겁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에 마쓰모토의 태도가 조금 누그러들었다. "뭡니까... 이게?" 고건희는 의아해하는 마쓰모토를 바라보며 피식 웃음을 지었다. "송수신기에 달려있는 블랙박스. 고토 팀이 쓰고 있던 거라고 하더군요." 순간 마쓰모토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고건희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재생성기를 꺼내 메모리에서 추출한 음성 파일을 플레이했다. -한국 놈들이 들어간 지 얼마나 지났지? -잠시. 10 분이 조금 안 됐답니다. -10 분이라. -슬슬 빠질 준비를 해야겠군.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일본인 중 하나인 고토 류지의 목소리가 똑똑히 담겨 있었다. 고건희는 재생기를 끄고는 말했다. "내가 왜 이 파일을 공개하지 않았는지 아시오, 마쓰모토 시게오 일본 헌터 협회 협회장?" 마쓰모토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흙빛이 되었던 그의 얼굴색이 이제는 하얗게 질려가고 있었다. "승리의 여운을 즐기고 있는 국민들에게 당신네들이 한 짓으로 똥물을 끼얹는 것이 싫어서였소. 당신들이 아니라 우리들을 위해서 조금 미뤄뒀던 거요." 마쓰모토의 손에서 녹음기가 툭 하고 떨어졌다. 고건희가 말했다. "이제 내가 할 말을 알고 있겠지. 마쓰모토 협회장." 고건희의 손에 들린 재생기가 S 급 헌터의 악력에 산산조각 났다. "이 방에서 당장 꺼지시오." *** 진우가 돌아가고 난 뒤, 부국장은 셀너 부인과 단 둘이 방에 남았다. "부인,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여태까지 많은 헌터들을 보아 왔고, 셀너 부인과도 한두 번 일해 본 것이 아니지만 이런 경우는 난생 처음이었다. 부인은 떨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가까스로 목소리를 짜냈다. "그는 왕이에요. 그것도 아주 강력한 왕." 부국장의 눈이 커졌다. 부인이 가진 능력의 원리를 아는 사람은 국장과 부국장, 그리고 셀너 부인 본인. 단 세 사람에 불과했다. 그런 부인이 성진우 헌터를 '왕급'이라고 확언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부국장은 다시 심장이 요동침을 느꼈다. "그럼... 그가 국가 권력급 헌터들과 맞먹는 수준이라는 말씀이십니까?" 절레절레. 부인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건 모르겠어요. 이런 경험은 처음이라. 그는 왕이지만, 보통 왕들과는 달라요." "예? 좀 더 알아듣기 쉽게 설명을..." "그를 들여다보는 동안, 그도 나를 보고 있었어요." "그거야 다른 헌터도 항상." "아니요! 성진우 헌터 말고 그의 안에 있는 끝없는 어둠이 저를 보고 있었다고요!" 셀너 부인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것은 모든 생명체가 가진 원초적인 공포, 즉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었다. 하지만 그건 중요한 게 아니었다. 정말로 중요한 말을, 그녀는 공포에 몸을 떨면서도 간신히 떠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부국장은 다시 그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부인은 힘겹게 입술을 뗐다. "리미터가 없어요." = 132 화 털썩. 마쓰모토가 무릎을 꿇었다. 한 단체의 장. 그것도 일본이라는 나라에서 모든 헌터들의 입장을 대표하는 자리에 앉아있는 남자가 무릎을 꿇었다. '...'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생각들이 마쓰모토의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보다 더 나은 방법은 떠오르지 않았다. 자존심이나 체면 따위를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 일이 새어나가면 여파는 자신의 자리가 날아가는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고건희 협회장... 부디 용서해주시오." 하지만 고건희 협회장의 눈빛은 냉랭했다. 증거가 드러나지 않았을 때는 큰 소리를 치다가, 증거가 드러나고 나자 곧바로 꼬리를 내리다니. 어찌 곱게 볼 수 있을까? "일어나시오." 고건희 협회장이 차가운 목소리로 무의미한 사과를 그만둘 것을 종용했으나, 마쓰모토는 막무가내로 이마를 바닥에 찍었다. "우리 일본은 최상급 헌터 전력의 반 이상을 잃어 앞으로 국제 사회의 도움이 절실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의 헌터 시스템이 뛰어나고 해도 S 급의 반이 사라진 현재, 언제가 됐건 구멍은 생길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A 급 게이트까지야 지금 있는 헌터들만으로도 문제가 없겠지만... S 급 게이트가 생성되는 순간 일본도 방심할 수 없게 된다. 어쩌면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일이 일본에서 발생하게 될 지도 모른다. "그 파일이 알려지게 되면 우리는 철저히 외면당하고 맙니다. 부탁입니다. 고건희 협회장. 죄가 없는 일본 국민들을 생각해서라도 한 번만 용서해주시길." "벌이라고 생각하시오." 고건희는 단칼에 마쓰모토의 말을 잘랐다. "당신과 당신네 헌터들이 저지르려고 했던 범죄의 벌이라고 생각하고 달게 받으시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을 짊어지고서 처벌의 시간을 기다리고 있어라. 그것이 고건희의 뜻이었다. 하지만 마쓰모토는 바닥에 붙인 이마를 떼지 않았다. "고건희 협회장... 당신의 노여움이 풀릴 때까지 일어나지 않겠습니다. 제발, 제발 다시 한 번 고려를." "그럼 어쩔 수 없군." 고건희는 불쾌하다는 표정을 짓고선 휴대폰을 꺼내 들었다. "5 분을 주겠소." 무슨 일을 하려는 것일까? 궁금함을 이기지 못한 마쓰모토가 고개를 들고 고건희를 올려다보았다. 고건희는 폰을 흔들었다. "5 분 안에 나가지 않으면 이 전화에 등록되어 있는 모든 기자들에게 일제히 메시지가 갈 것이오. 일본의 헌터 협회장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고 빌고 있노라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무서워 발목을 붙들고 늘어지겠다면 지금 바로 터트려주겠다. 협박이 아닌 통보였다. "그런..." 마쓰모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겨우 온정에 호소하는 것 정도로 약해질 만큼 고건희는 결단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다. 마쓰모토는 뒤늦게 깨달았다. 자존심까지 버린 마지막 시도가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힘없이, 마쓰모토가 몸을 일으켰다. 그런 그를 지켜보며 고건희는 폰을 내려놓았다. 비척이며 짐을 챙기고 있는 마쓰모토에게 고건희가 말했다. "성진우 씨에게 감사하시오." 고건희의 맹수 같은 두눈에 안광이 번들거렸다. "만약 당신네들의 수작 때문에 우리 헌터가 다쳤다면 지금 당신은 이 방을 살아나가지 못했을 테니까." 떨리는 손으로 짐을 모두 챙긴 마쓰모토는 뒤도 한 번 돌아보지 않고 도망치듯 협회 건물을 빠져나갔다. 전에 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의 당당함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었다. "후-." 고건희는 소파에 등을 기댔다.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이대로 끝낼 생각은 없었다. 일본 헌터 협회의 목숨 줄이 손안에 들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지.' 고건희는 예전부터 은원 관계 하나는 확실한 사람이었다. 그때. 탁상에 올려두었던 폰이 요란하게 울렸다. '음?' 고건희가 통화 버튼을 누르자 다급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가만히 듣고 있던 고건희의 눈동자가 커졌다. "뭐? 차도 한복판에 게이트가 생겼다고?" 그것도 평범한 공격대가 어찌해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닌 B 급의 게이트가. "거기가 어딘가?" 빨리 대형 길드에 연락해서 공격대를 출발시키는 것이 상책이었다. 그런데. '잠깐만.' 직원에게서 보고를 듣던 고건희의 표정이 묘해졌다. '그곳 근처에 성진우 헌터가 길드 사무실을 잡았다고 하지 않았나?' *** 갑자기 정체되기 시작한 도로. 진우는 나아갈 수 없게 된 차안에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 아줌마 뭔가 봤어.' 셀너 부인. 망각한 헌터들을 수없이 마주쳤을 여성이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할 정도의 두려움을 느끼고 있었다. 뭘 본 걸까? 시스템의 흔적? 시스템이 가끔 어려운 요구를 해도 그렇게 무서운 존재는 아닌데. '아니. 내게는 무섭기는커녕 최고의 서포터지.' 하지만 그게 다른 이들의 눈에는 어떻게 비칠까? 부국장이 말했었다. 다음에 연락드려도 괜찮겠냐고. 헌데. 부국장의 그 말을 꺼냈을 때, 뒤쪽에 있었던 부인에게서 끔찍한 동요가 느껴졌었다. 내가 만나고 싶다고 해도 부인이 알아서 피할 것 같은 그런 거리낌이. 진우는 그때 직감했다. 아마 그녀의 능력이 자신에게는 먹히지 않는 게 아닐까 하고. '더 이상 시간 낭비할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부국장에게 다시 연락하실 필요는 없을 것 같다고 정중히 거절 의사를 전하고 왔다. 굳어버린 부국장의 얼굴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다. '근데 차는 왜 이렇게 밀려?' 차들로 꽉 막혀있는 도로를 바라보던 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이래서 지하철이 편한데.' 앞에 뭔가 사고라도 난 모양인가, 생각이 들었을 무렵. 드드드드충전기 위에 꼽아놨던 폰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진우는 발신자를 확인했다. '협회장님?' 불과 몇 시간 전에 영결식장에 봤던 분이 또 무슨 용무로 전화까지 건 것일까? 진우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헌터님, 고건희입니다. 협회장은 차분한 목소리로 현재 서울 도심 한 가운데에서 일어나고 있는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예? 도로 한복판에 게이트가 생겼다고요?" 어쩐지. 평범한 교통 체증치고는 이거 너무 심각하게 밀리는 거 아닌가 싶었더니. 진우는 차를 돌리려고 시선을 뒤로 향했다. 그러나 뒤쪽이고 앞쪽이고 조금도 움직이기 힘들 정도로 차들이 빽빽이 들어차 있었다. 진우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시선을 바로 했다. 그런데 바로 그때. 극심한 체중에 밀려드는 불쾌함을 단박에 씻어내려 줄 반가운 소리고 수화기 저편에서 들려왔다. -저희 직원들이 측정한 결과 B 급 게이트라고 하는데, 헌터님께서 처리해주시겠습니까? 헛. 진우는 모처럼 들려오는 기쁜 소식에 웃음이 새어나오려는 것을 가까스로 참아냈다. 그래도 이렇게 많은 시민들이 불편을 겪고 있는 일을 기뻐해서는 안 되지, 암. 목소리를 가다듬은 진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공략 허가도 없이 이렇게 막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허허, 헌터님. 공략 허가는 어디서 나옵니까?" "협회에서 나오지요." "그럼 제가 누굽니까?" "헌터 협회 협회장이시죠." "걱정하지 말고 들어가십시오." "감사히 먹... 감사합니다." 진우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차에서 내려 선 진우는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흔적을 쫓아 앞으로 걸어갔다. 어차피 앞뒤좌우가 모조리 차들로 꽉 들어차 있어 따로 주차를 해둘 필요도 없었다. "네. 여러분들이 지금 보고 계시는 검은 구멍이 바로 오늘 도심에 출현한..." "지금 들어온 소식에 따르면 이번 게이트의 등급은 B, 길드의 개입이 필요한 상급 게이트라고 합니다." 게이트 주변에는 언제 나왔는지 기자들이 늘어서 있고, 협회 직원과 경찰이 주변을 통제하고 있다. '흠...' 진우가 기자들의 벽을 넘어서 게이트 쪽으로 다가가자 깐깐해 보이는 여직원이 앞을 막았다. "잠깐만요! 당신 뭐예요?" 여직원은 진우의 가슴을 손으로 밀며 목에 힘을 주었다. "여기 함부로 들어오시고 그러면 안 돼요!" 그러나. 그녀의 작은 손으로 아무리 용을 써봤자 진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제야 그녀는 눈앞에 있는 사람이 헌터, 그것도 상급 헌터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헌터...세요?" 진우는 신분증을 보여줬다. 여직원의 눈이 커졌다. 'S, S 급? 성진우?' 그렇다면 이 사람이 그 제주도에서 활약했던... 뒤늦게 진우의 신원을 알게 된 여직원이 고개를 들었다. TV 에서 봤을 때와 많이 다른 모습에 협회 직원이면서도 S 급 헌터를 알아보지 못했다. 하지만 수많은 사람들 중에 눈치 빠른 이도 존재하기 마련. "어?" "저 사람 혹시...?" "성진우다!" "성진우가 직접 게이트를 처리하려고 나왔나 봐." 정체에 짜증나있던 사람들이 하나둘 진우를 알아보고 얼굴이 환해졌다. 약속이 있던 몇몇 사람들은 아주 환호성까지 내질렀다. 하지만 시민들의 반응이 어떻든 간에 여직원은 완고한 태도를 굽히지 않았다. 잠시 머뭇거리던 그녀가 물었다. "여... 여기는 어떻게 오셨죠?" 어떻게 오긴. 헌터가 게이트 앞에 서 있으면 볼일은 하나밖에 더 있나.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다 싶어 진우는 손가락을 들어 여직원 어깨 너머의 게이트를 가리켰다. 잠깐 뒤를 돌아봤던 여직원은 뭔가 결심한 듯한 표정을 지었다. 많은 헌터들이 자신의 힘만 믿고 절차와 규정을 따르지 않다가 목숨을 잃었다. 'S 급 헌터도 마찬가지겠지...' 그런 사고를 방지하기 위해 협회가 존재하는 것이라고 누누이 배웠다. 협회가 최우선하는 것은 헌터의 안전. 특히나 상대가 S 급이라는 뛰어난 헌터라면 더더욱 불의의 사고를 당하게 할 수 없다고 생각한 그녀가 당차게 말했다. "아무리 S 급 헌터라도 절차를 무시하는 행동은 용납할 수 없습니다." "..." 진우는 할 말을 잃고 우두커니 여직원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다. S 급 헌터를 설득하는데 성공했다고 믿기 시작한 여직원은 질문을 쏟아냈다. "공략 허가권은 얻고 오셨나요?" 진우가 고개를 젓자. "아니, 허가권이 있다고 해도 최소 인원수를 다 채우지 않으시면 들어가실 수 없습니다." 여직원은 강경했다. 눈빛을 보아하니 악감정을 가지고 이렇게 나오는 것은 아닌 듯한데, 지나치게 원리원칙을 고집하는 직원인 모양이었다. 진우는 속으로 혀끝을 찼다. 뭐, 이러면 어쩔 수 없지. "잠시만요." 진우가 곧바로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통화가 연결되자 폰을 내밀었다. "자." 여직원이 의아해하자 진우가 또박또박 말했다. "받아 봐요. 당신 전화니까." 여직원은 의아한 눈초리로 물었다. "누... 누군데요?" "당신이 용납할 수 없을 것 같은 다른 한 사람." 엉겁결에 전화를 넘겨받은 그녀가 액정에 떠있는 수신인의 이름 석 자를 확인하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고, 고건희?' 설마 진짜로 전화를 받고 있는 사람이... "저... 전화 바꿨습니다." 여직원이 잔뜩 긴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자, 맞은편에서 묵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협회장이네. 역시나. 수차례 눈동자가 흔들리던 여직원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네. 네. 아니요. 네. 네. 그럼 말씀하신 대로 하겠습니다." 딸깍. 여직원은 풀죽은 얼굴로 폰을 다시 돌려주었다. 진우는 폰을 받고나서 한번 어깨를 으쓱하고는 그녀를 지나쳐갔ㄷ, '으...' 바짝 약이 오른 여직원이 부들대며 진우의 등에다 대고 저주...라기 보다는 악담을 빌었다. '하느님! 저 사람, 던전에서 넘어져 발목이나 삐게 해주세요!' 하지만. 성진우 헌터는 S 급 마수들이 가득했었던 제주도에서도 무사히 빠져나왔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이 B 급 던전에서 어떻게 되기야 하겠어?' 그런데 그 순간 여기저기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어? 저거 뭐야?" "왜 빨개지는데?" 진우가 들어가고 난 뒤 게이트의 검은 막이 서서히 핏빛으로 물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레드 게이트! 무서운 이름이었다. "아..." 여직원은 레드 게이트를 보고 망연자실했다. '설마 내가 방금 다치라고 빌었기 때문에?' 물론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녀의 머릿속에서 자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지워지지 않았다. 이차원과 연결된 레드 게이트가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는 교육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상급 헌터들조차 생환 가능성이 높지 않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었다. '설마...' 갑자기 최악의 상상이 떠오르자 여직원의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갔다. '진짜 그 헌터님이 다치기라도 하면.' 몇 분이나 지났을까? 자책하고 있던 그녀가 인기척을 느끼고 바닥으로 향하고 있던 시선을 들었더니 눈앞에 진우가 있었다. "어맛!" 그녀는 귀신이라도 발견한 듯 화들짝 놀랐지만, 진우는 잠깐 그녀를 바라보다 어깨를 으쓱하고 지나갔다. '...' 여직원의 얼굴은 협회장의 전화를 받고 난 후보다 더 빨개졌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진우가 짐칸에 감자를 가득 싣고 있는 트럭기사에게 다가갔다. "아저씨. 그거 한 포대만 파세요." "예? 감자를요?"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아뇨. 포대 자루요." *** 가칭 '솔플' 길드의 부사장이자 영입 담당자고, 변호사이며, 회계사까지 맡고 있는 유진호는 사무실 안으로 들어서는 진우를 보자 반가운 얼굴을 했다. "오셨습니까, 형님!" "별 일 없지?" "네. 형님. 그런데 창립 멤버 지원자 한분이." "오케이. 리스트 줘봐. 나도 한 번 확인해 볼게." 아침부터 했던 얘기로 지금까지 독촉하는 것을 보니 유진호도 얼른 길드를 만들고 싶어 몸이 달은 모양이었다. 다행히 진우도 같은 생각이었다. 창립 멤버가 될 나머지 한 사람. 최소한 세 명의 헌터가 모여야 길드 설립 조건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아무리 머리수만 채우는 용도라고 해도 기왕이면 성실한 사람이 좋겠지. 잠깐 보고 말 사이도 아닌데.' 진우는 스스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가만 보니 유진호의 얼굴이 좀 어두워보였다. "무슨 일 있어?" "그게... 형님." "응?" "아시다시피 길드 설립에는 돈이 좀 많이 듭니다. 상급 게이트는 경매가도 단위가 다르고, 신입 헌터들 계약금도 줘야 되고, 특히 이번에 창립 멤버로 지원하신." 진우는 말을 잘랐다. "돈은 이 정도면 될까?" 털썩. 진우는 가지고 온 감자 포대를 바닥에 놓았다. '뭐지?' 유진호가 의아한 눈빛으로 자루를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고가의 마정석들이 잔뜩 들어있었다. "혀, 형님...? 이게 다 뭡니까?" 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얘기했다. "오는 길에 게이트가 하나 보여서." "..." 오는 길에 고가의 마정석들이 있는 상급 던전이 보여서 거길 털고 마정석까지 가지고 나오셨다고? "역시 대단하십니다, 형님!" 유진호는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뒀다. 형님에게 상식의 잣대를 들이미는 짓은 더 이상 가치가 없는 행동이었다. 아버지로 인해 돈줄이 막혀 고통스러워하다 자금을 확보해 기뻐하는 유진호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진우가 회의실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런데 저분은 여기 왜 와 있는 거야?" "예? 아, 아까 말씀드리려다가... 지금 지원자 한 분이 와 계십니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지원자?" "네. 형님." "누가?" "회의실에 계신 분 말입니다, 형님." "본인이 그래?" "네, 형님." 지금 무슨 소리를... 진우는 유진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성큼성큼 걸어가 회의실 문을 열었다. 덜컹. 그러자 사무실 비품도 채 갖춰지지 않아서 유진호가 급하게 근처 편의점으로 달려가 사온 캔 커피를 묵묵하게 홀짝이고 있는 여성이 고개를 돌렸다. "이봐요, 당신." 진우의 목소리가 커졌다. "대체 무슨 생각입니까?" 그러자 진우를 가만히 올려다보고 있던 차해인이 말했다. "길드... 가입하려고요." = 133 화 제대로 들은 것이 맞나? 진우는 귀를 의심했다.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 부사장이자, 본인 실력 역시 최정상에 속하는 차해인이 아직 첫걸음도 제대로 떼지 못한 길드에 제 발로 들어오겠다니. 어디서 협박이라도 받고 온 것이 아니라면 이게 가당키나 한 소린가? 하지만. '과연 누가 저 여자를 협박할 수 있을까?' 진우는 한국에서 유일하게 그녀를 협박할 만한 능력이 있는 인물을 언급해 보았다. "혹시 협회장님의 지시입니까?" 차해인은 왜 여기서 협회장이 나오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분이 왜...?" 진짜 상황을 이해하기 힘든 사람이 누군데, 정작 원인을 제공한 장본인이 저런 표정을. '아니, 진정하자.' 분명 깜짝 놀랄 만한 소식이었고, 흥분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진우는 침착하게 의자를 빼내 차해인의 맞은편에 앉았다. 그리고 말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짧은 시간의 집중. 느려지기 시작한 시간 속에서 그녀에 대한 정보가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흘러들어왔다. '동요하고 있다.' 박동, 호흡, 눈빛. 차해인은 태연한 척하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진우의 높은 감각 스탯을 속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뭣 때문에 그녀는 이렇게 무리까지 해 가면서 가칭 '솔플' 길드에 들어오겠다는 것일까? 진우가 물었다. "아직 헌터스 길드와 계약 기간이 남아 있으실 텐데요?" 보통 길드와 헌터의 계약은 5 년 단위로 잡는 편이었다. 차해인이 S 급 판정을 받고 헌터스 길드에 들어간 것이 2 년 전. 최소 단위로 가정해도 아직 3 년은 더 기한이 남아 있다는 소리다. "위약금 물어 줄 돈은 있어요." 차해인의 차분한 대답에 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위약금은 대개 계약금의 두 배에서 세 배 사이. 헌터스 길드가 S 급 헌터를 잡으려고 지불했을 막대한 계약금을 생각하면, 위약금 또한 무시무시할 것이라는 계산이 금방 나왔다. 현실적인 이야기를 꺼내기에 앞서 진우의 목소리가 사무적으로 변했다. "저희 '솔플' 길드에서는 차 헌터님의 수준에 맞을 만한 계약금을 드릴 수가 없습니다." "기, 길드 이름이 '솔플'인가요?" "저와 부사장이 동의한 길드 이름에 무슨 문제라도?" "...아니요." 차해인은 작은 새처럼 한숨을 가볍게 내쉬더니 말을 이었다. "상관없어요. 계약금은 없어도 괜찮습니다." 엄청난 위약금을 물고 헌터스를 나와야 하면서 계약금 없이 계약을 맺어도 상관없다? '무슨 꿍꿍이지?' 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눈을 마주치는 시간이 길어지자 차해인이 더 이상 버티지 못하고 시선을 옆으로 피했다. 심장 뛰는 소리도 전보다 한층 더 빨라졌다. 진우가 귀를 쫑긋 세웠다. 예리한 청각은 그녀에게서 일어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뭔가 숨기는 게 있는 건가?' 이쯤 되자 진우는 도저히 묻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다. "그렇게까지 해 가면서 우리 길드에 오려는 이유가 뭡니까?" "..." 역시. 차해인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다물었다. 게다가 얼굴까지 붉어지는 것을 보아서는 아무래도 뭔가 숨기는 것이 있는 게 분명해 보였다. '가만...' 그러고 보니 이 여자, 영결식장에서 봤을 때도 평소와 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지. 무슨 생각인지는 모르겠으나, 어쩌면 그녀의 계획은 꽤 이전부터 준비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진우는 조용히 차해인의 대답을 기다렸다. 하지만 고개 숙인 그녀는 한참 동안 대답이 없었다. 아니,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괴물 개미에게 당해 의식을 잃고 있었을 때도 당신이 옆에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고. 아무것도 없는 어둠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아가는 와중에서 당신의 체취를 느낀 것만으로도 더없이 편안한 기분이 되었다고. 그때의 기분을 설명할 수 있는 단어 같은 것은 세상에 없었다. '설명한다고 해도 미쳤다는 소리만 돌아올 거야.' 후에 성진우 헌터가 정말로 거기 있었다는 사실을 알고서는 얼마나 가슴이 뛰었는지 모른다. 혼자만의 착각이 아니었다는 생각에 진심으로 안도했다. 그리고. '만약...' 만에 하나. 결코 죽음을 피하지 못할 상황이 찾아온다면 옆에 진우가 있어 주기를 바라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곁을 지켜 줬으면 좋겠어요, 라니.' 생각만 해도 뺨이 붉어지는 그런 낯뜨거운 발언을 어떻게 입에 담을 수 있단 말인가. 소녀 감성과는 거리가 먼 차해인에겐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래서 그녀는 준비해 왔던 대답을 내놓았다. "편하게." 고개를 들어 진우와 시선을 마주하며 뒷말을 이어 갔다. "편하게 지내고 싶어서..." 조금 핀트가 어긋나긴 했지만 완전히 거짓말은 아니었다. 최상급 헌터가 근처에 있으면 악취에 고개를 움직이기도 힘든 반면, 진우와는 같은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마음이 편안해졌다. 차해인이 말한 '편하게'라는 단어는 그런 의미였다. 의미의 해석은 달랐지만 진우는 차해인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녀의 대답을 듣고서 고개를 끄덕거렸다. 헌터스 같은 대형 길드에서 빠져나와 작은 길드에서 '편하게' 활동을 이어 가고 싶다. 진우가 알기로 차해인의 나이는 스물둘에서 스물셋. 'S 급 헌터가 짊어져야 할 부담감은 20 대 초반 여성의 어깨에는 무겁게 느껴지겠지.' 특히 이번에 제주도에서의 일처럼 생명의 위협을 느꼈을 경우에는 더더욱. 협회 소속으로 일할 때, 모든 걸 내팽개치고 달아나고 싶었던 적이 셀 수도 없었던 진우는 그녀의 마음을 십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정이 딱하기는 하다만...' 그녀를 덜컥 받아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괜히 길드 이름을 솔플로 지으려고 했을까? 앞으로 길드 이름으로 예약한 던전들은 모두 혼자서 클리어할 예정이었다. 최소 인원수 규정이 발목을 붙잡는다면 유진호와 함께 C 급 던전을 돌 때처럼 머릿수만 채워 줄 대타 멤버들을 구할 생각이었다. 그게 레벨업을 위해서는 가장 현명한 방법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차해인이 끼게 되면 여러모로 곤란해진다. 계약금은 그냥 넘어간다고 쳐도 돈은 줘야 생활이 가능할 게 아닌가? 굳이 데리고 있을 필요도 없는 S 급 헌터를 비싼 돈 주고 모시고 있으면서, 일까지 제대로 시키지 않는 국가적 차원의 낭비를 저질러야만 하는 것이다. 하지만. '계약금도 마다하고 길드에 들어오겠다는 S 급 헌터를 마냥 거절하는 것도 수상한 일이니까.' 해서 진우는 묘안을 하나 내놓았다. "사실 우리 길드에는 가입 테스트가 있습니다." "예? 모집 글에는 그런 내용이 없었..." 당황해하는 차해인의 말을 진우가 가로챘다. "만들어진 지 얼마 되지 않는 규정이라 우리 부사장이 실수했나 봅니다." 테스트라는 말에 차해인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어떤 시험이죠?" 진우는 내심 놀랐다. '이 여자, 진심인가?' 테스트를 봐야 한다고 하면 자존심 때문에라도 떨어져 나갈 줄 알았다. 그런데 차해인은 반대였다. 오히려 승부욕을 더 불태우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뒤에 숨겨진 열의가 느껴졌다. '걸려 온 싸움은 피하지 않는 타입인가?' 아니면 그냥 오기일까? 어쨌든 이렇게 된 이상 진우도 그냥 해 본 소리라며 물러설 수는 없었다. "제가 지정해 주는 소환수를 이기는 겁니다." 빠직. 그녀의 자존심에 금이 가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 저에 대한 평가가 정말 그 정도밖에 되지 않는 건가요, 성진우 헌터님? 신기한 일이었다. 눈빛을 마주쳤는데 그녀의 목소리가 생생히 전해지는 것 같은 기분. 하지만 차해인은 내색하지 않고 평소처럼 차분히 물었다. "어떤 소환수를 지정해 주실 거죠?" "차 헌터님께는 특별히 가장 강한 놈으로 골라 드리죠." "...좋아요." 그녀는 물러서지 않았다. 아마 그녀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진우의 소환수, 아니 그림자 군단 컬렉션에 어떤 녀석이 새로 추가되었는지. 승부욕이 강한 사람이니만큼 지면 깨끗이 물러나겠지. 진우는 그러한 판단으로 승부를 받아들였다. "좋습니다." "테스트는 언제죠?" "지금." 빨리 길드를 만들어야 하는 진우 입장에서는 차해인에게 낭비할 시간이 없었다. 생각난 김에 바로. 장소는 헌터협회의 체육관. S 급 헌터에게는 협회의 체육관을 마음대로 빌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S 급 헌터가 누리는 여러 가지 특혜들 중 하나였다. "알겠어요." 차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빠른 진행은 그녀 또한 바라고 있던 바였다.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일어났다. '잠깐.' 그때 진우의 뇌리를 번뜩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진우는 회의실을 나가려고 손잡이를 잡은 차해인을 불러 세웠다. "차 헌터님, 잠시만요." "네?" "그리로 갈 필요 없어요." "...?" 차해인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이 되었다. 회의실의 문은 하나. 설마 창문으로 뛰어내리자는 소리는 아닐 테고. 멈춰 선 그녀에게 진우가 가까이 다가갔다. "거기까지 쉽게 갈 방법이 있으니까." "네?" "그렇게 하려면 좀 붙어 있어야 하는데 괜찮죠?" "아..." 차해인은 백윤호에게서 전해 들었던 당시의 상황을 떠올렸다. 한국팀 공대원 모두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져 있던 순간 성진우 헌터가 갑자기 자신의 뒤에서 나타났었다고. '혹시 그걸 보여 주려는 걸까?' 예상했던 것 이상으로 가까워진 진우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녀는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실례." 진우는 그녀를 가볍게 안았다. 개미굴에서는 의식을 잃은 그녀를 안아 들고 돌아다녔는데 이 정도 가벼운 허그쯤이야. 진우는 그렇게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차해인의 얼굴은 금세 새빨갛게 변했다. 하지만 몸부림치거나 뿌리치려고 애쓰지는 않았다. '...좋은 냄새.' 그녀가 얼굴을 붉히는 사이 떨어지지 않도록 그녀를 조심스레 붙잡은 진우가 마음의 준비를 끝냈다. '좋아.' 확인해 보고 싶은 게 있었다. 이보다 더 좋은 기회는 아마도 흔치 않으리라. "어지러울 지도 몰라요." 나도 그랬으니까. 차해인은 그제야 진우의 허리를 끌어안고서 속삭이듯 대답했다. "네." 고개를 정면으로 들어 올린 진우가 속으로 되뇌었다. '그림자 교환.' 스르르. 두 사람은 소리 없이 바닥의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때 마침 이야기가 길어진다 싶어 편의점으로 달려가 다과를 사 온 유진호가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두 분 이거라도 드시면서 말씀들." 유진호와 눈이 마주친 하이오크 병사 하나가 무안한지 뒷머리를 긁적거렸다. "..." 챙그랑! 손에 들려 있던 쟁반이 떨어지며 음료수가 담긴 컵이 와장창 깨졌다. "뭐, 뭐야!" 기겁한 유진호가 눈을 질끈 감았다 뜨자 하이오크 병사는 감쪽같이 사라져 있었다. '방금 분명히...!' 양쪽 눈을 비비고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뒤 다시 주변을 둘러봤지만 마수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내가 요새 너무 쉬지를 못했나?' 헛것을 다 보고. 유진호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을 살펴보다가 바닥을 닦을 걸레를 찾으러 돌아섰다. 그런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발이 저절로 멈추었다. "형님이랑 차해인 헌터님은 어디 가신 거지?" = 134 화 발밑이 꺼지며 그림자 속으로 빨려 들어갈 때, 진우는 거의 동시에 떨어지는 차해인을 보았다. '역시나...' 예상이 맞았다. 몇 번 '그림자 교환' 스킬을 쓰면서 혹시 이렇게 되는 것은 아닐까 생각해 왔었는데 정답이었다. '그림자 교환' 스킬의 정체는 게이트다. 방금 헌터인 차해인이 같이 그림자를 통과한 것으로 증명됐다. '바닥에 생성되는 것이 입구, 좌표로 지정된 곳은 출구.' 물론 좌표의 기준은 그림자 병사의 위치가 된다. 비록 3 시간이라는 제약이 걸려 있긴 해도 스킬로 게이트를 만드는 것이 가능하다니. 진우는 자기도 모르게 꼴깍 침을 삼켰다. 놀람도 잠시. 순식간에 어둠에 잠겼던 시야가 금방 원래대로 돌아왔다. 어느새 두 사람은 협회 체육관 안에 있었다. 전에 이곳에 들렀을 때 급히 협회를 방문해야 할 경우를 대비해 그림자 하나를 심어 뒀었다. 팅! 팅! 팅! 팅! 두 사람의 마력을 감지한 자동 조명 시스템이 차례대로 불을 켜 금세 체육관 내부가 환해졌다. 눈부심을 느낀 차해인이 감고 있었던 눈을 떴다. "어떻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익숙한 공간. 체감으로는 불과 1 초도 흐르지 않은 듯했는데, 눈을 떠보니 주변 광경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거지?' 이런 스킬은 있다는 얘기는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놀란 눈빛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차해인의 시선이 진우에게로 옮겨갔다. "당신..." 묻고 싶은 게 가득 있는 눈치였지만, 그녀는 차마 입술을 떼지 못했다. 첫 번째 이유는 어떻게 물어야 할 지 감을 잡기가 힘들다는 것이었고, 그다음 이유로는 대화를 나누기에 거리가 너무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제 안전하니까." 진우는 그녀의 손목을 가볍게 쥐고는 허리에 둘려 있는 팔을 풀었다. "잡고 있지 않아도 됩니다." 끄떡끄떡. 차해인은 진우가 잡았던 손목을 문지르며 소리 없이 고개만 움직였다. "시작하죠." 진우는 하이오크 그림자 병사가 숨어 있었을 구석에 벗어나 체육관 중앙으로 걸음을 옮겼다. "네." 차해인도 진우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다가 검을 차에 두고 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직업상 필수품이라고 해도 남의 사무실을 방문하는데 검을 들고 갈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차해인이 말했다. "무기를 차에 두고 왔는데." "아, 그 곡괭이요?" "네?" "왜 전에 그 하이오크들이 나왔던 던전에서 들고 있으셨던." 잊고 싶었던 기억이 떠오른 차해인은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아니요, 제 무기는." 차해인은 큭큭거리는 진우를 보고서 겨우 그가 자기를 놀리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 붉어진 차해인의 얼굴에 진우가 손을 내저었다. "농담이에요, 농담." 장난은 여기까지만 하고. '그런데 진짜 어쩐다?' 이번에 불러낼 병사는 아무리 차해인이라고 해도 맨손으로 상대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당연히 병사가 이기기 원하지만, 그녀가 다치길 원하지는 않았다. "괜찮아요." 차해인의 시선이 체육관 내부의 창고 쪽으로 향했다. "창고에 빌릴 수 있는 무기가 있을 테니까." '오호.'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된 진우가 눈을 빛냈다. 차해인은 창고로 가더니 문의 측면에 위치한 잠금장치에 대고 헌터증을 세로로 그었다. 그러자. '삐빅.' 창고의 자동문이 스르르 열렸다. 안에는 쓸 만한 예비용 무기들이 줄지어 나열되어 있었다.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서서 안을 들여다보던 진우가 헌터협회의 준비성에 내심 감탄을 터트렸다. '협회 안에 이런 시설이 있었네.' 헌터들이 낸 그 많은 세금들이 어디 가나 했더니 다 쓰이는 곳이 있었던 것이다. 차해인은 안을 둘러보다 그중에서 자신이 사용하던 것과 가장 길이가 비슷한 검 하나를 들고 나왔다. "전 준비됐어요." "그걸로 되겠어요? 쓰던 검이 아니라 손에 잘 안 맞을 텐데." 차해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무기는 어떤 거라도 상관없어요. 마수들이 헌터의 무기를 따져 가며 싸워 주는 것이 아니니까." 지당한 말씀. 같은 생각을 가진 진우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았다. 딱 부러지는 거 하나는 마음에 드는 여자였다. '이제 병사를 부를 차례인가.' 진우는 차해인을 돌아보았다. 준비됐다는 말이 빈말이 아님을 증명이라도 하려는 것처럼, 그녀에게서 날선 기운이 흘러나왔다. 저런 여자를 상대로 어중간한 병사를 불러냈다가는 금방 검에 찢겨나가고 말 터였다. 따라서. 진우는 자신이 꺼낼 수 있는 최고의 카드를 꺼냈다. '나와라.' 진우의 그림자에서 떨어져나간 검은 그림자 하나가 몇 발짝 옆에서 움직임을 멈추더니 그 위로 검은 기사가 스르르 올라왔다. 칠흑같이 검은 갑옷과 투구. 투구의 끝 부분에 달려 있는, 허리까지 내려오는 빨간 깃. 그림자 군단에서 가장 검을 잘 쓰는 그림자 병사, '이그리트'였다. '차 헌터한테는 가장 강한 놈을 불러 준다고 했지만...' 그렇다고 베르를 불러내는 건 너무 지나치다고 생각했다. 베르는 그림자 병사가 되기 전 한국팀 멤버들을 전부 끔찍한 공포로 몰아넣었던 존재였다. 심지어 차해인은 녀석에게 공격당해 사경을 헤매기도 했다. 베르와 마주쳤을 때, 그녀가 받을 정신적 충격을 고려하면 섣불리 개미들의 왕을 불러낼 수는 없었다. 어금니는 체육관을 태워 버릴 것 같으니까 제외. 그래서 진우는 이그리트를 택했다. '역시 너밖에 없구나.' 이그리트의 늠름한 어깨를 보고 있었더니,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할 수 있었다. 하지만. "성진우 씨." 진우가 차해인을 돌아보았다. "승패의 조건은 어떻게 되나요?" 듣는 이의 심장까지 얼려 버릴 것처럼 서슬이 퍼런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확신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진우가 고민하다 말했다. "제 소환수가 파괴되거나 차 헌터님이 항복하실 때까지 하는 걸로 하죠." 끄떡. 차해인이 고개를 움직였다. 그리고 창고에서 꺼내 온 검을 뽑아 들었다. 어디에서나 흔히 구할 수 있는 평범한 마력검을 들고 있을 뿐인데도 불구하고 박력이 대단했다. '확실히 강해.' 진우는 느낄 수 있었다. 진심을 다하기로 작정한 차해인의 기세는 S 급 헌터들 중에서도 최상급의 실력을 지닌 여자다웠다. 이그리트도 검을 빼 들었다. 양손에 하나씩 장검 두 개를 손에 든 이그리트. 이대로는 이그리트가 그녀에게 무너질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진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데 그때. '가만... 무기는 어떤 거라도 상관없다고 했었지?' 진우는 차해인이 방금 했던 말을 떠올리고는 미소 지으며 부탁했다. "잠깐 돌아서 주실래요?" ".....?" 차해인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진우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돌아섰다. 그 틈을 타. 진우는 창고에서 '악마왕의 장검'을 꺼내 이그리트의 손에 들려주었다. '이걸로 해라.' 자신의 무기가 어떤 것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말은 반대로 해석하면 적의 무기가 어떤 것이든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 주군에게 직접 검을 하사받은 이그리트가 감격한 나머지 무릎을 꿇으려고 했지만 진우가 급히 만류했다. '그렇게 일일이 격식 차릴 필요 없다니까.' 아이언 녀석이 이그리트의 반만 닮았으면. 어쨌든. 준비가 끝난 진우가 다시 차해인을 돌려세웠다. "됐어요." 돌아선 차해인은 방금 전까지 보지 못했던 푸른 전류로 번쩍이는 검을 든 이그리트를 볼 수 있었다. "..." "시작해도 되겠습니까?" 진우는 시치미를 떼고서 테스트 시작 의사를 알렸다. "...네." 차해인도 승낙했다. "시작." 진우의 신호와 함께 이그리트가 '악마왕의 장검'을 휘둘러 패시브 효과로 선공을 가했다. 번쩍! 한 줄기 섬광이 일자로 차해인에게 날아갔다. 잠깐 흠칫했던 차해인이 날쌘 고양이처럼 유연하게 상체를 뒤로 꺾어 번개를 피했다. 콰지직! 번개에 맞은 체육관의 벽면이 까맣게 그슬렸다. 찌릿. 몸을 바로 세운 차해인의 따가운 시선이 진우를 향했으나, 진우는 시선을 외면한 채 먼 곳을 응시했다. '...' 차해인은 말없이 양손으로 검을 고쳐 쥐었다. 바로 그때. 정면에서 그녀를 쓰러뜨리라는 명을 받은 이그리트가 무서운 속도로 쇄도해 들어왔다. 그러나 그녀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이그리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 본관 건물의 최상층, 협회장실. 이곳에 앉아 있으면 협회 건물들은 물론이거니와 주변 경관까지 훤히 내려다보였다. '음?' 자신에게 올라온 보고서들을 읽어 내려가던 고건희 협회장의 시선이 창가로 향했다. 아무도 없을 체육관에서 방금 불이 커졌다. 고건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수화기를 들어 수행원을 찾았다. -네, 협회장님. 수행원의 빠른 대답이 돌아왔다. "오늘 누가 체육관을 빌리기로 예약했었나?" -확인해 본 결과 예약은 없었습니다. "그래?" 잠시 수화기를 막고서 체육관을 바라보며 생각을 정리하던 고건희가 나직이 말했다. "체육관 내부 CCTV 화면을 내 방으로 연결해 주겠나?" -알겠습니다, 협회장님. 곧 화면이 연결되고, 협회장실의 한쪽 벽면 전체를 차지한 대형 TV 에 성진우 헌터와 차해인 헌터가 서로를 안고 있는 모습이 나왔다. "크험." 놀란 고건희가 헛기침을 터트렸다. 몇 번을 다시 봐도 성진우 헌터와 차해인 헌터가 맞았다. 고건희는 고개를 갸웃했다. '두 사람이 그런 관계였던 건가?' 하긴. 헬기 안에서 눈을 뜬 차해인 헌터가 가장 먼저 찾았던 사람도 다름 아닌 성진우 헌터였다. '이거 내가 눈치가 없었구만.' 고건희는 화면 속의 두 사람을 보며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다 S 급이 되자마자 정보 보호 요청을 했을 정도로 사람들 눈에 띄기 싫어하는 헌터들. 차해인 쪽도 마찬가지지만 성진우 헌터는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는 지경이 되어 버렸다. 그런 두 사람이 만나 오붓한 시간을 보내려면 개관 시간이 지난 협회의 체육관 같은 장소밖에 없으리라. 요즘 젊은이들답지 않게 체육관에서 데이트라니. 이 얼마나 건전한 만남인가? 고건희는 흐뭇한 미소를 유지한 채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젊음이란 좋은 게지.' 고건희는 아까 내려놓았던 수화기를 한 번 더 들었다. "미안하지만 체육관 CCTV 를 전부 꺼줄 수 있겠나?" -예? 하지만... "오늘은 점검이 있었다고 기록해두게." -알겠습니다, 협회장님. 고건희가 전화를 끊자마자 CCTV 와 연결되어 있던 협회장실의 대형 화면도 꺼졌다. 잠깐 체육관 쪽을 바라보던 고건희는 피식 웃으며 중지됐던 서류 검토를 다시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쿠구궁.' 컵에 담긴 물의 표면이 흔들리며 체육관 쪽에서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허허." 고건희는 아예 체육관을 돌아보지도 않고서 흐뭇한 미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역시 젊음이 좋다니까.' *** '이런...' 진우는 옆구리를 짚었다. 아무래도 그동안 차해인의 실력을 과소평가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악마왕의 장검'으로 힘을 실어 줬지만 이그리트는 그녀의 실력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이그리트의 왼팔이 잘려 나가자마자 진우는 대결을 중지시켰다. "그만!" 비록 재생이 가능하다고 해도 병사들이 파괴되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딱 질색이었다. "후-" 차해인이 거친 호흡을 가다듬기 위해 숨을 크게 내쉬었다. 그래도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는지 차해인의 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있었다.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길고 하얀 손가락이 훔쳐 냈다. 안타까운 표정을 하고 있던 진우가 깔끔하게 패배를 인정하고서 이그리트를 거두어들였다. "졌습니다." 스르륵. 이그리트가 그림자로 돌아갔다. 하지만 차해인은 여전히 손에서 검을 놓지 않은 채 말했다. "아니요, 이건 무효로 해 주세요." "...?" 뜬금없이 무효라니,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소리일까? 차해인이 말을 이었다. "가장 강한 소환수를 지정해 준다고 하셨죠?" 진우와 거리를 좁혀 오던 차해인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멈추었다. "정말로 방금 나온 검은 기사가 가장 강한 소환수가 맞나요?" 이건 묻는 게 아니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을 상대에게 확인받겠다는 말투.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차해인은 기다렸다는 듯 곧바로 대답했다. "가장 강한 소환수를 불러 주세요. 처음부터 그리하기로 했었으니." "다칠 지도 모릅니다." "괜찮아요. 꼭 다시 한 번 싸워 보고 싶었으니까." 진우의 눈이 커졌다. "알고 있었어요?" 끄떡끄떡. "영상을 봤으니까요." 차해인은 진우가 나오는 레이드 영상을 몇 번이나 돌려보았다. 거기 나오는 거대한 괴물. 입에서 불기둥을 내뿜는 괴물은 얼마 전에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 A 급 던전의 보스였던 하이오크 주술사였죠, 그 소환수는?" 그렇다면 분명 이번에 그가 처치했던 괴물 개미도 그의 병사가 되어 있으리라. 차해인의 예상은 맞았다. 처음부터 그녀는 괴물 개미를 생각하고 테스트에 임했던 것이다. '이렇게 어중간하게는 싫어.' 괴물 개미의 힘을 사용하는 소환수를 이기고 진우에게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고 싶었다. 진우는 잠깐 고심한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 그러자 진우의 뒤편에서 온몸이 검은 증기로 둘러싸인 그림자 병사 하나가 나타났다. 눈앞에 등장한 베르를 보고서 차해인은 본능적으로 뒤로 뛰어 물러났다. 예나 지금이나 엄청나게 흉악한 기운이었다. 진우는 핏기가 가신 그녀의 얼굴을 보고 진심으로 그녀가 걱정돼서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요?" 생전보다 약해져 있다고는 해도 베르는 원래부터가 헌터들을 위한 살인 병기로 태어난 녀석이었다. 차해인은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물고서 묵묵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베르가 진우에게 고개를 숙이고서 물었다. '왕이시여. 이자를 어떻게 해드리면 되겠나이까?' 차해인에게는 베르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지 그녀는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진우도 속으로 얘기했다. '여자가 다치지 않는 선에서 쓰러뜨려라.' '그리하겠나이다.' 한때 개미들의 왕이었던 그림자 병사가 잔뜩 긴장해 있는 여전사를 향해 돌아섰다. 꼴깍. 차해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마주해 있는 상대에게서 소름이 돋을 만큼 무시무시한 마력이 전해졌다. '성진우 씨는 이런 녀석을 상대했던 거야?' 이그리트를 상대로는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그녀가 동요하고 있었다. 주군의 명을 따를 준비가 끝난 베르가 이윽고 괴성을 내질렀다. 키아아악베르의 손끝에서 칼날 같은 손톱이 돋아나기 시작했으나, 뒤에선 진우가 베르를 향해 눈을 시퍼렇게 떴다. '어이, 손톱은 집어넣고.' 기세등등하던 베르는 즉시 손톱을 집어넣었다. 진우가 녀석에게 한 번 더 명령을 되새겨 줬다. '저 여자가 다치면 너도 곱게는 못 지낸다.' '말씀대로 따르겠습니다.' 베르에게서 확답을 받은 진우가 드디어 대결의 시작을 알렸다. "...시작." = 135 화 베르가 먼저 움직였다. 주군의 명령은 하나. '적이 다치지 않게 쓰러뜨려라.' 한때 종(種)의 정점에 올라서 있던 베르는 명령을 완수할 수 있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바로 이것. -압도적인 격차를 각인시켜 전의를 상실케 한다. 팟! 이동과 동시에 차해인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베르는 어느새 그녀의 코앞에 서 있었다. "...!" 차해인은 베르의 속도에 경악을 금치 못하면서도, 동물적인 감각으로 그 짧은 순간 베르를 향해 검을 날렸다. 그리고 이어진 수십 번의 검격. 하지만. 베르는 제자리에서 선 채로 한 발짝도 움직이지 않은 채 모든 공격들을 피해 냈다. 불필요한 동작이 배제된, 정밀한 움직임이었다. 어찌나 빠른지 잔상이 일어날 정도였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격차. '말도 안 돼!' 공격이 빗나갈 때마다 차해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 거리에서 발을 전혀 쓰지 않고도 내 공격을 다 피해낼 수 있다고?' 또 한 번. 목을 노리고 휘두른 검을 상대는 상체를 살짝 젖히는 것만으로 가볍게 흘려 보냈다. 어떤 방향에서 어떻게 변화를 주어도 상대는 어렵지 않게 공격을 피해 냈다. '어떻게...!' 진짜 마수도 아닌, 죽은 마수의 힘을 빌렸을 뿐인 소환수가 이리 강할 수 있는 것일까? 그리고. '이런 소환수를 자유자재로 다루는 성진우 씨는 대체...' 막연한 공포심에 차해인의 움직임이 약간 둔해진 틈을 타, 베르는 쇄도해 오는 검을 손등으로 쳐 냈다. 그러고는 그녀의 얼굴에 아가리를 들이밀었다. 훅 불어오는 죽음의 냄새에 차해인은 경직됐다. '끝이다.' 거대한 턱이 시야를 가득 메운 순간, 그녀는 저도 모르게 침음성을 내뱉을 수밖에 없었다. "아!" 그러나 소환수는 턱을 다물어 머리를 부수는 대신 코앞에서 끔찍한 포효를 내질렀다. "키에에에에에엑!" 마력 실린 포효에 밀려 차해인이 나가떨어졌다. "꺅!" 진우가 눈가를 찡그렸다. 누군가가 일방적으로 당하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건 역시 좋은 취미가 되지 못한다. 하지만. 그녀는 쉽게 포기할 생각은 없는듯 다시 일어서 검을 고쳐 쥐었다. 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생각이지?' 자신이 아는 차해인은 상대와의 격차를 눈으로 확인하고서도 납득하지 못할 정도로 수준 낮은 헌터가 아니었다. '격차를 알면서도 덤벼들 정도로 무모한 사람으로는 더더욱 보이지 않고.' 그렇다면. 혹시 지금 뭔가 노리고 있는 게 있는 걸까? '나쁜 판단이 아니어야 할 텐데.' 베르와 연결되어 있는 진우는 녀석이 얼마나 살의를 억누르고 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반면 차해인은 절대적으로 불리한 입장이면서도 의지가 꺾이지 않고 있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둘을 주시하는 진우의 눈빛이 진중해졌다. '...?' 베르는 차해인의 판단을 이해할 수 없었다. 압도적인 기량의 차이를 몇 번이나 보여 주었다. 그런데 어째서 적은 도전을 멈추지 않는가? 먹이사슬의 가장 위에 군림했었던 개미들의 왕은 한낱 먹잇감에 불과한 인간 암컷의 만용에 슬슬 불쾌감을 느끼기 시작했다. 지배자로서의 기억이 그 분노의 원천이었다. '감히...' 베르는 마음을 먹자마자 순식간에 차해인 앞에 도달했다. 그리고 얼굴을 내밀어 나란히 시선을 마주했다. 숨이 붙어 있는 생명체라면 눈빛만 마주해도 서로가 포식자인지, 피식자인지 알아볼 수 있다. 본능의 경고. 적의 본능을 일깨워 전의를 상실시키려는 베르의 계획이었지만, 그가 생각했던 것만큼의 효과는 없었다. 진우가 예상하고 있는 것처럼 차해인에게는 아직 마지막 카드 한 장이 남아 있었다. 스킬 '검무'. 차해인이 가장 자신 있게 쓸 수 있는 스킬. 그녀의 움직임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빨라지며 검이 화려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팟! 팟! 팟! 하지만... 한순간의 막힘도 없이 유려하게 이어지는 공격들을 전부 다 손톱 끝으로 가뿐하게 막아 내던 베르가 결국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장난은 그만.' 베르는 날아오는 칼날을 맨손으로 움켜쥐고는 그대로 부숴 버렸다. 콰직! 반 토막 난 검. 그러나 낙담해야 할 순간에 차해인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기회는 한 번뿐!' 그녀는 가지고 있던 마력을 전부 다 검에 쏟아부었다. 스킬 '빛의 검'. 소모하는 마력이 워낙 커서 비장의 한 수로 밖에 쓸 수 없는 기술을 그녀는 처음으로 공개했다. 찬란히 빛나는 검. 검을 부러뜨린 뒤라 방심하고 있던 베르의 품 안으로 뛰어든 차해인이 검을 찔러 넣었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안 돼!' 물론 진우가 걱정하는 쪽은 베르가 아니었다. 하지만 진우의 염려에도 불구하고 금빛으로 빛나는 검은 베르의 복부를 뚫고 들어갔다. "키에엑-!" 찰나의 시간, 베르의 사고가 빠르게 돌아갔다. '이 여자는 적.' 내가 죽는 건 문제가 안 된다. 하지만 내가 쓰러지고 나면 이 여자의 검은 주군께 향한다. 그때. 그림자 병사들의 잠재의식 속에 위기가 닥치면 최우선으로 발동하게 되어 있는 본능이 꿈틀거리며 깨어났다. -주군을 지켜라! 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리셋되며 진우에게 받은 명령, '적이 다치지 않게 쓰러뜨려라'가 말끔히 지워졌다. 베르는 진우를 지키기 위해 악귀로 변했다. 거대하게 부풀어 오른 몸, 쇳덩이라도 자를 듯 크게 벌어진 턱, 칼날처럼 길게 솟아 나온 손톱! "그만!" 주인의 적을 찢어 버리기 위해 준비를 완료한 베르가 날이 선 열 개의 손톱을 움직였다. 쉬익! 열 개의 칼날이 차해인의 전신을 덮치기 직전. 덥석! 가까스로 늦지 않을 수 있었다. "...그만하라고 했지." 맨손으로 베르의 양쪽 손톱을 움켜쥔 진우가 눈을 부릅떴다. 시선을 마주한 베르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뒤로 폴짝 뛰어 복부에 박힌 검을 빼지도 않은 베르가 바닥에 납죽 엎드리고는 용서를 빌었다. "왕, 왕이시여. 자비를..." 진우도 녀석이 무슨 생각으로 일을 저질렀는지는 알고 있었다. 주군을 지켜야 한다는 사념이 머릿속으로 들려올 정도였으니. '...' 잠깐 베르를 노려보던 진우가 고개를 돌렸다. 털썩. 잠깐이지만 죽음과 직면했던 차해인은 서 있을 힘도 없는지 아예 바닥에 주저앉아 버렸다. "괜찮아요?" 진우가 다가가자 혼자 일어나려고 애쓰다가 포기한 차해인이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끄덕였다. "네." 괜찮기는 무슨. 진우는 그녀를 부축해 일으켜 세워준 뒤 물었다. "왜 이렇게 무리하는 겁니까? 그렇게까지 해서 우리 길드에 들어올 필요는 없잖아요." "..." 겨우 테스트였을 뿐이다. 그것도 명목상의 길드가입 테스트지, 실은 그녀를 거절하기 위한 수단이었다. 그런 대결에서 이런 위험한 스킬까지 써 가며 승리에 집착하다니. 결코 승부욕만으로는 다 설명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혹시..." 진우는 그녀의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물었다. "나한테 관심 있어요?" "네?" 당황한 차해인이 뒤통수를 얻어맞은 것처럼 멍한 표정을 짓자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것도 아닌가?'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정리해 보던 차해인이 이내 대답을 정정했다. "...네. 그런 것 같아요." *** 미 헌터 관리국 본부. 성진우 헌터 영입에 실패했다는 소식을 접한 국장의 심기는 불편했다. 그는 보고서를 받아 보는 대신 부국장을 직접 회의실로 불러냈다. 부국장은 셀너 부인과 함께 왔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국장은 자리에 앉기도 전에 물었다. 셀너 부인이 동반된 영입 제의가 거절당한 것은 헌터 관리국이 창립한 이래로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국장이 어두운 얼굴로 일어서 고개를 숙였다. "면목이 없습니다." "난 사과를 받으려고 자네를 부른 게 아닐세." 국장이 버튼을 누르자 유리로 되어 있던 벽에 칸막이가 쳐지고 출입구가 잠겼다. 안은 완전한 방음 상태가 되었다. 정보가 새어 나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셀너 부인이 관련된 이야기는 전화나 메일을 이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국장은 아직도 한국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전혀 알지 못했다. "어서 어떻게 된 일인지나 말해보게." 부국장이 잠깐 셀너 부인의 눈치를 살폈다. 그녀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부국장이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셀너 부인이 성진우 헌터를 '관찰'하셨습니다." "그래서 어떻게 됐나?" 그녀의 능력을 알고 있는 국장에게는 부인의 '관찰' 결과는 '영입'의 성공여부 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였다. "성진우 헌터는..." 긴장으로 바짝 마른 입술을 혀끝으로 적신 부국장이 말을 이었다. "왕들 중 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뭐?!" 국장은 벌떡 일어났다. 셀너 부인이 '왕'이라고 표현한 헌터들은 그녀가 만난 무수한 강자들 중에서도 단 세 명뿐. 그리고 하나같이 세계를 쥐고 흔드는 자들뿐이었다. 그야말로 헌터의 정점! 거기에 성진우라는 남성이 추가된 것이다. 국장이 부인을 돌아보며 물었다. "그럼 성진우 헌터 역시 국가 권력급 헌터 수준의 힘을 가지고 있단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예?" 국장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부국장은 국장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자신 또한 같은 대답을 듣고, 같은 반응을 했었으니까. 부인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명이... 조금 필요할 것 같군요." 그렇게 그녀는 운을 뗐다. "우선 두 분 다 제가 어떤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는 잘 아시리라 봅니다." 국장과 부국장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국장이 먼저 입을 열었다. "각성자들은 모두 저편의 힘과 연결되어 있는 존재라고 하셨지요." 부인은 각성자들의 눈을 들여다봄으로써 각성자와 저편을 잇고 있는 통로를 느낄 수 있었다. 그런데 간혹 저편에서 보내오는 힘이 너무 강대한 나머지 눈부신 빛이 쏟아져 내려오는 것처럼 보이는 각성자들이 있다고 한다. 그들이 바로 그녀가 말하는 '왕'들이었다. "그럼 성진우 헌터는 뭐가 다르단 말입니까?" "그에게는 통로 같은 게 없었어요." 부인은 또다시 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의 눈을 들여다보자마자 그 안에 있는 어둠이 나를 보았죠. 오, 맙소사. 그는 어둠 그 자체였습니다." 부국장이 반론했다. "하지만 그는 헌터로 활동하며 많은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저는 그가 그렇게 악한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습니다만..." 만약 성진우 헌터가 악독한 이었다면 총을 뽑아 들었던 부하 둘은 그 자리에서 죽었어야 이야기가 맞다. 하지만 성진우 헌터는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 주었다. 부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는 성진우 헌터의 선악을 논하는 게 아닙니다, 부국장님." 부인의 눈빛이 단호했다. "그의 힘이 어디에서 오는가를 말하는 겁니다." 턱밑에 손을 붙인 채 경청하던 국장이 입을 열었다. "그가 강한 헌터라는 것은 틀림이 없겠지요?" 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우 헌터, 그는 어딘가로부터 힘을 빌려오지 않아요. 통로로부터 전해져 오는 게 아닌, 본인 안에 있는 힘을 쓰니 통로에 제한을 받지 않고요. 그 말은 곧..." "힘에 제한이 없다..." 자기도 모르게 중얼거린 부국장은 문득 부르르 떨며 전율했다. 제한없이 뿜어져 나오는 힘이 얼마나 강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둘의 말을 들은 국장은 깊은 고민에 잠겼다. 그러고는 곧 무언가를 결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부인, 수고하셨습니다." 부인을 배웅한 국장은 부국장을 데리고 헌터 관리국의 지하로 내려갔다. "국장님, 어디로 가시는 겁니까?" "지하 9 층." "거긴 기록 보관소 아닙니까?" "문서 자료 말고도 보관하고 있는 것이 있지." 승강기 안에서 점점 밑으로 떨어지는 숫자를 보며, 국장은 말을 이었다. "셀너 부인의 힘을 쓸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써서라도 데려와야겠지." 젊은 나이. 막강한 힘. 셀너 부인이 말한 대로 성진우 헌터가 강대한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이 빛의 힘이건 어둠의 힘이건 관계없었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 든 칼도 타인의 시선으로 보면 평범한 흉기에 지나지 않는다. 국장은 성진우라는 칼을 가지고 싶었다. 9 층에 도착한 국장이 도어락을 풀면서 점점 더 안쪽으로 이동했다. 몇몇 직원들이 지나가며 인사를 보냈지만 국장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최초의 S 급 게이트를 기억하나?" "물론이지요." 미국 서부 일대를 날려 버린 최악의 던전 브레이크를 어찌 잊을 수 있을까? 미국은 막대한 보상을 걸고 전 세계 최강의 헌터들을 불러들였고, S 급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보스급 마수를 잡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살아남은 이는 다섯. 단 한 마리의 마수가 정상급 헌터 수십을 죽여 버린 것이다. 그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미국이라는 국가의 존재가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따라서. 미국은 자국의 운명을 구한 그 다섯에게 국가와 동등한 자격을 부여했고, 이는 국가 권력급이란 말의 시초가 되었다. 국장은 역사상 최악의 참사를 불러일으킨 마수의 이름을 꺼냈다. "드래곤 카미쉬..." 마법계열 헌터들이 말하길 '카미쉬'의 뜻은 꺼지지 않는 불꽃이라 했던가? 마지막 방에 들어가서 금고를 열자, 철저한 보안 속에 감시되고 있는 룬석 하나가 모습을 드러냈다. 부국장이 흠칫 놀랐다. "그럼 설마 이것이...?" "그 설마가 맞네." 국장은 룬석을 덮고 있는 강화 유리 상자에 손을 얹고는 미소를 지었다. "그 카미쉬의 사체에서 나온 룬석이지." 카미쉬 레이드가 끝난 후, 국가권력급 헌터 두 사람이 미국에 자리를 잡았다. 이를 테면 그들은 카미쉬가 가져다 준 선물. 그 뒤로 미국은 참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헌터 관리국'을 세우고 헌터들의 힘을 증진시키는 데 온 힘을 다했다. 그 뒤로 약 8 년. 살아남은 국가 권력급 헌터 중에 마법계열이 없었던 까닭에 카미쉬의 룬석은 이 차가운 헌터 관리국 지하에서 오랜 시간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국장은 유리 안을 들여다보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카미쉬는 또 한 번, 값진 선물을 이 아름다운 나라에 안겨줄 걸세." = 136 화 "행님, 어제 게이트뜬 거 우리한테 허가가 어렵다고 카던데예?" 기사단 길드의 사장, 박종수는 출근하자마자 얼굴이 굳어졌다. "뭐?" 부사장인 정윤태가 황급히 설명을 덧붙였다. "협회에서 측정한 결과가 좀 높게 나왔답니더." "S 급 게이트래?" "그건 아니고예, A 급인데 최대 측정치까지 올라갔다고 하네예." "골 때리게 됐네, 이거." S 급이 나왔다면 깔끔하게 포기할 수 있다. S 급 헌터 하나 없는 기사단이 S 급 게이트를 클리어한다는 건 말이 안 되는 소리니까. 아마 제주도 레이드 때처럼 전국의 S 급 헌터들을 불러 모아야 간신히 클리어할 수 있을 거다. 하지만. 마력 측정 결과가 A 급으로 나오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5 대 길드 중 하나인 기사단이 A 급 게이트 하나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냐는 소리를 듣게 되는 것이다. 안 그래도 줄어든 입지가 이제 아예 찾아보기 힘들어질 수도 있었다. "행님, 우째 하실 겁니꺼?" "글쎄다." "우리가 손 뗀다 카믄 분명히 명성 애들이 올라갈 텐데..." 호남의 명성 길드. 박종수는 '명성'이라는 단어에 눈에 핏대를 세웠다. "우리 앞마당에 뜬 게이트를 마동욱 입에 처넣어 주자고?" "말이 그렇다는 얘기지예, 행님." "내 눈에 흙이 들어가도 그렇게는 안 되겠다." "그라믄 이거 맡으실라고예?" 잔뜩 흥분해 있던 박종수가 입을 콱 다물었다. 당연했다. 자신의 말 한마디에 본인은 물론 공격대원들의 생사가 결정될 수도 있는 거니까. 흥분했다고 아무 말이나 내뱉을 수는 없었다. 박종수는 머리가 아파 왔다. '우리 길드 A 급 헌터들은 다른 대형 길드들과 비교해도 절대 꿇리는 수준이 아니다.' 아니, A 급들의 숫자나 질적인 측면에서는 한국 최고의 길드라 일컬어지는 헌터스와 비견될 수준이었다. 단지 S 급 하나. 그 S 급 한 명이 없다는 이유로 5 대 길드에서 퇴출될 위기에 놓여 있는 곳이 기사단이었다. 같은 이유로 평범한 A 급 게이트 정도는 기사단의 정예들만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A 급 중에서도 마력 측정값이 최상위에 속하는 게이트라면 S 급이 없는 기사단 길드로선 팀원들의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A 급으로 분류된다고 해도 던전의 클리어 난이도 자체는 S 급에 가까우니까. 헌터협회도 그 위험성을 알고 있기에 허가권을 내줄지, 말지 망설이는 중이라고 했다. '...' 박종수의 고민이 깊어지자 정윤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행님, 이거 만약에 레드 게이트라도 터지면 우리 진짜 다 죽는 겁니더." "그렇겠지." 최상위 A 급 게이트만 해도 벅찬데, 갑자기 그게 레드 게이트로 변한다?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었다. 운이 좋다면 절반. 만약 운이 따라 주지 않는다면 본인을 포함해서 공격대 전원이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었다. '냉철하게 생각하면 이 건은 포기한 것이 맞다.' 하지만 A 급 게이트를 포기한 길드라는 소문이 퍼지는 순간, 그날로 기사단의 운명 또한 끝난다고 봐야 했다. S 급 헌터도 없고, A 급 게이트도 처리하지 못하는 길드를 어떤 신인이 찾아오겠는가? "그라믄 행님, 이거 다른 길드랑 연합해서 들어갑시다." 박종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혼자서 안 될 것 같으니 연합하자고 드는 거 뻔히 알고 있을 텐데 굳이 손을 잡으려고 할까?" 기사단이 빠지면 오롯이 다 먹을 수 있는 A 급 게이트를 처리하기 위해서 말이다. 만약 손을 잡겠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였다. '역량 부족을 광고하고 다니는 건 마찬가지니까.' 두 사람의 얼굴에 수십이 깃들었다. 그때. "길드를 끌어들이는 게 좀 그러면 개인은 어때요?" 옆에서 들려오는 여성의 목소리에 두 사람의 고개가 돌아갔다. 기사단의 정예 공격대에서 힐을 담당하고 있는 치유계열 A 급 헌터, 정예림이었다. 힐러의 발언권은 크다. 그 힐러가 A 급 랭크 보유자에 다양한 스킬까지 가지고 있다면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번 일에는 기사단 길드의 운명이 걸려 있는 만큼 박종수는 난감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최상위 A 급 게이트에 들어갈 건데 개인이 무슨 도움이..." 박종수의 말이 끊겼다. "아!" 말을 이어 가다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A 급이 아니라 S 급 마수를 혼자서 쓸어 버리던 그 남자! 흥분을 참지 못한 박종수가 벌떡 일어났다. '성진우 씨가 온다면!' 한국의 S 급 헌터들이 전부 덤벼도 끄떡없었던 마수를 어렵지 않게 쓰러뜨린 그였다. 그가 함께해 준다면 공격대원들의 안전은 100 퍼센트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어디 그뿐일까? 다른 길드의 힘을 빌려 A 급 게이트를 처리해야 했다는 오명도 피할 수 있었다. '오히려 기사단의 이름값이 오르면 올랐지.' 최고의 헌터와 손잡고 레이드를 했다는 것이 길드에 누가 될 리가. 팀원들의 목숨과 기사단의 명예. 두 마리 토끼를 한 번에 다 잡을 수 있는 기막힌 방법이었다. 신이 난 박종수가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 "요즘 성진우 헌터님 뭐하시지?" 처음 말을 꺼냈던 정예림도, 가만히 듣고 있던 정윤태도 고개를 저었다. "얼마 전 도로에 생긴 게이트 하나 처리했다는 소식 말고는 조용하네요." 최근 뉴스에서 본 성진우를 떠올리던 정윤태가 핸드폰을 꺼냈다. "제가 성진우 헌터님 연락처 한번 알아볼까예, 행님?" "됐다, 됐다. 전화는 넣어 놔라." "예?" "이렇게 중요한 일을 전화 한통으로 해결하려고 해서야 되겠냐? 직접 찾아뵙고 말씀을 드려야지." "아하!" 정윤태가 동의하자 박종수는 웃으며 말했다. "한번 올라가 보자." *** 그날 밤. 침대에 누운 차해인은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채 괴로움에 몸부림치고 있었다. '그런 것 같아요라니, 그런 것 같아요라니!' 이래서야 고백해 버린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이불을 발로 마구 차던 그녀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럼...' 성진우 씨의 대답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러면 길드에 들어오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이 있지 않나요? 일단 자리를 모면하기 위해 생각해 보겠다며 급히 일어섰지만, 그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괴로워져서 자꾸 사고가 정지되었다. 화끈. 다시 떠오르고 만 기억에 얼굴이 또 화끈거렸다. 몸집이 커진 소환수의 광기 어린 눈을 마주했을 때, 결코 피할 수 없는 죽음을 예감했었다. 절대적인 공포. 피식자의 운명. 이어 양쪽에서 덮쳐 오는 10 개의 손톱을 보면서 차해인은 눈을 질끈 감았었다. 하지만 그때. 등 뒤에서 따스한 온기가 느껴졌다. 동시에 낯익은 향기가 그녀를 포근하게 감싸 안았다. '아...' 차해인은 슬며시 눈을 뜨고 뒤를 돌아보았다. 소환수의 손톱을 잡고서 버티고 있는 진우가 무서운 눈으로 소환수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 순간 가슴이 심하게 뛰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혹시... 나한테 관심 있어요? 그 상황에서 그렇게 물어 오는 것은 반칙 아닌가? '아니.' 차해인은 상념을 떨치려는 듯 빠르게 고개를 저었다. 설사 그렇게 물었다 해도 솔직하게 답해서는 안 됐다. '이상한 여자라고 생각하게 될 지도 모르니까.' 그런데. 안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입이 저절로 움직이고 말았다. 성진우 헌터와 같이 있으면 마음이 편해져 그런지 평소 보이지 않던 모습을 드러내고 만다. 마치 자신이 아닌 것처럼. '자신이 아닌 것처럼?' 묘하게 낯이 익는 그 단어들. 어디서였지? 분명 어디선가 그 비슷한 표현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그때. 머릿속에서 지워졌던 기억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전해 주세요. 벌떡. 차해인은 상체를 일으켰다. '......!' 분명히 오래된 일이 아닌데도 꿈을 꾸고 일어났을 때처럼, 기억 저편으로 아련하게 사라져 있던 목소리가 떠올랐다. -...한다고 전해 주세요. '나는.' 차해인은 목소리의 내용과 그 주인을 기억해 내려고 애썼다. 짙은 안개에 가려진 것처럼 희미하던 기억의 형태가 점점 제 모습을 찾아갔다. -......조심해야 한다고 전해 주세요. '민병구 헌터와 만났었어.' 의식을 잃고서 끝을 알 수 없는 어둠 속으로 끌려 들어갈 때, 자신의 손목을 낚아챈 이가 바로 민병구 헌터였다. 평온이 깨져 불쾌했던 기분도 잠시. 민병구 헌터의 전신을 둘러싸고 있는 검은 갑옷을 보고 의아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났다. 드러나 있는 것은 얼굴뿐. 그 얼굴마저도 평소와 달리 어딘지 모르게 슬퍼 보였다. 당시의 기억이 천천히 떠오르기 시작하자 차해인은 돌연 등줄기가 서늘해짐을 느꼈다. 민병구 헌터는 울음을 참는 것 같은 얼굴로 말했다. -성진우 헌터에게. '성진우 헌터에게...?' -자신이 가진 힘을 조심해야 한다고 전해 주세요. *** 샤워를 끝낸 진우가 욕실 거울 앞에 섰다. '흠...' 확실히 여기서는 괜찮아 보이기는 한다만. 그런데. 정말로 차해인 같은 미녀가 자신에게 호감이 있어서 길드까지 옮기려고 했을 줄이야. '내가 그 정도인가?' 진우는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누가 일러 주지 않아도 자아도취 같은 것에 빠질 생각은 없었다. 자신 있는 부분은 한 군데뿐. 하루도 빠지지 않고 매일 반복되는 일일 퀘스트 속에서 점점 더 단단해져 가는 근육과, 시스템의 영향인지 어쩐지 전보다 훌쩍 커 버린 키가 전부였다. 결국 몸이 다라는 소리다. 얼굴은...... 글쎄, 조금 강한 눈매를 제외하면 거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수준이 아닐까? 그런데 그때. '가만.' 거울을 보던 진우의 눈빛이 진지하게 변했다. 고개를 앞으로 약간 기울이고, 좀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았다. 거울 속의 진우와 현실의 진우가 한참 동안 서로를 마주 보았다. '엇?' 진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시선이 얼굴 곳곳을 훑었다. 역시나. 달라진 게 맞았다. 크게 티가 나지는 않아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발견할 수 있었던 작은 흉터, 점, 잡티 같은 것들이 어느샌가 말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재활의 의지 버프 효과 때문인가?' 플레이어가 되는 대가로 받았던 버프 효과 중 '손상된 신체의 모든 부위를 복구한다'는 내용이 있었다. 석상에게 잘렸던 다리까지 재생시킬 정도의 버프였다. 자잘한 피부의 손상이 치료되는 것쯤은 이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신기한 것은. '...아무래도 좀 어려진 거 같은데?' 20 대 중반의 나이. 그러나 거울 속의 자신은 그보다 두세 살쯤 어린 20 대 초반으로 보였다. 놀라운 일이었다. 마력이 각성자의 노화도 어느정도는 막아 줄 수 있다던데, 그것과 비슷한 현상인가? '에라이...' 남자 혼자서 거울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는 것도 웃긴다는 생각이 든 진우가 욕실을 빠져나왔다. 마침 여동생도 방을 나오던 참이라 남매가 거실에서 상봉했다. 진우는 씩 웃으며 진아를 불렀다. "동생아." "응?" "네가 보기엔 오빠 어때?" "뭐가?" "남자로서의 매력 같은 거." "허?" 진아가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또 근거 없는 자신감을 얻고 오셨대? 내 눈엔 그냥 집구석 오빠거든?" "오냐, 고맙다." 진우는 피식 웃으면서 진아의 볼을 꼬집었고, 진아 역시 날카로운 하단 차기로 응수했다. 물론 아파서 폴짝 뛰어오른 건 진아 쪽이었다. "오빠가 어떤 사람인지 그새 까먹었냐? 그 머리로 공부는 제대로 할 수 있겠어?" "뭐래?" 입이 뾰족하게 튀어나온 진아가 눈을 흘겼다. "이번 모의고사에서도 내가 전교 1 등이거든?" 진우는 동생의 반응이 재밌어 웃음을 삼켰다. 가족이 있어서 좋은 점은 설령 내가 달라진다고 해도 항상 같은 곳에서 같은 태도로 나를 대해준다는 거다. 진우는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문지르며 진아를 지나쳐 갔다. "수고." "오빠도." 방으로 들어가려던 진우가 뭔가를 떠올리고는 뒤를 돌아보았다. "참. 오빠가 이번에 길드를 하나 만들까 하는데." "오!" 반색한 진아가 눈을 반짝였다. "오빠도 이제 사장님 소리 듣는 거야?" "잘되면." "길드 이름은 뭐야?" "안 그래도 그걸 한 번 물어보려고." "오! 뭔데, 뭔데?" 기대하는 눈빛을 보내 오는 동생에게 진우가 조심스레 물었다. "솔플 길드는 어때?" = 137 화 "허?" 방금 전과 같은 대답이 돌아왔지만 뉘앙스는 많이 달랐다. 아까가 장난이었다면 이번은 분명히 진심이었다. "왜? 이상해?" "...길드 이름을 왜 그렇게 짓는 건데?" "혼자 움직이는 걸 좋아하니까." "오빠답기는 한데, 오빠 길드에 붙이기엔 좀 이상하지 않아?" "왜?" "오빠 능력은 그 검은 옷 병사들을 불러내는 거 아니었어?" "음." "그거 엄밀히 말하자면 혼자 싸우는 게 아니잖아." 듣고 보니 과연.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는 그냥 스킬의 한 종류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 눈에는 그렇게 안 보인다 이거지.'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어쩌면 지금부터 평생을 함께하게 될지도 모르는 길드니까, 길드명에는 자신을 잘 표현할 수 있는 의미를 담고 싶었다. 그래서 '솔플'을 택한 것인데. '그 의미가 잘 와 닿지 않는다면 소용이 없지.' 나를 표현할 수 있는 단어라. 진우가 다시 물었다. "아진 길드는 어때?" "아진?" 어감을 되새겨보던 진아가 웃으며 되물었다. "내 이름 거꾸로 한 거 같아서 정감 가기는 하네. 그런데 무슨 뜻이야?" "나 아(我), 나아갈 진(進)." 오로지 나만이 가능한 일. 그리고 나와 함께 성장할 길드에 붙여 주고픈 이름. "둘이 합쳐서 '내가 나아간다'는 뜻의 아진(拿進)이야." "오-" 진아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을 들려주었다. "그건 좀 괜찮은데?" *** 다음 날. 길드 이름도 정해졌겠다, 진우는 사무실을 찾았다. "길드명 말인데..." 아침부터 나와 있던 유진호가 이야기를 듣고서 활짝 웃었다. "정말 좋습니다, 형님!" 우아하게 떠 있는 백조도 수면 아래에서는 있는 힘껏 발장구를 치고 있다고 했던가? 그만큼 유진호는 필사적이었다. '뭐가 됐든 솔플만 아니면 돼.' 여러 번 상상해 봤다. 누군가에게 '솔플 길드의 부사장 유진호입니다'라고 소개하는 자신을. 고통스러웠다.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가슴 한쪽이 아파지곤 했다. 하지만 어떻게 하늘 같은 형님께서 고민하신 끝에 지은 이름에 토를 달 수 있겠는가? 그렇게 체념하고 받아들이려는 찰나에 기회가 온 것이다. "형님, 길드명은 그걸로 하시죠!" 이번에야말로 진짜 파트너의 동의를 얻은 진우도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그럼 길드명은 정해졌고." 그 한마디에 유진호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진우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남은 건 창립 멤버 한 사람인가." "참, 형님." "응?" "어제 차해인 헌터님은 어떻게 되신 겁니까?" "차 헌터는 안 될 것 같다. 원하던 사람이 아니어서." '컥!' 유진호는 신음을 삼켰다. 형님의 안목이 보통은 아닐 것이라고 예상했었지만 차해인 정도 되는 헌터로도 만족할 수 없으시다니. 차해인 헌터는 S 급에, 젊고, 실적도 뛰어나며, 심지어 미인이기까지 했다. 어디를 봐도 떨어뜨릴 만한 구석이 없었다. 평범한 사람이 보기엔 말이다. 하지만 형님께 어디 평범이란 단어가 가당키나 하던가? 'S 급을 받고 공식적으로 참가한 첫 레이드에서 S 급 마수들을 거의 혼자 쓸어버린 형님이시니까.' 어지간한 S 급 헌터로는 성에 안 차는 것도 당연하다면 당연한 이야기. 그렇다면. 과연 어떤 헌터가 와야 형님을 만족시킬 수 있을까? 아직 이름도 정해지지 않은 길드에 '성진우'라는 이름 석 자만 보고 날아든 수백 명의 지원서가 다 부질없어지는 느낌이었다. '지원자 중에 차해인 헌터보다 나은 사람은 없을 텐데...' 이러다 영원히 길드 문을 열지 못하게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걱정에, 유진호가 조심스레 물었다. "저기, 형님. 그러면 어떤 사람을 구하시는 겁니까?" "헌터자격증 소지자에, 길드 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지만, 그럼에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 "어...?" 유진호는 그 조건에 딱 맞는 사람 한 명을 떠올랐다. '이거 완전...' 그때. 똑똑. 누군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누구십니까?" 유진호가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못 보던 남자 둘이 어색하게 서 있었다. 진우를 찾아 무작정 서울까지 올라온 기사단 길드의 사장 박종수와 부사장 정윤태였다. 박종수가 먼저 진우를 알아보고 환한 미소를 지었다. "어! 계시네요." 진우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누구시죠?" "아, 인사가 늦었습니다." 재빠르게 다가온 박종수가 정중하게 손을 내밀었다. "기사단 길드의 마스터인 박종수라고 합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이더라니. 5 대 길드 마스터 정도 되는 사람이라면 관심이 없어도 얼굴 정도는 알아보기 마련이었다. 뉴스나 TV 에 오죽 나와야지 말이다. 한데. 기사단이라면 분명 부산에 거점을 둔 대형 길드인데. 소개를 들은 진우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기사단 분들이 여기까지는 어떻게 오셨습니까?" "아, 그게 말입니다..." 잠깐 망설이며 정윤태와 눈빛을 교환하던 박종수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이번에 저희가 A 급 게이트 중에서도 좀 큰 놈을 맡게 됐는데..." 그러나 곧 그의 눈빛에서 망설임이 사라졌다. "성진우 헌터님께도 후회 없으실 이야기입니다. 잠시만 저희에게 시간을 좀 내주시겠습니까?" *** [광안리 앞바다에 나타난 초거대 게이트를 보고 두려움에 떨고 있는 시민들...] [헌터협회, 허가권을 두고 고민중.] [기사단 길드, 광안리 게이트 공략을 포기하다?] [제주도의 악몽이 반복되는가?] 박종수는 많은 기사 중 하나를 열어 동영상을 보여 주었다. -저거 봐, 저거. 찍고 있어? -어, 어. -와, 저게 말이 되냐? 게이트가 뭐 저리 커? 일반인이 찍은 것으로 추정되는 영상에는 겁에 질린 목소리들이 가득 담겨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게이트의 크기가 너무 컸다. 10 층 건물을 넘어가는 높이. 시도 때도 없이 생성되는 게이트에 이제는 익숙해진 시민들조차 겁먹을 수밖에 없는 크기였다. "게이트의 크기와 등급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박종수는 영상을 종료하고 설명을 덧붙였다. "무식한 크기답게 마력도 어마어마하게 뿜어져 나오고 있다고 합니다." 흥미로운 소식에 진우가 진지한 눈빛으로 물었다. "S 급으로 나왔너요?" "측정 불가까지는 아니고 바로 그 한 단계 밑이라고 하네요. 여태까지 부산에 나타난 게이트들 중에서는 가장 크답니다." A 급이긴 하지만 S 급에 가깝다는 소리였다. '그 정도면 경험치를 기대해 봐도 되겠는데?' 진우의 심장이 조용히 고동치기 시작하는 것과는 다르게, 박종수는 씁쓸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아까 기사에서도 보셨겠지만 협회가 저희에게 허가권을 안 내주려고 하고 있습니다."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요?" "아시다시피 저희 기사단 길드에는 S 급이 한 명도 없으니까요. 헌터협회 입장에서는 저희를 믿고 맡기기가 어렵다 이거죠." 박종수는 말하다 말고 슬쩍 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혹시 아직 가입하실 길드를 구하고 계신다면 저희와." 진우는 박종수가 말을 맺기도 전에 회의실 책상 위에 놓여 있는 파일 커버를 보여 주었다. 커버 상단에 떡하니 박혀 있는 제목이 눈에 들어왔다. [길드 창립 멤버 지원자 명단] 박종수는 머쓱한지 뒷머리에 손을 얹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하..." 이렇게 언감생심 진우를 기사단으로 끌어들이려 했던 박종수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그렇다면 이제 진짜 본론을 꺼낼 차례였다. "기사단의 정예 헌터들은 헌터스와 비교해도 꿇리지 않습니다. 단지 A 급들을 이끌어 줄 S 급이 없을 뿐이죠." 지금까지는 잘해 왔지만 이번 레이드에서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른다. 그리고 염려하던 그 '무슨 일'이 생겼을 때,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최상급 헌터였다. S 급 존재 하나가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다. 멀리서 찾을 필요도 없다. 바로 앞에. 한국팀 헌터들이 전멸을 앞둔 순간 홀연히 나타나 상황을 반전시킨 장본인이 앉아 있는데. 더욱이 직접 가까이에서 본 성진우 헌터는... 같은 헌터가 봐도 정말 믿음직함 그 자체였다. '싸인... 부탁하면 해 줄까?' 제안을 거절당하면 사인이라도 한 장 받아 오라던 힐러 정예림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아, 아닙니다." 웃으며 손사래 친 박종수가 말을 이어 갔다. "그래서 헌터님이 저희 공격대에 합류해 주시면 저희가 이번 레이드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진우는 팔짱을 끼고서 의자에 등을 기댔다. 진우의 고민이 더 깊어지기 전에, 박종수가 황급히 말했다. "물론 대우는 섭섭하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그러고는 웃으며 가져온 계약서를 꺼냈다. "이번 던전에서 얻는 수익의 20 퍼센트를 드리겠습니다." 대형 길드가 일개 개인에게 던전에서 얻을 수익의 2 할을 바친다. 어지간한 헌터는 꿈도 꿀 수 없는 대우였다. 보통의 대형 길드가 던전을 공략할 때 S 급 헌터가 자기 몫으로 가져가는 수입은 보통 10 프로 내외. 기사단은 진우에게 그 두 배의 금액을 제시했다. 박종수의 말처럼 정말 섭섭하지 않은 보수였다. 하지만 진우의 생각은 달랐다. "50 대 50." 진우가 사인하기 쉽도록 챙겨온 펜을 꺼내던 박종수의 손이 움찔 떨렸다. "예?" "저를 개인이 아니라 길드로 대우해 주시겠다면 협조해 드리죠." 진우는 딱 잘라 말했다. 수입을 반으로 나누자는 발언에 박종수의 동공에 지진이 일어났다. '크윽...!' 하지만 그는 진우처럼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이번 레이드에 기사단 길드의 운명이 달려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라 할 수 있었다. 진우는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그래도 20 퍼센트는 아니지.' 기사단 길드의 딱한 사정을 이용해 뜯어내겠다는 심보는 아니었다. 여러모로 따져 봤을 때 가장 합리적인 배분. 그것이 50 대 50 이었다. '기사단 길드의 정예들이라고 해 봐야 그림자 병사들에 비할까?' 수적으로나, 질적으로나 비교가 안 된다. 거기다 이쪽은 S 급 헌터까지 한 사람 포함되어 있다. 그 대가로 받는 것이 겨우 수입의 20 퍼센트라면 무료 봉사에 가까웠다. 서로의 이익을 위한 정당한 거래에서 굳이 자신의 몫을 상대에게 넘길 필요가 있을까? 진우는 자신의 가치를 낮추고 싶지 않았다. "그럼 40 대 60 으로 하는 것이..." "저는 기사단 길드와 흥정하려고 하는 게 아닙니다." "그럼 50 대 50 말고는 생각할 여지가 없다는 뜻입니까?" 진우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끄응. 박종수는 생각에 잠겼다. '나이도 어려 보이고 인상도 친절해서 일이 쉽게 풀릴 줄 알았는데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네.' 하긴. 그는 대한민국의 S 급 헌터들을 전부 모아도 이길 수 없는 남자였다. 그만한 헌터를 공격대에 합류시키는 거다. 어쩌면 그의 요구는 무리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야...' 박종수는 고개를 저었다. 무리한 요구라니. 만약 상대가 독한 마음을 품었다면 50 대 50 이 아니라 역으로 자신이 8 할을 먹겠다고 우길 수도 있었다. 어쨌거나 아쉬운 건 자신이지 성진우 헌터가 아니니까. 이번 레이드를 포기할 경우 기사단의 손실은 이루 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그에 반해 그가 잃을 건? 아무것도 없다. 애초에 멱살을 잡힌 채로 협상 테이블에 앉아 있는 꼴과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도 반만 가져가겠다면 매우 신사적인 요구가 아닌가? '어디 그뿐일까.' 이 계약이 성사만 되면 성진우라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든든한 보험을 얻게 되는 셈이었다. 문득 어제 정윤태에게서 들었던 말이 떠올랐다. -행님, 이거 만약에 레드 게이트라도 터지면 우리 진짜 다 죽는 겁니더. 하지만 옆에 성진우 헌터가 있다면? 성진우 헌터는 수천에 달하는 S 급 마수들을 상대하면서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던 남자다. 제주도 개미들이 어떤 꼴이 되었는지 직접 보고 오지 않았나? '참, 그랬었지.' 그 개미들을 모두 죽인 사람이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라는 사실이 불현듯 실감 났다. 꼴깍.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고 힘겹게 넘어갔다. 개미들이 학살당한 현장을 눈에 담아 넣고 와서 그 장본인에게 한다는 말이 2 대 8 이라니. '무례한 쪽은 나였구나.' 박종수는 순순히 자신의 실수를 인정했다. 그리고 진우의 너그러운 조건에 마음속으로 깊이 감사했다. 하지만 고마운 건 고마운 거고. 저쪽의 요구만큼 한 발짝 물러서는 것이니만큼 이쪽도 하나를 가져가야 형평성이 맞는다고 볼 수 있는 것. 어찌할까. 긴 고민 끝에 박종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좋습니다, 대신..." "대신?" "보스급 마수는 성진우 헌터님께서 잡아 주실 수 있겠습니까?" = 138 화 박종수는 적어도 이 정도는 받아가야겠다는 각오로 눈에 힘을 주었다. 던전 안에서의 피해는 대부분 보스급 마수 때문에 발생한다. 공격대의 피해를 최소화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박종수는 보스급 마수의 처리를 진우에게 맡기겠다는 강수를 둔 것이다. '그때 개미굴에서 보여 줬던 성진우 헌터의 힘이라면, 혼자서도 보스급 마수를 처리할 수 있겠지.' 박종수는 이마저도 거절당할까봐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입을 꾹 다물고서 진우의 대답을 기다렸다. 정적이 길어질수록 점점 굳어져 가는 박종수의 얼굴과는 반대로. '크흡...' 진우는 자꾸만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를 숨기기 위해 턱밑에 붙이고 있던 손을 코밑까지 끌어올려 입을 가리고 눈살을 찌푸렸다. 최대한 고민하는 것처럼 보이고 싶어서였다. 작전은 성공했다. 박종수는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손에 땀을 쥐고서 진우의 결정에 집중했다. 결국 진우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고는. "알겠습니다." 말을 이었다. "그렇게 하도록 하죠." 박종수는 책상 밑에 가려진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됐어!' 진우에게서 승낙이 떨어지자마자 모든 걱정과 근심이 씻은 듯 내려가는 느낌이었다. 이 문제로 그동안 왜 그렇게 고민했을까? 처음부터 이렇게 했으면 될걸. 부산을 떠날 때부터 계속해서 경직돼 있던 박종수의 얼굴에 처음으로 환한 미소가 피어났다. 이제 남은 일은 협회에 연락해 공략 허가권을 받아 내는 것뿐이었다. 성진우 헌터가 공격대에 합류하기로 결정됐으니 더 이상은 거치적거릴 것이 없었다. "게이트가 발견된 지 시간이 좀 지난 뒤라 늦어도 내일은 레이드를 시작해야 합니다." "그럼 내일 뵙죠." "아." 가져온 짐을 챙기던 박종수가 급히 말했다. "그럴 게 아니라 차라리 저희 차로 같이 내려가시죠." 어차피 내일 다시 만나야 한다면 번거롭게 약속을 잡는 것보다 같이 행동하는 것이 낫지 않을까. 박종수는 그런 의미에서 동행을 권유했다. "최고급 호텔로 모시고 숙박비는 저희가 부담하겠습니다." 하지만 진우는 굳이 장시간 차를 타고 먼 길을 갈 이유가 없었다. 그림자 병사 하나를 박종수의 그림자에 붙여 놓으면 끝이었다. 이러면 길을 헤맬 일도, 시간에 늦을 일도 없다. 진우는 바닥을 기어 이동하는 원형의 그림자 하나를 힐끔 내려다보고는 적당히 둘러댔다. "오늘 저녁에 볼일이 좀 있어서 같이 내려가기는 어렵겠네요." "아하!" "그래도 시간을 못 맞추는 일은 없을 겁니다." 설마 길드 마스터 본인이 지각하지 않는 한은. 그때. 볼일을 본다며 회의실을 빠져나갔던 기사단의 부사장 정윤태가 들어오다 말고 비명을 꽥 질렀다. "해, 행님!" 당황한 박종수도 벌떡 일어나 돌아보았다. "왜? 왜?" "방금 그림자가 움직였습니더! 막 이쪽에서 저쪽으로." 박종수가 잠깐 멈칫하더니 곧바로 서서는 정윤태를 노려보았다. "윤태야... 너 술 마셨냐?" "..." 싸해진 분위기를 감지한 정윤태가 할 말을 잃고서 코밑을 검지로 쓱 훑었다. "술 마셨냐고?" "아까 휴게소에서 입가심으로 맥주 두 캔 했습니더, 행님." "내가 비즈니스 할 때는 조심하라고 했냐 안 했냐?" "죄송합니다, 행님." 박종수에게 꾸벅 머리를 숙인 정윤태가 이어 진우에게도 꾸벅 머리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헌터님." 박종수는 정윤태의 뒷머리를 꾹꾹 누르며 자신도 고개를 숙였다. "얘가 참 괜찮은 녀석인데 술만 먹으면 가끔 헛소리를 합니다. 놀라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가끔 그림자가 움직일 때도 있죠, 뭐." 그렇게 훈훈한 분위기에서 이야기가 끝나려던 찰나. 테이블 위에 올려 두었던 진우의 핸드폰이 울렸다. 드드드드. '누구지?' 발신인을 확인해 봤지만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번호였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오겠습니다." "예. 예." 정중히 양해를 구한 진우가 회의실을 나가자, 한바탕 소란을 일으킨 정윤태와 가슴 졸이던 박종수가 동시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이어 정윤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중얼거렸다. "아, 진짜 그림자가 움직였는데..." "콱 마!" 박종수가 눈을 부라리니 정윤태는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잠깐 정적이 흐른 뒤. 협상의 결과가 궁금했던 정윤태가 먼저 입을 열었다. "행님, 어케 됐습니꺼?" "어떻게 되긴 뭐가 어떻게 돼? 같이 하기로 했지." "잘 됐네예!" 긴장하고 있던 정윤태의 얼굴도 환해졌다. 싱글거리던 그가 다시 물었다. "근데 우리 길드 들어오라고 말은 한번 해 보셨습니꺼?" "말도 마라. 길드 만들 거라고 이걸 딱 내밀더라." 박종수는 진우가 했던 것처럼 [길드 창립 멤버 지원자 명단] 파일 케이스를 들어 보였다. 정윤태가 낄낄 웃었다. "길드들 다 자리 잡은 상황에서 지금 만들어 봤자 뭐가 얼마나 크겠습니꺼? 우리 길드 오면 왕 대접받을 수도 있을 낀데. 편한 길 두고 사서 고생을 하네예." "그러니까 말이야." 아쉬움에 입맛을 다시던 박종수가 파일을 제자리에 갖다 놓으려다, 그만 지원서가 한 장 빠져나오고 말았다. 화들짝 놀라 급히 지원서를 주워들던 그의 얼굴이 경직됐다. "어?" 어디서 많이 본, 낯익은 여자 사진이 지원서에 떡 붙어 있었다. "컥!" 정윤태의 얼굴도 경직됐다. "행님, 이 여자 혹시...?" 보고도 믿지 못하는 정윤태에게 박종수가 고개를 끄덕여 줬다. "어, 맞다. 헌터스 부사장." 말없이 차해인의 사진을 보고 있던 정윤태가 슬쩍 박종수의 눈치를 살폈다. "행님. 우리는 뭐 인수합병 그런 거 안 합니까?" 순간 박종수의 미간이 구겨졌다. "이 자식이 진짜..." *** 사무실을 나온 진우가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익숙한 여성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 진우는 목소리를 확인하고 나서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이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약간의 아쉬움이 들었다. "핸드폰 사셨어요?" -응. 핸드폰 생기자마자 아들 목소리가 듣고 싶어서 전화해 봤지. 혹시 바쁜데 엄마가 방해한 건 아니지? 진우는 기사단 길드의 두 사람이 기다리고 있을 사무실 쪽을 잠깐 돌아봤다가 피식 웃음 지었다. "전혀요." -다행이다. 그런데 엄마가 잘 샀는지 모르겠네. 이런 건 영 익숙하질 않아서. "대리점에 혼자 가셨어요? 진아 데리고 안 가고?" -공부하느라 바쁜 애를 뭐하러. 가끔은 자식들 말고 본인 생각도 좀 하시면 좋을 텐데. 진우는 어머니와 통화를 끝내고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전화를 건 사람이 어머니라는 사실을 알고서 어째서 실망했던 걸까? '뭘 기대했던 건지.' 웃으며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은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눈빛에 생기가 돌았다. 오늘 고마우신 기사단 길드분들이 찾아와 준 덕분에 내일 던전의 공기를 맛볼 수 있게 됐으니 말이다. 'S 급에 가까운 A 급 게이트라.' 몸을 풀어 본 지가 너무 오래된 것처럼 느껴졌다. 제주도 레이드에서 돌아온 지 이제 한 일주일쯤 지났나? 그동안 별거 없는 B 급 레드 게이트에 한 번 들어갔을 뿐 이렇다 할 활동이 없었다. 두근, 두근. 간만에 뛰는 가슴의 고동을 느끼며, 진우는 내일의 레이드를 기대했다. *** 기사단의 최정예 헌터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들은 묘한 기대감과 흥분으로 들떠 있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어쩌면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했을지도 모르는 레이드였다. 특히 레드 게이트로 변하면 전멸을 피할 수 없었을 터. 그런데 그런 레이드에 성진우 헌터가 함께해 준다고 했다. "꺄악!" 아이디어를 꺼냈던 정예림은 성진우의 합류 소식을 듣고서 기쁨의 비명을 질렀다. 다른 헌터들도 각자 표현의 방식과 정도가 다를 뿐, 강력한 안전장치가 생긴 것을 알고 다들 기뻐했다. 여기서 초조해하는 건 한 사람뿐. 발을 동동 구르며 오기로 한 진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는 길드마스터 박종수였다. '아오, 그냥 어제 억지로라도 데려오는 건데.' 박종수는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1 시 5 분 전. 예정대로라면 5 분 후에는 레이드가 시작돼야 한다. 그런데 곧 도착한다는 사람이 아직 코빼기도 보이지 않으니 애간장이 다 타들어 갈 수밖에. 그가 없이는 레이드를 시작할 수조차 없었다. 성진우 헌터가 공격대에 합류했다고 알리자마자 협회는 기다렸다는 듯 바로 허가권을 내주었다. 성진우의 이름값이 힘을 발휘한 것이 틀림없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 없이 레이드를 시작한다? '그건 둘째 치고...' 박종수가 공격대원들의 면면을 둘러보았다. 저 기대감에 찬 눈들을 보라. 협회가 아니라 길드원들의 반대에 부딪혀서 출발하지 못할지도 모른다. '이제 남은 시간은 3 분.' 초조함에 또다시 핸드폰을 꺼내들었던 박종수가 초인적인 인내심으로 다시 집어넣었다. 10 분 전에 곧 도착한다는 연락이 온 사람에게 다시 전화를 거는 건 역시 실례가 아닌가. 하지만 강한 기운을 가진 사람이 다가오는 기척도 없고, 도착했다는 진우의 연락도 오지 않았다. 박종수는 속 대신 태울 것을 찾다가 담배를 물었다. '도대체 어디 계신 겁니까, 성진우 헌터니임...!' 그 시각. 진우는 아파트를 나서고 있었다. 몸을 움직이기 쉬운 가벼운 복장에 운동화. 시계를 보니 11 시 1 분 전. 고개를 들었더니 우중충한 하늘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진아 녀석, 우산 챙겨 갔으려나. 하지만 그런 생각도 잠시. '슬슬 가 볼까.' 후드 티를 뒤집어쓴 진우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일단은 은신. 그리고. '그림자 교환.' 그림자 상태로 있는 병사와 곧바로 위치를 뒤바꿨다. *** 진아가 다니는 고등학교. 미술 선생의 심부름을 맡게 된 세 남학생의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했다. "이거 완전 노동력 착취 아니냐?" "그러게." "왜 자기가 해야 할 일을 우리한테 시키냐고." 남학생들은 툴툴거리면서도 지금은 창고로 쓰이고 있는 제 2 미술실의 자물쇠를 열고 들어갔다. "아, 먼지." "웩." 오랫동안 쓰지 않은 창고답게 뿌옇게 쌓인 먼지들이 남학생들을 반겨 주었다. 주위엔 낡아빠진 미술 도구들이나 버려진 그림, 소묘에 쓰이는 석고상들이 여기저기 놓여 있었다. "석고상 몇 개 가져오라고 했지?" "전부 여섯 조니까 여섯 개겠지." "아... 하나씩 챙겨도 한 번 더 와야 하잖아." "그럼 니가 네 개를 들고 가던가." 남학생들은 석고상을 옮기기 위해 소매를 걷었다. 그런데 가장 구석에 있던 석고상을 집으려던 남학생 하나가 안쪽에 있는 '무언가'를 발견했다. "어?" 심상치 않은 남학생의 목소리에 다른 두 사람이 옆으로 다가왔다. "어, 이거?" 벽면에 떠올라 있는 큼지막한 검은 구멍. 사람 키만 한 게이트였다. 그들 중 가장 덩치가 큰 남학생이 게이트를 보더니 피식 웃었다. "난 또 뭐라고." 남학생은 게이트 표면에 손을 짚더니 말했다. "이렇게 닫혀 있는 게이트는 안전해. 헌터들 말고는 안으로 들어갈 수도, 안에 있는 게 나올 수도 없다고." 그때였다. 파직. 게이트 표면에 금이 생김과 동시에 튀어나온 손이 남학생의 머리를 움켜쥐었다. "어?" 남학생은 몸부림쳤으나 머리를 잡은 손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콰직-! 단단한 열매의 껍질이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며 사방으로 핏줄기가 튀었다. "으, 으아아악!" "준석아!" 피를 뒤집어쓴 남학생들의 비명 소리와 함께. 게이트를 막고 있던 검은 장막이 유리창처럼 산산이 조각나며 안에 있던 마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 139 화 오크들은 타고난 사냥꾼들이다. 비록 지능은 인간에 비해 떨어진다 할지라도, 자신들보다 약한 대상을 추적하고 사냥하는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인간을 훨씬 능가했다. 부서진 문. 세상과 던전 사이를 막아 주던 벽이 사라진 게이트에서 그 사냥꾼들이 쏟아져 나왔다. "크르륵." "큭." 오크들은 거치적거리는 소년들의 시신을 발로 밀어 버리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킁킁." "크륵." 무려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던전 안의 어둠 속에서 숨죽이고 있었던 사냥꾼들이다. 주위 가득한 피와 살의 냄새에 잔뜩 흥분하는 건 당연한 일. 하지만. 자신들은 정찰대. 피가 끓는다고 해서 함부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아직 저 동그란 문 뒤에는 정찰대의 보고를 기다리고 있는 수십의 동족들이 있었다. 각진 벽들에 뚫려 있는 많은 문들과 많은 창문. 정찰대의 통솔을 맡은 오크는 자신들이 서 있는 곳이 성채처럼 복잡하게 만들어져 있는 건물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아챘다. "크르륵." 녀석이 콧구멍을 씰룩거렸다. 두 가지 선택이 있었다. 하나는 이 성을 나가서 사냥감들을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이 성에 있는 인간들을 전부 죽이고 성을 요새화한 후 사냥을 시작하는 것. 어느 쪽이 안정적인지는 생각할 필요조차 없었다. 놈은 부하에게 말했다. "형제들을 불러와라." 그러고는 고개를 들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놈의 귓바퀴가 움찔거리며 위쪽에서 내려오는 소리들을 파악했다. 저 위, 또 저 위의 위. 건물 안에 사냥감들이 가득했다. 머릿속에선 계속 그 사냥감들을 죽이라는 소리가 골이 아플 정도로 울려 대고 있었다. "좋다." 놈의 입가가 벌어지며 누런색의 어금니가 드러났다. "일단 이 안부터 깔끔하게 정리한다." *** 광안리 바닷가에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흐린 날씨도 개의치 않고 모여든 사람들의 관심사는 하나. 모래사장 위에 생성된 거대한 게이트였다. 협조를 요청받은 경찰들과 헌터협회 부산지부 직원들은 바리케이드를 치고 시민들의 접근을 철저히 말했다. 하지만 어떻게 된 것이 몰려드는 발걸음은 전혀 줄지를 알았다. "선배." 앞에서 한창 인파에 치이다 온 신입 여직원이 울상을 하며 사수에게 물었다. "저희는 게이트가 생길 때마다 이런 일을 반복해야 되는 건가요?" 사수도 이번 일이 당황스럽기는 마찬가지였다. 게이트 주변이 이리 복잡했던 적은 처음이었다. "부산에 뜬 게이트 중에서는 역대 최고 크기라니까 어쩔 수 없지." 그러면서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허공에 자리 잡은, 어마어마한 규모의 구멍. 보고 있기만 해도 안으로 빨려 갈 것 같은 기분에 일부러 무시하려 노력하는 중이었다. 물론.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지 않는 한 저게 사람에게 피해를 입힐 일은 없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게이트는 싫었다. 별다른 이유 없이 우주나 심해를 무서워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때문에 현장에 나와 있을 때는 그저 헌터들이 저 불길한 구멍을 어서 처리해 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이번 레이드는 마음 놓이는 구석이 있었다. 마침 신입도 그 이야기가 떠올랐는지 말을 꺼냈다. "아! 선배, 그거 들었어요?" "뭘?" "오늘 서울에서 S 급 헌터도 내려온다면서요?" 그걸 모르는 사람이 있나? 아마 여기 모인 사람들 중 반은 게이트, 나머지 절반은 S 급 헌터를 보러 왔을 텐데. "성진우 헌터?" '예! 그 사람요!" "혹시 아는 사람이야? 뭘 그렇게 좋아해?" "아, 아니요." 신입은 급히 손사래를 치다가 약간 상기된 얼굴로 몸을 배배 꼬았다. "사실 S 급 헌터를 실제로 보는 건 오늘이 처음이라서..." 사수는 한심하다는 얼굴을 했다. "성진우 헌터도 신입이고, 너도 신입인데 두 사람은 왜 이렇게 다를까." "선배!" "그렇게 노닥거릴 기운이 있으면 저쪽으로 가서 좀 도와주기나 하지그래?" "저 아까부터 계속 서 있다가 다리 아파서 잠깐 쉬러 왔는데!" 사수는 혀를 끌끌 찼다. 눈을 흘기는 꼬락서니를 보니 나름 억울하나 본데 영 미덥지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신입의 심정을 아주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긴 나도 살짝 궁금하긴 하네. 요즘 하도 말이 많은 사람이니." "역시 선배도 그렇죠?" "S 급 게이트의 보스를 혼자서 잡은 헌터잖아." 원래 제주도에 터진 S 급 게이트의 보스급 마수는 여왕개미였다. 하지만 그 강렬했던 임팩트 때문에 방송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이 괴물개미를 보스라고 생각했다. 보스급 마수를 잡는다는 것은 곧 게이트를 잡는다는 것. 혼자 S 급 게이트를 폐쇄시킬 수 있는 헌터. 성진우 헌터가 '국가 권력급'들에 근접해 있다는 소리가 괜히 나오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게 이목이 집중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S 급 헌터라니!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요?" 눈을 반짝이는 후임의 모습을 지켜보는 사수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이 녀석, 협회 일이 적성에 맞아서가 아니라 헌터들을 동경해서 입사한 거 아니야?' 선배의 눈빛이야 어떻든 간에 신입은 여전히 눈을 빛내며 들뜬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선배, 선배." "또 왜?" "진짜 강한 헌터들은 눈을 똑바로 쳐다보기도 힘들다던데, 선배는 S 급 헌터도 실제로 본 적 있으시죠?" 사수는 작년, 광주로 출장 갔던 일을 떠올렸다. "...있지." "와-" 감탄하는 후임을 보니 귀찮아하던 사수의 어깨에도 으쓱 힘이 들어갔다. "어땠어요, 선배? 진짜 무서워요?" "야야. 말도 마라. 작년에 협회 일로 명성 길드의 마동욱 헌터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데." "잠깐 지나가겠습니다." "아, 네." 협회 직원 두 사람은 자신들 사이로 지나가려는 한 남자에게 잽싸게 길을 비켜 주고는 다시 붙어 섰다. 그런데. "어?" 사수는 방금 옆을 지나간 후드쓴 남자를 돌아보았다. "왜요, 선배?" "아니. 저 남자 왠지 낯이 익은 거 같아서." "어? 신기하네요? 저도 그랬는데." "협회 스태프인가?" "흐음..." "잠깐, 내가 어디까지 얘기했었지?" "그... 명성의 마동욱 헌터요!" "아, 그래. 내가 마동욱 헌터를 직접 볼 기회가 있었는데, 등치가 얼마나 큰지 어깨 넓이만 해도 이만큼." "와-" 이러니저러니 해도 제법 호흡이 잘 맞는 선후임 두 사람이었다. *** "성진우 헌터니이임!" 박종수는 삼십 후반이라는 나이에 맞지 않게 울먹이는 목소리로 진우에 대한 반가움을 표현했다. 그만큼 이번 레이드에 걸려 있는 것이 많았다. 박종수의 격한 반응 속에서도 진우는 차분히 시간을 확인했다. 휴대폰 액정에 떠 있는 숫자들이 10 시 59 분에서 방금 막 11 시 00 분으로 바뀌었다. '좋아.' 진우가 씩 웃었다. 혼란을 피하기 위해 은신으로 잠깐 멀어진 후 다시 돌아왔음에도 딱 맞게 도착했다. 레이드를 시작하기 전부터 느낌이 좋았다. 그렇게 고개를 들자. '...실제로 보니까 더 크네.' 영상으로 접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커 보이는 게이트가 눈앞에 있었다. 협회가 기사단에게 고지했던 것처럼 게이트 바깥으로 새어 나오는 마력량도 범상치 않았다. '어떤 마수들이 있을까?' 진우는 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외에는... 무식하게 큰 게이트 말고는 대체로 평범한 모습들이었다. 레이드가 있는 곳이면 어디나 그렇듯 일단 두 군데로 나뉜 하급 헌터들이 보였다. '저쪽이 수거팀, 반대는 채굴팀.' 아는 만큼 보인다고 했나? 복장이나 장비로 쉽게 역할을 구분할 수 있었다. 헌터스의 레이드에 참가했던 경험 덕분이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길드 관계자들은 여전히 바쁘게 돌아다니시고.' 뭐가 뭔지 하나도 몰라 미숙한 티가 났던 당시와 달리 지금은 여유가 좀 있었다. 역시 경험은 좋은 선생이다. "어?" "진짜 오셨네!" "성진우 씨?" 박종수의 호출에 모이기 시작한 정예 헌터들이 진우를 알아보고 환한 표정을 지었다. 진우는 짧은 인사를 나누며 그들의 면면을 살폈다. 30 명이나 되는 상급 헌터들. 박종수가 자신했던 대로 A 급, B 급 헌터들의 수와 질만 따지자면 헌터스와 비교해도 나쁘지 않았다. '과연...' 한 지역을 대표할 수 있는 길드답다고 할까. 게다가 모두들 갑옷이나 마법효과가 있는 방어구로 철저히 무장하고 있어 '기사단'이라는 이름이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이만한 길드가 S 급이 없다는 이유로 과소평가를 받는다니. 안타까운 일이었다. 다짜고짜 기사단 길드에 들어올 생각이 없냐고 제의하던 박종수의 심정도 이해가 갔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긴 사이 어느새 헌터들이 주위를 둘러쌌다. "저기..." "흠." 서로 눈치를 살피던 그들이 곧 앞다투어 말을 쏟아 냈다. "헌터님, 제주도 레이드 정말 대단했습니다!" "그 검은 병사들은 어떤 방식으로 소환하시는 겁니까? 아니, 소환수가 맞기는 한가요?" "오늘 레이드는 성진우 씨가 앞장서시는 거죠?" 정신없이 쏟아지는 말들에 진우가 난감해질 무렵. "아, 좀! 좀!" 진우를 데려오자는 아이디어를 가장 먼저 꺼냈던 힐러 정예림이 헌터들을 밀치면서 앞으로 나왔다. "성 헌터님 난처하시게 왜들 이래? 촌놈들도 아니고." 동료들을 흘겨보는 그녀의 눈빛에 매섭게 날이 서 있었다. 상급 힐러는 팀의 생명을 책임지는 어머니 같은 존재. 공격대 멤버들은 어머니에게 꾸지람이라도 당한 것처럼 다들 불만을 속으로 삼키며 입을 다물었다. '훗.' 정예림은 미소를 지었다. 빙글 돌아선 그녀가 진우에게 손을 내밀었다. "기사단 정예 공격대의 메인 힐러 정, 예, 림이라고 합니다." 그러고는 살살 눈웃음을 지으며 말을 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리딩을 맡아 주실 분과 팀의 메인 힐러는 서로 마음이 맞아야겠죠?" 진우는 사심이 가득해 보이는 그녀의 눈빛을 피해 박종수를 바라보았다. "아직 설명 안 하셨어요?" "아, 그게..." 박종수는 민망한지 뒷머리를 만지작거렸다. "일정이 너무 빡빡해서요. 이것저것 수속 밟고 애들 불러 모으느라 바빠서 정신이 없었네요." 겸연쩍게 웃던 그가 헌터들을 둘러보았다. 공격대 멤버들이 한 자리에 다 모여 있으니 번거롭게 여러 번 말해야 할 필요가 없어서 좋긴 했다. "이번 레이드의 리더는 저 박종수가 맡습니다." 리더가 자신이라는 박종수의 말에 팀원들이 술렁거렸다. "또 사장님이?" "성진우 헌터가 있는데..." "그래도 되나?" A 급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탱커 박종수가 팀의 리딩을 맡는 것은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컨디션이 좋지 못해 빠지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레이드는 박종수가 리더를 담당했다. 하지만. 지금은 공격대에 S 급 헌터가 있지 않은가? 강한 헌터가 선두를 맡는다. 레이드의 가장 기본적인 상식 중 하나였다. 박종수는 혼란스러워하는 팀원들을 위해서 빠르게 설명을 이었다. "성진우 헌터님은 이번 레이드에서 후미를 맡아 우리들이 안전할 수 있도록 지켜 주실 겁니다." 뒤에서 공격대를 지켜보며 팀원들의 안전을 책임져 달라. 이건 박종수의 요구였다. 팀의 안전을 위해서이기도 했고, 길드 명성을 위해서이기도 했다. 전투력이 높은 헌터들은 주로 앞쪽에 선다. 뒤쪽에 서는 이들은 기습에 취약한 마법계열이나 치유계열, 혹은 보조계열 헌터들. 현재 신입을 모으기가 까다로워진 기사단의 사정상, 이들의 생존은 길드의 존망이 달린 문제였다. 거기에 성진우 헌터를 둔다면? 공격대 전체가 빠르게 던전을 공략해 나가면서도 후미를 공격당할 걱정이 없어지는 것이다. 아니! 뒤쪽에서 적이 나타나 준다면 오히려 환영할 일이다. 거기 있는 사람이 누군가? 제주도에서 S 급 마수 수천을 상대로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강행동파를 했던 성진우다. 적들이 계속해서 뒤쪽으로만 나타나 준다면, 공격대는 조기 퇴근까지 노려볼 수 있었다. 그게 첫 번째 이유였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두 번째 이유는... 꼴깍. 박종수는 폴리스라인 너머로 몰려와 있는 기자들을 바라보며 마른침을 힘겹게 삼켰다. 많은 사람들이 이번 레이드에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증거였다. 자칫하다간 이렇게 많은 눈들 앞에서 성진우 헌터에게 얹혀 가는 길드로 보이기 쉬운 상황. '뭐... 사실이긴 하지만.' 어쨌든 남들 눈에 그렇게 보일 수는 없었다. 기사단 길드에 있어 이번 레이드의 진정한 목적은 길드의 건재함을 알리는 것이었으니까. 그래서 박종수는 진우에게 간곡히 부탁했다. 그 결과. "성 헌터님과 서로 상의하에 결정된 사항이니까, 불만은 레이드가 끝난 후에 듣겠습니다." 팀원들에게 결과를 통보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 그때. "잠깐만요. 전 정말 이해가 안 가서 그러는데요." A 급 헌터 하나가 앞으로 나왔다. 기사단 길드에 들어온 지 얼마되지 않은 파릇파릇한 신입 헌터였다. "저희가 누군가의 보호를 받아야 할 정도로 약한 헌터들인가요?" 그 한마디에 선배 헌터들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컥...!' '마, 막내야!' 진우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 청년 헌터의 얼굴에는 자신감이 흘러넘쳤다. "안 그렇습니까? 형님, 누님들?" 그도 그럴 것이. 그는 올해의 신입 헌터 중에서 '김철' 다음으로 많은 주목을 받았던 루키 중의 루키였기 때문이다. 그의 자신감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상대가 상대라서 문제지. "성진우 씨가 보시기에도 우리 기사단 길드 정예 멤버들이 그렇게 약해 보이십니까?" '...' 진우는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꾹꾹 눌러 참으며 A 급 신인이 하는 말을 묵묵히 들어 주었다. 물론. 피가 마르는 긴장감은 다른 헌터들의 몫이었다. '아니, 쟤는 무슨 자신감으로...' '설마 저 자식... 부산 촌놈 아니랄까 봐 S 급 헌터 처음 보는 거냐?' '누가 쟤 좀 말려 봐!' '헛소리도 시와 때를 가려가면서 해야 말려 주지...' 어이가 없어 할 말을 잃은 선배들과, 침묵을 유지하는 진우의 모습에, 신인은 점점 더 기세가 등등해져 갔다. "사장님도 그래요!" "나?" 이번엔 또 나냐? 박종수는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기막혀했다. "아무리 S 급 헌터의 이름값이 높다고 해도 그렇지 개인이 길드만큼의 지분을 가져가겠다는 조건을 대뜸 승낙하시면 어떡합니까?" "..." 이쯤 되자 머리가 아파 오기 시작한 박종수가 진우에게 곁눈질을 보냈다. '성 헌터님... 우리 막내 부탁 좀 드리겠습니다.' 진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저는 이런 말도 안 되는 계약 정말 이해할 수가..." 그때. 열변을 토하던 신입의 코앞에 이그리트가 소환됐다. '헉!' 검은 기사가 지닌 강대한 마력에 A 급 신인은 흠칫하며 뒤로 물러났다. 그런데 채 두 걸음도 다 옮기지 못한 그의 등에 뭔가 딱딱한 것이 부딪쳤다. 화들짝 놀란 그가 돌아섰더니, 방금 봤던 기사보다 머리 몇 개 높이만큼 더 큰 기사가 위에서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이언이었다. "헉!" 속으로 삼키려던 신음이 저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이번엔 옆. 어깨를 톡톡 건드리는 느낌에 식은땀이 가득 맺힌 얼굴을 돌렸더니, 거기엔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무언가가 있었다. "으, 으악!" 어금니에게서 확 풍기는 흉악한 마력에 다리 힘이 풀린 신인이 풀썩 주저앉고 말았다. '차마 불쌍해서 베르까지는 못 부르겠네.' 진우가 손짓하자 신인을 둘러싸고 있던 기사급 병사 셋은 금세 다시 그림자로 돌아갔다. 진우는 창백한 얼굴이 된 신인에게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이래도 이해가 안 됩니까?" 진우의 손을 잡고 비틀거리며 일어난 A 급 신인은 빛보다 빠르게 고개를 흔들어 댔다. = 140 화 사소한 해프닝이 끝나고. 진우는 기사단 길드와 함께 게이트 앞으로 이동했다. 들어가기 직전. "잠깐만요." 사장인 박종수와 부사장인 정윤태가 팀원들의 장비나 상태를 마지막으로 점검했다. 입구 앞이라 그런지 떠들썩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정적이 감돌았다. '...' 진우는 언젠가부터 던전에 들어가기 전의 이 긴장감이 마음에 들었다. 머릿속이 차분해지는 느낌. 헌터협회의 소집령이 무서워 전화를 피해 다닐 때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모습이었다. "행님, 아무 문제없습니다." "좋다." 고개를 끄덕인 박종수가 공격대에서 한 발 물러나 있던 진우에게로 걸음을 옮겼다. 진우의 시선도 곧 그를 향했다. "성진우 헌터님." "네." 진우는 팔짱을 풀고서 박종수와 눈을 마주했다. 박종수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짧지만 많은 심경이 담겨 있는 한마디였다. 진우도 같은 말로 대답을 대신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박종수와 정윤태가 선두로 들어가고, 나머지 헌터들이 하나둘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헌터들이 전부 안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서. 마지막으로 남아 있던 진우가 천천히 게이트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남들은 보지 못하는 시스템 메시지가 가장 먼저 진우를 반겨 주었다. '음?' 진우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거인들도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통로가 이어져 있는 던전. 상급 던전을 자주 들어가 보지는 못했으나 운 좋게도 한 번 구경해 본 적이 있었다. 그렇기에 진우가 의아했던 것은 던전의 규모가 아니다. 던전의 공기에서 느껴지는 감각. '뭐지...?' 왜인지 모르게 던전 안이 편안했다. 공기를 타고 전해져 오는 불길함을 느꼈던 적은 수도 없이 많았지만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었다. 하지만. "오우거다!" 진우의 예감과 달리 공격대는 입구에서부터 난관을 만났다. "트윈 헤드 오우거!" "다들 조심해!" 상급 던전의 보스급으로 나오는 마수가 입구 바로 앞에 서서 시뻘건 눈을 번뜩이고 있었다. "그어어어어-!" 트윈 헤드 오우거의 덩치는 평범한 오우거의 두 배 이상. 놈의 괴력은 그 몇 배에 달할지 가늠하기조차 힘들었다. 어중간한 공격대가 던전 안에서 트윈 헤드 오우거와 조우했다면 혼비백산 달아나기 바빴겠지만. "갑니다!" 기사단 정예 헌터들은 달랐다. 방패를 세운 탱커 박종수가 오우거 앞으로 뛰어들어 갔다. 그를 발견한 오우거는 나무를 뿌리째 뽑아내 만든 것 같은 거대한 몽둥이를 머리 위로 들어올렸다. 콰앙! 동굴이 울릴 정도의 충격! 그러나 스킬로 온몸의 근육을 부풀린 박종수는 무릎 한 번 굽히지 않고 트윈 헤드 오우거의 무지막지한 힘을 견뎌 냈다. "행님!" "괜찮다!" "그람 저도 갑니데이." 박종수 옆에 서브 탱커인 정윤태가 붙어 섰다. 오우거의 시선을 자신에게 확실히 고정시키는 데 성공한 박종수가 목에 핏줄을 세웠다. "공격!" 기사단의 반격이 시작되었다. 화살이, 마법이, 검과 창이 트윈헤드 오우거에게 쏟아졌다. 그어어어어! 흥분한 트윈 헤드 오우거가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종수는 놈이 시선을 돌릴 틈을 주지 않았다. 가끔 주위로 튀는 공격들은 정윤태가 잽싸게 달려가 모조리 받아냈다. 쿵! 방금도 오우거의 발길질을 막아 낸 정윤태가 바닥에 긴 줄을 두 개 그으며 주르륵 밀려났다. 덕분에 다른 헌터들의 피해는 전무에 가까웠다. "그어억, 그어어억!" 딜러들의 공격에 오우거의 몸이 조금씩 찢겨져 나가기 시작했다. 환상적인 호흡! 진우는 기사단 길드가 오랫동안 영남의 일인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거어억!" 결국 입에 거품을 문 오우거가 뒤로 넘어갔다. 쿵! 보스급 수준의 마수 하나가 부상자 하나 만들지 못하고 쓰러지는 순간이었다. 깔끔한 승리. "좋아!" 리더 박종수는 두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손님이 있어서일까? 팀도 그렇고, 자신도 그렇고 오늘은 평소보다 더 기합이 들어가 있었다. 성진우 헌터 눈에는 우리들이 어떻게 비춰졌을까? '팀워크에 감동한 나머지 길드에 들어오겠다고 결정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을 텐데.' 흘깃. 곁눈질하던 박종수와 진우의 눈빛이 마주쳤다. 속마음을 들킨 것처럼 머쓱해하던 박종수가 어떡할까 고민하다 결국 미소를 지으며 진우에게 다가갔다. "여기서 잠깐 재정비 좀 하고 가겠습니다." "아, 그러시죠."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나나 체력을 포션으로 채우면 되는 자신과 달리 헌터들은 마력이나 체력에 한계가 있었다. 강한 마수와 싸운 뒤엔 잠깐이라도 쉬어 주는 것이 필수이리라. 어느새 진우의 옆으로 다가온 박종수가 오우거의 사체를 바라보다가 곤란하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큰일이네요." "...?" 진우의 시선이 박종수를 향했다. 박종수는 말했다. "역시나 이번 레이드는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입구 초입부터 트윈 헤드 오우거라니." 그는 턱을 만지작거리다 진우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혹시 트윈 헤드 오우거의 별명을 알고 있으십니까?" 진우가 고개를 젓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무덤지기." 워낙 강력한 마수라 많은 희생자들이 생길 수밖에 없다는 뜻에서 붙여진 별명일까? 하지만 이어진 박종수의 설명은 진우의 예상과 달랐다. "이게..." 그는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어둠에 잠긴 동굴 저편으로부터 음산한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보스로 만날 때는 안 그런데 이 녀석을 입구에서 만나면 꼭 그 던전에서는." 박종수는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을 맺었다. "언데드들이 나오거든요." *** 헌터협회 신고센터에 급한 전화가 한통 걸려왔다. 아직 앳된 소녀의 목소리. -거, 거기 협회죠! 전화를 연결하자마자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흐느끼는 소리에 직원은 심상치 않음을 감지했다. "네, 맞습니다. 말씀하세요." -여기 지금, 흑, 저희 학교인데... 밖에 흐흑, 괴물들이 있어요. "밖? 지금 전화 거신 분은 어디에 있으시죠?" -숨어 있어요. 제가, 친구랑 있었는데, 친구는, 으흑, 저는, 화장실에. 울먹임으로 뚝뚝 끊어지는 목소리에 대화가 힘들었다. 하지만 노련한 직원은 단어들을 연결해서 금방 소녀가 말하고 싶었던 내용을 유추할 수 있었다. 즉각 협회 본부에 메시지가 올라갔다. [학교에 마수 출현, 피해자 한 명 확인, 신고자는 피신 중.] 설마 학교 안에서 던전 브레이크라도 발생한 것일까? 직원은 끔찍한 상상에 몸서리치며 신고자 여학생을 살리기 위해 온 신경을 기울였다. "괴물들의 숫자가 얼마나 됩니까? 놈들이 근처에 있나요?" -몰라요, 몰라요. 아아, 비명 소리가, 흑흑, 너무 많이 들려요. 전, 흑, 죽는 건가요? "진정하고 제 말을 들으세요." 목숨이 위험한 순간에 인간이 얼마나 약해질 수 있는지 직원은 오랜 경험을 통해 잘 알고 있었다. 그럴수록 신고 전화를 받는 당사자는 침착해야 했다. 신고자를 진정시킨 뒤 상황에 맞는 최선의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것이 자신의 역할이니까. "지금 협회 헌터 분들이 그리로 달려가고 있어요. 헌터분들은 절대 학생을 포기하지 않아요. 그러니 끝까지 침착하게 행동하셔야 합니다. 아시겠죠?" -정말요? 그럼, 흑, 저 살 수 있는 거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조금씩 패닉 상태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좋은 징조였다. 여학생을 진정시키는 데 성공했다고 여긴 직원은 그녀가 살아남기 위해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질문을 던졌다. "혹시 그 괴물들... 어떤 마수인지 알고 있나요?" -네, 네. 알아요. 알아요. 봤어요. 티비에서. "어떤 마수죠?" 감각이 둔하고 눈으로만 인간을 쫓는 마수라면 화장실에 숨어 있는 것만으로도 좋은 해결책이 된다. 직원은 학교에 나타난 마수가 그런 종류이기를 기도했다. -그... 몸은 인간인데, 흑, 못생긴 얼굴을 달고 있는. 아, 그리고 피부가 녹색이에요. '설마?' 직원의 눈이 커졌다. "오크... 오크인가요?" -네. 그런 이름이었어요. 오크. '안 돼!' 직원은 자신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서 소리쳤다. "거기서 도망치세요! 당장! 오크는-" 그때. 직원의 간절한 바람에도 불구하고 화장실 문이 부서지는 소리와 함께 처절한 비명이 들려왔다. -꺄아아아아악! *** 기사단의 레이드는 순조로웠다. 너무 순조로워서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순항을 거듭하고 있었다. 또 한 마리. "크아악!" 집채만 한 덩치의 썩은 짐승이 공격대를 피해 달아나다 마법계열 헌터의 속박 마법에 붙잡힌 뒤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같은 일이 반복되자 헌터들도 의아해하기 시작했다. "이상한데?" "이 녀석들, 왜 자꾸 우리를 보고 도망치지?" "뭔가에 쫓기는 거 같지 않아?" 이번 던전에서는 뱀파이어, 리치, 드레드 웜, 붉은 구울 등의 강력한 언데드 마수들이 연이어 나왔다. 언데드들은 쉬운 상대가 아니었다. 죽이기도 힘들지만 죽였다고 방심해서도 안 된다. 언제 회복하거나 되살아나서 다시 공격해 올 지 모르기 때문이었다. 한데. 놈들은 별 힘을 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공격대에게 목숨을 내주었다. '마치 무언가에 겁먹어서 저항할 생각을 못하고 있는 것처럼...' 마수들에 대한 박종수의 평가였다. 이 정도면 굳이 성진우 헌터를 데려올 필요도 없었는데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역시 던전 안의 일은 아무도 모른다니까.' 최상위 A 급 던전을 이렇게 쉽게 공략할 수 있을 줄 누군들 알았을까? '그래도 뭐...' 다치는 사람 없이 깔끔하게 레이드를 끝낼 수 있을 것 같으니 나쁜 일은 아니었다. 불필요한 손해가 발생하긴 했어도 결과적으로는 다행이었다. 반면 진우는 실망하고 있었다. '최상위 A 급 던전이라기에 기대하고 왔건만...' 아직 안쪽에서는 무시무시한 마력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계속해서 이 모양이라면 경험치나 제대로 얻을 수 있을지. 기합이 잔뜩 들어가 있는 기사단 길드의 분투 덕분에 나설 기회조차 없었다. '...' 진우는 속으로 나직하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다 우뚝. 진우의 발걸음이 멈췄다. '어?' 멈춰 선 진우가 뒤를 돌아보자, 힐러 정예림도 따라 멈춰 섰다. "왜요, 성 헌터님? 뒤쪽에 뭐라도 있어요?" 진우는 대답하지 않았다. 질문에 일일이 대답할 겨를이 없을 정도로 심장이 미친 듯이 가슴을 때리기 시작했다. '설마...?' 게이트 바깥쪽을 향해 있는 진우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그제야 정혜림도 뭔가 이상하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성 헌터님?" 그 순간. 진우의 얼굴이 돌처럼 굳어졌다. *** "으아아악!" "꺄아악!" 학교 곳곳에서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살아서 학교를 빠져나간 학생은 불과 절반도 되지 않았다. 나머지 반은 이미 싸늘한 시신이 되었거나, 오크들을 피해 학교 안을 뛰어다녀야 했다. 그러나 무의미한 저항도 잠깐. 아래층에서부터 시작된 오크들의 사냥은 점점 위층으로 올라가며 모든 이들을 철저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으아아악!" 도망가지 못하고 교실에 남아 있던 학생들이 아래층에서 들려오는 비명에 귀를 틀어막았다. 3 학년 교실은 학교의 가장 위층. 진아도 미처 도망가지 못한 3 학년 학생들 사이에 끼어 있었다. 조악하게 막아 놓은 교실 문만이 오크들에게서 자신들을 방어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었다. "아..." "젠장." 남학생들은 벌벌 떠는 손에 의자며, 대걸레며 뭔가 무기가 될 만한 것들을 쥐었다. 그러나 어느 하나 의지가 될 만큼 든든하지는 못했다. 그저 오크들이 교실에 발을 들이기 전에 헌터들이 먼저 도착하기를 바랄 뿐. 쾅-! 찌그러진 문이 나가떨어졌다. "으아아아아악!" "꺄아악!" 학생들의 비명 속에서, 얼마나 많은 인간들을 죽였는지 시뻘겋게 피를 뒤집어쓴 오크 둘이 교실 안으로 들어왔다. "으, 으악!" 문 근처를 지키고 서 있던 남학생들이 대걸레를 내던지고는 달려가 뒷문을 열었다. 그러나. 뒷문에서 기다리고 있었던 오크가 맨 앞에 선 남학생의 이마에 도끼를 꽂아 넣었다. 콰직! 눈동자가 풀린 남학생은 힘없이 무너졌다. "꺄아아아악!" "으악!" 교실의 앞과 뒤. 모든 출구가 오크들에게 막혔다. 남은 학생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창가로 붙어 섰지만 6 층에서 뛰어내리는 것과, 오크들에게 붙잡히는 것의 결과는 크게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오빠! 오빠!' 오크들을 피해 조금이라도 구석으로 달아나려는 학생들 틈바구니에서 진아는 눈을 감고서 거듭 진우를 찾았다. S 급 헌터인 오빠. 부르면 어디선가 달려와 줄 것만 같았다. 그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그르르륵." "그윽?" 학생들을 포위하듯 구석으로 몰던 오크들이 걸음을 멈추었다. 오크들은 자기네들의 말로 대화를 나누었다. "대장, 여기 마력이 느껴지는 인간이 있다." "먼저 죽여라." 평범한 인간과 달리 마력을 다룰 줄 아는 인간은 위협적이다. 우선적으로 처리할 필요가 있었다. 대장의 명을 받은 오크가 학생들을 향해 눈을 두리번거리다 진아를 찾아냈다. "아!" 오크는 진아의 손목을 붙잡고 교실 안쪽으로 끌어냈다. "이 여자인가?" "그렇다, 대장." 부하의 말이 맞았다. 미약하긴 하지만 여자의 어딘가에서 마력이 느껴지고 있었다. 그게 여자의 능력이든, 무기든 간에 가장 먼저 제거해야 할 인간이 이 여자라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었다. 대장이 도끼를 쳐들었다. "아, 아...!" 진아는 자신의 머리 위로 올라간 도끼를 보다 말고 눈을 질끈 감았다. "크륵." 코를 벌렁거리던 대장은 무심한 얼굴로 도끼를 내려찍었다. 쉬이익-! '오빠!' 그런데 그때. 화아악진아의 그림자에서 터져 나온 검은 연기가 순식간에 온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덥석. 정찰조 대장 오크가 눈을 부릅떴다. 자신의 손목이 웬 검은 갑옷을 입은 하이오크의 손에 붙들려 있는 것이 아닌가? "크륵?" 오크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하이오크는 주먹을 내리쳐 놈의 머리통을 수박처럼 부숴 버렸다. 콰직! = 141 화 이 광경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학생들은 입을 쩍 벌렸다. 반 친구가 오크에게 살해당하는 끔찍한 장면에서 눈을 돌리려 했던 순간, 아무런 전조도 없이 검은 갑옷의 병사들이 나타났다. 병사들? 아니, 저들을 병사라 불러도 괜찮은 걸까? 오크들보다 더 오크 같은 생김새에 덩치는 오크들의 배가 넘어 보이는 붉은 피부의 괴물들을? 그 무시무시하던 오크가 검은 갑옷의 오크 앞에 서니 마치 성장기의 소년처럼 보였다. 그도 그럴 수밖에. 진우가 진아의 그림자에 숨겨 놓았던 병사들은 상급 던전에서 보스급 마수 '어금니'의 호위를 담당하고 있던 하이오크, 그중에서도 최고의 전사들이었다. 일개 오크 따위가 감히 하이오크 대전사와 맞선다? 어림도 없는 일. 그 극명한 힘의 차이를 직접 보여 주기라도 하겠다는 듯 하이오크가 주먹을 내려쳤다. 콰직! 단 한 방에 머리가 깨져 버린 오크가 교실 바닥에 처박혔다. 학생들은 경악했다. '헉!' 방금 전까지 목숨을 위협해 오던 끔찍한 괴물이 더 괴물 같은 녀석에게 부서져 버렸다. 한계치를 넘어선 충격과 공포가 학생들의 머릿속을 새하얗게 만들어갔다. 그러나 오직 한 사람. 진아만이 검은 갑옷의 의미를 알고 눈물을 글썽거렸다. '오빠? 오빠가...?' 진아는 자신을 보호하려는 듯 빙 둘러싼 하이오크 셋에게서 오빠의 흔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르르..." 진아 뒤에 선 하이오크 둘은 나서지도 않았다. 정찰조 대장 오크의 머리통을 박살 낸 하이오크가 달아나려는 나머지 오크 둘의 뒷목을 움켜쥐었다. "크르륵!" "그아아악!" 높이 떠오른 오크 둘이 필사적으로 발버둥 쳤다. 그러나 그런 저항도 무색하게 두 오크의 머리가 강하게 충돌했고. 쾅! 곧 이마가 터진 오크 둘의 사체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철푸덕. 철푸덕. 순식간에 교실로 들어왔던 오크 셋이 정리됐다. 그걸로 끝. 하이오크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진아 주위를 지켰다. 몇 초나 흘렀을까? 조금씩 진정되기 시작한 학생들이 떨리는 심장을 억누르며 서로 눈빛을 교환했다. '뭐, 뭐야?' '저 괴물들이 구해준 건가?' '우리를 지켜 주는 거야?' 적어도 저 검은 갑옷의 오크들이 자신들을 해치려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큼은 확실해 보였다. "오빠는? 오빠는 어디 있어?" 진아가 울먹이며 진우를 찾았으나, 하이오크 병사들은 대답이 없었다. "오빠?" 대신 다른 곳으로 가려는 진아를 살짝 저지할 뿐이었다. "...?" 진아가 조심스럽게 쳐다보자 하이오크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이오크들에게는 무엇보다 진아의 안전이 최우선. 주변에 적들이 깔려 있는 이 위험한 건물 안을 함부로 돌아다니게 만들 수는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교실 바깥에서 계단을 오르는 발소리들이 들려왔다. 척, 척, 척. 척, 척, 척. 하이오크 병사들이 등과 허리에 매고 있던 무기를 꺼내 들었다. 학생들은 오크들의 발소리에 숨이 넘어갈 듯 긴장하면서도, 차분히 전투를 준비하는 하이오크 병사들의 모습에 기대감을 갖기 시작했다. 살 수 있다는 희망. 자신을 지켜 줄 강한 아군이 있다는 안도감. 그러나 공포, 불안, 근심, 슬픔 등 여러 감정이 뒤엉켜 눈물을 보이는 아이들도 있었다. "으흑... 흑..." 우는 친구들을 감싸 안으며 학생들은 숨을 죽였다. 발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척, 척, 척. 그렇게 학교 전체에 흩어져 있던 오크들이 동족의 비명을 듣고 3 학년 교실로 모여들었다. *** 신호가 오고 있었다. 동생의 호위를 맡은 하이오크 전사들이 강한 신호를 보내왔다. '진아의 신변에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걸까?' "성 헌터님?" 정예림은 걱정스러운 듯 계속해서 진우를 불렀다. "..." 진우는 입을 굳게 다물고 그녀를 지나쳐 갔다. 그녀는 고개를 갸웃했다. '왜 저러시지?' 방금 전까지 여유가 넘쳤던 성진우 헌터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했다. 표정만 본다면 다른 사람이라고 해도 믿길 정도였다. '잠깐만...' 성진우 헌터는 S 급. 그런 그가 뒤를 돌아보며 예사롭지 않은 반응을 보였다. 그렇다면 혹시 지나왔던 길에서 자신들이 미처 보지 못했던 무언가를 발견한 것이 아닐까? 그녀는 괜히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응?' 누군가가 가까워지는 기척에 뒤를 돌아본 정윤태가 말했다. "행님. 헌터님이 이리 오시는데요?" "뭐?" 박종수는 걸음을 멈추었다. 그가 정지하자 자연스럽게 공격대 전체가 정지했다. '성진우 헌터님이 갑자기 왜?' 무심코 고개를 돌리던 그는 다가오는 진우의 눈빛과 마주하고 가까스로 신음을 삼켰다. '헉!' 진우의 분위기가 방금 전과는 완전 딴판이었다. '뭐지?' 그 짧은 순간, 그는 자신이 진우의 심기를 거스른 일이 있는지 빠르게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걸리는 건 없었다. '그렇다면...' 저 굳어 있는 얼굴과 살벌한 눈빛은 어떻게 설명한단 말인가? 박종수는 새삼 심기가 불편한 상태의 강자를 대하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를 실감하며 침을 꼴깍 삼켰다. 여기는 던전 안. 이 안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 박종수의 태도가 한결 조심스러워졌다. "헌터님, 무슨 불편한 부분이라도 있으십니까?" 마음이 급했던 진우는 거두절미하고 말했다. "급한 일이 생겨서 나가 봐야 할 것 같습니다." '헉!' 박종수는 뜨악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사태였다. 여기까진 쉽게 온 편이었다. 오죽하면 굳이 성진우 헌터를 모셔 올 필요가 있었을까 싶을 정도로 순탄한 레이드였다. 하지만 박종수는 가장 초창기부터 헌터 일을 해 왔던 사람 중 하나. 사고는 항상 마음을 놓고 있을 때 벌어진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어수룩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별일이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조심해야 한다.' 이 앞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가장 강한 전력이 빠질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뼈아팠다. 박종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성 헌터님이 없으면 저희들이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성 헌터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박종수는 최대한 완곡하게 진우를 만류했다. 이 이상 진우를 자극하는 것은 진우 없이 이번 던전을 클리어하는 것보다 훨씬 위험한 행위임을 그는 제대로 인지하고 있었다. 그만큼 진우의 얼굴이 좋지 못했다. '...' 아찔한 높이에서 줄타기하듯 아슬아슬한 심정으로, 박종수는 진우의 눈치를 살폈다. 긴장감에 입술이 바짝바짝 타들어 가는 걸 느낄 때. 진우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렇게 하죠." "네, 네." 박종수는 이야기를 들어 보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바로 저만큼 믿을 수 있는 친구를 불러오겠습니다. 여기서부터는 그 친구가 알아서 할 겁니다." 박종수의 귀가 솔깃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그 성진우 헌터가 실력을 보장하는 헌터가 당장 이리로 달려온다? '누굴까? 최종인? 아니면 차해인?' 그러고 보니 차해인 헌터의 프로필이 담겨 있는 문서를 진우의 사무실에서 본 기억이 났다. '차 헌터님 정도라면 충분하지.' 진우가 떠나는 것을 막을 수 없는 상황에서 조금이지만 박종수의 얼굴이 환해졌다. 누가 오든 명성의 마동욱만 아니라면 환영이었다. "그렇게라도 해 주시면..." 박종수가 눈을 반짝였다. 얼마나 강한 헌터이기에 다른 사람도 아닌 성진우 헌터를 대신할 수 있다는 것일까? 불안감이 줄어든 자리에는 기대감이 들어찼다. 박종수만이 아니었다. 대화를 듣고 있는 헌터들 전원이 기대감과 의구심이 반쯤 섞인 눈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진우는 망설임 없이 그림자 군단에서 가장 강한 병사를 불러냈다. '베르.' 온몸이 검은 증기에 휩싸인 개미들의 왕이 주인의 부름에 응답했다. '왕이시여...' 그림자에서 튀어나온 베르가 공손히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어, 어어!" "어!" 베르가 자신의 흉악한 마력을 조금도 숨기지 않은 까닭에 헌터들이 기겁하며 멀찍이 물러났다. 끔찍한 마력량, 똑같은 생김새. "저거 설마...?" "아니, 어떻게!" 헌터들은 한눈에 베르의 정체를 알아보았다. 제주도의 개미굴에서 S 급 헌터들을 장난감처럼 유린했던 그 괴물 개미가 분명했다. 박종수가 놀라 물었다. "헌, 헌터님, 그거 설마 제주도에서 나타났던 괴물 개미 아닙니까?"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상급 헌터들답게 베르를 알아봐 주니, 따로 구구절절 설명할 필요가 없어 좋았다. 베르의 힘은 전 국민이 다 목격했을 테니까. "지금부터는 이 녀석이 저를 대신할 겁니다." "예?" 박종수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하고 싶은 말쯤은 진우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하나하나 대꾸할 시간이 없었다. 진우는 당황해하는 박종수를 무시한 채 베르에게 지시를 내렸다. '인간들을 지켜 줘라.' '그리하겠습니다.' 짧게 대답한 베르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그렇다면 왕이시여. 인간 외의 존재들은 어떻게...?' 동굴의 저편으로 잠시 시선을 향했던 진우가 다시 베르에게 명령했다. '네 맘대로 해도 좋다.' 그 순간. 베르가 그동안 억눌러 왔던 살육의 욕망이 기쁨으로 변질되어 녀석의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키에에에에에엑-! 몸을 일으키며 쏟아 낸 베르의 포효에 동굴이 쩌렁쩌렁 울렸다. 전율. 헌터들은 자신들을 향한 것도 아닌 포효에 몸이 부르르 떨려왔다. '지, 지금... 저런 놈과 같이 레이드를 하라고?' 박종수의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러나 진우는 헌터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를 도울 개미 마수병들을 스물 정도 풀어주었다. 키에에엑-! 키에엑! 간만에 바깥의 신선한 공기를 마신 마수병들이 울부짖었다. 당연히 녀석들을 바라보는 헌터들은 얼어붙었다. "자, 잠시만요!" 정예림이 돌아서는 진우를 급히 불러 세웠다. "이대로 가시는 거예요? 이 괴물들을 풀어 두고?" "원한다면 소환을 전부 해제하고 가겠습니다. 하지만 그때는..." 진우의 차가운 시선이 닿자, 정예림은 움찔 몸을 떨었다. "기사단 길드가 어떻게 되든지 신경 쓰지 않겠습니다." 진우는 약속했다. 기사단 길드원들이 다치지 않게 보호해 주기로. 그러나 저쪽에서 먼저 이쪽의 호의를 거절한다면 굳이 책임져야 할 필요도 없으리라. "..." 진우의 단호한 한마디에 정예림을 비롯한 기사단 쪽 헌터들이 모두 입을 다물었다. 진우는 등을 돌렸다. 순식간에 진우의 모습이 기사단 공격대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대기시간이 얼마나 남았지?' 공격대와 멀어진 진우가 스킬창을 불러 왔다. [스킬: 그림자 교환 Lv.1] 직업 전용... ...1 시간 2 분 16 초 후 스킬 사용이 가능합니다. '제길...' 진우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림자 교환 스킬을 다시 쓰려면 무려 1 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했다. 아직까지 병사들의 신호는 계속되고 있었다. 예감이 심상치 않았다. '1 시간이나 기다릴 수는 없어.' 일단은 던전을 나가야 한다. 그렇게 마음먹은 진우가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공격대가 한 번 지나온 길에서 이미 해치운 줄 알았던 언데드들이 하나둘 몸을 일으켰다. '...' 진우의 눈이 번들거렸다. 분노. 자신의 앞을 막고 있는 하찮은 마수들에게 격렬한 분노가 치솟았다. 그러자. '...?' 거짓말처럼 언데드 마수들이 일제히 진우를 향해 무릎을 꿇었다. 털썩. 털썩. 하나도 빠짐없이. 되살아난 모든 언데드 마수들이 진우에게 머리를 조아렸다. '왜지?' 진우가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공격대가 상대했던 마수들이 예외없이 겁에 질려 있었던 것도 자신 때문이었나? '내가 언데드를 다룰 수 있는 네크로맨서의 상위 직업이기 때문에?' 의아스런 상황이었지만 깊이 생각할 시간은 없었다. 손에 쥐었던 단검을 다시 창고로 돌려보낸 진우는 전력으로 달려 게이트를 빠져나갔다. 게이트 밖에 있던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였다. 어째서 성진우 헌터 혼자만 게이트를 빠져나왔을까? 다들 그런 궁금증이 담긴 시선으로 진우를 바라보았지만, 진우는 조금도 관심을 두지 않았다. '카이셀!' 검은 기체로 뒤덮인 비룡이 모습을 나타냈다. 키아아아악-! 기사에 몇 번 나갔던 비룡을 알아본 구경꾼들이 진우를 가리키며 소리쳤다. "와아-!" "저거!" "저기 성진우다!" 사람들의 환호성 속에서 가볍게 비룡 위에 올라탄 진우가 카이셀에게 명령을 내렸다. '동생이 있는 곳까지, 최고 속도로!' 앞을 가로막는 게 있다면 그게 뭐든지 간에 박살 내도 좋다. 아무런 제약 없이 마음껏 날갯짓할 수 있게 된 카이셀이 기분 좋은 울음소리를 냈다. 키아악! 곧 카이셀이 큼지막한 날개를 홰치며 날아올랐다. = 142 화 최후의 금제가 풀렸다. 마침내 이동이 자유로워진 '던전의 주인'이 보스방을 떠나 게이트 밖으로 걸어 나왔다. 족장 그록타르. 온몸이 검은 문신으로 뒤덮여 멀쩡한 피부를 찾기 힘들었다. 오크의 문신은 승리의 상징. 여태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싸움에서 얼마나 많은 적들의 숨통을 끊어 왔는지 알 수 있는 증거였다. "그록타르!" "그록타르!" 게이트 앞에서 그를 기다리던 오크들이 그의 이름을 연호하며 고래를 숙였다. 반대로. 그록타르의 고개는 천장을 향했다. '...' 위쪽이 시끄러웠다. 정찰조가 인간들이 사는 성을 점령하겠다며 전사들을 이끌고 나간 뒤로 꽤 시간이 지났다. 한데 어째서 아직도 전투가 끝나지 않았는가? 분노한 족장의 시선에 오크 하나가 땀을 뻘뻘 흘리며 급하게 대답했다. "하이오크 전사들이 인간을 돕고 있습니다." "하이오크?" 하이오크 전사들은 강하다. 평범한 오크 전사들로는 상대가 되지 않을 터. 자신이 나서야 할 차례였다. "숫자는?" "셋입니다." 아무리 그렇다고는 해도 위대한 오크 족의 전사들 수십이 겨우 하이오크 셋을 못 당해서 쩔쩔매고 있다니. "한심한..." 그록타르의 얼굴이 구겨졌다. 족장의 분노에 놀란 오크들이 몸을 파들파들 떨었다. 곧 그록타르의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한발 뒤처져 오고 있었던 대전사들이 하나둘 게이트에서 나왔다. 숨을 헐떡거리는 대전사들의 숫자는 모두 다섯. 자신의 호위들이 전부 게이트를 빠져나온 것을 확인한 그록타르가 상황을 보고한 오크들에게 턱짓했다. "앞장서라." 보고자가 꾸벅 고개를 숙이더니 앞서 나가고, 족장과 그의 호위들이 성큼성큼 뒤따랐다. 그록타르의 눈에 안광이 번뜩였다. '건방진 놈들...' 이제 오크 전사들의 사냥을 방해한 하이오크들에게 대가를 요구할 시간이었다. *** 졸지에 개미들과 남게 된 박종수는 어이가 없었다. "행님..." "가만히 있어 봐. 생각 좀 해 보게." 키에에엑킥킥. 카아악! 스무 마리가 넘는 마수들, 아니 소환수들을 보고 있었더니 지금이라도 그냥 관두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다. 게다가 저거. 다른 개미보다 덩치가 크고 등에 날개까지 달린 저놈. S 급 헌터들을 가지고 놀던 그 괴물 개미가 아닌가? 놈이 지닌 무시무시한 마력은 지금도 살이 떨릴 정도였다. '저런 놈이 우리에게 적의를 보인다고 생각하면...' 새삼스레 제주도에서 괴물 개미와 맞섰던 S 급 헌터들이 대단하다는 생각과 함께. '아니, 잠깐만...' 갑자기 의구심이 들었다. 그 괴물 개미를 지금 소환수로 부리고 있는 성진우 헌터는 대체 정체가 뭐란 말인가? '이 녀석을 혼자 쓰러뜨린 것도 성진우 헌터잖아?' 그렇게 생각했더니 심장이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냐. 너무 멀리 갔다.' 박종수는 상념을 떨치려고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지금 생각해야 하는 건 저 괴물들과 함께 레이드를 계속하느냐 마느냐지, 성진우 헌터가 얼마나 강한지, 혹은 그의 정체가 뭐냐 하는 것이 아니었다. '일단... 레이드를 포기한다고 치자.' 그럼 게이트 밖에서 레이드의 결과를 기다리는 기자들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성진우 헌터가 갑자기 공격대를 이탈해서 더 이상 진행할 수가 없었다? 아니면, 성진우 헌터가 소환해 준 새 친구들이 너무 무서워 레이드를 포기해야만 했다? '그게 무슨 창피냐고...' 어느 쪽이든 두고두고 놀림감이 될 것이 틀림없다. 박종수는 이를 악물었다. '그래, 가자.' 소환수 놈들이 무서워 봤자 거기서 거기지. 어차피 결국 성진우 헌터의 종놈들 아닌가?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끽해야 성 헌터님 소환수들인데 별일이야 있겠어?' 박종수가 자신감에 찬 눈길을 돌리자 시선을 의식한 베르가 다가왔다. '헉...' 방금 전의 자신감은 휘발되어 날아가 버리고, 떨리는 목소리를 쥐어짜낸 박종수가 말했다. "가, 갑시다." 자연스레 존댓말이 튀어나왔다. 하지만 베르는 박종수의 목소리를 듣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가만히 서서 바라보기만 할 뿐. 박종수는 자기 말투가 잘못됐나 싶어 좀 더 공손히 말해 보았다. "가... 가실까요?" 그래도 베르는 전혀 움직일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눈을 마주치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자 강대한 힘이 담긴 시선에 박종수의 정신이 조금씩 아득해져 갔다. 그때, 정윤태가 뒤쪽에서 다가왔다. "행님, 얘들이랑 레이드 계속 진행하시게요?" 안 그래도 예민해져 있던 박종수는 재촉하는 부사장에게 버럭 화를 냈다. "가만히 좀 있어 보라고!" 아니면 그냥 네가 공격대 대장하고 얘네들한테 우리 그만하자고 말해 보던가! 하는 소리가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간신히 내려갔다. 애꿎은 정윤태에게 눈을 부라리던 박종수가 다시 베르를 마주 보았다. 꼴깍.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박종수는 어서 빨리 이 어색함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러다 문득. '혹시 이 녀석 내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어서 움직이지 않는 건가?' 생각이 거기까지 다다른 박종수가 안면근육을 억지로 움직여 미소를 만들었다. 그러고는 던전의 안쪽을 가리켰다. "앞쪽, 앞쪽." 그 순간. 피슉. 소음기를 단 총구에서 총알이 튀어 나가는 듯한 소리가 들리더니, 괴물 개미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 이게 어디로 갔지? 박종수가 어리둥절한 눈으로 주위를 훑어보기도 전에 베르가 돌아왔다. 탓. 베르는 자신의 손에 들린 무언가를 박종수의 얼굴 앞에 내밀었다. '뭐, 뭐지?' 자세히 봤더니 마수의 머리였다. 그것도 최상위 언데드 마수인 데스 나이트의 투구가 머리째로 뽑혀 괴물 개미의 손에서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었다. "으, 으악!" 기겁한 박종수가 엉덩방아를 찧었다. 공격대원들도 화들짝 놀라 박종수 곁으로 모여들었다. 한데 모인 헌터들을 훑어보던 베르가 데스 나이트의 머리를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는 개미들에게 소리쳤다. "키에에에엑!" 그러자 개미 군단이 일사불란하게 전진하기 시작했다. '...' 잠시 박종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베르도 천천히 몸을 틀어 개미들을 따라갔다. 곧 헌터들이 박종수의 상태를 살폈다. "행님!" "사장님, 괜찮아요?" "괜찮으세요?" 박종수는 얼이 빠진 얼굴로 대답했다. "어, 어. 나는 괜찮다." 몸은 괜찮았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가슴이 아팠다. 마치 소환수에게 희롱을 당한 기분이었다. '설마 진짜 그런 건 아니겠지만...' 소환수에게 그 정도의 지능이 있을 리 없으니까. 어쨌든 여기까지 와서, 이런 굴욕까지 당하고 레이드를 포기할 수는 없는 일. 박종수는 엉덩이를 탈탈 털고 일어섰다. "우리도 갑시다." 헌터들의 얼굴이 굳어졌다. "예?" "쟤들을 따라가자고요?" "어떻게 괴물들과 같이 레이드를 합니까? 저는 못합니다." "저도요." 박종수는 귀찮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여러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는 괴물 개미가 아무렇게나 틱 던져 놓은 데스 나이트의 머리를 찾아 들어 올렸다. "헉!" "저거 데스 나이트 머리 아냐?" "데스 나이트?" 경험 많은 베테랑 헌터들이 데스 나이트의 투구를 알아보고 기함을 토했다. 박종수는 담담히 설명했다. "최상위 마수에서 나오는 마정석 값이 얼마인지는 다들 아시죠?" 꿀꺽. 헌터들이 군침을 삼켰다. "우리는 그냥 쟤들 따라가면서 줍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자 방금 전까지 불만이 가득했던 헌터들의 얼굴이 조금씩 펴지기 시작했다. 예상했던 반응. 박종수는 질문으로 말을 끝맺었다. "이래도 빠지실 분?" 헌터들은 개미 군단보다 더 일사분란하게 움직였다. 벌써 저만치 앞서 나간 헌터들이 박종수를 돌아보며 소리쳤다. "사장님 뭐 하십니까, 뒤에 서서?" "빨리 오십쇼. 뒤처집니다." "행님, 언제까지 거 계실 겁니꺼?" 박종수가 입맛을 다셨다. "허 참... 사람들." 이렇게 잠깐 중지됐었던 기사단의 레이드가 재개되었다. *** 진우의 시선이 아래를 향했다. 사람, 도로, 차, 건물, 강, 나무, 산, 산, 산, 산. 배경은 끊임없이 순식간에 바뀌어 갔다. '빠르다.' 제한을 두지 않은 카이셀의 속도는 그야말로 무시무시한 수준이었다. 자신이 최상급 헌터가 아니라 일반인이었다면 도저히 견딜 수 없는, 엄청난 충격이 몸에 생생히 전달됐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진우는 애가 탔다. 병사들의 신호는 계속되고 있었지만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게다가. '상태창.' [MP : 8,619 / 8,770] 아까부터 마나가 줄어들기 시작했다. 이건 보통 일이 아니다. 하이오크 그림자 병사들이 파괴되고 재생하기를 반복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그림자 병사들을 파괴할 수 있는 수준의 적이 진아를 노리고 있다.' 뿌득. 진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설령 동생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고 해도 그 적이란 녀석은 절대 살려서 보내지 않겠다. 눈에 진득한 살기가 어리었다. '더 빨리.' 키아아-! 진우의 명령에 카이셀이 포효를 내지르며 속도를 더욱 올렸다. *** 하이오크 전사들은 강했다. 하지만 오크 족장 그록타르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호위들을 제쳐 둔 채 혼자 앞으로 나선 그록타르. 하이오크들의 공격을 가볍게 피하던 놈은 허리 뒤에 차고 있던 곡도를 꺼내 들었다. "겨우 이 정도냐!" 교실 안에는 오크들의 시체가 가득했다. 얼추 세어도 50. 50 이나 되는 부하들이 하이오크 셋에게 당했다. "좀 더 나를 즐겁게 해라, 하이오크 전사들아!" 족장의 분노는 자비 없는 칼질로 이어졌다. 그록타르의 곡도가 현란한 움직임을 그리며 하이오크들을 갑옷 째로 썰어 내기 시작했다. "아!" "꺄악!" 비명은 하이오크들이 아니라 그 뒤쪽에 있는 인간들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그록타르의 미간이 구겨졌다. '시끄러운 것들.' 하이오크들 다음은 저들이다. 하이오크 하나의 팔을 베어 조각 내던 그록타르가 싫증이 났는지 빙글 돌아서며 녀석의 목을 쳐 냈다. 스걱! 그러자 하이오크들에게 밀려 교실 바깥으로 도망가 있던 오크들이 환호성을 내질렀다. "그록타르!" "그록타르!" 그때. 그록타르의 눈가가 씰룩였다. 목이 떨어진 하이오크가 검은 연기로 변하더니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주술인가...?' 몇 번을 베어도 마찬가지였다. "크악!" 화가 난 그록타르가 함성을 내질렀다. 하이오크들을 수없이 베고 죽였지만 놈들은 어김없이 본래대로 돌아왔다. '백 번이고 천 번이고 죽이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끝이 없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머릿속의 목소리는 계속해서 인간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반복하고 있었다. 지끈지끈. 목소리가 울려 대서 머리가 아파 올 지경이었다. 그렇다고 하이오크들을 무시하고 인간들을 처치할 수도 없는 일. '...끝내야 한다.' 그록타르가 머리를 굴렸다. 만약 이들이 주술로 만들어진 병사라면 반드시 어딘가에 이 녀석들을 조종하는 누군가가 있으리라. 과거 많은 전투에서 여러 주술을 상대해 본 경험이 있는 그록타르는 이 더러운 주술을 끝낼 방법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저 여자!' 하이오크들 뒤에 멀찍이 떨어져 숨을 죽이고 있는 저 인간 여자! 그녀는 미약하게나마 이 하이오크 놈들과 연결되어 있다. 그록타르의 눈이 빛났다. '너인가?' 놈의 살기가 타깃을 바꾸었다. 순간 그록타르와 눈이 마주치고만 진아가 몸을 파르르 떨었다. 분명 여자는 뭔가를 알고 있다. 그렇게 직감한 그록타르가 뒤를 돌아보며 진아를 가리켰다. "저 여자를 죽여라!"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록타르의 명령대로 뒤에서 싸움을 지켜보고 있던 호위들이 뛰쳐나갔다. 그러자 하이오크들이 눈앞에 있는 그록타르를 무시하고 필사적으로 호위들의 앞을 막으려 했다. '역시.' 짐작은 맞았다. 그록타르는 하이오크들의 시선이 분산된 틈을 타 진아의 앞에 섰다. "너였구나." 그록타르는 곡도를 쥐지 않은 손으로 진아의 목을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아..." 목이 짓눌린 여자는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했다. 그록타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손가락에 조금만 힘을 주어도 그냥 아스라질 것 같은 가느다란 목. 이런 인간이 정말로 전사를 불사로 만드는, 고등의 술법을 완성시켰단 말인가? 확인할 방법은 하나. '죽여 보면 알게 되겠지.' 그록타르가 손에 힘을 주어 막 여자의 목을 부러뜨리려는 순간. 키아아악-! 멀리서 비룡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 143 화 그 순간, 그록타르는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뭐지?' 극도의 긴장감에 느려진 시간 속에서 한계치까지 단련된 전사의 감각이 경고했다. '무시무시한 것'이 온다고. 두근. 심장 박동이 천둥소리처럼 거칠게 고막을 때렸다. 이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으면 죽는다. 칼날처럼 예리하게 다듬어진 전사의 감각은 때론 예지에 가까운 힘을 발휘하고는 한다. 바로 지금처럼! '...!' 여자를 버린 그록타르가 동물적인 움직임으로 순식간에 문 쪽까지 물러났다. 쾅-! 귀를 찢을 듯한 폭음과 함께 유리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갑자기 눈앞에 나타난 족장의 등에 문 근처를 지키던 오크들이 한 발씩 뒷걸음질 쳤다. '...' 말없이 앞을 노려보는 그록타르는 숨소리까지 조심스러웠다. 예사롭지 않은 기운. 여자가 있었던 자리에는 여태 보지 못했던 한 남자가 같이 있었다. 그록타르의 시선이 슬쩍 옆으로 옮겨 갔다. 반대편 구석의 창가. 그쪽은 공성병기에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아예 벽 한쪽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다. '창을 깨고 들어온 건가?' 자신의 동체시력으로도 방금 움직임을 쫓을 수가 없었다. '...' 생각지도 못한 강적의 등장에 그록타르는 침을 꼴깍 삼켰다. 관자놀이 부근에 식은땀 한 방울이 흘러내렸다. 키아아악-! 괴성을 들은 그록타르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이 천장 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또 하나의 강한 적이 먹잇감을 노리는 매처럼 머리 위를 빙글빙글 맴돌고 있었다. '어려운 싸움이 될지도 모르겠군.' 그록타르의 눈빛에서 전에 보기 힘든 긴장감이 묻어 나왔다. 적은 자신과 부하들의 존재를 완전히 무사한 채 여자의 상태를 살피고 있었다. 그록타르가 적에게 말했다. "나는 붉은 칼날 부족의 그록타르!" 자신의 목숨을 앗아 갈 수 있는 상대에게만 허락하는 전사의 인사였다. 자기소개를 끝낸 그록타르가 물었다. "너는 누구냐?" 진우가 고개를 들고 조용히 말했다. "거기서 닥치고 기다리고 있어라." 인간이 오크의 언어를 쓴다? 놀라움도 잠시. 말에 실려 있는 힘의 무게 때문인지, 그록타르를 비롯한 오크들은 감히 움직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 *** "콜록, 콜록." 진우는 연신 기침을 하는 진아의 등을 토닥이면서 다친 곳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보았다. 다행히 눈에 띄는 곳은 없었다. 목에 선명히 나 있는 손자국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진우는 굳은 얼굴로 물었다. "괜찮아?" "오빠!" 기침을 멈춘 진아가 눈물을 글썽이며 와락 안겨들었다. 진우는 놀란 아이를 달래듯 조심히 진아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오빠?' '진아의 오빠라면...' '아!' 학생들은 그제야 눈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를 알게 됐다. S 급 헌터 성진우. 살았다! 학생들은 진우의 얼굴을 확인하고서 왈칵 눈물을 쏟았다. 그전까지 흘렸던 절망과 두려움의 눈물이 아닌, 기쁨과 안도감이 뒤섞인 눈물이었다. "흑흑." "괜찮아. 이제 괜찮아." 진우는 펑펑 우는 동생을 달래면서 기감을 확장시켜 보았다. 이 넓은 학교에서 느껴지는 사람의 기척이라고는 여기 있는 17 명이 다였다. '...' 진우의 굳은 얼굴에 검은 그림자가 드리웠다. 진우는 자신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진아를 조심스럽게 떼어놓고, 학생들과 같은 수의 그림자 병사들을 불러냈다. "다들 내 소환수들을 따라가." 학생들이 고개를 끄덕이자 병사들은 학생들을 안아 들었다. 진아는 특별히 이그리트에게 맡겼다. "먼저 내려가 있어. 오빠는 여기 정리하고 갈게." 평소 같았으면 오빠가 S 급 헌터, 아니 그 이상의 존재라고 해도 같이 가자고 말렸을 진아였다. 하지만 이번에는 그러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정색하고 있는 진우의 표정이 너무나 무서웠다. 진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진우가 신호하자 학생을 안은 병사들이 차례차례 박살 난 창문을 넘어 아래로 뛰어내렸다. 다 잡은 사냥감들이 도망치는 모습에 오크들이 움찔거렸다. 그러자 진우가 섬뜩한 눈빛으로 돌아보았다. "움직이지 말라고 했다." 거짓말처럼 모든 오크들이 동작을 멈췄다. 감히 따르지 않을 수가 없는 눈빛이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오크 하나가 눈치를 살피며 그록타르에게 조심히 말했다. "족장님..." "쉿." 그록타르도 동의했다. 지금은 저 약해빠진 사냥감들에게 신경을 쓸 때가 아니었다. 눈앞의 사냥꾼. 지금부터는 사냥꾼들끼리 누가 먹고 누가 먹히느냐 하는 싸움을 시작할 때였다. '하지만... 그래도 순순히 보내 줄 수는 없지.' 그록타르가 슬쩍 눈치를 보내자 호위 둘이 소리 없이 움직였다. 모든 학생들이 안전하게 교실을 벗어난 것을 확인한 진우가 돌아섰다. 진우는 학생들이 다칠까봐 교실에서 내보낸 것이 아니다. '이깟 오크들쯤...' 눈 깜짝할 사이에 처리할 자신이 있었다. 다만 지금부터 벌어질 일들을 동생이나 다른 아이들에게 보여주고 싶지가 않았다. 그리고 이제 모든 눈들이 사라졌다. 행동의 제약이 없어진 것이다. '...' 진우의 고개가 문득 교실 밖 계단 쪽을 향했다. 최대한 기척을 죽인 오크 둘이 아래로 내려가고 있었다. 아이들을 쫓아갈 모양이지만... 괜찮다. 이그리트를 같이 보냈고, 위에 카이셀도 떠 있으니. '남은 일은 이것들을 처리하는 것뿐.' 진우가 가볍게 숨을 내쉬었다. 내뱉은 공기에 짙고 무거운 마력이 묻어 나왔다. 그록타르가 다시 물었다. "그대는 누군가? 어째서 우리말을 아는 거지?" 진우는 그록타르의 말을 무시한 채 천천히 녀석을 향해 걸어갔다. 그록타르는 진우에게 대답할 마음이 없다는 사실을 알자마자 긴 어금니를 드러냈다. "가라!" 족장의 명령을 받은 용맹한 오크 전사들이 일제히 진우를 향해 달려들었다. "크르르륵!" "크라락!" 그러자 시간이 멈추었다. 진우는 정지 화면처럼 느리게 움직이는 오크들 사이를 유유히 걸으며 놈들을 하나씩 부서뜨렸다. 무기를 꺼낼 필요도 없다. 사용한 것은 손가락. 진우의 손끝이 스쳐 지나갈 때마다 오크의 머리가, 어깨가, 손목이, 옆구리가, 복부가 터져 나갔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스물이 넘는 오크들을 부수고 난 뒤. 진우는 그록타르 앞에 섰다. 진우의 잔상만을 눈으로 좇는데 그쳤던 그록타르가 떨리는 입술을 움직였다. "무, 무슨...?" 미처 곡도를 휘둘러볼 틈도 없이, 진우의 왼손에 입과 턱을 붙잡히고 만 그록타르가 짧게 신음을 내뱉었다. "컥!" 진우는 그대로 걸어가 놈의 머리를 복도의 벽에 처박았다. 쿵! 텅 빈 복도로 굉음이 퍼져 나갔다. 진우의 시선이 복도 양 끝을 훑었다. 복도에도 학생들의 시신이 가득했다. 차마 보고 있기가 힘든 참상. 하지만 진우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그 모습을 하나하나 눈에 새겨 넣었다. 이제부터 그 죄를 장본인에게 묻기 위해서였다. 진우의 시선이 다시 그록타르에게로 옮겨 갔다. "왜냐?" 목소리는 한없이 차가웠다. "어째서 너희들은 그렇게 인간을 죽이지 못해 안달인 거냐?" 이미 저항할 의지가 꺾여 버린 그록타르는 벌벌 떨며 대답했다. "머릿속에서 계속... 인간들을 죽이라고..." 진우가 의아하다는 눈빛을 했다. '인간을 죽이라고?' 전에도 같은 소리를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인간'이라는 단어를 '헌터'로 해석했었다. 한데. 지금 이 녀석의 말을 들어 보니 그 '인간'이란 단어가 정말 말 그대로 모든 인간을 지칭하는 듯했다. "그럼 나는?" 진우가 다시 물었다. "나를 죽이라는 목소리도 들리나?" 가까워지는 얼굴. 불가피하게 진우의 두눈을 들여다보게 된 그록타르가 무언가를 발견한 듯 고개를 저으며 심하게 몸서리쳤다. "요, 용... 서해... 주십시오." 있을 수 없는 일. 위대한 오크족의 대전사가 아이처럼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겁에 질린 마수의 모습을 지켜보며 진우는 갑자기 머릿속이 차갑게 식어 가는 기분을 느꼈다. '그런가...' 이 녀석의 머릿속에서도 역시 나는 인간이 아니라는 소리구나. '뭐, 상관없다.' 진우는 마수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는 별 관심이 없었다. 녀석들이 인간을 해치기 때문에 자신도 녀석들을 해치울 뿐. 그록타르는 감당할 수 없는 두려움에 계속해서 흐느끼며 어깨를 떨어댔다. "제발... 용서를..." 진우가 대답했다. "용서해 주마." 이어 오른손에 '악마왕의 단검'을 불러냈다. "하지만 그 과정이 편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마라." *** 괴물들의 싸움을 지켜보는 기사단 공격대는 기함을 토했다. "헉!" "어떻게..." 이걸 레이드라고 부를 수 있을까? 개미들이 언데드 마수들을 손쉽게 제압한 뒤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기 시작한 것이다. 우적우적. 공포스런 광경에 헌터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그런데 저렇게 다 먹어 버리면 뭐가 남는 거지?" "그러게, 마정석까지..." 헌터들은 최상급 마정석이 마수, 아니 소환수들의 뱃속으로 들어가는 걸 보며 발을 동동 굴렀다. 보다 못한 정예림이 뛰쳐나갔다. "그게 얼마짜린데!" 그녀가 뱀파이어의 사체를 뺏으려고 하자 성난 개미가 팔을 휘둘렀다. "악!" 개미의 손톱에 팔뚝이 베인 그녀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갔다. 털썩. "아야." 그녀가 엉덩이를 문지르며 일어서려는 찰나. "크르륵-!" 정신을 차리고 보니 팔을 휘둘렀던 개미가 눈앞에 있었다. 놈은 그녀의 머리를 베어 물려는 것처럼 그녀 앞에서 거대한 턱과 흉측한 아가리를 쫙 벌렸다. 정예림의 얼굴이 경직됐다. "아... 아..." 그때. 어느새 다가온 베르가 개미를 돌려세웠다. 베르는 개미가 그랬던 것처럼 개미의 면전에 대고 입을 쩍 벌렸다. 그러고는. "키에에에에에에에엑-!" 포효를 쏟아 냈다. 차원이 다른 존재의 분노를 사고 만 개미는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파들파들 떨어댔다. "키익..." 베르가 놈의 어깨를 놓아주자 놈은 황급히 자리를 피했다. 그 모습을 멍하게 바라보던 정예림에게 베르가 다가가 손을 내밀었다. '어...?' 얼떨결에 손을 맞잡은 정예림이 베르의 도움을 받아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고... 고맙습." 말을 하던 그녀의 입술이 멈췄다. 베르의 손끝에서 은은한 푸른빛이 감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치료 마법?" 정예림의 눈이 커졌다. 팔의 상처는 푸른빛에 닿는 순간 금방 아물었다. 상처가 완전히 치료된 것을 확인한 베르가 돌아서며 개미들에게 소리쳤다. "케엑!" 그러자 개미들이 식사를 멈추고 다시 던전의 안쪽으로 이동을 시작했다. 가만히 베르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정예림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어떻게... 소환수가 나보다 더 힐을 잘하지?" *** 헌터들이 학교에 도착했다. 헌터들을 마력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계단을 밟아 올라갔다. 엄청난 마력 반응이 6 층 복도 쪽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헌터들의 지휘를 맡은 이가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조심히."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6 층 계단 끝에 도착했을 때, 헌터들은 발견할 수 있었다. "헉!" 몇 조각으로 잘렸는지 세기도 힘든 오크 한 마리와 피 묻은 단검을 쥐고 그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저 사람은...?' 공격대 리더는 진우와 눈이 마주치고서 그 차가운 눈빛에 숨이 멎을 뻔했다. 그러나 가까스로 정신을 차리고 무전기를 들었다. "예. 성진우 헌터가 왔습니다." 그리고 주위를 한 번 둘러본 그가 다시 보고했다. "상황은 종료됐습니다." = 144 화 사건이 사건인 만큼 학교 주위에는 사람들이 벌떼같이 몰려와 있었다. "우리 아들이 학교에 있다니까요!" "좀 비켜 봐요!" "어떻게 된 건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다니까!" "아이고, 아이고!" 경찰과 협회의 필사적인 통제가 없었다면 몰려든 사람들로 현장은 벌써 아수라장이 됐을 터였다. 소식을 듣자마자 달려온 기자들도 바쁘게 셔터를 눌러 댔다. "어? 성진우다!" "찍어!" 진우는 그들의 시선을 피해 협회 관계자로 보이는 이에게 조용히 다가갔다. 관계자는 진우를 보고 긴장감에 몸이 굳어졌다. 그만큼 진우의 표정이 좋지 못했던 까닭이었다. "성진우 헌터님..." "제 동생은요?" "성진아 양은 다른 학생들과 함께 서울 일신병원으로 이송되었습니다." "..." 진우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만 끄덕이고 돌아섰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관계자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넘겼다. 꼴깍. 협회의 지시에 따라 이곳에 도착하고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이 성진아 학생의 상태였다. 다행히 그녀는 무사했다. 목과 손목 주변에 난 찰과상을 제외하면 부상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를 구해 낸 성진우 헌터가 그 사실을 모르지는 않을 터. '그런데도 저렇게 저기압이라니...' 본인이 제때 도착했으니 망정이지, 동생이 어떻게 되기라도 했으면 어떻게 됐을까? 관계자는 아찔한 느낌에 몸을 부르르 떨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관계자가 안도하는 것과 반대로 진우는 무거운 마음으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어머니도 소식을 듣게 되겠지.' 많은 학생들이 마수에게 당했다. 당연히 이 소식을 접하는 어머니게써도 억장이 무너지시리라. '그렇게 되기 전에 먼저 진아가 무사하다고 말씀드리자.' 그런 마음으로 번호를 누르려는 그때, 뒤에서 의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성 헌터님 어머니께는 저희 직원들을 보내 놨습니다. 아마 지금쯤이면 저희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가시는 중일 겁니다." 진우는 뒤를 돌아보았다. "협회장님." 고건희가 진우 못지않게 어두운 얼굴로 서 있었다. 본인에게 잘못이 없다고 해도, 한국 헌터협회를 대표하는 장으로서 참사를 막지 못한 데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런 와중에 가족까지 신경 써 준 것에 진우는 감사를 표했다. 그러자 고건희가 고개를 저었다. "감사는 저희가 해야지요." 학생 17 명. 그나마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 중 그 정도라도 살릴 수 있었던 것은 전부 진우 덕이었다. "매번 헌터님께는 신세만 지는군요." 진우는 씁쓸히 웃었다. 그림자 교환을 통해 바로 올 수 있었다면 더 많은 학생을 살릴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런 아쉬움이 스쳐 지나갔다. 고건희도 진우가 짓고 있는 표정에서 그가 지금 어떤 심정인지를 어렴풋이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감상에 젖어 있을 때가 아니지.' 해야 할 말이 있지 않은가? 고건희가 고개를 들었다. "병원으로 가실 겁니까?" 진우는 잠깐 광안리 게이트를 떠올렸다가 기억에서 지웠다. 자신의 마나는 줄곧 그대로였다. 이 말은 즉 베르를 포함한 개미들이 던전을 수월하게 토벌하고 있다는 뜻. '뭐... 다른 병사도 아닌 베르니까.' 그러니 지금은 레이드에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예." "그럼 저희 차를 타고 가시죠." "괜찮습니다." "같이 가시죠. 헌터님께 드리고 싶은 말씀도 있습니다." 예의상 하는 말인 줄 알고 거절했던 진우는 협회장의 간곡한 태도에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진우는 협회장의 안내를 받아 차의 뒷자리에 나란히 올라탔다. 대형 세단인데도 덩치가 큰 고건희와 어깨가 넓은 진우가 같이 타자 뒷좌석이 꽉 차는 느낌이 들었다. 운전석의 우진철이 백미러를 통해 인사를 보내왔다. 진우도 눈인사로 답했다. 차바퀴가 천천히 움직이자 협회장이 주저하다 입을 열었다. "...어쩌면 이번 사고는 예견된 것일지도 모릅니다." 굳은 얼굴. 진우는 의아했다. '그럼 협회는 막을 수 있는 사고를 방치해 뒀단 말인가?' 의아함이 노여움으로 바뀌기 직전, 협회장은 폰을 꺼내 액정화면을 보여 주었다. 화면엔 도표가 떠 있었다. "최근 6 개월간 서울에서 생성된 게이트의 증가폭입니다." 완만한 곡선을 그리던 점들이 현 시점에 가까워지자 가파르게 상승했다. "이쪽은 세계의 통계입니다." 협회장이 따로 설명하지 않았다면 같은 표를 보고 있다고 착각했을 것이다. 그만큼 두 개의 표는 비슷한 양상을 띠고 있었다. "전 세계에서 게이트가 기하급수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협회장의 얼굴은 어두웠다. "하지만 이상한 점은 이것이 다가 아닙니다." 핸드폰을 상의의 안쪽 주머니에 집어넣으며, 협회장이 말을 이었다. "요즘 각성자 등급을 확인하려는 사람들이 협회로 줄을 잇고 있습니다." 마수가 나오는 게이트가 늘고 있고, 게이트를 막는 헌터의 숫자도 는다? 마치 균형을 맞추려는 듯이? 관심 어린 진우의 표정을 보고서 협회장이 착잡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변화가 시작되고 있다..." 아직은 개인적인 견해일 뿐이지만. 고건희는 그런 뉘앙스로 긴 설명을 끝맺었다. "그것이 제 생각입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흥미로운 자료이기는 했다. 누가 봐도 무언가 벌어지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걸 보고 진우가 당장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리고 그건 협회장도 마찬가지였다. 더욱이 자료와 의견이라면 전화로도 충분했다. 굳이 바쁜 시간을 쪼개 자리를 청하지는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제게 하고 싶으시다는 말씀은." 협회장은 기다렸다는 듯 발아래 내려놓았던 서류 가방을 들어 올려 문서들을 꺼냈다.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 프랑스, 영국, 독일, 그리고 멀리 중동에서까지." 소위 힘 좀 쓴다는 나라들은 모두 열거되었다. "성진우 헌터님과 접촉을 원하는 나라들의 공식 요청을 담은 문서입니다. 아마 비공식적인 루트의 접촉도 몇 차례 있으셨겠지요." 헌터 관리국 요원들과의 일이 떠올랐으나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사실 헌터협회는 이들을 막을 권한이 없습니다. 헌터님의 요청에 따라 정보를 보호하고 있을 뿐이지요." 진우는 묵묵히 이야기를 들었다. "모든 결정은 성진우 헌터님의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만... 헌터님께서 떠나시면 우리나라는 이런 변화에 적응하지 못할 것 같다는 예감이 듭니다." 진우는 대답 대신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상념에 잠긴 진우의 시야에 멀리 대형 병원의 큰 건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진아가 입원해 있다는 병원이었다. "가능한 한 모든 편의를 제공해드리겠습니다." 고건희는 문서를 가방에 도로 집어넣으며 긴장된 낯빛으로 물었다. "그러니 남아 주시지 않겠습니까?" *** 기사단 공격대는 개미들을 따라 보스방 입구까지 왔다. 정윤태는 보스방으로 들어가기 시작한 개미들을 보면서 눈을 휘둥그레 떴다. "행님, 저거 말려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나는 자신 없다." 레이드는 여기서 중지하고 이제 마수들의 사체나 마석들을 거두어 들이는 시간을 가져야 한다고 괴물들을 설득할 자신이. 박종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여기서 접자.' 생각의 전환. 어차피 기사단 길드가 건재하다는 걸 알리기 위해 들어온 게이트였다. 한 명도 낙오하거나 다치는 멤버 없이 A 급 던전을, 그것도 최상위 던전을 클리어하는 모습을 보여 준다면 그걸로 충분했다. '그것도 성진우 헌터 없이.' 어차피 던전 안의 일은 아무도 모르지 않는가? 저 개미들이 보스를 다 잡았다고 해도 사람들은 기사단의 이름을 기억하지, 성진우 헌터가 불러놓고 떠난 소환수를 떠올리지는 않을 터. 어차피 보스가 죽고 게이트가 닫히면 확인할 길도 없다. 성진우 헌터의 성격상 어디다 떠들고 다닐 것 같지도 않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친 박종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전화위복이 별 게 아니잖아?' 그런데 그때. 뒤쪽 헌터들이 어수선했다. "사장님, 뒤에서 뭐가 잔뜩 오는 데요?" "네. 소리도 들려요." "응?" 박종수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뒤쪽으로 걸어갔다. 확실히 다수의 발소리가 들려왔다. '벌써 수거팀이 들어 왔나?' 기사단 길드의 숙련된 수거팀원들이 아무런 지시도 없이 막 던전에 들어오고 그러지는 않을 텐데. 그런 생각이 들었을 무렵. "헉!" 박종수의 눈이 커졌다. 개미들이 먹어 치우지 않았던 언데드 마수들이 되살아나 우르르 몰려오고 있었다. '설마...?' 개미들이 이걸 알고 먹어 치웠던 걸까? 하는 생각도 잠깐. 감당할 수 없는 숫자의 마수들을 보고 박종수가 다급히 외쳤다. "다들 보스방으로 들어가!" 유일한 희망은 성진우 헌터가 남긴 소환수들뿐이었다. 공격대는 보스방에 뭐가 있는지 확인할 겨를도 없이 다짜고짜 안으로 뛰어들었다. 헌터들이 전부 안으로 들어선 걸 확인한 박종수가 목에 핏대를 세웠다. "입구 막어!" 정예림이 스킬 '성스러운 벽'으로 보스방과 통로를 이어 주는 입구를 차단했다. 쾅-! 쾅-! 선두에 선 데스 나이트들이 보이지 않는 벽을 치는 소리가 요란했다. 이마에 식은땀이 가득 맺힌 정예림이 박종수를 돌아보았다. "사장님! 저 이거 5 분도 못 버텨요." "알고 있어." 이미 박종수를 비롯한 공격대원 전부가 벽이 뚫렸을 때를 대비해 전투 준비를 끝내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벽 너머로 벌레처럼 바글바글하게 모여 있는 언데드 마수들을 지켜보고 있자니 승산이 있을지 의심스러웠다. "그 전에 소환수들이 보스급 마수를 잡고 여기를 뚫어 주길 바라야겠지." 박종수는 간절함을 담아 보스와 대치하고 있을 개미들을 돌아보았다. 제발 쉬운 보스이기를 바라면서. '맙소사.' 그의 눈이 커졌다. 개미들과 마주한 마수는 박종수도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놈이었다. 누더기 로브를 걸친, 창백한 얼굴의 마법사. 아크 리치. 언데드들의 정점에 서있다고 일컬어지는 최악의 언데드형 마수였다. '하필 아크 리치라니.' 박종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소환수들이 보스를 잡고 자신들을 도와주기를 바랐는데, 상대가 아크 리치다. 차라리 자신들이 먼저 언데드들을 해치우고 소환수들을 도와주는 게 더 현실성 있는 이야기이리라. 그때. 베르가 한 걸음 아크 리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아크 리치가 개미들의 주위에 데스 나이트 십여 기를 둥글게 소환해 포위했다. "키에에에에엑-!" 이빨을 드러낸 베르가 손톱을 길게 세웠다. '...?' 아크 리치는 베르의 전신에서 끊임없이 피어오르는 검은 증기를 알아보았다. 휑하게 뚫려 있는 그의 검은 눈이 일순간 커진 듯 했다. "그림자 군단?" 아크 리치의 입에서 마수들의 언어가 나왔다. 말을 알아들은 베르가 손톱을 거두었다. 베르 뒤의 개미들까지 훑어보던 아크 리치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째서 왕의 직속 부대가 우리를 공격하는 것이냐?" 킥킥. 마치 비웃는 것 같은 소리를 낸 베르가 손으로 자기 가슴을 짚었다. "우리는 왕께 선택받았고." 이번엔 그 손이 아크 리치를 향했다. "너희는 선택받지 못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아크 리치의 목소리에 노여움이 깃들었다. "그럴 리 없다! 내가 직접 왕께 아뢸 테니...!" 그러나 아크 리치가 채 말을 끝맺기도 전에 베르가 눈앞에 나타났다. '...!' 아크 리치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베르는 S 급 던전의 주인이 자신의 생명력을 갉아먹어가며 만들어낸 상위체 마수. 그림자 병사가 되면서 능력치가 조금 떨어진다고는 해도 고작해야 A 급 던전의 주인인 아크 리치가 베르의 상대가 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경악하고 있는 아크 리치의 가슴에 베르가 손을 찔러 넣었다. 푹! 손은 아크 리치의 목에 매달려 있던 팬던트와 함께 가슴을 관통했다. "컥!" 아크 리치의 등 밖으로 삐져나온 손에 팬던트가 쥐여졌다. 팬던트는 아크 리치의 심장과 같았다. 한때 최상위급 마수였던 베르에게 적의 생명력이 어디서 공급되고 있는지를 감지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아크 리치가 고개를 저었다. "아... 안 돼...!" 그러나 적의 절규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베르는 팬던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콰직. "곧 죽을 놈이 말은 많구나." 베르의 한마디와 함께 아크 리치의 몸이 허물어져 내렸다. = 145 화 박종수의 입이 쩍 벌어졌다. 방금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한 일을 이해하는 데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을 정도로 그는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떻게 아크 리치를 한방에?' 수많은 보스급 마수들 중에서도 아크 리치가 특히 유명해진 계기가 있었다. 황룡길드 전멸 사건. 길드 하나가 아크 리치에게 전멸당했다. 그것도 중국 내에서 힘 꽤나 쓴다고 알려졌던 길드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른다. 아크 리치는 '데스 나이트'를 수시로 소환해 댄다. 데스 나이트는 A 급 헌터 여럿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제압이 가능한 언데드형 마수. 보스급 마수가 호위도 없이 혼자 있다고 우습게 봤다가는 전멸을 피할 수가 없는 것이다. 결국 황룡길드가 폐쇄에 실패한 게이트는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켰다. 중국의 국가권력급 헌터인 류즈캉이 제때에 도착해 참사로 번지지는 않았지만, 그 일을 계기로 많은 헌터들이 아크 리치의 무서움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저 괴물 개미 소환수는 아크 리치를 한 방에 처치했다. 경악스런 일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박종수만은 아니었는지, 옆에 선 정윤태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세상에..." 그는 자기 눈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박종수에게 물었다. "행님, 저거 아크 리치 아닙니까?" "맞다. 황룡길드 사건 때 게이트 밖으로 튀어나왔던 그놈." "그라믄 방금 저 개미가 아크 리치를..." 정윤태가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했다. 다른 헌터들도 박종수와 정윤태가 나누는 이야기를 듣고 놀라움을 나타냈다. "아크 리치?" "저게 아크 리치라고?" "그걸 한 방에?" "우와." 기사단 공격대 전체가 A 급 던전의 보스를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운 진우의 소환수에게 감탄하고 있을 때. 혼자서 몰려오는 언데드 마수들을 막느라 낑낑대는 재주 많은 힐러, 정예림은 뒤에서 일어나는 일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어 갔다. "뭐예요? 무슨 일인데요?" 하지만. 그녀의 궁금증은 오래가지 않았다. 바로 눈앞에서 놀라운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어?" 금방이라도 스킬 '성스러운 벽'을 뚫고 들어올 것처럼 날뛰던 언데드 마수들이 실 끊어진 인형들처럼 힘없이 쓰러져갔다. 털썩. 털썩. 그러고는 다시 일어서지 못 했다. "사, 사장님?" 갑작스런 이변에 화들짝 놀란 정예림이 뒤를 돌아보았다. 박종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처치했던 언데드 마수들이 부활했던 건 아크 리치의 힘이었나?' 새까맣게 몰려드는 마수들을 봤을 때는 이거 정말 어떻게 되는 거 아닌지 눈앞이 캄캄했었는데. 겨우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 들었다. "후-"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박종수의 뒤로 희색을 감추지 못하는 헌터들의 얼굴이 보였다. 다들 무사히 던전을 나갈 수 있다는 생각에 들뜬 모습이었다. "행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수고는 쟤들이 다 했지." 박종수의 턱짓에 정윤태가 뒤를 돌아보았다. 소환수들은 '이제 어디로 갈 거냐?'고 묻는 듯 가만히 서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저렇게 가만히 서 있으니까 조금은 귀여운 것 같기도...' 그러나 개미 하나가 심심했는지 아무 이유도 없이 위를 향해 포효를 내지르는 순간. "키에에에에엑-!" 잠깐 호의적으로 변했던 정윤태의 시선도 사라졌다. 휙. 고개를 돌린 정윤태가 말했다. "행님. 그런데 이번 던전은 결국 성진우 헌터님 혼자서 클리어하신 거나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런 셈이지." 박종수도 동의했다. 가장 난이도가 높은 던전 안쪽에서 기사단 공격대는 그냥 개미들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만 했을 뿐이었다. 개미들은 성진우 헌터 개인의 소환수. 결국 정윤태의 말대로 진우가 혼자 던전을 공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무서운 힘...' 제주도 레이드에서도 볼 수 있었지만 실로 대단한 능력이었다. 상상했던 것 이상의 전투력을 보여 준 소환수들도, 그 소환수들을 자유자래로 부릴 수 있는 성 헌터도 모두 놀라울 따름이었다. "그라믄 성진우 헌터님은 게이트 안 들어가고 점마들만 보내 놔도 클리어가 가능하겠네요?" 무심코 내뱉은 정윤태의 말. 하지만 듣고 있던 박종수는 그 말의 의미를 생각하다가 소름이 돋았다. '잠깐만...' 제주도에서 성 헌터가 소환했던 소환수는 아무리 못해도 2 백 마리 이상. 그것도 카메라에 잡힌 녀석들만 헤아린 숫자이니, 실제로는 얼마나 더 많은 소환수를 불러낼 수 있을 지 가늠조차 힘들었다. 본인은 움직이지도 않고 그 녀석들을 보내 던전을 공략하기 시작한다면? '소환수를 불러내고 움직이는 데 소모되는 마력이 있을 테니 그 많은 소환수들을 다 쓰지는 못하겠지만...' 그 반. 아니, 반의반 정도면 운용할 수 있다고 해도 대형 길드들을 찜 쪄 먹는 어마어마한 효율이었다. '아으.' 성 헌터의 길드가 주식회사라면 전 재산을 다 털어서라도 투자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행님, 우리 이라지 말고 진짜 성 헌터님 길드랑 인수합병이라도 함 추진해 봅시다." "이 자식이 진짜..." 정윤태에게 도끼눈을 뜨고 눈을 부라리던 박종수가 돌연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M&A 라고 해라, M&A. 최고의 헌터가 만든 신생 길드와 5 대 길드 중 하나인 기사단 길드가 M&A 를 추진. 얼마나 듣기 좋냐?" 컥, 정윤태가 움찔했다. "진짜로 해 보시게요?" "잘 생각해 봐. 성 헌터님의 실력과 우리 길드의 노하우가 있으면 헌터스가 무섭겠어?" 차해인 부사장이 괜히 헌터스 길드를 떠나 성 헌터와 손을 잡으려 하겠냐고. 화색이 묻어나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던 정윤태가 턱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런데 행님, 솔직히 성 헌터님한테 우리가 필요하겠습니까?" 쯧쯧. 박종수가 혀를 차고는 설명했다. "성진우 헌터님이라고 법을 어기면서 길드 활동을 할 수 있겠냐?" "예?" "아무리 소환수만으로 던전을 클리어하는 게 가능하다고 해도, 공략 최소 인원수 멤버들은 다 채워야 할 거 아냐." 오. 그럴싸한 이야기에 정윤태의 얼굴이 다시 밝아졌다. "그러네요, 행님." "성 헌터님은 최소 인원수 맞추시기 좋고, 우리는 성 헌터님 덕을 볼 수 있어서 좋고." 그야말로 윈윈. 레이드 준비 기간을 최대한 단축시키면서도 효율은 극대화할 수 있는 비장의 한 수. S 급 헌터를 길드로 데려올 수 없다면 길드가 S 급 헌터의 밑으로 들어간다. 박종수가 그리는 장밋빛 미래에 정윤태가 미소를 머금었다. "행님, 그거는 참 멋지기는 한데... 너무 성진우 헌터님한테 얹혀 가는 거 아닙니까?" "어허, 얹혀 가다니?" 쓰읍, 눈치를 준 박종수가 씩 웃으며 말했다. "기왕이면 줄을 잘 섰다고 하자." "행님도 참." 마주 보면서 행복한 미소를 짓는 두 사람의 발밑이 살짝 흔들렸다. 드드드득- "어이쿠." 박종수가 서둘렀다. 보스급 마수가 죽어 게이트의 폐쇄가 진행되고 있었다. "일단 나가서 얘기해야겠다." "예, 행님." 박종수는 지시를 기다리고 있는 공격대들에게 목청껏 외쳤다. "자자 게이트 닫히기 전에 다들 빠져나갑시다!" *** "모든 편의를 제공해 주신다고요?" "네. 그렇습니다." 진우의 질문에 고건희 협회장이 확언했다. 공식적으로 한국 헌터협회 기록에 남은 S 급 헌터는 진우까지 모두 10 명. 그중 세 명을 잃었다. 두 명은 마수들 손에 죽었고, 한 명은 미국의 유혹에 떠났다. 헌터협회로서도 더 이상 방관할 수만은 없는 일. 할 수 있는 일은 다 하겠다. 이것이 고건희 협회장의 생각이자 협회 전체의 뜻이었다. '다른 S 급 헌터라면 몰라도...' 성진우 헌터만큼은 절대 내주어서는 안 된다. 고건희의 눈빛이 확고했다. 헌터협회의 대표라는 직책상 그동안 많은 헌터들을 만나 봤다. 그중 손꼽히는 강자들도 여럿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심장을 뛰게 만드는 헌터는 그가 처음이었다. 헌터협회장으로서 뿐만 아니라 한 사람의 국민으로서도 반드시 진우를 한국에 남겨 두고 싶었다. -가능한 한 모든 편의를 제공해 드리겠습니다. 이 한마디는 진우에 대한 고건희 협회장의 평가가 축약된, 그를 잡아야 한다는 강한 의지의 표명이었다. "그럼..." 잠깐 생각에 잠겼던 진우가 입을 열었다. "앞으로 저 혼자서 상급 게이트에 들어갈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시겠습니까?" "예?"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요구가 튀어나오자 고건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소 인원수 제한을 없애 달라 이 말씀이십니까?" 끄떡. 진우는 고개를 움직였다. "허어..." 인원수 제한은 헌터들을 위한 최소한의 안전장치. 무턱대고 던전에 들어갔다가 목숨을 잃는 헌터들이 나오는 것을 방지하는 정책이었다. 하지만. S 급 마수들을 다수의 소환수들로 때려잡던 성 헌터에게 과연 그런 안전장치가 필요할까? 개미굴에서의 한 장면이 떠오른 고건희는 긴장된 낯빛으로 물었다. "혹시... 이제부터 헌터님 길드에서 공략 허가권을 얻은 게이트들은 전부 헌터님 혼자 들어가실 생각입니까?" "네." 고민의 기색조차 보이지 않는 진우의 대답에 고건희는 할 말을 잃었다. '설마 길드를 만든 것도...' 혼자 상급 던전들을 클리어하기 위해서였나? 전 세계에 강한 헌터들은 많았지만 아무도 이런 식의 레이드를 구상했던 이는 없었다. 지금 담담하게 대화를 이어 나가는 진우의 모습과 개미굴에서 소환수를 불러내 개미 떼를 밀어내던 진우의 모습이 겹쳐 보이자 전율이 일었다. '1 인 공격대...' 대형 길드들의 지나친 성장을 우려해 왔던 고건희에게는 너무나도 매력적인 단어였다. 두근, 두근. 또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고건희는 아파오는 가슴에 한쪽 손을 올리며 강건해 보이는 진우와 대비되는 자신의 모습에 씁쓸히 웃음 지었다. "어렵겠습니까?" 진우의 말에 고건희는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어렵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그것이 고건희의 생각이었다.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 헌터협회장이자, S 급 헌터이며, 국회의원인 남자다. 다른 사람도 아닌 성진우 헌터의 부탁이라면 어려운 문제라고 해도 못 들어줄 것이 없었다. 그 정도로 성 헌터를 한국에 머물게 할 수 있다면야. "맡겨만 주시지요." 자신감 있는 협회장의 목소리에 진우는 씩 웃었다. '좋았어.' 귀찮을 것 같았던 일이 하나 해결됐다. "감사합니다." 진우가 웃으며 인사하자 고건희도 웃으며 대꾸했다. "매번 드리는 말씀이지만, 제가 헌터님께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끼익. 차는 병원 입구에서 떨어진 곳에 멈춰 섰다.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성 헌터님." "예." 간단히 작별 인사를 주고받은 진우가 내려섰다. 피해자들이 이송됐다는 소식이 알려졌는지 병원 앞에도 많은 기자들이 몰려와 있었다. 일부러 입구에서 먼 곳에 차를 댄 것은 우진철의 배려였다. 협회장의 차가 병원에 멈춰 서고, 거기서 또 진우가 내리면 한바탕 소란이 일어날 것이 분명했기에. '이럴 때는 이름이 알려진 것도 귀찮네.' 고개를 저은 진우는 은신으로 몸을 감췄다. *** 유진건설 회장실. 넓디넓은 책상에 엎드려 졸고 있던 유명한 회장이 상체를 일으켰다. 창으로 비스듬히 새어드는 햇빛. 눈꺼풀이 무거워진다 싶었더니 깜박 잠에 든 모양이었다. 앞의 쇼파에는 유명한의 오른팔이나 마찬가지인 김 비서가 정자세로 꼿꼿하게 앉아 있었다. 유명한은 잠을 쫓으려는 듯 얼굴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잠깐 졸았나 보군. 내가 얼마나 잠들어 있었나?" 김 비서가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봤다가 고개를 들었다. "23 시간 46 분 동안 주무셨습니다." '...' 얼굴을 쓸어내리던 유명한의 손이 멈칫했다. "회장님의 지시대로 24 시간이 지나도 깨어나지 않으시면 병원으로 모셔갈 생각에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또 그 병인가? 손이 떨어진 유명한의 얼굴은 경직되어 있었다. 점점 시도 때도 없이 잠에 빠져들고, 한 번 잠들면 쉽게 깨어나지 못한다. 익면증. 그 병은 느리지만 확실하게 환자의 몸을 죽음으로 이끌어갔다. 뚜벅뚜벅, 다가온 김 비서가 유명한 앞에 섰다. "알려드려야 할 말씀이 두 가지 있습니다." "뭔가?" 유명한은 '포커페이스'라는 별명답게 금방 얼굴에서 수심을 지우고 원래의 표정으로 돌아갔다. 김 비서는 책상의 끄트머리에 있던 신문을 집어서 유명한의 앞에 공손히 놓았다. '...?' 유명한은 의아한 눈빛으로 신문을 들고는 빠르게 읽어 내려갔다. 신문의 첫 면을 장식한 기사는 서울의 학교에서 게이트가 열려 수백 명의 학생이 인명 피해를 입었다는 내용이었다. 쯧쯧. 참혹한 기사의 내용에 유명한은 눈살을 찌푸렸다. "안타까운 사고군. 피해 학교와 학생들에게 기업 차원에서 기부하도록 하게." "예. 회장님. 하지만." 고개를 숙였던 김 비서는 유명한이 내려놓은 신문을 한 장 넘겨 다음 페이지가 오게 만들었다. 펄럭. 거기에는 큼지막한 사진이 실려 있었다. "제가 드리고 싶었던 말씀은 이 사진입니다." 김 비서의 손가락 끝이 사진 속에 실려 있는 한 아주머니에게서 멈추었다. "이분... 기억하시겠습니까?" 끔찍한 사고의 생존자들이 입원해 있다는 병원을 찍은 사진. 김 비서는 그중에서도 급히 병원 안으로 달려가는 아주머니 한 사람에게 주목했다. 우연히도. 그 여인은 유명한 회장의 기억에 남아있는 사람이었다. "아니, 어떻게...?" 한 번 본 사람은 절대 잊는 법이 없는 유명한. 그는 아주머니의 사진을 전에 본 적이 있었다. 그녀는 성진우 헌터의 어머니였다. "성진우 헌터의 어머니는 분명 익면증에 걸려 있었을 텐데?" 성진우 헌터의 프로필은 몇 번이나 꼼꼼하게 검토했었다. 유명한이 아는 바에 의하면 생명유지 장치에 의존한 채 꼼짝하지 못하고 있어야 할 사람이 건강한 모습으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김 비서가 말하고 싶었던 것. 그것이 뭔지 유명한 회장은 그제야 알아챘다. 신문을 쥐고 있는 손이 떨려 왔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자세히 알아봐 주겠나?" "알겠습니다." "...고맙네." 김 비서는 유명한의 칭찬에 답하는 의미로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었다. 신문을 놓고서, 유명한이 조용히 말을 이었다. "내가 알아야 할 게 두 가지가 있다고 했었지." "네, 회장님." "그럼 다음은 뭔가?" 유명한은 고개를 들어 김 비서와 시선을 마주했다. 김 비서의 눈빛이 좋지 않았다. 그의 오래된 습관. 그는 항상 좋은 소식을 먼저, 나쁜 소식을 뒤에 전하는 버릇이 있었다. 잠시 주저하던 기색이었던 김 비서가 포기한 듯 말했다. "아가씨께서 어제 돌아소셨습니다." 그 말을 기다렸다는 것처럼. 덜컹. 화장실의 문이 벌컥 열리며 유명한 회장의 딸, 유진희가 안으로 들어서서는 눈물을 글썽였다. "아빠, 언제부터 그랬던 거예요?" = 146 화 늘씬한 검은 생머리의 여성이 이리저리 포즈를 취하는 사이 간간이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좋습니다, 좋아요." 촬영 감독의 입가에 내내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찰칵. 마지막 플래시가 터지고 감독이 고개를 들었다. "됐습니다. 아주 좋네요." 유진호의 사촌 누나이자 절친이기도 한 유수현이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현 씨도 수고했어요." 서글서글한 유수현의 성격 덕분에 그녀가 참여하는 촬영장에는 늘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 재벌가의 아가씨라는 이미지 때문에 촬영을 꺼리던 감독들도 한 번 같이 일하고 난 후에는 늘 그녀를 찾게 될 정도였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습니다." 그녀는 감독뿐만 아니라 스텝들에게도 일일이 환한 얼굴로 인사를 건네고서 코디이자 매니저인 여성에게 쪼르르 달려갔다. "언니, 진희한테 연락 왔어?" 코디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벌써 전화만 네 통째. 그런데도 아직 답신이 없다는 소식에 유수현은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어제 한국 도착했다는 기집애가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된담.' 유학 중이던 사촌이 잠시 한국에 들렀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어제 오전. 하필 밤샘 촬영을 마치고 곯아떨어졌을 때 걸려온 전화 한 통을 놓친 것이 이리도 억울한 일이 될 줄이야. 그 뒤론 어떻게 된 일인지 감감무소식이었다. '설마 무슨 일 있나?' 아냐, 그럴 리가. 유수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녀는 대한민국에서 가장 큰 기업의 오너, 유명한의 장녀 유진희가 아닌가. 그녀에게 무슨 일이 생길 가능성은 S 급 헌터가 던전에 들어갔다가 비명횡사할 확률과 맞먹었다. "언니, 내 폰 좀." 다시 한 번 전화를 걸어 보기 위해 핸드폰을 넘겨받던 유수현은 때마침 울리는 진동에 반가워했다. '진희인가?' 그러나 발신인을 확인한 유수현의 입술이 삐죽 나왔다. _못난 놈 '...' 통화 버튼을 누른 유수현이 귀찮다는 듯이 말했다. "여보세요." -누나! 유진호였다. 이 녀석이 자신을 누나라고 부를 때는 뭔가 부탁할 일이 있을 때뿐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유수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고서 물었다. "너 혹시 진희 어디 있는지 알아?" -누나? 우리 누나가 왜? 한국 왔대? "..." 그러고 보니 이 녀석 유진길드를 맡으라는 자기 아버지의 지시를 거절하는 바람에 그날로 집에서 쫓겨났다고 했던가? 여전히 도움이 되지 않는 사촌이었다. "아냐 됐어. 그런데 무슨 일이야?" 설마 이 시간에 또 저번처럼 술 먹자고 부르는 건 아닐 테고. 그때. 유진호의 들뜬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우리 길드 안 들어올래? 갑자기 이게 뭔 소리래? 유수현의 고운 미간에 일순간 주름이 생겼다. "길드?" 하도 어이가 없어서 되물었더니. -아버지 길드에 잡혀 가서 홍보 대사로 활동하는 것보다 우리 길드에 이름만 올리고 자유를 누리는 게 누나한테도 더 낫지 않아? ...라는 기막힌 대답이 돌아왔다. 미심쩍은 마음에 유수현의 목소리가 낮아졌다. "내 이름은 왜 필요한데?" -창립 멤버가 한 사람 모자라거든. "지금 나더러 아직 만들어지지도 않은 길드에 들어오라는 거야?" -응. 해맑게 대답하는 유진호. 얜 뭘 믿고 이렇게 쓸데없이 긍정적인지 유수현은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아니, 그것보다... 나머지 한 사람은 대체 누구야?' 창립 멤버에 이름부터 올리라는 '못난 놈'보다, 그 '못난 놈'과 같이 길드를 만들겠다는 다른 한 사람의 의도가 더 수상했다. "너 막 이상한 사람한테 속아서 그러고 있는 거 아니야?" 경력도 얼마 없는 D 급 헌터와 길드를 만들겠다는 사람이 사기꾼 빼고 또 있을까? 하지만 유진호의 반응은 예상과 달랐다. -훗. 수화기 너머에서 한쪽 입꼬리를 올리는 얼굴이 그려지는 웃음소리와 함께, 여유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 이상한 사람이 누구인지 들으면 깜짝 놀랄걸? "누군데?" -훗. "전화 끊을게." -아, 잠깐만, 잠깐만! 간절한 목소리에 통화 종료 버튼으로 올라가던 유수현의 손이 멈췄다. 유수현이 씩 웃으며 다시 폰을 귓가에 댔다. "3 초 준다. 3, 2." -성진우! '성진우?' 생각지도 못했던 이름이 튀어나오자 유수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아는 그 성진우 헌터?" -훗. "이민성 기자회견을 박살 내 버리고 홀연히 사라졌던 S 급 헌터?" -...놀라야 되는 포인트가 좀 잘못된 거 아니야? "진짜 그 사람이라고?" 유진호의 반응이야 어쨌든, 유수현에게 성진우라면 재수 없는 이민성의 콧대를 아작 내 준 S 급 헌터였다. 그때 얼마나 속이 시원하던지. -후후! 유진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저 밑도 끝도 없는 자신감도 이해가 갔다. '진호가 허세는 부려도 거짓말을 하는 타입은 아니니까.' 잠깐 고민해 보던 유수현이 다시 말을 꺼냈다. "만나서 얘기해 봐도 돼?" -그럼! 누나가 우리 사무실 쪽으로 올래? 형님도 이따 오시기로 했거든. "어디로 가면 돼?" 근처에서 뗀 포스트잇에 열심히 주소를 메모하던 유수현이 흥분을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지금 출발할게." -이따 봐, 누나! 뚝. 그렇게 전화는 끊어졌다. 본의 아니게 옆에서 대화를 엿들은 코디가 넌지시 물었다. "어디, 가야 하는 거야? 회식도 빠지고?" 끄덕끄덕. 설명할 시간도 없다는 듯 유수현은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겼다. "좀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누구...?" "나중에 설명할게." 대충 둘러댄 유수현이 자리를 뜨려는 찰나, 코디가 급히 불러 세웠다. "누구냐니까? 누군지 알아야 내가 회장님께 보고를 드리지!" 유수현의 부친 또한 모 제약 회사의 회장. 연예계 활동을 하고 싶다는 딸에게 부친이 내건 조건은 감시자의 동행이었다. 코디는 부친의 사람. 그녀는 유수현의 코디면서 매니저이며 감시자까지 겸하고 있었다. 유수현은 자기가 아무 말 없이 떠나버리면 코디 언니가 혼난다는 사실을 뒤늦게 떠올리고는 뒤돌아서 싱긋 웃었다. "성진우 씨!" 그렇게 대답한 후 빠르게 멀어져 가는 유수현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코디가 근심 어린 얼굴을 했다. "허락도 없이 남자 만나러 나갔다는 거 회장님께서 아시면 노발대발하실 텐데." 코디는 혀를 쯧쯧 차다가 방금 유수현이 한 말을 되짚어 보았다. '그런데... 누구 만나러 간다고 했었지?'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이름이었는데. 곰곰이 기억을 더듬어 보던 코디의 눈이 황소처럼 커지며 유수현이 나간 문을 휙 돌아보았다. "누구라고?!" *** '없다... 없어.' 유진호는 모니터를 들여다보며 손톱 끝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여기도... 저기도... 없다.' 어느 순간인가부터 형님을 욕하는 댓글들이 자취를 감추었다. 하긴. 이해 못할 일도 아니다. 제주도에서 S 급 헌터들을 구해 오고, B 급 게이트를 닫아 도로 정체를 없애고, 어제는 학생들 목숨까지 살리신 형님이니까. 아니, 오히려 형님께 욕을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끈질기게 달라붙던 안티들도 자신의 노력과 형님의 활약 덕분에 이제 거의 다 사라진 듯했다. 형님 관련 기사에서 가뭄에 콩 나듯 가끔 보이는 악플도 기사를 본 사람들의 십자포화를 견디지 못하고 금방 지워졌다. 좋은 일이다. 분명 좋은 일이었다. '한데 어째서...' 가슴이 허전한 걸까? 어쩐지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씩 줄어가는 느낌이었다. 딸깍, 딸깍. 그렇게 슬픈 표정으로 마우스를 움직이고 있는데, 사무실의 문이 조용히 열렸다. 진우였다. 형님의 얼굴을 확인한 유진호가 밝은 얼굴로 벌떡 일어나 허리를 숙였다. "오셨습니까, 형님." "어." 진우는 피곤한 기색이었다. 그도 그럴 수밖에.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진아 곁을 지켜 주다 이제 막 집에 들어가서 씻고 나온 참이었다. 만에 하나 병원 안에서 A 급 게이트가 열려도 대처할 수 있도록 일단은 동생의 그림자에 베르를 숨겨 두고 왔다. 유진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형님, 동생분은 좀 괜찮으세요?" "다행히." 일부러 괜찮은 것처럼 보이려고 노력하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걱정되는 게 오빠 마음이다. 담당 의사도 정신적 충격이 클 테니 당분간 주의 깊게 지켜봐야 한다고 했다. '빨리 떨치고 일어나기를...' 원체 밝은 아이니까. 그렇게 속으로 응원해 주는 것이 진우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였다. 그때. "어멋, 진짜네?" 깜짝 놀라는 여성의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왔다. 진우가 돌아보니 회의실을 빠져나온 유수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진우를 바라보고 있었다. 진우가 유진호에게 눈빛으로 물었다. '이분?' 유진호가 긴장된 눈빛을 돌려보냈다. '네, 형님.' 오기 전에 사정은 들어 둔 상태였다. -형님이 원하시는 조건에 딱 맞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번 만나 보시겠습니까? 헌터자격증 소지자에, 길드 활동에 전혀 관심이 없지만, 그럼에도 신뢰할 수 있는 사람. '거기다 A 급 헌터라...' 딱히 등급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어쨌든 맑은 눈빛과 환한 미소 때문인지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간단히 인사를 나눈 뒤. "저기." 계약 이야기를 하기 전에 진우는 먼저 궁금한 것을 물어보았다. "이렇게 하면 큰아버지와 사이가 나빠질 수도 있는데도 괜찮아요?" "유진성과 엮이는 것보다는 낫거든요." "유진성?" 진우가 돌아보자 유진호가 민망한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제 친형입니다, 형님." 아, 그 성격 나쁘다는 친형 말인가. '유진호가 아니면 유진성이 유진길드를 맡기로 했었지.'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진호가 얌전히 유진길드를 맡았으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 어떻게 보면 유수현도 진호의 선택으로 인한 피해자였다. '괜히 이 녀석 때문에 여러 사람이 피해 보네.' 진우의 시선이 자신에게로 향하자 유진호는 영문도 모르고 미소를 지었다. '...' 속으로 한숨을 내쉬는 진우에게 유수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저..." "네?" 약간 상기된 얼굴. 떨리고 있는 눈동자가 뭔가 중요한 것을 말하려는 분위기였다. 진우도 진지한 눈빛으로 변했다. "뭔가 하실 말씀이라도...?" 그러자 망설이던 유수현이 용기를 내며 눈을 반짝였다. "SNS 에 올리게 사진 한 장만 같이 찍을 수 있을까요?" *** 모 제약회사의 회장실. 유명한의 동생, 유석호 회장의 얼굴은 그 어느 때보다 엄숙하고 진지했다. "그게 정말인가?" "네." 코디는 겁먹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딸아이가 성진우 헌터를 만난다고?" "그렇습니다, 회장님." "이름만 같은 사람일 수도 있지 않나?" "저도 긴가민가했습니다만..." 주섬주섬 옷을 뒤지던 그녀가 조심스레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핸드폰 액정에는 유수현의 SNS 가 떠 있었다. 방금 업로드된 사진을 바라보는 유석호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로 뉴스에서 자주 보이던 그 얼굴이 있는 게 아닌가? '아니...' 사진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유석호가 이마를 짚으며 나지막하게 탄식을 내뱉었다. "허." "괜찮으십니까, 회장님?" "...자넨 나가 보게." "예?" "어허. 나가 보래도." 유석호는 핸드폰을 돌려주고는 코디를 회장실에서 내쫓아냈다. 그리고 그녀가 돌아간 걸 확인하자마자 컴퓨터를 켜 진우에 대한 기사를 검색해 보았다. [성진우 헌터, 과연 그의 몸값은 얼마인가?] [세계 각국에서 몰려들고 있는 러브콜, 성진우 헌터의 선택은?] [기사단 길드의 박종수 사장이 말하는 성진우 헌터, "그의 능력은 측정불가."] [성진우 헌터, 미국에서 비밀리에 접촉?] [전문가들은 이미 성진우 헌터를 걸어 다니는 대기업으로 표현...] 제주도 레이드 이후 폭증하고 있는 관심을 대변해 주듯 많은 기사들이 떠올라 있었다. 기사들을 하나하나 읽어 보는 유석호 회장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어리었다. "허어, 허어...!" 그러기를 두어 시간. 눈이 침침해진 그가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이마에 땀이 맺혔다. 손수건으로 땀을 찍어 낸 뒤 담배를 입에 물고 불을 붙이기 직전. 멈칫. 그는 담배를 내려놓고 대신 옆에 놓인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뚜르르, 뚜르르. 딸깍. -여보? 수화기 너머에서 중년 여성의 목소리가 나왔다. -이 시간에 웬일이에요? "허허, 마누라. 요즘 우리 딸이 누구와 만나고 있는지 아시오?" -네? "내가 딸 애 하나는 잘 키웠다니까." -그게 갑자기 무슨 소리에요? 유석호 회장은 확신하고 있었다. 수현이가 누군가? 얼굴이면 얼굴, 배경이면 배경, 거기다 심지어 학력까지. 뭐 하나 빠지는 것 없는 딸 아닌가? 지금은 그냥 얼굴만 아는 사이라고 가정해도 두 사람이 깊은 사이가 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이 양반 좀 봐. 수화기 속의 목소리가 의아해했다. -언제는 수현이 옆에 남학생이 앉는 것도 싫다고 학년마다 학교에 찾아가서 수현이 졸업할 때까지 여학생들만 짝이 되게 했던 사람이... "허허, 내가 그랬었나?" -누구를 만나기에 당신 반응이 그래요? 그만 뜸 들이고 말해 줘요. 유석호는 회장실이 떠나가라 웃었다. "누군 줄 알면 당신도 깜짝 놀랄 것이오, 으허허허헛!" = 147 화 "소환수를 공격대 인원으로 인정해 주겠다니, 그게 어디 말이나 될 법한 소립니까?" 남준욱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는 검사장 출신의 국회의원. 누군가의 잘못을 캐내 물어뜯는 데는 국내에서 따를 자가 없는 이였다. 맞은편에 앉은 고건희 협회장은 줄곧 침묵을 유지했다. 그런 그를 보며 남준욱은 속으로 미소를 지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겠지.' 이미 승부는 났다. 이건 누가 봐도 고건희 협회장의 무리수가 분명했으며, 협회장도 그걸 아는지 반격할 의사가 전혀 없어 보였다. '하지만...' 여기서 그만둘 생각은 없었다. 적이 수세에 몰려 있을 때 압박을 멈추지 않고 그대로 벼랑 끝까지 밀어 버리는 것. 그것이 남준욱의 스타일이었다. 그는 입을 굳게 다물고 있는 고건희가 아니라 제 3 회의장을 가득 메우고 있는 관계자들과 기자들을 향해 목에 핏줄을 세웠다. "성진우 헌터가 길드를 만들자마자 이런 말도 안 되는 규정이 생겼습니다. 이것이 특혜가 아니라면 뭐가 특혜입니까?" 공정해야 할 헌터협회가 성진우 헌터의 뒤를 봐주고 있다. 은연히 그런 소문이 돌던 차에 협회에서 새로이 내놓은 규정이 이 모양이니 당연히 논란이 일 수밖에. 오늘 청문회는 해명을 위한 자리였으나 고건희 협회장은 내내 굳게 입을 다물고 있었다. '좋아.' 남준욱은 승리를 예감했다. 제주도 레이드를 멋지게 성공시켜 인기가 하늘로 치솟았던 고건희에게 이번 던전 브레이크 사건과 성진우 헌터 특혜 논란으로 2 연타를 먹일 수 있게 됐다. 정치는 결국 밥그릇 싸움. 자신의 정치적 대척점에 선 고건희를 무너뜨리면 결국 그만큼의 몫이 자기에게 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내일 신문 1 면을 장식할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남준욱이 거만한 눈빛으로 고건희를 응시했다. "뭐라고 말이라도 좀 해 보세요, 고건희 협회장님!" 응. 오늘 처음으로 고건희의 마이크가 켜졌다. 툭, 툭. 마이크 끝을 쳐 소리가 제대로 나오는 것을 확인한 고건희가 입술을 가까이 가져다 댔다. "무슨 대답을 듣고 싶은 겁니까?" 남준욱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저 뻔뻔한 영감이...' 당연히 일단은 사과부터 할 줄 알았다. 그런데 아직까지 할 말이 남았다는 건가? 남준욱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번에 신설된 이 규정! 성진우 헌터에 대한 특혜입니까, 아닙니까?" 자, 이제 어떻게 피할 셈이냐? 비겁한 변명을 기대하고 있던 남준욱에게 고건희가 찬물을 끼얹었다. "특혜 맞습니다.' 짧은 대답. 하지만 그 파장은 엄청났다. 웅성웅성. 방청객들은 물론이고 기자들이나 국회의원들까지 옆자리 사람과 눈빛을 교환하며 소란을 더했다. 물론 가장 놀란 사람은 남준욱이었다. '저 영감이 노망났나?' 끝까지 발뺌하던가, 정 안 되면 싹싹 빌기라도 해야 할 사람이 저리 당당하게 잘못을 시인하다니. 하지만 실언을 한 사람이라고 보기에 고건희의 눈빛은 너무도 차분했다. 그 차분함과 뻔뻔함이 오히려 남준욱에게 묘한 긴장감을 불러일으켰다. 꼴깍. 마른침이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아니나 다를까. 고건희의 입이 다시 열렸다. "여기 모여 계신 분들께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압도적인 존재감. 고건희가 입을 여는 동시에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모두 입을 다물고 그를 바라보았다. "20 명의 A 급 헌터가 모인 공격대와 성진우 헌터 한 명이 전부인 공격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선 고건희가 사람들의 면면을 둘러보며 말을 이어 갔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장소에서 둘 중 어느 한 팀과 함께 해야 한다면, 어디를 고르시겠습니까?"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필요도 없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는 것과 마찬가지였으니까. "..." "..." 다들 고건희의 시선을 피하려 하는 가운데, 고건희의 고개가 남준욱에게서 멈추었다. "..." 남준욱 역시 입을 떼지 못했다. 만족할 만큼의 반응을 얻었다고 생각한 고건희가 미소를 지었다. "이래도 성진우 헌터에게 주어진 특혜가 부당하고 생각하십니까?" 한 명이서 능히 대형 길드의 정예 공격대 이상의 몫을 해낼 수 있는 헌터. 이런 쓸데없는 일로 그런 헌터의 발목을 잡아야겠냐고 고건희는 묻고 있었다. 남진욱이 뭔가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채 열기도 전에 고건희가 빠르게 말을 이었다. "미국, 일본, 중국 등 총 21 개국에서 성 헌터에 대한 정보를 요구해 왔습니다." 고건희는 가지고 온 두꺼운 공식 문서들을 쥐고 흔들어 보였다. "이들 모두가 성 헌터를 자국으로 데려가기 위해 눈이 벌게져 있습니다." 기자들을 바라보던 고건희의 시선이 다시 남준욱 의원에게 옮겨 갔다. "이런 상황에서 그 정도의 특혜도 없이 성 헌터가 한국에 남기를 원하십니까?" "..." 남준욱의 안색이 불편해지기 시작했다. 뒤바뀐 전세가 여실히 느껴졌다. 하지만 고건희는 쉽게 놓아줄 생각이 없는지 남준욱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다시 물었다. "미국으로 떠난 황동수 같은 사례가 반복되길 원하시는 거냐고 물었습니다." 윽. 남준욱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문서들을 내려놓는 고건희의 얼굴에서 숨겨 두었던 여유가 흘러넘쳤다. 남준욱은 알고 있었다. 저 표정의 의미를. 대개 이런 상황에서 자신이 마지막에 보이던 얼굴, 승자의 표정이었다. 남준욱은 이를 악물며 반론했다. "그래도 형평성이라는 것이..." "그래서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고건희가 남준욱의 말을 잘랐다. "남준욱 의원님께서 최근에 새로 이사 하신 곳이 헌터스 길드 근처의 아파트 아니십니까?" 남준욱의 얼굴이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붉어졌다. "굳이 주변보다 몇 배나 집값이 더 비싼 곳으로 옮겨 가신 이유가 뭔가요?" "..." 상대가 S 급 헌터만 아니었으면 달려 나가서 주먹질이라도 할 것처럼 남준욱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달아올랐다. 하지만. 고건희 또한 열세에 놓인 상대를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남준욱 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훤히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또다시 이 땅에 S 급 게이트가 생성되었을 때 누가 당신의 목숨을 지켜 줄 수 있는지 잘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고건희는 이렇게 말을 끝맺었다. "당신이 집값으로 지불한 돈의 몇 백 배, 몇천 배를 지불해도 목숨은 살 수 없을 테니 말입니다." *** 처음으로 A 급 게이트 앞에 서게 된 유진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게이트의 위쪽을 올려다보았다. "헉..." 한참 올려 봐야 하는 높이. 벌써 20 분째 입을 다물지 못하는 유진호를 보고 진우는 자신이 처음 A 급 게이트를 봤을 때의 반응은 양반이었구나, 하고 생각했다. "턱 떨어지겠다, 진호야." "예? 아, 예. 죄송합니다. 형님. 이렇게 큰 게이트는 처음이라서요." 광안리 게이트를 보여 줬으면 어떤 반응이 나왔을까? 진우는 피식 웃었다. 너무 티 나게 놀란 것이 무안했는지 유진호는 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형님, 그런데 진짜 수거팀이나 채굴팀 안 불러도 되겠습니까?" "괜찮아." 진우는 가장 오랫동안 자신과 함께해 온 정예 그림자 병사 30 기를 소환했다. "일은 얘네들이 할 거니까." 진우의 뒤쪽에 갑자기 나타난 그림자 병사들을 보고 잠깐 움찔했던 유진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하!" 검은 갑옷에 검은 눈가. 언제 봐도 위압감이 흘러넘치는 소환수들이었다. 마침 협회 직원들이 진우에게 다가왔다. 그중에는 낯익은 얼굴도 있었다. "성진우 헌터님." "우진철 과장님." 감시과 과장 우진철은 부하 직원에게서 스피드건처럼 생긴 휴대용 마력 측정기를 건네받았다. "먼저 확인부터 해도 되겠습니까?" "그러세요." 진우가 비켜서자 그림자 병사들이 한 걸음씩 앞으로 나왔다. 우진철은 병사들의 마력을 하나하나 측정해 보았다. '맙소사...' 병사들을 체크하는 우진철의 눈이 놀람으로 동그래졌다. 선글라스로 눈을 가리고 있어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라고 할까. '모든 소환수가 전부 A 급에서 B 급 이상이다.' A 급 게이트의 공략허가 기준을 가뿐히 넘어서고 있었다. 그러나 성진우 헌터의 소환수는 이 녀석들이 전부가 아니라는 것. 나머지 소환수들까지 비슷한 수준의 마력을 지니고 있다면... 우진철의 한쪽 입꼬리가 올라갔다. '여태까지 특혜다, 아니다를 놓고 싸웠던 사람들이 전부 바보 같군 그래.' 웃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우진철이 진우를 바라보았다. "체크 완료했습니다.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끄덕. 진우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레이드를 시작하는 데 거치적거릴 것이 없었... 다고 생각했지만. "성진우 헌터님 이쪽을 좀 봐주세요!" "아진 길드의 첫 레이드를 앞두고 계신 데 소감 한 말씀 좀요!" "길드 이름을 아진으로 정하신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창립 멤버인 유수현 씨와는 어떤 관계십니까?" 폴리스라인 너머에서 기자들의 우렁찬 질문이 쏟아지고 있었다. 진우가 만든 길드의 첫 레이드. 그 역사적인 순간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 아침부터 기다린 기자들이 게이트 주위로 발 디딜 틈 없이 모여 있었다. 여타 길드와 다른 점이라면 길드 직원이 아니라 협회가 직접 그들을 통제하고 있다는 것. 진우가 턱짓으로 기자들을 가리켰다. "제 정보는 보호되고 있는 거 아니었습니까?" "성 헌터님의 정보는 보호할 수 있어도 게이트 위치를 보호할 수는 없어서요." 우진철이 씩 웃으며 대답했다. "기자들은 저희가 막아 드릴 테니 무시하시고 레이드에 전념하시면 됩니다." "..." 열심히 기자들과 몸싸움을 하는 협회 직원들을 보고 있자니 새삼 협회장의 배려가 느껴졌다. "협회장님께 감사하다고 전해 주십시오." "예. 전해 드리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우진철이 돌아섰다. 떠날 사람들은 떠나고 결국 게이트 앞에 남은 사람은 진우와 진호뿐. 진우가 유진호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겠어?" "예, 형님." 유진호가 이를 악물고 대답했다. "형님이 가시는 곳이라면 지옥 끝까지라도 따라가겠습니다." 유진호의 목소리가 너무 비장해서 진우는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오냐." 유진호는 D 급 헌터. D 급 헌터가 A 급 던전에 발을 들이는 것은 자살하겠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몇 번이나 거듭해서 말렸지만 유진호는 짐꾼을 자처했다. 결국 진우가 포기했다. '뭐, 이 녀석 하나 정도는 충분히 지킬 수 있으니까.' 한 번 A 급 던전을 경험하고 나면 으레 떨어지지 않겠냐는 생각과, 던전에서 말동무 하나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럼 가 볼까?" "예, 형님." "가시죠." 뒤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진우와 유진호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거기에는 검은 양복 대신 장비를 겹겹이 껴입은 우진철이 서 있었다. "가신 거 아니었습니까?" 진우가 물었더니. "협회장님께서 성 헌터님의 레이드가 정말로 안전한가를 지켜보고 오라는 말씀이 있으셨습니다." 훗날 또 다시 진우의 솔로 레이드 문제가 부각됐을 때 우진철을 증인으로 내세우려는 고건희 협회장의 계획이었다. "그래서 같이 가신다고요?" 갑옷이 익숙지 않은 것인지, 아니면 상황이 부끄러운 것인지 우진철이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같이 가 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다 먹고살자고 하는 짓인데 안 될 건 또 뭔가. "마수만 안 건드시면 됩니다." "저희 과가 달리 감시과겠습니까? 가만히 지켜보기만 하겠습니다." "좋습니다." 진우가 흔쾌히 수락하자 우진철이 고개를 숙였다. "감사합니다, 헌터님." "그럼... 갑시다." 진우의 한마디에 유진호와 우진철이 게이트로 들어갔다. 진우 역시 그들을 따랐다. 그러자 익숙한 기계음과 함께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가 진우를 반겼다. 띠링.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 148 화 '지금쯤 레이드가 시작됐겠군.' 손목에 찬 시계를 내려다보던 고건희 협회장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성진우 헌터의 레이드. 가능하면 직접 가서 지켜보고 싶었지만... 여건상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라 가장 믿을 수 있는 직원을 대신 보내 놓았다. 우진철 과장이 무엇을 보고 올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참,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고건희는 고개를 가로저어 상념을 떨쳐 냈다. 그의 책상에는 이전까지 없었던 서류 더미가 산처럼 높게 쌓여 있었다. 이른바 서류의 탑. 학교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이후부터 아무리 일과에 집중해도 탑의 높이는 줄지 않고 오히려 불어나고 있었다. 그만큼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와중에도 성 헌터에 대한 관심은 줄어들지 않았다. 몸만 성했다면 성 헌터와 함께 던전을 누비는 날도 있지 않았을까? '나도 참 주책이군.' 또 한 번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 고건희가 웃으며 업무를 시작했다. 얼마나 집중했을까? 똑똑. 노크 소리에 고개를 드니 잠깐 사이에 3 시간이 흘러가 있었다. "우진철입니다, 협회장님." 마침 기다리고 있었던 소식. 고건희는 지친 기색도 없이 환한 얼굴로 우 과장을 맞이했다. "들어오게." 끼익.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서는 우진철의 얼굴을 보고 고건희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아니?' 별일 없이 다녀올 줄 알았던 우진철이 초췌한 몰골이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성진우 헌터와 같이 있었는데 어째서 우 과장 얼굴이 저렇게...?' 의문이 든 것도 잠시. "실례지만 잠시 앉아도 되겠습니까, 협회장님?" 간곡히 여쭤 보는 우진철에게, 고건희는 얼른 소파를 권했다. "물론 괜찮지. 어서 앉으시게." 그러고는 자신도 협회장석에서 일어나 우진철의 맞은편 소파에 엉덩이를 붙였다. 털썩. 우진철이 힘없이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그는 몹시 피로한 기색이었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우진철이 입을 열기도 전에 궁금함을 참지 못한 고건희가 먼저 물었다. "어떻게 된 일인가? 자네 얼굴이 왜...?" "예? 제 얼굴에 뭐라도 묻었습니까?" "지금 너무 피곤해 보이는 얼굴이라네. 며칠 잠이라도 설친 사람처럼." "아..." 끄덕끄덕. 우진철은 납득했다는 듯 혼자서 말없이 몇 번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마 너무 놀라서 그런 걸 겁니다, 협회장님." "놀라다니... 자세히 좀 이야기해 보게. 자네, 성진우 헌터의 레이드를 지켜보러 갔던 것 아니었나?" 우진철은 시선을 내리깔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그런 레이드가 아니라..." "...아니라?" 고개를 든 우진철의 눈빛에는 아직도 두려움과 놀라움이 뒤섞여 있었다. "대학살의 현장이었습니다." 감시과의 카리스마. 타고난 강심장으로 일컬어지는 우진철의 목소리가 조금씩 떨리고 있었다. "대학살...?" 고건희는 침을 꼴깍 삼켰다. 자신의 표현을 부정할 생각이 없는 듯, 우진철은 단호하게 대답했다. "예." 그것을 달리 무엇이라 표현할 수 있을까? 그야말로 학살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우진철은 협회장의 부탁대로 보고 온 것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남김없이 털어놓았다. "그 던전은 나가의 소굴이었습니다." 마수에 대한 기억을 더듬어 가는 고건희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나가라면...' 인간과 바다뱀을 섞어 놓은 듯한 모습에 습기 찬 곳을 좋아하며, 전투와 마법에 모두 능해 노련한 헌터들조차 애를 먹는다는 녀석들. 상급 마수면서도 항상 떼를 지어 다니기 때문에 상대하기가 쉽지 않은 마수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성진우 헌터 정도라면 나가 몇 마리쯤 뭉쳐 다닌다고 해서 곤란할 일은 없었을 텐데?' 고건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우진철이 대답했다. "...나가들이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습니다." "...!" 우진철은 당시를 회상했다. 30 마리가 넘는 나가들이 떼를 지어 등장했을 때는 옆에 있는 사람이 누군지도 잊고 잠깐 긴장하기도 했었다. 나가는 그만큼 두려운 마수였다. 그러나. "주위가 어두워졌었습니다." 정확히는 성진우 헌터의 발밑에서 검은 음영이 번져 나갔다고 해야 할까. 무언가 시작되고 있다는 느낌에 털이 곤두서던 그 순간, 그림자 속에서 머리를 드러낸 검은 병사들이 땅 위로 불쑥 올라왔다. 전투, 아니 학살의 시작이었다. -끼아아악! -키하악! -키아아아-! 튀어 나간 성진우 헌터의 소환수들이 나가들을 인정사정없이 찢어 발기기 시작했다. "그나마 갑옷을 입은 인간형 소환수나 하이오크 얼굴을 한 소환수는 좀 나았습니다. 하지만..." 곰처럼 생긴 소환수와 개미 형태의 소환수들은 그야말로 짐승 그 자체였다. "일부 개미들은 마수의 사체를 먹기까지 하다가 분노한 성 헌터님께 걷어차이더군요." 우진철은 나가 사체의 머리를 한 입에 집어 삼키려다 성 헌터에게 차여 그대로 벽에 처박힌 개미형 소환수를 떠올리고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몸을 떨게 만드는 것이 그 끔찍한 소환수인지, 그 소환수를 망설임없이 날려 버리는 진우였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지만. 잔뜩 긴장해 있는 우진철의 눈빛을 보고 고건희까지 덩달아 긴장해 침을 꼴깍 삼켰다. "소환수들은 강하던가?" "강했습니다." 두말할 나위 없이. 인간형 병사, 오크형 병사, 곰과 개미 형태의 병사. 어느 것 하나 약한 소환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압권은. "투구에 길고 가느다란 갈기가 달려 있는 소환수였습니다." 우진철이 잠시 숙였던 고개를 들고 고건희와 눈을 마주했다. "소환수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검에서 번개가 튀었다면 믿을 수 있으시겠습니까?" "맙소사..." 고건희는 경악했다. 전격마법은 불 속성 마법의 파괴력과 빛 속성 마법의 빠르기를 동시에 가지고 있다. 그 탓에 꽤 수준 높은 마법계열 헌터들만이 사용가능한 스킬이었다. 그마저도 연속적인 사용은 힘들었다. 한데 그런 마법이 소환수가 검을 휘두를 때마다 튀어나왔다고? 고건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자신이 아끼는 부하의 입에서 나온 말이 아니었더라면 믿기 힘든 소리였다. 그런데 믿기 힘든 소리가 한 번 더 이어졌다. "제 눈에는 그 소환수가 A 급을 넘어선 수준으로 보였습니다." "그, 그게 정말인가?" 고건희의 목소리가 커졌다. 어떻게 일개 소환수가 S 급에 가까운 능력을 가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곧이어 A 급 헌터들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한 실력자인 우진철이 장담했다. "일대일로 붙어도 제가 그 소환수를 이길 수 있을지... 솔직히 자신이 없었습니다." 과연. 자존심이 강한 우진철의 입에서 그런 평가가 나왔다면 S 급이라고 봐도 무방하리라. "허어..." 고건희가 소파에 등을 기댔다. 성진우 헌터의 대단함이야 진즉 알고 있었지만 소환수들까지 그만한 실력을 지니고 있었을 줄이야. 직접 가서 보지 못하는 현실이 안타까웠다. 이렇게 편하게 앉아 이야기를 전해 듣는 것만으로도 놀라운데, 내내 그 자리에 있었던 우진철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초췌하진 우진철의 모습도 이해가 갔다. 충격의 연속이었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라는 듯 우진철은 더 놀라운 광경은 따로 있었다며 말을 이었다. "개미들이 일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우진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진 길드의 부사장이 매고 있던 짐 가방의 곡괭이를 나눠 받은 개미들이 동굴 벽면에 솟아나 있는 마석들을 캐기 시작한 것이다. 캐낸 마석과 마수 사체를 옮기는 것도 모두 개미들의 몫이었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개미들의 작업 속도에 우진철은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작업'의 화신들. 우진철은 감탄에 감탄을 거듭했었다. "그건 1 인 공격대 따위가 아니었습니다." 혼자서 던전 공략, 사체 수거, 광석 채굴이 모두 가능한 1 인. 우진철은 확신했다. 성 헌터를 1 인 공격대라 칭하는 것은 그에 대한 모독이라고. "그는 길드 그 자체였습니다." 1 인 공격대가 아닌 1 인 길드. 엄밀히 말하자면 별 도움 되지 않는 부사장도 함께였으나, 있으나 없으나 다를 게 없어 보였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군.' 고건희 협회장은 무릎을 탁 쳤다. 얼굴에서 미소가 떠나지 않았다. 처음 기대했던 대로 성진우 헌터가 대한민국 헌터계의 새로운 균형추 역할을 하는 것은 물론이고, 어쩌면 세계의 헌터 지도가 뒤바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저희는 보스방에 도착했습니다." 아직 이야기가 끝난 것이 아니었던가? 고건희는 다시 집중했다. 원래 나가들의 몸집이 인간의 2, 3 배에 달하는데, 보스방에 있는 나가는 보통 나가들의 4 배에 달하는 크기였으며 위압감도 대단했다고 우진철이 말했다. "보스급 마수도 소환수들을 이용해서 금세 해치웠겠지?" 우진철은 고개를 저었다. "오히려 작업 중인 개미들만 빼고 모든 소환수를 해제하시더군요." "아니, 대체 왜?" 놀라는 고건희에게 우진철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저도 궁금해서 물어봤었습니다. 왜 보스를 앞두고 소환수들을 돌려 보내시냐고 말입니다." 이야기에 너무 집중한 나머지 고건희는 저도 모르게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그랬더니?" "성진우 헌터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기억을 더듬기 위함인지 약간의 뜸을 들인 우진철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소환수들에게 너무 의존하고 있으면..." *** "감이 떨어집니다." 진우는 한 걸음 앞으로 나서며 '악마왕의 단검'을 양손에 불러냈다. 병사들을 이용할 필요도 없었다. 눈앞에는 보스급 마수 하나와 녀석을 호위하는 나가 넷이 전부. 진우가 땅을 박차고 달려 나갔다. '신속.' 호위들이 미처 반응할 틈도 없이 순식간에 거대한 나가와의 간격이 사라졌다. '난도!' 수십 발의 은빛 섬광이 보스의 하체에 쏟아졌다. 두두두두-! "크아아아악!" 보스가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치는 사이, 호위들이 진우에게 달려들었다. 진우는 호위 하나의 머리를 밟고 수직으로 뛰어올랐다. 한참 위에 있던 보스와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진우가 단검을 내리그었다. "키악!" 보스의 머리가 세로로 잘려 나가며 메시지가 떴다. 띠링. [던전의 주인을 처치하였습니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반가운 시스템 메시지에 진우의 표정이 밝아졌다. '오!' 땅에 내려선 진우가 한 바퀴 빙글 돌자 사방으로 포위해 덤벼들던 호위 넷이 일제히 쓰러졌다. 하지만 시스템 메시지는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띠링, 띠링, 띠링...! 기계음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뭐야?' 놀라움도 잠시. [101 레벨을 달성했습니다.] [스킬 '그림자 추출'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그림자 저장'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군주의 영역'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스킬 '그림자 교환'의 레벨이 상승하였습니다.] 진우는 자신의 동체시력으로도 따라잡기 힘들 정도로 주르륵 올라가는 메시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 149 화 '허...!' 그렇게 스킬을 써 대도 미동조차 없었던 직업 전용 스킬들의 레벨이 한꺼번에 올라가다니? 쿵쾅쿵쾅. 진우는 오랜만에 가슴이 뛰었다. 현재 보스방에 같이 있는 사람은 유진호와 우진철 두 사람 뿐. 두 사람 다 뭔가를 트집 잡을 이들은 아니기에 눈치 볼 것 없이 상태창을 불러냈다. '상태창.' 띠링. 기계음과 함께 레벨에서부터 착용 아이템까지 현재 상태를 확인할 수 있는 모든 정보들이 떠올랐다. 진우의 시선이 멈춘 곳은 '직업 전용 스킬' 목록. [직업 전용 스킬] 액티브 스킬: 그림자 추출 Lv.2, 그림자 저장 Lv.2, 군주의 영역 Lv.2, 그림자 교환 Lv.2 '정말이다.' 사실을 아는 것과 사실을 보는 것은 다른 일. 진우는 다른 것보다 '그림자 교환'의 레벨이 올라간 걸 확인하고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좋았어!' 무궁무진한 스킬 활용도에 비해 대기시간이 길어서 답답했던 스킬, 그림자 교환. '대기시간은 스킬 레벨에 따라 달라진다고 했었지.' 이걸로 그 답답함이 줄어들게 되었다. 오늘의 가장 큰 소득이었다. 한동안 정체되어 있었던 레벨이 움직인 것보다 그림자 교환 스킬이 향상된 것이 더 기뻤다. '그럼 얼마나 달라졌는지 확인해 볼까?' 진우는 선물상자를 개봉하는 마음으로 그림자 교환 스킬의 정보를 열었다. 띠링. [스킬: 그림자 교환 Lv.2] 직업 전용... ...시전한 후에는 2 시간의 대기시간이 지나야 다시 사용할 수 있습니다. 대기시간은 스킬 레벨에 따라 달라집니다. '...!' 무려 1 시간! 1 레벨을 올린 것만으로도 3 분의 1 이나 되는 대기시간이 사라졌다. 진우는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1 레벨에 1 시간이 줄었다.' 단순하게 계산하면 다음 레벨에서는 대기시간이 1 시간으로 바뀔 가능성이 높았다. 그리고 거기서 레벨을 하나 더 올린다면? '내가 어디에 있건 어머니나 진아가 곤경에 처할 일은 없어진다는 말...' 그렇게 생각하자 짜릿한 전율이 일었다. 진우에게는 그 무엇보다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상기된 얼굴이 티가 났는지 유진호가 웃으며 물었다. "형님,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응?" 진우는 그제야 유진호가 가까이 다가온 것을 알았다. '얼마나 상태창에 집중하고 있었으면...' 유진호의 뒤로 이쪽으로 걸어오는 우진철 과장의 모습도 눈에 들어왔다. 진우는 피식 웃으며 상태창을 닫았다. 아무리 책잡을 일 없는 두 사람이라고 해도 일부러 미친 사람처럼 보일 이유는 없으니까. "그런 게 있어." "예. 형님." 진우와 같이 다니기 시작하면서 눈치가 많이 좋아진 유진호가 더는 캐묻지 않았다. 대신 유진호의 관심은 옆으로 옮겨 갔다. "와-" 유진호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A 급 던전 보스의 실물을 보았다. 상체는 사람의 형상이고 하체는 바다뱀인 괴물. 멀리서도 무지막지하게 컸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 크고 흉측하게 생긴 놈이었다.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것도 어쩌면 당연했다. '형님은 이전에도 상급 던전에 몇 번이나 갔다 오신 걸로 아는데...' 그럴 때마다 이런 녀석들을 때려잡으신 건가? 꼴깍. 유진호가 마른침을 삼켰다. 새삼스럽게 오늘따라 형님이 더 대단해 보였다. 그리고 그런 형님의 옆에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서 있다는 현실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형님!" "응?" "존경합니다." "뭐?" "아닙니다." 실없는 녀석. 진우가 빤히 쳐다보자 유진호는 자기가 생각해도 민망했는지 고개를 돌렸다. 옆에 선 우진철도 적잖이 놀란 모양이었다. '성진우 헌터의 실력이야 이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보스급 나가를 이렇게 간단히 해치울 수 있을 줄이야. 탱커, 딜러, 힐러가 전부 달려들어야 간신히 처치할 수 있는 다른 공격대들이 보면 자괴감에 머리를 쥐어뜯을 장면이었다. '...' 보스급 나가의 사체에 가까이 다가선 우진철은 녀석의 비늘을 톡톡 두들겨보았다. 손끝에서 강철 같은 단단함이 느껴졌다. 나가의 비늘은 갑옷이나 방패 같은 각종 방어구에 쓰일 만큼 견고함을 자랑한다. '그런 비닐을 이렇게...' 하체의 비늘 일부분이 마치 종이처럼 구겨지고 찢겨 있었다. 진우가 스킬 '난도'를 사용한 흔적이었다. '고작 단검 두 자루를 사용해 이만한 파괴력이라니.' 사체를 살피던 우진철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그가 아군이어서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그때. 등 뒤에서 진우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좀 뒤로 물러나 주실래요?" 생각에 잠겨 있어 제대로 듣지 못했던 우진철이 당황하며 뒤를 돌아보았다. "예?" "소환수를 만들려는데 우진철 과장님이 너무 가까이 계셔서요." "아." 어느새 멀찍이 물러나 있던 유진호가 우진철을 향해 손짓을 보냈다. "죄, 죄송합니다." 눈치껏 사과한 우진철이 잽싸게 뒤쪽으로 빠졌다. 그러고는 기대감 어린 눈으로 지켜봤다. 오는 동안 내내 소환수가 만들어지는 과정을 봐 왔지만, 보스급은 처음이었다. '설마 저 커다란 게 그대로 소환수가 되는 건가?' 유진호도 눈을 반짝이며 결과를 기다렸다. 두 사람의 뜨거운 관심 속에서 진우는 천천히 그림자 추출 스킬을 시도했다. '일어나라.' 보스급 마수의 그림자가 주인의 부름에 응답했다. 키야아아그림자에서 솟아오른 손이 땅을 짚더니 이윽고 그림자 위로 몸을 끌어올렸다. 그런데. 소환수는 생각보다 형편없이 작았다. 평범한 나가에서 만들어졌던 소환수와 동급, 혹은 조금 더 큰 수준이었다. '하하...' 손바닥에 땀이 고일 정도로 긴장했었던 우진철이 실소를 머금었다.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죽은 마수의 힘을 빌려 만든 소환수가 어떻게 본체와 비슷할 수가 있을까? 힘이든, 크기든 딱 저 정도가 적당한 것이다. 우진철은 미니 사이즈로 나온 소환수를 보고는 왠지 모르게 마음이 놓였다. '어쩌면 성진우 헌터의 능력은 한계가 명확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고 해도 성 헌터 본인의 전투력이 상상을 초월하기 때문에 절대로 쉽게 볼 수는 없겠지만. 그러나 우진철의 생각과 다르게, 진우는 의외의 횡재에 속으로 쾌재를 부르고 있었다. [군주의 목소리가 망자의 전의를 이끌어 냅니다.] [그림자 강화에 성공했습니다!] [그림자의 레벨이 13 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좋았어!' 그림자 추출의 레벨이 올랐기 때문일까? 이그리트 이후 오랜만에 그림자 추출 과정에서 강화 성공 메시지가 떴다. 진우는 서둘러 병사의 정보를 확인했다. [?? Lv.13] 정예기사 등급 A 급 던전의 보스인 만큼 어금니처럼 '정예기사' 등급이 뜬 것은 그다지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13 레벨! 진우는 레벨을 보고선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레벨이 높아서 그런가? 본체와 힘이 비슷한 것 같네.' 여태까지의 병사들과는 달리 이 녀석은 본체와의 능력치 차이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작아진 몸 안에 숨겨진 강한 마력이 감지됐다. 다만 생전과 다른 크기가 좀 의아했는데, 한 가지 짐작 가는 바는 있었다. '이게 원래 모습 아냐?' 하긴. 다 같은 나가인데 크기가 그렇게까지 다를 수 있을까. 하지만 어금니처럼 마법을 통해 자신의 덩치를 부풀리고 있었던 것이라면 충분히 말이 됐다. 어금니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마력을 컨트롤하고 있다는 점과, 어금니만은 못하지만 강한 마력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 그 짐작을 뒷받침해 주었다. 그때. [병사의 이름을 정해 주십시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병사의 이름을 정해줘야 한다는 메시지가 떴다. 진우는 별생각 없이 '지마'라고 이름을 붙였다. ['지마'로 하시겠습니까?] '그래.' 이로써 그림자 군단에 강한 마법사 하나와 그의 나가 군대가 추가되었다. 추출 과정이 끝나고, 진우는 지마를 자신의 그림자에 흡수시켰다. 마침 그때 주인 잃은 던전이 경고를 보내오기 시작했다. 드드드드바닥에서부터 미세한 진동이 올라왔다. 1 시간 내 게이트가 닫힌다는 신호였다. 떨어져 있던 유진호가 금세 달려왔다. "이제 나가셔야 합니다, 형님." "그래." 마지막으로 주위를 둘러보던 유진호가 웃으며 아쉬운 듯 입맛을 다셨다. "근데 이건 좀 아깝네요, 형님." 유진호의 시선은 보스급 마수의 사체에게 고정되었다. "요거 밖으로 가져가면 큰돈이 될 텐데." 던전의 보스가 제거되면 곧 게이트가 닫힌다. 그 말인즉 보스의 사체를 던전 밖까지 가지고 나가려면 상당한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뜻이었다. 자칫 잘못해 갇혔다가는 영원히 던전의 미아가 된다는 소리니까. 그래서 보스급 마수의 사체는 좀처럼 보기가 드물었다. 일단 대체적으로 덩치가 커서 운반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었다. 물론 보기 드문 만큼 가격도 상당했다. 그러나 진우는 아쉬워하는 유진호에게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가져가면 되지, 뭐가 문제야?" "예?" 유진호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물었다. "저건 가져가긴 너무 크지 않습니까, 형님?" 그러자 진우가 피식 웃었다. "괜찮아." 힘은 얼마나 셀지 몰라도 일단 덩치는 저것보다 훨씬 큰 녀석이 이쪽에도 하나 있으니까. '나와.' 진우의 명령이 떨어지자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하이오크 대주술사 출신의 병사 하나가 소리 없이 나타났다. 스르륵고개 숙여 인사하는 어금니에게 진우는 턱짓으로 사체를 가리켰다. '실시.' 순식간에 자신의 몸을 거대화한 어금니가 자기 크기의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보스급 나가를 질질 끌고 보스방을 나가 버렸다. "헉!" 그 충격적인 장면에 우진철의 동공에 강한 지진이 일었다. '방금 그건...?' 분명 놈은 얼마 전 헌터스의 레이드에서 진우가 쓰러뜨리는 걸 목격했었던 그 하이오크족 주술사였다. 그런데 그때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였다. 그냥 크기만 커진 게 아니다. 거대화하면서 확 풍겨 나왔던 마력은 전에 봤을 때보다 훨씬 더 무시무시했다. 우진철은 경악했다. '뭐야? 마수가 소환수로 만들어질 때 약해지는 거 아니었나?' 그렇다면 방금 그 하이오크 주술사 소환수는 어떻게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A 급 던전의 보스를 소환수로 만들 수 있는 데다 거기서 더 강화시킬 수도 있다고? '이게 대체 말이나 되는...'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우진철에게 진우가 물었다. "우 과장님은 같이 안 가세요?" "아..." 만약 놀라는 것만으로 수명이 줄어든다면 오늘 하루 만에 수명의 반은 날려 버린 듯했다. 물어보고 싶은 말들이 산더미였다. 하지만 진짜 물었다가는 어떤 대답이 돌아올지 무서워서 묻고 싶지 않기도 했다. 망설이던 우진철이 결국 피곤한 기색으로 대답했다. "...가야죠." *** 진우가 게이트에서 나오자 슬슬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싶었던 기자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뭐야, 벌써 끝난 거야?" "설마?" A 급 던전을 3 시간도 안 돼서 클리어했다고? 기자들의 머릿속에 불이 팍하고 들어왔다. '대박 특종이다!' 카메라를 쥔 기자들이 행여나 진우를 놓칠까 싶어 너 나 할 것 없이 게이트 앞으로 달려들었다. 하지만 대기하고 있던 감시과 헌터들이 금세 그들을 저지했다. "아 좀 나와 봐요! 인터뷰 안 한다니까?" "사진 한 방만 찍자고요! 아니, 나 사진 하나 못 건져서 잘리면 당신들이 책임질 거야?" "사진 한 장 찍는다는데 왜들 이러실까!" 기자들과 감시과의 몸싸움이 치열하게 진행되던 그때. 쿵. 뭔가 묵직한 것이 지면을 딛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어..." 기자 하나의 손에서 카메라가 떨어졌다. 콰직. 떨어진 카메라가 다른 기자들의 발에 밟히고 있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는 게이트를 가리켰다. "저, 저기..." 정확히는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엄청난 크기의 괴물을. "도, 도망가! 아니, 찍어! 얼른!" "저거 찍고 있지?" "예, 예!" 몸싸움을 관두고 카메라를 들어 올린 기자들이 황급히 셔터를 눌러대기 시작했다. 괴물이 공격할까 두렵기도 하련만 기자들은 무언가에 홀린 듯 정신없이 움직였다. 촤촤촤촤촤촤촤촤착-! 열심히 게이트에서 보스급 나가 사체를 끌어내던 어금니가 뒤쪽에서 꽂히는 시선들을 느끼고 천천히 돌아섰다. '...?' 기자들뿐만 아니라 경찰, 협회 직원, 심지어 근처를 지나가 행인들까지 발걸음을 멈추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왠지 민망해진 어금니는 쑥스러운 듯 자신의 뒷머리를 긁적였다. = 150 화 한 남자가 대형병원 안으로 숨어들었다. 그가 유난히 주위를 두리번거리고 있는 이유는 하나. 손에 들린 기름통 때문이다. 좀처럼 의욕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었던 그의 눈이 어쩐 일로 활기를 띠었다. '나를 우습게 봤다 이거지?' 그는 죽음을 각오한 상태였다. 그리고 한참을 서성인 끝에 간신히 적당한 곳을 찾아냈다. 인적이 드문 병원의 복도에서 멈춰선 그는, 가져온 휘발유를 조심스레 뿌리기 시작했다. '내가 혼자 죽을 것 같아?' 일주일 전. 만취해 비틀거리던 그는 지나가는 행인에게 아무 이유 없이 시비를 걸었다가 그만 흠씬 얻어맞고 말았다. 결과는 병원행. 잠시 뒤 의식을 되찾은 그가 자신을 치료하고 있던 의사에게 말했다. 난 병원비가 없으니까 치료는 이쯤하고 그냥 보내 달라고. 그때. 그는 보았다. 자신을 한심하다는 듯 내려다보는 의사의 눈빛을. 그 의사 놈. 지금은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지만 며칠이 지나도 그 눈빛만은 잊히지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다짐했다. 복수해 주마. 이렇게 자신이 실려 왔던 병원을 다시 찾은 데에는 그런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어차피 오래 살 생각 없었던 목숨이었다. 병원 구석구석 휘발유를 뿌린 그는 마지막 남은 기름을 자신의 머리 위에 콸콸 부었다. "다 같이 가는 거야." 그의 목소리가 악의에 찌들어 있었다. 물론 규모가 엄청난 병원이다 보니 이 정도로 전부 태우진 못할 거다. 그래도 몇 명은 데려갈 수 있겠지. 그 몇 명에 의사 놈이 포함되어 있으면 좋고, 아니면 뭐 어쩔 수 없고. 어차피 도박 빚으로 말아먹은 인생, 남들처럼 조용히 사라질 생각은 없었다. 텅텅 빈 기름통을 바닥에 내던지고, 여기저기를 뒤적거리던 그가 주머니에서 라이터 하나를 꺼냈다. 엄지에 닿은 부싯돌 휠을 돌리기만 하면 이 지긋지긋한 인생도 끝이었다. "..."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엄지에 힘을 주었다. 그런데 그때. 서늘한 바람이 잠깐 스쳐 지나갔다. '바람?' 이상함을 느낀 남자가 좌우를 살폈다. 창도 나 있지 않은 복도에서 어떻게 바람이 부는 걸까? '뭐지?' 주변을 둘러보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가 문득 허전한 느낌에 손을 내려다보았다. 들고 있던 라이터가 어느새 사라져있었다. '...!' 귀신이 곡할 노릇. 혹시나 저도 모르는 사이 떨어뜨렸나 싶어 바닥을 살펴봤지만 헛수고였다. '대체 이게 어디로...' 의아해하며 고개를 드는 그의 눈앞에, 크고 까만 무언가가 두 발로 서 있었다. 손과 발이 달린 벌레였다. 놀란 남자가 튀어나올 것 같은 눈으로 비명을 지르기 직전, 그 벌레가 손을 뻗어 입을 틀어막았다. "읍!" 킥킥. 벌레는 반대쪽 손의 검지를 들어 올려 자기 입가에 붙였다. "쉬-" 소란을 피울 수는 없지. 근처 병실에 왕께서 지키라고 한 인간 여자가 잠들어 있으니까. 남자는 몸부림쳤지만 손끝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 "읍, 읍!" 그의 눈동자에 비치는 벌레, 아니 베르의 벌어진 입이 점점 커져만 갔다. *** 어째서 101 레벨이었을까?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진우는 오늘 갑작스럽게 업이 된 스킬들을 떠올렸다. 생각에 잠겨 있는 와중에도 핸들을 잡고 있는 손은 부드럽게 움직였다. '100 레벨도 아니고 말이지.' 레벨로 인해서 뭔가 변화가 생긴다면 100 레벨에서가 아닐까 예상했었다. 하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직업 전용 스킬들은 모두 101 레벨에서 한 단계 위로 업그레이드 되었다. 여러 가지 추측들이 스쳐 지나갔으나, 현재로써 가장 유력한 가능성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1 이라는 숫자가 가진 의미때문에. 1 은 시작을 뜻한다. 그래서 전체 레벨이 101 로 넘어가는 순간 스킬 레벨의 제한이 풀리고 업이 가능해진 것이 아니었을까? '그게 아니라면...' 진우의 표정이 굳어졌다. 개인적으로 이쪽은 좀 아니길 바라지만. '내가 51 레벨에 전직을 했기 때문에...' 그로부터 딱 50 레벨이 지난 지금 스킬 레벨이 올라갔을 가능성이 있었다. 그럼 다음 단계는 151 레벨을 찍어야 가능해진다는 말이 된다. '...싫다.' 최근 레벨업 속도를 생각하면 역시 이쪽은 가설로만 그쳐줬으면 하는 바람이었다. 곧 길드 사무실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진우는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아진 길드의 애마 '봉고'에 탑승해 있는 사람은 진우 혼자뿐. 유진호는 마무리를 하고 오겠다며 현장에 남았다. 레이드는 끝났지만 던전에서 획득한 전리품들을 중개업자에게 넘기는 과정이 필요했다. 중개업자들을 모두 자신이 불러들인 만큼 끝까지 책임을 지고 싶은 듯했다. -맡겨 주세요, 형님! 자신감 넘치던 유진호의 목소리가 아직 귓가에 생생했다. '잘하려나?' 부사장이 의욕이 넘치는 건 좋지만, 역시 전문 직원들을 고용해야 하지 않을까. 진우는 곧 추가로 직원을 모집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주차장을 빠져나왔다. 그런데. '응?' 멀리서 길드 건물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낯익은 얼굴 하나가 보였다. 그 낯익은 얼굴도 곧 진우를 발견했다. "아..." 우뚝 멈춰 선 그녀. 차해인은 놀란 얼굴로 천천히 뒷걸음질 치더니 이내 돌아서 달아나기 시작했다. '허?' 진우는 기가 막혔다. 사람을 보자마자 도망치는 이유는 둘째 친다고 해도. '달리면 도망칠 수 있을 것 같나?' 저 여자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는 걸까. 갑자기 오기가 생긴 진우가 '신속' 스킬을 사용해 전력으로 튀어 나갔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배경만이 빠르게 뒤로 지나갔다. 차해인과의 간격은 금방 줄어들고. '뒤에서 잡거나 건들면 다칠 수 있으니까.' 가볍게 뛰어오른 진우가 공중에서 회전해 차해인이 달려오는 방향으로 착지했다. '...!' 차해인의 눈이 커졌다. 도주로가 가로막힌 차해인은 진우에게 양쪽 어깻죽지를 모두 붙들렸다. "꺅!" 이렇게 S 급 헌터 두 사람의 추격전이 싱겁게 끝이 났다. 진우에게 잡히고 만 차해인은 시선을 마주치지 못했다. 의아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던 진우가 차분히 물었다. "왜 사람을 보고 도망가요?" "..." 아니, 한발 양보해서 도망갈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럴 거면 우리 사무실 쪽으로는 왜 온 겁니까?" 그렇게 피하고 싶었다면 아예 근처에 얼씬도 하지 않았으면 될 일을. 진우가 그렇게 묻자 차해인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가... 주차장에..." 아. 어쩐지 못 보던 차가 며칠째 세워져 있더라니. 그날. 그녀가 길드에 들어오겠다며 찾아 왔을 때. 길드 사무실에서 협회의 체육관으로 바로 이동한 이후, 차를 찾아가지 않고 계속해서 주차장에 세워 뒀었던 모양이었다. '오늘 우리 길드가 레이드를 한다는 소리를 듣고 몰래 찾아가려 했나 보네.' 하지만 A 급 게이트의 공략이 불과 2 시간 남짓 만에 끝날 줄은 그녀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그 결과 두 사람은 마주치게 됐고, 도주를 시도했으나 잡히고 말았다. '...' 진우가 말없이 바라보자 차해인은 고개를 숙였다. 나직이 한숨을 내쉰 진우가 붙들고 있던 그녀의 어깻죽지를 놓아주었다. "도망 다닐 필요 없어요." 진우는 웃으며 말했다. "생각이야 바뀔 수도 있는 거니까." 있던 관심이 사라질 수도, 없던 관심이 생겨날 수도 있는 것이 사람 마음 아닌가? 굳이 불편하게 서로를 피해 다닐 것까지야. "..." 그러나 차해인은 대답 한마디 없이 여전히 숙인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야기할 기분이 아닌가?' 어쩌면 다짜고짜 붙잡아서 기분이 나빠진 건지도 모르고. "그럼." 진우는 눈인사를 보내고서 돌아섰다. 아니, 돌아서려고 했다. 그런데 방향을 틀기 직전 차해인이 급히 소매 끝을 붙잡았다. "저기..." "...?" 진우의 표정에 물음표가 네다섯 개쯤 나타났을 때, 망설이던 그녀가 어렵게 입술을 뗐다. "시간 좀 내주실 수 있나요?" 실컷 도망칠 때는 언제고 지금은 또 시간을 내달라니? 진우의 당혹감이 느껴졌는지 차해인이 급히 말을 이었다. "실은 민병구 헌터님이 꼭 전해 달라는 이야기가 있었어요." 의외의 이름이 나오자 진우의 표정이 달라졌다. "저한테요?" 끄덕끄덕. 차해인이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였다. "성 헌터님이 가진 능력에 대해서 해 줄 말이 있다고..." 그럴 리가. 진우는 민병구 헌터와 접점이 없었다. 처음이자 마지막 접촉이 죽은 그를 되살려 잠깐 그림자 병사로 만들었을 때였다. 그는 훌륭하게 임무를 완수했고, 덕분에 차해인은 목숨을 건졌다. 이렇게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것도 전부 그 덕택이었다. 하지만 언제 말을 남길 새가 있었단 말인가? 그 전에는 힘을 보인 적이 없었고, 힘을 썼을 땐 그가 죽고 난 뒤였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진우가 믿기 힘들다는 눈빛을 보내자 차해인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성 헌터님의 힘은..." 그녀가 거기까지 말했을 때 진우가 말을 잘랐다. "잠깐만요." 그 이야기가 진짜든, 가짜든 아무래도 이렇게 길가에 서서 들을 만한 이야기는 아닌 듯했다. 주위를 둘러보던 진우가 말했다. "어디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합시다." *** 유명한 회장은 김 비서가 전해 주는 자료들을 넘겨받았다. "이건?" "서울 일신병원에서 조사해온 자료입니다." 일신병원이라면 성 헌터의 어머니가 입원해 있던 그 병원. 유명한의 눈빛이 예리하게 바뀌었다. 그는 말없이 문서를 읽어 내려갔다. '간호사가 아침에 병실을 들렀더니 깨어나 있었다? 그런데 그 옆에는 성진우 헌터가 있었고?' 이상한 점은 또 있었다. 병원 측에서는 환자의 상태를 생각해 정밀 검사를 권유했으나, 성 헌터는 강력하게 퇴원을 요구했다고 한다. 유명한 회장은 무심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답지 않아...' 그는 어머니의 병원비를 충당하기 위해 목숨을 걸고 레이드에 임했을 정도로 효심이 깊은 남자였다. 한데. 어머니의 상태도 정확히 알지 못하면서 일방적으로 퇴원을 요구했다? '그 반대겠지.' 성진우 헌터는 이때 어머니의 상태를 확신했다는 뜻이다. 하지만 어떻게? 병원에서 보내 준 자료를 읽는 유명한의 미간에 주름살이 점점 늘어갔다. 성진우 헌터의 모든 것이 미스터리였다. '이중 던전의 사고, 갑작스런 재각성, 어머니의 쾌유. 거기다 무수한 소환수를 만들어 내는 정체불명의 능력까지...' 우연이 계속되면 필연이라고 했던가. 무언가 있다. 분명히. 자신의 날카로운 감각이 그리 말하고 있었다. 유명한은 결심을 굳혔다. "그를 만나 봐야겠네." "오늘 중으로 사람을 보내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네." 김 비서가 놀란 듯 물었다. "회장님께서 직접 가신다는 말씀이십니까?" "자네는 지금 내가 만나려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나?" "..." 그 한마디에 김 비서가 입을 꾹 다물었다. 그때. 위이잉김 비서의 핸드폰이 몸을 떨었다. 유명한 회장이 다시 자료로 눈을 돌리며 말했다. "괜찮네." 잠깐 고개 숙였던 김 비서가 빠르게 핸드폰을 확인했다. 속보가 담긴 문자였다. "회장님." 유명한 회장이 눈을 들었다. '일본에서 속보가 날아왔는데 보시겠습니까?" 김 비서는 어지간한 일로 호들갑을 떠는 성격이 아니다. 그는 만약 뭔가를 보겠느냐고 묻는 다면, 그건 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과 같았다. 끄덕. 유명한은 고개를 움직였고, 김 비서는 기다렸다는 듯 벽에 걸린 대형 TV 를 켰다. -예. 박성우 특파원입니다. 지금 보시는... 그러자 화면에서 일본 최고 번화가의 모습이 생중계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일본, 도쿄, 신주쿠. 일본의 심장부라 할 수 있는, 도쿄에서도 가장 활기를 띠고 있어야 할 거리에 어두운 그늘이 드리웠다. 단순한 비유가 아니다. 도로 위의 차, 자전거, 사람, 너 나 할 것 없이 모두가 그림자 속에서 움직임을 멈추었다. 탁. 멈춘 차에서 하나둘 사람이 내려섰다. 도로가 통제 불능으로 막혀 가는데도 누구 한 사람 경적을 누르거나 소리치는 이가 없었다. 마치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들의 시선은 전부 한쪽으로 향해 있었다. "맙소사..." "신이시여." 하늘을 가려 그늘을 만들 만큼 거대한 게이트. 사람들은 고층 빌딩에 맞먹는, 상식을 초월한 크기의 게이트를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다. "..." "..." 넘치는 사람들도 북적거리던 거리가, 구역질이 날 것 같은 거북한 정적에 서서히 잠식되고 있었다. *** 수상관저의 분위기도 심상치 않았다. 쾅! 분을 이기지 못한 총리가 리모컨을 던져 속보를 내보내던 TV 를 부수었다. "초, 총리님!" 보좌관들이 벌떡 일어섰으나 총리의 날카로운 눈빛에 아무 말도 못하고 다시 앉았다. "왜 헌터협회는 말이 없는 것이요?" 한국에 다녀온 뒤로 부쩍 수척해진 일본의 헌터협회장, 마쓰모토 시게오가 힘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총리의 얼굴이 굳어졌다. "빌어먹을..." 도쿄의 중심가에 저런 것이 나타났는데 책임을 져야 할 협회가 침묵하고 있다니! "도쿄 도심 한복판에 S 급 게이트가 나타났는데 협회에서조차 아무런 대책이 없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요, 이게!" 총리의 절규. 그러나 안에 있던 모두는 합심이라도 한 것처럼 굳게 입을 다물 뿐이었다. 세상의 고뇌를 전부 혼자서 짊어진 듯 인상을 찌푸리고 악을 써대던 총리가 털썩 의자에 주저앉았다. "솔직히 말해 보시오, 협회장." 그의 손가락이 금이 간 TV 화면을 가리켰다. "저것이 터지면 어떻게 되는 것이오?" "...끝장나고 말 겁니다." 역시나. 총리가 머리를 감싸고 중얼거렸다. "그런가... 고작해야 게이트 하나에 도쿄가 끝나 버리고 마는 건가." "그게 아닙니다, 총리님." "...?" 총리가 고개를 들어 올리자 마쓰모토 협회장이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일본 전체가 끝난다고 말씀을 드린 겁니다." = 151 화 "조용한 곳이... 요?" 주위를 둘러보는 차해인의 표정이 당혹감으로 물들어갔다. 진우의 얼굴도 굳어졌다. '어째 주변 건물들이 죄다...' 남녀가 둘이서 들어가기에는 부적절한 곳들뿐인지. 어색한 시간이 길어지기 전에 진우는 말을 돌렸다. "차도 찾아가셔야 하니 일단 사무실로 가실래요?" "아, 네." 끄덕끄덕. 발그레해진 얼굴로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이는 그녀가 귀엽다는 생각도 잠시. 진우가 사무실 방향으로 돌아섰다. "가시죠." "네." 진우는 방금 그녀와 달렸던 거리를 말없이 되돌아가면서 새삼 그녀가 S 급 헌터라는 사실을 자각했다. '참 멀리도 왔네.' 잠깐 뛰어다녔을 뿐인데, 일반인들의 걸음으로 10 분도 넘게 걸어야 했다. 길드 사무실은 3 층. 입구에 도착한 진우가 센서에 엄지를 대자 잠금이 풀리며 문이 열렸다. 진우는 곧장 회의실로 직행하려다가, 입구에 서 있는 차해인을 돌아보았다. "...?" 안 들어올 거냐고 눈빛으로 묻는 진우에게 차해인이 되물었다. "너무 어둡지 않아요?" 아. 그제야 진우는 안이 어두컴컴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웬만큼 어두워서는 시야에 지장이 없다 보니 가끔 이런 경우가 생기곤 했다. 차 헌터는 아직 어둠에 내성이 없는 모양이었다. 틱. 스위치를 누르니 실내가 아주 환해졌다. 밝아진 내부를 두리번거리던 차해인이 조심스레 물었다. "사무실에 아무도 없어요?" "부사장이 현장에 남겠다고 해서요." "설마 길드에 직원이 두 사람뿐인 건..." 무슨 문제라도 있냐고 말하는 것 같은 진우의 표정을 보고서, 차해인은 재빨리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눈앞의 남자에게는 세간의 상식이 통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남들보다 비교적 빨리 배워 나가고 있는 차해인이었다. '가만.' 진우를 따라 회의실로 향하던 차해인의 걸음이 멈췄다. '그럼 지금 길드 건물 안에 있는 사람이라고는 성진우 씨와 나 두 사람이 전부?' 차해인의 눈빛에 긴장감이 어렸다. 그리고 동시에 이런 긴장감이 정말 오랜만이라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아마 각성자가 되고 나서는 처음...' S 급 헌터, 그것도 S 급들 중에서도 하이레벨에 속하는 그녀를 긴장하게 만들 수 있는 남자가 세상에 몇이나 될까? 아까부터 '조용한 곳'이라는 단어가 이상하게 자꾸 뇌리에 남아 의식되는 바람에. 가슴이 조금씩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자신이 S 급 헌터에서 평범한 여자로 돌아간 것 같아 웃음이 나왔다. 쿡쿡. 웃음을 삼키는 차해인을 보며 진우는 고개를 갸웃했다. '길드 직원이 두 사람인 게 그렇게 웃기나?' 하긴. 대한민국 최고의 길드인 '헌터스'에서 부사장직을 맡고 있는 그녀가 보기에는 어이가 없을 만도 하겠지. 진우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며 회의실로 들어갔다. 가까운 자리에 차해인을 앉힌 진우가 그 맞은편 의자로 가서 앉았다. "어떻게 된 겁니까?" 그 한마디에 회의실의 공기가 변했다. "어떻게 민병구 헌터가 나에 대한 이야기를 차 헌터님께 남길 수 있었다는 거죠?" 진우의 눈빛이 진지해졌다. 진우는 차해인을 잘 알지 못했지만, 그녀가 관심받기 위해 허무맹랑한 거짓말을 늘어놓을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 기억을 떠올리는 데 시간이 걸리는 건지, 아니면 어디서부터 말을 해야 할지 고민인 건지. 차해인이 입술을 떼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날..." 고개를 든 차해인과 눈이 마주쳤다. 선해 보이는 눈동자가 물기를 촉촉이 머금고 있었다. 그걸 보고 진우는 이야기가 어디서부터 시작될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차해인이 조용히 말을 이어 나갔다. "목소리가 들렸어요." *** 심연으로 빨려 들어가는 차해인을 붙든 것은 위쪽에서 뻗어 온 민병구의 손이었다. "민병구... 헌터님?" 민병구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전신을 검은 갑옷으로 둘러싼 그의 복장이 생소해 차해인은 몇 번이나 그의 모습을 확인해 보았다. 드러난 맨얼굴이 아니었으면 절대 그라는 사실을 알 수 없었으리라. 차해인이 물었다. "여긴... 여긴 어디죠?"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 손을 놓으면 어떻게 되는지는 잘 알고 있습니다." 차해인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려고 했으나, 민병구가 급히 말렸다. "안 돼요!" "네?" 화들짝 놀라며 다시 고개를 치켜든 차해인. 민병구가 심각한 얼굴로 설명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다시는 올라올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는 민병구의 눈빛에서, 차해인은 그리움과 비슷한 어떤 감정을 읽었다. '설마...' 그녀는 의식을 잃기 직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제주도 레이드. 여왕개미. 그리고 갑자기 나타난 끔찍한 괴물 개미 하나. 뭔가 무서운 것이 다가온다는 사실을 느낀 뒤엔 깊은 어둠이 내려앉았었다. "제가... 죽은 건가요?" 민병구는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요." "그럼 민병구 헌터님은?"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민병구가 거기서 차해인의 말을 잘랐다. "이제 시간이 없으니 꼭 필요한 말만 하겠습니다." 아마도 지금이 마지막 기회. 이 기회를 놓치면 영영 이 말을 전할 수가 없을 터. 민병구는 절박한 표정으로 말했다. "성진우 헌터에게 전해 주세요." '성진우...?' 갑작스럽게 튀어나온 이름에 차해인이 당황하는 것도 잠시. 민병구가 말을 이었다. "자신이 가진 힘을 조심해야 한다고." "무슨 뜻이죠, 그게?" "눈치채셨겠지만 저는 한 번 죽었습니다. 저 밑으로 떨어졌었죠. 하지만 누군가가 저를 다시 끌어올렸습니다. 끝없는 어둠으로부터." "설마 그 사람이...?" "예. 성진우 헌터였습니다." 차해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성진우 헌터가 아무리 강하다지만 죽은 사람을 되살리다니? 하지만 민병구는 담담히 자신이 겪은 바를 들려주었다. "하지만 되살아난 저는 제가 아니었어요. 자아와 의식은 있지만 그를 위해서는 어떠한 것도 할 수 있을 것 같은... 오직 그를 위해서만 살아가는 맹목적인 노예가 된 기분이었습니다." 그가 누구인지는 물을 필요도 없었다. 차해인은 침을 꼴깍 삼켰다. "그게 또 너무나 행복한 느낌이어서 더 두려웠죠." 민병구는 씁쓸한 표정이었다. "성진우 헌터님께 알리세요." 그의 얼굴이 진중하게 굳어졌다. "그 힘은 너무 강력하고 무서운 것입니다. 그도 그걸 알고 있어야 합니다." 하지만 더 끔찍한 것은. 민병구는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방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성 헌터의 명령대로 그림자 병사가 되어 일어섰을 때, 그는 진우 뒤에 끝없이 도열한 검은 병사들의 환영을 보았다. 그 수는 수만, 아니 수백만.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병력들이 군주의 명령을 기다리는 듯, 조용히 진우 뒤에서 숨을 죽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 군대의 선봉에 선 대장군과 눈이 마주쳤을 때. 의식이 사라지고 눈앞에는 차해인이 있었다. 민병구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에 더해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또 있다는 사실도. 바로 성진우 헌터에게 자신이 얼마나 무서운 힘을 품고 있는지 알려 주는 것. 그는 정신적으로 진우와 연결되었던 잠깐 동안 그 힘의 실체와, 그의 진짜 군대를 보았다. 시간이 없음을 직감한 민병구가 외쳤다. "기억하세요! 성 헌터의 진짜 군대는..." 그때. 위쪽에서 쏟아져 내려온 빛이 차해인을 감쌌다. 민병구의 얼굴이 경직됐다. "그의 진짜 군대는...!" 그러나 그의 목소리는 공허한 메아리 속에 묻혀 아래로, 아래로 점멸해 갔다. *** "..." 차해인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그마저도 꿈을 꾼 것처럼 흐려졌다가 최근에야 간신히 돌아온 기억이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들은 진우는 무거운 얼굴이 되었다. '죽기 직전의 그녀와 죽어서 그림자가 된 민병구 헌터의 의식이 만났다?' 믿기 힘든 소리였다. 혹시 죽음의 위기로 큰 충격을 받은 그녀가 주위에서 들은 이야기를 바탕으로 잘못된 기억을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진우가 그렇게 말했더니. "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차해인이라고 왜 그 생각을 못했을까? 그래서 며칠을 고민한 끝에 지금에서야 말을 전하게 된 것이었다. 진우는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핸드폰을 내밀었다. "연락처를 드릴 테니 혹시 또 다른 기억이 떠오르시면 바로 연락해주실래요?" 차해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또 그러면 바로 연락드릴게요." 진우는 그녀의 얼굴이 조금 밝아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 일본은 즉각 국제사회에 도움을 요청했다. S 급 전력의 절반 이상을 잃은 일본으로서는 피치 못한 선택이었다. 하지만 국제사회의 시선은 싸늘했다. 이웃나라인 한국에서 벌어진 위기를 모른척하다 자기 발등에 불이 떨어지고 나서야 겨우 진화에 나섰던 일본이 아닌가? 국제사회는 이를 잊지 않고 있었다. S 급 헌터들을 절대 국외로 유출하지 않는 미국을 비롯하여, 아시아의 헌터 최강국 중국마저 등을 돌리자 일본은 망연자실했다. [미국, 일본에서 손 떼.] [중국은 일본의 멸망을 지켜만 볼 것인가?] [도쿄 게이트, 벌써 이틀. 앞으로 남은 시간은...] [과연 한국의 선택은?] 세계의 시선이 일본으로 쏠리기 시작했고, 자극적인 기사들이 연일 쏟아져나왔다. 그때. 절망과 공포에 휩싸여 가는 일본에 구원의 손길을 내미는 유일한 헌터가 있었다. 유리 오를로프. 러시아 국적의 S 급 헌터인 그가 일본 정부와 협상을 타진해 보기 위해 관계 인사들을 초대했다. 일본 헌터협회장 마쓰모토 시게오는 곧바로 러시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유리는 일본 측 인사들을 마중 나가지도 않은 채 궁궐 같은 자신의 집 거실에서 손님들을 맞이했다. "마쓰모토 시게오입니다." "유리 오를로프요. 다들 잘 아시겠지만 보조계열 헌터 중에선 이 몸이 최고로 불리고 있지." 간단한 소개가 끝난 후 두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앉았다. 유리는 일본 측에 미리 부탁해 두었던, 게이트와 관련된 자료들을 넘겨받고서 찬찬히 검토를 시작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연신 고개를 끄덕이며 계산해 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하루에 100 억. 돈만 제대로 넣어준다면 원하는 시간까지 계속해서 게이트를 막아 주겠소." 하루에 100 억? 말도 안 되는 가격에 일본 측 관계자들이 발끈했으나, 마쓰모토만은 예외였다. 그가 손을 뻗어 제지하자 움찔했던 일본 쪽 헌터들이 다시 자리에 앉았다. "당신은 말이 좀 통하는 모양이군." 유리는 금으로 덧씌워진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1 년에 3 조 6 천억. 그 돈이면 나라를 살릴 수 있어. 36 조가 아니잖아. 어때? 하루 100 억에 나라를 사겠나, 아니면 그 돈이 아까워 나라를 포기하겠나?" 공식적으로 알려진 세계 최고 부호의 재산이 100 조를 조금 넘는다. 1 년에 3 조 6 천억은 결코 적지 않은 돈. '그러나 일본이라는 나라와 비교했을 때는 하찮은 돈이다.' 결심한 마쓰모토가 입을 열었다. "돈은 지불해 드릴 수 있습니다." "좋소. 그럼 당장 계약하고 일단 계약금부터." "하지만 그전에 먼저..." 고용인에게 계약서를 가져오라고 지시하던 유리가 다시 마쓰모토를 바라보았다. "...?" 그의 노골적인 시선 앞에, 마쓰모토가 정중히 말했다. "당신의 실력을 한 번 보여 주실 수 있겠습니까?" 통역에게서 그의 말을 전해 들은 유리가 배를 잡고 웃었다. "으하하하하하핫!" 한참 숨이 넘어갈 듯 웃던 그가 눈물을 찔끔거리며 말을 이었다. "지금 당신네들이 찬밥 더운밥을 가릴 처지인가? 내 구두를 핥으며 빌어도 모자를 지경에?" 그때였다. 마쓰모토의 호위를 위해 러시아 땅을 밟았던 일본의 S 급 헌터 두 사람이 더 이상의 모욕을 참지 못하고 벌떡 일어섰다. "이보게들!" 마쓰모토가 급히 소리쳤지만, S 급들의 눈에선 불꽃이 튀었다. 그런데. 쾅! 쾅쾅! 움직이려 했던 S 급 헌터들이 뭔가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그 안에서 꼼짝도 하지 못했다. 흡사 유리병에 갇힌 생쥐 꼴로 눈빛을 교환하는 두 사람. 유리는 두 사람을 보고 또다시 낄낄 웃어댔다. "나올 수 있으면 나와 봐. 내 허락 없이는 거기서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을 테니까." 결계 능력자 유리 오를르프. 그의 힘에 S 급 헌터 두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마쓰모토까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유리는 입꼬리를 올리며 다시 제안했다. "하루 100 억에 S 급 게이트를 틀어막아 주고 덤으로 저치들 목숨까지 얹어 주지. 어때? 이만하면 그쪽도 만족할 만한 거래가 아닌가?" 그의 이가 실내조명을 반사하며 금빛으로 빛났다. S 급 헌터 둘을 아무렇지 않게 묶어 둘 수 있는 결계의 위력. '그러면 S 급 게이트도...' 마쓰모토가 러시아에 입국한 이후 처음으로 웃음을 보였다. "잠깐 전화 좀 쓸 수 있겠습니까?" "물론이오." 다음 날. 세계의 뉴스는 유리 오를르프의 이름으로 빼곡이 가득 찼다. = 152 화 집으로 돌아온 진우는 상태창을 불러냈다. '상태창.' 원하는 것은 스킬 정보. 아래로 내려가던 시선이 레벨, 직업, 칭호를 지나 스킬창에서 멈췄다. [스킬] 패시브 스킬: (알 수 없음) Lv.MAX, 근성 Lv.1, 단검의 대가 Lv.max 액티브 스킬: 신속 Lv.max, 살기 Lv.2, 은신 Lv.2, 난도 Lv.max, 단검 쇄도 Lv.max, 지배자의 손길 Lv.max 스킬창에 있는 많은 스킬들이 레벨 최대치를 찍고 최종형태로 변하거나 최종형태를 앞두고 있었다. 스킬 레벨의 최대치는 3. 3 레벨에 도달하면 레벨이 'Max'로 변경되면서 그 위로는 더 이상 레벨이 오르지 않았다. 대신 그 상태에서 숙련도를 계속해서 쌓으면 최종형태로 변하게 되는데, 최종형태 스킬들은 그 전 단계였을 때와 효율 차이가 엄청 났다. 스킬 '질주'는 '신속'으로. 스킬 '급소 찌르기'는 '난도'로. '단검 투척'은 '단검 쇄도'로. 심지어 단검을 능숙하게 다루도록 만들어 주는 패시브 스킬 '상급 단검술'까지 '단검의 대가'로 바뀌었다. 덕분에. 진우는 '악마왕의 단검'을 불러내 손 위에서 이리저리 움직여 보았다. 검지에서 빙글빙글 회전하던 단검이 손바닥 위로 올라가는가 하면, 손등에 밀착하며 부드럽게 미끄러지기도 했다.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이 매끄럽게 이어지다가. 착! 머리 위로 가볍게 던진 단검을 슬쩍 낚아챈 진우가 입맛을 다셨다. '관객이 없는 게 아쉬울 정도네.' 마치 단검이 손의 연장처럼 느껴지는 감각. 모두 '단검의 대가' 스킬 덕분이었다. 진우는 단검을 던졌다 받았다 반복하며 다시금 스킬창으로 시선을 옮겼다. '아직 성장 가능성이 있는 건 살기와 은신 정도인가?' 아쉽지만 레벨 1 에 머물고 있는 '근성' 스킬은 더 이상 발전의 여지가 없어 보였다. 그도 그럴 것이. [스킬: 근성 Lv.1] 패시브 스킬. 필요 마나 없음. 당신은 지치지 않는 근성을 가졌습니다. 체력이 30% 이하로 떨어지면 근성 스킬이 발동해 받는 피해가 50% 감소합니다. 근성은 체력이 무려 30 퍼센트 이하가 됐을 때만 발동하는 스킬이었으니까. 고작 스킬 레벨을 올리자고 일부러 목숨이 아슬아슬한 상황을 만들 수는 없는 일 아닌가? 더군다나 진우는 근성 스킬을 얻은 뒤에도 알게 모르게 많은 위기를 겪어 왔다. 그럼에도 1 레벨에서 올라가지 않는다는 건 웬만한 상황으로는 레벨을 올리기 힘들다는 뜻이었다. 진우가 너무 강해진 것도 문제였다. 이제 진우를 궁지로 몰아갈 만한 적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니 '근성'은 넘기고. 스킬을 사용할 기회가 적어서 2 레벨에 멈춰 있는 '살기' 와 '은신'의 숙련도를 올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아무 데나 난사하기 힘든 '살기'는 몰라도 '은신'은 평상시에도 얼마든지 사용할 수 있으니. 그런데. 진우의 시선이 위쪽에 고정되었다. '이건 대체 뭘까?' 패시브 칸에 있는 '알 수 없음'이란 스킬. 플레이어가 되고 나서 지금까지 가장 오랫동안 함께 해 왔던 스킬이지만 여전히 최소한의 정보조차 공개되지 않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 어련히 밝혀질 줄 알았건만...' 이 스킬에도 요구 조건 같은 게 있는 걸까? 처음부터 스킬 레벨이 최대치로 설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어떤 스킬이 나올지 기대가 컸었는데. 시간이 꽤 흘러간 지금까지도 궁금증은 커져 가고만 있었다. '...' 잠깐 '알 수 없음' 스킬을 뚫어져라 바라보던 진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확인하고 싶었던 건 일반 스킬창이 아니다. 바로 그 밑. 오늘 1 레벨씩 올라간 직업 전용 스킬들이었다. [직업 전용 스킬] 액티브 스킬: 그림자 추출 Lv 2, 그림자 저장 Lv.2, 군주의 영역 Lv.2, 그림자 교환 Lv.2 '뭐가 얼마나 달라졌을까?' 진우는 레벨업이 되자마자 확인을 끝냈던 그림자 교환만 빼고 다른 스킬들의 정보창을 전부 열람해 보았다. [스킬: 그림자 추출 Lv.2] 직업 전용 스킬. 필요 마나 없음. 생명이 다한 신체에서 마나를 뽑아내어 그림자 병사로 만듭니다. 대상이 가진 능력치, 대상의 사망 경과 시간에 비례하여 추출 실패 확률이 올라갑니다. 추출 가능 그림자 수: 590 / 1,300 2 레벨 효과 '고양': 그림자의 강화 확률이 상승합니다. 어렵게 레벨이 올라간 보상인지 추출 가능 그림자 수가 대폭 늘어나 있었다. '최대 그림자 수가 천삼백씩이나!' 주변에 추출 가능 대상만 충분하다면 아군을 원래 병력에서 두 배 이상으로 늘릴 수 있었다. 게다가 특수 효과까지 붙어 그림자를 추출하는 즉시 레벨이 오를 가능성이 높아졌다. '역시...' 보스급 나가였던 '지마'의 레벨이 13 에서 시작될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이 '고양'이라는 효과 덕분. 우연이 아니었다. '베르를 그림자 병사로 만들기 전에 고양 효과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럼 더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올 수 있었을 텐데. '사람 욕심은 끝이 없다더니.' 진우는 피식 웃으며 다른 직업전용 스킬들까지 하나하나 확인해 보았다. 모든 스킬들의 성능이 대폭 향상되고 전에는 볼 수 없었던 효과가 하나씩 추가되어 있었다. 그림자 저장, 군주의 영역. 업그레이드된 스킬의 설명을 읽어 내려갈 때마다 진우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좋았어.' 진우는 만족스런 얼굴로 상태창을 닫았다. 성장이 느려진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금씩 성장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올라갈 곳이 더 남아 있다는 사실이 진우의 가슴을 뛰게 만들었다. 좀 더 올라가고 싶다. '그 끝이 어딘지는 모르겠지만...' 향상심을 채워 나갈 때마다 가슴 벅찬 희열이 밀려들어 왔다. 두근, 두근. 단검을 창고로 보낸 진우가 오른손을 가슴 위에 가만히 올렸다. 두근, 두근. 심장이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다. 그러다 문득. '...무서운 힘이라고 했었나?' 몇 시간 전, 차해인에게서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민병구는 경고했다.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고. '시스템을 말하는 걸까?' 처음에는 진우 역시 자신에게 벌어지는 일들이 무서웠으며, 그 기현상을 불러일으키는 시스템이 두려웠다. 하지만 공포는 오래가지 않았다. 진우는 금방 시스템에 적응했고, 곧 시스템은 최고의 도구가 되었다. 다만 아직도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가 너무 많을 뿐. '...' 진우의 시선이 아무것도 없는 허공을 향했다. "너는 대체 뭐냐?" 대답은 없었다. "이제 그만 말해 줘도 되지 않을까." 대답을 기다리는 듯 진우가 말없이 허공을 응시했으나 역시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인벤토리.' 진우는 창고를 열어 반짝이는 검은 열쇠를 꺼냈다. [아이템: 카르네논 신전의 열쇠] 입수 난이도... ...후에 공개됩니다. 남은 시간: 249 시간 25 분 07 초 시스템이 보낸 초대장. 일주일의 시간이 훌쩍 지나가고 이제 남은 시간은 250 시간으로 줄었다. '여기서 나는 어떤 대답을 찾을 수 있을까?' 반은 기대감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반은 호기심. 잠깐 주춤했던 심장의 박동이 다시 거세졌다. 진우는 가슴에서 손을 뗐다. 남은 시간까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 두자는 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핸드폰을 집어 든 진우가 빠르게 전화를 걸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형님? 명랑한 목소리의 주인은 유진호였다. 진우는 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진호야." -예. 형님. "내일부터 이 근방의 상급 게이트를 싹 다 예약할 수 있을까?" -같이 C 급 레이드 할 때처럼 말씀하십니까, 형님? "그래." 잠시 생각에 잠겼던 유진호가 곧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형님! *** 러시아의 S 급 헌터, 유리 오를로프가 입국한 일본 공항은 꽉 들어찬 사람들로 발 디딜 틈 하나 없었다. 유리는 자신을 보기 위해 개미 떼처럼 몰려든 일본인들을 보고 한쪽 입꼬리를 올렸다. 반면 그를 데려온 일본 헌터협회 측 인사들은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채 걸었다. 자국의 헌터들이 재난을 막을 실력이 안 되어 타국 헌터의 힘을 빌려야만 하는 나라. 불과 몇 주 전까지 일본이 한국을 욕하는 데 쓰였던 말이었다. 그런데 지금 같은 일을 일본이 되풀이하고 있었다. 마쓰모토 협회장을 비롯한 협회측 인사들은 자신들의 과거를 떠올리며 고개를 들지 못했다. '만약 제주도에서 헌터들을 잃지만 않았더라면...' 마쓰모토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유리 오를로프!" "유리다!" 유리를 발견한 세계 각국의 기자들이 셔터를 눌러 대고. 촤촤촤촤촤촤촤촤촤악-! 유리는 그 앞에서 자신의 금니를 자랑이라도 하듯 입을 크게 벌리고 미소 지었다. 입국 수속이 번개처럼 끝나고. 유리가 처음 일본 정부에게 부탁받은 일은 국민들을 안심시키는 것이었다. 유리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의 별명은 '구원자.' 그동안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직전의 게이트들을 수없이 막아 왔기 때문에 붙은 별명이었다. 그리고 유리는 돈과 인기를 전부 거머쥘 수 있는 그 별명을 싫어하지 않았다. "준비되셨습니까, 유리 씨?" "물론." 당일 저녁, 그는 방송국으로 이동했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일본 전역의 시선이 TV 화면으로 몰렸다. 사회자가 그에게 물었다. "어떻게 게이트를 막으실 생각입니까?" "내가 늘 하던 방식이지." 유리의 얼굴에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그는 자신의 두손을 이용해 허공에 크고 둥근 원을 그려 보았다. "거대한 마법진을 그릴 거야. 이렇게, 게이트 주위에." 잠깐 화면이 반전되면서 신주쿠 게이트의 모습이 먼저 나오고, 뒤이어 마법진이 그려진 뒤의 예상도가 3D 화면으로 흘러나왔다. "그리고 내가 거기에 마력을 쏟아 부으면 끝. 그 게이트 안에 든 게 무엇이라도 빠져나올 수 없지." 하지만 그 정도 설명으로 일본인들의 불안감을 가라앉히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사회자부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저기... 그런데 가능할까요?" 유리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엇이?" 사회자는 그의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S 급 헌터 한 명의 힘으로 S 급 게이트를 막을 수 있다는 말씀이, 글쎄요... 믿기가 어렵다고나 할까요?" 피식. 유리가 웃었다. 성미가 급해 보이는 그가 화를 내는 대신 실소를 터트리자 일단은 안심하는 사회자였으나, 다른 한편으로는 그의 심기를 거스른 것은 아닌지 더욱 불안해졌다. 하지만 유리는 미소를 유지했다. "내가 내 마력으로만 결계를 유지한다면, 그래, 아무리 나라도 불가능한 일이지." 불가능하다? 꼴깍. 사회자가 마른침을 삼켰다. 일본의 S 급 헌터들이 레이드 포기를 선언한 지금, 유리마저 손을 놓아 버리면 더 이상 해결책이 없었다. 유리는 경직된 사회자의 얼굴을 음미하듯이 찬찬히 들여다보다 말을 이었다. "그러나 내 능력은, 내가 쓰는 결계 마법진은 주위의 마력을 흡수해 유지된다." "...!" 일순간 사회자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럼 처음에 본인의 마력이 필요하다고 하신 건...?" "차에 시동을 거는 것과 비슷한 원리지. 일단 발동을 시작한 결계는 마력을 흡수하여 더욱 견고하고 거대한 성벽으로 변해 간다고." 설명을 들은 사회자나 방송국 스텝들의 얼굴에 한 줄기 광명이 내리비쳤다. 여유 넘치는 유리의 목소리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마치 그의 자신감이 옮겨 오기라도 한 듯 듣는 이들의 불안감이 녹아 갔다. 그의 설명대로라면 주변의 마력이 강할수록 결계는 더욱 굳건해진다는 소리가 아닌가! 그리고 두말할 필요 없이 S 급 게이트에서 흘러나오는 마력의 양은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그 결계가 S 급 게이트를 둘러싼다면? 자신의 힘에 자신이 묶인다. 자승자박이라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가 있을까? 그 결계의 강도는 아마 사상 최대가 될 터였다. 유리가 카메라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아마도 그 손끝은 불특정 다수의 시청자를 향하고 있는 것이리라. 그의 목에 핏줄이 섰다. "나는 여러분들을 구한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누가 당신들을 살렸는지, 그것만 기억하면 돼!" 삑. TV 가 꺼졌다. 리모컨을 내려놓는 한국 헌터협회 고건희 협회장의 얼굴은 좋지 않았다. 옆에 서 있던 우진철이 물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협회장님?" "모르겠네." 고건희는 소파에 기대어 걱정스런 눈빛을 보냈다. 그는 일본의 누구와 달리 이웃나라의 불행을 비웃는 악인이 아니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자국의 피해를 감수하며 도움을 줄 생각 또한 조금도 없었지만. 잠깐 생각에 잠겼던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유리 오를로프가 S 급 게이트를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겠지만." 고건희 협회장의 눈빛이 사뭇 예리해졌다. "그가 실패했을 경우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잘 알고 있지." "...다행이군요." "...?" 고건희가 우진철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오해를 샀다는 것을 깨달은 우진철이 급히 손을 내저었다. "제 말은 일본의 상황이 잘됐다는 것이 아니라..." 잠시의 텀을 둔 뒤, 우진철이 말을 이어 갔다. "일본과 달리 저희에게는 믿을 만한 헌터가 있다는 사실이 다행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끄덕끄덕. 고건희의 고개가 크게 움직였다. 그 헌터가 누구인지는 굳이 콕 집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의 존재만으로도 든든한 느낌이 들었다. "참, 성진우 헌터님은 요즘 어떤가?" 우진철은 조용히 프린트된 종이 한 장을 내밀었다. 거기에는 최근 서울, 경기 일대에 생성된 상급 게이트들의 위치가 나열되어 있었다. "갑자기 이건 왜...?" "거기 빨간 동그라미들의 개수가 보이십니까?" "던전 전체의 거의 반쯤 되는 듯하군." 우진철은 이마를 흐르는 식은땀을 닦으며 대답했다. "그것들 전부 아진 길드에서 공략 허가를 요구해 온 게이트들입니다." 고건희의 눈이 휘둥그렇게 떠졌다. "이걸... 전부 다?" "네, 그렇습니다." = 153 화 우진철은 A 급 헌터 중에서도 최상위에 속하는, 감시과의 핵심 전력. 협회 내에서 고건희를 빼고는 당할 상대가 없는 강자였다. 그런 우진철이 강함에 놀랐던 소환수들을 하나둘도 아니고 몇백 기 단위로 부리는 성진우 헌터다 보니, 이런 스케줄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어째서 그는 이렇게 서두르는 걸까? '흐음.' 고건희의 이마에 주름살이 패였다. 다른 헌터들이라면 도시락을 싸들고 다니면서, 아니 매질을 해서라도 말려 놓겠지만... '성진우 헌터가 고작 A 급이나 B 급 던전에서 다치는 모습은 상상할 수가 없군.' 우진철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수들이 불쌍해 보인다'였던가. 고건희는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별문제가 없다면 그가 원하는 대로 해 주게." 협회 입장에서 마수 토벌에 앞장서는 헌터가 있다는 사실은 고마운 일이었다. 하물며 그가 다칠 염려가 없는 강자라면이야. 그러나 우진철이 말했다. "문제가 있을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다른 대형 길드들과 구역이 겹친다, 이거겠지?" "예. 협회장님." 현재 수도권에서 활동하는 대형 길드는 모두 세 곳. 백호, 헌터스, 사신. 이 세 길드가 각자의 구역을 전담하여 생성된 상급 게이트를 처리하고 있었다. 거기에 불쑥 끼어든 아진이 이리 빠르게 세력을 넓히면, 굴러들어온 돌에 쫓겨나는 입장의 세 길드가 웃으면서 지켜보지는 않으리라. '마찰을 빚을 수 있다.' 이것이 우진철의 견해였으며 고건희도 그에 동의했다. 문득 고건희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협회장님은 성 헌터님의 편이신 줄 알았는데?' 우진철이 의아한 시선으로 물었다.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아니, 그런 건 아닐세. 단지 길드원이라고는 세 사람, 그것도 전투원은 한 사람밖에 없는 신생길드가 벌써 대형 길드와 맞먹는 수준을 넘어서 그들의 영역까지 넘보려 하고 있으니 웃음이 나와서 말일세." "아..." 우진철도 납득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띤 채 고건희가 물었다. "아진 쪽에서 별다른 설명은 없었나?" "사정이 있어서 그러니 딱 일주일만 인근 게이트들을 맡겨 달라고 하더군요." "일주일이라..." 이번 제주도 레이드에서, 대형 길드의 마스터 세 명 모두가 성 헌터에게 목숨을 빚졌다. 일주일 정도라면 어렵지 않게 양보를 받아 낼 수도 있을 터. '다만 의아한 점은...' 어째서 성진우 헌터가 이리도 무리한, 적어도 남들의 시선에선 무리하는 것처럼 보이는 일정을 잡았느냐 하는 것이었다. '돈은... 아니겠지.' 돈을 원했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다. 미국이나 중국과 협상했다면 천문학적인 금액을 손에 쥘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성진우 헌터는 결국 한국에 남기로 했으며, 길드들과의 교섭도 일체 없었다. '그럼 대체...' 고건희의 시선이 옆을 지키고 선 우진철을 향했다. 그는 흘러가는 말처럼 물었다. "자네는 성 헌터가 왜 이렇게 많은 던전을 공략하려 한다고 생각하나?" 우진철이 잠깐 생각해 보다가 입을 열었다. "짐작 가는 점은 있습니다." 모르겠습니다, 글쎄요 정도의 대답을 예상하던 고건희는 의외의 대답이 나오자 귀를 기울였다. "그게 뭔가?" "성 헌터님은 마수들을 사냥하면서 몹시 즐거워하는 듯 보였습니다." "마수를 잡으며 기뻐했다?" "예." 우진철은 조금 지나간 기억까지 끄집어내었다. 진우가 헌터스 길드를 도와 하이오크들과 싸우던 때에도, 그는 즐거운 얼굴로 경쾌한 움직임을 보여주었다. "보스급 마수를 잡았을 때는 특히나 더 기뻐하셨습니다." "강한 마수를 잡으며 희열을 느낀다..." 고건희는 예전 진우에게 그 비슷한 말을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저는 마수들과 싸우고 싶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후로도 착실히 자신이 한 말을 지켜 나가고 있었다. '참 재미있는 친구로군.' 그 이상으로 대단한 친구기도 하고. 그때 협회장실의 전화기가 요란하게 울렸다. -협회장님. 수행원의 연락이었다. "무슨 일인가?" -미국 헌터관리국에서 온 연락입니다. "미국?" 그것도 헌터관리국에서? 고건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헌터관리국이 헌터협회장인 내게 연락을?' 미국씩이나 되는 나라에서 우리에게 협조를 요청할 일은 없을 텐데. 무슨 일일까? "연결해 주게." 전화는 곧바로 연결됐다.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가 다른 사람으로 바뀌는 데는 1, 2 초가 걸리지 않았다. -헌터관리국의 애덤 화이트입니다. "한국 헌터협회 고건희입니다." 사업자의 기본은 영어. 고건희의 입에서 유창한 영어 발음이 흘러나왔다. 어린 시절 맛만 본 수준의 일본어보다는 이쪽에 더 자신이 있는 그였다. "미 헌터관리국에서 저희에게 무슨 용무십니까?" 애덤 화이트는 망설임 없이 본론을 꺼냈다. -다음 달 초에 저희 헌터관리국에서 전 세계 굴지의 헌터님들을 초청하는 행사를 열 계획입니다. "...그리고요?" -거기 한국 대표로 성진우 헌터님을 모시고 싶습니다. *** 본격적인 레이드를 시작하기에 앞서, 진우는 먼저 적당한 길드를 물색했다. 상급 던전에서 수확할 수 있는 여러 부산물들을 원활하게 처리해 줄 길드가 필요했다. '레이드를 며칠 만에 한 번씩 한다면 모를까...' 빡빡하게 잡은 레이드 일정을 소화하려면 초짜 부사장 혼자서는 역부족이었다. 그리고 길드 입장에서 따져 봤을 때도 중간 업체에 맡겨 놓는 것보다 파트너 길드를 하나 정해서 같이 일하는 편이 훨씬 이득이었다. '문제는 어디와 하느냐인데.' 그간 왕래가 잦았던 백호 길드나 차해인이 있는 헌터스 길드가 떠올랐으나, 최종적으로 선택한 곳은 기사단이었다. 이유는 하나. 전에도 한 번 같이 일해 봤기 때문이다. 각각 서울과 부산에 위치해 있어 두 길드의 활동 영역이 서로 전혀 겹치지 않는다는 점도 한몫했다. 진우가 전화를 건 시각은 이른 저녁이었다. 레이드가 없는 헌터는 백수와 같다. 자택 소파에 누워 TV 를 보며 피식거리던 기사단 길드의 사장 박종수. 우우웅- 우우웅그는 머리맡 소파 팔걸이 위에서 진동하는 핸드폰을 별생각 없이 집어 들었다. '응?' _성진우 헌터님. 발신인을 확인한 그의 눈이 커졌다. 벌떡 일어난 그가 전화를 받았다. "헌터님?" -아진의 성진우입니다. "아, 예. 기사단의 박종수입니다." 진우의 설명을 듣던 박종수의 얼굴이 점점 환해졌다. 사실 규정이 바뀌는 바람에 진우와 긴밀한 관계를 구축하려던 계획이 어긋나버린 박종수는 맥이 빠져 있었다. 기사단 길드의 노하우와 성진우 헌터의 저력은 개뿔... 부사장 정윤태도 은근히 실망하는 눈초리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기대하지도 않던 전화가 먼저 걸려온 것이 아닌가? 강한 길드, 아니 강한 헌터와 유대를 형성하는 것은 길드의 입장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일. "네, 네. 문제없죠." 전화를 받는 내내 박종수의 얼굴에서 미소가 지워지지 않았다. "맡겨만 주세요." 던전 부산물들을 처리하는 일은 오랜 노하우를 지닌 기사단 길드에게는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레이드가 없을 때는 그냥 놀리고만 있어야 하는 처리팀을 이런 데라도 써먹는 것이 어딘가? 박종수는 얼굴 한가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럼 내일 뵙겠습니다!" *** 어머니가 싸 주신 도시락은 맛있다. 도시락을 먹는 장소가 설령 마수들이 우글우글한 던전 안이라고 할 지라도. 유진호가 우물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이러고 있으니까 예전에 같이 C 급 던전 돌 때가 생각나네요, 형님." 진우는 대답 대신 피식 웃었다. "밥이나 다 먹고 말해." "아, 죄송합니다. 형님." 하지만 유진호의 기분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었다. 눈에 보이는 게이트란 게이트는 전부 예약하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레이드를 이어 가는 나날. 단지 대상이 C 급 이하의 던전들에서 B 급 이상의 상급 던전들로 달라졌을 뿐이다. 굳이 그때와 달라진 점을 또 찾는 다면. '...' 진우와 눈이 마주친 이그리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밥 먹을 때 경계를 봐주는 녀석이 생겼다는 것 정도?' 사실 없어도 무방하긴 하지만. 감각 스탯 덕분에 진우는 딱히 집중하고 있지 않아도 던전 내부의 움직임을 훤하게 읽을 수 있었다. 근처로 다가오는 마수쯤은 눈 감고도 대처가 가능하다는 소리. 다만 식사를 방해받는 것이 싫었고, 진호의 불안감도 덜어 줄 겸 식사 중에는 보초를 세웠다. 진우가 반대편을 바라보았다. '...' 마찬가지로 진우와 눈이 마주친 아이언이 맡겨달라는 듯 자신의 넓은 가슴을 세차게 두들겼다. 쾅, 쾅. 동굴 안에 쇳소리가 울려 퍼졌다. 진우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저 녀석은 의욕이 너무 앞서는 게 문제라니까.' 소리가 난 쪽을 바라보던 유진호가 문득 진우에게 물었다. "형님." "응?" "형님 소환수들은 알아서 움직일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 셈이지." 민병구 헌터가 말했었다. 그림자 병사들에겐 각자의 '자아'가 있다고. '그 말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지는 모르겠다만.' 어쨌든. 유진호가 이어 물었다. "그럼 저희가 이렇게 레이드를 할 수 없는 상황일 때는 소환수들에게 맡겨 두면 안 됩니까, 형님?" "그건 안 돼." 거리가 벌어지면 획득할 수 있는 경험치가 줄어드니까. 하지만 유진호에게 경험치니 뭐니 설명하기는 그렇고 해서, 진우는 근엄하고 진지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 녀석들, 내가 안 볼 때 무슨 짓을 할지 모르거든." "히익!" 유진호의 밥맛이 떨어지는 소리가 실시간으로 들리는 듯했다. 농담은 여기까지 하기로 하고. '이걸 한 번 써 볼까?' 식사를 끝낸 진우가 얌전히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스킬: 그림자 저장 Lv.2] 직업 전용 스킬. 소모 마나 없음. 그림자 병사들을 시전자의 그림자 속에 흡수하여 저장해 둡니다. 저장한 병사들은 시전자가 원하는 때 언제든지 소환이나 재흡수가 가능합니다. 저장해 둔 그림자 수 : 840 / 840 2 레벨 효과 '감각 공유': 저장해 둔 그림자 병사 하나를 지정하여 감각을 공유할 수 있습니다. 그림자 저장에 붙은 특수 효과 '감각 공유'. 그림자 병사가 느끼는 감각을 시전자에게 전송해 주는 독특한 능력이었다. 멀리 떨어져 있는 그림자 병사를 선택하여 그쪽 상황을 살피는 것도 가능해서 꽤 유용하게 쓰였다. 이를테면. 가만히 눈을 감았다. '감각 공유.' 던전 외부, 한국 각지로 흩어져 있는 그림자 병사들의 신호가 잡혔다. '많이도 뿌려 놨네.' 진우는 별생각 없이 그중 하나를 선택했다. 우연하게도 차 헌터에게 숨겨 둔 그림자 병사였다. 그러자. 쏴아아바닥에 물이 떨어져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비도 안 오는데 웬 물소리가...?' 그런 의문도 잠시. 시야가 공유되자마자 진우의 눈이 번쩍 떠졌다. "형님? 잠깐 잠이라도 주무셨습니까?" "...아니다." 언제 한 번 사과하는 의미로 차 헌터에게 식사라도 대접해야겠다고 생각하는 진우였다. "참, 형님 이야기 들으셨어요?" "뭘?" "일본 신주쿠에 나타난 S 급 게이트 말입니다. 그거 던전 브레이크 예상 일이 내일이랍니다." 시간이 벌써 그렇게 됐나?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상급던전 레이드를 시작한 지도 벌써 6 일이 지났다는 말이네.' 그 6 일 동안 진우도 제자리에 머물지만은 않았다. 경험치는 느리지만 확실하게 쌓여 갔다. 그 결과 101 이었던 레벨이 103 까지 올라갔다. 만사를 제치고 레벨업에 집중한 보상이었다. 진우가 쥐었던 손바닥을 펴자 그 위에 검은 열쇠가 나타나 있었다. [아이템: 카르테논 신전의 열쇠] 입수 난이도... ...후에 공개됩니다. 남은 시간: 26 시간 51 분 49 초. '앞으로 하루.' 진우는 열쇠를 조용히 움켜쥐었다. 이걸 볼 때마다 가슴이 떨려왔다. "움직이지 마." "예?" 진우의 말을 들은 뒤부터 유난히 아이언과 이그리트를 힐긋거리며 숟가락을 뜨던 유진호가 화들짝 놀라 어깨를 들썩거렸다. "너한테 한 말 아냐." 움직이려 했던 그림자 병사들이 진우의 지시를 듣고서 일제히 동작을 멈춘 상태였다. "크르르르르..." "크르르륵." 동굴 저편에서 낫이나 장검 같은 무구를 든 짐승들이 이빨을 드러내며 걸어 나왔다. 진우가 녀석들을 응시하며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직 하루. '하루의 시간이 더 있다.' 창고에서 불러낸 '악마왕의 단검'을 손에 쥐며, 진우는 미소를 지었다. *** 던전 브레이크 전날 밤. 유리 오를로프의 지시대로 도쿄 신주쿠에는 거대한 마법진이 그려졌다.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어마어마한 규모였다. 주변 주민들은 모두 대피시켰지만 유리는 현장에 남아 마지막까지 결계를 점검하고 있었다. 일본인 관계자들은 침 한 번 삼킬 생각도 못하고 그를 주시했다. 그의 말 한마디, 동작 하나하나가 전부 주시 대상이었다. 턱을 만지작거리며 연신 인상을 찌푸리던 유리가 입을 열었다. "...이상하단 말이야." 통역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예? 뭔가 착오라도 있습니까?" "아니, 그건 아닌데." 마법진은 완벽했다. 이번 작업은 자신의 인생 최대의 걸작이 될 것이 분명했다. 이상한 건 결계가 아니었다. "주위에 누군가 있는 거 같다고." "예?"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심장이 떨려 올 리가 없지 않은가? 눈을 크게 뜬 유리가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악을 써댔다. "넌 누구냐? 어디 있어?" 그러나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텅 빈 거리에는 그의 목소리만이 메아리쳐 울릴 뿐이었다. "..." 일본 측 관계자가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안면근육을 움직여 억지 미소를 지었다. "던전 브레이크 하루 전날 거리에 남아 있는 간 큰 사람이 있을 리 없지 않습니까?" 그러자 유리가 콧방귀를 꼈다. "사람이라고 안 했는데?" "예?' 안색이 창백하게 질려 가는 관계자를 한심하게 바라보던 유리가 또 한 번 고개를 갸웃거렸다. "착각이었나..." 그러나 멀리 떨어진 빌딩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보는 인영이 하나 있었다. '감이 좋은 남자군.' 하긴. 유리의 힘이 어디에서 나오는 것인가를 생각하면 하등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보다. 남자의 시선이 S 급 게이트로 옮겨 갔다. 기분 나쁠 정도로 고요한 기운이 S 급 게이트 주변을 맴돌고 있었다. '...' 남자는 얼굴을 가리고 있던 후드를 벗었다. 삼십 대 중반의 동양인 얼굴. 정리하지 못해 덥수룩한 수염이 그가 누구인지를 말해주었다. 성일환. 그는 안타까운 눈빛으로 거대한 게이트를 응시하다 다시 후드를 뒤집어썼다. '드디어... 시작되는가.' 모든 것이 예정대로 흘러가고 있었다. = 154 화 전 세계의 기자들이 일본을 찾았다. 특이한 점은 그들 대다수가 전장을 취재하는 종군기자라는 사실이었다. 이번 일이 전쟁터에 발을 들이는 것만큼 위험하다는 증거였다. 게이트 주변의 경비는 삼엄했다. 기자들은 카메라를 들었다. 빌딩만큼이나 거대한 게이트를 감싸고 있는 결계와, 그걸 포위하듯 둘러싼 군대. 주위에는 전쟁 직전에서나 볼 수 있는 긴장감이 가득했다. 영국의 저명한 종군기자 윌리엄스벨의 보조기사는 긴장감에 침을 꼴깍 삼키며 물었다. "마수들에겐 현대 화기가 통하지 않는데, 군대는 왜 와 있는 걸까요?" 윌리엄스는 비장한 군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카메라에 담으며 대답했다. "시간을 끌려고." "예에?" "시선을 끌어서 일선 헌터들이 공격에 대비할 시간을 버는 거지. 겸사겸사 우리나 저기서 구경하고 계신 높으신 분들이 대피할 동안 미끼 역할도 하고." 찰칵. 그가 다음으로 사진기에 담은 얼굴은 결계 근처에 있는 마쓰모토 일본 헌터협회장이었다. 그는 심각한 얼굴로 관계자들과 무언가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하긴 이런 상황에서 웃을 수 있을 수는 없겠지만.' 찰칵. "과연..." 현장 경험이 많지 않은 보조기사는 긴장된 눈빛으로 말했다. "총알받이... 라는 거군요." "이봐, 남의 일처럼 말하면 곤란하지." "네?" "나한테 무슨 일이 생길 거 같으면 네가 내 앞을 막아줘야지." "예에?" 어린 보조기사가 놀라서 돌아보자 윌리엄스가 팔꿈치로 그,의 옆구리를 살짝 찔렀다. "그렇게 굳어 있으면 도망갈 새도 없이 죽어. 긴장을 풀고 있으라는 뜻이다." 그가 한쪽 눈을 찡그리는 걸 보고 겨우 농담이라는 걸 알아챈 보조기사가 가슴을 쓸어내렸다. '벨 씨... 이런 상황에서도 농담이 나오시다니.' 대선배다운 관록이 묻어나는 여유에 보조기사의 긴장도 조금 누그러졌다. 그러나 보조기사는 알고 있었다. 윌리엄스 벨이 웃고 있을 때야말로 가장 긴장해야 하는 순간이란 걸. 보조기사의 시선이 하늘 높이 솟은 게이트로 향했다. "저기서 뭐가 나올까요?" 사진을 찍던 손을 잠깐 멈추고, 윌리엄스도 같은 곳을 바라보았다. 크다. 크기에 압도당할 정도로. 지구에 게이트가 나타나기 시작한 이후 종군기자의 두 번째 전장은 게이트가 되었다. 그만큼 여태껏 본 게이트가 한둘이 아니었다. 심지어 던전 브레이크의 현장을 직접 취재했던 적도 있었지만... 눈앞의 게이트는 그야말로 차원이 달랐다. 올려다보는 것만으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이러니 정찰대조차도 파견이 안 됐겠지.' 던전 안을 살펴보고 나오겠다 나서는 상급 헌터들이 없어, 안에 뭐가 있는지조차 모르는 게 작금의 현실이었다. 일자로 다물고 있던 윌리엄스의 입술이 떨어졌다. "저기서 뭐가 나올지는 모르겠지만..." 그러고는 씁쓸히 웃었다. "그게 뭐든지 간에 유리 오를로프의 결계가 튼튼하기만을 바라야겠군." 그의 카메라가 마지막으로 향한 곳은 결계를 점검하는 유리 오를로프였다. 유리는 활짝 웃고 있었다. "완벽해. 아주 좋아." 유리는 결과물에 자신감이 가득했다. 자신의 결계는 훌륭했다. 어디 그뿐일까? 국민들의 반발을 걱정한 마쓰모토 협회장이 쉬쉬하는 바람에 자신이 자원봉사를 하러 온 줄 아는 일본인들이 기부금을 잔뜩 보내 줬다. 그 덕분에 막대한 돈이 모였다. 거기다 저기를 보라. 이 위험한 곳까지 몰려든 수많은 기자들이 자신을 찍고 있지 않은가. 돈과 명성. 유리가 환장하는 모든 것들이 한 번의 수고로 동시에 굴러들어 왔다. 그는 다시 한 번 더 강조했다. "완벽해!" 오늘 자신은 세계 최초로 S 급 게이트를 혼자서 틀어막은 남자로 기록될 터였다. '기왕이면 S 급 게이트를 혼자서 처리한 남자라는 말을 듣고 싶지만...' 아쉽게도 그 표현에 훨씬 더 적합한 헌터가 먼저 나오는 탓에 욕심을 부릴 수는 없게 됐다. 하지만 뭐 어떤가? 그는 전투 계열이고, 자신은 보조게열이다. 각자의 위치에서 최고로 이름을 날리면 되는 것이다. '암, 암.' 한껏 도취된 유리가 안주머니에서 손바닥만 한 수통을 꺼내 뚜껑을 열었다. 안에서 알싸한 보드카 냄새가 올라왔다. "유, 유리 씨! 술은...!" 그를 담당한 협회 직원이 기겁하고 말리려 들었으나, 유리는 오히려 눈을 부라렸다. "축배를 드는 거야. 축배를. 긴장 풀라고. 내가 최고의 쇼를 보여 줄테니." "그... 그래도." "너도 한 모금 마셔 볼래? 긴장이 싹 풀린다니까." 직원에게 술을 권하며 어깨동무하는 유리를 멀찍이서 바라보던 마쓰모토 협회장이 눈살을 찌푸렸다. '우리 일본의 미래가 저런 남자에게 달려 있다니.' 들리지 않게 혀를 차던 그가 옆의 수행원에게 물었다. "S 급 헌터들은 몇 명이나 대기하고 있나?" "모두 세 명입니다." "세 명이라..." 10 명이 넘는 S 급 헌터 중 단 셋 만이 협회의 호출에 응했다. 마쓰모토의 주름이 한층 더 깊어졌다. 제주도 레이드가 일본 헌터계에 재앙을 가져다준 이후 그의 영향력은 바닥을 기고 있었다. 일각에서는 마쓰모토가 욕심에 눈이 멀어 S 급 헌터들을 사지로 몰아넣었다는 말까지 나오는 상황. 이미 S 급 헌터 다수는 그에게 등을 돌렸다. 그가 협회장으로 있는 동안에는 협회의 지시를 따르지 않겠다는 강경책까지 내놓았다. '고토 군만 곁에 있었다면...' 주먹을 쥔 그의 손이 부르르 떨렸다. 고토의 죽음은 그를 오른팔로 이용했던 마쓰모토에게 너무나 뼈아픈 손실이었다. '하나 그렇기 때문에.' 오늘이 더욱 중요했다. 헌터협회의 노력으로 S 급 게이트를 무사히 막아 낸다면, 다시 한 번 비상을 노려볼 수 있었다. '고건희... 그리고 성진우.' 그러다 보면 자신의 앞길을 망쳐놓은 이들에게 치욕을 돌려줄 기회가 오는 날도 있으리라.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만 한다. 마쓰모토 협회장은 엄숙한 표정으로 게이트를 응시했다. 시계를 확인하던 수행원이 귓속말을 전했다. "던전 브레이크 3 분 전입니다." "알겠네." 마쓰모토가 고개를 끄덕였다. 게이트를 향한 그의 시선에 수많은 생각들이 담겼다. 2 분, 1 분, 59 초, 58 초... 긴장된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갔다. 이윽고 게이트를 막고 있던 검은 막이 희미해지기 시작했다. 기자들이 소리쳤다. "어, 어?" "게이트가 열렸어!" "나... 나온다!" *** "아들." 슬쩍 일어나려던 진우가 다시 얌전히 앉았다. "응." TV 를 보던 어머니가 진우를 뒤돌아보았다. 뉴스에선 아까부터 계속해서 일본의 S 급 게이트에 대한 속보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까지 앞으로 몇 분이 남았느니 하는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또 어디 가려는 거 아니지?" 어머니의 감은 때론 상급헌터들의 감각보다 예리하다. 진우는 뜨끔했지만 아무렇지도 않은 척 대답했다. "약속이 있어서요." "약속? 이런 날에 말이니?" "예전에 한 약속이어서요. 어차피 저 게이트는 일본에서 열리니까 영향 없을 거 같아서 취소 안 했어요." 어머니는 여전히 미심쩍어하는 눈빛이었다. 하지만 거짓말은 아니었다. '어떻게 보면 이것도 시스템과의 약속이니까.' 물끄러미 진우를 바라보던 어머니가 다시 물었다. "엄마가 걱정 안 해도 되는 거지?" 진우는 자신 있게 대답했다. "네." 그러기 위해서 얻으려고 노력했던 힘이다. 진우의 자신감 있는 눈빛을 마주한 어머니는 그제야 미소를 지으셨다. "조심해서 다녀오렴." 진우도 싱긋 웃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자리에서 일어난 진우가 집을 빠져나왔다. 진우의 집은 9 층.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가 이렇게 느린지 오늘 처음 알았다. 검은 열쇠가 열어 줄 던전이 어떤 곳일지 기대되어 괜스레 조바심이 일었다. 팅. 1 층에서 문이 열리고. 처음 보는 아저씨가 무심코 고개를 들다 진우와 눈이 마주쳤다. S 급 헌터가 이 아파트에 사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었는지, 그는 진우를 알아보고는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 그를 지나쳐 간 진우는 윗옷에 달린 후드를 눌러썼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걸음도 빨랐다. 금방 아파트 단지를 벗어나 거리로 나온 진우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일본의 게이트 때문인가?' 거리 전체가 한적했다. 덕분에 진우는 주변을 신경 쓰지 않고 느긋하게 검은 열쇠를 살펴볼 수 있었다. [아이템: 카르테논 신전의 열쇠] 입수 난이도: ?? 종류: 열쇠 '요구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카르테논 신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열쇠입니다. 지정된 게이트에서 사용할 수 있습니다. 지정된 게이트의 위치는 일정 시간이 지난 후 공개됩니다. 남은 시간: 0 시간 01 분 02 초 남은 시간은 1 분. '...됐다.' 수면 아래에서 차갑게 가라앉아있던 심장이 조용히 요동치기 시작했다. 쿵쾅쿵쾅. 진우는 가만히 심장의 박동에 귀를 기울이며 남은 1 분을 기다렸다. 시계 따윈 확인할 필요조차 없었다. 극한으로 단련된 육체의 생체시계는 세상 어느 시계보다도 정확했다. '... 3, 2, 1.' 정확히 1 분이 지난 후 진우가 감았던 눈을 떴다. 틱. [남은 시간: 0 시간 0 분 0 초]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게이트의 위치가 공개됩니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여긴...?' 시스템 메시지에 떠오른 게이트의 위치는 여기서 멀지 않은 곳이었다. 낯익은 장소. 진우는 헌터폰의 기능 중 하나를 이용해 협회 사이트에 들어가 게이트 정보를 검색했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전 협회에서 게이트가 생성되었다고 고지했던 곳이었다. 그런데 이곳이 열쇠를 사용할 수 있는 장소였을 줄이야. 얻어맞기라도 한 것처럼 뒤통수가 얼얼해졌다. '착각이었다.' 확실히 열쇠의 설명이 틀린 건 아니었다. 시스템은 게이트의 정보가 이 시간에 공개된다고 했지, 이 시간에 게이트가 생성된다고는 하지 않았다. 당했다. 진우의 손이 바빠졌다. 게이트 정보를 조회해 보니 이미 던전을 공략하고 있는 길드가 있었다. 게이트 등급은 C. '등급은 높지 않지만...' 그 안에 뭐가 숨겨져 있을지 모른다는 게 문제다. '그나마 멀지 않은 곳이라 다행인가.' 차로는 10 분 거리. 전력으로 달리면 60 초 내로 도착할 수 있다. 은신으로 몸을 감춘 진우가 있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스킬 '신속'이 추진력을 더했다. 목적지는 진아가 다니던 고등학교의 운동장. 오크 사건 이후로 휴교가 아직 풀리지 않아 민간인이 다칠 염려는 적겠지만. '던전을 공략하고 있다는 공격대가 위험하다.' 진우는 처음 지하신전을 방문했을 때를 떠올렸다. 아찔한 순간들. 몇 번이고 죽음의 위기가 스쳐 지나갔던 것이 기억났다. 그런데 왜일까? 분명 아찔하고 무서운 기억이었을 텐데, 그때를 떠올리면 지금도 가슴이 뛰었다. 그 신전에서, 진우는 처음 자신이 살아 있음을 느꼈다. 당시의 그는 무능력한 E 급 헌터가 아닌, 불가능에 대항하는 도전자였다. 순식간에 몇 개의 골목을 돌자 익숙한 학교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정말로 초 단위로 학교에 도착했다. 정문을 들어서니 운동장 한쪽에 덩그러니 남아 있는 게이트가 보였다. 게이트 주위는 협회 직원과 길드 관계자 몇 명이 지키고 서 있었다. 아직 큰일이 터졌다는 소식이 들려오진 않았는지 그들은 조용한 분위기였다. 그 평온은 진우의 등장으로 깨졌다. 진우가 근처에서 은신을 풀었다. "어, 어?" 다가오는 진우를 뒤늦게 발견하고서, 길드 관계자가 앞을 막아섰다. "여기 오시면 안 됩니다." 진우는 후드를 벗고 맨얼굴을 드러냈다. 그러자 옆에서 헉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신!" 진우를 알아본 협회 직원이 소리를 높였다. 전에 도로에 생긴 B 급 게이트를 처리했을 때 마주친 적 있었던 안경 낀 여직원이었다. 진우는 이쪽이 길드 직원보다 말이 더 잘 통할 것 같아, 막아서는 직원을 무시하고 바로 그녀에게 말했다. "지금 당장 레이드를 중단해야 합니다." "예?" 그녀가 당황하며 말했다. "하지만 측정 결과로는 겨우 C 급..." 진우는 고개를 저으며 다시 말했다. "지금 안 멈추면 다 죽습니다." "...!" 진우는 고개를 들어 게이트를 바라보았다. 이들에겐 느껴지지 않는 걸까? 게이트 안에서는 소름이 돋을 정도로 불길한 기운이 스멀스멀 흘러나오고 있었다. = 155 화 "안에 들어간 지 얼마나 됐어요?" 진우가 급히 물었다. 시간이 오래됐을수록, 안으로 깊이 들어갔을수록 헌터들이 무사히 돌아올 가능성은 낮아진다. 협회 여직원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두 시간 정도요." 2 시간. 금방이라고 말하기에도, 오래라고 말하기에도 애매한 시간이었다. 그때. "당신 뭐야? 협회 사람이야?" 길드 직원이 진우의 어깨를 덥석 잡고 뒤돌아 세우려고 했다. 난데 없이 와서 자신을 무시한 것도 모자라 재수 없는 소리들을 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깨를 쥐는 힘은 보잘 것 없었지만 진우는 순순히 돌아봐 주었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구구절절 한 백 마디 말보다 자신의 얼굴 한 번 보여 주는 게 더 효과적일 수 있으니까. "사람이 물었으면 대답을..." 그렇게 진우와 시선을 마주하게 된 길드 직원이 하던 말을 멈추었다. '잠깐만, 이 사람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어디서였더라? 기억을 더듬다 어렵게 이름 하나를 떠올려 낸 직원이 믿기지 않는다는 듯 더듬더듬 물었다. "서, 성진우 헌터?" C 급 게이트 앞에서 S 급 헌터와 마주치게 될 줄이야. 그런데 그런 그의 어깨를 잡고 노려봤단 말인가? 깜짝 놀란 그가 자신도 모르게 손을 들어 올리고는 뒤로 두세 걸음 물러섰다. "죄, 죄송했습니다." "..." 이 순간에도 시간은 간다. 길드 직원에게 시간을 낭비할 여유가 없었다. 진우가 다시 여직원에게 시선을 옮겼다. "제가 그 사람들 데리고 나오겠습니다." 여직원은 당혹스러웠다. B 급 게이트가 레드 게이트로 변했을 때도 그 안에서 웃으며 나왔던 남자다. 그런데 지금은 평범한 C 급 게이트를 앞에 두고 다급한 눈빛으로 사람들이 위험하다 말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도대체 무슨 일인데 그러세요? 뭐라고 설명이라도 좀 해 주시면." "그럴 시간 없습니다." 진우는 딱 잘라 말했다. 사실 은신을 하고 바로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었다. 이들의 시선을 따돌리고 게이트 안으로 들어갈 방법이야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던 이유는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기 때문에, 쓸데없는 시비에 휩쓸리지 않기 위해 최소한의 절차를 밟은 것이었다. 여직원의 입술이 달싹거리다 멈추길 몇 번째. 그녀는 고민했다. 한 길드가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 공략하고 있는 게이트에 아무런 증거도 없이 다른 헌터를 난입하게 둬도 괜찮은 걸까? 원래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진우의 눈빛을 보니 차마 막을 수가 없었다. "...가세요." "이따 뵙죠." 진우는 짧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게이트 안으로 뛰어들었다. [던전에 입장하였습니다.] 던전 안에는 마정석이 제거된 마수 사체들이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사체 자체가 돈이 되는 상급 던전과 달리 하급 던전에서는 그다지 얻을 만한 부산물도 없고, 마정석만이 유일한 돈줄이니까. 익숙한 광경이었다. 진우는 눈을 감고 집중해 봤다. 어째서인지 공격대의 기척을 찾을 수가 없었다. '설마 벌써?' 진우는 고개를 저었다. 설사 이미 늦었다 할지라도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은 시체에서는 마력이 흘러나온다. 그런데 그 마력조차 느낄 수 없었다. 가만히 내부를 둘러보던 진우는 문득 기시감을 느꼈다. 어째 익숙하다는 느낌. 어디선가 본 적 있는 던전이었다. '아.' 기억이 정확하다면 처음 능력을 얻게 됐던 던전과 형태가 비슷했다. '그렇다면...' 진우는 그때 이중던전의 입구를 발견했던 곳으로 가 보았다. 역시나. 던전 안에 또 하나의 입구가 있었다. '그때와 같다.' 그제야 왜 공격대 헌터들의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지 감이 잡혔다. '이 던전... 터무니없이 넓었었지.' 그때도 그랬다. 아무리 하급 헌터들의 걸음이라지만 거의 1 시간 가깝게 걸어서야 이상한 문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던전이 그때와 같은 구조라면 헌터들과의 거리가 꽤 벌어져 있는 것도 당연한 일. 마력도 얼마 없는 하급 헌터들의 기척을 찾기는 불가능에 가깝다. 진우가 동굴 안쪽을 바라보았다. 길은 하나. 그때 당시처럼 통로는 칠흑같이 어두웠다. 그러나 걱정할 필요는 없었다. 극한까지 끌어올린 감각 스탯이 어둠 속에 숨어 있는 길을 열어주었다. 진우의 눈이 밤의 짐승들처럼 서슬 퍼렇게 빛을 냈다. '보인다.' 어둠에 적응한 눈이 사물을 하나하나 담아냈다. 후우짧게 호흡을 끊어 쉰 진우가 총탄처럼 쏘아져 나갔다. 배경들이 순식간에 뒤로 밀리고, 또 밀렸다. 긴 거리였다. 그래도 워낙 속도가 빨라서 오래 걸리진 않았다. '여길 1 시간이나 걸었다니...' 처음 이 길을 걸었을 때를 떠올리면 비약적인 발전이었다. 어느새 기척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공격대 헌터들이다. 모두들 한곳에 멈춰 서 있었다. 처음엔 전투 중이거나 다 죽은 것은 아닌가 싶었지만 그건 아니었다. 다가가니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럼 여기까지 와서 그냥 가자고?" 탓. 지척에서 멈춰 서자 어디선가 들어 본 적 있는 것 같은 말이 들려와 그만 헛웃음이 나왔다. 다행이었다. 이들은 아직 안에 발도 들이지 못한 듯했다. 만약 그랬다면 이렇게 한가롭게 잡담이나 하고 있었을 시간은 없었을 테니까. 이번엔 여자의 목소리였다. "그럼 어떡해요? 마법을 쏟아부어도 끄떡없는 문인데." "차라리 나가서 대형 길드랑 쇼부를 보는 게 낫지 않겠어요?" "제 생각에도 그게 좋을 거 같은데." 그들은 열리지 않는 문을 앞에 두고 옥신각신 다투고 있었다. 이해는 간다. 이중던전을 발견하고서 일확천금의 꿈에 부풀어 있었을 텐데 1 시간 가까이 걸어 빈손으로 돌아가긴 싫겠지. 하지만 여기, 그곳에서 살아남은 증인이 있었다. 진우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거 함정입니다." 진우가 다가올 때까지 알아차리지 못했던 헌터들이 갑자기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펄쩍 뛰었다. "어매, 깜짝이여!" "뭐, 뭡니까, 댁은?" 진우가 전에 한 번 본 적 있는 거대한 철문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이중던전 생존잡니다." 이중던전 생존자? 헌터들은 자기들끼리 눈빛을 교환하며 수군거렸다. 안이 어두웠기 때문에 그들이 진우의 얼굴을 알아보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어?" "왜?" "저 사람 혹시 성진우 헌터 아냐?" "뭐?" 그 말을 꺼낸 헌터에게 모두의 시선이 향했다. 그들의 시선이 다음으로 향한 곳은 당연히, 진우의 얼굴이었다. "그, 그러고 보니..." "진짜네?" "아니, S 급 헌터분께서 여기까지 웬일로?" 진우는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문을 둘러싸고 있던 헌터들이 자연스레 길을 터 주었다. 진우가 문에 가볍게 손을 대며 말했다. "이 너머에 뭐가 있는지 저는 알고 있습니다." 오랜만에 다시 이 문 앞에 서게 된 진우는 감회가 새로웠다. 그러나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곳은 시스템이 자신을 초대한 장소. 헌터들을 위해서라도,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라도 불청객들을 남겨 둘 수는 없었다. 뒤로 돌아선 진우가 헌터들을 둘러보며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긴 끔찍하게 위험한 곳입니다. 여기서부터는 제가 맡을 테니 여러분들은 돌아가 주세요." 웅성웅성. 주위가 소란스러워졌다. 진우가 워낙 얼굴이 알려진 S 급 헌터였으니 망정이지, 금방이라도 불만이 폭발할 것 같은 얼굴들이었다. 그중에 한 명. 여기까지 와서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다던 사내가 기어코 앞으로 나섰다. "저기요, 성 헌터님." 이번 공략을 추진한 중소 길드의 마스터였다. "이 던전은 저희 용기 길드 공격대가 공정하게 허가권을 사서 레이드를 하게 된 곳입니다. 헌터님이 우리를 나가라고 할 권리는 없어요." "맞아요! S 급 헌터면 답니까?" 헌터들의 항의에 진우는 일자로 입을 다물었다. '...' 그들을 도우려는 것은 선의에서 비롯된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을 모아 놓고 하나하나 설명해 가며 설득할 생각은 없었다. '그래야 할 의무도 없고.' 할 만큼은 했다. 그래서 진우는 그들에게 선택을 맡기기로 했다. 과거, 진우가 포함된 협회의 말단 헌터들이 같은 곳에서 자신들의 선택으로 어떤 대가를 치러야 했는지 알고 있기에 웬만하면 이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진우는 다시 문 쪽으로 돌아서 손잡이를 잡았다. 덜컹! 진우가 손에 힘을 줘봤지만 진우의 근력으로도 문은 움직이지 않았다. '마법이 걸려 있나?' 그렇지 않다면 고작 철문 따위가 움직이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때. '띠링'하고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현재 카르테논 신전의 문은 잠겨져 있습니다.] [열쇠를 사용하십시오.] '이래서 열쇠가 필요했군.' 진우가 검은 열쇠를 불러냈다. 열쇠 구멍에 열쇠를 집어넣자마자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철컹. 문이 얼마나 단단하게 잠겨 있는지 확인을 끝냈었던 용기 길드 공격대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뭐야? 어떻게 열었대?' 진우는 그들의 속삭임을 무시하고 차갑게 말했다. "말리진 않겠습니다. 들어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얼마든지 들어가요." 물론 경고도 잊지 않았다. "다만 들어가신 분들은 살아나오기 힘들 겁니다." 그 한마디가 헌터들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S 급 헌터의 충고. 누가 과연 우습게 여길 수 있을까? 하지만 용기 길드의 마스터는 길드의 이름값을 하려는 건지 앞으로 나섰다. "제가 가보죠." "..." 진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선택은 그들의 몫. 결과도 그들에게 맡길 참이었다. 길드장은 문 쪽으로 걸어가며 공격대원들을 돌아보았으나, 다들 눈치만 살필 뿐 동행할 사람은 나오지 않았다. 길드장은 괘씸하다는 듯 동료들을 흘겨보다가 문 앞에 섰다. 진우는 그가 들어가기 쉽도록 닫히지 않게 잡고 있었던 문을 살짝 벌려주었다. 쿠웅-! 육중한 문이 움직였다. 잠깐 진우와 눈이 마주쳤던 길드장의 얼굴에 비장함이 어리었다. 망설이던 기색도 잠시. 용기를 낸 그가 안으로 한 발 걸음을 내디뎠다. 그때. 진우의 눈앞에 메시지가 주르륵 떠올랐다. 띠링, 띠링, 띠링! [열쇠를 소지하지 않은 이가 신전에 출입했습니다.] [출입을 불허합니다.] [지시를 따르지 않을 경우 문지기가 공격을 시도합니다.] 굉장히 위험하고 중요한 메시지들이었으나 플레이어가 아닌 헌터들의 눈과 귀에는 보이지도, 들리지도 않았다. 오직 진우만이 시스템의 경고를 들었다. 아무 것도 모르는 길드장이 결국 한 걸음을 더 내딛었고. 쉬익-! 그의 머리 위에 망치가 떨어져 내렸다. 쿵! 내리꽂힌 망치가 바닥의 석판을 부숴 버렸다. "컥!" 진우가 급히 길드장의 뒷덜미 옷깃을 잡아 밖으로 끌어내지 않았다면 그의 머리가 그렇게 됐으리라. "으, 으악!" 문지기 석상들이 뻗는 손에 질겁하던 길드장을 문밖으로 던져낸 진우가 빠르게 문을 닫았다. "안에 있는 건 전부 저런 것들입니다." 진우가 헌터들에게 돌아섰다. "그래도 꼭 들어가셔야겠습니까?" 바닥에 주저앉은 길드장이 고개를 미친듯이 뒤흔들었다. 길드원들이 급히 그를 부축해서 끌고 나갔다. 헌터들이 모두 떠나는 걸 확인한 후, 진우가 안으로 들어섰다. 띠링. [열쇠의 소지자가 입장했습니다.] 쿵. 문이 닫혔다. 거대한 방의 규모,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석상들. 그리고 가장 안쪽에 위치한 어마어마한 크기의 신상. 모든 것이 기억과 동일했다. '다시... 돌아왔다.' 가슴이 격하게 뛰었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도 분명히 존재했다. 바로 자기 자신. 달라진 진우의 눈에 그들의 실체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석상들은 마수도, 생명체도 아니다.' 그저 누군가에게 이어져 있는 꼭두각시들일 뿐. 이 방에서 마력을 뿜어내는 존재는 하나였다. 그것도 마력을 최대한 숨기고 있어서 직접적으로 감지하기가 불가능해 불길한 느낌만이 전해질 뿐이었다. 진우는 천천히 녀석에게 걸어갔다. "진짜는 너였구나." 진우가 말을 걸었음에도 녀석은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나오시겠다?" 진우가 입꼬리를 올렸다. 순식간에 속도를 높인 진우가 녀석의 가슴에 단검을 꽂아 넣었다. 그러나. 콰직! 공격은 놈이 들고 있던 석판에 막혔다. 단검은 석판에 박혔다. 석상들 중 유일하게 석판을 들고 있었던 녀석. "마침내." 여섯 장의 날개를 지닌 석상이 석판 너머로 진우를 내려다보며 싱긋 웃었다. "여기까지 왔구나." *** 도쿄, 신주쿠. 고층 빌딩처럼 높이 솟아있는 게이트에서 마수들이 하나둘 걸어 나오기 시작했다. 쿵. 쿵. "헉..." "저, 저게 무슨." 거인들이었다. 최상위 A 급 게이트의 보스로 종종 등장하는 마수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거인!" "거인들이다!" 지켜보던 이들 모두 겁먹고 뒷걸음질 치는 가운데, 유리만이 침착하게 술병을 들이켰다. '이 정도면 문제없다.' 보기만 해도 등골이 오싹해지는 마수들이었지만, 유리는 자신의 결과물에 자신감이 있었다. "와라!" 그의 예상은 맞아떨어졌다. 쾅! 쾅! 거인들이 게이트 주위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보이지 않는 벽을 두들겼으나 벽은 끄떡도 하지 않았다. 쾅! 쾅! 어깨로 밀어 보고, 온몸을 던져 부딪혀도 봤지만 유리의 결계 마법은 완벽했다. "으하하하하핫!" 유리가 거인들을 비웃으며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기를 30 분가량. 결계를 깨려고 발버둥 치던 거인들이 지쳤는지 다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이 기함을 내질렀다. "맙소사!" "던전 브레이크로 나온 마수들이 다시 게이트 안으로 들어간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듣도 보도 못한 경우. 연륜 많은 기자들조차 처음 보는 광경에 신들린 듯 셔터를 눌러 댔다. 마지막 남은 거인 하나가 게이트로 도로 들어갔을 때, 마쓰모토 협회장이 벌떡 일어나 박수를 쳤다. 짝, 짝, 짝, 짝! 곧 박수 소리는 하나에서 여러 개가 되고, 탄성이 되었으며, 탄성은 얼마 지나지 않아 함성이 되었다. 와아아아아-! 관계자들의 열렬한 성원을 받으며 유리가 기자들을 향해 돌아섰다. "이건 나밖에 할 수 없는 일이야. 내가 S 급 게이트를 막았다고." 그의 목에 힘줄이 섰다. "그깟 개미 몇 마리 잡은 놈과 저 거인들을 게이트 안으로 밀어넣은 나! 누가 더 대단한지는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겠지?" 취기로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지 않고, 그는 기자들을 향해 자신의 금니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런데 그때. 쿵! 땅이 울렸다. 쿵! 배치해 놓았던 탱크가 들썩거렸다. '...?' 그제야 유리는 기자들이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들의 시선은 게이트를 향해 있었다. 유리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들고 있던 술병을 떨어트렸다. 툭. '맙소사...' 유리의 눈이 커졌다. 방금 전 게이트에서 나왔던 거인들이 왜소하게 보일 만큼 거대한 거인이 게이트에서 나와 몸을 일으켰다. 몸을 일으키다. 유리는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현실이 맞는지 몇 번이나 눈을 껌벅거렸다. '어떻게... 어떻게 몸을 숙여야만 저 크기의 게이트를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큰 놈이 있을 수가 있지?' 굳이 설명하는 사람이 없어도 모두들 직감했다. 저 녀석이 보스라는 사실을. 고개를 꼿꼿이 세운 괴물 거인은 주위를 둘러보다가 결계에 몸을 부딪치기 시작했다. 쿠웅-! 전과 다른 묵직한 소음이 울려 퍼지며 땅이 심상치 않게 흔들렸다. 쿠웅-! 쿠웅-! 쿠웅-! 유리의 눈에는 똑똑히 보이고 있었다. 자신만이 볼 수 있는 마력의 결계에 거미줄처럼 금이 가고 있는 장면이. '이럴 수가...' 다리가 후들거리기 시작했다. 벽에 어깨를 들이밀던 괴물 거인은 이만하면 됐다고 생각했는지 뒤로 멀찌감치 물러났다. 그리고 전력으로 달려서 결계에 몸을 던졌다. 바로 그 순간! 퍼엉-! 뭔가가 폭발하는 굉음과 함께 마법진을 밝히던 빛이 사라져 버렸다. "으, 으아아악!" 유리가 비명을 내지른 것도 마침 그즈음이었다. 괴물 거인은 결계를 부수자마자 결계에 마력을 불어넣고 있던 유리를 움켜쥐고 들어 올렸다. 거인의 손에 붙들린 유리는 온몸이 아스러지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발버둥 쳤다. "으아아아악! 으아아아아아악!" 덥썩. 그러나 거인이 다시 입을 벌렸을 땐 더 이상 그의 비명을 들을 수 없었다. 그리고. 유리를 삼켜 버린 괴물 거인의 뒤로, 게이트로 들어갔었던 거인들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 156 화 드드드득. 관절에서 기괴한 소리를 내며 석상이 움직였다. 진우가 놈을 노려보았다. 놈과 다른 석상들의 차이점은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날개가 달려 있다는 점이 가장 컸다. 천사상. 놈만이 유일하게 천사를 표현한 석상이었다. 그것도 등 뒤에 날개를 여섯 장이나 단. 앉아 있던 천사상이 똑바로 일어서며 구부리고 있던 등을 펴니 장장 3 미터에 달하는 크기가 되었다. 팟! 진우는 빠르게 물러나 다른 한손에도 단검을 쥐고 자세를 낮추었다. 일단 싸우기로 마음먹자 온몸의 신경이 올올이 일어나며 마음부터 육체까지, 전투에 최적화되었다. '...' 그런데 분명 천사상은 진우의 전의를 느끼고 있을 텐데도 입가에 떠올라 있는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소름 끼치도록 징그럽고 부자연스러운 미소였다. 잠깐 고개를 숙여 단검 자국이 난 석판을 내려다보던 천사상이 아무렇지 않게 석판을 뒤로 던져버렸다. 당연히. 콰직! 바닥과 부딪친 석판은 여러 조각으로 부서졌다. 조각난 석판을 본 천사상이 딱딱하게 웃었다. "하하." 진우의 눈매가 가늘어졌다. '처음부터...' 처음부터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저 석판도, 저 석판에 적혀 있던 규율이란 것들도.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함부로 취급하지는 않겠지.' 그럼 이곳은 뭘 위한 장소였을까? 그리고 놈은 뭘 원한 것이었을까? '그리고...' 퀘스트, 레벨업, 열쇠 던전 등. 여기서 빠져나간 이후 생긴 기현상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이 모든 질문의 답을 찾을 기회가 왔다. 그런 생각이 든 순간. 두근, 두근, 두근! 심장이 가슴을 때렸다. 항상 차분히 뛰던 심장이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어떤 엔진보다 더 거칠게 몸부림쳤다. '놈은 알고 있다.' 진우가 경계를 조금도 늦추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나를 부른 게 너냐?" 너와 시스템은 무슨 관계가 있냐고, 진우는 그렇게 물었다. "그래." 천사상은 손가락 끝을 움직여 보더니 말을 이었다. "용케도 여기까지 왔구나." 그 다음은 목. 놈이 목을 좌우로 빙글빙글 돌렸다. 드드득. 드득. 놈은 몸을 풀고 있었다. 무엇을 위해서 몸을 푸는지는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보통 이런 경우에 진우는 선공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만큼은 예외. 싸움으로 대화를 날려 버리기에는 천사상에게 묻고 싶은 것들이 너무도 많았다. 진우가 다시 물었다. "너는 마수인가?" 천사상의 마력 파장은 마수들의 것과 분명 달랐다. 하지만 마수란 단어의 정의는 어차피 인간들이 편의를 위해 만들어 낸 것에 불과하다. 그게 괴물을 뜻한다면 놈이야말로 진짜 마수였다. 말을 하고 움직이는 석상. 세상 어디에 이보다 더 괴물 같은 괴물이 존재할 수 있을까? 단지 진우가 알고 싶은 것은 놈이 마수라 불리는 그 괴물들과 동류인가 하는 점이었다. 드드드득. 드드득. 허리를 숙이고 몸을 풀던 천사상이 상체를 일으켰다. "질문이 잘못되었군." "..." "내가 누구인지를 물을 것이 아니라, 네가 누구인지를 물었어야지." 멈칫. 잠깐 순간적으로 경직된 진우였으나, 당혹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짝! 천사상의 손뼉이 마주치는 소리가 상념을 지웠다. "자, 이것이 마지막 시험이다." 몸풀기를 끝낸 천사상의 얼굴에서는 이미 미소가 사라져 있었다. "시험이 끝나고도 네가 살아 있으면 모든 것을 알려 주마. 이것이." 천사상이 손가락을 퉁기자 석상들의 눈동자에 붉은빛이 새겨졌다. "내가 주는 상이다." 그 순간. 내부에 빽빽하게 세워져 있는 모든 석상들의 고개가 일제히 진우를 향했다. 쿵. 모든 석상들이 받침대를 내려왔다. 착. 모든 석상들이 자신의 무기를 들어 올렸다. 진우는 신전의 석상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꼭두각시들이라고는 하지만 강력해 보이는 놈들이었다. 실제로 이전에는 몇 번이나 죽을 뻔했었고. 진우는 침착하게 그림자 병사들을 불러냈다. '나와라.' 그런데. 띠링! [최후의 시험을 위해 직업 전용 스킬들이 제한됩니다.] [물약, 상점 사용 또한 금지되며, 레벨업과 퀘스트 완료 보상을 이용한 상태 회복도 불가능합니다.] [최후의 시험이 끝나기 전까지 퇴장할 수 없습니다.] '뭐?' 띠링, 띠링 귓가를 울리는 기계음에 진우의 미간이 구겨지는 것도 잠시. 석상들이 진우를 덮쳐 오기 시작했다. 조용하면서도 빠른 움직임. 전에 전직 시험에서 자신을 향해 달려오던 수백 기의 기사들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갖가지 포션이나 퀘스트 보상 등, 혹시나 해서 준비해 온 비장의 카드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어 버렸다. 그동안 긴 시간을 함께했던 만큼 시스템은 진우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다면 내 힘만으로 돌파해주마!' 각오한 진우가 단검의 손잡이를 굳게 쥐었다. 가장 쉽게 위기를 벗어나는 방법은 석상들을 움직이는 실체를 제거하는 것이었다. 천사상. 하지만 놈을 죽이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한다. 그것은 최후의 수단. 일단은 놈이 말하는 '시험'이란 것에 응한다. '그러기 위해서...' 성장을 멈추지 않았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림 없이 원하는 바를 취하기 위해 쉬지 않고 갈고닦은 레벨이었다. 후욱-! 진우의 코와 입에서 더운 숨이 확 뿜어져 나왔다. 이곳에 처음 발을 들였을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전혀 볼 수 없었던 것들이 눈에 담기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마치 순간이동처럼 보였던 석상들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을 수 있게 되었다. '왼쪽.' 캉! 왼쪽에서 날아온 석상의 창을 단검이 막아 냈다. '다시 왼쪽.' 창을 들고 있던 석상의 어깨를 밟고 뛰어오른 석상이 도끼를 내려쳤다. 위에서 아래로 떨어지는 공격을 정면으로 막는 것은 비효율적인 방법이기에, 진우는 몸을 반 바퀴 틀면서 공격을 흘려 보냈다. 쾅! 도끼에 박살 난 바닥에서 돌조각이 튀었다. 투쾅! 도끼를 든 석상의 얼굴을 있는 힘껏 차 버렸더니 머리가 박살나 버렸다. 그러나. 쉭-! 진우가 상체를 뒤로 숙여 피한 화살이 반대편 벽 쪽으로 날아가 박혔다. 한 놈을 처치했다고 기뻐할 시간도 없이 본격적인 공격이 시작됐다. 쉬익-! '오른쪽.' 이번엔 검. 진우는 막아 낸 석상의 검을 완력으로 밀어냄과 동시에 반대편 손의 단검을 사선으로 내리그었다. 툭! 팔이 잘린 석상은 고통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몸부림치며 나가떨어졌다. 왼쪽, 오른쪽, 오른쪽, 왼쪽, 앞, 앞, 오른쪽, 왼쪽. '된다.' 싸움에 깊이 집중하면 집중할수록 석상들의 움직임은 점점 느려지고, 반대로 자신의 움직임은 점점 더 빨라졌다. 뒤쪽에서 느껴지는 섬뜩한 감각. '뒤!' 뛰어오른 진우가 뒤쪽에서 다가오던 석상의 머리 위를 넘어가며 놈의 머리를 잘랐다. 스걱! 눈으로 볼 수 없는 곳은 감각 스탯의 힘으로 커버한다. 하아! 터져 나온 숨. 극한까지 단련한 신체가, 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전부 석상들의 움직임에 반응하고 있었다. 진우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집요하게 이어지는 석상들의 공격을 쳐 내며, 막아 내며, 뿌리치며 석상들의 숫자를 빠르게 줄여나간다. '마치 이 순간을 위해서...' 오직 지금만을 위해 손에 쥐어진 것처럼 악마왕의 단검들은 돌로 이루어진 적들의 신체를 가볍게 베어 냈다. 몸이, 정신이, 세포가, 단검이 하나가 되는 감각을 느끼며 진우는 정신없이 움직이고 또 움직였다. 진우의 움직임을 주의 깊게 지켜보던 천사상은 전율에 몸을 떨었다. '인간의 몸으로 잘도 거기까지...' 천사상의 얼굴에서 잠깐 사라졌었던 미소가 다시 떠올랐다. 선택은 옳았다. 하지만. 이대로 시험을 끝내기에는 아직 한참 일렀다. 천사상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거대한 의자에 앉아 때를 기다리고 있던 신상의 눈에도 붉은빛이 들어왔다. 의자의 양쪽 팔걸이 끝을 손으로 강하게 움켜쥔 녀석이 그 어마어마한 몸뚱이를 느릿하게 일으켰다. 쿠구구구구구구구궁-! 워낙에 거대해서 그런지 단지 보는 것만으로도 간담이 서늘해지는 장면이었다. 쿵. 신상이 첫발을 내딛자 넓은 공동 전체가 울렸다. 쿵, 쿵, 쿵. 신상은 워낙 보폭이 넓어 몇 걸음 걷지 않고 진우의 지척까지 다가설 수 있었다. 진우 주위에는 벌써 석상들의 잔해가 산을 이뤄가고 있었다. '...' 그 앞에 멈춰 선 신상이 오른팔을 들었다. 석상들과 뒤엉켜 무아지경으로 싸우고 있었던 진우가 이변을 감지한 것도 바로 그즈음이었다. 문득 어두워지는 주위를 보고 진우가 고개를 들어 올렸다. '...?' 거대한 손바닥이 시야를 덮어오고 있었다. 신상은 진우를 포위한 석상들의 안위는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거침없이 바닥을 내리쳤다. 쿠웅-! 급히 몸을 날려 손바닥의 범위를 벗어난 진우가 바닥을 데굴데굴 구르다 몸을 일으켰다. 신상을 바라보는 진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래, 저놈이 있었지.' 산 넘어 산이라더니. 진우의 시선이 다시 아래로 내려왔다. 아직도 목숨이 끊어지지 않은, 족히 백은 될 것 같은 석상들이 자신을 향해 질주해오고 있었다. 석상들은 금방 코앞까지 도착했다. 끔찍한 속도로 날아드는 철퇴를 단검 끝으로 살짝 건드려 궤도를 바꾸고, 미끄러지듯 앞으로 스윽 지나치며 철퇴를 든 석상의 목을 잘랐다. 툭. 석상의 목이 떨어지는 것이 신호라도 되는 것처럼 그 뒤를 따라오던 석상들이 덮쳐 왔다. 하지만 정말로 위험한 것은 석상들 따위가 아니다.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감각. 진우가 흠칫 놀라며 급히 고개를 쳐들었다. '...!' 아니나 다를까. 신상의 두 눈에 섬뜩한 붉은빛이 뭉치고 있었다. '피하기는... 늦었나?' 잘못 움직였다가는 석상들에게 퇴로가 가로막혀 광선에 녹아 버릴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렇다면.' 진우는 왼손의 단검을 놓는 동시에 자신을 덮쳐 오는 석상들을 향해 왼손을 내뻗었다. '지배자의 손길!' 지배자의 손길에 묶인 석상 다섯이 공중에서 겹쳐졌다. 띠링! [스킬 '지배자의 손길'이 최종 형태 스킬 '지배자의 권능'으로 상향됩니다.] '좋아!' 하지만 기쁨을 즐길 여유 따위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진우는 석상들도 만든 방패를 신상의 시선이 향할 경로로 이동시켰다. 지이이이잉-! 예상했던 대로, 신상의 양쪽 눈에서 붉은 광선이 쏟아져 나왔다. 치지지직-! 석상들을 뭉쳐져 만든 방패가 녹는 데는 불과 1 초도 걸리지 않았지만, 진우는 그 찰나를 이용해 광선의 공격 범위를 무사히 빠져나왔다. '지배자의 손길'을 거두어들이자 석상들이었던 찌꺼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투두둑. 진우는 석상들까지 흔적 없이 증발시키는 신상의 힘을 확인하며 전략을 수정했다. '역시 신상을 처리하는 게 우선이다.' 목표가 정해졌다. 신상의 눈에서 두 번째 광선이 쏟아지기 직전, 진우의 다리가 바닥을 박찼다. '신속!' 두두두두두두-! 그렇지 않아도 빠른 진우의 움직임이 신상의 인식 가능 범위를 아득히 초월한 속도로 변했다. 순식간에 석상의 발밑까지 도달한 진우가 두 다리에 힘을 주었다. 낮아진 자세에서 엄청난 도약력이 응축되었다. 기회는 한번. 아무래도 자유로운 움직임이 불가능해지는 공중에서는 무시무시한 속도로 날아드는 붉은 광선을 피하기가 더욱 어려워진다. 그러나 이미 배우지 않았던가? 어느 정도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 기회 또한 오지 않는다. '그러니까.' 입을 일자로 굳게 다문 진우가 바닥을 있는 힘껏 박찼다. 진우의 신형이 로켓처럼 쏘아졌다. '이만 부서져라!' = 157 화 진우는 단숨에 신상의 눈높이까지 도약했다. 낙하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최고점. 진우는 마치 주변의 모든 것들이 멈춰 버린 것처럼 느리게 느껴졌다. 뛰어오를 때 튕겨져 나간 땀방울의 반짝임이 보였다. 땀방울은 조금씩이지만 이쪽에서 멀어지고 있었다. 초고도의 집중 상태. 한 번만 실수해도 목숨을 잃을 수 있다는 위기감이 진우의 모든 능력치를 극한으로 끌어올렸다. '이것이 민첩 스탯의 진정한 힘...' 지금 민첩 스탯의 끝을 보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쿵쾅쿵쾅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그간의 성과를 만끽하고 있을 여유 따위는 없었다. 신상의 시선은 느리지만 분명하게 자신에게로 움직이고 있었다. 놈의 눈동자에 맺혀 가는 붉은빛을 이렇게 가까이서 접하니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스치기만 해도 그걸로 끝. 아찔한 감각을 느낌과 동시에 정신이 또렷해졌다. '침착하게...' 단검을 쥐고 있지 않은 왼손을 길게 내뻗었다. '지배자의 권능!' 한 단계 더 업그레이드 된 '지배자의 손길'이 신상의 어깨를 끌어당겼다. 물론 어마어마한 무게의 신상이 쉽게 움직일 리가 없으니, 자신이 당겨지리라는 계산에서였다. 우웅! 그런데 예상을 깨고 신상의 상체가 조금이지만 앞으로 움직였다. '...!' 엄청난 인력(引力). '지배자의 손길'이 '지배자의 권능'으로 바뀌면서 스킬의 성능이 전보다 배는 더 좋아진 듯했다. 덕분에 보다 수월하게 신상의 어깨에 안착한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지잉-! 맹렬히 터져 나온 붉은 광선이 아까 자신이 위치해 있던 공간을 정확하게 훑고 지나갔다. '좋았어.' 이제 몇 초는 신상의 광선 공격으로부터 안전하다. 진우는 아무런 부담 없이 신상의 어깨 위를 전력으로 질주해 놈의 목 옆에 도착했다. 진우의 오른손이 '악마왕의 단검' 손잡이를 꽉 움켜쥐었다. '난도!' 여러 갈래의 은빛 섬광이 산탄총처럼 쏟아졌다. 두두두두두두두두! 목을 향해 쏟아진 수십 발의 일격. 하지만 타격은 없었다. 어느 것 하나 치명상을 주지 못하고 피부 겉면에 흠집을 만드는 데만 그쳤을 뿐이었다. '단검이 안 먹혀?' 보스급 나가의 강철 같은 비늘도 걸레짝으로 만들었던 '악마왕의 단검'이 초라하게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그때. 진우는 자신에게 쇄도해 오는 거대한 손을 발견했다. 손이 자신을 움켜쥐기 전에, 진우는 한발 먼저 신상의 뒷목을 타고 반대편 어깨로 건너갔다. 그러면서 잠깐 아래를 내려다보니 높이가 아찔했다. 진우의 고개가 다시 신상의 옆얼굴을 향했다. 신상이 처음이라면 모를까, 날붙이가 통하지 않는 상대쯤은 이미 숱하게 상대해 봤다. '뚫을 수 없다면, 부수자!' 괜히 근력 스탯에 많은 포인트를 투자했던 게 아니다. 진우의 눈에 힘이 들어갔다. 가볍게 뛰어오른 진우가 심상의 관자놀이에 왼손을 내질렀다. 콰직! 왼쪽 손가락 다섯 개가 겉면을 파고 들어 갔다. '됐다!' 진우는 왼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러자 암벽등반 전문가가 한 손으로 절벽에 매달리는 것처럼 진우도 신상의 얼굴에 단단히 고정되었다. 여기까지가 준비과정. 이제부터가 진짜였다. 진우의 오른쪽 등과 어깨, 팔이 비정상적으로 팽창하기 시작했다. 무시무시한 마력이 진우의 오른팔을 감싼 결과였다. 일단은 한 방. 투쾅-! 단검으로는 끄떡도 않던 신상의 머리가 흔들렸다. '...!' 그 장면을 보고 천사상이 소스라치게 놀랐다. 위쪽에서 퍼져 나오는 강대한 마력에 신전 전체의 공기가 떨리고 있었다. 위를 올려다보던 천사상은 격한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저런 식으로. 자신의 야심작을 저런 방식으로 상대할 줄이야. 천사상의 눈빛에 더 큰 기대감이 어리었다. 투쾅-! 다시 진우의 주먹이 신상의 얼굴을 강타했다. 비틀. 잠시지만 신상이 균형을 잃었다. 공격은 먹히고 있었다. 하지만 신상도 가만히 당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부웅! 신상은 얼굴에 붙은 모기를 때려잡는 것처럼 거대한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을 내리쳤다. 쿵-! 손바닥을 피해 신상의 어깨에 내려선 진우가 히죽 웃었다. 이래서야 자신이 자신의 뺨을 후려친 꼴이었다. 손바닥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진우는 다시 신상의 얼굴에 매달렸다. 그리고. 쾅! 투쾅! 쾅! 쾅! 투쾅! 끔찍한 굉음이 쉴 새 없이 공동 안을 울렸다. 콰직, 콰지직. 신상의 얼굴에 생겨난 금이 점점 거미줄처럼 사방으로 번져 나갔다. 비틀거리며 중심을 유지하려 애쓰던 싱상이 이윽고 동공의 벽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쿵, 쿵, 쿵! 놈의 거대한 다리가 바닥을 광폭하게 밟았다. 벽에 돌진해 자신에게 달라붙어 있는 진우를 터트리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전에...' 그전에 끝을 내자. 진우의 주먹이 더 빠르게, 더 강하게 신상의 얼굴을 자비 없이 강타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쾅! 쿵! 쿵! 쿵! 신상의 속도가 빨라지며 벽과의 거리가 금세 줄어들었다. 흘깃. 남은 거리를 눈대중으로 재 보던 진우가 최후의 일격을 위해 온몸의 힘을 오른팔에 실었다. 부풀어 오른 근육에 힘줄이 솟으며 끔찍할 정도의 마력이 맺혔다. '...좋아.' 103 레벨의 힘. 진우는 그 모든 것을 이 한방에 쏟아부었다. 그렇게 벽에 부딪히기 직전. 투콰앙-! 콰직! 잘 익은 수박 깨지는 소리와 함께 머리 한쪽이 반파된 신상이 무릎을 꿇었다. 쿠웅! 동공 전체가 흔들렸다. 신상의 그 거대한 몸이 힘없이 바닥을 향해 기울어졌다. 쿠우웅-! 육중한 돌덩이가 맨땅에 충돌하니 자욱한 먼지가 뿌옇게 피어올랐다. 안개처럼 내부를 뒤덮은 먼지들을 헤치고 진우가 걸어 나왔다. "후우." 진우는 나직이 숨을 내쉬었다. 두근, 두근, 두근. 아직도 심장이 뛰는 소리가 세차게 고막을 때리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는 그냥 마주 서 있는 것만으로도 오금이 저리던 신상이 지금, 눈앞에 고꾸라져 있었다. 다른 누가 한 게 아니다. 자신이 만든 결과였다. '...할 수 있다.' 그게 무엇이든. 이곳에서 목숨을 잃었던 여러 헌터들의 얼굴이 떠오르며 벅찬 감정이 밀려들어 왔다. 그러나 감상에 빠질 시간은 주지 않겠다는 듯, 남아 있는 석상들이 빠르게 움직였다. 진우는 둥글게 에워싸고 포위망을 좁혀 오던 녀석들이 뛰어들려는 순간. 자신의 두 손을 내려다보던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지배자의 권능." 쿵-! 일제히 바닥에 머리를 처박은 석상들 전원의 움직임이 멎었다. 보이지 않는 손, '지배자의 권능' 스킬이 지닌 힘이었다. 진우는 다시 자신의 양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늘 싸움으로 난 한층 더 강해졌다.' 쥐었던 주먹을 펴고, 편 손을 다시 쥐어 본다. 강력한 힘이 이 두 손에, 아니 온몸 전신에 넘쳐흐르고 있었다. 힘의 흐름이 느껴졌다. 가슴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전투를 통해 내 안에 있는 무언가가 깨어나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때였다. 짝, 짝, 짝, 짝, 짝. 느린 박수 소리. 진우가 소리의 방향을 향해 고개를 들어 올렸다. 천사상이 예의 그 징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두 손을 크게 움직여 과장된 박수를 보내고 있었다. "훌륭하다." 하지만 입에서 나오는 말과 달리 천사상의 눈에서 흉흉한 기운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우가 말했다. "먼저 약속한 게 있을 텐데?" 최후의 시험인지 뭔지가 끝날 때까지 서 있을 수 있다면 질문의 답을 알려 주겠다고 녀석이 말했었다. 진우는 그 대답이 듣고 싶었다. 그러나 놈은 쉽게 말해 줄 생각이 없는 듯 기계처럼 딱딱하게 웃었다. "하하." 그러면서 한 걸음 가까이 다가왔다. "시험은 끝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여기." 또 한 걸음. 성큼성큼 거리를 좁혀 오던 천사상이 결국 진우의 앞에 섰다. "내가 있지 않나?" 드드득, 드드드득! 천사상의 등에 달린 길쭉한 날개들이 뒤틀리고 엉키더니 전부 팔로 변했다. 어깨에서 뻗은 두 개의 팔과, 등에서 뻗은 여섯 개의 팔. 모두 여덟 개의 팔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내가 마지막 시험이다." 진우가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진우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천사상이 먼저 말을 잘랐다. "내 목숨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흠칫. 진우의 눈이 커졌다. 자신이 무슨 말을 할지 녀석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너를 죽여 버리면 대답을 들을 수 없지 않나, 진우는 짜증을 담아 그렇게 물으려고 했었다. "놀라운가?" 천사상이 손 하나를 움직여 자신의 머리를 가리켰다. "너에 대한 정보는 모두 여기에 있다." 설마? 진우의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역시 눈치가 빠른 인간이군." 하하. 천사상이 다시 기계처럼 딱딱한 웃음소리를 냈다. 그러고는 말을 이어 갔다. "그래도 네가 나를 죽이지 않기 위해 힘을 조절한다면 제대로 실력을 재기가 힘들겠지." 그 순간 천사상의 입술이 빠르게 움직였다. 하지만 목소리는 천사상의 입이 아닌 다른 곳에서 흘러나왔다. ['긴급 퀘스트'가 발생했습니다.] [정해진 시간 내에 적을 쓰러뜨리지 못하면 당신의 심장은 정지하게 됩니다.] [남은 시간: 10 분 00 초] 퀘스트 메시지를 읽음과 동시에 남은 시간에서 1 초가 사라졌다. 틱. [남은 시간: 9 분 59 초] 천사상을 바라보는 진우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래." [그래.] 천사상이 말을 할 때마다 시스템의 목소리가 같이 들려오고 있었다. 잠시 평정을 찾았던 심장이 다시 쿵쾅거리며 미친 듯 날뛰기 시작했다. 숨이 빨라지고, 손끝이 떨려왔다. 천사상은 진우의 반응을 지켜보며 진우가 물어 왔던 첫 질문, '너는 누구냐'의 답을 말해 주었다. "내가 시스템의 설계자다." [내가 시스템의 설계자다.] *** "지금 일본은 던전 브레이크로 난리들인데, 김 기자님이 여기 계셔도 됩니까?" 우진철이 귀찮다는 듯 말했다. 김 기자는 하품하며 구레나룻 근처를 긁적거렸다. "거긴 이미 기자들 천지잖아요. 저 하나 더 간다고 뭐가 달라지겠습니까? 감시과에서 대기하다가 특종 하나 물어가는 게 낫지." "..." 하품을 하든지 머리를 긁든지 둘 중 한 가지만 하라고 말하려던 우진철이 그냥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다들 협회의 비리니 헌터들의 사생활이니 자극적인 기사만 써 대려고 안달 난 마당에, 거의 유일하게 협회를 호의적인 관점에서 다루는 기자가 그였기 때문이다. '아군을 굳이 적으로 만들 필요는 없겠지...' 그래서 우진철은 감시과에 들린 김 기자를 상대해 주고 있었다. 늘어지는 하품을 끝내고, 김 기자가 도리어 물었다. "그러는 우 과장님이야말로 나라 전체가 떠들썩한데 여기 앉아 계셔도 되는 겁니까?" 우진철은 작성하던 서류를 덮고서 한숨을 내쉬듯 조용히 대답했다. "누구 한 사람은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있어야 하니까요." 오. 눈을 동그랗게 뜬 김 기자가 손바닥만 한 수첩과 펜을 꺼내며 말했다. "그 말 멋지네요.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정확하게 적어가고 싶은데, 죄송하지만 다시 한 번." "김 기자님. 당신 정말..." 발끈하려던 우진철의 핸드폰이 때마침 울려 댔다. '음?' 신고 센터의 연락이었다. 감시과로 걸려오는 전화가 아니라 본인의 핸드폰으로 직접 오는 연락이라면 대개 보통 일이 아니라는 의미인데. 우진철이 급하게 전화를 받았다. "감시과 우진철 과장입니다." -과장님, 여기 신고가 접수됐는데요. 아무래도 한 번 가 보셔야겠습니다. 우진철의 눈매가 날카로워졌다. "무슨 일입니까?" -전에 오크들이 나왔던 학교 있지 않습니까? "거기서 또 무슨 일이...?" -아직 일이 생긴 것까진 아닌 분위기인데, 그 학교 운동장에서 생성된 게이트에서 이중던전이 발견됐답니다. '이중 던전?' 우진철의 눈이 커졌다. -그런데... 신고 접수 직원은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다. 우진철의 목소리가 급해졌다. "그런데요?" -거기 성진우 헌터가 들어가셨답니다. = 158 화 놀랄 틈도 없이. 천사상의 공격이 시작됐다. 단단하게 말아 쥔 커다란 주먹이 섬광처럼 날아들었다. 피하기에는 너무 가깝고 공격 속도 또한 빠르다. 전투로 숙련된 두뇌가 빠른 결론을 내렸다. 진우는 급히 팔을 세워 막았다. 틀린 판단은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정답도 아니었다. 투쾅-! 어찌나 강한 힘인지 주먹이 강타하는 순간 두 다리가 붕 뜬 진우가 벽까지 날아가 처박혔다. 콰직-! 부서진 벽의 잔해들이 후두둑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크윽.' 진우는 신음을 삼켰다. 예상치 못한 일격에 예상을 뛰어넘는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천사상은 정비할 시간을 주지 않겠다는 듯, 어느새 진우의 코앞까지 다가와 있었다. 쾅! 진우가 고개를 옆으로 틀어 피한 천사상의 주먹이 벽에 커다란 구멍을 만들었다. 그것은 시작. 벽을 등지고 선 진우에게, 퇴로를 원천봉쇄한 천사상이 여덟 개의 주먹을 무자비하게 내질렀다. 한 번의 공격으로도 상급 헌터를 즉사시킬 수 있는 일격이 쉴 새 없이 쏟아졌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천사상의 눈이 커졌다. '공격을... 막고 있다?' 여덟 개의 팔에서 폭격처럼 이어지는 공격들을 단 두개의 팔로 막고, 비틀고, 흘리고 있었다. 그 움직임이 너무 빨라 잔상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천사상은 속으로 감탄했다. 애초부터 이 싸움은 결말이 예정되어 있었다. 하나의 과정일 뿐이었다.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진우를 마지막으로 점검해 보는 과정. 원래라면 지루함을 느끼는 것이 당연했다. 그런데. '재미있군.' 인간과의 싸움에서 흥미를 느끼게 될 줄이야. 인간 따위가 자신의 상대가 될 수 있으리라고는 긴 여생 동안 단 한 번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빛이 번쩍였다. 아니, 빛이 아니다. 인간이 내지른 주먹이었다. 투쾅! 점프한 진우에게 얼굴을 얻어맞은 천사상이 꼴사납게 바닥을 굴러다니다가 벌떡 일어섰다. 미소를 유지하고 있던 얼굴에 작은 금들이 새겨졌다. [하하.] 이 얼마만의 즐거움인지.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 아까워서 몸서리 처질 만큼, 천사상은 흥분해 있었다. "후우-" 천사상에게 보기 좋게 한 방을 먹인 진우가 기뻐하는 기색도 없이 거친 숨을 내쉬었다. '강하다.' 여태까지 상대해 왔던 그 어떤 적보다 강했다. 시스템의 설계자. 놈은 자신을 그리 소개했다. 어째서 시스템을 설계했고, 자신이 왜 플레이어로 선택받았으며, 지금 이 세계에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묻고 싶은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러려면...' 일단 '저것'을 때려눕히는 것이 우선이었다. 진우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때. 주룩. 얼굴에서 뭔가 끈적하고 따뜻한 액체가 느껴졌다. 피였다. 피는 ?어진 이마에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 피하진 못했나?' 완벽하게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놓친 공격이 있었던 모양이다. 하필이면 피가 한쪽 눈으로 스며들어 시야를 방해했다. 그에 반해 적은 건재한 상태. 빈말로도 좋은 상황이라 표현하기가 힘들었다. '근접전은 불리하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론. 적은 덩치가 몇 배는 더 크고 팔도 여섯 개나 더 달려 있었다. 다양한 경로로 들어오는 빠른 공격을 모두 피하거나 막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마의 상처가 증명하듯이. '그렇다면.' 전투의 양상을 조금 바꿔 보자. 진우가 그렇게 마음먹은 순간, 쏜살같이 날아온 천사상이 크게 주먹을 휘둘렀다. 콰과광! 허공을 가른 주먹이 벽을 때렸다. 허물어진 벽이 와르르 무너졌다. 천사상의 고개가 옆으로 움직였다. 진우는 천사상이 인지하기 전에 벌써 멀찌감치 물러나 있었다. '속도는 지지 않는다.' 그러니까 거리를 유지하면서 타격을 가하면... 진우는 자신에게 돌아서는 천사상을 향해 '지배자의 권능'을 사용했다. 퍽! 위에서 아래로 찍어 누르는 강한 일격! 개미왕 베르를 때려잡을 때 사용했던 기술이 천사상의 머리 위를 덮쳤다. 그런데. '...?' 진우는 눈을 의심했다. 그 거대한 신상의 상체마저 기울어지게 만들었던 그 스킬이, 천사상의 목을 약간 까딱이게 만드는 수준에서 그쳤다. 뭔지는 모르지만 놈은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이용해 스킬을 방어했다.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었다. '뭐지?'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재밌구나, 재밌어.] 언젠가부터 천사상의 낮은 목소리와 시스템의 여성적인 목소리가 겹쳐져서 들려왔다. 그 부자연스러운 조합이 계속해서 귀를 거슬렸다. [즐겁단 말이지.] 놈이 여덟 개의 팔을 사방으로 뻗자 석상들이 쥐고 있던 무기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저건...?' 진우의 눈이 커졌다. 곧 석상들의 무기가 일제히 떠오르더니 천사상에게 날아갔다. 천사상은 한 손에 하나씩 여덟 개의 무기를 한꺼번에 움켜쥐었다. '지배자의 손길.' 천사상 역시 '지배자의 손길' 스킬을 사용할 수 있었다. 진우 자신이 쓰던 것보다는 레벨이 떨어져 보이지만, 어쨌든 놈이 어떻게 이쪽의 스킬을 막았는지 알았다. 역시 보통 상대가 아니었다. 틱. 문득 진우의 시선이 위로 향했다. [남은 시간: 6 분 19 초] 이제 남은 시간은 대략 6 분. '빨리 끝을 봐야 해.' 원거리 공격이 통하지 않는다는 걸 알았다. 진우는 작전을 변경하고 '악마왕의 단검'을 불러냈다. 아까 던져놨던 하나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여덟 개의 무기를 상대로 단검 하나라.' 두근, 두근. 싸움이 궁지로 몰릴 수록 심장의 박동이 거세져 갔다. 탓. 천장에 닿을 듯 높이 뛰어오른 천사상이 진우의 앞에 내려섰다. 콰직! 낙하의 충격을 견디지 못한 바닥의 석판이 부서지며 돌조각이 튀었다. 진우는 발목에 부딪히는 미세한 돌조각들을 느끼며 단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진우는 천사상과 시선을 마주하며 차분하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오싹한 한기가 등줄기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니나 다를까. 검, 창, 도, 도끼, 망치 등 여덟 개의 무기가 각자 생명을 지닌 것처럼 무섭게 쇄도해 왔다. 후뜨거운 숨을 훅 내뱉은 진우가 눈을 부릅떴다. 밝지도 어둡지도 않은 내부의 불빛 아래서, 진우의 움직임에 따라 안광이 길게 꼬리를 그렸다. 콰과곽콰콰콰과과곽! 무수히 날아오는 총알을 전부 마주 쏜 총알로 막아 내면 이런 소리가 날까? 굉음들이 끝없이 부딪치며 진우와 천사상의 공방이 찰나의 시간 무수하게 이어졌다. 느려진 세상 속에서 오직 둘만이 시간의 흐름에 역행하듯 격하게 몸부림쳤다. 위도 아래도 없는, 막상막하의 진검승부. 하지만... '느껴진다.' 진우의 어깨가 살짝 움직였다. 천사상의 검이 눈으로는 짐작 못할 미세한 차이를 두고 그곳을 스치고 지나갔다. 쓰지 못하게 된 한쪽 눈은 이제 신경 쓰이지 않았다. 극한마저 넘어 새로운 지평으로 발돋움한 감각이 보지 않아도 겪고 있는 것처럼 무기들의 궤도를 읽어 주었다. 천사상의 공격을 아슬아슬하게 피해 가면서 하나하나 역공을 적중시킨다. 놈의 몸에 상처가 늘어나고 있었다. 천사상의 속도는 그대로인 반면 진우의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천사상은 경악했다. "...!" 시험을 위해서라면 이렇게까지 할 필요도 없었다. 이 인간은 자신의 전력을 끌어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전력(全力). 온 힘을 다하는 자신과 대등하게 맞설 수 있는 인간이라니? 천사상은 의혹 어린 눈빛으로 진우를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게 되었다. '조금이지만... 섞여 있다.' 흠칫. 천사상이 어깨를 떨었다. 그래서 이만한 힘을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게 된 것인가. 그러나 그것 또한 자신이 바라던 일. 천사상의 얼굴에 들뜬 희열이 떠올랐을 때, 깔끔하게 절단된 팔 하나가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천사상의 고개가 위를 향했다. 무기를 놓쳐 버린 저 팔은... 자신의 오른손이었다. [크아아아아아악!] 가짜 육체라고 해도 통증은 전해진다. 순식간에 팔 하나를 잃은 천사상이 비틀거리며 물러섰다. [인간 따위가!] 천사상의 눈이 붉어졌다. 잠자고 있던 본성이 본분을 잊게 만들었다. [감히!] 그가 소리치자 쓰러져 있던 석상들이 동시에 일어났다. 쿵! 머리가 반파된 신상까지 땅을 짚으며 몸을 일으켰다. 진우는 움직이기 시작한 적들을 감지하면서도, 당황하지 않고 천사상에게 덤벼들었다. 캉! 천사상의 손 네 개가 단검 하나를 막는 데 쓰였다. 그런데도 주르륵 발끝이 뒤로 밀렸다. 민첩, 감각, 근력, 체력. 모든 능력치가 천사상의 예상을 넘어서고 있었다. [크악!] 천사상의 짐승 같은 외침에 석상들이 진우를 덮쳤다. 신전의 모든 적과 진우 하나의 싸움이 시작됐다. 틱. [3 분 02 초] 그 와중에도 시간은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진우의 단검이 또다시 천사상의 팔을 잘랐다. 여섯 개의 날개를 변형시켜 만든 팔 중 하나였다. [크아아아악!] 그러나 되살아난 석상들의 저항도 만만치 않았다. 둘러싼 석상들의 숫자가 워낙 많아서 공격을 전부 피해 내기는 무리였다. 치명상이 될 공격들만 피하고, 나머지는 무시한 채로 천사상을 공격하는 데 집중한다. 체력이 가파르게 깎여 내려갔다. 푹! 석상 하나가 내려찍은 방패에 왼쪽 어깨가 찍혔다. '큭!' 진우가 놈을 돌아보았다. 방패를 든 석상이 또다시 내려찍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진우의 얼굴이 구겨졌다. 다른 녀석들은 몰라도 이놈만큼은 용서할 수가 없었다. 그제야 천사상에서 떨어진 진우가 단검을 들지 않은 왼손 팔꿈치로 놈의 머리를 찍었다. 콰직! 마력이 실린 내려찍기에 놈의 머리가 박살 났다. 그사이 석상들이 잽싸게 진우를 둘러싸고 몸을 날렸다. 그러나 진우는 스킬로 놈들을 밀어냈다. '지배자의 권능!' 쾅! 한 무리의 석상들이 폭발의 중심에서 밀려 나가는 것처럼 뒤로 튕겨 나갔다. "하아, 하아." 그러나 진우가 한숨을 돌리기도 전에 신상이 진우의 머리 위에서 주먹을 내려쳤다. 진우는 가볍게 옆으로 점프해 신상의 공격을 피했다. 부웅-! 거대한 주먹이 진우 근처의 석상 수십을 쓸어버렸다. 진우는 자신을 덮쳐드는 석상들을 따돌리기 위해 크게 원을 그리듯 달리며 천사상에게 접근했다. 천사상이 잔뜩 찡그린 얼굴로 진우를 맞이했다. 그 표정은 분노였다. 다시 한 번 진우와 천사상, 그리고 석상들이 뒤엉켰다. 진우의 땀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땀과 피가 열기에 증발해 진우의 어깨 위로 붉은 수증기가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석상들이 우르르 밀려나고, 신상이 주먹을 내리꽂고, 천사상의 손들이 바삐 움직였다. 그 중심에 진우가 있었다. [크아아아악!] 또 하나의 팔이 날아갔을 때. 진우의 단검이 마침내 천사상의 목에 닿았다. 둘의 머리 위에서는 신상이 깍지 낀 거대한 두 손을 내려치고 있었다. 진우는 침착하게 천사상의 목에 들이밀고 있던 단검에 힘을 주었다. 그 순간 천사상이 항복을 선언했다. [졌다.] 동시에 신상과 석상들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시험은 끝났다.] 틱. 종교를 알리는 천사상의 발언과 함께 끊임없이 돌아가던 타이머가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남은 시간: 2 분 11 초] 진우의 전신에서 수증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정지한 타이머를 확인하고서, 진우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시선은 천사상에게 고정되었다. "묻고 싶은 게 있다." [뭐든지. 내가 아는 한에서라면 무엇이든 답해 주마.] 무표정한 얼굴의 천사상이 의외로 순순히 요구를 받아들였다. '...' 진우는 조용히 생각했다. 처음 천사상에게 '네가 누구냐'고 물었을 때 천사상은 질문이 잘못됐다고 비웃었다. 녀석의 말대로 녀석의 정체를 듣고 나니 의문이 풀리기는커녕 더 많은 의문이 생겨났다. 그래서 진우는 녀석이 해 준 충고대로 제대로 된 질문을 던졌다. "나는 누구냐?" = 159 화 감시과 헌터들이 현장에 도착했다. 상급 헌터 일곱 명. 당장 동원할 수 있는 협회의 최고 정예들을 모조리 긁어서 왔다. 하지만. 우진철은 알고 있었다. 겨우 이 정도 전력으로는 성 헌터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그래도 최악의 경우...' 감시과 헌터들은 성 헌터가 도주할 시간을 번다. 그럴 각오로 현장을 찾았다. "저기입니까. 과장님?" "그런 거 같다." 승합차에서 내려선 감시과 헌터들이 학교 운동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신고 후 대기 중이던 용기길드 헌터들이 감시과 헌터들을 발견하고는 환한 얼굴이 되었다. "이쪽입니다. 감시과분들!" 길드 마스터가 달려가 감시과 헌터들을 마중했다. 그러나 우진철의 시선은 여전히 게이트에 머물러 있을 뿐이었다. 심상치 않은 기운. 우진철이 부하 직원들을 돌아보며 지시를 내렸다. "서두르자." "예." 감시과 헌터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금방 게이트 앞까지 다다랐다. 그런데. 우뚝. 우진철의 발걸음이 멈췄다. "과장님?" "선배님?" 우진철을 뒤따르던 부하 직원들의 걸음도 멈추었다. 우진철은 선글라스를 조심스레 벗었다. 선글라스를 집은 손끝이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이게... 이게 대체...?' 끔찍한 마력의 폭풍. 게이트에서 새어 나오는 마력이 얼마나 흉포한지 게이트 근처의 공간이 일그러져 가는 것처럼 보였다. 돌연 그가 흠칫 놀라 한 발짝 뒷걸음질 쳤다. 착시일까, 흉조일까? 언뜻 게이트 위에 시커먼 장막이 드리운 듯했다. 언젠가 본, 죽음의 그림자였다. 뒷머리가 쭈뼛 섰다. 우진철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안에서 어떤 싸움이 벌어지고 있건, 자신들이 낄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새파랗게 질려 가는 우진철의 얼굴을 보고 깜짝 놀란 부하 직원들이 물었다. "과장님, 괜찮으십니까?" "..." 우진철은 대답 대신 질문을 던졌다. "이 근처에... 레이드 대기 중인 대형 길드가 있나?" 잠시 검색해 보던 부하 직원이 얼른 답했다. "예. 헌터스 길드가 레이드 대기 중입니다." "S 급 헌터 두 분은?" "최종인 헌터님, 차해인 헌터님 두 분 모두 레이드에 참여하시는 것으로 되어 있습니다." 최종인과 차해인. 그 두 사람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우진철의 고개가 다시 게이트 쪽으로 향했다. 손끝에서 시작된 작은 떨림이 점점 전신으로 퍼져 갔다. 꼴깍. 마른침이 절로 넘어갔다. 우진철은 떨리는 목소리를 힘겹게 가다듬고서 말했다. "헌터스 길드에... 긴급 협조 요청 넣어." *** 물었다. 천사상이 지적한 대로 질문을 바꿔, 네가 누구냐고 묻는 대신 내가 누구냐고 물었다. 그 짧은 순간. 가쁜 숨을 고르던 진우는 금방 원래의 호흡을 되찾았다. 조금 전까지 격렬한 전투를 치렀다고는 믿기 힘든 숨소리였다. 위아래로 들썩거리던 어깨도 차분해졌다. [...] 천사상의 대답이 늦어지는 듯하자 진우가 단검을 들이밀었다. 단검의 칼날은 석상의 목을 파고들어 갔다. 사람이었다면 벌써 피부가 베여 피가 줄줄 흘러내릴 만한 상처. 석상이어서 피가 흐르지는 않겠지만 이대로 목을 잘라 버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었다. 천사상도 그 사실을 알고 있는 것일까? 뒤늦게 입술을 뗐다. [이제야.] 가까이서 들으니 더 기괴한 목소리였다. [제대로 된 질문을 하였구나.] 그러면서 미소를 지었다. 여러 개의 팔이 잘려 나가고 턱 밑에 칼이 드리워져 있음에도 그다지 두려워하는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어딘가에 진짜 본체가 있는 건가?' 하지만 진우의 뛰어난 기감이 주변을 훑어도 느껴지는 기운은 없었다. 만약 정말로 다른 곳에 본체가 따로 있다면 얼마나 수준 높은 기술인지 감히 지금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얼굴에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서, 천사상이 말했다. [답은 네 안에 있다.] '내 안에?' 허튼 수작을 부릴까 봐 경계하고 있던 진우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오랫동안 하급 헌터로 지내며 진우는 자신을 죽일 수 있는 강한 적들과 수없이 대치해 왔다. 최하급으로 분류되는 E 급 헌터가, 그것도 E 급에서도 가장 밑바닥에 속하는 진우가 무려 4 년 동안 던전들을 돌아다니며 살아남는 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몇 번이나 생사의 경계를 넘나드며 갈고닦아진 감각이, 최악의 상황에서 항상 차선을 선택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그 예리한 감각이 무언가 달라진 분위기를 예고했다. 아니나 다를까. 띠링! 갑자기 튀어나온 기계음과 함께 늘 들려오던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천사상의 목소리와는 다른, 확실한 여성의 음성이었다. [메모리에 저장된 데이터를 불러들입니다.] [수락하시겠습니까?] (Y/N) 목소리뿐만 아니라 메시지 화면까지 떠올랐다. 예스 혹은 노우. 알파벳 Y 와 N 이 대답을 기다리고 있다는 듯 진우 눈앞에서 천천히 깜박이기 시작했다. '이게 대체...' 또 무슨 수작을 부리려는 것일까? 진우의 시선이 메시지 화면을 떠나 천사상을 향했다. 어느새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진 천사상은 감정이 전혀 담겨 있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선택은 네게 맡기지." 방금 전과 달리 목소리는 시스템과 분리되어 있었다. 기계처럼 딱딱한 남성의 목소리가 고막을 건드렸다. 진우는 입을 꾹 다물었다. '메모리에 저장된 데이터라...' 흔히 게임에서 그러는 것처럼 세이브 파일이라도 모셔놓고 있었다는 건가? 그리고 지금 그 파일을 확인해 볼 수 있다고? '...'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수없이 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을 교차했다. 그러나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진실을 확인할 기회를 얻었는데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지 않은가? 만약 이것이 시스템의 함정이라면 이렇게 번거로운 과정을 거칠 필요조차 없었다. 진우의 심장이 언제 멎을 것인지 시간까지 정할 수 있는 것이 시스템의 권한이니까 말이다. '천사상의 말대로 이 모든 과정이 시험이었다면... 데이터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자격을 얻은 거다.' 문득 싸움이 시작되기 전, 천사상이 했던 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시험이 끝난 뒤에도 네가 서 있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알려주마. 그것이 내가 주는 상이다. 아마도 그 상이란 자격을 뜻하는 것이리라. 결론이 나왔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진우의 입술이 서서히 열리었다. "...예스." 그러자 순식간에 어둠이 찾아왔다. 띠링. 익숙한 기계음이 귀청을 때린 후, 시스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데이터를 불러오는 데 성공했습니다.] *** 끝도 없이 긴 터널을 무한에 가까운 속도로 통과하는 기분이었다. 어둠으로 가득 찬 공간을 순식간에 지나쳐 저 멀리 새어 들어오던 빛에 몸을 부딪쳤다. 잠깐의 눈부심이 거쳐 간 후. 눈앞에, 아니 아래에 펼쳐져 있는 광경에 진우는 속으로 신음을 내뱉었다. '맙소사...'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마수들의 군대가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늘어서 있었다. 이쪽 끝에서 저쪽 끝까지. 마수들이 발 디딜 틈 하나 없이 땅을 덮었다. 실로 끔찍한 광경이었다. 여기 모여 있는 마수들이 한꺼번에 게이트에서 뛰쳐나온다면 인류에게 승산은 없었다.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얹힌 것처럼 속이 답답해졌다. '가만... 여기는 어디지?' 분명 지구는 아니었다. 식물이라고는 하나도 찾아볼 수 없는 적갈색의 메마른 평원 위에는, 괴이한 생김새의 길고 얇은 바위들이 하늘을 향해 삐죽 빼죽 솟아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이질적인 풍경. 눈에 보이는 것이라곤 적갈색 땅과 바위들, 그리고 온 땅을 뒤덮은 마수 대군뿐이었다. 진우는 마수들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하급 던전에서 흔히 보이는 잔챙이들부터 하이오크, 백귀, 거인들처럼 상급 던전에서만 만날 수 있는 강력한 놈들까지. 등급과 종류를 막론하고 새까맣게 모여든 마수들이 위를 올려다보며 무언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어디를 보고 있는 거지?' 그 눈빛들을 따라 진우의 시선도 자연스레 위를 향했다. 그리고 발견했다. '...!' 저 하늘 높은 곳에 고요히 떠 있는 검은 호수를. 아니, 그건 호수가 아니었다. 거대한 호수라고 착각해 버릴 정도로, 규모를 짐작하기도 힘든 게이트가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검은 구멍이 보랏빛 하늘을 가리고 있었다. '보랏빛 하늘...' 존재할 수 없는 하늘의 색을 보고서 이곳이 지구가 아니라는 사실에 더더욱 확신이 생겼다. 지구가 아닌 곳에서 마수들과 게이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지려한다. 침이 꼴깍 넘어갔다. 정적 속에서 시간에 비례해 긴장감도 높아져 갔다. 고오오오저기서 뭐가 나올까? 진우는 내심 마수들이 게이트를 통해 지구의 땅을 밟은 것처럼. 저 게이트에서 인간의 병기들이나 인류로 구성된 군대가 나오지 않을까 기대했다. 그러나. 쩌억! 갈라진 게이트 입구에서 쏟아져나온 검은 등에 날개를 달고 있는 은빛 갑옷의 병사들이었다. 은빛 갑옷의 병사들은 마치 벌집을 건드렸을 때의 벌 떼들처럼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마수들이 땅을 뒤엎었듯이 이번엔 병사들이 하늘을 뒤덮었다. 장관이었다. 진우는 속으로 연신 감탄을 터트렸다. 그러나 마수들의 생각은 달랐는지 녀석들은 하늘을 까맣게 채워가는 병사들을 보고는 괴성을 지르며 흥분해 날뛰기 시작했다.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보지 않고도 예상할 수 있었다. 전쟁이었다. 쏴아아아-! 병사들은 은빛 빛줄기가 되어 아래로 쇄도했다. 게이트는 하나가 아니었다. 몇 개나 되는 게이트에서 병사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쏟아졌다. 땅의 마수들과 하늘의 병사들! 서로를 향해 적의를 불태우던 두 집단은 이윽고 지상에서 격돌했다. 어마어마한 규모의 싸움이었다. 우워어어어어! 마수들의 함성이 지축을 뒤흔들었고. 부우우- 은빛 병사들이 부는 뿔피리가 웅장히 울려 퍼졌다. 무기와 무기가 부딪치고 갑옷이 부서지는 소리가 요란했다. 함성은 곧 비명과 신음이 되었으며, 땅이 붉게 물들어 가기 시작했다. 우세는 금방 점쳐갔다. 은빛 병사들은 강했다. 상급 헌터들을 찢어발길 수 있는 마수들의 목을 어렵지 않게 베어넘기는 놈들이었다. 그런 놈들이 저만한 무리를 이뤘으니 마수들이 쓸려 나가는 것은 당연한 일. 승부는 기울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게이트는 아직 은빛 병사들을 끊임없이 쏟아 내고 있었다. 해일처럼 밀려들기 시작한 은빛 병사들의 물결은 평원에 남아 있던 마수들의 흔적을 삽시간에 지워 나갔다. 크아아아악! 키에에엑! 처음의 격돌은 전쟁이었으나 이제는 살육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진우 자신이 마수들에게 그러했듯 병사들의 검과 창에도 자비심은 없었다. 덕분에 마수들의 숫자는 아주 가파르게 줄어 갔다. 그 끔찍하던 괴물들이 덧없이 쓸려 나가는 장면을 보면서 진우는 영문을 알 수 없는 복잡한 감정을 느꼈다. '이런 놈들에게 희생당한 사람들이 안타까운 건지, 사람들이 저런 힘을 갖지 못한 것이 아쉬운 건지...' 그러나 잡생각도 잠시. 이변은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났다. 마수들의 전멸이 멀지 않은 때. 파죽지세로 적을 몰아붙이던 하늘의 병사들이 하나둘 움직임을 정지하기 시작했다. '왜지?' 이제 와서 새삼스럽게 측은한 마음이라도 든 것일까? 아니, 그럴 리가. 만약 그랬다면 무기를 틀어쥔 손에 저리도 힘을 주고 있지는 않았겠지. 어찌나 힘을 주고 있는지 무기를 쥔 손이 부르르 떨려 왔다. 더구나 그들의 얼굴에 가득한 감정은 측은지심 따위가 아니었다. 그건 분명히 겁에 질린 표정들이었다. 그들의 시선은 어느 한곳을 향하고 있었다. 이 뒤. 진우는 직감했다. 지금 자신의 뒤쪽에서 뭔가 상황을 뒤바꿀 수 있을 정도의 이변이 일어나고 있었음을. 하지만 진우의 시선은 뒤가 아니라 아래를 먼저 향했다. 바닥. 적살색의 대지에 음영이 번져 나가고 있었다. 음영은 땅을 붉게 물들인 피와 쌓인 사체들을 지나 빠르게 퍼져 갔다. 음영이 사체들의 밑을 지나갈 때마다 영문 모를 비명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서 들려오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비명 소리들. 진우는 이것과 매우 흡사한, 아니 똑같은 스킬 하나를 알고 있었다. '군주의 영역...' 등줄기에 소름이 쫙 돋아났다. 진우는 천천히 아주 느릿하게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흑색의 갑주로 무장한 기사가 하나 있었다. 기사와 기사가 타고 있는 말에서는 오오라 같은 검은 기운이 쉴 새 없이 올라왔다. 어째서일까? 누가 알려준 것도 아닌데 그를 보고 떠오르는 단어는 단 하나뿐이었다. '...그림자 군주.' 그의 앞에 서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멎을 것 같은 무거운 압박감과 대면해야 했다. 하늘의 병사들이나 지성이 있는 마수들은 물론이거니와 지성이 존재하지 않는 마수들까지 숨을 멈추고서 그림자 군주를 주시했다. 전장의 모든 시선이 그림자 군주에게 모였다. [...] 하늘의 병사들을 노려보던 군주는 무언가를 움켜쥘 것 같은 모양의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흠칫. 하늘의 병사들이 움찔거리며 뒤로 물러서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숨을 턱턱 막히게 하는 정적이 하늘 아래에 있는 모든 존재들의 어깨를 찍어 눌렀다. 이윽고. 군주의 근엄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부쉈다. [일어나라.] = 160 화 두근. 심장이 뛰었다. 일어나라. 그 한마디에서 시작된 거대한 파문이 무서운 속도로 번져 나가며 그림자들을 일으켰다. 마수들의 피로 붉게 변했던 전장에 검은 물결이 출렁였다. 으아아아아아-! 바닥에서 튀어나온 그림자 병사들은 함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을 내지르며 검게 변한 눈을 적에게 돌렸다. 그들의 눈빛에서 더 이상 적에 대한 공포심은 찾아볼 수 없었다. 이들을 상대해야 하는 하늘의 병사들로서는 간담이 서늘해질 만한 광경. 그러나 군주의 힘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워어어어-!] 군주가 하늘을 향해 묵직한 포효를 쏟아 냈다. 그 포효는 고막이 아니라 심장을 뒤흔들었다. 심장이, 다리가, 대지가 흔들리는 함성이었다. 땅이 울고 있었다. 함성이 무엇을 위한 행위였는지 알게 되는 데는 그다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함성을 들은 그림자 병사들이 무기를 쳐들고 공명했기 때문이다. 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포효 한 번에 그림자 병사들은 전혀 다른 존재로 변했다. 이쪽 땅끝에서 저쪽 땅끝까지. 마수들은 그림자 병사들로 새로이 재편성되었다. 그 과정을 처음부터 숨죽여 지켜보던 진우는 그림자 병사들의 포효에 전율을 느꼈다. 두근. 또다시 가슴이 뛰었다. 만약 이것이 그림자 군주 클래스의 정점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면, 앞으로 자신이 가야 할 길이 얼마나 먼지 실감할 수 있었다. 드디어. 잠시 주춤했던 하늘의 병사들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늘로 떠오른 은빛 병사들이 한데 뭉치더니 마치 벌 떼들처럼 검은 병사들을 향하여 쇄도했다. 그러나 그림자 병사로 새로이 태어난 마수들은 전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해 주지 않았다. 무기와 무기가. 병사와 병사가. 은빛 군단과 검은 군단이 지상에서 뒤엉켰다. 굉음이 터지고 지축이 울렸다. 분명 일방적인 학살로 끝났어야 할 전투가 도로 전쟁이 되었다. 단 한 명의 등장이 모든 걸 뒤바꾸어 놓았다. 무서운 힘이었다. 어째서 이 장면을 보여 주는지 알 수 없었지만, 진우는 단 한시도 눈을 뗄 수가 없었다. 격돌. 첫 번째 전투와는 비교되지 않을 만큼 격렬한 싸움이 펼쳐졌다. 목숨이 붙어 있을 때는 하늘의 병사 하나를 감당하지 못했었던 마수들이, 그림자가 되어서는 전혀 밀리지 않는 기세를 보여 주었다. 하지만. 그림자 병사들의 진짜 무서운 점은 그들의 기세나 전투력이 아니다. 하늘의 병사들은 강력한 힘과 뛰어난 무구로 그림자 병사들을 몰아붙였다. 죽음을 불사하는 그림자 병사들의 용맹함도 힘의 격차를 넘지는 못하였다. 전투의 우위는 얼핏 하늘의 병사들이 가져가는 듯 보였다. 그러나 그림자 병사들은 파괴되기가 무섭게 곧바로 원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크아악! 하늘의 병사가 쥔 창에 몸이 꿰뚫린 그림자 병사가 사지를 비틀며 비명을 내지른다. 승리를 예감한 하늘의 병사는 창대를 놓고 허리에 찬 검을 뽑아 그림자 병사의 머리를 날려 버렸다. 스걱! 그런데 머리가 날아간 직후. '...!' 바닥으로 떨어지던 그림자 병사의 머리와 목 아래가 전부 연기로 변하더니 두 걸음 뒤쪽에서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하늘의 병사가 움찔하는 사이 그림자 병사는 쥐고 있던 검으로 적의 가슴을 찔렀다. 콰직! 갑옷을 부수고 안쪽으로 들어간 검이 등을 뚫고 밖으로 나왔다. 힘없이 쓰러진 하늘의 병사. 털썩. 눈에 초점을 잃어 가는 그의 귓가에 누군가의 위엄 어린 목소리가 들려왔다. -일어나라. 어느 순간. 하늘의 병사는 자신의 손아귀에 검은 창이 들려 있음을 발견한다. 그에게 찾아온 것은 죽음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 검게 변한 눈자위가 방금 전까지 동료였던 하늘의 병사들을 향했다. 흠칫.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떠는 동료들이 보인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알고 있었다. "우워어어어!" 그는 새롭게 찾아온 자신의 운명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진우는 병사들에게 시선을 떼고 전장의 전체적인 상황을 조망했다. 게이트에서 끝없이 쏟아지는 하늘의 병사들과 군주의 명령으로 태어난 그림자 병사들의 싸움은 박빙이었다. 죽은 숫자만큼 게이트에서 쏟아지고, 죽인 숫자만큼 그림자에서 일어났다. 지옥에서 전쟁이 일어난다면 이런 모습이 아닐까? 인간의 예상으로는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끔찍한 싸움이 넓은 평야에서 숨 돌릴 틈 없이 벌어졌다. 그러나 대등한 듯 보였던 두 진형의 균형은 한순간에 무너졌다. 한발 물러나 군단을 지휘하고만 있던 군주가 전장에 직접 발을 들이자마자 기류가 급변했다. 군주를 태운 흑마가 전장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적군 수천이 쓰러지며 길이 생겨났고, 죽은 적군은 어김없이 그림자 병사가 되어 몸을 일으켰다. 하늘로 날아서 도망가던 적군은 그의 손짓 한 번에 날개가 꺾여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지배자의 권능...' 군주가 지나간 자리는 폭풍처럼 휩쓸렸다. 처음으로. 양 진형이 서로 검을 맞대기 시작한 이후로 처음 하늘의 병사들이 밀려나고 있었다. 하늘과 땅을 가득 메운 수십, 아니 수백만 병사들이 적 하나를 감당하지 못해 밀려 나갔다. 그저 경이롭기만 한 광경에 진우는 탄성을 자아냈다. 이대로 전쟁이 끝나는가 싶었다. 그런데. 한참 그림자 병사들이 하늘의 군단을 몰아붙이기 시작한 이때, 뒤쪽에서 뭔가 형언하기 힘든 스산한 바람이 불어왔다. 등골을 오싹하게 만드는 기운이 몰려들었다. 적들을 앞에 두고, 군주는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쪽에 거대한 게이트가 두 개나 생성되어 있었다. 크기는 하늘에 떠 있는 것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 게이트 두 곳에서 두 무리의 마수들이 쏟아져 나왔다. 한쪽은 산 하나를 옮겨 온 것 같은 덩치의 늑대가 이끄는 짐승형 마수들. 그리고 다른 한쪽은 무수한 가문들의 깃발을 내세우고 진격하는 기사와 병사들이었다. 진우의 눈이 커졌다. '어...?' 깃발에 새겨진 문장들은 모두 익숙한 것들이었다. 리카도, 페이토스, 로칸, 인그레아스, 그리고 라디스까지. '...에실.' 전부 악마성의 꼭대기까지 오르며 만나 볼 수 있었던 악마 귀족가문들의 문장이었다. 어째서 악마들이 여기에 나타났는가 하는 의문도 잠시. 짐승들과 악마들은 미리 약속이라도 했던 것처럼 합심해 그림자 병사들을 공격해 왔다. 그림자 병사들은 두 마수 군단의 협공으로 뒤쪽에서부터 갈가리 찢기기 시작했다. 그게 끝이 아니다. 아직 앞에는 무너지지 않은 하늘의 병사들이 건재했다. 하늘의 병사들도 다시 공세로 돌아섰다. 앞에선 하늘의 병사들이, 뒤에선 두 마수 군단이 그림자 병사들을 둘러싸고 돌진해 왔다. 전세는 또 한 번 뒤바뀌었다. 두근. 진우는 가슴을 움켜쥐었다. 이번엔 심장이 아팠다. 진우의 시선이 천천히 옆에 선 군주에게로 옮겨 갔다. 어째서일까? 그의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 마치 그림자 병사들의 마음을 읽을 때처럼 생생한 감정이 전해졌다. 깊은 속에서부터 끓어오르는 그 진득한 감정은 분노였다. 아니, 분노를 아득하게 넘어선 격노 그 자체였다. 적들에게 포위당한 그림자 병사들은 끝없이 파괴와 재생을 반복했다. 언뜻 무한한 회복력처럼 비춰지지만 같은 능력을 쓸 수 있는 진우는 그 힘의 약점을 잘 알고 있었다. '마력이 허용하는 수준까지만...' 마력이 다하면 병사들은 재생되지 않는다. 더 이상 병사들을 쓸 수 없는 것이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방대했던 군주의 마력이 서서히 바닥을 드러내 가고 있음이 느껴졌다. 하늘의 군단을 향하고 있던 군주가 말머리를 뒤쪽으로 돌렸다. 그의 군마가 땅을 박차고 내달렸다. 전투는 치열했다. 시체가 산을 만들고, 피가 바다를 이뤘다. 수를 다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많은 병사들이 만들어 낸 '전쟁'이라는 불꽃은 땅 위에 서 있던 모든 생명체를 전부 다 삼키며 흉측하게 타올랐다. 그러나. 그 지독했던 싸움도 서서히 마지막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전장에 서 있는 이가 얼마 남지 않았다. 전투 도중 말을 잃은 군주가 앞을 가로막는 기사 둘을 베어 넘기고, 길게 솟아 있는 바위에 기대어 숨을 헐떡이고 있는 악마 앞에 섰다. 얼굴은 투구로 가려져 있지만 군주는 그의 정체를 알고 있는 듯 그를 내려다보았다. [오늘이야말로 놈들과의 싸움을 끝낼 수 있었다.] "..." [어째서 나를 배신했나?] 고개를 힘없이 떨어뜨리고 있었던 악마가 느릿하게 얼굴을 들었다. 그의 몸은 이미 중상을 입어 더 이상의 회복은 불가능해 보였다. 투구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가 끊어질 듯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참으로... 아쉽구나. 오늘이야말로 네놈을 끝장낼 수 있었는데." 군주는 더없이 차가운 음성으로 되물었다. [어째서냐고 물었다.] 큭큭. 어깨를 들썩이며 웃던 녀석이 다시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대답했다. "#$%#^#%#%@$." 어떻게 된 일인지 놈의 말이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실수로 놓쳤던 것일까? 아니. "@$^$##." 놈이 다시 뭔가를 말하는 데도 전혀 알아들을 수 없었다. 그러나 군주의 귀에는 다르게 들렸던 듯 그의 대답을 듣자마자 손을 내뻗어 그를 끌어당겼다. 목이 잡힌 악마가 고통스런 신음을 내뱉었다. "커헉." 파직! 목을 감싸고 있던 갑옷이 우그러졌다. 그러나 악마는 그런 와중에도 끝까지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이어 갔다. "...%^&#$@%^&." 푹. 군주의 엄지가 악마의 목청을 파고 들어갔다. 울컥. 악마가 피를 토해 냈다. 투구 안에서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악마와 시선을 마주친 것은 바로 그때였다. 어떻게! 진우는 화들짝 놀라 악마의 목을 놓아 주었다. 털썩. 이미 목숨이 끊어진 악마는 사지를 바닥에 축 늘어뜨렸다. '말도 안 돼.' 방금 그 눈빛. 분명히 전에 한 번 본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두근.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고개를 가로젓던 진우가 악마에게 다가가 조심스럽게 놈의 투구를 벗겼다. 놈은 죽는 순간까지 죽기 전과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어떻게 이 눈빛을 잊을까? 진우의 손에서 투구가 떨어졌다. 툭. 부릅뜬 두 눈에는 강한 증오의 빛이 담겨 있었다. 악마성 꼭대기에서 봤었던 바로 그 눈빛이었다. '악마왕... 바란?'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진우는 문득 이상한 점 한 가지를 더 깨달았다. 검은 갑옷에 둘러싸인 손. 발끝, 다리, 가슴.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그림자 군주의 몸을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두근, 두근, 두근. 격해지기 시작한 심장의 박동이 점점 더 커지며 고막을 때렸다. 진우는 심장이 있는 가슴 쪽에 손을 올렸다. 두근, 두근, 두근. 진우의 눈이 커졌다. '어째서... 어째서 여태 몰랐을까?' 그 신전에서 살아 나온 뒤로부터 줄곧 심장의 소리를 의식해 왔다. 하지만 전혀 알아채지 못했었다. 진우는 떨리는 손을 오른쪽 가슴으로 옮겼다. 진동이 느껴졌다. 왼쪽에 하나. 그리고 오른쪽에 하나. 두근. 두 개의 심장이 같은 소리를 내고 있었다. 놀란 눈이 아래를 향해 있을 때. 조금씩 커져가는 그림자 네 개를 발견했다. 위쪽에서의 접근이었다. 아래를 보고 있던 고개가 급히 위로 향했다. 머리 위에서.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천사 넷이 천천히 내려서고 있었다.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띠링. 기계음과 함께 어둠이 찾아왔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시스템의 청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불러온 데이터가 종료되었습니다.] = 161 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길드의 마스터에게 C 급 게이트로 와 달라는 소리를 하다니. 처음 우진철 과장의 연락을 받았을 때, 최종인은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자신은 빠지고 상급 헌터 몇으로 꾸려진 공격대를 보낼까 생각도 했었다. 하지만 이어지는 설명을 듣고서는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중 던전에 성진우 헌터가 들어가?' 이중 던전만으로도 흥미로운데 성진우 헌터가 들어가 있는 상태라. 이런 말을 듣고서도 초연할 수 있는 길드 마스터, 아니 헌터가 몇이나 될까? 한시가 시급하다는 우진철 과장의 당부에 최종인은 곧바로 준비중이었던 레이드를 미루고 정예 헌터들을 불러 모았다. "협회에서 지원 요청이 왔어. 아무래도 우리가 움직여야 할 것 같다." 그간 경험상 이런 식의 호출은 보통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아는 헌터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A 급 레이드를 코앞에 둔 헌터스를 움직여야 할 정도니 말이 더 필요할까? 하필 방금 전 일본에서 일어난 일을 속보로 접한 헌터들이라 소란이 더 커졌다. "무슨 일이에요?" 길드의 부사장으로서 최종인 다음의 입지를 가진 여성이 물어 왔다. 최종인은 차해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C 급 게이트에서 이중 던전이 발견됐다나 봐." '이중 던전?' 차해인은 고개를 갸웃했다. 물론 이중 던전은 쉽게 볼 수 있는 현상이 아니었다. 던전 안의 던전이라니. 이런 일이 흔할 리 없었다. 하지만 겨우 C 급 게이트에 던전 하나가 더 붙어 있는 걸 가지고 헌터스 길드를 부른다니. 상식적으로는 이해가 잘 가지 않았다. 의아한 시선을 보내는 차해인에게 최종인이 이동할 채비를 갖추며 말했다. "거기서 성진우 헌터 혼자 뭔가와 싸우고 있는 모양이야. 그 우진철 과장이 겁먹고 먼저 협조를 요청할 정도라면... 차 헌터, 왜 그래?" 갑자기 달라진 차해인의 눈빛을 보고 최종인이 물었다. "아니에요." "...그래. 성 헌터니까 별일은 없겠지만 일단 가 보자고." 끄떡. 차해인이 고개를 움직였고,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헌터들도 빠르게 짐을 챙겼다. 짐이라고 해 봐야 레이드에 쓸 무기가 다였지만 절대 소홀히 할 수 없는 준비였다. "어? 한 사람이 비는..." 숫자를 헤아리던 헌터의 어깨를 누군가가 툭 쳤다. 돌아보니 그 누군가가 턱짓으로 한쪽 구석을 가리켰다. 거기엔 한 남자가 망연자실한 얼굴로 주저앉아 있었다. "스즈키?" "내버려 둬." "아..." 헌터는 바로 납득했다. 스즈키는 얼마 전 스카웃되어 일본에서 한국으로 건너온 헌터. 속보가 나오고 있는 핸드폰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이 당연했다. "우리는 우리 일을 해야지. 가자." "아, 네." 두 사람은 스즈키를 놔두고 헌터스 길드의 밴에 올라탔다. 그렇게 정예 공격대원들을 모두 태운 헌터스의 차량들이 하나둘 현장을 떠나 목적지로 빠르게 향했다. *** "아, 뜨뜨!" 김 기자가 화들짝 놀라며 담배꽁초를 떨어뜨렸다. 아래는 모랫바닥인데도 꽁초를 밟는 발에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지금은 꽁초 따위에 신경을 쓰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김 기자의 시선이 다시 멈춰 선 차량들로 향했다. 내려서는 인물이 하나같이 낯익다 했더니, 헌터스 길드의 최정예들 아닌가? 에이스들을 하나씩 찾다 보니 손이 데는 줄도 몰랐다. '최종인에 차해인, 윤정호, 어어? 손기훈도 왔네?' 이만하면 헌터스의 간판이 모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무작정 우진철의 뒤를 밟아 도착한 현장에 이런 거물들이 나타날 줄이야. 그런데 게이트는 C 급. 김 기자는 침을 꼴깍 삼켰다. 대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어지간하면 순순히 사정을 밝히는 우진철 과장마저 극비라며 입을 꾹 다물어 버리는 통에 애타는 마음을 담배로 달래는 수밖에. 그의 발밑에는 아까부터 피우다 버린 담배꽁초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김 기자의 아쉬운 눈빛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진철이 빠르게 최종인에게 다가갔다. 최종인은 우진철이 그랬던 것처럼 게이트에서 눈을 돌리지 못했다. "젠장...! 제길...! 뭐야, 저건?" 그의 입에서 다짜고짜 욕이 튀어나올 정도로 게이트는 불길한 기운을 머금고 있었다. 전투계열 헌터 중 예외적으로 감이 좋은 우진철과 달리 최종인은 대한민국 최강의 마법계열 헌터. 마력을 느끼고 감지하는 데는 마수의 눈을 드러낸 백윤호나 기감의 차원이 다른 성진우를 빼곤 최고라 할 수 있었다. "가능하시겠습니까?" 우진철은 그렇게 물었다. 그 질문에 '자신은 불가능했다'라는 의미가 담겨 있음을 최종인은 놓치지 않았다. 그는 씁쓸한 얼굴로 대답했다. "안에 성진우 헌터가 있다면서요?" "예. 확실합니다." 끄덕끄덕. 최종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하긴. 그가 아니면 누가 또 이만한 싸움을 벌일 수 있을까? 아니, 누가 이만한 마력을 뿜어내는 상대를 막아 낼 수 있을까? "혼자서 지구라도 구할 셈인가?" 속으로 하려던 말이 무심코 튀어나왔다. 하지만 우진철은 최종인에게 되묻는 대신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있을 법한 이야기가 아닌가. "되든 안 되든 가 봐야죠. 성 헌터에겐 빚도 있으니." 만약 성 헌터와 헌터스가 막지 못할 마수들이라면 한국에서는 누가 와도 막을 수 없다. 달리 말하면 성 헌터를 도와 마수들을 처치하지 못하면 다음 기회는 없다는 소리였다. '뭐라고? 성 헌터?' 약간 떨어진 곳에서 최대한 귀를 기울이고 있던 김 기자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변했다. '성 헌터가 이 게이트 안에?' 그의 시선이 게이트로 향했다가 다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여기에 도착한 S 급 헌터만 두 명, A 급 헌터는 다 세기도 힘들다. 그런데 게이트 안에 성진우 헌터까지 있다는 말씀? '수... 수첩, 수첩.' 특종의 냄새가 코를 찌르자 김 기자는 재빠르게 수첩을 찾았다. 지금부터는 한마디, 한 장면도 놓쳐서는 안 된다. 모두가 일본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S 급 헌터 셋과 헌터협회가 연관된 대박 사건을 단독으로 보도할 기회가 생긴 것이다. '아까 그래서 우 과장이 입을 다물었구만.' 성진우 헌터는 정보보호 대상자로 헌터협회의 각별한 관리를 받고 있는 주요 인물. 우진철이 사정을 일절 입 밖에 낼 수 없었던 까닭도 이제야 이해가 갔다. 우진철과 최종인이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정예 공격대 전원이 준비를 끝마쳤다. 탱커는 방어구를, 딜러는 무기를, 힐러는 마력이 담긴 장비를. 최고 길드의 최정예들답게 준비는 신속했다. 잠깐 차해인과 눈이 마주친 최종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공격대를 점검했던 차해인도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와 점검이 모두 끝났다는 의미였다. 감시과의 정예 헌터들은 이미 한참 전에 준비가 끝나 있던 상태. 부하 직원에게 보고를 받은 우진철이 무거운 얼굴로 돌아섰다. "가시죠." *** 길은 길었다. 최대한 빠른 속도로 나아가고 있었으나 달리지는 않았다. 다 같은 상급 헌터라고 해도 달리는 속도까지 같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중 차해인은 특히나 빠르다. 그녀가 달려 나가려 하자 앞서 있던 최종인이 그녀의 팔목을 붙들었다. "차 헌터 혼자 가서 뭘 어떡하려고?" "..." 위기에 빠진 성진우를 구하려는 마음은 알지만 이러다가는 모두가 위험에 처할 수 있었다. "무리하게 차 헌터 속도에 맞추려다가 공격대 전원의 페이스가 흐트러질 수도 있어." 굳은 얼굴로 서 있던 차해인이 뒤로 돌아갔다. 차해인을 지켜보던 우진철이 작게 중얼거렸다. "소문이 사실이었군." "예?" 최종인의 질문에 우진철이 얼버무렸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고개를 갸웃거리던 최종인의 시선이 다시 앞을 향했다. 소름이 돋을 만큼 흉흉한 마력이 던전 깊숙한 곳에서부터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건 안에 먼저 들어가 있는 성진우 헌터도 마찬가지라고, 최종인은 생각했다. '부디 늦지 않았기를...' 지금은 성 헌터가 무사하기를 기도하는 것 말고는 딱히 그를 도울 방법이 없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최대한 빨리 이동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지나친 긴장감은 때론 몸을 둔하게 만들기도 하는 법. 최종인은 긴장을 풀기 위해 우진철에게 말을 붙였다. "성 헌터는 어쩌다 여기 들어간 겁니까?" "자세한 사정은 모릅니다. 하지만 신고한 이들의 의견을 종합해 보면 성진우 헌터님은 들어가기도 전에 이곳이 이중 던전임을 알고 있었던 눈치였다고 하더군요." "흐음." 최종인의 얼굴이 진중해지자 이번엔 우진철이 거꾸로 물었다. "혹시 짚이는 데라도 있으십니까?" "그건 아니고... 단지 이상해서 말입니다." "이상하다?" "저도 나름대로 성 헌터님에 대해서 조사해 본 적이 있었습니다." 최종인은 한 길드의 마스터. 수준 높은 길드원들로 길드를 구성해야 할 의무가 있는 그가 진우에게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것은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전에도 근처에서 한 번 이런 일이 있었죠." 그 사건을 직접 조사한 것이 본인인 만큼 우진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최종인이 무슨 얘기를 할지 알아챘다. 성진우 헌터는 반년 전에도 이중 던전에 들어갔던 경험이 있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른 지금, 또다시 이중 던전을 찾아 들어갔다.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결코 우연으로만은 보이지 않을 일이었다. 우진철의 예상대로 최종인은 그 이야기를 꺼냈다. "일생에 한 번 겪기도 힘든 이중던전을 혼자서 두 번, 그것도 다른 한 번은 제 발로 찾아들어 가다니. 이상한 일 아닙니까?" 우진철은 대답하지 않았다. 최종인의 말대로 성 헌터는 많은 것들이 베일에 가려져 있었다. 이중 던전, 재각성자, 그리고 독특한 능력.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그가 협회에, 아니 대한민국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때문에 성 헌터가 들어갔다는 게이트를 발견한 즉시 상부의 허락이 떨어지기도 전에 헌터스 길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무슨 수를 써서든 성진우 헌터의 안전만은 확보해야 했다. 질문은 그 뒤에 해도 늦지 않다. 상념에 빠져 있던 우진철이 고개를 들었다. '저기가...' 일반 헌터들이라면 한 시간가량을 걸어야 도착할 거리가 상급 헌터들의 속보(速步)로는 10 여 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어느덧 저 멀리에 동굴의 끝이 보였다. "도착한 것 같습니다." "느껴지네요."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대답하는 최종인의 얼굴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얼굴에 핏기가 점점 가시기 시작했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점은 아직 성진우 헌터의 기척이 느껴진다는 것이었다. '성 헌터가 무사하다면 괜찮다.' 그의 능력과 정예 헌터들의 지원이 있다면 던전 안에 어떤 괴물이 있더라도 위기는 없으리라. 그런 확신을 안고 최종인이 외쳤다. "서두르죠." 헌터스와 헌터협회의 정예 헌터들은 거대한 성문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오랜 헌터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본 적 없는 광경이었다. "이... 이게 대체...?" "뭐야 여긴?" 바닥에 수없이 많은 석상들이 파괴되어 있었다. 석상들의 잔해가 여기저기 흩어져 쌓여 있었다. "저, 저거!" 헌터 하나가 손을 들었다. 그 손가락 끝이 가리키는 곳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신상이 두 주먹을 깍지 낀 채 내려지는 자세 그대로 멈춰 있었다. 얼굴이 반쯤 날아간 머리가 특히 눈에 띄었다. 전에 이중 던전 생존자들의 증언을 들은 바 있었던 우진철은 가슴이 쿵쾅거렸다. '있었어... 신상과 석상들이 진짜 있었어...!' 생존자들은 분명 그랬다. 눈빛만으로 C 급 헌터를 녹여 버리는 괴물 신상과, 움직임이 눈에 비치지도 않는 석상들이 있었다고. 과연 그 말대로 치열한 전투의 흔적이 곳곳에 여실히 남아 있었다. '가만, 성진우 헌터는?' 모든 적은 제거됐다. 중요한 것은 성진우 헌터의 상태였다. 진우의 기척을 찾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최종인이 진우를 발견했다. "저쪽입니다." 신상의 주먹 아래에 진우는 잠이 든 것처럼 조용히 누워 있었다. "성 헌터님!" 헌터들이 그쪽으로 달려가려고 했으나, 이번엔 차해인이 양쪽 팔을 벌려 헌터들의 움직임을 막았다. 마음이 조급해진 우진철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오목조목 모여 있는 그녀의 이목구비가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차... 헌터님?" 차해인이 입술을 깨물며 말했다. "저기... 저기에 뭔가 있어요." 그때. 진우 옆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던 석상 하나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뜯어진 날개들과 남겨진 팔 하나. "인간들을 초대한 기억은 없는데." 완전히 일어선 천사상이 안으로 쳐들어온 헌터들을 둘러보며 씩, 입꼬리를 올렸다. = 162 화 "아..." 말문이 막힌다.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최종인은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확신했다. 게이트에 들어서기 전에 느꼈던 불길함의 원인은 바로 저 살아 움직이는 조각상이라는 것을. 조각상에게서 흘러나오는 마력이 어찌나 끔찍한지 놈 주변의 공간이 뒤틀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렇게 떨어진 곳에서 그저 바라보는 것뿐인데도 오싹오싹 소름이 끼쳤다. 문득 그의 시선이 조각상 옆의 진우에게로 옮겨갔다. 진우는 여전히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럼 성진우 헌터도 저놈에게 당한 건가?' 이상한 일은 아니다. '저런 것'이 상대라면 누구라도 버틸 수 없었을 것이다. 오히려 '저런 것'과 싸우면서도 이 많은 수의 석상들을 파괴할 수 있었던 그의 실력에 감탄이 나왔다. 하지만. '이제 우리가 그런 놈을 상대로 싸워야 한다.' 굵은 땀방울이 옆얼굴을 타고 흐르다 턱에 맺혔다. 이곳의 마수는, 아니 마수인지 아닌지조차 불분명한 적의 강력함은 분명 제주도에서 만났던 괴물개미 이상이었다. 숨 막히는 긴장감이 목을 죄어 왔다. 슬며시 옆을 돌아보니 차해인과 우진철의 반응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적의 힘을 알아보고 안색이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반면 뒤의 헌터들은 다른 측면에서 놀라고 있었다. 헌터들은 서로 믿기지 않는다는 눈빛을 교환했다. "저거... 말을 한 거야?" "내가 방금 잘못들은 게 아니지?" "마수가 우리말을 안다고?"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성을 가진 마수에게 자신들만의 언어가 있다는 사실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었다. 그래서 게이트가 생성되기 시작한 초기에는 그들의 언어를 배우고자 하는 시도도 꽤나 할발하게 진행되었다. 그러나 모든 시도들은 실패로 돌아갔다. 원인은 마수들의 흉포성. 어렵게 생포한 마수들은 인간들과 접촉하는 시간이 길면 길어질수록 견디지 못해 했다. 전신을 구속해 놔도 인간을 공격하기 위해 살이 찢어지고 뼈가 끊어지는 고통을 감수해 가며 미쳐 날뛰다가, 결국 제 분을 이기지 못하고 숨을 거두거나 인간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 -마수와 인간은 절대 공존할 수 없으며 의사소통 또한 불가능하다. 이것이 마수를 연구해온 전 세계 과학자들이 입을 모아서 확신하는, 공통된 결론이었다. 그런데. 눈앞의 마수는 어디서 배워오기라도 한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한국어를 쓰고 있는 것이 아닌가? 인간과 대화가 가능한 마수. 어찌면 세기의 발견이 될지도 모르는 마수의 등장이었다. 그러나 누구 하나 기뻐하는 사람은 없었다. 헌터들은 말을 하는 괴물에게서 다들 영문 모를 두려움을 느꼈다. 일류 헌터들이기에 감지할 수 있는 본능의 경고였다. 조각상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딛자 헌터들이 움찔 몸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그들의 공포를, 두려워하는 얼굴을 음미하듯 천사상의 눈동자가 좌우로 스르륵 움직였다. "하하." 녀석은 먹음직스런 과실을 발견한 것 같은 눈빛을 했다. "살아 돌아갈 생각으로 여기 발을 들인 것은 아니겠지?" 그러며 빙긋 웃었다. 뱀이 미소를 지을 수 있다 한들 이토록 징그러울 수 있을까? 천사상의 얼굴에 떠오른 어색하고 이질적인 미소 앞에서, 헌터들은 뱀 앞에 선 쥐처럼 목이 경직됐다. '침착하자.' 최종인이 이를 악물었다. 그는 속으로 주문을 캐스팅하며 헌터들에게 공격을 대비하라는 사인을 보냈다. 헌터들이 하나둘 싸움을 준비하는 사이, 두리번거리던 천사상은 옆에 널브러져 있던 석상 하나의 팔을 뜯어냈다. 콰직! '뭐 하는 거지?' '뭐야?' 헌터들의 의아한 시선은 오래가지 않았다. 천사상은 뜯어낸 팔을 잘려 나간 자신의 오른쪽 어깨 아래에 갖다 댔다. 그러자 접합 부위가 살아있는 것처럼 엉겨 붙기 시작했다. '헉...!' 지켜보던 헌터들의 경악 속에서, 천사상은 재생된 오른팔을 움직여 보았다. 그 순간. 슉. 시야에서 사라진 천사상이 헌터들 앞에 나타났다. 반응할 틈은 없었다. 천사상이 오른손을 힘껏 휘둘렀다. 정면에 서 있던 헌터의 얼굴이 뭉개졌다. 퍼걱! 얼굴이 안으로 밀려들어 간 헌터가 뒤쪽으로 날아갔다. 근처의 헌터들이 급히 반격을 시도했으나 이미 놈은 사라진 뒤였다. "어디...?" "저기!" 그 자리. 조각상은 처음부터 움직이지 않았던 것처럼 있었던 곳에 그대로 서있었다. 움직이기 전과 마찬가지로 새로 붙은 오른쪽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마치 손이 제대로 움직이는지 한번 테스트해 봤다는 듯이. "명철아!" "으, 으아아아아!" 뒤늦게 희생자를 확인한 헌터들의 절규가 터져 나왔다. 즉사였다. 대한민국 최고 길드의 A 급 탱커가 일격에 목숨을 잃었다. 천사상을 돌아보는 최종인의 동공에 지진이 일었다. '성진우 헌터는 혼자서 이런 놈과 싸웠다는 건가...?' 그에게는 동료를 잃었다는 아픔보다도 이 상황을 어떻게 타개해야 하는가에 대한 막막함이 앞섰다. 하지만. 모두가 그처럼 냉정한 판단을 내리지는 못했다. "이 개자식!" 죽은 헌터와 연인 관계에 있었던 여 헌터가 울부짖으며 달려나갔다. 두 손에는 이글거리는 화염이 맺힌 채였다. '안 돼!' 최종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아직 천사상을 상대할 구체적인 플랜이 갖춰지지 않은 이때, 움직이지 않고 있는 놈을 자극하는 일은 피해야했다. 방금 적의 움직임을 두 눈으로 확인하지 않았던가? 섣부른 공격으로 인해 팀이 전멸할 수도 있었다. "멈춰!" 그러나 최종인의 바람과 달리 여 헌터의 캐스팅은 끝이 났고, 시뻘건 불덩이들이 그녀의 두 손을 떠나려는 찰나. 재빠르게 접근한 누군가가 황급히 그녀의 손목을 붙잡았다. 여 헌터가 분노한 얼굴로 옆을 돌아보았다. 차해인이었다. 여 헌터는 팔을 흔들며 목소리를 높였다. "이거 놔!" "언니. 지금은 참아야 돼요." "이거 놓으라고!" "참으셔야 해요." 차해인은 손목을 붙들고 있는 손에 힘을 줘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뒤 눈을 부릅떴다. "저도 참고 있으니까..." 차해인의 비장한 얼굴에 여 헌터의 몸부림이 멎었다. 여 헌터도 알고 있었다. 이렇게 마구잡이로 달려 나가봐야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모를 만큼 그녀는 어리석지 않았다. 단지 참을 수가 없었을 뿐. 사랑하는 사람이 끔찍하게 죽임을 당했는데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니. 저항을 포기한 여 헌터는 낮게 흐느꼈다. "흑..." 여 헌터가 마법을 거두자 차해인은 살며시 그녀의 손을 놓고서 저 멀리 쓰러져 있는 진우를 바라보았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당장이라도 달려가고 싶었다. 지금 참고 있는 사람이 여 헌터 하나만이 아니라는 소리였다. 상황을 객관적으로 보면 현재 가장 위험한 사람이 진우였다. 의식이 없는 그의 옆에는 강한 힘을 가진 괴물이 있다. 바람 앞에 등불. 괴물이 마음만 먹는다면 언제든 진우라는 등불을 꺼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마수는 전혀 진우를 공격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리고 쓰러져 있는 것에 비해 진우의 상태 또한 나빠 보이지 않았다. 곤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평온한 표정이었다. 언제 다시 눈을 떠도 이상할 것 없는 분위기였다. 그러니 지금으로서는 진우가 깨어날 때까지 최대한 시간을 버는 것. 그것이 최선이었다. 그때.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보던 천사상이 돌연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 텅 빈 내부가 천사상의 목소리로 메아리쳐 울렸다. 짧은 웃음이 끝나고. 천사상의 눈이 헌터들을 향했다. "아무도 돌아가지 못한다." 쿵! 등 뒤에서 들려오는 소음에 헌터들의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문이!" 헌터들이 문으로 달려가 손잡이를 잡고 흔들었다. 덜컹덜컹. 하지만 굳게 닫힌 철문은 상급 헌터들의 힘으로도 끄떡하지 않았다. 퇴로가 막혔다는 사실은 헌터들의 목을 더욱더 옥죄어왔다. 꼴깍. 헌터들은 천사상 쪽을 돌아보며 마른침을 힘겹게 삼켰다. 천사상이 기다렸다는 듯 웃으며 입을 열었다. "시작은 인형들로 해볼까?" 말을 끝낸 천사상의 눈이 붉게 변하기 시작했다. "가볍게, 가볍게." 공격해오려는 걸까? 헌터들은 무기를 잡은 손에 힘을 주고 전투태세를 갖췄다. 한 놈이라면... 저놈 하나뿐이라면 어떻게든 할 수 있지 않을까? 여기엔 S 급 헌터 둘에 국내 최고의 헌터들이 삼십이 넘게 있으니 말이다. 그런 희망적인 관측이 잠깐 헌터들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을 때. 드드드드드득. 기괴한 소음이 울리며 내부가 흔들렸다. "아... 안 돼." 헌터들의 얼굴에 절망의 그림자가 드리웠다. 여기저기서 탄식이 흘러나왔다. 부서진 석상들이. 처치되었다고 생각했던 괴물들이 겨울잠에서 깨어나는 짐승들처럼 하나둘 몸을 일으키기 시작한 것이다. 목이 잘린 놈들이, 가슴에 구멍이 뚫린 놈들이, 사지가 떨어져 나간 놈들이 아무렇지 않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단연코 최악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은, 거대하다는 말로밖에 표현할 수 없는 신상. 얼굴 한쪽이 날아간 신상이 땅을 짚고서 그 어마어마한 몸뚱이를 일으키자 쿵쿵 하며 땅이 비명을 질렀다. "...맙소사." 헌터들은 망연자실한 얼굴로 신상을 바라보았다. 몸을 일으키던 신상과 석상들은 언제 쓰러져 있었냐는 듯 멀쩡히 일어서 헌터들을 마주보고 있었다. 감정 없는 그들의 얼굴들이 더더욱 괴기스런 분위기를 연출했다. 그들의 중심에 서 있는 천사상이 헌터들에게 말했다. "내 인형들이 모두 쓰러질 때까지 살아남은 자들은 왕의 탄생을 지켜볼 수 있는 영광스러운 기회를 주겠다." 우진철이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릴 하는 거지?' 놈이 지껄이는 말들은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한 가지만큼은 확실히 전해졌다. 저놈이 지금 여기 있는 헌터들 모두를 죽이려고 한다는 것. 그가 이를 악물었다. 협회에서 4 년. 숱한 위기도 있었지만 발버둥치면서 살아남아 왔다. 오늘도 마찬가지. 놈의 뜻대로 순순히 죽어줄 생각은 없었다. '만약 우리가 살아나갈 수 없다면...' 적어도 성 헌터만이라도. 처음부터 그럴 작정으로 들어온 던전이었다. 어떻게 해야 그를 살릴 수 있을까? 잠깐 진우에게 시선을 향했던 우진철은 문득 머리 위에서 느껴진 소름끼치는 기운에 화들짝 고개를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신상의 두 눈에 붉은 빛이 모여들고 있었다. 우진철이 돌아보며 목이 터져나가라 외쳤다. "다들 엎드려!" 헌터들은 급히 몸을 숙였다. 지이이이이이이잉-! 그들의 머리 위를 섬뜩한 붉은 광선이 아슬아슬하게 스치고 지나갔다. 지잉신상의 눈에서 뿜어져 나온 광선이 서서히 줄어들어갔다. 피해자는 0 명. 우진철의 정보와 헌터들의 대처가 만들어 낸 기적 같은 일이었다. '호오.' 천사상은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헌터들을 응시했다. 왕이 깨어나시기 전까지 즐거운 여흥이 될 듯했다. "헉, 헉, 헉." 우진철이 숨을 몰아쉬었다. 식은땀이 흘렀다. 이중 던전의 생존자들에게서 신상의 특징을 들어 두지 않았다면 이걸 피할 수 있었을까? 돌연 몸서리가 쳐졌다. 그들 덕택에 가까스로 첫 번째 공격을 무사히 넘겼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다. '이제 시작이지.' 우진철이 고개를 들었다. 석상들이 돌진해 오고 있었다. 상급 전투계열 헌터의 반응속도가 아니면 따라잡기도 힘든 움직임이었다. 하지만 우진철은 A 급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헌터. 벌떡 일어난 그가 허리를 틀며 주먹을 크게 휘둘렀다. 특수 제조된 장갑이 앞서오던 석상의 안면을 세차게 강타했다. 쾅! 우진철의 눈이 커졌다. '...?' 한 방이면 족할 줄 알았는데. 석상은 멀쩡했다. 석상의 한쪽 어깨가 누군가의 공격에 완전히 부서져 있던 터라 그만 놈들의 내구도를 착각해버리고 말았다. 석상을 그렇게 만든 이가 누구인지를 생각했다면 그런 계산을 해서는 안 되었다. 명백한 실수였다. '젠장.' 우진철은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왔음을 직감했다. 그의 예상대로, 약간 고개가 뒤로 밀리는 듯했던 석상은 금방 충격에서 회복한 후 손에 든 검을 내리쳤다. 쯧. 우진철이 속으로 혀를 찼다. 반격을 생각 않고 전력으로 내지른 공격이라 검을 피할 방법이 없었다. 면전에서 자유롭게 피할 수 있을 만큼 석상의 속도가 느리지도 않고. '이렇게 끝인가.' 찹찹한 마음에 눈을 질끈 감으려던 순간. 퍼엉-! 강력한 폭발에 휩쓸린 석상이 옆으로 멀찍이 날아갔다. 위잉- 잠시 귀가 먹먹해진 우진철이 손바닥으로 귓가를 탁탁 치며 고개를 뒤흔들었다. 길지 않은 시간이 지나자 옆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괜찮습니까?" 석상을 날려버린 사람은 최종인이었다. 그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한 우진철이 고개를 끄덕이며 감사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하지만 한가롭게 떠들고 있을 시간은 없었다. 이미 석상들이 지척까지 다가와 무기를 휘두르고 있었으니까. "최 대표님! 이 녀석들 도발 스킬이 안 통합니다!" 앞에 선 탱커들이 고함을 내질렀다. "뭐?" 최종인의 얼굴이 굳어졌다. 도발 스킬이 통하지 않는다면 놈들은 본능대로 가장 약한 헌터들부터 노릴 것이다. 힐러가 죽으면 방어진은 금방 무너질 테고, 방어진 없이는 이렇게 많은 수의 적을 상대로 버틸 수가 없다. 게다가. 석상들의 뒤에 자리를 잡은 신상이 아찔한 높이에서 그 바위덩이 같은 주먹을 내려치려 하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혀왔다. '여기서 살아나갈 수 있을까?' 상황은 절망적이었다. 그러나 딱 한 가지. 살아나갈 수 있는 방법이 있었다. 헌터들이 여기 도착하기 전 모든 석상들은 박살나 있었다. 그게 누구의 활약이었는지는 굳이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만약 석상들을 처치하는데 힘을 다 쓴 성 헌터가 아쉽게 천사상에게 패한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달랐다. 성 헌터를 도울 수 있는 일류 헌터들이 여기 수십이나 도착하지 않았나. 그러니까. '이 방법 밖에 없다.' 최종인의 손에 불꽃이 맺혔다. 그가 괜히 최종병기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것이 아니다. 화력은 물론이고, 정확도 또한 어떤 첨단 무기에 뒤처지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모 아니면 도. 최종인은 캐스팅한 마법을 진우에게 날렸다. 다소 충격이 있을 수는 있더라도 이 정도 마법에 성 헌터가 크게 다치는 일은 없을 터. 폭발의 여파로 성 헌터가 정신을 차린다면 이쪽에도 실낱같은 희망이 생긴다. '제발...!' 불꽃이 목적지를 향해 길게 꼬리를 그리며 날아갔다. 그런데. 순식간에 나타난 천사상이 불꽃의 앞을 가로막았다. 퍼엉! 불꽃은 천사상의 복부에서 터졌다. '...!' 예상하지 못했던 천사상의 개입에 최종인이 고개를 들었다. 천사상의 얼굴은 더 이상 일그러질 수 없을 정도까지 흉측하게 구겨져 있었다. "감히..." 내내 미소를 짓고 있던 놈이 처음으로 이를 드러냈다. "왕의 수면을 방해하려 해?" = 163 화 왕? 누가? 앞뒤를 알 수 없는 천사상의 말에 최종인이 물었다. "방금 뭐라고...?" 그러나 천사상은 그에게 대꾸하지 않았다. 인간이 벌레와 대화를 나누겠는가? 천사상도 마찬가지. 지금은 사정이 있어 이런 모습으로 현신해 있으나 상위의 존재인 자신이 하찮은 인간과 문답을 주고받을 생각은 없었다. 벌레가 귀찮게 군다면 때려죽이면 그만인 일. 천사상은 머리 위로 치켜든 주먹을 망치처럼 내려쳤다. 초고속의 손망치가 최종인의 머리로 향했다. 쉬익! 최종인은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하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최후의 최후까지 포기하지 말라. 자신이 팀원들에게 누누이 강조했던 말이니까. 그런데 주먹이 머리를 내려치기 바로 직전, 눈앞에 섬광이 번뜩였다. 쾅! 감았던 눈을 뜨자 앞에는 빛의 검이 일렁이고 있었다. 최종인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차 헌터!" 차해인이 천사상의 주먹을 스킬 '빛의 검'으로 막아 낸 상태로 버티고 있었다. 조금만 더 늦었어도 최종인의 머리가 날아갈 뻔한 순간이었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 최종인에게 차해인이 말했다. "여긴 제가 맡을 테니 대표님은 헌터들을 도와주세요." "알겠어." 최종인은 석상들과 싸우고 있는 헌터들에게 가세했다. 천사상은 빛으로 둘러싸인 차해인의 검을 내려다보며 호기심이 가득한 시선을 보냈다. "하하." 자신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인간이 진우 말고 또 있다니. "너는 재미있구나. 재미있어." 천사상이 주먹에 힘을 실었다. 그러자 차해인의 무릎이 살짝 굽혀졌다. 어떻게 막아 내는 데까진 성공했지만 힘에 부쳤다. "으윽..." 고운 입술에서 가냘픈 신음이 흘러나왔다. 손목이 파르르 떨렸다. "어디, 어디." 천사상은 히죽히죽 웃으며 온도를 높여 가듯 점점 더 강한 힘을 가했다. 차해인의 발이 맞닿아 있는 바닥에 콰직 하고 금이 갔다. 팔 하나에 말도 되지 않는 압력이 실리고 있었다. 차해인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이대로는... 얼마 못 버텨.' 더 이상 뒤가 없다고 판단한 그녀가 순간적으로 가진 힘을 집중해 천사상의 주먹을 밀쳐냈다. 과연 S 급 헌터들 중에서도 최상급에 속하는 그녀의 폭발적인 힘! 천사상은 한걸음 물러나며 미소를 지었다. "하하." 단순한 여흥거리로 생각했던 것이 기대이상의 즐거움을 주었다. 아직은 더 즐길 수 있을 듯했다. "좋아, 좋아." 이번에는 천사상의 두 손에 마력이 응축되기 시작했다. 꼴깍. 차해인이 마른침을 삼켰다. 강대한 힘이 천사상의 두 주먹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할 수만 있다면 여기서 날아나고 싶을 정도로 겁이 났다. '하지만...' 진우가 쓰러져 있는 이때, 자신마저 등을 돌린다면 누구도 이 괴물을 감당할 수 없었다. 그녀의 눈매가 매서워졌다. 그에 반해 천사상은 웃으며 한 걸음 성큼 다가와 섰다. 3 미터에 가까운 장신의 적이 히죽 미소를 보였다. 그때, 녀석의 공격이 다시 시작되었다. 천사상은 진우에게 했었던 것처럼 양손을 닥치는 대로 휘둘렀다. 손이 두 개뿐인 건 아쉽지만, 이 인간에게는 그 정도로도 충분할 터였다. 움켜쥔 주먹들이 총탄같이 튀어나갔다. 두두두두두-! 차해인이 눈을 부릅떴다. '검무!' 그녀의 움직임이 마치 춤을 추는 것처럼 빨라지며 검이 화려한 곡선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천사상의 주먹이 너무 빨라 반격은커녕 막아 내는 데 급급했다. 한순간. 딱 한순간만 놓쳐도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치명적인 공격들이 쏟아지고 또 쏟아졌다. 캉! 카강! 캉! 캉! 캉! 카앙! 카강! 캉! 카강! 캉, 캉! 캉! 카강! 캉! 캉! 카앙! 카앙! 캉! "그렇게. 그렇게. 하하." 천사상은 평범한 헌터들은 눈으로 좇기조차 힘든 공격을 쉴 새 없이 퍼부으면서 실컷 신을 냈다. 조금씩 조금씩 뒤로 밀리던 차해인은 전신이 땀으로 흠뻑 젖어 갔다. 그래서일까? 아니면 한계에 다다랐던 것일까? 젖은 손이 미끄러지며 천사상의 공격 하나를 놓쳤다. 뼈아픈 실수였다. 검을 빗겨 나간 주먹이 차해인의 어깨를 치고 지나갔다. 파각! "...!" 차해인이 다급히 뒤로 물러서며 이를 악물었다. 그러나 뼈가 부러진 듯 어깨에 감각이 없었다. 그렇게 왼손을 잃었다. 차해인은 축 늘어진 왼손을 안타까운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하하. 거기까지냐? 거기까지?" 천사상이 곧바로 거리를 좁혀 왔다. 놈은 틈을 주지 않았다. 잠시 중지되었던 공격이 또다시 퍼부어지기 시작했다. 캉! 카강! 카앙! 두 손이 멀쩡할 때도 감당하기 힘들었던 공격이었다. 한 손으로는 역부족이었다. 놓치는 공격이 점점 많아지면서 차해인의 몸이 부서져 갔다. 퍽! 퍼벅! 퍽! 뼈가 부서지고, 살이 찢겨졌다. 그러다 결정적으로 한방. 퍽! 주먹이 복부를 파고 들어가자 두 다리가 땅에서 떨어진 그녀가 입에서 피를 쏟아 냈다. "컥!" 휘어진 몸이 공중으로 떠올랐다. 당연히 공중에서는 움직임이 제한될 수밖에 없고, 다음 공격에 대한 대비가 미비해진다. 천사상은 망가진 장난감에 흥미를 잃었다. 끝을 내기 위해, 천사상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치는 그녀에게 접근했다. 손끝을 세워서 날을 만들고 그녀의 가슴을 노렸다. 그런데 그때. 어딘가에서 뿜어져 나온 푸른빛이 차해인의 몸을 감쌌다. 힘없이 떨어지던 차해인이 눈을 부릅떴다. 한 바퀴 몸을 비튼 그녀가 검을 휘둘렀다. 멈칫. 급히 멈춰 선 천사상이 검을 피해 목을 뒤로 뺐으나 칼끝이 눈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스걱. 천사상의 얼굴에 선 하나가 그어졌다. 탓. 반격에 성공한 차해인이 어렵사리 균형을 잡고 착지했다. 때마침 들어온 힐 덕분에 간신히 위기를 모면할 수 있었다. 천만다행이었다. 그러나 차해인에게 다행인 일이, 모두에게 다행은 아니었다. 휙. 천사상의 고개가 힐이 날아온 쪽으로 돌아갔다. 아뿔싸. 차해인이 힐러를 바라보며 비명을 질렀다. "거기 피해요!" 탱커들 뒤쪽에서 치료 마법을 날리고 있던 메인 힐러가 차해인의 외침에 움찔 어깨를 떨었다. "네?" 그러나 그가 차해인에게 고개를 돌렸을 때는 이미 천사상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아..." 메인 힐러의 입이 벌어졌다. 천사상은 최종인에게 하려 했던 짓을 서슴없이 저질렀다. 쾅! 얻어맞은 힐러의 머리가 바닥으로 처박혔다. 움찔움찔 떨던 다리는 금방 움직임을 멈췄다. "안 돼!" 천사상을 포위한 헌터들은 분노를 숨기지 않고 달려들었다. 그러나 불가항력이었다. 그들의 힘으로는 천사상을 막을 수가 없었다. 퍽, 퍽. 천사상이 주먹을 휘두를 때마다 A 급 헌터들이 상급 마수 앞에 선 하급 헌터들처럼 무력하게 죽어 나갔다. "재미없다. 재미없다, 인간들." 흥이 깨진 상위 존재에게 더 이상의 자비는 없었다. 후열에 있던 헌터들의 수가 줄어들자 신상과 석상들의 공격에 맞서고 있던 탱커진도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아비규환. 균형의 추가 삽시간에 기울었다. 쾅! 신상이 탱커들을 피해 거대한 주먹을 내려치자 아래에 있던 헌터 두 사람이 동시에 목숨을 잃었다. 그 뒤로 무기를 든 석상들이 무섭게 헌터들을 에워싸고 들어왔다. '제길...!' 헌터들에게 달라붙은 석상 넷을 빠르게 베어 낸 차해인이 천사상 앞으로 뛰어들었다. 일단 놈을 막아야 했다. 그러나 천사상은 그녀가 내려치는 검을 팔목으로 가볍게 막아 내고는 비어 있는 그녀의 옆구리를 발로 걷어찼다. 투쾅! 천사상이 제대로 나서기로 작정한 이상 그녀 또한 더 이상 상대가 되지 못했다. 차해인이 나가떨어지는 것을 보고 최종인이 가까이 있던 우진철의 어깨를 붙들었다. 석상 하나를 때려눕힌 우진철이 화들짝 놀라 돌아보았다. "내가 주의를 끌어 보겠습니다. 우 과장님이 성 헌터를 깨우시죠. 그거 말고는 답이 없으니까." "네? 성 헌터님은 쓰러져 계신 거 아닙니까?" "아뇨. 그냥 잠들어 있을 뿐입니다. 호흡도 마력도 안정적이에요. 제가 볼 때는 어떤 상처도 없었습니다." 혹시 수면 마법 같은 것에 당한 것은 아닌지? 어쩌면 천사상이 잠들어 있는 성 헌터에게 공격을 가하지 않는 이유도 혹시나 그가 깨어나 버리는 것이 염려되어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왕의 수면이니 뭐니 하는 말은 잘 모르겠지만...' 최종인은 성 헌터를 보호하려던 천사상의 필사적인 움직임을 떠올렸다. 그가 깨어나는 것이 천사상에게 치명적임은 확실했다. "어서!" 우진철이 고개를 끄덕였다. 최종인은 가지고 있던 마력 전부를 끌어올렸다. 곧 그의 손 위에서 만들어진 거대한 원형의 불덩어리가 사방으로 불꽃을 토해 냈다.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불꽃들은 사물에 닿을 때마다 강력한 폭발을 일으켰다. 쉬익-! 쉬익-! 펑! 퍼벙! 펑! 퍼엉! 당연히 석상들의 시선은 최종인에게 향했다. 최종인이 시간을 벌어주는 사이 우진철은 빠르게 진우가 있는 곳을 향해 달려갔다. 그는 최종인의 예상이 틀리지 않았기만을 속으로 기도했다. 한쪽에서 최종인과 우진철이 진우를 깨우려 애쓴느 동안, 천사상은 드러누워 숨을 헐떡이고 있는 차해인 앞에 섰다. 차였을 때 벌써 한쪽 갈비뼈가 모조리 부서진 그녀였다. 천사상은 그런 상황에서도 손에서 떨어진 검을 쥐려고 움직이고 있는 그녀의 팔을 밟았다. 콰직! "아아아악!" 차해인이 부러진 팔을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치유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닌 인간은 모두 죽였고, 여자 인간은 전투 불능의 중상을 입었다. 인간들 중 유일하게 위협적인 자가 제거된 순간이었다. "하하." 천사상이 다시 손날을 세웠다. "이걸로 끝이구나." 인간 여자는 자신을 노려보며 숨을 가쁘게 몰아쉬고 있었다. 모든게 끝났는데도 마지막까지 삶을 포기하는 기색은 없었다. 이런 면에서 보면 그녀는 그와 닮았다. 성진우. 그도 처음 이곳에서 만났을 때 저런 눈빛을 했었다. 피식. 입꼬리를 올린 천사상이 차해인의 가슴에 손을 찔러 넣었다. 아니, 찔러 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막 심장 위를 뚫고 들어가기 직전에 손이 멈췄다. 천사상이 움찔 하며 물러났다. 인간 여자의 그림자에 그림자 병사가 하나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 방의 룰에 따라 병사가 밖으로 나오지는 못하고 있었지만 존재의 유무는 확실했다. 깜짝 놀라고 있는 것 같은 천사상의 얼굴을 보면서 차해인도 의아한 시선을 보냈다. '...?' 금방이라도 숨통을 끊을 수 있으면서 녀석은 망설이는 듯 보였다. 그렇다. 천사상은 실제로 망설이고 있는 중이었다. 왕께서 병사를 심어 놓은 인간이라니. 무슨 특별한 의도가 있는 게 아닐까? 물론 이것은 왕이 아닌 인간의 뜻일 가능성도 있었다. 하지만. '분명 왕과 인간은 조금이지만 섞여 있는 상태였다.' 그렇다면 그의 행동이 왕의 뜻인지 인간의 뜻인지 어떻게 구분할 수 있다는 말인가? 만약 왕께서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여자에게 병사를 심어 놓았다면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된다. 그래서 천사상은 물었다. "너희는 어떻게 여기를 찾아왔지?" "..." 차해인은 대답하지 않았다. 침묵이 길어지자 천사상은 질문을 바꾸었다. "너희들과 성진우는 어떤 관계냐?" "..." 이번에도 대답은 없었다. 적의 질문에 대답할 의무가 없다는 사실을 차해인은 잘 알고 있었다. 이대로는 그녀의 입을 열게 만들 수 없다. 그렇게 직감한 천사상이 작전을 달리했다. 딱. 천사상이 손가락을 튕기자 헌터들의 비명이 멈추었다. 신상과 석상들이 어떤 신호라도 받은 것처럼 싸움을 멈추고 천천히 돌아서서는 한쪽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진우에게 다가가던 우진철이 '보이지 않는 손'에 이끌려 바닥에 처박혔다. "크윽!" 위에서 덮쳐진 힘에 저항하려 애썼지만 꼼짝달싹 할 수가 없었다. 우진철은 굳게 쥔 주먹을 부르르 떨며 신음을 흘렸다. 천사상이 손을 거두어들였다. 안에서 일어나는 움직임은 하나도 놓치지 않는다. 인간들이 발버둥 쳐봐야 자신의 손바닥 안이었다. 그게 인간들과 상위 존재인 자신의 차이. 그 간극을 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다시 묻겠다." 천사상의 손가락 끝이 우진철을 가리켰다. "이번에도 대답이 없으면 저 남자를 비롯한 네 동료들을 모두 죽인다." "...좋아." 차해인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라도 시간을 벌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이득이었다. 천사상이 상체를 일으킨 그녀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물었다. "너와 성진우는 어떤 관계냐?" "...친구." "너희는 어째서 여기에 왔지?" 잠시 생각해 보던 그녀가 대답했다. "성진우 헌터를 구하러." 질문의 답을 듣고 난 천사상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누가 누굴 구한다는 건지? 그는 확신했다. 이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음을. 잠깐 왕의 뜻이 있으리라 짐작했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이들은 인간 '성진우'만을 알고 여기에 찾아온 것이었다. 참지 못한 천사상이 그만 큰 소리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고는 말했다. "너에게는 기회를 주마." "...기회?" "오늘 여기서 위대한 군주 중 한 분이 현세에 강림하신다. 너에게는 그 영광스런 장면을 목도할 수 있는 기회를 주겠다." 왕의 의사를 확인하기 전까지는 차해인을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그러니 그녀만큼은 살려 둬야 했다. 하나 예외는 그녀뿐 다른 인간들까지 놔둘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너 외의 인간들은." 미소가 사라진 천사상의 얼굴이 살벌하게 변했다. "모두 이 자리에서 죽는다." 이 영광스러운 자리에 불청객을 남겨 둘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대답은 앞이 아닌 뒤에서 들려왔다. "누구 마음대로?" "...?" 천사상이 채 돌아보기도 전에 날아온 주먹이 녀석의 얼굴을 강타했다. 투쾅! 날아간 천사상이 벽에 처박혔다. 쿵! 충격으로 벽면에 거미줄 같은 금이 새겨지고 돌조각이 떨어졌다. 천사상이 스르륵 바닥으로 떨어지기 직전, 그 앞에 선 진우가 천사상의 목을 움켜잡고 말했다. "너." 진우의 다른 손은 오른쪽 가슴 위에 있었다. 역시나. 꿈이 아니다. 오른쪽에 다른 심장 하나가 쿵쿵대며 뛰고 있었다. 진우가 천사상의 목을 쥔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냐?" = 164 화 한순간. 진우는 불러온 데이터 속의 그림자 군주가 되었다. 그때 자각했다. 자신의 가슴속에 마력의 심장이 뛰고 있었음을. 심장에서는 강한 마력이 쉴 새 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게 과연 착각일까? 확인 방법은 쉬웠다. '상태창.' 진우는 천사상의 목에서 손을 떼지 않은 상태로 상태창을 불러 왔다. 나열된 많은 수치들 가운데, 진우가 확인해 보고 싶은 것은 시스템이 마나 포인트라고 명시한 마력량이었다. [MP: 109,433] 진우의 눈이 커졌다. '10 만?'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도 믿을 수 없었다.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의 마나량은 분명 9 천 대였다. 이곳으로 출발하기 직전에 확인해 봤으니 오차는 없을 터. 그랬던 것이 이제 10 배를 넘어서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칭호가?' 변동 사항이 있는 듯 칭호 칸이 연신 깜박거렸다. 지정한 것도 아닌데 칭호가 변경되어 있었다. 바뀐 칭호는 '악마 사냥꾼.' 정보가 개방되지 않아서 그동안 방치해 두고 있었던 칭호였다. 진우는 칭호의 정보를 확인했다. [칭호: 악마 사냥꾼] '요구 조건이 충족되었습니다.' 악마들의 왕, 백염의 군주 바란을 처치한 기억을 되찾았습니다. 강대한 힘이 플레이어를 주인으로 인정했습니다. 효과 '검은 심장': 마나량 +100,000 '검은 심장!' 마나량이 말도 되지 않는 수준까지 올라간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추가 마나량 10 만. 그건 그림자 병사들을 무한에 가깝게 재생시킬 수 있는 힘이었다. 문득. 진우는 데이터 속에서 보았던 그림자 군주의 모습을 떠올렸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은빛 병사들에게 Ъ 뭅?이들은 그가 이끄는 불사의 군단이었다. 그들은 끊임없이 부활을 거듭하며 적들을 압도해 나갔다. 같은 수의 마수들을 수월하게 제압했던 은빛 병사들조차도 그림자 병사들의 재생력을 견디지 못해 결국 뒤로 밀려나야 했다. 원군이 제때 도착하지 않았다면 은빛 병사들은 전멸을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것은 전부 데이터 속 군주가 가진 방대한 마력의 힘이었다. '그렇다면...' 이 '검은 심장' 효과만 있으면 내 그림자 병사들도 불사의 군단이 될 수 있다거기까지 생각이 미치는 순간, 온몸에 전율이 일었다. "어떻게... 네가?"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는 천사상의 입에서 나오고 있었다. 처음으로. 진우는 처음으로 천사상에게서 미소와 분노 외의 얼굴을 보았다. 표정이 나타낸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천사상은 진우를 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겁에 질린 채 말했다. "어째서 검은 심장을 가지고도 자아를 유지할 수 있는 거지?" '뭐라고?' 놈의 대답을 듣고 진우는 두 가지를 빠르게 눈치챘다. 자신에게 나타난 '검은 심장'은 결코 천사상이 유도한 결과가 아니라는 것. 그리고 그 결과가 자신에게 좋은 일은 아니었으리라는 사실까지. 콰드득. 진우가 손아귀에 힘을 주자 천사상의 목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크윽!" 천사상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 "플레이어라는 건 대체 뭐냐? 내게 뭘 하려고 했어?" 언제라도 목을 부러뜨릴 수 있도록 진우는 경계를 늦추지 않고 물었다. 그러나 천사상은 대답할 정신이 없는 듯했다. "설마...? 그, 그림자 군주 네놈이 우리를...! 다른 군주들께서 두고 보실 것 같으냐!" 천사상은 진우를 노려보며 헛소리를 지껄여 댔다. 콰직! 진우의 손가락이 천사상의 목에 박혀 들어갔다. 이제 손가락만 까딱해도 목이 부서질 정도였다. 고통은 오롯이 전해졌다. "크아아악!" 천사상이 하늘을 향해 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진우는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묻는 말에 대답해라." 그래서 시험의 결과로 물어볼 권리를 얻었다. 약속의 대가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했다. 그때. 천사상에서 붉은빛이 번뜩였다. "헉!" "뭐야?" 헌터들의 경악성에 진우가 고개를 뒤로 돌렸다. "저, 저것들이!" "온다!" 공동의 한쪽 구석으로 이동해 있었던 신상과 석상들의 눈에 붉은빛이 들어와 있었다.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하." 천사상이 크게 웃었다. "이제 나를 죽이면 아무도 내 인형들을 멈출 수 없다." 이래도 나를 죽일 수 있는가? 천사상은 그런 시선으로 진우를 바라보았다. 하위 존재는 약점이 많다. 녀석이 인간이라면 이런 것도 충분히 약점이 될 수 있을 터. 분명 저들 중에는 이 인간을 친구라 부르는 존재도 있었다. 그런데. 천사상의 예상과 달리 진우는 미소를 보였다. '웃어...?' 진우가 물었다. "너를 죽이고 나서 내가 인형들을 처리하면?" 당황한 천사상이 급히 대답했다. "시스템의 설계자인 나를 죽이면..." "그것도 생각해 봤는데." 천사상의 말을 끊은 진우의 눈빛이, 헌터들을 둘러볼 때의 천사상과 비슷했다. "시스템 설계자가 사라진다고 해서 이미 만들어진 시스템이 망가지는 경우는 없잖아?" 허를 찔렸다. 이 인간은 자신이 일부러 언급하지 않고 있던 부분까지 알고 있었다. 불찰이었다. 어떤 기준으로 이 인간을 선택했는지 잊고 있었다. 그는 전부터 규칙을 간파하는 데 능했다. '이렇게 되면 강제로라도!' 천사상은 자신이 가진 마지막 카드를 발동시켰다. 띠링! [시스템이 시스템 관리자의 접근을 차단합니다.] [시스템이 시스템 관리자의 접근을 차단합니다.] [시스템이 시스템 관리자의 접근을 차단합니다.] 띠링! 띠링! 그 뒤로도 계속해서 몇 번이고 기계음이 울렸다. 그러나 같은 메시지가 반복될 뿐이었다. [시스템이 시스템 관리자의 접근을 차단합니다.] 천사상의 얼굴이 굳어졌다. 천사상이 시스템을 이용해 뭔가를 시도하려 했으나 시스템마저 천사상의 편이 아닌 듯했다. 진우가 어깨를 으쓱하자 천사상이 몸부림쳤다. "으아아악, 네놈!" 대답할 생각이 없다면. '살려 둘 필요도 없지.' 진우는 천사상의 목을 놓는 동시에 마력을 실은 왼손을 날렸다. 쿠앙-! 천사상을 뚫고 지나간 충격이 벽면에 거대한 구멍을 남겼다. 고오오오일순간 주위에 정적이 깔렸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진우는 자신을 이용하려 했던 천사상에게 합당한 응징을 내렸다. 머리는 물론이거니와 상반신의 반이 사라진 천사상의 몸이 벽을 타고 스르르 미끄러져 내렸다. '대답을 듣지 못한 건 아쉽지만.' 어차피 처음부터 자신을 속이려 한 놈이었다. 그런 놈의 입에서 나온 말을 믿을 수 있을까? '이걸로 됐다.' 진우는 아쉬움을 떨치려는 듯 왼손에 묻은 흙먼지를 가볍게 털어 냈다. 그때. 간절히 진우를 부르는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성 헌터님!" 아. 진우가 돌아섰다. 천사상에게 너무 집중하고 있었던 나머지 그만 석상들을 잊고 말았다. 석상들은 천사상이 죽기 전에 지시를 내렸던 대로 인정사정없이 헌터들을 치고 들어왔다. "성 헌터!" 최종인이 마법으로 석상들을 견제하며 애타게 진우를 찾았다. 그렇게 외치는 그 순간에도 석상들이 까맣게 몰려들고 있었다. 퍽! 석상에게 턱을 맞은 우진철이 비틀거렸다. 흔들리는 다리로 균형을 유지하려 애쓰며, 그는 좌우로 곁눈질을 했다. 덮쳐 오는 괴물들과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헌터들의 피와 땀이 사방으로 흩뿌려지는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잠깐. 내가 지금 뭐하는 중이었더라? '아차.' 정신이 들었을 땐 석상이 코앞에 있었다. 자신의 턱을 때린 것이 무엇인지 확인한다. 백과사전 몇 개를 겹쳐 놓은 듯 두꺼운 책이었다. 모양은 책이라도 재질이 돌이다 보니 머리가 흔들렸다. '아니... 원래 두꺼운 책도 흉기로 간주되던가?' 짧은 순간이지만 이전에 TV 에서 봤던 형법 판결이 떠올라 피식 웃었다. 어차피 막을 힘도, 피할 힘도 없었다. 반격할 힘은 더더욱 없었다. 그래서 씩 웃으며 손을 내렸는데. 쾅! 허리가 둘로 쪼개진 석상이 폭발에 휩쓸린 듯 튕겨져 나갔다. "어...?" 정신이 바짝 들었다. 눈을 깜박이며 고개를 흔들었더니 옆에 낯익은 남자가 보였다. "괜찮아요?" "아..." 그저 탄식밖에 나오지 않았다. 남자는 성진우였다. 그를 보고 놀란 표정을 짓고 있던 우진철이 가까스로 물었다. "혹시 방금 맨손으로...?"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합시다." 진우는 우진철을 뒤로 한 채 달려나갔다. 그러면서 주위를 둘러보는 그의 시선에 조명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들어왔다. '악마왕의 단검'이었다. '찾았다!' 진우가 단검을 향해 손을 뻗었다. '보이지 않는 손'이 작용하며 단검이 손아귀로 빨려 들어왔다. 척. 손에 잡히는 그립감은 언제나 일품이었다. 쾅! 일단 앞을 막고 있던 석상 하나를 냅다 발로 차 버린 진우가 헌터들에게 엉겨 붙은 석상들을 베어 내기 시작했다. 흐읍. 그러면서 심호흡을 들이켰다. 느려진 시간 속에서 오직 홀로 자유로웠다. 이어 진우의 모습이 사라지고, 상급 헌터들조차 보지 못하는 움직임으로 석상들을 파괴해 나갔다. 스걱! 툭! 석상 넷이 동시에 쓰러졌다. 진우에게 도움받아 간신히 위기를 벗어난 헌터들이 입을 쩍 벌렸다. "어...?" 그들 옆에서 어느새 다가온 우진철이 조용히 말을 건넸다. "그 말밖에 안 나오죠?" "...네."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그렇더라고요." 몇 번을 보아 왔지만 나오는 건 탄성뿐이다. 우진철은 쓰게 웃으며 담배를 물었다. 감시과 헌터 하나가 곁에 붙어 섰다. "과장님, 이러고 계셔도 됩니까?" "왜?" "지금 성 헌터님께서 괴물들과..." 감시과 헌터가 진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어...?" 우진철은 쩍 벌어진 감시과 헌터의 입에 담배를 물려주고 불까지 붙였다. "우리가 나설 자리가 보이냐?" "안... 보입니다." "그러니까 조용히 그거나 피고 있어." "네." 헌터들은 경외의 시선으로 진우를 바라보면서 우진철에게 모여들었다. 우진철의 담배는 금방 동이 났다. 왠지 코끝이 따가웠다. '여기서 몇 번을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네.' 결코 넘을 수 없는 벽처럼 보였던 괴물들을 혼자서 쓸어버리는 진우를 보고 있으니 안도감과 함께 벅찬 희열이 몰려들었다. "과장님, 혹시 우십니까?" "아냐, 인마. 담배가 매워서 그래." "저도 맵습니다." "저도요." "저도." 헌터들 모두 오늘따라 담배가 매운지 눈물을 글썽거렸다. 쾅! 신상의 주먹을 방패로 막아 낸 손기훈이 기함을 토했다. "커헉!" 무릎이 덜덜 떨려 왔다. 힐러가 없으니 혼자서 충격을 다 버텨야 하는데, 이 이상은 무리였다. "누... 누가 좀!" 그가 힘겹게 고개를 돌리자 헌터들이 가만히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아니. 지금 자신은 이렇게 외로이 신상의 공격을 받아 내며 피똥 싸고 있는데 어째서 아무도 도울 생각을 않는단 말인가? 발끈한 손기훈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뭐합니까, 다들!" 그러자 헌터들이 일제히 위를 가리켰다. 손기훈은 그게 위에서 공격이 들어온다는 말인 줄 알고 움찔 놀라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러나 공격은 오지 않았다. '...?' 그러고 보니 아까부터 이상하게 주위가 조용했다. '뭐지?' 방패 밑으로 슬며시 주위를 둘러보니, 근처의 석상들이 전부 쓰러져 있었다. "뭐야?" 화들짝 놀란 그가 방패를 치웠다. 그러자 위가 훤히 보였다. 빌딩처럼 높게 솟아 있는 신상의 모습과, 그 어깨에 올라서 있는 진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어...?" 손기훈이 채 다 놀라기도 전에. 투쾅! 진우의 주먹에 신상의 나머지 얼굴 반이 날아갔다. 머리를 잃은 신상이 비틀대기 시작했다. "어? 어?"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손기훈이 부리나케 튀었다. 느낌대로 신상은 그가 있었던 자리를 덮쳤다. 쿠웅-! 피어오른 뿌연 먼지가 내부 전체를 뒤덮었다. 콜록콜록! 기침을 내뱉던 최종인은 먼지를 헤치고 차해인에게 다가갔다. "차 헌터." "대표님...?" "괜찮아? 일어설 수 있겠어?" 누워서 신음하던 그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온몸이 성한 곳이 없었다. 최종인이 안타까운 마음에 눈살을 찌푸렸다. "내가 도와줄게. 조심히 일어서 봐." 그녀를 부축하려 드는 최종인 옆에 석상들을 모두 처리하고 온 진우가 섰다. "제가 차 헌터님을 부축해도 될까요?" "예?" 최종인이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 살짝이지만 차해인이 자신의 손을 밀쳐 내는 기분이 들었다. 최종인이 얼떨결에 대답했다. "아, 네. 그러시죠." 진우는 잽싸게 차해인을 안아 들었다. 차해인의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조금만 참아요." 입구로 달려간 진우가 문을 걷어찼다. 쾅! 잠긴 문 따위는 발길질 한 번으로 충분했다. 상급 헌터들이 아무리 흔들어도 끄떡없던 문이 박살 나 날아갔다. 문밖에 차해인을 조심스럽게 눕힌 진우가 상점을 불러냈다. 그녀의 상태가 좋지 않았다. 상급 힐링 포션을 구입한 진우가 차해인의 입에 포션을 털어 넣었다. 꼴깍, 꼴깍. 상처는 놀랍도록 빠르게 아물어 갔다. "어떻게...?" "쉿." 진우가 검지를 들었다. 지금은 그런 것을 설명하고 있을 때가 아니지 않은가? 헌터들이 하나 둘 밖으로 빠져나왔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다들 꼴이 말이 아니었지만, 당장 응급처치가 필요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진우는 상점을 닫았다. 포션의 존재를 모르는 헌터들은 차해인이 멀쩡히 일어서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어? 차 헌터님, 방금 전만 해도..." "그게..." 무심코 대답하려던 그녀가 힐끔 진우의 눈치를 살피더니 말을 돌렸다. "지금 그런 걸 설명할 때가 아니니까, 일단 밖으로 나가서 얘기하죠." 헌터들은 모두 수긍했다. "생존자는 더 없나요?" 그녀는 기감이 가장 좋은 진우에게 물었다. 내부를 들여다본 진우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서 있는 사람은 전부 열일곱. 안에 들어갔던 헌터 중 반 이상이 죽었다. 살았다는 기쁨도 잠시, 분위기가 갑자기 숙연해졌다. "그럼." 굳은 얼굴로 뒤돌아서는 차해인의 손목을 진우가 잡았다. 차해인이 진우를 바라보았다. 헌터스 공격대가 여길 찾은 이유는 두 번째. 진우는 그것보다 더 궁금한 게 하나 있었다. "저기... 일본은 어떻게 됐죠?" S 급 게이트의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기 직전 이곳으로 들어온 진우는 일본 소식이 궁금했다. 차해인은 대답을 망설이다 겨우 적당한 표현을 찾았다. "망했어요." = 165 화 결국 그렇게 됐나. 결계로 게이트를 막는다던 유리 오를로프의 계획은 발상부터 위험천만하긴 했다. 그도 그럴 것이 S 급 게이트 아닌가. 헌터든 게이트든 S 급은 측정 불가를 뜻한다. 측정 불가. 즉 안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어떤 일이 발생할지 알 수 없다는 것. 그럼에도 유리는 자신의 힘을 과신했고, 그 어리석음은 참혹한 결과를 낳았다. 진우는 얼굴이 착잡해졌다. 일본의 헌터들이 제주도에서 저지르려 했던 일은 고건희 협회장에게 들었다. 그들의 최종 목표까지는 알아낼 수 없었지만, 그들은 결국 작전을 실행에 옮겼다. 한국 헌터들은 진우가 아니었다면 괴물 개미가 없었다고 해도 살아서 나오기 힘들었을 것이다. 그런 짓을 벌이고도 일본의 헌터 협회장이란 작자는 한국에 방문해 고건희 협회장을 협박했었다고 한다. '벌을 받아도 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본 헌터협회의 수뇌부와 수작질에 발을 담근 최상급 헌터들 이야기. 그밖에 선량한 일본 시민들에게는 죄가 없었다. 아직 풀리지 않은 역사적 감정은 남아 있지만, 무지가 죽어야 할 만큼 심각한 죄는 아니었다. 그러나. 도심 한복판에서 일어난 던전 브레이크. 오크들이 게이트에서 나온 것만으로도 학생들의 절반 가까이가 죽어 나갔다. 그런데 1,300 만 명이 넘는 대도시의 중심가에서 S 급 게이트가 열린다면? 참담한 결과는 불을 보듯 뻔했다. 또한 그 결과는 그들이 일부 자초한 것이기도 했다. '고토 류지를 비롯한 일본의 최상급 헌터들이 건재했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 모르지.' 고토는 강했다. 일순간 진우에게 위협을 가할 수 있었을 만큼. 고토의 공격이 눈을 아슬아슬하게 빗겨 나갔을 때는 천하의 진우도 아찔했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제주도에서 발견한 일본 헌터들의 주검은 하나같이 한국의 S 급 헌터들을 뛰어넘는 인재(人才)들이었다. 싸움의 기술까진 알 수 없어도 시체에 남아 있던 마나량 만큼은 그랬다. 죄 없는 사람을 언데드로 만드는 것이 내키지 않아 포기했었지만, 그림자 병사들로 쓰고 싶었을 정도로 뛰어난 헌터들이었다. '녀석들이 하려던 짓을 생각하면 그림자 병사들로 만들어도 쌌는데!' 진실을 알게 된 것은 한참 뒤의 일이었으니까. 아무튼 그 정도로 강한 헌터들이 일시에 몰살당했으니 자국에 나타난 S 급 게이트를 처리할 여력이 있을 수가 있나. 결국 이번 일은 하늘이 부른 재앙이 아니라 인간의 욕심이 부른 화, 인재(人災)였다. "성 헌터님?" 차해인이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진우를 불렀다. 진우는 아직도 그녀의 손목을 잡고 있는 채였다. "미안해요. 잠시 딴생각을 좀." "아." 진우는 손을 놓았다. 그러나 차해인이 진우를 불렀던 이유는 손목을 잡혀서가 아니라, 진우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기 때문이었다. 일본에 가족이나 친척이 가 있는 걸까? 그런 의문이 언뜻 그녀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직 일본 헌터협회가 어떤 흉계를 꾸몄었는지 모르는 그녀는 이번 일을 단순한, 아니 단순하기보다는 끔찍한 사고로 인식했다. 일본은 어떻게 됐는가? 그래서 첫 번째 의문은 해결됐다. 그래서 진우는 두 번째로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다들 여긴 어떻게 오신 겁니까?" 차해인, 최종인, 우진철, 그리고 어금니와 싸울 때 만났었던 손기훈과 그의 팀원들까지. 헌터스 길드와 감시과 일동이라는, 접합점이 없을 것 같은 상급 헌터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다. 부하들의 부상 정도를 체크하던 우진철이 앞으로 나와 말했다. "신고를 받고 왔습니다. 그런데 성진우 헌터가 들어갔다는 걸 알게 됐고, 던전에서 새어 나오는 마력을 보니..." 진우가 그쪽을 돌아보았다. 너무 많은 사상자가 발생해서인지 우진철의 얼굴은 잔뜩 굳어 있었다. "저희들의 힘만으로는 역부족이라 생각하여 근처에서 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던 헌터스 길드에 협조를 요청했습니다." 긴급 협조 요청 권한. 협회가 길드들에 제시할 수 있는 가장 강한 권한이었다. 헌터스 역시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자신을 도우러 왔고, 그 과정에서 피치 못한 희생이 일었다. 진우는 가슴이 아파 왔다. 진우의 말이 없어진 사이 우진철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도 한 가지 여쭤 봐도 되겠습니까?" "네?" "성진우 헌터님께서는 어떻게 이곳에 이중던전이 있는 걸 아셨던 겁니까?" 당연하다면 당연한 질문. 이번 일로 큰 피해를 입은 헌터스 길드의 대표 최종인도 그것이 궁금했던 차였다. 그는 어떻게 C 급 게이트에 이중던전이 있으며, 그 안에서 상식을 초월한 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걸 알았을까? 이야기를 전해 들은 헌터들은 모두 의아해했었다. 드드드득- 동굴의 진동. 게이트가 얼마 후에 닫힌다는 신호를 보내왔음에도 헌터들의 관심은 진우의 대답에 있었다. "던전이." 진우는 사실대로 말했다. "저를 불렀습니다." "...불렀다고요?" 우진철이 믿지 못하겠다는 얼굴로 다시금 물었다. "네. 이곳으로 오라는 메시지를 받았습니다." "그 메시지를 저희도 볼 수 있을까요?" 진우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고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가리켰다. "제 머릿속에서만 보이는 메시지라서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모두가 꿀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진우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필요 없는 사실 몇 가지를 숨기고 핵심적인 진실만을 전달했을 뿐. 그의 당당한 표정이 헌터들을 압도했다. 이들 중 가장 오래 진우와 알고 지냈다고 할 수 있는 우진철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도저히... 내 상식으로는 읽을 수가 없는 남자다.' 던전이 머릿속으로 불렀다고? 어쩌면 그는 세상의 모든 던전을 박살 내려고 내려온 화신 같은 존재가 아닐까? '무슨 말도 안 되는 생각을...' 우진철이 속으로 헛웃음을 터트리고 있는데, 그 옆을 진우가 소리 없이 지나쳐 갔다. 진우는 곧장 문턱을 넘어 내부로 들어섰다. 당황한 차해인이 그를 불렀다. "성 헌터! 지금 여길 나가지 않으면 위험해요!" 걱정스런 목소리를 듣고 돌아선 진우가 대답했다. "압니다." 왜 모를까? 여기까지 이르는 긴 통로를 두 번이나 지나갔던 진우였다. 헌터들의 걸음으로도 한 시간가량이 걸리는 거리. 게이트가 닫히기 전까지 도착하려면 꾸물거릴 시간은 없었다. 게다가. 진우의 아버지 또한 게이트에서 실종되었다. 큰 부상을 당한 몸으로 보스방에 남아 있던 동료들을 하나씩 밖으로 옮기다가 결국 안에 갇히고 말았다고 들었다. 진우만큼 던전의 위험성을 자각하고 있는 이는 없었다. 그래서 위험을 알고 있다는 대답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날 위해 달려온 헌터들을 이렇게 버려두고 갈 수는 없잖습니까?" 조급해하던 헌터들이 그 소리에 우뚝 멈춰 섰다. 이 안에서 죽은 이들은 모두 그들의 동료들. 누구 한 명도 버려두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들 모두를 데려가기엔 시간이 너무 촉박했다. 체력도 많이 떨어져 있는 데다 석상들의 잔해에 깔려 있는 그들을 찾으려면 구석구석 뒤져야 하니까.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돌아서려했던 것인데. "데려가겠습니다." 진우의 한마디에 헌터들은 전기라도 통한 듯 부르르 경련했다. 시간이 없다고. 나가야 한다고 아무도 따지지 않았다. 그저 멍하게 바라만 볼 뿐. 그러다 참고 있던 최종인이 힘없는 목소리로 입술을 달싹였다. "부탁... 드려도 되겠습니까?" 가족 같은 길드원들이다. 할 수만 있다면 모두 이 차가운 동굴 구석에서 썩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돌아섰다. 두근, 두근. 심장이 조용히 뛰었다. '조금 더 느껴 보자.' 기본적으로 두 개의 심장인 같이 뛴다. 아주 집중해야 검은 심장이 뛰는 소리를 구별할 수 있었다. 진우는 검은 심장에서 보내오는 마나를 손끝에 모았다. '이렇게 했던가?' 진우는 영상 속에서 봤던 그림자 군주의 손 모양을 똑같이 흉내 냈다. 무언가 움켜쥔 듯 위로 향한 손. 확실히 강한 마력이 손바닥 위에서 요동치는 듯한 느낌이 왔다. 할 수 있다. 진우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헌터들의 주검이 어디에 있는지는 마력의 위치로 금방 파악할 수 있었다. 진우의 안광이 번들거렸다. 이어 고요한 내부를 응시하던 진우가 말했다. "지배자의 권능." 그러자. 드드득- 석상들의 파편에 깔려 있던 주검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떠올랐다. "헉!" "아니!" 숨을 멈추고 진우를 주시하던 헌터들이 탄성을 터트렸다. 그 짧은 시간에 죽은 헌터들의 위치를 전부 파악한 것은 둘째치고, 그들 모두를 손도 대지 않고 들어 올리다니.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초능력이 아닌가? 떠오른 헌터들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문밖으로 들려져 나왔다. '이럴 수가...' '어떻게 저런 게 가능한 거야?' 일반인들이 헌터들을 보고 놀라워하듯, 헌터들은 진우의 능력에 경악했다. 마력에 대해 제법 견식이 높은 최종인은 두 눈으로 직접 목격하고도 믿을 수가 없었다. '저건 대체 무슨 스킬이지?' 생전 들어 본 적도 없는 능력. 진우의 힘을 보고서 그는 자신이 크게 착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처음 천사상을 봤을 때 '저런 것'이라면 진우를 이길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 생각했다. 그러나 그 생각은 틀렸다. 오판이었다. 저런 힘을 아무렇지 않게 쓰는 헌터를 어떤 마수가 감당할 수 있다는 말인가? 저도 모르게, 최종인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불가능한 일...' 실제로 진우가 눈을 뜨자마자 천사상은 순식간에 제거되었다. 그의 능력에 감탄만이 흘러나왔다. 싸늘한 시체로 변한 헌터들을 한 곳으로 조심히 옮겨 놓은 진우는 그림자 병사들을 불러냈다. 금제는 신전 내부에서만 발동하기에 문밖에서는 병사들을 불러낼 수 있었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헌터들 앞에 나타난 그림자 병사들이 죽은 헌터들을 안아 들었다. 다들 할 말을 잃고 진우를 바라보고 있을 때, 진우가 말했다. "이동합시다." 그때. 마침 기다렸다는 듯 던전이 다시 한 번 몸을 떨었다. 헌터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들이 출발한 직후 그림자 병사들이 뒤따라붙었다. 진우는 맨 뒤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때까지도 움직이지 않고 있는 차해인을 돌아보았다. 몸의 상처는 말끔히 나았지만 피로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당연하겠지.' 천사상은 자신도 힘들게 때려눕혔던 놈이다. 그런 놈을 혼자서 막고 있었으니 지칠 수밖에. 그녀에게 다가간 진우가 물었다. "부축해 줄까요?" 차해인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덥석. 다시 그녀의 손목을 잡은 진우를, 그녀가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진우는 그녀가 조금이라도 안심할 수 있도록 나긋이 말했다. "우리도 가죠." 끄덕. 동료들의 죽음으로 의기소침해 있던 차해인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게이트에서 헌터들이 빠져나왔다. 그때까지만 해도 주위에 몰려 있던 사람들은 이번 일의 규모를 예상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림자 병사들에게 안겨 나오는 죽은 헌터들을 보고서는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졌음을 깨달았다. "맙소사..." "저게 다...?" 일을 신고한 용기 길드원들과 대기하고 있던 협회 여직원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사망자의 수가 너무 많았다. 이들은 전부 국내의 정예 헌터들이 아닌가? 헌터스와 감시과, 두 집단의 헌터들 모두 최고로 분류되는 이들이었다. 앞선 이들이 모두 빠져나온 뒤 끝으로 진우와 차해인이 동시에 땅을 디뎠다. 시간이 많이 흘러 밖은 이미 어둑해지고 있었다. 그때까지도 떠나지 않고 현장을 지키고 있던 김 기자의 눈이 커졌다. S 급 헌터라는 두 사람조차 몸과 옷에 전투의 흔적들이 역력했다. 말라붙은 피와 찢어진 옷가지, 헝클어진 머리카락. 그럼에도 아름다운 차해인은 넘어간다 쳐도, 성진우 헌터는 혼자 전쟁이라도 치르고 온 분위기였다. '이거야... 바로 이거.' 김 기자는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들었다. 자신이 기자가 된 이유는 바로 이런 현장을 담기 위해서였다. 모두가 일본에 주목하고 있는 가운데 이런 보이지 않는 구석에서 모두를 위해 목숨 걸고 싸웠던 이들이 있었음을 만인에게 알리기 위해. 최상급 헌터들이 무려 스물 가까이 죽었다. 이런 게이트가 열려버렸다면 피해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을 터. 이들의 희생으로 참사를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이 없었다면 이들의 싸움이 알려질 수 있었을까? 이런 기사 하나를 건지려고 그동안 그렇게 협회 주위를 맴돌아왔었다. 찰칵, 찰칵. 얼마나 감격했는지 그는 눈물을 글썽이며 사진을 찍어 댔다. 게이트를 빠져나오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아버린 우진철에게 진우가 다가갔다. "...성진우 헌터님." 일어서려는 우진철을 진우가 만류했다. 진우는 턱짓으로 김 기자를 가리켰다. "자꾸 저를 찍고 있는 것 같은데 저래도 되나요?" 우진철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성 헌터님의 개인적인 취재는 불가능하지만, 제주도 레이드 때도 겪으셨듯이 사건의 보도 자체를 막을 수는 없습니다." 진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엉망인 모습이 기사로 나가면 어머니께서 또 걱정하실 텐데. 약간의 불안감이 밀려왔지만 그렇다고 기자를 억지로 막을 순 없었다. 기자는 당연히 자기가 해야 할 일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만에 하나 있을지도 모르는 사고를 위해 이곳에서 싸우다 죽어 간 헌터들이 있었다는 사실을, 누군가는 알아줬으면 하는 바람도 있었다. 조용한 바람이 불었다. 그 바람을 타고 멀리서 구급차들의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다. 다음 날. 모든 신문들이 일본의 던전 브레이크를 톱면에 다루는 가운데, 오직 한 신문만이 한국에서 일어난 이중 게이트 사고를 다루었다. 그 신문은 그날 가장 많은 부수를 판매했다. = 166 화 미 헌터 관리국은 일본의 현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기 위해 아시아 지부의 요원들을 움직였다. 안전지대에서 출발한 헬기가 이윽고 도쿄 상공을 가로질렀다. 목숨을 걸고 현장에 지원한 헌터 관리국의 상급 요원이 아래를 내려다보며 혀를 찼다. "처참하군." 도쿄의 상태는 생각보다 더 끔찍했다. 도시는 던전 브레이크로 인해 완전히 붕괴되었다. 형체가 사라진 건물들, 종잇장처럼 엉망으로 구겨진 차들, 꺾인 가로등, 화재, 연기, 그을린 흔적들과 잿더미로 변한 구조물들까지. 처참하다는 말이 이보다 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요원의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누군가가 지옥을 본 적이 있냐고 묻는다면 이제 그렇다고 대답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자신은 사라진 도시를 애도하기 위해 이곳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자신의 임무는 실태 파악. 영상을 찍으며 꼼꼼히 밑을 살펴보던 그가 옆의 일본 관계자에게 물었다. "도시가 파괴된 정도에 비해 시체들은 눈에 띄지 않네요?" 요원은 헌터 관리국에서 교육을 받을 때 똑같이 S 급 게이트가 열렸던 제주도의 모습을 본 적이 있었다. 영상이나 사진 속 제주도에는 거리마다 시체가 가득했다. 미처 섬을 빠져나가지 못한 주민들은 개미들에게 전멸했다. 사상 최악의 사고 중 하나였고, 헌터 관리국에는 그 사고에 대한 기록이 낱낱이 남아 있었다. 그런데. 도쿄는 도시의 형태가 아예 지워진 것에 비해 시체의 모습이 적었다. 아니, 아예 죽은 사람들의 흔적을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일본 관계자가 말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거인들이 사람들을 먹고 있거든요." 그는 일본 헌터협회 소속의 젊은 남성이었다. 붉게 충혈된 눈과 깎지 못한 수염에서 그가 최근 어떤 시간을 보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는 근심 어린 얼굴로 말을 이었다. "놈들은 마치 일본 땅에서 일본인들의 흔적을 모조리 지워 버리려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습니다. 건물은 부수고, 인간은 먹고, 심지어는 거리에 심어 놓은 나무까지 뽑아 버리고 있어요." 끄덕끄덕. 요원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S 급 게이트에서 쏟아진 거인형 마수들은 여타의 마수들과 다른 점을 보였다. 다른 마수들은 인간만을 죽이려했던 반면, 이번 마수들은 눈에 띄는 모든 것들을 파괴하고 있었다. 놈들이 지나간 자리에는 문명의 잔해들만 남았다. 도쿄 내 어디를 둘러보아도 멀쩡한 빌딩, 아니 집 한 채를 구경할 수 없었다. "덕분에 약간의 시간은 벌 수 있게 됐지만요." 덕분에라. 협회 직원은 자조적인 미소를 지었다. 눈에 띄는 모든 걸 때려 부숴주는 덕분에 사람들이 도망갈 시간을 벌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해야 하는지, 아니면 슬퍼해야 하는지. 직원의 얼굴에는 그런 복잡한 심경이 담겨 있었다. 요원은 그를 보며 생각했다. '미치지 않는 게 용하지.' 한순간 자기 나라의 수도가 이 모양 이 꼴이 됐는데. 마수들에게 자국을 유린당한다는 상실감은 낯선 감정이 아니었다. 미국도 불과 8 년 전 S 급 게이트에서 홀로 나온 마수 '카미쉬'에게 서부 일대가 날아갔다. 어디 그뿐인가. 옆 나라 한국만 해도 자국의 가장 큰 섬을 4 년 가까이 마수들에게 뺏겼다가 최근에 와서야 간신히 되찾지 않았나. 그 격렬했던 전투는 요원도 영상으로 확인한 바 있었다. 본인은 한국과 아무런 연고가 없는데도 불구하고, 웬 한국인 헌터 하나가 나타나 개미들을 쓸어버리고 괴물 개미에게 한 방 먹여 줄때는 자기도 모르게 벌떡 일어나 함성을 질렀다. 그건 꼭 자신이 아시아 지부에 속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그 싸움을 한국이라는 작은 나라와 마수들의 대결이 아니라 인류와 마수들의 대리전으로 본 까닭이었다. 그리고. 지금 여기 이 땅,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로 인류와 마수들의 싸움이 벌어지고 있었다. '그 결과가 이것...' 타타타타타타-! 헬기의 날개가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했지만, 소음은 그다지 신경쓰이지 않을 만큼 밑의 상황은 심각했다. 화가 나고 답답했다. 그러나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다 할 뿐. 요원은 그때그때 생각나는 것들을 물어 가며 카메라 렌즈를 이리저리 움직였다. 그러다 무언가를 발견하고는 깜짝 놀라 그만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헉! 저, 저게!" 연신 지져스를 외치며 식은땀을 흘리는 요원을 직원이 얼른 일으켜 주었다. "보셨군요." "저, 저기! 저기 거인이 아직!" "예. 아직 여기에 한 마리가 남아 있습니다. 아니, 남아 있다기 보다는 꼼짝하질 않는다고 할까요?" 직원의 시선이 그리로 돌아갔다. 요원은 이마의 식은땀을 훔치며 조심스레 같은 곳을 응시했다. 온통 폐허로 변해 버린 도쿄 중심지에 여태까지 봐 왔던 그 어떤 생명체보다 큰 마수 하나가 꼿꼿이 서 있었다. '저것이 거인형 마수...' 헬기는 직원의 지시에 따라 그쪽으로 접근했다. 요원이 창백해진 얼굴로 물었다. "이, 이렇게 가까이 가도 괜찮은 겁니까?" 그는 분명 이렇게 들었다. 모든 거인들은 도쿄를 빠져나갔으며, 현재 도쿄는 안전한 상태라고. 그런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설명과 너무 다르지 않은가? 직원은 걱정할 것 없다는 말투로 차근차근 말했다. "괜찮습니다. 놈의 손이 닿지 않는 높이에 있으면 먼저 공격하지 않는 이상 100 퍼센트 안전합니다. 몇 번의 관찰로 밝혀진 사실이니 믿으셔도 됩니다." 꼴깍. 요원은 침을 삼켰다. '몇 번의 관찰로 밝혀진 사실이라고?' 관찰. 직원은 쉽게 말하고 있지만 그 같은 결론을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이들이 저 거인에게 희생당했을까? 불행히 거인의 손이 닿는 범위까지 다가갔을 몇몇 이들을 떠올리면 섬뜩한 기분이 들었다. 어쨌든 S 급 마수들에 대한 정보를 모으고, 일본의 실태를 본국에 알려야 하는 그에게는 가치가 높은 정보였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거인을 내려다보았다. 가만 보니 놈의 얼굴이 낯이 익었다. '그래...' 유리 오를로프의 마법 결계를 몸으로 깨부쉈던 초대형 거인. 그놈이었다. 사방으로 흩어진 다른 마수들과 달리 많은 이들이 보스급으로 지목했던 그 거인 마수만이 여기 남았다. 일본 직원이 씁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요원님이 보시기에도 저 마수가 게이트를 지키고 있는 것 같나요?" "아... 뭐." "저는 지금 저 녀석을 세 번째 보고 있는 겁니다만, 자꾸 볼 때마다 다른 생각이 듭니다." "어떤 생각이 드십니까?" "제 눈에는 꼭." 직원은 잠깐 뜸을 들이다 한 박자 늦게 말을 이었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이 보여서요." "그렇... 습니까." 요원의 시선이 다시 거인에게로 옮겨 갔다. 과연. 어떻게 보면 그런 것 같기도 했다. 직원이 그렇게 느끼고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라고, 왠지 그런 생각이 들었다. 두 사람이 보스급 거인 마수에 대해 대화를 나누는 사이 헬기는 한계치까지 가까이 붙었다. 거인은 자기 머리 위로 헬기가 날아다니는 데도 꼼짝 않고 서 있었다. 처음부터 헬기의 존재를 인식하지도 못하고 있는 것처럼 얌전했다. 하지만 직원의 설명에 따르면 놈이 아예 공격하지 않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놈은 일정 범위에 들어오는 것은 반드시 공격합니다. 그리고 공격의 대상이 된 목표물은 그게 사람이든 기계든 절대 빠져나올 수 없습니다." 그것도 몇 번의 관찰로 알게 된 사실일까? 차분히 설명하고 있는 직원의 얼굴 위로 유리 오를로프의 마지막 모습이 겹쳐졌다. 결계를 부수고 나와 유리를 낚아채던 보스의 날렵한 움직임은 모두에게 경악을 안겨 주었다. 유리의 죽음은 그렇게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다. 헌터 관리국의 S 급 헌터 보고서는 유리 오를로프를 이렇게 기록하고 있었다. -부와 명성을 탐닉하는 남자. 비록 일본에게서 돈을 받아내는 데는 실패했지만, 그는 이번 일로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헌터 중 한 사람이 되었다. '그게 원하던 결과였는지는 잘 모르겠다만.' 요원이 유리의 최후를 떠올리며 인상을 찌푸리는 사이, 직원이 말했다. "이것도 제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말입니다." 그 개인적인 생각. 아까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설명도 그렇고, 요원은 직원의 생각에 관심이 있었다. "네." 요원이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이 말을 이었다. "저 녀석을 보고 있으면 저 녀석이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습니다. 분명 호흡도 하고 있고, 살아 움직이기는 하는데, 마치 프로그램에 맞춰서 움직이는 기계 같다고 할까요." "기계..." 하지만 그 의견에는 동의하지 못했다. 가까이서 지켜보는 거인의 위용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가슴이 답답해질 정도의 위압감은 느끼고 있노라면 도무지 기계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때. 스윽. 거인의 눈동자가 이쪽을 향했다. "헉!" 요원은 또다시 엉덩방아를 찍었다. 흡사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직원이 그를 빠르게 진정시켰다. 그는 거듭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저 보기만 할 뿐입니다. 거리만 유지하면 놈은 공격하지 않아요." 요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심장이 떨어지는 줄 알았다. 뒤늦게 들어 올린 카메라가 마수를 자세히 기록했다. 화면이 조금씩 떨리는 것은 헬기가 바삐 움직이고 있어서만은 아니리라. 충분한 데이터를 확보했다고 생각한 요원이 물었다. "저 게이트에서 거인들이 몇 마리나 나온 겁니까?" "합쳐서 31 마리가 나왔습니다. 보스급 한 마리를 제외하고는 사방으로 고르게 흩어졌죠." "...그중 제거한 마수는?" "딱 둘." "그럼 지금 28 마리의 거인들이 일본을 파괴하고 있다는 거군요." "이제 거인들과 싸울 헌터들이 남지 않았으니까요. 모두 도망치는 데만 급급해하고 있죠." 직원의 얼굴은 어두웠다.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던 날, 도쿄 시민들이 대피하는 시간을 벌기 위해 결전에 임했던 헌터들은 모두 죽었다. 그 결과 거인 둘을 잡긴 했지만, 국토 전역으로 뻗어 나가는 나머지 스물여덟을 막을 방법이 전무했다. 제 발에 떨어진 불꽃, 아니 몸 전체를 태우고 있는 불꽃을 끄기에도 바쁜 헌터협회 직원이 미 헌터 관리국의 협조 요청에 순순히 응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었다. 바로 그때. "왜, 왜 이러십니까?" 요원은 펄쩍 뛰며 말리려 들었지만 직원은 끝끝내 머리를 조아렸다. 무릎을 꿇고, 이마를 붙였다. 이미 자존심도 체면도 남지 않았다. 잃는 게 자존심과 체면이 다라면 이보다 더한 짓인들 못할까? 그렇게 엎드린 상태로 직원이 목에 힘을 주었다. "우리 일본을 도와주십시오." 멈칫. 그를 일으켜 세우려던 요원이 동작을 멈추었다. 직원의 비장함에 아무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직원은 유창한 영어로 다시 한 번 강조했다. "미국이 나서지 않으면 일본은 끝장납니다. 우리 일본은 항상 미국의 든든한 아군이 아니었습니까? 동맹국을 위해 한 번만 희생을 감수해 주시지 않으시겠습니까?" 그것이 직원 개인의 의지인지, 아니면 일본 헌터협회의 지시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게 누구 뜻이 됐든 간절함만은 분명히 와 닿았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깨물며 고민해보던 요원이 어렵사리 말했다. "본부에 지원 요청을 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몇 번이고 고개를 숙이는 직원에게 요원은 크게 기대하지 말라는 말을 차마 할 수가 없었다. '카미쉬'에 의해 상급 헌터들을 다수 잃고 자국 헌터들의 안위를 끔찍하게 관리하기 시작한 미국이, 과연 일본을 위해 움직여 줄까? '아마도 아니겠지.' 그러나 자국의 안정을 위해 머리를 바닥에 부딪치는 젊은이에게 어찌 당신네들의 나라는 이미 끝났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그저 하늘의 뜻에 맡길 수밖에...' 요원은 무심코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하늘은 예전에도 그래 왔고, 지금도 그러하고, 앞으로도 그러하듯 가만히 아래를 내려다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요원은 그 하늘을 망연히 올려다 보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신이시여... 부디 인간을 버리지 말아 주십시오.' *** 진우는 가볍게 조깅을 하며 길드 사무실로 향했다. '역시 예상대로네.' 반가움을 담은 눈매가 전방에서 조금 위쪽을 바라보았다. 거기엔 언제나처럼 일일 퀘스트의 진행 상황이 떠 있었다. 띠링. [현재까지 달린 거리: 10Km] [달리기 10Km 를 완료하셨습니다.] 설계자를 자처하는 놈을 처치했지만 평소와 달라진 점은 없었다. 시스템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고, 일일 퀘스트도 평소와 마찬가지로 눈을 뜨자마자 도착했다. 컨디션 또한 최고였다. '검은 심장'이 생긴 뒤론 몸에 활력이 흘러넘쳤다. 일부러 속도를 늦추고 있긴 해도 걸음이 가벼웠다. 하지만. 놈이 그렇게 사라진 덕분에 해결하지 못한 의문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그 영상은 대체 뭐였을까?' '검은 심장'을 얻기 위한 조건인 건 알겠는데, 그것 외에는 모든 것들이 미스터리였다. 그리고 녀석이 죽기 전 부르짖었던 다른 군주들은 또 뭐고. 상념이 깊어지려는 그때. "저기, 잠시만요!" "유진호 씨! 질문 좀 하겠습니다!"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에 진우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길드 건물 앞에 잔뜩 몰려와 있는 기자들이 눈에 들어왔다. 유진호는 그들에게 둘러싸여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출근 중에 붙들린 듯했다. 기자들의 질문이 쏟아졌다. "어제 일어난 헌터스 길드의 참사, 유진호 씨는 알고 계셨습니까?" "아진 길드의 부사장으로서 한 말씀 해 주시죠." "성진우 헌터는 어떻게 거기 간 겁니까?" "지금 일본은 난리가 났는데요. 혹시 성진우 씨는 일본을 도울 생각이 있다고 하시던가요?" 아하.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기자들이 자신을 인터뷰할 수 없으니, 만만한 유진호를 붙잡아 둔 것이었다. 이거 도와줘야 하나, 하고 나서려던 순간 무언가를 발견한 진우가 걸음을 멈췄다. 웬걸? 유진호의 표정이 나쁘지 않은 것이 아닌가. 겉으로는 곤란한 척하면서도 순간순간 웃음을 억지로 삼키는 표정이 진우의 뛰어난 눈에 그대로 잡혔다. 기가 막힌 진우가 피식 웃었다. '진호 녀석, 저런 걸 좋아했었나.' 그럼 이제 어떻게 한다. 조용히 은신으로 길드 사무실에 들어갈까, 아니면 기분 좀 내라고 집에 돌아갈까. 고민하던 진우의 뒤에 차가 한 대 멈춰 섰다. 스르르르. 내려가는 차의 유리. "혹시 성진우 헌터님 되십니까?" 생소한 남성의 목소리에 진우가 별 생각 없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어?' 목소리의 주인을 확인한 진우의 눈이 조금 커졌다. = 167 화 "맞으시군요." 돌아선 사람이 진우라는 것을 확인하자마자 곧바로 차에서 내려선 남자는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굳이 그의 이름을 떠올리려고 기억을 더듬을 필요조차 없었다. 대한민국의 경제 관련 뉴스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그는, 진우에게도 여러 가지 의미로 익숙한 인물이었다. "유진건설의 유명한이라고 합니다. 반갑습니다, 성진우 헌터님." 허리를 꼿꼿이 세운 유명한이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무례하지도, 비굴하지도 않은 인사. 마치 '이것이 진짜 인사다'라고 배운 것처럼 깔끔하고 절도 있는 동작에 진우는 내심 놀랐다. 기업 회장이나 되는 사람이 초면인 자신에게 이리도 정중히 인사를 건네올 줄은 몰랐던 까닭이었다. 그가 정중했기에, 진우도 정중하게 인사를 돌려주었다. "성진우라고 합니다." 짧은 소개가 끝나자마자 유명한은 용건을 말했다. "이렇게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죄송합니다만, 괜찮으시다면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으십니까?" 진우의 머릿속에 작은 의문이 스쳐 지나갔다. '날 만나고 싶었다면...' 직접 방문할 필요 없이 아들을 통해 연락했으면 편했을 텐데. 어째서 유명한 회장은 수고를 무릅쓰고 굳이 여길 온 것일까? 그런 의문을 속으로 삼키며 진우가 물었다. "무슨 일이시죠?" 유명한은 이럴 수밖에 없어서 안타깝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여기서 말씀 드리기는 어려운 얘기입니다." 그러고 보니. 편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후드를 쓰고 있는 진우는 몰라도, 유명한 회장에게는 하나둘 시선이 날아와 꽂히고 있었다. 길에 지나다니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보니 이런 곳에서 중요한 사인을 논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 점은 진우도 이해했다. 문제는. '내가 유명한 회장과 나눌 중요한 사안이라는 게 없다는 거지.' 짐작 가는 부분이 전혀 없었다. 억지로 하나 만들어 내자면 그의 차남이자 아진 길드의 부사장인 유진호 이야기 정도? 진우의 대답이 늦어지는 동안 무심코 유명한을 돌아보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심지어 핸드폰을 꺼내들고 사진을 찍으려는 사람까지 생겼다.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이 점점 늘기 시작하자 유명한 회장은 마음이 약간 조급해졌다. '이번 기회를 놓치면 대화를 나누기 더 힘들어진다.' 그에게는 반드시 진우를 만나야 할 이유가 있었다. 때문에 그는 용기를 내어 부탁했다. "성 헌터님. 실례지만 저와 같이 가 주실 수 없으시겠습니까? 절대 무례한 이야기는 꺼내지 않겠습니다." 진우는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기자들의 격한 관심 속에서 유진호가 행복해하는, 아니 곤란해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진우는 다시 한 번 웃음을 속으로 삼켰다. '오늘은 진호도 바빠 보이고.' 한동안 대형 길드들의 배려로 주변의 상급 던전을 독차지했었으니, 이제 레이드를 좀 쉬어 줄 때도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가 올린 유명한 회장이 귀빈을 모시듯 차의 뒷좌석 문을 열었다. "그럼 타시죠." 진우가 올라타자 반대편으로 돌아간 회장이 진우의 옆자리에 앉았다. 워낙 큰 차여서 건장한 남성 두 명이 함께 타고도 자리가 널찍했다. 출발하기 직전, 진우가 물었다. "어디로 가는 겁니까?" "딱히 정해진 곳은 없습니다. 혹시 성진우 헌터님께서 원하시는 장소가 있으시다면..." 진우가 고개를 젓자 유명한 회장이 차를 출발시켰다. 그는 진우를 돌아보며 말했다. "누구도 신경 쓸 필요 없이 조용히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곳을 알고 있습니다. 그리로 모시겠습니다." 진우는 시트에 등을 기대었다. 비싼 차라서 그런지 쿠션감이 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좋았다. 소리 없이 미끄러지듯 달리던 차가 어느덧 목적지에 도착했다. "여깁니다, 헌터님." 기사가 회장의 문을 열어 주러 다가왔으나 유명한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기사가 반대편인 진우에게로 다가왔다. 기사는 진우가 앉은 쪽의 문을 열어 주었다. 내려선 진우가 까마득히 높은 빌딩을 올려다보았다. '조용히 얘기할 수 있다는 곳이 여기...?' 할 말을 잃고 서 있는 진우 주위로 수행원들이 잔뜩 몰려와 90 도로 허리를 숙였다.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어서 오십시오, 회장님!" 여섯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이구동성으로 내는 소리에 진우는 속으로 감탄을 터트렸다. 얼마나 연습을 하면 호흡이 이렇게 완벽하게 맞을까? "들어가시지요, 헌터님." 유명한 회장은 거들먹거리는 기색 하나 없이 앞장서서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빌딩 꼭대기 근처 유리창에는 '유진건설'이라는 이름 넉 자가 정자로 박혀 있었다. '...' 곧 진우도 유명한을 따라 빌딩으로 들어섰다. 진우가 들어오기를 기다리던 유명한은 진우와 보조를 맞춰 걸었다. "이리로." 회장을 발견한 직원들이 유명한에게 깍듯이 인사를 건네 왔다. 유명한은 무표정한 얼굴을 유지하고 있으면서도, 일일이 고개를 끄덕여 가며 모두의 인사에 답해 주었다. 큰 사람. 헌터 협회의 고건희 협회장에게서 느꼈던 분위기를 유 회장에게서도 느낄 수 있었다. 진우는 유명한을 진심으로 따르는 직원들의 시선에서 유명한이란 사람의 됨됨이를 대략적으로나마 가늠해 보며, 말없이 그를 따라 걸었다. 유명한에게 고개를 숙였던 직원들은 이내 그와 함께 걷고 있는 진우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누구지?' '어? 저 사람?' '설마...?' 직원들은 건물에 들어서면서 후드를 벗어젖힌 S 급 헌터를 알아보고는 입을 쩍 벌렸다. 국내 최고의 헌터와 국내 최고의 사업가. 두 사람이 같이 유진건설 본사에 들어섰는데, 어느 누가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 '헉!' 직원들의 눈이 커졌다. 여성 직원들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콩닥거렸고, 남성 직원들은 진우를 향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성진우 헌터가 어째서 회장님과 같이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각자 분야에서 최고라고 일컬어지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으니 두 사람의 아득한 나이 차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되었다. 무릇 남자라면 동경할 수밖에 없는 장면이었다. 그렇게 쏟아지는 시선들을 지나쳐 간 두 사람은 미리 대기시켜 놓은 임원용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수행원들의 보좌는 여기까지. 스르르 문이 닫히는 엘리베이터에는 진우와 유 회장도 남았다. "..." "..." 유 회장이 입을 다물고 있었으므로 진우도 말을 하지 않았다. 엘리베이터는 멈추지 않고 곧장 회장실로 올라갔다. 팅. 문 앞에는 유 회장의 오른팔 격인 김 비서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진우에게 빠르게 목례하고는 유 회장에게도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회장님. 손님 한 분이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손님?" 유명한 회장의 얼굴이 경직되었다. "내가 없을 때 아무도 들이지 말라고 말해 두지 않았나?" 김 비서는 실수가 잘 없는 이였다. 유명한의 얼굴이 경직된 것은 화가 났다기보다는 놀라움에 더 가까웠다. 김 비서는 난처하다는 표정을 하고는 말을 흐렸다. "그렇게 말씀을 드렸지만 워낙 막무가내셔서..." "흐음." 거기까지만 듣고도 유명한은 손님이 누군지 금방 알아챘다. 고개를 절레절레 젓던 그가 진우에게 회장실 쪽을 가리켰다.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위이잉. 회장실로 통하는 문이 열렀다. 소파에 앉아서 신문을 뒤적거리며 시간을 때우고 있던 나이 든 남성이 고개를 들었다. "형님, 왜 이렇게 연락이 안 됩니까? 오늘 약속도 갑자기 취소해 버리시고." 벗겨진 이마가 반질반질한 그는 유명한의 동생인 유석호였다. 형을 보고 반갑게 일어나려는 동생에게 유명한이 눈살을 찌푸렸다. "오늘 중요한 볼일 있다고 하지 않았느냐? 지금은 바쁘니 나중에 다시 오거라." "아니, 형님 스케줄을 제가 뻔히 알고 있는데 오늘 무슨 바쁜 일이..." 진우와 눈이 마주친 유석호가 일시에 말을 멈추었다. "어? 어어?" 많이 본 것 같은 얼굴인데. 남들은 신문이나 뉴스 화면을 먼저 떠올렸겠지만, 유석호는 딸 아이 유수현의 SNS 을 떠올렸다. 거기서 사이좋게 찍힌 두 사람을 본 기억이 있었다. '진짜 성진우 헌턴가?' 확인을 위해 그는 쥐고 있던 신문을 펼쳐 일면에 나와 있는 사진과 진우의 얼굴을 비교해 보면서 눈을 껌벅거렸다. 진우로서는 당황스러울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왠지 이 이름 모를 반 대머리 아저씨가 밉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눈매가 유진호와 많이 닮은 사람이라 그런가?' 유진호가 늙어서 머리가 벗겨지면 저렇게 변할까? 진우의 머릿속에는 이미 늙은 유진호가 되어 버린 유석호 회장이 형의 날 선 눈치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활짝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이쿠! 성진우 헌터님!" "아." 진우는 얼떨결에 그가 내민 손을 맞잡았다. 몇 년 만에 힘겹게 재회한 사람을 대하는 것처럼 반갑게 손을 흔들어 대던 유석호가 자신을 소개했다. "말씀 많이 들으셨겠지만 제가 유일제약의 유석호입니다." "...?" 어디서 어떻게 말씀을 많이 들었다는 걸까? 그래도 이렇게 환대해 주는 사람에게 무안을 주기도 그렇고 해서 진우는 대충 대꾸해 주었다. "아, 예. 반갑습니다." 곁에서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던 유명한이 의외라는 얼굴을 했다. 유석호는 봤냐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가슴을 쭉 펼쳤다. '보셨수? 내 딸이 사귀는 남자가 이 정도입니다, 형님.' 음악에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는 유명한 회장의 딸에게 은근히 자격지심을 느끼고 있던 유석호는 이걸로 확실히 자존심을 세울 수 있게 됐다. 대한민국에 이만한 남자는 흔치 않을 테니까. '...석호가 제법 발이 넓군.' 진우와 유석호가 아는 사이로 보이자 진우가 떠난 뒤 동생에게 크게 한 소리 하려고 했던 유명한의 분노가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덕분에 이야기는 잘 풀릴 수 있을 듯했다. "어라, 내 정신 좀 봐." 그제야 유석호는 잡고 있던 진우의 손을 놓았다. "두 분이서 나누실 말씀이 있다고 하셨죠? 저는 이쯤에서 빠질 테니 말씀들 나누시죠." 그는 만족한 듯 웃으며 회장실을 나가려다가 진우 옆에서 우뚝 멈춰 섰다. "그리고 성 헌터님." "예?" "언제 한 번 날 잡고 저희 집에 들려주세요. 성 헌터님의 방문이라면 언제든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 날을 잡고 들리라고? 언제든 기다린다고? "허허허헛."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던 유쾌한 아저씨는 바람처럼 시원하게 사라졌다. 호통한 목소리와 환한 얼굴 표정 때문에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만 정말로 영문 모를 사람이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는 진우에게 유명한 회장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제 동생과는 어떻게...?" 본인이 나갔으니 더 이상 사정 봐줄 필요가 있을까? 진우는 담담하게 말했다. "오늘 처음 뵌 분입니다." 돌아오는 진우의 대답에 유명한의 얼굴이 팍 굳어졌다. '유석호 저 녀석...' 그럼 그렇지. 하지만 지금은 손님 앞이었다. 포커페이스라는 별명답게 순식간에 감정을 숨긴 유명한이 진우에게 자리를 권했다. "앉으시죠." 유명한 자신은 맞은편에 엉덩이를 붙였다. 때마침 들어선 김 비서가 회장에게 물었다. "차를 드시겠습니까?" "나는 괜찮으니 헌터님께 물어보시게." "저도 됐습니다." 진우도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유명한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헌터님께 드릴 말씀이 있으니 잠시 자리를 비켜 주겠나?" "알겠습니다, 회장님." 밖으로 나가 문을 닫은 김 비서가 문앞을 막고 섰다. 미리 지시를 받았다. 지금부터는 설령 대통령이 방문해도 안으로 들여보낼 수 없었다. 그만큼 이번 일에 달려 있는 무게는 남달랐다. "..." "..." 엘리베이터 안에 있을 때처럼, 진우와 유명한 두 사람 사이에 또 다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그때와 이번 정적은 무게감에 차이가 있었다. 유명한에겐 시간이 필요했다. 신변잡기를 논하듯 쉬이 할 수 있는 대화가 아니었다. 그래서 유명한 회장이 입을 연 것은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시간이 흐른 뒤였다. "성 헌터님." 침착하게 기다리고 있던 진우가 차분히 받았다. "네." 유명한은 품에서 준비해 뒀던 수표를 한 장 꺼내었다. 유진건설의 주거래 은행에서 유명한의 이름으로 발급한 수표였다. 그러나 보통 수표와는 달랐다. 거기에는 마땅히 있어야 할, 돈의 가치를 나타내는 숫자가 하나도 적혀 있지 않았다. "여기." 그런 수표를 스윽 내밀었다. 잠깐 수표를 내려다보던 진우가 고개를 들었다. 유명한은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저는 돈으로 뭐든지 살 수 있다고 믿는 거만한 이가 아닙니다. 하물며 그 상대가 돈이라면 아쉬울 것 없이 벌 수 있는 S 급 헌터분이라면 더더욱 그러하겠지요." 자꾸 입에 침이 말랐다. 아버지를 여의고 처음 가업을 물려받았을 때보다, 수만 명의 직원들 앞에서 처음 연설을 시작했을 때보다, 수백 명의 기자들에게 둘러싸여 곤욕을 치를 때보다 지금 이 순간이 더 떨렸다. 당연했다. 사안의 중요성이 당시의 상황들과 비교할 수 없었으니까. 여기에는 자신의 목숨이, 일생을 다 바쳐 일궈 놓은 기업의 미래가, 그리고, 그리고, 아이들의 성장을 조금 더 지켜보고 싶은 아버지의 욕심이 걸려 있었다. "그러니 이것은 제가 보일 수 있는 성의의 표현이라고 생각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유명한의 비장한 눈빛을 보고 진우는 그가 대화 장소로 이곳을 고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지금부터 하는 이야기는 절대 밖으로 새어 나가서는 안 되는 것이리라. '길드 가입 권유 따위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천재지변이 덮치지 않는 한 자신이 100 퍼센트 컨트롤할 수 있는 자신의 영역을 고른 듯했다. 진우는 눈치가 빠른 편이었다. 그래서 물었다. "회장님은 제게서 뭘 사고 싶으신 겁니까?" = 168 화 유명한은 자신의 사정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실은 저도 헌터님의 어머니와 같은 병을 앓고 있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에 진우가 순간 멈칫했다. "진호도 알고 있습니까?" 유명한은 고개를 저었다. "담당 의사를 제외하고 제 병에 대해 아는 사람은 저와 아내, 그리고 비서 세 사람뿐입니다." "이제 네 사람이 됐군요." "그렇습니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왜 유 회장이 진호를 거치지 않고 자신을 비밀리에 찾아 왔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가족에게도 병을 숨기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긴 그의 어깨에 운명이 달려있는 직원들의 숫자만 몇만 명인데...' 기업 총수가 기침 한 번만 해도 오르락내리락하는 것이 주가다. 유 회장이 멀쩡히 활동할 수 있는 기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문이 퍼져 나갈 경우, 유진건설과 산하 기업들의 미래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가족들에게조차 병명을 숨기고, 철통 같은 보안을 유지하는 이유.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엔 유 회장이 짊어지고 있는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도. '그 사실을 내게 밝혔다.' 그건 그만한 리스크 쯤은 감당해야 한다는 판단이 섰기 때문이리라. 유명한은 기업인. 그것도 실패를 모르는 백전불패의 용장이다. 그런 사람이 아무 이득도 되지 않는 일에 위험을 끌어안고 덤벼들 리는 만무했다. 진우는 유 회장이 무슨 말을 할지 대충은 짐작할 수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 회장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을 백방으로 알아보던 중 세계에서 단 한 사람, 이 병에서 자유로워진 환자를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역시나. 진우가 예상했던 대로 이야기가 흘러갔다. "그 유일한 한 분이 성 헌터님의 어머니라는 사실이 제게는 우연으로 보이지 않는군요." 진우는 여태까지 등장한 적 없었던 신기한 능력으로 많은 사람들을 경악하게 만들었다. 어쩌면 그는 그런 능력으로 어머니의 병까지 치료한 것이 아닐까? 여러 자료를 통해 진우를 알아본 적 있는 유 회장으로서는 충분히 도달할 수 있는 결론이었다. '...' 진우는 그렇다, 아니다 대답도 없이 가만히 유 회장을 응시했다. 유 회장은 침을 꼴깍 삼켰다. '실수가 있어서는 안 돼.' 지금까지가 준비 운동에 불과했다면 여기서부터는 본 게임. 가장 중요한 순간이었다. 깊은 숨을 짧게 토해 낸 유명한이 힘주어 말했다. "제가 헌터님께 얻고 싶은 것은 진실입니다." 유 회장은 손끝으로 수표를 조금 더 밀었다. 스윽. "그리고 이것이 그 대가로, 제가 성 헌터님께 제공해 드릴 수 있는 성의의 일부입니다." 전부가 아닌 일부. 원한다면 돈뿐만 아니라 그 외의 것들도 넘겨줄 수 있다는 이야기였다. "헌터님께서 저를 도와주신다면 그 은혜는 반드시 잊지 않겠습니다." 재계의 호랑이가 머리를 숙이고는 도움을 구했다. 유 회장을 아는 사람들이 봤다면 기함을 토했을 만한 상황. 그러나 의외로 당사자인 진우는 평소처럼 침착했다. 차분한 시선으로 유 회장을 지켜보고 있었다. '거짓말은 아닌 것 같다.' 높아진 심장 박동과 가빠진 호흡, 그리고 평정을 가장한 그의 간절한 표정이 모든 것을 말해 주고 있었다. 유 회장은 진심이었다. 하지만. 누군가가 진심으로 무언가를 얻고 싶어 한다고 해서, 모두가 그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짧은 고민 끝에, 진우가 굳게 닫혀 있던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그 한마디에 유명한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안타깝지만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일이 없군요." "그... 그렇다면." 걸었던 기대가 컸던 만큼 유 회장은 그답지 않게 쉽사리 물러나지를 못했다. "성 헌터님의 모친분께서는 어떻게 완치된 겁니까?" "회장님." 진우의 눈매가 진지해졌다. 주변 공기가 싸늘하게 식어 가기 시작하자, 유 회장은 지금 자신이 마주하고 있는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다시금 깨닫게 되었다. 진우가 말했다. "제가 만약 그 이유를 알고 있고, 그것으로 돈을 벌고 싶었다면 왜 지금까지 입을 다물고 있었을까요?" 몇 개의 대답이 유 회장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힘을 가진 사람의 표적이 되는 것이 무서워서? 아니. 유 회장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는 현역 S 급 헌터다. 그것도 특출하게 강한. 누가 그를 표적으로 삼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럼 돈 외에 다른 것을 원한다는 소리인가? 다시 한 번 자신도 모르는 사이 유 회장의 고개가 좌우로 움직였다. 지금의 성 헌터라면 명예든, 인기든 원하는 것이라면 모두 마음대로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성 헌터는 그러지 않았다. '아아.' 유 회장은 뒤늦게 자신의 실수를 알아챘다. 거래의 기본은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아내는 것이다. 상대가 원하는 것을 가져오고, 상대에게 원하는 것을 받는다. 그게 거래의 상식. 그러나 자신은 진우가 원하는 것을 조금도 알지 못했다. 거래가 실패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두 가지 중 하나군.' 진우가 정말로 이유를 알지 못하거나, 아니면 원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거나. 어느 쪽이라고 해도 자신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었다. "...알겠습니다." 유 회장은 더 이상 진우를 붙잡지 않았다. "그럼." 진우가 일어서는 걸 보고 엉거주춤 일어난 유 회장이 김 비서를 불렀다. 밖을 지키고 있던 김 비서가 냉큼 안으로 들어왔다. "회..." 첫발을 내디딘 순간, 그는 진우와 유 회장 사이에 흐르고 있는 경직된 기류를 읽었다. 마지막 희망이었던 만남이었기에 김 비서의 얼굴도 어두워졌다. "회장님, 부르셨습니까?" 유명한 회장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님이 돌아가신다고 하니 댁까지 모셔다드리게." "저는 괜찮습니다." 정중히 거절한 진우는 유명한과 김 비서에게 가볍게 인사하고서 혼자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위잉초고속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서 최하층을 향했다. 둘이 있을 때는 몰랐지만 혼자가 되니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혼자서 타기에는 지나치게 크고 넓은 엘리베이터였다. 진우는 한숨을 쉬었다. "후." 부탁을 거절하는 쪽의 마음도 편치는 않다. 그래도 동생 같은 녀석의 아버지가 아닌가. 인정에 못 이긴 척 손을 내밀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그를 모른다.' 유명한 회장이 어떤 사람인지. 그가 정말로 병을 앓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꿍꿍이가 있는 것인지. 어머니를 치료하는 데 사용한 '생명의 신수' 아이템은 성능이 탁월한 대신 수가 한정되어 있었다. 그러니 사용에 좀 더 신중을 기할 수밖에. 유 회장이 제시한 조건은 파격적이었지만, 자신의 마음을 움직이는 데는 실패했다. 그것이 결론이었다. 팅. 금방 1 층에 도착한 엘리베이터가 문을 열었다. 진우는 후드를 쓰고 내렸다. 유 회장과 있을 때와 달리 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잠깐씩 돌아보는 시선들도 '누군데 임원용 엘리베이터에서 내리는 거지?' 하는 눈빛이었다. 진우는 딱히 신경 쓰지 않고 입구로 걸어갔다. 대기하고 있었던 안내 요원이 진우를 발견하고서 가는 길을 열어주었다. 로비를 가로지르던 진우가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일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지금 막 일본에서 들어온 소식입니다.] 진우의 고개가 돌아갔다. 올라갈 때는 꺼져 있던 로비의 대형 TV 가 실시간으로 현지의 뉴스를 내보내고 있었다. 던전 브레이크,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가는 대재앙에 관한 속보였다. 진우는 TV 앞으로 걸어갔다. 촬영용 헬기 위에서 찍힌 도시는 끔찍했다. 거인들이 건물을 파괴하고 있었다. 미처 대피하지 못했던 시민들은 잡히는 족족 거인들의 입속으로 들어갔다. 남아 있는 군대가 화력을 퍼부었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헌터들의 힘이 아니고서는 마수들을 잡는 게 불가능하니까. 정확한 집계는 불가능하지만 벌써 사망자가 백만 단위를 넘어간다는 추정치가 나왔다. 그야말로 대참사였다. "..." 진우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실상을 목격한 건 처음이었다. 그야 그럴 수밖에. 이중 던전에서 빠져나온 뒤 우진철 과장에게 뒤처리를 맡기고 집에 돌아가서 쓰러지듯 잠들었던 게 바로 어제였다. 예상은 했었지만 일본의 상황은 예상보다도 더 심했다. 4 년 전 제주도에서 일어났던 악몽을 방불케 했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할까. 당시의 던전 브레이크는 섬 지역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문제가 더 커지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일본은 다르다. 그냥 섬으로 치부해 버 기에는 너무 크다. 나라 자체가 지워질 수도 있는 위기였다. 두근, 두근, 두근. 거인들을 지켜보는 진우의 심장이 뛰었다. 불쾌함이었다. 겨우 저런 녀석들 따위가 사람들을 짓밟고 있다고 생각하자, 깊숙한 곳에서부터 강한 혐오감이 치밀어 올랐다. 그런데. '가만...' 진우가 상념에서 벗어났다. 겨우 저런 녀석들이라니? 거인형 마수는 여태 상대해 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TV 로는 마력을 감지할 수 없다. 한데 어째서 거인을 보자마자 무의식적으로 '겨우'라는 단어를 떠올린 것일까? 자신감인가? 고개를 갸웃거리던 진우가 곧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리가 복잡하니 별생각이 다 드네.' 진우는 돌아섰다. TV 앞에 모여 걱정스러운 얼굴로 속보를 바라보는 사람들의 틈을 헤쳐 나온 진우가, 조용히 건물을 빠져나갔다. *** 던전 브레이크 이틀째. 즉시 전 세계의 시선이 일본에게 집중되었다. 던전 브레이크의 대책은? 일본에게 방법이 남았나? 만약 아니라면, 과연 미국이 나서 줄 것인가? 그리고. 일본을 모두 파괴한 거인들이 바다를 건너 타국에도 피해를 입힐 가능성은 없는가? 무너지는 일본에 우려와 근심의 시선들이 쏟아졌다. 물론 일본과 적대적인 관계에 놓여 있던 몇몇 나라들은 다른 생각을 하기도 하였으나, 적어도 겉으로는 다들 유감의 뜻을 전해 왔다. 그러나 일본에게 필요한 것은 말 뿐인 위로가 아니었다. 실질적인 도움. 마수들에게서 일본을 구해 낼 수 있는 구체적인 힘, '구제력'이 필요했다. 미국의 입장 발표가 늦어지고 있는 가운데, 벌써 일본 국토의 1/10 이 파괴되었다는 소식이 나왔다. 고속도로를 가득 메운 일본 난민들의 행렬이 전파를 탔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 터전을 버리고 동쪽으로, 서쪽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모든 나라가 그렇듯 일본의 땅덩이도 무한하지 않다. 결국은 막다른 골목에 다다르고 만다. 예고된 종말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들의 안타까운 모습을 보며 세계가 묻기 시작했다. -한국은 무얼 하는가? -한국은 왜 일본을 돕지 않는가? -그들의 은혜를 모르는 것인가? 세계는 바로 몇 주 전 있었던 제주도 레이드를 보았다. 일본은 한국을 위해 투입한 S 급 헌터들의 절반을 잃었는데, 어째서 한국은 일본의 위기를 가만히 지켜보고 있기만 하느냐는 것이었다. 일본의 피해 규모와 사망자의 숫자가 매시간 갱신됐다. 사람들은 분개하고 애도했다. 일본에 대한 동정론이 커질수록 한국에 대한 비판이 거세졌다. -움직여라, 한국! -그들에겐 의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가? -한국은 제주도를 잊었나! 세계의 여론이 들끓었다. 그리고 일본이 왜 유독 한국에만 마수들의 퇴치를 요청하지 않는지, 하는 의문도 커졌다. 그렇게 사흘째가 되던 날. 때가 됐다고 생각한 고건희 협회장이 드디어 기자들 앞에 섰다. 웅성웅성. 발 디딜 틈 없이 모여든 기자들과 카메라를 둘러보던 고건희 협회장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일본에 일어난 참사를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바이며, 그에 대해 우리 헌터협회의 입장을 밝히겠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조금 더 앞선 시간, 미 헌터관리국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 169 화 미 헌터관리국의 기자회견장. 미국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우리는 헌터들을 한곳으로 모으고 있습니다." 일본을 구제하기 위해 미국이 드디어 손을 쓰는가? 헌터관리국에서 입장을 표명한다는 소식을 듣고 몰려든 기자들은 자기 일처럼 환호성을 질렀다. 어느 누구도 수천만, 아니 억 단위의 사람들이 비명에 죽어 가는 것을 바라지는 않았다. 때문에 기자들이 열광한 것이다. 기자회견장의 분위기가 한없이 달아오른 그때, 대변인이 조용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하지만 그것은 일본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뭐라고? 기자들이 웅성대며 서로를 바라보았다. 아무도 미리 접한 정보가 없는지, 모두들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대변인은 뒤의 화면을 가리켰다. "헉!" "아니..." 화면에 떠오른 영상에 기자들은 입을 다물었다. 일시에 소란이 가라앉고, 그 자리를 정적이 대신했다. 무거운 침묵 속에서 드문드문 신음이 흘러 나왔다. 준비된 영상은 그만큼 충격적인 것이었다. "오늘 동부 메릴랜드 주에서 발견된 게이트의 모습입니다." 게이트의 크기가 정상이 아니었다. 일본에 생긴 것보다는 작다고는 해도 보기 드물 정도의 크기. 게이트의 크기가 등급과 직결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어마어마한 규모의 게이트가 하급 던전으로 연결되는 경우 또한 없었다. 대변인이 설명을 이었다. "저희 조사단이 측정한 결과 이번 게이트 역시 일본의 것과 마찬가지인 S 급으로 밝혀졌으며, 본국의 최상급 헌터들은 이를 처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입니다." 기자들은 얼굴을 감싸 쥐거나, 고개를 절레절레 젓거나, 깊은 탄식을 내뱉으며 각자 절망감을 표출했다. 비슷한 시기에 S 급 게이트가 동시에 생성되는, 유례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물론 미국은 걱정이 없었다. 지금까지 전 세계에서 모셔 온 수십 명의 S 급 헌터가 어렵지 않게 게이트를 처리해 줄 터였다. 문제는 일본이었다. '미국은 일본을 도울 여력이 없다.' 이 끔찍한 소식이 일본에 알려지자 미국의 지원만을 간절히 기다리고 있던 일본인들의 절규가 이어졌다. 일본은 끝났다. 거인형 마수들은 눈앞의 모든 것들을 파괴하며 남진하는 중이었고, 북으로 쫓겨난 사람들은 점점 막다른 곳으로 몰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침묵을 지키고 있던 한국 또한 입장을 밝혔다. 기자들 앞에 선 고건희가 말했다. "우리는 일본의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 하루 전. 여느 때와 같이 아진 길드의 드넓은 사무실에는 진우와 유진호, 단 두 사람뿐이었다. 유진호가 눈을 반짝였다. "형님. B 급 게이트가 하나 나왔는데, 이거 예약할까요?" "헌터스 길드 구역이지?" "네? 아, 그러네요. 형님." "그럼 됐어." "아... 알겠습니다, 형님." 다수의 정예 헌터들이 희생된 헌터스는 지금 한창 정신없이 바쁜 시간을 보내고 있을 터였다. 그 틈을 타 그들의 게이트를 차지하는 건 여러모로 모양새가 좋지 않았다. 옆머리를 긁적거리던 유진호가 진우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형님. 아까부터 뭘 그렇게 열심히 보고 계십니까?" 모니터에서 눈을 뗀 진우가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진호야." "예, 형님." "나 일본이나 갔다 올까?" "예?" 유진호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말을 하고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모르는 것은 아니었다. 형님의 활약을 누구보다 가까이서 지켜봐 왔다. 하지만. S 급 게이트는 상식이 통하지 않는 곳이었다. 측정불가. 그것은 이미 규격 외아른 남리 아닌가? 같은 S 급끼리도 넘을 수 없는 격차가 있듯이 측정이 불가능한 게이트에서 튀어나온 마수가 얼마나 위험한 지는 아무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유진호는 일본을 가겠다는 진우의 말에 웃을 수 없었다. 문득 유진호의 고개가 모니터로 돌아갔다. '아...' 화면에는 일본에 대한 속보가 가득 차 있었다. 형님이 신경 쓰고 계시구나. 자신과 달리 형님은 큰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니 그에 맞는 고뇌가 동반될 수밖에. "형님, 잠시만요." "응?" 가볍게 던져 본 말이었는데 유진호의 반응은 사뭇 진지했다. 잠깐 자리를 비웠던 유진호가 캐비닛에서 앨범 같은 것을 하나 들고 왔다. 두꺼운 책을 펼치자 신문 기사들이 잔뜩 스크랩되어 있었다. '이건...?' 전부 진우가 나온 기사였다. 언론에는 진우의 개입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레드 게이트 사고에서부터 제주도 레이드, 도로 정체를 해결했던 일, 그리고 최근에는 헌터스와 함께 정체불명의 석상들과 싸웠던 것까지. 진우가 기막혀 하며 물었다. "이런 걸 모으고 있었냐?" "네, 형님." 유진호의 얼굴은 조금 붉어져 있었다. "근데 갑자기 이건 왜?" "이 기사들 공통점이 뭔지 아십니까, 형님?" "글쎄..." 내가 관련된 사건들이라는 걸 말하는 건 아닐 테고. 잠시 뒤 유진호가 모기만 한 소리로 말했다. "저는 어디에도 없다는 겁니다. 형님." 높은 감각 스탯으로 강화된 청력이 아니었으면 놓칠 뻔한 목소리. "뭐?" 진우가 돌아보자 유진호가 숙였던 고개를 들고 진우를 바라보았다. "형님, 일본에 가시는 거면 저도 데려가 주세요." "...?" 진우는 의아해했다. 일본에 간다고 하면 말리거나 응원할 거라고 생각했지, 데려가 달라는 말이 나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하지만 유진호는 진심이었다. "제 입에는 말씀드리기 부끄럽지만 형님은 제 자랑이십니다. 제가 남들 앞에서 떳떳하게 내세울 수 있는 거라고는 그것뿐입니다." "너..." 진우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보다 가진 것이 많아 보이는 유진호. 하지만 그동안 진호에게 들은 바에 따르면 그것들은 지금껏 녀석을 괴롭혀 온 족쇄였지. 자랑은 아니었다. 그러나 자신을 만나고 아진 길드를 키워 가는 건 모두 유진호의 선택이었다. 유일한 자부심이라 말하는 진호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니까 저도 형님이 계신 곳에 있고 싶습니다. 꼭 데려가 주세요, 형님." "내가 어딜 간다고 했는지, 기억은 하는 거지?" 아무리 철없는 진호라도 일본 소식 정도는 들었을 것이었다. 그곳은 지금 현세에 강림한 지옥이었다. '거인'이라는 악마들이 인간들을 처참하게 심판하고 있는 지옥. 그러나 유진호는 결의에 찬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형님이 무사하시면 저도 무사할 겁니다. 형님이 다치시면... 에이, 그런 건 생각도 하기 싫습니다." 유진호는 강한 신뢰감이 담긴 눈빛을 보내왔다. 누군가에게 강한 신뢰를 받고 있다는 것은 빈말로도 나쁘다고 할 수 없는 기분이었다. 가슴속이 간질거리는 것 같은 묘한 기분에 진우는 유진호의 머리를 헤집었다. 유진호는 당황했지만 고개를 빼지는 않았다. "혀, 형님?" "당연히 농담이지. 이 시기에 일본을 왜 가겠냐?" 진우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오늘은 이만 퇴근하자. 수고했다." "어? 벌써 가십니까, 형님?" 손을 흔들며 사무실 문을 나서는 진우의 등에 유진호가 허리를 숙였다. "내일 뵙겠습니다, 형님!" *** 덜컹. 진우가 집으로 들어섰다. 군침 돌게 만드는 향긋한 찌개 냄새가 코끝에 스며들었다. 잠시 멈춰 서서는 저녁 냄새를 맡아 보았다. '좋다.' 어머니께서 퇴원하고 나서 가장 좋아진 점 하나는 집에 반겨 줄 사람이 있다는 것이었다. 예전처럼 어둡고 조용한 집은 이제 없었다. "아들 왔니?" 부엌 쪽에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두고 부엌으로 걸음을 옮겼다. 뒤를 돌아보는 어머니께 미소를 지었다. "다녀왔습니다." "저녁 먹을 거지?" "네. 진아는요?" "입맛 없다네." 멈칫. 의자를 빼내려던 진우의 손이 멈추었다. "아직도요?" "안 그래도 어젯밤까지 한숨도 못 자다가 이제 잠들었어." "..." 진우는 기척을 죽이고서 조심스럽게 동생 방의 문을 열었다. "음... 음..." 진아는 몸을 계속 뒤척이며 쉽게 깊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평소에는 밝은 모습을 유지하고 있지만, 아직도 정신적 고통이 심한 모양이었다. '하긴... 그런 일이 있었는데.' 동생이 힘들어하는 모습을 지켜볼 때마다 마수들에 대한 적의가 끓어올랐다. 어째서 녀석들은 이렇게 인간을 끊임없이 괴롭히는 걸까? 그때. 진우의 머릿속에서 게이트에서 쏟아져 나와 마수들을 쓸어버리던 은빛 병사들이 떠올랐다. 마수들과 서로 적의를 불태우던, 수를 헤아릴 수 없는 규모의 군대. 만약 그들이 실존한다고 한다면. '그들은 우리의 아군인가?' 적의 적이 아군이라는 말도 있으니. 잠든 동생을 조용히 바라보던 진우가 방문을 닫았다. "잘 먹었습니다." 저녁을 먹은 뒤, 진우는 운동 삼아 협회의 체육관으로 이동했다. 체육관에 심어 둔 그림자 병사가 있어 편했다. 생각이 많아질 땐 땀을 흘리는 게 최고였다. 오랜만에 땀을 좀 흠뻑 흘리고 싶어졌다. 진우는 베르를 불러냈다. 가볍게 몸을 풀고 있는 진우 앞에 전직 개미왕이 공손히 무릎 꿇고 고개를 숙였다. "왕이시여..." 베르는 그림자 군단에서 유일하게 진우의 공격을 약간이나마 버틸 수 있는 병사였다. 그러나 그 베르조차 달라진 진우의 변화를 감지하고는 흠칫 몸을 떨었다. "감축드립니다, 왕이시여. 더욱더 고강해지신 힘이 느껴집니다." '검은 심장'의 가공할 마력에 베르는 전율을 느꼈다. 아래를 향한 녀석의 고개가 오들오들 떨렸다. 하지만 성장을 자랑하기 위해 베르를 불러낸 것이 아니다. 진우는 베르에게 일어나라고 손짓했다. "...?" 그림자 군단에 속하고부터는 접한 적 없었던 진우의 근심 어린 눈빛에 베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진우는 나직이 말했다. "지금부터 전력을 다해서 덤벼라." "왕이시여. 제가 어떻게..." "괜찮아. 땀 좀 흘리고 싶은 거니까. 너밖에 없다는 거 알잖아." "감... 감개무량하옵..." 감격해 무릎을 꿇으려는 베르에게 진우가 날카로운 눈빛을 보냈다. "너 어째 어휘가 점점 늘어 간다? 어디서 또 사람 잡아먹은 거 아니지?" 베르가 움찔 어깨를 떨었으나, 더 이상 추구하지는 않았다. 진우는 주먹을 쥐고 다시금 지시를 내렸다. "전력을 다해라." "정녕 주군의 뜻이 그러하시다면..." 고개를 들어 올린 베르가 손톱을 길게 세웠다. "키에에에에엑-!" 자신이 손톱을 써도 왕께는 닿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부담은 없었다. 진우도 그 모습을 보고 씩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바라던 바였다. "키엑!" 체육관 내부를 뒤흔드는 강한 포효와 함께 베르가 덤벼들었다. 쾅! 바닥에 처박힌 베르가 대짜로 뻗었다. "끼엑..." 127 전 127 패. 역시나 전력을 다한 공격으로도 털끝 하나 건들지 못했다. 며칠 못 본 사이에 왕께선 더욱 더 강해지셨다. 오늘로 힘에 대한 경의와 왕을 향한 충의가 한층 더 깊어졌다. 뻗은 채 쉽사리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베르 옆에 진우가 털썩 앉았다. 이마에 땀방울이 몇 개 맺혔다. 그나마 이것이 최선이었다. 이 이상 격하게 움직이면 체육관이 박살 나고 만다. 진우는 앉아서 가만히 앞을 바라봤다. 얌전히 몸을 일으킨 베르가 무릎을 꿇고 물었다. "왕이시여... 혹시 근심이라도 있으십니까?" "근심?" "주군과 저희의 정신은 일부분 연결되어 있습니다. 왕의 고충은 저희에게 고통으로 전해집니다." "..." 그림자 병사에게 위로를 받다니. 그것도 원래는 곤충이었던 녀석에게. 진우는 피식 웃음이 나왔다. 평소라면 그렇게 그냥 웃어넘기고 말았겠지만 이번에는 조금 달랐다. '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 일본에서 일어나는 일은 엄밀히 말해 남의 일이었다. 거기에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을지 모르고, 세계 모든 사고를 혼자서 다 처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아직 한국 헌터협회와 일본 헌터협회 사이에는 풀리지 않은 감정의 앙금도 남아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들이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었다. 그러자. 베르가 고개를 들었다. "왕이시여!" 진우가 놀란 눈으로 베르를 돌아보았다. 녀석이 그림자 병사가 된 후로 이렇게 강력하게 의지를 피력한 적은 처음이었다. "왕께는 그 무엇도 걸림돌이 되어서는 아니 됩니다." 그 신념에 찬 목소리는 베르를 마수 출신의 그림자 병사가 아니라, 오랫동안 곁을 지켜 온 충신처럼 느껴지게 했다. "하고 싶은 것을 행하는 자. 그것이 왕이십니다." "그러니까 나는 왕이 아니라니까." 시스템에 의해 우연히 정해진 직업이 그림자 군주인 거지. 하지만 베르는 진우의 말을 강하게 부정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왕께서는 하고자 하는 바를 행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계십니다." 진우의 눈이 흔들렸다. 두근. 왜인지 심장이 크게 요동쳤다. "틀림없는 왕이십니다." 그놈의 왕 소리. 하지만. 하지만 어째서인지 뛰기 시작한 가슴이 쉽게 진정되질 않았다. '내가 하고 싶은 것...' 다시 앞을 응시하는 진우의 눈빛이 차갑게 빛나기 시작했다. *** 다음 날. 미국이 성명을 발표하고, 고건희 협회장도 헌터협회의 뜻을 못 박았다. "우리는 일본의 일에 일체 관여하지 않겠습니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플래시가 쉴 새 없이 터졌다. 고건희 협회장은 기자들 앞에서 일본 헌터들이 행하려고 했던 만행을 낱낱이 고했다. 그가 내민 증거들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들을 뒷받침했다. 끔찍한 흉계를 꾸며 놓고 뻔뻔이 큰소리치는 마쓰모토 일본 헌터협회장의 모습이 찍힌 CCTV 영상은, 기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국의 원조를 기대했던 일본 기자들은 망연자실 영상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어느새 카메라를 든 그들의 손은 바닥을 향해 내려가 있었다. 방금 전 미국이 일본을 도울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 헌터협회의 폭로는 일본에 사형선고나 다름없었다. 일본 기자들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렀다. "...이상입니다." 고건희 협회장은 할 말을 다했다. 원래라면 질문이 쇄도해야 할 시간에 모두가 충격과 경악으로 입을 열지 못했다. 기자회견의 분위기가 방송국 카메라를 통해 전국으로 생중계되었다. 사람들은 그제야 어째서 한국이 일본의 위기에 침묵하고 있는지 그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하지만." 기자회견을 마치고 돌아설 듯했던 고건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우리 헌터협회의 결정이며, 헌터 개인의 의지를 막아설 생각은 없습니다." 이게 또 무슨 소리인가? 술렁술렁. 충격에 얼어붙어 있던 기자들이 겨울잠에서 서서히 깨어나는 동물들처럼, 느릿하게 시선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한 사람. 일본의 거인형 마수들을 처치하고 싶어 하는 헌터가 있습니다." 누구? 누가 이 시기에 단독으로 일본을 향한단 말인가? 착 가라앉았던 기자회견장의 분위기가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눈물을 흘리던 일본 기자도 떨리는 손으로 카메라를 쥐었다. '제발... 제발...' 유일한 희망에 가슴이 두방망이질하고 있었다. 한국 기자 하나가 손을 높이 들었다. 협회장이 그를 가리켰다. 그가 순서를 뺏길까 겁나는 것처럼 빠르게 물었다. "그 헌터는 누구입니까?" 내부의 모든 시선이 고건희의 입으로 향했다. 잠깐 뜸을 들인 고건희는 마이크에 입술을 최대한 붙이고 말했다. "성진우 헌터님이십니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촤악-! 그 한마디에 카메라 수백 대가 일제히 빛을 뿜었다. = 170 화 "성진우 헌터님이십니다." 세계 헌터들이 고건희 협회장의 목소리를 들었다. 누군가는 속보를 통해서, 누군가는 연락을 통해서, 누군가는 동영상 공유 사이트를 통해서. 그들의 반응은 한결같았다. -이 시기에 일본을? -무슨 생각인 거지? 헌터들도 알고는 있었다. 지금 일본에 붙은 급한 불만 꺼준다면 일본 정부가 얼마나 큰 보상을 해 줄지 짐작조차 어렵다는 사실을. 하지만 어떤 나라도 자국의 최상급 헌터들을 미중유의 재앙 속에 던져 놓길 거부했다. 전 세계 최상급 헌터의 숫자들을 격감시킨 S 급 게이트의 마수 '카미쉬'의 교훈은 헌터계를 폐쇄적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상황이었지만, 가라고 해도 누가 과연 나설 수 있을까? "미친 짓이지." 메릴랜드 주의 최고급 호텔에 모이기 시작한 미국 국적의 S 급 헌터들도 한국의 소식을 들었다. 그들 중 다수는 '업그레이더' 셀너 부인의 힘에 의해 능력이 강화된 이들. 세계 최고의 무력 집단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런 이들이기에 아시아의 작은 나라에서 들려오는 무모한 헌터의 이야기를 비웃을 수 있었다. "재각성한 지 얼마 안 된 녀석이 자기 힘에 도취된 거지." "그 녀석, 설마 곤충 따위와 거인족을 같이 보고 있는 건가?" "자신의 힘을 과신하는 헌터는 100 프로 죽어. 오히려 개미들을 잡은 게 명을 단축하는 결과가 될 줄이야. 아이러니하군." 그들도 제주도에서 진우의 빛나는 활약을 보았다. '성진우'의 힘은 확실히 강했다. 하지만 거인족은 다르다. 숫자로 밀어붙이는 개미 떼들에게 많은 소환수를 불러낼 수 있는 그의 능력이 잘 먹혀들었을 뿐. 아무리 그가 강하다고 해도 개개인의 개체가 최상위 A 급 게이트에 보스급으로 등장할 만큼 강한 거인형 마수들을 혼자서 감당할 수 있을까? 거기다 유리 오를로프를 낚아챘던 보스급 거인의 기이한 움직임. 그건 맹수의 동작을 방불케 했다. 그 덩치로 그런 속도와 민첩함이라. 어떻게 한 명의 헌터가 그 괴물을 잡을 수 있다는 말인가? 헌터들은 농담 삼아 내기를 걸었다. "하루 만에 죽는다에 내 요트를 걸지." "난 이틀에 내 집을 걸겠어." "그럼 난..." 그때. "과연 그럴까?" 구석에서 조용히 식사하던 토마스 안드레가 식기를 내려놓으며 입을 열었다. 국가권력급 헌터 중 한 사람. '카미쉬' 토벌 이후로 많은 강자들이 나왔지만, 아직까지도 인류역사상 가장 끔찍했던 재앙과 맞서서 살아남았던 헌터들의 위상을 뛰어넘지는 못했다. 그가 피식 웃자 모두가 잡담을 멈추었다. "나는 녀석이 살아남는다에 스케빈저 빌딩을 걸겠다." 그는 선글라스 너머로 내기를 걸었던 헌터들을 슬쩍 훑어보고는 그대로 식당을 나갔다. "..." "..." 그가 나가고 난 뒤 불편한 정적이 내려앉았다. 헌터 하나가 인상을 찌푸리며 침묵을 깼다. "저 인간, 분위기 망치는 덴 정말 선수라니까." "저 괴짜 놈이 이러는 게 어디 한두 번인가. 신경 안 쓰는 게 좋아." "그래. 아무리 한국의 헌터가 강하다고 해도 혼자서 S 급 거인들을 막는 건 불가능하지." 잠자코 듣고 있던 옆자리의 헌터가 말했다. "혼자는 아니고 한 명 같이 간다던데?" 그럼 그렇지. 아무리 정신 나간 놈이라도 그 생지옥에 혼자서 갈 생각은 안 하겠지. 헌터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물었다. "어떤 멍청한 S 급이 그를 따라나선다고 했나?" "S 급이 아냐." 헌터 셋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S 급 거인들과 싸우러 가면서 S 급 미만의 헌터를 데리고 간단 말인가! "A 급 힐러라도 데려가나 보지?" "아니. 유진호라는 D 급 탱커랑 같이 간다던데?" 세 헌터들 모두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할 말을 잃고 입을 꾹 다물었다. 성진우라는 헌터, 미쳐도 단단히 미쳤구나. 어쩌면 미친놈들끼리는 통하는 것이 있는 게 아닐까? 토마스 안드레가 성진우를 응원하는 게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세 헌터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 인천국제공항. "아, 잠시만요. 좀 지나가겠습니다!"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을 헤치고 유진호가 위풍당당하게 걸어나왔다. 얼굴을 가리는 큼지막한 선글라스, 양손에는 장비가 담긴 가방 두 개. 표정에서 흘러나오는 비장함은 클라이맥스에서 등장하는 영화배우 뺨 칠 정도였다. "지나가겠습니다아-!" 유진호가 만든 길 위를 진우가 조용히 따라 나왔다. 촤촤촤촤촤촤촤촤촤악-! 기자들이 진우의 1 초라도 놓칠세라 연신 플래시를 터트렸다. 들떠있는 유진호와 달리 진우는 종일 차분한 모습이었다. 일본에서는 진우가 온다는 소식을 듣고 바로 전용기를 보내 주었다. 당연히 모든 입국 절차는 깔끔하게 생략됐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 진우는 배웅 나와 있는 낯익은 얼굴들을 발견했다. 고건희 협회장과 우진철 과장이었다. 가볍게 눈인사를 주고받은 세 사람이 가까이 붙어섰다. 공항 안은 소란스러웠으나 세 사람 모두 감각이 발달해 있는 최상급 헌터들이라 따로 목소리를 높여야 할 필요는 없었다. 고건희가 아쉬운 얼굴로 말했다. "지금이라도 말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습니다." 진우는 한국이 보유한 헌터 최강의 전력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런 힘을 함부로 내보내고 싶지 않았다. 막말로, 그가 없는 동안 한국에 무슨 일이 생길지 모르는 일 아닌가? 하지만 진우의 뜻은 확고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가고 싶습니다." 거인들을 처치해서 레벨을 올리고, 그림자 병사들의 수를 늘린다. 때문에 진우는 일본에 마수의 모든 권리를 넘겨 달라고 요청했고, 너무도 당연한 요구에 일본은 두 손 들어 환영했다. 고건희는 허허 웃었다. "거기 마수가 있기 때문입니까?" 진우도 씩 웃었다. "저는 마수와 싸우고 싶습니다." "헌터님의 뜻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요." 고건희가 손을 내밀었고, 진우도 손을 잡았다. 맞잡은 두 손이 위아래로 움직이는 동안 고건희는 진심 어린 인사를 건넸다. "부디 무사히 다녀오십시오." 촤촤촤촤촤촤촤촤촤악-! 악수를 나누는 두 사람의 모습은 수백 개의 카메라 렌즈에 고스란히 담겼다. *** 진우가 온다는 소식은 절망에 빠져 있던 일본의 생존자들에게 한 줄기 등불이 되었다. 몇 개 남지 않은 방송국들은 진우와 관련된 자료 영상을 연신 틀어 댔다. 사람들은 진우의 활약상들을 보며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S 급이었던 개미들이 쓸려나갈 때 그들은 전율을 느꼈다. 한일 협동 작전이 벌어질 때만 해도 크게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이 재방송에 매달리기 시작했다. 거인들의 남하가 점점 더 가속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올수록 그들의 간절함 또한 커져 갔다. "성진우 헌터가 일본에 도착했대!" 라디오를 듣던 소년이 소리치자 사람들의 얼굴이 환해졌다. 하지만. 모두가 희망을 발견한 것은 아니었다. 거인의 공격으로 전기도, 가스도 끊긴 곳에서는 조력자의 등장을 알지 못했다. 그들의 유일한 희망은 구조대가 도착하는 것뿐이었다. "자위대에서 왔습니다!" 노부부가 운영하는 작은 요양 병원에 자위대 병사 둘이 사색이 된 얼굴로 들어섰다. 하늘에 기도하는 심정으로 구조를 기다리던 노부부 의사 내외는 병사들을 보고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보다 좋지 않았다. 병사들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환자분들을 모두 태울 자리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세 네 분을 더 태울 수 있습니다." 노부인이 말했다. "말도 안 돼요... 여기에 거동이 불편한 환자가 10 명이 넘는다고요." 노의사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자위대 청년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지금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분들 걱정하실 때가 아닙니다! 거인들이 이곳으로 오고 있다고요!" 땀으로 범벅된 자위대 청년이 악을 썼다. 벌써 이 근방의 주민들은 다 피신을 완료한 상태. 사람 냄새가 나는 곳은 여기뿐이니 거인이 들이닥치는 건 시간문제였다. 바닥을 바라보던 노의사가 고개를 들었다. "환자분들을 두고 갈 수는 없습니다. 아내와 저는 환자분들의 마지막을 지켜드리기로 약속했습니다." 노의사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두 청년은 눈을 부릅뜨고 노의사를 바라보다가 하는 수 없이 무전기를 들었다. "...민간인들이 대피를 거부합니다. 우리는 철수하겠습니다." 일부러 들으라는 듯 교신을 마친 두 병사들은 서둘러 밖으로 뛰어나갔다. 곧 차의 시동이 걸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부부는 서로를 다독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가 버린 줄 알았던 병사 하나가 뛰쳐 들어왔다. 손에는 실탄이 장전된 소총이 들려 있었다. "뭐, 뭡니까!" 화들짝 놀란 노부부가 서로의 손을 맞잡았다. 병사는 목에 핏대를 세웠다. "여기 계시면 거인들에게 찢겨 죽습니다! 그렇게 끔찍하게 죽느니 차라리 제 손에 죽는 것이 낫습니다!" 총구가 노의사에게 한 번, 노부인에게 한 번 번갈아 움직였다. 그럴 때마다 노부부는 어깨를 움찔 떨었다. "마지막 경고입니다. 저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아니면 제 총에 죽으실 겁니까?" 청년은 말없이 총을 겨눴다. 노부부는 한참 말이 없었다. 그들도 왜 모르겠는가? 이렇게 해서라도 자신을 데려가고 싶은 눈앞 청년의 마음을 말이다. 하지만 쉽사리 대답할 수는 없었다. 그건 일평생 사람들에게 봉사해 온 자신의 신념에 등 돌리는 행위였다. "..." "..." 영원 같은 찰나가 지나갔다. 그렇지 않아도 땀으로 범벅되어 있던 청년의 이마에서 굵은 땀방울 하나가 아래로 흘러내렸다. 눈썹을 타고 들어간 땀이 한쪽 시야를 침침하게 만들었다. 청년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때. 꼬르륵청년의 배가 허기를 알렸다. 그러나 청년은 아랑곳하지 않고 살기등등한 시선을 유지했다. 그런데. "저기 총각."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청년이 병상 쪽으로 급히 총구를 돌렸다. "뭐, 뭡니까?" 어두컴컴한 병실의 한구석, 병상 위에 앉아 있는 할머니가 쟁반을 내밀었다. 그 위에는 주먹밥이 올려져 있었다. 할머니는 웃으면서 권했다. "배고프면 이거라도 먹으이. 난 영 입맛이 없어서." "..." 그제야 자위대 청년은 총구를 아래로 내렸다. "자, 어서." 주먹밥을 건네받은 청년의 손끝이 떨렸다. 불현듯 자신이 군복을 입은 이유가 떠올랐다. 군인이 되고자 마음먹었던 것은 이런 선량한 시민들을 지키고 보호하기 위해서가 아니었던가. 그런데 괴물이 오고 있다는 걸 알면서 이런 이들을 모른척하고 도망치려 했다니. 자신의 무력감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영문 모를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조용히 무전기를 들어 동료를 먼저 보냈다. 놀란 노의사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대체 어쩔 셈입니까?" "저도 남겠습니다." 자위대 병사는 총을 어깨에 걸쳐맸다. "저는 군인입니다. 시민들이 남아 있는 걸 알면서 도망칠 수는 없습니다." 목이 메 넘어가지 않는 주먹밥을 억지로 입에 다 삼킨 청년이 할머니께 꾸벅 허리를 숙였다. "잘 먹었습니다. 주먹밥 정말 맛있었습니다." 그때. 쿵, 쿵, 쿵. 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청년은 비장한 얼굴로 병원을 뛰쳐나갔다. 거인 하나가 무서운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짐승처럼 바닥을 기어서 이동하는 거인이었다. '저건...?' 총구를 겨누는 청년의 눈에 뭔가가 들어왔다. 거인은 먼저 출발했던 동료를 입에 물고 있었다. 청년의 눈이 붉게 충혈되었다. "으아아아아아!" 청년은 거인을 향해 소총을 쏴댔다. 두두두두두두두-! 그러나 현대 문명의 이기로는 마수들을 해할 수가 없었다. 쏟아지는 총탄에도 끄떡하지 않은 거인이 청년의 코앞까지 닥쳤다. 딸깍, 딸깍. 탄이 떨어진 소총도 헛기침만을 내뱉을 뿐이었다. 청년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신이시여...' 고개를 위로 쳐들어 물고 있던 인간을 꿀꺽 삼킨 거인이 폴짝 뛰어올라 청년을 덮쳤다. 바로 그때. 어마어마한 덩치의 나가족 거인이 거인형 마수의 옆을 덮쳤다. = 171 화 나가떨어진 거인이 바닥을 과격하게 구르다 튕기듯 일어났다. 몸집에 어울리지 않는, 용수철 같은 몸놀림이었다. "그르륵." 섣불리 반격하지 않고 바닥에 넙죽 엎드려 이빨을 드러내는 거인 앞에 나가족 거인이 섰다. 새로이 그림자 군단에 편입된 나가족의 보스급 마수 '지마'였다. 지마는 오른손을 옆으로 쭉 뻗었다. 그러자 바닥의 그림자에서 검은 창 하나가 스르륵 솟아 올라왔다. 강하게 움켜쥔 창을 앞으로 겨누는 지마에게서 이 뒤로는 그 누구도 보내지 않겠다는 위용이 느껴졌다. "어...? 어...?" 자위대 청년은 눈앞에 벌어지는 광경이 꿈인지, 생시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괴물이 다른 괴물에게서 자신을 지켜 주고 있다니. 꼼짝없이 거인의 입속으로 들어가는 줄 알았던 청년은, 다른 괴물의 늠름한 등을 바라보며 여러 감정들이 북받쳐 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게 대체..." 살 수 있을까? 거인에게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자신도, 노부부도, 그리고 환자들도.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갑작스레 맥이 탁 풀리며 눈물이 핑 돌았다. "여기요." 누군가 알록달록한 손수건을 내밀었다. 청년은 천천히 옆을 돌아보았다. 자기보다 어려 보이는 청년이 턱짓으로 손수건을 가리킨 뒤 고개를 끄덕였다. 일본어가 아니라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무슨 뜻인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한국인인가?' 청년은 흐르는 눈물을 손수건으로 닦으며 물었다. "누구세요?" 한국인은 말없이 고개를 가로젓더니 엄지손가락을 척 들어 올렸다. "굿." "예?" "굿." "가... 감사합니다." 청년이 얼떨결에 인사하는 사이, 한국인의 동료로 보이는 남자 하나가 더 나타났다. 온몸이 핏자국으로 가득한 그는 헌터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청년이 보기에도 격이 다른 강자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위험한데." 병원 안을 둘러보고 나온 진우는 유진호에게 뒤를 가리켰다. "자리 좀 옮겨야겠다. 여긴 너무 가까워." 거인들과의 싸움을 벌써 몇 차례 구경한 유진호는 진우가 무슨 말을 하는지 금방 알아들었다. "전 여기서 대기하겠습니다, 형님." "그래." 진우는 청년을 지나쳐 가며 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수고했다는 의미였다. 단신으로 총 하나만 들고 거인에게 맞서는 것은 보통 사람이 흉내낼 수 있는 일이 아니다. E 급인 몸으로 던전을 들락거렸던 진우는 청년이 얼마나 큰 용기를 냈는지 알고 있었다. "아..." 자신을 지나쳐 가는 진우의 등을 바라보며 청년은 낮은 감탄을 내뱉었다. 어깨를 잠깐 스치고 갔던 온기, 무게. 그 손길 한 번에 죽음까지 각오하게 만들었던 공포가 싹 씻겨 나가는 기분이었다. 강한 안도감이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밀려 올라왔다. 그 순간. 청년의 머릿속에 거인들을 잡고 다닌다는 두 한국인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한국에서도 S 급 마수들을 거의 혼자서 다 때려잡았다는 헌터의 이름은. '성진우 헌터...' 틀림없다. 저 남자가 바로 그다. 청년은 아직도 옆을 지키고 서 있는 한국인 청년에게 급히 물었다. "저 사람이 그 사람인가요? 한국의 S 급 헌터?" 유진호는 또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굿." 진우는 엉켜 있는 두 마수에게로 나아갔다. 진우의 미간이 구겨졌다. "키아아아아아악-!" 지마의 품 안으로 파고든 거인이 지마의 어깨를 물어뜯고 있었다. 지마는 A 급 던전의 주인이었던 마수. 비록 뒤의 인간들을 지키느라 신경이 분산되어 있다고는 해도, 일반 병사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함을 지닌 그림자 병사다. 그런데 같은 보스급도 아닌 일반 마수가 지마를 압도하고 있다니. 거인형 마수가 얼마나 강한지 잘 알 수 있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진우는 자신의 병사들이 당하는 모습을 끔찍이도 싫어하는 주인이었다. 굳은 얼굴이 된 진우가 무릎을 굽혔다. 강한 힘이 허벅지와 종아리에 실렸다. 드득, 드득진우의 다리를 지탱하던 아스팔트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투쾅! 땅을 걷어차듯 튀어오른 진우의 신형이 순식간에 거인의 얼굴로 쏘아졌다. 그 짧은 순간. 거인이 날아오른 진우를 발견했다. 진우의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역시 보통 놈들이 아냐.' 쾅! 진우의 주먹이 거인의 미간을 강타했다. 하지만 예상했던 것만큼의 데미지는 들어가지 않았다. 놈이 타격 직전 목을 뒤로 빼 충격을 최대한 죽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덩치와 날렵한 몸짓. 놈들을 상대해야 하는 헌터들 입장에서는 막막해질 만도 했다. 그러나 그건 일반적인 헌터들에게나 통용되는 이야기. 진우는 공중에서 '악마왕의 단검'을 소환했다. 그리고. '지배자의 권능!' 단검이 들려있지 않은 다른 손을 거인의 얼굴을 향해 뻗었다. 보이지 않는 손은 강한 인력으로 거인의 얼굴을 잡아당겼다. 진우와 거인의 간격은 빠르게 좁혀졌다. "크륵?" 공중에 뜬 상대가 바로 다음 공격을 가해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거인이 크게 당황해 발버둥 쳤지만, 헛수고였다. 거인의 코앞까지 날아간 진우가 스킬을 사용했다. "난도."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잔영이 새겨질 정도의 빠른 연격이 거인의 얼굴을 벌집으로 만들었다. "크아아아악!" 바닥을 나뒹굴던 거인이 얼굴을 감싸 쥐었다. 방금 공격으로 시력을 잃은 거인은 고통에 격렬히 몸부림쳤다. 착. '끝났다.' 가볍게 착지한 진우가 씩 웃으며 다가가자, 접근을 감지한 거인이 움찔 어깨를 떨더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아났다. '기감도 느낄 수 있나?' 보면 볼수록 신기한 놈들이었다. 소감을 말하자면 거대한 육체를 가진 전투병기 같다고나 할까? 거인은 빠르게 멀어졌다. 물론 달아나게 두진 않는다. '신속.' 진운의 신형이 번개처럼 미끄러졌다. 거인이 사력을 다해 네 발로 달려도 거리가 벌어지기는커녕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거인은 공포를 느꼈다. 등 뒤에서 싸늘한 한기가 느껴졌다. 아무리 용을 써 봐야 달아날 수 없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거인이 급정거한 뒤 뒤돌아서 덮치려 했지만. '...?' 금방까지 무섭게 따라붙던 인간의 기척이 사라져 있었다. 사라진 기척은 뒤에서 나타났다. 거인은 눈이 보이지 않음에도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덕분에 베기는 쉬웠다. 제자리에서 수직으로 점프했던 진우가 '악마왕의 단검'을 내리그었다. '검은 심장'에서 나온 마력이 듬뿍 담긴 '악마왕의 단검'은 거인의 얼굴을 깔끔하게 세로로 쪼갰다. "그억..." 비명도 지르지 못한 거인이 도끼질에 나무가 쓰러지듯 스르르 뒤로 기울었다. 쿵! 이걸로 세 마리째. "후-" 진우가 승리의 여운이 담긴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형님-!" 멀리서 싸움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던 유진호가 후다닥 달려와 시원한 차가 담긴 보온병 뚜껑을 내밀었다. 진우가 환히 웃으며 받아 들었다. "땡큐." 뚜껑에 담긴 차가 벌컥벌컥 소리를 내며 진우의 목으로 내려갔다. '음?' 기척에 돌아보니 일대일 싸움에서 패배한 지마가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가왔다. '잘 싸웠어. 수고했다.' 진우는 지마를 격려해 주고는 소환을 해제했다. 지마는 나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림자가 되어 진우의 발밑으로 흡수됐다. 그 장면을 보고 있던 유진호가 말했다. "형님." 진우는 다 마신 보온병 뚜껑을 돌려주며 대답했다. "응?" "다른 소환수들은 다 따로 내보내셨으면서 나가들하고만 같이 다니시는 이유가 있으신가요?" 유진호는 그게 의문이었다. 방금만 해도 거인은 형님 혼자 다 잡았다. 나가만 없었어도 거인을 잡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어 보였다. 그런데 형님은 꼭 싸우기 전에 꼭 먼저 나가를 내세웠다. 유진호는 진우의 의중이 궁금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나가 애들 레벨업 좀 시키고 싶어서.' 그동안 진우와 같이 싸우며 레벨을 빠르게 올렸던 다른 그림자 병사들과 달리, 최근에 편입된 나가들은 상대적으로 레벨이 낮았다. 그래서 이참에 사냥을 통해 나가들의 레벨을 올려 주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대놓고 말하긴 힘들지 않은가? 진우는 씩 웃으며 대답했다. "아직 나가 애들하고는 서먹한 거 같아서. 같이 다니면 좀 친해지지 않겠어?" "아." 유진호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 속이기 좋은 녀석이다. 무언가를 곰곰이 생각하던 유진호는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소환수 하나도 소홀히 대하지 않는 모습, 역시 형님다우십니다!" '...' 그리고 속이기 미안한 녀석이기도 했다. "저기..." 진우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용감하게 거인과 맞섰던 병사가 거인의 사체를 힐끔거리며 이리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의 어깨 너머로 병원을 지키던 노부부의 모습도 보였다. 아직 대화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그들의 표정만 봐도 하고 싶은 말을 알 수 있었다. 그걸로 됐다. 지금은 인사 하나하나를 받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지금 이 시간에도 다른 거인들이 어디선가에서 날뛰고 있을 테니까. 진우는 거인의 사체를 응시했다. 일본을 찾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저기에 떡하니 누워 있었다. "스톱! 스톱!" 유진호는 일본인들을 막아섰다. 요즘 들어 느끼는 거지만 처음 만났을 때보다 유진호의 눈치가 정말 빨라졌다. 덕분에 그림자 추출 작업을 하기가 편해졌다. 피식 웃으며 유진호를 바라보던 진우가 다시 사체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손을 내뻗은 진우가 조용히 읊조렸다. "일어나라." *** "시청자 여러분... 제가 보고 있는 광경이 믿어지십니까?" 타타타타타타타-! 헬기에 탑승한 리포터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연이어 탄성을 내뱉었다. 이내 카메라가 아래를 비추었다. 수백쯤 되어 보이는 개미 마수들이 일사분란하게 어딘가로 향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선봉에는 날개 달린 괴물 개미가 있었다. 유일한 장군급 그림자 병사, '베르'였다. "키에에에에엑-!" 리포터가 급히 귀를 틀어막았다. 베르의 포효에 개미들이 일제히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앞에 있는 거인은 셋. 크기로는 코끼리와 생쥐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하지만. 손톱을 칼날처럼 길게 뽑아낸 베르는 두려워하는 기색 하나 없이 빠르게 돌진했다. "키에에에엑!" 그 뒤로 개미 떼들이 땅을 까맣게 덮었다. "맙소사! 맙소사!" 치열한 전투 끝에 거인들을 쓰러뜨린 개미들이 거인의 사체를 뜯어먹기 시작했다. 우드득! 콰직! 물론 베르의 통제에 따라 그림자 병사가 만들어질 만큼의 사체를 남겨 두는 것은 잊지 않았다. 욕심을 부리는 개미들은 어김없이 베르의 발차기에 날아갔다. "거인들이 잡아먹히고 있습니다! 그 거인들이 벌레들에게 먹히고 있습니다!" 리포터가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사람들을 잡아먹으며 충격과 공포를 안겼던 거인들이 개미 떼에게 뜯어먹히는 장면은 일본인들에게 묘한 통쾌감을 선사했다. 그래서인지 촬영을 거부한 진우 외에 가장 많은 관심이 쏠려있는 쪽도 개미군단이었다. 다만 문제는. "헉!" 어느새 헬기 옆까지 날아온 베르를 보고 흠칫 놀란 리포터와 카메라맨이 몸을 뒤로 뺐다. 베르는 주저하지 않고 자신을 향해 있던 카메라를 박살 냈다. 콰드득. "컥!" 리포터와 카메라맨은 서로를 감싸 안고 오들오들 떨었다. "..." 먹음직스런 시선으로 두 사람을 번갈아 보던 베르가 조용히 아래로 돌아갔다. "휴." "하아, 하아." 두 사람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매번 장비값만 천만 원이 넘는 카메라를 부숴 먹으면서 괴물 개미를 따라다니는 것은 그만큼 시청자들이 열광하고 있기 때문이다. 카메라맨은 준비해 두었던 예비용 카메라를 꺼내 들었고, 리포터는 이미 익숙해진 듯 능숙하게 마무리 멘트를 날렸다. "...뉴스의 키타무라였습니다." *** "꺄아아악!" 이제 막 초등학교를 졸업했을까? 앳된 여자아이가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비명을 지르며 달아나고 있었다. "아, 아아!" 그 뒤를 거인 하나가 징그러운 미소를 짓고서 쫓았다. 작은 다리로 달아나 봐야 얼마나 더 갈 수 있을까? 거리는 금세 좁혀졌다. 거인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리고 다른 거인보다 1.5 배는 더 길어 보이는 손을 쑥 내밀었다. 그리고 우악스런 손이 가냘픈 소녀의 몸을 낚아채기 직전. 한 줄기 섬광이 거인의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거의 동시에 짧은 번개가 상처를 태웠다. 파지직! "그아아아아아악!" 벌떡 일어난 거인이 잘린 손목을 붙들고 비명을 내질렀다. 이그리트는 창백한 얼굴로 파르르 떨고 있는 소녀를 안고 뒤로 물러났다. 거인이 아래를 노려보았다. 자신의 손목을 깔끔하게 절단한 녀석이 먹이를 가지고 도망가고 있었다. 분노한 놈의 눈이 붉어졌다. 엄청난 마력이 거인의 안에서 휘몰아쳤다.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릴 만한 장면. 그러나 그 괴물 앞에 기사 하나가 섰다. 정예기사가 되어 장갑이 더욱더 두터워진 아이언이었다. 아이언은 방패를 바닥에 푹 꽂고서 가슴을 활짝 폈다. 곧 녀석의 투구에서 어마어마한 함성이 튀어나왔다. 우워어어어어어어어어어-! [아이언이 '스킬: 도발의 함성'을 사용합니다.] [적이 도발 상태가 됩니다.] 이그리트를 노리던 거인의 시선이 아이언을 향했다. 올 테면 와 보라는 듯. 자신의 가슴을 쾅쾅 친 아이언이 자신의 몸집만큼 육중한 방패를 치켜들었다. "그어억!" 거인의 주먹이 인정사정없이 아이언을 후려쳤다. 투쾅! 그러나 아이언은 밀리지 않았다. 승급의 효과는 아이언을 전혀 다른 경지까지 끌어올렸다. 쾅! 쾅! 쾅! 수십 번의 일격을 버텨 낸 아이언이 고함쳤다. "워어어어!" 그러자 양옆에서 가장 오랫동안 진우를 보필해 왔었던 그림자 병사들과 아이스 베어 군단이 함께 치고 들어왔다. 아이스 베어 군단을 이끄는 '탱크'가 간만의 전투에 흥분했는지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포효를 내질렀다. "그워어어어어!"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진동이 느껴질 정도의 거친 포효였다. 그들을 지켜보던 기자가 카메라를 향해 소리쳤다. "여러분 보고 계십니까? 소환수들이, 소환수들이 거인을 상대로 레이드를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현실이란 말인가. 유리 오를로프도 믿지 않았던 기자는 당연히 성진우에게도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성진우 본인뿐만이 아니라 그가 흩어져서 진격하게 만든 소환수들까지 속속들이 거인들을 잡아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쩌면. 어쩌면 그가 정말로 혼자 이 나라를 구해 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속에서부터 뭔가가 울컥 올라왔다. "저, 저기!" 카메라맨이 급히 거인 쪽을 가리켰다. 본분을 잠깐 깜박해 버렸던 기자가 촉촉하게 변한 시선을 거인에게 돌렸다. "어떻게...!" 기자는 신음을 내뱉었다. 자세가 무너지기 시작한 거인의 머리 위로 무수한 번개가 내려치고 있었다. 그것은 지켜보는 이들이 할 말을 잊게 만들 정도로, 너무나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 172 화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일본 헌터협회의 본부는 일본의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도쿄 중심에 위치해 있었다. 그날. 게이트에서 거인들이 쏟아져 나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신주쿠에서 S 급 게이트가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켰을 때, 최전선에서 희생한 헌터들과 군인들 덕분에 구사일생에 성공한 마쓰모토 일본 헌터협회장은 부랴부랴 헌터협회의 본부를 관서 오사카로 옮겼다. 북서쪽 끝에 있는 다른 도시들을 마다하고 오사카를 선택한 이유는 하나. 인구 266 만의 오사카마저 지키지 못한다면 일본은 가망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최후의 방어선. 마지노선이었다. 그래서 오사카에서 멀지 않은 나고야까지 거인형 마수들의 손에 무너졌다는 소식이 들려왔을 때, 마쓰모토 협회장은 눈앞이 캄캄해지는 경험을 했다. 멸망이 코앞이었지만 국제사회에 도움을 구걸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일본 헌터협회가 꾸민 흉계가 한국 헌터협회장 고건희에 의해 낱낱이 드러나 버려 아무도 일본을 도우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고건희 협회장의 기자회견 이후. 교토로 옮겨진 일본 임시정부가 급히 마쓰모토 협회장을 호출했다. 그는 책임을 묻는 고관들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이 사태의 모든 책임은 저에게 있습니다. 그러나 누군가는 사태를 수습해야만 합니다. 그때까지만이라도 책임을 유예시켜 주시지 않겠습니까?" 그를 등지고 서 있던 내각총리대신이 고민 끝에 대답했다. "...좋소." 마쓰모토 협회장이 스스로 자초한 위기임은 분명했지만, 그의 말처럼 누군가는 던전 브레이크의 뒤처리를 해야 했다. 처벌은 그다음 순서. 본보기는 발등이 아니라 전신에 옮겨 붙은 불을 끄고 나서 해도 늦지 않았다. 그때. 진우가 일본에 도착했다. 진우를 가장 먼저, 버선발로 뛰쳐나가 마중한 이도 마쓰모토 협회장이었다. 마쓰모토 협회장의 운명은 정해져 있었다. 하지만 조국도 자신과 같은 미래를 맞이하게 둘 수는 없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공항에서 진우를 처음 본 순간, 마쓰모토 협회장은 소름이 돋았다. '이럴 수가...' 강하다. 협회장으로 있었던 수년간 숱한 강자들을 만나 보았기에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그간 많은 헌터들 앞에 섰었지만 뒷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소름이 돋은 적은 많지 않았다. 아니, 처음이었다. 만약 자신이 제주도 레이드 전에 진우를 한 번이라도 만날 기회가 있었다면 한국의 헌터들을 곤경에 빠뜨리겠다는 계획을 철회했으리라. 당시 그를 직접 보았었던 고토의 말은 역시 틀리지 않았다. 눈앞의 헌터에게는 그런 위압감이 있었다. 그러나 적은 S 급 게이트에서 뛰쳐나온 거인형 마수들. 성진우 헌터가 아무리 강하다고 해도 혼자서 그들 모두를 상대하기는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마쓰모토가 간곡히 청했다. "오사카를 중심으로 방어를 부탁드립니다." 진우가 방어에 전념하여 시간을 벌어 주는 동안 미국이나 러시아와 협상에 나서겠다는 것이 일본 헌터협회의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계획은 진우의 한마디에 산산조각이 났다. "싫습니다." 진우는 딱 잘라 말했다. 당연히 마쓰모토 협회장과 일본 헌터협회 관계자들은 펄쩍 뛸 수 밖에. 이제 와서 마수들을 처치하겠다는 그의 마음이 변하기라도 한 걸까? 마쓰모토가 전전긍긍하며 물었다. "그... 그럼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진우는 대답 대신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자신의 소환수들을 각각 세 팀으로 나누어 각자 진격시키는 한편 자신 또한 따로 이동을 시작한 것이다. 그 엄청난 숫자의 소환수들도 놀라웠지만, 마쓰모토는 다른 이유로 침음을 삼켰다. '그는 정말로 혼자서 거인 전부를 상대하려는 것인가?' 세계 모든 헌터들이 입을 모아 불가능하다고 말한 일을 해내려는 생각인가? 답은 알 수 없었다. 그저 지금은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기다리고 있는 것만이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일 뿐. 헌터협회 건물로 돌아간 그는 현황 파악에 주력했다. 의외로 답은 금방 돌아왔다. "나고야 시, 탈환 성공했습니다!" "뭐라고?" 마쓰모토 협회장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진우 헌터가 출발한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나고야까지 들이닥친 거인형 마수가 쓰러졌단 말인가? 마쓰모토 협회장이 놀란 마음을 진정시키기도 전에 전국 각지에서 연락이 쏟아졌다. "나카스가와 시, 거인의 사체가 발견되었습니다." "시즈오카 시, 탈환 성공했습니다." "다카야마, 나가노 시도..." 성진우 헌터와 소환수들은 일본 전역으로 흩어진 거인형 마수들을 제거해 나가며 도쿄를 향했다. 말도 되지 않는 속도였다. 마쓰모토 협회장은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들어 가는 한국 헌터의 힘을 지켜보며 전율했다. 떨리는 심장이 진정되질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고후 시... 성진우 헌터가 고후 시에 도착했습니다." 도쿄에서 130 킬로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고후 시의 거인들까지 처치되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을 때는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협회장님!" "마쓰모토 협회장님!"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그는 정말로 혼자서 모든 거인형 마수들을 해치울 생각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그가 하는 짓은... 내가 한국에 하려 했던 짓이 아닌가?' 한국의 헌터 체계를 무너뜨리고 일본의 헌터력을 이용해 한국을 마음대로 주무른다. 지금은 상황이 반대가 되었다. 헌터 체계가 무너진 일본이 진우 한 사람에게 휘둘리고 있었다. 자신과 헌터협회, 최상급 헌터들, 그리고 일본 정부까지 합심해 벌이다 실패한 계획을 그는 오직 혼자서 실행하고, 또 성공했다. "..." 멍하니 의자에 앉은 그가 자신을 걱정하는 협회 관계자들에게 지시했다. "다들 여기서 나가 줄 수 있겠나? 잠시만 혼자 있고 싶네." 텅 빈 방에서 그는 고개를 떨구었다. 생애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강렬한 패배감이 물밀 듯이 밀려왔다. 졌다. 완벽히 졌다. 그러나. 패배감 다음으로 마음을 채워 가는 감정은 짧은 자기반성과 그 끝을 알 수 없는 감사함이었다. 그는 소리 없이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그날. 오사카에서 출발하여 동쪽으로 이동하며 조우한 거인들을 모두 잡아낸 진우와 소환수들은, 마침내 도쿄에 도착했다. *** 쿵! 거인형 마수 둘이 쓰러졌다. [레벨이 올랐습니다!] 정말 이렇게 원 없이 레벨을 올려 본 게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진우는 주먹을 불끈 움켜쥐었다. 던전 브레이크가 열린 도쿄 시까지 거의 직선으로 이동하며 혼자서만 13 마리의 거인형 마수를 잡았다. 그동안 올라간 레벨은 여섯 개. 거인형 마수 하나하나가 보스급 개체다 보니 어마어마한 경험치가 굴러들어 왔다. 물론 다른 방향에서 거인들을 잡고 있는 그림자 병사들에게서 들어오는 경험치의 영향도 컸다. 이동 중에 [레벨이 올랐습니다!]라는 메시지가 뜰 때면 절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바로 이렇게. [레벨이 올랐습니다!] '그렇지!' 타이밍 좋게 울리는 레벨업 알림에 진우가 다시 두 주먹을 움켜쥐었다. 머릿속에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왕이시여. 또 하나의 적을 처치하였습니다.' 방금 경험치를 보내온 쪽은 진군 속도가 가장 빠른 베르의 개미군단이었다. 베르부터가 가장 강한 그림자 병사인 데다, 개미의 숫자도 많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베르는 마수들을 잡고 나면 매번 이렇게 진우에게 보고를 해 왔다. 진우는 개미군단의 성과를 격려했다. '좋아. 수고했다.' '감사합니다, 왕이시여.' 베르와 연락을 마친 진우가 '감각 공유'를 통해 각 군단의 상태를 점검했다. 베르가 이끄는 개미군단만큼은 아니더라도, 어금니의 하이오크 군단과 이그리트의 정예병 군단 역시 거침이 없었다. 부쩍 성장한 병사들의 레벨은 진우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형님, 오늘은 여기서 묵을까요?" 진우가 눈을 떴다. 유진호가 트렁크에서 빼 온 텐트를 꺼내 들고서는 묻고 있었다. 고개를 들어 보니 날이 저물어 땅거미가 내려앉는 중이었다. 상점에서 파는 회복제나 레벨업의 효과로 피로도는 높지 않았지만 정신적 피로가 계속해서 누적이 되고 있는 상태. '좀 쉬어야겠네.' 진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의 야영지가 결정되었다. 두 사람은 금방 텐트를 설치하고, 식사 준비를 마쳤다. 어느덧 더위도 가시고 밤바람이 싸늘해졌다. 가을이다. 진우는 일본 협회에서 제공한 음식들을 모닥불에 데우며 문득 겨울도 머지않았구나, 하고 생각했다. 겨울. 문명의 흥망성쇠를 나눈다면 지금 저 멀리서 보이고 있는 도쿄 외곽의 모습은 완연한 겨울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그런데 도시의 형태가 무너져 버린 도쿄의 풍경은 어딘가 많이 낯이 익었다. '어디서 봤더라?' 잠깐 기억을 더듬어 보던 진우는 얼마 안 가 답을 찾아냈다. '악마성.' 그때, 악마성에서 봤던 황폐해진 도시들의 모습이 이러했었다. 불타고 있지 않다는 점이 다를뿐.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진우의 얼굴에 그늘이 드리웠다. '설마...' 악마성의 1 층부터 꼭대기까지. 모든 도시들은 부서져 있었다. 그게 만약 시스템의 암시라면, 관리자 녀석은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걸까? 진우는 피식 웃었다. '아무렴 어떠랴.' 관리자는 이미 죽어 던전 속으로 사라졌는데. 그 이후로 아무런 접촉이 없는 걸 봐서는 녀석이 살아 있을 가능성은 희박했다. '만약 그게 이후에 벌어질 일들을 암시하고 있다고 해도...' 내가 막으면 된다. 그러기 위해서 갖춰 온 힘이다. 상대할 수 없는 힘에 휘둘리기 싫어 끊임없이 강함을 추구했다. 레벨을 올리고, 스킬을 손에 넣고, 다시 레벨을 올리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두근. '검은 심장'이 반응하듯 크게 한 번 뛰었다. 손을 얹어 진동을 느끼던 진우가 옅게 웃었다. 병원에서는 정상이라고 했었다. -아무런 이상도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헌터님은 완벽히 건강하십니다. 한국을 떠나기 전날, 진우는 병원에 가 정밀검진을 받았다. 의사는 진우의 전신을 스캔하고도 두 번째 심장 같은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검은 심장'은 육체의 변화가 아니었다. 분명히 존재하고, 그 박동을 느낄 수도 있지만, 실존하지는 않는다. '무슨 소리야, 그게.' 진우는 실소했다. 남들과 다른 신체 구조가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는 안심이 되었지만, 그렇다면 이 가슴의 진동은 어디서부터 오고 있는 것일까? 그때. 도쿄 시내 쪽에서 가벼운 바람이 불어왔다. 바람 속에는 깊이를 짐작하기도 힘들 만큼 흉측한 마력이 끈적끈적하게 실려 있었다. "형님..." 유진호가 불안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기감이 떨어지는 유진호조차 느낄 수 있는, 강대한 힘이었다. 진우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어디서 오는 바람인지는 의심할 필요도 없었다. 신주쿠에서 게이트를 지키고 있다는 거인. 여태까지 상대했던 거인들과는 궤를 달리하는 기운이었다. 이렇게 떨어져 있는데도 순간적으로 팔뚝에 닭살이 돋았다. 하지만. 진우는 웃었다. 강한 마력에 반응이라도 하는 것처럼, '검은 심장'이 쿵쿵대며 격렬히 뛰었다. 놈을 잡으면 레벨이 얼마나 올라 갈지, 혹은 놈의 그림자는 어떤 병사가 될지. 벌써부터 기대감이 들기 시작했다. = 173 화 이그리트의 정예병 군단이 가장 먼저 도쿄에 도착했다. 다음은 어금니의 하이오크 군단이었다. 다가오는 하이오크 군단을 발견한 이그리트가 고개를 까닥여 인사했다. 로브 속에서 한쪽 입꼬리를 올린 어금니 역시 고개를 숙였다. 정예병 군단과 함께 움직인 아이스 베어 부대, 그리고 하이오크 군단이 한자리에 모였다. 그리고 잠시 후. 척, 척, 척. 일사불란한 발소리. 희뿌연 안개 너머로 대규모의 그림자 병사들이 접근해 왔다. 가장 먼 길을 돌아왔으면서도 가장 많은 거인들을 사냥한 병사들답게, 마지막으로 도쿄에 도착한 베르의 개미 군단이었다. 베르가 선두에서 안개를 헤치며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에도 이그리트가 먼저 인사를 보냈다. "..." 하지만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그대로 이그리트를 지나쳐 간 베르는 진우의 등 뒤로 다가가 정중히 한쪽 무릎을 꿇었다. "아, 다 왔네." 그제야 진우는 저 멀리 보이는 거인에게서 눈을 떼고 뒤를 돌아보았다. "다들 수고했다." 반갑게 맞아 주는 진우에게 그림자 병사들 전원이 베르가 한 것처럼 무릎을 꿇었다. 신체 구조상 무릎을 굽힐 수가 없는 아이스 베어들은 코를 땅에 박고 엎드렸다. 정예병, 곰들, 개미들, 하이오크들, 그리고 나가들과 틈틈이 모은 다른 그림자 병사들까지. 숫자만 일천에 가까운 그림자 병사가 모두 한 자리에 집합했다. "다들 일어나." 진우가 손으로 일어서라는 제스처를 취하자 모든 병사들이 기립했다. 척.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유진호는 분위기에 압도되어 넋을 잃고서 그림자 병사들을 둘러보았다. '이게 형님의 스킬이니까 망정이지 진짜 마수들이었다면...' 이 정도 숫자의, 그리고 이 정도 수준의 마수들이 한꺼번에 움직인다고 생각하니 그런 일이 있을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절로 몸서리 쳐졌다. 아군이라 다행이다. 형님처럼 이 말이 잘 어울리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보다 더 놀라운 광경이 바로 뒤에 있었다. 꼴깍. 유진호는 마른침을 힘겹게 삼키며 조심스레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엔 거인이 있었다. 여기까지 오면서 봐 왔던 거인들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의 거인형 마수였다. 아득한 높이에 위치한 거인의 머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저것이 마수인지, 고층 빌딩인지 분간이 가지 않을 정도였다. "와아-" 터져 나오는 탄성. 영상으로 접하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에는 차이가 컸다. 진우가 입을 다물지 못하고 있는 유진호의 머리 위에 손을 척 올리며 웃었다. "그러다 턱 떨어지겠다." "혀, 형님." 정신을 차린 유진호가 민망한지 뒷머리를 긁적였다. 유진호의 머리에서 손을 뗀 진우가 말없이 보스급 거인형 마수를 응시했다. '어떻게 저런 게 존재할 수가 있는 걸까.' 너무도 거대한 생명체. 놈에게서 흘러나오는 흉악한 마력에 이 자리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불쾌했다. 불쾌함을 없애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존재한다. 불쾌함의 원인에게서 도망쳐서 잊고 살거나, 그 원인을 아예 뿌리째 뽑아 버리거나. 어느 방법을 택할지는 한국을 떠날 때부터, 아니 진우가 각성했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두근, 두근. 눈을 감고서 가만히 심장의 고동을 즐기던 진우가 눈을 떴다. "물러나 있어." "네, 형님."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유진호가 병사들 사이를 가로질러서 빠르게 자리를 벗어났다. '좋아.' 유진호가 멀어지길 충분히 기다린 진우가 새로운 식구들을 불러냈다. "나와라." 보스급 거인만큼은 아니지만, 거대한 몸뚱이를 지닌 그림자 병사들이 지면으로 올라왔다. 1 호부터 13 호. 진우는 거인 그림자 병사들의 이름을 추출 순서에 따라 1 호에서 13 호로 정했다. 덩치 큰 놈들을 맨 앞줄에 세우니 그림자 군단이 한층 더 든든해진 것 같아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 '이만하면 됐다.' 준비가 끝났다고 생각한 진우가 손을 들었다. 진우의 손이 하늘로 치켜 올라감과 동시에 그림자 병사들 전원이 공격 태세를 갖추었다. 척! "전군." 검은 갑옷과 증기에 둘러싸인 병사들. 그림자 병사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던 진우가 다시 거인에게로 돌아섰다. 거인은 자신의 거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 대상에겐 관심이 없다는 듯 무심히 진우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게 마음에 안 들어.' 마수 따위가 저 먼 위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다는 사실이 진우는 영 내키지 않았다. 진우의 얼굴이 사나운 미소를 띠었다. 그리고. 하늘을 향해 있던 손이 거인 쪽으로 내려갔다. "진격!" 베르가 고개를 쳐들고 포효했다. "키에에에에에에에에에엑!" 개미들이, 곰들이, 거인들이, 아니 그곳에 있는 모든 그림자 병사들이 거인 마수를 향해 일제히 돌격했다. 쿠구구구구궁-! 그림자 군단의 맹렬한 돌진에 대지가 울었다. 땅이 흔들리고, 먼지가 피었다. 마침내 진우의 병사들은 거인의 영역 안으로 들어갔다. 그 순간. 주변의 공기가 변했다. "뭐?!" 진우의 입에서 비명 같은 고함이 터져 나왔다. 순식간에 모습이 사라졌던 거인이 멈추었을 때는, 이미 그림자 병사들의 반이 전멸한 상태였다. '슬라이딩?' 쭉 뻗은 다리로 미끄러지듯 그림자 병사들을 갈아 버린 거인의 자세는, 슬라이딩이라는 단어 말고는 다른 말로 표현할 수가 없었다. 무시무시한 파괴력. 그 공격 한 번에 거대한 덩어리였던 그림자 군단이 양쪽으로 나뉘었다. 그러나 병사들도 녹록히 당하고 있지 만은 않았다. 거인의 발끝에서 일어난 먼지가 채 가라앉기도 전에 거대화를 끝낸 어금니가 놈의 얼굴 앞에 섰다. 후읍-! 숨을 깊이 들이마신 어금니의 가슴이 크게 팽창했다. 이내 어금니의 입에서 무지막지한 불기둥이 쏟아졌다. 쿠와아아아아아아아-! 불속성 공격에 저항이 있는 마수조차 숨결 한 번으로 녹일 수 있는 어금니의 공격. 그러나 업화는 거인의 손바닥에 가로막혔다. 어금니가 경악하고 있는 것이 진우에게도 느껴졌다. 거인은 여전히 자세를 낮